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평선 너머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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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여보, 나 차를 한 잔 진하게 끓여주.”
신경서 사흘을 불면불휴로 활동을 하고 어제는 밤새도록 서인준이라는 괴상한 청년과 기차에서 이야기를 하느라고 한잠도 못 잔 필호는 집에 돌아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곧 깨었다.
젊은 안해의 끓여다 주는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조반을 되는 대로 먹은 뒤에는 필호는 그새의 경과도 보고도 할 겸하여 옷을 갈아입고 무거운 머리를 앞으로 늘이고 서에까지 나왔다.
서에 들어가서 주임에게 그 새 신경에서의 경과를 대략 보고하고 도로 집으로 나와서 낮잠이라도 한잠 자려고 나오려 할 때 주임이 필호를 불렀다.
“왜 부르셨읍니까?”
필호가 곤한 몸을 의자 위에 내어던지며 이렇게 물으매 주임은 목소리를 작게 하여
“여보게 자네 윤 백작 댁 알지?”
하고 물었다.
“윤 백작이란─ × 동 윤찬두 씨 말씀이지요?”
“그래.”
“네, 집은 압니다.”
“거기 이제 좀 가 봐 주게.”
“왜 무슨 사건이라도 생겼읍니까?”
“아니, 알 수 없는 일이 있어. 오늘 새벽 두 시쯤 그 집 후당 근처에서 단총 소리가 몇 번 나는 것을 그때 순행하던 순사도 들었고 그 근처의 주민들도 분명히 들었는데 백작 댁에서는 아무 보고도 없을 뿐 아니라 아까 미심끼로 그런 일이 없었느냐고 전화를 해보니깐 펄펄 뛰면서 부인하거든. 그런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경찰에 알려야 할 터인데 알리지 않을 뿐더러 사건을 전연 부인해 버릴랴니 무슨 중대한 비밀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지만 백작 댁은 보통 집과 달라서 함부로 들어가서 질문을 하든가 할 수는 없고─ 상당히 예를 써 갖추어서 완곡히 알아봐야 할 터인데 그럴 만한 수완을 가진 사람이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서 자네게 부탁하네. 곤하겠지만 어디 한번 가서 알아봐 주게.”
“네….”
필호는 몽롱히 대답하였다. 머리를 집중하여 보려 하였다. 이런 일에는 어떤 순서로 알아보아야 할지 생각하여 보려 하였다. 그러나 잠에 취한 위에 억지로 커피로써 흥분시킨 그의 머리는 산산히 헤어질 뿐이었다.
“두 시쯤요?”
“응.”
“단총 소리는 몇 번이구요?”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라데!”
“너덧 번이라… 너덧 번이라… 좌우간 가 보지요.”
이렇게 승낙을 하고 필호는 서를 나섰다.
유난히도 누렇고 붉은 날씨였다. 겨울에서 봄철을 들어서려는 절기─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면 명랑하고 밝은 날씨지만 졸음에 취하고 피곤에 취한 필호에게 있어서는 붉고 누렇고 침침한 날씨였다.
꿈결같이 거리를 왕래하는 인파들을 보면서 필호는 졸음 때문에 연하여 눈물이 나오는 눈을 연방 문지르면서 윤 백작의 광대한 저택이 있는 × 동으로 향하여 무거운 발을 옮기고 있었다.
오늘 새벽 두 시라 하면 그때는 자기는 황주(黃州) 근처를 통과하는 기차 안에서 서인준과 농담 아닌 농담을 교환하고 있을 그때일 것이다. 자기와 이렇듯 유기적으로든 무기적으로든 관련이 먼 일에까지 일종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필호는 연하여 혀를 채었다. 졸음과 피곤에 취한 그에게는 아무것도 모두 귀찮았다. 허든허든 다리를 내어짚을 때마다 골치에 울리는 역한 통감이 그로 하여금 귀찮은 느낌을 더하게 하였다.
“즈쯔우니 노신(頭痛にノ─ツソ─ 두통에 노─신)─ 노─ 신이나 한 봉 사 먹어 볼까.”
약방 앞을 지나면서 필호는 노─신을 사서 그 자리에서 두 봉을 먹었다.
