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암의 길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前言[전언][편집]

덕천가강(德川家康 ― トクガワ イヘヤス)이 풍신(豊臣) 정부를 꺼꾸러뜨리고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연 지도 어언간 삼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 개의 정치 생명(政治生命)은 삼백 년을 그 장기(長期)로 한다. 삼백년이면 한 정치생명은 이미 늙어서, 다른 새롭고 싱싱한 정치의 출현을 기다린다.

한(漢)이 전한(前漢)과 동한(東漢)을 합하여 사백 년, 당(唐)이 삼백 년, 명(明)이 또한 겨우 삼백 년 ― 이것이 정치 생명의 긴 자〔長者〕들이다.

지금 삼백 년 가까운 정치 생명을 누려 온 자가 지나에는 애신각라 씨의 청(淸)이 있고, 동방에는 덕천막부가 있다.

하늘의 법칙은 여기도 움직이어, 청(淸)은 아편 문제의 영국 대포 한 방으로 그 사직의 경중(輕重)이 이미 저울질받았으며, ‘덕천’막부 역시 삼백 년 안일의 꿈은 밖으로는 아메리카의 페리 제독(提督)의 인솔한 함대의 위협과 안으로는 차차 존황심(尊皇心)에 눈뜬 지사들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의 흔들림을 보기 시작하였다.

‘덕천’막부는 자기 생명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때의 막부의 대로(大老 ― 총리대신 격) 이이 나오스케(イイ ナホスケ·井伊直弼[정이 직필])에게 그의 막하 나가노(ナガノ)모가 진언한 바가,

“경도(京都)조정의 공경(公卿)들의 들먹거리는 것은 마치 민요 같은 것으로, 한 번 탄압하면 잦아 버릴 것이오이다. 귀찮고 성가신 것은 소위 지사(志士)들의 준동인데 ‘우메다 움삥(梅田雲濱[매전운빈]), 라이 미끼(賴三樹[뇌삼수]), 이께우찌 다이가꾸(池內大學[지내대학]), 야나가와 세이강(梁川星巖[양천성암])’ 등이 그 괴수요, ‘요시다 쇼잉(吉田松陰[길 전송음])’도 악모(惡謀)가 빼난 사람이외다.”

이러하였다.

막부에서는 곧 포리를 보내어 그 소위 괴수들을 잡아올렸다.

그런데, 성암(星巖)을 잡으러 가니까. 성암은 행인지 불행인지, 막부의 손에 붙잡히기 며칠 전에, 칠십 세의 그의 천수(天壽)를 다하여 세상 떠났다.

막부의 손에 붙잡히기 이틀을 앞하여, 칠십 세라는 그의 천수를 다하고 자기 집에서 운명한 성암은, 당대의 이름 높은 시인(詩人)이었다.

그런지라 세상이 그의 죽음을 찬송하여 가로되, ‘시니(シニー死ニ 혹은 詩ニ) 쟈우즈(上手ージャウズ)’라 하였다.

성암을 잡으려다가 그만 염라대왕에게 빼앗긴 막부 포리들은 하릴없이 성암의 안해로 시, 서, 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이름높은 홍란(紅蘭)여사를 잡아올렸다.

운빈(雲濱)이하의 지사들도 잡아올려, 그들에게 사련(辭蓮)된 다른 지사들도 육속 잡아올렸다.

그들을 문초하매, 그들의 입에서 여출일구로 나오는 말이 가로되,

“우리의 수령은 양 시선(梁詩禪 ― 성암)이오.”

하는 것이었다.

과연 ‘시니(詩ニ)上手[상수]’였다.

막부의 검거가 이삼 일만 앞섰든가, 성암이 이삼 일만 더 장수하였더면 그는 옥사(獄死)든가 형사(刑死)를 면치 못하였을 것이었다.

지사들이 여출일구로 ‘우리의 수령’이라 일컫는 성암 ― 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사(平凡社)판 ‘대백과사전(大百科事典)’의 ‘야나가와 세이강’을 찾아 보자.

‘양천성암(梁川星巖) (1789~1858) 시인. 처음의 이름은 묘(卯), 자는 무상(無象). 통칭 신십랑(新十郎). 그의 사는 읍에 성강(星岡)이 있으므로.

성암(星巖)이라 호하였다. 천곡(天谷), 백봉(百峯), 노룡암(老龍庵)등의 호도 썼다. 미농국(美濃國) 안팔군(安八郡) 증근촌(曾根村) 사람으로 관정원년(寬政元年)에 났다. 일곱 살에 고향(花蹊寺)에 들어가서 자구(字句)를 대수화상(大隨和尙)에게 배웠는데, 본시 명민하고 강기하여 남에게 칭찬을 받았다. 열두 살에 양친을 여의고 침식을 잊도록 슬퍼하였다. 형화(亨和) 삼 년 열다섯 살(사실은 열아홉 살)에 집을 동생에게 맡기고 학업을 닦으러 에 도(江戶)로 나와, 고하정리(古賀精里), 산본북산(山本北山) 등에게 배우다가, 얼마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문화(文化) 칠 년에 또 에도로 나와 산본 북산(山本北山)의 문하에 들었는데, 학업이 크게 떨치고, 더우기 시(詩)에는 놀라운 천품을 보였다.’ 이상이 그의 전반생이었다.

백과사전은 다시 그의 기사를 전개하여 가로되 ―당시 ‘ 대와천민(大窪天民)은 성암보다 앞서 시명(詩名)이 장안에 떨쳤는데, 간다(神田) 오다마가(オタマガ) 지(池)에 강호시사(江湖詩社)를 열고 천하에 시객들을 청해 가지고 즐기는, 성암도 그 축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그후 성암은 그의 생애의 짝 홍란(紅蘭)을 맞아 천하를 우유하며 시상(詩想)을 닦기를 이십 년, 천보(天保) 오년에 에도로 돌아와서 옛날의 강호시사의 자리를 찾았으나, 잃어진 자취 찾을 바이 없어 그 근방의 땅을 사서, 새로이 한 못을 파고 옥지음사(玉池吟社)를 열었다. 그의 명성이 떨치고, 문하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홍화(弘化) 일년에 경도(京都)의 압천(鴨川)가의 압기소은(鴨沂小隱)에 옮아 운하(雲霞)를 벗하여 음영(吟咏) 홀로 즐겼다.

그의 시 고아청기(古雅淸奇), 고취(高趣)하고 기품높아, 세상에서는 그를 일본의 이백(李白)이라 하였다. 근세의 시인 관다산(菅茶山), 광라담창(廣瀨淡窓), 대와천민(大窪天民), 국지오산(菊地五山) 등 선배도 오히려 성암의 명성보다 눌리어, 당시 글에서는 뇌산양(賴山陽)으로 마루〔宗〕를 삼고, 시로는 성암을 북두(北斗)로 삼았다.

안정(安政) 오년 가을 막부 각로 간부전승(閣老 間部詮勝)막부의 명령을 받들고 양이근왕론자(攘夷勤王論者)들을 일망타진하려 할 때에, 성암은 강개하여 시 이십오 편을 지어 시사를 평하고 그리고는 구월 이튿날 병으로 세상 떠났다. 나이 칠십.

근황지사들을 잡아 문초하매, 모두 성암을 수령이라 하여 성암의 안해 홍 란(紅蘭)을 옥에 내렸다.

대소침산(大沼枕山), 원산운여(遠山雲如), 삼춘도(森春濤), 노송당(鱸松塘), 강마천강(江馬天江)등 모두 성암의 문하에서 난 사람들이다. 명치(明治) 이십사년 사월, 정사위(正四位)를 추증하였다.

요컨대 백과사전도 그의 가다가끼(カタガキ ― 직함)를 ‘시인’이라 하였지, ‘지사’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사들은 성암을 수령이라 일컬었고, 서향융성(西鄕隆盛), 길전송음(吉田松陰), 교본좌내(橋本左內), 구판현서(久坂玄瑞) 등 쟁쟁한 지사들이 모두 그의 문을 두드려, 혹은 스승으로 혹은 선배로 그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 일생을 한낱 초야의 시인으로 보낸 그에게, 죽은 후에 지사로서의 욕이 돌아오려 했고,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순난지자’의 대우로서 정사위의 작이 추증되었다.

말하자면 칠십년 전 생애를 시인으로 보낸 그가, 때때로 시사에 분개하여 써 던진 불붙는 노래가, 때의 열혈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충격하여, 드디어 그를 맹주로 우러르게 한 것이었고, 그의 노래가 원동력의 하나이 되어, 명치유신의 위업을 달성케 한 것이었다.

화조(花朝)를 찬송하고 월석(月夕)을 노래하는 당시(唐詩)에 적을 두고도, 이 구각을 깨뜨리고 존황(尊皇)을 고취하며 양이(揚夷)를 외치며 시사를 통탄한 그의 노래의 힘 ― 이런 노래를 산출한 그의 정신의 힘, 얼마나 세차고 위대한 것이냐.

당시인(唐詩人)의 통례에 벗어나지 못하여 성암도 숭당(崇唐)사상은 적지 않게 가졌었다.

그 위 본 성씨 도진씨를 버리고 ‘양천(梁川)’씨라 통칭한 것도 요컨대 지나식의 이름 양맹위(梁孟緯) 혹은 양시선(梁詩禪)등을 일컫기에 편리키 위해서였다.

일청전쟁 이후의 천당심(賤唐心)이 배양된 뭇 평가(評家)들은 이를 부인하기 위하여, 각자각양의 설을 지어내어 그 새 성씨의 곡절을 부회(附會)하지만, 이들은 한낱 억설이요, 성암이 자기의 안해(역시 본시 도진(稻津)씨 경완 여사(景婉女史)를 장씨 경완(張氏景婉) 혹은 장씨 홍란(張氏紅蘭)이라 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의도한 바를 알 수 있다.

이 양성암(梁星巖)이 장경완(張景婉)을 안해로 맞은 것은 벌써 서른두 살이라는 중년의 때였다. 경완은 그때 열일곱.

1[편집]

1[편집]

“내 강태공 아니어늘, 고기는 어째서 미끼만 따 먹는고.”

미끼를 떼인 낚시에 다시 미끼를 꿰었다. 낚시를 다시 시내에 던졌다.

“자, 용왕님. 방치만한 고기, 홍두깨만한 고기 모두 몰아보내 주시우. 용왕님께 찬시(讃詩)를 올리리다.”

미소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낚시를 일단 물에 던진 뒤에는 그의 주의는 낚시 위에 멎어 있지 않았다.

시내 건너는 일면이 밭이었다. 한창 자라나는 밀 보리는 춘풍에 물결치고 있다. 일록일청으로.

눈은 거기 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눈만 그리로 붓고 있는 다름이었다.

그의 머리는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공상 위에 헤매는 것이었다.

그(성암)가 그 새 경도 등지로 방랑의 길을 더듬다가 집에 돌아오매 그의 아우가 어느덧 안해맞이를 하고 있었다.

아우의 나이 벌써 스물아홉이매 안해맞이를 한 것이 무엇이 이상하랴마는, 아직껏 성암이 아우에게 안해맞기를 권고할 때마다,

“형님이 먼저 가셔야지 어찌 동생이 먼저 장가들리까.”

하여 거부하여 오던 것이어늘, 이번 방랑에서 돌아오매 집안에는 ‘계수’라 하는 한 여성이 새로 생겨 집안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기를 보이게 한다.

부모를 일찍 여의기 때문에 홀아비 살림이 냉락하고, 쓸쓸하던 집안은 계수라는 한 젊은 여성이 생긴 덕으로 아주 호젓하고 화기있는 집안으로 변하였다.

아우 내외의 의좋은 모양을 보매 방랑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성암도 약간 비위 동하지 않는 배 아니었다.

“안해라는 게 그렇게 좋은 것인가.”

돌아보고 회상해 보면 과연 지금껏의 생애는 과히 냉락하였다.

방랑을 즐겨하는 그가, 천하를 방랑하다가 그래도 자기의 난 집, 자란 집이라고 고향을 찾아오면 역시 홀아비 동생이 그를 맞고, 냉락한 베개가 피곤한 그의 머리를 고여 주는 뿐이었다.

이전에는 그것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되더니, 지금 눈앞에(총각을 면한) 동생의 살림을 보매, 지금껏 당연한 일이라고 보던 것이 모두 부자연하고 더욱 쓸쓸하게 보였다.

“나두 안해맞이를 할까.”

서른두 살이었다.

너무 늙은 총각이었다.

2[편집]

“오빠. 낚시질하세요?”

공상에 잠겼던 성암의 고막을 두드리는 이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의 육촌 누이 경자(景子)였다.

“에쿠쿠.”

바삐 낚싯대를 들어 보았다. 또 미끼만 잘린 낚시가 줄에 달려 올라왔다.

“강태공이 아니라 양태공, 고기 배만 불려 주누나. 경자 너 어디 가느냐.”

“언니한테 갔다가 ―.”

“언니란? 오, 오, 오. 그래 갔다가 어디루 가는 길이냐.”

경자의 언니란, 성암의 아우의 안해 ― 즉 성암 형제의 육촌 누이였다. 성암의 아우는 육촌 누이와 부부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언니한테 댕겨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집으로 가지요.”

“집으루? 이렇게 시냇가까지 돌림길을 해서?”

경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약간 얼굴을 붉히며 외면하였다.

“야, 좌우간 여기 잠깐 앉아서 태공망의 낚시질이나 구경해라.”

“몇 마리나 잡으셨어요?”

“태공도 고기 잡는다디?”

성암은 경자를 위하여 약간 자리를 비켰다.

“에쿠. 네가 앉는데 땅이 쿵하니 울리는구나. 세월도 빨라라. 인젠 제법 색시 꼴이 났네. 언니는 시집갔는데 너 부럽겠구나.”

“망칙해. 오빠는 작은오빠 장가 드시는데 부러우세요?”

“암, 부럽지. 내가 부럽기에, 너도 부러울 줄 짐작이 가는 게 아니냐.”

“망…”

아마 ‘망칙해’를 또 말하려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뒤를 흐려 버렸다.

성암은 다시 낚시를 끌어당겨, 거기 또 미끼를 끼려 하였다. 그러나 경자가, 그것을 막았다.

“오빠두. 일껏 예까지 뵈려 오니까, 낚시질만. 난 몰라요.”

“오오. 일부러 나를 찾아왔더냐. 난 또 돌림길해서 집으로 간다기에….”

“오빠, 그래 수정 같은 시냇물 앞에 두고 너울거리는 보리밭 건너편에 펴시고, 어떤 노래를 얻으섰어요? 그 노래 들려 주세요.”

“노래는 하나도 못 얻었구나.”

“그럼 고기두 못 잡으시구 노래두 못 얻으시구 무얼 하셨어요?”

“아우놈 장가든 거 강짜만 하구 있었다.”

“망….”

또 ‘망’이었다.

“그럼 오빠두 장가드시면 되지 않아요.”

“그러니, 재산은 아우에게 죄 물려 주고, 한 푼 반 전 없는 ― 게다가 서른두 살의 늙은이에게 누가 오겠느냐.”

성암은 눈을 들었다.

머리를 약간 돌려 경자의 뺨을 보았다. 강바람에 깜티티하게 타기는 하였지만, 몹시 이지(理智)적이면서도 또한 정열적인 눈을, 흐르는 시내에 붓고 있는 이 열일곱의 소녀는 무슨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잠자코 있었다.

잠깐 그것을 바라보고 다시 눈을 앞으로 돌렸다. 서른두 살의 중로(中老) 답지 않은 정열이, 차차 그의 마음 한편 구석에 일려 하였다.

성암은 일단 놓았던 낚시를 다시 끌어당겨, 거기 미끼를 끼려는 조작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한 유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는 전제에 지나지 못하였다.

“야 경자야.”

“네?”

“네 어렸을 때 흔히 하던 말, 생각나느냐.”

“무에요?”

“있지 않느냐? 그 ―”

다시 반문하려다가 경자는 얼굴을 홱 돌려 버렸다.

경자 어렸을 때 하도 ‘에도’에 공부 가 있는 오빠(성암)가 그립고 훌륭해 보여서, ‘나 이다 ― ㅁ 에 오빠게루 시집갈 테야’ 늘 외던 것이었다.

“잊었느냐.”

“…”

혹은 인젠 생각이 달라졌느냐.”

“…”

“야 경자야, 아내 말을 들어 봐라. 내 나이 서른둘, 장가들기 싫어서 아직 총각으로 있는 것도 아니다. 들구 싶어. 들구 싶기는 하지만, 사실 마음에 맞는, 마음에 드는 색시를 아직 찾아 내지를 못했구나.”

경자는 눈을 들었다. ‘말’로가 아니고 ‘눈’으로 물었다.

“어떤 색시를 그렇게 어렵게 구하세요?”

“응? 말하자면, 영리하고 영특하고 슬기롭고 ― 게다가 이쁘고 마음씨 곱고 ― 또 정열 많고, 그 위에 시를 이해할 줄 알고 ―. 야 경자야, 꼭 너 같은 색시가 있어야 내가 총각을 면할 테로구나. 그러니 내 아우가 벌써, 네 언니를 안해로 맞아왔으니, 내 또 어찌 너를 안해로 달랄 수 있겠느냐.

가련한 양 선생 총각귀신을 면할 바이 없구나.”

