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2장
色酒家
[편집]1.
[편집]옳다 그르다, 기쁘다 괴롭다 하는 속에서, 바람 불고 비 오 고, 차고 덥고 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인생으로서 면할 수 없는 일이라면 순영도 그러하였다. 순영이 사숙에 다니면서 가무를 배운 지도 어느덧 이태가 되었다. 그리하여 가무나 풍류를 옳게 다 배우는 것은 아니지마는 다른 아이들에게 비하여 성적이 우월하였고, 또는 나이 열여섯이 된지라 신 체도 상당히 발육되어서, 처녀로서 피어나는 때에 으레 있 는 아름다운 구석이 곳곳에 보였다. 측량하기 어려운 것은 세상일이라 하지마는, 아직도 천사 같은 순영이, 그 몸은 재 수사망을 빌기 위하여 고사지내는 아귀도(餓鬼道)의 제단(祭 壇)으로 이바지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만한 무슨 전생의 업 원(業?)이 있었든지 없었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얘, 순영아."
송씨가 정중한 태도로 순영을 부른 것은 가을철 비 오고 바람 부는 어느 날이었다.
"네."
자기의 겨울옷을 꿰매느라고 잠착하고 앉았던 순영은 바느 질감을 놓고서 돌아앉는다.
"네 민적(民籍)이 어디 있니?"
하고 천만 의외의 소리를 묻는다.
"아마 제 고향에 있겠지요."
한참 덩둘하다가 대답하는 순영은 이상한 눈으로 송씨를 본다.
"너 살던 데가 무슨 면이냐?"
"자세히 모르겠는데요."
순영은 한참 주저하다가 말한다.
"저 살던 면 이름도 모른단 말이냐?"
"잘 모르겠는데요."
혼잣말처럼 하고 무엇을 생각하던 송씨는 놀라는 듯이,
"오, 알 수가 있겠다. 너 살던 동리가 운옥이 사는 동리하 고 한 면이겠지."
"모르지요, 한 면인지."
"모를 것 없다. 한 면일 게다. 등 너머 사인데 면이 다르겠니?" 송씨는 다시,
"아니야, 아니야."
하고 머리를 흔들더니,
"운옥이는 민적이 거기가 아니야. 운옥이는 강릉(江陵)서 그리로 이사온 지가 얼마 안 된대야, 그렇지. 운옥이가 거기 로 이사온 지가 얼마 안 되지?"
"얼마 안 돼요. 저 열 살 땐가 열한 살 땐가 이사를 왔어요." "그럼 네가 운옥이를 안 지도 얼마 안 되겠구나."
"얼마 안 되어요. 몇 번 보지도 못하였어요. 첫 번인가 두 번짼가 만나서 쌈을 다 했는데요."
"쌈은 왜?"
"아마 두 번째 만났을 땐가 봐요. 제 집으로 놀러 오라구 하기에 갔더니 운옥이 어머니가 저를 이쁘다고 하면서 운옥 이는 밉다고 나무라고 때려 주었어요. 그때두 운옥이는 서 울로 공부하러 갔다가 온 땐데, 공부도 잘못하고 까불기만 한다고 그랬는데, 제가 집으로 올 때에 고래 너머까지 따라 나오더니 아무도 없는 데서 때리겠지요. 그리고서 언제든지 원수를 갚는다고 앙심을 먹겠지요. 그래서 싸웠어요."
"고년의 소가지가 그렇지. 망할 년 같으니, 제 어미가 그런 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야. 또 원수는 무슨 원수야. 고년의 씨알머리가 나쁘니까 소견이 고 모양이지. 제 아버지가 유 명한 노름꾼이요 협잡꾼인데, 강릉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오 다시피 거기를 와서 사는데, 그래서 저의 거취가 드러날까 봐서 민적도 파 오지 못했단다. 그런 아비의 속에서 났으니 까 소가지가 좋을 수가 있니. 그런데 너 있는 면을 모르면 민적을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스럽게 말한다.
"민적은 무얼 하세요?"
"민적은 무얼 하다니, 지금 세상에는 민적이 없으면 때려 죽여도 살인도 없단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민적등 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단다. 하니까 민적등본을 해 와 야지. 그런데 민적등본은 면소에서 하는데 면 이름을 몰라 서 되겠니?"
송씨가 걱정을 하는 중에 밖에서,
"아주머니 계셔요?"
하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에구, 김 선달이요? 마침 잘 왔소. 어서 들어오시오."
송씨는 대단히 반갑게 맞는다.
"한참 못 뵜습니다. 그새 제절(諸節)이 안녕하시오?"
하고,
"안녕히 오셨어요?"
하고 인사하는 순영을 보면서,
"너는 볼 때마다 조금씩 크는구나. 인제 색시 태가 완연하다. 커갈수록 이뻐지고, 들으니까 공부도 잘한다는구나, 너 무 고맙다."
하고 웃더니,
"아주머니, 인제 한 시름 잊으시겠소. 순영이가 저만큼 되 었으니 무슨 걱정이요."
하고 송씨에게 치하하듯이 말한다.
"아니잖아 그만했으면 벌어먹어야 하겠는데, 민적등본이 있 어야 하지 않우. 한데 저 사는 면 이름을 모른다는구료."
"동리 이름은 알지요?"
"동리 이름은 알겠지. 너 동리 이름은 알지?"
하고 순영을 본다.
"동리 이름이야 알지요. 동리 이름은 가평이에요."
"어떻게?"
송씨는 다행한 듯이 기쁜 기색으로 김 선달을 바라본다.
"그런 것을 아는 책이 있어요. 조선 십삼도의 각 고을과 면 면촌촌의 이름을 적어놓은 책이 있으니까, 무슨 고을 무슨 동리라는 것만 알면 면을 찾기는 여반장이지요."
"에구, 별 책이 다 있네. 그러면 그런 책이 어디 있을까?"
"어디 있다니요. 각 책사에 다 있고 내게두 한 권 있지요.
이런 노릇 해 먹는 놈이 그런 책도 없어서 되겠어요."
"딴은 그래. 나는 잔뜩 걱정이 되더니 그런 책이 다 있소그려. 그러기에 여편네라는 것은 너나 할것없이 다 멍텅구리야. 하하하. 그것을 모르구서 혼자 애절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순영이는 내가 소개할 터이니 그런 줄 아시고 다 른 데 말씀 마시고 계시오. 차금도 남보다 더 받아 드릴테니. 알아들으시오?"
"시구문 안 형님이 처음부터 말을 하고 그새두 몇 번이나 조르는데, 그새두 괄시하기가 어렵지 않소? 나도 지금 똥이 두 자루요."
"벌써 재작년이로구면. 순영이 처음 왔을 때 시구문 안 아 주머니가 와서 말하는 것을 나도 같이 앉아서 듣지 않았소왜? 하지만 거기는 안 되오. 남의 집 폄제(貶題)를 내는 것 같아서 말하기는 안 돼지만 그 집은 애 둘을 거느릴 줄 몰 라서 안 되오. 그집을 가 보면 아이들 거느리는 것이 모양 이 없소. 잘 거두어 먹이지도 않고 옷 입히는 것이라든지 당초에 아이들을 거두지를 아니하니 되겠소? 그래 아이들이 들어가기가 무섭게 도망하지요. 나도 그 집에 아이들을 몇 개 소개를 해보았지마는, 필경은 다 나오고 말았지요. 더군 다나 저 만큼 얌전한 순영이를 그런 데 주어서 되겠소? 두 말 마시고 내 말대로 하시오."
"그 형님이 성미가 이상은 하지. 그래 그런지 저래 그런지 그 집 아이들이 잘 나가는 모양이야. 어디 차차 봅시다."
송씨는 김 선달의 말을 잘 승낙하지는 않는다.
"차차 볼 것 없어요. 나는 아주머니 알다시피 그 바탈로 늙 은 놈이 아니오? 그 등속에는 박사요. 좋은 곳이 두어 군데 있는데, 어디든지 그것은 아주머니 마음대로 하시오."
"하기야 김 선달이 그런 일에 대해서는 박사고 말고. 박사 라두 이만저만한 박사요? 미국박사나 독일 박사지. 더구나 내 일에 대해서 범연하겠소?"
송씨는 당장에 구체적으로 분명히 말하길 꺼리는 모양이다. "그저 두말 미시오. 우리네가 손을 대면 세상 만사가 다 이 렇구 이렇소."
하고 김 선달은 손을 엎었다 젖혔다 한다. 송씨는 김 선달 에게 눈을 끔쩍이고 턱으로 순영을 가리키더니,
"너는 갑갑한데 밖에 나가 놀아라."
하여서 순영을 내보내었다. 비는 그치고 바람은 여전히 분다.
2.
[편집]순영은 송씨와 김 선달의 하는 말이 자기를 도마 위에 올 려 놓고 가늘게 썰까 굵게 썰까, 정(鼎)가마에 지질까, 솥에 다 끓일까 요리할 방식을 의논하는 것인 줄을 분명히 알았다. 또는 기생은 어떤 것이요 작부는 어떤 것인 줄도 알았다. 자기를 기생에 넣지 아니하고 작부로 보내려는 것도 알 았다. 자기를 작부로 보내기 위해서는 민적등본이 필요한 것도 알았다. 송씨가 민적에 대한 말을 하고 면 이름을 물 을 때에 벌써 그마한 눈치는 채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는 면 이름 쯤이야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짐짓 모른다고 하 였다. 그것은 한때의 모피(冒避)하는 것으로, 그 일을 아주 모면하리라고 생각되지 아니하였으나, 자기가 하고 싶지 아 니한 일인지라 일시라도 모른다고 한 것이었다. 이 년 동안 이나 여러 아이들과 같이 배우고 일반 사회의 만반 사정을 자연히 보고 듣고 하는 사이에서 쪼들리고 깎이고 한 순영 은, 지식이나 경험이나 여러 가지로 보아서 벌써 서울에 처 음 올 때의 순영은 아니었다.
순영은 마루 끝에 앉았다가 송씨와 김 선달이 자기를 나가 라고 하고서 가만가만 속삭이는 것이 자기를 피하려는 것인 줄을 아는 때에는, 가까이 앉아 있는 것이 미안도 하고 창 피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당으로 나섰다. 비 오고 갠 뒤의 가을 하늘은 거울같이 맑았다. 어디서인지 바람에 불려오는 포플라 나무 잎새 한떼가 공중에서 휘휘 돌다가 먼 데로 가 까운 데로 흩어진다. 더러는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와서 개 천에도 떨어지고 장독대에도 떨어지고, 진흙에도 들어가고 혹은 자기의 품에도 떨어진다. 순영은 그 잎새들의 날아가 고 날아오고 하는 것을 무심히 보다가, 홀연히 자기의 신세 가 그 낙엽과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그 잎새들은 한 나무 에 피었다가 한때에 떨어져서 같은 바람에 불려 가다가, 어 떤 놈은 멀리 가고 어떤 놈은 가까이 가고, 어떤 놈은 정 (淨)한 데에 떨어지고 어떤 놈은 더러운 곳에 떨어지고, 어 떤 놈은 광대한 너른 천지에 공교히도 근심 있는 자기의 품 에 화서 떨어지는 것이, 무슨 인연이냐 우연이냐, 그러한 것 까지는 생각하려고도 못하였지마는, 자기가 강원도의 산골 에서 서울까지 오게 된 것이 그와도 비슷하거니와, 장차 무 슨 바람에 어디로 불려 가서 어떠한 곳에 가 떨어지려는지 모르는 것이, 그 낙엽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만일 다른 것이 있다면, 낙엽은 잎사귀지마는 자기는 꽃이라고 할까. 낙엽은 공중로 날아가지마는 자기는 땅으로 간다고 할까. 그것이 다르다고 할는지 모르지마는, 친지간에 정처 없이 가는 것 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은 낙엽은 다행히 눈물이 없지마는 순영은 불행히 눈물이 있었다. 순영은 자기의 품에 떨어지는 잎새를 주워 들고 동 정하는 듯이 고요히 보았다. 그 잎새는 어느덧 젖었다. 그것 은 아까 온 빗방울에 젖은 것이 아니라, 지금 떨어진 순영 의 눈물 방울에 젖은 것이다.
"순영아."
하는 소리에 놀라서 돌아보는 순영은,
"채란(彩蘭)이냐, 어서 오너라."
하고 갑자기 눈물을 씻는다.
"거기서 무얼 하니?"
"갑갑해서 나와 바람 쐰다. ."
"너 왜 우니?"
"울긴 왜 울어."
"그럼 왜 눈물을 흘렸니?"
"이렇게 섰는데 잎새가 불려 와서 눈알을 때리는구나, 그래 서 눈물이 났다."
순영은 손으로 눈을 비비다가 수건으로 눈을 씻는다.
"아니다, 얘 울었다. 우는 것 모르고 다쳐서 눈물 흘리는 것 모를까, 뭐."
채란은 순영을 자세히 보다가 귀에다 대고
"너 애인 있는 게로구나. 애인 보고 싶어서 우니?"
하고 가만히 웃는다.
"망할 것, 그런 소리는 잘하지."
순영은 웃는 눈으로 흘긴다.
"너 나하고 장충단에 가자."
"장충단에는 왜?"
"가서 구겨두 하고 산에 가서 소리두 익히고 하게."
그러지 아니하여도 갑갑하여서 어디로든지 나가고 싶던 순 영은 기회를 만난 듯이 대번에 허락하고,
"동무하고 나갔다 오겠어요."
하는 한 마디를 송씨에게 남기고 채란과 같이 나갔다.
송씨와 김 선달은 순영이 나간 것을 기회 삼아서 걸릴 것 없이 말을 하였다. 순영의 민적등본에 대한 일과 순영을 작 부로 소개하는 일은 김 선달이 담당하기로 하였는데, 민적 등본을 해 오려다가 순영이 종적이 드러나게 되면 본집에서 찾으러 오지나 아니할까 염려하였으나, 그것까지도 달리 변 통하여 순영이 종적을 모르도록 할 수가 있다는 것을 장담 하고, 만일 민적 등본이 여의치 못하면 그대로라도 소개할 수가 있다는 것까지 김 선달이 전책임을 지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다 하고, 실로 염려되는 일이 하나가 있소."
송씨는 새 판으로 말을 꺼낸다.
"염려되는 일은 또 무어란 말씀이요?"
일이 다 된 줄로 믿고서 고만 일어나려고 하던 김 선달은, 또 무슨 지장이 생기나 하고 염려스럽게 묻는다.
"다른 일이 아니라, 그 애 순영이가 말이요, 곧 죽어도 씨 가 있는 집 자식이라 그런지 첨부터 그런 일을 싫어하는 눈 치란 말이요. 그래 처음에 소리를 배울 때도 아예 안 배우 려고 하는 것을 야단을 쳐서 억지로 가르치고, 차차 크고 소견이 나니까 눈치로 알았는지 남의 말을 들었는지 모르 되, 마뭏든 제가 얼마 아니 되어 어디로든지 가게 될 것을 아는 모양이요. 나도 이따금 귀를 울렸지요. 어차피 보내게 되는데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해서 그런 말을 하면 마지 못 하여 듣기는 하고, 또 무어라고 반대는 못하나 가만히 기색 을 보면 아주 싫어하는 눈치란 밀이요. 제가 아무리 말을 않기로니 그런 것을 모르겠소. 내가 누구라고 십리 하방에 눈치만 남은 사람으로, 귀신을 보지는 못해두 귀신 가는 자 취는 아는 터인데 안 그렇소, 김 선달? 우리네가 그만 걸 모를 사람이요."
하고 김 선달을 보면서 찬성을 요구한다.
"아, 그렇고 말고요, 아주머니가 누구시라구 그런 눈치를 모르시겠어요. 그런 데야 「서순둥이」찜쪄 잡수실 건데 어 서 말씀이나 합시오."
김 선달은 입을 실룩거리고 코방귀를 뀌면서 허리를 굽히 고 얼굴은 들어서 송씨를 본다.
"그런데 그것이 예사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정말 싫어하는 모양이야, 그러니 그것두 걱정이 아니요?"
"그래, 그것이 걱정이란 말씀이요? 하하하."
김 선달은 가소롭게 여기는 태도를 보인다.
"그것이 걱징이 아니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만다는데, 당자가 그렇게 싫어하면 근들 어째 걱정이 안 되오?"
"아주머니, 만고 풍상을 다 겪고서 속고갱이만 남은 줄 알 았더니 아직도 숫보기요 그려."
"숫보기가 아니라 그것도 걱정이 아니오?"
"그까짓것 무슨 문제가 되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읍네다. 달래서 안 듣거든 귀싸대기를 서너 번 올려붙이 면 되오. 그까짓 계집애들 무슨 장구지심이 있는 줄 아시오.
과자 하나만 사 주어두 해해 웃고, 눈 한 번만 부라려두 벌 벌 떠는 것들인데 무슨 일이 있단 말이요. 아주머니, 그런 말씀은 안 할 말씀이요."
김 선달은 팔을 걷어치우면서 자긍하는 빛을 보인다.
"아니, 제가 싫어한다고 보내지를 못한다든지 그런 말이 아 니게든. 김 선달이 말귀를 잘못 알아 듣는군그려. 낸들 그 만한 수단이야 없겠소. 그래도 엄송이 밤송이 다 겪은 사람 인데. 하지만 그런 말이 아니요. 제가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무슨 수단을 부리든지 보내기야 보내지요. 그러나 가서 얼 마 아니 있다가 뺑소니를 하면 그것이 걱정이란 말이요. 나 도 그런 꼴을 더러 겪어 보았기에 하는 말이요. 누가 보낼 수가 없어서 걱정하는 줄 아시오. 나보고 숫보기라고 하지 만 김 선달이 아직 멀었소."
송씨는 안감힘을 쓰고 입술로만 웃는다.
"그것 참 그렇게는데, 나는 미처 그 생각까지는 못했지요."
김 선달은 동곳을 뺀다.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 거요. 지금 가서 이 리이리 하시오."
하고 잠모총장이 간첩에게 지휘하듯이 하였다. 김 선달은 그 계획을 절절이 탄복하고 나갔다.
3.
[편집]순영과 채란은 나란히 어깨를 겨루어서 장충단으로 갔다.
들어가는 머리의 연못을 구경하고 국화 진열한 데로 갔다.
국화는 종류도 많았지마는 기르기도 잘 길렀다.
"국화가 많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어쩌면 저렇게 좋을까."
채란이 먼저 말을 한다.
"그러기에 말이야, 어쩌면 기르기를 잘 길러서 그렇겠지."
순영도 탄복하는 기색을 나타낸다.
"기르기도 잘 길렀지마는, 어쩌면 저렇게도 좋을까."
"그거야 기르기만 잘하면 저보다 더 좋을 수도 있겠지. 국 화는 마찬가지라도 잘못 기르면 꽃도 작고 잘못되는 것 아 니야? 아마 사람도 저럴 거야. 잘 기르면 좋은 사람이 될 거구, 잘못 기르면 나쁜 사람이 될 거구, 그럴 거야."
순영은 꽃을 보다가 인생관을 깨친 듯이 국화와 사람의 같 은 점을 말하면서 홀연히 자기의 신세를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채란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때에 중등 정도의 여학 생 대여섯이 오더니, 그들도 역시 국화를 칭찬하면서 화분 마다 달아 놓은 표를 보고서 다 각기 국화 이름을 말하고, 재배하는 법이라든지 비료는 무슨 비료를 주고 병이 나든지 벌레가 일면 무슨 방법으로 어찌한다는 것을 말하며 학교에 서 실습하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어깨를 겨루어서 다른 데로 가면서 가는 목소리로 창가를 한다. 여학생들의 일동 일정을 유심히 살펴보는 순영은 그들의 걸어가는 뒷모양을 보면서 창가 소리를 듣다가, 그들이 느티나무 밑 벤치에 가 앉는 것을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순영은 다시 국화 이름을 써 붙인 표를 보았으나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우리도 고만 가자."
하고 순영은 앞을 서서 산으로 가다가 여학생들 있는 곳을 돌아보더니,
"사람도 국화처럼 기르기에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은 마찬 가지지만 저런 애들은 학교 공부를 했으니까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니. 하지만 우리는 기르기를 잘못 길렀으니까 이 모양이 아니냐. 아는 것두 없구 천덕꾸러기 노릇만 하다가 말지 않겠니. 네나 내나 마찬가지지 뭐야."
하고 채란을 본다.
"에구, 그 말 다해 무얼 하겠니. 네나 내나 팔자가 그뿐인 거지. 어서 산에나 놀라가자."
채란은 앞을 서서 헤죽헤죽 올라간다. 순영도 따라갔다. 산 위에 올라서니 장안이 다 보이는 듯하였다. 신정 유곽(新町 遊廓)이 바로 그 밑에 있었다. 그들은 사방을 둘러보다가 북 악산 쪽을 향하여 앉았다.
"너 이 아래가 어딘지 아니?"
하고 채란이 묻는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순영은 그 아래를 둘러 보면서 말한다.
"이 아래가 바루 신마찌다."
"아, 그러냐 신마찌가 바로 여기로구나."
"나는 저......."
하고 말을 내려다가,
"그 말은 이따 하고, 너 참 아까 너의 집에서 왜 울었니?"
채란은 순영을 본다.
"새삼스럽게 그 소리는 왜 하니?"
"아니야, 물을 일이 있어서 그런다. 바른 대로 말해라."
채란은 웃지도 아니하고 진정으로 묻는다.
"글세, 왜 그래? 네가 먼저 묻는 까닭을 말해라. 그럼 나도 말할게."
"네가 말을 안해도 우는 속내를 내가 안다. 너 어디로 가게 되어서 울었지?"
"너 어떻게 아니?"
순영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아는 수가 있지. 너 그래서 울었지?"
"그래, 그랬다. 말해 봐라. 어떻게 알았니?"
"아까 너의 집에 어떤 손님이 있었지?"
"그래,?
"그게 시궁골 김 선달이지."
"그래 어떻게 아니?"
"목소리를 들으니 그 작자더라. 그이가 너를 소개한다고 하지?" "그래, 너 어떻게 그런 속내를 다 아니?"
순영은 이상한 듯이 흥미를 가진다.
"그이는 그 바탈로 늙은 사람이다. 그전에는 여기창기소개 소(麗妓娼妓紹介所)에서 사무를 보다가 지금은 그것을 고만 두고 혼자 해먹는데, 그이가 나두 소개하여서 나는 이 아래 신마찌로 가게 되었어."
채란은 말을 하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그이가 왜 하필 그런 데로 소개하였니?"
순영도 눈살을 찌푸린다.
"그거야 그이가 억지로 그런 데로 징권하였겠니, 우리 집에 서 그런 데라도 해 달라니까 그런 거지."
"너의 집에서는 너를 왜 그런 데로 보내니?"
"그런 데로 보내면 돈을 더 받는다."
"너도 그 집이 정말 너의 집이 아니지?"
"아니고 말고, 나는 본래 경상도 산청군(山淸郡) 적벽(赤壁) 이라는 동리서 살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어느 해에 흉년이 들어서 나락이 얼마 안 났는데, 논임자에 게 도조로 다 빼앗기고 살수가 없어서, 내가 열한 살 되었 을 때에 나를 지금 나 있는 집에다 팔았다. 그러니까 죽으 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러는 수밖에 벗게 된 것이 아니냐?" 채란은 눈물을 그렁그렁한다.
"그런데 아무리 굶어 죽게 되었기로 어떻게 딸을 팔아먹니?" 순영도 눈물이 그렁거린다.
"그럼 어떻게 하니? 집안 식구가 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으냐?"
"그럼 너는 신마찌로 가겠구나?"
"나는 그리 가게 되면 어디로 도망을 하든지 죽어 버리든 지 그럴란다. 사람이 그 노릇을 어떻게 하니. 기생 노릇을 한다든지 술을 들고 술을 판다든지 하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 하루에도 된 놈, 안 된 놈 몇씩을 치러야 한다니, 여자 가 일부종사는 못할지언정 제 몸을 서푼짜리 개고기 팔 듯 이야 할 수가 있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낮지."
"그럼 너 꼭 죽겠니?"
순영은 다잡아 묻는다.
"그렇게 되면 도방을 가든지 죽든지 두 가지 중에 하겠다."
"도망? 말 마라. 도망을 가면 어디로 가며, 어디로 가면 별 수가 있겠니. 나도 꾐에 빠져서 도망하여 왔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 하니까 그런 노릇을 안 하려면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말이 그렇지, 도망은 어디로 하겠니? 네 말마따나 어디로 가면 별수가 있겠니.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라는데 그 러니까 한강 철교에 가서 떨어져 버리지."
"그러면 꼭 죽겠니?"
"꼭 죽을란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다그쳐 묻니?"
채란은 이상한 눈으로 순영을 본다.
"네가 죽을 테면 나도 죽을란다."
순영은 결심 있는 태도로 말을 한다.
"아니, 너는 왜 죽니?"
"난들 살면 무얼 하겠니. 남에게 팔려 가서 술을 팔아 주고 있으면 무슨 여망이 있겠니. 진작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그건 그렇잖다. 술을 파는 것은 고생은 되지만 제 마음만 깨끗하면 몸은 망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일이 어느 구 름에 비가 든지 눈이 든지 알겠니. 그러다가도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잘 살 수가 있는 것이요, 또 너는 나처럼 돈을 받고 팔려 온 것은 아니니까 나중이라도 몸을 빼치기가 쉬울 것 이다. 나는 우리 부모가 돈을 받고 영영 팔아 버렸으니 너 와 다르지 아니하냐? 나는 색주가로 가게 된다면 아무 말도 않고 가겠다. 또 나는 일부종사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신마찌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까딱하면 모진 병을 얻 기가 쉽고, 사람이 견디어 내는 수가 없다고 할 뿐 아니라, 내 생각에도 그러하니까 그럴 테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니. 해서 그러는 게지. 너야 왜 죽니. 그런 소리는 하지 도 마라."
"아니다. 나도 죽을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는 무서워 서 죽기가 어려울 터라, 네가 죽으면 나도 같이 죽겠다."
다시 말을 계속하려고 할 때에 뒤에서,
"너희들 게서 무얼 하니?"
하는 소리가 난다.
4.
[편집]순영과 채란은 놀라면서 돌아다 보았다. 그것은 다른 사람 이 아니라 김 선달이었다. 순영과 채란은 김 선달이 오다가 자기네의 말을 듣지나 아니하였나 하여서 얼굴이 질리도록 놀랐다. 그러나 김 선달의 오는 거리는 조금 새가 떠서 자 기네 말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을 듯도 하고, 김 선달의 기 색이 자기들의 말을 들은 것 같지 아니하였다.
"아저씨, 어째 오세요?"
하고 두 입에서 한결같이 나오는 소리엔 대답도 아니하고,
"참 용하다. 사람이 아니고 귀신이로구나, 귀신인들 그렇게 용할 수가 있나."
김 선달은 미친 사람처럼 손바닥을 치면서 야단이다.
"무엇이 그렇게 용하다고 그러세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하는 순영과 채란은 어이가 없어서 웃는다.
"그런 일이 있다. 참 용하다. 영락이 아니면 송락 이로구나. 여기 와서 너희들이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냐."
하고 그 아이들 옆에 가서 앉더니,
"너희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지?"
하고 두 얼굴을 번갈아 본다.
"모르겠어요, 무엇이 그렇게 용타고 야단이세요?"
하고 둘이 다 웃는다.
"야단이라니, 어른 보구서. 괘씸한 새악시들 같으니라구."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웃더니,
"그런게 아니다. 아까 내가 순영이 너의 집에서 나오다가 누구를 만났는데, 장충단에 관상도 보고 점도 하고 하는 사 람이 하나 있는데, 무슨 일이든지 여합부절로 맞추는데 누 구 든지 가서 관상이나 점을 한 뒤에 그 사람보도 맞느냐 안 맞느냐 물어 보아서, 만일 안 맞는다고 하면 복채를 받 지 않는다고, 그러면서 한 번 가 보자고 끌더구나. 그런데 나는 평생에 그런 관상이나 점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성미여 서, 가지 아니하려고 하여도 한사코 끌더구나. 그래 못이기 는 체하고 가서 보지를 않았겠니. 했더니 어떻게 맞추는지 뭐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 지나간 일을 말하는데 어느 때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느 때는 무슨 일로 손재(損財)를 하 고, 어느 때는 병이 나고, 어느 때는 어디를 가고, 심지어 토방에서 낙망한 것, 술집에 가서 막걸리 몇 잔 먹은 것까 지 다 알아내는 구나. 거기 은근히 죄지은 사람은 못갈러라.
