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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전설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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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始祖 五陵을 蛇陵이라 부르고 또 五陵이라 부른다. 여기 對한 瀆慢하고 또 悖妄한 傳承하여 오는 한 傳說이 있다. 우선 「三國遺事」卷一 新羅始祖赫居世王條에“理國六十一年, 王升于天, 七日後, 遺軆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 亦名蛇陵, 曇嚴寺北陵是也”라 한 것을 비롯하여 「輿地勝覽」 二十一卷과 「東京雜記」 一陵墓條에 모두 “赫居世陵, 在曇嚴寺傍, 官禁田柴, 世傳王升天, 七日後, 五體散落于地, 國人欲合而葬, 因蛇妖, 名葬之, 遂號五陵, 亦云蛇陵”이라 하였다. 慶州 무당에게 들으니 始祖王은 낮이면 人間 공사를 하시고, 밤이면 天上 공사를 하시던 어른인데 나중은 하늘의 罰을 받아 머리와 四肢가 따로 떨어져 내렸다 한다. 記籍의 傳錄됨이 저러한 것을 보면, 村閭 巫婆의 무식한 傳會야 새삼스럽게 議論할 것도 없지 아니한가. 始祖는 聖王이시라 “光明理世”의 大德으로 新羅 를 처음 열어 이제껏 衆庶의 欽崇이 衰하지 아니하였다. 이같은 聖王으로서 貴體는 分裂의 慘을 免치 못하고, 國家의 大葬이 蛇妖로써 苟且하였다 할진대 이 어찌 우호로 聖王을 汚鱴하고 아래로 大邦을 厚誣함이 아니랴. 考徵으로써 辨正됨을 기다릴 것 없이 좀 識見 있는 사람은 누구나 傳錄 傳說의 종작 없음을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妄說 謬錄이 서로 表裏되어 傳沿한 지 오래니, 民疑를 洞劈하기 爲하여 도리어 區區한 줄을 알면서도 考徵으로써 이를 깨치고자 한다.

記錄의 謬悖함은 「遺事」, 「勝覽」, 「雜記」의 三書가 다 一轍이라 할 것이나, 그 중에도 「遺事」ㅣ 먼저이매 「遺事」의 謬ㅣ 가장임을 標出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遺事」는 二書에 比하여 初本인 만큼 얼마쯤 謬說 속에도 正體가 섞이어 그의 謬됨을 容易하게 辨別할 수 있나니, 謬로서 먼저이매 그 謬說의 責咎ㅣ 크니만큼 謬로도 먼저인지라 오히려 後說보다는 正體를 考按할 만한 것이 있음은 幸이다. 그러나 이만큼 正體聞見하는 近古한 때에 있어 가지고 謬說을 推助하는데 그침이 더한층 책망할 만한 것이 아니랴. 「遺事」부터 檢討해 보면 우선 “王升于天”이라는 것은, 그대로 새기면 王이 하늘에 올라갔다 할 것이나 이는 文章의 溢辭로 帝王의 崩殂를 崇嚴하게 記錄하려 한 것이니「尙書」 舜典에“五十載, 陟方乃死”의 陟이 무엇이냐. 升과 같이 오름을 이름이요, 오르면 어디로 갈 것인가, 곧 하늘로 올랐다는 말이다. 「竹書」紀年을 보면 帝王의 돌아감을 다 “陟”이라 하여 舜典과 交徵되며, 「莊子」에 華封人이 堯를 頌祝함을 記錄한 것이 있는데, “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于帝鄕”이라 한 것은 “陟”에 對한 彩色 넣은 鋪張이라 할 것이라. 이 뒤에 帝王의 崩御를 升遐라, 登遐라, 禮陟이라 하여 이제 와 新奇할 것도 없는 典語가 된 것이니 升天은 곧 “陟”이라, 곧 升遐의 義며 곧 登遐의 義며 곧 禮陟의 義이다. 과연 저 蕩蕩한 蒼穹으로 冉冉히 올라간 것으로 볼진대, 떨어지지 아니한 歷代帝王은 陵墓ㅣ 모두 虛封일지라, 이 어찌 우습지 아니하냐. “七日後,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을 다시 考案하여 보자. “七日後”라는 것이 怪常하다. 그러나 이것은 따로 按說이 있을 터이므로 아직 머물러 두고, “遺體散落于地”라 함은 聖王은 가시고 遺體만 人間에 남아 계시다 함이니, 「尙書」 舜典에 堯의 崩御를 쓰되 “二十有八載, 帝乃殂落”이라 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殂는 徂往의 義로 갔다는 말이니 곧 陟과 같은 것이요, 落은 遺下의 義로 처졌다는 말이니 곧 陟에 對한 相反語이라, 集傳 에 이를 解하되 “殂落, O也, 死者, 魂氣歸于天, 故曰升, 體魄歸于地, 故曰落”이라 한 것이 여기 對한 正義로 볼 것이다.

