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A는 같은 편집실의 젊은 동료이었다. 평소의 친절을 두터운 우정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하였던 것이 우정의 한계를 넘어 돌연히 사랑의 고백이 되었을 때 유라는 현혹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그의 친절이 별안간 치장된 함정같이 생각되어서 유라는 황급히 신변을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태도와 눈치가 진하면 진할수록 쌀쌀하게 몸을 지녔다. 이것이 도리어 그의 부당한 반감을 사게 되어 마침내 절교까지에 이르렀다. A는 얼마 안되어 사를 물러가게 되었으나 그후 유라는 일신에 관한 대중없는 중상과 소문을 자주 들을 때마다 그것이 A의 유언의 소치나 아닌가 하고 우울한 날이 많았다. 일면 팔침을 맞았을 때의 남자의 계염과 천려를 슬퍼하고 민망히도 여겼다.
그러나 일단 같은 지붕밑 편집실을 나가버린 사람이니 차차 교섭이 엷어짐을 따라 A와의 사이는 완전히 청산되어 버렸으나 그보다 더 추근추근하고 귀찮은 것이 B였다. B역 A가 가버린 후의 편집실의 동료이었다. 일단 가정에 풍파를 겪는 중년의 신사요, 과거의 빛나던 투사인 그를 유라는 선배로 섬기는 마음으로 일상 경대하였다. 유라는 경대하던 그 선배를 경원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동기는 물론 그 선배가 가져온 것이다. 선배는 사상적 지도를 칭탁하고 마침내 유라의 마음의 문까지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가진 열쇠는 유라에게는 맞지 않았다. 감정의 문은 사상만으로는 열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눈으로부터 드는 것이니 유라의 눈을 정복하기 전에는 구슬보다 더 아름다운 지혜를 가지고 와도 하릴없는 것이다. 지도의 「호의」를 유라는 도리어 귀찮게 여기에 되었다. 달마다의 잡지에 B가 수필을 이름삼아 가지가지의 암시와 비유를 들어 구애의 도구를 삼는 것이 유라에게는 말할 수 없이 낯 간지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익명으로 가끔 날아드는 기다란 편지였다. 그 속에서 B는 연연한 글자로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드디어 유라를 직접 찾아오게까지 되었다.이렇게까지 되면 유라도 굳은 태도로 냉정하게 몸을 지닐 수밖에는 없었다. 눈치까지 무시하고 둔갑하게 구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선명하게 차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A와 똑같은 경우를 일으켰다. B의 소치인 듯한 가지가지의 중상과 소문이 유라의 신변에 빗발치듯 날았다. 소문 속에 인물의 한 사람이 C―아내가 고향으로 내려갈 대 정거장 차 속에서 나에게 소개한 유라의 동료였다. 유라와 C와의 교우 관계라고도 할 것이 시작된 것은 마침 유라와 B와의 옥신각신이 있은 전후였던 것이다. 사 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유라를 항상 막아주고 지켜주는 사람이 C라는 것을 유라는 전에도 누차 나에게 전하여 주었던 듯하다. B와 C는 책상을 나란히 한 같은 방안의 동료인고로 B의 샘과 비난이 유라와 C와의 관계로 집중되고 과장되었음은 자연의 형세였다.
유라의 이야기는 이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귀에도 유라들의 소문은 또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도 자꾸 들렸다. 유라는 웬일인지 C와의 소문을 즐겨하지 않았다. 유라의 약한 성격이 여기에도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소문이란 게 염스럽고 바람결같이 허황한 것임을 모르는 것이 아닐 터이니 사실이 소문 이상이든 이하이든 있는 대로의 것을 긍정하여 마음의 자유대로 말달리는 것이 더 양심적이 아닌가. 사회는 이해관계가 엷을 때 개인의 연애생활까지 손찌검할 염치는 없는 것이다. 개인의 연애생활을 도마 위에 올려 난도질하여 비판함이 반드시 그 사람의 양심적 생활을 지도함을 안되는 것이다. 유라는 샘과 억지 많은 세상에 대하여 조금도 그의 사생활을 겸양하고 희생할 필요는 없었다. 하물며 나에게까지 대하여서랴. 유라는 나에게 대하여서도 C와의 관계를 얼버무리고 간간이 희생까지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다따가 영화구경 가기를 청하였을 때 유라는 선뜻 승낙은 하였으나 그 어디인지 걱정의 표정이 보였다. 그러나 물론 약속한 시간에 어김없이 오기는 왔다.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같이 상설관까지 갔다. 거기에서 나는 의외에도 혼자 앉아 있는 C를 발견하였다. 유라도 C를 돌연히 발견한 듯한 표정을 가졌던지 안 가졌던지까지는 살피지 못하였으나 세 사람의 사이는 확실히 한참 동안 어색하였다. 생각컨대 나의 청을 들었을 때의 유라의 걱정스럽던 표정은 C와의 약속을 생각한 결과인 듯하였다. 그러나 먼저 C와의 약속을 한 것이라면 나의 청을 시원히 차버리면 그만이 아닌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거리를 걸어가 약속한 C를 목적지에서 거북스럽게 만나는 것보다는 도리어 나의 약속을 거절하고 시원히 처음부터 C와 같이 가서 몇시간을 즐기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가. 나에게 겸손하여 도리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말살할 필요가 있었던가.
