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29
하거서(河渠書)
[편집]역대 치수의 상황
[편집]『서경(書經)』 「하서(夏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하나라의 우(禹)임금은 13년 동안이나 홍수를 막기 위해 자기 집을 지나면서도 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육로를 다닐 때에는 수레를 탔고, 수로를 다닐 때에는 배를 탔으며, 진흙길을 다닐 때에서는 덧신을 신고 걸었고, 산길을 다닐 때에는 가마를 탔었다. 그리하여 구주(九州)의 구획을 정하고, 산세의 지형에 따라 하천을 파서 소통시켰고, 토질의 특산물에 따라 공물을 정했다. 구주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구주에 있는 큰 호수와 연못에 제방을 쌓고, 구주에 있는 산들을 측정했다.”
그럼에도 황하는 넘쳐서 재앙을 불러일으켰고, 그 피해가 중국에 매우 심했다. 이에 우임금은 오직 황하를 다스리는 일을 임무로 삼고, 황하의 물줄기를 끌어와 적석산(積石山在, 청해성 동남부에서 감숙성 남부 변경까지 뻗어있는 산. 황하가 시작되는 산)에서 용문산(龍門山, 산서성 하진현(河津縣) 서북쪽에 위치함. 황하의 중류 지역)을 거쳐 남쪽으로 화음현(華陰縣, 섬서성 위남시에 위치함. 관중평원의 동부)에 도달하게 하고, 거기서 동쪽으로 내려와 지주산(砥柱山, 하남성 섬현(陕縣)의 동북쪽에 위치함)과 맹진(孟津, 하남성 중서부 구릉지구에 위치함. 현재 낙양시에 예속됨)과 낙예(雒汭, 하남성 공현(巩縣) 경계에 위치함)를 거쳐 대비산(大邳山, 하남성 학벽준현(鹤壁浚县) 동쪽에 위치함)에 도달하게 하였다.
우임금은 대비산 위의 황하가 높은 지대에서 흘러와서 물살이 급하고 소용돌이치기 때문에 대비산 동쪽의 평지로 흘러가기 어렵거나 제방을 자주 무너뜨려 여러 차례 범람한 것이라고 여겼다.
이에 황하 물줄기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물살의 기세를 약화시켜 흐르게 했고, 더불어 물길을 북쪽으로 끌어들여 지세가 높은 기주(冀州, 지금의 하북성 형수시(衡水市) 일대) 지역으로 흐르게 해 강수(降水, 하북성 광종현, 남궁현, 기현, 형수, 무읍현 경내를 흐름)를 거쳐 대륙택(大陸澤, 하북평원 서부)에 도달하게 하고, 거기서 아홉 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 역하(逆河, 황하의 물길과 바닷물이 만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가 되어 발해(勃海)로 흘러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9주의 하천들이 모두 소통되고 구주의 큰 못에 제방이 쌓여져 여러 중국의 나라가 편안하게 되었고, 그 공적은 하(夏), 은(殷), 주(周) 3대까지 베풀어졌다.
이후로 사람들은 형양(滎陽)에서 황하의 물을 동남쪽으로 이끌어 홍구(鴻溝, 고대의 운하로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에 위치함)를 완성시켜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조(曹), 위(衛) 등의 나라와 연결시키고, 제(齊), 여(汝), 회(淮), 사(泗) 등의 물줄기를 모이게 하였다. 또 초(楚)나라 지방에서는 서쪽으로 한수(漢水)와 운몽(雲夢)의 들판을 개천으로 연결시키고, 동쪽으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를 운하로 서로 관통시켰다.
오(吳)나라 지방에서는 삼강(三江)과 오호(五湖) 사이를 하천과 도랑으로 연결했고, 제(齊)나라 지방에서는 치수(淄水)와 제수(濟水)를 연결했으며, 촉(蜀)나라에서는 태수 이빙(李氷)이 이대(離碓, 이퇴(離堆)로 불리기도 하고, 사천성 도강언 경내에 위치)를 뚫어서 통하게 하고, 말수(沫水, 사천성 일대를 흐르는 대도하(大渡河)를 지칭)의 수해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또 두 강줄기를 뚫어 성도(成都) 일대에 흐르게 하였다. 이런 하천에는 모두 배들이 통행할 수 있었고, 남는 것은 관개용수로 썼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이익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수로들이 지나가는 지역은 사람들이 도처에서 그 물줄기를 논밭으로 끌어와 그 수는 억만을 헤아렸다. 그런 작은 수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많았기 계산하기 어렵다.