그리고 미래의 일을 말하는데 무엇은 어떻구 무엇은 어떻구 지껄여 대는데, 하나도 안 맞는 것이 없구나. 말도 청산유수 요, 괘(卦)를 풀어 내는 것두 줄줄줄줄 조금도 서슴지 않고, 어쨌든 노 뭉치로 개 때리는 것이야. 그 말은 다 할 수가 없고, 미래 일로 정말 맞추나 하고 맨 나중에 일어설 때에, 내가 지금 가다가 무슨 일이 있겠느냐고 물어 보지를 않았 겠니. 했더니, 그 사람이 웃으면서, 가다가 신마찌 있는 뒷 산에를 조금 올라가면 아는 사람 둘을 만나리라고 그러더라. 하기에 시험삼아 올라왔더니 너희들을 만났구나. 그것 귀신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탄복을 한다."
김 선달은 입에 침이 없이 말을 한다.
"아, 정말이세요?"
두 아이는 눈이 둥그래 가지고 묻는다.
"정말이지 그럼, 점잖은 사람이 너 같은 아이들을 대해서 거짓말을 할 듯하냐. 그리고 거짓말도 분수가 있지. 비싼 밥 을 먹고 공연히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김 선달은 조금 불쾌한 빛을 나타낸다.
"그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왜? 일러 주면 너희들도 가서 점을 하게? 싫다 안 일러 준다. 남보고 거짓말이라고 하던 년들이 어디 있는 건 물어 서 무얼 해."
하고 외면을 하고 몰래 웃더니,
"그래 알고 싶으냐, 일러 주랴?"
"일러 주세요. 그것 좀 일러 주시면 어때요?"
"그래라, 특별히 일러 주지. 가 보아야 사람은 허름하고 차 리고 읹은 것도 보잘것없느니라. 장충단 들어오는 데 잔디 밭에 자리뙈기 갈고 앉았는 늙수구레한 그 사람이다. 아 참 나는 바빠서 가야겠다. 너희들은 놀다 오너라. 옛다. 이것으 로 과자들이나 사 먹어라."
하고 돈 일원을 던져 주고 갔다.
"아이, 나는 지금까지 가슴이 덜렁덜렁한다. 아마 간이 떨 어졌나 보다."
김 선달이 가는 것을 보다가 채란이 말한다.
"왜?"
"그이가 우리들 말한 것을 들었으면 어쩔 뻔했니. 나는 어 떻게 놀랐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말이야, 나는 등골에 땀이 다 흘렀다."
순영은 손을 돌려서 수건으로 등을 문지른다.
"그런데 그이가 우리들의 말을 듣지는 못한 눈치지?"
"듣지 못했기에 아무 말도 없지, 들었어 봐라 말을 않는가." "그런데 말이야, 그 점장이가 우리들의 말한 것을 알고서 그것까지 김 선달에게 말을 했으면 어쩌니?"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용한 점장이가 있니?" "아마 그게 이인인가 보다. 이인이 아니구서야 그렇게 맞출 수가 있니?"
"지금두 이인이 있을까?"
"이렇게 어릉터릉릉 세상에 이인이 더 많다. 우리두 가서 점을 해 볼까?"
"글세, 그러다가 우리들 속내를 다 알고 말하면 남부끄러워 서 어쩌니?"
"남부끄러울 것이 무엇 있니. 인제 우리들이 어떻게 되겟나 그거나 물어 보지."
"그렇지만 그렇게 용한 점장이는 복채를 많이 받을 텐데 돈이 있어야지."
"김 선달이 준 돈 일 원하고 내게 삼십 전이 있다. 그러면 되겠지."
"하기야 내게두 이십 전이 있다. 하지만 그것 가지고 될까?" "그나저나 가서 물어나 보자. 되면 하고 못되면 그만두지."
채란이 먼저 일어선다.
"그래, 가서 구경이나 하자."
순영도 일어섰다. 해는 석양이 되어서 장충단에는 그늘이 지고, 오직 나무 끝이나 높은 곳이 저녁놀에 반사되어서 가 을 얼굴을 물들이고 있다. 연못 가에만 눈을 쏘고 걸어가는 그들은 발부리에 조약돌이 채는 것쯤은 본 체도 아니하였다. "저기 앉은 게 그 인가 보다."
가로 퍼진 향나무 밑에 볕을 향하여 팔짱 끼고 앉은 사람 을 가리키면서 순영이 말한다.
"글세, 그이가 그인가 보다. 상투장이로구나."
"글세 상투장이다. 그런데 이때까지 흩 중의적삼을 입었구나." 가까이 가다가 채란은 돌아보고 가만히 말한다.
"그렇게 무엇을 아는 이가 머리를 깎겠니. 또 그런 이들은 남이 모르게 하느라고 일부러 허술하게 하고 다닌단다."
그 사람은 기름 결은 창호지에다가 신수, 재수, 결혼, 구직, 실물, 신병 등등 제목을 가로 써서 놓고, 그 위에 손때가 묻 어서 새까맣게 된 점책 몇 권이 놓여 있는데, 그 사람은 그 것을 걷으려고 하다가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서 도로 놓고 무릎을 안은 채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순영과 채란은 그앞 에 거의 가서는, 그 사람을 흘금흘금 보는 듯하면서 주춤하 고 돌아서서 서로 빙긋빙긋 웃다가,
" 얘, 네가 먼저 가서 해라."
순영이 두 손을 비비면서 말한다.
"싫다. 얘, 네가 먼저 해라."
"남부끄러워 어떻게 하니?"
"부끄럽긴 뭐 부끄러워, 같이 가자."
채란은 순영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서 조금 주저하다가,
"그게 뭐에요?"
깔아 놓은 종이와 책들을 가리키면서 붇는다.
"점도하고 관상도 보고하는 문서요."
"점은 아무나 해도 괜찮아요?"
"그럼 아무나 하지, 하는 사람이 따루 있소?"
"점이 맞아요?"
"맞고말고, 맞지 아니하면 점이라구 할 것이 있나."
그 사람은 웃는다.
"복채가 얼마씩이어요?"
"복채 많잖지. 보통은 십 전이고 특별히 잘하려면 오십 전 이면 평생 것을 다 보고, 또 저렇게 이쁜 아가씨들이 돈이 없으면 거저두 보아 주고 그렇지."
"돈을 안 내고 거저 하면 점이 맞나요?"
"돈 내고 하느니만은 못하지마는, 그래두 맞기야 맞지."
하고 웃는다.
"그러면 오십 전씩을 낼 테니 잘 좀 보아 주세요."
"오십 전씩이면 잘 보고말고. 벌써 언뜻 보아두 돈을 안내 구 본다든지 보통으로 십 전만 내놓고 본다든지 그럴 처지 가 아니로구면."
하고 조금 찌긋한 눈으로 순영과 채란을 번갈아 보더니,
"노루허구 당나귀허구 같이 다니니 이상한 일이다."
하고 더 자세히 본다.
"우리가 노루허구 당나귀허구 같이 다니는 게란 밀씀이어요?" "그래."
"우리가 왜 사람이지 노루허구 당나귀어요?"
순영과 채란은 서로 보면서 두리번두리번한다.
"사람은 사람이라도 하나는 노루고 하나는 당나귀란 말이야. 내가 여북 알고 말할까, 두말 말지그려."
그 사람은 자신 있게 말한다.
"에구, 별소리 다 들어 보겠네, 우리가 애 누루구 당나귀냐? 멀쩡한 사람인데."
순영이 채란을 보고 말하더니,
"그러면 누가 누루고, 누가 당나귀에요?"
하고 그 사람을 쳐다본다. 채란도 쳐다본다.
"누가 노루고 누가 당나귀냐? 당신은 노루고 이 양반은 당 나귀란 말이야."
하고 순영과 채란을 차례로 가리킨다.
"노루는 뿔이 돋쳤지요, 당나귀는 귀가 쫑긋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디 뿔이 있고 귀가 쫑긋한가요, 이것 보세요."
하고 순영은 자기의 머리를 만지더니, 또 채란의 귀를 가 리킨다.
"하하하하, 정말 노루요 당나귀란 말이 아니라, 당신은 성 이 노루가구 이 양반은 성이 당나귀 가란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는 노루고 하나는 당나귀가 아니야?"
"에구, 이상두 해라. 어쩌면 우리 성이 왜 노루가구 당나귀 가냐? 세상에 그런 성이 어디 있니?"
"그러기에 말이야, 그 어른이 점은 아니하고 남의 성을 갈 려 드시는구나. 에구, 망측스러워라."
순영과 채란은 웃지도 아니하고 말을 주고 받는다.
"아니, 하나는 장가구 하나는 정가가 아니야. 장가는 노루 장(獐)자가 있으니까 노루라고 하고, 정가는 나라 정(鄭) 자 가 두 귀가 쫑긋하니까 당나귀라고 하는 것이야. 그래, 이 아가씨는 장가가 아니구, 이 아가씨는 정가가 아니란 말이니? 내가 관상을 얼른 하여도 성이야 모를 리가 있나."
순영과 채란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하더니 다시,
"그래, 아니거든 아니라구 그래. 만일 아니라면 관상도 쓸 데 없고 점도 할 것이 없는 것이야. 내가 잘못 보았나. 암만 해도 하나는 장가구 하나는 정간데."
그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힘있게 말한다.
순영과 채란은 정신이 홱 돌면서 요술에 걸린 것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 혀만 내두른다.
"그런데 성을 묻지도 아니하시고 어떻게 그렇게 아세요?"
하는 채란의 말에,
"저런 소리가 있나. 성을 물어 보고서 알려면 누가 못 알 아, 묻지 않고서 알아 내야 그것이 용한 것이지."
하는 말이 떨어지자.
"너는 바보 소리를 하는구나."
순영은 채란의 어깨를 치면서 웃는다. 채란도 깔깔 웃다가 돈 일원을 내어서 공손하게 놓으면서,
"그럼 점을 해 주세요. 그런데 이 애 점부터 해 주세요. 저 는 나중에 할 테에요."
"저을 하기는 어렵지 않지마는, 점을 하거든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이야. 과거사는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알지만, 미래사 는 말하는 것을 들어도 모르는 것이니까. 점괘에 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쓸데가 없다는 것이거든. 하니까 점에 나는 대 로 실행을 할 테야?"
여러 가지로 다짐을 받고서 점을 하기로 하였다.
"다른 사람은 관상 따루 보고, 사주 따루 보고, 점 따루 하 고 하지마는, 나는 그것을 다 어울러서 보는 사람이야. 그래 야 여러 가지를 서로 모아서 맞추게 되는 것이야."
그 사람은 순영을 본다. 그러자 사람이 하나둘 모여들어서 대여섯이나 둘러서서 구경을 한다.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순 영과 채란은 부끄러웠으나 점장이는 신이 났다.
"무슨 생이야?"
점장이가 순영에게 묻는다.
"성은 아시면서 나이는 모르세요?"
"나이도 알려면 알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걸리니까, 해가 저 물어 가는데 얼른 해야지 묻는 대로 대답을 하라구."
"열여섯 살이에요."
"생일은?"
"섣달 그믐날이에요."
"하루만 참았으면 좋은 걸 그랬다. 정월 초하룻날 났더라면 고만 좋은데 그랬구나. 시는 무슨 시냐?"
"시는 몰라두 첫국밥을 해 먹고 나니까 첫닭이 울더래요."
"그럼 자시쯤 될까, 부모가 다 살아 계신가?"
"안계셔요."
"그럼 누가 먼저 돌아가셨는고?"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모선망(母先亡)이로구나, 모선망이면 자시가 아니 구 축시로군."
천세력(千歲歷)을 내어놓고 생년월일의 간지(干支)를 적어 놓더니, 책을 하나 내놓으면서,
"이 책을 어디든지 떠들고서 무슨 글자든지 마음대로 한 자만 짚으라구."
순영은 축축한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른손의 둘 째손가락으로 정성스럽게 글자를 짚었다.
"남녘남(南) 자로군."
하고 남녘남 자를 종이에다 써 놓고서,
"또 한 자를 짚으라구."
또 한 자를 짚었다.
"선비 유(儒) 자로군."
하고 또 써놓더니, 또 한 자를 짚으라고 한다. 세 번째 또 한 자를 짚었다. 당나라 당(唐) 자를 써 놓더니, 지필과 수 판을 내 놓고서,
"첫번의 남녘남 자가 몇 획이냐, 하나 둘 셋............... 아홉 획 이라, 아홉 획을 팔팔제지(八八際之)로 여덟을 제하면 한 획이 남는다. 그러면 일건천(一乾天) 건괘(乾卦)가 되고, 그 다음 선비유자는 열어섯 획인데 여덟을 제하면 여덟이 남는다. 그것은 팔곤지(八坤地)가 된다. 또 동효(桃梟)는 어떻게 되었는고, 당나라 당자는 열 획인데, 그것은 육육제지(六六 際之)를 하니까 열 획에서 여섯을 제하면 사효동(四爻動)이 로구나."
다 쓰고 괘를 그려서 육효(六爻)를 벌여놓고 구경하는 사람 들을 흘금흘금 보더니,
"좋다, 참 좋다. 괘도 잘 나오고 동효도 썩 잘 되었구나.
처음에 건괘요 나중에 곤괘니 그것은 지천태(地天泰)괘가 된 단 말이야. 지천태괘는 여간 좋은 괘가 아니거든. 「주역(周 易)」에 보면 천지(天地)는 비(否)괘가 되고, 지천은 태괘가 되었거든, 건괘는 하늘이요, 땅은 아래에 있는 것인즉, 건괘 가 위에 있고 곤괘가 아래에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마는 그렇 지 아니하고, 천지비(天地否)가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 늘은 위에만 있고 땅은 아래만 있으면 양(陽)은 양대로 있고 음(陰)은 음대로 있어서, 음양이 배합이 되지 못하니까 좋지 못한 비괘가 된 것이오, 또 그와 반대로 땅이 위에 있고 하 늘이 아래에 있으면 그것은 거꾸로 되어서 좋지 않을 것 같 지마는, 지기는 상승하고 천지는 하강하여 음양 배합이 되 는고로, 지천대라는 좋은 괘가 되었단 말이야. 「주역」 계 사(繫辭) 첫머리에 천존 지비하니 건곤 이정의 (天尊地卑乾 坤定矣)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하늘은 우에 있고 땅은 아래 에 있으므로 건괘와 곤괘가 되었다는 말이나 그것은 대체의 말씀이고, 괘상(卦象)으로 보면 곤괘가 위에 있고 건괘가 아 래 있는 것이 좋다는 말이야. 그러니 지천태괘가 나온 것이 대단히 좋지. 그런데 이러한 학문은 보통 점장이들은 모르 는 것이야. 여간 사람들이 「주역」이치를 알 수가 있나, 하 하하."
하고 자긍하는 빛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을 계속한다.
"도효도 사호동이면 대단히 좋거든. 동효어든 사효동이면 상괘(上卦)인 곤괘에는 초효동(初爻動)이니, 곤삼절(坤三絶) 에 초효동이면 진하련(震下蓮)이 된단 말이야. 진(震), 뇌 (雷)니까 본괘(本卦) 지천태가 뇌천대장(雷天大壯)이 되거든.
그런데, 뇌천대장은 하늘에서 우레를 하면 그 기상이 크고 웅장하다는 뜻이니까, 물론 좋은 괘명이라 괘와 동효로만 본대도 여간 좋은 것이 아닌데."
하고 순영을 바로 보고 곁눈으로 다른 사람을 보더니,
"그러나 괘와 동효가 좋다고 반드시 다 좋은 것은 아니거든. 하니까 붙일 것을 다 붙이고 또 관상과 사주를 아울러 보아야지."
하고 육효에다 관귀(官鬼)니, 재수(財數)니 하는 것을 붙이 고 순영의 생년월일을 보고 손가락을 꼽짝거리며, 또 순영 이 얼굴을 연해 보고 한참 잠잠하더니, 종이와 붓을 놓고서,
"내가 본 대로 말을 할 터이니 자세히 들으렷다."
하고 기침을 크게 하고 몸을 끄덕거리다가,
"이 점을 의론하건대, 초분은 좋지 못하고 후분이 좋을 것 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계모 슬하에서 고생을 하게 되 었구나. 그러다가 송씨 성을 가진 은인을 만나서 몸을 의탁 하게 되었는데, 멀지 아니하여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런데 가는 곳은 곧 생문방이라, 거기로 가게 되면 자연히 붙들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부귀 영화를 누릴 것이라, 만일 그러한 곳을 가지 아니하고 다른 생각을 먹으면, 신수가 불 길하여 모진 병에 걸릴 것이요, 재수가 없어서 문전걸식이 웬일이냐. 그런데 거기로 가게 되면 원앙이 녹수를 얻어서 백년 해로를 할 것이요, 자궁을 본다면 아들 삼형제에 딸이 형제로다. 재수로 말하면 큰 부자는 될 수가 없으나 사오백 석은 넉넉할 것이다. 수명이 얼마나 될까 하니 이순(耳順)에 가립(加立)이라, 이순은 육십이요 입은 삼십인데, 육십에 삼 십을 더하면 구십 상수는 떼논 당상이로구나, 좋다. 이만하 면 상지상(上之上)은 못 되어도 중지상은 되는구나. 아차, 잊었다. 청실홍실 늘이기는 이구십팔 열여덟 살이 제격이라." 하고 맥없이 자기의 이만 쳐다보고 앉았는 순영을 한잠 보 더니,
"자, 나는 다른 점장이들처럼 키둥대둥 여러 말을 않는 사 람이요, 대강 요령만 따서 말하는 성미라. 그러나 구슬이 서 말 이라도 궤어야 보배라구 말이야, 적으나 많으나 점이 많 아야 하는 것이야. 한데 미래 일은 지내 보지 아니하였으니 까 모른다 하려니와, 지나간 일은 맞는지 안 맞는지 소상히 알수가 있는 것이야. 우선 과거사에 대하여 내가 한 말이 맞나 안 맞나 생각해 보라구. 과거사가 안 맞으면 미래사도 안 맞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점이라는 것이 소용이 있는 것 인가? 그런 점장이는 거짓말하고서 남의 돈푼만 따먹는 것 이야. 하니까 만일 내 말이 맞지 않거든 내놓은 돈을 도루 가져가는 것이 옳은 일이야. 나는 점장이를 하고서 복채를 받아서 구명도생을 하는 사람은 아니란 말이야."
하고 돈 일 원을 내어 놓는다.
"아니에요, 지나간 일은 다 맞아요."
순영은 점장이의 말에 홀려서 자기의 정신이 있는지 없는 지 모르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순영의 과거사에 대하여 조목조목 한 마디씩 물었으나 순영은 다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점장이는 다시 순영의 미래사에 대하여 더 소상히 말을 하고 그 점을 마치었다.
그 사람은 다시 채란의 점을 하였는데 하는 방식은 마찬가 지요 과거사는 그럴 듯하게 말을 하고, 미래사는 역시 다른 데로 가게 되면 장차 잘 되겠다고 하였다. 다만 여의치 못 한 일이 있을 때에는, 김가 성 가진 남자에게 말을 하여서 그의 지도대로 하라고 하였다. 해는 저물어서 저녁 연기는 흩어지고 새들은 나무에 깃들인다.
일기는 조금 선선하였다. 순영과 채란은 결은 흩 중의적 삼에 가을 추위를 못 이겨서, 가볍게 떨면서 점하는 제구를 챙기는 점장이의 모양을 다 보지 못하고 돌아 온다.
순영은 점장이의 말을 듣고서 모든 생각이 근본으로부터 흔들렸다. 비관만 하고 있던 자기의 앞길에 명랑하게 열리 는 듯하였다.
"그런데 웬 사람이 그렇게 용한 사람이 있니?"
하고 순영은 묻기는 하면서도 명백한 대답을 기다리지는 아니하였다.
"그러기에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아니? 성도 먼저 알고 지 나간 일을 모두 알아 내니, 그게 아마 인간 사람은 아닌게다. 그리구 사람이면 도통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아무 그럴는지, 아무 무슨 수가 있나봐. 그런데 지나간 일 을 그렇게 알면 이 다음 일도 맞추겠지?"
"그야 그렇지. 지나간 일을 아는 사람이 이 다음 일을 모르 겠나."
"그러면 우리도 잘 살게 될까?"
"하기야 우리라고 잘 살지 말라는 법이 있겠니."
"글세, 그것은 죽기보다도 싫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는지 모르겠다. 점하는 이 말이, 여의치 못한 일이 있거든 김가 성을 가진 사람에게 물어 보라고 하는데 아마 김가 성 가진 사람은 김 선달 말인가 봐. 하니까 김 선달보고 말이나 해 봐야 되겠다. 그래서 정히 할 수 없으면 그대로라도 하지 어쩌니."
"나두 딴 생각 말구 그대로 가라는 대로 갈까?"
"말이 그렇지 죽기가 쉬우냐? 그렁저렁 지내보자 얘."
그들은 말이 끝나지 못한 채로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순영은 집에 들어가기가 서먹서먹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좋았다.
술이 얼근하게 취하여서 거슴츠레한 눈으로 힘없이 보면 서,
"어디로 갔다가 이렇게 늦게 오니?"
하는 송씨가 예없이 정다운 듯하였다.
"채란이하고 장충단에 갔다가 조금 늦었어요."
"가서 무얼 했니?"
"하기는 무엇을 해요, 그저 돌아다니며 놀았지요."
"거기 무엇 좋은 구경거리가 있던?"
"아무 것도 없어요. 그저 경치 구경이지요."
"언젠가 거기 한 번 지나다 보니까 길가에 관상쟁이, 점장 이들이 모두 무엇을 펴놓고 앉았더니, 지금도 그런 것들이 있는지, 원."
혼잣말 비슷하게 하는데 순영은 못 들은 체하고 대답을 아 니하였다.
"그런 사람들 더러 없던?"
"더러 있나 봐요."
"똑똑히는 보지 못했니?"
"왜 거기 있어요. 하나 있는 것은 보았어요."
"보았어, 그럼 점이나 한 번 쳐보지 , 왜?"
"그건 쳐서 무얼 해요?"
순영의 말소리는 조금 어색하였다.
"무얼 하다니. 부자 되겠는가 도보고, 언제 시집을 가겠는 가 도보고, 아들은 몇이나 둘는지 그런 것을 보아야지. 무엇 하러 본단 말이 무슨 말이야."
순영은 고개를 외어 틀고 웃으면서 말이 없다.
"너 말을 않고 웃는 것을 보니 필경 점을 한 것이로구나."
"............"
"점하는 것이 나쁜 이이 아니다. 가릴 것이 무엇이냐. 했으 면 했다구 그러지. 그리구 그렇게 길가에 앉았다구 업신여 길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정말 용한 점장이가 있 는 법이다. 했거든 이야기나 좀 해라. 심심한데 들어 보자.
나도 그전에 너만 때에는 그런 무꾸리를 많이 해 보았다."
송씨도 궁금한 듯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점하고 아니한 것 을 듣고자 한다.
"채란이가 자꾸 하자구 하여서 한 번 해 보았어요."
순영은 마지못하여 대답하였다.
"그래 무어라구 하던? 대관절 재수가 어떻다구 하던? 지나 간 일을 맞히는 것을 보면 용한지 안 용한지를 알지."
송씨는 여러 가지로 묻는다.
순영이 들은 대로 대강 말을 하매 송씨는 만족한 듯이 너 털웃음을 웃는다.
5.
[편집]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순영은 공부를 가고, 송씨가 혼자 누워서 여러 사람들과 화투를 하자고 맞추어 놓은 뒤, 그날 저녁의 매깃돈을 어떻게 주선을 할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으나, 아무리 하여도 방책이 나서지를 아니하여서 번민 하는 중이었다.
"에헴."
하고 김 선달은 문을 버쩍 열고 들어선다. 송씨는 반가우 면서도 가슴이 두근 거린다.
"한참 못 왔습니다."
김 선달은 승전한 장수처럼 호기스럽게 말한다.
"글세, 그새 기다렸는데 웬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소?"
"일이야 별일이겠어요. 소 갈 데, 말 갈 데 돌아다니는 일 이지. 그 사이에 서울로 시골로 얼마를 돌아다닌지 모르겠소. 이놈의 팔자가 언제나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서 살아 볼 는지 모르겠소."
"에구, 나두 사내들처럼 훨훨 돌아다니기나 했으면 좋겠소.
방구석에만 들어 엎드려 속을 태우니까 갑갑하여 죽겠소."
"그런데 저번에 그 일은 잘 되었지요?"
"그 일이라니?"
"아따 점하는 일 말이요. 오늘 아침에 그 점장이를 만나서 말을 들으니까 아주 잘 되었다구 하더군요. 어찌 되었나 하 고 궁금하였더니, 만일 잘못되었으면 내가 심부름이나 잘못 하여서 그랬나 하고 생각하실까 봐서 마음이 졸밋졸밋하더 니 잘되었어요. 그런 자들은 하루 종일 벌어도 돈 일 원이 안 생기는데 돈을 이 원이나 주었으니 여북 하라는 대로 잘 하겠어요. 그 때 아주머니가 돈 일 원만 나를 주셨지요. 그 런데 일 원이 조금 약소한 듯하여서 내 돈 일 원을 더해서 이 원을 주고 아주머니 말씀대로 부탁을 하였지요. 하니까 점장이는 그런 땡은 첨 보았겠지요. 그래 절을 열 번이나 하면서 그러겠다구 하더군요. 그리구 또 순영이두 돈 일 원 을 주었지요. 말은 과자 사 먹으라고 주었지만 실은 점하라 고 준 것이지. 그런데 그애들이 점을 하러 가지 아니하면 어쩔까 하였더니 간 것이 다행이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 였는데 저희들이 안 갈 수 있나. 그 일 땜에 내 돈 이 원이 도망갔소. 그런줄이나 이시오."
하고 공치사를 한다.
"에구 그랬소! 그러면 그 돈 이 원은 내가 드려야지. 그러 나 지금은 없고 차차 셈하지요."
"이게 무슨 망령의 말씀이요. 내가 그래 그런 돈을 받아먹 고 사는 놈인 줄 아시오. 우리는 모래밭에다 혀를 박아도 비리칙칙하게 그런 돈은 안 받소. 우리는 한 푼 없지마는 그런 돈 이 원 같은 것은 돈으로 알지를 않소. 내가 그렇게 돈을 알았으면 논 사고 종 부리게요. 그런 말씀은 하지두 마시오."
김 선달은 손살을 내젓는다.
"쇠뿔도 각각이요 염주도 몫몫이라구, 내 일에 왜 김 선달 이 녹을 리가 있소, 내가 차차 내리다."
"이거 이렇게 말씀하면 우리가 친한 본의가 없겠구료. 자꾸 그렇게만 하시면 도리어 섭섭합니다. 그리고 그게 어디 아 주머니 일 뿐이요, 그게 즉 내 일이지. 그런 일이 되면 나도 입맛을 다시게 되지 않소 왜? 그러니까 그 일이 즉 내일이 란 말이요. 하니까 그 돈 이 원을 주려 마시고 그 일이 되 거든 구문이나 많이 주시오, 하하하."
"그거야 물론이지. 사람이 남녀간에 저렇게 서근서근한 맛 이 있어야지, 아주 외 얽고 벽친 친구들하고 말을 하려면 속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거든. 하여간 사람은 서울 태생이 라야지 벽창호 같은 시골 놈들 말해 보면 기막히지. 그 중 에도 평양 놈들은 더하지요. 무뚝뚝하고 인정 없고 그 중에 아는 체는 모두 하고, 나 살던 고장이지마는 기막히지. 여북 해야 내가 그 고장을 떠났나요. 서울 와서 살아 보니까 사 람들이 모두 연한 참배맛 같습디다."
송씨는 번민하던 끝에 김 선달을 추어주다가 흥분이 되어 서 자기가 살지 못하고 나오게 된 평양의 인심을 나무랐다.
그리고 계속하여서 순영이 점한 이야기를 들은 대로 말하였다. "그러면 순영이가 점을 하고 온 뒤의 기색은 어떻습디까?"
김 선달이 그 계책의 효과를 묻는다.
"그거야 물어 볼 것 무엇 있소, 아주 좋아하지. 겉으로 말 은 다 아니하여도 속으로는 여간 좋지 아니한 모양이던데.
늘 새초롬하고 있던 것이 아주 벙글벙글하고 야단이겠지."
"그럼 인제는 어디를 가게 되든지 좋으니 나쁘니 하는 소 리는 아니 하겠군요."
"좋으니 궂으니가 뭐요? 말은 아니해두 어서 가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모양이던데."
