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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대남적화공작단 사건/1차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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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는 6.25사변때 완전히 궤멸되었던 남한의 지하세력을 재건하기 위해서 대남공작기구를 정비강화하고 직접 또는 일본을 통해서 간첩을 침투시키는 한편 구미지구를 통한 간첩의 합법적 침투를 기도하여 1957년도부터 비교적 동서통행이 용이한 여건을 갖춘 동백림東伯林[1]에 공작거점을 설치하고 북괴 동독대사에 대남공작경험자인 박일영을 임명하였고 대사관원은 대부분 훈련된 공작요원으로 충당하였음은 물론 다수의 공작책을 서구 각국에 합법적으로 주재시켜 적극적인 대남공작을 벌여왔다.

이와 같은 북괴의 대남공작은 1958년부터 서독을 위시한 서구각국에서 재학중인 유학생과가 도구渡歐[2]중인 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심리전 공작을 전개하면서 서서히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우선 초단계공작으로 공산주의제도의 우월성과 북괴의 발전상에 대한 선전문건으로서 이들을 현혹시킬뿐만 아니라 당시북괴보다 산업건설이 뒤떨어지고 무능과 부패에서 나오는 정치적 · 사회적 불안정 상태의 조국현실에 대한 실망과 또한 이역에서의 심리적 부동상태에 있는 유학생과 장기체류자들의 사상적경향을 포착하여 북괴공작항책을 통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평화통일선전을 하는 등 이들의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신념변화를 싹트게 하였고 동백림東伯林[1]관광유혹과 재북가족의 소식의 전언 및 상봉주선 제언과 경제난의 약점을 이용하여 생활비를 제공하는 등 모든 물질적 · 심리적인 공작수단을 다하여 이들의 사상적 「부동」浮動[3]을 더욱 자극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의 공작에 경사된 이들은 1958년 9월 교양 및 지령 수령차 현 명지대학 조교수 임모박사가 동백림東伯林[1]에 잠행하여 북괴 동독대사 박일영등을 접선한것을 비롯하여 1967년 5월 까지 사이에 주로 당시의 유학생인 현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부교수 황모박사등 15명의 현 대학교수 · 의사 · 예술인 및 공무원등이 수차 동백림東伯林[1]을 왕래하면서 전기 북괴대사 박일영 및 노동당연락부대구라파공작총책 이원찬과 기타 공작지도원과 접선하고 수일간 우대를 받으면서 이들로부터 사상무장과 적화통일의 초보단계인 서신 · 문화 · 주민의 교류와 미군철수 연립정부수립 평화적 통일이 불가능시의 무력남침등에 대한 교육과 난수조립 · 암호해독 · 「A-3」통신청취등의 연락방법에 대한 간첩교육을 받은 후 해외유학생 광부 간호원등이 명단입수 · 평화통일방안선전 · 학원내 지하당 조직공작 · 정계요인 포섭 · 혁신정당조직 · 반공법의 개정 · 선거기간중 야당 및 혁신계 인사지지 · 소위 혁명조건 미성숙시 지하세력을 총동원한 남한 정권의 전부활동 등에 관한 지령과 미화 2백 내지 2천불씩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활동을 벌였다.

더우기 전기 임박사 조모박사 윤모등 7명을 북괴의 지령에 의해서 1961년 8월 부터 1965년 8월간에 1차 내지 2차 북괴공작망책의 안내로 소련 또는 중공을 경유 입북하여 1~4주간 평양에 체류하면서 현 북괴노동당부위원장이며 대남사업총국장인 이효순 대남공작고급간부인 서철 임춘추 및 기타간부의 환대와 더욱 철저한 밀봉교육을 받고 북괴의 소위 선전농장과 공업지대 선전시설을 관람하고 북괴 사회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혔고 프롤레타리아적 당파성이 강한 자만이 차지할 수 있는 당원자격을 획득하였고 귀로에는 모스크바 · 동백림東伯林[1] · 체코를 거쳐 서서瑞西[4] · 오지이墺地利[5]등의 서방국에 이르러 수일간 체류함으로써 합법귀환을 가장하였다.

