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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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잔치[편집]

1[편집]

팔월 한가위 , 축시에 기운 달은 그 의젓하고 밝은 얼굴을 안압지(雁鴨池) 물속에 뉘엿뉘엿 잠그었다. 어지럽게 반공에 떠돌던 삼죽(三竹) 삼현(三絃) 박판(拍板) 대고(大鼓)가 어우러진 줄풍류 소리도 스러지고 구슬처럼 물 얼굴을 스쳐 가던 청아하고도 구슬픈「회소곡」도 끊인 지 오래다. 임해전(臨海殿) 밤 잔치도 거의거의 끝이 난 모양이었다.

육부의 처녀를 모아 두 패로 갈라 놓고 칠월 보름부터 팔월 한가위까지 두레 삼을 삼아 승부를 다툰 끝에 지는 편이 진수성찬을 장만하여 이긴 편에게 한턱을 내고 집안이 가난한 탓으로 음식을 준비 못해 내는 처녀는 그 벌로 「회소곡」을 불러 일좌의 흥을 돕던 옛 풍속도 오늘날 와서는 길쌈의 승부도 승부려니와 길쌈 끝난 한가위 달 밝은 밤은 위로 왕과 왕비를 모시고 왕자며 공주며 첫째 뼈 둘째 뼈의 귀인과 벼슬아치와 향단을 대표하는 부로와 육부의 처녀가 한자리에 모여 크나큰 잔치가 벌어지는 명절이 되고 말았다.

한순간 질탕한 잔치가 끝나려는 괴괴한 적막이 일대를 싸고 돈다.

연잎에 나리는 이슬 방울이 제법 사르럭사르럭 소리를 낸다. 수멀거리는 물속에 축 늘어진 갈대 그림자가 유난히 길어 보이었다…….

문득 잠귀 밝은 물새 떼가 깜짝 놀랜 듯 푸드득 날아 오른다. 그 윤나는 나래는 마치 서릿발을 맞은 듯 달빛에 번득인다.

아니나 다를까 뒤미처 우둥우둥하는 발자최와 왁자지껄하는 사람 소리, 흐르렁거리는 말의 호통과 소의 울음이 고요하던 공기를 뒤흔든다. 궁문 밖에 등대했던 구종들이 상전 행차의 전갈을 듣고 별안간 그 차비에 법석을 하는 까닭이었다. 감격하고 즐겁고 흥겨운 이 밤의 놀이건만 닭이 두 홰 째 울었으니 아니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새 임해전 길고 넓은 복도와 뜰엔 사람의 사태다. 활짝 열어제친 궁문으로 그들은 물결처럼 구비쳐 흐른다.

근엄한 늙은 재상의 걸음걸이도 약간 지척거린다. 어떤 귀인은 황금 올린 복두가 뒤로 벌렁 제켜졌다. 느슨하게 띤 백옥 띠가 하마하마 끌러질 듯.

귀부인들의 태깔 있는 발길은 의젓하고 얌전하였지마는 이 붐비는 통에도 분진 같은 손을 들어 대모 봉채와 구슬 뒤꽂이를 연신 만져보고 또 만져보는 것은 향락의 회호리바람에 제 소중한 물건이 날아가지나 않았나 새삼스럽게 의심이 나고 또 나는 탓이리라. 금실 은실로 공작 꼬리를 수놓은 소맷자락이 풍정 있게 벌어지려다가 말고 살짝 얼굴을 붉히는 부인은 아마도 무심코 멋떨어진 무척(舞尺)의 흉내를 내보다가 제출물에 무안해 하는 것이리라.

처녀들의 한 패는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는 듯한 발길을 항청항청 군호나 맞춘 것처럼 떼어 놓으며 웃고 지껄이며 지나간다. 그들의 뺨은 농익은 연시와 같이 터질 듯이 붉다.

궁문 밖은 탈것과 등불의 바다다. 찢어지도록 밝은 달 아래 홍사초롱 청사초롱은 마치 땅 위에 별처럼 반짝거린다.

자단향목과 심향목으로 맨든 호화로운 가마채가 떴다. 자줏빛 붉은빛 남빛 휘장이 펄렁거린다. 혼란한 비단 실들이 흔들린다. 주렁주렁 달린 은 갈구리 옥 갈구리가 쟁그렁거린다.

가슴걸이를 비단으로 치장한 황소가 뚜벅뚜벅 둔한 걸음을 옮기면 수레바퀴는 덜덜 가볍게 구른다. 은등자 구리등자가 번쩍번쩍 달빛을 차면 말들은 호기좋게 뛰닫는다.

한동안 서라벌의 거리와 한길과 골목은 선선한 새벽 바람에 금세로 지나간 황홀한 꿈자락을 더듬으며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는 굽과 바퀴와 발자최로 어지러웠다.

한참 분잡하던 궁문 앞도 사람의 그림자가 거의 드물어졌을 무렵 맨 나종으로 지껄이며 떠들며 휘젓고 휩쓸고 나오는 젊은이 한 축이 있었다.

의복 차림차림으로 보아 나이보담 벼슬 계제는 매우 높은 듯. 아마 참뼈(眞骨)나 육두품(六頭品)의 귀공자들이리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구종들은 제 상전이 나타나는 것을 잽싸게 알아보자, 제각기 혹은 수레 혹은 말들을 끌고 몰아 제 주인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중 두셋은 곤죽이 다 된 몸을 제 수레에 실었으나, 남은 축은 그래도 여흥이 미진한 듯 또는 친구를 차마 놓기 싫은 듯 머뭇거린다.

“얘 여봐라, 난 수레 타기 싫다. 천천히 걸어갈 테니 너 먼저 가려무나, 응. 알아들었니? 응.”

그 중 몸피 호리호리한 한 사람이 제 집 구종에게 이렇게 호령하고 손까지 내저어 보이었다.

“어, 좋아, 좋아. 수품(首品) 파진찬(波珍飱) 말이 좋아. 자아 우리도 모두 걸어들 가세나. 이 좋은 밤에 집에 일찍 돌아가면 뭘 한단 말인가?”

일행 중에 가장 의젓해 보이는 한 사람이 대번에 파진찬 수품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그것 참 좋은 말일세 “ , 바람도 이렇게 선선하고 달도 이렇게 밝고…… 파진찬 칠부(漆夫) 자네도 그런 운치가 있을 줄은 뜻밖일세. 허허.

여럿의 웃음소리는 더욱 흥겨로웠다.

“왜 나를 벽창호로 알았던가?”

“여느 때에는 너무 점잔을 빼니 말이지.”

“점잖은 사람일수록 운치를 더 아는 법이어. 허허.”

그들은 말과 수레와 구종들을 돌려보낸 뒤에 윤나는 자피화(紫皮靴)로 달 그림자를 밟으며 느렁느렁 비척비척 발길을 옮기었다.

2[편집]

생명의 찬 이슬이 소매자락에 축축히 나렸지만 그들은 치운 줄도 몰랐다.

감흥과 환락과 도취의 도가니 속에서 빠져 나온 그들은 아직도 몸과 마음이 화끈화끈 달았던 것이다.

멋갈진 노랫 가락이 귓가에서 잉잉 운다. 어사주의 달고도 준한 맛이 따근따근 하게 목구멍을 넘는다. 더구나 찬란한 꽃밭을 이룬 부인네와 처녀들의 자리에서 풍기던 물씬한 향기는 좀처럼 코에서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달 가에 하르르하게 흐르는 한 조각 구름도 너울거리는 춤 소매인 양하였다.

“어, 성대여, 성대.”

칠부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다가 감격에 넘쳐 중얼거렸다.

“자네, 그 그 무슨 소린가? 지금 새삼스레 성대다 마다…….”

일행 중에 가장 나이 낮고 가장 술이 많이 취한 듯한 대아찬(大阿飱) 눌문 (訥文)이 쓰러지듯이 칠부의 어깨를 탁 짚으며 꼬부라진 혀 끝을 간신히 돌린다.

“원, 이 사람, 누군 뭐라고 했나? 성대랬지.”

눌문이 어깨를 짚는 바람에 하마하더면 넘어질 뻔한 칠부가 겨우 몸을 가누고 뒤받는다.

“글쎄,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럼 구만이지.”

“아니 구만이구 말구 간에 금상 상감마마 같으신 어른이 전대에 또 계셨더냐 말야.”

눌문의 취한 말투는 언제든지 시비조다.

어 이 사람 아무리 “ , 취중이기로 무엄하게 그 무슨 객쩍은 소린고? 상감 마마의 키가 크네 작네…….”

“그래, 자네 눈에는 그 그 크신 키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그 키가 예삿 키란 말인가?”

눌문은 버럭버럭 대어든다.

“누가 키야 크지 않다고야 하나뵈. 지망지망히 그런 소리를 않는 게라는 게지.”

“이를테면 자네가 누굴 훈계를 합시는 모양일세그려. 아스시게 아서. 자네 훈계 들을 사람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다네.”

하고 눌문은 칠부의 어깨 짚었던 손을 떼어 한 걸음 주춤 물러서다가,

“참, 참, 크신 키야. 아마도 열 마는 넘으실걸.”

감탄을 마지 않는다.

“크시고 말고, 나는 일어섰을 적마다 그 드높은 전각의 추녀가 어두(御頭)에 닿을까 싶어서 황송쩍었어.”

“키만 크신가, 그 몸피는…….”

“무엄한 말이지만 육체의 주위를 재어 본다면 한 아름이 넘으실 거야.”

여럿은 눌문의 끄집어낸 화두로 돌아갔다.

“하늘이 내신 어른은 다르거든.”

“그러기에 성골(聖骨)이 아니신가!”

“지금 띠고 계시는 옥대만 해도 예사 사람은 쳐들지도 못할거야.”

“오, 참, 그 하늘에서 나리신 옥대 말이지.”

“정말 하늘에서 나렸을까?”

“그럼.”

“뭘?”

“내 눈으로 본걸.”

“정말 보았단 말인가?”

“보구 말구. 그날은 일기가 약간 흐리었어.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겹겹이 쌓이었는데 별안간 오색 무지개가 하늘 한복판으로부터 바루 궁 앞 뜰에 박혔겠지. 그러더니만 어느 결엔지 칠보 화관을 쓰고 이상야릇한 붉은 학창의를 떨뜨린 천사가 나려와서 외여 가로되‘상황의 명을 받들어 옥대를 왕께 전하노니 받들지어다.’상감께서는 곧 뜰에 나리시어 무릎을 꿇고 그 옥대를 받으셨는데 그 옥대가 상감의 두 손 위에 놓여지자마자 오색 무지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천사도 온 곳 간 곳이 없데그려. 얼핏 하늘을 우러러보니 산더미같은 구름 한 가운데가 턱 갈라지며 금세로 연연한 붉은 빛이 도는데 현연히 천사의 옷자락이 펄렁하고 보이는 것 같데…….”

여럿 사람의 개개풀린 눈초리는 옥대를 가져온 천사를 보았다는 동관의 입술 위에 모이었다. 그 동관의 눈은 감격에 번쩍이고 잠깐 말을 끊은 입은 엄숙하게 닫혀졌다. 그 태도의 어느 모를 뜯어보아도 털끝만한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더더군다나 거짓이 숨겨진 자최가 있을 리 없었다.

“갸륵한 일이어.”

수품이 감탄하였다.

“하늘이 내신 어른은 암만해도 다르시거든. 그 날 꼭 천사가 나려올 줄 아셨던 모양이지.”

“그렇구 말구, 그 날 따라 대내에는 아침결부터 황토를 펴라 하시고 정갈하게 소제까지 시켜 놓으셨다니 상감께서는 미리 무슨 짐작이라도 하셨던 것 아닌가뵈.”

옥대 나린 광경을 목도한 동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옥대 기럭지가 어떻게 길었던지 얼른 보기에 우리 발로는 열 발이 넘을 거란 말이야. 세상에도 진기한 옥으로 아로새겼고 황금으로 꾸몄으니 여간 인력 가지고야 맨들어 내려 해도 맨들어 낼 수가 없거든. 더구나 띠돈을 새겼단 것만 헤어 봐도 예순 하고도 두 개란 말이어. 천상천하에 이런 보물은 쉽지가 않을 것 아닌가. 더구나 이상한 것은 이 육중하고 혼란한 옥대를 상감께서 띠시고 보니 쩍말없이 들어맞는단 말이거든…….”

“참 이상한 일이야.”

“그 어마어마하게 크신 허리에 쩍말없이 맞게까지 하였으니.”

“그야 하늘에서 나리신 게니 아니 맞을 리야 만무한 일이지.”

어쨌든 이 옥대 이야기로 신이야 넋이야 떠들어대었다.

“옥대도 옥대지마는 상감마마의 신용(神勇)이 절륜하신 것은 정말 놀랠 일이거든.”

이번에는 칠부가 또 화제를 돌리었다

“사냥을 하실 제 한 번 옥음을 높게 지르시면 달아나던 산도야지가 제자리에 펄썩 주저 앉아 올 곳 갈 곳을 모르는 것은 우리도 여러 번 뵈었거니와, 천주사(天柱寺)를 처음 이룩하시고 거기 거동을 하셨을 때 돌사다리를 올라가시니 그 우람스럽고 육중한 돌 사다리가 마치 썩은 나뭇가지와 같이 찌근하고 부러지지를 않았겠나”

“옳지, 참 그런 일이 있었지. 상감께서는 한 번 밟아 분질러 놓으셨지만 여간 인력을 가지고는 분질러진 그 돌멩이를 움직일 수도 없어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그게 이 서라벌 서울 다섯 개 움직이지 않는 돌(五不動石 [오불동석])의 하나가 아닌가?”

칠부가 수품의 말을 받았다.

“위로 그런 성주(聖主)를 뫼셨으니 올 내년 안으로 고구려 백제를 때려부시어 삼한(三韓)을 통일할 날도 멀지는 않을 걸세.”

눌문이 팔을 뽐내었다.

“그런데 걱정은 꼭 한 가지가 있지.”

칠부가 정중하게 말을 끄집어내었다.

“무슨 한 가지 걱정이란 말인가?”

여럿은 고이쩍다는 듯이 칠부를 쳐다보았다.

“상감의 보령이 벌써 사십이 넘으셨는데 아직 아드님이 없지 않으신가.”

“아드님을 아직 못 두신 것은 걱정이라면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출중한 공주가 세 분이나 계시지 않나?”

여러 사람의 지향 없는 발길은 자기네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주사 문 앞까지 다다랐다.

“우리가 이렇게 떠들고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다시 안압지 못가로 가세그려. 그 못둑 비단길 같은 잔디 우에나 앉아 이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주고 받세그려.”

수품은 마치 뒤에서 누가 잡아 당기기나 하는 듯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여럿의 운에 따라 옮기다가, 마츰내 이런 제의를 하였다.

“수품과 파진찬 말이 그럴 듯하이. 어째 임해전이 멀어갈수록 마음이 허전허전해지는 듯하네. 안압지로 다시 올라가세.”

눌문이 대번에 수품의 말에 찬성하였다.

“그래, 그래, 그 말이 좋군. 한 발자욱 두 발자욱 우리가 흥을 떨던 자리가 멀어가는 것이 따는 휘젓도 하거든”

여럿은 안압지 못 가에 다시 허청거리는 발길을 멈추었다. 이슬 나린 풀밭에 앉고 쓰러지고 누운 채 다시금 아까 이야기의 뒤끝을 찾는다.

“아까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두었던가? 오 옳지. 상감께서는 아드님을 두시지는 못했으나 달도 같고 꽃도 같은 공주 세 분을 두셨다고 그랬것다…….”

“암만해도 맏따님 덕만(德蔓)공주께서 인금은 으뜸이시지.”

하고 수품은 여럿의 동의나 구하는 듯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야 다 이를 말인가. 어질고 착하시고 또 총명이 제일 하시다고 들었으니 설령 태자가 아니 나시는 한이 있드래도 맏공주님께서 의당당히 나랏뒤를 이으실 것 아닌가?”

칠부는 수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덕만 공주의 칭찬을 늘어 놓았다.

