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락원의 별
上券[상권]
[편집]十八年間[십팔년간]의 貞操[정조]
[편집]『아이, 벌써 열 두시네.』
머릿장을 겸한 화장대 위에 너저분한 화장품 병들이 놓여 있었고 파란 유 리로 만든 동그란 사발 시계가 전등 밑에서 열 두시 오분 전을 가리키고 있 었다.
푸른 깃이 달린 다홍색 양단 이부자리 속에서 소설 책을 읽고 있던 부인은 시계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웃목쪽으로 자리가 연달아 깔려 있었으나 사람은 없고 베개만 덩그라니 놓 여 있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소설 책에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새하얀 융 바탕에 굵다란 분홍 줄과 가느다란 노랑 줄이 쭉쭉 세로 뻗은 파자마가 부인의 삼십 팔세를 사 오년이나 젊게 보이게 했다.
웃목 옷장 거울에 비쳐진 자기의 모습을 후딱 부인은 바라보았다. 머리가 보기 흉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화장대 앞으로 가서 빨간 레자 걸상에 걸터 앉으며 서랍에서 스카프를 꺼내 들고 흐트러진 머리를 감쌌다. 흰 나일론 바탕에 빨간 물방울이 흩어져 있는 스카프였다.
아까 잠자리에 들 때, 클린싱 크림으로 일단 닦아낸 얼굴이었으나 그 동안 에 벌써 엷은 기름 땀이 배어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흰 가제로 부인은 땀을 씻어 냈다. 눈꼬리 언저리에 잡혀진 잔주름을 다소 서운한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나서 부인은 총총히 복도로 나섰다.
『아이, 비가 오네요.』
유리 문을 드르륵 열고 캄캄한 정원을 내다 보았다.
저녁 때부터 불기 시작한 꽃바람이 마침내 보슬비를 뿌려 왔다. 창경원 벗 꽃이 한창인 무렵이었으나 요만한 보슬비로는 꽃이 떨어질 염려는 없을 성 싶다.
주방으로 들어가서 홍차 두 잔을 거르고 토스트 한 접시를 굽는 동안, 부 인은 연방 <홈 스위트 홈>을 콧 노래로 부르고 있었다.
이윽고 남편의 간단한 야식(夜食)을 소반에 담아 가지고 부인은 현관 옆 층계를 올라 갔다.
양식과 일본식과 한식을 얼버무린 절충식 양옥이었다. 크지는 않았으나 아 담은 했다. 이층에는 팔조와 사조 반의 다다미가 있었다. 그 팔조 방에서 남편은 원고를 쓰고 있었다.
『아직 멀었어요?』
부인은 테이블 옆에 소반을 내려 놓고 남편의 어깨 너머로 원고지를 들여 다보았다.
『응, 이제 조금만 더……』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엎딘 채 만년필을 휘 두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원고 뭉치, 잉크 병,재떨이, 담배 갑, 라이터, 위스키병, 잡지 나부랭이같은 것이 새파란 형광등(螢光燈) 밑에서 너저분하 게 흩어져 있었다.
『아이, 곰 잡겠어요, 이 방……』
집필에 신이 나면 날수록 왼편 손길에서 담배 연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부인은 일어나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자욱한 담배 연기가 꼬리를 물고 봄 비에 젖은 캄캄한 허공으로 쏜살같이 흩어져 나갔다.
『비가 와요.』
『그래?』
남편은 고개 한 번 들지 않는다.
『벚꽃이 떨어짐 어쩌나!』
『흥, 당신도 인제 시인이 다 됐구려.』
『서당 개 삼년에 뭐 어쩐다는 말이 있잖아요.』
『꽃 떨어질 걱정은 그만 하고 뒤쥐에 쌀 떨어질 걱정이나 해요.』
『그거야 당신의 책임이지, 난 몰라요.』
『어쨌든 팔자는 늘어졌어.』
『호호……』
행복한 웃음을 부인은 삼키며
『미안합니다!』
했다.
남편은 그러나 그 이상 더 대꾸를 하지 않고 다시금 벙어리가 되어 원고지 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더러 좀 잠자코 있어 달라는 의사 표시임을 알고 있기에 부인 도 얼른 입을 다물고 말았다. 테이블 앞으로 사뿐사뿐 걸어가서 반 만큼 열 려진 곰보 유리문을 꼭 닫고 코오너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에서 개나리 꽃 세 가지를 뽑아 쥐고 적당한 각도로 다시금 옮겨 꽂아 봄으로써 생각없이 떠들어댄 자기 자신을 어린애처럼 부인은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십 팔년 동안에 걸친 결혼 생활과 네 아이의 어머니라는 확고 부동한 주부 로서의 위치와 삼십 팔세라는 어지간히 지긋한 년치(年齒)를 가지고도 항상 부드러운 신경을 이 부인 김옥영(金玉影)은 남편에게 써야만 했다.
연치의 차이와는 역행(逆行)을 하여 까다로운 어린애를 달래듯이 남편을 다루어 오는데 신경의 피로를 때때로 느끼는 것이었으나 그것이 고통이 될 정도도 또한 아니기에 남편의 이 특수한 직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일 종의 색다른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옥영은 가만히 복도로 걸어 나갔다. 남편이 원고를 끝마칠 때까지 난간에 몸을 기대고 혜화동 일대의 밤 풍경을 감상하기로 하였다.
밤이 깊어 불빛은 반절이나 줄었으나 철야등이 들어오면서 부터 이 주택지 의 밤 풍경은 갑자기 아름다워졌다.
『평화로운 밤이다!』
중얼거림 한 마디가 문득 옥영의 입술을 새어 나왔다. 아직도 켜져 있는 밝은 들창마다 제각기 자기다운 크고 작은 행복이 소복 소복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봄 비에 꽃 떨어질 것을 걱정한 자기의 평온한 삶을 옥영은 조용한 마음으 로 하늘에 감사하였다. 남편의 농담대로 정말 팔자가 늘어진 것이라고, 그 늘어진 팔자 위에 언제까지나 안주(安住)해 있어도 무방할 것 같지가 옥영 은, 도시 않다.
세우(細雨) 속에서 철야등은 꿈결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부인은 일종의 충 족감을 전신에 느끼며 남편의 뒷모양을 불현 듯 돌아다보았다.
남편은 그냥 책상과 마주 앉아 있었다. 십 팔년 동안이나 보아온 남편의 그 고슴도치와도 같은 뒷 모습이 부인에게는 새삼스레 믿음직했다. 그 동안 파란 곡절도 적지 않았지마는 어쨌든 붓 한 자루로 숱한 가족을 부지해 온 남편이었고 여자 관계로 아내의 속을 썩혀 준 일도 또한 없는 남편이었다.
『차가 다 식을 텐데……』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려 보는 것이다.
『인제 다 됐어, 먼저 들어요.』
남편이 말을 받아 왔다.
『같이 들어야지.』
『현모양처로군.』
『말해서 뭘 해요.』
『애들은 다 자우?』
『벌써……』
그러는데 남편이 홱 펜을 내던지며
『오 케!』
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으며 샤쓰를 걷어 붙인 두 팔로 힘껏 기지개를 폈다.
『아아, 고단해!』
사십의 고개를 넘으면서 부터 남편은 집필의 피로를 갑절이나 느낀다고 했 다.
『어깨 쳐 드려요?』
옥영은 얼른 남편 옆으로 다가앉았다.
『괜찮아! 그 보다도……』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시장해!』
그러는데 토스트 한 조각이 옥영의 손가락을 거쳐 남편의 입으로 냉큼 기 어 들어갔다.
천정을 멀거니 쳐다보며 사십 삼세의 작가 강석운(妻石雲)은 중학생처럼 토스트를 쩝 씹기 시작하였다.
반듯이 누워 야식을 하는 남편 옆에서 옥영은 책상 위에 되는 데로 흩어져 있는 원고를 추리며
『아이, 많이 쓰셨네! 몇 회 분이나 돼요?』
『…………』
남편은 대답을 않고 연방 토스토만 쩝쩝 씹었다.
『몇 회나 되느냐고 묻는데……』
『내 입은 목하 식사 중이요.』
『그래서 대답할 사이가 없다는 말씀이지?』
『물어서 뭘 해.』
『내 참…… 대답할 사이는 없어도 말할 사이는 있나 보지.』
『내 입으로 하여금 지나친 사역(使役)을 시키지 않는 것이 현모양처의 미 덕이라오.』
『아이구, 현모양처 노릇 두 번만 하다가는 식사 중엔 죄 벙어리가 돼야만 하겠네.』
『생각하면 조물주가 덜 돼 먹었거든.』
『무슨 말인데……』
『입은 하난데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래두.』
『식사도 해야 하고……』
『말도 지껄여야 하고……』
『숨도 쉬어야지.』
『또 하나 있으니까 걱정이요.』
『뭐가 또 있어요?』
『글쎄 뭘까? 부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텐데……』
『내가 뭘 알아요.』
그러다가 옥영은 비로소 말귀를 짐작하고
『아이, 내 참……』
원고를 가리던 옥영의 손길이 저도 모르게 입술로 갔다.
『괜찮소. 목하 식사 중이고 보면 딴 것을 거들떠 볼 여유는 도시 없오.』
『아이, 귀 아파!』
옥영은 두 손으로 자기의 두 귀를 막았다 떼며
『그런 소릴랑 소설에나 쓰는 거예요.』
했다. 그리고는 다시금 원고를 간추려 한 회 분씩 핀으로 꽂아 놓으며
『아이, 많이 쓰셨네. 네 회 분이나……』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
강석운은 목하「유혹의 강」이라는 장편 소설을 K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것 이다.
그 동안 몇 회분 밀렸던 원고를 죄 까먹고 오늘은 기를 쓰고 들어앉아 있 었다.
『어서 읽어요.』
남편은 자기가 쓴 원고를 두 번 다시 읽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옥 영이가 대신 소리를 내어 읽는다. 그것을 강석운은 옆에서 듣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오자나 탈자는 옥영이가 임의로 고쳐 넣었고 적당하지 않는 대목은 남편의 구술을 받아 정정을 하였다.
석운은 누운 채 손을 뻗쳐 토스트를 연방 입에 집어 넣었고 영옥은 홍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원고를 읽기 시작하였다.
자정이 지난 고주낙한 밤이다. 창 밖은 봄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원고를 읽는 옥영의 낭랑한 목소리가 방 안에 영롱했다.
석운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아내의 옆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 다. 처음에는 다소 더듬거리던 아내의 목소리가 차차 열과 윤을 띄어 왔다.
신이 나는 것이다. 신이 나서 남편의 원고를 읽는데 이 여성 김옥영의 삼십 팔세가 지닌 조촐한 행복 같은 것이 깃들여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이란 상대편의 애정을 독점하면서 해로 동혈(偕老同穴)을 약속하는 인생의 행사였다. 그렇건만 아내가 인제 남편의 애정을 독점할 수가 없게 된 이 순간, 두 사람의 결혼은 자연 발생적으로 해소가 된 셈이 되는 것이 다……》
「유혹의 강」의 한 귀절에 그러한 대목이 있었다.
작가 강석운이가 목하 K신문에 집필 중에 있는「유혹의 강」의 주제는 대 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결혼 생활의 첫 위기인 권태기를 재치 있게 넘겨 보내고 이십 년 동안이나 평온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온 한 사람의 진실한 기독교인인 중년 목사의 생 활 기록이었다.
주인공 박목사는 제 이의 위기인 중년의 허무감, 불안감, 초조감 등에 사 로잡히게 되었다. 신앙에 있어서나 사업에 있어서나 또는 인간적인 면에 있 어서나 그 무엇 하나 만족한 것을 거두지 못한 채 그는 이미 오십 대를 바 라보는 몸이 되는 것이다.
사업도 신통치 못하고 신앙 생활에도 충실치 못할 바에는 최소한 자기 자 신에게나 충실해 보고자 마침내 유혹의 물결이 굽이치는 홍등 녹주의 거리 로 발을 들여 놓게 되는 심경을 강석운은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결국 박목사는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일신을 망쳐 버리고 마는 건가요?』
스토리 발전에 적지 않은 흥미를 느끼면서 부인은 물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오.』
『쓰는 사람이 모르고 누가 알아요?』
『써 봐야만 아는 거지. 쓰기 전에 그걸 어떻게 안다는 말이요? 박목사의 심경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텐데, 그걸 아는 건 신 뿐이고 박목사 자신 도 앞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니까……』
『박목사의 심경이 그 처럼 변한 이상, 박목사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괴된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지 않아요.』
『음, 말하자면 그렇겠지.』
남편의 대답이 어쩐지 신통치가 않다.
『말하자면이 아냐요. 결혼이란 상대편의 애정을 독점하면서 일생 동안 살 아 나가는 생활방편이라면서……』
『글쎄 그렇다니까……』
『남편의 애정을 독점할 수 없게 된 박목사 부인은, 당신의 지론대로 하면 자연 발생적으로 이혼을 당한 셈이 되잖아요?』
『아마도 그런 계산이 될 거야.』
『아이, 김 빠진 대답만……』
『왜 김이 빠져?』
『당신, 요즈음 약간 이상해요.』
『뭐가?』
『그러니까「유혹의 강」같은, 이런 흉칙한 작품을 신이 나서 쓰는가봐 요.』
『누가 신이 나서 쓴대?』
『지금까지는 성실한 작품만 써 왔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흉칙한 작품 에 손을 대는지 모르겠어.』
『흉칙! 음, 흉칙한 작품!』
강석운은 저도 모르게 신음하듯이 중얼거리고 나서
『쓸데 없는 데 신경을 쓰지 말아요. 작가는 무엇이든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거요.』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지만…… 당신의 말투를 빌면, 가정은 상대편의 애 정을 독점할 수 있게끔 만든 편리한 울타리 ― 애정의 영구적 교환소(交換 所)라면서?』
『암, 지상의 파라다이스(樂園[낙원])……』
부인은 만족해 하며
『정말이죠?』
『누가 아니래?』
『아니, 정말 말좀 해 봐요.』
옥영은 무릎 걸음으로 다가앉아 엎딘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편의 턱을 한 손으로 살짝 쳐들며 갸웃 하고 들여다보았다.
남편의 표정을 살피려는 것이기도 했지마는 애정의 교환이기도 했다.
『정말이죠? 정말로 가정은 지상의 천국이라고 생각하시죠?』
남편의 표정을 살피면서 부인은 소녀처럼 다짐을 받아야만 했다.
『아, 글쎄 내 참……』
강석운은 물었던 담배를 한 손에 옮겨 쥐며
『과거만이 그 사람의 역사인 것이요. 자그만치 십 팔년 동안에 걸쳐 성실 해 온 이 강석운을 가지고 왜 자꾸만 못 살게 구는 거요?』
『흐응……』
하고 옥영은 코에 걸린 동그만 소리를 내며
『팔자가 늘어져서 그런가배!』
했다.
『참 여자란 언제까지나 어린애 같애.』
『좋지 않우?』
『당신 나이가 도대체 몇이오?』
『스물 여덟…… 요즈음의 육체 연령은 십년 쯤 줄어 들었다우.』
『음, 그럼 나는 서른 셋이다.』
『당신두 나이 먹는 것, 그렇게 싫소?』
『싫지는 않지만 반갑지가 않을 따름이오.』
옥영도 다다미에 엎디어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남편과 마주 바라보며
『가정이란 참으로 좋은 거죠?』
했다.
『글쎄 낙원이라니까……』
강석운도 두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아내와 마찬가지의 포즈를 취하며
『동시에 가정은 말이요……』
『응?』
『상대방의 애정의 방랑(放浪)을 감시하고 사찰하는 감찰기관(監察機關)이 기도 하오.』
『참 당신은 솔직해요.』
『내가 솔직한 것이 아니라, 결혼의 원시적 형태가 그랬으니까 하는 말이 요.』
『약탈 결혼(掠奪結婚)?』
『암, 다른 사나이의 손에서 암놈을 약탈해다가 감금해 둔 곳이 소위 가정 이었오.』
『암놈이 뭐예요? 상스런 말만……』
재롱의 말이었으나 모욕 같은 것도 동시에 옥영은 느꼈다.
