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1955년 12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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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조사단이 돌아간 직후 '박헌영 사건 조사를 속히 끝내 공개 재판에 회부하라'는 김일성 수상의 지시가 떨어져 내무성 예심처는 초비상이 걸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 시일 내에 끝낼 수 없는 어려움이 여러 군데 도사리고 있엇다. 1년여 동안 수사를 계속하면서 온갖 고문과 협박,회유를 동원해 자백을 얻어냈지만 번복되기 일쑤여서 재판을 열 경우 자칫 큰 낭패를 당할 위험이 항상 잠재해 있었다.


설사 자백이 번복되지 않는다 치더라도 자백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들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사정으로 인해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수상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1년 반이 계속됐다. 그러니까 만 2년 반 이상을 조사해 재판에 부친 셈이다.


1955년 12월 어느 날, 평양 시내 내무성 구락부. 최고 재판소 군사 재판부 주관으로 역사적인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빨치산 출신으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인 최용건이, 배심원은 소련 정보 기관 출신 내무상 방학세와 김일성 유격대 출신인 최고 검찰 소장 이송운이 각각 맡았다. 노동당 중앙 위원, 중앙당 부장 이상 간부, 내각 부상 이상, 시,도당위원장, 각 사회 단체 핵심 간부들은 모두 재판을 방청토록 하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1천여명이 참관했다. 군사 재판으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사건의 조사,예심 주관부처 내무성 부상인 나(강상호)는 맨 앞줄 왼쪽에 앉아 예심처 간부들의 재판 진행 업무를 진두 지휘했다. 재판장과 배심원들의 책상에는 그동안 조사했던 박헌영 부수상에 대한 조사서 등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예심처는 이 재판에 대비해 간밤에 박 부수상을 내무성내 간부용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 목욕으로 면도를 시키고 검거 당시 입고 있었던 검은 양복을 챙겨두었다.

호송원들이 박 부수상의 팔장을 끼고 재판장에 입정했다. 재판장에 들어선 박 부수상은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지정석에 앉아 태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검찰측이 범죄 사실을 낭독하고 사형을 구형하는 논고장을 모두 읽어 내릴 때까지도 안경 속으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일절 표정을 노출하지 않았다. 이어 재판장의 질문이 시작되자 두 눈을 뜬 후 시선을 재판장에게 고정시켰다.



최용건: 검사의 논고를 들었는가.

박헌영: 잘 들었다.

최용건: 이 논고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헌영: 논고장이 길어 재판장이 어떤 부분을 묻는지 잘 모르겠다. (재판장 최용건이 곧바로 질문을 잇지 못하고 멈칫하자, 배심원 방학세가 재판장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넘기면서 몇마디 귓속말을 건넸다.)

최용건: 검사는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다고 선언했지 않은가.

박헌영: 재판장이 보는 미제 간첩이라는 개념이 나와는 큰 차이가 있다.

최용건: 스파이면 스파이지 개념의 차이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박헌영은 내무성 예심처 조사과정에서 미국놈들과 여러 차례 만났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았는가.

박헌영: 그렇다. 멀리는 상해에서, 가깝게는 남조선에서 혁명 사업을 하면서 여러 차례 미군정 고위 인사들과 만났다.

최용건: 그것이 스파이가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인민들은 미제 스파이임을 잘 알고 있다. 이 엄숙한 재판을 모면하려는 수작을 부리지 마라. 왜 스파이를 했는지 말하라.

박헌영: 남조선에서 미군정 인사들에게 이승만 세력과 감싸고 돌지 말고 민전(1946년 남한內 비상국민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범 좌익단체들이 결성한 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 한다.) 인사들의 활동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속히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가고 조선의 통일은 조선인 손으로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을 뿐이다.

(최용건이 학식과 법률 지식이 모자라 박헌영의 이론과 논리에 밀리는 분위기가 계속되자, 배심원 방학세가 말을 가로챘다.)

