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망국인기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광공국장 ○씨(광공국은 그 뒤에 상무부의 한 국으로 되었고 ○씨는 상무부장으로 되었다)의 그때의 호의는 진실로 고마웠소. 물론 그 집은 ○씨의 사유가 아니요 또한 아주 거저 주는 것이 아니요 ‘본시 일본인의 집이었던 것을 광공국에서 접수하여 김동인이에게 상당한 집세를 받고 빌려주는 것’이지만 하마터면 일가 이산할 뻔한 그 찰나에 그런 비극을 겪지 않고도 되게 되었으니 이런 고마운 일이 어디 있겠소? 내 성질이 하도 대범해서 고맙다는 사례의 인사조차 변변히 안 한 듯하지만 내 일생에 겪은 가지가지의 고마운 일 가운데 가장 큰 것의 하나요.

더욱이 고마운 가운데도 감격되는 바는 ‘글 쓴 대상’으로 이런 고마운 대접을 받은 점이었소. ‘글’을 업으로 택하고 이 길에 정진하기 무릇 30년, 그동안 일반 대중은 물론이요 친구 친척 형제에게까지 수모와 멸시만을 받아왔거늘 오늘 처음으로 ‘글쓴 것’이 ‘공’이라는 대접을 받은 것이었소. 그것도 ‘글’에 종사한다든가 혹은 다른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이가 아니요, 전연 ‘글’과는 인연이 먼 이에게서 ‘글에 대한 대접’을 받은 것이었으니 어찌 감격과 감사가 크지 않겠소?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아, 나는 소설가로다. 나는 소설가로다.’

천하에 향하여 내 직업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가 없었소. 지금껏은 누구와 인사를 할 때에도 직업은 어름어름해 버렸고, 여행 때에 여관 숙박계 같은 데도 ‘회사원’쯤으로 카무플라주해왔으며, 이리하여 서 모멸을 가급적 피해왔지만, 인제부터는 큰 소리로 ‘나는 소설가로다’고 할 수 있는 세월이 왔나보다. 30년을 고집해왔더니 이런 세상도 있기는 있었구나. ‘소설가’이기 때문에 받는 대접…… 이것은 평생에 처음이요 전연 뜻 안 한 때에 뜻 안한 이로부터 받았는지라 감사와 감격은 그만치 더 컸었소.

의기양양히 새집으로 이사한 것은 1945년 11월 중순이었소. 일본인 회사 중역들의 사택 100여 채 가운데서 마음대로 골라낸 것이요 1억 몇 천만 원짜리 회사의 사장의 사택이었더니만치 상당히 좋은 집이었소. 더욱이 내가 고른 바의 표준은 ‘글 쓰기에 적당한 집’이었더니만치, 집의 방의 배치도 마음에 들었소. 보통 부엌이며 가족실과는 기역자로 꺾여져 멀리 떨어져 조용하고 한적한 방이 있고, 그 방 문을 열면 아리따이 설계된 일본식의 정원이 눈앞에 전개되어서 글 쓰다가 피곤한 머리를 쉴 수도 있고, 정원에는 탑이며 천수며 값진 상록수들이 조화 있게 배치된 위에 노송 몇 그루가 뜰을 보호하고…….

본시 무슨 목표로 어떤 취미로 설계된 집인지는 모르지만 글 쓰는 사람에게는 아주 나무랄 데가 없는 설계이며 사랑과 내실이 멀리 격지되어 있어서 이것은 글 쓰는 데뿐 아니라 조선인 습관 풍속에도 좋게 되었으며, 생활 문화 설비로는 전화, 전등, 전열, 가스, 수도, 모두 구비되었고 우물도 있고, 200평에 가까운 빈 터까지 딸려서 야채 등속을 내 집에 심어 먹을 수 있고, 집 앞에는 아이들의 유원지도 있고, 어느 점으로 뜯어보아도 나무랄 데가 없는 집이었소. 내 마음대로 설계를 하여 신축한다 하여도 내 생활과 직업과 취미 등에 이만치 맞게 짓긴 힘들 것이오.

