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삼국사기/권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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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편집]

을지문덕(乙支文德), 未詳其世系, 資沈鷙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與九軍至鴨淥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則執之, 仲文等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紿文德曰, 更欲有議,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淥而歸, 述與仲文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淥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羣議, 遂進東濟薩水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방진(方陣)을 만들어 나아가니, 文德出軍, 四面鈔擊之, 述等且戰且行, 至薩水軍半濟, 文德進軍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至鴨淥水, 行四百五十里, 初度遼, 九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거칠부[편집]

거칠부(居柒夫)또는 황종(荒宗)이라 한다는 성이 김(金)씨이다. 내물왕의 5세손이고, 祖仍宿角干, 父勿力伊湌, 居柒夫少跅弛有遠志, 祝髮爲僧, 사방(四方)을 유관(遊觀)하고, 便欲覘高句麗, 入其境聞法師惠亮開堂設經, 遂詣聽講經, 一日, 惠亮問曰, 沙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 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鷰頷鷹視, 將來必爲將帥,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好者, 有如皦日, 遂還國, 返本從仕, 職至大阿湌,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湌,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湌比台角湌耽知迊湌非西迊湌奴夫波珍湌西力夫波珍湌比次夫大阿湌未珍夫阿湌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乘勝取竹嶺以外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領其徒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거도[편집]

거도(居道)는 그 일족(一族)의 성(姓)씨(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려, 어느 곳 출신의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을 섬겨 간(干)이 되었을 때,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은 인접한 경계에 끼여 거주하고 있었으니, 상당히, 나라의 근심이 되었다. 거도가 변방의 관리가 되자, (두 나라를) 병탄(倂呑)할 뜻을 몰래 품고, 매년 한번 장토(張吐)의 들판에 많은 말을 모아두고, 병사들로 하여금 이 말을 타게 하여 말달리는 것을 놀이와 즐거움으로 삼았다. 시인(時人)들이 이를 마기(馬技)[1]라 칭하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늘 보았고, 신라의 통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괴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병마(兵馬)를 일으켜, 그들을 불의(不意)에 공격하니, 이로써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

  1. 이사부
  2. 김인문

김양[편집]

김양(金陽)의 자(字)는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의 구세손이다. 曾祖周元伊湌,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湌,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太和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太守, 尋拜中原大尹, 俄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湌祐徵均貞妹壻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以拒之, 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遏,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於是, 突圍而出, 至韓歧【一作漢祇】市, 均貞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收殘兵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讎,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入海, 見祐徵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迕新羅兵與戰, 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秣馬, 겨울에 혜패(彗孛)가 서방(西方)에 나타났다. ,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耻之祥也, 陽號爲平東將軍,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建榮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 新羅大監金敏周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以馬兵三千突入彼軍, 殺傷殆盡,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大丘,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入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 命左右將軍領騎士, 徇曰, 本爲報讎, 今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勿妄動, 遂收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 淸宮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追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仕至侍中波珍湌,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 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太常卿,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授南原太守,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湌兼相國, 開成己未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宦,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1. 흑치상지
  2. 장보고 정년
  3. 사다함

각주[편집]

  1.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종래의 모든 판독에서는 ‘기(技)’자를 ‘숙(叔)’으로 읽어 많은 해석이 있었다. 성암본(誠庵本) 《삼국사기》에서 ‘수(手)’변이 분명히 확인되고 ‘지(支)’자의 윗 부분이 마모되었으나, 아래의 ‘우(又)’자 획이 분명하므로 《역주 삼국사기》 1 校勘 原文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에서는 ‘기(技)’로 판독하였다. 또한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 《동사강목》의 탈해이사금 23년조에서도 이를 ‘기(技)’자로 판독한 바 있다. 중종 임신간본 및 주자본 《삼국사기》를 최초로 이용한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에서부터 ‘마숙(馬叔)’으로 판독되었고(그 내용 및 의미에 대하여는 윤경열, 「자료·신라의 유희」, 《신라민속의 신연구》, 신라문화선양회편, 1983 | 李基東, 「신하상고의 전쟁과 유희」, 《소헌남도영박사화갑기념논총》, 1984 참조), 그 영향을 받아 현재의 인쇄본에서는 모두 ‘마숙(馬叔)’으로 판독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96~6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