키도 부왕을 닮으시어서 “ 훤출하시고 그 얼굴도 마치 오늘밤 은달 모양으로 맑고 밝으시고 덕성스러우시고……. 치마를 두르셨기에 여자시지, 어느 남자고 그 어른을 따르실 만한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워낙 천품이 뛰어나시거든, 당나라에서 목단화 꽃씨를 보내고 만발한 그 꽃을 그린 그림을 보냈을 적에 덕만 공주께서는 그 그림을 한번 보시고 이 꽃이 화려하고 탐스럽기는 하나, 필경 향기가 없으리라고 하셨다지. 상감께서 이상히 여기시고 어째 네가 그 꽃에 향기가 없을 줄 아느냐, 물으시매 공주의 대답이 절창이거든. 꽃만 그려 놓고 나비를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정녕 향기 없는 꽃인 줄로 아옵니다, 아뢰었단 말이지. 그 후 그 꽃씨를 심어 꽃이 핀 뒤에 보니 과연 향기가 없더란 말이어. 이 조그만한 일 한 가지만 보드래도 어째 범상한 어른이라 할 수가 있느냐 말이야. 성인의 바탕이 시거든.”

칠부의 입에는 침이 없었다.

“그는 그러하시지만 너무 덕성스러우시지.”

눌문은 의미있게 하늘을 쳐다본다.

“너무 덕성스러웁단 말이 웬 말인가?”

칠부가 시비나 차릴 듯이 대어든다.

“아기자기한 여자다운 맛이 적단 말일세. 예삿 어른이 아니고 성인이란 말일세.”

“그러기에 성골이시지.”

“그래 성골이시지.”

“그러면 둘째 공주는 어떠신고?”

“달만(月蔓)공주, 곧 달 애기씨 말이지.”

“따지기는 왜 이렇게 따져, 뻔한 노릇을.”

“글쎄, 어떻다고 할까. 달같이 환하시기야 하시지만…….”

“너무 아버님을 많이 닮으셨어.”

“키가 너무 크시단 말이지.”

“허헛허.”

여럿의 웃음소리는 달빛을 따라 흩어졌다.

“워낙 잘 나신 큰 공주와 아름다우신 셋째 공주 틈에 끼였으니 그러하지.

둘째 공주 님도 따로만 떼어 놓고 보면 여느 인물에 대일 수야 있나!”

“그야 물론이지.”

“그러면 셋째 따님 선화(善花) 공주, 곧 꽃 애기씨는 어떠신가?”

“꽃 애기씨!”

여럿의 입술은 너무 귀여운 듯 너무 아까운 듯 너무 안타까운 듯 일제히 속살거리었다.

“꽃 애기씨의 인물이야 어떻다 할까? 저 달에 비기자니 너무 곱고 부드럽고…… 후우…….”

수품은 마악 구름 자락에서 뛰쳐나온 쨍쨍한 달을 쳐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꽃에 견주자니 너무도 깨끗하고 맑고……흥.”

눌문도 가볍게 탄식하였다.

“버들 잎새보담 더 가늘고 진한 눈썹 밑에 번쩍이는 두 눈은 가을 호수와 같다 할까? 그 오목한 코끝은 백옥으로 깎았다면 되려 쌀쌀스럽게 들리겠지.”

“그 도톰한 두 뺨은 어쩌면 그렇게도 그렇게도 연연할까.”

“언제든지 언제든지 방씻방씻 웃음이 떠도는 듯한 그 두 입술은…….”

“크도 작도 않으시나마 설멍한 편인 그 알맞은 키는…….”

“훨씬 펴진 목 고개…… 마치 흰 기름이 엉긴 듯한 그 고운 살결은 손만 대면 손바닥 밑에서 그대로 녹아 나릴 것만 같애…….”

눌문은 감격에 겨운 눈을 껌벅껌벅 하며 마치 잠꼬대하듯 중얼거렸다.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품은 별안간에 숨길이라도 막힌 듯이 시근벌떡거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결엔지 그의 손에는 서리 같은 환도를 빼어 들었다.

“무 무엄한 놈!”

게거품을 흘리며 한 마디 배앝자 다짜고짜로 눌문에게 달겨들었다.

여럿은 이 뜻하지 않은 살풍경에 우하고 일어나서 두 사람의 사이를 가루 막았다.

“웬일이야, 웬일이야!”

수품은 제 분을 제가 못 참는 듯 몸을 사시나무 떨듯한다.

“무 무엄한 놈! 뭣이 어쩌고 어째! 꽃 애기씨를 손에 대면 녹아 나린다.

이눔! 꽃 애기씨를 손에만 대였담 봐라, 한칼에 네눔의 몸은 두 동강이가 날 줄 알아라!

수품의 호통은 뒤이어 또 떨어졌다.

숨은 사랑들[편집]

1[편집]

수품이가 다짜고짜로 칼을 빼어들자, 눌문은 웬 영문인 줄 모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하였지만, 수품에게 호락호락 질 눌문이가 물론 아니었다.

그 애티 있는 얼굴에 벌컥 피가 오르자, 어느 결엔지 그의 손에도 서리 같은 환도가 번쩍였다.

“이놈, 너만 칼이 있는 줄 아느냐! 누구를 보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느냐! 말이면 다 말인 줄 아느냐! 뭣이 어쩌고 어쩐댔지. 꽃 애기씨께 손을 대였담 봐라. 목을 비겠다. 원 같지도 않은 소리. 꽃 애기씨 말끝에 네 몸이 무슨 관계가 있기에 탄하고 덤벼든단 말이냐! 그 연연한 볼에 손을 대면 녹아 나릴 듯하다고 하였지, 누가 정말 손을 대여봤다더냐!”

하고, 눌문의 큼직한 눈은 화경같이 빛났다. 너무도 세찬 반박에 수품의 칼 쥔 손은 떨리었으나, 그 꼿꼿이 선 눈썹이 한번 찡끗하고 움직이자 왼 몸은 분노의 덩어리로 변한 듯, 그 가냘픈 체수가 빳빳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눌문을 노리는 가느다란 눈엔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 이를 악물고 잇새로 말을 배앝았다.

“네까짓 놈이, 네까짓 놈이 어디 언감생심 꽃 애기씨의 손톱 하나도 건드렸으면 당장에 천참만륙될 것. 그야 두말 할 게 있느냐! 네까짓 놈의 입길에 꽃 애기씨가 오르나리는 게 살이 떨린단 말이다, 피가 끓는단 말이다!”

“원 별놈의 별의별 소리를 다 듣겠구나. 꽃 애기씨 말만 들어도 네놈의 살이 떨릴 게 뭐란 말이냐? 그 따위 소리를 지망지망히 하다간 네놈의 목이야말로 열이 있어도 보전을 못할 줄 모르느냐? 건방지고 무엄한 놈!”

“오냐, 내 목숨이야 열이든 백이든 누가 네놈에게 염려를 하라느냐. 네놈의 목숨이야 내 삼척 장검이 한번 번득이면 가을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한조각 썩은 잎. 그까짓 썩은 잎쯤 베혔기로 살인이나 될 법하냐.”

“오, 나는 썩은 잎이고 네놈은 바루 금지옥엽이란 말이냐! 아무리 네 아비가 이찬 지위에 올라앉아 서슬이 푸르다 해도, 내 칼에 묻은 네 몸의 피는 씻어주기 어려울걸.”

“이놈, 아무리 불학무식하기로 존장을 쳐들어 욕지거리!”

하고, 수품은 분통이 터져서 더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비록 군주(軍主)의 아들이다마는 너 같은 썩은 선비쯤 백 명이고 천 명이고 한칼에 무찌를 내다.”

“어디!”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르자 수품의 날카로운 칼끝은 눌문의 가슴을 향해 정통으로 짓쳐들어왔다.

“이게 겨우 칼 쓰는 법이냐!”

눌문은 비웃듯 한 마디를 던지고 여유작작하게 수품의 칼을 막아내었다.

칼과 칼은 눈부신 달빛 아래 쨍하고 서로 부딪치며 한 줄기 흰 무지개가 흩어진다.

두 칼은 몇 번 마주쳤다 떨어졌다. 수품의 날렵한 칼 솜씨와 눌문의 세찬 검술은 막상막하 저절로 호적수를 이루었다. 피차에 약간 취기는 어리었을망정 능란한 솜씨는 좀처럼 실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러 친구들은 하도 어이가 없는 일이라, 애초엔 미처 말릴 생각을 못하였고, 나종에는 정말 칼날이 왔다 갔다 하고 보니 함부로 뛰어들어 갈라 놓기도 어려웠다. 몽롱한 취안들로 자기네 코앞에 벌어진 사단이 참인가 거짓인가 의심이나 하는 듯이 멀거니 있을 뿐이었다.

일진일퇴 오 합 십 합이 넘어가자 두 칼은 갈수록 살기를 띠고 어우러져 좀처럼 헤어질 줄을 몰랐다.

마츰내 칠부가 마지 못하는 듯 선뜻 제 칼을 뽑아 들고 사납게 날뛰는 두 전사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2[편집]

“이게 무슨 짓들이냐, 자네들이 미쳤단 말이냐!”

칠부의 호통이 떨어졌다. 어떻게 그 목소리가 호되었던지 정신을 놓고 섰던 몇몇은 경풍을 할 지경이었다.

평시에 점잖고 부드러워 보이던 칠부가 이런 벽력 같은 소리를 지닌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냉큼 칼을 던지고 물러서지를 못하느냐!”

두 번째 호령은 더욱 추상같았다. 그 의젓해 보이던 두 눈에는 불 같은 광채가 번쩍였다.

그 서슬에 두 사람은 움찔하고 칼을 멈추었다.

“도대체 자네들이 칼을 빼어든 곡절이 무엔가? 이게 임금께 충성된 일인가?”

칠부는 말끝을 약간 부드럽게 하면서도 두 친구를 번갈아보며 꾸짖는 듯 물었다.

“…….”

“…….”

싸우던 둘은 씨근벌떡 가뿐 숨길을 돌리며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임금께 충성되지도 않은 일, 그러면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기 위해서 칼을 빼어들었는가?”

“…….”

“…….”

“이도 저도 아니라면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기 위함인가?”

싸우던 이들은 말없이 고개만 수그러졌다. 칠부는 한층 목소리를 가다듬어, “둘이 버티고 서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적진과 대진 중이란 말인가? 왜 대답이 없는가? 화랑의 길을 가는 자가 살생은 않을 수 없는 일, 그렇다고 함부로 죽이지 말고 죽일 만한 자를 골라 죽여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들의 오늘밤에 저지른 일은 이 다섯 가지 경계에 모조리 어그러지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도 칼을 들고 섰을 터인가?”

두 사람의 손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쥐었던 칼이 일시에 힘없이 떨어졌다.

칠부의 얼굴찌는 새삼스럽게 엄숙해지고 그 목소리는 더욱 장중한 맛을 띠었다.

“더구나 이런 재미롭지 못한 사단이 꽃 애기씨로 말미암아 벌어졌다는 것은 더욱 통탄할 노릇일세. 입 밖에도 내지 못할 노릇일세. 그분을 가지고 설왕설래하다가 칼부림까지 하다니 될 뻔이나 할 말인가? 도대체 그분이 누구신가? 금지옥엽, 공주가 아니신가? 이 소문이 왁자하게 나서 대내에까지 들어가 보게. 위에서 얼마나 진노를 하실 텐가. 설령 위에서 아무런 처분이 안 계시다 해도 신자 된 도리에 배를 갈라 용서를 빌어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 아닌가? 항차 그분이 어떠신 분인가? 신라의 빛이시고 신라의 자랑이 아니신가? 그대도록 맑고 높고 아름다운신 분은 몇 백년 몇 천년 만에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시거나 하신다는 분이 아니신가?…….”

칠부는 잠깐 말을 끊었다. 그는 너무 감격에 겨워 목이 메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애기씨의 아름다움은 다시 이 하늘 아래에는 짝이 없으신, 백제에서도 고구려에서도 멀리 중원에서도 신라에 한 번 나서 그 애기씨를 지척에 뵈올꼬지고라고 발원까지 한다지 않는가. 우리가 다행히 이 땅 이 나라에 나서 그분을 우러러 뵈올 수 있는 것만 해도 영광이요 지복이어든, 만일에, 만일에…….”

칠부의 장강대하를 기울이는 듯하던 웅변이 금세로 더듬거린다. 그의 불같이 빛나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만일에 우리가 하찮은 시비로 그분에 털끝만치라도 누가 되고 옥에 티가 된다면 그런 죄송쩍고 아까운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말을 채 마치지 못해서 칠부는 칼을 던지고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수품과 눌문도 주저앉았다. 여럿 중에는 감격에 겨운 그 누구인지 훌쩍 소리까지 내었다.

3[편집]

과연 칠부의 말마따나 신라 선화 공주의 아름다운 이름은 천하에 떨치었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고 딸 삼 형제만 두었다는 것부터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접양지국 백제와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멀리 수(隋)나라의 조정에까지 화제에 오르나리게 되었다. 나쁘게 말하는 편은,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으니, 지금은 진평왕이 절륜의 용맹과 거대한 체구로 나라를 잘 다스리겠지만, 만일 죽기만 하는 날이면, 후사가 끊어져 내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리니 그 틈을 엿보자고 단안을 나리기도 하였고, 좋게 말하는 편은, 비록 딸은 딸일망정 맏공주가 인물도 출중하려니와 슬기가 놀랍고 덕성이 무던하니 여왕으로도 넉넉히 나라를 바루잡을 터인즉, 호락호락 넘볼 수도 없다고 관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십 년 후가 될지 이 십 년 후가 될지 모르는 노릇이라, 노련한 정치객 이외에는 그리 큰 흥미를 끌지 못하였고, 젊은 축의 속을 끓이기는 차라리 셋째 공주가 절세미인이란 점이었다. 이 소문이 어떤 경로를 밟고 어떻게 전파가 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마, 선화 공주의 자색이야말로 천하에 뛰어난다는 평판이 자자하였다.

젊은 장수나 공자들은 십 만 대병을 휘몰아 대번에 신라를 쳐 무찌르고 왕궁을 범한 뒤에 절세가인 선화 공주를 뒷 수레에 싣고 의기양양하게 개선을 해 보는 것이 미상불 그들의 호화로운 꿈이었다. 나라를 얻고 미인을 얻고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청춘과 야심에 불타는 그들의 일생의 소원이요 소망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신라 쪽 동편 하늘을 흘겨보며 장검을 어루만져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한한 자도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언젠가는 고구려 장수와 백제 왕자가 단신으로 장사치나 농부로 변장하고 국경을 몰래 넘어 서라벌 서울로 들어와서 왕궁을 엿본다는 풍문이 떠돌아서, 군사를 풀어 왕궁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거리거리에 방을 내붙이고 수상한 외국인 같은 눈치만 보이거든 곧 관가로 밀보하라고까지 한 일도 있었다.

다른 나라의 귀공자들도 선화 공주 때문에 이런 공단 같은 꿈을 꾸는 판이니 더구나 본국인 신라의 ,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태어난 다음에야 저마다 선화 공주에게 불 같은 향의를 가질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공주님이 심에 어찌하랴. 하늘 까마득하게 반짝이는 별임에 어찌하랴. 사색도 낼 수 없는 노릇, 호소도 할 수 없는 노릇. 가슴속 깊이깊이 숨은 사랑을 부둥켜 안고 남 모르게 제 애간장만 바짝바짝 태우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밤 흐무러진 한가위 잔치에서, 그 물씬한 향락의 분위기 안에서, 그 도취의 황홀경 속에서, 제각기 그리고 그리던 선화 공주를, 꽃 애기씨를 제 눈앞에 현실로 보고야 말았다. 백랍이라 하기엔 너무 생기고 돌고 옥으로 깎았다면 너무 따스할 듯한 그 살결을 현실로 보고야 말았다. 그 어여쁜 눈매, 그 연연한 뺨을 분명히 보았다. 가는 웃음이 실바람처럼 스쳐 가는 듯한 입술을 분명히 보았다. 그 옻빛 같은 머리 밑에 뽀얗게 드러난 살쩍을 분명히 보았다. 알맞게 편 목고개가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날씬한 가는 허리가 확실히 그들의 눈앞에 움직였다. 질질 흐르는 비단 옷자락 위로 무수한 별처럼 번쩍이는 주옥과 금은의 혼란한 꾸밈꾸밈이 정말로 그들의 눈을 어리게 하였다. 그 존귀한 모양 그 한아한 거동이 참말로 그들의 창자를 녹이게 하였다.

