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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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편집]

강숙(康叔)[편집]

위(衛) 강숙(康叔)은 이름이 봉(封)이고, 주나라 무왕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다. 그 밑으로 염계(冉季)가 있는데, 염계가 가장 어렸다.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물리치고 은나라의 유민과 그 땅을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봉하여, 제후와 동등하게 해주고 주나라 선조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받들도록 했다. 무경이 그래도 따르지 않자, 그에게 난을 일으킬 마음이 있지 않을까 두려워 무왕은 동생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에게 무경녹보를 보좌하게 하여 그 인민을 화합시켰다.

무왕이 세상을 뜨고 성왕(成王)은 어렸기에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맡아 다스렸다. 관숙과 채숙은 주공을 의심하여 무경녹보와 함께 난을 일으켜 성주(成周)를 공격하려고 했다. 주공 단이 성왕의 명을 받아 군대로 은나라를 정벌하여 무경녹보와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추방했다. 그리고 은나라 유민들을 강숙에 봉해주어 그를 위의 국군으로 삼고, 황하(黃河)와 기수(淇水) 사이 옛 상의 터에서 관할하게 했다.

주공 단은 강숙이 나이가 어린 것이 마음에 걸려 강숙에게 “은나라의 현인과 군자 그리고 장자들을 찾아 그 선조인 은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반드시 묻고 인민을 사랑하는 데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 은나라 주왕이 망한 것은 지나친 음주로 정치를 그르치고 여자 말만 들었기 때문이며, 주왕의 난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주공은 「자재(梓材)」를 지어 군자가 따라야 할 법을 보여주었다. 주공은 이에 따라 「강고(康誥)」, 「주고(酒誥)」, 「자재」라는 이름의 글을 지어 가르쳤다. 강숙이 나라로 가서 이 가르침을 실천하여 인민을 화합시키고 안정시키니 인민이 크게 기뻐했다.

성왕이 장성하여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자, 강숙을 주나라의 사구(司寇)로 임명하고 위에는 보물과 제기를 내려 그 덕을 널리 드러냈다.

강백(康伯)[편집]

강숙이 죽고, 아들 강백(康伯)이 뒤를 이었다.

고백(考伯)[편집]

강백이 죽고, 아들 고백(考伯)이 섰다.

사백(嗣伯)[편집]

고백이 죽고, 아들 사백(嗣伯)이 즉위했다.

첩백(𢈻伯)[편집]

사백이 죽고, 아들 첩백(𢈻伯)이 즉위했다.

정백(靖伯)[편집]

첩백이 죽고, 아들 정백(靖伯)이 즉위했다.

정백(貞伯)[편집]

정백이 죽고, 아들 정백(貞伯)이 즉위하였다.

경후(頃侯)[편집]

정백이 죽고, 아들 경후(頃侯)가 즉위했다.

경후는 주나라 이왕(夷王)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고, 이왕은 위를 제후로 삼을 것을 명했다.

희후(釐侯)[편집]

경후는 재위 12년 만에 죽고, 아들 희후(釐侯)가 즉위했다.

희후 13년(기원전 842년)에 주나라 여왕(厲王)이 체(彘)나라로 도망치고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28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공백(共伯)[편집]

42년에 희후가 죽고, 태자 공백(共伯) 여(餘)가 국군에 올랐다. 공백의 동생인 화(和)가 희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희후가 준) 많은 재물을 무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매수해서는 공백을 무덤 위에서 습격하니, 공백은 희후의 무덤으로 들어가 자살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희후 옆에 장례를 치러주고, 시호를 공백(共伯)이라 했다.

무공(武公)[편집]

이어 화를 위의 제후로 세우니 이가 무공(武公)이다.

무공은 즉위하여 강숙의 정치를 다시 살려내고 백성들을 화합시켰다.

42년에 견융(犬戎)이 주나라 유왕(幽王)을 죽이자, 무공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주나라를 도와 견융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무공을 공(公)으로 삼았다.

장공(莊公)[편집]

55년에 무공이 죽고, 아들 장공(莊公) 양(揚)이 즉위했다.

