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권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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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편집]

미자(微子)[편집]

미자(微子) 개(開)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큰아들이자, 주왕(紂王)의 배다른 형이다. 주왕이 즉위하였으나, 현명하지 못한데다 정치도 음란했다. 미자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주왕은 듣지 않았다.

주(周)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이 덕을 닦고 구라는 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이(祖伊)는 그 화가 미칠까 겁이 나서 이를 주왕에게 일러바쳤다. 주왕은 “내가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천명 아닌가? 그가 무얼 어쩌겠는가?”라고 했다.

미자는 주왕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죽이려 하다가, 떠나려고 마음을 먹은 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가서 말했다. “은나라는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해 사방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는 세상에 공업을 이루었지만 주왕은 술에 빠져 부인 말만 듣다가 탕(湯)의 덕을 어지럽히고 무너뜨렸습니다. 은나라는 높거나 낮거나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하고 법을 어기며 난을 일으키기 좋아했습니다. 왕실의 경사들은 서로를 본받으며 법도를 지키기 않으니 모두가 죄를 짓고도 누구 하나 응분의 대가인 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 모두 서로를 적이나 원수처럼 여깁니다. 지금 은나라는 나라의 법과 제도를 상실하여 마치 나루터도 없이 물을 건너려는 것 같습니다. 은나라가 마침내 망할 것 같으니 지금이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묻기를 “태사, 소사! 내가 나와서 도망쳐야겠소, 아니면 남아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소? 지금 그대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아 불의에 빠진다면 어찌할 셈이오?”라고 했다.

태사는 이렇게 말했다. “왕자시여! 하늘이 엄중한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데도 (주왕은)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늙은이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지금 은나라는 인민들조차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나라를 다스려 잘 다스려진다면 몸이 죽어도 여한이 없겠으나, 죽어도 끝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떠나는 것만 못합니다.” (미자는) 마침내 도망쳤다.

기자(箕子)는 주왕의 친척이다. 주왕이 상아 젓가락을 쓰기 시작하자 기자는 “그가 상아로 만든 젓가락을 사용했으니 틀림없이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할 것이고, 옥으로 만든 잔을 사용한다면 틀림없이 먼 곳의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들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수레와 말 그리고 궁실의 사치가 점점 이렇게 되어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탄식했다.

주왕이 제멋대로 쾌락에 빠지자, 기자가 충고했으나 듣지 않았다. 누군가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기자는 “신하된 자가 간언했는데도 듣지 않는다고 떠나면 이는 군주의 잘못은 드러내고 자신은 인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소.”라 하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미친 척하여 노예가 되었다. 드디어 숨어서 스스로 슬퍼하면서 거문고를 연주하니, ‘기자조(箕子操)’로 전해지고 있다.

왕자 비간(比干) 역시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듣지 않고, 기자가 노예가 되는 것을 보고는 “군주에게 허물이 있는데도 죽음을 무릅쓰고 따지지 않는다면 무고한 백성들만 피해를 입지 않겠는가?”라 하고는 주왕에게 바른말로 충고했다. 주왕이 노하여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던데 정말 그런가?”라며 왕자 비간을 죽여 그 가슴을 열고 심장을 보았다.

미자가 “아비와 자식 사이에는 골육의 정이 있고, 군주와 신하는 의리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아비에게 잘못이 있으면 자식은 세 번을 간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자식은 계속 통곡할 따름이다. 신하된 자가 세 번을 충고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그 의리상 떠나도 된다.”라고 했다. 이에 태사와 소사가 미자에게 떠날 것을 권하니 마침내 떠났다.

주 무왕이 주왕을 토벌하여 은나라를 물리치자 미자는 바로 제기를 들고 군문(軍門)으로 가서는 웃통을 벗고 등 뒤로 손을 묶는 다음 (사람을 시켜) 왼편으로는 양을 끌고 오른편으로는 소꼬리로 장식한 깃발을 쥐게 했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이에 무왕은 미자를 석방하고 전과 같이 자리를 회복시켰다.

무왕은 주왕의 아들 무경녹보(武庚祿父)에게 은나라 왕조의 제사를 잇게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을 시켜 그를 돕게 했다.

무왕이 은을 물리친 다음 기자를 방문했다.

