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팔번뇌 비평에 대하야
一
[편집]육당의 시조집이 출판된 뒤로 세상에 돌아다니는 비평을 들으면 첫째 간회(艱晦)한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아즉 시조에까지 연구가 미치지 아니한 이로서 시조로도 가장 깊은 경계(境界)를 가진 육당의 시조를 보면 누구던지 얼른 알기 어렵다고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보기 어렵다」는 말과 「이 글은 간회한 글이라」는 말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 글더러 간회하다고 하면 물론 여실지(如實智)가 아니다. 자기들로부터 만든 환현상(幻現相)을 거리어 암만 작자에게 쓰이랴 한들 작자가 스사로 본질이 있음에야 어이랴. 간회의 본질을 가진 작가가 고금에 없는 것은 아니나 일시에 간회하다는 시비를 듣는 사람은 열에 아홉이 고심인(苦心人)이다. 영경(靈境)은 엷은 곳에서 나타나지 아니하고 심충(深衷)은 직서(直抒)하는 앞에 드러나지 아니하는 것이니 엷어도 좋고 범용(凡庸)하야도 견대는 사람으로 말하면 신령하니 깊으니 하는 것을 당초부터 몽상도 아니하얐을 것이나 문장의 경계라는 것은 천혜(天慧)의 바탕과 구해(究解)의 힘으로조차 여러 층으로 열리는 까닭에 웬만큼 조예가 있으면 발서 좋아하는 곳이 다르고 이만으로는 견대지 못하는 것이 많다. 백난(白鸞)의 고히 드는 날개가 청산호 울[籬] 사이로 은은하게 보일 때 닭의 홰 비들기장이 어찌 그이 고면(顧眄)을 구할 수 있으며 홀로 이는 슬품과 단예(端倪)도 못할 느낌이 바야으로 참담한 경영 속에 있을 때 다반항어(茶飯恒語)가 어찌 그의 채방(採訪)을 기대할 수 있으랴.
그러나 바라매 방불(髣髴)한 것이 갈수록 멀고 심회(心繪)로 의사(擬似)할 듯한 것이 써보면 여간 틀리는 것이 아니라 바라다 못하야 눈물이 흐르고 쓰다가 속이 상하야 긴한 숨을 지을 때면 몇 번이나 잡은 붓대를 고뇌와 함께 바리랴 하얐으랴마는 멀어갈수록 더욱이 영롱한 것은 지경이요 아니 써질수록 점점 나타낼 만한 가치(價値)가 높아가는 것은 충곡(衷曲)이라 여기서 끌림을 받고 여기서 계련(係戀)이 생겨서 스사로도 라서지 못하고 그대로 고생을 니어가다가 또다시 바리고자 하며 또다시 참아바리지 못하야 이 반복을 수없이 한다. 바릴 마음이 세여감을 따러서 끌림과 계련도 또한 전에 비할 수 없이 형구(形軀)와 한가지 늙어가게 된다. 이 곡절은 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야 안다. 이를 모르고 쉽사리
고심인의 구출(嘔出)한 바를 어찌 의론할 것이랴. 느꺼웁다. 저같이 기구한 도경(道徑)을 지나서 간신히 하로아츰에 그야 얻은 바이 있다. 그래도 덜 깊은 것이 한이요 그래도 바라는 지경에 못 미친 것이 한이요 그래도 붓대가 마음과 덜 사괸 것이 한이다. 홀로 읊어보고 남모르게 눈썹을 찡기어 한은 한대로 하면서도 그래도 몇 번 끄덕이는 고개가 깨닫지 못하는 유쾌를 형용하고 남음이 있다. 이것이나마 시월간(時月間)에 이룬 바이 아니요 백간(白艱)으로써 바꾸어 얻은 것이어늘 이를 보는 사람은 찰나의 심사도 드리랴 하지 아니하고 발서 의론을 더하고자 하니 마음을 가지고야 어찌 개연치 아니할 수 있으랴. 육당의 시조가 간회한 시조가 아니다. 그는 그대로 지경이 있고 그만큼 엷은 것을 좋아하지 못한다. 글이라는 것이 있을 때까지는
천상(淺想)과 용경(庸境)이 글 노릇할 이치가 없고 이것으로 글 될 수가 없다할 것 같으면 육당의 시조가 의론을 받을 까닭이 없다. 한번 시속의 의견을 좇아서 누구나 휙 지나가 보아도 알 만한 글만 이 세상에 남기어 보라. 지경은 조예로부터 열리는 것이니 아즉 말하지 말고라도 가다가 엷은 말로 형용 못할 정곡(精曲)이 있을 때 있을 것이요 이 정곡을 드러내지 못하야 번민이 일어날 때 있을 것이다.
