민족정기의 심판/제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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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飛行機 獻納에 狂奔한 朝鮮新聞社長 文明琦의 罪惡史[편집]

世上은 虛無孟浪하다. 하잘것 없는 怪物이 장판방에 벼룩같이 튀어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갈팡질팡 한없이 뛰다가 그만 제물에 기진맥진하여 쓰러지니 쓰러진 벼룩으로 인하여 수많은 가족의 다리 팔 혹은 全身이 콩알같이 부르키고 가려워 긁고 그것이 腫氣가 되고 거기에 膏藥 사서 붙히느라고 막대한 金錢을 소비하고 완치되는 날까지 무한한 고생을 한다. 그 조그마한 벼룩 한 마리 때문에 一家族에 소동이 일어나 피해 막심하거늘 하물며 벼룩의 몇 十萬倍되는 괴물이 나타나 3천리 疆土를 무대로 삼아 地上으로 地下로 혹은 海洋으로 天空으로 휩쓸며 亂舞하니 3千萬 民族의 피해는 막대한 것이다. 火災같이 타오르는 榮慾에 水火를 헤아리지 않고 燈前에 불나비같이 난무한 文明琦-. 대체 文明琦란 어떠한 놈이냐. 그의 正體부터 알아보자!

1. 世稱 野蠻琦[편집]

文明琦는 世稱 野蠻琦라 하며 1878년(明治 11년) 6월에 慶尙北道 盈德郡 盈德面 南石洞에 居住하는 漢學者 文承煥의 장남으로서 탄생하였다. 그는 교육을 못받아 원래 무식하나 허영심은 남달리 뛰어나고 평소에 어떻게 인색하고 잔인한지 누구나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은 두번도 대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니 가위 인간의 最末端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딴 배짱은 있어 農村서 땅이나 캐고 사는 것보다는 무슨 事業같은 것을 하여 富貴功名하여 보겠다는 野心으로 製紙業에 종사하였다. 종이장사에 거대한 利를 본 그는 製紙業에 관한 財團法人 廣濟會를 조직하고 계속하여 노다지나 캐보겠다는 野望으로 鑛山 브로커 노릇을 하면서 왜인들과 結託하여 鑛産業(金銀 採掘)에 투자한 것이 들어맞아 거액의 수를 보았다. 그는 慶北에서도 손꼽는 財産家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감투 욕심이 났다. 그리하여 倭帝에게 信任을 받겠다는 野慾으로 10만 원을 드려 海軍과 陸軍에 飛行機 한 대씩을 獻納하고 동시에 皇道 宣揚과 國防運動에 희생적 노력을 하였다. 그 효과가 나타나 쉽사리 盈德 國防議會長이 되고 在鄕軍人 特別會員이 되고 보니 그는 기고만장하여 倭政高官들을 買收하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에 돈 싫다 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 文明琦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은 倭政高官들은 그를 慶北道會 議員으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었다.

2. 飛行機 一郡一臺 獻納을 絶叫[편집]

文明琦의 賣族行狀은 점차 熾熱의 度를 가하여 愛國機 百臺 獻納을 열광적으로 主唱하고 동시에 數十萬圓을 드려 飛行機 5대를 軍部에 獻納하여 倭總督이 ‘文明琦號’라고 命名式까지 거행함에 한 술 더 떠서 이제는 全朝鮮 一郡一臺 獻納運動을 전개하고 中日戰爭 통에 塗炭에 빠진 同族을 여지없이 달달 볶기 시작하였다.

天照大神을 모셔라!

飛行機를 獻納하라!

이렇게 하여야만 皇國臣民이 될 가치가 있다고 외치면서 우선 그 방침에 대한 宣傳策으로 日文紙 朝鮮新聞을 창간하여 거기의 社長이 되었다. 그리하여 가가호호에 神棚備置運動을 열광적으로 전개하고 자기 집안을 모두 倭式으로 꾸미고 심지어 妻子까지 倭服을 입히었으며 禮儀 動作 言語까지 倭式으로 개량시켰다. 子息들이 만약 朝鮮말을 하면 “이 못된 非國民아!”라고 고함 지르면서 기절하도록 亂打하고 언제나 하오리 하까마에 게다짝을 끌고 東京 往來하기를 이웃집 다니듯 했다고 하니 腰絶腹絶할 노릇이다. 또한 文明琦는 엉뚱한 致富術이 있으니 즉 神棚을 만들어 강제로 팔아가지고 거액의 利를 보았다 하며 이런 神出妙案으로 致富한 돈을 갖고서 糖蔘 등 선물을 사가지고 北支方面으로 皇軍 慰問하러 다닌다고 洪吉童이 처럼 東馳西走하며 또는 義勇隊를 강제 모집하여 수많은 靑年을 北支로 보냈다.

이렇듯 文明琦는 日本을 위해서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 덕으로 中樞院參議가 되고 其他 數多한 명예직에 오르고 스스로 皇道宣揚會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臨戰報國團 慶北支部常任理事 國民總力朝鮮聯盟評議員 등에 피임되어 文明琦의 일생을 통하여 가장 영화로운 시기였다. 만약 倭帝가 이번 싸움에 승리하였던들 金?勳章 하나쯤은 문제 없었을 것인데 虛榮樓閣의 豪華夢이 수포와 같이 사라져 철창신세가 될 줄이야 어이 뜻하였으리요. 註(文明琦는 去 1월29일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 남석동 152번지 자택에서 特警隊의 손에 잡혀 방금 엄중한 민족의 심판을 받아 단죄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3. 文明琦의 親日狂狀

文明琦의 가증한 매족행장은 枚擧키 어려울만큼 多大하였으나 그 중의 일부를 공개하면 如左하다.

1. 1937년(소화 12년) 9월 4일 비행기 백대 헌납운동을 전개하고 그후 一郡一機운동에 착수하여 민족을 좀 먹었으며.

2. 同年 同月 7일 황군위문차로 북지에 가는 도중 평양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대기염을 토하였고.

3. 同年 同月 14일부터 北支황군 위문상황 보고차로 京釜沿線 각지를 순회하면서 조선사람은 행복이라고 지꺼렸으며.

4. 同年 12월에 쓴 『所志一檄』이라는 소위 조선과 일본의 관련성을 해설한 책에서 단군은 素?鳴男尊의 아들이며 朴赫居世는 神武天皇의 형이 되는 사람으로 역사상이나 제반 문헌에 昭祥한 바가 있다고 가소롭기 짝이 없는 글을 썼고.

5. 1938년(소화 13년) 7월 21일 義勇단원을 강제 모집하여 수많은 청년들을 北支에 몰아내고.

6. 1941년(소화 16년) 12월 7일 臨戰報國團 慶北支部를 결성하여 상임이사로 피선되고.

7. 1943년 (소화 18년) 7월 21일 皇道宣揚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취임되고.

8. 그외 神棚제조와 가가호호 비치운동을 전개하였고 金城隆외 4인과 동행하여 애국시 인쇄물 3천매及 당삼 50상자를 携去하여 약 1개월간 北中支 황군 위문행각을 하였고 國民總力朝鮮聯盟 평의원及 조선신문사장 중추원참의 등으로 황도선양과 국방운동에 헌신적 활동을 하였다.

朴春琴과 共謀하여 大義黨을 組織한 親日派 魁首 朴興植의 罪惡史[편집]

서울 종로 十字街에 으리으리하게 버티고 있는 주식회사 화신을 주재하는 朴興植-. 이 땅 인민을 억압하고 고혈을 착취하여 부귀영화를 누린 친일파 괴수 朴興植은 전 인민이 학수고대하던 반민법 발동의 拘引狀 제1호로 去 1월 8일 하오 3시 40분 화신 5층-인민의 고혈을 빨아 가지가지의 호화찬란한 장식을 꾸민 사장실에서 특경대원에 체포되어 단죄의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일제의 총아로서 살찌고 기름진 朴興植의 과거의 죄악상에 인민의 深怨이 골수에 사무치거늘 해방 후 또다시 국회요인 반민특위 간부를 암살 음모하였다 함은 실로 천인이 공노할 바이며 그의 어디까지나 민족에 반역하려는 가증한 행위에 전 인민은 切齒 분개치 않을 수 없다. 그러면 朴興植이란 대체 어떠한 놈이냐. 그의 죄악사를 더듬어 보자.

1. 酒池肉林에 싸인 幸運兒[편집]

인간의 출세하는 길이란 기기묘묘하다. 하지만은 朴興植이 같이 부귀영화를 한 몸에 지니고 일본의 천황과 악수까지 하기에는 참으로 희귀한 것이다. 일대의 행운아 朴興植은 1903년(명치 36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387번지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실업가가 될 것을 지망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 그는 적수공권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서대문 밖에서 인쇄소 외교원으로 注文 받으러 다니다가 ‘스텐다드’석유회사 지배인에게 신임을 받아 ‘케나다’ 신문지를 판매하게 된 것이 그의 성공의 첫 출발이었다.

그는 鮮一紙物주식회사란 간판을 안국동 네거리에 걸고 각 신문사에 신문지를 팔기 시작하였다. 이에 재미를 본 그는 내외 각 제지회사와의 특약을 체결하여 和洋紙의 도매及 신문용지의 수입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천재적으로 상업방면에는 예리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기회를 그의 사복을 체우는데 유리하게 이용하였던 것이다. 종이장사로 거액의 이익을 본 朴興植은 당시 일제의 간악무도한 저물가 정책의 착취적 수단으로 인하여 폐점의 운명에 이르른 서울 종로 金銀美術品 겸 吳服雜貨商 和信商會를 買受하고 때마침 閔奎植씨가 和信商會 자리에 5층 대건물을 짓게 되자 그는 그 건물을 세로 들어 和信商會를 주식회사라 개명하고 소위 근대적 백화점으로서의 운영에 착수하는 한편 京電과 결탁하여 전차 정류장 이름을 ‘和信 앞입니다’라고 외치도록 묘안을 꾸몄다.

이리하여 和信을 굉장히 선전한 다음 그 자본 조달의 최선책으로 독특한 考案을 案出하였으니 참으로 신출귀몰한 방식이라 할 것이다. 즉 조선 농촌의 합리적 소비경제와 생활양식에 一新生面을 타개한다는 미명하에 연쇄점 설치의 계획을 책동하였던 것이다. 이 7백만원의 자본조달 방법을 목적한 연쇄점 설치에 어리석은 지방 사람들이 아니 넘어갈 수 없었다. 서로 경쟁하여 가며 우선권을 얻을려고 현금이 없으면 不動産을 抵當하여 가면서 덤벼 들었다. 그리하여 全鮮 3백여 개소에 연쇄점이 설치되고 和信連鎖店株式會社라 이름 지었다.

朴興植은 힘 안들이고 수집한 不動産 文書를 殖銀에 자기 명의로 抵當시키고 7백만원이란 거액을 차용하여 和信 基礎資本을 확립시켰다. 그리하여 朴興植은 당시 총독이던 宇垣에게 아부하며 일제의 경제정책에 적극 협력하여 일시에 일제의 총아가 되었고 민족의 고혈을 착취함으로서 날로 그의 재산은 가속도적 증가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朴興植은 이제 實業界의 제1인자가 되고 보니 이성이 그리워졌다. 더구나 매일 六味補湯을 복약한 덕으로 체격이 지나치게 비대하여 감에 따라 성욕이 더욱 왕성하여졌다. 1妾 2妾으로는 만족치 않아 많은 기생을 어루만지고 매일 酒池肉林에 파묻혀 있어도 시원치 않아 조선의 색향 평양 某 기생에게로 비행기 결혼까지 하여 장안의 화제를 일으킨 일까지 있었으며 계집의 궁둥이에서 못떨어져 매일같이 음탕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는 언제나 여자와 한번 관계를 맺고는 그 여자를 헌신짝같이 버렸으며 그 여자의 얼굴 육체 臭氣 그 때의 태도만 기억했으면 그만이었다.

2. 飛行機 製造에 着手[편집]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성취한 朴興植은 방향을 돌리어 감투나 써보겠다는 야심으로 총독부 고관을 비롯하여 정계 인물과 교제하기 시작하여 동경 출입이 자자하였다. 이 때에 朴興植의 출세할 길은 또 열리었다. 일본이 聯合軍에게 宣戰布告하자 朴興植은 일본이 동양의 맹주로서 聯合軍을 격멸시키라는 것을 하늘같이 믿었다. 이 기회에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하면 그 공로로 남작 하나는 문제 없다고 생각하여 徵用報國團이란 명목 아래 이 땅의 젊은 청년을 징병에 징용에 유인하는 데 결사적 노력을 하였다. 또한 일본에 건너가 東條와 회견하고 조선민족이 전력을 다하여 戰爭完遂에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인에게 兵器 製作을 담당케 하지 않음은 실로 言語道斷이라 大怒力說하여 東條로 하여금 감격케 하였으며 결과로 일본 천황 裕仁의 초청을 받아 대면하고 친히 악수까지 교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또한 朴春琴 일파와 공모하여 대학살 음모단체인 大義黨을 조직하고 이 땅 인민을 학살하려 하였으며 일제의 前哨兵으로서 초인적 노력을 다 하였던 것이다.

