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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KYPark/세계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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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엔사이클로피디어[편집]

이 곳에서 이 청중을 위한 강의의 대부분은 매우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제공합니다. 그들은 여러분들이 전에 몰랐던 무언가를 여러분에게 말하려고 여기에 옵니다. 그러나 오늘밤 저는 여러분들이 이미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지 의심스럽습니다. 저는 사실을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말고는 더 의욕적으로 더 희망적으로 제가 제안하고 싶은 다른 청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저의 특별한 관심 분야는 언제나 종합과 합성이었습니다. 저는 따로 떨어져 있는 사건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세부사항들을 싫어합니다. 저는 정말로 진술, 의견, 편견, 신념 따위가 여러분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을 혐오합니다. 저는 저의 세계가 될 수 있는 대로 정합하고 일관되는 게 좋습니다. 아무튼 현재로서 저의 기질은 과학자의 그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세계사 대요와 세계사 개요, 생명과학 개론, 경제적 재정적 사회적 생활을 하나의 개요로 정리하려는 노력, 그리고, 이보다 더욱 맹렬하게, 이런 저런 원인들이 인류의 장래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고자 하여 수만 시간을 소비한 이유입니다.

이 모든 시도는 뿌리깊으면서 두드러진 결함과 약점을 갖고 있어서, 제 친구들조차도 겸연쩍은 미소를 띄며 그것들을 언급하곤 합니다. 그것들이 주제넘고 터무니없음을 인정하지만, 그래도 저는 조금도 부끄럼없이 그것들을 되돌아 봅니다. 누군가는 얼음을 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보편적인 마음가짐에 대하여 그같은 종합을 시도했어야 합니다. 가장 뛰어난 비평가에 대한 저의 답변은 언제나 (미안합니다) "제기랄, 그것 더 잘해보세요."

이같은 저의 실험들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점은, 저로서는, 학식있고 능력있는 분들을 금방 설득해서 훌륭한 대안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경제학, 사회과학, 재정학을 전공하고 가르치는 능력있고 이름있는 분들의 수효를 고려하고, 또 세계의 재정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의 참으로 불만족스러운 성격을 고려하면, 1932년에 출간되어, 사실상 평가되지도, 검토되지도, 거의 읽히지도 않은 "인류의 일거리와 부와 행복"은 인간의 생태계를 유기적으로 관찰하고자 한 유일한 시도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오늘밤 어쩌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여러분 앞에 던지고 있다고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제가 지금 이 실험적인 작업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여기서 설명드리고자 하는 생각들은 수년 동안 제 마음을 괴롭혔으며, 제 아이디어 들은 이러한 실험과 경험을 통해서 서서히 정의되어 갔습니다.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인 다른 걱정거리들과 점점 더 밀접하게 엮였던 바, 그 안에서라면 여러분의 이해와 동정을 얻을 수 있으리라 저는 꽤 확신합니다.