이와 같이 북괴로부터 철저한 교육과 지령을 받은 이들은 점에서 점으로 조직을 진행하였고 점차적으로 확대하여가면서 포섭상황과 북괴지령에 의한 서구내 유학생 · 간호원등 명단과 동향등 정보수집 보고는 물론 북괴와 접선되어있는 국내 저명인사의 명단과 동정보고를 하였는데 이들이 서구에서 간첩활동중 북괴로부터 받은 공작금은 전후 연 20여차에 거쳐 미화 총액 10만여불에 달하며 또한 간첩통신용 문건 및 물폼도 대량받았다. 계속하여 이들은 북괴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서 그들의 지령에 의한 대남공작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1962년 이후 계속 귀국하였고 간첩 김모(女) · 이모(女)의 경우 입국시 난수표를 음부에 삽입하였었다.

그리하여 귀국 후 이들은 합법토대를 무난하게 구축하여 공작활동을 벌였으며 전 외국어대학강사 조모의 경우는 감도불량으로 북괴의 「A-3」 지령의 청취가 곤란하자 북괴지령의 수령과 지령에 의한 정보수집내용과 공작상황 보고차 67년 2월 18일 다시 도불渡佛[6], 동백림東伯林[1]을 거쳐 입북하여 북괴노동당부위원장 이효순에게 보고하였고 공작금미화2천불을 수취귀국하였고 전기 김모(女) · 이모(女)등은 국내관공서등 기관에서 합법을 쟁취하고 국가기밀을 수집중이었고 전기 황박사는 학계 및 정계에 구축된 합법적토대를 이용하여 1963년 9월경 남한의 민주주의제도를 변혁하고 북괴가 주장하는 적화통일의 실현을 기도하고 당시 서울대생이며 현 모신문사기자 이모 외 20여명과 학생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라는 비합법단체를 조직하고 자신은 지도교수로서 암암리에 반식민 · 반보수 · 반매판 · 반외압등을 내세우고 볼온사상을 고취함으로써 북괴 지령을 수행하였고 전 민비연구회장이며 현 모정당운영위원인 김모외 6명은 전기 황박사와 내란음모 및 선동시위 등으로써 정부전복을 밀의한 사실이 밝혀졌다.

본 사건을 통하여 밝혀진 북괴망원과 전기 임박사들의 주모자로부터 포섭된 자와 그 대상자는 학계 · 언론계 · 문화계 · 저명인사등 각계각층에 거쳐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있는데 총수는 194명에 달하고 있으며 입건 또는 구속수사 중인 자는 107명이다.

우선 일단계수사에서 밝혀진 피의자 중에서 몇 사람의 범죄사실을 발표하고 앞으로 수사진전에 따라 다시 발표하겠다.

1. 피의자 임모 당 36세는
본적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117
주소 동 상
직업 명지대학 조교수(철학박사)로서
1956년 1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락을 거쳐 서독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동대학 자연과락 연구원으로 종사중 북괴공작원 서독거주 조모에 포섭되어 자진 동독주재북괴대사 박일영의 면접을 서신으로 요청하여 1960년 4월 북괴대사로부터 이에 응하는 회신을 접하고 동백림東伯林[1] 북괴대사관근처 옥호屋號[7] 미상未詳 호텔에 투숙하면서 북괴문정관 석학철로부터 1, 조국의 평화통일 2, 북괴의 발전상 3, 자연법칙에 의한 사회주의화이념등 교육을 받고 북괴공작에 동조 · 당명에 충실할 것을 선서한 후 한국 모신문사 서독특파원을 대동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5백부을 수수, 1960년 8월 중순경 전기(前記)특파원을 대동, 동백림東伯林[1]으로 월경, 북괴대사관공작원 석학철로부터 전시와 같은 방법으로 교양을 받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4백불을 수수한 사실이 있고

1960년 1월 중순 경 동독주재북괴대사관에 소환되어 공작목적지인 한국으로 귀국 예정일을 1961년 가을로 정하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3천불을 수수 귀환하였고

