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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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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언(前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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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는 이 거룩한 땅은, 아득한 반만년 전의 옛날 우리의 성조(聖朝) 단군(檀君)께서 세우신 나라이다.

단군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금에서 거꾸로 거슬러 우리의 법통(法統)을 찾자면 이씨(李氏)의 이룩한 대한(大韓)과 및 대한의 전신인 이씨조선(李氏朝鮮)의 오백여 년, 그 전에는 왕씨(王氏)의 고려(高麗)가 또한 오백년, 왕씨 고려의 전에는 약 이백 년간 법통이 모호히 되었다가 그 전에는 고씨(高氏)의 고구려(高句麗) 팔백 년― 그 전에는 아득한 고대(古代)라 기록이 상세하지 못하나, 고구려는 부여(扶餘)를 잇[繼[계]]고 부여는 단군(檀君)에서― 이렇듯 우리의 반만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

단군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로― 우리 민족의 기록술이 아직 발달 되지 못하였던 시절이라 단군시대에 몇 임금이 위(位)를 계승(「단군」은 한 분이 아니라 제일대는 「단군왕검(王儉)」이시오, 마지막대는 「단군 해모수(解慕漱)」시요, 중간 몇 대인지는 알 수 없다)하였는지는 알아볼 바이 없으나 성조 단군이 지금의 만주 땅 아사달(阿斯達)에 처음 나라를 세우실 그때는 여러 종류의 민족이 지금의 만주며 조선반도 이곳저곳에 무수한 부락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통일된 한 종족으로 나라를 이룩한 단군조선 민족은 다른 민족들을 혹은 동화(同化)하며 혹은 구사(驅使)하며 혹은 격멸하며, 서(西)로는 요(遼) 지방으로, 남(南)으로는 반도(半島)로, 차차 팽창하였다. 만주평원에 점재(点在)해 있던 말갈(靺鞨) 그 밖 여러 가지 종족이며, 반도에 점재해 있던 왜종(倭種) 그 밖 여러 가지 종족들은 이리하여 단군조선의 품안에 포옹되거나 혹은 멀리 쫓겨가거나 했다.

이 단군조선(환(桓)국 혹은 진(辰)국이라 일컫는다)의 서쪽에는 지나 족(支那族)이라는 종족이 있어서, 침략기술에 능하여, 그들의 침략 기술은 단군조선의 보고(寶庫)요 옥토(沃土)인 지금의 중부 조선 지방을 점령하고 그곳에 낙랑(樂浪) 등 그들의 식민지를 두어서, 조선의 지역은 허리를 끊기어 두 조각이 나게 되었다.

두 토막 난 그 남부(南部)는 환웅(桓雄)을 전설적으로 숭배하는 종족이라, 차차 와전(訛傳)되어 한(韓)으로, 다시 삼한으로― 이리하여 마한 진한 변한(馬, 辰, 弁韓)의 삼한이 되었다.

북방에 남은 단군족속― 단군의 직계 후손인 종족은, 역사상 부여족(扶餘族)이라 일컫는다. 부여가 단군의 법통 후계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부여(부여라는 말은 나라의 이름도 되고 종족의 이름도 되고 지역(地域)의 이름도 된다. 여기는 부여 지역을 말한다)에서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이 생겨났는데, 옛 전설로 보자면 동명(고주몽)의 아버지가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 하였고, 또한 동부여의 임금이 「천제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解夫婁)라 하였으니, 동명과 해부루는 결코 남이 아니요, 동명이 부여 지방에 고구려 나라를 세운 것은 또한 떳떳한 일로서 고구려 나라는 단군의 법통 후계국인 것은 뉘라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동명이 북쪽에 고구려 나라를 이룩한 뒤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의 세째 아들 고온조(高溫祚)를 멀리 남으로― 한(漢)족의 식민지인 낙랑 지역을 넘어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한(韓)족(단군 후예)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 뒤로는 허리를 끊긴 중부 반도 지방에서, 한족(漢族一韓[한족 일한]과 漢[한]이 섞갈리기 쉽겠으므로 이하는 「漢[한]」은 「지나(支那)」 족이라 일컫는다)을 도로 제 땅 지나로 내쫓는 것이었다.

북쪽에서는 아버지 동명 고주몽이 이룩한 고구려와 남쪽에서는 아들 고온 조가 이룩한 백제― 이 두 단군 후예의 나라는 남북으로 협격하여, 고구려 셋째 임금인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에는 이 반도 안에서 지나 종족을 완전히 물리쳤다.

북부 대륙에는 고구려, 반도의 서남쪽에는 백제, 반도의 동남쪽에는 또한 단군 후예로서 서라벌(뒤에 계림으로 또다시 신라로 이름을 고쳤다)이, 원주민(原住民)인 왜종(倭種)이며 그 밖 잡종들을 소탕하며 나라를 이룩하여, 단군 후예는 완전히 동방의 전역(全域)을 차지하였다.

지나며 일본의 옛 기록에도 「백제다사(百濟多詐)」라, 혹은 「백제 반복 무쌍」이라 하여 백제국의 무신함을 통매하였거니와, 단군의 손이 아직 남쪽까지 및기 전부터 그 땅에 살던 여러 가지의 원주민을 합친 오합지중으로 성립된 백제국이라, 자연 그 국민성이 불건전하게 된 것이다. 뒷날, 단군 후예의 통솔자요 보호자요 겸해 지도자인 고구려가 수(隋)나라며 당(唐)나라와 사투(死鬪)를 할 때 백제는 도로혀 몰래 사신을 수나라며 당나라에 보내서,

"상국이 포학한 고구려를 치시는 이때, 신국(臣國)이 향도자가 되어 길을 인도하겠습니다."

고 하여 되려 수며 당에게 꾸중을 들은 만치 반복무쌍한 백제―.

또는 내 나라이 하도 미약하기 때문에 왜(倭)에게까지 굴복하여 지내는 신라,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에 호태왕은 그때 왜에게 침략받은 신라를 구해 주기 위해서, 「오만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이천여 리의 먼 길을 지금의 김해(金海)땅까지 달려가서, 거기 있는 왜군을 잔멸시킨 일이 있다)― 그 신라는 나중에 도로혀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당나라와 힘을 아울려, 동방 수호의 대국 고구려를 꺼꾸러뜨린 것이다.

이러한― 반역적 색채를 다분히 띤 두 나라를 남쪽에 두고, 단군 후예의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자 건투하는 고구려. 당년의 천하는 과연 단군 후예와 지나 종족의 두 큰 덩어리로 나누이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딴에는 자기네가 인류의 꼭두머리라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 지나 종족에게는, 고구려라는 나라이 단 하나의 가시[荆[형]]였다. 고구려만 없어지면 천하에는 지나(支那)만이 남는다.

그러나 지나는 스스로 끼리끼리의 다툼을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외적(外敵) 고구려를 곁눈질할 여가가 없었다.

그러다가 수(隋)나라 때에 비로소 지나 사백 주를 통일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한 덩어리가 되면서는 그 합친 힘을 즉시로, 개벽 이래의 가시[荆[형]]인 고구려에게로 향하였다.

작게는 일일이 셀 수도 없지만, 크게 부딪치기를 네 번― 고구려 부서져라 하고 온 힘 다하여 부딪치기 네 번, 고구려는 끄떡도 안 하고 도로혀 부딪친 수(隋)나라가 부서져 나갔다.

수나라이 부서져 나가고, 대신 생긴 당(唐)나라 역시 지나족의 나라다. 단군 후예를 없애려는 전통적 사상 위에, 수나라 원수를 갚겠다는 사상까지 겸친 나라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이끈 대군은 연하여 몇 번을 와서 또 부딪쳤다.

그러나 도로혀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장수 양만춘의 쏜 살에 눈깔 하나를 잃고, 참패 참패만 거듭하다가, 당태종은 종내 분통이 터지어서 죽으며, 그 임종의 유언으로써까지, 고구려를 꼭 멸하기를 부탁하였다.

뼈에 사무치게 부탁받은 고구려 복멸― 그러나 당나라의 힘만으로는 절대로 고구려는 어쩔 수가 없었다.

여기서 당나라에서는 연구한 결과, 단군 후예의 겨레의 델리케이트한 형세를 알아내었다.

당나라에서는 우선 단군 후예 중의 한 나라인 백제를 없이했다. 길을 닦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번은 신라에 공작하였다. 단군에서 벌써 삼천여 년, 단군 후손의 긍지라는 관념은 신라인의 머리에는 이젠 거진 없어진 때라, 신라를 동방의 맹주로 삼아 준다는 달큼한 발림으로 신라를 달래어서 당나라 손아귀에 넣었다.

이리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한 군대는 남쪽에서, 당나라 홀로의 군대는 북쪽에서, 남북에서 고구려를 들이쳤다.

고구려는 나라를 수호하던 큰 기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이미 가고 그 뒤를 이었던 연개소문(淵蓋蘇文) 또한 가고, 좋은 승계자 아직 생기지 않은 위에, 겸해 그 새 수나라의 공격, 당태종의 공격에 끄떡도 않기는 하였지만, 그때 커다란 트집은 벌써 갔었다.

그 상처가 아직 낫기 전에, 또한 안으로 국내의 반역과 신라의 반역에, 당나라의 결사적 공격까지 겸쳐서, 동명성제 고주몽이 단군의 뒤를 계승하여 이룩했던 고구려는 이에 꺾어졌다.

이 「동방삼국지」는 고구려 팔백 년간의 건투사(健鬪史)와 그 시대에 서남과 동남에서 한 구실을 맡아 한 백제 칠백 년, 신라 일천 년의 외사(外史)를 체계 있게, 흥미 있게, 각 시대의 영웅과 열사를 붙들어서 그들의 활약에서 움직이는 동방 삼국의 동태를 소설화해 보려는 것이다.

연(延)시대 삼천 년에 가깝고, 등장하는 인물이 주요한 자도 수백 명이 될 것이요, 관련되는 국가가(주인공 격인 동방 삼국 밖에) 지나에도 기복(起伏)된 자 백여 국의, 그것도 역사가 아니요 소설화된 이야기니, 합계 몇 권이 될지 작자로도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쓰는 데 몇 해 걸릴지도 미리 짐작할 수 없다. 그저 부지런히 써 나갈 뿐이다.

그동안 건강이 지속되기만 충심으로 바랄 뿐이다.


단군의 법통 후계자가 없어졌으면, 그래도 단군 후손인 백성들을 현재 품에 품은 신라가 이 빛나는 전통을 계승해야겠거늘, 신라는 자신이 고구려를 멸한 책임자이니만치, 신라는 단군과는 관계없는 듯이 뚝 떼어 버리고, 단군 법통은 고구려 복멸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진 듯하였다.

고구려의 한 지족(支族)인 여진족이 모국(母國) 고구려 복멸을 아껴서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터에 「발해(渤海)」국을 이룩하고 자기는 고구려의 뒤라 하며,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을 불러 품었지만, 그 임금 대조영(大祚榮)이 단군 후예가 아니니, 고구려의 계승자라 할 수 없다.

몸을 의탁할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그래도 하릴없이 발해국에 투신하고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옛터는 쑥밭이 되어 버려서, 이러한 참담한 세월을 겪기 이백 년, 고구려 옛터의 끝 송도(松都)에 고구려의 유민 왕건(王建)이 일어서서 왕씨고려(王氏高麗)를 세우매, 몸둘 곳 없어서 방황하던 고구려의 유민은 죄 왕씨 고려로 몰려들었다. 압록강 이남, 평양 이북, 그 새 이백 년간 쑥밭으로 묵던 빈터는 삽시간에 고구려 유민으로 가득 찼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고려로 다시 단군 법통을 이었다.

왕씨고려에서 다시 이씨조선으로, 이리하여 오늘날까지― 잠시 한때씩 그 법통이 끊겨 본 일은 있지만 사천삼백 년 전에 우리의 성조 단군이 세우신 위대하신 기업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신라의 후인인 고려 사가(高麗史家) 김부식(金富軾)이 의식적으로 단군을 역사상에서 말살하려 한 것은, 신라를 고구려보다 추켜 세우려는 좁은 야심에서 생겨난 일이요, 일본인이 단군을 말살하려 한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이 일본의 건국보다 뒤졌다고 억설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여독은 가장 악질로 아직 남아서, 우리나라 사람은 대개 고구려는 모르는 웃지 못할 희극의 현재 상태다.

끝끝내 일본(왜)을 누르고 멸시하고 천시한 팔백년 고구려는 일본인에게는 뼈에 사무치도록 분하고 미울 것이다. 일본보다 훨씬 문화가 앞섰던 고구려는 일본에게는 절통하게 샘날 것이다.

이 고구려가 오늘날의 조선 민족의 법통의 조상이라기는 일본인의 입장으로는 과연 싫을 것이다. 그래서 꾸며대어 말하기를, 「고구려는 만주(滿洲)라 조선과는 관계없다」…고.

고구려 전성시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로 널리 벋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서울이 압록강 연변이요, 건국 얼마 뒤에는 평양으로 이도(移都)를 하여서 평양서 종신까지 한 고구려며, 단군 이래로 전통적으로 남하 책(南下策)을 쓴 고구려가 아니뇨. 일본인이 빚어 놓은 「만주국」도 염치에 자기네가 고구려의 후라는 말은 감히 못 하였다. 왕건(王建)이 고려를 세움에 그 국호(國號)만 계승한 것이 아니고, 민족을 계승하고 전통을 계승하고 민습(民習)을 계승하고, 건국 초부터 마지막 우(禑)왕에 이르기까지 요동(遼東─ 옛 고구려 영토)을 회복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거늘, 고구려의 법통은 신라에게 완전히 망했다, 고구려는 만주라는 소리가 어디서 감히 나오랴.

고려 왕씨를 계승한 조선 이씨도 단군 이래의 전통인 피의 가르침으로, 북쪽 땅을 찾으려는 운동은 늘 계속되었고, 북쪽 땅에의 애착은 깊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다 그 까닭이다.

우리의 역사가 이러하거늘 야스꺼운 사가(史家) 김부식(金富軾)과 일본인의 악독한 정책 때문에, 고구려는 어느 남의 나라의 이야기인 듯이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은 유감된 일이다.

지나의 역사가 진수(陳壽)는 삼국지를 찬술함에 조위(曹魏)를 정통으로, 촉한(蜀漢)과 오(吳)를 윤(閏)으로 잡았다. 이것은 옳은 필법으로 한실(漢室)의 뒤를 곧 물려받은 「위」가 떳떳한 정통일 것이다. 한낱 시정의 신 장수로 표랑하던 유현덕(劉賢德)은 다만 그 성씨가 황실과 같다는 근거뿐으로 자기가 정통이로라고 주장하였거늘, 주자(朱子) 일파에서는 도로혀 촉한의 주장을 옳다 보고 위씨의 나라를 부(副)로 꼽았다.

당시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주자 일파의 대의명분론(大義名分論)을 줏대로 「삼국지연의」를 저술하여, 이로써 진수의 의견을 깨뜨렸다.

이 덕으로 멀리 조선의 시골 노파까지라도 조조의 이름을 알고 제갈량의 이름을 알게 된 형편이다. 그와는 사정이 달라서, 마땅히 정통으로 잡아야 할 고구려가 어떤 몇 개인의 농락으로 아래 깔린 것은, 그 후손 된 우리로서 마땅히 시정해야 할 일이다.

지나의 삼국지가 약 사십 년간의 역사를 이야기로 기록한 것이 그런 방대한 책이 되었으나, 고구려 팔백 년은 그 이십 배라 같은 비례로 이십 배의 지면(紙面)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재간은 우리의 형편으로도 절대로 못할 노릇이요, 작자의 정력과 건강상으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깎고 다듬고 갈아서 그 요지만을 적어야 할 터이니, 이로써 작자의 하고 싶던 의견이 넉넉히 발표될 것인지, 따라서 독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인지, 스스로 위태롭다.

그러나 이 저술은 작자가 오래전부터 벼르던 일이요, 또한 단군 후예의 겨레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저작물이며, 겸해서 둘러보아야 현재는 내가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 아래서 대담스러이 이 붓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가 언제 끝날지, 얼마나한 기럭지로 끝날지, 다만 성심 다하여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갈 뿐이다.


범례(凡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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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 이천 년 전 단군(檀君) 후예(後裔)의 민족으로써 이룩하여졌던 세 나라―고구려 백제 및 신라― 의 정립(鼎立) 일천 년간의 기복사(起伏史)를 매 나라를 단위로, 그 시대를 움직인 제왕(帝王)이며 영웅들을 등장인물로 온 동방(東方)과 거기 연접한 지나(支那) 지대를 무대로 체계 있게 엮어 내려 보려는 것이 이 「이야기」다.

잃어버린 역사 기록, 잊어버린 풍습 제도, 찾아 낼 수 없는 강역 경계(疆域境界), 알아볼 바이 없는 혈족 계통, ―아주 박약하고 모호한 사료(史料)를 근거 삼아 한 개 이야기를 꾸미자니 말하자면 적지 않게 무리한 일이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손대기가 스스로 겁나고 주저되고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만치 누구든 아직 손대 보지 못했고 손대 볼 생각도 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일찍이 남이 손댈 생각도 내 보지 못했던 일을 대담스러이도 착수한다는 것은, 무슨 남보다 낫[優[우]]다는 자신이든가 자부가 있어서 하는 노릇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는 꼭 있어야 할― 없으면 안 될 우리의 경과기(經過記)며, 이런 종류의 「경과기」는 사(史)학적 기록보다도 「소설 체제」 의 기록이 더 효과적(效果的)이라는 의미 아래서 이 나라의 국민 된 책무와 이 나라의 소설가 된 책무로써 손을 대게 된 것이다. 「역사소설」이 아니고 「소설 역사」 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원이 서력(西曆)기원보다 뒤지기 겨우 수십 년의, 진실로 태고적의 일이요 그 시절의 땅[地域[지역]]이 지금의 어디에 해당하는지, 물[江[강]]이 어느 물에 해당하는지, 따라서 어느 방향(동? 서? 남? 북?)에 해당하는지, 몇 리 길 혹은 며칠 길이 되는지 전혀 상고할 바이 없고, 「여지승람」의 판단도 신빙키 힘든 곳이 많고, 이즈음의 학자들의 판정도 독단이 많아 그대로 좇을 수 없어서, 소설 체재로 꾸미기는 기초부터 거진 무리한 일이다.

게다가, 풍습 제도 관급(官給) 등에 관해서도 기록이 전혀 없고,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포인트가 몇 개 있다 할지라도, 나라 수효로(가락까지) 네 나라에 나라마다 각기 다른 연세월(延歲月) 삼천여 년간 끊임없이 변동된 풍습, 제도라, 소설 기교상 처리하기 지난한 일이다.

또한 언어(言語) 문제로 볼지라도 처음은 성조 단군이 업을 일으키신 그때의 것이 온 민족의 표준어였을 것이나, 단군 때에서 흐르기 이천 수백 년, 퍼져 나가기를 수천 리, 삼국 건국 당년에는 자연의 세로서 고구려의 말[語[어]]에는 지나 계통의 말이, 또는 백제 신라 등에는 원주민(原住民) 등등의 말이 적지 않게 포섭, 동화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법(語法)이며 특별한 민간 귀중어만이 원형(原型)을 계승하고 형용사 부사 감탄사 등은 삼국 정립 당년에는 세 나라이 서로 통하기도 힘들만치 달라졌을는지도 알 수 없다. 무론 오늘날 우리가 쓰는 우리말과는 어법(語法)만이 같을 뿐이요 다른 점으로는 비슷도 안 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꾸미는데 이런 문제들은 모두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무론 지금에 앉아 이천 년 전 옛 말투를 찾아낼 수도 도저히 없거니와, 찾아내어 소설상의 회화(會話) 등에 고어(古語)를 그대로 쓴다 할지라도 독자들이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요, 일일이 주(註)를 달아서 편익을 돕는다 할지라도, 그런 불편하고 쑥스러운 일은 다시 없을 것이며, 대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 속에서는 지문(地文)과 대화(對話)를 아울러 현대어로 하기로 하였다. 다만 좀 심한 현대어, 예컨대, 인텔리 청년들만이 사용하는 새 형(型)의 용어는 피하고, 사오십 내지 오륙십 세 가량의 사람이 사용하는 국어로 기준하였다.

작자는 일찍이 적지 않은 사담(史譚)을 썼는데, 그 경험으로 미루어, 가장 무난하다고 인정되는 한어(韓語)를 여기도 쓰기로 한다. 현대인이 옥편을 뒤적이지 않고는 알아보지 못할 옛말은 피하고, 오륙십 세 이상의 노인이 알아보지 못할 새 말도 아울러 피하고, 이즈음 사극(史劇)계에서 사용하는 야릇한 용어(文語體[문어체]를 會話體[회화체]에 誤用[오용]하는)도 피하고, 가장 무난한 중간어를 취하였다.

민족 계통으로 따지는 데는 진(秦)이건, 한(漢)이건, 당(唐)이건 몰아 「지나(支那)」라 하였다.

좌우간 작자부터가 그 풍습이며 제도 회화체 등을 전연 모르는 이천 년 전의 옛이야기를 쓰자니 막대한 부자연미와 어색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목표한 바가, 옛날의 제도나 풍습을 알리고자 하는 바도 아니요, 또는 소설상 「리얼」의 형태를 알리고자 하는 바도 아니요, 그 새 이천 년간을 그릇된 관념 때문에 잘못 전해진, 또는 최근 몇 십 년간 악의로 개조된 우리의 선인의 걸어온 자취를 시정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 그 목적한 바에 추호만치라도 도움이 된다면 작자로서는 만족한 바이다.

단군기원 4280년 7월 저자

발단(發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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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년 칠월 작자 발단(發端) 소슬한 이른 봄의 황혼은 온 세상을 덮었다. 황금빛의 가운데 싸여 있던 누리는 차차 검티티한 빛[色[색]]과 푸르직직한 빛[光[광]] 가운데로 잠겨 들어가는 이른봄의 저녁 무렵이었다.

동부여(東扶餘)의 서울 교외를 두 장정이 길을 걷고 있었다. 우거진 삼림 새로 뚫린 외발자욱 길.

이 숲새를 지나오면서 지금껏 내내 하고 있던 이야기도 인젠 끝난 양하여 주고받는 말도 없이 다만 묵묵히 숲새의 길을 그들의 기운찬 발자욱을 내어 디디며, 서울 쪽으로 향하여 길을 걷고 있었다.

"?"

문득 앞서 가던 사람(이름은 「오이〈烏伊〉」라 한다)이 약간 놀라는 기색으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손을 뒤로 뻗치어 설레설레 저어서 조용하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뒤따르던 사람(이름은 「마리(摩離)」라 한다)도 걷던 발을 멈추고, 오이의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름드리의 큰 나무들이 빽빽이 막혀 있는 사이 틈으로, 겨우 내다보이는 저편 앞에는, 한 마리의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잠자는 것도 아니요,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요, 그저 우두머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사람은 호랑이를 무서워하고, 호랑이는 사람을 무서워한다. 오이와 마리 두 젊은이는 머리털이 쭈뼛하였다. 호랑이도 그랬을 것이다. 호랑이는 사람 둘이 가까이 이른 것을 인식한 모양으로 머리를 돌려서 두 젊은이를 보았다.

달려들든가 도망치든가 할 것으로 여기고, 불행히 화살[弓失[궁실]]을 몸에 못 지닌 두 「사람」은 서로 눈짓하며, 네 개의 젊은 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 눕힐 것을 약속하고 마음의 감발(束足[속족])을 차리었다.

호랑이는 어두워 가는 저녁 빛을 받은 불덩이 같은 눈을 구을려서 한번 두 「사람」을 보고는 다시는 참견도 안 하려는 듯, 앞으로 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호랑이는 무론 덤벼들든가 도망치든 가 둘 중에 하나를 할 것으로 여기고, 그러면 이 젊은 주먹의 힘을 한 번 날려 보려던 것이, 호랑이의 이해할 수 없는 무심한 태도에 그만 자기네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거취와 판단을 내리기 힘들게 되었다.

두 젊은이가 자기네의 취할 방침을 결정치 못해 주저하는 동안, 호랑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젊은이들이 서 있는 반대의 방향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

우거진 숲새로― 삼림 뒤로 호랑이는 그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좀 지나서 성산 불함(聖山 不咸)의 등성이 골짜기로 울려 나가는 호랑이의 한 마디 포함성― 그것은 여기서 떠난 그 짐승의 부르짖음일까. 하늘을 우러를 수 없도록 무성한 천고(千古)의 대삼림은 더욱더욱 저녁 어두움에 잠겨 들어 간다.

"그놈의 짐승이 거기서 무얼 하고 있었드람."

"잡아서 가죽 벗겨, 배자나 지어 입으렸더니, 분해라, 놓쳐서…."

오이와 마리는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곳으로 더듬어 갔다.

채 가지 못하여, 발에 무엇이 뭉클하는 것이 걸려서 굽어보니, 이리[狼[랑]] 죽은 것이 하나 넘어져 놓여 있었다. 모두 찢기고 뭉크러지고 한 품으로 보아서, 사냥꾼의 손에 걸린 것이 아니라, 같은 짐승끼리 싸워서 이 꼴이 된 것이라 볼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우와 환경으로 따져 보아서 아까 그 호랑이에게 이 꼴이 된 것으로 판단할 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글쎄."

조금 더 앞에는 이번은 표범이 한 마리 또 이리 꼴같이 되어 죽어 있었다.

오이와 마리 두 사람은 연하여 머리를 기울였다. 서울의 교외라 하나 맹수가 출몰하는 깊은 숲이라 호랑이가 있고, 표범이 있고, 이리가 있다는 것은 기이 하달 수 없지만, 표범과 이리가 분명 호랑이에게 해를 받은 모양으로 넘어져 있고, 호랑이는 또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어슬어슬 숲속으로 잠겨 버리고― 사면이 꽤 캄캄해졌으니 또 어떤 물건이 복재해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모양만으로도 적지 않게 기괴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부석부석! 지끈! 적지 않게 요란한 소리가 매우 가까운 곳에서 났다.

호랑이도 주먹으로 때려눕히려던 두 젊은이도 이 기괴한 소리(무엇을 부수는 것 같은)에는 사실 놀랐다. 소리 나는 편으로 두 사람의 눈은 일시에 돌았다.

그들의 조금 앞― 표범이 넘어져 있는 너덧 걸음 왼쪽에 나무가 하나 있었다. 중동이 부러진 나무인 듯, 밑동은 꽤 굵은데, 키는 두어 길 될까 한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가 한 번 커다랗게 움직이더니,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이었다.

무서움을 모르고 겁을 모르는 두 젊은이였지만, 이 너무도 기괴한 일에는 뜻하지 않고 날카로운 부르짖음이 나왔다. 그 부르짖음이 끝나자,

"고약한 친구들."

나무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왔다.

두 젊은이들은 마음이 꽉 얼어붙어서, 떨지도 못하고, 못[釘[정]]박힌 듯이 서 있을 때에, 낑낑 두어 번 굳은 힘 쓰는 소리가 들리더니, 굵은 바[繩[승]]라도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걸어오던 소나무는 약간 모로 쓰러지는 듯, 소나무 뒤에서는 아직 팔에 걸려 있는 바를 뿌리쳐 치우며,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나무 뒤에서 나타난 사람도 젊은이였다. 울창한 숲속이라 벌써 꽤 어두운 가운데서 장대한 몸집과 빛나는 두 눈이 난란히 번득였다.

"고약한 친구들…."

또 한번 혼잣말같이….

오이와 마리 두 젊은이는, 경위의 윤곽을 어렴풋이 이해하였다. 젊은이(나무 뒤엣)는 지금껏 지금 비스듬히 모로 쓰러져 있는 나무에 결박지어 있던 모양이었다. 왜 아직껏 결박진 채 가만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기가 비끄러 매여 있던 소나무를 송두리째 뽑고, 자기가 매여 있던 끈은 끊어 버리고 자기의 몸의 자유를 회복한 것이다.

지고 있던 나무를 뽑아낸 그 놀라운 힘, 또는 결박하였던 그 굵은 바를 끊어 버린 놀라운 힘― 오이와 마리는 여전히 입도 못 벌리고 젊은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쪽에서들 오시우?"

젊은이는 팔다리를 폈다 굽혔다 해서, 몸의 저린 것을 풀면서 물었다.

"저쪽에섭니다."

오이가 자기의 온 방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오시는 길에 인마(人馬)를― 좀 더 똑똑히 말하자면, 사냥하는 패거리의 인마와 만나지 않으셨수?"

"만났습니다."

"몇 사람의 패거리입디까?"

"사오십 명― 왕자(王子)님의 일행인 듯싶습디다."

"고약한 친구들. 그래 맹수 출몰하는 이 숲속에 나를 결박해 매 두고 그냥 간담…."

오이와 마리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아까 왕자와 그 시종 일행이 사냥하여 잡은 많은 짐승들을 지워가지고 지나가면서, 서로 지껄이던 이야기 가운데 귓결에 들은 말이 있었다. 오이와 마리는 한 걸음 물러서며, 공손히 젊은이에게 물었다―.

"그럼, 임께서는 고주몽(高朱蒙)님 아니서요?"

"고주몽이오."

"아이―."

오이와 마리는 한 무릎을 꿇어 주몽이로라는 젊은이를 경배하였다.

×

고주몽은 이 일대(부여)에 있어서 유명한 젊은이였다.

그의 출생에 관한 전설은, 벌써 부여 숙신 일대에 널리 퍼져서 불함산(不咸山)과 우발수(優渤水) 일대의 민간 촌락에까지 모르는 이가 없을이만치 유명하였다.

그 전설에 의지하건대,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라 한다. 유화가 어떤 날 그의 동생들과 시내에 멱감을 때에, 천제(天帝─단군)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는 이가 유화를 웅심산(態心山) 아래 오리내[鴨緣] 물가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 해모수는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아버지 되는 하백은 유화를 「몰래 시집갔다」 하여 우발수(優渤水) 가로 내쫓았다. 집에서 쫓겨나서 우발수 가에서 쓸쓸한 귀양살이를 하던 유화는 임금 금와왕(金蛙王)에게 발견된 바 되어, 부여 궁실에 거두이었다. 그때는 유화는 잠깐 본 해모수와의 인연으로 임신한 몸이었다.

부여 궁실에 거두이어 있는 유화의 몸 위에는 언제든 햇빛이 비취었다. 유화가 몸을 일으켜 피하면, 볕은 그냥 유화를 따라와 비취었다.

천제(天帝) 단군(檀君)의 씨요 해의 정기의 화(化)인 유화의 뱃속 물건은 점점 자라서 열 달이 차매 유화는 해산을 하였다. 그런데 사람의 어린 애가 아니요, 닷 되(五升)만 한 커다란 알을 낳았다.

유화를 보호하고 거두던 임금 금와왕은 사람이 알을 낳단 성서롭지 못하다 하여 그 알을 짐승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개 도야지도 먹지 않고, 소 말은 밟기를 피하므로, 들에 버렸더니, 새 짐승이 도로혀 덮어주고 보호해 주므로, 이것을 깨뜨려 버리려 하나, 깨지지도 않고 하므로, 마지막에는 왕은 다시 그 알을 어머니 유화에게 돌려주었다.

자기가 낳은 바의 알을 도로 돌려받은 유화는 그 알을 고이 싸서 따뜻하게 잘 간수하니까 얼마 뒤에 그 알에서는 한 아이가 나왔다.

나면서 벌써 기상이며 골격이 비범하고 옹건하고, 더욱이 어렸을 때, 파리[蠅]들이 얼굴에 와 붙어서 성가시고 귀찮으니 활을 만들어 달라므로 어머니 유화가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 주었더니, 바늘을 활촉 삼아 그 활로 파리를 쏘아서 하도 잘 맞히므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일컫는 방언(方言)에 따라서 그 아이의 이름을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

이 부여의 임금 금와왕의 전 임금은 해부루(解夫婁) 왕이었다.

해부루 왕의 아버지도 해모수(解慕漱)라 전한다.

천제(天帝─단군이라 범칭(汎稱)한다) 왕검(王儉)이 온 동방의 인종을 한 날개 아래 모아서, 하늘과 해와 산천을 숭앙하고 제(祭)하는 신앙 밑에 통합해서, 자손이 그 업을 누려 내려오기를 이천여 년, 지금 「단군 해모수」까지 이르렀다.

「단군」(혹은 천제)이라 하는 일컬음은 동방 민족의 거룩한 신앙의 대상이다. 지금의 단군인 해모수는 북부여 땅에 자리를 정하고 아들 되는 해부루를 부여 임금으로 삼았다.

그런데 해부루 왕은 불행 아들(嗣子)를 보지 못하여 조상 때부터의 전통 관습으로, 산천에 제사하여 아들을 보려 했는데 어떤 날 왕의 탄 말이 곤연(鯤淵) 큰 바위 앞에 서서 무엇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 바위를 굴리고 보니, 거기는 금빛[金色] 머구리 형상[蛙形]의 어린애가 하나 있다.

임금은 「이것이 하늘이 주신 사자(嗣子)」라 하여, 이 아이를 거두어 태자로 봉하였다.

뒤에 해부루 왕 세상 떠나고, 금와(금빛 머구리 형상의 아이라 하여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었다)가 임금이 되었다.

하백의 딸 유화를 우발수 가에서 거둔 것이 즉 이 금와왕이었다.

금와왕의 의부(義父)인 해부루는 단군 해모수의 아들이었다.

해모수의 나라이매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임금 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그 해부루가 또한 아들이 없을 때는?

해부루는 혈자(血子)가 없기 때문에 한 딴 아이(금와)를. 구해 태자로 삼고, 뒤에 나라까지 물려주었다. 그러나 그 금와가 임금이 된 뒤에, 해모수의 아들이 또 하나 생겨났다 하면?

고주몽은 천제(단군) 해모수와 유화와의 새에 생긴 아들이다. 이 나라는 해모수가 조상 왕검부터 대대로 물려받아 내려온 나라이다. 지금의 이 땅의 임금인 금와왕은 전 임금 부루가 곤연(鯤淵) 가에서 주워 온 아이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얽힌 관계로 하여, 고주몽의 출생 전설은 이 지역의 이야깃거리요 옛말거리로 민간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었다.

고주몽을 노인으로 아는 이도 있는 반면에 아직 동자로 아는 사람도 있고, 지금의 임금 금와왕은 이 땅의 주인인 성조 단군과는 아무 혈통적 관계가 없는 사람이니까 장차 물러앉고, 단군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것은 백성들 새에 거진 신앙으로까지 되어 있었다.

×

그런 여러 가지의 말썽은 있건 말건, 고주몽은 부여 왕실에서 금와왕의 보호 하는 아래 현명한 어머니 유화의 양육 가운데서 고이고이 자라고 있었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그는 아들 주몽의 인품과 인격과 역량을 알아보고, 「너는 하늘 아래 제일인이다. 아래는 천하와 만인이 있지만, 위에는 오직 하늘이 계실 뿐이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깊이 뿌리박아 주었다. 그리고, 네가 장차 자라서는 조업(祖業)인 임금의 자리는 으레 차지할 것이지만, 이곳 동부여는 부루왕(금와의 전 왕이며 주몽의 의형)이 본시 북부여서 서울 하고 있다가 아버지 되는 단군 해모수의 분부로 이리로 옮긴 것이니, 이곳은 아예 탐내지 말고, 금와왕으로 하여금 안주(安住)케 하여, 금와왕에게 받은 신세를 원수로 갚지 말고, 더 기름지고 좋은 땅을 골라 잡아, 그곳에 왕검 성조부터의 거룩한 업을 잇(繼)고 겸해 배달 억조창생의 보금자리를 꾸미라고 강보 적부터 가르치었다.

임금 금와왕은 주몽 모자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여러 가지의 연분 관계로 주몽의 존재는 금와왕에게는 꺼리우고 무시무시한 것이었고, 더욱이 주몽이 자라면 자랄수록 그 인품이 더욱 위대하고 활달하여 가서, 한 개 야인(野人)으로 종시(終始)하지는 않을 품이 지금부터도 넉넉히 보이었고, 백성들의 존신도 높아 가서, 이 나라의 주인 되는 입장으로는 적지 않게 불안한 바이지만, 금와왕은 그래도 귀여웠다. 차차 엉뚱하게 위대해 가는 것이 겁나기 전에 도리어 귀엽고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금와왕의 아들인 왕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주몽보다 나이가 위인 태자(太子) 대소(帶素)를 비롯하여, 아직 어린 동자에 이르기까지 합계 일곱명의 왕자는, 처음 철없을 시절에는 주몽을 단지 궁중에 기식하는 천민(賤民)쯤으로 수모에만 그쳤지만, 약간 철이 들면서는, 주몽의 온갖 방면(활쏘기 말달리기 사냥 등)의 재주의 월등한 데 투기하여 심술내고 미워하다가, 더 철이 들면서는 그것이 모두 겁으로 변하였다.

더욱이 태자 대소는 심하였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주몽이, 말달리기 활쏘기 등 온갖 무술에 있어서 자기보다 훨씬 우승한 데서 출발한 증오심은, 차차 민간전설(장차 주몽이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는)에서 활짝 성하여, 불안과 경계심이 나날이 더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여러 번 아버님 금와왕께, 주몽을 제거하기를 간청했다. 그저 주몽을 멀리 내쫓는다 할지라도 역시 후환을 남겨 두는 것이니, 아주 주몽의 목숨을 끊어서, 근심을 뿌리째 없애 버리자고 주청하였다. 만약 태자가 몸소, 하다못해 암살(暗殺)로라도 주몽을 없이 할 수 있었다면, 태자는 주저하지 않고 주몽을 암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태자 스스로는 어쩔 도리가 없으므로 아버님께 간청하여, 왕권(王權)으로써 주몽을 처치하여 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주몽에게 대하여 알 수 없는 애착을 가지고 있는 금와왕은, 매번 태자를 얼러 두는 데 그치었다. 그리고 주몽을 시켜서, 왕실의 목장(牧場)에 보내서 말 기르는 감독을 하게 하였다.

×

이 날 (오이 마리들과 숲에서 처음 만난 날) 태자 대소는 뭇 왕자와 시신들을 거느리고 교외에 사냥을 나갔다. 주몽더러는 배행하기를 분부하였다.

그 날 종일의 사냥.

태자와 왕자와 시신의 일행은 합계 사십 명이었는데 종일 노력하여 겨우 사슴 단 한 마리를 잡았다. 그런데 주몽은 단 혼자, 따로 돌아다니며, 노루, 사슴, 도야지, 합하여 수십 마리를 잡았다. 본시 밉고 본시 투기하던 데, 오늘 이 모양이라 분하고 불쾌하였다. 눈에는 독과 살이 올랐다. 주몽이 스스로 잡은 많은 짐승을 묶느라고 허리를 굽히고 돌아갈 때에 태자는 그것을 곁돕는 체 주몽의 옆에서 어름거리다가, 한(힘깨나 있는) 시신에게 눈짓하며 주몽을 발길로 찼다.

태자께 눈짓 받은 시신은 지금 태자의 발길에 채어 꺼꾸러지는 주몽의 몸에 올라탔다.

주몽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 유화의 교훈이 그러하였고 주몽 자신의 뜻 역시 그러하였다. 팔 한 번 휘두르면 사십명 태자 일행 따위는 어디로 날아갈지 모를 것이로되, 장차 자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그때가 이르기 전에는 무슨 일을 당하건 그저 겪고 참는 것이 주몽의 주의요 어머니의 지휘였다.

태자 및 그 일행도, 아직껏 주몽의 참 힘을 본 일이 없는지라, 주몽이 얼마나 한 힘을 가진 사람인지 모른다. 만약 알기만 했더면, 사십 명은커녕 사백 명일지라도 주몽에게 덤벼들지 않았을 것이다.

주몽은 잠자코 묶이었다. 또한 잠자코 묶이었는지라, 태자 일행도, 「사십 명이면 주몽도 어쩌지 못한다」는 자신을 가지고 묶은 것이었다.

주몽을 묶어서는, 거기 중동 부러진 어떤 소나무에 주몽을 비끄러매었다.

이곳은 맹수가 출몰하는 곳이라, 주몽을 이곳에 매어 두고 가기만 하면 밤에는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되고 말리라, 이런 생각 아래서, 태자의 일행은 주몽을 나무 그루에 결박지어 매어 놓고, 주몽의 잡은 짐승들을 자기네의 사냥의 소득인 듯 하인에게 지워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돌아갔다.

맹수 출몰하는 산곡에 혼자 결박지어 버리운 주몽은, 태자의 일행이 멀리 사라진 뒤에, 한 번 힘주어 발을 버티어 보았다. 힘주면 나무가 넉넉히 뽑아지겠다. 결박진 몸에 한 번 힘을 보내어 보았다. 넉넉히 뽑을 만한 자신이 있었다.

자기의 결박에 대하여 이를 벗겨 버릴 자신을 얻은 뒤에는 주몽은 나무에 달린 채,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종일의 사냥에 피곤하여 한잠 자기 위해서였다. 지금 결박을 벗어나서 가다가 불행 태자의 일행과 만나게 되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따져서 태자 측도 가만있지 못할 형편이다. 반드시 무슨 불상사가 생기기 쉽다.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저쪽(태자 측)이 주몽을 처치했다는 기쁨(혹은 흥분)에서 좀 삭은 뒤에 주몽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한잠 자서 피곤이나 삭이고 저녁에 서울로 돌아가서, 내일이나 모레쯤 대궐에 나타나기로― 좌우간 한잠 자려 하였다.

풀낏 한잠 잤다.

무슨 기수에 깨었다.

저벅저벅― 이라기보다 부석부석 무슨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무에 결박진 주몽의 등 뒤쪽에서 나므로 무슨 소리인지는 볼 수 없었다.

버석버석, 그 소리는 나무를 우회하여 앞으로 돌아온다.

시야 한 편 끝에서 나타나서, 무슨 물건이 차차 앞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무슨 물건인지 알아보고 주몽은 몸이 오싹하였다. 하마터면 땅을 걷어차고 결박진 나무를 뽑으며 일어설 뻔하였다.

호랑이였다. 꽤 커다란 한 마리의 호랑이가 꼬리를 땅에 끌며, 천천히 나무를 우회하여 주몽의 앞을 지나서, 그냥 주몽 쪽은 보지도 않고 가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주몽의 뒤를 돌아서 주몽을 두고 나무를 도는 것이었다.

다시 주몽 앞으로 돌아오는 호랑이― 이번은 머리를 돌려 주몽을 잠깐 바라보고 다시 공손히 머리를 돌린다.

주몽은 비로소 알았다. 뜻하지 않고, 결박진 채 머리를 가슴에 숙였다.

「오오, 하느님이시여.」

주몽이 땅에 떨어진 때로 비롯하여 오늘까지 이십 년, 벌써 여러 번 나타난 하늘의 도우심이다. 호랑이는 주몽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철없는 짐승이 달려들까 보아 주몽을 두루 돌며 주몽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철없는 이리 한 마리 표범 한 마리가 눈치없이 이 근처를 배회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광경을 주몽은 나무에 달린 채 구경하였다.

×

주몽은 여기서 만난 오이와 마리의 두 젊은이에게, 자기가 나무에 결박져 있던 까닭을 간단히 설명하여 주었다.

저런! 저런! 연하여 감탄하여 혀를 끌끌거리며, 오이와 마리는, 주몽이 굳이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몽의 등 뒤로 돌아서, 주몽의 살에 깊이 새겨진 결박자리를 주무르고 쓸면서,

"주몽님, 저희들의 소청을 하나 들어 주십시오."

고 하였다.

"오늘 여기서 우연히 만난 당신네들이 내게 소청이 무에 있겠소?"

"있습니다. 평생 소청이올시다. 꼭 들어 주십시오."

"대체 이야기나 해보시오."

"네, 저희는― 저는 이름이 오이라 하옵고 저 사람은 마리라 하옵고, 또 한 사람 이 자리에는 없습니다마는 합부(陜父)라는 동무가 또 있습니다. 저희 세 사람은 좋은 주인을 구해 만나서 저희의 일생을 의탁하고자 지금껏 천하를 찾아 돌았습니다. 지금 천하에 나라이 꽤 많고, 우리 동방에도 중국인의 나라까지 있으되, 아직 마음 맞는 주인을 못 얻었습니다. 우리 거룩하신 조상 단군님의 갈래 나라도 여기저기 여러 군데 있지만, 원갈래 부여를 찾아 여기까지 왔습더니, 이곳 임금님도 먼젓번 부루(夫婁) 임금님의 혈자(血子)가 아니시고 딴 데서 들어오신 분, 게다가 태자도 영특하시지 못하다 하와, 주인으로 섬기기 좀…."

잠깐 말이 끊어지는 것을, 곁에서 마리가 계속하였다.

"그래서 주몽님을 찾아 뵙고자 벼르던 중이옵니다. 오늘 우연히 여기서 만나 뵈옵고, 우러러 뵈오매 결코 저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와, 이분이야말로 저희들의 평생을 의탁하옵고 매달릴 분이라고 오늘 여기서 우둔한 몸이나마 맡기는 배옵니다. 받아 주시옵소서."

그러나 주몽은 대답 없이 머리를 가슴에 묻었다. 천고의 숲속― 높이 나무 끝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우렁찼지. 그밖에는 고요하고 조용한 가운데, 세 젊은이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이윽고 주몽이 머리를 들었다―.

"뜻은 고맙소마는, 내 아직 시하에 있고, 남의 치하(治下)에 있는 어리고 철없는 몸이, 내 아래 또 어찌 사람을 두겠소? 내 장차 무슨 자리를 얻게 되면 그때 동무들의 도움을 빌게 되겠지요. 그때까지 좀 기다려주시오."

"아니옵니다. 스스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임께는 아무리 하늘의 도우심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 도우심도 임이 움직이셔야 품 안에 듭니다. 아직 아무 지위 없으시다 하시나, 어느 조부(祖父)가 일찍이 손주 아니던 조부가 있사오며, 어느 천자(天子)가 일찍이 소민(小民) 아니던 천자가 있습니까. 손주 자라서 할아비 되고, 소민 일어서 천자도 되는 겝니다. 해모수님의 아드님이신 임 아니고서, 지금 일어서실 분이 어디 있습니까. 어리석은 저희입지만 저희들을 부리시와 지금이 바야흐로 일어서실 때가 아닌가, 저희는 소견 하옵니다."

주몽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일찍부터 벼르던 바요, 한때 반드시 손에 휘잡아 보려는 바요, 또한 운명이 그리로 향해 진행하는 듯싶지만, 아직 어머니와 마주 의논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좌우간 밤 들기 전에 서울로 돌아갑시다."

"저희는 모시고 따라가겠습니다."

주몽은― 주몽을 따라 두 젊은이도 몸을 일으켰다.

그들이 어두운 대지에 발을 내디딜 때에, 저 멀리 어디서 무슨 맹수의 부르짖음이 울리었다.

동으로는 멀리 동해(東海)를 바라보고, 북으로는 불함(不咸─長白)의 큰 뫼의 줄기를 탄 곳에, 가섭원(迦葉原)의 벌이 벌려 있다. 동부여는 그 가섭원에 서울 터를 잡고 있다.

서울의 북쪽 기슭에 왕실의 목장이 자리 잡고 있고, 이 목장을 감독하는 책임을 띠고 있는 주몽은 목장 옆에 자그마한 초막을 틀고, 어미니 유화 부인과같이 거기 거처하고 있었다.

×

가을의 아침 해가 아직 뫼 위에 나타나기 전인 이른 아침, 주몽은 그의 원기 좋은 몸을 자리에서 일어, 어머님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이편으로 돌아와 보았다.

어제, 산곡 사냥터에서 새로 만난 세 동무(오이, 마리, 합부)도 벌써 일어나, 아침 소세를 끝내고, 셋이 가지런히 앉아 있다가, 주몽에게 인사를 한다.

주몽은 세 사람을 데리고 벌[野]로 나왔다. 목장이었다. 나무로 넓게 책을 둘러친 가운데는, 굴레도 안 쓴 말이 오륙십 필 둘러 있다.

모두 살진 늠름한 말이었다. 그 말들은 주몽을 반기는 듯, 모두 주몽의 앞으로 가까이 왔다. 주몽은 책 한편을 넓게 열어, 말들로 하여금 아침 풀을 뜯어 먹으러 나갈 길을 터 주었다. 뭇 말은, 그 열어 주는 길로 하여, 풀 무성한 곳을 향하여 모두 나가 헤어졌다.