현대적 지식과, 뭐랄까, 배우고 익힌 사고방식이 현재의 문제 해결에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얼마만큼 걱정하지 않은 분이 오늘밤 여기 계실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대표하는 교양있고 학식있고 과학자는 사람들의 세계가 지식의 쓸모없음을 의식하게 된 것은 주로 1914년 이후의 험난한 세월부터라도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는, 또는 더 정확하게, 1909년이나 1910년 이전에는, 세계, 또는 우리 늙은이들이 부르는 바, 우리 세상은 신념과 안정된 가치와 확실한 안전 보장의 상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상태는 이제 이미 믿을 수 없게 되어 갑니다. 우리는 그 때 그 표면적인 안전이 과학과 발명과 회의론적 탐구에 의해서 얼마나 많이 훼손되었는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계대전에 뛰어 들면서, 그리고 더욱이나 그 전쟁 내내,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받아들인 믿음의 관성 아래 머물러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종류의 역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우리는 느꼈으며, 그 전쟁이 옛날의 전쟁들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라는 것, 옛날 방식의 전략은 비참하게 구식이었다는 것, 그리고 전쟁 후에 수습하는 옛날 방식은, 우리가 오늘날 찬찬히 보는 바와 같이, 나쁜 결과물들이 더욱 심하게 얽히고 설키게 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잘 압니다. 우리가 모두 그 사건들을 치르고 나서 더 현명해졌으며, 1919년과 1920년의 조약 체결을 특징짓던 엄청난 무지, 사회적 경제적 현실 파악의 완전 실패, 단견, 얄팍한 마음가짐 등을 깨닫지 못할 사람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저는 메이나드 케인즈 씨가 이같은 전세계적인 지적 결핍에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든 선각자중 한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책, 평화의 경제적 중요성이 실제로 세계에 말했던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 이 정객들, 이 정치인들, 우리 위에서 권세를 부리는 지배자들은 그들의 수중에 있는 업무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도 많이 알지 못하는데, 깨달아야 할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알려져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저렇게 처리하면, 이런 저런 것들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들은 이런 저런 것들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없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합당한 사고에 익숙하지 않고,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 지식이 무엇에 관한 것이라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불충분한 정신적 장비에 대한 그 무시무시한 인식은 국제연맹의 탄생을 바라보던 우리들 가운데 몇사람에게 싹트고 있었씁니다. 마지못해서 그리고 공포 같은 것을 느끼며, 우리는 인류 역사상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고 참신한 장을 시작한다고 스스로 상상하던 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역사를 형성하는 힘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집단적으로 말입니다. 전반적으로 그들은 상당한 양의 지식, 꽤 괜찮은 지식의 부정합 단편들, 어떤 것은 이 시대, 어떤 것은 저 시대에 대한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얽히고 설키게 될 과정에 대해서는 도무지 공통적인 이해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1919년의 세계 문제에 대한 현명하고 안정적인 해결책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과 모든 시책의 착상은 단편적으로 조각 조각 여기 저기 존재했지만,  실제로 아무 것도 취합되지 않았고, 실제로 아무 것도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고, 실제로 아무 것도 그 지식과 그 착상을 한 데 모아서 종합적인 세계 구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수행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르사이유 평화 회담은 그 당시 이미 인간의 두뇌에  존재했던 정치적 경제적 지혜의 매우 작은 부분 밖에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만일 이같은 사태에 대한 우리의 이해력이 용법 때문에 얼어붙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것을 괴기한 부조리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합리적인 피조물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세계 대전 이후의 18년 동안 인류의 역사의 일반적 진행에 대한 간추린 개요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버둥거림, 폭력적이고 잘못 지도된 군중 운동, 여기서는 무기력한 표류, 저기서는 발작적인 행동 등의 연속이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제가 여러분과 같은 편에 서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존엄성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제가 가장 극단적으로 멸시하는 현학적 말투입니다. 인류의 역사에 존엄성은 아직 없습니다. 역사가 그토록 자주 비극적이고, 그토록 빈번하게 음산하고, 대체로 망신스럽고, 이따금 아주 무시무시하지 않다면, 그것은 진짜 희극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비극적입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정말 이지적이고, 섬세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으며, 미술과 음악과 문학에서 자신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다음이 제가 꾀하는 바인데, 쓸데 없이 더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미국의 경우만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언행을 다했을 때의 미국은 세계에서  지능적으로 가장 /깨어 있는/ 공동체의 하나입니다. 그곳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거의 알고 있는 듯합니다. 알 수없는 자급자족의 단계, 전례없는 번영의 단계, 개화기, 위기, 쇠퇴, 그리고 공황 등을 먼저 돌이켜 보십시오. 그리고 그때 새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나타났는데, 이 강좌의 관점에서 그는 역사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중 한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와 같은 지식과 이해가 존재하고 자기에게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정말로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참을성이 놀라웠던 때의 미국은 남들이 자기들을 말하고 보여주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대학들, 훌륭한 학교들, 기라성같은 권위자들, 학자들, 전문가들, 선생님들, 가운 입은 분들, 존경받는 분들, 훌륭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 지식 집단으로부터 대통령의 잘못에 대한 수많은 매우 신랄한 비판이 내내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의 이, 뭐랄까요, 이 고급 인력, 이 두뇌, 이 지성은 전반적으로 부정합하였으므로 대통령이 의지할 수 있을 만큼 정말로 포괄적이고 깊이있고 신중하고 믿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자기에게 알맞은 것이 없었으므로 이것 저것을 시험하고 시도해야 했고, 이 유망한 고문에서 저 고문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는 신인 양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기 드문 선의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아시는 그런 독재자 신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직화된 정보와 길잡이를 향하여 지극히 개방적이고 포용력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만 . . . /그것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거기에 없습니다.