1960년 12월 중순경 당시서독유학중인('다름슈타트 공과대학)실제를 포섭 동독주재북괴대사관으로 가게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되게하고 1961년 8월 중순 일자미상경 입북할 것을 기도오지리 빈 대학에 수학차 이사한다고 위장후 모스크바 · 옴스크 이르크스크 경유 평양에 도착 대남공작원 밀봉 아지트에 수용된 후 3주간에 긍하여 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 인준을 받는 동시남한에서 학원 또는 혁신정당에 잡입하여 지하당을 조직후 합법 또는 비합법수단으로 남한정권을 타도 북괴가 지향하는 평화통일을 성취할 것이며 한국유학생명단 한국광부명단 한국공무원명단 등을 입수하고 가급적 동인원중에서 동독까지 유인 지하당원으로 포섭케하라는 지령과 함께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1천불을 수수 귀로. 오지이墺地利[5]수도 빈 대학에 등록한 사실이있고, 1962년 1월 경 프랑크푸르트 대학 동기생인 정모를 포섭하였다고 보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5백불을 수수 포섭자를 대동하여 교육을 받도록 지령을 받고 1962년 5월 경 동백림東伯林[1]에 체류 교양을 받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8백불을 수수 각각 4백불씩을 분배소지하고 서독으로 귀환한 사실이 있고,

1963년 3월 중순경 공작보고와 아울러 이대대학원작곡과에 재학중인 홍모(26)와 결혼 부부조[8]로 과업을 수행하겠다는 것을 보고 동 결혼을 북괴중앙당으로부터 승인을 받고 결혼비용명목으로 공작금미화 6백불을 수수 서독에 귀환하여 1963년 5월 25일 홍모(女)를 도독渡獨[9],케하여 결혼후처로 하여금 간첩활동을 자원케하였으며,

2. 피의자 정모 당 34세는
본적 서울 성복구 돈암동 263
주소 성복구미아동825의 108
경희대학 조교수(정치학박사)로서 1955년 10월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 4학년재학중 도불渡佛[6] 국립파리대학교 정치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 3월 동 대학 정치학박사학위를 수여받고 1966년 3월 13일 귀국하여 경희대학교 정경대학 조교수로 재직중인 자로서 1959년 1월 경 약혼녀인 상피의자 이모(당 37세)의 도불渡佛[6]로 파리대학교내 「안토니」 부부학생기숙사에서 동거하며 북괴대불란서공작망책 노모와 접촉하며 북괴친척 불온책자를 탐독, 북괴의 발전상과 국내정치정세를 비교분석하고 1962년 1월 13일 북괴의 대불공작망책에 포섭되어 이의 지시로 동백림東伯林[1]소재 북괴대사관에서 노동신문화보(등대)잡지등 기타 팜플렛에 의거 교양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6백불을 수수하는 동시 접선을 위한 연락방법을 교육받고 동월 12일 파리로 귀환하였고 1962년 9월경 불란서공작망책 이모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경유 평양에 도착 3주일간 체재하면서 1.남한정세와 북한의 실정 2 평화통일방안 3 지하당조직방법등의 교양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되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2천불을 수수 피의자의 처 이모를 대동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모스크바 경유 귀불歸佛[10]한바 있고

1964년 12월 14일 피의자 이모와 동도同途[11]백이의 경유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북괴대사관직원 집에 11일간 체류하면서 김일성 항일 빨치산투쟁기 등 수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한편 노동신문 화보 등 간행물에 의한 교양과 철학개론의 학습지도를 받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1천불을 수수 귀환한 사실이 있고,

1965년 처 이모를 대동, 동백림東伯林[1] 모스크바 경유 평양에 이르러 안전가옥에 수용된 후 약 40일간 체류하면서 북괴내 각처를 관람하는 한편 ①난수표해문방법 ②무인포스트 설치방법 ③암서기입법 ④축소필름제조방법 ⑤가두접선방법 ⑥학원내침투지하당조직과 아울러 학생선동 ⑦지령방법(방송을 이용한 방법)등 교육을 받고 처 이모는 직장관계로 동년 9월 29일경 먼저 귀불歸佛[10]케하고 피의자는 계속 전시교육내용을 복습하다가 동년 10월 10일경 모스크바경유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 동지에서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2천불을 수수한 후 「체코」 · 서서瑞西[4]경유 동년 10월 17일경 귀불歸佛[10]하였고

