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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제2장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영신은 그날 밤 그가 숭배하는 백씨에게 백 퍼센트로 동혁을 소개하였었다. 어쩌면 동혁이가 영신에게 대한 것보다, 그 이상으로 '박동혁'이란 인물의 첫인상이 깊었는지도 모른다. 그 구릿빛 같은 얼굴, 황소처럼 건강한 체격, 거기다가 조금도 꾸밀 줄은 모르면서도 혀끝으로 불길을 뿜어 내는 듯한 열변, 그리고 비록 처음 만났으나마 어두운 길거리로 제 뒤를 따라다니며 보호해 주면서도, 조그만치도 비굴하거나 지나친 친절을 보이지 않던 그 점잖은 몸가짐.

영신이가 입에 침이 말라서 동혁의 외모와 행동을 그려 내니까 백씨는,

"오우 그래? 온 저런. 매우 좋은 청년이로군."

하고 서양 여자처럼 연방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자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곁눈질로 흘끔흘끔 영신의 눈치를 살피더니,

"아―니, 영신이가 대번에 그 남자헌테 홀딱 반헌 게 아냐?"

하고 거침없이 한마디를 하고 사내처럼 껄껄껄 웃는다. 영신의 얼굴은 금세 주황물을 끼얹은 것처럼 빨개졌다. 머리를 푹 수그린 채,

"아이 선생님두……."

하고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을 보고, 능갈친 백씨는 나이 찬 처녀의 마음속을 뚫고 들여다보는 듯이,

"그렇지? 별안간 앙카슴 한복판에 화살이 콱 들어와 박힌 것 같지? 난 못 속이지, 난 못 속여."

하고 사뭇 놀려 댄다. 영신은 그렇지 않다는 표시를 하느라고 억지로 얼굴을 쳐들며,

"제가 그렇게 경솔헌 여잔 줄 아세요?"

하고 가벼이 뒤받듯 하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는 다시금 부끄러움에 눌려 익은 곡식의 이삭처럼 저절로 수그러진다. 백씨는 한참이나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꿈벅꿈벅하며 무엇을 생각하다가, 손등으로 하품을 누르면서,

"그렇지만, 지금 와서 맘에 맞는 남자가 나타났드래두……."

하고는 주저주저하더니,

"벌써 약혼해 논 사람은 어떡허누?"

하고 혼자말하듯 하며 돌아누워 버렸었다.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사연이었다. 영신은 그 편지를 백씨에게까지 가지고 가서 보이고, 침상머리의 일력을 하루에 몇 번씩 쳐다보면서 그 다음 토요일이 달음박질로 돌아오기만 고대하였다.

시합하는 날, 동혁은 연습할 때와는 딴판으로 컨디션이 매우 좋았다. 신문사 같은 데서 후원을 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도 늦더위가 대단해서 그런지 넓은 운동장에 구경꾼은 반쯤밖에 아니 찼다. 중학교끼리 대항을 하는 야구와도 달라서 응원도 매우 조용하게 진행이 되었다. 전반까지는 골키퍼인 동혁이가, 적군이 몰고 들어와서 쏜살같이 들여 지르는 볼을 서너 번이나 번갯불처럼 집어 던지고 그 큰 몸뚱이를 방패삼아서 막아 내고 한 덕으로 승부가 없다가, 후반에 가서는 선수 중에 두 사람이나 부상자가 생긴 데 기운이 꺾여서 '고농'이 세 끗이나 졌다.

그러나 최후까지 딱 버티고 서서 문을 지키다가, 볼을 막아 내치는 동혁의 믿음성 있고 민활한 동작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혁은 풀이 죽은 다른 선수들과 섞여서 운동장으로 나왔다. 나오다가 정문 곁에 비켜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여자를 발견하였다.

"구경 오셨에요?"

동혁은 발을 멈추며, 뜻밖인 듯이 영신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 곁에 초록색 양장을 하고 서서 저를 주목하는 나이가 한 사십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를 보자,

'백현경이로구나.'