『괜찮아. 누가 듣는 사람 있어?』
아내를 쳐다보며 남편은 웃었다.
『하늘이 듣고 땅이 듣고……』
『당신이 듣고 내가 듣지요.』
『남의 말을 가로채는 건 교양 부족을 의미하는 거예요.』
『교양이란 여자의 핸드백처럼, 남자의 넥타이처럼 남이 보는 데서만 필요 한 일종의 장식품과 같은 거요.』
『재미 있어요. 당신 이야기!』
『암, 재미 있지.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과실을 따 먹고 에덴 동산을 쫓겨 날 때, 이브는 무화과의 잎사귀로 엮은 치마로 아랫도리를 둘러야만 했오.
실로 이 무화과의 치마에서 부부 교양이라는 관념이 생겨진 반면에는 진실 을 음폐하려는 허위의 관념도 동시에 생긴 것이요.』
『무슨 말이예요?』
『이브로 하여금 무화과의 치마를 두르게 한 것은 주 여호와의 의사가 아 니고 한 마리의 간사한 뱀의 지혜였다는 말이요.』
『그래서요?』
『그러니까 에덴 동산에 있을 때는 그들은 무화과의 치마 같은 거치장스런 물건은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는 말이요.』
『훗훗……』
옥영은 쿡쿡 웃었다.
『내가 가정을 가리켜 지상의 낙원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 있는 거요.
만일 우리 사회제도에 가정이라는 하나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인간은 모두가 다 남의 세상을 살다가 죽어지고 말 거요. 체면이니 도덕이니 교양이니 하 는 따위에 속박을 받아 단 하루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가 없었을 거라 는 말이요.』
『동감이예요.』
『따라서 세상의 온갖 허식과 절연할 수 있는 하나의 피난소가 곧 가정이 요. 무화과 잎사귀로 아랫도리를 가리우지 않아도 무방한 곳…… 그것이 가 정이요.』
『에덴의 낙원인데……』
옥영은 만족했고 강석운은 유쾌했다.
남편의 지론인 가정 제일 주의에는 결혼 당시부터 옥영은 전적으로 찬의를 표했을 뿐 아니라, 옥영 자신 그러한 가정 속에서라면, 그리고 그러한 남편 밑에서라면 심산 유곡의 단간 두옥(斗屋)에서라도 일생을 뉘우침없이 살 것 같았기에 그토록 빗발처럼 쏟아져 오는 구혼자들의 애소의 염서(艶書)를 모 조리 물리치고 강석운과의 결혼을 단행했었던 것이다. 신뢰감을 넘어선 존 경의 염까지를 옥영은 이 남편에게 대해서 품고 있었다.
그러한 남편의 신념이 오늘 밤, 휘뚜루 마뚜루 주워다 붙인 느낌이 없지도 않지마는 가정 제일 주의를 이론화하여 하나의 보편성을 띄어 온「가정 낙 원설(家庭樂園說)」에는 그 어떤 진실의 발판이 있는 것 같아서 옥영에게는 새삼스레 남편의 존재가 한층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오늘도 또 밤을 새우게 되는가봐요.』
『좋지 않소? 마작이나 <맛세라>로 밤샘을 하는 것보다는……』
『누가 나쁘대요?』
이 부부는 이야기로 곧잘 밤을 새웠다. 도란 도란, 이야기에 신을 내다가 보면 어느덧 창살에 먼동이 트곤 했다. 그러한 밤샘의 역사는 자칫하면 고 갈하기 쉬운 이 중년 부부의 감정을 클리닝하는 하나의 표백제(漂白劑)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고단하지 않으세요?』
옥영은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끌러 놓은 남편의 팔목시계를 들여다보았 다.
『벌써 한시 반인데……』
『괜찮아.』
『인제 내려가 자요.』
『봄밤은 천금이라고 했오. 문 좀 닫고 이리 와 앉아요.』
옥영은 일어나서 창문을 닫으며
『아이, 빗발이 굵어졌어요.』
『꽃이 떨어짐 어쩌나!……』
아내의 말투를 강석운은 흉내 내며
『그런데 여보!』
『응?』
창문을 반쯤 닫다 말고 비 내리는 캄캄한 정원을 내다보는 자세 그대로 옥 영은 대답을 했다.
『내가 만일 말이요.』
『기적 소리가 들려요. 멀리서……』
『내가 만일……』
『밤에 우는 기적 소리는 어쩐지 처량하죠?』
『…………』
강석운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밤 정거장…… 쓸쓸한 대합실…… 서글픈 인생의 유리(流離)……』
『…………』
『고달픈 나그네들…… 따뜻한 가정을 두고 그네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아이, 비풍이 와요.』
복도 유리 문 사이로 빗방울이 날아 들어왔다. 옥영이 머리를 감쌌던 스카 프를 끌러 파자마 아랫도리에 풍겨진 빗방울을 찍어 내는데
『내가 만일 바람을 피면 당신 어떡할 테야?』
『응?』
창문을 등지고 옥영은 남편을 돌아다보았다. 저편 쪽을 향하여 엎디어 있 는 남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빙글빙글 웃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 다.
『물어보고 바람 피는 양반이 어디 있어요?』
옥영도 생끗이 웃는다.
『여기 있지 않아?』
남편은 엎딘 채 열없은 모양인지, 어린애처럼 다리질을 했다.
『…………』
옥영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며 그러한 남편의 어리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 았다.
다리질을 연방 하며 위스키 반 잔을 찻종지에 또 남편은 따라 마셨다.
『당신 정말 바람 피기가 그처럼 소원이오?』
창문에 우두커니 기대고 서서, 옥영의 표정은 다소의 긴장과 호기심을 띄 우고 있었다.
『위스키가 창자에 찌르르하는 걸!』
『대답 좀 해요.』
『알콜이란 참으로 좋은 거야.』
『뭐가 어째요? 묻는 말에 대답은 않고……』
『아, 무슨 말을 나한테 물었오?』
『나 참……』
옥영은 달려가 남편의 얼굴 앞에 딱 마주 앉으며
『어서 대답 좀 해요. 바람 피기가 정말 소원이오?』
『아, 참 그런 종류의 대화가 진행중이었었군 그래.』
『능청 싫어! 정말 원이야?』
『가령 그렇다면 말이요, 그렇다면 당신 어떡하겠냐는 말인데……』
『암만 해도 요즈음 당신 좀 수상해요.「유혹의 강」같은 난봉 소설만 쓰 고 ……』
『으앗! 난봉 소설?』
들었던 종지를 강석운은 탁 놓았다.
『난봉 소설이지, 그럼 뭐예요? 박목사 같은 교인을 왜 그처럼 망쳐 놓으 려는 거예요? 사람들 말마따나 사내들은 정말 모두가 다 도둑놈인가봐.』
『아니야, 아니야. 박목사는 원체가 도둑놈의 기질을 타고 났으니까 그렇 지만…… 나는, 나만은 말이야, 사람이 원체 다르다니까 글쎄.』
『누가 알아요? 다른지 같은지……』
『글쎄 그 모든 도둑놈 가운데서 나 하나만 살짝 빼 버리면 된다니까 ……』
『하기야 아버지 같은 분도 계시기는 하지만……』
안도의 발판 하나를 옥영은 발견하는 것이다.
옥영의 시부(媤夫) 강학선(姜學善) 교수는 칠십의 노령을 맞이한 이날 이 때까지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정조를 그대로 고스란히 시모에게 받혀 온 노학자였다. 일생 동안 뜬 소문 하나 없었다. 서로 서로가 부축하고 의지해 가면서 고달픈 인생 칠십을 무난히 배 저어 나간 이 늙은 부부의 고담(枯 淡), 여생(餘生)을 바라볼 때마다 옥영은 어쩐지 성스러운 순교자의 모습 같은 것을 발견하고 옷깃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그것 봐요. 당신의 남편이 그처럼 유명한 애처가의 아드님이고 보면 아 버지의 절반 쯤은 성실해야만 할 게 아니요?』
『절반만? 아니, 나머지 절반은 어떡하고?』
토스트 조각을 집어 쥔 손 하나를 소녀처럼 옥영은 둘러메어 보였다.
『아이구, 무서워!』
강석운은 빙글빙글 웃으며
『내가 바람을 피워도 당신은 아마 눈 감아 줄 거야.』
『흠, 미리부터 살살 달래는구려. 준비 공작으로……』
둘러 메었던 손길을 옥영은 멋적게 내리우며
『하는 수 있나? 그처럼 원이람 해 보랄 수 밖에……』
『아이고, 손 들었오! 그 음성이 하도 처량하고 보니, 바람은 다 피웠지 다 피웠어!』
『그렇지만 바람은 싫어!』
『응?』
『외도는 싫다니까! 하고 싶음 연애를 해요. 연애를……』
옥영의 시선이 반짝 빛나며 날아왔다.
외도건 연애건, 그러한 종류의 남편들의 행동을 한 사람의 아내의 입장으 로서 허용할 수 있는 일이 되기는 만무하지마는 어차피 딴 여자에게 손을 댈 바에는 차라리 남편의 연애행동을 이 부인 김옥영은 원하고 있었다. 그 리고 그것을 오늘 밤, 이 사이 좋은 중년 부부는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연애? 음, 연애, 연애!』
아내에게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작가 강석운은 이상하게도 밝고 어두운 두 갈래의 감정 속에서 방황을 하였다.
『왜 말만 들어도 어깨가 으쓱하슈?』
남편의 얼굴을 갸웃하고 들여다보면서 옥영은 생글생글 웃었다.
『으쓱하다가 말았오.』
『왜 그럴까?』
『당신이 울고 불고 할 것이 가엾어서……』
『아이고, 고양이 쥐 생각하는 판이로군요.』
『정말이라니까……』
『걱정 말아요. 울지도 불지도 않을 테니 마음 놓고 하세요.』
『정말이야? 정말로 울지도 불지도 않을 테야?』
『남 연애하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울고 불고 해요?』
『남? 어째 남이야?』
『남이지 뭐예요? 결혼이란 상대편의 애정을 독점하면서 살아 나가는, 결 합이라는 말을 누가 했어요? 애정을 독점하지 못했으니 당신의 논리로 말하 면 결혼은 자연적으로 해소가 된 셈이고, 해소된 부부는 남 남이지 뭐예 요?』
『아이고, 맙소사! 앞장 서 다니면서 불리한 말만 잔뜩 늘어 놓았으니, 이 거야 말로 자승자박(自繩自縛), 제 손으로 무덤을 판 셈이고 보면 늙어 죽 도록 바람 한 번 못피울 팔자요.』
『오호호홋…… 오호호홋……』
부처님 앞에서 절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두 손으로 합장을 하며 부인은 자 지러지게 웃고 나서
『그러니까 너무 입 빠른 말을 하는 게 아냐요?』
『내 언제 했어? 작품 속에서만 그랬지.』
『호호홋…… 그 놈의 작품이 문제라니까 글쎄. 그 놈의 작품이 당신의 자 유를 동여 매 놓았지요. 아이, 재미 있어!』
『그만 웃고, 대답 좀 해요.』
『또 무슨 대답이 있다는 말씀이예요?』
『내가 연애를 해도 정말로 울고 불고 안할 테야?』
『안해요.』
『그건 다소 서운한 걸!』
『아이, 욕심두…… 어쩌면 남자들은 욕심이 그처럼 많을까?』
『음, 실상 내가 생각해도 욕심이 다소 많긴 많은 것 같아.』
강석운은 진심을 말했다.
옥영은 갑자기 조용한 어조가 되며
『경험해 보기 전에는 어떻다고 말할 수가 없지만 그렇지만 관념적으로 생 각할 땐 아주 냉정해질 것만 같애요. 더구나 그것이 일시적인 바람이 아니 고 진실한 연애일 경우에는 말이예요.』
『음, 알 것도 같소만…… 그래 일시적인 바람일 때는?』
『아이, 이게 다 준비 공작인가봐?』
『아니야, 나는 한 사람의 작가의 입장에서 묻는 거요.』
『알 게 뭐야? 남자들의 마음은 엉큼하다는데……』
『여자들의 마음은 앙큼하구?』
『아이, 요런……』
옥영의 손가락 셋이 남편의 볼을 한 번 쥐어 뜯었다.
『개운한 걸! 한번 더……』
저편 쪽 볼을 석운은 마저 내밀었다.
『그래 일시적인 바람인 때는…… 그런 경우에는 어떡할 테야?』
남은 볼을 마저 꼬집으러 오는 아내의 손길을 휘감아 쥐어 짜며
『어떡할 테야?』
『야잇, 아퍼!』
『눈 감아 줄 테야?』
『노오, 노오! 천만에……』
『그럼?』
『모르긴 모르지만…… 그런 때는 어떻게 좀 막아 보려고 발버둥을 칠 것 만 같애.』
『전연 반대다. 보통 생각과는……』
『어째서?』
『남자들의 욕망은 말하자면 태반이 단순한 거야. 가정을 파괴하면서 까지 진실한 연애를 하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 그거야 말로 그저 한 번 바람을 피워 보겠다는 건데…… 그런 건 막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가정 파괴의 우 려가 다분히 있는 연애는 도리어 내버려 둔다는 말이지?』
『나는 그럴 것 같아. 다른 사람은 어쩐지 몰라두……』
『어째 그럴까?』
『당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무슨 말이야?』
『동시에 나 자신의 자존심을 옹호하기 위해서도 그럴 것 같아.』
『음, 이쯤 되면 이야기는 좀 더 심각해지는 걸.』
무슨 뜻인지를 석운은 안다.
『그것이 진실할 경우에 있어서 연애의 자유는 인권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 문이예요. 그것을 방해하거나 하는 것은…… 물론 방해하고 싶은 질투감은 강렬히 작용하고 있겠지만 말이예요. 그렇지만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 하고 당신의 인격을 참되게 존경한다면 그러한 방해 공작은 당신의 인권을 무법하게도 유린하는 행동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닐 거예요. 따라서 그것은 내가 스스로 나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뭐라고 하면 좋을까?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아, 참 제가 저를 모욕하는 행 동이었기 때문이예요.』
『아이구, 손 들었다! 손 들었어!』
석운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놓으며
『바람을 피려면 방해 공작이 심해서 못하고 연애를 하려면 방해 공작이 통 없어서 못하고…… 거 어디 손가락 하나 달싹 하겠오?』
『호호호홋……』
옥영은 유쾌히 웃고 나서
『그렇지만 낙심할 게 없어요. 당신의 의론에 의하면 가정은 상대방의 애 정의 방랑을 감시하는 감찰기관이라고 하지만…… 그건 남편이 아내의 애정 발산(發散)을 감시하는 기관은 될망정 아내가 남편의 그것을 감시하는 기관 은 될 수가 없으니까 말이예요.』
『그럴까?』
『그렇지 않구요. 남편들은 밤 낮으로 가정을 비우고 나돌아 다니고 보니 어디 감찰기관의 손이 가 닿아야죠?』
『아, 거 참 그렇기도 하군.』
『그런 의미에 있어서 당신은 손해를 다소 보는 편이죠.』
『응?』
석운은 얼굴을 들었다.
『당신의 사무실은 바로 그 감찰기관 이층에 있으니까 말이예요. 헬리콥터 를 이용하던가 도깨비 감투라도 쓰기 전에는 어림도 없지!』
그리고는 좋아라고 허리를 꼬며
『오호호홋…… 오호호홋……』
하고 한바탕 웃어대는데
『요것이?』
석운은 벌떡 일어나자 옥영의 손목을 휘감아 쥐고 휙 잡아 일으켰다.
일으켜진 자세가 그대로 <록크>가 되어 <PSS>로 접어들면서
『외로운 밤의 탱고여, 별빛처럼 흐르는 탱고여……』
석운의 입에서「밤의 탱고」가 흘렀다.
<푸롬나아드>에서 <아웃 더블 턴>, 거기서 <턴>이 잘게 섞여진 <스토핑 록 크>가 두 세 번 계속되다가 마침내 둘이의 몸뚱이는 <휘거어>를 상실하고 노래 소리만 흘렀다.
