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권001

위키문헌 ― 우리 모두의 도서관.


무제(武帝) 상(上)[편집]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의 휘(諱)는 유(裕), 자(字)는 덕여(德輿), 소명(小名)은 기노(寄奴)이고, 팽성현(彭城縣) 수여리(綏輿里) 사람[1]이며, 한(漢) 고제(高帝)의 동생인 초원왕(楚元王) 교(交)의 후손이다. 교는 홍의후(紅懿侯) 부(富)를 낳았고, 부는 종정(宗正) 벽강(辟彊)을 낳았고, 벽강(辟彊)은 양성목후(陽城繆侯) 덕(德)을 낳았고, 덕은 양성절후(陽城節侯) 안민(安民)을 낳았고, 안민은 양성희후(陽城釐侯) 경기(慶忌)를 낳았고, 경기는 양성숙후(陽城肅侯) 잠(岑)을 낳았고, 잠은 종정(宗正) 평(平)을 낳았고, 평은 동무성령(東武城令) 모(某)를 낳았고, 모는 동래태수(東萊太守) 경(景)을 낳았고, 경은 명경(明經) 흡(洽)을 낳았고, 흡은 박사(博士) 홍(弘)을 낳았고, 홍은 낭야도위(瑯邪都尉) 회(悝)를 낳았고, 회는 위(魏)의 정양태수(定襄太守) 모(某)를 낳았고, 모는 야성령(邪城令) 량(亮)을 낳았고, 량은 진(晉)의 북평태수(北平太守) 응(膺)을 낳았고, 응은 상국연(相國掾) 희(熙)를 낳았고, 희는 개봉령(開封令) 욱손(旭孫)을 낳았다. 욱손(旭孫)은 혼(混)을 낳았는데, 그의 대에 비로소 장강을 건너 진릉군(晉陵郡) 단도현(丹徒縣)의 경구리(京口里)에 살았으며, 관직이 무원령(武原令)에 이르렀다. 혼은 동안태수(東安太守) 정(靖)을 낳았고, 정은 군공조(郡功曹) 교(翹)를 낳았는데, 교가 바로 황고(皇考)이다. 고조는 진 애제(哀帝) 흥녕(興寧) 원년 세차 계해(癸亥)년 3월 임인(壬寅)일 밤에 태어났다. 장성해서는 신장이 7척 6촌이었고, 풍채와 골격은 기이하고 특별했다. 집이 가난했지만 큰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가난한 것을 염치로 여기지 않았다. 계모를 효도하고 삼가서 모시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처음에, 관군(冠軍) 손무종(孫無終)의 사마(司馬)가 되었다. 안제(安帝) 융안(隆安) 3년 11월에, 요사스러운 도적 손은(孫恩)이 회계(會稽)에서 난을 일으키니, 진 조정의 위장군(衛將軍) 사염(謝琰)과 전장군(前將軍) 유뢰지(劉牢之)가 동쪽으로 토벌하였다. 유뢰지가 고조에게 부(府)의 군사(軍事)에 참여하기를 청했다. 12월에, 유뢰지가 오(吳)에 이르렀는데, 도적들이 길에서 둔치고 모여있자 유뢰지는 고조에게 명을 내려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도적들이 얼마나 멀고 가까이 있는지 엿보게 하였다. 도적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도적들은 수천 명이나 되었지만 고조는 여유롭게 전진하며 싸웠다. 죽는 사람이 많게 되었고 전의가 바야흐로 상실되려고 하자, 손으로 긴 칼을 떨치며 죽이고 다치게 한 무리들이 많았다. 유뢰지의 아들 경선(敬宣)이 고조가 그곳에 머무른지 오래 되자, 도적들에 의해 곤란하게 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어 마침내 경기(輕騎)를 이끌고 그를 찾아 나섰다. 여러 경기들이 아울러 도착하자, 도적들은 이내 달아나 물러갔고, 천여 명을 베고 사로잡았다. 선봉을 앞세워 진격하여 산음(山陰)을 평정하니, 손은은 달아나 돌아가 바다로 들어갔다.

융안 4년 5월에, 손은이 다시 회계로 들어와서 위장군 사염을 죽였다. 11월에, 유뢰지가 다시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출정하니, 손은은 물러나 달아났다. 유뢰지는 상우(上虞)에 주둔하였고, 고조에게 구장성(句章城)을 지키게 하였다. 구장성은 보잘것없이 작았기 때문에 전사들이 수백 명을 채우지 못했으므로 고조는 항상 무기를 굳게 잡고 사졸들의 앞에 서서 매번 전투마다 쉽게 적의 선봉을 격파하고 진을 함락하니, 도적들은 마침내 물러나 협구(浹口)로 돌아갔다. 당시 동쪽을 치는 모든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는데 규율이 없어서 사졸들은 모질게 약탈하곤 하여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여길 정도로 심하였다. 오직 고조만이 법에 따라 명령을 내리는 것이 밝고 가지런하였으므로 친하고 신뢰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융안 5년 봄에, 손은이 자주 구장성을 공격했지만 고조는 여러 번 이를 격파하여 손은은 다시 달아나 바다로 들어갔다. 3월에, 손은이 북쪽으로 해염(海鹽)으로 나오니 고조는 쫓아가서 그곳을 도와서 성을 쌓아 질서를 바로잡았다. 도적이 나날이 와서 성을 공격하는데 성 안의 병사들이 심히 약했으므로 고조는 죽음을 각오한 수백 명을 뽑아 모두 갑주를 벗기고 짧은 병기를 쥐게 하였으며 아울러 북을 치고 들레면서 나오자, 도적들은 떨며 두려워하여 기운이 빠지게 되어 이로 인해 달아나면서 갑옷을 버리고 흩어져 도망가니, 그 대장 요성(姚盛)을 베었다. 비록 계속되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여전히 중과부적이었으므로 고조는 홀로 깊이 걱정하였다. 어느 날 밤에, 깃발을 쓰러뜨리고 숨은 무리들 중에 이미 달아난 자가 있었다. 이튿날에 문이 열고 파리하고 병에 걸린 사람 몇 명으로 하여금 성을 오르게 하였다. 도적들이 멀리서 유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말하기를, "밤에 이미 달아났습니다."라고 하니, 도적들은 이를 믿고 무리를 이끌어 크게 올라왔다. 고조는 그들이 나태해진 틈을 타서 분발해 냅다 쳐서 크게 격파하였다. 손은은 성을 떨어뜨릴 수 없음을 알고서는 호독(滬瀆)을 향해 나아갔다. 고조는 다시 성을 버리고 그를 쫓았다. 해염령(海鹽令) 포루(鮑陋)가 아들에게 오(吳)의 병사 1천을 이어받게 하였고, 전구(前驅)가 되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말하기를, "도적의 병사가 심히 뛰어난데다 오(吳) 사람들은 전투에 능하지 않으니 전구가 된다면 손해를 보아 반드시 아군을 패하게 할 것이다. 뒤에 남아서 응원하는 것이 좋을듯하다."라고 하며 좇지 않았다. 이날 밤에, 고조는 복병을 많이 감추어 두고 겸하여 깃발과 북도 두었는데, 한 곳에 불과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튿날에, 도적들이 무리 수만여 명을 이끌고 전투를 맞이하였다. 전구가 보고를 하자 모든 복병이 나와서 깃발을 들고 북을 울렸다. 도적들은 사방으로 군사들에 둘러싸이게 되어 이에 물러났다. 이어서 달아나는 것을 쫓자 도적들은 숨었다. 고조는 싸우고 물러나는 것을 반복하였으나 도적들이 많아서 통솔하는 병사들이 죽고 다쳤으며 또 다하게 되었다. 고조는 면할 수 없음을 생각하여 복병이 있는 곳에 이르러 멈추고 좌우에 영을 내려 죽은 사람의 옷을 벗겨 취하게 했다. 도적들은 달아나다가 돌이켜 멈추는 것을 일러 아직 복병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고조는 이로써 다시 싸우자고 소리쳤는데, 기색이 사나워서 도적의 무리는 그렇다고 여겨 이에 군사를 돌려 갔다. 고조가 천천히 돌아간 후에야 흩어진 병사들이 점점 모였다. 5월에, 손은이 호독을 격파하고 오국내사(吳國內史) 원산송(袁山松)을 죽였으며, 죽은 자가 4천 명이었다. 이 달에, 고조는 다시 루현(婁縣)에서 도적들을 격파했다.