해방 이후 朴興植은 과거의 죄악을 秋毫도 悔悟함이 없이 다시금 美軍政에 아부하여 이 땅의 산업경제를 총파탄시켰으며 拂下謀利 貿易謀利로서 巨億의 富를 획득하고 親日 叛逆徒黨과 결탁하여 정계의 이면에서 정치혼란을 조장하였으며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民族統一을 적극 방해하여 왔던 것이다. 더구나 盧德述 李鍾榮 일당과 공모하여 인민의 代辯人 國會要人과 反民特委 幹部의 암살을 꾀하여 日帝時 大義黨을 통하여 同族虐殺을 기도한 것을 재연출하려 하였던 것이다. 실로 朴興植의 어디까지나 민족에게 반역하려는 행위는 천인이 共怒할 바이라 아니할 수 없다.

朴興植의 親日 賣族行狀의 일부를 공개하면 如左하다.

3. 社會經濟部面關係(一部)[편집]

1. 和信商事株式會社 取締役 社長

1. 株式會社和信 取締役 社長

1. 東洋拓植株式會社 監事

1. 京城紡織株式會社 監事(후에 取締役)

1. 北鮮製紙化學工業 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石油株式會社 取締役

1. 濟州道興業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生命徵兵保險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勸業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工營株式會社 取締役

1. 大興貿易株式會社 取締役

1. 南滿紡織株式會社 取締役

1. 東光生絲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洋紙配給株式會社 取締役

1. 東仁企業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映畵製作株式會社 取締役

1. 株式會社每日新報社 監査役

1. 朝鮮래-스株式會社 取締役

1. 朝鮮飛行機工業株式會社 取締役 社長

4. 親日團體及公職關係(一部)[편집]

1. 朝鮮總督府 物價委員會 委員

1. 朝鮮中央賃金委員會 委員

1. 朝鮮總督府 保護觀察所囑託 及 保護司

1. 國民總力朝鮮聯盟 理事

1. 國民總力京畿道聯盟 參與

1. 國民總力京城府聯盟 理事

1. 朝鮮臨戰報國團 常務理事

1. 京城司法保護委員會 參與

1. 財團法人私立光新商業學校 理事長

1. 京城體育振興協會 副社長

1. 朝鮮貿易協會 理事

1. 朝鮮工業協會 常務理事

1. 帝國發明協會朝鮮本部 理事

1. 朝鮮社會事業協會 評議員

1. 朝鮮輸出工業協會 理事

1. 朝鮮實業俱樂部 副會長

1. 朝鮮儒道聯合會 理事

1. 財團法人機械化國防協會 朝鮮本部 理事

1. 食糧協會 朝鮮本部 (軍) 評議員

1. 被服協會 朝鮮支部 (軍) 理事

1. 朝鮮住宅營團 評議員

1. 京城商工會議所 特別議員

1. 借地借家調停委員會 委員

1. 國民營養報國 朝鮮聯盟 副會長

1. 東亞經濟懇談會 朝鮮委員會 委員

1. 大和同盟 審議員

1. 大義黨 幹部

5. 親日賣族功績에 의한 功勞賞[편집]

1. 1940년(소화 15년) 10월에 日本帝國 敎育會長으로부터 교육사업 진흥에 공헌한 공적으로 공로상을 수여.

1. 同年 同月 朝鮮敎育會長으로부터 敎育事業賞을 수여.

1. 同年 9월 朝鮮總督 南次郞으로부터 반도 항공사업의 발달에 공헌한 공적으로 공로상을 수여.

1. 同年 10월 역시 南次郞으로부터 소위 조선의 개발 진전에 盡?하여 施政上 기여하였다는 공적으로 施政 30년 기념에 당하여 공로상을 수여.

1. 1942년(소화 17년) 12월 15일 일본 總理大臣의 초청에 의하여 全國産業經濟代表 戰力增强 懇談會에 참석.

1. 동년 동월 동일 일본 천황 裕仁의 초청을 받아 대면하고 친히 악수를 교환.

1. 1943년(소화 18년) 6월 日本海軍協會에서 공로상을 수여.

1. 동년 9월 朝鮮貿易協會長으로부터 朝鮮貿易振興에 盡?한 공로로 표창을 받음.

6. 朴興植의 講演行狀[편집]

1. 1941년(소화 16년) 10월 13일 臨戰報國團 결성을 앞서 각지 강연행각에 참가하여 高元勳과 함께 평양에서 臨戰報國團의 사명을 역설.

1. 1942년 朝光誌 2월호에 「光明의 天地로 향하여」란 題下에 논문을 발표.

1. 同年 5월 30일 「永遠히 못잊을 慈父」란 題下에 南次郞 惜別談을 每新 紙上에 발표하였고.

1. 1943년 11월 10일 「學兵의 奮起를 바란다」라는 題下에 談話를 발표.

1. 同年 12월 16일 역시 「至誠으로 奉公」이라는 題下에 談話를 발표.

1. 1945년 4월 4일 每新紙上에 「大詔를 받자옵고」라는 題下에 談話를 발표.

1. 기타 『每日新報』, 『三千里』 후에 『大東亞』 『朝光』 『東洋之光』 등에 논문을 발표하고 각지를 강연행각하여 皇道宣揚 戰力增强 飛行機獻納 등을 절규하였다.

歷代 總督別傳閣을 建築한 中樞院參議 金甲淳의 罪惡史[편집]

1.義妹의 惠澤으로 出世[편집]

金甲淳(金井甲淳)이라 하면 충청남도에서는 명물의 하나이다. 그는 致富術에는 妙案이 神通하여 혈벗고 굶주린 농민의 고혈을 착취함으로서 忠南甲富로 그 이름을 떨치었다.

그는 1872년(명치 5년) 5월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면 旭町 245번지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天涯에 孫獨한 신세로서 나이 20세가 넘어도 편발 노총각으로 투전판이나 쫓아다니면서 개평 술잔이나 얻어먹고 三旬에 糊口를 변변히 못하다가 公州監營의 使令軍奴로 들어가게 되어 한 다리에 노름꾼 잡으려 갔다가 묘령 미인을 만났다. 이것이 金甲淳의 출세의 행운을 싣고 온 여신일 줄 누가 뜻하였으랴. 金甲淳은 그 여자와 義男妹를 맺어 監使의 소첩으로 중매하였다. 그리하여 賤職에서 일약 總巡이 되었다. 그 후부터 그의 앞에는 출세의 길이 열리어 義妹의 혜택으로 總巡으로부터 石城 (現 扶餘)郡守 되기까지 이르렀다. 그 보다 더 행운을 亭通하게 된 것은 上納金을 자기 임의로 징수하게 된 것이다. 늦게 행운을 亭通한 金甲淳은 날이 갈수록 致富할 기회가 많아 魯城 林川 公州 金化 牙山 등의 郡守를 역임하는 동안에 巨富를 획득하였다. 더욱이 그가 牙山郡守로 부임하자 한일합병이 성취됨에 국고세금 수만금을 횡령 독식하였다. 그러나 國體가 變革되니만큼 무사하였다. 그는 다시 公州에 돌아와 沿澤地 及 荒廢地를 起墾하여 시장을 만들고 一方으로는 自動車營業을 시작하여 시장으로 自動車로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

2. 獨立鬪士 金剛道 敎徒를 密告[편집]

金甲淳의 官廳 交際는 참으로 능하였다. 朴重陽 외 어느 道知事 郡守 署長 判檢事 쳐놓고 金甲淳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總督 總監 한번만 행차하면 純金 花甁이 한쌍씩 선물되고 보니 金甲淳에 대한 왜정의 신임은 나날이 깊어가 이에 더 말할 수 없을 만큼 되어 결국 忠淸南道 參事를 걸쳐 道評議會員이 되었고 乃子 弼用君은 判事가 되었던 것이다.

金甲淳은 또한 倭帝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당시 祖國光復을 위하여 투쟁하여 온 金剛道敎의 비밀을 탐사하여 倭警에 밀고하여 敎頭 以下 각 幹部를 투옥하였으며 경찰 후원 하에 金剛道敎 소유인 檀君聖殿을 압수하여 자의로 歷代總督列傳閣이라는 해괴한 것을 건축하여 歷代朝鮮總督 寫眞을 安置하고 강제로 이에 참배케 하였던 것이다. 그 때 被檢된 敎徒 63명 중 7명은 악독한 고문에 못이겨 천추의 한을 품고 무참하게도 옥사하였다 한다.

3. 倭政의 功臣으로 온갖 快樂을 滿悅[편집]

金甲淳은 명실공히 부귀영화를 획득하였으나 그러나 그는 그것에만은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성에 굶주려 왔던 것이다. 나이 30이 되어서 겨우 계집맛을 알았으며 자기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또한 附日協力에 눈코 뜰 사이가 없어 계집에 대해서는 자연히 등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늙어서 바람이 난다고 좀 얼굴 맵시가 고운 여자라면 덮어놓고 덤비어 大田은 물론 儒城溫泉 公州 등에 小家가 수두룩하여졌다. 늦바람은 그칠 줄을 몰라 한시라도 계집의 궁둥이를 못떨어져 그의 淫行에 대한 사회의 비난은 날로 높아갔으나 그럴수록 그의 계집 道樂은 날로 激甚하여져 갔다.

한편 그는 附日協力에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倭人高官이 更送될 때에는 만사를 불고하고 반드시 釜山까지 歡送 迎接하였으며 동족의 和益을 위해서는 단 1전도 아끼면서도 日本을 위해서는 자기 재산을 다 바칠 듯이 날뛰었다.

그는 또한 至富術에 능통하였으므로 당시 그의 토지가 大田邑內에 數萬坪있는 것을 미끼로 하여 폭리할 묘안을 꾸며냈다. 즉 그는 사업에 실패하였다느니 보담 官廳 交際에 많은 채무를 졌으므로 원상태로 회복하자면 자기 토지를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만평이나 되는 토지를 每坪에 15전 불과한 것으로 판다면 도저히 예산이 맞지 아니하므로 倭官들과 결탁하여 忠南道廳을 大田에 遷移시키도록 하였다. 결국 道廳이 大田으로 옮기고 보니 每坪 15전 불과하였던 것이 坪當 一躍 數百圓에 폭등되어 거액의 폭리를 획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사에 성공한 金甲淳은 總督府高官을 주무르기 시작하여 朝鮮人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中樞院參議가 된 金甲淳의 세력은 날으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굉장하였다. 그러자 中日事變과 太平洋戰爭이 일어나자 그는 戰爭協力에 狂奔하였다. 혹은 臨戰報國團의 理事로서 혹은 國民總力朝鮮聯盟의 評議員으로서 其外 각 親日團體의 幹部로서 內鮮一體化 皇道실천에 超人的 활약을 하여 赫赫한 功績을 세웠던 것이다.