서문표(西門豹, 전국시대 업현의 현령)는 장수(漳水, 두 줄기로 나뉘어져 있고 하북성과 하남성 사이에 위치함)의 물을 끌어와서 업(鄴) 지방의 농토에 관개함으로써 위(魏)나라의 하내(河內) 지역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한(韓)나라는 진(秦)나라가 각종 토목과 건축 같은 사업을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나라가 사업으로 국력을 소모시키고, 동쪽으로 자신의 나라를 침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수리(水利) 기술자인 정국(鄭國)을 진나라에 간첩으로 보내어 유세하게 했다. 정국은 진나라로 하여금 경수(涇水, 위하(渭河)의 지류로 섬서성 중부를 관통함)를 굴착하여 중산(中山,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북쪽에 위치함)의 서쪽으로부터 호구(瓠口, 섬서성 예천(禮泉) 동북쪽에 위치함)에 이르기까지 수로를 만들고, 북쪽의 산들을 따라 동쪽으로 낙수(洛水, 위하(渭河)의 지류로 섬서성 중부를 관통함)까지 3백여 리를 흐르게 하고 이로써 농토에 관개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로 공사를 진행하는 중도에 정국의 음모가 발각되어, 진나라에서는 정국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정국은 이렇게 변명했다. “처음에 신은 한나라의 간첩으로 쓸데없이 시작했으나, 수로가 완성되면 확실하게 진나라에 이롭습니다.” 진나라도 그의 말이 옳다고 여겨 최후에는 그로 하여금 수로를 완성시키도록 했다.
수로가 완성되자 진흙이 충적된 경수와 낙수의 물을 끌어와서 염분이 성분이 많은 관중(關中) 지방의 4만여 경(頃, 밭의 넓이로 주나라 때에 약 24,326m2에 해당됨)에 달하는 농토에 관개해, 마침내 매 1무(畝, 면적단위로 240보에 해당함)당 1종(鍾, 용량단위로 6석(石) 4두(斗)에 해당함)의 수확이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중의 1천리 평야가 비옥한 농토로 변해서 흉년이 없게 되었고, 진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부강해졌고, 마침내 제후국들을 병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수로를 ‘정국거(鄭國渠)’으로 명명하였다.
한나라의 치수 사업
[편집]한(漢)나라가 건립한지 39년이 되던 효문제(孝文帝) 때, 황하의 제방이 산조현(酸棗縣,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북쪽에 위치함)에서 터져 동쪽의 금제(金堤, 일명 천리제(天里隄)로 하남성 골현(滑縣)에 위치함)가 무너졌다. 이에 동군(東郡)에서는 허다한 병졸들을 동원하여 금제를 틀어막았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지금의 천자(天子, 한무제) 원광(元光) 연간(BC 134 ~ BC 129)에 황하가 호자(瓠子, 하남성 복양현(濮陽縣) 서남쪽 위치함)에서 무너져 동남쪽으로 거야(鉅野, 산동성 거야현(巨野縣) 북쪽에 위치함)로 쏟아져 회수(淮水)와 사수(泗水)까지 통하게 되었다. 이때 천자는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로 하여금 일꾼들을 동원하여 터진 제방을 틀어막게 했지만 자주 다시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조정의 승상으로 있었는데, 그의 봉읍(奉邑)은 유현(鄃縣, 산동성 하진현(夏津縣) 동북쪽에 위치함)이었다. 유현은 황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황하의 제방이 남쪽으로 무너졌지만, 유현은 수재를 입지 않았고 수확도 많았다. 이에 전분은 천자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강하(江河)의 제방이 무너진 것은 모두 하늘의 일이라 인력으로 억지로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억지로 틀어막는다면 반드시 하늘의 뜻에 부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기를 보고 길흉을 예언하는 점술가도 모두 역시 그렇다고 동조하였다. 이 때문에 천자는 오랫동안 제방을 다시 막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때 정당시(鄭當時)가 대사농(大司農, 한나라의 관직명으로 조세나 염철 등의 재정을 주관함)으로 있었는데, 천자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예전에 관동(關東)에서 양식을 배로 운반할 때에는 위수(渭水)를 거슬러 올라와서 장안에까지 이르는데, 6개월이나 걸렸습니다. 이 수로의 길이는 9백여 리로 운반하는 도중에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장안에서부터 수로를 뚫어 직접 위수의 물을 끌어들이고, 더불어 남산(南山)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 보낸다면 황하까지 곧바로 3백여 리가 되고, 수로가 한 갈래로 곧게 뻗어 운송하기에 용이하게 되어 삼 개월이면 운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로가 지나는 곳에 백성들의 농토가 1만여 경(頃)이 있는데, 또 여기에도 물을 대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배로 양곡을 운반하는 시간과 동원하는 병졸들의 수를 줄일 수 있고, 또 관중(關中) 지방은 더욱 비옥해져 더 많은 곡식을 얻을 것입니다.”
