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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곡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電話[전화]의 女人[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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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열한 시를 조금 넘은 을지로 네거리 ─ 이맘 때쯤 되고 보면 이 일대 에 걸친 중심지는 도회적인 감각과 정열 속에서 완전히 무르익어 가기 시작 할 무렵이다.

파동치는 인파를 좌우로 가르며 하이야, 자가용, 찦차, 뻐스, 츄럭, 쓰리·코 오터, 자전거, 전차가 홍수처럼 도도히 흘었고 그 끊임 없이 흐느적거리는 거대한 율동에 반주나 하드시 경적과 궤음과 확성기가 쉴새 없이 소리소리 를 질렀다.

그 어지러운 율동과 소란한 잡음 속에서 삼십 대의 쩌널리스트 고영훈(高永 薰)은 도회적인 정열과 감각을 거스름 없이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한 사람의 순수한 도회의 아들이었다. 도회서 나고 도회에게 자랐다. 눈이 뒤솝히고 신경이 경련을 이르키는 이 어지러운 율동과 소란한 잡음이 그에게 있어서는 한 잔의 모 ─ 닝·커피와 함께 없어서는 아니 될 자극제가 이미 되어 있는 것이다.

하루에 단 한 시간씩이라도 이 도회적인 정열과 감각 속에 젖어 보지 않고 서는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할 만큼 그의 생리는 잘 조정(調整)되어 있었다.

『오늘 쯤 은주에게서 또 편지가 왔을는지 모른다.』

여성 잡지「신여인」(新女人)의 편즙장 고영훈은 약혼자인 한은주(韓恩珠) 의 총명한 모습을 무심중 머리에 그렸다.

그것은 고영훈이가 을지로 입구에서 뻐쓰로부터 뛰어 내리는 순간의 일이 었다.

한 주일에 한번씩, 혹은 열흘에 한번씩은 꼭꼭 편지가 온다. 전화로나 또는 만나서도 넉넉히 될 일을 은주는 곧잘 편지로 쓴다.

『어젯 밤엔 영훈씨,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주무셨는 지, 똑 바로 한번적어 보내 보세요. 제 생각, 한번도 안 하고 주무셨대도 좋 아요. 나무랠 은주는 이미 아니니까 어니 한번 양심적으로 적어 보내 보세 요. 허위가 있는지 없는지, 제가 그걸 엄격하게 채점(採點)을 해서 요 다음 만날 때 갖구 가지요.』

이런 편지를 은주는 썼다.

거기 대한 회답을 써 보낸 것이 얼마 전이니까 오늘 쯤 편지로나 혹은 전 화로나 어디서 좀 만나자는 기별이 있을 상 싶어 고영훈은 적지 않은 기대 로 마음이 부프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의 회답을 엄격하게 채점해 갖고 오겠다는 은주를, 마치 소학생 들이 시험 답안을 갖고 들어 오는 선생님을 기다리는 것처럼 영훈은 기다려 본다.

은주는 본래 영훈이가 「신여인」사에서 같이 데리고 있던 여기자였다. 그러 던 것이 금년 봄에 정식으로 약혼을 하면서부터 사내의 분위기 같은 것을 고려하여 퇴사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빈둥빈둥 놀고만 있을 수도 없는 집안 형편이기도 했고 또는 결혼 후의 생활 타개를 위한 방편으로서도 무슨 확실한 기술 하 나를 습득해 둘 필요를 절실히 느낀 끝에 연중을 더듬어「샹하이」양재점의 견습생으로 들어왔다.

「샹하이」양재점은 종로 삼가에 있었다. 자력도 있고 기술도 능하여 종로 일대에서는 판을치는 양재점이다. 해방 후 상해가 돌아 왔다고 해서「샹하 이」양재점이 되었고 그 여주인을「마담·샹하이」라고 사람들은 불렀다.

「신여인」잡지에「아·라·모 ─ 드」하는 폐 ─ 지가 있어 여성들의 신유행 복장을 매월 소개하는 집필자로서 마담·샹하이가 등장을 했다. 그러한 연줄 로써 은주는 비교적 쉽사리 마담에게 채용이 되었고 대단히 총명하다 하여 견습생이라도 봉급을 지불하였다. 그것이 벌써 지난 봄철의 일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기술의 능숙과 함께 보수도 올랐다.

잡지 기자로서 쨍쨍 울리는 고관 대작들과 인터뷰를 다니던 은주가 일개 양재점의 견습생으로 들어 가는 데는 다소간의 망서림도 없지 않았지만, 그 러나 그러한 체면문제 같은 것은 비교적 쉽사리 초월할 수 있는 생활력을 은주는 갖고 있었다.

『견습생임 어때요? 체면 때문에 몸을 망칠만큼 어리석은 은주는 되고 싶 지 않아요. 영훈씨가 몸이라도 아파서 드러누음 누가 쌀 갖다 주고 찬 갖다 준대요?』

영훈이가 다소 주저하는 빛을 보고 은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은주를 영훈은 지극히 탐탁하게 여겨 온 것이다.

아니, 결혼을 하면 영훈이가 드러누어도 무방하도록 당분간 어린애는 낳지 말고 같이 벌어서 같이 먹자고 했다. 사실 편즙장이라고 직함 만은 크지만 사의 보수는 뻔했기 때문이다.

뻐쓰에서 내린 영훈은 혼잡한 네길어름을 건넜다.「신여인」사 사무실은 바 로 이 어지러운 을지로 네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Y삘딩 이층에 있 다.

영훈은 휘파람을 불며 Y삘딩의 육중한 유리 문을 어깨 한 쪽으로 떠밀고 들어 갔다. 어제 밤 늦게까지 사에 남아 내달 편즙을 끝마치고 인쇄소로 넘 긴 것이 영훈으로 하여금 어깨를 가볍게 하였다. 심신이 다 같이 상쾌한 출 근이었다.

『편지가 분명히 와 있을 거야.』

소라 형으로 빵빵 돌면서 올라 가게 된 충충대를 오르면서 영훈의 휘파람 은「이탈리안·까 ─ 든」─

『여어, 꿈·모 ─ 닝!』

사무실로 들어 서면서 영훈은 말했다.

『꿈·모 ─ 닝은 다소 철이 늦소.』

동료들과 함께 시선을 들던 영업주방 최성진(崔成鎭)의 대꾸다.

『천만에! 쩌널리스트의 아침은 오전 열 한시를 두고 하는 말이오.』

『옳소!』

부하 사원들이 환성으로 영접을 했다. 이래서 고영훈 편즙장은 인끼가 있는 것이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사무실이다. 한 쪽이 편즙부, 한 쪽이 영업부다. 열명 남짓한 사원이었다. 사장실이라고 씨어진 유리 문이 사원들 등 뒤로 넘겨다 보였다.

『어쨌든 고선생,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최부장은 그러면서 부원들과 함께 빙글빙글 웃었다.

『허어, 최선생이 나를 기다렸다? 모―닝·커피 한잔 내고 싶으시우?』

영훈은 걸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책상 위에 보얗게 내려앉은 먼지를 원고로 뻑뻑 문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두 고선생, 오늘은 한턱 톡톡히 해얄 걸요.』

최부장은 영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래 위를 한번 쭉 훑어 보았다.

『한 턱 할만한 일이 있다면 할 수 밖에……』

『한턱 할만 한 일이 있기에 하는 말이 아니오?』

최부장은 회전 의자를 한번 삥 돌려 놓고 앉으면서

『한 시간 동안에 전화가 세 번 ─ 그것도 꾀꼬리 같은 목소리의 젊은 여 인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지 않소? 에헴 ─』

사원들이 쿡쿡 웃었다. 영훈은 담배 한 꼬치를 붙여 물며

『허어, 꾀꼬리는 다소 과장이시군요.』

물어보지 않아도 은주의 전화임에 틀림이 없다.

『이거 왜 이러시우? 그저 그만 해두면 서로가 다 알 법한 일이구 헌 데……』

『그건 아마 그 방면의 선수인 영업 부장께 걸린 전화겠지요.』

영훈도 녹녹지는 않다.

글쎄 그 놈의 전화가 『 , 나한테 걸린 게라구……그렇지 않아두 오늘쯤 걸려 올 전화두 있구해서, 다른 사람들이 받으려는 걸 내가 빼앗어 받군 했지만 두……아, 글쎄 고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고선생만 자꾸 대달라는군요.』

『하하하……거 정말 딱한 걸!』

부원 하나가 응원까지 했다.

『어디 중고품 쯤이면 하나 슬쩍 이리로 돌려 보구려.』

여사원 하나가 얼굴을 붉혔다.

은주 어머니의 병환이 급작히 더쳤는지도 몰랐다.

월여전부터 가슴 앓이로 병상에 누어 있는 은주의 노모를 위해서 한약 한 제를 지어다 준 것이 한 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며 영훈은 아침 나절에 배달된 우편물 속에서 은주의 필 적을 발견하고 부리나케 봉함을 뗐다.

『─ 요지음 매일 밤처럼 저는 영훈씨의 꿈을 꾼답니다. 어제도, 그리고 그 제도……영훈씨가 지어다 주신 한약을 잡수시고 어머니의 병환은 쾌차! 이삼 일 내로 방문 혹은 전화를 걸 예정! 오늘은 요만!』

그저께 부친 편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걸렸다는 전화가 사실이라면 은주임 에 틀림 없었고 병환은 쾌차하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 째르랑…….

─ 째르랑…….

최부장의 싸이드·테이블 위에 전화가 올렸다.

『애크, 또 걸렸다!』

부원들이 싱글싱글 또 웃고 있는데 최부장은 얼른 손을 뻗쳐 수화기를 들 었다.

『네네, 신여인삽니다. 어디십니까?……』

아주 엄숙한 표정에다 점잖은 음성이다.

『저어……저어……』

벌써 세번째나 걸려 온 바로 아까 그 꾀꼬리 목소리였다.

『에크, 또 꾀꼬리다!』

최부장은 송화기 구멍을 손바닥으로 탁 막으며 영훈을 향하여 눈 하나를 싱긋이 감아 보인 후에 손을 뗐다.

『네네, 알겠읍니다. 저 고선생 말씀이시죠?』

『네, 고선생……고영훈씨, 아직 출근 안 하셨나요?』

『아, 나오셨읍니다. 지금 막 나오시는 길인데, 잠간만 기다리시지요. 곧 대 드리겠읍니다. 에헴 ——』

그리고는 방 안이 떠나갈 것 같이 커다란 목소리로

『고선생, 전화 받으십시오!』

하고 고함을 치면서 원숭이처럼 얼굴을 찌프리고 부원들을 한번 휘이 둘러 보았다. 부원들이 펜을 멈추고 또 쿡쿡 웃었다.

영훈은 미소를 지으며 싸이드‧테이불로 가서 수화기를 드는데

『그래두 한 턱 안 할테요?』

최부장은 영훈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쿠욱 찔렀다.

『고영훈입니다. 누구십니까?』

『아, 고선생! ——』

낮으나마 극히 흥분을 띤 여자의 음성이었다. 예기했던 한은주의 목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傳說[전설]의 女主人公[여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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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바루 고영훈입니다.』

『아, 영……영훈씨……』

동굴동굴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네, 제가 고영훈……』

『저어, 저는……절 몰라 보시겠어요?』

누구의 음성인지, 통 기억이 없다.

『글쎄 올시다. 도무지 기억이 없읍니다.』

『그러실 거야요. 몰라 보실 거야요.』

『누구신데요?……』

『저는 정말……제가 누구라고 알으켜 드리기가 무서워요. 고선생은 저 를……』

전화의 목소리는 영훈을 무척 반기면서도 한편 또 무척 망서리고 있었다.

『………………』

그 순간, 고영훈은 아득한 기억의 실마리 같은 것을 한 오락 후딱 붙잡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십년 전 일이다. 그럴 리는 또한 있을 수도 없 었다. 부질 없는 기억의 실마리였다고, 영훈은 마음 속으로 돌이돌이를 했 다.

『옛날 이야기에 나왔던 인물……』

『뭐라구요?……』

『영훈씨에게 뺨 한대 얻어 맞고……울면서 떠나 가던……』

『아, 역시 ‥…?』

『아시겠어요?』

『아, 알 것 같습니다.』

한 토막 전설인 양 까맣게 녹쓸었던 기억이었다. 그 아득한 기억이 그 유 달리 동굴동굴한 목소리 속에서 아직도 한 오락 살아 있는 것이 영훈에게는 기적과 같았다.

『기억해 주셨다니, 고마워요.』

『………………』

『영훈씨!』

『………………』

『왜 대답이 없으세요?』

『………………』

대답을 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말로 대꾸를 해야만 될는지, 영훈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왜 그처럼 잠자코만 계셔요? 영훈씨! 고선생!……』

여자의 음성이 차차 격해 졌다.

『연숙씨, 어서 말을 하세요.』

영훈의 어조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열을 띠워 왔다.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아니, 이북서 언제 오셨읍니까?』

『삼년 전, 일사 후퇴 때…… 그 동안 쭉 영훈씨의 처소를 찾아 봤지만 통 알 수가 없어서…… 며칠 전에야 거기 계신 줄을 알았어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서대문 어떤 약방에서 걸고 있어요. 저 같은 것, 만나기 싫으시겠지 만……한번 만나 주실수있으면……저 종로로 지금 나갈가 해요. 종각 앞에 서 만나요. 거기서 제가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 종각 앞에서……』

『형편이 어떠실는지……?』

『………………』

영훈은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열두 시 십분 전이다. 은주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것만 같아서 잠시 망서리다가

『그럼 저도 그리로 가지요.』

『그럼 꼭……』

영훈은 전화를 끊었다.

흥 종각 『 , 앞에서 … 이야기가 약간 로맨틱한 걸! 비단결 같아!』

최부장은 빙글거리며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여인! 신문 소설의 소제목은 확실히 될 거요.』

『하하핫……』

부원들은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나 고영훈은 웃지를 못했다. 은주의 생각으로써 통일이 되어 있던 명 랑한 감정이 점점 두 갈래로 쪼개지기 시작하였다.

『연숙이가 왔다!』

영훈의 감정이 차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책상 앞에 앉아서 영훈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 서면서 모자를 썼다.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정오의 태양이 가로수에 눈부시다. 네거리 한 가운 데서 교통 순경은 여전히 춤을 추었고 확성기는 끊임 없이 아우성을 쳤다.

『그 사람이 왔다.』

찾아 와서는 아니 될 백연숙(白蓮淑)이가 찾아 왔다. 그것은 진정 꿈과 같 은 일이었다. 꿈길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한 증거로, 가로수에 반 사되는 태양이 지나치게 눈부시다. 소란한 잡음이 일순간 영훈의 청각에서 중단되기도 했다. 통행인의 팔고비를 건드리다가 논총도 한두번 맞았다.

진부한 어투나마 헤어진지 이삼년 동안은 오매에 그리던 백연숙이었다. 그 것은 영훈에게 있어서나 연숙이에게 있어서나 글자 그대로의 첫 사랑이었 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웠던 첫 사랑은 그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비극 소 설의 주인공을 만들어 버린채 간단히 막을 닫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십여년 전 일이다. 고영훈과 백연숙은 가난한 전문학교 학생과 부유한 집 의 딸이라는 자격을 가지고 사랑을 속삭여 왔다.

고향이 황해도인 백연숙은 학교 기숙사에서 무슨 연애 소설에 등장하는 여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낮이면 푸른 하늘 가를 바라보고 밤이면 조각달을 하 염없이 쳐다보면서 지나치게 살지고 기름진 자기의 젊은 꿈을 어루만져 보 곤 하였다.

그러나 백연숙의 가슴 속 한 구석에는 연애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 은 지극히 낭만적인 아봔츌이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고 또는 그와 반대로 꿈 과 현실을 칼로 베이드시 구별할 줄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인지도 몰 랐다.

어쨌든 비극은 왔다.

백연숙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출신인 김 모라는 대지주의 장남이 청혼을 해 왔을 때 연숙은 자기와 , 영훈의 애정 문제를 한낱 아름다운 신화인 양 과거의 사실로 흘러 보내고 말았다.

그것은 그 누구처럼 부모의 강요로서 이루워진 것도 아니었고 무슨 피치 못할 딱한 사정이 있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모두가 연숙 자신의 또렷한 계 산 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영훈과의 한토막 꿈을 청춘의 금자탑처럼 가슴 속 한 구석에 곱게 모셔 둔채 백연숙은 대담하게도 김석호와 결혼을 했다.

말하자면 백연숙은 연애 비극의 주인공인 동시에 비극의 작자이기도 했다.

시를 좋아 한다는 가난한 사나이와 냄비 밥을 끓여 먹으면서 일생을 낭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은 영화나 소설에서 밖에 더 생각할 수 없는 연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종류의 순정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것과 같은 삭막한 인생도 또한 연숙의 생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고……』

그렇게 생각한 연숙이었기에 영훈과 최후의 작별을 하는 날, 자기가 흘린 눈물의 가치를 결코 과소 평가 하지도 않은 대신 황해도 부호의 며느리가 되어 가는 날 느낀 일종의 행복감도 또한 거짓 감정은 아니었다.

『영훈씨는 저를 마음껏 원망해도 좋아요. 이 넓은 세상에서 자기가 그 누 구에게 애정의 원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을……저는 끝 없는 행복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살수가 있으니까요.』

『누구나가 다 하는, 판에 박은 말이다! 네가 싫어져서 내가 간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 법이다.』

영훈은 단지 그 한 마디 뿐, 별반 연숙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니, 원망할 이유를 갖지 못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 반을 당했다고 해서 그를 원망한다는 것은 이미 낡은 도덕에 속하는 감정이 었다. 애정의 일방적 강요라는 것은 벌써 한낱 봉건적인 유물로서 밖에는 더 대우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렸을 적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연숙의 안일한 육체와 화려한 감정은 넉넉한 살림살이를 베풀 수 있는 결혼 생활을 원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 자체로 본다면 당연히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있어서 이성의 자기 설복을 의미했을 뿐, 영훈의 손 길은 최후의 선물로 연숙의 뺨 한대를 보기 좋게 내갈기고 일어섰던 것이 다.

그것은 그 해 가을 늦은 계절에 속하는 어느 날 밤,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어떤 조그만 중국 요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해 겨울 철에 영훈은 학도병으로 뽑히어 훈련을 받다가 이듬 해 정월 초순에 북지로 출정하였다 . 일제가 손을 들고 팔·일오 해방이 왔다. 영훈 이가 서울로 돌아 온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그 후, 영훈은 신문사와 중학교를 비롯하여 여기저기로 직업을 찾아 다니 는 동안에 여성과의 교제도 몇번 있었으나 약혼까지에 이른 것은 한은주 뿐 이었다. 「신여인」의 편즙장의 일을 맡아 보게 된 것은 대구서 환도해 오 면서 부터였다.

『일·사 후퇴와 함께 남하한 백연숙이!』

그 연숙이가 삼년 동안을 쭉 영훈의 처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십여년 동안에 있어서의 연숙의 변모를 영훈은 이것 저것으로 머리에 그려 보며 종로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가고 있었다.

『혼자서 넘어 오지는 않았을테지. 가족이랑 남편이랑……』

그런 것을 생각하며 광교 다릿 목까지 다달았을 때였다.

『아이, 잘 됐어요!』

한 눈을 팔며 걸어 가던 영훈의 코 앞에서 낯 익은 목소리 하나가 톡 떨어 졌다.

『아, 은주 아니야?……』

하마트면 영훈은 은주의 구두 코를 밟을 번 했다.

『잘못 함 놓칠 번 했어요.』

영훈의 아래 위를 은주는 다행이라는 드시 훑어 본다.

『허어, 무슨 소린데?……』

타원형의 달걀 같은 은주의 보드러운 얼굴이 약간 무르익어 있었다. 숨이 가쁜지, 두 손으로 젖 가슴을 짚고 심호흡을 한두번 했다. 발랄한 젊은 육 체를 팽팽히 갑싼 선명한 그리인 빛 투·피스가 고영훈의 고색 창연한 낭만 적 추억을 보기 좋게 깨뜨려 버리고 있었다.

『내 참, 계산은 잘 했어! 빠름 광교 다리 목, 늦음 종로 네거리에서 붙잡 을 꺼라고 생각했죠.』

『그건 또 어떻게?……』

영훈은 어리둥절 했다.

『사에 전화를 걸었더니만 인제 방금 종로로 나갔다지 않어요?……아이, 참 난 놓질가 봐서 혼이 났네!』

온주의 눈 꼬리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영훈의 표정이 약간 당황을 하며

『놓질가 봐 혼이 나다니, 누구가 도망을 친댔어?……』

그리고 나서 영훈은 후딱 멀리 종각 쪽을 바라다 보았다. 은주의 날샌 두 눈동자가 생글생글 코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종각 앞으로 오락가 락하는 통행인의 모습을 마음 놓고 골라 볼 여유가 영훈에게는 없다.

『누굴 찾으슈?』

은주의 감각이 너무나 예민하다. 한번 걸핏 종각 쪽을 바라다 보았을 뿐인 데 사냥개 모양 은주의 후각이 날새게 달려 왔다.

『누가 누굴 찾는댔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훈의 혀 끝이 거짓 말을 했다.

그것은 진정 고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 그런지, 영훈의 혀 끝은 영훈 의 의식을 무시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

순간, 은주의 표정이 후딱 어두어 졌다.

거리의 人魚[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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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 앞에서 기다리고 섰을 옛날의 애인 백연숙과 광교 다리에서 우연히 만난 약혼자 은주와 ─ 이 두 사람의 여인 사이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영훈은 우두머니 서 있었다. 거리가 멀기나 하면 또 모르거니와 종각과 광 교 다리는 지척지간이다. 한은주는 어딘가 다소 미심한 표정으로 종각 쪽을 핼끔 바라보며

『정말 누굴 만나려는 거 아냐요?』

『글쎄 만나긴 누굴 만나?……』

아까는 혀 끝이 무의식적으로 돌아 주었지만 이번은 의식적이다. 일단 부 정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인정하기가 어쩐지 싫었다.

『다소 수상하긴 하지만 관용하지!』

은주의 표정이 다시금 평온해 졌다.

『관용을 하다니……무슨 말인데……?』

다소의 불안을 느끼며 영훈은 물었다.

『관대하게 용서한다는 말, 모르세요?』

『죄 없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법두 세상에 있었나?』

『죄가 없음 다행이지만 죄가 있어두 용서를 한다는 밖에……』

『오늘은 또 만나기가 바쁘게 왜 자꾸만 죄인 취급이야?』

『글쎄 죄인이라두 용서를 함 되잖아요? 엄벌주의 보다 관용주의가 결과로 는 언제든지 효과적인 걸요』

『허어, 이러다간 정말로 죄인이 되구 마는 걸!』

고영훈은 다소 초조한 눈동자로 또 한번 멀리 종각 쪽을 후딱 바라보고 나 서

『어쨌든 은주는 명랑해서 좋아.』

『난 영훈씰 만남 명랑해 지는 버릇을 가졌으니까요. 나쁜 버릇이죠?』

『음 나쁜 버릇이야.』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영훈의 그러한 농담을 은주는 어째 그런지 종전처럼 농담으로는 받 아 주지 않고 잠시 영훈을 말똥말똥 쳐다만 보다가

『인제부턴 그 나쁜 버릇을 고쳐야겠어요.』

은주의 표정이 약간 어두어 졌다.

순간, 영훈은 어린애처럼 귀여운 일찰나를 약혼자의 그 어두어진 표정 위 에서 불현듯 느끼는 것이다.

『저번에 지어다 주신 약을 잡수시구 어머니가 인제 아주 쾌차하셨어요.

그래서 치사도 할겸, 같이 진고개로 나가서 점심을 한 턱 할려구 온 것이예 요.』

『아 점심을……』

영훈은 가슴이 덜컹했다.

어머니의 병환이 쾌차하다는 것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 없었다. 그리고 은 주와 식사를 나누는 것도 또한 유쾌한 일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백연숙과의 약속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할 것인가?……영훈은 적지 않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대문 쪽에서 전화를 걸었으니까 자기처럼 빨리 오지는 못했을 백연숙을 영훈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은주의 다짐이 다 시 튀어 나왔다.

『점심 아직 안하셨죠?』

『아, 아직……』

『제가 점심 사 드릴테예요. 영훈씨가 좋아 하시는 오이스터·후라이와 맥 주 한 병……』

『아, 고……고맙소. 그런데……』

마음의 당황을 보이지 않으려고 영훈은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리 표정이 크세요? 암만 해두 다소는 수상한 걸요?』

방글방글 웃어 넘기면서 은주는 힐난을 하여 본다.

그러나 방글방글 웃고 있는 그 얼굴 한 껍질 밑에는 종각 앞에서 영훈을 기다리고 있을 그 어쩐 미지의 여자와 열심히 씨름을 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심각한 얼굴을 은주는 분명히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한은주는 오늘의 약혼자 고영훈이가 이처럼 당황하는 이유를 빤히 알고 있었다.

은주가 오늘 영훈을 데리고 진고개로 나가서 점심을 한턱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벌서 한 주일 전부터 품어 온 달콤한 플랜이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가 은주의 월급 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명랑한 기분으로 출근할 수 있었던 은주였으며 오정 때까지의 몇 시간을 지극히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 리고 있었던 은주였다.

열한 시 반쯤 되었을 무렵에 은주는「신여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 니 만나려는 영훈은 나오지 않고 그대신 능글맞은 굵다란 목소리가 튀어 나 오면서 하는 말이

『아, 인제 방금 당신을 만나러 나갔답니다. 하하하……』

하고 지극히 유둘유둘한 웃음 소리가 흘러 나오지 않는가. 그래 은주는 영 문을 모르고

『네? 저를 만나려구요?……』

하고 물었더니 그 기름끼가 뚝뚝 흐르는것 같은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왜 이러십니까? 아니, 고 새를 못 참아서 또 걸었군요! 하하하……종각 앞에서 만나자구 지금 막 뛰쳐 나갔답니다요. ── 쳇, 오늘은 아침부터 신 세가 왜 이리 따분할가?……』

『네? 뭐라구요?……』

『아하하……아니 올시다. 마지막 한 마디는 날 두고 하는 팔자 한탄입 죠.』

그 순간 딸칵하고 전화는 끊기었다.

『종각 앞에서 그이가 어떤 여자와 만난다구?』

은주는 보르르 가슴을 떨었다. 은주의 안색이 해말쑥해 졌다. 아침부터 명 랑해 졌던 고만큼 은주의 마음은 어두워 졌다. 들어서는 아니 될 말을 은주 는 들은 것 같았다.

『망할 녀석 같으니! 누가 절더러 그런 얘기꺼정 하랬나?……』

그 유둘유둘한 목소리를 은주는 나무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쩌면 좋을가고, 요리 조리 망서리는 습성을 은주는 갖지 못했다. 은주는 부리나케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양재점「샹하이」를 뛰쳐 나온 것이다.

『스톱!』

지나 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 타면서

『종각 앞까지 대 지급으로! 삼분에 감 요금은 배를 드려요!』

『오·케! 이 분이면 넉넉하지요.』

사실 종로 삼 가에서 종각까지는 이 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은주는 딴 여자와 만나러 가는 영훈을 굳이 막아 보려는 심경은 아니었다 .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 그것이 은주는 알고 싶었다.

『고 새를 못 참아서 전화를 여러번 걸었다는 여자!』

그것이 은주는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은주 이외에는 여자 교제가 하나도 없다던 영훈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다소 괘씸도 했다.

『스톱!』

화신 앞에서 뛰어 내리기가 바쁘게 은주는 토끼 처럼 깡충 깡충 종각 앞으 로 건너 갔다.

그러나 종각 앞에는 영훈도 보이지 않고 또 영훈을 기다리는 그럴 상 싶은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 놓쳤네!』

은주는 발을 동동 굴었다. 운전수에게 삼분의 여유까지 준 것이 후회가 났 다.

『왜 일분 동안에 가 달라고 그러질 못했을가?……』

시간과 거리에 대한 자기의 관념이 다소 루우즈했던 것을 은주는 뉘우쳤 다.

『에라 모르겠다!』

아침부터 지니고 있던 긴장이 탁 풀리면서 은주의 하이·힐이 페이브의 조 악돌 하나를 톡 찼다.

『하는 수 없는 것은 하는 수 없는 것이지 뭐야!』

단념하는 데 있어서는 남 보다 시간이 훨씬 덜 걸리는 은주의 성미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복천을 재단하다가 가위 질을 잘 못하여 엉뚱한 데 를 썩둑 베어 버렸을 때처럼 그렇게 간단히

『에라 모르겠다!』

고 단념해 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그 무엇이 한줄기 젖 가슴 밑에서 뭉클 거리고 있는 것을 은주는 어쩌는 도리가 없다.

『행여나?』

하는 일념이 은주로 하여금 전자 길을 건너서 을지로 쪽으로 거닐게 하였 다. 좌측 통행이고 보면 이편에서 우측 통행만 하면 영혼을 혹시나 만날는 지도 몰랐다.

『그렇다. 차가 너무 빨리 달려 온 것이 아닐가?』

거리와 시간에 대한 계산을 다시 한번 고쳐해 보면서 걸어 가다가 마침내 영훈을 붙잡는 요행을 은주는 가졌던 것이다.

『왜 무슨 볼 일이 있어요?』

『아니……』

『그럼 점심 먹으러 가요. 맥주 한 병이 모자른 담 두 병 사죠. 어제가 월 급 날인데……』

『고맙소.』

『고맙다는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하세요? 이담 결혼을 해 가지구 조반 상 만 들여 옴 아마 절두 하겠네요?』

『아, 하하핫……』

『필요 이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라 구……그렇지만 이건 제 얘기가 아니구 우리 집 마담의 교훈이래요.』

『으와. 하핫……』

영훈은 찔렸다.

『왜 실 없이 웃기만 하세요? 여자배(女子輩)한테서 점심 얻어 잡수시는 게 쑥스러워서 그러세요?』

그만 했으면 실토를 할 것 같은데 그냥 바재고만 있는 영훈이가 은주는 저 으기 괘씸해 졌다.

괘심해 져서 휙 돌아 서 버려야만 은주의 포오즈가 서기는 했다. 그러나 은주의 총명은 돌아서 버린 후에 있어서의 감정의 처리가 도리어 문제여서 최후의 순간까지 유화 정책을 쓰기로 작정을 한다.

『그래 어딜 가시댔어요?』

『나 누구 좀 만날가 하구……』

『바쁜 일 아님 점심 잡수시구 가세요.』

『아, 조금 바쁜 일인데……』

『삼십 분임 될텐데 뭐가 그리 바쁘세요?………적어두 약혼잔데! 약혼자에 게 삼십 분의 시간두 못 주세요?』

은주는 마음 속으로 깨보숭이 처럼 고소한 웃음을 향락하면서 영훈의 애정 을 정밀히 계산해본다.

『은주는 무슨 말을 그처럼……? 삼십 분이 아니라, 세 시간이라고 무방한 데……』

『정말?……』

은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언제 내가 거짓 말을 했소?』

『그럼 돌아 서 봐요.』

『어디루 돌아 서요?』

『저리루……진고개 쪽으로……』

『자아, 돌아 섰소.』

영훈의 후리후리한 키가 은주의 눈 앞에서 휘익 돌아 섰다.

『인제 걸어 가 보세요. 성큼 성큼, 뒤는 절대로 돌아 보아서는 아니 돼 요!』

『자아, 이렇게 말이오?』

영훈은 도로 을지로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 갔다.

『한번이라도 뒤를 돌아 봄 맥주는 안 살테예요.』

『오·케!』

『베리·나이쓰!』

죄수를 앞세운 여간수 모양 은주는 영훈의 발꿈치 뒤로 또박또박 걸어 갔 다.

은주는 흡족하다. 행복이란 이런 걸 두고서 하는 말인가?……역시 임벌주 의 보다는 관용주의가 승리를 하는 것이라고, 자기의 총명을 은주는 생각한 다.

『하나, 둘, 셋, 넷……』

『그건 뭐요?』

그러면서 영훈이가 돌아다 보려는 것을 은주는 두 손으로 막아 바로 세우 며

『돌아다 봄 안 돼요! 뒤에는 나 밖에 없으니까 돌아 볼 필요는 조금도 없 어요. 내 신호에 보조나 잘 맞추세요. 자아, 하나, 둘, 셋, 넷……』

그 말에 영훈도

『하나, 둘, 셋, 넷……하나, 둘, 셋, 넷……』

했다.

『부부는 보조가 잘 맞아야만 한다구 지금부터 연습을 해 두는 거야요.』

『은주는 귀여워!』

뒤는 못 돌아 보고 영훈은 말했다.

『암, 두말 할 필요 조차 없죠.』

『인어(人魚)같애. 거리를 헤엄쳐 다니는 귀여운 인어 ─』

『그리구 때때로는 죄수를 몰구 가는 여간수가 될 수도 있는 인어 ─』

『응?……』

『안돼 안돼! 뒤를 안 돌아다 보아도 말 소리는 들릴텐테……』

인어는 죄수를 또 바로 세워 놓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은주 자신은 걸핏하면 뒤를 돌아다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각이 점점 멀어 짐을 따라 은주의 행복감은 차츰차츰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부풀어 올라 가고 있었다.

女性[여성]의 位置[위치]

[편집]

을지로 네거리를 지나 진고개로 걸어 가면서 영훈은 또 영훈 대로 귀여운 인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흘러 버린 과거에서 녹쓰러 버린 낡은 행복을 힘들여 뒤적거려 보는 것 보다 현재 내 눈 앞에 던져진 이 싱싱한 귀여움을 행복의 절정에까지 끌어 올리는 노력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층 더 귀중한 것이다.』

백연숙을 단념하고 선뜻 둘아 서 온 자기의 생활을 영훈은 무척 귀여워 하 는 것이다.

『흘러 간 행복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 보는 데서 한 토막 시심(詩心)은 발 견할는지 모르나 그곳에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생활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앞으로 끊임 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되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의 성실한 생활인이 영훈은 되고 싶은 것이 다.

이윽고 두 사람은 진고개 입구 어떤 지하실 그릴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자배한테 점심을 얻어 먹는 것, 다소 명예롭지 못한 노릇인 걸! 벌써 여러번 째가 아니오?』

뒤를 돌아 보지 않은 덕택으로 맥주는 약속 대로 두 병이 들어왔다.

『그럼 어때요? 남자배만 내라는 법은 없을 테죠?』

은주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주객이 자꾸만 전도될 염려가 있는 걸.』

『누구가 주고 누구가 객인데요?』

『남자가 점심을 사야 할텐데……』

『영훈씨의 논법, 다소 곰팡이가 쓸었어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식사를 하 게 됨 계산은 으레 남자가 치르거니 하는, 그런 종류의 여자를 좋아하세 요?』

『좋아한다는 것 보다도 그것이 오늘 날의 상식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 오.』

『전차를 타도 표는 으례 남자가 사겠거니 영화관엘 들어 가도 입장권은 응당 남자가 사겠거니하고 시치미를 딱 떼는 것이 오늘의 여자들의 상식이 람 그러한 상식은 여성들 자신을 남성에게 예속시키는 결과를 손수 만들고 있는 것 뿐이지 뭐예요?』

『경제적 조건도 있을테니까……』

『노오!』

은주는 완강히 그것을 부인하며

『그것은 한낱 관념적인 관찰이예요.』

『그럴가?……』

『여자의 주머니가 남자의 주머니 보다 훨씬 더 배불러 있을 때도 시치미 를 곧잘 떼니까요.』

영훈은 웃었다.

『그러니까 남녀 평등이란 말 뿐이지, 좀처럼 실현되기는 힘들 꺼예요. 될 수만 있음 남성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생활 태도 만이 민주주의 적인 동등권을 부르짖을 수 있을꺼예요. 그렇지 않아요?』

『음 ——─』

은주의 그러한 지성이 영훈에게 있어서 커다란 매력의 하나가 이미 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날처럼 민주주의 사회 체제에 있어서도 왜 걸핏함 남성들이 월권 행위를 하느냐 하면 그건 모두가 다 경제적인 우월감이 뿌리 깊이 인백혀 있기 때문이지, 뭐 다른 거 있어요? 참된 자유주의를 여성들이 향유하려거 든 남성들의 덕을 보지 않고도 살아 나갈 수가 있어야 해요』

『다소 딱딱한데……』

『그 딱딱한 것이 결국에 있어서는 좋은 거예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돈 을 쓰지만, 아주 대범한 얼굴로 돈을 쓰지만요.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는 모두들 발란·씨이트 (貸借對照表[대차대조표])를 들여다 보면서 채산을 맞추고 있는 거예요.』

『허어, 은주가 언제부터 그처럼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었소.』

은주에게 다소 그러한 경향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남성들의 심리를 이렇듯 명확하게 분석해 낼 줄은 정말로 몰랐다.

『호호호……』

은주는 귀엽게 한번 웃어 보이며

『모두 다 마담·샹하이에게서 교수를 받은 거예요. 차 한잔 점심 한 그릇 을 남자에게 얻어 먹어도 그것이 성실한 여성일 것같음 그만큼 마음의 부채 를 느끼게 되니까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처럼 약해지기를 남성들은 발란·씨이트를 들여다 보면서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거라구요. 그 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남성들의 월권이고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위기(危機)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호호호……』

나이프를 놓고 은주는 입을 막았다.

음 마담 샹하이는 『 , · 확실히 나쁜 교사요. 재단법이나 가르칠 것이지, 그 런 쓸데 없는 말까지……이 다음 만나면 항의를 제출해야겠소.』

그런 농담을 영훈은 하며 유쾌히 웃었다,

『그래 제 말이 맞지 않아요?』

『음, 일리는 있지만……』

『왜 일리 만이야요? 이리, 삼리까지도 있을 꺼예요.』

『어쨌든 그러한 심리 해부는 남성들에게 일대 위협을 주는 좋지 못한 이 야기요. 남성들의 호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 놈의 호의가 무섭다구, 우리 집 마담이 그랬답니다. 하하하……』

입을 버리고 이번엔 웃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남성들의 덕을 봐야만 하는 경우가 꼭 한가지는 있다 고요.』

『그건 뭔데?……』

『체력상 어떨 수 없는 일이니까, 완력이 모자랄 때는 주먹을 좀 들어 달 라는 것, 그것 한가지 만은 덕을 봐야 한다구요.』

『아하하핫……』

『그 밖에는 덕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거야요. 호호호……』

커피를 마시며 둘이는 유쾌히 웃었다. 은주가 이처럼 흥미로운 화제를 연 거퍼 꺼내서 자기도 웃고 영훈도 웃기고 하는 데는 그 화제의 내용도 내용 이지만 그 이외에 또 한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식사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 나가려는 심산에서였다. 십 분이 라도 더 영훈의 시간을 잡아 먹어 주는 것이 은주에게는 필요했기 때문이었 다.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여인을 은주는 쭈욱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은주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한 시간이나 되었다. 그 전화의 여자 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입때까지 한길 가에서 기다리고 섰지는 않을 것이라 고, 저으기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미심해서 은주는 화제를 좀더 끌고 나갔 다.

『우리 마담의 지론을 말함 말이야요.』

『응?……』

『마담의 말이, 여자가 애당초 어째서 결혼을 하게 되었나, 함 말이예요.

여자는 힘이 약하니까 이리 저리 물리우고 뜯기우고 하잖겠어요? 그래 혼자 서 살 수는 도저히 없으니까 남자의 보호를 받을 셈으로 결혼을 했다는 거 예요. 말하잠 주먹 힘을 좀 빈 것 뿐이죠.』

『그러니까 일종의 보스 (문지기 주먹 대장)로군요?』

『하하하핫……일어로 말함 요오짐보오가 되겠죠.』

『음, 그 쯤 되고 보면 남자의 시세가 아주 폭락인 걸!』

『왜 있잖어요? 다방 같은 데서 거지가 들어 옴 문깐에 지켜 섰다가 막 때 려 쫓는……하하하핫……』

『으와, 하핫……』

영훈은 완전히 백연숙의 존재를 잊어 버리고 이 귀여운 약혼자가 발산하는 그윽한 분위기 속에 젖어 있는데 은주가 입을 또 열었다.

『암만 생각하두 삼십 분 가지군 잘 안될 것 같아요.』

『뭣이?……』

『아까 약속은 영훈씨의 시간 삼십 분만 절 달라구 했었지만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되잖았어요?』

『아, 그거 말이오?』

영훈은 후딱 제 시계를 들여다 보면서

『삼십 분이 세 시간 돼두 무방하다니까 ——─』

『정말?……』

『글쎄 누가 거짓 말을 합디까?』

『은주 정말 행복해요?』

『왜 또 갑자기……?』

『흐응, 그럴 이유가 있대요.』

『그 행복, 내게도 좀 나눠 줘요.』

『아, 영훈씨는 그럼 행복하지 못하나 봐요.』

『아, 그런 의미에서 말이오?』

『암만 해두 약간 우울해 보이는데……내가 행복해 하는 고만큼 우울하나 봐요?……』

『허어, 어째 그럴가?……』

『암만 생각해두 모를 일인데……』

『거 참 모를 일이예요. 난 이렇듯 행복한데 영훈씨는 저렇듯 우울해 보이 는 게 암만 생각해두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 얼굴이 그렇게도 우울해요.』

그러면서 영훈은 바로 식탁 맞은 편 바람벽에 걸린 무슨 약방 집 마아크가 붙은 체경을 후딱 들여다 보았다.

『어디가?……이처럼 명랑한데……』

벙글벙글 영훈은 웃었다.

얼굴은 일견 명랑한 『 것 같지만두……마음은 암만 해두 어두울 거예요.』

『응?……』

『하하핫, 뭘 그리 놀래요?』

『놀래긴……?』

『그러기에 아까 내가 뭐라구 했어요? ——─ 죄가 있어두 관용을 한다는 밖 에……』

『또 죄인 취급이오?』

『아이, 웃어!』

은주는 익살 웃음을 하나 지으며

『자아, 인제 나가요.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됐으니까요.』

『괜찮소. 세 시간은 앉아 있어야 은주의 마음이 편할테니까 ——─』

『후훗 ——─』

은주는 그 말에 한두 번 쿡쿡 웃음을 깨물다가

『괜찮어요. 인제 그만 함 됐어요.』

『왜 좀 더 앉아 있읍시다. 하루 종일이라두……』

『아냐요. 필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서루가 다 불경제니까요.』

『어째 오늘은 아까부터 경제 문제가 그처럼 빈번히 나올가?……』

『그럴 이유가 있대요. 후훗 ——─』

『그럴 이유라니?……』

『두 시간 가까이나 한길 가에서 기다릴 그런 쑥은 아닐테니까 말예요.』

『응?……』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 졌다.

『누구예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다.

『누구라니?……』

『그이가 누구냐 말이예요.』

『그이?……』

영훈은 은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은주의 표정 없는 새침한 얼굴이 레지 뒤 먼 담벼락을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바라보면서

『아까 종각 앞에서 영훈씨와 만나자던 그 여자가 누구냐 말이예요.』

『………………?』

너무나 갑자기 달려 드는 토라진 질문이다.

『요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인제 나가요?』

냉큼 일어 서서 계산을 하고 총총히 걸어 나가는 은주의 뒤를 영훈은 허둥 지둥 따라 나섰다.

人生[인생]데코레이슌

[편집]

그릴을 나서서 진고개 입구를 향하여 한은주는 또박 또박 걸어 나가고 있 었다.

오후 두시 ——─ 지하실 그릴에서 갓빠져 나온 영훈에게는 거리에 범람하는 오후의 태양이 눈에 부시다.

『같이 가요.』

한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은 채, 서편 하늘을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곧장 걸어 가고 있는 은주였다.

『화 났소?』

영훈은 따라 가서 나란히 걸었다.

『아뇨. 화는……』

절대로 영훈을 쳐다보지를 않는다.

『어떻게 알았소?』

『그 녀석이 묻지도 않는 말을 알으켜 줘서 알았죠.』

『그 녀석이라니?』

『유둘유둘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 말이예요.』

『아, 영업부장! 뭐라고 그래요?』

은주는 들은 이야기를 솔직히 말했다.

『왜 입때까지 잠자코 있었소?』

『그건 누가 할 말인데요?』

영훈이 이내 대답을 못했다. 못하고 얼마 동안을 묵묵히 걷다가

『어쨌든 은주와 세 시간 동안을 허비할 결심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전 행복했었죠.』

『안 됐소.』

『누가 안 됐대요?』

『대답이 자꾸만 까다로워 지는 걸!』

『아냐요. 나 어지간히 허심 탄회할 수 있는 성미예요. 영훈씨와 점심을 나누겠다는 내 풀랜은 적어도 내개 있어서는 중대사니까요. 그래서 그 중대 사를 나는 예정대로 실행한 것 밖에 없어요. 다소의 난관은 있었지만요.』

자기 행동에 대하여 추호도 두리번거릴 줄을 모르는 은주였다. 그러한 은 주에게서 영훈은 기 보다 한 걸음 먼저 새로운 세대의 공기를 호흡 하고 있 는 한 여성의 생태(生態)를 눈 앞에 보는 것이다.

『어떤 여자예요?』

『어떤 여자라구……』

『나이가 몇이예요?』

은주는 우선 나이부터 묻는다. 그것이 제일의 관심점이다.

『자아, 며칠가?……』

『나이두 몰라요?』

『헤어진지가 하두 오래니까, 스물 여덟? 아홉?……』

『직업은?……』

둘째가 직업이었다. 마치 피고에게 대하는 재판관의 질문과 비슷하다.

『무직업 ——─』

『세상에 직업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 부인이니까 ——─』

『가정 부인은 직업이 없는가요?』

『……?』

『가정이라는 직장에서 아내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어요?』

영훈은 웃었다.

『남편은 뭘 하는 사람이에요?』

『대부호의 아들……』

『그럼 취직은 곧잘 했군요.』

『그렇지만 이북 지주니까 몰락을 했을 거야.』

『그래서 전직(轉職) 운동 때문에 찾아 온거 아냐요?』

『전직 운동?……』

『실직(失職)을 했음 재취직 운동이구요.』

『아직 만나 보지 못 했으니까 알 수 없지.』

해골과 같이 시뻘건 뼛대만 남은 우체국 앞으로 둘이는 빠져 나왔다.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 가면서

『이뻐요?』

은주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것을 물었으나 사냥 개의 두 귀박죽처럼 신경을 오뚝 세우는 것이다.

『밉고 곱고는 주관적 문제니까……』

『그러니까 그 주관이 어떠냐 말이예요?』

『약간 ——─』

『흥!』

하고 은주는 콧 소리를 가볍게 내며

『도대체 만나자는 건 어느 편이예요?』

『저 편 ——』

『향수병(鄕愁病) 환자군요.』

『모르지.』

『어쨌든 영훈씨의 심장이 다소 들뜬 것만은 사실인데……』

『들뜨긴……』

『괜찮어요. 애정의 속박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니까요.』

그 때 동대문 행 전차가 우루루 들어 닿았다.

『영훈씨는 사무실꺼정 걸어 가시죠?』

영훈이가 머리를 끄덕이는 동안에 은주는 여학생처럼 경쾌한 포오즈로 전 차에 올랐다.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안전 지대에 멍하니 서 있는 영훈의 귓 전에다 입술을 갖다 대듯이 하며

『애정은 자유에요. 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 요.』

『그런 말은 왜 새삼스럽게……』

그러나 은주는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전자가 막 떠나려는 무렵에

『암만 해두 영훈씨,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칠 것만 같애요. 종각 앞에 서 두 시간 동안이나 영훈씨를 기다리는 로맨쓰! 호호홋……』

전차가 한국 은행 앞에서 커어브를 할 무렵에 핸드·빽을 들창 밖으로 흔 들어 대는 은주의 쌔하얀 손목이 눈부신 햇볕 속에서 조그맣게, 조그맣게 나불거리며 사라졌다.

『귀여운 사람!』

영훈은 입 속 말로 중얼거렸다.

영롱, 구슬과 같은 존재 한은주! 질투심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 는 한은주의 애정의 포오즈가 그의 세련된 회화와 함께 영훈의 다소 들떴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 주는것이다.

『잘 했다!』

백연숙을 버리고 은주를 따라 온 자기 자신이 영훈은 추호도 뉘우쳐 지지 가 않았다.

『귀여운 여자! 내 아내!』

소리를 내어 그렇게 되씹어 봄으로써 들떴던 감정이 아직도 다소의 꼬리를 물고 있던 자기 자신을 영훈은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었다.

영훈이가 걸어서 을지로 사무실로 돌아 온 것은 두시 반이 넘었을 무렵이 었다.

사원들은 거지반 외출을 하고 영업 부장 최씨와 여기자 한 사람이 남아 있 었다.

『아니 고선생,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던 영업 부장이 얼굴을 불쑥 들면서 하는 말이다.

『왜요?』

걸상에 털썩 걸터앉으면서 고영훈은 시선을 던졌다.

『왜요가 뭐요? 그처럼 철석 같은 약속을 해 놓고서 슬쩍 빠지는 법이 어 디 있소?』

영업 부장 최성진은 일부러 정색을 했다.

『빠지다니요?』

『아무튼 과복자는 다르구려. 그처럼 어여쁜 여인을 슬쩍 따 버리다니, 아 까운 일이오』

그제서야 고영훈도 반색을 하며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라구……종각 앞에서 만나자던 미인이 여기로 찾아 왔었답니 다.』

『옛, 찾아 왔었다고요?』

뭉클하고 가슴에 무어가 하나 왔다.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 시간쯤 전이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고선생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떻 게 된 셈이냐고요.

그래 고선생은 분명히 당신을 만나려고 열두 시 전에 나갔다고 했더니, 그 것이 정말이냐고, 수차 따지다가 돌아갔답니다. 원 그런 미인을 따 버리다 니, 고선생두 참…….』

가슴이 차츰차츰 설레어 온다. 은주와 헤어질 무렵에는 완전히 가라앉았던 감정의 들뜸이었다.

『그래 그 밖엔 다른 말은 없이 돌아갔읍니까?』

『무슨 말이든 고선생께 전해 드리겠노라고 했더니, 다소 망서리는 표정으 로 섰다가, 별로 전할 말은 없노라고 하면서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 갔지요.』

물론 과장인 줄은 알면서도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는 이 마지막 한 마디가 영훈의 가슴 한 복판에 조그만 못 하나를 박아 주었다.

지금이 세시 그리고 ——─ 백연숙이가 한 시간 전에 찾아 왔었다니까, 그는 열두 시부터 자그만치 두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리다가 찾아 온 계 산이 된다. 오주주하니 달려 드는 일종의 스릴 같은 것을 영훈은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이유 모를 신비로운 전률이었다. 이것이 대체 어디서 무엇 때 문에 오는 것일가?……

『나는 지금까지도 연숙을 사모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훈은 자기의 감정의 풍경을 자기 자신 측량할 도리가 없었다. 영훈의 성 실한 의욕은 한은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신비로운 한줄기의 전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훈은 갑자기 백연숙이가 만나고 싶어 졌다. 만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돌이돌이를 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감정이 앞장을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필수품은 아니다. 생활의 데코레이슌(裝飾物[장식물])이요, 악세써리(附帶物[부대물])일 따름이다.

앞장을 서는 감정의 부풀음을 영훈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무자비하게 억 눌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노예로부터 벗어 나려는 듯이 한두번 머리를 휙휙 흔들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바깥 공기가 마시고 싶어 영훈은 다시 모자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영훈의 집은 사직동 공원 뒤에 있었다. 영훈은 종로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끊임 없 는 움직임 속에서 도회의 생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영훈도 움직이었다. 시간이 이르니까 어느 때 같으면 명동 쪽으로 움직여 야 할 영훈이가 종로 쪽을 택했다. 백연숙이가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종 각 앞 한길이 그리워 졌는지도 모른다.