"그렇겠지, 그런 꾀에는 무쇠라두 녹아날 텐데 제가 견디겠소. 어쨌든 아주머니는 제갈 양(諸葛亮) 찜쪄먹겠소. 그런 계교가 어디서 나온단 말이요! 아무튼 그런 꾀는 사내보다 여자가 훨씬 이상이야."
하고 송씨를 춘다.
"이거 왜 또 비행기를 이렇게 태우누? 너무 올라가다 떨어 지리라. 그런 수작은 고만두고 일이나 잘 좀 꾸미시오. 요새 궁해서 공동 묘지로 가게 됐소."
송씨는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을 한다.
"남은 사실대로 말하는데왜 비행기를 태운다고 하시오. 한 데 그런 말은 고만두고 정말 의논 좀 합시다."
김 선달은 기침을 하고 다리를 포개고 앉더니,
"순영이를 어디로 보낸시다."
하고 송씨를 본다.
"인천(仁川)으로 보냅시다."
"어떻게 작정하고?"
"삼 년 작정하고 칠백 원 받기로 하였소. 그리고 보증이 있 어야 된다구 하여서 내가 보증을 서기로 하였소."
"칠백 원."
송씨는 만족하지 못한 어조로 말을 한다.
"왜 칠백 원이 적어서 그러시오?"
"그거야 사람 나름이지. 순영이는 그렇게 안 되오. 지금 장 안을 뒤집어 놓고 보시오, 그만큼 쏙 빠진 것이 어디 있는가?" "그거야 장안에 설마하니 순영이 만한 인물이 없대 서야 말이 되오. 하지만 그만이나 하기에 칠백 원이지 그렇지 아 니하면 어림이나 있소. 지금 삼 년 작정하면 보통으로 삽백 원이요. 쭉 해야 사오백 원밖에는 없소. 이것은 내가 젖 먹 던 힘을 다 들여서 만들어 놓은 것이요. 그 집에는 순영이 코빼기도 안 보고서 내 말만 듣고 하는 것이요. 그 집 주인 이 나하고 같이 올라와서 저기 있는데, 인제 그 사람이 순 영이를 보면 칠백 원도 과하다고 할는지도 모르지요. 우리 끼리 있으니 말이지 순영이가 인물이야 그다지 볼 것 있소?
그저 면추는 되고 얌전스러워 보일 따름이지. 그리고 그애 가 알고 보면 붙임성이 적습네다. 술 파는 게집애는 인물보 다도 붙임성이 제일인데 그것이 흠절이지요. 이런 자리를 놓치면 안됩니다. 두말 말고 내 말대로 하시오. 설사 그 사 람이 순영이를 보고서 조금 떠름하게 여긴대도 내가 우겨서 되도록 할 터이니 이렇게 전황한 판에 칠백 원이 적소? 대 답만 하시면 그 사람을 데리고 와서 돈 칠백 원을 백원짜리 로 착착 세서 드릴 테니."
김 선달은 기운을 돋우다.
"이거, 돈이라면 누가 깜짝 죽는 줄 아는구료. 다른 사람은 백원짜리 지전을 만져 보지도 못한 줄 아시오. 나도 백 원 짜리도 만져 보고 천 원짜리도 만져 보고 다 만져 보고 난 나머지요. 내가 죽게는 되었어도 돈 칠백 원에 목을 맬 사 람은 아니오. 한데 순영이는 삼 년이면 못 받아두 천 원은 받아야지. 전 원이라도 한 달에 삼십 원 꼴이 못 질리오. 그 러면 하루에 일 원이 못 되니 그래 순영이 같은 아이가 하 루에 일원 벌이만 하겠소? 요전에도 누가 삼 년 작정하고 천 원을 준다는 것을 내가 싫다고 하여서 파의한 일도 있는 데, 하지만 이번에는 김 선달이 사이에 들었으니까 어디로 보나 그럴 수가 있소. 하니까 천 원만 시키시오. 하면 낸들 그 공로를 모르겠소? 김 선달두 해롭지 않겠지. 알아듣소?"
송씨는 눈을 끔쩍한다.
"다른 사람은 천 원을 준다고 하였으면 그리로 보내시오.
내 주재로는 한 푼도 더 시킬 수는 없소. 나는 있는 구변 없는 구변 다 내어서 한껏 시킨 것이요. 천 원 아니라 만 원리아도 시켰으면 좋겠지마는 낼 놈이 즐겨야지 받을 놈이 즐기면 되오. 하니까 그 일은 동을동을 그리고 고만둡시다.
다른 아이들도 두서넛이나 있으니까 그 애들이나 소개해 주지. 다른 아이들 다 젖혀놓고 순영이를 해주니까 남의 공은 모르구 딴 말씀만 하시는 구료. 그럼 나는 갑니다. 다시는 막설합시다."
김 선달은 구구하게 사정만 하는 것이 도리어 재미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데서 천 원을 준다고 하였다는 말이 빨간 거짓말이요, 또는 문틈에 손을 넣게 된 송씨로서 끝끝내 버 틸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여서 한 번 탁 퉁겨 보았다. 그 리고 무릎을 짚고 일어나려고 하면서 짐짓 주춤거린다.
"그렇다고 곧 갈 것이야 무엇 있소. 이야기나 더 하다 가지." 송씨는 놀라는 듯이 몸을 움직이면서 말한다.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요. 남은 돈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이야기만 하고 앉았으면 심이 되나요. 그 사람도 은 행에다 집문서를 갖다 넣고서 빚을 내 가지고 왔어요. 하니 까 순영이가 안 되면 다른 애라도 얼른 얻어 보내야지요."
도로 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날 듯이 하는 김 선달은 엉거주 춤하고 있다.
"가더라도 조금 앉았다 가시오. 바늘방석인가 원, 급하기는 우물에다 숭늉 달라겠네."
송씨는 김 선달의 무릎을 밀어서 앉힌다.
"에구, 이거 사람 치겠소."
김선달은 쓰러지듯이 앉는다.
"그러지 말고 삼백 원만 더 시키오. 칠백 원 하는 사람이 천 원 못할까, 원."
"이게 무슨 말씀이요. 내가 아주머니 일에 조금이라도 범연 할 줄 알고 그러시오. 아주머니가 군색하시면 안할 말로 도 적질이라도 해다가 드릴 생각인데, 할 만하고서야 한 품이 라도 덜 받아 줄 리가 있나요. 두말 하시오. 지금 당장에 그 사람을 데리고 올 터이니 현금 칠백 원을 보태서 논마지기 라도 사시오. 아주머니도 손에 풀기가 없어지면 되겠소? 하 니까 나중 일은 유념을 해야 합네다."
김 선달은 진정한 태도로 송씨를 본다.
"논마지기가 다 뭐요? 입에 풀칠하기가 바쁜데, 하기야 산 입에 거미줄 치겠소. 어떻게라도 살아가지......... 그럼 어떻 게 하나, 김 선달이 새에 들어서 그렇게까지 하였는데, 그것 을 못한다고 하면 사람 대접이 아니구."
혼잣말처럼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조금 잠잠하고 있 다가,
"그렇게 하시오. 돈이나 맞돈으로 가져오시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겠소? 김 선달 대접을 해야지."
송씨는 선선하게 말하고 김 선달을 본다.
"그렇지요, 그래요. 아주머니는 서울 사람이 서근서근하다 고 하십니다만, 사람은 남녀간에 평안도 사람이 시원스럽거든. 우리는 아주머니하고 무슨 일을 해보면 되고 안되고 간 에 가슴이 시원합니다. 그러면 내가 곧 가서 그 사람을 데 리고 오리다."
하고 나가더니, 조금 있다가 김 선달이 혼자만 와서 돈 육 백 원만 내어놓으며 칠백 원 중에 백 원은 그 사람이 급한 일이 있어서 다른 데 썼은 즉, 이따가 내일에는 자기가 책 임을 지고 틀림없이 받아다 줄 터이니 계약서에 도장을 질 러 달라고 한다. 송씨는 벌써 김 선달이 돈 백 원은 자기의 소개료로 떠어 놓고서 핑계 대는 말인 줄은 알았으나 그것 은 그전부터 김선달의 버릇인 것을 아는지라, 그다지 이상 스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는 그 사람이 순영이를 보지도 아니하고 돈을 준 것이 의심스럴 듯하나, 그것도 그렇게 계 집애들을 데려가는 사람들은 말질이 되기 전에 어느 틈에든 지 먼저 당자를 보고서야 정식으로 교섭을 하는 것이므로, 그 역 이상할 것이 없어서 송씨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 었다. 김 선달은 내일이라도 순영을 보낼 것을 부탁하고 빙 긋빙긋 웃으면서 나갔다.
6.
[편집]송씨는 그 돈 중에서 얼마를 떼어서 고기 사고 술 사고 여 러 가지를 사서 한 밥 먹을 것을 장만하였다. 당장에 집안 은 풍성풍성 하게 되었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순영은 문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달라진 집안 공기에 이상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술이 칠분이나 취하여 머리가 조금 흐트러지고 치맛자락이 빠져서 한 손으로 걷어잡은 채 부엌문에 기대 서서, 음식을 만드는 행랑어멈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던 송씨는 순영을 보 자마자 너털웃음을 보기 싫게 웃으면서,
"순영이냐. 오늘은 좀 늦었구나, 시장하지, 어서 옷 벗고 고기 좀 먹어라."
하더니 다시 행랑어멈을 보고서,
"여보게, 그 살코기 연한 데로 얼른 썰어서 초고추장에 무 쳐서 아가씨 좀 먼저 드리게, 그 약주술 조금 하고, 인제 술 도 조금씩 배워야지. 이게 다 우리 손영이 덕이야."
송씨는 음식을 재촉하여서 손수 가지고 들어가더니 순영의 앞에 놓으면서,
"어서 먹어라, 시장한데."
하더니 예 없이 술을 한 잔 따라 주면서,
"옛다 이것도 먹어라. 인제 술도 배워야 된다. 여자도 많이 는 몰라도 한두 잔은 먹어야 하는 것이야. 더구나 손님을 치르는 사람은 너무 맨숭맨숭하면 못 쓰는 것이다."
송씨는 술잔을 든 채로 순영에게 권한다. 순영은 술잔을 받아서 상에 놓고서,
"술이 다 뭐에요, 술을 어떻게 먹어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어서 먹어라, 한 잔만 먹어 보아라."
"입에 대보지도 아니한 것을 한 잔이나 먹었다가 취하면 어떻게 해요?"
순영은 진정으로 어떻게 할 줄을 모른다.
"어서 먹어라. 어른이 먹으라고 하면 사약이라도 먹어야지 취하면 대수냐."
송씨는 굳이 권한다. 순영은 송씨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주 저하다가 잔을 들어서 입술에 달락말락하게 조금 마시고서 얼굴을 찡그리더니,
"에구, 쓰고 독해서 못 먹겠어요."
하고 잔을 도로 놓는다.
"그까짓 게 독하긴 무엇이 독해? 우리는 너만한 때에 석잔 술은 먹었다. 그럼 고기나 먹어라."
송씨는 순영이가 먹다 남은 술을 그대로 들이마시고 안주 도 아니 먹은 채 또 한 잔을 그뜩 따라서 한숨에 들이켜더 니,
"좋다. 물이 술맛 같으면 한강물을 다 먹어도 나쁘겠다."
하고 순영을 바라보더니,
"내 시조 한 장 할 테니 들어 보아라."
하고 술 취한 목을 자다듬더니,
"노자 젊어 노자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인생 일장 춘몽이라 아니 노든..........."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면서 부르더니,
"초로 같은 우리 인생 아니 놀고 무얼 하겠니. 너도 마음껏 놀고 마음껏 놀아라. 북망산이 일분토 되면 후회한들 쓸 데 있니?"
하고 술잔을 또 따라 마시더니 조금 태도를 고치면서,
"너 인제 출장(出張 : 그들은 술집에나 요리집에 차금을 받 고 팔려 가는 것을 출장이라고 한다. )을 가게 되었다."
하고 순영의 기색을 본다. 순영은 언제든지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을 알았었고, 점장이의 말을 들은 뒤로는 은연히 어 디로든지 가기를 바라기도 하였으나, 급기야에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매 새삼스럽게 가슴이 질리면서 마음이 떨렸다.
"어디루 요?"
순영은 젓가락을 놀리면서 입에 든 고기가 모래 씹는 맛같 았다. 그제야 자기가 먹는 쇠고기가 자기의 고기를 팔아서 대신 산 것인 줄을 아는 까닭에, 그 고기가 곧 자기의 고기 라고 생각하였다.
"외방으로 멀리 보내고서야 내가 너를 보고 싶어서 견디겠니. 그래서 허다한 데 다 파의치고 가까운 인천으로 가게 하였다."
"그래요?"
순영은 자기의 가는 길이 멀고 가까운 것으로 관계가 아닌 줄을 알면소도 어쩐지 송씨의 말이 정이 붙는 듯하였다.
"그럼 어떻게 하고 가게 되었어요?"
말을 계속하는 순영은 자기가 가는 조건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라니? 영매(永買)는 아니다. 내가 너를 영매할 듯싶 으냐? 삼 년 작정하고 가게 되었으니 삼 년만 가서 있다 오 너라. 그러면 그 뒤에는 네가 가고 싶어하면 몰라두 그렇지 아니하면 굶으나 먹으나 나하고 같이 살게 되든지, 또 좋은 데로 시집을 가게 되든지 그렇게 될 것이다. 낸들 너를 보 내고 싶어 보내겠니. 너도 알다시피 하도 어려우니까 너를 양육한 비용이나 뺄까 하고 하는 짓이다. 너를 양육한 비용 이 전부 빚이다. 이자는 늘어가고 할 수가 있니? 하니까 삼 년만 가서 고생을 해라. 또 점장이 말이. 네가 후분이 좋아 서 오래잖아 잘 살겠다구 하더라지, 하니까 네 복으로 해도 잘 살게 될 것이다."
송씨는 술이 취한 중이라도 다년간 경험한 수단과 말솜씨 는 여전하였다.
"차금은 얼마나 되어요?"
"차금은 말로는 칠백 원이라고 하지마는, 구문이니 무엇이 니 이것 떼고 저것 떼고, 정작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칠백 원이어요?"
순영은 다시금 놀랐다. 자기가 생장한 이래로 칠백 원이란 돈을 구경한 일도 없고, 자기 본집의 전 재산을 다 팔아도 칠백 원어치가 못 될 터인데, 자기는 불과 삼 년 동안의 자 금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받게 된 것은, 자기에게 그만한 자치가 있다는 것을 세상이 인정하는 것이요, 또 자기보다 먼저 팔려간 운옥으로 말하면, 무엇이든지 별로 자기에게 빠질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아이는 보통학교도 졸업을 하였고, 또 그러한 데에 경험도 있어서 오히려 자기보다 낫 다고 할 테인데, 삼 년 차금으로 삼백 원밖에 못 받은 것을 확실히 기억하는 터인데, 자기는 그러한 데에 경험도 없는 초대로서 대번에 칠백 원을 받게 되는 것은, 운옥과 같은 기한의 차금으로는 배가 더 되는 터인즉, 순영은 부지중에 우월감이 나서 마음이 슬그머니 기뻤다.
"그래 요새 돈 칠백 원이 얼마 되는 줄 아니? 풀어놓고 쓸 라면 쓸 것이 없다."
"그러면 그것이 양육비는 될까요?"
"세세히 치면 몰라도 그렁저렁 될 것이다. 네가 이태 동안 에 먹으면 얼마를 먹었겠니. 웃값하고 월사금하고 그 뿐이지. 하니까 칠백 원이면 양육비는 될 것이다."
송씨는 또랑또랑한 정신 같으면 물론 그것만으로는 양육비 가 어림도 없다고 하였을 것인데, 한 잔 먹은 김이라 말끝 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모르고서 사실대로 말하였다.
"그러면 여복이나 좋아요."
순영은 자기의 대강 짐작으로라도 이태 동안에 자기 때문 에 비용난 것이 아무리 늘 잡아 치더라도 그 이상 더 될 것 같지 아니하였으나, 송씨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오는 것 은 대단히 기뻤다. 순영은 그 사이에 동무들이라든지 다른 아는 사람이라든지가 자연히 그러한 방면의 사람들이 많았 으므로, 듣고 보는 경험과 지식도 그 방면의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송씨 따위의 뚜장이 종류로 사람 장사를 하는 사 회에 있어서는 거기에 대한 경위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들 이 계집애들을 불행한 부모나 친척에게서 돈을 주고 사온다 할지라도, 나중에 그 돈과 양육비만 물어 주면 도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요, 더구나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라 철모 르는 미성년(未成年)을 가만히 꾀어 낸 데 대해서는 그 아이 에게 대한 정당한 권리자만 있다면 거저라도 찾아 낼 수가 있는 것이요,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그 사이의 양육비만 물어주고 나가리라는 생각을 가졌었는데, 한때의 차금으로 양육비가 된다는 송씨의 말을 들은지라, 옭아맨 쇠사슬을 풀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하여도 삼 년 뒤의 일이라 아직은 공상에 지 나지 못하였다.
송씨는 내일 떠나야 할 터이니 행장을 차리라는 말을 부탁 하고, 어디든지 쓰라고 돈 십 원을 주고서 취기를 이기지 못하여 그 자리에 쓰러진다.
순영은 내일 떠난다는 말을 듣고서는 마음이 다시 어수선 하였다. 챙긴댔자 입던 옷 몇 가지와 쓰던 화장품밖에는 별 로 챙길 것이 없었다. 순영은 자기가 가는 길이 아무리 가 깝다고는 하지마는, 삼 년 후에나 오게 될는지 혹시 삼년 후에도 못 오게 될는지 알수 없는 길이라, 자기를 이태동안 이나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라든지, 같이 정답게 배우고 놀 고 하던 동무들이라든지, 찾아보고서 한 마디의 작별이라도 아니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나가다가 술 한 병과 마른 안 주와 담배 몇 갑을 사 가지고 먼저 사숙으로 찾아갔다. 저 녁때가 된지라 배우는 아이들은 다 돌아가고 선생님이 혼자 서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순영은 가지고 간 것을 안 옆에 놓고서 아무 말도 없이 절을 한다. 절하는 태도와 기색은 날마다 다니면서 인사로 하는 그것과는 달랐다.
"너 어째 또 왔니?"
선생은 순영의 기색을 살피다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묻는다. "그저 왔어요."
"그저라니, 아까 다녀가고서 왜 또 왔어? 저녁 먹을 때가 되었는데."
선생은 더욱 의심스런 눈으로 순영을 본다.
".........하직하러 왔어요."
순영은 두 눈에 눈물이 핑 돈다.
"하직이라니, 무슨 소니냐?"
선생도 놀라는 빛을 띤다.
"내일 출장가요."
순영의 목소리는 떨렸다.
"출장을 가, 어디로 가니?"
"인천으로 간대요. 삼 년 작정하고 간다니 선생님을 언제 또 뵈올는지 알아요? 그래서 술을 한 병 사가지고 하직하러 왔어요. 선생님, 저를 가르쳐 주시느라고 애쓰셨어느 술이나 한 잔 잡수세요."
하고 가지고 온 것을 선생 앞으로 내어놓는 순영은 그 앞 에 엎드려서 느껴 가며 운다. 그 광경을 보는 선생도 부지 중에 눈물을 흘린다. 날마다 날마다 노래와 웃음으로 채워 지는 그 방안의 공기는 홀연히 인생고해(人生苦海)의 저기압 으로 변하여, 눈물의 홍수(洪水)에 어린 순영의 영(靈)이 표 류(漂流)되었다.
"얘야 순영아, 울지 마라."
여러 번 순영을 진정시켜서 일어앉힌 선생은 목소리를 가 다듬고서,
"울지 마라. 인천이면 가까우니까 자주 만날 것이다. 아, 세월은 빠른 것이다. 네가 처음 와서 소리 배운다고 할 때 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태가 되어서 소리를 배워 가지고 출장을 가게 되었구나. 그 때 보다 키두 많이 컸다. 사람의 일은 다 그러한 것이지, 사람이 나면 먹고 입어야 되는 것 이요, 머고 살기 위하여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는 것이 아니냐. 너는 또 이러한 길로 들었구나. 하니까 아무쪼 록 가서 잘 있거라. 그런 데 가 있을수록 몸을 잘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장래성이 있는 것이다. 몸을 함부로 가지면 못 된 병도 무섭고 점점 타락이 되면 무엇이 될 줄 모르는 것 이다. 그런데,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런 것을 다 사가지 고 왔니. 공연한 것을 사가지고 왔구나."
하고 술병을 돌아본다. 순영은 선생의 말을 저신 차려 들 었다. 순영은 선생에게 술을 대접하려 하였으나, 그 집은 살 림하는 집이 아니라 술상을 차릴 수도 없고 술을 데기까지 도 마따치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이 두고 쓰는 표주박 에다 찬술을 그대로 따르고, 마른안주를 자기 손으로 뜯어 서 몇 잔을 권하였다. 선생도 정답게 먹었다. 다시 사 가지 고 간 담배를 포개어서 선생의 앞에 놓고서, 위에 있는 한 갑을 풀어서 담배 하나를 드리고 당성냥을 그어서 올렸다.
그리하여 이 년 동안이나 자기에게 소리 가르쳐 주던 일을 회상하였다.
"그럼, 안녕히 계셔요."
하고 일어나는 순영은 수건으로 다시 눈물을 씻는다. 차마 안 떨어지는 발을 문 밖에 내놓고서, 방안을 돌아보다가 걸 음을 돌렸다. 가다가 몇 번이나 방문턱에 앉아서 내다보고 있는 선생을 돌아보았다.
순영은 다시 동무 몇 사람을 찾아 보았다. 그 중에 채란을 찾아서 정담을 하였다. 채란도 신마찌(新町)로 가지 아니하 고 다른 데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리 고 돌아온 순영은 공산명월이니 우중행인이니 하는 화투판 옆에서 어수선한 꿈이 깊지 못하였다.
7.
[편집]이튿날 순영은 알지 못하는 사내에게 끌려서 가고 싶지 않 은 곳으로 가게 도었다. 순영이 처지를 바꾸어서 다른 데도 가게 되는 것은 두 번째었다. 처음에 자기 집에서 송씨를 따라올 때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꿈만을 안고 나왔었다. 다 시 말하며는 철을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아무리 송씨의 꾐에 빠져서 왔다 할 지라도 자기의 자유 의 사로 한 일이어서, 오지 아니하려면 아니 올 수가 있는 것 을 오고 싶어서 온 것이거니와, 이번에는 꿈도 아닌 현실로 서 생활전선의 실사회에 강제적으로 밀려 나가는 것이어서 안 가려야 아니 갈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이것이 꾸불꾸불 하고 울퉁불퉁하며 가시덤불, 끊어진 언덕, 웃음과 눈물을 종잡을 수 없이 자아내는 인생 행로의 어느 부분인 한 토막 이었다. 순영이 떠나기에 다다라서 집안 사람이나 작별하러 좇아온 동무들 사이에, 잘 가거라 잘 있거라 하는 등의 입 술 끝에 붙은 인사라든지, 여자로서 피씩만 하여도 흘릴 수 있는 값싼 눈물 이라든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마는, 진정 으로 애석히 여긴다든지 섭섭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순영은 어느 동무에게서 얻어다 기르던 국화 화분이 있었다. 거기에다 물을 다시 한 번 주었다. 자기가 떠난 뒤에는 아무도 물을 줄 사람이 없어서 국화가 마를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주었다. 화분에 넘치는 물은 국화가 물이 너무 많다고 도로 토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순영은 분을 기울여서 물을 도로 따라 주었다. 꼴꼴 소리를 내고 방울을 지어가며 흙으로 스며들어가는 남은 물은, 너무 많 이 주었다고 자기를 원망하는 듯도 하였다. 순영은 다 피지 아니한 국화 송이를 볼에 대었다가 다시 입술에 대었다. 자 기의 더운 눈물이 행여나 국화를 시들게 할까 해서 국화꽃 은 조금 휘어서 가법게 휘어 떨었다. 순영이 행랑어멈을 보 고,
"이 화분에 물을 좀 자주 주세요."
하는 것이 집을 나설때의 오직 한 마디의 부탁이었다. 순 영이 집을 나서자 다시 그리운 것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작 별하여주는 사람들보다도, 이태 동안이나 날마다 사숙에 다 니노라고 밟고 다니던 길이 무엇보다도 그리웠다. 그 길에 는 흙 한 덩이 모래 한 개라도 자기의 발때가 묻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다시는 그 길을 밟아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짐짓 걸음을 멈추면서 그 길을 한 번이라 도 더 밟아 보려고 하였다. 길이야 무엇을 알랴마는 그 뜻 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자기네를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머 뭇거리는 줄로 알았다.
"이거 차 시간 늦겠는데, 어서 가지."
하고 재촉하는 것은 순영을 데리고 가는 사람의 말이었다.
그 사람은 전설에서 듣던, 저승에서 사람 잡으러 온 사자처 럼 천하에 인정이라고는 터럭끝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의 재촉 한 마디에 거미줄같이 서리어 있는 순영의 다 하지 못한 생각은 다른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잘 가거라."
"안녕히 계세요."
"부디 잘 가거라."
"오냐, 잘 있거라."
"인제 가면 언제 오니?"
"쉬이 만나자."
새삼스럽게 작별의 인사가 벌어진다. 이웃집에서 대문 틈 으로 내다보는 여자들은,
"에구, 저 애가 또 팔려 가는구나."
"그 집은 몇 해를 두고 사람 장사만 해 먹나봐."
"에구, 사람은 어떻게 개나 도야지처럼 사구 팔구 하노, 목 맨 송아지처럼 졸졸 딸려가는구나."
"저 애가 순영이라나 한데, 다니는 것을 보아도 아주 얌전 한 아인데, 저렇게 팔려 가면 아주 버리겠지."
이렇게 허드레 공론들을 하면서 입을 삐죽거리는 사람도 있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가엾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러번 돌아보면서 주춤거리던 순영도 그 골목을 나서자 어 디로인지 사라졌다.
순영이 경인선(京仁線) 차를 타려고 경성역에 이르렀을 때 에는 오전 열시경 이었는데, 이십 분쯤의 시간의 여유가 있 었다. 순영은 정거장에 이르자 자연히 시골서 처음에 올라 왔을 때에 거기서 내리던 생각이 났다. 정거장 집이라든지 모든 시설이며, 사람들의 왔다갔다하는 것이라든지, 기타 여 러 가지 경색이, 다소의 다른 것이야 있겠으나, 대처에 있어 서 그때에 있던 그 정거장이건마는, 그것을 보는 순영의 감 상은 여간 다르지 아니하였다. 전에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고 정신을 차릴수가 없을만큼 현황하였으 며, 자기의 가슴에는 순결한 생각과 아름다운 희망이 봄 호 수의 넘치는 물결처럼 건드리지 아니하여도 출렁거렸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경색에는 아 무런 흥미를 갖지 못하고, 우렁찬 소리를 지르고 검은 연기 를 내뿜으면서 왔다갔다하는 기관차들은 무슨 악마처럼 사 람들을 실어다가 못된 구렁으로 집어넣으려는 것만 같았다.
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볼 때에, 희희낙 락하고 활발한 사람도 있었지마는, 젊은 여자들로서 기상이 화평하여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다 자기와 같 은 술집이나 요리집으로 팔려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여자에게는 가서 살그머니 말도 물어 보고 자기의 사정도 하소연하여 보고도 싶었으나, 그것도 같이 가는 사 람의 눈이 어려워서 못하였다. 뗑그렁뗑그렁 요령 소리가 나자 확성기로부터 인천행이라는 소리가 연하여 난다. 사람 들은 제각기 앞을 서려고 달음질을 쳐서 개찰구를 향하여 간다. 순영도 조그마한 보퉁이를 든 채 데리고 가는 사람의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기적 한 소리에 기차는 경성을 뒤에 두고 서쪽으로 서쪽으 로 간다. 용산을 떠나갈 때에 순영은 한강 철교를 유심히 보았다. 만일 장충단에서 점장이를 만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채란과 같이 저 다리에서 떨어져서 고기밥이 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정신이 아찔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차라리 그 때에 그렇게나 되었으면 오늘날의 이 러한 고통이 없으리라고도 생각하였다. 다른 사람이 볼까 봐서 차창을 열고서 가만히 뿌리는 두어 줄기의 눈물이 한 강물을 얼마나 보태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만고의 사람사람은 시간이 빠르다고 한탄하였는데 순영은 시간보다도 기차가 빨랐다. 한 시간이 좀 더 걸리어 어느 사이에 기차는 팔십여 리를 굴러 가서 인천에 닿았다. 순영 이 눈에 먼저 띄는 것이 바다였다. 순영은 바다를 볼 때에 반가운 듯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진저리가 날 듯도 하였다. 순영은 평생에 바다를 두 번째 보는 것으로, 처음에 동 해 바다를 볼 때에 하도 시원하고 기쁘던 것이라, 다시 보 매 그립던 것을 문득문득 만나는 것처럼 기뻤으나, 다시 생 각하매 배를 타고 풍랑에 고생하던 일과 원산에서 물에 빠 지던 일이 기억에 선연하게 새로워서 가까이 보기가 무서운 듯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작 고 큰집들이라든지 길거리에 지고 메고 끌고 형형색색으로 다니는 사람이나 우마들을 보는 것보다, 가이없이 출렁거리 는 물 가운데에 작고 큰 섬들이 점점이 놓여 있는 것이라든 지, 여러 종류의 배들이 오락하락하는 것이라든지, 무엇으로 보든지 육지보다 바다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듯하였다. 순영 은 하늘만 쳐다보이는 산골에서 생장하였고 서울 와서 있었 대야 시도의 화려하는 것은 다상관이 없는 남의 일이요, 자 기는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내와하는 곳이라야 날마다 되풀 이하는 사숙뿐이어서, 농에 든 새처럼 지내다가 광활하게 시원한 바닷가로 살러 오게 되는 것이 행복스러운 듯하였다. 차에서 내려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다만 데리고 가는 사람의 뒤만 따르는 순영은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졸이면서 어떠한 집으로 가는가를 알고 싶었다.
