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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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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류우![1] 나는 지금 할리우드 벨에어의 주택에서 자유로운 아메리카의 공기를 한껏 마시며 참새같이 기쁘게 날뛰고 있을 그대의 자태를 생각하면서 이 글을 적는다. 깨끗한 주택 앞에는 나무가 있고, 꽃밭이 있고, 장미문이 섰고, 나무그늘 아래에는 넓은 풀까지 설비되어 있을 그 속에서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명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화려한 것인가를 느끼면서 지내갈 그대를 공상해 본다. 밝은 캘리포니아의 태양과 하늘과 공기와 초목 속에서 미국은 얼마나 명랑한 동산인가를 생각하면서 고국 구라파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 그대가 남편과 동행인지 어쩐지는 알 바 없으나 ― 적어도 당분간은 잊어버리고 있을 그대를 상상해 본다.

미국! 구라파의 예술가들 그 가운데서 특히 영화배우들은 본국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으면 반드시 미국으로 뽑히어 가는 것이 오늘에 와서는 한 풍속이 되었다. 신대륙의 시원한 공기 속에 활개를 펴고 젊은 문명의 혜택에 고전 이상의 매력을 느끼면서 아울러 돈벌이도 되는 ─ 일거양득의 이익이긴 하다. 여배우로만 말하더라도 가르보, 디이트리히를 비롯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차례차례로 미국으로 시집을 갔으며, 불란서로 말하더라도 아나 베라, 시몬느 시몽 그리고 그 다음을 이은 것이 다류우 그대가 아닌가. 나는 반드시 그대들의 미국행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은 아니나, 다만 구라파인은 구라파인으로서의 자랑과 절도가 있을 것이니 그대들이 어느 정도까지 그 자랑과 절도를 각각 굳게 가지고 있느냐는 것을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영화 감상인으로서의 솔직한 고백을 하면 나는 미국 영화보다는 구라파에서 제작되는 영화를 한층 높게 평가하는 자이며, 이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는다. 즉 미국 영화의 내용과 사상이 전보다 그다지 변하고 발달했다고는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라파를 버리고 건너간 그대들이 그런 미국 영화 속에서 대체 어떤 역할을 맡아보고 있느냐 말이다.

다류우!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그대의 몇 장의 그림 속에는 망칙한 한 장이있다. 벨에어의 주택 지붕 위에서 그대가 발가벗고 엎드려 일광욕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아마도 플라타너스의 잎같이 짐작되는 굵은 낙엽이 흩어져 있는 기왓장 속에 보료를 펴고 그 위에 구두만을 신고 길게 엎드린 그대의 자태 ─ 허리에서 흰 다리 위까지를 담요로 가리기는 했으나 ― 그 무례한 자태 속에 나는 ‘미국’이라는 것을 백 마디의 설명 이상으로 느끼며 그대가 지금 완전히 그 미국의 성격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어떤 감개가 없지는 않은 것이다. 그야 보이지 않는 지붕 위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든 알 바 아니며 알 수도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일단 사진사가 찍어서 세상에 공포할 때에는 뜻이 스스로 달라진다.

다류우! 그대가 그것을 한 곳에 ‘미국’ 에 물든 흔적이 있는 것이며 나더러 말하라면 결코 유쾌하지 않은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대가 영화의 나라 미국에서 맡아보는 역할의 인상이 역력히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대체 무어라고 그대에게 이런 싫은 소리를 쓰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편집씨가 내게 그대에게 주는 편지를 쓰라고 분부한 것조차가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다. 사랑의 편지를 쓰란 말일까. 아무리 그대가 아름답고 유명하다기로 무턱대고 사랑의 편지를 쓴다는 것도 쑥스러운 짓이며, 도시 스타니 무어니 해 가지고 팬이 ─ 팬이란 말부터가 내게는 싫은 것의 하나이다 ― 법석을 하고 편지질을 한다는 것부터가 속되고 상스러운 것이다. 팬이면 팬의 자랑과 프라이드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 그렇게 소락소락 여배우라면 덮어놓고 아무나에게 사족을 못쓰고 미친 짓을 할 사내라는 것도 없을 법하다. 그러나 가령 편집씨가 내게 사랑의 편지를 쓰라고 했다고 가정하고 그렇다면 하고많은 여배우 중에서 왜 하필 그대를 내게 짝지어 주었느냐는 의문이다. 그대를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여배우의 선봉으로 내세우자는 뜻에서 온 것일까.