『…울고만 싶은 그 옛날, 밤의 탱고여……』
이윽고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움직임도 없고 음향도 없다. 빗발 소 리가 엄청나게 커지면서 차양을 두드려 왔다.
몇 시나 되었는가?…… 그것을 알 필요도 여유도 또한 둘이에게는 없었다.
수수께끼의 女人[여인]
[편집]강석운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 중절모에 역시 밝은 빛깔의 회색 춘추복이 가뜬하게 몸에 어울리고 있었다. 담배를 붙여 물고 강석운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창경원 벗꽃이 채 떨어지지 않은 어느 일요일 오전, 열 시가 거의 가까운 무렵의 일이었다.
로터리 일대에는 봄 놀이를 떠나는 탐승객들이 여기 한 무더기 저기 한 무 더기씩 너저분히 늘어 서 있었다. 서울 장안이 온통 떠난 것 같은 느낌이었 다. 탑승객들을 만재한 뻐스, 지프 하이어, 트럭들이 기가 차서 교외로 달 음질을 쳤다. 계절은 완전히 봄 속에서 무르익어 있었다.
강석운의 마음도 어지간히 화창해졌다. 의식주의 걱정만 없으면 어쨌든 동 물은 심사가 평온한가 보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한 오라기의 근심 걱정도 없는 듯이 저처럼 신이 나서 봄놀이에 들떠 있는지 모른다.
『혜화동……혜화동……』
돈암동 쪽에서 버스 한 대가 달려와 멎었다. 만원 뻐스였다.
창경원 앞에는 사람이 부풀어 버스는 종로 오가 쪽으로 돌아 원남동에서 창경원 손님들을 부려 놓는다. 그래서 혜화동에서 내리는 사람은 봄놀이와 는 인연이 먼 소수의 손님들뿐이었다.
어린애를 업은 허수름한 아낙네 하나가 머리에는 커다란 광주리, 한 손에 는 간장 도꾸리병 두 개를 넣은 망태를 들고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대끼며 가까스로 헤엄쳐 나왔다. 어린애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만이 다행 이라고 색채 짙은 명암(明暗)의 대조가 뭉클하고 석운에게 왔으나 결국은 한낱 감상(感傷)일 뿐,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인과율로서 추구하기에는 이 작가의 신경은 이미 피로해 있었고 도회인으로서의 감각은 벌써 면역이 되 어 있었다.
『아, 빨리 좀 내려요?』
우락부락한 이십대의 차장이 꿰액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복시간에 제한이 생기면서 부터 어떤 때는 거북이처럼 느렸고 어떤 때는 토끼처럼 뻐스는 뛰 었다.
『이 숱한 사람을 실어 놓고 어떻게 빨리 내리라는 말이야? 눈깔 하나가 삐뚤어져서 안뵈?』
그제서야 오르고 내리는 승객들은 차장이 사팔눈인 줄을 비로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팔뜨기에게 꾸중을 들은 아낙네가 아니고 아낙네 뒤로 따 라 내려오던 검은 곤색 양복의 여학생이었다. 조롱박처럼 달랑달랑 매어 달 린 어린애의 대강이를 여학생은 한 손으로 받들고 있었고 한 손에는 카메라 를 들고 있었다.
『뭐가 어때?』
사팔뜨기는 화를 벌컥 내며 땅에 내려선 여학생에게 달려들었다.
『인제 뭐라고 그랬지? 한 번 더 말해 봐!』
『눈 하나가 삐뚤어졌다고 그랬어. 왜 어쩔래?』
여학생도 딱 버티고 섰다.
나이는 둘이가 다 비슷했다. 스물 두 셋은 좋이 되어 보이는 여대생이었 다. 홱 눈에 뜨이는 얼굴이기에 사람들은 싸움에의 관심보다도 학생의 얼굴 을 더 많이 바라보았다.
『뭐야, 이년이……』
차장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학생의 입술이 조용히 이그러지며 가느다란 조소 한 줄기가 흘러 나왔다.
흰 바탕의 피부를 지닌 얼굴에는 화장한 흔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왜 웃어? 왜 웃는 거야?』
『네 꼴이 한심해서 웃는다.』
학생은 이미 침착해져 있었다.
『얘 내 꼴이 어떻게 한심하다는 말이냐?』
자기의 불구가 조소를 받았다. 그것은 진정 참을 수 없는 모욕이라고, 이 점을 차장은 기를 쓰고 해 볼 판이다. 학생의 팔 소매를 차장은 덤썩 붙잡 고 잡아 챘다.
『이 자식 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외치기가 바쁘게 손길이 들렸다.
『찰싹……』
차장의 따귀에서 소리가 났다.
『야아, 이놈의 계집애가 사람을 친다?』
내버려 두었으면 정말로 갈길 셈이었을까? 번쩍 들린 차장의 손목을 손길 두 개가 뻗어와 잡았다. 하나는 굵은 테 안경을 쓴 어떤 청년의 손길이었고 하나는 강석운의 그것이었다.
『놔요, 놔! 요 건방진 년이 사람을 마구 갈겨?』
『너 같은 건 좀 맞아야 해. 사내가 못 된 게 분하다. 분해!』
여학생은 잡혔던 팔 소매를 더러운 듯이 툭툭 털었다.
『이 우라질 년이?』
그냥 달려들려는 차장의 멱살을 청년은 휙 긁어 쥐며
『해 볼 테야?』
『당신은 뭐야?』
『지나가던 깡패다!』
『무슨 상관이요?』
차장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빨리 가자던 버스 속의 손님들이 들창으로 저마다 머리를 내밀고 이 진기 로운 싸움의 연장을 은근히 바랐다.
『깡패는 싸움이 직업이야. 알아 듣겠으면 손님을 모시고 빨리 떠나!』
탁 하고 떠밀어 버리는데 운전수가 달려 왔다.
『왜 사람을 치는 거야?』
『넌 또 뭐야?』
『운전수다!』
『음, 보아하니 힘 깨나 쓸 것 같지만…… 모르는 척하고 가는 편이 유리 할 거야.』
운전수도 갑자기 기가 죽으며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이름을 꼭 대야 하겠나? 호적등본을 꼭 봐야 하겠어?』
운전수는 잠자코 있었다. 형사인지도 모른다.
『생각 잘 했어. 쓸 데 없이 말대꾸하다가 녹아 떨어지는 것 보다는 유리 할 테니 말이다.』
그러는데 차 안에서는 볼만하던 싸움이 점점 싱거워져 가는 것을 보고
『얘, 시셋 장 틀렸다. 빨리 가서 창경원 꽃 구경이나 시켜다고 얘.』
평안도 말씨가 튀어 나왔다. 사람들은 웃어댔고 운전수는 차에 올랐다.
『아, 선생님…… 강선생님이시죠?』
움직이는 버스에 올라 타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강석운을 불렀다. 돌아 다보니, 사팔뜨기의 따귀를 갈긴 사건의 여주인공이 빼곡 둘러선 구경군들 의 틈에서 헤엄치듯이 하며 다가왔다.
『네?』
떠나 가는 버스를 내버려 두고 강석운은 돌아섰다.
『강선생님이시죠? 저 소설 쓰시는……』
『강석운인데요.』
『아이, 마침 잘 됐어요! 저 지금 선생님 댁을 방문 가던 참이예요.』
『그래요? 누구신데……』
그러나 거기는 대답할 사이도 없다는 듯이
『아이, 하마터면 선생님을 놓칠뻔 했어요! 사팔뜨기와 싸움을 하고 있었 기에 다행이지 길이 어긋날 뻔 하잖았어요?』
강석운은 웃었다.
토 - 니 퍼머가 조촐했다. 흰 나일론의 하이 넥크 블라우스, 검은 곤색 사지의 투 피스가 비교적 늠름한 학생의 사지를 수수끔하게 감싸고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 매무시가 굵은 눈썹 밑에 시원했고 연지 없는 입술이 핑크 색으로 뽀얗다.
『선생님, 바쁘시죠? 물론 바쁘실 거예요.』
『별로 바쁘달 건 없지만……』
『누구와 긴급한 약속이 계신 건 아니죠?』
『긴급하지는 않지만…… 어떤 출판사에 잠깐 들러 볼 일이 생겨서……』
눈 매무시처럼 음성도 서글서글했고 차림새처럼 어조도 어딘가 수수끔 한 데가 있었다.
단번에 느낀 강석운의 작가적 인상은 교양의 발판을 지닌 강렬한 소박성이 었다. 아까 얼핏 보고 스물 두 셋으로 생각한 것은 착각인지도 모른다. 스 물 너덧은 좋이 되어 보였다.
구경군들이 제각기 흩어져 갔다. 그 흩어져 가는 한 무더기의 군중 속에서 오늘의 영웅인 자칭 깡패가 천천히 이편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디 다친 데나 없습니까?』
청년의 태도가 지극히 은근하다.
『아이, 정말 감사합니다.』
여학생은 허리를 약간 굽혀 인사를 하며
『저 때문에 공연히……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청년은 묻지도 않은 먼지를 양복에서 툭툭 털어 내며
『버스는 시민의 발이 돼야만 할 텐데, 이건 어디서……』
『그러기에 말이요. 그렇지만 아이를 업고 광주리를 이고 망태까지 들고 탄 내가 잘못이었지.』
싸움을 하는 동안 다리 쉼을 하고 난 장본인인 아낙네가 말을 받으며 가로 수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미안합니다. 그리고 아저씨두……』
햇볕에 쪼들은 까무짭짭한 얼굴에 웃음 하나를 지어보이며 혜화동 골목으 로 아낙네는 접어 들어갔다.
그러나 청년은 그 아낙네가 이 싸움의 장본인인 줄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싸움 중도에서 걸려든 이 청년은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러셔요?』
하고, 여학생의 의협심에 무척 감동한 듯한 태도와 어조로
『사실 차장 아이들의 꼴 사나운 건 볼 수가 없지요. 그렇지만 용하십니 다. 남자들도 멍하니 보고만 있는 세상인데……』
그것은 동시에 자기의 의협심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했다.
잠자코 듣고만 섰던 강석운은 얼굴이 갑자기 간지러워졌다. 그러한 간지러 움을 학생도 느꼈는지, 학생은 표정없는 얼굴로 잠자코 있었다. 자기 대로 의 인사는 차렸으니까 이상 더 이 청년과 말대꾸를 해야만 할 필요를 느끼 지 않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학생은 이윽고 강석운을 향하여
『선생님이 가시는 출판사는 어디시죠?』
『견지동입니다.』
『그럼 저걸 타고 가시지. 제가 거기까지 모셔다 드리겠어요.』
돈암동 쪽에서 자가용인 듯 싶은 플리머스 한 대가 호기있게 다가오고 있 었다. 손을 들어 멈추며
『선생님, 타세요.』
강석운을 먼저 태우고 나서 자기는 그 옆에 적당한 간격을 두면서 앉았다.
『견지동까지 가 주세요.』
『네.』
차는 떠났다. 종로 오가 쪽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차였다.
『쳇!』
청년은 발뿌리로 돌 하나를 찼다. 테일 라이트에 돌은 맞았으나 원체 중량 이 적어서 플리머스는 다행히도 상처는 받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이 플리머스를 흘렸다. 곤색 더블에 모자는 없다. 키가 작은 편이었으나 체구는 야무지게 여물어 있었다.
『어떻게 찾아 오셨오?』
대학 정문 앞을 지날 무렵, 담배를 피워 물며 강석운은 물었다.
문학자는 젊은이들이 가끔 찾아 왔다. 그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그런 종류의 방문일 것이라고, 강석운의 직감은 벌써 넘겨잡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 생각하던 것 보다는 무척 젊으세요.』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학생은 씨부렸다.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다행히 알아는 봤지만 사진과는 좀 다르세요. 이것 저것 선생님의 사진 을 보아 왔지만요.』
석운은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학생도 웃었다.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않고 딴 소리만 하면 어떡하나?』
『…………』
학생은 잠자코 웃고만 있었다. 소리를 잃은 조용한 웃음이었다.
『이상한 학생이야. 남자의 따귀만 갈겨 대구……』
『후후훗……』
학생은 단정히 모아 앉은 두 무릎 위에서 카메라를 집어 얼굴을 가리우며 웃음을 감추었다. 그런 타이프의 학생의 웃음에서 석운은 순간, 아내에게서 느끼던 인상 한 조각을 불현듯 붙잡았다.
추억이 짙은 인상이었다. 약혼 전후를 통하여 그런 종류의 아내의 웃음에 석운은 잊지 못할 감각의 맛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기억이 소생을 하며 이번에는 석운의 시선이 학생의 옆 모습을 찬 찬히 훑었다. 웃음을 떨쳐 버린 학생의 얼굴에서 이미 아내의 인상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용하게 알아 보았군요. 난 줄을……』
『네 어딘가 사진과 비슷한 분이라고 생각은 했어요. 선생님이 사팔이의 손목을 붙잡았을 때 말이예요.』
석운은 또 싱긋이 웃었다.
『그렇지만 그 때는 다소 흥분했었기 때문에 정신은 온통 사팔이에게 만……』
『하하, 차장의 귀가 어지간히 가렵겠는 걸!』
『그러다가 선생님이 버스에 올라 타는 모습 한 조각이 무척 인상적이어 서…… 우물쭈물 하다가 헛걸음 칠 것이 불경제여서…… 눈을 딱 감고 불러 봤지요.』
『음, 불경제! 헛걸음 칠 것이 불경제!』
이야기가 간략하고 요지(要旨)가 명백했다. 뿐만 아니라 그 신선하고 투명 한 어휘에는 어딘가 현대 감각이 지닌 창조성을 엿볼 수가 있었다.
차는 이화동에서 원남동 쪽으로 줄기찬 물줄기와도 같이 반원을 그림 그리 며 감돌고 있었다. 플리머스의 쿠션이 쾌적한 동요를 지니고 두 사람의 좌 상(坐傷)을 한편 쪽으로 휙 몰아 놓았다가 다시금 바로 잡아 주었다.
그러나 두 줄기의 그 어떤 까다로운 의식의 흐름이 둘이의 육체로 하여금 접촉의 자연성을 부자연하게 방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아이, 저 사람들 좀 봐!』
원남동에 다다르자 학생은 의외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종로 사가 쪽으로 부터 창경원 쪽으로 향하여 꽃 놀잇군들의 행렬이 파동 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학생은 왜 꽃놀이 안 가시요?』
『선생님은?』
『나는 아직……』
『저도 안 갔어요.』
『왜요?』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요.』
『…………?』
강석운은 놀라며 이처럼 젊고 예쁜 학생이 고독하다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 각하였다.
칙칙한 사지의 검소한 복장이 도리어 어울리는 것 같은 품위있는 얼굴이었 다. 그 얼굴이 곧장 프론트 글라스로 내다보며
『길이 어긋나지 않은 건 좋았지만 사모님을 못 뵙구 온 것이 서운해요.』
했다.
『아, 뭐 그런 용무가 있었오?』
『아냐요. 그저 이런 것 저런 것 다 보아 둠 좋잖아요, 참고 재료로……』
『참고 재료……』
어느 새로 나온 잡지사나 신문사의 신입 기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찾아 온 용무를 아직껏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인까?
『집이 어디지요?』
『서대문 쪽이예요.』
『그런데 돈암동에서 오는 버스에서 내려요?』
『정능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정능…… 시간이 이른 걸 보면 들놀이도 아닌 상 싶고…… 카메라를 들 고 있는 걸 보면 그럴상 싶기도 하지만……』
『어떤 불량 노신사와 싸움을 하고 오는 길이예요.』
『싸움?』
석운은 웃으며
『그러다 보니 여자 깡패가 아니요?』
『후훗……』
하고 학생도 웃으며
『제가 존경하던 선생님이신데 그런 얌전치 못한 꼴만 보여서 어떡허나?』
말로는 걱정을 하는 것 같았으나 태도는 태연했다.