윤 백작은 금년 팔순에 가까운 노인이었다. 그 전반생을 지방 방백으로 돌아다니며 누거만의 재산을 모은 윤 백작이니만치 백작에게 대한 세상의 평판은 구구하였다. 이전에 학정을 많이 하니만치 악평도 꽤 많은 반면에 호활한 신경의 주인으로서 그 많은 재산을 소위 자선 사업에도 꽤 뿌려 놓았으므로 자선가라는 명목도 일부 사회에서는 듣고 있는 노백작은 인제는 세상의 모든 고락을 다 맛본 한 없는 여생을 자기 집 후원에 따로 지은 후당에서 충복 한 사람을 데리고 한가로이 지내면서 세상사에는 일체 간섭치 않고 운학이나 희롱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지금 윤 백작의 집을 대표하는 사람은 백작의 외아들이요 금년에 서른한 살 나는 윤찬두였다. 동경제국대학의 법학사라는 학위와 ‘캠브리치’의 경제학 박사라는 학위를 가진 고등한 교양의 주인 찬두는 또한 거기 적당한 인격과 품격을 가진 젊은이였다.
×× 서 형사 이필호가 그의 임무를 띠고 찾은 것은 노백작이 아니고 찬두였다.
소위 화양 절충식이라는 건축 양식을 피하고 순전히 영국 귀족의 저택을 본받아 지은 찬두의 집 현관에서 필호가 하인의 인도로써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서 응접실로 들어갈 때는 사람 방문에 그다지 손서툴지 않은 필호였지만 좀 어마어마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한참을 필호는 응접실서 기다렸다. 십 분 십오 분─ 졸음과 피곤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필호에게는 오래 기다리는 것이 역하지도 않았다. 평안한 쿠션에 푹 박혀서 몽롱히 눈을 감고 조을고 있었다.
드디어 문소리가 났다. 눈을 번쩍 떠 보니 들어오는 사람은 역시 하인이었다.
“좀 몸이 불편하시다고 침실로 잠시 오시랍니다.”
몸이 불편하여 여기까지 내려오기가 싫으니 침실까지 올라오라는 뜻이었다. 필호는 말없이 하인의 뒤를 따랐다.
필호가 찬두의 침실에 이른 때는 찬두는 침대에 누워서 담배를 붙여 물고 있었다. 찬두는 담배를 붙여 문 채 방문객에게 대한 예의로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러나 조금 일으킬 뿐 더 일으키지도 않고 더 눕히지도 않고 멍하니 방문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기괴한 표정이 나타났다.
“실례합니다.”
필호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였다.
그 인사에 대하여 찬두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이것은 필호에게 있어서는 의외의 질문이었다. 아까 명함을 들여보냈으며 명함을 들여보냈기에 지금 이렇듯 침실에까지 불리어 온 것이 아닌가.
“네, 저는 ×× 서 고등계에 근무하는!”
“이필호 씨요!”
“네.”
“분명히 당신이 이필호 씨요?”
“네, 왜 무슨 미상한 일이 계십니까?”
찬두는 거기 대답치 않았다. 그리고 초인종을 눌러서 하인을 불렀다. 초인종에 응하여 하인이 올라온 때는 찬두는 침대에서 일어서 나왔다.
“이필호 씨 잠깐 실례합니다. 야, 그 이필호 씨를 내가 다시 들어오기까지는 꼭 단단히 감시해라.”
무슨 영문인지 찬두는 하인에게 필호 감시하기를 명하고 허둥지둥 침실을 나갔다. 어두운데 주먹으로 기괴한 일을 당한 필호는 얼빠진 사람 모양으로 눈이 켕하니 졸음 오는 몸을 벽에 기대고 찬두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침실에서 허든허든 나갔던 찬두는 잠시 뒤에 도로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짓으로 하인을 물러가기를 명하였다.
하인이 물러간 뒤에 찬두는 잠시 머리를 수그리고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드디어 필호를 청하였다.
“필호 씨─ 이리로 와 앉으시오.”
“네, 실례합니다.”
두 사람은 의자에 서로 마주 앉았다. 마주 앉아서도 찬두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이 한참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야 비로소 머리를 들었다.
“오늘 찾아오신 용무는?”
필호는 머리를 약간 흔들었다. 머리의 몽롱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뜻이었다.
“네, 좀 수상한 소문을 들었기에 그 진부를 알아보려고 왔습니다.”
“권총 소리 말씀이오?”
“?…”
의외였다. 펄펄 뛰면서 부인하더라던 사건을 찬두 쪽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이었다.
“네, 그런 소문이 있기에 직책상 그저 넘길 수도 없고 해서….”
찬두는 다시 머리를 수그렸다. 다시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필호 씨.”
“네?”
“좀 이상한 말씀을 묻습니다마는 당신네 서(署)에 혹은 필호 씨와 동성동명의 분이라도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올시다, 수많은 순사가 있으며 이필호라는 이름은 흔히 있는 이름이니까 혹은 있는지도 알 수 없읍니다마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찬두는 또 무엇을 좀 생각하는 듯하였다. 그런 뒤에 나잍 캐비넽에 가서 거기서 무엇을 가져다가 필호의 앞으로 내어 밀었다.
