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삼인
등장인물
[편집]- 김원경(金原卿) / 고등여학교장
- 길춘식(吉春植) / 헌병보조원
- 공소사(孔召史) / 여의(女醫)
- 이옥자(李玉子) / 여교사
- 정필수(鄭弼秀) / 학교 하인
- 하계순(河桂順) / 의사
- 박원청(朴原淸) / 회계
- 업동모(業童母) / 미점(米店)주인여자
- 전경선(田景善) / 상노(床奴)
- 치삼(致三) / 찬상(饌商)
- 설월(雪月) / 조방군이[1]여자
1장
[편집]여교사 이옥자 본저
무대에는 이옥자의 집 방안이요, 그 부엌에는 밥짓는 제구와 소반 그릇 등들이 널펴있는데, 부엌에서는 이옥자의 남편되는 정필수가 불도 들이지 아니하는 아궁이에서 밥을 짓느라고 부채질을 하고 있다.
- 정필수
- 아이참, 세상도 괴악하고, 강원도 시골구석에서 국으로 가만히 있어서, 농사나 하고 들어 업드려 있었으면 좋을 것을 이게 무슨 팔자란 말이오. 서울을 올라올제. 우리 내외가 손목을 마주 잡고 와서 무슨 큰 수나 생길 줄 알고, 물을 쥐어 먹어 가면서 내외가 학교에를 다니다가 막 이월에 졸업이라고 하여서 어떤 학교의 교사 시험을 치르었더니, 운수가 불행하느라고 마누라는 급제를 하여서 교사가 되고, 나는 낙제를 하여서 그 학교 하인이 되었으니 이런 몰골이 어데 있나. 학교에만 가면 우리 마누라까지 나더러 하인 하인 부르면서 말 갈 데 소 갈 데 함부루 시부름을 시키고, 하도 고단하여 할 수 없이 집에서 앓고 있을 때는 이렇게 밥이나 짓고 있으니, 이런 망할 놈의 팔자가 어데 있나, 계집을 이렇게 상전같이 섬기는 놈은 나밖에 없을 걸. (하며 중얼거리고 앉아 있는데 쌀집 주인 여편네 업동어머니가 달음질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며)
- 업동모
- 아이고 무얼 하시오. 서방님이 부엌에서 밥을 다 지시네. (하며 들어오는데, 정필수는 창피하고 부끄러워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시침을 뚝 떼이며)
- 정필수
- 응, 업동어멈인가. 오늘은 우리 마누라란 사람이 학교에 가서 입때까지 아니 오네그려.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금 내가 밥짓는 연습을 하고 있는 중일세. 그러나 자네 집 쌀은 왜 그렇게 문내가 나나, 응.
- 업동모
- 그럴 리가 있나요. 언제든지 댁에 가져오는 쌀은 상상미로 가져 오는 데요.
- 정필수
- 아, 이게 상상미야. 좀 이 쌀 내음새를 맡아 보게. (하며 솥뚜껑을 열어다가 업동어미의 코에 콱 대니, 업동모는 내음새를 맡아보고,)
- 업동모
- 아이고머니, 서방님도 이것은 쌀이 언짢아서 그러합니까, 쌀을 잘 일지를 못해서 그러하지요. 그게 겻내올시다. 문내가 아니라.
- 정필수
- 옳지, 그래서 날마다 우리 마누라가 나더러 밥 잘 못 짓는다고 핀잔을 주었구먼.
- 업동모
- 아, 그러면 진지는 서방님이 노상 지으십니까.
- 정필수
- 아니, 날마다 내가 밥을 짓는 것이 아니라, 흑간 가다가 심심하면 운동 겸하여서 하는 것이지.
- 업동모
- 아이, 댁 아씨는 남편 양반도 잘을 얻으셨지, 어쩌면 심을 그렇게 덜어 주실까.
- 정필수
- 천만에, 나는 잘 얻지도 못하였어. 마누라라고 밤낮 서방을 나무라기만 하니까 아주 귀치 않아 못 견디겠어.
- 업동모
- 아, 그것은 서방님이 너무 순진하시니까 그렇지요. 가끔가끔 좀 사나이 행티[2]를 하시구려.
- 정필수
- 응, 내 사정을 누가 알겠나. 제법 서방인 체하고 무슨 말을 하였다가는 첫째 코 아래 구녕에 들어갈 것이 있어야지.
- 업동모
- 네? 무엇이야요, 코 아래 구녕에 들어갈 것이 없어요? 정말 그러하시면 우리 쌀값은 언제 받나요. 쌀값을 아니 주시구 오래 가면, 우리도 코 아래 구녕에 뫼실 쌀을 못 드리겠는데요---
- 정필수
- 그게 무슨 소린가. 그래서야 쓸 수가 있나, 자연 우리 마누라가 학교 교사를 다니게 된 이후로는 의복에도 돈이요, 친구 추축[3]하는 데도 돈이요, 집안일을 내버려두고 저는 쏘단기면서 나더러는 일상 밥이나 지으라고 하고, 혹시 잘못하면 꾸지람은 하고, 나도 정말 못 견디겠네. 이 불쌍한 내 사정도 좀 생각하여 주어서 이번 월급날까지만 좀 참아주게.
- 업동모
- 공연히, 그런 실없는 말씀 마셔요. 댁에서는 내외분이 다 학교 교사를 단기시면서 두 분이 다 월급을 타시면서 그러셔요. 남의 돈을 갚지 아니하실 작정이신 게지.
- 정필수
- 아니야. 그럴 리가 있나. 진정 말일세 마는 나는 아직 교사직위까지를 가지 못하였단 말이야.
- 업동모
- 네에 그럼, 서방님은 날마다 학교에 아니 가시오. 요전에 말씀이 내외분이 교사하는 시험을 치렀다고, 교사가 되면 월급을 탈 터이니 쌀값은 그때 주마하고 하시지 아니 하였소.
- 정필수
- 응, 옳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저간에 내가 그렇지 못한 연고가 있어서 교사를 하지 않었지.
- 업동모
- 그러면, 교사시험을 보시다 떨어지신게구려.
- 정필수
- 그, 그저, 그렇다면 그렇고, 저렇다면 저렇고---
- 업동모
- 아이그머니나, 나는 도무지 그런 줄은 몰랐지. 아이 별 양반도 다 있지, 마누라에게 얹혀 사는 이가 어데 있소. 여편네 뜯어먹고 있는 이에게 나는 외상 줄 수가 없어요.
- 정필수
- 아아니, 천만에, 내 말을 다 듣고 말을 하란 말이야. 나도 사내인데 아무리기로 계집을 뜯어먹고 살까. 나도 학교의 교사는 아니라도, 그래도 다달이 그 학교에서 상당한 월급을 타는 사람인데, 그러나---
- 업동모
- 네에 그러면, 서방님은 그 학교에서 무엇을 하고 월급을 타시오.
- 정필수
- 응, 나 하는 일 말인가. 내 사무야말로 참 대단히 분주하지. 안팎에 쓰레질도 하고, 찻물도 끓이고, 손이 오면 명함도 전하여 주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심부름도 대신하여 주고, 한두 가지가 아니지. 내 사무같이 분주할까. 도트러 말하면 내 사무는 위생과 외교내치(外交內治) 를 겸한 것이지.
- 업동모
- 아이고, 무슨 사무가 그리 야단스러워요, 그러면 그 학교 하인이구려. 다를 것이 무엇 있나요.
- 정필수
- 이를테면, 그저 그러하지---
- 업동모
- 아이고, 망측해라. 아씨는 선생님이고 서방님은 하인이라니. 아이고, 그 세상은 거꾸로 되었지. 그런 일이 어디 있어. 아이 망측해라. 그러니깐 서방님이 밥짓고 꾸지람 들어도 할 말 없겠소.
- 정필수
- 그저, 자네까지 이렇게 구박을 주면 어찌하나. 정말 서러워 못 견디겠네. 그러나 내 사세가 아까 말한 대로 이 모양이니까 암만하여도 내 힘으로는 외상값을 갚지 못하겠으니, 이따라도 주인이 들어오거든 내가 말을 잘 하여서, 이 그믐 안으로는 다 끊게 할 것이니 어서 가게. 응.
- 업동모
- 아, 그러면 진작 그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암만 졸라야 피천대푼 나올 도리 없습니다그려. 그럼, 요 다음날, 아씨가 아씨가 아니 주인양반이 계시거든 와 말씀하지.요. (하며, 업동모가 일어서려 하는 것을 다시 불러 앉히고,)
- 정필수
- 자네 지금 집으로 가나?
- 업동모
- 네, 집으로 가지요. 그럼 어딜 가요.
- 정필수
- 그러면 요 앞에 칠보네 장국밥집을 지나지 아니하나, 아마 그리 지내어 가겠지.
- 업동모
- 암, 그리 해서 가지요.