『괜찮소. 아까 그 청년의 이야기대로 용하십니다. 사내들도 모두들 잠자 코 있는데……』
『아이, 선생님까지……』
예쁘게 흘겨 오던 눈 꼬리가 후딱 자제(自制)를 했다. 그래서 눈 꼬리는 애교가 되다 말고 찡그림이 되고 말았다.
『사실입니다.』
사실 강석운은 차장과의 대결에서 이 학생이 지닌 하나의 발랄한 미를 감 취(感取)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양의 뿌리를 지닌 강렬 한 순수성의 약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참된 의미에 있어서 현대 여성이 지 녀야만 할 하나의 미덕인 동시에 한 송이 지성의 꽃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선생님, 우연의 돌발로 말미암아 오늘은 그랬었지만…… 제게 도 약간은 얌전한 데가 있어요.』
『자아, 어떤 때 얌전할까? 잘못하면 손길이 날아 올 텐데……』
그러나 학생은 웃지도 않는 얼굴로
『아리켜 드려요?』
『어디……』
『선생님이 얌전하실 때는 저도 얌전할 거고 선생님이 발악을 하실 때는 저도 발악을 할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요?』
석운은 정말 말귀를 못 알아 들었다.
『선생님의 작품을 저는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어떤 분인가를 저는 잘 알고 있어요.』
『…………』
석운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생의 그 한 마디는 사고 방법에 있어서 둘 이가 똑 같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런 정도로 사물을 생각할 줄 아는 위인이었더냐고, 석운은 정신적인 동요 한 오라기를 희미하게 느꼈다. 그리 고 그러한 동요를 상대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침묵이었다.
구름다리를 빠져 나와 차는 돈화문 앞 광장을 기분좋게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조금 더 가서 나는 내립니다.』
『그러세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찾아 왔는지 알 수가 없다.
『용건은 극히 간단하니까 견지동까지라면 넉넉할 거예요.』
했다.
얼핏 보면 아쁘레 같기도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학생이라고 봤는데 그렇지도 않나보군요.』
석운은 여자의 가슴패기를 다소 열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뺏지…… 뺏지가 없어서 말씀이죠?』
『아……』
『인제 다 아실 거예요.』
석운은 잠자코 있었다. 이상 더 이 학생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느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스펜스의 효과를 지나치게 노리는 것 같았다.
앞 쿠션 등골에 달린 재떨이를 열고 담배를 비벼 넣었다. 그리고 무뚝뚝한 본래의 표정으로 석운은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저 선생님……』
『말을 하시오.』
프론트 글라스를 똑바로 내다보는 자세 그대로 석운은 표정없는 대답을 했 다.
『선생님, 기분 상하셨어요?』
학생의 센스는 빨랐다.
『아니요. 다만 말을 귀로만 들으면 부족없이 충분하니까요.』
『…………』
학생의 표정이 순간 당황을 하였다.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학생은 다소 기가 누그러지며
『제 말을 들으시는데 선생님의 시선까지 동원시킬 필요가 없으시다는 말 씀이신데……』
『그렇소. 내 귀와 눈, 그리고 학생의 입이 형성하는 삼각형에서 귀와 입 사이에 눈과 입 사이에 가까울 테니까 말이요.』
『재미 있어요. 선생님! 무뚝뚝하지만……』
『학생도 그만 했으면 재미있는 편이요. 따귀도 곧 잘 갈기고 말귀도 곧 잘 알아 듣는군요.』
학생은 조용히 웃으며
『왜 갑자기 시선의 동원을 중지 시키셨어요?』
『요즈음의 학생들은 통 예의를 몰라 보지요. 그게 민주주의인가요?』
『무슨 말씀이신데요?』
『사람을 방문했으면 최소한 자기의 성함과 신분 쯤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 그런 의미시람……』
학생은 얼굴을 붉히며
『선생님, 정말 실례했습니다.』
앉은 자세로 머리를 가만히 숙였다.
『다소의 실례가 되겠지요. 학생은 나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지 만 나는 학생을 전연 모르고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는 전연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딴 생각?』
『이처럼 제가 선생님 옆에 앉아 있는데 무얼 모르신다고 그러시는지……
버스 간에서부터 이 순간까지 선생님이 보아 오신 제가 바로 저니까요.』
냅다 다가오는 풍경의 흐름 속에서 강석운은 후딱 시선을 돌렸다. 학생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으며 석운은 신음을 했다. 투명한 사고 방법을 이 학 생은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작가적인 호기심과 인간적인 흥미를 동시에 석 운은 느끼는 것이었다.
『적어도 선생님과는 이름이라든가 신분이라든가 하는, 그런 종류의 편의 상의 명칭이나 세속적인 환경을 가지고 대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예요. 용 서하세요. 그렇지만 서운해요.』
『스톱!』
강석운은 외쳤다. 차는 안국동 네거리를 돌아 견지동 어떤 출판사 앞에서 급정거를 하였다.
작가 강석운의 신경은 적이 앙양(仰陽)되어 있었다.
그것이 이 학생이 갖고 있는 한낱 언변의 재치일런지도 모른다고, 스톱을 호령하기 직전의 강석운은 순간적으로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실 요즈음의 학생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주고 받는 회화가 무척 발랄하고 슬기가 있어 보였다. 상대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재치있는 대꾸로서 받아 넘겨야만 체면이 서는 줄로 알았고 교양이 있는 줄도 알고 있는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의 한 조각일 뿐, 교양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연 깜깜이다. 따라서 대화는 조리를 상실한 한낱 재담으로서 결말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이치에 닿지 않은 자기네들의 이야기를 얼버무리기 위해서 그들은 반드시「하하핫……」「호호호……」의 웃음 하나로서 종지부(終止 符)를 찍는 것이다.
실로 경박한 현상이라고, 그런 종류의 대화를 들을 때마다 작가 강석운의 마음은 어둡고 우울했다. 그들의 유일한 재산은 재치있는 대화와 반비레한 차림새일 뿐, 껍데기 하나만 벗겨 버리고 나면 있는 것은 다만 한 무더기의 잡연한 지식의 조각 조각과 유치하고도 편협한 한 오라기의 자존심과 그리 고는 미끈하게 기름진 육체일 따름이다.
그러나 스토프를 명령하고 난 강석운은 이 학생의 언변이 한낱 재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다음 순간에 후딱 느꼈다. 학생의 이야기에는 계통의 흐름이 있었고 뿌리가 있었고, 인간이 지닌 소박한 조리를 사수(死守)하려 는 불타는 의욕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혜화동 버스 사건에서 젊은 차장 의 따귀를 갈기던 행동에서 부터 쭈욱 연장되어 온 확고한 의욕의 발로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작가적인 냉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강석운은 물었다.
『나는 여기서 내려야만 하는데, 학생의 용건은?』
『저도 여기서 내리겠어요.』
백환 짜리 몇 장이 학생의 손에서 운전수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핸드 백도 들지 않은 학생이었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서……』
강석운은 인삿말을 그렇게 하였다.
『글 쓰는 분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학생은 인사말을 그렇게 받았다.
두 사람은 내리고 차는 갈대로 갔다.
『선생님, 용무를 마치고 곧 댁으로 들어가시겠죠?』
『오늘은 나왔던 김에 하루 휴양을 하겠읍니다.』
『그러시담 선생님의 시간, 한 시간 쯤 빌릴 수 없으시겠어요?』
『좋습니다.』
『이따 네 시 쯤…… 그 때 까지는 용무가 끝나시겠죠?』
『충분합니다.』
『선생님이 잘 가시는 다방이 어디신지……』
『잘 가는 데도 없지만 용무만 있으면 아무 데도 가지요.』
『그러시담……』
학생은 잠깐 생각하고 나서
『다동 호수 다방은 어떠실까요 호수 그릴 밑층인데요.』
『가까워서 좋군요.』
『그럼 선생님, 어서 들어가 보세요. 미안합니다. 처음 뵙는 선생님인 데…… 대견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인사를 하고 몇 걸음 종로 쪽으로 걸어가다가 돌아서며
『선생님, 그 때 까지 시장하심 무얼 조금만 잡수시고 오세요. 조금만……
』
양쪽 손가락으로 돈잎만한 조그만 동그라미를 학생은 그려 보였다.
석운은 웃었다. 싸움도 잘하지만 신경도 가냘픈 학생이라고, 석운은 웃는 얼굴을 그대로 가지고 S출판사 간판 밑을 들어섰다.
수수께끼 같은 여자였다.
王者意識[왕자의식]
[편집]S출판사 사장과 출판 계약을 끝마치고 거리로 나온 것은 오후 한 시가 가 까운 무렵이였다.
이번 계약으로 불원간 백여만원의 인세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재 판물도 몇 가지 섞여 있었다.
『이번에는 만사를 젖혀 놓고라도 피아노를 사 줘야지!』
맏딸 경숙(京淑)은 금년 들어 고등학교 이학년이다. 피아노에 소질이 있다 고 해서 대학 진급은 음악과로 이미 집안에서는 결정 짓고 있었다.
그러나 피아노가 없는 탓으로 이 교습소 저 교습소를 미친 개처럼 싸돌아 다니면서 한시간씩 얻어 치는 딸 자식의 꼬락서니를 볼 때마다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서 강석운 내외는 항상 마음이 언짢아 있었다.
어머니보다 그것은 아버지의 탓이라고, 강석운은 아내의 몇 갑절의 무게를 가지고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터이었다.
『인제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석운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아, 어디로 갈까?』
양춘의 눈부신 햇볕 속에서 거리는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살이는 활짝 벗어 버린 춘장(春裝)의 남녀가 페이브에는 범람하고 있었다.
『봄은 왔다!』
종로 쪽으로 휘청 휘청 걸어가면서 석운은 경쾌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봄은 벌써부터 이 거리에 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계절의 바뀜을 오늘 따라 완연히 느낀 것은 암만해도 피아노 구입의 가능성인지도 모른다고, 물 질적인 행복과 정신적인 행복의 경중을 강석운은 저도 모르게 저울질해 보 고 있는 것이다.
『어디로 갈까?』
쉼 없이 거닐고는 있지만 정말로 갈 데가 없다. 이처럼 용무나 빨리 끝날 줄 알았더라면 학생과의 약속을 좀 더 당겨 잡았어도 무방했을 것이라고, 세 시간 동안의 사무적 공백을 생각하면 일종의 진저리까지 석운은 느꼈다.
『학생의 말대로 어디 들어가서 돈잎만큼 무얼 좀 먹어 볼까?』
손가락 두 개로 조그만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던 학생의 모습이 불현 듯 생 각키었다. 시장기는 그러나 조금도 없다.
『수수께끼 같은 학생이야!』
차림새가 검소한 것을 보면 무역장이나 감투장의 딸 같지는 않았다. 뺏지 가 없는 것을 보면 학생이 아닐런지도 몰랐고 점잖지 못하게 추측을 한다면 어느 삼류나 사류의 야간 대학생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문학의 세계에서 호흡을 하는 여성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라고, 형식 과 세속을 전연 무시하려고 들어 붙는 학생의 순수한 태도를 석운은 찬양하 고 있는 것이다. 진저리가 나게 생각키던 세 시간 동안의 공백이 차츰 차츰 기다림에의 쾌감으로써 메꾸어지고 있었다.
『응?』
종로 네거리까지 와서 횡단 도로의 신호를 기다리고 섰을 때였다.
맞은 편 종각 앞을 을지로 방면으로 걸어가고 있는 아내의 자태를 석운은 문득 통행인 속에 발견하였던 것이다.
『어디를 가는 건가?』
보아 하니 무척 바빠하는 걸음걸이었다. 핸드백을 든 손목을 쳐들고 시간 을 들여다본다. 회색 치마에 옥색 양단 반회장 저고리를 옥영은 입고 있었 다.
석운은 불현 듯 아까 집을 나올 때 생각을 했다. 출판 계약이 끝나는 대로 달려갈 테니 신신백화점 이층에서 구경을 하면서 기다리고, 그러면 그릴로 가서 점심을 한턱 하겠노라고 했었으나 오늘은 일거리가 있다고 그것을 거 절한 아내가 아니었던가!
강석운 내외는 곧잘 동반을 하여 외출을 했다. 남편이 볼 일이 있는 날은 대개 백화점같은 데서 시간을 정하고 만나곤 하였다.
그런데 옥영은 오늘 따라 무척 기뻐하면서도 냉큼 일어나지를 않았다. 이 유는 다듬이 감을 마침 축여 놓아서 마르기 전에 식모와 다듬이질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요 다음에 사 주세요. 오늘은 혼자서 한 잔 하시고……』
그러는 아내를 주부답다고, 하는 수 없이 혼자 나선 석운이었던 것이다.
신호가 풀리며 석운은 인파와 함께 네거리를 건넌다. 아내는 벌써 저 만큼 서 종각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시간이 남아서 걱정하던 판이라 마침 잘 만났다고 석운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 갔다. 따라 가서 시치미를 딱 떼고 나란히 걸을라치면 옥영은 한 동안 무심히 걸어가다가 웬 사나이냐고, 호닥닥 몸을 비끼며 쳐다보다가
『아이, 깜짝이야! 난 또 누구라고……』
그런 경험이 과거에 한 두 번 쯤 있었다.
오늘도 그런 장난을 해 볼 셈으로 석운은 따라 갔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 었다.
『무슨 다른 장난은 없을까?』
똑 같은 장난에 흥미를 잃고 휘청휘청 아내의 뒤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따 라 가면서 좀 더 창작성을 지닌 신통한 장난 하나를 석운은 골똘히 생각하 고 있었다.
그러나 신통한 장난은 좀처럼 튀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데 (다듬이 감은 어떻게하고 나왔을까?) 하는 생각이 되집어 왔다.
원체 이 부부 사이에는 웬만한 행동을 가지고는 의심을 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과거 십팔년 동안의 경험 철학이었다. 아뭏든 무척 바쁜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다고, 축여 놓은 다듬이 감과 남편과의 점심식사를 대담하게 포기하고 나선 아내를 석운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이 바쁜지 옥영은 연방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걸었다.
「기다림」이라는 다방은 을지로 초입에 있었다. 그러나 자기 아내가 이 다방으로 들어갈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강석운이었다. 아내는 서슴지 않 고 다방 문을 밀고 들어가 버렸다.
『응?』
석운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 순간에 있어서 석운이가 느낀 것은 우선 일종의 허무감이었다. 좀 더 재치있는 장난을 꾸며 보려던 즐거운 기대가 무참히도 파괴되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근인(近因)일 뿐 그러한 허무감은 다음 순간, 좀 더 뿌리 깊은 원인(違因)과 연결이 되면서부터 강석운은 비로소 한 줄기의 의혹의 염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옥영의 주부다운 하나의 미덕과 습성에서 오는 의혹감이었다. 옥영 은 아직껏 남편 이외의 사람과 다방 출입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더우기 혼 자서는 아무리 시장하더라도 음식점 같은데도 발을 들여놓기가 싫다고, 집 으로 돌아와서야 요기를 했다.
그러한 옥영이가 오늘 다방 문을 서슴지 않고 들어선 것이 무슨 까닭인지 석운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나?』
그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이 부부의 습성으로 보아서는 가장 타당한 추측 이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상스럽지 못한 생각 한 오라기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행 동을 의심해서가 아니고 아까 그 수수께끼의 여학생과 네 시에 호수 다방에 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자기의 행동에서 자연적으로 연결이 되어 버린 한낱 허황된 공상임을 강석운 자신도 알고 있었다.
『모를 일인 걸!』
적이 의아스런 감정을 가지고 강석운은 다방 앞으로 걸어갔다.
