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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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편집]소공(召公) 석(奭)은 주(周)와 같은 성인 희씨(姬氏)이다. 주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멸망시키고 소공을 북연(北燕)에 봉했다.
성왕(成王) 재위 때 소공은 3공의 한 사람이 되다. 섬(陝) 서쪽 지역은 소공이, 섬 동쪽 지역은 주공(周公)이 다스리게 되었다. 성왕이 어려 주공이 섭정하여 국정을 주관하며 천자 자리에 오르자 소공은 그를 의심했다.
이에 (주공은) 「군석(君奭)」을 지었다. 소공이 주공을 언짢게 여기자 주공은 이렇게 말했다.
“탕(湯)나라 때는 이윤(伊尹)이 있어 하늘의 도에 맞게 나라를 다스렸고, 태무(太戊) 때는 이척(伊陟)과 신호(臣扈)가 있어 상제의 뜻에 어긋나지 않게 업적을 쌓았고, 무함(巫咸)은 왕가를 보필했다. 조을(祖乙) 시대에는 무현(巫賢) 같은 현자가 있었고, 무정(武丁) 때는 감반(甘般) 같은 인물이 있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은나라를 편하게 잘 다스렸다.”
이에 소공이 마음을 풀었다.
소공이 섬 서쪽을 다스릴 때 인민의 환심을 많이 얻었다. 소공이 향읍을 순시할 때면 팥배나무 아래에서 송사를 판결하고 정사를 처리했다. 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자 맞는 일을 맡기니 자리와 일을 잃는 사람이 없었다.
소공이 죽자 인민들은 소공의 정치가 생각나고 팥배나무가 그리워 베지 않고 ‘감당(甘棠)’이란 시를 지어 그를 노래했다.
소공 아래로 9대를 지나 혜후(惠侯)에 이르렀다. 연나라 혜후 때는 주나라 여왕(厲王)이 체(彘)나라로 달아나고 공화정(共和政)이 시작된 시기에 해당한다.(기원전 841년)
연나라 혜후가 죽고 아들 희후(釐侯)가 섰다. 그해(기원전 828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새로 즉위했다.
희후 21년(기원전 806년)에 정(鄭)나라 환공(桓公)이 처음으로 정에 봉해졌다.
36년에 희후가 죽고 그 아들인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경후 20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음란하게 굴다가 견융(犬戎)에게 시해당했다.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제후 반열에 올랐다.
24년에 경후가 죽고 아들 애후(哀侯)가 즉위했다.
애후가 2년 만에 죽고 아들 정후(鄭侯)가 섰다.
정후는 36년만에 죽고 아들 목후(繆侯)가 섰다.
목후 7년(기원전 722년)은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이다. 18년 만에 죽고 아들 선후(宣侯)가 섰다.
선후가 13년 만에 죽고 아들 환후(桓侯)가 섰다. 환후가 7년 만에 죽자 아들 장공(莊公)이 들어섰다.
장공 12년(기원전 679년)에 제나라 환공(桓公)이 처음으로 패주가 되었다.
장공 16년에 송(宋)나라가 위(衛)나라와 함께 주나라 혜왕(惠王)을 공격하니 혜왕은 온읍(溫邑)으로 도망쳤고, 혜왕의 동생 희퇴(姬頹)를 주나라의 왕으로 세웠다.
장공 17년에 정나라가 연나라의 중보(仲父)를 잡고 혜왕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장공 27년에 산융(山戎)이 연나라을 침략하자, 제나라 환공이 연나라를 구하러 나서 북으로 산융을 정벌한 다음 돌아갔다. 연나라의 국군(장공)이 제나라 환공을 배웅하느라 국경을 넘었다. 환공은 연나라의 국군이 밟은 땅을 떼어서 연나라에게 주었다. (환공이) 연나라에게 주나라 초기처럼 천자에게 조공하도록 하고, 연나라로 하여금 소공(召公)의 정치를 다시 따르도록 했다.
33년 만에 죽고 아들 양공(襄公)이 그 뒤를 이었다.