나는 그러한 경우의 유라의 심중을 이해할 수 없다. 이때뿐이 아니었다. 수시로 거리를 거닐 때나 찾점을 찾을 때는 별것으로 하고 무용발표회를 구경갔을 때난 작가들의 원고 전람회인지를 보러 갔을 때에도 일껏 같이 가기는 하였으나 유라의 태도에는 서먹서먹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있었다.
하루는 밤 늦도록 거리를 거닐다가 백화점에 들렀다. 유라의 권고도 있었고 하여 넥타이를 사려는 것이었다. 수효뿐이지 변변한 넥타이는 하나도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제가 골라 드리지요 하고 유라는 넓은 넥타이의 폭포 속에서 손쉽게 하나를 골라냈다. 검은 빛깔에 붉은 줄이 은은히 섞인 사치하면서도 결코 속되지 않은, 몸에 조화되고 취미에 맞는 넥타이였다. 맬수록 몸에 어울리고 마음에 들었다. 카페에서는 안목 높은 여급이 「썩」이라는 형용사를 써서 기품있는 색조를 칭찬하였다.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나는 훌륭한 감각과 세련된 안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유라의 세련된 취미의 일부분을 빌어 내 몸을 치장한 셈이었다. 유라와 같이 거리를 거닐 때의 경우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유라는 거리에서 나의 몸을 치장하는 넥타이의 구실을 한 셈이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유라로서는 몸치장 구실을 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그의 생활을 살리는 것이 정당하지 않았던가.
허황된 소문을 극도로 싫어한 탓이었다면 하필 C와의 소문만을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었던가. 유라와 나와의 동행을 거리에서 자주 목격한 신문사 여기자가 그것을 글거리로 유라를 조롱하였다는 사실을 유라는 나에게 거북하였다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그를 톡톡하게 반박하여 주었다고 하면서 웃음을 머금고 뒤슬뒤슬 이야기하였던 것이다. 어느 날 유라가 내게 와서 저녁 고기를 도마위에 난도질할 때 나의 동무가 찾아왔다. 소문이 나려면 그때와 같이 공교로운 기회는 없었으나 유라 자신은 그것을 그다지 걱정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았으나 무슨 까닭인지를 알 수 없다. 유라는 본말을 거꾸로 하고 줄기와 가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C와의 탄로를 걱정하면 할수록 일은 더 틀어지고 생각지 않은 곳으로 야단스럽게 빗나가 버렸다. B의 과장된 샘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이 관계를 중심으로 하고 한 폭의 의외의 사건이 일어났다. 유라를 심중에 두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으니 D였다. 운동의 전선에서 완전히 탈락한 후 하는 일 없이 거리로 돌아다니며 기적적으로 살아가는 사나이였다. 거리의 소문을 전하고 가십을 만드는 것이 일일까. 과거의 동무들은 그를 이용하려고 하는 외에는 대개 위험시하고 멀리하였다. 표면으로는 그 역시 「지도」를 핑계삼아 유라의 신변을 그림자와도 같이 항상 굼실굼실 싸고 돌았다. B와도 물론 과거의 동무는 동무였으나 혼자 마음속으로는 유라를 둘러싼 사랑의 적수인 까닭에 유라에게 대한 B의 책동을 은근히 질시하며 그것을 기회로 B를 함정에 빠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마침 한 사람의 동지가 나타났으니 E였다. 당시 합법운동의 최고 간부의 한 사람인 E를 D는 얼마간 존경한다면 존경하는 터였고 B도 일단 탈락한 몸이라 그에게 대하여 떳떳이 고개를 쳐들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E가 돌연히 얼기설기 얼크러진 사건의 그물 속으로 불쑥 뛰어 들어오게 된 것은 아직 C의 자태가 표면에 선명히 드러나기 전 B와 유라의 관계만이 뚜렷할 때였다. 잘 지도하면 쓸만하다고 생각한 것이 즉 다시 말하면 유라를 「지도」하겠다는 것이 E의 용감한 간섭의 첫째 이유였고 둘째 목적은 탈락된 B의 행동을 따갑게 책망하여 그의 길을 바로 잡자는 것이었다. 유라와 나에게서 B와의 관계 일체를 들은 후 대책을 강구하고 전술을 세우려고 E와 D는 나의 방에서도 자주 만났다.
