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성화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어린아이의 장난과도 같은 그 기괴한 습관을 나는 버리지 못하였다. 꿈을 빚어 내기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발명이었던 까닭이다. 두 개의 렌즈를 통하여 들어오는 갈매빛 거리는 앙상한 생활의 바다가 아니요, 아름다운 꿈의 세상이었다.

그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만은 귀찮은 현실도 나의 등뒤에 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굳이 도망하여야 할 현실도 아니겠지만 나는 모르는 결에 그 방법을 즐기게 되었다.

비밀은 간단하다. 쌍안경 렌즈에 갈매빛 채색을 베푼 것이다. 나의 생활의 거의 반은 이 쌍안경과 같이 있다. 우두커니 앉아 궁리에 잠기지 않으면 렌즈를 거리로 향하는 것이 이층에서 보내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 쌍안경의 마술이 뜻밖에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 것을 생각하면 그 기괴한 습관을 한결같이 비웃을 수만도 없다.

'유례가 아닌가.'

거리 위를 대중없이 거닐던 렌즈의 방향을 문득 한곳에 박고 나는 시선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비치는 것은 안정된 정물이 아니요, 움직이는 물화인 까닭에 인물의 걸음을 따라 핀트가 틀어지고 동그란 화폭이 이지러진다. 나사를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초점을 맞추기가 유난스럽게 힘든다.

'유례일까.'

손가락이 가늘게 떨린다. 눈이 아프고 숨이 막히는 것은 전신이 극도로 긴장된 까닭일까. 한 사람의 인물의 정체를 판정하기에 사실 나는 우스꽝스러우리만치 있는 노력을 다하였다. 행길의 거리가 줄어듦을 따라 흐렸던 렌즈가 차차 개어지더니 초점이 바로 박혀 마침 인물의 모양이 또렷이 솟아올랐다. 듬직한 고기를 낚았을 때와 같은 감동에 마음이 뛰놀았다. 오똑한 얼굴 검소한 차림 찌그러진 구두가 한 걸음 한걸음 눈 속으로 뛰어들어온다. 렌즈의 장난으로 전신이 갈매빛이라고는 할지라도 그것은 꿈속의 인물이 아니요, 어김없는 현실의 인물이다.

"유례!"

두 치 눈앞의 유례를 나는 급작스럽게 정답게 불렀다. 그러나 눈 아래 검은 점까지 보이는 지경이면서도 실상인즉 먼 거리에 반가운 목소리가 통할 리 없음을 속간지럽게 여겨 나는 쌍안경을 그 자리에 던지고 이층을 뛰어내려갔다. 천리 밖에서 온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감격이었다.

가게는 며칠 닫히고 있는 중이라 아래층 홀이 광 속같이 어둡게 비어 있는 것도 요행이었다. 뒷문을 차고 골목을 나가 큰 행길 모퉁이에서 손쉽게 유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옳게 맞혔군."

인사를 한다는 것이 됩데 이런 딴소리를 하면서 앞을 막고 섰을 때 유례는 주춤하고 나를 바라보더니 비로소 표정의 긴장이 풀렸다.

"언제 나오셨소? 보석이 된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선생이 나와서 뵈는 첫 분예요. 그러나 노상에서 이렇게 뵈옵게 되긴 우연인데요."

"유례를 어떻게 발견한 줄 아시우. 망원경으로 거리를 샅샅이 들췄다면 웃으실까."

필요 이상의 이런 말까지를 전할 제는 나의 마음은 확실히 즐겁게 뜬 모양이었다.

"가시는 방향은?"

"또렷한 것이 없어요. 어쩐지 정신이 얼떨떨해서 지향이 잡히지 않는군요. 그러나 하긴 누구보다도 먼저 선생을 찾을 생각은 생각했지만. 만나는 사람이 많으면 자연 수다스럽고 귀찮을 뿐이니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몸을 푹 휴양해야겠어요."

"마침이군요. 가게로 가십시다."

주저하지 않고 선뜻 발을 떼어놓는 것이 반가웠다. 유례와 나란히 서서 걸으면서 비로소 나는 그에게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말을 잊은 것을 깨달았다.

"건수 무사한가요?"

"별일 없는 모양예요."

질문도 간단은 하였으나 유례 자신도 짧게 대답할 뿐이지 같이 들어갔던 남편의 소식을 장황히 전하지는 않았다. 통달치 못한 까닭일까,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 까닭일까?

"몸이 튼튼한 편이니 고생만 안 되면 다행이죠."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서 유례를 볼 수밖에는 없었다. 피곤―---이라는 것보다는 주림의 빛이 유례의 전신을 폭 쌌다. 먹을 것, 입을 것, 얼굴은 기름에 주렸고 발에는 구두가 필요하다. 윤택이 없고 굽이 닳아빠진 헌 구두가 나의 신경을 유심히도 어지럽혔다.

가게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를 이층으로 인도하고 피로의 포도주 대신에 아침에 온 우유를 제일 큰 잔에 가득 따라서 권하였다. 그에게는 축배보다도 먼저 이것―---영양이 필요하다고 느낀 까닭이다.

바에 올 만한 계급은 산이나 바다에 피서를 떠났는지 가게가 한산하기 짝이 없으므로 여름 한 고패를 문을 닫기로 하였다. 그것을 기회로 보라는 듯이 란야는 함손을 데리고 해수욕을 내뺀 지 여러 날이 되었다. 실상인즉 가게까지 닫은 것은 요사이 생활이 어지간히 문란하여 온 란야에게 대한 꾸지람이요 경계인 셈이었으나 란야는 도리어 담차게도 그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거리의 룸펜이요 불량자인 함손의 어느 구석에 쓸모가 있느냐고 물으면, 돈 없고 일 없는 궁측스런 꼴이 알 수 없이 마음을 당긴다고 대답하는 란야였다. 가난을 싫어하는 란야에게 궁측스런 꼴이 마음에 들 리는 만무하나 극도로 유물적이요 감각적인 란야의 경우이니 아마도 눈에 띄지 않는 그 어느 곳에 그를 끄는 요소가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용돈이 떨어지면 나에게서 졸라다가 모르는 곳에서 함손과 같이 낭비하여 버리는 눈치까지 알면서도 나는 두 사람의 관계에 한마디도 입을 넣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일없이 거리에서 건들거리는 란야를 끌어다가 가게를 연 지 일년이 넘는 동안에 나는 그에게서 받을 것은 받았고, 그역 나에게 줄 것을 다 준 후이라 두 사람의 마음이 어느덧 늘어지고 심드렁하여진 관계도 있기는 있겠지만, 나는 벌써 란야의 처신에 대하여서는 천치같이 되어서 드러내 놓고 질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리만치 속이 누그러진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의 자유를 말같이 놓아 주는 것은 반드시 나의 게염에 끓는 마음을 부처 같은 참을성으로 누른 연후의 일은 아니었다. 함손과 지내는 동안의 그의 시간은 나의 알 바 아니요, 나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를 나는 천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태도가 란야의 탕일한 마음을 더욱 기르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확실히 두 사람과의 생활을 각각 칼로 벤 듯이 쪼개어 생활하는 놀라운 기술을 가졌다. 란야들이 내뺀 뒤의 시간을 나는 이층에 앉아 쌍안경과 씨름하면 그만이었다. 쌍안경에 지치면 맞은편 벽에 걸린 한 폭의 성화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법도 있다.

호프만의 그 성화(聖畵)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은연히 나의 마음을 끌게 되었다. 크브로의 청년에게 딴세상을 가르치는 기독의 손길이 나에게는 무한한 유혹이었다. 청년 대신에 나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워 보면 그 유혹은 한층 더하였다. 기독의 말을 이해치 못하고 무거운 번민을 품은 채 하염없이 가버린 청년과는 달라 나는 나 자신의 뜻으로 기독을 이해할 수 있고 나 자신의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인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요구는 란야와의 현세적 생활의 피곤에서 결과되었음에 틀림없는 것이니, 나의 마음속에는 이역 어느 때부터인지도 모르게 란야와 대차적으로 유례의 자태가 우연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욕심과 피부의 감각밖에 없는 란야에게서 떠나 근대적 이지의 덩어리와도 같은 유례에게로 생각은 말같이 달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독의 손길이 가르치는 세상이 나에게 있어서 유례들의 행동의 세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는 그들의 행동의 세상이라는 것도 나에게는 그다지 먼 것이 아니고 종이 한 장의 벽이 놓였을 뿐이었다. 그만큼 나는 그들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는 있었으나 끝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는 생각이 편벽된 때 솟는 것이다. 인류가 쌓아 온 전 지식의 이해는 나에게서 온전히 용기를 뺏어 버렸다. 따라서 유례들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요, 그들의 세상은 여전히 종이 한 장 건너편의 것이었다. 그런고로 유례는 나에게는 유물적 행동의 대상이 아니고 일종의 정신적 우상으로 비치었다. 유례를 데리고 행동의 세상을 떠나 더 높은 세상으로 들어감이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그 성화의 의미였다.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유례와 함께 현실 세상을 떠남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러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나가기보다도 어려운 그 길을 생각할 때 몸에 소름이 쪽 끼치면서도 한편 마음은 즐거웠다.

이때부터 나는 일종의 예감을 가지고 한결같이 유례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유례가 많은 동무들과 함께 들어간 지는 거의 반년이 넘었다. 들어가는 마지막까지도 길은 다르면서도 나는 그를 은밀히 보호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최대한도의 우정이 흘렀다. 가지가지의 기억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이층에 혼자 앉아 호프만의 그림을 바라보며 쌍안경으로 유례를 찾은 셈이다. 그러므로 이날의 해후는 몹시도 암시적이요 기쁜 것이었다.

받은 우유를 다 마시고 난 유례는 어머니의 젖꼭지에서 떨어진 어린아이와 같이 적이 얼굴이 빛났다.

"더 드릴까."

"욕심쟁이로 아시나 봐요."