하고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영신은 가벼이 답례를 한 뒤에,

"중간에 왔지만 참 썩 잘 막어 내시드군요."

하고 흙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뒤발을 한 동혁의 얼굴을 훑어보면서,

"백선생님허고 인사허시죠."

하고 양장 부인을 소개한다. 백씨는 동혁이가 모자를 벗을 사이도 없이 다가서며,

"오우, 미스터 박!"

하고 손을 내민다. 동혁은 같이 나오던 선수들이 흘끔흘끔 돌려다보고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전찻길로 건너가는 것을 보면서, 흙투성이가 된 운동복 바지에다 얼른 손바닥을 문지르고 백씨의 악수를 받았다.

"박동혁이올시다. 백선생의 선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체수에 걸맞지 않게 수줍어한다. 백씨가,

"아, 이 미스 채가 자꾸만 구경을 가자구 졸라싸서……."

하고 돌려다보니까 영신은,

"아이, 선생님두…… 제가 언제 졸랐어요?"

하고 선생의 말끝을 무지르며 살짝 흘겨본다.

"아무튼 아주 파인 플레이를 보여 주셔서 여간 유쾌허지 않었습니다."

하는 백씨의 칭찬에,

"천만에요, 두 분이 오실 줄 알었드면 꼭 이길 걸 그랬습니다."

하고 동혁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운동선수다운 쾌활한 웃음을 웃어 보인다. 그때에 먼저 전차를 탄 선수들이 승강대에서,

"여보게, 동혁이―---"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동혁은,

"가네, 가!"

하고 손을 들어 보이자, 영신이가 다가서며,

"이따가 꼭 오시죠? 시간은 일곱시야요."

하고 입빨리 묻는다. 동혁은,

"네, 가겠습니다."

한마디를 던지듯 하고, 백씨에게는 인사도 할 사이가 없이 전찻길로 달려가더니, 속력을 놓기 시작한 전차를 홱 집어탔다. 전차가 지나간 뒤에는 두 줄기 선로만 영신의 눈이 부시도록 석양을 반사하였다.

……동혁은 약속한 시간에 거의 일 분도 어김없이 백씨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목욕을 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와서, 중문간까지 나갔던 이 집의 주인은 그를 얼른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서 들어오세요. 난 누구시라구요. 시간을 썩 잘 지켜 주시는군요."

하고 팔뚝시계를 보고 너스레를 놀며 동혁을 반가이 맞아들인다.

"댁이 훌륭헌데요."

하고 동혁은 두리번거리며 집 안을 둘러본다. 삼천 원이나 들여서 새로 지었다는 집은 네 귀가 반짝 들렸는데, 서까래까지 비둘기장처럼 파란 뼁끼칠을 하였고, 분합 마루 유리창에는 장미꽃 무늬가 혼란한 휘장을 늘여 쳤다. 마당은 그다지 넓지 못하나 각색 화초가 어울려 피었는데, 그 중에도 이름과 같이 청초한 옥잠화 두어 분은 황혼에 그윽한 향기를 놓는다.

먼저 온 회원들은 응접실로 쓰는 대청에 모여서 혹은 피아노를 눌러 보고, 혹은 백씨가 구미 각국으로 시찰과 강연을 하러 다닐 때 박힌 사진첩을 꺼내 놓고 둘러앉았다.

그가 여류 웅변가요 음악도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집에 피아노까지 있을 줄은 몰랐고,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가 이러한 문화주택을 짓고 지낼 줄은 더구나 상상 밖이었다.

그는 대청으로 올라가서, 주인의 소개로 칠팔 명이나 되는 젊은 여자들과 인사를 하였다. 여자들은 입 속으로만 제 이름을 대서 하나도 기억은 할 수 없다. 남자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아니 온 모양인데, 웬일인지 안내역인 영신은 그림자도 나타내지를 않는다.

'그저 아니 왔을 리는 없는데…….'

