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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반지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좋든지 그르든지 또는 크든지 작든지 간에 한번 젊은 가슴을 애틋이 끓게 한 사실은 좀처럼 스러지지 않는다.

나는 그 눈을 몹시 쏘던 보석반지와 그 반지의 주인공인 혜경이를 내 기억이 있는 동안에는 잊을 것 같지 않다.


내가 지금 몸을 붙여 있는 이 최목사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온 지 벌써 삼 삭이나 되었다.

철없는 어린 것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리 괴로울 것이 없으나 남의 지배 하에서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젊은 나로서는 여간한 고통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있는 바요 또 어떠한 고통이든지 견디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잘 깨달은 나는 모든 감정을 꿀꺽꿀꺽 참고 최목사의 명령대로 하여 왔다.

최목사는 금년 서른 한 살 되는 사람이다. 그는 일찍 자기의 아우가 어떤 여학생과 연애를 했다가 하느님의 뜻에 어그러지는 의사간(意思姦)이라 하여 쫓아버린 일까지 있는 이다. 그는 교회에서라도 젊은 남녀가 마주 서서 소곤거리는 것만 보면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책망을 내린다.

동네 사람들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최목사는 칠 년 전엔가 그 본처하고 이혼하고 그 후 이태 만에 독실한 신자요 독신 생활을 표방하기로 유명하던 김마리아와 결혼하였다. 지금 부인은 김마리아다.

내가 최목사 집에 가정교사로 온 지 한 이십일 넘었었다.

하루는 노곤한 봄잠을 깨니 어느새 금빛 태양이 동창에 다정하게 비추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최목사 집에 온 후로 애써 일찍 일어나지만 그래도 해뜨기 전에 일어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맨셔츠 바람에 뜰로 나갔다.

뒷산 송림을 스쳐내리는 아침 바람은 부드럽고 시원하였다. 이슬에 촉촉이 젖은 화단의 개나리 봉오리는 어린 애기 입술 같다.

나는 산뜻하게 찬 고무신을 끌고 뒷간으로 나갔다. 화단을 왼편으로 끼고 돌아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뒷간 문이 펄쩍 열리더니 웬 여자가 급히 나온다. 나는 주춤하면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도 나를 언뜻 쳐다본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칠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걸음을 빨리하며 마룻간에 이은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벌써 일삭 남아 두고, 내 머릿속에서 대룩대룩하던 그 눈, 이 코에 남은 그 부드러운 향기를 다시 맡는 나는 가슴이 띵하였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왔나? 어데 있는 여잘까?’

뒷간에 들어앉은 내 머리에는 한 달 전 기억이 지새는 안개 속에 나타나는 산봉우리같이 점점 밝게 떠오른다.

내가 그 여자를 처음 본 것은 지나간 이른 봄이었다.

그때 나는 안국동 어떤 학생 여관에서 내 고향 학생과 같이 있으면서 호구할 도를 생각하였다. 무릎이 다 나간 양복을 입고 어둑한 방에서 머리를 끙끙 썩이다가 형용할 수 없는 갑갑증에 나도 모르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궂은 비 뒤의 둔한 햇빛은 마치 늦은 가을 같았다.

나는 여관 문을 나서기는 하였으나 어디를 가면 좋을는지 한참이나 망설였다. 워낙 서울에 온 지가 얼마 되지 않고 또 낯이 넓지 못한 나는 그리 알뜰살뜰하게 갈 곳도 없었다.

‘엑 나온 바자에 순옥이나 찾아볼까?’

나는 어청어청 자국을 띄었다. 순옥이는 내게 먼 조카가 되는 계집애다. 그는 그때 고등여학교 이년급에 다녔다. 나는 간혹 아무 의미 없이 다만 이상어른이라는 체면으로 그를 찾아보곤 하였다.

나는 질척한 별궁 뒷골목을 헤어 나와 안동 네거리를 지나 간동을 향하고 힘없이 걸었다. 간동 순옥의 여관에 간 나는 서슴지 않고 순옥의 방문 앞에 갔다. 마루에는 여자 구두가 둘이 놓여 있다. 뒤가 삐뚤어지고 코가 벗어진 노랑 구두는 눈에 익은 것이나, 진땅을 곱게 골라 디디어서 바닥 가로 돌아가면서 진흙이 살짝 묻힌 반득반득한 까만 아미앙에는 이 문 앞에서 처음 보는 것이다.