다만 이사온 처음 한동안은 아직 집에 낯익지 못하고 근처에 낯익지 못하고 집이 좀 크기 때문에 허전하고 무시무시하였소. 더욱이 해방 직후 사면에 강도며 테러가 횡행하고 무경찰 상태의 세상이 현출되었고 이 동네가 도대체 본시 일본인 고관 중역들의 사택촌으로 현재는 모두 새 주인들이 들어서 역시 집에 낯익지 않은 사람들이라 저녁만 되면 겹겹이 문을 잠그고 깊은 방에 들어 잠기고 말므로, 그 일대는 밤만 되면 사람의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고 마치 심산 중의 절간같이 되오. 여기는 서울의 한 귀퉁인가 의심되도록 한적하지요.

게다가 이 동네에서도 두세 집 강도의 방문을 받은 집이 있었으며 우리 집도 이사오는 날 저녁에 절도의 방문을 받았으리만치 어수선한 세상이었으매, 아직 낯익지 않은 넓은 집은 처음 한동안 약간 무시무시하였소.

밤에는 하도 조용한 세상이라 가족들끼리 큰 소리로 웃고 지껄이기를 꺼려서 소근소근 이야기들을 할 때에 저편 멀리서 야경꾼의 딱딱 하는 소리라도 차차 가까워오면 마음이 든든해지고 그 소리가 고맙게 들리는 형편이었소.

이러한 가운데서 나는 어서 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만 기다렸소. 그동안은 집도 좀더 낯익어지겠고, 날이 다사로워져서 뜰에도 낯익고 정이 들면이 무시무시한 기분도 삭아질 것이며, 나만 아니라 근처의 사람(모두가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오)들도 겨울의 칩거에서 해방되어 한여름만 겪고 나면 이 동네도 좀더 사람 사는 동네같이 될 것이오.

새집에 들기는 들었지만 연료 관계도 있고, 아직 집이 낯선 관계도 있어서 온돌방과 부엌을 중심으로 한 몇 방만 썼지 저편 사랑 쪽은 그냥 굳게 봉한채로 버려두었으매 아직 그 일대는 내 집같이 생각되지 않았소. 다사로워지면 거기 한 방을 서재로 꾸미고 거기서…….

거기서면 좀 나은 글도 쓸 수 있을 것 같았소. 사실 붓을 잡은 지 30년이요 서울로 이사온 지 17년에, 서울에서는 행촌정의(집은 열한칸이었지만) 단 한 칸의 건넌방을 내 전용으로 침실 겸 응접실 겸 서재 겸으로 그 방에서 붓대와 씨름을 하기를 17년간이었소. 앞집에서 음식 먹는 젓가락 소리며 뒷집에서 빨래 너는 발소리며 내지 건너편 집의 내외 싸움하는 소리까지 빤히 들리는 소란한 주위 가운데서 총독부 검열계의 철저한 제한 아래서 사회 대중의 무시와 모멸속에서 그야말로 불가능한 환경과 정세 가운데서 붓을 잡아온 것이었소.

조선 문학이 오늘만한 형태라도 이루어진 것은 전혀 거기 종사하는 사람들의 무신경(모멸을 모멸로 보지 않는)과 정성의 산물이오. 약간이라도 신경이 있는 사람은 과즉 수삼 년간 붓대를 잡아보다가는 다른 업으로 전향을 해버렸지, 그냥 달려 있는 사람이 없소. 요만한 것이라도 조선 문학이라는 것을 건설해놓은 것은 전혀 우리(문인들)의 지극한 정성의 산물이오.

좀더 우수한 문학을 산출해보겠다는 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욕심인 동시에 불타는 야심이었소.

그러나 창작상의 문구인 연월일같은 것에까지도 명치, 대정, 소화 등의 연호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국수적 검열 제도 밑에서 우선 첫서리를 맞아야 하고, 그 뒤에 조용히 앉아서 붓을 잡을 만한 집이나 방 하나도 못 가진 옹색한 환경 아래서 무슨 작품이 나오겠소? 나왔다 하면 이는 전혀 기적이었소.

지금 우선 총독부의 검열이라는 관문이 없어졌소. 이 관문 하나가 없어졌으면 붓을 놀릴 범위는 훨씬 넓어진 것이오.

정신적 자유 아래서…… 한 개의 큰 관문이 없어졌으니 여기 조용하고 마음에 드는 장소만 생기면 전보다는 좀 우수한 창작도 산출될 것 같았소.

평소에 늘 생각하는 바(죽기 전에 꼭 쓰고 싶은) 써놓아야 할 것이 둘이 있소.

