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시황전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조(我朝) 효종 9년(1658) 戊戌에 배시황(裵是愰)이란 자가 신유(申?)를 쫓아 나선 오랑캐〔羅善〕를 토멸하던 사적(史蹟)이다.

여진 오랑캐 더욱 북으로 퍅개와 왈개와 개부라 하는 세 오랑캐 나라가 있으니, 나선에게 막히는 바가 되어, 청(?)나라에 조공길이 끊긴지라. 3국이 청나라에 하소연하니, 청이 철기(鐵騎) 1만 5천을 발하여 나선을 치다가 패하여, 돌아온 자 겨우2백인이라. 때는 청나라 순치8년 신묘(辛卯) 10월이더라.

황제(皇帝) 대로하여 해마다 흥병(興兵)하여 치되, 토평(討平)을 못하는지라. 갑오년(甲午年,1654)에 칙사를 아국(我國)에 보내어,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같이 치라."

하니, 드디어 북도 육진(六鎭)의 선방포수(善放砲手) 500명을 조발하고, 변급(邊?)으로 영솔(領率)하여 북경(北京)에 가서, 청장(淸將)을 쫓아 나아가 치다가, 사상(死傷)하여 다 죽고, 아국병 생환한 자 30인이라. 변급이 주복야행(晝伏夜行)하여 같이 돌아오니라.

정유년(丁酉年-1657)에 또 칙사가 와서 ‘발병(發兵)하라’하거늘 드디어 육진 군사 5천을 발하고, 북도 병마우후(北道兵馬虞侯) 신유로 장수를 삼아 출전할새, 배새황이 비장(裨將)장으로 종행(從行)하니, 신우후와 배비장이 다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약목리인(若木里人)이라.

신우후가 시황을 임명〔自?〕하여 중군(中軍)을 삼으니, 시황이 길주(吉州), 명천(明川)등 아홉 군현에 순행(巡行)하여 정예병(精銳兵) 5천을 얻고 조정 명령을 기다리더니, 무술(戊戌,1658) 정월 초십일에 선전과 신명전(申命全)이 표신(標信)을 받들어 군중에 이르러, 신유를 명하여

"군사를 거느려 발행하시오."

하니, 명전은 신우후의 종자(從子)라. 숙질이 서로 붙들고 통곡하여 이별하니, 당시 신우후의 부모가 다 영남에 생존하였더라.

2월 27일에 행군하여 회령(會寧)에 이르니, 청 통관(通官) 김대언(金大彦)과 윤수(尹壽)가 대령하니라. 이때에 군식(軍食)을 두량(斗量)하니, 대장 이하로 군사와 치중(輜重), 인마(人馬) 다 합하여 8만 8천 785이더라. 경원영장(慶源營將) 박대영(朴大榮), 종성(鐘聲)영장 이일백(李一白), 김중명(金重鳴)은 군기를 영솔하고, 종성 유응천(劉應天)은 예방(禮房)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 장관은 온성(穩城) 신청일(申?一), 부령(富寧) 박세웅(朴世雄), 종성 김대웅(金大雄), 경원 박세문(朴世文), 홍일검(洪一儉), 회령 이기신(李起新)이요, 통사(通事)는 길주 김명길(金命吉), 회령 엄애남(嚴愛男)이 따라가니라.

3월 초일일에 행군하여 두만강(豆萬江)에 이르니, 육진 수령 변장이 다 전송할 제 초창키 측량 없더라. 도강(渡江)하여 5리쯤 행하매, 수목이 참천(參天)하고 한풍(寒風)이 소소(蕭簫)한지라. 고향을 돌아보니 운애(運?)가 호묘(浩杳)하매 장사가 다 타루(墮淚)하는지라. 신공(申公)이 시황더러 일러 가로되,

"금행(今行)에 하나 죽고 하나가 살거든, 죽은 자의 무명지를 끊어, 돌아가 가인(家人)을 보이게 하리라."

약속을 마치매, 서로 더불어 울고 비가강개(悲歌慷慨)하니라.

시일(是日)에 어제강(魚濟江-漁濟江)에서 자니, 산이 낮고 들이 넓은데, 강에 가득한 고기가 사람 보고 놀라지 아니하더라. 어우지(於于只)란 고기와 열목어(熱目魚)란 고기는 길이가 한 길씩 되고, 적어(赤魚)란 고기는 길이가 한길 반이나 되더라. 드디어 쏘아 잡으니 맛이 농후하며 껍질이 두껍고 질기어 북을 메엄직하더라.

