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탑/정릉 일일
정릉의 산 속은 새소리 없이도 푸르다. 물소리만이 그저 솨아솨 골짜기마다 들릴 뿐인데 산은 푸르렀다. 새소리를 무시하고도 정기만으로 푸르른 그 기개만은 장하다 아니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만한 녹음이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음이 무색하구나.
내 본래 산이나 바다의 취미를 모르거니와 오늘 내가 정릉의 녹음을 찾게 된 것도 무슨 이런 녹음의 유혹에서가 아니요, 사우(社友)들의 종용에 마지못해 따라 나섰던 길이니 그까짓 녹음이야 짙었던, 말았던 꾀꼬리야 울던, 마던 어아(於我)에 하관(下關)이리오만 그래도 이 녹음에, 이 물소리라면 꾀꼬리 소리 한마디쯤은 있어야 면목이 설 것 아닌가. 어쩌다 오다가다 숲 속을 다녀가는 밀화부리 소리 한마디 들을 수 없다.
이러한 녹음(綠陰)도 좋다고들 모여든다. 우리도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건만 언제들 이렇게 떨쳐났는지 아직 오정도 멀었을 텐데 산은 사람으로 찼다. 아니, 곳에 따라선 벌써 도도한 취흥에 허리를 부러치고 꼽당춤에 냄비 장단이 한참인 데도 있었다. 우리 일행도 물이 흐르는 골짜기의 한 곳을 택정하고, 짐을 풀었다. 소고기, 닭고기, 계란, 과자, 술, 쌀 거기에 이것들을 요리할 도구 일습이 자전거로 하나가 실리어 왔다.
논다는 것은 결국 먹는다는 의미가 아닐는지 모른다. 제 아무리 명승경개를 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향락으로서의 본의였다면 반드시 먹는 일항(一項)이 따라야 그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먹을 줄 모르는 것까지 먹어야 되는데 그 의의가 있다면 향락의 존재에 나는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행 칠팔 인 중 다만 한 사람만이 호주객이요, 여타는 모두 비주객인데 우리의 짐 속에서도 소주가 한 되, 삐루가 서너 병 나왔으니 먹을 줄 모르는 술이라도 이러한 좌석에서는 먹어야 된다는 법칙일까. 그리하여 억지로라도 먹어야 향락이 되는 것일까. 어쩌자고 먹을 사람도 없는 술의 준비가 이렇게도 많았을까. 처리에 곤란할 것이 미리부터 짐작되었지만 결국 삐루 몇 잔에 나는 괴로웠다. 제가 그물을 떠나 놓고 그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 사람의 장난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지어서 괴롭게 만들어 놓고 괴로워하는 것으로 낙을 삼는 것이 인생 본래의 사는 재미인지 모른다. 육자배기 장타령에 산을 떠내 보낼 듯이 노자 때리던 맞은짝에서도 모두 혼곤히들 근더졌다. 즐거운 현상일까 괴로운 현상일까. 나도 한번 한껏 취하여 그들의 심경에까지 이르러 봄으로 그들의 심경과 같은 심경에서 인생을 한 번 내다보고 싶기도 하건만 몇 잔에 괴로운 술이니 도저히 그런 경지에까지 보지 못할 주량이 한이다.
“자, 한 잔만 더?”
하는, 권도 간절한 좌석의 권고이었으나 주량의 말을 안 듣는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을 들어가서는 살아 볼 수 없는 영원한 인생의 초년병인가 보다.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에…….”
하고 곡조도 어디선가 흘러드는 것을 보면 술에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녹음에도 취하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 같거니, 녹음에도 술에도 취할 수 없는 인생은 결국 괴로운 의의를 모르는 인생일까. 그렇다면 녹음도 술도 모르고 괴로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괴로움일까.
만산에 주흥이 물소리와 같이 골짜기마다에 찼는데, 오직 침묵으로 물소리만을 흘려 내려 보내는 이 골짜기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녹음도 술도 무시한 이날의 히트에 틀림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