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슬픈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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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밤에 안식하시옵니까.
내가 홀로 속엣소리로 그대의 기거를 문의할삼아도 어찌 홀한 말로 부칠 법도 한 일이 아니오니까.

무슨 말씀으로나 좀더 높일 만한 좀 더 그대께 마땅한 언사가 없으오리까.

눈감고 자는 비둘기보다도, 꽃 그림자 옮기는 겨를에 여미며 자는 꽃봉오리보다도, 어여삐 자시올 그대여!

그대의 눈을 들어 풀이하오리까.
속속들이 맑고 푸른 호수가 한 쌍.
밤은 한 폭 그대의 호수에 깃들이기 위하여 있는 것이오리까.
내가 어찌 감히 금성(金星) 노릇하여 그대 호수에 잠길 법도 한 일이오니까.

단정히 여미신 입시울, 오오, 나의 예(禮)가 혹시 흐트러질까 하야 다시 가다듬고 풀이하겠나이다.

여러 가지 연유가 있사오나 마침내 그대를 암표범처럼 두리고 엄위롭게 우러르는 까닭은 거기 있나이다.

아직 남의 자취가 놓이지 못한, 아직도 오를 성봉(聖峰)이 남아 있을 량이면, 오직 그대의 눈[雪]에 더 희신 코, 그러기에 불행하게도 계절이 난만(爛漫)할지라도 항시 고산식물의 향기 외에 맡으시지 아니하시옵니다.

경건히도 조심조심히 그대의 이마를 우러르고 다시 뺨을 지나 그대의 흑단빛 머리에 겨우겨우 숨으신 그대의 귀에 이르겠나이다.

희랍에도 이오니아 바닷가에서 본 적도 한 조개껍질, 항시 듣기 위한 자세였으나 무엇을 듣기 위함이었는지 알 리 없는 것이었나이다.

기름같이 잠잠한 바다, 아주 푸른 하늘, 갈매기가 앉아도 알 수 없이 흰모래, 거기 아무 것도 들릴 것을 찾지 못한 적에 조개껍질은 한갈로 듣는 귀를 잠착히 열고 있기에 나는 그때부터 아주 외로운 나그네인 것을 깨달았나이다.

마침내 이 세계는 비인 껍질에 지나지 아니한 것이, 하늘이 쓰이우고 바다가 돌고 하기로소니 그것은 결국 딴 세계의 껍질에 지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조개껍질이 잠착히 듣는 것이 실로 다른 세계의 것이었음에 틀림없었거니와 내가 어찌 서럽게 돌아서지 아니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람소리도 무슨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저 겨우 어눌한 소리로 떠돌아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대 귀에 가까이 내가 방황할 때 나는 그저 외로이 사라질 나그네에 지나지 아니하옵니다.
그대 귀는 이 밤에도 다만 듣기 위한 맵시로만 열리어 계시기에!
이 소란한 세상에서도 그대 귀 기슭을 들러 다만 주검같이 고요한 이오니아 바다를 보았음이로소이다.

이제 다시 그대의 깊고 깊으신 안으로 감히 들겠나이다.

심수한 바다 속속에 온갖 신비로운 산호를 간직하듯이 그대 안에 가지가지 귀하고 보배로운 것이 갖추어 계십니다.
먼저 놀라울 일은 어찌면 그렇게 속속드리 좋은 것을 지니고 계신 것이옵니까.

심장(心臟), 얼마나 진기한 것이옵니까.
명장(名匠) 희랍의 손으로 탄생한 불세출의 걸작인 뮤즈로도 이 심장을 차지 못하고 나온 탓으로 마침내 미술관에서 슬픔 세월을 보내고 마는 것이겠는데 어찌면 이러한 것을 가지신 것이옵니까.
생명의 성화(聖火)를 끊임없이 나르는 백금보다도 값진 도가니인가 하오면 하늘과 따의 유구한 전통인 사랑을 모시는 성전인가 하옵니다.

빛이 항시 농염하게 붉으신 것이 그러한 증좌(證左)로소이다.
그러나 간혹 그대가 세상에 향하사 창을 열으실 때 심장은 수치를 느끼시기 가장 쉬웁기에 영영 안에 숨어버리신 것이로소이다.

그 외에 폐는 얼마나 화려하고 신선한 것이오며 간(肝)과 담(膽)은 얼마나 요염하고 심각한신 것이옵니까.

그러나 이들은 지나치게 빛깔로 의논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그 외에 그윽한 골 안에 흐르는 시내요 신비한 강으로 풀이할 것도 있으시오나 대강 섭렵하야 지나옵고,

해가 솟는 듯 달이 뜨는 듯 옥토끼가 조는 듯 뛰는 듯 미묘한 신축과 만곡을 가진 적은 언덕으로 비유할 것도 둘이 있으십니다.

이러 이러하게 그대를 풀이하는 동안에 나는 미궁에 낯선 나그네와 같이 그만 길을 잃고 헤매겠나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미 모이시고 옮기시고 마련되시고 배치와 균형이 완전하신 한 덩이로 계시어 상아(象牙)와 같은 손을 여미시고 발을 고귀하게 포기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혜와 기도와 호흡으로 순수하게 통일하셨나이다.
그러나 완미하신 그대를 풀이하올 때 그대의 위치와 주위를 또한 반성치 아니할 수 없나이다.

거듭 말씀 번거로우나 원래 이 세상은 비인 껍질같이 허탄하온데 그 중에도 어찌하사 고독의 성사(城舍)를 차정(差定)하여 계신 것이옵니까.
그리고도 다시 명철한 비애로 방석을 삼아 누워계신 것이옵니까.

이것이 나로는 매우 슬픈 일이기에 한밤에 짖지도 못하올 암담한 삽살개와 같이 창백한 찬 달과 함께 그대의 고독한 성사를 돌고 돌아 수직(守直)하고 탄식하나이다.

불길한 예감에 떨고 있노니 그대의 사랑과 고독과 정진으로 인하야 그대는 그대의 온갖 미(美)와 덕(德)과 화려한 사지(四肢)에서, 오오,
그대의 전아 찬란한 괴체(塊體)에서 탈각하시어 따로 따기실 아침이 머지않아 올까 하옵니다.

그날 아침에도 그대의 귀는 이오니아 바닷가의 흰 조개껍질같이 역시 듣는 맵시로만 열고 계시겠습니까.

흰 나리꽃으로 마지막 장식을 하여드리고 나도 이 이오니아 바닷가를 떠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