강에 배가 없어 나무를 베어 다리를 놓고 13일에 도군(渡軍)하니, 큰 비가 종일 내려 겨우 40리를 간지라. 통관이 근심하여 가로되,

"청나라 양원수(兩元帥)가 제국병(諸國兵)을 영거하여 바야흐로 영고탑(寧古塔)에 머물러 있으니, 장군이 더디 행한즉 군사 기약을 잃으리니 어찌할꼬."

하더라.

15일에 모단강에 이르러 자니, 강이 비고 밤이 고요한데, 다만 이상한 짐승 소리만 들리더라.

16일 천명(天明)에 30리 행하니, 평연(平連)한 들에 갈대가 묶은 듯한데, 움직이는 곳에 사슴 무리가 사람 보고 목을 길게 들어 우뚝 우뚝 바라보더라. 드디어 에워싸고 총을 쏴 사슴 80여 마리를 잡아 사졸(士卒)을 크게 호궤하고, 녹비〔鹿皮〕는 통관이 다 가지더라.

19일에 비로소 영고탑에 이르니 청 원수(元帥)가 휘장을 열고 큰 창(槍)을 빗기고 병위(兵威)를 성히 베풀어 군례(軍禮)를 행하여, 마친 후에 사좌(賜坐)하고 물어 가로되

"칙사(勅使)나간 지가 오래되었는데, 군사를 오래 발치 아니함은 어찌 된 일이뇨?"

아장(我將)이 대답하여 가로되,

"감히 완만(緩慢)함이 아니라, 길이 멀고 치중이 많으며 또한 하늘이 오래 비를 내려 길이 막혔나이다."

원수가 명령하여,

"강상(江上)에 진(陣)을 치라."

하더라. 이때에 몽고병(蒙古兵), 등래주병(登萊州兵)이 다 와 모였더라.

영고탑의 번화부성(繁華富盛)함을 통관이 이르되

"성경(盛京)이 예서 못하지 아니하다."

하더라.

청 원수가 제장과 더불어 열립(列立)하여 차례로 군례를 받으니, 아국 장사는 본국례로 삼배(三拜) 삼고두(三叩頭)를 행하여 예필(禮畢)하매, 인하여 호군(?軍)하니 항오마다 큰 돌 하나와 큰 화로 하나씩 놓고, 칼을 체견에 얹어 군사로 하여금 스스로 베어 구워먹게하고, 각각 소주 삼배(三盃)씩을 주니, 심히 준렬(峻烈)하더라. 예필하여 원수가 환차(還次) 후에 통관으로 하여금 전령(傳令)하여 가로되,

"행군과 치중을 당일로 발행하라."

하니, 시황이 그 최행(催行)하기 이렇듯 급거함을 뜻하지 못한지라.

곧 달려 성에 들어가 원수를 뵙고 가로되,

"금일 행군은 전령이 비록 엄하시나, 인마(人馬)가 피척(疲?)하여 죽기에 이르렀으니, 결단코 조발하기 극난하오이다."

원수가 가로되,

"혹후혹선(或後或先)은 못하리라."

시황이

"이곳에 큰 수레와 건장한 소가 집마다 있으니, 이것을 얻으면 가히 일을 끝내겠소이다."

원수가 오랫동안 묵묵하다가 통관을 불러 두어 마디 하니, 시황이 그 말을 풀어 알지 못하여 통관더러 물은즉, 군량(軍糧) 전할 일이더라.

원수가 시황을 머물러 필담(筆談)하여 이시(移時)한 후에 놓이어 진중으로 돌아오니, 대차(大車) 여러 채와 멍에할 소와 탁타(?駝) 두어 필이 이미 등대(等待)하였더라. 드디어 치중을 싣고 곧 행군하니 큰 강이 앞에 비낀지라. 강 이름은 후통강(後通江)이니 너비가 10여 리라.

병선(兵船) 수십 척이 이미 강에 닿았으니, 도군(渡軍)하여 행한지 10여 일만에 몽고에 이르니, 48부(部) 동진두(東盡頭)라 하더라. 몽고사람이 다 웅위(雄偉)한 얼굴이요, 계집은 무비절색(無比絶色)이더라.

4월 19일에 우가리강(虞加里江)에 이르니, 강파호묘(江波浩杳)한데, 콩깍지같은 작은 배가 오락가락하기를 베 짜는 북같이 하니, 다 강 근처에서 장사하는 여자라 하더라.

금천강(金泉江)에 이르러 자고, 익일(翌日)에 군사를 건네니, 이때에 길주군(吉州軍) 1인, 회령군 1인, 경원군 1인이 창질(瘡疾)이 심한지라. 시황이 다 입으로 빨아 득효하니라.