- 정필수
- 그러면 불안하지만은 청 하나 할 것이 있네. 다른 게 아니라, 그 칠보네 집에 가서, 산적 스무 꽂이만 하고, 장국에 밥은 넣지 말고 국수나 좀 놓고, 홉살하고, 맛난이 많이 쳐서, 따끈따끈하게 한 그릇만 하고 가져오라고 일러 주게.
- 업동모
- 압다, 남의 외상값은 아니 갚고 입치레는 되우 하십디다.
- 정필수
- 아니야, 그것은 내가 먹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마누라가 들어오면 저녁 반찬을 하려니까 그렇지. 내 손으로 만든 반찬은 도무지 맛이 없다니까 그리하는 걸세. 수고는 되지마는 어찌하나, 가는 길에 잠깐 들러 주게나그려. 너무 불안하이.
- 업동모
- 내가 언제 댁에 심부름하러 왔소. 외상값 받으러 왔지. 그러나 과히 힘드는 일이 아니니까 말은 이르고 가오리다. 서방님의 신세야 참 부럽기도 하오.
- 정필수
- 그렇지 어찌하나, 제 팔자를 그렇게 타고난걸.
- 업동모
- 압다, 속은 퍽이나 유하십니다. 그렇기나 하기에 새기고 살겠지만---
업동모는 부대 하수(下手)[4]로 들어간 후, 정필수는 업동모하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밥을 눌려붙인 모양으로 마누라에게 꾸지람 듣겠다고 허둥지둥 하는데, 하나멋지(花道)[5]로부터 정필수의 아내 고등여자학교 교사 이옥자(21,2세) 가 검은 치마에 하사시가미하고 책보를 들고 학교로부터 오는 대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 이옥자
- 아이고 밥탄 내야. (코로 내음새를 맡아 가며)
- 정필수
- 에구 언제 오십니까, 누룽지를 좋아하시기에, 조금 밥을 눌렀지요.
- 이옥자
- 밥을 눌리면 밥이 준다고 해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려. 예참 말도 안 듣지.
- 정필수
- 그저--- 잠깐--- (머리를 쓱쓱 긁으며)
- 이옥자
- 그저--- 잠깐이 다 무엇이야, 어서 이 구두나 벗겨 주어요. 어서.
- 정필수
- 네에.
- 이옥자
- 네에 네만 하지 말고 어서 신을 벗겨 주어야지.
(신을 벗겨주매 이옥자는 책상앞 방석위에 앉으며)
- 이옥자
- 내가 지금 들어오느라니까 어떤 계집년 하나가 우리집에서 나가니 그년은 웬년이야. 내가 집에 없을 때면 모든 못된년을 끌어다가 지랄 발광을 하니까 밥 아니라 옷은 안 태울까.
- 정필수
- 그것 무슨 소리야, 내가 아무렇기로 그럴 리야 있나. 그 계집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요 앞에 싸전장이 계집인데, 쌀 외상갑 받으러 왔던 길이야요. 공연히 자세 아지도 못하고 남만 나무라네그려.
- 이옥자
- 그럼, 쌀값은 입때까지 안 주었소.
- 정필수
- 갚고 말고--- 당초에 할 수가 있어야지. 지난 달 월급은 알금 자네--- 아, 아니 선생님 옷에다 디밀어 버리고, 어떻게 한다는 수가 있습니까.
- 이옥자
- 그래도 그것을 어떻게라도 해서 주지 않고---
- 정필수
- 어떻게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야?
- 이옥자
- 원, 사람도, 지금 나이 삼십에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세음을 그렇게 몰라서 어찌한단 말이오.(대갈일성)
- 정필수
- 아무리 세음을 잘 알기로 없는 돈으로 외상을 어떻게 갚는단 말이오.
- 이옥자
- (그러할 듯이) 그러면,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하지요.
- 정필수
- (옳다, 언제는 내가 이겼으니 들이대어 주겠다는 모양으로) 내가 그리게 아까부터 하는 말이 그 말이지. 저는 밤낮 편하기만 하구서, 구차한 살림은 날더러만 하라니, 이놈은 어떻게 하라고 그리 하나 응, 여보게.
- 이옥자
- (별안간에 성이 잔뜩 나서) 날더러 저가 무엇이고, 여보게가 무엇이야. 언감이 아래위 입술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 선생과 하인의 구별을 좀 생각해야지.
- 정필수
- 네에, 그저 잘못했습니다.
- 이옥자
- 그러나 오늘은 학교에 와서 심부름도 아니 하고 팔자 좋게 집에 들업드렸어? 무슨 까닭으로,
- 정필수
- 날마다 잔심부름도 하많아서 고단하기에 오늘은 하루 쉬려고 그래서 안 갔지요. 그리고 아무리 하인이기로 그저 노오 하인 하인 하고 부르니까 창피해서---
- 이옥자
- 하인이니까 하인이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대사인가. 창피하다는 것은 다 무엇이야. 아이고, 꼽살스러워라. 그리고 밥 뜸들 동안에 매일 하는 일이 공부를 해야지요. 어서 국어독본을 이리 가져오. 내 가르쳐 줄게.
- 정필수
- 그 공부는 제발 밥 먹고 나서 밤에 합시다. 누가 오더라도 남부끄럽지 않습니까.
- 이옥자
- 그렇게 되지 않은 부끄러운 생각부터 있으니까 공부가 늘지 않지. 선생님이 무엇이라고든지 분부를 내리면 네 하고 고분고분해야지, 왜 이리 방패막이를 하고 있어. 못된 버릇도 다 하네.
- 정필수
- 네에. (하릴없이 일어서서 책을 가지러 가는 모양으로 가면서 혼자말) 이런 제기, 남의 집에서는 내외가 밥 먹을 제 같이 겸상하여서 정다이 권커니 자커니 하고 먹는데, 이놈의 팔자는 무엇인지를 모르겠네, 계집이라고 계모인지도 모르지. 까닭을 알지 못하겠네 그려.
- 이옥자
- (그 말을 잠깐 듣고) 이애, 하인아, 교사를 향하여서 계모 같은 계집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버릇 없는 소리야.
- 정필수
- (제발 비는 모양으로) 여봅시오, 학교에 가서는 하인 하인 하더라도 집에 있을 때는 좀 내외간같이 지내어 봅시다그려.
- 이옥자
- 주제남은 소리 또 하고 있네, 공자 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하셨으니, 하인 소리 듣길 싫거든 어서 공부를 잘해서 나처럼 교사가 되어야지요,
- 정필수
- 그러게 나도 교사가 언제 될 터야.
- 이옥자
- 그러면 왜 어서 책을 가지고 오지 않어. 그렇게 하는 말을 잘 안들었다가는 내쫓칠 터이니 알아 해요. (정필수는 내어쫓는단 말에 겁이 나서 급히 책을 가지고 이옥자의 앞에 와서 책을 펴놓으니, 이옥자는 책장을 넘기며,)
- 이옥자
- 아마 전에 배운 가나합음(假名合音) 을 잊어버렸을 터이니, 처음부터 배요. 가우고 기야우교,
- 정필수
- 가우고--- , 기야우교--- .
- 이옥자
- 시우슈, 시야우쇼--- .
- 정필수
- 시우슈, 시야우쇼--- .(두서너 번 가르친 후에,)
- 이옥자
- 언제는 혼자 합음을 해보오.
- 정필수
- 가우구, 기야우고--- .
- 이옥자
- 가우고--- , 기야우교--- 라고 해요, 그렇게 정신이 없어. (정필수는 떠듬떠듬하면서 합음을 그릇하는 고로, 이옥자는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잘 못하니까, 나중에는 골이 나서 바른손에는 서산대, 왼손으로는 책상을 두드르며)
- 이옥자
- 글세, 시야우소--- 가 아니라, 시야우쇼--- 에요, 그렇게 못 알아듣는단 말이오. (소리쳐 꾸짖으니 정필수는 얼굴이 벌개지며 애를 써서 잘하려 하나, 점점 더 아니 된다. 이옥자는 골이 바락 나서)
- 이옥자
- 대체 이 귀는 무슨 까닭으로 달고 있소, 귀가 있으면 남의 말을 알아들어야지, 그렇게 미련스러이 못 알아듣는 데가 어디 있소. (정필수는 점점 합음을 삐뚜로 하니 이옥자는 참다 못해서)
- 이옥자
- 가우고--- 시야우쇼--- 그렇게 하는 것이야요, 귀가 먹었나, 왜 그렇게 못 알아들어. (하며, 귓바퀴를 손으로 한번 붙이니 정필수는 별안간에 귀가 먹은 것 같이 어름어름한다.)
- 이옥자
- 다시 한 번 읽어보아요, 저 따위도 사람이라고 밥을 먹나.
- 정필수
- (어름어름하면서) 그만 밥이나 먹어 보자는 말씀이오,
- 이옥자
- 밥 먹자는 것이 아니라, 어서 찬찬히 읽어 보라는 말이야요,
- 정필수
- 네에, 찬 말씀이오, 찬은 내가 만들 줄을 몰라서 장국집에 산적을 맞추었지요, 아마 오래지 아니해서 올걸.