무왕이 “오호! 하늘은 조용히 천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서로 화목하게 살게 하는데 나는 일상 이치의 순서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기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 곤(鯀)이 홍수를 막으면서 오행의 질서를 어지럽히자 상제께서 크게 노하여 '홍범구등(鴻範九等)'을 주지 않아 일상의 이치가 이로써 흐트러졌습니다. 곤이 죽임을 당하고 우가 그 일을 이어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하늘이 우에게 홍범구등을 내려 주어 일상의 이치가 순서를 찾게 된 것입니다.”

“(홍범구등의) 그 처음을 오행(五行)이라 하고, 두 번째를 오사(五事)라 하며, 세 번째를 팔정(八政), 네 번째를 오기(五紀), 다섯 번째를 황극(皇極)이고, 여섯 번째를 삼덕(三德), 일곱 번째를 계의(稽疑), 여덟 번째를 서징(庶徵), 아홉 번째를 향용오복(嚮用五福)과 외용육극(畏用六極)이라 합니다.

오행은 물, 불, 나무, 쇠, 흙입니다. 물은 아래로 젖어들며, 불은 위로 타오릅니다. 나무는 굽거나 곧으며, 쇠는 모양을 바꿉니다. 흙은 뿌리고 거둘 수 있습니다. 아래로 젖어들면 짠 맛을 내고, 위로 타오르면 쓴맛을 냅니다.

굽거나 곧으면 신맛을 내고, 모양을 바꾸면 매운맛을 내며, 뿌리고 거두면 단맛을 냅니다.오사란 몸가짐, 말, 보기, 듣기, 생각을 말합니다. 몸가짐은 공손해야 하고, 말은 (이치에) 맞아야 합니다. 보는 것은 밝아야 하고, 듣는 것은 총명해야 하고, 생각은 (사리를) 통달해야 합니다. 공손하면 엄숙해지고, 이치에 맞으면 다스릴 수 있고, 밝으면 지혜로워지고, 총명하면 일을 꾀할 수 있고, 통달하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팔정이란 식(食), 화(貨), 사(祀), 사공(司空), 사도(司徒), 사구(司寇), 빈(賓), 사(師)를 말합니다.

오기는 세(歲), 월(月), 일(日), 성신(星辰), 역수(曆數)입니다.

황극은 제왕이 세워야 할 지고하고 무상한 법칙으로, 오복을 모아 백성들에게 두루 베풀면 백성은 제왕의 법칙을 지키게 되고 제왕도 백성에게 법칙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사악한 패거리를 짓지 않고, 관리들은 사사로이 패거리를 지어 간사한 짓을 하지 않으면서, 한 마음으로 제왕의 법칙을 지키게 됩니다.

또 백성들 중 꾀도 있고, 능력도 있고, 지조도 있는 사람들은 생각해서 쓰시면 됩니다. 제왕의 법칙에 맞지 않더라도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제왕을 그들을 받아들입니다. 기쁜 얼굴로 사람을 가까이 대하고, 누구든 ‘내가 미덕을 좋아 합니다’하면 당신께서는 그에게 작위와 녹봉을 내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제왕의 법칙을 지키고 홀아비와 과부 그리고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을 깔보지 않으며, 높고 귀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능력 있고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재능을 펼치게 하면 나라는 번창 할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자리와 녹봉으로 부유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당신께서 훌륭한 사람들로 하여금 왕실에 공헌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사람들은 죄를 지은 듯 떠날 것입니다. 덕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께서 자리와 녹봉을 내려 준다 해도 나쁜 짓을 하여 당신께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할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선왕의 의로움을 지켜야 합니다. 사사로운 마음으로 편애하지 말고 제왕의 길을 지키십시오. 무엇인가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한쪽만 바라보고 제왕을 길을 따르십시오. 사사로이 치우친 마음을 갖지 말 것이며, 패거리를 짓지도 마십시오. 그래야만 왕도가 탕탕해집니다. 그래야만 왕도가 평안해집니다. 거스르지 않고 벗어나지 않아야 왕도가 바르고 곧아집니다. 모두가 제왕의 법칙 아래로 모여야 하고 제왕의 법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법칙에 의거하여 발표한 제왕의 언론은 백성들을 이끄는 변치 않는 법으로 상제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법칙에 의거하여 발표한 언론에 따라 실행함으로써 천자의 광명에 가까워집니다. 천자는 백성의 부모가 되고 천하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삼덕은 바르고 곧음, 굳세게 이겨냄, 부드럽게 이겨냄을 말합니다. (천하가) 평안하고 즐거우면 바르고 곧게 다스리고, 억세게 복종하지 않으면 굳세게 다스리며, 순하고 친근하면 부드럽게 다스립니다. 음모로 난을 꾀하려는 자는 굳세게 다스리고, 고상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부드럽게 다스립니다.