나는 유난스럽게 빛나는 그 구두를 볼 때 내 상상은 미닫이 종이 한 겹을 통하여 화려하게 단장한 그 구두의 임자를 보았다. 나는 이때에 나로도 알 수 없는 어떠한 부드러운 미감(美感)을 느끼는 동시에 가물에 선 능장대 같이 시들시들한 내 그림자를 생각하고 일종 부끄러운 생각과 같이 불쾌한 기분에 쌓였다.

‘들어갈까? 돌아갈까?’

그 자리에서 돌아가기는 너무도 무인격하고 비겁하고 그 구두에 밟히는 것 같아서 차마 발이 돌아서지 않았다. 그러나 이 꼴을 해 가지고 그 구두의 주인공 앞에 앉기는 순옥이에게도 미안하려니와 내 인격이 너무도 값이 없을 듯이 생각났다.

‘원 별소리를 다하지! 이러면 어때! 내가 연애를 하겠으니 걱정인가? 못 입은 놈은 사람이 아닌가?’

나는 이렇게 억지로 나를 위로하면서 가장 대담스럽게 기침을 ‘칵’ 하였다.

미닫이가 팔짝 열리더니 새까만 순옥의 눈이 반짝한다.

“에구 아저씨 오셨네.”

순옥이는 어리광 비슷하게 만족히 웃으면서 마루에 나섰다. 그때 순옥이와 미닫이 사이의 틈으로 방바닥에 앉은 어떤 여자의 무릎과 무릎 위에 걸어 놓은 흰 손이 보였다.

나는 순옥이를 보면서

“요새 어떠냐?”

하였다. 그 말은 혀가 굳은 것처럼 어색하게 나왔다.

“늘 그래요, 들어오셔요!”

순옥이는 방긋 웃고 한 쪽으로 피해 서서 길을 낸다.

“가겠다.”

나는 주춤거렸다.

“괜찮아요, 우리 언니예요.”

영리한 순옥이는 내가 그 여자를 꺼리는 것을 눈치 채었는지 우스운 변명을 한다.

나는 방에 들어섰다. 방에 앉았던 여자는 어느새 일어났다. 그는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면서 몸을 반쯤 돌려 윗벽에 걸어 놓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을 보고 있다. 갸웃드름한 까만 머리 뒤에는 붉고 푸르고 흰 수정을 박은 빗이 박히고 한편으로는 아롱아롱한 긴자시가 질렸다. 곤세루 치마 옥양목 저고리에 수수한 뒷모양이 내가 상상하던 성장은 아니나 그만하면 어디가서 빠질 차림은 아니다.

“언니 왜 섰소?”

나를 따라 들어온 순옥이는 미닫이를 살금히 닫으면서 그 여자의 반면(半面)을 웃음 띤 눈으로 본다.

“인제는 가겠다.”

하면서 그 여자는 휙 돌아서더니 다시 몸을 돌려서 저편 이불 위에 놓인 푸른 숄을 집어든다. 그 돌아서는 때에 순옥이를 보고 쌍긋 웃는 까풀이 약간 진 눈이며 가볍게 허리를 구부려 숄을 집는 옴팍옴팍한 손이며 불그레하게 보이는 뺨은 퍽 다정스럽게 보였다.

“왜 언니 가세요? 저이는 우리 아저씨예요. 괜찮아요. 더 놀아요. 응?”

순옥이는 그가 가는 것이 아까운지 서운해 한다. 나는 공연히 왔다 하는 후회도 없지 않았다.

“얘 벌써 네 시가 지났다. 밥 종 칠 때가 고대될 텐데 가야지!”

하면서 또 쌍긋 웃는다. 밥 종이라는 소리에 ‘오오 그러며는 기숙사 생활을 하는구나?’ 하는 것을 나는 직각했다.

그 여자는 마루에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면서 머리를 가볍고 다정스럽게 숙였다. 나도 숙였다. 그 여자가 간 뒤에 순옥이와 나 사이에는 별 이야기가 없었다. 나는 묻고는 싶었으나 순옥이가 어떠하게 여기지나 않을까 해서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순옥이도 흥이 풀어졌는지 가만히 있었다.