그러나 이것도 실례의 말이나 내가 만약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한다면 그대보다도 먼저 ― 노여워하지 마라 ― 얼마든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 계통의 라 야아나나 말타 에까아트에게 썼을 것이며, 혹은 안보작이나 존 브론델도 그대보다는 먼저 가는 사람들이다. 감초를 먹든 고초를 먹든 다 제멋이어서 이런 일이란 설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니 열광이니 생각할수록에 우스워만 진다. 대체 그대들의 얼굴을 한번 만나 면대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대들의 꾸미지 않은 인격에 잠깐이라도 접촉해 본 일이 있었던가. 얼굴도 모르거니와 그대들의 실제의 인물에 대해서 그 무엇 한 가지도 아는 법 없이 다만 종이나 은막에 나타난 검고 흰 그림자만을 가지고 좋으니 싫으니 하고들 시비요 법석인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이랴. 종이 위에 나타난 흑백의 그림자만으로는 그대들의 얼굴 빛깔이 어떤 것이며, 감정과 이지의 조화가 어느 정도며, 인격의 향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바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슨 예찬이며 무슨 편지랴. 내가 그대에게 처음부터 이런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물론 이런 세속적 풍속에대한 한 줄기의 항의라고 보아주면 좋은 것이다.

다류우! 그대의 그림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미상불 놀라고 탄복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맨 처음 본 영화가 「여인 구락부」(금남의 집)[2] 였으니 그때의 그대의 인상이란 참으로 신선하고 매력 있는 것이었다. 대체로 그 영화는 일종 육체의 진열장인 감이 있어서 고기 무리 같이 생기에 넘쳐 뛰노는 수많은 육체에 숨이 막히는 지경이었으나 그 수많은 속에서 역시 그대가 가장 빛나고 아름다웠음이 사실이다. 몸도 알맞고 얼굴도 빈틈없고 신선한 애티와 허물없고 착한 교태가 백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띠이는 ─ 그런 선명한 인상을 준다. 그대가 리뷰극단의 하층 여배우로 있을 때, 포스터 한 장을 얻어 가지고 와서는 출연자의 이름들 속에서 끝에서 두어 번째 되는 그대의 이름에다 연필로 줄을 치고 MOI라고 적을 때의 그 허물없는 어린 자태 ─ 인상적이고 귀여운 한 장면이었다. 그대의 격에 꼭 맞는 그대가 아니고는 어색하게 보였을 그런 역할이었으나 생각하면 또 여기에 그대의 예술적인 품격이 있지나 않은가 한다. 그대는 아직 젊고 그대의 예술의 전도는 양양해서 앞으로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그 무슨 역할인들 못하게 되랴마는 ─ 나는 그것을 바라는 바이며 「여인 구락부」의 조그만 귀여운 예술만이 그대의 예술의 장기라면 나는 그대를 위해 슬퍼하는 자이다. 그대는 귀엽고 아름답고 얼굴만을 뜯어보더라도 이마며 코며 입이 조각같이 정리되어서 한 점 나무랄 곳이 없다. 그 위에 파들파들한 생기와 명랑성까지를 갖춘 그대이다. 따뜻한 정미를 보이다가도 곧 쌀쌀하고 냉정해지는 것도 그대의 매력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아름다운 소질을 「여인 구락부」 정도의 예술에만 담는다면 그대를 위해서 결코 치하할 일은 못 된다. 가령 그대는 그같은 작품 속에서 자살하게 되는 한 여자를 기억하는가? 그대의 자태와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인상깊은 것은 내게는 그 여자의 자살이었다. 원래 추물로 태어나 자연의 혜택을 못 입었던 그는 풀에서 다른 모든 동무들이 육체와 청춘을 자랑하면서 한껏 기쁘게들 놀 때 홀로 풀 전에 앉아 슬픈 마음으로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며 조물주의 불공평을 저주하다 나중에는 드디어 물에 몸을 던져 자진하지 않았던가. 가엾은 일이나 위대한 예술이었다. 나는 그 한 사람의 불행한 여자의 행동에서 참으로 위대한 그 무엇을 발견하고 옷섶을 바로잡았다.