지금 창작상의 마음의 해방을 얻었고, 그 위에 마음에 드는 방까지 생겼으니 겨울만 지나서 이 집에도 낯익고 서재도 쓰게 되면 거기서 정원의 노송을 바라보며 수십 년째 벼르기만 하면서 붓을 잡을 기회를 못 얻었던 작품을 만들어보고자 새집에 들면서부터 나의 욕심은 움직였소.

죽기 전에 꼭 쓰고 싶은, 그리고 써놓아야 할 두 개의 창작.

그 하나는 일본에게 합병된 이후의 조선의 걸어온 자취요.

이것은 수십 년 전부터 나의 숙망이요 어떤 잡지의 설문에도 그런 대답을 한 일까지 있는 바요. 붉은 산은 푸르게 되고 거친 벌판은 미답으로 변하고, 심심산곡까지 기차가 통하고, 매 고을에 학교가 서고, 전기가 보급되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뒤에 조선은 이렇게 개혁하였다는 일본 당국자의 자랑의 이면에는 농촌에는 떼거지가 만주로 떠나가고 한 채의 큰 벽돌집이 생기려면 원주민 몇 십호는 이산과 유랑으로 몰락하며, 생도가 스승의 따귀를 때리며, 며느리가 시아비에게 짐을 지워가지고 나들이를 가고, 일본인과 함께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집을 저당해서 연회비를 마련하는 조선인의 실정…… 그것이 나날이 더해가고 심각해가는 조선에 그래도 도시에는 칠팔 층의 큰 빌딩이 서고, 양복쟁이가 나날이 더 많아가고 이러한 현황을…….

이러한 것을 소설화함에 아무리 교묘하게 카무플라주할지라도 총독부의 검열을 패스하기는 지난할 것이오. 그러나 패스가 못 된다 하면 단지 문헌으로라도 한 벌 남겨둘 필요는 꼭 있소. 그것을 쓰고자 하는 것은 수십 년래의 오랜 숙망이었소.

표면으로는 피상적으로는 이러한 길을 밟아왔지만 이 이면으로는 가지가지의 뚜껑과 껍질 밑에서 민족으로서의 생명의 촛불만은 그래도 꺼지지 않고 깜틀깜틀 살아와서 제아무리 폭력과 교묘한 수단을 다할지라도 한 개의 다른 말을 가진 민족은 아주 없이할 수 없다는 암시가 이 작품의 큰 안목이니만치 공공히 내놓지는 못할 작품이오.

1945년 8월 보름날, 연합군의 승리로써 조선은 일본에서는 해방이 되었소. 수십 년간 머릿속에서 벼르기만 하던 작품은 여기 큰 수정을 가해서 공포할 수 있는 자유가 생겼소. 조선이 일본에게 삼키운 때부터 다시 해방되는 때까지의 40년간의 세월을 배경으로 그 40년에 조선이 걸어온 자취.

그 작품의 주인공이 당시 스무 살이라 하면 스무 살부터 근 60살까지의 생애, 그 주인공이 자식을 낳고 손주를 낳고 며느리를 맞고…… 이러한 인생노정을 밟는 동안, 그와 평행하여 혹은 교착하여 걸어 나아가는 ‘조선’이라는 지역.

40년의 가시의 길을 걸은 뒤에 홀연히 조선이 일본에서 해방된다. 어제까지는 국가의 유공한 사람이노라고 큰 머리 들고 다니던 사돈이며 ‘호국의 신’이라고 명성이 자자하던 조카며가 모두 몰락되는 반면에 세상은 한번 거꾸러진다.

그 40년간과 오늘날의 조선이 밟는 형태를 소설화해보자는 욕망이오.

그 소설의 큰 배역 혹은 부주인공으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 씨를 이용하기로 생각했소. 김 주석의 70년 생애의 공적 반면은 즉 조선 독립 측면사요. 사심이라는 것은 전연 모르고 오직 조선 독립의 순일한 마음으로 ‘임시정부’라는 보따리를 등에 지고, 상해로 한구로 중경으로 유랑한 40년간의 표박 생활…… 거기는 혹은 실수도 있었겠고, 착오도 있었겠으며, 그 실수가 혹은 민족이나 독립운동에 해로운 것도 있었는지도 모를 바이나, 오직 잠시 한때 사사에 곁눈질 않고 곧추 신념대로만 행하여 나와서 오늘날 일본에서의 해방까지 본 것이오.