그들은 미칠 듯하였다.

왕궁을 떠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극히 사랑하는 이에게 한 발자욱이라도 더 가깝게 가고 싶었다.

새벽 이슬을 맞으면서도 다시 안압지 못둑으로 그들은 모였던 것이다.

그들은 더 참을래야 참을 수 없었다. 더 견딜래야 견딜 수 없었다. 더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저절로 선화 공주의 이름이 입길에 올랐다. 한번 그 이름을 듣자, 가슴이 울리고 창자가 울리고 왼 몸 뼈마디가 저리었다.

저 이외의 다름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슨 큰 모독 같았다. 큰 죄악 같았다. 까닭 모를 불덩이 같은 분노가 치받치어 칼까지 빼어들고 만 것이다.

먼저 칼을 뽑아 든 수품이가 조금 기단하였을 뿐 그들의 마음 경지는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적어도 수품, 눌문, 칠부 세 사람은 왜 그러냐 하면, 칠부는 당시 재상 상대등 노리부(駑里夫)의 아들이요, 수품의 아버지는 이찬 수을부(首乙夫)로 상대등에 다음 가는 지위에 있었다 선화 공주의 . 부마를 구하자면 이 두 사람이 첫 물망에 오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눌문은 비록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북한산주 군주(北漢山州軍主) 눌최(訥催)의 아들일망정 세 사람이 다 같은 참뼈(眞骨)로, 더구나 눌문은 어려서부터 화랑에 뽑히어 그 낭도가 오늘날 천 여명을 헤아렸고 왕의 총애도 두터워 불시 발탁으로 대아찬(大阿飱) 벼슬까지 받은 터이라 내심으로 만만한 자신은 결코 칠부와 수품에게 떨어지지 않았던 까닭이다.

4[편집]

한가위 잔치가 있은 지도 어느덧 열흘 넘게 지났다.

상대등 노리부의 작은 사랑에는 주인 칠부가 휘황한 촛불 아래 손자 병서를 보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미닫이를 한번 드르륵 열어젖히고 닫쳐진 덧문 문풍지를 손으로 더듬더듬 무엇을 찾는 듯하더니, 다시 미닫이를 닫다, 제 앉았던 다단향 책상머리와 옆을 두리두리 살피기도 하고, 나종에는 고개를 책상 밑에 처박고 들여다보기도 하며 무엇인지 분주히 찾는 모양이었다.

“대관절 이놈이 어디 숨었단 말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찾기를 단념한 듯 다시 책을 집어들었으되, 종시 마음이 쏠리지 않는 모양으로, 필경 책을 덮어버리고 와락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 거닐었다.

“미물도 사람의 정을 꽤 충동이거든. 허.”

한탄 비슷 쓴 웃음을 배앝는다. 본대부터 나이보담 노성한 그의 얼굴이건만 이 열흘 동안에 눈에 띄도록 수척해지고 앳된 티가 사라졌다. 눈등이 꺼지고 볼이 홀쭉 빨아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쓰르라미 우는 소리에 마음이 헛갈리어 보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쓰르람, 쓰르람! 단조로우나 애를 끓는 듯한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까닭 없이 귀에 울리고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는 이 조그마한 벌레의 정체라도 알아보려고 찾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가 하면 바루 책상머리에서 울고 그곳으로 눈을 주면 어느 틈엔지 책상 밑에서 재재거린다.

상 밑을 굽어 보는 새 영리한 그놈은 벽 속에나 숨은 듯.

“허, 고놈!”

그는 또 한 마디를 뇌이었다. 실없이 찾기를 시작한 노릇이 불찰인지 모른다 하잘것없는 조그마한 . 일이나마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여지없이 그의 비위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그의 싫어하는 것은 하필 쓰르라미 소리뿐이었다. 요새 와서 더욱 느껴지는 가을이 도대체 싫었다.

아닌 밤중에 우 하고 몰려 와서 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도 싫었다. 가까스로 든 잠을 깨워 버리는 고통은 어지간히 큰 것이었다. 정녕 사람의 발자 최소리를 내는 버석버석하는 낙엽 소리는 더구나 싫었다. 생생하던 푸른 빛이 하루밤 사이에 걷히고 누르불긋 단풍이 드는 것도 마땅치가 않았다.

왜 이렇게도 마음이 죄이는가. 왜 이렇게도 가슴이 뻑적지근한가. 그가 선화 공주를 사모하기는 어느 동료보담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는 어느 동료보담 지체가 높지 않은가, 나이가 차지 않았는가, 어른답지 않은가.

동료들 중에 가장 의젓하고 점잖다는 비평이 높은 그이어니, 입때 내색을 낼 리야 만무하였다. 내색을 내지 않기로 꽃 애기씨야 자기의 천생배필같이 든든한 자신이 없지 않았었다.

그렇던 것이 저번 한가위 밤을 지낸 뒤에는 어쩐지 마음이 서틀러진다. 자기의 경쟁자가 하나둘이 아니요, 또 결코 넘보지만 못할 작자들이었다.

이 둘 데 없는 심사를 누구에게 호소할까.

물론 당자인 꽃 애기씨에게 호소하는 것이 가장 첩경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가망도 없는 일.

그러면 누구에게.

한 번 생각이 이에 미치자 그의 가슴은 한 그믐 밤빛같이 어두워진다. 재상가 집에서 근엄하게 자라난 그는 절대로 권도를 쓸 생각도 못하였다.

그의 방안을 거닐던 발길은 별안간 뚝 멈추어졌다.

“에라, 아버지에게나 호소해 버릴까?”

언뜻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쳐간 것이다.

일인지하요 만인지상인 아버지, 임금님의 신임과 총애를 한 몸에 모으신 아버지, 그 어른이 드시면 안 될 리도 없을 상싶었다. 엄하신 때엔 열화와 같으시지만 벌써 칠순이 넘으시고 자기를 집안의 기둥으로 믿고 귀여워하시는 아버지시니 자기의 간곡한 소원을 아니 풀어주실 리도 만무할 듯하였다.

더구나 자기는 둘도 없는 외동아들이 아닌가.

“옳다, 아버지께 청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있는 용기를 다 내어 방장 큰사랑으로 건너가려는 임물이었다.

문득 댓돌에서 인기척이 나며 큰사랑에서 부리는 어린 종놈이 불쑥 나타났다.

“쇠불한께옵서 잠깐 오시라는 분부가 계시옵니다.”

칠부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이게 웬일로인가. 이야말로 천우신조가 아니냐. 내가 아버지께 여쭐 말씀이 간절하거늘 아버지께서 먼저 부르시니 일은 벌써 다 된 일이었다.

허둥지둥 큰사랑으로 건너가는 그의 발길은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불행한 행운[편집]

1[편집]

칠부의 아버지 노리부는 칠순이 휠씬 넘어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 재상이었다.

훤출한 키, 둥그스럼한 얼굴이 풍신도 좋으려니와 떡 벌어진 어깨판하며 꾸정꾸정한 허리하며 젊은 사람 뺨칠 만큼 건강하였다. 다만 이가 다 빠져 합죽한 입과 은사실 같은 흰 수염이 늙은이다웠을 뿐. 여섯 간이 넘는 넓은 방에 혼자 앉았으되 왼 방안이 거들먹하게 찬 듯하였다.

“아버지, 불러 계시오니까?”

장지를 열고 읍하고 서는 아들을 힐끗 바라보는 눈엔 자애가 흐르면서도 번쩍하고 광채가 돈다.

“이리 들어와 가까이 앉거라.”

자상스러우나 그 목소리는 우렁우렁 울리었다. 한창 당년 천군만마를 질타하던 호령조가 어딘지 남아 있는 탓이리라. 그는 한 나이나 젊었을 적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여러 차례 출전을 하였고, 그 때마다 번번이 대공을 이루어 오늘날 상대등의 높은 지위를 차지한 터이라, 오로지 문벌 덕택으로 벼슬계제만 올라간 위인과는 저절로 그 유가 달랐던 것이다.

칠부는 분부대로 공손히 들어와 아버지 멀지 않게 꿇어 앉았으나, 아까 제 방에서 생각하던 바와 같이 그렇게 쉽사리 제 사정을 이 아버지 앞에서 털어놓기가 여간 거북하고 어려운 노릇이 아닌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었다.

머리는 저절로 수그러지고 몸은 저절로 웅숭그려졌다.

노리부는 칠부의 앉은 꼴을 보고,

“그 앉음 앉음이 뭐냐?”

못마땅한 듯이 화를 내었다.

칠부는 가슴이 덜렁하였다. 역정만 내신다면 마른 나무에 불 붙는 듯하는 아버지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틀렸구나 ─ ! 속으로 생각하고 제출물에 실망을 하였다.

“아무리 아비의 앞이기로 사내자식이 그렇게 궁축하게 기를 못 펴고 앉았단 말이냐, 쯧쯧.”

아버지는 혀까지 찬다. 그러나 얼마나 깊은 사랑이 그 말 속에 숨겼느냐.

칠부는 오늘 따라 흑 하고 눈물이 날만치 감격하였다. 이런 좋은 아버지시니, 그 말씀을 사뢴다 해도 큰 꾸중을 모시지 않을 듯. 칠부의 가슴은 까닭 없이 두방망이질을 한다.

“그래, 너 요새『손자』병서를 보느냐?”

아버지는 엄부(嚴父)의 탈을 벗고 점점 자부(慈父)의 본색을 나타내었다.

“네에.”

칠부의 대답 소리도 흥겨로웠다.

“그래, 뜻을 알겠더냐?”

“자세히는 모르옵지오만…….”

칠부는 어리광 피듯 몸을 한번 추술렀다.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안단 말이냐?”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그 어수선한 한문을 무슨 수로 알알 샅샅이야 알 수 있겠느냐? 대강만 짐작을 해도 그만이지.”

“네에.”

칠부는 허청대 놓고 또 한 번 대답하였다. 실상인즉 아버지가 『손자』 병서를 손수 구해 주신 지가 한 달이 넘었다. 그렇게 술도 많지 않은 책이로되 이 때까지 다 읽지도 못하였다. 한문에 대한 남 못하지 않은 재주를 가져 문리까지 환하게 터진 칠부이매, 그 해석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아니지만, 읽은 대문조차 읽을 때뿐이지 도모지 기억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아니, 읽을 그 때에도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애당초부터 몰랐다는 것이 옳을런지 모르리라.

그대도록 이마적 그의 왼 머리가 마음은 선화 공주에게 쏠리었던 것이다.

── 만일 아버지께서 강이나 하라시면 어떡하나.

불현듯 일어나는 생각에 칠부는 속으로 쩔쩔매었다.

“그래, 말타기와 칼쓰는 것보담 더 재미가 있더냐?”

아버지는 잼쳐 물었다.

“…….”

칠부는 이 엉뚱한 질문에 무에라고 대답을 해야 옳을지 몰랐다.

그래 요새는 “ , 글공부만 하고 검술 공부는 도모지 않는단 말이냐?”

아버지의 두 번째 엉뚱한 신문이 또 떨어졌다.

칠부는 더욱 움찔하였다. 그는 아버지가 검술을 여간 사랑하지 않는 줄 잘 안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 한번 칼을 잡으면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었다는 검객이기도 하다. 필마단도로 적진을 짓쳐 들어가면 수많은 적군은 물길 갈라지듯 흩어지고 거침없이 적장의 머리를 버혀 기공을 세우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진 재상이 되어 칼을 놓은 지도 벌써 수십 년이 넘지마는, 지금도 칼집을 황금으로 장식한 삭방검 한 자루는 언제든지 벽상에 걸려 있었다. 그는 중원에서 나는 이 명검을 손에 넣으려고 수천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는 칼에 대한 애착조차 깊었던 것이다.

칠부는 저도 모를 사이에 불빛을 받아 유난히 번쩍이는 황금 칼집을 쳐다보며,

“네에, 이따금씩 후원에서 검술 공부도 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제가 턱없는 사랑에 얽매이어 검술 공부까지 집어 치웠다면 앉은자리에 당장 벼락이 떨어질 것은 뻔한 일이 아니냐. 더구나 한번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리는 나달에는 제 소원과 계획이 한꺼번에 물거품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냐.

“정말이냐?”

아버지는 한번 다지고 그 광채 도는 눈이 칠부를 쏘아본다.

2[편집]

── 아뿔싸, 내가 괜히 거짓말을 하였구나, 아버지께서는 내 폐부까지 꿰뚫어 보시는구나.

칠부는 송구스러워서 안절부절을 하였으나, 아버지는 이내 천장을 쳐다보며 자탄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흥, 인제는 내가 귀까지 먹었나 보구나. 네 칼 우는 소리도 벌써 아니 들린 지가 오래니.”

칠부는 더욱 양심이 찔리었다. 이대도록 저를 믿어 주시는 아버지를 속인 것이 죄송스러웠다. 지금 사뢴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란 것을 까바치기 위해서라도 선화 공주 일절을 설파해야 되리라고 결심하였다. 그는 도실러 앉기까지 하였지마는 좀처럼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부자 사이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노리부도 무슨 깊은 생각에 잦아진 듯 한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그래,『손자』병서도 읽고 검술 공부도 하고, 오 ─ 그래서…….”

노인답게 아까 한 말을 또다시 되풀이한다.

“너도『손자』의 뜻을 대강 짐작한다니 말이지.『손자』란 정말 천하에 첫 손가락을 꼽을 기서(奇書)이니라. 한적(漢籍)이 아무리 많다 하나 『손자』만한 기이한 서적은 다시 없느니라. 그네들의 소위 성경현전보담도 내 생각엔 더 특이한 책인 줄 안다. 그야말로 만인적(萬人敵)을 알으키는 좋은 책이니라. 그러나……『손자』를 읽어 안다 한들…….”

노인의 말끝은 흐리마리하다. 다시금 골똘히 무슨 생각을 하다가,

“『손자』를 홑으로 병서로만 알아서는 아니 된다. 책 지은 사람이 병법의 대가라고 해서 꼭 전쟁에만 소용 있는 책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단 말이다. 그야 물론 싸우는 데 필요한 진리와 술법을 늘어놓은 것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성현이 설파 못한 진리까지 적힌 책이니라. 전쟁이란 하필 갑옷 투구하고 창과 칼을 들고 나서야만 전쟁이 아니니라. 넓게 생각하면 이 세상이란 왼통 전쟁터다. 그러니 우리 일상 생활에도 병서는 물론 필요한 것. 이왕 시작한 터이니 잘 읽어는 두어라마는…….”

노인의 말투는 점점 이상해진다. 칠부는 속으로 의아하였다. 기껏 자기가 읽어라 해 놓고, 읽어나 두어라마는 ─ 이라 함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아무리 정정은 하셔도 노인은 역시 노인이시라, 이게 소위 망녕의 시초인지도 모른다. 효성스러운 칠부는 어쩐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아버지, 읽어나 두란 말씀은 무슨 뜻이시온지?”

칠부는 한번 채쳐 물어 보았다.

어느 사이인지 아버지는 눈을 딱 감고 몸을 흔들흔들 하시며 얼른 대꾸가 없으시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합죽한 입이 더욱 합죽해진 것 같고, 흰 구레나룻 옆으로 불쾌한 뺨빛이 적이 젖힌 것 같았다.

“쓸데가 없기로 좋은 책을 읽어두는 게 안 될 짓이란 말이냐?”

이윽고 아버지는 도리어 더럭 화증을 내었다.

“그러고『손자』전편의 정수가 어느 마디에 뭉쳐 있는 줄 네가 아느냐?”

“…….”

