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생각
病床[병상]의 생각
사람!
사람!
그 사람이 무엇인지 알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내가 모르고, 나의 누구임을 당신이 모르는 이것이 혹은 마땅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당신이 언제 보았다고, 언제 정이 들었다고 감히 안다 하겠읍니까. 그러면 내가 당신을 한개의 우상(偶像)으로 숭배하고, 그리고 나의 모든 채색(彩色)으로 당신을 분식(粉飾)하였든 이것이 또한 무리 아닌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물론 나의 속단(速斷)입니다. 허나 하여간 이런 결론을 얻은걸로 처 두겠읍니다.
나는 당신을 진실로 모릅니다. 그러기에 일면식도 없는 당신에게, 내가 대담히 편지를 하였고, 매일과가치 그회답이 오기를 충성으로 기다리였든 것 입니다. 다 나의 편지가 당신에게 가서 얼만한 대접을 받는가, 얼마큼 이해될수 있는가, 거기 관하야 일절 괘념하야 본일이 없었읍니다. 그러던차 당 신에게서 편지를 보내시는 이유가 나변(那邊)에 있으리요.
이런 질문이 왔을때 나는 눈알을 커다랗게 뜨지 않을수 없었읍니다. 당장에 나는 당신의 누구임을 선뜻 본듯도 싶었읍니다.
우리는 사물(事物)을 개념(槪念)할때 하나로 열을 추리(推理)하는 것이 곧 우리의 버릇입니다. 예전우리의 선배가 그러하였고 또 오늘 우리와같이 살고있는 모든 사람이 그러합니다. 내가 그 질문으로 하여금 당신의 모형을 떠 온것이 결코 그리 큰 잘못은 아닐겝니다.
나는 당신을 실로 본듯도 하였읍니다. 나의 편지 수통에 간신히 (그 이유가 나변에 있으리요) 이것이 즉 당신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배후의 영리하신 당신의 지혜를 보았읍니다. 당신은 나에게서 연모(戀慕)라는 말을 듣고 싶었고, 겸하야 거기 딿으는 당신의 절대가치(絶對價値)를 행사하고 싶었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요구에서 좀 먼 거리에 있는 자신을 보았읍니다. 우울할때, 고적할때, 혹은 슬플때 나는 가끔 친한 동무에게, 나를 이해하야 줄수 있는 동무에게 편지를 씀니다. 허나 그것은 동성(同性)끼리의 거래가 아니냐고 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는 몸이 아플때, 저 황천으로 가신 어머님이 참으로 그리워집니다. 이건 무얼로 대답하시렵니까. 모자지간의 할수없는 천륜이매 이와는 또다르다 하시겠읍니다. 그럼 여기에 또한가지 좋은 실례(實例)가 있읍니다. 우리는 맘이 울적할제 벙싯벙싯 웃기는 옆집 애기를 가만히 디려다 보다가는 저마저 방싯하고 맙니다. 이것은 어쩐 이유겠읍니까.
다시 생각하면 우리가 서루서루 가까히 밀접(密接)하노라 앨쓰는 이것이 또는 그런 열정을 필연적으로 갖게되는 이것이 혹은 참다운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동시에 궁박한 우리생활을 위하야 이제 남은 단 한길이 여기에 열려있음을 조만간 알듯도 싶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머리우에 늘려있는 복잡한 천체(天體), 그것이 제각기 그 인력(引力)에 견연(牽連)되어 원만히 운용되어 갈수 있는것에 흡사하다 할는지요. 그렇다면 이 기능(機能)을 실지 발휘하는걸로, 언어를 실어가는 편지의 사명이라 하겠읍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것이 나의 번뜻은 아니로되, 다만 당신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로 단출히 연모한다 하였읍니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리 공중으로 열아문길식이나 치올려뜨신 당신의 태도를 보았읍니다. 나는 또 다시 눈알이 커다랗게 디굴려지지 않을수 없었읍니다. 여성이란 자기자신이 남에게 지극히 연모되어 있음을 비로소 느꼈을때, 어쩌면 그렇게 무작정 올라만 가려는가고 부질없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 하나를 보는걸로 모든 여성을 그 틀에 규정(規定)하여서는 안될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당신에게 넉히 실레가 될겝니다. 마는 나는 서슴지 않고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야 보았습니다.
