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해협/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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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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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희게로 편지를 보낸 다음 준걸은 아침 저녁으로 하회를 기다려 보기도 하고 매일 만나는 소희의 표정을 살펴 보기 도 했지만 편지를 읽은 듯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그저 새침한 태도로 말없이 인사나 할 뿐 더 다정한 맛도 더 소원한 맛도 없었다.

준걸은 소희 얼굴을 볼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혹시 자 기게로 시선이 와서 제 시선과 마주만 치게 되면 그만 얼굴 이 화끈 달아 오르곤 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심정은 다만 가슴만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 어느날 아침 준걸은 일찍 학교로 와서 소사가 우편수부 함에서 꺼내온 편지를 뒤적이다가'희준'에게 오는 영숙의 편 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희준은 같은 학교 선생으로 동경 고 등사범학교를 겨우 육개월 다니다가 그 어떤 사정으로 퇴학 한 이다. 어느때나'고사' 학생이었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자 랑이었다.

그런데 영숙이가 희준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이상한 일이 었다. 준걸은 다시 그 봉서를 똑똑히 들여다 봤다. 아무리 봐도 그것은 영숙이의 필적이 분명하였다. 비록 이름은 쓰 질 않았어도 틀림없는 영숙이 편지였다.

그러나 그때 바로 희준이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 에 준걸은 그 이상한 편지를 어떻게 뜯어볼 용기도 갖지 못 하고 자기 자리고 비켜서면서 새로온 신간 잡지 봉투를 떼 고 있었다.

(그게 영숙이 편지가 확실하지! 그럼 그걸 좀 뜯어 볼걸!)

준걸은 혼자 중얼거리며 잡지 목차를 뒤적이고 있었지만 공연히 가슴은 울렁거렸다. 비록 자기가 탐탁하게 생각하던 여성은 아니지만 자기와 그동안 조그마한 친분으로나마도 관계가 있었더니만큼 준걸에겐 그것이 한편 의심도 되고 한 편 불안도 하였다.

그러나 벌써 때는 늦었다. 준걸이가 서울 강습 간 뒤 영숙 이는 그에게 거의 실연을 당한 분한 마음을 풀길이 없던 가 운데 우연히 희준이와 가깝게 되었다. 그는 남의 행복을 깨 치기 좋아하는 특성을 가진만큼 희준은 준걸과 영숙이와 사 이가 가까운 관계를 알고 기어히 그 두사이를 멀리 하려는 심정에서 영숙이를 친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은 가지가 지로 준걸을 중상하는 일방 영숙을 감언이설로 꾀어 자기 손에서 꼼짝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 말았다. 더구나 구월 신 학기에 영숙이가 서울로 갈땐 부랴부랴 영숙이를 따라 서울 까지 가는 동안 별 별 수단으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까지 맺어 놓고 말았다.

이런 것을 준걸이가 알 리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준걸은 그게 그렇게 오랫동안 마음에 걸리지는 않 았다. 그것은 영숙이야 어찌되든 어떡하든지 소희와의 사랑 만을 얻을 수 있다면 행복 되리라는 일편 단심이 가슴 깊이 박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회답없는 소희게 또 다시 한 장의 편지를 썼다. 그것은 일전 편지를 받아 보 았으며 그 편지에 대해 어찌해서 회답을 주지 않느냐는 것 을 눈물겨웁게 쓰고 자기는 평생을 두고 소희를 잊지 못할 터이니깐 이 골수에 맺힌 사랑을 어떡하면 좋으냐는 내용으 로 그리 길지 않게 써 보냈다. 그리고 어떤 말이든지 회답 을 주어 가슴에 불타고 있는 짝사랑의 불길을 끄도록 해달 라는 것을 끝으로 간곡하게 썼다.

준걸은 편지를 쓰기 바쁘게 포스트복스에 갖다 넣고 회답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소희는 준걸의 편지를 또 한 장 받을 수 였다. 그러나 지금의 소희론 그것이 부질없는 장난으로 밖 에 보이지 않았다. 비록 입술만이라 하더라도 처음으로 바 친 사내가 있거던 다른 사내게서 편지를 받는다는 것조차 자기의 순결을 더럽히는 것이란 생각과 또 소희 가슴속에 불타는 영철에게 대한 첫사랑의 불길이 소희로 하여금 준걸 이 편지 같은건 다시 볼 아무런 가치도 없던 것이다. 더구 나 얼마전 영철이와의 약혼반지를 가슴깊이 간직한 오늘날 에 있어서는 오직 영철이 이외의 다른 남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금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 소희게 준걸이가 아무리 순정을 다해 쓴 수백장의 편지를 보낸다 하더라도 소희 마음을 털끝만큼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 구나 그런 편지를 받기가 무섭게 읽어 보지도 않고 아궁이 에 불태워버리는 소희로서는 그 편지가 어떤 것인 것조차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영철씨 한테선 어째 편지가 없누?)

소희는 눈을 깜박이며 보름이나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는 영철이가 궁금하였다. 그동안 두 번이나 편지를 했건만 어 쩐 셈인지 아무런 회답도 없기 때문이다.

(어디 편찮으시나? 혹시 또 다른 여성을.....)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혹시 몸이 편찮으시고..... 그렇지만 어째서 아무런 소식두 없으실까 두 주일이나 됐는 데.....) 이렇게 혼자 조바심치며 있는 소희게 전보 한 장이 배달되었다.