제왕만이 복을 내릴 권한이 있으며, 제왕만이 죄를 다스릴 위엄을 가질 수 있으며, 제왕만이 좋은 음식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신하에게는 복을 내릴 권한과 죄를 다스릴 위엄과 좋은 음식을 누릴 권리가 없습니다. 신하가 복을 내릴 권한과 죄를 다스릴 위엄과 좋은 음식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면, 그 피해는 (제왕의) 집안에 미치고 나라에 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관리들은 사악을 길을 걷게 되고 백성들은 본분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계의란 점복에 능한 사람을 뽑아 점복을 하도록 명하는 것인데 비, 갬, 구름, 안개, 음양이 서로 침범하는 형상, 내괘, 외괘의 일곱 가지를 봅니다. 복(거북점)은 다섯 가지, 점(산가지점)은 두 가지로 점괘를 살핍니다. 이런 사람들을 임용하여 점복을 행하는데 세 사람이 점을 쳤을 경우 결과가 같은 두 사람의 말을 따릅니다. 만약 풀기 어려운 중대한 문제가 있으면 왕께서 먼저 깊이 생각하시고 그 다음에 대신들과 상의하시고 그 다음에 관리와 백성들과 논의하십시오. 그런 뒤에 점복의 결과를 봅니다.

왕께서 하고자 하는데 점복도 대신들도 관원들도 백성들도 그렇게 하는 것에 찬동한다면 이를 대동(大同)이라 부릅니다. 그러면 몸도 건강해지고 자손들도 크게 길할 것입니다. 왕께서 하고자 하는데 점복도 그렇게 나왔다면 대신과 관리, 백성들이 반대해도 길합니다. 대신들이 하려는 일이 점복에도 그렇게 나왔다면 왕과 관리와 백성이 반대해도 길합니다. 관리와 백성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점복에도 그렇게 나왔다면 왕과 대신들이 반대해도 길합니다. 왕께서 하려는 일에 거북점은 좋다고 나왔는데 산가지점과 대신들, 관리들, 백성들이 반대하면 내부 일은 길하지만 외부 일은 흉합니다. 점복이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어긋난다면 가만히 있으면 길하지만 뭔가 하려고 하면 흉합니다.

서징이란 비 오고, 맑고 따뜻하고, 춥고, 바람 불고, 때에 맞고 하는 징조를 말합니다. 이 다섯 가지 기상이 갖추어져 각각 그 순서에 따라 나타나면 모든 풀과 나무가 무성하게 자랍니다. 그중 징조 하나가 지나치거나 모자라면 수확이 좋지 않습니다. 좋은 징조란 이렇습니다. 군왕의 자태가 경건하고 엄숙하면 비가 제때에 내립니다.

군왕의 통치가 잘 이루어지면 태양이 때맞추어 대지를 비춥니다. 군왕이 현명하고 지혜로우면 기후는 때맞추어 따뜻해집니다. 군왕의 식견이 통달해 있으면 때맞추어 바람이 붑니다. 나쁜 징조란 이런 것들입니다. 군왕이 행위가 망령되면 비가 멈추지 않고 내리고, 군왕이 주제넘으면 해만 오래도록 비춥니다. 군왕이 안락만을 원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군왕이 일을 너무 급하게 서두르면 추위가 오래갑니다. 군왕이 어리석으면 바람이 그치지 않습니다.

군왕이 정책 결정을 잘못 내리면 1년 동안 영향을 미칩니다. 대신들의 관리에 착오가 생기면 그 영향이 한 달을 갑니다. 관리들이 일을 잘못하면 하루 동안 영향을 줍니다. 한 해, 한 달, 하루에 거스름이 없으면 백곡이 풍성해지고 정치도 맑아집니다. 재능 있는 인재가 중용되면 나라는 태평과 강녕을 누립니다. 한 해, 한 달, 하루가 어긋나면 백곡이 익지 않고 정치도 어두워집니다. 인재들은 숨고 나라는 편치 않습니다.