광교 다리 목에서 영훈은 종각 쪽으로 건너 갔다. 건너 서서 두리번거리며 연숙이가 아직도 한길 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자기를 기다릴는지도 모를 일 이라고, 꿈 같은 공상을 영훈은 하여 보았다.

『행여나?……』

하는, 무슨 기대 같은 것이 역시 영훈의 의식 세계에 있는 것일가?……생활 필수품이 될 수 없는 일종의 악세써리를 인간은 역시 욕구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사치품!』

영훈은 그것을 명확히 느끼며 네길어름으로 걸어 가면서 후딱 시선을 종각 쪽으로 던지다가

『앗 ——─?』

하고 가는 외침과 함께 걸음을 탁 멈추었다.

단청도 새롭게 개축된 종각 앞에 백연숙은 서 있었다.

鄕愁病患者[향수병환자]

[편집]

옅은 회색 양단 저고리에 자지빛 베르벹 치마를 백연숙은 입고 있었다. 거 지반 십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백연숙의 젊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 영훈씨!』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연숙이가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애처럼 뛰 쳐 왔다.

뛰쳐 오다가 그러나 연숙은 영훈의 앞까지 다다르지 못한채 오뚝 걸음을 멈추고 무슨 기적이나 눈 앞에 보는 것처럼 덤덤히 영훈을 바라보았다.

옛날 그대로의 영훈의 모습이었다.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감정 대 로 곧장 달려 가서 영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연숙은 깨닫는 것이다.

『안 오시는 줄……영영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닥아오는 영훈을 빤히 쳐다보며 연숙은 말했다.

『………………….』

영훈은 묵묵히 연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환영 보다는 훨씬 풍부해 보이는 연숙의 얼굴이었다. 세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린 연숙의 얼굴을 영훈은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다소 지나친 학대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그러한 학대를 달갑게 받고 있는 것이다.

『와 주셨네요! 영훈씨가…….』

표정 없는 영훈의 모습을 꿈꾸는 사람 모양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어요. 꿈 길에서 보던 모습과 꼭 같으셔요.』

그러나 끝끝내 대답이 없는 영훈을 발견하고 연숙은 후딱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톡톡톡……말간 눈물이 몇 방울, 옥색 고무신 코 끝을 적시었 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둘이의 모양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영훈씨가 저를 반갑게 맞아 줄 줄 알고 찾아 온 건 아니예요. 그저……

그저 제가 영훈씨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봅니다. 눈물을 거두시오.』

연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꼭꼭 찍어 내며

『과히 바쁜 일 없으시면 같이 좀 걸어요.』

둘이는 광화문 통으로 걸어 갔다.

『지금도 댁이 사직동인가요?』

『네.』

『아까 사무실로 찾아 갔댔어요.』

『알고 있읍니다.』

『왜 안 오셨어요?』

『……………….』

『일·사 후퇴 때부터 지금꺼정 쭉 영훈씨를 찾고 있었어요.』

『……………….』

『그러다가 바루 어저께 잡지「신여인」을 우연히 펄쳐 보았아요. 거기서 편집 책임자로 있는 영훈씨를 발견했어요.』

대꾸 없는 말을 연숙은 혼자서만 했다.

『어찌나 기쁜지, 어제 하룻 밤 저는 통 잠을 못 잤어요.』

『……………….』

『영훈씨!』

『……………….』

영훈은 얼굴을 돌려 나란히 걷고 있는 옛 날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영훈씨가 그처럼 아무런 말도 건너 주지 않는 것이 제게는 무척 좋아 요.』

『무슨 뜻입니까?』

『영훈씨의 감정이 지금까지도 저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저를 지금 무척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연숙씨는 소설의 히로인 이군요』

『십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인사 말 한 마디 없이……그처럼 무뚝뚝하게 대해 주는 영훈씨가 제게는 한 없이 좋아요. 좀더 경쾌하게, 좀더 반갑게 대해 주었던들 제 행복은 훨씬 덜했을꺼야요.』

『마음대로 좋아 하고 마음 대로 행복하세요. 옛 날부터 당신은 제멋 대로 슬퍼하고 제멋 대로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흐응 ——─.』

백연숙은 비로소 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훈의 한 마디를 자 기 자신 그대로 승인하는 웃음이기도 했다.

『연숙씨가 어째서 나를 그처럼 찾았읍니까?』

『보고 싶으니까, 찾은 거 아냐요.』

연숙의 어조가 차차 생기를 띠우며 옛 날의 그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 다. 대꾸 없는 독백을 하던 아까 와는 차츰차츰 달라져 왔다.

『보고 싶을 때는 찾아 오고 보기 싫은 떄는 버리고 가고……아주 마음이 편해서 좋겠읍니다.』

『……………….』

둘이는 이윽고 광화문 네거리까지 왔다. 네거리를 건너 그냥 곧장 걸어 가 며

『결혼 생활이 불행했읍니까?』

영훈이 물었다.

『그렇지만 영훈씨를 늘상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별반 불행한 삶은 아니 었어요.』

『흥 ——─.』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숙씨는 옛 날부터 배우의 소질이 풍부했었지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살아 왔어요.』

연숙도 쓸쓸히 웃었다.

『소생은 몇이나 되지요?』

『둘 낳았다가 둘 다 잃어 버렸어요.』

또 잠자코 얼마 동안 걷다가

『그래 결혼 생활이 왜 불행했읍니까?』

『바람을 수없이 피웠으니까요. 계집 한둘은 늘 끼고 돌았지요. 해방이 되 자 토지는 송두리채 몰수를 당하고 반동 분자로 몰리워 다니다가 단신 삼팔 선을 넘어 월남해 왔어요.』

『그게 언젠데요?』

『그러니까 그것이 해방 후 삼년째 잡히는 해 봄이었어요. 소문을 듣자니, 처음엔 고생도 한모양이지만 무역인지 뭔지를 해서 돈도 착실히 빌었다구 요. 그래 이번 일·사 후퇴 때 제가 이리로 밀려 나와 보니까, 벌써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래 어떻게 했읍니까?』

『잘 살라고 내버려 뒀지요. 그랬더니 이 즈음 와서는 그 여자와는 곱게 헤어질테니 다시 살자구요.』

『다시 살면 되지 않습니까?』

『누가 영훈씨더라 그런 말 해 달랬어요?』

그것을 계기로 둘이는 또 잠자코 걸었다. 동양극장 앞까지 와서

『영훈씨, 놀래지 마세요.』

『무얼 놀래요?』

『일한(一韓)무역 사장 김석호(金石豪)를 영훈 씨는 잘 아실 꺼야요.』

『아, 김사장?……』

백연숙의 말투로 보아 김석호가 그의 남편인 것을 영훈은 짐작했다. 일한 무역의 김석호는 동시에 영훈이가 봉직하고 있는「신여인」사의 사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놀래시는군요.』

『그랬읍니까?……』

『그 사나이, 해방 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태양신보라는 주간 신문을 경영한 적이 있답니다.』

『잘 알고 있읍니다.』

실로 뜻 밖의 일이었다.

일한 무역에서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는「신여인」을 맡아 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은 환도후부터의 일이었다. 사장 김석호는 영훈 보다 오륙년 연장자였으나 채림 채림이 화려한 탓인지 그런 연세로는 통 보이지 않았다.

태반은 일한 무역에 들어 배겨 있었고「신여인」사에는 한 주일에 한번 정 도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장의 신임이 아주 두터운 영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편즙만을 맡아 보고 있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는「신여인」

의 운영 책임자로 등용할 단계에까지 다달아 있는 영훈이었다.

『그래 그 동안 연숙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혼자 지냈지요. 쭉 대전에 있다가 환도하면서 집한채 사 주길래 거기서 먹구 자구…….』

『집은 어딘데?……』

『아현동이예요.』

연숙은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환경의 변모를 옆에 서 생각하는 것처럼 괴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제 운명이예요.』

그리고는 영훈을 핼끔 쳐다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말과 태도는 침울에 가 까우리 만큼 고요한 연숙이었으나 그러나 어딘가 마음의 여유가 엿보이는 것 같아서 영훈의 적지 않게 안도의 염을 품는 것이다.

서대문 네거리에 둘이는 다달았다.

네길어름을 건너 마포 쪽으로 조금만 걸어 가면 오른 편으로 깨끗한 중국 요릿집이 하나 있다 둘이는 . 무슨 약속이나 하고 온 사람처럼 그리로 들어 갔다.

『어서 오십쇼』

목소리가 낯익어 바라다보니, 이집 주인 장서방이 옛날 그대로의 그 무뚝 뚝한 얼굴로 둘이를 맞이했다.

『아, 장서방!』

연숙은 억제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가지고 다소 늙어져 보이는 장서방을 향하여 외치듯이 불렀다.

『오오, 난 또 누구시라구?……옛날의 학생 아가씨 아니오?』

오십이 훨씬 넘은 장서방이었다. 그 장서방이 십년 전의 연숙과 영훈을 알 아 주었다.

사람이란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만나면 누구나가 다사로워 지는 것일가 ?……장서방까지도 이처럼 반가히 맞아 주는 십년이란 세월의 흐름이었다.

그렇건만 마음의 애인 고영훈은 아직까지 단 한 마디의 다정한 말도 건너 주지 않았다.

『장서방, 좀 늙었네요.』

『아가씨는 조금도 늙지 않았습니다. 그때 보다 더 이뻐졌는데…….』

연숙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장서방이 반가워하면 할수록 연숙은 서글 퍼 진다. 영훈은 자기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통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연숙은 자꾸만 서글퍼 지는 것이다.

지나간 시절, 이북서 청요리를 먹을 때마다 부처님처럼 표정이 없는 이집 주인 장서방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 보던 연숙이가 아니었던가. 남편 김석호 가 기생 오입을 하면서부터는 한층 더 자주 연숙의 기억에 오르내리던 장서 방의 얼굴이었다.

『그 장서방은 옛날과 변함 없이 나를 맞아 주건만…….』

영훈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면서 연숙은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男性[남성]의 貞操[정조]

[편집]

지나간 날, 영훈과 둘이서 여기 저기로 싸돌아 다니다가 시장끼를 느끼면 이 청요리 집으로 들어 와서 짜장면을 두 그릇 세 그릇씩 먹어 대던 그 시 절의 왕성하던 식욕을 다시는 찾아 볼 수 없는 청춘의 심볼인 양 연숙은 쓸 쓸히 회상하며 방으로 들어 섰다.

옛날과 다름 없는 어둑 컴컴한 골방이었다. 이 방에서 연숙은 눈물을 흘리 면서 최후의 작별을 했었고 그러한 연숙의 따귀를 보기 좋게 내갈기고 영훈 은 영원히 연숙의 옆을 떠나 갔던 것이다.

『생각하면 정말 감개 무량해요.』

식탁 앞에 마주 앉으며 연숙은 깊은 감회가 서린 목소리를 내며 방 안을 한번 휘이 둘러 보았다.

『이 방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데……?』

변해 버린 자기의 신세를 연숙은 푸념하고 있는 것이다.

『뭐 잡수십니까?』

장서방이 우선 김이 문문 나는 보리 차를 두 사람 앞에 따라 놓으면서 물 었다.

연숙은 영훈을 쳐다보았다. 옛날부터 음식점엘 들어가면 영훈은 손님이 되 고 연숙은 주인이 되었다.

『짜장면을 먹지요.』

차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영훈은 말했다.

연숙은 기뻤다. 역시 영훈의 미각(味覺)에도 추억을 그리워 하는 데가 남 아 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아서 무척 기뻤다. 그래서 연숙은 짜장면과 그 밖의 안주 감이 될만 한 몇 가지를 칭하고 나서

『그리구 술도 주세요. 일주 있죠?』

『있읍니다.』

장서방은 사라져 갔다.

『연숙씬 약주 잘 하십니까?』

술상 앞에 앉은 연숙의 포오즈가 어딘가 모르게 그럴 듯이 어울려 보인다.

어린애를 둘이나 낳았다는 백연숙의 결혼 생활의 연륜(年輪)이 그렇게 만드 는 지도 몰랐다.

『그래두 남자 분네들은 저녁을 자실 때, 반주를 하지 않어요?』

연숙은 다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러한 백연숙에게서 결혼 생활의 비밀을 엿보는 것 같아서 이 편의 얼굴 이 도리어 간지럽다.

『그이는 항상 반주를 했었군요.』

영훈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네. 술과 계집은 떨우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면서 교태 있는 웃음을 웃었다. 요염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연숙씨도 한두 잔의 약주는 사양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지요?』

『책망하시는 말씀이세요?』

『책망은 내가 왜 해요?』

『그렇지 않으면 놀리시는 거구요.』

『놀리긴 또 내가 어째서……?』

『그럼 왜 빙글빙글 웃기만 하세요?』

『연숙씨의 성장(成長)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슬프기도 하실 거야요.』

만났을 때와는 딴판으로 연숙은 점점 능변(能辯)해가는 것이다.

음식이 들어 왔다. 접시가 주루루 식탁 위에 버러지자 연숙은 술병을 들었 다.

『한잔 드세요. 정말 십년 만이야요.』

그러면서 연숙은 영훈의 잔에도 조심성스럽게 한 잔을 따랐다. 그러나 영 훈은 연숙의 잔에 술을 따라 주지 않았다. 남의 집 부인을 모욕하는 것 같 아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먹을 줄 안다면 제 손으로 따라서 먹었으면 했 다.

그러나 연숙은 제 잔에는 따르지 않고 병을 식탁에 놓으면서 영훈을 바라 보며 귀여운 듯이 빙그레 웃었다. 추억과 동경에 찬 웃음임을 영훈은 안다.

영훈도 따라 웃으며

『한잔 쯤 못 하시오?』

했더니

『술은 제 손으로 따라 먹으면 맛이 안 난다죠?』

야아, 요것 봐라?……제멋 대로 생각하고 제멋 대로 해석 하던 영훈의 소 박한 감정이 눈을 번쩍 떴다.

영훈은 웃으며 백연숙의 그러한 변모를 다소의 생리적인 질투를 가지고 묵 묵히 상대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자아, 같이 들어요.』

연숙은 눈 꼬리로 곱게 웃으며 자기가 먼저 술잔을 들었다.

영훈은 한 모금에 잔을 쭈욱 냈다. 굳어졌던 감정이 차차 풀리기 시작했 다.

그러나 연숙은 일단 들었던 잔을 다시 식탁에 놓고 영훈의 잔에 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또 제가 먼저 놓았던 잔을 들고 영훈이가 마시기를 기다 리고 있다가 다시 잔을 식탁 위에 내려 놓았다.

제멋 대로 생각하고 제멋 대로 불유쾌한 하던 영훈의 유치한 감정이 또 한 번 눈을 비볐다. 과거 십년 동안 품고 있던 연숙에의 환영이 어제 오늘처럼 영훈의 감정 속에서 알뜰히 살아 나기 시작 하였다.

『왜 한 잔도 못 해요?』

『한두 잔 억지루 먹음 먹기두 하지만……그이에게서 배웠어요. 그인 반주 를 하면서 자꾸만 제게 술을 권했지요.』

『그럼 조금 들어요.』

『오늘은 그만 두겠어요. 그이에게서 배운 술을 영훈씨 앞에서 먹다가 는……영훈씨가 무서워요. 그 술잔으로 제 면상을 내갈길 것만 같아서 무서 워요.』

연숙은 후딱 고개를 숙였다. 눈물 한두방울을 초간장 접시에 톡톡 떨어뜨 리며

『나 조금만 울겠어요. 울고 싶을 때는 빨리 울어 버려야 시원해요.』

간장 접시를 밀어 놓고 연숙은 식탁 위에 엎드러져서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껴 울었다.

『영훈씨를 만나면 이렇게 한번 싫건 울어 볼려고…… 그것이 결혼 뒤에 온 제 꿈이었어요. 그렇지만 그 놈의 삼팔선 때문에……』

저녁 전등이 들어 왔다. 허벅지게 쌔하얀 연숙의 목덜미가 전등 밑에 눈부 시다. 애욕의 경험을 쌓은 목덜미라고, 요염에 가까운 분위기를 느끼며 사 장 김석호의 얼굴 모습을 영훈은 불현듯 연상하였다.

보리 차를 쏟아 버리고 찻 종지에 영훈은 될될될될 술을 따라 약을 마시듯 이 꿀꺽꿀꺽 들이켰다. 얄밉기 짝이 없는 연숙이었으나 여위었던 감정이 차 츰차츰 사라 지면서 영훈의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 졌다.

『그만 하고 인제 얼굴을 들어요.』

한 고뿌 들이킨 술 기운이 화악 몸에 퍼지면서 영훈의 마음은 부드럽게 누 그러져 가고 있었다.

『영훈씨가 그저 보고 싶어서……그래서 찾아 온 것이지, 나 다른 생각 아 무 것도 없어요. 보고 싶은 사람, 한번 보러 온 것이 뭐가 그리 나빠요?』

그러면서 연숙은 머리를 들고 눈물 젖은 얼굴로 영훈의 눈동자를 원망스럽 게 쏘아 보았다.

『누구가 나쁘다긴……?』

『나쁘다지 않음 왜 두 시간씩이나 사람을 한길 가에서 기다리게 하는 거 야요? 누가 영훈씨를 잡아 먹으러 왔대요?』

삐쭉 삐쭉, 연숙의 빨간 입술이 한두번 경련을 일으켰다. 영훈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간신히 지탕해 오던 감정이 어린애처럼 와락 울상을 지었다. 영훈은 은주 를 생각했다. 일부러 새롭혀 보는 은주에의 기억이었다. 은주를 생각함으로 써 영훈은 허무러지려는 감정을 부축해야만 하였다.

『왜 대답은 없구, 잠자코만 계세요?』

『………………』

『자아, 제 술 한 잔 받아요.』

다 식어 버린 술을 연숙은 훌쩍 마시고 나서 그 잔을 영훈에게 권해 왔다.

영훈은 잠자코 잔을 받아 쥐고 따르는 대로 마셨다.

『제게두 한 잔 줘 봐요.』

영훈은 술을 따라 주었다. 또 훌쩍 연숙은 마셨다.

『아이, 요건 귀찮어!』

연숙은 그러면서 잔을 던지고 찻 종지를 들었다.

『자아, 이걸루 한 잔 해봐요, 나두 이걸루 받을테니까요……』

영훈은 찻 종지로 마셨다. 연숙도 찻 종지로 절반쯤 내고 나서

『아이, 오늘 술 맛 나네요. 나 변했죠?』

『아, 약간……』

『인제부터는 더 자꾸만 변할테야요. 술을 한 독쯤 먹고 영훈씨 앞에서 죽 어 버릴테야요.』

영훈은 웃었다. 그것이 취기가 돈 연숙의 신경을 몹시 자극했다.

『웃긴……웃긴 왜 웃어요? 아주 냉정하시군요!』

연숙은 그러면서 무릎 걸음으로 닥아와서 영훈의 손목 하나를 가만히 잡아 쥐며

『누구야요?』

하고 물어 왔다.

『뭐가, 누구라니?……』

『영훈씨를 그처럼도 냉정하게 만들고 있는 여자가 누구냐 말이야요. 부 인?……』

『나는 아직 독신이오.』

『독신?……어머나?……』

연숙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나는 정말 아들 딸 낳고 그럴듯이 사실 줄만 알았어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영훈씨, 용서하세요?』

연숙은 탁 영훈의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들먹거리는 연숙의 어깨를 영훈의 손길이 가만히 쓸어 주며

『결혼 생활이 행복했으면 찾아 오지 않았겠지요.』

연숙은 한 동안 격렬히 울다가

『결국……결국 그랬을는지 몰라요.』

솔직한 대답을 연숙은 했다.

연숙의 그 어린애 같은 솔직한 심정이 더할 나위 없이 얄미우면서도 한편 영훈은 그저 없이 가엾어 졌다. 워낙이 연숙을 좋아했던 영훈이기에 허무러 지는 감정의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불행하면 찾아 오고……인제 또 행복한 데가 있으면 또 그리로 찾아 가 야지.』

그 말에 연숙은 무릎 위에서 가만히 돌이돌이롤 어린애처럼 하며

『인제 나는 아무런 데도 갈 데가 없어요. 인생의 계산을 애당초 잘못 했 었으니까요.』

영훈은 연숙의 폭 넓은 어깨 둘을 무심히 쓸어 보며

『갈 데가 없어도 연숙은 가야 돼! 시기가 너무 늦었어!』

『가래면 가지만……안 가두 된다면 난 안 갈테야요.』

『가야만 돼.』

『어디로 갈 데가 없어요.』

『없어도 가야만 돼.』

『독신이라면서……?』

『약혼자가 있지요.』

『…………?』

연숙은 얼굴을 들고 영훈을 찬찬히 쳐다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저 만나기를 망서렸군요.』

『그렇소.』

영훈은 쓸쓸히 웃었다.

『당연한 일이야요. 난 아들 딸꺼정 있을 줄 알았는데요.』

연숙의 어조가 갑자기 조용해 졌다.

결혼 생활 십년 간은 확실히 백연숙의 그 찬란하던 꿈을 정리해 주었고 연 애 소설의 주인공처럼 다양(多樣)하던 성품을 고요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 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백연숙의 성장을 의미하는 반가운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이를 사랑하세요?』

『사랑하지요.』

연숙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측은해서 영훈은

『자아, 인제 돌아가요.』

하며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나는 갈 데가 없어요.』

『아현동 집으로 돌아가요.』

『그이가 와 있을 것 같애서 싫어요.』

『그이라니……김사장 말이오?』

연숙은 고개를 끄떡끄떡 했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어떻게 해요?』

연숙은 고개를 후딱 들며

『싫으시겠지만……옛날처럼 한번만 안아 주고 가세요.』

『……?……』

영훈은 대답을 상실한 채 심각한 표정을 하고 눈물젖은 얼굴로 말끄럼이 쳐다보는 연숙의 처량한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한번만……한번만 안겨 보고 헤어짐 한이 없겠어요.』

그러면서 연숙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가지고 영훈의 양복 저고리 앞 자락 을 어린애 모양 만지적거렸다.

『내게는 약혼자가 있소.』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야요.』

영훈은 시선 둘 곳을 잃은 채 당황한 어조로

『연숙씨, 나를 괴롭히지 말고 어서 돌아갑시다!』

『그이를 사랑한다면 괴로울 거지만, ……그렇지만 포옹 한번쯤 뭐가 그리 괴로울가요?』

『아아, 연숙씨는……』

영훈은 돌부처모양 우뚝 서서 후딱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월남해서 삼년 동안이나 찾았는데……』

연숙은 두 손바닥으로 영훈의 가슴패기를 자꾸만 쓰다듬고 있었다.

『제 잘못을 내가 모른다면 모르지만……텅 비인 이 마음 속……거지처럼 초라해진 제 감정이야요. 오만하고 화려했던 옛날의 연숙은 이미 아니지 요.』

그래도 영훈은 그대로 눈을 감은채 꼳닥 서 있었다. 꼳닥 서서

『연숙씨!』

『네?……』

연숙은 시선을 들어 눈을 감은 영훈의 모습을 말뚱히 쳐다보았다.

『서글픈 말을 해서 나를 울리지 말아요! 내 감정은 당신을 용서하여도 내 이성은 당신을 안아 줄 수가 없소.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이대로 돌아갑시다.』

『어쩌면……?』

연숙은 삐죽삐쭉 입술을 깨물면서

『냉혹한 분이야요 당신은……내 마음은 이처럼도 초라하고 가난해 졌는 데……모두가 내 탓이지만……조금이라도 불쌍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지나 가 는 거지에게 동냥 한 푼 주는 셈 치구……』

『내 감정은 이미 당신을 용서했소. 그렇지만 나로 하여금 한 사람의 성실 한 애정을 배반하게 만들지 말아 주시오.』

영훈은 후딱 눈을 떴다. 연숙은 쓸쓸히 웃으며

『인제 울지 않을테야요. 그리고 무리한 청 인제 아예 안할테야요. 저는 인제 자존심도 아무것도 없어진 사람이 됐어요. 영훈씨는 역시 성실한 분이 었어요. 가혹하리 만큼 성실하셔요. 나로서는 인제는 어쩌는 도리가 없어 요.』

그리고는 핸드·빽을 주워 들며

『자아, 인제 가요.』

둘이는 이윽고 요정을 나섰다. 캄캄한 밤 하늘에 별들이 아롱지다.

꿈은 깨어지고 영훈과 서대문 네거리에서 헤어진 연숙은 아현동 집까지 쭈욱 울면서 걸었 다.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 내려 앞을 가려 볼 도리가 없다.

꿈은 깨어졌지만 어쨌든 영혼을 만나 본 것만이 연숙에게는 다행이었다.

사람의 마음 하나 돌이키지 못할 법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 험준한 삼팔선 을 넘으면서부터 생각해 오던 백연숙의 꿈은 결국에 있어서 한낱 허황한 공 상이었음을 연숙은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감정은 마침내 나를 용서했다!』

그 하나의 사실 만으로도 연숙은 적지 않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고, 거지처럼 초라했던 감정을 무마하면서 아현동 중턱에 있는 열 다섯 간 짜리 대문을 열고 연숙은 들어섰다.

『오셨어요.』

밥 짓는 계집애가 보루루 마주 나오면서 호명은 없이 연숙의 귀 밑에다 속 삭이었다. 연숙의 남편인 김석호가 왔다는 말이다.

『그래?』

연숙이가 안방으로 들어 가보니, 김석호는 아랫 목에다 연숙의 이부자리를 단정히 깔아 놓고 웃 목에서 샤쓰 바람으로 술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삼십 칠팔 세의 유둘유둘한 장년이다. 벌거우리 취기가 돈 얼굴이 연숙을 바라보자 희쭉하고 웃었다.

『주인 마님도 안 계시는 집에 무단히 드나들어서 미안하오.』

이처럼 농담조로 나오기 시작하면 한이 없는 사나이였다.

『미안한 줄 알면서 왜 드나드는 거야요?』

뾰루퉁하니 대답 하나를 던지고 연숙은 이부자리와 술상 사이에 주저 앉아 서 날름 김석호를 흘겨 보았다.

『마님의 술을 한잔 얻어 먹으러 왔소. 거 너무 박대는 마시오.』

그러다가 김석호는 빙그레 웃으며

『마님도 한잔 걸렸구려!』

했다.

그 말에 연숙은 다소 당황한 빛을 보이며 후딱 경대를 들여다 보았다.

감정이 들떠 다소 무리를 했던 고뿌 술이 눈 언저리를 발가우리 붉히고 있 었다.

『마님의 얼굴 풍경이 그럴듯 하오. 내가 다시 한번 반해 봐야겠소.』

김석호는 잔을 들어 연숙에게 권하면서

『자아, 내 술 한잔 드시오.』

『싫어요.』

연숙은 뺑하니 돌아 앉았다.

『하아, 이거 큰 일인 걸! 어떤 놈팽이와 나누고 온 술인지는 모르지만 남 편의 술이 필시 그만 못하다는 말인데……』

김석호의 두 눈이 정욕의 불길로 말미암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남편은……누구가 내 남편이라는 말이야요?』

감정이 담뿍담뿍 서린 대답이었다.

『허어, 백연숙의 남편은 필시 하나 밖에 없을텐데, 또 다른 데두 한두 사 람 있다는 말 같이 들리는 구려.』

『당신을 남편이라고 부를 사람은 따로 있을텐데, 왜 이러는 거야요?』

『아, 그런 문제 밖이래두!』

『왜 문제 밖이야요? 산월(山月)이가 당신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 리고 있을테니까, 어서 빨리 가 보아요.』

『이거 봐요, 연숙이!』

김석호는 농치면서 무릎 걸음으로 닥아왔다. 닥아와서 연숙의 손을 잡고 술잔을 쥐어 주며 『한 잔만 먹어요. 내가 배워 준 술을 딴 사내와만 먹어 서야 되겠소? 생각 하면 벼락을 맞을 노릇이지.』

그러면서 연숙의 목을 껴안고 술을 억지로 먹여 주었다.

『놔요. 내, 내 손으로 먹을테니 놔요.』

놓기 전에 김석호는 연숙의 볼에다 입술을 꽉 갖다 댔다.

『글쎄 놔요! 놓면 먹겠다는데 왜 이래요?』

연숙은 탁 남편의 손을 뿌리치며

『자아, 여기다 부어 줘요.』

밥 주발 뚜껑을 연숙은 상 위에 탁 벗겨 놓았다.

『허어, 이거 오늘 술막 나게 됐는 걸!』

석호는 될될 술을 부었다.

이 감정 저 감정이 한데 뭉킨 서글프고도 고단한 심정의 노예가 되어 연숙 은 칠칠 넘는 주발 뚜껑을 약이라도 먹는 것처럼 눈을 딱 감고 벌컥벌컥 마 셔 댔다.

『허어, 대단한 걸!』

김석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고 연숙은 서글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숙이, 울기는 왜 또……가 이처럼 당신 품에 돌아 오려는데……자아, 눈물을 씼고 웃어바요.』

연숙의 어깨를 한 손으로 껴안고 한 손으로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눈물 을 김석호는 씻어 주었다.

연숙은 멍하니 앉아서 끝끝내 안아 주지 않고 사라져 간 영훈의 냉혹한 심 정을 원망스럽게 들이켜 본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영훈의 성실한 인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성 실이 연숙에게는 하나의 냉혹으로서 되돌아 오는 것이다. 당연한 노릇이라 고는 생각하면서도 연숙은 차차 질투의 감정이 움트기 시작하고 있는 자기 의 가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처럼 골돌히 생각하는 거야?』

김석호는 또 연숙의 목덜미에다 입을 맞췄다.

『어서 돌아가요. 당신과 나는 이미 거리가 먼 사람들이야요.』

연숙은 쓸쓸히 말했다.

『내가 이처럼 연숙을 사랑하는데두……?』

『그건 사랑이 아닐 거야요. 점심 한끼 굼때듯이 어떻게 후딱 생각나니까 그러는 거지. 당신의 수중에 돈이 있는 한, 당신은 영원히 애욕의 방랑자야 요.』

『무슨 말을…….』

『제 버릇 개는 못 줘요.』

당신은 내 조강지처가 『 아니오?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곱게 모시리다.

당신의 마음만 돌아서 준다면 내 재산은 모조리 당신의 것이 될텐더…….』

『나 돈 필요 없어요. 당신의 돈 안 얻어 먹구, 나 굶어 죽는 편을 택할테 야요.』

『무슨 그런 뾰족한 말만……그러지 않아도 나는 지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소.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족히 해 나갈 사업이 하나 있는데……당신은 본래가 인테리요, 또 그 방면에 다소의 소질도 있고 해서……일한 무역만 해도 나는 바쁜 몸이고 또 믿을만한 사람도 없고 또 나와의 관계는 어쨌든 간에 당신의 장래를 생각해서도「신여인」사의 전책임자로서 당신이 한번 나서 볼 생각을 해 보면 어떻소?』

「신여인」사라면 고영훈의 직장이 아닌가! 그 순간까지도 예사로 들어 넘 기고 있던 남편의 이야기에 갑작스럽게 관심이 가기 시작하였다.

孤影[고영]과 함께

[편집]

「신여인」사를 맡아서 경영을 해 보라는 김석호의 한 마디는 백연숙으로 하여금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우리게 하였다.

『이 김석호가 본 마누라를 통 돌보지 않는대서야 어디 내 체면이 서는 가?』

거나하니 취한 김석호는 연숙의 몸둥아리에서 그럴듯한 부분만을 골라서 바라보며 연숙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체면 때문이야요?』

연숙은 연숙대로 또 한번 비꼬아 보는 것이다. 실은 김석호의 애정을 연숙 은 이미 원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렇게 한번 비꼬아 보는데 무슨 대화적(對 話的)인 흥미 같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체면도 체면이구…….』

김석호는 제 손으로 술을 따라 꿀꺽꿀꺽 마시며

『워낙 외도는 타고 난 소질이라 하는 수 없이 하는 거구……내가 언제 연 숙을 싫어 했나? 응, 그렇지 않어?』

그것은 사실이었다. 외도는 하면서도 아내의 육체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김 석호였다.

『나를 싫다고 한 것은 연숙이 편이었지, 내가 언제 연숙을 싫다고 했 어?』

『싫지 않은 양반이 왜 밤낮으루 계집질이야요?』

『글쎄 그건 내 타고 난 소질이라니까 ──.』

그러니까 『 타고 난 소질 대로 빨랑빨랑 돌아가라는 밖에…….』

연숙은 뻥하니 소리를 치며 외출복을 갈아 입을 생각도 않고 그냥 아랫목 에 깔아 놓은 이부리 속으로 훌쩍 들어 가 버렸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 다니는지, 내가 다 알고 있어요. 이 즈음에 는 종로 삼가에 있는 샹하이 양재점의 마담과도 배가 맞는다지?』

『허어, 그건 또 다 어떻게 알았소?』

『당신의 뒷 조사는 내가 다 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건 연숙이 오해요. 마담·샹하이는 우리 잡지의 집필자니 만큼 그저 그런 정도로서 대우를 하는 거지, 뭐 별다른 게 있겠소?』

『대우를 하려거든 사원들을 시켜서 할 것이지, 왜 사장이 직접 출마를 하 는 거야요?』

『어허, 허, 허……질투가 상당하구려!』

그러면서 김석호는 간단히 엄버무려 버리고 말았다.

『질투는……누구가 당신 같은 사람에게 질투를 한다는 말이야요.』

『그런게 아니구, 마담·샹하이로 말하면 우리 일한무역과 다소 금전관계 가 있는 사람이야. 우리 회사에서 마담의 돈을 좀 끌어다 쓰고 있는 관계 를』

『돈을 갖다 주는 게 아니구, 돈을 끌어다 써요? 팔자 좋구려! 돈두 끌어 다 쓰고 마담두 끌어다 쓰고…….』

『어쨌든 좋아. 그만큼 샘을 내는 걸 보니, 아직 희망이 많아!』

그러면서 김석호는 술 상을 밀어 치우고 이부자리 속으로 손을 넣어 연숙 의 손목을 잡아 댕겼다.

『놔요! 누구보고 하던 버릇야요?』

연숙은 뺑하고 소리를 쳤다.

『밉건 곱건 어쨌든 부부가 아니오? 남편이 아내의 손목을 좀 잡았다기에 그게 무슨 큰 소동이 날 일이라구…….』

그리고는 같이 누워서 연숙을 못살게 굴기 시작했다.

『연숙의 몫으로 「신여인」사 하나를 떼어 준다는 밖에……팔걸이 의자를 빙빙 돌리면서 사원들을 턱 끝으로 부리는 재미도 그리 나쁜 건 아니야.』

연숙은 영훈을 생각했다.

영훈을 턱 끝으로 한번 부려 볼가?……끝끝내 포옹을 거절하고 사라진 그 사나이에게 대하여 연숙은 불현듯 잔인한 생각이 들었다.

연숙은 자연히 항거의 자세를 조금씩 버리며 김석호의 이야기에 귀를 솔깃 이 기우리고 있었다.

사장님 소리를 듣는 『 건 그리 나쁜 건 아니래두. 더구나 무역 회사와는 달라서 잡지사 사장이면 떳떳한 문화인 대접을 받을 것이 아니야? 백연숙 사장, 어떻습니까?』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대단히 능숙하다.

『내가 사장이 되면 마담·샹하이의 집필은 그 날부터 중지시킬 테야요.』

연숙은 차차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마담·샹하이의 집필 중지 같은 것은 기실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고영훈을 생각하는 댓가로서 그런 말 이라도 씨부려 봐야만 하는 것이다.

『또 샘을……인제 만나 보게 될테지만 재미있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사람에게나 재미있지, 다 재미있어요?』

『어쨌든 한번 여사장 노릇을 해 봐요. 조강지처에게 대해서 그만한 생활 보장이라도 해 놓구야 외도를 하더라도 마음이 놓일 것 아니야?』

『흥,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격이군요.』

『마음만 내킨다면 내일로라도 나와요. 사무적인 사장 인계도 해야겠고 사 원에게 소개 인사도 시켜야겠고…….』

순간, 연숙은 불현듯 소개 인사의 광경을 상상해 보며 고영훈이가 어떠한 표정으로 자기를 사장으로 맞이하려는지, 그것이 자꾸만 연숙에게 이상야릇 한 호기심을 복돋아 주고 있었다.

『사원이 모두 몇 명이야요?』

『열아믄 되지. 편집부에 여섯, 영업부에 셋, 심부름하는 아이가 하나…

아주 탐탁한 식구야.』

연숙은 잠자코 있었다.

『내가 「신여인」사를 맡으면서부터 잡지의 내용이 충실해 졌어. 부수가 부쩍 늘었다는 말이야. 더구나 편집 책임자가 아주 견실한 사나이여서 재주 도 있고 열성도 있어서……믿을만한 사람이거든』

『뭐래는 사람인데요?』

『고영훈이라는 사람인데 만일 당신이 나서 주지 않는다면 「신여인」사의 총책임자로서 그를 등용할 셈으로 있었다우.』

『당신이 그만큼 신용하는 걸 보니 당신처럼 여자 관계가 많은 사람인 모 양이구려?』

그렇게 말하여 연숙은 고영훈의 신분 조사를 해 보기 시작했다.

『천만에! 여자 관계가 많은 사람에게는 일을 맡길 수가 없지. 상당한 인 테리구, 상당히 견실한 위인이야. 책임 관념이 세구…….』

『당신이 홀딱 반했구려.』

『당신이나 홀딱 반하지 말우.』

『반함 어떻걸래?』

『잘 안 될 걸!』

『왜?……』

『벌써 약혼을 했어.』

『약혼을 했음 못 반하나?』

『저 쪽이 말을 들어야지?』

『말을 듣게 만들면 되지 뭐야?』

『잘 안될 걸! 약혼자가 또 상당한 여자거든.』

『상당한 여자래두 눈 둘에 코 입은 하나씩이겠지?』

『내가 맡기 전에 「신여인」사에서 일을 보던 여기잔데 지금은 샹하이 양 재점에서 양재 공부를 하는 여자야. 아주 똑똑한 현대 여성이지.』

『탐이 나요?』

『탐은 나지만 그럴 수야 있나?……』

『자기 사원의 약혼자래서……』

『암 그렇지.』

『남한에 와서 철이 들었구려!』

『탐이 난다고 쓸데 없이 손을 댔다가는 고영훈을 놓쳐 버리거든.』

『놓지면 다른 사람으로 갈아 댐 되잖아요?.』

『안 될 말! 그만한 사람이 그리 쉽지 않을거야. 실업가는 어디까지나 사 업이 중심이 돼야 하는 거야! 여자와 사업을 한데 엄버무렸다가는 패가 망 신은 정한 이치거든.』

『당신의 말이 아주 훌륭한 걸 보니 손을 댔다가 데인 모양이구려.』

『천만에!』

『그렇지 않음 마담·샹하이가 방해를 논 거구.』

『마음 대로 생각하구려. 연숙의 신용을 잃은지는 이미 오랜 나야. 변명을 했댔자 소용이 없지.』

이 작자, 손은 약간 대기는 대인 것이라고, 연숙은 다년간에 걸친 경험으 로써 그것을 직각하였다.

『그리군 또 누가 있어요?』

『영업부 책임자로 최성진이가 있는데, 이 작자는 신용을 못 해.』

『어째서요?』

『여자 관계가 많아.』

『당신과 배가 맞을텐데 왜 그래요?』

술 좌석에선 배가 『 맞지만 사업 관계로는 믿어선 안 돼. 그런 줄 알고 백 사장께서도 주의를 하셔야 할 거요. 첫째로는 경리 관계고 둘째로는 여자 관계야. 최부장은 당신을 사장으로 모시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 대할테 니까, 주의를 해요.』

『주의는 무슨 주의야요?』

『어쨌든 당신은 내 아내가 아니오?』

『욕심은 많지. 이 계집 저 계집, 미친 개 모양으로 쫓아 다니면서도…

….』

『글쎄 욕심이 많은 것이 우리들 남자라는 밖에…….』

능글 맞기가 짝이 없다.

아까 영훈을 만나러 「신여인」에 들렸을 때, 장부를 펴 놓고 자기를 맞아 준 그 위인이 바로 영업부장 최성진임에 틀림 없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런 것을 느꼈지만 능글맞기로는 난형난제인 최성진 김 사장이었다.

『그런 위인, 난 싫으니까, 내보내요.』

자기와 고영훈의 관계를 최성진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연숙은 우선 최씨의 추방이 필요했다. 최씨의 고자질로 자기와 영훈의 관계를 김석호가 안댔자 무서울 것은 조금도 없지만 그 빙글거리는 모습을 날마다 대해야 한 다는 것은 불쾌한 노릇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영업 책임자를 갈아 낼가고 생각하던 참이오.』

『갈아요. 그렇지 않음 나 나서지 않을 테야요. 능글맞은 사나이, 제일 싫 어요.』

『됐어! 남편을 가진 여자는 그래야만 하거든. 아주 착실한 부인이야.』

멋도 모르고 김석호는 좋아 하는 것이다.

『능글맞은 사나이에게는 십년 동안이나 식상(食傷)을 해서요.』

『체했다는 말이지?』

연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이 그렇다면 내일이라도 내보내지. 그렇지만 적당한 후임이 없어. 벌 써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지만 고영훈이더러 겸임을 하랄 수 밖에 없는 데…….』

『겸임이면 일이 바쁠 거 아냐요?』

『다소 바쁘겠지만 그 대신 겸임 수당을 좀 톡톡히 내면 될테지.』

『어쨌든 최씨는 내보내요.』

『정숙한 부인이야!』

『나는 부인이 아냐요!』

그러면서 연숙은 홀라아 일어나 앉았다.

나는 벌써부터 부인이라는 『 신분을 면한 사람이야요. 그렇게 알고 돌아가 요. 당신을 기다리는 진짜 부인이 있으니까요.』

『이게 또 무슨 말이야?』

김석호도 하는 수 없이 부수수 일어났다.

『그렇지 않어요? 한 사람에게 부인이 두셋씩이나 있을 리가 만무하지요.

돌아가지 않으면 나는 잡지사에 나서지 않을테야요.』

『허허, 이건 조건이 틀리지 않는가?……』

그러면서 김석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제 잘못을 안다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던지, 그렇 지 않으면무런 조건도 내대지 말고 내게 잡지사를 넘겨 주던지 해요.』

『다소 까다로운 걸! 세상이란 그처럼 까다롭게 살 게 아닌데…….』

『당신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나갈테야요.』

연숙은 훌쩍 일어섰다.

『아, 어딜 가는 거요? 이 밤중에…….』

김석호도 따라 일어섰다.

『당신이 사 준 이집 밖으로만 나가면 될 거 아냐요?』

『하아, 이건 점점 더 까다로워 지는 걸. 글쎄 누구가 집 타령을 했기에 그러우?』

『그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요? 이 집에는 영영 발을 들여 놓지 말라는데 왜 자꾸만 추근추근 다니는 거야요?』

연숙은 갑자기 서글퍼 졌다. 울음이 자꾸만 복바쳐 올라 견딜 수가 없다.

연숙은 의장에 머리를 기대고 마침내 소리를 내어 운다.

오늘의 이 불행의 원인이 바로 자기 자신에 있기에 연숙은 그 누구를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연숙이, 그처럼도 내가 싫거든 오늘은 돌아가지요. 그러나 그것과는 별 문제로 치고 잘 알아서 해 봐요. 어쨌든 그만한 것은 내가 연숙을 위해서 해야만 하니까 말이오.』

『나를 아내라고 생각하지 말아요. 잡지사 때문에 나를 또 못살게 굴려거 든 나는싫어요.』

『연숙이, 그 동안에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소?』

『아무도 없어요! 나는 이 세상에 나 혼자예요!』

연숙은 어린애처럼 더 흐느껴 울었다. 정말로 자기 혼자인 연숙이었다.

『잘 알았소. 그럼 돌아가오. 이삼일 안으로 통지를 할테니까, 잡지사로 나오쇼 집 안에만 들어 . 배겨 있는 것 보다는 사회의 바람을 좀 쐬는 것도 무방하니까요. 그 동안에는 나도 철이 들겠지.』

김석호는 양복을 주워 입고 주섬주섬 마루를 내려 섰다.

연숙은 담벼락에 그려진 자기의 외로운 그림자 하나를 말끄럼이 바라보면 서 하룻 밤을 뜬 눈으로 새웠다.

不安[불안]의 一夜[일야]

[편집]

그날 밤, 영훈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숙이가 김사장의 부인이라는 것도 꿈 같은 일이지만 무엇 보다도 영훈을 괴롭힌 것은 영영 나타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백연숙의 출현이었다.

참으로 저 좋을 대로만 하는 백연숙이라고, 마음대로 갔다가 마음대로 온 연숙이가 그지 없이 얄미우면서도 끝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감정 하나가 여 전히 영훈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백연숙의 출현으로 말미암 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고영훈이었다.

끝끝내 포옹을 거절한 자기 자신을 영훈은 참으로 잘했다고는 생각을 하면 서도 십년 전 연숙의 따귀를 갈기던 때와 마찬가지의 심정 같은 것을 영훈 은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을 영훈은 또 한편 은주를 위하여 미안하게 여기는 것 이다. 될 수만 있으면 연숙이가 살지 않는 머나먼 곳으로 은주를 데리고 가 고 싶었다. 자기 눈 앞에 연숙이가 자주 보인다는 것은 은주와의 결혼 생활 을 자꾸만 좀먹어 들어 갈 것만 같아서 영훈은 무서운 것이다.

『제발 연숙이가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영훈은 자기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절실히 바라는 것이다.

이튿 날 오전 중, 영훈은 머리가 떼엥하고 신열이 다소 있어서 오후에야 사에 나갔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최부장이 사를 그만 두었다는 것이었다. 부원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오전 중에 사장이 나타나서 최부장을 사장실로 불러 가지고 약 삼십 분 동안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다가 최부장이 홱 문을 열고 나왔다고 한다.

『돈 일이십 만환 쯤 당장에라도 마련해 놓으면 되지 않소?』

그런 말을 하고는 사원들에게 사임 인사를 하고 나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최부장은 이십 만환을 전차금으로 썼다고 했지만 사 장의 결재가 없었기 때문에 무단 사용이라고 사장은 말하면서 모든 원인은 여자 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만큼 최씨의 경리가 흐렸다는 것도 숨길 수 없 는 사실이었다.

『그래 사장은 지금 어디 계시오?』

『아마 일한 무역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내일은 인사 이동이 다소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좀 일찌감치 출사하라고요. 편즙장이 오늘 결근을 하시 면 사람을 보내서라도 연락을 취하라고, 특별한 주의가 있었지요.』

『잘 알았소.』

편즙 일을 끝마치고 영훈은 은주의 명랑한 목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서 샹하이 양재점에 전화를 걸었다. 은주의 음성에 접한다는 것은 하룻 동안에 다소 병들어 있는 자기의 마음의 동요를 바로잡는 일종의 진정제가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화통 앞에 나온 것은 은주가 아니고 마담·샹하이였다.

『난 또 누구라구?……편즙장 선생이었군요. 그렇지만 은주 아가씨를 못 대 드려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어디 나갔읍니까?』

『오늘은 결근이래요. 그렇지만 무슨 꿀 같은 이야기람 내가 대용품이 되 어서 들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결근?……어디가 편찮은가요?』

『알만한 양반두 모르고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호호호…….』

『어제 나갈 때 무슨 말 없었는가요?』

『암 말두……어제는 점심을 같이 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얼마나 깨가 쏟아졌기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사람이 해질 무렵에야 돌 아온담?』

『해질 무렵이라고요?……세시 경이 아니구요?』

『이거 왜 그러는 거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깨만 쏟았나 보구려.』

『아닙니다. 분명히 세 시 쯤에 헤어졌읍니다.』

『음식이 맛나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른다는 격으로 얼마나 달콤했기 로 그 놈의 해가 세시에 졌노?』

『아, 마담! 정말 좀 똑똑히 이야기해 주시오. 정말로 해질 무렵에 돌아왔 읍니까?』

『글쎄 그렇다는 밖에……세 시는 세 시래도 해는 졌다는 밖에…….』

『알았읍니다.』

『김사장 안녕하신가?』

『하시겠지요.』

왜 이리 『 무뚝뚝한 대답이야? 내 말 한 마디면 편즙장두 없어!』

『영광이 올시다.』

영훈은 전화를 끊었다.

공연히 삭막하다. 그 삭막감이 차차 불안감으로 변해 갔다. 이유는 잘 모 르지만 그저 불안하다.

『어디가 아픈가?……』

어제 헤어질 무렵까지는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전차 들창으로 핸 드·빽을 나불나불 내졌던 광경이 눈 앞에 선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영훈은 사를 나와 동대문 밖 은주의 집을 방문할 셈으로 전차를 탔다.

그러나 삼십 분 후, 창신동 은주의 집에 다달았으나 은주는 없었다. 아침 에 은주는 여니 날저럼 천연히 집을 나갔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으니까 걱정 말우. 기분이 좀 나쁘면 하루 진종일 영 화이기두 하구 그런다우. 애가 원채 성질이 좀 깔끔해서…….』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여 영훈을 안심시켰다.

『어쨌든 내일 양재점으로 전화를 걸어 보겠읍니다.』

『무슨 말 다툼을 했었나?』

『아닙니다. 말 다툼은…….』

『그러구 보니 어제 저녁엔 기분이 좀 우울해 보이긴 했지만두…….』

『그랬읍니까? 어제 저녁은 어느 때쯤 집에 돌아왔었읍니까?』

『어제는 좀 늦었지. 통행 금지 시간이 거지반 가까운 무렵이었으니까 …….』

『그래요?』

『왜 같이 다니지 않았나?』

『아닙니다. 저와 헤어진 것은 세 시쯤이었지요.』

『그래?……』

그러나 어머니는 별반 걱정하는 빛은 없었다.

『어제 아침 집을 나갈 때는 제가 점심을 한턱 한다구 어린애처럼 날뛰며 나갔었는데……참 인사가 늦었구먼. 지어다 준 약을 먹구 이처럼 쾌차했는 데…….』

『어머니 다행입니다. 하여튼 제가 다녀갔다고 전해 주시오.』

『또 어디서 영화 구경을 하구 있겠지. 그저 제 사람이 되고 보면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구 저처럼 걱정을 해주니 고마운 일이지 뭐요?』

식구라고는 모녀 두 사람 뿐이다. 사위가 되어 줄 사람이고 보면 눈물이 나도록 이 어머니는 고마운 것이다.

영훈은 다시 골목을 되돌아 나와서 전차를 타고 사직동 자기 집으로 돌아 왔다.

그날 밤 영훈은 또 공연히 ,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밤은 연숙의 생각을 하면서 그랬었고 오늘 밤은 은주의 생각 때문에 또 그랬다. 이유 모를 불안 이 자꾸만 영훈의 신경을 긁어 쥐었다.

『죄가 있대도 관용을 하지!』

광교 다릿 목에서 종각 쪽을 핼끔 핼끔 돌아다 보면서 자기의 애정을 저울 질 하던 어제를 영훈은 생각한다.

『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될 거예요.』

헤어질 무렵, 전차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며 속삭이던 은주의 모습이 그 어 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을 가지고 영훈의 가슴을 차츰차츰 굳세게 눌러 왔 다.

『아무리 봐두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칠 것만 같아요.』

그 모두가 다 명랑한 미소의 면사포를 쓰고 흘러 나온 말이었기에 그 말들 이 지닌 감정의 말도(密度)를 미처 측량하지 못했던데 자기의 과오가 있었 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영혼의 불안은 또 다시 비약을 거듭하기 시작하였 다.