농담 비슷이 자조(自嘲)비슷이 내어던지는 이 말에는, 그의 무한한 뜻과 무한한 희망이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경자는 묵묵히 아래만 굽어보고 있었다.

땅에는 개아미가 줄을 지어 무엇을 나르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굽어보다가 , 경자는 그냥 눈을 아래로 부은 채 말하였다.

“오빠. 안 잡히는 고기를 그냥 기다리실 테야요? 해도 차차 기울려는데….”

“글쎄, 집에 들어간댔자 쓸쓸한 다다미, 냉락한 방석 ― 아우 내외 부럽구 강짜만 나구 ― 원(鴛)은 있지만 앙(鴦)은 없고 봉(鳳)은 있지만 황(凰)은 없고 낙(駱)은 있지만 타(駝)는 없는 살림이니 왜 쓸쓸치 않으랴.”

홱 머리를 경자에게로 돌렸다. 뺀뺀히 깎은 중머리 아래 그의 눈이 빛을 내었다.

“아, 경자 너 타(駝)가 되지 않으련? 어렸을 때부터 늘 말하던 대로….”

3[편집]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암도 안해맞이를 하였다. 성암 나이 서른두 살. 그의 안해 경자는 열일곱이었다.

簾閣通明日漸高[염각통명일점고]
畫眉窓下笑櫻桃[화미창하소앵도]
一輪妝鏡何多事[일륜장경하다사]
更向潘郎管二毛[경향반란관이모]
(발을 드리운 다락에는 해가 높이 올랐고,
창안에서는 새색시 눈썹을 그리고 있는데,
한 개 거울은 바쁘기도 해라,
늙은 신랑의 흰 털 뽑는 데도 쓰여야겠구나)

스스로 자기의 늙음을 노래로 비웃으며, 서른두 살의 새서방은 어린 안해의 아리따운 자태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새살림을 시작하고, 살림의 자리가 좀 잡히자 이 방랑성을 다분히 가진 시인의 마음에는, 차차 무럭무럭 또 방랑의 유혹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절기는 첫여름.

첫여름 훈풍에 벌에는 오곡 춤을 추고, 농촌의 길에는 말똥구리 말똥을 희롱하는 이 좋은 방랑절기에, 집안에 박혀 젊은 안해의 화장 구경이나 하며 있기는 약간 싫증도 났다.

“네(ネ), 홍란(紅蘭 ― 경자) 이 머리 봐. 흉허지?”

밴밴히 깎았던 머리를 결혼하려고 기르기 시작했다. 지금이 꼭 솔잎 머리였다.

“이 머리가 좀더 자라서 손질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아주 보기 흉할 테야. 늙은 것만 해도 젊은 안해 보기에 좀 어떤데 머리까지 이 꼴이니, 내 되지 않았어. 이 머리 자랄 동안, 한동안 어느 산골에 가서 숨어 있을까봐.

어떨까?”

이 말에 그의 어린 안해도 미소하였다.

“또 방랑 생각이 나신 모양이외다그려. 이 홍란보다 객주집 밥따르는 계집애가 더 그리우서요?”

“아니야, 아니래두 그런다. 그럴 리가 있나. 이 머리가 ―”

“머리는 괜찮아요. 제가 좋다는데 왜 그러세요.”

“그래두 젊은 색시에 늙은 중 ― 꼴이 안됐어. 내 사탕 엿, 많이 사다 주께. 나 없는 동안 당시선(唐詩選)이며 삼체시를 횅횅 따로 외고, 운(韻)도 더 잘 ―.”

“엿 엿 싫어요. 사탕 싫어요.”

“그럼 뭐나?”

“중 영감.”

“그 중 영감이 한동안 오작교 건너가 있다가, 머리 기른 새서방 돼서 돌아올께. 내 딸 귀여워라, 내 딸 착하지.”

성암에게는 벌의 매력, 산야의 매력은 막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리고 아리따운 안해의 아양보다도, 산수의 부르는 소리, 창해의 외치는 소리가 더 고혹적이었다.

“이봐, 홍란. 은하수 가운데 두고, 견우직녀 서로 건너다보며 그리는 정경 더욱 아름다우느니. 그 정경 두고 나 없는 동안 늘 노래 일백 수만 지어 두어. 아아, 애처 홀로 집에 두고, 먼길 떠나자니, 오장이 끊어지는 듯하이.”

“누가 떠나시래요?”

“압다. 집 잘 보아 주게.”

며칠 뒤, 성암은 어린 안해의 간곡한 전별을 받으며, 또 방랑의 길을 떠났다.

소위, 깎은 머리 길기까지를 목표로.

2[편집]

1[편집]

성암이 머리를 깎은 것은 그의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불붙는 향학열을 누를 수 없어, 제 집안의 장손이라는 자리를 벗어 버리고, 아우에게 가독(家督)과 재산을 죄 물려주고 배움의 길을 ‘에도(江戶)’로 떠난 것이 그의 열아홉 살의 일이었다.

‘에도’에 나와서는 창평숙(昌平塾)에 들려 하였다.

그러나 창평숙은 막부 직신(直臣)의 자제의 교육을 목적한 서재니만치, 웬만한 번사(藩士)며 처사의 자제들도 좀체 창평숙의 숙생이 되기는 힘들었다. 성암 따위 시골 서민의 자식은 염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릴없이 창평숙을 단념하였다.

처음 고하정리(古賀精里)의 문에 들었다. 일찍부터 시골서 그 명성만을 듣고 사모하던 이 노유(老儒)의 문하에서 성리의 학을 닦다가, 북산(北山)의 문에 적을 옮겼다.

북산 선생은 당대 첫손가락 꼽히는 시인일 뿐더러, 온갖 학문에 있어서 이름 높은 학자였다.

게다가 성미가 청렴하여, 그 집안이 대대로 막부 직신(直臣)의 떳떳한 집 안이었지만 끝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고, 자제 훈육에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 문하에서 성암은 여러 선배(성암이 가장 나이 어렸다)들 틈에, 배움의 길을 더듬었다.

일대의 시종(詩宗) 북산 선생의 문하에서 시에 눈뜬 것도 이때였다.

성암의 시인으로서의 천품과 재질은 이 거장의 문하에서 비로소 눈뜨고 눈 뜬 뒤부터는 무럭무럭 자라서, 삽시간에, 그의 선배들의 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시는 글재주❲文才❳뿐으로는 안 된다. 글재주의 아래 시상(詩想)이라 하는 것이 복재해 있어야 한다. 다른 선배들이 글재주만으로 이렁저렁 당면의 시를 읊어 나가는 동안, 시인으로서의 천품을 가지고 있는 성암에게서는 진정한 ‘노래’가 연하여 우러나왔다. 아직 노래를 구성하는 글에 있어서는 얼마의 서투름이 있다 하지만 서투른 문장으로 조성된 풍부한 ‘시상’의 노래는 그의 모든 선배들을 압도하기에 넉넉하였다.

동시에 그의 성래의 유흥선도 이 번화한 대 ‘에도’에서, 날개를 벌리기 시작하였다.

악우들의 유혹에도 유리(遊里)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다.

한 번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 끝을 보고야 마는 이 정열의 젊은 시객은 유리의 달콤한 맛과 , 향그러운 미녀의 체취에 접촉하자, 그만 거기 빠지고 말았다.

틈을 타서, 틈을 내어서, 그의 발길은 ‘아사꾸사’의 유리에 헤매었다.

‘화선(花扇)’이라 하는 한 미회에게 성암의 온 정열은 부어졌다.

그러나, 여기도 일어나는 것은 현실이라는 가혹한 문제였다. 유리에 드나드는 사람에게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다는 현실은, 이 젊은 시인의 앞에 적지 않은 고뇌를 주었다.

본시는 적지 않은 재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재산은 통 아우에게 물려주고, 현재 그의 오촌 아저씨가 관리하는 형편이매, 한두 번 두세 번은 보통 학비 이외의 금전에도 응하기는 했지만 너무도 도수가 잦고 또한 그 청구하는 금액이 서생의 신분으로는 좀 넘치는 액수가 되매, 차차 말썽이 붙어 오다가 종내는, 일정한 학비 이외에는 한 푼 반 전도 보내지 못하겠다는 선고가 내렸다.

그러나 화선과의 정사에 침혹한 이 정열의 젊은이는 쉽사리 화선과의 연분을 끊을 수가 없었다.

빚을 내어 그냥 화선에게 다녔다. 빚도 못 지게 되매, 화선이 있는 기루(妓樓)에 외상으로 다녔다.

섣달 그믐.

밀린 빚은 일단 청산해야 되는 속세의 빚장이의 성가신 날이 이르렀다. 포주의 빚 채근이 자심하였다.

아직 이런 단련을 받아 본 경험이 없는 성암은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쩔쩔매었다.

이런 때, 같은 북산 문하의 사람으로 막부의 옥리(獄吏)로 있는 모가 성암을 동정하여 이런 진언을 하였다.

“머리를 잘라, 포주에게 내어주게. 가객(謌客)은 중 머리❲僧頭❳라도 무관하이.”

“머리가 얼마짜리라고 포주가 들을까.”

“뒤는 내 담당하마.”

빚에 몰려 진퇴유곡하게 된 이 순진한 젊은이는, 면도를 내어 자기의 검은 머리를 썩 잘라 버렸다.

빚 대신 머리털을 받고, 이 따위 머리가 돈값이 되느냐고 그냥 기루에서 투정할 때에, 벗(막부 옥리)이 맡아 나섰다.

“이 짐승 같은 놈. 터럭과 피부는 부모의 끼치신 물건이야. 이 귀중한 터럭으로 사죄를 하는데도 그냥 투정이냐. 그럼 당장에 이 터럭은 도로 붙여 올려라. 돈은 내가 주리라.”

여차하면 칼이라도 뽑으려는 기세에, 기루에서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머리를 자른 성암 ― 빚에 쫄리어 머리는 잘랐으나, 생각하매 세상사 한심하였다.

청운에 뜻을 주고, 집안은 아우에게 물려주고 ‘에도’로 배움의 길을 닦으러 올라왔거늘 지금 이 승형(僧形)으로야 청운이 무엇이고 출세가 무엇이냐. 고향의 집도 아우에게 물려준 배니 돌아갈 집도 없다.

그렇다고 가지가지의 계급의 층층의 백만 인구가 끓는 이 대‘에도’도 승 형의 한 소년을 포옹할 빈 자리가 없다.

내 고향에 돌아가 내 종조부께나 몸을 의탁하자. 일찌기 출가하여 불문(佛門)에 들어 있는 종조부야말로 이 승형 소년의 가장 의탁하기 쉬운 곳이다.

스승 북산께 그 뜻으로 하직을 고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그 의견에 찬성하지 못하였다.

“네 재주가 아까와. 왜 그 재주 길러서 이름을 육십 주에 떨칠 생각을 못 두고, 고향 진토에 묻히려느냐.”

“선생님. 그러니 이 승형으로야 ―.”

“네 서민의 자손으로도 청운에 뜻을 두지 않았느냐. 서민의 자손이나 승 형의 인생이나, 사분(士分) 못 되기는 일반이니라. 또 ― 말이로다. 사분이라 해도 국주, 대명(國主, 大名)이 있고 ‘하따모도(ハタモト ― 旗本[기본])’가 있고 배신(陪臣)이 있고, 층층의 계단이 있지만 위로는 덕천(德川)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을 비롯하여 한낱 하향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성천자(聖天子)의 적자이기는 일반이니 승형의 서민이라고 높은 뜻 못 둔다는 법 없느니라.”

스승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타일렀다.

“네가 재질이나 범상할 것 같으면 내 이런 말도 않겠다마는 네 재질은, 초야에 묻어 두기는 아까워. 잘 닦고 기르면 길이 청사에 빛날 이름을 왜 초야에 적이랴. 더 배워라 더 닦아라. 예로부터 ‘에도’서 배우고 대판(大阪) 서 돈벌고 경도(京都)서 호강한단 말도 있거니와 배우기는 ‘에도’에서 배워야 한다.”

스승은 간곡히 성암을 격려하였다.

스승의 말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십 년 지니고 있던 머리를 잘라 버리고 또한 오래 정들였던 ‘화선’과 떨어지기로 결심한 오늘에 있어서는 성암에게는, 모든 것이 모두 귀찮고 마음 냅떠지지 않고, 희망 붙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고향이라고 시원하고 신통한 데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나 이 백만 대 ‘에도’같이 매끄럽지 않고 쌀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성암은 스승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스승께 하직하고 동료들과도 작별하고, ‘학(學)’ 아직 겨우 초보를 들여놓은 뿐으로, ‘에도’를 떠나서 고향으로 내려왔다.

2[편집]

그러나 고향에 돌아와 보니 고향도 마음붙지 않았다. 그의 마음 자체가 고적한 것이지 ‘에도’가 고적한 바가 아니었으매, 고향이라고 신통하게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책도 펴보기 싫었다. 한 귀의 습작(習作)조차 읊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화계사에 종조부 태수(太隨)대사를 찾아 한담으로 신통 못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무위의 날을 보내다가, 이듬해 그는 다시 고향을 떠났다.

천자 계오신 경도로 올라가 보기 위해서였다.

역시 승형이었다. 가사를 입지 않고 고깔을 쓰지 않은 이 중 아닌 승형 청년은, 우울한 심사를 가슴에 가득히 품은 채 경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 감개의 청년이 경도에서 본 바는? 천자 계오신 마을 경도가, 덕천 장군의 서울 ‘에도’에 익은 청년 시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었나.

3[편집]

경도(京都) 들러서 천자 계오신 곳을 절하고, 유서 깊은 고적들을 찾아보려는 것이 성암의 본시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성암은 경도에서 이 본시의 계획을 의식적으로 내어던졌다.

번화하고 창성한 ‘에도’에 젖은 성암에게는 쓸쓸하고 고요한 경도는 너무도 눈물겨웠다. 팔백팔 정, 인구 이백만을 자랑하는 덕천씨의 서울 ‘에도’에 비기어, 성천자의 계신 곳은 어쩌면 이다지도 쓸쓸하랴.

보지 않아야지 ― 생각치 않아야지 ― 보고 생각하고 대조하자면 자연히 불쾌하여졌다. 아니, 불쾌뿐 아니라 불쾌가 도를 넘쳐서 노여웠다.

천자의 계신 곳이 이렇게 검소하고 질박하거늘 덕천씨는 제 무엇이길래, 그렇듯 호화롭고 그렇듯 뽐내는가. 보지 않고 생각치 않고 대조하지 않아야지, 보고 생각하고 대조하자면 불끈불끈 불쾌와 노염이 솟아올랐다.

의식적으로 보기를 피하고 대조하기를 피하였다. 그리고 학자들이나 사괴며 시도(詩道)나 좀더 닦고자 하였다.

그러나 경도의 학자들은 성암의 희망을 이루어 주지 못하였다.

학자가 없는 바가 아니었다.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은 순전한 학자로서, 퇴계(退溪) 우암(尤庵)등 조선의 성리학자들의 뒤를 물려받아, 순전히 학문을 연구하는 학도들이지 시(詩)를 읊조리는 ‘작가(作家)’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간간 시를 읊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시상(詩想)에 없는 단지 문자의 회롱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시’만을 읊조리고 ‘시’만을 숭상하는 것을 천하게 보고, ‘학문의 외도’라 본다.

성암은 한동안 경도에서 배회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역시 클클하고 답답한 고향이었다.

게다가, 그의 마음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시에 대한 변함없는 동경심이었다.

그가 먼젓번 머리를 깎고 고향으로 돌아오려 할 때, 그의 스승 북산(北山)도 간곡히 말하였지만, 자기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자기가 장차 나아갈 길은 ‘시도(詩道)’다. 자기에게 시인으로서의 천분이 있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안다.

단지 아직 수련이 부족하다. 흉금에 솟아오르는 구상을 글자로써 넉넉히 나타낼 만한 기술이 부족하다. 이 기술을 닦기 위하여는 이름높은 스승의 문하에서 더욱 더 수양을 닦을 필요가 있다.

스승 북산의 말마따나, 이 천품을, 시골서 진토에 묻어 버리기는 애석하였다. 이름을 해내에 떨치고 천추에 남긴다는 것은 혹은 과한 욕심일는지 모르나, 시골서 이름없이 삭아 버리기는 그래도 애석하였다.

고향서 한동안 굴다가, 성암은 다시 ‘에도’로 뛰쳐올라갔다.

다시 옛날 스승 북산의 문하에 들었다. 좀더 닦고자.

4[편집]

다시 북산의 문하에서.

성암의 본질은 비로소 껍질을 깨뜨리고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명옥(名玉)은 명공의 손에 걸려서 비로소 명옥으로서의 본질을 나타내었다. 북산 선생의 좋은 지도 아래서 성암의 시명(詩名)은 나날이 높아 갔다.

이리하여, 젊은 시인으로의 성암의 이름이 꽤 자자하게 되었을 때에, 스승북산이 세상을 떠났다 . 그러나, 인제는 스승의 지도가 없을지라도 자기의 길을 걸어나갈 만한 자리가 잡힌 성암은, 더욱 열심으로 자기의 길을 닦아 나아갔다.

성암은 오따마가(オタマガ)지(池)의 강호시사(江湖詩社)의 한 객원으로 들었다.