그 가운데, 단 한 마리의 말― 모두 살진 가운데 이놈 한 마리는, 참혹하도록 야위고 원기가 없었다― 은, 동무들을 따라 나갈 생각도 않고, 주몽의 앞으로 와서 무엇을 하소하는 듯, 주몽의 앞가슴에 얼굴을 문지르며 눈만 서먹거리고 있다.

오이가 한 걸음 가까이 나서면서, 말의 콧등을 어루만져 보면서,

"이 말이 탈이 났습니까? 보아하니, 쉽지 않은 천리용마(龍馬)인 듯싶은 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습니까."

하며, 연해 갈기를 두들긴다.

"종자가 좋아 보이오?"

"네. 희대의 용마올시다."

"당초에 아무것도 먹지를 않는구료."

"제가 약간 말 다룰 줄을 아옵니다. 어디 탈이 났는지 좀 손질해 보오리까?"

"글쎄…."

온몸이 불붙는 듯 시뻘겋고, 그 몸집도 유달리 크고, 엉덩이 드높고, 다리 날씬히 길고, 나이는 네 살쯤― 명마로서의 소질은 다 지니고 있는 모양인데, 몸을 지탱키 힘들도록 야위고 눈곱이 끼고, 입으로는 침을 흘리며― 아주 꼴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침을 너무 흘리므로, 입속에 무슨 고장이 있는가 하여, 오이가 말 얼굴을 쳐들고 입을 벌려 보려 할 때에 주몽이 앞서, 말의 입을 벌리고, 손을 넣어, 말의 혓바닥을 잡아당겨 꺼내어 보이었다. 말의 혀에는 꽤 커다란 바늘이 하나 꽂혀 있었다.

"이 혀로 어떻게 죽을 먹겠소? 아무리 명마라도 굶으니 이 꼴이지."

"아, 이게 웬일입니까."

"내일쯤은 바늘을 뽑아얄까 보오. 그렇지 않았다가는 말이 굶어 줄을 걸."

"일부러 바늘을 꽂으셨습니까."

주몽은 대답치 않고, 그곳서 발을 떼었다. 오이는 그 말이 못내 측은한 모양으로 말을 떠나지 못하고 그냥 서 있었다.

주몽은 조반 뒤, 임금(금와왕)께 아침 문안을 드리러 대궐로 갔다.

임금은 주몽을 보며 깜짝 놀란다.

"주몽이― 너― 어디 다치지나 않았느냐?"

"?"

주몽은 뜻을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였다.

"태자랑 시종들의 말에 너 어제 사냥 갔다가 호랑이한테 물려 갔다더니."

아마 어제 태자의 일행은, 임금께 그렇게 보고한 모양이었다. 주몽을 결박 지어 맹수 출몰하는 심산 중에 매어 두고 왔으니, 그들로서는 무론 주몽이 죽었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 발뺌을 하기 위하여 임금께 그렇게 보고해 둔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이온지, 신은 어제 종일 목장에서, 목장 밖을 나지를 않았습니다. 마침 말 다루는데 능한 사람 세 명을 구해서, 종일 말의 손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웬 호랑입니까?"

"흐─ㅇ, 이상하구나. 태자랑 사십여 명이 여출일구로, 너하고 함께 사냥 갔다가, 호랑이가 뛰쳐나와, 미처 손쓸 틈 없이 너를 물어 갔다는데."

"글쎄올시다. 나랏님도 아시는 바, 호랑이 한두 마리 덤벼들기로서니, 그런 것에게 물려 갈 신도 아니옵거니와 신은 어제 하루 종일 울 밖에 나 보지를 않았습니다. 어느 틈에 사냥을 가오리까."

"거 이상하다. 누구 태자 좀 내가 부른다고 여쭈어라."

부왕의 부름에 멋모르고 들어서던 태자는, 거기(어제 자기네가 결박 지어 소나무에 매 두고 온― 지금쯤은 맹수에게 오리가리 찢기어 죽어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주몽이 아버님 곁에 모시고 있는 양에 하마터면 소리까지 낼 뻔 놀란다.

"너희들 어제 저녁 뭐랬느냐. 호랑이에게 어쨌다는 주몽이― 주몽은 대체, 어제 사냥 간 일도 없었다는데…."

자기네들은 어제 꼭 주몽을 죽게 만들어 두었었는데, 그 주몽이 현재 아무 고장 없이 여기 나타나 있으며, 더욱이 스스로 「사냥 간 일이 없다」고 자기네(태자)의 비겁한 행동을 폭로하지 않는 이상, 구태여 어제의 주장을 고집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태자는, 이 자리를 어름어름 어물어 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스스로 은근히 이것은 주몽의 혼백이나 아닌가 하여, 기회 보아 슬쩍 주몽을 어루만져 보아서, 손으로 분명 만져지는 품이 혼백도 아닌 듯하니, 당초에 어찌 된 셈인지 알 수가 없어서, 마음으로는 무시무시한 생각과 의문을 품은 채 어전을 물러갔다.

주몽도 어전을 물러감에 임하여 임금께 목장에 한 번 거둥해 주시기를 간청했다. 말 다루는 명인 세 사람을 새로 얻어, 말을 모두 손질했으니 한 번 보아 줍시사고.

×

이즈음 태자가 주몽에게 대한 태도가 나날이 고약해 가서, 그냥 어름거리다 가는 필경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것이 근심되어, 일전에 주몽은 어머니 유화 부인에게 그 하소연을 한 일이 있었다.

어디든 좋은 곳에 자리잡고, 성조 왕검 때부터 아버지 해모수까지 이어 내려온 업을 계승할, 새 터를 잡고 싶으나, 홀어머니 남기고 떠나기가 차마 어려워서, 이 고충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하였던 것이다.

그때에 어머니는,

"자식 잘 되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가장 큰 낙이요, 그것이 가장 큰 효도니라. 이 어미는 아무렇게 되든 간에, 너 좋은데 찾아가서 너 잘 되어야 어미는 기쁘지, 어미 곁에서 그냥 요 꼴로 지내는 것이 어미의 소망이 아니로다."

하며, 장부(丈夫)의 장도(長途)에는 반드시 좋은 말의 준비가 있어야 한다 하며, 모자(母子)서 함께 목장에 나와, 긴 채찍을 둘러 뭇 말을 칠 때, 뭇 말이 모두 도망치는 가운데, 한 큰 붉은 말은, 두 길(二丈)되는 난간을 성큼 넘어 뛰어 달아났다.

어머니는 그 붉은 말[騂]을 다시 불러오라 하여 각가지로 시험해 보고, 이 말이야말로 쉽지 않은 명마라 해서, 주몽더러 각별히 기르고 임금께 간청해 이 말을 네 것을 만들라 하여 두었다.

그 이래, 주몽은 그 말의 혀에 커단 바늘을 하나 꽂아서, 아주 죽을 먹지 못하게 하여, 이렇게 며칠 지내는 동안에, 그 크고 장대하던 말은, 거칠고 눈꼽끼고 아주 보기 참혹한 형상이 되었다.

좀 더 그대로 지내다가는 그 명마는 굶어 죽을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잘 먹여, 제 원 모양을 회복하면, 임금은 결코 주몽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쓰지 못할 죽어가는 말인 듯 변형해 두었다가, 기회 보아 임금께 줍시사고 청할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임금은 아직 목장에 행행하지 않아 주몽은 그 말을 달랠 기회가 지금껏 없었다. 그냥 이대로 지내다가는 말을 죽이기 쉽겠으므로 주몽은 오늘 기회 보아 임금께 한 번 와 줍시사고 청한 것이었다.

이따가 낮 뒤에 목장에 잠깐 거둥하마는 임금의 대답을 듣고, 주몽은 대궐을 물러 나와 자기의 말에 올라 목장으로 향하였다.

주몽의 탄 말은 소위 과하마(果下馬)였다. 몸집이 하도 작아서, 그 말을 타고도 과목(果木) 아래를 다닐 수 있다 하여, 「과하마」라는 이 부여 특산의 종류였다. 큰 강아지만 하여, 위에 탄 주몽보다도 오히려 작으면 작았지 크지는 못할 방정맞은 짐승이었지만, 기운은 놀랍게 세어, 주몽을 허리에 가벼이 싣고서, 발발발 기어간다.

목장에 돌아오매, 오이 마리 합부의 세 새 동무는 아까 주몽이 시킨 대로, 목장의 말들을 모두 솔질하고 물로 닦고 야단법석이다가 주몽을 절하여 맞는다.

주몽은 타고 온 과하마를 그들에게 맡기고 자기는 병든 말께로 돌아갔다.

또한 애소하는 듯 주몽께 와서 부벼대는 말의 갈기를 두들기며, 알아 들으라는 듯이 말에게 말하였다―.

"아프리라. 배고프리라. 네가 배고프고 혀 아프니만치, 너를 그렇게 하는 내 마음도 아프다. 오늘 임금님이 오시면 임금님께 너를 내게 줍시사 해서 내 것을 만들고, 그러고는 네 아픈 원인을 없애 주마. 아픈 것만 없어지거든 잘 먹고 곧 회복되어, 한 번 우리 천하를 뛰어 돌아 보자꾸나."

말은 이 주인의 뜻을 알아보겠다는 듯이, 그 앞에 그의 기다란 얼굴을 디밀었다.

×

그 날 낮 조금 지나서, 임금은 주몽과의 약속대로 목장에 행행하였다.

임금이며 시신들은 주몽의 인도로써 목장에 기르는 말을 순시하였다.

그들의 눈은 자연 맨 마지막에 그 야윈 말에 머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몽이 아까 혀의 바늘을 뽑았기 때문에, 바늘 꽂혔던 자리에서는 피가 흘러서, 그 피가 침에 섞이어 입 밖으로까지 흘렀다. 이 때문에 꼴은 더욱 참혹하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네이…."

"입에서 피가 흐르는구나. 무슨 병이 들렸느냐."

"아마 그런 듯, 죽을 당초에 먹지 않습고 나날이 야위어 들어가옵니다. 종자는 좋은 모양이온데."

"응 빛깔이며 키 꼴이며 굽 모양이며 쉽잖은 좋은 말 같은데, 왜 이 꼴이냐."

"아마 죽을 병이 들린 모양이옵니다."

"아까와라."

"나랏님. 저 말을 신께 주시면 좋겠습니다."

"죽어가는 말을 해서 뭘 하느냐. 네 마음대로, 이 가운데서 가장 좋은― 나 탈 것 하나 제하고는 네 마음대로 한 마리 골라 가지려무나."

"아니옵니다. 말이 탐나서가 아니오라, 저 죽어가는 말이 저대로 두면 필시 죽을 것이온데, 그렇다고 신의 것이 아니고 나랏님 것이오매, 비상수단을 써서 손질도 못해 보옵고, 그냥 죽이기는 아까와서, 신께 저 말을 주시오면, 신 한번 비상수단을 써서, 죽으면 죽고 요행 살면 살, 거친 손질을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거든 가지려무나."

"성은을 무엇으로 갚소리까."

임금의 일행이 간 뒤에 주몽은 미리부터 준비해 두었던 말죽을 내다가 말에게 주었다. 그 죽에는 합부가 아침에 산에 들어가서 캐 온 약초(藥草)도 들어서, 말의 여러 날 쇠하였던 원기를 회복할 일종의 약죽이었다.

오래간만에 혓바닥의 고장을 제하고, 죽그릇 앞에 선 말은, 원기 좋게 그 죽을 먹었다. 혀의 자유를 회복한 말은 그것이 기쁜 듯, 물을 먹다가도 고개를 쳐들고 소리높이 울어 보고 하였다. 명마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기다란 여음을 끄을며 산곡 간에 울려 나가고 하였다.

주몽은 오이 마리 합부의 세 사람에게도 각각 말 한 마리씩을 골라 잡아서 각별히 가꾸어, 무슨 비상한 일이 있을 때의 예비를 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까지 원기 좋게 죽을 먹은 말은 원기를 다 회복한 모양으로 주몽이 시험 삼아 유화 부인까지 청해 내고, 주몽 스스로, 안장도 없이 갈기를 잡고 올라타 보니 말은 우렁차게 땅을 울리며 앞으로 달았다.

오이 등 세 사람도 각각 한 마리씩 골라잡아 목장을 경주하여 보니, 다른 말(오이 등이 탄 말)은 열 바퀴를 돌고는 숨차서 잘 못 닫는데도, 주몽의 탄 말은 그 새 여러 날 굶고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열 바퀴쯤에는 끄떡도 않고, 열다섯 바퀴 돌고도, 역시 힘이 얼마이고 남아 있었다.

어머니 유화 부인도 이 말에 만족한 모양이었다. 주몽이 열다섯 바퀴를 돌고 말에서 내릴 때도 숨소리 여전히 예사로운 말을 하는 유화 부인은 몸소 죽 그릇을 들어서 말의 입에 갖다 대었다.

"좋은 벗이 생기고 좋은 말이 생기고― 아마 네가 떠나야 될 날이 멀지 않은 모양이다. 네가 떠날지라도, 어미를 여기 남겨 두었다는 생각일랑 아예 말고, 네 등에 늘 업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어미 걱정은 말고, 네 자리 잡기나 힘쓰거라."

말죽 그릇을 들고 말을 먹이면서 유화 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예씨(禮氏)한테도 한번 가 보아야겠구나. 더구나 홀몸도 아니라니."

"네. 내일쯤 한 번 가 보겠습니다."

예씨란 주몽의 안해였다. 부여의 풍속이 남녀가 혼인하면 안해는 그냥 눌러 친정에 있다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가 자란 뒤에야 남편의 집으로 간다. 그 풍속대로, 주몽은 예씨 집에 장가들어서 안해의 뱃속에는 벌써 주몽의 씨까지 들어 있지만, 예씨는 그냥 친정에 있던 것이었다.

"이번 가거든, 혹은 갑자기 어디로 가게 될는지도 알 수 없다고 미리 알려 두어라. 이즈음 형세를 보니 태자가 너를 미워하시는 품이 나날이 더해 가서, 여기 오래 있지 못할 모양이더라."

주몽은 어머니가 팔 아플까 보아, 죽그릇을 받아 땅에 내려놓으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님."

"왜?"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여기에 사람 열 명을 세워 놓고, 저와 태자가 동서에 갈라서서, 각각 이리로― 내게로 오라고 외치면, 태자와 저 가운데, 어느 쪽으로 많이 가리까."

"내가 그런 걸 어찌 알겠느냐."

"아니올시다. 그런 일에 어머님이 보시는 눈은 놀랍게 밝습니다. 어머님의 소견을 말씀해 주세요."

"응, 그러면 내 본 대로, 내 마음대로 말하마. 그렇게 좌우 편에서 부른다면 아마 네게 아홉, 태자께 한 명― 어미 된 욕심에 이렇게 보고 싶지만, 네가 해모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이 나라 사람에게 알릴 만한 일이 네게는 아직 없어. 태자님도 인망은 적지만, 아버님(금와왕)의 인망이 있으니까, 너와 태자님이 좌우 편에서 부른다면, 아마 태자님께 기우는 이가 많으리라."

그리고, 아들의 얼굴에 어두운 표정이 나타나려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빨리 말을 계속하였다―.

"그따위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나 할 일을 한다는 생각 아래서, 내 믿음대로 크게 외치면, 나약한 태자보다 네게 돌붙는 사람이 많으리라."

때에 주몽의 나이 스물두 살― 인생의 가장 꿈 많고 희망 많고 야심 큰 혈기의 소년이었다. 자기의 근본과 계통과 역량에 대하여 굳은 자신이 있고, 게다가 현명한 어머니 유화 부인의 교훈이 있고 또한 여러 번 천우신조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자기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는 주몽이었다.

아직껏 자라기를 그러한 신념 아래서 자랐거니와, 그 신념은 나날이 커 가고 굳어 갔다.

더욱이 일전 어떤 날, 하루의 틈을 내어, 활과 살을 메고, 불함산 어떤 깊은 골짜기를 의미 없이 목적 없이 배회하다가, 한 동굴(洞窟)을 발견하고 그 속을 장난삼아 들어갔다가, 거기서 캄캄한 동굴 속에 살고있는 한 노인과만 나서, 그 노인과 꽤 한참을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에 주몽의 자신은 더욱 커졌다.

그 노인은 자기의 이름을 흰곰이라 하였다. 흰곰 노인은 스스로 자기의 나이를 몰랐다. 백 살이 썩 넘노라 하였다. 여든 살까지는 나이를 세었으나, 그 뒤부터는 귀찮아서 따지지 않지만, 그 뒤에도 여러 십 년이 지났으니 백 살은 넘었다. 해모수님이 임금인 적에 갑자기 세상사 허무한 생각이 들어, 이곳에 숨은 이래로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니, 그 뒤의 세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 노인에게서 주몽은, 막연히 역사 지식을 배웠다.

흰곰 노인은 주몽이 자기는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매, 반겨 절하며, 그러면 임금이냐 아니냐 물었다. 거기 대하여 주몽은 「아직 아니노라」 고 장차 임금 될 뜻을 암시하매, 노인은 주몽더러 어서 임금 되라고 권하며, 이 땅의 내력을 주몽에게 알려 주었다.

까마아득한 옛날, 단군왕검이라는 거룩한 어른이 생겨나서, 이 땅 백성에게 하늘과 해를 섬기는 법과, 부모며 웃어른을 존경하는 법과, 서로 욕심내고 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겸해서 밭 가는 법이며 온갖 제도를 안출해서 가르치어, 한 개 집단생활을 시작한 데서, 이 땅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이 종족은 이웃 종족보다 다른 문화 생활을 경영하며, 남쪽으로 북쪽으로 번식해 나가서 천오륙백 년 단군왕검에서 시작하여 단군 누구, 단군 누구 하는, 평화로운 세월이 계속된 뒤에, 저 서쪽 나라 중국 사람들이 차차 이 땅으로 침입해서, 그 사람들이 성을 쌓고, 군사를 기르고, 싸움을 하고 하여, 지금은 이 단군의 땅을 적지 않게 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

뿐더러 이 땅 사람들도 그 중국인에게 고약한 것을 배워서, 이전까지는 다만 임금의 아래서 착한 백성 노릇을 할밖에는 몰랐는데, 이 땅 사람들도, 지금은 여기저기 제각기 나라를 세우고, 나랏주인 노릇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옛날은 온 동방이 모두 단군임금의 터였었는데, 지금은 중국인에게도 꽤 크게 잘리고, 그 잘린 나머지의 땅에 여러 나라 여러 임금이 있는 형편이요, 지금 단군의 터로 남아 있는 것은 이 부여(扶餘) 근처 이천 리에 지나지 못한다.

흰곰 노인이 그냥 세상에 있을 때의 단군은 해모수임금이었다. 단군 해모수님은 사면으로 뜯기고 남은 작다란 터에 임금으로 오르셨다. 그러나 중국(지나)의 세력은, 요 조금 남은 터조차 연해연방 잠식해 들어가서, 이 꼴대로 가다가는, 단군 옛터는 씨도 없이 없어지고, 모두 중국 땅이 필시 될 것이다.

이런 것 다 보기 싫어서, 흰곰 노인은 세상을 버리고 이 깊은 산에 들어와 숨은 것이다.

"여보소 젊은이. 해모수님의 아드님. 이 땅의 한 포기의 풀, 한 덩이의 돌멩이가 모두 단군의 것이외다. 즉 당신의 것이외다. 동으로든 서로든 남으로 든 북으로든 몇천 리, 몇만 리, 서로 같은 말(言語)를 쓰고, 한가지 해와 하늘을 섬기고, 보통 때 흰옷을 입는 사람이 사는 데는 다 단군님의 땅, 즉 당신의 땅이외다. 거기 무색옷 입고, 말이 다른 사람들이, 활과 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흰옷 입은 사람을 구박하고 내쫓으오. 이게 하늘의 이치입니까.

왜 제 땅을 두고 남의 땅에 와서 그 땅 주인을 내쫓아? 보아하니 당신은 녹록하지 않소. 사람, 사내, 욕심이 있고 심술이 있고 패기와 뱃심이 있어야 하오. 당신은 눈썹 위에 두드러진 그 군살이, 한 번 심술부려 봄직하오. 내 땅 내 강산 찾아서, 내 백성과 같이 평안히 살아 보겠다는 생각도 냄직하오. 구태여 남의 땅까지 빼앗아서 무얼 하리요마는, 내 땅 남 주고, 좁은 데서 엉키어 살 것이야 또 무엇이오. 내 모르겠소마는, 젊은이 좀 잘 생각해 보시오."

흰곰이라는 노인은, 주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단군 해모수요, 단군왕검의 직손이며, 이 땅은 단군왕검의 땅이라는 것은 일찍부터 알았지만, 소위 「이 땅」이라는 것이 부여 일대만이 아니라, 몇천 리 밖의 광막한 지역이며, 현재 지나인에게 그 대부분이 빼앗기어 있다는 것은 처음으로 지적받은 바였다. 같은 흰옷을 입고, 해와 천지를 경배하는 습관을 가진 백성이 사는 곳은, 모두가 단군의 땅이라는 것도 새 지식이었다.

흰곰 노인과 작별하고, 산에서 내려올 동안 주몽의 가슴에는 무드기 자부심이 더하여졌다.

나는 이 땅의 주인이로다. 어서 주인의 자리에 올라앉아서, 중국인에게 빼앗긴 내 땅을 다 도로 찾아서, 내 백성과 함께 이 땅에서 즐기리라.

아무 마음에 남는 바 없지만, 어머니 홀로 남겨 두고 떠나기가 인정상 그래도 어려워서, 아직 그냥 주저하고 있는 주몽이었다.

그 어머니도 또한, 자식의 영광이 어미의 기쁨이니, 어미 걱정은 아예 말고 마음 가벼이 떠나라는 것이었다.


장도(壯途)

[편집]

이튿날 주몽은 안해 예씨를 가서 만났다. 그리고 자기는 혹은 가까운 장래에, 어디 먼 길 떠날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겸해서, 장차 예씨의 몸에서 나는 것이 사내거든, 내가 지금 여사여사한 곳에 무슨 물건을 감추어 두었으니, 그 물건을 얻어 내어 가지고 오는 자는, 내 아들로 알겠노라는 것을 말하고, 자기가 지금 떠나면, 장차 죽지 않으면 한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이니 뱃속의 아이가 사내거든 장차 왕자로서 부끄럽지 않을 교양을 베풀어 두라고 당부하였다.

주몽의 신분과 포부며 역량을 짐작하는 예씨는 부여 아낙의 억센 성격으로 부탁한 바를 애써 감당할 터이니 뒷 근심은 아주 말고, 큰 자리를 잡도록 노력하라고 지아비를 격려하여 작별하였다.

발발발 땅을 기는 과하마(果下馬)에 몸을 싣고, 지금 목장에서 기두를 「큰 미리」(혀에 바늘 꽂았던 붉은 말을 「큰 미리」라 이름 지었다)를 머리로 생각하며 목장까지 돌아오매, 오이 마리 합부의 세 사람은, 어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절하여 맞았다.

"잠깐 이리로―."

주몽을 청하여 뒤로 돌아갔다.

네 사람이 자리 잡고 앉아서, 오이가 동무들을 대표하여 말을 꺼내었다―.

"주몽님. 먼저 저희들이 아까 본 바를 말씀드리리다. 아까 태자궁에서 큰 돝을 한 마리 잡아 가겠지요. 그래서 처음은 그저 무심히 보았는데, 뒤로 태자궁 하인이 많은 화살을 소에 실어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행 우리들은 태자궁인들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슬며시 뒤를 밟았지요. 무슨 이야기들이라도 하나 들어 보려고. 그랬더니―."

태자궁인들은 오늘 한밥 잘 먹을 수가 생겼다고 좋다고 덤비면서도, 저희들끼리 걱정하는 것을 들어 판단한 바에 의지하건대, 태자궁에서는 오늘 밤 주몽을 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축하하고자 도야지 잡아 잔치하여 무사들을 한턱 먹인다는 것이다. 먹는 것은 좋지만 활쏘기에 귀신 이상인 주몽이라, 뒤가 켕기어 걱정들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태자가 점점 더 이러는 이상은, 이 땅에 더 있을 수 없고 더욱이 언제든 한 번 떠나기는 할 것이니, 이 기회에 오늘로 떠나자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유화 부인 남겨 두고 떠나자는 일이라, 주몽을 몰래 이리로 데려온 것이었다.

이 말을 들으면서 결심과 결단을 하였다. 어머니는 말리지 않을 것이다.

도로혀 어서 떠나라고 등 밀 것이다. 켕기는 아무것도 없는 이 땅을 어서 버리고, 희망과 광명의 명일을 맞으려 어서 오늘 저녁으로 그러면 떠나자.

주몽은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 하늘을 우러르는 그의 두 눈에는 차차 차차 빛이 더하여 갔다.

"내 잠깐 어머님께 하직하고 나올게― 그러고 떠납시다."

"어머님께 여쭤서 어머님이 말리지 않으시겠어요?"

"여쭈면 어서 가서 잘되라고 등 밀어 보내실 어머님이외다."

주몽의 마음은 꽤 설레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노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급기 떠나려고 보니, 마음은 걷잡을 수 없도록 설레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주몽은 안뜰로 돌아갔다.

안뜰로 돌아가매,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며, 어머니는 몸소 불에 고개를 굽고 있다가, 주몽이 들어오는 기수에 몸을 일으킨다. 함지박이며 큰 그릇에는 고기가 드북드북 담긴 품이, 소를 한 마리 잡은 모양이었다.

"어머님. 무슨 잔치라도 하십니까."

"오오, 너 오느냐. 잔치로다. 네 동무 세 사람 다 있지?"

"네. 이게 무슨 고기가―."

"그 사람들 좀 들어오라고 해라."

"무슨 고기가―."

"좌우간 어서 들어 오라거라."

주몽은 영문을 모르고 나와서, 오이 마리 합부의 세 동무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머님―."

"자, 나 따라들 오너라."

어머니는 소의 머리와 고기를 큰 소반에 받쳐 들고, 앞서서 후원으로 돌아갔다. 네 사람은 영문 모르고 잠자코 따라갔다.

뒤뜰에는 제단이 있다. 해를 제사하는 제단이었다.

제단 앞에 제물을 늘어놓고 유화 부인은 꿇어 절하며 기도드렸다.

"해님. 지금 이 네 아이가 먼 길 떠납니다. 그들― 더욱이 제 아들, 해모수님의 아들 주몽을 헤아려 복 많이 내려 주시옵소서. 가는 동안도 무슨 일 안 생기도록 살펴 주시옵소서."

기도를 끝내고 다시 절하고 유화 부인은 젊은이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 오늘 당장 길 떠나거라."

"네? 어머님, 어떻게 저희가 길 떠나려는 것을 아셨습니까?"

"오오. 너희도 길 떠나려고 했었느냐."

"네. 그래서 어머님께 하직차로 들어오던 길이옵니다."

"너희도 그랬다니 다행이로다. 오늘 태자궁 풍세가 괴상하기로, 아까 무당 불러 점쳐 보았더니 태자궁에선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그래 태자궁에서 돼지 잡아 잔치한다기, 나는 너를 위해 소를 잡아 제사하기로 한 게로다."

"어머님!"

"너희들 말도 배불리 먹여 두었다. 너희도, 이 제사 고기 튼튼히 먹고 어서 길 떠나거라."

"어머님!"

"먼 길 갈 터인데 어서 배를 채워라."

아들의 장도를 축복하기 위하여, 어머니는 손수 고기를 뜯어 젊은이들을 먹이었다. 한시바삐 떠나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이 어머니의 대접을 물시하기도 어렵고 먼길 떠남에 배도 튼튼히 하려고 어름어름 시간이 가는 동안에 해도 어언간 서산에 걸리었다.

그때 벌써 밖에는 수상한 기색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부의 기색을 가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역시 여인이었다. 밖에 나는 인기척이, 정녕 내 아들을 해하려는 사람들의 기척으로 판단이 될 때에 유화 부인은 한순간 얼굴이 창백하여졌다.

"왔구나― 벌써…."

네 젊은이의 안색도 한순간 변하였다. 그러나 한순간 뒤에는, 모두들 도로 천연하게 되었다.

"요거나 마저 먹고 갑시다."

"아 그럼요. 일껏 손수 만드신 맛있는 것을 남기고 가겠어요?"

"아들아. 무엇에 싸 가지고 어서 떠나려무나."

"염려 마세요. 어머님은 얼른 말들이나 좀씩 더 먹여주세요."

밖에서는 이 일대를 차차 포위하려는 모양이 분명한 가운데서, 네 젊은이는 음식들만 그냥 먹고 있었다.

이윽고 어머니가 말에 죽을 좀 더 먹이고 들어올 때에, 네 젊은이는 비로소 일어섰다.

"자, 어머님!"

"오오."

가벼이 말에 올라탔다.

"어머님!"

"오오."

"가겠습니다."

"성공하거라. 웃사람이 되거라!"

채찍 소리 날카롭게 나면서, 네 마리의 말의 발소리는 우렁차게 땅을 울렸다.

곧추 책을 향하여 달렸다. 책에 이르러 고비를 낚아챈 때에, 네 마리의 말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이 공중으로 날았다. 짐승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드높이 친 책이라, 네 마리의 말이 그 높은 책을 날아 넘는 광경은 진실로 훌륭하였다.

밖을 포위하고 안을 향하여 난사(亂射)하려고 채비하던 태자 수하인들은, 주몽 일행의 예기하지 않았던 탈출에 낭패하였다. 주몽 일행이 꽤 멀리 달려간 뒤에야, 태자 수하인들은 비로소 방침을 정하고, 주몽을 따르기 시작했다.

천하는 차차 황혼에 잠기기 비롯한 무렵이었다.

×

주몽의 일행 네 사람은 말을 남쪽으로 달렸다. 한참 달리다가야 비로소 뒤에 추격하는 무리가 있는 것을 알았다.

쫓기는 무리는 엄호수(淹琥水) 가에까지 이르렀다. 거기는 나룻가라, 으례히 나룻배가 있을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불행 배들은 강 건너쪽에 다 가 있고, 이쪽에는 한 척도 없었다.

네 사람이 함께 고함지르면 혹은, 강 건너까지 들릴지 모르나, 그렇게 하여서 배를 부를 동안은, 쫓는 무리가 이곳까지 이를 것이다.

날은 차차 어두워 가는데, 여기서 길이 끊긴 네 사람은, 말머리를 모으고 탄식하였다. 귀를 기울이면 저편 쪽에서는, 쫓는 무리들의 말 발소리가 요란스러이 나는 품이, 벌써 컴컴하여 보이지는 않으나 그다지 멀리 떨어진 것 같지도 않다.

부여 궁중 같으면 모르지만 외딴 이곳에서 태자 수하인 일행에게 붙들리기만 하면, 반드시 해를 볼 것이다. 그렇다고 앞에는 큰 물 막혔으니 어디 다른 데로 피할 수도 없는 이 막다른 곳에서, 어떻게 이 액화를 면하는가.

차차 더 가까이 더 똑똑하여 가는 추격자의 말발 소리를 들으며, 주몽은 강을 향하여 돌아섰다. 시커먼 물이 소리를 치며 앞을 흐르고 있다.

주몽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늘은 무얼 하시는가. 하늘의 아들, 하백(河伯)의 외손(外孫)이 엄호수 가에 길이 막혀, 진퇴유곡이로소이다. 우리를 살리소서."

뒤로는 쫓는 무리에게 쫓기고, 앞으로 큰물에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하늘에 호소할 때에 앞의 시커먼 물에서는 홀연히 이상한 소리― 동요가 있었다.

출렁출렁, 철썩철썩 온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소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천만 마리의 어별(魚鼈)의 총집결로써, 한 개의 다리[橋深]가 홀연히 이루어졌다.

하늘의 도우심, 하백의 호의에, 못내 감사하며, 네 사람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 네 사람이 다 건너자 다리는 풀려 잠겨서, 벌써 이 다리에까지 뒤미쳐서 다리에 올랐던 태자의 수하인들은, 적지 않게 물에 빠졌다.

엄호수를 어별의 도움으로 무사히 건넌 네 사람은, 밤을 도와서 길을 갔다. 강 건너는 모두 돌 뿌중다리와 벼랑뿐으로 여간 험준하지 않았다. 그들이 탄 말이 좋기에 말이지, 좀체의 말로서는, 더욱이 이런 캄캄한 밤중의 산길은 갈 수가 없었다.

일행은 이튿날 동틀녘에 조금 평평한 땅에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몸을 쉬며, 아침 동편 산봉우리로 솟아오르는 해를 경배하고, 장차 취할 일을 의논하려 하다가, 거기서 또한 우연히 새 동무 셋을 얻었다.

그 새 동무 셋에게 각각 성(姓)을 주고, 자기가 장차 일으키려는 위엄을 말하여 주어, 협력해 주기를 청할 때에, 그들은, 죽도록 변함없이 있는 힘 다 쓰겠다고 맹서하였다.

주몽은 막하 여섯 사람을 데리고, 졸본내(卒本川)까지 이르렀다. 거기 이를 동안 「단군 해모수의 아들 주몽이, 조상 왕검의 끼치신 업을 일으키고자 마땅한 땅을 찾아간다」는 소문이 백성들 새에 차차 퍼져서, 꽤 많은 무리가 주몽의 뒤를 따랐다.

졸본 땅에 이르러 보매, 넓지는 못하나마 땅이 기름지고 산천이 아름답고 험준하여, 가히 머물러 있을 만하므로, 미처 궁궐을 새로 일으킬 겨를도 없이, 천하에 건국을 외쳐 알렸다.

나라의 이름은 그 땅이 고구려(高句麗) 현(縣)에 속하므로 「고구려(高句麗)」 나라라 하였다. 주몽의 그때의 나이가 스물둘이요, 지나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이년 이른 봄이었다.


민족국가

[편집]

주몽이 고구려 나라를 세울 때까지의 천하의 형세는 어떠하였는가.

지나 땅에는 지금 「지나」라 일컫는 종족이 벌써 삼천여 년 전부터 국가 형태를 이룩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일천 년 뒤에, 동방에는 단군왕검이 동방 종족을 모아서 「조선」이란 나라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지나인의 나라나 조선 나라나 모두가 튼튼한 왕권(王權)을 가지고, 백성을 통제하고 다스린 바가 아니요, 덕으로써 자기 세력범위 안의 백성을 화하는 뿐이었다.

그런데 지나인의 영토 주변에는 여러 가지의 오랑캐가 있어서, 부단히 지나를 침노하였다. 따라서 지나인은 자연히 전쟁이라는 수법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조선에는 단군의 세상이 그냥 계속될 동안, 지나에는 몇 개의 왕조(王朝)가 생겼다가는 없어지고 생겼다가는 망하고 하여, 그때는 은(殷)이라는 왕조가 생겼다가 또한 주(周) 왕조에게 망하였다.

지나의 은(殷)의 왕족인 기자(자서여)라는 사람이, 어지러운 지나땅을 도망하여 조선 땅 서편 끝 요(遼) 지방에 피난하여 왔다. 그러매 지나땅에 새로 생긴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기자를 조선후(朝鮮侯)로 봉하였다.

태고적 인심 후한 시절이라 조선의 주인인 단군 후손은, 서편 한 모롱이에 지나인 기자가 부하 오천여 명을 데리고 온 것을 그냥 방임해 두었다.

기자 일행은 처음 요서(遼西) 땅으로 들어와서, 차차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했다. 전쟁을 모르고 남과의 시비를 싫어하는 단군 후손과, 단군 백성인 조선 사람은 차차 뒤로 쫓기고, 나라 이름 「조선」까지도 기자 후손에게 빼앗겼다.

이리하여 단군 백성은, 차차 압축되어 동쪽으로 쫓기고 남쪽으로 쫓기는 동안, 기자 후손들은 「조선」이라는 칭호를 자기네가 쓰고, 단군민족을 쫓으며 차차 자기네의 식민지를 넓혀, 조선반도로까지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반도의 북부와 중부는 기자 후손에게 강탈당하고, 단군민족은 허리를 끊겨, 두 토막이 되었다.

그동안 지나는 전국(戰國)시대라 춘추(春秋)시대라, 숱한 파란을 지나서 진(秦) 나라에 생기면서야 온 지나땅을 한 덩어리로 한 임금의 아래 뭉치었다.

따로이 동쪽으로 갈려온 기자 후손은 순진한 백성(조선 토민)을 손안에 넣고, 태평 무사히 본국의 풍파를 대안(對岸)의 불로 방관하며 지냈다.

지나에서는 진(秦)나라도 몇 해 못 가서 망하고 한(漢)나라이 섰다. 그 한(漢) 왕조 때에 위만(衛滿)이라는 지나인이, 조선 땅에 와서, 기자 후손을 내쫓고 위만 자신이 왕이 되었다.

지나의 주(周) 왕조며 진(秦) 왕조는, 어느 하가에, 조선까지 참견할 겨를이 없었지만, 한(漢)이 서서 한동안 지나서, 좀 기초가 잡히자, 멀리 단군 옛 터에도 용훼하고자, 또는 단군 백성의 세력범위를 교란하고자 공작하였다.

반심(叛心) 있음직한 사람을 골라서, 혹은 예(濊)라, 맥(貊)이라, 옥저(沃沮)라, 지나의 분봉국(分封國)을 세우며, 기자 이후 내내 간섭을 못하였던 위(衛) 씨의 나라는 없이하고, 그 땅에다 간섭을 시작했다. 낙랑(樂浪) 등 네 군(郡)을 두었다.

지나인에게 허리 끊겨 남쪽에 갈린 단군 백성은, 한(韓)이라 일컫고 있었는데, 위만에게 쫓긴 기자 후손이 이곳에 밀려와서 두 번째 단군 백성을 괴롭혔다. 즉 지나인 끼리끼리 다툰 것이었다. 이 한(韓)땅의 일부인 마한(馬韓)에 위만에게 쫓긴 기자 후손이 뛰쳐 와서, 스스로 마한왕이 되었다.

단군의 후손과 단군 백성의 대부분은, 지나인(기자 후손)에게 뜯기고 남은 겨우 수천 리의 땅에 「부여(扶餘)」라 일컬으며, 겨우 잔명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나, 아주 참담한 형태로서, 여러 작은 나라가 갈려 나가고, 또한 문화(文化)에 좀 덜 멱감은 종족(숙신, 읍루 등)도 있어서, 이러다가는 단군 백성이라는 것은 아주 없어지지나 않을까 의심될 지경이었다.

이런 때에, 단군 후손 고주몽이 단군 나라 재건을 외치며 일어선 것이었다.

처음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실 때와 달라, 이때는, 종족과 종족의 대립 관계로, 민족의식도 생기고, 민도도 발달되고, 학술과 온갖 기술도 꽤 높아진 때였다.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못한 시절이라, 글이 널리 민간에까지 퍼지지는 못하였지만, 상류사회에 이 나라 독자의 글이며, 한문도 간간 사용되는 형편이었고, 농구(農具)를 만들기 위하여 철광(鐵鑛)이 개발되고, 금은보석을 몸에 장식하고, 비단을 짜 입고, 꽤 고등한 문화생활을 경영하는 때였다.

더욱이 또한 단군 백성보다 먼저 문화 세상에 들어선 지나인들이, 전국시대며 춘추시대 등의 제 나라의 어지러운 판국에 살기가 힘들어, 동방에는 낙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육속부절 동방으로 피난해서 오기 때문에, 그들이 지니고 온 문화 재산에 단군 백성도 적지 않게 배운 바 있어, 그들(지나인)의 문화를 참고하여 발전된, 불함(不咸) 문화의 꽃은, 어지러운 지나 판국보다 훨씬 더 찬란하게 피어 있었다.

고구려 나라는 이러한 판국에 이러한 때에 생겨난 것이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우수한 민족이면서도, 무력(武力)적으로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차차 쇠미해 들어가는 현상을 개탄하는 충분한 자각과 포부를 가지고, 용감하게 동방 천지에 고함치며 일어섰다.

이 젊고 용감하고 현명한 임금을 사모하여, 백성은 나날이 모여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서울은 커다란 도시를 이루었다.


비류국(沸流國)

[편집]

고구려 나라는 이렇듯 주몽왕의 손으로 이룩하여졌다.

아직 동부여에 있을 때에 만난 세 동무, 오이 마리 합부는 새 나라의 터를 넓히는 데 가장 긴한 장수로 삼았다.

졸본땅에서 만난 세 동무― 극재사(克再思) 중실무골(仲室武骨) 소실묵거(少室默居)― 는 새 나라의 행정 방면의 좋은 기술자로 썼다.

그러나 새 나라의 국토(영토)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는 것은, 새 나라 주인인 주몽왕도 몰랐다. 산곡 간에 좀 평평한 빈 땅이 있으니 거기 도읍하고 칭국칭왕(稱國稱王)을 했고, 주몽왕을 사모하여 백성은 꽤 모여들었지만, 궁궐도 없이 막을 틀고 우선 거기 거처하며 우선 모여든 백성 가운데서 인재를 골라내어 소임을 맡기며, 이제부터 나라를 꾸려 나가려는 것이었다.

먼저, 나라의 정사를 보며 임금이 거처할 궁궐부터 짓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은 마치 저희들의 집이나 짓는 듯, 성의의 힘을 다하여 주몽왕을 위하여 웅대한 대궐을 짓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좋은 주인을 얻어 섬기고자 천하를 돌아다녀, 많은 대궐이며 큰 집을 본 일이 있는 오이 합부 마리의 세 사람은, 자기네의 지식을 털어 목수들에게 협력하였다.

극씨, 중실씨, 소실씨의 세 사람은 나라 근처의 형세를 보러 늘 나다녔다.

나라이 선 뒤에, 새로 부분노(扶芬奴)라는 장수가 하나 또 생겼다.

이 신하들은 주몽왕께 대하여 한결같이 변함없는 충성을 보였다. 그들의 의견에 따라서, 임금이 거둥이라도 할 때에는, 위의(僞儀)를 갖추기 위하여 고각(鼓角)이 필요하다 하여, 고각과 및 임금이 탈 수레를 마련하였다.

수레와 고각의 준비가 된 뒤에, 주몽왕은 종신 몇 명을 데리고 민정 순찰의 거둥을 하였다.

고각이 요량히 울리고, 새로 지은 수레가 종신들의 호위 아래 임금의 시어소를 떠날 때에, 그 수레 위에 높이 앉은 젊은 임금의 마음은, 매우 흡족하였다. 동시에, 이 영화로운 모양을 지금 부여에 쓸쓸히 혼자 계실 어머님 유화 부인께 한 번 보여 드리고 싶었다.

부여의 어머님은 아직도 그 아드님이 임금이 된 줄도 모르고 혼자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부여 금와왕보다 훨씬 대규모의 고각과 더 찬란한 수레의 주인으로, 아래는 벌써 백성도 달리고, 웅대한 대궐도 영조중인 줄을 알지 못하고, 그냥 아드님의 신상만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 임금을 사모하는 백성은 남녀노소 벌써 몇천 명이, 노부를 따라오며 우리 임금 만만세를 부르고 있다.

절기는 봄이었다.

북국 산간에도 봄은 찾아와서, 온갖 기화요초가 봄을 찬송하고, 알지 못할 나비와 새의 떼는 하늘을 날며, 역시 백성들과 함께 이 임금 만만세를 부르는 듯하였다.

노부(鹵簿)는 봄날의 교외로 나섰다. 따르는 백성의 수효는 꽤 기다란 줄을 이루었다.

주몽왕의 수레의 곧 뒤를 따르던 중실씨가, 이때 임금의 수레 가까이로 왔다.

"나랏님. 저 뒤따르던 소민(小民)들이 자기네끼리의 이야기를 듣잡건대, 이 길로 하룻길 남짓이 더 가면, 무어라나 하는 다른 나라 서울이 된다옵니다."

"이 길로?"

"네이."

왕은 머리를 기울였다.

"그 백성을 이리로 좀 데려오오."

수레를 멈추고 분부하였다.

중실씨가 데려온 백성은, 터럭이 허연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황공한 듯이 임금 앞에 엎디었다. 엎디기는 엎디었지만, 임금의 용안을 한순간이나마 우러러 뵙고자, 이상하게 몸을 비틀며, 곁눈을 번득인다.

그 백성의 뜻을 알아본 주몽왕은, 용안을 약간 앞으로 내밀며,

"이 백성아, 마음대로 쳐다보아라."

고 허락하였다.

백성은 한순간 눈이 부신 듯이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그러고는 참으로 감격한 듯이 도로 얼굴을 땅에 부비었다.

"여기서 하룻길 남짓한 데, 다른 나라이 있다고?"

"네이."

"무엇이라는 나라이며 임금님은 누구시냐?"

"네이. 비류(沸流)라는 나라이옵고, 그 나라 나랏님은, 송양(松讓)님이라 한다옵니다."

"그 나라는 가멸으냐."

나처럼 수레도 있고 고각도 있느냐고 묻고 싶은 말을 이렇게 물었다.

"가멸은지 가난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선 지― 생긴 지 오랜 나라이냐?"

"네이. 꽤 오래다고 생각하옵니다."

"어째서?"

"소민의 할미가 그 나라에서 시집왔다 하옵니다."

한번 가 보고 싶었다. 그 나라 임금과 만나 보고 싶었다. 부여 궁실에서 자랐으매, 임금의 일상생활의 모양이며, 또는 신하며 백성에게 대하는 임금의 태도 등은 익히 아는 배지만, 나도 한 개의 임금으로서 이웃 나라 임금과 대해 보고 싶었다.

곁에 모시고 서 있는 중실씨를 돌아보며 분부하였다―.

"이 길로 그 비류라는 나라에나 가 봅시다그려. 멀지도 않으니…. 저 따르는 백성들은, 떨어지고 싶은 자는 여기서 떨어지라고 하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주저하거나 밀거나 하지 않는 주몽왕은 이 길로 곧 비류국이라는 나라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한 사신(使臣)은 한발 먼저 비류국으로 달려갔다. 비류국 임금께, 고구려국 임금이 찾아온다는 뜻을 알리고자―.

한 사신(使臣)은 도로 뒤로 달렸다. 임금이며, 따르는 백성들이 비류국까지 갈 동안, 시장기를 면할 음식을 준비하고자―.

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며, 산곡 간에 고각의 소리를 울리면서, 주몽왕의 일행은 비류국으로 길을 더듬었다. 첫날은 길이 늦어 노영(露營)하였다.

먼저 달려간 사신의 예통으로, 비류국 임금 송양이 시신들을 거느리고, 역시 고각을 울리며 중도까지 주몽왕을 맞은 것은, 이튿날 점심때쯤이었다.

임금과 임금의 상대는 주몽왕에게도 처음이요 송양왕에게도 처음이었다.

서로 만나기는 하였지만, 어떤 격식을 하여얄지 서로 몰랐다. 서로 수레에서 내리어서 한 무릎 꿇어 상례하고, 송양왕이 먼저 주인의 체면으로 인사하였다―.

"이 산간벽지에 아직 거룩한 이를 못 보았는데, 오늘 뜻밖에 높은 분을 맞게 되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소리까. 누추하지만 이 사람의 궁까지 같이 가십시다."

비류 나라의 백성들도, 이웃 나라 임금이 온다 하여, 많이 구경 겸 중로에 나와 맞았다.

두 임금은 각기 자기의 수레에 올라탔다. 두 임금이 수레를 나란히 하여 비류 궁궐에 든 때는, 벌써 날이 어두운 뒤였다.

날도 어둡고, 피곤하기도 하니, 이 밤은, 우선 저녁만 얻어먹고는 자리에 들었다.

나라는 가멸지 못하고 가난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라이 선 지는 오랜 모양으로, 온갖 기구가 다 탄탄하고 자리잡히고, 나라 안에서 황금과 보석이 산출되는 모양으로, 보석으로 장식하고 금으로 꾸민 물건이 사면에 번득이었다.

대궐도 웅대하지는 못하나, 쓸모 있게 꾸미었으며, 나라 주인의 체면을 유지할 만한 위의도 있었다.

장차 이 비류 나라도 삼켜 버려서 온 동방을 한 덩어리로 만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는 주몽왕은, 주의 깊게 사위를 관찰하였다.

이튿날 아침 두 임금은 마주 앉았다.

"과인은, 왕검님의 꼭지요 해모수님의 아들 고주몽이라 합니다. 부조(父祖)의 업을 이어, 이 동방을 과인의 품 안에 넣으려 하오."

주몽왕이 이렇게 말하매, 송양왕은 잠시 생각해 본 뒤에 말하였다―.

"이 땅― 고장이 협소해서, 두 임금을 용납하지 못할 터이니, 그러면 젊으신 이는 이 사람의 아래서 지내주시오."

당찮은 말이었다. 이 비류국도 장차 삼키려는 주몽왕에게 도리어 송양왕은 주몽왕더러 내 아래 들라 한다.