不吉[불길]한 誘惑[유혹]

[편집]

불안의 하룻 밤은 밝았다.

조반을 일찌감치 먹고 영훈은 사로 나갔다. 사원들도 모두 출근해 있었다.

『사장께서 부르십니다. 빨리 들어가 보셔요.』

편즙 부원 하나가 영훈을 보자 사장실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장이 벌써 나오셨어?』

『네, 지금 막 나오셨읍니다.』

붙여 물려던 담배를 다시 갑에 집어 넣고

『나한테 어디서 전화 온 데는 없었소?』

은주의 소식이 궁금하여 영훈은 물었다.

『없는데요.』

영훈은 사장실로 들어 갔다.

김석호 사장이 이처럼 일찌감치 「신여인」사에 나온 것은 근래에 드문 일 이었다.

김사장은 테에불 위에 두 팔꿈치를 올려 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들어오는 영훈을 물끄럼이 바라보고 앉았다.

『거기 좀 앉으시오.』

아침 인사를 하고 영훈은 사장과 마주 앉았다.

이 사나이가 바로 연숙의 남편이다. 이 사나이가 바로 내 손으로부터 연숙 을 끌어다가 마음대로 안아 보고 마음대로 학대를 할 수 있는 그 어떤 권위 를 가진 사나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위에 군림(君臨)하여 나를 사회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나이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영훈에게 있어서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의 실마리가 연숙이라는 한 여성을 끄나풀로 하여 자기와 김석호의 대결을 끝까지 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지처럼 초라 해진 연숙의 감정을 끝끝내 거부한 자기의 태도가 어쩐지 위선자의 그것 과도 같이 생각키워지는 것이었다. 그러한 연숙을 생각하면 마음이 알끈했고 은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뜬했다. 그 알끈한 심정과 이 가뜬한 심경 속에서 영훈의 불행의 싹은 차차 움트고 있었다.

『이형도 아다 시피 내가 다소 바쁜 몸이어서 「신여인」에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소. 그래서 구상을 좀 달리해 보았소.』

김사장은 우선 담배 한 대를 영훈에게 권하며

『그래서 나로서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이형이 「신여인」사의 총책임 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벌써부터 갖고 있었지요.』

『사장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책임이 너무 무겁습니다. 저는 그저 편즙만을 전적으로 맡아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훈은 사양했다.

『알법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지요. 편즙자란 일종의 기 술잔데, 이 사회에서는 기술자로서만은 성공하기가 힘든다는 것이오. 기술 자는 어디를 가나 기업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도 사람 위에 서는 통솔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벌써부터 들어온 이야기이기에 영훈은 잠자코 있었다.

『다소 바쁠지는 모르지만……그 대신 이형의 보조자를 한 사람 배치하도 록 하겠소. 알기 쉽게 말을 하면 나는 당분간 「신여인」에서 손을 떼고 나 를 대신할 새로운 사장이 들어 오게 되었소.』

『아 그러면 「신여인」의 운영체가 바뀌어집니까?』

『아니오. 내용에 있어서는 마찬가진데 내가 다소 바쁜 몸이어서 하는 말 이오.』

『그러면 그 사장되실 분은 어떤 분인가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오.』

김석호는 거기서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으며

『실은 내 아낸데……』

『에?……』

『이형은 잘 모를지 모르지만 이북에 있던 내 아내가 이번 일·사후퇴 때 월남을 했지요. 지금 아현동서 살고 있지만……문과 출신이라, 그 방면에도 다소 소질이 있는 것 같고……지금은 별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멀지 않아서 는 한데 모여야만 될 형편인데……그 때까지는 무슨 발 붙일 사업 하나를 장만해 줘야겠고……명목은 사장이라지만 결국은 이형의 보조자가 되겠지 요.』

실로 뜻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러한 사태가 자기 배후에서 버러지고 있 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그렇습니까!』

주권자의 의견이니 반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명목이 사장이지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형에게 있을 거요. 잘 협조해서

「신여인」사의 발전을 도모해 주시오.』

『잘 알았읍니다.』

영훈은 가슴 속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영업 부장 최성진은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만 두라고 했소.

당분간 이형이 겸임을 해 주시오. 부원이 모자르면 적당히 보충을 해도 좋 고 편즙 기술자를 따로히 채용해도 무방하오. 둘이서 잘 의논해서 적당한 발전책을 강구해 주시오.』

『힘 자라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읍니다.』

그렇게 대답은 했으나 영훈의 감정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허공에 떠 있었다.

무엇인가 꼭 지적할 수는 없었으나 그 무슨 불길한 운명이 자기를 차츰차 츰 학대할려고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불길한 예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감미로운 일면을 지닌 예감이기도 했다. 아무런 것도 모르고 있는 김석호 사장의 이 야기는 하나의 불길한 유혹을 의미하고 있었다.

운명이 자기에게 지금 하나의 가혹한 시련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영훈은 생각 하였다. 그 시련에 쓰러지지 않고 그 불길한 유혹에 이겨 나갈만 한 굳세인 의지력이 영훈에게 필요했다. 자신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 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있는 것도 같았다.

녹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여기자 한 사람이 연숙을 인도해 가지고 사장실로 들어 왔다.

『아, 마침 잘 왔소.』

여기자는 나가고 김석호는 연숙을 맞아 들였다.

새로이 웨이브를 한 파아마에 윤이 반지르니 돌고 있었다. 보오얀 분 가루 가 유달리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회색 양단 저고리에 깜정 벨벳트 치마가 대학생들처럼 짧다. 자색 하이·힐이 유달리 놓다. 고무신에 긴 치마를 입 었던 이틀 전 보다는 사오 년이나 애티가 있어 보였다.

『인사를 하시오. 이 분이 편즙장 고영훈씹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훈을 향하여

『내 아내요.』

했다.

어색하기 짝 없는 장면이었다. 사장의 소개로 인사는 바꾸었으나 그것이 영훈에게는 무슨 죄를 짓는 사람처럼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연숙은 태연하게

『아내라는 건 지난 날 이야기고 지금은 자유로운 몸이니까, 김사장의 말 을 곧이 들으시면 서운해요.』

그러면서 요염한 웃음을

『호호호호……』

하고 유쾌히 웃었다.

『허어, 이러다가는 집 안 내용이 다 드러나겠는 걸! 어쨌든 이북에 있는 내 호적에는 백연숙이가 김석호의 배우자로서 등록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 오.』

『그렇지만 고선생, 사장의 말 재주에 넘어 가서는 안 되셔요. 이북 법률 이 남한에서 발효(發效)하지는 못하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고 선생님?』

연숙의 눈 꼬리가 곱게 웃어 왔다. 지난 날의 학생 티를 거지반 회복하고 있는 연숙의 명랑한 어조가 그의 짧은 치마와 함께 영훈의 눈에는 지나치게 부시다.

영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후딱 들창 밖으로 외면을 했다. 을 지로 네거리에 인파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흐느적거리는 인파와도 같이 영훈의 감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쨌든 백사장, 좀 앉으시오.』

김석호는 연숙을 그렇게 부르며 싸이드·체어를 권했다. 연숙은 앉으며

『고선생님, 잘 좀 지도해 주세요.』

그러면서 영훈의 모습을 말끄럼이 바라보았다. 비밀의 속삭임을 향락하는 것과 같은 윤택있는 눈동자였다.

『힘 자라는 데까지는 해 보겠읍니다.』

연숙의 그 윤이 반지르니 도는 두 눈동자가 영훈은 차차 무서워 졌다. 오 늘의 이러한 인사이동의 배후에는 연숙의 의욕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영훈 은 그것을 명확히 느끼며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이 여성의 삼십 대의 연륜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원은 모두 몇 명이나 되죠?』

사장으로서의 권위를 연숙은 세워 오기 시작하였다.

『편즙부에 여섯 명, 영업부에 세 명. 그리고 사환애가 하나 있읍니다.』

『이 달 편즙은 어떻게 됐어요?』

『끝마치어 인쇄소에 넘겼읍니다. 내달 원고를 수집하고 있지요.』

『재미있겠어요, 잡지 일이란……』

『해 보시면 아시지만 재미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애로가 많습니다.』

『거야 그렇겠지요. 인생에 애로가 있듯이 잡지 편즙에도 그런 대목이야 물론 있겠지요.』

의미 깊은 한 마디를 연숙은 던져 보며

『아마 김석호 사장 보다는 제가 다소 이 방면에는 안목이 있을 거예요.

여자라고 지나 치게 깔보지는 마세요.』

웃지도 않고 하는 연숙의 다짐을 영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김석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됐어! 그만하면 사장으로서의 관록이 상당 하오. 그늘에서 자란 콩나물 쯤으로 알아 왔었는데 이처럼 턱 사회에 내놓고 보니 예상 밖으로 믿음직 하오.』

그리고는 혼자서 유쾌히 하하 웃었다.

『고형, 이 여성은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깔끔한 데가 있고 꿈이 많으면 서도 계산은 밝지요. 계산이 밝은것 같으면서도 또 어두운 데가 있고 현실 의 행복을 추궁하다가도 하늘의 별만 쳐다보는 여성 ── 길을 보지 않고 걸 어 가다가 가끔 돌뿌리를 차고 넘어도 진답니다. 넘어지고 나서는 쳐다보던 별만 원망하지요.』

영훈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쯤 알아 두고 고형이 잘 협조해 주시오. 지나치게 별을 쳐다볼 때는 고개를 좀 눌러도 주고 지나치게 땅만 보고 걷다가 전선 때 같은데 부딪칠 염려가 있을 때는 턱 밑을 좀 밭혀도 주고……』

그러나 연숙은 마이동풍 격으로 들창 밖 푸른 하늘만 내다보고 있었다. 내 다보는 연숙의 눈 위에 금방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무게를 가지고 헤리콥터 한 대가 할딱할딱 날아 가고 있었다. 김석호는 이윽고 사장의 인계 서류를 두 사람 앞에 내주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운 무 렵이었다. 신구 사장의 퇴임 인사와 취임 인사를 사원들에게 하고 세 사람 은 김석호의 인도로 점심을 먹으러 거리로 나왔다.

感情[감정]의 거리

[편집]

명동 어떤 그릴에서 오찬을 하고 김석호는 대단히 바쁘다는 말과 함께 일 한 무역으로 먼저 돌아갔다.00000 영훈과 연숙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김석호가 옆에 있을 때는 뭐라고 적당 히 대화를 이어 가던 두 사람이었지만 그 김석호가 훌쩍 사라져 버리기가 바쁘게 둘이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연숙은 말끄럼이 벽에 걸린 풍경화를 열심히 쳐다 보고 있었고 영훈은 쇼 오·윈도오 너머로 한길을 묵묵히 내다보고 있었다. 둘이는 오랜 동안 그러 고 앉아 있었다.

『불쾌하시나봐요, 얼굴 표정이……』

풍경화를 쳐다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혼잣 말처럼 연숙은 외웠다.

영훈은 시선을 돌렸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다. 풍경화를 쳐다보면서 연숙의 얼굴이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불쾌하실 거야요. 보기 싫은 사람이 자꾸만 접근해 와서……』

『…………』

『아주 냉혹하던데요. 성실을 위해서는 거지에게 동냥 한 푼도 안 줘야 하 는가 보죠!』

『…………』

『정말로 제가 싫어졌다면 하는 수 없어요. 그렇지만 영훈씨의 눈동자를 보면 그렇지도 않는것 같던데……내가 잘못 보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요.』

『나갑시다.』

들었던 찻잔을 영훈은 놓았다.

『사장의 의사를 무시하고 혼자 나가세요?』

영훈은 웃었다.

『얼마나 잘난 사원인지는 모르지만 사장의 말에는 대답 한 번도 없지요.

건방진 사원이야요.』

『백사장, 인제 그만 하시고 일어 서지요.』

영훈도 종시 농담조를 썼다. 그렇게 해서 밖에는 받아 넘길 도리가 없는 연숙의 푸념이었다. 일단 그렇게 해 받아 넘겨 보니, 자기의 완고한 감정이 숨길을 펴는 것 같아서 괴롭던 마음 속이 다소 가벼워 졌다.

『인제부터 사장을 잘 모셔야 해요.』

방글방글 웃고 있던 연숙의 얼굴이 웃음을 후딱 걷우면서 하는 말이다.

『잘 모시겠읍니다.』

『사장의 말에는 절대 복종을 해야만 해요.』

『네 하지요.』

『복종을 안하면 재미없을 거야요.』

『목이 잘리웁니까?』

『목이 문제가 아니죠.』

『그럼 뭐가 문젠가요?』

그러나 연숙은 거기는 대답을 하지 않고

『샹하이·양재점이라죠?』

했다.

『뭐가요?』

너무 돌연한 질문에 영훈은 어리둥절 했다.

『샹하이·양재점에 취직을 하고 있다죠?』

『…………』

말 귀를 그제서야 알아 보고

『그런건 다 어떻게……?』

『다 알고 있지요. 총명하다죠?……』

『…………』

『귀엽게 생겼다죠?……』

『…………』

『이름이 뭐야요?』

『한은주 ──』

『본시는「신여인」사의 여기자였다죠?』

『그렇소.』

『그처럼 총명하고 유능한 기자라면 도루 우리 사로 모셔 오는 게 어때 요?』

이미 연숙의 이야기는 농담의 영역을 넘어 서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일 종의 도전(挑戰)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처녀들처럼 단순하지 않은 연 숙의 삼십 대가 일종의 협위를 지니고 영훈을 압박해 왔다.

그이를 불러 오면 제가 『 특별 대우를 하겠어요. 영훈씨편에서도 매일 찾 아 다니는 수고가 덜어 질테니 편할 게 아냐요?』

은주의 이야기가 튀어 나오는 순간, 불안과 초조로서 새운 어제 하루 밤을 영훈은 불현듯 생각하며 훌쩍 몸을 일으키었다.

『나가요.』

연숙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 섰다.

그릴을 나온 두 사람은 명동 입구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후 두 시, 번 잡한 가두 풍경이 영훈의 심정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연숙에게서 받는 유혹과 은주에 대한 불안이 파도처럼 덧두겨지며 밀려 왔다. 안정된 심정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영훈은 꿈결처럼 허둥 지둥 걸었다.

빨리 사로 돌아 가서 샹하이·양재점에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고, 그것만을 골돌히 생각하며 명동 입구로 빠져 나와 오른 편으로 커어브를 해서 서너 걸음 걸어 가는데 은주의 그리인 색 투·피스가 또박 또박 눈 앞으로 닥아 왔다.

『아, 은주!』

영훈은 후딱 걸음을 멈추며 닥아오는 은주를 불렀다.

은주의 표정이 다소의 놀람을 지니고 영훈과 나란히 걸어 오고 있던 연숙 의 모습을 핼끔 붙잡았다. 두 여인의 시선이 무섭게 부딪치다가 홱 떨어지 며 군중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어제 집에 갔었는데……』

그러나 은주는 대답 대신 가벼운 조소의 눈초리로 영훈을 말똥말똥 쳐다만 보고 있었다.

『양재점엔 왜 결근을 했소?』

『…………』

『오늘은 나갔었소?』

『…………』

자기의 불안이 마침내 현실화 한것이라고, 영훈은 불길한 예감을 앞질러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 무척 귀여운 분이예요. 한은주씨죠?』

연숙의 얼굴이 영훈의 폭 넓은 어깨 옆에서 화려하게 꽃 피는 순간, 은주 는 홱 고개를 돌리며 영훈의 옆을 지나쳐 또박또박 걸어 가기 시작했다.

『호호호호……암만 봐두 총명한 아가씨야!』

연숙의 명랑한 웃음 소리가 은주의 뒤를 따라 은방울처럼 굴러 갔다.

『아, 은주! 은주!』

영훈은 은주를 따라 군중 속을 헤엄쳐 갔다.

은주가 뛴다. 영훈도 뛰었다.

『아, 은주! 잠간만……』

한길 한 복판으로 은주는 무턱 대고 뛰었다.

『아, 위험!』

달리던 자동차 하나가 크락숀 소리와 함께 급정거를 했다.

『죽어두 좋아?……』

운전수의 목소리가 발악을 하듯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은주의 자태는 물밀듯이 폭주하는 차도를 사슴처럼 깡충깡충 건너 가는데 성공하였다. 교통 순경이 뭐라고 소리소리를 질렀다.

『은주, 잠간만 기다려요!』

떠나려는 택시 안에 영훈은 우뚝 막아 섰다. 일단 움직이었던 택시가 그 자리에서 다시 섰다.

영훈은 닥아가서 택시 문을 열려고 했으나 은주는 안으로부터 고리를 비틀 어 잡고 좀처럼 열어 주지를 않는다.

『빨리 떠나요!』

빽하고 은주는 소리를 쳤다.

『위험합니다.』

운전수는 떠나 주지 않는다.

영훈은 하는 수 없이 조수대에 올라 탔다.

『떠나도 좋소!』

영훈은 운전수에게 발차를 명령했다.

차가 움직이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은주는 차에서 뛰어 내려 을지로를 향하여 또 달리기 시작하였다.

『미안하오.』

영훈도 뛰어 내렸다. 뛰어 내리면서 백환 한 장을 운전수에게 쥐어 주었 다.

『이 양반들 술래 잡기를 하는 모양인가?……』

운전수는 멍하니 핸들을 잡고 앉아 있었다.

을지로 네거리에서 영훈은 마침내 은주를 붙드는데 성공하였다.

『은주, 이야기가 있소!』

은주의 숨결이 할딱할딱 높다. 둘이는 잠자코 네길 얼음을 건너 「신여 인」사 앞을 그대로 지나 종로로 걸어 갔다.

인제 은주는 뛰지 않았다. 숨결이 차차 가시고 은주의 표정이 여니 때처럼 태연해 졌다.

『여기 좀 들어가요.』

광교 다리 근처에 와서 영훈은 은주의 팔을 다방 안으로 잡아 끌었다. 순 순히 은주는 끌리어 들어갔다.

구석진 복스에 둘이는 마주 앉았다. 그러나 은주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다. 죽어라 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새침한 얼굴이 무섭게 차다.

『은주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를 오해하고 있는 거요.』

그러나 은주는 레코오드에 귀를 가만히 기우리고 있다. 홍차가 왔으나 은 주는 손도 대지 않았다.

『오해라는 것처럼 우리에게 해로운 것은 없는 것이오. 은주가 무엇을 오 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을 충분히 풀어 줄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은주는 표정 하나 까딱 없이 손을 들어 레지에게 신호를 하면서

『미안하지만 무슨 유쾌한 경음악 하나 틀어 주세요.』

했다.

『은주, 내 말 좀 들어요.』

『경음악이 적당한 것이 없으면 바이올린 콘첼트 같은 것도 좋아요.』

『이거 봐요, 은주!』

『그렇지만 그런 게 없으면 피아노 독주 같은 것도 무방해요.』

이윽고 경음악이 흘러 나왔다.

영훈은 마침내 발언을 중지하였다.

은주는 가만히 귀를 기우리고 구두 끝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이 다방 에 들어 서면서부터 지금까지 은주는 영훈의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愛情[애정]의 姿勢[자세]

[편집]

경음악이 흐르는 오후 한길 가 다방 안은 삶의 의욕을 어지러운 페이브에 포기하고 온듯 싶은 인간들이 어항 속의 금붕어인양 나릇나릇 느러져 있는 한 폭의 풍속화(風俗畵) ──.

새침한 표정 밑에 감정의 가시가 날카롭게 돋아 있는 은주의 모습을 묵묵 히 영훈은 바라보고 있었다. 오랫 동안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제는 왜 양재점을 쉬었수?』

『…………』

『오늘은 나갔었소?……』

『…………』

『그런 건 왜 물어요?』

은주는 비로소 입을 열어 대답을 하였다.

『왜 묻다니…… 내가 물어서 안될 사람이오?』

『물을 필요가 없을 사람 같애서 말이예요.』

『무슨 뜻이오? 도대체……』

『그런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그럼 누구가 압니까?』

『알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거 아냐요?』

『통 모를 말이오.』

『참 모를 말이예요.』

두 사람은 또 한참 동안 대화를 상실한 채 마주 앉아 있었다.

『그저께 진고개 입구에서 나와 헤어진 후, 은주씨는 어딜 갔었소?』

『전차를 타고 오잖았어요?』

『곧장 양재점으로 돌아가지는 않은 모양이던데……마담의 말을 들으면 저 녁 무렵에야 돌아왔다는데……』

은주는 잠시 영훈의 얼굴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앉았다가

『종로에서 내렸어요.』

샹하이 양재점은 이가에서 내려야만 가깝다.

『그리곤 어딜 갔었어요?』

『왜 자꾸만 남의 행적을 더듬는 거예요? 아무델 갔댔음 영훈씨가 무슨 상 관이예요?』

『허어……?』

영훈은 말 문이 막혔다. 완전히 남과 남의 대화였다.

『염려가 되니까, 묻는 게 아니오?』

『염려가 될만한 일을 하셨나 보군요.』

그러면서 은주는 훌쩍 일어섰다.

『나 먼저 갈테예요.』

『아, 은주 잠깐만……』

영훈은 은주의 손목을 잡았다.

『손 놓세요.』

은주는 영훈의 손길을 무슨 더러운 물건이라도 뿌리치는 것처럼 냉혹히 취 급을 했다.

『그처럼 염려가 된다면 알으켜 드려요.』

은주는 다시 걸상에 탁 몸을 던지며

『전차를 타고 종로 네거리를 커어브하는데, 후딱 바라보니까 종각 앞에 가지 비로오드 치마를 입은 여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죠. 그래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 거에요. 영훈씨를 위하여 선을 좀 봐 드리고 싶었을 따름 이예요.』

『아, 그럼 은주는……』

다소의 당황한 빛을 영훈은 보이며 말 더듬이를 했다.

『괜찮더구먼요. 영훈씨가 좋아 할 타잎이던데……이쁘구, 감성적(感性的) 이구, 가끔 가다가 눈 꼬리 웃음도 웃을 줄 알구……취직을 한 경험도 있다 니까 요염(妖艶)한 대목도 있을 법하구……』

식어 빠진 홍차를 은주는 마셨다. 마음도 갈했지만 목도 갈했다. 홍차 한 잔을 더 청하고 나서

『내 뭐라고 그랬어요. 사무실 앞을 그냥 지나칠것만 같다고 그러지 않았 어요?……』

영훈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아니나 다를가, 어슬렁 어슬렁 찾아 오던데……몇 년만이랬죠? 아, 참 십 년만……십 년만의 대면이 그럴듯 하더군요. 카메라가 있었더람 한 컷트 집어 넣고 싶었지만……여자가 울던데……오죽했음 한길 가에서 눈물을 흘 린담!』

말에는 야유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지만 은주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처럼 새침하다.

『다소 비겁한 느낌을 느끼기는 했으나 약혼자의 러브·씨인이 하두 보고 싶어서 뒤를 따라 봤어요. 원앙처럼 둘이는 걸어 갔지요. 노을을 바라보며 둘이는 추억의 거리를 걸어 갔지요.』

홍차가 왔다. 은주는 한 입술 마시며

『뜨거워!』

찻 잔을 도로 놓고

『서대문 중국 요리집까지 두 분을 모셔다 드리고 나는 돌아 왔어요. 그러 노라니까 늦어 졌을 밖에……』

뜨겁다던 찻 종지를 또 무심중 들고 마시다가

『아이, 뜨거!』

홍차까지 오늘은 말썽이냐고, 은주의 감정은 갈구라져 가기만 했다.

잘 알았소 『 . 그러나 거기에는 다소의 설명이 필요하지요.』

영훈은 엄숙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설명을 들을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 않아요?』

『그렇지가 않소. 설명이 꼭 필요합니다. 나는 은주씨의 말처럼 사무실 앞 을 그대로 지나친 것이 아니고……』

은주는 두 손으로 자기 귀를 탁 막으며

『듣기 싫어요!』

하고 뺑 소리를 쳤다.

『뭐라고 또 변명을 할려면 나 영 손을 떼지 않을테야요.』

『좋소. 그럼 거기 대한 설명은 그만 두지요. 손을 떼요.』

영훈은 손수 은주의 두팔소매를 잡아 당겨 손을 떼 놓았다.

영훈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또 물었다.

『그리곤 또 어딜 갔었소? 어머니의 말씀으론 밤 늦게야 돌아 왔다는 데……』

『영화 구경 갔었어요.』

『혼자서요?……』

『아니오.』

『누구와 갔었소?』

『박인해씨와 같이 갔었어요.』

『박인해?……』

박인해(朴仁海)는 샹하이·마담의 동생으로서 안국동에서 개업을 하고 있 는 젊은 의사였다. 작년에 상처를 한 박인해는 영훈과 약혼하기 전부터 은 주와 혼인 말이 있던 사람이었다.

은주가 아직 「신여인」사의 기자로서 샹하이 양재점으로 마담 박인숙(朴 仁淑)을 찾아 다니면서 기사 청탁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마담이 중간에 나서서 두 사람의 접촉을 꾀하여 주었다. 셋이서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 구 경도 같이 갔다.

박인해 ( ) 는 은주를 무척 요망하고 있었다. 선처가 남겨 놓고 죽은 어린 것이 하나 있었으나「인해병원」은 연조가 얕은 젊은 의사로서는 비교적 수 입이 많았다. 오늘 날처럼 여성들의 결혼난이 극심한 시대에서는 그만하면 좋은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은주는 모나지 않도록 은근히 거절하 고 영훈과 약혼을 했다.

그러한 사실을 영훈도 잘 알고 있었고 그 박인해가 아직도 후취를 맞아들 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샹하이·마담에게서 언젠가 들었다. 그리고 그 러한 관계에 있는 박인해와 같이 은주는 영화관에를 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은주의 거짓 말이었다. 영훈과 연숙을 서대문까지 바라다 주고 돌아오는 길에 후딱 박인해라는 하나의 존재가 은주의 기억에 떠올랐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비교적 오랜 시간을 두고 은주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은주는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고영훈의 불신과 박인해의 구혼을 똑 같이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영훈은 적지 않게 불쾌한 감정을 느꼈으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시할 계제 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잠자코 앉았다가

『그래 어제도 양재점을 쉬고 구경을 갔었소?』

『네.』

『또 둘이서……?』

『아냐요. 어제는 혼자 갔었어요. 낮에는 환자들때문에 병원을 비일 수가 없잖아요?』

『그래 어제 밤에는……?』

『같이 저녁을 먹고……』

『박인해와……?』

『네.』

그것도 물론 거짓 말이었다. 그러한 거짓 말이라도 씨부려 봐야만 자기의 괴로운 감정이 다소라도 누그러질 것 같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자세도 서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어딜 가던 길이오?』

『형사들처럼 왜 자꾸만 캐묻는 거예요?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예요?』

그러나 기실 은주는 그저 「신여인」사 앞 거리인 을지로를 거닐고 싶었던 것이다. 영훈을 만나는 것이 무섭기도 했고 영훈을 만나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한 불안정한 마음을 가지고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 섰던 은주였다. 그리 고 그러한 은주의 눈 앞에 영훈과 연숙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잘 알았소. 그러나 서로가 다 오해는 풀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지 요.』

거기서 영훈은 자기가 연숙을 만나게 된 관계를 있는 그대로 쭉 이야기하 였다. 은주는 이미 아까처럼 귀를 막지는 않았다. 영리한 눈동자를 가끔 들 어 영혼의 이야기의 진위를 가만히 가리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 가 보니 연숙이가 찾아 왔었다는 말, 퇴사하여 지나가는 길 에 종각 앞에 서있는 연숙을 보았다는 말, 서대문 중국 요릿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곧 헤어졌다는 말, 알고 보니 김석호사장의 본처라는 말, 그리 고 오늘 실로 뜻 밖에도 김석호 사장과 대치되어 「신여인」사 사장의 자격 으로 사원 일동에게 취임 인사를 하고 김사장과 세 사람이서 점심을 먹으며 나왔던 길이라는 말을 쭉 이야기하였다.

은주는 무엇 보다도 놀란 것은 연숙이가 「신여인」사의 사장으로서 영훈 을 지배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은주에게 있어서 한층 더 불리한 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잘 됐군요! 인제부터는 매일 만날 수가 있겠으니까 말이예요.』

은주는 토라지게 말했다.

『이거봐요. 비꼬아서 말할 때가 아니오. 좀 더 내 입장을 이해하여 주면 어떻소?』

영훈은 사실 은주의 그러한 태도가 싫었다. 약혼자를 위하여 그만한 정조 를 지키는 남성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영훈은 자기의 그러한 노력 이 점점 서글퍼 졌다.

『비꼬는 게 아니고 사실대로 이야기 했을 따름이예요. 그 백연숙이라는 여자가 어째서 갑자기 「신여인」사 사장이 됐는지는 모르지만요. 어쨌든 잘 되지 않았어요?……』

백연숙의 사장 취임의 배후에는 필경 뱅연숙과 영훈의 암암리에 합치된 의 욕이 도사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은주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둘이가 만나자 사흘만에 그러한 급작스런 변동이 생길 리는 만무 한 일이 아닌가!

더럽다! 은주는 그 이상 더 영훈의 옆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더럽다는 생각 이 갑자기 가슴에 복바쳐 올라 훌쩍 걸상에서 일어서 나오고 싶은 감정을 누르며

『여러 말 할 필요는 없어요. 나는 지금, 저번 날 광교 다리에서 저희들이 만났을 때, 영훈씨가 내게 대해서 취한 그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거니까 요. 그 때만 해도 적어도 나는 영훈씨의 약혼자였지요. 내 입으로부터 질문 을 받기 전에 왜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백연숙의 이야기를 내게 해 주지 못 했느냐 말이예요.』

『아, 그건 결국 은주를……』

영훈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뭐가 그건이예요?……탈로가 나지만 않았음 영원히 거기 대한 이야기를 내게는 숨길 셈였어요……내가 그 날도 무어라고 했어요?……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어요?……내가 영훈씨에게 관심하 고 있는 건 그러한 이야기의 줄거리나 뼛대는 아니예요. 그여자와 만나 보 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의 자세였으니까요.』

은주는 훌쩍 몸을 일으키자 획 다방을 나가 버렸다.

『은주!』

영훈이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뛰쳐 나왔을 때는 은주는 이미 택시 한 대를 잡아 타고 있었다.

『은주, 잠깐만……』

영훈은 택시 옆으로 뛰어 갔다. 그러나 택시는 그러한 영훈은 무시하고 종 로를 향하여 획 달아났다.

돌아다 보아도 좋을만한 들창이 등 뒤에 있었으나 앞을 향하여 꼳닥 앉아 있는 은주는 다방앞에서 어린애처럼 날뛰는 영훈을 완전히 피아마의 뒷통수 로 무시하면서 사라져 갔다.

다방 앞에 영훈은 오랫 동안 서 있었다. 은주의 뒤를 그냥 따라 갈 수는 쉬 운 일이었다.

그러나 은주가 배앝고 간 최후의 한 마디가 영훈에게는 아팠다.

『그렇다! 연숙을 만나 보고 싶어 하던 마음의 자세!』

그 마음의 자세를 은주는 지금 무자비하게 꼬집어 내어 영훈의 낯작에다 보기 좋게 내동댕이를 치고 사라져 간 것이다. 은주의 그 매서운 감정의 돌 팔매 앞에 영훈은 어리둥절해 졌다.

『일이 공교롭게 되어 버렸다!』

정말로 공교롭게 얽혀져 버린 오늘의 사태였다.

영훈이가 아무리 성실한 변명을 꾀하여 보았댔자 은주의 마음을 돌이키기 에는 상당한 시일의 경과를 요할 것 같았다. 은주의 눈에는 영훈의 성실이 인제는 조금도 믿기워 지지가 않을 것이다. 영훈은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신여인」사를 향하여 걸어 갔다.

感情[감정]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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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차는 달려 갔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종로 네거리에 다달으자 운전수는 물었다.

『아무 데도 좋아요.』

빽·미러에 비치는 사십 대의 운전수의 얼굴이었다. 그 운전수의 얼굴을 은주는 매서운 표정을 하고 말끄럼이 바라보고 앉았다.

『아무 데도 좋으시다고……』

운전수도 거울을 통하여 은주의 매서운 표정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도 가시는 데가 있을 것 아닙니까?』

『아무 데나 가 주세요. 찻 값은 넉넉( )니까, 걱정 말아요.』

『거야 그러시겠지만……』

『곧장도 좋고 커어브를 해도 좋고……어쨌든 길만 있음 차는 달릴 수 있 을 거 아냐요?』

『아하하하…… 그럼 서울 시내를 한번 멋지게 드라이브해 볼가요?』

『좋아요. 아저씨가 모시는 대로 어디든지 갈테예요.』

『그럼 어디 한번 그래 봅시다요.』

찻 값은 넉넉하다고, 마음 대로 가라는 것이 운전수를 저으기 유쾌하게 하 였( ).

차체가 휘익하고 커어브를 하면서 로오타리를 빵 돌아 광화문 통을 향하여 쾌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 차 무슨 차예요?』

『포오드 오십 년돕니다. 좋은 차지요?』

『기분 나이스예요.』

『모 차관의 찬데요. 담배 벌이( ) 해 볼 셈으로……하하……』

『그럼 택시가 아니군요.』

『에헷헷……』

운전수는 웃고 나서

『아가씨도 이런 차 하나 장만하세요.』

『차 한 대쯤 살만한 아가씨 같애 뵈요?』

『그럼요. 멋진 아가씬데……』

『후후훗……』

은주는 쿡쿡 웃고 나서

『인제 나두 차관 급하고 결혼을 할테예요.』

시치미를 딱 떼고 은주는 말했다.

『아하하핫……』

운전수는 유쾌하게 웃으며

『곧장 내 뽑을가요?』

광화문 네거리였다.

『글쎄 난 모른다니까요. 아저씨 마음대로요!』

차는 네거리를 건너 서대문을 향하여 또 달려 갔다.

『유쾌한 아가씬데요.』

『유쾌해 뵈요?』

『종달새 같은 아가씹니다.』

『고마워요.』

마음의 풍경과는 정반대의 표정을 은주는 하고 있는 것이다.

『좀더 속력을 내요. 저기 가는 찦차 한번 따라 마셔 봐요.』

은주는 어린애처럼 발을 굴렀다.

『위험합니다. 사고가 나기 쉽지요.』

『사고 좀 나면 어때요?』

정말로 사고라도 한번 내 보면 하는 은주의 심경이었다.

『아직 목숨이 아까우니까요.』

『뭐가 아까워요? 저기 오는 저 츄럭과 한번 탁 부딪쳐 봐요.』

『말씀 맙쇼. 이래 뵈두 자식 새끼가 수두룩 하답니다.』

거기서 두 사람의 대화는 뚝 끊기었다.

『어디로 갈가요?』

서대문 네거리에 차는 다달았다.

『글쎄 마음 대로 가시라니까 ⎯⎯』

『서울 역 쪽으로 가서 남산 공원을 한 바퀴 돌아 봅시다.』

『좋아요.』

그러나 로오타리를 삥 도는데

『스톱!』

하고 은주는 갑자기 외쳤다.

『여기서 내려요?』

『아냐요. 나 저기 보이는 중국 집에 잠간 들렸다 올테니 기다려요.』

핸드·빽을 운전수에게 맡겨 놓고 은주는 깡충 차에서 뛰어 내렸다.

『이 핸드·빽을 갖고 다라나면 어떻걸 셈입니까?』

운전수는 웃으면서 그런 농담을 했다.

『괜찮아요. 십만 환 이상은 들어 있지 않으니까, 그것 때문에 콩밥 잡수 시기는 다소 아쉬울거예요.』

『아하하핫……』

운전수의 유쾌한 웃음 소리를 뒷 통수에 들으면서 은주는 또박또박 중국 집으로 들어 갔다.

한참만에 은주는 도루 또박또박 걸어 나와서 또 차를 탔다.

『왜 달아나지 않았어요?』

핸드·빽을 받아 쥐며 은주는 물었다.

『자식 새끼가 귀해서요.』

『호호호홋……』

『하하하핫……』

차는 또 쾌속도로 서울 역 쪽으로 달려 갔다.

은주가 장서방에게서 얻어 들은 이야기는 간단하였다. 사흘 전 저녁 무렵 에 왔던 영훈과 연숙은 그 후에는 다시 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 둘이는 십년전 학생 시대에 자주 찾아 왔었다는 이야기 ⎯⎯ 그것 뿐이었다.

차는 이윽고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올라 갔다. 공원을 삥 돌았다.

『참 경치가 좋아요.』

『좋지요.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니까요.』

『십만 환임 차 값은 충분하겠죠?』

『웬 걸요. 다소 모자를 걸요.』

대화는 거기서 또 뚝 끊어 졌다. 은주의 얼굴은 차츰차츰 깊은 우수에 잠 기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다 같이 피로한 은주였다.

『아가씨, 무슨 걱정이 있읍니까?』

『아니오.』

『그렇다면 좋지만요.』

남산 공원을 삥 돌아 차는 이윽고 을지로 육가로 빠져 나왔다.

『그냥 가요?』

『그냥 가세요.』

운전수는 차츰차츰 머리를 기우리기 시작했다. 수상하다. 아무래도 손님의 태도가 수상하였다.

동대문 앞으로 해서 종로 오가에 왔다. 오가에서 오른 편으로 꺾어져 대학 앞 거리를 차는 달렸다.

『인제 그만 가지요.』

『십만 환이 모자를가 봐서 그래요?』

운전수는 또 빙그레 웃으면서 차를 그냥 몰아 댔다. 혜화동에서 창경원 앞 으로 차는 또 커어브를 했다.

『울적하시면 창경원에나 들어 가 보시지요.』

『아저씨와 같이 들어 가요.』

『나야 어디 시간이 있읍니까?』

『혼자서 뭘 하러 들어 가요?』

『누구 좋은 사람 안 계십니까?』

『없어요.』

『그럴 리가 있겠읍니까? 아가씨처럼 명랑( )고 예쁜 분에게……』

『얼마 전까지는 있었는데요, 그만 늙은 독수리한테 떼워 버렸어요.』

『하하하핫……』

운전수는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그 놈의 독수리를 가만 놔 두었어요?』

『원체가 능글맞은 독수리어서 힘에 부쳐요.』

차는 원남동에서 돈화문 쪽 탄탄 대로를 미끄러져 갔다.

『아가씨는 참 명랑한 성격이어서 좋겠읍니다.』

『침울해 봤댔자 저만 손해니까요.』

『하하, 그런 것이 소위 현대적 성격이라는 게 아닙니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정확한 판단과 재빠른 단념 ⎯⎯ 그것만이 비참 한 감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출하는 오직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요.』

『맞은 말씀입니다.』

『단념하기 위하여…… 그래서 지금 아저씨에게 십만환어치만 차를 태워달 라는 거예요.』

『하하하……아가씨의 심정은 잘 알아 모셨읍니다.』

『제가 저를 빨리 구출해 내야만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나 육 체적으로나 한 시간 한 시간이 손해니까요. 다른 사람의 손해 쯤 세상 사람 은 눈하나 깜박도 안 한답니다.』

『정말 그렇지요. 제가 저를 생각해야지요.』

돈화문을 거쳐 안국동 「인해병원」 앞을 차가 지나고 있었다. 중앙청 방 향으로 백 메타 쯤 지나쳐 버렸을 때

『스톱! 여기서 인제 내리겠어요.』

『그러셔요?』

차는 서고 은주는 내렸다.

『수고하셨어요. 얼마나 냄 되요?』

『실비만 받지요. 천환만 주세요.』

『너무 헐 값인 것 같은데요.』

『괜찮습니다. 빨리 단념만 하세요.』

『탱큐!』

은주는 방긋 웃고 나서 천환을 세어 주며 운전수에게 ( )드·빽 속을 내어 보였다. 백환 자리 석장이 댕그라니 남아 있었다.

『인제 내 차관 급하고 결혼을 하면 정말 십만환 하나 넣어 가지구 올게 요.』

『그 때는 택시가 필요 없으시( )지요. 하하핫… ‥』

『호호홋……』

차는 이윽고 중앙청 쪽으로 사라지고 은주는 멀리 「인해병원」의 간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斷念[단념]의 方途[방도]

[편집]

정확한 판단과 재빠른 단념 ── 불행한 감정으로부터 자기를 구해 낼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그것 뿐이라고, 은주는 거스름 없이 생각하고 있었 다. 그 비참한 감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오랫동안 학대할 필요가 은주에게 는 없었다. 영훈의 애정의 자세를 확실히 본 이상 은주는 자기의 그 미련에 찬 감정을 재빨리 청산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그 한 방도로서 후딱 박인해 를 생각하고 차에서 내린 은주였다.

잠시 은주는 한길에 오두머니 서서 안국동 로오타리 저편으로 건너다 보이 는「인해병원」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로오타리를 건너 서 서 또박또박 병원으로 걸어 갔다.

오후 세 시가 좀 지난 무렵이었다.

병원은 비교적 한산하였다. 부인 손님이 한 사람 진찰대 위에서 정맥주사 를 맞고 있었다. 인해병원은 내과가 전문이었다. 대합실안으로 들어 갔다.

『아, 은주씨가 어떻게……?』

주사를 놓던 손을 잠시 멈추고 박인해는 얼굴을 들었다. 옆에 서 있던 간 호원이 은주를 핼끔 한번 쳐다보고 나서 곧 외면을 했다.

『참 오랫만입니다. 좀 걸터앉으시지요.』

주사를 놓고 난 부인 환자를 간호원에게 맡기고 박인해는 손수 걸상을 끌 어 당겨 은주에게 권했다.

『요지음 바쁘시나 봐요. 양재점엔 통 들리지 않으시구…….』

은주는 권하는 대로 들창 가 테이블 옆에 끌어다 놓은 걸상에 걸터앉으며 진찰실 안에 휘이둘러 보았다.

『별로 바쁜 것도 없으면서……어째 들리기가 다소 서먹서먹 해서요.』

박인해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머리를 긁었다.

자기와의 혼인 말이 순조롭게 가지 못한 사실을 의미하는 말인 줄을 빤히 짐작하면서도

『왜 누님과 무슨 그런 일이 있어요?』

했다.

『아니오.』

『그럼 뭐가 그리 서먹서먹 하세요?』

그 한 마디를 토라지게 던지면서 은주는 박의사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아, 하하핫……아무런 것도 아닙니다.』

회전 의자에 은주와 마주 걸터앉으며 박인해는 어린애처럼 또 얼굴을 붉혔 다.

올해 서른 다섯의 박인해 의사였다. 그만한 연륜을 가진 위인이면 다소는 세상의 쓴 맛도 알법한 일인데 산골 사람처럼 소박한 데가 있다. 그 호인 타잎의 소박성이 은주에게 있어서는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었다.

은주의 현대적인 기질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할 때, 그러한 소박성을 자칫하 면 세련되지 못한 쑥스러운 시골뚜기로 여기기도 쉬웠으나 은주의 성미에는 그러한 것을 귀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데가 또 한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면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기에 「인해병원」의 문을 들어 선 것이다.

『그래 오늘은 어떻게 여기까지 들렸읍니까?』

좀더 재치있는 인사 말을 왜 못하느냐고, 박의사의 그러한 물음이 정녕 쑥 스럽기는 했으나 은주의 현재의 심경으로서는 그 쑥스러움을 탓할만한 여유 가 없다. 화장을 하지 않은 본 바탕 얼굴을 바라보는 것처럼 은주는 도리어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어떻게라구……저는 뭐 여기 못 올 사람인가요?』

은주는 그러면서도 방긋이 웃어 보였다. 웃어 보이고 나서 은주는 자기 자 신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것은 분명히 한 사람의 매춘부의 웃음이었다 고 생각키웠기 때문이다.

별로 이렇다 할만큼 애정도 느끼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생활 보장이 되어 있는 이 삼십오세의 개업의에게 자기는 지금 매춘부와도 같이 웃음을 팔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아, 하하……은주씨의 이야기는 가끔 비약을 해서 나 같은 사람은 좀처 럼 따라 갈 수가 없지요. 하하……』

저 혼자 말하고 저 혼자 웃었다.

『요지음은 양재 기술이 많이 늘었겠군요?』

담배를 붙여 물며 박의사는 말했다.

『그렇지도 못한가 봐요. 결근을 잘 하니까요.』

『아, 결근을……왜 몸이 편찮으셔서……?』

『건강은 지극히 좋지만 마음이 다소 병들었나 봐요.』

『아, 마음이……?』

박의사는 일부러 놀라 보이며

『여기는 몸의 병만 치료하는 데가 되어서……마음의 병은 어딜 가야 치료 가 될가요?』

박의사로서는 최상급으로 재치있는 말을 했다고 은주는 생각하며

『박선생, 말 재주가 무척 늘으셨어요.』

은주는 또 곱게 웃었다 . 어째 그런지 박인해 의사에게 밉게 보이고 싶지가 않다.

『하하……은주씨의 말을 받아 넘기려면 힘이 들어요. 그래서 나도 기를 쓰고 해 본 것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지요.』

둘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부인환자에게 치료대를 받아 세어 보면서 간호원이 이 쪽을 핼끔핼끔 바라보고 있었다.

은주 또레의 나이었다. 개름한 얼굴에 눈 모습이 시원시원해 보였다. 은주 와 혼인 말이 났을 때부터 있던 간호원이었다.

『정말은 나 머리가 쑤시게 아파서 왔어요.』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이지 않기 위해서 후딱 내던진 한 마디였으나 기실 머리가 땡하게 아픈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이삼일 동안, 은주로서는 정확한 판단과 재빠른 단념을 하기 위해서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재밤 중 같은 때 후딱 깨면 좀처럼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감정의 파동을 가까스로 무마하노라면 이윽고 먼동이 훤하게 트이 곤 했다.

『아, 감기를 드신 게 아닐가?……』

박의사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냐요.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러나 봐요.』

『아, 그럼 역시…….』

『또 무슨 재치있는 말을 하시려구……?』

『하하, 한 마디 해 보려고 했지만 은주씨가 그처럼 앞질러 주시니까, 그 만 쑥 들어 가고 마는군요. 하하…….』

『어디 한번 해 보세요.』

『인제 그만 김이 빠졌읍니다.』

『괜찮아요. 빠져 나간 만큼 제가 보태서 들을테니까요.』

부인 환자를 전송하고 난 간호원이 진찰대 위에 손질을 하다가

『쿡, 쿡 ──.』

하고 웃었다.

『하하, 보태서 들어서야 어디 실감이 납니까?』

하고 박의사는 벙글벙글 웃으면서

『실은 밤 잠을 못 자는 것과 마음의 병과는 대단한 관련성이 있다는 말을 좀 재치있게 해 보려던 참이지요.』

그 말에는 은주도

『하하하…….』

웃었다 매춘부의 웃음이 . 아니고 진정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본연의 웃음이 라고, 은주는 다소 비굴해졌던 자기 자신을 도로 찾은 것 같애서 유쾌했다.

『그런 때는 어떻게 말해야만 재치가 생깁니까?』

『그 물음부터가 일종의 재치를 의미하는 거예요.』

『하하하……은주씨에게는 손을 들었읍니다.』

『그것도 이즈음 유행되는 재치있는 말 가운데 하나죠.』

『그래요?』

『박선생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세련되셨어요.』

『그렇습니까! 인제는 나도 은주씨의 상대가 꽤 되어 보입니까?』

『상당하세요.』

『간호원!』

하고 그 때, 박의사는 손 하나를 들어 간호원을 불렀다.

그러나 간호원은 핼끔 한번 박의사를 돌아다 보기만 했을뿐, 대답이 없다.

콘로 위에다 주사기를 간호원은 끓이고 서 있었다.

박의사는 처방지에 「미그로낭」을 섞은 약제를 써 가지고

『간호원!』

하고 또 한번 불렀다.

그래도 간호원은 보굴보굴 끓는 알마이트 그릇만 열심히 들여다 보고 서 있었다.

『간호원, 들었나 못 들었나?……』

처방지를 한 손에 집어 든채, 엔간한 호인인 박의사도 언성을 다소 높였 다.

『들었어요.』

알마이트 그릇을 들여다 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간호원은 조용한 대답을 했 다.

『들었으면 왜 대답이 없어?』

은주의 눈 앞이다. 박의사는 어쨌든 체면을 세워야 했다.

『………….』

간호원은 잠자코 있었다.

『들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않아?』

『대답하기가 싫어서 안 했어요.』

역시 조용한 말이었다.

『대답하기가 싫다?……』

『………….』

『어째서 대답하기가 싫을가?』

박의사의 어조는 다시 조용해 졌다. 함부로 화를 내는 것만이 웃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는 어조였다.

『월급쟁이 보고 봉급자, 봉급자, 그래 보세요. 일군 보고 노동자, 노동 자, 그래 보세요.』

『허어?……』

박의사는 흴끔 은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은주의 얼굴은 새침해 있었다.

『간호원이라고 부른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지?』

『잘못은 아닐 거예요. 간호원은 간호원이니까요.』

『그랬으면 됐지, 손님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선생님에게는 손님일는지 몰라도 제게는 환자예요.』

『환자는 손님이 아닌가?』

『손님과 환자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다르다는 말이야?』

『………….』

간호원은 또 잠자코 있었다.

『허어, 이거 참 말 한 마디 잘못 했다가 손님 앞에서 무안을 보았군.』

그 때까지 묵묵히 앉아 있던 은주가

『그건 박 선생의 불찰이에요.』

했다.

『허어, 은주씨까지……?』

박의사는 비로소 웃음 띤 얼굴을 돌렸다.

『박선생 보고 의사 의사, 그래 보세요. 의사임에는 틀림 없겠지만 듣기에 약간 귀에 거슬릴 것만은 사실이지요.』

『음 ──.』

박의사는 깊은 신음을 했다. 그 신음 소리가 예상 이외로 긴 것이 은주의 날카로운 촉수(觸手)를 움직이었다.

『제게도 이름이 있으니까, 이름을 불러 주세요.』

그러면서 간호원은 비로소 몸을 돌려 테에불 앞으로 걸어 왔다. 박의사의 손에서 잠자코 처방지를 받아 들고 진찰실을 나섰다. 진찰실 바로 옆 방이 조제실이었다.

쓸쓸한 사람들 간호원이 나간 후, 박의사와 은주는 대화를 상실한 시선을 서로의 얼굴로 던졌다 그리고는 . 서로의 표정을 각기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얌전하면서 무척 똑똑한 여자에요.』

얼마 만엔가 은주편에서 먼저 대화의 실마리를 끄집어 냈다.

『성질이 약간 괴벽한 데가 있지요.』

『그건 절대로 괴벽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럴가요?』

『당연하다고 저는 생각하지요.』

『그렇다면 은주씨도 괴벽한 편인가 보지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뭐가 괴벽하다는 말이예요?』

『권리라고요?』

『그럼요. 인권에 관한 문제에요. 그 사람의 직업은 결코 그 사람의 인격 을 대표하는 건 아니니까요. 직업은 직업이고 인격은 인격이야만 해요. 박 선생이 저더러 재단사, 재단사, 하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아요?』

『음 ⎯⎯.』

박의사는 비로소 현대적 관념에 대한 지식 하나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직업이 인격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한국 민족의 비극은 있다고 보아요.』

『그럴가요?』

『그렇구 말구요. 오늘날, 정부의 기관이나 민간단체에서 감투를 쓰고 있 는 양반들이 죄다 그 감투만한 인격이 있다고는 보지 않겠지요?』

『물론 보지 않지요.』

『그것과 꼭 같은 이야기니까요.』

대답할 말을 박의사는 마침내 잃었다.