동혁은 매우 궁금하기는 하나 이구석 저구석 기웃거리며 찾을 수도 없고, '채영신은 왜 보이지를 않느냐'고 누구더러 물어 보기도 무엇해서, 한구석 의자에 걸터앉아서 분통같이 꾸며 놓은 마루방 치장만 둘러보았다. 백씨가 조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반쯤 열린 침실이 언뜻 눈에 띄었다. 유리 같은 양장판 아랫목에는 새빨간 비단 보료를 깔아 놓았고, 그 머리맡의 자개 탁자는 초록빛의 삿갓을 씌운 전등이 지금 막 들어와서 으스름 달처럼 내리비친다. 여자의, 더구나 독신으로 지내는 여자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실례인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주인이 제가 앉은 바로 맞은쪽의 미닫이를 열고 드나들기 때문에 자연 눈에 띄는 데야 일부러 고개를 돌릴 까닭도 없었다.

동혁은 그와 똑같이 으리으리하게 치장을 해놓은 방이, 그 윗간에도 또한 이 간쯤이나 엇비슷이 들여다보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왜들 얘기도 안 허고 있어요? 자, 이것들이나 들으면서 우리 저녁을 먹읍시다."

하고 귀중품인 듯 빨간 딱지가 붙은 유성기판을 들고 나오는데, 그 등뒤를 보니까 윗목에 반 간통이나 되는 체경이 달려 있다. 동혁은 속으로,

'오오라, 체경에 비쳐서 또 다른 방이 있는 것 같은 걸 몰랐구나.'

'기생방이면 저만큼이나 차려 놨을까.'

하면서도, 은근히 영신이를 기다리느라고 고개를 대문 편으로 돌리곤 한다. 그러자,

"아 이건 별식을 헌다구 저녁을 굶길 작정야?"

하고 백씨가 분합 끝으로 나서며 외치니까,

"네에, 다 됐어요."

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부엌 속에서 나더니, 뒤미처 에이프런을 두른 영신이가 양식 접시를 포개 들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나온다. 동혁이가 온 줄은 벌써 알았지만, 음식을 만들다 말고 내달아 번잡스러이 인사를 하기 싫어서 인제야 나온 것이다. 동혁은 영신과 눈이 마주쳐서,

'오, 부엌 속에 있었구나.'

하면서 말 대신 웃음을 띠고 머리만 숙여 보인다.

유성기를 틀어 오케스트라(交響樂)를 반주삼으며, 여러 사람은 영신이가 만든 라이스카레와 오믈렛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이야기판이 벌어졌대도 영신은 이 집의 식모와 함께 시중을 드느라고 부엌으로 들락날락하고, 농민수양소 여자부에서 초대를 받아 온 시골 학생들은 처음으로 먹는 양식을 잘 못 먹다가 흉이나 잡힐까 보아 포크를 들고 남의 눈치들만 보는데, 백씨 혼자서 떠들어 댄다. 동혁과 영신을 번갈아 보면서, 그 동안에 몇십 번이나 곱삶았을 듯한 정말(丁抹)의 시찰담으로부터, 구미 각국의 여성들의 활동하는 상황 같은 것을 풍을 쳐가며 청산유수로 늘어놓는다.

청년회의 농촌지도부 간사로 있는 얼굴이 노란 김씨라는 사람이 늦게야 참석을 해서 인사를 하였을 뿐이요, 남자는 단 두 사람이라 동혁은 잠자코 제 차례에 오는 음식만 퍼넣듯 하고 앉았다.

영신이가 모박아서 두둑히 담아 준 라이스카레 한 접시를 게눈 감추듯 하고는 잠자커니 앉았는 동혁을 보고 백씨는,

"여봐 영신이, 이 미스터 박은 한 세 그릇 자셔야 헐걸."

하고 더 가져오라고 눈짓을 한다. 영신은 저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듯이 카레 건덕지를 담은 것을 냄비째 들고 와서,

"첫번 솜씨가 돼서 맛은 없지만, 냉기시면 안 돼요."

하고 귓속하듯 한다. 동혁은,

"허, 이건 나를 밥통으루 아시는군요."