칠부는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역정과 힐문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손자』의 천언만언 중에 이 한 마디에 가장 뼈가 맺혔느니라. 한자로는 뭐라든가…… 으, 치지사지이생(置之死地而生)이라든가, 죽을 땅에 놓아 두어야 산다는 말이다. 참 용한 말이니라. 꼭 죽을 땅에 두어야 산다는 것은 물론 군사를 가르친 말이겠지만, 제 몸도 죽을 땅에 던져 놓아야 살아나는 길이 나서는 법이니라 . 몸을 사리고 살 곳을 찾는 사람은 정말 죽을 고비로 걸어들게 되느니라. 목숨을 떼어놓고 대드는 사람에겐 언제든지 살 길이 열린다는 말이다. 이 한 마디를 부디 명념하여라.”

칠부는 아버지의 유언이나 듣는 듯이 눈시울이 뜨끈뜨끈해졌다.

3[편집]

아버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금 말끝을 이었다.

“나는 오늘날까지 네가 하루바삐 자라서 국가의 간성이 되기를 빌었었다.

지금 비록 나라의 힘은 나날이 늘어간다고는 하지마는, 동해 바다 한 모서리에 붙은 손바닥만한 이 나라가 아니냐. 백제를 아우르고 고구려를 품에 넣어 삼한을 통일한 다음에 강대한 한족과 중원 천지를 각축할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 태어난 자로 오죽 할 일이 많으냐. 해서 보람 있는 일이 산같이 쌓이지 않았느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고 나라를 북돋우고 문호를 빛내기가 손바닥 뒤집기보담 더 쉬운 이 때가 아니냐. 이야말로 남아로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 이 좋은 판국에 부드럽고 향기로운 뒷방 구석에 틀어박힌다는 건, 피가 끓는 젊은이로는 차마 못할 노릇…….”

아버지의 어세는 나리지르는 폭포와도 같이 급격해진다.

칠부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슴이 덜컥덜컥 나려앉았다. 아버지는 어디서 어떻게 아셨는지 제 옹졸한 속을 화경같이 들여다보신 것 같다.

“─ 세상에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나가면 천병만마를 질타하여 적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들어오면 만백성과 뭇 신하를 거느리어 성명을 받드는 것이 얼마나 쾌한 노릇이냐. 설령 말가죽에 시체를 싸고 돌아오는 한이 있더래도 그 꽃다운 이름은 죽백에 길이길이 남을 것. 남고 안 남고는 둘째, 셋째. 첫째 남아로 떳떳한 일이 아니다. 응, 그렇지, 칠부야!”

칠부는 웬 영문인지 몰랐으나,

“네에.”

하고, 맞장구를 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렇겠지. 네 뜻을, 나도, 잘, 안다.”

하고, 노리부는 어리둥절해 하는 칠부를 귀여운 듯 아까운 듯 바라보다가 휘 한숨을 내쉬었다.

“내 비록 외동아들 너일망정 보신지책만 찾고 열 손 재배한 채 부귀와 영화만 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출장입상은 부자 양대에 복이 과분한 줄 알았지만 자유로운 몸으로 나라를 위하여 임금을 위하여 든든하고 씩씩한 일꾼이 되기를 바랐더니라 . 나라를 위하여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처지에 있기를 바랐더니라. 나라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곧 나라 속에 사는 것, 그 오죽 영광스러운 노릇이냐, 후.”

하고, 아버지는 기가 막힌 듯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말씀이나 결코 망령은 아니었다. 유언도 아니었다. 무슨 깊은 곡절이 있는 것만은 짐작이 아니 갈 수 없었다.

“호화로운 의복과 달콤한 술과 혼란한 이부자리 속에 파묻히어 사내의 일생을 보내다니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아버지는 연신 혼잣말을 뇌이고 또 뇌이었다.

“무슨 말씀이시온지?”

칠부는 궁금증을 걷잡을 수 없어 아버지의 기색을 살피며 다시 물었다.

노리부는 아들의 말은 들은 척도 아니하고 제 말 뒤끝만 잇는다.

“꿈에도 뜻하지 못한 노릇. 탈은 꼭 한가위 잔치야…….”

“네?”

하고 칠부는 깜짝 놀래었다. 그러면 한가위 잔치 끝에 선화 공주로 말미암아 싸움이 일어나고, 수품과 눌문이 칼부림까지 한 사단이 어느 틈에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는가. 이런 말이 날까 봐 자기가 그렇게 애를 졸이며 두 친구를 뜯어 말리고 여러 친구에게도 각별히 단속을 하였거늘, 필경엔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마츰내 큰 말썽을 버르어집어낸 모양.

─ 에익, 경망한 녀석들, 어느 놈이 입을 놀렸을까?

그 날 밤 하인들은 다 보냈고 몇몇 절친한 친구 이외에 잡인이라고는 없었으니 말을 내었다면 그 때 한 축에 끼었던 어느 놈의 소위가 분명하였다.

─ 이런 끔찍한 말을 입 밖에 내다니.

칠부는 속으로 발을 동동 굴리었다.

아버지는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이윽히 아무 말이 없다가,

“이번 한가위 잔치를 너희들은 다 범상하게 알았겠지만, 속살로는 부마감을 구하실 겸 너의 젊은애 축까지 모조리 부르시고 예년보담 잔치도 더 광장하게 차리신 게다. 알아듣겠니?”

혹시나! 하고 칠부의 가슴은 뛰었다.

“그래서, 네가 첫째 물망에 올랐단다.”

아버지는 배앝는 듯 한 마디 던지고 입을 닫아버렸다.

칠부는 아버지의 앞인 줄도 잊어버리고 무망중에 몸을 소스라쳐 일으켰다.

그는 왼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시 펄썩 주저앉았다.

바라고 바라던 커다란 행복이 이렇게도 쉽사리 굴러 떨어질 줄이야.

4[편집]

칠부는 제 귀를 의심하였다.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도 가슴을 쥐어뜯고 지금도 아버지께 이 청을 드릴까 말까 마음을 졸이던 판이 아니냐.

그는 장지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산이고 들이고 천방지축 헤매고도 싶었다.

그냥 이대로 가만히 앉아있다가는 이 엄청난 행복의 바위에 지질리어 두 수 없이 숨이 막히고 말 것 같았다.

그는 수수께끼 같은 아버지의 말씀을 분석해 볼 나위도 없었다. 그는 맏공주에 덕만, 둘째 공주에 월만이 있는 엄연한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공주라면 그의 일구월심에 맺히고 그리운 선화 공주 단 한 분이 있을 뿐이었다.

노리부는 섰다 앉았다. 상례를 벗어난 제 아들의 행동을 가여운 듯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위로하듯 타일렀다.

“이왕 그렇게 된 것을 지금 와서 안절부절못하면 어떡하느냐! 위에서 그 말씀이 계시기에 나도 몇 번 소신의 자식이 인물이 출중치 못하니 공주님을 받들어 뫼실 수 없다고 아뢰었지만 굳이 듣지를 않으시니 어떡하느냐 말이다. 왕명이시니 어떻게 거스를 수 있니? 너도 단념을 하여라.”

칠부는 들을수록 용솟음해 오르는 기쁨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저 이외에 다른 사람은 물망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넌즈시 물어 보았다.

“왜 여럿이 있었느니라. 이런 말은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된다. 첫째 죽은 이찬 종세(宗世)의 아들 음(飮)이 뽑혔으나 너무 왕실과 연줄이 가까웁다고 꺼리시고, 그 다음에는 이찬 수음부의 아들 파진찬 수품이 지체로 보아서 쩍 말 없을 자욱이지만, 당자의 몸피가 가냘프니 너무 약하지 않을까 염려하셨고, 또 그 다음엔 대아찬 눌문이 활달한 기상으론 볼 만한 점이 없지 않았으되 나이도 어리거니와 진중치가 못하다 하여 필경엔 너에게로 탁방이 난 게란다.”

─ 그러면 그렇지.

칠부는 좋아라고 길길이 뛰었다.

─ 제까짓 놈들이 어림이나 있는 일이냐. 언감생심 내 발 밑에나 따를 것이냐.

칠부는 난데없는 자부와 자신이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하였다. 더구나 한가윗날 새벽 수품과 눌문이 칼까지 빼어들고 꽃 애기씨를 다투던 것을 생각하면 코웃음이 절로 터졌다.

─ 어처구니도 없는 놈들 같으니.

칠부는 또 한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노인의 잠꼬대는 또다시 흥분된 칠부의 귀에 응얼거려 들리었다.

“너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한번 부마가 되면 꼼짝을 못하는 법이다. 지극히 그 몸을 아껴야만 한다. 싸움에는 물론 못 나가려니와 나라 정사에도 참예를 못하는 법이다. 털끝만치라도 그 몸에 해자가 붙어서는 아니 되는 까닭이다. 벼슬 계제가 아무리 높아도 정작 정사에는 왈가왈부를 못하는 법, 그저 허위(虛位)를 지킬 뿐이니라.”

그제야 칠부는 아까부터 아버지의 탄식하는 까닭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 같은 기상으로 아녀자에게 매인 몸이 되어 군사에 정사에 마음대로 뜻대로 권력과 경륜을 힘껏 휘두르지 못하는 것이 딴은 쓸쓸도 하리라, 적막도 하리라. 자기가 걷던 길로 자기 아들이 못 걸어 가는 것이 무한히 슬프기도 하리라.

그러나 정작 당자인 칠부 저는 어떠냐. 꽃 애기씨만 인해를 삼는다면 하늘을 주어도 아깝지 않고 땅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그까짓 공명이 다 무엇이냐! 그까짓 영달이 다 무엇이냐. 죽백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다 무엇이냐! 못난이로 반편이로 천추만세에 손가락질을 받는다 해도 하상 대사이랴!

한평생 그이의 곁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 곧 소원이 아니냐! 그까짓 병서 읽은 것 쓰지 못하는 게 그렇게 원통하랴! 그까짓 검술 재조 못 부려 보는 게 그렇게 애닯으랴……!

“더구나 이 공주님이야 예삿 공주님이시냐. 다 같은 공주님이시라도 유만부동, 이 나라의 대통을 뒤이으실 맏공주님이 아니시냐…….”

“네? 아버지, 아버지!”

칠부의 숨길은 삽시간에 가빠졌다.

“그러면, 그 그러면……저어……맏공주님, 더 덕만 애기씨 말씀이십니까?”

칠부의 말은 더듬거린다. 찡하고 우는 머릿속은 벼락이 금시에 나리친 듯.

“그럼 맏공주님이 아니시고?”

하고, 노리부는 자개바람이나 난 듯이 실룩거리는 아들의 기색을 괴이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사랑의 길목[편집]

1[편집]

“맏공주, 맏공주!”

칠부는 기진맥진, 제 방에 머리를 싸고 드러누워서 혼자 수없이 중얼거렸다.

칠부는 그 날 밤 아버지로부터 무서운 선고를 받은 이후, 벌써 여러 밤을 뜬눈으로 밝혔다.

등골이 화끈하고 달았다가, 오싹하고 추웠다가, 진땀이 줄줄이 흘러나리고, 상기된 눈엔 시뻘건 핏발이 일어섰다. 핑핑 내어둘리는 머리는 천 근보담도 더 무거웠다.

“맏공주, 맏공주!”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이 불꽃처럼 일었다가 스러졌다가 하던 끝에, 마지막으로 저절로 입술을 뚫고 나오기는 이 한 마디였다.

“맏공주, 맏공주!”

아버지의 입에서, 벽력 같은 이 말이 떨어질 때보담은, 얼마쯤 그 끔직한 울림이 줄어졌지마는, 제가 속살거려 제가 들어보아도, 언제든지 귀는 찡 하고 울었다. 울리는 것은 귀뿐만이 아니다. 그의 왼 몸과 왼 넋이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였다. 그 한 마디는 마치 어마어마한 바위덩이 모양으로 그를 누르고 지질렀다. 그 세찬 압력에 자기의 안타까운 사랑은 두수 없이 꼼짝달싹을 못하고 그대로 질식을 해 버릴 것 같았다.

셋째 공주 선화에 대한 불같은 사모를 걷잡다 못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아버지께 이 사유를 사뢰려고 결심을 하였고, 그 결심을 하자마자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 그는 겅정겅정 뛰지 않았던가. 막상 아버지의 앞에 앉고 보니, 쉽사리 말은 나오지 않고 몇 번이나 헛되이 몸을 도스르고 마음을 도슬렀던가. 생각하면 기괴한 운명적인 밤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천연덕스럽게『손자』병서의 강(講)을 받다시피 하시고, 검술 공부를 채근하시고, 향기로운 규방에 파묻히어 장부의 일생을 늙히는 것을 한탄하시며, 좀처럼 칠부에게 말할 기회를 주시지 않다가, 뜻밖에, 천만 뜻밖에 나라에서 부마 감을 고르셨다는 비밀을 알으켜 주시고, 다른 사람 아닌 자기가 첫 물망에 올랐다 하실 적에 그는 얼마나 기뻐하였던가. 금세로 하늘에나 오르듯 행복의 절정에 곤두서서, 제가 제 몸을 어떻게 주체를 해야 옳을지 몰랐었다. 아버지의 앞인 줄도 잊어 버리고 마치 미친 사람 뻔으로 벌떡 일어서고 펄썩 주저앉고……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바루 제 눈 속에 뿌리를 박고 뻗쳐 일어선 듯, 아득하고 캄캄하던 앞길이 환하게 열리었었다.

부마라면 선화 공주의 배필을 두고 이름이요, 결코 다른 공주의 남편일 까닭이 없었다. 부마에 뽑혔다는 것은 곧 선화 공주와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이요, 꿈엔들 다른 공주와 짝이 될 리가 없었다. 일구월심 머리와 가슴속에 그리고 새긴 것이 선화 공주 단 한 분뿐이어니, 그분 아닌 다른 공주에게 생각을 돌릴 여지가 없었다.

그는 깜박 다른 공주의 존재를 잊었던 것이다. 선화 공주 이외에, 첫째 덕만 공주, 둘째 월만 공주, 한 분도 아니요 공주가 두 분씩이나 있는 것을 그는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다.

잊은 것이 잘못이라면 큰 잘못이요, 어림없다면 어림없는 수작이로되, 그때 칠부의 머릿속엔 공주란 말이 오직 선화 공주 단 한 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그분 아닌 다른 분도 공주라고 부르는 것이 도리어 고이쩍게 들릴 지경이었다.

‘맏공주’란 말을 들을 때, 그는 앉은자리에서 벼락을 맞는 듯하면서도 오히려 제 귀를 의심하였다. 아버지께서 황송한 말로, 미치셨거나 찰망녕이 나셨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혼란한 그 순간이 지나가자, 미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요 자기 자신인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불보담도 더 밝은 명명백백한 사실을 그는 앙탈하랴 앙탈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부마를 고르신다면 물론 맏공주님의 배필을 먼저 구하실 것이 의당한 일이었다. 첫째 둘째를 건너뛰어 셋째 공주 꽃 애기씨의 배필부터 뽑을 까닭이 없었다.

사실이 엄연하면 엄연할수록 그의 절망은 더욱 컸다. 찬란한 행복의 꽃구름에 싸여 둥실둥실 하늘 끝까지 떠올라가던 그는, 담박에 천길만길 절망의 구렁텅이로 거꾸로 떨어져 버렸다.

“저는 싫습니다. 죽는 한이 있드래도 싫습니다. 맏부마 노릇은…….”

하고 울부짖어 보았으나, 아버지는 눈을 감으신 채 아무 대꾸가 없으셨다.

“낼, 조정에 들어가시옵거든, 이런 말씀을 아뢰 주시옵소서.”

또 한번 부르짖었다.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떠서 못마땅한 듯이 애원하는 아들을 쏘아보았다.

“안 될 말이다. 지금 와서 싫다면 될 말이냐. 내가 입때 뭐라고 타일르더냐. 군부의 명령을 어떻게 거슬린단 말이냐. 안 될 말을 중언부언하면 무슨 쓸데가 있느냐. 사내자식이 한번 안 될 일이라 생각하면 선선히 단념을 해 버려야지.”