순옥의 여관을 나선 내 머리에는 생각지 않으려고 했으나 그 여자의 자태가 떠올랐다. 안국동 네거리에 나서서 파출소 앞을 지날 때였다. 거뭇한 파출소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추이는 내 옷맵시를 볼 때 나는 어깨가 축 처지는 듯이 불쾌하였다. 암만해도 거지같은 나와 귀부인 같은 그 여자의 사이에는 커단 창벽이 가로질려서 피차에 접촉치 못할 암시나 주는 듯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후로 그 여자의 그 어글어글한 눈이 잊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그 여자를 꿈에도 생각지 않던 곳에서 만났다. 푸근한 봄꿈에 잔잔한 물결같이 되었던 내 가슴은 재릿재릿한 슬픔과 간질간질한 기쁨에 울렁거렸다.

‘저 여자가 왜 여기 왔을까? 어데서 예배 보러 왔나. 아니 오늘이 화요일인데! 몸차림을 봐서는 오기는 어제 와서 여기서 잔 듯한데?’

나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함께 있는 창수더러 묻고도 싶지만 어둔 밤에 홍두깨격으로 식전 댓바람에 여자 이야기를 꺼내기는 나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이날 아침 나는 늘 보는 신문이며 책도 보지 않고 그것만 골똘히 생각하였다.

“선생님 어디 아프셔요?”

창수는 나의 낯빛을 보면서 묻는다. 나의 낯빛은 그렇게 이상스럽도록 되었던 게다.

‘흥 내가 미쳤나! 다 집어 세여라. 나의 밟을 길이나 튼튼히 밟자!’

나는 이렇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세상에 나온 날부터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못 받고 자라 청춘의 반생애를 부평같이 보낸 나는 어떠한 행복을 생각할 때면 그것이 나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것보다 와질 것같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아직 스물 셋이나 되는 청춘이라 이성의 뜨거운 사랑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때까지 사랑을 그린 것은 미적지근하였다. 마치 물 못 본 기러기가 물 그리듯 하였다.

멀리 총독부 굴뚝 끝에 남았던 석양빛은 어느새 스러졌다. 으스름한 황혼 빛은 그물에 한 연기와 같이 만호장안을 흐리었다. 수없는 전등들은 반짝하고 눈을 떴다. 나는 저녁 후에도 볼일이 있어서 어린애들을 가르치지 못하고 서대문정 김 전도사를 찾아갔다가 열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야학 갔던 창수도 벌써 돌아와 있었다.

이날 밤에 창수와 나는 열한 시가 넘어서 자리에 들었다. 흐린 안개를 뚫고 흘러나리는 으스름 달빛에 창밖은 번―하였다. 사면은 인적이 끊겼다.

마루방에 걸어 놓은 시계 소리가 어쩌면 들릴 듯하다. 창수와 나는 눈이 말똥말똥해서 천정에 빛나는 전깃불을 쳐다보았다.

이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그 소리 나는 곳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저편 건넌방으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였다.

자비하신 예수여
제가 사람 가운데
의지할 이 없으니
슬픈 자가 됩니다.……

고운 목청으로 가만히 부르는 그 소리의 높고 낮고 길고 짧은 리듬은 고요한 봄밤 공기에 조화되어서 유리창 틈으로 흘러든다. 눈을 살곰히 감은 나는 자줏빛 안개 속에 싸이는 듯이 저릿하고도 달짝지근한 감정에 싸여서 그 소리의 여음까지라도 놓치지 말고 잡으려고 하였다.

“선생님 벌써 주무시우? 선생님 왜 웃으셔요?”

내 낯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렀든지? 사근사근하고 헤롱거리기 좋아하는 창수는 그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나는 달콤한 꿈을 깨치는 것이 좀 섭섭하였다.

“응 잠 좀 들었어! 왜 지금도 안 자나?”

하고 선하품을 하면서 그를 보았다.

“히히 선생님 주무셨어요? 선생님 웃으시던데!”

창수도 그 찬송가 소리에 흔들렸는지 무슨 말을 퍽 하고 싶어한다.

“저게 누군가?”

“왜요 선생님 못 보셨어요? 히히.”

그는 의미 있는 듯이 웃는다. 나는 내 가슴속에 품은 무엇을 창수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없지 않았다.

“응 못 봤어.”

“이~ 왜 아까 낮에 선생님이 목사님하고 말씀하실 때 마당에서 무엇을 빨고 있는 것을―.”

“응 저게 근가?”

나는 벌써 그라는 것을 직감하였지만 짐짓 모르는 체하였다.