6월에, 손은이 승세를 타고 바다를 지나쳐 갑자기 단도(丹徒)에 이르렀는데, 전사가 10여 만이었다. 유뢰지는 아직도 산음(山陰)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경읍(京邑)에서는 두려워 동요하였다. 고조는 속도를 높여 가서 도적들과 함께 양쪽이 마주쳤다. 당시 무리들의 힘은 이미 약했고, 먼 곳까지 걷느라 피로한 것도 더하여 단도를 지키는 군사들은 싸울 의지가 없었다. 손은이 무리 수만을 이끌고 북을 치고 들레면서 산산(蒜山)으로 올라가자,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짐을 지고 섰다. 고조는 거느리는 분격(奔擊)을 이끌고 이를 크게 격파하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물에 들어가 죽은 자가 심히 많았다. 손은은 곁으로 밀려나서[2] 스스로 탈 것에 탔으며, 겨우 배로 돌아올 수 있었다.雖被摧破,猶恃其眾力,徑向京師。樓船高大,值風不得進,旬日乃至白石。尋知劉牢之已還,朝廷有備,遂走向鬱洲。八月,以高祖為建武將軍、下邳太守,領水軍追討至鬱洲,[3]復大破恩。恩南走。十一月,高祖追恩於滬瀆,及海鹽,又破之。三戰並大獲,俘馘以萬數。恩自是饑饉疾疫,死者太半,自浹口奔臨海。

元興元年正月,驃騎將軍司馬元顯西伐荊州刺史桓玄,玄亦率荊楚大眾,下討元顯。元顯遣鎮北將軍劉牢之拒之,高祖參其軍事。次溧洲。玄至,高祖請擊之,不許,將遣子敬宣詣玄請和。高祖與牢之甥東海何無忌並固諫,不從。[4]遂遣敬宣詣玄。玄剋京邑,殺元顯,以牢之為會稽內史。懼而告高祖曰:「便奪我兵,禍其至矣。今當北就高雅於廣陵舉事,卿能從我去乎?」答曰:「將軍以勁卒數萬,望風降服。彼新得志,威震天下。三軍人情,都已去矣,廣陵豈可得至邪!裕當反服還京口耳。」牢之叛走自縊死。何無忌謂高祖曰:「我將何之?」高祖曰:「鎮北去必不免,卿可隨我還京口。桓玄必能守節北面,我當與卿事之;不然,與卿圖之。今方是玄矯情任算之日,必將用我輩也。」桓玄從兄脩以撫軍鎮丹徒,以高祖為中兵參軍,軍、郡如故。

孫恩自奔敗之後,徒旅漸散,懼生見獲,乃於臨海投水死。餘眾推恩妹夫盧循為主。桓玄欲且緝寧東土,以循為永嘉太守。循雖受命,而寇暴不已。五月,玄復遣高祖東征。時循自臨海入東陽。二年正月,玄復遣高祖破循於東陽。循奔永嘉,復追破之,斬其大帥張士道,追討至于晉安,循浮海南走。六月,加高祖彭城內史。

桓玄為楚王,將謀篡盜。玄從兄衞將軍謙屏人問高祖曰:「楚王勳德隆重,四海歸懷。朝廷之情,咸謂宜有揖讓,卿意以為何如?」高祖既志欲圖玄,乃遜辭答曰:「楚王,宣武之子,勳德蓋世。晉室微弱,民望久移,乘運禪代,有何不可。」謙喜曰:「卿謂可爾,便當是真可爾。」十二月,桓玄篡帝位,遷天子於尋陽。桓脩入朝,高祖從至京邑。玄見高祖,謂司徒王謐曰:「昨見劉裕,風骨不恒,蓋人傑也。」每遊集,輒引接慇懃,贈賜甚厚。高祖愈惡之。或說玄曰:「劉裕龍行虎步,視瞻不凡,恐不為人下,宜蚤為其所。」玄曰:「我方欲平蕩中原,非劉裕莫可付以大事。關、隴平定,然後當別議之耳。」玄乃下詔曰:「劉裕以寡制眾,屢摧妖鋒。汎海窮追,十殄其八。諸將力戰,多被重創。自元帥以下至于將士,並宜論賞,以敍勳烈。」