순영은 가는 길을 대강 살펴보았다. 정거장에서 나서서 남 쪽으로 조금 나오다가 동쪽으로 뚫린 큰 골목으로 가는데, 거기는 양쪽으로 중국 사람의 가게가 많았다. 그 길은 비슥 한 고개인데 그 고개를 넘어서 한참 가니 십자 길이 나선다. 거기서 북쪽으로 꺾어서 조금 가다가 우체통이 섰는데, 거기서 오른편의 다음 집으로 들어간다.
그 집은 들어가는 앞기둥에 <음식점 영업>이라는 큰 패가 붙었는데, 그 패 한편에 조그맣게 <주 홍숙자>(洪淑子)라고 씌어 있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드나드는 문은 유리 미 닫이로 되었고, 문에 들어서면 곧 술먹는 장소인데, 정면으 로 술펑이 있고 그 왼편의 살강에는 갖은 안주가 있고, 그 곁에는 큰 화로에 숯불을 이글이글하게 피워서, 그 위에 석 쇠를 놓고 석쇠의 한편에는 대접만한 양재기에다 물을 끓여 놓았는데, 석쇠에는 각색 고기와 생선을 굽고, 끓인 물에는 낙지 같은 것을 데치게 된 것이다. 오른편에는 큰 가마솥이 걸리고 아궁이에는 석탄이 지펴져 있는데, 솥 안에는 되직 한 추탕이 고뭇나게 끓고 있었다. 그 옆에는 기다란 붙박이 도마가 선반처럼 매여 있는데, 그 위에는 초장, 간장, 초고 추장, 새우젓국, 겨자, 고춧가루, 소금 등이 그릇그릇에 담겨 있고, 반달같이 생긴 식칼이 두셋 놓여 있다. 그리고 출입고 의 동쪽으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안에는 따로 큰 방이 있 는데, 그 방 정면의 유리창에는 사이사이에 종이로 오려서 글자를 붙였는데, 장국밥, 냉면, 온면, 만두, 비빔밥..... 그러 한 등이요, 이층에는 칸칸이 막아서 상술을 먹게 되어 있고, 그 외에도 안채의 으슥한 곳에 조그만씩한 방들이 있어서 특별히 조용하게 술을 먹게 되어 있다.
순영이 들어갈 때에는 술꾼과 음식 먹는 사람들이 와글와 글하는데, 술 봉당에서는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술 을 팔고, 안주 심부름을 하는 것은 젋은 사내들인데, 국솥을 보는 사람은 얼굴에 주독 오른 듯한 늙수그레한 영감이었다. 음식들을 먹는 방의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 지 알 수 없으나, 이층으로 술상을 가지고 오르내리는 것은 이십세 내외의 여자들인데, 그 위에서는 웃는 소리, 말하는 소리, 노래하는 소리가 섰이어 들리므로,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으나, 다만 자즌 난봉가 소리가 분명하 게 들리는데, 그것은 목청이나 곡조가 흡사히 자기 소리와 같은 듯하였다. 그 사람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으나 물론 그러할 기회가 없었다. 안집에 딸린 으슥한 방들에는 대개가 문앞에 사내 신과 여자 신 두 켤레씩이 놓여 있는 것을 볼 뿐이요, 그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순영이 들어가자 술 먹던 사람들은 유심히 보는 사람도 있 었고, 본체만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거기서 술 파는 사람 과 심부름하는 아이들은 남녀를 물론하고 서로 눈짓도 하고 옆구리도 찌르면서 무엇을 수군거리는데, 자세히는 들을 수 가 없으나,
"저 애가 새로 오는 아이로구나."
"괜찮지?"
"그래두 아직 초대 같다 얘."
"소리는 꽤 한다더라."
"얼굴도 이쁘다 얘."
이러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순영은 못 들은 체하고 걸음 을 빨리하여 안으로 들어갔으나,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 같아서 부끄럽고 서먹서먹하였다.
"이 방으로 들어가거라."
같이 온 사람은 방 하나를 가리키면서 말을 하고 어디로인 지 사라진다. 순영이 들어가 보니 그 방은 사람이 거처하는 방으로, 때묻은 인조견 이부자리와 허술한 경대에 값싼 화 장품들이 놓여 있고, 벽에는 입던 저고리와 치마가 걸려 있 는데, 생각건데 그 집에서 술을 팔든지 심부름하는 여자, 즉 자기동류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방인 듯하였다. 순영이 방안 을 살펴보고 앉았는데,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같이 온 사람과 어떤 여자가 들어오는데, 그 여자는 오십 세쯤 되어 보이는 중늙은이로, 몸집도 뚱뚱하고 키대도 크 며 기름한 얼굴에 콧날이 서고 눈방울이 둥글둥글한 것이 몹시 게염스럽게 보인다.
8.
[편집]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순영은 벌떡 일어섰다.
"이 어른이 주인 어른이시다. 인사해라."
같이 온 사람은 순영을 그 여자에게 소개한다. 순영은 공 손히 절을 한다.
"오, 잘 왔니?"
하고 그 여자가 말을 계속하려고 하는데,
"아주머니, 앉아 말씀하십시오. 나는 출출하여서 무엇 좀 먹어야 되겠습니다."
하고 같이 온 사람은 일어선다.
"응 그러지, 가서 무어든지 달래서 자시게. 애썼네, 시장하 겠지. 오정이 지났는데, 그리구 이 애두 무엇 좀 억어야지.
하지만 이 애는 내가 알아 할 테니 족하(足下)나 가서 먹게." 하여서그 사람을 보내고 말을 계속한다.
"너 나를 모르겠지?"
하고 순영을 보면서 웃는다.
"모르겠어요."
이상한 듯이 그 여자를 보는 순영은 어디서인지 그 여자를 본 듯싶기도 하였다.
"너는 나를 모를 게다. 나는 너를 두 번이나 보았다."
"어디서요?"
"서울서 보았지, 어디서 보아."
"저는 한 번 뵌 듯은 해두 자세히 모르겠는데요."
"너는 모를 게다. 너 시궁골 김 선달 알지?"
"예, 알아요."
"김 선달하고 같이 보았다. 한 번은 너 사숙에 가는 길에서 언뜻 보고 또 한 번은 동물원에서 보았다. 너 요전에 네 동 무들하고 동물원에 구경갔었지?"
"네, 요전에 국화 구경 하느라구 갔다 왔어요."
"그 때 내가 너를 보았다. 나는 너를 자세히 보았지마는, 너는 나를 몰랐을 거다."
하고 껄걸 웃는다.
"네, 그러셨어요?"
순영은 그이가 자기를 데려오려고 그전부터 가만히 선을 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네 이름이 순영이라지?"
"네."
"순영이, 이름이 좋다. 순하다고 순영이로구나. 사람은 순 해야 쓰는 것이지. 기집사람이 그 악스러워서 뭣에 쓰겠니.
순영이, 순영이, 이름 잘 지었다. 그런데 그 전에 먼 빛으로 보아서 그런가, 그렇게 이른 줄을 몰랐는데, 가까이 보니까 얌전하구나. 우리 집에 있는 년들은 모두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 아무것도 무르는 것들이 되잖게 모양이나 내려구 하구." 혀를 낄낄 차더니,
"에구 참, 네가 시장하겠구나. 무엇을 좀 먹어야지."
하고
"산월아."
하고 부른다. 밖에서는 왁자지껄하는 소리만 나고 대답이 없다.
"이년들이 귀가 처먹었나."
하고 미닫이를 화닥닥 열더니, 두 손으로 문지방을 짚고 고꾸라질 듯이 몸을 내밀고서 목을 늘이고,
"산월아."
하고 악을 쓰듯이 부른다. 그래도 대답이 없으니까,
"거기 아무도 없니? 누구든지 이리 좀 오너라."
목에 핏대를 올려 가지고 부른다. 어디서인지 대답하는 소 리가 나더니 젊은 여자 하나가 허겁지겁 하고 달음질로 오 더니,
"예."
하고 그 앞에 와 선다.
"이년들이 모두 귀가 처먹었니, 왜 대답이 없어?"
"심부름하느라고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듣긴 왜 못 알아들어? 그렇게 천호만환(千呼萬喚) 하는데 못 알아들어? 듣고도 서로 미루구 안 오려고 못 들 은 체 하지, 저년들이."
"아니에요, 저는 이층에서 심부름 하느라구 못 알아들었어요." "그러구 저러구 점심 한 상 얼른 차려 와. 이 새로 온 아가 씨 도임상이다. 아주 잘 차려 와. 또 아무렇게나 차리지 말고." 심부름하는 여자는 대답을 하고 간다. 그 광경을 보는 순 영은 주인 마누라의 하는 짓이 하도 거칠고 우악스러운 듯 하여서 공연히 무서웠다. 그러나 그만한 집을 지니고 그만 한 영업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부리는 데는 그만한 틀거지 가 없어서는 아니 될 듯하여서, 한편으로는 믿음성도 있는 듯하였다.
조금 있다가 주인 마누라는,
"에구, 이것들이 열 나절은 꾸무럭대고 있겠지, 어느 천년 에 가져올는지, 내가 나가 봐야겠다."
하더니 순영을 보고서
"너 거기 편히 앉았거라. 내 잠깐 다녀올게."
하고 일어서서 나간다. 조금 있다가 점심상을 들려 가지고 오더니, 손수 받아서 순영의 앞에 놓으면서,
"시장하겠다. 어서 먹어라. 그런데 도임상이라구 반찬이 변 변찮다. 그대로 먹어라."
하고 권한다. 그런데 점심상은 잘 차렸을 뿐 아니라 주인 마누라의 하는 태도가 금방에 정이 붙는 듯하였다. 순영은 그렇게 훌륭한 밥상은 처음 받아 보는 터로 어떻게 먹어야 좋을는지 몰라서 주저할 뿐이었다. 심부름하는 여자는 순영 의 먹는 양을 보려고 가지도 아니하고 문지방을 짚은 채 빤 히 들여다보고 섰다. 순영은 그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리 하여 주인 마누라가 여러 번 권하는 데에도 숟가락을 들까 말까 망설이기만 하고 심부름하는 여자의 눈치만 본다. 그 럴수록 심부름하는 여자는 더욱 빙긋빙긋 웃으면서 염치없 이 쳐다보고 있다.
순영은 여간 곤란하지 아니하여 실로 어쩔 줄을 모른다.
"이년아, 무엇을 그렇게 서서 보고 있어? 얼른 가서 심부름 이나 하지, 정신을 놓고 섰네. 어서 가거라."
주인 마누라는 순영의 사정을 아는 듯이 심부름하는 여자 를 쫓아 보낸다. 순영은 여간 시원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부끄럼이 남아서 숟가락을 들고서 먹는다는 것이 끄 적거리기만 하고 변변히 먹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앉았던 주인 마누라는,
"찬찬히 많이 먹어라. 왜 부끄러우냐? 너희들 만한 때는 어 디 가서 무엇을 먹으려면 부끄럽게도 하니라. 하지만 이게 인제 네 집인데 스스러울 것이 무어 있나, 어서 다 먹어라.
나는 볼 일이 있으니까 나가 보아야 겠다."
하고 나간다. 그것은 정말 볼 일이 있어서 나가는 것이 아 니라, 순영이 혼자 마음대로 밥을 먹게 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었다. 그 눈치를 아는 순영은 벌떡 일어나서 그의 나가 는 것을 본 뒤에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주인 마누 라가 손수 숭늉을 가지고 와서 문안에 들여 놓고 가면서
"이년들이 물을 가지고 오면 또 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 니까, 내가 갖다 주어야지."
한다. 순영은 그러지 아니하여도 심부름하는 계집애들이 또와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찌 하나 하고 염려를 하던 중 에, 주인 마누라의 하는 것을 보고서 대책 여간 수단이 아 닌 것을 탄복하였다.
순영이 점심을 먹은 뒤에 주인 마누라는 순영을 데리고 자 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방안 세간이라든지 차림 이 제법 훌륭하였다. 자개 삼층장, 화류 이층장, 의걸이가 보기 좋게 놓여 있고, 이불장에는 갖은 비단으로 만든 이부 자리가 첩첩이 쌓여 있으며, 경대 뒤에는 체경이 걸려 있고 두어 분의 화초와 어항에 금붕어를 기르는 것이 그럴 듯하 고, 축음기와 라디오는 상당한 사치품이어서 순영으로서는 그만한 방안 치장을 드물게 보는 것으로 제법 으리으리하였다. 순영은 자기도 장차 방안 치장을 그만큼만 하고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윗목 벽 위에 선반 같은 것을 매고, 그 위에 조그마한 책장 같은 것 을 놓고 그것을 비단 주렴으로 가리었으며, 그 앞에는 은으 로 만든 종지만한 향로와 향합이 놓였는데, 향로에는 만수 향이 타다가 꺼진 것이 그대로 꽂혀 있고, 그 옆에는 보리 자(菩提子)를 갈아 만든 백팔 염주가 걸려 있다. 순영은 그 주렴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모든 것을 유심 히 둘러보던 순영은 눈이 거기 가서 멈추었다. 순영은 대번 에 물어 보고도 싶었지만, 경솔히 묻는 것이 조심성 스러워 서 참고 참고하였다. 그러던 차에,
"너 무엇을 그렇게 보니?
하고 주인 마누라가 묻는다.
"저게 뭐에요?"
순영은 좋은 기회를 얻어서 반문하였다.
"무엇 말이니?"
"저기 저것 말이에요. 선반 위에 주렴 늘인 그 안에 무엇이 있어요?"
하고 손으로 저기를 가리킨다.
"거기 부처님을 모셨다."
"부처님이요? 부처님은 왜 모셨어요?"
"에구, 나는 이 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내생에나 좋은 곳으 로 가려구 부처님을 모시고 염불을 한다."
하더니,
"아미타불."
하고 한숨을 가볍게 쉰다.
"부처임을 모시고 염불을 하면 죽어서 좋은 곳으로 가요?"
"그렇단다, 염불을 지성으로 하면 살아서도 소원 성취를 하 고, 죽어서도 좋은 곳 으로 간단다."
"살아서도 소원 성취를해요?"
"그렇단다."
"꼭 그렇게 될까요?"
"누가 아니, 그렇다니까 그런줄 알지, 낸들 지내 봤니. 왜 너도 염불 좀 해 보련?"
"염불을 어떻게 해요?"
"염불은 아무 거든지 좋단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든지 관 세음보살을 부르든지 지장보살을 부르든지 아무라도 다 좋다." 하더니,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하고 소리 없이 입을 달막달막하고 있다.
"왜 세 가지를 다 하세요?"
순영은 이상한 듯이 주인 마누라의 입을 쳐다본다.
"나는 욕심이 많아서 염불을 해도 한 가지만 하면 시우정 찮다. 그래서 세 가지를 다 한다."하더니 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하고 껄걸 웃는다. 순영도 속으로 염불을 하고서 웃었다.
"너 부처님 좀 구경하련?"
주인 마누라는 수건에다 손을 닦고서 비단 주렴을 젖힌다.
무슨 나무로 만든 불감(佛龕)인지는 모르겠으나, 겉은 옻칠 을 하고 안은 금박으로 발랐으며, 한가운데에 비단 좌복을 켜켜 깔고 그 위에 조그마한 금부처님을 모셨는데, 상호(相 好)가 대단히 거룩하여 보였다. 주인 마누라는 새로 향을 꽂 고 불을 당겨 놓더니, 합장을 하고 공손히 절을 한다. 순영 도 합장을 하고서 굽혀 절을 하였다. 순영은 무슨 일을 목 적하여서 빈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으로 엄숙하게 귀의(歸 依)하는 뜻을 표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당장에 부처님이 자기를 도와 주시는 것같이 생각되어서 마음이 든든한 듯하 였다. 순영은 향을 한 대 피워 올리고 싶었으나, 다만 마음 으로 분향을 할 뿐이요 몸으로는 못하였다. 주인 마누라는 주렴을 도로 덮고 나오더니,
"이제 우리 이야기 좀 해보자."
하고 아랫목의 비단 방석에 호기스럽게 앉는다. 순영은 앞 문을 등지고 공손히 앉아서 말을 기다린다. 주인 마누라는 순영의 고향과 집에서 나오게 된 동기와, 송씨에게 있은 일 을 차근차근히 묻는다. 순영은 묻느 s말을 따라서 자기의 역사를 사실대로 대강 말하였다. 주인 마누라는 순영의 역 사를 들을 때에는 거기 대하여서 가타부타 자기의 의사를 말하는 일은 없고, 다만 듣기만 하고 있더니 그 말이 대강 끝나자,
"너 그전에 어디로 가서든지 술을 팔아 본 일은 없었지?"
하고 본문제로 들어간다.
"없어요."
"그렇지, 없었겠지. 그런데 술을 좀 팔아 보겠니?"
"....팔게 되면 팔지요."
순영은 시름없이 대답한다.
"팔게 되면 팔다니, 너 여기를 어째 온지 아니?"
"가서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하라고 그러세요."
"응, 그렇지, 너는 차금을 받고 팔려 왔으니까 인제는 내 사람이다. 하니까 무엇이든지 하라는 대로해야지. 하지만 너 더러 논을 매라구 하겠니, 밭을 매라구 하겠니? 하만히 앉 아서 술이나 팔고 손님 접대나 하고, 그렇지."
하고 기침을 하고 자리를 고쳐 앉더니 말을 계속한다.
"그런데 술도 오늘이나 내일부터 곧 팔라는 것은 아니다.
술도 팔면 팔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술 파는 것도 졸업생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술을 붓는 것도 적지도 않고 많지도 않게 똑같이 부으려면 그것도 어려운 것이다.
어떤 잔은 많이 붓고 어떤 잔은 적게 붓고 그러면 쓰겠니?
또 술을 데우는 것도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 알맞게 데워야 하는 것이야, 술이 아무리 좋더라도 데우기를 잘못 데우면 맛이 없어지는 것이다. 쩔쩔 끊는다든지 치디차게 한다든지 하면, 술맛만 없을 뿐 아니라 먹을 사람이 잘 먹 을 수가 없느니라. 그리고 술을 치는 것도 단정스럽게 쳐야 되는 것이야. 술을 치다가 찔금찔금 엎지른다든지 술잔에 부딪쳐서 왈그락달그락 소리를 낸다든지 그러면 못 쓰는 것 이다. 그리고 술잔 수효를 잘 따져야 되는 것이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왁짜지껄하고 술을 먹더라도 술 파는 사람은 정신을 다른 데쓰지 말고 누구는 몇 잔 먹고 누구는 몇 잔 먹는 것을 낙출없이 기억하여야 되는 것이다. 술 먹는 사람 들이라는 것은 자기가 몇 잔씩 먹은 것은 뻔히 알면서도 몇 잔이요 하고 묻는 수가 많이 있다. 그런 때에 많이 먹은 것 을 적게 먹었다고 해두 못 쓰는 것이요, 적게 먹은 것을 많 이 먹었다고 해두 못 쓰는 것이요, 또 몇 잔 먹은 것을 모 르구서 어리둥절하고있어도 못 쓸 것이 아니냐. 하니까 천 병만마가 뒤끓어 오르더라도 정신을 초롱같이 차리구서 있 다가, 몇 잔이냐구 묻거든 암만 잔이라구 또박또박 말하구, 또 손님이 술 추한 손님은 모르구서 술값을 잘못 내는 수도 있고, 알고서도 어쩌나 보느라구 잘못 내는 수도 있다. 그런 때는 정신을 차려서 모자라는 것은 더 받고, 더 내는 것은 도로 내주구 그래야 하는 것이야, 그것도 대단히 어려운 것 이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이 소리 들으랴 저 소리 대답하 랴, 이 술 치랴 저 술 회계하랴, 정신을 제대로 가지기가 어 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정신을 벼락같이 차리고 또박또박 회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도 어렵 지만 그런 것은 정신만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첫째에 마음을 잘 써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특별히 없는 것을 남을 준다든지 그러한 선심 을 하라는 게 아니라, 손님 대접을 잘 하라는 말이다. 술잔 을 들고 앉았으면 무슨 손님이 안 오겠니. 그야말로 팔도 손님이 다 모여드는데 지금은 팔도 사람뿐인가? 외국 사람 들까지 모여들지. 하니까 그 중에 무슨 사람은 없겠니? 잘 난 사람, 못난 사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전다리, 코뺑뺑이....... 별의 별 사람이 다 모여든다. 하지만 그 손님을 다 좋은 낯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술 한 잔 사먹기는 마찬 가지인데 어느 사람은 잘 대접하고 어느 사람은 푸대접하면 쓰겠니. 하니까 똑같은 대접해야 하는 것이다. 하기야 그 중 에도 조금 달리 대접할 손님이 있지, 아주 없기야 하겠느냐 마는, 그런 손님이야 몇이 되나? 그런 손님은 어떤 손님이 냐 하면, 자주 다니면서 술을 많이 팔아 주는 손님이라든지, 또 그 외에 알심 있는 손님이 있느니라. 너는 아직 지내보 지를 못했으니까 그런 속내를 모를리라만, 지내보면 다 그 런 손님이 생기는 법이야, 하니까, 그런 것은 차차 알려니와 제일 질색할 일은 손님이 술 추해 가지고 된 소리 안 된 소 리 지껄이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그런 손님도 좋은 말로 좋도록 호송을 해야지, 그런 손님을 덧들여 놓으면 당장에 도 주정받이를 해야 되고, 그런 손님일수록 노염은 더 잘 타서 한 범 돌리면 다시는 안 온다. 허다한 술집에 돈 내고 먹기는 마찬가진데, 푸대접하는 데로 왜 자주 다닐 맛이 무 엇 있니. 하고 술 주정하는 손님이라야 술을 많이 팔아 주 는 법이다. 안 그러냐, 생각해 봐라. 술을 많이 먹기에 주정 하는 것 아니야? 술 주정하는 사람을 다 빼놓으면 누구에게 술을 팔아먹겠니? 하니까, 술장사는 아무튼 술 주정꾼과 잘 사귀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도 오히려 어차고, 술 꾼을 끄는 것은 꼭 한 가지가 있으니라."
하고조금 웃는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손님의 비위를 잘 맞추어야 되 는 것이다. 아까도 손님 대접을 잘해야 된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예사로 순님 대접을 충하 없이 하라는 말이고, 손님 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말을 그런 말이 아니다. 술집에서 계집애가 술을 팔고 앉았으면 사내들은 누구든지 범연히 보 는 법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술 파는 계집애를 힐끗 보아서 조금 반반한 듯싶으면, 그저 지나가려 하다가도 일 부러 들어와서 술을 먹는 수가 있고, 그 때에 못 들어오게 되면 그 다음이라도 거기를 찾아 오는 것이다. 그리고 술 먹는 사내들은 술 파는 계집애가 똑똑만 하면 기어이 말 한 마디라도 붙여 보려고 하는 것이다. 점잖은 사람들은 그렇 지 않지마는, 소양배양한 젊은 사람들은 어려 사람 있는데 도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농지거리두 하고 그런다. 하지만 그런 것을 내색을 내서는 못 쓰는 것이야. 그저 좋은 낯으 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고만이 아니냐.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없는 정도있는 체하고 안 나오는 웃음도 웃고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님들이 따로 술상을 차려다 가 조용한 방에서 먹는 수가 많이 있다. 한데 그런데 가서 술 심부름을 하려면, 그 때는 손님들이 마음대로 농담도 하 고 장난도 하고 공연히 실까스리기도 하고, 별별 일이 다 많은 것이다. 그런데 손님들이 다 깨끗이나 하고 얼굴도 괴 히 흉하지나 않으면 농받이 하기도 괜찮지만, 의복도 너절 하고 생김새도 꼴도 보기 싫은 것이 너덜대고 귀찮게 하면 그것도 어렵기는 어려우니라만 근들 어쩌겠니? 그런 것들일 수록 노염을 더 잘 타고 소가지는 고양하여서, 까딱하면 술 상을 메친다, 사람을 때린다 야단법석을 하고서, 간다 봐라 하고 내빼 버리면 호소 무처지 어쩌겠니? 그리고 그렇게만 하고 가서 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소문을 고약하게 내놓는다. 아무 술집은 술맛이 나쁘니, 안주가 안됐느니, 인심이 고약하니, 술 파는 게집애가 찰깍정이니, 있는 소리 없는 소 리 보태어서 흠운을 내놓는다. 하니까 그런 사람들을 다 웃 는 낯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속마음만 찬 물 같으면 고 만이 아니냐?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더라도 너무 헤 프게 말을 듣는다든지 하면 못 쓰는 것이다. 사람이 너무 헤프다는 수문이 나면 웬만한 손님들은 도리어 잘 안 다니 는 법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게 모가 박히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하니까, 이 사람 에게도 좋은 체, 저 사람에게도 좋은 체, 체만 하여야 하는 것이야. 그래야 손님을 오래 두고 끄는 것이야, 알아듣겠니?
그러다가 정히 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 때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너희들끼리 어찌하든지 그거야 아랑곳 할 바 아니다. 술 파는 계집애가 그런 일이 아주 없을 수야 있니.
네가 뭐 정렬 부인이냐, 뭐냐? 그런 데서 술 파는 이외에 네 수단대로 생기는 돈은 얼마든지 네 아람치다. 하지만 그 런 데 가서 정신 없이 빠지면 못 쓰는 것이야, 못 쓰기만 하겠니? 소문새가 고약하면 경찰서에 붙들려 가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는 지경이면 쫓겨나게까지 되는 것이다.
하니까, 남의 집에 가서 술을 딸아 주려면, 아무쪼록 술꾼이 많이 오도록 하는 것이 제일이란 말이다. 그래야 술도 잘 팔리고 제게도 이익이 있는 것이아니겠니? 손님들에게 하는 일을 아무리 속으로 하더라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고 무르는 줄 아니? 술꾼이 많이 오는 것 을 보면 손님에게 잘하는 줄을 알 것이고, 술꾼이 잘 오지 아니하면 손님에게 잘 못하는 줄을 알 것이 아니냐. 하니까 아무쪼록 잘해 보아라."
주인 마누라는 일장의 설법을 하고 나서 아미타불을 부르 더니 버릇으로 하는 한숨을 쉰다.
9.
[편집]주인 마누라가 말을 다하도록 순영은 들을 따름이요, 무슨 질문을 한다든지 자기의 의사를 말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적당한 고비에, 예 하고 대답을 한다든지, 자리를 고쳐 앉는다든지, 이따금 말하는 입을 쳐다본다든지 하여서, 자기가 말을 잘 듣는 기색만을 표시하였다. 그러다가 맨 나 중에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인제 나가서 집안 구경이나 하구, 그 방에 가서 편히 쉬어라. 그 방은 네 동무들이 있는 방인데 같이 있거라. 저녁에 동무들이 들어오거든 인사도 하고 술 파는 이야기도 들어라. 그리고 내일부터는 잔심부름을 하면서 남하는 것을 보 아라. 그러면 차차 미립이 나지. 그래 얼마 익혀 가지고 네 손으로 술을 팔아야지. 그런데 너는 재주가 얼굴에 나타난다. 무엇이든지 배우면 잘만 배울 것이다. 우리 집에는 계집 애가 명색이 셋이나 있지마는, 술청에 앉아서 술 파는 것이 낮살도 지긋하고 하는 것이 웬만하지, 그 나머지 두 년들은 미친년들처럼 덩컹대기만 하고 아무것도 아니다. 손님끌 줄 도 모르고, 그러니까 제 실속도 못 차리고 그렇다. 네가 인 제 채를 잡게 될 것이다. 어서 나가서 집안 그경을 하든지 네 방에 가 쉬든지 그래라. 그리고 같이 있으려면 내가 누 군 줄이나 알아야지. 나는 이 집 주인인데 혼자 사는 사람 이다. 성은 홍가구 이름은 숙자, 홍 숙자라는 사람이다. 문 패가 붙었느니라. 그런데 인제 나보고 어머니라고 그래라.