백성들은 뭇별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별은 바람을, 어떤 별은 비를 좋아합니다. 해와 달의 운행으로 겨울이 있고 여름이 있습니다. 달이별을 좇으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립니다.

오복이란 목숨, 부귀, 건강, 덕을 좋아하여 즐겨 행함, 제명대로 편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육극은 요절, 질병, 근심, 가난, 추함, 허약함을 말합니다.

이에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되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

그 뒤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를 드리러 은나라의 폐허 은허(殷墟)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진 자리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는 것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기자는 상심하여 통곡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울고도 싶었으나 아녀자 같아 ‘맥수(麥秀)의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니 그 시는 이랬다.

“보리 이삭은 패고, 벼와 기장은 무성하구나! 저 악동아, 나와 가까이 지내지 못했구나!”

이른바 악동이란 주왕을 말한다. 은나라의 유민들이 이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무왕이 세상을 떠났으나 성왕(成王)이 어려서 주공(周公) 단(旦)이 정치를 대행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주공에 의심을 품고 무경(武庚)과 함께 난을 일으켜 성왕과 주공을 습격하려 했다.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아 무경을 베고 관숙을 죽였으며 채숙은 내쫓았다. 이어 미자 개를 은나라의 후손으로 대체하여 선조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고 「미자지명(微子之命)」을 지어 널리 알린 다음 송(宋)에 나라를 세우게 했다. 미자는 원래 어질고 유능했기 때문에 무경을 대신했고, 따라서 은나라의 유민들도 그를 매우 사랑했다.

미중(微仲)[편집]

미자 개가 죽고, 그의 동생 연(衍)이 서니 이가 미중(微仲)이다.

미중이 죽고, 아들 송공(宋公) 계(稽)가 섰다.

송공 계가 죽고, 아들 정공(丁公) 신(申)이 즉위했다.

정공 신이 죽고, 아들 민공(湣公) 공(共)이 자리를 이었다.

민공 공이 죽고, 동생 양공(煬公) 희(熙)가 즉위했다.

양공이 즉위하자, 민공의 아들인 부사(鮒祀)가 양공을 죽이고 자립하면서 “내가 자리에 서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했다. 이가 여공(厲公)이다.

여공이 죽고, 아들인 희공(釐公)이 즉위했다.

희공 17년(기원전 842년)에 주(周)나라 여왕(厲王)이 체(彘)나라로 달아났다.

28년에 희공이 죽고, 아들인 혜공(惠公) 간(覵)이 즉위했다.

혜공 4년에 주나라 선왕(宣王)이 즉위했다.

30년에 혜공이 죽고, 아들 애공(哀公)이 즉위했으나 애공이 원년에 죽자 아들 대공(戴公)이 즉위했다.

대공 29년(기원전 771년)에 주나라 유왕(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당하고, 진(秦)나라가 처음으로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34년에 대공이 죽자 아들 무공(武公) 사공(司空)이 즉위했다. 무공의 딸은 노(魯)나라 혜공(惠公)의 부인이 되어 노나라 환공(桓公)을 낳았다.

18년에 무공이 죽고, 아들 선공(宣公) 역(力)이 즉위했다.

선공에게 태자 여이(與夷)가 있었다. 19년에 선공이 병이 나자 동생 화(和)에게 자리를 물려주려 하면서 “아비가 죽으면 아들이 뒤를 잇고,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자리가) 돌아가는 것은 천하에 통용되는 이치다. 내가 화를 세우겠다.”라고 했다. 화가 세 번이나 사양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선공이 죽고, 동생인 화가 자리에 오르니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 9년에 병이 들자 대사마(大司馬) 공보(孔父)를 불러 “선군 선공께서 태자 여이를 두고도, 나를 세우셨으니 내가 그것을 어찌 잊겠소.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이를 세우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공보가 “신하들은 모두 공자 풍(馮)을 세우자고 합니다.”라고 했다. 목공은 “풍을 세워서는 안 된다. 내가 선공을 저버릴 수 없다.”라 했다. 이에 목공은 아들 풍을 정나라로 옮겨 살게 했다.

8월 경진일에 목공이 죽고, 형 선공의 아들 여이가 즉위하니 이가 상공(殤公)이다. 군자들이 이를 듣고는 “송나라 선공은 사람을 아는구나! 그 동생을 세워 도리를 이루고, 끝내 그 아들이 다시 자리를 누리게 하였으니!”라고 했다.