"젊으신 이는 나이도 나보다 젊거니와, (송양왕은 마흔댓쯤으로 보였다) 나라를 이룩한 지도 겨우 엊그제니, 좁은 바닥에서 두 나라이 옥신각신하느니, 합쳐서 한 개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소."

그리고 말을 이어서,

"이 사람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는데, 아비의 자랑이 아니라, 인물도 얌전하거니와 아주 영민하오. 젊으신 이를 보니, 사람됨이 비범하고 그 마음보가 또 커 인물이 욕심나. 그러니까 이 사람의 사위가 되었다가 이 사람 죽은 뒤에, 이 사람의 뒤를 이어서 나라 주인이 되는 것이 어떻겠소? 좁은 바닥에서 두 사람이 옥신각신 다투느니,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한다.

주몽왕은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피하며 속으로 생각하였다.

어차피 장차는 이 나라도 삼키기는 할 것이지만, 고구려가 무력(武力)으로 이 나라를 삼키기까지 자라자면, 아직 한동안 있어야 할 것이다. 한동안 나라를 키워가지고, 힘으로 이 나라를 삼킬 것인가.

또는, 이 나라에 장가들어 친선 관계를 맺어가지고, 기회 보아 술책으로 삼킬 것인가.

혹은 이 나라 사위(상속인)가 되었다가 송양왕 승하한 뒤에, 나라를 물려받을 것인가.

×

그 날 송양왕은 주몽왕을 환대하는 뜻으로, 함께 산곡에 사냥을 하였다.

송양왕과 그 시신, 주몽왕과 그 종신, 이렇게 편을 갈라서 내기 사냥을 하기로 하였다.

오이 마리 합부의 세 무장(武將)이 있고, 게다가 활쏘기에 귀신 이상인 주몽이 있는지라, 주몽왕 측은 삽시간에 놀랄 만치 많은 짐승을 잡았다. 그러고는, 송양왕 측을 놀라게 하고자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산 채로 잡아 결박지어 놓고, 이만하면 송양왕 측이 며칠을 사냥할지라도 이만치는 못 잡으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주몽왕은, 극씨, 중실씨, 소실씨 등 지혜의 신하며, 오이 마리 합부 부분노 등의 무용(武勇)의 신하를 이끌고, 조용하고 외딴곳을 찾아 거기 둘러앉았다. 신하들과 의논할 일을 조용히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주몽왕은 신하들에게 아까 송양왕이 한 이야기를 다 피력하고, 여기서 주몽왕으로서는 어떤 길을 취해야 할까고 의견을 물었다.

무장 측의 의견은, 이 비류국을 둘러엎고 송양왕을 들쳐 내자는 것이었다.

자기네 몇 사람만이면 요맛 나라는 둘러 엎기 여반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사(謀士)측의 의견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주몽왕이 이 나라에 장가들어서, 가정적으로 연결되고, 그러는 동안에 이 나라 왕실과 백성에 공작하여, 주몽왕은 왕검님의 후손이요 해모수님의 아드님이라는 점을 비류 백성에게 밝혀서 비류국 백성의 마음부터 흔들어 놓고, 경우에 따라 공작하여 이 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스스로 나라를 들어 주몽왕께 바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무사 측의 의견은 무사답게 용감스럽기는 하지만, 모사 측의 의견이야말로 주몽왕 몸소의 의견과 부합되었다.

주몽왕은 우선 이 나라에 장가들기로 방침을 정하고, 의논을 끝냈다.

내기 사냥에 따로이 갈렸던 송양왕의 일행은 저녁때쯤 그들의 잡은 짐승을 가지고, 약속하였던 고장으로 모이었다. 그들이 종일 잡은 짐승은 겨우 노루 몇 마리, 토끼 몇 마리, 도야지 몇 마리뿐이었다. 그들은 주몽왕 일행의 잡은 묏더미 만한 많은 짐승에 먼저 놀라고, 이어서 생금하여 결박지어 둔 호랑이에 입들을 딱 벌렸다.

그날 저녁, 사냥해 잡은 짐승으로 잔치하며 주몽왕은 송양왕에게 은근히 말하였다―.

"아까 말씀에, 과인(寡人)이 젊었으며 과인의 나라 고구려가 비류 나라보다 뒤에 생겼으니, 비류 나라에 와서 합치라 하셨지만, 과인은 왕검님의 후손이요, 하늘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이요, 조선 천지의 우두머리의 주인이니까 비류 나라가 없어지며 고구려 나라에 합쳐야 천리(天理)일까 합니다. 과인의 신하들을 꾸짖어 비류 나라를 고구려 나라에 합치려면 어렵잖은 일이지만, 과인이 비류 나라의 사위 될 생각도 있고, 늙으신 이를 억지로 몰아내기도 인정에 어려워, 시재는 그냥 두고, 늙으신 이가 언제든 마음 다시 잡기를 기다립니다. 천리를 따라, 비류 나라는 멀지 않아 고구려 나라를 합치게 될 것입니다. 우선 따님은 과인에게 주십시오."

태도는 은근하나, 적지 않게 위협미를 띤 말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주몽왕은 송양왕의 딸 소서노(召西奴)를 왕후로 맞았다.

또 며칠 더 뒤에는, 송양왕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게 바치고, 주몽왕의 봉작(封爵)으로 비류태수(沸流太守)가 되었다.

주몽왕은 해모수님의 아들이요 왕검님의 후손으로, 지금 고구려 나라를 세우고, 왕검님의 옛터를 회복하고 옛 백성을 부른다는 소문이 차차 높아서, 여기 거슬렀다가는 천의(天意)를 거스르는 일이라, 반드시 천견이 있다는 소문과 동시에, 비류 백성의 마음이 동요되고, 고구려에 돌아 붙는 백성이 많이 생기고, 이 때문에 나라의 기초도 흔들리는 위에, 주몽왕의 유세객(遊說客)이 송양왕을 달래고 위협하여, 송양왕으로 하여금 나라를 들어 주몽왕에게 바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비류 나라를 힘 안 들이고 집어삼키었다. 나라를 들어 바치기 때문에 송양은, 제 고장에 무사히 그냥 주저앉아서, 고구려 나라의 다물(多勿) 태수가 되었다.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방언에 「다물」이라 한다. 부조(父祖)의 옛터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고 「다물」이라 한 것이다.

×

왕후를 맞고, 비류국을 합병하고 한 그때는, 고구려의 궁궐(졸본)도 정전과 내전은 되어서, 고구려 국가의, 국가로서의 체재도 좀 정비가 되었다.

이 임금을 사모하여 모여든 백성이 벌써 한 도시를 이룩하기에 넉넉하므로, 주몽왕은 장신(將臣)들에게 분부하여, 거기서 젊은 장정을 추려내어서, 군대를 조직하여 무술을 훈련하게 하였다. 나라를 크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구획을 그어 서울의 도시계획을 진척시키며, 온갖 장인바치를 불러들여 서울을 장식하며, 의(醫)와 무(巫)와 농(農)의 능한 자를 불러 들여 민생을 편케 하며, 각가지의 제도를 세우며― 단지 요 졸본 일대가 아니라, 장차 온 동방을 지배할 대고구려 나라를 목표로 꾸려 나갔다. 극씨, 중실씨, 소실씨 등의 세 「행정 기술자」는 그들의 슬기로운 머리를 들어 나라에 기울였다.

고구려 나라는, 북쪽으로는 강을 건너서 저편에 동부여며 북부여 나라가 있다. 부여는, 성조 「단군」의 법통을 이은 나라라, 이웃의 군소 국가들(지나인의 세력 범위에 들지 않은)은 부여에 조헌(朝獻)하고, 부여는 은연히 「큰집」 같은 지위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지나인의 영토인 낙랑 현토 등 지방이 있다. 그밖에는 그새 왕권이 쇠약할 동안에, 근처의 토호(土豪)들이 세운 조그마큼씩한 나라이 부지기수였다. 이 부락 국가들에게 대하여, 연해 고구려 나라의 사신이 갔다. 즉 너희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치고, 너희는 각각 제 고장에 다물(多勿) 태수가 되라고 권하는 권유사였다. 이 권유에 따라서 많은 국가군이 싸우지 않고 고구려의 날개 아래 들어왔다.

말로 권유하여 날개 아래 들지 않는 국가는 장차 힘 길러 정복할 것이었다. 이 불손 국가들을 복멸하고 겸해서 조선 땅 안에 들어와 있는 지나 세력을 복멸하기를 목표로 하는 고구려의 양병은 규모도 크거니와 또한 실력을 위주하였다.

신흥 국가의 기백― 게다가 해모수의 아들의 나라라는 자긍과 포부가 있는지라, 온 백성의 열성도 그만치 컸다.

고구려 서울에 들어서서 보면, 무슨 큰 공사장 같았다. 모두 씩씩한 사람들이 쌓고 깎고 다듬고, 노래와 춤추기를 즐겨 하는 민족이라, 사면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열심히 일을 한다.

성(城)도 드높이 쌓기 시작하였다.

상서로운 징조가 연하여 나타나서, 새 나라의 건국을 축복하는 듯― 골령(鶻嶺)에는 황룡(黃龍)이 나타나고, 그 앞에는 서운(瑞雲)이 서리고, 대궐 뜰에는 신작(神雀)과 두루미가 와서 춤추고, 만물이 이 새 나라를 축복하는 듯하였다.

그 시월 초사흘(이 날은 단군이 업을 일으키신 날로, 과거 천여 년간 동방 민족이 섬기는― 고구려 나라의 가장 큰 절일이다)― 이 민족의 습관대로 임금과 온 백성이 함께 모여, 크게 하늘에 제사하였다. 그 천제(天祭) 날에는 멀리 비류(沸流) 송양 태수까지 와서 함께 즐겁게 제사 드렸다.

×

고구려 나라는 활발하고 순조롭게 자랐다. 젊고 용감하고 슬기로운 임금과, 날쌔고 굳세고 충성된 백성으로 조직되어, 그 국토는 저절로 넓어 가고, 백성은 늘어 가고, 국본은 튼튼해 갔다.

주몽왕이 왕후(본시 비류왕이었던 송양의 따님)를 맞은 이듬해, 왕후는 왕자를 탄생하였다. 여러 가지의 인연을 따져서, 왕자의 이름을 비류(沸流)라 하였다.

비류 왕자가 탄생된 다음다음 해에 또 왕자가 탄생되었다. 이름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주몽왕은 이 나라 백성에게는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였다. 온 동방에 퍼진, 주몽왕의 출생 전설과 생장 전설이 모두 신비하였더니만치, 고구려 백성들은 자기네의 임금을 거룩한 검으로 섬기었다. 두고두고 대대손손 이 「천제(天帝)의 아들 하백(河伯)의 외손(外孫) 고주몽님의 나라, 고구려 백성이노라」고 자랑하고 뽐낸 고구려 사람의 민족적 자랑은 주몽왕 초년 때부터 고구려 백성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었다.

신하들은 진실로 잘 협좌하였다. 모신(謀臣)은 지혜로, 무신(武臣)은 국토 확장과 국방에─

본시 이 나라 백성의 체력(體力)은 놀랍게 세다. 제사에 쓰려고 잡아온 멧도야지 같은 것이 어쩌다가 도망치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빈손으로 그 도야지를 쫓아가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몇십리 내지 백여리까지라도 따라가서 도로 잡아 오고야 마느니만치 날래고 힘세었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였다. 열다섯 살부터 마흔 살까지의 사내는 누구를 막론하고 다 한 번 병역(兵役)을 치러야 하는 제도를 세웠는지라, 병졸이 벌써 몇만 명을 넘었다.

장차 대고구려를 목표로 한 양병이라, 얼마 많을지라도 과하달 수 없지만, 지금의 병졸만으로도 움직이기만 하면 넉넉히 동방 천지를 긁어 안을 만한 강하고 날랜 병졸이었다.

말[馬]도 여러 만 마리가 장만되었다.

짐승의 가죽과 구리[銅]를 사용하여, 방패며 투구며 갑옷도 많이 장만하였다. 경험에 의지하여 생겨난 지식의 산물이었다.

이 나라 백성이 즐기는 춤[舞]에 흥을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악기(樂器)도 발명되었다. 그 악기는 또한 제사 드릴 때며, 짐승 사냥할 때에도 울리었다.

왕검님 시대부터 문화 방면에 머리가 트인 민족이라, 온갖 방면으로 편리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방법을 안출하여서 이용하였다.

이 나라의 근처를 통과하는 지나인을 포로로 잡아다가, 지나인이 먼저 개척한 것도 흡수하여, 이 나라 국민성에 맞도록 고치어서 이용하는 것도 퍽이나 많았다. 그런 필요상, 지나 계통의 인종으로 이 나라에 포로로 되어 종[奴僕]살이 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무기(武器)제작과 양병(養兵)은 매우 급급히 하였다.

×

이 나라 장수들과 이 나라 병졸들과 이 나라 말을 가지고, 조상의 옛터를 회복하여, 그 백성들과 함께 즐기려는 주몽왕의 큰 이상(理想)은 차차 진행되어, 지금 바야흐로 포화 상태가 되었다. 벋는 힘을 어디로든 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스스로 폭발이라도 할 만치, 고구려는 국가적으로 팽팽 긴장되었다. 부르쥔 주먹 내려칠 곳이 없어서 안달아 하는 긴장한 국가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고구려는 행인국(荇人國) 원정을 하였다.

행인국이라는 나라는 태백산 동남쪽 기슭에 있었다. 고구려에서 좀 거리가 멀기도 하거니와, 온 나라이 통 험한 산에 둘러싸이어 있어, 국방이 튼튼하고, 백성이 또한 산골 사람이라 효용하기 때문에 스스로 믿는 바이 있어서, 고구려 나라에서 그새 누차 달래 보았지만, 굴하지 안 하고 자기네의 독립을 고집하고 있었다.

옛터를 전부 다시 품 안에 넣으려는 고구려의 대방침에는 배치되는 바이었지만, 좀 멀리 있고 게다가 고구려는 아직 양병 도중이므로, 괘씸하다 보기만 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괘씸한 도는 차차 더해 가서, 고구려 영토와 연접한 지역(지금은, 서울에서는 꽤 먼 데까지가 고구려의 영토였다)까지 행인국 사람이 간간 들어오는 일이 있고, 「하늘의 아들 하백의 외손 고주몽님의 나라」라는 것을 자랑하면, 행인국인은 그것을 코웃음쳐 버리고 한다.

주몽왕의 무장들은 연해 행인국 정벌을 임금께 진언했지만, 주몽왕으로서는 그 치중(輜重) 문제 등으로 아직 버려두었던 것이었다.

고구려 나라이 선 지 제육 년째 되는 해에, 드디어 행인국을 복멸할 원정군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 건국 이래 첫 번 원정에 주몽왕이 베푼 꾀는 단순한 것이었다.

행인국은 본시 하도 벽지의 험준한 곳에 있으니, 산간벽지라 그 국민이 죄 사냥을 업으로 하므로 날래고 활쏘기에는 능할지 모르나,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받은 병대는 없는 나라이니까, 전쟁에는 아주 무능할 것이다. 군대라는 것은 없고, 사냥꾼이 즉, 국방군이니까….

그런 나라를 상대로 하는 바이라, 전쟁 잘할 필요는 없고, 이 고구려의 북과 쟁과 소라를 몇백 틀 가지고 그 나라 국경까지 가서, 고각을 소란하게 울리면, 그 나라 임금 백성을 막론하고, 이 평생 처음 듣는 소란에 혼비백산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야단일 터이니, 그 틈을 타서 날랜 군사를 뛰쳐 들게 하여, 그 나라 임금을 사로잡고, 성과 궁궐(그런 것이 있다 하면)을 점령하면 힘 안 들이고 그 나라를 둘러 엎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나라를 점령하고는 그 나라 백성을 사로잡아 이곳(졸본 서울)으로 옮겨서, 고구려 혼을 길러 주고, 이 나라(고구려) 백성을 얼마 그 땅에 옮겨, 그 땅을 고구려화(化)하고― 이렇게 하도록 하라는 것이 주몽왕의 지휘였다.

서로 경쟁하여 이 전쟁에 나가겠다는 장수들 가운데서, 오이와 부분노를 뽑아서 보냈다. 고각을 울리기에 능한 군졸 일천 명과 고각 일천 틀을 함께 보냈다.

나라 선 이래 첫 번의 원정이라, 주몽왕도 십리 밖까지 이 장졸을 배웅하였다. 연변의 백성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길가까지 나와서, 이 용감한 원정군을 보냈다.

이기고 돌아올 것을 서로 굳게 믿는 바이라,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한결같이 웃음으로 보내고 떠났다.

원정군이 떠난 며칠 뒤에, 임금은 정무관(政務官)으로 극(克)씨를 뒤따라 보냈다. 그 나라(행인국)를 둘러 엎은 뒤에, 행인국의 전 임금을 주몽왕의 이름으로 그곳 태수로 봉하고, 그곳 토민들을 교환할 책무를 띤 것이었다.

한 달쯤 뒤에, 행인국 원정군의 첩보와 함께, 행인 토민 삼천 명이 서울에 이민 되었다.

행인 땅은 고구려의 한 현(縣)으로 편입되었다.

×

나날이 팽창하고 커 가는 고구려 나라의 임금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주몽왕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동부여 땅에 남기고 온 어머님 유화 부인의 안부와 안해 예씨 및 예씨의 몸에서 났다는 아들의 안부였다.

소식만은 간간 듣는다. 그 소식에 의지하건대, 부여의 금와왕은 주몽왕의 어머님 유화 부인을 부여에 붙들어 두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접에 있어서는, 이웃 나라 임금의 어머니답게 융숭하고 후하게 하지만, 아들의 나라 고구려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는 단단히 한다는 것이다.

아마 볼미[人質] 셈으로, 신흥 고구려가 연해연방 이웃 나라를 집어삼킨다니까, 여기 대한 보장으로 왕모를 전당잡아 두는 모양이었다.

유화 부인으로도 금와왕에 대한 은의에 보답하기 위하여, 몰래 탈출한다든가 하지는 않고, 멀리 부여 땅에서 아드님의 나라의 활발한 생장에 대한 소식만으로 위안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해 예씨 또한 마찬가지로써, 예씨는 금와왕께는 아무 의리며 의무도 없지만, 시어머님이 그냥 있는 나라를 등지고, 남편의 나라로 뛰쳐 오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예씨가 아들을 낳았다 한다. 들리는 소문에는 매우 영특하며, 더구나 할머님 유화 부인이며 어머님 예씨가 왕자로서의 훈육을 게을리지 않은 덕으로, 아주 훌륭한 인물로 길러나고 있다 한다.

주몽왕도 금와왕께 대해서는 은의와 정의가 있다. 금와왕의 태자 대소(帶素)가 등극만 하였으면 무슨 수단을 써서든 어머님과 처자를 뽑아 오고, 부여 정벌의 쾌거를 도모할 것이지만, 금와왕께 대한 은의 때문에 그도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몽왕은 일찍이 아버지는 보지도 못하였다. 아버지가 해모수님이라는 것을 전설로만 들었지, 모습도 풍모도 모르는지라, 따라서, 신성하고 거룩한 분으로 존경하고 섬겼지, 육친으로서의 정애는 안 느껴졌다. 새 나라의 임금이 되기 이전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어머님 유화 부인이었다.

강보에서 떨어지면서부터 스물두 살 때까지, 오직 어머님의 품밖에는 모르고 자랐다. 사랑과 보호와 훈도에 오직 어머님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에 안해 예씨를 만났다. 아들까지 생겼다.

이들이 주몽왕의 잠룡(潛龍) 시절의 가까운 이의 전부였다.

그들이 다 동부여에 있다. 그들인들, 아들 되고 남편 되고 아버지 되는 이가 남방으로 가서 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어, 부조(父祖)의 업을 잇는다면, 얼마나 달려오고 싶으랴. 이곳으로 달려오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애타고 조급하랴. 아드님의― 혹은 지아버님의 일국 군주로서의 씩씩하고 영화로운 모양을 얼마나 보고 싶으랴.

주몽왕께는 두 번째로 맞은 왕후 소서노(召西奴)가 있고,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가 있어, 주몽왕의 가정적의 낙은 부족함이 없지만, 애모하는 어머님 유화 부인과 사랑하는 안해 예씨와 아직 보지도 못한 아드님(이름은 유리(類利) 혹은 유류(儒留)라 하였다)에 대한 정애 또한 극진하여, 주몽왕으로 하여금 늘 한숨짓게 하였다.

주몽왕의― 즉 고구려의 세력범위는 급속히 커져서, 남쪽으로는 지나인의 식민지인 낙랑 등지는 적지 않게 압축되어 국경선이 밀려갔고, 근린의 군소(群小) 국가는 차례로 흡수되었고, 문화정도가 좀 뒤떨어진 읍루(挹婁) 종족(이도 본시는 단군의 품안엣 백성이었지만, 일천여 년간을 풍습 다른 생활을 하는 동안에, 문화 정도가 부여종족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소위 말갈(靺鞨)이다)의 부락들도 거진 예하에 들고, 지금은 동으로는 옥저(沃沮)가 아직 고구려의 왕권 권외요, 북으로는 「동부여」가 역시 그런― 그 이외에는 대개가 고구려의 품 안에 들었다.

은의 깊은 금와왕만 없어지면, 동부여도 복멸할 것이요, 그러고는 지나인의 영토인 낙랑도 단군 백성의 철퇴 아래 부숴 버려야 할 것이다.

그 지나인의 영토를 건너서 더 남쪽에, 역시 단군 족속의 땅이 「 한(韓)」이라는 칭호로 남아 있다. 고구려가 장차는 벋어서 그 한(韓)땅까지 도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 한(韓)의 일부분인 마한(馬韓)에는 역시 지나인인 기(箕) 씨의 마수(魔手)가 뻗쳐 기씨가 마한왕이 되어 있다 한다. 단군 백성과 단군 땅을 이렇듯 침략하는 지나인을 이 동방에서 아주 송두리째 내쫓아야 할 것이다.

신우(神祐)와 천조(天助)를 깊이 믿는 주몽왕으로서는, 이 모든 위업을 당신의 손으로 넉넉히 하리라는 굳은 자신을 가지고 매진하였다. 만약 불행 당신께 수(壽)가 부족하면, 아드님께 계승시켜서라도, 단군의 끼치신 터는 단군 후손의 품 안에 품어야 할 것이다.

이 큰 사업을 당신께 계승하여야 할 아드님은 지금 부여 땅에서 예씨의 품 아래서 자라고 있다. 소문으로 듣자면 영특하고 슬기롭다 한다. 아버님인 당신(주몽왕)을 닮고, 어머님인 예씨를 닮았다 하면, 훌륭한 소년일 것이다. 보지도 못한 아드님(유리)께 대한 주몽왕의 기대도 컸다.

부여 땅에 있는 맏아드님 유리께 대한 기대도 컸거니와, 여기에 당신의 품 아래서 자라는 두 왕자(비류와 온조)께 대한 기대도 컸다.

지금 왕후 소서노(召西奴)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그는 지아버님의 전 부인 예씨의 탄생한 바 유리 왕자의 지위에 대하여 이해성이 있었다.

소서노 당신도 떳떳한 왕후요, 당신 탄생한 바의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도 떳떳한 왕자이지만, 예씨 탄생의 유리 왕자에게는 아랫동생이 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만약 그 왕자(태자가 될 것이다)가 이곳에 오면 고구려 나라는 마땅히 그 태자(유리)가 계승할 것이요, 당신 탄생의 두 왕자는 왕자에 그칠 것을 이해하고, 어린 아드님들을 늘 그 정신으로 가르쳤다.

여자의 마음이라 가만히 생각하면 얼마간 섭섭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도리로 생각하여 역시 웃동생은 웃동생이요, 아랫동생은 아랫동생이라는 순위의 관념은 어려서부터 길러 주었다.

아버님인 주몽왕은 현명한 소서노 왕후의 왕자 훈육 정신을 어여삐 보아서, 아무 용훼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였다.

예씨와 그 아드님이 아버님의 나라를 찾아올 것을 크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불행 그 일이 달성 못 된다 할지라도, 소서노 왕후 탄생의 왕자도 넉넉히 임금의 그릇이 되겠다 보아서, 주몽왕은 아무 근심도 안 하였다.


북옥저(北沃沮)

[편집]

주몽왕이 졸본(卒本)에 서울하고 고구려 나라를 세워서, 나라이 팽창하고 백성이 은성하여, 동방의 대국의 기초를 쌓아 나가기 십 년, 그 십 년째 되는 해에 고구려 나라는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 해에, 왕대(王臺)에 봉황(鸞[난])이 와서 춤추고, 하늘에는 오색 서운(瑞雲)이 돌고,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는 징조가 연해 나타났다.

온 백성들은, 이 서조(瑞兆)를 보고, 무슨 좋은 일이 생기련다고 모두들 기다렸다. 흥하는 나라요, 따라서 무슨 좋은 일이 늘 하늘에서 내린다고 굳게 믿고 있는 고구려라, 무슨 유다른 일을 만나면, 이는 좋은 일이 생기려는 하늘의 징조라고 단정하여 버리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그 여름, 주몽왕은 북옥저(北沃沮) 복멸의 원정(遠征)을 분부하였다.

사년 전 행인(荇人)을 복멸할 때에, 서울 유수장(留守將)으로 남아 있게 되어 울분해 하는 마리(摩離)를 이번 도원수로 부위염(扶尉厭)을 군사(軍師)로 하여, 삼만 대군을 이끌고 정도에 오르게 하였다.

북옥저는 그 백성은 무론 단군 백성이다. 지나인의 교란으로 단군 왕권(王權) 쇠미했을 때에, 모국을 배반하고 따로이 딴살림을 한 지 수백년, 인제는 단 지방으로서의 기초도 튼튼히 잡혔거니와 모국과는 태산준령이 가운데 끼여 격절되고, 도리어 낙랑(지나인의 식민지인)과의 거래가 많았고, 땅이 기름지고 해산물이 풍족하여 꽤 가멸고 넓은 지역이었다.

고구려에서 거리도 멀거니와, 딴살림한 지도 오랬고, 게다가 가면 지방이라, 이전의 군소(群小) 국가들처럼 홑볼 지역이 아니었다.

게다가 북옥저에서는 고구려의 흥기와 팽창에 겁을 내어, 책을 수리하고 무기를 충실히 하고, 낙랑과 더욱 깊이 맺는 등, 경계를 게을리지 않아서, 좀체의 틈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온 동방의 통일과, 단군 백성 총규합을 목표로 하는 고구려로서는, 이 넓은 지역을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주몽왕은, 나라의 실력을 기르면서 가만히 기회만 엿보고 있던 것이었다.

조용히 힘만 기르기 십 년, 인제는 힘도 넉넉히 찼다. 게다가 금년에 생긴 여러 가지의 길조(吉兆)로써 온 백성이 무슨 좋은 일이 생기리라는 희망에 불붙는 이 기회에, 큰일을 결행하려는 것이었다.

이 나라― 아니, 이 종족의 가장 큰 축제일인 시월 초사흗날, 고구려의 대군은 정도(征途)에 오르기로 날을 잡았다.

수만 석의 양곡이며, 수천 바리의 화살이며, 모든 치중(輜重)은, 여러 길로 나누여서, 국경까지 운반되어 대기하고 있었다. 해(太陽[태양] )를 도안화(圖案化)하여 제정한 이 나라 국기와, 마리 장군의 장군기(將軍旗)는, 바람에 펄럭이며 승리를 예언하는 듯 온 백성과 군졸의 의기를 돋구었다.

옥저는 고구려보다 남쪽 지방이요, 동쪽으로는 바다를 안았다. 그 새 수백 년간, 안온한 생활을 한 전통을 가졌다. 그러니만치 어려움과 추위에 견디는 힘이 고구려에 비길 바 아니었다.

고구려는 나라이 북국 산간이요, 곡식의 산출이 부족하여, 절식(節食)에 단련되었고, 게다가 군사적 맹훈련을 겪는 백성이라, 웬만한 어려운 일을 어려이 여기지도 않는 민족이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주몽왕은 바야흐로 엄동을 앞둔 시월에 동원을 한 것이었다.

소라성 우렁차게 삼만 대군이 졸본 서울을 떠날 때, 주몽왕은 홀로 이 시조묘(始祖廟―단군묘)에 꿇어 엎드려 하늘께 기도드리고 있었다.

"하늘! 지금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아이들이 길을 떠납니다. 도우소서. 도와주소서. 소자를 위함이 아니오라 동방 천만 백성을 위함이로소이다. 동방 천만 백성이 자리를 같이하여 즐길 나라를 만들고자 함이로소이다. 이 백성을 어여삐 보아 주소서."

주몽왕은 기도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서, 왕후 처소로 들었다.

왕후 처소에 들어 보니, 소서노 왕후의 안색이 예사롭지 못하고 약간의 흥분된 기색이 있다.

"왜 안색이 좋지 못하오? 무슨 일이 생겼소?"

주몽왕은 자리 잡아 앉으며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나― 그리고 없었다는 듯이 태도 지으려 하나, 분명 예사롭지 못하였다. 십년간을 부부 생활을 해온 주몽왕으로서 그 맛 눈치 못 알아볼 것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구료. 마음 언짢은 일이 있거든 펴 놓고 서로 의논합시다. 오늘 큰일을 차리려는 경사로운 날에, 역한 일이 있어서야 되겠소? 서로 감춤 없이 의논합시다."

"나랏님, 제 동생에게 비상을 주었습니다. 벌(罰)을 받으라고…."

"?"

소서노 왕후의 동생 되는 여인이 일찍이 홀몸 되어 대궐에 몸을 의탁하고, 형님 왕후의 아드님인 두 왕자를 보육하며 있었다. 그 과부 동생에게 왕후는 비상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비상을 내려 주단, 즉 사사(賜死)를 뜻함으로서 「죽기」를 명하였다는 것이다.

왕후와 그 동생 형제간의 의는 유달리 좋았다. 더욱이 홀몸 되어 대궐에 기탁하고 있는 신세를 가긍히 여기어서, 왕후는 늘 동생에게 후하였다. 그 사랑하던 동생에게 왕후가 죽음을 명하였다 하니 동생이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왕후로서는 큰 용단이었다.

사랑하던 동생에게 죽음을 분부하였으니, 분부하기도 가슴 아픈 일일 것이요, 죽음을 분부치 않을 수 없을 만한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도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단 하나의 동생에게 죽기를 명하였을까.

"그이가 무슨 일을 저질렀소? 좀 웬만한 일 같으면 눈감아 넘겨 보시구료. 대체 무슨 실수가 있었소?"

"나랏님께 아뢸 바 아니옵니다."

"내가, 크게 보자면 임금이요 작게 보자면 지아비이니, 나라에 대한 실수든 집안에 대한 실수든 어찌 무심하겠소? 말해 보시오. 더욱이 당신이 비상을 주고도 그렇듯 심사 불평해 하니 어찌 무심하겠소?"

"……."

"시비를 불러서 문초해 알아볼까―?"

"…."

주몽왕은 두 번 세 번 왕후에게 곡절을 물었다. 그리하여 겨우 그 곡절을 알았다.

왕후의 동생 되는 이는, 두 왕자를 보육하고 있느니만치― 더욱이 그 신분이 과부이니만치, 젊고 넘치는 과부로서의 정열과 애정을 죄 두 조카(왕자)에게 붓고 있었다.

두 왕자가 지금은 아무 불만도 모르고 고이고이 자라지만, 두 왕자에게는 배다른 형이 있다. 그 형이 현재는 먼 딴 나라에 있지만 장차 이리로 오게 되면, 무론 이 나라의 태자로 책봉되고 장차에는 임금으로까지 될 것이다.

배다른 형이 임금이 되면, 배다른 동생들의 신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근심되고 마음에 걸려서, 늘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는 거기 대한 이야기를 하고 하였다.

배다른 형제가 모일 때에, 무슨 마음의 티각태각이 안 생기도록 이 점을 매우 삼가는 소서노 왕후는, 과부 동생이 조카들을 데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리어서, 동생에게 늘 주의시키고 하였다.

그러던 중에, 오늘은 그 동생이 조카들과 의붓형제의 사이를 이간 붙이는 듯한 말을 하고, 역모(逆謀)를 교사하는 듯한 말까지 하는 것을 왕후가 지나다가 귓결에 들었다.

이것은 그저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 되는 왕후가 여러 번 주의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삼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늘 같은 암시까지 하는 것은 유유한 문제이다. 이 나라의 만년지계를 위하여, 왕후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죽음을 명한 것이었다. 그런 나쁜 교사자를 제거하여, 왕자들의 마음에 못된 생각 들지 않도록― 나아가서는 이 본보기로써 다른 궁인들도 경계할 겸하여, 왕후는 이 처분을 한 것이었다.

주몽왕은 왕후의 심모원려에 참 마음으로 감격하였다.

"지금쯤은 그 약을 먹었겠소?"

"한 각 경쯤 지났으니까 먹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설사 아직 먹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처분 거두시지 마세요. 후인의 본보기로―."

"안 거두겠소. 입 가벼운 사람에게의 본보기로, 왕후의 동생일지라도, 쓸데없이 입 가벼이 놀렸다가는 이런 일 겪는다고 알리기도 할 겸, 두 아이(왕자)에게도 이 뜻 마음에 아로새기게 하도록…."

주몽왕은 두 왕자를 이리로 불러오라고 하였다.

그 왕자(아홉 살과 일곱 살이었다)에게, 어머님 왕후가 이모에게 내린 처분을 들려주고, 장차 부여 땅에서 맏형이 올지라도, 언제까지든 이 어머님의 정신을 저버리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말도록 훈계하였다.

두 어린 왕자는 맹서하여, 이 정신 저버리지 않기를 약속하였다.

×

삼만의 원정군은 본국을 떠나서 북옥저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태산을 넘고 준령을 넘고, 내내 험한 길이었다.

금년 따라 눈(雪[설])이 일찍 내려서, 이 원정군이 고국 국경을 넘어서자 한 자에 가까운 큰 눈이 천하를 덮어, 사람의 세상은 백설 아래 잠겼다.

등성이가 어딘지 골짜기가 어딘지 분간키조차 힘든, 길도 없는 산골로 삼만의 원정군과, 거기 못지않은 치중은 동으로 동으로 진군하였다.

본국부터의 향도자와 북옥저의 향도자를 합하여 사오십 명이 넘는 향도자가 머리를 모으고 의논하였지만, 깊은 눈에 덮인 천지에서 길을 찾아낼 수가 없어서, 종군하는 일자(日者)의 지도만 좇아서, 방향만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어찌어찌하여 길을 얻어 만나 그길로 하여 나아가면, 산간의 옥저 부락도 만난다.

연락졸(連絡卒)이 꽤 많았다. 이 연락졸의 임무는 끊임없이 본국 임금께 그날그날의 상태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길도 없는 산골을 진군하지만, 본국과의 새에는 연락졸로써 길이 생기고 정보가 교환된다.

눈에 덮인 천하이라, 아무 별다른 일 생기지 않고, 맹수도 있으련만 이 대군에 질겁해서 굴에 숨어 나지 않고, 어쩌다가 옥저인(沃沮人)의 부락이거나 성이거나를 만나서, 그를 쳐서 항복받는 것이 유일의 흥미요 행사였다.

성이나 부락을 만나서 이를 항복 받으면, 그 성이나 부락의 백성을 삼분 일쯤을 고구려 본국으로 옮기고, 그만한 인원을 본국에서 갖다가 메우고, 주몽왕의 이름으로 그 지방을 고구려의 군현(郡縣)으로 고치고 그 지방의 치자(治者)를 고구려의 지방 태수로 임명하고― 이런 선무(宣撫)와 동화(同化) 방침을 써 나아갔다.

민족이 근본적으로 다른 바가 아니요, 역시 단군왕검을 국조(國祖)로 우러르는 백성들이라 단군 해모수의 아들 고주몽의 나라이라는데 끝끝내 반항할 까닭이 없었다.

북옥저에 붙어서 옥저의 이름으로 세도하던 사람들은, 그 세도를 잃기 싫어 버둥거릴지 모르나, 마리 장군과 부위염 군사는 잘 의논하여 그 위인을 보아서, 쓸만한 사람이면 그냥 눌러 주몽왕의 이름으로 본시의 지위를 계속하여 누리게 하는지라, 민심상 추호 만한 흔들림도 없이, 선무 공작은 성공하였다. 일단 이번 원정군에게 정복된 지역은 진심으로 고구려에 돌아붙고 하였다.

이렇듯 옥저의 부락들을 선무하면서 진군하여 산간 지대를 지나서 옥저의 평원에 나서게 되었다. 평원에 나서면서, 비로소 길을 잘못 온 것을 알았다. 그들은 지나쳐서 동쪽으로 왔다. 도로 서쪽으로 좀 돌아가야 되겠다. 북옥저 서울은 도로 서쪽으로 돌아서 험준한 산곡 간에 있다는 것이다.

서울을 빼앗는 것이 전쟁의 목표라, 옥저를 복멸하기 위해서는,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야 되게 되었다.

다시 돌아서려 하다가, 이 원정군은 이번 길 떠난 이래의 처음의 저항― 반격을 받았다. 꽤 큰 도시였다. 여기서 지나 계통의 전법(戰法)으로써의 저항을 받았다.

고구려가 지금껏 이웃 나라를 정벌할 때에 쓴 전법은 아류(我流)였다.

그 상대한 나라들이 모두 약소국가라, 병술(兵術)이라 무엇이라 할 것이 없이 들이치고 할 뿐이었다. 그런데 옥저 땅에서는, 지나 계통의 무던히 발달되고 훈련된 진(陣)법이라 전법으로써의 저항을 받았다.

이 지역도 본시 단군조선의 지역이다. 단군을 밀어내고 자기네가 대신 들어앉았노라고 자신하는 지나인은, 옥저 지대도 본시는 단군조선의 한 귀퉁이요 따라서 기자조선, 그 뒤는 위만조선, 현재는 한(漢)의 식민지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있다. 그 지역의 백성이 단군 백성이요, 언어 풍속 신앙이 단군조선의 것을 그대로 절충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나 계통의 관부(官府)에서 행정에도 용훼 간섭하고, 관리 임명에도 낙랑(지나 정부의 조선총독부 격)에서 꽤 간섭한다.

그런 살림을 수백 년 하는 동안에, 지나 색채가 꽤 농후하게 침염되어 있었다.

지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어지러운 시대를 겪고 권모술수(權謀術數)도 꽤 발달되어 있는 나라이었다. 고구려의 정벌에 대하여 옥저는 지나식의 지혜를 여기 가져다 썼다.

순후하고 정직하고 오직 굳센 실력만으로 옥저땅에 들어선 고구려는, 여기서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전법의 저항을 받은 것이다.

성하(城下)에 이르러, 도원수 마리 장군은 예에 의지하여, 소라(나팔)를 입에 대고 큰 소리로,

"하늘의 아들 하백의 외손 고주몽님의 나라 고구려의 우두머리 장수 마리 장군이 생쥐새끼 같은 너희들을 도륙하러 왔다. 성 안에도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결쿠어 보자."

고 고함쳤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잠긴 채, 성 안에는 생쥐새끼도 없는 듯,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마리 장군은 막료 몇 명을 데리고 말을 타고, 성을 몇 바퀴 돌면서 같은 말을 고함쳤다. 성이 공성(空城)이 아닌 증거로는, 장군 일행을 향하여 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뿐, 역시 다른 반응은 없었다.

밤에야 비로소 두 군사는 마주쳤다. 그 첫 싸움에서 시작하여, 이튿날 또 몇 번 또 이튿날 몇 번, 두 군사의 새에 작은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충돌에서, 고구려군은 그 적은 옥저군과 싸움에 매번 난전을 하였다. 기괴한 진(陳)법, 기습, 야습, 매복, 포위, 위패주(僞敗走) 등등, 지금껏 고구려가 마주 싸워 본 전쟁에서는 일찍 보지 못한 전법을 이용하여, 적은 군사로써 고구려군을 시달렸다.

고구려군은 강한 압력으로써 결국은 이기고 하였지만, 옥저군의 이 술책은 진실로 성가시고 귀찮았다. 그러다가 옥저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성안으로 도망 들어가 숨어 버리고 성문은 굳게 닫아 버린다.

이런 싸움을 몇 번 해 본 뒤에는, 옥저군은 죄 성 안에 숨어서 활질만 하고 다시 나지 않았다.

고구려군 지휘장 마리 장군의 가죽과 구리로 만든 투구며 갑옷은, 용하게 그 살을 모두 튀기어 버렸다.

그러나 옥저군은 성 안에 숨어 다시는 나오지 않아, 고구려군으로서는 싱겁기 짝이 없었다. 숨어서 살을 쏘는 뿐,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건국 이래 지금껏 겪은 전재에서는, 이렇듯 싸움을 돋구면 으레히 적은 나와 싸웠다. 이렇게 성문을 굳게 닫고 숨어서 살만 날려 보내는 전쟁은 겪어 보지 못했다. 비록 반드시 질 줄― 전멸당할 줄 알면서도, 상대측에서 싸움을 돋구면 으레히 맞아 싸워야 한다. 이것이 지금껏 경험한 고구려의 전쟁 도덕이요 단군 백성의 전쟁 도덕이었다.

몇 번 싸움을 돋구어 보다가 아무 반응도 없으므로, 마리 장군은 군사(軍師) 부위염과 그 대책을 의논하였다.

"싱거운 놈들이구료."

"하, 참."

"그런 싱거운 놈들이 어디 있담."

"아마 놈들은, 성이 튼튼한 걸 믿고, 저희네가 그냥 안 나오면, 우리 가물러 갈 줄 알고 하는 노릇이겠지요."

"저 성을 허물 수는 없고― 정 놈들이 안 나오면 하기는 도로 갈밖에 없기는 하오이다마는…."

이런 때에 좋은 꾀를 베풀어야 할 책임을 띤 부위염이로되, 무슨 꾀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하루 이틀 지내봅시다."

싸움을 돋구어도 나오지 않고 이날도 벌써 저녁도 가까왔으니 오늘은 또 여기서 야영할 밖에는 없었다. 엄동에도 노숙(露宿)할 수 있도록 단련된 고구려 군사는 성을 포위한 채 저녁을 지어 먹고 그 밤도 노숙을 하기로 하였다.

그 저녁, 또 그 이튿날, 또 이튿날― 이렇게 나흘을 지냈다. 그러나 성문은 그냥 굳게 잠긴 채 사람 하나 얼씬치 않는다. 고구려의 삼만 군은 클클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다.

나흘 뒤 하릴없이 퇴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준비를 하려다가, 군사 부위염이 문득 마리 장군의 곁으로 왔다.

"장군님."

"?"

"물러가는 「체」만 해보면 어떠리까. 물러가는 체하면 혹은 놈들이 우리 뒤를 쫓아 안 올까요?"

장군은 머리를 가슴에 묻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무위히 물러간다 하면, 군졸들에게 대해서나 장차 귀국해서 임금께 대해서나 면목이 없다.

그러나 성문 닫고 나오지 않는 적을 어찌하랴.

부위염 군사의 말을 따라서, 물러가는 체하면 혹은 적은 우리 뒤를 쫓을지도 알 수 없다.

"참 그래 봅시다. 그렇게 하자면서 생각해 보니, 또 우리 군졸 몇백 명을 성문 밖에 꼭 숨어 있게 했다가, 저놈들이 문을 열면, 일변 그리로 쫓아 들어가서 무찌르면 어떻겠소?"

"참 좋은 꾀입니다."

권모술수를 모르는 그들에게는 이만 것이 아주 귀신의 꾀같이 보였다.

날래고 힘센 군졸 이백 명은 딱 성문 밖에 기어가서 매복하였다.

목소리 큰 막료 한 사람은 갑옷 튼튼하게 차리고, 말 타고 성 밖을 돌며 성 안을 향하여 꾸짖었다.

"이 더럽고 겁 많은 놈들 같으니. 그래 종내 싸우자고 나오는 놈이 없단 말이냐. 너희 같은 놈들과 헛 세월 보낼 수 없어서 우리는 간다. 더러운 놈들!"

그러는 일방 차차 대오를 지어서 퇴각을 시작하였다.

마리 장군은 몸소 일지군(軍)을 인솔하고 성벽에 가서 붙어 숨어 있었다.

고구려군이 퇴각하기 시작하면 그때야 옥저군도 성문을 조금 열고 병졸을 달려 보내서,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엄습하여, 고구려군을 큰 혼란 상태에 빠지게 하렬 것으로 알았다. 퇴각하는데도 그냥 성문을 굳게 닫고, 보기만 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성벽에 붙어 숨어 있는 마리 장군과 그 막료들은 이제나 이제나 성문이 열리기만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성문은 그냥 닫긴 채, 간간 옥저사람들이 성 위에 올라가서 고구려의 퇴각을 구경하고 있는 듯 두런두런 사람의 소리만 간간 들렸다.

성벽에 붙어 숨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여 보매 성 위에 올라서서 고구려의 퇴각을 구경하고 하는 무리 가운데는, 무색옷 입은 사람들도 적지 않게 섞이어 있었다.

지나인― 적어도 지나인을 본뜨려는 옥저 사람들일시 분명하였다. 이 종족이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흰옷을 안 입고, 지나인을 흉내내려는 무리들일 것이다.

마리 장군은 가슴에 치받치는 불쾌를 느꼈다. 고구려가 건국한지 십 년, 그 새 옛터를 회복하느라고 졸본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에는 끊임없이, 혹은 회유(誨諭), 혹은 토벌의 손을 뻗쳤다. 주몽왕 건국 이전부터의 동무로, 내내 주몽왕을 모신 마리 장군은 많이 보고 잘 아는 바이어니와, 이 종족은 옷은 흰옷밖에 안 입는다. 먼 길을 간다든가, 무슨 경사스런 일을 할 때거나, 사냥에 나선다든가 하는 때 밖에는 무색옷을 안 입는다. 그런 천성이요 습관이라 따라서, 이 종족이 세우는 도시는 반드시 강을 끼고 자리 잡고, 부락 마을은 반드시 개천이나 시내 등을 끼고 만들어서, 빨래에 편리하도록 터 잡는다.

이것은 주몽왕이 늘 막하들에게 들려주는 바이요, 마리 장군이 귀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들은 바이다.

이 옥저 지방도 흰옷 입는 백성이 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누런 옷 푸른 옷 등의 무색옷을 입은 백성이 드문드문 보이는 것이었다.

지나인인지 옥저 토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현상은 적지 않게 마리 장군의 마음에 거슬리었다. 적개심(敵愾心)이 맹렬히 불붙었다.

그런 가운데서 마리 장군이 내심 불안하고 초조하게 여기는 바는 이곳 성문이었다. 지금의 눈치로 보아서는 우리(고구려) 군사가 다 멀리 물러간 뒤에야 열 배짱인 모양이다. 연해연방 고구려의 퇴각 상태를 정찰하는 사람만 보이지, 문은 여전히 열릴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군사는 차례차례 뒤달려 이 성하를 떠났다.

우리가 다 멀리 간 뒤에야 성문을 연다 치면, 겨우 이백 명만 여기 남은 마리 장군의 친솔군은, 본대(本隊―主力[주력])에서 격절되어, 적지(敵地)에 고립하여 남는다. 우리 본대도, 성문을 열게 하자는 계략 아래 거짓 퇴각하는 것이매, 퇴각한다 할지라도, 아주 멀리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로되, 좌우간 우리의 계략은 착오를 만났다.

고구려의 삼만 군은 인제는 그 전군(殿軍)까지도 성하를 떠났다. 하얀 눈의 광야에, 삼만의 발자욱을 새로 내며, 차차 성하를 떠난 고구려의 군사가, 그 마지막 사람까지 안 보이게 된 뒤에, 성문은 비로소 조금 움찔움찔하다가, 삐그적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하였다.

본대와는 격절되었건 어떻건, 요 군사만으로라도 성내에 돌입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는 마리 장군은 막하를 끌고, 성문 꼭 밖에 붙어 숨어 대기하고 있었다.

성문의 빗장이 분명 벗겨진 것을 알자, 이백 명의 고구려 아이들은 마리 장군이 칼 높이 두르는 것을 군호 삼아 하늘이 무너질 듯 노호하며 성문을 박차고 성 안으로 난입하였다.

고구려 군사는 인젠 꽤 멀리 물러갔으리라고 마음 놓고 성문을 열던 옥저 사람들은 모두 덜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 겁쟁이놈들!"

"한(漢)나라 종놈들!"