1966년 3월 11일경 전기와 같은 방법으로 처 이모와 동도同途[11]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 북괴대사관 직원가에 14일간 체류하면서 이미 평양에서 받은 교육을 정리 복습하고 난수표암호해문 및 조립에 필요한 비밀문건 1조와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2천불을 수수 귀국하면 피의자의 실제인 정모를 파리에 유학시켜 연락거점을 확보케하는 동시 피의자 조모와 결속하라는 지령을 받고 「체코」 · 「이탈아리」 경유 귀국한 사실이 있고

1966년 4월 13일 귀국함에 앞서 수수한 공작금 미화 2천불 중에서 미화 1천불을 처인 피의자 이모의 친구인 불인佛人 모에 위탁하고 암서해독용 확대경을 미화 30불에 다이아 지환指環[12](1카트) 미화 8백불에, 트랜지스터라디오 미화 30불에 각각 구입 소지하는 동시에 난수표를 처인 피의자 이모의 음부에 삽입 은닉토록함으로써 관헌의 눈을 피하여 무난히 귀국한 사실이 있고

1966년 10월 6일 전시불인여자 모에게 보관시켰던 공작금으로 실제 정모의 비행기표를 구입 동인을 도불渡佛[6]시켜 북괴와의 연락거점을 확보함으로써 지령을 수행한 사실이 있고

1967년 2월 4일 피의자 조모를 동백림東伯林[1]주재북괴대사관에 파견 부고기로부터 수수한 공작금인 한화 13만원을 1967년 5월 6일 수취하였고

1967년 3월 1일 처인 피의자 이모를 국회도서관 직원으로 취직시켜 입법부의 동향을 탐지하는 등 부부조로서 북괴지령하에 따라 간첩활동을 하여온 자이고

3. 피의자 조모 34세 정치학박사는
본적 서울 서대문구청동 10
주거 서울 종로구 명륜동 1가 28

함남 원산시에서 1946년 8월경 가족과 같이 월남,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군에 복무타가 제대후 1959년 10월 도불渡佛[6] 파리대학교 구루노블 대학교 법경대학을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획득한 후 일본동경대학교 강사로 종사 중 장기문단결근으로 해직된 후 귀국 동국대학교법정대학강사, 외국어대학강사로 종사타가 현재 무직으로 있는 자로서

1961년 4월경 재불유학중 북괴선전간행물 조국통일 민주조선을 탐독하는 한편 파리유학중인 실형 조모의 친우이며 북괴노동당 연락부 대불란서공작원인 노모 박모가 주장하는 공산주의노선에 따른 평화통일론에 동조 북괴노선을 지지키로 결의한 다음

1963년 6월 15일 북괴대불공작망원 노모가에서 동인으로부터 ①북괴는 조국통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환영한다. ②평화통일방안의 타당성 ③남북한 문화교류의 필요성 ④남북한 학생대표교류의 타당성 ⑤남북한 체육혼성팀의 필요성 등 괴뢰선전에 공오동인共嗚同人의 주선으로

1963년 7월 10일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북괴대사관직원 집에 8일간 체류하면서 군복무시 지득한 군사비밀을 제보하고 평화통일방안 북괴의 우월성에 대하여 토론형식으로 교양을 받은 다음 재불공작원에게 부달하라는 지령문을 받아 전달한 사실이 있고

1963년 10월 7일 재불공작원 노모와 동도同途[11]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 북괴영화. 잡지. 화보 등 선전물에 의거 ①한국은 사회주의제도하에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②남북한 서신교환 ③언론인 · 학생단체 등 교류의 필요성 등에 대한 교양을 받고 북괴공작원이 될 것을 권유 받고 공작금으로 2백불을 수수 동년 10월 15일 귀불歸佛[10]하여 전기노모로부터 1.입북하면 우대하며 신변을 보장한다.2 입북에 소요되는 일체경비는 북괴가 부담하낟. 3. 빅북도중 모스크바를 위시. 수개의 중립국을 관광할 수있다 등 권유를 받고 입북할 것을 결정한 사실이 있고