——— 근대식으로 제작(制作)되어진 한덩어리의 예술품(藝術品)———
왜 내가 당신을 하필 예술품에 비하였는가, 그 까닭을 아시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마는 여기서 별반 큰 이유가 있을것도 아닙니다.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든 그 동기를 따저보면 내가 작품을 쓸때의 그 동기와 조금도 다름이없읍니다. 만일 그때 그편지를 않썼드라면 혹은 작품하나를 더 갖게 되였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당신에게 잘 소통되지 않을겝니다. 그렇다면 따로히 얼른 이해하기 쉬운 이유를 드는것이 옳을듯 싶습니다.
연애는 예술이라든 당신의 그 말슴, 연애로 하야금 인류(人類) 상호결합(相互結合)의 근본윤리(根本倫理)로 내보인 나의 고백을 불순하다 하였고 더 나아가 연애는 연애를 위한 연애로 하되 항여나 다른 부조건(副條件)이 딿아서는 안되리라 그 말슴이 더 큰 이유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당신의 이 말슴을 듣고 전후 종합하야 문득 생각나는 무엇이 있었읍니다. 현재 우리사회(社會)의 일부를점령하고 있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즉 그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없는 일을 나의 생각만으로 부합시킨것이 아닐듯 싶습니다. 실지에 있어, 그들과 당신은 똑 가치 유복한 환경에서 똑같은 궤도(軌道)를 밟아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쪽이 저쪽의 비위를 마처가며 기생(寄生)되어 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당신은 학교에서 수학을 배웠고, 물리학을 배웠고, 화학을 배웠고, 생리학을 배웠고, 법학을 배웠고, 그리고 공학, 철학등 모든 것을 충분히 배운 사람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울만치 발달된 근대과학(近代科學)의 모든 헤택(惠澤)을 골고루 즐겨오는 그 사람들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근대과학을 위하야 그 앞에 나아가 친히 예하야, 참으로 친히 예하야 그 영예를 감하치 않아서는 않될겝니다. 왜냐면 과학이란 그 시대, 그 사회에 있어 가급적(可及的) 진리(眞理)에 가까운 지식을 추출(抽出)하야 써 우리의 생활로 하야금 광명으로 유도(誘導)하는 곳에 그 사명이 있을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지 않을수 없게 됩니다. 그럼 근대과학이 우리들의 생활과 얼마나 친근(親近)하였든가, 이것입니다. 이 대답으로 나는 몇가지의 예(例)를 들어 만족할 밖에 없읍니다.
근대과학은 참으로 놀라울만치 발달되어 갑니다. 그들은 천문대를 세워놓고, 우리가 눈앞에서 콩알을 고르듯이 천체를 뒤저봅니다. 일생을 받처 눈코 뜰새없이 지질학(地質學)을 연구합니다. 천풍으로 타고난 사람의 티를, 혹은 콧날을 임의로 느리고 주립니다. 근강한 혈색(血色)을 창백히 만들고서 조석을 피하고 앨 키웁니다. 찌저깨비로 사람을 만들어 써먹노라 괜스리 속을 태웁니다. 소리없이 공중으로 떠보고저하야 그 실험(實驗)에 떨어저 죽습니다. 두더지가치 산을 파고 들어가 금을 뜯어내다가 몇십명이 그속에 없는듯이 묻힙니다. 물속으로 쫓아가 군함을 깨트리고 광선으로 사람을 녹이고, 공중에서 염병을 뿌리고 참으로 근대과학은 놀라울만치 발달되어 있읍니다.