천자도 그렇게 여기고, 제나라의 수리 기술자인 서백(徐伯)에게 명하여 지세를 측량하게 하고, 수만 명의 병졸을 동원하여 수로를 뚫어 3년 만에 완공시켰다. 수로가 개통하자 배로 운반하는 것이 매우 편리해졌다. 이후 수로를 통해 배로 운반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났고, 수로 부근의 백성들도 농토에 넉넉하게 물을 대 줄 수가 있었다.
그 후 하동(河東)의 태수 파계(番系)가 이렇게 아뢰었다.
“산동(山東)에서 서쪽 장안까지 수로로 운송되는 양곡은 매년 1백여만 석인데, 중간에 지주산의 험난한 지역을 지나오려면 배와 인명의 손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운송비용도 많이 듭니다. 만약 지금 수로를 뚫어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다가 피지(皮氏, 산서성 하진시(河津市)에 위치함)와 분음(汾陰, 산서성 만영현(萬榮縣) 경내) 일대의 토지에 물을 대주고, 황하의 물을 끌어다가 분음과 포판(蒲坂, 산서성 영제시(永濟市)) 일대의 토지에 물을 대주면 대략 5천 경(頃)의 농경지를 조성할 수 있습니다.
이 5천 경의 농경지는 원래 모두 하수 주변에 방치된 황무지로서 백성들은 단지 거기에서 방목을 할 따름이었습니다. 이제 거기에 물을 대어 경작을 할 수 있으면 2백만 석 이상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곡식들은 위수를 따라 장안으로 운송될 것이니, 직접 관중으로부터 곡식이 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며, 다시 지주산 동쪽으로부터 곡식을 배로 운송해 올 필요가 없습니다.”
천자는 그의 말에 동조하여 수만 명의 병졸을 동원하여 수로를 파고 농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황하의 물길이 바뀌어 파놓은 수로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곳의 농민들은 임대로 받은 종자마저도 보상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하동의 하천과 농지가 버려져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곳을 월(越) 지구에서 이주한 백성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고, 소부(少府)로 하여금 약간의 조세 수입을 받게 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상소를 올려 포야도(褒斜道, 일명 석우도(石牛道), 금우도(金牛道)로도 불리고, 진령(秦嶺)을 관통하는 도로)를 개통하고, 수로와 연결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천자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에게 이 사안을 넘겨 처리하게 했다. 장탕이 이 사안을 상세하게 알아보고 이렇게 아뢰었다. “한중(漢中)에서 촉(蜀)지방으로 가려면 옛 길로 이용해야 하는데, 옛 길은 산비탈이 많고 높을 뿐만 아니라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만약 포야도를 뚫게 되면 산비탈도 적고 여정이 4백 리나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포수(褒水, 섬서성 서남부 한태(漢台)에 위치함)와 면수(沔水, 옛 이름은 한수(漢水)이고, 감숙성 강릉강(嘉陵江) 서쪽의 지류)를 서로 통하게 하고, 야수(斜水)와 위수(渭水)를 서로 통하게 하면, 여기에 모두 배를 띄워 곡식을 운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배로 남양(南陽)에서 곡식을 싣고 면수를 거슬러 올라와서 포수로 들어올 수 있고, 포수에서 야수까지 약 1백여 리는 수레로 바꾸어 운반하며, 그 다음은 배를 타고 야수를 거쳐 위수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중(漢中)의 곡식을 장안으로 운반해올 수도 있고, 산동의 곡식을 면수까지 올려 보내는 것도 막힘이 없이 소통되어 지주산 일대를 경유하는 수운에 비해 훨씬 편리하게 됩니다. 또한 포야(褒斜) 지역의 목재나 죽전(竹箭) 등의 풍부함도 파촉(巴蜀) 지방과 견줄 만 합니다.” 천자는 그의 말을 옳다고 여기고 장탕의 아들 장앙(張卬)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임명하고 수만 명의 동원하여 5백여 리에 달하는 포야도를 만들게 했다. 이 도로가 개통되니, 편리하고도 가까웠지만, 물길은 급류이고 돌도 많아서 조운은 불가능했다.