장공 5년에 제(齊)나라 여자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아름답긴 했지만 아들이 없었다. 다시 진(陳)나라 여인을 부인으로 취하여 아들을 낳았지만 일찍 죽었다. 진나라 여자의 여동생도 장공의 총애를 받아 아들 완(完)을 낳았다.

완의 어머니가 죽자 장공은 부인인 제나라 여자에게 (완을) 아들로 삼게 하고는 태자로 세웠다. 장공의 애첩이 아들 주우(州吁)를 낳았다. 18년에 주우가 커서 군대 일을 좋아하자, 장공이 그에게 군대를 이끌게 했다.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서자께서 군대 일을 좋아한다 하여 군대를 이끌게 하면 그 때문에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환공(桓公)[편집]

23년에 장공이 죽고, 태자 완(完)이 즉위하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환공 2년에 동생 주우가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환공이 내쫓으려 하자 주우가 도망쳤다.

13년에 정백(鄭伯)의 동생 단(段)이 그 형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자 주우가 그에게 벗이 되길 청했다.

주우(州吁)[편집]

16년에 주우는 위(衛)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모아서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는 자신이 위나라의 국군이 되었다. (주우가) 정백의 동생 단을 위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려고 송(宋), 진(陳), 채(蔡) 나라에 동참을 요청하자, 세 나라가 모두 주우의 청을 받아들였다. 주우가 새로 즉위해서는 전쟁을 좋아하는데다 환공을 시해했기 때문에 위나라 인민들이 모두 주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 어머니의 친정이 진(陳)나라란 것을 가지고 주우와 거짓으로 잘 지내는 척했다. (위나라의 군대가) 정나라의 교외에 이르자, 석작은 진후(陳侯)와 공모하여 우재추(右宰醜)로 하여금 먹을 것을 바치면서 복(濮)에서 주우를 죽이도록 했다.

선공(宣公)[편집]

그리고는 환공의 동생 진(晉)을 형(邢)에서 맞아들여 세우니 이가 선공(宣公)이다.

선공 7년에 노(魯)나라가 그 구군 은공(隱公)을 시해했었다.

9년에 송나라의 화보독(華父督)이 그 국군 상공(殤公)과 대부 공보가(孔父嘉)를 죽였다.

10년에 진(晉)나라 곡옥(曲沃)의 장백(莊伯)이 그의 국군 애후(哀侯)를 시해했다.

18년에 선공이 총애하던 부인 이강(夷姜)이 아들 급(伋)을 낳자 태자로 삼고, 우공자(右公子)로 하여금 가르치게 했다. 우공자가 태자를 위해 제(齊)나라 여자를 아내로 취하게 했는데, 혼례를 치르기 전에 선공이 태자비가 될 여자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취하고, 태자는 다른 여자를 취하게 했다. 선공이 제나라 여자에게서 아들 수(壽)와 삭(朔)이 태어나자, 좌공자(左公子)에게 가르치게 했다.

태자 급의 어머니가 죽자, 선공의 정부인은 삭과 함께 태자 급을 나쁘다며 헐뜯었다. 선공이 태자의 아내가 될 여자를 빼앗은 뒤로 태자를 미워하며 폐위시키려 했다. 태자에 대한 나쁜 말을 듣자, 크게 노하여 태자 급을 제나라로 보내면서 강도를 시켜 국경에서 죽이게 했다. 태자에게 흰 깃대 장식을 들고 가도록 했는데 강도에게 국경에서 이 흰 깃대 장식을 가지고 있는 자를 보면 죽이라고 했다.

(태자 급이) 떠나려 할 때 태자의 배다른 동생이자 삭의 형인 수가 삭이 태자를 미워하고 국군이 태자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태자에게 “강도가 국경에서 태자의 흰 깃대를 보면 바로 태자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일렀다. 태자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라 하고는 끝내 떠났다.

