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고려사/권001
원문
[편집]太祖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姓王氏,諱建,字若天。松嶽郡人,世祖長子,母曰威肅王后韓氏。
唐乾符四年丁酉,正月丙戌,生於松嶽南第,神光紫氣,耀室充庭,竟日盤旋,狀若蛟龍。幼而聽明睿智,龍顔日角,方頣廣顙。氣度雄深,語音洪大,有濟世之量。
번역
[편집]태조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太祖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은 성이 왕씨이고 이름이 건(建)이며 자는 약천(若天)이다. 송악군(松嶽郡 : 지금의 개성직할시) 사람으로 세조(世祖)의 장남이며 모친은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이다.
당나라 건부(乾符) 4년(신라 헌강왕 3년, 877) 정유년 정월 병술일. 송악군 남쪽의 집에서 태어나자 신령스런 빛과 자색의 기운이 방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 찼으며 종일토록 서려있는 형상이 흡사 용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용의 얼굴에 이마 뼈는 해처럼 솟아났으며 턱은 모나고 이마는 넓었다. 도량이 큰데다 말소리가 우렁차 세상을 구제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 당시 신라의 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도적떼1)가 다투어 일어났다. 견훤(甄萱)2)이 반란을 일으켜 남쪽 지방에 웅거해 후백제(後百濟)를 칭하였고3) 궁예(弓裔)4)는 고구려 땅에 터를 잡고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에 도읍하고는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했다.
건녕(乾寧) 3년(신라 진성여왕 10년, 896) 병진년. 당시 송악군의 사찬(沙粲)으로 있던 세조가 송악군을 바치고 귀부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며 금성태수(金城太守)로 삼았다. 세조가 궁예더러, “대왕께서 조선(朝鮮)·숙신(肅愼)·변한(卞韓)5) 땅의 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먼저 송악군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라고 설득하자 궁예가 그 말을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勃禦塹城)6)을 쌓게 한 후 성주로 임명했다. 이 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년, 898) 무오년. 궁예가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태조가 찾아가 알현하자 정기대감(精騎大監) 벼슬을 주었다.
광화(光化) 3년(신라 효공왕 4년, 900) 경신년.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광주(廣州 :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충주(忠州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및 당성군(唐城郡 :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괴양군(槐壤郡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군) 등의 군현을 토벌하게 했는데, 이를 다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粲) 벼슬을 주었다.
천복(天復) 3년(신라 효공왕 7년, 903) 계해년 3월. 태조가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7) 접경에 이르러 금성군(錦城郡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8)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10여 군현을 쳐서 빼앗았다. 그리고는 금성군의 이름을 고쳐서 나주(羅州)라 한 후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게 한 후 돌아왔다.9) 이 해에 양주장수(良州將帥) 김인훈(金忍訓)10)이 위급함을 알려오자, 궁예가 태조를 시켜 구원하게 했다. 그 후 돌아오자 궁예가 변경의 일에 대해 물었는데,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키고 영토를 확장시킬 전략을 보고했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태조를 눈여겨보게 되었으며 궁예도 기특하게 여겨 알찬(閼粲)으로 진급시켰다.
천우(天祐) 2년(신라 효공왕 9년, 905) 을축년. 궁예가 다시 철원에 도읍했다.11)
천우(天祐) 3년(신라 효공왕 10년, 906) 병인년. 궁예가 태조로 하여금 정기장군(精騎將軍) 금식(黔式) 등을 거느리고 군사 3천명을 지휘해 상주(尙州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의 사화진(沙火鎭)을 치게 하니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겼다. 궁예는 영토가 더욱 넓어지고 군세가 점점 강해지자 신라를 병탄하려는 야심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면서 신라에서 귀부해온 사람을 모두 죽였다.