1963년 4월 하순경 전기노모로부터 북괴중앙당에서 부부동반 입북하라는 연락을 접하고 1964년 3월 27일 처 김모당 30세와 같이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모스크바를 경유 평양에 도착, 밀봉 아지트에 수용되어 교양을 받은 6개월 후 재입북할 것을 약속하고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2천불을 수수 , 체코를 경유 귀불歸佛[10]한 사실이 있고

1965년 8월 초순경 부부동반 재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처 김모와 동도同途[11]입북 밀봉아지트에서 15일간 체류하면서 ①민족통일전선 ②농민공작 ③학생공작 ④평화통일방안 ⑤중간노선정당에 대하여 ⑥제4차 전당대회선언문 등에 대한 교육과 ① 암호해득방법 ②방송청취방법 ③사진필름 축소방법 ④상부법와의 연락방법 ⑤드보크설치방법 ⑥암호문작성 ⑦대인접선방법 등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고 처 김모와 같이 북괴노동당에 가입하고

(1)실형 조모가 경영하는 회사중역으로 입사 월5~10만원의 공작금을 조달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라

(2)혁신정당을 조직하고 국회의원을 포섭반공법 국가보안법등을 개정 국내에서 공산계열의 서적을 합법적으로 구독할수 있게 하라.

(3)학생 · 교직원등을 형조모의 경영중인 사업체에 다수 취업케한 다음 포섭하여 당의 지령에 의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라.

(4) 「A-3」방송청취방법 등 지령을 받고 (1)난수표수신용 1조 (2) 암호원문 1매 (3) 암호입조방법서 2매를 받는 동시에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2천불을 수수, 동월 25일경 귀불歸佛[10]한 사실이있고

1965년 10월 27일 처 김모와 동도同途[11] 귀국하여 북괴지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실황 조모가 경영하는 회사에 침투코자 하였으나 가정불화로 실패후 학원침투를 기도하고 1966년 3월 1일 동국대학교법정대학 선거법강사로 침투하였고 처 김모를 1966년 3월 7일 모기관 통신원으로 취직시켜 공작토대를 구축하였으며 북괴방송 「A-3」를 수신코자 하였으나 감도불량으로 실패한 사실이 있고

1966년 5월 상순경 거주지 자가에서 정모와 접선하여 결속과업을 수행하라는 지령이 잇음을 접하고 모기관에 잠복중인 김모로 하여금

(1) 월남전에서의 아군의 전사상자수 (2) 정부고위인사의 지방시찰일정 (3) 국내저명인사의 모기관 출입상황 (4) 모기관직원일부의 성명 및 담당임무에 관한 정보를 수집보고케 사실이 있고

1966년 11월 상순경 정모와 접선 「A-3」 청취불능으로 지령을 받지 목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사업보고를 겸하여 입북할 것을 사전연락하는 한편 「A-3」수신일자에 입북허가여부의 회신을 고대하였으나 하등 연락이 없어 1967년 2월 4일 불란서 구록노블 대학불인교수의 초청장을 소지코 파리 경유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북괴공작원과 동도同途[11] 평양에 도착, 비밀아지트에 수용된 후 북괴노동당부위원장 이효순 및 책임지도원에게