태자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수는 흰 깃대를 훔쳐 먼저 국경으로 달려갔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도는 그 표지를 보고는 바로 죽였다. 수는 이미 죽었는데 태자 급이 도착해서는 강도에게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라고 했다. 강도가 태자 급마저 죽이고 선공에게 보고했다. 선공은 바로 아들 삭을 태자로 삼았다.

혜공(惠公)[편집]

19년에 선공이 죽고, 태자 삭이 즉위하니 이가 혜공(惠公)이다. 좌우 두 공자는 삭이 즉위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혜공 4년에 좌우 두 공자는 혜공이 태자 급을 헐뜯고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켜 혜공을 공격하고, 태자 급의 동생인 검모(黔牟)를 국군으로 옹립하자 혜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위의 국군 검모가 즉위한 지 8년에 제나라 양공(襄公)이 주왕의 명을 받들어 제후들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정벌해서는 위 혜공을 돌려보내고 좌우 공자를 죽였다. 위나라의 국군 검모는 주나라로 달아났고, 혜공이 다시 자리에 올랐다. 혜공이 3년 만에 도망쳤다가 망명 8년 만에 돌아오니, 이전까지 모두 합치면 13년인 셈이다.

25년에 혜공은 주나라가 검모를 받아들인 것에 원망을 품고 연(燕)나라와 함께 주나라를 공격했다. 주 혜왕(惠王)은 온(溫)나라으로 달아나고, 위나라와 연나라는 혜왕의 동생 퇴(頹)를 왕으로 세웠다.

29년에 정나라가 혜왕을 주나라로 돌려보냈다.

의공(懿公)[편집]

31년에 혜공이 죽고, 아들 의공(懿公) 적(赤)이 즉위했다.

의공이 즉위하여 학을 좋아하는 등 사치를 일삼고 음탕함을 즐겼다.

9년(기원전 660년)에 적(翟)나라가 위나라를 침공하자 의공이 군사를 일으켰으나, 병사 중에 반발하는 자가 있었다. 대신들이 “국군께서는 학을 좋아하시니 학더러 적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시오.”라고 했다. 적나라가 마침내 들어와 의공을 죽였다.

대공(戴公)[편집]

당초 의공이 즉위하자, 백성과 대신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의공이 아버지인 혜공 삭이 태자 급을 헐뜯고 죽인 이래로 의공 때까지 늘 그들을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마침내 혜공의 후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검모의 아우 소백 완(頑)의 아들 신(申)을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대공(戴公)이다.

대공 신은 즉위 원년에 죽었다. 제나라 환공(桓公)은 위나라가 여러 차례 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적나라를 토벌하여 위나라를 위해 초구(楚丘)에 성을 쌓았다.

문공(文公)[편집]

대공의 동생 훼(燬)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문공(文公)이다. 문공은 난리 때문에 제나라로 달아났었는데 제나라 사람이 돌려보낸 것이다.

당초 적나라가 의공을 죽이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가엾게 여기는 한편, 선공이 죽인 태자 급의 후손을 다시 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급의 아들 역시 죽었고, 급을 대신하여 죽은 수의 아들도 없었다. 태자 급에게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이 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검모로 혜공을 대신하여 국군이 되었다가 8년 만에 물러났다. 둘째가 소백(昭伯)이다. 소백과 검모 모두 죽었기 때문에 소백의 아들 신을 대공으로 세운 것이다. 대공이 죽자 다시 그 동생을 훼를 문공으로 세웠다.

문공은 즉위하여 세금을 가볍게 하고 형벌을 공평하게 했다. 몸소 일하고 백성과 고통을 같이 하면서 위나라의 인민들을 거두었다.

16년에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가 위나라를 지나갔는데 위나라에서 무례하게 대했다.

17년(기원전 643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었다.

성공(成公)[편집]

25년에 문공이 죽고, 아들 성공(成公) 정(鄭)이 즉위했다.