“그런 때 그게 누구야?”

“목사님 누이예요!”

“목사님 누이?”

나는 무의식중에 이렇게 도로 물었다. 이때 아아 최목사에게 저런 누이가 있나 하는 생각이 기적같이 내 가슴에 울렸다.

“네. 목사님 누이가 둘인데 하나는 시집가고 저 혜경이는 금년에 졸업했어요.”

이 말에서 나는 그가 혜경인 것을 아는 동시에 지나간 이른 봄 순옥의 집에서 “밥종 칠 때가 가까웠다.” 하던 그의 소리를 생각하고 오오 그래서는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 게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모두 모르는 체하고,

“그래 지금까지 어데 있었누?”

하매

“고등여학교 기숙사에 있었어요.”

창수는 대답한다.

“지금 몇 살인데?”

“열여덟이라나? 히히 왜 선생님 그건 물으셔요?”

창수는 또 해롱해롱한다. 창수는 그것이 무심히 하는 소리겠지만 나는 무심히 들려지지 않았다.

“하 이 사람 좀 물으면 어떤가? 흥.”

나는 창수를 보고 픽 웃었다.

“아니 글쎄 그러나 글렀수다. 벌서 정가표(定價票)를 붙였답니다. 흥.”

정가! 그래서는 벌써 결혼하였구나! 나는 정가라는 그 소리를 이렇게 해석할 때 시험 방목을 찾아보던 낙제생 모양으로 가슴이 덜컥하고 사지에 풀이 죽었다.

“누구하고 결혼했나?”

나의 목소리는 최후의 부르짖음같이 내 귀에 울렸다.

“우리 고향(사리원) 사람인데 예수를 아주 진실히 믿어요. 그리고 시방 장사를 하는데 돈도 많고 또 와세다대학 경제과 출신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요.”

창수는 묻지 않는 말을 줄줄 꺼낸다.

“지금 마흔하난지 둘인지 됐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혜경이가 울었대요. 히히.”

“그래 지금은 괜찮은가?”

“지금은 둘이 사진까지 박구 잘 지내요. 그런데 처음에는 어찌 우는지! 그러다가 결혼만 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준다고 하는 바람에 정이 든 모양이에요. 최목사가 그저께도 말하는데 혜경이는 금년 가을에 미국으로 간대요. 그리고 최목사도 그 사람(혜경이와 결혼한 남자)이 돈을 대서 작년에 일본까지 갔다 왔어요. 나도 어데서 그런 자리나 하나 얻었으면…….”

창수는 자기의 기구한 처지가 다시금 구슬픈 듯이 말끝에 애조를 띠었다.

나는 그 모든 소리를 들을 때에 꽃다운 혜경의 장래에 대한 동정심과 아울러 최목사와 그 남자의 추행에 대한 의분과 질투에 끓었다.

“혼례식은 언제 하나?”

“이제 앞으로 한 달 반쯤 남았어요. 오월 열 이튿날이라니까……. 그래서 그 준비 때문에 졸업식 전에 먼저 나왔대요.”

나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싸였다. 혜경이와 아무 관계도 없건마는 그가 불원간 떠나게 된다는 것이 내게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하였다. 어째서 쓸쓸한지 나로도 알 수 없었다.

‘단념! 단념! 모든 것을 단념! 하자! 내가 왜 이럴까?’

나는 그와 같은 아내를 가질 자격도 없거니와 더구나 그는 결혼한 여자다……. 그러나 다만 누이로라도 사랑한다면. 나는 얼토당토않은 이런 생각으로 밤잠을 못 이루었다.