방학세: 민전을 도와 달라고 요청한 것이 바로 미제와 손잡고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박헌영: 미군정이 민전활동을 감시하고 공산당 당원들만 잡아가는 것을 항의한 것이지 그들과 손잡고 혁명 사업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방학세: 무슨소린가. 예심처에서 미제들과 주고받은 담화 내용과 그 증거들을 확보하고 있는데 그래도 부인할 작정인가. (목청을 높이며) 우리 공화국 원수 미제의 간첩이 인민 앞에 솔직히 죄과를 털어놔도 용서받을지 모르는 판에 어디서 주둥아리를 까발리고 있는가.


(순간 박헌영 부수상은 '그래! 너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며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 던졌다. 안경알이 박살났다.)


(느닷없이 박헌영이 안경을 던지는 바람에 재판정 분위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호송병들이 시멘트바닥에서 박살난 안경알을 줍는 사이 방청석의 일부 고위간부들이 '저새끼 아직도 정신 못차렸구만.' '저런 새끼는 재판할 필요가 없어'라며 웅성거렸다. 그들은 모두 김일성 수상 직계의 빨치산파 또는 갑산파 간부들이었다. 그러나 당과 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연안파와 소련파 간부들은 굳은 포정으로 묵묵히 재판과정만 지켜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배심원 방학세(내무상)가 일부 간부들의 웅성거림에 고무된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방학세: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 따위 행패를 부리는가. 동무(박헌영이 부수상 시절에 경칭인 동지로 호칭)는 아직도 왜 이 자리에 서있는지를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가?

박헌영: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잘 알고 있다.

방학세:(손가락으로 박헌영을 가리키며) 동무는 반당종파분자들의 두목으로 공화국의 특급비밀을 미제들에게 까발린 스파이 왕초였다. 동무를 믿고 공화국에 따라 올라 온 이강국(전 외무성부상), 권오직(전주중대사), 구재수(전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등이 그 증인으로 이자리에 와 있지 않은가? 지금 저자들은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동무에게 실망과 조소를 보내고 있다. 종파분자 두목답지 않은 행동을 벗어 던지고 솔직히 동무의 죄과를 시인하고 용서받는 것이 이 도리 아닌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재판장 최용건(부수상 겸 민족보위상)이 준엄하게 입을 열었다.)


최용건: 동무는 미제 간첩임을 시인하는가?

(박헌영은 증인석에 나와있는 이강국,권오직 등에게 시선을 보냈다. 자신들의 보수였던 박헌영의 첫 시선을 받는 이강국등의 표정은 조금전 방학세 내무상의 힐난과는 크게 달라 보였다. 그들이 면면에서는 원망하는 표정은 전혀 읽을 수 없었고 오히려 '억지로 끌려온 부하들을 용서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더이상 시선을 마주칠 면목이 없다는듯 고개를 시멘트바닥으로 처박은채 한참동안 일으킬 줄 몰랐다. 박헌영 역시 자신의 시선이 상대방을 잃자 초점없이 고개를 재판정 천장으로 올려놓았다. 재판정의 분위기도 잠시 숙연해졌다. 지금도 나(강상호)는 불운의 한 혁명가와 그 부하들이 '운명'의 재판정에서 최후 시선을 맞부닥치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박헌영이 2~3분간 계속된 침묵을 깨고 다시 가느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박헌영: 너희들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 진술 기회인가?

최용건: 그렇다.

박헌영: 알겠다. 얘기가 조금 길더라도 양해해 줄 수 있는가?

방학세: 이미 예심처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했지 않은가. 그 얘기를 시인하는지 여부만 간단히 하면 되지 않은가.

박헌영: 그렇다면 예심처에서 조사한 사실만 가지고 당신들끼리 모여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고 왜 나를 재판정에까지 데리고 나왔는가. 이렇게 많은 간부들에게 이 박헌영의 몰골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함인가. 자, 박헌영을 똑바로 봐라!


(그는 전후 좌우로 돌리면서 매서운 표정으로 돌변했다.)


최용건: 그래, 동무의 말이 옳소. 이 자리는 동무가 예심처에서 못했던말을 다할 수 있는 곳이오. 지루하지만 들어주겠오.


(박헌영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최용건이 갑자기 경어를 써가며 충분한 최후의 진술을 허락했다.)