여하튼 金甲淳은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使令軍奴에서 朝鮮人으로서는 최고 지위의 中樞院參議까지 지냈으니 그도 한때의 偉人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가 그만큼 출세하게 된 裏面에는 얼마나 많은 동포가 희생당하였던가. 實로 그의 죄악을 생각할 때 切齒憤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註(老親日巨頭 金甲淳은 3천만 인민의 절대 지지하에 맹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反民特委에 체포되어 罪斷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

關東震災 虐殺事件의 張本人 代議士 朴春琴의 罪惡史[편집]

代議士 朴春琴이라 하면 그의 죄악이 너무도 殘忍하다. 인간으로는 想像도 못할 그 죄악상을 폭로함에 있어 붓끝이 激憤에 떨린다. 금일 親日派이니 民族叛逆者이니 하지만 朴春琴처럼 철저한 일제의 忠犬이며 또한 極惡無道한 놈은 없다. 아니 東西洋을 막론하고 朴春琴처럼 잔인한 惡鬼는 없을 것이다. 과거 이자의 흉계로 얼마나 많은 동포가 희생되었던가. 실로 몸서리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날 해방된 아니 新生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된 이 마당에 있어서 더욱 反民法이 공포 실시되어 賣國의 무리를 숙청하는 이 때에 朴春琴을 그냥 둔다면 전 민족이 용서치 않을 뿐더러 地下에 계신 殉國烈士와 그의 손에 쓰러진 동포의 영혼이 용서치 않을 것이며 現政府의 威信이 땅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가 현재 국내에 없다고 別視한다면 地下에 계신 영혼에 무엇으로 대하랴. 日本은 고사하고 南極 北極에 가서 숨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잡아와 민족의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다. 이에 政府當局은 하루 속히 日本에서 朴春琴을 잡아와 민족의 심판을 받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1. 無識蠻勇의 行狀[편집]

朴春琴은 密陽 출생으로 왜놈의 주점에 머슴 노릇하던 早孤餘生한 無賴漢인데 천성이 불량하고 쌈 잘하기에 유명하였으며 언제나 쌈패 대장 노릇하고 그의 이름은 不良者層에 絶對的이었다. 己未運動 전만 해도 南鮮에는 쌈패 별명이 굉장했다. 大邱에서는 ‘도리웃지’패 金泉에서는 백골패 釜山에서는 相愛會패인데 이것이 서로 만나기만 하면 三國誌가 연출된다. 그 당시의 朴春琴은 相愛會패 首領으로 張飛역할을 하였으며 보담 더 水滸誌에 黑旋風같이 만용을 부리어 그의 勇名은 斯界에 떨치었다고 한다. 朴春琴이의 유일한 포부는 싸움장사요 그 蠻勇을 밑천삼아 동경으로 가서 國粹會 巨頭인 ‘頭山滿’과 악수하고 출세해 보겠다는 큰 뜻을 품고 日本으로 건너갔다. 그는 東京에 가서 不良者를 수백명 모으고 相愛會 本部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걸어놓고 ‘頭山滿’을 방문하여 자기 포부를 說破한 결과 의외에도 ‘頭山滿’과 의지가 상통되었다. 그리하여 意氣揚揚한 朴春琴은 출세할 기회만 노리고 있을 때 天載一遇의 好機會는 왔다.

2. 關東震災 大虐殺事件 眞相[편집]

東京을 중심으로 한 關東地方 일대에 大地震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고 火焰이 沖天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大地震 즉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일어난 激震으로 20여 만 가옥이 倒潰되고 동시에 일어난 火災로 인하여 東京, 橫濱은 거의 灰燼되고 24만여의 사상자를 보게 된 關東大震災였다. 이 천지가 뒤집힌 수라장 속에서 수많은 동포와 유학생들의 살길이 어디임에냐? 혼란과 공포 속에서 살길을 찾으려고 헤매이는 우리 동포들의 앞에는 殘惡無道한 학살이 기다렸으니 이 무슨 惡神의 作戱이냐. “鮮人 죽여라!”하는 소리가 아우성치며 여기저기서 竹槍 棍棒 消防隊가 사용하는 쇠갈쿠리를 든 惡鬼들이 날뛰었으니 비참하게도 쓰러지는 것은 가련한 동포 유학생 뿐이다. 하늘을 가리운 火焰 속에서 그 어느 악귀가 잡아가는지 悲鳴을 치고 쓰러지는 조선 동포들-. 아! 그 얼마나 원통하고 분하였던고. 아마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였으리라. 도대체 동포를 그 누가 학살케 하였는가? 여기에는 戰慄할 兇謀가 있으니 이것이 즉 朴春琴이가 출세하겠다는 야욕이 빚어낸 술책이었다. 당시의 混亂과 恐怖 속에서 흥분된 시민들의 동요사태는 수습할 도리가 極難하여 政府 當路者들은 이를 기회로 사회주의자들의 民衆蜂起나 있지 않을까 하여 공포를 느끼고 있을 때 朴春琴이 ‘頭山滿’을 방문하여 “朝鮮人及 社會主義者들이 震災를 契機로 暴動을 일으켜 皇室을 顚覆하려고 計劃하고 있다.”라는 터무니도 없는 말을 끄집어내어 만일 그들을 없에버린다면 그 일은 자기가 맡겠다고 하였다. 이에 놀랜 頭山은 당시 加藤 내각의 內務大臣 水野鍊太郞이와 鳩首會議하고 朝鮮人과 中國人을 謀略 학살할 것을 成案하였다. 그리고 朴春琴을 불러 水野와 會見케 하였고 또한 朴春琴이는 조선 동포를 살해할 것을 下請負하였다. 이리하여 水野는 9월 2일 새벽에 「朝鮮人 支那人 社會主義者들이 各地에서 掠奪 放火를 恣行하니 各地에서는 嚴重 取調할 事」라는 無電을 치고 朴春琴은 相愛會 會員을 總動員시켜 “朝鮮人들이 放火 强姦 掠奪을 한다. 水源地와 井水에 毒藥을 넣는다. 朝鮮人이 武裝을 하고 橫濱에 上陸하였다. 죽은 屍體에서 금반지 金齒를 盜奪한다.” 등등의 謀略 宣傳을 하고 조선 동포를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던 것이다. 其殺戮方法은 붓으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殘忍無道하여 닥치는대로 銃殺 竹槍으로 刺殺 頭部四肢를 자르는가 하면 棍棒으로 打殺 生埋 등 실로 想像에 絶할 殘忍無?한 방법이었으며 더욱이 부인에 대하여는 老若의 차별없이 裸體로 하여 凌辱을 가하고 혹은 局部를 칼로 찢고 竹槍으로 찔러 죽이고 妊婦의 배를 갈라 胎兒를 끄집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다수의 동포를 被服廠跡에 몰아놓고 게솔린을 쳐서 燒殺하는 등 그 殘忍兇惡한 本性을 暴露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兇惡無比한 殺人鬼들이 약 6천有餘의 동포의 귀중한 생명을 뺏어갔던 것이다. 이 慘虐無道한 虐殺事件은 우리 민족으로서 영구히 잊을 수 없는 大屈辱이며 深怨 骨髓에 사무침을 새삼스러이 느껴진다. 아!- 兇鬼 朴春琴과 왜놈 水野들의 兇計에 희생이 된 우리 동포의 영혼 지금 어디매서 해매느뇨.

3. 드디어 代議士로 立身揚名[편집]

이리하여 朴春琴은 日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런데 이 虐殺事件의 진상이 東亞日報에 報道되어 朴春琴이의 兇惡無比한 罪惡이 暴露되었다. 이에 朴春琴은 하오리하까마에 게다짝을 끌고 서울로 와서 東亞日報社를 白晝에 襲擊하였다. 不意의 襲擊을 당한 故 宋鎭禹 사장은 그만 魂飛魄散하여 뒷문으로 도피하고 朴春琴이의 게다짝으로 사무실은 대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其後부터 朴春琴은 눈동자를 부릅뜨고 각계 재산가를 歷訪하고 相愛會 寄附金을 强請하였다. 결국 이 때문에 崔昌學씨와 拳銃 擊鬪까지 하였다. 하나는 鑛夫로 황금벼락 맞은 富豪 崔昌學씨요 朴春琴은 蠻勇이 밑천이니만큼 그들의 상대는 兩虎相鬪格으로 그리 만만치 않았다. 결국은 拳銃으로 쌍방이 만용부리다 사태가 불리함을 알자 相互間和解 하였다 하나 실은 崔씨에게 朴이 졌다고 한다.

우리 동포를 虐殺한 공로로 朴春琴은 드디어 代議士로 立身揚名하였다. 代議士가 된 朴春琴의 行悖는 점점 심하였다. 代議士란 간판을 갖고 각지로 돌아다니며 挾雜하기 시작하였는데 被害者가 不知其數이다. 혹은 利權事業 알선한다고 또는 鑛山 經營한다고 혹은 獵官運動하여 준다고 가지각색으로 神出鬼沒하였다. 그가 經營하던 春滿鑛山은 지대는 좋으나 운이 부족하였던지 年年 缺損으로 급기야는 鑛山經營難에 自陷하자 怜悧한 朴春琴은 崔昌學씨를 찾아가 春滿鑛山 經營權을 최씨에게 위임하였다. 이것이 달면 삼키고 쓰면 뱉자는 수작이었다. 의외에도 崔가 經營하자 採採有金格으로 성적이 양호하였다. 朴은 불같은 욕심이 爆發하여 總督府 高官을 買收하여 崔昌學씨를 誣告하였다. 드디어 崔는 敗訴하고 朴은 승리하여 巨額의 利를 보았다.

4. 大義黨을 組織[편집]

朴春琴은 朝鮮사람이면서 왜놈이다. 더구나 조국을 헌신짝 버리듯 잊어버리고 일제의 忠犬으로 어디까지나 충실하였으며 一言 一句가 祖國魂을 말살시켰다. 해방 직전까지도 各處를 순회하면서 內鮮一體 講演을 비롯하여 大東亞 聖戰이라 하여 皇道를 宣揚하였다. 그리하여 大和同盟을 조직하고 친일행동을 어쩔 수 없이 하면서 裏面에서는 일본이 망하기를 鶴首苦待하는 良心的 人士들을 위협하여 자기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자는 경찰에 밀고하였다. 점차 朴春琴의 愛國熱은 최고 절정에 달하여 關東震災 虐殺을 재실시하려는 목적으로 虐殺計劃機關인 大義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關東地方 大震災時 在日 朝鮮同胞의 학살을 下請負하여 그 兇惡無道한 殘忍性을 폭로하듯이 군사 당국자와 비밀리에 虐殺計劃을 세우고 국내 抗日 反戰 朝鮮民衆 30만명을 虐殺할 것을 下請負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朴春琴이의 白日夢은 깨어지고 말았다. 1945년(소화 20년) 7월 24일 오후 6시에 大義黨 주최로 府民?에서 亞細亞民衆奮起大會가 開催되어 忠犬들이 大氣焰을 올리고 있을 때 천벌이 내리어 정의의 폭탄 두 개가 폭발하여 이 會合을 두들겨 부셨다. 이는 지하에서 祖國光復을 위하여 血鬪하는 3인의 청년투사가 던진 다이나마이트로 왜놈과 朴春琴 一派의 간담을 서늘케하고 동포에게 무한한 통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의 날 8. 15는 왔으며 朴春琴 一派의 兇惡無道한 大陰謀는 분쇄되고 朴春琴은 자기의 신변이 위험해짐을 알자 일본으로 逃亡가고 말았다. 이 親日賣族의 元兇 殺人鬼 朴春琴을 일본으로 놓치고 만 것은 전 민족으로 하여금, 切齒憤慨치 아니할 수 없으며 이제는 다만 反民特別調査委員會가 전 민족의 總意에 얼마만큼 報答할 것인가를 볼 뿐이다.

5. 朴春琴의 講演行狀[편집]

朴春琴은 원래 무식한 所致로 講演 談話 논문 등은 많지가 못하였으나 그중 몇 가지를 공개하면 如左하다.

1. 1938년(昭和 13년) 5월 11일

京城敎化團體聯合會 주최로 「東洋平和를 爲하여」라는 題目으로 大氣焰을 토하였고

2. 1944년(昭和 19년) 1월 17일

每日新報社 주최로 府民館에서 개최된 學兵激勵大演說會에서 「朝鮮에 告한다」라는 演題로 “學徒들아 피를 흘려서 皇國을 지키라고” 絶叫하였고.(申興雨, 李鍾麟 등)

3. 1945년(昭和 20년) 7월 24일

大義黨 주최로 府民館에서 亞細亞民族奮起大會를 개최하여 「亞細亞民族解放」이라는 演題下에 獅子吼하였다. 朴春琴이의 演說要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朝鮮에 告한다>(1944. 1. 17. 學兵激勵大演說會)

“(前略) 내 신분을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는 1圓 49錢밖에는 수중에 없었고, 그리고 나는 부모의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었다. 나는 昭和 7년에 代議士가 되었다. 나는 그 당시 466명의 議席에서 조선인에게 3, 4의 議席쯤은 주어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立候補하였다. 그래서 개표의 결과는 최고점으로 당선되어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를 놀라게 한 셈이다. (중략) 이제야말로 일억 국민이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內地나 半島를 구별할 것 없이 이 聖戰을 完遂하여야할 것이다. 이번 特別志願兵도 이 정신을 이해하고 5천인이 합심하여 하나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한다.”라고 絶叫하고 “學徒들아 半島를 바르고 밝은 길로 引導하여라. 너의 피를 흘려서 2천 5백만의 前途를 열어 주어라. 우리의 活路는 오직 皇民化가 있을 뿐이다.”라고 창자가 끊어지도록 부르짖고 부르짖었다.

萬古逆賊 李完用의 亡種孫 貴族會理事 李丙吉의 再發惡[편집]

李丙吉의 죄악을 暴露함에 있어서 순서대로 공개하자면 萬古逆賊 李完用이를 初頭에 解剖치 않을 수 없다. 하나 目下冥府에서 崔判官의 豫審에 廻附되어 秋霜같은 審判을 받고 있는 惡鬼를 새삼스러히 紙上에 검토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만 賣國奴 李完用의 特殊實跡만을 공개하고 乃組의 賣國賣族行狀을 再踏襲한 李丙吉의 죄상을 공개하는 바이다.