- 이옥자
- 아, 정말 귀가 먹은 걸세. (이옥자는 귀가 먹은 줄 알고 깜짝 놀라고, 정필수는 점점 아니 들리는 것같이 귀를 후비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이때에, 여자고등학교 촉탁의사 하계순이가 문간에 와서 (이리 오너라) 찾는다. 정필수는 못 들은 체하고 이옥자가 일어서서 문을 열고 보더니 반가와하면서,)
- 이옥자
- 하계순씨, 오십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서요. (하며 소매를 붙잡아 끌어들인다.)
- 하계순
- 왜 이리십니까. (끌려와서 자리에 앉는다.)
- 이옥자
- 다름이 아니라, 하인 이 애가 지금 별안간에 귀머거리가 되어서--- 어서 진찰을 좀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 하계순
- 네? 귀머거리가 되었어요. 그것 큰일났구려. 어디 잠깐 진찰해보지요.
(하며, 정필수의 옆으로 가까이 가 앉으니, 정필수는 꾀병한 것이 탄로날까 겁하여 눈짓 손 짓으로 하여 보이며, 귀머거리로 진찰하여 달라는 뜻을 보이니, 하계순도 알아듣고 눈짓으로 허락하고 웃음을 참고, 귓구녕을 들여다본다.)
- 하계순
- 에이 참, 귓구녕도 더럽고, 한 백년 귀도 후비지 아니하였나 보다. 지금 진찰을 하여 본 즉 의외에 병이 대단 위중하외다. 이옥자 씨께서 이 사람을 몹시 구박하셨지요.
- 이옥자
- 네, 그런 것이 아니라요, 지금 일어를 가르쳐 주는데 하도 알아듣지를 못하기에 좀 말마디나 했지요.
- 하계순
- 하하, 내 어쩐지 그렇드라니, 그거 안되었소이다. 지금 조곰 잘못하면 귀창이 아주 떨어지겠습니다. 까딱하다가는 귀창이 아주 떨어질 터이니 귀창이 떨어지면, 다시는 고칠 수가 없지요,
- 이옥자
- (깜짝 놀라는 기색) 지금은 곧 약을 쓰면 고치지요.
- 하계순
- 글쎄올시다, 우선 내일부터 학교에 와서 일을 시키지 말고, 제 마음대로 몸을 좀 편안히 두어야 하겠습니다. (필수는 가만히 감사해하는 눈치)
- 이옥자
- 그렇게만 하면 나을까요.
- 하계순
- 그리구요, 또 한 가지는 당신이 이 사람더러 하인 하인하고 홀대마시오, 이 사람은 그 하인이란 말이 마음에 대단히 격노가 되어서 이런 병이 생겼으니 행여 그 말씀은 하지 마시오.
- 이옥자
- 그리고 또는 없어요.
- 하계순
- 아니, 또 있지요. 그리고 아침이면 당신이 먼저 일어나서, 집안도 말갛게 치워 놓고, 밥을 지어 가지고 반찬도 맛있게 만들어서 이 사람을 권하시고, 술 담배 사먹을 돈냥도 주고, 당신이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거든 이 사람의 팔다리도 주물러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드리고--- 앗차 참, 귀먹장이지--- 어떻든지 그렇게 잘 대접만 하면 곧 낮지요.
- 이옥자
- (기가 막혀서) 네, 그렇게 아니하면 낫지 아니할까요.
- 하계순
- 암, 그렇게 아니 하면 백 년을 가도 아니 낫지요, 당신이 지금, 누구시오. 그래도 이 개화세상에 여학교 교사로 있는 양반이구려. 여간 사나이 첩둔 심으로만 치고, 이 정필수 하나를 잘 먹여 살리시구려.
- 이옥자
- 아, 먹여 살리기야 지금도 먹여 살리지요마는, 명색이 이 집안 주인된 내가 밥을 짓는다 팔다리를 주무른다 해서야 너무 심하지 않어여. 제일 첫째로 학교 교사로 다니는 사람이 그런 천역[6]을 해서야 체통이 되었습니까.
- 하계순
- 아니오, 그렇지 않지요. 병 있을 때에는 남편이라도 마누라의 다리도 치고 배도 문질러 주는 일이 없지 아니 있는 것인데요.
- 이옥자
- 옳지, 그는 그러하지요. 암만 어른이라도 아랫사람이 병이 나면 그 심부름도 해주는 일이 있지요. 그리고 다른 약은 쓸 거 없을까요.
- 하계순
- 네, 이 병은 다른 약 쓸 것은 없어요. 지금 말씀한 대로 편히만 하여 주고 맛난 음식이나 먹이고 하면 자연 쾌차하지요.
- 이옥자
- 아따 그런 병은 앓을 만도 한 병이올시다그려.
- 하계순
- 지금 내 말씀한 대로 그렇게 하셔야지, 조금이라도 틀렸다가는 이 병인의 목숨이 없어지기 쉽습니다. 정신차리시기요. 그러나 나도 우리 마누라가 오기 전에 내가 집에 먼저 가서 있어야 할 터이니까 나는 가겠습니다.
- 이옥자
- 댁에서는 내외분이 다같이 날마다 학교에 사진[7]하시니까 좋으시겠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하인이 되어논 데다가 가끔 이렇게 앓기는 하고 귀찮아 죽겠어요.
(하며, 가장 근심되는 것같이 말한다. 정필수는 등뒤에 서서 일서서 나아가는 하계순을 바라보며 은근히 감사한 뜻을 표하니 하계순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하고 화도로 좇아나간 후에, 하계순의 처 공소사가 들어온다. 연기는 이십 이삼 세 되었고 하이 칼라한 사람인데, 이 여자도 그 여학교 촉탁여의(囑託女醫) .)
- 공소사
- 이옥자 씨 계시오. 벌써 나오셨습니까.
- 이옥자
- 아이구, 이게 웬일이시오. 인제 학교에서 나오시는 길이오. 지금 막 당신 남편 양반이 여기 다녀가셨는데요.
- 공소사
- 아, 그게 댁에를 왔었에요. 학교에서 집으로 간다고 해서 먼저 나오더니 여기와서 또 지절거리다가 갔구먼. 인제는 혼자 먼저 가지 못하게 해야 하겠네. 그러나 당신도 그 사람하고 가까이하지 마시오. 밤낮 앉으면 당신 이쁘다는 말뿐이니 정신차리시오.
- 이옥자
- 에그, 숭업소,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그런 게 아니라오. 우리집 하인이 오늘 학교에를 못갔으니까 웬일인고 하고 궁금해서 오셨던 길이야요. 그러나 이리 좀 올라와 앉으시오.
- 공소사
- (방으로 들어와서) 하인이 왜 무슨 병이 났나요. 학교에 오늘도 결석을 했어요.
- 이옥자
- 그런게 아니라 별안간에 귀가 먹었어요. 그래서 마침 남편 양반이 오시기에 좀 보아 달라고 했지요.
- 공소사
- 그까짓 위인이 진찰했으니 무엇을 알겠소. 그래도 내가 진찰을 해야지. (정필수는 진찰할까 겁하여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이옥자가 붙들어 앉히고,)
- 이옥자
- 오이, 이리 와 앉어. 저 의사께서 일부러 병을 보아 주마고 하시는데 그리 달아나려 해. (억지로 끄집어 당기며 공소사가 진찰을 한다. 정필수는 역시 눈짓 콧짓으로 귀머거리로 진찰을 하여 달라는 뜻으로 은근히 부탁하는 모양.)
- 공소사
- 하계순이는 보고서 무엇이라고 합디까.
- 이옥자
- 대단히 중증이라고 합디다.
- 공소사
- (빙그럼이 웃으며) 옳소, 병이 중하기는 중하오.
- 이옥자
- 그러면 댁 남편 양반이 말씀하시듯이. 평안히 노려두고 맛난 음식이나 먹어야 나을까요.
- 공소사
- 아니, 우리 집 영감장이가 그렇게 말합디까. 워낙이 명의라 진찰은 똑바로 하였구먼. 참, 그렇게 해야만 낫겠소. (하며, 정필수의 얼굴을 들여다 보며 말을 하니, 정필수는 좋아하는 모양이요. 이옥자는 근심하는 모양.)
- 공소사
- 그러니 여보, 병 있는데 이런 찬 마루에 앉았으면 병이 더하기 쉬우니 뜻뜻한 방안으로 가서 좀 누워 계시오. (정필수는 아니 들리는 체하고 어름어름하니 이옥자가 손짓을 하여 안으로 들어가라 하메 정필수는 안으로 들어간다.)
- 이옥자
- 정말 병이 그렇게 몹시 들었을까요. 그나마 저 모양이면 내 팔자를 어찌한단 말씀이오. (하며 실심한다.)
- 공소사
- 걱정 마시오. 귀커녕 아무 것도 아니 먹었소.