二
[편집]이때에도 「차라리 정곡을 막자를지언정 어찌 남으로 하야금 얼른 알지 못하게 하랴」 하는 한화(閑話)를 내일 수 있을까. 쓰기 쉽고 알기 어렵지 아니한 것은 대개 천감(淺感)이요 용경이다. 좀 올라가면 자연 고뇌로조차 나오게 되고 고뇌로조차 나온 것은 힘 아니들이고 얼른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 만한 혜경(蹊經)이 없는 것은 아니니 골 찾어 들어가 보면 들어갈수록 보이는 것이 점점 명료할 것이요 다 들어간 뒤는 그 글이 오곡(奧曲)을 아는 한편에 자기의 경계가 고만큼 열리었을 것이다. 열릴수록 골 찾는 눈이 빠르고 들어가는 걸음이 민활할 것이다. 여기서 지음(知音)이 생기는 것이요 여기서 감식(鑒識)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바리고 생민(生民)의 무한한 지혜를 막 잘너서 자신의 서 있는 곳까지에 끄치게 하고자 하니 이 어찌 단견(短見)이 아니라 하랴. 비로봉을 쓸데없이 높다고 하야 저 올라가기 졸 만큼 깎어바리면 이 한 사람에게는 편할는지 모르나 가다가 못 가더라도 마음으로는 높이 운표(雲表)에서 서 천풍(天風)이 옷자락을 날리는 것을 장쾌하게 아는 사람이 아즉도 세상에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어떠한 사람은 육당의 시조가 자연한 맛이 없고 너무 공정(功程)만에 치우쳤다고 한다. 그리하야 공정 없이 일시우발(一時偶發)한 영언(永言)이 육당의 시조보다 여간 나은 것이 아니라고 하나 문장의 감고(甘苦)를 조금이라도 저작(咀嚼)하야 본 사람에게는 이 말이 언제던지 서지 못한다. 공정이라는 것은 자연을 향하는 경로이다. 붓끝에 자연이 나타나려면 적루(積累)한 공정이 먼저 음예(陰翳)를 씻어야 하고 침손(侵損)을 막어야 하고 훤괄(喧聒)을 금해야 하고 간출(間出)하는 허환(虛幻)을 깨쳐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 같이 나타나기 어려운 지경이 없거늘 이를 알지 못하고 생각 아니하고 얼는 나오는 것을 자연으로 아니 이 하나만 보아도 속론의 근저(根柢)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일시우발이 사의(辭意)가 저절로 맞어서 얼른 보매 혹 천취(天趣)가 있는 듯한 것도 없지 아니하나 공정으로조차 나타난 자연경(自然境)에 비하야 보면 유사한 듯하고도 천심(淺深)의 대차(大差)가 있다. 그러나 공정이 깊은 이 일수록 남의 일시우발을 보고 그의 경계를 칭찬하야 스사로 미치지 못함을 한하는 일이 많다. 유속(流俗)이 이를 서로 전하야 과연 우열이 있는 줄 아나 깊은 공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일시우발을 칭찬하는 것은 일시우발의 자경(自境)이 제법 칭찬받을 만한 지품(地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공정의 적루된 광기(光氣)가 점점 자연의 경계를 영출(映出)하는 지음이므로 이 경계가 유사한 듯한 것을 만나 한층 더 솟아나며 그때 곧 농안(籠眼)하는 유리가 되야
유사를 곧 그것으로 보아 가지고 저의 자경이상(自境以上)의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학자(初學者)로서 일시우발을 칭찬할 것 같으면 이는 본령(本領)의 엷은 것을 말하는 것이요 깊은 공정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일시우발을 칭찬할 것 같으면 이는 단정(丹鼎)의 화후(火候)가 거의 익어가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일이 십이 되면 십이 도로 일이다. 그러나 십으로서 일이 아까 일이던 그 일은 아니다. 이것과 같아서 일시우발한 자연과 적고(積苦)로조차 나타난 자연을 병론(並論)할 것이 얼마 전에 육당을 만나서 시조를 말하다가
육당의 말이 암만하야도 쉬운 듯한 선배의 제작(製作)을 당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보고 육당 모르게 나 혼자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말로 「한층 더 오르는군」 하얐다. 육당으로서 하는 이 칭찬은 우에 말한 바 익어가는 화후라 하려니와 시속이 이로써 우열을 말하는 것을 들을 때는 문제가 말하는 이의 본령으로 옮기지 아니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시비가 하상 육당의 시조를 숙미(熟味)하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없이 서로 벋어 나가는 것이다. 시비도 하자를 지적할 것 같으면 상음(賞音)이나 다를 것 없이 좋은 지기(知己)라 할 수 있건마는 상음은 바라도 말고 들어맞히는 시비도 얻어들을 수가 없다.