이 시절은 성암에게 있어서는 일생을 통하여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절이었다. 글벗❲文友[문우]❳들을 짝하여, 연못가에 거닐며 흥나는 대로 노래를 읊으며, 혹은, 캄캄한 침야의 못가에서 연꽃 벙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무럭무럭 자라는 시상에 무럭무럭 자라는 기교에 ― 자기로도 넉넉히 알 수 있는 자기의 성장을 즐기며, 좋은 벗 짝하여 아름다운 곳 찾아다니며 놀던 강호시사의 몇 해는 성암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시절이었다.

성암의 방랑성은 이때에 배태된 것이었다. 독신자의 구애없는 몸이라, 생각나는 때 생각나는 곳을 향하여, 붓 한 자루를 벗삼아 표연히 나가서, 지방의 글벗들을 찾아다니며, 혹은 십여 일, 혹은 너덧 달씩 방랑을 하고 하였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기 칠팔 년, 서른 살 나는 해에 그는 오래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는 왔지만 역시 클클하고 답답한 고향은 마음에 맞지 않아, 이듬해 봄에 또 다시 표랑의 길을 떠났다.

한동안 또 표랑하다가, 그래도 또 고향이라고, 찾아 돌아오니, 그의 동생이 안해맞이를 하여 새 살림을 차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우 내외의 의좋은 것을 보니, 아닌게아니라 은근히 부러웠다. 생래의 방랑성 때문에, 서른두 살이라는 지금도 아직 총각으로 지냈고 거기대하여 아무 부자연성이며 불만을 느껴 본 일이 없지만, 아우 내외의 아늑한 신혼 생활을 보니, 적지 않게 마음이 동요되었다.

이리하여 성암도 드디어 경자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안해맞이를 하고, 열일곱 살의 어린 안해와 꿀 같은 속살거림의 신혼 생활 몇 달을 하고 나니, 생래의 방랑벽은 또다시 그를 충동하여, 창해의 물결치는 소리 귀에 쟁쟁하고 우거진 논밭 새로 다니는 발의 촉감의 유혹 막을 바이 없어 ‘이 깎은 머리 자라기까지’라는 핑계로 어린 안해 집에 남기고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난 것이었다.

3[편집]

1[편집]

동산도(東山道)를 지나서 동해도(東海道)로.

돋아나는 솔잎 머리에 갓을 튀겨쓰고, 붓 한 자루 벗하여 성암은 유월 염천에 그의 방랑의 길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슨 목적이 없는 길이었다. 시인으로서의 표박성과 방랑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그가 단지 그 방랑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길이었다.

혹은 배움의 도를 닦고자, 혹은 글벗들을 찾으려, 또는 단순히 방랑을 즐기기 위하여, 동해도의 길을 오르내리기 이미 칠팔 차, 눈에 익은 바다요 눈에 익은 산이건만, 다시 보아도 겸증 안 나고 다시 밟아도 싫증 안 나는 표박이요 방랑이었지만, 이번의 길은 왜 그런지 마음 산란하였다.

“주막집 밥 따르는 계집애가 그리우셔요?”

성암이 이번 또 방랑의 길을 떠나고자 할 때, 그의 어린 안해 홍란이 이렇게 그를 웃어 주었지만 ― 그리고 과거의 방랑의 길에서는 피곤한 몸을 주막에 내어던지고 주막집 밥 따르는 계집에게 부질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도 아닌게아니라 적지 않은 취미였더니, 이번 길에서는 그것이 그다지 신통치 못하였다.

집에 버려 둔 어린 안해가 그리웠다.

“은하수 가운데 두고, 견우직녀 사모하는 정경두 더 아름다우느니.”

이번 길 떠나기에 임하여, 성암이 안해에게 남긴 핑계가 이것이었고, 또한 시인으로서의 감상(感傷) 욕구성을 유달리 많이 가지고 있는 성암이라, 어린 안해 집에 남기고, 객창의 쓸쓸한 자리에서 안해 사모하는 기분에 도취해 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급기 길을 떠나서 객창의 외로운 홑베개에 머리를 눕히고 보니, 안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더우기 일전,

階前栽芍藥[계전재작약] 堂後蒔當歸[당후시당귀]
一花且一草[일화차일초] 情緖兩依依[정서량의의]

라는 안해의 오언절구를 받고, 안해의 정경을 생각하니 측은한 생각과 동시에, 한층 더 안해가 그리웠다.

벌써 서른두 살이었다. 게다가 열아홉 살부터 화류계에 놀아난 성암이었다. 여인 경험이란 것도 충분히 하였고, 게다가 서른두 살의 중년 사나이였다.

이십 소년의 풋사랑 같은 정열과 긴장은 느끼지 못할 나이요, 느끼지 못할 처지였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러하였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이치를 무시하고, 성암의 마음은 이십 소년 ― 이 아니라, 마치 이팔 처녀와 같이 헤적이었다.

이런 애상적 기분에 도취해 보려던 생각도 없어졌다. 그저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거기는 무슨 곡절이며 이유가 없이, 무조건하고 그리운 것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라고 나부럭이 뛰놀던 홍란의 입술, 꿈꾸는 듯한 황홀한 눈으로 무한한 원망을 바라보고 하던, 홍란의 눈매, 반짝이는 이빨이며 경쾌하던 몸매 ― 모든 것이 그리웠다.

나이로 따지자면 어버이와 딸이라 해도 좋을 만하였다. 육촌 누이동생이며 겸하여 또한 계수의 언니라, 어렸을 때부터 그 성장을 보아 왔고, 코흘리던 어린시절부터 늘 붙안아 주고, 응석받아 주던, 홍란 ― 냉정한 이성으로 따지자면, 역시 누이동생으로 귀여워해야 할 홍란, 그러나 그 홍란에게 대하여 이성으로 안해로 애인으로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독신 시절에는 느껴 보지 못한 고적 ― 또한 독신자의 공상이나 상상으로는 명확히 본체를 붙들 수 없는 고적감이었다.

2[편집]

성암은 종내, 일정(日程)을 다그어, 예정보다 일찌기 귀향하기로 작정하였다.

깎았던 머리가 자라기까지 ― 그러니까, 명년 봄쯤이나 귀향하려던 것이 본시의 예정이요, 안해며 친지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고 떠난 길이었으니, 차마 오늘내일로는 체면으로든 염치로든 돌아가기가 쑥스럽다 하지만, 이 머리가 조금 자라서, 이렁저렁 상투를 짤 수가 있게만 되면, 금년 가을로라도 다시 고향으로 ― 안해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혼자의 길이 진실로 겨웠다. 논밭에서, 내외 의좋게 김이라도 매는 꼴을 보든가 할 때는,

“내게도 마누라가 있다. 네 계집 같은 것보다, 천 곱 만 곱 나은 이쁘고 젊은 마누라가 있다.”

역정 비슷한 감정으로 외면해 버리고 하였다.

이리하여 간신히 그 가을 ― 깎았던 머리가(비상한 고심을 하면) 어떻게 상투 비슷이 짤 수 있게쯤 자라기가 바쁘게 고향을 향하여 발을 돌이켰다.

가는 동안이 오륙 일이 더 걸릴 것이요. 오륙 일 더 지나노라면, 머리는 좀 더 자라리라는 에누리까지 가산하여, 황황히 회정을 한 것이었다.

3[편집]

성암이 고향 자기 집에 도착한 것은 자정이 썩 지난 밤중이었다.

고향서 오십 리 되는 곳에서 날이 저물었다. 오십 리나 되는 곳에서 날이 저물었으니 거기서 그 밤은 묵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러나 성암의 마음이 그렇지 못하였다. 오십 리는 지척이었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즉 안해를 지척에 두고, 안해 만나기를 내일로 미루기가 싫었다.

밤을 도와서 가면, 한밤중에는 안해를 만날 수가 있을 것을 공연히 이곳서 묵어서, 오늘 밤으로 만날 수 있는 안해를 내일 저녁에야 만난다는 것은, 되지 않은 일이었다. 며칠을 계속하여, 바삐 온 몸이라, 꽤 피곤도 하였지만, 오늘밤으로 만날 수 있는 안해를 내일로 밀기가 싫어서, 그냥 밤길을 계속한 것이었다.

갑자기 뛰쳐들어서 안해를 광희케 하랴, 혹은 문을 두드려 부르랴, 이런 생각을 하며 문득 보니, 이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집에는 불빛이 비치인다. 그리고 돌아가 보았다.

덧문 틈으로 들여다보니, 그의 젊은 안해는 앞에 종이를 펴놓고 일심불란히 글씨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암은 잠시 그 연습하는 자세를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보다가 눈물겨웠다.

일찍이 성암이 제 안해에게 당시(唐詩)의 초보를 가르칠 때에, 하도 안해의 글씨가 흉하므로,

“이게 무슨 개발 글씬가. 글씨부터 이 꼴이니 시가 될 게 있나.”

하여 그 글씨를 핀잔준 일이 있었다.

그 이래, 안해는 은근히 글씨에 마음썼고, 지난 봄 성안이 ‘머리 자라기까지’라고 방랑의 길을 떠날 때, 안해는,

“당신 머리 기르시는 동안, 저는 집에서 글씨를 기르지요.”

한 일이 있었다.

그때 무심히 들어 두었더니, 안해는 그것이 무심히 한 말이 아니었고 그동안 골독히 글씨 공부에 마음을 썼던가. 글씨의 체, 글씨의 자취까지는 이곳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연습하는 그 자체로 보아, 아주 격에 맞았다.

반 년 전까지만 할지라도, 붓을 잡는 격식조차 맞지 않아 자류(自流)로 되는 대로 휘갈기던 그가, 얼마나 독을 들여 연습하고 연구했으면, 단 반 년 새에, 이만치 턱 격에 맞게가 되었는가.

혹은 이것이 남편에게 웃기운 데 대한 자존심의 발로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원인에서든 간에, 결국은 학자 남편에게 대한 안해로서의 호의요, 또 성암 자기에게도 반가운 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 정성과 호의가 고맙고 눈물겨웠다. 다소곳이 앉아서 일심불란히 획마다 정성을 넣어 쓰는 그 운필을 문틈으로 잠시 들여다보다가, 성암은 할 수 있는껏 안해를 놀라지 않게 하려고, 가만가만 문을 두드리며 나지막히 불렀다.

“여보, 홍란, 홍란, 내가 왔소 내가.”

홍란은 몸을 소스라쳐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로 향하여 성암은 다시 나지막이 불렀다 ―

“내야 나.”

홍란은 황황히 일어섰다.

“아이나.”

달려와 문을 열었다.

“아이, 웬 일이서요?”

“머리가 돋았길래.”

싱겁게 웃으며 감발을 벗어던지고 올라섰다.

4[편집]

단 반 년 새에 놀라운 진보였다. 얼마나 열심으로 얼마나 성의껏 공부했으면 단 반 년 새에 이만한 결과를 얻었을까.

글씨뿐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다만 경탄할 밖에는 도리가 없을 만한 놀라운 진보였다. 칭찬의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칭찬에 홍란은 마치 어린애같이 자기의 반 년간의 수확을 차례로 내어 뵈어 자랑하였다.

차례를 따져 가며, 자랑하는 안해의 반 년간의 진보의 자취를 보니, 과연 어제가 그제보다 나았고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 일취월장의 뛰엄뛰기의 자취가 역연하였다.

“어쩌면 이렇게 껑충껑충 뛰어 진보한담.”

“어서 바삐 양성암의 안해로 부끄럼이 없도록 되기 위해서 악에 받쳐 연습했지요.”

무론 그렇게 연습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 노래든가, 글씨든가 하는 것은 결코 연습만으로 ,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천분, 소질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안해의 반 년간의 진보의 자취를 보면서, 성암은 안해에게 구비되어 있는 천품을 넉넉히 알아보았다. 이 천품은 잘 지도만 하면, 장차 넉넉히 대성할 수 있으리라는 점도 알았다. 그리고 내심 흡족히 생각하였다.

“오실 줄은 뜻도 안했어요. 오시기까지, 좀 착실히 공부해 두려 했는데, 뜻밖에 벌써….”

“머리가 다 자랐거든.”

“아직 덜 자랐어요.”

“게다가 마누라 보구 싶어서.”

“저도….”

서로 바라보았다. 명랑한 미소가 둘의 얼굴의 흘렀다.

안해는 돌아앉아 ‘단스’서랍에서 무슨 종이 뭉치를 하나 꺼내었다.

“웃으시면 안 뵈어 드려요.”

“안 웃을께. 대체 뭐야.”

“미리 칭찬해 주세요.”

“칭찬? 하지. 뭐라구. 좋다 좋다, 이만했으면 칭찬 됐나? 대체 뭐야.”

안해는 종이 뭉치를 남편에게 주었다. 그리고 옷소매를 입에 물며 얼굴을 돌렸다.

성암은 종이 뭉치를 펴보았다.

노래 ― 한시였다.

자초지종, 몇 십 수, 모두가 공규원(空閨怨)이요. 상부곡(想夫曲)이었다.

아직 수법(手法)에는 서투른 점이 많고 표현에는 유치한 점이 많지만, 청신하고 절실한 그 상(想)은 성암으로 하여금 재독 삼독, 권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웃지 말라는 부탁이었지만 웃어 주겠네. 하하하하, 하하하하. 조롱의 웃음이 아니고, 기쁨의 웃음일세. 아아 내 마누랄세. 우리 마누랄세. 이런 마누라 집에 남겨 두었으니 머리 채 자라기 전에 돌아올 밖에.”

“좀더 뒤에면 좀더 닦달된 걸 뵈어 드렸을걸.”

“그럼 내 좀더 가 있다가 올까?”

“그러세요. 오십 년만 더 가르쳐 주시구 그리구는 몇 해이구 더 나가 계시다가 오세요.”

“이런 마누라 두고 혼자 길 떠나는 놈도 밸빠진 놈이지.”

홍란은 눈을 들어 남편을 쳐다보았다 ―.

그래두 집에 “ , 한두 달만 계시면 또 길 떠나실 생각이 드실걸요.”

“아니지. 그런 법 없지.”

“정말?”

성암은 문득 동남조를 벗어 버리고 안해를 보았다 ―.

“홍란, 내 이번 길에 생각했는데, 내 성질이 본시 돌아다니길 좋아해서 이 버릇은 버릴 수 없어. 그러나 또 마누라 떠나서도 살 수 없어. 그러니까, 이 뒤 만약 또 길 떠나는 일이 있다면 마누라 함께 가세. 혼자서는 외롭고 심란해서 길 다니지 못하겠어.”

안해의 얼굴에는 환희의 빛이 나타났다. 함께 다니기가 기쁘다기보다, 함께 다니자는 그 말이 기쁜 것이었다.

“그래두 어떻게 그렇게 하세요? 남 보기에도 ―.”

“남 때문에 나 할 일 못하겠네.”

“또 ― 비용은 ― 돈은.”

무슨 재산이 있어서 호화롭게 길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다니면서 그곳 그곳서 동호자들의 부조를 받으며 혹은 시회(詩會)를 열며 하여, 거기서 방랑 비용을 짜 내는 것이었다. 이것을 소위 행상(行商)이라 한다. ‘행상’의 근소한 수입으로 어떻게 두 사람의 비용을 짜 내겠느냐 하는 안해의 말이었다.

“뼈를 갈고 피를 짜서라도 그 비용이야 어떻게든 만들지. 한 보름 쉬어서 이번은 둘이서 다시 길 떠나세.”

“글쎄요.”

5[편집]

이번은 안해를 데리고 애처 동반의 ‘행상’의 길을 떠나려고 한 성암의 뜻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 저런 일에 밀리어 좀체 곧 길 떠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이 틈을 이용하여, 안해는 화도(畵道)에 손을 대기 시작할 때에, 성암은 이번 방랑의 길에서 구해 온 사서(史書)를 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중국사기를 보았다.

하, 은, 주(夏殷周)의 세 왕조를 지나서 전국(戰國)시대의 어지러운 기복, 그 어지러운 시대를 겪은 뒤에는, 일대의 위인 진시황(秦始皇)이 생겨 나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 집권의 ‘황제’시대를 지나서 한(漢)이 나타나고 ‘한’의 뒤에는 삼한, 삼한이 부스러져서는 오호십육국, 그 뒤에는 어지러운 정국을 지나서 다시 수(隨)의 통일.

‘수’가 넘어지고 당(唐). 당의 뒤에는 ‘오대’의 난장판. 오대를 지나서는 송(宋).

‘송’에서 ‘금(金)’으로 , ‘금’에서 ‘원(元)’으로, ‘원’이 넘어지고는 다시 한족의 ‘명(名)’으로 ‘명’이 넘어지고는 ‘청(淸)’으로.

순서를 기억하기도 힘든 이 지나 오천 년간의 기복을 마치 「수호전」이나 읽는 것 같은 흥미로 읽었다.

이 지나 역사를 읽는 동안 저절로 역사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이 역사에 대한 흥미는 성암으로 하여금 다시 이번은 ‘일본 역사’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게 하였다.

연전 성암이 경도 방면으로 방랑의 길을 더듬을 때에 꽤 가까이 사괸 뇌산양(賴山陽)이 (산양은 성암보다 아홉 해 맏이었다) 성암에게 들려준 ‘일본 역사’의 자랑이 생각났다.

저 한토에서는 소위 ‘성즉 천자요 패측 역적이라(成則天子, 敗則逆賊)’이라 하여, 누구든 힘만 있으면 천자 될 수가 있고, 그러기 때문에 어중이떠중이가 모두 천자 되어 보려고 꿈틀거리며, 또한 힘만 있으면 능히 천자도 될 수 있지만 ―.