1. 子婦와 姦通한 李完用[편집]

甲申政變 이후 朝野의 친일파는 왜구의 維新派 魁首 伊藤博文, 西園寺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 삼천리 槿域에 노예의 굴레를 씌우려고 暗躍하기 시작하여 李完用 내각에 이르러 飛躍的으로 露骨化되었다. 그리하여 國運이 衰盡함인지 天理가 無心함인지 李完用, 宋秉畯 같은 萬古逆賊이 미친狂이처럼 날뛰어 生佛과 같은 高宗皇帝를 威脅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長谷川好道가 聳南山에 대포를 걸고 李完用이는 ?劍을 겨누어 황제를 脅迫恐喝하면서 말하기를 “천하는 한사람의 亨運할 바가 아닙니다. 더구나 덕이 있어야 제왕노릇합니다. 陛下는 失德하였습니다. 民生은 塗炭에 빠졌소이다. 그리하여 동양의 先驅 日本天皇에게로 민심은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臣은 민의를 代하여 陛下께 충고합니다. 五條約 七條約에 調印함과 같이 合倂調印하소서.”라고 大膽하게도 李完用이는 無嚴한 彈壓的 行爲를 敢行하였다.

嗚呼라! 北漢山은 依舊히 높고 漢江은 悠久히 흐르건만 白衣民族은 倭寇의 毒牙城에 陷入하여 노예의 굴레를 쓰게 되었으니-.

이리 하여 韓日合倂의 絶對功勞者 李完用은 나라와 민족을 팔아 겨우 伯爵이란 爵錄을 받았다.

민족의 怨讐 李完用은 또한 人面獸心의 典型이다. 그의 子婦의 이름은 任乾九인데 얼굴이 푸르딩딩하고 입술이 가무잡잡한 꾀 淫蕩한 여자였다. 하나는 媤父요 하나는 子婦이다. 三綱이 뚜렷한 媤父요 子婦인데 天倫을 逆襲함도 분수가 있지 子婦가 쓸쓸히 閨房에 獨居함을 窺視한 李完用은 불타오르는 淫慾을 억제하지 못해 子婦의 허리를 껴안고 貞操를 要求하였다. 오랫동안 性慾에 굶주린 子婦는 媤父의 요구를 처음엔 거절하였으나 男便이나 媤父이나 자기의 性慾을 滿足시킴에는 別差異가 없다고 생각하여 속옷 끈을 풀어 헤치고, 인간으로서 하지 못할 죄악을 犯했다. 李完用은 젊은 子婦의 肉體를 마음대로 하면서,

“얼마나 좋은가!”하고 사랑의 속삭임을 시작하니 子婦는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좋은지 어쩐지..., 하늘이 무섭소.”라고 대답하였다 한다.

“此夜細雨三更時 兩人心事兩人知”라 그 두 淫男淫婦의 정사야 그 누가 알 것이냐마는 그래도 발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벌써 巷間에 山間僻地 坊坊曲曲에 傳播되어 三尺童子까지 “李完用이 며느리와 붙었다.”라고 노래를 부르고 곳곳마다 共同便所는 모조리 누가 썼는지 모르나 賣國奴 李完用 식당이라고 大書特筆로 써져 있었다. 李完用은 이같이 人類道德上 용서치 못할 죄악을 敢行하고 더구나 一身의 富貴榮華를 貪하여 사천년 빛나는 역사를 가진 조국을 송두리채 팔아먹었으니 實로 神人이 共怒치 않을 수 없다. 李完用은 그 후 朝鮮民族魂을 祭祀한 덕으로 侯爵이 되었으나 그 어찌 뜻하였으랴 京都 留學시킨 乃孫 李丙吉이가 ?盜질하다가 경찰에 체포될 줄을 그도 신이 아닌 다음에야 全然 몰랐으리다.

2. 李丙吉의 賣族行狀[편집]

李丙吉은 西紀 1905년(明治 38년) 1월 賣國奴 李完用(侯爵)의 차남 李恒九(男爵)의 장남으로서 誕生하였으나 1914년(大正 3년)에 李完用의 장남 侯爵 李升九(자기 처와 부 李完用과의 淫行을 알자 자살하였음)의 養嗣子가 되어 家督을 相續하였다. 翌年 4월에 東京學習院에 입학하여 同校를 卒業하고 京都帝國大學에 學籍을 두었다. 인간이라 하면 留學生으로서 더욱이 貴族으로서 행동을 謹身하고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李丙吉은 外貌만 인두겁을 썼지 그 행동은 亡種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乃組 李完用의 腐血을 받고 混血雜種의 자식이니 만큼 그 행동이 온전하다고는 상상하는것부터 忘想이다. 학교랍시고 看板뿐이요 대학생 교복에 금단추 달고 돌아다니면서 旅館하녀 倭갈보 부스러기의 궁둥이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쓰리 ?盜를 상습적으로 하여 放蕩하다가 倭警에게 數十次 붙잡혔으나 乃組가 侯爵인지라 그 面目을 보아서 訓示만 하여 放免시켰다. 그러나 그는 제버릇 게 못주어 ?盜團 魁首노릇 하다가 결국 형무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후 李完用이가 急死하였다는 보도를 듣고 李丙吉이는 귀국하여 乃組가 살던 阿房宮 같은 豚舍를 받아 淫婦 任氏와 같이 同居하였다.

李丙吉이는 乃組의 뒤를 이어 倭帝의 충실한 走狗가 되겠다고, 興亞報國團에 가입하여 常任理事가 되고 계속하여 臨戰報國團에 理事가 되고 國民總力朝鮮聯盟에 評議員이 되고 1942년(昭和 17년) 5월 30일 南次郞과 惜別함에 統治史에 劃時期라 題하여 談話를 신문지상에 발표하였고, 乃組의 덕으로 中樞院參議 朝鮮貴族會理事가 되고 보니 朝鮮 天地엔 나하나 뿐이라고 철없이 날뛰고 侯爵이란 看板下에 남의 아내 處女 賣春婦 等 가림없이 貞操를 빼았았다. 또한 所謂 大東亞戰爭이 일어나자,

“諸君, 때는 왔소이다, 전 세계의 인류의 적 米英을 撲滅할 때는 왔소이다. 우리가 皇國臣民이 된 영광을 보답할 때는 왔소이다. 千載一遇의 好機를 놓치지 말고 귀하 子息과 물자를 아낌없이 天皇陛下에게 바칩시다.”라고 絶叫하였으나 그 구변없는 말솜씨는 犬吠之聲과 같았다. ;

韓日合倂의 裡面에서 暗躍한 國際스파이 裵貞子의 罪惡史[편집]

1. 伊藤博文의 養女[편집]

가랑잎이 떨어지기 시작한 늦은 가을 어느 날, 당시의 임금 李太王의 王妃 嚴氏의 紹介로 그의 姪女라는 27세 가량 되는 한 美貌의 여자가 임금 앞에 안내되었다.

“이름은 裵貞子라 부르옵고, 오빠(金永振)의 딸이온데 오래 일본에 가 있다가 이번 日本公使館 通譯으로 오게 되어서 대리고 오게 하였읍니다.”

웃으며 말하는 嚴妃의 말에 임금은 滿面에 喜色을 띠우며 듣고 있다가 喜悅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하하하... 하고 呵呵大笑한 다음,

“그래, 이렇게 예쁜 姪女가 그대에게 있었단 말인가! 日本公使館 通譯이라니 반갑다. 일본의 정보나 가끔 알려주도록 해라.”하고 여자를 빙그레 바라다 보는 것이었다.

王室에서 벌어진 이 이야기는 밖에까지 알려지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王宮은 近來에 없는 喜悲 兩氣色으로 充滿된 感이 있었다. 이날부터 이 美貌의 麗人 裵貞子는 가끔 王室에 나타나게 되고 임금의 寵愛를 한 몸에 받게 되었다. 裵貞子- 한국의 貴顯名簿中에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당당히 왕궁에 드나드는 그의 행동은 必然 各 方面의 關心을 사게 되었다.

“嚴妃의 姪女란 말이 있는데 저런 미인이 있는 줄은 몰랐는걸...”

말에 말이 꼬리를 물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그러나 그 여자의 正體를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全然 迷宮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생사의 사이를 헤매고 열세 살 때 겨우 일본에 亡命하여 伊藤博文을 알게 되어 그 양녀로 訓育을 받고 성장하자, 日淸戰爭 勃發時에는 大島 少將과 같이 來國하여 어떤때엔 淸國公使 袁世凱와 會見하여 淸國軍의 動靜을 살피고 우리나라 王室의 비밀을 探査하여 조국을 일본에게 팔아먹으려는 導火線 役割을 해온 일본의 密偵 裵貞子였다. 裵貞子가 또 다시 한국에 오게된 裡面에는, 일본의 韓國侵略의 야망을 달성할 것과 그 障害가 되는 露國勢力의 排除라는 重大 使命이 있었던 것이다. 裵貞子는 伊藤博文에게서 秘密히 이 重大 命令을 받아가지고 駐韓公使로 赴任하는 林權助와 같이 조국인 이 땅에 온 것이었다.

露國과 일본과의 風雲은 점차 險惡하여가고 閔泳徽 李容翊 等 친로파 거두들의 暗躍은 날로 激甚하여졌다. 親露派에서는 露國의 大軍을 받아들여 일본과 開戰시키고 이것을 契機로 임금을 ‘우라지오스톡크’에 遷居시키자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 密謀는 卽時 일본군 密偵 裵貞子의 探知하는 바가 되었다.

이 急報는 당시의 日本公使 林權助의 손으로 電波를 타서 일본에 알려지게 되고 俄然 時局은 露日의 一戰에로 악화될 氣運이 濃厚하여졌다.

이렇게 內外情勢가 騷然한 가운데 어느 날 裵貞子는 또 다시 왕실에 나타났다. “朕이 露領으로 갈때는 貞子 그대도 同行함이 어떨꼬?...”

이날부터 며칠 안 지나서다. 仁川 바다에서 露艦 2隻이 日本軍艦에게 擊沈되었다. 때를 놓치지 아니 하여 裵貞子는 임금에게 上言하여 露國公使와 武官의 仁川追放과 親露派 內閣의 更送을 斷行하게 하고 韓圭卨 內閣의 成立과 親日政策이 실현되는 사이에 露日戰爭이 시작되어 裵貞子는 日本軍 軍部의 從軍命令을 받아 砲煙이 重疊한 滿洲曠野로 出戰하게 되었다.

2. 釜山 絶影島로 流刑[편집]

女軍事密偵 裵貞子의 滿洲에서의 活躍은 一躍 그 이름을 日本軍 將校들 간에 알려지게 하였다. 東奔西走 문자 그대로 일본의 走狗가 되어 活躍하다가 親露派가 다시 跋扈하게 되었으니 이를 肅淸하기 위하여 귀국하라는 日本軍 命令을 받아 急據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하여 親露派를 續續 密告하여 완전히 肅淸한 다음, 裵貞子는 伊藤博文에게 보내는 임금의 親書를 받아가지고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오래간만에 裵貞子를 만난 伊藤은 기뻐하며 親書를 받고 그를 駿河臺 濱田病院에 입원시켜 위로하여 주었다. 그리고 얼마 없어 裵는 伊藤博文에게서 重要 秘密文書를 받아 가지고 귀국하여 임금에게 바쳤던 것이다. 이때 李鳳來, 姜錫鎬氏 等은 暗暗裡에 이 賣國女의 暗殺計劃을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관계로 목적을 達成치 못하였다.

그 重要文書란 日本政府로부터 韓國皇帝에게 보낸 「勸告書」로 野蠻國 日本에 대한 주의를 喚起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이 蔑視的인 書翰을 받은 정부에서는 大驚失色하여 일본에 대한 警戒를 개을리 하지 말것을 분부하는 한편 매국녀 裵貞子를 체포하여 釜山絶影島로 流刑시키었다. 때는 西紀 1905년(明治 38년) 初春 2월이며 그때 裵의 나이는 35세이었다. 어제의 華麗한 身勢는 찾아볼 道理가 없이 孤島에서의 流刑生活은 悲慘을 極하였다. 그러나 日本公使館에서는 그를 同情하여 書記官 國分象太郞 監川一太郞 等을 派遣하여 慰問하고 일본정부에서는 桂首相 小村外相 伊藤博文 등이 各各 代理慰問使를 보내어 孤島에서 寂寂한 생활을 하는 裵貞子를 慰問하였다 한다.

露日戰爭의 일본승리로 인하여 1905년(明治 38년) 11월 14일 釜山에 상륙한 伊藤博文은 福田別莊에 旅裝을 풀고 제1차로 國分秘書官을 시켜 裵貞子의 赦免을 정부에 慫慂하였으며 한국정부에서도 할 수 없이 裵貞子를 赦免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裵貞子는 伊藤의 特使 國分秘書官에 引渡되어 서울로 올라와서 伊藤과 相面하게 되고, 임금은 侍從武官을 派遣하여 裵貞子를 불러 伊藤博文의 내한에 裵의 공로가 컸음을 致賀하였다 한다.