하며 이 집에 와서 처음으로 영신이와 말을 주고받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차가 나오고 실과가 나왔다.

백씨는 잠시도 입을 다물 사이가 없이 '우리의 살 길은 오직 농촌을 붙드는 데 있다'는 것과 '여러분들과 같은 일꾼들의 어깨로 조선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는 등 열변을 토한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감동이 된 듯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을 보고 백씨는,

"미스터 박, 그 동안 많이 활동을 허셨다니 그 얘기를 좀 들려 주시지요. 대단히 참고가 될 줄 믿습니다."

하고 농촌운동에 관한 감상을 묻는다. 동혁은,

"나는 여러분의 말씀을 들으려구 왔으니까요……."

하고 사양을 하여도 무슨 말이든지 해달라고 굳이 조르다시피 하니까, 동혁은 못 이기는 체하고 찻잔을 입에서 떼며 뒤통수를 긁적긁적하더니,

"그럼 한마디 허지만 들으시기가 좀 거북허실는지두 모를걸요."

하고 뒤를 다진다.

"온 천만에,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라는데요."

사교에 능란한 백씨라, 낯을 조금 붉히는 듯하면서도 그만한 대답쯤은 예사로 한다. 동혁은 실내의 장식과 여러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둘러본 뒤에,

"나는 뒷구녁으루 남의 숭을 본다든지 당자가 듣지 않는데 뒷공론을 허는 걸 싫어허는 성미예요."

하고 화두를 꺼내더니 목소리를 떨어뜨려,

"이런 모임이 고적허게 지내는 백선생을 가끔 위로해 드리는 사교적 회합이라면 모르지만, 농촌을 지도헐 분자들이 장래에 헐 일을 의논허려는 모임 같지는 않은 감상이 들었어요."

하고 눈도 깜작거리지 않고 쳐다보는 영신을 향해서 말하듯이,

"나는 이런 정경을 눈앞에 그려 보구 있었는데…… 들판〔平野〕의 정자라구 헐 수 있는 원두막에서 우리들이 모였다구 칩시다. 몇 사람은 밭으루 내려가서, 단내가 물큰허구 코를 찌르는 참외나, 한 아름이나 되는 수박을 둥둥 두드려 보고는 꼭지를 비틀어서 이빨이 제리두록 찬 샘물에다가 흠씬 담거 두거든요. 그랬다가 해가 설핏헐 때 그눔을 끄내설랑 쩍 뻐개 놓구는 삑 둘러앉어서 어적어적 먹어 가며 얘기를 했으면 아마 오늘 저녁의 백선생이 허신 말씀이 턱 어울릴 겝니다."

하고 의미 깊게 듣는 듯이 고개만 끄덕여 보이는 주인을 흘낏 본다. 영신은,

"아이, 말만 들어두 침이 괴네."

하고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애처럼 다가앉는다. 동혁은 물끄러미 영신을 보다가 말을 계속한다.

"석양판에 선들바람이 베옷 속으루 스며들 적에, 버드나무의 매미 쓰르라미 소리가, 피아노나 유성기 소리버덤 더 정답구 깨끗헌 풍악 소리루 들려야 허겠는데…… 어째 오늘 저녁엔 서양으루 유람이나 온 것 같은걸요."

하고 시치미를 딱 갈기고 한마디 비꼬아 던지는 바람에 백씨는 고만 자존심을 상한 듯 동혁과는 외면을 한 채,

"그야 도회지에서 살게 되니까 외국 사람허구 교제 관계두 있어서 자연 남 봄에는 문화생활을 하는 것 같겠지요. 그렇다구 내가 그런 시굴 취미를 모르는 줄 아시면 그건 큰 오핸걸요."