성공 3년에 진(晉)나라가 송(宋)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위에 길을 빌리려 했으나 성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나라는 길을 바꾸어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 송나라를 구원하고는 위나라에 군사 징발을 요청하자 위나라의 대부들은 응하려 했으나, 성공은 내켜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부 원훤(元咺)이 성공을 공격했고, 성공은 달아났다. 진나라 문공 중이는 위나라를 공략하여 그 땅을 송나라에 줌으로써 과거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송나라를 구원하지 않은 원한을 갚았다.

위나라 성공은 진(陳)나라로 도망쳤다가, 2년 뒤 주나라로 가서 자신의 귀국을 호소하니 진나라 문공과 만나게 되었다. 진나라는 사람을 시켜서 위나라 성공을 독살하려 했다. 성공은 주나라에 사사로이 뇌물을 주어 독을 약하게 타게 하여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주나라가 진나라 문공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성공이) 위나라로 돌아가니, 원훤은 죽임을 당하고 위나라의 국군 하(瑕)는 국외로 달아났다.

7년(기원전 628년)에 진나라 문공이 죽었다.

12년에 성공이 진나라 양공(襄公)에게 조회했다.

14년(기원전 621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26년에 제나라의 대부 병촉(邴歜)이 그 국군 의공(懿公)을 시해했다.

목공(穆公)[편집]

35년에 성공이 죽고, 아들 목공(穆公) 속(遫)이 즉위했다.

목공 2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진(陳)나라를 정벌하여 하징서(夏徵舒)를 죽였다.

3년에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여 정나라가 항복하자 포위를 풀었다.

11년에 위나라의 대부 손양부(孫良夫)가 노(魯)나라를 구하려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정공(定公)[편집]

목공이 죽고, 아들 정공(定公) 장(藏)이 즉위했다.

헌공(獻公)[편집]

정공은 12년 만에 죽고, 아들 헌공(獻公) 간(衎)이 즉위했다.

13년에 헌공이 악사 조(曹)로 하여금 첩에게 거문고를 가르치게 했다. 첩이 잘하지 못하자 조가 매질을 했다. 첩이 헌공에게 조의 험담을 하자 헌공도 조에게 300대 매질을 했다.

18년에 헌공이 손문자(孫文子)와 영혜자(寧惠子)에게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여 이들이 들어왔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헌공은 이들을 부르지 않고 사냥터로 가서 기러기를 잡았다. 두 사람이 헌공을 찾아갔으나 헌공은 사냥 복장을 벗지도 않은 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화가 나서 숙읍(宿邑)으로 가버렸다.

손문자의 아들이 헌공의 술자리를 여러 차례 시중든 적이 있다. (헌공이) 악사 조에게 「교언(巧言)」의 마지막 장을 노래하게 했다. 악사 조는 헌공이 300대 매질한 것에 화가 나 있던 터라 그 노래를 부르면서 손문자를 노하게 만들어 위나라 헌공에게 보복하고 싶었다.

손문자가 이 일을 거백옥(蘧伯玉)에게 말하자 백옥은 “신은 모르겠소이다.”라고 했다. (손문자가) 바로 헌공을 공격했고 헌공은 제나라로 달아났다. 제나라는 위나라 헌공을 취(聚)나라에 머물게 했다.

상공(殤公)[편집]

손문자와 영혜자는 함께 정공(定公)의 동생 추(秋)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우니 이가 상공(殤公)이다.

상공 추가 즉위하자 손문자 임보(林父)를 숙읍(宿邑)에 봉했다.

12년에 대부 영희(寧喜)와 손임보가 총애를 다투어 서로를 미워했다. 상공이 영희를 시켜 손임보를 치게 했다. 손임보는 진(晉)나라로 도망쳐 전 국군 위나라 헌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요청했다. 헌공은 제나라에 있었는데 제나라 경공(景公)이 이 소식을 듣고는 위나라 헌공과 진나라로 가서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맹을 이끌어냈다. 위나라 상공이 진나라 평공과 회맹하려 했으나 평공은 상공과 영희를 잡고는 위나라 헌공을 다시 귀국시켰다.

헌공(獻公)[편집]

헌공은 외국에서 12년을 망명했다가 귀국했다.