流刑生活에서 다행히 해방된 日本國 密偵 裵貞子의 宮中에서의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만한 화려한 것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왕실에 金永振, 李容馥이 있고 靑年將校 朴榮喆, 金永善, 李甲, 金基元 등이 있었고 表面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伊藤의 뒤에서 暗躍하여 그의 일본군에 협력한 功勞는 實로 컸던 것이다.

3. ‘시베리아’ 벌판을 亂舞한 朝鮮의 ‘마다. 하리’[편집]

統監府의 設置, 李王 垠의 東京遊學, 高宗讓位 등 韓末의 悲史는 시대의 動向을 如實히 反映하는 것과도 같이 唐慌한 潮流속에서 움직이었다.

한편 淸國의 形勢는 날로 險惡해지고 동양의 大勢는 一觸卽發의 陰鬱한 空氣속에 쌓였었다. 한국침략의 元兇 伊藤이 드디어 한국을 떠나는 날이 왔다. 統監 伊藤은 한국에서의 複雜微妙한 淸國과의 국제관계를 모면하기 위하여 동경으로 귀국하게 된 것이다. 伊藤이 서울을 떠나는 날 統監 伊藤 官邸의 一室에 앉은 裵貞子는 꿈과 같은 重大 秘策을 알게 되었다.

“청국의 今後의 동정은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동양의 大勢에 影響이 미치게 된다. 袁世凱의 부인은 한국인이라 하며 그네의 힘을 꼭 빌어야 하겠다. 그대는 卽時 청국으로 가서 한국사람인 袁氏夫人과 接近하여 日淸의 和睦을 達成시키도록 노력하여라. 나의 이상은 將來 東三省을 조선에 倂合하여 일청 양국의 중간에 帝國을 만들고 東洋平和의 基礎를 튼튼히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伊藤과 裵貞子와의 密約은 누구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대도 大磯에 와서 修養하는게 어떠냐”.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이 말이 실행되지 않고 憫憫한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伊藤博文, 哈爾賓 驛頭에서 暗殺!” 이라는 靑天霹靂같은 消息이 裵貞子에게 전해졌다. 10월 27일 伊藤이 暗殺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裵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으며 마음의 태양을 잃어버린것과 같이 伊藤이 죽은 뒤의 裵貞子는 半狂狀態로 수개월을 지내다가 드디어 병으로 呻吟하게 되었다. 그러나 ‘韓日合倂 調印’의 消息을 들었을 때는 病席에 누워 있으면서도 소리를 높여 萬歲를 불렀다 한다. 王室의 權勢者 裵貞子는 그때의 ‘弟5列部隊長’格인 倭將 明石의 보호를 받아 日本軍 憲兵司令部의 따뜻한 날게 밑에서 療養生活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중에 歐洲大戰이 勃發하였다.

1925년(大正 14년) 가을도 짙어갈 무렵, 女軍事 密偵 裵貞子에게 ‘시베리아’의 從軍命令이 내리었다. 바르치잔戰이 跋扈하는 쓴도라 地帶인 저 ‘시베리아’ 벌판에서 ‘마다하리’와도 같이 出沒하는 이 怪婦人의 행동은 及其也는 露軍의 頭痛 거리가 되고 말았다. 어떤 때엔 捕虜가 되어 投獄되고 어떤 때엔 匪賊에게 拉致되어 몇번이나 死線을 넘어 생사의 地境에서 奇蹟的으로 살아난 것은 그의 갖은 美貌의 德이라고 하며 露國에 있는 日本領事館 密偵과 滿洲에서의 日本軍 囑託을 지내는동안 獨立運動者들을 密告하여 投獄殺害시키는 등 갖은 惡質行動을 敢行하였던 것이다.

4. 純潔한 朝鮮女性 백여 명을 倭兵의 ‘노리개깜’으로 提供[편집]

裵貞子가 한참 內鮮一體 運動에 活躍하던 9년 전의 어느 날 裵貞子를 訪問한 일본인 某新聞 記者는 그의 印象을 다음과 같이 發表한 일이 있다.

금년 67세를 맞이한 往年의 女流志士 裵貞子 女史는 옛날의 旺盛한 元氣 그대로 餘生을 半島統治에 바치고 있다. 動亂 속에서 살고 國事(日本政治)에만 盡力하여온 그에게는 아직도 쉴 餘暇 없다.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었는데 집을 잘 찾아 오셨군요.”

往訪한 記者를 남자와 같은 소리로 맞는 裵女史는 아직도 44, 5세의 精力이 있어 보인다.

“꿈으로 生覺하여 말씀드리더라 해도 저의 밟아온 길은 너무도 길고 어지러웠어요. 가끔 가만히 옛 일을 生覺하여 보면 죽지 않고 요행히 잘 살아왔다고 生覺될 적이 없지 않아 있지요. 그렇지만 微力이나마 저희들이 活動한 보람이 있어 조선이 오늘과 같은 즐거운 날을 맞게 된 것을 生覺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生覺되어요.”

그때의 裵의 나이는 67세였다.

太平洋戰爭이 始作되자 日帝의 走狗 裵貞子는 戰線에서 祖國 日本將兵들이 苦生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프다 하여 日本軍部의 後援으로 70 老軀를 이끌어 純潔한 조선여성 백여 명을 軍人慰問隊라는 名目下에 强制 動員시켜 南洋群島로 誘引하여 가서 性慾에 굶주린 倭兵의 ‘노리개깜’으로 提供하여 일본의 最後勝利를 위하여 熱烈히 協力하였다.

이와 같이 70餘 年을 韓日合倂과 獨立運動의 勢力排除에 盡力하고 일생을 日帝侵略戰爭의 最前線에서 暗躍하여 조선민족의 全面的 抹殺을 꾀하는 등 最惡質的인 ‘스파이’ 行爲를 敢行한 賣國女 裵貞子의 叛逆罪狀에 대한 민족의 怨恨은 子孫萬代에 이르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민족의 이름으로 處斷하여 燦然히 빛날 앞날의 우리 역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이다.

5. 裵貞子와 記者와의 一問一答[편집]

어렸을 때 伊藤博文의 養女가 되어 李朝 末期로부터 日帝의 間牒으로 韓日合倂의 裏面에서 暗躍하였고 合倂 後에도 일제를 위하여 縱橫無盡으로 活動하여 온 稀代의 女密偵 裵貞子의 解放 後動靜은 어떠한가? 76의 老齡인 裵貞子의 動靜을 城北洞으로 探査하여 記者는 다음과 같은 收獲을 얻었다.

×월×일 城北支署를 通하여 裵貞子의 孫子가 製粉業을 경영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다음에 洞會事務所에서 裵貞子의 世帶食口와 前 住所를 探知하고 洞會 某課長이 多年間 同 洞會에 勤務하고 있었던 것을 알고 同 課長을 訪問하여 다음과 같은 豫備知識을 얻었다. 裵貞子가 解放前 警務局 囑託으로 있을 때는 權勢가 堂堂하였다 하며 그가 老婦임에도 不拘하고 洋裝에 ‘빠-마낸트. 웨이브’하고 다니는 것을 脾胃에 맞지 않는 듯이 評하였다. 그러나 滿足할만한 收獲을 못 얻어 同 課長이 紹介해주는 同里 某有志를 찾아 裵貞子의 親日罪相의 短片을 얻었다.

裵貞子는 韓日合倂 前에 玄英運 朴榮喆 朴斗營 盧伯麟 田永勳 金起元 李甲 柳東悅 등 8명을 일본으로 遊學시켜 陸軍士官學校까지 졸업시켰으나 其中 柳東悅 李甲 盧伯麟 등 3명은 韓日合倂時 中國을 거쳐 露國으로 亡命하였으며 朴榮喆 朴斗榮은 그대로 일본군인으로 最後에는 陸軍大佐까지 昇進시키고 또한 그의 오빠인 裵國泰를 漢城判尹(現 서울시장格)으로 또 그 아우를 警務監督官(現 警務局長格)으로 하는 등 日本天皇의 絶對的인 信任을 받은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는 滿洲保民會를 創立하는데도 많은 活躍을 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警務局 囑託으로 있었다 하는데 前記 滿洲保民會라는 것은 조선의 獨立運動을 하다가 亡命한 愛國志士나 국내에서 生活苦로 男負女戴하여 移民하여 가는 同胞들을 抑壓하고 滿洲에 親日傀儡政府를 樹立하기 위하여 陰謀間諜을 하는 단체인 것이다. 裵貞子는 同 단체의 役員及 顧問으로 있으면서 朝鮮總督府로 來往하여 基金調達에 全的으로 盡力하였던 것이다. 또한 裵貞子는 자기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 玄英運과 결혼하여 약 1년간 생활하다가 離婚하고 再次 同 유학생 朴榮喆과도 약 1년간 생활하다가 또 다시 離婚하였다. 이 결혼의 仲介와 主禮는 伊藤博文이가 하였을 것이라 한다.

記者는 다시 城北洞 183番地의 6號(1統 5班) 마루택 위에서 시들어버린 毒버섯처럼 76세의 老軀로 製粉業을 하며 愁心의 餘生을 보내고 있는 裵貞子의 自宅을 찾아 그의 孫子인 한 청년(製粉業하는)과 對面하였다. 恐怖와 疑惑에 쌓인 表情으로 記者의 質問에 對答을 廻避하는 그 청년은 裵貞子 當者를 꼭 만나겠다는 强硬한 記者의 態度에 못이긴 듯 內房으로 안내한다. 來意를 告하고 病席에 누운 裵貞子와 問答하였다. 그는 周圍를 돌아보고 웃으면서 前提하기를 老病으로 아무 生覺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 우리 조선이 解放되어 新生政府의 樹立을 보게된 데 대하여 어떻게 보느냐 하였더니

“기쁜 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라고 뻔뻔스럽게 말한다.

“朝鮮獨立이 그리 기쁘다면은 과거 자신의 親日叛逆 行爲는 어찌된 셈이냐?”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伊藤의 養女가 되어 自然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면 親日行爲를 率直히 말하여 달라.”

“지금 아무 記憶도 없고 무엇이라 할 것도 없다. 다 어리석고 年少한 까닭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의 親日行爲가 歷史에 歷歷한데 率直히 말하여 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質問에 그는 年少한 탓으로만 돌리고 答辯을 避한다. 옆에 있는 孫子가 焦燥한 表情으로 자기 祖母를 흔들면서 “自白하라” “容恕를 받아라”는 등 웃지 못할 喜劇을 演出하고 있다. 記者도 質問의 方向을 돌리어,

“노인이 13歲時 伊藤의 養女로 된 것이 사실이냐?”

“그렇다. 어려서 아무 것도 몰랐다.”

“韓日合倂시 玄英運외 8명을 일본에 유학시켜 士官學校를 졸업시켰느냐?”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

“어떠한 意圖로 였었느냐?”

??히 答辯을 拒絶...

“答辯을 避하는 것은 親日意圖였었다는 것으로 認定한다.” 이 때 손자되는 청년 唐慌하여 祖母에게 容恕를 구하라고 哀願....

“노인이 한참 活動할 때가 30년 전후이니 年少하였다는 것은 거짓이고 意識的 行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빠 裵國泰를 漢城判尹에서 警務監督官까지 출세시킬 때에는 相當한 權勢일 것인데?”

“나의 힘이 그리 클 리 없다. 다만 伊藤의 養女 탓으로.”

“그보다 日帝에 忠實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허허... 하고 쓸쓸히 웃으면서 對答을 避한다.

“滿洲에서 保民會를 創立하였는데 會長은 누구며 노인은 무엇을 맡았는가?”

“會長은 ○○○씨이고 나는 顧問으로 就任하였다.”

“保民會 基金調達을 위하여 자신이 總督府로 交涉하여 發展시킨 것은 노인의 盡力의 膳物이 아닌가?” 하는 質問에는 말없이 沈?-.

“同단체가 親日間牒機關으로서 愛國志士나 移民하여 가는 同胞를 抑壓하고 同胞의 犧牲을 强要하여 謀略과 密偵行爲로 滿洲傀儡帝國을 세우자고 든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質問에 쓴 웃음을 띠우며 顔色이 붉어졌을뿐 沈?-.

“노인이 大正 10년 頃 귀국하여 警務局 囑託으로 活動하였다는데 그 紹介는 누가 하였던가?”

“當時의 警務局長 丸山의 幹旋이었다.”

“當時 贈與받았다는 土地는 얼마나 되는가?”

“약 600坪 된다.”