몇년 전에 세계적으로, 준비된 부분과 안된 부분에 대하여 상당한 소동이 있었습니다.  그 소동의 대부분은 전쟁의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백명의 저명 인사들 쪽의 아주 괴상한 무대책의 한 사례였습니다. 평화로운 시절의 어느 공동체의 정상적인 진행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것을 연구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필요했던 지식의 조직화를 겨냥한 시도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식이 우리를 묵인으로 몰아넣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는 집단적으로 정신이 나가서 자기네 업무를 함부로 계획성 없이 무관심한 태도로 얼버무리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당초의 인식을 날카롭게 파악했다가 점점 무뎌졌을지도 모를 분들이 여기 계신다면 그 누구든, 이른 바 현재 수집되지 않고 활용되지 않는 세계 최고의 사유와 지식, 그리고 다른 한편, 서민 대중 뿐만 아니라 공공 업무를 지휘하는 분들, 지배자들, 지도자들, 정치가들, 신문 편집장들, 종교계 지도자 내지 교육자들, 이런 모든 분들의 생각과 행동, 이 양쪽 사이의 엄청난 간격을 돌이켜 보시기에 충분할 만큼 제가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재능이 활용되지 않고 잘못 적용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 판단입니다. 지식과 사유가 효과가 없습니다. 인류는 전체적으로 마치 가장 탁월한 두뇌의 소유자가 그 하부 조직의 어떤 질환이나 결함이나 불충분 때문에, 무도병, 실서증, 실성증 같은 가장 황당한 부조화에 시달리고, (언제나 스스로 잘 알다시피) 자기의 바보같은 끔찍한 몸짓과 자기의 어리석은 언행 때문에 몹시 시달리고 있는 경우와 아주 비슷합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처럼 언제나 뚜렷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처지와 이것에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가 수집한 지식 사이의 격차가 과거에도 지금처럼 엄청났는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어떤 행운이 스쳐감으로써 그처럼 엄청난 격차의 존재와 그처럼 엄청난 격차의 위협이 세계대전 이후처럼 우리의 주목을 사로잡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최선의 사유와 지식이 효과가 없다는 그 깨달음은 처음에는 예컨대 메이나드 케인즈처럼 말하자면 탁월한 위치에 있던 두 세분에게만 닥쳤지만, 그러나 점차로 저는 그같은 깨달음이 퍼지고 자라고 있음을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여러가지 형태를 취합니다. 저명한 과학자들이 점점 더 자주 세계의 무질서에 대한 과학의 책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모든 신문 가운데 가장 존경스러운 신문 /네이처/와 친밀하다면,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대략 지난 4반 세기 동안 매우 대표적인 그 주간지의 파일을 넘겨서 기사의 표본을 추출해 본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의 특성과 범위에서 매우 괄목할 만한 변화를 관찰하실 겁니다. /네이처/는 거의 현학적으로 전문적이고 과학적이었습니다. 그것의 정치 및 일반적인 문제로부터의 초연은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회적 지진의 진동과 총성의 진동이 실험실에서 점점 더 감지되어 갔습니다. 전문적이었던 /네이처/는 세계를 의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제 거기에는 거의 매주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의 사고 방식을 세계 문제에 쓸모있게 만들려면, 너무 늦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관점에서, 그것은 오늘밤 이 극장을 매운 여러분 같은 사람들 (만일 제가 제 자신을 여러분과 같은 계층으로 분류해도 된다면) 거의 모두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표출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국 협회의 최근 집회에서 다루어졌던 토픽을 돌이켜 보십시오. 회장 연설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의 바로 그 제목? 조시아 스탬프 경은, 여러분이 기억하시다 싶이, 사회과학 분야의 기금을 늘리고 종사자들을 늘여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필립 교수는 "공동체에서 봉사하는 화학자들의 훈련"을 다루었습니다. 크램프교수는 "엔지니어와 국가"를 언급하였고, 또 "과학의 문화적 내지 사회적 가치"에 관한 중요한 토론이 있었던 바, 거기서 리차드 그레고리 경, 화급한 교수, 그리고 다니엘 홀 경은 기억할 만한 것들을 언급했습니다. 과학자가 우리 미래의 사회적 청사진 속에서 하나의 뚜렷한 조직 요소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 현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 지금까지 저는 그저 저의 주제를 펼치기 시작하여 고려 대상 문제를 진술하여 왔습니다. 우리는 지식인들이 인류의 청사진 속에서 더욱 뚜렷이 /조직화된/ 요소가 되길 바랍니다. 그 요소는 어떻게 조직화되는가? 지식이 실제적이고 전반적인 효과를 낼 수 있게 만드는 무슨 방법이 있는가? 우리가 점점 더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는 바, 전문 지식 및 사고와 인류의 상식 및 동기 사이에 존재하는 이 드넓고 더욱 벌어지는 간격을 매울 수 있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매울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검토하여 주시길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과학 지식과 전문화된 사고가 일반적인 문제에 더욱 밀접한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이 /가능할까요/?