이튿날부터 나는 혜경이를 자주 보게 되었다. 나는 그와 마주칠 때마다 부드러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수줍고 부끄러워서 그의 낯을 똑똑히 바라보지 못하였다. 나뿐이 아니라 혜경이도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혹 내가 마당에서 거닐거나 무엇을 할 때에 그의 방문이 열렸거나 그가 마당에 나섰거나 하면 나는 그를 등지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내 등 뒤에선 그가 무슨 발광체 같기도 하고 나의 일동일정을 감시나 하는 듯해서 보고 싶으면서도 차마 머리를 돌리지 못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눈이 삐뚤어지도록 은근히 돌려서 애교가 흐르는 그의 얼굴을 도적해 보았다. 도적해 보다가 생각하던 바에 뒤져서 그가 나를 주의해 보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나는 마음이 좀 편하면서도 섭섭하였다. 혜경이도 어찌 되어 나를 등지고 내 앞에 서는 때면 그의 일동일정이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도 내 모양으로 머리를 돌려서 내 편을 못 보았다. 그러나 간간이 그의 머리가 극히 고요한 동작으로 돌아지면서 하―얀 귀, 불그레한 뺨의 반면이 내 쪽으로 향할 듯하다가도 그만 못 돌리는 것은 곁눈질하는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마음은 끓었다. 거치른 환경에서 거치른 바람에 꽉꽉 응결되어서 인간의 달콤한 정열을 못 느낀 내 마음은 공교롭게 만난 이성의 냄새와 빛에 봄눈같이 풀렸다. 동시에 기구한 내 신세가 더욱 슬펐다.

하루 이틀 지나 십여 일이 넘는 새에 혜경이와 내 사이에는 말없는 속에서 말없는 친분이 얼크러졌다. 나는 어디 갔다 돌아오더라도 혜경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면 어디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애 맘같이 허수하였다. 또 내가 어디 갔다 오면 그는 말없이 마당에 나와서는 뒷간으로 가거나 혹은 빨래 같은 것을 만지기도 하였다. 그때 내 생각에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할멈을 불러도 할멈이 대답이 없으면 그가

“할멈 저 방에서 부르셔…….”

하고 대신 불러 주기도 하고 또 할멈이 없는 때에 물을 청하면 그가 떠다가 마루에 놓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목사의 내외가 듣거나 보는 눈치만 있으면 혜경이는 내 동작에 대해서 추호 반 점도 관념치 않는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나도 자연히 신경이 긴장되었다. 주위의 경계선이 엄밀할수록 대상(對相)의 태도가 부드러울수록 나의 번민은 컸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할멈더러 세수물을 놓아라 하고 책을 읽고 있는데 당그랑하고 세숫대야를 마루에 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수건을 집어들고 미닫이를 열었다. 나는 의외 일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 앞에는 혜경이가 섰다. 그는 세숫대야를 살그머니 툇마루에 올려놓으면서 비눗갑을 살짝 열어 놓더니 나를 힐끗 쳐다본다. 이때 부딪치는 두 시선은 무슨 비밀과 비밀을 암시하는 듯이 내 머리는 띵하고 가슴이 뭉클하면서도 일종의 만족을 느끼었다. 혜경이는 머리를 숙이고 제비같이 날쌔게 저편 안 마룻간으로 갔다. 나는 어떻게 유쾌한지 알 수 없었다. 동서에 유리표박하여 친절한 대우를 못 받아 본 나는 이날 아침 혜경의 일이 어떻게 고마웁고 유쾌한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랜 여로에 섰다가 사랑하는 내 집에 돌아와서 자고 난 듯하였다.

‘아아 사람들은 이 때문에 사랑을 구하고 가정을 동경하는구나!’

나는 이때까지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단란한 부부 생활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나는 이날 낮에 예배당에 갔으나 목사의 설교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원래 종교의 신앙을 못 가진 나는 그렇지 않아도 설교가 귀찮은데 이날은 더욱 몸 괴로웠다. 나중에는 누가 뭐라는지? 마음속에는 혜경이라는 일념뿐이었다.

‘그도 나를 생각할까? 흥 내가 부질없이 이러지.’

나는 이렇게 자문자답하였다. 그리고 그가 내게 대한 태도가 그리 저어하지 않는 것을 생각할 때 그도 나처럼 나를 생각하고 마음을 쓰는 듯해서 기쁘고 든든하였다. 나는 그러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사리원에 있다는 그의 남편의 약력과 현재를 생각하고 나의 지금 처지를 볼 때 암만해도 나를 생각하리라는 추측이 믿어지지 않아서 나는 슬프고도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예배가 끝난 뒤에 나는 바로 집으로 향하였다. 오늘은 할멈까지 예배당에 왔으니 집에 가면 혜경이가 대문을 열 줄(최목사 집은 밤낮 없이 대문을 잠근다) 안 까닭이다.

“혜경 씨!”

나는 가슴을 찌르르 울리고 나오는 떨리는 소리로 불렀다. 문을 열고 돌아서던 혜경이는 말없이 주춤 선다.

“혜경 씨! 혜경 씨!”

내 소리는 내 호흡과 같이 급하고 떨렸다.

