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과 그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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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시대의 총아(寵兒) 리스트는 일찍이 쇼팽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쇼팽의 용자(容姿)를 한 번 접견(接見)한 사람치고 어느 누구도 나팔꽃을 연상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손가락 한 개만 대더라도 곧 시들어버릴 듯이 섬약(纖弱)하면서도 오히려 향훈(香薰)이 높고 마치 성배(聖杯)를 받든 듯이 고귀하고 청정한 나팔꽃이야말로 아름다운 쇼팽을 상징했다고 비유할 만하다.”고.

또 베를리오즈도 자기 친우에게 이같이 말한 일이 있습니다.

“쇼팽을 한 번 만나 보게. 아마 자네는 지금까지 이런 풍채와 용자를 가진 사람은 만난 일이 없을 것일세. 한번만 본다면 그 인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일세” 하고.

사실상 그의 화사(華奢)하고도 늠연(凜然)한 체격이라든지, 세련된 귀족적 태도라든지, 또 그의 시인적 기질이라든지, 사람을 매혹하는 듯한 미성(美聲)이라든지, 그 위에 화미(華美)한 피아노의 연주풍(演奏風)이나 그의 아름다운 작곡들을 통해서라도 쇼팽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숙녀 귀부인들의 선망과 찬탄의 목표가 될 만한 전형적 남자였으며, 또 그는 비상히 예의를 존중하여 의복은 언제나 호사에 가까웠으며, 자기의 거실이나 연습실 같은 것은 비용의 다과(多寡)를 불문하고 호화로이 장식했으며, 그 외에 금단추 유(類)나 금식(襟飾)이나 단장과 구두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용의주도(用意周到)하여 어떠한 고귀한 사람들과 교제할 때라도 그는 무상(無上)의 호감을 살 수가 있었으며, 특히 상류사회의 부녀자들과의 교제에 있어서는 꿀과 같이 달콤한 말과 장미의 향기 속에 파묻혀 지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쇼팽은 모든 작곡가들 중에서도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나, 또는 받는 데 있어서나 가장 적당한 자격을 갖추어 가진 모범적 연인(戀人)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쇼팽은 비록 그의 짧은 일생일지라도 수많은 연인을 가졌을 것이며 여기에 따르는 애달픈 로맨스도 적지 않을 것이지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가 한번도 자기의 사랑을 신의 제단 앞에까지 가져가지는 못햇음을 볼 때 그도 또한 재자(才子)로서의 기박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쇼팽의 연애는 그의 외유(外遊)하던 소년시대에서 비롯했습니다. 1829년 그가 19세 되던 해에 그는 고국 폴란드를 떠나서 오스트리아의 서울 비엔나로 갔습니다. 그 시대의 쇼팽은 실로 다정다감하여 하루저녁에 연인을 얻기도 했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벌써 전연 모를 타인이 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비엔나로 가던 다음해에 고국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보도를 듣자,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 음악가는 곧 귀국하여 혁명군에 투신할 결심이었으나, 본시 섬약한 여성적인 쇼팽은 자기 부모의 애원에 가까운 권고에 못 견디어 이것을 단념하기는 했지마는, 그러나 애국의 정열만은 끊임없이 발동하여 그는 유명한 〈혁명의 에튀드〉까지 작곡한 것입니다. 그가 최초의 연인 레오폴디네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처음으로 비엔나를 방문한 직후의 일입니다. 레오폴디네는 당시 17세의 소녀로 쇼팽을 제1류의 예술가라고 상찬(賞讚)해준 비엔나의 신문기자의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끝났는지,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지마는 쇼팽이 이 소녀와 이별하게 된 때에 그는 몹시 슬퍼했고, 또 그 소녀도 자기의 연인과의 별리가 심히 애석하여 자작의 소곡(小曲)을 정사(情寫)하여 기념으로 그에게 보냈다는 것만이 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 진가(眞假)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그가 비엔나로 가던 때를 전후하여 알게 된 콘스탄치아 크라드코브스카와의 연애가 그의 초련(初戀) 이야기로 더 유명하니, 물론 쇼팽의 연애사에 있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조르주 상드와의 교정(交情)이 그 제1위를 차지할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지마는, 그러나 콘스탄치아와의 로맨스도 역시 대작곡가의 심흉(心胸)에 한때는 비상한 정염(情炎)을 일으켜서, 그의 전반생(前半生)을 통하여 가장 크고 아픈 추억의 씨를 심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콘스탄치아는 바르샤바 음악학교의 학생으로 아리따운 소프라노 가수였던 바, 부녀자를 감상하는 데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은 리스트도 이 여자를 한 번 보자 “사랑스런 어여쁜 소녀”라고 칭찬한 바이지만, 쇼팽 역시 어떤 음악회 석상에서 그와 초대면을 한 후부터는 젊은이의 혈조(血潮)가 불타듯 하는 자신의 정열을 그 소녀에게 경주(傾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섬약하고 수줍은 여성적 성격의 소유자인 쇼팽으로서는 내심의 불타는 정염을 한 번도 발표해 보지 못한 채, 반년이나 되는 세월을 오직 혼자서 오뇌와 고심과 수치와 주저 중에서 애태우고 지냈으니, 어떤 날 그가 자기 친구인 보이체코프스키에게 써 보낸 편지의 1절을 읽음으로써, 그의 심경을 족히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 이것은 내게 대해서 차라리 불행일는지도 모르지만 ── 이미 충실하게 또한 진지하게 섬겨가려고 생각하는 이상(理想)의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크라드코브스카 양을 알게 된 지도 벌써 6개월이나 되는 바, 매일매야 심중으로는 그의 앞으로 뛰어가지 않은 때가 없지만, 아직 한 번도 그 여자와 면담한 일은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그 여자와 함께 있을 동안에 나는 내 협주곡의 아다지오(제 2악장)를 작곡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여자를 명상하고 있으려니까, 영감이 샘솟듯 하므로 한 개의 원무곡을 지었습니다. 이것을 이 글과 함께 증정합니다.”

