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권45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을파소(乙巴素)[편집]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이다. 고국천왕 때 패자[1] 어비류와 평자[2] 좌가려의 무리가 모두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불의한 짓거리를 하고 다니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잡아 목베려 하자 좌가려 등은 모반을 일으켰다. 왕이 그 일당을 잡아 죽이기도 하고 일부는 내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령하길, “근자에 벼슬이 총애로써 내려지고 덕없는 이가 자리에 오르니, 그 독이 백성에게로 흘러들어가고 우리 왕실은 흔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그대들 사부[3]에서는 각자 부족의 어질고 착한 이를 추천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사부에서 모두 동부[4]의 안류를 추천해서 왕이 국정을 맡기기 위해 그를 불렀다. 안류가 왕에게 말하길, “하찮은 신은 용렬하고 어리석어 큰 정치를 다룰 수 없습니다. 서압록곡 좌물촌의 을파소라는 자가 유리왕 때 대신 을소의 후손인데, 성격이 강직하고 굳세며, 슬기와 지혜가 연못처럼 깊습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기에 혼자 밭을 갈며 살고 있는데,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신다면 바로 이 사람이 없이는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사람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초빙해 중외대부[5]에 임명하고 우태[6]의 작위를 주었다. 왕이 말하길, “내 감히 선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신민들의 위에 있게 되었으나 덕이 야박하고 재능이 짧아 다스림이 모자라오. 선생은 재주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궁벽한 풀밭 늪지에 처한 지 오래이나, 지금 나를 저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이켜 이리 와 주니 이것은 나 혼자의 기쁨과 행복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들의 복이올시다.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마음을 다해 주오.” 파소는 비록 나라에 몸바치려 하였으나, 내려진 벼슬자리가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대답하길, “신은 둔하고 굼뜨어, 엄한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대왕께서 현량한 자를 고관으로 삼아 대업을 이루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이에 국상[7]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때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 인척들이 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신하들을 차별한다고 말하며 그를 흠잡았다. 왕이 하교하길, “진실로 국상에게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귀쳔을 따지지 않고 일족을 멸하리라!”라고 하였다. 파소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길,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이 선비로서 떳떳한 일이다. 금상께서 나를 두텁게 대우하시는데 어찌 다시 숨는 것을 생각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고 정치를 밝히며 상벌을 신중히 하니, 인민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했다. 왕이 안류를 불러 말하길, “만약 그대의 말이 없었다면 내 파소를 능히 얻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그대의 공이다.”라고 하고 이에 대사자[8]에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을파소가 죽으니 백성들이 대단히 슬퍼하며 곡을 했다.

김후직(金后稷)[편집]

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智證王)[9]의 증손이다. 진평대왕(眞平大王)[10]을 섬겨 이찬(伊湌)이 되었고, 병부령(兵部令)으로 자리를 옮겼다. 大王頗好田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在右正士, 容受直諫, 孶孶矻矻, 不敢逸豫, 然後德政醇美, 國家可保, 今殿下, 日與狂夫獵士, 放鷹犬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騁田獵, 令人心狂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不從, 又切諫不見聽, 後, 后稷疾病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瘱吾骨於大王遊畋之路側, 子等皆從之, 他日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湌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潸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復獵

녹진(祿眞)[편집]

祿眞, 姓與字未詳, 父秀奉一吉湌,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脉,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於是, 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祿眞曰, 下官非不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悒之慮, 故此來耳, 若不見則不敢退也, 門者再三復之, 於是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以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嘿嘿,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砭,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榱,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大厦成焉, 古者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六官百執事, 外則方伯連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不材, 擬送於雲霄,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亂其志, 則不獨國事溷濁, 而爲之者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泣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不可枉以輕重, 如繩焉不可欺以曲直, 如是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角干於是, 謝遣醫官, 命駕朝王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答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不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 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湌, 辭不受

밀우·유유(密友紐由)[편집]

밀우·유유는 모두 고구려 사람이다. 동천왕(東川王) 20년(246년), 위(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毋丘儉)이 병사를 이끌고 침략해 오니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고, 王出奔, 將軍王頎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舊擊決勝, 王曰諾, 紐由入魏軍詐降, 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명림답부(明臨答夫)[편집]

명림답부는 고구려 사람으로, 신대왕 때 국상을 지냈다. 한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이 큰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려 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울 것인가 물었다. 여럿이 의논하여 말하길, “한나라 병사는 우리가 약함만을 믿고 있으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겁낸다 여기고 빈번히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야말로 한 사람만 지키고 있으면 만 명도 그를 당해내지 못하는 곳입니다. 한나라 병사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어찌 우리를 이기겠습니까. 군사를 일으켜 막기를 청하옵니다.” 답부가 말하길, “그렇지 아니하오.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은데다 지금 강한 병사들이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칼날을 당해낼 수 없소. 또 병사가 많으면 마땅히 싸우고 병사가 적으면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지상사요.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천리 밖에서 양식을 가져 왔으니, 능히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게 쌓은 뒤, 청야[11]로써 기다리면 저쪽은 반드시 몇달 내에 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이즉, 그때 우리가 굳센 병사로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소.” 왕이 그러하게 하여 성을 덧대고 굳세게 지키자, 한나라 사람들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려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기병을 동원해 뒤쫓아 좌원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대왕이 기뻐하며 답부에게 좌원과 함께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5년[12] 가을, 9월에 향년 113세로 죽으니 왕이 몸소 찾아와 슬퍼하며 7일간 조회를 파하고 예로써 질산에 장사지내 무덤지기 20 가를 두었다.