박헌영: 나는 이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말 그대로 요식일뿐, 어떠한 최후 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때, 아니 그 훨씬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엇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내가 약속한 그 협의는 현재 소련과 미국의 두 지도자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국제문제를 협의하고 있는것과 가은 맥락의 뜻이다.


(최후 진술이 본론부분에 접어들면서 더욱 카랑카랑해진 박헌영의 목소리는 재판정을 압도했다. 최후진술을 듣고 있던 재판장 최용건이 박헌영과 일문일답을 시작했다.)


최용건: 동무는 미국의 스파이 활동을 대체로 시인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서 누구와 연락을 했고 어떤 자료를 제공했는가.

박헌영: 재판장은 말귀를 그렇게 못알아 듣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내무성 예심처에서 진술한 기록이 재판장 책상위에 있을테니 그것으로 대신하시오.

최용건:(말귀도 못알아 듣는다는 비아냥거린 답변에 최용건은 약간 열을 받은듯 목소리를 높이면서) 동무는 예심처의 진술과 재판정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양인데 양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굳이 답변을 거부한다면 예심처의 진술을 참고하겠다.

박헌영: 아직도 재판장은 말귀가 열리지 않은 것 같다. 예심처의 진술과이곳에서의 최후 진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나는 독립운동을 하다 여러차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형사법에 관한한 나도 '반풍수'는 됐다고 자부한다. 재판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예심처의 진술로 대체하라는 말은 그 이상 새로운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최용건: 이론가(김일성이 박헌영에게 붙인 별명), 이곳은 법이론을 토론하는 토론장이 아니다. 다 떨어진 일본놈들의 법이론을 들고나와 어쩌겠다는 건가.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재판장의 질문에만 충실히 답변하라. 공화국의 비밀자료를 누구에게 넘겨주었는가.

박헌영: 미군정 지도자들을 만나 약속한 것은 내가 장차 통일조국의 최고 책임자가 되면 미국과 국제협력관계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직 내가 최고책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과의 약속은 하나도 이루어진게 없다.

최용건: 그런 헛소리를 듣기 위해 이 재판을 연 것이 아니다.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소리인가.

박헌영: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겠다. 그대들 말대로 나는 미국의 스파이었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 달라. 거듭 부탁한다.


(박헌영의 최후진술이 끝나자, 재판관들은 잠시 안으로 들어갔다. 당의 지시와 미리 준비한 판결문 원고를 선고에 앞서 최종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20여분 후 최용건을 선두로 재판관들이 준엄한 표정으로 나타났고 재판장 최용건은 준비한 판결문을 낭독했다.


최용건: (중략, 예심처 기소장과 중복)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재판장 최용건.



최용건은 긴 판결문을 낭독한 후 배심원들과 함께 퇴정했다.

정확히 밤 10시였다. 5시간동안 진행된 마라톤 재판이 막을 내렸다. 일부 수상직계 간부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이엇으나 대부분의 참관간부들은 굳게 입을 다문채 사형선고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각자 귀가했다. 이렇게 하여 1953년 3월 검거 후 2년여동안 끌고 온 박헌영 재판은 막을 내렸다.


다음날 아침 9시 정각, 내무성 간부회의실. 제1부상겸 정치국장인 필자(강상호)와 예심처장 주광무등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학세 내무상 주재로 박헌영재판에 따른 대책회의가 있었다. 예심처장 주광무가 재판때까지 박헌영이 미제간첩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수사과정의 이런 저런 어려움을 장황하게 보고했다. 시종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주광무의 보고를 듣고 있던 방학세는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변명만 갖고 수상실에 올라가 보고 할 수 없으니 그 대책을 제시하라!'며 화를 냈다. 주광무가 '내무상동지, 현 상태에서 박헌영의 사형언도를 집행할 경우 소련을 비롯한 형제국들의 화살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사형집행을 보류하고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건의했다. 방학세는 여전히 신경질적인 어투로 '알았소, 수상동지께서 우리의 변명을 받아주실지 모르지만 만약 기회를 주신다면 나와 동무의 목은 이론가의 스파이 증거에 달려 있소'라고 강조한뒤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수상실로 직행했다. 전 간부들은 방학세 내무상이 김일성수상에게 보고를 끝내고 돌아 올 때까지 그대로 회의실에서 기다렸다. 한시간여 후 방학세가 가벼운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에 나타났다.