"차입할 동무도 없었을 텐데 벌충으로 실컷."

"한 잔이면 그만이지요."

"한 잔의 젖으로 해결되는 인생."

나는 유례의 겸양의 얼굴을 엿보면서 다음 말을 잇기까지에는 한참이나 걸렸다.

"현대의 이상은 기껏 그뿐일까."

역시 한참이나 있다가 유례는,

"더 무엇이 있단 말예요?"

"유물의 싸움이 전부라면 인생은 너무도 가엾지 않을까?"

유례의 눈은 별같이 맑아 보인다.

"영혼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셈이지요."

"반동으로 몰릴까."

"적어도 오늘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그럼 내일의."

"죽은 후에나 있거나 말거나."

농이겠지만 유례의 답변에 나는 뭉클하여 '죽은 후에나'의 뜻이 머릿속에 아롱아롱 어른거렸다. 그것은 또한 유례에게 대한 나의 생각의 종점인 까닭이다.

나는 극히 자연스럽게 벽 위의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유혹을 받은 듯이 유례의 눈도 나의 시선을 따랐다.

"기독이 가르치는 세상을 알게 되었다면 나를 비웃으려우?"

"그 세상으로 들어가시고 싶단 말예요?"

"동무만 있다면."

나는 여기서도 나의 속뜻을 얼마간 노골적으로 표시한 셈이었다.

"무엇을 즐겨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어요."

"즐겨서가 아니라 참고 들어가야지요."

"참을 필요가 있을까요?"

유례의 뜻과 나의 뜻의 핀트가 꼭 들어맞지 않음이 슬펐다. 차라리 그가 딴소리를 꺼내는 것이 나에게는 그 자리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 제게는 기독의 그림보다도 이것이 더 긴할 법해요."

하고 책상 위의 그림책을 집어 든 것이다. 불란서에서 오는 모드의 잡지였다. 파리 남녀의 가지가지의 양자가 사치한 채색에 싸여 페이지마다 꽃피었다. 유례는 누그러진 표정으로 장을 번겨 갔다.

"옳은 말이오. 유례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생활이 필요하오. 반년 동안 잃었던 생활을 한꺼번에 가장 풍부하게 빼앗아야 할 것이오. 생활의 테두리가 만월같이 꽉찼을 때 내 말한 뜻이 알려지리다."

단숨에 내지껄이고 나는 유례가 들치는 책장을 넘겨다보며,

"어느 맵시, 어느 감이 마음에 드는지 말해 보시우. 우선 옷을 장만합시다. 다음엔 구두를 갈고."

재촉하는 듯한 어조에 유례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뼈부터 궁골로 생겼는지 평생 가난이 비위에 맞아요. 생활이 찼다간 짜장 딴생각이 들게요?"

진정으로 들을 필요 없는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뒤미처,

"두말 말고 생활을 설계합시다."

하고 마치 건축을 설계하려는 고명한 기사와도 같이 책상 위의 종이와 연필을 집어 들었다.

"갖은 진미를 먹어야 할 것. 음악을 풍성히 들어야 할 것. 좋은 그림을 보아야 할 것. 영화를 적당히 감상해야 할 것. 몸을 충분히 휴양해야 할 것."

지껄이는 한편 번호를 따라 조목조목 내려 적고는 얼마간 자신 있는 눈초리로 유례를 바라보았다.

"보시오. 다 건강한 것이지 하나나 불건전한 조목이 있소?"

"뜻음 감사하오나 과분한 사치는 동무에게 죄예요."

"쓸데없는 겸손이지, 많은 동무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회복되고 충실하여지면 반가운 일이 아니겠소? 죄니 양심이니 하는 것이야말로 도리어 일종의 장식물이 아니오? 오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인간적인가 하오. 인간을 떠나 무엇이 있소?"

나는 도리어 내 일류의 역설로 장황하게 그를 꾸짖는 것이었다. 그가 잠자코 있음을 보고 마지막으로 못을 박는 듯이 나 자신의 결론으로 그를 휘이고야 말았다.

"의견을 버리고 내 설계대로만 좇으시오. 불과 얼마 안 가 온전한 몸을 만들어 드릴게."

들어간 후로 숙소가 어지러워진 까닭에 우선 알맞은 셋집을 골라 옮기도록 한 후에 시절에 맞도록 외양을 정돈시키니 유례는 신부와도 같은 초초한 인상을 주었다. 새 구두의 감상을 그는 처음으로 요트를 탄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외모가―---형식이―---정리되니 마음도 적이 조화되어 유례는 차차 나의 계획에 순응되어 가는 모양이었다. 순응이라기보다는 거의 짐승 같은 탐욕을 가지고 주렸던 생활을 암팡지게 먹으려는 듯도 한 탐탁한 열정이 보였다고 함이 옳을는지 모른다.

"거리에서 가장 생활적인 곳이 어딜까요?"

그의 이러한 질문도 극히 자연스럽게 들렸다.

"가장 생활적……."

다따가의 물음에는 나도 문득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노래 듣고 춤추고…… 거리낌없이 마음껏 천치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럴듯한 청이오."

그러나 카페로 인도할 수도 없는 터이므로 문득 호텔이 있음을 생각한 것은 나로서는 지당한 처지였다.

오후가 늦어 우리는 거리에서 하나인 호텔을 찾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유례는 호텔의 문을 들어서자 소년같이 흥분하여 다변이었다. 행여나 동무들의 눈에라도 뜨일까 하여 일부러 뒷골목을 돌아온 그건마는 문을 들어서서부터는 거리낄 것도 없고 어색하지도 않은 늘 드나드는 인종같이 익숙하고 천연스런 걸음임에 나는 얼마간 놀라기까지 하였다. 사치한 카펫도 부드러운 그의 발밑에서는 만날 임자를 만난 듯이 아깝지 않게 밟혔다.

하룻동안의 그 속의 생활을 온전히 즐기기 위하여 각각 방까지 정하고는 그 안의 설비를 이용함이 마치 일류의 손님같이 손익었다. 식당에는 사람들이 웬만큼 빈 데를 깐보아서 내려갔으나 그래도 유례는 남은 사람들의 시선을 알뜰히 끌었다. 천연스럽게 앉았으면서도 처음 받는 찬란한 만찬의 식탁에 적이 현혹한 모양이었다.

"무슨 고긴 줄 아시우?"

나는 농담삼아 접시의 고기로 그를 떠보았다.

"닭고기요."

"천만에, 칠면조외다."

유례는 오도깝스럽게―---가 아니라 침착하게 눈알을 굴렸다.

"이 술은?"

"백포도준가요?"

"하긴 샴페인도 백포도주 같기는 하지요."

"샴페인이란 말예요?"

납작한 유리잔을 어색하게 입술에 대었다. 처음 받는 진미에 유례는 도리어 대담하여져서 등대하고 섰는 보이의 눈치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거동하였다.

"팔자 없는 곳에 한몫 드려니 왜 이리도 편편치 못해요. 어차피 귀인이 아닌 바에야 되고말고 하지요."

식도를 함부로 쓰고 냅킨으로 입까지 훔쳤다.

식후 식당을 나가 정원을 거닐 때에는 옴츠렸던 사지가 활짝 펴져 자유로운 자세로 돌아갔다. 정원의 규모를 말하고 화단 꽃을 칭찬하는 나긋나긋한 양자는 익숙한 부인의 그것이었다. 지붕 밑을 떠나 하늘 아래로 나갈 때 유례의 거동은 한결 자유로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소풍을 마치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 로비에 앉았을 때에는 수많은 시선이 어지럽게 흐르는 속임에도 유례의 자태는 의젓하고 부드러웠다. 음악이 이미 시작되었고 남녀는 한 패, 두 패씩 겨르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탱고의 리듬이 마음을 달뜨게 간질렀다. 겨른 짝들은 물고기같이 미끄럽고 풍선같이 가볍고 바다 위에 뒤뚝거리는 요트의 무리다. 휩쓸리고 싶은 유혹을 느끼면서도 초보의 스텝도 못 밟는 유례와는 겨를 수도 없는 까닭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소파에 들어붙어 '벽의 꽃'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꽃밭이라고 할까요."

춤추는 무리를 유례는 이렇게 비유하고 곧 뒤를 이어 비평적으로,

"그러나 그뿐예요. 꽃이란 아름다울 뿐이지 속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그 꽃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려우."

"천치가 되란 말이지요."

"오늘 밤은 천치같이 생활을 탐험하러 온 터가 아니오? 맑은 정신으로야 생활에 취할 수 있소?"

"도저히 취할 수야 있나요. 이런 곳이 비위에 맞을 리 없어요."

음악이 끝나고 새 곡조의 반주가 시작되었을 때 낯모를 사나이가 와서 유례에게 춤의 상대자 되기를 청하였다. 유례는 거절하고 뒤미처 자리를 일어섰다. 그 결에 나도 같이 일어나 로비를 나갔다. 역시 사람의 숲을 떠나 넓은 천장 밑으로 나가는 편이 자유롭고 거북하지 않은 것 같다. 어두운 정원을 유례와 같이 나 역 해방된 느낌으로 거닐 수가 있었다.

"유례의 당장의 원이 무엇이오?"

돌연한 질문에 유례는 의아하여 반문하였다.

"무슨 뜻예요?"

"가령 지금 눈앞에 한덩이의 횡재가 있다면 그것으로 무엇을 하시겠소?"

"샘 속 벌레에게 바다를 말씀하시는 셈예요."

"횡재란 있으려면 있는 것이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 위에 뿌릴 수도 없고―---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농담이 아니오. 알다시피 내게 얼마간의 사유재산이 있지 않소? 가게까지 훌두드려 팔면 상당한 액일 것이나 지금의 내게는 벌써 필요치 않은 것이오. 생활에 소용된다면 나는 즐겨 그것을 유례에게 제공할 작정이오."