이리하여 산양은, 지나의 어지러운 역사를 통탄한 뒤에 말을 이어 ―. 우리 일본의 자랑을 말하였다.

우리 일본은 저 한토와 달라, 어중이 떠중이가 황위(皇位)에 오르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인황 제일대이신 신무 천황의 후윤이시고서야 비로소 황 위에 오를 수 있지, 제 실력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한 사람일지라도, 황윤이 아니고는 황위를 염내지 못한다.

중간, 무사(武士) 계급의 대두가 있어서, 무사 정치의 막부(幕府)라는 것이 생겨 나서, 통치의 임을 대행한 시절이 있었지만 비록 정치는 막부에서 대행한다 할지라도, 역시 ‘대행’하는 뿐이지, 황권은 엄연히 황윤만이 계승하시는 것이다.

막부의 세도가 좀 과하여, 일견 막부의 주재자가 즉 통치자인 듯한 느낌이 없은 바는 아니나, 그러나 역시 그것은 성천자께 위임받은 대행뿐이지, 막부 자기의 권한은 아니다.

“그러나 성천자는 구중 깊은 곳에 계서 우리 서민들은 우러릅기조차 못하고, 우리가 조석으로 상대하는 자는 대행기관인 막부이니까, 어리석은 서민 가운데는, 막부가 우리의 맨 꼭두머린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잘못 생각이고, 덕천 대장군이나 양 형이나 내나 모두, 성천자의 한 보잘것없는 적자이기는 일반이외다.”

일찌기 성암의 스승 북산도 그런 뜻의 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철없는 어린시절이라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뒤 산양(山陽)에게 같은 말을 들을 때도, 그 뜻은 알아듣겠으나, 그 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지금 지나의 오천 년 역사를 상고하고서 다시 일본의 역사를 생각해보니, 과연 그 양자의 새에는 대상부동의 차이가 있고, 일본 국체에 대한 긍지를 비로소 느낄 수가 있었다.

“덕천 장군가도 대대손손이 이백여 년이나 누려 내려왔으며 사람이란 환경에 젖는 법이라. 지금쯤은 제법 외람된 생각도 품는 듯하지만, 만일 우리 국체에 맞지 않는 생각을 품게 되면 오천만 황민이 도저히 묵과하시 않아요. 용인하지 않아요. 제 그은 금에서 한 발이라고 넘겨짚으려 하면 오천만 황민의 철퇴가 그 머리에 내리게 되겠지요. 지금 현황이, 막부 좀 과히 자세하는 듯한 태도가 보이기 시작하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근황운동 , 왕정 복고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는 모양이 아니오? 제 분에서 넘어서려 하면 용인할 수가 없거든.”

“이제라도 덕천 장군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의 침람된 행위를 고치면 여니와 그냥 그 태도를 계속했다가는 막부의 생명은 길지 못하리다. 이런 때에 있어서 우리 같은 선각자들이 앞장서서, 더욱 근황사상을 고취하고, 국체사상을 뿌리깊이 서민들에게 넣어주어서, 우리 국체에 추호의 오점이라도 찍히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할 게외다. 그래서 내 ―.

「일본외사(日本外史)」를 찬술하는 뜻이 여기 있지요. 「고사기」, 「일본서기」의 뒤를 물려받아 만세일계의 우리 자랑스런 국체를 글자로 적어 우리 황민에게 널리 전하자는 뜻이외다. 저‘미도고몽(水戶黃門)’공이 덕천씨의 일족이면서도 「대일본사」를 찬술케 하신 뜻도 여기 있지요.”

산양이 이렇게 말하던 그 말의 뜻은 알아들었지만 뜻의 의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던 것이 오늘은 확연히 밝아졌다.

그 의의가 이해되자, 성암의 마음에도 불연히 자긍심과 자부심이 일어났다.

“나는 천자의 백성이로다.”

“거룩하신 황위 우리 위해 임하신다.”

“덕천씨나 내나 같은 황민이기는 일반이로다.”

6[편집]

이로부터 성암은 오직 국체선명에 전심하였다.

안해의 지도도 게을렸다. 시작(詩作)도 한동안 내어던졌다.

전심일의 고전을 뒤적이었다. 뒤적이면, 뒤적이느니만치 이 나라 백성이 된 자기의 긍지와 기쁨을 느꼈다.

아직껏 존경하고 숭배하던 저 한토는 문화의 나라, 문물문명의 나라로는 역시 존경하고 존숭할 것이나, 국체로는 내 나라에 비기자면 진실로 창피하고 너절한 나라라는 생각도 생겨 났다.

저 나라는 한때 천여 후국(侯國)으로 나뉘어서도 아무 불만이 없이 살았고 오호십육국으로 나뉘어서도 그냥 좋다고 살았지만, 이 나라는 남목 정성(楠木正成) 같은 충신이 나지 않았던가.

지금 세상 형편 조금 이상한 데가 있어, 덕천 대장군이 세도를 누리고 있지만, 이 나라 백성의 마음에 선조 대대로 이천 년간 흘려내려온 만세 일계의 사상과 황실존중의 사상은 아무런 힘으로 밀살하려야 밀살할 수가 없는 귀하고 거룩한 관념이다.

경도의 뇌산양이 그리웠다. 연전 서로 만났을 때는 단지 한 개 학자로 서로 즐겁게 놀았더니, 지금 그의 사상을 자세히 음미하고 보니, 놀라운 선각자요, 위대한 지도자였다.

다시 만나 보고 싶었다. 그때 만났을 때에 산양은 성암에게 구주(九州) 방면을 한 번 순유해 보기를 권했다.

구주 방면은, 덕천 막부와 거리가 꽤 머니만치 막부에 대한 위포의 염은 박약하고 그 대신 존황심이 발달된 곳이니 한 번 순유해 볼 필요가 있다 하였다.

그 말을 따라 구주도 한 번 돌아보고 싶었다.

시작(詩作)에 대한 자기의 과거의 실수도 깨달았다. 과거에는 단지 당·송(唐·宋)의 본때에만 도취하여, 당시를 본받고자 송시를 본받고자 노력하고 애썼지만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점을 알았다.

작시의 방법이며 기술은 무론 거기 배울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이며 방법의 아래는 ‘일본인의 노래’라 하는 사상이 들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일에서 십까지 당시와 송시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거기 본받을 것은 다만 방법과 기술뿐이다. 그 방법 그 기술로써, 일본인의 노래를 창작을 해야 할 것이다.

― 겨울이나 지나서 봄에는 다시 안해까지 동반하여 길 떠나려던 성암은, 그로부터 삼 년간을 고향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삼 년간을 골독히 공부하였다 . 국가의 유서와 국가의 사상과 국체의 본의를. 안해 홍란은 수련을 쌓고 있었다.

수련을 쌓다가 좀 미심한 데가 있어서 거기를 밝히고자 남편에게 의견을 물으면 남편은 거기 대해서조차 그다지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답을 하기가 귀찮았다. 자기의 공부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마음이 쏠리면 그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암이었다. 안해를 그렇게 애타히 사랑하던 성암이 안해의 존재까지 잊고 방랑을 그렇게 좋아하던 성암이 방랑까지 잊고, 삼 년간을 오직 국사에 관한 서적 탐독으로 보냈다.

삼 년간 탐독한 결과, 그렁저렁 국체에 대한 관념을 짐작하였다.

짐작이 간 뒤에야 책을 집어치웠다.

7[편집]

삼 년 뒤, 비로소 책을 걷어치운 성암.

“자, 또 어디 길을 떠나 볼까?”

이 말에 안해는 그의 맑은 눈을 치뜨고 미소하였다.

“인젠 책 다 보셨어요?”

“암. 다 인젠 내 뱃속에 들어갔지. 이 배 ―.”

자기의 배를 어루만졌다.

“인젠 머리도 넉넉히 자랐어요. 이번엔 저도 데리고 가시지요?”

“같이 안 가려도 목 매서 끌고라도 가겠네.”

“아이 좋아. 역시 구주로 가셔요?”

“구주….”

안해를 굽어보았다.

“이봐 홍란. 가는 길에 나라(奈良)와 경도에 들려, 우리 임금님 계시던 곳과 지금 계신 곳을 참배하고 그리고는 세도내해 해변 길 더듬어 장기(長崎)로 ―. 다산(茶山)선생 이하의 선배며 친구들도 두루두루 찾으며, 마누라 뒤에 달고 ― 이번 길은 사실 즐거울 것일세. 다만 연약한 홍란 여사 이 먼 길 능히 감당할지가 문제야. 가다가 업어 달라면 이를 어쩌나?”

“업어 달라면 업어 안 주시겠어요?”

“싫으이.”

4[편집]

1[편집]

“아아, 고향을 떠난 지 어언간 ―.”

“여기두 아직 고향땅이야요.”

“쯧(혀를 채었다). 속물(俗物)이란 할 수 없어. 시(詩)를 모르거든.”

“선물(仙物)이란 할 수 없군요. 고향에서 사향탄(思鄕歎)을 하시니.”

마주 보고 마주 웃었다.

양성암(梁星巖)과 그의 안해 장홍란(張紅蘭)이었다. 방랑의 길을 이번은 안해를 데리고 떠나는 것이었다.

문정(文政) 오년 구월 구일 ― 가을의 짧은 해 벌써 저녁으로 기울기 시작한 때에야 성암 내외는 겨우 전별하는 친지들과 작별하고 동구를 나섰다.

“마누라.”

“싫어요. ‘홍란’ 하구 불러 주세요. 영감께 ‘마누라’하구 불리면, 저두 할멈 같아서 슬퍼요.”

“홍란 노파.”

“왜 그러세요? 양 소년.”

“말께 오르지.”

홍란이 피곤하면 태우고자 데리고 오는 말은, 마부에게 끌리어서 방울을 달랑거리며 그들의 뒤를 따른다.

“아이나. 아직 내 집 뜰인걸요.”

“내 집 뜰에선 말을 못 타나. 타기 싫거든 말을 업게.”

“망칙해.”

“것도 싫거든 내 등에 타게. 내 업어 주마.”

“허리 부러지시리다. 되려 제가 영감을 업어 드리리다. 이리 온. 어부 마.”

“요것이!”

사실 탄탄하고 탄력있고 여문 홍란에게 비기자면, 성암은 가련하고 비참한 체격이었다. 돌덩이 같은 안해를 등에 업었다가는 부스러질 듯싶었다.

“이보세요. 업구 업히기는 피곤한 뒤에 따질 문제요. 에쿠!”

길가의 돌부리를 차고 비츨 하였다.

“그봐. 업어 줄 테니까.”

“당신 쳐다보느라구 돌부리를 못 봤어요.”

“봐야 영감 이쁘지.”

“참 이뻐요. 광대뼈 부사산(富士山) 같구, 매부리코에, 주름살 야마계(耶馬溪) 같구, 팔다리 뺑대구.”

“잘 깎아내린다.”

“― 좌우간 낭중(囊中)준비는 어떠세요? 넉넉하세요.”

“사내 어찌 그런 일에 머리를 쓰랴.”

“넉넉치 못하신 모양이군요.”

“걱정 말아. 준비는 낭중이 아니라, 흉중(胸中)이니. 가는 곳마다 동호자 불러 행상(行商)을 하면 돈은 소나기로 쏟아지니까.”

안해는 고뇌하는 듯한 눈을 치떠 남편을 우러러보았다. ‘행상’이라 하는 것은 시회(詩會)같은 것을 열고, 거기서 약간한 금전을 구하는 것 ― 말하자면 일종의 구걸이었다. 부부동반하여, 기한 없는 먼길 떠남에, 미리의 준비는 조금도 없고, 가는 곳마다 거기서 푼푼이 벌어서 그 비용을 얻어 내자는 것이었다.

“서방님(시동생)께 좀 달라시지요.”

“그걸 뭐라구. 형의 체면도 있지.”

“본시는 죄 당신 것이 아니에요?”

본시 맏아들인 성암이 물려받을 것이었다. 그러나 금전과(속세의) 당주(當主)라는 지위 따위를 초개같이 여기는 성암은, 자기의 오직 시(詩)의 길에 정진하고자 가독을 들어 아우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아깝지 않으세요?”

“아깝긴? 귀찮기만 허지.”

“이런 곤핍한 때를 당해두?”

“그런 법 없지. 내 흉중에 학문 있것다. 내 곁에 할멈 있것다. 세상에 동호자(同好者) 수두룩하것다. 천하 제일 팔잘세.”

“눈앞에 빈곤이 딱 막혀두요?”

“그럴 때야 돈 생각이 안 나지야 않지.”

“그 보세요.”

“무얼? ― 시재 쓸데 있으니 금전 생각이야 나지만, 쌓아두자고 재산 생각이 나는 법은 없지.”

길이 험한지라 길바닥으로 눈을 붓고 있던 홍란은 눈을 다시 치떠 남편을 우러러보았다.

남편의 이 결백한 심경이 홍란에게는 진실로 기뻤다.

기쁘기도 기뻤다. 그러나 여인의 마음이라, 역시 재산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본시는 남편이 물려받은 재산을 통 시아우에게 물려주고, 그 시아우는 형의 재산의 덕으로 풍족한 살림을 하여나아가거늘 본래의 그 재산의 주인이었던 남편은, 붓 한 자루와 안해 한 사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로, 그리고도 활연히 그처지에 만족해 하는 것이었다. 단계의 벼루를 보고도 침만 흘리며 사지 못하는 남편, 희귀한 당서(唐書)를 보고도 일부로 외면해 버리는 남편, 몇 해(혹은 몇 십 년이 계속될지도 모르는) 먼길을 더우기 안해까지 동반하고 떠나면서도, 도착되는 그 곳에서 행상하여 여비를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남편 ― 거기 반하여, 시아우와 동서(동서는 또한 겸해 홍란의 친언니였다)의 내외는 부족만 없을 뿐 아니라, 남고 넘치는 살림을 해나아간다. 재물에 담박한 남편의 성미가 반갑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재산이 없기 때문에 받는 고통을 생각하면 역시, ‘있는 편’이 나았다. 남편은 ‘금전이 생각날 때는 있지만, 재산은 싫다’하지만, 여인 된 마음에는, 금전이 즉 재산이고 재산이 즉 금전이었다.

“이 긴 길을 내내 행상으로 ―.”

“우선 북세(北勢)에는 친구두 많구 하니, 거기서부터 행상을 시작해가지구, 월동(越冬)이나 해서 쯔끼가세(つきがせ ― 月瀨[월뢰])에 매화나 따구―. 좋으려니. 이곳 국향(菊香), 쯔끼가세의 매향(梅香), 그러니 임자는 콧구멍이 작아서 절반 밖에는 못 맡겠으니 애석해라. 좀 나같이 큼직하고 벌떡 한 코를 타고 날 게지. 눈치 없이. 우선 여기서 국향부터 맡게. 콧구멍이 작으니, 절반은 흘리겠네. 흘린 것까지 내 하나반(半) 몫 맡으마.”

성암은, 하나반 몫의 국향을 맡으려는 듯이 코를 벌리며, 한 번 사면을 둘러 맡았다.

“참 좋을세. 아따따따따, 나온다, 나온다 ― 한 구 나온다. 曉痕仍滑馬蹄霜[효흔잉활마제상]이요 重疊靑山去路長[중첩청산거로장]이라.”

“애캐캐.”

비츨 하면서 남편에게 쓰러졌다.

“사람. 나오다가 끊어졌다. 시인의 여편네 노릇 못하겠네.”

“제 마저 채리까?”

“집어치게. 뒤따라 나오네. 一把黃花半瓢酒[일파황화반표주]에 藍川堤上作重陽[람 천제상작중양]이라.

이담에는 내가 노래 읊을 때 하폄도 하지 말게. 노래 달아나면 다시 잡지 못하느니.”

“그러면 당신하구 마음놓고 길 다니겠어요?”

“하기는 노래보다도 마누라 하폄 더 듣기 산뜻해.”

둘러보면, 먼산 가까운 벌, 모두 노란 국화꽃으로 덮였다. 거기서 몰려 오는 그윽한 향내는 사람의 코는커녕 마음까지도 도취케 한다.

사랑하는 젊은 안해 동반하여, 군잡스런 목적 없는 흥그러운 길 ― 성암의 마음은 한껏 흡족하였다.

장량천(長良川) 시내를 끼고 한 걸음 한 걸음, 연해 연방 안해를 굽어보며, 길을 더듬었다.

“마누라.”

“싫어요, 마누라란 소리.”

“그럼 할멈.”

“왜요 할아버지.”

“젊은 색시의 서방이 왜 할아버지람. 새서방님 허구 부르게.”

홍란은 입을 비쭉 하였다.

“새서방님.”

“요것을! 마부(馬夫)란 놈만 뒤따르지 않으면 요것을 탁 한 번 ―.”

슬쩍 마부를 뒤돌아보았다.

무심한 마부는 채찍을 뒤통수에 꽂고 콧노래를 부르며 뒤를 따라온다.

성암은 안해를 굽어보며 미소하였다. 안해는 거기 대하여 명랑한 미소로 대답하였다.

가을의 청신한 바람은 그윽한 만야의 국향을 풍기어다가 이 사랑하는 남녀의 가슴에 안기어 주었다. 장량천 시내는 똘똘.

때에 성암 서른네 살이요, 안해 홍란은 열아홉 살이었다.