무엇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저는 불안해 하는 과학자 내지 전문가 친구들 가운데 직접적인 정치적 행위 및 전문적인 정치적 항의를 향한 어떤 성향을 발견하며, 그것은 잘못된 성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젊었던 시절의 과학계와 인문계 종사자들은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보수적이었는데, 요즘은 그들중 상당히 많은  분들이 과격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좌파적이고 혁명적이고,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비판적 정신 훈련에 걸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야릇한 유사과학적 독단을 받아들이고, 또 좌차에 가담하지 않은 이들조차도 확실히 한 사회계급으로서 공동체의 일반적인 행사에 끼어들 무슨 방법을 찾으려고 안절부절입니다. 가능한 행동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중요해 보이는 서명된 선언문 또는 항의문에서부터 업무 중단 및 잘못 응용될지 모를 기술 개발에 대한 협조 거부 같은 일종의 반전 파업까지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정부가 모종의 엘리트를 이용하여 군중 민주주의의 정치 형태와 방법을 점차로 억압하는 아이디어를 선호하는데, 여기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지배적인 역할을 할 모양입니다. 이 아이디어에는 매우 넓은 애매한 덧댄 조각들이 있지만, 일반적인 계획은 일종의 현대적 성직자 조직, 또는 교수와 비상한 재주꾼들의 과두정치의 형태를 취합니다. 플라톤처럼 그들은 철학자 군주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 계획은 지식인의 일반적 퀄리티와 우수성에 대한 어떤 가정을 내포하고 있는데, 저는 그것이 검증 불가 아닐지 걱정됩니다.

정치활동, 정당 간섭, 권위있는 엘리트의 꿈 같은 종류의 것들은 국가에 대하여 치명적인 감정과 이해를 형성하는 전문가, 예술가, 전문적인 사상가와 실무자들이 인류 문제의 제어를 위하여 이것과 의도적이고 효과적이고 선도적이고 지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반적 생개의 관점에서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 어떤 종류의 전문적인 지능은 집단적인 행동을 위해서 동원될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을 하면서 저지른 과학과 철학에 대한 어떤 불경죄든 여러분이 사면해 주사기를 희망합니다.) 그들은 비상하게 잡다한 집합이며,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성은 상대적 은둔 상태에서, 즉 각자 자기 자신의 노선에서, 집중성입니다. 그들은 결속은 없고, 습관적인 /처세술/, 예컨대 법률가, 의사, 또는 정말로 사회적으로 조직된 직업중 어느 것이나 표출하는 공통적인 실무와 활동과 관심에서 우러나오는 습관만 있습니다. 교수가 지배하는 세상은 신학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처럼 현대적 생활의 스트레스와 기복이 심한 조건 아래에서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탁월한 전문가는 그의 갈고 닦은 재능 때문에 소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방위적으로 필수적인 표준에 비추어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정말로 그의 전문성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그는 

보통 사람보다 더 경험이 부족하고 자격이 떨어질지 모릅니다. 아마도 그는 신문을 그다지 진지하게 읽지 않으며, 많은 공동 부문은 귀찮고 혼란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하고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12명의 잡다한 과학자와 전문가를 예컨대 수석 서기가 탄 도심행 출근 열차에서 데려온 12명의 비전문가와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평범한 팀웍을 위해서 그리고 생활의 평상적 필요와 돌발적 긴요를 위해서 그 핵심을 발견해야 하는 바, 두번째 12명은 개인적으로 첫번째 12명보다 더 낫지 않았다면 확실히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불타고 있는 호텔에서 또는 무인도에 버려져서도, 두번째 12명은 아마 꽤 잘 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집단적으로 그들은 정보가 부족하고 제약이 많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12명 전체는 그중 어느 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해줄 수 없을 것입니다. 반면, 12명의 전문가들은 각자 여러분에게 말해 줄 어떤 특수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전자 그룹은 지식과 능력이 지붕의 타일처럼 거의 균등할 것이고, 후자는 복잡한 조각 그림 맞추기의 조각과 비슷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더 많이 아우를 수록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12명의 서기든 백명의 서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은 오직 단조로운 반복만, 삶에 대한 따분한 수동적이고 암시적인 전망만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한 전문가는 각자 삶의 지배적인 짜임새에 무언가를 더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오늘밤 우리의 문제를 정의함에 있어서 우리를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만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정치를 계몽하고 활력있게 해주고 세계를 다스려 주길 바라는 것은 /과학/이지 /과학자/가 아닙니다. 