“네!”

혜경이는 나를 살짝 쳐다보더니 폭 숙이는 그 머리 한편에 부드럽고 흰 귀밑이 불그레하다.

“혜경 씨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결혼한 여자인 줄 알면서도 나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못 받더라도 당신 집에 몸을 붙인 김경호라는 기구한 청춘이 당신을 그리고 생각했다는 것만 당신 기억에 박아 주신다면 나는 기쁘겠습니다. 나는 혜경 씨에게 이 위에 더 요구가 없습니다. 아― 혜경 씨 들어주셔요? 네? 제 요구를 들어 주셔요? 당신도 청춘이지요. 아! 혜경 씨!”

나는 팔을 벌렸다. 그를 껴안고 그의 허리가 끊어지도록 포옹하면서 기껏 울었으면 가슴이 확 풀릴 것 같다. 나는 혜경의 앞으로 뛰어갔다. 이 때에 무엇이 내 이마를 자끈 박는다. 나는 두 눈에서 불이 번쩍하면서 정신이 아찔하였다. 최목사의 시뻘건 눈이 머릿속에 언뜻한다. 나는 어떤 벽에 기대어 서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나는 예배당 문밖을 나서면서부터 환상(幻像)에 취했다. 환상에 열중한 나는 집 앞을 지나서도 한참이나 가서 앞집 담에 가서 이마가 부딪치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정신이 든 나는 스스로 무참하고 비열한 감정이 가슴에 치받혀서 누가 보지나 안했나 하여 사면을 돌아보면서 집으로 바삐 갔다. 벌써 최목사며 여러 식구들은 돌아와 있었다.

“자네 예배당에 안 갈라나?”

“머리가 어찌 아픈지 오늘밤은 쉬겠습니다.”

나는 최목사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실상인즉 머리도 아팠다.

“웬만하면 가지?”

최목사는 못 미덥다는 눈초리로 나를 본다.

“글쎄 어찌 아픈지 휭한 게 걸을 것 같지 않아요.”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최목사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돌아서면서

“할멈! 할멈은 오늘 밤에 집에 있게. 쟤(혜경)가 혼자서 적적하겠으니…….”

나는 벌써 최목사의 뱃속을 들여다보듯이 알았다. 젊은 남녀를 혼자 두기가 의심스럽다는 것을 나는 그의 표정에서 알아챘다.

최목사 내외와 애들까지 예배당으로 가고 나니 집안은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듯이 고요하다. 할멈은 수나 난 듯이 제 방으로 들어가더니 코를 드르렁드르렁 곤다. 나는 환한 전등을 쳐다보면서 누웠다 앉았다 번민이 컸다. 어떠한 기회를 얻어서든지 이 가슴의 정열을 붓으로나 입으로 혜경에게 설토하기 전에는 그 번민이 없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워낙 저쪽이야 듣거나 말거나 내 쪽에서 설토치 않고는 가슴이 막 터질 것 같다. 아홉시가 친 뒤였다. 나는 나로도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밖으로 나갔다.

초생달 빛이 엿보는 담 안은 무거운 침묵에 싸였다. 내 귀에 들리는 내 혈관의 피 뛰는 소리는 할멈의 코고는 소리와 같이 주위의 공기를 울리는 듯하다. 나는 좀 떨리는 다리를 옮겨놨다가는 멈추고 멈췄다가는 옮겨놓으면서 수묵을 찍어놓은 듯한 화단을 지나 불빛이 환한 혜경의 방문 앞에 이르렀다.

……의지할 이 없으니,
슬픈 자가 됩니다.……

그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에 내 마음은 더욱 고조되었다. 전신의 피가 막 끓어오르는 듯이 머리가 띵하고 얼굴이 화끈하였다. 목구멍은 속속히 들이마르고 침은 고추 먹은 뒤같이 극도로 걸어진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고 툇마루 아래 섰다. 떨리는 호흡은 뛰노는 가슴과 같이 높았다……. 방안에서 흘러나오던 찬미 소리가 뚝 그치더니 혜경의 그림자가 붉은 창문에 언뜻하자 창이 드륵 열렸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빛은 마루 아래에 떨고 선 나의 상반체를 거멓게 비추었다. 나는 가슴속에 붙은 불이 단번에 폭발되어 나의 온몸을 깡그리 살라버리고 마는 듯하였다. 나는 머리를 번쩍 들어 보았으나 뜨거운 불길에 흐린 내 눈에는 무엇이 똑똑히 비추이지 않았다.