그 어떤 상스럽지 못한 공상을 품고 아내의 뒤를 밟아 다방으로 따라 들어 간다는 하나의 행동이 자기의 인격을 스스로 모독하는 것 같은 생각이 불현 듯 강석운은 들었다. 수치스럽기도 했고 멋적기도 해서 석운은 다방 문 앞 까지 채 다다르기 전에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세상의 남편들은 대체 어떻게 행동을 하는 것인지, 작가적인 상상력을 가지고도 석운은 짐작조차 꾀할 수가 없었다. 그 처럼 아내를 믿고 덮어 놓고 따라 들어가는 것이 순진해서 좋을 것 같기도 했지 마는 이미 그 어떤 상스럽지 못한 공상에 붙잡혀 있는 이상 그것은 결코 신 사답지 못한 비열한 행동 같아서 강석운의 교양이 도리질를 했다.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지.』
결국 그러는 것이 가장 자기다운 행동 같았다. 사실 그 어떤 사나이와 마 주 앉아 있는 밀회(密會)의 장면을 목격해야만 한다는 것도 열없고 고통스 런 일이지마는 남편에게 목격을 당하는 아내의 입장도 입장일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방 「기다림」은 바로 옆 집에 꽃 가게를 갖고 있었다.
아니, 그 꽃집에서 다방을 경영하고 있는 것이다. 들여다보니, 이 편쪽에 새파란 짧은 커튼이 늘어진 유리 들창이 꽃 가게와 다방을 가로 막고 있었 다.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협소한 꽃집이었다.
석운은 꽃 가게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다방에 접한 커튼 밑으로 가지 각색 의 꽃 화분이 주루루 놓여 있었다. 꽃 구경을 하는체 하고 석운은 커어텐 밑으로 다방을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틈서리가 원체 좁아서 다방 탁자 밑 만 옆으로 길게 보일 뿐, 손님들의 얼굴은 볼수가 없다.
『커어텐을 조금만 제끼면 될 텐데……』
석운은 뒤를 돌아다 보았다. 여학생들이 주인과 꽃 흥정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떨린다.
『오오버 센스! 오오버 센스!』
어쨌든 그것은 한낱 망상이기를 이 순간에 있어서의 강석운은 절실히 바랬 다.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커어텐을 젖히고 다방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 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기가 강석운은 어쩐지 무섭다.
그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이 십 팔년 동안에 걸친 평화로운 가정 생활을 일 순간에 조각조각 부셔 놓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침내 손가락은 움직이고야 말았다.
다방 안은 컴컴해서 처음에는 손님의 얼굴이 잘 보이지가 않았다. 아늑하 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다방 안 풍경이었다.
『아, 저기 있다!』
커다란 파초분 옆 걸상 저 편을 향하여 옥영은 혼자 앉아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 옥영은 초조한 듯이 거기서도 또 시계를 들여다 본다. 손님이 드나들 적마다 문깐쪽을 연방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다방에서 기다려야만 될 사람이 있을 리가 없을성 싶었다. 아니, 없을성 싶었던 것은 자기 혼자만이고, 아내에게는 벌써부터 그런 종류의 기다림의 대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석운은 점점 괘씸한 생 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슨 피치 못할 돌발 사건이 생겼는지도 모르지.) 괘씸한 생각을 억누르고 석운은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흰 쿠크 복을 입은 요정 보이 같은 젊은이가 하나 들어서면서 두룩두룩 다방 안을 둘러보았다. 속에는 무슨 종이 조각 하나를 쥐고 있었다.
여자 손님은 옥영 혼자였다. 보이는 성큼 성큼 옥영의 앞으로 걸어가서 허 리를 굽히며 뭐라고 몇 마디 수근거리고 나서 종이 조각을 내보였다.
순간, 아내의 옆 얼굴에서 초조감은 사라지고 반가운 웃음이 꽃피어졌다.
아내는 얼른 일어서서 보이의 뒤를 따라 총총히 다방을 나갔다. 나가는 길 에 차 한 잔 값을 옥영은 레지 위에 올려 놓았다.
무슨 돌발 사건이 생겼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선의로 생각해 보던 강석운 의 사념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소녀처럼 반가운 얼굴을 하고 보이 녀석의 뒤를 따라 나가는 아내의, 그 하느적하느적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강석운의 두 눈에는 새파란 불똥이 화악 튕기어졌다.
전신의 피가 무서운 속도를 가지고 우욱 하고 머리로 기어 올랐다. 고르지 못한 혈액의 순환이 강석운의 눈앞을 일시 암흑처럼 어둡게 했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다. 십분 전까지도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 돌발사는 강석운의 사고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말았다.
십 팔년 동안의 평화였다. 아니, 지금에 이르러서 깨닫고 보니, 십 팔년 동안의 방심(放心)이었던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해야만 한다!』
강석운은 자기의 성격 가운데 격하기 쉬운 일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 는 것이다.
『어떡해야만 하나?』
보이 녀석의 뒤를 아내는 따라 나선 것이다. 아내는 필시 어떤 요정으로 끌리어 갈 것이다. 아니, 제 발로 자진해서 하는적하느적 따라가고 있는 것 이다. 따라가서는? 따라 가서는……?
순간, 징그러운 모습을 한 어떤 놈팡이 하나가 기다랗게 아랫목에 누워서 들어서는 아내를 히죽히죽 웃으며 맞이하는 광경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 다.
『위기!』
위기는 절박했다. 그것은 실로 순간적인 연상의 발전이었다. 아내의 뒷모 습이 다방에서 사라진지 단 십 초도 못 되는 동안에 있어서의 강석운의 불 길한 상상이었다.
강석운은 휙 몸을 돌이키며 총알처럼 꽃집에서 튀어나왔다.
『철썩……』
하고,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뒤이어
『여보시오!』
하는 굵다란 목소리가 강석운의 발을 마침내 동여매어 놓았다.
문 밖까지 튀어 나왔던 석운이가 힐끔 뒤를 돌아다보는데 주인 사나이의 손길이 덤썩 따라 나오면서 석운의 팔 소매를 꽈악 붙잡았다.
『남의 물건을 망쳐 놓고 도망을 쳐야 옳다는 말이오?』
『아, 화분이……』
협소한 장소라, 황황히 뛰쳐 나오는 바람에 선반을 건드렸는지, 화분 하나 가 떨어져 콩보숭이가 되어 있었다. 야쓰데를 심은 화분이었다. 석운은 당 황한 목소리로
『미안합니다. 얼마 드려요?』
『오천환짜리요, 오천환……』
양복 안 주머니에 쑥 손을 넣으며 석운은 다방 앞을 후딱 바라보다가
『앗, 여보오!』
한길 건너 쪽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그러나 이 번화한 거리의 소란한 음향은 이미 보이와 함께 전차길을 건너 선 옥영의 귀에는 모기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여보오! 옥영이…… 옥영이!』
목구멍이 찢어져도 좋았다. 고함 소리와 함께 튀어 나가려는 석운의 몸뚱 이를 꽃가게 주인의 완강한 손길은 그냥 긁어 쥐고만 있었다.
『자아, 이검 되지! 거스름은 이따 오다가 찾아 갈게……』
걷어 잡히는 대로 만환 한 뭉치를 끄집어내어 주인에게 쥐어 주며
『스톱, 스톱! 그 차 스톱!』
미친 사람 모양 외치며 전차길을 튀어 건너가고 있는 석운의 등 뒤에서
『멀쩡한 양반인데 머리가 돌았어!』
만환 뭉치를 들여다보며 주인은 만족해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차…… 보이와 옥영을 실은 그 차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을 지로 쪽으로 머리를 두고 한길 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깜자주의 고급 자가용 차였다.
『스톱!』
전차길을 가까스로 건너 선 강석운은 낡아 빠진 시보레 하나를 잡아 세우 며 부리나케 올라 탔다.
『대지급으로…… 저기 가는 저 깜자주 자가용을 따라가 주시오.』
『어느 차 말입니까?』
키다리 운전사가 물었다.
『저기, 저기…… 로타리로 빠져 나가 왼 쪽으로 달려가는……』
깜자주 자가용은 을지로 로타리를 삥 돌아 을지로 이가 쪽으로 빠져 나가 고 있었다.
『아, 저 닷지 말이오?』
『저게 닷지요?』
『닷지 오십 삼년입니다. 쓸만한 차지요.』
『어쨌든 그 차를 놓치지 말아 주시오!』
『염려 마시오!』
그러나 네거리 왼쪽으로 커브를 하여 내무부 앞까지 다달았을 때는 이미 깜자주 닷지와의 사이에는 지프, 하이어, 추럭 등의 십 여대 차가 쭉 늘어 서 있었다.
『어떻게 좀 앞설 수 없을까요?』
조바심으로 말미암아 석운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위험합니다. 눈에 띄이는 빨간 차이니까, 옆길로 빠지지만 않으면 문제 없읍니다.』
아내가 다방으로 들어갔을 때, 곧장 따라 들어가지 않은 것이 인제는 한이 되었다. 화분은 왜 또 건드렸는고?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아내의 위기는 좀 더 속히 방지되었을 것이 아니냐고, 강석운의 초조감은 이루 말할 수 없으 리만큼 다급해 있었다.
『암만 해도 이즈음 당신 좀 수상해요.』
며칠 전 비오는 날 밤, 아내는 그런 말을 하여 남편을 의심하는 체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 준비공작이 아니냐고, 남편의 마음을 견제해 놓으면서 실상은 자기대로의 딴 꿈을 아내는 꾸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여자란 앙큼한 동물이다!』
혼자서는 음식점에 못 들어간다는 아내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아내가 남편 의 외출한 틈을 타서 다방 출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정 보이를 시켜서 아내를 불러도 무방하리만큼 자가용 차의 소유자와는 허물이 없는 옥영이었 다.
『이런 허무맹랑한 일이……』
분노보다도 허무감이 앞장을 섰다.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하느냐 말이다!』
가정을 지상의 낙원이라고, 석운은 진심으로 그것을 믿어 왔었다. 세상에 온갖 중상 모략과 그리고 허위와의 절연(絶緩)을 꾀할 수 있는 다사로운 피 난소가 가정인 줄만 알았다. 그렇거늘……
참으로 앙큼한 여성이라고 아내의 총명을 찬양해 오던 강석운은 그 총명이 이러한 불미로운 방향으로 이용되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남성들의 엉큼에는 그래도 관용이 있었으나 여자들의 앙큼에는 철두철미 냉혹한 사성(蛇性)밖에 없다. 여성의 역사가 그러하였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랬고, 달기(妲己)가 그랬다.
칼멘이 그랬고 맥베스 부인이 그랬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추방을 당한 원인이 아담에게 있지 않고, 염치를 모르는 대담성을 가지고 한 마리 간악 한 뱀과 타협을 한 이브에게 있는 것이라고, 강석운은 작가적인 집념(報念) 을 가지고 여성들의 냉혹한 간악성을 공박하고 있는데
『아, 닷지가 옆으로 빠졌읍니다.』
운전수가 부르짖었다.
『어디로?』
『을지로 삼가에서 수도극장 쪽으로 빠졌읍니다.』
『빨리 가요! 빨리……』
강석운은 꿈결처럼 외쳤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내의 간계가 깜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가정이 상대편의 애정을 감시하는 감찰기관이기도 하다고 농담 삼아 말했 을 때, 옥영은 뭐라고 대답했던고? 외출한 남편에게는 감시의 손이 닿지를 않는다고 했었지. 그러나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동시에 외출한 남편들의 감시의 눈이 가정에 있는 아내들에게도 닿지 않는다는 것 을 암암리에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여태까지 하여 온 옥영의 재롱에 찬 한 마디 한 귀 절이 모두가 다 하나의 복선(伏線)과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차 차 명백해졌다.
『앗, 저기 갑니다!』
을지로 삼가를 돌아섰을 때, 깜자주 닷지가 수도극장 앞 골목으로 속도를 늦추며 접어 들어가고 있었다.
번거롭지 않은 거리길래 운전사는 속도를 내어 따라갔다.
일시적인 난봉은 싫고 연구적인 연애을 하라고 옥영은 말했다. 그것을 옥 영은 남편의 인권과 자기의 자존심에 다 결부를 시켜서 설명을 했었지만 지 금에 이르러 보면 모두가 다 그 어떤 현실적인 발판을 가지고 있는 말임에 틀림이 없다. 남편의 영구적인 연애 행동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어도 무방한 준비 공작을 이미 옥영은 해 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무슨 요정이 있지 않소?』
『있읍니다. 북경루(北京樣)라는 커다란 중국 요리집이 있지요.』
석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숨결만이 무섭게 파동을 쳤다.
『아, 닷지가 저기서 멎었읍니다.』
석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차는 이미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었고, 저 만큼서 깜자주 자가용은 멎어 있었다. 커다란 간판이 붙은 북경루 앞이었 다.
『고맙소. 여기서 내려 주시오.』
요금을 치르고 석운은 내렸고 차는 다시 뒷걸음을 쳐서 한길로 빠져 나갔 다.
그러나 석운은 곧장 요정 앞으로 걸어가지를 못했다.
치가 떨렸다. 다리가 후둘거려 견딜 수 없었다.
이 순간에 있어서의 작가 강석운은 실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착잡한 사념 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우선 불길처럼 타 오르는 질투의 일념이 명령하는 대로 맹수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소박하고 순수한 행동임을 석운은 안 다. 동시에 그것이 십 팔년 동안에 걸친 뿌리 깊은 신뢰와 애정의 표현이기 도 함을 석운은 안다.
그러나 석운은 감히 그것을 하지 않았다. 치가 떨리고 다리가 후둘거려서 가 아니다. 그것을 감히 하지 않는데 현대인의 비극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 다고 단순한 감정의 격동을 그대로 행동할 수 없는 한 줄기 까다로운 자의 식(自意識) 속에서 강석운은 질식할 것 같은 숨가쁨과 현기를 느꼈다.
『이미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는가? 아내까지 도…… 아내의 정조까지도……』
석운은 갑자기 자기 자신의 인간성이 무서워졌다.
『이러한 냉정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강석운은 자기를 불현 듯 돌이켜 보며, 자기는 이미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 이라고 생각하였고 새로운 인간성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였다.
강석운은 천천히 자가용 앞으로 걸어갔다. 다리는 이미 후둘거리지 않았 다.
『이 차는 자가용이지요?』
차 안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 젊은 운전사에게 석운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차주는 누구시요?』
『어떤 회사 사장입니다.』
석운은 이미 떠들지를 않았다.
표정없는 얼굴을 가지고 요정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남편의 눈을 속이고 이 지경에 까지 이른 아내고 보면 떠들고 서둘러 보았댔자 소용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또 이미 아내의 애정을 독 점하지 못한 이 순간에 있어서 느낀 강석운은 가장 다급한 감정을 십 팔년 동안에 걸친 인간적 신뢰와 뿌리 깊은 애정의 배반에서 오는 우주적인 고독 과 허무와 그리고 절망적인 영혼의 흐느낌이어야만 하였다.
아니, 그러한 감정도 물론 절실했다. 그러나 그 보다도 한층 더 강력한 힘 을 가지고 강석운의 감정을 지배한 것은 아내의 불미로운 행동에서 받는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모욕감이었다. 남편의 존재가 헌 신짝처럼 무시를 당 하고 있는데서 오는 비참한 굴욕감이었다.
이러한 암담한 굴욕감에 비하면 인간적 신뢰의 배반이라든가 애정의 변모 (變貌) 같은 것은 그다지도 다급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서 오십쇼.』
장개석 총통의 초상화 밑에 앉아 있던 뚱뚱보 주인이 몸을 일으키며 석운을 맞이하였다. 보이 하나가 옆에 서 있었으나 아내를 인도해 온 젊은이는 아 니었다.
아랫층 식탁은 죄 비어 있었다. 석운은 거의 쓰러지다시피 하며 털썩 걸상 하나에 주저앉았다. 다리의 후둘거림도 멎고 인제는 완전히 냉정해졌다고 생각하면서 걸어 들어온 석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두 다리는 이미 석운의 십 칠관 반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 잡수십니까?』
보이 하나가 보리 차를 따르면서 물었다.
『인제 저 차로 여자 손님 한 분을 모시고 온 청년은 어디 있나?』
『이층에 있읍니다.』
그러는데 빈 소반을 들고 바로 그 청년이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차를 따르던 보이는 자기네들 말로 뭐라고 전언을 했다. 이윽고 소반을 든 보이 가 다가왔다.