“이것이 뉘 명함이오니까?”
보매 그것은 아까 필호가 면회를 청하기 위하여 들여보낸 명함이었다.
“제 명함이올시다.”
찬두는 주머니 속에서 다른 명함 하나를 꺼내어 필호에게 보였다.
“이건 뉘 명함이외까?”
필호는 보았다. 그것도 필호 자기의 명함에 틀림이 없었다. 이번 신경서 명함이 떨어져서 거기서 급작히 만든 필호 자기의 명함에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명함은 신경서는 몇 장을 쓴 일이 있으나 조선서는 아직 한 장도 남의 손에 넘긴 일이 없는 명함이었다.
“그것도 제 명함이올시다만….”
“분명히 노형의 명함이오?”
“네, 분명히 제 명함이올시다만 어디서 그 명함을 얻으셨읍니까?”
“얻은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받은 것이외다.”
“네?”
잠에 취하여 몽롱하게 되었던 필호의 머리도 여기서 번쩍 뜨였다.
“누구에게 받으셨읍니까?”
“자칭 ×× 서 고등계 이필호라는 사람에게서.”
“언제쯤이오니까?”
“한 시 반─ 두 시쯤 전에.”
“그 소위 자칭 이필호는 무슨 용무로 선생님을 찾았읍니까?”
“역시 권총 소리에 관해서 물어본다는 명색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셨읍니까?”
“이필호 씨, 일이 차차 이상케 되어 갑니다. 나도 어젯밤 잠을 잘 못잤기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소이다. 노형도 보매 눈이 붉은 것이 역시 잘 밤을 지내지 못한 것 같아. 서로 한잠을 잘 자고 나서 구체적으로 의논합시다. 처음에는 이번 문제는 경찰에까지 알리지 않고 삭혀 버리렸는데 지금 보니 사건이 매우 중대한 모양이야. 노형도 집에 가서 한잠 잘 자고 저녁때쯤 찾아오시오. 아까 노형이 이 방에 들어올 때에 내가 허둥지둥 나갔던 것은 ××서에 이필호 씨에 인상(人相)을 물으려던 것이었소. 인제는 노형이 진짜 이 형사인 줄 알았으니 저녁때 다시 찾아주시오. 그때 다시 구체적으로 의론하고 선후책을 강구합시다.”
윤 백작의 집을 나온 필호가 다시 그 집 문을 두드린 것은 해가 기울고 전기불이 방금 온 뒤였다. 그리고 이때는 낮잠으로써 그의 피곤함을 다 삭히고 원기를 회복한 뒤였다.
조용한 방에서 찬두와 마주 앉아서 찬두에게서 들은 바 소위 권총 사건이라는 것은 대략 이러하였다.
노백작이 심복 하인과 따로이 거처하는 후당에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 두 시쯤 웬 괴한이 들어왔다.
어두운데 들어온 괴한이라 그 모양은 보지를 못하였다. 모양도 알아보기 전에 노백작이 권총을 난사하여 괴한은 그 바람에 달아났으므로 무슨 목적으로 들어왔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단지 한 괴한이 후당에 잠입하였다가 권총의 난사를 받고 달아난 것이었다.
후당에는 노백작의 시계며 장신기구 이외에는 현금은 없는 것이매 강도의 소위로도 보기 힘든다. 강도라 하면 본채를 버려두고 후당으로 갈 까닭이 없다.
무론 보통 방문객도 아닐 것이다.
피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들어왔다가 도망했을 뿐이므로 손해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배후에는 머리를 끄덕이지 못할 몇 가지의 일이 있었다.
팔순이 가깝다 하나 아직도 마음이 든든키가 짝이 없던 노백작이 괴한이 도망하여 버린 뒤에 스스로 기절하여 버린 것이 첫째로 이상하였다. 권총 소리에 놀라서 찬두와 하인들이 왔다. 모두 후당으로 달려가 보매 노백작은 기절하여 넘어져 있고 완쇠라 하는 늙은 충복이 노백작을 간호하고 있었다. 노백작이 기절을 하였다가 깨어나면서 첫 번으로 입 밖에 낸 말이었다.
“그놈 어디 갔느냐. 그놈─ 그놈─ 그놈이 감히 내게를─.”
백작은 겁에 뜬 눈을 휘두르면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 말구로 짐작하자면 백작은 그 괴한이 누구인지 짐작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찬두가 몇 번을 간곡히 물어도 노백작은 내내 전말을 취소하고 완강히 모르노라고 부인하였다.