문을 드륵 열던 혜경이는 미닫이에 손댄 채 꼼짝하지 않는다. 청춘인 그의 가슴은 어떠한 감상에 끓었는지? 나는 무슨 큰 죄나 지으려다가 들킨 듯이 말도 나오지 않고 무참하기도 짝이 없었다.

바로 이때다.

“문 열어라!”

하는 최목사의 소리는 내게는 죄수에게 내리는 사형 선고같이 들렸다. 나는 무의식중에 뒷간으로 뛰어갔다. 할멈이 문을 열었는지 예배당에 갔던 온 식구들은 저벅저벅하고 들어오더니 마루를 구르는 소리 문 여는 소리에 한참은 분주하였다. 나는 그네가 내 동정을 살핀 듯한 자곡지심에 주저주저하다가 고요할 때 뒷간을 나서서 내 방으로 갔다. 혜경의 방 미닫이는 방긋이 열려 있었다.

나는 밤중부터 일어난 두통이 아침에도 그치지 않아서 아침도 못 먹고 그냥 드러누워 있었다. 눈을 가만히 감고 드러누은 내 몸은 끝 없는 끝 없는 함정으로 휘휘 떨어지는 듯하였다.

나는 모든 것을 잊으려고 하였다.

나는 다시 혜경의 낯을 볼 것 같지 못하였다. 그는 나를 야비하고 축축하고 가증스럽게나 보지 않았는가 생각한 까닭이다. 그리고 온 집안 식구에게 그것이 알려진 듯해서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오후에 마당에서 유치원 갔던 어린애들이 노래를 한다.

―지난 엿새 동안에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하고
오는 일요일 또 대하니
즐겁기 한량 없네…….

하는 세 아이의 소리와 같이 혜경의 청아한 소리도 들렸다. 그러다가 노래가 뚝 그치더니

“얘 요한(목사의 큰아들)아 선생님한테 왜 문병 안 가니?”

하는 나직한 소리는 혜경의 목소리였다.

“응 어떻게?”

“선생님 어디가 편찮으셔요? 그러지 흥.”

“선생님 어디가 편찮으셔요?”

요한의 목소리는 바로 내 창 앞에서 들렸다.

“이― 문을 열고 해야지!”

알 수 없는 유쾌를 느낀 나는 미닫이를 방긋이 열면서

“네! 요한 군이오!”

하였다. 이때 저편에 선 혜경이와 나의 시선은 언뜻 부딪쳤다. 두 눈에는 말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의 얼굴은 불그레하였다.

창경원 사쿠라가 한창이던 사월 그믐께였다. 하루는 어디를 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저녁을 먹는데 창수가 곁에서 빙그레 웃는다.

“자네 왜 웃나?”

“히히 선생님 우필운이 왔어요! 히히.”

“우필운이 누군가?”

“혜경의 남편…… 지금 혜경의 방에 있어요. 히히 아엉.”

내 눈앞에는 돼지 목덜미같이 살이 피둥피둥한 어떤 부호가 언뜻 지나자 전등불이 환한 아래서 두 년놈이 얼싸안고 키스하는 환상이 너무도 천연하게 보였다. 내 가슴에는 나로도 금할 수 없는 질투가 일어났다.

검붉은 탐욕(貪慾) 덩어리에 눌리는 혜경이의 불쌍한 형상이 보이는 듯도 하였다. 신자라는 거짓 탈을 쓰고 갖은 음흉을 다 부리는 최목사까지 미웠다. 나는 단번에 그 무리들을 쳐부수고 싶었다.

“아! 경호씨! 저를 살려 주셔요. 저는 이 못된 놈들 힘에 못 견디어서 이 몸을 더럽힙니다.”

하는 혜경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선생님 무얼 생각하시우.”

먹던 밥을 입에 문 채 숟가락으로 상을 짚고 멍하니 창문을 보면서 생각에 골몰하였던 나는 창수의 말에 비로소 내 정신이 들었다.

“응 배가 아파서 그러네.”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다시 밥을 먹었다.