양공 26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천토(踐土)의 회맹으로 패주가 되었다.
31년에 진(秦)나라의 군대가 효산(殽山)에서 (진<晉>나라에) 패했다.
37년(기원전 621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40년에 양공이 죽고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환공은 16년 만에 죽고 선공(宣公)이 즉위했다.
선공은 15년 만에 죽고 소공(昭公)이 뒤를 이었다.
소공이 13년 만에 죽고 무공(武公)이 뒤를 이었다.
그해 진(晉)나라가 삼극대부(三郤大夫)를 없앴다.
무공은 19년 만에 죽고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문공은 6년 만에 죽고 의공(懿公)이 즉위했다.
의공 원년에 제나라의 대부 최저(崔杼)가 국군 장공(莊公)을 시해했다.
의공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아들 혜공(惠公)이 즉위했다. 혜공 원년에 제나라의 고지(高止)가 연나라로 도망쳐 왔다.
6년에 혜공에게는 총애하는 신하들이 많았다. 공이 여러 대부들을 제쳐두고 송(宋)을 앞세우려 하자 대부들이 송을 죽였다. 혜공이 겁을 먹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4년에 제나라의 고언(高偃)이 진(晉)나라에 가서 함께 연나라을 토벌하고 그 국군(혜공)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했다. 진나라 평공(平公)이 이를 받아들여 제나라와 함께 연나라를 토벌하여 혜공을 돌려보냈다. 혜공이 연나라에 이르러 죽었다. 연나라는 도공(悼公)을 세웠다.
도공이 7년 만에 죽고 공공(共公)이 즉위했다.
공공은 5년 만에 죽고 평공(平公)이 섰다. 진(晉)나라의 공실이 약해지고 육경(六卿)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평공 18년(기원전 506년)에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초나라를 격파하고 수도 영(郢)까지 쳐들어갔다.
(평공이) 19년 만에 죽고 간공(簡公)이 섰다.
간공이 12년 만에 죽고 헌공(獻公)이 들어섰다.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조가(朝歌)에서 범씨(范氏)과 중항씨(中行氏)를 포위했다.
헌공 12년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자신의 국군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14년(기원전 479년)에 공자(孔子)가 죽었다. 28년에 헌공이 죽고 효공(孝公)이 즉위했다.
효공 12년에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가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지니 이들 삼진(三晉)이 강대해졌다.
15년에 효공이 죽고 성공(成公)이 즉위했다.
성공이 16년 만에 죽고 민공(湣公)이 즉위했다.
민공은 31년 만에 죽고 희공(釐公)이 뒤를 이었다. 같은 해(기원전 403년)에 삼진이 제후 반열에 올랐다.
희공 30년에 임영(林營)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 희공이 죽고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환공이 11년 만에 죽고 문공(文公)이 들어섰다. 그해에 진(秦)나라 헌공(獻公)이 죽었다. 진(秦)나라가 더욱 강해졌다.
문공 19년에 제나라 위왕(威王)이 죽었다.
28년에 소진(蘇秦)이 처음으로 와서 문공을 만나 유세했다. 문공이 마차, 금, 비단을 주어 조(趙)나라로 보내자 조나라 숙후(肅侯)가 그를 기용했다. 6국이 동맹을 약속하니 (연나라 문공이) (동맹, 즉 합종을 이끄는) 종약장(縱約長)이 되었다. 진(秦)나라의 혜왕(惠王)이 자기 딸을 연나라 태자의 부인이 되게 했다.
29년에 문공이 죽고 태자가 들어서니 이가 역왕(易王)이다.
역왕이 즉위하자마자 제나라 선왕(宣王)이 연나라의 장례를 틈타 연나라를 정벌하여 열 개의 성을 취했다. 소진이 제나라에 유세하여 연나라의 성 열 개를 돌려주게 했다.
10년(기원전 323년), 연나라의 국군이 왕을 칭했다. 소진이 연나라 문공의 부인과 사사로이 간통하다가 죽임을 당할까 겁이 나서 왕에게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반간계(反間計)로 제나라를 어지럽히겠다고 유세했다.