이것이 또한 수상한 일이었다.
세째로 이상한 일은 그 일이 생기자 노백작은 아직껏 거처하던 별당을 버리고 이 양관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찬두가 영국서 돌아와서 새로이 지은 이래 아직껏 한 번도 와 보지도 않으니만치 양관을 싫어하던 백작이 스스로 원하여 이리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네째로 이상한 것은 노백작의 그 괴한에게 품는 놀라운 공포심이었다. 양관으로 이사온 뒤에도 노백작의 방 앞에는 네 사람의 하인을 파수로 세워두게 하고 깜박 잠이 들다가는 펄덕 깨면서.
“그놈 또 안 왔느냐.”
고 충복 완쇠에게 묻고 하는 것이었다. 아직 마음은 장년 남자를 넉넉히 당하며 팔십 년 생애에 공포라 하는 것을 모르고 지낸 노백작의 이 태도는 이상하였다.
그 다음에 이상한 것은 이필호라는 명함을 가지고 찬두를 찾은 다른 괴한이다. 무슨 필요로 찾았는지 이것은 당자가 아니고는 알 도리가 없다.
그 (필호라 자칭한) 괴한이 찬두를 찾아서 물어본 일은 어젯밤의 권총 사건의 상세한 점과 이 집안의 지리(地理)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서 오늘 아침의 그 괴한은 밤중의 괴한과는 아무 관계며 연락이 없는 인물인 듯싶었다.
그러면 밤중의 괴한과 관련이 없는 자이면 무슨 필요로써 형사의 이름을 가칭하여서까지 필요 없는 밤중 사건을 알아보려는가.
이 몇 가지가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이상한 점이었다.
“다 알아 들었읍니다. 다른 일은 모르지만 한 가지 아까 아침에 제 명함을 가지고 여기 왔더라던 사람에 대해서는 짐작이 가는 일이 있읍니다. 그 사람은 나이가 이십팔구 세 가량 키는 중키나 되고 얼굴은 온화한 듯하고도 날카로운 점이 있으며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이 아닙니까?”
“네, 회색 양복을 입고.”
“왼손 무명지에는 보석 반지를 끼고.”
“그렇습니다. 혹은 노형의 친구시오?”
“아니올시다. 억지로 친구라면 친구랄 수도 있지만 원수라면 원수랄 수도 있는 사람이올시다.”
“그 사람이 이 사건에 직접으로 무슨 관련을 가질 만한 사람입니까?”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간접으로는 모르지만, 직접으로는 아무 관련도 없을 줄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저와 같은 기차로 오늘 아침에야 경성에 도착한 사람이올시다. 사건 발생 당시에는 황주나 사리원쯤을 통과하는 기차에서 저와 한담을 하고 있었겠읍니다. 그러니깐 직접으로는 관계치 못 했지만 그 사람이 보매 상해 방면에서 들어오는 어떤 사상 계통의 인물인 듯싶고 또 그 일이 발생되자 오늘 이른 아침에 제 명함을 이용해 가지고 선생님을 찾은 것을 보면 온전히 관련이 없다고도 볼 수가 없읍니다.”
오늘 이른 아침에 필호 자기의 명함을 이용해 가지고 찬두를 방문한 사람은 서인준임에 틀림이 없었다.
필호는 여기서 머리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해 방면에서 들어오는 사상 계통의 인물을 대략하여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한 가지는 적색 사상의 선전을 획책하는 계통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대개 조선 땅 안에 잠입함에 있어서 경찰의 눈을 기일 수 있을 만한 변장을 하고 들어오지 공공히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또 한가지의 계통은 민족주의자의 계통이었다. 이들도 경무국의 흑표에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대개 그냥 해외에 있어서 무명한 사람을 입국을 시키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네들도 중국 화물선을 타고 몰래 들어오는 것이었다.
필호가 본 바의 서인준의 인물은 그 교양이라든지 인격이라든지 학식이라든가 어느 방면으로 보든지 무명한 졸병은 아닐 듯싶었다. 그러한 서인준으로서 변장도 않고 공공히 국제열차에 몸을 싣고 조선 땅에 들어온다 하는 것은 그것이 적화운동자이든 민족운동자이든 좀 대담한 일로 볼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지라 필호는 인준이를 그런 사상 계통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단지 해외에 오랫동안 있던 인물로만 여겼다. 인준이가 자기의 입으로 나는 당신네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 사람이라고 장담을 하였지만 이것을 필호는 단지 한때의 조소(嘲笑)로 들었다. 블랙 리스트에 오른 사람이 그렇듯 공공히 들어오며 또한 경찰관이 자기와 태연자약히 담소를 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가 없으므로….