시황이 청인(淸人)러 가로되,

"여기서 가려면 장성(長城)이 몇 리고, 여진(女眞)은 몇 리며, 막중(漠中)은 몇 리요?"

답하기를,

"장성은 6일정(日程)이요, 여진은 10일이요, 막중은 20일에 가히 이릅니다."

하더라.

4월 29일에 퍅개부에 이르니, 남녀가 다 단정하고 미려(美麗)하여 수염 유무로 사나이와 계집을 분별하더라.

5월 5일에 왈개부(介曰部)에 이르니, 근본은 청인과 한 유(類)라 풍속이 또한 대동(大同)하더라.

15일에 송가라강(家宋羅江-松花江)에 이르니, 강 너비가 10여 리라. 청인이 가로되

"나선이 이 강에 왕래하여 사람의 재물을 침략하여 산업을 삼아 스스로 한 부락을 이루었으니, 수전(水戰)이 아니면 이기기 어려운지라. 바야흐로 전선(戰船)을 정제하니, 얼마 있지 않아 또한 도착할 것이니 주병(駐兵)하여 기다리노라."

하고, 드디어 강상에 머문 지 여드레이자 23일에 전선 2천 460척이 상류(上流)로부터 이르니라. 그 배 제작이 나무를 작판(作板) 아니하고 두어 아름 대량목(大樑木)을 연복하여 바닥을 만들고, 배의 온 길이가 15,6장이요, 높이 4장이요, 연복한 틈에 생콩가루를 부레풀에 호합하여 메우고, 또 밀가루를 옻칠에 혼합하여 입혔으니, 그 두께가 1촌이요, 두꺼운 판목으로 3층루(三層樓)를 꾸몄으며, 높이가 다 길이 넘으니 하층에는 군량을 두었는데 가히 100석 곡식을 두겠고, 중층에는 갑주(甲?), 궁시(弓矢), 병기를 감추고, 상층은 가히 5,6백인 주선(駐船)하겠고, 온통 오색으로 채색한 단청 위에 퉁유로 덮었으니 광채가 햇빛에 번득여 눈이 부시더라. 이러한 기구를 우리 사람이 뉘 듣기나 하였으리오.

원수가 하령하여 각선(各船)을 정제하니, 매선(每船)에 종선(從船)이 5척이요, 격군(格軍)이 30씩이요, 갑옷 입은 군사를 100인씩 실었더라. 제국 장수와 군사는 다 흩어 나누어 실으니 아국장수 오른배는 북경, 영고탑, 몽주, 등주,왈개, 퍅개, 개부의 군사 각 50명과 우리 군사 3명과 중군과 통사와 군관과 구종, 급창일 따름이요. 우리 군사 4천 997인과 군관, 장관은 다 타선(他船)에 실었으니, 그 삭막하기가 측량없고, 그 듯을 가히 알리라.

이 날에 왈개국인이 큰 고기 하나를 장창(長槍)으로 에워 잡으니 고기 이름은 악지어(岳只魚)라. 길이가 5장이요, 몸 부피는 네 아름이 넘더라. 반을 나누어 우리 군중에 보내니 일군이 족히 먹더라.

팔국(八國)이 다 인마와 불긴(不緊)한 치중을 강상에 머물러 두고, 각각 싸움 제구를 다스려 배에 올라 발행하여, 6월 3일에 흑룡강(黑龍江)에 이르니, 강 너비가 30여 리라. 심불가측(深不可測)이요, 물빛이 칠(漆)같고, 물고기오 강변 금수가 다 빛이 검더라.

시황이 청인(淸人)더러 물어 가로되,

"이 강이 어느 지방으로부터 오느냐?"

대답하되,

"송가라강은 장성 북에서 시작하여 몽고로 오고, 흑룡강은 여진에서부터 몽고를 지나 오지요. 나선이 물로 땅을 삼고 배로 집을 삼고 불경부직(不耕不織)하고 다만 겁탈로 산업을 하오."

하더라.

6월 10일에 닻을 거두어 송가라강, 흑룡강 양수 합류처(合流處)에 정박(碇泊)하고 물 위에서 자다.

이튿날 새벽에 원수가 하령하기를,

"각선 장졸은 아침을 재촉하라."

하니, 제군(諸軍)이 당장 밥 지을 제 들은즉

"적병(賊兵)이 하류(下流)로부터 크게 이른다!" 하니, 대개 바야흐로 둔피하려다가, 강중에 한 섬이 있으니, 삼면이 깎은듯한 수십 장 석벽(石壁)에 둘려 있는데 본디 적의 소굴이라. 적이 이 섬을 의탁하여 저의 전선을 벌려 정박하고, 군졸, 병기를 나누어 반은 배에 싣고 반은 섬에 두니, 수륙 합력할 뜻이러라. 또 상류(上流)에 있는 적이 다소를 헤아리지 못할지라. 도중지적(島中之賊)이 둔결(屯結)하기를 구름 같고, 검극(劍戟)이 요일(耀日)하더라.