이 편지 중에 말한 협주곡이란 세상에서 ‘초련(初戀) 콘체르토’란 별명으로 유명한 〈Concerto in F Minor〉요, 원무곡이란 〈Waltz in D flat(op.70)〉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드러내어 발표할 수 없는 자기의 연정에 사로잡힌 바 되어 사랑을 성취시켜서 조국에 묻힐까, 사랑을 버리고 타향의 넓은 세계로 뛰어나갈까, 실로 방황 미결(未決)하고 지내더니, 그는 드이어 장지(壯志)를 품고서 일찍이 자기 친우를 통하여 그 여자에게 “죽더라도 나의 불탄 재(灰)는 그대의 발 아래 뿌리리라"고 맹세한 말도 잊어버린 듯이 1830년 11월에 고향산천에 영별(永別)의 인사를 고하고서, 악상(樂想)이 충일(充溢)해 있는 머리와 기술이 유여(有餘)한 쌍수(雙手)를 유일의 무기로 하여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다시 그 영자(英姿)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악재(樂才)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하고, 그의 명성이 일세(一世)를 풍미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련의 애달픈 기억만은 잊을 길이 없어서, 그는 비엔나의 도착한 후 처음으로 쓴 그의 일기에,

“그 여자의 자태가 내 눈앞에 어린다. 나는 벌써 그를 잊어버린 셈치고 있건만, 그러나 그의 모습은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고 하였고, 이 일기를 쓴 지 6년이 지난 1837년 6월에 파리에서 쓴 일기 중에,

“콘스탄치아, 콘스탄치아! 그의 형자(形姿)는 사라졌다가도 또다시 어렴풋이 떠오르는 달과 같이 내 눈 앞에 미소를 보여준다. 오오, 내 가슴 속에 잠들 콘스탄치아!”

라고 적혀 있음을 보더라도 콘스탄치아에게 향한 그의 짝사랑의 상흔(傷痕)이 얼마나 심각했는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방(一方) 콘스탄치아의 태도는 어떠했을는지? 그 여자 역시 쇼팽의 사랑을 감지하고 그를 사랑했었는지, 여기 대해서는 전연 불명(不明)입니다. 그러나 쇼팽 자신의 서간이나 일기를 종합해 보더라도 쇼팽이 그 여자를 일부러 왕방(往訪)한 일은 한 번도 없었고, 또 그 여자가 쇼팽의 심중을 감득(感得)하지 못했던 것도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난 지 2년 후인 1832년에 그 여자는 필경 타인의 소유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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