역왕은 12년 만에 죽고 아들 쾌(噲)가 들어섰다.
쾌가 즉위한 후에 제나라 사람들이 소진을 죽였다. 소진이 연나라에 있을 때 재상 자지(子之)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동생 소대(蘇代)도 자지와 교류했다. 소진이 죽자 제나라 선왕이 다시 소대를 기용했다.
연왕 쾌 3년에 초나라와 삼진(한, 위, 조)이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자지가 연나라의 재상이 되어 더욱 귀하신 몸이 되자 국정을 독단했다. 소대가 제나라를 위해 연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연왕이 “제나라의 왕은 어떻소?”라고 묻자 “분명 패주가 못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이 “왜 그렇소?”라고 하자 “신하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소대는 이렇게 연왕을 자극하여 자지를 더욱 존중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연왕이 자지를 크게 신임하였다. 자지는 소대에게 100금을 주어 마음대로 쓰게 했다.
녹모수(鹿毛壽)가 연왕에게 “나라를 국상(國相) 자지에게 양보하느니만 못합니다. 사람들이 요(堯)를 현자라 하는 까닭은 그가 천하를 허유(許由)에게 선양(禪讓)했기 때문입니다. 허유가 받지 않았지만 천하를 선양했다는 명성을 얻었고, 실제로 천하를 잃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자지에게 양보한다 해도 자지는 감히 받지 못할 것이고, 왕께서는 요와 같은 덕행을 쌓게 됩니다.”라 했다.
이로써 연왕은 자지에게 나라를 맡겼고, 자지는 더욱 중요해졌다. 누군가 말하길 “우(禹)는 익(益)을 추천하고 계(啓)의 사람을 관리로 삼았다. (우가) 늙어서 계에게 천하를 맡기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익에게 자리를 전했다. 얼마 후 계가 무리들과 함께 익을 공격하여 자리를 빼앗았다. 천하는 우가 명목상 익에게 천하를 전했지만 실제로는 아들 계에게 알아서 천하를 취하게 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지금 왕이 나라를 자지에게 맡긴다고는 했으나 관리들은 태자의 사람 아닌 자가 없으니 명목상 자지에게 맡기고 실제로는 태자에게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왕은 300석 이상의 녹봉을 받는 관리들에 대한 임용권을 자지에게 넘겼다. 자지가 남면하여 왕의 일을 행사했다. 쾌는 늙어서 정치를 돌보지 못하여 도리어 신하가 되고 국사는 모조리 자지가 결정했다.
3년 째 나라에 큰 난리가 나서 백관이 공포에 떨었다. 장군 시피(市被)가 태자 평(平)과 자지를 공격하려고, 모의했다. (제나라의) 여러 장군들이 제나라 민왕(湣王)에게 “이 틈에 공격하면 틀림없이 연나라를 깰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제왕은 사람을 연나라 태자 평에게 보내 “과인은 태자가 대의를 알아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적인 도를 세우고, 군신관계를 정돈하고, 부자간의 지위를 바로잡으려 한다고 들었소. 과인의 나라는 작아서 앞뒤에 서서 도울 수는 없지만 태자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라 전했다.
이에 태자는 당파를 만들고 무리를 모으며, 장군 시피는 궁궐을 포위하여 자지를 공격했으니 이기지 못했다. 백관들이 도리어 태자 평을 공격했고, 장군 시피가 죽자 저자거리에서 조리를 돌렸다. 몇 달에 걸친 난리 때문에 죽은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고 백관들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맹자(孟子)가 제왕에게 “주나라 문왕과 무왕 때와 같으니 지금 연나라를 정벌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제왕은 장자(章子)에게 5도(五都)의 군사와 북방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연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연나라의) 사졸들은 싸우지 않았고, 성문도 닫지 않았다. 연나라의 군주 쾌는 죽고 제나라는 대승을 거두었다. 연나라의 자지가 죽은 지 2년(기원전 312년)에 연나라 사람들이 태자 평을 세우니 이가 연나라 소왕(昭王)이다.