- 이옥자
- 귀가 안 먹었어요.
- 공소사
- 귀가 무엇이야요. 거짓말로 능청을 그렇게 부리느라고 그러지요.
- 이옥자
- 아, 저것 보게.
- 공소사
- 그러나 나는 인제 집에 가서 서방인지 남방인지 들어대 줄 일이 한가지 더 생겼으니 당신 덕에 너무 고맙소.
- 이옥자
- 우리 집 하인도 능청스럽지만 당신 남편 양반은 어쩌면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고 사람을 그렇게 속이실까요.
- 공소사
- 나는 집에 가면 실컷 해대어야지.
- 이옥자
- 아이고, 요새 세상은 명색 사나이들이 어찌해서 모두 그 모양들인가. 그래서야 이 문명세계에 여편네의 권리가 어디 있겠소. 우선 우리집 하인부터 단단히 나무래야 하겠소. (하며 안으로 들어가서 정필수를 공박하려 하는 것을 공소사가 말리며,)
- 공소사
- 여보, 가만히 계시오. 이 보복으로 분풀이를 하려며는 한 계교가 있소. 그래서 아까도 내가 처음 진찰하였던 말 같이 중병이니 편안히 놀리어 두고, 맛난 음식을 주라 하였지요. 내 가만히 할 말이 있으며 귀를 잠깐 이리 대시오. (두 여자가 무슨 말인지 한참 수군수군하더니 이옥자는 화하는 모양이라. 이때 문간으로부터 사람 들어오는 소리나며 장국밥집 더부살이놈이 장국과 산적을 목판에 받쳐 가지고 들어온다.)
- 장
- 장국하고 산적 여기 가져 왔습니다. (두 여자는 깜짝 놀래고 안으로부터 정필수가 달음질하여 나오더니 그 목판을 받아들고 장국에 산적을 넣어서 풍풍 퍼먹는다. 이옥자는 급히 목판을 빼앗으며,)
- 이옥자
- 이건 무슨 행세야.
- 정필수
- 맛난 음식을 아니 먹으면 병이 안 낫는다지요?
- 공소사
- 어. 말소리가 들리는 게구려. (정필수는 깜짝 놀래어, 두 손으로 귀를 훔켜 쥐는 것이 막 닫히는 군호 딱딱딱.)
- 정필수
- 가우구--- 기야우고--- 사우시, 시오소--- . (하며, 공부나 하는 듯이 외우고 있으매 두 여자는 기가 막혀 서로 바라보고 있고 장국밥집 더부살이는 영문을 모르고 먹먹히 섰는데 막이 닫힌다.)
2장
[편집]여의 공소사(家)
무대는 병원 응접실이 되고, 그곳에 적당한 교의와 책상 등물이 놓였으며, 대문 문패에는 공소사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시각은 오후 사시(四時) 쯤 되었다. 막이 열리면 하계순은 응접실로 나와서 어질러 놓은 것을 정제히 하고 교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그 아내 공소사가 들어온다.
- 하계순
-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나.
- 공소사
- 나는 늦었거니마니 당신은 왜 늦었소, 올 제 바로 오지 않고 어디 당겨왔지요.
- 하계순
- 학교 하인이 오늘은 학교에 오지 아니하였기에, 웬일인고 하고 궁금해서 그 하인이 집에 잠깐 다녀왔지.
- 공소사
- 그리고 그 하인의 병도 보아 주었지요.
- 하계순
- 아, 보아 달라니까 보아 주었지요.
- 공소사
- 그래서 무엇이라고 집증을 했소.
- 하계순
- 아, 그 병이 귀머거리더구려.
- 공소사
- 아니, 어찌해서 귀머거리야?
- 하계순
- 남의 말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니까 귀머거리지.
- 공소사
- 남의 말이 안들리는지 들리는지 어찌 알았소.
- 하계순
- 그것은 앓는 병자의 말이, 안 들린다니까 다시 두말할 것이 있나.
- 공소사
- 그 못생긴 소리 하지 마오. 그 흉증스러운[8] 위인이 일부러 귀먹은 체하고 있는데 명색이 의원이라면서 그만한 것을 분간치 못한단 말이오.
- 하계순
- (어름어름하면서) 그만 것을 모르는 내가 아닌데.
- 공소사
- 그러면 무엇을 증거 잡고 귀머거리라고 진찰을 하였소.
- 하계순
- 자네는 무엇을 보고서 귀머거리가 아니라고 집증[9]을 하였나.
- 공소사
- 나는 학리(學理) 와 경험으로 알았지.
- 하계순
- 나도, 학리와 경험으로 귀먹어린 줄을 알았지.
- 공소사
- 흥, 그말 좋소. 아무렇지도 아니한 사람을 갖다가 병인이라고 하는, 학리가 어디있소. 그런 학리가 있거든 좀 들읍시다.
- 하계순
- 우선 자네 먼저 말하게.
- 공소사
- 응, 나도 말하려니와, 당신이 처음에 귀먹어리도 진찰을 하였으니까, 당신말부터 들읍시다. 그사람이 어디가 어때서 귀먹어리오. (하며 덤비니 하계순은 어쩔줄을 모르며)
- 하계순
- 그, 그, 그--- 그것을,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귀에 말소리가 들리지 아니한다니까---
- 공소사
- 글세, 말소리가 들리는지 들리지 아니하는지 어떻게 알았느냐 말이야요. 우선 그 대답부터 하오.
- 하계순
- 내게 밀지만 말고 자네부터 먼저 말을 하게나그려.
- 공소사
- 나는 암만해도 당신 말부터 들어야 하겠소 그래도 명색이 의원이라고 형세를 하면서 어떻게 의사를 잡았던지, 믿은 데가 있게시리 귀머거리라고 진찰을 한 것이 아니오. 첫째 그 말을 내가 좀 듣고 싶단 말이오. 지금까지 남의 병에 약을 삐뚜루 써서 남의 목숨을 없애는 것이 얼마요. 이런 돌팔이 의원을 우리 병원에 두었다가는 첫째 우리 병원의 명예가 손상할 터이니까 소위 학리라 하는 것을 내가 자세히 들어야 하겠소. (과격한 언사로 설명하라 재촉하메 하계순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고개를 숙이고 앞만 내려다본다.)
- 하계순
- ---
- 공소사
- 왜 아무 말을 못해, 고미정기(苦味丁幾)[10] 탈 데다가 간장을 타서 사람을 먹이는 의원이니까 무병한 사람을 병인으로 보았는지는 알 수 없소마는, 만일 그렇게 잘못하였거든 이 져녁에 잘못하였노라고 사과를 할 일이지, 주제넘게 학리라 하는 것은 다 무엇이야. 아이고 아니꼬와서 그 학리는 어떤 책에서 나온 학리요. 대관절 동의보감이요, 방약합편[11]이오. 정말 이런 짓을 가끔 하면 나까지 망신하겠으니까 오늘은 용서할 수 없소. 어디 그 학리를 설명해서 내 속이 시원하게 알아듣도록 하여 주우. (하계순은 눈만 꿈쩍꿈쩍하고 있다.)
- 공소사
- 대답 좀 해야지 가만히만 있으면 제일인가.
- 하계순
- ---
- 공소사
- 어쩐 셈이오, 왜 말이 없어, 벙어리가 되었나.
- 하계순
- 어--- .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 공소사
- (냉소하며) 응, 벙어리가 별안간에 되었단 말이지. 그것 참 안되었구려. 그러나 우리 병원에서 벙어리 의사는 해서 무엇에 쓰겠소. 그러하니 오늘부터는 문간 심부름이나 하시오. (분연히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들어가니 하계순은 눈이 휘둥그래서 있고, 이때에 정필수가 문간에 와서 찾는다. 하계순이 나아가보니 정필수다.)
- 하계순
- 어어, 자네 왔나. 어찌해서 찾아왔나. 나는 자네로 해서 아주 혼났네.
- 정필수
- 시야우소--- 기우구--- .
- 하계순
- 여보게, 내 앞에서 귀머거리 행세할 것이 있나.
- 정필수
- 아참, 그렇지요. 참 선생님 덕택에 귀머거리로 진찰을 해주셔서 인제는 맛난 음식도 얻어먹고, 날마다 편안히 놀고, 잘 지내리라 하였더니, 웬걸요, 맛난 것은 고사하고 병인은 배가 불러서는 못쓴다고 종일 가야 밥 한 술을 아니 줍니다그려. 정 못 견뎌서 혹시 의사의 말씀대로 좋은 음식을 어찌해서 아니 주느냐고 말을 하면, 귀머거리라면서 그 말은 어찌 들었냐고 들이대지요. 그러니 선생님이 분부하신 말씀과는 아주 딴판이란 말씀이니, 이게 어쩐 곡절인지를 모르겠습니다그려. 첫째 배가 고파서 제일 못견디겠어요. 선생님께서 어려우시더라도 한 번만 말씀을 해주시면 좋을 듯해서 집에 몰래 지금 나온 길이올시다.