2[편집]

일찍이 방랑의 길을 북세(北勢)에도 수삼 차 들여놓은 일이 있는 성암은, 적지 않은 친구를 북세에 가지고 있었다.

‘행상’은 당시 가난한 문사들의 상례였다. 성암의 친구들은 이번의 성암의 온 것을 행상인 줄 알아채었다. 안해 동반이라 하는 것은 당시에 있어서 좀 이례였지만, 명랑하고 쾌활하고 게다가 노래와 그림에 천재의 싹을 보이는 성암의 젊은 안해는 그들의 인기를 끌었다.

성암은 어떤 좌석이든 안해를 동반하였다. 낯선 객지에 안해 혼자 여사(旅舍)에 남겨 두기도 싫었거니와 홍란 자신도, 남편 가는 곳은 으례히 따라갈 것으로 알았다.

북세에서 행상하기를 두석 달 ― 장차 몇 달 동안의 여비가 주머니에 남기게쯤 되어서, 성암 내외는 북세를 떠났다.

이가(易賀)에서 과세를 하고, 이듬해 이월에 그들은 쯔끼가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쯔끼가세의 매화를 보기 위하여, 부러 일정(日程)을 그렇게 잡은 것이었다.

아직껏 오는 동안 밤 잠잘 때 밖에는, 호젓하게 내외에서 마주 앉을 기회가 적던 그들은, 여기서 기회보아, 단둘이서 호젓하니 매향(梅香)을 맡으러 나섰다.

“홍란. 좋지?”

만산만야, 그윽한 매화꽃으로 덮인 가운데를 내외는 손을 마주 잡고 거닐었다.

“언제까지든 ― 언제까지든 이런 곳에 있구 싶어요. 이런 데가 선경(仙境)이 아닐까요?”

“내 아까부터 이런 경치를 두구, 노래 한 구 만들어 보려구 생각하고 생각해 봤는데 경치 너무 좋으면 사람이란 거기 압도돼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단 말이지. 아무 방해하는 사람 없이 조촐하니, 호젓하니 이런 델 마누라 짝해 돌아다니노라면 저절로 노래두 생겨 날 것 같은데, 그렇지도 못해.

衝破春寒曉出城[충파춘한 효출성] 하니, 새벽 춘한(春寒)을 무릅쓰고 성을 나오니 말이지.

東衣風剪弄衣輕[동의 풍전롱의 경]이라, 새벽 찬바람이 옷자락을 휘날리어. 말하자면 춥단 말이지.

漫山匝水二十里 [만산 잡수이십리]에 盡日梅花香裹行[진일매화향과 행]이라.

이십 리 긴 길 매향 가운데서 논다는 뜻으로 지은 것인데 말이 어울리지 않고, 딴 것을 따다가 접붙인 것 같아서 싱겁구 잘 표현되지 않았어. 내 시재(詩才)가 아직 부족한지, 경치가 너무 황홀한지, 속으로 몇 번을 고치고 고치고 한 게 겨우 이게란 말이야. 그림으로는 어떨까?”

홍란은 머리를 기울였다. 기울이고 모으로 한 번 매화 멧견을 엿보았다.

“그림으로도 모양만이야 딸 수 있겠지만 그 기분을 나타내겠어요?”

“우리 저기 좀 가 앉아 쉬세.”

내외는 어떤 매화 그루에 가서 나란히해 앉았다.

“사람의 새끼 하나 보이지 않네.”

“글쎄요. 아무도 구경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매화는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질까요?”

“내 매화의 쯔끼가세를 천하에 소개할까. ― 그러나 글재주 부족해 감당치 못하겠는걸.”

“그런데 이보세요.”

“왜?”

홍란은 머리를 외로 돌렸다. 적적한 눈자위였다.

“적적해요.”

“응? 음, 시굴놈이란 이런 좋은 경치를 보러 올 줄도 모르고, 매화가 혼자서 피었다가 혼자서 지니, 적적할 밖에 ―”

“아녜요. ― 제 나이 벌써 반 사십.”

“그러구 보니 나두 금년 서른다섯, 만 칠십일 세. 인간칠십고래희라, 반 고래희로구먼. 임자는 사십이 불혹이라, 반 불혹. 반 고래희에 반 불혹….”

홍란은 남편은 힐끗 쳐다보았다. 약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

“반 칠십의 남편 모시고, 벌써 반 사십에 집도 없고.”

슬하도 없고, 란 말을 삼켜 버렸다. 겨우 스무 살이라 슬하 없는 것을 탄식하기는 과히 이르지만 ―.

그래도 남편 맞이한 지 삼년. 누구도 아들을 낳았다 누구도 딸을 낳았다.

야단들 하는데, 남편을 맞은 지 삼 년에, 집 한 간 없고, 자식조차 없이, 오늘은 동으로 내일은 서로 표박 생활을 하며, 매화나 보며 좋다하고, 달이나 우러르며 춤추기에는, 그래도 쓸쓸하였다.

“인제 귀항하면 집 한 채 장만합시다.”

“집? 좁다랗게 울타리를 둘러막고, 이건 내 집이라, 저건 네 집이라, 다툴 게 뭐람. 내 울타리 없으면 천하의 산야가 모두 내 정원이어늘.”

“그래두 피곤할 때 머리 눕힐 곳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고단할 때 다리 뻗칠 곳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내 가슴에 눕히고, 내 허리에 뻗치게. 별소리 다 하네.”

튀기기는 하였다. 그러나 홍란의 마음이 짐작이 갔다.

여인이라 차차 가정 생각도 날 것이요, 자식 생각도 날 것이다. 나는 것이 당연하였다.

“홍란. 내 이전 총각 시절에는 천하의 계집이 다 내 계집이요 천하의 여편네가 다 내 안해같이 생각되더니, 임자를 덜컥 만나고 보니, 장홍란 하나 이 내 안해, 저것도 남의 안해, 저것도 남의 딸, 장홍란 하나 밖에는 모두가 남이 되어 버려. 요컨대, 집도 가정도 그럴 게란 말이지. 울타리 둘러막은 내 집 없을 동안은 천하의 산야는 모두 내 것같이 생각되지만, 내 집이라고 울타리를 막아 놓은 뒤에는, 좁다란 내 집 밖에는, 모두가 남의 집 남의 산야로 보일 테니, 그게 여간한 손실인가? 안 그런가?”

“그럼, 홍란 하나이 내 안해 그 밖에는 모두 남의 딸 남의 안해라 생각되셔서, 많은 상처(喪妻)를 하신 것같이 슬프세요?”

“아냐. 그건 안 그렇지. 홍란 하나는 내 안해니만치, 홍란만은 남이 엿보지 못할 내 안해거니 하면 되려 기쁘지.”

“집두 마찬가지 아닐까요. 울타리 둘러막은 내 집은 남이 넘보지 못할 양성암의 것이거니 ―.”

“그건 또 안 그렇지.”

“어째서요?”

“압다, 안 그렇다면 안 그런 줄이나 알아 두지. 내가 나이 임자보다 십오 년 맏이니 내 말만 믿어 두게.”

농담으로 흐려 버렸다.

그러나 안해의 마음에 차차 가정에 대한 요구가 생겨 나는 것을 성암은 인식하였다.

“마누라. 본시 우리가 길 떠나기를 나는 시도(詩道)를 더 닦고 임자는 화도(畵道)에 더 정진키 위해서야. 우리 장차 남국(南國) 구주까지 휘돌아서 좀 더 견문을 넓히고 수양을 쌓은 뒤에, 그 뒤에, 집두 장만하세, 자식두 낳세. 너무 일찌기 집 장만하면 건사하기 귀찮고, 너무 일찌기 자식 낳으면 기르기 숨차느니. 자 일어서게. 가만 앉아 있자니, 차차 추워 오는구만. 매향도 너무 맡으니까 코가 저리이 인젠 여사에 돌아가 이번은 처향(妻香)좀 맡세. 코가 저리도록 좀 맡겨 주게.”

성암은 일어섰다. 홍란도 따라 일어섰다. 그러나.

“좀더 돌아다니세요. 이 매화동산 두고 여사에 돌아가시기가 아깝지 않아요?”

“아무케나. 홍란의 분부니 내 어찌 거역하리.”

아지랑이같이 부옇게 전개된 매화의 동산을 성암과 홍란은 날이 기울기까지 거닐었다.

3[편집]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지역(地域)에 구속되지 않은 그들의 표박은 이곳서 하루이틀, 저곳서 나흘닷새 더듬고 더듬으며, 하오월에는 옛 서울 나라(奈良)에 이르렀다.

“옛날, 천자 계오시던 곳일세.”

좀 쓸쓸하지만 역시 “ , 지난날의 위엄이 어딘지 모르게 감추여 있구먼요.”

“예를 조상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세.”

나무에서는 꾀꼬리 운다. 나무 아래 시냇가에서는 사슴이 떼를 지어 거닐고 있다. 무심한 거리의 악동들은, 돌을 던져 사슴이를 희롱하고 있다.

안해를 곁에 달고, 이 옛 서울을 거닐 동안, 성암의 감격키 쉬운 마음은 고도의 정취에 잠겼다.

이 안에는 옛날 거룩하신 분 계시던 곳인가. 지금 내가 밟는 이 흙은, 지난날 고귀한 분들의 발끝을 더럽히던 그 먼지일까. 저기 서 있는 저 늙은 버드나무는 옛날 그 시절부터 그 자리에 서 있던 것일까.

모든 그 자취가, ‘세월’이라는 물결에 씻기어 나가고 지금은 단지 황폐한 빈 동산만 남아 있는가.

며칠을 ‘나라’에 묵으며 황폐한 옛터를 울었다. 그리고 ‘나라’를 떠났다.

‘나라’를 떠날 때는 그들의 주머니는 매우 가벼워졌다. 그 새 행상하여 준비했던 여비는 벌써 다 쓰고, 인젠 ‘나니와’에 가서 다시 행상으로 여비를 장만할 때까지는 비용 생길 곳이 없는데, 주머니는 벌써 텡 비었다.

어떤 자그마한 마을에 묵으며, 안해에게도 여비의 군색을 말하기가 측은하여 말하지 못하고, 객창에 몸을 눕힐 때는 성암의 입에서는 쓴 한숨이 나왔다.

예전에는 설사 도중에 여비가 떨어진다 할지라도(그런 경험에 비일비재다) 근심스럽지 않았다. 여비가 떨어지면 ‘쓰지 않으’면 그뿐이었다. 다시 생길 때까지 가난한 채로 버티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안해라 하는 짐을 곁에 달고 보니, ‘안해’는 인생 행로의 지대한 부담이었다.

“나니와까지는 돈 생길 방도가 없는데 ―.”

산촌에 우는 버꾸기 소리가, 진실로 처량하였다. 버꾸기의 소리 귀에 서리어, 좀체 잠이 들 수 없었다.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 곁의 안해를 보았다. 낮 동안의 길걸이에 피곤함인지, 안해는 그 천진한 얼굴 전면에 촛불빛을 받고, 철모르고 잠이 들어 있다.

이때같이 안해의 얼굴이 이쁘게 보인 일이 과거에 없었다. 얇다란 입술은 약간 벙을고 바야흐로 무슨 말을 할 듯한 그 입매며 고요히 닫고 있는 그 눈매며, 명옥을 깎아 놓은 듯한 그 이마 ― 천진하고 귀여웠다.

“이 천진하고 귀여운 여인을, 돈 때문에 걱정시키는 것은 남편의 도리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든 . 홍란이게는 금전 상의 곤궁을 보이지 않으리라.”

이튿날, 성암은 새벽참 안해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돈 생길 곳 ‘나니와’를 향하여 어서바삐 가고자.

4[편집]

‘나니와’에서 적지 않게 ‘행상’한 성암은, 인제는 주머니가 드북한지라 마음놓고 방랑을 즐길 수가 있었다.

‘나니와’에서 배로, ‘오까야마(岡山[강산])’로 ‘오까야마’에서는 다시 육로로 옥도(玉島)로, ‘옥도’에서는 ‘비후’(備後)의 대선배 관다산(菅茶山)을 찾았다.

당시 관서(關西)시단(詩壇)의 수령급인 다산을 찾으매, ‘다산’은 성암에게 구주탐승을 권하는 것이었다.

본시의 이번 길의 목표가 구주였고 뇌산양(賴山陽)의 권고에 의하여 구주를 목표로 하였던 성암이라, ‘다산’ 선생에게도 그 뜻을 말하고, 구주의 지인들에 의 소개를 얻었다.

그 뒤, 성암 부처는 다시 길을 더듬어, 오노미찌(尾道)로 오노미찌에서 히로시마(廣島)로, 히로시마에서 석 달을 지내고, 그 해 동짓달에 미하라로, 미하라서 이번 방랑의 두번째의 과세를 하였다.

그들 내외가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와서, 드디어 나가사끼로 향하여 배를 띄운 것은 새해의 봄도 지난 오월 단오날이었다.

오월도 그믐께, 구주의 연산(連山)을 바라보며 하까다에 도착하였다.

일찌기 뇌산양도,

“하까다에 가실 기회가 있거든, 송영화돈(松永花遁)을 찾으셔요. 청상당(淸賞堂)이라는 전당포를 경영하는 사람인데, 친구를 좋아하고 또 학문 있는 사람이외다. 찾아가시면 환대하리다.”

하는 소개가 있었고, ‘다산’선생도 화돈을 소개하였으므로 성암은 하까다에서 다짜고짜로 화돈의 집을 찾아들었다.

다산 선생의 소개장을 내어놓았다.

“경도의 뇌산양 형도, 하까다를 가거든 선생을 찾아뵈라고 그러시더군요.”

성암이 화돈에게, 다산 선생의 소개에 겸한 자기소개까진 하매, 화돈은 매우 반가와하며 성암 내외를 맞았다.

“일찌기 성암 선생의 성화는 많이 듣자왔읍니다. 지금 더욱 다산 선생의 소개까지 계시니 더 무슨 말씀을 드리리까. 변변친 못하지만 제 집에 묵어 주세요. 얼마이고 간에 묵으시고, 놀다 가세요.”

이리하여, 성암 내외는 화돈의 집에 닻을 주었다.

5[편집]

“바다는 언제 보아도 어떤 환경에서 보아도, 시원하고, 상쾌하거든요.”

“암, 그렇지요.”

하까다만(灣)의 시원한 바다를 앞에 바라보며, 잔치를 열었다.

주최자는 이 지방의 이름있는 시인 소양(昭陽)이었다. 주빈(主賓)은 성암 내외요, 배빈으로 화돈이며 그 밖 하까다의 동호가 수삼 인이 있었다.

성암을 환영하는 뜻으로 연 잔치요, 이 지방의 이름있는 학자들이 모인 모임이라, 성암은 매우 흡족하였다.

“부인도 한잔 드시지요.”

어떤 젊은 사람이 술잔을 들어 홍란에게 권하였다. 홍란은 의견을 묻는 듯이 힐끗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주시는 것이니, 홍란도 받아.”

성암도 미소하며 권하였다.

“고맙습니다.”

홍란은 한순간 남편의 눈치를 살피고는 서슴지 않고 잔을 받아 마셨다.

“내 잔도 한잔 받으셔요.”

이번은 다른 젊은이가 권하였다.

권하는 바람에 홍란은 너덧 잔을 받아 먹었다. 술에 익지 못한 홍란의 얼굴은, 빨갛게 되며, 가쁜 듯이 자리를 조금 물러 앉았다.

“홍란, 어때 술맛이?”

“술이란 사람의 먹을 것이 아니에요.”

“왜?”

“그게 뭐예요? 쓰구, 숨차구.”

“아니지, 술이란, 개짐승이 먹는 것두 아니구, 맹수가 먹는 것두 아니구, 전혀 사람 위해 생긴 것이라네. 나앉아서 한잔 더 먹어 보지.”

“싫어요.”

곁에 있던 젊은이가 술을 부어 가지고 홍란에게 향하였다.

“부인, 오늘 이 좋은 자리에서 한잔 더 받으셔요. 술은 적어두 십 배주는 들어가구야 술맛을 알게 됩니다.”

“먹어두 쓰구쓸 뿐이지요.”

“자, 받으셔요.”

“홍란. 일껏 권하시는 게니 받게.”

권하는 바람에 또 받았다.

드디어 열 잔도 넘어섰다.

취기(醉氣)라 하는 것을 평생 처음 겪어 보는 홍란이었다. 취기가 차차 돌매, 마음이 가벼워지고, 차차 유쾌한 듯한 상쾌한 듯한 기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제 잔을 한잔 받으셔요.”

“부인이 주시는 잔 받구말구요.”

“나두 한잔 주세요.”

남녀가 차차 어지러이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하였다.

도학자(道學者)의 기품을 다분히 가지고 있는 소양(주최자)은 성암을 상대로, 이쪽에서 따로이 시화(詩話)를 토론하며 간간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면서, 때때로 눈을 잠깐 돌려, 홍란을 중심으로 한 젊은 남녀들의 지껄이는 양을 엿보고 하였다.

젊은 여인으로 ― 더우기 인처(人妻)로 남편까지 동반한 좌석에서, 남의 남자들과 기탄없이 술을 나누며 지껄여 대는 것이, 도학자의 마음에 마땅치 못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홍란의 입은 화려한 옷은 구주(九州) 사람의 눈에는 마치 기녀(妓女)의 차림으로라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닌게아니라, 성암의 마음도 차차 불쾌하여졌다. 도학자적 견지에서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제 안해 홍란이 젊은 사내들과 너무 기탄없이 노는 것에 대하여 샘 비슷한 감정이 차차 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성암도 슬금슬금 그 쪽으로 곁눈질하고 하였다.