더욱이 김 주석의 일대는 소설적으로도 파란중첩하여서 탐정소설에 흡사한 장면도 비일비재요. 그 김 주석의 일대기를 소설화하여 약간의 고기를 붙이면 그것이 즉 ‘조선 독립사’가 될 것이오.

오랜 숙망이던 ‘병합 이후의 조선의 걸어온 길의 소설화’와 김주석의 일대기를 교묘히 엮으면, 흥미와 사실을 아우른 기록이 될 것이오.

글 쓰기에 좋은 방이 생겼고 기색 또한 절호의 기회이니 봄부터 그것을 착수하기로 하였소. 그 필요상 김 주석과 누차 만나기도 했고 공주며 마곡사 등지에 함께 여행도 하였소.

꼭…… 더욱이 내 손으로 쓰고 싶었소.

수십 년 벼른 바라 그 점으로도 내 손으로 쓰고 싶었지만, 사실 마음 놓고 이런 글을 맡길 만한 사람이 언뜻 생각나지 않소.

조선에 문사가 수효는 꽤 많지만, 조선이 일본에게 합병된 36년의 전 기간을 몸소 보고 경험한 사람은 몇이 못 되오. 오랜 일이 아니니 남에게 물어서라도 알아볼 수는 있지만 몸소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의 사이에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것이오.

그도 그러려니와 이 대 파노라마를 적절하고 정확하게 붓으로 재현시킬 만한 사람이 또한 언뜻 생각 안 나오.

얼마나 인재가 나지 않는 땅인지 문학의 씨가 뿌려진 지 30년, 그사이 배출한 문사 무려 수백 명이 되나 나(30년 전의 옛사람인)를 능가할 만한 사람도 아직 못 보니 한심한 처지요.

혹은 김구 주석의 전기를 꾸미라며 용하게 꾸밀 만한 사람은 있을 것이오. 또는 독립운동사를 꾸미라며 용히 꾸밀 사람이 있을 것이오. 내지 그 40년간의 조선 사회의 변천을 그리라면 그도 그릴 사람이 있을 것이오. 그러나 ‘김구’라는 한 노인의 일대기에 배(配)하기를 40년간의 조선의 동태로 하고 이면으로 민족 운동사를 엮어넣으나 다 아는 바요.

그 지나의 「삼국지」에 대하는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의 진역 삼국지를 꾸며보자는 것이오. 고구려 800년, 백제 700년, 신라 1,000년…… 그 기나긴 세월 동안에 이 지역 위에서 활약한 많은 영웅들의 활약상을 얽어넣어 엮어 내려가면 유례없는 위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오. 나의 요만한 미약한 힘이 도저히 감당하기는 힘든 일이지만, 늘 욕심은 동하는 일이오.

연일월(延日月) 2,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에 한토에 기복한 국가가 무려 수백…… 그를 상대로 단군 후손 부여 민족이 살아온 역사…… 역사적 서술을 피하고 전혀 소설화하여 꾸며놓으면 위대한 소설인 동시에 위대한 역사기록이 될 것이오.

만난을 극복하고라도 만들어보고 싶소. 또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여상의 두 가지 소설……. 꼭 만들어야겠지만, 누구나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형편이니 나만 손 붙이지 않으며 그런 작품은 나와보지도 못할 것이오.

지금 글 쓰기 좋은 집이 생겼으니 이 기회에…… 그리고 죽기 전에…….

어서 날만 다사로워져서 마음에 맞는 방에 나앉아 여상의 작품을…….

혹은 원고지라 혹은 잉크라, 글 쓸 준비를 착착 진행하며 마음은 가속도로 긴장되어갔소.

그러나 기대하던 봄에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집 근처 일대에는 불길한 소식이 들리기 시작하고 그 소문은 나날이 커가고 나날이 농후해갔소.

즉 이 근처의 일인 가옥은 다 빼앗는다. 일본인에게서 양도를 받은 집이건 또는 군정청에서 제정한 양식 수속(그 법령은 다시 없이했지만)을 밟은 집이건 또는 일인에게서 빼앗은 집이건을 막론하고 본시 일인의 집이던 집은 빼앗는다 하는 것이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미 군용차는 이 일대를 요란스럽게 드나들며 시민들의 안돈을 위협하고 있었소. 뉘 집도 내란다 뉘 집도 내란다, 앞집 뒷집 차례차례로 명령을 받았소.

