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파상에 일엽주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라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한데 산수간에 나도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니 늙기도 절로 하리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달 돋아온다.
아이야 박주산채일 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샛별 지자 종다리 떴다 호미 메고 사립 나니
긴 수풀 찬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겠다.
아이야 시절 좋을세면 옷이 젖다 관계하랴.
한가한 날에 더욱 한가로움을 탐하여 그 한가로움에서 더욱 한가로운 흥을 일으키는 것도 또한 뜻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서울 장안을 푸른 산이 두르지 않은 것이 아니오, 소조한 절과 한적한 정자가 없는 바 아니지마는 산 하나와 절 한 채와 정자 한 집이 어찌 탐심 있는 사람이 족하다고 할 바랴. 더구나 절기가 여름 중턱에 들려 하니 서늘한 바람이 푸르른 솔잎을 새어나와 촉촉하게 등을 적신 땀을 어느덧 들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마는 이왕이면 푸른 산 흐르는 물이 한꺼번에 있는 것을 바람도 더욱 뜻깊은 일일까 한다.
그것은 한강에서 취하였다. 내 본시 서울 사람이요 또는 다른 시골에 많이 가보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곳 산수를 말할 수 없으매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찌 없을 바랴마는 나로서는 가장 많이 알고 또 가장 인연이 깊은 까닭에 생각 이 그곳으로 먼저 달아나는지라 만일 이 먼저 생각난 것을 그대로 제쳐놓고 다른 곳을 취하였다 하면 입이 없고 귀가 없는 한강이 만일 입과 귀가 있어 듣고 말할 줄을 안다 하면 나의 너무 소홀한 것을 원망삼아 꾸짖을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떻든 첫 번 생각난 한강을 중심으로 나의 생각이 다다르는 다른 곳까지에 잠깐 날아갔다가 또다시 잠깐 날아오는 느낌을 써볼까 한다.
한강은 아직 처녀를 잠깐 넘어설 듯 말 듯한 강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넌지시 혼인은 하여놓고 아직 혼인 잔치를 하지 않은 격이다. 처녀가 못되는 것이 아까웁고 애석하지마는 또는 아직까지 남의 아내가 아주 되지 않았다는 것에 얼마간의 나머지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산이나 물이 들을 곁들여 아직까지 사람의 손이 이르지 못한 곳이 손이 이르른 곳보다 몇 배 이상 더 많은 곳에 어쩌면 더욱 을씨년스러운 맛이 있을는지는 모르지마는 또 한 옆으로는 귀여운 곳이 있다는 것이다.
내 본시 도회생활을 구한다 하면 극도의 도시로 가서 쇳소리 나는 감정을 가진 그네들과 사귀어 보고 싶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심산벽촌이나 해항어촌의 흙내 나는 마음을 가진 이들과 친해 보고 싶고 서울같이 반버들충이는 바라는 바가 아니지마는 운수가 시키는 일이라 하는 수 없이 여기에 붙어 있는 것이라 몸은 여기 있으나 마음이야 어찌 그러하랴, 모든 자연과 모든 형상이 모두 마음을 의지하여 나지 않는 것이 없으매 한강이라 어찌 내 마음에 어그러지는 일이 있으리오. 내가 보고 느낌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것일 것이다.
한강 중턱에 배를 저어간다. 그것도 나 혼자가 아니라 친구 두엇이 같이 탔으매 그리 심심하지도 않고 또 그리 번거하지도 않다. 무르녹은 녹음이 병풍과 같이 한 옆에 둘러섰으면 백설 같은 모래가 또다른 옆에 한없이 깔렸다. 그 가운데 길게 흐르는 물위로 가라앉을 듯 말 듯하게 떠나가는 배(보트)들은 마치 맑게 개인 푸른 하늘에 하나씩 둘씩 반짝이다가 사라지다 하는 별들과 같다.
