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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잡기 (筆耕舍雜記) by 심훈

―최근의 심경을 적어 K友에게


우리의 붓끝은 날마다
흰 종이 위를 갈〔耕〕며 나간다
한 자루의 붓! 그것은
우리의 쟁기〔犁〕요 유일한 연장이다
거친 산기슭에 한 이랑〔畝〕의 화전을 일려면
돌부리와 나무등걸에 호미끝이 부러지듯이
아아, 우리의 꿋꿋한 붓대가
그 몇번이나 꺾였었던고!

이것은 3년 전에 출판을 하려 하던 ― 五字不得已略 ― 시집 원고 중 〈필경(筆耕)〉이란 시의 제1련이다. 필경사(筆耕舍)란 그 시의 제목을 떼어다가 이른바 택호(宅號)를 삼은 것이다.

하늬바람 쌀쌀한 초겨울 아침부터 내리던 세우(細雨)에 젖은 흰돛 붉은돛이 하나둘 간조(干潮)된 아산만의 울퉁불퉁하게 내어민 섬들 사이를 아로새기며 꿈속같이 떠내려간다.

이것은 해변의 치송(稚松)이 에두른 언덕 위에 건좌손향(乾坐巽向)으로 앉은 수간초려(數間草廬), 그중에도 나의 분방한 공상의 세계를 가두고 독서와 필경에 지친 몸을 쉬이는 서재의 동창(東窓)을 밀치고 내다본 1934년 11월 22일 오후의 경치다.

당진읍(唐津邑)에서도 40리나 되는 부곡리(富谷里)란 마을은 서울서 불과 2백리라 하건만 전보가 2,3일 만에야 통상우편과 함께 배달되는 벽지의 궁촌(窮村)이다.

住近溢江地低濕 黃蘆孤竹繞宅生

이 고장의 풍물이 백낙천(白落天)의 적거(謫居)하던 심양강두(瀋陽江頭)와 비슷하다고 할까, 깊은밤 툇마루에 홀로 앉았으면 눈앞에 아물거리는 어둠과 함께 우주이 적망이 온통 내 좁은 폐 속으로 스며드는 듯 무서운 고독감에 온몸이 떨릴 때가있느니만치 모든 도회의 소음과 온갖 문화의 시설과는 완전히 격리된 원시지대인 것이다.

其問朝暮聞何物 杜鵑啼血哀狂鳴 (기문조모문하물 두견제혈애광명)

그러나 두견(杜鵑) 대신에 밤에도 산비둘기가 꾹꾹꾸루룩 하고 청승스럽게 울고 원숭이는 없으나 닭장을 노리는 여우와 삵괭이가 희앵한다. 가두의 축음기점에서 흘러나오는 비속한 유행가와 라디오 스피커를 울려나오는 전파의 잡음으로 안면이 방해될 염려는 조금도 없는, 일테면 별유천지다.

창새도 깃들일 추녀끝이 있는데 가의무일지(可依無一枝)의 생활에도 인제는 고만 넌덜머리가 났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고, 〈직녀성(織女星)〉의 원고료로(빚도 많이 졌지만) 엉터리를잡아가지고 풍우를 피할 보금자리를 얽어논 것이 위에 적은 자칭 ‘필경사’다.

7원짜리 셋방 속에서 어린것과 지지고 볶고 그나마 몇달씩 방세를 못 내서 툭하면 축출명령을 받아가며 마음에 없는 직업에 노명(露命)을 이어갈 때보다는, 맥반총탕(麥飯蔥湯)일망정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끓여먹고 저의 생명인 시간을 제 임의로 쓰고, 티끌 하나 없는 공기를 마음껏 마시는 자유나마 누리게 되기를 벼르고 바란 지 무릇 몇해였던가.

내 무슨 지사(志士)어니 국사(國事)를 이하여 발분(發憤)하였는가. 시불리혜(時不利兮)하여 유사지적(幽師志的) 강개(慷槪)에 피눈물을 뿌리며 일신의 절조(節操)나마 지키고자 백골이 평안히 묻힐 곳을 찾아 이곳에 와 누운 것이면, 그야말로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벗을 삼을 마음의 여유나 있을 것이 아닌가.

東窓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兒孩놈은 상기 ㅏ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어제 갈려 하느니

내 무슨 태평성대의 일민(逸民)이어니 30에 겨우 귀가 달린 청춘의 몸으로 어느새 남구만(南九萬)옹의 심경을 본떠보려 함인가. 이 피폐한 농촌을 음풍영월(吟風詠月)의 대상을 삼고자 일부러 당진 구석으로 귀양살이를 온 것일까.

