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한담
나는 어려서부터 文獻[문헌]의 가치를 혼자 생각하고 감히 존중하게 알아 서, 무릇 글씨를 쓴 종이는 다 귀중하게 넣어 두는 중에서도 특별히 국가와 민족의 생활에 관계되는 文獻[문헌]을 수집 보존하기에 고심한 것은 거의 天性[천성]이었다.
내가 국문을 解毒[해독]한 것은 六[육], 七[칠]세경의 일인데, 그 때에는 국문으로 冊[책]을 발간하는 것이 예수교편의 전도문자밖에는 없었건만, 그 것이 발행되는 대로 사서 읽고 보존해서 한 콜렉션을 이룰 만했었다.
그 다음에는 七[칠], 八[팔]세에 漢文[한문]을 읽기 시작하고 그때 漢文 [한문]으로 서양 서적을 많이 번역 간행하는 기관이 중국에 여러 군데 있어 서 다수한 서적이 韓國[한국]으로까지 흘러 들어오고 했었는데 韓國[한국] 에 들어오는 이러한 종류의 책도 가장 먼저 보고 가장 깊이 인식하기에 힘 썼는데, 이런 것들도 내가 가졌던 책 가운데서 또 한가지의 콜렉션이 되었 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고도 하겠지만, 원래 서양의 학술 서적을 동양으로 옮기는 데 있어서도 일본보다 중국이 앞서고, 따라서 서양의 학술 용어를 번역하기도 중국 사람이 먼저 손을 대어서, 이를테면 經濟學[경제학]을 生 計學[생계학]이라고 하고, 社會學[사회학]은 大同學[대동학]이라고 하고, 哲學[철학]을 性理學[성리학]이라고 하는 類[류]의 譯字[역자]가 있었는데, 실상 서양 학술을 이러한 서적과 용어를 통해서 처음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열 세 살 때에 일본 신문을 통해서 일본말을 알게 되고, 아는 대로 일본 책을 모아서 보았는데, 그때 서울서 볼 수 있는 일본 책은 官立[관립] 몇 군데 학교에서 교과서로 쓰는 종류가 있을 뿐이다. 하나는 관립 학교에서 初等[초등] 算術[산술]을 가르치는 數學[수학] 교과서요, 또 하나는 관립 醫學校[의학교]에서 일본 醫學書類[의학서류]를 번역해서 교과서로 쓰는 內 科學[내과학] 解剖學[해부학]과 같은 종류였다. 나는 이 두가지를 얻어 보 고 신기한 생각을 금하지 못해서 算術[산술] 問題[문제]와 解剖學[해부학] 명사 같은 것을 낱낱이 암기하기에 이르렀다.
十五[십오]세 되던 해에 俄日戰爭[아일전쟁]이 일어나서 韓國[한국]에 있 는 일본 세력은 아라사를 대신하고, 그 해 一[일]〇월에 韓國[한국] 황실로 부터 留學生[유학생] 五[오]〇명을 일본 정부에 위탁할 때에,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으로 끼어 갔었다.
일본에 이르러 보니, 문화의 발달과 서적의 풍부함이 상상 밖이요, 전일 의 국문예수교 書類[서류]와 漢文[한문] 번역 書類[서류]만을 보던 때에 비 하면 대통으로 보던 하늘을, 두 눈을 크게 뜨고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 다. 나는 그런 그런 책이라는것은 다 좋아서 보고 보고 또 한옆으로 번역까 지하는 버릇이 일본에 가서 더욱 활발해졌다. 그때는 이런 공부로 밤잠도 자지 않고 여기에 정신을 썼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운 일은, 당시 일본에 칸트의 <純粹理性批判[순수이 성비판]>이라는 책이 처음 번역되었었다. 칸트라는 이가 近代哲學[근대철 학]의 大前提[대전제]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인데, 내가 그 책을 사서 읽 고 또는 생각한 일이 있다. 지금 보아도 모를 칸트의 理性批判[이성비판]에 관한 저서를 그때 내 지식과 日本語[일본어]로 알아본 체한 것은 실로 우스 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三[삼]년 동안 일본에서 책을 모으기 시작하고, 특별히 時勢[시세] 에 자극되어서 국민 정신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역사 지리의 연구 에 눈을 뜨고, 이 방면에 관한 서적을 더욱 모으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 학자의 경향을 보면 우리가 國祖[국조]로 믿는 壇君[단 군]을 후세에 어떤 사람이 정치적 필요상으로 만들어낸 것이므로 역사가가 관계할 바 아니라는 설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국민 감정으로 激憤[격분]을 느끼고 壇君[단군]의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朝鮮[조선]의 原 始宗敎[원시종교]와 동방의 고대 문화로 번져 나가면서 朝鮮精神[조선정신] 의 근본을 壇君[단군]에 두려는 데에 평생동안의 연구 제목이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國史[국사] 연구는 역사를 위해서의 연구라기보다 국민 정 신을 위해서의 역사적 開拓[개척]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壇君[단군]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人類學[인류학]‧ 民俗學[민속학]‧ 宗敎學[종교학] ‧ 言語學[언어학] 등 허다한 補助科學[보조과학]의 지식을 필요로 하므로, 이 각방면의 예비 지식을 얻기 위해서 무서운 고심 勞力[노력]을 아니할 수 없는 가운데에 나의 서적 수집은 자연 그 범위를 점점 넓히게 되고 수량을 늘이게 되었다.