그 가운데도 춘성(春城)이라 하는 사람이 더 불쾌하였다. 춘성은 나이는 스물일여덟, 큼직한 몸집에 체격도 좋았거니와, 싱글벙글하며 이야기하는 그 품이, 남의 호감을 살만 하였고 ― 그 춘성이 더욱 기탄없이 제 안해 홍란과 히닥거리며 술을 주고받으며 ― 마치 창녀가 손님과 노는 그런 꼴이었다.

“소양 노인. 저 춘성의 학문이 어떻습니까?”

“시를 꽤 합니다.”

“위인은?”

“구주 남자싸게, 쾌활하고 호협하지요.”

“…”

남자답게 생겼기에 불쾌한 것이다.

안해를 눈짓으로 책망하여 보려 하였으나 눈이 서로 맞는 기회가 없었다.

본시부터 안해를 동반하여 떠난 길이며, 아직껏도 무슨 잔치나 연회가 있을 때마다 안해와 함께 한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나 지금껏은 안해도 스스로(늙은이의 마누라라는 뜻도 있었겠거니와) 몸가짐은 삼갔고, 남자들도 역시 인처(人妻)라는 점잖은 대접을 해왔기 때문에, 성암은 도리어 젊은 여인의 남편이라는 자긍심으로 안해를 추켜 내세우려는 태도를 취해 왔지만, 지금 이 구주에서 구주인의 무체면(無體面)에 겸쳐, 안해조차 지금껏의 몸가짐과 달라 마치 창부와 같은 태도로 그들을 대하는 것을 보니, 안해의 태도가 괘씸하기까지 하였다.

황혼에 연회가 끝이 났다. 주최자 측에서는 자리를 바꾸어 이차회를 하자 하였으나, 성암이 이를 사양하고, 그들과 작별을 하였다.

화돈의 집에 묵어 있는 관계상, 화돈과 함께 화돈의 집으로 돌아오려고 서로 등지게 된 때였다. 오늘의 주최자 소양은 화돈과 작별할 임시에, 화돈에게 향하여,

“마치 나가사끼 창부구료.”

하는 말이 걸핏 들렸다.

창부 같다 함은, 무론 홍란에게 대한 말일 것이다. 소양이 화돈에게 조용히 한 말이었으나, 성암의 귀에도 명료히 들린 것을 보니, 홍란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소양은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일는지도 알 수 없다.

“마치 창부 같구료.”

홱 얼굴로 피가 몰려올랐다. 소양에게 대한 노염이라기보다, 또는 창피라기보다, 오히려 안해 홍란에게 대한 노염이었다.

하두 까불더니 ―.

인처의 도리로서 ―.

괘씸한 ―.

두세 가지의 생각이 머리에 서리어 돌아갔다. 힐끗 안해를 보니, (분명 소양의 말을 들었을)안해는 못 들은 체하고 앞서서 몇 걸음 간다.

화돈의 안내로 화돈의 집으로 돌아왔다. 화돈과도 작별하고 자기네 방으로 돌아왔다.

아까 그게 무슨 창피한 꼴이냐, 고 성암이 따지려 할 때 홍란이 먼저, 딱 버티고 선 채로 하는 말.

“더러운 고장. 내일 나가사끼로 떠납시다. 더럽구 아니꼬와.”

“춘성 남겨두구 어떻게.”

독살스러운 히니꾸(ひにく ― 빈정거림)가 성암의 입에서 나왔다.

“?”

홍란은 눈을 쫑긋하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뭐라셨어요?”

“못 들었으면 그만두지.”

“아까 그 시굴뜨기 늙은이가 뭐라는 말 들으셨어요.”

“들었지. 임자 노는 꼴이 창부 같다구. 옳은 말 하데.”

“?”

“옳은 말이지. 젊은 사내놈들과 손목 맞잡고 히닥거리며 그게 창부 아니고야 그럴 법 있으리?”

홍란은 눈을 쫑긋 하고 남편을 우러러보았다. 한참을 우러러보았다. 보다가 눈을 푹 떨어뜨렸다.

“전 또 제 옷이 시굴 노인에게는 화려하게 뵈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제 태도가 ― 당신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당신께도 그렇게 보이신 모양이구료. 만약 그렇다면 ―.”

홍란은 고요히 주저앉았다 ―.

“당신께까지 그렇게 보였다면 ― 제 잘못 ― 제 태도가 좀 천박했던 모양 이외다. 사죄하리다. 용서해 주세요. 전 또 당신께서 제자나 동생들 같은 젊은이들이길래, 흠없이 대접해 주느라고 ― 늙은 남편 섬기는 제 입장 생각치 않고, 이 뒤에는 삼가리다. 왜 제가 추호만친들 당신께 불쾌히 생각되시는 일을 하겠어요?”

유창하던 말솜씨 다 어디로 가고, 외마디 외마디로, 끊어 하는 이 사죄의 뜻을 따지자면, 자기는 술잔이나 들어간 김에 흠없이 대접해 주느라고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인데, 그때라도, 남편의 불쾌한 기색 살폈기만 했더면, 곧 태도를 고칠 것을 술김에 그런 고찰도 못해 끝끝내 남편이 불쾌해하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는 것이었다.

그 변명을 하기 위해서는 내일 다시 그 젊은이들을 청해 잔치를 열면, 홍란은 그 좌석에서 일부러 그들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여서, 남편의 마음을 다시 편안케 해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아까의 불쾌는 성암 자기의 마음상이지, 결코 안해에게 대하여 무슨 딴 의심을 품는 바가 아닌 성암은, 안해의 이 솔직한 사죄에 가슴에 엉켰던 불쾌감이 사라졌다.

“내야 뭐라나? 남들이 창부 같다구 그러니 말이지 ― 하여간 그 문제는 집어치구 내일 나가사끼로 떠나세.”

“왜요, 갑자기?”

“하까다는 딱 정떨어져.”

하까다가 정떨어진 것이 아니라, 나가사끼가 그리워진 것이었다.

나가사끼에는 청관(淸舘)이 있다. 나가사끼에는 청인(淸人)들이 많이 있다. 일찍부터 청국과의 거래가 많은 나가사끼에는 청국 문물이 많이 수입되어 있었다. 숭당(崇唐) 사상에 젖은 한시인(漢詩人)인 성암으로서는, 직접 청국에 건너는 못 갈망정, 하다못해 나가사끼에 가서라도, 그곳에 수입된 지나 문물에 멱감고 싶었다.

“이보세요. 나가사끼로 그저 가신다면 모르지만, 추호만치라도 아까 그런 문제가 마음에 남으셔서 떠나신다면 당신 마음 편하시도록 내일 다시 그이들을 청하세요. 당신이 만약 그 자리에서 직접 저더러 그 사람들을 망신이라도 주라면, 그것까지라도 당신 마음 편하시도록 하겠어요. 제가 당신의 안해 되고야, 왜 조금인들 당신 마음 불편하실 일을 하겠어요? 안 그래요?”

“아니야. 아니래두 그런다. 내야 뭐라구 하나. 내야 우리 홍란. 이리 보아 두 내 홍란, 저리 보아두 내 홍란, 그저 내 딸이지. 어화 둥둥 내 딸아.”

성암은 어름어름 말을 돌려 버렸다.

그리고, 내일은 청인의 도시, 난인(蘭人)의 도시 나가사끼로 떠나기로 하였다.

5[편집]

1[편집]

국제 도시 나가사끼.

일찌기 뇌산양(賴山陽)이 그(성암)에게, 나가사끼 탐승을 권하였고 또한 관 다산(菅茶山) 선생도 역시 나가사끼 탐승을 권하였다. 그런 권고가 없을지라도 나가사끼는, 성암에게 있어서는 동경(憧憬)의 도시였다.

거기는 난인(蘭人)과 청인이 적지 않게 살고 있었고, 그들과의 거래가 많으므로, 따라서 이국의 색채를 다분히 띠고 있던 도시였다.

난인은 성암에게 있어서는 관심되지 않는 인종이었다. 그러나 청인은 ―.

당(唐) 이래로, 이 나라의 문물 제도는, 그 나라로부터 수입하고 혹은 본따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 문물과는 비교적 관련이 없이 살아 가는 무사와 상인의 계급은 그러 하지도 않았지만 한학자(漢學者) 한시인(漢詩人)들의 숭당(崇唐) 사상은 심한 것이었다 그 지역의 . 학문을 숭상하는지라, 그 지역의 온갖 문물을 숭상하였다. 문물을 숭상하는 심리는, 그 고장 사람들까지 숭상하게 되었다.

이 사상은 차차, 근본을 잃고 말(末)만 취하게 되어, 저 땅의 물건이면 무엇이든 무조건하고 숭상하였다. 그리고, 겸쳐, 저 땅의 사람들까지 무조건 하고 숭상하였다.

나가사끼에 와 있는 지나 사람들은 모두가 장사아치였다. 장사아치의 가운데도 무론 글자를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저 땅의 사람이면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거니 하는 선입관이 있는지라, 장사아치들도 모두 훌륭한 학자로 보였다. 이 땅의 이름있는 학자들이 모두 머리를 숙여 저 사람(淸人)들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 하고, 학문을 전수해 달라 하고, 한결같이 그들을 숭상하였다.

한시인인 성암도 역시 그 예에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의 본 성씨(稻津氏[도진씨])를 버리고 양(梁)씨를 일컬었으며, 안해 홍란도(역시 稻津氏) 장씨(張氏) 홍란이라 하고, 평소에 청국을 숭배하였으며, 청인이 많고 살고 청국 풍습이 많이 건너와 있는 나가사끼를 한 번 가 보고자 함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나가사끼는 참 좋은 곳이야.”

“바루. 언제 와 보신 것 같구료.”

“내 형(山陽)두 그러구, 다산(茶山) 선생도 그러시니까 말이지.”

“나가사끼서 소주(蘇州) 비단 오비(オビ ― 띠) 한 감 ―”

“소주 비단으로 띠는? 주제넘게. 내 훈도시(フンドシ ― 샅바)나 한 감사 지.”

“그만두세요.”

일찍부터 생각하고, 그 뒤 깎고 다듬고 갈고 하여 지은 노래가 있었다.

아직 직접 나가사끼에 발은 못 들여놓았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소문에 의지하여 지은 것이었다.

萬疊峯圍一席天[만첩봉위일석천]
海雲崖樹碧於煙[해운애수벽어연]
市樓籠地無空闊[시루롱지무공활]
佛刹綠山互接連[불찰록산호접련]
落日鐸聲亞蘭舘[락일탁성아란관]
迥風旗影淛江船[형풍기영제강선]
時淸不見窺窬者[시청부견규유자]
夷往鸞來二百年[이왕란래이백년]

남국(南國) 여름의 상쾌한 해풍(海風)을 받으며, 성암 내외는 동경의 나가사끼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정(文政) 칠년, 성암이 서른여섯 살, 그의 안해는 스물한 살이었다.

2[편집]

“양 선생의 성화는 이 나가사끼에도 자자해서, 일찍부터 익히 듣고 사모했읍니다마는 ―”

나가사끼에 강운각(江芸閣)이라는 청국 상인이 있었다. 딴 나라에 와서 크게 장사를 하는 사람이니만치, 재산도 풍부하였다. 일대의 풍류랑이요, 친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일본 사람으로도 친구가 많았다. 약간 한 글도 알았다. 자류의 풍월도 읊었다.

한낱 장사아치니, 제 글을 알면 얼마나 알랴마는, 지나라 하면 덮어놓고 숭상하는 당시의 한학자들은 다투어 운각과 사괴었다.

이렇게 되매 운각도 인젠 제법 학자인 체하였다. 스스로도 풍월을 읊조렸거니와 일본인들의 시에 대하여 비평도 가하였다. 이 지방의 한학자들은 그를 꽤 숭상하고 그에게 지도를 빌었다. 그래도 지나인이요, 그래도 약간한 글자는 있는지라, 그의 의견에는 그래도 얼마만치 들을 바이 있었다.

당시의 한시인의 예에 벗어나지 못하여, 운각을 한학자인 듯 여기고 있는 성암은 그와 사괴기 시작하며, 그에게 자기 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양 선생의 시에는 선생 자신이 자주(自註)를 다셨지만, 그 주가 없으며, 마치 주역(周易) 같아서 뜻을 알아보기 힘들어요. 예컨대, 선생이 쯔끼가세에서 매화를 보시고 또 미우하에서 매화를 보시고 지으신 노래.

梅花不見只聞香[매화부견지문향]
遍野漫山春渺茫[편야만산춘묘망]
非有鼻神能諦觀[비유비신능체관]
直須喚做白雲鄕[직수환주백운향]

이라신 노래가 있지요. 그 기구(起句) ‘매화불견’ 운운도 말이 어색하기는 하지만, 좌우간 뜻은 통하기는 해요. 그러나, 결구(結句) ‘비유비신’ 운운은, 선생이 스스로 주(註)를 다셔서, 비신 ― 즉 냄새 맡은 신령의 덕을 빌지 않고는 단지 부연 구름 동리로밖에는 볼 수 없다. ― 즉 꽃 향내가 나기에 여기를 매화밭으로 알지, 그렇지 않으면, 백운(白雲)의 마을로 알리라 하는 뜻이라 하셨기에 그렇게 여기지, 그 주만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여기겠어요.”

그렇게 해석하고 보면 그 시상으로야 참 훌륭하지만, 그 노래만 읽고는 그게 주역이지 어떻게 그렇게 해석을 하겠어요?

또 이번에 선생의 이도사끼(イトサキ)에서의 노래가 있지요. 이 나가사끼에서도 모두들 선생의 명작이라고 읊고 외고 있읍니다마는

詩酒還成半日遊[시주환성반일유]
此生隨處送悠悠[차생수처송유유]
他年夢裹問陳述[타년몽과문진술]
細雨春帆雙鷺洲[세우춘범쌍로주]

란 것 말씀입니다.

주(註)를 보면, 시주(詩酒)로써 한나절을 보냈다. 내 늘 이렇게 유유하게 세월을 보낸다. 뒷날 누가 오늘날의 일을 물으면, 가랑비 가운데서 배를 띄우고 쌍로주에 놀았다 하리라, 하는 뜻이라지만, 주를 읽기 전에는 그 해석 얻기 어려우리다.

요컨대 선생의 노래의 대부분은, 주(註)가 있어야 알 수 있고, 주가 있고도 또한 주의 해설까지 있어야 하겠으니,

往自不安行更難[왕자부안행경난]
荆釵何暇共酣歡[형채하가공감환]
吾生唯有飄〇以[오생유유표〇이]
慚殺高人梁伯鸞[참살고인량백란]

이며, 또는

連山中斷一江過[련산중단일강과]
禹鏊隨開豈讓功[우오수개기양공]
薄夜潮聲驅萬里[박야조성구만리]
平公塔畔月如弓[평공탑반월여궁]

이며 또는,

雪灑笠檐風卷袂[설쇄립첨풍권몌]
呱呱索乳若爲情[고고색유약위정]
他年鐵拐峯頭嶮[타년철괴봉두험]
叱咜三軍是此聲[질타삼군시차성]

이란 노래들을, 주가 없고, 또 그 위에 고실(故實)을 모르고서야 무슨 뜻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성암뿐 아니라, 일본 한시인들의 한시는, 역사를 뒤적이고 고실(故實)을 뒤적이고 그 위에 옥편을 뒤적이어, 할 수 있는 대로 어렵고 까다로운 문자를 찾아내어 이것을 쓰기를 ,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일본 말을 그냥 한문 글자로 직역하여, 예컨대 ‘봉황은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의 ‘죽실이 아니면’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본 말 아라사 레바(アラサレバ)를 그대로 써서 ‘非有竹實[비유죽실]’등으로 나타내며, 또는 자기 혼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주를 붙여서, 남에게도 그렇게 해석하기를 강요하는 등, 지나인으로서는 머리 끄덕이지 못할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운각은 학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압운이라든가 시의 격(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한시’에 쓰이는 말을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니만치, 거기 대한 비평은 적절하였다.

더우기 단지 청인이면 존숭하는 성암은 머리를 숙여 그의 의견을 고맙게 들었다.

3[편집]

성암 내외는 어떤 고찰(古刹)을 숙소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가사끼의 일본 시인이며 청국 장사아치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성암도 안다. 저 청인들은 한낱 장사아치에 지나지 못함을. 그들에게는 무슨 학문의 소양도 없고, 그 위에 시상(詩想)도 없는 글을, 시재 가슴에 느끼는 즉흥으로 성암의 시에 응수한다.

‘한시’가 대체 저들의 일상 쓰는 ‘언어’에서 나온 것이매, 게다가 운이나 붙이면 노래가 안 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내용(시상)이 없는, 단지 문자는 희롱이었다.

거기 비기자면 자기의 노래는….

무론 내 나라 말이 아니매, 언어 구사에는 어색한 점이 많으리라. 글자의 오용(誤用)도 있으리라.