석우로(昔于老)[편집]

석우로(昔于老)는 내해 이사금(奈解尼師今)의 아들이다. 또는 이르기를 각간(角于) 수로(水老)의 아들이다. 조분왕(助賁王) 2년 (231년) 7월, 이찬(伊湌)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나아가 감문국(甘文國)을 쳐서 이를 깨뜨리고,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조분왕) 4년 (233년), 7월 왜인(倭人)이 침략해 오자, 우로(于老)는 사도(沙道)에서 응전하여, 바람을 타고〔乘〕 종화(縱火)하여 적의 전함을 불사르니 적이 익사(溺死)하거나 힘이 다해 죽었다. (조분왕) 15년 ((244년)) 정월, 나아가 서불한(舒弗耶) 겸 지병마사(知兵馬事)가 되었다. (조분왕) 16년 ((245년)),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나아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밤이 되어 사졸들이 추위에 고생하자, 우로는 몸소 노고의 질문을 행하고, 손수 섶을 태워 화톳불을 만들어, 그들을 따뜻하게 해 주니, 그 무리의 마음이 마치 솜옷을 껴입은 것 처럼 고맙고 기뻐하였다. 첨해왕(沾解王) 재위 시에, 사량벌국(沙梁伐國)이 우리 (나라)에 속한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귀속하였다. 우로는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쳐서 멸하였다. 7년 ((253년)[13], 계유년), 왜국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잠을 자며 묵을 때, 우로가 이를 주관하였는데, 손님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 너희의 왕을 소금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부뚜막의 여인네로 만들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 (나라)를 치니, 대왕(大王)이 나가서, 우유촌(于柚村)에 머물렀다. 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근심은 나의 말이 삼가지 못하여 말미암은 것이니, 내가 마땅히 그것을 책임지겠다’하였다. 마침내 왜군을 만나 고하여 말하기를, ‘전날에 한 말은 그를 놀린 것일 뿐인데, 어찌 (귀국(貴國)이) 군사를 일으켜 여기까지 이르게 할 (정도의) 뜻이었겠는가?’ 하였다. 왜인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섶을 쌓아 두고 그 위에서 그를 불태워 죽이고는 가버렸다. 우로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여 걸을 수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를) 안아 말을 타고 되돌아오니, (그가) 후에 흘해 이사금(訖解尼師今)[14]이 되었다. 미추왕(未[味]鄒王) 때, 왜국의 대신(大臣)이 내빙(來聘)하자, 우로의 처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그가 술에 몹시 취하자, 장사(壯士)를 시켜 뒷 뜰로 끌고가 불태우니, 이로써 옛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화가 나서, 와서 금성(金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사론(史論) : 우로는 당시에 대신이 되어 군사와 국사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비록 이기지 못해도 또한 지지는 않았다. 곧, 그의 모면책은 필시 빼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한 마디 말의 어그러짐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취하였고, 양국이 교전하게 하였다.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는데, 이 또한 변칙(變則)이며 올바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의 공적과 업적은 또한 가히 기록할 만한 것이었겠다.

박제상(朴堤上)[편집]

박제상(朴堤上)또는 모말(毛末)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고, 파사이사금의 오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 갈문왕(阿道葛文王)이고,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勿品波珍湌)이다. 堤上仕爲歃良州干,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壬子, 高句麗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祇王卽位, 思得辯士往迎之, 聞水酒村干伐寶靺一利村干仇里迺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세 사람이 함께 대답하여 말하기를, 臣等聞歃良州干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而請行, 제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臣雖愚不肖, 敢不唯命祗承,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鄰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覇, 誠末世之事也, 今寡君之愛弟在此, 殆將十年, 寡君以鶺鴒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王曰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奈何,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 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 使彼聞之,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抵栗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前入倭, 讒言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邏戍新羅境外, 會, 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於是, 出師將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孥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 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煙霧晦冥, 望不及焉,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 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斬之,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湌, 厚賜其家, 使未斯欣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鄕樂憂息曲, 是也

귀산(貴山)[편집]

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鷄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眞平王建福十九[二十四]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英】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于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箒項, 幷以少監赴焉,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箒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戶滿野, 匹馬隻輪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羣臣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箒項大舍

온달(溫達)[편집]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鍾可笑, 中心則▩[睟]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聒我耳, 커서도 필시 사대부(士大夫)의 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공주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况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노모(老母)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吾子貧且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공주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古人言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可共乎, 乃賣金釧,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其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第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卽位, 溫達奏曰, 惟新羅割我漢北之地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失所中, 路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바깥고리[편집]

주석[편집]

  1. 沛者. 벼슬 이름. 상당히 고위직이다. 고구려의 관직 참조.
  2. 評者. 벼슬 이름.
  3. 四部. 고구려 오부 중 왕족인 계루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문.
  4. 東部. 순노부(順奴部)를 이른다.
  5. 中畏大夫. 벼슬 이름.
  6. 于台. 벼슬 이름.
  7. 國相. 고구려 전기 최고위 총리직.
  8. 大使者. 고구려의 중위 관직. 고구려의 관직 참조.
  9.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년 ~ 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10.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년 ~ 632년)은 신라의 제26대 임금이다.
  11. 청야전술.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
  12. 서기력 179년.
  13. 삼국사기/권02〉 첨해 이사금 條에서는 이 일을 24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4. 석우로가 죽은 때와 흘해 이사금이 태어난 때의 시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아들이 아닌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