『인제 자네가 모셔 온 여자 손님은 이층에 있나?』
『네, 있읍니다.』
석운은 명함 한 장을 꺼내 주며
『올라가서 이런 사람이 찾아 왔다고 전해.』
『네, 잠깐만 기다리십쇼.』
보이가 소반을 식탁 위에 던져 놓고 이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우쭐우쭐 걸 어 올라가는 보이의 뒷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강석운은 이상하게도 한 줄기 상쾌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무슨 복수자의 감정 같기도 하 였고 이십 년에 가까운 평화로운 가정을 일순간에 파괴해 버릴 수 있는 고 성능 수소탄의 소유자 같은 그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악마적이요 독재자적인 강자 의식(强者意識)의 발동 만이 인간적인 배신과 애정의 배반과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위신을 유린당한 데서 오는 강석운의 이 비참한 굴욕을 무마할 오로지 하나의 길이었다.
『파괴다!』
그렇다. 파괴만이 한 사람의 남편인 강석운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서 강석운이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온갖 교양과 민주정 신은 완전히 멸각(滅却)되어 있었다. 왕자(王者)는 그가 지배하고 있는 국 가를 파괴할 수가 있는 것처럼 강석운은 평화를 가장(假裝)했던 자기네 가 정은 일순간에 산산이 파괴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아내의 불미로운 행동을 눈 앞에 목격하면서도 한 마리 짐승처럼 뛰어 올 라가고 싶은 질투의 본능을 억제하고 강석운은 점잖게 명함을 올려 보냈다.
이러한 냉정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강석운은 그것을 자기의 교양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작가 강석운의 교양이나 지성이 아니 고 파괴를 전제로 한 하나의 왕자 의식의 발동인 사실을 강석운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 아내가 내려온다!』
보이의 뒤를 따라 내려오는 옥영의 회색 양단 치맛귀와 옥색 고무신 부리 가 우선 강석운의 시야에 뛰어 들어왔다.
『어마, 그이가 어떻게 알고 왔을까?』
명함을 쥔 채 옥영은 당황한 걸음으로 보이를 따라 나섰다.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남편이 이런 구석진 요정에 나타날 리는 만무했 다.
『어머나? 어떻게 아시구 오셨어요?』
보이를 따라 층계를 내려오면서 옥영은 의아 절반 반가움 절반이 뒤섞인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는데 찻종지 하나를 앞에 놓고 부처님처럼 앉아 있던 남편이 훌쩍 몸 을 일으켰다.
『아니, 정말 어떻게 알으셨어요?』
방글방글 웃는 얼굴을 가지고 옥영은 남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떻게 된 셈인지, 남편은 대답이 없다. 무서운 눈초리가 옥영의 아래 위를 열심히 핥고 있을 뿐이다.
『왜 그러세요?』
옥영의 얼굴에서 후딱 웃음이 사라졌다.
『당신이야 말로 어떻게 이런 데를 다 찾아 왔오?』
남편은 비로서 입을 열었다. 남편의 음성은 떨고 있었다.
『아, 당신은……』
그제서야 옥영은 눈치를 챘다. 몸소 따라 올라오지를 않고 명함을 올려 보 낸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짐작을 하고 옥영은 금새 얼굴을 붉혔다.
『무얼 하러 왔오? 누구를 만나러 왔오? 분명한 대답이 필요하오!』
『아, 당신은…… 알았어요. 무슨 뜻인지 인제 알았어요.』
『알았으면 대답을 하시오!』
그러나 옥영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리 만큼 옥영은 억한 감정과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얼굴이 확확 달아 올랐다.
『어쩌면 당신은……』
옥영은 사람의 눈이 부끄러워 불현 듯 뒤를 돌아다 보았다. 보이 둘은 이 층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저만큼서 뚱뚱보 주인이 장부를 들여다보면서 주 판을 튕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부끄러워하는 자기의 태도가 남편의 감정을 한층 더 자극하 고 있는 줄을 옥영은 모른다.
『왜 빨리 대답을 못하는 거요?』
분노가 억압되어 있는 남편의 음성이었다.
순간, 옥영의 부끄럼은 돌연 커다란 서글픔으로 변해 버렸다.
『어쩌면 당신은 사람을 그렇게도……』
못 미더워 하느냐고, 옥영은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졌다.
『응?』
그제서야 석운은 펄떡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당신이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옥영은 저고리 고름으로 눈꼬리를 찍어 내며
『아직도 당신이 저를 몰라 주는 것이 슬퍼요!』
『아니, 여보! 도대체 어떻게 되 셈이요?』
커다란 안도감이 석운에게 왔다. 금새 감정은 밝아지며 석운은 열없어 견 딜 수가 없다.
『정능 아버님이 오셨어요. 어머님과 함께……』
『아버지?』
석운은 아연하게 입을 벌리며
『아버지가 어떻게 저런 자가용 차를 다……』
『아, 그래서 당신이 의심을 하셨군요.』
눈꼬리에서 저고리 고름을 떼며 옥영은 어린애처럼 남편을 흘겼다.
『어쩌면 남자들이란 그 처럼 자기 아내를 못 미더워 할까?』
세상의 남편들은 모두가 다 의처증(疑妻症) 환자인지도 모른다고, 옥영은 자기 또래의 아내들의 입에서 들은 한 마디를 불쑥 생각하였다.
姜敎授[강교수]와 高社長[고사장]
[편집]『아까 아침, 당신이 외출한 직후에 아버님이 오셨어요.』
마침 일요일이라, 정능 사는 강학선 교수는 들놀잇군들이 들볶는 난장판이 보기 싫다고 부인을 동반하여 반대로 시내로 들어와서 영화 구경을 할 생각 이었다. 혜화동을 지나다가 문득 손자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이 늙은 부 부는 아들의 집에 들렸다.
그랬던 것이 집에는 며느리가 혼자 남아서 다듬이질을 하고 있을 뿐, 아들 도 없고 손자들도 없다. 맏손자 딸 경숙은 동생 셋을 데리고 명륜동 동무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서 생일 잔치를 얻어 먹고 있는 판이라고 하였다.
『너무 어머니를 정능 구석에만 쳐박아 두었더니 곰팡이가 쓸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는데.』
그러면서 강교수는 집안을 한 바튀 휘이 들러보고 나서
『들놀이니 꽃놀이니 하고, 세상에 떠나갈 판인데 애 어멈도 어디 같이 영 화 구경이나 가보지.』
『너의 아버지가 구경을 하고 나서는 명동으로 가서 점심을 한턱 하신다는 데 ……』
시모도 자꾸만 옥영을 재촉했다.
시부모의 권이 고맙기도 하고 해서, 그럼 구경은 그만 두더라도 점심이나 사주십시고, 그 동안만이라도 다듬이질을 하고 나갈 생각을 옥영은 했다.
정히 그렇다면 그러자고, 수도극장의 제 일회가 끝나는 대로 가서 기다릴 테니 을지로 네거리에 있는 「기다림」이라는 다방으로 한 시 까지만 나오 면 된다고 시부는 말했다.
옥영은 교양도 있고 금슬도 좋은 이 늙은 시부모를 무척 따랐다. 마르면 다시 축여서 할 수밖에 없다고, 절반도 더 남은 일감을 식모에게 맡겨 놓고 옥영이 집을 나선 것은 열 두시 십분, 종로 이가에 있는 단골 양재점에 들 려서 며칠 전에 주문한 경숙이의 스커트가 됐느냐고 알아 보았다. 아직 채 되지 않았다기에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싫고 이십환도 아까워서 을지로까지 옥영은 걸었다.
약속 시간은 한시가 다 됐기에 들어만 서면 시부모 두 분이 점잖게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는 줄로만 옥영은 믿었었다. 그러나 시부모는 보이지 않았다. 다방에 혼자 앉았기가 싫어 밖에서 기다릴까도 했었으나 비교적 한 산한 분위기에 안심을 하고 옥영은 파초 나무옆에 앉고 말았다.
그러는데 보이가 들어 와서 종이 쪽지를 내보였다.
《경숙 어미 보아라. 손님을 만나서 지금 수도극장 앞 골목 북경루에서 식 사 중이다. 손님의 차을 보내니 이 인편을 따라 오너라. 시모 씀 》 그리고는 착 착 접은 표면에 「김옥영 앞」이라고 씌어 있었다. 낯익은 시 모의 글씨였다.
『왜 저 정능 아버님 댁 바로 옆에 희한한 이층 양옥 있잖아요? 크림색 나 는……』
『아, 바로 그 사람이오? 젊은 이호를 데리고 산다는 영감님?』
『네, 바로 그 이호를 데리고 수도극장에 구경을 왔었데요. 극장에서 아버 님을 만났는데 꼭 아버님께 식사를 대접하겠다고요.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인사를 못 차려서 미안하다구요.』
『그래 이호도 지금 여기와 있오?』
『그럼요. 아주 이쁘고 말 잘하는 분이니까 당신 조심해야 해요!』
『요것이?』
석운이가 손을 드는데
『너희들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빨랑 빨랑 들어오지 못하고……』
층계를 내려오던 강교수 부인이 번쩍 들린 아들의 손길을 후딱 바라보며
『쟤들이 그저 만나기만 하면 ……』
금년 들어 육십 오세의 강교수 부인이었으나 교양에서 오는 일종의 품위가 그의 단정한 차림새와 함께 부인을 무척 고상하게 하였다.
『그런데 너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느냐?』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어머니는 물었다. 그것은 동 시에 옥영의 물음을 대신하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었다.
『마침 이 앞을 지나가는데 저 양반이 차에서 내리길래 ……』
그 말에 어머니는
『어쩌면 ……』
하고 신통하게 만났다는 듯이 감심을 했고 옥영은
『정말이세요?』
하고 남편의 말을 곧이 듣지 않는다.
석운은 눈을 번 껌벅해 보이며
『가만 있어. 내 이따 집에 가서 죄다 이야기할게.』
어머니 등 뒤에서 둘이는 마주 보며 싱긋이 웃었다.
『너희들은 무슨 이야기가 그처럼 많으냐?』
저만큼서 걸어가시기에 못 들은줄 알았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못 들은 척 하세요. 어머니는 귀두 밝으셔.』
『옛날부터 하는 말이, 아들 며느리의 속삭임은 귀머거리 시어머니도 듣는 다더라.』
아들의 말이 풍자(風刺)를 띄어 왔기에 강교수 부인도 한 마디 대답 쯤 없 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참 재미 있는 말씀을 잘 하세요.』
옥영이가 감탄을 하는데
『여보오.』
석운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지며
『나는 오늘 홍역을 했오! 홍역……』
『홍역?』
『인생의 홍역 말이오. 땀 바가지나 흘렸으니까……』
『후홋……』
하고 옥영은 나지막이 웃다가
『참 나빠요, 당신은!』
눈흘김과 함께 옥영의 손길이 남편의 손가락 두 개를 휘감아 쥐고 비틀어 댔다.
그러나 그 순간, 후홋 하고 웃음을 죽이며 흘러나오는 아내의 입매 눈매에 서 강석운은 불현 듯 아내 아닌 딴 사람의 환영 한 조각을 발견하였다. 그 것은 아까 견지동까지 차를 같이 타고 온 수수께끼 같은 여학생의 옆 모습 이었다.
『참 오늘 당신과 비슷한 인상을 주는 학생을 한 사람 만났는데 ……』
『학생? 여학생?』
『음……』
『누군데요?』
그러는데 앞장 서 가던 어머니가
『애들아, 좀 빨랑 빨랑 오너라, 손님들이 기다리고 계시는데……』
『네 네.』
석운은 빠른 걸음걸이로 따라가며
『내 이따 이야기할게.』
『아이구, 오늘 밤도 또 새우게 되나봐.』
어머니의 뒤를 따라 강석운 내외는 방으로 들어갔다. 십조 넓이는 쾌히 될 성 싶은 다다미 방이었다.
커다란 식탁 위에 요리 접시가 흩어져 있었고 맥주 병이 서 넛 있었다.
안경을 쓴 강교수의 머리는 글자 그대로 설백(雪白)처럼 희었고, 그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육십객의 회색을 이루는 반백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옆 댁에 계시는 고(高)사장 내외 분이시다. 인사를 여쭈어라.』
『그러십니까! 송구스런 자리에 처음 뵙겠읍니다. 석운이라고 불러 주십시 오.』
아버지의 소개로 석운은 꿇어 앉아 정중한 인사를 하였다.
『고명은 이미 다 듣고 아는 바요. 편히 앉으시오.』
『황송한 말씀입니다.』
그러는데 옆에서 명랑한 목소리 하나가 뛰어 나왔다.
『소설은 아주 말쑥하던데 사람은 약간 십 구세기야! 오, 호호호 ……』
『…………』
석운은 후딱 고개를 들었다.
함박꽃이 웃고 있는 것 같은 요염한 얼굴 하나가 그 사람 옆에 있었다.
『하하하하 ……』
일동은 유쾌히 웃었다.
『아, 십 구세기?』
그 함박꽃 같은 여인을 쳐다보면서 석운은 조용히 웃었다.
『아니예요. 정말은 저한테도 꿇어 앉아서 십 구세기 인사를 하실까 무서 워서 그래 본 겁니다. 호호호 ……』
『이 사람은 개방주의(開放主義)가 되어서……』
고사장은 다소 겸연쩍은 얼굴로 동반자의 성품이 본시부터 그렇다는 것을 은근히 변명해 주었다.
부대한 체구에 장년들처럼 혈색이 좋았고 그런 색이 조금씩 섞인 선명한 회색 양복이 액면(額面)대로의 고사장의 연령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다.
옅은 고동색 양복에 두루미처럼 말라 빠진 강교수와 좋은 대조가 되고 있었 다.
『아이 참, 개방주의, 좀 좋아요? 선생님』
여인은 석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동의를 구해 왔다.
『좋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석운은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아, 초면 인사나 하고 나서 개방을 할 것이지. 그게 무슨 실례요?』
『웃어 버리면 인사지, 인사가 뭐 따로 있어요?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는 것이나 입을 벌리고 웃는 것이나 매일반이지 뭐예요? 하하하 ……』
이번에는 남자들처럼 웃어댔다. 강교수 내외도 웃고 옥영도 웃었다.
『그래도 자기의 성명 삼자는 통해 놔야만 할 께 아니겠오?』
그러면서도 고사장은 젊고 명랑한 동반자를 귀엽다는 듯이 실눈을 뜨며 바 라보았다.
『내 이름 같은 게 뭐가 그리 신통하다고 …… 아르켜 드려도 이런 훌륭한 선생님들은 금새 잊어 버리는 거예요. 영감님은 괜히 알지도 못하고 ……』
그래서 또 일동의 웃음은 연장이 되었다.
옥영과는 동년배의 여인이었다. 흰 양단의 금박이 회장 저고리, 같은 양단 의 다홍 치마를 그 여인은 입고 있었다. 옥영의 말대로 이야기가 참으로 청 산 유수와 같은 여인이다.
『자아, 작은 강선생님, 한 잔 드세요.』
여인은 잔을 권해 왔다.
『고맙습니다. 저는 술을 잘 못합니다.』
『아이, 그러다 보니 정말 효자이시네요!』
『괜찮다. 한 잔 받아라.』
강교수 부인이 옆에서 권해 왔다. 석운은 하는 수 없이 맥주 잔을 들고 비 스듬히 돌아앉아 조금만 마셨다. 그리고는 자기 손으로 고사장과 아버지의 여인의 잔에 골고루 따라 놓았다.
『아이구, 맙소사!』
여인은 표정을 크게 쓰며
『숫제 요리도 돌아앉아서 잡수시지!』
그 말에 일동은 또 하하 웃었다.
『여보, 여기는 점잖은 좌석이요. 그 만큼 개방을 했으면 인제 문을 좀 닫 구려.』
『점잖은 분네들은 뭐 별 다른 것 있을상 싶으세요? 한 껍질 벗기고 나면 모두가 벌거숭인데 ……』
웃음 소리는 한층 더 커졌고 옥영은 얼굴을 붉혔다.