그랬더니 그 서인준이가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첫번으로 한 일이 너무도 기괴하였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는 인준이는 분명히 기차 안에 있었다. 그 인준이가 어느 틈에 누구에게서 윤 백작 집에서 생긴 밤중의 권총 사건을 들었으며 무슨 필요가 있어서 아침잠도 자지 않고 백작의 집을 찾아서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가지고까지 그 일을 끈끈히 캐어물으러 갔나?
호사객(好事客)의 부질없는 짓이라고 그저 넘기기는 너무도 기괴한 일이다.
그러면 밤중의 권총 사건과 서인준과의 새에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필호는 서인준의 이 기괴한 행동에 연하여 머리를 기울였다.
필호와 찬두와 서로 헤어질 때에는 두 사람의 새에는 네 가지의 약속이 성립되었다.
첫째는─
이 사건은 단지 한 개의 가택 침입과 명칭 도용에 그쳤지 그 이상 중대한 범죄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이 일을 공공히 경찰 사무로 넘기지 말고 필호 개인으로서 그 이면을 들추어 보아서 그 이면에 중대한 복선이 복재하여 있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경찰 사무로 옮길 것─ 즉 아직은 피해라고 일컬을 만한 일이 없는데 공연히 세상을 소란케 하기가 싫다는 찬두의 마음에서 나온 바였다.
둘째는─
찬두 자신이 기회를 엿보아서 자기 아버지에게 야반의 괴한의 정체를 알 수 있는껏 잘 알아보아서 만약 그 괴한과 자기네 집안과의 새에 장차 무슨 불길한 일이 필연코 생길 듯싶으면 미연에 방지시키도록 전력을 다할 것.
셋째는─
필호는 이번 사건에 한해서는 경찰관이라는 자기의 직업을 떠나서 사립탐정과 같은 길을 밟아서 잘 연구하여 볼 일.
넷째는─
서인준이라는 청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데까지 잘 알아볼 것.
이만한 약속을 한 뒤에 필호는 찬두의 인도로써 야반의 활극의 현장인 후당에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후당에서 얻은 바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노백작이 난사한 권총의 탄환들이 담벽 여기저기 박혔을 뿐 그 이외에는 괴한이 다녀간 것을 증명할 아무런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은 야반의 그 활극이 노백작의 환몽이나 아니겠읍니까?”
필호가 미심결로 찬두에게 이렇게 물으매 찬두도 얼굴에 고소를 나타내었다.
“글쎄 혹은 나도 그렇지나 않은가 해서 아버님께 그렇게 여쭈어 보았었지요. 그랬더니 아버님께서는 벌컥 역정을 내시며 네게는 내가 벌써 그렇게 노쇠해 보이느냐고 꾸중을 하시는구료. 그리고 아버님의 성격으로 보아도 환몽뿐으로 그렇게까지 무얼 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이리하여 필호는 찬두와 작별을 하였다.
그 이튿날은 필호는 벌써 어제의 그 사건을 잊었다.
매일 사법계와 고등계의 탁자 위에 쌓이는 많고 많은 사건 중에 어제의 사건 같은 것은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사건이다. 그 집이 윤 백작의 집이기에 잠시라도 생각을 해보았지 아무 피해 사건도 없이 단지 야반에 한 방문객(결과 없이)이 다녀간 데 지나지 못하다 하는 사건은 많고 많은 중대 사건에 관계한 필호에 있어서는 아무 관심 되는 점이 없었다. 단지 상해서 들어온 서인준이라 하는 청년에 대해서 좀 알아볼 필요가 있어서 알아보매 서인준이는 평양 태생 당년 스물여덟, 중국서 중학을 졸업하고 빈 대학에서 이학 박사의 학위를 받고 그 뒤는 상해에 있어서 민족주의자의 한 중진으로 있다는 것뿐 그 이상 무슨 활동에 참가를 했다든가 적극적으로 무슨 일을 했다든가 하는 가지는 가지지 않은 인물로서 경무국 흑표에 들기는 들었지만 비교적 문제도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만치 알아 둔 뒤에 필호는 윤 백작의 집에서 생긴 야반의 활극(?)을 단지 한 개의 역사적 사실로서 머리의 한편 구석에 담아 둘 뿐 그 뒤는 그다지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않았다.
윤 백작의 집에서도 그 뒤에는 별다른 사고가 생겨나지 않았다. 노백작이 양관으로 이사를 할 뿐 그 밖에는 여전히 평범하고 평온한 생활이 계속될 뿐이었다.
이리하여 권총 몇 방으로 조금 이야깃거리 되려던 그 사건은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