헌공이 복위 원년에 영희를 죽였다.

3년에 오나라의 연릉계자(延陵季子)가 사신으로 위나라에 들러 거백옥과 사추(史鰌)를 만나서는 “위나라에는 군자들이 많이 있으니, 나라에 별일은 없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숙읍을 지나는데 손임보가 경(磬)을 연주하자 “즐겁지 않고 크게 슬픈 것이 위나라의 분란이 여기서 비롯되었구나!”라고 했다.

양공(襄公)[편집]

이 해에 헌공이 죽고, 아들 양공(襄公) 오(惡)가 즉위했다.

양공 6년에 초나라 영왕(靈王)이 제후들과 회맹하는데 양공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9년에 양공이 죽었다.

영공(靈公)[편집]

당초 양공에게는 천한 첩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를 예뻐하여 임신이 되었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녀에게 “나는 강숙(康叔)이다. 네 아들이 꼭 위나라를 차지할 수 있게 할 테니, 아들 이름을 원(元)이라 하여라.”라고 했다. 첩이 괴이하게 여겨 공성자(孔成子)에게 물었다. 공성자는 “강숙은 위나라의 조상입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아이를 낳으니 사내였고, 첩은 그간의 모든 사정을 양공에게 알렸다. 양공은 “하늘의 안배로다!”라면서 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양공의 부인은 아들이 없어 원을 후계자로 세우니 이가 영공(靈公)이다.

영공 5년에 진나라 소공(昭公)에게 조회했다.

6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靈王)을 시해하고 자신이 자리에 오르니 이가 평왕(平王)이다.

11년(기원전 524년)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38년에 공자(孔子)가 위나라에 오니 그에게 노나라에 있을 때와 같은 녹봉을 주었다. (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공자는 떠났다가 뒤에 다시 왔다.

39년에 태자 괴외(蒯聵)가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미워하여 그녀를 죽이려 했다. 괴외가 그 무리 희양속(戱陽遫)과 모의하여 조회 때 부인을 죽이라고 했다. 희양속이 후회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괴외가 여러 차례 눈짓을 하자 부인이 이를 알아채고는 두려워하며 “태자가 나를 죽이려 한다!”고 고함을 질렀다. 영공이 노하였고, 태자 괴외는 송나라로 도망쳤다가 바로 진(晉)나라의 조씨(조간자)에게로 갔다.

42년 봄에 영공이 교외로 놀러 나가면서 자영(子郢)에게 호위를 맡겼다. 자영은 영공의 작은아들로 자를 자남(子南)이라 했다. 영공은 태자가 도망친 일을 원망하면서 자영에게 “나는 너를 후계자로 삼을까 한다.”라고 했다. 자영이 “영은 모자라서 사직을 욕되게 할 것이니 국군께서는 생각을 달리하소서.”라고 답했다.

여름에 영공이 죽자 부인은 자영을 태자로 삼으면서 “이는 영공의 명령이오.”라고 하자 자영은 “망명간 태자 괴외의 아들 첩(輒)이 이곳에 있으니 저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출공(出公)[편집]

위나라가 첩을 국군으로 삼으니 이가 출공(出公)이다.

6월 을유일에 진(晉)나라의 대부 조간자(趙簡子)가 괴외를 귀국시키려고 양호(陽虎)를 시켜 10여 명에게 상복을 입히고는 위나라에서 태자를 맞이하여 귀국시키려는 것처럼 꾸미게 했다. 조간자 자신은 괴외를 배웅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내어 괴외를 공격했다. 괴외가 들어가지 못하고 숙읍으로 가서 스스로를 지키자 위나라 사람들도 병사를 철수시켰다.

출공 희첩 4년에 제나라의 전걸(田乞)이 국군 유자(孺子) 도(荼)를 시해했다.

8년에 제나라의 포자(鮑子)가 그의 국군 도공(悼公)을 시해했다. 공자가 진(陳)나라에서 위나라로 왔다.

9년, 공문자(孔文子)가 공자에게 군대 일에 관해 물었으나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뒤 노가 공자를 맞이하자 공자는 노로 돌아갔다.