先是高祖東征盧循,何無忌隨至山陰,勸於會稽舉義。高祖以為玄未據極位,且會稽遙遠,事濟為難,俟其篡逆事著,徐於京口圖之,不憂不剋。至是桓脩還京,高祖託以金創疾動,不堪步從,乃與無忌同船共還,建興復之計。於是與弟道規、沛郡劉毅、平昌孟昶、任城魏詠之、高平檀憑之、琅邪諸葛長民、太原王元德、隴西辛扈興、東莞童厚之,並同義謀。時桓脩弟弘為征虜將軍、青州刺史,鎮廣陵。道規為弘中兵參軍,昶為州主簿。乃令毅潛往就昶,聚徒於江北,謀起兵殺弘。長民為豫州刺史刁逵左軍府參軍,謀據歷陽相應。元德、厚之謀於京邑聚眾攻玄,並剋期齊發。

三年二月己丑朔,乙卯,高祖託以遊獵,與無忌等收集義徒,凡同謀何無忌、魏詠之、詠之弟欣之、順之、檀憑之、憑之從子韶、韶弟祗、隆、道濟、[5]道濟從兄範之、高祖弟道憐、劉毅、毅從弟藩、孟昶、昶族弟懷玉、河內向彌、管義之、陳留周安穆、臨淮劉蔚、從弟珪之、東莞臧熹、[6]從弟寶符、從子穆生、童茂宗、陳郡周道民、漁陽田演、譙國范清等二十七人;願從者百餘人。丙辰,詰旦,城開,無忌服傳詔服,稱詔居前。義眾馳入,齊聲大呼,吏士驚散,莫敢動,即斬脩以徇。高祖哭甚慟,厚加殯斂。孟昶勸弘其日出獵。未明開門,出獵人,昶、道規、毅等率壯士五六十人因開門直入。弘方噉粥,即斬之,因收眾濟江。

義軍初剋京城,脩司馬刁弘率文武佐吏來赴。高祖登城謂之曰:「郭江州已奉乘輿反正於尋陽,我等並被密詔,誅除逆黨,同會今日。賊玄之首,已當梟於大航矣。諸君非大晉之臣乎,今來欲何為?」弘等信之,收眾而退。毅既至,高祖命誅弘。

毅兄邁先在京師,事未發數日,高祖遣同謀周安穆報之,使為內應。邁外雖酬許,內甚震懼。安穆見其惶駭,慮事必泄,乃馳歸。時玄以邁為竟陵太守,邁不知所為,便下船欲之郡。是夜,玄與邁書曰:「北府人情云何?卿近見劉裕何所道?」邁謂玄已知其謀,晨起白之。玄驚懼,封邁為重安侯;既而嫌邁不執安穆,使得逃去,[7]乃殺之。誅元德、扈興、厚之等。召桓謙、卞範之等謀拒高祖。謙等曰:「亟遣兵擊之。」玄曰:「不然。彼兵速銳,計出萬死。若行遣水軍,不足相抗,如有蹉跌,則彼氣成而吾事敗矣。不如屯大眾於覆舟山以待之。彼空行二百里,無所措手,銳氣已挫,既至,忽見大軍,必驚懼駭愕。我案兵堅陣,勿與交鋒,彼求戰不得,自然散走。此計之上也。」謙等固請,乃遣頓丘太守吳甫之、右衞將軍皇甫敷北拒義軍。

玄自聞軍起,憂懼無復為計。或曰:「劉裕等眾力甚弱,豈辦之有成,陛下何慮之甚。」玄曰:「劉裕足為一世之雄;劉毅家無擔石之儲,摴蒲一擲百萬;何無忌,劉牢之甥,酷似其舅。共舉大事,何謂無成。」

眾推高祖為盟主,移檄京邑,曰:

夫治亂相因,理不常泰,狡焉肆虐,或值聖明。自我大晉,陽九屢構,隆安以來,難結皇室,忠臣碎於虎口,貞良弊於豺狼。逆臣桓玄,陵虐人鬼,阻兵荊郢,肆暴都邑。天未亡難,凶力繁興,踰年之間,遂傾皇祚。主上播越,流幸非所,神器沉淪,七廟毀墜。夏后之罹浞、豷,有漢之遭莽、卓,方之於玄,未足為喻。自玄纂逆,于今歷年,亢旱彌時,民無生氣。加以士庶疲於轉輸,文武困於造築,父子乖離,室家分散,豈唯大東有杼軸之悲,摽梅有傾筐之塈而已哉。仰觀天文,俯察人事,此而能久,孰有可亡。凡在有心,誰不扼腕。裕等所以叩心泣血,不遑啟處者也。是故夕寐宵興,援獎忠烈,潛搆崎嶇,險過履虎。輔國將軍劉毅、廣武將軍何無忌、鎮北主簿孟昶、兗州主簿魏詠之、寧遠將軍劉道規、龍驤將軍劉藩、振威將軍檀憑之等,忠烈斷金,精貫白日,荷戈奮袂,志在畢命。益州刺史毛璩,萬里齊契,掃定荊楚。江州刺史郭昶之,奉迎主上,宮于尋陽。鎮北參軍王元德等,並率部曲,保據石頭。揚武將軍諸葛長民,收集義士,已據歷陽。征虜參軍庾賾之等,潛相連結,以為內應。同力協規,所在蜂起,即日斬偽徐州刺史安城王脩、青州刺史弘首。義眾既集,文武爭先,咸謂不有一統,則事無以輯。裕辭不獲已,遂總軍要。庶上憑祖宗之靈,下罄義夫之力,剪馘逋逆,蕩清京輦。
公侯諸君,或世樹忠貞,或身荷爵寵,而並俛眉猾豎,自効莫由,顧瞻周道,寧不弔乎!今日之舉,良其會也。裕以虛薄,才非古人,勢接於已踐之機,受任於既頹之運。丹誠未宣,感慨憤躍,望霄漢以永懷,眄山川以增厲。授檄之日,神馳賊廷。

以孟昶為長史,總攝後事;檀憑之為司馬。百姓願從者千餘人。

三月戊午朔,遇吳甫之於江乘。甫之,玄驍將也,其兵甚銳。高祖躬執長刀,大呼以衝之,眾皆披靡,即斬甫之。進至羅落橋,皇甫敷率數千人逆戰。寧遠將軍檀憑之與高祖各御一隊,憑之戰敗見殺,其眾退散。高祖進戰彌厲,前後奮擊,應時摧破,即斬敷首。初高祖與何無忌等共建大謀,有善相者相高祖及無忌等並當大貴,其應甚近,惟云憑之無相。高祖與無忌密相謂曰:「吾等既為同舟,理無偏異。吾徒咸皆富貴,則檀不應獨殊。」深不解相者之言。至是而憑之戰死,高祖知其事必捷。