(1) 정모는 무사하다.
(2) 자신은 학원에 침투중이다.
(3) 처 김모의 보증인 이모는 모기관고위간부의 보좌관이다.
(4) 야당은 월남파병을 반대하며 국군 5만명을 3억원에 팔아먹었다.
(5) 5개년 사업계획으로 10억불을 차관하여 국민 1인당 백불의 빚을 지고 있다.
(6) 외국차관이나 은행융자는 빽이 있어야 되며 약면의 1할 5분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제공된다.
(7) 각 기관에 반공표어가 붙어있으며 교과서에도 반공과목이 있다.
(8) 9.25 사변 중 인민군의 행패가 심하였기 때문에 20년내 적화통일은 불가능하다.
(9) 현재까지 포섭된 자는 없으나 장차 5명 정도를 포섭대상자로 선정하겠다.
(10) 기간중 「A-3」수신이 곤란하니 재조정을 바란다는 등으로 사업보고를 마치고
(1) 통신지도원으로부터 국제모루스부호수신방법
(2) A-2수신에 관한 기술문제
(3) 무전기송신음으로 직접청취하는 연습
(4) 성분 쫗은 학생 다수를 포섭하여 각 학교에 학생위원장 1명 정도는 부식할 것
(5) 학원공작은 직위가 필요하니 속히 전임강사나 조교수가 되도록 노력하라.
(6) 야당청년간부들을 포섭
(7) 정모는 가급적 신문논설위원으로 침투시키라.
(8) 사람을 포섭할때는 가장하라
(9) 김모는 계속 그 기관에 잠복케하라는 지령을 부하하라는 등 지령을 받고 동시에 공작금조工作金條[8]로 미화 2천불을 받고 1967년 5월 6일 귀국하여 처 김모에게 지령사항을 전달하고 피의자 정모에게 북괴에서 수령한 공작금의 일부조로 한화 13만원을 전규하는 등 부부조로서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간첩으로서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이고

4. 피의자 김모 당 44세는
본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159
주소 상동
직업 서울대학교의과대학교조교수 한일병원피부과장(의학박사)으로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병원을 개업중 1953년 2월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강사로 1961년 8월 도독渡獨[9] 프랑크푸르트 대학피부과 조교수로 근무타가 1965년 5월 16일 귀국후 동년 8월 25일 한일병원피부과장으로 근무하면서 병원을 개업하는 한편 서울 대학교 의과대학교수로 재직중 모발생장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학위를 획득한 자로서 1962년 1월상순경 서독 프랑크푸르트 대락병원에서 북괴주동독공작책리원찬과 접선하여

(1) 북괴는 대한민국의 서독유학생이 동독등지를 자유로이 왕래할수있도록 문호를 개방하며 (2) 평화동일을 위한 토론을 자유로이 할 수 있고 (3) 금품을 제공하며 (4) 북한은 한국보다 발전하였다는 등 북괴허위찬양선전에 고무되어 북괴대사관과 접선할 것을 결의하고 1962년 9일초순경 대서독공작원 임모의 안내로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옥호미상비밀아지트에서 5일간 체류하면서

(1) 북괴의 발전상

(2) 평화통일방안 등 교양을 받고 북괴노동당에의 입당을 전제로하는 자서전을 작성제출하여 북괴노선에 동조할 것을 서약하고 공작금으로 미화 300불을 수수, 서독으로 귀환한 사실이 있고 1963년 1월 상순경 동일한 방법으로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 3일간 체류하면서 북괴를 찬양하는 내용의 교양을 받고 공작금으로 서독화[13] 300DM을 수수 귀가한 사실이 있고 1963년 9월 초순경 동일한 방법으로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하여

(1) 미국은 인종차별이 심하다.

(2) 프랑크푸르트 한국유학생으로 삼이계학생 2명이 있다는 사실들의 보고를 하고 프랑크푸르트이외에 있는 공과계학생을 물색 · 포섭하라는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서독화 200DM[13]을 수수 귀가한 사실이 있고 1964년 4월 중순경 피의자의 처 손모(당 42세)에게 서백림西伯林[14]을 관광하자고 위장구실을 붙이고 동인을 대동, 동백림東伯林[1]에 도착, 단독으로 접선, 처가 한국으로부터 내독하였다는 것과 내년 초에는 귀국한다는 등 보고를 하자 귀국전에 구체적인 공작지령을 할 것이니 재차 접선하자는 데 합의하고 일박한 후 공작금으로 미화 2백불을 수수, 처를 대동 귀가한 사실이있고 1965년 2월 중순경 귀국 보고차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동백림東伯林[1]에 가서 북괴노동당에 입당, 반국가단체구성원이 되어

(1)지하당조직 (2)귀국후병원을 개업하고 입원실을 완비하고 남파공작원을 입원은닉보호하라 (3)서독유학생명단을 입수, 또는 포섭하라는 등 지령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 백불, 현미경 1대 (미화 5백불 상당)를 받아 귀가한 사실이 있고 1965년 5월 16일 귀가후 지령사실의 실천을 위하여 자가에 다 김모피부과병원을 개업하면서 북괴와 암호서신연락을 한 사실이 있는 자이다.