12년에 당초 공문자는 태자 괴외의 누이를 아내로 맞이하여 공회(孔悝)를 낳았다. 공씨 집에 혼양부(渾良夫)라는 잘 생긴 노비가 있었다. 공문자가 죽자 혼양부는 공회의 어머니와 간통했다. 태자가 숙읍에 머물고 있었는데 공회의 어머니는 혼양부를 태자에게 보냈다. 태자가 혼양부에게 “내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그대에게 대부가 타는 수레로 보답할 것이다. 또 죽을죄 세 가지를 사면하여 묻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함께 맹서하고 또 공회의 어머니를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윤달에 혼양부와 태자 괴외가 함께 위나라로 들어와 공씨 집 뒤뜰에 숨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두 사람은 여자 옷을 입고 두건을 쓰고는 내시 나(羅)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공씨 집으로 갔다. 공씨 집의 늙은이 난녕(欒寧)이 누구냐고 묻자 인척의 첩이라고 했다. 마침내 집 안으로 들어와 백희씨(伯姬氏)에게로 갔다. 식사를 하고는 공회의 어머니가 창을 들고 앞장섰다. 태자와 갑옷 입은 사람 다섯이 돼지를 둘러메고 그 뒤를 따랐다. 백희가 공회를 겁박하여 뒷간으로 데려가 억지로 맹서하게 하고 누대 위로 올라가게 했다. 난녕이 술을 마시려고 고기를 굽다가 미처 익지 않았는데 반란 소식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중유(仲由)에게 알렸다. 소호(召護)가 수레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고 구운 고기를 먹으면서 출공 첩을 모시고 노나라로 달아났다.

자로(子路, 중유)가 공씨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자고(子羔)와 만났다. 자고가 “문은 이미 닫혔습니다.”라고 하자 자로는 “내가 가서 살펴보겠소.”라고 했다. 자고가 “늦었습니다. 난리에 휘말리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자로가 “이 집 밥을 얻어먹고 있는 이상 난리를 피할 수는 없지!”라고 했다. 자고는 나가 버렸다.

자로가 들어가 문 앞에 이르자 공손감(公孫敢)이 문을 닫으면서 “못 들어가오!”라 했다. 자로가 “이 사람이 정념 공손감인가? 이익은 탐내면서 난리로부터 도망치려 하다니! 이 중유는 그렇게 못하오. 그의 녹봉을 먹는 이상 반드시 그를 재난에서 구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심부름꾼 하나가 나오는 틈에 자로가 안으로 들어가서는 “태자께서는 어찌하여 하필 공회를 이용하려 하십니까? 그를 죽인다 해도 다른 사람이 그를 이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자로가 이어 “태자께서는 용기가 없다. 누대에다 불을 지르면 분명 공회를 놓아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는 겁이 나 석기(石乞)와 우염(盂黶)을 보내 자로에게 맞서게 하니 창으로 자로를 공격하여 갓끈을 잘랐다. 자로는 “군자는 죽을지언정 관은 벗지 않는다!”라며 갓끈을 다시 매고는 죽음을 맞이했다.

공자가 위나라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허! 시(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유(자로)는 죽겠구나!”라고 탄식했다.

장공(莊公)[편집]

공회가 끝내 태자 괴외를 세우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 괴외는 출공(出公)의 아버지로 국외에 머무르고 있을 때 대부들이 자신을 맞이하여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즉위 원년(기원전 480년)에 대신들을 다 죽이려 하면서 “과인이 나라 밖에서 오랫동안 머문 것은 그대들도 들어서 잘 알고 있지 않았는가?”라고 했다. 신하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그만 두었다.

2년(기원전 479년)에 노나라의 공구(공자)가 세상을 떠났다.

3년에 장공이 성에 올라 융주(戎州)를 보면서 “융 놈들이 어찌 여기에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융주 사람들이 원한을 품었다. 10월에 융주가 조간자(趙簡子)에게 일러바치자 간자가 위나라를 포위했다.