아버지의 마지막 선고는 단념하라는 것뿐이었다.

내가 미친놈이야 미친놈이야 ─ , . 부마라면 아직 시집 안 가신 맏공주님의 신랑감 말이겠지. 어째 엉뚱하게 꽃 애기씨를 생각했더란 말인가.

제가 생각을 해 보아도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그릇된 지레 짐작만 하지 않았더래도 이 뼈마디 마디까지 저리고 쓰린 고통이 얼마쯤이라도 덜한 것을. 제 품속에 갈데없이 안긴 줄 알았던 행운이 실장인즉 피치 못할 액운인 줄 한 순간 먼저 알기만 해도 이대도록 살을 오려내는 듯이 원통하고 애숙하지나 않을 것을. 그런 액운을 다만 한 찰나 동안이라도 행운으로 기뻐 날뛰다니.

액운이라도 지독한 액운이었다. 맏부마로 뽑히지만 않았어도 실낱 같은 희망이 없지 않다. 그러나 맏부마로 작정되는 그 시각이 벌써 선화 공주의 배필 되기는 영영 틀리는 운명적 시각이다. 이런 줄은 모르고, 제가 부마로 뽑혔다는 바람에 으쓱 어깨가 올라가며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랑의 경쟁자 수품과 눌문을 비웃던 생각이 났다.

─ 제깐 놈들이 언감생심 내 대적이 될까 보냐.

하고, 뽐내던 것이 쑥스러웠다. 저는 희미한 희망조차 아주 끊어졌으되, 그들은 운수만 좋으면 어느 놈이고 정작 꽃 애기씨의 사랑을 누릴 수도 있지 않으냐.

─ 칠부는 맏사위님으로 뽑혔다니, 흥.

하고, 자기를 비웃는 갈걍갈걍한 수품의 얼굴과 두툼한 눌문의 입술이 아찔아찔하는 눈앞에 어른거리었다.

2[편집]

─ 맏부마가 되는 것이 그렇게 하찮은 일일까?

칠부는 비웃는 수품과 눌문의 환영에 대항이나 하는 듯이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정상하게 생각한다면 맏부마가 되는 것이 결코 나쁜 일도 아니요 슬픈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남에게 비웃음 받을 까닭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영광이라면 이에 더 큰 영광이 없고 명예라면 이에 지나친 명예가 또다시 없으리라. 아버지의 말씀마따나 태자가 없으시니 지금 나랏님의 천추만세 후에는 맏공주 덕만 애기씨가 이 나라의 대통을 뒤이으실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는 당당한 이 나라 여왕의 남편이 아니냐. 비록 지엄한 자리는 아니라 하더래도 이 나라의 극존극귀한 자리에 자기는 힘 안 들이고 올라앉는 셈이 아니냐.

더구나 덕만 애기씨도 , 결코 박색이 아니다. 꽃 애기씨처럼 아기자기한 자색만 없다 뿐이지 출중한 인물은 인물이다. 동녘 하늘에 둥실 솟은 보름달과 같이 희고 맑고 둥글고 환한 얼굴은 어느 한 구석 빈 데도 없고, 어느 한 모 곯은 데도 없었다. 부처님 귀처럼 두둑한 귓부리가 풍성풍성한 두 뺨은 얼마나 의젓하고 덕성스러운지 몰랐다.

칠부는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덕만 공주를 눈앞에 그려 본 적이 없었다.

선화 공주와 또 달라서 맏공주님이시라 더욱 성스럽고 존귀하신 터이므로 감히 사모하는 열정을 쏟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거니와, 꽃 애기씨의 환영이 머리에 가득 차고 가슴에 가득 찬 칠부로서는 비단 맏공주뿐 아니라, 다른 어느 여인도 그의 마음에 머리올만한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인제야 그는 덕만 공주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고 스스로 황홀하였다.

그 어글어글한 눈매는 너그럽고 다정한 웃음을 풍기면서도 한 줄기 맑은 광채가 쏘는 듯이 일어난다. 번듯한 이맛전엔 윤끼가 흐르고 숱많은 새까만 눈썹엔 서기가 어린 것 같다. 가득한 아래턱은 몽실몽실 갓 따다 놓은 복숭아 같고, 알맞게 일어선 코허리와 오목한 코끝이 상아로 깎아낸 듯이 아름답고 씩씩한 기운이 떠돌았다.

꽃 애기씨를 아츰 이슬을 머금은 한 떨기 해당화에 비긴다면, 덕만 애기씨는 푸른 물결을 헤치고 솟아나는 부용과도 같았다. 하늘하늘하는 엷은 구름을 나부끼며 돌아오는 반달이 꽃 애기씨의 양자라면, 덕만 애기씨는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두둥실 떠오르는 햇발과도 같았다.

─ 잘나신 얼굴, 아무렴, 잘 나신 얼굴이구 말구.

칠부는 자기를 다짐 두는 듯이 한번 뇌어 보았다.

그렇다. 너무도 잘나신 얼굴이었다. 너무도 잘나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와 인연이 멀었다. 동이 떨어졌다.

우러러 뵈올 얼굴이요, 가까이 들여다볼 얼굴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누르는 위엄이 흘렀다. 어딘지 모르게 감히 범치 못할 무엇이 움직였다. 높고 높으신 어른으로 위해 올리고 받들어 올릴지언정, 아름다운 임으로, 사랑하는 안해로 백년을 지내기엔 너무 벅차고 송구스러웠다.

─ 그분의 치마 밑에서 목을 움츠리고 뒷방 구석에 갇힌 몸이 되어 아무런 나랏일에도 참예를 못하고 아까운 세월을 보내게 되다니 칠부는 필경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부마가 되기만 될 말로야 일생을 반편으로 판관으로 지내어도 고소원이라던 칠부가 아니었던가. 아버지의 쓸데없는 걱정을 오히려 망령으로 돌리던 칠부가 아니었던가. 다 같은 공주 이건만, 한번 사람이 바뀌고 보매, 나라의 부마란 죽은 목숨보담 더 불쌍하고 가련한 것이었다. 고량진미와 능라금침에 파묻히어 그날 그날을 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갑갑하고 답답한 노릇이냐.

─ 세상에 사내 대장부로 태어나서 출장입상은 못할망정 일거수 일투족의 자유조차 잃어 버리고 한평생을 안해에게 매달려 지내다니 될 말인가, 될 말인가!

칠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탄식을 그대로 되풀이하였다. 그 어려운 한문 글자를 뜯어가며 가까스로 깨친『손자』병서는 어디다가 쓴단 말이냐. 십 년 가까이 배우고 닦은 검술을 속절없이 부려 보지 못한단 말이냐.

─ 안 될 말이다, 안 될 말이다.

접친 듯이 누웠던 칠부는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찔 하고 내둘리는 머리를 그는 두 손으로 부등켜 쥐었다.

─ 사내란 나면서부터 사방(四方)에 뜻을 둔다 하였거늘, 삼국 풍운이 어지러운 오늘날 배운 재조를 한번 부려 보지 못하고 분내와 향내에 결은 규방에서 헛되이 잦아질 지경이면 차라리 지금 죽어 버리는 것이 오히려 쾌하지 않으냐!

칠부는 팔짱을 끼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였다. 그는 이루어질 가망도 없는 사랑의 번민과, 밤빛같이 어두운 제 장래에 실망한 나머지, 참말로 죽음의 길을 선택해 보았다.

대번에 목을 찌르거나 배를 갈라 버리면 쉽사리 요정이 날 것이지만, 그것은 너무 보잘것없고 열쩍은 짓 같았다. 대장부의 죽음으론 너무도 무성무취하지 않으냐.

이왕 목숨을 떼어놓은 다음에야, 필마단도로 적진에 짓쳐 들어가 힘껏 마음껏 능란한 검술 솜씨를 부릴 대로 부리어 추풍낙엽같이 적장과 적군의 목을 무수히 버히다가, 세궁역진, 칼이 부러지거든 비장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통쾌할 것 같았다.

─ 가자, 백제의 변경으로 가자. 지금 백제 군사가 쳐들어와서 분요를 일으켰다는 속함(速含), 앵잠(櫻岑),기잠(蚑岑) 등 육성(六城)으로 가자. 거기야말로 죽을 땅이 나를 기다리리라.

내일 아버지께 여쭈고 출전을 자원할까도 싶었으나, 좀체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실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아버지께서는 이 비장한 청을 들어 주신다 해도, 이미 부마로 작정된 몸이라, 나라에서 허락해 주실 리 만무할 듯하였다.

가자면 차라리 아무도 , 몰래 이 밤으로라도 길을 재촉하는 수밖에 없다.

─ 칠부는 벽에 걸린 단도를 떼어 허리에 차 보았다. 정말 밤길을 떠나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 모양으로 칼을 차고 전포(戰袍)를 갈아 입으니, 차비는 이만하면 그만이었다.

문을 박차고 나서려다가 말고, 그는 잠깐 망설이었다.

─ 그런데……꽃 애기씨를.

전지에 나가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죽는 것은 좋지마는, 죽기 한 걸음 전에 꽃 애기씨의 얼굴이 보고 싶다. 의엿한 작별 인사는 못할지언정 먼 빛으로라도 바라보고, 제 마음으로나마 작별을 하기 전에는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듯하였다.

─ 어떡할까.

에라, 이왕 내친 걸음이 아니냐. 지금 당장 궁으로 들어가자. 궁장이 아무리 높다 한들 뛰어넘을 도리가 바이 없지도 않으리라. 한번 궁 안에 들어선 다음에야 몇 번 궁중 출입도 해 본 터이니 구중궁궐이 깊다 한들 꽃 애기씨의 별당을 못 찾을 리도 없으리라.

칠부는 마치 허깨비에 홀린 사람 모양으로 진동한동 자기 집을 빠져 나왔다.

3[편집]

어느덧 팔월 달도 그믐이 가까워, 자정 겨운 밤 공기는 선뜩선뜩 등골에 스며들었다.

칠부는 길고 긴 궁장을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와글와글 들끓던 칠만 호 서라벌 서울도 깊은 잠에 떨어진 양, 죽은 듯이 괴괴하다. 대낮에도 으쓱한 이 곳이어니 이 캄캄 칠야에 어리친 개아미 한 마리 얼씬거릴 리 없었다. 바루 길옆 황룡사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결에 댕그렁댕그렁 한층 더 적막을 자아낼 뿐. 가만가만히 발소리를 죽여서 걷는 걸음이건만 서벅뚜벅 하는 제 가죽신 소리만 유난히 귀에 울렸다.

─ 이쯤이면 꽃 애기씨가 거처하는 별당 어름이 될까.

칠부는 이따금씩 발길을 멈추고 기웃거려 본다.

그는 몇 번 궁중 출입을 한 탓으로, 왕과 왕후께서 계시는 정침이 어디쯤이고 애기씨들의 별당이 , 대개는 어느 지점이리라는 짐작이 없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밤에 항차 드높은 담을 격해 놓고 그 지점을 점쳐 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렵다기보담 귀신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하건만 이쯤이나 될까, 저쯤이나 될까, 헛되이 머리를 짜 가며 궁장을 더듬어 돌고 또 도는 것은, 담을 뛰어넘어 공주의 처소까지 가장 가까운 거리를 미리 자질한다는 것도 이유는 이유리라.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는 동안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좋을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실상인즉 이 궁장을 뛰어넘기가 집에서 생각하던 것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높이는 두 길이 넘고 넓이는 한 간통이나 될 듯한, 굼튼튼하고 육중한 궁장 ─, 그것은 마치 어마어마한 거인(巨人)의 떼 모양으로, 칠부의 앞길을 막아서서 놀리고 얼러대는 듯하다.

─ 네까짓 놈이 이 담을 넘어 보아, 어림도 없어.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를 것 같다. 반듯반듯하게 정 맞힌 돌들이 어둠 속에서 힐끔힐끔 사나운 눈알을 부라리는 것 같다.

한식경 넘게 칠부는 궁장을 돌다가 지친 듯이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 내가 이 담을 뛰어넘어 공주 처소에 찾아 들어간다 한들…….

언뜻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불 붙는 듯하던 정열이 잠깐 고개를 수그렸다.

─ 지금이 어느 때냐, 자정이 넘어 축시가 가깝지 않았느냐. 꽃 애기씨는 이미 공단 같은 꿈길을 걸으리라. 무망중에 문을 열고 뛰어들면 그분은 얼마나 놀랄 것이냐. 혹은 소리라도 칠는지 모른다. 그러면 궁중은 발칵 뒤짚히리라. 시녀들이 뛰어오고, 시위부(侍衛府) 군사가 들끓어 나오고…….

칠부의 용솟음하던 용기는 부쩍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한가위를 지낸 지도 어느덧 보름, 그 동안에 꽃 애기씨는 얼마나 더 어여쁘고 아름다워졌을까. 하루하루 방싯방싯 벌어지는 꽃봉오리 같은 그 얼굴이 얼마나 더 피어났을까.

─ 나는 이왕 죽은 목숨이 아니냐. 목숨을 떼어놓은 사람이 아니냐. 무서울 것이 무엇이고 겁낼 것이 무엇이냐.

─ 이 못생긴 놈아. 죽으러 가는 길에 꽃 애기씨를 한 번 안 보고 길을 떠날 수 있느냐.

─ 나는 바람결같이 이 담을 넘으리라. 바시락하는 발자욱도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그분의 처소를 찾아들리라.

그분을 깨울 필요는 ─ 조금도 없지 않으냐. 소리 없이 비단 문을 열고 잠든 그 얼굴이나마 단 한 번 바라보면 그만이 아니냐. 그분의 얼굴을 이생에서 다시 한번만 본다면 이 밤이 새기 전에 죽음의 길을 재촉하여도 아무 한이 없을 것 아니냐?

칠부는 제 몸이 문득 날 것같이 홀가분해진 것을 느끼었다. 제가 발길을 멈추었던 그 자리에서 궁장을 쳐다보았다. 인제 와서는 꽃 애기씨 별당이 어디쯤 되리라고 어림을 잡아볼 필요도 없었다. 아무 데서나 결연히 궁장을 뛰어넘을 작정이었다.

일이 잘 되느라고, 어둠 속에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으나마, 그 곳은 후원협문이 가까운 곳으로 비교적 담 높이가 다른 데보담 낮았다.

칠부는 궁장에서 대여섯 걸음 물러나왔다. 발을 모두꾸려 방장 몸을 솟구치려는 판이었다. 문득 제 옆 멀지 않은 곳에서 난데없는 사람 발자욱 소리가 났다.

공중으로 날려는 칠부의 발은 멈칫하고 말았다.

칠부는 인기척 나는 곳을 쏘아볼 제, 제가 선 자리에서 서너 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궁장 모퉁이에 정녕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한 걸음 두 걸음 자기 쪽을 향해서 가까워 온다.

─ 웬 놈일까?

칠부는 처음에는 적지 않게 놀래었으나, 나종엔 이 뜻하지 않은 헤살꾼에 대하여 불 같은 분노를 느끼었다. 그는 허리에 찬 환도 자루를 힘있게 쥐었다.

4[편집]

그 사람도 자기 모양으로 넋을 잃은 듯 기신기신 기운 없는 걸음걸이였다.

깊은 생각에 잦아진 양, 고개를 지숙히 빠뜨리고 흐느적흐느적하는 팔다리가 풀기 하나 없어 보였다.

저편이 자기를 해치려는 위험인물이 아닌 것을 알아보자, 칠부의 긴장은 적이 풀리었으나, 아직도 그 작자의 일거일동을 쏘아보며, 제 숨 소리를 죽였다. 될 수만 있으면 저편이 누구이든지 간에 자기가 여기 이러고 서 있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피신을 하려다가는 도리어 저편의 눈에 띄게 쉬울 듯 손끝발끝 하나 꼼짝을 하지 않고 말뚝같이 서서, 제발 덕분에 자기를 몰라보고 그대로 지나치기를 바랐다.

두 간만큼 간 반만큼 , ! 두 사람의 거리는 다가들었다. 무슨 서슬에 저편에서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래는 듯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그제야 그 쪽에서도 어둠 속의 칠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 순간, 저편에서 먼저 입을 떼었다.