무서움을 모르는 고구려의 건아들이었다. 지금껏 어디를 가든지 이긴 경험만 가진 그들이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조차 몰랐다. 어디를 가든, 어디를 치든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이 쇠같이 굳었다. 이 성 안에는 피난민까지 모여들어서 수만 명이 적(敵)이며, 자기네는 겨우 이백 명이라는 점은 생각할 줄도 모르는 젊은이들이었다.

옥저 사람의 머리는 마치 추풍낙엽같이, 땅에 떨어졌다. 고구려군의 칼에….

×

적(敵)과 전쟁하여 적을 노획(鹵獲)하면, 노획한 것이, 금은보화건 사람(남녀노소를 막론하고)이건 간에, 노획한 자의 소득으로 삼는 것이 그때의 전쟁 수법이요, 전쟁 도덕이었다. 그러므로, 병졸들은 다투어 많은 금은보화며 사람(젊은 사내는 종으로, 계집은 계집으로 쓴다)을 자기가 노획하고자 한다. 이것을 미끼 삼아 병졸들을 부르고 모집하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렇지 않았다. 노획한 것은 보화건 사람이건 모두 왕정(王庭)에 바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면 왕은 따로이 그 공에 대하여 상을 준다. 그리고 사로잡은 사람은 서울로 옮겨다가, 고구려의 교육을 베푼다.

그러니까, 소득을 탐내서 전쟁에 나가는 병졸은 없다. 오직 병졸 그들의 불타는 애국심과, 젊은 투쟁심으로 전쟁하였다. 고구려병의 강함도 여기서 나온 것이요, 자랑도 여기 있는 것이다.

성문을 박차고 성 안으로 뛰쳐든 이백 명의 병졸은, 그야말로 아수라같이 돌아갔다. 단 이백 명의 고구려 병졸이 마치 온 성 안에 가득 찬 듯,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보이느니 다만 고구려병 뿐이었다. 그 가운데도, 죄 구리로 만든 갑옷을 입은 마리 장군의 모양은, 바야흐로 기우는 저녁 해에 반사되어, 불덩어리가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굴러다니는 듯 하였다.

그러나 하도 그 수효에 차이가 있는지라, 고구려 군사도 하나둘 꺾이기 시작하였다. 다닥치는 대로 찍느라고 주위를 살피지 못하였지만, 마리 장군의 주위에는 고구려병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의 떼가 몹시 동요되는 곳에는, 중심에 고구려병 하나씩이 있어서, 자기를 포위 한 옥저인을 엄살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씩 하나씩 따로 떨어진 고구려 병이 단독으로 싸우는 뿐이지, 본시의 이백 명이 산지사방 헤어져서 지금은 오분의 일도 못 되는 모양이었다.

지금쯤은 아마, 멀리 성하에서 떠났던 삼만의 본대가, 다시 발을 돌이켜서 이리로 향하여 달려오는 도중이겠지만, 여기 있던 고구려병의 운명은 기울었다.

여기서 싸우고 있는 고구려병들은, 제각기 자기가 현재 고립한 위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모르고, 그런 점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싸우기에 골몰해 있을 것이지만, 진실로 참담한 형편이었다.

게다가 옥저인도 첫 순간의 경악에서는 깨어서, 인제는 이성을 약간 회복하여, 형세를 관망하고, 지금 연락 없이 외따로이 떨어져서, 상처받은 짐승같이 날뛰는 고구려병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대하여, 수백 명씩이 한 떼가 되어 공격하였다. 고구려병은 산산히 분리되어,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로 넘어졌다. 적에게 넘어진 것보다 오히려 피곤에 못 견디어 넘어지고, 넘어진 뒤에 옥저인에게 죽은 사람이 그 대부분이었다.

외따로이 막하들과 분리되어 혼자 싸우던 마리 장군― 그 혼자서 오늘 벤 적의 수효가 수백 명이 넘을 것이다.

호랑이를 주먹으로 때려 잡으려더니만치 놀라운 힘의 주인이었다. 게다가 그의 휘두르는 칼은, 이번 싸움에 떠날 때에, 주몽왕이 특별히 내려준 희대의 명검이었다.

희대의 명검에다가, 쉽지 않은 기운에다가, 검술 또한 비범한― 이 세 가지의 장점을 가진 장군이었다. 성문이 열린 이래, 마리 장군의 칼의 이슬이 된 목숨이 무려 수백 명은 넘었다.

칼은 피를 먹어, 인젠 미끄러워서 잡을 수가 없었다. 한순간― 그야말로 진실로 한순간 사위를 둘러보면, 우리 군사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자기 혼자서 분신난투한다. 적은 이 금갑 금투구의 무서운 장수에게 덤벼들기를 피하여, 장군이 움직이는 방향에는 사람의 물결이 갈리며 헤어지고 하지만, 무수한 옥저병은 이 금투구의 장수를 목표로 들이친다.

얼마를 없이하여도 그냥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적은 한이 없었다. 피에 미끄러운 손을 한 번 흙에 닦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여유조차 없이, 미끄러운 칼을 놓치지 않도록 부르쥐고 감투하노라니 노력은 몇 곱 더 들었다.

차차 칼의 무게를 느끼고, 갑옷과 투구의 무게며 거추장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몸의 피곤이 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군으로서는, 이런 일을 생각하여 판단할 마음의 여유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개미떼같이 달려드는 적을, 본능적으로 찍고 자르고 하는 뿐이었다.

드디어 적의 한 장수를 찍다가, 적의 갑옷에 튀겨지는 칼의 타력으로, 마리 장군은 칼을 놓쳐 버렸다. 칼을 놓치는 바람에 방패까지 내려뜨렸다.

내려뜨린 칼을 집으려고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한 적이 장군을 향하여 칼을 둘렀다.

내려뜨린 칼을 집을 시간을 잃어버린 장군은, 시재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서 방패로 썼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방패로 대용하면서 보니, 사람의 팔이었다. 잘려서 땅에 구르던 어떤 옥저병의 팔이었다.

그 팔을 한 번은 방패 삼아 썼지만, 그것이 적의 팔인 줄 이해하는 순간, 그것을 적에게로 내던졌다.

그 팔이 날아오는 바람에, 적이 주춤하는 순간을 이용하여, 마리 장군은 그곳에 내려져 있는 창을 하나 주웠다. 오십 근 큰 칼에 비기어 종잇장같이 가벼운 창을 집어, 바야흐로 두드려 할 때에, 무슨 쇠뭉치 같은 것이 마리 장군의 머리에 내려 맞았다.

몇십 리 물러갔던 고구려 삼만 대군이 발을 돌이켜서 이리로 달려와서, 그 앞선 자는 벌써 성 안에 들어오고, 꼬리도 거진 뒤미친 때쯤, 성안에 건투하던 고구려 이백 건아는, 하나도 남지 않고 전멸을 하였고, 그 통수자 마리 장군마저 적의 철퇴에 맞아서 넘어진 것이었다.

×

마리 장군이 이백 명 용졸을 데리고 성하에 남을 때에, 삼만의 가장(假裝) 퇴각군의 인솔은 비장(裨將) 물사(勿沙)에게 맡겼었다. 군사(軍師) 부위염(扶尉厭)의 지휘를 받아서, 삼만 군졸을 운용하게 한 것이었다. 성하에서 얼마만치만 떠나면 성문이 열릴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전군(殿軍)까지가 다 떠나도, 성문은 의연히 열리지 않았다.

뒤에만 정신을 두고 물러가는 흉내만 내다가, 성문이 열렸다는 보고에 삼만 대군은 일제히 돌아섰다. 인제는 성 안에 난입했을 우군(友軍) 이백 명의 안위가 근심되는지라, 속력 다하여― 나는 듯이, 성으로 달려 돌아왔다.

그들이 성에까지 돌아온 때는, 성 안의 이백 명 우군은 한 명 남지 않고 다 옥저의 군민에게 도륙을 당한 뒤였다. 아직 채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한 걸음만 더 빨리 왔더면 몇 명은 해를 받지 않고 구원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고구려병의 노염은 하늘을 찌를 듯 컸다. 그들이 하늘이라 추앙하는 거룩한 임금 주몽왕의 엄격한 군규(軍規)가 있어서, 어떤 지방을 점령한다 할지라도 그곳 소민(小民)은 시달리지 말라는 엄한 분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성을 도륙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장관인 마리 장군까지 해를(고구려군이 도착한 때는 마리 장군은 실낱같은 목숨이나마 아직 붙어 있기는 하였다) 받았다 하여, 온 주민을 다닥치는 대로 도륙하였다.

부위염 군사며, 물사 비장도 방임하였다. 그들도 조국의 본 욕에 대하여 복수심이 컸었기 때문이다.

이백 명 고구려병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사만 명 주민은 도륙을 당하였다.

노인과 부녀자 몇 명이 겨우 면하였다. 그리고 어떤 더러운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곳 태수도 생금을 당하였다. 이 생금한 태수는, 지금 실낱같이 겨우 살아 있는 마리 장군의 눈앞에서 참(斬)하기 위하여 마리 장군의 앞으로 끄을려 왔다.

이곳 태수의 꽤 웅대한 궁궐 정침에, 마리 장군은 실낱 같은 목숨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마리 장군의 갈라진 골에는 두껍게 헝겊을 감아서, 장군의 두 눈만 겨우 밖으로 보였지, 온 얼굴은 안 보였다. 그 장군의 눈은 굳게 닫겨 있었다.

부위염 군사와 물사 비장은, 이곳(이곳은 옥저의 버금서울이었다) 태수를 결박 지어 꿇려 가지고, 위독한 장군의 앞에서, 장군의 눈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은 혼수상태에 빠진 듯이, 그냥 가만있었다.

그러나 장군은 혼수상태에 빠지든가 잠자든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까 머리의 상처를 처매기를 끝난 때쯤 장군은 정신이 들었다. 몸이 몹시 아플 터인데 아픈 것도 감각하지 못하였다. 그저 온 세상이 휑뎅한 뿐이었다.

이곳 태수가 자기 앞에 끌려 와 있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장군은 무슨 생각 하는 바이 있어서, 그냥 자는 체 가만있는 것이었다.

주몽왕의 아래서 주몽왕을 도와서, 이 종족의 옛 땅 회복에 생애를 바쳐 온 장군으로서는, 지금 죽음의 직전에 있어서도, 생각하느니 그것이었다.

아직껏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경험만 가지고 있고 진다든가 하는 것은 겪기는커녕 생각해 본 일도 없었는데, 여기서 뜻밖의 일을 당하였다. 결국에 있어서 이기기는 한 모양이지만, 자기의 친솔 이백 명은 전멸을 당하였다.

그리고 자기도 이 자리에서 다시 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고구려가 옥저보다 약하다는 데서 생긴 결과가 아니다.

다만, 판단― 이쪽에서 이렇게 하면 저쪽은 어떻게 하리라는 판단의 착오와 후방 연락의 착오 등에서 생긴 결과다. 이것은 즉 무술(武術)이 아니요 전술(戰術)에 있어서, 우리가 실수를 범한 탓이다.

지금껏 다만, 세면 이긴다고 생각하던 그 단순한 생각을 버리고, 고구려도 전술의 연구를 쌓아야겠다. 아직도 이 땅 안에 예(濊)라 현토(玄菟)라, 지나인의 재간을 배운 종족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순전히 지나화한 낙랑(樂浪) 등의 큰 지역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이것을 모두 고구려의 아래 집어넣으려면, 지나식 재간과 많이 싸우고 정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순후한 실력만 믿었지 아직 그런 재간을 농락한다는 수단을 배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걱정이다.

자기가 살아서 임금께 뵈올 날이 있다면, 이 뜻으로 주상하여 여기 대한 대책도 세울 수 있으련만 자기는 이 침상에서 살아서 내리지 못할 중상한 몸이다.

꼭 임금께 사뢰어서, 「전략」에 관하여 연구를 쌓아야겠는데, 임금께 이 뜻을 무슨 수단으로 사뢰나.

세세한 사정은, 임금께 면알해야 되겠지, 글에 어두운 마리 장군은 글월로 사뢸 수도 없고―.

주몽왕께 협력하여 고구려 나라를 이룩한 무인(武人) 출신의 마리 장군이니만치, 바야흐로 죽음의 자리에 누워서도, 마음 향하는 것은, 고구려 나라뿐이었다. 앞으로 지나인 계통의 낙랑, 현토, 예 등 지역에도 무력적의 토벌을 가해야 할 고구려로서, 전술에는 전 깜깜이라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범상치 않은 지혜를 가진 주몽왕이니 혹은 이 방면에도 유의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리 장군으로서는, 기수를 챈 일이 없었다.

나이 서른을 넘었지만 아직 안해 맞이도 하지 않고, 그의 정열을 오직 임금과 나라에 바치고 있던 마리 장군이었다. 오늘날 고국을 멀리 떠난 타 향에서 죽게 되어서 마지막으로 그 고국 그 임금께 대하여 단 한 마디 「병술을 연구하소서」하는 말조차 몸소 사뢸 수가 없게 되었다.

마리 장군은 자는 체하며 묵묵히 이런 생각만 하고 있다가, 비로소 조금 몸을 움직이며, 군사(軍師)와 비장을 불렀다.

군사와 비장은 상관이 움찔하는 바람에, 그 앞에 달려와 부복하였다.

마리 장군은 자기가 생각하는 바, 임금께 사뢰고 싶은 단 한 마디의 말을 해보려고 시험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뼈가 어떻게 어그러졌(脫骨[탈골])는지, 그저 무의미한 발음을 간신히 낸 데 그치었다.

그 뒤 꽤 많은 애를 써 보았다. 그러나 삐둘어진 입은 바로 되지 않고, 한마디의 말도 이룰 수가 없었다.

숱한 노력을 해본 뒤에, 마리 장군은 말하기를 단념치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이 똑똑하면서도, 말을 할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은 형언할 수가 없었다.

×

고구려군은 이 옥저의 버금서울에서 묵기로 하였다. 지휘관 마리 장군이 몸 움직일 수 없는 중태이며, 그렇다고 장군을 버려두고 떠나지도 못할 바이라, 여기 묵기로 한 것이었다.

그새껏 엄동의 야영만 거듭하며 여기까지 온 삼만의 대군은, 오래간만에 집― 집도 대궐 같은 집에서 묵게 되었다.

눈을 꺼벅이어서 「그렇다」는 뜻과 「아니라」는 뜻만은 간신히 나타낼 수 있는 마리 장군의 뜻을 받아, 이곳 태수는 장차 개선하는 날에 왕정(王庭)에 갖다 바치기로, 참(斬)은 연기되었다.

마리 장군은, 목뼈가 부러져서 목이 속으로 부어, 이 때문에 물 한 모금 들이켤 수 없어서, 그의 실낱같은 목숨은 장차 굶어서라도 죽음은 면할 수 없었다.

꼼짝 움직일 수 없는― 금명간 반드시 죽을 중태의 몸을 가지고, 마리 장군은 자리에 고요히 누워 있지만 그의 눈시울에서는 눈물이 샘솟듯 하였다.

오이와 합부의 두 동무를 만나, 셋이서 좋은 주인을 찾아 섬기고자 천하를 돌다가, 그야말로 하늘 아래 우두머리 되는 훌륭한 주인을 만나, 그 주인을 협조하여, 우선 고구려 나라를 이룩하고, 대고구려의 영광도 멀지 않은 장래거늘, 자기는 무슨 운명이 고약하여 여기서 전사를 하게 되는가.

북옥저의 버금서울은 빼앗았다 하나, 가장 효용하고 강한 이백 장정을 잃고 나조차 여기서 죽는다면, 이 무슨 면목이랴. 임금이 들으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랴. 전술을 잘못 써서― 우리 이백 명이 산산히 헤어져서 행동했기 때문에 이백 명이 전멸을 한 것이다. 한데 뭉치어 이곳―대궐로 뛰쳐 들어, 막을 것 있는 곳에서 함께 싸웠더면, 우리 군사 삼만이 달려올 때까지 넉넉히 견디었을 것이다. 전혀 혼자서 산지사방하여 싸웠으니, 이렇듯 전멸을 한 것이다.

이런 어지럽고 뉘우쳐지는 생각들 때문에, 마리 장군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차피 죽을 몸이요 몹시 아픈 몸인 위에, 자기 때문에 삼만 장졸은 이 버금서울에 얽매어져서 진군도 못하는 형편이니, 자기는 죽음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스스로 죽어 보려는 생각도 나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몸이라,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고, 막하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당부하고 싶으나, 그 방도도 없었다. 그런 뜻을 나타내 보려고 몇 번 노력해 보았으나, 뜻은 통하지 않았다. 인제는 무가내하 굶어 죽거나 상처로 죽거나 하기를 기다릴 밖에 없었다.

적도(敵都)를 점령하고 있는 고구려 삼만 군도 사령관의 중태를 근심하여 근신하는 듯, 본시 같으면 소 잡고 춤추고 노래하고 야단일 터인데, 아주 고요하였다.

×

마리 장군은 나흘을 지내도 아직 죽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이란 무던히 질긴 모양으로 그렇듯 중한 상처를 받고 그 위에 굶어서도, 그냥 목숨은 붙어있었다. 굶어도 시장기는 그다지 느끼지 않지만, 정신은 더욱 쇠락하여, 근심 걱정만 더 확대되어, 마음을 괴롭게 한다.

이렇게 지내기를 나흘 하였다. 군사와 비장은, 행여 하여 연해 미음이라도 한 술 마셔 보기를 청했으나, 나흘을 지내도 부기는 조금도 내리지 않아 물 한 술 넘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러진 목뼈와 쪼개진 머리도 부기가 생기며 곪기 시작하였다.

그 나흘째 되는 밤, 이 밤도 여전히 쇠락한 머리로, 오늘밤이나 행여 죽어질까 하면서, 어제부터 느끼는 심한 시장기에 괴로워하고 있는 밤중― 꽤 깊은 밤중이었다.

한 번 더 임금(주몽왕)을 우러릅고 싶었다. 자기의 주검이나마 임금 계신 졸본 서울에 묻히고 싶었다. 그러나 의사(意思)를 발표할 수 없는 병신 몸이라, 모든 욕망 다 버리고 어서 죽어지는 날이나 기다릴 밖에는 도리가 없는 신세였다. 자기가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면, 임금은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온 인생 노정의 겨우 첫걸음인 서른 살 안팎의 꽃다운 나이로, 광휘의 날을 분명 눈앞에 두고, 면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였다 하는 것은 안타깝기 한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임금의 아래서면 대고구려 달성은 반드시 보리라는 신념은 굳게 가질 수 있는지라, 이 점만은, 죽음의 마지막 선물로 마음 튼튼하게 생각되는 바이었다.

곁에 모시던 부위염 군사며 물사 비장은, 벌써 고요히 잠들어 있고, 그 곁에는 이곳 태수가 결박진 채 잠자는지 깨어 있는지 모로 쓰러져 있다.

그들의 숨소리에 마리 장군이 귀를 기울일 때였다. 이 대궐 밖에서는, 갑자기 천지가 떠나가는 듯한 굉장한 규환성이 났다.

사령관 마리 장군이 중태로 누워 있다 하여, 고구려 장졸들은 장군을 놀라게 하지 않고자, 모든 음향을 삼가고 있었다. 무슨 소리가 장군께 들려 병상의 장군의 놀랄세라 하여, 모든 음향을 삼가서 요란스런 음향은 절대로 내지 않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아우성이 나는 것이다. 잠들었던 군사와 비장도 깜짝 놀라서 깨었다.

"와아!"

"만세에! 만세에!"

"우리 나랏님 만세에!"

"주몽님 만세에!"

"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중태였던 마리 장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임금님 오셨구나."

물 한 모금 못 넘기던― 입의 뼈가 삐뚤어져서 신음 한 마디 못 내던 마리 장군의 입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비츨비츨 일어서려다가 털썩 쓰러졌다. 막료들은 깜짝 놀라서 상관을 붙들었다.

"장군님, 왜―."

"우리 임금님 오셨소. 어서 나를 부축해서―."

"장군님, 왜 그러서요? 정신 차리서요. 그리구 밖은 왜 이리들 소란하냐."

"군사(軍師)! 어서 우리 임금님께―."

그때였다. 우렁찬 말발 소리와 함께, 천지를 위압하는 듯한 고함 소리가 앞뜰에서 났다―.

"마리 장군은 어디 계시냐. 장군! 내가 왔소! 주몽이 왔소!"

천지를 누르는 듯한 그 음성은 틀림없는 고주몽 왕의 소리였다.

부위염과 물사도 이에 비로소 주몽왕의 내림(來臨)을 알았다. 두 사람은 황황히 달려나갔다.

마리 장군은 따라 나가지도 못하고, 팔(지금껏은 움쩍 못하던)만 두르며 희열의 부르짖음만 내고 있었다.

"장군님은 이 안에 계시옵니다."

부위염 군사가 임금께 아뢰는 소리가 들린 다음 순간은, 마리 장군은 애모하는 임금 주몽왕의 힘찬 팔에 꽉 안겼다.

"아직 살아 계신 장군과 대하니―."

말을 맺지 못하는 주몽왕의 눈에서는, 눈물만 좔좔 흘렀다.

"나랏님 갑자기 어떻게―."

일전에 여기서 연락사(連絡使)가 본국으로 가는 편에, 마리 장군은 이곳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곳은 지나의 색채가 적지 않게 있으며, 이곳 군병은 정면으로 우리와 싸우지 않고 성 안에 숨어서 좀된 계략으로 성가시게 군다는 뜻의 보고였다.

이 보고를 받고 주몽왕은 몸소 이곳에 와서 상황을 보고자 하였다. 적이 간사한 술책이라도 농락한다 하면 순후무비(順厚無比)한 마리 장군과 그 아래 삼만 장졸은 혹은 곤경을 겪게 될는지도 모르겠으므로….

그래서 이리로 떠나려 하매, 오이와 합부의 두 장군도 같이 가겠다 하므로, 오이 합부의 두 장군만 데리고, 단출하니 본국을 떠났다.

이리로 오다가 그저께, 여기서 가는 연락사와 길에서 만났다. 그 연락사에게서 주몽왕은 옥저 버금서울의 싸움의 경과를 듣고, 이백 명 전멸의 비보를 듣고, 마리 장군이 중상하여 넘어져 있다는 놀라운 보고를 들었다.

아직 생명은 붙어 있다는 마리 장군을 생전에 한 번 더 보고자 주몽왕은 이리로 달렸다. 오이 합부의 두 장군은 탄 말이 임금의 말만 못하여 썩 뒤로 떨어졌지만, 내일 아침은 두 장군도 여기 뒤미칠 것이다. 주몽왕의 탄 말 「흰미리」는 희대의 명마였다. 「흰미리」의 앞에는 언덕도 벼랑도 개천도 없었다. 이러한 온갖 장해물을 날아 넘으며, 눈보라를 산곡간에 피우며 휘날리며 이리로 달려왔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마리 장군과, 여기 군신간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뼈가 어그러졌던 마리 장군의 입도 이 돌연한 감격에 바로 잡혔다.

감격의 흥분이 조금 삭자, 비장 물사는 상관의 신상이 생각난 듯,

"장군님. 말씀도 하시니 무얼 좀 잡수실까요? 하다못해 마음이라도…."

"참, 장군은 굶으셨다지? 며칠째 굶으셨소?"

"나다흘 되나 보옵니다."

"무얼 좀 자셔 볼까?"

"글쎄옵니다. 아마 아직 목을 넘기지를 못할까 보옵니다."

"좌우간, 누구 미음이라도…."

막하들이 마리 장군의 무슨 요기할 음식을 준비할 동안, 장군은 임금을 가까이 청하여, 죽기 전 임금께 사뢰고 싶던 의견을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오직 순후무비하고 직한 것만 높여 왔지만, 전쟁에는 괴며 전술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과 아울러, 장차 맞서야 할 낙랑 등지와 싸우려면 이 「전술」이라는 것을 몰랐다가는 의외의 낭패를 볼지도 모르겠다는 뜻을 임금께 사뢰었다. 그리고 명일이라도 결행해야 할 옥저의 「큰서울」과의 싸움에도, 적은 그 「전술」을 이용할는지도 모르겠으니 애전에 그 준비도 해야겠다는 뜻도 아뢰었다.

주몽왕은 이 의견을 듣고 미소하였다―.

"장군도 「꾀」를 아셨구료. 한 나라의 주인된 내가 왜 그런 일 미리 생각지 않았겠소? 그래, 국사(國師) 극재사(克再思)님, 중실무골(仲室武骨)님, 소실묵거(少室默居)님 세 분께 의논해서, 우리나라 땅,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 지위에 맞을 진법(陳法) 전법(戰法) 등을 짜내 보라고 해 두었으니까 되어 갈게요. 다 되면 장수며 백성들에게 가르쳐서 천하 어떤 꾀쟁이와 맞서도 지지 않는 꾀를 짜내게 되겠지요."

"아아, 나랏님!"

그런 방면까지 벌써 고려하셨습니까. 어리석은 우리들로서는 그저 분부에 따를 밖에는 딴 말 낄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마리 장군은 진심으로 새삼스러이 이 임금께 감복하였다.

나흘을 굶은 마리 장군을 위하여 미음이 이곳 소산인 꿀과 함께 등대되었다.

임금은 몸소 미음을 떠서 장군의 입에 갖다 대었다. 임금이 몸소 권하여 몸소 떠서 입에까지 갖다 대 주는 광영의 미음이라, 단 한 방울이라도 넘기어 보려고 숱한 애를 썼지만, 목― 식도(食道)와 목젖이 통 부어서, 한 방울도 넘길 수 없이, 입밖으로 흘러 버렸다.

"장군! 이러다가는 굶어 죽겠소."

"하늘이 먹으라지 않습니다."

"사람이, 더구나 음식 앞에 놓고 굶어 죽는 법도 있담? 꼭 한 방울만이라도 임금의 명령으로…."

"나랏님의 엄명이실지라도 넘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뒤 마리 장군은 임금께 안겨서, 여기까지 달려온 오이, 합부의 두 동무에게 손 잡힌 채 세상을 떠났다. 마리 장군은 임금이며 두 동무에게, 「시장기가 죽기보다 더 어려우니 칵 죽여 주어 이 어려운 시장기에서 면케 하여달라」고 누차 애원하였지만 그래도 행여 부기가 낫는 날을 오늘이나 오늘이나 기다리다가 그만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리 장군은 만족하여 죽었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던 고구려군의 전술적 훈련도 임금이 일찍부터 알아서 대책을 강구 중이라 하며, 이 이 금의 아래서면 그의 큰 이상인 대고구려도 틀림없이 건설될 것이며, 처자권속이 없으매 안근심도 없이 아주 만족히, 애모하는 임금의 품에 안겨서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사람에게 혼백이란 것이 있사오면 소신 언제까지든 나랏님과 고구려 나라에 모시고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임금께 마지막 유언으로 사뢰고….

마리 장군의 주검은 옥저 버금서울 대궐 뜰에 묻었다. 장차 고구려군이 이곳을 떠날 때는 이곳을 불살라 쑥밭을 만들고 갈 것이지만 (마리 장군을 잃은 곳이라 하여 온 고구려군은 이곳을 원수의 땅으로 본다) 마리 장군의 묘소 수직을 위하여, 열 사람을 뽑아서 그 책임을 맡겼다.

커다란 돌을 산에서 구을려다가, 거기 고구려 국기와 마리 장군의 문장(紋章)을 새겨서 무덤 앞에 세웠다.

동부여에서 같이 떠나서, 오늘까지 십 년간 내내 함께 있으며 큰 업에 협력하여 오늘날에 이른 마리 장군은 임금에게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마리 장군을 잃은 임금은 한 팔을 잃은 듯한 섭섭함과 불안을 느꼈다.

어떤 대접을 할지라도 과하달 수 없는 마리 장군이었다.

임금은 오이 장군과 합부 장군을 데리고, 마리 장군의 새 무덤 앞에서 종일을 울었다.

인제는 마리 장군의 영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어서 바삐 옥저의 큰서울을 복멸해야 할 것이다. 삼만의 온 고구려 병졸도, 마리 장군 조상(弔喪) 싸움을 해야겠다고 모두 팔을 걷고 날뛰었다.

무론 마리 장군의 영을 위해서뿐 아니라, 국가의 대 정책으로도 옥저의 큰서울은 어서 복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몽왕은, 전쟁하지 않고 큰서울을 엎을 수 없을까 하는 방면으로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힘으로 보든지, 병졸들의 현재 불타는 복수심과 적개심으로 보든지, 옥저 큰서울은 우리가 들이치기만 하면 무론 부서지고 엎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필연상 우리 쪽도 단 몇 명이라도 희생이 생길 것이다. 없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단 몇 명이나마 희생이 없이― 즉 아주 그저 복멸할 도리가 없을까. 단 몇 명이라도 희생을 내기가 싫었다. 여기 온 고구려의 병졸은 그 모두가 애전에 죽음을 각오하고 떠난 용사들이다. 너 죽어라 하면 모두 달가이 죽음을 받을 무리들이다. 그러나 단 한 명도 희생 없이 옥저 큰서울을 꺾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몽왕은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여기 현재 포로로 붙들려 있는 이곳 전태수를 앞에 불렀다. 그 포로는 옥저 큰서울 태수와 친동기간이라 한다.

주몽왕은 포로의 결박을 끄르게 하였다. 붙들린 이래 지금까지 열흘간 내내 결박지어 있던 포로는 결박을 풀린 뒤에도 팔을 여전히 쓰지 못하여, 주몽왕은 병졸에게 명하여 그의 팔을 주물러 주게 하였다.

그리고 주몽왕은 그에게 이해(利害)로 타일렀다.

"너도 시재 겪고 보고 했지만 우리가 큰서울로 가기만 하면, 우리에게 대항하려다가는 큰서울도 이곳과 마찬가지로 쑥밭이 된다. 한인(漢人)이 되고자 하는― 온갖 일에 한인을 본떠서, 이곳 본래의 정신을 멸시하는 너희 같은 것은 백만 명 죽어도 아깝지 않으나, 옥저 큰서울에도 흰옷입는 백성이 꽤 많다 하니, 우리 손으로는 차마 그 흰옷 입는 백성은 도륙하기 싫다. 그래서 너한테 당부하는 바이다. 이제 너를 놓아줄 터이니, 너는 큰서울로 가서 네 형(큰서울 태수)에게 권하여, 곱다랗게 항복하도록 하게 하여라. 공연한 반항을 하여 쑥밭이 되고 도륙을 당하느니, 곱게 항복하여 너희와 너희의 아랫백성의 잔명이나 보존하도록 하여라. 너희가 곱게 항복하면 그 땅의 한인(漢人)만 잡아가고, 너희 형제와 토민은 그냥 보호해줄 뿐 아니라, 네 형을 눌러 태수로 봉작해 주마."

이렇게 분부하여 주몽왕은 포로를 놓아 큰서울로 가게 한 것이었다.

×

고구려의 병졸들은 왁자하였다. 마리 장군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옥저 큰서울을 도륙하겠다고 날뛰던 젊은이들이라, 싸움 없이 큰서울을 점령하고자 진군하자 할 때에 부르쥐었던 주먹 힘 처치치 못하여 두선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신왕(神王)이라고 애모하는 주몽왕이 이 삼만 군을 친솔하고 행군한다 하는데, 그들은 이 광영에 춤추었다.

고구려가 건국하여 우금 십 년에, 주몽왕이 몸소 싸움터에 나서서 용군한 일이 없었다. 매번 막하 장군들을 보내어서 정벌하였지, 임금은 제일선에 나서 보지 않았다. 임금이 친솔한다 하는 것은 고구려 생긴 이래의 처음 일이다. 게다가, 오이와 합부의 두 장군도 참가하여― 이것은 고구려 나라의 무력 방면 수뇌의 총규합이었다.

온 고구려병에게는 몸둘 곳을 모르도록 황공하고 감격적인 행군이었다.

버금서울을 떠나서 큰서울로 가는 길, 그들의 엄격한 군규도 잊고 임금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접하고자, 대오(隊伍)를 잃고 임금께 집중하였다.

임금은 당신을 이렇듯 애모하는 병졸들의 적심을 알아주어서 병졸들에게 간간 이야기도 던지며 행군하였다.

그러면서도 임금은 약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옥저 큰서울에서는 혹은 버금서울의 복멸을 낙랑에 보고하고, 구원병이나 청하지 않았는지. 큰서울에서는 무슨 꾀를 베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나 않은지. 멋모르고 들어오는 우리를 맞아 잔멸하고자 온갖 준비를 다 하고 있지 않은지.

분부 듣고 큰서울로 달려간 버금서울 태수가 제대로 보고를 하였으면― 그리고 큰서울 태수가 총명한 사람일 것 같으면 우리에게 반항을 한다든가 잔꾀 쓴다든가 하는 일이 결국에 있어서는 아무 쓸데 없는 일이며, 우리의 노염만 사는 데 지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겠지만, 그렇지 못하여― 혹은 지나인이 뒤에서 뚱기쳐서 무슨 딴꾀 부리면, 우리에게도 약간의 희생이 생길 것이다. 이 점이 성가시었다. 누구 한 걸음 앞서 보내서, 그 점을 진맥해 보고 싶으나, 우리는 모두가 천성이 순후정직하여 아직 그런 일을 눈치 떠볼 만한 약은 꾀 안 생긴 백성이다.

큰서울은 험준한 산간에 두었는지라, 버금서울을 떠난 이튿날부터는 길은 차차 험한 산간으로 뚫렸다. 산간이라 딴 곁길 없이 단 한 가닥의 길이 큰서울로의 길이었다.

여기 들어서면서, 주몽왕은 눈치 있음 직한 병졸 이십여 명을 뽑아서, 한 걸음 앞서서 큰서울로 향하게 하였다. 큰서울로 가면서 좌우(큰길 및 길 없는 골짜기)를 잘 살펴 혹은 적의 매복이나 없나 혹은 함정 같은 것이나 없나, 수상한 무엇이 없나 답사하고, 무슨 수상한 점이 보이거든 곧 돌아와서 본대에 보고하게 하고, 도중 초부(樵夫)든 누구든 사람을 만나거든 곧 붙들어서 이리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또, 샛길로 한패를 떠나보내서, 먼저 큰서울로 가서 큰서울 기색이 불안초조해 하는지, 혹은 태평한지를 엿보아 곧 이리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아무 탈 없이 복병도 만나지 않고, 이튿날 낮, 이 대군은 큰서울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세상이 백설이 덮여 흰 천지에서, 분명히 눈에 뜨일 복병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서울의 기색을 탐지하러 갔던 패의 보고는, 혹은 불안초조해 하더라 하며 혹은 태연자약하더라 하여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 기색은 불안한 가운데도 무엇을 기다리는 희망을 품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낙랑의 구원군은 없는 모양이었다.

성하 십리 밖에서, 주몽왕은 대군은 대오지오 정렬케 하여 뒤에 달고, 당신은 「흰미리」에 높이 앉아 막료 네 명을 곁에 달고, 입성(入城)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때 큰서울 안에서는, 고구려 신왕(神王)을 맞고자 큰서울 태수와 그의 동생(버금서울 태수)이 말을 나란히 하여 막료 몇을 데리고 나왔다.

형제 태수는, 멀리서부터 말에서 내려, 걸어서 차차 가까이 왔다. 주몽왕의 앞에까지 이르러서는, 한 무릎 꿇어 주몽왕께 절하였다.

흰옷 입는 백성의 공통되는 경배법(한 무릎 꿇어 절하는 것)을 태수 형제에게서 발견하고, 종족의 전통은 벗지 못하는 태수 형제에게 얼마간 친애미를 느꼈다.

"애쓴다."

"여기까지 왕림하시기, 얼마나 고단하시오니까?"

"말에 오르거라. 길도 험한데."

그러나 형제 태수는 말에 오르지 않고 좌우 편에서 주몽왕을 모시고 차차 성으로 갔다. 곧 성하에 이르렀다.

그때 「씽」하니 살이 하나이 주몽왕을 향하여 날아왔다. 그 첫 살에 뒤이어서, 연달아 십여 개가 날아왔다.

그러나 그 살은 하나도 주몽왕은커녕 「흰미리」도 다치지 못하였다. 주몽왕이 말안장 곁에 상비해 둔 작은 칼을 어느 틈에 쥐었는지, 그 칼만이 공중에서 반짝반짝하는 가운데서, 살은 모두 촉이 잘려서 땅에 떨어졌다.

다시 날아오는 살이 없다고 본 뒤에, 주몽왕은 눈을 큰 태수에게 돌렸다.

"무슨 짓이냐?"

의외의 변괴에 태수 형제는 털썩 주저앉아 몸만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게 나를 맞는 대접이냐?"

"소신들은―."

와들와들 떠는 가운데서 간신히 꺼내는 이 말과 그들의 태도 표정 등으로, 주몽왕은 이 짓이 태수들의 지휘한 배 아니요 태수들에게도 의외의 변괴인 것을 알아채었다.

"너희들의 한 짓은 아니구나."

"― 소신들이 감히― 언감생심…."

"누구의 짓으로 짐작되느냐."

"소신들이―."

그냥 변명하려다가 생각난 듯 자기의 막료를 돌아보았다.

"누구의 짓 같으냐."

"알 수 없습니다마는 혹은 낙랑인― 낙랑의 한노(漢奴)들의 짓이 아니오리까?"

"옳아! 그러려니. 그놈들의 짓이로구나. 우리야 언감생심 신왕님께― 그래, 그래."

진범인이 발견되어 자기의 청백이 드러난 듯, 같은 소리를 중언부언하는 이곳 태수의 혼잣말을 귓등으로 넘기며 주몽왕은 눈을 구을렸다.

"그래 나를 쏘려고? 내 몸에 한인 놈의 살이 박힐 듯싶으냐. 괘씸한 놈들 같으니. 그래 얘들아, 이 큰서울에 한인놈들이 몇이나 있느냐?"

태수 형제는 마주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는 좀 어색한 듯 머뭇거리며 대답하였다―.

"소신의 적은이(버금서울 태수)가 이리로 와서 신왕님의 높으신 분부를 전하기 전에, 소신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옵고, 낙랑에 구원을 청하온 일이 있사옵니다. 그래서 한인놈들의 병졸이 이곳에 사오백 명 왔었습니다. 그 뒤 적은이가 이리로 와서 신왕님의 높으신 분부 전하옵기, 그 분부에 좇으와 한인놈들을 도로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 했사옵더니, 그놈들은 신왕님의 면용이나마 한 번 우러릅고 가겠다고 하옵기, 그러라고 해 두었삽더니, 그놈들이 이런 짓을 했사옵니다."

"너도 은근히 바랐지. 한인들이 나를 넘어뜨려 주기를?"

"천만에. 소신이 언감생심…."

"너도 보았거니와 내 몸에는 살이 박히지 않아. 공연한 짓 하다가 너의 아우 같은 꼴을 겪지 말아라."

"언감생심― 언감생심…."

자기네의 경애하는 임금에게 살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성 안으로 엄살해 들어가려는 병졸들을 주몽왕은 달래어 멈추었다. 그리고, 이곳 형제 태수의 옹위하는 가운데서, 주몽왕과 그의 장졸은 위의당당히 옥저성 안에 들었다.

성 안에 있던 몇백 명 한인은 이곳 토민들이 고구려병을 인도하여 다니며 일일이 지적하여 고스란히 잡았다. 포로로서 고구려의 종(奴[노])이 되어, 장차 이번 종군한 병졸들에게 상으로 하사될 것이다.

한 개 종족에게는 종족으로서 흐르는 피가 있다. 수백 년간 치자(治者)의 야심으로 인한 다른 정치체제 아래서, 다른 지역으로 갈려 살던 옥저도 마치 기름에 섞는 기름처럼, 고구려에 섞이어 버렸다.

북옥저도 없어지고 고구려의 한 현(縣)으로 편입되었다. 그 태수는 역시 고구려의 한 다물(多勿) 태수로 임명되었다.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북옥저를 삼킨 주몽왕의 만족도 컸다.

옥저도 삼키고, 단군의 옛터로 아직 고구려의 왕권 아래 들지 않은 땅은, 정 보잘것없는 몇 개 나라(나라라기보다 부락이었다)와 그리고는 부여와 낙랑과 및 낙랑을 지나서 더 남쪽에 있는 한(韓)땅 뿐, 그 나머지는 차례 고구려의 안에 포옹되었다.

동부여는 아직 금와왕(金蛙王)이 그 임금이다. 부여 지대는 본시 이 종족의 발상지(發祥地) 다. 부여 지역에서 처음 발상하여 약 이천 년간 동서남북으로 확대되었다가, 지나인(기자)의 침략을 받아 허리를 끊겨서 남쪽 지대는 남방에 남기고, 지나인의 팽창에 차차 압축되어, 본시의 발상지인 부여 땅을 중심 삼고 현재같이 압축되었다. 그러나 부여의 왕실만은 지금껏 미력(微力)하나마 엄존한 관계상, 부여의 옛 구역 안에 이 종족으로 이룩되는 국가들은, 관례상 부여를 종국(宗國)으로 우러르고 부여에 조공(朝貢)하고 한다. 마치 지나를 중심으로 한 제후국(諸侯國)처럼─

고구려는 장차는 이 부여도 집어삼킬 것이지만, 아직은 힘도 모자라거니와, 「종국」이라는 관념이 아직 남아서 그냥 둔다. 그러나 현재의 임금인 금와왕(주몽왕에게 은의도 있다)만 승하한 뒤에는 고구려는 용서 없이 부여를 집어삼킬 것이다. 이것이 고구려의 건국의 주지요 목표요 국시(國是)다.

낙랑― 낙랑은 무론 고구려의 가장 성난 철퇴가 내릴 곳이다. 나라 땅을 두 토막에 내고, 종족의 허리를 끊어, 종족의 적지 않은 수효를 남방에 격리한 지나인의 세력 구역 낙랑― 주민(住民)인 토민(土民)은 역시 흰옷 입고, 해와 하늘과 바위를 절하며, 한 무릎 꿇어 경배하는 종족이지만, 치자(治者)인 지나인은 토민의 위에 임하여 이곳을 저희네 땅으로 여기고 더욱이 지나 본국 정부(만 리 밖에 있는)에서까지 간섭한다. 지금 고구려의 힘이 아직 낙랑(전쟁 기술이 꽤 발달된)만 못하니 버려두거니와, 이 고장은 뼈를 갈아서라도 내 손에 찾아야 할 지역이다. 더욱이 이 낙랑 때문에 허리 끊겨 남방에 떨어진 지내는, 낙랑이 가운데 끼여있기 때문에, 소식도 불분명하거니와 연락도 할 수 없다. 고구려 나라만이 아니라, 종족을 위하여 때려 부수지 않을 수 없는 땅이다.

그 낙랑에 격리되어 남방에 떨어진 한(韓)땅. 이 종족이 지나인에게 허리를 끊겨 남방에 격절된 지역이다. 북방(이 종족 발상지를 중심 삼은)과 남방의 중간에는 지나인의 침략 식민지인 낙랑이 끼고, 본국인 북방에서 멀리 격절된 남방 지역을 「한(韓)」이라 불렀다. 그 「한」이 마한 진한 변한(馬[마], 辰[진], 弁韓[변한])의 삼한으로 갈리었다.

중간에 끼여 있는 낙랑땅만 고구려가 엎으면, 그때는 고구려는, 한(韓)땅(같은 피의 종족의 땅인)에 연접하게 된다. 한땅 가운데 일부분인 마한 땅에도, 지나인(기자의 후손)이 가서 왕 노릇한다 한다. 본시 단군의 옛터를 모두 합쳐서 한 임금의 아래 넣고, 이 땅에서 딴 종족을 내쫓으려는 주몽왕의 이상이라, 이 땅 안 한 귀퉁이에 지나인이 왕 노릇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바이다.

단군의 옛터에는 그 밖에 또 색채 다른 땅이 있다. 본시 하도 넓은 지역이라, 그 지역의 어떤 귀퉁이는, 오랜 세월을 거듭하는 동안에 풍습과 언어가 원줄기와는 인제는 아주 딴판으로 달라진 지역이 있다. 그 지역은 언어 풍습이 달라지느니만치 딴살림을 하노라니, 자연 문화 정도도 달라져서 원줄기와는 썩 뒤떨어진 문화 정도의 생활을 경영하고 있다.

숙신(肅愼) 그 뒤는 읍루(挹婁) 또는 말갈(靺鞨)이라고 불리는 종족이다.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뒷간과 거처실의 구별이 없으며, 원줄기인 부여(및 그 계통 종족)의 생활과는 아주 딴판인 미개한 생활을 경영한다.

이 종족도 태고적 옛날은 한 할아버지의 후손이라 하여, 주몽왕은 남같이 안 생각되어, 품 안에 끌어넣을 공작을 늘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주몽왕의 동방 민족 총규합의 큰 운동은 착착 진척되고 있었다.

×

주몽왕 건국 제십사 년 여름, 동부여에서는 가장 슬픈 소식이 고구려 왕궁에 들어왔다.

주몽왕이 늘 생각하며 사모하여 마지않던 어머님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부여 임금 금와왕은 유화 부인의 별세를 조상하고 겸하여 새 나라 고구려에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유화 부인의 주검을 태후(太后)의 예에 의지하여 후히 장례 지내고, 또한 신묘(神廟)를 세워서 제사케 한다 하는 것이었다.

금와왕의 이 호의가 고마왔다. 동부여로서는 고구려국의 발흥과 팽창에 겁내어, 볼미(人質[인질])셈으로 유화 부인을 그냥 동부여에 억류하여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화 부인께 대한 정의도 있고, 신흥 고구려에 대한 경의(敬意)도 있는 위에 겁도 겸하여, 유화 부인을 그의 아드님의 나라로 보내지 않고 그냥 멈추어 두었을 것이다. 대접은 내내 극진하였다 한다.

유화 부인도 지난날의 신세도 있고 또한 정든 땅이기도 하고 해서, 무정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부여 땅에 그냥 있다가 임종까지 그곳서 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화 부인인들, 당신의 아드님이 졸본 땅에서 한 나라를 이룩하고 그 임금이 되었고, 그 나라이 활발하고 굳세게 생장한다는 소문을 들을 때 얼마나 이리로 오고 싶었으랴. 거룩하고도 씩씩한 아드님의 용자와, 강하고 옳게 생장하는 새 나라 모양이 얼마나 보고 싶었으랴.

그러나 부여 나라와 새 나라의 사이에 무슨 감정상의 알력이라도 생길까, 이런 방면으로 생각이 미쳐 그냥 부여 땅에 머물러 있었다.

부여는 그래도 동방 모든 나라의 종국(宗國)이라, 종국이 임금이 새 나라 왕모(王母)를 그만치 후히 대접한다 하는데, 주몽왕으로서도 어머님을 굳이 옵시사 하기도 어려웠다. 금와왕 승하하고 그 태자 대소(帶素)가 등극했으면 주몽왕으로서도 동부여 나라에 아무 관대함도 안 보였을 것이지만….

금와왕이 어머님 유화 부인을 그냥 동부여에 붙들어 둔 점을 충분히 이해하는지라, 증오심이나 적개심은 일지 않지만, 그래도 어머님 생전 단 한 번이라도 더 어머님께 뵙고 싶었다. 무르익고 크게 된― 한 개 나라의 임금으로 된 당신을 어머님께 단 한 번이라도 자랑하고 싶었다. 어린애다운 응석으로 「어머님, 저를 보세요」 하고 어머님 앞에서 외쳐 보고 싶었다.

그럴 기꺼운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히 어머님의 부보(訃報)가 주몽왕께 이른 것이었다.

아직 오십 미만의 한창의 나이로 왜 벌써 돌아가셨습니까, 이 자란 아들을 왜 한 번이나마 보시지 않고 돌아가셨습니까?

인제는 영원히 「아들」이라는 지위는 누릴 기회를 잃은 당신이었다. 지아버님이며 아버님이며 할아버님이며, 현재와 장래의 당신께는 이같은 무수한 지위가 있지만, 아들이라는 지위는 다시 볼 기회가 없다.

어머님께 보이고자 나라를 이룩하고 늘리고 한 바는 아니지만, 어머님을 잃고 보니 그런 일 하기도 맥이 빠지는 듯하였다.

금와왕이 어머님께 한 대접이 고마워서 주몽왕은 방물을 보내어 그 덕을 사례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실마리 삼아 고구려와 동부여의 새에는 친선관계가 맺어지고 친선사가 끊임없이 왕래하였다.

동방 모든 나라의 종국으로 자타가 허하는 동부여의 임금인 금와왕은, 주몽왕― 고구려에 대해서만은, 종국 같은 존대(尊大) 풍을 부리지 않고, 대등의 나라로, 대등의 임금으로 대접하였다. 더욱이 주몽왕은 아직 잠저(潜邸) 때에 금와왕의 한낱 말(馬[마]) 간수인이었던 데 지나지 못하거늘 그 주몽왕께….