十七[십칠]세에 책상을 집어던지고 故國[고국]으로 돌아와서 新文館[신문 관]이라는 것을 만들고, 한옆으로는 교과서를 편집하고, 한옆으로는 잡지를 발행한 것이 조선의 신문학 사상에 관하여 상당히 중요한 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가서 時勢[시세]가 急轉化[급전화]를 하여 韓日倂合[한일 병합]이 실현하게 되었으므로 나라는 보존하지 못할지라도 文化[문화]는 밝 혀야겠다는 생각에서 朝鮮光文會[조선광문회]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국내 서 적의 수집에 힘을 써서, 무릇 조선 문화의 재료가 될 만한 것은 내용의 경 향을 묻지 않고 힘이 자라는 대로 극력 수집하였다.
그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면의 일을 중히 여기는 이도 없고, 가치에 대하여도 정당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에 도서 수집은 상당히 便利[편리]하게 진행되었다. 十二[십이]년 동안에 수만 권의 서적을 모으게 되고, 더욱 前 副統領[전부통령] 李始榮氏[이시영씨]가 西間島[서간도]로 가실 때에, 그 大小家[대소가]의 傳來[전래]하던 수만 권의 서적과 文書[문서]를 나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 사업 진행상에 커다란 寄與[기여]가 되었다. 그 가운데에 는 淸日戰爭[청일전쟁] 전후에 관한 귀중한 재료만도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 다.
이래저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내 藏書[장서]는 各種[각종] 國語[국어]에 걸쳐서 비교적 많은 蓄積[축적]을 보고, 이 사실은 내외국에 알려져서 조선 의 藏書家[장서가]라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나는 본래 藏書[장 서]가 목적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조선 문화의 숨은 빛을 발견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책의 수가 많아진 것은 그 副産物[부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 다.
그 후 種種[종종]이 파란을 겪다가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가 생기 고, 박물관 ‧ 도서관 기타 학술 기관이 생김에 따라서 직접 간접의 관계를 이에 가지게 되고, 이것이 또 내 藏書[장서]를 많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 었을 것이다. 가령 滿洲國[만주국]이 생기고 建國大學[건국대학]이 建立[건 립]됨과 함께, 조선 민족의 代表敎授[대표교수]라는 명목으로 建國大學[건 국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의 전후 四[사], 五[오]년 동안은 滿洲[만주]와 蒙古[몽고]와 北支那[북지나]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다수한 중국 서적을 수 집하는 데 막대한 편의를 갖게 되었다.
이러저러한 관계로 내 藏書[장서]의 수는 太平洋戰爭[태평양전쟁] 당시 서적 보존을 본위로 하여 東郊[동교] 牛耳洞[우이동]으로 疎開[소개]할 때 는 트럭으로 여덟 차를 싣고 나갔고, 그 수효는 약 十七[십칠]만여라고 계 산되었다.
牛耳洞[우이동]에 나간 뒤에는 세상의 풍운을 모르는 체하고 서적 보존의 목적을 거의 달성할 뻔 하였더니, 一九五日年[일구오일년] 一‧ 四後退[일․사 후퇴] 때에 그것을 온전히 내버리고 南部로 피난한 뒤에 UN軍[군]이 追擊 戰[추격전]을 行[행]하는 砲火[포화]에 전부 재가 되고 말았다.
이 가운데 우리의 문화와 歷史[역사]를 위한 귀중한 재료가 헤아릴 수 없 을만큼 많아서, 아까운 생각을 하면 心藏[심장]이 파열하지 아니함이 기이 할 정도지만, 이것도 時代[시대]의 희생이요 世紀[세기]의 悲劇[비극]이라 고 하면 또한 斷念[단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해 六[육]월 一[일]일에 아픈 가슴을 부둥켜 안고 비교적 일찌기 서울 로 올라와서 牛耳洞[우이동]에 남은 서적의 잿더미를 눈물로 조사한 뒤에, 즉시 西齋[서재] 재건에 착수해서 오늘날까지 三[삼]년 동안에 겨우(그 전 수효의) 약 四[사]분지 一[일]인 四[사]만 권 가량을 수집하고, 급한대로 날마다 요구되는 것을 찾아보게 되는 것도 생각하면 不幸中[불행중] 多幸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수효가 四[사]분지 一[일]이라는 것이지, 그 質[질]에 있어서는 전 일에 비해서 과연 얼마만한 퍼센트가 될 것인지는 거의 문제 밖이라 할 것 이다.
<一九五四年[일구오사년] 새벽 十二月號[십이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