산에는 나무가 있어야한다. 조선의 산 정조는 소나무에 있는 것이다. 소나무에는 바람이 있어야 그 소나무의 값을 나타내는 것이다. 허리 굽은 늙은 솔이 우두커니 서 있을 때에는 마치 그 위엄이 능히 눈서리를 무서워하지 않지마는 서늘한 바람이 쏴아 하고 지나가면 마디마디 가지가지가 휘드러져 춤을 추는 것은 마치 식물장삼의 긴 소매를 이리 툭 치고 저리 툭 치며 신이 나게 춤을 추는 노승과 같아 몸에 넘치는 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여름 정조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강 연안에는 솔이 적다. 있다 해야 아직 나이가 적은 어린 솔들이 아니면 아카시아나 포플라니 아는 이로서는 적적한 일이다.
배는 또다시 동작강을 향하고 올라간다. 한강을 가로지른 시뻘건 다리가 물과 하늘을 구분하여 놓은 듯 공중에 뜬 것도 같고 물에 잠긴 것도 같다. 그 위로는 삼개 서강이 보일 듯 말 듯한데 물 건너 백사지 넓은 들을 앞에 두고 두어 개 봉우리가 떴다 가라앉았다 마치 바다에 뜬 섬과 같아서 가슴이 저절로 넓어지는 듯하고 한없는 그 쪽으로 마음을 끌어가는 것 같다. 나무 없는 산이 매 바위가 있고 풀 없는 들이매 모래가 있다.
검은 것이 바위요 흰 것은 모래, 그 가운데 푸른 것이 물이다.
물은 바위가 있어야 물의 값이 나타나는 것이니 천 길이나 높은 곳에서 만 길이나 낮은 곳으로 떨어져 그것이 다시 용솟음쳐 흐르는 곳에 백룡이 되고 청룡이 되어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의 박연, 아메리카의 나이아가라와 같이 장관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며 이 돌 틈과 저 돌 사이로 졸졸졸 스며들다 새어나와 만수청산에 경개 하나를 더할 수도 있는 것이며 한강과 같이 울퉁불퉁 나왔다가 들어간 바위는 흐르는 물을 감돌아 들게 하여 은구슬 진주구슬이 한꺼번에 뛰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강가에 우뚝 솟아 있는 이름 없는 바위에는 피서차 나왔는지 멀리서 보이지는 않으나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입 속에서 들듯 말듯 소리를 읊고 있다. 라인강의 로렐라이? 그러나 내 배는 깨지지 않았다.
배는 동작리를 향하여 올라갔다. 밀리는 물결이 젓는 올(oar)을 세차게 밀어서 힘은 몇 갑절 더 드나 배는 그 반대로 몇 갑절 더 올라간다. 얼마 동안은 안개 같은 노랫소리가 물 위에 떠돌더니 지금 그것조차 사라지고 사면은 다만 산 물 모래사장뿐인데 머리 위로 뭉게뭉게 얽힌 흰 구름이 모란 봉우리같이 피어오른다. 저쪽 산언덕에서는 한가히 풀을 뜯는 누런 소 한 마리가 고삐를 풀 위로 끌면서 소리쳐 동무를 부르고 있다. 이쪽 강가에는 주인 없는 나룻배 하나가 한가히 매어 있고 저 앞 동리에서는 붉은 옷 입은 촌색시가 물 길어 가지고 집으로 향해 간다. 난데없는 바람이 휙 스쳐 지나갈 때 흐르던 땀이 훨쩍 식는다. 다만 한적한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배가 돌아 나오니 이미 해가 서산에 걸리었다. 물결 주름과 주름 사이에는 은을 녹여 부은 듯 눈이 부시게 햇볕이 쪼이는데 그 위를 우리 배는 미끄러져 간다. 낚싯배 한 척이 가로 떠 있다. 손뼉 같은 생선이 금빛 나는 비늘로서 햇빛을 희롱하며 낚시 끝에 매달려 올라왔다. 그 배에서는 기운찬 소리가 떠올라 왔다.
해가 이미 지매 하늘은 저녘놀로 오색칠을 하였는데 저쪽 숲에서는 갈매기가 난다. 다리 위로는 기차가 들어온다. 사면을 보니 같이 떴던 배가 하나씩 둘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어느덧 남은 것은 우리 배와 낚시질 배. 다시 달 맑은 날을 기약하고 육지에 오르자 날은 아주 어둡고 강 건너로 등불만 반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