- 하계순
- 응, 옳지. 인제 내가 알겠구. 자네 집에서 내가 나온 후에 우리집 마누라가 자네 병을 또 진찰하였지.
- 정필수
- 네, 보아 주셨지요. 당신 말씀과 똑같이 말씀을 하시던데요.
- 하계순
- 응, 그것은 자네 앞에서만 그렇게 말을 하였지. 자네가 부러 귀먹은체 하는 줄은 우리 마누라가 벌써 알고 여편네끼리 말짜듯 짜고서 자네를 아마 고생을 시키려고 그러는 것일세.
- 정필수
- 아, 저것 보았나. 그러니까 아주 꼭 그 꾀에 빠졌습니다그려. 지금 와서는 별안간에 귀머거리 행세를 아니 할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단 말씀이오. 그래도 당신께서 밥이나 먹이라고 말씀을 해주셔야지요.
- 하계순
- 아이고, 말 말게. 남을 구하기는 고사하고 지금 오비가 삼 척일세. 내가 자네를 귀머거리로 진찰하였다고 어찌해서 귀머거리냐고 들이 닦아세는데 대답할 말이 있어야지. 허릴없이 나는 지금 벙어리가 갓 되었는데 남의 사정 생각할 여가도 없네. 벙어리라고 의원이 떨어져서, 문간 심부름꾼이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이 일이 폐일는지 큰일났네.
- 정필수
- 저는 그래도 당신만 잔뜩 믿고 있었으니, 인제는 당신이나 저나 다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그려. (이때에 홀연 안으로 쫓아 공소사가 나오며,)
- 공소사
- 그게 누구야. 벙어리가 무엇을 이리 요란히 중얼거리고 있어. (하계순은 급히 입을 막고 정필수는 두 귀를 붙들고 공소사의 얼굴을 흘금흘금 치어다보는 것이 막 닫히는 암호)
3장
[편집]여학교장 김원경 사무실
평무대 양실이 되고, 테이블, 교의, 등불이 놓였으며 지화가 궤 속에 들어 있고, 수판을 놓으며 장부를 조사하고 있는 사람은 그 학교 교장 김원경의 남편되는 박원청이니 나이는 삼십여 세 되는데 그 학교 회계로 있는 사람이러라. 이때 하인이 들어오더니,
- 하인
- 지금밖에 웬 여편네가 하나 와서 영감께 보이겠다고 합니다.
- 박원청
- 웬 계집이란 말이냐. 나이는 얼마나 되었디. 모양은 어떠하고,
- 하인
- 전에는 보지 못하던 계집어야요. 나이는 스물 대여섯이나 되어 보이고, 얼굴을 기름이 조로로 흐르는 것이 똑 기생의 집 자릿저고리[12] 같습디다. 매화의 집에서 왔다던가요.
- 박원청
- 무엇이, 매화집에서. 그럼, 거기서 조방 보는 설월이라 하는 년이 온 것이로구나. 학교에까지 쫓아와서야 어떻게 하나, 내가 없다고 보내려무나.
- 하인
- 댁에 계시다고 했는걸요.
- 박원청
- 그럼 안되었구나. 그렇지만 네가 어떻게 말을 잘 꾸며대서 말을 해 보내야지. 이리 들어와서야 쓰겠니.
- 하인
- 아이고 쓸데없습니다. 벌써 여기 들어 왔는걸요. (박원청이 깜짝 놀래어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설월이가 들어온다.)
- 설월
- 영감은 오래간만에도 뵈옵겠구려. 어쩌면 그렇게 한번 아니 오신단 말이오. 우리 매화는 밤낮으로 영감 생각만 하고 있는데, 인정이 있거든 한번 와서 좀 보시구려. (박원청이는 하인이 옆에 있는데 창피함을 못견디어 눈짓과 기침으로 눈치를 보이나, 종알거리기 좋아하는 설월이는 조금도 남의 창피한 것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물 흐르듯 종알거린다.)
- 박원청
- 글세, 다 알아들었으니 그만두어. 매화가 필 때가 되면 어련히 내가 또 꽃구경을 갈라고.
- 설월
- 얼시고, 그렇게 시침을 떼고 딴 소리로 나를 속이려고 하면 내가 그렇게 속아 넘어가나. 우리 매화가 당신으로 해서 병이 나다시피한 것을 생각하면 매화는 고사하고 내 마음에도 미워서 못 견디겠소.
- 박원청
- 실없는 소리 하지 말게.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이렇게 와서 요란을 피우나.
- 설월
- 어디는 어디야, 학교지. 우리집에 와서 매화 무릎을 베개삼아 배고 자빠져서 지랄할 때와는 아주 점잖은 체도 하네.
- 박원청
- 그건 무슨 소리야. 어서 오늘은 그대로 가게. 오늘은 사무가 좀 바쁘니.
- 설월
- 일이 있어서 왔는데 도로 가요. 그러나 지난 달에 세음은 어찌하실터이오. 오늘은 좀 주셔야지요.
- 박원청
- 세음이 무엇이야.
- 설월
- 왜 또 모르는 체하고 이리하오. 똑 노름채라고 말을 해야 알아듣겠소. (박원청이는 하인 보는 데 창피를 이기지 못하여,)
- 박원청
- 이애, 너는 왜 거기 잔득 서서 있니. 어서 가서 심부름이나 하지 아니하고, 어서 저리로 가거라.
- 하인
- 네에, 지금 가겠습니다. 두 분이 하시는 수작이 곧 재미있습니다그려.
- 박원청
- 예이 그놈, 가라면 어서 갈 것이지.
- 설월
- 손님이 왔으니 차라도 한 잔 주구려.
- 박원청
- 차 가져 올 것도 없다. 저기 나가 있다가 부를 때나 들어오노라, (하인이 밖으로 나간 후,)
- 박원청
- 글세, 사람이 어찌하면 그렇게 염치가 없이 덤비나. 하인이 앞에 있는데 창피해서 죽을 뻔했네. 만일 교장께서--- 아니 우리 마누라가 이것을 보았더면 어찌할 뻔하였나. 큰일날 걸.
- 설월
- 무엇이오. 큰일나요. 판관사령[13]으로 사는구먼. 아이고 망측해라. 그게 사내 주먹이란 말이오.
- 박원청
- 그렇지만 여기는 여편네가 주장하는 학교가 되어서 암만 사나이라도 소용이 없어. 그러나 내 세음은 모두 얼마가 되나. (세음발기를 바라보더니)
- 박원청
- 합계 이십칠원 삼십오전이로군. 대단 비싸다.
- 설월
- 당신은 놀 제는 좋아하다가도 세음해 달랄 때엔 꼭 군소리를 하고서 값을 깎으려고 하니 노름채도 깎습니까. 그런 단작스러운[14] 버르장머리는 인제 좀 내버리시오. 암만해도 오늘은 세음을 다 해주셔야 하겠소.
- 박원청
- 아무렴, 세음은 해주겠지만 오늘은 돈이 마침 없으니 요다음에 받아가게.
- 설월
- 할 수 없어요. 오늘은 세상 없어도 받아 가야만 하겠소. 저 책상 위에 있는 것은 그게 돈이 아니고 무엇이오.
- 박원청
- (손을 들어 돈을 꽉 누르고) 천만의 소리를 다 하네. 이것은 학교 돈이니까 암만 많이 있어도 쓰지 못하는 것이야. 만일 그 돈을 건드렸다가는 내 목이 비어서 양풍하는 날일세.
- 설월
- 당신 목 달아나는 것을 내가 알 것 있소. 당신이 돈을 아니 주면 나는 교장 마님께 달라겠소.
- 박원청
- 아이고 아이고 천만에, 우리 마누라더러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나는 죽고 사지는 못하는 사람일세. 저 오늘만 참아 주면 내일은 일찍이 어떻게든지 변통해다가 줄 터이니 오늘은 그저 돌아가게. 이 치부책을 다 그럭저럭하면 그 속에서 돈이 날 모양이니까 내일은 실기 아니함세. 응.
- 설월
- 할 수 없어요, 속이는 것도 한 번 두 번이지요. 오늘은 세상없어도 받아야 하겠소. 세음만 다 해주시면 당신이 반가와 하실 것을 하나 드리지요.
- 박원청
- 내가 반가와할 것? 무엇이야, 응.
- 설월
- 무엇은 물어 무엇해요. 보면 기가 막힐 것이지. 생각해 보시구려. 무엇일 듯한가.
- 박원청
- 암만 생각해도 알 수 없는걸.
- 설월
- 알면서도 부러 모르는 체하는 게지. 그런게 아니라, 매화가 편지를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 박원청
- 응, 매화가 내게 편지를 했어. 옳지, 요전에 만났을 때에, 우리 단둘이서 문밖으로 훗훗하게 놀러 가지고 하더니, 필경 그 말인 게로구. 이리 내어 어서 보게, 궁금하니. (하며 수염을 좌우로 쓰다듬으며 얼굴 모양을 낸다.)