상공 원년에 위(衛)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그 국군 완(完)을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제후들의 인정을 얻으려고 사람을 송나라에 보내 “정나라에 가 있는 풍이 난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와 함께 토벌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알렸다. 송나라가 이를 받아들여 함께 정나라를 정벌하러 나서 동문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2년에 정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여 동문에서의 싸움을 되갚았다. 그 후 제후들이 여러 차례 (송나라를) 쳐들어왔다.

9년에 대사마 공보가(孔父嘉)의 아내가 아름다웠는데, 외출했다가 길에서 태재(太宰) 화독(華督)을 만났다. 화독은 공보가의 아내가 마음에 들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독이 공보가의 아내가 탐이 나서 사람을 시켜 나라 안에 선전하길 “상공이 즉위한 지 10년 만에 열한 차례나 전쟁을 일으켜 인민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모두 공보가가 한 짓이니 내가 공보가를 죽여 인민들을 편하게 하겠다.”고 했다. 이해에 노나라는 그 국군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10년에 화독이 공보가를 공격해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상공이 분노하자 상공마저 시해하고 정나라에서 목공의 아들인 풍을 맞아들여 옹립하니,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 원년에 화독이 상(相)이 되었다.

9년에 정나라의 제중(祭仲)을 잡고, 돌(突)을 정나라의 국군으로 옹립하려 했다. 제중이 이를 받아들이자 마침내 돌을 옹립했다.

19년에 장공이 죽고, 아들 민공(湣公) 첩(捷)이 즉위했다.

민공 7년에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즉위했다.

9년에 송나라에 물난리가 나자, 노나라에서 장문중(藏文仲)을 보내 물난리를 위로했다. 민공은 자책하며 “과인이 귀신을 섬기지 못하고,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물난리가 났다.”라고 했다. 장문중이 이 말을 칭찬했다. 이 말은 공자 자어(子魚)가 민공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10년 여름에 송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승구(乘丘)에서 전투를 벌였다. 노나라가 송나라의 남궁만(南宮萬)을 산 채로 잡았다. 송나라가 남궁만을 (풀어줄 것을) 요청해서 남궁만은 송나라로 돌아왔다.

11년 가을에 민공과 남궁만이 사냥을 나가서 바둑을 두다가 다툼이 벌어졌다. 민공이 화가 나서 남궁만에게 “당초 내가 그대를 존경했지만 지금 그대는 노나라의 포로일 뿐이다!”라고 모욕을 주었다. 힘이 셌던 남궁만은 이 말에 원한을 품고는 몽택(蒙澤)에서 바둑판으로 민공을 쳐서 죽였다. 대부(大夫) 구목(仇牧)이 이를 전해 듣고는 병사를 이끌고 궁문에 이르렀다. 남궁만이 구목을 때리니 구목은 이가 문짝에 부딪치며 죽었다. 그해 (남궁만은) 태재 화독을 죽이고 바로 공자 유(游)를 국군으로 옹립했다.

공자 몇은 소(蕭)나라로 달아났고, 공자 어열(禦說)은 박(亳)나라으로 도망쳤다. 남궁만의 동생인 남궁우(南宮牛)는 병사를 거느리고 박나라를 포위했다. 겨울에 소나라와 송나라에 있던 공자들이 함께 남궁우를 공격해 죽이고, 송나라의 새로운 국군 유를 시해한 다음 민공의 동생 어열을 세우니, 이가 바로 환공(桓公)이다. 남궁만은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송나라가 진나라에 뇌물을 주고 (남궁만을) 요청하니, 진나라는 여자를 보내 남궁만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가죽으로 남궁만을 싸서 송나라로 돌려보냈다. 송나라는 남궁만을 썰어서 젓갈을 담갔다.

환공 2년에 제후들이 송나라를 토벌하려고 교외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3년(기원전 679년)에 제나라 환공이 패주로 칭하기 시작했다.

23년에 (위<衛>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에서 공자 훼(燬)를 맞이하여 세우니 이가 위나라 문공(文公)이다. 문공의 여동생은 제나라 환공의 부인이 되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즉위했다.