다류우! 그대의 용모와 인품이 어떠한 것이든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예술은 참으로 이런 아프고 쓰리고 위대한 예술인 것이다. 그대의 타고난 미모의 은혜가 도리어 화되어 이런 예술의 길을 막아 놓는다면 내 또 스스로무엇을 말하랴만 그대의 길은 앞으로 긴 것이니 부디 위대한 예술의 길로 고삐를 잡아 달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참으로 그대를 살리고 길이길이 빛나게 할 길인 것이다. 그대는 지금 미국에서 루비치나 그 외 고명한 감독들과 만나고 있지 않는가. 제작자에게 다만 기계같이 쓰이지 말고 원작과 역할에 대한 자기의 의견과 주장이라는 것도 가져 보아야 참으로 자기의 길을 걸을 수 있지 않은가. 하기는 이것은 나의 쓸데없는 노파심인지도 모른다. 「포트 아아서」(여순항)[3]에서 그대는 동양 여자로 분장해 보았으나 무표정한 목석에 그치고 말았다. 동양인이라고 반드시 그렇게 기괴한 차림을 하고 무언의 표정을 할 법은 없다. 생기와 약동이 더 있어야 할 것을 너무도 관념적인 표현에 그쳐서 그대로서는 아까운 실패였다. 역시 그런 역할은 격에 맞지 않는 것일까.

「불량청년」 「연애 교착점」 등에 있어서는 다시 「여인 구락부」의 연장을 보였을 것이다. 그대의 파들파들한 명랑성 속에 이미 술에 취해서 한들한들하고 지붕 위에서 날뛰고 법석을 할만한 소질이 제물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경박하고 무의미한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은 고것 잘두 까분다 별 재주를 다 부리거든 하고 허물없는 웃음으로 그 자리를 한바탕 웃어 버릴 뿐이지 그 이상의 아무것도, 가령 훌륭한 예술이라든지 위대한 정품이라든지 하는 것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대를 위해 결코 반가운 일은 못된다. 토막토막의 조그만 잔재주를 버리고 더 큰 재주를 위해서 그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곳에 위대한 예술도 나올 것이니 말이다.

그 외의 그대의 작품을 많이 보지 못한 까닭에 내 말에는 편벽된 점이 있을는지도 모르기는 하다. 가령 바이에의 「마이아 링크」에 그대가 나왔든지 어쨌든지 지금 내 기억에 없고, 만약 나왔다면 어떤 심각한 역할을 하였는지 알 바 없기는 하나 ― 어쨌든 대체로의 그대의 지금까지의 예술의 풍격은 이상에 내가 지적한 한계를 넘지는 못한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발전은 차라리 앞날에 속하는 것이다.