“누구냐?”

그것은 무망중에 불쑥 나오는 외마디 소리에 가까웠다.

“누구냐?”

칠부는 앵무새처럼 맞소리를 질렀다.

“나는 길 가는 사람.”

“나도 길 가는 사람.”

그 목소리들은 피차에 귀에 익었다. 양편에서 서로 의론이나 한 것같이 한 걸음 두 걸음씩 다가들었다.

“이게 웬일인가? 자네는 칠부가 아닌가?”

“어, 자네는 수품일세그려. 이 밤중에 웬일인가?”

“자네는?”

“자네는?”

두 친구는 서로 의아해 하며, 어둠 속에서 피차의 겉과 속을 더듬어 보았다.

두 친구는 신기하다는 듯이 한동안 마주 선 채 잠깐 말문이 막혔다.

“이 캄캄 칠야에 자네 혼자서 등불도 없이 여기를 오다니, 정말 뜻밖일세 그려. 허, 허.”

칠부는 지어서 웃어 보였다.

“나는 자네가 천만 의외일세. 나는 곧잘 밤출입도 하는 사람이지만 자네 같이 술과 계집을 모르시는 성인군자도 밤길을 걸을 때가 있단 말인가? 허허.”

수품도 허전허전 하는 소리로 억지 웃음을 웃었다.

“어쩐지 잠이 설들어서 소풍 차로 나온 길일세.”

칠부의 변명은 어딘지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자네도 잠을 설치는 밤이 있나?”

“원, 이 사람, 남을 잠충으로 아네그려. 낸들 잠 안 오는 밤이 없겠나?”

“칠부, 자네야 뭣이 부족해서 잠 안 오는 밤이 있겠나? 나는 요새 잠하고는 아주 담을 쌓았다네. 밤이 새도록 쏘다니지 않고는 배기지를 못한다네.”

“허, 그것 또 큰일 났네그려. 또 어디 알뜰한 고운님이 생겼나보이그려.

나 같은 사람도 좀 같이 다녀 보세나.”

흥 알뜰한 “ , 고운님이 생겼다? 흥, 그렇기나 하면 작히나 좋으리.”

“그러면 맨 건깽깽이로 밤이슬을 맞아가며 이 캄캄 칠야를 헤맨단 말인가?”

“그야말짝으로 외기러기 짝사랑, 후우.”

수품은 말은 농조(弄調)로 하면서도 한숨은 진국으로 내쉬었다.

“짝사랑, 허 짝사랑이라니 자네 같은 인품과 풍채라면 왼 서라벌 논다니를 두루말이를 할 텐데 짝사랑이 웬 말인가. 그야말로 절세가인이 어디 숨어 있나 보이그려.”

칠부는 수품과 말을 주고받는 사이 마음에 얼마쯤 여유가 생겼다. 아까 같았어도 꽃 애기씨를 한시바삐 보지 못하고는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으나, 옛 친구이요 사랑의 경쟁자인 수품과 딱 마주치고 보니, 궁장을 뛰어넘기는 애적에 틀렸고, 그런 사색조차 숨기노라니 저절로 허튼 수작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절세가인? 흥. 여보게 칠부, 자네가 내 절세가인이 무엔줄 알겠나?”

“절세가인이 무에라니, 그야 물론 곱고 고운 각시겠지.”

“아니라네, 아니야. 내 절세가인은 돌이라네, 돌!”

“절세가인이 돌이라께?”

칠부는 고개를 기우뚱거렸다.

“바루 저걸새, 저것.”

수품은 궁장을 손가락질해 가리켰다.

“궁장 말인가?”

“그러네, 궁장 말일세, 궁장이 싸늘한 돌맹이가 아니고 무엔가?”

“자네가 수수께끼를 하는 모양일세그려.”

“수수께끼가 아니라 진정일세.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저 궁장 돌맹이를 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네. 하도 여러 번 만지고 더듬어서 인젠 그 반들반들한 돌얼굴이 정이 붙게 되었네. 낮에 밥을 먹다가도 훌쩍 집을 뛰어 나오면 저 돌맹이를 얼없이 바라보네. 술청에서 밤늦도록 술타령을 하다가도 돌아오는 길에는 저 길고 긴 돌맹이의 행렬을 휩싸안고 한번 돌아야만 직성이 풀린다네. 오늘밤같이 술도 싫고 놀음놀이도 싫어서 보송보송 뜬눈으로 자반뒤집기를 하다가도 한번은 뛰어나와 저 단단하고 육중한 놈들 옆을 한 바퀴 휘돌아야만 된다네.”

칠부는 벌써 수품의 말눈치를 알아채고 제 가슴이 찔리어 뭐라고 농담을 걸 수조차 없었다.

수품은 또다시 말을 이었다.

여보게 “ 칠부, 그만하면 자네는 내 속사정을 짐작하겠지.”

“…….”

동병상련, 병이 같으면 서로 불쌍히 여긴다. 아무리 서로 적대해야 할 사랑의 경쟁자이지만, 이 피나는 고백 앞에 귀를 아니 기울일 수 없었다. 칠부는 제 눈시울이 뜨근뜨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품은 덥썩 칠부의 손목을 잡았다.

“여보, 형님, 칠부 형님! 카악 ─”

수품은 말을 하다가 말고 카악 침을 배앝었다. 말문이 눈물에 막힌 탓이리라.

“나보담도 한 나이라도 더 먹었으니 내가 칠부 자네를 형님이라고 불러도 결코 망발은 아닐 겔세. 형님! 어찌하면 나를 구해 줄 수가 없겠소?”

수품은 무릎이라도 꿇을 듯하다.

“내가 어떻게 자네를…….”

칠부의 말끝은 흐렸다. 여북 답답해야 죽음의 길을 취한 자기가 아닌가.

제 시름도 주체를 못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도맡을 수 있는가. 그러나 똑같은 사정이요 딱한 사정이었다.

“여보게 칠부, 자네가 힘을 쓰면 될 듯도 한 일일세. 한 달 후에라도 좋고 두 달 후에라도 좋으니 어떻게 꽃 애기씨를 조용히 한 번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볼 수 없겠는가? 말없이 단 한 번이라도 참 얼굴을 대한다면 이 육중한 궁장을 새에 두고 천번 만번 만나 보는 것보담 몇 백 곱절 낫지 않겠는가?”

“궁장을 새에 두고 만나 보다니…….”

칠부는 귀가 번쩍 띄었다. 수품의 애원을 들어 주고 안 들어 주는 것은 둘째 셋째요, 자기는 궁장을 격해서나마 꽃 애기씨를 만날 수 있는 신통한 방법부터 알고 싶었다.

5[편집]

“어떻게 궁장을 새에 두고 꽃 애기씨를 만난단 말인가? 무슨 묘한 방법이 있단 말인가?”

칠부는 숨을 가쁘게 쉬며 채쳐 물었다.

“그야 무슨 별다른 방법이 있기야 하겠나. 나는 딴은 신통하다면 신통도 한 일이야. 처음에는 그분 계신 곳에 한 발자욱이라도 가까이 가 보려고 저 궁장 밑에 다가서 보았네 . 내가 선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그분이 계시거니 그분의 영롱한 눈초리가 어리고 그분의 향기로운 숨길이 서리거니 하는 생각만 해도 흐뭇하였네. 그러기를 열 번 스무 번, 한 번은 ─ 이 담 외면은 이렇듯 무뚝뚝하고 싸늘하지만 바루 이 담 내면엔 그분의 아름다운 그림자가 어른거릴른지 모른다. ─ 하는 생각이 언뜻 떠오르데.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두근거린단 말일세. 정말 그분을 대하기나 한 듯이. 그 때도 지금처럼 어두운 밤이었네. 뛰는 가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 육중한 담 모서리를 뚫고 그분의 방싯 웃는 얼굴이 선연히 나타난단 말일세. 애절할 그 얼굴이 선연히 나타난단 말일세……. 이상하게도 향긋한 그분의 숨길조차 내 코 안으로 완연히 기어들었네. 그 후로는 내가 이 궁장을 끼고 돌 적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면 영락없이 그분의 얼굴이 나타나고, 그 녹는 듯한 향내가 내 코에만은 스르르 스며들었네. 그분의 몸과 이 내 몸뚱아리는 이 궁장을 넘나들지 못하지만 바람결에 날리는 그분의 숨길과 내 숨길만은 이 높은 담을 넘어 정녕 서로 통하는가 부데…….”

칠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진국으로 제 속을 털어내 놓는 수품의 얼굴을 빠안히 들여다 보았다. 이 세상에 저만큼 골똘히 꽃 애기씨를 사모하는 사람은 다시 없는 줄 알았더니, 수품의 사랑은 저보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듯하였다.

“그야 암만 만나 봐도 내가 그린 환영에 불과한 것, 속절없는 노릇이 아닌가. 정말 참얼굴을 좀 만나게 해 주게나.”

수품은 매어달릴 듯이 또 다시 졸랐다.

“이사람, 내가 무슨 수로 꽃 애기씨를 만나게 해 준단 말인가?”

칠부는 배앝는 듯 한 마디 쏘아 붙였다. 신통할 줄 알았던 꽃 애기씨 만나는 방법이 시원치도 않거니와, 제가 지극히 사모하는 이에게 대한 저편의향의가 너무도 지나친 데 와락 화가 치받치었다. 아까의 동정과는 딴판으로 꽃 애기씨의 환영을 부둥켜안고 그 숨결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 시새롭기도 하고 괘씸도스러웠다.

“내가 다 아는 것을 자네가 시침을 떼면 되겠는가? 자네가 여기 온 뜻도 나는 다 아네.”

“내가 여기 온 뜻을 자네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칠부는 가슴이 털썩 나려앉으면서도 채쳐 물었다.

“뻔한 노릇 아닌가? 자네는 다 된 일도 이렇듯 가슴을 졸이지 않는가? 단 며칠이 못 되어 어엿이 만날 그분 계신 곳에도 가까이 와 보려고 여기를 온 것 아닌가?

“그건 다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끝까지 시침을 떼려나? 그렇다면 내가 바른 대로 일러 줄게. 자네가 여기 온 것은 덕만 공주님을 사모하는 탓이 아닌가?”

“덕만 공주?”

“그래도 딴청을 부리네그려. 누구는 모르는 줄 알고…….”

“안다는 게 무에란 말인가?”

칠부는 수품이가 덕만 공주를 사모해서 여기 온 줄로 아는 것이 역시나 다행하였으나, 덕만 공주란 말만 들어도 까닭 모를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모른단 말인가? 아무리 궁중지밀한 분부시지만 파진찬 수품의 귀에는 들어오거든. 자네가 맏부마로 뽑힌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나?”

하고 수품은 한번 뽐내었다.

“자네가 덕만 공주님의 배필로 뽑혔단 말을 듣고 나는 춤이라도 출 듯이 기뻐하였다네. 친구에게 좋은 일이 내게도 해로울 것은 없거든.”

“흥, 좋은 일!”

“좋다 이를 뿐인가? 장래 나랏님이 되실 덕만 공주님의 남편이 되었으니 세상에 이보담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칠부는 귀라도 막고 싶었다.

“……눌문과 나도 그 물망에 오르기는 올랐다네마는, 인품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자네가 뽑히는 것이 의당당한 일이라고 나는 진정 좋아하였다네.”

“자네는 떨어지고 내가 뽑힌 것이 그렇게 좋더란 말인가. 안 될 말.”

“거짓말이라면 내 목이라도 베어 바침세. 공주님이라도 그런 높으신 어른을 뫼실 감도 못 되거니와,그 판에 내가 낙선이 된 게 내심으론 해롭지도 않았다네.”

“그건 또 웬 말인가?”

“내가 자네께야 무엇을 기이겠나? 꽃 애기씨야말로 나에게는 생명일세.

자네는 벌써 짐작을 하였겠지만, 한가위 잔치 끝에 눌문과 칼부림을 한 것도 꽃 애기씨 때문. 목숨까지 떼어내 놓고 꽃 애기씨를 사랑하는 내가 만일 맏부마로 뽑혀 보게. 아주 절망이 아닌가? 생목숨을 끊는 수밖에는 다시 무슨 수가 있는가? 이번에 낙선된 것이 다행이라면 큰 다행이거든. 기쁘다는 게 참말 진정일세.

칠부는 실심한 사람 모양으로 아무런 대꾸도 없이 우두머니 서 있었다. 어찌하면 제 생각과 수품의 생각이 부절을 합한 듯이 이렇게 같을까? 제 속을 꼭 집어내어 수품의 입을 통하여 제 귀에 들려주는 것 같았다.

6[편집]

한동안 자랑스럽게 재재거리던 수품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휘 그러나 그 기쁘다는 “ , 게 하도 답답한 소리기도 하지. 신체가 튼튼치 못하다고 맏부마에 낙선된 놈이 셋째 부마인들 될 가망이 있을까, 한번 이 생각이 들면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네그려. 한번 간선에 빠진 것이 영영 미끄러질 장본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걷잡을 수 없네그려. 자다가 깨어도 가슴이 무슨 멍이고 든 듯이 삐적지근하게 아프고, 가위에 눌린 것 같이 식은땀이 흘러 나리네. 몸을 튼튼히 해야지 몸을 튼튼히 해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나를 타이르고 색도 멀리하고 술도 줄이었건만, 웬일인지 몸은 날이 갈수록 골골이 말라가네그려.”

칠부는 친구의 애끓는 호소를 귓가로 흘려들으며, 겹겹이 쌓인 제 시름에 잦아졌다. 부마 간선에 떨어진 것도 그리 달가운 행운은 아닌 모양이나, 그래도 자기의 처지에 비하면 얼마나 행운과 희망에 넘치는 수품의 경우냐.

수품의 하소연은 그칠 줄은 몰랐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도리어 자네가 부러우이. 차라리 자네와 같이 맏부마로 나 뽑혔으면 쉽사리 꽃 애기씨를 단념이나 해 버리겠고, 아무리 단념을 하려도 단념을 못할 지경이라도 아츰으로 저녁으로 그 아름다운 얼굴을 대할수나 있지 않은가? 설령 꽃 애기씨가 다른 데로 출가를 한다 해도 평생을 두고 일년에 한번이나 이태에 한번쯤은 어렵지 않게 만나질 것 아닌가?”

칠부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딴은 그렇기도 하리라. 이 어두운 밤길을 더듬거리며, 순라병의 눈초리를 피해 가며, 찬이슬을 맞아 가며, 이 드높은 궁장을 격해서 날아 넘어 오는 그분의 숨길이라도 맡아보려고 헤매는 것보담는 얼마나 수월한 노릇인지 모르리라. 의당당한 형부로 그분을 조석으로 만나보는 것쯤이야 미상불 쉬웁기도 하리라. 그러나 이것도 오죽 답답한 노릇이냐. 여북 가슴 미어질 일이냐. 자기를 속이고 안해를 속이고 사랑하는 그분까지 속이는 짓이 아니냐. 하루가 아니고 이틀이 아니고 기나긴 한평생 동안에 지긋지긋한 그 지옥고를 어떻게 겪을 것인가.

─ 암만해도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칠부는 또 한번 굳게 결심하였다.

수품은, 제 친구가 어떤 번민의 회호리 바람에 싸인 줄도 모르고, 다시금 힘있게 칠부의 손을 부여잡았다.

“여보게 칠부, 그만하면 자네도 내 타는 듯한 충정을 살폈겠네그려. 아까 내가 자네를 형님이라 부른 것도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일세. 맏동서님이시면 형님이 아니겠소? 형님이 되셔서 이 아우를 구해 주오. 이 불쌍한 치정한을 구해 주오. 구월 안으로 가례도 치르게 되신다니, 그렇게 되거든, 제발 잊지 말고 내 일을 이루어 주오. 아드님이 없으시니 대모한 사삿일은 맏사위님이 맡아서 처단할 것 아니겠소? 내가 여기서 우연히 형님을 만난 것은 이야말로 천우신조. 내 일이 성취될 전조인가 보오.”