“警務局 囑託을 지낼 때 愛國志士를 投獄하고 ?盜 등 雜犯으로부터 金品 등을 供給받고 無罪釋放시킨 일이 事實인가?”

역시 沈?- 無答-.

“太平洋戰爭中 同胞여성 백여 명을 南洋群島로 軍人慰問이란 名目으로 끌고 간 일이 있지 않은가?”

이 말이 나오자 손자된 청년이 가로막아 代辯을 한다.

“그 때 曺圭卨이가 數次 우리 집에 찾아와서 錢主가 있으니 이 일을 하면 收支가 맞을 것이니 그 許可手續만 하여주면 된다 하여 手續을 하여 주어 같이 가자고 하기에 同伴하였던 것이다. 그 仔細한 것은 錢主가 잘 알 것이다. 錢主의 住所姓名은 잘 모르고 그의 丈人 梁正?을 안다. 더 仔細히는 曺圭卨이가 알 것이다.”

憂鬱한 空氣가 充滿되었다. 보다 큰 收?을 바라는 것을 斷念하여 告別하고 문을 나서는 記者에게 孫子되는 청년은 握手를 再三次 懇請하기에 喜悲交錯하는 마음을 부여안고 그의 哀乞을 들어주고 뒤돌아섰다. 註(裵貞子는 反民特委의 손에 逮捕되어 方今 斷罪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朝鮮臨戰報國 總參謀 七人組長 李晟煥의 罪惡史[편집]

1. 學務局長鹽原의 參謀[편집]

李晟煥은 思想假裝行列하면서 農民運動을 猛烈히 하여 수십만원 詐取한 惡質分子다. 그는 計劃的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三國志의 曺操行爲를 敢行하였다. 뿐만 아니라 金東煥이와 같이 臨戰報國團의 總參謀로서 附日協力의 意思없는 多數한 人士를 臨戰報國團에 威脅과 誘導로서 强制로 加擔케 한 最惡質 親日叛逆者이다. 여기에 李晟煥의 罪惡을 白日下에 暴露시키어 民族精氣 培養의 祭物로 바친다.

倭政 40년 간의 首級功勞者 70餘 名中에서 安興晟煥 즉 李晟煥의 功績만은 第1指를 屈할만큼 偉大하였다. 그는 若干의 辯才를 武器로 혹은 思想家에 自處하고 혹은 天道敎徒로 혹은 實業家 行勢를 하였으며 一時는 某團體關係公金××問題로 滿洲에 逃避生活도 한 바 있었다 한다.

그는 ××術에 能하여 그 甘言利說에 誘惑되어 被害當한 靑年男女가 不少하였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의 私生活 問題는 論外로 하고 그가 滿洲로부터 歸國한 후 무엇을 하였던가? 南次郞 總督時代 鹽原 學務局長의 信任을 받아 辛泰嶽 金東煥과 合流하여 鹽原의 秘密 顧問格으로 유명한 所謂 7人組로서 倭總督 政策樹立에 重大한 殺割을 한 것이다. 當時의 그는 鹽原의 私設參謀格이었으며 7人組의 組長格으로 猛活을 하였다. 우리 민족의 記憶에 아직도 生生한 朝鮮語廢止 創氏制 志願兵 學兵 徵兵 徵用 등 諸 制度의 創設立案者 獻策者 贊同者로서 李晟煥 存在와 7人組의 大役割과 그 功績은 萬古不朽할 것이다. 勿論 當時에 韓相龍 尹致昊 崔麟 崔南善 李光洙 其傀親日派의 巨頭 또는 名物로서 南次郞의 信任을 받은 자 不少하였으나 南次郞은 ‘로보트’에 不過하였고 總督의 實權과 모든 重要政策 樹立은 鹽原이 左右하였는데 그 鹽原의 參謀는 李晟煥이었음으로 李晟煥의 裏面 役割과 숨은 功勞는 前記 名物들을 훨씬 凌駕하였던 것이다.

所謂 大東亞戰 卽前과 後에 있어서의 李晟煥의 表面活動도 活潑하였다. 朝鮮臨戰報國團 國民動員總進會 등을 組織하여 그 總參謀格으로 있으면서 다수한 人員을 動員케 하였다. 그 當時의 知名人士中 일제에 好感을 갖지 아니한 자는 戰爭協力的 行動을 忌避謀免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인물일수록 끄집어내기에 노력한 자는 李晟煥이었다. 警察壓力의 背景을 갖았음으로 不應키 困難하며 排日的 思想家로 指目받은 인물의 大部分은 不得已 順從하였으며 高元勳은 道知事 出身이었으나 臨戰報國團에 參加키를 最初는 拒絶하였다가 그의 甘言利說에 被動되어 양자 합작으로 거액을 취득하여 私腹에 充하였다 하며 韓圭復 또한 李晟煥이에 被動되어 일시 많은 활동을 한 것이라 한다.

이상과 같이 혹은 그의 감언에 被動된 자와 그의 배경 위협에 부득이하여 임전보국단 간부 또는 강연회 연사 등으로 非本意의 참가 또는 출석한 자 不少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병역 징용 등에 응징된 청년 금품을 헌납한 양민 혹은 자진적으로 혹은 피동적으로 일제에 헌납한 인사가 數多한 이면에는 李晟煥의 공로가 절대 위대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여하튼 李晟煥은 친일파의 친일파이며, 그의 전시 활약의 일 부면만 소개하면 如左하다.

2. 李晟煥의 講演行狀[편집]

1. 1941년(昭和 16년) 9월 2일 부민관에서 辛泰嶽 金東煥 등과 함께 臨戰對策講演會(이는 본지에 공개하였으니 그 欄을 보시라)를 개최하고 「愛國의 至誠은 이 機會」라는 演題로서 일본을 위하여 우리 민족은 이 때에 죽어야 된다고 열렬히 부르짖었으며.

1. 동년 10월 7일에는 中央中學校 강당에서 金東煥 외 6명과 함께 「志願兵 普及 血戰隊」라 題하고 지원병 응모를 강조하였고.

1. 동년 10월 9일에는 臨戰報國團 결성식을 앞두고 각도 순회강연대를 조직하여 그는 春川 大田 등 각지에서 애국열을 고취하고 臨戰報國團의 사명을 역설하였고.

1. 동년 12월 14일 府民?에서 임전보국단 주최로 개최된 米英타도 대연설회에서 「打倒米英侵略主義」라는 演題하에서 대기염을 토하였고.

1. 1942년(昭和 17년) 2월 27일 中央放送局을 통하여 「半島 靑年에 告함」이란 演題로서 우리 청년의 황민화와 전쟁협력의 필요를 강조하였고.

1. 동년 3월부터 1944년(昭和 19년) 9월까지 2년 有餘間에 강연 방송 좌담 등 京鄕 각지에서 50여 회를 행하였으며. 1. 1944년(昭和 19년) 10월 18일 부민관에서 金東煥 辛泰嶽 등과 함께 국민동원 대강연회를 개최하여 그는 「2천 6백만 總進軍」이란 題로서 전국민이 전사할 각오를 갖어야 된다고 獅子吼하였으며.

1. 동년 11월 1일 일본 徵用 공장 체험 좌담회를 개최함으로서 징용공장의 대우를 기만적으로 선전케하였고.

1. 동년 12월 18일 大東亞戰 기념강연회에서 일본의 전승을 祝하고 제국 신민의 영예를 자찬하였고.

1. 1945년(昭和 20년) 1월 중 부민관 및 국민학교 數個 所에서 황민화사상 고취와 전쟁 절대협력 필요의 연설회 등에 참가하여 犬吠之聲 같은 말솜씨로 역설하였으며.

1. 1942년 이래 1945년 3월까지 『三千里』, 『東洋之光』, 『每新』 기타 신문잡지에 20여 회에 亘하여 논문과 담화 등을 발표하여 황민화사상 注入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에의 응모를 권고하였고 참정권 부여를 찬양한 바 있었다. 李晟煥의 논문 담화 강연 등을 종합하여 전부를 소개하면 그가 얼마나 일제에 충실하였던가를 容易히 알 수 있을 것이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므로 다만 그 중의 일례를 소개한다.

<半島 靑年에 告함>

“(前略) 世人 중에는 혹은 露西亞의 공산주의를 찬미하여 혹은 米英의 자본주의를 동경하나 이 양자는 모두 우리 적이다. 우리는 우리 황국의 광휘있는 역사와 皇恩을 감사히 생각하고 황국의 승전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 내어 놓아야 될 것이다. 大東亞戰爭은 지금으로부터 본격화하는 중대 단계이다. 우리 청년은 一死報國의 새로운 각오를 갖고 혹은 전쟁에서 혹은 직장에서 勇戰敢鬪 하다가 순국하면 無上의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 황국은 과거 수십년 간 우리 반도동포의 복리를 위하여 성심성의로써 노력하여 왔다. 그 은혜를 보답할 시기도 이 때이며 만대후손의 장래를 위하여서도 우리는 대일본제국 신민이란 영예를 감명하고 진충보국하여야 될 때이다.(中略)”

日本 代議士로 出馬한 七人組의 巨頭 辯護士 辛泰嶽의 賣族行狀[편집]

일본 代議士로 출마까지 하고 변호사란 직업을 악용하여 철두철미 일제의 施策에 협력하여 이땅 인민을 억압하던 首級 친일파 辛泰嶽(三川淸)의 반민족행위 죄상은 너무도 世間에 유명하기 때문에 구태어 여기에 其 죄상을 적어 붓끝을 더럽힐 생각조차 나지 않으나 현재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친일 반역도들의 과거의 죄악사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1. 李晟煥 一派와 같이 誘導役割[편집]

변호사 辛泰嶽은 咸北 扶寧 출신으로 1902년(明治 25년)에 탄생하여 소학 중학을 거쳐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변호사로서 朝鮮日報社 법률 고문으로 있을 때엔 그래도 민족주의자로서 자처하며 일반의 신임도 얻었으나, 자기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차츰 본성을 나타내어, 왜정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부귀공명하겠다는 야욕에 조선어폐지 창씨제도 실시 학병 지원병제 실시 등에 많은 공헌과 협조를 한 親日魁首 李晟煥 일파에 합류하여 소위 七人組라는 것을 꾸며냈다. 그리하여 전쟁에 협력할 의사가 없는 양심적 인사들을 좌담회 강연회 기타 친일단체에 갖은 수단방법으로 유도참가케 하였으며 또한 臨戰報國團 준비위원으로서 각지에 강연행각을 하여 내선일체화 황도선양에 헌신적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辛泰嶽의 감언이설과 위협에 마음에 없는 附日협력을 한 인사가 다수였다 한다.

2. 日本 代議士로 出馬[편집]

서울시 武橋洞과 일본 大阪市 東成區 中道町에 이중으로 사무소를 둔 변호사 辛泰嶽은 약 2개년간을 도일 출장하여 일본 대의사로 출마할 준비공작을 하였다. 당시 關東에서는 蠻鬼 朴春琴이가 출마하였고 관서에서는 李善洪 康慶玉 등이 출마하였는데 辛泰嶽은 왜인 응원 변호사 수십명과 조선인 응원 변호사 洪舜秉 등을 시켜 비굴하게도 투표할 의사가 없는 조선인 동포들을 1표에 ○○원을 제공하여 가며 선거권 약 5000표를 매수하여 선거장에 임했으나 경쟁자인 前記 李善洪의 밀고로 사실이 탄로되어 애석하게도 대의원의 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辛泰嶽은 응원 변호사 洪舜秉과 같이 8개월 體刑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 때 辛泰嶽의 응원 변호사이던 왜인 수명은 최고 1년 내지 8개월 體刑을 받았으며 그의 야욕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희생된 동포들은 이로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辛泰嶽은 출마 당시 도처에서 정견발표할 때 언제나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열렬히 주장하여,

“조선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당선되어야 대동아공영권의 일원으로 조선사람도 끼게 될 것이니 내가 자격이 있으나 없으나 투표해주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한다.

변호사 辛泰嶽은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는 최후 발악적으로 전쟁협력에 광분하였다. 李晟煥 일파와 같이 臨戰報國團을 조직하여 이사가 되었고 또한 그에게는 무한한 영광인 國民動員總進會 상무이사로 피임되었고 其 외 국민동지회 대의당 등의 중심인물로서 매족행위를 하기에 촌각의 쉴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3. 辛泰嶽의 講演行狀[편집]

辛泰嶽은 변호사인만큼 강연 담화 논문 등으로 附日협력한 일이 많았으나 일일이 枚擧키 어려움으로 그 일부를 들면 如左하다.

1. 1941년(昭和 16년) 9월 4일 오후 6시 반부터 서울 부민관에서 臨戰對策 협의회 주최인 임전대책 대강연회에서 李晟煥 金東煥 申興雨 등과 같이 「東京 大阪은 이렇다」라는 演題하에 대열변을 토로하였고.