玄聞敷等並沒,愈懼。使桓謙屯東陵口,卞範之屯覆舟山西,眾合二萬。己未旦,義軍食畢,棄其餘糧,進至覆舟山東,使丐士張旗幟於山上,以為疑兵。玄又遣武騎將軍庾禕之,[8]配以精卒利器,助謙等。高祖躬先士卒以奔之,將士皆殊死戰,無不一當百,呼聲動天地。時東北風急,因命縱火,煙爓張天,鼓噪之音震京邑。謙等諸軍,一時土崩。玄始雖遣軍置陣,而走意已決,別使領軍將軍殷仲文具舟於石頭,仍將子姪浮江南走。

庚申,高祖鎮石頭城,立留臺官,[9]焚桓溫神主於宣陽門外,造晉新主,立于太廟。遣諸將帥追玄,尚書王嘏率百官奉迎乘輿。[10]司徒王謐與眾議推高祖領揚州,固辭。乃以謐為錄尚書事,領揚州刺史。於是推高祖為使持節、都督揚、徐、兗、豫、青、冀、幽、并八州諸軍事、領軍將軍、徐州刺史。[11]

先是朝廷承晉氏亂政,百司縱弛,桓玄雖欲釐整,而眾莫從之。高祖以身範物,先以威禁內外,百官皆肅然奉職,二三日間,風俗頓改。且桓玄雖以雄豪見推,而一朝便有極位,晉氏四方牧守及在朝大臣,盡心伏事,臣主之分定矣。高祖位微於朝,眾無一旅,奮臂草萊之中,倡大義以復皇祚。由是王謐等諸人時失民望,[12]莫不愧而憚焉。

諸葛長民失期不得發,刁逵執送之,未至而玄敗。

玄經尋陽,江州刺史郭昶之備乘輿法物資之。玄收略得二千餘人,挾天子走江陵。冠軍將軍劉毅、輔國將軍何無忌、振武將軍劉道規率諸軍追討。

尚書左僕射王愉、愉子荊州刺史綏等,江左冠族。綏少有重名,以高祖起自布衣,甚相凌忽。綏,桓氏甥,亦有自疑之志。高祖悉誅之。

四月,奉武陵王遵為大將軍,承制。大赦天下,唯桓玄一祖後不在赦例。

初高祖家貧,嘗負刁逵社錢三萬,經時無以還。逵執錄甚嚴,王謐造逵見之,密以錢代還,由是得釋。高祖名微位薄,盛流皆不與相知,唯謐交焉。桓玄將篡,謐手解安帝璽紱,為玄佐命功臣。及義旗建,眾並謂謐宜誅,唯高祖保持之。劉毅嘗因朝會,問謐璽紱所在,謐益懼。及王愉父子誅,謐從弟諶謂謐曰:「王駒無罪,而義旗誅之,此是剪除勝己,以絕民望。兄既桓氏黨附,名位如此,欲求免得乎?」駒,愉小字也。謐懼,奔于曲阿。高祖牋白大將軍,深相保謐,迎還復位。光祿勳卞承之、[13]左衞將軍褚粲、游擊將軍司馬秀役使官人,為御史中丞王禎之所糾察,謝牋言辭怨憤。承之造司宜藏。高祖與大將軍牋,白「粲等備位大臣,所懷必盡。執憲不允,自應據理陳訴,而橫興怨忿,歸咎有司。宜加裁當,以清風軌」。並免官。

桓玄兄子歆,[14]聚眾向歷陽,高祖命輔國將軍諸葛長民擊走之。無忌、道規破玄大將郭銓等于桑落洲,[15]眾軍進據尋陽。加高祖都督江州諸軍事。玄既還荊郢,大聚兵眾,召水軍造樓船、器械,率眾二萬,挾天子發江陵,浮江東下,與冠軍將軍劉毅等相遇於崢嶸洲,眾軍下擊,大破之。[16]玄棄眾,復挾天子還復江陵。玄黨殷仲文奉晉二皇后還京師。玄至江陵,因西走。南郡太守王騰之、荊州別駕王康產奉天子入南郡府。初征虜將軍、益州刺史毛璩,遣從孫祐之與參軍費恬送弟喪下,有眾二百。璩弟子脩之時為玄屯騎校尉,[17]誘玄以入蜀。至枚回洲,恬與祐之迎射之。益州督護馮遷斬玄首,傳京師。又斬玄子昇於江陵市。

初玄敗於崢嶸洲,義軍以為大事已定,追躡不速。玄死幾一旬,眾軍猶不至。玄從子振逃於華容之涌中,[18]招聚逆黨數千人,晨襲江陵城,居民競出赴之。騰之、康產皆被殺。桓謙先匿於沮川,亦聚眾以應。振為玄舉哀,立喪廷。謙率眾官奉璽綬于安帝。無忌、道規既至江陵,與桓振戰于靈溪。玄黨馮該又設伏于楊林,義軍奔敗,退還尋陽。

兗州刺史辛禺懷貳。會北青州刺史劉該反,禺求征該,次淮陰,又反。禺長史羊穆之斬禺,傳首京師。十月,高祖領青州刺史。甲仗百人入殿。

劉毅諸軍復進至夏口。毅攻魯城,道規攻偃月壘,皆拔之。十二月,諸軍進平巴陵。

義熙元年正月,毅等至江津,破桓謙、桓振,江陵平,天子反正。三月,天子至自江陵。詔曰:

古稱大者天地,其次君臣,所以列貫三辰,神人代序,諒理本於造昧,而運周於萬葉。故盈否時襲,四靈通其變,王道或昧,貞賢拯其危,天命所以永固,人心所以攸穆。雖夏、周中傾,賴靡、申之績,莽、倫載竊,實二代是維。或乘資藉號,或業隆異世,猶詩書以之休詠,記策用為美談。未有因心撫民,而誠發理應,援神器於已淪,若在今之盛者也。
朕以寡昧,遭家不造,越自遘閔,屬當屯極。逆臣桓玄,乘釁縱慝,窮凶恣虐,滔天猾夏。遂誣罔人神,肆其篡亂。祖宗之基既湮,七廟之饗胥殄,若墜淵谷,未足斯譬。
皇度有晉,天縱英哲,使持節、都督揚徐兗豫青冀幽并江九州諸軍事、鎮軍將軍、徐青二州刺史,忠誠天亮,神武命世,用能貞明協契,義夫響臻。故順聲一唱,二溟卷波,英風振路,宸居清翳。暨冠軍將軍毅、輔國將軍無忌、振武將軍道規,舟旗遄邁,而元凶傳首,回戈疊揮,則荊、漢霧廓。俾宣、元之祚,永固於嵩、岱,傾基重造,再集於朕躬。宗廟歆七百之祜,皇基融載新之命。念功惟德,永言銘懷。固已道冠開闢,獨絕終古,書契以來,未之前聞矣。雖則功高靡尚,理至難文,而崇庸命德,哲王攸先者,將以弘道制治,深關盛衰。故伊、望膺殊命之錫,桓、文饗備物之禮,況宏徵不世,顧邈百代者,宜極名器之隆,以光大國之盛。而鎮軍謙虛自衷,誠旨屢顯,朕重逆仲父,乃所以愈彰德美也。鎮軍可進位侍中、車騎將軍、都督中外諸軍事,使持節、徐、青二州刺史如故。顯祚大邦,啟茲疆宇。

高祖固讓。加錄尚書事,又不受,屢請歸藩。天子不許,遣百僚敦勸,又親幸公第。高祖惶懼詣闕陳請,天子不能奪。是月,旋鎮丹徒。天子重遣大使敦勸,又不受。乃改授都督荊、司、梁、益、寧、雍、涼七州,并前十六州諸軍事,本官如故。於是受命解青州,加領兗州刺史。

盧循浮海破廣州,獲刺史吳隱之。即以循為廣州刺史,以其同黨徐道覆為始興相。

二年三月,督交、廣二州。十月,高祖上言曰:「昔天禍皇室,巨狡縱篡,臣等義惟舊隸,豫蒙國恩,仰契信順之符,俯厲人臣之憤,雖社稷之靈,抑亦事由眾濟。其翼獎忠懃之佐,文武畢力之士,敷執在己之謙,用虧國體之大。輒申攝眾軍先上,[19]同謀起義,始平京口、廣陵二城,臣及撫軍將軍毅等二百七十二人,并後赴義出都緣道大戰,所餘一千五百六十六人,又輔國將軍長民、故給事中王元德等十人,合一千八百四十八人,乞正封賞。其西征眾軍,須論集續上。」於是尚書奏封唱義謀主鎮軍將軍裕豫章郡公,食邑萬戶,賜絹三萬匹。其餘封賞各有差。鎮軍府佐吏,降故太傅謝安府一等。

十一月,天子重申前令,加高祖侍中,進號車騎將軍、開府儀同三司。固讓。詔遣百僚敦勸。

三年二月,高祖還京師,將詣廷尉,天子先詔獄官不得受,詣闕陳讓,乃見聽。旋于丹徒。

閏月,府將駱冰謀作亂,將被執,單騎走,追斬之。誅冰父永嘉太守球。球本東陽郡史,孫恩之亂,起義於長山,故見擢用。初桓玄之敗,以桓冲忠貞,署其孫胤。至是冰謀以胤為主,與東陽太守殷仲文潛相連結。乃誅仲文及仲文二弟。凡桓玄餘黨,至是皆誅夷。

天子遣兼太常葛籍授公策曰:「有扈滔天,夷羿乘釁,亂節干紀,實橈皇極。賊臣桓玄,怙寵肆逆,乃摧傾華、霍,倒拔嵩、岱,五嶽既夷,六地易所。公命世英縱,藏器待時,因心資敬,誓雪國恥,慨憤陵夷,誠發宵寐。既而歲月屢遷,神器已遠,忠孝幽寄,實貫三靈。爾乃介石勝機,宣契畢舉,訴蒼天以為正,揮義旅而一驅。奔鋒數百,勢烈激電,百萬不能抗限,制路日直植城。[20]遂使衝鯨潰流,暴鱗江漢,廟勝遠加,重氛載滌,二儀廓清,三光反照,事遂永代,功高開闢,理微稱謂,義感朕心。若夫道為身濟,猶縻厥爵,況乃誠德俱深,勳冠天人者乎。是用建茲邦國,永祚山河,言念載懷,匪云足報。往欽哉!俾屏余一人,長弼皇晉,流風垂祚,暉烈無窮。其降承嘉策,對敭朕命。」

十二月,司徒、錄尚書、揚州刺史王謐薨。

四年正月,徵公入輔,授侍中、車騎將軍、開府儀同三司、揚州刺史、錄尚書,徐兗二州刺史如故。表解兗州。先是遣冠軍劉敬宣伐蜀賊譙縱,無功而返。九月,以敬宣挫退,遜位,不許。乃降為中軍將軍,開府如故。

初偽燕王鮮卑慕容德僭號於青州,德死,兄子超襲位,前後屢為邊患。五年二月,大掠淮北,執陽平太守劉千載、濟南太守趙元,驅略千餘家。三月,公抗表北討,以丹陽尹孟昶監中軍留府事。四月,舟師發京都,泝淮入泗。五月,至下邳,留船艦輜重,步軍進琅邪。所過皆築城留守。鮮卑梁父、莒城二戍並奔走。

慕容超聞王師將至,其大將公孫五樓說超:「宜斷據大峴,刈除粟苗,堅壁清野以待之。彼僑軍無資,求戰不得,旬月之間,折棰以笞之耳。」超不從,曰:「彼遠來疲勞,勢不能久,但當引令過峴,我以鐵騎踐之,不憂不破也。豈有預芟苗稼,先自䠞弱邪。」初公將行,議者以為賊聞大軍遠出,必不敢戰,若不斷大峴,當堅守廣固,刈粟清野,以絕三軍之資,非唯難以有功,將不能自反。公曰:「我揣之熟矣。鮮卑貪,[21]不及遠計,進利剋獲,退惜粟苗。謂我孤軍遠入,不能持久,不過進據臨朐,退守廣固。我一得入峴,則人無退心,驅必死之眾,向懷貳之虜,何憂不剋。彼不能清野固守,為諸君保之。」公既入峴,舉手指天曰:「吾事濟矣!」