이날 밤에 내 번민은 컸다. 나중에는 부질없는 내 생각을 스스로 픽 웃어도 보았다. 우필운이는 최목사와 같이 자고 이튿날 새벽차로 사리원으로 갔다. 내가 세숫물을 화분에 주는데 정거장에 우필운의 전송을 나갔던 최목사와 혜경이가 들어왔다. 왜사저고리에 옥색 모시 치마를 산뜻하게 입은 혜경이는 나를 보더니 낯이 불그레해서 머리를 수굿하고 남빛 양산을 휘휘 저으면서 제 방으로 강둥 뛰어들어간다. 이때 내 눈을 톡 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왼손 무명지에 낀 홍보석반지다. 나는 아침볕에 반짝하는 반지를 볼 때 가슴이 서늘하였다.

“아아! 혼인 반지로구나!”

나는 무의식중에 부르짖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영예(榮譽), 지위(地位), 부귀(富貴) 이 모든 것에 비파 소리와 냄새가 그 노란 금반지에 꼭 물린 붉은 보석에 엉키고 맺혀서 아무나 가까이할 수 없는 무서운 빛을 발사하는 듯하다. 그 허영의 바탕 위에 교만의 빛을 지어 놓은 빛을 볼 때 나의 온 인격은 알 수 없는 멸시와 모욕을 받는 듯해서 견딜 수 없었다.

‘아아 너도 그 힘에는 끌리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그 매력을 주던 혜경이가 여우같이 눈앞에 서하여 퍽 불쾌하였다.

‘흥 내가 미쳤지. 왜 내가 그(혜경)를 미워할까? 그가 나를 사랑하다가 버렸단 말이냐? 설사 사랑하다가 버렸다 치더라도 내가 그를 원망할 권리가 있을까? 흥! 그가 이미 결혼한 여성인 줄 번히 알면서 러브한 내가 미쳤지!’

나는 이렇게 마음을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보석반지를 생각하면 또 불쾌하였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 거무데데한 내 낯과 땟국이 꾀죄죄하게 흐르는 내 의복을 거울에 슬그머니 비추어 볼 때 두 어깨가 축 처지고 이 세상에서는 아무 권리도 없는 듯해서 퍽 불쾌하였다.

‘내가 왜 이러나? 응 글쎄. 내가 어서 공부나 열심히 하자! 어떠한 고통이든지 이기고 나가서 민중적 큰일을 해 보자. 그까짓 조그마한 계집애 때문에 번민하다니…….’

나는 애써 단념하려고 하였으나 쉽게 스러지지 않았다.

10

[편집]

오월 열하룻날 밤차에 혜경이는 최목사와 같이 사리원으로 갔다. 나는 이날 밤 방에 가만히 들어박혀서 혜경이가 떠나노라고 분주히 구는 소리를 들을 때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눌렸었다. 내 눈에는 여러 사람의 부러운 부르짖음 속에 선 신랑 신부의 화려한 모양이 보였다.

나는 책도 갈 대로 가거라 하고 벽에 기대어서 눈을 꾹 감고 번민에 골똘하였다. 밤 열시가 넘어서 정거장에 나갔던 창수가 들어왔다. 창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선생님!”

은근히 부른다.

“왜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미스 H가요 부탁합디다.”

―라는 소리에 나는 솔깃하였다. 그는 혜경이를 H라고도 불렀다.

“무어라고?”

나는 가장 태연하게 물었다.

“한집에 오래 있으면서도 이목이 번다해서 인사치도 못하고 더구나 떠날 때에도 뵈옵지 못했으니 용서하시라구요.”

“용서?”

“네 용서하라 하고 그리고 저더러 이 말을 가만히 여쭈라고 해요. 선생님은 좋겠습니다.”

“좋기는 무에 좋아! 한집에 오래 있었으니 그 말도 하겠지!”

나는 나의 내적 생활을 창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이렇게 말했으나 나로도 알 수 없는 충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소리를 듣고 보니 그가 더욱 그립고 그와 말 한번 못 한 것이 어찌 안타까운지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보석반지를 다시 생각할 때면 나는 무거운 기분에 눌렸다.

혜경에게 대한 부드럽고 아름다운 느낌은 다 스러져 버린다.

그 후로 나는 애써 모든 것을 잊으려 하는 동시에 이전처럼 공부에도 차츰 애착이 붙었다.

그러나 젊은 가슴에 한 번 끓어넘은 사실은 그렇게 용이히 스러지지 않았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혜경이와 보석반지는 내 가슴속에서 서로 얼크러져 싸우는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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