양나라 개평(開平) 3년(신라 효공왕 13년, 909) 기사년. 태조는 궁예가 날로 교만하고 포학해지는 것을 보고 다시 변방[閫外12)]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궁예가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의 상황을 우려해 태조를 시켜 진압하게 하고 한찬(韓粲)·해군(海軍) 대장군(大將軍)으로 진급시켰다. 태조가 정성껏 군사의 사기를 북돋우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보여주니 군사들이 그를 공경해 다들 힘껏 싸울 것을 다짐했으며 적의 국경 사람들도 두려워하며 복종했다.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光州)의 염해현(鹽海縣 : 지금의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13)에 진을 쳤다가 견훤이 오월국(吳越國)14)에 보내는 배를 나포해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포상했다. 다시 태조를 시켜 정주(貞州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에서 전함을 수리하게 한 후 알찬(閼粲) 종희(宗希)와 김언(金言)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 명을 지휘해 광주(光州)의 진도군(珍島郡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을 공격하게 했다. 태조가 진도군을 함락시키고 진군하여 고이도(皐夷島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 고이리)에 진을 치니 성안의 사람들이 군대의 위용이 엄정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태조가 나주의 포구에 이르니, 견훤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을 배치했는데, 목포(木浦 : 지금의 전라남도 목포시)15)로부터 덕진포(德眞浦 :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까지 바다와 육지에 걸쳐 질서정연하게 늘어서서 그 군세가 매우 성했다. 장수들이 우려하자 태조는, “걱정하지 말라. 승리는 화합에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 있지 않다.”고 격려했다. 아군이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자 적 함선이 조금 물러났다. 바람을 타고 불을 지르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으며, 5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자 견훤이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처음에는 나주 관내의 고을들이 우리 영토와 멀리 떨어진 데다 적병이 가로막고 있어 서로 응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 컸으나 태조가 견훤의 정예군을 분쇄하자 사람들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리하여 삼한(三韓) 땅의 태반을 궁예가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가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그대로 주둔해 수비하려 했다. 김언(金言) 등이 스스로 전공은 큰데 상이 없다고 여겨 크게 불만을 품자 태조가 타일렀다. “게을리하지 말도록 조심하고 오직 힘을 다하여 딴 마음을 품지 않으면 복록을 차지할 수 있다. 지금 임금이 방자하고 포학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는 데다 참소와 아첨을 일삼는 무리들이 득세하여 참소가 점점 퍼져가고 있다[浸潤16)]. 이 때문에 내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 상황이므로 차라리 전장에 나가 힘껏 왕을 도움으로써 몸을 보전하는 것이 낫다.” 장수들이 옳은 말이라 여겼다. 드디어 광주(光州)의 서남쪽 경계에 있는 반남현(潘南縣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의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지에 풀어 놓았다. 당시 압해현(壓海縣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면)17) 반란군의 두목 능창(能昌)이 바다섬에서 봉기했는데 수전(水戰)을 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수달(水獺)이라 불렀다. 그는 유랑하는 자들을 불러 모아 갈초도(葛草島 : 지금의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면 일원)의 군소 도적떼와 결탁한 다음 태조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요격해 타격을 가하려 했다. 이에 태조가 장수들에게 지시했다. “능창이 내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필시 섬의 도적들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다. 도적떼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세력을 합쳐 앞뒤로 협격해 온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수영을 잘하는 10여 명을 완전 무장시켜 작은 배에 태운 다음 밤중에 갈초도 나룻가로 가서 변란을 꾸미려고 왕래하는 자를 사로잡아 그 음모를 미리 막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장수들이 모두 그 말을 따랐다. 작전에 따라 작은 배 한 척을 나포했더니 바로 능창이었다. 잡아서 궁예에게 보내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고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으면서, “해적들이 모두 너를 추대하여 수령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이는 나의 신묘한 계책 때문이다.” 고 으쓱댄 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쳤다.