六月,慕容超遣五樓及廣寧王賀賴盧先據臨朐城。既聞大軍至,留羸老守廣固,乃悉出。臨朐有巨蔑水,去城四十里。超告五樓曰:「急往據之,晉軍得水,則難擊也。」五樓馳進。龍驤將軍孟龍符領騎居前,奔往爭之,五樓乃退。

眾軍步進,有車四千兩,分車為兩翼,方軌徐行,車悉張幔,御者執矟。又以輕騎為遊軍。軍令嚴肅,行伍齊整。未及臨朐數里,賊鐵騎萬餘,前後交至。公命兗州刺史劉藩、弟并州刺史道憐、諮議參軍劉敬宣、陶延壽、參軍劉懷玉、慎仲道、索邈等,齊力擊之。日向昃,公遣諮議參軍檀韶直趨臨朐。詔率建威將軍向彌、參軍胡藩馳往,即日陷城,斬其牙旗,悉虜超輜重。超聞臨朐已拔,引眾走,公親鼓之,賊乃大奔。超遁還廣固。獲超馬、偽輦、玉璽、豹尾等,送于京師。斬其大將段暉等十餘人,其餘斬獲千計。

明日,大軍進廣固,即屠大城,超退保小城。於是設長圍守之,圍高三丈,外穿三重塹。停江、淮轉輸,館穀於齊土。撫納降附,華戎歡悅,援才授爵,因而任之。七月,詔加公北青、冀二州刺史。超大將垣遵、遵弟苗並率眾歸順。公方治攻具,城上人曰:「汝不得張綱,何能為也。」綱者,超偽尚書郎,其人有巧思。會超遣綱稱藩於姚興,乞師請救。興偽許之,而實憚公,不敢遣。綱從長安還,泰山太守申宣執送之。及升綱於樓車,[22]以示城內,城內莫不失色。於是使綱大治攻具。超求救不獲,綱反見虜,轉憂懼。乃請稱藩,求割大峴為界,獻馬千疋。不聽,圍之轉急。河北居民荷戈負糧至者,日以千數。

錄事參軍劉穆之,有經略才具,公以為謀主,動止必諮焉。時姚興遣使告公云:「慕容見與隣好,又以窮告急,今當遣鐵騎十萬,逕據洛陽。晉軍若不退者,便當遣鐵騎長驅而進。」公呼興使答曰:「語汝姚興,我定燕之後,息甲三年,當平關、洛。今能自送,便可速來。」穆之聞有羌使,馳入,而公發遣已去。以興所言并答,具語穆之。穆之尤公曰:「常日事無大小,必賜與謀之。此宜善詳之,云何卒爾便答。公所答興言,未能威敵,正足怒彼耳。若燕未可拔,羌救奄至,不審何以待之?」公笑曰:「此是兵機,非卿所解,故不語耳。夫兵貴神速,彼若審能遣救,必畏我知,寧容先遣信命。此是其見我伐燕,內已懷懼,自張之辭耳。」

九月,進公太尉、中書監,固讓。

偽徐州刺史段宏先奔索虜,十月,自河北歸順。[23]

張綱治攻具成,設諸奇巧,飛樓木幔之屬,莫不畢備。城上火石弓矢,無所用之。六年二月丁亥,屠廣固。超踰城走,征虜賊曹喬胥獲之,殺其王公以下,[24]納口萬餘,馬二千疋,送超京師,斬于建康市。

公之北伐也,徐道覆仍有窺窬之志,勸盧循乘虛而出,循不從。道覆乃至番禺說循曰:「本住嶺外,豈以理極於此,正以劉公難與為敵故也。今方頓兵堅城之下,[25]未有旋日。以此思歸死士,掩襲何、劉之徒,如反掌耳。不乘此機而保一日之安,若平齊之後,小息甲養眾,不過一二年間,必璽書徵君。若劉公自率眾至豫章,遣銳師過嶺,雖復將軍神武,恐必不能當也。今日之機,萬不可失。既剋都邑,傾其根本,劉公雖還,無能為也。」循從之,乃率眾過嶺。是月,寇南康、廬陵、豫章,諸郡守皆委任奔走。于時平齊問未至,即馳使徵公。公之初剋齊也,欲停鎮下邳,清盪河、洛,既而被徵使至,即日班師。

鎮南將軍何無忌與徐道覆戰于豫章,敗績,無忌被害。內外震駭。朝廷欲奉乘輿北走就公,尋知賊定未至,人情小安。公至下邳,以船運輜重,自率精銳步歸。至山陽,聞無忌被害,則慮京邑失守,乃卷甲兼行,與數十人至淮上,問行旅以朝廷消息。人曰:「賊尚未至,劉公若還,便無所憂也。」公大喜,單船過江,逕至京口,眾乃大安。四月癸未,公至京師,解嚴息甲。

撫軍將軍劉毅抗表南征,公與毅書曰:「吾往習擊妖賊,曉其變態,新獲姦利,其鋒不可輕。宜須裝嚴畢,與弟同舉。」又遣毅從弟藩往止之。毅不從,舟師二萬,發自姑孰。循之初下也,使道覆向尋陽,自寇湘中諸郡。荊州刺史道規遣軍至長沙,為循所敗。逕至巴陵,將向江陵。道覆聞毅上,馳使報循曰:「毅兵眾甚盛,成敗事係之於此,宜并力摧之。若此克捷,天下無復事矣。根本既定,不憂上面不平也。」循即日發巴陵,與道覆連旗而下。別有八艚艦九枚,起四層,高十二丈。公以南藩覆沒,表送章綬,詔不聽。五月,劉毅敗績于桑落洲,棄船步走,餘眾不得去者,皆為賊所擒。