아마 금와왕으로서는, 당신은 해모수님의 왕자인 해부루님의 양자로 지금 왕위에까지 올랐고, 주몽왕은 해모수님의 아드님이라는 역사적 관계로 주몽왕을 얕보지 않는 것이겠지만, 주몽왕으로서는 옛날 일찍이 나랏님으로 우러르던 금와왕의 지금의 대등적 대우에 감격하고 감사하였다.

동부여에 그냥 살고 있는 안해 예씨(그 사이 어머님 유화 부인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는 소식은 늘 들었다)와 예씨의 품 아래 있는 유리(瑠璃) 소년은 어머님 그냥 계시니 버려두었지만 어머님도 떠나신 지금에는 동부여에는 아무 인연도 없다. 곧 이곳으로 부르고 싶었지만, 이 역시 금와왕의 그런 호의에 어머님 세상 떠났다고 그 날로 이리로 부르기도 좀 어떠하여, 장차 좋은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그냥 두었다.

고구려와 부여는 서로 저퍼하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삼가는 나라로서, 서로 건너다보기만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중원(中原)

[편집]

"천자(天子)의 종자가 따로이 있으랴. 누구든 하늘의 뜻을 받고,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예로부터의 지나인의 천자관(觀)이요 왕권관(王權觀)이었다.

그런지라, 요(堯)가 순(舜)에게 선위(禪位)하고, 순이 우(禹)에게 선위한 것이다.

그러나, 제 자식이 남보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따라서 무슨 좋은 물건이 생기면 남에게보다 내 자식에게 주고 싶은 것은 동물의 본능이다. 내 것은 장차 내 아들에게 주고 싶지 남에게 주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왕권(王權)」 같은 천하의 지보(至寶)는 내게 자식이 없으면여니와, 있기만 하면 결코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위자계(父位子繼)의 제도는 사람의 본능상 자연히 필연적으로 생겨나지 않을 수 없는 제도다.

지나인은, 이 인간세계를 지나 종족의 것으로 믿는다. 지나 종족이 아닌 종족은, 이를 오랑캐라 하고 화외(化外)의 백성이라 하여, 「사람」 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치고, 지나 종족의 예하(隸下)의 것으로 쳐서,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지라, 지나 종족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요, 그런지라, 지나의 천자(天子)는 세상 만물의 신성하고 거룩한 주인이다.

그 위대하고 거룩한 위(位)를 처음 동안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을 산 사람」이면 누구든 오를 수 있지, 별다른 종자가 있지 않다는 관념을 가졌을 때는, 제각기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또는 인심을 사고자 노력하였지만, 부자계승(父子繼承)의 제도가 확립된 뒤에는 감히 왕위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생념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워낙 지나는 바닥이 넓고 사람 수효가 많아서, 한 개 왕권으로는 다 보살피기도 어려운 위에, 워낙 또한 왕권을 부러워하는 무리(부러운 나머지에 욕심까지 내는 무리)가 많아지매, 이 욕구에도 순응할 겸 폭발(욕심에 의지한)도 막을 겸하여, 제후(諸侯)제도가 생겨났다. 지나 땅의 바닥을 이 모퉁이, 저 모퉁이로 나누어 가지고, 그 나누인 지역마다 통치자 한 개씩을 두어서, 그 구역(관할 구역) 안에서 왕권을 행사하여, 왕 노릇 하고 싶은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였다.

이 제후국(諸侯國)이, 많을 때는 천여 국까지 늘었다. 천자는 중앙에 앉아서, 천령(天領)이란 직할(直轄) 땅에만 전권을 가졌지, 각 제후의 땅은 제후들의 오로지하는 바였다.

그 제후라는 것도, 처음 천자가 임명하는 것이었지만, 차차 지방의 실력자들이 제 실력으로 땅을 점령하고 스스로 제후가 되어 그 지방을 관할하게 되고, 천자는 다만 「천자」라는 높고 거룩한 칭호만 누렸지, 아무 실력도 없는 허수아비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따지자면, 역시 천자는 천자로서, 만방(萬邦)의 가장 높은 주인이요, 제후는 천자의 아래서 각각 제 관할 구역의 지방장관일 따름이다.

그런 관계 아래, 그 옛날, 은(殷)이라는 천자의 나라이 있다가 그 「은」 이 「주(周)」 나라에게 망할 때에 은나라의 왕족이었던 자서여(子胥餘― 기자라 한다)라는 사람이 주나라를 섬기기 싫어서 부하 오천 명을 데리고 주나라를 피하여 동방으로 망명하였다. 동방에는 「단군」이란 임금이 「조선」이란 나라를 이룩하고 온 동방을 통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지나인은 온 천하를 지나인의 것으로 지나 천자의 영토로 여기고 있다. 그런지라, 동방에는 단군이란 임금(지나의 은실(殷室)이라든가 주실(周室)이라든가 하는 것과 대등(對等)으로 동방의 천자다)이 조선이란 나라를 이룩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동방에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는지 어떤지는 인정하지 않고 「조선」이라는 지역(地域)이 있는 것으로만 여기고 있다. 그리고 조선 지역에는 오랑캐(東夷[동이])가 살고 있고, 토왕(土王)이 있는지는 혹 모르되 적어도 지나 천자가 임명한 임금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지라, 기자가 주(周)를 피하여 조선 땅으로 오매 「주」는 기자를 「조선후(侯)」로 봉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땅 안에는, 미리부터 있던 단군 왕실과 주나라의 제후로서의 기자 왕실의 두 왕실이 있게 되었다.

「조선」이란 것은 나라 이름이냐 혹은 지역 이름이냐, 따라서 이 종족의 임금이 되어야 조선왕이냐 혹은 이 땅의 왕이 되면 조선왕이냐, 그런 점을 따지고 캐자는 까다로운 세월이 아니요, 순후무쌍한 태고적 시절이라, 민족의 임금인 단군 왕실 이외에 「지나 천자가 임명한 조선 지역의 임금」 인 「기씨 왕실」이 병립하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은 조선 지역 같은 먼 화외(化外)의 땅은 욕심나지도 않고 관할하기 성가시고 귀찮기나 하지만, 기자가 그 땅으로 주나라를 피하여 가고 보니 주 왕실의 체면도 유지하고 권위도 밝히기 위하여, 기자를 조선후로 봉한 것이었다. 이것은 지나 왕실(천자)의 상투 수단으로, 먼 곳에 있는 지역(관할하기 힘든)에는 지나 천자의 이름으로 봉작(封爵)을 하여 둔다. 저쪽은 그 봉작을 받건 말건 간에 이쪽에서 봉작하고는 그 지역도 예하(隸下)의 나라라 여긴다.

기씨는 주나라 왕실을 피해 온 사람이라, 주나라에서 자기를 조선후로 봉했건 말았건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이 땅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이 땅의 이름이 조선이라 하여 조선왕으로 자임하였다.

조선 민족의 왕이요 이 땅의 본시의 주인인 단군 왕실은, 이것이 내 땅이라 네 땅이라, 조선이란 이름을 내가 지었다 네가 지었다, 까다롭게 다투지 않는 순후한 관대심으로, 내 땅 한 귀퉁이에 지나인이 와서 조선왕이노라고 행세하건 말건 버려두고, 그들과 시비하든가 옥신각신하기 싫어서, 좀 뒤로 비켜 주었다.

지나땅 안에서는 주나라에 제후국이 생기고 늘고 하여, 천여의 제후국까지 생기노라니, 여간 어지럽고 시끄러운 세상이 전개되고 계속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노라니, 그 백성들도, 어제는 「갑」 나라 백성이다가 오늘은 「을」 나라 백성으로 또 내일은 「병」 나라 백성으로― 백성이야말로 도탄의 괴로움에 빠져서 도저히 안주(安住)할 수가 없었다. 이 가련한 지나인들은, 동방에는 조선이라는 낙원이 있고 기씨라는 지나인이 그곳 왕 노릇한다는 소식에, 자기네들의 활로를 찾아 연락부절로 조선 땅으로 넘어왔다.

기씨 왕실은 이 붇고 늘어 가는 지나인을 끄을고, 차차 더 살기 좋고 다스러운 지방으로― 동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반도(半島)의 중부 지대까지 흘러갔다. 그 흘러간 전(全) 노정(路程)― 처음 넘어선 곳인 요서(遼西)로부터 마지막 자리 잡은 평양(平壤)까지― 에는 선적(線的)으로 지나인 부락을 남기었다. 남과 시비하기를 싫어하는 본시의 조선종족은, 지나인이 통과하는 데며 머무는 데마다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런데 이 조선 땅에 들어온 지나인 저희끼리 또 다툼이 생겼다. 위만(衛滿)이란 지나인이 한때 기씨 왕실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홀연히 기씨를 반역하여 스스로 조선왕이 되었다. 지나인의 「위만 조선」이란 것이 생겼다.

위만을 보호하느라고 품 안에 안았다가 도리어 위만에게 배반받은 기씨왕은, 조선 땅에서 도망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남쪽에도 조선종족(단군 백성)이 살고 있었다. 본시 조선종족이 온 동방에 퍼져서 살고 있었는데, 지나인에게 침입받아서 허리를 끊겨 두 토막이 된 바의 그 남쪽 토막이다. 남쪽 토막은 「한(韓)」이라 일컫고 마, 진, 변(馬 辰 弁)의 삼한이 있었다.

위만에게 쫓겨난 기씨는, 여기도 또 순후한 조선종족이 살고 있는 것을 하늘께 감사하며 마한을 쳐서 마한의 임금이 되었다.

그동안에 지나 본토는 어떤 움직임을 하였나.

「천자는 별종자냐」는 천자관(天子觀)을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나인이라, 제각기 천자가 되려는 무리가 늘고 늘어서 천여의 제후국이 생기고 따라서 천여의 임금이 생겼지만 「왕」이 이렇게 많이 생기고 보니, 왕도 도한 신통하지 않아서, 역시 천자가 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왕마다 생기게 되는 것은 이 또한 필연한 일이다. 많은 왕 가운데서, 나 혼자 천자가 되려면, 다른 우왕(友王)들을 다 꺾어야 할 것이다. 아직 주실(周室)이 천자라는 자리는 차지하고 있지만, 실력 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못하고― 이리하여 제후 가운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멸하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일곱의 큰 제후만이 남게 되었다.

그 일곱 제후 중에 가장 강한 진(秦)왕이, 드디어 다른 제후를 다 멸하고 혼자 남게 되었다.

이것이 진의 시황(始皇)이었다.

진시황이 단 혼자― 즉 천자가 되면서는, 재래의 봉건(封建)제도를 없이 하여 「제후」하는 것을 안 두고, 천하를 단 하나의 천자와, 그 천자 의정부에게 예속(隸屬)하게 하였다. 제후가 있어서 제후가 그 지방의 절대권자 노릇을 하던 봉건제도는 진시황에게 꺾이고, 천자와 및 천자의 정부에 천하를 직속하게 하여 천하를 군현(郡縣)으로 나누고, 각 군현에는 천자의 정부가 임명한 장관(長官)이 천자의 명을 받아서 관할하고, 그 임명과 경질 면관 등은 오직 천자의 정부의 권한으로 하여, 지나 건국 이래의 대개혁을 하였다.

그러나 진(秦) 왕조는, 지나 제국의 기초와 운용 방침의 틀만 잡아 놓고는 또 무너져 나가고, 진조(秦朝)에 대신하여 유씨(劉氏)의 한조(韓朝)가 생겨서 지금은 유씨 천자의 세상이다.

그런데, 지나 종족이 건국 이래 암(癌)으로 여기는 것이 있다. 즉 조선이라는 종족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다. 지나인인 기씨며 위씨의 조선이 아니라, 그 지역 원주민의 조선이다.

천하는 지나의 것이며 지나 천자의 것이라는 것은, 지나인의 신념이며 신앙이다. 지나 종족 이외의 종족은 모두가 야만인이며 오랑캐라는 것도 그들의 신념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과한 자대망상(自大妄想)도 아니어서, 지나 주변의 나라(혹은 인종)들은, 혹은 싸움에 강하거나 혹은 개인 완력이 세거나 한 종족은 있었지만, 모두가 문화적으로는 미개하여 오랑캐의 역을 벗지 못하였다.

옷도 없이 벗고 산다든가 혹은 짐승의 가죽으로 겨우 좀 감추고 산다든가 하고, 그릇과 수저도 없이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다든지, 남녀 관계가 짐승이나 일반이라든지, 인륜 생활이 무규칙하며, 어미를 안해로 삼고 혹은 딸을 안해로 삼는다든지― 사람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지고 더구나 문화생활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지나인은 벌써 꽤 고등한 문화생활을 경영하던 종족이라, 이러한 미개 인종은 혹은 싸움에 세기 때문에, 그들(미개인)에게 욕보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래도 역시, 그네들을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었고, 또한 그럴 특권을 가졌다고 자신할 수도 있었다. 그 미개 종족들도, 혹은 때때로 지나인과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지나 계통의 사람을 잡아다가 종으로 부려 먹기도 하지만, 그러기는 하면서도 지나인을 자기네보다 훌륭한 종족으로 자기네는 지나인보다 야만인으로 알고 믿고 자처하였다.

지나를 천하의 중심지라 하여 중원(中原)이라 하고 지나인을 중국인이라 하는 것은, 천하가 공허하는 바이다. 설사 철없고 견식(見識) 없는 종족이 있어서 지나의 우수한 점을 모르고 지나를 수월하게 안 본다 할지라도, 지나인 자체로서는 그런 무지한 인종은 도리어 도외시하고, 개의(介意)치 않는다.

그런 가운데, 동방에 단군이란 이가 이룩한 조선이란 나라는, 처음 모를 적에는 몰랐지만, 차차 거래가 생기로 상종이 생기면서 보니, 그 생김생김도 지나인과 흡사하고, 무슨 이치를 깨우치는 머리도 지나인에게 지지 않으며, 쑥쑥 발달되는 문화 정도도 홑볼 종족이 아니다. 게다가, 지나 자신은 춘추시대라 전국시대라 어지러운 세월을 계속적으로 겪기 때문에 백성은 이리 시달리고 저리 쫓기느라고, 온갖 문화는 순조로운 발달을 못할 동안에, 저 백성은 싸움 모르고 평화한 생활을 해온 덕으로, 문화 방면으로는 지나보다 훨씬 앞선 자도 있다.

그 땅(조선)에 지나인 기씨가 들어가서 지나 민족을 끄을고 차차 남으로 내려가면서 이룩한 문화도 지나 본토보다 훨씬 우수하니, 그곳 토민의 문화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종족이 지나의 종주성(宗主性)을 무시한다.

그 종족은 「지나도 한 개 나라요 우리도 한 개 나라라」고 생각하지, 결코 지나 천자가 천하의 주인이요, 우리(조선 원주민)도 지나 천자의 땅안에 사는 지나 천자의 백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나인에게는 아니꼽게 생각되는 점이었다. 봉건 시절에는 천하가 나누여서 제후의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어디를 따로 구별하여 볼 수가 없었지만, 진시황이 지나땅을 통일하고 보니, 동방의 조선 땅에 지나인 계통의 조선이 따로 있고 본고장 계통의 조선이 따로 있다.

진시황의 야심과 패기로는 여기도 무슨 손질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본토 통일을 간신히 끝내고 먼 곳까지 손을 뻗칠 여력과 시간이 없이, 이렁저렁 하는 동안에 진시황 세상 떠나고 뒤이어 진나라까지 넘어지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한나라.

그 한나라가 새로 생긴 지 십이 년 뒤에, 지나인 위만(衛滿)이 기씨 조선왕을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 땅 안에서, 지나인들이 저희끼리의 세력다툼, 권력 다툼이지, 한(漢)나라 본국에서는 아랑곳하지 않는 바이었다. 아직 조선 일에까지 손을 뻗칠 여력이 없었다. 한나라 자체가 아직 안돈되지 않은 것이다. 한(漢)은 한으로, 조선 땅 안의 지나인은 또 「위씨조선 백성」으로 제각기 지냈다.

그런데 그 뒤 약 팔십 년 뒤에 조선 땅 안에 원주민(단군 백성)으로 이룩하였던 예(濊)가 스스로 자진하여 「한」나라의 속령(屬領)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종족의 반역이었다.

「한」은 좋다꾸나 하여 「예」를 「한」의 창해군(滄海郡)으로 하였다.

약 십오 년 지나서, 한은 비로소 군사를 움직여서 위씨의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낙랑, 현도, 진번, 임둔의 네 고을을 두었다.

기자가 주나라를 피해서 이 땅으로 넘어와서 조선 땅의 한 귀퉁이에 주저앉아 「지나인의 조선」을 따로 이룩하여서 그 뒤 또 지나인 「위만」이 「위만조선」을 이룩하였던― 이 땅 안의 지나인의 조선은 지나인의 한(漢)이 멸하고 그 땅에 지나의 네 고을을 둔 것이다.

그리고 조선종족의 조선은 「부여」라는 칭호를 가지고 지나인(기씨 조선)에게 차차 압축되어 한구석에 밀려가 있었다.

기씨가 이 땅에 들어와서, 들어온 어구에서부터 마지막 자리잡은 「반도 중부 지대」까지의 그 연로(沿路)는, 지나 본토의 끊임없는 동란 때문에 동방 낙토로 피난해 온 피난민이 쭈욱 선적(線的)으로 머물러 토착(土着)하여 지나인의 식민지를 이룩하고 있다. 「한」이 지나인의 조선(기씨 조선과 뒤이은 위씨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네 고을을 처음 두었다가 이십여 년 뒤에는 임둔군과 진번군은 폐하고 현토군은 요동땅 안으로 옮기고― 말하자면 의미 없는 일이지만, 먼 조선 땅도 늘 간섭하노라는 시늉이었다.

그러나 지나 종주권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 단군조선은 전쟁의 힘이 부족하니, 한쪽으로 압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부여」라는 나라를 그냥 유지하고, 지나의 속령 되기를 거절하는 아니꼬운 나라이다. 미개 종족 같으면 괘념할 바도 아니나, 지나 민족과 동등의 문화를 가진 종족이라, 그 굴복하지 않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고 불쾌하였다.

자진해서 내공(來貢)하거나 내속(內屬)되지 않으니, 엎질러서라도 절을 받아 보고 싶은 것이, 지나 천자의 심사였다.

그 예비공작으로 한 것이 조선(지나인이 건설한 바의)의 복멸이었다.

그 임금은 지나인이나, 지나 왕권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지나인의)은 지나 본국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나라다. 한나라 원봉(元封) 이년에 한의 천자는 조선왕인 위만의 손주에게「서울로 와서 천자께 한 번 폐현(陛見)하라」고 분부하였지만 그 분부도 거절한 조선왕(지나 계통)이었다.

그런 조선 나라를 멸해 버리고, 그 땅을 지나의 고을로 하고, 본국에서 그 태수를 임명해 보내서, 그 지역을 지나 본국에 직속하게 하였다.

그리고서는 좀 더 기회를 보면서, 본국(한)의 힘도 좀더 정돈하여 가지고 기회 무르익은 뒤에, 본국병과 지방병(낙랑지방)의 힘을 합해서, 지나의 암(癌)인 「단군조선」을 부수려는 것이다.

한(漢)이 초(楚)의 항우(項羽)를 최후로 멸하여 천하에 주인 되고 보니 한나라에 그냥 대립 되어 있는 땅은 부여밖에 없다. 그 밖에는 보잘것없는 조그만(한 개 부락에 지나지 못하는) 나라이거나 하잘것없는 야만 미개국뿐인 가운데, 오직 잔부(殘部) 조선만이 대등의 문화를 가지고, 통일된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조그맣게 압축은 되었지만), 동방에 예하국(隸下國)까지 적지 않게 가지고 그냥 맞서 있다.

이 조선민족의 조선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지나 종족의 전통적 희망이요 야심이요 목표였다. 더구나 한(漢)나라가 온 지나를 손아래 넣은 뒤로부터는 나날이 구체화하여 가는 생각이었다.

― 이러한 때에, 이러한 시절에, 고주몽의 고구려 나라가 생겨난 것이다. 시대가 아직 태고시대니만치, 종족 관념이란 것에 대한 명확한 의식과 인식과 판단과 자각은 모호하였을 것이나, 같은 언어, 같은 풍습, 같은 신앙을 가진 종족은 한 왕권의 아래 통합하겠다는 목표로서 우선 이 땅 안에서, 같은 종족으로 딴 나라로 갈려 있는 나라들을 한데로 뭉치고 그런 다음에는, 이 한 개로 된 힘으로 장차 다른 종족에 대하겠다는 목표 아래, 그의 힘찬 발자욱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형제(兄弟)

[편집]

골령(鶻嶺)은 졸본 서울 근방에서 경개 좋기로 이름나고, 때때로 황룡이 와서 춤춘다고 길한 곳으로 이름난 곳이다.

뒤(남쪽)로는 아로새긴 듯한 기암(奇岩)과 괴석을 등지고 거기는 숲과 꽃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졸본내의 푸르른 물을 안고 두루미 길게 울며 날아다니며, 아래로는 바야흐로 늘고 커 가는 졸본 서울의 오색칠채로 꾸민 새 거리가 연연한 장성(長城) 안에 아늑하게 잠겨 있어서, 대고구려 출발의 상서로운 땅임을 말하는 듯하다.

이즈음 몇 해째 졸본 서울 사람들이 놀러 다니느라고 그 발길에 새로 생긴 길이, 바라보는 경개 좋은 곳을 따라서 이리저리 닦여 있고, 좀 과히 가파로운 길에는 발 짚을 자리며 손 붙들 자리도 생겨 있다.

이 길을 따라서 주몽왕은 두 왕자(비류와 온조)의 손목을 잡고, 산으로 놀러 오르고 있다. 심복 막료 합부 장군 단 한 사람이 뒤를 따른다.

"숨 차냐?"

"아니오."

"그럼 저기 보이는 부리까지 뛰어 올라 가자느냐?"

"네."

두 왕자를 앞세워 달려 오르게 하고 임금은 뒤로 성큼성큼 따라 올라갔다.

두 소년은 꽤 가파롭고 긴 벼랑을 내내 달려 올라갔다. 그리고 아버님이 아까 가리킨 곳(몇 사람이 앉을 수 있을 평평한 바위였다)까지 가서 발을 멈추고서 그때야 숨이 꽤 찬지, 아래 감감히 굽어 보이는 강을 향하여 돌아서서 가슴을 하― 하― 뛰놀리고 있다.

왕자들이 거기 서자 아버님도 곧 뒤따라 왔다. 합부 장군도 와서 조금 뒤떨어진 곳에 선다.

"자, 앉아 좀 쉬자."

가정에서의 주몽왕은 천하 일의 행복자였다. 현철한 왕후에 영특한 왕자에― 부족한 곳이 없는 이였다.

임금은 단출하니 두 왕자와 심복 부장 한 사람만 데리고 이 영(嶺)으로 산보를 나선 것이다. 그들이 발을 멈추고 쉬는 곳은, 이 영의 마루턱이 거진 다 올라온 데였다. 영의 마루턱을 넘어서 늦은 봄 상쾌한 바람은 산꽃(山花)의 향기를 풍겨다 준다.

"좋지? 산 아름답고 물 맑고 사람 훌륭하고─ 좋은 나라이 아니냐. 이렇게 좋은 나라가 또 어디 있을 줄 아느냐. 참 하늘나라로다."

이 좋은 나라의 임금이로라는 긍지가 임금의 마음을 더 흥그럽게 하였다.

"나는 이곳 임금이요, 너희는 내 아들이로구나. 좋지 않으냐?─ 장군도 이리 가까이 나오구료."

그러나 지금 쉬는 바위는, 합부 장군까지 함께 앉기에는 부족하다. 부자(父子)는 서로 붙안고 혹은 무릎에 앉고 할 수도 있지만, 군신(君臣)지간이라는 지위상의 차이가 있는 합부 장군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따라서 장군은 겨우 한 걸음 나와서는 거기 서 버렸다.

"자, 앉아서 이야기들이나 하자─. 장군. 우리가 동부여에서 도망해 우발수 건너 이리로 온 게 벌써 십─ 팔년 전이구료. 그때 셋이서 떠난, 그 세 사람 가운데 마리 장군은 옥저(沃沮)에 잃고…."

"나랏님께서 하시려는 큰일 다 되거든 함께 즐기려던 동무 하나는 그만…."

마리 장군을 옥저벌에서 잃은 것을 군신은 새삼스러이 조상하였다.

"하기는, 나두 여러 동무들과 오래 더 있지 못할 것 같소. 나도 얼마 더 살지 못할 것 같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랏님은 천만 세 살아 계셔야 하옵지…."

"나도 그러고 싶지만, 하늘이 부르시면 할 수 없지. 하늘이 나를 시켜서 하시려던 일은 대개 터전은 닦아 놓았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끝난 셈이외다. 이제 부여에 있는 아이(유리 왕자)가 이리 와서 나 하던 일 뒤 맡아 주기만 하면, 내 일은 다 끝났으니까. 내가 없는 뒤라도 그 아이를 잘 거두어 주시오. 이게 내 부탁이외다."

"참 그 태자님은─."

유리 태자는 그의 어머님 예씨와 함께 그냥 동부여에 있다. 시어머님인 유화 부인 세상 떠난 뒤에는 곧 이리로 불러야 할 것인데,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동부여 임금 금와왕이 승하하였다.

금와왕은 주몽왕이 한낱 이름 없는 소년으로 어머님 유화 부인과 함께 몸을 의탁하고 있을 동안도 이 모자를 각별히 대접했고, 그 뒤 주몽왕이 이리로 떠난 뒤에도 유화 부인을 왕모(王母)로서 융숭히 대우했고, 유화 부인 세상 떠난 뒤에도, 주몽왕의 부인인 예씨와 그 소생인 유리 소년을 여전히 융숭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금와왕의 아들의 대소(帶素) 태자는 일찍부터 주몽왕(그때는 이름 없는 한 개 소년에 지나지 못했다)을 꺼리고 미워하고, 죽이려까지 한 사람이다.

지금 금와왕 승하하고, 대소가 등극한 부여에서는, 예씨며 예씨 소생의 소년에게 대한 대접은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고, 혹 고구려로 도망갈세라 감시 또한 여간 엄중하지 않다 한다. 예씨인들 품에 유리라는 소년까지 있으니, 얼마나 이리로 달려오고 싶으랴. 못 오는 것은 단지 대소왕의 감시가 엄중한 탓일 것이다.

"그 부여에 계신 태자께서 이리 오시면─."

함부 장군은, 눈을 구을려, 아버님 앞에 가지런히 앉아 있는 두 왕자를 보았다.

"─ 여기 계신 비류님과 온조님…."

이 합부 장군으로서는, 아직 보지도 못한 유리 왕자(태자)보다 그 강보적부터 함께 모시었고, 손수 손잡아 무예(武藝)를 가르치고, 지도하고, 함께 놀고 하여 오늘날까지 키운 이곳 왕자께 정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 왕자가 사람이 덜 나기라도 했으면여니와, 영특하고 비범하여 아버님의 위업을 넉넉히 계승하여 감당할 만한 기상인데, 그리로는 전연 생각도 안 두는 임금의 심사가 합부 장군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여에 있는 왕자도 위인이 영절하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어떤지. 이곳의 두 왕자는 참으로 영특하고 비범한데, 부여의 왕자는 이곳 왕자만 하기나 할까.

인제는 주몽왕이 목적하는 위업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사업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또한 얼마나 필요성이 큰 것인지 알고 있는 합부 장군으로서는, 그 목표 달성에 장군 자신도 진심으로 제힘 다 바쳤으며, 장차도 그 목표 달성에 우수한 후계자가 있기를 바라는 적성으로서, 이곳 왕자를 지지하는 것이다. 정리로도 또한 이곳 왕자의 계승을 바란다.

그런데 주몽왕은, 아직 보지도 못한 부여 옛 왕자를 튼튼히 믿고, 그 왕자 오기만 하면 당신이 하여 나아가던 위대한 업을 마음 놓고 그 왕자께 계승시키고자 하고 있으니, 그러고 마음이 놓이는지.

인제는 주몽왕께 배양된 생각(민족의식)이 합부 장군의 마음을 지배하는 바이라, 불안까지 느꼈다.

또한 이곳 두 왕자도 다 십사오에서 육칠로, 더욱이 숙성한 소년들이라, 당신네들의 현재의 지위가 어떤지, 또 장차 부여엣 왕자가 오면 어떻게 될지 짐작이 갈 것이다. 즉 이대로면, 아버님의 이룩한 나라도 장차 이곳 왕자께 계승될 것이로되, 부여엣 왕자가 오면, 이곳 왕자들은 그냥 여전히 「왕자」 혹은 「왕제」로 있고, 아버님의 만든 위업은 부여엣 왕자께 계승 될 것이다. 얼마나 불안하고 섭섭하랴.

"그래─ 비류와 온조가?"

"네…."

"어떻겠다고?"

"네…."

"섭섭하겠다고? 혹은 불안하겠다고?"

"…."

장군은 대답하기 좀 곤란하였다. 이전에, 소서노(召西奴) 왕후의 동기 되는 이(왕자들의 이모다)가 이 문제를 가지고 왕자께 경솔히 말하다가, 형님 되는 왕후께 노염을 사서 사사(賜死)된 일까지 있다.

주몽왕은 개의치 않는 듯 용안에 미소를 띠며 장군을 보고, 다시 두 왕자께로 눈을 돌렸다─.

"이애들아."

"네?"

"합부 장군이 너희를 근심하누나. 부여에서 형이 오면 너희들은 섭섭하게 되겠다고. 그러냐? 형이 오면 너희는 섭섭하게 되겠느냐? 어디 대답해 보아라. 너희의 마음을…."

"왜 섭섭해요? 형님이 생기면 더 튼튼하지요."

─ 이것은 아우 되는 온조의 대답이었다.

"저는 동생 노릇 못해 보는 게 섭섭했는데 형님이 생기면 저는 동생이 되니, 천하 반가운 일이올시다."

─ 이것은 형 비류의 대답이었다.

왕자 형제의 이 대답을 들으며 합부 장군은, 아아, 소년의 마음은 물같이 맑구나, 그 누리던 위를 잃고, 또는 부여엣 왕자가 마음이 포악한 사람이면 (게다가 못된 신하의 참소질까지 있으면) 혹은 당신네들(왕자네)의 신상이 위태로울지도 알 수 없는─ 그런 방면은 생각이 못 및는 단순한 귀인들이여. 합부 장군은 머리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주몽왕은 왕자들의 대답을 들으며 머리를 다시 합부 장군에게 향하였다.

"이 애들의 어머님 되는 왕후의 가르침이오. 형제의 의좋게─ 배다른 형제라는 생각은 애전부터 두지 말고, 내내 형제간 의좋으라는 왕후의 가르침이오. 아무리 배다른 형일지라도, 나를 따르는 동생을 괄시할 못된 형은 없을게요."

"지당하오신 말씀이옵니다."

이렇게 아뢰기는 하였다. 그러나 합부 장군의 마음에는 여전히 미흡한 데가 있었다.

"장군과 내가 부여에서 피해 나온 것이─ 그때 내 나이 스물둘이었소. 이애들이 열일곱과 열다섯인데, 내가 부여에서 도망해 와서 여기 나라를 세운 스물두 살까지 이제 사오년─ 이 애들이 사오 년 뒤에는 한 나라의 임금이 될 수 있을 만치 자랄까. 하기는, 나는 장군이라 그 밖 좋은 동무들이 좌우에서 도와주었기에 이런 큰일을 달성한 것이지만…."

이 말에 대하여 온조 왕자가 곁에서 말하였다─.

"흥. 아버님은 아버님만 잘나 보이시나베. 사오 년은커녕, 오늘이라도 저희에게 한 나라를 맡겨 보셔요. 어떻게 잘 능란하게 다스리나…."

"온조님, 지당한 말씀이옵니다."

합부 장군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자 주몽왕도 웃으면서 말하였다─.

"맡겨 보아? 누가 맡겨? 아버지는 누가 맡겨서 나라를 다스린 줄 아느냐. 내 손으로 세우고 이룩하고, 내가 이룩한 내 나라를 내 손으로 다스려야지."

"그럼 아버님. 저희를 저 남쪽으로 보내 주셔요. 그러면 남쪽 한(韓) 땅에 저희가 나라를 세우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낙랑으로라도…."

"그런 먼 데 가서는 젖 생각 나서 며칠을 못 있을 꼴에─."

아버님 주몽왕은 농담으로 이렇게 웃어 버렸다. 그러나 이 순간 가슴에 선뜻 박히는 무엇이 있었다. 아들의 웃음의 말─ 희롱의 말 가운데서, 가슴에 박히는 커다란 암시가 있었다.

"참─."

같은 암시를 받은 듯, 합부 장군은 말을 꺼내다가 그쳐 버렸다.

이 왕자들이 좀 더 자라서, 좀 더 지혜가 생기면, 「그 일」이야말로 할 만한 일이다. 해야 할 일이다.

남쪽 지방에는 「조선의 부스러기」가 한 덩어리 있다. 「조선」이란 큰 덩어리가 지나인에게 허리를 끊겨서, 원 몸뚱이는 이곳에 남아 있지만, 가운데를 잘린 저쪽 덩어리는 멀리 남쪽에 굴러가 있다.

그 덩어리에까지, 지나인인 기씨(箕氏)가 내려가서 왕 노릇을 하고 있다 한다.

지나 본토에서 현토(玄菟)로 낙랑(樂浪)으로, 이 지나인에게 잃은 이 땅들은, 지나 본국의 직할지(直轄地)로서 지나 본국에 직속되었고, 그 이남 땅은, 역시 지나인인 기씨(기준(箕準)이다)가 같은 지나인(위씨)에게 쫓겨 그리로 가서, 순후한 토민을 속이고 협박하고 하여, 그곳(마한이라 한다)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 한다. 장차 고구려에서, 거기까지 힘이 자라면, 우선 현토 낙랑을 복멸하고 차례로 순서대로 한(韓)땅까지 복멸하여, 우리의 옛터에서 지나인을 뿌리째 뽑아 버리고 우리 땅 찾으려던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 진행의 순서를 달리하여, 마한(馬韓)을 먼저 복멸하여 마한을 우리 것으로 만들고, 그곳을 근거지로, 중간에 남아 있는 지나 영토 낙랑을 남북에서 합세하여 치면 어떨까.

낙랑은 지나에 직속된 지역이라, 우리의 힘이 썩 자란 뒤가 아니면, 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지나 본토에서 내내 육지로 접속된 땅이라, 낙랑이 공격 받으면 본국에서 구원병이 달려갈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낙랑을 꺾기는 좀 노력이 들 것이다.

그러나 마한은 지나인(기씨)이 왕 노릇을 하고 있다 하나 지나 본국과는 천여 년 전에 관계없이 된 기씨이며 그곳 주민(住民)도, 본토인인 흰옷 입는 백성과 및 기씨가 위씨(偉氏)에게 쫓겨갈 때 데리고 간 근소한 지나인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니, 그 근소한 지나인만 꺾으면 마한은 힘 안 들이고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여기서 시작하여 낙랑으로 마한으로 이런 순서로 꺾어 가자면, 우선 낙랑에서부터 큰 저항을 받을 것이요 지나 본국에서 구원병까지 달려올지도 모를 것이요, 요행 숱한 공을 들여 낙랑을 꺾고 뒷차례로 마한을 친다 하면, 그때는 마한에는 낙랑서 쫓겨간 무리까지 마한에 투신하여 마한이 강화(强化)도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마한도 꽤 힘들이어야 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마한부터 꺾고, 낙랑은 남북에서 합세해서 치면─ 마한도 보잘것없을 것이요 낙랑도 손쉽게 될 것이다.

"좌우간 합부 장군. 장군은 핏덩어리─ 물덩어리 적부터 이 두 아이에게 정 들였으니까, 그 정의가 크고 깊을 게요. 여간 ─"

계속 하는 주몽왕의 말에, 합부 장군이 끊으며 끼어들었다─.

"소신도 나랏님을 모신 뒤, 나랏님 덕분으로 처자도 생기옵고, 그 생긴 자식이 또한 남의 아이 못지않게 영리하와, 금옥으로 바꿀 수 없도록 소신께는 귀하옵지만, 두 분 왕자님께야…."

"내 이미 잘 아우. 장군이 이 애들에게 대한 지성을 잘 알지만, 나 또한 내 자식이니, 내가 이 애들을 사랑하는 마음 또 결코 장군보다 못하지 않을 게 아니오? 그 내가 다 생각하는 바이 있으니 장군은 염려는 말고, 이 뒤 이애들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그때도 그냥 이 애들을 위해서 힘 아끼지 말고 보아주시오."

"다시 분부 없사온들…."

"야, 너희들도 장차, 나 있건 없은 뒤건 모든 일을 장군과 의논해라. 너희 아버지가 아직껏 믿어서 함께 일해 왔고, 장차도 그냥 믿고 힘입어야 할 튼튼한 장군이니, 마음 놓고 믿고 힘입어라."

"네…."

아까 작은 아드님 온조 왕자의 웃음엣소리에서 암시를 얻어 주몽왕의 마음속에 생긴 생각은 이러하였다─.

즉 동부여에서 유리 왕자가 어머님 예씨와 함께 이곳으로 오면, 그 왕자의 인품을 보아서 정 치물(痴物)만 아니거든 그를 태자로 봉한다. 그리고 장차는 고구려 나라를 맡기고 아울러 주몽왕 당신이 하려던 위대한 업무─ 이 땅에서 딴 인종을 내쫓고 이 땅을 도로 찾는 일─까지 아울러 맡긴다. 인제는 나라의 틀도 잡아 놓았으니, 정 치물만 아니면, 좋은 보필자(輔弼者)만 곁에 보필하면 넉넉히 감당을 할 것이다.

이 나라를 그렇게 하고, 그러고는 작은 왕자(비류와 온조)는 좋은 보필자를 붙여서, 이 나라를 떠나게 한다. 떠나서는 남쪽으로 가서, 소위 「기씨」라는 지나인 임금을 내쫓고 그들(두 아들)로써 그곳을 잡게 한다. 마한도 자기네의 힘(실력)이 하도 약하니(약할 것이다) 북쪽 신왕(神王)의 아들이 왔노라 하면 맞아 싸우기를 피하고 한 귀퉁이 땅을 빌려주어, 거기 자리 잡을 터를 줄 것이라 보았다. 만약 그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애전에 여기서부터, 약소한 무력과 보필자(輔弼者)를 데리고 떠나고, 또 그곳에 가서는 왕검님의 후손 해모수님의 손주라는 것을 외치면 그곳 토민들도 지금의 미약한 왕권을 배반하고 돌아붙을 자 태반이리라.

그곳 왕이 아첨 영합하느라고 땅을 빌리면 더 할 말 없고, 이편이 무력으로 한 귀퉁이 얻어 잡는다 할지라도, 약간한 근거지가 생기기만 하면, 그곳 주민을 불러서 곧 크게 될 것이요, 얼마만치만 크게 되면, 그 남쪽에 생긴 힘과, 현재 북쪽에 기르는 힘을 합쳐서는, 그 뒤는 낙랑을 부수기도 훨씬 쉽게 될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곳 왕자가 어서, 그만한 일 감당할 수 있을 만치, 몸과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지금 부모의 아래서니 응석도 부리고, 어린애 노릇을 하려 하나, 간간 신하들과만 대해 있을 때 엿보면, 제법 어른다이 지낸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다. 네 위에는 하늘이 있을 뿐이요, 네 아래는 억조의 창생이 있느니라."

는 관념은 일찍 주몽왕의 어머님인 유화 부인이 주몽왕을 기르는 동안, 내내 아드님의 머리에 부어 넣고 배양한 사상이었다.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는, 위에 「유리」라는 형(형은 또 겸해서 태자다)이 있으니, 그 사상 그대로 부어 넣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래를 긍휼히 여기는 사상을 배양하기 위하여 두 왕자에게도 웃사람 노릇의 교양을 하여 두었었다.

따라서 웃사람이 되기에 소질도 넉넉하거니와 소양도 넉넉하였다.

그 소질과 소양을 가지고,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를 남쪽 나라로 내려 보내려고 구체적으로 그 생각을 해보고자 하였다.

"이애들아. 너희들도, 아버지가 언제까지든 너희와 함께 있을 사람이 아니요, 아버지는 너희보다 먼저 죽어 없어질 사람이라는 것은 알 게다. 지금 아버지의 아래이니 다 한 지붕 밑에 한솥밥으로 살아가지만, 아버지 없은 뒤에는 비류는 비류 집 주인이요 온조는 온조 집 주인으로 제각기 한 집의 주인이 될 터이니, 주인 노릇하는 법도 배워 두어라. 주인 노릇도 감당키 힘든 것이다."

형왕자 비류는 잠잠히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 그러나 아우왕자 온조가 그 눈을 저으기 치떴다.

"아버님. 저희도 아버님의 자식이올시다. 저희 어머님도 또 아버님의 어머님만 못하지 않게 애써서 저희를 기르셨어요. 저는 간간 혼자 몰래 생각했어요. 이 고구려 나라는 물론 맏형님이 오시면 맏형님께 올릴 것입니다. 맏형님이 어찌해서 못 오시면 가운데 형님의 것이옵고…. 하여간 장래에도 제 것은 되지 않을 것이지요. 저는 언제까지나 형님 모시고 형님의 애나 태우며 있어야 할 물건입니다."

소년 왕자가 뜻밖에도 장중한 태도로 엄숙한 말을 꺼내는데, 형 되는 비류 왕자는 물론이요 합부 장군이며, 아버님 되는 주몽왕까지 일종의 위압감을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그 가운데서 온조 왕자의 말은 계속하였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밥버러지로 형님의 애나 태우며 지내야 하나, 혹은 무슨 다른 길은 없을까고 간간 생각해 보았어요.아버님께서 세 장수를 데리시고 부여에서 피해 나오셔서 이런 훌륭한 나라를 세우신 것처럼 그런 재간은 피울 수 없을까고도 생각해 보았어요. 그런 새 나라를 세우려면 어디를 터 잡을까, 빈 땅, 주인 없는 땅은 어디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저편 남쪽─ 낙랑도 건너서 더 남쪽에, 우리나라 사람과 같은 사람이 사는 땅이 있다는 생각이 나자, 또 아버님께서는, 같은 옷 입고 같은 말 쓰는 사람은 다 한데 모여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는 그 생각이 나서, 제가 그리로 갈까, 그리로 가서 거기 나라를 세우고, 이곳 형님의 나라와 서로 의좋게, 지낼 수 있는 나라를 세워 볼까, 이렇게 생각해 본 일이 있어요. 그런 생각이 난 다음부터는, 저는 장차 그렇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작정하고, 어서 좀 더 자라서 혼자 멀리 떠난대도 아버님께서 허락하실이만치 크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올시다. 아버님, 제가 좀 더 자라거든 그렇게 허락해 주서요."

소년답지 않은 이 위대한 발언에, 주몽왕은 놀라운 표정으로 아드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지혜냐, 혹은 어머니든가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냐."

"아버님! 저를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생각치 않으서요? 아버님이 열다섯 적에 얼마나 한 생각이거나 욕심을 가졌었는지 생각해 보서요."

왕자의 지적을 받아 주몽왕은 과거 열다섯 살쯤의 기억을 회상하여 보았다. 그다지 먼 과거도 아니다.

어머님 유화 부인의 사랑 아래서 응석도 부리고 어리광도 부렸지만, 당신 홀로의 야심과 공상과 욕망은, 천하를 삼켜 보겠달이만치 컸었다. 당신의 과거를 미루어 따지자면, 온조 왕자의 야심도 그럴 만하였다.

주몽왕은 이 아드님께 진심으로 감복하였다. 그리고 벌써 이만한 아드님이면 장차 남쪽 땅에 가서 한 개의 일을 넉넉히 달성할 것으로 보았다.

"온조야. 가까이 오너라."

손을 들어 아드님의 등을 두드렸다.

"마음 튼튼하구나."

그리고 합부 장군을 돌아보았다.

"장군. 이 애가 나보다 앞서 생각하는구료. 마음 튼튼하오."

아버님께 칭찬받고, 얼굴이 벌겋게 되며 기뻐하는─ 역시 아직 소년이었다.

×

그로부터 주몽왕은,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장차 남쪽 땅으로 보낼 것을 목표로, 그런 방침 아래 훈육하고, 장차 좋은 보필자가 될 신하 십여 명을 골라서, 두 왕자에게 직속하게 하여, 늘 토론도 하고 경기도 하게 하였다.

마리, 합부, 극씨, 중실씨, 소실씨, 부분노 등의 건국의 원훈들은 주몽왕도 놓기 싫고 그들(신하들)도 마찬가지여서, 내내 주몽왕을 모시게 하고, 장차 유리 왕자가 오거든, 이어서 유리께 보필하게 하고, 다른 명신들은 대개 두 왕자에게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왜 두 왕자에게 따로 그들의 몫을 갈라 내어 따로 하는지는, 임금과 왕후와 두 왕자와 건국 원로 및 건국 원로 몇 사람 밖에는 까닭을 몰랐다. 따로이 분리되어 왕자께 직속된 막료들도 까닭을 몰랐다. 임금의 분부이니 시행할 따름이었다.

병졸도 삼천 명을 갈라서 직속케 하였다. 이 병졸들을 가지고, 왕자께 직속된 무장이 매일 교외에서 훈련하였다. 극씨와 중실씨가 짜낸 진법(陳法)으로서 홍백군으로 나누여서 맹훈련을 하였다.

영문 모르는 백성들이며 신하들은, 장차 무슨 큰 전쟁을 치르려고 그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이즈음 한동안 고구려는 「전쟁」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는 조그만 사변(부락국가를 몇 개 합병한 것)밖에는 전쟁다운 전쟁이 없어서 태평한 세월을 보냈는데, 이 군사연습은 또한 건국 이래의 가장 큰 것이라, 무슨 큰 전쟁을 준비하는 줄 알았다.

낙랑일까. 동부여일까.

그들은 의아히 궁금히 여기었다.

졸본 서울도 처음보다는 놀랍게 커져서, 교외라 하면 꽤 멀다. 씩씩한 병졸들이 교외에서 하루 진일 전법(戰法)을 익히고 저녁에 서울로 돌아오는 활발스러운 모양을 보고는, 백성들은 저 씩씩한 젊은 발에 밟힐 자는 낙랑일까 부여일까 궁금하게 여기었다.

백성들이 궁금히 여기는 군사훈련을 계속하여 시키며, 주몽왕은 또한 나라를 가멸게 하기 위한 방책을 늘 모신(謀臣)들과 의논하고 있었다.


유리(類利)

[편집]

그것은 고구려 건국 제십구 년― 왕의 즉위 제십구 년 여름이었다.

여름이라 하나 첫여름인 사월 어떤 날, 임금은 정청에 앉아서 원로 대신(원로 대신이라 하나, 임금이나 원로 대신이나 모두 사십 세 안팎의 장년들이었다)들과 무슨 의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외전에서 일보고 있던 원로 대신 오이 장군이, 장군답지 않은 흥분한 태도로 들어왔다. 흥분― 흥분 가운데도 기쁜 흥분인 모양이었다. 사십 장년답지 않게 얼굴에 홍조까지 띠고, 옥좌 앞에 와서 한 무릎 꿇어 절하며,

"나랏님 아뢰옵니다."

한다. 임금은 미소하며 고요히 머리를 들었다―.

"무슨 좋은 소식을 내게 들리려우?"

"나랏님. 소신 사십 평생 가장 기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식이요? 장군 사십 평생 가장 좋은 소식이면 내게도 마찬가질 터인데, 무엘까. 혹 유리가 졸본에 왔소?"

"나랏님!"

"어서 말을 하구료."

"나랏님. 나랏님께는 왕자님 이리 오신다는 게 가장 기쁜 소식이옵니까?"

"내 팔자가 천하 일로서, 늘 반가운 소식밖에는 모르는 형편이니, 지금이야, 보고 싶은 그 애 왔다는 소식 이상 더한 소식이 있겠소? 장군은 대체 무슨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소?"

"나랏님! 태자님이 오셨습니다."