三
[편집]육당의 시조집 한 권 있는 것이 아니 다 문칭추(文秤錘) 한 권도 다 차지 못하는 시조집을 가지고도 이렇게 정론(正論)이 없고 이렇듯이 부설(浮說)이 많거든 좀더 크게 학설의 단서를 열거나 또 좀 크게 생평(生平)의 부심(腐心)한 오의(奧義)를 드러낼 것 같으면 과연 어떠한 의론이 있을까. 시비로나 혹 들어맞는 시비를 들어볼 수 있을까 묻노라. 상하고금(上下古今)에 이 느낌을 안은[抱] 이 과연 얼마나 되는고. 나도 육당의 시조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편표(翩飄)하는 체세(體勢)를 질겨하지 아니하야 혹 묵어운 듯하고 자태(姿態)의 섬연(纖姸)함을 좋다하면서도 싫여하야 가끔 옥환(玉環)의 풍비(豊肥)가 나타나는 이 몇 가지를 가지고 말함일러니 그동안 몇 해를 지나 게으르나마 책권이 눈에 시친 까닭에 자연 여러가지로 생각한 바이 있어 비로소 무슨 글이던지
작자마다 작자의 본색이 있고 이 본색을 바리고는 일가를 이를 수 없는 것을 깨달아 육당더러도 누가 무슨 말을 하던지 그대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질언(質言)하얐다. 유약(柔弱)하면 유약한대로 강건(剛健)하면 강건한대로 청려(淸麗)하면 청려한대로 질중(質重)하면 질중한대로 번미(繁靡)하면 번미한대로 천생인 바탕은 늘 그대로 있어야 한다. 이것이 근간이 되어야 여기서 가지가 벋는 법이요 이것이 전인(前引)이 되어야 여기서 도정(道程)이 막히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유약이나 강건이나 청려나 질중이나 번미나 다 각각 다른 바이 있으나 극처에 이르러는 모다 좋은 곳이 있고 좋은 곳에 이르러서는 피차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각각 다름으로부터 모인 까닭에 마츰내 이렇듯 합하는 것이라. 제 본색을 바리고 억지로 다른 것을 따르랴 하면 언제던지 판오(判澳)할 뿐일 줄 안다. 이를 깊이 알지 못하고 요량없이 남의
저작을 말할 것이랴. 달은 둥글게 빛나고 구름은 피어오른다. 구름더러 달 같이 둥글라 할 사람이 있거든 오라. 공작은 날고 기린(麒麟)은 긴다. 기린더러 공작 같이 날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즉 육당의 시조는 육당의 본색대로라야 좋을 것이 아닌가. 이를 부론(附論)함이 식해(識解)를 자랑하랴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 정평이 어려운 것을 보이어 독자로 하야금 우에 말한 두 가지 의론을 한번 더 경고(冋顧)하게 하랴는 것이다. 정평이 이같이 어려우니 나의 이 글은 과연 어떠한 비평이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를 아는 이 있으며 오즉 친우의 일권신저(一券新著)를 위하야 그에 대한 훼예(毁譽)를 변정(辨正)하랴고 이같이 쓴 것이라고는 아니할 줄 믿는다. (끝)
『백팔번뇌 비평에 대하야』의 정오
[편집]제일일 초단 제삼행 간회 『한』다고는 『하』다고의 오
이단 제심이행 이『엿』지는 이『엇』지의 오
제이일 삼단 제팔행 병론할 것이 하(下)에 『아니다』 삼자가 탈유
제삼일 초단 『육당의 시조집 한 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칭추』 십팔자는 오입
초단 제심칠행 옥환의 풍비는 풍기(豊肌)의 오
삼단 제삼행 판오는 판환(判渙)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