『하아, 이러다가는 강선생 내외 분을 모신 것이 도리어 실례가 되지 않겠 오?』
고사장은 다소 엄숙한 어조로 동반자를 견제하였다. 그때서야 여인은 강교 수 내외에게 머리를 약간 숙이며
『너무 헤실펐읍니다, 용서하세요.』
했다.
『괜찮읍니다. 무얼 그런 ……』
강교수가 부드럽게 웃고 있는데
『그리고 작은 선생님, 인사 드리겠어요. 이름은 황산옥(黃山玉)이지만 한 성양조(漢城釀造) 고종국(高宗國)사장이 요거라고만 생각해 두시는 것이 기 억에 편하실거예요. 요거 아시죠?』
그러면서 여인은 새끼 손가락 하나를 쳐들어 가지고 까딱까딱 해 보였다.
『하하하하……』
사람들은 또 웃었다.
『나 원 참……』
고종국 사장은 입맛을 다셨다.
황산옥의 새끼 손가락은 그냥 까딱거리고 있었다.
『아, 여보! 당신을 데리고 다니다가는 어디 거 창피해서 견디겠오?』
고종국 사장은 노골적인 투정을 해 보였다.
『뭐 어때요. 사실이 그런 걸.』
까딱거리는 새끼 손가락 다음 약지에는 비취 가락지가 끼어 있었고 장지에 는 캐러트 반의 다이야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금박이 끝동에서 하얗게 드 러나 보이는 기름진 손목에 백금 시계가 번쩍이었고 맥주 잔을 든 바른편 팔목에는 파아란 비취 팔찌가 눈부시게 호화롭다.
『아, 글쎄 누가 사실이 아니래요? 강선생님 내외 분도 다 알고 계시는 이 야긴데, 무얼 새삼스레 들추어 내가지고 그러는 거요? 참 성미도 고약하다 니까…… 에잇, 내 참……』
그 말에 산옥은
『아, 하하핫…… 아, 하하핫……』
하고 자지러들게 웃어대며
『사실 말이지, 영감이 있으니까 제가 있는 것이지, 영감 없이야 어떻게 제가 빛을 낸다는 말씀이예요.』
『글세, 인제 그만 했으면 손님 접대나 좀 해 보구려. 한 동네 살면서도 데면데면 하던 강선생님을 오늘 일부러 모신 자리가 아니요?』
『참 선생님이나 사모님이나 옆에서 늘상 뵈면서도 인사 한 번 번번히 못 차리고 ……』
황산옥은 그러면서 강교수에게 또 맥주를 권했다.
『원 무슨 말씀을 …… 우리들이 도리어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강교수는 잔을 받아 쥐면서 그렇게 대답을 하였다.
『인가가 드문 외따른 산 밑이라, 영감만 나가 버리면 하루 진종일 혼자 있어야만 하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인제부터는 저의 집에도 가끔 오시고 저도 종종 놀러 가겠어요.』
『정말 그렇답니다. 놀러 오시우.』
강교수 부인은 그리고 나서
『오셔야 별반 대접할 것도 없지만 계란은 있답니다. 호호……』
『참 닭을 치시던데…… 터가 넓어서 참 좋으시겠어요.』
그것이 행인지 불행인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생활 방식이 전연 다른 두 가정이 정능 산 밑에 있었던 것이다.
양조계에 있어서 거물급의 한 사람인 고종국씨는 금년 들어 환갑을 맞이하 는 연령에 있었다. 그러나 고사장은 시내에 있는 본집은 항상 비다시피 하 고 이 정능 집에만 나와 있었다. 그 별장 비슷한 이층 양옥이 바로 강교수 가 만년(晩年)을 보내고자 자리를 잡은 삼간두옥의 바로 옆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년에 한번, 이태에 한 번씩 안주인을 갈아대는 고사장의 호화판 인 만년 생활과 한 주일에 두 번씩 K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이외에는 태반 집에 들어박혀서 저술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채소 밭이나 닭장을 거들어 주는 강교수의 생활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래서 서로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나 할 정도 밖에 안면이 없었다.
그러던 참에 오늘 우연히 극장에서 만나게 되었고 또한 고사장의 초대를 받게 된 강교수 내외였던 것이다.
『인제부터는 강선생님을 자주 좀 뵙겠읍니다. 알고 보니 주량도 비슷하고 …… 외따른 곳이라 밤에는 더구나 고적해서 ……』
『감사합니다. 내 집에도 좀 놀러 오시오.』
그러는데 황산옥이가 냉큼 나서며
『아이구, 영감도 …… 영감 같은 술장수 오야붕이 강선생님 같은 학자님 의 친구가 될 것 같아서 그러세요?』
했다. 그래서 또 웃었다.
그러나 오늘의 이 초대연이 실상인즉, 강교수 내외에 대하여 고사장 내외 가 개시하는 일종의 인생 도전(人生挑戰)을 의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 기에는 강교수 내외의 인품이 극히 선량했고 생활 체험이 너무도 단조로왔 다.
인류 역사에 전쟁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또한 어려서나 젊어서나 늙어서나를 막론하고 각기 자기다운 투쟁 의식을 가지고 살아 가 는 데 그 어떤 행복한 쾌감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이미 육순칠순을 맞이한 이 두 노인에게도 그런 종류의 우월감은 확실히 있었던 것이다. 다만 강교수로서는 그러한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는 수양 을 쌓았을뿐, 사람을 저울질하는 가치 기준이 없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강학선 교수는 윤리학(倫理學)의 노대가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사계 의 권위자였다. 해방후 K대학 문리과 학장을 거쳐 육이오 전후를 통하여 사 년 동안이나 총장의 자리에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환도 이후, 강교수는 건 강을 이유로 하여 모든 책임 있는 자리에서 떠나 동란 전부터 살아 오던 정 능 산 밑으로 완전히 은거(隱居)하고 말았다. 지금은 청에 못 이기어 한 주 일에 두 번씩 강의를 나갈 뿐이다.
주택은 비록 삼간 두옥이었으나 삼백 평 가까이 되는 넓은 대지가 강교수 내외의 유일한 낙원이었다. 동리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산 기슭이라, 심산 유곡의 절간처럼 집안은 조용했다.
그러던 것이 칠이칠 휴전 협정이 조인되기가 바쁘게 이층 양옥이 한 채 옆 에 생겼다. 빨간 슬스렛트 지붕에다 크림색 타일의 아주 말쑥한 양옥이었 다.
그것도 역시 삼백평 남짓한 대지를 갖고 있었다. 정원에는 가지각색의 울 창한 나무가 추럭으로 운반되어 왔다. 그 울창한 수목 사이에 연못을 파고 연못에는 붉은 난간을 가진 예쁜 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그때만 해도 이 양옥 안주인은 오늘의 황산옥이가 아니었다. 좀 더 젊은 삼십 전후의 아주 몸이 가냘픈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새 황산옥 으로 변환 것은 약 일년 전부터의 일이었고 그들은 항상 자가용으로만 출입 을 하였다.
강교수는 비록 고사장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지마는 고사장은 물론 강교수 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고사장은 오늘 날까지 몸소 성명을 통할 생각을 통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이유 모를 반감에서였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데서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때리고 규탄할 적마다 고종국 사장은 공연히 강교수 내외의 조촐한 생활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모르게 항상 무언의 견제를 받 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사장은 고사장 대로의 인생 항로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일제 시대, 경성 제대 법과를 나온 고종국씨는 중학 교원, 총독부 관리, 금융조 합, 상사 회사등, 여러 가지로 직업을 바꾸어 오다가 해방 후에는 애국도 하여 보고 정치도 하여 보았으나 결국에 있어서 제일로 실속 있고 보람 있 는 감투는 황금의 감투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관에 대해서는 황산옥이도 전적으로 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고사장 내외는 그 어떤 자격지심에서 강교수 내외를 경원해 왔었 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좀 더 강교수의 생활에 접근해 볼 생각을 가지고 오늘의 연석을 베풀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사장은 산옥이의 개방주의를 탓하는 것 같은 투정을 하여 보였지 마는 실은 산옥의 말에는 벌써부터 동감이어서 산옥의 입을 빌어 강교수 내 외의 근엄한 생활을 한번 건드려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인제 이 사람이 말한 것처럼 술장수 오야붕이니 만큼 술은 얼마든지 집 에 있읍니다. 인제부터는 종종 자주 뵙고 좋은 말씀 듣기로 하겠읍니다.』
이야기는 봄바람처럼 대탕하지마는 그 이야기가 양파처럼 껍질이 많은 줄 을 단순한 강교수 내외로서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이윽고 연회는 끝났다.
강교수 내외는 권하는 대로 황산옥과 함께 정능까지 편승하기로 하였고 고 사장은 볼일이 있다고 남았다.
『애 경숙 어미도 그럼 같이 타고 들어가자꾸나.』
앞장 서서 내려 가던 강교수 부인이 며느리를 돌아다보며 불렀다.
『네.』
그러는데 옥영을 보고 석운은 물었다.
『당신 집으로 곧장 들어가겠오?』
『들어가야겠어요. 오늘 정말 바빠요.』
『다방에서 어떤 학생과 만나기로 했는데 당신도 같이 가서 차나 한 잔 하 구려.』
『아, 아까 그 여학생? 나하고 비슷하다는 ……』
『응, 아주 재미 있고 똑똑한 학생이야.』
석운은 거기서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하였다.
『오늘은 혼자 가서 만나 보시고 오세요. 그처럼 똑똑한 학생이람 무슨 긴 한 이야길런지도 모르겠군요.』
『글쎄.』
그러다가 석운은 문득 생각난 듯이
『실은 오늘 내가 당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아, 아까 홍역하셨다는 이야기?』
『응.』
석운은 멋적은 웃음을 띄었다.
『아이, 당신두 참……』
눈을 흘기는데 시어머니가
『얘, 경숙어미, 빨리 나와 타려므나.』
『네.』
옥영은 뛰어 나가 차에 올랐다. 여자 셋은 뒷간에 타고 강교수는 운전수 옆에 올라 앉았다.
『작은 선생님은 안 타세요?』
황산옥의 명랑한 소리가 차 안에 들렸다.
『예쁜 여학생과 약속이 있대요.』
옥영이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래 그걸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세요?』
『…………』
옥영은 잠자코 웃었다. 이 여자의 윤리와 생리로로서는 모든 것이 다 그런 방향으로 비치는지도 모른다고, 습성의 차이가 이내 머리에 왔다.
『작은 선생님, 정능에도 자주 좀 놀러 나오세요. 여학생만 만나러 다니시 지 말고 ……호호홋 ……』
『네, 놀러 가겠읍니다.』
『지금 K신문에 쓰시는 「유혹의 강」은 참 재미 있게 읽고 있답니다.』
『그러세요?』
그러는데 계산을 치르고 나오는 고사장을 가리키며
『영감님도 대단한 애독자랍니다. 강 선생님이 쓰시는 「유혹의 강」말이 예요.』
『아, 참 좋은 소설이더군!』
고사장은 숨김없이 동감을 하며
『박목사가 바람을 피우는 과정이나 심리 파악이 대단히 훌륭해 그러다 보 니 강군도 그방면에는 녹록치 않은 선수인 모양이야. 하하핫 ……』
『호호홋 ……』
그러나 웃지 않는 것은 운전수 옆에 앉은 강학선 교수 혼자 뿐이었다.
『그럼 강선생님, 볼 일이 있어서 나는 여기서 실례하겠읍니다.』
『고사장, 과용하셨읍니다.』
이윽고 차는 떠나고 고사장과 석운은 한길로 나섰다.
『참, 훌륭한 작품이요. 색즉공(色卽公)이라고, 인생 자체가 텅 비인 것이 고 보면 무엇인들 안 비었겠오만 그러나 박목사의 엽색(獵色)에는 철학이 있어서 참 좋았오.』
『과분하신 말씀입니다.』
『강교수 같으신 분은 원체 목석 같은 분이니까 논지할 바가 못 되지만도 …… 아, 강군!』
『네?』
『강군의 생각은 나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좋다니까 글쎄. 인제부터 우리 색시 집에 한번 가볼까? 아주 좋은 데가 있다니까』
『감사합니다만 …… 네 시에 누구와 약속한 바가 있어서 ……』
『색신가?』
『아니올씨다. 어떤 여학생입니다.』
『여학생은 색시가 아닌가? 어쨌든 강군은 나보다 급이 하나 높으이!』
고사장이 여학생을 탐내기 시작한 것은 실로 순간부터의 일이었다.
강석운은 수도극장 앞에서 고사장과 헤어져 을지로 네거리로 천천히 걸어 가고 있었다. 여학생과 만나기로 한 네 시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거리는 밝다!』
그러고 그 거리처럼 석운의 마음도 점점 명랑해지고 있었다.
『나는 오늘 정숙하지 못한 아내를 가진 한 사람의 남편의 감정을 절실히 경험했다.』
현실적으로 가정을 파괴함이 없이 그 뼈저리고 가슴 아픈 감정의 풍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인간적으로나 작가적으로나 하나의 성장을 의미하고 있 는 것이라고, 강석운은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상대적인 위치에 놓여 있는 아내의 심정을 미루어 볼 수 있는 좋은 재료도 또한 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석운은 여태까지 자기의 방탕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은 아내의 괴로운 감정을 단지 관념적으로만 상상해 왔었다. 아니, 그것은 혼자 강석운 뿐만 이 아니었다. 난봉을 피우는 세상의 뭇 남편들은 모두가 다 그러하였다. 참 으로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마음 고생 쯤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아내들은 태반이 다 참아 왔다. 울고 불고 하다가도 결국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왜? 남편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세상의 아내들은 어째서 그 처럼 강인 한 인내성을 가지고 참아야만 했는가?』
그것을 남편들은 주부다운 미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남편들은 남편다운 미덕으로써 아내의 방탕을 눈감아 주지는 않았다. 그 눈감아 주지 못할 무 서운 감정의 폭발을 강석운은 오늘 실제로 체험했다. 다른 사나이에게 아내 를 빼앗겨 본 남편들과 똑같은 비참한 감정속에서 강석운은 마침내 교양의 가면과 민주정신의 탈을 벗어 버리고 한낱 왕자의 권위로써 가정의 파괴를 기도했던 것이다.
『그렇건만 세상의 아내들은 곧잘 참아 왔다!』
남편들에게는 왕자와 같은 독재 의식의 발동이라는 최후의 무기라도 있었 다. 그러나 아내들에게는 그것조차 있을 수가 없었다. 남편들처럼 가정을 파괴하는데 상쾌한 감정을 맛보기에는 불행히도 약자 의식이 먼저 머리를 들었다. 비장한 참을성을 가치고 허수아비 같은 아내의 자리를 사수(死守)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비장한 열등감을 의식하면서 감정을 버려야만 했다.
사회는 쌍벌죄(雙罰罪)의 원고인 아내들에게 동정을 보내기 전에 먼저 비웃 음으로 대했다.
『아내를 위하자! 아내를 열심히 사랑하자!』
강석운은 중얼거렸다. 아내들의 입장이 약한 줄을 비로소 느끼는 강석운은 물론 아니었다. 다만 오늘에 와서야 느낀 강석운의 그 비참한 감정 체험을 살림으로써 약자로서의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좋은 약이 되기를 석운 은 절실히 원했다.
지금까지도 강석운은 가정 파괴의 우려가 있는 행동은 될 수 있는 한 피해 왔었지마는 오늘의 이 절실한 체험은 앞날에 있어서의 자기의 행동을 견제 하는데 좋은 브레이크(制動機[제동기]) 가 될 것만 같았다.
아까 그 수수께끼의 여학생에게서 정신적인 매력 한오라기을 느끼고 다소 명랑한 마음으로 기다려지던 네 시의 약속이 인제 한낱 무미건조한 사무적 인 일거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일시나마 아내를 의심한 것은 미안한 일이지마는 뜻하지도 못했던 오늘의 체험은 과거 십 팔년 동안에 걸친 애정의 타성과 때(垢[구])를 세탁해 준 것만 같았다. 따라서 아내의 존재가 차차 더 소중해지는 반면에 여학생과의 약속이 점점 더 귀찮아졌다.