청 군중(軍中)에서 향포명고(響砲鳴鼓) 후에 먼저 군사 1만 5천을 발하여 150선에 실어 순류(順流)하여 내려가 적선이 가까우매 방패 미처 막지 못하여 수륙지적(水陸之賊)이 일시에 총을 쏘니 150선이 일시에 복패(覆敗)하여 돌아온 자 겨우 천여 명이라.

원수가 크게 겁내어 또 갑사(甲士) 4만을 발하여 4백 수에 싣고 급히 진공(進攻)하니, 적의 철환(鐵丸)이 또 비 퍼붓듯 하여 사상자가 반이 넘으니, 또 전봉(前鋒)을 정제하여 장차 떠날 제 , 나는 듯한 배 하나가 기를 휘두르며 곧 원수의 배를 향하니 빠르기 유성과 일반이라.

시황이 급히 통관을 데리고 가 살핀즉, 이것은 황제의 급한 칙서(勅書)더라. 통관으로 하여금 가만히 사연을 탐지하니 대강 말이,

"왈개, 개부 두 부락(部落)이 군사 조발하여 연년이 왕사(王師)를 도왔으니, 저들의 사상하고 모손하기가 적에게 해 받는 것에 비길 데 아닌즉, 지금에 또 군사 내었을 것이니, 만일 왕사가 이롭지 못하면 나선이 양국을 함독(含毒)하여 해침이 전보다 10배나 되리니, 양국이 또한 일변 승패(勝敗)를 관망하여 스스로 보존을 도모하리니 이 향배(向背)에 안위(安危)를 입판(立判)하리라."

운운(云云)하고 방략(方略)을 지수(指授)하였으나 그 속은 비밀하여 더 알 수 없더라.

원수가 거듭 하령하되,

"금일 흑룡강에서 초멸(剿滅)하겠노라."

하고, 다시 군사6만을 정(精)히 빼어 각선에 나누어 싣고, 방패 심우고 기 두루며 북 쳐, 곧 도적(島賊)쪽으로 향하니, 병인(兵刃)겨우 접하매 수상적(水上賊)이 다 와서 장창, 화포(火砲)로 수륙 상응하여 함성이 대진하고 연진이 폐천(蔽天)이라. 각선이 철환과 장창에 상함이 무수하니, 아국인은 총에 죽은 자 아홉이요, 철환이 얕게 들어가 죽지 아니한 자 넷이니, 시황이 네 사람에 참례하니라.

8천 병이 합전 10여 일에 연패하니, 원수가 하령하여,

"전함(戰艦)을 두 편으로 나누어, 한편은 수적을 치고, 한편은 도적을 치라."

하니, 도적 맡은 전함이 급히 틈을 타 물과 섬을 베어 쳐 열선(列船)하되, 한편에 두꺼운 판목으로 층층히 맺어 성(城)을 이루어 수적을 방비하고, 한편으로 도중적(島中賊)을 치니, 도중적이 저의 수군 길 끊김을 보고 참새 수풀에 던지듯하여 한 창으로 서넛을 꿰치는지라. 제국병도 같이 궁구 형세가 되었으매 죽기로 싸워, 호성(呼聲)이 진천(震天)하고 포뢰동지(砲雷動地)라.

적병이 살 맞아 고슴도치 같은지라. 드디어 쫓아들어가 도적(島賊)장수 10여 명을 결박하여 배에 가두고, 적의 노략하였던 왈개, 개부, 퍅개 3국 여자를 거두어 각선에 분치(分置)하고 적의 병기를 많이 얻은지라. 날이 저물고 복병(伏兵)을 염려하여 급히 군사를 거두니라.

이 날에 한편 수전한 공은 그 서로 구하는 형세를 저어하여 막을 따름이니, 그 공도 적지 아니하더라.

익일〔25일〕 효두(曉頭)에 수적의 큰 배 하나가 섬 뒤로 둘러 와 섬 모퉁이에서 엿보니, 원수 급히 그 배로 나아가 쳐서 손으로 세 적을 죽이니, 여력효용(?力驍勇)도 장하더라. 또 세 적이 돛대로 치달아 올라가 두판(斗板) 위에 앉아서 크게 불러 무리를 청하니, 원수가 심히 싫어 급히 무찌르려 하되,투구와 갑옷이 견후(堅厚)하여 살과 철환이 뚫지 못하는지라. 아국병이 큰 도기로 돛대를 찍어 넘기니 세 놈이 물에 떨어지니라. 주중적(舟中賊) 100여 명을 무찌르매, 이때에 원수가 이김을 타 곧 수적을 치니 축로가 겨우 상접하매 적이 판공(板孔)으로 화포, 장창을 부려 삽시간에 청병이 진패(盡敗)하니, 원수가 겨우 몸이 살아 돌아와 7일이 되도록 싸움할 뜻이 없는지라.