1. 동년 10월 18일 19일 양일에 걸쳐 金?洙와 함께 晋州 光州 양지에서 臨戰報國團의 사명을 강조하였으며.

1. 동년 11월 15일 言論報國會를 조직하여 이사가 되었고 각지에 강연행각하여 言論報國會의 취지를 역설하였고.

1. 1944년 10월 18일 오후 6시부터 서울 부민관에서 개최된 국민총동원 총진회 주최인 국민동원 대강연회에서 「援護運動에 對하여」라는 演題하에 대사자후하였다.

李晟煥이는 또한 언론보국회 상무이사로서도 혁혁한 친일공적을 세웠다 한다. ;

日本의 守護神되라고 絶叫한 中樞院參議 高元勳의 賣族行狀[편집]

1. 大義黨 大和同盟 等으로 民族殺害 企圖[편집]

中樞院參議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가진 老친일파 高元勳은 왜정 총독부 고관 중에서 稀有의 인물의 하나로 왜정 40년간의 首級 공로자 중에서 으뜸가는 거물이었다. 그는 서기 1881년(明治 14년) 3월에 慶北 聞慶郡 山陽面 新田里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의 따뜻한 날개 밑에서 무난히 소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0년(明治 40년) 7월에 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1911년 8월 總督府 警部로 被任되어 倭帝의 충실한 走狗로서 눈부신 활약을 하다가 1913년 5월 경성 보성전문학교 교수로서 교편을 잡고 1922년 同校 교감에서 학교장으로 승진됨에 기고만장하여 倭帝의 고관들에게 달라붙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4월에 조선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중추원참의가 되어 동년 12월 全羅南道 참여관 1926년 慶尙北道 참여관 1929년 1월 平安南道 참여관을 거쳐 京畿道 참여관이 되고 1930년 4월 平安北道 참여관을 역임 후 1932년 9월에 全羅北道 知事에 被任 되었다. 도지사가 된 高元勳은 권세를 방패로 돈벌이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거대한 재산을 모으고 지사를 그만둔 후부터는 附日협력에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소위 中日事變이 돌발되고 계속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남에 친일파 高元勳의 반민족행위는 최고조에 달하였다.

그는 李晟煥 金東煥 辛泰嶽 曺秉相 일파와 합류하여 가지고 임전보국단의 요인이 되고 각지로 다니며 同祖同根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끄집어내고, 내선일체이니 황도실천이니 창씨개명이니 하며 소위 聖戰완수를 위하여 피를 흘리고 절규하고 조선어 말살과 민족문화에 대한 무자비한 억압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여 민족에 대한 최대의 죄악을 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전세가 불리하여 玉碎만 거듭함에 이 위기를 神機에 돌리려고 朴春琴 일파와 공모하여 大和同盟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最高盡忠을 맹세하였든 것이며 소위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에 장해물이 되는 모든 비결전적 요소를 숙청하기 위하여 흉악무비한 대학살 계획기관 大義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실로 그의 죄악은 神人이 공노할 바이며 그에 대한 민족의 深怨은 골수에 사무쳤던 것이다.

그의 전시활약은 枚擧키 어려울만큼 多大하였으나 그 일부만을 공개하겠으니 응당 민족의 秋霜같은 심판이 있기를 바란다.

2. 高元勳의 親日狂狀[편집]

1. 1937년(昭和 12년) 9월 6일부터 金在煥 申鉉求 등과 같이 慶北 각지를 돌아다니며 내선일체 황도실천을 앙양하는 강연을 하였고.

1. 1938년(昭和 13년) 7월 20일 경성여고보 강당에서 개최된 朝鮮敎化團體 연합회 주최 총독부 후원의 시국대응강연회에서 尹○昊 車載貞 등과 함께 일본의 수호신이 되라고 절규하였으며.

1. 1939년(昭和 14년) 8월 5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주최 국민정신선양 各道 강연행각에 참가하여 韓圭復 金思演 梁○三 李覺鍾 李升雨 등과 함께 전력증산 지원병 응모 등을 강조하였으며.

1. 1941년(昭和 16년) 8월 24일 尹○昊 朴興植 金東煥 李鍾麟 등과 興亞報國團을 조직하여 상임위원으로 피선되고.

1. 同年 同月 25일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으며

1. 同年 10월 하순에 임전보국단 결성식을 앞두고 각도 순회 강연대를 편성하여 18일은 春川邑에서 李晟煥과 13일은 平壤에서 朴興植과 함께 임전보국단의 사명을 해설하는 강연을 하였고.

1. 동년 10월 22일 부민관에서 임전보국단을 결성하여 부단장에 피임되었고.

1. 국민총동원조선연맹의 이사로서 혹은 鍊成部委員으로서 내선일체 조선어말살 등에 눈부신 활약을 하였으며.

1. 1945년(昭和 20년) 2월 11일 부민관에서 학살음모단체 大義黨의 자매당 대화동맹을 결성하고 심의원이 되었으며.

1. 동년 6월 22일 부민관에서 반일반전 조선동포 30만명의 대규모 학살을 기도하고자 大義黨을 결성하고 위원이 되었으나 8. 15로 인하여 이들의 전율할 흉모는 깨지고 말았으며 그는 또한 비행사 愼鏞頊 대주주 金?洙 등과 朝鮮航空工業株式會社를 조직하여 헌신적 노력을 하였다. 이와 같이 高元勳의 매족행상은 도저히 枚擧키 곤란하며 그는 유일무이한 부일협력자이었고 東光製絲 사장으로서 거액의 이윤을 본 巨富로도 유명하다.

流暢한 文章으로 皇道宣揚을 鼓吹한 親日狂洙 李光洙의 罪惡史[편집]

1. 第 1次 變節은 許英淑의 秋波[편집]

소설가 李光洙는 그 이름이 너무나 세상에 유명하다. 소설가로서 친일파로서 명성이 높은 李光洙는 한때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上海를 근거로 한 대한임시정부 기관지인 獨立新聞 主筆로 조국광복을 위하여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허나 그가 변절한 후의 매족행위는 너무나 과격하였고 또한 그 죄악이 너무도 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李光洙는 平北 定州 五山 출생으로 오산학원 李昇薰 문하에서 중학 정도까지 수학하고 上海로 망명하였다. 당시의 上海 佛祖界는 우리 선배 혁명투사의 총본영이었으며 安昌浩 呂運亨 선생을 위시한 혁명투사들이 대한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당당하게 조국을 일제의 毒牙城에서 구출하려고 천하에 호소하던 때였다. 李光洙도 또한 혁명대열에 참가하여 조국광복을 위하여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되어 혁명대열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것은 朝鮮總督府 警務局 밀정으로 上海에 탐사하러 온 許英淑이가 李光洙에 요염한 추파를 보내어 유인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심지박약한 李光洙는 許英淑의 선정적인 유혹에 못이겨 동지를 배반하고 그와 사랑을 속삭였다. 許英淑의 爛熟한 육체에 도취된 李光洙는 동지들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조국을 사랑의 보금자리로 삼아 귀국하였다. 그런데 그 어찌 뜻하였으랴. 애인 許英淑이가 경무국장 丸山의 명령으로 李光洙를 유인하러 온 독사같은 요부일 줄이야! 그도 新人이 아닌 다음에는 꿈에라도 몰랐을 것이다. 李光洙의 몽상은 그만 공중누각이 되어 서대문형무소 철창에서 신음하게 되었다.

2. 日帝에 文章報國을 盟誓[편집]

李光洙는 철창에서 신음하면서도 許英淑에 대한 사랑은 변치 않았다. 그리하여 출옥 즉시로 許와 결혼하고 東京으로 가서 早大 專門部에 학적을 두고 일인문사와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李光洙는 문인이다. 그의 죄악은 가증하나 그러나 그가 발표한 서적은 민족주의에서 친일로 전환하였을망정 정밀한 구상이며 유창한 문장이 조선문단을 풍미하였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평소에 ‘톨스토이’를 숭배하였다. 그의 저서를 보아 인도주의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대세가 일본에게로 유리하게 됨을 窺視한 그는 일본의 문호 蘇峯과 菊池寬을 숭배하게 되었다. 논문으로는 蘇峯 소설로는 菊池寬이라고 생각하였다. 급기야는 신문 논문에 조선혼을 말살시키고 大和魂을 선양하기 시작하였다. 소설마다 황국신민이 되라는 誘文을 썼다. 그리고 총독부의 고관에게 또는 일본정치가들에게 아첨하기 시작하여 결국은 李光洙 이름이 東京 조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李光洙를 유인한 요부 許英淑은 산파 노릇을 하여 상당히 치부하였으나 李光洙가 원래 폐병환자이니 만큼 그의 왕성한 정욕이 만족할리 만무하다. 그리하여 淫猥한 慾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기보다 나이 어린 청년과 음락을 즐겼다.

李光洙는 자기 妻의 방약무인한 음행에 보다 환멸을 느껴 모든 것에 대하여 염증이 생겼다. 그리하여 차라리 불도나 닦아 후생의 명복이나 빌어볼까 하여 천사만념 끝에 결국 일본에 문장보국이나 하여 일황에게 충성의 뜻을 알려 입신양명함이 최선책으로 오산하였다.

그리하여 金東煥 일파와 합류하여 臨戰報國團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임전보국단의 전시생활부장으로서 李光洙의 매족행위는 世人이 光洙를 ‘狂洙’라 할 만큼 정상에서 벗어나 너무나 狂態的이었다. 뿐만 아니라 金東煥 朱○翰 등과 같이 조선문인보국회를 조직하고 이사로서 文章報國을 맹서하였던 것이다. 그의 문장은 구구절절마다 황민화 전쟁협력 盡忠報國이 충만하였으며 일제 말기 시는 代議士 朴春琴 일파에 합류하여 가지고 대화동맹 大義黨을 조직하고 일본을 위하여 최후진충을 맹서하였던 것이다. 만약 일본이 승리하였더라면 李光洙는 전쟁협력 大공로자로서 명예의 공로상을 받았을 것이다.

3. 李光洙의 親日行狀[편집]

『每日新報』 『京城日報』 『三千里』 등 각 신문 及 잡지에 발표한 논문 及 담화와 각 강연회에서 토로한 괴변이 枚擧키 곤란할 만큼 多數하였으나 그 일부만을 소개하면 如左하다.

1. 1940년(昭和 15년) 2월 16일 每新에 「國民文學의 意義」라는 題하에 민족문학을 말살시킬 것을 강조-.

1. 동년 7월 1일 每新에 논문을 발표하여 조선문학의 황민화를 주장-.

1. 1941년 1월 21일 京日에 논문 「重大한 決心」을 발표-.

1. 동년 3월 11일 每新에 논문 「文人의 應召」를 발표-.

1. 동년 7월 6일 每新에 「忍苦의 銃後文化」라는 題하에 붓은 총이니 붓으로서 일본을 지키자고 괴변-.

1. 동년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임전보국단 주최로 개최된 미영타도 대강연회에서 「思想도 함께 米英 擊滅」이라는 演題하에 괴변을 토로하고-.

1. 1942년 1월 12일 每新에 논문 「生活의 日本化」를 발표-.

1. 동년 5월 12일 京日 귀빈실에서 曺秉相, 李淑鍾 등과 왜인 고관들이 모인 좌담회에 출석하여 황민화를 찬양하였고-.

1. 1943년 7월 28일 每新에 「徵兵制의 感激과 用意」라는 題하에 논문을 발표하여 징병제를 받들어 참다운 황국신민이 되자고 역설하였고-.

1. 1944년 1월 1일 每新에 시 「새해」를 발표하여 새해를 맞이함으로서 황국신민 됨에 결의를 굳게하자고 부르짖고-.

1. 동년 8월 13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적국항복 대강연회에서 「戰爭과 文學」이라는 演題하에 문학도 결전이라고 大사자후하였고-.

1. 1945년 1월 17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처우개선 감사대회에서 「내 모든 것을 드림」이라는 광태적인 시를 발표-.

1. 동년 8월 7일 「亞細亞의 運命」이라는 題하에 비통한 결의를 표시한 논문을 每新에 발표하였다.

李光洙의 시 「새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해>(1944년 1월 1일 『每新』)

새해가 왔네.

地球가 처음 보는 偉大한 새해

貪慾의 地獄인 舊世界가 무너지고

仁義와 禮의 새 世界의 터를 닦는 새해.

太平洋의 물결에 잔잔함이 돌아오고

亞細亞의 天地에 復興의 萬歲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날 새해.

기뻐라. 나는 이 새해를 보았어라

開闢 以來에 처음오는 偉大한 새해를

노래하는 나의 幸運이어

그러나 一億의 同胞여

이 해 새해는 또 땀을 많이 흘려야할 해.