그 후 장웅파(莊熊罷)가 이렇게 아뢰었다. “임진(臨晉, 산서성 운성시(運城市)의 직할 현인 임의현(臨猗縣)에 소속됨) 지방의 백성들은 낙수(洛水, 하남성 언사(偃師) 경내와 이하(伊河) 지역을 흐름)를 뚫어 그 물로 중천(重泉, 섬서성 포성현(蒲城縣) 일대) 동쪽의 평원(관중평원의 동북부)에 있는 염분이 많이 포함된 땅 만여 경(頃)에 물을 대줄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 물만 얻을 수 있다면 1무(畝)당 10석(石)은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만여 명의 병졸을 동원하여 수로를 뚫어서 징현(徵縣)으로부터 상안산(商顔山, 지금의 철렴산(鐵鐮山)) 아래까지 낙수의 물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이 수로의 언덕이 잘 무너져서 바로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 깊이가 40여 장(丈)이나 되었다. 이렇게 꾸준히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 우물이 땅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도랑이 생겼다. 이 도랑의 물은 땅속으로 흘러 상안산(商顔山)을 지나 동쪽으로 산봉우리의 중간쯤인 10여 리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정거(井渠, 우물 도랑)는 바로 이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이 도랑을 뚫다가 용의 뼈를 얻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용수거(龍首渠)’라고 했다. 이 도랑을 10여 년 동안 만들어서 제법 일부 지방까지 통하게 하였으나 풍족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제방이 무너진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매년 이로 말미암아 농토는 물로 잠기어 누차 풍년이 들지 않았는데, 양(梁)나라와 초(楚) 나라지방은 더욱더 엄중했다. 이때 천자는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더불어 천하의 명산대천을 순찰하면서 제사를 지냈지만, 그 이듬해에는 가뭄이 들어 흙으로 쌓은 제단에도 비가 조금씩만 내렸다. 이에 천자는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병졸 수만 명을 동원하여 호자의 무너진 제방을 막게 하였다.
이에 천자는 이미 만리사(萬里沙)에서 제사를 마친 다음에 돌아와서 친히 황하의 터진 곳에 이르러 백마(白馬)와 옥벽(玉璧)을 황하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군신들과 수종하는 관리들에게 장군 이하는 모두 나무를 운반해 와서 터진 황하를 다시 틀어막게 했다. 이때 동군(東郡)은 초목이 다 불살라졌기 때문에 땔나무가 부족하여 기원(淇園, 고대 위나라 원림으로 대나무가 유명했다. 하남성 기현(淇縣) 서북쪽에 위치함)의 대나무를 베어서 가져와 방죽을 만들었다.
호자가(瓠子歌)
[편집]천자가 황하의 터진 곳에 친히 왕림해 제방을 막는 공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었다.