하고 변명 비슷이 한다. 동혁은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처럼,

"취미요? 시굴 경치에 취미를 붙인다는 것과, 농민들과 똑같은 생활을 해가면서 우리의 감각까지 그네들과 같어진다는 것과는 딴판이 아닐는지요? 값비싼 향수나 장미꽃의 향기를 맡어 오던 후각이 거름 구덩이 속에서 두엄 썩는 냄새가 밥 재치는 냄새처럼 구수하게 맡아지게까지 돼야만, 비로소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생길 줄 알어요. 농촌 운동자라는 간판을 내걸은 사람의 말과 생활이 이다지 동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나서 동혁은 제가 한 말이 좀 과격한 듯해서,

"반드시 백선생더러만 들으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허지만, 농촌 운동일수룩 무엇버덤 실천이 제일일 줄 알어요. 피리를 부는 사람 따루 있구, 춤을 추는 사람이 따루 있던 시대는 벌써 지냈으니까요. 우리는 피리를 불면서 동시에 춤을 추어야 헙니다. 요령을 말씀하면, 우리는 남의 등뒤에 숨어서 명령하는 상관이 되지 말고 앞장을 서서 제가 내린 명령에 누구버덤 먼저 복종을 허는 병정이 돼야만 우리의 운동이 성공허겠단 말씀입니다."

이 말을 하기에 동혁은 이마에 땀을 다 흘렸다. 그 동안 백씨는 몇 번이나 얼굴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다가 무슨 생각에 잠긴 모양인데, 영신은 눈을 내려감고 앉았으나 동혁이가 말 구절마다 힘을 들일 때는 무엇에 꾹꾹 찔리는 것처럼 어깨와 젖가슴이 움직이는 것을 동혁은 정면으로 보았다.

백씨가 자기의 변명을 기다랗게 늘어놓으려는 기세를 살피고, 동혁은 기둥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쳐다보더니,

"기차 시간이 돼서 고만 실례허겠습니다."

하고 일어선다. 백씨는 형식적으로,

"왜 어느새……."

하고 붙잡는 체하는데, 영신이도 시계를 쳐다보더니,

"참 저두 가야겠어요."

하고 따라 일어선다.

*

두 사람은 큰길로 나왔다. 상기가 되었던 뺨을 스치는 밤바람이 여간 시원하지가 않다.

"우리 산보나 헐까요?"

"기차 시간이 되지 않었어요?"

"오늘 못 가면 내일 첫차루 가지요. 하룻밤쯤 새우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영신 씨가 또 쫓겨나실까 봐서……."

"전 괜찮아요. 쫓겨나면 고만이죠."

영신은 동혁이가 또 그대로 뿌리치고 갈까 보아 도리어 겁이 났던 판이라 '어디로 갈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

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두 허는 덴가요?"

"여태 한 번도 못 가보셨어요?"

"온, 시굴뜨기가 돼서……."

"누군 시굴 사람이 아닌가요. 우리 고장은 옛날에 서울 양반들이 귀양살이나 하러 오던 동해변의 조그만 어촌인데요. 동혁 씨의 고향은 저번에 소개를 해주셔서 잘 알었지만 거기두 어지간히 궁벽한 데드군요."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서로 자기네 고향의 풍경과 주민들의 생활하는 형편을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버스는 그친 지도 오랜 듯, 큰길 양 옆의 가게는 빈지를 닫기 시작한다.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감옥 앞 넓은 마당까지 오니까 전등불이 겅성드뭇해지고, 오고 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어두운 골목 속으로 드나드는 흰 옷자락만 희뜩희뜩 보일 뿐.

떠오른 지 얼마 안 되는 하얀 달은 회색빛 구름 속에 숨었다가는 흐릿한 얼굴 반쪽을 내밀고 감옥의 높은 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악박골 물터 위의 조그만 요릿집에서는 장구 소리와 함께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건달패와 논다니들이 어우러져서 약물이 아닌 누룩 국물을 마시고 그 심부름을 하는 모양이다.

동혁은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돈 십 전을 주고, 약물 한 주전자와 억지로 떠맡기는 말라 빠진 굴비 한 마리를 샀다.

"온, 샘물을 다 사먹는담."

하고 한 바가지를 철철 넘치도록 따라서 영신에게 권한다.

"주전자 꼴허구, 약이 되기는커녕 배탈이 나겠어요."