내 무슨 은일군자(隱逸君者)어니 인생의 허함과 세사(世事)의 무상함을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던가. 매화로 아내를 삼고 학으로 아드를 사마 일생을 고산(孤山)에 은서(隱棲)하던 송나라 처사(處士) 임포(林逋)를 흉내내고자 하루저녁 서회(舒懷)할 벗커녕 말동무조차 없는 이 한미(寒微)한 조선의 서촉(西蜀)땅에 첩거하는 것인가.

벌써 10여년 전이다. 내가 중국 항주(抗州)에 유학할 때 서자호반(西子湖畔)에 있는 임화정(林和靖:和靖은 逋의 시호)의 무덤 앞에 죽장을 멈추던 생각이 난다.

화정의 칠세손 되는 홍(洪)의 저서인 《산가청사(山家淸事)》에 의하면 당시 그의 생활은,

“舍三, 寢一, 讀書一, 治藥一, 後舍二, 一儲酒穀, 列農其山其, 一安僕役庖瘤, 稱是, 童一, 園丁二, 太十二足, 驢四蹄, 牛四角” 이었다 하니 이 임처사에 비하면 심처사의 생활은 실로 10대0이다. 내 소유라고는 밭 한뙈기 논 한마지기도 없는 것은천하주지(天下周知)의 사실이다. 舍一, 妻一, 子二 이외에 톡톡 털어도 주머니 속에서는 희연(囍煙) 부스러기밖에 나올 것이 없는데 처자나마 나의 사유 재산이 아닌 바에야 실로 손꼽을 거리도 되지 못한다.

나는 생어장(生於長)을 서울서 한지라 외모와 감정까지 ‘서울놈’을 못 면한다. 철두철미 놀고 먹는 도회인의 타입인 것을 나 스스로 인정한다. 그러니 낙오자라고까지 저를 부르고 싶지는 않으나 도회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피천 한닢 없느 놈이 도회에서 명맥을 보전하려면, 첫째 바지런하고 참새굴레를 씌울만치나 약아서 백령백리(百怜百悧)해야 하고, 월급쟁이면 중역이나 간부의 보비위(補脾胃)를 하는 술책과, 무슨사업이라고 해보려면 돈있는 자에게 무조건하고 고두백배(叩頭百拜)하는 심법(心法)과 허리가 곡마단의 계집애처럼 앞으로 착착 휘는 재주를 습득해야만 할 뿐 아니라 겸하여눈뜬 놈 코 베어먹는 천재가 구비되어야만 비로소 입신양명을 할 수 있음은 만고에 변함이 없는 진리이요 철칙이다. 그렇건만 나는 성격상 이 위의 여러가지 조건 중에 하나도 들어맞는 것이 없다. 구렁이 제 몸 추듯이 나자신을 개결(介潔)한 선비요 청렴강직한 인물이라고 생가가느 것은 아니나, 아뭏든 천생으로 게을러 빨랑빠랑하지 못하고 이(利)를 탐하는데 눈이 밝지 못하고, 돈없어 아쉬운 줄은 알면서도 돈 자세(藉勢)하는 놈을 보면 속이 메스꺼워 입에 군침이 돌고, 권세있는 자의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기는커녕 산돼지처럼 목덜미가 뻣뻣해진다. 그래서 한 고주(雇主)를 꾸준히 섬기지 못하고 수틀리면 누구 앞에서나 불평을 토하고, 심지어 심술을 불끈불끈 내는 밥 빌어먹을 성미 때문에 이 토박한 시골구석으로 조밥·보리밥을 얻어먹으려고 그야말로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기어드 것읻. 그러나 반드시 공명이나 명예감에 담박하기 때문에 도회에서 미끄러진 것도 아니니 내 일이면서도 무가내하(無可奈何)다.

도회는 과연 나의 반생에 무엇을 끼쳐주었는가! 술과 실연과 환경에 대한 환멸과 생에 대한 권태와 그릭 회색의 인생관을 주었을 뿐이다. 나 어린 로맨티스트에게 일찌감치 세기말적 기분을 길러주고 의지가 굳지 못한 희똑희똑하는 예술청년으로 하여금 찰나적 향락주의에 침륜(沈倫)케 하고, 활사회(活社會)에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이요 실인생(實人生)의 부유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