“호자에서 황하 터졌나니, 장치 어찌 하리오? 끝없이 넘실넘실한 하수가, 백성들의 사는 곳마저 다 없애 버렸네! 다 없어지고 온통 하수가 되었으니, 이 지방은 평안하지 못하네. 공사는 그칠 날이 없고, 어산(吾山)은 이미 다 파내 평평해졌다네. 어산이 평평해지니, 거야택(鉅野澤)마저 범람한다네. 사방에 물고기 떼 뛰노는데, 겨울은 다가오네. 황하의 물길이 문란해져, 통상적인 흐름에서 벗어났다네.
교룡(蛟龍)은 날뛰며, 멀리까지 노닌다네. 황하가 옛 물길로 돌아오도록, 수신(水神)이여 은택을 내려주소서! 만일 봉선을 행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 범람을 알았겠소? 날 위해 하백(河伯)에게 어찌 그리 어질지 못하냐고 고해주시오. 범람이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은 근심으로 애간장이 탄다네. 설상정(齧桑亭)을 휩쓸어버리고, 회수, 사수는 넘실거린다네. 오래도록 옛 물길은 돌아오지 않고, 마냥 느릿느릿 흘러만 가는구나.”
또 한 수는 다음과 같이 지었다.
“황하의 물결은 세차고, 급하게도 흘러가네. 북쪽으로 가는 물길은 굽이굽이 돌아, 준설하여 소통하기가 어렵도다. 긴 줄 풀을 취해 터진 제방을 막고, 아름다운 옥을 하신에게 바쳤다네. 하백(河伯)은 물길을 잡아주기로 허락하셨는데, 땔나무가 부족하다네. 땔나무가 부족한 것은, 위(衛)나라 사람들의 죄로다. 모두 불태워서 스산하니, 어떻게 범람하는 물을 막을 수 있나! 기원(淇園)에서 대나무를 가져와 방죽과 돌로 막았다네. 선방(宣房)으로 막으면, 만복이 찾아오리라.”
이에 마침내 호자의 터진 곳을 막고, 그 입구에 궁을 건축하여 이름을 ‘선방궁(宣房宮)’이라고 불렀다. 더불어 황하를 두 줄기의 물길로 나누어 흐르도록 하여 하나라 우(禹)임금 때의 옛 수로를 회복되었고, 양(梁)나라와 초(楚)나라 지방도 또 평안해지고 수재가 없어졌다.
이후로부터 하천과 도랑을 책임지는 관리들은 다투어 수리(水利)에 관한 일을 진언했다. 삭방(朔方), 서하(西河), 하서(河西), 주천(酒泉) 등지에서는 모두 황하나 하천, 계곡물을 끌어와서 농경지에 공급했다. 관중 지방에서는 보거(輔渠)와 영지거(靈軹渠)를 만들어 여러 하천의 물을 끌어왔고, 여남(汝南)과 구강(九江)에서는 회수의 물을 끌어왔으며, 동해(東海)에서는 거정택(鉅定澤)의 물을 끌어왔고, 태산(泰山) 밑의 지역은 문수(汶水)의 물을 끌어왔다. 이 모두가 각자가 하천을 파서 농경지에 물을 댄 것으로 그 범위는 각기 1만여 경(頃)에 달했다. 기타 작은 하천이나 또는 산을 허물어 수로를 만든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모든 수리 공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선방(宣房)이었다.
사마천의 논평
[편집]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쪽으로는 여산(廬山)에 등반하여 우(禹)가 소통시킨 구강(九江)의 유적을 보았고, 또 후에 회계(會稽)의 태황(太湟)에 이르러 고소산(姑蘇山)에 올라 오호(五湖)를 조망했다. 동쪽으로는 낙예(洛汭), 대비(大邳)를 살피고, 하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회수(淮水), 사수(泗水), 제수(濟水), 탑수(漯水), 낙수(洛水) 등을 다녀보았다. 서쪽으로는 촉(蜀)나라의 민산(岷山)과 이대(離碓)를 보았고, 북쪽으로는 용문(龍門)으로부터 삭방(朔方)에까지 섭렵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감탄했다. ‘물이 주는 이로움과 피해란 것은 심대하도다!’ 나는 천자를 따라 직접 땔나무를 지고 선방(宣房)을 막는데 참여했고, 호자(瓠子)에서 지은 시에 비애를 느껴 「하거서(河渠書)」를 짓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