군정청 발포의 법령에 의지하여 집값을 은행에 공탁하고 인젠 내집이거니 안심하고 있던 사람, 군정청 법령에 의지하여 은행에 임대차 계약을 하고있던 사람,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합법적과 비합법적을 막론하고 일단 명도령이 내리기만 하면 거기는 인젠 더 무슨 용서할 틈새는 절대로 없소.

“군에서 쓴다는데 무슨 잔말이냐.”

“조선 해방을 위해서 많은 피를 흘린 은인이로다.”

전혀 조선 해방을 목표로 한 전쟁이었던 듯……. 합법적으로 손에 넣었던 집을 빼앗기고 억울하여 모 부장, 모 국장(조선인들)께 진정 갔던 사람들은 도리어 배은한(背恩漢)이라는 꾸중만 듣고 쫓겨오고, 경찰에 억류된 사람까지 있었소.

내 민족을 보호해줄 정부를 못 가진 가련한 망국인. 이 너른 우주에서 ‘유태’ 민족과 함께 정부 없는 인생이 된 우리는 다만 실력자의 하라는대로만 움직일밖에는 없었소.

이러한 가운데서 ‘나’만은 뱃심 좋게 안심하고 있었소. 왜?

아무리 군정하라 하기로서니 그래도 부장이 처리한 일이다. 공식증여가 아니요 비공식 대여라 할지라도 그래도 ‘부장’의 낯을 보아서라도……. 이것이 한 가지의 이유이고, 그 위에 또한 아메리카의 문화에도 희망을 두었소.

나의 30년간의 문화 공적에 대한 상여라는 의미로 준 집이니 문화를 존경할 줄 아는 인종이면 무슨 생각이 있으리라…… 이런 뻔뻔스러운 생각이었소.

뻔뻔스러운 기대를 가지고 그래도 전전긍긍 그 소위 지프라나 하는 소형차가 내 집 근처에 정거할 때마다(매일 수십 번씩이오) 깜짝깜짝 놀라면서 불길한 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떤 날 외출하였다가 돌아오니 우리 집 대문간에도 ‘○○숙사’라는 커다란 나무판이 걸렸소.

참으로 기분 나쁜 나무쪽이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에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이런 나무쪽을 갖다 걸고 이로써 너희 집도 내놓으라는 통고를 대신하는 것이 즉 ‘결정적 통고’나 일반이다 하니 기가 막히오.

그러나 ○씨라는 적잖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나라 이를 호소하려 ○씨를 찾아갔소.

내 이야기와 사정과 호소를 다 들은 ○씨는 천장을 우러르며 긴 한숨 한번을 쉰 뒤에,

“일껏 김 선생의 편의를 보아드렸지만 군에서 쓴다면 할 수 없지요.”

하며 이어 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말고 어서 이사갈 집이나 물색하라는 것이오.

나는 ○씨에게 더 무슨 요구나 희망이나 불평을 말하지 아니하였소. 한댔자 쓸데없을뿐더러, ○씨를 괴롭게 하는 데 지나지 못할 것이므로…….

1945년 8월 15일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다만 ‘망국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할 뿐이오. 광공국장으로도 집 한채 좌우할 실권을 못 가진 가련한 인종임이 스스로 울 뿐이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래도 집을 거저 내놓기는 차마 어려워서 한 장의 진정서를 초하여 이 지정의 최고 권력자에게 사정하고자 그의 비서관 L씨에게 이를 부탁하였소.

“되고 안 되는 건 모르지만 이 진정서를 그(최고 권위자)에게까지 제출이나 해달라.”

고 다짐다짐을 비서관에게 하였소. 한 주일쯤 뒤에 그 결과를 알려 비서관을 찾았던 나는 여기서 한 전형적 ‘망국인’을 발견하였을 뿐이오. 그(비서관)는 내 진정서를 자기 혼자서 보고 자기의 뜻으로 그냥 삭여버리고 내게 대해서는 상관께 보였지만 머리를 가로젓더라는 대답을 한 것이었소. 자기에게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추호만치라도 상관을 시끄럽게 하지 않으려는 비서관의 충성이오.

이리하여 서로 말이 통하지 못하는 행정자와 민중의 사이에 끼여 있는 비서관의 충성으로 행정자와 민중 사이의 오해는 생기고 커가는 것이오.