그러나 내 노래에는 시상이 있다. 시의 생명인 ‘상’이 있다. 그 ‘상’을 나타냄에 혹은 글자 사용에는 틀린 점이 많을지나 그것은 수련하면 진보될 기교에 지나지 못하고, 시의 본체를 구성하는 시상은, 저 사람들과 비길 바가 아니다.

이만한 자존심과 자우심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본래 하도 동경하고 하도 사모하던 중국 문물이라 그 나라 사람들을 대하면 저절로 존경하는 생각이 일었다.

나가사끼에 와 있는 저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강운각이 가장 학문도 나았고 인격도 나았고, 교제성도 나았다.

성암은 숙소 고찰을 나와서 매일 운각을 찾았다. 운각은 성암을 화월루(花月樓)에 초대하여 놀고 하였다.

화월루의 수소(袖笑)라는 여인이 운각의 정부였다.

성암과 홍란, 운각과 수소, 이 두 패거리의 남녀는 한 좌석에서 함께 놀고 하였다. 처음 몇 번은 그렇게 지냈지만 차차 안해를 데리고 청루(靑樓)에 다니는 것이 좀 자미 없기도 하고 운각도 또한 홍란의 앞에서는 마음대로 놀지 못하는 양도 보이는 위에 성암 자신도 얼마만치 구속되는 느낌이 있으므로, 안해에게 갑갑하겠지만 혼자 남아 있으라고 부탁하고 혼자 다니게 되었다.

“이봐 홍란. 그렇지 않겠느냐 말이야. 적어두 우리나라 당당한 여시인이요 화가인 홍란 여사 어전이니, 사내며 더우기 청루 계집들이 어떻게 마음대로 놀겠느냐 말이야.”

“못 놀면 어때요? 당신두 그만했으면, 싫증도 안 나셔요?”

“아니지. 그럴 법 없지. 그렇지 않으냐 말이야. 나두 좀 ― 임자두 들었겠지만, 시의 말 쓰기(용어 구사)가 어색하구 서툴단 말이지. 우리 일본말이 아니구 청국 말로 쓰자니 그럴 밖에. 그걸 저 친구들과 평소에 사괴노라면 익숙해지겠단 말이지. 또 임자두 시 서투른 사람의 안해라기보다 대시인 양성암의 안해라는 편이 좋지 않겠나.”

“그럼 저두 함께 익히면 좋지 않아요?”

“내 배워다가 가르쳐 줄께. 임자야 나한테 배워야지.”

“저두 직접 ―.”

“아냐 아냐. 아니래두 그런다. 내 잘 배워다가 가르쳐 주마. 남의 남자에게 구차스럽게 배울 것 없이, 제 영감께 배우면 멋이 쿡 드느니. 내 딸 착하지, 말 잘 들어 이쁘지. 내 밀조(蜜棗)사다 주마. 소주(蘇州) 비단 고시마끼(コシマキ ― 무지기·일본식 속치마) 사다 주마. 참 이쁠 테지. 너무 이뻐서 잠시두 눈을 떼지 못했다가는 성암 선생 노래도 못 지을 테니, 기처(棄妻)할까.”

어름어름 떼어 버렸다.

나가사끼에 깃들이고 있는 이국 계집의 정취가, 성암을 유혹하는 바였다.

본시 방랑하던 성미 ― 안해를 맞고, 그 뒤는 이내 안해 동반으로 시골길 더듬노라고 다른 데 눈팔 겨를이 없었다.

여기서 청인들을 작반하여, 이국 정취에 배회하니, 곁에 안해 달한 것이 귀찮았다. 핑계 좋게 떼어 두고, 혼자 좀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좋은 말로 안해를 뗀 뒤에, 성암은 혼자서 청인들을 찾았다.

결혼한 이래, 이렇게 혼자 마음껏 돌아다니기 처음이었다. 훨씬 자유롭고 훨씬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놀이를 끝내고 취안이 몽롱하여 숙소인 고찰로 찾아 돌아오면, 안해 홍란은, 밤화장 고이 하고, 책상귀에 기대어 글씨공부를 하며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밤이 늦어서 자(子)시에 돌아와도, 축(丑)시에 돌아와도, 또는 인(寅)시에 돌아와도, 안해는 한결같이 그냥 깨어서 남편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안해를 보면, 칵 미안한 생각이 마음에 솟아오르고 하였다. 야반의 안해를 대하고 보면, 아까의 놀이가 진실로 싱겁고 의의 없고 가치없는 것으로 보였다. 내일은 다시는 나가지 않고, 안해를 데리고 이 근처의 산책이나 하리라, 안해가 물길러 우물에 나갈 때도 함께 따라가 주리라. 잠시도 안해의 곁을 안 떠나서, 그로 하여금 외로운 느낌은 결코 생기지 않게 하리라.

이렇게 결심하고 하였다.

그러나, 하룻밤의 수면으로 지난날의 피곤을 다 삭이고, 새로운 원기의 아침을 맞으면, 그의 마음은 저절로 뒤숭숭해지고, 또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는 그였다.

더욱 성암의 마음에 켱기는 것은, 비용 ― 돈의 문제였다.

짐작컨대 준비해 가지고 온 금전은 다 썼거나, 적어도 거진 다 썼을 것이다. 안해에게 물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물었다가는 십중팔구는 없어요 소리가 나올 것이 무서워 묻지 못하고, 안해에게서 무슨 불길한 선고가 나올 것을 전전긍긍히 기다렸다.

어떤 날 드디어 그 문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날도 역시 취하여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매, 늘 화려한 옷으로 화장 곱게 하고 남편을 기다리던 안해가, 이 날은 검소한 옷을 입고 있었다.

“미울세. 왜 낡은 옷으로 영감을 맞아?”

어색하여 역시 농으로 물었다.

안해는 미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미소가 마치 우는 듯한 언짢은 얼굴이었다.

“미워. 감자 장수 할멈같이. 자 우리 홍란, 새 옷 갈아입구 일어나 춤을 한 번 추지.”

“…”

“응? 좋은 옷 어땠어?”

“여보세요.”

“왜?”

“옷 팔았어요.”

“무얼?”

“쌀이 떨어졌어요. 차례루 차례루, 오늘 마지막 하레기(ハレキ ― 나들이옷) 팔았어요.”

취기가 한꺼번에 달아났다.

책망? 무에라 책망하랴.

“그러면 왜 좀 미리 말 안했어?”

“…”

“왜?”

“말씀드리면 뭘 합니까. 사내어른 마음 들뜨신 때 ―. 기다리노라면 언제든 그만두실 날이 올 것을.”

더 할 말이 없었다.

“홍란. 미안하이. 맹서하마. 인젠 다시 안 나가마.”

그 새 놀이에 달떠서 몰랐지만, 집은 씻은 듯이 맑았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쌀은 어제 산 것이니 있지만, 다른 반찬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늘부터는 다시 나가지 않으려는 남편을 위하여 무슨 반찬거리를 장만하려 나가려 하는 안해를 성암은 말렸다.

“반찬거리는 내 장만하마.”

어떤 청국인 친구에게, 도야지고기를 좀 보내 달라는 편지를 써서, 상좌시켜 나가사끼 시내로 보냈다.

오래간만에, 진실로 오래간만에 내외는 저녁 식탁에 마주 앉았다.

“역시 우리 마누라가 으뜸일세.”

“왜요. 화월루 매우(梅雨)는 어떠시구요.”

“지저분하게. 이름부터 왜 산뜻하게 홍란이라든가 못하고 매우람. 에 퀴퀴하구 지저분해.”

4[편집]

홍란이 낡은 절에서 홀로이 지아비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쓸쓸히 지내는 동안에, 홍란의 마음에 잔뜩 움돋은 것은 고향 생각이었다. 고향이래야, 자기네 가정은 단 두 내외가 다 이곳에 와 있으니, 가정 생각은 날 것이 없지만, 그래도 거기는 부모가 있고 동생이 있고, 함께 자란 동무가 있고, 낯익은 우물과 행길이 있다.

고향을 떠나서 객지살이 삼 년, 비록 고향에는 내 집도 없을지라도 그래도 객지는 인제는 겨웠다. 게다가 남편은 홀로이 놀러 다니고, 가난까지 겹치고 보니, 고향 그리운 생각은 나날이 더하였다.

남편이 청인들과의 놀이를 그만둔 뒤에도 얼마를 더 나가사끼에 있었다.

인제부터 다시 여행을 계속함에 그 비용을 얻기 위해서였다.

안해 홍란이 곁에 있고 홍란의 끊임없는 독려와 애정이 있었기에 면했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방랑의 길에 빠질 뻔한 성암은, 마음 가다듬은 뒤에는 다시 시작(詩作)에 열중하였다. 행상의 준비였다. 다시 여비를 준비해 가지고 나가사끼를 떠나서 그해 연말에 하관(下關)에 들었다.

思歸三葳未能歸[사귀삼위미능귀]
紅獨依微照曉緯[홍독의미조효위]
憶得東風舊粧閣[억득동풍구장각]
姉呼妹喚整春衣[자호매환정춘의]

홍란의 제야시(除夜詩)였다.

“새 옷 입고 널뛰고 싶지?”

“누가 안 그렇대요?”

“경도(京都)에 가서 새 옷 지어 주마.”

“언제 경도에 갈 날이 있을까요?”

“늙기 전에야 가지.”

5[편집]

새해, 봄도 지나고 여름도 지나고 가을도 지나고, 겨울 시월에야 성암 내외는 겨우 다시 오노미찌까지 돌아왔다. 여기서 한 달, 저기서 두 달, 히로시마 같은 데서는 뇌향평(賴香坪)을 만나기 때문에 반 년이나 놀았다.

옥포(玉浦)에서 배를 탔다.

그때 맞은편에서도 배 한 척이 이리로 향하여 왔다.

가까이 이르렀다. 서로 어긋나면서 맞은편 배를 보니, 그 배 승객 가운데는, 경도의 뇌산양이 있다.

“양성암!”

산양도 성암을 알아보고 고함쳤다.

“아! 산양 형! 어떻게 여기를?”

“숙(叔) 춘풍(春風)이 별세하세서 그 장례에 참예코자. 성암은?”

난 형의 권고대로 “ 구주 일대를 탐승하고 지금 돌아가는 길이외다.”

두 배의 상거가 차차 벌어졌다.

“성암! 경도에 오시거든 찾아 주시오.”

“아마 명년 봄에야 경도에 가게 되리다. 그때 찾으오리다.”

“그럼.”

“산양 형!”

빠른 물살에 나누이는 배의 상거는 벌써 서로 소리를 알아듣기 힘들게 되어 간다.

뜻안한 곳에서, 존경하는 선배 뇌산양을 만났다가 다시 헤어진 성암은 손을 들어 산양의 배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산양도 못내 애석한 듯이, 뱃전에 앉아서 이리로 손을 치고 있다.

6[편집]

오까야마에서 또 과세를 하였다.

문정(文政) 구년, 성암 서른여덟.

나니와에 들어서 좀 어름어름하는 동안에, 경도에서 오는 소식에 의지하면, 지금 아라시야마의 꽃이 한창이라 한다.

꽃 생각도 났다. 그 위에, 작년, 옥포에서의 뇌산양과의 약속도 생각났다.

황황히 짐을 꾸려 가지고 배에 올랐다.

“꽃때에는 양 형 내외분이 꼭 오실 줄 알았소이다.”

산양은 손을 들어 환영하였다.

산양은 성암을 위하여, 까모가와에 뱃놀이를 열었다. 산양과, 산양의 안해, 성암과 성암의 안해, 이 두 패거리 내외의 조촐한 뱃놀이였다.

나가사끼에서, 강운각과 수소, 성암과 홍란, 이런 두 패거리의 놀이를 여러 번 겪어 보았지만, 그때의 난잡하고 소란하던 놀이에 비하여, 서로 존경하고 서로 이해하는 두 친구와 그들의 좋은 짝들의 놀이라, 그 취미는 아주 달랐다.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까모가와에 배를 띄우고, 서로 시서를 토론하고 경개를 상미하는 아담한 잔치였다.

“성암. 나가사끼의 취미가 어때요?”

“마굴입디다. 거기 있을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고 유혹되더니. 일단 떠나고 보니 거기서 지낸 내 꼴이 되려 부끄럽거든요.”

“강운각의 인상은?”

운각은 내 노래를 흉보던걸요 “ . 어렵고 까다로운 문자를 억지로 얻어 내어, 어울리지도 않게 사용하고 ―.”

“흐 ― ㅁ”

“또, 우리나라 사람이 한문에 무식하다구요. 예컨대 ‘피할 수 없다’는 말은 불능피(不能避)라 해야 하는데, 일본인은 피불능(避不能)이라구 하구, 요컨대 한문 공부를 더 해야겠다구.”

“운각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우리 일본인은, ‘불능 피’라 안 쓰고 ‘피불능’이라구 쓰고도 사꾸아따하즈(サクアタハズ)로 읽으니까, 결국 같은 일이외다. 우리는 일본인에게 읽히고자 쓰는 노래니까, 일본인이 그렇게 읽어 주었으면 그뿐이지요. 글자는 저 나라 글자지만 그것을 빌려다가 쓰는 우리가 히후노오(ヒフノウ ― 避不能[피불능])라 읽지 않고 우리 식으로 사꾸아따하즈라 읽는 이상에는,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법식으로 쓰는 편이 옳을 것이외다. 모든 것이 다 그럴 것이외다. 우리는 어디까지든 일본인이니까, 우리의 부족한 건 혹은 저 나라에서 빌려온다 할지라도, 그것을 빌려다가는 우리에게 적합하도록 소화시켜서 쓰는 일이 옳을 것 이외다. 부인, 성암 형이 혹은 나가사끼서 부인께 못살게는 안구십디까?”

홍란은 명랑히 웃었다 ―

“왜요? 매우(梅雨)라나 하는 소주 계집에게 홀짝 반해서, 야단했답니다.”

“고약한 친구로군.”

성암도 웃었다 ―

“투(妬)는 칠거지악에 드는 건데, 머리에 뿔을 돋아 가지구 강짜해서―.”

“뭐이 또!”

“기처(棄妻)할까 했는걸요.”

산양은 앞의 술잔을 들며 조금 물러 앉았다 ―

“제 고국을 등지고, 일본 나가사끼까지 밀려나와 있는 저들이니 무슨 큰 인물은 없지만, 운각은 그래두 그 가운데서는 좀 출중한 사람입디다.”

“좀 경박한 것이 탈이더군요.”

“저들은 그대로 한족(漢族)의 종자 ― 여진(女眞)족에게 밀려, 나라도 잃고 외국까지 밀려나온 사람들이니, 다른 것 다 집어치우고 돈벌이나 해보자, 말하자면 불우(不遇)의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인도(印度)와 같은 운명, 영국인에게 국가 주권까지도 유린당하는 그런 비참한 운명을 눈앞에 보면서도, 여진족 지배하의 ‘청국 국가 운명’ 따위는 고려할 생각도 안 하고 내 돈벌이나 잘하자 ― 즉 자포자기 ― 동정할 만한 가련한 사람들 이외다.”

술좌석에도 튀어져나오는 우국지사(憂國志士)로서의 탄식이었다. 한(漢)민족의 운명, 청국의 현황을 탄식하는 산양의 말의 뒤에는 덕천(德川)씨 지배하에 있는 야마도 민족의 근심도 감추여 있는 것이었다.

성암은 고요히 머리를 끄덕이었다.

7[편집]

사 년간의 표랑을 끝내고, 성암 내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긴 여행은, 분명히 성암의 견문과 아울러 시상의 범위를 넓혀 주었다.

송시(宋詩)에서 당시(唐詩)로의 복귀에 힘쓰던 성암은, 이 긴 여행에서 ‘일본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아니, ‘일본시’라기보다 성암시였다.

시의 주제를, 대자연이든가 혹은 회고, 적막 등에서 잡는 한시의 전통을 벗어나서, 시사(時事) 우국 등에서, 노래의 주제를 얻기에 주력하였다.

문장에 대해서도, 이것은 일본식 한문이 아닌가, 이것은 문법에 틀리지 않는가 등의 구속감을 벗어 버리고, 그런 문제에 구속될 필요가 없다는 대담성을 어느덧 얻었다.

옥편을 뒤적이고 고실을 뒤적이어, 노래 한 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고심을 하던 그런 고심도 차차 줄어들어서, 자연스러운 구가 술술 솟아나게 되었다.

사 년간의 여행으로 이만한 성과를 얻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오고 보니, 눈앞에 막히는 문제는 역시 생활 문제였다.

고향에서는 ‘행상’을 할 곳도 없었다. 기본 재산은 무론 없었다.

동생이 부자였다. 그 동생의 재산이라 하는 것이, 본시는 성암의 것이었다. 그러매 떳떳이 동생에게 생활 부조를 요구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고, 성암 자기는 그래도 그런 문제에 구애되지 않았지만 안해 홍란이 싫어하였다.

일 년간을 고향에서 자존심과 싸우고 가난과 싸우다 못해, 일 년 뒤, 문정 십년 사월에, 성암은 또 보따리를 싸 가지고, 길을 떠나기로 하였다.

“내 돈 벌어 집으로 보내줄 테니, 집에서 기다리게.”

이번에는 안해를 두고 떠나기로 하였다.

“어디 어디로 다니실 예정이야요?”

“경도에 가서 묻혀 있겠네.”

“그러면?”

“산양(山陽) 형은 인정 있고, 이해 있는 사람이니까, 좋도록 주선을 해주겠지.”