- 설월
- 드리기는 드리더라도, 세음을 해주셔야지요, 세음을 해주어야 드릴터이요, 세음을 해주시면 이 편지를 드리지, 그렇지 아니하면 이 말을 교장마님에게 하고 돈을 받아갈 터이니 어찌하실 터이오.
- 박원청
- 어, 지독한 귀신도 만났고, 할 수 없으니 나중에 어떻게든지 할 양으로하고, 우선 이 돈으로라도 세음을 하여 줌세.
- 설월
- 그러면 어서 주시오.
- 박원청
- 편지부터 먼저 뵈여야지.
- 설월
- 그건 할 수 없소. 편지를 드릴 터이니 돈을 내이시기오. 우리 좌수우봉[15]합시다. (박청원은 할 수 없어 이십팔원 지폐를 책상위 내어 놓고 편지를 받는다.)
- 박원청
- 자, 돈은 여기 이십팔원이 있으니 육십오전을 거슬러 내야지.
- 설월
- 아이고, 고맙습니다. 또 한 번 놀러오시오. (하며 이십팔전을 다 가지고 슬며시 밖으로 나아가니, 박원청은 편지 보기에 정신이 없어 설월이 가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 박원청
- 편지는 모슨 편진고. 요사이 기운 어떠하시며, 일전 세음은 도무지 소식이 없사오니 어찌 하시는 일인지 모르와, 이 설월을 보내오니 이편에 곧 보내주시기 바라오며 일전에 말씀하시던 반지는 그간 잊어버리셨는지, 다시 소식이 없사오니 약조대로 곧 사서 보내십소서. 아녀자에게 그다지 실언을 하시옵나이까. 총총 수자 적습나이다. 이런 빌어먹을 년 보았나. 나는 무슨 정다운 편지나 하는 줄 알고 반가이 보았더니 왼통 돈만 달라는 말뿐일세그려. 이 설월이란 년이 나를 속였구나. 고헌 년 같으니--- 아, 이년도 벌써 달아났네. 육십오전, 거슬러 주지도 않고, 이런 죽일년이 세상에 있나. (마침 이때에 안에서 기침소리 나며 그 학교 교장 김원경이 양복 입고 나온다.)
- 김원경
- 이에, 무슨 소리를 그렇게 요란히 떠드오.
- 박원청
- 지금 잠깐 일이 있어서--- (하며 급히 편지를 집어 양복 주머니에 넣으려 하다가 책상 아리로 떨어뜨린다. 김원경은 무심히 이 편지를 집었더라.)
- 김원경
- 왜 이리 허둥허둥하고 있소. 오늘 세음은 다 해보았소.
- 박원청
- 네, 대강 다 되었습니다.
- 김원경
- (치부와 돈 수효를 맞추어 보더니) 아, 세음이 맞지 않는구려. 치부보다 돈은 이십팔원이 부족인데---
- 박원청
- 응, 그럴 리가 없다구.
- 김원경
- 그럴 리가 없는 게 무엇이오. 자세히 세음을 해보구려.
- 박원청
- 그러면 치부의 합계가 잘못된 게지.
- 김원경
- 아니 가만히 있소. 내가 세음을 해보고 내 도장까지 쳤는데 틀릴 리가 있소. 그런데 돈이 왜 부족이 된단 말이오. 바로 말을 하오.
- 박원청
- 모자랄 리가 있다구. 내가 똑 여기 있어서 떠나지를 아니 하였는데 누가 와서 집어갈 리도 없는데 어쩐 세음이란 말인고, 알 수 없는 일이구--- 아아 옳지, 아까 내가 오줌 누러갔을 때에 누가 와서 홈쳐간 게로구. 암만해도 하인놈의 짓인 게지, 다른 놈이야 여기를 들어올 틈이 있나. 그놈의 목자가 항상 불량하더니 그게 그런 짓을 하는구. 눈을 밝혀야 하겠네그려.
- 김원경
- 얼사, 그건 다 무슨 소리야. 제 죄를 남에게 씌우려고 하니 나를 암만 속이려도 내가 속지 아니할 걸.
- 박원청
- 그건 무슨 소린가. 내가 그럴 리가 있나.
- 김원경
- 그러면 왜 돈이 부족될 리가 있소.
- 박원청
- 나는 부족되는 줄을 모르겠는데.
- 김원경
- 그러면 돈하고 회계하고 맞추어보구려.
- 박원청
- 무슨 회계하고---
- 김원경
- 이 회계해 놓은 채부책하고 맞추어 보란 말이예요.
- 박원청
- (안경을 쓰고 책을 들여다보며 어름어름하다가) 어디 보이나.
- 김원경
- 이 합계해 놓은 것 보고, 이 돈을 세어 보란 말이예요, 그래도 몰라.
- 박원청
- 글세 합계가 어떤 것인지, 돈이 어떤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눈을 쓱쓱 씻는다.)
- 김원경
- 나를 속이려고, 나는 벌써 다 알고 있는데, 낫살이나 먹어 가지고 밤낮 계집의 집에만 당기고.
- 박원청
- 그럴 리가 있나.
- 김원경
- 그럴 리가 있나, 흥, 그러면 이 편지는 웬 것이야. (하며, 매화의 편지를 내밀어 박원청의 턱밑에 들이댄다.)
- 박원청
- 응, 무--- 무엇이, 무엇인지 도무지 나는 보이지 않는데,
- 김원경
- 아니 보이면 내 읽어 주리까. (하며 편지를 낭독한다.)
- 김원경
- 이래도 모른다고 하겠소 그래도 명색이 여학교 교장의 남편이란 사람이 이런 나쁜 짓을 하고 당긴단 말이오.
- 박원청
- 나는 그런 일이 없는데 웬 소린지 모르겠네.
- 김원경
- 왜 이리 시치미를 떼고 이리해. 겉봉에다가 당신 이름이 잔뜩 쓰여 있는데 그래.
- 박원청
- 거짓말 하지 말게, 그럴 리가 있나.
- 김원경
- 글세, 이걸 보면서도 그럴 리가 있느냐고 그리오 이 편지가 그래 눈에 들어가지 않는단 말이오.
- 박원청
- 편지가 눈에 들어가면 요술꾼이지.
- 김원경
- 말을 어떻게 알아듣고 그리해. 이 편지가 보이지 아니하느냐 하는 말이요(소리를 지른다.)
- 박원청
- 도무지 안 보이는데, 어디--- (하며 눈을 희번덕이고, 손으로 더듬더듬하여 장님모양을 짓는다)
- 김원경
- 눈을 뜨고서도 이것을 못 보아요.
- 박원청
- 응, 눈을 떴어도 희미해서 도무지 보이지를 않네그려. 별안간에 안질이 났나. 원. 조금도 보이질 않는걸.
- 김원경
- 그러면 장님이로군.
- 박원청
- 그렇지 보이지 아니하니까 장님이지.
- 김원경
- 응, 그러면 그만두시오. 전재 출납하는 일을 장님한테 맡겨둘 수 없으니 회계는 보지 마오. 내가 요전부터 어쩐지 궤 속에 돈이 날마다 없어지더라니. 이상히 여겼더니, 모두 이 장님의 짓이로구먼. 인제 장님이 되었으니까 장님 행세를 해야지.
- 박원청
- 장님 행세는 어찌하는 것인가.
- 김원경
- 내 뒤로 와서 어깨나 좀 주물러 주어요.
- 박원청
- 그건 좀 어렵구려. 명색이 서방님인데 계집의 어깨를 주무르다니, 그건 정말 어려운걸.
- 김원경
- 어렵기는 무엇이 어려워. 잔말말고 어서 주물러요. 공연히 분부를 거역하면 서방의 지위까지 파직을 시킬 터이니--- (하릴없이 뒤로 돌아와서 어깨를 주무른다. 이때에 하인이 들어오는지라 박원청은 머뭇머뭇한다.)
- 하인
- 지금 여기 공소사께서 오셨는데 교장마님을 잠깐만 조용히 뵈옵겠답니다.
- 김원경
- 그러면 이리 들어오시라 하려무나--- 그런데 어깨는 왜 안 주무르고 가만히 있어.
- 박원청
- 글세, 손님이 왔다는데 이게 무슨 꼴인가. 여봅시오, 그저 남 보는데는 그만 둡시다.
- 김원경
- 아이고, 아니꼬와라. 이 꼴에다가 부끄러운 줄은 아는 것일세. 관계치 아니하니 어서 주물러요.
- 박원청
- 그렇지만 공소사가 비밀히 만나서 이야기를 하겠다고 하니 나는 저리로 저리로 들어가겠소--- 이에, 내손을 좀 끌어다고, 보이지 아니하니. (하며, 발을 더듬더듬하여 하인에게 끌려가고 공소사가 밖에서 들어온다.)
- 공소사
- 아이고, 어떠십니까.