『잘 알았읍니다. 이후는 주의하지요.』

그러는데 약을 지어 들고 간호원이 조용히 들어 왔다. 테에불 위 은주의 눈 앞에 약 봉지를 놓고 돌아 서려는데

『정옥이, 미안했소.』

박의사는 그러면서 심정옥(沈靜玉)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제부터는 그런 실언은 하지 않기로 하겠소. 이 손님에게 지금 톡톡히 충고를 받았으니까요.』

그러나 심정옥은 소그듬이 선 채 말이 없다. 그 때 은주가 말을 받았다.

『그래요. 인제부터는 아까처럼 해라를 하지 말고 존칭어를 쓰세요. 오죽 듣기 좋아요?』

『그러지요. 오늘 참 은주씨의 교육을 많이 받는군요.』

그러나 심정옥은 은주에게 대해서 별반 이렇다 할 호의는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도리어 그러한 은주에게 . 그 어떤 압박감을 느끼고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 어두운 표정이 심정옥의 얼굴에는 있었다.

『나 한은주라고 불러요.』

은주는 갑자기 감정이 다사로움을 느끼며 자기 소개를 손수 했다.

『저 다 알고 있어요.』

비로소 시선을 들며 심정옥은 말했다.

『그래요?』

『지난 봄에도 몇번 오시지 않았어요?』

지난 봄이란 은주와 박의사 사이에 혼담이 오고가고 하던 무렵을 의미하고 있었다.

『참 그랬었지.』

비로소 생각난 것처럼 은주는 말하며

『인제부터 우리 친구가 되요.』

그러나 심정옥은 거기 대한 대답은 없이 돌아 서 갔다.

『자아, 은주씨 오랫만인데 저녁이나 같이 하지요.』

그러면서 박인해는 훌쩍 회전의자에서 몸을 이르키며 까운을 훨훨 벗었다.

『약 값 밖에 가진 것이 없어요.』

핸드·빽을 열고 삼 백환을 은주는 꺼내 놓았다.

『아, 하하……은주씨는 ( )제든지 회계가 밝으시지. 넣어 두시오.』

『아냐요. 낼 껀 내야지, 짐이 되요.』

은주도 ( )( ) 일어 서며 하는 ( )( )다.

『짐?……』

박의사는 표정 하나를 크게 써 보이며

『그럼 정옥이, 이백 환만 받아.』

『받아요 ⎯─ 그러세요.』

은주가 또 교육을 시켰다.

『아, 참 자꾸만 잊어 먹었어! 그럼 정옥이, 받아요.』

『하하하…….』

은주는 유쾌히 웃었으나 심정( )은 그래도 웃지를 않았다. 시키는대로 이 백환만 가지고 가서 책상 위 금고에다 넣고 전표에 기입하였다.

『그럼 잠간 나갔다 올게.』

『나갔다 올게요 ⎯─ 그러세요.』

『아, 참……나갔다 올게요.』

심정옥은 전표 기입을 마치고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오래 걸리세요?』

『뭘……한두 시간 쯤…….』

『영식(永植)이가 기다릴테니 너무 늦지 마세요.』

영식이란 죽은 아내가 남겨 놓은 박의사의 아들이었다.

『아, 곧 돌아올테니…….』

박의사는 모자를 쓰고 성큼성큼 진찰실을 나섰다.

『그럼 안( )히 계세요.』

은주가 나오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나 심정옥은 대답을 않고 두 사람의 뒷 모습을 말끄럼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괴벽한 성미에다가 원체 인사성이 없는 사람이어서…….』

병원을 나서면서 박의사는 그러한 심정옥을 변명하고 있었다.

『그런게 아닐 거예요.』

택시를 불러타면서 은주는 말했다.

『네?……』

『성미가 괴벽해서 그런게 아닐 거라는 말이에요.』

차는 종로로 달리고 있었다.

『왜요?』

박인해는 담배를 붙여 물었다.

『그이는 박선생을 사랑하고 있는 거에요.』

『정옥이가 나를……?』

표정이 지나치게 크다.

『숨길 거 뭐 있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쁘대 요?』

『허어, 은주씨의 생각이 다소 지나치는군.』

『간호원이라고 부른 건 오늘날만이 아니죠? 저번 봄에도 그렇게 부르던 데…….』

『아, 전에도 그랬었지만……』

『그것 보세요. 다른 환자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던 그이가 오늘만은 화를 냈지요.』

『왜 그럴가요?』

『아이, 누구를 어린애로 취급하시나 봐.』

은주는 그러면서 방글방글 웃고만 있다가

『박선생은 애정의 책임을 져야 하실 거에요.』

『애정의 책임이라고요?』

소박한 박의사는 그 순간, 적지 않게 당황한 빛을 표정에 보였다.

『손 아랫 여성……더구나 사회적으로 박선생 보다 미천한 지위에 있는 한 여성이 혼담이 있었던 서은주 앞에서 그만큼 반항을 한다는 것은 이유가 있 다는 증거지요.』

『음 ⎯─.』

그릴 앞에서 차가 멎었다. 이층으로 올라 가서 식탁에 마주 앉을 때까지 박의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은…….』

음흉하지 못한 박인해 의사는 마침내 실토를 했다.

『나는 은주씨와 꼭 ( )혼이 하고 싶었답니다.』

맥주에다 함박스테크를 먹으면서

『그러나 은주씨와의 결혼이 뜻 대로 되지가 않았지요. 정옥은 그 무렵부 터 나를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내 성격이 모질러 먹지를 못해 서…… 또는 은주씨를 놓쳐 버린 고독이 원인이 되어……정옥의 애정에 질 질 끌리어 들어갔지요.』

『그럴 줄 알았어요.』

아까부터 마음 속으로 은근히 우려하고 있던 것이 인제는 사실로 화하고 말았다. 은( )는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을 전신에 느꼈다. 그처럼 좋 아하던 함박스테크가 갑자기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그럼 인제 곧 결혼을 해야겠군요.』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겠지요.』

박인해 의사의 표정이 갑자기 쓸쓸해 졌다.

『하기 싫다뇨?』

짐작은 하면서 ( )주는 물었다.

『은주씨는 아직 모를는지 모르지만……남자란 반드시 애정만을 가지고 여 성에게 접촉하는 건 아니니까요. 정옥을 사랑하기에는 은주씨의 이메지가 내게는 너무도 강렬했읍니다.』

박의사는 그러면서 제 손으로 맥주를 두 컵이나 한꺼번에 쭉쭉 들이켰다.

『그렇지만 정옥에 대한 애정의 책임은 꼭 내가 질 작정입니다. 은주씨에 게 향하고 있던 내 애정을 정옥에게서 발견하도록 노력을 해야지요.』

박인해는 쓸쓸히 웃었다.

『참으로 좋은 생각이에요!』

은주도 포오크를 노면서 똑 같이 쓸쓸히 웃었다.

『은주씨는 언제쯤 결혼식을 거행하십니까?』

『아직……아직 미정이에요.』

『왜 빨리 하시지 않구……?』

『……………….』

은주는 대답을 못하고 들창 밖 한길을 내( )( ) 보았다.

둘이는 오랫 동안 묵묵히 마주 앉아서 인간의 운명을 골돌히 생각하고 있 었다.

『어서 가 보셔야지 않겠어요? 영식이가 기다릴텐데…….』

『뭘요. 정옥이만 옆에 있으면 좋아하니까요.』

『그래도 아까 그이는 영식이가 기다린다구…….』

『아, 그건 자기가 할 말을 그런 형식으로 한 것 뿐이지요.』

그대로 좀더 앉아 있고 싶어하는 박인해를 재촉하여 둘이는 황혼의 거리로 나섰다.

『가끔 좀 놀러 오시오. 결혼식 때는 꼭 청첩을 주셔야 합니다.』

『드리구 말구요. 그럼 박선생, 안녕히…….』

『안녕히…….』

쓸쓸한 작별을 둘이는 했다. 박인해는 안국동으로 총총히 돌아갔고 은주는 명동 쪽으로 목적없이 걸어갔다.

영훈이가 갑자기 은주는 그리워 졌다.

눈동자의 秘密[비밀]

[편집]

삐뚜러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걷잡을 수 없는 은주였다. 그러한 뾰족한 성 품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영훈이었다. 영훈의 편에서 아무리 울고 불고 해 보았댔자 소용이 없다. 제풀에 돌아서 주기 전에는 별 도리가 없는 일이라 고, 한 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은 채 택시를 몰아 댄 은주의 날카로운 뒷 모습이 은주의 모난 감정을 그대로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었다.

영훈은 절망을 느꼈다.

『비수 같은 자존심!』

그 자존심의 칼날 위에 은주는 지금 구두도 양말도 벗어 던진 무방비(無防 備)의 맨발로 피를 뿜을는지 모른다. 그러한 자기 희생의 출혈 작전(出血作 戰)을 은주는 지금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박인해를 만나 본 은주의 행동도 일종의 출혈 작전을 의미하고 있었다. 하 등의 애정도 느끼지 못하면서 은주는 박인해 의사의 마음을 타진해 보고자 했다. 다행히 박의사의 성실한 인품이 은주에게 출혈을 강요하지 않았을 뿐 이었다.

은주를 끝끝내 놓쳐 버린 영훈은 기력을 잃고 터벅터벅 사로 돌아왔다.

『새 사장이 좀 보시잡니다.』

부원 한 사람이 연숙의 의사를 영훈에게 전달했다. 영훈은 사장실로 들어 갔다.

연숙이가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까지도 김석호 사장이 앉아 있던 커다란 사무탁 앞 회전 의자에 깊이 파묻힌 그대로의 자세로

『어때요?』

풀끼 없이 들어 서는 영훈을 향하여

『에헴, 이만 함 사장 같아요?……』

하며 표정을 가다듬고 목을 한번 빼 보였다.

『사장 같군요.』

영훈은 웃으며 실감 없는 대답을 했다.

『대답이 어째서 시원치가 못해요. 영훈씨는 아마도 제가 사장으로 취임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시나 봐요.』

『그건 오해입니다. 누구가 사장이든 나는 내 직무에 충실하면 그만이니까 요.』

그러면서 영훈의 옆에 놓인 쏘파로 가서 소탁자 앞에 털썩 앉았다. 담배 한 꼬치를 피워 물며 멍하니 창 밖을 영훈은 내다보았다. 택시 뒷 유리 창 으로 들여다 보이던 은주의 가시가 돋은 두 어깨가 다시금 영훈에게 절망감 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장이 강아지든 도야지든 통 관심이 없다는 말이죠?……』

연숙의 대화가 차츰차츰 비약을 하기 시작하였다. 맨 첫날, 영훈과 더불어 서대문 중국 요릿집에서 대면을 하던 때의 그 거짓 말 같던 비참한 감정을 백연숙은 이미 청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강아지 쯤으로 생각해 두세요.』

수동적인 자세에서 연숙은 점점 능동적인 태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의 사장 취임은 제 생각이 아니고 순전히 김석호사장의 생 각이라는 것을 영훈씨도 알아 두실 필요쯤은 있다고 생각해요.』

『누구의 생각이든 내가 그것을 알 필요는 없겠지요. 김사장이든 백사장이 든 나는 일정한 보수를 받고 일을 해 드리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 말에 연숙은 잠시 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너무 무뚝뚝하지 마세요.』

했다.

영훈은 얼굴을 돌렸다 . 연숙의 하얀 얼굴이 화려하게 웃고 있었다. 요염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영훈씨는 제게 대해서 무슨 감정이 있나 봐요.』

그리고는 자기도 제 말이 웃으운지

『호호호호……』

하고 웃었다.

영훈도 따라서 조용히 웃었다. 십년 동안의 결혼생활에서 습득한 능청 맞 은 한 마디였으며 요염한 웃음이었다.

영훈은 순간, 은주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 직전까지도 은주의 날카로운 뒷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던 영훈이었다.

『제게 대해서 무슨 감정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아무런 감정도 없소.』

연숙의 말과 꼭 같은 성질의 대답을 영훈도 했다.

『그렇다면 너무 지나치게 뽐내지 마세요.』

『뽐은 누구가……』

『흥, 너무 그러지 말아요! 사람이란 살아 가노라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거예요. 어린애들이 산수를 하듯이 하나와 하나를 합하면 꼭 둘만 은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 줄만 아세요.』

영훈은 묵묵히 또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대학 교수에게 설교를 받는 소학 생과도 같았다.

『인간이 자기의 실행(失行)을 보충하는 오직 하나의 길은 참회 밖에 없다 고 저는 믿어요. 그것을 지금 저는 하고 있는 거야요. 그 밖에 저더러 무엇 을 하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연숙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쏘파로 걸어 가서 영훈의 옆에 가만 히 앉았다. 영훈은 그냥 외면을 하고 있다가 한참만에 대답을 했다.

『나는 연숙씨에게 참회를 강요하지는 않았소.』

『강요를 받고 하는 것은 참회가 아닐 거야요.』

『그러나 이미 늦었소.』

영훈은 잊어 먹었던 은주의 생각을 불연듯 했다. 은주의 생각을 골돌히 해 봄으로써 연숙의 유혹을 영훈은 물리쳐야만 하는 것이다.

『저는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늦었소!』

영훈은 힘찬 대답을 의식적으로 했다. 그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의 취약한 인간성을 채찍질 하는 외침이기도 하였다.

연숙은 말끄럼이 영훈의 옆 얼굴을 들여다 보고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가 이윽고 손 하나를 살그머니 들어 외면하고 있는 영훈의 흩으러진 머리카락 을 가만히 쓸어 올리며

『영훈씨, 조금도 늦지 않았어요.』

했다.

『늦었소.』

영훈은 또 무뚝뚝한 대답을 되풀이했다.

아냐요. 영훈씨는 지금도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아니오! 당신을 잊어 버린지 나는 이미 오랬소. 나는 나의 약혼자를 사 랑하고 있는 것이오.』

힘찬 한 마디와 함께 영훈은 얼굴을 돌려 연숙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연숙은 조용히 웃으며

『아냐요. 영훈씨는 분명히 저를 사랑하고 있어요. 영훈씨의 입은 저를 미 워하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지만……영훈씨의 눈동자는 저를……연숙을 지 금도 잊지 못하고 있지요!』

『아니오. 그것은 당신의 착각이 아니면 오만일 것이오!』

자기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있는 연숙의 손길을 영훈은 홱 떠밀어 버 렸다.

『아이, 무서워!』

연숙의 화려한 표정이 일부러 놀라 보이며 착각이래도 좋고 오만이래도 무방해요. 그렇지만 영훈씨의 눈동자는 저를 분명히 사랑하고 있어요. 영훈씨의 말과 행동은 저를 미워하고 있는 것 같 지만 눈동자의 정열만은 속일 수 없는 거예요.』

『건방진 소리다!』

『아냐요. 절대로 건방진 말이 아냐요. 영훈씨는 지금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거야요. 저를 미워할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약혼자를 귀여워 해 보 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당신은 실로 오만한 여성이다!』

『아냐요. 나는 절대로 오만한 사람이 못 돼요. 영훈씨의 애정을 거지처럼 초라한 감정으로 애원했던 건데요. 다만 저는 영훈씨의 참된 애정의 자태를 말하고 있는 것 뿐이지요.』

『당신은 일종의 요부다!』

그렇게 외치면서 영훈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요부일는지는 몰라요.』

연숙도 따라 일어 서며

『그렇지만 남성들이 사랑에 미치면 정신 병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 미에서 여성들이 사랑에 취하면 요부처럼 요염해 지기도 하고 거지처럼 감 정이 초라해 지는지도 몰라요.』

영훈은 물끄럼이 연숙의 애달퍼 하는 얼굴 모습을 오뇌의 표정을 하고 들 여다 보았다. 이 여성은 어딘가 요부적인 윤리와 생리를 지니고 있는 것이 라고 그 순간 불현듯 생각하였다.

십년 전, 애인 고영훈을 버리고 애정도 아무 것도 없는 김석호와 결혼한 것은 일종의 요부적인 윤리관에서 출발한 행동이었고 오늘 다시금 고영훈을 찾아 월남한 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요부적인 생리의 방랑을 의미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고, 영훈은 비로소 백연숙이라는 한 여성이 지닌 행동의 원동력 같은 것을 후딱 미루어 보는데 연숙의 몸둥이가 쓰러지듯이 영훈의 품 안으 로 기어 들어 왔다.

『거지도 좋고 요부도 좋아요! 아무래도 좋아요!』

발꿈치를 들고 두 팔로 영훈의 목을 끌어 당기며 영훈의 입술을 연숙은 마 침내 도적 했다.

『뭐랬든 좋아요. 요부, 요부……인제부터 요부가 될테예요!』

영훈의 품 안에서 연숙은 무섭게 몸부림 쳤다.

삼십 대의 난숙한 육체가 영훈의 품 안에서 약동을 했다.

『영훈씨가 저를 사랑하고 있지 않음 모르지만……빤히, 저를 좋아하고 있 으면서도……』

연숙은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 두 번째의 사랑의 비명이었다.

영훈은 은주를 생각했다. 저번처럼 은주를 위하여 남성의 정조를 끝끝내 세우기에는 은주와의 감정의 끄나풀이 이미 희박해 졌다.

영훈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연숙을 안고 있었다.

『당신은 요부다!』

『아무래도 좋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의 눈이 저를 사랑함 돼요.』

『착각이다! 나는 한은주를 사랑한다!』

『한은주는 말로만 사랑해 주세요.』

그 순간, 영훈은 펄떡 정신을 채리며 연숙을 홱 떠밀었다. 백연숙의 입으 로부터 한은주가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훈을 극도로 불유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은주를 모욕해서는 『 아니 되오. 한은주는 내가 존경하는 약혼자요.』

『존경으로써 행복한 결혼생활을 예측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예요.』

떠밀리우는 바람에 서너걸음 비틀거린 것이 연숙은 분했다.

『흥!』

하고 코 웃음을 연숙은 하며

『남녀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경사(傾斜)라는 것을 알아 야 할 거예요. 세속적인 의미에 있어서 제 행동이 좋았다고는 물론 생각하 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 좋지 못한 백연숙에게 영훈씨의 감정이 여전히 쏠 리고 있다는 그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할 뿐이예요.』

『마음대로 생각해요. 누구가 당신같은 절조 없는 여자에게 감정이 쏠린다 는 말이오?』

『영훈씨는 인제 금방 저를 안아 주고도 그런 거짓 말만 하셔? 호호호 ……』

연숙은 요염하게 웃어 제꼈다.

『그것은 별 문제다. 남자는 누구든지 그런 경우에 그만한 제스츄어는 쓰 는 것이다. 그것을 애정이라든가 감정의 경사로 속단하는 것은 여성들이 우 매한 때문인 줄만 알아요.』

『그런 일면도 확실히 남성에게 있는 것 같지만……결국 영훈씨는 한은주 보다 백연숙을 조금 더 좋아하는 것만은 사실일 거야요. 그것을 영훈씨는 체면이라든가 약혼자로서의 의리라든가 또는 제게 대한 과거의 불쾌한 감정 같은 것 때문에 솔직하게 표현을 못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당신은 마치 연애 심리학자 같소.』

『다소의 경험이 있으니까, 그만한 심리는 해석할 거야요.』

『나쁜 여성이다!』

『좋은 여성에게만 애정이 가는 줄 아는 건 어리석은 인간들 뿐이지요.』

연숙은 콤팩트를 꺼내 얼굴을 고치면서

『아까 잠간 만나 보니, 약혼자가 무척 똑똑하던데요. 그렇지만 사람이 지 나치게 똑똑하면 정이 안가는 법이야요. 나처럼 다소 터벅하구……가다가는 자존심 같은 건 쓰레기 통에 내동댕이를 치고……남성을 부여잡고 울기도 하고……요부처럼 웃기도 하고……하늘의 별을 따려는 꿈도 꾸어 보고……

그래야만 붙을 정도 붙는 것이지, 너무 지나치게 톡톡 떨면 붙을 정도 떨어 지는 법이라니까요.』

그냥 그대로 버티고 서 있다가는 백연숙의 연애 강의가 끝 없이 계속될 것 만 같았고 또 은주가 이상 더 모욕을 받을 것만 같아서 영훈은 획 사장실을 나와 버리고 말았다.

愛情[애정]의 두가지 길

[편집]

한 시간 동안 편즙 일을 끝마치고 영훈은 우울한 모습으로 사를 나왔다.

연숙이가 따라 나설 기색이 보이기에 영훈은 훌쩍 먼저 뛰쳐 나온 것이었 다.

저녁 무렵의 을지로 네거리가 물결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영훈은 최후 로 한번 더 은주의 집을 방문하려고 마음을 먹고 나섰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다운 행동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다소 일러서 집으로 찾아 가더라도 은주가 돌아 와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간 은주가 어디서 내린지 알 수가 없다.

『양재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훈은 종로 쪽으로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걸어 가면서 영훈은 저 도 모르게 백연숙의 정열의 포로가 되었던 일순간을 불현듯 생각하였다.

『내 눈동자가 과연 연숙을 탐내고 있었던가?』

연숙이가 대담하게 배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에 왔다. 옛날에도 그러 한 대목을 가끔 연숙에게서 발견했었지만 십년에 걸친 결혼 생활이 연숙의 성격을 한층 더 다채롭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말로는 은주를 사랑하고 눈동자로는 연숙을 사랑하고 있었던가?……』

자기 자신도 미처 지각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연숙은 대답하게 입에 담았 다. 그것은 실로 남성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은주 같은 여자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날센 후각(嗅覺)임에 틀림 없었다.

한시바삐 은주와의 관계를 정상적인 상태로 돌리지 않으면 결국에 있어서 는 백연숙의 정열의 노예가 될 것만 같은 위구심이 영훈을 새삼스럽게 부여 잡기 시작하였다. 자기를 배반하고 간 얄미운 여자이지만 어쨌든 연숙에게 는 젊은 시절의 꿈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은주를 생각하면 애정의 엄숙성을 느끼지만 연숙을 생각할 때는 애정의 타 락을 영훈은 느꼈다. 애정의 타락 ― 그것은 그대로 곧 애욕의 길로 통하고 있었다.

옛 날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연숙을 만나기 며칠 전까지도 애정의 엄숙성 을 가지고 가끔 연숙을 회상하던 영훈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두 번 연숙과 함께 접촉하는 사이에 연숙에 대한 영훈의 생각이 차츰차츰 타락해 갔다.

연숙의 결혼 생활이 영훈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를 배반한 연숙의 변절(變節)이 영훈으로 하여금 애정의 엄숙성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은주에 대한 애정에서는 정신적인 늠렬(凜烈)을 느끼지만 연숙에 대한 거 기에서는 감각의 연소(燃燒)를 느끼는 것이다.

이 두 갈래의 욕망의 자세에서 영훈은 자기 자신을 붙들지 못하고 허덕이 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애정의 실체인지를 영훈은 똑똑히 몰랐다.

『은주를 속히 붙들어야만 한다!』

은주의 그 늠렬한 애정으로써 연숙에 대한 애정의 타락을 하루바삐 씻어 버려야만 하였다. 그것이 또한 자기 자신의 인생을 올바르게 끌고 가는 길 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광교 다리에 채 못 미친 오른 편 골목 어구에 이층 집으로 된 그릴 하나가 있었다. 영훈도 가끔 드나드는 그릴이었다. 그 그릴 앞에서 영훈은 마침내 불행한 사실 하나를 목격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아, 저건 은주가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틀림 없는 한은주였다. 그리고 그 은주와 함께 택시에서 내린 것은 불행히도 박인해였던 것이다.

『은주와 혼담이 있던 박인해!』

둘이가 그릴로 들어 가는 양을 영훈은 맞은 편 한길 가에 우두머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하다!』

절망과 함께 분노가 왔다. 은주는 저 번에도 박인해와 영화 구경을 갔고 저녁을 같이 했다. 은주는 너무도 재빠르게 손을 쓰는 것이라고, 그 지나치 게 재치있는 처세술이 영훈의 감정을 자극해 왔다.

현대의 여성들은 한 곳에서 감정의 답보(踏步)를 하지 않는 생리 조직을 갖고 있는 것일가…… 은주가 그처럼 재빨리 자기의 감정을 청산해 버린데 대해서 영훈은 눈을 부비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과 삼사 일 사이가 아닌가!』

그 삼사 일 사이에 은주는 지극히 간단하게 인생의 궤도를 돌려 놓은 것이 다.

『감정의 전환이 그처럼 빠르다는 것은 현대 여성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처럼 울고 불고 하지 않는데 애정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 있는 것일가?……실로 간단 명료한 한은주의 몸 가짐이었다.

동시에 영훈은 또 이렇게도 생각하였다.

이즈음의 여성들은 애정의 『 깊이 보다도 애정의 넓이를 더 소중히 여기는 지도 모른다.』

은주가 만일 자기를 좀더 깊이를 가지고 사랑해 왔다면 그렇게도 간단히 애정의 위치를 바꾸어 놓을 수가 좀처럼 없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현대의 남녀 관계에 있어서 그들이 지닌 애정의 밀도(密度)나 유대 (紐帶)가 강인하지 못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영훈은 서글프다기 보다도 오히려 허무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나니 약혼자를 위하여 백연숙과 투쟁을 하여 온 자신 이 가소롭기 짝 없었다. 결국에 있어서 은주는 이번 일을 기화로 삼아서 좀 더 생활 안정이 되어 있는 박인해 개업의에게로 옮아 앉을 뱃장 같았다.

그래서 그처럼 재빨리 손을 쓴 것이라고 영훈은 획 되돌아 서서 도로 을지 로 쪽으로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명동으로 나가서 대포 술이라도 몇 잔 걸 치고 싶은 생각이 골돌히 생겼다.

『허무하다!』

그릴 이층을 두어번 바라다 보면서 삭막한 공허감과 함께 영훈은 걸어 갔 다.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면 붙을 정도 안 붙는 거야요.』

사장실에서 한 연숙의 한 마디가 불쑥 가슴에 왔다. 한시바삐 은주와의 관 계를 정상적으로 돌림으로써 백연숙의 유혹을 방지하려던 영훈의 독실한 생 각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 가 버린 것이다.

『영훈씨!』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 서려는데「신여인」사를 나서는 백연숙의 목소리가 영훈을 붙들었다.

『아 ─』

영훈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짧은 치마에 하이·힐이 연숙을 무척 젊게 하고 있었다.

『왜 혼자서만 뛰쳐 나오는 거야요?』

연숙은 영훈의 곁으로 바싹 따라 서며 교통 순경의 신호를 기다렸다.

『나 저녁 좀 사 주세요. 시장해요.』

영훈의 어깨 옆에서 연숙은 쓸쓸히 웃었다.

『사드리지요.』

무뚝뚝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둘이는 잠자코 네거리를 건넜다. 명동 쪽으로 천천히 걸어 가면서

『어딜 가시댔어요?』

『갑자기 술 생각이 나서요.』

『술은 혼자 자시면 맛이 없다는데……』

『그래서 술 친구를 찾아 가드랬읍니다.』

『술 친구로는 저만 한 사람도 드물거야요.』

『…………』

『술도 술이지만……짜장면이 갑자기 먹고 싶어 졌어요.』

『아, 짜장면……』

『옛날처럼 두 그릇 세 그릇 먹고 싶어요!』

『그럼 가시지요.』

『아서원에 가요.』

둘이는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을지로 입구로 다시 되돌아 와서 아서원을 향하여 시청 쪽으로 걸어 갔다.

은주가 그릴 이층에서, 박인해의 입으로부터 간호원 심정옥 과의 관계에 귀를 기우리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激流[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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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색(暮色)이 스며 드는 거리를 영훈과 연숙은 아서원을 향하여 걸어 가고 있었다. 걸어 가면서 영훈은 은주의 모난 성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난 성격이 은주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올 것만 같았고 또한 그것을 은주 자신도 뻔히 알면서 취하는 행동 같기도 하였다.

『영훈씨, 무척 우울해 보여요.』

나란히 걸으면서 연숙은 말했다.

『……………….』

영훈은 대답을 않고 연숙의 옆 얼굴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바라다본 옆 얼 굴에 미소 하나가 가볍게 떠올라 있었다.

『뭐가 우스워서 그래요?』

『영훈씨의 우울이…….』

『남의 우울을 즐긴다는 건 악취민데…….』

『본시부터 제게는 그런 종류의 악취미가 다소는 있나 부죠.』

연숙은 그러면서 영훈의 손길 하나를 붙잡아 쥐었다.

『은주씨 생각, 인제 그만 하세요.』

『……………….』

『싫다고 도망하는 사람, 구태여 쫓아 갈 필요 없잖어요?』

『……………….』

연숙의 손길에 불현듯 힘이 온다.

옛날도 가끔 『 ……이렇게 걸으면서……이렇게 제 손을 한번씩 잡아 보셨 지!』

『……………….』

추억이 왔다. 감각의 추억도 뒤이어 따라 왔다. 영훈도 부지중 손길에 힘이 갔다. 연숙의 나릇나릇한 손길이 예나 다름 없이 감각에 왔다. 의욕과는 반 대로 영훈의 손은 마침내 연숙의 손길을 꼭 쥐었다.

『연숙씨의 손이 다소 커진 것 같아요.』

『십 년이면 산수도 변한다는데……손길도 조금은 변했을 테지요.』

운명이 자기와 연숙을 가까운 거리로 자꾸만 몰아 넣는 것만 같이 영훈에 게는 생각키웠다.

『저는 지금 울고 싶도록 기뻐요. 영훈씨와 이렇게 한번 서울 ( )리를 걸어 볼 생각으로…… 오직 그 한 생각으로 삼팔선을 넘었지요』

『고맙소!』

영훈은 오주주 몸서림이 쳤다.

『나는 또……나 같은 인간은 깨끗이 잊어 비리고 행복스런 결혼 생활에 도취해 있을 연숙씨만 생각하고 있었지요』

『용서하세요!』

잡았던 손길이 반대로 잡히워졌다. 연숙은 남은 손에 들었던 핸드·빽 모수 리로 눈물이 훑어 ( )며

『제 결혼 생활은 불행했었어요.』

『내 독신 생활도 그만큼 불행했었답니다.』

『원망하실 줄은 알고 있었어요.』

『원망을 해 보았댔자 하는 수 없는 노릇이기에……재빨리 단념하려고 노 력을 했었지요.』

『용서하세요』

『……………….』

그러나 용서한다는 한 마디를 영훈은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금후 에 있어서의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중대한 발언(發言)이기 때문 이다.

이윽고 아서원 문 앞까지 와서 둘이의 손길은 풀려 졌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 갔다. 온돌 방이었다.

『나 술이 늘었어요.』

식사가 들어 오고 술이 들어 왔을 때, 연숙은 그러면서 병을 들어 영훈의 잔에다 일주를 딸았다.

『그럼 인제부터는 술 친구가 잘 되겠군요.』

자기도 마시고 연숙에게도 권하며 영훈은 웃었다.

『술 친구도 좋고……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영훈씨 옆에 있기만 하면 좋아 요.』

아까 사장실에서는 요부처럼 요염하던 연숙이었다. 그 연숙이가 다시금 거 지처럼 초라한 심경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참된 연숙의 모습인지 를 종잡기 어려운 데가 연숙에게는 있다.

『짜장면이 먹고 싶던 건 식욕이 아니고 의욕이었던 모양이예요.』

짜장면도 들어 왔으나 마지 못해 서너 젓가락 뜨다 말고 연숙은 술을 마셨 다.

『술에는 소질이 있나 봐요. 저의 집 안은 모두가 다 대주가들 뿐이니까요.

호호호…….』

연숙은 화려하게 웃었다. 그 화려한 웃음과 꼭 같은 화려한 감정이 연숙의 혈관을 핑글 핑글 감돌고 있었다.

축 느려질 때는 그지없이 보이는 연숙이었으나 일단 생기를 얻고 나면 명 랑한 여왕처럼 화려해 지는 일면을 연숙은 옛날 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라에리(戀化)를 지닌 연숙의 성품이 영훈에게는 서글프기도 했지만 매력도 있었다.

연애 소설의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영훈을 버리고 별로 애정도 느끼지 못하 는 김석호에게 시집을 간 것도 그러했고 다시금 삼팔선을 넘어 옛 애인을 결사적으로 찾아 온 것도 또한 그러한 성품의 소위일는지 몰랐다.

『연숙을 사랑하기에는 힘이 든다!』

영훈은 잔을 들면서 그것을 느꼈다. 연숙에게는 성격의 탄력성이 지극히 풍 부하지만 영훈은 그것을 잘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힘이 들수 밖에 없는 일 이라고, 영훈은 문득 은주를 생각 했다.

은주의 성품에도 탄력성이 없다. 대(竹)처럼 꺾어는 지지만 구리(銅)처럼 구 부러 지지는 못한다. 오늘의 은주의 행동이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애정 앞에 연숙은 자존심을 버렸지만 자존심 앞에 은주는 애정을 버렸다.

이 두 개의 성격과 성격 사이에 끼어서 영훈은 지금 자기 자신의 성격과 윤 리가 시련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애정이라든가 애욕이라든가 하는 문제라 기 보다도 성정(性情)과 성정의 갈등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훈씨!』

연숙의 눈동자가 취기에 다소 몽롱해 졌다.

『네?……』

영훈의 심신에도 취기가 왔다.

『남자들은 여자 편에서 조금 잿서야만 매력이 있다죠?』

방글방글 웃으면서 하는 연숙의 물음이었다. 눈동자에 정열이 찼다.

『무슨 말이오?』

몰라서 묻는 영훈의 물음은 아니었다.

『나처럼 모든 자존심을 포기하고……있는 그대로의 순정을 노출하는 여성 에게는 매력이 없다죠?……』

『………………』

영훈은 물끄럼이 연숙의 그 풍만감을 주는 얼굴과 아울러 젖 가슴을 묵묵 히 바라보았다. 익을대로 익은 삼십대의 육체가 눈 앞에는 있었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을 거요.』

영훈은 솔직한 대답을 했다. 반드시 그렇지도 않는 매력이 그의 눈 앞에는 있었던 것이다.

『아냐요. 제가 처음부터 좀 잿섰으면 영훈씨에게 그처럼 흑심한 애정의 학 대는 받지 않았을는지 몰라요.』

『애정의 학대가 아니오. 도의(道義)문제였지요.』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게 저 자신을 굽힌 것 같아요. 여자가 남자 앞에 그 처럼 비굴 하도록 애정을 애걸한다는 건 확실히 남자들에게는 정내미가 떨 어질 것 같이 생각키워요. 인제부터는……인제부터는 절대로 그처럼 초라 한 감정은 가지지 않을테예요.』

그리고 나서 연숙은 술 잔을 쭉 들이키며

『너무 뽑내지 말아요! 아주 부처님 같던데요. 포옹 한번이 뭐가 그리 값비 싼 게 되서 손가락 하나 달싹 없이 부처님처럼 꼳닥 서서 배기는 거예 요?……아주 잘났어!』

연숙의 빨개진 얼굴이 조소와 함께 요염하게 웃어 댔다. 두 눈동자가 애욕 의 경험을 회상하는 것 처럼 유난히 윤택있는 빛을 띠우고 있었다.

영훈의 감정이 차차 들뜨기 시작하였다. 연숙의 말과 같이 여자가 잿서면 지남 철에 끌리는 쇠부치처럼 가속도로 감정이 쏠리는 것이 남성이라는 동 물인지도 모른다.

연숙의 그러한 교묘한 애욕의 도발은 은주를 잃어 버린 영훈의 비인 마음 을 메꾸는데 점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영훈의 청춘을 화려하게 불살러 주던 여성이었다. 아직도 백 연숙에게는 영훈의 아름다웠던 꿈이 사라지지 않고 살아 있음을 영훈은 분 명히 깨닫고 몸서림을 쳤다.

영훈씨의 포옹을 나는 『 다만 원했을 뿐이었어. 포옹의 책임같은 것을 져 달라는 건 아니야. 책임이라든가 도의라든가, 그러한 마음의 부담을 요구한 건 아니야. 애정의 순수한 자태는 그러한 마음의 부담을 제거해 버리는데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연숙의 거나한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 술잔을 들어 영훈의 면상을 향하여 홱 뿌려 버렸다.

『아주 잘 났어! 누구가 절더러 결혼을 해달라는 거야? 생활보장을 해 달라 는 거야?……』

영훈은 손수건을 꺼내 들고 조용히 얼굴을 닦았다. 얼굴을 닦고 난 영훈의 두 눈이 정열의 불 꽃을 튕기면서 이글이글 끓어 오르고 있었다. 무서운 표 정을 하고 영훈은 물끄럼이 연숙을 쏘아 보았다.

열심히 쏘아 보고 있는 동안 십년 전의 환영이 완전히 소생하기 시작하였 다.

『저 육체에는 내 청춘의 꿈이 깃들여 있었다! 저 입술에……저 가슴에 ……』

영훈의 창백했던 정열이 핏기를 뿜으며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였다.

『뭐가 무서워서 나를 못 안는 거야?……은주가 무서워서 그래?……책임을 져 달랄가 보아서 그래?……』

이마에 흩으러져 내린 파아마를 두 손으로 닥아오는 얼굴과 함께 쓰러 올 리며

『인간의 과실에 대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은 참회 밖에 있을 수 없어! 그래 그걸 해도 돌이를 흔들어?……어떻거라는 말이야? 도 대체 어떻거면 마음이 편하겠다는 거요?……당신의 눈 앞에서 죽어 보이라 면 당장에라도 죽어 보일 수 있어요! 당신을 죽이라면 당장에라도 칼을 들 수 있는 나야! 이거 왜 잿서기만 하면 제일인 줄 알아?……』

영훈은 이미 항거의 기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영훈이 지닌 정조의 한계선이 었다.

『연숙, 연숙이!』

연숙의 두 팔을 돌연 잡아 끌어 품안에다 연숙을 넣었다.

『내가 연숙을 지나치게 냉대를 했다면 용서해요!』

입술이 무섭게 부딪쳤다. 영훈의 품에 머리를 박고 연숙은 울었다. 자꾸만 울었다.

『나는 이미 영훈에게는 아무런 소용도 닫지 않는 인간이지만……』

연숙의 두 어깨가 영훈의 턱 밑에서 무섭게 들먹거렸다.

『그렇건만 제게는……제게는 소중한 영훈씨였어요!』

『아, 연숙이! 미안했소!』

『그 사지판인 삼팔선을 넘으면서 나는 오직 영훈씨만을 꿈꾸고 있었지요.

죽지만 않았으면 만날 날이 있겠지! 만나서 옛날처럼 서울거리나 걸어 보 고 싶어서……걷다가 걷다가 배가 고프면 서대문 장서방네 집에서 짜장면 을 먹음 되지!』

『그래요. 내일이라도 또 장서방네 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읍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영훈씨가 결혼을 해서 아들 딸이 두서넛은 있 을 줄 알고 왔어요. 그러니까 결혼이라든가, 무슨 그런 세속적인 인간 관계 를 희망하고 온 것은 절대로 아냐요. 그저……그저 한번 만나 보고 싶어 서……』

『됐소. 인제부터는 매일처럼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이니까요. 연숙, 인제 그 만 울어요.』

『아직 좀 더 울어야겠어요. 조금만 더 내버려 두시오. 울대로 울고 나면 마음이 시원해 져요.』

연숙은 오랫 동안 영훈의 품에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제 행동 나쁜 줄을 모른다면 미친 년이지. 왜 내가 그걸 모르겠어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더 만나 뵙고 싶었어요.』

연숙은 이윽고 눈물 젖은 얼굴을 조용히 들고 영훈의 모습을 가만이 들여 다 보았다. 찬찬히 들여다 보았다. 들여다 보면서 조용히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

눈물과 웃음이 겹쳐져서 어떤 것이 참된 연숙의 감정인지 분간할 수가 좀 처럼 없다.

『요 얼굴……』

연숙은 두 손으로 영훈의 볼을 쓰다듬어 보며

『이 서늘한 눈……이 넓직한 이마……니는 변했건만 영훈씨는 조금도 변 하지 않았어요.』

『연숙씨도 변하지 않은 셈이지요.』

『아냐요. 나는 많이 변했어요. 이처럼 변해 버린 몸을 가지고 영훈씨를 보 러 온 내가 잘못이지만……』

눈물이 또 갑자기 쏟아져 나오며

『그렇지만 보고 싶은 걸 어떻게요?……』

『자꾸만 보아요.』

『매일처럼 볼테야요.』

또 한차례 포옹을 하고 나서 또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 보며

『내가 나타나서 영훈씨는 괴롭겠어요.』

『아, 아니오.』

『거짓 말!』

『거짓 말은 왜……』

『은주씨를 사랑하고 있었지요?』

『………………』

『은주씨 화 무척 났지요?』

『은주는 영영 가 버렸소.』

『영영……?』

『내 힘으로는 인제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소.』

『모두가 나 때문에……』

戀愛苦[연애고]

[편집]

이튿 날부터 은주는 샹하이 양재점에 나갔다.

『어찌 된 일이야?』

표정을 크게 써 가면서 마담은 호기심과 함께 은주의 아래 위를 도록도록 훑어 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상했어.』

실상 이 며칠 동안에 은주의 얼굴은 까칠하게 여위어 있었다. 그처럼 발랄 하던 기력도 없이 보였다. 심신이 다 함께 애고(愛苦)로 말미암아 창백하리 만큼 여위고 피로해 있었다.

그러나 은주의 강직한 성정(性情)은 그러한 괴로움을 조금도 마담에게 보 이고 싶지는 않아서

『상하긴 왜 상해요? 이처럼 심신이 건전한데……』

그러면서 팔과 다리를 늘려 보건 체조의 한 토막을 은주는 기를 쓰고 해 보였다.

『그렇다면 좋지만두……』

마담은 그래도 미심하다는 표정을 버리지 못한 채

『어디 편찮았어?』

『네, 약간……』

『감기?……』

『아뇨.』

『그럼……?』

『심장이 약간……』

『심장?……심장병이 있었나?』

『다소간……』

『심장 변막증은 아니겠지?』

『그런 위험한 건 아냐요. 심장이 다소 흥분했대요.』

『심장이 흥분했다.……무슨 병인데?……협심증(狹心症)은 아니겠지?』

『협심증인지도 몰라요. 가슴이 자꾸만 답답하니까 ─ 때로는 흥분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구……그렇지만 인제 괜찮아요. 마담, 무단 결근을 해서 미 안합니다.』

은주는 사뿐 고개를 숙여 보였다.

『미안해 할 건 없지만두……』

『일이 많이 밀렸죠?』

『무얼……』

『밀린 일 제가 죄 해 치울테니 마담, 용서하세요.』

쇼오 윈도우 옆에 걸상을 갖다 놓고 둘이는 마주 앉았다.

『미스터, 고가 전화를 누가 걸어 왔던데……은주를 만날려구……』

『그래요?』

『아직 못만나 봤나? 허둥지둥이던데……』

『만났어요. 어저께……』

『결혼두 하기 전에 벌써부터 내외 싸움은 아니겠지?』

『마담두!』

『어쩐지 좀 이상하긴 해.』

『뭐가 이상해요?』

『미스터, 고가 허둥지둥 하는 걸 봄 뭐가 있긴 꼭 있는 것두 같은데 ……』

장식 선반에 츠렁츠렁 걸어 놓은 가진 색갈의 라사지(羅沙地)가 자기 자신 에게는 통 인연이 없는 물건처럼 은주의 눈에는 비쳤다. 입때까지는 라사의 질이라든가 빛갈의 조화라든가 영국산, 일본산, 국산 등등, 그런 것에 대해 서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은주였다. 재단에 대한 기능은 말할 것도 없 지만 장래 한 사람의 재단사로서 자립이라도 하게 되는 경우에는 위선 라사 지에 대한 지식이 절대로 필요할 것 같아서 은주는 그런 것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슨 독특한 기능 하나만 갖고 있으면 만일의 경우에 있어 서도 남편의 심뇌를 덜어 줄 수도 있을 것이며 최소 한도의 생활은 보장되 기 때문에 한 사람의 아내로서 사람들에게 조소를 받을만한 천한 직업 부인 으로 전락하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 그래서 길만이 없는 기자 생활을 대담하 게 내던지고 이 길을 택한 은주였었다.

그랬었건만 희망의 탑은 너무나 간단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마음의 발판을 완전히 잃어 버린 은주의 눈에 () 그 가지가지의 색채를 지닌 호화로운 양 복지가 한낱 그림 속의 떡인 양 무의미한 물건들이 되고 말았다.

마담 앞에서 훌쩍 일어 나서 은주는 조그만 쪽문을 밀고 재단실로 들어 갔 다. 동료가 하나 견습생이 하나 재단대 앞에 서서 라사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은주 언니, 어쩐 일이야?』

동굴 납작한 얼굴을 가진 견습생이 얼굴처럼 동굴 동굴한 목소리를 냈다.

『어디 아팠수?』

『아냐.』

마담과의 대화가 다시금 되풀이되었다.

『안색이 나빠요.』

『흐응 ─. 』

은주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날 오후, 외출했던 마담이 돌아 오기가 바쁘게 은주를 점포로 불러 냈 다.

『어제 인해를 만났었다면서?……』

그러면서 마담은 의미있는 웃음을 입 가에 지었다.

『어떻게 아세요?』

『지금 병원에 다녀 오는 길이야. 뭣 때문에 갔었나?』

『병원임 병 때문에 갔었지, 뭐예요?』

『거짓 말!』

눈 하나를 싱긋이 감아 보이며 마담은 웃었다.

『뭐가 거짓 말이예요? 머리가 떼엥하니 아파서 갔었어요.』

『핑계 없는 무덤이 있을라구?』

『핑계는 또 무슨 핑계예요?』

『머리 쯤 떼엥하다구 인해병원을 찾아 갈 은주는 아니었었는데……옆집 약방에서 노오신 하나 사먹음 될 것을 안국동까지 일부러 찾아 갈 은주였었 나?』

『아이, 마담……마담은 그런데만 신경이 빨라서 걱정이시지.』

신경이 둔했다간 『 하루도 못 살 세상이니 허는 수 없지, 뭐야? 저녁까지 같이 먹었다면서……?』

『마담은 사 달래서까지 먹은 저녁을 사 주는 판에도 못 먹음 정말로 하루 도 못 살라구요?』

대꾸는 그럴듯 했으나 은주의 마음은 다소 찔리고 있었다.

마담은 자기 동생 인해와의 결혼 문제가 퉁그러지면서부터 고영훈을 공연 히 깎아 내리고 있었다. 연애의 대상은 될는지 몰라도 한 사람의 남편으로 서는 경제적 기초가 약해서 믿음성이 없다는 것이 고영훈에 대한 마담의 의 견이었다.

뿐만 아니라, 연애유회의 일류 선수인 샹하이· 마담은 고영훈을 자기 자 신의 애욕의 대상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기때문에 말하자면 은주에게 영 훈을 빼앗긴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한 심경에 놓여 있는 마담이 오늘 우연히 동생의 병원엘 들렸다가 은 주가 찾아 왔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면에는 남달 리 육감이 빠른 마담이기 때문에 은주의 인해병원 방문을 결코 가볍게 보아 버리지는 않고 있는 것이다. 무슨 곡절이 꼭 있다고 마담은 본다.

『인해는 지금도 은주를 잊지 못하고 밤을 꼳닥 새우는 적이 많대나.』

사실은 사실이지만 표현이 엄청나게 클 뿐이다.

『제 생각을요?……』

대답은 태연했으나 마음은 확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미친 자식이지! 사내 대장부가 그게 뭐야? 떳떳한 한 사람의 개업의로서 그래 서울 장안에 은주 보다 난 여성이 없어? ─ 그렇게 내가 쏘아 붙여 주 었지.』

그리고는 자기 말의 효과를 엿보려는 듯이 은주의 표정의 움직임을 가만히 살폈다.

그러나 은주는 표정이 없다. 마음의 풍경을 은주는 있는 그대로 얼굴에 나 타내지를 잘 않는다.

『간호원과 결혼을 한다면서요?……』

『누구가 그래?』

『어저께 인해씨가 그러던데……』

『거짓 말이야.』

『아냐요. 정말 그랬어요』

『그렇담 그건 은주에 대한 일종의 시위 운동일 거야. 자기를 차 버린 은 주에 대한 허세일 거야.』

아냐요 인해씨는 솔직한 『 . 말을 했어요 하고 싶지 않는 결혼이지만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겠다구요』

『미련한 자식이지 뭐야? 책임이구 뭐구, 일생을 같이 살 반려자인데, 지 금부터 싫은 결혼을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애?』

『그렇지만 인해씨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요지음 세상에 행동에 대한 책임 을 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걸 인해씨가 지겠다는데 마담은 뭘 그러세 요?』

『절대로 안 될 말이야! 내가 옆에 있는 한 그 결혼은 안 되!』

그리고 나서 마담은 갑자기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은주도 죄 많은 사람이지. 제 동생 잘 났다는 건 아니지만……그만큼 진 실한 사람도 드물텐데……그렇지만 이미 미스터· 고와 약혼을 한 사이니 까, 그 애가 아무리 은주를 생각한대도 소용 없지 뭐야?……』

은주는 후딱 시선을 들고 눈 앞에 걸려 있는 라사지를 들여다 보았다.

『이건 영국제지만 빛갈이 좋지 못해요.』

마음의 당황을 은주는 그렇게 해서 숨기고 있는 것이다.

愛情[애정]의 化粧[화장]

[편집]

박인해를 찾아 갔던 자기의 속마음을 마담이 빤히 들여다 보는 것 같아서 은주는 시선 둘 곳이 없다. 그래서 만지작거리는 양복천이었다.

『현대의 결혼은 사랑한다는 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해. 먹구야 사랑이지, 먹 지 못하구서야 무슨 사랑이야?』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박인해를 결혼 상대로 택하라는 마담의 이야기였다.

『문전 걸식(門前乞食)을 해두 사랑만 한다면 그만이라는 말은 벌써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구……』

『누구는 하루에 다섯끼 여섯끼 먹었나요?』

듣다 못해 은주는 대꾸를 했다.

『거야 셋끼 밥에 더 먹진 않겠지만……』

마담은 얼른 은주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사람이란 그런 게 아니야. 하루에 세끼만 이에 풀칠을 하고 둘이서 사랑 만 찾으면 될 것 같지만두, 생각해 보면 그런 게 아니야. 말 타면 경마 잡히 고 싶다고, 사랑에도 장식(裝飾)이 필요해. 화장을 해야만 한다는 말이야.』

『무슨 말이예요?』

『은주는 왜 화장을 하노?』

『………………?』

이뻐지라고 하겠지 『 ? 본 바탕 얼굴보다 이뻐지라고 화장을 하는 거 아니 야?』

『거야 그렇죠.』

『마찬가지 이야기래두. 본 바탕 얼굴 임 되지, 왜 구태여 돈을 써 화장품 을 사 들이는 거야? 어째서 오늘 날 화장을 하지 않고는 거리를 나다니지 못하게 끔 됐느냐 말이야. 현대의 사랑도 그것과 마찬가지야. 시대가 달라졌 다는 걸 알아야 해.』

마담의 이야기에 어딘가 진실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은주는 불현듯 느 끼며 만지작거리던 양복 천에서 손을 거두었다.