이어서 나는 오래전부터의 원이던 해외여행의 계획을 버렸다는 것, 이 거리에서 족히 모든 생활을 꿈으로 살았다는 것, 가령 파리에 간댔자 꺼진 열정을 다시 불붙일 신통한 것이 없으리라는 것, 결국 나는 생활에 피곤하였다는 것을 대충 이야기하였다.

"가방 속에 가득 든 지전을 가지고 항구의 호텔 한 간 방에 있는 신세…… 이것이 현대인의 최대의 원이라고 하나 그것이 꿈만큼 생각될 젠 확실히 나는 생활할 힘을 잃은 것 같소. 아무것도 다 집어치우고 산속에 널집이나 한 간 짓고 가락나무와 백양나무를 심고 그 속에서 염소나 한 마리 길러 보았으면 하는 소극적 원이 있을 뿐이오. 염소는 종이를 좋아하니 지리한 소설책이나 한 장 뜯어 먹이면서 날을 지우고 싶소."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여요…… 피곤하신 것은 란야 때문일까요?"

란야를 드는 것은 유례로서는 당연하다고 할까. 그러나,

"란야를 통하여 여자란 여자는 죄다 안 셈이나 그렇다고 란야쯤이 전폭의 이유는 아닐 거요. 앞으로 올 생활의 전 내용을 지금에 있어서 벌써 전 육체를 가지고 짐작할 수 있는 까닭에 미래라는 것은 내게 아무 매력도 흥미도 일으키지 못하는 거요…… 하긴 란야와의 사이도 쉬이 청산하여야 하겠고 이어서 가게도 그만두어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 생활도 갈아야 될 터이니 과분의 재산은 필요치 않은 것이오."

"그렇다고 제가 그것을 받을 무슨 값이 있어요? 너무도 과만한 뜻을."

"유례 이외에 그 뜻을 이을 만한 사람은 없으니 말요."

그러는 동안에 정원을 여러 차례나 왔다갔다하면서도 결국 아무 결정도 해결도 없이 그대로 각각 방으로 돌아갔다. 야단스럽게 생활하러 왔으면서도 너무도 고요한 그림이었다. 나는 일부러 불을 끄고 창에 의지하여 하염없이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불란서 교회의 뾰족 지붕이 어둠 속에 우렷이 나타나고 그 위에 검은 십자가가 그럴 듯이 짐작되었다.

보고 있는 동안에 차차 윤곽이 선명하여지자 문득 호프만의 그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시 십자가가 눈에 보이더니 그것이 볼 동안에 커지며 삽시간에 눈앞까지 육박하여 온다. 무서운 착각에 나는 날쌔게 외면하여 버렸다. 앞에 놓인 길은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길 같다.

지난날 란야와 같이 같은 방에서 같이 유숙할 때와는 얼마나한 차이인가. 그때에는 다만 생각 없는 열정만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에는 나는 여기서 별안간 유례를 생각하고 밤인사를 보내러 이웃방까지 갔다. 그러나 유례의 자태는 어느덧 사라졌던 것이다.

이튿날 그의 숙소에서 유례를 발견하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천연스런 태도와 웃음으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런 법이 있소?"

"용서하세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주무시는 것도 같기에 깨울 수도 없고 혼자 도망했지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조급히 군단 말요."

"어쩐지 죄 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그의 '죄'의 뜻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건수의 의식이 응당 그를 지배하고 있을 것을 나는 깜짝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얼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셔요."

침묵을 거북히 여겨 유례는 웃음 소리를 냈다.

"호텔은 제게 당치 않은 곳이에요. 로비는 사람을 주럽만 들게 하고 금빛 벽은 이유 없이 사람을 압박하는걸요. 거리에서는 얼마든지 생활도 즐겨 할 수 있으나 호텔이란 이 세상에서 갈 마지막 곳 같아요."

"당초에 제의는 왜 했소?"

"그 대신 호텔 외의 생활이라면 어디든지 설계대로 좇겠어요. 분부라면 어디든지 가지요. 자 거리로 나가실까요."

확실히 미안은 해하는 태도나 유례는 몸을 가볍게 쓰면서 마음도 역 가벼운 눈치였다. 핸드백을 들고 사뿐히 일어섰다.

거리에 나가 백화점에 들렀을 때, 그의 소위 '대중적'인 그곳 식당에서는 호텔 식당에서와 같은 거북한 예절을 무시할 수 있었으므로 유례는 한결 누그러진 태도였다. 접시의 고기를 가리켜,

"이것이야 칠면조 아닌 틀림없는 닭고기겠지요."

하고 농을 거는 그였다.

"더한층 떨어져 오리 고긴지도 모르지."

"고기에도 사람만큼 계급이 있군요."

유례는 식도를 함부로 쓰고 냅킨으로 입까지 훔쳤다. 그러나 그것은 호텔에서 한 것과 같은 꾸며낸 대담한 태도가 아니고 극히 자연스럽게 주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학생이 전람회를 구경하는 것과도 같이 공들게 우리는 백화점의 층층을 세밀히 보아 내려갔다. 그 동안의 시민의 생활경향을 자세히 살펴보자는 유례의 청으로였다. 소시민을 비평하는 것보다는 그 속에 휩쓸려 사는 편이 유례의 축난 건강에는 더 자양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은 하였으나.

복작거리는 지하층에 내려갔을 때에 유례는 별안간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향기예요?"

나도 그 자리에 서서 그가 발견한 향기를 감식하려 하였다.

"거리에서 맡은 향기는 아니에요."

"향수 냄샐까, 화장 냄샐까."

"그런 사람 냄새가 아니에요."

"그럼 꽃 냄새."

"솔잎 냄새 같기도 하고 나무진 냄새 같기도 한데요."

"옳지."

말을 듣고 생각을 하니 그제야 겨우 짐작되었다.

"알았소. 오존 냄새요."

나는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음을 단언하고 큰 백화점에는 거개 오존 발생기를 장치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오존―--- 어쩐지 금시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요. 사람 냄새가 아니요, 거리 냄새가 아니요, 산이나 바다 냄새니까."

"실컷 맡았으면 몸이 당장에 회복될 것 같아요."

"옳게 말했소. 산이나 바다로 갑시다. 응당 가야 할 곳을 미처 생각지 못했소그려."

그 자리에서 그 시간에 여행을 결정하고 그 길로 여행에 들 것을 준비하러 층 위로 올라갔다. 새로이 커다란 트렁크를 두 개 장만하고 옷벌과 일용품을 될 수 있는 대로 풍부하게 갖추었다. 아직 떠나지도 않은 여행의 감동에서 나는 오래간만에 생활의 활기를 얻어 마음이 짝없이 유쾌하였다.

떠날 시간과 목적지를 결정한 후 유례를 보내고 혼자 가게로 돌아와 이층에서 여행에 필요한 물건을 더 생각하고 있을 때 별안간의 손님이었다. 문을 익숙하게 열고 성큼 뛰어들어온 것은 오랫동안 없던 란야였다.

"바다가 독하긴 하군. 인도 병정같이 새까맣게 탔을 젠."

"첫인사가 그것뿐예요?"

란야는 불만한 듯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 방 가운데 우뚝 섰다.

"사슴같이 기운차구."

"더 형용해 보세요."

짜장 사슴같이 껑충 달려들어 란야는 나의 목을 얼싸안았다.

"성인인가요. 돌부천가요. 놀고 들어와도 이렇게 천연스러울 젠."

목에 감긴 그의 팔을 풀어 슬며시 물리치며 나는,

"때려 달란 말인가."

하고 여전히 표정을 이지러뜨리지는 않았다.

"도리어 그편이 낫지요. 노염도 없고 게염도 없는 것보다는. 그렇게 천치같이 천연스러우면 퉁길 힘조차 없어져요."

"게염이라니, 게염은 애정의 표시인데 그 꼴에 여전히 내게 애정을 요구한단 말인가?"

"이젠 그런 권리도 없단 말예요. 그럼 차라리 내쫓지요. 왜 문지방을 넘게 해요."

"맘대로 나갈 게지."

소리는 쳤으나 짜장 나는 천치나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음은 아니었다.

"옳지, 나가라고 했지요."

란야는 입술을 비쭉하고 영화 속에서와 같이 어깨를 으쓱하였다.

"정말예요. 또 한번 말해 봐요."

성큼 달려들어 무릎 위에 올라앉더니 야살스럽게 나의 턱을 쥐어 흔들었다.

"아닌때 짐은 웬 짐예요."

나는 아무 감동도 주지 않는 그의 몸을 굳이 밀어 떨어뜨리려고도 하지 않고 눈은 딴전을 보았다.

"바다에 가려고."

"철지난 바다로 가시는 법도 있나요. 사람도 없는 파돗소리만 있는……."

"그래야 해수욕복을 입지 않거든."

"오라! 해수욕복을 싫어하시는 성미지요. 월계나무 잎새 대신에 호박 잎새나 잔뜩 뜯어 가시지요. 아담같이 앞을 가리게. 호박 잎새는 잔가시가 있어서 조심 안 하시면 살이 아플걸요."

오도깝스럽게 깔깔 웃고 목덜미를 더운 입으로 물었다. 이 미치광스런 애정의 표현에도 나는 돌같이 동하지 않는다. 란야는 나의 다리를 꼬집으며 건강한 전신으로 육박한다.

"이브는 누구예요? 대세요."

거의 여자의 본능적 신경으로 그것을 알아챈 것 같다.

"내게 무엇을 속이세요. 일언일동이 역력히 설명하는 것을. 나를 돌려 놓고 결국 갑절의 재미를 보셨으니 하긴 큰소리도 할 만하였다. 사람 없는 가을 해변에 한 쌍이 서면 옛날의 낙원같이 즐겁겠지요."

"……"

"들으니 유례도 나왔다지요. 탄 자리에 다시 불이 붙으면 좀체 끌 수 없을걸요."