나는 유라를 막으려는 그들에게 단간의 셋방을 때때로 제공하기를 아낄 필요는 없었다. 어떤 때에는 유라까지 합쳐 네 사람이 좁은 방안에서 만나게 되는 수도 있다. 배짱이 서고 기회가 익은 하루 아침, D는 드디어 잡지사로 달려가 과거의 교우관계와 모든 의리 일체를 신짝같이 집어던지고 한 사람의 벌거벗은 영웅으로서 B 앞에 늠름히 나타났다. B의 허물을 꼬집어 내고 행동을 탄로하여 대경실색한 B를 사정없이 우겨댔다. 세밀히 조사된 재료의 무기로 빈틈없이 난도질한 것이다.
옆에는 유라도 있었을 터, 편집실 안은 별안간의 폭풍우에 발끈 뒤집혔다. B와 D는 마침내 폭력을 가지고 서로 어울려 의자가 날고 주먹이 부딪쳐 편집실은 일장의 수라장이 되었다. 때를 살펴 E가 뛰어갔다. B는 의외의 곳에서 뛰어드는 불의의 공격에 허전허전 힘을 잃고 완전히 넘어진 셈이었다. 소문은 거리에 쫙 날리고 B의 얼굴에는 옳든 그르든 한 모개의 진흙이 꺼얹혀졌다. 사회적으로 와싹 부숴버리려던 E의 소망은 어느 정도까지 공을 이루었고 속사랑의 적수를 쳐버린 D의 심중도 어지간히 유쾌하였다. B는 다음날부터 사를 쉬었다.그의 진퇴문제까지 논의되었다. 물론 D들에 대한 그의 미움은 컸고 한편 유라에게 대한 술책도 어금니를 더욱 날카롭게 하였다. 유라도 사건의 중심인물인 만큼 그 스스로 출근을 부끄러워하여 겸양하는 날이 많았으나 주간의 두터운 호의로 하여 그의 퇴사는 극력 만류를 당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유라와 E들의 사이는 확실히 더 가까와는 갔다. 그것이 애초부터의 E의 소망이었으나 단독으로 혹은 같이들 만나는 날이 많았다. E가 유라를 「지도」하려는 본인의 흑백은 하늘만이 아는 노릇이다. 한편 유라에게 대한 B의 공격은 더한층 날카로와지고 적극적이었다. 그의 전면공격은 유라의 C와의 관계의 탄로로 집중되었다. 이것이 유라의 아픈 곳이었다. 드디어 사건은 사건을 낳았다.
유라와 C와의 숨은 생활이 폭로되었음을 물론이어니와 C에게 관한 자세한 속사정까지 겉에 드러나게 되었다. D 자신 가끔 유라의 숙소를 살피고는 C와의 생활을 추측하여 말하게 되고 E는 E로서 또한 여러 가지 들리는 말을 재료삼아 유라의 생활을 유심히도 캐내고 감시하게 되었다. 이 사이에 있어 유라에게 약간이라도 걸림이 있는 F G H ……여러 인물의 호기심과 책동으로 말미암아 C의 가장 아픈 상처까지 드러나게 되었다.
C에게는 수학시대의 그를 도와까지 준 조강지처가 있었던 것 이상 소문을 무시하고 여론을 멸시하여 실속 있는 생활을 적극적으로 살림이 더 뜻있지 않았을까. 어줍지 않은 여론의 총아가 되고 착한 시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생활의 악마가 되었더면 유라의 살림은 한층 빛났을 것이다. 이러한 권고는 쓸데없는 나의 역설이고 하릴없는 감상에 지나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