『화장을 하면 도리어 흉이 되던 옛날에는 본 바탕 얼굴만 가지고도 넉넉 했어. 애정만 있으면 깡통을 차고 바가지를 차도 좋을는지 몰라. 그렇지만 오늘의 남녀관계는 애정만 가지고는 불충분해. 돈이 없어 화장을 못하고 거 리를 나다니는 때에 느끼는 그 쑥스러움, 그 초라함,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그 외로움, 사람의 눈에 특별 취급을 받는 그 고립감(孤立感)……그것은 물 론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못하지만, 그러나 주위와 균형이 잡히지 않는 그 형식에서 우리가 일종의 불행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또 모르지만……그것을 분명히 느낀다면,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이상, 문제는 달라지는 거야. 남녀의 관계도 소박한 애정 그것만 가지고는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쑥스러움과 초 라함과 고립감을 면할 도리가 없어. 그러한 감정이 자꾸만 쌓이고 쌓이면 남 처럼 화장을 하지 못한 자기네의 사랑에 불만을 느끼게 되는 거야. 화장을 하려면 돈이 필요해. 화장품을 사야만 하니까 말야.』

돈이라는 말에 은주는 일종의 혐오의 감정을 느꼈으나 찬찬히 생각하니 마 담의 이야기가 지극히 당연하기도 했다.

『잡지사 편집장의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둘이서 한 달 동안 먹고 나면 분 한갑 살 돈도 남지 않을 거야. 둘이의 사랑이 땅 두께만 큼 두텁더라도 애정의 화장을 못하는 이상 환멸의 비애는 반드시 올거야.』

『어떻거는 것이 애정의 화장을 하는 거예요?』

알면서도 홧김에 묻는 말이다.

『호화로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남과 어울릴만 한 생활 수준은 유지해야만 할 거 아니야? 식모를 둘 여유가 없으니 은주의 그 고운 손이 꺼멓게 거치러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남자란 역시 일 많이 한 손 보다는 일하지 않은 날씬한 손을 좋아 하는 동물이라는 걸 알아야 해.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야 할 것이고 잘 입지는 못할망정 남처럼 철을 따라 가면서 입어야 하고 때로는 영화 구경도 가야만 하고 한 달에 한두 번씩은 외식도 해야만 하고 봄에는 하다못해 꽃 놀이랍시고 창경원이나 덕수궁에라 도 가야만 하고 여름에는 대천에 가서 해수욕은 못할망정 한강에 나가서 뽀 오트라도 타야 할 것이 아냐? 그만한 애정의 화장도 못한다면 그건 마치 얼 굴에 분 한점 주워 바르지 못하고 나다니는 것과 꼭 같은 초라한 감정이 될 수 밖에 없지 모야?……그렇지만 미스터·고의 수입 가지고는 그것이 절대로 용이한 일이 아니라니까 글쎄.』

『그러니까 내가 이처럼 데자이너가 되려는 게 아냐요?』

마담의 이야기를 마음 속으로는 수긍하면서도 은주의 뾰족한 성미가 연방 항거를 해야만 했다.

『흥, 데자이너!』

마담은 코 웃음을 한번 치고 나서

『그래 데자이너가 되어서 몇푼 안 되는 월급을 위하여 늙어 죽도록 매어 살 작정이야? 양재사의 장래는 언젠가 한번은 자기의 점포를 가지는데 있는 거야. 자본이 필요하다는 말이야. 하늘에서 돈 비가 내리기 전에는 어디서 이삼백만환의 자본이 생기느냐 말이야.』

사실 듣고 보니 암담한 일이었다. 그만한 자본은 장래에 어떻게 되겠지, 하 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은주였다. 그 막연한 장래성에 일루의 희망을 품 고 있던 은주는 오늘에 있어서 직업 여성들의 운명을 비로소 깨달은 것 같 았다.

『기껏 해서 자기의 화장품 값이나 간신히 벌어 들일 지경이고 보면 한심 한 노릇이지 뭐야? 결혼을 하면 애도 낳겠지. 애 안 낳을테야?……』

『………………』

은주는 대답을 못했다.

『애를 가진 직업 여성! 처참한 노릇이지! 외국처럼 훌륭한 탁아소라도 있 다면 또 모르지만두……애를 밤낮 업고 다닐테야? 유모는 못 두더라도 식모 는 둬야 할테지. 젖은 먹이러 다녀야만 할테니까 말이야. 그것도 하나 뿐이 면 또 모르지만 두셋쯤 연다라 낳아 보라니까. 생활비가 늘어가는데 따라서 수입도 그만큼 늘어야만 할텐데, 잡지사 편집장의 수입이 늘면 얼마나 늘며 지위가 올라 가면 얼마나 오라 갈텐고? 자본이 있어야 사장 노릇도 하는거 야.』

마담은 그리고 나서

『후우 ──』

하고 한숨을 지었다. 은주의 한숨을 자기가 대신하여 지어 주는 것이다.

『오늘의 젊은 여성들이 왜 결혼을 못하고 주빗주빗하는 줄 알아? 사내가 없어서 못하는 줄 알아 ? 그만한 정도의 애정의 화장을 시켜 줄 상대자가 없 기 때문이야. 오늘의 청년들이 왜 장가를 못하고 불편한 독신 생활을 하는 줄 알아? 쐬구쐰 것이 여자들이지만 그만한 애정의 화장을 시켜 줄 자신이 없기 때문이야. 그만한 자신이 없으면서도 장가는 가고 싶다는 것이 말하자 면 고영훈 같은 인물일 밖에……』

『그만 둬요!』

은주가 빽 소리를 쳤다. 영훈을 깎아 내리는 마담의 이야기를 그 이상 더 듣 고 있을 수가 은주는 없었다. 영훈에 대한 모욕이 곧 자기에 대한 그것처럼 느껴졌기 까닭이었다.

『어마나? ──』

마담·상하이는 표정을 크게 쓰며

『내가 뭐 못할 말을 했어?……모두가 다 은주를 위해서 한 이야긴데 ……』

그말에 은주는 푹 머리를 숙이며

『마담의 이야기, 잘 알아요. 그렇지만 나 그런 이야기 새삼스레 듣고 싶지 않아요.』

은주의 눈에서 툭툭툭 눈물이 떨어졌다. 영훈의 모욕을 자기의 모욕처럼 느 끼는 은주에게서 이미 영훈은 떠나가고 만 것이다.

울음이 자꾸만 복받쳐 왔다. 좀처럼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던 은주가 아 니였던가 ──

『은주, 울긴……울긴 왜 갑자기……?』

마담은 훌쩍 일어 나서 은주의 들먹거리는 어깨를 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 며

『나는 그저 내 동생만한 사람도 그리 쉽지 않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랬을 따름이야. 오해하면 못 써.』

『잘 알아요.』

은주는 입술을 꼭 깨물고 후딱 얼굴을 들었다. 얼굴을 든 은주의 눈 앞에

「메이드·인·잉글랜드」의 그리인 빛 양복지가 츠렁츠렁히 느려져 있었다.

『하기야 생활력이 없는 것이 탈이지, 미스터·고도 오죽 얌전한 사람인 가!』

마담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얌전한 고영훈이가 마침내 은주에게는 얌전하지를 못했던 것이 다.

『뭐니 뭐니 해두 여자에게는 얌전한 남편만 있으면 제일루 행복하지. 그러 니까 인제 한 이야기는 이를테면 그저 그렇다는 말이야. 그걸 은주가 오해하 면 나는 슬퍼.』

그 말에 은주는 여전히 그리인 빛 양복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머리를 살 랑살랑 흔들었다.

『아냐요. 나 조금도 오해하지 않아요. 마담의 이야기가 꼭 맞은 말인 줄도 잘 알아요. 그렇지만 그저……그저 어쩐지 듣기가 싫었어요.』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었으나 꼭 깨물은 입술만은 좀처럼 풀지를 않았다.

『은주, 고마워. 이를테면 그저 그렇다는 말이었지. 인해가 은주를 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 보기가 딱해서 한 말이었어. 그렇지만 은주의 행복이 미 스터·고에게 있는 이상, 모두가 다 쓸데 없는 말이었지.』

마담의 말씨가 대단히 능난하다. 영훈이와의 사이에 무슨 트러불이 있는 줄 을 빤히 들여다 보면서도 그런 사실은 통 모르는 척하고 능치는 것이다.

『미스터·고만 한 사람도 실은 드물거야. 그만큼 성실하고 그만큼 행동이 고운 사람이 그리 쉬울라구?……모두가 다 선 멋만 든 사내들인데……모르 긴 몰라도 미스터·고면 일생 동안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은주에게 쓸데 없 는 마음 고생은 안 시킬 거야.』

이 한 마디는 마담이 미리 노리고 있는 것처럼 백 퍼센트의 효과를 은주에 게 던져 주었다.

은주는 가슴이 아팠다. 마담의 이 한 마디를 태연히, 그리고 긍지를 가지고 들을 수가 인제는 통이 없다. 그러한 영훈이가 현재 은주에게 가혹한 마음의 고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나빠, 나빠, 나빠!』

영훈의 불신을 그렇게 질책하면서 은주는 홱 걸상에서 일어 섰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마담은 잘 알아 듣지를 못한채 재단실 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 가는 은주의 날카로운 뒷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있기는 확실히 있구나!』

마담은 싱긋이 혼자서 웃었다.

어여쁜 박쥐 오후 네시반 ─ 마담 · 샹하이는 일찌감치 일을 걷어 치우고 은주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은주를 좀더 구슬려서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마담의 능난한 술책이었다.

『미스터 · 고를 불러 내서 같이 가지.』

상점을 나서면서 마담은 그렇게 말하여 은주의 거동을 살폈다.

『요지음 일이 바빠서 아마 사에 없을 거예요.』

은주는 완곡히 마담의 의향을 거절하였다.

은주를 빙자하여 고영훈을 만나 보려던 마담의 숨은 계획이 통그러졌다.

『그래도 어디 한번 전화를 걸어 보지. 혹시 있을는지 알아!』

『없어요. 오늘은 오후부터 쭉 외출했을 거예요.』

은주가 기를 쓰고 마담을 막는데 상점 앞에 택시가 멎으면서 일한무역의 김석호 사장이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 들어 왔다.

『허어, 마침 잘 됐군. 하마트면 저녁 값 굳을 번 했는 걸!』

상점으로 들어 서면서 김석호는 너털웃음을 웃었다.

『정말 마침 잘 됐어요. 하마트면 저녁 값 밑질 번 했어요.』

녹녹지 않은 마담이었다.

『그래 오늘 또 어째서 이처럼 일찌감치……?』

『김사장이 저녁 사 주러 올 줄 알고요.』

『거 콧 김두 센 걸.』

『콧 김이 세나? 먹을 복을 탔지.』

『아차차……미쓰 · 한도 있었군.』

김석호는 그러면서 한은주를 향하여 싱긋이 한번 웃어 보였다.

『콧 김은 김사장이 센 모양이야』

마담이 눈치를 채고 하는 말이다.

『하하하……마담의 대꾸는 감당해 나갈 수가 없는 걸. 그렇지만 콧 김이 센게 아니고 아마도 여복(女福)을 탔겠지.』

그리고는 마담과 은주를 한번씩 아래 위로 훑어 보는 포오즈를 일부러 취하며

『암만 생각해도 오늘은 여복이 넘쳐. 한 손에는 마담 · 샹하이, 한손에는 미쓰 · 한! 김석호, 일생 일대의 꽃다운 영광이 올시다.』

모자를 벗어 들고 두 여성 앞에 김석호는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혔다.

『헤실픈 소릴랑 그만하고 빨리 모셔요. 여왕님과 공주님이 배가 고파서 눈 알이 돌 지경이야.』

『잘 알아 모셨읍니다. 그러면 여왕님, 공주님, 양요리로 하실갑쇼, 청요리로 하실갑쇼…….』

『아무래도 좋아.』

『왜식은 어떨갑쇼?』

『아무래도 좋다니까 글쎄.』

국산품 애용시대고 보면 『 추탕에 막걸리 한잔이 제법일 것도 같소이다.』

그 소리에는 은주도 그만 마담과 함께

『하하하하…….』

웃었다.

한번 그렇게 웃어 보고 나니 어쩐지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풀리는 것 같아서 막막하던 가슴속이 약간 후련해 졌다. 극장에서 희극 쇼오를 볼 때와도 같은 자기 망각의 순간이 은주에게 왔다.

『잊어 버리자! 잊어 버리자!』

이 며칠 동안 송곳처럼 예리해 졌던 갈구라진 신경을 일시적이나마 이 유쾌하고도 다소 징그러운 사나이에게서 풀 수가 있다면 그만한 약 효과는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은주는

『좀더 웃겨 주세요!』

했다.

『허어?……』

김석호는 눈을 한번 크게 떠 보이며

『그처럼 새침 뚜기인 공주님이 마침내 나에게 분부를 하셨다!

사역(使役)의 광을 힘입을 수 있사와 공주님의 다사로운 배념은 백골 난망이 올시다.』

김사장은 다시금 은주를 향하여 허리를 九十[구십]도로 꺾었다.

『호호호…….』

『하하하…….』

두 여성은 모든 것을 망각하고 웃었다.

그러는데 밖에 세워 두었던 택시가 뿡뿡 소리를 냈다.

『빨리 나가 타요.』

마담이 앞장을 서서 걸어 나갔다. 사람은 그렇지 못했지만 마담 · 샹하이의 양장은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였다. 젊었을 적부터 양장을 하고 지난 탓인지, 외국의 귀부인 같은 멋진 스타일이었다.

『운전수 양반!』

『네.』

『이 두 여성은 추탕에 막걸리가 먹고 싶다니까 동대문 밖 형제 주점으로…….』

『아이, 싫어요!』

마담이 빽 소리를 쳤다.

『아니, 국산품을 애용 안 하시겠읍니까?』

『후훗 ─ .』

은주는 쿡쿡 웃었다.

『어쨌든 곧장 가요.』

차는 머리를 둔 쪽으로 곧장 달렸다. 머리를 둔 쪽은 종로였다.

『한국의 세계적인 요리가 추탕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그렇겠죠. 한국 밖에 없으니까 세계 제일일 수 밖에…….』

『솥에다 물을 반쯤 붓고 두부를 삶지요. 그 솥에다 이번에는 미꾸라지를 쏟아 넣습니다. 미꾸라지는 아주 강물에 뜬 것처럼 꼬리를 흔들며 헤엄을 치지요. 물이 점점 더워 오다가 솔솔 끓게 되면 고 놈이 미꾸라지들이 엉덩이가 따가워서 꼬리를 치며 쭉쭉 뻗다가 두부 속으로 콕콕 박혀 들어가서 나무아미타불 ── .』

『아이, 징그러워!』

은주와 마담이 동시에 몸부림을 쳤다.

『몸부림이 다소 약해서 서운한 걸! 좀더 폭 넓게 쳐 봐요.』

『아이, 징그러운 말만…….』

옆에 은주가 앉아 있기 때문에 하는 마담의 제스츄어였다.

『왜 미꾸라지처럼 징그러워?』

『미꾸라지는 작아서 애교나 있지.』

『그럼 뭐가 더 징그러운고?』

『미꾸라지의 아버지!』

『미꾸라지의 아버지면 뱀장어?……』

『뱀장어의 아버지!』

『가만있자. 뱀장어의 아버지 뭘가?……』

『잘 생각해 봐요.』

『아, 뱀장어의 아버지는 뱀이로구먼.』

『아냐요. 뱀의 아버지!』

그 때, 은주가 또 쿡하고 웃었다. 뱀의 아버지는 구렁이기 때문이다.

『음, 그만 했으면 알아 들겠어.』

『알아 들었음 용해요.』

그러다가 마담의 그편 쪽 다리 하나가 호닥닥 하이 · 쨤프를 하며

『아얏! 아퍼!』

은주는 후딱 외면을 했다. 웃고만 지나다가는 코다칠 광경이었다. 외면한 눈 앞에 종로가 흘렀다.

은주는 갑자기 또 서글퍼 졌다. 옛날의 무심하던 종로 거리는 이미 아니었다 창 밖에 . 흐르는 모든 물체가 은주의 불행한 감정에 반주(伴奏)를 해 주는 것만 같았다.

은주는 후딱 영훈을 생각했다. 다자꾸 그리워만 지는 영훈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리움 속에다 자기 자신을 오랫 동안 적시어 둘 은주는 되지 못했다. 그러한 모난 성미가 자기의 불행에다 한층 더 불을 붙여 주는 것 같았지만 그것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는 종로서 남대문 쪽으로 꺾어져 갔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은주는 갑자기 차 안이 싫어졌다. 마담의 다리가 또 한번 들석거리며 아얏 소리를 내면 어떻거나?……은주는 그것을 또 한번 보는 것이 무서워 졌다.

『미쓰·한!』

김석호가 은주를 불렀다.

『네?……』

그 쪽을 돌아다 보는 것이 싫고 무서워서 창 밖을 내다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은주는 대답만 했다.

『무얼 그리 골돌히 생각하는 거요?』

『나 아무런 것도 생각하는 것 없어요.』

『고군을 생각하는 거요?』

『네, 그이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이구 찔렸다!』

그러는데 마담이 이편 쪽 창 밖을 내다보다가 소리를 쳤다.

『아, 저건 분명히 미스터·고가 아냐?』

마담이 가리키는 곳을 김석호와 은주는 동시에 바라다 보았다.

그것은 광교 다리에서였다. 다릿 목에서 왼 쪽으로 꺾어져 개천을 끼고 태평동 쪽으로 연숙이가 나란히 걸어 들어 가고 있었다.

『허허, 이러다가는 고군에게 마누라를 떼울 우려가 다분히 있는 걸!』

그러나 이 한 마디는 그것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기 보다도 새침뚜기 은주에게 침을 한대 놓아 주는 말이었다.

『마누라?…… 마누라라구?……』

사정을 모르는 마담의 어리벙벙한 질문이었다.

『음, 분명히 이 김석호의 부인이야.』

『지금 같이 사는……?』

마담의 관심이 대단히 크다.

『아니, 또 있지.』

『부인이 그렇게 많아?』

『마담까지 치면 대여섯 될가?……』

『어마나?……』

『아얏 ─ .』

이번에는 김석호의 왼편 다리가 하이 · 쨤프를 했다.

『이러다가는 불행한 사람이 두어 사람 생길 것 같은데…….』

은주는 다시 휙 외면을 했다.

『미쓰· 한, 주의를 해요. 고군은 순진한 편이니까 유혹 당하기가 쉬울 거요.』

『김사장이나 잘 주의하세요!』

외면을 한 채 하는 대답이다.

『허어, 태산처럼 믿고 있는 모양인데……그렇지만 남자란 결국에 있어서는 다 같은 동물이란 것만 알아 두어요.』

『걱정두 팔자예요. 그이만은 절대 그런 염려는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기를 쓰고 은주는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두 저으기 안심이 되지만두……그렇지만 암만 해도 마누라를 떼울 것만 같은데…….』

『떼우는지 따는지, 누가 알아?』

마담이 톡하고 내쏘는 말이다.

『아니야. 나는 마누라를 절대로 믿고 있어. 유혹하는 건 고군일지도 몰라.』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저녁쯤 같이 하러 가는 것이 뭐가 그리 불안해서 그래요? 그처럼 불안하담 아예 부인을 내놓지 말지…….』

은주는 기를 쓰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그런 말을 태연히 했다.

『같은 직장이라구?……』

마담은 은주를 돌아다 보았다.

『마담 아직 모르슈? 이북에 있던 부인이 월남했어요. 그 부인이 이번에

「신여인」사의 사장이 됐죠.』

『오오, 원더풀!』

마담은 탁 김석호의 등을 치며

『그런 걸 깜쪽같이 숨기고 있었구먼!』

김석호가 빙글빙글 웃고 있는데 차가 명동 입구에서 멎었다.

세 사람은 차에서 내렸다. 마담은 새로히 나타난 김석호의 본처에 대단한 신경을 쓰는 모양 이었다. 둘이는 앞장을 서서 명동으로 걸어 들어 가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사를 하면 마담에게 붙잡힐 것이 분명해서 서너 걸음 뒤로 따라 들어 가다가 은주는 홱 발꿈치를 돌려 왼편 골목으로 뛰어 들어 갔다.

우중충한 골목을 끼어 저편 전차 길로 총총히 빠져 나가다가 은주는 마침내 기력을 잃고 삼층 건물 노란 타일 담장에 이마를 기대고 얼굴을 부볐다. 소리를 내어 한두 번 흐느껴 울기도 했다.

박쥐처럼 담장에 납작 붙어 서서 울고 있는 젊은 여성의 뒷 모습을 통행인은 힐긋힐긋 바라다 보다 걸음을 멈추는 사람도 한둘 있었다.

男性[남성]의 純情[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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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지탕할 힘이 은주에게는 이미 없었다. 아무리 꼳꼳한 성격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은주는 역시 여자였다. 담장에 얼굴을 부비며 은주는 울 었다.

타일 담벼락의 매츠려운 차거움이 은주의 허탈된 감각을 산뜻산뜻 위무해 주었다. 통행인의 시선이 자기 등골에 쏠릴 줄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은주는 그냥 담벼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 은주씨가 아닙니까?……』

등골에서 사나이의 목소리가 났다. 낯익은 음성이었으나 그것이 누구의 것 인지를 은주는 갑자기 알아 채릴 수가 없다.

『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돌아 선 은주의 눈 앞에 박 인해의 부드러운 얼굴이 우뚝 서 있었다.

『은주씨, 어찌 된 일입니까?』

적지 않게 놀라는 음성이었으나 박인해의 표정은 그의 감정을 대변하리 만 큼 섬세하지는 못했다.

『갑자기……갑자기 배가 아파서……』

은주는 그러면서 들었던 핸드 · 빽으로 자기 배를 눌러 보였다.

『갑자기라니……언제부텁니까?』

박인해는 한 걸음 다가는 섰으나 은주의 몸에 손을 대지는 못했다.

『아까부터 조금씩 아프던 밴데……』

거짓 말이란 이처럼도 하기 힘드는 것일까? 이야기가 자꾸만 꼬리를 잃었 다.

『그렇지만 인제 좀 괜찮아요.』

박인해의 등 뒤에서 걸음을 멈추었던 통행인이 빙글거리는 얼굴을 하면서 다시금 걸어 갔다.

아닙니다 집으로 가서 『 . 진찰해 봐야겠읍니다. 맹장염 같으면 위험하니까 요.』

『아냐요. 아까 보다는 좀……』

은주는 그러면서 걷기 시작하였다. 박인해는 적지 않게 염려된다는 얼굴을 짓고 전차 길까지 걸어 나오면서

『스톱!』

하고 택시 한 대를 멈추었다.

『빨리 타시오. 급성 맹장염일는지도 모르니까요.』

『아냐요. 정말 인제 좀 났어요.』

거북스런 입장에 은주는 울상을 했다. 그 울상을 박인해는 역시 배가 아픈 탓이라고 생각하며 은주의 등을 떠밀다 싶이 차에 올려 태웠다.

『안국동까지!』

손수 문을 닫()며 박인해도 올라 탔다. 그러한 비효과적인 친절이 박인해 에게는 때때로 있는 것이다. 상대편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 가고 있는지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의 거짓 없는 친절만을 다하면 되었다. 그것이 박인 해의 장점인 동시에 결점이기도 했다.

『배는 어디가 아픕니까? 바른 편? 왼편?……』

차가 움직이는 것과 함께 박인해는 물었다.

『바른 편이…….』

되는 대로 대답한 바로 그 바른편 밑 배에 맹장이 들어 있다는 생리학적 지식이 은주에게는 결핍되어 있었다.

『음…….』

박인해는 은주의 복부를 바라보며

『어디 꼭 한번 눌러 보시오.』

『인제 괜찮아요.』

『글쎄 눌러 보시오.』

은주는 하는 수 없이 바른 편 밑배를 손으로 눌러 보였다.

『아파요?』

『아니오.』

『그럼 맹장은 아닌듯 싶은데……』

『인제 정말 괜찮아요.』

『그렇다면 안심이지만요.』

혹시나 은주가 혼담이 있던 자기에게 육체의 일부분을 보여서까지 진찰을 받기가 부끄러운지도 모른다고 박인해는 생각하여 잘 아는 외과 의사가 『 있는데 역시 한번 진찰을 보는 것이 좋을텐데요.』

『아이, 박선생, 정말…….』

은주는 진정 거북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때서야 박인해도

『아차, 실수!』

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여성에게 매양 있는 생리적인 현상이 그 복통의 원인이었다고, 자기의 둔감이 홱 부끄러워 졌다.

『그런데 은주씨, 어디 가시더랬읍니까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말 머리를 돌려야 했다.

『명동에 잠간 볼 일이 있어 나왔다가 집으로 돌아 가던 참이예요.』

거짓 말이 자꾸만 꼬리를 문다. 마음의 상처만 없다면 이런 종류의 가벼운 거짓 말 쯤은 도리어 유쾌했을는지도 모른다.

『박선생은?……』

은주는 박인해의 옆 얼굴을 후딱 바라다 보며

『박선생은 어디 가시는 길이예요?』

『산보……울적해서 저녁 산보를 나오던 길입니다.』

『산보……늘 그렇게 혼자서 산보를 하셔요?』

『가끔 하지요.』

『무척 쓸쓸해 보여요.』

박인해는 은주를 돌아다 보며 쓸쓸히 웃었다. 그 쓸쓸한 눈동자에서 은주 는 정열의 불꽃 같은 것을 불현듯 발견하고 후딱 외면을 하였다.

은주 자신의 그것과 똑 같은 고독을 이 사나이는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은주는 박인해의 쓸쓸함을 자기 자신의 그것처럼 동정하였다.

『어디 가서 저녁 잡수시고 가시지요.』

차가 종로 네거리에 닿았을 무렵 박인해는 조용히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이 고독한 사나이의 호의를 그대로 받는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한편 무섭기 도 했다. 그래서 무릎 위에 놓인 핸드 · 빽을 툭툭 한 두번 쳐 보이며

『속이 비어서 오늘은 사양을 해야겠어요.』

사실 핸드· 빽 속에는 일금 팔십환의 뻐스 값 밖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은주씨는 왜 그런 말만 하십니까? 저녁 쯤 제가 샀다기에…….』

『한두 번임 모르지만 저번에도…….』

『무슨 말을 ……일본 음식 좋아하십니까?』

『아무거나 다 먹지만……다음에 사주세요.』

그 다음이란 은주 자신도 경제적 여유가 생겨 저녁을 살 수 있는 시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운전수, 차를 돌려요.』

『네.』

로오타리를 삥 돌아 광교 다리까지 차는 되돌아 왔다.

『오른 편으로 들어 가요.』

차는 개천을 끼고 태평동 쪽으로 조금 들어 가다가 어떤「갑보야」앞에서 멎고 둘이는 내렸다. 아까 영훈과 백연숙이가 걸어 들어 가던 그 바로 그 길이었다. 은주는 새삼스레 가슴이 아팠다.

이층으로 올라 가서 둘이는 조그만 방 안에 마주 앉았다. 컴컴한 개천이 내려다 보이는 방이었다. 옆 방에도 맞은 편 방에도 손님이 들끓고 있었다.

접대부들의 웃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시끄러운 분위기였다.

왜정식이 들어 와 둘이는 저를 들었으나 둘이가 다 식욕은 나지 않았다.

박인해는 손수 술을 따라 한 두 잔 마셨다.

『어째 그런지, 은주씨는 이 즈음 대단히 우울해 보입니다. 전에는 무척 명랑했었는데요.』

잔을 들며 박인해는 물끄럼이 은주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은주는 방긋이 웃으며 새우 튀김을 집어 밥 공기 위에다 놓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지만……제 힘에 자라는 일이라면……아무런 힘 도 없는 몸입니다 만…….』

『고맙습니다.』

공기를 잡은 채 은주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솔직하게 밖에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지만……나는 이미 은주씨에 게 대해서 아무런 야심도 기대도 갖지 않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곤난할 때 는 서로 돕고 고독할 때는 서로 위로해 가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저 는 만족하지요.』

들었던 술잔을 훌쩍 내고 나서

『내 지나친 생각인지는 모르지만도 무슨 경제적인 문제로써 마음 고생을 하신다면……내가 다소의 힘이 될 수도 있읍니다만…….』

박인해의 그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어조에서 은주는 똑 같은 고독을 절실히 느끼며 상대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그런게 아냐요.』

『그럼……?』

『그저……그저 공연히 우울해 졌어요.』

『……………….』

은주의 그 쓸쓸한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으나 그 이상의 것을 박인해는 캐 묻지 않았다.

한참동안 묵묵히 앉았다가

『은주씨의 그 쓸쓸한 모습을 바라볼 적마다 어쩐지 저는…….』

박인해는 돌연 머리를 푹 숙으리며

『……어쩐지 저는 자꾸만 서글퍼 져요.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답답해 져 요. 제 힘으로 은주씨의 우울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 제 무능이 자꾸만 서 글퍼 지지요.』

눈물이 한 줄기 박인해의 얼굴을 쭈루루 미침질해 내렸다.

『은주씨가 약혼을 한 몸이 고 제가 또한 그러한 사정에 있는 몸이고 보 면……그건 이미 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요. 그래서 저는 은주씨에게 대해서 무슨 기대 같은 것은 전혀 갖지도 못하지요. 그저 이처럼 은주씨와 한 자리 에 앉아서 식사라도 하는 것이 제일 행복하답니다.

은주는 후딱 밥 공기를 든채 눈을 감았다. 박인해의 모습을 그냥 그대로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은주는 숨이 다소 가빠져 왔다. 잘못하면 이 사나이의 순정이 자기와 영훈 의 츄러불을 청산해 줄 것 같은 위기를 불현듯 은주는 느꼈다.

은주는 반짝 눈을 떴다. 박인해의 숙으린 얼굴이 그대로 눈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멀지 않아서 부인 되실 분이 계시는데……제계서 행복을 느낀다는 건 나 쁜 감정이지요.』

『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나쁜 일인 줄은 뻔히 알면서도……이 행 복한 감정을 억누를 힘이 제게는 없읍니다.』

『더구나 저도 약혼자의 몸인데…….』

약혼자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는 보았으나 은주의 어조는 이미 밑 힘을 상 실하고 있었다.

『그것도 잘 알고 있지요.』

『마음이 약하신 탓이예요.』

『저는 비교적 의지가 굳다는 말을 친구들 간에서 듣고 있읍니다. 그래서 저는 제 발로 은주씨를 만나려고 찾아는 안 가지요. 그 대신 오늘처럼……

저번 날처럼 우연히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이처럼 저녁이라도 같이 하고 싶 어서……그저 그것뿐이지요.』

텅 비었던 마음 속이 한 구석 한 구석 메꾸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은주에 게 왔다 아까 명동골목 . 담장에 엎디어서 흐느껴 울던 비애와 괴로움이 차 차 희박해 갔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처럼도 간사한 것일까?……박인해에게 만일 그 간호원이 없었던들 은주는 사나이의 순정을 가지고 고영훈과의 애 정의 갈등을 청산해 버렸을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었다.

現代[현대]의 奇蹟[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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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는 끝끝내 고영훈의 관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요정을 나왔다. 그것은 영훈과의 관계가 원만하던 옛날로 돌아갈는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에서 도 아니었고 또한 박인해와의 관계에 있어서 고영훈을 발판으로 하여 자기 자신을 좀더 값 비싸게 팔려는 심산에서도 또한 아니었다.

어쩐지 이야기 하기가 싫었다. 또한 그것을 이야기 함으로써 박인해로 하 여금 좀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게 하는 것도 그리 아름다운 소치는 못 되 었기 때문이( )다.

『바쁘시지 않으면 좀 걸어 보지요.』

『별로 바쁜 것은 없어요.』

『그럼 걸어요.』

광교 다리로 나서서 둘이는 어두컴컴한 안국동으로 걸어 들어 갔다. 아직 초저녁이다. 밤 바람이 싸늘했다.

『사나이란 참 맹랑하지요.』

밑도 끝도 없이 불쑥 그런 말을 박인해는 했다.

『무슨 말인데요?』

나란히 거닐면서 은주는 물었다.

『정옥이만 해도 ─ 저의 집 간호원 심정옥 말입니다.』

『아, 인제 결혼하신다는……』

『네, 싫던 좋던 해야지요. 정옥이가 그것을 요구하는 이상…….』

『……………….』

『사나이가 맹랑하다는 건 말입니다. 지난 이른 ( ) 그렇게 해서 은주씨와 의 혼담이 틀어진 후 제게는 그 어떤 절망 같은 것이 왔답니다. 심정옥이도 그렇고 죽은 아내도 그렇고 저는 아직껏 여성에게 절실한 애정 같은 것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나이었지요. 은주씨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가을 밤처럼 박의사의 이야기도 고요했다.

『누님이 중간에 나선 중매 혼담이긴 했지만 저는 은주씨를 한 두번 만나 보고 어린애 같은 순수한 애정을 느꼈지요. 그것이 틀어지자 저는 영영 독 신으로 지날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러던 것이 사나이란 참으로 맹랑한 동물 인가 보아요.』

박인해 의사는 자기를 비웃듯이 그러던 것이 지난 여름 『 우연한 기회에 정옥에게 손을 댔답니다. 그것은 어떤 일요일이었읍니다. 영식이와 ⎯─ 내 어린 것 말입니다. 정옥이와 셋 이서 한강엘 놀러 갔었지요. 영식이 놈이 자꾸만 한강 구경을 하겠( )고 졸 라서요. 그래 셋이서 한 나절 멱을 감았지요. 웃어운 이야기지만……』

박인해는 잠간 이야기를 주저하다가 이윽고 결심을 한듯이 다시 말을 이었 다.

『나는 어떤 외국 작가의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 읍니다. ⎯─ 오랫 동안 해상 생활을 하던 주인공인 선원이 어떤 항구에 상 륙을 했지요. 육지에서의 생활, 다시 말하면 여성들이 살고 있는 육지의 생 활과는 전혀 절연되어 있는 해상 생활을 하던 그 사나이에게 있어서는 상륙 하자 맨 처음으로 만난 여성이 곧 그의 애인이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결혼 한 그 여성에의 애정은 곧 식어 버리고 일생 동안을 저주에 찬 부부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니 된 사나이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읍니다.』

『그건 토마스·하아디의 소설이죠.』

『아, 그렇습니다. 제 경우도 말하자면 그것과 비슷했지요. 아내가 죽은 후, 나는 실로 오랫만에 여성들의 육체를 자연 속에서 보았읍니다. 환자를 제외하고 하는 말입니다. 수영복을 입은 수많은 여성이 모두다 제게는 한량 없이 어여뻐 보였지요. 더구나 정옥의 육체가 그러했읍니다. 병원에( )는 초라한 간호복을 입고 늘 눈치만 살피며 쩔쩔 매던 심정옥이가 한강 백사장 위에서는 은어(銀魚)처럼 발랄했고 여왕처럼 고귀해 했었지요. 아직 순결하 신 은주씨에게는 제 말을 못 알아 들으실 대목도 있을는지 모르겠읍니다 만…….』

『어서 말씀 하세요.』

표정 없는 얼굴로 은주는 말했다.

『말하자면 인( )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 )게는 상대편에 대한 선택의 여 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밤, 저는 집으로 돌아 와서……사나이란 참으 로 맹랑한 동물이지요.』

『……………….』

오랫 동안 둘이는 말 없이 걸었다. 안국동 네거리에 있는 인해병원 앞을 두 사람은 모르는 병원처럼 그대로 지나치며 돈화문 쪽으로 나란히 걸어 갔 다.

『한강 백사장 위에서 가졌던 그 저주받은 정열이 나의 일생을 암흑 속에 몰아 넣을 줄은 정말 몰랐었읍니다 . 알고 보니 심정옥은 대단한 여성이었지 요. 성격이 가혹하리만큼 차고 반항심이 무섭게 강하고 시기심이 굉장히 굳 센 여성이지요. 이리하여 정옥에 대한 나의 일시적인 정열은 며칠도 못 되 어 싸늘하게 식어 버리고 남은 것은 오로지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리 뿐입 니다. 그것이 나의 일생을 멸망의 구렁지에 빠뜨릴 한이 있더라도 나는 심 정옥과 결혼을 해야만 하지요.』

박인해는 추호도 자신을 변명하려 들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의 무계획한 행동이 일생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실예를 이야기 하는 것 뿐이었다.

『나를 이 불행한 운명에서 구제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박선생을 구제할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이 심정옥일 따름이니 까요.』

『그렇습니다! 은주씨의 말씀이 꼭 맞았읍니다.』

박인해는 절망적인 감동을 했다.

『그이는 물론 박선생과 결혼하기를 희망하겠죠?』

『물론 희망하고 있지요.』

『그럼 해야죠』

『하겠읍니다. 그렇지만…….』

주위의 어둠처럼 박인해의 목소리는 어둡다.

『그렇지만 저는 조물주에 대한 불평이 한가지 있읍니다.』

『무슨 뜻인데요?』

박인해는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묵묵히 걸어 가다가 마침내 결심을 한 듯이 대답을 하였다.

『남성의 생리를 어째서 그처럼도 허술하게 만드셨는지, 그것이 제게는 불 평입니다.』

은주는 후딱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쳐다 보았다. 무슨 뜻인지는 명확히 알아 들을 수가 없었으나 함부로 텃취해서는 아니 될 문제 같기에 그대로 그냥 별만 묵묵히 쳐다보면서 걸었다.

『그 허술하고 근시안적인 생리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남성들이 비극의 씨를 인류에게 끼쳤는가를 생각하면 몸서림이 치지요.』

알 듯도 ( )고 모를 듯도 은주는 했다. 어쨌든 남성들의 방탕성을 두고 말 하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애욕의 방랑성(放浪性) ─, 남성들이 지닌 그러한 습성은 여성들에게만 이 아니고 남성들 자신에게도 불행을 가져 오지요. 그렇다고 해서 심정옥에 대한 나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알아 들을 것 같아요.』

비로소 은주는 대꾸를 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애정이 아니었읍니다. 일장의 악몽(惡夢)이( )지요. 모두 가 다 내 사람된 ( )이 덜나서 그랬겠지만요.』

돈화문 앞까지 둘이는 왔다.

『쓸데 없는 말만 느러 놔서 미안합니다.』

박인해는 걸음을 멈추며

『이 길이 그치는 데까지 같이 걷고 싶지만 은주씨도 인젠 돌아 가셔야만 하실테고…….』

작별의 인사를 해야만 하겠다는 말이었다.

『저는 뭐 괜찮지만…….』

『그럼 원남동까지만 더 걸으실가요? 거기서 전차를 타고 가시지요.』

『그래도 무방해요.』

둘이는 돈화문 앞 넓은 마당을 나란히 건넜다.

『은주씨를 자주 뵙고 싶지만 찾아 가 뵈일 수 있는 제 입장도 못 되 고……다만 오늘처럼 우연히 나마 뵈일 수 있기를 원할 따름이지요.』

『감사합니다.』

『결혼식 때는 제게 꼭 알려 주셔야지요. 그 때나 한번 더 은주씨를 뵙겠 읍니다.』

『결혼식……네네, 알리구 말구요.』

허둥지둥 은주는 말했다.

『그렇지만 제 결혼식, 그리 속히 올 것 같지가 않아요.』

『그러셔요?……』

『사정이 좀 있어서요.』

『아, 사정이……무슨 사고가 생겼읍니까?』

『네, 약간 ⎯─.』

『무언데요?』

『그이가 딴 여성과 교제를 시작했어요.』

『아아……』

박인해는 진심으로 놀라며

『그래서…… 그래서 은주씨가 그처럼 우울했었군요.』

『그렇지만 저는 비교적 무신경한 편이어서 그리 큰 마음의 타격은 없어 요.』

거짓 말을 은주는 했다.

그래도 그럴 수가 『 있겠읍니까? 아아, 그럼 은주씨도 저와 똑 같이 쓸쓸 한 분이 되었군요.』

굴다리 밑을 지나 원남동 로오타리까지 둘이는 묵묵히 걸어 갔다.

『인제 여기서 헤어져요.』

은주는 걸음을 멈추며 돌아 섰다.

『아, 잠간 ⎯─.』

박인해는 은주의 고독한 모습을 빤히 바라보면서

『지금 후딱 생각한 일이지만요. 그 일에 제가 무슨 힘이 되어 드릴 수가 있다면 하고 생각했지요. 누님의 말을 들으면 「신여인」사에 계시는 고영 훈이라는 분이라지요?』

『네, 그래요.』

『제가 그 분을 만나 보겠읍니다.』

『아냐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은주는 당황히 막았다.

『아닙니다. 은주씨를 그처럼 고독하게 만든 그이를 제가 꼭 만나겠읍니 다. 제 힘이 모자를는지는 몰라도……인간의 약속은 엄숙합니다. 어쨌든 부 부가 되자는 굳은 약속을 바꾼 사이가 아니겠읍니까?』

그 어떤 정의감이 박인해를 무섭게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아냐요. 암말 마시고 어서 돌아 가세요. 저는 그럼 여기서 실례를 하겠 어요.』

그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은주는 종로 사가를 향하여 깡충깡충 뛰어 갔다.

전차도 안 타고 뛰어 갔다.

『은주씨!』

박인해는 정류장에 우두머니 서서 소리 높이 은주를 불렀다.

『박선생, 안녕 ⎯─.』

홱 돌아 서서 손 하나를 들어 보인 후에 뛰던 걸음을 늦추어 또박또박 은 주는 걸어 가기 시작하였다. 걸어 가는 은주의 등 뒤로 전차가 우르르 따라 갔다.

조금 후에 택시 한 대가 걸어 가는 은주의 옆에서 멎으며 문이 열렸다.

『아가씨, 타세요.』

『안 타요.』

『아닙니다. 저기 정류장에 서 있던 분이 아가씨를 모시고 가라고 대금까지 지불했읍니다. 동대문 밖이라지요?……』

은주는 오뚜기처럼 얼마 동안을 그대로 오뚝 서 있다가 이윽고 권하는 대로 차에 올라 탔다 차는 쏜살같이 . 달려 갔고 쿳숀에 깊이 몸을 파묻고 은주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친절하고도 소박한 사나이!』

은주를 그처럼 동경하면서도 은주를 위하여 고영훈과 담판을 하겠다는 박인 해 의사의 장식 없는 모습이 현대의 기적인 양 은주에게는 성스러워 보였다.

悲劇[비극]의 製造者[제조자]

[편집]

가을의 표정이 점점 짙어 가는 서울 거리였다. 가로수의 누루퉁퉁한 낙엽이 발( )리에 걷어 채우는 무렵이 되었다.

그 짙어 가는 추색(秋色)과 보조를 맞추듯이 백연숙과 영훈의 관계도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연숙이가 풍기는 그 색채짙은 분위기 속에서 영훈은 자존 심과 씨름을 하는 한은주의 처참한 자태를 가끔 망각하는 것이다.

두 쪼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감정인듯도 싶다. 연숙에게 사로잡 힌 영훈의 감정이 은주를 한낱 먼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양 바라보는 시간 이 차츰 많아져 갔다.

『오늘은 제 집에서 저녁을 먹어요.』

그것은 어떤 토요일 저녁 무렵이었다. 을지로 네거리에서 연숙이가 멈춘 택 시에 영훈은 묵묵히 올라 탔다. 연숙의 생활 풍경이 보고도 싶어서 굳이 사 양도 안했다.

『아현동까지!』

연숙은 방향을 가리켜 주고 영훈의 옆에 가까이 닥아와 앉았다. 무릎이 덧 두기지 않은 것이 다행인, 그러한 밀접감을 가지고 연숙은 닥아와 앉았다.

영훈은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며 표정이 없다. 거리가 휙휙 눈 앞에서 흘렀 다.

『이 즈음의 영훈씨는 점점 더 침울해만 가요. 은주씨 생각?……』

연숙의 숨길이 귀 밑에 간지럽다. 그러한 가까운 거리에 연숙의 입술은 있 었다.

『아니오.』

사실 영훈의 그 순간, 은주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영훈은 연숙에게 사로잡힌 자기의 감정을 뒤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화려한 색채를 띠우지 못하고 침울이라는 표정을 가지고 나 타났을 따름이었다.

『그럼 왜……?』

『내가 뭐랬어요?』

『같은 값이면 명랑하세요.』

『명랑하지요.』

얼굴을 돌리며 영훈은 웃었다.

『아이구, 그거야 말로 쓴 웃음이네요.』

영훈은 또 웃었다.

『좀더……좀더 명랑하게 웃어 봐요.』

영훈은 또 웃었다.

『됐어요, 그만 했음…….』

광화문 네거리를 차는 건넜다. 번잡한 거리다. 바람이 인다. 낙엽이 이리 저 리로 미침질을 해 갔다.

아현동 중턱 연숙의 집 앞까지 들이는 한 마디도 말을 않고 왔다. 연숙이도 이상 더 영훈을 달래지 않았기 까닭이었다.

『네 시면 돌아 오신다고 그래서 벌써 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중년 식모가 수선을 떨면서 두 사람을 맞이 하였다. 하얀 상보를 덮은 식탁 이 안 방에 준비되어 있었다.

『아이, 시장해요. 인제 빨리 들여다 줘요.』

『네 잠간만 기다리셔요.』

식모가 부엌으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 갔다. 영훈을 위하여 미리부터 준비해 놓은 만찬임에 틀림이 없다.

『저고리 벗으세요.』

연숙은 익숙한 솜씨로 영훈의 뒤로 돌아 가서 저 고리를 벗겨 양복장 속에 다 걸었다.

그러나 연숙의 그 익숙한 솜씨가 영훈은 슬펐다. 김석호 사장과의 부부 생 활에서 습득한 애욕의 때(垢)인 것이다.

식모가 마루 끝에 세숫 물을 떠 놓았다.

『자아, 세수를 하셔야지.』

연숙의 목소리가 소녀처럼 명랑했다. 영훈은 하라는 대로 마루로 나가서 대 야 물에 손을 담( )다.

『비누 —— .』

연숙은 손수 뜰로 내려 가 비누갑을 갖다 대야옆에 놓았다.

『나 옷 좀 갈아 입을 께 방문 열지 마세요, 네?』

대야에 손을 담근채 영훈은 표정 없는 얼굴을 들었다. 연숙의 양장( )방안 으로 들어 서며 얼굴이 홱 돌아 섰다. 방 문이 닫기기 직전, 돌아 선 연숙의 ( )려한 얼굴이 소녀처럼 수집게 웃으며 사라져 들어 갔다.

닫쳐진 방 문을 영훈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며 꺼꺼부둥히 대야 앞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가 후딱 . 정신을 채리며 영훈은 물을 움켜 얼굴을 씻기 시 작하였다.

영훈은 아직껏 마루에서 세수를 해본 기억이 없다. 부부 생활의 일면을 경 험하는 것 같아서 낯이 확근 닳아 올라 왔다. 그 닳아 올라 오는 얼굴을 영 훈은 두 손바닥에 힘을 주어 호되게 닦아 내는 것이다.

세수를 하는 동안 방 안에서는 부스럭 옷 갈아 입는 소리가 났다. 양복장 문을 여닫는 소리도 났다.

『아주머니.』

연숙의 동굴동굴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굴러 나왔다.

『네?……』

부엌에서 식모가 대답을 했다.

『약주를 너무 데움 안 돼요.』

『아이유, 염려 마시우.』

『( )로두 너무 끓이지 말구…….』

『글쎄 맡겨 두시우.』

『계란은 반숙이라야 해요.』

『글쎄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범연하겠수?』

『후후훗 ——.』

연숙은 웃음을 깨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모양이로군.』

영훈은 대야 앞에서 일어 서며 손수건을 눈으로 찾았다. 마루에는 손수건이 ( )이 보이지 않았다.

『저 손수건좀…… 내 양복 주머니에 있는데요.』

영훈은 방 문을 향하여 중얼거렸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손 수건두 안 드리구……잠간만, 일 분만, 기다리 세요. 나 지금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니까 말이예요.』

그리고 나서 또

『후후훗 ─ .』

하고 연숙은 웃음을 죽였다.

영훈은 또 확근 얼굴이 닳았다. 젖은 손을 들고 영훈은 앞 집 지붕 바로 위 로 날 저문 하늘을 불현듯 바라보았다.

발버둥을 치던 최후의 노력이 허무러지는 순간을 영훈은 문득 느꼈다. 그것 이 죄 연숙의 계획인지 우연인지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영 훈은 은주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할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그 두 여성의 위 치를 바꾸어 놓아도 어색하다거나 불안 하다거나 하는 감정이 추호도 없는 무슨 전생의 숙명 같은 것을 불현듯 느꼈다.

그러는데 전등이 환하게 들어 왔다. 이윽고 방 문이 열리며 한복에다 짙은 화장을 한 연숙이가 분홍색 수건을 들고 나왔다.

『그만 수건을 깜박 잊어 먹었어요. 미안합니다. 귀한 손님을…….』

갓 시집 온 신부처럼 연숙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수건을 내밀었다.

영훈은 웃었다. 그것은 추호도 아까 택시 안에서 웃던 그런 종류의 쓴 웃음 은 이미 아니었다. 연숙이가 요구한 좀더 명랑한 웃음이 그 곳에는 있었다.

영훈은 수건을 받아 들고 얼굴을 씻었다. 옅은 향수 냄새가 영훈의 후각을 자극해 왔다.

이윽고 두 사람은 호화로운 식탁 앞에 마주 앉는 몸이 되었다. 술 한잔 오 고 가고 신선로가 끓었다.

『웬 음식을 이처럼 많이 채렸소?』

『영훈씨, 많이 잡수시라고요.』

『감사합니다.』

『아냐요. 모두가 다 영훈씨 덕분이예요.』

『내 덕분이라고요?』

『그럼요.』

『어째서요?』

『영훈씨 덕분이 저까지 잘 얻어 먹는 셈이 되는 거예요.』

『모르겠는데요. 무슨 말인지……?』

『아이, 어쩌면 영훈씨! 十[십]년 전 오늘 밤, 영훈씨가 제 뺨을 무섭게 갈겼지요.』

『아, 오늘 밤 —— .』

『뺨을 갈기고 훌쩍 일어 나서 밖으로 나가 버렸지요. 그리고는……그리고 는 영영…….』

그것이 오늘 밤이었던가! 자기는 이미 망각의 세계로 정배보낸 十[시]월 二十五[이십오]일 밤을 이 여인은 인생의 무슨 고귀한 금자탑(金字塔)인 양 고이고이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었구나! 백연숙의 정열을 한낱 부질없는 유한 마담의 그것으로만 취급해 왔던 영훈의 몰인정이 뉘우쳐 졌다.

『그리고는 영영 가 버렸던 영훈예요.』

연숙의 두 볼이 차차 정열에 익어 왔다. 눈동자의 윤택이 차차 선명해 왔 다.

『영영 가 버린 것은 연숙씨가 아니였읍니까?』

『그런…… 그런 까다로운 말은 인제 그만 두기로 해요. 사람이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다 정정 당당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럴 수 없는 곳에 인생의 맛이 있는 거니까요.』

『옛 날과 꼭 같은 이야기다! 꿈꾸는 소녀 —— 당신은 三十[삼십]대의 소녀요.

『나는 구태여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정 당당할 수 있는 행동의 소유자를 나는 그리 존경하지 않아요. 언제든지 올바를 수 있는 인간 —— 아이, 구역질 나요. 그런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 나지 말고 신으로 태어 났음 좋았을 거예요.』

『당신은 무서운 로맨티스트다!』

『그것 보다도 비극의 히로인일는지 모르지요. 후후훗 ——.』

익살맞게 연숙은 웃고 나서

『자아, 그런 의미에서 한 잔 —— .』

연숙은 잔을 맞대고

『과거를 캐지 말고 앞 날을 묻지 말고 오직 하나 현재를 축복해요.』

영훈은 웃으면서 잔을 들었다. 연숙은 마시고 나서

『영훈씨.』

『………………?』

『현재란 무슨 말인지 아세요?』

『현재란……현재란 말하자면 이 순간이겠지요.』

『맞았어요.』

영훈은 또 빙그레 웃었다.