연 소왕은 연나라가 다 무너진 직후 즉위하여 몸을 낮추고 후한 대우로 현자를 초빙했다. 곽외(郭隗)에게 “제나라가 우리의 난국을 틈타 연나라를 기습하여 무너뜨렸소. 우리 연나라의 땅은 작고 힘이 약해 되갚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정말 유능한 인재를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리며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바람이오. 선생께서 보기에 이런 인재가 있다면 이 몸이 친히 그를 모시리라.”라 했다.
곽외가 “왕께서 꼭 그런 인재를 모시려 한다면 먼저 이 곽외부터 시작하십시오. 하물며 이 곽외보다 나은 인재들이 어찌 천 리를 멀다 하겠습니까?”라 했다. 이에 소왕은 곽외를 위해 궁을 짓고 스승으로 그를 모셨다.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오는 등 인재들이 다투어 연나라로 달려왔다. 연왕은 죽은 사람에게는 조의를 표하고, 혼자 유족들을 찾아가 위문하는 등 백성들과 동고동락했다.
28년에 연나라는 부유해지고 병사들은 기꺼이 전투에 나가려 했다. 이에 마침내 악의를 상장군으로 삼아 진(秦)나라와 초나라, 삼진과 함께 제나라를 정벌하기로 했다. 제나라의 군대는 패했고 민왕은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연나라의 군대만 추격하여 임치에 진입해서는 제나라의 보물을 취하고 궁실과 종묘를 불태웠다. 함락되지 않는 제나라의 성으로는 요(聊), 거(莒), 즉묵(卽墨)만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의 차지가 되어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소왕이 33년 만에 죽고 아들 혜왕(惠王)이 즉위했다.(기원전 279년)
태자 때 혜왕은 악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즉위한 후 악의를 의심하여 기겁(騎劫)에게 상장군을 대신하게 했다. 악의는 조나라로 망명했다. 제나라의 전단(田單)이 즉묵에서 연나라의 군대를 격파했다. 기겁은 전사하고 연나라의 군대는 철수했다. 제나라는 잃었던 성들을 모두 되찾았다. 민왕이 거(莒)에서 죽고 그 아들이 양왕(襄王)으로 즉위했다.
연나라 혜왕은 7년 만에 죽었다. 한, 위, 초가 함께 연나라를 정벌했다. 연의 무성왕(武成王)이 즉위했다.
무성왕 7년에 제나라의 전단이 연나라의 정벌하여 중양(中陽)을 빼앗았다.
13년에 진(秦)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40만 군대를 패배시켰다.
14년에 무성왕이 죽고 아들 효왕(孝王)이 즉위했다.
효왕 원년(기원전 257년)에 한단(邯鄲)을 포위하고 있던 진(秦)나라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효왕이 3년 만에 죽고 지금의 왕 아들 희(喜)가 왕이 되었다.
왕 희 4년에 진(秦)나라 소왕(昭王)이 죽었다.
연왕이 재상인 율복(栗腹)에게 조나라와 동맹을 맺게 하고 500금을 보내 조왕의 장수를 빌었다.
율복이 돌아와 연왕에게 “조왕의 장정들이 모두 장평에서 죽고 그 자식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왕은 창국군(昌國君, 악간樂間)을 불러 물었다. (창국군은) “조나라는 사방으로 전쟁을 치르는 나라로 사람들이 싸움에 익숙하므로 정벌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우리가 다섯으로 하나를 치는데도 말이오?”라고 했지만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연왕은 성을 냈고, 신하들은 모두 할 수 있다고 했다.
끝내 군대를 동원하여 둘로 나누고 전차 2,000승을 내어 율복에게는 호(鄗)를, 경진(卿秦)에게는 대(代)를 공격하게 했다. 오직 대부 장거(將渠)만이 왕에게 “사람을 보내 수교를 하고 500금까지 보내 그 왕의 건강까지 빌었습니다. 사신의 보고만 듣고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려 하시니 좋지 않습니다. 전쟁은 성공 못합니다.”라고 했다.