전쟁 잉여물자가 많고 많을 터인데 하필 칠면조와 버터, 잼 등을 빚낸 돈으로 사들인다는 희극도 이런 데서 생겨났을 게요.

“쌀이 부족하거든 고기나 과일, 채소 등을 먹으면 좋을 터인데 쌀만 부족 하다고 야단하는 조선인의 심리를 모르겠다.”

는 말의 원인은 여기 있을 게요.

그저 그렇습니다, 옳습니다로 상관의 비위만을 맞추려는 통역자가 가운데 끼여 있으니 민중의 하소연은 위에까지 가보지도 못하는 형편이오. ‘조선 인민은 군정에 열복해 있다’는 맥아더 원수의 국무성으로의 보고도 이 통역자들의 ‘그렇습니다, 옳습니다’에서 나온 결론에서 생겨났을 것이오.

일제 시절에는 그래도 서로 말, 언어가 통하여 이쪽 의사를 저쪽에 알릴 수 있고 저쪽 의사를 이쪽이 알 수 있었으니 서로 오해는 없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다만 저들의 눈에는 우리는 미개인일 따름이요 우리의 눈에는 저들은 다만 군인일 따름이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돼지는 진주의 무엇임을 알지 못하나니’라는 격언을 가지고 있는 저들의 눈에는, ‘문학 돼지’, ‘기술 돼지’, ‘거지 돼지’ 등의 우열의 구별이 안 보일지라, 무슨 협회 무슨 동맹의 총재며 위원장이라는 이들의 쟁쟁한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사소한 일로 수감, 구류 등 처분을 하기가 일쑤요 좀 우수한 돼지라고 대접해준다는 일 등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30년간의 조선 문학에 대한 공로로 운운은 저들에게는 다만 아니꼽고 구역나는 수작일 뿐일 것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에는 저들은 다만 총질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라 역사도 전통도 문화도 못 가진 갑작부자일 뿐이오.

이 중간에 끼여 있는 통역자란 사람들이 또한 다만 망국인 근성을 가진 뿐 이지, 이쪽으로의 민족애도 저쪽으로의 진실한 충심도 없는 사람이라, 지금 의 우리의 형태는 다만 뒤죽박죽일 뿐이오.

이 문제는 이만치 걷어치우고 과거 일제 시대보다도 글 쓰는 관문은 어떤 방면으로는 더 좁아져서 걸핏하면 처벌이오. 이 글도 더 진전하다가는 처벌 받을 근심이 있으니 이만치 하고 과거에는 그래도 이모저모로 어떤 정도까지 대접도 있고 보는 데도 있었거니와 지금은 김 주석일지라도 이 박사일지라도 또는 앞집 김 서방 뒷집 이 서방 모두 일시동인하의 공평무사한 세상이라, 김 주석 이 박사일지라도 ‘무허가 집회’라는 사소한 죄목으로라도 수감당하기를 면하지 못하는 세상이니 김동인이 붓쯤 경솔히 놀렸다고 군정비방에 참작이 있을 까닭이 없으니 쉬쉬해두고.

좌우간 숱한 기대와 희망과 계획을 가졌던 그 집에서도 ‘그 일’에는 착수도 못해보고 전전긍긍한 1년을 보내다가 쫓겨나왔소.

얌전한 서재가 있는 주택을 대신으로 구해주마는 조건으로 명도 승낙을 받은 뒤에는 전언(前言)은 곱다랗게 식언하고, ‘네가 한 채(이중 점유한 적산)를 골라내면 그 집을 비워주마’하는 두 번째의 제의에 또 속아서(이것이, 즉 이 점진적 정책이 그들의 특기요) 이리저리 물색하여 집 한 채 골라내더니 이번은 또 네가 경기도 주택과에 가서 그것을 얻도록 수속해보라는 것이오.

집 문제로 빙빙 돌아다니는 두 달 동안, 그들의 정책의 교묘하고 용함에 절실히 감복하였소. 따질 듯 따질 듯 미끼는 곧 코앞에 달려있는 듯하지만 막상 따려면 쑥 미끼는 물러가고…… 그래서 아주 실망도 주지 않고 그냥 희망을 계속하면서 절망의 최후 장소까지 끌려가게 하는 교묘한 수단.