주몽왕의 용안은 순간 진실로 빛났다. 참으로 아드님이 이즈음은 보고 싶었다. 당신의 해야 할 일은 다 끝냈고 인젠 다만 태자께 계승시킬 일만 남았고, 또한 다른 왕자(비류와 온조)에게 맡길 일도 준비되었고, 비류와 온조 두 왕자도 남방을 목표로 한 행진이 시작된 뒤부터는, 그냥 남아 있던 어리광 태며 소년 색도 사라져 없어지고 외모며 마음이 어른같이 홀변하여, 넉넉히 큰 임무 감당할 꼴이 분명해져서, 이곳 주인(유리)을 어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아드님 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간절하여져서 이즈음 그 생각이 가속도로 커 가고 간절해 갔다. 사람을 부여로 보내고 싶기까지 하였다.

아직 보지 못한 아드님― 그러나 영특하다는 소문은 늘 들은 아드님.

"이리로― 불러들여 주시오."

다시 나갔다가 들어오는 오이 장군의 옆에는, 한 청년이 동반했다. 그 청년은 성큼성큼 들어와서 임금 앞에 꿇어 절하였다.

나이는 열아홉일 것이다. 그러나 장대한 몸집, 침착한 눈찌, 열아홉으로 보긴 힘들도록 원숙하다.

아직 거울이 없는 시절이라, 당신의 용안을 거울에 비추어 보지는 못 하였지만, 잘 간 검이나 빛나게 닦은 기명이나, 그릇의 물에 비치는 그림자로써 당신 면영을 짐작은 한다.

"나랏님! 소신이 처음 모실 때의 꼭 그 시절의 모습이옵니다."

오이 장군이 곁에서 보증하는 말은 에누리 없는 것으로 임금은 믿었다.

"네가 유리냐?"

"네이, 나랏님의 아들 유리옵니다."

"무슨 증표가 있느냐?"

이십 년 전 주몽왕이 동부여에서 떠날 임시에, 안해 예씨에게 장차 아들을 낳거든 여사여사한 물건을 증표 삼아 내게로 보내라고 부탁했었다. 그런 증표 없을지라도, 오이 장군의 증명이 있고 또 임금 당신의 직각 등으로 의심할 바는 아니지만….

"네이,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유리 왕자는 품에서 보자기를 하나 꺼내어 끌렀다.

그것을 보면서 임금은 시종을 안으로 보내서 무슨 물건을 가져오기를 분부하였다.

유리 왕자가 품에서 꺼낸 것은 한 개 부러진 칼날이었다. 시종이 안에서 내온 것은 한 개 날 부러진 칼자루였다.

임금은 그 물건들을 들어 오이 장군에게 주었다.

"맞는가 맞추어 보시오."

그러고는 그것을 맞추어 보는 오이 장군 쪽은 보지 않고, 그냥 왕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랏님. 요것, 요렇게 꼭 들어맞습니다."

오이 장군의 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임금은 그의 억센 두 팔을 길게 뻗치었다.

"야, 유리야. 평생 처음 한 번 너를 안아 보자. 이 아비의 팔에 한 번 안기거라!"

이십 청년을 임금은 마치 어린애인 듯 힘있게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아드님의 얼굴에 겹지 않고 부벼 대었다.

유리 왕자는 아버님의 품에 안겨서, 아버님의 귀에 입을 가까이 하고 속삭였다―.

"아버님. 이번 어머님도 저와 같이 오셨어요."

"무얼? 어머니도?"

무론 같이 올 것이요, 안 왔다 하면 묻기라도 했어야 할 것이다. 아드님을 만난 반가움에 잠깐 잊었던 것이다.

"어디 계시냐?"

"밖에 기다리십니다."

이십 년 전 동부여를 피해 탈출할 적에 홀홀히 작별한 이래, 이십 년을 보지 못한 아내― 적지(敵地)나 다름없는 곳에서, 시어머님 모시고, 유복자나 일반인 유리 왕자 기르며, 갖은 신고 다 맛본 아내다. 당신은 이곳서 한나라를 이룩하고 그 나라의 시조왕으로 영화 누리며, 새 아내 맞아서 자식까지 낳고 온갖 영화 누릴 동안, 아버지 없는 자식을 홀시어머님 모시고 적지에서 기르노라니 얼마나 고생하였으랴.

임금의 분부로 달려나간 시종은 궁문 밖에 기다리는 예씨 부인을 맞아 모시고 돌아왔다.

"오오!"

이십 살에 작별하여 사십 살에 만나니, 감개무량하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안으로―."

유리 왕자가 오거든 거처하게 하려고 지어 둔 태자궁이 있다.

주몽왕은 이십 년 만에 보는 예씨 부인과 유리 왕자를 데리고 그 태 자궁으로 들어갔다.

동부여에서 예씨와 유리 왕자가 왔다는 말이 소서노 왕후에게 들어가자, 소서노 왕후는 곧 태자궁으로 달려 나와서 예씨를 절하였다.

"먼 길 오시느라고 애쓰셨겠습니다."

그 말눈치와 옷차림으로 보아서, 예씨는 상대자의 신분을 알아보았다.

"그맛 게 무슨 애? 소문에 듣기에는 왕자가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디 놀러 가섰습니까?"

부여의 풍습은 여인의 시기를 엄금한다. 시기하는 자는 죽음으로 벌한다.

시기를 여덕(女德)의 가장 큰 수치요 죄로 여기는 습관에서 자란 예씨 부인은, 시앗이라 볼 수 있는 소서노 왕후에게 따듯한 정으로 인사하였다.

그 날로 정식으로 유리를 태자(太子)로 봉하였다.

그 뒤, 뒤따라 위까지 유리 태자께 물리고 주몽왕은 뒷 대궐로 물러앉았다. 이것은 두 가지 까닭 때문이었다.

첫째는 물론 유리 신왕께, 고구려 건국의 대이상(理想)을 알으켜서 이 국시(國是)에 따라서 나라를 운용하게 하며 겸하여 신왕께 임금 노릇을 하는 법을 손목 잡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또 한 가지 까닭은 이 종족에게는 괴상한 풍습이 있어서, 남편이거나 주인이거나 임금이거나 죽으면, 그 아래의 안해거나 아랫사람이거나 신하거나는 순사(殉死)하는 습관이 있다.

주인을 사모하는 적성으로 뒤따른다는 것이야 그 무엇이 나쁘랴마는, 이 새 나라에서 일꾼이 얼마 있어도 넘친달 수 없는 이 형편 아래서, 쓸모 있고 긴한 재상들이 임금 따라 순사하면 다음 임금께 시종할 인물이 축난다.

그래서 주몽왕 당신이 배양한 명신들을 모두 신왕께 속하게 하여, 이 뒤 불행 주몽왕 당신이 승하하는 날에도 순사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신왕 등극을 축하하는 뜻으로 사(赦)를 내려서 옥문을 열고, 또한 포로로 잡혀 와서 종살이하는 외국인들을 모두 속량케 하였다. 속량된 포로들은 자유로 제 본국 혹은 본고향에 돌아가기를 허가했지만, 그들은 그냥 이 나라에 머물러 있기를 자원하였다. 미약하거나 모호한 본고장에 돌아가느니, 이 바야흐로 하늘을 찌를 듯 창성하는, 명군 치하의 태평성국에 그냥 머물러 안온한 생활을 유지하고자 함이었다.

×

주몽왕은 인젠 당신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업무는 다 끝난 것으로 여기었다.

나라의 기초도 섰다. 종족 기초의 목표도 확립되었다. 그리고 그 업무를 계승할 태자(신왕)도 왔다.

비류와 온조 두 왕자를 남방으로 보낼 준비도 되었다.

그 업무의 계승자들은 모두 넉넉히 업무를 이해하고 책임맡아 나갈 만한 소질로 충분하였다.

이만 했으면, 하늘이 당신께 짊어지워 준 책임은 다한 것으로 여기었다. 그리고 뒷대궐에 물러앉아 잔무 처리만 하면서, 이십 년 만에 만난 안해 예씨와 즐겁고 안온하게 날을 보냈다.

안해 예씨는 아직 그냥 친정에 있는 시절에 작별하였었는지라, 주몽왕께는 그냥 애인이었다. 이곳서 다른 안해(왕후)를 맞아 왕 노릇을 하는 이십 년 내내, 애인으로서의 예씨는 그리웠다. 그 그립던 예씨가 왔는지라 무한 기뻤고, 무한 사랑스러웠다.

소서노 왕후는 모든 것을 예의로 사양하고, 지아버님 주몽왕은 왕의 옛날 애인 예씨에게 맡기고 왕후는 장차 당신 소생의 두 왕자와 함께 남방으로 갈 준비에만 마음 두었다.

나라를 맡은 유리 신왕은 능란하게 모든 정무를 치렀다. 뒷대궐에서 고요히 이를 관찰하고 있는 주몽왕은 이만했으면 마음 놓인다고 안심하였다.

그 여름,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는 어머님 소서노 왕후를 모시고, 직속된 십여 신하와 삼천 병졸을 인솔하고 남방으로 향하여 졸본 서울을 떠났다.

두 왕자가 아버님과 형님께 하직할 때에, 아버님 주몽왕은,

"크게 되거라. 못해도 이 아비만은 하게 되거라. 이것만을 아비는 진심으로 바란다."

고 축복하였다.

백성들은 무슨 일인지 몰랐다. 그 떠나는 까닭을 발표하지 않았는지라, 공론이 구구하였다. 부여에서 맏왕자가 오매 곧 그를 태자로 봉하고, 뒤이어 주몽왕이 물러앉고 태자가 위에 오르고, 또 뒤이어 비류와 온조의 두 왕자는 이 나라를 떠나서 중간의 낙랑(지나인 식민지)도 지나서 남방으로 간다 하므로, 거기는 무슨 가정적의 중대한 알력이라도 생긴가 하여 수근거리고, 이 떠나는 왕자들을 동정하고 사모하여 적지 않은 백성이 그 뒤를 따라 본국을 떠나 남방으로 향하였다.

아드님(두 왕자)을 떠나 보내자니 섭섭하기는 하였다. 더구나 이것이 영 이별이요, 다시는 볼 기회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니 그 섭섭한 정은 여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왕자네들을 위함이요 또한 겸해 큰 이상을 위해 떠나는 이별이라 하니, 모든 것이 단념되었다. 더욱이 주몽왕 당신이 이십 년 전, 어머님 유화 부인의 앞을 떠날 때 적(敵) 가운데 남는 유화 부인은 얼마나 마음 섭섭하고 불안하였으랴.

그때에 희망에 불붙는 열혈의 청년이던 주몽왕 당신은, 어머님 슬하 떠나는 것도 그다지 서운하게 안 여기었지만, 어머님으로는 얼마나 섭섭하였으랴.

지금, 두 왕자도 오직 희망에 불타는 열정으로 아버님 슬하와 고국을 떠나는 것도 아무 섭섭함도 안 느낄 것이다. 그들의 장래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장래에, 하늘의 도우심과 복이 많이 많이 내립소서― 두 왕자를 떠나 보내며 주몽왕은 속으로 한없이 한없이 축수하였다.

그 구월에 주몽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니고 왔던 위대한 사명을 순순히 다 치러 놓고, 그가 이룩한 고구려 나라의 서울, 그가 세운 대궐 안에서, 이 나라 신왕과 사랑하는 부인 예씨와 원로 대신들의 간호 아래, 사십 년의 짧으나 또한 위대한 일생을 마치었다.

앓지도 않고 그저 고요히,

"내 할 일은 다 했다."

의 한 마디를 남기고, 고요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 할 일은 다 했다― 참 양심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이만치, 그는 마음 온화하게 승하한 것이다.

그를 숭앙하는 마음으로 그를 동명성제(東明聖帝)라 불러 모시고, 용산(龍山)의 길한 땅에 그의 거룩한 주검을 묻었다.

아드님 유리왕― 아버님 생전에 손목 잡혀 지도받았고, 아버님 생전에 훈련받은 신하와 백성의 위에 올라앉았고, 또한 국시와 정치 운용 방침이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는 국가라, 아주 용이하게 다스릴 수가 있었다.

×

새 임금 유리왕, 동부여에서 금와왕 때에 탄생하였다.

동부여 태자 대소(帶素)가 그때 이름 없는 소년이던 주몽왕의 너무도 걸출임을 저퍼하여, 박해를 가하려는 눈치가 보이므로 동부여를 탈출하여 피할 때에, 유리왕은 그때 어머님 예씨의 뱃속에 있었다.

동부여를 탈출함에 임하여 주몽은 안해 예씨에게 작별하며,

"나는 남방으로 가서 뜻대로 되면 그곳의 임금이 될 터인데, 그대가 낳는 애가 만약 사내애거든, 잘 길러서 이 뒤에 내가 임금 되어 있는 곳으로 보내라. 그 애가 나를 찾아올 때에 내 자식이라는 증거물로써 내게 자기 신분을 증명할 무슨 물건을 이곳에 감추고 가노니, 그 물건을 찾아내어 가지고 내게로 오게 하라. 그 물건을 가지고 오는 아이면 나는 내 아들로 인정을 하겠다."

무슨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감추어 둔 곳은,

"일곱 모 난 바위 위에, 소나무 아래."

라 하였다.

그 뒤 예씨는 옥 같은 사내애를 낳아가지고,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귀히 길렀다. 소년은 예씨의 아버지인 외조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자랐다.

아버지가 무엇인지, 할아버지가 무엇인지, 구별할 줄 모르는 소년(유리라 이름지었다) 은, 어머님 슬하에서― 좀 뒤에는 할머님 유화 부인까지 합한 어른들의 귀염을 오로지하고 고이고이 자랐다.

예씨는 얼마 뒤, 지아버님 주몽이 고구려라는 나라를 이룩하고 그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성공하셨구나. 이곳에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는 아들 유리는 그럼 고구려라는 나라의 태자요 장차 고구려 임금이 될 귀한 아이로구나.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어머님이라 그 밖 사정에 얽매여 이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아버님이 떠날 때 부탁도 있었고 시어머님 유화 부인의 지휘도 있어서, 그 소년을 장차 임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한 교양을 베풀면서 장래의 기회를 기다리며 마음만 죄이고 있었다.

유리 소년은 조금 자라서는 내가 지금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는, 실상은 어머님의 아버지요,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점은 알았다. 그러나, 할머님과 어머님의 귀염을 독차지하고 있는 유리 소년으로서는, 아버지 없는 불만은 느껴 보지 않고 자랐다.

유화 부인은 간간 며느리 예씨에게, 이 애를 아버님께 보내야겠구나 하고 걱정도 하였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유화 부인은 이곳을 못 떠날 줄 아는 예씨로서는, 시어머님 버려두고 나만 내 자식 데리고 떠날 수도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유화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그와 전후하여 부여 임금 금와왕도 승하하였다.

태자 대소가 등극하면서는, 금와왕이 유화 부인이며 예씨에게 하던 후한 대접은 없어지고, 그 대접이 아주 고약하게 되었다.

시어머님 유화 부인은, 금와왕의 후한 대접을 뿌리치지 못해서 그냥 동부여에 머물러, 아드님이 남방에 임금이 되었는데도 그리로 가지도 못하고 의리를 지켜 왔었다. 지금 유화 부인 없고 금와왕도 없는 이 동부여는, 예씨 모자의 그냥 있어야 할 아무 의무며 의리가 없었다. 더욱이 신왕 대소가 그 대접까지 고약하게 하니 있기 어렵기도 하였다.

지아버님의 나라 고구려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런데 못 가게 붙들어 두고, 감시까지 엄중하였다. 열댓 살의 소년 유리는 할머니와 어머니 두 과부의 아래서 길러나느니만치, 비록 왕자(王者) 교육은 받고 있다 하나, 밸 세고, 떼 세고, 고집 세고― 소위 과부의 자식 태는 자연히 가져졌다. 혼자 있을 때거나, 사내 어른을 대할 때는, 제법 어른 같고 왕자 같은 위엄성까지 있었지만 여느 때는 어리광까지 부리기 일쑤였다.

그 유리 소년이 어떤 날 길에 나가서 놀다가 앞의 소나무에 참새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참새를 잡으려 돌멩이 몇 개를 주워가지고 참새를 겨냥하여 돌을 던졌다.

그 돌은 참새는 못 맞히고, 불행 물길어가지고 길 가는 여인의 물동이에 가서 맞았다.

동이가 깨지면서, 물은 동이 이고 가던 여인에게로 쏟아졌다.

동이를 깨뜨리고 물벼락을 맞은 여인은 돌아보아서, 그 악희(惡戱)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유리 소년은 남의 동이를 깨뜨리고 남을 물벼락을 주고도 미안하다든가 잘못 했다든가 하는 기색이 없이, 다만 참새 못 맞힌 것이 아까와서 다시 돌을 던지려고 또 겨냥을 하는 중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교육이 그러하였다. 내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간에, 옳고 좋고 잘한 일이라는 신념을 갖도록 어려서부터 가르쳤다. 그런지라, 유리 소년에게 있어서는 내가 돌을 던지려는 방향으로 지나가는 것은 그 사람의 실수지 내게 관계없고, 여인이 동이를 깨뜨린 것은 여인 자신의 실수 때문에 생긴 일이니 내 아랑곳할 것이 아니요, 나는 다시 참새 잡을 돌이나 던진다는 것이 배짱이었다.

동이를 깨뜨리고 물벼락을 맞은 여인은 돌아보아서, 그것이 못된 장난 심하기로 소문난 유리 소년인 것을 알아보고, 더욱이 유리 소년이 미안하다는 얼굴도 안 하고 또 다른 돌을 던지려는 모양을 보고, 노염이 난 모양이었다.

"야. 장난 좀 작작해라. 남의 동이 깨뜨리고도 그냥 장난이야?"

소년은 대척하지 않았다.

"누가 동일 깨뜨려요? 돌멩이에 맞아서 깨졌지…."

"아비 없이 길러 나면 저 꼴인가. 참 딱한지고."

소년을 상대하여 싸울 수도 없고 여인은 하릴없이 혀를 차며 가 버렸다.

그러나 여인의 이 말은 소년의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 없는 줄은 잘 알지만, 아버지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 욕먹기는 처음이었다.

이 욕을 먹고 보니 아버지 없는 것이 분하였다. 사람이 생김에 아비 없이는 못 생기는 것이니, 내게도 아버지가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세상 떠났는지 혹은 어디 멀리 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어디 있어서 나로 하여금 오늘 아비 없는 아이라는 욕을 먹게 하는가.

불쾌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참새 잡으려던 돌을 그냥 던지고 집으로 달려 들어왔다. 어머니는 알 것이다. 어머니에게 따져 볼 심산이었다.

"어머니!"

달려 들어와서 어머니를 찾는 유리 소년의 목소리는 다분의 도전(挑戰)하는 색채가 있었다.

"왜?"

"아버지 내놔요. 우리 아버지 어디 있어요?"

"얘두…. 갑자기 아버진."

"남은 다 아버지 있는데 나는 왜 없어요? 아버지 내놔요!"

"오오. 네가 누구한테 아버지 없다고 흉을 뵌 모양이구나."

"아버지 어서 내놔요."

"야, 유리야. 거기 앉아라."

"어서요."

"거기 앉아서 어머니 말을 듣거라. 넌들 왜 아버지가 없겠느냐."

"그럼 어디 있어요?"

어머니는 고요히 눈을 아들에게 구을렸다. 책망하는 눈자위를….

"어디 있어요가 뭐냐. 어디 계셔요 할 게지. 내나 할머님이 그렇게 가르치지는 않았는데, 어디서 그런 무지한 말을 배웠느냐. 그런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다. 처음이니 이번은 용서하지만 다시 그런 무식한 말을 썼다가는 널 보지 않겠다."

말은 고요하지만 추상 같았다. 소년은 어리광 삼아 떼쓰다가 이 어머니의 꾸중에 그만 예봉을 꺾이었다.

"버릇 고칠 테냐, 어쩔 테냐. 네 대답 듣고야 아버님을 알으켜 주리라."

소년은 머리를 숙였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죄하고, 고치기를 부끄러이 여기지 말라는 부여 정신의 교육을 받은 소년은 어머님의 앞에 꿇었다.

"어머님. 다신 안 그러겠어요. 우리 아버진 어디 계셔요?"

아들이 솔직하게 사죄하는데 어머니는 도로혀 미안한 모양으로, 다정한 소리로 말하였다―.

"유리야. 네게 알으키려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이다. 왜, 저 고구려라는 나라이 있는 걸 아느냐?"

"네. 강하고 훌륭한 나라라고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너희 아버님은 그 고구려의 임금님이시다. 너는 고구려의 태자로다. 장차는 너는 고구려의 임금님이 될 사람이다."

"어머님. 그게―."

가슴에 북받쳐 오르는 흥분과 희열에, 목소리까지 떨면서 소년은 어머님을 우러러 보았다.

어머님은 소년에게 자초지종을 다 들려주었다.

"일곱 모 난?"

"일곱 모난 바위 위, 소나무 아래."

"감추신 물건이 무엡니까?"

"그건 모른다."

"감추신 곳은 어딥니까?"

"그것도 모른다. 좌우간, 이 집안 어디니라."

당년의 주몽왕의 처가댁이요 예씨의 친정이던 집이었다.

"이 집에 어디 소나무가 있습니까. 전에― 그때는 혹 있었습니까?"

"전에도 소나무는 없었는데."

"혹은 이 집이 아니고, 다른 집이나 아닐까요?"

"분명 이 집이니라."

"없는 소나무에, 「소나무 아래 감추」단, 어떤 일일까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말할 뿐이로다. 소나무는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

그러나 이 어머님의 말에 유리 소년은 무슨 암시를 얻고, 깨달음을 얻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어머님과의 이야기를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나갔다.

나갔던 유리는 조금 뒤에야 돌아왔다. 손에 들고 온 물건(자루 부러진 칼이었다)을 어머님 앞에 내놓았다.

"어머님. 이게 뭐입니까?"

이 부러진 칼을 보는 순간, 어머님의 얼굴은 홍조가 띠었다가 다시 창백하게 되었다.

"이게― 어디서 났느냐."

"저 뒤 정자(亭子) 아래서 얻어 냈습니다. 이게 뭐입니까?"

"이게로구나. 아버님이 감추신 물건이…. 이게, 아버님 여기서 떠나시는 날까지 몸에 지니고 계시던 칼이로다. 이걸 꺾어서 증표로 두고 가셨구나. 어떻게 얻어 냈느냐?"

아버님이 두고 가신 물건이라는 어머님의 증명을 들으며, 유리는 흥분을 못 참겠는 듯, 숨소리도 가빠졌다.

"저 뒤 정자가 있지 않습니까. 정자의 굵은 기둥이 있지요. 이 집에 예전부터 없는 소나무 아래 감추셨다기에 열곱 모 난 바위를 생각해 보았지요.

이 집에 일곱 모 난 바위란― 저 정자의 주춧돌이 일곱 모이어서, 별다른 주춧돌이라 늘 치념(置念)해 두었었는데 일곱 모 난 바위라기에 문득 그 주춧돌이 생각나서, 혹은 하고 생각하여 나가 보니 기둥이 소나무겠지요. 그래서 일곱 모 난 바위 즉 주춧돌 뒤, 소나무 기둥 아래나 아닐까 해서, 지금 가서 기둥 밑 빈 구멍을 손 넣어 저어 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물건이 잡혀 나오지 않겠어요? 이게 분명…"

아버님이 감추어 둔 물건을 찾기는 찾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달려 가고 싶었다. 그러나 유리 혼자면 혹 모르지만, 이 적지(敵地)에 어머님 예씨를 남겨 두고 떠날 수 없고, 어머님 모시고는 대소 왕자 감시를 벗어나 피하기 힘들었다.

이젠 아버님께 보일 증거들도 얻었으니 가기만 하면 된다. 천천히 눈치 안띄고 기다리노라면 빠져 나갈 좋은 기회도 올 때가 있을 것이다.

어머님은 유리 혼자서라도 떠나라고 했지만, 유리는 그냥 좋은 기회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봄에 비로소 적당한 기회를 얻어서, 동부여를 탈출해서 아버님의 나라 고구려로 달려 온 것이다.

이리하여 유리는 주몽왕 승하한 뒤에 고구려의 제2대 임금으로 위에 올랐다. 바야흐로 팽창의 길에 올라선 고구려 나라에─


한(韓)

[편집]

단군왕검이 동방 민족을 합쳐서 조선 나라를 이룩하신 뒤에 그 종족은 언어와 풍습을 지닌 채, 차차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팽창하고 발전하는 종족은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서쪽으로는 지나 접경까지, 북쪽으로는 사철 얼음 지고 눈 쌓여 있는 한 끝(지금의 시베리아)까지, 그리고, 남쪽은 왜(倭)까지─

이 반도의 맨 남단(지금의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는 선주민(先住民)으로, 「왜」가 살고 있었다. 「왜」의 몸뚱이는 벌써 바다 건너로 이동했고, 그 꼬리의 약간이 아직 「한」 땅에 남아 있는 그것이다.

팽창하고 발전하는 조선 민족의 「남하(南下)하는 가지」는 남하하다가 거기서 선주민 왜와 마주쳤다.

이 「왜」를 혹은 압축하여 (바다 건너로) 쫓으며 혹은 동화 포섭하며, 자연법칙에 의지한 민족 이동 운동이 바야흐로 활발하게 진행되려는 무렵에, 뜻 안 한 지나인의 침략을 받아서 허리가 끊겼다.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그 주체는 북쪽에 있다. 남쪽에 떨어진 「한」은 가지다.

중간엔 지나인─

남쪽에 떨어진 「가지」는 언어와 흰옷 전통과 광명 숭배의 신앙을 지니고, 처음은 진(辰)이라 하다가 뒤에는 한(韓)이라 하며 남방으로서의 독립한 생활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 한(韓)땅에, 기씨 조선의 임금인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겨서 달려왔다.

기씨가 남방으로 쫓겨와 보니, 이 남방은 한(韓)땅으로서 그 주민(住民)은 기씨네가 잘 아는 바, 지금껏 자기네가 북방에서 손아래 넣고 다스리던 그 겨레인 순후무비한 조선족이었다.

새삼스러이 야심이 다시 생겼다.

할 수 없이 위씨에게 쫓겨 오기는 하였지만, 「왕위」는 그냥 연연(戀戀)하였다.

이 「조선족」이라는 인종은 기씨네가 이미 그사이 천년간을 북방에서 백성으로 부려 먹던 인종이라, 그 성품을 잘 안다. 순후하고 겸손하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착하다. 그 성격을 잘 아는 기씨는, 이 순후하고 착한 백성을 속이고 위협하여 스스로 이곳 임금이 되었다. 이곳에 본시 있던 토민인 임금은, 겸손히 기씨에게 나라를 사양하였다.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진(秦)」나라 망하고,「한(漢)」나라이 지나의 주인이 된 시절이었다.

지나는 흔히 국가적 또는 민족적 대변혁이 생기며,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많은 백성(지나인)은 그 소란 난리를 피하여 딴 나라로 피난을 한다. 진시황의 진나라가 겨우 두 대 누리고는, 유방의 이룩한 한(漢)나라에게 망하고 예에 따라서 많은 진인(秦人)은 외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마한 땅으로도 적지 않은 무리가 밀려왔다.

마한왕은 이 망명한 진인들이 내 나라에 잡거하여, 못된 지혜 가르치고 귀찮게 구는 것이 시끄러워서 땅을 좀 떼어 주어서 진인은 거기 모여서 살게 하였다.

이 떼어 준 땅(지금의 경상도 지방)에 세운 나라가 진한(辰韓)이다.

진한 이남의 땅(지금의 김해(金海) 근처)에 원주민인 왜종과 조선(단군)족과 그 밖 잡종이 살고있는 땅에는 변한(弁韓)이 생겼다. 이리하여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남방 지대에는 마한, 진한, 변한, 세 나라이 생겼다.

그 진한땅의 여섯 촌의 어른들이 어떤 날 친목으로 모여서 이야기들을 하다가, 우리도 어진 이 찾아서 임금으로 모시고, 한 개 나라를 만들자 하여, 합의되어 진한 안에서 따로이 나라를 하나 세웠다.

이리하여 서라벌(徐羅伐) 나라가 생겨났다.

임금은 박혁거세(朴赫居世)라 하였다. 불거내(弗居內)라고도 하였다.

혁거세나 불거내나 아울러 「광명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종족(왕검님 후예)의「광명 숭배」의 전통이다.

임금이란 칭호는 거서간(居西干)이라 하였다.

혁거세 거서간이 서고 서라벌 나라를 이룩한 것이, 한(漢)나라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사월이요 주몽왕이 고구려를 세우기 이십 년 전이었다.

처음에는 다만 여섯 촌락(村落)을 모은 한 부락에 지나지 못하였다. 게다가 그 주위에서 기성 국가(旣成 國家)인 진한(辰韓)의 각 부락(부락도 모두 칭국(稱國)하였다)들이 둘러 있어서 팔다리 펼 곳조차 없는 빈약한 나라였다.

다만, 같은 종족이 이룩한 나라이요 그 임금이 거룩한 이라 하여, 이웃 부락이며 나라에서 은근히 존경하였다.

팔 년 뒤에, 왜(倭)가 침범하려 왔다가, 거룩한 임금이 위에 임하여 있다는 소문에 스스로 겁내어 물러가고, 이 소문이 널리 퍼져서 「서라벌」은 거룩한 나라이라고 근방에 알리어졌다.

이리하여 서라벌 나라는, 남쪽 한구석에서 차차 커 가며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주변(周邊)은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전(全)국에서 장정 스물 몇 사람을 추려낼 수 없어서 전쟁을 못 하였다는 꼬마 나라 따위며, 왜종(倭種)의 나라며, 지나종의 나라며, 심지어 사람 잡아먹는다는 식인(食人)종의 나라 등까지― 이런 무수한 「부락국가」가 서라벌 주변에 널려 있었다.

이런 수두룩한 꼬마 국가 가운데 서라벌 나라이 생겨난 것이다. 여섯 촌락을 모아서 이룩한 나라이니 서라벌 나라 역시 비슷비슷한 꼬마 나라였다. 뒷날 신라 나라로 대성을 하였으니 말이지, 서라벌 역시 처음은 다 그렇고 그런 나라(나라라기보다 한 부락이었다)였었지만 훌륭한 임금과 충성된 명신들의 합한 힘으로 나라 키우기에 공들인 덕으로써, 비슷비슷한 무리 가운데서 빼어나게 자라서 종내는 대신라(大新羅) 나라를 쌓아올린 것이다.


백제 건국(百濟 建國)

[편집]

이 서라벌 나라가 생겨난 모체(母體)인 진한― 또 그 진한이 생겨난 모체인 마한─

기 씨는 남방으로 쫓겨와서도 예대로 임금 칭호는 차지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데리고 온 군사력이 하도 미약하니, 게다가 북으로는 자기네를 내쫓은 강력한 위씨 나라와 접해 있고, 그 밖에는 통 바다로 싸인 곳이라, 세력 펼 여지가 없이 그대로 현상유지만 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이라, 상대방이 가만히 굴복해 있으면 요행으로 여기고,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거나 주장하거나 하면 얼마이고 양보하였다. 그저 이 순후한 백성의 위에서 「왕」이라는 존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지라 진(秦)의 망인들이 이 나라 동남쪽에 한 귀퉁이 집단되어 있으매 땅을 떼어 주어 「진한」을 세우게 하고, 또 흰옷 백성과 왜종과 잡종의 집단에게 「변한」을 이룩하게 하고, 그 나머지 땅에서나마, 「왕」이라는 존위를 누릴 수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하였다.

이런 때에, 북쪽 멀고 먼 한 끝에서 고구려 왕자 비류와 온조가, 부하 삼천을 이끌고 들어왔다.

민족의 조신(祖神)으로서의 북국 신왕(北國 神王)의 이름은 이 지방까지 널리 존신된다.

옛날, 기씨 왕의 조상이 이 땅(조선)에 오기 전부터 이 땅 본시의 주인으로서의 북왕(北王)은 이 땅 인종의 한결같이 존신하는 임금이다.

기씨 왕이 지금의 낙랑이며 현토 지방에서 천여년간 왕 노릇 할 때에도, 이곳 주민들은 여전히 북왕을 존신하였다. 기씨네가 왕 노릇하는 그 영토 안에서도 시월 초사흘 북왕 왕검님 개천(北王 開天)의 날을 절일로 여기고, 북왕이 수립한 제제(祭制)를 눌러 답습하였다.

기씨 왕이 위씨에게 쫓겨서 남방으로 와서 보니, 남방 토민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천 년간을 남쪽으로 분리되고, 가운데 우리(지나인) 영토로써 격리되어 살면서도 천 년 전 전통을 그냥 답습해 왔다.

그 북왕의 손(孫)(더구나 형제에서) 부하 삼천을 인솔하고 마한 땅에 왔다는 것이다.

북방에서 이곳까지는, 가깝지도 않거니와 서로 맞닿은 곳도 아니요, 중간에는 한(漢)의 영토가 천여 리나 끼여 있다. 천 리의 외국 영토를 건너서 이곳까지 더욱이 부하 삼천이나 데리고 온다는 것은 간단한 일도 아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삼천의 대부대가 천리길을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만치, 또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때 마한왕은 기씨(箕氏)로 학왕(學王)이었다. 학왕은 이 예사롭지 못한 일에 가슴이 뜨끔하였다.

기씨가 마한에 왕노릇한다 해야, 무슨 행정을 하는 것도 아니요, 조세(租稅)를 받는 것도 아니요, 토민을 징병(徵兵)하거나 징용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요, 법을 펴거나 제도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다만 쫓겨 올 때 데리고 온 부하시켜 왕령(王領)이라고 땅을 잡고 거기 농사시켜서 그 수확으로서 왕과 부하들의 의식에 충당하고, 그러고는 「왕」이라는 존호를 누리고 그것으로 만족해하였다. 애전 종족부터 다르고 보니, 스스로 의붓아들 같아서 이 백성 부려 먹거나 무슨 일 시키거나 할 생각은 염도 내지 않고, 다만, 나는 이곳 왕이거니 하는 자긍심만으로 만족하였다. 백성과는 아주 관련이 없었다.

그렇더니만치 마한 임금 학은 북왕의 아들이 부하 삼천을 데리고 마한 땅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썩하며, 인제는 쫓겨나는 것으로 알았다. 더구나, 북국 고구려는 전쟁을 즐겨 하고 또 전쟁에 능하다는 소문은 많이 들었고, 전쟁의 목표가 국토로 넓히고 옛터를 회복해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은 추측이 되던 바이라, 인젠 왕 노릇 다했다 생각하였다.

자기네게는 전연 병력이 없다. 무기도 없다. 북국 사람이 싸움을 하자면 피할 밖에는 없고, 그래도 그냥 굳이 하자면 도망칠 밖에는 없다. 두고 가는 것에 아까운 물건은 없지만, 이곳서 쫓겨나면 또 어디 가서 왕 노릇을 하는가. 조상 기자 적부터 천여년간 해오던 왕 노릇을 인젠 그만두어야 하는가. 이것만이 아까왔다.

어떻게 전개되며 진전되려는가, 마음 떨려 걱정할 즈음에, 북왕의 아들에게서 학왕에게 한번 좀 만나자는 사자가 이르렀다.

나가라고 내쫓지나 않을까, 혹은 군사로 들이치지나 않을까, 가슴 조일 때에 회견하기를 청하는 것은 학왕에게는 도리어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만날 날짜를 정하여 사자에게 말하였다. 만날 장소는 이 대궐로 하기로 하였다.

임시로 꾸민 병장(兵仗)으로 위의를 갖추고, 학왕은 약속한 날에 북왕의 아들을 맞았다. 북왕의 작은 아들 온조만이 온 것이었다. 형 비류는 진에 머물러 있었다.

학왕과 온조 왕자는 정중하게 마주 절하였다. 학왕은 처음, 상대자가 아직 소년(열일곱 살이었다)인 것을 보고 자기는 어른 행세를 하려 마음먹었었는데, 막상 마주 대하니 그 위엄에 눌려서 맞절을 한 것이었다.

한두 마디의 인사가 사괴어졌다. 그 뒤 온조 왕자는 눈을 구을려서 이방을 둘러보았다.

"이곳 땅을 좀 줍시사고 왔습니다."

집터를 달라는 것인지 영토를 베어 달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늑탈하지 않고 달라는 것은 학왕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무엇에 쓰실 땅입니까?"

"우리나라에서 내 형님이 등극하셔서, 우리 아랫형제는 부접할 땅이 없게 됐길래, 아랫형제 부접할 땅을 구하고자 천리길 왔습니다. 우리가 데리 고온 백성이 삼천 명이니까, 그만한 사람이 살 만한 땅을 좀 주십시오."

내 땅이 얼마나 넓은지는 모르지만, 동쪽에 진한에게도 몇백 리 떼어 주었다. 내 땅은 사면에서 떼 달라는 땅인가고 내심 분하기도 하고 역하기도 하였지만, 워낙 힘이 약하고 또 남의 땅을 늑탈해 가지고 있느니만치 버젓하지 못한 위에, 또한 온조 왕자의 요구하는 태도가, 안 주면 빼앗기라도 할 배짱이니, 그저 무사히 「왕」이라는 자리만 그냥 유지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이었다. 미리 겁냈던 보다는 약소한 요구이니 응하기로는 내심 작정하였다. 그러다, 내 것은 그렇게 사면에서 뜯어 먹는 것이냐는 분기도 있고, 첫마디에 응하기도 싫어서 한두 마디 하여 보았다―.

"당신 형님께 줍시사 하실 게지, 왜 하필 예까지 오셔서…."

"형님 것은 형님 드려야지요. 내 땅을 떼 내면 형님 것이 작아지지 않습니까?"

말하자면 형님 몫 축내지 않고자 마한 땅을 베어 달라는 것이다. 뻔뻔한 요구다.

"그럼 내 것은 내가 가져야지요."

"오면서 보니까, 위례(慰禮) 지방에 빈 땅이 있읍디다. 그저 거기 주저앉아서 차지해도 좋을 게지만 좌우간 그 땅 주인께 말씀이라도 드리고 차지하고자 왔습니다. 거기는 낙랑과 접경이라, 마한에게도 시비 많아 귀찮을 땅일 줄 생각합니다. 그런 귀찮은 땅 남에게 주면 마한서도 시원할 겝니다."

"그런 시비 많을 땅을 당신은 왜 하필 그 땅을 달라십니까?"

"그 땅에 접경한 낙랑은 본시 우리 조상님네 땅입니다. 위례 땅에 자리 잡고 조상님네 땅 찾을 생각입니다."

학왕에게는 가슴 뭉클하는 말이었다. 낙랑 땅이 이 소년의 조상의 땅이라면 이 마한도 마찬가지다. 학왕은 그 문제를 피해 버렸다.

"드리지요. 한 백리 드리리까?"

"이(里) 수를 미리 작정치 말고, 이제 가서 내게 쓸데 있는만치 떼어 가지리다. 나 혼자가 아니요 내 중형님도 함께 오셨으니까, 두 몫은 있어야겠소이다."

이리하여 마한은 이 왕자에게 몇백 리 땅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

비류와 온조 두 고구려 왕자는, 마한의 북쪽 지방이요 낙랑과 접경한 땅을 떼어 얻어가지고 두 나라를 세웠다. 형 비류 왕자는 해변 미추홀(彌鄒忽)로 내려가서 거기 나라를 이룩하고, 동생 온조 왕자는 위례(慰禮) 땅에 자리 잡았다. 위례 땅은, 북으로 강을 끼고, 동으로는 큰 산으로 진(陳)치고, 남으로는 기름진 벌을 안고, 서쪽은 바다에 임하여, 천험(天險)과 지옥(地沃)을 아울러 가진 쉽잖은 좋은 서울 터라고 위례에 함께 있기를 주장하였지만, 형 비류 왕자는 이 말을 좇지 않고 미추홀로 갔었다. 그러나 미추홀로 가서 지내보니, 풍토가 맞지 않고 물이 짜고 모든 점으로 아주 고약하였다. 거기 반(反)하여 동생 온조 왕자(인제는 왕이다)의 터 잡은 위례는, 모든 점이 국도(國都)로서 훌륭하였고 땅 기름져서, 나라로서의 행진이 제법 본격적으로 진척되고 있었다.

비류왕은 당신의 길이 아주 실패였음을 깨달아 알았다. 그 점에 대한 심통(心痛)도 컸고, 게다가 수토불복 등으로 성병되어, 당신 몫의 사업을 들어 동생 온조왕께 맡기고, 온조왕의 사업이 건전히 자라고 성취되기를 심축하면서 그만 세상 떠났다. 비류왕께 소속되었던 몫까지 온조왕에게 돌아왔다.

때는 지나의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삼년이요 서라벌(徐羅伐) 건국 제사십 년이요 고구려 건국 제이십 년이었다.

고구려에서 데리고 온 삼천 명이 근간 되어 불어 나가고 늘어 나갔다. 나라 이름은 백제라 하였다.

본시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나라라 자칭하던 기씨 마한(箕氏 馬韓)은 그 존재가 아주 모호하였다. 임금과 임금 직속의 몇 신하가 「임금」이란 칭호며 「대신」이란 칭호만을 그냥 유지하고 누렸으면 그만이지, 그 이상의 희망이라든가 야심이며 욕구며 포부며 이상(理想)이 없는 몇몇 지나인이 치자(治者)의 자리에 앉아서, 한가하고 무위한 세월을 보내며 누구가 와서 땅을 떼 달라면 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왕」 칭호와 「대신」 칭호만 그냥 붙들어 두고는 아낌없이 베어 주고, 표면은 존대하고 안으로는 소심익익(小心翼翼)하게 지내는 왕권이었다.

민족 이동(民族 移動)의 물결을 타고, 북방 대륙에서 조선반도를 거치어서 바다 건너로 이동해 가던 왜(倭)종, 또는 표류하여 반도에 들게 된 표류 왜인이 이 나라 남쪽 끝에 꽤 많이 있다. 조선 민족이 북방에서 일어서 차차 팽창 발전하여 남쪽으로 반도로 벋어 오던 부대는, 자연의 세(勢)로써 왜종을 압축하고 혹은 포섭 동화하면서 남하(南下)하고 있다가, 지나인에게 허리를 끊겼던 것이다.

민족(조선족) 발전의 원동(原動) 근거지에서 허리를 끊겨서, 팽창과 발전은 중단되었다.

고식적으로 현상유지― 현상은 유지 못되어도 「왕」호만이나마 유지하기를 꾀하고 있는 마한 한 귀퉁이에, 고온조(근본이 부여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씨를 씨 삼았다)의 이룩한 백제 나라이 생긴 것은,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남쪽 부스러기」 스스로의 독립한 민족 운동력의 자연 소산이다.

마한은 왕실과 백성과의 사이에는 유기(有機)적으로건 무기적으로건 아무 관련이 없고, 서로서로의 애착도 의무감도 또는 의뢰심도 없이― 따라서 서로 친애나 경모심도 없는 대신에 귀찮다든가 밉다는가 하는 생각도 없이, 너는 너요 나는 나로 살고 있었다. 이러한데, 북왕(北王)의 아들이 나라를 따로 하나 세웠다. 마한 나라로서는 서로 원수지간인 낙랑과의 중간에 완충지대가 생겼는지라 도리어 마음 든든하게 여겼다. 더욱이 새로 되는 나라는, 우리가 땅을 빌려주어 우리에게 신세 진 나라이다.

"낙랑은 본시 우리 조상님네 땅이니 도로 찾겠소."

하던 백제 왕의 말은 역시 그 조상네 땅에 앉아 있는 마한으로서는 가슴 뜨끔하는 말이었지만, 시재로는 무슨 말썽 부리지 않고 있으니 무시무시한 원수의 나라 낙랑과의 사이에 완충지대가 생긴 것만 마음 든든하였다.

×

백제 나라이 서자, 백제 나라와 지경을 접하고 있는 근처의 지방(마한의 영역)이 연해 백제에게 돌아 붙는다. 국경선이 어디라고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태고 시절이라, 백제에게 준 것이 어디까지라고 금 그은 데는 없지만, 한 백 리 한(限)하고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백제에서 참견하는 지역은, 이삼백 리가 넘는다.

이전 마한 시절에는 너는 너요 나는 나로 지내 왔었는데, 백제는 그렇지 않아 나라와 백성이 합하여 「우리」가 되었다.

나라에서 군사를 뽑으면 각곳에서 거기 응모하고, 임금(온조왕)이 백성의 농상(農桑) 상태를 시찰하고자 지방을 순찰하면 백성은 만세를 불러 임금을 환영하였다.

마한(왕실)으로서는 매우 쓴[辛] 일이었다. 자기네는 이전에, 백성의 고락(苦樂)을 알아본다든가 그런 일은 안 하였지만, 가령 하였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이처럼 기쁘다고 뛰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백제의 모양은, 그 임금의 백성이요 그 백성의 임금이라는 국가 형태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본시의 임금인 마한왕 학은, 도리어 의붓아들같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버님 고주몽왕 생존 때에, 작은 아드님 온조왕께 보필자(輔弼者)로 주려고 훈련한 신하 오간(烏干) 마려(馬黎)등 고구려 적부터의 신하들은 이 나라의 국가 목표며 국시를 잘 이해하고 있느니만치 참으로 잘 보필하였다.

온조왕은 아직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지만, 숙성하고 지혜 많은 위에 침착하여서, 나라를 능란하게 키워 나갔다.

북국 고구려, 아버님의 옛터를 떠나서 그 새 천리길 온 것이 내내 지나인의 영토였으며, 이곳 또한 지나인이 왕 노릇하는 땅이라, 이 우리나라에 침입 된 지나인의 세력이 이렇듯 광대한 데 온조왕은 새삼스러이 적개심이 더하여졌다. 이 땅 안의 백성들은 이처럼, 내 땅 다 남주고, 그 남은 구석에서나마, 기껏해야「따로 나라를 하나 만들고 임금이 되어 보리라」 이 맛 정도의 욕심밖에 못 내는데, 그런 가운데서 「우리 땅 우리가 찾고 지나인을 우리 땅에서 내쫓겠다」는 엉뚱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로 일생을 행동한 위대한 선각자 위대한 영웅으로서의 아버님이 무한 사모되었다.

아버님은 혹은 단군왕검님이 후손이시요 해모수님의 아드님이라는 유다른 신위(身位)에 계셨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셨겠지만, 역시 해모수님의 아드님인 부루왕(夫婁王― 동부여 임금이요 금와왕의 아버님)은 꼭 같은 신분을 가지고도 다만 동부여의 임금으로 만족하였고 그 이상 미쳐 보지 못하였는데, 오직 아버님 주몽왕이 이 목표로 먼저 한 개 나라를 이룩하고 그 나라로 큰 목표를 향하여 매진했고, 아드님들이며 원로 신하들에게도 그 목표를 이해하게 하여서, 당신 떠난 뒤에라도 그 목표의 후계자를 양성하여 둔 것이다.

지나인 영토(본국에게 직속된 낙랑 지방) 천여 리 길을 통과하여, 또한 지나인이 왕 노릇 하고 있는 땅에 자리 잡고 보니, 아버님 추모하는 정이 더 크게 솟았다.

이 정이 간절하여, 백제 건국 첫해에 동명제묘(東明帝廟)를 웅장하게 세우고 아버님 승하하신 날에 여기 제사하게 하고, 백제 나라이 존재하는 동안은 내내 이 제사 게으르지 못하리라는 제도를 세워 놓았다. 그리고 이 제사날은, 시월 초사흘, 왕검님 개천(開天)한 날과 아울러 이 나라의 가장 큰 축제 일로 정하였다. 이리하여 백제 나라에는 고구려 시조의 묘가 서고, 이 대묘를 본받아서 처처에 동명묘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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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는 마한 전주를 백제의 아래 둘 것이지만, 현재 백제 왕권이 및는 지역에는, 확호한 시정 방침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좀 상류에 속하는 계급에게는 글을 가르쳤다. 온조왕이 아버지의 나라에 있을 때, 아버지의 나라에서도 예의(銳意) 백성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 못한 시절이라, 옷감의 베며 짐승 가죽을 쓰던 고구려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일반 국민에 글을 퍼뜨렸다. 이 땅은 본시 지나인인 기씨가 임금으로 있었지만, 저는 저요 나는 나로 살았는지라 서로 접촉이 없었으므로, 지나인의 글은 마한 궁실과 대신들의 사이에만 돌았고 민간에는 퍼지지 않았던 것을, 글은 사람의 살림살이에 없을 수 없는 것이라는 주지 아래서 나라에 글을 퍼뜨렸다.

마한의 치자(治者)는 지나인 기씨(箕氏)와 그 부하지만 천여 년간 지나 본국과 격절되어, 문화적으로는 퇴화한 대신, 마한 땅 안에 생긴 「백제」의 문화는 쑥쑥 진보되었다. 백제의 문화는 마한과는 별개로 자라 올랐다.