이러한 고급지식(高級知識)이 우리 생활의 어느 모로 공헌(功獻)되어 있는가, 당신은 이걸 아십니까. 내가 설명하지 않어도 당신은 얼뜬 그걸 이해하여야 될겝니다. 과학자 자신, 그들에게 불만을 묻는다면 그 대답이 취미(趣味)의 자유(自由)를 말할게고, 더 이어 과학에 있어 연구대상(硏究對像)은 언제나, 그들의 취미여하에 의하야 취택할 수 있다 할겝니다. 다시 말하면 과학을 위한 과학의 절대승(絶對性)을 해설하기에 그들은 너머도 평범한 태도를 취할겝니다.
과학에서 얻은 진리를 리지권내(理知圈內)에서 감정권내로 옮기게, 그걸 대중에게 전달(傳達)하는것이 예술이라면 그럼 우리는 근대 과학에 기초(基礎)를 둔 소위 근대예술이 그 무엇인가를 얼른 알것입니다. 예술, 하여도 내가 종사하야 있는 그 일부분, 문학에 관하야 보는것이 편할듯 싶습니다. 우선 꽤 많이 물의(物議)되어 있는 신심리주의문학(新心理主義文學)부터 캐여 보기로 하겠읍니다.
예술의 생명을 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간판(看板)으로 되어 있는것이 그 형식(形式), 즉 기교(技巧)입니다. 마는 오늘 그들의 기교란 어느 정도까지 모든 가능(可能)을 보이고 있읍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더 나갈 길은 당연히 괴벽하야진 그취미(趣味)와 병행해야 예전보다도 조곰 더 악화(彎曲)된 지엽적(枝葉的) 탈선(脫線)입니다. 그들은 괴망히도 치밀(緻密)한 묘사법(描寫法)으로 인간심리(人間心理)를 내공(內攻)하야, 이내 산사람으로 하여금 유령(幽靈)을 만들어 놓는걸로 그들의 자랑을 삼습니다. 이 유파의 태두(泰斗)로 지칭되어 있는 쩨임스쪼이스의 「율리시즈」를 한번 읽어보면 넉넉히 알수 있을겝니다. 우리가 그에게 새롭다는 존호(尊號)를 붙이어 대우는 하였으나, 다시 뜯어보면 그는 고작 졸라의 부속품(附屬品)에 더 지나지 않음을 알것입니다. 졸라의 걸작(傑作)인 「나나」는 우리를 재웠고, 그리고 쪼이스이 대표작(代表作), 「율리시스」는 우리로 하여금 하품을 연발(連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졸라와 같은 흉기(凶器)로 한 과오(過誤)를 양면(兩面)에서 범(犯)하고 있는것입니다.
어느 누구는 예술의 목적(目的)이 전달(傳達)에 있는가, 표현(表現)에 있는가, 고 장히 비슷한 낯을 하는이도 있읍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먹기 위하야 사는가, 살기 위하야 먹는가, 하는 이 우문(愚問)에 지나지 안습니다. 표현이라 원래 전달을 전제(前提)로 하고야 비로소 그 생명이 있을겝니다. 다시 말하면 그결과에 있어 전달을 예상하고 게략(計略)하야 가는 그 과정(過程)이 즉 표현입니다.
그러나 오늘 문학의 표현이란 얼마나 오용(誤用)되어 있는가, 를 내가 압니다. 그들이 갖은 노력을 경주(傾注)한 치밀한 그묘사가 얼뜬 보기에 주문의 명세서(明細書)나 혹은 심리학 강의(講義), 좀 대접하야 육법전서(六法全書)의 조문해석(條文解釋)같은 지루한 그 문짜만으로도 넉히 알수 있으리다. 예술이란 자연의 복사(複寫)만도 아니려니와 또한 자연의 복사란 그리 쉽사리 되는것도 아님니다. 그렇게도 사실적(寫實的)인 사진기(寫眞機)로도 그 완벽(完璧)을 기차 못하겠거늘, 하물며 어떼떼의 문짜로 우리인간의 복사란 너머도 심한 농담인듯 싶습니다.