다른 애들도 다 어머니라고 그런다."
숙자는 일어서서 나가려고 한다.
"네."
하는 순영도 숙자의 뒤를 따라 가서 집안을 여기저기 조금 둘러보다가 제 방으로 들어갔다. 순영은 혼자 앉아서 숙자 의 하던 말을 되풀이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장차 술잔 을 들고 손님 치를 생각을 하니 스스로 부끄럽고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녁 때가 되매 순영에게도 따로 밥상을 차려 왔으나, 다 른 계집애들은 한꺼번에 밥을 먹지 못하고 하나씩 대거리로 먹는바, 먹다가도 밖에서 부르면 나가고 하기를 두세 번씩 한다. 그리고 밤까지 술을 팔다가 오후 열한시가 지난 뒤에 들어오는데, 하나는 들어올 때 본 술청에서 술 팔던 여자요, 둘은 왔다갔다 심부름하던 계집애들이었다. 순영이 서로 인 사를 한 결과, 술 팔던 여자는 박 모란(朴牡丹)이요, 계집애 하나는 조 산월(趙山月)이, 하나는 임 향선(林香仙)인 것을 알았다. 모란은 들어오자 피곤한 듯이 자리를 깔고 드러눕 는다. 그러나 산월과 향선은 순영에게 대하여 이런 말 저런 말을 묻는데, 치우쳐서 거기까지 오게 된 내력을 묻는다. 순 영은 사실대로 대강 대답하고,
"그래, 내 얘기를 들었으니, 이제 네 얘기 좀 해라. 너는 어떻게 여기를 와서 있게 되었니?"
순영은 산월에게 묻는다.
"나 말이냐? 나는 전라도 화순(和順) 땅에서 살다가 집이 구차해서, 우리 아버지가 만주로 돈 벌러 간다고 가시더니 다섯 해가 되어도 아니 오셨다. 그래 어머니하고 단 둘이 사는데, 한 번은 서울 사는 화장품 장수가 와서 예서 이렇 게 구차하게 사느니, 자기를 따라서 서울로 가면 어느 고무 공장이나 직조 공장 같은 데 넣어서 돈을 많이 벌게 해 준 다고 꾀더구나. 그래 나도 솔깃하고 어머니두 그렇게 하라 구 하시더구나. 차차 내가 서울 와서 돈을 벌면 어머니도 오시겠다구. 그래 어머니가 무엇을 팔기도 하고 빚도 내구 해서 노자를 장만해 가지구, 그이를 따라서 서울로 오지 않 았겠니? 그랬더니 사흘만에 나를 어디다 몰래 팔아먹구서 기두 망두 없이 도망을 해버렸구나. 그래서 여기를 두 번째 팔려 왔다. 그래 그 여편네를 어디서든지 만나기만 하면 붙 들구 야단을 치려고 해도, 어디로 갔는지 한 번도 볼 수가 없구나. 세상에 별일도 다 많지."
하고는 깔깔 웃는다.
"또 너는 어떻게 되어서 여기를 왔니?"
순영은 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는 듯이 눈을 까막거리고 향선에게 묻는다.
"나 말이냐? 나는 말할 것도 없어."
향선은 빙긋이 웃는다.
"왜 남의 말만 듣구 네 말은 않니? 너는 외상말만 듣는 사 람이냐, 뭐."
산월이 말을 하면서 향선에게 눈을 흘긴다.
"나는 말을 할 게 없으니까 그렇지."
"없긴 왜 없어? 벙어리더냐? 말할 것이 없게."
"그까짓 소리를 하면 뭘 하니?"
"그까짓 소리구 저까짓 소리구, 할 말은 해야지. 왜 남의 속만 뽑아 보고 제 속은 안 준담. 네가 말을 안하면 내가 대신 하겠다."
하는 산월은 순영을 보면서
"저년은 시집갔다가 서방이 어리다고 도망질해서 색주가가 됐단다."
하고 다시 향선을 본다.
"그럼, 누가 열일곱 살이나 먹어서 시집을 갔는데 열두 살 밖에 안 된 조막덩이만한 서방을 바라구 사니? 그나마 꼴두 꼴 같지 않은 것을 서방이라구 데리구 살겠니, 그래."
향선은 산월에게 종주먹 대듯이 말을 하더니, 다시 순영을 보면서,
"이렇게 됐단다. 내가 열일곱 살 먹었을 때에 시집이라구 갔는데, 그러니까 그게 재작년이다. 우리 아버지가 집이 구 차하니까 돈을 받아먹고 시집을 주었지요. 그래 시집이라구 가보니까 밥은 굶지 않는 모양인데, 신랑이라는 것이 열두 살인데 게다가 맞자라서 똑 조막덩이만밖에 안 된다 말이야 (제 주먹을 내밀면서). 게다가 못 생겨서 꼴두 보기 싫은데 어떻게 사니? 그랬다구 저년이 저렇게 숭을 본단다."
향선은 산월을 가리키고 다시 순영을 본다.
"에구, 이상두 해라. 그래 시집살이하는 것보다 이런 데서 사는 것이 나으냐?"
순영은 이맛살을 조금 찌푸리면서 묻는다.
"낫고말고, 지금 생각해두 그런 서방은 꿈에 뵐까 무섭다."
"이년아, 서방이 어리면 항상 어리냐? 조금 있으면 클 것을 그 새를 못 참아서 도망질이 다 뭐냐?"
산월이 농 비슷이 말한다.
"나이 어리다구 서방이 그리워서 그런 줄 아니? 보기 싫어 서 그렇지. 우리 아버지는 신랑이 못 생긴 줄을 알면서도 돈 받아먹는 맛에 시집을 주었단다. 지금 세상에는 돈이 제 일이지, 자식두 모른단다. 나도 인제 무슨 짓을 하든지 돈을 모아 가지고 마음에 맞는 서방을 얻어 가지고 살란다. 돈만 있어 봐라. 아무 놈이라두 골라 잡을 수가 있지 않는가."
하더니, 다시 말을 다른 방면으로 나간다.
"아까두 말이야, 여기 왜 어떤 때는 양복두 입고 오구, 어 떤 때는 조선옷도 입구 오구 하는,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 는 사람 안 있니. 왜 수염이 채수염으로 나구, 그 사람이 저 녁때 와서 상술을 차려 오라구 하더니, 먹으면서 나하구 연 애하자구 그러겠지. 그러면서 나보고 돈을 얼마나 모았느냐 고 그래. 그이가 나는 차금이 없고 월급으로 받고 있는 줄 을 알거든. 하니까 묻는 말이지. 그래 별로 저금한 것이 없 다고 그러니깐, 그런게 아니라 미두(米豆) 시세가 앞으로 좋 은 싯세가 있는데, 돈이 얼마든지 있으면 자기 돈하고 보태 어서 백 원이나 이백 원만 되어도 며칠 안에 몇천 원을 만 들 수가 있으니, 얼마든지 있는 대로 내어 놓으라고 그러겠지. 그래서 돈으 따거든 집을 사 가지고 아주 정식으로 결 혼식을 하자구. 자기는 색시를 고르느라고 아직 장가를 안 들었다나. 그리고 이 소리 저 소리하면서 구에다 꿀을 들어 붓겠지. 그러기에 차차 보자구 그랬지. 그러니 돈만 있으면 골라잡을 수가 있지 않겠니?"
하고 웃는다.
"그래, 차차 보자구 했으면 돈을 얼마든지 주겠니?"
산월이 묻는다.
"주기는 무얼 줘? 그런 자들은 그렇게 곯려 줘야지."
이러한 인정 세태를 처음으로 들어 보는 순영은 반쯤은 꿈 인 듯하였다.
"고만들 자자."
하는 모란의말을 따라서 그들은 꿈나라로 들어갔다.
10.
[편집]순영은 이튿날부터 허드레 심부름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익히게 되었는데, 다른 것은 보는 대로 할 수가 있으 나 술 치는 것을 배우기가 어려웠다. 술도 주전자 술을 치 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아니하나, 구기로 치는 것은 좀처럼 손에 익지 아니하였다 한 잔이나 두 잔이나 혹은 몇 잔이든 지, 손님이 청하는 대로 꼭 그 잔 수가 될 만큼 항아리에서 양푼에 떼내어 그 양푼을 더운물에나 극 속에 땡그르 돌려 서 알맞게 데워 가지고, 구기로 떠서 그 잔 수효대로 똑같 이 치기는 여간 어렵지 아니하엿다. 그리고 술꾼이 들고나 고 한꺼번에 여러 패씩 닥치는 때는 누가 몇 잔씩을 먹었는 지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눈여겨서 자수를 헤아려 도 조금 있어서 손님들이 뒤섰여서 여러 잔씩을 먹게 되면, 정신이 아리송하여서 기억하였던 것까지도 마처 잊어버리게 되곤 하였다.
순영이 그렇게 견습을 한 지도 며칠이 된 어느날 저녁이었다. 손님 대여섯이 호기스럽게 들어오더니 숙자를 불러 가 지고,
"우리는 주안(朱顔) 사는 사람들인데, 이 집에 새로 이쁜 아가씨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일부러 예까지 술 한잔을 먹으러 왔으니, 조용한 방을 하나 치고서 그 색시 손에 술 한잔 얻어먹어 볼 수가 없겠소?"
술이 거나한 목소리로 말한다.
"술을 잡수시기야 어렵지 않지마는, 그 애가 온 지가 며칠 안 되어서 범절이 모두 서투른데요."
숙자는 인사성 있게 말한다.
"서투른 것 좋지요. 너무 졸업생이 되면 우리가 실수할까 무서워서. 아무리 서툴러도 우리가 그것을 잡을 사람은 아 니오. 술을 치다가 똥을 싸더라도 우리가 다 칠 터이니 염 려마시오."
"하하하, 그렇게 까지야 하겠습니까마는, 아직 미립이 못난 아이라 손님에게 실수할까 봐 조심스러워서 하는 말씀이지요. 하여튼 먼 데서 일부러 오셨으니 들어가시지요. 그러나 그 애는 아직 손님 한 번도 치러 보지 못한 숫계집애올시다. 마수 걸이나 잘해 주십시오.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용 서하시고, 하하하."
"이것 주인 마님의 너스레가 너무 과한테, 사람을 불도 안 땐 찬물에다 막 삶으려 드는구료, 제발 맙소사."
하는 사람은 제 흥을 못 이겨서 비틀걸음을 친다.
"에구, 별말씀을 다 하시네, 너스레가 무슨 너스레야요. 머 리는 이렇게 세었어도 사람은 아주 진국이랍니다."
하더니 계집애들 있는 방을 향하면서,
"얘들아, 그 중 깨끗한 삼호실을 치워라. 걸레질을 깨끗이 치고 비단 방석을 갖다 놓아라. 거기 있는 인조견 방석은 치우고 다락에 있는 본견 방석 말이다. 그리고 얼른 술상을 좀 잘 차려라. 보아하니 그럴 손님들이 아니다. 영업하는 집 에서 손님의 충하를 보겠느냐마는 조밥에도 어시뎅이가 있 고 아이뎅이가 있다고, 손님도 그렇잖은손님은 그대로 대접 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영이 옷이나 갈아입어라. 또 추헤해 가지고 첫날 저녁에 눈 밖에 날라."
하더니 다시 손들을 돌아보면서,
"에구, 내가 말을 잘못 했네. 첫날 저녁이라니까 또 혼인 지내는 첫날 저녁으로 알지 마세요. 손님 접대를 처음으로 하는 첫날 저녁이란 말씀이에요. 에구, 사람이 폐물이 되니 까 말두 헛나와."
하고 애교를 부린다.
"말이야 똑바로 잘한 말이요. 나는 보기에는 손자까지 두었 을 것 같지마는 알고 보면 아직 장가를 못 들었소. 오늘 저 녁에 아주 결혼실을 합시다. 그러구 그 방에다 신방을 차리 면 첫날 저녁이 아니오. 말은 잘해 가지고 주(註)를 내는 것 이 탈이야."
하고 한 사람이 숙자 앞으로 나서더니,
"자, 장모님 봅시다. 친딸은 아니라도 이런 데 있는 계집애 들을 보니까 으레 호모호녀(呼母呼女)를 하더구면, 하니까, 하여간 장모님이 되겠지."
하고 절을 꾸뻑 한다.
"에구, 관세음보살, 장모가 무슨 장모에요, 그러지 마시고 방으로 들어가세요."
하고 손들을 방으로 인도한다.
순영은 손님들이 특별히 자기를 찾는 것을 보고서, 몇 해 동안 배운 소리와 거기 와서 익힌 방법을 비로소 실지로 행 하게 되는 것을 깨달았다. 순영은 옷을 갈아 입고 몸매를 다시 매만지는데,
"순영이는 별청을 받아 가는구나, 좋기도 하겠다."
하는 향선의 말에,
"에구, 우리도 저렇게 별청을 한 번 받아 보았으면 죽어도 원이 없겠다."
산월이 뒤를 받아친다. 술상을 차리느라고 부산하게 다니 는 모란도,
"순영이는 참 좋겠다."
하고 거든다. 그러지 아니하여도 평생의 처음 일이라, 성공 을 할는지 실패를 할는지 몰라서 염려가 되는 주에 동무들 의 놀리는 소리를 듣고서다시금 주눅이 들었다.
"너, 기를 탁 펴고 무엇이든지 손님이 하라는 대로 해라.
설사 손님이 안할 말을 하고 안할 짓을 하더라도, 그것을 내색을 내서는 못 쓰는 것이다. 아무쪼록 순종을 해야 정래 성이 있고 네게도 해롭지 아니하니라."
숙자는 순영이 옷매를 매만져 주면서 정답게 부탁한다. 순 영은 마음이 더욱 어수선하다.
"너 먼저 들어가서 인사나 하구 그래라. 술상은 차차 들여 갈테니."
숙자가 재촉한다. 손님방에 들어가는 순영은 아무리 기를 펴려고 하였으나 조심스럽기만 하고 마음이 활발하지 못하 였다.
"안녕하시오?"
순영은 사숙에서 배운 대로 절을 하고서 인사를 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니?"
양복장이가 묻는다.
"장 순영이에요."
"무슨 자, 무슨자여?"
"베풀장(張) 자 장가에, 순할순(順), 꽃부리영(英)이에요."
"아, 너 문장이로구나. 고향은?"
"강원도에요."
"강원도가 다 네 고향이야?"
"아니에요."
"그러면?"
"인제군 복면 가평리에요."
"그렇다면 모르되, 몇 살이구?"
"열 여섯이에요."
"이팔이 십육 열 여섯, 춘향이 이 도령 만나던 나이로구나.
좋다. 나도 이 도령이다. 성은 이가요 아직 장가를 안 갔으 니 이 도령이 아니냐. 너, 나하고 연애 좀 하련?"
하고 앞으로 나앉는다. 순영은 그 대답을 뭐라고 하였으면 좋을는지 몰라서 머리를 숙이고 앉았는데 마침 술상이 들어 온다. 술상을 받아 놓은 순영은 그 대답을 모면하기 위하여
"이거 안주가 변변치 않습니다."
하고 새 말을 꺼내었다.
"안주? 우리는 안주 먹으러 온 사람이 아니야. 순영을 보러 왔으니까 안주는 소금 안주라도 일 없거든."
수염 텁석부리가 말을 하고 술상을 둘러보더니,
"이것 안주가 아주 하이칼라로구나. 돼지 순대에 생선회는 그렇다 하려니와, 도미찜은 조금 과한데. 그러나 술이나 한 잔 부어라 먹고 보자."
하고 소매를 걷고 나앉는다. 순영은 술을 따르고서 조금씩 곯은 잔에는 다시 더 쳐서 똑같이 하였다. 그리고도 행여 고르지 못한 잔이 있나 하고 살펴보았다. 수염 텁석부리가 술잔을 들려고 하는데,
"가만있게, 우리가 벙어리 술을 먹으려면 집에서 술을 사다 가 우리 마누라보고 부어 달라고 해서 먹을 일이지, 애써서 돈들이고 여기까지 올 맛이 있나. 자네 술 먹기가 그렇게 급하거든 한꺼번에 서너 사발 따라 달래서 먼저 먹고 가게, 우리는 주인 아가씨 소리 좀 들어보고 차근차근히 먹겠네."
안경장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는데,
"그 동의에 재청이요."
하고 양복장이가 소리를 높이니,
"찬성, 찬성."
하고 일제히 박수를 찬다.
"......진실로 이 술 한잔 잡으시면 만수무강......"
순영은 그들의 하는 광경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도사려서 그들이 하라고 재촉하기 전에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권주가 의 종장만을 불렀다. 그런데 순영은 정식으로 손님을 모시 고 소리를 하기는 처음이니 만큼, 몸 가지는 태도에는 다시 활발하지 못한 구석이 있는 듯아였으나 소리만은 제대로 되 었다.
"좋다. !"
"야아, 이것 잘하는구나."
"그런데 색주가로 손님을 접대하기가 오늘이 처음이라구 하더니 멀쩡한 거짓말이로구나. 권주가의 종장만 뚝 따서 하는 것이 누그러진 졸업생인데."
손들은 제각기 지껄이고서 술잔을 들어 마신다. 밖에서 엿 듣고 있던 숙자나 동무 아이들은 순영이 손님을 대하기가 처음이라 혹시 실수나 아니하나, 또는 소리를 어떻게 하나 염려도 하였지마는, 산월이나 향선은 한편으로 은근히 순영 이 실수도 하고 소리도 잘못하였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순영은 들어가면서부터 인사하는 것이라든지 앉 음앉음이나 별로 흠 잡을 데가 없고 소리도 구기는 데가 없 이 천연히 하는 것을 보고서, 숙자가 기뻐하는 것은 물론이 요 동무 아이들도 서로 소곤거려 가며 칭찬하는 소리가, 가 다가 한 마디씩 순영의 귀에 들린다.
순영은 손님들이 칭찬하는 것이라든지 밖에서 동무들의 말 하는 것이 좋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도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학생처럼 시원하고 기뻤다. 언제든지 손님을 처음 대하게 되면 인사 범절이나 소리를 하게 될 때에 잘못 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날이 갈수록 걱정이 되었는데, 급 기야에 실제를 당하여서 별다른 잘못이 없을 뿐 아니라 잘 한다는 칭찬을 듣게 되는 것은 여간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순영은 용기가 나고 자부심이 생겨서 어려울 것이 없을 듯하였다.
"그런데 너 정말 술 팔기가 처음이냐?"
양복장이가 진정처럼 묻는다.
"처음이에요."
"처음 같지 않은데, 아주 익숙해 뵈는데, 바른 대로 말해라. 정말 처음이야?"
"정말 처음이에요, 왜 거짓말을 할 리가 있어요?"
"술 파는 것만 익숙할 뿐 아니라 사람도 숫색시 같지 않다.
너 숫색시 아니지?"
소리를 낮추면서 귀를 기울인다.
"........"
"왜 말을 안 하니? 그렇다든지, 안 그렇다든지 말이 있어야지." "저는 그런 말귀는 못 알아들어요."
순영의 눈썹은 조금 실쭉하면서 까칠해진다.
"야 이것 봐라, 그런 말은 알아듣지도 못한다? 정말 도저하 구나. 그럼 내가 실수했다. 그만두어라."
그 사람은 웃으려고 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본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 저 같은 아이를 대해서 실수라고 말씀하세요?"
자리를 고쳐 앉는 순영은 저녁마다 숙자가 글 가르치듯이 가르쳐 주던 응구 접대하는 말 중의 하나를 써먹었다. 그러 나 그 말하는 태도를 눈여겨본다면 조금 어색한 듯하였다.
"저것 보게, 저애 대답이 어떤가? 신출내기야 저런 대답을 할 줄 아나? 자네 섣불리 수작하다가 코만 떼구 본전두 못 찾을 테니, 다소곳이 술이나 먹고 말하지 말게."
안경장이가양복장이를 보고 이죽거린다.
"여보게, 그런 말 말게. 뺨을 맞아두 은가락지 낀 손에 맞 는다구, 코 아니라 귀를 뗀대도 순영이 같은 아가씨에게 떼 는 것이야 영광일세."
하고 순영을 보더니,
"너, 내 코만 떼지 말고 내 몸뚱이째 떼어 가거라."
하고 양복장이는 순영에게로 바짝 다가앉는다. 순영은 놀 라는 듯이 비켜 앉으려고 몸을 움찔하다가, 무슨 생각을 하 였는지 그대로 천연스럽게 앉았다가, 새로 술을 치고 목을 가다듬더니 시조를 낸다.
"이몸이 죽고 죽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순영은 손님이 소리를 하라고 청하기 전에 소리를 불렀다.
순영은 선생에게 소리를 배울 때에 그 시조가 제일 처음으 로 배우던 시조요, 그 시조 사설의 뜻을 항상 사모하고 있 는지라, 맨 처음으로 그 시조를 부른 것이다. 순영은 손님 앞에서 처음 부르니만큼, 또는 그 시조의 뜻을 사모하느니 만큼 시조를 부르고 나서 자연히 흥분이 되는 듯하였다.
"좋다."
"잘한다."
하는 소리가 손들의 입에서 다투어 나오고,
"아, 참 우리 순영이, 소리 잘한다."
밖에서 엿듣고 있던 숙자가 들여다보면서 칭찬을 한다. 순 영은 입술이나 눈으로는 웃는 듯 마는 듯하였으나 마음으로 는 깊이깊이 웃었다.
"그런데 시조를 하기는 잘 한다마는 대관절 그게 무슨 시 조냐?"
텁석부리가 묻는다.
"평시조지 무슨 시조에요."
"아니, 평시존 줄이야 누가 모르나, 시조 사설을 모르겠단 말이야."
"사설은 지금 하는 것 들으셨지요, 그렇지요ㅡ 모르실 것이 있어요?"
"사설 말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뜻을 모른단 말이다. 그 종 장이 뭐라고 했니?"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그렇지요. 모르 실것이 뭐 있어요."
"그런데 네 임은 누구기에 그렇게 못 잊니?"
"시조 사설이 그렇지, 제가 임이 있다구 그래요, 왜?"
"그러면 너는 임이 없니?"
"저는 없어요."
"그러면 내가 네 임 노릇을 하면 어떻겠니?"
"이 사람아, 어디 사람이 없어서 수염 텁석 부리하고 연애 를 하겠나. 얼굴을 대면 껄껄해서 안 되네. 자네는 낙젤세.
내가 되겠네."
순영이 말하기 전에 안경장이가 나선다.
"쉬, 아무 말 말게. 임자는 있는 사람을 가지고 그렇게 말 들을 하면 되나. 순영이는내가 맡았네. 나를 향한 일편단심 이야 공동 묘지를 가더라도 가실 수가 있나."
하고 양복장이가 순영의 손목을 잡으려고 한다. 순영은 인 정없이 빼려고 하다가 문 밖에 있는 숙자를 돌아보더니 침 착한 듯이 앉았다.
"여보게, 순영이에게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되네. 우 리 여럿 중에 누구든지 순영의 마음에 드는 대로 고르라고 하세. 사랑이라는 것은 외짝 사랑은 소용이 없는 걸세. 지금 이 어느때라구 그러나. 그 전에 강제로 결혼하던 시대와는 딴 판일세."
하고 뒤에 앉았던 가냘픈 사람이 나선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일세. 그럼 그렇지."
양복장이가 순영의 손목을 잡으려던 손을 떼고서,
"그럼 네 맘대로 골라라. 여러 분 중에서 누가 네 임이 되 겠나?"
하고 순영을 본다. 다른 사람들도 순영을 본다. 문 밖에 있 는 사람들도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모든 사람의 눈과 귀는 순영에게로 집중되었다.
"여러 어른이 다 임이시지요."
조금 주저하다가 순영은 활발하게 대답한다.
"야, 이것 걸작이다."
하고 여러 사람이 박수한다. 밖에서도 웃음 소리가 난다.
"그래, 우리가 모두 네 맘에 든단 말이냐? 하지만 여자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 다섯 사람을 한꺼번에 임을 삼는단 말 이냐?"
하고 양복장이가 순영을 들여다본다.
"여러 어른이 다 손님이 아니세요. 손님은 임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제게는 다 임이 되시지요."
순영도 조금 웃는다.
"야, 이건 정말 걸작이다. 손님이라는 임이라, 이런 말이로 구나."
일제히 웃는다. 손님들은 밤이 늦도록 술을 먹는데 순영은 시조도 하고 잡가도 하고 놀어지게 놀았다. 그러나 그들은 순영을 상(常)없이 다루지는 아니하였다.
11.
[편집]그 후로 순영은 술 팔고 손님 접대하는 데 파겁(破怯)이 되 어서 봉당에 앉아서 선술을 팔기도 하고, 딴 방에서 상술을 팔기도 하고, 손님의 특청으로 밤을 새워 가며 술을 파는 때도 있었다. 술꾼들은 입으로 입으로 서로 전하여서, 홍 숙 자의 술집이 새로 계집애가 왔는데 인물도 괜찮고 소리라든 지 범절이 도저하다는 소문이 인천 바닥에 퍼졌는데, 소문 이라는 것은 여러 입을 건너서 전할수록 자꾸자꾸 보태어서 끝이 퍼지는 것이다. 일 없는 사람들은 순영을 한 번도 보 지도 못하고 자기도 순영이 손에 술을 여러 번 먹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요 소리가 명창이요, 조(調)가 높고 범절이 도 저하여서 여간 사람들은 말을 붙여 볼 수가 없는데, 자기만 은 순영이 대접을 잘하여서 며칠 저녁을 다니면서 잘 놀았 다고 참말답지 아니한 말을 공연히 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 어 순영을 가까이하였다고 생거짓말을 퍼뜨리면서 순영의 인물과 가무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하여 상류 계 급으로부터 청년층, 장사하는 사람, 뱃사람, 미두꾼(米豆軍), 노동자 할 것 없이 홍 숙자의 술집으로 몰린다. 오는 술꾼 은 반드시 순영을 찾는데, 부득이한 사람이 아니면 으레 딴 방에다 술자리를 벌이고 순영을 부르고, 할 수 없이 선술을 먹는 사람도 반드시 순영이 누구냐고 물어 보아서 얼굴이나 마 보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술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순영을 찾아서 순영이 있으면 기이한 인연이나 얻은 듯이 기쁘게 술을 먹지마는, 만일 순영이 벌써 다른 술자리에 불 려 갔으면 순영이 다치르고 나오기를 기다리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대로 갔다가 나중에 다시 오는 사람이 적지 아 니하였다.
순영의 인기가 그러하니만큼 한때는 그술집이 여간 번창하 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면 소문과 같이 순영이 그러한 일색도 아니고, 가무가 그리 능한 것도 아니었으나, 사람만은 얌전하므로 어느 정도까지 청년들의 연모하는 바 가 되었다. 그리하여 순영의 환심을 사려고 화장품 같은 것 을 선사하는 사람도 있고, 술은 몇 잔 아니 먹고 팁으로 몇 원씩을 주는 사람도 있으며, 조용한 술자리에서 직접으로 사랑을 청하는 사람도 있어서, 순영은 여러 방면으로 사랑 에 대한 교섭도 받고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순영은 그러한 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였고, 난폭한 청년을 만나 서 아슬아슬한 경우를 당해 보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으나, 다른 사람이 알도록 손발을 친다든지 또는 그 사람의 감정 을 그다지 상하지 않는 정도에서 용하게 모면을 하곤 하였다. 그것은 순영이 아직 이성에 대한 감정의 발달이 덜 되 었다든지, 혹은 정조에 대한 관념이 굳세다든지 하는 것보 다, 천품이 이성에 대한 감정이 비교적 희박하고 게다가 미 약하나마 어려서 배운 가정 교육의 힘을 입어서, 다소 정욕 을 제재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연락한 순영 의 보드라운 마음의 깊은 곳에는 연악하지도 않고 보드랍지 도 아니한 무슨 결심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사내라는 것은 까닭 없이 여자에게 대하여 우월감을 가지 는 동시에, 사랑을 요구하다가 여자 편에서 용이하게 응하 지 않는 때에는 더욱 호기심을 가지고 욕망을 달성하기 위 하여 거의 수담을 가리지 아니하려고 하는 것이 보통 청년 의 공통된 점이라면, 그들도 그러한 청년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순영이 한 걸음을 물러서면 그들은 두 걸음씩 이나 좇아오게 되어서 그 술집의 번창은 그러한 정도에서 계속되었다.