시황이 신공께 헌계(獻計)하여 왈,

"청병이 일패지차(一敗至此)하니 위금일계(爲今日計)하건댄 화공(火攻)보다 나은 것이 없소이다."

하고, 인하여 화전(火箭) 하나를 만들어 보이니, 그 법은 화살에 화약봉지와 화승(火繩)을 맺어서 쏘면, 살 박힐 때에 화약 매끔이 밀리어 화승불에 가 닥치게 하였으니 심히 편리한지라. 신공이 그 화전을 갖다가 원수를 보이고 화공 계책으로 달래이니, 원수가 청파(聽罷)에 묵연하매 신공이 무연(憮然)히 물러나니라.

원수가 하령하되,

"파적(破賊) 후 감히 재물 은닉(隱匿)하는 자는 참하리라."

드디어 스스로 선봉(先鋒)을 거느려 치니, 기세가 장하더니, 또 복패하여 사상자가 반이 넘은지라. 신공이 시황과 더불어 원수를 보고 다시 달랬더니, 또 불청(不聽)하고 연전연패, 또 5일 되자 7월 7일 아침에 홀연히 우리 군중에 명령하기를,

"화공 모책(謀策)을 허락하노니 당일로 시행하라."

하거늘, 이때에 신공이 배시황, 유응천에게 명령하여

"출전하라."

하니, 시황, 응천이 청령하고 하직할 제 시황이 신공이 찬 윤도(輪圖)를 청하여 스스로 차고, 저 찼던 윤도를 응천을 주어 채우고, 응천더러 이르기를

"들은즉 적선에 화약이 많은데, 그 봉과와 배 안에 입힌 것이 다 벚껍질이라 하니, 이게 인화하기에 극품(極品)이니, 우리는 화전을 일제히 쏘아 불만 질러놓고 화약에 당기기는 기다리지 말고, 급히 회선(回船)하여야 살리라."

하고, 드디어 각각 종선을 타고 궁수(弓手) 50인은 각각 화전10개씩 가지고 겹갑옷 입고,철방패 벌려 심고, 순류하여 노를 빨리 저어 내려가니 비연(飛燕)같더라.

적둔이 서너 과녁 되매, 두어 군사로 선두(船頭)에 열립(列立)하여 혹 기(旗)도 두르며, 혹 중의 예불하는 합장(合掌)도 하여 빨리 들어가니, 적이 천리경(千里鏡)으로 바라보고 연하여 응포(應砲)만 놓고 철환은 아니 쏘더라.

이때에 시황이 먼저 한 살을 발하니, 적의 배 집난간에 떨어져서 불이 번지니, 적이 바야흐로 황급히 불을 두들기며 크게 지껄일새, 모든 궁수가 살을 일제히 쏘아 혹 담장 밖도 맞추고, 혹 시초(柴草)더미도 맞히매 불을 쾌히 질렀는지라. 바야흐로 급히 회선하려 할제 중간 큰 배에 벽력이 이니 두 귀가 멍멍하더라. 화광 속에 사람과 물건이 튀어 반공중에 솟아오르더니 도로 휘어 거꾸로 박히더라. 그 배에 화약이 터지면서 불그을음이 두루 튀어 흩어져 여러 배가 연소(燃燒)함이 더욱 장하더라.

노를 급히 저어 회선하더니, 또 한 배가 터지니 격동한 물결이 산더미처럼 쫓아 덮쳐 배를 엎치겠는지라.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응천의 배가 간 데 없으니, 시황이 뛰며 가로되

"응천이 죽었다!"

하고, 힘을 다하여 빨리 저어 4,5리 동안 되매,파도가 적이 가라앉는지라. 적진을 발라보니 산봉우리같은 불꽃이 벌어 퍼졌고, 구름같은 연기는 곁으로 뿜고 위로 솟으며, 높은 하늘에는 흑운이 일자로 비꼈더라.

진에 돌아오니 날이 저물더라. 신공(申公)이 전도(顚倒)히 붙들고 떨어 가로되,"살아 오느냐, 살아 오느냐! 화약 터지는 소리 들은 지 양구하여 격파가 몰아닥쳐서 큰 배는 돛대 기울어지고 작은 배는 물이 들어 송구하였으니, 화약 터진 근처야 불언가상(不言可想)인즉, 너 반드시 죽었다 하였노라. 응천은 어디 있느냐?"