"……"

"왜 뜨끔은 하세요. 유례라면 돌에도 감정이 통하는 모양인가요."

"웬 소리요. 대중없이 함부로."

나는 금시에 정색하고 란야를 밀쳐 버렸다.

"유례와의 사이를 오해하지 마시오."

유례에게 대한 미안한 답변을 겸하여 나는 나의 입장을 설명하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돌부처도 노여하시네. 서쪽에서 해가 뜬 것같이 어울리지 않아요. 차라리 가만히 계시지 황급하게 구시면 더 수상치 않아요?"

조롱이 끝나기 전에 나의 손은 란야의 볼을 갈기고 있었다.

란야의 마지막 마디가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젖어들며 나는 곧 나의 경솔한 거동을 뉘우쳤다. 그의 말마따나 도리어 그에게 수상한 느낌을 주었을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였다. '돌부처'의 낯짝에다 제 손으로 흙을 끼얹은 셈임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순간 상기되었던 란야의 얼굴빛이 즉시 풀어지고 아무 대거리도 없이 온순하고 침착한 태도로 돌아간 것도 나에게는 도리어 심히 겸연쩍은 노릇이었다. 그의 목소리조차 부드럽다.

"말이 과했다면 용서하세요. 유례에게 대한 제 인식만 고치면 그만 아녜요. 모든 것을 옛 동지에게 대한 존경으로 돌려보내면 그뿐 아녜요. 어서 여행이나 즐겁게 하세요. 바다생활이나 재미있게 하고 돌아오세요."

란야가 이렇게 풀어지면 풀어질수록 나는 더욱 겸연쩍고 나의 흥분의 이유가 어디 있었던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그의 화제가 빗나가 피차의 주의가 다른 방향으로 흐름이 원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그의 제의는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누그럽혀 주는 효과가 있었다.

"유례의 말이라면 놀라셔도 제 말이라면 놀라시지 않으니, 어디 얼마나 냉정하신가 볼까요."

"또 무슨 장난을 하려고."

"오래간만에 돌아와도 놀라지 않으며 짜증을 내도 놀라지 않으며 목을 물어도 놀라지 않으셔. 어떻게 하면 놀라신단 말예요."

"어떻게든지 놀라게 해보구려."

란야는 문득 새로 그와는 다른 문제를 꺼내는 듯이 어조를 갈아 침착하게 말줄을 풀었다.

"사나이가 있어요. 항산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거리의 가난뱅이. 설마 금덩이가 우러날까 하고 바란 것은 아니었으나 풍신이 아까워 발에 채이는 돌멩이를 줍는 셈치고 주워 올렸지요. 튼튼만 한 줄 믿었더니 차차 알고 보니 초라한 신세에 병까지 폭 씌었어요. 어차피 거리의 죄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신세이므로 마음이 더욱 쏠림은 무슨 까닭인지요. 회복되어야 할 바다에서는 도리어 피를 게웠어요. 기쁨의 바다가 아니요 우울의 바다였어요. 병세는 날로 더한 것 같고 가난은 물같이 새어들고…… 기구한 인연을 어쩌면 좋아요."

"옛날이야기로 들어야 옳소? 란야의 현실로 들어야 옳겠소?"

장황한 그의 이야기에 나는 얼마간 현혹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란야의 어조는 확실히 애원하는 듯도 한 부드러운 것이었다.

"처분대로 하셔요."

"이야기라면 차라리 소설책을 읽는 편이 낫지."

"소설가 아닌 제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야 있나요. 이 무미한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시켰으면 좋겠어요?"

나는 더 농담을 계속할 수도 없어 진담으로 돌아가며,

"함손이 그런 졸장부인 줄은 몰랐구려. 불량스런 거리의 갱으로만 여겼더니 듣고 나니 병든 이야기의 주인공이란 말요. 가련한 약질의 지골로."

동정의 어조일지언정 물론 모욕의 어조는 아니었다. 한참이나 있다가 란야는,

"아까 어떻게든지 놀라게 해보라고 말씀하셨지요. 지금 이 자리에 문뜩 함손이 나타난다면 놀라시겠어요."

"놀라기보다도 진저리가 나겠소. 아예 그런 연극은 꾸미지 마시오. 해쓱한 병든 얼굴을 굳이 내게 보일 필요가 있소?"

손을 들어 굳게 사절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해결의 길은 한 가지밖에 없잖우. 내겐 그 이야기 속에 참례할 권리도 의무도 없으나 될 수만 있다면 좋게 처리하는 것이 국외자로서도 기꺼운 일임에는 틀림없으니까."

하면서 책상 서랍을 열고 여럿 되는 예금통장 중에서 하나를 들춰 냈다. 내용을 살펴볼 필요조차 없으므로 그대로 란야에게 내밀었다.

"한 반년 동안의 요양비는 될 거요. 될 수 있는 대로 한적한 곳에 가서 회복에 힘쓰도록 함이 좋을 것이오."

그것이 바란 것이면서도 란야는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은 것같이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감사의 뜻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천치같이 우두커니 서서 손을 가늘게 떨면서 이윽고 눈썹 끝에 눈물이 맺히며―---이것이 그의, 나에게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나는 문득 란야에게서 '운명의 여자'를 본 듯하였다. 이어서 곧 나 자신이 더한층 운명적임을 깨달았다. 란야가 함손을 받들듯이 나는 그 란야 자신과 아울러 유례까지를 섬기는 셈이 아니었던가. 실로 마음속에는 유례의 그림자가 있으므로 나는 란야에게 대하여 그와 같은 너그러운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음을 깨닫고 가슴은 부끄럽게 수물거렸다. 그러나 백지장같이 해쓱한 함손의 꼴을 목전에 보지 않고 지낸 것은 다행이었다고 마음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뻐도 하였다.

란야의 일건을 처리하고 난 나는 무거운 짐이나 벗어 놓은 듯싶었다. 몸이 개운하여 날개가 돋친 것 같다. 유례와의 여행도 즐겁게 기대되었다. 란야가 함손과 고요한 생활을 시작할 것과 같이 나는 유례와 고요한 생활을―--- 하고 생각하다 문득 엄격한 반성으로 돌아가며 나와 유례와의 사이는 물론 함손과 란야의 사이와는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며 앞으로 올 생활도 그 양식이 스스로 같지 않다는 것을 마음속에 밝히고 설명하려고 애쓰는 것이었다.

란야는 예금통장을 가진 채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란야와 함손과의 생활은 나에게는 말하자면 제목만을 알고 내용은 펴보지 않은 야릇한 이야기책인 셈인 고로 그들의 간 자취와 있을 곳도 나에게는 안개 속인 것이며 알아볼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나대로 혼자 뒤떨어져 가게를 닫치고 행장을 들고 집을 나오면 그만이었다. 가게문은 자물쇠로 잠근 위에 군데군데 못까지 박고 휴업의 간판을 내걸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폐가와 같이도 보였다. 꿈의 보금자리인 이층과도 나를 무한히 유혹한 호프만의 성화와도 영영 하직일 듯한 느낌이 났다. 알 수 없는 한 줄기의 감상이 유연히 가슴속에 솟는 것이었다. 슬픈 탓인지 기쁜 탓인지도 모르게 발꿈치는 땅에 들어붙어 무거웠다.

일부러 유례의 집을 찾아 첫걸음부터 동행이 되었다. 새 생활에 대한 감동으로 유례는 빛나는 아침을 맞이한 아내와 같이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간 지 얼마 안 되는 새 구두도 벌써 발에 꼭 맞아 조금도 어색함 없이 그 체모에 어울렸다. 새 구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와의 사이도 어느덧 익숙하여져서 티끌만큼도 겸연하고 서투른 점이 없었다. 거리에서의 그의 자태는 구름같이 가볍게 보였다.

여행의 목적지로 동해안의 먼 곳을 고른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될 수 있는 대로 서울을 멀리하고 싶었고 차 속의 시간을 지리하지 않을 정도에서 길게 가지고자 하였고 끝으로 아름다운 동해의 창파와 그 부근의 고요한 피서지를 그 어느 곳보다도 사랑한 까닭이었다. 물론 유례의 의견도 그와 일치되어 별다른 제의가 없었다. 기차 속의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오후 차를 골랐다. 차 속은 상당히 복잡하였으나 건듯하면 가라앉으려는 마음에는 그편이 도리어 도움이 되었다. 기실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각각 그 무슨 비밀을 품은 것같이 나에게는 신비롭게만 보였다.

거의 일주야가 걸리는 여행에 지칠까를 두려워하여 많은 시간을 식당차에서 보냈다. 나는 흰 식탁 위에 트럼프쪽을 펴놓고 의미 없이 하트의 여왕을 고르려고 애썼다. 알맞게 흔들리는 차 안의 기분은 마치 기선의 선실과도 같으며―---여객기의 객실도 그러려니 짐작된다. 차라리 기선을 타고 멀리 바다를 건너거나 그렇지 않으면 여객기에 올라 첩첩한 산맥을 넘어 대륙을 내뺐으면 하는 공상도 들었으나 혼자라면 몰라도 유례와는 하릴없는 노릇이었다.

고원지대에 들어서 높은 영에 걸린 것은 황혼에 가까운 때였다. 영은 얼마든지 길고 차는 돼서 기운이 부치는 모양이었다. 창 밖에 새풀이 손에 잡힐 듯이 흔들린다. 나는 씨근거리는 기차와 호흡을 맞추며 눈은 한결같이 밖을 바라보며 그 무엇을 찾았다. 이윽고 차는 기적 소리와 함께 그곳에 다다랐다. 나는 감동의 어조로 유례의 주의를 끌었다.

"보시오. 여기가 분수령!"

차는 산맥의 최고지점을 지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례는 나의 새삼스런 주의와 은근한 속뜻을 알 바 없어 평범한 표정을 지녔을 뿐이었다.

"이 분수령이 또한 내 생활의 분수령이 될는지도 모르오. 이곳을 넘는 때 나는 서울과 지금까지의 생활과 영영 작별하는 셈일 듯하니 말이오."