그런즉 “王升于天”은 곧 殂요 “遺體散落于地”는 곧 落이다. 그런데 落만이 아니라 散은 疑端이 있는 글자이니 “七日後”에 對한 解釋뿐 아니라 “散”에 對한 辨誤가 다시 있어야 할 것이다. “七日後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을 이레 뒤에 大葬을 지나 彩眉 龍顔이 드디어 沈埋되었다 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陟”과 “落”이 서로 參差될 것이 아니라, 陟하매 곧 落함이 있을지니 陟으로부터 落까지에 七日의 時間을 끼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다음으로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 有大蛇逐禁, 各葬五體, 爲五陵”이라 한 것을 究覈하여 보면, “后亦云亡”이라 한 것이 “七日後”에 붙는 말이됨과 “遺體散落于地”라 한 것이 “王升于天”의 밑에 바싹 닿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安順庵 「東史綱目」 第一에 赫居世 殂落을 쓴 것이 있는데 “三月, 斯盧居斯于赫居世卒, 越七日, 妃閼英卒”이라 한 것이 大意를 얻었다 할 것이다. 國人이 合하여 葬코자 하였다 함은 “后亦云亡”의 句와 相關되는 것이라 異說을 붙일 배 아니거늘 오직 散落의 “散”字ㅣ 종작 없이 끼인 까닭으로 “合”이 이 “散”에 對한 對辭로 錯誤된 것 이니, 이제 이를 校正하여 “王升于天, 遺體落于地, 七日後, 妃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라 써 놓고 보면, 浮說이 스스로 없어질 것이다. “有大蛇逐禁, 各葬五體”라는 悖說이 저 “散”字의 感徑으로 좇아 芽生한 것이다. 閼英聖妃의 陵所, 傳錄되지 아니하였으나 同園에 各葬하였음을 이 傳錄 속에서 髣髴히 推想할 수 있나니 “合”이 始祖 玉體의 散裂을 對하여 말함이 아닐진대 后와의 “合”을 이름이요, 또 各葬이 玉體의 散裂로서 各葬함이 아닌 바에는 各葬은 后와의 各葬일 것이다. 이제 蛇陵의 陵墓를 보매 封壟이 다섯임은 分明하고, 五封이 두렷한 것을 보면 五數의 封만으로도 저 散落과 各葬을 證할 수 있다 할 듯도 하나 이 도리어 辨正에 對한 確證이 되나니 「三國史記」를 보면 “南解次次雄 二十一年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고, 또 “儒理尼師今 三十四年 冬十月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고, 또 “婆娑尼師今 三十三年 冬十月에 王이 薨하여 葬蛇陵園內”라 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園內 三陵에 한 분은 南解, 한 분은 儒理, 한 분은 婆娑이신 것이 두렷하지 아니하냐. 이만으로도 始祖王 五體가 裂散되어 合葬치 못하고 各葬하여 五陵이 되었다는 瞽說이 깨어지지 아니하는가. 그러면 또 記錄 없는 한 陵은 누구실까. 閼英聖妃 처음 이 園內에 各葬하신 것이니 「遺事」의 合字, 各字가 糢糊한 대로 얼마쯤 留證으로 傳하는 것이다. 그런즉 五陵은 始祖王·閼英妃·南解·儒理·婆娑의 四世五位의 珠襦 玉匣의 永奠하온 곳이라, 이에다 다시 淬厲를 加하여 重論하여 보자. 五陵이 四世五位이시니 始祖王의 遺體 散落하여 各葬하였다 함이 무엇을 依據함이냐. 여기에 依據ㅣ 없을진대 容易히 正體를 考見할 수 있나니, “王升于天”은 神魂의 升登하심이요, “遺體散落于地”는 體魄만을 遺留하심이니 合하여 殂落의 義요, 七日後에 后도 薨逝하시매 合葬할 것인데 各葬하였으므로 怪說이 이에 釀出된 것이다. 그러나 “大蛇逐禁”의 解와 陵名蛇陵의 所以 마땅히 出處ㅣ 있을 것이니 이까지에 窮覈함이 있어야 비로소 蛇陵傳說의 辨正이 完了될 것이다. 다시 檢覈을 이에 돌리고자 한다.