農夫는 논밭을 갈기에 가꾸기에 일구기에 鑛夫는 땅속에서 파기에 깨뜨리기에 저내이기에

工夫는 공장에서 갈기에 두들기기에 漁夫는 바다에서 그물치기에 낚기 끌기에 男,女,老,少, 一億一心 쉬일새없이 흘리는 땀이 日本의 國土를 흠씬 적실 때에- 오직 그 때에만야

榮光의 勝利는 오는 것이다.

이를 일러 一億 戰鬪配置 戰力增强 빛나는 새해 偉大한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銃을 메고

戰場으로 나가고

어여뿐 우리 딸들은 몸빼를 입고

工場으로 農場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느들이 아닌가

千年和平 道義世界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命을 받자와 ‘예’ ‘예’하고 집에서 뛰어 나오는 무리 이 날 설날에

半島三千里도 기쁨의 日章旗 바다.

無限한 榮光과 希望의 偉大한 새해여! ;

時中會를 組織하여 內鮮一體化를 鼓吹 中樞院參議 崔麟의 罪惡史[편집]

1. 巴里서 羅惠錫 女史의 貞操를 蹂躪[편집]

老 친일거두 崔麟은 1878년(명치 11년) 1월 咸鏡南道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3. 1운동 당시에 孫義庵 선생의 제자로서 孫秉熙 선생과 같이 33인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33인이라 하면 全鮮的으로 인민의 대표자이며 동시에 지도자였다. 崔麟도 당시는 열렬한 애국지사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천도교 대표로 歐米 시찰으로 떠나 佛蘭西 巴里에 도착하니 첫눈에 뜨이는 것은 羅惠錫이란 묘령 조선미인이었다. 남달리 정력이 왕성한 崔麟으로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온갖 감언이설로서 유혹하여 결국 羅여사의 정조를 유린하고야 말았다. 전도가 洋洋한 여류화가 羅惠錫 여사는 그만 악마에게 짓밟히여 일생을 원한으로 보내게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망쳐놓은 崔麟은 귀국하자 환상의 곡을 읊으며 東京을 무대로 하여 난무하기 시작하였다.

2. 賣族行爲에 狂奔[편집]

崔麟의 매족행위는 너무나 광태적이었다. 그는 천도교 新派 中央宗理院 최고고문을 거쳐 중추원 참의직까지 얻고보니 득의만면하여 “루-즈벨트여 귀가 있거든 안테나를 通하여 들어 보라. 내가 윌손 大統領의 民族自決이란 말에 속아 天皇의 反臣 노릇을 하였다. 이 切齒腐心할 怨讐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過去를 모두 淸算하고 훌륭한 皇國臣民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하고 괴기염을 올렸다.

그는 또한 時中會란 해괴한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내선일체화를 고취하고 총독부의 기관지 每日新報의 초대 사장으로서 가증한 언론죄악을 범했고 金東煥 일파와 합류하여 가지고 황민화운동의 선봉 臨戰報國團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고 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서 언론보국회 회장으로서 附日협력에 헌신적 노력을 하여왔던 것이다.

3. 崔麟의 講演行狀[편집]

1. 1937년(昭和 12년) 7월 19일 중추원참의 지방강연 행각에 참가하여 각지에서 황민화 선양을 고취하였고.

1. 동년 8월 15일 「東洋平和의 大精神」이라는 演題하에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을 발휘할 것을 역설하였고.

1. 1939년 2월 9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東洋之光』 창간기념 시국문제 대강연회에서 尹○昊 張○秀와 함께 「國民精神의 締結」이라는 演題하에 괴변을 토로하였고.

1. 동년 5월 15일 남산광장을 장소로 개최된 조선춘추사 주최 排米英국민대회에서 개회사를 하였고.

1. 1941년 9월 4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임전대책협의회 주최인 임전대책 대강연회에서 「우리는 왜 蹶起하였던가」라는 演題하에 괴기염을 올렸고.

1. 동년 10월 11일 임전보국단 결성을 앞둔 지방강연 巡脚에 참가하여 金思演과 함께 淸州邑 海州府 양처에서 臨報의 취지를 역설하였고.

1. 동년 10월 1일 正學會결성 기념강연회에서 「皇民의 本分을 闡明」이라는 演題하에 조선민족의 황민화를 주장하였고.

1. 동년 12월 14일 부민관에서 개최된 임전보국단 주최 米英타도 대연설회에서 「所懷」라는 演題하에 대사자후하였고.

1. 1945년 7월 5일 本土決戰府民大會에서 중대하고 절호한 神機를 맞은 우리들에게는 오직 一死奉公이 있을 뿐이라는 요지하에 개회사를 하였다.

朝鮮語 全廢를 主張한 綠旗聯盟理事 玄永燮의 罪惡相[편집]

과거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자로 반기를 들어 일제에 충성을 다하기로 맹서를 한 후 갖은 악질 행동을 다하여 조선민족을 여지없이 사지로 몰아넣던 일본의 충량한 番犬 玄永燮은 綠旗聯盟이라는 해괴한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이사가 되었다. 그는 조선민족을 일본 대화민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창씨를 적극적으로 독려하였고 또한 조선어를 전적으로 폐지하기 위하여 왜장 南 總督을 방문 회견하고 반도 삼천만을 大和族으로 化하는 데는 제일 급선무가 조선어 全廢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때 南次郞의 말이 군이 조선사람으로 大和정신을 찬양하고 국어(일어)를 조선민족에게 전용케 한다는 것은 좋으나 그러나 한 나라 한 민족의 모어를 전폐할 수도 없고 또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하다고 冷答하면서 玄永燮이 애걸하던 요구를 거절하였다 한다.

玄永燮과 南次郞의 問答

玄 : “世界를 統一한다는 것은 歷史的으로 悠久한 根據를 가지고 있으나 한번도 實現된 일이 없다. 이러한 세계적인 이상을 생각 할 때에 내선일체의 문제는 극히 사소한 문제이다. 그러나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무의식적인 융화 즉 완전한 내선일원화에서부터 되지 않으면 神道를 통하여 또는 조선어사용 전폐에 의하지 않으면 안될 줄 안다.” 이에 대하여 南次郞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南 : “조선어를 배척함은 불가하다. 가급적으로 일어를 보급함은 가하나 지금 조선의 일반 인심을 살펴보면 일어보급운동도 조선어 폐지운동으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조선어 전폐운동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전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는 이와 같이 간악하고 더러운 친일분자요 우매한 악질이라 할 것이다. 해방이 되자 공포를 느끼어 일본으로 走行郎하고 말았다.

날개 돋친 親日派 日帝侵略戰에 활약하던 愼鏞頊의 罪狀[편집]

이 자는 전라도 고창인으로 일찍이 일본에 가서 비행기학교를 졸업하고 多年試鍊하여 일본의 일등비행사가 되었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자기 私財를 던져 비행기학교를 창립하여 교장이 되고 또한 조선의 청년들을 强募하여 비행술을 가르쳐 소위 대동아전쟁에 특공대 출정시켰으며 金?洙 高元勳 등 친일거두와 결탁하여 비행기 회사를 조직하고 비행기를 생산하여 일본군부에 다수 헌납하였으며 물심양면으로 대동아전쟁에 적극 협력한 악질 친일분자 중의 제일인자이다. 또한 가증스러운 것은 자신이 조선인이면서도 같은 회사에서 日鮮人 차별을 현저히 하였다. 예를 들면 서기 1944년 2월 20일 서울에서 二○MC호 여객기가 추락하였을 때 왜놈 조난자에게는 조위금 多額을 보내어 위로하였고 우리 동포 조난자에게는 일전금 보조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동족애도 없고 머리털부터 발굽까지 왜인을 지지하던 親日番犬이며 조선의 청장년을 징병 학병 징용으로 적극 독려하였고 또 권력을 부려서 이 땅 인민의 고혈을 착취하여 많은 금전을 치부하였고 일본제국으로부터 보조금도 많이 받았으며 또한 비행기 헌납에 혁혁한 공적을 세웠고 한 동안은 첩을 二三人 式이나 거느리고 豪華으로 지내든 날개돋친 친일파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할 때에 愼은 말하기를 천황폐하의 적자인즉 일본을 위하고 천황폐하를 위하여서 중국으로 가겠다고 자원까지 하였다. 그때 일본고관들은 愼에 대한 충성을 찬양하면서 “그대 한 사람이 특공대로 출정하는 것 보다는 비행기회사에서 생산을 많이 하고 용사를 많이 양성하여 多數 출정시킴이 또한 공이 크다”고 하여 만류하였다. 그리하여 愼은 일심전력으로 비행회사에서 노력하였고 그 후원은 朴興植 金?洙 등이 하였다. 이 외에도 다수 하였으나 전부 略함.

代代로 一進會를 繼承한 萬古逆賊 李容九 實子 李碩奎 反逆罪相[편집]

대대로 명문거족이라더니 한일합병 당시 소위 一進會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李完用과 宋秉畯 기타 친일주구들과 공모하여 조선을 송두리째 팔아먹던 李容九의 實子 李碩奎는 자기의 애비 유훈을 답습함인지 자기 아비의 공로를 내세워서 왜놈들과 결탁하여 우리 민족의 피를 빨고 또 소위 大東一進會를 조직하여 대동아전쟁에 협력한다는 강령을 내세워 우리 민족을 못살게 사지로 몰아넣는 역할에 진심으로 노력하였다. 과연 이것으로 보아서 혈통을 짐작할 수도 있겠지마는 이야말로 人面獸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오늘날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후손을 경계하기 위하여서는 그 실적여하도 보려니와 민족적 견지에서 그 의도여하를 충분히 검토하여 가지고 냉엄히 斷을 내려야 할 것이다.

民族運動에서 皇民化運動으로 轉向한 東洋之光 社長 朴熙道의 罪相[편집]

朴熙道는 과거 민족운동자의 한사람으로 삼일운동 당시 삼십삼인 중에 一****히 운동하던 자로서 한동안은 그의 명성이 자자하더니 일본세력이 점점 강해짐을 본 그는 돌연히 방면을 돌려 일본에 아부하여 자기 개성을 발전시키려고 과거의 투지와 절개를 초개같이 버리고 또 동지를 배반하고 부귀공명을 누리려고 일제의 충신이 된 그는 황국신민화운동을 철저히 함으로서 왜인들에게 多大한 신임을 받았으며 또 『東洋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친일과 전쟁협력에 유일한 일본의 기관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황민화운동에 열중한 朴熙道는 지방순회강연대 평안남도책임반으로 피선되어 金永弼 등과 함께 순회강연을 하였다 하며 그 외에도 강연 좌담회 등에 열심히 참가하여 우리 조선민족의 혼을 말살하기에 腐心하며 황민화운동 지원병 학병 국방헌납 독려 등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 가장 충견이 된 일인자로 그야말로 의식적인 일본의 赤子요 황민이었던 것이다. 일본에 공적이 다대한 그는 이것을 기화로 삼아 약하고 빈곤한 조선민족에게 음으로 양으로 직접 간접으로 끼친 해독은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이며 언론을 통하여 예리한 독설과 황색 국방복이라는 복장에 소위 국방모를 쓰고 기름이 번질번질하고도 뚱뚱한 倭養子 朴熙道의 모습은 그 당시야말로 늠름한 풍채 좋은 朴熙道이었으나 해방이 되고 건국이 된 오늘날은 그 모습이 가장 음흉하고 추잡한 민족반역자를 낙인한 듯 해괴한 흉악상으로 보인 것이다. 머리털로 발굽까지 변절하여 왜놈의 赤子가 된 朴熙道는 개 중에도 똥개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민족적 견지로 보아서 용서치 못할 반역자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못생긴 親日派 黃金勢力만 믿고 豪言壯談하다가 걸린 白樂承[편집]

장안의 갑부로 유명한 泰昌織物회사 사장 白樂承은 수전노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이 자는 일인에게 아부하여 많은 돈도 벌었고 또 대동아전쟁에 武運長久를 기원하면서 많은 금품을 헌납하였다. 그러자 해방이 되니 자기의 죄상이 두려워서 어찌하면 금전도 그대로 유지하고 무사할까 하여 처음에는 한민당으로 가서 요리저리 하다가 나종에는 인민당으로 와서 呂運亨 선생에게 인민당본부로 사용해 달라고 舊 天香園 요리집을 제공하고 우왕좌왕 하더니 요새는 형제간 골육상쟁으로 세인의 이목을 놀라게 하더니 얼마 안되서 반민특경대원에 잡히어 철창생활을 하는 바 단기 4282년 2월 21일 비로소 문초를 하는데 검찰관 앞에서 울면서 하는 말이 나는 친일파가 아닌 즉 제발 덕분 석방해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모양은 참으로 못생긴 친일파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