이 나라가 말갈(靺鞨)― 본시 맨 처음은 역시 왕검님 치하에 있은 같은 종족이었지만, 그 본거가 깊은 산간에 있는만치, 본국과의 교섭이 적고, 따라서 본국의 나날이 진보되는 문화(文化)와 격리되어, 이러한 생활을 오래 계속하는 동안에 모국(母國― 차차 변하여 「부여」라 일컫게 되었다)보다는 문화 정도가 훨씬 뒤떨어진 종족이다. 음식 먹는데 그릇과 수저를 모르며, 짐승 가죽을 그대로 몸에 감아 옷감으로 쓰고, 겨울에는 도야지 기름을 몸에 두껍게 발라 추위를 막고, 뒷간을 가운데 두고 사람은 그 주위에서 살고, 활에 아직 돌촉[石鏃]을 사용하는 등,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종족으로서, 처음에는 「숙신(肅愼)」이라 불리었는데 아마 「숙신」은 「조선」의 와음(訛音)일 것이며, 뒤에 읍루(挹婁)라 하였고 지금 「말갈」이라 하며, 오늘날의 「여진(女眞)」의 조상이다)과 접경하고 있어서 말갈을 막을 준비라 하여, 병졸을 많이 모집하여 맹훈련을 하였다.

말갈은 전통적으로 남을 귀찮게 굴고 성가시게 구는 종족이라, 말갈에 대한 방어도 잘 해야겠거니와 그보다도 장차 낙랑에 대한 준비로 양병을 하는 것이었다.

건국 제사 년에 온조왕은 낙랑에 사신을 보내서, 서로 친선하기를 약속하였다.

제팔 년에 말갈이, 삼천 군을 이끌고 와서 침범하였다.

겨우 엄동은 지난 이른 봄 이월이었다. 삼천의 말갈군이 와서 서울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온조왕은 지난 옛날, 아직 고구려의 왕자이던 칠팔 세의 소년 시절에 고구려병이 북옥저를 치러 갔던 그때의 기억을 회상하여, 그때 북옥저 버금서울에서 쓴 전략을 여기 이용하고자 하였다. 소년 때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 삼만 대군을 이끌고 간 마리 장군이 북옥저 버금서울을 포위하고 싸움을 돋구니, 북옥저 측에서 성문을 굳이 닫고, 나와서 마주 싸우지 않았다. 치중(輜重)을 넉넉히 준비해 가지고 갔으니 군량 떨어질 근심은 없었지만, 저쪽이 마주 싸워 주지 않으니, 튼튼한 성이라 성을 깨뜨릴 수도 없고― 얼마 포위하고 있다가 하릴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물러나는 체만 하고, 거기 속아서 옥저에서 성문을 열 적에 성내에 돌입하여 승리는 얻었지만, 성문을 굳이 닫고 있으면 포위군은 결국 물러가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옥저에서는 우리가 포위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우리가 포위당한 편이었다.

이전 옥저에서는 우리는 물러가는 체만 하였지만, 말갈병은 꾀 없는 군대라 한동안 포위했다가는 그냥 성문 열지 않으면 정말로 물러갈 것이다.

물러가는 것을 희망하는 바가 아니다. 그들이 물러갈 때에 우리가 정병으로 허심퇴병하는 말갈을 뒤쫓아 엄살하면, 마음 놓고 물러가던 말갈병은 낭패하여 수습 못 할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요, 그때를 교묘히 이용하면 혹은 왔던 말갈을 전멸할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리라.

― 이렇듯 한 번 된 경을 치러 보내서, 이 뒤 다시 우리나라를 침범할 생념도 못하게, 혼을 내어 보내리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고구려가 예전 옥저에게 쓴 바와 같이, 거짓 물러가는 것이나 아닌지(그만 꾀도 안출치 못할 말갈이지만) 이점만을 잘 알아보아서 뜻 안 한 실패는 하지 않도록,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성문을 굳이 닫아 버렸다.

말갈은 위례성을 포위하고, 연해 싸움을 돋구었다. 그러나, 백제는 문을 굳이 닫고 응치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저쪽의 약을 올리기 위하여 자지러지게 풍악을 울리고 연무(演舞)하는 모양을 일부러 알리도록 성대히 하였다.

밖에서는 포위군 말갈이 연해 살을 쏘며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구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성문만 굳이 닫고 밖의 포위며 소란도 모른다는 듯이 잔치며 놀이만 하고 있었다.

그러는 일방, 가장 날래고 용맹한 병졸로 조직된 한 부대는 장차 성문이 열리는 날에, 달려나가서 퇴각하는 말갈을 충살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성 안에 식량이며 물자가 충족하여서, 몇 해를 포위 속에 있어도 근심 없다는 점을 말갈에게 알리기 위하여 일부러 성 너머 던지는 쓰레기에는 아직 먹을 수 있는 음식의 폐기물을 많이 섞어서 버렸다. 말갈이 헛되이 쏜 살들을 모두 주워 묶어서, 말갈에게 보기 좋게 성 위에 높다랗게 걸었다.

말갈은 십여일 간을 위례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많은 살만 헛되이 성안으로 쏘았다. 그러다가 자기네의 군량이 모자라게 되어서, 물러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갈도 그맛 꾀는 있어서 한꺼번에 물러가지를 않고, 그 대부대는 차례차례 은근히 물러가고 얼른 보기에는 그냥 포위하고 있는 듯이 가식하였다.

말갈의 퇴각하는 모양을 엄중히 정찰하고 있는 백제로서는, 아무리 말갈이 슬몃슬몃 조금씩 물러간다 할지라도 뻔히 알고 있었다. 한 삼백 명만이 그냥 포위하고 있는 체하고, 그 대부대는 물러갔다.

주력이 물러간 뒤에도 잔존 부대는 하루를 더 있어서, 퇴각 부대(주력)가 멀리까지 가기를 기다려서야 잔존 부대도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이 잔존 부대가 물러가기까지 백제는 그냥 대기만 하고 있었다. 젊고 용감하고 혈기방농한 임금인 온조왕은 추격할 백제군을 몸소 지휘하고자 당신이 진두에 나섰다.

아버님 주몽왕은 몸소 진두에 나서 보지 않았다. 장수들을 믿고 그 역량을 신용하는지라, 싸움은 장수들에게 일임하였었다. 임금이 직접 칼을 뽑아들고 진두에서 지휘하여 전쟁하는 것은, 고구려 이래 이번의 온조왕이 처음이었다. 장군들은 처음에는 말렸다. 그러나, 젊고 게다가 자신이 만만한 온조왕은 굳이 몸소 나가려 하였다.

임금이 몸소 지휘하려 하는지라, 장졸들의 의기는 더 성하였다. 말갈의 잔존 부대가 퇴각을 시작하자 뒤따르자고 들먹거렸다.

그러나 온조왕은 그냥 움직이지 않고, 장졸들을 붙들어 두었다.

말갈이 퇴각하여 보이지 않게까지 된 뒤에, 온조왕은 비로소 성문을 열게 하였다. 그리고 친솔군(전부가 마병(馬兵)이었다)의 선두에 나섰다.

"가자!"

임금님의 한 마디 호령에 백제의 마병들은, 말발 소리 우렁차게 위례성을 떠났다.

삽시간에 말갈의 전군(殿軍― 잔존 부대)에 뒤미쳤다. 그러나 그 말갈은 버려두고, 더 앞으로 달렸다. 하루 먼저 떠난 말갈의 주력을 목표로 뒤따르는 것이다.

하루 먼저 떠난 말갈의 주력은, 십여 일을 위례를 포위하고 있다가 군량이 떨어져서 할 수 없이 퇴각하는 군대라, 군심이 해이되고 맥이 빠져서― 게다가 군량이 부족했으니 주리기도 했을 것이다― 기운 없이 연로(沿路)의 민가를 약탈하면서 퇴각하는 형편이었다. 그 말갈에게 대부현(大斧峴)에서 뒤미쳤다.

맥이 빠져서 대오(隊伍)도 정렬되지 못하고, 무규칙하게― 군대가 아니요 한낱 난민의 집단에게 향하여, 온조왕 친솔의 백제 정예는 돌입하였다.

난장판이 되었다. 말갈은 싸울 생각은 내지도 못하고, 사면으로 헤어지며 도망치기만 위주하여, 엎어지며 자빠지며 밟히며 밟으며 수라장이 된 가운데를, 백제의 마병은 종횡으로 충살하였다.

칼에 죽은 자보다 말발에 밟혀 죽은 자가 더 많았다. 오륙백 명을 죽이고, 그 나머지는 도망쳐 버렸다.

이 말갈의 주력 부대를 꺾어 버리고, 온조왕은 부하 장졸을 데리고 돌아섰다. 아까 뒤떨구고 온 말갈의 전군(殿軍)을 처리하고자─

말갈의 전군은 시셋장 틀린 것을 각오하였는지 다 도망쳐 버려서, 「군」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몇 명 혹은 몇십 명씩이 숨고 피하고 도망하고 하는 것을, 차례로 혹은 죽이고 혹은 사로잡고 하여서, 결국 적지 않은 포로를 얻었다.

온조왕이 등극한 제삼 년(즉 백제 건국 제삼 년)에 말갈이 북경(北境)을 침노한 때도 이를 전멸하다시피 했고, 두 번째인 이번의 침노에도 또한 이처럼 이겼다. 이리하여, 백제는 말갈에게 충분한 위엄을 보이었다.

임금이 몸소 출정하여 말글을 크게 이긴 그 칠월에, 백제는 국경을 튼튼히 하고자 낙랑과 접경한 마수(馬首)에 성을 견고하게 쌓고, 병산(甁山)에 책(柵)을 높이 세웠다.

이것은 낙랑에게 대한 방비며 공략의 예비며 또한 시위(示威)였다. 친선관계를 맺은 낙랑이매, 이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친선관계가 있는 낙랑에게의 적대 행위다.

"낙랑에서 시비가 없으리까?"

"있기를 내 바라는 바이오."

군신간에는 이런 말이 사괴어졌다. 투심 만만한 백제요, 그 임금이 또 한 소년 혈기 하늘을 찌를 듯한 온조왕이라 시비가 무섭지 않았다.

과연 낙랑에서 사자가 왔다. 낙랑 태수가 직접 보낸 사자였다.

그 낙랑 사자를 온조왕은 몸소 만났다. 오간(烏干)과 마려(馬黎)의 두 원로 신하가 배석하였다. 뒤에 한(漢)나라라는 배경을 가진 낙랑 사자는 이 소년왕을 애초에 숙보고 들었다. 이 새로 생긴 조그만 나라, 더구나 위만에게 쫓겨서 와 있는 마한에게 한구석 땅을 빌어가지고 있는 빈약한 나라의 젖비린내 나는 소년왕이라, 자기네는 위만을 내쫓은 한(漢)이니만치 숙볼 만도 하였다.

"마수(馬首)에 성을 쌓았다구요?"

"그랬소."

"병산(甁山)에 책을 세우고?"

"그랬소."

"견고하게 잘 쌓으셨던데요."

"더 견고하게 하고 싶었지만, 날짜가 급해서 뜻대로 못 되었소."

"마수, 병산은 순전히 우리 낙랑에 향한 땅인데 왜 그리하셨는지요?"

"남에게 향한 땅이니까 그래야지요. 내 나라에 향했으면야 성도 책도 쓸데없겠지만 불행히…."

"백제와 낙랑은 서로 좋게 지내자구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약속은 두었소."

표면은 온공하나 서로 할퀴는 응답이었다.

"좋게 지내는 사이에 성책이 쓸 데 있을까요?"

"우리 태수께서 이런 글월을 이 사람에게 주셔서, 이 나라에 전하라십니다."

무슨 종이를 꺼냈다.

"어디!"

온조왕은 팔을 폈다.

낙랑 사자는 네가 글을 알겠느냐는 의아심과 모멸심을 아우른 얼굴로 그 종이를 온조왕께 바쳤다. 그 글은 대략 이러하였다―.

頃者[경자] 聘問結好[빙문결호], 意同一家[의동일가], 今逼我境[금핍아경], 造立城柵[조립성책], 或者其有蠺食之謀[혹자기유잠식지모], 若下渝舊好[약하투구호], 壞城破柵[괴성파책], 則無所猜疑[즉무소기의], 苟或不然[구혹불연], 請一戰以決勝負[청일전이결승부]

(일찌기 서로 한집안같이 좋게 지내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성책을 엄히 하여 우리 지경을 누르려는 것은 혹 잠식하려는 준비인지, 그렇지 않아 옛 의를 그냥 유지하자면, 그 성책을 없애서 공연한 의혹을 피할 것이며, 그렇지 않거든 한 번 싸워서 승부를 결하자)

온조왕은 칵 치받치는 노염을 누르고, 원로 대신 오간을 돌아보았다. 낙랑 태수의 글을 오간에게 주면서….

"좌보(左輔― 오간의 벼슬직함), 괘씸하고 버릇없는 낙랑의 더벅머리를 어떻게 벌하잡니까?"

임금의 뜻을 잘 아는 오간 좌보는 임금에게 낙랑 편지를 받아 보고서 아뢰었다―.

"글쎄옵니다. 천자(天子) 같으면 마주 대해서 다투기라도 하겠읍지만, 만리 밖(萬里外) 낙랑 변지(邊地)에 밀려 와 있는 미관(微官)이 무슨 버릇을 알리까. 어른답게 버려두시는 편이 좋을까 하옵니다."

"하기는 그렇소. 그럼 그 버릇 모르는 더벅머리의 심부름으로 온 이 늙은이에게, 법이나 알려 줍시다. 이 낙랑 늙은이, 내 말 듣소. 남의 나라와 접경한 땅은 성을 쌓고 책을 치는 건 고금의 상도요, 나라 지키는 원법이어. 이것으로 말썽 부리는 건 당찮은 일이오. 이걸로 시비하여 싸우자면, 우리는 소국(小國)이지만 결코 사양치 않을 테니 그리 알소."

그러고는 신하들을 데리고 일어나서 그 자리를 나왔다. 낙랑인은 터지려는 분통을 참는 듯, 몸만 우들우들 떨고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낙랑에 도전을 하여 두었다.

이로부터 백제는 말갈과 낙랑이 두 적(敵)을 목표로 한 양병에 전력을 다하였다.

백제를 숙보고 백제를 위협하려 왔다가, 도리어 욕보고 돌아간 낙랑은 그래도 백제를 칠 만한 힘이 부족하였던지 아무 소리 없이 있었다. 그리고 삼 년을 지나서, 말갈을 충동하여 말갈이 와서 병산책(甁山柵)을 헐고 달아났다. 백제에서는 바삐, 다시 독산과 구천(禿山, 狗川)의 두 책을 세워서, 낙랑 길을 더 튼튼히 하였다.

온조왕 십삼 년에 왕의 어머님 소서노 왕후가 승하하였다. 승하하기에 임하여 아드님께 서울 터를 옮기기를 부탁하였다. 이곳은 하도 낙랑 말갈 등과 가까와서, 베개 높이 할 날이 없으니, 더 남쪽으로 서울을 옮기라는 것이었다. 남쪽은 마한 땅이다.

이것은 온조왕도 늘 마음먹고 있던 일이었다. 혹은 사냥 다닐 때 혹은 민정 순찰 다닐 때, 마땅한 서울 터를 은근히 물색하고 있었다. 지금 어머님의 말씀까지 있고 보니, 아주 결정하였다.

남한(南韓)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우선 위례성 안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남한 땅으로 옮기고, 성을 쌓고 궁궐을 짓고 하여 이도(移都)할 준비를 하면서 마한(馬韓)과도 상의할 일을 상의하였다.

본시 처음 마한에게 백리 가량을 빌었던 것이다, 백성이 저절로 오고, 돌아 붙는 지역이 저절로 넓어져서, 약속했던 백리는 훨씬 넘게 되었다. 그래서 마한과 상의하여, 남쪽으로는 곰내[熊川(웅천) ─ 지금의 公州(공주)]까지 서쪽은 바다까지를 백제 땅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이듬해에 남한으로 서울을 옮겼다.

백제 나라는, 처음 생길 적에는 하도 작은 나라(겨우 백 리 땅이니)라 남들이 대수롭게 여기기 않았지만, 차차 자라자 백제 주변의 나라는 모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쪽으로는 바다를 꼈으니 문제없거니와 남쪽으로는 마한이요 북과 동쪽은 낙랑 말갈 등이다. 말갈 나라는 썩 북쪽에 있지만, 예(濊)며 낙랑에 말갈 종족이 많이 잡거하여 성가시게 구는 것이었다.

이런 형편이라 사면에 성을 쌓고 책을 치기에 바빴다. 장차는 마한도 삼키고 낙랑도 복멸할 것이지만, 우선 그 접경한 땅의 수비는 튼튼히 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새 국경(마한과 협정한)인 곰내에 책을 튼튼히 하매 마한왕 학(學)이 말썽을 부렸다. 곰내는 마한과 접경한 지역이었다.

"그대가 처음 왔을 때 몸 붙일 땅이 없다길래, 백 리 땅을 빌려서 나라를 세우게 했고 지금껏 대접이 후했거늘 지금 곰내에 책을 높이 쳐서, 과인(寡人)의 강토를 엿보는 듯한 것은, 신세를 원수로 갚으렴인가."

옛날 병산책에 대하여 낙랑에서 항의할 때는 물리쳐 버렸지만, 마한과의 사이에는 아직 시비가 없었고, 백제가 무슨 일을 하건 마한은 양보만 해오던 터이라, 이 항의에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이미 세웠던 책을 다시 헐었다.

체면과 염치에 몰려서 일단 세웠던 책을 도로 헐었지만 「마한도 복멸할 곳」이라는 주의에는 추호의 변동도 없었다.

이 임금 이십육년 드디어 마한도 복멸하였다. 원산(圓山) 금현(錦峴)의 두 성이 약간 반항할 뿐이요, 다른 곳은 온조왕이 사냥한다는 구실로 데리고 간 약소한 사람으로 꺾이니만치, 속살이 텅빈 마한이었다. 군졸단 몇 명을 데리고 사냥하는 체 어름어름 하다가 들이치니, 그만 퍽석, 이백여 년 마한의 사직은 꺾어져 나갔다.

인제는 마한도 없어졌다. 백제의 국경은 남으로는 바다까지 뻗었다.

동쪽으로는 진한과 변한이며 꼬마 나라가 수십 개 있지만 문제가 안 되고, 그 더 저편에 서라벌 나라이 이웃의 꼬마 나라들을 차례로 삼키며 자라고 있지만 백제와는 지역적(地域的)으로건 정치적으로건 아직 아무 관련이나 상종이 없고, 오직 북과 동에 낙랑(말갈을 포함한)이 정면의 적일 뿐이었다.

×

마한을 멸하고 마한왕인(王印)을 거두어 이로써 아버님 동명제의 사당에 아뢸 때에, 온조왕은 감개무량하였다.

아버님께 분부받은 큰 목적 품고 형님인 비류와 함께 남방으로 오자, 북쪽에서 오는 소식은 아버님의 승하함을 알리었다. 그러나 큰 희망 큰 야심을 품고 온 온조왕에게는 아버님의 승하도 그다지 슬프게 안 느껴졌다.

남방에 오자 또한 형님 비류왕이 승하하였다. 이도 또한 그다지 슬프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온조왕은 나라를 이룩한 처음 시기로서 당신의 할 일이 너무도 많은지라, 사람 결련의 그런 문제는 아주 소소하게 보였다.

남과 북으로 지나인의 나라를 두고 그 지나인 나라를 복멸하는 것이 아버님에게 받은 책무라, 그 이래 온조왕은 오직 그 한길로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남북에 있던 지나인 가운데, 남에 있는 자는 지금 없이하였다. 인제는 오직 북쪽에 지나인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동안 북쪽 아버님의 나라(고구려)에서는 아버님의 승하의 뒤를 이어, 부여에서 돌아온 형님 유리가 위에 올랐다 한다. 상거가 천여 리니, 그리고 중간에는 지나인 영토 낙랑 천 리가 끼여 있으니 소소한 소식은 이곳까지 오지를 못하거니와, 큰 소식으로 형님의 나라에서는 그사이 선비(鮮卑─몽고)를 꺾어 속국(屬國)으로 하였다 한다. 선비는 서북쪽의 강한 종족으로 모두 저퍼하고 두려워하는 족속인데 그를 꺾어 속국으로 하였다 한다.

또 서울을 위나암(慰那巖)으로 옮겼다 한다. 졸본 서울은 아버님이 십년간에 크고 튼튼히 되기는 되었지만, 바닥이 더 넓힐 여지가 없는 곳이라 아버님도 늘 옮길 것을 생각하시던 바이다. 위나암은 어떤지는 모르지만 졸본 서울보다는 터전이 넓을 것이다.

또 최근에 들린 소식으로는, 지나인이 「고구려(高句麗)」를 「 하구려(下句麗)」라고 저희끼리 이름을 고치었다 한다. 내란(內亂)을 즐겨 하고 끊임없이 국내에 내란이 있어서 천자(天子)의 위가 늘 바뀌는 지나에서는, 한(漢) 나라도 생긴 지 이백여 년 되었으니, 또 넘어질 때가 되었다. 왕망(王弁)이란 사람이 생겨서 한나라 사직을 넘어뜨리고 자기가 천자가 되었다.

왕망이 천자가 되어서는, 「온 세상은 지나인의 것이며 지나의 천자는 인류(人類)의 으뜸 임금」이라는 지나인 공통의 사상에 지배되어, 아직껏 한(漢)이 이백 년간 내내 범접치 못한 고구려를 호령하여 보려고 지나에서 흉노(凶奴)를 치는데 고구려에서도 군사를 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변경(邊境)지방에서 징병을 하여 전쟁에 내보내려 하였다. 거기 끌려 갔던 장정들은 모두 새(塞) 밖으로 도망해 피해서, 그 근처 일대를 어지럽게 하였다.

지나인 관리(官吏)인 전담(田譚)이 이를 잡으려 하니, 그들은 도리어 전담을 잡아 죽였다.

여기서 임시 천자 왕망은, 엄우(嚴尤)에게 이 처리를 분부하여 엄우는 고구려 장수 연비(延丕)를 속여 유인하여서 죽이고 왕망에게는 「고구려 후(候) 추(騶)를 죽였노라」고 그 목을 베어 보냈다. 왕망은 기뻐서 이를 천하에 크게 자랑하고, 고구려를 내리쳐서 「하구려(下句麗)」라 하였다 한다. 낙랑에도 그 자랑은 전해 와서, 낙랑서도 「우리 한나라(왕망은 나라를 신(新)이라 하였다)이 고구려 왕을 잡아 죽이고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이름 고쳤다」고 들썩하며 고구려 사람을 하구려 사람이라고 갑자기 수모들을 한다 한다.

고구려를 모국(母國)으로 여기는 온조왕으로서는, 지나인의 이 존대가 다만 우스울 따름이었다.

왕망에게 망하고도 여전히 대국(大國) 행세를 하려는 지나인. 장차 낙랑에서 그들을 부수고 내쫓아 주리라. 돌아가신 아버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시던 말씀― 「흰옷 입는 사람의 땅은 흰옷 입는 사람이 차지해야 되느니라」시던 그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형님의 나라 고구려와 이 나라 백제가 땅이 마주 닿아서, 고구려에서 내미는 물그릇을 백제에서 입대고 마시며 백제에서 지은 밥을 고구려에서 먹으며, 백성들 사이에는 그 뿌리가 백제 땅에 있고 가지가 고구려땅에 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백제 것이라 고구려 것이라 다툴 세상을 가까운 장래에 꼭 현출시키고야 말리라.

멀리 배다른 형님의 나라의 건투하는 모양을 바라보며, 온조왕은 이 백제도 어서 그만치 키우고자 당신의 이룩한 나라에 정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온조왕으로서 마음에 불만하고 불안한 일이 있었다. 그것은 즉 이 당신의 나라 당신의 백성이 형님의 나라 형님의 백성처럼 웅건하지 못한 점이었다. 체격으로도 그러하였지만 속으로가 더 그랬다.

형님의 나라(아버님이 세우신 나라 고구려)의 백성은 그 성품이 순후웅건한 데 이곳 백성은 나약하고 더욱이 간사한 데가 있었다. 남쪽 끝으로 내려가면서 더욱 현저하였다.

아마 남쪽에는 본시 왜인이 살았고, 그 잡종이 많이 생기고, 그 위에 마한왕실의 흐리멍덩한 치하(治下)에 수백 년 살기 때문에 생긴 성질일 것이다.

이것이 불안하고 불만하였다. 백성이 강건해야 강건한 나라이 생길 터인데, 이 점이 불안하였다. 지금은 북쪽에서 데리고 온 신하들이 국정을 보살피거니와, 장차 이곳서 난 사람들의 세상이 될 것 같으면, 나약한 나라로 변하지 않을지.

하루 이틀로 걷어치울 일이 아니고 백만 년 계속해야 할 나라 일이라, 적지 않게 불안을 느끼는 바이었다.

원대하게 생각하자면 그런 일까지 근심되었지만, 눈앞의 일로서는 순조롭게 왕업은 달성되어 나아갔다.

사면에 성과 책을 늘려서 국방은 튼튼하여 가는 일로(一路)였다. 낙랑에 예속되었던 땅도 조금씩 조금씩 온조왕의 백제에 돌아 붙었다. 시시로 말갈이 귀찮게 굴지만, 그 매번 큰 타격을 주어 쫓고 하였다. 흔히 (넓어 가는) 새 영토를 순시하며 백성을 어루만졌다.

멀리 남옥저(南沃沮)에서도 백제까지 와서 투신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고구려와 지경을 맞접한다는 대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 기초와 목표는 튼튼히 섰다.

이리하여, 예전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서 남방으로 온 온조왕은 당신 일대 사이에 한 개 나라를 세우고 마한을 복멸하고 나라 기초를 튼튼히 하고― 이만한 업적을 남기고서 즉위 사십육 년 이월에, 아드님 다루(多婁)께 위를 물려드리고 승하하였다.

다루왕이 아버님의 이룩한 나라를 맡아 가지고 백제 제이대의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이후 대대손손 주몽왕이 처음 고구려 나라를 세운 그 건국 목표와 노선(路線)에 따라서 나라를 운용하고 못하는 것은 장차 문제요, 또한 사실에 있어서, 고구려와 백제는 국경이 맞닿은 관계로 국경선 분쟁에서 알력이 시작되어서, 두 나라의 국민성의 차이 때문에 그 알력은 차차 크고 격화하다가, 고구려 임금이 백제의 유시(流矢)에 맞아 승하한 사건 때문에 두 나라는 종내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변하였지만, 건국 초에는, 백제는 고구려를 큰 나라로 여기고 엄지 나라로 여기고, 스스로 지국(支國)으로 자처하고, 고구려 시조 동명성제 고주몽을 국신(國神)으로 그 묘를 세우고 제사하고, 고구려의 국시(國是)를 백제의 국시로 삼아 나라를 운용하였다.

백제의 모체(母體)인 마한은 백제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마한이 백제에게 흡수되어 없어진 지 칠팔 년 뒤, 온조왕 제삼십사년에 마한의 옛 장수 주근(周勤)이 부하 약간을 데리고 우곡(牛谷)성에서 반기(叛旗)를 들었다가 온조왕의 친정을 받아서 처자까지 전멸하고, 그 뒤 다루왕(온조왕의 아드님으로 백제 제이대의 임금) 때에, 역시 마한 옛 장수 맹소(孟召)가 그의 거성(居城)의 복암성(覆巖城)을 들어 서라벌에 항복한 일 등, 마한 이백년 사직의 망해 들어가는 자취를 남기면서 기준(箕準)에서 시작된 마한은 아주 사라져 버렸다. 지나인 기자에서 시작이 되어서, 단군조선의 땅에서 업을 일으켜서, 그 지역의 이름을 그냥 답습하여 기씨 조선이라 하던 나라는 차차 요지(遼池)를 거치어 압록강을 넘어 패수(浿水) 너머까지 발전하여서 이 땅 본래의 주인 단군은, 기씨의 왕성한 세력 뒤에 감추여서 알아볼 수 없도록 모호하게 되어서, 그 땅도 기씨의 것인 듯 나라 이름 「조선」도 기씨의 독점으로, 그 땅에 살고 있는 백성도 기씨의 백성인 듯 이러한 천년 세월을 지내다가, 역시 지나인인 위만(衛滿)에게 땅도, 나라 이름도, 주민(住民)도, 송두리째 빼앗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이 땅에 마한왕실을 세워가지고 또 이백여 년을 왕 노릇 하다가, 왕검님의 후손, 해모수님의 손 주님인 온조왕에게 아주 망하여 백제 땅의 한 망민으로 남았다.

그 기씨를 조선 땅에서 내쫓은 위만(衛滿)은 단 백 년도 왕 노릇(조선 왕)을 못하고, 지나 본국병에게 망하였다. 지나 정부는 조선(위씨의)을 멸하고, 그 땅에 네 고을 두었다.

― 이리하여, 「조선」은 아주 없어졌다.


조선(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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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조선」이란 것은, 지역의 이름이요 나라의 이름이요 겸하여 종족의 이름이요 또한 시대의 이름이다.

단군왕검님이 동방 종족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조선이라 하였으니, 그때는 「조선」이라는 것은 나라의 이름이었고 「조선인」이라 하는 것은 단군 백성의 칭호였고, 또 「조선」이라 하는 것은 단군 건국부터의 「시대」 이름을 겸한다. 그리고 또한 지역의 칭호까지도 겸하여서, 북방 불함(不咸) 산기슭에서 발상하여 조선인 조선종족이 발전함에 따라서 「조선 땅」도 넓어져서, 온 동방이 「조선」이 되었다.

그 뒤, 기씨가 이 땅으로 들어오매 주(周)나라에서는 이 땅을 조선이라 하여 기씨를 조선 땅의 왕으로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때부터, 「기씨 조선」이라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본시는 조선은 종족의 칭호인 동시에 나라의 이름이요, 그 종족이 살고 있는 지역의 이름이라, 이것은 단군에게 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우주를 지나인의 것으로 인정하는 지나 천자는, 기씨가 조선 「땅」에 오자 기씨를 조선 「땅」의 왕으로 봉하였다. 이 「때」부터, 「조선」은 정체가 모호하게 교착(交錯)되어 들어갔다.

기씨가 단군조선 땅에서 동진(東進)하고 남하(南下)하는데 따라서 기씨의 지역이 차차 넓어 가고, 기씨의 지역은 조선왕의 지역이라 기씨 조선이 차차 넓어 갔다.

조선의 땅이 주인이요 나라의 주인이요 종족의 주인이던 단군 대대의 임금은 조선이란 칭호의 소유 행사권을 아득바득 다투지 않고, 기씨에게 침식되는 대로 차차 압축되며 분해(分解)작용까지 일어서, 밀리고 줄어 들어갔다. 「조선」이란 칭호도 아주 잃고 말았다. 「조선」이라는 칭호는 기씨에게 아주 넘어가고 말았다.

지나인이며 지나인의 한 사람인 기씨가 「조선왕」이매 기씨의 나라가 「 조선국」이며 기씨의 세력범위 안에 있는 땅이「조선 지역」(그것은 계속적으로 동으로 남으로 확대되었다)이며, 그 지역 안에 사는 주민을 「 조선인」이라 하였다.「조선족」이라 하는 것은 기씨의 아래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동방 지역, 기씨의 세력 이외의 지대(본시 단군의 지역에서 기씨에게 앗긴 지역을 제한)는「동이(東夷)」의 땅이라 하고 그곳의 주민을「동이」라 하였다.

본시의 조선족은 이리하여 기씨의 세력 아래 있는 데 사는 자는「조선 백성」이 되고, 그 밖은 「동이」가 되었다.

그런지라, 기씨의 시절에는「조선국」과「조선족」은 관계가 없었다. 조선족은 일부는「동이」가 되고 일부는「조선인」이 되었다. 단군의 옛터는 일부는 기씨 조선이 되었고, 나머지는「동이」가 되었다. 「동이」는 또 부여(扶餘)를 비롯하여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였다.

「조선」이란 칭호는 이「종족」을 떠난 것이었다.

백성의 대부분이 조선족으로 이루어진 조선국(기씨의)은 그래도 순조롭게 발전되고 성장되었다. 나라의 수뇌부는 그 뒤 위씨로 바꾸이고 또 그 뒤 지나에 직속된 고을로 되었지만, 수뇌와 관계없이 백성(토민)은 순조롭게 길러나고 있었다. 지나 본국은 계속되는 혁명과 난리에 늘 안돈되지 못하였지만 조선 지역은 그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이 독립된 지대라, 오직 문화적으로 향상의 일로만을 더듬었다. 더욱이 지나 본토의 소란을 피하여 육 속 부절로 지나의 망명인들이 동방으로 피난해 오는지라, 조선(기씨의) 지역에도 꽤 많이 넘어왔고, 그들이 올 때 지니고 오는 문화는 이곳 토민에게 전수되고 토민에 의지하여, 이곳 민족성에 따르는 문화로 개량되고 변조되어, 낙랑 때에는 최고도로 발달되어 만날 난리에 시달리는 지나 본토에 비길 수 없이 위대하고 지고한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이 발달된 문화는 또한 지경을 접하고 있는 고구려로 이출되고, 고구려에 서는 또한 고구려식으로 발달되고― 이리하여 동방문화는 지나 본토보다 훨씬 앞선 빛나는 것이 되었다.

기씨 조선은 위씨에게 망하고 위씨조선은 한(漢) 본국에 망하여, 그 땅(조선)은, 지나의 네 고을[四郡]이 되었지만, 거기 거주하는「조선족」은 기씨건 위씨건 지나 본국이건 관계없이 여전히 이 땅의 주인이었다.

그새 천여년간 지나인에게 교란받아, 중부 지대에서 허리를 끊겨서, 나라 이름을 빼앗기고 국토의 대부분과 백성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허리 끊긴, 그 남쪽 덩어리― 남부는, 역시 지나인「마한」의 주권 또는 역시 지나인 「 진한」의 주권, 잡종인「변한」의 주권 아래 들고, 발상(發祥) 땅인 북방은 백 조각에 부스러져서, 예, 맥, 옥저(濊,貊,沃沮) 등 역시 지나의 세력이 꽤 침투한 자와, 그 밖, 단군 백성의 수백 꼬마 나라로 부스러져 있었고, 다만 부여(扶餘) 홀로이 종주국 비슷한 형태로 겨우 단군 후손 잔명을 유지하고 있는 참담한 형편이었다.

조그만 바람만 불어도 꺼질 듯한 위태로운 형태였다.

그러나「언어」가 생명을 갖고 있는 동안은 그「언어」의 종족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언어를 쫓아다니는「습관」이 있고 「신앙」이 있고 「종교」가 있어서, 언제든 다시 살아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민족의식」에 부채질해지는 주기(週期)만 만나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부여 땅에서 고주몽이 일어서 고구려 나라를 세우고, 그 아들로 하여금 천리의 적지(敵地)를 넘어 남방에 내려가서 백제를 세우게 하였다. 나라 이름과 나라 땅을 잃고, 그 종족만「조선 백성」과「동이」로 되어 천여 년 지내 오던 이 종족에게도 민족의식의 선풍은 불어 든 것이다.

동남방에서 이루어진 서라벌 나라, 이도 역시 이 주기를 만나서 튀어져 나온 한 개 결정이었다.


서라벌(徐羅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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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나라이 선 지 삼십팔 년 뒤, 즉 혁거세 거슬감(거슬감 혹은 거서간이란 것은 임금을 말함이다) 제삼십팔 년, 아직 백제 나라이 생기기 이년 전이었다. 그때 서라벌에는 호공(瓠公)이란 사람이 재상으로 있었다. 이 호공이란 본시 왜인으로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 서라벌에 와서 투신하여, 그 위인이 슬기로우므로 서라벌에서는 재상으로 등용했던 것이다.

서라벌에서는 그 호공을 시켜서, 마한에 평문하게 하였다.

마한은 지나인에게 허리 끊긴 남방 지대였다. 기씨가 위만에서 쫓겨와서 이곳 토민 임금을 내쫓고 스스로 임금이 된 이래, 남방 전부를 그의 세력 범위 아래 넣고 있다가, 진한과 변한에 땅을 베어 주어 나라를 이룩하게 한만치, 남방의 종국(宗國)으로 스스로도 자처했고 자처할 만한 근거도 있었다.

그 마한에 서라벌의 재상이 문안차로 온 것이다. 서라벌은 마한에게 땅을 빌어 나라를 세운 진한의 한구석에 생긴 나라라, 마한에게는 손주뻘 나라였다. 서라벌의 재상을 일견하는 것만도 서라벌에는 광영인 일이었다. 그 서라벌의 재상 호공을 마한왕은 인견한 것이었다.

인사를 사괴인 뒤에, 마한왕은 호공을 힐책하였다─.

"진한과 변한은 본시 우리의 속국으로, 늘 직공(職貢)과 사대(事大)의 예에 결함이 없었고, 또 그리해야 할 것인데, 너희 서라벌은 그 진한의 한 귀퉁이의 조그만 나라로서 어쩌면 이다지도 무례하냐?"

"무슨 말씀이오니까?"

"아무리 예절을 모르는 오랑캐 나라기로서니, 공(貢)도 모르고 문안도 모르느냐?"

사실 거룩한 이를 임금으로 모셨노라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서라벌로서는, 마한이건 진한이건 모두 대등의 나라로 여기었지 대국으로 생각지 않았다.

"우리 서라벌은 거룩하긴 이를 모시어 수인사(修人事) 화천지(和天地), 나라의 창고가 가득하고 백성은 예를 알아, 변한, 낙랑, 왜인이 경외하지 않는 자 없습니다. 우리 나랏님께서 하신(下臣)을 보내시와 대왕님께 인사를 닦는 것은 도리어 예(禮)에 과한 일로 생각하옵니다. 지금 대왕님께서 노하시어 하신(下臣)을 힐책 위협하심은 웬일이신지 하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상국이로라 하는 존대심을 가지고 있는 마한이었다. 마한왕은 이름도 없는 조금만 나라「서라벌」의 재상인 호공의 이 괘씸하고 무례한 대답에 퍽 노하였다.

"어째? 무엇이 어째? 이 괘씸한 놈 같으니. 누구 저놈 잡아 결박해라."

"마한의 밧줄이 하신을 결박할 만치 튼튼한 게 없을 줄 압니다."

침착하게 이 말을 남기고, 호공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한왕(계왕(稽王)이었다) 이 몸을 떨며 누구 저놈을 붙들라고 야단하는 것을 곁눈으로 보면서 천천히 나섰다. 왕은 저놈을 붙들라고 야단하다가 아무도 응하는 자가 없으므로, (호공이 올 때에 튼튼한 무장 몇을 데리고 와서, 그 서라벌 무장이 방 밖에 있으므로 마한의 신하들은 그것이 겁나서 도리어 자기네의 임금을 만류하였다) 당신이 몸소 뛰쳐나오려다가 신하들에게 붙들리었다. 그리고 호공은 유유히 마한의 대궐을 나서서, 자기네 무장들을 데리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마한의 계왕이 승하하였다. 서라벌에서는 이 기회에 작년에 받은 수치를 갚으려 마한을 정벌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혁거세 거슬감이 이를 말렸다.

"남의 불행한 때에 그를 시달리는 것은 못쓸 일이라."

하여, 도리어 정중하게 조위사(吊慰使)를 보냈다.

진한의 한 귀퉁이에 일어난 서라벌이지만, 서라벌은 차차 동남방에 크게 자라면서, 진한의 그림자가 도리어 줄어 갔다. 종국 마한도 무슨 국교상의 교섭이 있으면, 진한보다 서라벌에 하였다.

혁거세 거슬감 사십년에 마한 땅에 백제가 생겼는데, 이때는 진한의 그림자는 서라벌의 뒤에 감추여서 아주 미약하게 되고, 서라벌이 커다랗게 동남방에 빛나기 시작할 때였다. 저절로 돌아 붙는 지역, 혹은 정벌하여 아래 집어넣은 지역─ 이리하여 서라벌의 방역은 나날이 늘었다. 멀리 남옥저(南沃沮)에서까지 혁거세 거슬감이 성덕을 사모하여, 좋은 말 스무 마리를 갖다가 바쳤다.

혁거세 거슬감은 육십일년을 재위하고 세상을 버렸다. 그 아드님 남해(南解) 차차웅(次次雄─차차웅이란 것도 임금이란 말이다)이 그 뒤를 이었다.

혁거세 거슬감 육십일 년간의 왕 생애─ 단군조선의 유민이요, 기씨 조선의 팔이 채 및지 못한 허리 잘린 남쪽 덩어리에 생긴 진한, 진한의 여섯 마을의 어른들을 모이어 의논하여 만든 서라벌 나라의 첫 번 임금으로 올라서 재위 육십일 년간, 고구려 시조 동명왕같이 민족(종족) 의식을 가지고 건국 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연히 끌리는 피의 인력으로 흰옷 입은 백성을 부르고 모아서 나라를 키우기 육십일 년, 주변에는 아직 지나인이며 왜인이며 심지어 식인종(기록에 말하기를, 몸이 구 척이요 시꺼먼 사람의 나라이 있어서, 사람도 잡아먹고 하므로, 그들과의 경계(境界)에는 책을 튼튼히 쳐서, 침입을 막았다고 하니 아마 남방 식인종이 표류해 와서 한 부락을 이룩하고 있는 모양이다)까지 있어서, 어지럽고 어수선한 가운데서, 그래도 착착 견실한 걸음을 내짚어서 장래 일천 년 사직의 기초는 확호하게 닦아 놓았다.

그때는 고구려는 시조 동명 고주몽왕은 벌써 승하하고, 제이세 유리왕이 선지도 삼십여 년이요, 백제 온조왕 이십일년이요, 지나 땅에는 한나라 이백년 사직도 바야흐로 쓰러지려 왕망(王莽)의 작희 한창인 시절이요, 마한은 마지막 임금인 학(學)이 넘어지는 사직을 억지로 버티고 있는 때였으며, 조선의 지나인 영토 낙랑은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에서의 협위 아래 전전긍긍히 지내는 시절이요, 단군조선이 부스러져서 생긴 북부 지대의 무수한 부스러기 나라들은 언제 고구려에게 복멸당할지 속수무책 그 날만을 기다리는─ 이 동방에 바야흐로 대변동이 생기려고 진통에 앓는 시절이었다.

이 무대에 장차 등장할 한 개의 작은 배우가 또 있다. 즉 변환의 한 귀퉁이에서 생겨나는 가락(駕洛)이다. 이 가락은 왜종도 꽤 많이 섞여 있어서, 임나(任那) 부락은 거의 왜종으로 이루어진 나라─

그 국세(國勢)도 미약하고 지역도 좁아서 이 무대에서 한 몫 구실은 못 하였지만, 그 나라 임금 김수로(金首露) 왕으로 하여 오늘날의 김해(金海) 김씨가 나왔고, 신라 나라를 「대신라(大新羅)」로 쌓아 올린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또한 가락 계통의 사람이라, 이로써 한몫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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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단군의 나라 단군의 민족이 백 조각으로 한때 부스러졌다가, 지나의 전한(前漢) 말엽경에 서로 전후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로 되면서 동방 무대에 다시 나타났다.

같은 시대에 세 나라이 접경하여 살아 가자니 아무리 근본은 한겨레라 할지라도, 다툼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고 싸움이 생겨서 피투성이가 되면서 싸웠다.

그 가운데 고구려는 백제며 신라를 상대로 하는 집안싸움도 하면서, 일방으로는 동방 종족에게 가하여지는 지나의 총공격에 동방 민족을 대표하여 감연히 싸워서 굽히지 않았다.

일천 년간 이 세 나라 집안싸움과, 고구려 대 지나종(수나라 당나라 등)의 민족 싸움의 자취를 우리는 차례로 뒤적이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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翩翩黄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이것이 이 겨레의 글자, 기록에 남아 있는 조선족의 최초의 노래다.

고구려 둘째 임금(주몽왕의 아드님)인 유리왕은 첫 번 맞았던 왕후를 잃고 계후(繼后)로서 치희(雉姬)와 화희(禾姬)의 두 사람을 맞았다. 화희는 이 졸본 서울 근방인 골령(鶻嶺) 기슭 냉곡(冷谷)에 경치 좋은 곳에 터 잡아 이궁(離宮)을 짓고 두 계후를 그곳에 두었다.

두 계후는 서로 임금의 총애를 많이 사고자 경쟁하였다. 시기 질투는 죽음으로 벌하는 제도화 풍습과 전통 아래서 길러난 화희는, 오직 임금의 총애를 더 많이 살 수단으로서 재간 다하여 임금께 고이 보이려 하였다.

치희는 화희에게 대한 질투를 노골적으로 나타내어, 임금께 고이 보이려는 수단을 쓰기보다 임금께 화희를 깎기에 주력하였다.

임금은 당신께 고이 보이려고 온갖 수단 다 쓰는 화희도 사랑하였다. 동시에 치희의 강짜하는 꼴도 이쁘게─ 더욱이 이국(異國) 여인이라는 점에 대한 호기심도 겸하여 치희도 화희에게 못하지는 않게 사랑하였다.

왕이 기산(箕山)에 사냥 나가서 이레 동안을 거기 묵었었다. 그동안에 두 계비의 사이에는 큰 충돌이 생겼다.

고구려 아낙이라는 종족적 자랑을 가지고 있고, 한(漢)을 적시하고 얕보고 수모하는 화희는 종내 민족적으로서의 욕을 하였다─.

"너는 한(漢)나라 계집이 (한나라를 수모하여 하는 말이다) 고구려 물을 마시는 것만도 광영이거늘 어디다 감히 내게 맞서느냐. 그런 버르쟁이는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지만 고구려에서는 못하느니라. 오랑캐 계집 같으니!"

근본까지 들추어 욕하였다. 고구려 있어서는, 한인(漢人)이라 하면 포로거나 또는 제 나라를 망명하여 고구려에 투신한 사람들이라, 「종(奴)」이라는 욕이나 일반이었다. 치희는 분하고 부끄러워서 숨이 딱딱 막혔다. 같은 지아버님을 섬기는지라, 자기거나 화희거나 일반으로 지아버님께는 다만 안해이요 여인이다. 그렇거늘 자기는 「한인」인 탓으로 이 수모를 받는가? 받지 않을 수 없는가? 시기 강짜는 여인이 가질 수 있는 특권쯤으로 알고 있는, 지나인인 치희는, 그 억울하고 분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여인의 강짜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도덕 표준이라, 이 분한 심정을 하소연할 곳도 없고, 자기가 한인인 이상은 언제까지나 면치 못할 수모라, 치희는 흥분과 분기를 참을 수 없어서, 이 임금의 아래를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임금의 안해라는 지위가 아무리 영화스럽다 할지라도, 한인인 수모는 그냥 부어져서, 자기에게 시종드는 시녀(고구려 계통의)들까지도 「임금의 안해」이니 시종드는 것이지, 한인이라는 모멸심은 가지고 시종든다.

사냥에서 돌아온 임금은 치희가 나갔다는 말을 듣고, 치희에게 대한 애정은 그냥 갖고 있는 터이라 치희가 그리워서 말을 달려서 치희를 쫓아갔다.

치희를 만나서 같이 다시 돌아가기를 청했지만, 치희는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아무리「임금의 안해」라는 지위가 영화스러울지라도, 시녀들에게까지 수모를 받으면서 살아 가야 하니, 도리어 민간에 나가서 한 백성으로 지내자면 그런 수모는 받지 않을 것이라, 수모가 역하여서 다시 「임금의 안해」 노릇을 안 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었다.

치희를 달래다 못해서, 성공을 못한 왕은 하릴없이 치희를 단념키로 하였다.

단념키로 마음 먹었지만 연련한 정애는 삭일 수 없어서, 마음에서 저절로 우러나는 감회를 글로써 나타내는 것이 여상의 노래다.

유리왕 즉위 삼년 때의 일이다.

이러한 가정적의 비극은 겪으면서도, 아버님에게서 물려받은 왕업은 순조로이 진척되어 나아갔다.

제십일 년, 선비(鮮卑)에게 대한 철퇴를 내렸다. 선비는 나라이 험한 데 있고, 유목(遊牧) 민족이라 백성이 모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지나 나라도 이를 큰 국우(國憂)로 여기느니만치 두통거리의 나라다. 그 나라이 험한 데 자리잡고 백성이 모두 무(武)에 능하기 때문에, 좀체 치기 힘들었다.

다른 나라이 능히 치러 올 생각도 못 내는지라, 선비는 안전한 살림을 하면서 자기네들의 넘치는 힘을 가지고, 연해 남의 나라를 침노한다. 말을 달려서 와서 침노하다가 불리하게 되면 말타고 도망하여, 제 나라 안전한 데 들어가 버리고 만다.