"왜요. 무슨 말씀예요."

하기는 유례가 내 뜻을 알 리는 없었다. 나 자신 나의 결심의 정도를 확실히 잡지 못한 형편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것'을 이미 확적히 마음속에 작정하였는지 못 하였는지 마음은 갈팡질팡하여 안개 속같이 아리숭할 따름이었다.

"해발 팔백 미터!"

유례의 주의에 나도 분수령의 표식을 내다보았다. 하아얀 기둥이 삽시간에 눈앞을 지나갔다. 순간 이상하게도 그것은 나에게 한 폭의 환영을 번개같이 가져왔다. 바다 위에 솟은 팔백 미터의 간드러진 기둥 꼭대기에서 일직선으로 바다에 떨어지는 나 자신의 꼴이 펀뜩 눈을 스친 것이다. 이 돌연한 어지러운 환영에 나는 주물뜨려 놀라며 전신에 소름이 쪽 돋는 것이었다.

잠 안 오는 밤을 침대차에서 고시랑거리다가 날이 밝자 뛰어내려 세수를 마치는 길로 식당차에 들어갔다. 거기서 나는 우연히 꼭두새벽부터 예측지도 못한 광경에 부딪쳤다. 마치 그 광경을 보러 그렇게 일찍이 그곳에 들어간 것과도 같았다. 두 사람의 보이가 무슨 까닭으로인지 식탁 위에 진을 치고 맹렬한 육박전에 열중되어 있는 중이었다.

식탁 위에 깔린 보이는 부치는 기운에 꼼짝달싹 못 하고 적수의 공격에 몸을 맡기다시피 하고 높은 고함을 치는 법도 없이 약한 목소리로 어르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어가자 두 사람이 문득 싸움을 중지하고 깔렸던 편도 날쌔게 몸을 일으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어슬어슬 몸을 움직였다. 불 같은 분을 품은 욕지거리일 터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건네는 말은 은근한 회화같이 부드럽고 입은 저고리같이도 하아얀 얼굴에는 이렇듯한 노기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 싸움 가운데에서 이상한 것은 그것을 방관하고 섰는 다른 한 사람의 보이였다. 그는 한편에 가담하는 법도 만류하는 법도 없이 냉정하게 그러나 부드러운 낯으로 동료의 싸움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드럽게 보이면서도 기실 눅진한 공기가 흘렀다. 이상스런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평화스럽고도 격렬한 싸움은 나에게는 우연히도 진한 암시였다.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날 새벽부터 목격하게 된 그 괴이한 인연을 나는 결코 유쾌히 여기지 않으며 식당을 닫혔다.

목적지에 도착되자 우리는 바다도 멀지 않고 산도 가까운 온천거리에 행장을 내렸다. 개울로 향한 여관 이층에 각각 방을 잡고 산속의 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식당에서 목격한 것과 같은 진득한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다.

"저는 지금 꿈속 사람인 셈예요."

유례는 짐을 정리하고 나서 말하였다.

"꿈속 아니고는 이러한 행동을 할 리 없어요. 정신없이 짐을 싸가지고 기차를 타고 이런 곳에 내려 이런 방에까지 들게 된 것이 모두 꿈예요. 무슨 까닭에 무엇 하러 왔는지를 도모지 분간할 수 없군요. 이 꿈이 깨일 때 저는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게 될는지 몰라요."

유례가 이런 반성에 잠길 때 나는 또한 나 자신의 생각과 괴롬 속에 잠겼다. 두 가지의 마음이 두 사람의 보이같이 평화스럽게 은근히 싸우는 것이었다.

울적한 심사를 뿌리칠 겸 나는 유례를 꼬여 즉시 산속으로 산보를 떠났다.

산속은 드문드문 별장이 선 외국 사람들의 피서촌이었다. 초행인 유례에게 나는 그 마을에 관한 여러 가지 지식을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유례는 적지 않은 흥미를 가지고 캐물으므로 나에게는 그것이 한 큰 도움이 되었다. 여름이 지난 까닭에 피서객들은 거반 하얼빈이나 상해로 가버린 뒤이므로 마음이 쓸쓸하였으나 그 한적한 맛이 첫 가을의 정취로는 도리어 맞는 것이었다. 나는 언덕을 올라가 행여나 주인이 있을까 생각하면서 비행기식 저택을 기웃거렸다. 별장의 주인 콜니에프 씨와 면목이 있는 까닭이었다. 아직 도회로 돌아가지 않은 콜씨는 다행히 뜰안을 거닐고 있었다. 나는 그 중년의 노인과 반갑게 인사하고 유례와 함께 뜰안에 들어감을 얻었다. 어디서인지 뒤미처 젊은 부인이 나타나 친절하게 맞이하여 앞장을 서서 응접실로 베란다로 후원으로 안내하면서 새삼스럽게 집의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꽃 없는 온실 앞에 이르렀을 때 부인은 문득 유례를 가리키며 '레이디'냐고 나에게 물었다. 너무도 당돌하고 급스러운 질문인 까닭에 나는 두 사람의 사이를 장황하게 설명할 수도 없어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할 겨를이 없이 웃어만 보였다. 부인 자신이 어떻게 짐작하였는지는 모르나 유례는 나의 그 태도를 별로 불쾌히 여기는 빛도 없이 나와 같이 픽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콜씨는 두 송이의 달리아를 꺾어다 나와 유례의 옷자락에 꽂아 주었다. 꽃밭에서 해바라기씨를 정신없이 까먹는 콜씨의 막내딸인 어린 소녀조차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주인에 비겨서 부인이 너무도 젊어요."

비행기관을 나와 다시 언덕을 내려오면서 유례가 이렇게 의아해 할 때 나는 기다렸던 듯이 마침 설명하려던 터요 하고 부부의 비밀을 귀띔하여 주었다.

"하얼빈서 얻은 제이부인이라나요."

"오라, 그러니까 벽지에다 별장을 꾸며 놓고 여름 한철을 와서 숨어 있는 셈이죠."

산속은 시절에 대하여 한결 예민한 듯하다. 가을을 잡아들었을 뿐이나 나뭇잎들은 물들기 시작하였고 마을길은 쓸쓸하게 하얗게 뻗쳐 있다. 길 위에도 나무 사이에도 별장 베란다에도 피서객 남녀의 그림자는 벌써 흔하게 눈에 뜨이지 아니한다. 그들은 한여름 동안 기르고 익힌 꿈을 싸가지고 푸른 능금이 익으려 할 때 손을 마주 잡고 하얼빈으로 상해로 달아난 것이다.

붉은 푸른 흰 지붕의 빈 별장들은 알을 까가지고 달아난 뒤의 새둥우리요, 머루넝쿨과 다래넝쿨 아래 정자는 끝난 이야기의 쓸쓸한 배경이다. 조그만 극장 닫힌 문간에는 가을 청결검사 종이 표지가 싸늘하게 붙었고 홀 안에는 울리지 않는 피아노가 거멓게 들여다보인다. 벽 위의 그림이 칙칙하고 무대에 장치한 질그릇의 독들이 앙상하다. 운동장 구석의 먼지 앉은 벤치에도 때묻은 그네줄에도 지천으로 버려진 초콜릿 종이에도 사라진 꿈의 찌꺼기가 고요하게 때묻었을 뿐이다. 한잎 두잎 떨어지는 낙엽은 이야기의 부스러기와도 같다.

남이 꿈을 깐 뒷자리를 하염없이 거닐기란 웬일인지 이야기를 잃은 초라한 거지 같은 느낌이 문득 든 까닭에 쇠를 잠근 별장 앞을 지나기도 먼지 앉은 벤치에 걸어앉기도 멋쩍어 우리는 양코스키 씨의 터 안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꿀을 치는 벌떼, 풀 먹는 소들, 뛰노는 사슴들―---쓸쓸한 마을 속에서 그곳만은 생활이 무르녹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기운찬 사슴떼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별안간 란야의 자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필요치 않은 환영을 떨쳐 버리려고 애쓰며 나는 즉시 그곳을 떠나 골짝 아래 식당으로 유례를 이끌었다.

산에서 짠 우유와 꿀과 머루잼과―---사치하지는 못할망정 산골 식당의 점심으로는 신선한 풍미였다. 개울물 소리에 벽에 꽂힌 새풀과 단풍잎새가 떨린다. 휑뎅그레한 긴 식탁 맞은편 구석에 앉아 이쪽을 연해 바라보는 한 쌍의 남녀, 그들이 아마도 피서지의 마지막 한 쌍일 듯싶다. 쉴새없이 소곤거리는 품이 이날 밤으로 떠나자는 마지막 의론이 아닐까. 단발한 동그란 얼굴에 붉은 입술을 재게 놀리는 여자―---란야와 흡사한 종류의 인상을 주는 여자이다. 나는 여기서도 또 필요 없는 란야의 그림자에 마음을 어지럽힐 까닭이 없으므로 웬만큼 앉았다 자리를 일어섰다.

바위억설을 지나 험한 개울 위에 어마어마하게 높게 걸린 널다리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문득 아찔하였다. 누긋누긋 휘는 다리 아래 수십 길 되는 곳에 새파란 물이 거품을 품기며 바위 사이로 용트림하여 흐르고 있음을 보려니 별안간 기차로 분수령을 넘을 때에 본 환영이 생생하게 눈을 스친 까닭이다. 바다 위에 솟은 팔백 미터의 간드러진 기둥 꼭대기에서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나 자신의 꼴이 바로 그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꼴로 변하였던 것이다. 순간 나는 주춤하여 몸을 끌고 새삼스럽게 유례를 보았다. 다리가 휘는 바람에 유례도 겁을 먹고 나를 붙들었다. 나의 마음은 순식간에 다시 풀리며 즉시 겁을 먹은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도리어 그 무엇을 결심하기에 넉넉한 마음의 여유조차 가질 수 있었다. 다리는 나에게 정다운 유혹이 아니었던가. 나는 순간의 어색한 공기를 풀기 위하여 다리에 관한 한 가지의 이야기를 유례에게 들려 주었다.