하면서도 한창 조갈이 심하던 판이라, 둘이 번차례로 한 사발씩이나 벌떡벌떡 마셨다. 물이야 정하나마나 폭양에 운동을 한데다가 한여름 동안 더위에 들볶이던 오장은 탄산수를 마신 것처럼 쏴아 하고 씻겨내려가는 것 같은데, 골 안으로 스며드는 밤기운에 속적삼에 배었던 땀이 식어서 선뜩선뜩할 만치나 서퇴가 되었다. 두 사람은 으슥한 언덕 밑 바위 아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았다. 등 뒤 송림 속에서 누군지 청승맞게 단소를 부는 소리가 들린다. 영신은 한참이나 말없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감옥 속에 갇힌 사람이 자다 말구 저 소릴 들으면 퍽 처량허겠어요."

하고 얼굴을 든다. 구름을 벗어난 창백한 달빛은 고향 생각에 잠겼던 그의 얼굴을 씻어내린다.

"참,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군요."

동혁이도 약간 애상적인 감정에서 눈을 번쩍 뜨며 혼자말하듯 한다.

"왜요?"

영신의 눈은 동그래졌다.

"몇 주일 전까지는 백판 이름두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어서 약물터의 달을 똑같이 쳐다볼 줄이야 꿈이나 꾸었겠어요?"

"참말요, 이것두 하나님의 뜻인가 봐요."

"참, 영신 씨는 크리스찬이시지요?"

"전 어려서버텀 믿어 왔어요. 왜 동혁 씨는 요새 유행하는 마르크스주의자세요?"

"글쎄요, 그건 차차 두구 보시면 알겠지요. 아무튼 신념을 굳게 하기 위해서나 봉사의 정신을 갖기 위해서는 신앙생활을 허는 것두 좋겠지요.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아첨을 허는, 그 따위 타락헌 종교는 믿구 싶지 않어요."

하다가 영신이가 무어라고 질문을 할 기세를 보이니까 동혁은,

"종교 문제 같은 건 우리 뒀다가 토론허십시다. 그버덤 더 중요헌 얘기가 있으니까요."

하고 손을 들어 미리 영신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그러고는 눈을 딱 감고 한참이나 이슬에 젖은 숲속의 벌레 소리를 듣고 있더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구 있에요."

하고 응성깊은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간담회 석상에서 영신 씨가 허신 말씀을 듣구 감복을 했지만, 내가 농촌의 태생이면서두 여러 해 나와 있다가 직접 농촌 속으루 들어가 보니까, 참말 그네들의 사는 형편이 말씀이 아니에요. 신문이나 잡지에서 떠드는 것버덤 몇 곱절 비참하거든요."

하고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마른침을 삼키더니 오래 전부터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처럼,

"난 자진해서 학교를 퇴학허고 싶어요."

하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숲속에서 반득이는 반딧불을 들여다보며 동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영신은 얼굴을 번쩍 들며,

"왜요? 일년 반만 더 댕기시면 졸업을 허실 텐데요?"

하고 놀라운 듯 눈을 크게 뜬다.

"고만둘 수밖에 없어요. 중학교 때엔 억지를 쓰구 별별 짓을 다 해가면서 고학을 했지만, 나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구 아버지는 올봄까지 대대루 내려오던 집 앞 논까지 거진 다 팔으셨에요. 졸업만 하면 큰 수가 날 줄 알구 계량할 것두 아니 남기신 모양인데, 내가 졸업이라구 헌댔자 바루 취직두 허기 어렵지만, 무슨 기수(技手)라는 명색이 붙대야 월급이라군 고작 사오십 원밖에 안 될 테니, 그걸 가지구 객지에서 물 밥 사먹어 가며, 양복 해입구 소위 교제비까지 써가면서 수다 식구를 먹여 살릴 수가 있겠어요? 되레 빚만 지게 되지요. 그러니까 나머지 땅마지기나 밭날갈이를 깡그리 팔어 없애구서 거산을 허게 되기 전에 하루바삐 집으루 돌아가서 넘어진 기둥을 버티고 다시 일으켜 세울 도리를 차려야겠에요. 까딱허면 굶어 죽게 될 형편이니까요."