수품은, 마치 물에 빠지는 사람이 지푸라기 한 개라도 움켜쥐듯이, 칠부를 잡고 늘어졌다.

“이야말로 오비가 삼척일세, 후.”

칠부는 간단히 한 마디 대꾸를 하고 뜨거운 한숨을 내뿜었다.

잠깐 두 사이에 답답한 침묵이 흐를 때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한 간통도 떨어지지 않은 궁장 위에 무엇이 털석하고 벼락 치는 소리를 내었다. 사면이 괴괴한 때라 조그마한 음향도 그 울림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두 친구는 펄쩍 뛰도록 놀랐으나 눈길은 소리나는 데로 몰렸다. 웬 사내 하나가 궁장 위에 상반신을 불쑥 올려 놓았다. 뒤미처 와지끈 소리가 나는 것은 담 위를 짚은 두 손이 용을 쓰는 바람에 기왓장이 부서지는 까닭이리라. 어느새 두 다리마저 선뜻 담 위에 올라설 겨를도 없이 비호같이 이리로 향해 뛰어나렸다. 쿵 소리가 나자마자, 궁장을 뛰어나린 사람은 옷도 털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궁장 모퉁이로 사라져 버렸다.

어둠 속에서 두 친구는 서로 바라보며 혀를 빼어 물었다. 궁장을 뛰어넘기가 그렇게 어려운 노릇이 아니겠지만 그 거침새 없는 대담한 태도와 날랜 행동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칠부는 자기가 뛰어넘으려고 그렇게 망설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거늘, 그 난데없는 장한은 예 봐란 듯이 바루 제 코앞에서 제가 하려던 행동을 해내 뜨린 것이 장쾌한 생각까지 자아내었다. 어둠 속이라 그렇지 그 장한이 뛰어나린 자리가 그들이 서있는 곳과는 한두 발에 넘지 않았다.

말하자면 곧 지척이었다.

“웬 사람일까? 궁안에서 궁밖으로 뛰어넘으니, 수상한데…….”

칠부는 그 장한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그 킷세하며 걸음걸이하며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 같기도 한데…….”

수품은 머릿속으로 제 아는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들추어내어 보았다.

“글세, 그 똥똥한 몸피하며 날랜 품이 천연 눌문이 같기도 하네마는 …….”

칠부의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품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옳아, 옳아, 갈데없는 눌문이야.”

세 가지 길[편집]

1[편집]

아월(阿月)이네 술청은 오늘 저녁에도 벅적대었다.

안주인이 젊고 아름답고 두름머리도 있고 너름새 좋기로, 술맛이 그럴듯하고 음식 솜씨가 깔끔하기로, 허다한 서라벌 서울 술집 총중에도 둘째 가라면 설워할 만한 유명한 주점이었다.

새벽 훤할 때부터 새벽 훤할 때까지라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실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손님이 잇대어들고 잇대어나서 열도 넘는 중노미들이 언제든지 종종걸음을 쳤다.

오늘 저녁 따라 맨드는 안주가 더 질번질번하고 식칼 소리가 더 요란한 것은 큰손님 치다꺼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양지머리도 둘이나 삶아 내놓았다.

비록 애저(兒猪)일망정 돼지도 너댓 마리 쪄내었다. 부침개질 냄새와 가리 굽는 연기가 뭉게뭉게 대문간으로 쏟아져 나와서 길 가는 사람의 회(蛔)까지 동하게 하였다.

널따란 대청을 치우고 이 날 밤의 큰손님인 낭도(郎徒) 한 패가 자리를 잡았다. 일행은 오십 명도 넘을 듯. 예닐곱 개씩 맞추어 놓은 화류목 교자상을 가운데 두고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쭉 둘러앉았다.

그들은 많아야 갓 스물, 열일곱 여덟의 고만고만한 나이들 같다. 호화로운 긴 복두(幞頭)를 일매지게 쓰고 구슬 복두 끈이 영롱하게 번쩍였다. 겉옷(表衣[표 의 ]) 위에 질끈질끈 졸라맨 쇠띠하며 홀가분한 감발이 자못 씩씩하였다. 맹렬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나이보담 신체들은 발육될 대로 발육되었 으나, 그 애티나는 얼굴들은 볕에 그을려 검붉은 빛이 돌았으되 동탕하고 아름다워, 화랑(花郞)이란 글자 그대로 꽃과 같은 도련님들이요 서방님들이었다.

제 앉은 자리 뒤에 벗어 놓은 활 동개로 보아 그들은 활쏘기를 익히고 돌아오는 길인 듯하였다.

교자상 위에는 벌써 음식이 벌려졌다.

자배기만큼이나 큼직큼직한 청동 양푼에 술이 넘치도록 따루어져서 여나무 개나 놓여 있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왼 마리 돼지며, 가리구이며, 기름이 바글바글 끓는 듯한 전유어며 , 게다가 얼큰한 지짐이와 아담한 채소 안주가 곁들이어, 왕만한 술 양푼을 중심으로 구멍 틈틈이 그들먹지게 짭잘하게 늘어 놓였다.

그러나 둘러앉은 축들은 이따금씩 대문쪽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혹은 그 먹음직스러운 안주와 술을 힐끗 보다가는 그대로 외면해 버리고 어느 누구 하나 젓가락을 들려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아마도 누구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일각이 지났다, 이각이 지났다…….

안주인 아월이가, 음식을 장만하다가 말고 올라온 듯, 양념 묻은 손을 치마 꼬리로 감추며 나타났다.

“그저 안 오셨군요. 웬일이예요?”

허청대놓고, 어리광 피듯, 혀가 조금 짧은 듯한 말씨로 이런 말을 하고, 가늘게 그은 듯한 눈썹을 살짝 찡그려 보이었다.

갓 스물이 넘었을 둥 말았을 둥, 턱이 둘이 되도록 살이 너무 오른 것이 험이라면 험이로되 동그스럼한 흰 얼굴이 예쁘고 다정스러웠다. 두 눈가엔 찡그린 눈썹과는 정반대로 생글생글 웃음이 실룩거린다.

“보는 바와 같네.”

좌중에서 익살 잘 부리기로 유명한 덧니박이가 한 마디 받았다.

“히 히, 히 히.”

좌중은 안주인이 들어오니 별안간 생기가 돌고, 별로 우습지도 않은 말이건만 여기저기서 가만한 웃음과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럿의 시선은 함빡 아월에게로 몰리었다.

아월은 여럿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시침을 뚝 떼었다. 무엇에 놀래기나 한 듯이 눈을 호동그랗게 떠서 말 받은 낭도를 알아본다.

“뭘 보랍시오, 대관절 뭘 보란 말씀입시오?”

여럿은 아월의 능청에 또 한번 와그르 웃어대었다.

“좌중도 둘러보고 술상도 둘러보고 청상도 둘러보고 녹수도 둘러보고 …….”

덧니박이 익살꾼도 지지 않았다.

“아이 맙시사, 그러다가 정말 노래를 부르시겠네, 호호호.”

이번에는 아월이도 자지러지게 웃어대었다.

뭘 봤기에 저렇게 좋아라고 웃음이 터져 나올까? 캄캄 칠야 어두운 밤에 알뜰한 고운 님이 넌즈시 사창 문 여는 것을 봤단 말인가? 이웃집 총각이 남의 속사정도 몰라 주고, 기세 좋게 말을 타고 쭐레쭐레 딴 마을로 장가 길을 떠나다가 제 동네 동구 밖을 못 나가서 낙마하는 꼴을 봤단 말인가 ……?”

“아이, 인제 고만해 두세요. 그만해도 말솜씨 좋으신 건 왼 세상이 다 아는걸.”

아월은 치마 밑에 숨겼던 손을 내어 짤래짤래 저으며 덧니박이의 말을 막았다.

“내 말솜씨보담 자네 손짓 솜씨가 더 좋으이.”

“아이참, 이 국들이 다 식었겠네.”

아월은 불현듯 생각이 난 것처럼 국 대접을 만져 본다.

“에구머니, 벌써 육초가 끼이고, 이거 안 되겠군.”

하고, 한동안 어쩔 줄을 모르는 듯이 쩔쩔 매는 시늉을 하다가,

“얘들아, 이리 좀 오너라.”

뜰 아래를 향해 소리쳐 불렀다. 중노미 서넛이 대령하는 것을 보자,

“이거 큰일 났다. 국이 다 식었구나. 소반들을 가져 나와 이 국그릇을 물려 내어라, 그러고 이 가리구이들도 다시 구워야겠다.”

제가 앞장을 서서 일변 국그릇을 물러내며 종알거렸다.

“그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나 차릴 것을, 진동한동 차리노라고 괜히 진땀만 빼었지.”

“이거 미안하구려, 수고가 망칙하구려.”

덧니박이가 또 괴사(怪辭)를 피었다.

“하고 말 게야 뭐 있어요?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라도 갓 해 놓을 때엔 그래도 뜨신 맛이라도 있지, 가뜩이나 변변치 않은 음식을 식혀 놓아야 되겠어요.”

하고, 국과 가리구이를 훌훌 몰아 가지고 나려간다.

“이것 참 정말 미안하구료.”

낭도 하나가 진정으로 미안해 하였다.

“괜찮아요. 대아찬께서 아시면 상급을 두둑이 나리시겠지요.”

하고, 아월은 씽긋 웃고 살랑살랑 나려가 버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 아닌 대아찬 눌문이었다.

2[편집]

또 한 시각이 지났다. 눌문은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월이가 올라와서 한동안 재재거리는 바람에 여럿은 사람 기다리기 지루한 것을 잠시 잊었다가 아월이가 나려가고 나매, 기다리기에 더욱 지쳤다.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고대 뒤따라 온다는 이가 웬일일까? 이렇게 늦을 까닭이 없는데.”

그 중에도 눌문과 절친한 문숙(文宿)이란 낭도가 침묵을 깨뜨렸다. 한 일(一)자로 죽 그은 두 눈, 진한 눈썹, 넙주룩한 입이 당차고 믿음직해 보였다.

“그래, 우두머리(눌문을 가리키는 말)께서 정녕 곧 뒤좇아 오신다든가?”

덧니박이가 다지는 듯이 채쳐 물었다.

“이 사람,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할 줄 아나? 오신다기에 오신다고 그랬지. 그게 무슨 당찮은 소린가?

문숙이가 벌컥 화를 내는 바람에 덧니박이는 멀쓱해졌다.

한창 몸을 쓰고 용을 쓴 끝이요 출출한 판이라 진수성찬을 코앞에 놓고만 있노라니, 배에서는 쪼그락 소리가 연달아 일어나고 목구녕에서는 손이라도 넘어 올 것 같다.

“초다짐으로 우리 한 잔 해 보세나그려. 술 한 양푼이만 돌라 먹어 치우고 안주도 한 접시만 먹으면 고만이니 왼 상을 휘정거릴 것도 없단 말이지.

어디 목이 컬컬해 견디겠나.”

마츰내 일좌 중에 제일 몸이 가냘프고 먹고 마시기에 안달인 ‘아귀’라고 별명까지 있는 낭도가 이런 제의를 하였다.

여럿은 말없이 침을 꿀꺽 삼키었다.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은 피차에 굴뚝 같았지만 자기네의 우두머리가 오기도 전에 첫 입을 대는 것이 부당한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누가 먹기에 걸신이 들렸던 말인가?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첫 꼭지를 떼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인가?”

문숙이가 엄연하게 꾸짖었다. 여럿은 또 한번 말없이 침을 삼켰다.

또 한 시각이 지났다.

“고이한 일, 어째 입때 오지를 않을까? 무슨 별 탈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문숙은 진국으로 걱정을 하였다.

“아무튼 대아찬 행동이 요새에 이상한 점이 더러 있었어.”

낭도 하나가 생각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그래 참, 자네 말이 옳으이. 그 불콰하던 얼굴이 혈색이 거칠고…….”

누가 맞방망이를 친다.

“걸음걸이에도 풀기 하나 없어 보이고. 그야말짝으로 첩첩 수심에 쌓인 것 같아.”

덧니박이가 그예 한 마디 거들었다.

“아마도 무슨 걱정이 생긴 모양이야.”

“무슨 걱정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니 알릴 리가 만무한데.”

문숙이가 고개를 기울인다.

“우리에게 말 못할 무슨 비밀 걱정이나 아닌지?”

“생사를 같이할 우리에게 숨기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지.”

문숙은 또 여럿의 말을 막았다.

“암만해도 어느 때보담 행동이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이.”

“첫째 오늘만 해도 그 백발백중하던 활이 왜 그렇게 빗나간단 말인가. 열 번에 서너 번이나 관혁을 못 맞추니.”

“딴은 이상한 일이어, 그 솜씨에 생으로 화살이 허청을 치다니.”

“여보게들, 말 말게.”

하고, 아귀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네들 알다시피 내가 오늘 개자리 (화살이 관혁에 맞는가 안 맞는가, 바루 관혁 밑에다가 웅덩이를 파 놓고 사람이 들어앉아서 조사하는 곳)를 맡아보지를 안 했겠나. 대아찬 화살이 번번이 빗나가기에 그대로 군호를 하였더니, 나종에 시근벌떡 뛰어와서‘또 안 맞았어.’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는 서슬에 나는 아주 경풍을 할 뻔하였네.”

“자기도 하도 맞지를 않으니 의심도스러웠을 게야. 귀신 붙은 활이라고 별명까지 듣던 활 솜씨가 아닌가? 그 솜씨가 어쩌면 그렇게도 줄어들까?”

“줄기야 줄었겠나마는 심기가 불편하면 어디 활이 제대로 나가나!”

“여북해야 활을 꺾어 버렸겠나!

“그 굼튼튼한 각궁이 한 번 우쩍 잡아당기는 바람에 지끈 부러지니.”

“장사는 장사야.”

“허, 이 사람 보게. 눌문 대아찬이 장사인 줄 인제야 알았단 말인가.”

“어디 기운 불림하는 거야 내가 보았어야 말이지, 궁술과 검술이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그 장 치는 걸 좀 봐요. 채쪽을 후려 갈기면 장방울이 뺑소니를 치며 반공중에 날아 오르지를 않나.”

“힘뿐인가, 날래기는 뛰엄질을 해도 두세 길은 예사로 훌훌 뛰어넘지 않던가.”

“그가 누구의 아들이기에 북한산주 군주 눌최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그 아버지가 당대의 맹장이라,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으로 완력과 날램도 대를 물리는 게지.”

여럿은 중구난방으로 안 오는 눌문에 대한 비평이 들끓어 나왔다.

눌문의 힘없는 그림자가 아월이네 집에 나타나기는 그 뒤에도 한식경이 넘어서였다.

3[편집]

눌문도 칠부와 수품에게 지지 않게 선화 공주를 사모하는 것은 다시 이렁성거릴 필요조차 없으리라.

눌문이 편으로 말하면 이 하늘 아래에 꽃 애기씨를 사랑하는 사람도 오직 자기 하나뿐이고 그분의 , 백년의 짝이 되고 그분의 꿀보담도 더 달고 불보담도 더 뜨거운 사랑을 누릴 사람도 오직 자기 하나뿐인 줄로 칠석같이 믿었다. 무슨 까닭으로? 아무런 까닭도 없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굳고 굳은 신념이 그에게 그럴 줄로, 그래야 될 줄로 믿게 하였을 따름이다.

어느 뉘가 감히 선화 공주를 사랑하랴, 어느 뉘가 감히 그의 남편이 될 것이랴. 오직 자기가 있을 뿐이다. 자기야말로 하늘이 내신 꽃 애기씨의 천정배필이다. 자기 이외에 그분의 신랑감이 있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내가 있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요, 옳지 못한 일이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의 사랑도 뜨거웠다. 그만큼 그의 자부심도 강하였다. 하늘을 쓰고 도리질을 하는 것도 하려면 못할 것이 아니라는 타오르는 청춘의 힘이 그에게 턱없는 자존심을 주었던 것이다. 셋 중에 그의 나이 제일 어리기도 하였다. 어리다고 해야 그는 금년에 열아홉, 가장 많다는 칠부가 스물둘, 수품이가 갓 스물이다.