연왕은 듣지 않고 직접 군대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장거가 왕의 도장 끈을 잡아당기며 “왕께서 직접 가시면 정말 안 됩니다. 가셔도 성공 못 합니다.”라고 말렸다. 왕이 발로 그를 걷어찼다. 장거가 울면서 “신은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라고 했다.
연나라의 군대가 송자(宋子)에 이르자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장수로 삼아 호에서 율복을 격파했다. 악승(樂乘)은 대에서 경진을 깼다. 악간은 조나라로 달아났다. 염파는 500여 리나 뒤쫓아 연나라를 포위했다.
연나라가 화친을 요청하자 조나라는 허락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장거가 화친에 나서게 하라고 요구했다. 연나라가 장거를 재상으로 삼아 화친에 나서게 했다. 조나라가 장거의 요청을 듣고는 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었다.
6년에 진(秦)이 동주(東周)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삼천군(三川郡)을 두었다.
7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유차(楡次) 등 37개 성을 공략해서 태원군(太原郡)을 두었다.
9년에 진왕 영정(嬴政, 진시황)이 즉위했다.
10년에 조나라가 염파를 보내 번양(繁陽)을 공격해 빼앗았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이 죽고 도양왕(悼襄王)이 섰다. (도양왕이) 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했으니 염파가 따르지 않고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도 대량(大梁)으로 도망쳤다.
12년에 조나라가 이목(李牧)에게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무수(武遂)와 방성(方城)을 빼앗았다. 전에 (극신<劇辛>이) 조나라에 있을 때 방훤(龐煖)과 친하게 지냈는데 얼마 뒤 연으로 왔다. 연은 조가 진나라 때문에 여러 번 곤경에 처했고, 염파도 떠나버려 방훤을 대장으로 삼은 것을 보고는 피폐해진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극신에게 묻자 “방훤은 쉽습니다.”라 했다. 연나라는 극신을 장군으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방훤에게 맞아 싸우게 하여 연나라의 군대 2만을 물리치고 극신을 죽였다. 진나라가 위나라의 성 20개를 빼앗고 동군(東郡)을 두었다.
19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땅 업(鄴)의 9개 성을 빼앗았다. 조나라 도양왕이 죽었다.
23년에 태자 단(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25년(기원전 230년)에 진나라가 한왕 안(安)을 포로로 붙잡고 한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영천군(穎川郡)을 두었다.
27년(기원전 228년)에 진나라가 조나라 왕 천(遷)을 포로로 붙잡고 조나라를 멸망시켰다. 조나라의 공자 가(嘉)가 대(代)에서 왕으로 자립했다.
연나라는 진나라가 머지않아 6국을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군대가 역수(易水)까지 밀어닥쳐 화가 연나라에 미칠 것을 알았다. 태자 단은 몰래 장사 20명을 기르고 형가(荊軻)를 보내 독항(督亢)의 지도를 (진나라에) 바치면서 기습적으로 진왕을 찌르게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아채고 형가를 죽이고는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 연나라를 공격했다.
29년에 진나라가 연나라의 도성 계(薊)를 빼앗자, 연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쳐서는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쳤다.
30년(기원전 225년)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33년(기원전 222년)에 진나라가 요동을 빼앗고, 연왕 희(喜)를 사로잡아 마침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이해에 진나라의 장수 왕분(王賁)도 조나라 대왕(代王) 가(嘉)를 사로잡았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소공(召公) 석(奭)은 어질다 하겠다! (백성들이) 팥배나무도 사모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연나라는 밖으로는 만맥(蠻貊)과 가깝고 안으로는 제나라와 진(晉)나라와 같은 강한 나라에 끼인 가장 약소한 나라로서 거의 몇 번이나 망할 뻔했다. 그럼에도 사직의 제사를 800에서 900년 가까이 유지하며 희씨 성들 가운데 가장 늦게 망했으니 이 어찌 소공의 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