대왈,

"죽었나이다."

서로 대하여 슬퍼하더니, 식경(息頃)만에 응천이 이르니,

"바야흐로 급히 회선할 제 향방을 잃어 하류(下流) 편으로 과녁 몇 솔 바탕을 더 내려가다가 올라오려니 더디었노라."

삼인이 비희(悲喜)하여 말하되,

"죽지 않은 것은 돛대 없는 소선 타기와 지남침(指南針)을 가진데 있으니, 만일 돛대가 섰다면 기울어질 제 살았겠으며, 지남침 아니런들 갈 적 향방 거슬러 밤 전에 왔겠느냐. 이 두 가지를 실수하였던들 이 시각에 물짐승의 복중(腹中)에 들었으리니, 인생의 일이 어찌 기이하지 않으리오. 돛대는 아니 가지기로 살았고, 반침(盤針)은 가지기로 살았으며, 한가루 부싯불을 쓰고 아니 씀에 이편 100만 인명 생사와 저편 100만 인명 사생이 달렸으니, 이것은 오히려 형용이 있거니와 형용도 없는 것, 어찌 무섭지 않으리오." 이튿날 아침에 청 원수가 제국 장졸을 데리고 방포명고(放砲鳴鼓)하여 적둔처를 가본즉, 만수몽충이 변하여 일대부벌(一帶?筏)이 되었는데 왕왕이 헐어진 담과 무너진 벽이 종횡(縱橫)으로 회탄(灰炭)위에 드러났으니, 뱃전 덜 탄 것이더라. 젖은 연기와 쇠잔한 불꽃이 오히려 남아, 쉬지 않고 예악(穢惡)한 독취 훈증(薰蒸)한 열기를 가까이 못할지라.

각각 진으로 돌아왔더니, 제국 장수 즉시 우리 선중에 일제히 와서 우리 장수를 둘러 읍하고, 통관을 인하여 치사(致辭)하여 가로되,

"화공기책이 장군께서 나고 토벌대공이 장군에게 있으니, 이는 자못 하늘이 장군을 주셔서 제국 만인의 명을 살려 계셨다."

아장이 사례하여 가로되,

"하늘의 신령과 원수의 복력(福力)을 힘입어 흉적을 소탕하였고, 또한 오직 제위(諸位) 장군의 정성소감(情誠所感)이라. 외람한 장후를 황괴(惶愧)하여 감히 당치 못하겠노라."

원수가 군졸을 명령하여 섬으로 들어가 전사한 주검을 돌려오고, 남은 적을 뒤져 잡아 무찌르니라.

적이 모두 신장이 10척이요, 두면(頭面)의 크기가 마면(馬面) 같고, 흰 눈에 검은 안정(眼睛)이요, 털이 붉고 짧으며, 의복은 청흑색이요, 군기는 대소 화포, 장창이요 궁시는 없고, 총을 쏠 때 화승 아니 쓰고, 수만호 조각을 화문에 동여 방아쇠 퉁기어 쏘니 심히 편리하더라. 배는 청전선보다 장(長), 광(廣), 고(高)가 사오 분에 일이분 더하고, 선내에는 화피(樺皮)를 입히고, 매선에 큰 방을 두 칸씩 꾸미고, 나물밭과 짐승우리와 귀틀방아와 바퀴 꾸며 절로 도는 매등속이 다 갖추었으니, 세 나라 사람들이 자세히 전하더라.

대저 강약을 교량(較量)할진댄, 이번 모인 군사로는 진실로 가히 대적 못하리라. 만일 화공이 아니런들 8국 장사 다 흑룡강 어복에 장사하였을러라.

이때에 군졸의 주검에 찬 명패(名牌)로 아병(我兵) 98인 시체를 얻으니 전에 별치(別置)하였던 아홉 주검과 합하니 107인이 된지라. 총록(總錄)에 타점(打點)한 후에 귀록(鬼錄)을 다시 정서하고,또 다시 나무로 명패를 만들어 각각 채우고, 약손가락 하나를 끊어 그 본디 찼던 명패에 동여놓고 군중 음식을 합하여 베풀고, 신공이 귀록을 손으로 펴들어 107인 성명을 불러 합고왈(合告曰)

"네 혼과 네 백이 이 명패와 이 지골(指骨)에 의탁하여 나와 같이 나라에 돌아가서 각각 갈 바로 가라."