지난해 여름, 다리 아래 소에서 목욕하던 피서객 중의 한 여자가 다리 위에서 물에 잠기려 하다가 잘못 떨어져 목숨을 버려 지금에는 낯선 땅 무덤 속에 붉은 십자가와 함께 잠자고 있다는―---나에게는 무한한 흥미를 주는 그 이야기가, 그러나 유례에게는 그닷한 감동을 주지 못하는 듯하였다.

"실족해서 떨어졌다면 그다지 로맨틱할 것이 있어요?"

"어떻게 돼서 떨어졌든지 간에 떨어진 그 사실이 내게는 유혹이오.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가 물 속에서 나를 부르는 듯도 하오."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유례는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문득 나에게 전신을 쏠리고 둥그런 눈망울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이 나의 얼굴 앞에 불과 몇 치의 거리로 가까이 있다.

밤은 괴로웠다. 이웃방의 유례가 의식의 전부를 차지하여 좀체 잠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생활의 설계를 실천함이 유례를 그곳까지 이끈 목적임을 반성하고 이튿날 아침은 일찍이 일어나 그의 소원인 바다로 떠났다.

차로 한 시간이 걸렸다. 누구나가 다 하는 것같이 해수욕복을 입고 그 모래 위에 뒹굴기도 멋쩍어 궁벽한 곳을 찾아 등대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확실히 신기한 생각이었다. 등대에는 통속소설의 세상과는 다른 아름다운 시가 있으려니 짐작된 까닭이다. 유례는 즐거운 기대에 차 속에서 유쾌하게 회화하였다.

먼지와 해어 냄새의 항구를 지나 고개를 넘은 높은 산기슭에 등대가 있다. 파란 산, 푸른 바다의 짙은 배경 속에 뜬 하아얀 집들은 호수 위에 뿌려진 조개껍질이다. 일면으로 깔린 조약돌, 우윳빛 뼁끼, 조촐한 화단―---모두가 종이 위에 채색된 수채화의 인상이지 흙덩이 위에 선 현실의 풍경은 아니다. 바다로 깎아내린 산등에 솟은 등대는 꿈속의 탑. 속세를 떠난 그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는 사람의 거동조차 유장하고 넉넉하다. 우리의 청을 승낙하고 등대 안으로 길을 인도하는 젊은 당직 간수의 걸음은 게걸음같이 느렸다. 아직도 세상에는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남아 있었던가 하는 감격을 못 이기면서 한 조각의 풍경도 놓치지 않겠다는 면밀한 주의로 길 구석구석을 살피며 간수의 뒤를 따랐다.

일등선실과도 같은 등대의 탑 안은 어둠컴컴하고 탑 꼭대기 등불까지에는 두 층으로 나누인 긴 층대가 섰다. 이십 해리를 비취는 사만 팔천 촉광의 위대한 백열등―---그것은 땅 위의 태양이다. 그 태양으로 오르는 층대는 마치 천당으로 통하는 길과도 같이 좁고 험하여 겨우 한 사람만이 통하게 되었다. 길은 외통이요 오를 사람은 둘이다. 층대 어귀에 서서 (나는 유례에게) 길을 사양하였다.

유례는 서슴지 아니하고 앞장을 서서 층대에 발을 걸었다. 나는 무심히 뒤미처 그의 뒤를 따랐다. 올라 보니 층대는 사다리같이 곧고 좁아 유례와 나는 거의 일직선 위에 서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유례는 나의 목말을 타고 두 어깨 위에 올라선 셈과도 같았다. 유례의 발은 바로 나의 코앞에 있고 난간을 붙든 두 팔에는 치맛자락이 치렁거리는 지경이었다. 층대의 철판이 턱에 부딪히므로 나는 하는 수 없이 얼굴을 위로 쳐들 수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무심중의 행사였으나 나는 다시 급스럽게 얼굴을 내려뜨렸다. 그러다가 철판에 턱을 호되게 찧고 도로 떠받들리울 수밖에는 없었다. 별안간 태양을 마주 본 듯이 눈이 부셨던 까닭이다. 골이 어지럽고 현기증이 났다. 무심중에 보게 된 유례의 몸이 사만 팔천 촉광 이상의 광채를 가지고 나의 눈을 둘러 빼었던 것이다. 지상의 태양은 오만 촉광의 등대가 아니고 참으로 유례의 육체였던 것이다. 탑 꼭대기에까지 올라가 찬란하게 타는 프리즘의 백열등은 본체만체하고 탑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나는 허둥거리는 몸을 위태스럽게 철난간에 부딪혀 버렸다. 수십 길 되는 난간 아래는 물감덩어리를 풀어 놓은 듯이 도지는 푸른 바다다. 그러나 나의 몸이 떨리고 다리가 허전거리는 것은 그 바다가 무서워서가 아니요 층대에서 받은 무서운 감동으로 인함이었다.

유례의 몸이 떨림은 발 아래가 무시무시한 까닭일까. 난간에 의지한 몸을 부르르 떨더니 별안간 나의 곁에 쏠려 전신을 던져 왔다.

품안에 날아든 새를 붙드는 셈으로 나는 유례를 두 팔에 안았다. 몸이 허공에 뜬 것같이 떨린다. 유례의 얼굴이, 눈이, 입이, 나의 얼굴 밑에 가깝다. 번개같이 더운 입이 유례의 이마를 스쳤다. 바다가 고요하고 하늘이 높다. 그대로 한몸이 되어 난간을 뛰어넘어 단숨에 바닷속으로―---그것이 단 하나의 길이건만 오래간만에 유례의 몸을 안은 그 자리에서 나의 머릿속은 순간 꺼진 필름장같이 부옇게 비었을 뿐이었다.

오래간만에 유례의 몸을―---오래간만에―---꺼진 필름장같이 비었던 머릿속은 문득 환해지며 다시 그림이 연속되는 필름장같이 지난 기억의 한 폭이 비쳐지기 시작하였다.

유례에게는 아직 건수가 없고 나에게는 란야가 안 생겼을 때였다. 나는 학교를 마쳤을 뿐 아직도 생애의 지향이 서지 못한 채 셋방에 뒹굴며 하는 일 없이 나날을 지냈다. 학교에서 받은 철학의 체계도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여 주지는 못하였다. 해골을 모아 짜놓은 빈 탑과도 같은 쓸모없는 철학의 많은 노트를 모조리 뜯어 불살라 버리고 굳이 활기를 찾으려고 생활의 앞길을 노렸으나 헛수고였다. 가령 직업으로 말하더라도 나의 마음을 당기는 직업은 하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지고 있는 과만한 재산을 쓸 길도, 그것을 바치고 싶은 방허도 없었다. 그런 나의 무위의 성격을 비웃는 듯이 유례는 그 자신의 굳센 신념의 목표로 향하여 활기 있는 행동의 열정을 모조리 쏟는 것이었다.

마침 유례는 그를 길러 준 여학교의 파업을 지도할 임무를 띠고 주야로 분주할 무렵이었다. 기어코 파업은 불성공으로 단결은 깨뜨려지고 희생자를 내기 시작하자 이윽고 등뒤의 주동이 주목되었다. 벌써 구체적 인물이 판정되어 지칭을 받게 됨을 알았을 때, 유례는 하는 수 없이 거리의 눈을 피하여 이쪽 저쪽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마저마저 걸릴 듯한 형세예요."

신변에 가까운 그물 기슭을 피하는 물고기와도 같은 민첩한 자세로 나의 방에 뛰어든 것은 늦은 저녁때였다. 긴장된 때의 눈방울이란 공기같이 차고 전신에는 탄력이 넘쳤다. 방향 잃은 물고기를 나는 방속에 가두었다. 방 안에서는 유리항아리 안의 금붕어같이 연하고 부드러운 자세였다.

신변의 위험은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밤늦도록 제각각 책장을 번겼다. 무미한 파업의 경과보고를 듣기도 괴로운 일일 듯하여 나는 유례에게 책을 권하고 읽던 소설책을 펴든 것이었다. 그러나 유례 자신의 마음속은 알 바 없어도 나는 모처럼 숨었던 유례를 옆에 놓고 마음속에는 아무 파도도 없는 듯이 천연스럽게 독서에만 열중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나에게는 달리 애정의 대상되는 여자가 (란야가 아니라) 있었다고는 하였으나 의식의 그 어느 구석에 유례의 자태도 늘 떠나지 아니하고 맴돌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것이 곧 애욕을 의미하였던지 않았던지는 알 바 없다.

책에 지쳤던지 자정을 넘었을 때에는 유례는 한구석에 그대로 쓰러져 쉽게 잠이 들었다. 이불을 걸쳐 주고 나는 내 자리에 누웠으나 눈은 말똥말똥해지고 정신은 더욱 맑아 갈 뿐이었다. 등불이 지나쳐 밝은 죄도 있었겠으나 그렇다고 불을 끌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불을 푹 쓰고 고시랑거리다 어느결엔지 약간 잠이 든 모양이었으나 그것은 짧고 어지러운 잠이어서 다시 눈이 뜨였을 때에는 골이 무겁고 관자놀이가 후둑후둑 뛰었다. 잠드는 약이라도 먹어 볼까 하고 일어나 책상 서랍을 들칠 때 애써 안 보려고 하던 유례 쪽으로 자연 눈이 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목석이 아닌 바에 사람을 옆에 두고 그렇게 곤하게 잠들 수 있을까. 유례는 이불을 차고 무례하게 아랫몸을 드러내 놓고 얼굴을 불그레 물들이고 단잠에 폭 빠져 있지 않은가. 방 안에는 나밖에는 꺼릴 눈은 하나도 없었으나 그래도 그의 벗은 몸을 덮어 주려고 가까이 가 이불을 끌어올리다 나는 힘을 잃고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버렸다. 정신없이 유례에게 몸을 부딪쳤다. 얼굴이 맞닿았다. 방 안이 어지럽게 핑핑 돌았다.