初循至尋陽,聞公已還,不信也。既破毅,乃審凱入之問,並相視失色。循欲退還尋陽,進平江陵,據二州以抗朝廷。道覆謂宜乘勝徑進,固爭之。疑議多日,乃見從。

毅敗問至,內外洶擾。于時北師始還,多創痍疾病。京師戰士,不盈數千。賊既破江、豫二鎮,戰士十餘萬,舟車百里不絕。奔敗還者,並聲其雄盛。孟昶、諸葛長民懼寇漸逼,欲擁天子過江,公不聽,昶固請不止。公曰:「今重鎮外傾,強寇內逼,人情危駭,莫有固志。若一旦遷動,便自瓦解土崩,江北亦豈可得至!設令得至,不過延日月耳。今兵士雖少,自足以一戰。若其克濟,則臣主同休;苟厄運必至,我當以死衞社稷,橫尸廟門,遂其由來以身許國之志,不能遠竄於草間求活也。我計決矣,卿勿復言!」昶恐其不濟,乃為表曰:「臣裕北討,眾並不同,唯臣贊裕行計,致使強賊乘間,社稷危逼,臣之罪也。今謹引分以謝天下。」封表畢,乃仰藥而死。

於是大開賞募,投身赴義者,一同登京城之科。發居民治石頭城,建牙戒嚴。時議者謂宜分兵守諸津要。公以為:「賊眾我寡,若分兵屯,則人測虛實。且一處失利,則沮三軍之心。今聚眾石頭,隨宜應赴,既令賊無以測多少,又於眾力不分。若徒旅轉集,徐更論之耳。」移屯石頭,乃柵淮斷查浦。既而羣賊大至,公策之曰:「賊若於新亭直進,其鋒不可當,宜且回避,勝負之事,未可量也。若回泊西岸,此成擒耳。」

道覆欲自新亭、白石焚舟而上。循多疑少決,每欲以萬全為慮,謂道覆曰:「大軍未至,孟昶便望風自裁,大勢言之,自當計日潰亂。今決勝負於一朝,既非必定之道,且殺傷士卒,不如按兵待之。」公于時登石頭城以望循軍,初見引向新亭,公顧左右失色。既而回泊蔡洲。道覆猶欲上,循禁之。自是眾軍轉集,修治越城,築查浦、藥園、廷尉三壘,皆守以實眾。冠軍將軍劉敬宣屯北郊,輔國將軍孟懷玉屯丹陽郡西,建武將軍王仲德屯越城,廣武將軍劉懷默屯建陽門外。[26]使寧朔將軍索邈領鮮卑具裝虎班突騎千餘匹,皆被練五色,自淮北至于新亭。賊並聚觀,咸畏憚之;然猶冀京邑及三吳有應之者。遣十餘艦來拔石頭柵,公命神弩射之,發輒摧陷,循乃止不復攻柵。設伏兵於南岸,使羸老悉乘舟艦向白石。公憂其從白石步上,乃率劉毅、諸葛長民北出拒之,留參軍徐赤特戍南岸,命堅守勿動。公既去,賊焚查浦步上,赤特軍戰敗,死沒有百餘人。赤特棄餘眾,單舸濟淮。賊遂率數萬屯丹陽郡。公率諸軍馳歸。眾憂賊過,咸謂公當徑還拒戰。公先分軍還石頭,眾莫之曉。解甲息士,洗浴飲食之,乃出列陳於南塘。以赤特違處分,斬之。命參軍褚叔度、朱齡石率勁勇千餘人過淮。[27]羣賊數千,皆長刀矛鋋,精甲曜日,奮躍爭進。齡石所領多鮮卑,善步矟,並結陳以待之。賊短兵弗能抗,死傷者數百人,乃退走。會日莫,眾亦歸。

劉毅之敗,豫州主簿袁興國反叛,據歷陽以應賊。琅邪內史魏順之遣將謝寶討斬之。興國司馬襲寶,順之不救而退,公怒斬之。順之,詠之之弟也。於是功臣震懾,莫敢不用命。

六月,更授公太尉、中書監,加黃鉞。受黃鉞,餘固辭。以司馬庾悅為建威將軍、江州刺史,自東陽出豫章。

七月庚申,羣賊自蔡洲南走,還屯尋陽。遣輔國將軍王仲德、廣川太守劉鍾、河間太守蒯恩追之。公還東府,大治水軍,皆大艦重樓,高者十餘丈。盧循遣其大將荀林寇江陵,[28]桓謙先於江陵奔羌,又自羌入蜀,偽主譙縱以為荊州刺史。謙及譙道福率軍二萬,出寇江陵,適與林會,相去百餘里。荊州刺史道規斬謙于枝江,破林於江津,追至竹町斬之。

初循之走也,公知其必寇江陵,登遣淮陵內史索邈領馬軍步道援荊州。又遣建威將軍孫季高率眾三千,自海道襲番禺。江州刺史庾悅至五畝嶠,賊遣千餘人據斷嶠道,悅前驅鄱陽太守虞丘進攻破之。公治兵大辦。十月,率兗州刺史劉藩、寧朔將軍檀韶等舟師南伐。以後將軍劉毅監太尉留守府,後事皆委焉。

是月,徐道覆率眾三萬寇江陵。荊州刺史道規又大破之,斬首萬餘級,道覆走還盆口。初公之遣索邈也,邈在道為賊所斷,道覆敗後方達。自循東下,江陵斷絕京邑之問,傳者皆云已沒。及邈至,方知循走。

循初自蔡洲南走,留其親黨范崇民五千人,高艦百餘,戍南陵。王仲德等聞大軍且至,乃進攻之。十一月,大破崇民軍,焚其舟艦,收其散卒。

循廣州守兵,不以海道為防。是月,建威將軍孫季高乘海奄至,而城池峻整,兵猶數千。季高焚賊舟艦,悉力而上,四面攻之,即日屠其城。循父以輕舟奔始興。季高撫其舊民,戮其親黨,勒兵謹守。初公之遣季高也,眾咸以海道艱遠,必至為難;且分撤見力,二三非要。公不從。敕季高曰:「大軍十二月之交,必破妖虜。卿今時當至廣州,傾其巢窟,令賊奔走之日,無所歸投。」季高受命而行,如期剋捷。