고하여 마치고, 드디어 대곡(大哭)하니, 군중이 다 울더라. 이에 주검을 도중(島中)에 묻고, 절지명패(切指名牌)를 한 궤에 넣어 봉하고, 전립(戰笠)과 가졌던 제구를 다 표하여 치중에 두니라. 칠처(七處) 군인은 다 주검을 불질러 뼈를 가져 견대(肩帶)에 넣어 가더라.

7월 10일에 원수 섬에서 황제께 첩서(捷書)를 올리고, 드디어 발선하여 물을 거슬러 떠나니, 제처 장사를 실은 배가 다 뒤에 좇더라. 남천(南天)을 바라보니 창파가 하늘에 접한지라. 아인(我人)이 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관예(官隸) 수배(數輩)로 혹 저도 불리고, 혹 해금도 켜게 하니, 원수가 듣고 제장더러 묻되,

"가취(歌吹)가 어느 밴고?"

대왈,

"조선 장선(將船)이니이다."

원수가 대희하여 부수(副帥)와 더불어 아선으로 올라앉으며, 일변 주식을 분부하니, 이때 마음에 사랑스럽기가 내 상관이나 다름이 없더라.

시황이 전포(戰袍)를 벗고 일어나 춤추어 승전곡(勝戰曲)을 노래하고, 이어서 여민락(與民樂)을 연주하니, 청한인(淸漢人)이 무릎을 두드려 들으매, 태평안락 음악의 곡절을 모르건마는, 다만 흠선하여 저의 신세 서러웠던지 모두 눈물을 흘리다가, 또한 다 일어나 춤추니 원부수(元副帥)가 서로 돌아보아 가로되,

"재예(才藝)와 기개(氣槪)가 심히 범상치 않으니, 우리 잡아두세."

하니 괘씸하더라.

주행(舟行) 열사흘이 되자, 22일에 비로소 물에 오르니 차이전(此以前)은 다 흑룡강이러라.

8월 5일에 송가라강에 이르니, 우리 사람이 둔취하였다가, 다투어 뺨을 부비며 슬퍼서 통곡하는 자 있더라. 이때우리 군량이 결핍하여 청나라 장수에게 청대(請貸)하니라.

20일에 몽고에 이르니, 근처에 부전(赴戰)하였던 군졸의 집 가속(家屬)이 다투어 주식(酒食)을 가져와 아장께 드려 가로되

"우리 부형(父兄) 양인 생환함은 장군께서 주신 바라. 어른의 은덕을 결초(結草)로도 갚지 못하겠소이다."

하더라.

9월 17일에 영고탑에 이르니 원수가 머물러 회칙(回勅)을 기다린지 여드레에 칙서 내리니, 이렇게 아국에 간섭함은 장사를 호귀 호송하란 말과 빌린 군량은 탕감하란 말이더라.

원수 용골대, 부수 부골대 각각 상이 비단〔彩繒〕20필, 부채〔扁子〕5개, 장도(裝刀) 3개, 수주머니〔繡囊〕2개씩이더라. 이때에 영고탑 부도통(副都統) 벼슬일러라.

원수가 군중에 있을 때는 규율이 심히 엄숙하더니, 토평 준사(竣事)한 관후낙이(寬厚樂易)하며, 아장에게 특별히 관곡하더라.

하루는 시황더러 일러 가로되,

"여기서 내 집에 가기가 10리라. 바라노니 날을 가리어 한번 찾아오시오."

시황이 허락하고 그날이 당하여 신공(申公)께 고하고 가니, 원수가 집문에 나와 영접하더라.

제택(第宅)이 장려하고 포진배설(鋪陳排設)이 심히 화치(華侈)하더라. 원수가 두 아들을 보이니, 나이 겨우13세, 11세더라. 원수가 시비(侍婢)를 눈으로 지휘하니, 시비가 물러가더라. 원수가

"가권(家眷)이 장군을 뵙고자 함이 날이 있었더니라."

잠시 후에 환패(環佩)소리가 낭랑(琅琅)하고, 시비가 세 부인을 전도(前導)하여 이르니, 시황이 돗자리를 피하여 북향하여 서매, 첫째 부인은 나이 40쯤 되고, 둘째,세째는 다 20세 전후더라. 다 용모가 단정하고 주취현황(朱翠眩煌)하더라. 삼부(三婦)가 다 시황에게 절하니, 시황이 답배(答拜)한대, 삼부가 다 시황에게 향하여 말을 하는데 알아듣지 못하나 응당 또한 그 말이 야양은덕(爺孃恩德) 같은 사연일러라. 삼부가 앉으니 시황 역시 앉으니라. 얼마 후 성비(盛備)한 음식을 앞에 베푸니, 시황이 저(箸)를 들어 쌍수로 잡아 읍하듯 하여 가로되,

"성찬을 싣고 돌아가 상관(上官)과 더불어 영광을 함께 하고 싶소이다."