"웬일이세요. 이럴 법 있나요."

깜짝 놀라 유례는 눈을 떴다. 그러나 짜증을 내며 불시에 나의 뺨을 치는―---법도 없이 애써 나의 몸을 밀쳐 버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계시지 않어요."

다른 말도 많을 터인데 하필 이러한 말을 함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었다. 겸양의 말일까. 연애의 공덕을 지키자는 뜻일까.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든 것을 나에게 바칠 수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금시에 냉정한 반성으로 돌아가며 덥던 몸이 순간에 식어 버리고 나의 꼴이 몹시 겸연쩍음을 느꼈다.

유례의 몸은 별안간에 따뜻한 피를 잃고 마치 신성한 그림같이, 엄숙한 '터부'같이, 싸늘하게 보여 더 다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불같이 유례를 훔치려고 한 것은 사랑이었던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짐승의 욕심이었던지를 모르고 말았다.

그 밤과 이 밤과는 퍽도 다르다. 바다에서 등대에서 돌아온 밤 한결같이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은 도저히 끌 바 없었다. 그 밤에 시작된 열정은 이 밤에 맹렬히 살아나 곱절의 세력으로 불붙는 것이었다. 타는 몸을 어쩌는 수 없어 나는 잠자리를 일어나 아닌때 목욕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뜨거운 온수는 도리어 몸을 덥힐지언정 마음을 식히지는 못하였다. 바로 창 밖 기슭에는 한 포기의 느릅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의 아름드리 고목이 우거져 가뜩이나 어두운 창을 칙칙한 검은 그림자로 압박하고 있다. 허물없는 그 고목까지도 깨끗하게 나의 답답한 마음을 뒤덮는 결과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웃간 여탕에서는 이 역 아닌밤중에 목욕하는 사람이 있는 눈치였다. 그 역 잠 안 오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유례나 아닐까 생각하며 고요히 철벅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욕실을 나가 잠옷을 걸쳤다.

일단 방으로 돌아갔으나 마치 유령에게나 홀린 것같이 발은 허둥허둥 되돌아 정신없이 옆방으로 향하였다. 아무렇게 되거나 마지막 결단을 내자는 심판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유례는 방에 없었다. 유례 대신에 텅 빈 방에서 날쌔게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유례의 존재를 대변하는 듯도 한 한 장의 편지가 책상 위에서 나의 시선을 끌었다. 넓은 책상 위에 꼭 한 장 놓인 흰 봉투의 오똑한 편지가.

달려들어 그 편지를 집은 결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건수에게로 보내는 유례의 편지임을 알고 순간에 그것을 꾸짓꾸짓 꾸겨 손아귀에 훔쳐 쥔 것은 삽시간의 거의 미치광이의 거동같이 황망한 것이었다. 편지를 다시 펴서 떨리는 손으로 죽죽 찢어 내용이 사라져 버린 의미 없는 종잇조각을 뭉크려 쥐었을 때 복도에 발소리가 나며 유례가 들어왔다.

여탕에서 목욕하던 사람은 역시 유례였다. 잠옷의 앞을 되고말고 두 손으로 여며 쥐고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들어오는 유례를 향하여 나는 다짜고짜로 찢어 쥔 편지의 뭉치를 뿌렸다. 유례는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 주춤 섰다.

확실히 바른 정신을 잃은 착란된 꿈속의 거동이었다. 이어 나는 불같이 유례에게 달려들어 부서져라 그의 몸을 안고 얼굴을 찾았다. 유례는 순간에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이었다. 굳이 발버둥치며 나의 몸을 밀쳐 버리지는 않았다. 침착하게 입술을 허락하였다. 나는 욕심쟁이같이 언제까지든지 얼굴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입술은 솟는 피같이 더웠다.

나는 이 밤같이 건수에게 질투를 느낀 적은 없다. 불붙는 게염, 용솟음치는 미움―---원시인이 던지는 창살과도 같은 날카로운 감정이 건수를 쏘았다. 그 무서운 질투로 말미암아 나는 비로소 내가 유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유례에게로 기울어 맴돌던 갈피갈피의 감정―---그것은 모두 사랑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장구한 마음의 방황은 그 사랑의 확증을 얻으려고 싸운 시험과정임을 알 수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한 발견도 그 자리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 수 있던가.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었다. 때가 늦었고 모든 형편이 너무도 뒤틀려진 것이다.

이윽고 유례는 얼굴을 돌리며 나의 몸을 밀쳤다.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었던가. 그 이상 더 사랑의 증거를 주고 사랑의 표시를 빼앗을 수 있던가. 그의 몸을 놓치지 않으려고 벅서는 나의 팔을 물리치고 유례는 방 가운데 주저앉으며 팔로 얼굴을 가리어 버렸다.

"더 괴롭게 하지 마세요. 제 처지를 생각해 주세요."

금방 울 듯한 목소리였다.

더 손을 댈 수도 없어 나는 산란한 정신을 부둥켜안고 방을 뛰어나가 뜰에 내려섰다. 허둥지둥 골짝을 내려가 개울가 돌밭에 섰다. 방에 돌아가지 못할 운명을 잘 아는 나는 어두운 밤 돌 위에서 밤을 새울 수밖에는 없었다.

긴 꿈이라도 꾼 것 같다. 어찌 되어 그 개울가에 섰으며 그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지가 머릿속에 까맣고 아득하다. 당금 서 있는 곳이 서울이 아니며 방 안이 아니며 틀림없는 개울가인가.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는 갈피갈피의 착각이 마음속을 구름같이 휘저어 놓았다.

어느 맘때나 되었는지 나는 문득 등뒤의 울음 소리를 들은 듯하여 돌아섰다. 어둠 속에 유례가 서서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고 보니 때가 너무 늦었었소. 달을 보러 나왔을 젠 이미 새벽이 가까웠구려. 좀더 일즉이 마음의 의향을 종잡았던들……."

짜장 새벽이 가까웠는지 밤기운이 몸에 차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기어코 마지막으로 그 길이 왔음을 깨닫고 나의 마음은 설레는 법 없이 도리어 침착하였다.

무위의 생애에 끝으로 하나 남은 희망은 유례였으나 그것을 알게 된 순간이 곧 또한 유례를 떠나야 할 순간임은 확실히 저주된 인생인 것이다. 저주된 인생을 떠남이 나에게는 차라리 구원이다. 동시에 그것은 영원히 유례를 차지하는 수단도 된다.

그러나 그 길은 반드시 새삼스럽게 작정된 길도 아니다. 평소부터 늘 예감하여 오던―---호프만의 그림을 보기 시작한 때부터 마음속에 우렷이 짐작되고 유례와 같이 기차로 분수령을 넘을 때에 웬만치 작정된―---말하자면 마음속에 익숙한 길이었다. 그것이 이 밤에 마침내 유례에게 대한 감정의 성질이 확정되자 동시에 결정적으로 작정되었을 뿐이다. 해발 팔백 미터의 기둥 꼭대기에서 일직선으로 바다로 떨어지던 어지럽던 환영이 절실한 현실의 요구로 변하여 눈앞에 나타났을 뿐이다.

유례의 몸을 옆에 가까이 두고도 그것이 터부인 까닭에 다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쁜 것이 아니라면 슬픈 것이어야 할 것을 마음은 눈도 깜짝 안 하고 무감동하게 침착함은 대체 무슨 까닭이었을까.

간밤의 기억도 다 잊어버린 듯이 나는 무심히 행장을 정리하였다. 실상은 그럴 필요도 없었겠으나 일이 난 후에 어지럽게 널려 있을 꼴이란 상상하기도 을씨년스러운 까닭에 그런 주밀한 마음씨를 아끼지 않았다. 트렁크 속에 넣을 것을 다 수습한 후에 서울에 있는 가게의 처리와 예금통장의 처치를 부탁하는, 유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그 속에 넣고 주인에게는 은밀히 유례가 머무르고 있을 동안까지의 숙박료를 넉넉하게 치러 주고는 낮쯤 되었을 때 유례를 이끌고 여관을 나갔다.

가을 하늘이 유릿조각같이 단단해 보인다. 바로 산기슭의 푸른 한 폭은 때리면 깨뜨러질 것같이 맑다. 산허리의 단풍이 날이 새롭게 물들었고 그것이 고기비늘 같은 조각구름과 아름답게 조화되었다. 이런 자연의 풍물을 한폭 한폭 감상할 만한 마음의 여유조차 잊었던 모양이다. 유례와의 마지막 산보의 한걸음 한걸음을 아깝게 여기면서 피서촌으로 향하였다.

한 줄기의 곧은 하아얀 마을길은 들어갈수록 낙엽이 어지럽다. 백양나무, 아카시아, 다래넝쿨의 낙엽이 한층 민첩하고 빠른 것 같다. 머루송이가 군데군데 떨어진 길바닥에 병든 나무 잎새가 한잎 두잎 펀득펀득 날아 떨어졌다. 문득 베를렌의「샹송 도톤」의 구절이 가슴속에 흘렀다. 들리지 않는 비올롱의 멜로디가 확실히 나의 걸음의 반주로 뼈를 아프게 긁는 것이다. 낙엽과 나―---나와 낙엽! 두 번째 들어간 산 식당의 마지막 오찬―---그것은 최후의 만찬과도 같이 검소한 것이었다. 빵과 포도주―---포도주를 대신하는 꿀은 그다지 달지도 않았으나 그렇다고 쓰지도 않았다.

식당을 나가 기어코 다다를 곳에 마지막 목적지에 서게 되었다. 깊은 소 위에 어마어마하게 걸린 높은 널다리 위에 다시 선 것이다. 다리가 출렁거리고 물이 나뭇잎 같은 것은 전과 일반이다. 다른 것은 나의 마음뿐이다.