『현재 영훈씨는 무얼하고 있나요?』

『술추념을 하고 있지요.』

『혼자서?……』

『아니오.』

『그럼?……』

『옛 날, 내가 생명처럼 소중히 하던, 그러나 약간 정숙하지 못한 애인 백 연숙과 술을 마시고 있지요.』

술 기운이 차차 영훈의 굳어져 있던 마음을 풀어 주기 시작하였다. 차차 기 분이 화락해 졌다.

『아이구, 웃 대가리가 너무 길어요. 그런 쓸데 없는 형용사는 대담하게 떼 버려요.』

『대담하게…….』

『네, 대담하게 떼 버려 보세요.』

『그럼 이렇게 되겠지요. —— 정숙하지 못한 옛 날의 애인 백연숙과 술을 마시고 있지요,』

『역시 길어요. 좀더 간단하게 주리세요.』

『그럼 애인 백연숙과 술을 마시고 있지요.』

『오·케! 부라보!』

연숙은 외쳤다.

『그러나…….』

영훈은 조용히 웃으며

『주리던 김이니 좀 더 주려야지요.』

『인제 됐어요. 인제 그만 주려요.』

『아니오. 당신의 말대로 좀더 대담하게 주려서 「애인」마저 떼 버리고 단 지 백연숙과 술을 마시고 있읍니다.』

그 말에 연숙은 쓸쓸히 웃으며

『하는 수 없이 일이지! 그것이 현재니까 하는 수 없어. 그렇지만 영훈씨의 입은 내 이름 위에서 「애인」이라는 두 글자를 떼 버렸지만……영훈씨의 두 눈동자는 그것을 도루…….』

순간, 영훈은 당황히 머리를 흔들었다. 연숙의 얼굴 위에서 움직일 줄을 모 르고 오랫 동안 머물러 있던 자기의 두 줄기 시선을 영훈은 그렇게 해서 당 황히 흐틀어 버렸다.

『영훈씨의 눈동자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요.』

『아니다!』

영훈은 강경히 그것을 부인했다.

『자기 감정에 쓸데 없이 항거하지 말아요. 영훈씨는 단지 현재의 감정을 살리면 되는 거예요.』

『건방진 소리다!』

『아냐요. 나 조금도 건방지지 않아요.』

『나를 싫다고, 나를 버리고 간 여자를 누구가……?』

『그건 영훈씨의 의지력이고 영훈씨의 감정은 아마도 그렇지가 않을 거예 요.』

『당신은 요부다!』

격렬한 한 마디가 무섭게 튀어 나왔다.

『그럴는지도 몰라요. 내가 영훈씨를 사랑하기 때문에 요부가 됐는지 몰라 요.』

『당신은 옛 날부터도 요부였다.』

『그렇지만 요부라는말은 다 소 적당한 용어가 못 되는 것 같아요. 나는 지 금 비극을 만들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옛 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비극 을 제조하는 데서 나는 가장 깊고 참다운 행복을 느끼니까요.』

『나는 가겠소!』

영훈은 훌쩍 자리를 박차고 일어 섰다.

『안 돼요! 가시면 안돼요!』

연숙이가 호닥닥 따라 일어 서며 영훈의 앞에 탁 막아 섰다. 문을 등지고 연숙은 막아 섰다.

『왜 가는 거예요?』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서 가는 거요.』

『그렇지만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당신을 막는 거예요.』

『비켜요!』

영훈은 한 손으로 연숙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못 비켜요!』

연숙은 탁 영훈의 품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왔다.

城廓[성곽]은 무너지고

[편집]

쓰러져 온 연숙의 몸 무게를 영훈은 두 팔로 가만히 받았다. 그리고는 문 안에 우뚝 서 있었다.

『영훈씨, 자기를 속이지 마세요!』

『……………….』

연숙을 품에 안은채 영훈은 눈을 가만히 감았다.

『비극에 충실한다는 것은 가장 인간 다운 행동이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영훈씨는 인간일 뿐 인간 이상의 아무런 것도 아닐 거예요. 왜 영훈씨는 자 기를 자꾸만 속이려고 하는 거예요?』

『연숙씨!』

한참만에 영훈은 눈을 감은채 연숙을 불렀다.

『네?⎯─』

『비극은 내 취미에 맞지가 않습니다. 언제든지 비극을 피해 가면서 살아 왔답니다.』

『그러니 그건 결코 아름다운 삶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아요.』

『아름다운 것만이 삶의 가치가 아니겠지요. 인간이 모두 다 아름다운 것 만을 찾아 헤매인다면 거기에 있는 것은 인류의 멸망 뿐이니까요.』

『영훈씨는 인류를 생각하면서 사시나요?』

『아니오. 다만 개체(個體)를 통하여 인류의 운명을 미루워 볼 따름이지 요. 아름다운 것만을 찾는다는 것은 먼저 개체의 멸망을 초래하겠지요.』

『영훈씨는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하는 종류의 인간이예요?』

『이유 없이 빨리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요.』

『영훈씨가 저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세 요?』

『나는 다만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가 않을 뿐이지요.』

『내일 일을 생각하니까 비극이 자꾸만 문제가 되는 거지요.』

『그러나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으리만치 나는 데카다니즘(瞬間主義 [순간주의])의 신봉자는 못 된 답니다.』

『조금만 앉으세요.』

연숙은 영훈을 끌어 식탁 앞에 앉히었다.

『암말 말고 내 얼굴을 한참만 들여다 봐 주세요.』

두 손으로 영훈의 두 어깨를 잡고 연숙은 눈물 어린 얼굴을 영훈의 눈 앞 에 조용히 내 밀었다. 영훈은 어린애처럼 하라는 대로 연숙의 얼굴을 들여 다 보았다.

『인제 됐으니 나를 가게 해 주시오.』

오랫 동안 들여다 보다가 영훈은 기를 쓰고 입을 열었다.

『영훈씨가 그처럼 제가 무서워서 가시겠다는건……비극을 피하기 위해서 가시겠다는 건…… 그건…… 그건 영훈씨가 저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예 요.』

영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영훈씨 입이 그걸 말하지 않을 뿐이지요.』

『……………….』

『영훈씨는 저와 이렇게 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영훈씨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뭐가 무서워서 자꾸만 도망을 치 려는 거예요?』

연숙은 두 손으로 영훈의 볼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며

『제 마음 가엾지 않으세요?』

『……………….』

무서운 의지력을 가지고 영훈은 연숙의 한 마디를 무시해 보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 노력의 한계선은 이미 허무러지고 있었다.

영훈은 연숙의 얼굴에 볼을 부비었다. 연숙의 입술이 달려 왔다.

『연숙은 악마다!』

잠고대처럼 영훈은 중얼거렸다.

『악마도 좋아요!』

포옹이 왔다.

『연숙은 요부다!』

『요부도 좋아요!』

애욕의 경험을 지닌 백연숙의 작렬된 육체 앞에서 영훈은 기를 썼으나 마 음의 성곽(城廓)은 이미 허무러지고 있었다. 그 성곽 속에 한은주는 도사리 고 있었으나 이미 먼 세계의 희미한 존재 이상의 아무 것도 되어 있지 못했 다.

『영훈씨, 그리웠어요!』

연숙의 정열이 불꽃을 튕겨 왔다.

『영영 나를 안아 주지 않을 줄로 알았어요!』

『……………….』

영훈은 말을 잃고 연숙의 몸을 끌어 안았다. 예상 밖으로 풍만한 육체였 다.

『영훈씨, 무척……무척 행복해요!』

『……………….』

『영훈씨는?……』

『……………….』

『왜 대답이 없나요?』

『……………….』

『은주씨 때문?……』

『……………….』

『은주씨와 나를 똑 같이 사랑해 주심 돼요. 그러니까 너무 마음 고생은 말아요.』

『아, 연숙!』

영훈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나는……나는 두 사람을 똑 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는 성격 이 못 돼서…….』

『그럼 더욱 좋지.』

『은주의 이야기는 제발 입 밖에 내지 말아요. 연숙이, 나는 마침내 연숙 에게 졌다!』

『지다니……우리가 무슨 승부를 했나요?』

『나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커다란 승부였다! 무서운 투쟁이었다! 그러나 나는 졌다!』

옆에 놓였던 식탁 한 모퉁이가 퉁그러지며 술 주전자가 쓰러졌다. 쏟아진 술이 둘이의 옷 자락 위로 철철철철 흘러 내렸다.

『오랫 동안……정말 오랫 동안의 꿈이었어요!』

육체와 육체에 불이 붙었다.

둘이는 마침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이튿 날은 일요일이었다.

연숙은 ( ) 조반을 먹고 화장을 했다. 열두 시에 명동 다방에서 영훈과 만 날 약속을 어제 밤에 했었다.

『행복은 마침내 왔다!』

화장대 앞( )서 연숙( ) 콧 노래를 부르면서 소녀처럼 행복해 있었다.

『흐흥, 어린애 ( )애!』

아무리 뻗대 봤댔( ) 연숙의 앞에서는 어린애와도 같은 영훈이었다. 오늘 영훈을 만나 가지고 인천 여행을 하리라 생각하였다. 바다를 보고 갈매기를 보면서 둘이의 애정을 장식해 보리라 하였다.

연숙이가 한복으로 몸 채림을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김석호 사장이 들어 섰다.

『오, 부인께서 어딜 또 출입하십니까?』

김석호는 방 안으로 들어 오자 다짜고짜로 연숙의 어깨를 껴안았다.

『아이, 놓아요!』

연숙은 짜증을 내면서 김석호의 손을 뿌리쳤다.

『뭣하러 어슬렁 어슬렁 또 들어 오는 거예요?』

『부인을 사랑해 드리려고 찾아 온 것이오.』

빙글빙글 웃어 대며 김석호는 또 ( )아왔다.

『아이 징그러워! 저리 좀 비껴요!』

뺑하니 소리를 치며 핸드·빽으로 상대편의 손을 탁 쳤다.

『화장이 좀 지나치게 짙은 걸 보니, 확실히 어떤 남성을 만나러 가는 모 양인데…….』

『아무를 만나러 가든 무슨 상관이예요?』

『허어! 이거 큰일 날 말을 하는 걸! 남편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난 당신의 아내가 아냐요.』

『그럼 누구의 아낸고?』

『듣기 싫어요. 저리 비껴요!』

연숙이가 문 쪽을 향하여 뛰쳐 나가려는데 김석호가 탁 앞을 막아 왔다.

『고영훈을 만나러 가는 거지?』

순간 연숙의 눈초리가 오들오들 떨다가

『고선생은 왜 갑자기 들고 나서는 거요?』

『밤낮 같이 쏘다니니까 하는 말이겠지.』

『누가 쏘다닌다는 말이예요?』

『관철동 개천 가로 산보두 하구…….』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 그럼 산보두 못 해요?』

『산보한다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고영훈을 만나러 가면 간다고 솔 직히 말하라는 말이오.』

『그래요. 고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예요.』

『어디서?』

『명동 다방에서…….』

『나도 좀 같이 가 볼가?』

『가세요.』

하는 수 없이 연숙은 김석호와 함께 거리로 나왔다.

『제가 택시로 모셔 드리지요. 귀부인이 전차를 타서야 되겠소?』

택시 한 대를 멈추고 둘이는 올라 탔다. 차는 명동을 향하여 달려 갔다.

『고영훈에게는 약혼자가 있어.』

담배를 붙여 물며 김석호는 태연히 말했다.

『나두 알아요.』

『고영훈은 독실한 사람이야.』

『나두 알아요.』

『그리 쉽사리 걸리지는 않을 거야.』

『염려 마세요.』

『허어, 자신이 만만한 걸!』

『헤실픈 말 그만하고 인제 여기서 내리세요.』

『안 내릴 걸. 내가 따라 가서 눈치를 좀 봐야겠어. 어떤 경지쯤 들어갔는 지?……』

『몰상식한 사나이야!』

『흥, 상식이야 풍부하지. 밀회(密會)를 가는 마누라를 이처럼도 정중히 모시지 않소?』

둘이는 이윽고 명동 입구에서 택시를 내렸다.

『어느 다방이오?』

『가 보면 알 걸 뭘 그래요?』

조금 걸어 들어 가다가

『정말 따라 들어 올려는 거예요?』

『내 언제 거짓 말 했나?』

『아이, 징글징글이야!』

『괜찮아. 마누라가 밀회하는 광경을 보는 맛도 괜찮아!』

다방 문 앞까지 김석호는 따라 왔다.

돈과 愛慾[애욕]과

[편집]

다방 안은 비교적 한산하였다. 들창 가에 적당한 자리가 있어 연숙은 그리 로 걸어 가 앉았다. 열두 시 십분 전, 영훈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연숙의 등 뒤로 따라 들어 온 김석호가 연숙과 털석 마주 앉으며

『고군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데…….』

하고 중얼거렸다.

『걱정두 팔자라니까 ─ .』

새침한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연숙은 커피 한 잔을 청했다.

『사람은 분명히 둘인데 커피는 한 잔 뿐이다?』

빙글빙글 웃어 대며 김석호는 연병 출입문 쪽을 바라본다.

『마음대로 청해 잡수세요.』

콤팩트를 들여다 보면서 하는 연숙의 대수롭지 않은 대꾸였다.

『음, 이쯤되고 보면 한국의 자유주의도 고도로 발달한 셈이 되는 거야.』

김석호는 담배 한꼬치를 붙여 물었다.

『취미가 제각기 다를테니까요.』

연숙은 이윽고 콤팩트를 핸드 · 빽 속에 거두어 넣었다.

『화장이 너무도 잦은 걸.』

『조금이라도 더 이쁘게 뵈기 위한 노력은 현대 여성의 교양중의 하나로 되어 있지요.』

그러는데 커피가 한잔 왔다.

『이거 봐요.』

김석호는 커피를 갖다 놓고 돌아 가려는 여급을 불러 세웠다.

『네?……』

『사람은 둘인데 왜 커피는 한 잔이오?』

『저……이 분이 아까 한 잔만……?』

둥굴납작한 얼굴을 가진 여급은 연숙을 후딱 내려다 보았다.

『아베크로 들어 왔으면 응당 두 잔을 가져 와야만 예의가 아니오?』

『아, 그러세요? 저는 한 잔이라는 줄만 알고……곧 가져 오겠읍니다.』

『그래야지.』

하는 것을 연숙이가 냉큼 나서며 여급을 향하여

『저 아베크가 아니니까 오해 마세요.』

했다.

『그러세요?』

가려던 여급이 영문을 모르고 또 주춤하니 섰다. 언저리에 앉았던 손님이 힐끔힐끔 바라다 보았다. 쿡쿡 웃는 손님도 있었다.

『이 양반은 불량 신사예요. 지나 가는 사람을 공연히 붙들고 추근추근 따 라 다니지 않겠어요?』

여급은 대답을 잃고 울룽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태가 이쯤 되고 보면 명예 손상으로 고소를 제 할 수 밖에 없는 걸.』

여급은 하는 수 없이 바아텐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멋진 양장을 한 중년 부인이 한 사람 걸어 들어 오 다가

『아이유, 김사장이 아니세요?』

다방이 떠나갈 것 같은 수다스런 인사를 했다.

『아, 마담, 오래간만이로구려.』

『그럼! 어저께 만나고는 못 만났으니까 오래간만일 수 밖에 ……아이, 이 쁜 아가씨야!』

마담 · 샹하이는 김석호 옆에 몸을 걸터 앉으며 연숙의 아래 위를 핥는듯 이 바라 보았다.

『애인?……』

마담은 새끼 손가락을 날름 처들어 보인다.

『틀림 없소!』

김석호는 넌즈시 대답을 했다.

『이쁜 분이예요.』

마담은 생긋 웃어 보이며

『그렇지만 좀 주의를 하셔야만 할 거예요. 김사장의 손 버릇이 도시 얌전 치가 못 하답니다.』

『경험이 있는 분은 다르시군요.』

새침한 얼굴로 연숙은 첫 화살을 쏘아 붙였다.

『오야 오야 (어마나)? 그러다 보니 조련치 않는 아가씨로군요!』

마담 · 샹하이는 다소 얼떨떨해 졌다.

연숙은 까막하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그만 하면 좋은 성적이예요.』

『우등생은 문제 없겠어요?』

『풋내기는 아닌듯 싶군요.』

『선배, 눈이 무척 밝으셔. 존경합니다!』

연숙은 또 한번, 그러나 이번에는 아주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하아 다소 『 , 까다로워 지는 모양 같은데……이 쯤서 소개를 하지.』

김석호는 담배 연기를 유리 창에 후우 내뿜었다.

『소개는 필요치 않아요. 모르긴 하지만 상해서 굴러 잡수시던 분 아냐 요?』

연숙의 육감이 처음부터 그것을 단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마담 · 샹하이의 표정이 홱 변했다. 험악한 눈초리로 김석호를 쳐 다보며

『이 애숭이가 누구예요?』

하고 토라지게 물어 왔다.

『글쎄 올시다 요 지음 다소 관련성이 복잡해 져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이 되었군요. 十[십]년 전에는 분명히 사모관대(紗帽冠帶)로 맞아 들인 여성인데 이 즈음에 와서는…….』

『아, 그럼 바로 부인?……』

마담의 표정이 호닥닥 놀란다.

『글쎄 내 이야길 좀 들어 보시래두. 그러던 것이 이 즈음에 와서는 커피 한 잔도 같이 나누지 않는 이상 야릇한 관계로 발전을 했답니다.』

『아이유, 가없어라! 내가 사 드려야지.』

이미 사정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는 마담으로서는 그렇게 해서 능칠 도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커피 두 잔을 청하고 나서

『부인, 실례했읍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헤실픈 말만 해서……용서하세 요, 네?』

마담은 깍듯이 인사를 했다.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김석호에게 부인이 있건 없건 이러한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의 남녀의 애정 문제란 어디까지 자유롭고 독자적이 야만 할텐데, 어지간한 마담도 부인이라는 한 마디에는 청천 벽력 같은 느 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충격을 오랫 동안 지니고 있을 마담은 또한 못 되었 다. 잘못하면 고영훈과 손을 잡을는지도 모른다는 말을 저번 날 은주와 더 불어 차를 타고 가면서 김석호의 입으로부터 농담 비슷이나마 들어 온 마담 이기에 부인에게 대한 약점은 동시에 자기에게 있어서는 강점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후딱 그런 것을 생각하며

『이름은 박인숙이지만 마담 · 샹하이라고 사내들이 불려준답니다.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연숙은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표정으로 저는 백연숙이라고 『 불러요. 김사장과 남달리 두터운 친분이 계신 줄은 모르고 그만 실례를 했어요. 저는 혼자서 마신 차를 마담이 사드려서 대단 히 고맙습니다.』

『아이, 어쩌면 인사성이 밝으시담!』

그러는데 커피 두 잔이 왔다.

『하마트면 차 한 잔도 못 얻어 먹고 쫒겨 날번 했는 걸.』

김석호는 유쾌하다는 듯이 훌훌 커피를 들이켰고

『호호호호호……김사장, 유 ─ 모어가 그럴듯 하시네.』

마담은 마음을 어지간히 저리면서 능치는 것이었다.

『참 내 눈두 어둡지!』

찾 잔을 입술에 대다 말고 마담은

『그러지 않아도 저번 날 부인을 한번 뵌 적이 있답니다. 다소 거리가 멀 어서 똑똑히는 못 뵈었지만요.』

『그러세요?』

연숙은 시선을 보냈다.

『그럼요. 김사장이랑 같이 차를 타고 가는데……광교 다릿 목 개천 가를 산보하시더군요. 누가 볼래서 봤는가요? 아, 참 그 때, 저의 집에서 일을 하는 한은주도 같이 타고 있었어요.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말 이예요. 김사장은 하나 밖에 없는 여편네를 떼우겠다고 걱정을 하지 않겠어 요. 그래 뭘 그러느냐고 물었더니만 개천 가 길을 가리키는 거예요.

그래서 봤었지, 볼래야 본 것 아니라니까요. 혼자가 아니더라구먼요. 그런 데 말이예요. 아베크의 상대자가 바루 미스터 · 고가 아니겠어요? 거기서 또 가슴이 덜컹 내려 앉은 사람이 또 하나 생겼답니다. 그게 나 같은 노파 라면 또 몰라두 바루 내 옆에 앉았던 한은주라는 거예요.

부인은 아직 모르실는지 모르나 한은주와 미스터 · 고가 목하 약혼중이고 보면 은주의 심정도 어지간히 뛰었을 거예요. 그래서 나도 부인을 먼발로라 도 바라보았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오늘 이처럼 해실픈 말만 해서 미안하다 고 생각하는 겁니다.』

『좀더 계속해 주세요. 이야기가 너무 짧아서 서운하군요.』

연숙도 녹녹지 않은 대꾸를 했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데 취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지요. 누굴 들으라고 하 는 것 보다도 제가 유쾌해서 하는 거니까, 할만큼 하고는 집어 치우는 버릇 이 자연히 생겨 버렸답니다. 미안해요.』

『존경합니다.』

『부인께서 존경을 해 주시니, 고맙지, 뭐유?』

『부탁합니다.』

연숙은 홀랑 자리를 일어 섰다. 반 시간이 지나도록 영훈은 좀처럼 나타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부탁은 무슨……?』

마담은 멍하니 연숙을 쳐다 보았다.

『김사장을 잘 부탁한다는 말이예요.』 마담은 마음으로 뜨끔했으나 이왕 일이 이렇듯 된 이상 잠자코 있을 수는 도저히 없다.

『아, 그런 의미였어요?』

『김사장이 가끔 가다가 쪽도리를 씌우고 데려 갔던 사람을 못 살게 구는 수가 있어서 그러는 거예요. 말귀 알아 들으시겠어요?』

『오 · 케! 염려 마세요. 그렇지만 한가지 말해 둘 것이 있읍니다.

『뭔데요?』

『냄새가 나면 돌려 보낼터이니까 그 때는 이 편에서 좀 부탁을 해야겠기 에 말이예요.』

『냄새가 날 리는 만무할 거예요. 마담에게는 김사장 정도가 어울릴 거 아 냐요?』

『뭐가 어쨌어요?……』

마담의 자존심이 왜그라 졌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차 한잔 값을 식탁 위에 내놓고 연숙은 다방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어허, 허허헛……어허, 허허헛…….』

김석호는 참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다방이 떠나갈 것 같은 호탕한 웃음을 했다.

『뭐가 우스워 그러는 거예요?』

마담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이다.

『허허허헛……허허허헛…….』

『사람을 이처럼 망신을 시켜 놓고 뭐가 우습다는 말이예요?』

『이 봐요, 마담!』

웃음을 거두며 김석호는

『마담에게는 이 김석호 쯤이 어울릴 거야.』

『듣기 싫어요!』

뺑하니 소리를 치며 마담도 일어 섰다.

『가면 같이 가야지. 어울리는 한 쌍인데…….』

『따라 오지 말아요.』

『그건 일종의 허세래두. 문 밖에만 나서면 손목을 잡아 끌 것을…….』

『징그러워.』

『미꾸라지 같애?』

둘이는 다방을 나섰다.

『미꾸라지의 아버지 같애.』

『그럼 뱀장어겠군.』

명동 거리를 걸으면서

『뱀장어의 아버지는 뭐랬지?』

『뱀이겠지.』

『뱀의 아버지는?』

『구렁이! 아야얏!』

마담이 김석호의 옆구리를 무섭게 꼬집어 뜯었다.

『사람 볼라!』

『알 거 뭐야?』

『어디로 갈가?』

『돈 이자 줘요.』

『조금만 더 기다려.』

『닷새가 지났는데두?』

『복리 계산을 한대두.』

『양복지 좀 사야겠어.』

『얼마나 필요하지?』

『오백만환에 대한 이자만 주면 돼.』

『그만 쯤은 문제 없지』

『수표장 갖구 나왔지?』

『갖고 나왔지만 한길에서 쓸 수는 없지 않아?』

『내 점심 살게.』

『저녁은 내가 사지.』

『어디서?……』

『어떤 깊숙한 요정 조용한 일실에서…….』

『깊숙하지 않음 안 돼?』

『연숙이가 갈 때 뭐라고 그랬어? 잘 부탁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이, 고년 얄미워서 죽겠어! 내 죽어두 안돌려 보내련다!』

『냄새가 나두?……』

『고년이 뭐라고 그랬게? 원앙처럼 어울리고 보니 냄새가 날 리는 만무하 다고…….』

『고것이 암만 해두 나를 시험하나 봐?』

『어째서?……』

『아까 아현동엘 갔었지. 그랬더니만 아까 그 다방에서 영훈과 만날 약속 이 되었다나. 그래서 따라 와 봤더니만 거짓 말이야. 암만 해두 나를 둥떠 보는 모양인데…….』

『아현동엔 또 뭘 할려구 어슬렁 어슬렁 찾아 갔었어?』

『어쨌든 조강지천데…….』

『무엇이?……』

『아얏 ─ .』

『고 배라먹을 년이…….』

『아아, 유쾌하다!』

『뭐가 유쾌해요? 남 약만 올려 놓구서…….』

『남자란 이런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동물이거든. 애욕의 싸움질이 버러 진 여성들 가운데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면서 뻐저어 나가는 만족감 ─ 삼천 궁녀 모아 놓고 육체에의 병풍 속에서 일생을 지닌 연산군(燕山君)의 만족감이야 말로…….』

『나쁜 사람이야!』

돈과 애욕의 쌍주곡(雙奏曲) ─ 이런 풍경이 어찌 서울 거리에 한둘 뿐이 랴만…….』

山月[산월] 이

[편집]

그보다 한 걸음 먼저 다방을 나선 백연숙은 행여나 고영훈을 한길에서 만 나지나 않을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명동 입구로 빠져 나왔다.

『약속 시간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활줄 같이 긴장했던 밀회에의 기대가 차차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 만 나면 같이 인천으로 가서 축항 근처를 거닐며 소녀처럼 흐뭇하게 한번 달콤 한 감상에 젖어 보려던 기대가 허무러지고 말았다.

어제 밤의 애욕의 꼬리가 아직도 연숙의 육체 한 모퉁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타다 남은 불길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숙은 그 순간, 마담·샹하이의 그 풍만한 육체를 문득 생각하고 불유쾌 해 졌다. 김석호를 잘 부탁한다고, 남편을 마담의 품안에다 아낌 없이 떠맡 기고 나온 연숙이기는 했지만 자기가 먹기는 싫어도 개 주기는 싫다는 격일 가 불유쾌한 느낌이 다음 ? 순간에는 이상하게도 희미하고 야릇한 질투로 변 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예기치 못했던 암초(暗礁)와도 같은 감정이었다. 늑대처럼 추 근추근한 사나이라고만 여겨 왔던 김석호가 아니였던가. 그 김석호에게 마 담은 한사코 매달려 있는 것이다. 매달릴만 한 무슨 매력이 김석호에게 있 는 모양이다.

『돈이겠지!』

연숙은 간단히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질투의 감정을 무마해 보는 것이었다.

『진저리가 나게 생각하고 있던 남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건…….』

확실히 여성들이 지닌 다욕(多慾)의 탓인지도 몰랐다. 이러고 보면 자기가 고영훈에게 전 정열을 붓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좀처 럼 움직여 주지 않는 옛 날의 애인을 움직이기 위하여 일부러 과장한 정열 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위구심은 확실히 어제 저녁까지는 가져 본 적이 없는 연숙이었다.

어제 밤까지는 전력을 다해서 고영훈의 완강한 마음을 움직이어 그것을 함 락시키는데 저도 모르게 열중해 있었다.

그러나 고영훈을 함락시키고 난 오늘에 와서는 고영훈에 대한 애정 보다도 일종의 승리감이 연숙의 감정을 한층 더 화려하게 하고 있었다.

『영훈씨의 말대로 나는 일종의 요부인지도 몰라?』

그러나 백연숙으로서는 자기가 과연 요부라고는 생각켜 지지가 않았다. 영 훈을 함락시킨 자기의 정열이 조금도 거짓 같지가 않았기 까닭이다. 그것은 실로 오랜 시일에 걸친 연숙의 아름다운 꿈이었고 숙원이었다. 그리고 그 꿈이 어제 밤에 드디어 실현되었을 따름이었다,

『어째서 영훈씨가 안 왔을가?』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는지 몰랐다.

『어떻거면 그이를 오늘 중으로 한번 더 만날 수가 있을가?』

마담·샹하이와 김석호의 관계가 자꾸만 머리에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

연숙은 갑자기 그들과 같이 무슨 경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고영훈을 필요 로 했다.

『혹시 사에 나왔을는지 몰라.』

일요일에도 일이 있으면 영훈은 사에 나왔다. 그래서 연숙은 을지로를 향 하여 걸어 가고 있었다.

『아, 산월이가 아냐?』

김석호와 살림을 하는 평양 기생 최산월(崔山月)이가 양단 치마를 잘잘 끌 면서 걸어 오고 있었다.

『아, ── .』

모르는 척하고 연숙을 피해 가려던 산월이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 서며 무색한 얼굴을 지었다.

『못 본 척할 게 뭐야?』

『아니야요, 형님, 정말 모르고 지나 가댔어요.』

곰살곰살하게 생긴 동군 얼굴이었다. 나이는 연숙이 보다 한두 살 아래, 평양 시절부터 연숙에게 마음 고생을 시켜 오던 산월이었다. 지금 신당동에 서 김석호와 살고 있다.

『요즘 「신여인」사에 나가신대지요?』

『남편을 떼웠으니, 일을 해야 밥술이나 얻어 먹을 거 아냐?』

『아이, 형님두 참…….』

산월이는 매양 시선을 발 뿌리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이는 뭐가 아이야? 산월이는 팔자가 좋아서 놀고 먹지만 나는 일을 해 야 먹어.』

『자꾸만 그러시면 저는 슬퍼요.』

산월이는 고개를 아주 숙이고 말았다.

『슬플 게 뭐야? 산월이는 승리잔데…….』

『저 점심 안 잡수셨으면……?』

고개를 들며 산월이는 어쩔 줄을 모른다.

『산월이한테 점심을 얻어 먹게까지는 아직 안 됐어.

『아니야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점심 전이면 이리 들어 와!』

그것이 바로 그릴 문 앞이었다. 연숙은 산월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 갔 다.

런치를 청하고 나서

『얼굴이 왜 까칠했어?』

『……………….』

산월이는 또 고개를 숙으렸다. 유리 들창으로 한길이 내다보이는 자리였 다.

『무슨 맘 고생이 있어서 그래?』

『아니야요.』

『아니긴…… 그만한 것쯤 내가 모를 줄 알구? 밤에 잘 들어 와 자?』

산월이는 조용히 웃었다.

『왜 웃기는……?』

『아현동 댁에 늘 가시지요?』

『뭐?……』

연숙의 물음이 다소 기세를 띠고 튀어 나왔기 때문에 산월이는 또 말문이 막혀 버렸다.

『……………….』

『나한테 댕기는 줄로 알고 있었어?』

『예, 밤샘을 하고 들어 오는 날이면 으례히 아현동에서 묵고 온다구…

….』

『맹꽁이 같은 것!』

식사가 왔다.

『먹어.』

『예.』

연숙은 도마도 슾을 뜨며

『그래서 얼굴이 까칠 했었군.』

『……………….』

『그래서 나를 무척 미워했었군』

『아니야요. 당연하시지 뭐.』

『당연하다고……? 당연할가?……』

『큰 댁에 들리는데 그럼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래서 말두 못 하고 꽁꽁 앓고만 있었군. 맹추 같은 것! 남 한창 딴 장 을 보고 있는 줄은 모르구…….』

『그래요?』

『놀라긴 또 갑자기…….』

『누구야요?』

『잘못 하다간 일한 무역을 들어 먹을 위인이야.』

『알으켜 주세요.』

『어떻걸테요?』

『가만 안 둘테요.』

『아니, 내가 산월이를 가만 두었는데 산월이는 가만 못 두겠다는 거야?』

『……………….』

산월이는 대답을 잃고 질투의 불길만 눈초리에 세웠다.

『나는 꼭 아현동엘 가는 줄만 알았어요.』

『그래서 비교적 마음이 편했었군.』

두 여인은 거기서 말을 끊고 묵묵히 식사만 취하다가

『종로 삼가에 「샹하이·양재점」이라는 데가 있어. 그 집 마담의 이름이 박인숙, 마담·샹하이 라고 불리우는 여자야. 상해서 굴러 먹던 건데 녹녹 지 않아.』

『몇 살이나 됐어요?』

『역시 나이가 먼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로군. 사십이 지긋한 여잔데 사 나이 여나믄 쯤은 한입에 삼킬만한 위인이야. 그러니까 산월이 같은 건 애 숭이 취급을 할 거야.』

『아니야요. 나 형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 모양이지만…….』

『자신 있어?』

『문제 없어요.』

『상당하구먼. 바로 그 수완으로 김석호를 내게서 뺏어 갔나?』

『아이, 형님두! 형님은 애당초부터 그이에게 정이 없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산월이의 덕을 입은 셈이로군.』

『형님두, 자꾸만 그러지 마시라우요.』

『그래 산월이는 그럼 그이에게 정을 붙였나?』

『미운 정 고운 정이 없지두 않아요.』

『돈 때문만이 아니었군.』

『기생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이에게도 좋 은 점은 있지 않아요?』

『허어, 자기 남편의 좋은 점을 산월이에게서 설명을 받는 셈이로군.』

그러는데 후딱 들창 밖을 내다보던 산월이가

『아, 형님, 저 여자야요?』

하고 호닥닥 외쳤다.

바라다 보니, 명동 입구에서 나온듯 싶은 김석호와 마담·샹하이가 전찻 길을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누구가 안 그렇대?』

『년놈들을…….』

연숙의 앞에서는 도시 기를 못 펴던 산월의 눈초리가 금방 경련을 일으키 면서 세모꼴이 되었다.

『저 먼저 가겠어요.』

산월이가 홀랑 자리를 일어 섰다.

『어떻걸테야?』

『따라 가 보겠어요.』

『따라 가 보면 뭘 해?』

『현장을 붙들어 놔야지요.』

『어마나?…… 그런 용기 있어?』

『나는 형님처럼 점잖지 못하니까 괜찮아요.』

『힘으로 해서는 산월이가 얻어 맞을 걸.』

『악으로 하면 돼요.』

『산월이는 용감해.』

『형님만 응원해 주시면 마음은 든든해요.』

『응원하지. 어디 한번 따라 가 봐요.』

두 여인은 그릴을 나서면서

『형님, 후에 보고를 하러가도 괜찮을가요?』

『네버·마인, 네버·마인!』

『뭐라구요?』

『괜찮다는 말이야.』

『아, 년놈들이 자동차를 타네요.』

『같이 택시를 타고 따라 감 되잖아?…… 스톺!』

연숙은 손수 지나가는 택시를 붙들어 주었다. 산월이는 차에 오르며

『형님, 오늘은 정말 고마워요.』

『언제는 고맙지 않았나?』

『형님은 마음이 너그러워서 정말 좋아요.』

『요것이! 알랑방귀는 그만 뀌고 빨랑빨랑 따라나 가요!』

『여보, 운전수 양반, 저 앞에 가는 파란 차를 따라 가 줘요!』

『네네.』

차는 이윽고 휙 연숙의 옆을 떠나 갔다.

『재미있어!』

연숙은 밝은 심정으로 을지로를 향하여 걸어 갔다. 마담·샹하이에게서 느 낀 약간의 압박감과 다소의 질투감이 청명한 대기(大氣) 속으로 휙 흩어져 버리는 것 같은 상쾌한 심신이었다.

그러나 산월이 때문에 일단 중단되었던 고영훈의 생각이 다시금 연숙의 마 음 속에 도사려 앉기 시작했다.

『하여튼 사로 가 보자.』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 연숙은 이층 「신여인」사로 올라 갔다.

사원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심부름을 하는 소년이 혼자서 갓 나온 十二[십이]월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고선생 안 나오셨지?』

연숙은 텅 비인 고영훈의 자리에 걸터앉으면서 물었다.

『네, 오늘은 아무도 안 나왔읍니다.』

소년은 다시 잡지 책을 뒤졌고 연숙은 턱을 고이고 들창 밖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고영훈을 불러 내고 싶은 다급한 심정이 차차 연숙의 가슴 속 에 다시금 소생해 왔다.

『너 심부름 좀 갔다 와.』

『네.』

소년은 일어 서면서 기운찬 대답을 했다.

『내 편지를 써 줄께. 너 고선생 댁 알지?』

『네, 압니다.』

『잠간 기다려.』

연숙은 영훈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원고지에다 간단한 글월을 적었다.

『편집상 긴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간만 출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적어서 봉투에 넣었다.

『자전거 있지?』

『네.』

『빨리 다녀 와야만 한다.』

『네.』

소년은 부리나케 방을 나갔다.

소년이 나가자 ( )텅 비인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하며 콧 노래를 흥겨 이 부르기 시작했다.

『연숙의 꿈이 이루어 졌지!』

콧 노래를 멈추고는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영훈씨는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한은주는 말하자면 일종의 대용품이었지 뭐야?』

그리고는 유쾌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커다란 웃음 소리를

『하하하핫…… 하하하핫…….』

하고 터뜨리는 것이었다.

『영훈씨는 역시 순진한 데가 남아 있어. 나에 대한 꿈이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니까!』

지나간 밤의 정열을 저( )질해 보며 연숙은 결혼 생활의 선각자로서의 판 단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한은주에게는 다소간 『 미안하지만 하는 수 있나? 결국 한은주에게는 그만 한 흥미와 매력이 없었던 탓이지.』

여왕과 같은 화려한 긍지가 연숙에게 왔다. 십년 전, 자기 자신의 의욕으 로써 멀리해 버렸던 한 사나이를 십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다시금 자기의 감정 속에 완전히 넣어 버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연숙은 무 슨 외국 영화에나 나오는 것 같은 호화롭고도 위대한 주인공의 가치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해 봄으로써 지대한 행복감에 도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니, 백연숙이가 결혼 생활 중, 고영훈을 쭉 생각해 온 것만은 사실이었 다. 그것도 그럴 법한 것이 영훈이가 싫어서 김석호에게 시집을 갔던 연숙 은 분명히 아니었기에 고영훈에게 대한 그러한 로맨틱한 꿈을 안은채 불만 투성인 현실의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이 소설의 주인공으로서의 존재 가치로 보아서 연숙의 생리에는 가장 어울리는 삶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꿈이 실제에 있어서 실현되리라고는 좀체로 생각 하지 못했던 연숙이었다. 다못 연숙의 생리로서는 무엇이든지 하나 아름다 운 꿈을 안고야만 살았다. 꿈이 없이는 하루도 살아 나갈 수 없는 인간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인지도 모른다.

삼팔선을 넘을 적만 해도 고영훈에 대한 꿈이 없었던들 그 가혹한 사지판 에서 그처럼 여유를 가진 심정으로서는 도저히 못 넘었을 것이었다.

『어쨌든 고영훈을 한번 찾아 보자!』

찾아 본 결과가 어떠했던지 간에 찾아 보는 행동 그 자체가 삶의 가치를 연숙에게는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애 한둘 쯤은 충분히 낳아 놓고 있을 줄로만 알았었고, 비록 그렇다고 해도 연숙은 별반 슬퍼하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영훈이가 아직도 미혼이었다. 그것은 오직 하늘이 혜택일 뿐, 자기 의 노력은 물론 아니었다. 거지처럼 초라한 감정이 연숙은 정말로 될 수 있 었다. 김석호와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는 것은 결국에 있어서 한낱 구실이 었고 요는 자기의 그러한 아름다운 꿈이 실현될 수 있는 문제냐 하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본 것 뿐인 것이다.

그것이 다소 힘은 들었지만 결국에 있어서 성공을 본 셈이 마침내 된 오늘 이었다.

심부름을 갔던 소년이 돌아 왔다.

『외출하고 안 계세요.』

『외출?……』

연숙은 고개를 기우렸다.

幻影[환영]의 交替[교체]

[편집]

그 보다 조금 전, 영훈은 정처 없이 서울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낡아 빠진 바아바리∙코오 트를 걸치고 흩으러진 머리를 쓸어 올릴 생각도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광화문 거리를 종로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어제 밤 백연숙과 약속을 한 열두시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집을 나선 영훈이었으나 걷는 동 안에 영훈의 마음은 자꾸만 침울해 지기 시작하였다. 고뿌 술을 무턱대고 퍼 먹던 어제 밤 의 기억이 옛날처럼 영훈에게는 아득했다.

『절망!』

단지 그 한가지 관념만이 영훈의 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절망인지, 그 이유조차 똑똑히 영훈은 알지 못했다. 다못 막연하게나마 예기하고 있던 인생의 비극을 급 기야 질머지고 말았다는 의식만이 뚜렷했다. 비극을 예측하면서도 그 비극은 손수 제거하지 못하는 인간의 취약성을 새삼스럽게 영훈은 되씹고 있었다.

영훈은 그저 울고만 싶었다.

『나에게는 이미 아무런 긍지도 있을 수 없다!』

백연숙을 소유했다는 데서 영훈은 하등의 긍지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은주을 생각할 자격조차 없다는 데서 영훈은 완전히 한 사람의 약혼자로서의 긍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허무하다!』

남성의 정열이 지닌 허무감과 영훈은 지금 딱 마주서 있는 것이다. 그처럼도 허무할 줄은 정녕 몰랐었다. 적어도 十[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두고 그려 오던 아름다운 꿈이건만 그것이 이처럼도 순식간에 깨어질 줄은 몰랐었다.

『환영이 지나치게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연숙은 영훈의 눈동자에서 불타는 정열을 보았다고 했다. 사실이기도 또한 했다. 그렇건만 그것은 결국에 있어서 영훈 자신이 동경하고 갈망했던 높은 경지의 애정은 되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정열이란 이처럼도 가지각색의 변모를 일으켜도 무방한 것일가? 자기 를 못살게 굴던 백연숙의 눈물이 갑자기 거리의 매춘부의 그것처럼 값싸게 여겨 지기 시작 했다.

『아아, 은주!』

종로 네거리에서 영훈은 은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후딱 걸음을 멈추었다.

한은주의 그 꼬장꼬장한 모습이 갑자기 고귀해 졌다. 한가을 푸른 하늘처럼 영롱한 한은주 였다.

『어떻거나?……』

응당 명동 쪽으로 향해야 할 발길이 좀처럼 띠어지지가 않았다.

열두 시 십분 전 ── 다방에서는 연숙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영훈은 불현듯 고개를 돌려 맞은 편 종각을 바라다 보았다. 그 종각 앞에서의 연숙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어린애처럼 사로잡혔던 十[십]년 전의 환영이 새삼스럽게도 저주스러웠다.

『연숙에 대한 자기의 정열이 이처럼도 알맹이가 없는 공허한 것일 줄을 알았던들……』

뉘우침이 뭉클뭉클 솟구어 올라 왔다.

그것은 오로지 정열의 환영일 뿐, 연숙의 삼십대에는 애욕의 신비 같은 것은 추호도 없다.

신비로움을 상실한 애욕 행동에 이미 영원성은 있을 수 없다. 애정의 신비성이 영훈에게는 갑자기 주옥처럼 고귀해 졌다 신비성을 . 상실하지 않는 데서만 인간의 애정은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애정의 성스러움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훈의 발길은 저도 모른 사이에 종각 쪽으로 건너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허탈된 사람 모양 종로 삼가 샹하이ㆍ양재점이 있는 곳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어 가고 있었다.

걸어 가면서 영훈은 마음 속으로 자꾸만 울고 있었다. 은주를 영원히 잃어 버렸다는 생각 이 그제서야 결정적으로 영훈에게 왔다. 구리처럼 누그러질 줄을 모르고 대 처럼 꺾어질 줄 만 아는 은주의 모난 성품이 갑자기 영훈의 눈 앞에 확대되어 왔다.

『아앙 ──』

하고 정오의 싸이렌이 났다.

그러나 영훈은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연숙 대신에 어둠컴컴한 재단실 안에 모난 표정으 로 오두머니 앉아서 자기의 비극을 흰 쵸오크로 선(線)과 각(角)을 그려 가면서 냉정하게 재 단 하고 있을 은주를 생각하였다.

이윽고 삼가까지 영훈은 걸어 갔다. 전차 길 건너 편으로 샹하이ㆍ양재점을 바라보면서도 영훈의 발길은 좀처럼 전차 길을 건느지 못하고 망설거리고 있었다. 은주를 생각할 자격조 차 없는 몸인데 은주를 찾아 들어 가기는 더욱 무섭다. 그래서 행여나 은주의 모습이 불쑥 점포 밖으로 나타나지나 않을가고, 그런 종류의 야릇한 기대를 가지고 영훈은 오랫 동안 한 길 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은주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일요일이 되어서 그런지, 드나드 는 손님도 별반 없다. 언제까지나 영훈은 초라한 감정의 소유자가 되어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무슨 으리으리한 궁전(宮殿)이나 바라보는 것처럼 우두머니 서 있었다.

『한은주!』

약혼자의 이름이 이 순간처럼 아름답고 신성하고 고귀하게 느껴진 적은 없다.

은주의 그 뾰적한 성품이 얼마나 오들오들 떨면서 자기의 불행한 감정을 처리해 나갈가를 생각하니 영훈은 정말 하늘이 무서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 지음 은주는 양재점 안에서 박인해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마담은 외출하고 없고 여자 점원 하나가 멍하니 점방에 앉아 있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은주의 표정이 다소 굳어져 있었다.

『은주씨지? 저 박인햅니다.』

『아, 박선생……』

『그 동안 별고 없으셨읍니까?』

『녜, 그저……』

『실은 오늘 아침에 일요일인 줄은 깜짝 잊어 먹고 「신여인」사로 고영훈씨를 찾아 갔더 랬읍니다.』

『어마나?』

은주의 표정이 갑자기 복잡성을 띠워왔다.

『그랬더니 사에는 심부름하는 소년이 혼자 나와 있을 뿐, 고씨는 만나 보지 못하고 돌아 왔지요.』

『선생님!』

은주의 감정이 다소 다급해 졌다.

『네?』

『제발……제발 그대로 내버려 두어 주세요. 박선생의 그 너그러운 호의는 제가……잘알아 모시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은주씨를 아끼는 제 정의감으로서는 『 이대로 방관할 수가 도저히 없읍니다.』

『아, 선생님은……선생님은 너무도 착하셔요!』

자기에게 대한 박인해의 감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은주는 그만 눈시울이 핑 뜨 거워 졌다. 좀처럼 자기 감정을 눈물로 표시하지 않는 은주에게 있어서 그것은 정말 처음으 로 맛보는 다사로운 눈물이었다.

『내일 다시 한번 찾아 가 보겠읍니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하고……』

『아, 잠간만……』

끊으려는 상대편 전화를 돌연 막으며

『지금 선생님 어디 계시죠? 댁에……?』

『네. 병원에 있읍니다.』

『전화로는 이야기가 길어서 잠간만 만나 주시면 좋겠어요. 혹시 틈이 계신지……?』

『틈은 얼마든지 낼 수 있읍니다』

『그럼 근방 다방으로라도 잠간 나와 주시면 제가 그리로 가겠어요.』

『그럼 마침 잘 되었읍니다. 점심도 같이 할겸 제가 화신 앞으로 나가서 기다리겠읍니 다.』

『네, 좀 그렇게 해 주세요. 곧 저도 그리로 가겠어요.』

『잘 알았읍니다.』

전화를 끊고 은주는 부리나케 코오트를 떨쳐 입었다.

박인해라는 사나이 ── 그야말로 요즈음 세상에서는 좀처럼 볼수 없는 기적적인 인간이었 다.

저번 날 밤, 원남동 로오타리에서 헤어질 때, 고영훈을 찾겠다는 말을 박인해에게서 듣기 는 했지만 그것이 자기를 낚을려는 한낱 수단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내심 다소의 경계심을 품어온 은주였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

꿈결처럼 코오트를 떨쳐 입은 은주는 잠간 다녀오겠다는 말을 동료에서 남겨 놓고 점포를 나섰다.

종로 쪽으로 걸어 가면서 은주는 박인해가 지닌 하나의 폭 넓은 건실한 인간성과 딱 마주 서 있었다.

은주의 모습이 점포를 나서는 순간, 영훈은 저도 모르게 그만 후닥닥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 섰다.

『아, 은주다!』

무슨 강렬한 인력에나 끌리듯이 전차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훈은 은주와 폭 넓은 평행 선을 그리면서 허둥지둥 역시 종로를 향하여 걸어 가고 있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발랄한 은주의 모습이었다. 갓 잡아 낸 생선처럼 은주의 걸음걸이에 탄 력성이 풍만하다.

『어디를 저처럼 황급히 가는 것일가?……』

그 발랄한 탄력성을 무슨 보물처럼 아끼고 선망하면서 영훈은 꿈 속 길을 걷는 것처럼 따 라 가고 있었다.

『은주!』

하고, 목구멍까지 튀어 나오는 외침을 가까스로 영훈은 억제하고 있었다. 불러도 돌아 설 것 같지가 않았고 돌아 서서도 자기를 반겨 맞아 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고영훈은 이미 한 은주에 대하여 완전한 한 사람의 죄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영훈의 호흡이 차차 가빠졌다 입 김이 . 차차 뜨거워 졌다. 한길 건너로 한눈을 팔며 걷던 영훈은 어떤 사십 남짓한 아낙네의 발등을 밟고 당황이 머리를 숙였다.

『젊은 양반이 소경도 아닌데……눈 좀 똑똑히 뜨고 다녀 봐요!』

영훈의 얼굴과 흙 묻은 발등을 번갈아 보면서 아낙네는 호통을 했다.

『네네, 미안합니다. 그만 한눈을 팔다가……』

영훈은 수차 머리를 숙이면서 손수건을 꺼내 부인의 발등에 묻은 흙을 닦아 주려고 허리를 굽혔다.

『닦기만 하면 될 줄 알아? 발등이 부셔질 지경인데……』

부인은 그러면서 홱 돌아 서 갔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쇼.』

부인의 뒤로 한 걸음 따라 가다가 다시금 은주를 생각하고 후딱 돌아 섰다. 은주의 옅은 녹색 코오트가 저만치서 감실감실 걸어 가고 있었다.

영훈은 허겁지겁 걸음을 재촉했다. 절반은 달리듯이 하여 종로 네거리가지 다달을 때, 은 주는 화신 정문 앞에서 회색 스푸링ㆍ코오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신사와 인사를 바꾸고 있 었다.

화신 앞이나 횡단도로에 사람은 범람하고 있었다.

『아, 저건 박인해!……』

둔중하게 흐르는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은 곧 택시 한 대를 잡아 타고 을지로 쪽으로 삥 돌 아서 사라져 갔다.

종각 앞으로 몇 걸음 달음질로 따라 가다가 영훈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아, 은주!』

영훈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은주는 박인해에게로 결국 가 버리고 말았다!』

박인해와의 동반을 목격한 것은 이미 두번째의 일이었다.

십년 동안에 걸쳤던 낡은 환영은 점점 사라지고 새로운 환영이 강렬하게 싹트기 시작하였 다. 이러한 환영의 신진대사(新陳代謝) 속에서 인간의 정신 생활은 영위되고 있는지도 몰랐 다.

새로운 幻影[환영]

[편집]

흡사 닭 쫓던 강아지 모양이었다. 은주와 박인해가 사라진 쪽으로 영훈은 털썩털썩 걸어 갔다. 옛 날 백연숙을 놓쳐 버렸을 때와 꼭 같은 허무감 속 에서 영훈의 서글프고도 괴로운 영혼의 방랑은 다시금 시작되었다.