5. 피의자 천모 당 29세는
본적 경남고성군동해면 장좌리
주소 서울시성복구안암동 3가4
직업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동사범대학 성신여자사범대학강사로서 서울대학교문리대를 거쳐 동대학원독문과에서 수학중 군에 입대, 1961년 7월 23일 제대외 동시 도독渡獨[9], 하이델벨크 대학교 철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66년 10월 23일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동문리과대학 성신여자사범대학 등의 강사로 종사라는 자로서 1964년 6월 28일 동백림東伯林[1]주재 북괴대사관에 가서 북괴발행의 각종간행물을 탐독하는 한편

(1)평화통일 (2) 한일회담의 부당성 (3)남북한 서신교류 (4) 국제정세와 한국의 입장 (5) 북한의 발전상과 우월성등에 대한 교양을 받고 공작금으로 미화2백불을 수수 귀가한 사실이 있고

1964년 9월 14일 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춘향전등 북괴를 찬양하는 내객의 영화를 통한 교양을 받고 「하이델베크」대학에 유학 중인 김모가 북괴에 동조적이라고 보고함으로써 차후 접선시 포섭 · 대동하라는 지령을 받는 동시 공작금으로 미화 2백불을 수수 귀가한 사실이 있고 1964년 10월 초순 지령을 실행키 위하여 「하이델벨크」대학 기숙사를 방문, 김모와 면접하고 평화통일 및 남북한서신교유등의 필요성을 설득, 포섭에 성공

1964년 10월 8일 동인을 대동,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서구 유학생 대부분이 대한민국정부에 비판적인 반면 북괴에 동조적이라고 허위보고하여 공작금으로 미화 2백불을 수수 귀가한 사실시있고 1965년 5월 3일 전기와 동일한 방법으로 단독 동백림東伯林[1]에 이르러 모스크바를 경유 평양에 도착

(1) 전기 김 그의 포섭경위 (2) 재독한국유학생에 대한 한국정부의 대책 (3) 재독유학생에 대한 사상동향등의 보고와 아울러 북괴로부터 북괴공업의 우월성과 평화통일의 타당성등의 사상적교양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 된 후 지령사항으로서

(1) 귀국후 학원에 침투하여 학원의 민주화공작 (2)지하당조직 (3) 남한의 중대벼노하등을 탐지보고하라는 지령과 공작방법에 대한 교양을 받고 공작금으로서 2백불을 수수하고

1966년 10월 3일 귀국한 후 전시지령사항의 실천을 위하여 서울대학교문리과대학 부교수 강모외 16명을 위시하여 교수 · 언론인 · 회사원등을 대상으로 동조자 물색에 광분하는 등 암약중에 있는 북괴간첨임

주석

[편집]
  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1.17 1.18 1.19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동베를린
  2. 이탈리아로 넘어감
  3. 진득하지 못하고 들뜸.
  4. 4.0 4.1 스위스
  5. 5.0 5.1 오스트리아
  6. 6.0 6.1 6.2 6.3 6.4 프랑스로 넘어감
  7. 가게나 술집의 이름.
  8. 8.00 8.01 8.02 8.03 8.04 8.05 8.06 8.07 8.08 8.09 8.10 8.11 8.12 8.13 조(條) : (주로 ‘조로’ 꼴로 쓰여) 어떤 명목이나 조건.
  9. 9.0 9.1 9.2 독일로 넘어감
  10. 10.0 10.1 10.2 10.3 10.4 10.5 프랑스로 돌아감
  11. 11.0 11.1 11.2 11.3 11.4 11.5 같은 길
  12. 가락지
  13. 13.0 13.1 Deutsche Mark
  14. 서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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