그러노라니 숙자의 사랑은 자연히 순영에게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순영이 옷이 더러우니 너희들이 좀 빨아 주어라."
하고 산월이나 향선을 시키기도 하고,
"순영이는 밥을 가지고 내 상으로 오너라."
하여서 끼니때에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든지, 숙자가 순영 을 사랑하는 형식을 여러 가지로 편벽되게 나타났다.
순영이로 하여서 술꾼들이 많이 오게 되므로, 숙자가 특별 히 순영을 사랑하는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나, 그로 인하여 서 순영의 동류들이 순영을 미워하게 되는 것도, 그들의 정 도로서 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산월이와 향선이는 물론, 모란까지도 손님들이 순영이만 찾는 데에 샘이 났지마는, 그 보다도 순영이 특별히 숙자의 사랑을 받게 되는 데에 더욱 순영을 시기하였다. 게다가 숙 자가 자기들에게 순영의 빨래를 시킨다든지, 순영에게 자기 들은 먹어 보지도 못하는 좋은 반찬을 갖다 주라고 하는 때 에는 마음이 저리도록 시기가 났다. 그리하여 순영의 빨래 를 하는 때에는,
"팔자가 사나우니까 별년의 빨래를 다 하겠네, 제년의 대꼽 재기를 제 손모가지로 빨아 입지, 왜 남보고 빨래? 제 손으 로 하기 싫거든 삯을 주어서 빨아 입든지, 빌어먹을 년."
하면서 빨래를 되는 대로 두들겨서 옷감을 상해 놓는 수도 있었지만, 반찬을 갖다 주라는 때는,
"제년은 발도 없고 손도 없나, 제가 갖다 처먹지 왜 남을 시켜. 우리가 제년의 종년인가."
하고 일부러 반찬을 휘정거려서 갖다 주는 수도 있었다.
그런다고 숙자가 사설을 하는 때에는 그들은 숙자에게는 말 을 못하고, 만만한 순영에게만 독살 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순영을 마음으로만 미워할 뿐 아니라 기색도 나타내 고 형식에도 나타냈다.
순영이 손님을 치르는 때에는 무엇이든지 심부름을 잘해주 지 아니하였다. 순영이 술을 더 가지고 오라든지 안주를 가 지고 오라든지, 소리소리 지러도 못들은 척 한다든지, 대답 은 하고도 실행은 않는다든지 하여서 기어이 순영이 왔다갔 다 하게 하며, 바쁘다고 핑계하고 술을 데워 준다든지 안주 를 놓아 주는 일도 없었고, 순영만 보면 서로 눈짓을 하고 입을 삐죽거리며 까닭 없이 흉을 보았다. 그리고 같이 있을 때에는 저희들끼리만 웃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여서 재미있 게 놀면서, 순영이만을 도려서 같이 싸이지 아니하였고, 혹 말을 한 대야 비꼬고 빈정대고 할 뿐이었다. 한 상에서 조 석을 먹을 때에도,
"순영이는 밥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좋은 반찬하고 먹어라. 귀골이 우리 같은 사람들하고 반찬 없는 밥을 먹어 서 되겠니?
하는 산월의 말에,
"그렇고 말고, 순영이는 들어가서 먹어야지."
모란이와 향선이가 쌍으로 거들기도 하고, 잠을 잘 때에도,
"에구, 너는 따뜻한 안방에 가서 비단 이불을 덮고 자야지, 우리들하고 찬방에서 자면 되겠니? 그러다가 감기나 들리면 어쩌니. 손님들을 치르 수도 없고 그리고 어머니가 우리들 이 잘못해서 너를 감기 들게 했다고 야단을 치면 어쩌니.
우리들은 아무리 못 생겼지만 죄 없이 그런 소리를 듣기가 좋으냐? 들어가서 자거라."
산월과 향선이 대거리로 말을 하면 모란은,
"그렇잖아 그렇지."
하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밤에 자다가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취 소리만 나도,
"얘, 순영아, 너 찾아오는 손님인가 보다. 일어나 보아라."
하고 꾹꾹 찌른다든지, 순영이가 순영이가 새 옷을 입어서 아무것도 안 묻었는데,
"얘 순영아, 고만 옷을 벗어라. 우리가 빨아줄게. 이쁜아씨 가 추레해서 쓰겠니?"
하고 일부러 치마나 저고리에다 검정칠이나 흙칠을 하면서 웃는다든지, 실로 성화를 붙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 서 순영은 여간 괴롭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은 될 수 있는 대로 숙자와 가까이 접촉하기 를 피하여서, 밥을 가지고 숙자의 상으로 오라고 한 대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아무쪼록 가기?"? 피하고, 자기의 옷이 빨 때가 되면 어느 틈엔지 자기가 주물럭거려서 꿰매 입든지, 할 수 없는 때에는 가만히 삯을 주어서 다시는 다 른 동류들의 손응로 빨게 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아무리 자기를 시기한 대로 그러한 것을 숙자에게 고자질을 한다든지 손님에게 말을 한다든지 그런 일은 없었다.
12.
[편집]그러나 술꾼들의 인기가 순영에게로 쏠리는 이상, 숙자가 순영을 두둔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러할수록 순 영의 동류들은 순영을 시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입을 모아서 순영을 욕하고 미워할 뿐 아니라, 차차 거기 대한 대책을 강구 하여서 계획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듬해의 봄이었다. 순영은 감기로 며칠을 눕게 되었는데, 손님들은 대개가 순영을 찾았으나 순영이 없으므로 자연히 다른 아이들에게 술을 먹게 되었다.
"그래, 순영이는 어디를 갔니?
하고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렇게 묻는 사람이나 그와 같이 온 사람들은 술을 자주 먹으러 다니면서 순영을 사랑 하는 축들이었다.
"순영이 앓는답니다."
"어디를 앓니?"
"이상스런 병이랍니다."
"무슨 이상스런 병이야?"
사람들은 이상한 듯이 묻는다. 다른 사람들도 대답을 기다 린다.
"요새 꽃샘이 아니에요?"
"꽃샘이나 단풍 무렵에 터져 나오는 병이 안 있어요, 왜? "
"그게 무슨 소리냐? 순영이가 매독이 들렸단 말이냐?"
"아마 그런가 보더군요."
산월은 입술을 실룩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순영이가 깨끗한 아인데 그런 병이 들 릴 리가 있나. 당초에 순영이가 조금이라도 난잡하다는 말 을 못 들었는데?"
하고 다른 사람들을 본다.
"그러기에 말이야, 순영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게 웬 일 일까?"
다른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을 한다.
"흥, 시시덕이 재를 넘고 새침데기 골로 빠진답니다. 그럴 것 같지 아니한데 그런 병이 들었으니 걱정이지요."
산월은 조롱하듯이 말을 하다가 다시 걱정스러운 듯한 빛 을 띤다.
"그두 그래여, 누가 쫓아다니며 보지 않는 바에야 그 일을 아는 수가 있나. 겉으로는 얌전한 제 하면서 속으로는 별 짓 다 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더구나 여자의 속은 알 수 가 없는 게야."
하고 그들은 서로 보면서 반신반의 한다.
"그러기에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 다는 말이 있지 않아요? 저도 여자지만 여자의 속내는 알기 어렵거든요. 더구나 분의(分義) 딴 계집애 속은 우렁이 창자 보다도 더하다는데요, 순영이라는 애가 조금 분의가 따거든요. 손님들은 모르실 겁니다. 손님들은 어셔서 술 잡수실때 에 다 각기 순영이가 그 앞에서 하는 것만 보지요. 그러니 까 언제든지 순영이가 다른 손님에게도 꼭 그렇게만 하는 줄로 아시지요. 그렇지만 순영이가 손님 대접하는 것은 천 층 만층 이거든요. 그래서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에게는 쌀쌀하고 얌전한 체하여서, 아주 치맛고리에서 찬바람이 도 는 것 같지요. 자기 마음에 맞는 손님이 오면 아주 야단입 니다. 희희낙락해서 시시덕거리고, 갖은 요악을 다 떨고 무 릎에 가 안긴다, 술을 먹다가 합환주(合歡酒)를 한다, 눈꼴 이 시어서 볼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순영이 친한 양반들은 술을 자시러 와도 여럿이 오질 않거든요, 혼자 와서 딴 방 에서 술을 자시고 가든지, 한껏 해서 둘이나 셋이 왔다가 다른 이들은 먼저 가고 하나가 떨어져 있다가 술을 더 먹고 가든지, 그렇지요. 하니까 그런 때에야 술을 먹는지 떡을 먹 는지 누가 아나요. 그렇게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 있다가 가니까, 우리두 처음에는 모르고서 순영이가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차차 보니까 그렇더군요. 그러다가 저런 병이 들 어노니까 아주 안 됐어요. 그 병을 얼른 고쳐야 될 텐데 큰 일났어요. 지금도 육공룩혼가 그 약을 먹는 모양인데, 그 약 도 좀처럼 안 듣는 모양이에요. 남한테 말 못할 추한 병이 니, 자연 저 혼자만 꿍꿍거리고 앓고 있지만, 어디 한집에 있는 저희들 입장은 그래요."
하고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런데, 참 이런 말을 누구보고라도 하지 마세요. 다른 손 님에게 해도 안 되고 순영이에게 이런 말을 해도 못 써요.
에구, 참 내가 공연히 그 소리를 했네. 다른 손님과 달라서 말을 했지만."
산월은 가렵지 아니한 머리를 긁으면서 웃는 얼굴을 찡그 린다. 그러자 술 주전자를 가지고 오는 향선이,
"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니?"
하고 문지방을 짚고서말을 한다.
"손님이 물으시기에 순영이 병 얘기를 하였다."
"뭐라고?"
"뭐라고 하긴 뭐라고 해. 바른 대로 말씀드렸지."
"그게 무슨 좋은 소리라고 손님에게 그런 얘기를 하니? 우 리만 알고서 쉬쉬하고 말을 내지 말자고 했는데, 그런 소리 를 듣고서 손님들이 안 오시면 큰일이 아니냐, 어쩌자고 그 런 얘기를 하니?"
향선은 순영에게 동정하는 어조로 말을 한다.
"그렇지만 손님이 물으시는데 어떻게 거짓말을 하니, 다른 손님과도 다르고, 그래서 바른 데로 말을 했는데...... 하고 생각하니 안 할 것을 했어."
산월은 몸가질 줄을 모르는 듯이 이상한 태도를 짓는다.
"엎질러진 물을 도로 주워 담겠니. 하지만 다시는 그런 소 리를 하지 마라. 에구, 정말 큰일이다. 우리 집에는 순영이 하나로 꾸려 가는데 그런 병이 들려서 어쩐단 말이냐. 어서 낳아야 할 텐데."
하더니 손님들을 향하여서,
"지금은 그런 병을 쉽게 고친다지요. 그런 병이 있더라도 고치면 고만이 아니에요. 그리고 지금도 외양으로 보면 성 한 사람 같아요. 툭툭 불거지거나 그렇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러니까 손님들도 그 전처럼 자주 오세요."
하더니 상긋 웃고서 간다.
"하, 그것 안됐는데, 어린 것이 그런 병이 들려서 될 수가 있다구."
"요새는 매독 같은 것은 고치기는 쉽다더구면. 그래도 아주 거근(去根)하기는 어렵다네. 그 병이라는 것은 한 번만 들리 면 신세를 조지는 게지."
손님들은 술잔을 놓고서 서로 말을 하는데,
"그런데 어떤 몹쓸 놈이 그런 짓을 했담. 꽃으로 이르면 봉 오리도 못 되는 계집아이에게다. 그것도 평생을 같이 사는 부부간이라면 모르지마는, 잠시 지내고 말 것을 그 짓을 한담. 그런 부도덕한 놈이 있을 리가 있나."
하고 흥분하는 사람도 있지마는,
"하여간 계집애가 그 모양이 되었으면, 사람은 깨진 그릇이 되었지. 밤을 모른다 하더라도 술을 같이 할 수가 있나. 가 까이하기는 고사하고 그 손에 술인들 얻어먹을 수가 있나."
하고 구역질 흉내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들의 하는 말과 태도를 살피고 있던 산월은 입술을 달 막거리다가,
"그런데 순영이가 또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손님들이 그런 것을 알아 두셔야 하시겠지요, 저 순영이가요....."
하고말을 끊더니,
"아니, 이 말은 안할 테에요. 공연히 말을 냈네. 술이나 잡 수세요."
산월은 두 손을 들어서 깍지를 끼고 몸을 조금 틀더니, 다 시 술을 따르면서 입술을 다문다.
"무슨 말이냐 말을 해라. 우리 있는 데는 아무 말을 해도 관계없다."
손님들은 술도 들지 않고 산월을 보면서 말을 재촉한다.
"에구 참, 공연히 말을 했네. 말을 냈다가 안 할 수도 없고." 하고 조금 주저하더니, ?저 순영이가요, 이런 일이 있었답 니다. 좋아하는 손님하고 같이 자다가 그 손님의 호주머니 에서 돈지갑을 꺼냈답니다. 그래서 나중에 찾기는 찾았지요.
단 둘이 누웠다가 없어 졌으니 갈 데가 있어요? 그래서 경 찰서에서 알까 봐서 쉬쉬하지요. 손님들이 그런 줄이나 아 셔야지, 내 집에 다니시다가 그런 일이 있으면 쓰겠어요?
하니까 귀띔으로 해 드리는 것이에요. 달리 생각은 마세요."
하고 애교를 부린다.
손님들은 워낙 순영을 얌전하게 생각하던 터이라 처음에는 산월의 말을 반신반의하였으나, 사실의 증거까지 들어서 말 하고 향선이까지도 오히려 순영을 동정하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것을 안 믿을 수가 없어서 순영이 겉으로 는 얌전한 듯이 보이고 속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으로 생 각되어서 더욱 괘씸하게 여겼다.
그 후로 순영의 동류들은 기회 있는 대로 서로 호응하여서 손들에게 그러한 과실이 있는 사람으로 선전하였다. 그러고 보니 그 집에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러한 소리를 직 접으로 듣게 되고, 또 그 말이 차차전파되는 데는 말에다 말을 보태어서 순영에게 대한 평판은 여지없이 나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점점 순영을 찾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전 얼부터 다니던 사람까지도 자연히 발을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렇게 잘 다니던 손들이 졸지에 발을 끊으며, 순영을 귀여워하던 사람이나 아니나를 물론하고, 혹 순영을 대하는 때에는 소가 닭 보듯 할 뿐 아니라 순영이 전일처럼 친절하고 공손하게 인사하더라도 하는 때에는 코웃음으로 대답을 하든지, 내색을 내어서 더욱 불쾌히 여기든지 하므 로, 순영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그보다도 숙자는 어쩐 영문인 줄을 모르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술꾼이 잘 안 오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리하여 순영이 손님에게 대하여 불친절하게 한다든지, 무슨 다른 병통이 었나 하고 살펴도 보고 순영에게 물오도 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를 얻지 못하 여서 다시 순영의 동무들에게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요새 손님들이 잘 안 오니 웬일이냐?"
어느 날 어느 저녁에 숙자는 산월과 향선을 자기 방으로 불러다가 물어싿.
"모르지요."
산월과 향선은 서로 보다가 향선이 대답하였다.
"모른다구? 너희들이 늘 술도 팔고 심부름도 하면서 손님 들이 아니 오는 것을 왜 모를 리가 있나."
숙자는 엄숙하게 묻는다.
"저희들은 손님에게 잘잘못이 없는데요. 또 손님들이 저희 들은 수에 치기나 하나요. 순영이보고 물어 보시지요. 아마 순영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는 게지."
숙자는 충동을 시켰다.
"저희들이 무엇을 잘못해요? 또 저희들이 잘못했으면 손님 들이 저희를 나무라든지 하지, 왜 순영이에게 다니던 손님 들이 안 오세요. 또 이따금 오시는 손님들의 눈치를 보아도 순영이를 대단치 않게 여기던 모양이던데요. 저희들이 잘못 했으면왜 순영이를 미워할 리가 있어요. 저희들은 손톱만큼 도 잘못한 일이 없어요."
하는 향선은 산월을 보면서
"순영이가 잘못한 것을 왜 우리가 둘러쓰니?"
하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년이 잘못하기는 게가 모두 잘못하고서 왜 우리한테 대 답을 듣게 해? 그년이 이상하리도 몸이 아픈 것이 잘못이지." 산월도 얼굴을 붉힌다.
"제 죄가 무슨 죄냐, 순영이가 무슨 죄를 지었니? 어디 말 해 봐라. 너희들이 꼭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잘 다니던 손님들이 갑자기 씻은 듯이 오지 아니하니까 무슨 잘못한 일이 있는가 묻는 말이다. 순영이든지 누구든지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내가 묻지 않더라도 그것을 귀띔해 줘야 아니 하겠니. 어디 너희들 아는 대로 말을 하여라."
숙자는 그 애들 말에 단서를 얻어서 흥미와 기대를 가지고 묻는다.
"네가 말하여라."
하는 향선의 말에
"네가 말하여라."
하고 산월은 향선에게 미룬다.
"서로 미루지 말고 누구든지 말을 하여라. 너 미룩, 나 미 룩 할 것이 무엇이냐."
숙자는 나무라듯이 말한다.
"말을 한들 어머니가 저희들 말을 곧이들으시나요? 순영이 만 얌전하다고 하시고 저희들은 모두 미친년으로 돌리시는 데, 바른 대로 말을 했다가 거짓말이라고 얻어맞으면 어쩌게." 산월은 뒤까지 여물린다.
"아니다. 그럴 리가 있나. 무슨 말이든지 바른 대로 하여라. 때리기는 왜 때려. 말만 바른 대로 하면 옷도 해 주고 신도 사 주고 그러지, 어서 말해라."
숙자는 은근히 달랜다.
"그래 어머니가 순영이보고 물어 보셨어요?"
"그래 한 번 물어 보았다. 물어 보았으나 자세히는 안 물어 보고 대강 물어 보았다."
"그래 순영이가 뭐라고 해요?"
"물어 보니까 저는 조금도 잘못한 일이 없다고, 웬 일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더라."
"그거야 그러겠지. 제 잘못한 일을 말하겠니. 더구나 다른 일도 아니구 그런 일을."
향선이 산월에게 말을 한다.
"그거야 그렇지, 그저 묻기랑 새뢰 죽어도 그 말은 안할 게다. 고게 어떤 깡정이라구 그러니,?
산월도 숙자에게는 대답을 아니하고 향성이 하고만 찧고 까분다.
"그래 그 일이 무슨 일이냐? 어서 말해라."
숙자는 더욱 의심이 나서 듣고 싶었다.
"네가 말해라, 얘."
산월은 새삼스럽게 향선에게 미루면서 말하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
"아무나 말하면 어떠냐. 왜 그 말이 그 말이지, 그럼 고만 두어라. 내가 말할게."
하는 향선은 숙자를 쳐다보더니,
"저......... 순영이가 그런 버릇이 있나 봐요."
하고주저한다.
"그런 버릇이 뭐냐? 어서 말을 해라. 갑갑하다."
숙자는 화를 낸다.
"손바닥에 엿이 묻었어요."
"손바닥에 엿이 묻었다니?"
"손님들의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더러 꺼낸대요."
말을 하고 산월을 쳐다보고 향선은 조금 어색한 듯하였다.
"그럼, 순영이가 도적질을 한단 말이냐?"
숙자는 놀라면서 묻는다.
"그게 도적질이야 되겠어요?"
향선의 말하는 태도가 어색스런 것을 보고서 산월이 나섰다. 향선은 고개를 숙인다.
"손님의 호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냈으면 그것이 도적질이지 뭐냐, 남의 담구멍을 파야만 도적질이냐? 그런데 무엇을 훔 쳐 낸단 말이냐?"
"돈이겠지요, 다른 것 있어요?"
"어느 손님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냈단 말이냐?"
숙자의 묻는 것이 강경하고 자세할수록 산월과 향선의 기 색은 풀이 죽는 듯 하였다.
"어느 손님인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있나 봐요."
"네 눈으로 보았니?"
"보지는 못했어요."
"그럼 어떻게 아니?"
"들었어요."
"어디서?"
"손님들한테요."
"어느 손님한테?"
"어느 손님인지는 몰라도 손님들이 그런 말들을 하던데요, 순영에게 자주 다니던 손님에게서 물어 보세요."
산월은 기운을 편다.
"그럼 멀쩡한 도적년을 길렀구나. 무슨 까닭이 있기에 님들 이 그렇게 안 오지, 그렇잖으면 그럴 리가 있나."
숙자는 얼굴빛이 변한다.
"얘, 그 말두 마저 해라."
숙자의 거동을 보고서 용기를 얻은 듯이 향선이 산월을 깨 우친다.
".....그 말은 고만두자. 순영이를 너무 흠구하는 것 같아서 안 됐다, 얘."
조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산월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있는 대로 다 말해라. 정작 그렇다면 그 년을 쫓아내든지 무슨 거조를 해야지. 그저 두어서 되겠니? 무슨 말이든지 다 해라."
숙자의 눈에는 독이 오른다.
"그렇지만 순영이가 손님의 호주머니를 뒤진 것은 손님들 도 다 아는 일이니까 말은 내도 괜찮지마는, 이것은 아무도 모르고 저희들만 아는데 말을 했다가 순영이가 저희들에게 앙심을 먹으면 어쩌게요."
산월은 뒤를 사린다.
"어서 말을 하라니까 그러는구나. 원 말을 않는 것을 보니 네년들도 순영이년하고 한통인 게로구나. 말을 안할 테면 고만두어라. 경찰서로 기별해서 모두 경을 쳐 놀 테니."
숙자는 얼러딱딱거린다.
"네가 말을 안할 테면 내가 하겠다."
하고 향선이가 나서더니,
"다른 말이 아니에요. 순영이가 손님들을 모시고 술을 팔면 술 심부름은 저희들이 하잖아요, 왜?"
하고 숙자를 쳐다본다.
"그래서?"
"그런데 저희들이 술을 들여가니까 몇 주전자를 들여왔는 지 수효를 알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그런데 나중에 순영이가 술값 받은 것을 회계하는 것을 보면 대중이 틀리거든요."
"어떻게 틀린다는 말이냐?"
"어떻게 틀리는 게 아니라 술을 열 주전자를 들여가면 열 주전자 값이 나와야 옳지 않아요?"
"그렇지,?
"그런데 열 주전자를 들여갔으면 일곱 주전자나 여덟 주전 자 값이 나오고, 어떤 때는 다섯 주전자나 여섯 주전자 값 만 나올 때도 있거든요. 하니까 그것은 손님들이 술값을 덜 낼 리도 없고, 순영이 같이 똑똑한 아이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면 더 받았지 덜 받을 리야 있겠어요? 그런데 웬일인지 모르겠어요."
하고 산월을 본다.
"그것뿐이냐, 한번은 열다섯 순배를 들여갔는데 일곱 순배 값만 나왔으니 어떻게 되었니? 하두 기가 막혀서."
산월이 보탠다.
"언제부터 그렇단 말이냐?"
숙자는 시름없이 묻는다.
"온 지 얼마 안 돼서부터 미심스런 듯해두 누가 그러려니 꿈이나 꾸었어요. 그러다가 하두 대중이 틀리기에 그 담부 터는 술 들여가는 것을 꼭꼭 치부를 하였지요. 했더니 그렇 더군요. 그래 진작이라도 어머니께 그런 말을 하고 싶어도, 어머니가 순영이를 하두 사랑하시니까 걱정 들을까 봐 무서 워서 못 했어요."
하고 향선은 숙자의 눈치를 본다.
"그럼 모란이도 그런 줄을 아니?
"알고 말고요."
"손님의 호주머니 뒤진 것두 알구?"
"그럼요."
"그럼 돈을 주고서 멀쩡한 알도적년을 사다 놓았구나. 이 탓 저 탓 할 것이 있니, 다 내 팔자가 글러서 그렇지. 내가 눈은 있어도 동자가 없구나. 그것을 얌전하다고 보았으니."
숙자는 물었던 담뱃대를 힘없이 미뤄 놓으면서 천장을 쳐 다보더니,
"아미타불!"
하고 한숨을 진다.
"우리가 공연한 소리를 했다 얘. 어머니 걱정만 되시게."
산월은 향선을 보더니 다시 숙자를 본다.
숙자는 들은 체도 아니하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한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물으시는 것을 어떻게 말을 않니? 우 리가 그런 말을 않고 있으면 점점 어머니께 손해만 나지 뭐냐. 우리가 말하기를 잘했지."
향선은 한풀이 꺾인 듯이 말을 하면서 숙자의 눈치를 본다. "그래, 그밖에는 또 없니?
숙자는 어이가 없는 듯이 말소리가 나직하다.
산월과 향선은 서로 보고 주저하다가,
"이젠 없어요."
하고 향선이 고개를 숙인다.
"고만 나가서 볼 일들 보아라. 차차 조처하지."
산월과 향선을 내보내었다.
산월과 향선이 조금 가다가 도로 돌아서서 오더니, 미닫이 를 열고 들여다 보면서,
"어머니, 참 순영이보고 그런 소리를 마세요. 저희들이 그 런 말을 한 줄을 알면 원수로 삼지 않겠어요? 제가 잘못한 줄은 모르구서. 하니까 어머니만 알고 계세요."
산월이 겨우 알아들을 만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눈을 끔쩍 인다.
"어머니가 말씀을 한들 제가 그런 일이 있다구 하겠니. 죽 여 봐라, 바른 대로 말을 하는가? 순영이가 어떻게 안차고 다라지다고, 어머니가 순영이 보고 물어 보신대야 말씀만 귀양보내지 소용이 있겠니."
향선이 순영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을 것을 말한다.
"내가 알아 할 테니 고만 두어라. 원수 치부를 하면 대수냐? 내일이라도 쫓아 보내면 고만이지."
하는 숙자의 말에 산월과 향선은 만족하여서 나간다.
13.
[편집]숙자는 순영의 일이 분하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하였다. 순 영이 온 뒤로 손님도 상당히 있어서 영업이 잘 되는 중이 요, 그로 인하여 순영을 애지중지하여 친딸처럼 기르면서 장래까지 촉망하는 중인데, 찬만 뜻밖에 그러한 짓을 하여 서 제 신세만 그르칠 뿐 아니라, 영업까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여간 불쾌하지 아니하였다. 잘 다니던 손들이 오지 아 니하므로 의심에 의심을 더하다가, 산월과 향선의 말을 들 으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장에 순영 을 잡아다가 거조를 낼까 하다가 그래도 그렇지 못하여 소 양배양한 어린아이들 말만 듣고서 조처를 하는 것이 너무 경솔하다 싶어서 낫살이 지긋한 모란을 불러서 듣기로 하였다. "너 순영이에게 대해서 무슨 들은 말이 있니?"
숙자는 모란을 불러 놓고 물었다.
"무슨 말이요?"
"무슨 말이든지 아는 대로 말을 하란 말이다."
"무슨 말인지 저는 모르겠어요. 들은 말이별로 없는데요."
모란은 공연히 체면 차리는 기색이 나타난다.
"대관절 요새 술꾼들이 아니 오니 웬일이냐?"
"선 술꾼은 그런 대로 오지요. 상술 잡숫는 손님들이 안 오지." "선 술이고 상술이고 손님들이 안 오니 웬 일이냐 말이다."
"선 술은 제가 파니까 알지마는 상술이야 제가 파나요. 모 두 순영이가 팔지요. 하니까 상술 손님이 오고 안 오는 것 은 순영이가 알지 다른 사람이야 알 수가 있어요?"
모란은 손님 안 오는 책임을 순영이에게 몰아 붙이기만 하 고, 순영의 허물은 먼저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 말이다. 손님들이 안 오는 것이 무슨 까닭이 있기 에 그런 것이 아니냐?"
"그렇겠지요, 공연히 안 오겠어요."
숙자는 갑갑한 듯이 대답을 재촉한다.
"왜 산월이와 향선이가 말씀하지 않아요?"
"글세, 그 애들 말은 들었다만 그것들 말만 가지고 신청할 수가 있느냐. 해서 너보고 물어 보는 것이다."
"저도 보지는 못하고 말만 들었지요."
"그래 정말 순영이가 손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고 순배 회계를 잘못하고 했단 말이냐?"