건화(乾化) 3년(신라 신덕왕 3년, 914) 계유년. 태조가 누차 전공을 세우자 거듭 승진시켜 파진찬(波珍粲) 겸 시중(侍中)으로 삼고 내직으로 불러들였다. 수군의 지휘는 모두 부장 김언(金言) 등에게 맡겼으나 전투에 관련된 군무는 반드시 태조에게 보고한 후 시행하게 했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 가운데 으뜸이 되었으나 태조가 평소 바라던 바가 아니었고 또 참소가 두려워 그 지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관아에 출입하며 국정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했으며 감정을 누르고 행동을 근신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 힘썼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자를 미워했다. 무고한 사람이 참소당하는 것을 볼 때마다 번번이 모두 억울함을 밝혀 구해 주었다. 청주(靑州) 사람 아지태(阿志泰)는 본래 아첨을 잘하고 간특한 자로, 궁예가 참소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같은 고을 사람인 입전(笠全)·신방(辛方)·관서(寬舒) 등을 참소했다. 해당 관청에서 이를 심문하였지만 몇 년 동안 판결을 내리지 못했는데 태조가 즉시 진위18)를 가려내어 아지태의 자백을 받아내자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군부의 장교들과 종친과 공신 및 지략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이 모조리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게 되자 태조는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기를 자원했다.
건화(乾化) 4년 갑술년. 궁예가 수군(水軍)의 지휘관이 현재 지위가 낮아 위엄으로써 적을 제압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를 시중에서 해임하여 다시 수군을 지휘하게 했다. 이에 태조는 정주(貞州)의 포구(浦口)로 가서 전함 7십여 척을 정비하여 거기에 병사 2천 명을 싣고 나주까지 가니 후백제와 해상의 좀도둑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 겁을 내어 옴짝 달싹을 못했다. 태조가 돌아와 순군의 전황이 유리하며 작전이 적절했다고 보고하자 궁예가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내가 거느린 장수들 가운데 왕건과 견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때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없이 꾸며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니 장수나 재상 가운데 해를 입는 자가 열 명 중 팔구 명이나 되었다. 항상 스스로, “나는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19)을 체득하여 부인(婦人)이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도 알아 낼 수가 있다. 내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아 그런 짓을 한 자가 있으면 곧 엄벌에 처하리라.” 하고 뽐냈다. 그리고 석자나 되는 쇠방망이를 만들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불에 달구어 음부에 쑤셔 넣으니 여인네들이 입과 코로 연기를 뿜으며 죽어갔다. 이 때문에 부녀자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극심해 갔다. 하루는 태조가 급한 부름을 받고 궁궐 안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처형당한 사람에게서 몰수한 금은보화와 가재도구들을 점검하고 있다가 성난 눈으로 태조를 노려보며, “경이 어젯밤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왜 반역을 모의했느냐?”고 힐문했다. 태조가 얼굴빛을 변치 않고서 몸을 돌리고 웃으면서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궁예는,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사람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으니 내가 이제 입정(入定)20)하여 경의 마음을 살핀 후 밝혀 주리라.”하고는 곧 눈을 감고 뒷짐을 지더니 한참 동안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그 때 궁예의 곁에 있던 장주(掌奏) 최응(崔凝)이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뜰에 내려와 줍는 척하면서 태조의 곁을 빠르게 지나며 귓속말로, “복종하지 않으면 위태롭습니다.”라고 일러주었다. 태조가 그제서야 깨닫고, “신이 모반한 것이 사실이오니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고 말했다. 궁예가 크게 웃으며, “경은 정직하다고 할 만하다.”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내려주며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했다. 드디어 보병장수(步兵將帥) 강선힐(康瑄詰)·흑상(黑湘)·김재원(金材瑗) 등을 태조의 부장으로 삼아 배 1백여 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로서 위에 망루를 세웠고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태조는 군사 3천여 명을 거느리고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는데, 이 해에 남쪽 지방에 기근이 들어 좀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수자리 사는 군졸들은 모두가 콩을 반이나 섞은 밥으로 끼니를 때웠는데, 태조가 정성껏 구휼하니 그 덕택에 모두 살게 되었다. 과거 태조의 나이 30세 때, 9층 금탑(金塔)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정명(貞明) 4년(918) 3월. 