오후 태양이 눈부시게 거리에 범람하고 있었다. 거리도 가로수도 사람도 자동차도 모두가 다 그 눈 부신 가을 햇빛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으나 영훈 의 시각에는 은주의 환영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들어 오지 않았다.

낡은 환영과 새로운 환영이 영훈의 머리 속에서 그 위치를 바꾸어버린 것 이다. 연숙에의 환영이 살아 있을 무렵에는 은주에의 환영이 색채를 띠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주에의 환영이 발랄하게 살아 온 현재에 있 어서 연숙에의 환영은 차차 퇴색하여 갔다.

이것은 실로 영훈 자신은 예기치도 못했던 정신 생활의 변모를 의미하고 있었다.

『나라는 인간이 불량한 탓일가?……』

영훈은 그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연숙에의 환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켜 불량 하다고 말한 다면 그것은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고영훈의 성실성을 가지고 이러한 환영의 고체가 야기 되었다는 것을 영훈 자신 슬퍼할 도리 밖에 없 었다.

연숙과의 관계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른 이상 십년 동안에 걸친 환영을 그대 로 고히고히 기르므로써 은주에 대한 새로운 환영의 싹을 문질러 버리는 것 이 도의적이고 또한 사건을 처리하는데 순서적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은중 에 대한 환영은 자츰 더 강렬해져 가는 것이었다.

광교 다릿 목에 있는 판자집으로 들어 가서 영훈은 꼬치 안주와 함께 벌컥 벌컥 대포 술을 연거퍼 들이켰다. 몸의 심지가 빠져 나가 자즈러들 것만 같 던 기력이 차차 밑힘을 얻으면서 기분이 조금 너그러워 졌다.

박인해와 달려 간 은주의 모습이 아까처럼 신경을 갈구라지게 긁어 쥐지는 차츰 않아 왔다.

그러한 갈구라진 신경을 은주도 가졌을 것이라고, 자기 몸을 한번 뒤채어 봄으로서 지나간 날의 은주의 불행했을 감정을 저울질하여 보는 마음의 여 유가 점점 생겨 왔다.

『술이란 이래서 좋다.』

술 기운을 빌어 은주에의 환영을 영훈은 한사코 축소시키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었다.

『인숙을 열심히 생각하자!』

은주를 재빨리 잊어 버릴 수 있는 길만이 자기의 이 불행한 감정을 구하는 유일한 방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훈의 의욕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은주가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줄은 정말 몰랐다.』

판자집을 나서서 을지로 쪽으로 휘청휘청 걸어 가면서 영훈은 중얼거려 보 았다.

『그처럼 재빨리 몸을 뒤챌 수 있는 한은주야 말로 가장 현대적인 여성의 한 타잎일는지 모른다.』

자기가 연숙에의 환영을 안고 있던 것처럼 은주도 박인해의 환영을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가 ?……둘이가 다 딴 환영을 지닌채 이루워 졌던 결합 같 이만 생각키웠다.

그러나 다음순간, 그것은 자기의 한낱 망상일 것이라고, 영훈에 대한 은주 의 애정에 허위가 섞여 있었던 것 같지는 또한 않았기에 은주는 다만 자기 의 불행한 감정을 한시바삐 처리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은주를 대할 면목은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인제 새삼스럽게도 은 주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숙이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댔자 모난 은주의 성격으 로서 용서할 감정도 나지 않을뿐더러 그것은 또한 영훈 자신의 욕망의 제시 로서 상대편의 관용을 빌려는 뻔뻔스런 행동일 수 밖에 없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자기의 과오를 절실히 느끼고 깨끗한 유리 그릇에서 이미 엎지러진 물일진 대 그 물이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 가건 뒷간으로 흘러 들어 가건 흘러가는 대로 흘러 갈 수 밖에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백연숙과의 금후의 관계가 아무리 불행한 결과를 맺을지언정……』

자기의 행동으로서 취해진 결과일진대 그 곳에 안주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결국은 연숙의 환영을 십년 동안 안고 살아 온 것처럼 한은주의 환영을 일생 동안 안고 살아 나갈 수 밖에 나에게는 없다.』

백연숙의 과오를 영훈은 결국에 있어서 용서할 것처럼 되어 있지만 영훈 자신의 과오를 은주에게 용서받을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남을 관용하 는 수는 가끔 있어도 남에게 관용을 받을 생각은 도시 못하는 영훈이었다.

고영훈의 삶의 방도가 그만큼 옹졸하다면 옹졸했지만 자기 손으로 이루워 진 비극은 자기 자신이 감수할 줄 밖에 영훈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아, 한은주는 정말로 가버린 것일가?』

은주가 자꾸만 그리워 졌다. 애정의 주류(主流)가 단 하루 동안에 이처럼 급변할 줄은 꿈에도 영훈은 몰랐다.

을지로 네거리까지 영훈은 왔다.

『어디로 갈가?……』

영훈은 걸음을 멈추고 어지러운 네길어름에서 두리번거렸다.

『갈 데가 없다. 한 곳도 없다.』

영훈의 마음은 완전히 주인을 잃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영훈의 마음 속에 는 연숙과 은주의 두 여성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여성이 하루 사이에 한꺼번에 홀랑 날아 가 버리고만 것이다.

연숙은 인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연숙을 만난다는 것은 엎지러진 물이 마치 시궁창으로 흘러 들어 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꾸만 주기 때문 이다.

어지러운 십자로 한 모통이에 멍하니 서서 갈 바를 모르고 두리번거리는데

『고선생님!』

맞은 편 「신여신」사 이층에서 소리가 났다. 머리를 후딱 들었더니 들창 밖으로 깍아중이 머리를 내밀고 사동이 열심히 손을 내졌고 있었다.

『어이.』

영훈도 손을 들어 보였다.

『사장이 부르셔요! 빨리 올라 오세요!』

그러는데 사동의 등 뒤로 백연숙의 얼굴이 나타났다. 말은 없이 연숙은 사 동의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연숙의 그 은근한 인사가 영훈의 허둥거리던 마음 한 구석을 조금씩 조금씩 차지하기 시작했다.

네거리를 건너 영훈은 다소 취기있는 걸음으로 층층대를 올라 가면서 후딱 연숙의 육체를 생각하였다. 십년 동안에 걸친 아름다웠던 환영은 이미 완전 히 사멸(死滅)해 버리고 있었다.

환영 보다도 먼저 육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라고, 영훈은 마지 막 계단에 올라 서면서 격렬히 돌이돌이를 했다.

문을 열고 편집실로 들어 섰을 때는 이미 연숙의 자태는 보이지 않았다.

『아까 사장님의 심부름으로 고선생님 댁에 갔었더랬어요.』

들어 서기가 바쁘게 소년은 보고를 해 왔다.

『그래?』

『바쁜 일이 계시다고 사장님이……어서 들어가 보셔요.』

영훈은 다소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 갔다.

커다란 사무탁자 앞에 앉아 있던 연숙이가 조용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아까보다도 좀더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영훈은 얼굴이 확근 달아 왔다. 그러나 고개를 든 연숙의 얼굴은 태연하였 다.

『편히 쉬시는데 모시러 보내서 죄송합니다.』

익살맞은 동글동글한 목소리를 연숙은 냈다. 표정하나 까딱 없다.

닳아 올라 오는 얼굴을 가까스로 지탕하며 영훈은 천천히 연숙의 앞으로 걸어 갔다. 걸어 가는 영훈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왜 다방에는 나오시지 않았어요?』

까딱 없던 표정을 그제서야 풀면서 연숙은 반만큼 웃었다.

『………………』

대답은 없이 영훈은 연숙의 꽃피는 얼굴을 정면으로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잊었어요?』

『아니오.』

영훈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럼……?』

『………………』

『그럼 왜 안 나오셨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제 물음은 왜 안 나오셨냐는 말이예요.』

『공연히 나오기가 싫었습니다.』

솔직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순간, 연숙의 반만큼 웃고 있던 표정이 후딱 굳어지며, 그리고 가만히 얼 마 동안 석고상처럼 서 있다가

『알아 들을 것 같애요.』

했다.

『무슨 뜻인가요?』

『서로가 너무 솔직한 말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설명은 그만 두겠 어요.』

무슨 뜻인지, 영훈도 알아 들을 것 같아서 잠자코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 다.

『나도 한 꼬치……』

연숙은 손을 뻗쳐 영훈의 담배 갑에서 캬멜을 한 꼬치 빼 물며 영훈의 코 앞으로 바싹 닥아 섰다.

라이타를 켜 대려는 영훈의 손을 막고 영훈이가 문 담배 불에 자기 것을 갖다 대며

『빨아요, 힘껏!』

연숙도 담배를 빨아 불을 옮기며 영훈의 두 눈동자를 말끄럼이 쏘아 보고 있었다.

『빨리 붙여요.』

담배를 문 연숙의 빨간 입술이 너무도 눈 앞에 가깝다. 아름답던 환영은 이미 없고 연숙의 입술에 먼저 관능이 왔다. 건들여도 아끼지 않을 입술이 기에 일부러 그런 포오즈를 취하는지도 몰랐다.

『왜 자꾸만 투정이야?』

담배를 빼 들기가 바쁘게 빨간 입술에서 영훈의 얼굴을 향하여 홱 연기를 뿜어 왔다.

『담배는 또 언제부터 피웠소?』

『지금 이순간부터……』

『왜?……』

『지나치게 솔직한 표정에는 연기라도 뿜어 줘야 개원해서……』

『………………』

영훈은 또 대답을 잃었다.

『말을 안 해도 다 알아』

『뭘 알아요?』

『환영이 깨진 게지.』

『………………』

『십년 간의 아름답던 환영이 하루 밤 사이에 조각 조각이야?』

『………………』

자기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연숙이가 차츰차츰 무서워 졌다.

『그렇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응?……』

영훈은 몰랐다.

『놀랄 것이 뭐가 있어요? 피장파장인 걸!』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얼어 붙기 시작하였다.

『그럼 연숙은 역시 장난으로……?』

『천만의 말씀이예요.』

『그럼……?』

『장난은 분명 아니지만……결과에 있어서 환영이 깨어진 것만은 나 역시 사실이야. 영훈씨의 환영이 아름답던 것처럼 내 환영도 아름다웠어요. 그래 서 그 사지판인 삼팔선을 넘어 온 연숙이었으니까요.』

『잘 됐소!』

영훈은 퉁명스런 대답을 뱉았다.

『잘 된 것도 없고 안 된 것도 없지요. 사람이란 누구든지 다 자기의 아름 다운 환영을 실현 시켜 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 뿐이니까요. 노력의 결과가 어떠 하리라는 것은 해 봐야만 아는 일이구요.』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요부다!』

『노오!』

연숙은 격렬하게 부정을 하며

『나는 다만 나의 아름다운 이상을 실현시켜 봤을 따름이예요. 내 행동에 단 한가지도 거짓은 없었으니까요 . 장난이라든가 누구를 일부러 유혹한 다 든가, 그런 허위의 감정은 추호도 없었어요. 모두가 다 다급하리만큼 진실 한 감정 문제였으니까요.』

『옛날의 백연숙이와 똑 같다.』

영훈은 그 어떤 의분을 느끼면서 배앝듯이 말했다.

『인간의 성격이라든가 취미라든가 좀처럼 변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이 순간에 와서야 확실히 깨달은 것 같아요.』

『당신은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아냐요. 비극의 제조가(製造家)일는지 몰라요.』

『불행한 성격이다.』

『그렇지만 별반 불행을 느끼지도 않는 성격이기도 한가 봐요.』

『연숙씨!』

영훈은 그 때, 다소 엄숙한 어조로 존칭을 써서 불렀다.

『네?』

연숙은 담배를 재떨이에 문질러 버리면서 미소 띤 얼굴을 가만히 돌렸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연숙씨의 명확한 마음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어서 대 단히 감사 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좀더 마음 고생을 했을는지도 모 르니까요.』

『과히 뇌심하지 마세요. 영훈씨에게 대해서 취해진 내 행동이 어디까지나 순수했다는 건만 알아 주면 정말 나는 행복해요.』

『연숙씨의 또 하나의 색다른 행복을 빌며 연숙씨 옆에서 나는 영원히 떠 나겠읍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지 않아요? 왜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한다는 말이예 요? 예기했던 환영이 다소는 깨졌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영훈씨의 존재 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예요.』

『……?』

영훈은 다시 한번 놀람을 금지 못했다.

『너무 심각히 놀랄 필요는 없어요. 영훈씨 역시 한은주만 없다면 나에 대 한 환영이 다소 깨어졌다고 하더라도 백연숙의 존재를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못할만한 가치는 있으리라고 믿으니까 하는 말이예요.』

백연숙이라는 한 여성이 이처럼 자기 자신에 철저하고 또한 상대방의 심정 을 이렇게도 이해하여 줄 수 있는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영훈은 오늘에 와서 야 분명히 깨달은 것 같았다. 십년전의 백연숙의 어림보다 십년이라는 세월 의 애정의 경험을 쌓은 오늘의 연숙의 성장이 인간적인 깊이를 가지고 영훈 의 관념적인 상식을 문지러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영훈의 연륜(年輪)에서 오는 어림과 남녀 관계에 대한 무경험은 백연숙의 경지를 이해는 하여도 도저히 몸소 보조를 맞추어 나갈만한 확고 한 인생관의 형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훈씨가 내 옆에서 떠나야만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요. 그렇지만 구태여 그래야만 되겠다면 그것 역시 하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지금 영훈씨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영훈씨가 제 입술에 다소간의 유혹을 받을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것을 영훈씨에게서 요망한다는 말이예요. 담배를 버려요.』

백연숙에 대한 세로운 환영 하나를 그 순간, 영훈은 불현듯 발견하였다.

그냥 물고 있는 담배를 손을 뻗쳐 연숙은 빼앗아 가지고 휙 재떨이에 던졌 다.

『나는 이 순간, 영훈씨의 포옹을 원하고 있어요.』

영훈은 한 걸음 닥아서며 아무런 저항 없이 연숙의 상반신을 품 안에 넣었 다.

『힘껏!』

『………………』

『입술!』

『………………』

둘이는 그러한 자세를 오랫 동안 유지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늦 가을이자 초겨울의 다사로운 햇볕이 유리 창으로 쪼여 드는 오후 ── 그 햇볕이 이 덧두겨진 두개의 옆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포옹은 끝났 다.

하루 밤 사이에 갑자기 여위어 버린 환영을 품고 둘이의 포옹은 생리의 톱 리바퀴인 양 타성적으로 돌고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애정이 아니다!』

포옹의 자세에서 풀려져 나오며 영훈은 부르짖듯이 중얼거렸다.

『그러한 느낌은 연숙씨도 마찬가지 일거요.』

연숙은 그러나 영훈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웃고만 있었다.

『그래 영훈씨는 지금 화풀이를 하는 것이지만……그렇건만 나는 웃고 있 지요.』

『당신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마음 속에 깃들어 있었지만……나에게는 그것 이 없었소.』

미안하다고 『 생각해요. 그러한 영훈씨를 내가 유혹해서……』

『유혹에 걸렸다고 생각하기에는 당신에 대한 나의 환영이 너무 컸었지요.

그러니까 누구가 누구에 대해서 미안하다든가 안 하다든가는 따질 필요가 없지요.』

『좋은 말씀이예요. 영훈씨의 그 관대한 마음씨를 나는 감사히 생각하겠어 요.』

『자기의 정열을 자유 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연숙씨를 나는 다만 부러워 할 뿐이요.』

『그렇소. 나는 확실히 연숙씨의 인생 보다 어리지요.』

『영훈씨!』

연숙은 다소 힘을 주어 영훈을 불렀다. 영훈은 시선을 들어 연숙을 쏘아 보았다.

『아깝지만……아직 아까운 존재이기는 하지만 나 인제부터 영훈씨를 놓아 드릴테예요.』

『뭐라고? 나를 놓아 준다고요?』

영훈의 눈섭이 두어번 파동을 쳤다.

『그래요. 영훈씨를 묶어 놓았던 제 정열의 끄나풀을 풀어 드리겠어요. 그 러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다면 은주씨를 귀여워해 주세요.』

『에고이스트!』

외침과 함께 영훈의 손길이 연숙의 뺨을 내갈겼다.

『이마? ──』

인숙은 얻어 맞은 뺨을 부비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처음부터 나의 감정을 농락하기 위해서 당신은……』

영훈의 침울했던 감정이 차차 불붙기 시작하였다.

『천만에요! 그런 것이 아니라니까 ──』

연숙은 볼을 부비며 태연하였다.

『변명은 그만 둬요.』

『변명할 필요는 조금도 느끼지 않아요. 영훈씨를 농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달 뿐이요. 그것은 마치 영훈씨가 나를 농락할 생각이 조금도 없이 종 각 앞까지 와서 나를 만나 준 것과 꼭 같다고 생각하지요. 내가 좀더 적극 적이었고 영훈씨가 다소 소극적이었던 것뿐 ── 그것 밖에 아무 것도 없어 요.』

영훈은 대꾸를 하지 못했다.

나는 옛 날부터도 솔직한 『 사람이었어요. 김석호와 결혼을 할 때도 나는 영훈씨를 조금도 속인 적은 없었어요. 비극의 주인공이 항상 돼 있어야만 삶의 보람같은 것은 느꼈으니까요. 자기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데 서 나는 오히려 행복 같은 것을 느꼈으니까요. 자기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의 불행은 시작돼요.』

백연숙의 사고 방법이 결코 정상적이 아니었던 것만은 옛 날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처럼 자기 자신에 철저한 인간인 줄은 또한 몰랐다.

『영훈씨를 만나서 내가 제일로 행복했던 순간은 맨 처음 날 밤, 서대문 네거리 중국 요리집에서였지요. 끝끝내 포옹을 거절한 당신에게 거지처럼 초라한 감정을 가지고 그것을 애소하던 그 순간이었지요.』

『당신은 꿈을 먹고 사는 여자다!』

영훈은 배앝듯이 말했다.

『그래요. 나는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일는지 몰라요.』

『굉장한 여성이다!』

『비참한 여성이지요.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행복도 즐거움도 가질 수 없는 여성 나는 또다시 현실의 비참과 암담 속에서 꿈을 찾아 헤매이게 될 거예 요.』

『당신에게 또 새로운 꿈을 제공하는 그 사나이야 말로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다.』

영훈은 진심으로 연숙을 비웃었다.

『새로운 사나이?……』

연숙의 표정이 일순간 홱 파동을 일으켰으나 곧 태연한 안색으로 연숙은 돌아가 버렸다.

『영훈씨는 인생이 너무 어려요. 좀 더 깊이가 있을 줄로 믿었었는데 ……』

『무슨 뜻이오?』

영훈은 정말로 백연숙이라는 하나의 인간성을 이해 할 도리가 없었다.

『나 이상 더 내 마음의 풍경을 영훈씨에게 설명해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다만 한가지 똑똑히 말해 둘 것은 내게 대한 영훈씨의 꿈이 깨진 것처럼 영 훈씨에 대한 나의 꿈도 마찬가지로 깨졌달 뿐이에요.』

실은 그러나 백연숙의 이 말은 아까부터 거짓말이었다. 아까부터 연숙은 영훈에게 대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씨부리고 있는 것이다. 영훈에 대한 연숙의 꿈은 조금도 깨진 것이 아니었다. 아름답던 환영이 현실적으로 더 굳어졌으면 굳어졌지, 희박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자기에 대한 고 영훈의 꿈이 깨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연숙의 입술은 거짓 말을 씨부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고영훈에게 대한 한낱 대항 의식에서 출발한 거짓 말 은 결코 아니었다 . 깊이나 넓이를 지닌 애정의 거짓말이었다.

연숙은 고영훈을 자기 품으로부터 영원히 놓아 줄 것을 결심하였던 것이 다.

『인제 꿈이 깨졌으니까 갈대로 가라는 말이지요?』

영훈은 의분심과 비웃음이 한데 얼버무려 버린 것 같은 한 마디를 배앝았 다.

『결국은 그런 말이지만……좀더 듣기 좋게 말한다면 갈대로 가라는 것이 아니고 갈 대로 가도 무방하다는 말이겠지요. 갈 데가 있는 당신이니까 말 이에요. 갈 데가 있는 당신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환영이 좀더 빨리 깨졌을 는지도 모르니까요.』

『비꼬아서 하는 말이로구려?』

『흥, 싱거운 소리! 비꼬아 볼 생각은 애당초부터 없었다니까요. 아들 딸 두엇은 있을 줄로 믿고 찾아 왔던 연숙이었으니까요.』

『하루 사이에 정이 뚝 떨어졌다는 말이오?』

『누구가 할 소리? ──』

그러다가 연숙은 이내 그것을 인정하는 어투로

『말하자면 결국 그런 걸 께야.』

옛날 십년 전에는,

『당신을 그냥 사랑하면서 가오.』

하고, 무대에 선 배우들처럼 자기의 마음 속을 털어 놓고 사라졌던 연숙이 었다.

그러나 오늘의 백연숙이에게는 십년이라는 인생의 성장이 있었다. 뿐만 아 니라, 옛날과는 달라서 자기에 대한 영훈의 정열이 식어져 가고 있는 것이 다. 한은주라는 한 여성에 대한 다소간의 자비심도 있었지만 좀더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영훈을 은주에게 돌려 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왕 돌려 보 낼진대 영훈으로 하여금 마음 가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연숙은 거짓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 했으면 잘 알았소.』

영훈은 무뚝뚝한 어조로 투정을 했다.

『투정은 또 왜?……감정이 가뜬하게 되어서 도리어 기쁠텐데……』

『서로가 다 잘 됐소. 당신은 당신대로 또 새로운 사나이에게서 새로운 꿈 을 꾸도록 하시오.』

『또 새로운 사나이야?』

연숙의 표정이 또 한번 파동쳤다.

『꿈을 먹고 사는 동물이 새로운 꿈을 꿀려면 그럴 수 밖에 도리가 없겠지 요.』

『내가 언제 사나이를 자꾸만 바꿔서?……』

『김석호는 사나이가 아니오?』

『당신에게 꿈을 남기고 갔었지, 내가 언제 김석호에게 꿈을 안고 갔었 어?』

『그런 논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오?』

『당신에게는 없어도 내게는 있었죠.』

『그래서 당신이 다시 꾼 새로운 꿈은?……』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을 것에요.』

말로는 새로운 꿈 새로운 꿈 하지만 영훈에 대한 연숙의 꿈은 예나 지금이 나 언제나 새로웠다. 단지 그 꿈의 주체(主體)를 소유하지 않고 있었을 뿐 이었다. 소유하지 않고 있는데 꿈은 영원히 새로워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 다.

현재의 상태로 계산해 보면 영훈을 계속적으로 소유할 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일것 같았다. 그러나 연숙은 그것을 하기를 단념하였다. 영훈의 환영이 여위어 가는 탓도 있었지만 그것 보다도 연숙은 자기다운 불행 속의 행복을 찾고 싶었다.

『미스터·영훈!』

연숙은 천천히 의자에서 도로 몸을 일으키며 영훈의 앞으로 걸어 가며

『한가지 물어 보고 싶은 말이 있는데……』

『………………』

영훈은 무뚝뚝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영훈씨는 한은주의 옆으로 가는 것이 결국 좋을 것 같아요.』

『………………』

『그렇지 않어?』

영훈의 손 하나를 잡아 쥐었다.

『하라는 대로 하지요.』

영훈은 여전히 애교 없는 대답을 했다.

『하지 말래도 하고 싶지?』

연숙은 가만히 영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인제 연숙씨에게는 『 그리 달갑지 않은 인간이 됐으니 갈 수 밖에……』

『거짓 말! 하고 싶어서 죽을 지경일 걸! 그 얼굴……』

조그만 주먹으로 영훈의 배를 한번 톡 찌르고 나서

『최후로 한 마디만 대답해 줘요.』

『대답을 하지요.』

『분명히 대답해야만 돼.』

『분명히 하지요.』

『영훈씨에게 대한 내 꿈이 깨진 것 말이야.』

『………………』

『그걸 영훈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잘 됐다고 생각하지?』

『………………』

『왜 대답을 하겠다더니 안 해?』

『………………』

『미안해 할 것 하나두 없어. 결국 잘 됐지? 귀찮지 않아서……』

『지나치게 솔직한 말은 묻지도 말고 대답도 안 하기로 해요.』

『흠, 남의 말투만 흉내내는 걸! 그렇지만 알았어.』

쓸쓸한 표정이 홱하고 얼굴을 덮어오다가 다시금 환하니 꽂피어

『기뻐! 내 참다운 행복은 이 순간부터 다시 시작되는 거야. 새로운 꿈, 새로운 환영이 시작되었으니까 말이야.』

이 쓸쓸하고 서글픈 감정 속에서 연숙은 다시금 비극의 주인공다운 비애의 감미로움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 감미로움을 가리켜 백연숙은 행 복이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내 꿈이 다시 새로워지는 셈이야.』

『무슨 말인데……』

『내게 대한 영훈씨의 꿈은 점차로 소멸(消滅)해 가고 있지만……영훈씨에 대한 나의 꿈은 이번에 세번째 새로워 져요. 김석호와 결혼할 무렵에서 당 신에게 남겨두고 온 꿈……삼팔선을 넘어 올 무렵에서 당신을 만나 보겠다 는 꿈……』

『………………』

『그리고 이번에 다시 당신을 은주에게 돌려 보낸면서 꾸는 꿈……아마도 이 꿈이 마지막 꿈으로 변할는지도 몰라.』

그러면서 연숙은 가만히 눈을 감고 영훈의 품속에 머리를 기댔다.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다음 순간, 나는 늘 서글픈 행복을 느끼지.

세속적으로 말하면 당신을 다시금 찾아 올 연숙이가 못 되지만……그렇지만 말이야 나는 어느 누구가 . 뭐랬든 세속에서 살고 있지는 않아. 나는 나대로 살아 왔어. 인제부터는 또 그렇게 살아갈테야.』

연숙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지만 영훈의 가슴팍이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그 눈물을 영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연숙은 얼른 영훈의 넥타이로 눈물 을 찍어 냈다.

『당신은 불행한 성격의 소유자다.』

영훈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의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냐. 이럴 때 나는 도리어 행복한 걸 뭐. 은주씨, 힘껏 사랑해 줘요!』

영훈은 두 손으로 연숙의 어깨를 떠밀어 일으켜 가지고 연숙의 손 하나를 잡아 쥐며

『악수!』

『영영? ──』

『내일 다시 나와서 정식으로 사표를 내겠소. 김사장께도 인사를 하고 ……』

『안돼. 사표는 내가 낼테야. 영훈씨는 여기 있어야 할 사람이야.』

『그럼 내일 다시 ──』

영훈은 총총히 사장실을 나섰다.

영훈의 자태가 문 밖으로 사라지자 연숙은 팔걸이 의자에 털석 주저앉으며 사무탁자에 탁 엎드려졌다.

失戀[실연]의 幸福[행복]

[편집]

그 지음 점심 식사를 마친 은주와 박인해는 명동 어떤 다방 한 구석에 마 주 앉아 있었다.

다방 안이 다소 소란하여 뜸뜸히 흘러 나오는 박인해의 말 소리가 잘 들리 지 않을 적이 많았다. 더구나 재즈 풍의 경음악이 두 사람의 대화를 자꾸만 중단시켰다.

저번에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박인해의 진심이라면 사 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도 하나를 은주는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은주씨는 내 말을 수상하게 여길는지 모르겠읍니다만 나는 본래 말을 꾸 며서 할 줄을 잘 모르는 인간입니다. 은주씨가 내 말을 추호라도 의심한다 면 그건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그리고 그것은 또한 내게 있어서는 가장 슬픈 일이지요.』

박인해는 마치 시골 농사군의 이야기처럼 윤택이 없고 재치도 없는 말을 천천히 피력하였다.

아냐요 박선생의 말씀을 『 . 의심한다는 것이 아니구요. 저처럼 종로 한 복 판에서 벌어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얼른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는 솔직한 감상일 뿐이에요. 박선생이 저와 결혼하고 싶어 하시는 심정은 잘 알아 모 시고 있어요. 그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지요.』

은주는 잠간 말을 멈추고 박인해의 표정을 가만히 살피었다. 그러나 박인 해의 표정에는 별반 이렇다 할 아무런 감정의 빛도 떠돌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제 욕심을 차리는데 박선생은 그렇지가 않아요. 저 를 위해서 영훈씨를 만나러 가셨던 박선생의 성의가 꼭 무슨 이야기 책에 나오는 신화만 같아요. 그럴 수가 있을가요.』

그 말에 물끄럼이 은주를 바라보고 앉았다가 박인해는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아니, 현재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요. 절대로 그 것은 신화가 아니랍니다.』

다 식어 빠진 홍차를 밑바닥까지 꿀꺽 내고 나서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을 제 것으로 만들지 않아도 무방하지요. 하기야 될 수만 있다면 제 사람을 만들고 싶지만요. 그렇지만 제 사람이 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행복을 나는 가질 수가 잇을 것 같습니 다. 이 한 마디는 절대로 가면의 말도 위선의 말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박인해의 그 둔중한 표정 속에 그 순간, 한 줄기 영롱한 광망(光芒)같은 것이 풋득 떠 올랐다.

『그럴가요?……』

은주의 꼬장꼬장한 성미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렇구 말구요 은주씨가 누구와 결혼을 하든 그건 문제가 아니지요. 다 만 은주씨가 행복하다면 저도 또한 행복할 수 있다는 것 뿐입니다.』

은주는 박인해의 심정에 자꾸만 동정이 갔다. 그 서글픔을 제 힘으로 구해 줄 길만 있다면 구해 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길이 좀처럼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박인해와 그 간호원의 관계도 관계려니와 고영훈을 끝끝내 잊지 못할 것 같은 은주 자신의 감정이 쉽사리 처리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서글픔을 하나의 행복감에까지 끌어 올리는 길만이 참다운 애정의 자 태가 아닐가요? 제게는 그것이 가능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한 박인해의 마음 속을 생각하면 은주는 점점 더 서글퍼만 지는 것이 다.

고영훈에 대한 자기의 감정만 곧 처리된다면 그러한 박인해를 위하여 은주 자신도 그 어떤 확고한 태도를 취할 수가 있을 것도 같았다.

여자란 결국에 있어서 남자의 성실성만이 오직 하나인 행복의 원천(源泉) 일는지 모른다고, 은주는 새삼스럽게 거기 대한 진리 같은 것을 박인해에게 서 발견한 것 같았다. 이 때까지는 별반 애정 같은 것을 느끼지 못했던 박 인해에게서 체념의 행복으로써 일생을 서글프게 살겠다는 굳세인 신념을 보 고 은주는 가벼운 전률과 함께 애정의 실마리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을 불현 듯 깨달았다.

『그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시는 박선생의 호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 맙게 생각해요.』

은주는 그 말을 진심으로 입에 담을 수가 있게끔 되어 가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는 다만 은주씨를 사랑하고 있으면 행복하답니다. 구태여 은주씨의 호의가 없더라도……』

꼬리에서 박인해의 말은 점점 떨려 가고 있었다.

은주는 후딱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박선생에 대한 제 감정을 솔직하게 말씀 드리겠어요. 그러는 편이 서로 가 다 좋을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듣지 않아도 무방하지요.』

은주의 말을 듣는 것을 무서워 하는 것 같은 박인해의 태도였다.

『그래도 들어 두시는 편이 좋으실 거에요. 영훈씨에 대한 제 감정이 아직 도 깨끗이 처리가 되지 못하고 있지요. 제 자존심이 그이를 용서하지 못하 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

『그이에 대한 제 감정이 처리만 된다면……』

『알겠읍니다. 그러나 억지로 처리할 필요는 조금도 없지요. 나는 지금 그 런 것을 은주씨에서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까요. 그 간호원에 대한 내 감정은 벌써부터 깨끗이 처리가 되어 있 지만……나는 용기가 없읍니다.』

『잘 알겠어요.』

은주는 긴 한숨을 지었다.

『은주씨!』

『네?』

거기서 박인해는 얼마 동안 묵묵히 은주의 다소 예각적(銳角的)인 모습을 빤히 바라 보고 있다가

『은주씨의 자존심이 어쨌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지요.』

『무슨 말씀인데요?』

애정 앞에 자존심은 『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존심을 끝끝내 세울 수 있는 애정이란 참다운 애정의 자태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잠자코 제 말을 들어 주시오.』

『………………』

『은주씨가 아무리 자존심을 세워 보아도 그이에 대한 은주씨의 애정은 아 직 처리가 되지 못하고 있읍니다. 아니, 끝끝내 처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믿지요.』

『그럴가요?』

은주는 반신반의로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읍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은주씨의 자존심은 차차 머리를 숙여 가고 그이에 대한 애정만이 또렷하게 남게 되실 겁니다.』

『모를 말씀이에요. 자기를 그처럼 모욕한 사람을 어떻게 그냥 사모할 수 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있읍니다!』

확고한 대답을 박인해는 했다.

『아무리 은주씨가 노력을 해 봐도 그이에 향하는 은주씨의 애정은 좀처럼 처리할 도리가 없을 거에요. 모욕을 당 했다는 생각은 차츰 희박해 지고 남 는 것은 안타까운 그리움 뿐이지요.』

그 순간, 뭉클하고 무엇인가 하나 은주의 가슴 속에 왔다.

『은주씨가 저와의 혼담을 차 버리고 그이에게로 갔었읍니다. 나는 그 때,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모욕감을 느꼈지요. 그렇지만 나는 지금 그때의 그 모욕감 같은 것은 추호도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

은주는 후딱 외면을 했다. 들창 밖 명동 거리에 사람은 흐르고 있었다.

『은주씨도……』

한참만에 박인해는 다시 말을 이어

『자존심이라든가 모욕이라든가……그런 쓸데 없는 뾰적한 생각만 붙들고 있지 마시고 그이를 한번 만나 보시오.』

『그건 못 하겠어요! 죽어도 못 해요!』

토라진 대답을 은주는 했다.

『그러면 어떻거실 생각이시오?』

『그이는 그이대로고 나는 나대로지요.』

『감정의 처리가 되지 않는데도……?』

『처리해 보일테에요.』

『자연적으로 처리가 돼야지, 애정이란 노력으로써 소멸하지는 않지요.』

『그런 어려운 문제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어요. 다시는 그이를 만나지 않 겠어요.』

은주의 입술이 제 풀에 바르르 떨렸다.

하는 수 없이 박인해는 잠자코 있었다.

『나가실가요.』

벗어 놓았던 모자를 박인해는 썼다. 두 사람은 다방을 나와 거리로 나섰 다.

『양재점으로 가시지요?』

『네.』

박인해는 차 한대를 불렀다. 차가 을지로 입구까지 왔을 때, 은주는 핼끔

「신여인」사 사무실을 한번 쳐다보고 나서

『선생님, 병원으로 돌아가셔야죠?』

했다.

『네, 그래야지요.』

『선생님 영화 구경 좋아하세요?』

『네, 가끔 가지요.』

『가요.』

『어디 좋은 영화가 걸렸읍니까?』

『모르겠어요. 아무데나 가요.』

『그렇담 제가 모시고 가지요.』

『병원 괜찮을가요?』

『괜찮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은주씨를 모시고 가는데 병원 쯤이 무슨 ……』

은주는 핼끔 박인해를 돌아다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수도극장으로 갔다. 다행히 일어 서 나가는 부부가 있어 서 중간 쯤인 그 자리를 두 사람은 차지할 수가 있었다.

「신여인」사의 이층을 쳐다보는 순간, 은주는 아까 다방에서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그 무엇이 가슴 속에 뭉클하고 왔었다. 그 안타까운 그리움에 반항이나 하듯이 은주는 종시 박인해와 더불어 영화관을 들어 선 것이었다.

영화는 연애 활극이었다. 중간에서 보아서 전후는 잘 연락이 되지 않지만 은주는 별반 스토리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은주는 무슨 피치 못할 마음 고생이 있을 때는 곧잘 캄캄한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을 갖고 있었고 또한 그 습성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 뿐이었다.

키쓰와 피스톨의 장면이 지나치게 많은 「스릴라」였다. 중간쯤서 본 줄로 알았더니 지나 보니 비교적 처음부터 보고 있는 것을 두 사람은 알았다.

『저처럼 키쓰를 아무런데서나 마구 하면 어떻거나?』

그것이 박인해는 걱정인 모양이었다. 은주는 대답을 안 하고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남녀의 애정에는 신비로운 데가 있어야만 할텐데 저이들처럼 자연 과학 적으로만 행동을 하면 어떻건다는 말이예요?』

의사인 자연 과학자가 지금 자기의 영역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은주는 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훈과의 키쓰 장면을 은주는 다만 회상하고 있는 것이었다. 가슴 아픈 서글픈 회상이었다.

그 회상 속에 자존심은 이미 있을 수가 없었다.

은주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죽어도 만나지 않겠다던 자기의 말이 얼마 나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었던가를 은주는 새삼스럽게 깨닫기 시작하였다.

『정말로 성실한 사람이다!』

동시에 은주는 옆에 앉은 박인해를 생각했다.

『이런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일생을 평온한 행복 속에서 보낼 수가 있을 거야.』

화면의 스토리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은주는 도시 모른다.

그런 것을 골돌히 생각하고 있는데 손길이 왔다. 박인해의 손길이었다. 그 손길이 은주의 왼편 손을 가만히 잡아 봤다.

『용서하시오.』

박인해의 떨리는 목소리가 귓 밑에서 더듬거렸다.

『최후로……한번 잡아보고 싶었읍니다.』

『………………』

은주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눈을 가만히 감았다.

『이 성실한 사나이에게 이것쯤 못하랴!』

그러한 생각이 불현듯 은주는 들었다. 영훈에 대한 감정만 청산된다면 이 선량한 인간에게 무엇이든 못 바치랴! 새로운 애정에의 싹이 은주의 가슴 속에 한층 더 북돋기 시작 하였다.

『지나치게 겸손하세요. 그런 말씀 그만 두어도 좋았었는데……』

은주는 조금도 허위 없는 대답을 분명히 하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샘 솟듯이 박인해에게 솟았다.

현재에 있어서의 제게는 『 이것이 최고의 욕망입니다. 제가 만일 인간이 아니고 신이었던들 이러한 욕망조차 갖지 않았을 것이에요.』

『………………』

『미안합니다.』

이윽고 박인해는 은주의 손을 놓았다.

『감사합니다.』

『도리어 송구해요.』

『저는 지금 최대의 행복을 향유하고 있읍니다. 이 이상의 행복을 제가 바 란다면 신은 반드시 노하실 겁니다.』

『아아, 박선생님!』

은주의 감정은 십자로에 선 어린애처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한 갈팡질팡하는 감동을 지닌채 은주는 박인해와 함께 영화관을 나섰 다.

『저녁 자셔야지.』

『아니오. 저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차를 불렀다.

둘이는 차에 올라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둘이가 다 엄숙한 기분 속에 사 로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은주가 차에서 내릴 무렵,

『오늘 밤 제가 무척 실례했읍니다.』

박인해는 그러면서 모자를 벗어 들고 머리를 숙였다.

『아냐요.』

그럴려다가 은주는 잠자코 있었다.

그 대신 은주는 손을 내밀며

『쥐어 주세요.』

했다.

『아, ──』

박인해는 황송해서 손을 잡았다.

『악수는 인사니까 달리 생각지 마세요.』

『알았읍니다.』

『아까 영화관에서 잡은 손길과는 다른 손길이에요.』

『알았읍니다.』

『인제 그만 ──』

박인해는 은주의 손을 가만히 놓았다.

『안녕히 가세요.』

은주는 말했다.

『안녕히……은주씨, 영원히 행복히……』

『박선생도 영원히 행복히……』

이윽고 은주는 발꿈치를 돌렸고 박인해는 차에 올랐다.

차가 떠날 무렵, 은주는 꼭 한번 뒤를 돌아다 보았다.

박인해는 은주의 모습이 사라질 무렵까지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 다.

아내와 戀愛[연애]를 하자는 사나이

[편집]

이튿 날 아침, 영훈은 일찌감치 출근하여 사무 정리를 하였다. 어떤 후임자 가 오더라도 일목요연하게 사무를 인계할 수 있도록 편집 사무와 영업 장부 를 정리해 놓았다. 자기의 후임자로서는 지금 실직중에 있는 친구인 박태종 (朴泰鐘)을 추천할 생각까지를 영훈은 하고 있었다.

사무를 대강 정리해 놓고 영훈은 방안을 한번 휘 둘러 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동료들이 어제와 다름 없이 열심히 책상에 붙어 있었다. 어딘 가 감개 무량하여 영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연숙이가 출근한 것은 열 시가 넘어서였다. 그럴 상 싶어서 그런지, 하루 밤 사이에 연숙의 얼굴이 갑자기 까칠해진 것 같았다. 잠을 못 잤는지도 모 를 것이라고, 다소 부석부석 부은 눈두덩이 이내 영훈의 시야에 뛰어 들어 왔다.

영훈은 앉은채 고개를 숙여 아침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연숙은 본척 만 척, 사장실로 태연히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감정에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 다.

영훈은 또 얼마 동안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백연숙의 자기 저항 과 한은주의 그것을 동시에 영훈은 생각하는 것이다. 감정에 저항한다는 것 은 결국에 있어서 하나의 불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영훈은 두 여성을 동 시에 불행하게 만들어 놓은 자신의 처신을 뉘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 은 한 사람의 연애인(戀愛人)으로서의 처신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김석호가 왔다. 영훈은 인사를 하며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였 다.

『이 달 편집은 대단히 좋았다고 회사에서도 평판이 좋던데…….』

싱글벙글하면서 김석호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영훈은 다소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시치미를 뗏다.

이윽고 김석호는 사장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갔다.

그 때, 연숙은 콤팩트를 들여다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어제 하루 밤 울어 새운 얼굴을 영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심정에서 화장이 약간 짙어졌 다.

『아침부터 또 어느 서방을 맞을려고 짙은 화장이야?』

쏘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김석호는 연숙의 푸로필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그것이 자기 아내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적에는 별반 신통해 보이지 도 않았지만 이 즈음처럼 손에 잘 가 닿지 않고 보니 연숙의 얼굴이 유달리 새로운 감각을 지니고 김석호의 시야에 뛰쳐 들어 오는 것이었다.

『이상한걸!』

김석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 확실히 이상한 현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꼭 같은 얼굴이건만 아 니, 지금 보다도 옛날에는 한층 더 젊은 얼굴이었는데, 그리고 그 때는 도 리어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던 얼굴이었는데 이 즈음의 연숙의 얼굴에 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정말 이상한 걸!』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뭐 어째요?』

화장을 고치던 손길을 멈춤이 없이 조그만 거울을 들여다 보는채 연숙은 물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미쳤나 봐?』

『응, 당신한테 미쳤나 보오.』

연숙이가 신통치 않아서 외도를 시작했었고 그것들이 또 달갑지 않아서 산 월이를 데려 왔었고 산월이가 또 뜻뜻미지근 해서 마담· 샹하이에게 손을 댔고 그 마담이 또 차차 징그러워 져서 마침내 연숙에게로 돌아 선 김석호 의 애욕의 방향인 것이다.

『처음 보는 여자처럼 매력이 풍부한 걸.』

『흥!』

『어째 그럴가?……모를 일이야. 아마도 조강지처가 돼서 그럴지도 모르 지.』

그러나 기실 김석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손이 쉽사리 가 닿지가 않는 까닭이었다 더구나 . 자기라는 한 사람의 남편의 위치를 무시하고 고영 훈에게 잔뜩 들떠 있는 것 같은 연숙의 애정의 방향이 그로 하여금 일종의 질투를 느끼게 하였고 따라서 연숙에게 대한 관심이 차차 소생해 가고 있었 던 것이다.

『어떤 낭군을 맞으려고 화장이 또 그처럼 긴고?』

콤팩트를 집어 다시 핸드· 빽에 넣고 있는 연숙을 곁 눈으로 힐끔 힐끔 바라보며

『고영훈은 착실한 사람이야. 당신의 유혹에 그리 녹녹히 걸려 들지는 않 을 거야.』

『걱정두 팔자지.』

『바람 난 마누라를 걱정하는 건 남편들의 팔자라니까―.』

『누구가 누구의 마누란데?……』

『이북 가서 호적 등본을 해 와야만 알겠군.』

『유엔군 폭격에 호적 대장이 모두 불탄 줄을 몰라? 도대체 왜 자꾸만 그 러는 거요?』

『내가 뭐랬나?』

『귀찮은 존재라고 일단은 버려 놓고서 왜 또 자꾸만 껍진거리는 거요?』

『글쎄 처음 보는 여성들처럼 매력이 풍부해 졌다니까!』

『맹랑한 사람이예요.』

『글쎄 내가 맹랑한게 아니고 세상의 남편들이 죄 맹랑하다니 밖에……그 건 이를테면 남편들의 애욕 행각(愛慾行脚)에 있어서 맨 마지막 코스를 의 미하고 있는 것이지.』

『참 사내들이란……산월이가 들음 큰일 나겠소.』

『산월이 쯤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이 사내 저 사내로 싸돌아 다니던 말 하자면 일종의 걸레조박지야.』

『흥, 마담· 샹하이는 어떻거구?』

『그까짓 화냥년은 문제도 아니지.』

『입에 발린 말 작작해요. 참 욕심두 이만 저만 해야지만…….』

『그게 사내라니까…….』

『그게 당신이지!』

『인제 마담· 샹하이와는 헤어질 작정이야.』

『왜?』

『산월이가 칼을 들고 덤벼 들어 왔어.』

『언제?……』

『어제…….』

대충 추려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저께 마담과 택시를 타고 청진동 모 여관으로 갔었는데 어디서 어떻게 알고 뒤를 밟았는지, 산월이가 여관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 두 사람의 잠자리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후훗!』

하고 연숙은 웃으며

『그것 볼만 했을 거야.』

했다.

『창피해서 정말……산월이 년을 두들겨 주었지만…….』

『마담은 쓰러 지구?……』

『쓰러가 다 뭐야? 그런 창피를 겪고 보니 참 사람의 마음이란 이상해, 두 년이 다 갑자기 미워진다는 말이야. 인제 그년들의 낯작은 보기두 싫어 졌 어.』

김석호는 그러면서 담배를 한 꼬치 피워 문다.

『그런 꼴을 당하고 나니 당신의 모습만이 눈 앞에 선해서……들국화처럼 가련하고 깨끗하고…….』

『왜 배꽃처럼 청초는 안 해요?』

『비꼬아도 좋아. 그러나 내가 지금 당신에게 연애를 하고 있는 것만은 사 실이야.』

이것은 결코 거짓 말이 아니었다. 연애 감정 같은 것을 이 즈음의 김석호 는 가끔 느끼기 때문이다.

돈을 가지고 외도는 하기 쉬웠으나 그들에게서 진정한 아름다움 같은 것을 느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있는 것은 단지 육체의 변화일 뿐, 돈과 애정을 항상 저울질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는 것은 결국에 있어서 유쾌한 일은 못 되기 때문이다.

『연애……흥, 누굴 어린애로 알고 다루워 보는 거요?』

연숙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다루워 보는 것이 아니고 진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요. 우리는 연애 결 혼이 아니고 중매 결혼이었소.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연애라는 걸 해 본 경 험이 없는 사람이오. 그런 거치장스런 수속이 내게는 도무지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여자를 보면 그저 단시일 내에 소유할 생각 밖에는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손이 잘 미치지 않은 여자는 애당초부터 간단히 단념을 했었으니까 남처럼 꿍꿍 앓으면서 연정을 불살리고 있는 것 같은 정열의 소모는 하지 않았소. 그건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불경제니까 말이오. 그러던 것이 말이 오.』

김석호의 어조가 차츰차츰 엄숙해 갔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김석호에게서 는 별로 보지 못하던 현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당신이 월남해 온 후부터는 어쩐지 손이 미칠 것 같으면서 도 잘 미치지 않는 당신으로 변해 버렸소. 어쨌든 내 아내니까 마음대로 건 드릴 수가 있지 않으냐 하는 생각이 절반, 그러나 내가 당신을 지금까지 냉 대해 왔던 탓으로 마음대로 손이 닿지 않는 데서부터 생기는 초조한 생각이 절반 ── 간단히 단념할 수도 없고 간단히 손이 닿지도 않고……그러한 심 정이 마침내는 나에게 연애 감정 같은 것을 품도록 한 것만 같다는 말이 오.』

김석호로서는 정말로 참다운 고백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자기의 마음 속을 이처럼 솔직히 피력한 것은 처음이다.

연숙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처음 당하는 심정이라는 말이오. 결혼 당시에도 해 보지 못한 연애를 이제부터 한번 해 보자는 거요.』

『흥미 없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연숙이가 간단한 결론을 지어 버렸다.

『큰 일인 걸!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정녕 실연인데……내 온갖 과거를 깨 끗이 청산할테니까 우리 한번 알뜰한 신접 살림을 차려 보아요.』

『내게는 그런 종류의 감정,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자꾸 비싸게만 굴면 내 마음은 더 한층 초조해 지지 않소? 당신 처럼 보배로운 존재를 어째서 지금껏 발견하지 못하고 지났는지 생각하면 정말 모를 일이오.』

『음흉한 소리, 좀 그만 해요. 누굴 소녀로 아세요?』

『소녀가 무슨 흥미가 있을라구? 당신의 나이 또래가 여자로선 한창이라니 까……금을 주고도 못 살 존잰데 내가 어째서 구리(銅[동])로만 알았지, 사 나이의 마음이란 참으로 모를 거야.』

『흥, 인제 그만 했으면 할 소리는 죄 했을테니까 돌아 가요. 나 다소 바 빠요.』

『연애 때문에 바쁠테지만도…….』

『싱거운 소리만…….』

『들어 맞은 소릴테지.』

『빨리 가 봐요. 산월이가 울고 있을테니까 말이야.』

『모를 말이야. 오늘 아침에도 그 년을 두들겨 주고 나왔어.』

『바른 손으로 두들고 주고 왼 손으로 쓸어 줬겠지.』

『정말이라니까…….』

『정말이람 더 나쁘지 뭐야? 언제는 귀엽다고 쓸어 주다가 인제 와서는 냄 새가 난다고 두들겨?』

김석호는 얼른 대꾸가 나오지 않아서 덤덤히 앉아 있는데

『산월이 년도 맹꽁이지. 그런 줄 모르고 입때껏 붙어 살았나?』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영훈이가 들어 왔다.

『실례합니다.』

영훈은 두 사람을 향하여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고군, 이리 와서 한대 피시오.』

김석호는 쏘파에 앉아서 소탁자 저편에 놓인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이離別[이별] 저離別[이별]

[편집]

영훈은 사직원이 들어 있는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가지고 김석호 앞 소 탁자 위에 내놓으며

『다소 돌연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일신상의 형편으로 부득이…….』

『응? ── 』

김석호의 표정이 둔중하게 움직이며

『뭐요?』

하고 봉투를 들었다.

『사직원……?왜요?……』

김석호로서는 실로 청천에 벽력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인제도 말씀 드렸읍니다만……일신상의 형편으로 부득이……사장의 격별 하신 덕택으로 실무상 대과가 없었던 것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모를 일인데……결혼을 하시오?』

『……………….』

영훈은 잠자코 있었다.

『결혼을 한데도 직업을 포기할 필요까지는 없을텐데……사에 대해서 무슨 불평 같은 것이라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건 아니고요. 다만 제 사정이 약간…….』

『알겠소. 그렇지만 서로 오해가 없도록 그 사정이라는 건 말해 주시오.