- 김원경
- 웬인이시오. 어서 이리 올라오시오. 무슨 일이 있소?
- 공소사
- 다른 말씀이 아니라요, 내가 이 학교 의원이지요. 명색이 촉탁의가 되어서 듣고 가만히 있지 못할 일이 있어서---
- 김원경
- 예, 무슨 일인가요.
- 박원청
- 다른 게 아니라, 이 학교 직원 중에 꾀병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못쓰겠어요.
- 김원경
- 꾀병하는 사람이 있어요?
- 공소사
- 예, 지금 당장에 우리 남편된다는 사람이 가짜 벙어리가 되었지요. 또 하인에 정필수는 가짜 귀머거리가 되었지요.
- 김원경
- 예에, 요새 그런 일이 많이 있구려. 우리 학교 회계도 지금 별안간에 장님이 되었구려. 당신 말을 지금 듣고 보니까 그것도 꾀병인 게요. 저런 못된 사나이들이 어디 있단 말이오.
- 공소사
- 예에, 당신 남편 양반께서도 그러셔요. 그럼 요사이 꾀병들이 돌림인게 올시다그려.
- 김원경
- 그럴 리가 있소마는, 명색이 사나이 주먹이라고 여편네를 업신여겨서 그리하는 것이니까, 다시는 그 따위 버릇을 하지 못하게 단단히 버릇을 가르치겠소.
- 공소사
- 글세, 내 말이야요. 우리가 오백 여 년을 갇혀 있다가 이런 성대를 만나서 여자로 사회에서 활동을 해서 사나이의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려 하는 것이 우리 목적인데, 이런 일이 있어서야 우리 목적을 득달할 수가 있소. 그러하니까 다시 사나이들이 이런 행실을 못하도록 단단히 장치를 해야 하겠길래, 당신을 뵈어 보고 그 의논을 하러온 길이올시다.
- 김원경
- 아이고, 당신 말씀이 옳소이다. 우리 영감--- 아니 우리집 치붓꾼부터 먼저 장치를 해주셔아 하겠소.
- 공소사
- 그렇게 하지요, 나도 지금 하계순이를 단단히 혼을 내고 왔습니다. 그러면 당신 남편을 장치하여 드리리다. (하며 하인을 부르더니 박원청을 데려오라 한다. 박원청은 하인에게 끌려 나온다.)
- 김원경
- 여보 영감, 눈이 그렇게 별안간에 아니 보이면 어찌하오. 마침 의사가 여기 와서 계시니 좀 보아 줍시사고 하구려.
- 박원청
- 아아니, 의사한테 보일 것은 없어. 돌림으로 그러는 것이니까 며칠 있으면 도로 낫겠지요.
- 김원경
- 그걸 어찌 믿소, 사람이란 것은 눈같이 중한 것은 없는데 만일 그대로 두었다가 영 눈이 멀어버리면 어찌하려고 그리하오.
- 공소사
- 그렇게 사양하시지 말고 어서 이리와 보이시구려.
- 김원경
- 이얘, 그 영감을 교의에 앉혀 드려라.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인이 교의에 앉히니 공소사가 대강 진찰한 후.)
- 공소사
- 지금 보아서는 눈은 아무렇지도 아니한 것 같은데.
- 박원청
- 글세, 보기에는 그러해도 조금도 보이지는 아니하니까.
- 공소사
- 그것 참 안되었소이다. 그러면 시험을 해봅시다. (하며 실내에 있는 제구를 가리키며 무엇이냐 묻는데, 박원청은 진정 보이지 아니하는 것같이 딴소리로 대답한다. 두 여자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 공소사
- 이것은 참 중병이올시다. 정말 아니 보입니다그려. 이 병을 만일 그저 내어버려두면 눈 뿐이 아니라 나중에는 얼굴까지 다 썩어 없어지지요.
- 김원경
- 예? 그러면 큰일났소이다그려. 어서 무슨 약이든지 써서 고쳐 주시오.
- 공소사
- 염려 마십시오 내게 맡기시면 고쳐 드리오리다.
- 김원경
- 어서 속속히 고쳐 주시오. (하며 가방 속으로부터 가위와 칼과 집게를 내어 가지고 앞으로 가니 박원청은 놀래어,)
- 박원청
- 아 여보, 내 눈을 어떻게 하려고 기계를 가지고 덤비오.
- 공소사
- 눈이 보이는 게일세.
- 박원청
- 아니, 보이지는 아니해도 무엇인지 번쩍번쩍하는 것 같애서 하는 말이오.
- 공소사
- 이 눈은 칼로 도려 내어야지 낫지, 그렇지 아니하면 큰 병신이 되오.
- 김원경
- (하인을 부르며) 이에, 잔뜩 붙들고 있거라. 꼼짝 못하게.
- 박원청
- 도려내어. 아이고머니나. (하며, 하인과 공소사가 붙든 손을 뿌리치고 한달음에 달아난다. 뒤쫓아 세 사람도 쫓아가는데 막이 닫힌다.)
4장
[편집]여학교 문전
무대 상수(上手)[16]에는 여학교 통용문이 되고 바른편에는 여학교 문패가 걸렸고, 장명등이 처마 앞에 달렸고, 정면으로는 담이 둘리었으며 담안에는 학교 교실이 넘어다 보이는데, 하수(下手) 로는 멀리 시가가 보이는 배경.
이때에 화도로 쫓아 정필수와 하계순이 들어오는데, 학교 문안으로 쫓아 미친 사람같이 쫓겨오는 박원청은 이 두 사람과 마주쳐서 세 사람이 넘어질 뻔하다가 다시 일어서서, 박원청은 두 사람을 지내어 화도 있는 곳까지 갔는데,
- 하계순
- 여보, 그게 박회계 아니오.
- 정필수
- 옳지, 그게 박생원이로구먼. 웬일이야, 사뭇 쫓겨나오니.
- 박원청
- (별안간에 장님인 체하며) 그것들이 누구야, 응. 모를 사람들이니.
- 하계순
- 왜 이렇게 시침을 때이고 이리해. 나는 하계순이오.
- 정필수
- 저는 정필수올시다.
- 박원청
- 응, 나는 누구라고, 자네들일세그려. 그럼 상관없지.
- 하계순
- 아, 무엇이 상관없다고 그리하시오.
- 박원청
- 아니, 그건 지금 내 말일세--- 그러나 자네들은 어찌하여서 왔나?
- 정필수
- 다름이 아니라요, 당신이 좀 살려 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저의 처에게 일어를 배우는데요, 배우기가 귀찮아서 귀머거리 노릇을 하였더니 그 후로는 밥도 먹이지 아니 하고, 그래 견디지 못해서 하 선생님 댁에를 의논차로 갔었지요.
- 하계순
- 나는 저 정필수를 귀머거리로 진찰을 하였더니, 우리 마누라가 그렇게 진찰하는 법이 어떤 책에 있느냐고 들이대니까, 나도 할 수 없이 벙어리 행세를 하였더니, 벙어리가 의원노릇 할 수 없으니 인제부터는 문간 심부름이나 하라고 내어 쫓는데 마침 저 사람이 오기에 서로 신세타령을 하고 계집년들 날뛰는 것을 어떻게 방비할 도리가 없겠느냐고 의논하는데, 또 마누라에게 들키었지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당신에게나 말씀을 해서 계집들을 단속을 해볼까 하고 온 길이오. (두 사람이 간단히 지난 말을 하니 박원청은 같은 일도 다 있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말로 하다가,)
- 박원청
- 자네들 하는 말이 무슨 못생긴 소린가. 제 계집한테 꾸지람을 듣고 꿈쩍을 못한대서야 그게 사람인가, 무엇인가.
- 정필수
- 암만, 말씀은 그렇지오마는 사나이보다 여편네가 글도 잘하고 돈도 더 벌어서 서방을 먹여 주니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 하계순
- 이게 이른바 우승열패(優勝劣敗) 라 하는 것이오그려.
- 박원청
- 자네들은 생각을 그렇게 하니까 못쓰겠다 하는 말일세, 대체 동양이라 하는 것은 남존여비한 풍속이 있는 곳이라, 가령 여자가 아무리 학문이 있고 돈을 많이 벌지라도 사나이들은 처음부터 마누라들에게 소들하게[17] 보이어 놓아서 점점 여편네는 기승하고 사나이는 죽처지지. 나를 보게나그려, 암만 보기에는 이러해도 밤낮 기생상패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진탕 놀아도 누가 나를 가지고 말을 하겠나. 오늘도 어떤 내 정든 기생 하나가 편지를 하구서 둘이서 훗훗이 어디로 구경을 가자고 했데그려. 그 편지를 마침 우리 마누라가 보고서 무엇이라고 옥천암을 내어서 종알거리기에, 내가 주먹기운으로 막 내질러 놓았더니 자라 모가지 모양으로 쑥 들어가서는 다시 꿈쩍을 못하데, 그런데 자네들은 계집이 무서워 병신 흉내를 다 낸단 말인가. 그저 주먹바람이 제일일세. 그래도 듣지 않거든 내쫓아 버리지.