그 수단에 밀려서 나는 지금 그 숱한 기대와 희망과 계획을 가지고 들었던 집에서 쫓겨나서, 한 오막살이를 구해 들었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망국인…… 망국인에게는 이 오막살이나마 과람할지 모르나 적어도 내 있던 집을 빼앗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오.

망국인에게는 수[雄]와 암[雌]의 구별은 있을지언정 다른 구별이 있을 까닭이 없으니 우수한 인종이 입주하려면 마땅히 물러서는 것이 당연할 것이오.

그들이 가까이 사귀고 고문 삼아 의논하는 이 나라 사람들로 미루어 보아서 짐작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열등의 민족에게는 오막살이일지라도 너무 거룩할지도 모르오.

무슨무슨 처장, 무슨무슨 장…….

그들이 마주 사귀고 의견 교환을 할 수 있는 이 나라 인종은 민족적으로는 아메리카 토인보다도 민족애에 결핍되고 단결력이 없고 서로 깎고 할퀴기만 위주하는 유례없는 망종임을 영리한 그들은 인젠 너무도 명료히 알았을 것이다.

‘그대들은 이 땅에 와서 왜 가장 이 땅의 열등 인종과만 사귀고 그 국부적인 좁다란 지식으로서 이 땅 이 민속을 율(律)하려 하는가.’

이런 질문이나 항의는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오. 그들은 이 땅과 이 민족을 속속들이 다 알았노라 스스로 굳게 믿고 있소. 과일이나 고기나 우유 등속도 좀 혼식하지 않고 쌀 부족하다는 앙탈만 한다는 그만한 지식으로.

다만 내게 있어서 그냥 아깝고 애석한 것은 조용히 글 쓸 방을 잃고 그 때문에 수십 년 숙망을 그냥 보류해두지 않을 수 없는 일이오.

내 나이 벌써 마흔여덟, 평소에 병 많고 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를 몸이 평생 벼르던 글을 쓸 기회를 또 잃은 일이오.

그러나 엎어져도 망국인, 자빠져도 망국인…… 이 망국인이 망국라 하면 언뜻 나설 사람이 없을 것이오.

낸들 그 자신까지야 있으리오만 그래도 이렁저렁 흉내쯤은 낼 것 같은데 나만한 사람도 생각이 안 나는 형편이오.

남녀의 정사로 혹은 회고적 센티멘털리즘으로, 또는 한때 한때의 기지로 독자를 미혹할 비술을 농락하는 수완이 용한 작가는 꽤 여럿 꼽을 수 있으나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은 작가는 왜 그렇게도 나지를 않소?

맡길 만한 작가도 생각나지 않거니와 내 욕심으로도 꼭 내 손으로 만들어 놓고 싶소.

내가 세상에 다녀갔다는 표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도 한 개의 대작은 써야겠는데, 나이가 쉰이 내일모레고 게다가 맨날 몸이 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지라, 조급한 생각이 날 때도 있소. 쓸 만한 적임자도 얼른 생각나지 않거니와 그런 일을 소설화할 의도나 흥미를 가진 작가가 대체 있기나 한지.

그런지라 민족적 대기록으로 남겨야 할 1910 ~ 1945년간의 사실은 내가 남기지 않으면 혹은 조선총독부의 공문서거나 수필식 기록은 있을지나 소설화된 기록으로는 남지 못할는지도 모르오. 그 시대를 몸소 겪은 한 작가로서, 이 대사실을 소설화하지 못하는 것은 작가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바요.

이것과 또 한 개 꼭 내 손으로 만들고 싶은 그리고 또 만들어야 할 소설은…….

진역(震域) 삼국지요. 위와 촉과 오의 세 나라가 일어난 데서 비롯하여 망할 데까지를 엮은 것이 한토(漢土)의 삼국지요 사마씨의 역사「삼국지」와 함께 소설「삼국지연의」가 있는 것쯤은 조선 사람 누구 기록 하나를 더 쓰면 무얼 하고, 이 망국이 호화롭던 예전의 꿈 이야기 한 토막을 쓰면 무얼하리오.

다만 망국한을 그냥 홀로 울고 있을밖에는 없을 것이오.

이 저작물은 저자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으므로, 저자가 사망한 후 50년(또는 그 이하)이 지나면 저작권이 소멸하는 국가에서 퍼블릭 도메인입니다.


주의
1924년에서 197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면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퍼블릭 도메인인 저작에는 {{PD-1996}}를 사용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