형으로서의 자존심상, 동생에게는 차마 구걸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고 알아주는 산양에게는 가슴 터놓고 자기의 빈곤을 호소하고, 그 선후책을 의논할 수도 있었다.

“내 땜장이 노릇을 할까 하네.”

“땜장이란요?”

“무론 매시(賣詩)도 하고, 시회도 열고 하겠지만, 남의 지은 시를 땜질― 즉 얼마씩의 사례를 받고, 서툰 데를 고쳐 주고, 잘못된 데를 수정해 주고 ― 말하자면 땜질일세그려. 옷 땜질, 그릇 땜질은 할 줄 모르지만, 시 땜질은 내 당해 내마.”

“그게 될까요?”

“되구말구. 시를 배우는 사람이 자기 지은 시에다가, 성암 대선생이 이렇게 이렇게 해야 좋다고, 땜질해서 본때를 보여 주면 거저 배우는 것보다 훨씬 진보가 빠를 것일세. 싸구려 싸구려루, 북을 두들기며, 에 또, 여기는 양성암 대선생의 대장간이외다, 한시, 대책, 서간, 무엇이든 가져오면, 감쪽같이 때우고 고쳐 드립니다. 에에 싸구려 싸구려루 크게 외치면, 남으로는 팔장(八丈)에서 북으로는 에소(蝦夷[하이])까지 문이 메어서 몰려올 것일세. 임자두 함께 가서, 문간에서 손님을 불렀으면 좋겠구만.”

“싫어요.”

홍란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집 한 간 마련하고 거기 엉덩이를 붙이자고 함께 돌아왔던 노릇인데, 막상 고향에 돌아와 보니, 그럴 가망 보이지 않고, 시가의 친척이며 친정의 친척이 모두 버젓이 살아 가는 가운데, 홀로이 삐어져서, 집 한 간 없고 그날그날의 살림조차 구차하게 지내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름 좋은 개살구라고, 시인 양성암의 성화는 지금 육십 주에 찬연히 빛나지만, 어름이 직접 밥이 되지 않고, 명예가 직접 그들의 구차함을 구원해 주지 못하니, 자존심을 유지키 위해서 남에게 창피한 꼴은 보이기 싫고, 홍란의 여인으로서의 마음은 진실로 괴로웠다.

바가지를 안 긁으려야, 안 긁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긁는 바가 아니고, 체면을 버티기 위하여 긁는 바였다.

행장에 붓 한 자루를 싸 가지고, 행상에 겸 땜질을 하기 위한 길을 떠났다.

擾擾輪蹄塵滿城[요요륜제진만성]
浮名世利日紛爭[부명세리일분쟁]
如何林下忘會者[여하림하망회자]
也策嬴慘去入京[야책영참거입경]

소연한 경도의 땅으로 향하는 자기의 심경이 스스로 가엾었다.

더우기 매시(賣詩)만도 아니요, 시 땜질을 목적하고 떠나는 자기의 처지가 가엾었다.

“안해란 참 인생 행로의 지대한 부담이로다.”

일 년 전, 나니와에 배회하다가, 경도에 꽃이 한창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황히 경도로 달려가던 그 날이 회상되었다.

오늘도 그 날과 마찬가지로 노변에는 꽃이 한창이요, 시내에는 봄물이 용용히 흐른다.

만물이 새 봄을 맞아 소생하려는 이 봄날, 성암은 가볍지 못한 가슴을 붙안고 길을 더듬었다.

6[편집]

1[편집]

뇌산양(賴山陽)은 성암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좋은 후원자였다. 성암을 위해서는, 몸이나 정성이나 아끼는 것이 없었다.

붓 한 자루를 밑천삼아, 붓으로써 구복(口腹)의 문제, 의식 거처의 문제 온갖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는 성암에게는 동정자 이해자 후원자가 절대로 필요하였다. 뇌산양을 그의 아버지의 대부터 유관(儒寬)으로 내려왔으니만치, 면이 많고 지반이 넓으며 일찍부터 문명이 높았으니만치, 위신도 많았다. 그 산양이 정성을 다하여, 혹은 물질로, 혹은 정성으로 성암의 뒤를 보아준 것이었다.

나이 사십에, 아직 안정할 집도 마련하지 못한 성암은 이리저리 방랑하며, 시작(詩作)에 정진하고 있었다.

안해 홍란도 또 가까이 불렀다.

고달픈 세상을 헤엄쳐나아가는데, ‘안해’라는 것은 지대한 부담인 동시에 또한 지대한 위안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 하도 고되고 어려워서, 탁 절망에 빠지려 할 때에, 곁의 젊은 안해를 돌아보면 안해 부양의 의무를 통절히 느끼는 동시에, 안해의 따뜻한 위로 한 마디는, 다시금 성암의 용기를 돋구어 주는 것이었다.

안해를 다시 불러 곁에 두고, 가난과 싸우며 세상과 싸우며, 오직 대성(大成)의 날을 목표로 매진하고 있었다.

근기(近畿)의 명소라는 명소는 다 찾아 보았다. 좋은 벗 찾아 아름다울 경개를 순유하는 동안 그의 시낭(詩囊)은 부쩍부쩍 늘었다.

2[편집]

천보(天寶) 삼년 여름(마흔네 살) 성암은 다시 ‘에도(江戶[강호])’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로는, 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이 불혹(不惑)을 지난 지금까지도, 만날 내일의 조반쌀을 어디서 생길까고 근심하는 불안정한 생활이 인제는 진저리났다. 표랑에 계속하는 표랑으로, 내 집 한 간 없이, 오늘은 이 주막에서, 내일은 저 주막으로 흘러다니는 신세가 나이 사십을 지나고 보니, 인젠 고달픔이 뼈에 사모쳤다.

‘에도’는 이 나라의 학문의 중심지라, ‘에도’에 자리잡고 천하에 제자들을 부르면,(인제는 흔들림 없는 대가(大家)이매) 제자들도 문하에 모여들 것이다.

제자들을 문하에 모으기만 하면, 지금같이 조반쌀을 위한 근심은 저절로 해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점보다도, 성암에게는, ‘에도’라는 땅이 그리웠다. 아니, ‘에도’보다, ‘에도’의 강호시사(江湖詩社)가 그리웠다. 지난 젊은 시절에, 뜻 같은 젊은이들과 짝하여 벙으는 연꽃, 지는 사꾸라를 즐기던 그 지역이, 늙어 가면 차차 새삼스러이 그리워졌다. 재옥가지(才玉加池)의 우거진 버드나무 그늘에서, 피어오르는 시상(詩想)에 적적한 싯구(詩句)를 생각해 내느라고 안달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동시 그 땅이 그리웠다.

나이가 마흔넷.

게다가, 당당한 시의 대가.

체신도 있겠거늘, 아직 시골로 돌아다니며, 시회(詩會)와 땜질의 근소한 수입으로 연명이나 해가는 지금의 처지가 부끄럽기도 하였다.

다시 ‘에도’로 나가 볼까는 생각을 하기는 벌써 오래 전부터였지만, 이때에 비로소 결정을 하고 안해와도 의논하고 또, 장차 뇌산양과도 의논하려 하였다.

인제 경도로 가서, 산양과도 그 의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어떤 날, 경도의 산양이 히고네(ヒコネ ― 그때:성암 내외는 히고네에 부접하고 있었다)로 찾아왔다.

그때 마침 방에 누워서 , 여름날 저녁의 상쾌한 바람을 즐기고 있을 때, 문간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산양의 음성이었다.

벌떡 일어났다. 흩어진 옷을 수습하였다. 현관으로 나가려 할 때, 현관에서는 또 ‘여보슈, 여보슈’찾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들으매, 산양의 음성이 아닌 것 같았다. 목이 갈리고 기운없는 그 소리는, 어디인지 낯익기는 하지만 그래도 산양의 음성은 아닌 것 같았다.

서생(書生)이나 하녀도 없고, 안해는 지금 부엌에서 설거질하고 있는 모양이므로 성암이 몸소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가 보니 역시 산양이었다.

“아, 웬 일이셔요?”

“갑자기 성암을 좀 만나구 싶어서!”

“올라오셔요.”

걸터앉아서, 김발을 푸는 산양을 성암은 굽어보았다.

서로 못 본 지 겨우 너덧 달이다. 그런데, 그동안에 산양의 변화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야위어서 뺨이 쑥 들어가기 때문에, 광대뼈가 놀랍게 솟아오르고, 얼굴은 종이빛같이 창백하고, 숨찬 듯이 어깨가 들먹거리는 양이, 보통 몸, 보통 건강 상태가 아니었다.

일전에 산양에게서 이즈음 몸이 좀 불편하다는 글을 받기는 받았다. 그러나 환절기의 지나가는 탈쯤으로 알았더니 지금 대하고 보니, 심상치 않은 용태인 모양이었다.

“신상이 왜 그렇게 ―.”

“조금 앓았소이다.”

조금만 앓은 모양이 아니었다.

“무슨 탈이기에 ―”

“폐 ― 피두 꽤 토하구 ―”

“그 신상으로 어떻게 ―”

“친구가 히고네에서 살림을 하였다는데, 한 번 와 보고 싶긴 하지만, 탈이 나 좀 차도가 생기면 올까 올까 벼르나 어디 차도가 보입디까. 그래, 이 꼴로 왔구료.”

감발을 끄르고 발을 닦고 올라왔다.

“부인은?”

“설거질하나 봅니다. 부르지요.”

아니 아니 내 곤해서 “ , , 다리를 좀 뻗치고 있고 싶은데, 부인이 오시면 황송해서 ―”

“아, 참 삼조 방에 들어가 애전에 좀 누우시지요. 오죽 곤하실까.”

산양은 꽤 곤했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사양하지도 않고 곁방으로 가서, 성암이 펴주는 자리에 들고 말았다.

“성암! 하늘은 내게 인색하시게도 명(命)을 안 빌리시는구료. 내 나이 겨우 쉰셋, 아직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

산양은 자리에 들면서, 숨찬 숨을 모다쉬며 이런 말을 하였다.

“그런 말씀두 하시나. 그게 ―”

“자고로 허파를 앓고 다시 일어난 사람이 없으니까….”

이튿날부터, 산양은 성암을 채근하여 근처의 명승을 탐승하러 다녔다. 하도 산양의 피곤해 하는 양이 민망하여, 천천히 쉬어 가면서 탐승하기를 권하여 보았지만 산양은 굳이 성암을 몰아 앞세우고 탐승다녔다. 한 십여 일을 함께 돌아다녔다. 성암의 안해 홍란이며, 근처의 친구들도 모두 찾아 데리고.

어떤 날, 산양은 유난히 일찍이 차리고 나서려 하였다. 아직 다른 벗들은 아무도 온 사람이 없고, 홍란도 아직 설거질도 못한 이른 새벽에 ―.

“아 벌써요? 아무도 아직 안 왔는데.”

“아니, 성암과 단둘이서 나갑시다. 사실로는 내 조금 조용히 성암께 의논하고 부탁할 일이 있어서 ―”

이리하여 단둘이서 나섰다.

자그마한 배를 하나 세내어 가지고, 둘이서는 물에 떴다.

강 복판 가운데 이르러서, 첨벙 닻을 주었다. 산양의 부탁으로 ― 산양은 문득 성암의 딱 앞에 와 앉았다. 무릎을 꿇고 손을 맞잡고 성암의 앞에 꿇어 엎드렸다.

“양 형! 양 형!”

“아 웬 일이셔요?”

“양 형! 내 양 형께 절실한 부탁이 있소이다. 들어 주시오.”

“산양 형의 부탁이시라면 내 무얼 사양하리까. 이렇게까지 안하신들, 어서 일어나셔요.”

“아니, 내 하두 절실하고 거룩한 부탁이라, 소홀히 하지 못하겠소이다.”

“대체 무엇이오니까?”

“양 형, 글을 살려 주시오. 시를 활용해 주시오. 보통 문자들과 같이 단지 단지 글을 글로만 희롱하시지 말고 글을 살려서 살려서 이용해 주시오!”

“?”

“내 필생의 사업이, ‘일본외사(日本外史)’와 ‘일본 정기(日本政記)’의 찬술이어. 글을 단지 글로 희롱하지 않고 글을 이용해서 ― 글의 교화력, 선전력을 이용해서 우리나라 국체 사상을 백성들에게 침투케 해보려던게 내 필생의 사업이었소. 그 두 찬술은 이렁저렁 끝이 났다 하지만, 그냥 국민사상을 선도할 만한 찬술이 계속되지 못하면, 국민은 전사는 잊어 버리고 다시 뒷걸음질칠 것이외다. 누구, 후계자가 뒤를 이어서 꾸준히 국민정신을 지도해 주지 않으면, 국민정신은 퇴폐해 버릴 게외다. 조용한 기회 있을 때마다 양형과 늘 한탄한 바지만 무가정치(武家政治)를 청소해 버리고 하루바삐 왕정 복고의 세월을 현출해야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는 날까지, 꾸준히 국민정신을 옳은 길로 끌어 주어야 할 게외다.

장차, 칼을 들고 실력으로 그 일을 해낼 사람은 무인(武人)들이겠지만, 그런 사람이 생겨 나도록,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그런 시절을 희망하도록 만드는 것은 문사의 직책일 것이외다.”

산양은 또 잠시 말을 끊었다. 머리를 조금 들어 성암을 쳐다보았다.

“양 형. 우리나라에, 문사의 수효는 적지 않소이다. 술잔을 들고, 달을 노래하고 꽃을 찬송하라면 당송(唐宋)의 시인에게 그다지 손색이 없을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게외다. 그러나 ―.”

숨찬 듯이 또 말을 끊었다. 잠시 머리를 숙이고 숨을 태워 가지고 다시 계속하였다 ―

“숨이 차서 많은 말을 못하겠소이다. 그러나 내 뜻을 양 형은 짐작하실테니, 여러 말 말고, 내 뒤를 맡아 주시오. 나는 산문이요. 양 형은 운문으로 그 길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의 글의 힘이 ― 무인들의 칼의 힘보다 훨씬 나으리다. 뒤를 맡아 주시오. 뒤를 맡아 주시오. 양형 밖에는 마음놓고 뒤를 부탁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는구료. 글에도 능하고, 사람들이 믿고, 그 위에 건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언뜻 보이질 않는구료.”

성암은 잠자코 들었다.

가슴을 파먹어들어가는 병에 걸리어서 목숨이 단석에 있으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적심에만은 변함이 없는 이 학구의 앞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장의 선전력을 알고 문장의 감화력을 알고 이 선전력 감화력을 국민 사상 지도에 쓰려는 산양의 심정 ― 그 일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몹쓸 병에 거꾸러지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의 이 지도자의 마음의 아픔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 있어서 그대의 , 병이 과하지 않으니 마음 든든히 가지라는 등의 입에 발린 인사로 당면을 속일 수는 없었다. 숨이 차기 때문에 많은 말을 하지 못하고, 지극히 간단한 말로 당부한 바이지만, 그 요령과 뜻은 넉넉히 알아들을 수 있는 성암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비로소 대답하였다.

“산양 형. 이런 일이야 어찌 누구에게 당부를 받고야 할 일이리까. 내가 이 나라에 태어난 이상이야 마땅히 자진해서 할 일. 내 나이 산양 형보다 겨우 아홉 살 아래니 낸들 여생이 얼마나 많으리까마는, 그래도 아직 다행히 몸이 큰 탈 없으니 잘만 삼가면 천수는 보지하오리다. 그렇기만 하면 형의 말씀 폐부에 새기고 늘 고려하오리다.”

“응 그것, 천수 그 점을 명심하시오. 우리는 무인(武人)과 달라서, 이 몸뚱이를 내어놓아 몸뚱이로써 앞장선 것이 아니라, 뒤에 숨어서 국민사상 지도에 나 정진을 해야 할 것이니, 그 점을 잘 유의해서, 경솔한 일은 피해야 할 것이외다. 앞장선 무인이 일이백 희생되는 것 그닷지 않지만, 뒤의 한 지도자가 없어지는 건 막대한 손실이니까, 그 점을 잘 유의해서, 막부 당국의 기휘의 예봉은 할 수 있는껏 피해야 할 게외다. 자기의 한몸 경솔히 폐하면 여간한 무인 몇 백 명 잃는 데 비기지 못할 손실이니까 그 ‘천수’를 다하도록 경솔히 일찍 폐하지 않도록, 그 점 주의해야 할 일이외다.”

산양은 성암에게, ‘에도’로 나아가기를 권고하였다. 천하의 젊은이들이다 모이는 ‘에도’에 숙(塾)을 열고 젊은이들을 모아 은연중 무가 정치의 그릇을 알게 하고 대의명분을 일으키면, 그 가운데서 장차 적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테니 꼭 결심하고 ‘에도’에 나가기를 권고하였다.

“형의 권고가 안 계실지라두 ‘에도’에는 나갈까고 생각은 했지만 ― 온 형의 그 병이 걱정이외다그려.”

“사람은 장생은 바라지 못할 게라, 내가 났던 보람만 이렁저렁 남겼으면 그만이니까 죽는 게야 무에 아까우리까마는 그래도 생각했던 일이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좀 미흡하구료. 성암이 뒷일을 맡아 주실 테니 뒷걱정은 없겠지만, 그래두 내 눈으로 좀더 보구 싶어.”

적적히 미소하는 산양의 눈가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었다.

(미완)

라이선스[편집]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5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