고구려가 서쪽으로 벋어 선비와 지경을 접하게 되면서는 늘 그들의 시달림을 받았다.

고구려 역시 팽창한 힘, 주먹 처치할 곳이 없는 형편이었지만, 선비는 전광석화적으로 와서 건드리고는 곧 다시 도망쳐 제 나라 깊은 데 들어가 숨어 버리는지라 성가시고 귀찮았다.

십일년, 유리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이 걱정을 하였다.

장군 부분노(扶芬奴)가 임금의 걱정에 대하여 한 무릎 나앉으며 아뢰었다.

부분노는 아버님 주몽왕 때부터의 명장으로 주몽왕의 아래서 행인(荇人)국을 복멸할 것을 첫 공로로 하여, 고구려 발전의 무수한 싸움에 일찍이 실패해 본 일이 없는, 지혜와 힘이 아우른 국보적 명장이었다. 오십이 넘은─ 초로(初老)에 든 나이였지만, 그 기개는 하늘을 삼킬 듯 왕성하고 젊은이를 넉넉히 능가하였다.

"나랏님, 선비 따위를 무얼 근심하십니까. 생식(生食)하는 오랑캐를."

"지금 우리나라에 선비 밖에야 근심될 만한 나라가 어디 있소?"

"하기는, 나라이 험하고 놈들이 싸움 잘하니 귀찮기는 합지만, 용(勇)은 있어도 지(智)는 없는 놈들이 아닙니까. 힘으로 싸우자면 좀 귀찮지만, 방략으로 싸우면 보잘것없을 줄 아옵니다."

"어떤 방략을?"

"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했으면 될 줄 아옵니다."

부분노의 아뢴 꾀는 이러하였다.

미리 사람을 놓아 선비에 들어가게 하여, 이런 공설을 퍼뜨린다. 즉 고구려는 싸움에 뒷심이 없는 나라로서, 처음 손 붙이기는 용감하고 활발하나 그 첫 손만 꺾어 놓으면 뒤는 아주 보잘것없다. 지금껏 고구려가 상대한 나라는 고구려의 첫 손질에 부러졌기 때문에 고구려가 강한 듯이 이름났지만, 선비 같은 강한 나라이 고구려의 첫 손질을 딱 막아 놓으면 뒤는 아주 맹랑한 나라다. 이런 소문을 선비에 퍼뜨린다.

그런 뒤에 부분노 자기는 일지병을 이끌고 선비 나라를 건드린다. 건드려서 한참 싸운다. 그러다가는 패하는 체 도망친다. 그렇게 되면 선비는 지금껏 싸우느라고 동원했던 정예를 이끌고 부분노를 따라올 것이다. 그 따라오는 선비를 유인해 서쪽으로 끌고 가고.

다른 장수(합부 장군이든 누구든)를 시켜서, 또 선비를 건드리어 한참 싸우다가 도망쳐서 선비의 또 한 개의 정예 부대를 동쪽으로 유인해 가고.

북쪽도 그렇게 하고.

그 유인해 가는 도달처에는 큰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유인해 온 선비를 지나 보낸 뒤에 배후에서 돌격해서, 유인하던 (도망하던) 군사까지 돌아서서, 선비를 가운데 넣고 앞뒤에서 협격해서, 그물 속의 고기인 선비를 잔멸하고.

임금은 고구려의 정예를 친솔하고,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선비가 동쪽과 서쪽과 북쪽으로 유출된 빈 성 (설사 비지까지는 않았을지라도, 크게 약화(弱化)된) 안에 돌입하면 그다지 어렵지 않게 성을 빼앗을 것이다.

유출하고 도망하고 복병하기 위해서는, 선비의 근방 지리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선비에게 「고구려가 뒷심이 없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기간을 이용하여 선비의 동서남북의 지리를 잘 연구해야 할 것이다.

―부분노 장군의 이 방략은 채용되었다. 선비에 소문 퍼뜨릴 부대, 지리 연구할 부대는 왕명을 받아 고구려를 떠나서 선비에 잠입하였다.

산간 지대의 나라인 선비에서 싸울 만한 병졸(고구려 자체가 산간에 있느니만치, 고구려병은 모두 산악전에 능하였다)을 다시 맹훈련을 거듭하였다.

준비와 예비가 다 끝나고 날짜를 미리 잘 짜 가지고, 선비 공략의 막은 드디어 열리었다. 지나인도 감히 건드리기를 꺼리는 선비에게 대하여 신흥 고구려는 손을 붙이었다.

부분노 장군의 작전 병략은 용히 들어맞아서, 부분노 장군 인솔의 유출대가 거짓 도망칠 적에 선비는 국력의 거진 전부를 들어 부분노 부대를 추격하였다. 그래서 합부 장군의 제이대가 공격하다가 거짓 패주할 때는, 벌써 선비는 아주 미약한 군졸로 추격하였고, 고구려 제삼대가 가서 건드릴 때는, 이를 맞아 싸울 군사도 없는 듯 늙은이며 여인들까지 모두 창과 칼과 내지 막대까지 가지고 나와 싸웠다.

이런 형편이니 유출하려야 유출할 군대가 없었다. 그냥 성내로 돌입을 하자니 이 돌입의 영예는 임금께 돌리어야 될 것이라, 제삼대가 유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임금 친솔 부대에 그 뜻으로 알리어서, 유리왕은 선비의 추장(酋長)과 몇몇 막료와 늙은이 여인들만이 남아 있는 선비성에 입성하여 이를 점령하고 그 추장을 사로잡았다.

고구려군에게 유출당한 선비병은, 도달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군에게 포위당하여, 절반은 죽고 절반은 사로잡혀서 잔멸하였다.

고구려를 두고두고 귀찮게 굴던 선비 부락은 이리하여 복멸되고 선비는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나라의 큰 암종을 제거하여 속국으로 삼고 개선하여서, 임금은 이 공로를 크다 보아서 공로자 부분노 장군에게, 상으로 식읍으로 선비를 하사하려 하였다.

여기 대하여 부분노 장군은 굳이 사양하였다.

"소신, 선대왕 주몽님께 발탁을 받자와 오늘날이 소신의 부귀는 모두 나랏님 덕분이로소이다. 오늘날 선비를 이긴 것도 무비 나라의 덕이옵지, 소신이야 저 한 병졸이나 일반으로, 나랏님 아래서 일할 뿐이옵지, 소신의 공이 무엇이 있사오니까. 소신께 무슨 상을 주시오면 저 병졸도 공이 소신만 못 하지 않사오니, 소신께 주시고 병졸에게는 없사오면 공평을 잃는 것이옵니다. 모두가 나라의 덕이옵고 나랏님의 덕이오니, 소신께는 아예 특별한 상이 없으시기를 바라옵니다."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공을 크다 보아서, 공에 대한 상이 없을 수 없어서, 유리왕은 다른 원로 대신들과 의논한 끝에 황금 삼십 근과 좋은 말 열 마리를 상으로 하사하였다.

이렇듯 선비까지 꺾어서, 고구려의 이름은 더욱 빛나게 되었다.

×

왕의 십사년에, 동방 나라의 종국(宗國)으로 자타가 허하는 부여 나라에서 사신이 고구려로 왔다.

부여에는 대소(帶素)왕이 재위하고 있었다. 그 대소왕과 고구려는 서로 이상한 관계가 아직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고구려는 선왕인 주몽왕이 부여에 의탁하고 있었고, 대소왕은 그때 부여의 태자로서 주몽왕의 주인격이었다.

그 위에, 주몽왕(당시에는 명색 없는 소년)을 꺼리고 미워하여 주몽왕은 태자를 피해 도망하여 고구려 나라를 이룩한 것이다.

그러매 원수라면 원수인 동시에 주인이라면 또 주인이었다.

태자 대소가 왕으로 등극할 때는, 주몽왕의 아드님의 현 유리왕은 부여의 한 구박받는 소년에 지나지 못하였다.

지금 흥성하는 고구려의 임금으로 앉아서 대소왕의 대등의 친선사를 맞음에 유리왕으로서는 여러 가지 감회가 자연 마음에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소왕의 보낸 친천사는 다만 친선을 목적한 것만이 아니었다. 대소왕의 요구 조건을 전할 임무를 겸해 띤 것이었다.

대소왕의 요구─ 희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부여가 친선을 서로 약속하고 보장하기 위해서 볼미[人質]를 교환하자는 것이었다. 대소왕이 왕자를 고구려에 볼미할 터이니, 고구려에서도 부여로 왕자를 볼미 보내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유리왕은 이것을 꺼리었다. 당신이 부여에 있을 때는 고구려 왕(주몽왕)의 맏아드님이라 하나, 공식─정식으로 부여에 그 신분으로 있은 배 아니니, 혹은 근본부터 성질이 다를는지는 모르나, 당신이 부여에서 겪은 천대가 회상되어 사랑하는 아드님을 부여에 보내기 싫었다. 우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부여 왕자를 바꾼다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보내기 싫었다. 더욱이 유리왕은 장차 좋은 기회 생기면 부여를 부수려는 계획이 있느니만치 왕자를 그곳에 볼 미로 주었다가는, 좋은 기회 올지라도 그 일을 결행할 수 없겠는지라, 이 점도 꺼리었다. 유리왕의 태자인 도절(盜竊)도 부여에 볼미 가기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유리왕은 좋은 말로 부여의 이번의 요구를 사절하였다.

부여 대소왕은 이것을 혐의하여 그해 동짓달에 오만의 대병을 친솔하고 고구려에 침범해 왔다.

외국에게 공격을 받은 것은 고구려 건국 이래의 처음의 일이었다. 더욱이 오만의 대병이라 하는 것은 동방 지역에는 전례가 적은 놀라운 많은 군사였다.

고구려의 강한 것을 아는지라, 이만저만한 병력쯤은 보내어야 쓸데없을 것이고, 지금 좋은 핑계 생긴 김에 일거에 고구려를 복멸하여, 국가의 큰 근심을 근본적으로 뽑아 버리고자, 대소왕은 움직일 수 있는 온 국력을 들어서 이번의 거조에 나온 모양이었다.

이 대군을 맞아 고구려 또한 이 기회에 부여와의 자웅을 결하려고, 만단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아직 고구려 부여의 자웅 결하려는 것을 때가 아니라 보았던지, 무서운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사람의 키가 거진 빠질 듯 천하는 눈 아래 깊이 잠겼다.

이 깊은 눈 속에 파묻히어서, 부여의 군사에는 눈에 묻혀 죽은 사람이 많이 생겼다. 싸움은 도저히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싸우지 않고 적잖은 군사를 눈에 묻어 죽이고, 대소왕은 그만 무위하게 군사를 부여로 돌이켰다.

장차 한 번 반드시 자웅을 결쿠어, 나 넘어지든 너를 꺾든 좌우 양단간에 결말을 지어야 할 고구려와 부여는, 하늘이 허락지 않아서 뽑았던 칼을 도로 그냥 칼집에 꽂았다.

그러나 이번의 사변에 있어서, 고구려는 한 커다란 불안을 느꼈다. 즉 부여가 볼미를 교환하고자 왔던 것이 이른 봄이었다. 그것을 거절당하고 가서, 동짓달에 오만 대병을 동원하여 가지고 왔던 것이었다. 열 달 미만 동안에 오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여의 실력이 얕보지 못할 것을 알았다. 마주쳐서 싸워 보지 못했으니, 얼마나한 강병인지는 모르지만, 오만의 군사라 하는 것은 결코 적은 군사가 아니다. 고구려로서는, 오만쯤을 상대로 싸울 자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오만을 맞아 싸우려면 고구려로서는 지금껏 상대한 적보다는 좀 힘이 들어야 할 것이다. 그 오만이 만약 고구려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달려오면, 고구려로서도 낭패를 않을 수 없다. 장차 이 동방에 있는 적(敵)으로는 낙랑과 부여를 가장 크게 잡고 있기는 하지만, 좀 더 정신을 차려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서울의 위치도 다른데 적당한 곳이 있으면 그것도 유의해 두어야 하겠다. 이 졸본 서울은 그때 임시로 잡았던 곳으로, 견고한 요새로는 적당하나, 터전이 좁고, 하도 산간이라, 만약 적에게 오래 포위를 받는 일이 있다면 안에서 식량을 생산할 수 없는지라, 적에게 문을 열지 않을 수 없다.

국가 만년지계를 위해서는, 터전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오곡을 생산할 밭도 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신하들에게 분부하여 새 서울 터도 물색해 보도록 하였다.

바쁜 일이 아니라, 그저 그만치 해두었었는데 이십일년에「여기면 어떻겠습니까」하는 후보지가 생겼다.

제상 쓰려고 잡아 두었던 멧도야지가 달아났다. 유리왕은 장생(掌牲─제관) 설지(薛支)에게 쫓겨가서 도로 잡아 오기를 명하였다. 도야지는 기운 다 하여 도망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그냥 도망쳤다.

고구려 젊은이의 기운으로도 따르기 힘들도록 그냥 도망쳤다. 도야지는 또한 이처럼 날래게 기운 좋게 그냥 쫓아오는 설지의 기운에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설지로서는 책임도 책임이려니와 그 위에 제 생명까지 관계되는 일이다. 이년전에도 제사 도야지가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왕의 분부로 제관 두 사람이 쫓아가서 장옥(長屋)까지 가서 겨우 잡았다. 두 제관은 겨우 그 도야지를 잡아서는 다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도야지 다리 힘줄을 칼로 끊었다. 그 말을 듣고 왕은 제사 짐승을 병신 만들단 웬일이냐고 두 제관을 땅에 묻어 죽인 일이 있다.

제사 도야지를 잃어도 가벼운 벌쯤으로 면치 못할 것이다. 장생 설지는 죽을 기운 다 내서 도야지를 쫓아가서 국내 위나암(國內 尉那巖)까지 가서 간신히 그 도야지를 붙들었다. 도야지는 잡아서 든든히 결박지어 어떤 민가에 맡겨서, 나라에 찾아갈 때까지 잘 간수하고 기르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졸본 서울로 발을 돌이켰다.

돌이키면서 이 국내(國內)땅 지형을 보았다. 산 험하고, 물 깊고, 들에는 사슴이며 노루가 많이 놀고, 강에서는 어별(魚鼈)이 많이 나고, 벌은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겠고― 늘 유의하는 서울 터로 쉽잖은 좋은 곳이었다.

임금께 돌아와서 그대로 복주하였다.

"만약 이도(移都)하시려면 그 땅이야말로 민리(民利) 무궁하옵고 병혁(兵革)이 근심 없는 가장 적당한 땅이라고 소신은 보았습니다."

그 구월에 왕은 위나암(尉那巖)에 사냥 가서 그 지세를 보고 서울 터로 내정하였다.

도로 대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사물택(沙勿澤)에서 왕은, 웬 한 장부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만났다.

보기에 하도 늠름하게 생겨서 인물이 탐났다. 왕은 가까지 가며 (황급히 내려서 절하는) 그 장부에게 말을 걸었다─.

"무얼 하는 사람이며 지금 무얼 하는고?"

"신하(臣下)로 써 주십시오."

그 사람은 다만 간단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왜 그런지 사람이 탐나서, 왕은 곧 허락하였다. 성(姓)을 위(位)씨라 이름은 사물(沙勿)이라 하사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데리고 돌아와서 벼슬을 주었다.

이듬해에, 국내 위나암(지금의 만주 즙안현)에 성과 궁을 크게 짓고 그리로 이도(移都)를 하였다. 이리하여 졸본(卒本)사십 년 뒤에 국내로 서울을 옮겼다.

×

유리왕의 맏아드님 해명(海鳴) 왕자는, 할아버님 주몽왕을 닮아서, 그 기상이며 역량이 비범한 소년이었다.

아버님이 국내(國內)땅에 새 대궐을 짓고 이사간 뒤에도, 해명 왕자는 옛 서울 졸본에 유수하고 있었다. 합부 장군(벼슬이 대보(大輔)였다)이 구도(舊都)에 머물러 해명 왕자를 모시고 있었다.

할아버님이 영웅적 기상과 성품을 물려받아, 장차 훌륭한 왕업을 이룩할 이라고 모두들 기대가 큰 왕자였다.

왕자는 합부 대보를 상대로 늘 고금동서의 영웅 열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물으며, 소년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 왕자의 할아버님 동명성제가 부여에 한 무명 소년으로 있을 때부터 동명의 아래 들어서, 이래 고구려 창업에서 발전으로 대성(大成)의 오늘날까지, 처음은 동명왕을 협좌하고 그 뒤는 유리왕을 협좌하여 오늘에 이른 합부 대보는, 인젠 벌써 육십 노인이었지만, 아직도 그 패기며 원기는 젊은이를 능가하였다. 육십 년의 인생 경험은 소년 왕자의 지식 벗[友] 노릇 하기에 맞았다.

이날도 왕자는 할아버님과 아버님의 두 영걸이 좌어(坐御)하시던 용상에 걸터앉아, 합부 대보를 상대로 세상 잡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해명님. 나랏님(유리왕)께오서는 근자 너무도 사냥에 짐착하시는 듯 하온데, 나랏 주인 되시는 몸으로 좀 너무 사냥에 치중하시는 듯해서 이 늙은이는 근심스럽습니다."

"글쎄요, 국태민안─ 사냥 밖에는 하실 일이 없으시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부여 있삽고 낙랑 있삽고, 왜 하실 일이 없겠습니까? 하실 일, 하셔야 할 일이 많고 많습니다."

"그러기에─ 부여 있고, 낙랑 있기에, 사냥이나 하고 모른 체 하셔야지 않을까요?"

만약 이것이 지모(智謀) 다 자란 어른의 말이라면, 그렇기에 남의 눈 속이기 위하여 사냥이나 해야지 않느냐는 뜻으로 들을 것이지만, 아직 열다섯 소년이라 합부 대보는 무에라고 응해야 할지 잠깐을 주저하였다.

"지금 서울을 새로 옮겨, 백성의 마음이 불안한 때에, 지금도 또 질산(質山)에 사냥 가셨지요. 벌써 나흘, 아직 안 오시니 이 일이 되겠어요? 이번 사냥에서 돌아오시면 이 늙은이가 한번 가서 간(諫)해 보겠습니다."

"해 보시오마는 듣지는 않으실 것이고, 내 생각으로도 지금 사냥밖에는 하실 일 없을 것 같소이다."

임금은 닷새가 지나서야 사냥에서 돌아왔다. 합부는 행장을 차리고 졸본을 떠나서 새 서울 국내로 갔다.

임금께 뵙고 사냥이 과하다는 뜻으로 임금께 아뢰었다. 그러매 임금은,

"지금 사냥 밖에야 무에 할 일이 있소?"

꼭 해명 왕자와 같은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지금 새 서울의 민심도 안돈되지 않은 이때, 나랏님께서 만날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오시면 백성이 마음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사냥도 안 하면 내 마음이 불안한 걸 또 어쩌겠소?"

"나랏님!"

선왕 주몽님은 이러하지 않았다. 오이 마리 합부 등 원로 대신이 무슨 충언을 하면 청납하거나, 설사 청납치 않을지라도 정중하게 듣기는 하였다. 그런데 유리왕의 태도는 어디인지 조롱하는 듯한 기색까지 있었다.

"이러시다가는 나라를 잃으시리다."

"대보는 말을 삼가시오. 무슨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시오?"

"나라를 위하고 나랏님을 위한 말씀이옵니다. 소신은 나랏님보다 일찍부터 고구려 세우기에 애쓴 늙은이올시다. 고구려를 사랑하는지라 이런 말씀을 아뢰옵니다.

"고구려를 사랑하는지라 고구려에 상서롭지 못한 말을 하시오?"

"상서롭지 못한 말씀이 아니옵니다."

무장의 괄괄한 성미요, 고구려 창업에 큰 기둥이로라는 자신을 갖고 있는 합부라, 함부로 말을 내던졌다.

"대보! 대보는 원로 대신이고 노인이고 하기에 덮어 두거니와, 다시는 그런 상서롭지 못할 말 하지 말우!"

"또 하리다. 그러시다가는 나라를 망치오리다!"

그러고는 당장에 합부의 대보 벼슬을 깎고 동산지기[원직(園直)]로 내리쳤다.

합부는 졸본 옛 서울로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손잡아 기른 왕손 해명께 그 정을 하소연하였다.

"그러기에 내 그리 말라고 미리 말하지 않습디까. 대보는 오래 아버님을 모시고도 아버님을 모르시는구료."

합부는 자기는 결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나라를 사랑하는 적성에서 임금께 임금의 잘못을 말한 것이, 신도(臣道)에 결코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유리왕)은, 합부가 주몽왕과 협력하여 이 나라를 이룩하고 기초 튼튼히 잡은 뒤에 비로소 부여에서 건너온 이다. 합부 자기보다 고구려에 소원한 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랏일에 이처럼 성의가 없는 것인가 생각되었다. 동시에 자기가 손목 잡아 기른 왕자 온조님이 그리웠다. 그 온조님은 지금 남방에 가서 백제라는 나라를 이룩하고 임금이 되어 있다 한다. 온조님을 찾아가면 얼마나 반가와하랴. 온조님이 세우신 백제 나라도 보고 싶거니와 온조님이 그리웠다. 이곳서 유리왕께 바쳐도 받아 주지 않는 충성을 온조님께 바쳐서 백제라는 나라 키우는데 협좌를 할까. 아버님 되는 주몽왕을 도와서 고구려국을 건설하였으니, 이 늙은 몸의 여생을 다시 온조님께 바쳐서, 백제 키우는 데 할 팔의 힘을 도울까.

늙으면 나무람이 많아진다. 합부는 유리왕이 간언(諫言)을 청납하지 않은데 큰 나무람이 가고, 그 나무람에서 온조왕이 그리워졌다.

이틀을 생각한 뒤에, 남방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자기를 몹시 위해 주던 해명 왕자를 두고 떠나기가 좀 마음 언짢았지만, 온조왕의 장성하시고 왕 노릇 하시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은 해명 왕자를 떠나는 일에 넉넉히 벌충이 되었다.

합부는 자기가 떠나는 데 대하여 해명 왕자께도 아뢰지 않았다. 알리어서 붙들면 뿌리치기도 어려웠지만, 간다 못 간다는 말썽이 유리왕 귀에 들어갔다가는, 억센 유리왕은 어떤 처분을 할지 그것도 무서웠다. 그래서 합부는 자기가 떠난 뒤에 왕자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직의 글월을 닦아서 아랫사람에게 부탁하고, 몰래 국내 서울을 빠져서 남방으로 내려갔다.

×

합부가 남방으로 떠난 뒤에 합부의 하직 글월을 받은 해명 왕자는, 아까운 늙은이를 잃었구나 탄식하였다. 직하고 고지식하고 충성되고 용감하고 다만 너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것이 탈이었다. 융통성이 없어서 아버님께 신임을 못 얻었고, 또 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왕자 당신이 부렸더면 서로 잘 이해하여 이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았을 것을─

이듬해에 왕자는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국내를 크게 사(赦)하였다.

그러나 아버님 유리왕은 해명 태자를 그리 사랑하지 않았다. 성품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태자는 부왕을 지극히 경모하였지만, 부왕의 따뜻한 애정은 받아보지 못하였다. 임금은 도리어 그다음 아드님 무휼(無恤)을 끔찍이 사랑하였다. 무휼 왕자는 성품도 아버님 비슷하였거니와, 어려서부터 쉽지 않은 영웅의 기품이 보이어서, 후일 부여를 복멸하고 낙랑을 복멸하여 주몽왕 건국의 대국시(大國是)를 달성한 대영웅이었다.

해명 태자는 부왕의 귀염을 못받느니만치 어려서부터 부왕의 슬하를 떠나 살았다. 그리고 부왕이 국내 서울로 이도한 뒤에도 눌러 옛 서울 졸본에 유수하였다.

가까이 모시던 늙은 대보 합부까지 멀리 남방으로 작별하고는 사실 쓸쓸한 옛 서울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태자가 스무 살 나는 정월도 쓸쓸하게 옛 서울에서 맞았다.

그 정월에 황룡(黃龍)국의 사신이 태자께 뵈러 왔다. 황룡국은 단군조선의 부스러진 한 조각이다.

태자가 기운이 세고, 활을 잘 쏜다는 소문을 듣고, 황룡국 임금은 태자의 기운을 시험해 보고자, 사신 시켜 강궁(强弓)을 하나 태자께 바친 것이었다.

"미신(微臣)의 나랏님께오서 태자께 강궁(强弓)을 하나 보내옵니다."

하면서 가지고 온 활을 태자께 바쳤다.

태자는 황룡국 임금이 내 힘을 시험해 보려는 것을 알아챘다.

"응 그래? 어디 보자. 얼마나한 강궁인지…."

태자는 활을 받았다. 활의 줄을 잡아당겼다. 활은 끝이 서로 맞닿도록 굽어들었다. 그것을 그냥 당기니까, 지끈 소리를 내며 활은 꺾어져 버렸다.

"어디 강궁이냐? 내 아이의 힘에도 부러지니."

강궁이라고 바쳤다가 태자께 맹랑히 꺾이고 황룡국의 사신은 얼굴을 붉혔다.

황룡국 사신이 돌아간 뒤에, 태자의 시신이 그 활을 집어 보았다. 집어 보고 깜짝 놀랐다. 천하 무류의 강궁이었다. 황룡국 왕이 강궁이란 이름을 붙여 보냈더니만치, 짝이 없는 강궁이었다.

태자가 기운이 센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센 줄은 시신도 뜻밖이었다.

"태자님, 이것을…."

아연하였다.

"응, 강궁이더라. 황룡국에서 우리나라를 시험해 보려는 눈치이기에, 분질러 벼려서 그 뜻을 보였다."

아아, 이 태자가 장차 임금이 되시면 우리나라는 더욱더욱 훌륭해지겠구나. 시신은 경악 가운데서도 공열(恐悅)을 느꼈다.

수일 후, 황룡국에서 이번은 아버님 되는 유리왕께 사신이 또 왔다.

태자가 하도 영웅이시라니 한 번 만나 뵈오면 좋겠다는 황룡왕의 뜻이었다.

고구려의 신하는 보내면 안 됩니다고 하였다. 황룡왕이 뜻을 알 수가 없으니, 우리 태자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은 태자를 귀여워하지 않는지라,

"이웃 나라 임금이 태자와 상견하자는데, 안 보내면 예가 아니라."

하여 태자께 가라고 분부하였다.

이 분부가 졸본 옛 서울 태자께 전해지자 태자의 시신들은 울면서 태자를 붙들었다.

"이웃 나라 임금이 연고 없이 보자는 것은 그 뜻을 모를 일이옵니다.

아무리 나랏님의 부분이실지라도, 이 일만은 못하십니다."

그러나 태자는 가벼이 여기었다─.

"하늘이 나를 죽이시려면, 자리에 누웠을지라도 죽는 게요, 하늘이 안 죽이시려면 활로 쏘아도 안 죽는 법이니라. 죽고 사는 것은 하늘께 달렸으니, 하늘께 달린 일 때문에 아버님 분부를 거역해 불효가 되어 무얼 하랴."

그러고는 단신 황룡국으로 갔다.

해명 태자가 황룡국 사신의 인도로 단신 황룡국 서울에 이르러서, 성하에까지 오매 황룡국에서는 그 나라 신하 세 명이 성문까지 맞이 나왔다.

해명 태자는 그 황룡 신하가 몸에는 튼튼히 무장하였고 기색이 좋지 못한 것으로 보아서, 이 무리가 당신을 해할 임무를 띠고 나온 줄 짐작하였다.

아버님의 분부라 거역치 못하고 오기는 왔지만, 황룡국에서 당신을 해하려 해도 그냥 해를 받으라는 분부는 아버님께 받지 않았는지라, 황룡국인이 수상한 행동 시작하면 당신은 당신대로 취할 일을 따로이 생각하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 성 밖 쪽에서 노루가 한 마리 비틀거리며 앞에까지 와서 쓰러진다.

보니 이마에 살이 하나 박혀 있어, 어느 사냥꾼에게 맞고 예까지 달려와서 쓰러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살 박힌 자리를 보고 태자는 흥미를 느꼈다. 우연히이면 모르지만, 일부러라 하면 천하에 쉽지 않은 명궁수의 쏜 살이었다. 살은 양미(兩眉)의 정중(正中)에 박혀 있었다.

눈을 들어 둘러보았다. 누구가 활을 쏘았는가 하여….

그때, 그 활을 쏜 사람이 노루를 찾아서 달려왔다. 달려와서는, 노루보다도 태자를 보며, 한 무릎 꿇어 절하였다─.

"아이, 태자님!"

아버님 유리왕이 사물(沙勿) 지방에서 만나서 신하로 삼은 위사물(位沙勿)이었다.

"아, 어떻게?"

"태자님, 모시오리다. 귀국하실 때도 모시고 가오리다."

황룡 신하들은 이 뜻 안 한 방해인에 혀를 채었다. 그러나 고구려인이 고구려 태자를 모시겠다는데 거절할 핑계가 없어서, 하릴없이 사물씨까지 함께 성안에 들어갔다.

사물은 태자의 곁에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큰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의 손에는 언제든 손창이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놓는 일이 없었다.

사물은 (뒤에 안 일이지만) 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따라온 것이었다.

내내 먼발로 태자를 지켰다. 그러다가 태자가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노루를 쏘아서 태자께 접근할 기회와 핑계를 얻어가지고, 태자 곁을 잠시 한때 떠나지 않고 태자를 지킨 것이었다.

황룡왕은 태자의 곁에 사물까지 모셨는지라, 손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내내 좋은 낯으로 환대하여 돌려보냈다.

황룡국 사건은 이렇듯 끝이 났다. 이 일로 태자의 마음은 언짢고 슬펐다.

아버님은 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가? 안 사랑하실 뿐 아니라 미워까지 하시는가. 나는 아무리 돌아보아야 아버님께 실수한 일은 없다. 아버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예나 이제나 일반으로,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 세상의 어느 아들에 지지 않게 아버님을 경외하거늘, 아버님은 왜 나를 미워하시는가.

인품으로든 역량이로든 누구에 비길지라도 부족 없는 당당한 아들이거늘 갓 나서 어머님을 여의고, 오직 나를 사랑하여 줄 분은 아버님밖에 없거늘, 이 외로운 자식에게 동정도 안 가시는가.

아버님은 동생 무휼(無恤)을 사랑하신다. 무휼은 그 사람됨이 나보다 낫[優(우)]다. 아버님은 무휼 왕자로 하여금 뒤를 이어 장차 무휼로써 고구려 나라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더 크고 훌륭하게 하고 싶으신 욕망 때문에, 태자 되는 나보다도 나도 동생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다. 태자로서도 안다.

태자 당신보다 동생 무휼이 더 사람됨이 나음을. 그런지라, 나라를 위하여서라도 동생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다. 아버님께서 그렇게 분부만 하시면 깨끗이 태자 당신은 물러앉을 용의도 있다.

태자 당신의 마음은 그렇거는 아버님께서는 그저 미워하시고, 자식에게 죽을 구덩이까지 지시하시니, 이것이 딱하고 민망하고 슬펐다.

황룡국에서 이번에 죽고 말았더면 아버님은 도리러 만족하였을는지도 모르나, 불행 죽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 때문에, 어버님의 마음은 불만하실 것이다. 태자의 나이 갓 스물의 아직 소년이지만, 그 사람됨이 비범하여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태자가 등극하는 날은 부조(父祖)께 지지 않는 훌륭한 임금이 될 것이라고 기대가 컸지만, 태자의 아우님 무휼 왕자는 태자보다도 월등하게 훌륭하였다. 아버님 유리왕은, 하늘이 고구려를 크게 만드시고자 이런 위대한 왕자를 주셨거늘 왕자의 위에 태자가 있어서, 무휼 왕자가 임금 될 앞길을 막고 있다 하여, 태자를 미워하고 대승적 입장에서 태자가 없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다. 해명(解明)이 태자로 있는 것은 국가 발전에 지장이 된다 보아 태자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태자의 마음으로는 아버님이 「너 죽거라」하시면 죽기도 그다지 싫지 않은 바이나, 아버님으로서는 또한 아드님께 죽으라는 분부는 힘들 것이다. 그 아드님이 특별히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의 마음이 왜 밉기야 하랴) 아랫 아드님이 더 귀엽고, 겸해서 국가적 안목으로 작은 아드님 등극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태자의 존재가 싫었던 것이다.

"무휼아."

"네?"

"장차 네가 임금이 되면 참 좋겠구먼. 네가 고구려의 임금이 되면…."

"저는 작은 아들이 아니오니까? 형님 계신데 제가 어떻게 임금이 됩니까?"

"내가 없으면 말이다. 내가 없으면 좋겠지?"

"무슨 말씀을…."

그 태자 해명─.

×

황룡국 사건이 있은 이듬해(제이십팔년) 봄이었다.

황룡국 근처를 다녀온 사람에게서 이런 말이 들렸다.

「고구려에서는 태자가 힘깨나 쓴다고, 그것으로 외국의 임금까지도 업수히 여긴다」는 말이 황룡국 안에 많이 돌아서, 황룡국 백성들은 고구려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내 나라에 관하여 좋지 않은 소문이 외국에 돈다는 이 소식은 아버님인 유리왕을 혁노케 하였다. 힘깨나 쓰노라고 그것을 자세하여 버릇없이 굴어, 외국에게 욕까지 사다니 무슨 일이냐. 그렇지 않아도 태자를 사랑하지 않던 유리왕은, 태자 때문에 내 나라에 돌아오는 이 비방에 참지를 못하였다.

태자를 책망하는 책임을 띤 한 신하가 졸본성으로 갔다. 신하들 사이에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왕은 모든 간과 충고를 물리쳤다.

「짐(朕)이 서울을 옮겨서, 방업(邦業)을 공고케 하고 백성을 안도(安堵)케 하려 했거늘, 너는 네 조그만 힘을 믿고 아비를 따르지 않고 옛 서울에 남아 있어, 이웃 나라의 마음을 잃고 원수를 사니, 이것이 신도(臣道)에 어떠며 자도(子道)에 어떠냐, 네 나이 벌써 스물하나라 아주 어린애도 아니니, 여기 보내는 한 자루 칼은 무엇에 써야 할지 네 짐작 가리로다. 하늘과 나라와 아비에게 지은 죄를 스스로 깨끗이 씻어라.」

자재(自裁)하라는 뜻이다.

태자는 그 아버님의 꾸중을 듣고 하사하는 칼을 받았다.

칼을 뽑아 보았다, 푸르른 빛이 번쩍 하는 명도였다. 고구려 건국에 많은 피를 머금은 칼이었다. 한참 칼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광이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한 시신이 태자의 팔을 잡았다.

"태자님, 칼 어디 잘 간수합시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아버님께서 자재하라고 보내신 칼을 어디 간수하느냐. 다만 나라 세운 데 공이 큰 이 칼을 이런 데 쓰기가 아까와서 좀 보던 것이다."

"태자님, 무슨 말씀이서요? 지금 사자(使者)의 한 개 전갈에 태자님 그리하시면 너무 경솔치 않사오리까. 한 번 다시 나랏님의 뜻을 알아보시고 일을 결정하십사."

"칼을 놓아라."

"소신 죽을지라도 이 칼은 못 놓겠습니다. 태자님 경경히 일을 처리하시와, 욕이 나랏님께 돌아가면 도리어 불효가 아니오니까."

"아니니라. 향자 황룡왕이 강궁을 보내서 나를 시험할 때, 그 기를 죽여주려고 활을 분질러 버렸더니, 아버님께서 불효로서 책망하시고 칼을 주시어 자재하라시니, 어찌 부명을 거역하랴. 이 칼을 놓아라."

"소신을 먼저 죽여 주소서. 소신 죽기 전에는 칼을 못 놓겠습니다."

아아, 길이 한숨 쉬며 태자는 몸을 일으켰다.

창(槍)을 하나 얻어 들고 뜰로 나갔다. 창은 자살에 쓰일 무기가 아니라 보아서, 시신은 태자가 울울한 심화라도 펴려고 사냥이라도 나가려는가 해서 태자의 적적한 뒷모양을 바라보며, 다만 기다랗게 탄식을 하였다.

태자는 말을 한 마리 끌어내어, 말게 올라서 창을 비끼고 궁 밖으로 나갔다.

태자가 나간 조금 뒤에, 태자의 동생인 무휼 왕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달려들어 왔다.

"형님! 형님! 형님 어디 계시냐."

"지금 막 밖에 나가셨습니다."

"혼자시냐?"

"네이. 창을 비끼시고……."

"어디로 가셨느냐."

"모르겠습니다. 여진 동원(礪津 凍原) 방향으로 가셨는데요."

"말 타시고?"

"네"

무휼 왕자는 태자의 시신(侍臣) 한 사람을 따라오라고 분부하면서 달려나갔다.

왕자와 시신을 함께 말을 달려 동원 쪽으로 갔다.

벌에 나서자, 넓은 벌 저편 건너 맞은편에 태자를 보았다.

태자는 말을 달리는 것이었다.

"형님! 형니─임."

무휼 왕자는 청을 다하여 큰 소리로 형님을 부르며, 태자 보이는 곳을 향하여 말을 몰았다.

태자는 들리지 않는 듯 당신의 말만 앞으로 달렸다. 그러나 얼마 닫지 못하여 태자는 말에서 땅에 떨어졌다.

그 떨어지는 모양이 예사롭지 못하여, 무휼 왕자는 전속력으로 그리로 달려갔다.

태자는 말께서 떨어진 채, 그 자리에 엎드려 있다. 일어나지도 않고 그냥 엎드려 있는 것이 수상하여 가까이 달려들면서, 말에서 뛰어내렸다.

"형님!"

웬일이냐, 태자의 앞에는 창(槍)이 넘어져 누워 있고, 태자의 밑에는 피가 쿨쿨 솟고 있었다.

"형님!“

탁 형께 쓰러졌다. 태자는 눈을 떴다. 힘이 없이─

"오오, 너 왔느냐! 어떻게?"

"형님! 무슨 일이서요?"

태자는 창을 땅에 꽂고, 말을 달려 스스로 창에 찔린 것이었다.

"형님! 이런 일이나 있지 않을까 해서 국내 서울서 지금 달려오는 길이올시다. 한 걸음 늦었습니다그려."

"아버님의 뜻이시다."

"형님!"

"인제 네가 나라의 주인이다. 나라 키우고 백성 사랑하거라."

"형님, 다르게라도 아버님 뜻을 펴 드릴 길이 있을 것을. 이게 무슨 일이서요?"

"내 뜻을 받아서 나라 잘 키워라."

"형님!"

태자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무휼 왕자는 안타까이 태자를 흔들었으나, 태자의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이리하여 해명 태자는 스물한 살로 영원의 나라로 떠났다.

태자가 살아 있을 무휼 왕자의 방해라 하여 미워했지만 세상 떠나고 보니 유리왕은 어버이로서의 애정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까운 놈 죽이었다."

내어 던지듯 이렇게 말하는 유리왕이 모양에는 아들 잃은 어버이로서의 슬픔이 역력히 들어 있었다.

태자로서의 예를 갖추어 동원(凍原)에 후히 장례하였다. 묘(廟)를 세워서 제사케 하였다.

그 땅은 그 뒤로부터 창원(槍原)이라 하였다.

무휼 왕자는 형님의 사당에 뵙고 천지신명께 맹서하였다. 나라를 키우기 위하여 아버님의 뜻을 받아서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신 형님께.

"아버지께서 미처 못 처리하시고 남기시면, 제가 맹서코 할아버님 때부터 숙망을 달성하와, 제 자식의 대(代)까지는 그냥 끌지 않기를 천지신명을 두고 형님께 맹서합니다."

황룡국 이하 개마국(蓋馬國) 구다(句茶)국 갈사(曷思) 조나(藻那) 주나(朱那) 등 무수한 꼬마국가가 아직 주변에 수두룩하고, 낙랑 부여 등 큰 덩어리가 그냥 남아 있다. 이것들을 반드시 멸해서 고구려 나라를 동방의 종국(宗國)으로 동방의 주인으로 만들고야 말기를 형님 묘에 굳게 맹서한 것이었다.

해명 태자가 무참히도 스스로 목숨을 바친 뒤에 아버님 되는 유리왕은 무휼 왕자를 태자로 대접하였다.

형을 대신할 자리에 선 무휼 왕자는 아직 소년의 몸이었지만 자기의 어깨에 짊어 지어진 사명이 어떤 것이며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충분히 이해하여, 형님이 죽음으로 하여금 헛 죽음이 되지 않게 하려고 굳게 결심하였다. 유리왕 이십팔년(해명 태자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해) 팔월에 북쪽 웅국(雄國)인 북부여에서 고구려 대하여 시비를 걸어 온 일에 대하여 소년 무휼 왕자가 조정을 대표하여 그 난(難)문제를 어렵잖게 해결지어 소년답지 않은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서 유리왕 삼십일년에 지나(支那)에서는 왕망(王莽)이라는 호걸이 생겨나서, 「한(漢)」나라를 둘러엎고 스스로 「신(新)」나라를 세우고,(「신」나라이 서기는 유리왕 이십칠년이다) 천자(天子)가 되어 주위의 오랑캐 나라들을 정벌을 하는데 고구려에게도 군사를 내어서 협력하기를 명하였다. 왕망으로서는 자기는 지나의 천자가 되었으니 세계 만방을 자기의 속국(변방)으로 여기고 자기의 명령이면 으레히 고구려에서 복종할 줄로 여기고 호령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지나 종족과 단군종족의 별립(別立)을 주장하고, 고구려 자기네는 단군족의 종주(宗主)고 자임하느니만치 왕망의 명령에 복종할 까닭이 없었다.

여기 화가 난 왕망은 군사를 고구려에 보내서 고구려의 변경을 침노하는 한편, 고구려는 나라 이름[國號(국호)]이 괘씸하고「고구려 왕」이라는 것이 건방지다 하여, 나라 이름을「하구려(下句麗)」라 깎고,「고구려 왕」을 「 하구려 후(候)」로 내리친다고 이 뜻을 천하에 포고하였다.

그러나 왕망이 내리쳤다고「고구려」가 「하구려」로 된 것이 아니요, 도리어 이로써 고구려의 노염을 사서, 고구려의 복수적 침공 때문에 변경(邊境)만 더 어지럽게 되었다.

고구려가「하구려」로 깎인 이듬해에 부여에서는 또 고구려를 침노하였다.

아버님인 유리왕은 이 부여의 대거 내침에 대하여 무휼 왕자에게 적은 군사를 맡기어 대응하게 하였다. 때는 동짓달이었다.

적은 군사로써 적(敵)의 대군을 격퇴하라는 어렵고 중대한 임무를 아버님에게서 받은 무휼 왕자는 기계(奇計)를 써서, 부여의 구름 같은 많은 군사를 산골짜기로 유인해 몰아넣고, 미리 매복하였던 군사로 엄살하여 부여의 대병을 산곡 간에 아주 전멸시켰다.

이 장재(將才)를 아버님 유리왕은 높이 보았다. 무휼 왕자가 부여의 대군을 잔멸시키고, 「국내」서울로 담당 개선할 때에 아버님은 이 개선 소년 장군을 멀리 교외에 맞고 거기서 개선 장병은 위하여 큰 잔치를 열었다.

그리고 무휼 왕자의 역량을 충분히 본 유리왕은, 무휼을「태자」로 책봉하고 군국의 모든 중요한 일을 태자에게 일임하였다.

유리왕 삼십칠년 칠월, 왕은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였다.

그 유년시절과 소년 시절을 북부하여 금와(金蛙)왕의 아래서 아비 모르는 고독한 생애를 보냈고, 그 뒤에는 아버님이 세운 고구려 나라로 들어와서, 고구려의 태자로 다시 아버님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제 이대 임금으로 초창기(初創期)의 국가를 맡아가지고 삼십칠 년간 고구려 임금으로 고구려 나라의 주춧돌을 벌려 놓고, 영걸 아드님 무휼 태자께 뒤를 맡기고 고요히 승하한 것이었다. 낙랑 복멸과 지나인 구축, 부여국 병탐, 주변의 꼬마국가 흡수, 아우님의 나라 백제(百濟)와의 연락 등등 위대한 국가사업이 지표만 세워 놓은 뿐 아직 그냥 남아 있지만 태자 무휼이 비범한 기상의 주인이 매, 당신(유리왕)이 미처 결말짓지 못한 사업은 아드님 대(代)에 영락없이 달성이 되리라는 굳은 믿음 가운데서 마음 고요히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세째 아드님 무휼 태자(뒤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라 불러 모신)가 뒤를 이어, 고구려 제삼대 임금으로 위에 올랐다.


남해(南海)와 유리(儒理)

[편집]

고구려가 북쪽에서, 단군의 업을 물려받아 사산된 배달 종족을 품에 품으려 지나 종족과 종족 항쟁을 하는 동안, 남쪽에서는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서라벌 나라를 이룩하고, 처음의 조금만 부락국가(部落國家)에서 조금씩 조금씩 세력 범위를 넓혀 가면서 건전한 생장을 하고 있었다.

박혁거세 거서간(거서간이란 임금이란 칭호다)의 어우도 육십일 년을 계속하고 그 맏아드님 남해 차차웅(南海 次次雄―차차웅도 임금이란 칭호다)이 위에 올라서 역시 왜(倭)며 낙랑(樂浪) 등과의 작은 분규는 있을망정, 큰 사고는 없이 건전하게 자라고 있었다.

남해 차차웅이 이십일 년의 어우는 태평성대였다. 백성은 욕심을 모르고 다툴 줄을 모르고 기름진 땅에 풍족한 의식재료로 태평무사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후계자에게 뒤를 맡기고 승하하였다.

뒤를 맡은 아드님 유리(儒理)는 임금의 위에 몸소 오르기가 송구하였다.

스스로 덕이 부족할 것 같고, 감당치 못할 것 같았다.

더욱이 아버님 때부터 대보(大輔)로 있는 석탈해(昔脫解)의 위인 당신보다 훨씬 월등한 것 같아서 탈해보다 윗자리에 앉기가 매우 송구하였다. 그래서 탈해를 불러서 그대가 임금이 되어 줄 수가 없겠느냐고 청하여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기(神器)는 거룩한 것으로, 범인(凡人)이 감당치 못할 것이옵니다.

"그래도 나는 감당치 못할 것 같구료."

"일찍이 듣자오니, 슬기로운 사람은 이빨[齒]이 많다 하옵니다. 그럼, 저와 차차웅께서 시험 삼아 떡을 씹어 보아서 이빨 자욱 많은 이가 신기를 맡기로 하면 어떠리까."

이리하여 유리와 탈해는 떡을 갖다 씹어 보았다. 그 결과는 유리가 이빨 자욱이 더 많았다.

뒷날 임금을 이사금(尼師今)이라 부른 것은, 여기서 나온 바다, 「잇금」 즉 「이사금」으로….

유리 이사금 제구년에 육부에 각기 성(姓)을 내려주고, 열일곱 등급(等級)의 벼슬을 베풀고, 이사금의 두 따님으로 하여금 육부를 두 패에 나누어 두 패의 여인들을 두 왕녀로 각각 거느리고 칠월 보름부터 팔월 보름까지 베짜기[績市]의 경기를 시키고 이를 「가위[嘉俳]」라 하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춤추고 노래하여 서로 축하하였다. 회소곡(會蘇曲)이 여기서 생겨났다.

땅 기름지고 일기 다스로운 곳에 터잡은 서라벌 나라는 북쪽 박토에 건국한 고구려와 달라 웅건(雄建)보다 우아(優雅)에 기울었다. 고구려에서는 절식(節食)이 국민성이 되고, 투지(鬪志)와 정복욕과 웅건 사상이 국민성으로 될 동안, 서라벌은 포식과 가무 유흥 등으로― 전연 다른 성질의 인종이 되어 갔다.

유리 이사금 제십사 년에 북쪽 나라 고구려가 낙랑을 둘러 엎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러나 비록 낙랑의 옛 영토가 다 고구려의 날개 아래 들어서, 고구려의 국경선이 썩 남쪽으로 내려왔다 할지라도, 아직 고구려(새 영토를 포함한)와 서라벌 나라와의 사이에는 무수한 꼬마국가(부락국가)들이 끼어 있어서, 그 국경선(고구려와 서라벌의)은 서로 닿게까지 되지 않았는지라, 낙랑이 없어졌다는 것도 그다지 큰 충동을 느낄 바이 아니었다.

×

그럼 이하 무휼(대무신왕)왕이 지나 영토 낙랑을 둘러 엎기까기지 전말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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