그것은 오늘 저녁차로 영철이가 도착된다는 전보였다.

(어쩐 일야? 방학 때두 아닌데.....)

소희는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그리고 소식없던 영철이가 온다는 것만도 소희게는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참말일까?)

꿈을 꾸는 듯 소희의 정신은 몽롱하였으나 그날밤 온다던 영철은 참말로 오고야 말았다. 그날이 바로 십 일원 십 오 일 꼽아보면 서로 이별한지 만 두달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어쩐 셈인지 영철이의 얼굴은 몰라 보리만큼 파리해져 서 그렇잖아도 살기가 없는 얼굴이 더 뾰족해졌다.

영철의 말에 의하면 동경 들어가는 길로 졸업 논문 제작에 착수하여 주야를 돌보지 않고 써냈기 때문에 소화불량이 생 기고 신경쇠약이 되어 먹지도 못하였고 신음한 때문이라 한 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영철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졸업 논문을 반밖에 만들지 못한 채 내버려 두고 혜옥이 자살사 건 때문에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밤낮으로 술만 마시 구 청루가 아니면'마찌아이'에 가서 밤을 새는 것이 거의 일 과같이 되어 나중엔 그만 소화 불량증이 생기고 신경쇠약이 된 것이다.

영철은 몸도 몸이지만 또 한가지 중대한 일이 있었다. 그 건 밤마다 혜옥이가 문을 두들기는 통에 -- 사실 밤중만 되 면 혜옥이가 꼭 문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만 질겁을 하 여 견딜 수가 없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짐을 싸가 지고 조선으로 나온 영철은 웬 셈인지 고향의 하늘을 보자 마음이 다소 안정되는 것 같기고 하였다.

영철은 집에 오는 길로자기방을 다시 치우고 자리를 하고 누웠다. 보약을 지어다 먹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그는 한 가로운 시골의 맑은 공기 속에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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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흘러 어느덧 십 이월 보름이 되었다.

벌써 나뭇잎은 모두 떨어지고 고목 여윈 가지엔 찬 바람만 이 스치고 지나가는 겨울이 오고 말았다.

눈! 흰눈이 푸뜩 푸뜩 떨어지기 시작하는 밤 영철의 방에 서는 밤 늦도록 소희와 영철의 은실을 뽑은 듯 가느다란 말 소리가 소근소근 들리었다.

"다시 동경으로 가긴 해야겠는데 소희를 떨어져 어떻게 가 우? 응! 우리 그만 같이 가요. 그까짓 소학교원 노릇을 뭐이 좋다구 하구 있대? 더구나 내 아내를 그런 자리에 두구 싶 진 않어."

영철의 불타는 눈이 소희 얼굴을 뚫어질 듯 바라볼 때 소 희는 눈물이 핑 돌았다.

"글쎄 봄까지만 허구 그만 둔다는데요, 뭐 석달밖에 더 남 었어요....."

"그건 그래두 난 소희때매 모든게 다 귀찮어요."

보드러운 소희 손가락에 끼워 준 반지를 만지며 영철은 다 시 뽑은 듯 고운 열 손가락을 차례차례로 만지었다. 그것은 마치 무슨 고귀한 조각에 온도를 마친 듯 보드라웁고 따스 하고 어여쁜 것이었다.

"소희..... 나와 속히 결혼할 생각이 나지 않어?"

"속히 하고 싶지만 금년은 못한다면서요?"

"글쎄 금년은 못할 형편이지만 그럼 우리 내년 삼월 그믐 께 할까?"

"그러죠....."

"아이 내 사랑....."

소희의 볼을 왼편손으로 살짝 스치며 때리는 체했다.

"아이 아퍼....."

별인 듯 반짝이는 소희의 눈이 영철의 눈과 마주쳤다.

"저 때문에 오셨어요 뭐?"

"그럼 소희가 없으면 여길 뭣하러와..... 동경 근처엔 정양 할 곳이 없나?"

"?................"

생각하니 그럴 것도 같았다.

"소희씨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뭐요....."

"내 머리를 좀 짚어 줘....."

자리에 누운 채 영철은 소희의 손을 갖다 대었다.

"영철씨 맘대루 손을 가져가시면서 무슨 부탁야요?"

"뿌리칠까봐....."

"호호....."

"그럼 뿌리치진 않지?"

영철은 누운채 두 손을 들어 소희 몸을 끌어 당겼다.

"아이....."

소희는 약간 거절하는 체하면서 끌리는대로 따라갔다.

"내 사랑 내 아내....."

영철은 힘껏 두 볼에 입을 대었다. 소희도 끌어 안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소희를 영원히 영원히 잊질 못할테야, 이 고운 보 (원문에서 글자판독 불가능) 듭했다.

불타는 사랑에 취한 그들은 그밤이 가는 것도 몰랐다.

그러나 이날밤 준걸은 무슨 인스피레이슌의 작용인가 소희 의 방이 있는 담너머서 구슬픈 휘파람을 불며서 눈보라 속 에 이리 걷고 저리 걷고 있는 것을 소희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소희는 새벽 세시나 돼서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소희는 처녀의 보배는 여지 없이 때뜨려지고 만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