“大蛇逐禁, 各葬五體, 爲五陵”이라는 것은 五陵에 對한 考據ㅣ 저러한 뒤 저절로 辨破될 것이나, 陵名을 蛇陵이라 함은 「三國史記」에도 記載되었고 오늘까지 傳承하여 왔으니, 대개 蛇와 五陵에 關한 무슨 因綠이 있음을 爬梳하여 보지 아니할 수 없다. 地稱人名이 古今의 轉變이 無數하니, 俗談의 傳하는 것을 보아도 이를 짐작할 것이다. 古代 우리의 稱謂로 轉變함은 約三層으로 나눌 수 있나니 最初本邦의 口稱, 다음으로 漢字의 移寫, 그 다음으로 다시 漢字의 音이나 或 그 義에 붙이어 생기는 謬辭인데 이 三中에 가장 迷亂한 때를 가리키자면 第三層이 곧 그 時期라 할 것이니 “峯”이 “수리”로, “西鳶”이 “西수리”라 함은 前에도 말하였거니와 “西鳶”의 “鳶”을 鳥類의 鳶으로만 보아 가지고 「三國遺事」 第五 “感通” 第十七 仙桃聖母隨喜佛事條에“神母, 本中國帝室之女, 名娑蘇, 早得神仙之術, 歸止海東, 久而不還, 父皇寄書繫足云, 隨鳶所止爲家, 蘇得書放鳶, 飛到此山而止, 遂來宅爲地仙, 故名西鳶山”이라 한 것이 곧 第三期의 誤謬에 該當한 것이다. “수리”를 “述爾” 或 “述”로 쓰는 것이 一期로 二期에 온 것인데 “述爾” 或 “述”의 音으로부터 “鳶”에 이르러 가지고, “鳶”이 된 本根은 내어 버리고 빙빙 도는 “소리개”로만 잡아서 이에서 傳會가 생기니, 이는 漢字로 좇아 생기는 流誤이다. 支那로 말하더라도 下馬陵이 蝦蟇陵(國史補)이 됨과 杜拾遺가 杜十姊(黃氏日鈔) 됨이 모두 流傳에서 그릇된 것이나, 本邦語로 漢字로 또 漢字로 좇아 생기는 變轉으로 이같이 眩幻多端한 우리 古昔과는 비길 수 없다. 대개 五陵의 稱號가 먼점이요, 蛇陵은 後出한 更讀寫音인가 하니, 五陵을 音讀하면 “오능”인데 五의 音이 古音으로는 “오”이니 “고”와 混雜하기 가장 쉬운 것이며 “능”이 “릉”으로 變하기 또 쉬우니 “五陵年少”를 “오릉연소”로 읽는 것이 恒例이다. 그런즉 이 陵園에 五陵이 계시매 本朝의 東九陵, 西五陵이라 부르는 셈으로 五陵이라 불러 오다가 “오”가 “고”로 變하고 “능”이 “릉”으로 바뀌어 村閭의 訛傳으로 “구렁” 곧 “”蛇“로 부른지도 年代 久遠하였을 줄 안다. 鵄述의 述에다가 附贅로 嶺을 붙이고 西述의 述에다가 懸瘻으로 山을 붙이듯이 ”구렁 “에다가 다시 ”陵“을 붙여 한번 또 漢字만을 바꾸어 쓰니 蛇陵이 곧 이에 생긴 稱號인 줄 안다. 陵名이 이같이 구르매 各葬에 妖怪說이 생기고, 또 다시 散裂 分墜의 怪度妖測이 붙어 墟巫, 野覡, 井娘, 田婆의 무식한 이야기가 釋子의 好奇心과 護怪念을 만나 古都의 古寔같이 傳하매, 儒士ㅣ 이를 辨正치 아니하고 文家ㅣ이를 材料로만 여기어 三傳하매 드디어 市虎를 만들고 말았다. 蛇를 구렁이라 함은 지금도 하는 말이어니와, 古語로 微跡이 있으니 稷山古號가 蛇山인데 蛇山은 本 百濟 慰禮城이니 慰禮城이 구레재 의 更讀寫音으로 곧 蛇山이며, 다시 뱀재 로 굴러 稷의 訓이 피 임을 빌어 피 , 비 의 互轉으로 稷山이 된 것이니, 이로써 보아도 五陵의 音이 구렁 으로 變하여 蛇陵되는 徑塗를 짐작할 수 있다. 安康縣은 지금 安康里附近이다. 여기 興德王陵이 있는데, 「東京雜記」 陵墓條에 俗號獐陵이라 하였다. 璋은 “노리 ”이니 安康의 鎭山인 “於乙於”가 “느리”의 音을 가진 것으로, 璋陵이 이 山麓에 있으매 어느 時節에든지 山名이 陵稱에 混同된 것이다. 이것도 始祖王의 蛇陵과 한 照映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즉 大蛇逐禁, 各葬五體라 한 것은 蛇陵으로 記寫하게 된 뒤니 이에 傳會로 傳說의 煙雲이 저렇듯이 일어난 것이나, 史籍과 封墓ㅣ 五陵에 對한 分體各葬의 謬說을 證키에 足할 뿐 아니라 語音으로부터 생기는 地名의 轉誤ㅣ 당치 아니한 物名을 猥附케 됨이 이 한 군데만이 아니니, 智者를 기다릴 것 없이 辨正할 수 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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