혹시 보수 같은 것이 적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도리어 과분하다고 생각하고 있 지요.』

하잘 것 없는 사업이기는 『 하지만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루 아침에 이 처럼 불쑥 사직원을 들어 대면 어떻거란 말이오?』

『그 점에 대해서는 충심으로 부끄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제 후임에 관해서는 저 보다도 훨씬 경험이 많고 충실한 사람을 추천하겠읍니다. 박태 종이라고, 혹시 모르실는지 모르겠읍니다만 편집에는 일류급에 속하는 제 친구가 한 사람 있읍니다. 지금 실직중에 있지만 제가 추천을 한다면 쾌히 승락해 줄 것 같습니다.』

김석호는 한참 동안 불쾌한 표정을 하고 묵묵히 앉아 있다가

『잘 알았소. 그렇지만 나는 이미 「신여인」사의 사장이 아니오. 그러니 까 이 사직원은 잘 못 전달된 것 같소. 직접 사장에게 제출하시오.』

사직원을 도로 봉투에 넣은 후에 영훈에게 내주었다.

영훈은 말 없이 봉투를 받았다. 그 때까지 연숙은 신문을 들여다 보고 있 었다. 표정은 태연했으나 호흡이 다소 거치러진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 이었다. 펴 들은 신문지가 연숙의 코앞에서 숨길과 함께 아스파라가스와도 같이 하느적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훈은 연숙의 앞으로 걸어 가서 사무탁자 위에 봉투를 묵묵히 내놓았다.

『사정은 방금 김사장께 말씀 드린 대로입니다.』

그러나 연숙은 까딱도 없는 자세로 그냥 신문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숨길 에 흔들리던 신문지의 동요가 차차 더 폭이 넓어질 따름이었다.

그러한 연숙을 김석호는 쏘파에서 덤덤히 바라보았고 영훈은 부동의 자세 로 묵묵히 내려다 보았다.

그러고 있는데 연숙의 토라진 한 마디가 이윽고 튀어 나왔다.

『사직원은 분명히 접수했어요. 꺼내 보지 않아도 내용에 허위는 없을테니 까 말야요.』

『응?……』

김석호의 양미간이 후딱 어두어 졌다.

『싸움을 했소?』

물었던 담배를 재떨이에 김석호는 문지러 버렸다.

『싸움을 왜……누구가 어린애들인가요?』

『그럼 왜들 그리우?』

『누가 뭐랬어요? 싫다고 나가는 사람을 붙들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두 어디 그럴 수가 있소? 일단은 만류해 보는 것이…….』

『당신이 그처럼 만류해도 제 고집만 부리는 분인데 내가 만류했다고 들을 것 같아요?』

연숙은 거기서 비로소 신문을 옆으로 밀어 놓고 영훈을 쳐다보았다. 묵묵 부답의 태도로 영훈은 그대로 서 있었다.

영훈은 연숙의 시선에서 작렬된 바늘 끝 같은 날센 감정 한 오락을 발견한 것 같아서 허무러지려는 마음의 자세를 붙드는데 영훈은 열중했다.

무엇이 있기는 분명히 있는 것이라고, 김석호는 일종의 구경군의 심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군,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물론 알 수 없지만 한번 더 마음을 돌이켜 볼 수는 없겠소?』

『내버려 둬요.「신여인」사가 쓰러지든 자빠지든 내 알 배 아니라는 사람 인데, 뭐 그러는 거요?』

고영훈을 놓아 줘야겠다는 자기의 결심에 대한 마지막 항거가 이러한 형식 으로써 연숙에게 폭발되고 있는 것이다.

『사장!』

영훈은 김석호를 향하여

『사장의 호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후일 다시 제가 「신여인」

을 위하여 일을 할 기회가 올는지는 몰라도 이번만은 일단 저를 용서해 주 시면 좋겠읍니다.』

『정히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지만……음, 그래 여기를 그만 두고 는 어떻걸 셈이오?』

『당분간 쉬겠읍니다.』

『아무 것도 안 하고……?』

『네.』

『그럼 생활 문제는 어떻거구……?』

『어떻게 될테지요.』

생활 문제가 아니고 생존에 관한 문제라고, 영훈은 심중 그렇게 생각하면 서 대답하였다.

『그럼 그 박태종이라는 사람을 하루 바삐 추천해 주시오.』

『네, 내일이라도 제가 데리고 오겠읍니다.』

『부탁합니다.』

연숙의 옆에서 고영훈을 떼 놓는 것은 사업상으로는 유감스런 일이지만 연 숙의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편으로서는 절호의 챤스이기도 했다.

그 때, 사동이 들어 오며

『고선생, 손님이 오셨읍니다.』

『손님?……』

『이런 분이…….』

영훈은 사동의 손으로부터 명함 한장을 받아 들었다.

「인해병원 원장 박인해」라고 적혀 있었다.

사장실을 나설 때, 영훈은 연숙의 시선을 한번 더 붙잡아 보았다. 연숙의 눈동자에는 이미 작렬된 바늘 끝 같은 감정은 허무러져 있었다. 김석호가 옆에 앉아 있지 않았던들 발판을 잃은 인형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을는지 몰 랐다.

인사는 없으나 얼굴은 아는 박인해였다. 그 박인해가 영훈의 책상 앞에 조 용히 앉아 있었다.

『이 사나이가 나를 왜 찾아 왔을가?……』

명함을 들여다 보는 순간부터 느낀 정말로 예상 불측의 사나이었기 때문이 다.

한은주와 과거에 있어서 혼담이 있던 사나이었으며 최근에는 한은주를 이 리 저리 끌고 다니는 사나이 박인해 ─ 그 박인해가 말하자면 일종의「라이발」(戀敵[연적])의 위치에 있는 자기를 방문했다는 것은 결코 상식적으로 보아서 타당한 일이 아니었다.

『나와 은주의 사이를 알아 보러 온 것이다. 그 결과 여하에 따라서 은주 와 자기와의 혼담을 추진시키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한 영훈은 한 줄기 적개심을 가지고 박인해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 갔다.

『제가 고영훈입니다.』

영훈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더니 박인해는 그보다도 한층 더 정중히 허리 를 구부리며

『박인해라고 부릅니다. 너무 돌연한 방문이 되어서 죄송합니다. 실은 어 제 아침에도 찾아 왔었지만 마침 일요일인 줄을 모르고…….』

『앉으시지요.』

『저 잠간 조용히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혹시 바쁘시지 않으면 어디 근방 다방으로라도…….』

『아, 그렇습니까. 그럼 나가시지요.』

이 박인해라는 사나이와의 이야기에서 은주의 최근의 동향을 엿 볼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영훈은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신여인사」를 나섰다.

다방은 을지로 입구에 있었다. 손님이 부풀어 자리가 없다. 서성대고 있는 데 구석진 자리가 비게 되어 둘이는 그리로 가서 마주 앉았다.

커피가 오기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인품과 마음 속을 저울질하기에 신경을 썼다.

혹시 아실는지 모르지만 『 저 샹하이·양재점의 마담이 바로 제 누님이 올 시다.』

박인해는 그러면서 덤덤히 앉아 있는 영훈을 바라보았다. 우선 자기의 신 분을 밝히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읍니다.』

간단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누님한테서 들으셨는지 또는 은주씨한테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읍니다 만……과거에 있어서 은주씨와 저 사이에 혼삿 말이 났던 적이 있읍니다.』

『그것도 알고 있읍니다. 둘이에게서 다 들었으니까요.』

그러고는 대화가 저절로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는데 커피가 왔다. 말을 잇지 못하고 박인해는 커피 잔만 한참 동안 들여다 보고 있었다. 서글픈 표정이 그의 둔중한 얼굴 뒤에서 숨바꼭질을 하듯이 가끔 가다가 머리를 불쑥불쑥 들었다.

『차 드시지요.』

말은 잇지 못하고 박인해는 차를 권해 왔다. 대화의 중단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영훈은 묵묵히 차를 들면서, 이 사나이가 찾아 온 용건이 무엇인지를 짐작 하였다. 은주와의 결혼을 승인시키려고 온 것임에 틀림 없었다.

『최근 은주씨와 만나신 적이 있읍니까?』

박인해 편에서 먼저 은주의 이야기를 꺼내 왔다.

『만난 적이 없읍니다.』

명확한 대답을 영훈은 했다.

『혹시 실례의 말씀이 된다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든 솔직히 듣겠읍니다.』

거기서 또 다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한은주에게 대한 감정의 중량(重量) 을 서로가 다 똑같이 저울에 다루어 보고 있었기에 발언 보다는 좀더 관찰 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윽고 박인해는 입을 열었다.

『은주씨를 한번 만나 주실 수는 없을가요?』

『………………?』

영훈은 다소 이외의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은주씨의 감정은 지금 대단히 불행해져 있읍니다. 언제까지나 은주씨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다소 잔인한 것 같습니다.』

이 사나이는 대단히 음흉한 인간이라고, 영훈은 직각적으로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나이의 떳떳한 연적(戀敵)으로서 순수한 태도로 대하 려는 영훈의 감정이 홱 돌아 서 버렸다.

『내가 잔인했던 사실은 나 자신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하필 왜 박선 생이 이 문제를 저한테 가지고 오셨는지, 그것이 나에게는 대단히 궁금합니 다.』

『아, 그것은…….』

박인해는 한대 얻어 맞은 것 같은 심정이 갑자기 되어

『그 동안 나는 은주씨와 몇번 만났읍니다. 그래서 은주씨의 심정을 비교 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그처럼 불행해진 은주씨의 감정을 다소라도 무마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고영훈이가 아니고 도리어 박선생이 아닐가?……그렇게 생각합니다.』

『오해 올시다!』

박인해는 침통한 표정이 되어

『그건 정말로 오해지요. 과연 과거에 있어서 저희들 사이에 혼담이 있었 던 것만은 사실이고……또 그것을 계기로 해서 제가 은주씨를 진심으로 사 모하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 드리겠읍니다만……나로서 는 도저히 은주씨를 제 사람으로 만들 자격이 없읍니다.』

『무슨 뜻입니까? 좀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시면 좋겠읍니다.』

『제게는 이미 결홀을 해야만 될 딴 여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

『제가 아무리 은주씨를 사모해 보았댔자 가망이 없는 노릇일 뿐더러……

아니, 은주씨의 애정은 역시 고선생에게 깃들여 있읍니다. 은주씨의 성격이 다소 꼬장꼬장해서 태도로는 고선생을 멀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마음 으로는 고선생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답니 다.』

영훈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 사나이의 음흉은 상당히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상대자의 입장이 입장인 만큼 박인해의 이야기가 잘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영훈은 잠시 얼떨떨 해서 상대편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가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은주와의 츄러불이 생긴 직후, 거리에서 박인해를 만나 가지고 둘이 서 영화관에를 갔었다는 은주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한 후에 은주씨는 역시 선생과 『 나와의 사이에서 두 발을 걸치고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읍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처럼도 신속히 몸을 뒤챌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아, 고선생!』

하고 박인해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그런 이야기를 은주씨가 참말로 했었읍니까?』

『물론 참말이지요.』

『아닙니다. 전연 그런 일은 없읍니다. 은주씨가 감기로 내 병원을 찾아 온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고 또 그 때가 은주씨와 처음으로 다시 만난 때지 요. 아, 그런 말을 은주씨가 했었군요.』

『………………?』

영훈은 또 멍멍해 졌다.

『그 후 명동 골목에서 담장에 이마를 기대고 울고 섰는 은주씨를 발견했 지요.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런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어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타격을 이겨 내지 못해서 그처럼 한길 가에서 울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 없었읍니다. 그 증거로 내가 병원으로 가자고 했을 때, 은주씨 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서 극력 거절을 했었으니까요.』

『그런 일이 있었읍니까?』

뭉클하고 가슴이 치받쳐 왔다. 골목 담장에 얼굴을 기대고 어린애처럼 울 고 섰는 은주의 모습이 어느 외국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마음에 절실히 왔 다. 후딱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영화 구경을 갔던 것은 바로 어제 저녁 한번 뿐이었읍니다. 어제 아침 내가 고선생을 찾았으나 일요일이 되어서 만나 뵙지 못하고 돌아 온 사실을 은주씨에게 전화로 알렸더니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하면서 그런 행동을 다 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나서 극력 나를 만류할 셈으로 종로에서 만났던 것 이예요. 제가 점심 대접을 하고 다방에 잠간 들렸다가 양재점으로 다시 모 셔다 드릴 셈으로 택시를 타고 을지로 네거리까지 왔을 때지요. 은주씨는 그때 후딱「신여인」사 사무실을 쳐다보다가 무슨 충동을 느꼈는지는 모르 지만 돌연 영화 구경을 가자고 했읍니다. 그래서 저는 수도 극장으로 모시 고 갔었지요. 그러니까 맨 처음 만났을 때 영화 구경을 갔었다고 한 것은 절연 허위의 말이랍니다.』

『잘 알아 들었읍니다.』

영훈은 어쩐지 몸이 오주주 떨리는 것 같아서 몸부림을 한번 쳤다.

『제가 은주씨를 사모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주씨는 말하 기를 고선생에 대한 자기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 이상 제 마음을 받아 들 일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라고, 명확한 대답을 했지요. 아니, 표현이 그릇 되어서 오해하실는지 모르겠기에 거듭 말씀 드립니다만 나는 입때까지 내 마음을 받아 들여 달라고 은주씨에게 애원한 적은 한번도 없지요. 나는 도 저히 은주씨를 행동으로써 사랑할 자격이 없는 몸이니까요.』

『박형, 감사합니다!』

영훈은 불쑥 손을 내밀어 박인해의 손길을 굳세게 잡아 쥐었다.

『나는 박형의 말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도 박형과 같은 성실 한 친구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 다.』

영훈의 숨결이 차차 거세어 졌다.

『과분한 말씀, 듣고 있기에 낯이 간지럽습니다.』

박인해도 손길에 힘을 주어 영훈의 손을 감아 흔들며

『처음 보는 저를 믿어 주시는 그 너그러운 마음씨로 오랫 동안 사귀어 온 은주씨를 믿어 주시요. 사랑하는 약혼자에게 배반을 당한 한 사람의 젊은 여성으로서 그만한 몸 가짐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동 안에 있어서의 은주씨는 몸과 마음이 다 함께 결백했읍니다. 단 하나의 문 제로서 자기의 자존심을 어떻게 처리하고 무마하느냐?……하는 그 일념 뿐 이 은주씨에게는 도사리고 있었으니까요.』

『박형, 황송하도록 고맙습니다!』

영훈은 박인해의 손길을 탁 놓고 탁자 위에 엎들어 졌다.

『고형, 은주씨의 불행한 감정을 구해 주시오. 그것은 오직 고형만이 할 수 있는 자비심이니까요.』

그 때, 영훈은 천천히 얼굴을 들며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도저히 은주씨의 불행한 감정을 구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침통한 표정이 영훈의 얼굴을 온통 덮어 버렸다.

『어째 그럴가요? 은주씨는 고형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답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더욱 더 나는 은주씨를 사랑하고 있답니다.』

『무슨 말이지, 나로서는 좀처럼 알아 들을 수가 없군요.』

정말로 박인해로서는 논리의 자막대기가 부족했다.

『박형!』

영훈은 서글픈 목소리와 표정으로 박인해를 불렀다.

『………………?』

『한은주의 불행한 감정은 어디서부터 생겼는지, 박형은 아시겠지만…

….』

『그거야 물론 고형의 행동이 불미로웠다는 데서부터…….』

『그렇습니다. 제 행동은 확실히 불미로웠읍니다. 잔인하도록……그리고 그것은 은주씨의 불행한 감정의 근본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행 한 감정과 좀더 절실한 유기적 관계 맺고 있는 것은 제 불미로운 행동에서 부터 결과된 은주씨의 자존심의 상처이지요. 제가 은주씨를 만나서 아무리 참회를 해 보아도 은주씨의 자존심의 상처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읍니다.

은주씨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자존심의 상처는 그 만큼 더 클테니까요.』

『음 ──.』

설명을 듣고야 박인해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사랑하던 사이었다면 그만큼 자존심의 상처도 작았을 것이고, 또한 은주씨의 불행한 감정을 구할 길이 좀더 손쉬 울는지 모르지요.』

『이야기가 자꾸만 까다로워 지는군요. 어쨌든 덮어 놓고 은주씨를 만납시 다.』

박인해는 다소 안타까워 졌다.

『덮어 놓고 만나기는 쉽지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는게 아니오?』

『박형!』

『어서 계속하시오.』

『나는 이미 한은주를 만나 볼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한은주의 심신이 결백하면 결백할수록 나는 이미 한은주를 넘겨다 볼 아 무런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었읍니다.』

그 한마디를 남겨 놓고 영훈은 자리를 일어섰다. 밖으로 나오니 오늘따라 태양이 그지없이 눈부시다.

『고형, 잠간만…….』

등뒤에서 박인해의 목소리가 초조하게 따라 왔다.

白蓮淑(백연숙)의 가는 길 영훈이가 사라져버린 사장실에서 김석호와 백연숙은 덤덤히 앉아 있었다.

『암만 해두 사랑 싸움을 했나 보군.』

김석호는 담배 한 꼬치를 다시 피워 물며 제 딴에는 의미 심상하다는 어조 로 불쑥 그런 말을 하였다.

연숙은 그러나 잠자코 앉아서 들창 너머로 늦 가을의 푸른 하늘을 말끄럼 이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은 암만 해두 사업가로서는 『 적당하지 않어. 가정이나 지키고 애들이 나 기르고……그러는 게 제일 안성 맞춤이야.』

『맞았어요!』

말똥말똥 창 밖을 바라보고 앉았던 연숙이가 경쾌한 대답을 했다.

김석호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그러니까 부인께서도 인제 꿈은 그만 꾸시고 가정으로 들어 가서 애나 나요.』

『애!』

그것은 김석호에 향한 대화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혼자서 씨부려 보는 독백으로서 튀어 나온 한 마디였다.

그렇다. 자기에게는 애를 낳을 가능성이 확실히 있는 것이다. 김석호가 원 하는 김석호의 애가 아니고 새로운 환경을 남겨 놓고 간 고영훈의 애를 낳 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연숙은 불현듯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심신이 다 함께 땅 속으로 잦아 들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한 줄기 가느다란 희망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실로 예측도 하지 않았던 돌연한 한 줄기 희망이었다.

『자아, 나가서 점심이나 해요.』

김석호는 주섬주섬 소파에서 일어 섰다.

『잠간…….』

연숙은 김석호를 바라보며

『여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업가로선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응?……』

그러다가 김석호는 알았다는 듯이

『암, 그렇구 말구. 여자는 어쨌든 가정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니까 글쎄.』

김석호에게도 마침내 한 줄기 희망이 확실히 생겨지는 것 같았다. 손이 잘 가 닿지 않던 연숙이가 마침내 자기 품으로 돌아 오려는 것이다. 그래서 김 석호는 히쭉하고 웃으며

『어디 나가서 점심이나 해요. 오랫만에 당신과 한번 마주 앉아서 단란한 식사를 합시다.』

『나 점심 먹고 싶지 않아요.』

『응?……』

『나도 오늘 사직원을 내야겠어요.』

『아, 좋아! 사업은 역시 내가 맡아서 해야겠소. 여자는 역시 가정이 낙원 이라니까 ──.』

『구두로 취직을 했었으니까 구두로 사직원을 내는 거예요. 얼마 동안 신 세 많이 졌읍니다.』

연숙은 일어 서면서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니……?』

김석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어리벙벙해 졌다.

연숙은 책상 설합에서 자자부런한 물건을 대강 추려 가지고 새파란 보재기 에 쌌다. 핸드·빽과 함께 그것을 들고 연숙은 홀가분히 사장실을 나섰다.

『아, 여보!』

당황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 왔다. 그러나 연숙은 돌아다도 보지 않고 편즙실을 거쳐 복도로 빠져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야?』

사장실 한 가운데 김석호는 얼빠진 사람 모양 우두머니 서 있었다.

영훈과 연숙이가 일시에 사를 그만 둔다는 사실이 조리있게 머리에 들어 오지가 않았다.

『빌어 먹을…….』

김석호는 물었던 담배를 휙 방바닥에 내던졌다. 따라 가서 김석호는 구두 로 담배 불을 문질러 버리며

『될대로들 돼 봐라!』

마담·샹하이의 모습이 눈시울 속에 떠올랐다. 연숙을 끝끝내 놓쳐 버렸으 니 마담·샹하이라도 그냥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김석호는 언제나 자기 옆에 두세 명의 여자를 붙여 놔 두어야만 마음이 가 뜬한 사나이다. 그래야만 사업에 흥이 났다. 김석호의 주머니에서 돈은 떨 어질 때가 있어도 김석호의 옆에서 여자가 떨어질 때는 없었다.

『여자가 붙어야만 돈도 붙는 것이다.』

김석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김석호에게 있어서 그 어떤 하나의 미신 같은 선입관이었다. 돈이 붙어야만 여자가 붙는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의 자존심 같은 것이 허용하지 않았다.

『오늘 밤에는 채옥이 년을 한번 건드려 볼가?……』

채옥(彩玉)이란 어제 밤 술 좌석에서 처음으로 본 접대부였다. 한 두번쯤 건드려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아서 준비 공작은 이미 어제 저녁에 해 놓은 김 석호였다.

연숙이나 『 채옥이나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지 뭐야?』

연숙을 놓쳐 버린 울화가 그런데로 불이 붙었다.

그러다가도 채 단념을 못하고

『어디 연숙이 너 두고 보아라. 오늘부터는 단돈 십환을 안 내놀테다!』

애정 문제의 처리를 결국은 돈으로 해 볼 수 밖에 도리가 없는 김석호였던 것이다.

사를 나선 연숙은 번화한 명동 거리를 등지고 시청 앞으로 되는대로 걸어 가고 있었다.

『갈 데가 없다!』

정말로 백연숙은 인제 갈 곳이 없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번화한 거리 풍경도 싫었고 화려한 눈 요기도 인제는 싫다. 어서 어서 집으로 돌아 가서 어두컴컴한 방안에 이불을 쓰고 누을 생각 밖에는 통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택시를 잡아 탈 생각도 또한 없었다. 시청을 지나 태평통을 광화문 쪽으로 풀끼 없이 걸으면서 연숙은 눈시울 속이 점점 뜨거워 오는 것을 느꼈다. 눈 꼬리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이 마침내 ( ) 이루워 왔다. 볼 을 적시는 대로 연숙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마침내 비극의 주인공이 또 다시 되었다!』

그리고 그 비극 속에서 연숙은 한줄기 행복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비 극의 주인공인 동시 그 비극의 관객이 되어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연숙 은 또한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막(終幕)은 이미 연숙 자신이 예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피· 앤드」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연숙이가 아니었기에 철 모르고 덤비던 소녀들 처럼 극심한 타격은 받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감미로운 서글 픔 속에서 꿈을 즐기는 자기의 영혼이 좀더 윤택있게 살질 것만 같았다.

『그랬으면 됐지, 뭐야?』

영혼과의 트러불에 있어서 자기가 이득을 보았으면 보았지 손실을 본 것은 아니라고, 연숙은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되풀이하여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정처 없이 옮겨지는 발길이 조악돌 하나를 무심중 찼다.

뽀르릉 날아간 조악돌이 가로수 밑에서 울깃불깃한 점책을 펴 놓고 앉은 영감님의 담뱃대를 톡 쳤다.

영감님의 주름진 얼굴이 번쩍 들리자 연숙은 웃었다.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난 또 애들의 장난이라구…….』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려다 말고

『팔자 소관이나 한번 보시고 가시우.』

했다.

연숙은 지나 가려다 걸음을 멈추며

『꼭 맞쳐요?』

『맞치구 말굽쇼. 앉으시우.』

은근한 권유가 마음에도 들었지만 그 순간, 연숙은 후딱 생각키우는 의욕 이 한 줄기 있어 영감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어렸을 무렵, 어머니를 따라 점바치를 찾아 다니던 생각이 불쑥 났다. 그 러나 연숙 자신이 이런 노릇을 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다.

『어떻검 돼요?』

연숙은 미소를 지으며 영감님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영감님이 묻는 대로 연숙은 생년 월일을 댔다. 흰 종이 쪼각 한장 을 들고 그 위에다 영감님은 붓으로 한문자를 너저분히 써 놓더니 꿍꿍 앓 는 어조로

『음, 음 ──.』

하고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뭘 꿍꿍 앓으세요?』

『가만 계시오, 음 ──.』

한시(漢詩) 비슷한 걸 써 놓았으나 원체 흘려 쓴 초서가 되어서 연숙으로 서는 알아 볼 수도 없었고 알아 볼 흥미조차 없었다.

『그래요?』

연숙은 그냥 웃고만 있었다.

『초년에는 남 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영감님은 그러면서 울깃불깃한 물감 그림책을 펄떡펄떡 뒤지더니

『이걸 보면 초년 신세는 늘어진 셈인데…….』

영감님이 가리키는 그림을 연숙은 들여다 보았다.

고루 대하(高樓大廈) 청기와집에 노적 나까리와 장독이 주루루 놓여 있었 고 마누라가 어린아이 하나를 붙안고 대청 마루에 앉아 있었다.

『팔자가 늘어지도록 먹을 것은 많은데, 이 그림에는 바깥 양반이 보이지 를 않소.』

『왜 그럴가요?』

연숙은 또 물었다.

『바깥 양반이 타향으로 떠돌아 다니지 않았으면 홍등 록주(紅燈綠酒)의 객(客)이 되었을 거요.』

『바람을 피웠다는 말이에요?』

『그럴 상 싶소만…….』

『어쩌면……?』

연숙은 진심으로 감탄을 했다.

『그래서 마음 고생을 하셨겠소만…….』

영감님은 또 펄떡펄떡 그림책을 몇장 뒤지더니

『음, 이상한 걸!』

했다.

『왜요?』

『소생은 분명히 둘인데……이 그림에는 하나도 보이질 않는구려.』

『이 그림이 뭔데요?』

『이건 당신의 중년 팔자요.』

조그만 초가 막살이에 마누라가 혼자 앉아 있었고 뜰악에는 장독이 두개 밖에 없었다.

『여기도 바깥 양반은 보이지 않고……살림살이는 다소 줄어 들었을 거요.

독수 공방(獨守空房)도 한 많은 노릇이거늘 살림살이 조차 여의치 않고 보 면…….』

『어떻게 그처럼 맞치세요?』

연숙은 혀를 찼다.

『맞았으면 다행이 올시다만……그런데 어린애가 보이지 않는데 혹시나 잃 어 버리신 게나 아니겠소?』

『죽었어요. 일곱 살 때…….』

『원, 그러나 소생은 분명히 둘로 되어 있는데……가만 계시우.』

영감님은 또 종이 쪼각을 들여다 보고 나서 이번에는 되집어서 책장을 반 대 쪽으로 펼쳐 놓았다. 그것은 중류 가정으로서 장독이 셋, 노적 나까리가 둘, 마누라는 집 안에서 담뱃대를 물고 있고 아들 하나가 옆에 앉아 있었 다.

『이건 말하자면 노년의 팔잔데, 소생은 둘이지만 결국 하나만이 남아서 자식 노릇을 할 거요.』

연숙은 무엇인지 모르게 젖가슴 밑으로 솟구쳐 오르는 지극히 밝은 감정 한 줄기를 불현듯 느꼈다.

『정말이예요?……』

『글쎄 앞 날의 일이니 모르긴 하지만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얼마 내면 돼요?』

『백환만 내시우.』

『자아, 삼백환!』

『아이구 이렇게 많이…….』

영감인은 겁신 머리를 숙였다.

미신인 줄은 알면서도 연숙은 그것을 믿어야만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이 현실적으로 다소나마 연숙을 구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현동까지 ──.』

다소 밝은 감정이 되어 연숙은 택시를 잡아 탔다.

『애가 생길는지도 모른다!』

광화문을 지나 서대문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연숙은 일순간 소녀처럼 얼굴 을 붉혔다. 그리고 그 애와 일평생을 살아 나갈 결심을 불현듯 해 보면서 내일부터라도 취직 자리를 구해야만 하겠다고 연숙은 생각하는 것이다.

김석호의 경제력에서 하루 바삐 빠져 나오는 것만이 자기의 자립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임을 연숙은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다.

『스톱 ── 여기서 멈춰 주세요.』

서대문 로오타리를 건너 섰을 때, 연숙은 갑자기 외쳤다.

택시는 멎고 연숙은 내렸다.

『또 타십니까?』

운전수는 물었다.

『아냐요. 인제 가세요.』

택시는 떠나고 연숙은 한길가 중국 요릿집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 갔다.

『어서 오십시오.』

그러다가 왕서방이 연숙을 알아 보고

『아, 오랫만입니다. 왜 통 오지 않았읍니까?』

그러면서 반가운 얼굴로 연숙을 맞이 하였다.

연숙은 그저 웃기만 했다.

『왜 혼자 오셔요?』

그래도 연숙은 웃기만 했다.

『어서 앉으시오.』

왕서방이 걸상을 가리켰다.

『나 방으로 들어 갈테야.』

『아, 방으로……누구 또 오십니까?』

『아니.』

『자아, 이리 들어오시오.』

구석진 방이었다.

저번 날 밤 영훈이가 ,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연숙은 가만히 앉아 보았다.

『뭘 잡수시오?』

『짜장면…….』

『네.』

보리 차 한 잔을 따라 놓고 왕서방은 사라졌다.

짜장면이 오기를 기다리며 연숙은 가만히 치마 위로 자기 배를 어루만져 보았다. 고영훈의 애정이 자기의 육체 속에 살아 있는 것만 같아서 전에 없 이 자기의 몸이 귀여워 지고 소중해지는 것이었다. 먼지가 낀 유리 들창으 로 오후의 햇빛이 뿌우옇게 들여 쪼이고 있었다. 그 뿌우연 햇빛 속에서 연 숙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아까 점바치 영감이 보여 주던 맨 마지막 그림을 눈시울 속에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韓銀珠[한은주]의 孤獨[고독]

[편집]

어쨌든 은주씨를 한번 만나야만 하지 않느냐고, 팔소매를 붙잡다 시피하며 따라 오는 박인해를 향하여 영훈은 마침내 결심을 하고 걸음을 멈췄다.

『박형의 말대로 어쨌든 은주씨를 만나겠읍니다. 만나 줄 의사를 은주씨가 가졌다면 말입니다.』

『그런 의사를 은주씨가 가졌건 말건 고형은 만나야 하지요.』

『어딜 가면 만날 수가 있읍니까?』

『우선 양재점으로 가 보십시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종로 二[이]가 샹하이·양재점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은주는 없고 마담이 대신 얼굴을 냈다.

『왜들 거기서 서성대고 있는 거야? 들어들 못오구…….』

차 앞에 서 있는 영훈을 한길 건너 바라보며 마담은 눈치 빠른 한 마디를 건녔다.

『누님, 은주씨는 어디 나갔읍니까?』

마담과 함께 걸어 나오던 박인해가 물었다.

『아무델 갔건……너는 왜 또 몸이 달아서 이 시중이냐?』

마담의 화살이 조련치가 않다.

『아니, 정말 어딜 갔읍니까?』

애원하듯이 박인해는 연방 물어 봤다.

『사람 좋은 것도 분수가 있지, 은주를 네 동생 쯤으로 알고 있느냐?』

『아니, 글쎄 누님!』

『한은주 아님 못 살겠다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만 있던 위인은 도대 체 누군데……?』

『글쎄 쓸데 없는 말은 그만 두세요.』

마담은 시선을 돌려 한길 건너 영훈을 바라보며

『저 총각은 왜 또 저 모양인고? 쓴 맛 단 맛 다 보고 나니 은주 맛이 제 일이야?』

『글쎄 누님은 왜 또 그런 걱정을 하시우? 은주씨 간 데나 알으켜 주면 되 지 않아요?』

『저 총각이 다소 건방져서 하는 말이다.』

『고형이 왜 건방지긴 또……?』

『알지도 못하면서 가만히나 있어요.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쏟는 줄 아니? 그런 것도 모르고 저 총각을 위해서 은주를 찾으러 다녀?』

녹녹치 않던 고영훈에 대한 마담의 울화가 이상한 곳에서 이상한 형식으로 폭발이 된 셈이다.

『글쎄 은주씨 어디 있어요?』

『내가 알 거 뭐야? 내가 은주의 비서라는 말이냐?』

마담은 휙 안으로 들어 가 버렸다. 그때, 옆에 섰던 은주의 동료 하나가 마담의 눈치를 핼끗핼끗 돌아다 보며 재 빨리 속삭이었다.

『창경원에 가 보세요.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서 한 시간 전에 나갔어요.』

『고맙소.』

차 앞에 우두머니 서 있는 영훈을 안으로 떠밀어 넣으며 박인해는 올라탔 다.

『창경원! 대지급으로…….』

『네에.』

차는 돈화문 앞으로 해서 구름다리 밑을 부살처럼 달려 갔다.

『박형!』

차 안에서 영훈은 박인해의 손을 잡았다.

『나 같은 사람은 박형의 발 밑에 쓰러질 자격도 없읍니다!』

영훈은 그만 감격에 못 이기어 눈물이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영훈은 남 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며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박형을 오해만 했었답니다. 뭐라고 말해야 이 감 격을 표현할 수 있을는지…… 박형, 용서하시오! 황송합니다!』

『천만에요.』

영훈에게 손 하나를 잡힌채 박인해는 물끄럼이 창 밖에 흐르는 가두 풍경 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풍경이 희미해 지며……눈물이 한 두 방울 박인해의 얼굴을 적셨 다.

외면을 하며 영훈에게는 몰래 눈물을 얼른 찍어 냈다.

『박형, 정말로 송구해서 견딜 수가 없읍니다.』

『인제 그만 하시오. 이런 때는 서로 말이 없는 것이 편하니까요.』

『아아 ⎯⎯.』

창경원 앞에서 둘이는 내렸다.

넓은 창경원 안이라, 은주가 어디 있는지, 알 도리가 막연하였다.

『샅샅이 뒤져 봅시다요.』

박인해는 앞을 서서 왼편 새 우리 앞으로 우선 걸어 갔다. 일요일이 아니 어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새 우리를 뺑 돌아 원숭이 우리 앞으로 나갔다. 거기서 두 패로 나눠져 영 훈은 타조 우리 쪽으로 갔고 박인해는 호랑이 우리 앞으로 갔다.

창경원 사무소 앞에서 다시 만났다가 하나는 연못 가로 걸어 갔고 하나는 층층대로 올라 가서 역시 연못을 향하여 내려 갔다.

거기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가 연못을 중심으로 영훈은 오른 편 유원지 쪽을 더듬어 갔고 박인해는 왼 편 오솔길로 해서 식물원 쪽으로 걸어 갔다.

그대로 걸어 가면 식물원 앞에서 둘이는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영훈은 허둥지둥 유원지로 들어 섰다. 탁구대에는 군인과 중학생들이 땀을 흘리며 마주 서 있었다. 조무래기들이 이 그네 저 그네에 매달려 있었다.

어른들이 그네 앞에 서 있었으나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원지를 둘러 싼 만추(晩秋)의 언덕 위를 삥 둘러 보았다. 몇 쌍의 아베크가 여기저 기 바라다 보일 뿐, 은주의 그리인 색 투·피스는 전혀 시야에 들어 오지 않았다.

허무감이 돌연 영훈의 가슴 속에 깃들기 시작하였다. 보배로운, 지극히 보 배로운 인생의 구슬 하나를 홀랑 우물 속에 빠뜨린 것 같은 안타까운 심정 이 영훈은 차차 되어 가고 있었다.

『왜 좀더 빨리 은주를 만나 보지 못했을가?……』

그것만이 인제 와서는 천추의 한이다. 조그만 자존심과 조그만 자비심(自 卑心)이 오늘의 이 대사(大事)를 저질러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는 뉘우침만이 자꾸만 복받쳐 오는 것이었다.

『은주! 내 보배로운 은주!』

마음의 외침이 소리가 되어 영훈의 입술을 튀어 나왔다.

허겁지겁 이번에는 달렸다 , . 달리는 발뿌리가 언덕을 넘어 식물원 쪽으로 몇 걸음 튀어 올라갔을 때였다.

『앗, 은주다!』

영훈은 후딱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 편 솔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은주의 뒷 모습이 시야에 뛰어 들어 왔다.

그러나 은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국민학교 학생인 듯 싶은 계집애 둘이 하 나는 노란 빛, 하나는 빨간 빛 세에타를 입고 은주와 마주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땅을 들여다 보면서 은주가 연방 손 하나를 놀리고 있었다. 그것을 조무레기 계집애 둘이 말똥말똥 들여다 보고 있었다.

『공기를 하는구나!』

조그만 돌이 은주의 손길에 하나 하나씩 놀아 나고 있었다.

영훈은 픽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오죽이나 쓸쓸하면…….』

영훈은 으스스 몸서림을 느꼈다.

어떤 條約(조약) 영훈은 한 걸음 두 걸음 은주의 등 뒤로 조용히 걸어 왔다. 기울어진 햇볕 이 은주의 그리인 색 양복 위에 알숭달숭 반점(斑點)을 아로새기고 있었다.

반점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소나무 위에는 역시 바람이 일고 있는가 보다.

조무래기 들이 닥아오는 영훈을 한번씩 쳐다 보았으나 놀음에 열중한 그들 의 얼굴은 까딱도 없이 다시금 시선을 떨어뜨렸다.

『은주씨!』

은주는 호닥닥 놀라며 뒤를 핼끔 돌아다 보았다. 반만큼 튀쳤던 공기돌 하 나가 땅을 짚은 은주의 흰 손등 위에 톡하고 떨어졌다.

『아-?』

은주는 발딱 몸을 일으켰다.

반가움과 증오가 한데 엄버무려진 시선이 총알처럼 영훈의 얼굴을 쏘았다.

『은주씨는…….』

한 걸음 더 영훈이가 닥아섰을 때, 은주는 홱 외면을 하며 솔 밭 사이를 다람쥐처럼 달렸다.

『은주씨, 잠간만…….』

영훈도 달려 갔다 조무래기 . 들은 멍하니 서서 솔밭 사이에 전개된 이 진 기한 경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주는 한 두번 돌 뿌리를 차고 쓰러질 것 같았으나 끝끝내 쓰러짐이 없이 그냥 달렸다. 그러나 영훈의 뜀박질을 당해 낼 도리는 전혀 없다.

간격은 자꾸만 좁아 졌다.

『따라 옴 싫어!』

두간 남짓한 거리까지 좁아졌을 때, 은주는 솔나무 하나를 부여잡고 홱 돌 아서면서 외쳤다.

원체가 새침한 얼굴에 서슬이 파래 있었다. 긴 살눈섭 밑에서 눈동자가 오 들오들 떨고 있었다.

『은주씨, 잠간만…….』

『닥아 옴 싫어!』

은주의 오른 손이 홱 들리면서 공기돌 셋이 영훈의 면상을 향하여 날아 갔 다. 둘은 머리 위를 날았고 하나는 영훈의 이마를 치고 떨어졌다.

『닥아옴 날치기라고 소리를 칠테예요!』

『좋습니다!』

영훈은 성큼성큼 한간 길이까지 닥아왔다.

『싫어! 싫어!』

은주는 외치자 되는 대로 집어서 마구 내던졌다. 나무가지도 날아 가고 흙 도 한줌 날아 갔다. 풀 잎도 날아 가고 짚 오락도 날아 갔다. 종이 부스러 기도 날아 가고 사과 껍질도 날아 갔다.

영훈은 우두머니 선채 그 하나도 몸을 비껴 피하지 않았다. 좀더 커다란 돌 같은 것이 날아와 자기의 면상을 갈겨 주지 않는 것을 오히려 슬퍼하였 다.

『엄마아-.』

자기 자신을 지탕할 기력을 잃고 은주는 두 손으로 얼굴을 탁 가리우면서 소나무에 이마를 부볐다.

어깨에 걸려 있는 사과 껍질과 양복 앞 자락에 묻은 흙을 영훈은 털어 냈 다. 그리고는 은주 옆으로 조용히 닥아갔다.

『닥아오지 말아요! 인제 당신 얼굴 보기도 싫어요!』

어린애들이 숨바꼭질을 하듯이 은주는 좀처럼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목소리가 눈물에 젖어 있었으나 흐느낌은 없었다. 어깨도 흔들지 않았다.

이 여성은 자기의 격정(激情)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타잎의 하나 같았다.

백연숙이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한 인생의 자세였다.

영훈은 오랫 동안 고개를 숙으리고 은주 옆에 서 있었다.

『내가 은주씨를 찾은 것은…….』

영훈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은주씨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은주씨의 마음을 그처럼도 괴롭힌 나 자신을 참회하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영훈은 또 한참 묵묵히 서 있다가

『은주씨는 내게 있어서 감히 넘겨다도 못볼 높은 존재가 되었읍니다. 그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감히 은주씨를 찾을 생각을 못하고 있 었읍니다.』

거기서 영훈은 어조에 힘을 주어

『은주씨, 어떻게 하면 은주씨의 상처 받은 마음을……자존심을 보장할 수 가 있을 것인가?-그 방도를 가르쳐 주시오.』

『……………….』

은주는 여전히 얼굴을 들지도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은주씨, 나는 인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것을 알으켜 주시오.』

영훈은 진심으로 그 방도를 은주에게 물었다. 은주가 그것을 요구만 한다 면 어떠한 고행(苦行)이라도 영훈은 감수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만 영훈 은 상처 받은 은주의 자존심을 보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박인해씨가 나를 찾아 왔읍니다. 나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읍니다. 감히 넘겨다도 못 보는 높은 위치에 은주씨가 서 있다는 사실 을 나는 비로소…….』

순간, 은주는 그 어떤 강렬한 충동과 함께 후딱 얼굴을 들었다. 빨개진 눈 에 눈물이 대룽대룽 맺혀져 있었다.

은주는 그 때서야 영훈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조악돌에 얻어 맞은 영훈의 이마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조르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숙였던 얼굴을 영훈도 들었다. 영훈은 울고 있었다.

『은주씨!』

영훈은 그러면서 은주의 손길을 잡으려다가 멈추고 그만 도로 움츠려뜨리 고 말았다.

『……………….』

똑 같이 영훈의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으나 은주는 입술을 악물고 말똥말 똥 영훈을 쳐다만 보았다.

악물은 입술이 이윽고 두어번 경련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삐쭉삐쭉 어그러 지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또 어그러지지 못하도록 한층 더 굳세게 입술을 악물었기 때문에 울음은 마침내 소리를 이루지 않았다.

소리를 내어 울어 버리기에는 자기의 슬픔이 너무도 컸었다고, 은주는 끝 끝내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견뎌 배길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데 멀리 등 뒤에서 박인해의 목소리가 명랑하게 들려왔다.

『고형, 그러면 나는 좀 바빠서 먼저 돌아가야겠소.』

두 사람이 문득 뒤를 돌아다 보았을 때는 언덕 길을 연못 가로 걸어내려 가면서 박인해는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 박선생!』

그렇게 외치며 은주는 서너 걸음 따라 내려 가다가 후딱 걸음을 멈추었다.

『은주씨, 안녕히…….』

박인해는 또 손을 내저었다.

『박선생, 안녕히…….』

은주도 손 하나를 쳐들어 보였다. 은주의 눈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이윽고 박인해의 모습은 언덕 밑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금 연못 가 신작로 위로 조그맣게 나타났다.

영훈과 은주는 나란히 서서 박인해가 한번 더 뒤를 돌아다 보기를 진심으 로 기다렸으나 박인해는 끝끝내 두 사람의 기대를 풀어 줌이 없이 우거진 가로수 저편으로 남실남실 사라져 갔다.

은주는 후딱 영훈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영훈이가 은주를 쳐다보는 것과 동시의 일이었다.

『박형은 정말 훌륭한 분이었읍니다.』

『같이 오셨어요?』

이것이 은주가 영훈에게 말을 거닌 최초의 한 마디였다.

『네. 박형은 나를 여기까지 끌어다 주었답니다.』

『……………….』

은주는 말이 없었으나 말이 있는 사람들보다 못지 않은 충격을 받고 있다 가 한참 후에

『끌어다 주기 전에 왜 안 왔어요?』

빤히 쳐다보는 은주의 눈동자가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무서워서……은주씨 뵈일 낯이 없어서…….』

영훈도 은주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 보면서 대답을 했다.

『끌어다 안 줬음 영영 안 오셨겠네요?』

『은주씨!』

영훈은 또 은주의 손길을 잡으려다 말았다.

은주씨의 성품을 『 잘 알고 있기 때문에……은주씨는 나를 영영 만나 주지 않을 것만 같았지요.』

『모르는 말이예요. 겉으로 뻗대는 사람일수록 속으로는 더 울어요. 겉으 로 우는 사람은 속으로는 덜 울지요.』

『아아, 은주!』

체면을 가릴 도리가 없다. 영훈은 마침내 은주의 손길을 잡았다.

『은주, 나는 인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하오? 뭘 해야만 되는 거요?』

정에 격하여 눈시울이 또 뭉클 했다.

『영훈씨가 하고 싶은 것을 하시랄 수 밖에…….』

『내 행동에 대한 벌로서 나는 어떠한 고행이던 사양하지 않겠소!』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는 것은 냉혹한 질서(秩序)일 뿐 애정은 아닐 거 예요. 왜 좀더 빨리 용서해 달라는 말을 않는 거애요? 나는 그 말만 바라고 있었는데…….』

『아아, 은주는…….』

영훈은 은주의 어깨를 꼭 품에 넣었다. 은주의 파아마 머리에 이슬처럼 영 훈의 눈물은 하나둘 맺히기 시작했다.

『인제 정말 그 여자와는 안 만나죠?』

영훈의 품 속에서 억압된 은주의 목소리는 마침내 흐느낌을 지니고 있었 다.

『영영……영영 안 만나요!』

『정말?……』

『오늘 아침에 사직원을 냈소.』

『아, 사람이 와요.』

둘이는 포옹을 풀고 오랫 동안 그렇게 서서 마주 쳐다보고만 있었다.

『피를 씻어요.』

은주는 손수건을 꺼내 들고 영훈의 이마에서 피를 닦아 냈다.

아베크가 두 사람 앞을 지나 갔다.

『인제 내려 가요.』

둘이는 눈물을 씻고 연못 가로 내려 섰다.

기울기 쉬운 만추의 햇발이다. 연못 기슭에 산 그림자가 내려 앉았다. 저 녁 바람이 이나 보다. 산 그림자가 청포처럼 푸들푸들 흔들리고 있었다.

『실직을 한 셈이니, 내일부터는 내가 열심히 양재점에 나가야겠어요.』

『괜찮어. 열심히 구해 보면 자리가 또 생기겠지.』

멀리 남산 위로 잠자리 비행기가 한대 떠 오고 있었다.

영훈씨는 『 아까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그러셨지?』

『그렇소. 은주씨가 하라는 대로 하지요.』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요?』

『일생을 독신으로 지낼 각오를 하세요.』

『일생……?』

그러다가 영훈은 곧 이어

『은주씨가 그것을 원한다면 하겠소.』

『그대신 나도 일생을 독신으로 지나요.』

『아, 은주씨도……?』

『네.』

『그건 어째서……?』

『둘이가 다 독신으로 지나다가 어쩔 수 없는 시기에 이르러서 결혼을 해 요. 알아 듣겠어요?』

『아, 말하자면 그 때까지 여유를 두자는 말이지요?』

『오해하면 안 되요. 둘이가 다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말것- 저희들 둘이가 결혼을 하되 양편에서 다 어쩔 수 없는 시기에 하자는 말이 예요.』

『알겠소. 그만한 벌은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겠지요.』

『오해하면 슬퍼요. 내가 내 감정을 완전히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이예요.』

『알겠소.』

『현재도 그렇고 앞 날에도 그렇고 나는 영훈씨 이외의 남성에게 대해서 애정을 느낄 것 같지가 않아요. 적어도 영훈씨가 내 옆에 항상 있는 이상에 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점은 안심하셔야만 해요. 다만 나 자신의 감정이 어느 시기에 깨끗이 처리가 되느냐 하는 시간 문제를 말하고 있는 거니까 요.』

『알겠소. 은주씨 잘 알아 들었소.』

『그렇다면 정말 고마워요. 그 시기가 열흘 후에 올는지. 한달 후에 올는 지, 혹은 일년 후에 올는지……?』

『삼년도 좋고 십년도 좋습니다!』

『일생 동안 안 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나지요!』

『흐응 -.』

은주는 만족한 듯이 코에 걸린 소리를 가만히 냈다.

『손 한번 만져 봐요.』

사람들 눈을 피해 가며 은주는 몰래 영훈의 손가락 세개를 얼핏 더듬어 잡 았다.

『얼마 동안 못 만져 본 손인데…….』

『고맙소!』

은주의 총명한 애정의 자세를 영훈은 오늘에야 속속 드리 발견한 것 같았 다.

『두개 마자!』

은주는 영훈의 다섯 손가락을 다 함께 자기의 조그만 손아귀 속에 넣어 보 며

『어느 소설가의 말이 세월이 흐르면 마음도 흐른다고요. 아마도 그 시기 가 일년은 넘지 않을 ()야!』

그러다가 홀랑 영훈의 손길을 놓고 천연스럽게 활개를 치며

『순경이 와요. 풍기 문란죄로 붙들려 가면 무서워!』

『화장을 고쳐야겠소. 눈물 자욱이 알숭달숭…….』

둘이는 창경원 문을 향하여 나란히 걸어 나갔다.

서글픈 善行[선행]

[편집]

그 무렵, 박인해는 창경원 구름다리 밑을 끼어 돈화문 앞 광장을 건너서 안 국동 네거리를 향하여 털썩털썩 걸어 가고 있었고 백연숙은 서대문 네거리 의 중국집을 나서서 아현동 고개를 넋없이 걸어 올라 가고 있었다.

고영훈과 한은주를 중개로 한 이 두 사람의 존재는 직접적으로는 하등의 관련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백연숙으로서는 박인해의 존재까지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건만 지금 공간을 달리하는 둘이의 귀로(歸路)는 똑 같이 하나의 선행 (善行)이 가져 온 서글픈 인생의 항로를 의미하고 있었다.

선행은 언제나 자기 희생 위에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라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지 못하는 현대인의 에고이즘을 박인해는 억지로라도 인정해야만 하였 다.

한은주의 참된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 동시에 자기 자신의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중세기적인 「로만스」의 주인공이 되어 보려던 박인해의 꿈이나 불행의 눈물 속에서 도리어 행복을 찾겠다는 비극 제조가로서의 백연숙의 꿈이나가 똑 같이 인간성의 정직(正直)을 교양의 미덕으로 음폐하려는 하나 의 자기 기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님을 뼈아프게 느끼기 시작하였다.

『교양이나 겸양은 언제나 인간을 속여 왔다!』

박인해는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 속에서 신음하듯이 허덕이었고

『새로운 환영 속에서 자기를 속이는 것 보다는……』

고영훈이가 남겨 놓고 간 씨앗 하나를 자기 뱃 속에서 고이고이 기르고 발 아(發芽)를 시킴으로써 얻어 지는 좀더 현실적인 기다림만이 자기의 삶의 길이라고, 그 머나먼 별 빛처럼 희미한 한줄기 희망을 품고 아현동 비탈 길 을 쓸쓸하고 서글픈 단념과 함께 백연숙은 기진맥진하여 걸어 올라 가고 있 었다.

저녁 바람이 고개를 타고 불어 넘어 왔다.

어느 집 울타리 안에서 떨어져 불려 왔는고? 노오랗게 물든 은행 잎 하나 가 발길에 걷어 채였다.

연숙은 은행 잎을 주서 들고 말끄럼이 들여다 보면서 걸었다.

『흥!』

노오랗게 물든 그 은행 잎이 자기 자신의 모습과도 같아서 연숙은 불현듯 눈시울이 저려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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