좀더 심악한건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標榜)하고 함부루 내닿는 작가입니다. 이것은 바루 당신의 연애를 위한 연애와 조곰도 다를 곳 없는것이니 길게 설명하지 않어도 좋을겝니다. 그들은 썩 호의(好意)로 보아 중학생의 일기문(日記文)같은 작문을 내여놓고, 그리고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의 미명(美名)으로 그걸 알뜰이 미봉(彌縫)하러드는 여기에는 실로 웃지, 못할것이 있을줄 압니다. 그들의생각에는 묘사의 대상여하(對象如何)를 물론하고, 또는 수법(手法)의 방식여하(方式如何)를 물론하고 오로지 극도로 뻗인 치밀한 기록(記錄)이면 기록일스록 더욱더 거기에 문학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작품이 예술품이라기보다는 먼저 그 자신이 정말 예술가(藝術家)가 아님을 말하는 것에 더 나오지 못합니다. 마치 그 연애가 사랑이 아니라기보다는 먼저 당신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아닌것과 비등(比等)할겝니다. 당신이 화려한 그 화장과 고급적인 그 교양(敎養)을 남에게 자랑할때 그들은 자기의 작품이 얼마나 예술적인가, 다시 말하면 인류생활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를 남에게 자랑하고 있는것입니다. 그 결과는 애매한 코날을 잡아 늘리기도 하고, 또는 사람대신의 기게가 작품을 쓰기도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술가적 열정(熱情)이 적으면 적을스록 좀더 높은 가치의 예술미(藝術味)를 갖게 되는것입니다.
예술가에게는 예술가다운 감흥이 있고 그감흥은 표현을 목적하고 설레는 열정이 딿읍니다. 이 열정의 도(度)가 강하면 강할스록 비레로 전달이 완숙(完熟)하야 가는것입니다. 그리고 예술이란 그전달정도와 범위에 딿아 그 가치가 평가(評價)되어야 할겝니다.
기게에는 절대로 예술이 자리를 잡는 법이 없읍니다. 예술가란 학교에서 공식적(公式的)으로 두드려 만들수가 없다는 말이 혹은 이를 두고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든 구실(口實)이 다하였을때 마즈막으로 새롭다는 문자를 번적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미가 무엇인지, 그들의 설명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키가 어렵습니다. 새롭다는 문짜는 다만 시간과 공간의 전환(轉換)만에 그칠것이 아니라, 좀 더 나아가 우리 인류사회에 적극적(積極的)으로 역할(役割)을 가져오는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할것입니다. 얼른 말하면 쪼이스의 「율리시스」보다는, 저, 봉근시대의 소산이던 홍길동전(洪吉童傳)이 훨적 뛰어나게 예술적 가치를 띠이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여기에서 오늘의 예술이라는것이 무엇인가, 를 자세치는 않으나마 얼추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따라 당신의 연애는 예술이라니, 혹은 연애는 결코 불순하지 말지로되 다만 연애를 위한 연애로 하라니, 하든 그말이 어디다 근저를 두고 나온 사랑인가도 대충 알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겸하야 근대예술이 기계의 소산이 동시에, 당신이라는 그 인물이 또한 기계로 빚어진 한 덩어리의 고기임을 충분히 알리라고 생각합니다.
——— 근대식으로 제작되어진 한덩어리의 예술품 ———
내가 이렇게 당신을 불렀든것도 얼마쯤 당신을 대접하야 있는걸 알아야 될 겝니다. 당신은 행복인듯 싶이 불행한, 참으로 불행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자기의 불행을 모르고 속없이 주짜만 뽑는 사람을 보는이만치 더 딱한 일은 없을듯 합니다. 육됴풍월(肉桃風月)에 날 새는줄 모르는 그들과 한가지로, 요지경(瑤池鏡)바람에 해 지는줄 모르는 당신입니다.