그대는 파리에서 태어났고 파리에서 자라난 순수한 파리내기 ─ 파리젠느가 아닌가. 파리의 감상의 에술적 표현이라는 것을 더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없는가. 나는 파리에 관해서는 무지는 하나 먼 이국에서 파리의 감상이라는 것을 때때로 공상해 보며 그 표현을 생각해 본다. 벌써 낚시질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드물어진 세느강 언덕의 가을! 안개가 자옥이 끼인 속으로 단풍든 수목이 울창해 보이고 간간이 낙엽이 날아와서는 강물 위에 떨어지는 가을 ─ 어디서인지 군밤 굽는 냄새가 흘러오는 강 언덕을 검게 입은 여인의 외로운 그림자 걸어오는 강가의 가을 ─ 이런 파리의 그림을 생각할때 그것을 배경으로 한 파리의 애끓는 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법하며 그것의 표현이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의 길이 아닐까. 이 길에 있어서 다류우, 그대야말로 가장 적당한 표현자가 되지 않을까. 물론 나는 「파리의 지붕 밑」이나 크레엘이 그린 그 외의 파리의 감상이라는 것을 맛보아 왔으나 대개는 지나쳐 요란해서 고요한 정서의 맛이 적은 것이 유감이었고, 프랑소와 로제에나 아나 베라의 감상도 보아 왔으나 그들에게서도 촉촉한 정서의 맛 ─ 눈물이 푹 솟을 만한 애끓는 겨자씨의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이런 방면의 빈 것을 채워 주고 불만을 기워 줄만한 작품의 출현이야말로 나의 지금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이며, 다류우! 나는 그대에게서 그것을 속히 완성할만한 소질을 보는 것이다. 그대의 앞으로의 영화의 한 가지 길은 여기에도 암시되어 있지 않은가. 지나친 명랑성을 버리고 파리의 감상 ― 감상이란 말을 오해하지 말라 ― 을 회복할 때 거기에 밋밋하게 자랄 미래성이 있지 않을까. 속히 고향으로 돌아가라. 구라파로 돌아가라. 거기서 다시 그대의 길을 찾으라.

이 충고로서 나는 이 편지를 막으려는 것이나 돌아보면 쓸데없는 소리도 많으나 그 싫은 소리도 퍽은 적었다. 그러나 이것도 따져 보면 그대를 귀히 여김으로 그대의 소질을 아깝게 여김으로다. 그대를 참으로 경멸하고 문제삼지 않는다면 아예 붓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이 그대의 눈에 띠일 리도 없는 것이나, 그러나 이것을 쓰는 동안 적어도 그대의 귓속이 무던히는 가려웠을 것이다. 지금 이곳은 낮을 막 지난 시간이니 미국의 시간으로는 밤중일 것이며, 따라서 그대는 침대 속에서 단잠에 잠겼을 것이다. 어렴풋한 꿈속에서 행여나 동양의 이 어리석은 나그네를 보지는 말라. 아무리 내 마음의 생활이 가난하거니 굳이 그대의 꿈속에까지 뛰어들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도 귓속이 가렵다고 발끈 이불을 차고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혀를 차고 악담이나 하지 말라. 그것으로서 내 원은 족한 것이다.

그러면 역시 귀 가려운 것을 무릅쓰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그대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붓을 놓는다. 이마가 조금 불룩 나오기는 했으나 잠든 그대의 얼굴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랴. 눈망울이 또렷하고 입술을 꾹 다문 그대의 깨어 있을 때의 얼굴을 볼 때에는 너무도 영리한 모습인 까닭에 그대의 입김이 그대로 흘러오는 것도 같아서 공연히 이쪽이 피로해지고 마음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그대가 잠든 얼굴이라면 아무리 들여다보더라도 이쪽이 피곤해질 리는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그대는 그대의 민첩한 영혼을 감아 버린 눈 속에 잠깐 간직해 둔 까닭이다. 꼭 감긴 눈 아래로 속눈썹이 둥그런 무지개를 그려서 웃눈썹과 대하고 그것이 불쑥 솟은 이마와 코 사이에서 깊은 골짝을 이루었으며 그 콧등을 넘어 다시 입 위로 경사를 짓고 목을 건너 가슴 위로 흘러간 부드러운 곡선을 생각할 때, 그대의 잠든 모양이라는 것은 이 또한 평화롭고도 성스럽고 범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껴진다. 가라앉은 밤 공기에 손톱만큼의 파문을 일으킬 고요한 숨결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그럼 내일을 위해서 편히 쉬라. 아침이 올 때 새로운 경영을 바라오며 기쁜 낯으로 잠을 깨어라. 동양식으로 키스를 보내지 않노라. 이만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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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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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anielle Darrieux (1917~2017)
  2. Club de femmes (1936)
  3. Port Arthur(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