반사(斑師)[편집]

11월에 장공이 도망치자 위나라 사람들은 공자 반사(斑師)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세웠다.

기(起)[편집]

제나라가 위나라를 정벌하여 반사를 포로로 잡고 공자 기(起)를 위나라의 국군으로 바꾸어 세웠다.

위군 기 원년에 위나라의 석만부(石曼尃)가 국군 기를 내쫓으려하자 기는 제나라로 달아났다.

출공(出公)[편집]

위나라 출공 첩이 제나라에서 돌아와 자리에 다시 올랐다. 당초 출공은 12년간 재위하다가 망명하여 나라 밖에서 4년을 보낸 뒤 다시 들어온 것이다.

출공 복위 후 원년(기원전 476년)에 망명 당시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다. 출공이 21년 만에 죽었다.

도공(悼公)[편집]

출공의 숙부 검(黔)이 출공의 아들을 몰아내고 스스로 서니 이가 도공(悼公)이다.

경공(敬公)[편집]

도공은 5년 만에 죽고, 아들 경공(敬公) 불(弗)이 즉위했다.

소공(昭公)[편집]

경공은 19년 만에 죽고, 아들 소공(昭公) 규(糾)가 즉위했다. 이때 삼진(三晉, 한·조·위)이 강해지고 위나라는 작은 제후처럼 되어 (조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회공(懷公)[편집]

소공 6년에 공자 미(亹)가 소공을 시해하고 대신에 자리에 오르니 이가 회공(懷公)이다.

신공(愼公)[편집]

회공 11년에 공자 퇴(頹)가 회공을 시해하고 즉위하니, 이가 신공(愼公)이다. 신공의 아버지는 공자 적(適)이고, 적의 아버지가 경공(敬公)이다.

성공(聲公)[편집]

신공이 42년 만에 죽고, 아들 성공(聲公) 훈(訓)이 즉위했다.

성후(成侯)[편집]

성공이 11년 만에 죽고, 아들 성후(成侯) 속(遫)이 즉위했다.

성후 11년(기원전 351년)에 공손앙(公孫鞅)이 진(秦)나라에 들어갔다.

16년에 위나라의 국군이 (공에서) 후로 깎였다.

평후(平侯)[편집]

29년에 성후가 죽고, 아들 평후(平侯)가 즉위했다.

사군(嗣君)[편집]

평후는 8년 만에 죽고, 아들 사군(嗣君)이 즉위했다.

사군 5년에 군(君)으로 호칭이 깎이고 복양(濮陽) 땅만 남게 되었다.

회군(懷君)[편집]

사군은 42년 만에 죽고, 아들 회군(懷君)이 즉위했다.

회군 31년에 위(魏)나라로 조회하러 가자, 위나라가 회군을 가두었다가 죽였다.

원군(元君)[편집]

위(魏)나라가 사군의 동생을 다시 세우니 이가 원군(元君)이다. 원군이 위(魏)나라의 사위였기 때문에 그를 세운 것이다.

원군 14년에 진(秦)나라가 위(魏)나라의 동쪽 땅을 차지하고 동군(東郡)을 처음으로 설치했다. 위나라의 국군(원군)을 다시 야왕현(野王縣)으로 옮기게 하고, 복양을 동군에 합병시켰다.

각(角)[편집]

25년에 원군이 죽고, 아들 각(角)이 즉위했다.

위군 각 9년(기원전 221년)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가 즉위했다.

21년(기원전 209년)에 진(秦)나라 2세(二世)가 위군 각을 평민으로 내치니 이로써 위나라의 제사가 끊어졌다.

사마천의 논평[편집]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세가의 기록을 읽다가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태자가 부인 때문에 살해되고, 동생 수가 서로 죽음을 다투는 대목에 이르렀는데, 이는 진(晉)나라의 태자 신생(申生)이 여희(驪姬)의 잘못을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로 모두 아버지의 뜻이 상하지는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는 죽음에 이르렀으니 어찌 슬프지 않은가! 아비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없애려 했으니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