이제 저는 제 논변에서 한 걸음쯤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저는 /신백과사전주의/라는 용어를 도입하고 그것을 정의하는 데 제 시간의 나머지 대부분을 소비할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사회 기구, 새로운 기관 같은 것이 조각 그림 맞추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우리 세계의 분산적이고 비능률적인 정신적 자산을 모두 모아서 공통의 이해같은 것으로, 또는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일상생활에 대한 효과적인 반응으로, 유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이제 막 여러분 앞에 내놓을 제안에서 절제는 바람타게 내던지겠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제안입니다. 저는 전세계적 교육 및 정보의 재조직과 재출발을 위한 정말 한장의 청사진을  묘사하고자 합니다. 그 이하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계의 기존의 학교, 대학, 종합대학, 연구소 등에 매우 익숙하고, 그들은 우리가 애초부터 그들을 존중하고 신뢰하도록 우리를 조종하고 만들고 훈련시켰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의 장점을 탐색하고, 그들은 이제는 비상하게 느슨하고 허약하고 낡아빠진 잡동사니가 전혀 아닌지 의심하도록 제가 제 마음을 허락하면서, 말하자면, 몰염치와 모교 배반의 불충을 저는 정말 느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지식과 현재의 사회적 정치적 사건들 사이의 이 무시무시한 격차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러분이 저와 함께 그것을 인정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중국에서 페루까지, 학자의 방식과 훈련과 강의를 포함한 이 거대한 학계 전체에 대한 고발 같은 것보다는 실제적인 태만이 아니라면 적어도 부적합과 부정합에 대한 고발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부적합 또는 부활하기 전의 발전의 정지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만, 그 모든 것이 부적합합니다. 종합대학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그렇습니다만, 그들은 위력과 범위와 능률이 있어서 지난 세기와 같은 전반적 발전에 참여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교통에서 우리는 마차와 말에서 기차를 거쳐 전동차와 자동차와 비행기로 발전했습니다. 지적 조직화에서 우리는 다만 우리의 마차와 말과 마굿간을 늘렸습니다.

현대의 인간사회구조에서 빠져있는 바로 그 요소, 인식 및 정보의 조각들과 제가 세계백과사전이라고 일컫는 거대한 조직화 사이에 요구되는 바로 그 연결을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그려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우선적으로 교육받은 서민의 관점에서 다루겠습니다. 왜냐 하면 완전히 현대화된 나라에서는 모든 서민은 교육받은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백과사전의 조직화가 어떻게 시민의 생활에 들어가서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 보시길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시민의 관점에서 세계백과사전은 자기집 또는 어느 이웃집 또는 근처의 공공도서관 또는 어느 초중고교나 대학에 있는 한 질의 전집입니다. 그러면, 이런 시민은 이 전집에서. 별로 힘들지 않고 어렵지 않게 우리의 사회 질서에서 지배적인 개념, 모든 지식 분야의 개론과 각론, 우리 우주의 참모습 아니면 근사한 모습, 세계사, 그리고, 만일 그가 어떤 문제를 어떻게든 깊이 파고 들어가고자 할 때, 지식의 일차 정보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완벽한 전거를, 분명한 언어로, 최신 정보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과 의견이 존재하는 분야에서 그는 의견들의 우연한 요약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게 선택되고 상호관계된 진술과 논변을 발견할 것입니다. 저는 전공과목이 좀 서둘러 작성된 특수한 기사에서, 다시 말해서, 디데로의 영웅적인 노력의 시절 이후에 백과사전의 전통이 되었던 방식에서 다루어진다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그의 시절과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수만권의 책과 팜플렛과 논문에 흩어져 있는 진술과 설명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문헌이 있으므로, 오래된 전통이 장삿속으로 만들어야 했던 그처럼 졸속 요약에 매달리는 것은 필요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정력적인 저널리스트가 두 세명의 스타급 기고자와 질적으로 매우 고르지 않은 잡동사니 편집자를 긁어 모아서, 가끔은 선동과 선전으로 얼룩진, 전문적인 기사를 끄적여서 그것을 백과사전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현대의 세계백과사전은 각 분야의 탁월한 전문가들의 승인을 받은 매우 신중하게 취합되어 신중하게 상호연결되고 편집되고 비판적으로 제시된 선택, 추록, 인용 등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잡동사니가 아니라 농축이고 명확화이고 융합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