원수가,

"이미 별도로 갖추어 보냈소이다."

이때에 시황이 약간 먹는 모양을 하다가 물리며 종자를 주어 가로되,

"돌아가 사졸과 먹으라."

하고, 차를 마신 다음에 고퇴(告退)하니, 삼부가 찼던 향낭(香囊)을 끌러 아들로 하여금 무릎 꿇어 드리니, 시황이 받아 절한대, 삼부 답배하고 드디어 서로 진중(珍重)함을 축수하여 작별하였다.

11월 10일에 호군을 성히 하고, 원수가 별도로 준합(樽?)을 가져다 송별하고, 신, 배 두 장수에게는 다 백금 10냥, 호백구 1영으로 선물하더라.

15일에 아장이 나라에 나선을 토평하고 환군하는 연유로 장계(狀啓)를 닦아 군관 5인을 정하여 주마발송(走馬發送)하니라.

이 날에 신공이 통음 대취하여, 곡일장(哭一場), 소일장(笑一場), 무일장(舞一場)하더니 시황더러 일러 가로되,

"하늘이 어찌하여 동토사람으로 하여금 정성애대(精誠愛戴)하는 데는 효충(效忠)을 못하고, 핍박 구책하는 데는 진충(盡忠)을 이렇듯 편벽되게 하느뇨. 돌려 생각하니 재천하신 고황제(高皇帝)께서 저 사심없는 하늘과 같으셨으니, 생령권고하시는 마음이 살아 계실 제나 다름 없으리라. 나선을 치는 데 청나라가 징병하여 합력함을 바랐을 따름이요, 전공책성(全功責成) 없었는데, 우리 손에 초멸(剿滅)되었으니, 이 어찌 심상한 일이리오. 나선을 이번에 멸치 못하였더라면 청나라의 징병을 또 당하리니, 아국은 무슨 운수며, 중원 유려(遺黎)의 액화는 어떠하겠느뇨. 합병(合兵)하던 처음에 장수와 군사를 분치(分置)하던 일과 황제의 급칙(急勅) 내려 개부(介夫), 왈개(曰介)의 향배를 살피라던 일과 토평 후에 제국 사녀(士女)의 환천희지(歡天喜地)하는 모양으로 볼진댄 청인의 계엄(戒嚴)하는 바와 각국의 진공(震恐)하는 바를 가히 알지라. 이로 말할진댄 우리 일을 비록 이르되, ‘대명조종(大明祖宗)에 보답(報答)이라’하여도 가(可)하니라."

북경이 통관 2인, 갑군 10인을 차정하여 호송하더라.

18일에 영고탑에서 떠나 12월 15일에 돌아와 두만강에 이르니, 얼음이 육지 같더라. 남안(南岸)을 바라보니 성(城) 위에 사람이 총총하고, 호망(呼望)하는 나발소리 들으니 반가운 마음 가누지 못하여, 인하여 천하게 반가운 정경을 생각게 하는지라. 연전에 강진(康津) 갔을 때에 표풍하였던 사람에게 들으니, ‘지금 명 천자께서 영락황제(永樂皇帝)시라 하는데, 충신, 열사 구름처럼 모이어서 구혈통곡(嘔血痛哭)하여 못내 일 경영이 없으매, 심지어 작척한 일본국(日本國)에 원병 청할 의론이 있다’하니, 수은망극(受恩罔極)한 우리 조선이 청나라에 징병되어 조대수(祖大壽) 진을 함몰하므로 징병 생의(生意) 없으신가. 지금에도 성주(星州) 포수 이사룡(李士龍)이 한둘뿐이 아니련만, 만일 남중(南中)이 주사(舟師)를 부스시면 조정이 필연코 울며 보낼 따름이니, 그 일 더욱 섧도다. 어느 날에 연경(燕京)에 환도(還都)하실꼬.

한창 느끼더니 부지불각에 하마포(下馬砲)를 무지하게 귀 곁에 놓으매, 깜짝 놀라 떨어질 제, 얼른 붙들어 등대하였던 남여(藍輿)에 앉히니 한 꿈과 같더라. 여러 군악을 일시에 합주(合奏)하여 맞으니, 소리가 굉장함이 헌원씨 동정악이 아마도 이러했던 듯하더라.

몰아 성문에 들어 문루(門樓)에 오르니, 육진 수령, 변장이 다 모이어 기다리더라.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100년이 지났으므로 전 세계적으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단, 나중에 출판된 판본이나 원본을 다른 언어로 옮긴 번역물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