- 정필수
- 아이고나, 내쫓아요. 계집을 내쫓기는 고사하고 제가 지금 내쫓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수는 없으니 달리 무슨 묘한 방법이 없겠습니까.
- 박원청
- 글세, 이왕 병신인 체들을 하였다니 그대로 내어뽑는 것도 사나이의 행동이란 말이야.
- 정필수
- 그래서 여편네들 좀 고생을 시켜야지, 그것도 묘한 계책인데.
- 하계순
- 정말, 그렇소이다. 제일 병신이라 하는 것은 법률상으로 말을 하더라도 불론죄(不論罪) 라 하는 것이 있으니까.
- 박원청
- 그렇지, 그렇지. 여간 야단은 좀 쳐도 관계없네. (이때에 박원청의 아내 김원경이 문 안으로부터 나온다.)
- 김원경
- 여보,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장님이 되어 가지고 고칠 생각은 아니 하고 도망질하여 나와서는--- 어, 자네들은 어찌해서 왔나. 여기들 모여서 무슨 못된 공론들을 하고 있었어--- 응.
- 박원청
- 그게 누구야, 나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데.
- 김원경
- 나요 내야, 교장 김원경 씨야, 그래도 몰라.
- 박원청
- 응, 나는 누구라고, 마누라든가.
- 김원경
- 마누라가 다 무엇이야. 버릇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눈 고칠 생각이나 해요, 만일 그래도 아니 들어가면 끌고라도 들어갈 터이니.
- 박원청
- 네네, 가겠습니다. 여보게, 자네들. 내가 지금 들어가면 눈을 칼로다가 도려내인다니 좀 말려 주게. (정필수와 하계순이 보다못하여 두 사람의 사이를 파고 들어간다.)
- 김원경
- 자네들은 교장도 몰라보고 이게 무슨 짓들인가. (하며, 하계순과 정필수를 좌우로 밀어 물리치니 두 사람은 비틀비틀하며 좌우로 물려갈 때에 상수로는 공소사, 하수로는 이옥자가 나온다.)
- 이옥자
- 저 하인이 왜 여기를 왔어.
- 공소사
- 아이고, 저이는 왜 또 여기 있을까. (세 사람은 모두 병신 모양을 제가끔 한다.)
- 이옥자
- 너 같은 하인은 두어야 쓸데없으니까 오늘부터 내어쫓는 것이니 그런 줄 알아.
- 공소사
- 하계순도 오늘부터 방축하는 것이니 그리 알으시오.
- 김원경
- 박원청도 오늘 이혼신고를 집행하였소.
- 박원청
- 자아. 인제 우리가 이 모양 당한 바에야 무엇을 헤아릴 것이 있나. 병신은 법률에도 불론죄니까 아무짓을 하여도 관계없으니 우리 세 사람이 입때가지 벌어놓은, 학교에 있는 돈은 모두 가지고 나가서 우리 분배하여 먹세. 자아, 들어가세. (하며, 박원청이 앞을 서고, 하계순 정필수도 문안으로 들어가려하는 것을 세 여자는 놀래어 못 들어가게 붙들고 한참 동안 다투는데 헌병 보조원 길춘식이 나와서 제재하며,)
- 길춘식
- 이얘 웬일들이냐.
- 이옥자
- 예에, 이것은 우리 하인인데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내어 쫓으려 하니까 이렇게 요란을 피웁니다그려.
- 정필수
- 거짓말 마라, 이년아.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니, 네가 도리어 나를 밥도 아니 주고 구박을 하였지.
- 이옥자
- 에라, 귀에 말이 들리는 게일세. (정필수가 깜짝 놀래어 어름어름.)
- 길춘식
- 그리고 너는.
- 공소사
- 이것은 우리 병원에 있는 의사올시다. 그런데 지금까지 환자의 병을 보는데 약을 잘못 써서 사람을 수없이 죽였으니까. 이 사람은 살인죄이올시다.
- 하계순
- 언제 내가 사람을 죽였어.
- 공소사
- 에라, 벙어리가 언제 낫나.
- 길춘식
- 그리고 또 너는?
- 김원경
- 이 사람은 우리 학교의 회계로 있던 사람인데 돈을 너무 축을 내어서 노오 나무래도 듣지 않다가, 심지어 외입을 해서 기생의 편지가 하루로 몇 십 장씩이 오는지 모르지요. 이게 증거물이니, 이 편지를 좀 보십시오.
- 박원청
- 함부로 사람을 무소[18]하지 말아. (하며 급히 그 편지를 빼앗는다.)
- 김원경
- 엄마, 눈이 보이는 걸세.
- 길춘식
- 허허, 우연히 오늘은 큰 중죄인들을 잡았군. 어떻든지 우선 구류를 해야 하겠구.
- 정필수
- 네. 가서 갇혀 있는 것이 밥은 줄터이니까 집에 있는 것보다 낫습니다.
- 하계순
- 집에서 찡찡거리는 소리만 듣느니보다 상팔자올시다. 어서 갑지오.
- 박원청
- 저 세 계집이 우리 잡혀가는 것을 보면 속이 시원들 할 터이니 어서 잡아 갑시다. (헌병은 포승으로 묶으려 하고, 세 여자는 잡아다가 어찌하려느냐 물은즉,)
- 길춘식
- 말끔 조사한 후에는 검사국으로 보내서 감옥소로 들어갈 터어지. (세여자는 깜짝 놀라며,)
- 이옥자
- 잘못하였으니 용서합시오.
- 공소사
- 감옥소에는 아니 가도록 하여 주십시오.
- 김원경
- 그러면 우리 여자의 사회가 손상이 될 터이니 잡아 가지는 말고 단단히 꾸짖기나 하여 주십시오. (세 사나이는 발을 구르며, 잡아가라 하고 헌병은 영문을 모르고,)
- 길춘식
- 안된다 안되어. 저의들이 호소를 하고 나중에는 무슨 딴소리야--- 너희들 어서 가자.
- 세 계집
-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그 사람들은 죄인이 아니올시다.
- 길춘식
- 응, 그러면 무엇이야.
- 세 계집
- 저희 남편이올시다.
- 길춘식
- 응, 남편이야, 기가 막혀. (깜짝 놀라는 모양이 막을 닫히는 군호)
- 세 계집
- 인제 다시는 병신 흉내를 내지 마시오. (세 뭉텅이 내외가 서로 손을 잡고 화목한 모양. 헌병 보조원은 기가 막혀 말 한 마디 없는 것으로 막이 닫힌다.)
주석
[편집]- ↑ 오입판에서 계집과 사내 사이의 갖가지 일을 주선하여 심부름해 주는 사람.
- ↑ 행짜를 부리는 버릇. ‘행짜’는 심술을 부려서 남을 해롭게 하는 행위.
- ↑ 추축(追逐): 친구끼리 서로 오가며 사귐.
- ↑ 객석에서 무대를 향해 바라볼 때 무대의 왼쪽.
- ↑ 가부키(歌舞伎)에서 관람석을 건너질러 만든 배우들의 이동 통로. 배우들의 등・퇴장 강조 효과를 위한 무대 장치의 하나다.
- ↑ 천역(賤役): 천한 일.
- ↑ 사진(仕進): 벼슬아치가 규정된 시간에 근무지로 나아감. 출근(出勤).
- ↑ 흉증(凶證)스럽다: 그늘지고 험상궂은 태도가 있다.
- ↑ 병의 증세를 살펴 알아냄.
- ↑ 고미정기(苦味丁幾): 등피, 용담, 산초 따위의 가루를 묽은 알콜에 담가 뽑아낸 용액. 황갈색을 띠고 쓴맛이 나며, 건위제(健胃劑)로 쓴다. 쓴맛을 뜻하는 ‘고미’(苦味)라는 말과 영어의 ‘tincture’의 음을 취한 합성어 ‘고미팅크’에서 온 말이다.
- ↑ 고종 때의 의원 황도연(黃道淵)이 지은 《의방활투(醫方活套)》와 《의종손익(醫宗損益)》을 합쳐 새롭게 엮은 것을 그 아들 황필수(黃泌秀)가 1884년에 보충하여 펴낸 의서(醫書).
- ↑ 잘 때 입는 저고리를 ‘자릿저고리’라 한다.
- ↑ 판관사령(判官使令): 아내가 시키는 대로 잘 순종하는 사내.
- ↑ 보기에 치사스럽고 다라운 태도가 있다.
- ↑ 좌수우봉(左授右捧): 왼손으로 주고 오른손으로 받음. 그 자리에서 바로 주고받음.
- ↑ 객석에서 무대를 향해 바라볼 때 무대의 오른쪽.
- ↑ 분량이 마음에 덜 차서 서운하다.
- ↑ 무소(誣訴): 없는 일을 꾸며서 송사를 일으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