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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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갈이쯤 되는 텃밭 이랑에 손이 곱게 돌아가 있다.

갈고 흙덩이 고르고 잔돌 줍고 한 것이나 풀포기 한 잎 거친 것 없는 것이나 갓골을 거뜬히 돌아친 것이나 이랑에 흙이 다복다복 북돋우인 것이라든지가 바지런하고 일솜씨 미끈한 사람의 할 일이로구나 하였다. 논밭 일은 못하였을망정 잘하고 못한 것이야 모를 게 있으랴.

갈보리를 벌써 뿌리었다기는 일고 김장 무배추로는 엄청 늦고 가랑파 씨를 뿌린 성싶다.

참새떼가 까맣게 날라와 안기에 황겁히 활개를 치며『우여어!』소리를 질렀더니 그만 휘잉! 휘잉! 소리를 내며 쫓기어간다.

그도 그럴 적뿐이요 새도 눈치코치를 보고 오는 셈인지 어느 겨를에 또 날라와 짓바수는 것이다.

밭 임자의 품팔이꾼이 아닌 이상에야 한두 번이지 한나절 위한하고 새를 보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번에는 난데없는 비둘기떼가 한 오십 마리 날라오더니 이것은 네브 카드네살의 군대들이나 되는구나.

이렇게 한바탕 치르고 나도 남을 것이 있는 것인가 하도 딱하기에 밭 임자인 듯한 이를 멀리 불러 물어 보았다.

“씨갑씨 뿌려둔 것은 비둘기 밥 대주라고 한 게요?”

“그 어떻겁니까. 악을 쓰고 좇아도 하는 수 없으니.”

“이 근처엔 비둘기가 그리 많소?”

“원한경 원목사집 비둘긴데 하도 파먹기에 한번은 가서 사설을 했더니 자기네도 할 수 없다는 겁디다. 몇 마리 사랑 탐으로 기른 것이 남의 집 비둘기까지 달고 들어와 북새를 노니 거두어 먹이지도 않는 바에야 우정 좇아낼 수도 없다는 겁니다.”

“비둘기도 양옥집 그늘이 좋은 게지요.”

“총으로 쏘던지 잡어죽이든지 맘대로 하라곤 하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내버려두지요.”

농사 끝이란 희한한 것이 아닌가. 새한테 먹히고, 벌레도 한몫 태우고 풍재(風災) 수재(水災) 한재(旱災)를 겪고 도지 되고 짐수 치르고 비둘기한테 짓바시우고 그래도 남는다는 것은 그래도 농사 끝 밖에 없다는 것인가.

밭 임자는 남의 일 이야기하듯 하고 간 후에 열 두어 살 전후쯤 된, 남매간인 듯한 아이들 둘이 깨여진 남비쪽 생철쪽을 들고 나와 밭머리에 진을 치는 것이다.

이건 곡하는 것인지 노래 부르는 것인지 야릇하게도 서러운 푸념이나 애원이 아닌가.

날짐승에게도 애원은 통한다.

유유히 날라가는 것이로구나.

날김생도 워낙 억세고 보면 사람도 쇠를 치며 우는 수밖에 없으렸다.

농가 아이들을 괴임성스럽게 볼 수가 없다.

첫째 그들은 사나이니까 머리를 깎았고 계집아이니까 머리가 있을 뿐이요 몸에 걸친 것이 그저 구별과 이름이 부를 수는 있다. 그들의 치레와 치장이란 이에 그치고 만다.

허수아비는 이보다 더 허름한 옷을 입었다. 그래서 날김생들에게 영(令)이 서지 않는다.

그들은 철없어 복스런 웃음을 웃을 줄 모르고 웃음이 절로 어여뻐지는 옴식옴식 패이고 펴고 하는 볼이 없다.

그들은 씩씩한 물기와 이글거리는 피빛이 없고 흙빛과 함께 검고 푸르다.

팔과 다리는 파리하고 으실 뿐이다.

그들은 영양이 없이도 앓지 않는다.

눈도 아모 날래고 사나운 열기가 없다. 슬프지도 아니한 눈이다.

좀처럼 울지도 아니한다----노래와 춤은 커니와.

그들은 이 가난하고 꾀죄죄한 자연에 나면서부터 견디고 관습이 익어 왔다.

주리고 헐벗은 고독함에서 사람이란 인내와 단련이 필요한 것이 되겠으나 그들은 새삼스럽게 노력을 들이지 아니하여도 된다.

그들은 괴롭지도 아니하다.

그들은 세상에도 슬프게 생긴 무덤과 이웃하여 산다.

그들은 흙과 돌로 얽고 다시 흙으로 칠한 방 안에서 흙냄새가 맡아지지 아니한다.

그들은 어버이와 수척한 가축과 서로서로 숨소리와 잠꼬대를 하며 잔다.

그들의 어머니는 명절날이면 횟배가 아프다.

그들의 아버지는 명절날에 취하고 운다.

남부 이태리보담 푸르고 곱다는 하늘도 어쩐지 영원히 딴 데로만 향하여 한눈파는 듯하여 구름도 꽃도 아무 장식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