"그랬나 봐요,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단 말은 손님들에게서 들었는데,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모르되, 제 귀로도 여러번 들었어요, 그러구 손배 회계를 잘못한 것은 술 심부름하는 산월이와 향선이가 잘 아는데 한두 번이 아니래요. 그 애들 이 하두 그러기에 한 번은 술 들여가는 것을 제가 헤아려 보았지요. 했더니 과연 나중에 회계를 하는데 두 주 전자가 틀리겠지요. 그래서 저도 확실히 그런 줄을 알았지요. 얌전 한 애가 어찌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런 짓은 인력으로는 못 하고 산소를 잘못 써서 그렇게 된대요."
하고 모란은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서 숙자를 본다. 숙자는 더 들을 것이 없다는 듯이 두어 말을 묻다가 모란을 내냈다. 밤은 이슥하여서 일반으로 사람의 자취가 끊어지고, 이따 금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자전거 소리, 칼을 차고 저벅저벅 다니는 순사의 자취가 들릴 뿐이다. 숙자는 순영을 닦달할 양으로 모든 것을 분비하였다. 그리고 마루에 나서서 골이 난 소리로,
"순영아?"
하고 불렀다. 잘 채비로 드러누웠던 순영은 깜짝 놀라서,
"네."
하고 대답하면서 일어난다.
"이리 좀 들어오너라."
"네."
하고 순영이 옷을 주워 입는데,
"순영이 또 별청 받아 가는구나."
"비단 이불 속에서 따뜻이 자겠지."
"그것뿐일까, 별식을 또 얻어먹어야지."
"얘, 우리도 좀 따라가랴?"
산월이 말을 내자 모란과 향선이 받고차기로 빈정거리며, 저희끼리 낄낄웃기도 하고 눈짓을 하기도 한다. 순영은 그 전부터 돌려 지내는 줄을 아는 고로, 그 말들을 타내지 아 니 하고 빨리 안방으로 들어갔다.
순영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숙자의 기색이 좋지 못한 것을 보고서 마음을 졸이면서 우두커니 섰다.
"거기 앉아라."
숙자는 눈을 부리댄다. 순영은 한 무릎을 끓고 한 무릎을 세우고서 겨우 앉았다.
"너 이년, 내가 말을 물을 테니 바른 대로 대답하여 조금 이라도 거짓말을 하면 이것으로 때려 죽이겠다."
하더니, 방구석에서 세웠던 다듬지도 아니한 굵은 나뭇가 지를 내어서 방바닥을 탁 친다. 순영은 몸이 움찍하면서 놀 랐다.
"그것뿐인 줄 아니? 정히 바른 대로 대지 아니하면 이 칼 로 당장에 찔러 죽이겠다. 이년아."
숙자는 경대 서랍에서 날이 시퍼런 손칼을 내놓는다. 그 칼은 날이 세 치나 되는 허드레로 되는 칼인데, 새로 갈아 서 전등에 비치는 번쩍거리는 빛이 푸른 기가 난다. 순영은 전 일에 그 칼로 무엇을 하다가 너무 날카로와서 손을 벤 일이 두어 번이나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영은 몸이 오싹하 고 소름이 끼치고 얼굴빛이 새파랗게 되면서 마음이 떨리기 시작한다.
"요 어린 도적년 같으니, 손님의 지갑은 왜 훔치며 술값은 왜 봉창질을 하니? 요 쥐새끼 같은년."
눈이 벌개지는 숙자는 매를 들고 때리려고 한다. 순영은 한쪽 어깨를 추키고 몸을 반대 방면으로 기울여서 매를 피 하려는 자세를 지으면서 벌벌 떨 뿐이다. 그 꼴을 보는 숙 자는 매를 놓고 조금 물러앉으면서,
"그러지 말고 말을 해라."
하는데도 순영은 매가 내리는 줄로 알고서 팔을 들어서 한 쪽 얼굴을 가리면서 몸을 더욱 기울인다.
"이년아, 때리지 않을 테니 바른대로 말을 해라."
숙자는 말소리를 조금 낮춘다. 순영은 바로 앉아서 덜덜 떨면서 숨이 찬 듯이 식식거린다.
"너 어린년이 무슨 짓을 못해서 도적질을 한단 말이냐? 또 도적질을 해도 분수가 있지, 자주 다니는 손님의 주머니를 뒤져서 지갑을 훔치면 어찌 되며, 또 순배를 숙여서 술값을 훔쳐먹으면 어찌 되니. 아무리 어린것이라도 소견이 있지.
그러면 탄로가 안 날 줄 아니? 싹이 그래 가지고 무엇에 쓰 겠니. 너 무슨 생각으로 그랬니? 단지 돈이 탐이 나서 그랬니? 무슨 다른 생각이 나서 그랬니? 무엇이 둘러씌어서 그 랬단 말이냐? 알 수가 없으니 어디 바른 대로 말을 해라.
그랬다고 너를 죽이겠니, 어쩌겠니? 하지만 속이나 시원하 게 말이나 들어 보자."
숙자는 기운을 누그린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순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일이 다 탄로 되어서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네가 숨기려 고 해도 안될 게다. 쓸데없이 그러지 말고 바른 대로 말을 해라. 암만 해도 말을 않고서는 못 배길 테니, 시끄럽기 전 에 말을 해라."
숙자의 기색은 다시 사나와진다.
"저는 모르겠어요. 저는 그런 일이 없어요. 죽어도 저는 그 런 일이 없어요."
순영은 진정으로 애원하면서 맞을까 봐 매를 피하는 자세 를 지으려 한다.
"얘 요년 보아라, 아닌 보살인 체하고 생청을 쓴다. 그런짓 하는 년이 쉽사리 불겠니, 둥줄게에서 누린내가 물씬물씬 나야지."
하는 숙자는 매를 들고 달려들어서 덮어놓고 두들린다. 순 영은 아프지도 하거니와 겁이 나서 소리를 높여서 운다.
"아, 이년이 일부러 소리를 질러서 떠드는구나. 어디 온 동 리가 시끄럽도록 소리를 질러 보아라."
하고 매질을 더욱 급히 하면서 악을 쓰고 때린다. 순영은 겁이 나서 울지도 못하고 거의 정신 없이 맞는다.
"이년, 그래도 대지 못하겠니?"
숙자는 매질을 조금 멈추고 식식거리며 묻는다.
"죽어도 도적질한 일은 없어요."
그때는 애원이 아니라 거의 반항적으로 말을 한다.
"이년 봐라, 그만이나 하기에 도적질을 하는게지. 네가 아 무리 영악한 체해도 바른 대로 불지 않으면 내 솜씨에 못견 딜 게다."
숙자는 독이 나서 벌벌 떨면서, 순영이 머리채를 휘어잡고 되는 대로 때리다가, 나중에는 이빨로 물어 떼고 손으로 집 어 뜯고 발길로 차고, 온 방 안으로 끌고 다니면서 독살을 있는대로 피운다. 순영은 아픈지도 모르고 겁도 날 경황이 없었다.
"그래도 바른 대로 대지 못하겠니?"
숙자는 자기가 지친 듯이 조금 쉬면서 가쁜 소리로 말을 한다. 순영은 목소리가 안 나와서 속히 대답을 못하다가 침 을 삼켜서 타는 목을 조금 적신 뒤에,
"죽이려면 죽이세요. 저는 죽어도 도적질을 한 일은 조금도 없어요."
순영은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한 듯이 엎드려서 맞던 대로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한다. 숙자는 악을 너무 써서 맥이 풀렸는지 매를 든 채로 물러나서 아랫목에 앉아서,
"후유."
하고 한숨을 길게 쉬더니,
"너 일어나서 얼굴 좀 들어라."
한다. 순영은 일어나서 외면하고 앉아서 온 몸을 던다.
"날 좀 보아라, 이년아."
순영은 놀라면서 돌아앉아서 숙자를 쳐다보았다. 숙자의 얼굴은 본래 그악스럽게 생긴데다 머리끝까지 독이 올라서 차마 바로 볼 수가 없었다.
"너 정말 대지 않겠니?"
"........"
"글세, 이년아, 아무리 도적년이라도 손님의 것을 훔치는 것은 모르겠다 하지만, 술값을 훔치는 것은 내 것을 훔치는 거다. 너를 먹이고 입히고 사랑하는 내것을 훔쳐서 나를 못 살게 하는 년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고도 바른 대로 말 을 안해. 네가 경찰서에 잡혀 가서 조사를 받아도 불지 않 을 테냐? 내가 아무렇게로 네까짓년 조사하나를 못 받겠니.
너 죽고 나 죽으면 고만이다. 네가 죽어도 안했다고 그랬지.
네 년 좀 죽어봐라."
숙자는 이를 갈더니 옆에 놓았던 칼을 가지고 달려든다.
전등빛에 번쩍이는 칼빛은 어느새 순영의 정신을 죽였다.
순영은 때그르 딩굴었다.
"이년아 인제도 안 댈 테냐?"
"에구, 어머니 살려 주세요."
"도적질했니 안했니?"
"에구 했어요."
"정말 했지."
"네."
"손님의 지갑도 훔치고 순배도 속였지?"
"네."
"몇 번이나 했니?"
"한 번이요."
"한 번이 뭐냐? 이년아."
"두 번이요."
"두번? 몇 두 번 열두 번이냐? 백두 번이냐?"
"에구 어머니, 몇 번이고 어머니 마음대로 다 했어요. 살려 주세요. 어머니가 몇 번 했다고 하면 그대로 대답하겠어요.
어머니 진정으로 저를 죽이려면 조금만 참아 주세요. 저는 내 생에나 좋은 곳으로 가게 염불이나 조금 하고 죽겠어요.
그것만은 용서하여 주세요."
순영은 불단을 향하여 합장하고 앉더니,
"아미타불, 아미타불."
지성으로 부른다.
14.
[편집]숙자는 칼을 들고 날뛰면서 위협을 하다가 순영이 자복할 뿐 아니라, 하는 양이 어이가 없어서 칼을 든 채로 서서 물 끄러미 보다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순영은 소리 없이 염불 을 하다가 조금 간이 삭은 뒤에는 울기 사작하였다. 첨에는 훌쩍훌쩍 울다가 차차 느껴 울고 마침내는 딩굴어 가며 운다. "어머니, 에구 어머니, 저는 도적년이 되었어요. 인제 저는 죽어서 어머니한테로 가겠어요. 우리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세요? 우리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세요? 어구 어머니, 저 는 어머니한테로 가겠어요."
이것은 순영이 울면서 하는 사설이었다. 순영은 더운 눈물 이 낯에 흐르고 다시 머리를 적신다. 독시같이 야단치던 숙 자도 불쌍하고 비감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밖에서 소곤대고 픽픽 웃기만 하고 있던 순영의 동류들은 한참 고요하더니 방으로 들어온다.
"어머니, 인제 고만 참으세요. 제가 했다고 하는데 공연히 마음 상하시고 그러지 마세요."
모란이 정답게 말한다.
"어머니, 고만두세요. 차차 법지법대로 하든지, 또 달리 조 처를 하든지 하시지, 기운 지치시는데 고만두세요."
산월도 얼굴을 조금 찡그리면서 말한다.
"얘야, 고만두어라. 그렇게 극성스럽게 울 것이 뭐 있니?
그러면 어머니 속만 더 태우지.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 낮지, 울기만 하면 제일이냐?"
향선은 발로 순영을 직신거리며 말한다.
"고만 좀 울어라, 시끄럽다."
"그렇게 자꾸만 울면 어머니 보채우라고 우는 것이지, 뭐냐. 고만 울어라."
"울고 싶거든 얼마든지 울어라. 암만 울면 소용이 있니? 하 지만 어머니 앞에서 우니까 어머니 맘 상하실까 봐 그렇지.
울고 싶거든 나가서 울어라. 어머니 맘을 더 상하게 하지 말고,?
그들은 돌려 가면서 말한다.
그러한 말을 듣는 순영은 울음이 더 북받쳐 나왔으나 울다 가 무슨 광경을 당할는지 무서워서 꿀꺽 참았으나, 터져 나 오는 울음을 참기는 맞는 것보다도 어려웠다.
"인제 고만 나가거라. 오늘 저녁에 아주 초상을 치려고 하 였더니, 네가 자복을 했으니까 차차 조처할 일이 있지."
숙자의 말이 떨어지자 순영은 동류들에게 붙들려서 제 방 으로 나갔다.
"에구, 얼마나 아프냐, 뻐냐 상하지 않았니?"
하고 순영의 다리를 만져 주는 체하는 산월이 있다면,
"에구, 들어가서 말려 주고 싶더라만 어머니는 골났을 때 말리면 더하니까 더 맞을까 봐 말리지 못했다. 아프기도 아 프겠지만 얼마나 놀랐니? 에구, 세상이 무서워라."
하고 진저리를 치는 체하는 향선이도 있었고,
"그런데 그런 일을 어머니가 어떻게 아셨을까? 우리는 순 영이가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첨 듣는 말인데, 순영이가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어디서 안 말일까? 이상두 해라."
하면서 순영을 바라보는 모란이도 있었다.
그러나 순영은 아무 말도 귀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턱을 괴고 앉아서 잠잠하였다.
"순영아, 아까 우리가 안방에서 한 말을 노엽게 생각하니?
어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어떻게 하니. 그런데 정말 너 그런 일이 있었니? 우리는 듣느니 첨이다."
산월은 향선에게 눈을 끔쩍하더니 순영을 본다.
"......."
"얘, 그런 소리 묻지 마라. 남은 화나는데 그런 소리를 물 으면 쓰겠니? 남보고 애매한 소리를 하면 죄로 간단다. 그 런 소리하지 마라."
향선은 산월에게 눈을 흘기는 듯하더니 모란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순영은 그들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들의 하는 것을 보았는지 알았는지 말이 없이 눈물이 비오는 듯할 뿐이다.
손수건을 둘이나 적시고도 오히려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에 누웠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꿈을 꾸는지 잠결에 웃기도 하고 얘기를 하였으나, 말은 분명치 못하여 서 의미를 알 수는 없었다. 순영은 구태여 그들의 꿈을 알 려고도 아니하고, 또한 자기가 무슨 꿈을 꾸려고도 아니하 였다. 순영은 다만 가슴에 가득한 모든 생각이 괴로울 뿐이 었다. 자기의 과거사는 말하지 말고라도, 숙자의 집에 온 뒤 로부터 적이 자리가 잡혀서 손님들의 귀엽도 받고 숙자의 사랑도 받고, 동무들의 부러워하는 바도 되어서 술 파느라 고 밤잠을 못 자는 피곤이 라든지, 손님들에게 시달리는 성 가심도 잊어버릴 뿐 아니라, 때로는 자기의 신세가 어떻게 된 것까지도 모를 만큼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팁 으로 얼마씩 준 것을 모은 것이 그렁저렁 수십 원이 되어서 그것을 저금하는 통장을 볼 때마다 웃음을 머금게 되는 것 도 적지 않은 위안이었다.
그러다가 웬 일인지 손님이 차차 오지 않게 되매 자기 생 각에도 미안하고 의심날 뿐 아니라, 숙자의 눈치든지 동류 들의 태도가 이상하게 달라지므로, 항상 미안하고 조심스럽 게 지내던 중에 천만 꿈밖에 그러한 광경을 당하고 보니 어 떻게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맞은 결과로 팔과 다리를 꼬깨끼가 어렵고 살이 붓고 뼈가 시어서 돌아누울 수도 없 었다. 그리하여 아픈 것을 참으려고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 게 앓는 소리가 난다. 순영은 몸뚱이의 아픈 것도 참기가 어려웠지만, 그것보다도 마음의 아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 었다. 시골풍속으로는 도적질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장 못할 이이라고 알아 왔었고, 더구나 여자로서 도적질을 한 다는 것은 죽는 것만도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자 기가 졸지에 도적의 누명을 쓰고 보니 도저히 눈을 들어 하 늘을 본다든지 낯을 들어 사람을 대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몸둘 바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마음의 둘 바도 알지 못하였다. 순영의 고민은 불도 아니건만 저녁에 핀 박꽃처럼 희고 고우며, 맑 은 여울에 거슬러 오르는 은어처럼 토실토실하고 기름진 청 춘의 몸을 재도 안 남기고 태울 듯하였다. 순영은 졸려서가 아니라 정신이 너무 생생하다 못하여 도리어 희미하게 되었다. 순영은 숨기척도 죽여 가면서 염불을 하여서, 자기의 애매 한 누명을 벗겨 달라고 빌기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의 자는 것을 살피면서 가만히 두 손으로 자기의 숨통을 쥐어서 죽 으려고도 하였으나, 갑갑하여서 견디기 어려운 때에는 도로 놓았다. 손으로 쥐는 것이 시원치 아니하여서 그런가 하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어서 졸라 보기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한참 있다가는 도로 끌러 버렸다. 순영은 아무리 하여도 다 시는 면목을 들고 사람을 대할 수 없어서 죽기는 죽어야 하 겠는데, 그러한 방법으로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쉽게 죽을 수가 있을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홀연히 바다에서 빠지던 생각을 하였다. 물에 빠졌을 때에는 죽는지 사는지 아무런 의식이 없어서 조금도 고통을 모르고, 다만 건지는 사람만 없으면 손쉽게 죽을수 가 있을 뿐 아니라, 한 번 빠지기만 하면 설사 다시 나오고 싶어도 나올수가 없는 것이 가장 묘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가만히 일어서서 바다에 나가 볼까 하였으나, 다른 사람이 깰까 염려될 뿐 아니라, 자기의 사지가 아파서 마음대로 추스를 수가 없었다. 한 팔로 베개를 짚고서 일어 나려고 하던 순영은 모르는 결에 에구 소리를 지르면서 도 로 쓰러졌다.
서창에 비친 달빛은 너무도 밝았다. 순영은 자기의 마음이 달빛에 비쳐서 자기 사람들의 꿈으로 들어갈까 염려하여서, 아픈 팔로 이불을 간신히 끌어당겨서 가만히 얼굴을 덮었다.
15.
[편집]숙자는 순영의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순영 의 한 행동이 통틀어 잘못된 중에 술값을 속였다는 것이 더 욱 분하고 괘씸하였다. 술값을 속인 것은 곧 자기의 것을 훔친 것이 되는 까닭 이였다. 그리하여 밝은 날이라도 야단 을 쳐서 쫓아 보낼까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그렇게 조급히 서둘면 자연히 소문새도 사납고 영업에도 더욱 방해가 될 듯하고 우선 순영이 몸시 맞아서 굴신을 못하는 중이니, 아 무리 밉다고 하더라도 그 지경이 된 사람을 당장에 내 보낸 다는 것도 차마 못할 일이요, 또는 순영이 그런 병통만 없 다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용이치 아니한 일인즉, 한편 으로는 내보내기가 아까운 생각도 없지 아니하였다. 그리하 여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 순영은 병이 없이 앓고만 있 었다.
다음 일요일에 숙자가 포교당으로 법문을 들으러 가는데, 중간에서 자기 집에 자주 술먹으러 다니던 사람을 만났다.
서로 인사를 한 뒤에,
"순영이 요새는 좀 나은가요?"
하고 그 사람이 묻는다. 숙자는 자기에게 얻어맞은 데가 나으냐고 묻는 줄 알고 조금 주저하다가,
"아직 누워 있지마는 인제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그런데 어린것이 어쩌다가 그런 병을 얻었을까, 불쌍한 일 이야. 좀처럼 나을 수가 있다고, 또 낫는다니 완인이 될 수 가 있나? 사람은 얌전한 것이 안 됐습니다. 아마 요새는 손 님들도 그 전만큼 못 오지요?"
그 사람은 동정하는 기색으로 말한다.
"아니, 순영이가 무슨 병이 있기에 말씀이요?"
숙자는 놀라면서 반문한다.
"왜 이러슈, 다 알고 있는데 시치미를 뚝 떼고 그러면 되나요? 한데 약이나 좀 잘 써 주시오. 그거 불쌍합디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요? 순영이가 무슨 병이 있기에 그 리시오? 나는 참 모르는데요."
숙자는 진정으로 모르는 기색을 짓는다.
"모르기는 무엇을 모른단 말이요. 순영이가 육공육호를 쓴 다는데 몰라요? 착호성명(着呼姓名)을 해야만 맛이요, 꽃샘 이나 단풍 시절에 툭툭 튀어나는 그 병 말이요. 아명(兒名) 은 당창이고 관명(冠名)은 매독이고, 그래도 모르겠소?"
그 사람은 말하는 입을 숙자의 구에 가까이 대고 코를 실 룩한다.
"아, 그게 무슨 말씀이요? 순영이가 매독이 다 뭐에요. 농 담으로 하는 말씀이죠? 농담인들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실까?" "농담이 다 무슨 농담이요, 동담이라는 것도 분수가 있지.
남에게 대해서 그런 농담을 누가 한단 말이요."
그 사람의 기색은 조금 불쾌하여진다.
"그렇게 말씀할 것이 아닙니다. 농담이라는 것이 아니라, 나는 생가망가 모르는 말씀을 하시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자세히 말씀 좀 해 주세요. 나는 진 정으로 몰라요. 알고서 그러면 개를 두고 맹세하지요."
하고 숙자는 지나가는 개를 가리킨다.
"그 말이 파다해서 인천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숙 자가 모른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그런데 대관절 그 말이 어디서 난 말인가요?"
"불을 때면 연기는 굴뚝에서 나는 것이 아니오. 하니까 그 런 말이 그 집 속에서 나왔지 다른 데서 나왔겠소?"
"그렇겠지요, 그러면 우리 집에서 누가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거야 내 귀로도 여러 번 들었는데 산월이도 그러고 향 선이도 그러고 다 그러던데요. 나 혼자서만 들은 것이 아니 라 여러 사람이 같이 들었는데, 그 애들이 거짓말이야 할 리가 있나. 그 애들도 순영이에게 동정을 해서 말하던데, 그 래 진정 모르시오?"
"모르기에 모른다지 여북해야 개를 두고 맹세를 했나요. 그 러면 그래서 아마적에는 술들을 잡수시러 잘 안 오시는 군요." 숙자는 무엇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잖아 그렇지. 누가 매독 오른 계집애에게 술을 먹으러 간단 말이요. 술 먹을 때에 그런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나 는데. 그리고 계집애가그 모양이 되면 꺼림칙해서 데리고 놀 맛이 있어야 아니하우? 그러니까 자연히 술꾼이 끊어질 밖에......."
하고 무슨말을 또 하려다가 고만 둔다.
"그런데 순영이에게 대해서 그런 말밖에 없습니까?"
숙자는 무엇을 생각하다가 묻는다.
"왜, 또 다른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알 수 없습디다. 그러 나 그 말도 왁자하게 퍼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야."
하고 그 말의 정체는 말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에요?"
"글세, 하두 말같잖으니까."
"들은 대로 말씀하세요."
"순영이는 상관 있는 사람의 주머니를 뒤졌다나 어쨌다나,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어디서 났을까요?"
"그 말도 한 굴뚝에서 났지, 딴데서 났겠소? 하지만 그런 일을 당했다는 사람은 아직 없는 모양이던데."
"그러니까 그 말도 산월이와 향선이 한테서 났단 말씀이요?" "몰라, 그 말의 시초는 또 다른 데서 났는지 모르지마는, 우리는 그애들 한테 들었으니까."
"고맙습니다. 잘 알았습니다."
하고 숙자는 돌아서려고 하는데,
"그런데 당신은 정말 그런 사실을 모르시오?"
그 사람이 의심스런 기색으로 묻는다.
"에구, 처음 들어요. 들었으면 들었다고 하지, 왜 거짓말을 할 리가 있나요? 그리고 그 애가 관계있는 손님의 주머니를 뒤졌단 말도 거짓말일 겝니다. 관계 있는 사람도 없고 관계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모를 리가 있나요? 그 노릇이라는 것은 아무리 속으로 한 대도 다 드러나는 겁니다. 계집애가 그러한 일이 있으면 눈치만 다를 뿐 아니라 얼굴이나 목소 리까지도 다르게 되는데, 같은 여자끼리 그런 것을 모를 리 가 있나요? 그리고 주머니를 뒤졌다는 말도 출처가 어디서 났는지 모르지만 아마 거짓말이겠지요. 하여튼 더 자세히 알아봐서,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아주 보내 버려야 되지요.
그리고 그런 일이 없으면 손님들이 자주 오셔야 되지요. 그 러지 마시고 자주 오세요."
숙자는 조금 웃는다.
"그렇지, 그런 일이 있으면 주인이 모를 리가 없지, 화류병 이야 더구나 모를 리가 있다구, 육공육호까지 맞는다는 말 을 들었는데, 그 지경이 되면 주인이 모를 리가 있나. 상관 있는 사람의지갑을 훔쳤다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우리도 의 심을 하기는 했어, 아무리 보아도 순영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지 않은데, 한 집에 있는 아이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곧이 들을밖에. 하여간 이상한 일이로군, 자세히 조사를 해 보시오, 내 일간 한 번 가리다."
그 사람은 돌아서서 히죽이죽 간다.
숙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에게,
"안녕히 가세요. 내일이라도 오세요."
하고 가는 사람의 뒷모양을 한참 보다가 포교당을 향하여 걷는다. 숙자는 그제야 술꾼들이 안 오는 이유를 분명히 알 았다고, 순영이 일에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줄로 생각 하였다.
그리하여 순영의 동류들이 순영을 시기해서 그런 엉터리 없는 말을 지어 낸 것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으나, 순영만이 잘못하여서 손님들이 안 오는 것이라고는 알지 않 게 되었다. 그러면 그게 어찌 된 일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 느라고 잠착하여 가다가, 뜻밖에 반대 방면에서 달려오는 자전거가 빽 하고 소리를 내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움찔하 고 섰다가,
"빌어먹을 것."
하고 가는 자전거에다 눈을 흘기고 돌아섰다.
16.
[편집]숙자가 교당에 이르니 벌써 신도들이 다 모이고 법사(法師) 가 설법상에 올라앉아서 마악 설법을 시작하려는 중이다.
숙자는 부리나케 올라가서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리에 앉았다. 법사는 검은 장삼에 금란 가사를 수하고 장업하게 앉아 서 주장자(?杖子)로 설법상을 꽝 치고서 조금 있다가,
"이 소식을 아는가?"
하고 대중에게 묻는다. 대중은 대답이 없다.
"대중이 말일 이 소식을 안다면 설법은 이로써 마치려니와, 그렇지 못하면 배암을 그리고 말을 붙이지 아니할 수 업습 니다."
하고 조금 있다가,
"오늘은 신(身), 구(口), 의(薏) 삼업(三業)이라는 제목으로 말을 하겠습니다. 사람은 몸과 입과 뜻 세 가지로 모든 업 (業)을 짓는 것인데, 몸에 세 가지가 있고, 입이 네 가지가 있고, 뜻에 세 가지가 있나니, 몸에 세 가지라는 것은 살생 하는 것과 도적질하는 것과 음란한 것인데, 살생이라는 것 은 무고히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이요, 도적질은 물론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것이요, 음란이라는 것은 남녀간에 정 당한 배필 이외에 다른 사람과 음행을 하는 것인즉, 이 세 가지는 몸으로 짓는 업이요, 입에 네 가지라 하는 것은 기 어(綺語),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네 가지를 이 름인데, 기어라는 것은 비단기 자 말씀어 자 기어인데, 비단 같은 말이라는 뜻이라 사람이 말을 정정당당하게 하지 아니 하고서 말을 공교하게 아러새겨서 비단에 무늬를 놓듯 한다 는 뜻인 즉, 말이 간교하고 사곡 하다는 의미요, 망어라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뜻이니, 사람이 실답지 않게 이 말 저 말 거짓말을 하여서 남을 속이는 것이요, 악구는 남보고 욕 지거리를 한다든지 악독한 말을 한다는 것이요, 양설이라는 것은 두양 자혀설 자, 혀가 둘이라는 뜻인데, 혀가 둘이라는 말은 말을 한결같이 아니하고, 말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 도 하여 이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고, 저 사람에게는 이 말 을 하여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간을 붙이며, 말질을 만들 어서 시비를 일으키게 하는 것인즉, 이 네 가지는 다 입으 로 짓는 업인데, 사람이 이런 업을 지으면 그 사람은 발설 지옥(拔舌地獄)으로 가는 법인즉,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요."
하고 법사는 목이 갈한 듯이 물을 마신다. 숙자는 평생에 거짓말도 많이 하고 악독한 말도 많이 하였지마는, 우선 수 일 전에 순영에게 너무 악독한 말을 하고 악착스럽게 때리 던 생각이 나서 새삼스럽게 무서운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울 렁거렸다.