당신에게는 생명이 전혀 없읍니다. 그 몸에서 화장(化粧)과 의장, 혹은 장신구를 벗겨내고 보면 거기에 남는것은 벌건, 다만 벌건, 그렇고도 먹지 못하는 한 육괴(肉塊)에 더 되지 않을겝니다.
그러나 재삼숙고(再三熟考)하야 볼진댄 당신은 슬퍼할것이 없을듯 싶습니다. 웨냐면 당신의 완전한 사람이 되고 못되고는 앞으로 당신이 가질 그 노력여하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순전히 어지러운 난장판일줄 압니다. 마는 불행중에도 행이랄가, 한쪽에서는 참다라운 인생(人生)을 탐구하기 위하야 자기의 몸까지도 내여버리는 아름다운 히생이 쌓여감을 우리가 봅니다. 이런 시험이 도처(到處)에 대두(擡頭)되어 가는 오늘날 우리가 처할 길은 우리 머리속에 틀지어 있는 그 선입관부터 우선 두드려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새로히 눈을떠, 새로운 방법으로 사물을 대하여야 할것입니다.
그러나 그새로운 방법이란 무엇인지 나역 분명히 모릅니다. 다만 사랑에서 출발한 그 무엇이라는 막연한 개념이 있을뿐입니다. 사랑, 하면 우리는 부질없이 예수를 연상하고 또는 석가여래(釋迦如來)를 곳잘 들추어냅니다. 허나 그것은 사랑의 일부발현(一部發現)은 될지언정 사랑 거기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할겝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전혀 알길이 없읍니다. 우리가 보았다는 그것은 결국 그 일부일부의 극히 조꼬만 그일부의 작용(作用)밖에는 없읍니다. 그리고 다만 한가지 믿어지는것은 사랑이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있어, 좀더 많은 대중(大衆)을 우의적으로 한끈에 뀔수있으면 있을스록 거기에 좀더 위대한 생명을 갖게되는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최고이상(最高理想)은 그 위대한 사랑에 있는것을 압니다. 한동안 그렇게도 소란히 판을 잡았든 개인주의(個人主義)는 니체의 초인설(超人說) 마르사스의 인구론(人口論)과 더부러 머지 않어 암장(暗葬)될 날이 올겝니다 그보다는 . 크로보로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이나 맑스의 자본론(資本論)이 훨신 새로운 운명(運命)을 띠이고 있는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여자에게 염서(艶書)아닌 엽서를 쓸수가 있고, 당신은 응당 그 편지를 받을 권리조차 있는것입니다. 나의 머리에는 천품으로 뿌리 깊은 고질(痼疾)이 백여 있읍니다. 그것은 사람을 대할적마다 우울하야지는 그래 사람을 피할려는 염인증(厭人症)입니다. 그 고질을 손수 고처보고저 판을 걷고 나슨것이 곧 현재의 나의 생활이요, 또는 허황된 금점에서 문학으로 길을 바꾼것도 그 이유가 여기에 있을것입니다. 내가 문학을 함은 내가 밥을 먹고, 산뽀를 하고, 하는 그 일용생활과도 같은 동기요, 같은 행동입니다. 말을 바꾸어보면 나에게 있어 문학이란 나의 생활의 한 과정입니다.
그러면 내가 만일에 당신에게 편지를 안썼더라면 그 시간에 몇편의 작품이 생겼으리라든 그 말이 뭣인가도 충분히 아실줄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을 없우이여긴 기억은 없읍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건 당신을 위하야 슬픈 일임에 틀림 없을겝니다. 나는 다만 그 위대한 사랑이 내포(內包)되지 못하는 한, 오늘의 예술이 바루 길을 들수없고, 당신이 그걸 모르는 한, 당신은 그 완전한 사람을 이내 모르고 말리라는 그것에 지나지 않을겝니다.
그럼 그 위대한 사랑이란 무엇일가. 이것을 바루 찾고 못찾고에 우리 전 인류의 여망(餘望)이 달려있음을 우리가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