循方治兵旅舟艦,設諸攻備。公欲御以長算,乃屯軍雷池。賊揚聲不攻雷池,當乘流逕下。公知其欲戰,且慮賊戰敗,或於京江入海,遣王仲德以水艦二百於吉陽下斷之。十二月,循、道覆率眾數萬,方艦而下,前後相抗,莫見舳艫之際。公悉出輕利鬭艦,躬提幡鼓,命眾軍齊力擊之。又上步騎於西岸。右軍參軍庾樂生乘艦不進,斬而徇之。於是眾軍並踊騰爭先。軍中多萬鈞神弩,所至莫不摧陷。公中流蹙之,因風水之勢,賊艦悉泊西岸。岸上軍先備火具,[29]乃投火焚之,煙爓張天,賊眾大敗,追奔至夜乃歸。循等還尋陽。初分遣步軍,莫不疑怪,及燒賊艦,眾乃悅服。召王仲德,請還為前驅。留輔國將軍孟懷玉守雷池。循聞大軍上,欲走向豫章,乃悉力柵斷左里。大軍至左里,將戰,公所執麾竿折,折幡沈水,眾並怪懼。公歡笑曰:「往年覆舟之戰,幡竿亦折,今者復然,賊必破矣。」即攻柵而進。遁兵雖殊死戰,弗能禁。諸軍乘勝奔之,循單舸走。所殺及投水死,凡萬餘人。納其降附,宥其逼略。遣劉藩、孟懷玉輕軍追之。循收散卒,尚有數千人,逕還廣州。道覆還保始興。公旋自左里。天子遣侍中、黃門勞師于行所。

校勘記 <references>

  1. 彭城縣綏輿里人 各本並奪去「輿」字。御覽一二八引徐爰宋書作「彭城綏輿里人」。符瑞志中附會祥瑞,云:元嘉二十一年,「甘露降彭城綏輿里」。南史亦有「輿」字。今據補。
  2. 恩以彭排自載 「彭排」各本並作「鼓排」。御覽三五七引晉安帝紀作「彭排」,今據改。王鎮惡傳亦有「見軍人擔彭排戰具」語,釋名:「彭排,彭,旁也。在旁排敵禦攻也。」
  3. 領水軍追討至鬱洲 「討」各本作「罰」,據元龜一八四改。通鑑亦作「討孫恩於鬱洲」。
  4. 高祖與牢之甥東海何無忌並固諫不從 「諫」各本並作「請」,據南史改。
  5. 憑之從子韶韶弟祗隆道濟 各本不疊「韶」字,又「道濟」上有「與叔」二字。孫虨宋書考論云:「祗、隆、道濟並韶弟,依文義當疊『韶』字。」今據孫說補。張熷讀史舉正云:「韶、祗、道濟並兄弟,此云『與叔』,誤。」今據張說刪。
  6. 東莞臧熹 「熹」各本並作「喜」,據臧質傳改。
  7. 既而嫌邁不執安穆使得逃去 「嫌」各本並作「廉」,據通鑑晉安帝元興三年改。
  8. 玄又遣武騎將軍庾禕之 晉書桓玄傳作「武衞將軍庾頤之」。
  9. 立留臺官 三朝本、毛本作「立留臺官」。北監本、殿本、局本作「立留臺總百官」。通鑑作「立留臺百官」。按時晉安帝尚在尋陽,故建康稱留臺。據下文眾欲推劉裕領揚州,裕固辭,則此時劉裕必無總百官之事。以此知作「總百官」者,誤。
  10. 尚書王嘏率百官奉迎乘輿 「王嘏」各本並作「王假」,據南史及通鑑改。晉書王導傳:「嗣孫嘏,歷領軍、尚書。」
  11. 領軍將軍徐州刺史 御覽一二八引徐爰宋書、魏書島夷劉裕傳、建康實錄並作「鎮軍將軍」。孫虨宋書考論云:「領軍與都督刺史異職,晉書及宋本紀同卷後進位侍中詔皆作『鎮軍將軍』,則都督刺史加號也。當從之。然高祖時蓋兼領軍,南史書領軍在徐州刺史下。」
  12. 由是王謐等諸人時失民望 「時失民望」,北監本、殿本作「時眾民望」。三朝本、毛本、局本作「時失民望」。李慈銘宋書札記云:「當作時失人望」。今從三朝本、毛本、局本。
  13. 光祿勳卞承之 「卞承之」各本並作「丁承之」。據晉書桓玄傳改。按通鑑晉安帝義熙三年殺殷仲文時,並誅卞承之,蓋即其人。
  14. 桓玄兄子歆 「兄子歆」各本並作「兒子韶」。據通鑑晉安帝元興三年改。
  15. 道規破玄大將郭銓等于桑落洲 「郭銓」各本作「鄭鈐」,舊本臨川王道規傳(新本已改正)及御覽一二八引徐爰宋書作「郭鈐」,本書劉懷肅傳及晉書桓玄傳、通鑑作「郭銓」。按作「郭銓」是,今改正。
  16. 眾軍下擊大破之 「眾軍」各本並作「眾驚」,據元龜一八四改。
  17. 璩弟子脩之時為玄屯騎校尉 「脩之」各本並譌「循之」,據南史及通鑑改。
  18. 玄從子振逃於華容之涌中 「涌中」各本作「浦中」,據南史及晉書桓彝傳曾孫振附傳改。按杜預左傳莊十八年注:「涌水在南郡華容縣。」水經江水注:「江水又東,涌水注之。水自夏水南通於江,謂之涌口。」
  19. 輒申攝眾軍先上 「申」字三朝本空白,各本作「輒攝眾軍」,不空白。今據元龜一八四補。
  20. 制路日直植城 句有譌。
  21. 鮮卑貪 南史作「鮮卑性貪」。通鑑作「鮮卑貪婪」。
  22. 乃升綱於樓車 「樓車」各本並作「樓上」,據通鑑改。
  23. 十月自河北歸順 各本並無「自」字。通鑑晉義熙五年作「段宏自魏奔於裕」。孫虨宋書考論云:「河北上當有自字」。按孫說是,今補。
  24. 殺其王公以下 「王公」各本作「亡命」,據南史、元龜一八四、通鑑晉安帝義熙六年改。
  25. 今方頓兵堅城之下 「頓」各本並作「領」,據建康實錄、通鑑晉安帝義熙六年改。
  26. 廣武將軍劉懷默屯建陽門外 「劉懷默」各本並作「劉默」,據晉書安帝紀、建康實錄補。懷默見劉懷慎傳。
  27. 命參軍褚叔度朱齡石率勁勇千餘人過淮 「褚叔度」各本並譌「諸葛叔度」。據通典兵典改。又見本書褚叔度傳,時為中軍諮議參軍。
  28. 盧循遣其大將荀林寇江陵 臨川王道規傳作「荀林」。晉書姚興載記及通鑑作「苟林」。今本書一律作「荀林」。
  29. 岸上軍先備火具 各本並奪「岸」字,據南史、通典兵典、通鑑晉安帝義熙六年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