"그리고 뜻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은 탐(貪), 진(瞋), 치(痴) 삼독(三毒)을 말하는 것인데, 탐심이라는 것은 탐하는 마음 이니, 무엇이든지 자기의 것이 아닌 것과 분수 밖의 것을 탐하는 마음이니, 무엇이든지 자기의 것이 아닌 것과 분수 밖의 것을 탐내는 것이요, 진심이라는 것은 대수롭지 아니 한 일에도 성을 내고 골을 내어서 악한 마음을 불꽃같이 일 으켜서, 자기도 불안하고 남도 불안하게 하는 것이요, 치심 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마음이니, 사람이 지혜를 닦지 못하 고 모든 일에 어리석은 생각을 내어서, 되지 못할 일을 행 하려고 하는 것인즉, 사람의모든 악업은 이 탐, 진, 치 삼독 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 모든 업의 근본이 되나니, 위에 서 말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업과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업도, 실상은 이 탐, 진, 치, 삼독에서 일어나는 것인즉, 사 람은 마당히 마음을 먼저 잘 닦아서 탐심, 진심, 치심 세 가 지 마음을 없애면 차차 부처님께 친근하게 될 것이요, 그렇 지 아니하여 신삼(身三), 구사(口四), 의삼(薏三)의 모든 악 업을 짓는다면 반드시 무간(無間) 지옥에 떨어질 터이니 우 리는 다 같이 부처님을 믿고 이러한 악업을 짓지 맙시다."
하고 다른 말을 조금 부연한 뒤에 법문을 마치었다.
숙자는 자기 평생에 행한 일과 또 순영에게 한 일이 자연 히 생각나서, 그 날의 법문은 꼭 자기를 들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을 보기에 부끄럽고 계면쩍었다.
그리고 부처님이나 법사는 자기의 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것만 같아서 치마끈을 졸라매고 빨리 돌아왔다.
숙자는 집에 돌아오면서 순영에 대한 일을 여러 가지로 생 각하였으나, 아무래도 곡절이 있는 이이어서 단순히 순영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집에 가면 우선 순 영을 위로하고 자세히 물어보는 동시에, 계집애들을 닦달하 여서 사실의 진상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숙자는 순영에게 너무 혹독하게 한 것을 후회도 나고 계집애들에게 속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으로 분하기도 하였다. 좋지 못 한 기색으로 집에 들어가는 숙자는, 뛰어오면서 정답게 인 사하는 계집애들에게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둥 하고서는, 바로 순영의 방으로 향하였다. 숙자는 부드러운 마음과 화 평한 기색을 지으면서 아직 누워 있는 순영을 위로할 양으 로,
"에구, 순영아, 좀 어떠냐?"
하면서 미닫이를 열었다. 순영이 누워서 꿍꿍앓고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측간 같은 데를 갔나 하고 생 각하였으나, 자리까지 개어 얹은 것으로 보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숙자는 마음이 섬뜩하였다.
"예들아, 순영이, 어디 갔니?"
숙자는 술청으로 좇아 나오면서 물었다.
"모르겠어요, 아까 갑갑다 하고 나가서 바람 좀 쐬겠다고 나갔어요."
산월이 대답한다.
"옷을 입고 나가던?"
"일어나서 머리를 빗더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고 그러고 나갔어요."
"뭐? 보퉁이는 안 가지고 갔니?"
"아무것도 들고 나가는 것은 못 보았는데요."
"이부자리는 제가 개 놓았니?"
"이부자리 개 놓은 것은 모르겠어요. 나가는 것만 보고 나 간 뒤에 방은 안 들여다 보았어요."
"그럼 어디를 갔을까. 몸은 추스를 만하게 나섰니?"
"어디가요, 어제 저녁까지 앓는 소리를 하고 아침도 안 먹 었는데요, 그렇지만 속으로는 괜찮은 것을 꾀병으로 앓는 소리를 했는지도 모르지요."
상월을 한 번 꼬집어 뜯는다.
숙자는 다시 순영의 방으로 가서 휘휘 둘러보더니 순영의 손그릇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들어 있을 만한 것이 그 대로 들어 있었다. 숙자는 허둥지둥 나와서 자동차를 불러 타고 하 인천정거장으로 가서 순영의 종적을 물어 보았으나 게서는 그런 아이는 못 보았다고 한다. 숙자는 다시 상 인 천역으로 가려고 하다가 돌이켜 생각하니, 순영이 만일 도 망을 하였으면 자기의 물건을 오수름이 그대로 두고 갔을 리가 만무한일인즉, 정거장에 가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망 계(妄計)인 듯하였다. 그리하여 바닷가로 발멈발멈 나가면서 물어 본즉, 그런 아이가 월미도(月尾島) 쪽으로 가더라고 한다. 숙자는 다시 자동차를 몰아서 월미도로 달렸다. 그때는 해수욕도 시작이 안된 때라 사람들의 내왕이 별로 많지 못 하고, 다만 봄을 찾아다니는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거닐기 도 하고 앉았기도 하고 섰기도 한 것을 볼 뿐이었다. 숙자 는 자동차를 세우고 눈이 바쁘게 찾아보았으나 순영은 그림 자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숙자는 순영이 오던 맡으로 바다 에 빠져 죽지나 아니하였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자못 초 조하였다. 숙자는 순영이 만일 자기의 혹독한 매를 못 이겨 서 애매한 누명을 둘러쓰고 원통하게 죽었다면, 가엾기도 하려니와 죽은 혼이 원귀가 되어서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면 어찌 하나 하는 꺼리는 생각도 나고, 또는 애매한 사람을 죽였다고 부처님이 죄를 주셔서 지옥으로 가게 되면 어찌 하나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해변으로 갔다가, 산으로 올라갔다가, 이쪽으로 오다가 저쪽 으로 가다가, 미친 사람 헤매듯이 땀을 흘려 가며 돌아다녔다. 숙자는 월미도의 물쪽을 다 보고서 산으로 하여서 남쪽을 찾기로 하였다. 조금 내려가다가 둘러보니 서쪽으로 조금 당기어서 바닷가에 앉은 것이 분명한 순영이었다. 숙자는 마음이 기쁘면서도 섬뜩하였다. 숙자는 순영이 자기를 보면 놀라서 뜻밖의 결과를 낼는지 몰라서, 될 수 있는 대로 몸 을 숨기고 자취 없이 내려가면서 순영의 거동을 본다. 순영 은 합장을 하고 바다를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그것 을 본 숙자는 더욱 깜찍스러웠다. 숙자는 거의 내려가다가 솔포기에 걸려서 신이 벗어진 것을 주워 신으면서 내려가 보니, 합장하고 앉았던 순영이 일어나서 휘휘 둘러보더니 신을 벗어서 옆에다 나란히 놓고서, 치마를 쓰고 바다를 향 하여 몸을 던지려 한다. 그때에 숙자는 이십 보 가량이나 못 미쳐 갔었다. 숙자는 그것을 보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 었다. 그러나 쫓아가서 붙들 겨를이 없었다.
"순영아!"
숙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크게 질렀다. 깜짝 놀라서 돌아다보는 순영은 숙자를 보자 집어 내버리는 듯이 펄썩 주저앉는다. 숙자는 힘이 있는 대로 달음질을 쳐서 순영을 붙들었다. 숙자는 숨이 차서 말을 못하고 순영은 얼굴이 질 리면서 금방에 숨이 지는 듯하였다. 바닷가의 그 광경은 적 지 아니한 인간 비극의 한 토막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면서 출렁거리는 바닷물은 순영을 핥을 듯이 넘실거리 며 언덕으로 올라오려 한다.
"너 웬일이냐?"
속자는 아직도 다 진정이 안 되어서 가쁜 목소리를 조금 떨면서 말한다.
"......."
"글세, 너 이게 웬일이냐?"
"도적질한 년이 살아서 무얼 해요, 죽어야지요."
순영은 다시 일어나서 바다로 들어가려 한다.
"아서라, 이게 무슨 짓이냐. 차차 내 말을 들어라. 에구, 숨 이 차서 죽겠다."
숙자는 순영을 얼싸안고 어쩔줄을 모른다.
"이러지 마세요. 도적질을 했다고 다 자복을 했는데, 또 이 럴 것이 뭐에요?"
순영은 숙자가 또 때리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심으로 자복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아니다. 너를 때린다든지 잘못한 일을 나무란다든지 그런 일로 온 것이 아니다.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저만치 산으로 가자. 여기서 이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보면 볼상도 사납고, 또 순사가 보든지 하면 조사를 하네 무엇을 하네 하여 되겠니? 하니까 저리로 가자."
숙자는 지성으로 달래어 순영을 데리고 솔밭으로 올라갔다. "순영아!"
숙자는 그래도 못 미더워서 순영을 뒤에 앉히고 자기는 앞 에 앉아서 만일 순영이 달아나면 뭍들기 조을 만한 자세를 취하고 친절한 어조로 불렀다.
"예."
순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대답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너를 때린다든지 나무라면서 네 잘 못한 일을 물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네 애매한 것을 대 강 알았다. 하니까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말고, 네 진정대로 말을 해라. 너 조금도 그런 일은 없지?"
하고 순영의 기색을 본다. 순영은 숙자의 얼굴만 흘끗 쳐 다보고 대답이 없다.
"그럴 게 아니라, 꼭 진정으로 말을 해라. 네가 아무 말을 해도 관계 없으니, 말을 해라. 안할 말로 나보고 욕을 하더 라고 조금도 관계 없으니, 사실대로만 말을 해라."
숙자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무슨 말을 하라고 그러세요?"
순영의 말소리는 조금 날카롭다.
"아니, 손님의 주머니에서 무엇을 훔쳤다든지 그런 일말이다. 너는 그런 일이 없지?"
"몰라요. 나는 그런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사내들은 더러 도적놈이 있다건만 계집애가 어떻게 도적질을 해요.
고금에도 무서워라."
"그러기에 말이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지."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없어요."
순영은 숙자가 자기에게 했다는 말을 들으려고 다그쳐 묻 는 줄로 알고 내친걸음에 조금 불쾌하게 말했다.
"아니다. 마음대로 하긴 무엇을 마음대로 해. 네게서 진정 을 들어 보려고 하는 말이다. 그럼 고만두어라. 다 잘 알았다." 하고 조금 주저하더니,
"너 또 조금 물어 볼 말이 있으니, 조금도 달리 생각하지 말고 대답해라."
하는 말을 전제로 하고, 순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너 무슨 병이 있니?"
"병이 또 무슨 병이요?"
순영은 숙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하고 눈이 둥그래지 며 반문한다.
"아니, 무슨 병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이 있어서 물 어 보는 말이다. 무슨 이상한 병은 없지?"
"이상한 병이 뭐예요?"
"글세, 무슨 병이든지 없느냐 말이다. 없으면 없다고 하면 고만이 아니냐."
숙자는 말을 여물게 한다.
"저번에 고뿔 앓은 일밖에 아무 병도 없어요."
"그럴게다. 내가 알다시피 아무 일도 없지......."
숙자는 또 무슨 말을 할 듯하더니,
"인제 고만두어라, 다 알았다."
하고 한숨을 쉬면서 먼 바다를 바라본다. 숙자는 무엇이 감동이 되었는지 수건으로 눈물을 씻는다. 순영도 울었다.
조수가 점점 물러가고 갯바닥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조개잡 이 여자들이 모여든다. 그 중에는 웃고 지껄이는 사람도 있 었지만, 구슬프게 노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새들은 사람을 보고서 놀랐는지 날다가 내리고, 내리다 날고 하였다. 반돛 을 달고서 나가는 배들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저녁볕을 가 득히 받고서 자꾸자꾸 가기만 한다. 옷을 추키는 대로 추켜 서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다래끼를 꽁무니에 차고, 맨발로 미끄러운 갯바닥을 밟으면서 물을 따라 들어가는 여자들은, 숙자와 순영을 바라보고서 한가하게 앉아서 구경하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넘어 가는 해는 지평선에서 쇠바 한 거리밖에는 남지 아니하였다. "인제 고만 가자."
숙자는 순영을 돌아보고 말을 한다.
"......."
"어서 일어서라. 해가 저물어 간다."
숙자는 먼저 일어서서 옷 뒤를 턴다.
"저는 안 가겠어요."
"안 가다니, 안 가면 어떻게 하려고 안 간단 말이냐? 어서 일어서라, 가자."
"남부끄럽게 어떻게 도로 들어가요."
"남부끄럽긴 무엇이 남부끄러워?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인 제 내가 네 속내를 다 알았으니까 조금도 걱정 없다. 일전 에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은 섭섭히 생각하지 마라. 내가 고 약한 년들의 말을 듣고서 너무 지망지망히 일을 했다. 나도 지금 혓바닥을 깨물고 싶다. 내가 들어가면 그년들을 별반 거조를 내고 너는 찬물로 씻은 듯이 될터이니, 아무 염려 말고 들어가자."
숙자는 순영의 손목을 잡고서 끌었다. 순영은 조금 버티려 고 하다가 슬슬 따라간다.
17.
[편집]숙자가 순영을 데리고 집에 들어가매 순영의 동류들은 이 상한 눈으로 숙자의 기색을 살피면서 순영의 태도를 눈여겨 본다. 숙자의 안색은 폭풍우를 감춘 험한 일기처럼 당장에 살풍경을 낼 듯하였다. 그들은 숙자가 도망하는 순영을 붙 들어 가지고 오느라고 화가 나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하여 서, 인제는 순영이 전일보다도 톡톡히 당하고 쫓겨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저녁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이 없고, 숙자는 무엇을 하는지 안방에서 나오지도 않는데, 순 영은 안방으로 들락날락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색 이 새치름할 뿐이요, 다른 눈치를 볼 수가 없었다.
순영의 동류들은 저녁 늦게까지 일을 다 치르고서 들어가 서, 순영이 어디 갔던 것을 묻기도 하고, 또 그것을 빌미로 삼아서 순영을 실까스리기도 하려고 하는 중에,
"산월아?
숙자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대답을 하고 들어가는 산월 도 마음이 섬뜩하였고, 향선과 모란도 공연히 가슴이 울렁 거린다.
"너 꼭 진정대로 말을 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온 집안이 모두 큰일이 날 터이니, 바른 대로 말을 해라."
산월을 불러 놓고 말하는 숙자는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이 한다.
"무슨 말씀이에요?"
산월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숙자를 본다.
"너 저번에 말하던 순영이 일 말이다. 순배를 속인 것은 너 희들이 안다 하려니와 손님의 지갑을 훔쳤다는 말은 어느 손님에게서 들었니?"
순순한 말로 묻는다.
"글세, 손님에게서 듣기는 하였지마는 어느 손님인지는 모 르겠어요."
산월은 대답이 조금 거북하였다.
"어느 손님인지 모른다는 것이 되는 말이냐? 그게 예사 말 도 아니고, 크게 관계 있는 말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서 범 연히 들을 리가 없은즉, 그 사람의 성명은 모른다 할지라도 얼굴이야 모를 리가 있나. 또 술먹으러 자주 다니던 손님이 라니 얼굴조차 모를 리가 있나. 얼굴은 어떻게 생겼으며 나 이는 얼마나 된 사람이냐?"
산월은 차근차근 허 묻는 말에 대답이 궁하여서 어름어름 하다가,
"글세요, 얼굴도 잘 생각이 안 나는데요."
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년아, 모르기는 왜 몰라? 항상 다니던 손님이라면서 몰라? 눈깔은 빼서 봉창질을 하고 보았느냐, 얼굴도 모르게.
너 이년, 경찰서에서 붙들어다 주릿대를 앵겨도 모른다고 할 테냐, 이년아? 순영이가 애매하다고 경찰서에 고소하러 가는 것일 내가 가까스로 데리고 왔어. 너 정히 말을 아니 하면 순영이를 경찰서로 가라고 내버려 둘 터이니 어쩔 테냐? 예서 말을 할 터냐, 경찰서에 잡혀가서 형벌을 당하고 말을 할 테냐? 그것은 네 마음대로 해라. 네가 그 사람을 안 대고 는 못 배기리라."
숙자는 얼굴에 푸른빛이 돌면서 전일에 순영을 때리던 매 보다 더 크고 험살궂은 나뭇가지를 들먹거린다.
"저는 손님에게서는 못 들었어요."
산월은 벌벌 떤다.
"그럼 누가 들었단 말이냐?"
"향선이가 들었다고 그래요."
"향선이가 들은 것을 왜 네가 들었다고 그랬니, 이년아."
"그러라고 그래요."
"누가 그러라고 해?"
"향선이가 손님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하라고 그래요."
산월은 문밖을 향하여 돌아보면서 말소리를 나직이 한다.
"향선이는 제 귓구멍으로 들었다고 하더냐?"
"그것도 모르겠어요. 그저 그렇게 하라고만 그래요."
산월은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럼 그건 그렇다 하고 순영이가 순배를 속여서 술값을 숨쳐 먹은 것은 분명히 아느냐?"
".............."
"왜 말을 안해 이년아? 한 번 맛을 보고서야 말을 하겠니?" 숙자는 매를 들어서 두어 번 후려갈겼다.
"에구, 살려 주세요. 그것도 저는 몰라요. 향선이가 그렇게 하라구 해서 했어요."
"그것도 향선이가 하라고 해서 했니?"
"네."
"너는 향선이 말만 듣고 사는 년이로구나."
숙자는 어이가 없는 듯이 웃더니,
"네년들이 또 순영이가 못된 병이 있다고 손님에게 말한 일이 있지?"
"저는 그건 몰라요."
산월은 얼굴빛이 더욱 변한다.
"네 주둥이로 말하고서 몰라, 이년아?"
숙자는 매를 들고서 때리려고 하다가 시끄러운 것이 재미 가 없어서 매를 든 채로,
"말을 안할 테냐, 이년아?"
하고 때리려는 자세를 짓는다.
"에구, 그랬어요, 살려 주세요."
산월은 맞기 전에 구르면서 입을 벌리고 손으로 매를 막으 려고 한다.
"그건 어째서 그랬니?"
"그것은 모란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랬어요."
"그것은 거짓말 아니냐?"
"에구, 어머니, 살려 주세요. 죽을 때가 들어서 그랬어요."
산월은 겁이 난 얼굴에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한다.
"응, 그러면 너는 고만두고서 웃방에 가서 가만히 있거라.
예서 무슨 짓을 하든지 너는 죽은 듯이 기척 없이 앉아서, 무슨 말을 한다든지 인기척을 내었다는 죽여 버리겠다. 이년." 하고 눈을 부릅뜨더니, 산월은 웃방으로 가서 장지를 닫고 한쪽 구석에 죽은 듯이 앉아서 숨도 크게 못 쉰다.
"향선이란 년 이리 오너라."
숙자가 곱지 않게 부르니 향선이 눈이 휘둥그래서 들어온다. "네 이년, 왜 다른 년들을 꾀어 가지고 죄 없는 순영이를 도적을 만들려고 그랬니, 이 몹쓸 년아?"
숙자는 덮어놓고 매로 후려갈겼다.
"에구 어머니, 저는 안 그랬어요."
안그런 것이 다 뭐냐. 네년의 죄상이 다 드러났다. 암만 발 명해도 소용이 없어, 네년이 다 흥와조산(興訛造?)을 해서 그랬지, 뭐냐 이년, ?
하고 매를 드니, 향선은 놀라면서 방안을 둘러 보더니,
"산월이는 어디 갔어요?"
한다.
"산월이는 왜? 산월이 어디 갔다."
"산월이가 그래요? 제가 그랬다고?"
"산월이도 그랬고 다른 예기도 들었다. 내가 모두 꼬셔 이 노릇을 해서 순영이를 모함하고 손님들도 못 오게 만들었 지, 이년아."
숙자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힘껏 두들긴다.
"아이구, 저는 안 그랬어요. 제가 말하겠어요."
"말이 무슨 말이냐? 어디 말을 해 봐라."
숙자는 매를 거두고 앉는다.
"저는 산월이가 그렇게 하라고 시켜서 했어요. 저는 안 그 랬어요."
"네가 모두 시켰지, 산월이가 시킨 것이 무엇이냐."
"아니에요. 산월이가 자꾸만 그렇게 하라고 꾀어서 그랬어요. 그리고 산월이가 손님들에게 순영이가 당창 올랐다고 말하는 것도, 저는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요, 저는 죽어도 안 그랬어요."
"이년아,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먼저 그랬지."
웃방에서 듣고만 있던 산월이 참다 못하여 악을 쓰듯이 말 한다.
향선은 산월이 없는 줄 알고서 되는 대로 말을 하였는데, 뜻밖에 산월이 야단을 치고 나서니 놀라고 무색하여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내친걸음에,
"네가 먼저 그랬지, 내가 먼저 그랬니? 네가 그러고서 왜 남에게 다 떠다미니?"
하고 웃방 쪽을 바라본다.
"네가 그랬지. 나는 안 그랬어. 네가 우리 방에서 단둘이 있을 때 그렇잖았니. 순영이 때문에 우리는 사람 축에서 못 낀다구 순영이를 매독으로 몰아서 쫓아 보내자구 네가 그러 구서 무슨 말이냐?
"이년아, 너는 목욕 갔을 때에 순영이가 당창 올랐다고 손 님들에게 말해서 손님들을 못 오게 하자구 안 그랬니? 그리 고 어머니보고 심술망나니라고 욕하지 않았니, 이년아. 안 했거든 안 했다, 그러고서 왜 남에게 다 떠다 밀어. 너만 입 있고 나는 입 없는 줄 아니? 암만 해도 안 되어, 이년아."
"이년아, 너는 어머니보고 경치게 수선떤다고 욕하지 않았니? 순영이 치마 좀 빨라고 하니까. 그리고 순배를 속였다 고 하는 것은 네가 먼저 말했지. 우리 짜고서 그렇게 말하 자고 안 그랬어? 너는 입이 열이라도 내 앞에는 말을 못해, 왜 그래?"
산월은 새 장지를 열어 젖히고 나앉는다.
"그 말은 모란이가 시켜서 한 것이야, 알지도 못하고서 왜 남에게다 떠다 밀어, 암만 해도 네년이 잘못한 것이 많지, 나는 조금 잘못했어, 왜 그래. 그리고 손님들에게 말한 것은 무두 네가 했지, 나는 한 마디도 안했어. 모란이를 불러다가 셋이 무릎맞춤을 해볼까. 우리."
양선은 얼굴이 발개 가지고 삿대질을 하면서 산월에게 달 려든다. 그 꼴을 보고 앉았던 숙자는,
"이년들아 고만두어. 비렁뱅이까지 자루 찢는다고 공연히 야단일세."
하고 매를 들어서 두 사람의 사이를 내리치려고 하니까, 산월과 향선은 제각기 물러 앉는다.
"글세, 이년아, 어린 년들이 싹수가 없어도 분수가 있지 엉 터리로 남을 모함해서 도적을 만들여 든단 말이냐, 그래서 집에 손님도 못 오게 하고. 피고 안 내고 사람을 잡으려 들 어, 이년들아? 너 같은 년들은 죽도록 고생을 시키고 콩밥 을 먹어야 된다. 우선 나한테 경을 치어 보아라."
하고 일어나더니 두 년의 머리끄덩이를 한테 감아쥐고서 죽어라고 두들긴다. 두 년들은 맞으면서도 아픈 것은 둘째 치고 서로 집어뜯고 때리면서 앙심풀이를 하느라고 경황이 없다. 숙자는 한참 때리다가 제 풀에 지쳐서 물러 앉았다.
산월과 향선은 숙자를 무서워한다든지 원망하는 생각보다 서로 눈을 흘기고 원망하였다. 그들은 숙자에게 맞은 데보 다 서로 집어 뜯고 물어 뜯은 자리가 상처도 더 나고 알심 있게 아팠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독이 나서 아파하는 기색 도 없고 숙자에게 빌붙는 눈치도 없다. 그들의 속내를 모르 는 숙자는 그들이 그렇게 맞고도 자기의 배를 채우기 위하 여 일부러 안차고 달라진 기색을 보이는 줄로 생각이 되어 서 조금 풀리려고 하던 분통이 다시 터지게 되었다.
"이년들, 그렇게 못된 짓을 하고서 어른이 분통이 터져서 이렇게 걱정을 하여도, 잘못했다는 소리 한 마디도 없이 눈 깔이 독사 눈깔처럼 또록또록하고, 얼굴에 독기가 잔뜩 껴 가지고 그러면 누구를 어쩔 테냐? 이년들, 네년들이 나를 잡아먹을 테냐. 그렇게 독살을 부리고 앉았게."
하고 다시 두들긴다. 그제야 우는 소리도 나고
"에구 어머니, 잘못했어요. 살려 주세요."
"죽을 때가 들어서 그랬어요, 살려 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어요."
울며불며 비는 소리가 두 입에서 다투어 나온다.
숙자는 한참 때리다가 시끄럽기도 하고 너무 때리다가 죽 을까도 무서워서 매를 놓았으나, 우는 소리는 여전히 시끄 러웠다. 안방에서 그렇게 야단법석을 하는 통에 모란은 웬 영문인지 모르고 들어가서 말려 볼까 하고 마당에 나와서 듣다가, 모든 일이 여지없이 발각되어서 자기의 죄상까지 탄로된지라, 다음은 자기가 불려 들어가서 무릎맞춤을 당할 것이므로 부끄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다가 마침내 도망하기로 하였다. 모란은 숙자 가 모두 경찰서로 보내고 콩밥을 먹인다는 바람에 더욱 겁 이 났던 것이다. 모란은 제 방으로 들어가서 순영이 보는 것도 모르는 체하고, 부랴부랴 제 것을 챙겨 가지고 어디론 지 미꾸라지 새듯 나가 버렸다.
순영은 처음에는 어쩐 영문인지를 몰랐다가, 차차 새어 나 오는 말도 듣고 하여서 자기의 일 때문에 동티가 난 것을 알았다. 그러나 너무도 송구스러워서 들어가서 말려 볼까 하고도 생각하여 보았으나, 제 일 때문에 그러는데 들어가 서 말리기도 열적은 일이요, 또는 불 붙는 데 키질하는 격 이 될까 봐서 고만두었고, 모란이 나가는데 말 한마디라도 하고 싶었으나, 또는 무어라고 말을 붙여야 좋을는지 서먹 서먹하여서 모든 것을 못 보는 체하고 말았다.
숙자는 부르튼 김에 모란을 마저 불러서 그 일의 뿌리까지 끄집어 내고, 따라서 분풀이도 하려고 하였으나, 달아난 바 에는 어찌할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모란이 달아난 것이 서운하기도 하였으나, 또한 의심스럽기도 하여 당장에 찾아 볼 생각도 있었으나, 밤도 깊고 맥도 풀려서 고만두기로 하 였다.
산월이와 향선이도 제 방으로 나와서 서로 핑계대고 서로 원망하가다 분을 이기지 못함인지 뉘우치는 생각이 났는지, 나중에는 서로 울다가 기진맥진한 듯이 잠일 들었다. 그 광 경을 보는 순영은 도리어 미안스러웠다.
숙자는 분김에 생각할 때에는, 이튿날이라도 세 년들을 모 두 내쫓고 싶었으나 다시 생각하니 그러느라면 집안이 온통 소란할 뿐 아니라 당장이라도 술을 팔아 낼 수가 없고, 갑 자기 사람을 구하자니 그도 용이한 일이 아니요, 새로 구한 댔자 그전의 경험으로 보아서 쉽사리 신통한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아니하였고, 우선 이라도 모란이 하나 없는 데도 자리가 나서 술청이 어울리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생각다 못한 숙자는 도리어 모란을 찾으러 나섰다. 본래의 모란을 소개한 집에서 가서 어렵지 않게 모란을 찾아다가 산월과 향선과 함께 나무라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잘못한 일은 용서하기로 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않기로 다짐을 받은 뒤 에, 순영과도 화해를 붙여서 무도 안정을 시켰다. 그리고 며 칠 지난 뒤에 한 주판을 차리고 그 전에 다니던 손님들을 청하여 일장 타파를 하였다.
그러고 나니 순영은 엷은 구름에 가린 것같이 혐의를 받던 것을 홀딱 벗게 되어, 오히려 그전보다도 더욱 깨끗하게 되 었으므로, 손님들의 총애와 숙자의 사랑은 일층 더 하였다.
순영의 동류들은 자연히 부끄럽기도 하고 뉘우치기도 하여 서 순영을 모함한다든지 할 생각이 나지 아니할 뿐아니라, 다소 시기와는 하옵니 었다 할지라도 한 번의 실패한 경험 과 무엇을 획책할 용기도 나지 아니하고, 또 저희들의 입으 로 서로 비밀을 탄로한 것을 아는지라 서로 경계하여서 행 여나 눈치라도 보일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 집의 영업은 상당히 흥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