30년에 환공이 병이 났는데 태자 자보(玆甫)가 배다른 형인 목이(目夷, 자어)에게 후계자 자리를 양보했다. 환공은 태자의 뜻이 도의에 비추어 옳다고 여겼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31년 봄에 환공이 죽고, 태자 자보가 즉위하니 이가 양공(襄公)이다. 그의 배다른 형 목이를 국상으로 삼았다. 장례를 마치기도 전에 제나라 환공이 규구(葵丘)에서 제후들과 회맹한다 하여 양공이 회맹에 갔다.

양공 7년에 송나라의 하늘에서 유성이 비처럼 떨어졌는데, 비도 함께 떨어졌다. 여섯 마리의 익조(鷁鳥)가 세차고 빠른 바람 때문에 뒤로 날아갔다.

8년에 제나라 환공이 죽자, 송나라가 회맹을 소집하고자 했다.

12년 봄에 송나라 양공이 녹상(鹿上)에서 회맹하고자 초나라에게 제후들을 소집해달라고 요구하니, 초나라가 이를 허락했다. 공자 목이가 “작은 나라가 회맹을 다투면 화를 불러들이게 됩니다.”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가을에 제후들이 우(盂)나라에서 송나라 양공과 회맹했다. 목이가 “화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국군의 욕심이 지나치니 어찌 감당할까?”라고 했다. 이에 초나라가 송나라 양공을 붙잡고는 송나라를 정벌했다.

겨울에 (제후들이) 박(亳)나라에서 회맹하여 송나라 양공을 풀어주었다. 자어(목이)가 “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13년 여름에 송나라가 정나라를 정벌했다. 자어가 “화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했다. 가을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여 정나라를 구원하고자 했다. 양공이 맞아 싸우려 하자 자어가 “하늘이 상(송나라)을 버린 지 오래니 안 됩니다.”라고 간언했다.

11월 겨울에 양공은 초나라 성왕(成王)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다. 초나라의 군대가 강을 다 건너지 않았는데 목이가 “상대는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강을 건너기 전에 공격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강을 건넜으나 전열을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자, 목이가 “지금이라도 공격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양공은 “저들이 전열을 갖추기를 기다려라!”라고 했다. 전열을 다 갖춘 다음 송나라가 공격했으나 송나라의 군대는 크게 패하고 양공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공을 원망했다.

양공은 “군자는 남이 곤경에 처했을 때 공격하지 않으며, 전열을 갖추지 않았는데 북을 울리지 않는다.”라고 했다. 자어가 “군대는 승리가 우선이거늘 무슨 그런 어리석은 말씀을 하십니까? 공의 말대로라면 노비처럼 남을 섬기는 것이 낫지 전쟁은 무엇하러 한답니까?”라고 했다.

초나라 성왕이 정나라를 구하니 정나라가 성왕을 접대했다. (성왕은) 떠나면서 정나라 국군의 두 딸을 취하여 돌아갔다. 숙첨(叔瞻)이 “성왕이 무례하니,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무분별함으로 예를 끝냈으니 그가 패업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겠노라.”라고 했다.

이해(13년)에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가 송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양공은 진나라의 원조를 얻고 싶어, 말 20승을 선물하는 등 후한 예로 중이를 접대했다.

14년 여름에 양공이 홍수(泓水)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결국 죽었다. 아들 성공(成公) 왕신(王臣)이 즉위했다.

성공 원년에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즉위했다.

3년에 초나라와의 맹약을 저버리고 진나라와 가까이 지냈는데 (이는 양공이) 문공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4년에 초나라 성왕이 송나라를 토벌하자 송나라는 진나라에 위급함을 알렸다.

5년에 진나라 문공이 송나라를 구원하자 초나라의 군대는 철수했다.

9년에 진 문공이 죽었다.

11년에 초나라 태자 상신(商臣)이 그 아버지 성왕을 시해하고 뒤를 이었다.

16년에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죽었다.

17년에 성공이 죽었다. 성공의 동생인 어(御)가 태자와 대사마 공손고(公孫固)를 죽이고 국군으로 자립했다. 송나라 사람들이 함께 국군 어를 죽이고, 작은아들 저구(杵臼)를 옹립하니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 4년에 송나라가 장구(長丘)에서 장적(長翟)의 연사(緣斯)를 물리쳤다.

7년에 초나라 장왕(莊王)이 즉위했다.