그런 때문에 그는 하루바삐 꽃 애기씨를 옆에 두고 아침으로 저녁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만이 한 가지 번민이라면 번민이로되, 다른 두 사람 모양으로, 혹시나 남에게 앗길까 봐 조바심을 하고 애를 태우지는 않았다. 어느 때든지 선화 공주는 자기 품속으로 돌아올 줄로 믿고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동무들을 시새는 마음이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가 선화 공주를 공공연하게 만나보기는 저번 한가위 잔치까지 세 번밖에 안 된다. 첫 번은 진평왕이 등극하시는 의식을 거행할 때 두 분 형님과 함께 왕과 왕후의 뒤에 모시고 선 것을 보았고, 둘째 번은 하늘에서 나리신 옥대(玉帶)를 띠실 때에, 길고 긴 옥대 한끝을 무거운 듯이 쳐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외에는 모후(母后) 마야부인(摩耶夫人)을 뫼시고 절에 행차를 하실 때 어른어른하는 수레 주렴 안으로는 수없이 보았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그 얼굴에 마음을 조인다는 것보담도 저렇듯 아름다운 분이 내 안해가 되거니 생각하매, 주체를 못할 기쁨이 왼 몸과 넋을 뒤흔들었다.

이번 한가위 잔치에는 정말 오랜만에 꽃 애기씨를 정면으로 대하게 되었다. 그 날 밤 잔치에는 파격으로 젊은 축들을 앞줄에 앉히었다. 알고 보면 왕과 왕후께서는 사윗감을 고르시노라고 젊은이 축의 행동을 눈여겨 보시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눌문이가 가장 나이 어린 덕으로 맨 앞줄에 나올 수 있었다.

왕후 편으로는 가장 젊은 선화 공주가 역시 맨 앞에 앉게 되었다.

눌문과 꽃 애기씨의 거리는 몇 자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른 누구보담도 꽃 애기씨를 자주 보고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 저분과 나는 천상배필이라 이런 자리에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대하게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매 눌문은 길길이 뛰어도 이 기쁨과 행복에 배겨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인 꽃 애기씨가 얼굴을 환하게 내어놓지 않는 것이 한이라면 한이었으되, 이따금 드는 맑고 어여쁜 눈길은 제 얼굴 위로 이 글이글하게 흐르는 듯이 느껴졌다.

밤 잔치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의 발은 땅에 닿지 않고 겅정겅정 뛰었었다.

여럿 사이에 선화 공주 평이 나올 제 눌문의 어깨는 으쓱으쓱 저절로 추켜 올려졌다. 필경엔 그의 입술은 미끄러지고 말았다.

“흰 기름이 엉긴 듯한 그 고운 살결은 손만 대도 손바닥 밑에서 그대로 녹아나릴 것만 같애.”

이것은 오늘밤에 제가 꽃 애기씨를 가까이 보고 여러 번 느낀 실감이었다.

이 말을 수품이가 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엄하다고 책망하여도 분통이 터질 노릇이거늘, 칼까지 빼어들고 들이덤비니 눌문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말았다. 한칼에 수품을 두 동강이를 내어도 시원치 않았다. 검술로야 수품이쯤이 원래 대적이 아니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피차에 술이 취했기 때문에 칼끝이 정통으로 들어맞지를 않아 큰일에는 이르지 않고, 칠부의 도도한 웅변에 눌리어 칼을 던지고 만 것이었다.

샐녘에야 집으로 돌아와, 곤죽이 다 된 몸을 침상 위에 던지면서도 수품이 괘씸한 생각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었다.

제깐 놈이 언감생심 ─ , 나에게 칼을 빼어들고 들이덤비다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흥.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적어도 몇 천 명 낭도의 우두머리다. 네 아비가 이찬 벼슬께나 다닌다고, 괘씸한 놈.

잠이 어릿어릿 오면서도 눌문은 주정 반 잠투세 반으로 뽐내 보았다.

─ 대관절 꽃 애기씨가 네놈에게 무슨 관계냐. 무엄하니 마니, 내 장래 안 해 칭찬을 내가 하는데 네놈이 무슨 개소리 쇠소리냐. 건방진 놈, 우스꽝스러운 놈, 흥.

4[편집]

─ 왜 수품이가 칼을 빼어들고 덤볐을까?

그 이튿날 늦잠을 깨고, 새 정신이 돌아오자, 눌문의 머리에 떠오르기는 첫째 이 의문이었다.

수품의 언사와 행위가 한없이 분하고 괘씸도 하였지마는, 그 속에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숨겨 있는 것 같았다.

꽃 애기씨가 아무리 공주님이요, 높고 귀하신 분이기로, 그 살결을 곱다고 한 것이 그렇게 죄 될 말일까, 무엄한 소리일까? 설령 무엄하다 하기로서니, 오늘날까지 그대도록 친하던 사이에 죽이려고 야심을 먹을 까닭이 무엇일까?

수품의 칼끝엔 분명히 살기와 독기가 어리었다. 술김에 작난삼아 빼어 든 칼 같지는 않았다. 달빛에도 그 타는 듯한 핏발 선 눈과 앙다문 이빨이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마치 저와 나와 무슨 불공대천지수나 맺힌 것처럼.

순진한 눌문으로도 까닭 붙은 일인 줄은 어렴풋이 짐작이 안 날 수 없었다.

문득 소리소리 외치던 수품의 말 한 마디가 귓가에 앵하고 울리었다.

“이놈! 꽃 애기씨를 손에만 대었담 봐라, 한칼에 네놈의 몸은 두 동강이가 될 줄 알아라!”

뼈가 맺히고 가시가 든 소리였다.

─ 혹시나 그놈도 꽃 애기씨를 사모하는 게나 아닐까?

눌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옳다. 적실히 그놈도 꽃 애기씨에게 항의를 품은 모양이다. 어림도 없는 놈! 수품이 뇌이던 말낱이 샅샅이 살아온다.

“네까짓 놈의 입길에 꽃 애기씨가 오르나리는 게 살이 떨린단 말이다. 피가 끓는단 말이다!”

들을 그 때에는 흥분한 나머지 무슨 뜻인 줄 얼른 알아듣지를 못하였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꽃 애기씨는 제 사랑이니 이름도 이렁성거리지 말라는 말이 분명하다.

눌문은 난생 처음으로 제 사랑의 경쟁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 이외에도 감히 선화 공주를 사모하는 작자가 있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 어림도 없는 놈! 그 다 뒤어져가는 말라깽이가 허.

코웃음을 쳐보았으나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활쏘기 내기를 하든지, 검술로 겨누든지 도저히 자기의 적수가 아니었다.

그양 힘으로 주먹다짐을 하여도 수품이쯤 여나문 달겨들어도 눈꼽만큼이라도 겁낼 것이 못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넘볼 경쟁자는 아니었다.

지체가 저보담 못하기는커녕 오히려 나은 편이었다. 벼슬 계제도 저보담 한 등이 높았다. 휘추리같이 가는 몸피가 불면 날을 것 같지만 맴시가 있고, 희고 갸름한 얼굴이 여우 새끼 모양으로 예쁘장스럽기도 했다.

부마가음이란 어디 무예(武藝)로만 뽑는 것이 아니매, 혹은 문벌 덕택으로 백우의 화살이 수품에게로 가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았다.

눌문은 새로운 번민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 그런 줄 알았으면 그 때 한칼로 그놈의 목을 뎅겅 베고 말 것을!

눌문은 후회하였다. 저 쪽에서 선손을 걸고 칼부림을 하는 그 좋은 계제에 후환을 없애지 못한 것이 새삼스럽게 뉘우쳐졌다.

번민의 몇 날 몇 밤이 지나갔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쪽이 불리하기만 한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꿀리는 것은 자기 아버지는 멀리 변방에 있고, 수품의 아버지 수을부는 상대등 다음 가는 이찬 지위에 있어 왕의 은총도 두터워 한창 서슬이 푸르다.

부자가 서로 짜고 무슨 간책을 꾸며낼는지도 모른다. 지금쯤은 귀신도 모르게 수품이가 꽃 애기씨의 부마로 작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눌문은 안절부절을 못하였다.

그러던 판에 괴상한 풍문이 그의 귀에 들렸다. 그것은 자기가 맏부마의 물망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눌문은 펄쩍 뛰도록 놀랐다. 칠부만 못하지 않게 그의 고민은 컸다. 상대 등과 이찬을 아버지로 모신 칠부와 수품과는 달라서, 그는 궁중 지밀한 일을 손살피같이 알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이 풍문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정해 낼 재조는 없지마는 수품이 부자가 꾸며 낸 듯한 간책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자기를 맏부마로 추켜올려 세워서 꽃 애기씨에게 대한 사랑의 길을 영영 막아 버리고, 수품이 제가 어엿하게 꽃 애기씨의 백년랑군이 되려는 흉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 수품이 네놈이, 수품이 네놈이!

눌문은 분통이 터져서 몇 번이나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산으로 들로 헤매며, 입버릇처럼 수품의 이름을 뇌이고 또 뇌이었다.

─ 밤을 타서 궁중에 들어가, 꽃 애기씨를 들쳐업고 멀리 멀리 달아나자.

깊숙한 개골산으로나 북한주로 달아나자. 둘이 손에 손목을 이끌고 한번 달아 난 다음에야 수품의 아비가 제 아무리 서슬이 푸르다 한들 혈마 우리 둘을 어찌 하랴.

더구나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난 한가위날 밤 잔치에서 꽃 애기씨와 누구보담도 가까이 앉았을 적, 꽃 애기씨는 정녕코 자기를 보고 또 본 것 같았다.

본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그 어여쁜 눈매가 정다웁게 자기를 쓰담고 지나간 줄 믿었다. 꽃 애기씨를 만나기만 해서 이런 사유를 알으켜 주면 그분은 의심 없이 자기를 따라 나설 것이었다.

이리하여 눌문은 그 날 밤으로 궁장을 뛰어넘었었다.

5[편집]

덮어놓고 궁장을 뛰어넘으니 마츰 궁중 후원이었다. 아름드리 낙락장송 뒤에 몸을 숨기고, 가쁜 숨을 돌릴 겸 눈을 어둠에 익힐 겸 한동안 죽은 듯이 서 있었다.

사면은 괴괴하게 인기척이 없다. 후원 한복판 석가산 모옥 밑 연못에서 잉어가 뛰는지 이따금 풍덩풍덩 하는 물소리가 그윽히 들려 온다. 멀리 보이는 전각에도 사초롱의 초가 거의 다 닳았는지 불빛이 희미하다.

몇 번 궁중 잔치에 참예하기 때문에 이 후원의 발새는 그리 서툴지 않았지만, 이 후원에는 전각이 없고 비록 낮고 작을망정 또 다시 중문을 지나고 내장을 넘어야 전각이 있고, 왕과 왕후가 계시는 정침을 동으로 끼고 돌아 남으로 치우친 곳에 애기씨들이 거처하는 별당이 있는 것을, 눌문은 어렴풋이 짐작하였다.

궁장을 한번은 뛰어넘었지만, 또다시 담을 뛰어넘을 것이 성이 가시어, 혹은 중문이 열리지나 않았나 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중문 가까이 가 보니, 중문은 벌써 잠기었고, 게다가 파수병이 창을 짚은 채, 끄덕끄덕 졸고 섰다.

귀찮으나 또 담을 하나 넘을 수밖에 없다. 한 길도 되락 되락 한 담이라, 발소리도 내지 않고 그대로 사뿐 뛰어넘을 수 있었다.

정침을 멀리 돌아, 애기씨의 처소 가까이 이르기는 하였으나 어느 것이 꽃 애기씨의 처소인지 얼른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공주가 세분이니 집채도 셋이고 맨 끝이 셋째 공주의 처소이니 지레짐작을 하였더니, 전각도 여남은 채가 될 뿐 아니라, 채마다 담이 있고 문이 있어서 또 담을 몇 개 더 뛰어넘어야 될지 방도가 나서지를 않았다.

눌문은 어둠 속에 선 채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구중궁궐이라더니 실상 들어와 보니 열 겹 스무 겹도 더 넘을 것 같았다.

설령 또 다시 담을 넘고 또 넘어 용하게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아낸다 하여도 덧문까지 첩첩이 닫히었으니 무슨 수로 꽃 애기씨를 만나볼 것이냐.

그까짓 덧문쯤이야 뻐개고 들어가기가 용이한 노릇이로되, 한번 와지끈하는 소리가 나는 날에는 시녀들이 잠을 깨고 파수병이 뛰어와서 만사가 틀릴 것은 아무리 앞뒤를 가리지 않는 눌문에게도 뻔한 일이었다.

눌문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섰던 그 자리에서 무너지는 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처음 계획대로 그분을 들쳐 업고 달아나는 것은 애저녁에 틀린 수작이니 단념도 하겠지만, 그 애를 쓰고 허위단심 여기까지 들어와서 그분의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그대로 발길을 돌린단 말인가.

먼빛이라도 좋다. 그분의 그림자라도 보고 싶다. 비단 창 위에 흐릿이 비치는 그림자라도 좋다.

이윽고 눌문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세상없어도 꽃 애기씨의 처소를 찾아내고야 말리라고 또 한번 결심을 한 것이었다.

방안에는 불을 켰는지 모르지만, 덧문이 빈틈 없이 닫힌 탓인지 불빛 하나 새어 흐르지 않았다. 세 번 장대 위에 드높은 전각들이 나는 추녀(飛檐 [비첨])를 반공에 솟구치며 어둠 속에 삼엄한 자태를 잠그었다.

눌문이가 어딘지 질정을 못하고 몸을 담에 부비며 조심조심 이리저리 헤맬 제, 문득 쩌렁쩌렁 창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담한 눌문으로도 머리끝이 쭈뼛해지고 등골에 찬 땀이 오싹 흘렀다. 종잇장처럼 담에 몸을 붙이고 숨결을 죽였다.

순행 도는 시각이 되었음이리라. 궁문 있는 쪽에서 시위부 군사 너댓이 창을 휘두르며 이리로 향해 올라온다.

─ 인제 두수 없이 죽었구나.

눌문은 생각하였다. 몸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도 없었다. 이야말로 움치고 뛸 수도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내어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군사들은 만뢰가 구적한 가운데 자기네들만 살았다는 듯이 저벅저벅 발소리를 높이 울리고 이리저리 휘돌아보며 올라왔다.

그들의 눈초리가 자기 서 있는 곳으로 모인 듯하여 눌문은 오마조마 가슴이 뛰놀았으나, 다행히 그들은 별당 근처는 바라다만 보고 정침 앞을 휘돌아 다시 나려가고 말았다.

그들의 발소리가 아주 멀리 사라진 뒤에야 눌문은 입때껏 참았던 숨길을 한꺼번에 모두꾸려 내쉬었다.

일각 일분이라도 지체할 자리가 아니었다.

눌문은 오던 길로 다시 돌아섰다. 궁 안을 벗어날 더 빠른 길이 있을 것도 같았지만 밤새 익은 오던 길을 그는 다시 취하기로 하였다.

안 궁장은 소리도 안 내고 뛰어넘을 수 있었다.

후원으로 빠져 나왔다. 후원 문 지키는 파수병이 이번에는 졸지 않고 창을 두르며 왔다 갔다 하는 꼴이 멀리서 얼른 보이었다.

눌문의 마음은 급하였다. 아까 시위부 군사들이 도루 나려가기를 기다리는 데 진땀을 빼었다.

지금 예까지 빠져 나와서 궁장 하나만 뛰어넘으면 아주 궁 밖으로 나서는 이 판에 다시 은신을 하고 이 파수병의 동정을 또 보살피기엔 진저리가 났다.

그는 다짜고짜로 줄달음을 쳐서 아까 뛰어넘어온 궁장 밑을 찾아갔다. 제 귀에도 제 발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장에 뛰어오르기는 하였으나,

“이놈! 게 있거라.”

호통을 치고 파수병이 등뒤에 뛰어오는 것만 같았다.

未完[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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