"……"

영신은 동혁이의 사정도 딱하거니와, 그만 못지않게 말이 아닌 저의 집의 형편을 생각하느라고 말대답도 아니 하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한숨을 섞어,

"제 사정은 백선생밖에는 아무헌테두 말한 적이 없어요. 홀로 되신 우리 어머니는 육십 노인이 딸 하나 공부를 시키느라구 입때 생선 광주리를 이고 댕기세요. 올 여름엔 더위를 잡숫고 길바닥에 가 쓰러지신 걸, 동네 사람들이 업어다가 눕혀 드렸어요. 그렇건만 약 한 첩 변변히……."

그는 고만 목이 메었다가 간신히 입술을 떨며,

"정신을 잃으신 동안에 어느 몹쓸놈이 푼푼이 모아 넣으신 돈주머니를 끌러 가서 그게 원통해 밤새두룩 우시는데……!"

하고 영신은 가슴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는 울음을 참느라고 잇자국이 나도록 손가락을 깨문다.

동혁은 몹시 우울해졌다. 가슴이 턱 막힌 듯이 갑갑해서 더운 입김을 후― 하고 내뿜는다. 숲속의 버러지 소리도, 바위 틈으로 졸졸졸 흘러내리는 샘물 소리도 두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동혁은,

'내가 공연히 그런 소리를 끄집어냈구나.'

하고 바로 정수리 위에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내려다보는 유난히 큰 별을 원망스러이 쳐다보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앉으며,

"자, 우린 그런 생각은 고만 허십시다. 어쨌든 우리는 명색 전문학교까지 댕겨 보니까, 여간 행복된 사람들이 아니지요."

하고 목소리 부드러이 영신을 위로한다.

"참말 공부니 뭐니 다 집어치구 시굴루 내려가야겠어요.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서울 와서 나 혼자 편안히 지내는 게 어머니께나 동리 사람들한테까지 큰 죄를 짓는 것 같어요. 첨엔 멋도 모르구서 무슨 성공을 허구야 내려간다고 하나님께 맹세꺼정 허구 올라왔지만요…… 더군다나 아까 백선생 댁에서 허신 말씀을 듣구, 이제까지 지내 온 걸 여간 뉘우치지 않었어요."

그 말을 듣자 동혁은 벌떡 일어섰다. 양복 바지에다가 두 손을 찌르고 거진 궐련 한 개를 태울 동안이나 왔다갔다하며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영신의 앞으로 다가서며,

"영신 씨!"

하고 힘차게 부른다.

"우리 둘이 이렇게 만나서 한 십 년이나 사귄 동지처럼 가슴을 터놓구 하룻밤을 새운 기념을 우리 영원히 남기십시다."

하고 중대한 동의를 한다.

"어떻게요?"

영신의 눈은 별빛에 새파랗게 빛난다. 동혁은 버썩 대들어 그 소댕 같은 손으로 서슴지 않고 여자의 두 손을 덥석 잡으며,

"우리 시굴루 내려갑시다! 이번 기회에 공부구 뭐구 다 집어치우구서 우리의 고향을 지키러 내려갑시다! 한 가정을 붙든다느니버덤두 다 쓰러져 가는 우리의 고향을 붙들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 용기를 냅시다! 그네들을 위해서 일을 허다가 죽는 한이 있드래두 선구자로서의 기쁨과 자랑만은 남겠지요."

영신이가 무엇에 아찔하게 취한 듯이 눈을 내리감고 있는 것은 불시에 두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의 고동을 진정하려 함이다. 그는 마주 일어서서 동혁에게 으스러지도록 잡힌 두 손에 힘을 주며,

"고맙습니다! 당신 같으신 동지를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영신은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덧 인왕산 너머로 기울어 가는 달빛 아래서 두 남녀의 마주 쏘아보는 네 줄기 시선은 비상한 결심에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