9년에 소공이 무도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포혁(鮑革)은 유능하고 인재를 대우할 줄 알았다. 이보다 앞서 양공의 부인이 공자 포혁과 정을 통하고 싶어 했으나, 포혁이 거절했다. 부인은 그를 도와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대부 화원(華元)을 시켜 (포혁을) 우사(右師)로 삼게 했다. 소공이 사냥을 나가자 양공의 부인 왕희(王姬)는 위백(衛伯)을 시켜 소공 저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동생 포혁이 즉위하니,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원년에 진(晉)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송나라를 토벌하여 국군 시해를 나무랐다. 문공이 정식으로 자리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갔다.

2년에 소공의 아들이 문공의 친동생인 수(須)와 함께 무공(武公), 목공(繆公), 대공(戴公), 장공(莊公), 환공(桓公)의 친족들과 난을 일으키자 문공은 이들 모두를 죽이고 무공과 목공의 친족들은 추방했다.

4년 봄에 초나라가 정나라에게 송나라를 정벌하라고 명했다. 송나라는 화원을 장수로 삼아 맞서 싸웠으나, 정나라는 송나라를 패배시키고 화원을 포로로 잡았다. 당초 화원은 전투에 앞서 양을 잡아 병사들을 먹였으나, 자기 마부에게는 양고기국을 주지 않았다. 마부가 원망하여 정나라의 군대를 향해 돌진하는 바람에 송나라의 군대는 패하고 화원은 포로로 잡힌 것이다. 송나라가 마차 100승, 얼룩말 400필로 화원을 맞바꾸려 했다. 그런데 이것들을 다 보내기 전에 화원은 도망쳐 송나라로 돌아왔다.

14년에 초나라 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나라의 국군이 초나라에 항복하자, 초나라는 포위를 풀었다.

16년에 초나라의 사신이 송나라를 지나가는데 송나라가 과거 원한 때문에 초나라의 사신을 붙잡았다. 9월에 초나라 장왕이 송나라를 포위했다.

7년에 초나라가 송나라를 다섯 달이나 포위한 채 풀지 않자, 송나라의 도성은 먹을 것이 바닥나는 등 위기에 처했다. 화원이 밤에 몰래 초나라의 장수 자반(子反)을 만났다. 자반이 장왕에게 보고하자, 장왕은 “성안의 상황은 어떤가?”라고 물었다. “사람 뼈를 쪼개 불쏘시개로 쓰고, 자식을 서로 바꿔 먹고 있다고 합니다.”라 하자 장왕이 “그 말이 정말이었군, 우리 군대도 이틀 분 식량만 남았소.”하고는 믿는 바가 있어 마침내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22년에 문공이 죽고, 아들 공공(共公) 하(瑕)가 즉위했다. 후장(厚葬)이 시작되었다. 군자들은 화원이 신하 노릇을 못한다며 나무랐다.

공공 원년(10년)에 화원이 초나라의 장수 자중(子重)과 잘 지내고 또 진(晉)나라의 장수 난서(欒書)와도 사이가 좋아 두 나라와 동맹했다.

13년에 공공이 죽었다. 화원은 우사(右師)가 되었고, 어석(魚石)은 좌사(左師)가 되었다. 사마(司馬) 당산(唐山)이 태자 비(肥)를 공격하여 죽이고, 화원도 죽이려고 하자 화원은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어석이 그를 막아서자 황하에서 되돌아와 당산을 죽였다. 곧 공공의 작은아들 성(成)을 옹립하니, 이가 평공(平公)이다.

평공 3년에 초나라 공왕(共王)이 송나라의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송나라의 좌서 어석을 그곳에 봉했다.

4년에 제후들이 함께 어석을 죽이고 팽성을 송나라에 돌려주었다.

35년에 초나라 공자 위(圍)가 그 군주를 죽이고 자립하니, 이가 영왕(靈王)이다.

44년에 평공이 죽고, 아들 원공(元公) 좌(佐)가 즉위했다.

원공 3년에 초나라 공자 기질(棄疾)이 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자리에 올라 평왕(平王)이 되었다.

8년에 송나라에 큰불이 났다.

10년에 원공이 신의 없이 속임수로 공자들을 죽였다. 대부 화씨(華氏)와 향씨(向氏)가 난을 일으켰다.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建)이 (송나라로) 도망 왔으나, 화씨 등이 난을 일으켜 서로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그곳을 떠나 정나라로 갔다.