김일성 수상에게 박헌영의 사형선고에 따른 대책을 보고하고 돌아온 내무상 방학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간부회의를 진행했다.


방학세: 수상동지께서도 재판결과에 대해서는 만족하셨소. 그러나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음을 증명할 증거를 확보해야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무성 책임으로 남아있소. 국제동향을 보아가며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무성안이 받아들여졌으니 공은 다시 내무성으로 넘어온 점을 명심해야하오. 예심처장은 전 요원들을 다그쳐 빠른 시일내에 미제간첩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해야 하오. 그리고 강상호 부상도 수상동지와 당의 명령이 하루속히 관철되도록 예심처를 철저히 감독해 주어야겠소.


이날회의에서 방학세의 지시(곧 김일성의 지시)를 종합하면 박헌영에 대한 사후처리문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즉, 미제간첩에 대한 증거가 확보되는대로 국제여론에 관계없이 곧바로 사형을 집항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심처에선 어느때보다도 강도있게 '미제간첩' 증거확보에 나섰다. 전 예심처 조사요원들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8개월여 동안 박헌영과 남로당 간부들을 불러 원점에서부터 재심문하는 등 증거확보에 나섰다. 특히 이번에는 내무성 특수요원들까지 동원해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의 '미제간첩' 흔적을 찾는데 안간힘을 썻다.

그러나 결과는 당초 예측했던대로 전혀 진전이 없었다. 주광무를 비롯한 예심처 요원들은 지칠대로 지쳐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 새로운 각도에서 증거수집을 진행하고 있던 1956년 2월 중순께였다.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지시로 소련 외무성에서는 평양주재 이와노프 소련대사를 통해 공화국에 '박헌영 문제'에 대한 압력을 내려보냈다.


이와노프 대사는 김일성을 여러차례 방문, '우리는 박헌영에 대한 재판소식을 듣고 있다. 박헌영을 죽이지 말고 소련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소련 외무성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의 의견을 참고하겠다.'고 약속했고 이와노프 대사는 이를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모스크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의례적인 것이었고 이와노프 대사가 돌아가고나면 간부들 앞에서 '모스크바에서 우리의 내정을 간섭하고 있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았다. 당과 내각의 주요 간부들은 수상의 이같은 태도로 미루어 박헌영의 사형집행은 증거확보여부에 관계없이 실현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언제일 것이냐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공화국의 역사상 김일성 정권이 가장 위기에 처했던 1956년 8월 하순이었다. 김일성이 동유럽 형제국 순방을 나선틈을 이용, 연안파 핵심간부들을 중심으로 일부 소련파 간부들까지 합세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김일성이 급거 귀국했다. 김일성은 '8월 종파사건'이 스탈린 사망후 거세게 불고 있는 개인숭배와 1인 독재배격운동과 박헌영, 정치노선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했다.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은 방학세 내무상에게 느닷없이 '방동무, 그 리론가(박헌영)은 지금 어떻게 됐어? 문제의 증거는 완벽하게 확보했느냐?'고 물었다.


김일성의 질문이 끝나기가 바쁘게 방학세는 '예심처에서 그동안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수상동지께서 만족하실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김일성은 답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증거고 뭐고 다 필요없다. 오늘밤에 목을 따버려!'라고 엄명했다. 시기가 시기이고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김일성의 엄명에 감히 이론을 제기한 간부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방학세는 그 길로 내무성에 돌아가 예심처장 주광무를 불러 '오늘밤 박헌영의 사형집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김영철 내무성 중앙부장이 이날밤 박헌영을 지프에 싣고 평양시내 변방 야산기슭으로 가 방학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총살)을 집행했다.


사형집행 직전 박헌영은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참고자료[편집]

  • 1993년 12월호 월간잡지 《말》. 기고자는 소련파 출신 북한 내무성을 지낸 강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