당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어느 날 우연히 저자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헌칠한 용모에 수염과 두발이 희고 머리에는 낡은 관을 썼으며 거사(居士)의 복색으로 왼손에는 바리 3개21)를, 오른손에는 사방 1자쯤 되는 낡은 거울 하나를 들고 있었다. 왕창근더러 자기 거울을 사겠느냐고 묻기에 왕창근이 쌀 두 말을 주고 그 거울을 샀다. 그랬더니 거울 주인은 그 쌀을 가지고 길 따라 가다가 거지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후 회오리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왕창근이 그 거울을 저자의 담벼락에 걸자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에 겨우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글자가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그 글의 내용22)은 다음과 같았다.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23) 아래로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내어 먼저 계(鷄 : 鷄林 즉 신라)를 잡고 뒤에 압(鴨 : 압록강)을 칠 것이니 이것은 운수가 차서 삼갑(三甲 : 三韓의 뜻)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을 일컫도다. 어두움 속에서 하늘에 올라 밝음 속에서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子年)을 만나면 대사를 일으킬 것이며, 종적과 성명을 혼돈 속에 감추었으니 그 혼돈 속에서 누가 진(眞)과 성(聖)을 알리오? 법뢰(法雷)를 떨치고 신전(神電)을 휘두르며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형체를 드러내리. 지혜로운 자는 보고 어리석은 자는 보지 못하나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뿌리며 사람들과 함께 정벌에 나서 때로는 성함을 드러내고 때로는 쇠함을 보이기도 하나 성쇠는 악한 잔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라. 이 가운데 한 마리 용은 아들이 서너 명인데 대를 번갈아 육갑자(六甲子)를 서로 잇게 되리. 이 사유(四維)는 반드시 축년(丑年)에 멸망하고 바다를 건너 와서 항복함은 모름지기 유년(酉年)을 기다려야 하리. 만약 현명한 왕이 이글을 보게 되면 나라와 백성이 태평하고 왕업은 길이 창성할 것이로다. 내가 적은 것은 총 147자라.”
왕창근이 당초 글자가 있는 줄 몰랐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왕창근을 시켜 그 거울을 판 거사를 찾도록 하였으나 한 달이 지나도록 끝내 찾지 못했다. 다만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 발삽사(勃颯寺)의 치성광여래상(熾盛光如來像) 앞에 전성고상(塡星古像)24)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거울 주인과 같고 양손에 바라와 거울을 들고 있었다. 왕창근이 기뻐하며 자세히 그 형상을 아뢰자 궁예가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겨 문인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그 글을 해독하게 했다. 송함홍 등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삼수(三水) 가운데 있는 사유(四維) 아래로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냈다.’라고 한 것은 진한(辰韓)과 마한(馬韓)을 가리킨다. 그리고 ‘사년(巳年) 중에 두 마리 용이 나타나서 하나는 청목(靑木) 속에 몸을 감추고 다른 하나는 흑금(黑金) 동쪽에 형체를 드러내리.’라고 했는데 청목은 송(松)이니 송악군(松嶽郡) 사람으로서 용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왕시중(王侍中)이 왕후의 상을 지녔으니 아마도 이 분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흑금이란 철(鐵)이니 지금 도읍한 철원(鐵圓)을 말한다. 지금 임금이 처음에는 이곳에서 번성하였다가 아마 끝에는 이곳에서 멸망한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먼저 계(鷄)를 잡고 뒤에는 압(鴨)을 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왕시중이 임금이 된 후 먼저 계림(鷄林 : 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왕이 시기가 많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에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며 우리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상의한 후 딴 말을 꾸며 보고했다.
6월 을묘일. 기병장수(騎兵將帥) 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이 몰래 모의한 후 밤중에 함께 태조의 집으로 찾아와 그를 왕으로 추대하겠노라고 말했다. 태조가 단호히 거절하며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인 유씨(柳氏)25)가 손수 갑옷을 가지고 와 태조에게 입히고 여러 장수들이 옹위해 집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리면서, “왕공(王公)께서 이제 정의의 깃발을 드셨다!”고 외치게 했다. 이렇게 되자 뒤질세라 달려오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환호하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 명을 넘었다. 궁예가 그 소식을 듣자 깜짝 놀라며, “왕공이 나라를 얻었다면 나의 일은 다 허사로다!”라며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다가 미복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와 달아나니 나인들이 궁궐을 청소하고 새 왕을 맞이했다. 궁예는 산골짜기에 숨어 이틀 밤을 머물다가 허기가 심해지자 보리 이삭을 몰래 잘라다 먹었다가, 곧 부양(斧壤 :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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