15년에 원공은 노나라의 소공(昭公)이 계씨(季氏)를 피해 나라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는 그를 노나라로 돌려보내려 애를 쓰다가 죽었다. 아들 경공(景公) 두만(頭曼)이 즉위했다.

경공 16년에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도망쳐 왔다가 얼마 뒤 다시 떠났다.

25년에 공자(孔子)가 송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송나라의 사마 환퇴(桓魋)가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자, 공자가 옷을 갈아입고 떠났다.

30년(기원전 487년)에 조(曹)나라가 송나라를 배반하고, 또 진(晉)나라도 배반했다. 송나라가 조나라를 토벌했는데 진나라가 구원하지 않아, 마침내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했다.

36년에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37년에 초나라 혜왕(惠王)이 진(陳)나라를 멸망시켰다. 화성(火星)이 심수(心宿) 자리를 침범했다. 심수 자리는 송나라의 분야이다. 경공은 이를 걱정하자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재앙을 재상한테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재상은 나의 팔다리요.”라 하자 “그렇다면 인민들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경공이 “군주는 인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 아니오?”라 하자 “그렇다면 한 해의 수확 쪽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라 했다. 경공이 “수확이 나빠 인민이 굶주리면 누구에 의지하여 군주 노릇을 하겠소?”라 했다. 자위가 “하늘이 높긴 하지만 인간 세상의 일을 두루 살핍니다. 주군께서 군주로서 해야 할 세 마디를 하셨으니 화성은 틀림없이 자리를 옮길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다시 살폈더니 과연 3도를 옮겼다.

64년에 경공이 죽었다. 송나라의 공자 특(特)이 태자를 죽이고 자립하니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원공(元公)의 증손자이다. 소공의 아버지는 공손규(孔孫糾)이고, 공손규의 아버지는 공자 단진이고, 단진이 바로 원공의 작은아들이다. 경공이 소공의 아버지 공손규를 죽였기에 소공이 원한을 품어 태자를 죽이고 자립한 것이다.

소공이 재위 47년 만에 죽고, 아들 도공(悼公) 구유(購由)가 즉위했다.

도공은 재위 8년 만에 죽고, 아들 휴공(休公) 전(田)이 즉위했다.

휴공 전이 재위 23년 만에 죽고, 아들 벽공(辟公) 벽병(辟兵)이 즉위했다.

벽공은 재위 3년 만에 죽고, 아들 척성(剔成)이 즉위했다.

척성 41년에 척성의 동생인 언(偃)이 척성을 기습했다. 척성이 패하여 제나라로 달아나고 언어 송나라의 국군으로 자립했다.

국군 언은 재위 11년(기원전 318년)에 ‘왕(王)’으로 자립했다. 동으로는 제나라를 물리치고 다섯 개의 성을 취하였고, 남으로는 초나라를 물리치고 300리 땅을 취했다. 서쪽으로는 위(魏)나라의 군대를 패배시키니 이로써 제나라, 위나라와 적국이 되었다.

(언은) 가죽 주머니에 피를 가득 채워 매달아 놓고는 화살로 쏘게 하면서 ‘하늘을 쏜다’고 했고 술과 여자에 빠졌다. 신하들이 바른 말을 하면 바로 활을 쏘았다. 이에 제후들은 모두 ‘걸송(桀宋)’이라 부르며 “송나라가 은나라 주왕이 한 짓을 되풀이하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며 제나라에게 송나라를 토벌하라고 알렸다.

송나라 왕 언 47년(기원전 282년)에 제나라 민왕(湣王)과 위(魏)나라,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여 왕 언을 죽이고, 마침내 송나라를 멸망시키고는 그 땅을 셋으로 나누었다.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공자께서는 ‘미자는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바른 말을 하다가 죽으니 은나라에는 세 사람의 어진 이가 있었다.’라고 했다.『춘추(春秋)』에서 말하길 송나라는 내란으로 선공이 태자를 폐하고, 동생을 세우면서 나라가 10세 동안 편치 못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양공 때는 인의를 수행하며 맹주가 되고자 했다. 그 대부 정고보(正考父)가 이를 찬미하고자 설(契), 탕(湯), 고종(高宗)을 추모하고 은나라가 흥성한 이치를 「상송(商頌)」으로 나타내 보였다. 양공이 홍수에서 패했으나 그를 칭찬한 군자도 있었는데, 중국에 예의가 사라진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송나라 양공의 예양을 칭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