"좁은 문이 지금의 내게는 탄탄대로로 보이는구려."

나의 목적을 예료한 듯이 끝까지 나의 거동을 세밀히 관찰하던 유례는 그 한마디에 나의 마음을 간파한 눈치였으나 놀라는 표정을 하였을 뿐 다따가 말은 못 이었다.

나는 그가 못 미치는 동안에 꾀바르게 혼자 떨어져 어느덧 다리의 거의 복판까지 걸어가 섰다.

"내내 건투하시오. 현실의 유례에게는 내 손이 닿지 않으니 유례를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세상으로 가려는 거요…… 외국 여자의 본을 받아 붉은 십자가를 세울 필요도 없소."

농으로 보이려고 될 수 있는 대로 웃으면서 난간의 쇠줄을 잡고 널판 기슭에 나섰다. 벌써 일순도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참으세요. 기다리세요."

유례가 황겁히 외치면서 뛰어올 때에는 나는 벌써 발을 빗디디고 잡았던 쇠줄을 놓은 뒤였다.

얼굴이 뜨고 오금이 근실거리는 극히 짧은 순간 문득 눈앞에는 푸른 물 대신에 유례, 건수, 란야 세 사람의 모양이 회오리바람같이 휩쓸려 뱅돌다가 다음 순간 탈싹 부서져 버렸다.

몸이 찢어지는 것 같고 어깨가 쑤욱 솟는 것 같고―---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이야기는 끝났어야 할 것이나 질긴 목숨이 소생된 까닭에 더 계속된다. 소에 빠진 채 바위에 몸을 부딪치거나 영영 솟지 않거나 하였던들 그만이었을 것을 공교롭게도 혹은 공칙하게도 몸은 길이로 살촉같이 물 속에 잠겼다가 깊은 타격도 상처도 받지 않고 다시 쑤욱 솟으면서 물 위에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 당장의 감각이라든가 의식이라든가는 전혀 기억 속에는 없었고 다시 눈이 뜨였을 때는 여관방 복판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의사가 막 다녀간 뒤였다. 새 요 위에 누운 나의 주위에는 시중드는 하녀들의 오락가락하는 그림자가 어지럽고 알콜 냄새 약 냄새가 코에 맡혔다. 팔에는 주사를 맞은 뒷자리가 여러 군데요 머리와 다리에는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무거운 환자의 병실같이 화로에는 숯불이 이글이글하고 주전자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천장에는 여러 폭의 축인 수건이 걸려 있다. 물론 그 모든 어수선한 사이로 무엇보다 먼저 유례의 자태가 눈에 뜨인 것은 두말할 것 없다.

문득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하였을 때 유례는 선뜻 머리맡에 다가앉으며 나의 겨드랑 밑에서 체온계를 뽑았다. 들여다보더니 금시에 긴장되었던 얼굴이 풀리며 기껍게 나를 바라보면서 체온계를 흔들어 수은을 내린다.

"됐어요. 평온에 가까워 왔어요."

되지 않아야 할 것이 된 것은―---없어야 할 목숨이 붙여진 것은 나에게는 뼈저린 비꼬움이었다. 이루지 못한 비극은 희극보다도 더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미치광이 같은 주제를, 광대 같은 꼴을 유례의 앞에 드러내 놓기가 겸연하고 부끄러웠다. 물론 차라리 물 속에 고스란히 꺼져 버렸더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다시 살아났댔자 거사 이전의 그 감정, 그 형편의 연장 이외에 아무것도 오지는 않을 것을.

"평온에 가깝다는 것이 나를 축복하는 말이오? 그놈의 체온계를 분질러 버렸으면."

"안정하세요. 흥분은 금물예요."

유례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부드럽혀 나의 감정을 문지르고 가라앉히려 애쓰는 눈치였다.

"허수아비는 논 가운데나 세우지, 산송장은 무엇에 쓴단 말요."

말도 끝나기 전에 나의 비웃음의 태도를 경계하는 듯이 유례는,

"생명을 멸시함은 사랑을 성취하는 도리가 아닐 거예요. 길이 좁다면 참으면서 정성껏 걸어감에 값이 있지 않을까요."

"무슨 값이란 말요."

반문하면서도 언제인가 호텔방에서 바라본, 밤 교회당의 검은 십자가가 짜장 앞길에 놓였음을 문득 깨달았다. 무덤 앞에 세울 십자가가 죽은 후의 운명을 대신하여 생전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 드릴까요."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며 유례는 어조를 갈았다.

"놀라실까요…… 란야가 맞은편 여관에 와 있어요."

별로 놀라지 않고 천연스럽게 듣노라니 유례는 어저께 변이 일어났을 때 우연히 거리에서 란야를 만났다는 것, 같이 여관까지 달려와 누구보다도 많이 나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 얼마 안 있으면 찾아올 법하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말하는 그의 표정을 살필 필요도 없었으나 극히 천연스럽고 사실 반가운 듯도 한 말씨였다. 친한 동무의 소식을 말하는 그런 어조였다. 반드시 발악을 하는 것도 같지 않은 의젓한 태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물론 나에게는 슬픈 일이어서는 안 된다. 잠자코 들었다.

얼마 안 되어 정말 란야가 왔다. 세 사람의 태도는 서로 아무 속임도 없는 듯 능청맞은 것이었다.

차라리 눈앞에 유례를 보지 말게 되기를 원하였다. 안타까운 회한은 더 많이 눈으로부터 들어오는 까닭이다.

이 원을 풀어 주려는 듯이 또는 꼴 보라는 듯이 일도 공교롭게 되었다.

저녁 무렵은 되어 유례는 신문을 얻어 들고 얼마간 급스럽게 들어왔다.

"한걸음 먼저 떠나야겠어요."

이유를 말하는 대신에 신문을 내밀며 한곳을 가리켰다.

떨릴 것도 없고 놀랄 것도 없다.

건수가 중병으로 말미암아 보석으로 출옥하였다는 소식이 보도되어 있다.

그것이 힘든 노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냉정한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가구말구. 얼른 떠나시오."

부드러운 충고라느니보다도 침착한 선언이었다.

"꿈을 깨고 현실로 행동으로 돌아갈 때요. 꿈…… 잠깐 동안의 꿈으로 생각하고 발을 돌리면 그만이니까."

"노여워하세요?"

"권리가 있나."

"왜 웃는 낯으로 못 보내 주세요."

"울 필요가 없는 것같이 웃을 필요도 없잖우."

정말 울 것이 없었던가. 나는 뜨거운 눈을 꾸욱 감았다.

"필요가 없는 것을 왜……."

유례는 나의 젖은 눈을 본 것이다. 눈물을 책망하려는 것이다.

"티가 들어도 눈물은 나고 하품을 해도 눈물은 나는 법이니까."

주책없는 눈물의 핑계는 이렇게밖에는 댈 수 없다. 거북스런 마음에 눈을 뜰 수도 없어 감은 채 느끼는 마음을 꾹 누르고 있으려니 유례의 손가락이 눈을 훔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거운 목소리를 힘껏 자아냈다.

"가시오.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내 곁을 떠나시오."

목소리가 사라진 뒤까지도 여음이 마음속에 길게 울려 마치 체조교사의 호령 같은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하는 쓸데없는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유례가 가버린 뒤는 가을 벌레 소리가 문득 그쳤을 때와 같은 정서였다. 쓸쓸은 하나 평온하다. 아마도 마지막 작별이었겠건만 마음은 설레지 않았다. 건수에게 안부의 말이라도 한마디 전하였더면 하는 여유조차 생겼다.

유례를 대신하는 듯이 란야는 나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하녀들과 함께 나의 시중을 들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나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유례와의 사이에 어떤 교섭과 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유례와 나와의 그 동안의 여러 가지의 과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고도 깨달았는지 천연스럽고 의젓한 태도였다. 마치 온종일 집을 잊어버리고 밖에서 놀던 아이가 시침을 떼고 천연스럽게 집을 찾아 들어온 때와도 같다.

"역시 사람을 잘못 봤어요. 속았어요…… 함손은 천생의 부량자예요. 주제넘게 그를 기르려고 한 것이 불찰이었지요. 가난뱅이 주제에 무서운 돈 후안인 것을."

함손에게는 다시 새 짝이 생겼다는 것, 정양차로 피서지까지 동행하였다가 그대로 갈라졌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나에게는 아무 필요 없는 소식이었으나 그것을 실토하려는 란야의 속뜻은 짐작된다. 구태여,

"어떻게 하란 말요."

하고 물을 필요도 없기는 하였다.

"뻔질뻔질하다고 책하시겠죠."

날렵하던 그 기개는 간곳없고 거북스럽고 겸연쩍은 란야의 태도였다.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자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그 뜻이 이제 와서는 아무 감격도 정서도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란야는 벌써 나에게는 향기를 잃은 고깃덩이요, 김빠진 한잔의 술이었다. 등뒤에 질질 끌릴 무거운 짐을 느낄 뿐이었다.

"생활의 요구에는 얼마든지 응할 수 있으나 쓸모없는 열정은 천당으로나 날려 보냄이 어떻소."

말이 가혹하였을까.

"저를 죽이자는 셈이죠."

란야는 짧게 외치고 나의 가슴 위에 푹 꼬꾸라졌다. 두 어깨가 움쭐움쭐 파도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슴 위에 사람을 느끼는 대신에 물건을 느꼈다. 숨이 가빠 쳐들려고 하니 맥이 없다.

"됩데 사람을 죽이자는 셈인가."

뼈저린 비꼬움임에도 시침을 떼고 어여쁜 흰 말은 얼굴을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몸을 얼싸안은 두 팔은 말다리같이 탄력이 있다.

온천의 밤은 의미 없이 저물어 갔다―---마치 이 이야기와도 같이 고요하게.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주의
1929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