화분을 깨뜨린 꽃집 앞에서 석운은 걸음을 멈추었다.
나이 환갑을 맞이하면서도 고종국 사장은 젊은 황산옥과 여생을 즐기고 있 다. 그것도 일년에 한 번 이태에 한번씩 새것으로 갈아 댄다고 했다. 아까 헤어질 때는 강석운더러 색시집에를 가자고 하였다.
고종국 사장의 그러한 삶의 태세(態勢)를 한낱 방종이라고 간단하게 규정 지어 버림으로써 인간의 윤리(倫理)는 만족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윤리의 자(尺[척])로써만은 재단(裁斷)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인간의 생명력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수 많은 윤리의 파괴자들이 이 거리에는 범 람했고 또한 범람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생명력의 신비는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십 고개를 넘으면서 부터 강석운의 머리에는 한 오라기 두 오라기 흰 머 리털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 오라기 흰 머리카락을 처음으로 발견 한 순간, 석운은 생명력의 전률 같은 것을 전신에 느꼈다.
『청춘은 이미 갔다!』
희미한 한 줄기 서글픔 속에서 석운은 흰 머리 털을 뽑아 버렸다. 어느 틈 에 어물어물 도망을 쳐 버린 청춘이었다.
그 순간까지도 자기는 청춘의 소유자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아내 이외의 딴 여성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선을 넘지 않 았다는 데는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근신도 있었지마는 청춘의 권리를 일 부러 행사(行使)하지 않는다는 긍지도 또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흰 머리털 한 오라기를 뽑아 버린 후부터는 그러한 긍지가 차츰차 츰 희박해졌다. 권리의 불행사(不行使)가 아니고 권리 행사의 위축을 의미 하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 십 팔년 동안에 걸친 성실한 가정 생활에 대한 이유 모를 반 동(反動)같은 것을 강석운은 희미하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예측하 지 못한 복병(伏兵)과도 같은 강적이었다.
젊었을 때는 도리어 여자들의 얼굴이 쳐다보이지를 않았다. 무관심에 가까 운 존재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청춘의 상실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부터는 젊은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차차 늘어갔다. 손을 뻗쳐도 손길이 잘 가 닿지 않는 데 인간의 이 상은 깃들어 있는 것일까? 밤 하늘의 아득한 초록 별과도 같은 그들 젊은 여성의 존재였다.
남녀 관계의 이상적 결합은 단란한 가정에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몸소 실천해 오던 강석운이가 아득한 초록 별과도 같은 젊은 여성을 가끔 생각해 본다는 것은 확실히 자기 모순인 동시에 사자 심중(獅子心中)의 해 충(害蟲)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해충을 소탕하기 위하여 강석운은 비 상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생리와 윤리의 투쟁의 그래프(圖表[도표])다!』
이것이 자기 모순에 대한 강석운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석운은 작가였다. 현실적으로는 윤리의 편에 서서 생리와의 투쟁을 꾀하는 한편 작품 「유혹의 강」에서는 생리의 편에 서서 주인공 박목사로 하여금 윤리를 파괴시켜 봄으로써 인생 하나를 더 경 험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투쟁의 한낱 수단으로서 강석운은 꽃집으로 들어가서 아까 자기가 깨뜨린 야쓰데를 달라고 했다. 야쓰데는 이미 새파란 도기(陶器)분에 옮겨 심어져 있었다. 화분 값을 제하고 강석운은 거스름을 받았다. 화분이 좀 더 작았으며 호수 다방까지 들고 가도 무방했으나 두자반 길이나 되어 보이는 야쓰데였다.
『이따 오다가 가져갈 테니까 맡았다 주시오.』
『네 네, 언제든지 좋읍니다.』
꽃집을 나서서 강석운은 호수다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야쓰데 화분을 바라보며 강석운은 오늘의 기억을 항상 새롭힐 작정이 다. 불륜한 아내를 가진 남편의 심정을 연장시켜 불량한 남편을 가진 아내 의 심정을 미루어 봄으로써 마음의 동요를 방지하는 약제로 삼으려는 것이 었다.
女人二態[여인이태]
[편집]『결국 만나 보길 잘했어!』
용기를 내어 강석운을 만나 본 것을 곤색 양복의 여학생은 잘했다고 생각 하였다.
견지동 S출판사 옆에서 강석운과 헤어진 여학생은 다소 흥분한 얼굴로 종 로 네거리를 건너서 을지로 쪽을 향하여 나불나불 걸어갔다.
걸음걸이가 지극히 명랑하였다. 자색 평화(平靴)가 남자들처럼 페이브를 탄력있게 아로 새기고 있었다. 몸집 전체에서 젊음의 향기가 구름처럼 뭉게 뭉게 피어 오르는 것 같은 걸음걸이었다. 쭉 쭉 다리를 뻗었다.
화장도 않고 수수끔한 복장이었으나 손에 든 카메라는 콘텍스 신형의 고급 품이다.
다동 입구로 접어 들어가다가 호수다방의 곰보 유리 문을 학생은 서슴지 않고 열고 들어갔다. 레지 앞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서
『미안하지만 나 종이 한 장만 빌려 주세요.』
『어서 오세요.』
아는 얼굴이기에 레지는 인사를 하며 학생에게 흰 종이 한 장을 내 주었 다.
학생은 주머니에서 파카 오십 일을 꺼내 들고 빈 테이블로 가서 다음과 같 이 썼다.
《미스터 송 오늘 뜻하지 않은 돌발사가 생겨서 한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어 요. 따라서 오늘의 촬영 대회에는 혼자 다녀 오셔요. 모델이 이쁘니까 신이 나실 거예요. 그렇지만 그 모델에게는 집의 오빠가 매니저로 항상 따라다니 니까 웬만큼 마력을 내기 전에는 함락이 잘 안 될 거예요. 어쨌든 성공을 빌어요, 미안해요.
즉일 열 한시 쟈스트.
고영림》 고영림(高英林)은 편지를 착착 접어 가지고「송준오(宋準五)앞」이라고 겉 에다 썼다. 그리고는 울긋불긋 비단 테이프로 엮어 놓은 전언판 한 구석에 끼워 놓았다.
오늘 두시부터 한강 백사장에서 아마추어 촬영 대회가 있다. 모델은 이애 리(李愛梨) ── 고영림과는 고등학교 동기동창, 대학 이학년까지 다니다 가 가정 사정으로 중퇴를 하고 목하 오빠가 전무로 되어 있는 한성 양조회 사의 여사무원으로 있는 것이다.
고영림은 다방을 나섰다. 한길로 빠져 나오며 손을 들었다.
『아현동까지 가 주세요.』
택시 하나를 잡아 타고 고영림은 일렀다.
차는 삥 돌아 종로로 해서 광화문을 향하여 달렸다.
달리면서 고영림은 자기의 편지를 보고 무척 불유쾌해 할 송준오의 얼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불가항력도 있는 것이라고, 자기의 행 동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 있어서 작가 강석운을 한 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은 벌써 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로 실행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던 것 이다. 만일 오늘 아침, 정능에 나가서 아버지와 싸움만 하지 않았던들 강석 운 방문은 후일로 밀었을 것이요, 따라서 송준오와의 약속을 배반하지는 않 았을 것이었다.
아현동 고개 중턱에서 차는 멎었다. 오십, 건평에 이백 평 대지를 가진 커 다란 한옥 앞이었다. 대리석 문패에는 ── 高宗國 (고종국)── 이라고 씌어 있었다.
뜰 한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돌산이 있었고 그 돌산 한 복판에 조그만 삼층 탑이 한 기둥서 있었다. 가지각색의 화분이 돌산을 삥 둘러 싸다시피 놓여 있었다.
으리으리한 대청 마루에서 늙은 침모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고 주방 찬 마 루에서 젊은 식모는 양념감을 다지고 있었다. 쇠갈비 한 채가 찬 마루 기둥 에 매달려 있었다.
『엄마랑 다들 가셨어요?』
『그럼요. 벌써들 떠나셨는데…… 아가씨는 왜 안 따라가셨우?』
침모가 돋보기를 벗어 놓으며 영림을 맞이하였다.
『아이구, 할머니도…… 그런 델 뭘하러 다 따라 다녀요?』
『왜 좀 좋으셔요? 진종일 들에 나가서 실컷 자시구 실컷 노시구 할 텐 데……』
곗군들과 함께 우이동으로 들놀이를 간다고, 어젯밤부터 식찬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였다.
『난 또 정능에 들르셨다가 우이동으로 곧장 따라 가신 줄로 알았더니 만……』
어머니랑 어머니의 친구들이랑 자꾸만 같이 가자고 하길래 영림은 하는 수 없이 정능에 나갔다가 우이동으로 뒤 쫓아 간다고 얼버무려 둔 이야기를 이 즈음 갓 들어온 늙은 침모는 곧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도 참, 금덩어리가 나온데도 그런 델 덜렁덜렁 따라다닐 아가씨 같이 보이셔요? 어떻게나 꼬장꼬장하고 괴벽스런지, 할머니도 인제 좀 두고 보셔요.』
젊은 식모 덕순(德順)이는 그리고 나서 하하 웃었다.
『아니, 뭐 어째?』
영림은 익살스런 얼굴을 하고 찬 마루 앞으로 달려 가면서 콘텍스를 둘러 메어 보였다.
『아이구, 그걸로 한 대 얻어 맞았다간 대강이가 부서져 나가요.』
덕순이는 두 팔로 머리를 싸 매어 보였다. 이 덕순이와 영림은 세 살 차이 밖에 되지 않는다. 오 륙년이나 한 집에서 살고 보면 형제처럼 친했다.
『내가 언제 덕순 언니한테 괴벽스럽게 그랬어?』
식모를 언니라고 부른다고, 집안에서는 모두가 다 못마땅하게 여겨 왔으나 영림은 끝끝내 자기 고집을 세워 왔다. 그것을 덕순이는 무척 고마와 했지 마는 그런 것이 다 괴벽 가운데 하나라고, 식모는 식모대로 계산을 하고 있 는 것이다.
『아냐요, 아냐! 저한테는 안 그러셨지만……』
『그럼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인젠 아예 언니라고 안 그럴 테다. 식 모! 어멈!… 그렇게 부름 좋겠어?』
『제발 좀 그렇게 불러 주어요. 언니란 소리를 들을 적마다 눈총만 맞는 줄은 모르시고……』
『눈총을 맞는 사람이 나쁜가? 눈총질을 하는 사람이 나쁘지. 입 벌려 요!』
『네?』
덕순은 어리둥절했다.
『빨리 입 벌리래도! 눈은 감고……』
덕순은 하라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추잉껌 두개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 하나를 까서 쩍 벌린 식모의 입에다 홀랑 넣어 주었다.
『씹어 봐요. 눈을 뜨고……』
『아, 껌이네요!』
『이번엔 할머니두……』
대청으로 영림은 깡총 깡총 걸어갔다.
『아가씨두 어쩌면……』
『빨리 할머니, 입 벌리세요.』
『자아.』
홀랑 또 한 개가 들어갔다.
『아, 하하핫…… 아 하하핫……』
세 사람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게 재미있는 아가씬 줄은 몰랐었오.』
껌을 씹으면서 침모는
『그렇지만 아가씨, 밖에 나가서는 껌을 씹지 마시우.』
『왜요?』
『양갈본 줄 알면 어떡해요?』
『으왓, 양갈보?』
영림은 허리를 꼬며 자지러들게 웃어댔다.
『덕순 언니, 오빠 나갔어?』
돌아 앉은 사랑채를 바라보면서 영림은 물었다.
『벌써 나가셨어요.』
『삼청동 간다지 않았어?』
올케의 친정이 삼천동에 있다. 친정에서 올케는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것 이다.
『그런 말씀 없었어요. 한강에서 무슨 사진 찍는 대회가 있다고 하면서 사 진기를 메고 나가셨어요.』
『흥, 내 그럴 줄 알았어!』
이번 일요일에는 올케한테 가 본다고 하던 오빠였다. 그 오빠가 종시 애리 를 따라 한강으로 나가고 만 것이다.
『남들은 들놀이니 뱃놀이니 하면서 모두들 따라 나서는데 아가씨는 왜 도 루 들어오셔요?』
침모는 다시 돋보기를 꼈다.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할머니두……』
대청으로 올라서면서 영림은 웃는 얼굴로 대꾸를 하였다.
『아이구, 왜 같이 갈 사람이 없겠우? 학교 동무들두 있을 테구, 점잖은 신랑감도 수두룩 할 텐데……』
『후훗……』
하고 영림은 웃고나서 자기 방인 건넌방으로 들어가며
『할머니, 나 신랑감 하나 골라 주세요.』
했다.
『원 황송도 허지. 나 같은 늙은이가 뭘 안다고……』
그때, 또 덕순이가 냉큼 나서며
『할머니, 아예 중신들 생각은 마세요. 성미가 어떻게나 괴벽스런지 글 쎄…… 돈 있은 양반은 돈이 있다고 싫어하고…… 고관의 아드님은 감투 놀 음만 한다고 싫어하고…… 젊은 양반은 비린내 난다고 튕겨 버리고…… 나 이 지긋한 양반이 좋다지만 그런 양반들은 모두가 다 처자가 있고 보니, 하 늘의 별 따기보담 더 어렵지 뭐예요.』
『아니, 정말 그럴 테야?』
건너방 문을 홱 열어 젖뜨리며 영림은 약간 엄숙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아이, 무서워라!』
덕순이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리우고 고개를 슬며시 돌리다가,
『아이, 쓰려! 아이, 눈이 쓰려!』
양념을 다지던 매운 손이라, 눈알이 콕 콕 쏜다.
『아, 하하핫…… 쌤통이다. 쌤통이야! 남의 흉을 그렇게 보다가는 인제 눈알이 홀랑 썩어 빠질 테니, 두고 봐요!』
『아니, 정말 남 쓰려서 죽겠는데……』
덕순이는 떼굴떼굴 굴르다시피 하며 부엌으로 나가서 푸푸 세수를 한다.
침모는 웃으며
『젊었을 적이 그저 꽃이지, 늙으면 만사가 파이지, 파이야!』
『할머니도 젊었을 적이 있었어요?』
『낸들 왜 없었겠오만……』
영림은 양복 저고리를 벗어 걸며
『그러셔요? 난 또 할머니는 배에서 나올 때부터 머리가 하얀 줄만 알았어 요.』
『머리가 파 뿌리 될 때까지 살다 죽자던 양반이 사십도 못 돼서 덜컥 죽 어 버렸다우.』
『그래 그때서 부터 쭉 혼자 살았어요?』
『그럼 혼자 살지, 어떡하우?』
『아이, 가엾어라!』
영림은 뛰쳐 나가자 침모의 얼굴에다 자기 볼을 한 번 비벼 주었다.
『아이, 황송두 해라! 아가씨는 정말로 재미있는 분이셔요.』
침모는 또 돋보기를 벗으면서
『그런데 아가씨는 왜 화장을 안 하셨우? 입술 연지두 찍구 눈썹두 곱게 그리고, 좀 그러시지. 그냥도 이처럼 예쁜 아가씬데…… 화장을 하면 참 굉 장히 예쁠 거야.』
『그러니까 괴벽하다는 거예요.』
덕순이가 또 부엌에서 나오면서 말을 가로챘다.
『그 칙칙한 곤색 양복은 좀 벗어 버리고…… 왜 그 옷장에 말쑥한 양복이 많이 걸렸던데……』
『글쎄 말이예요, 할머니! 그 옷들을 한 번이라도 입어 본 줄 아세요? 지 어만 놓고는 바라만 보는 아가씨래도!』
『후훗……』
하고 영림은 웃고 나서
『인제 입을 때가 오면 입는 거야!』
했다.
세칸 넓이의 건넌방이었다. 책상과 양복 장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파란 비니루 상보가 덮인 책상 위에 분홍갓을 쓴 스탠드, 그리고 이층으로 된 책 꽂이에는 대학 영문과 교재와 강석운의 소설 책도 몇 권 꽂혀 있었다.
영림은 동편 쪽 미닫이를 열고 양실로 꾸며 놓은 마루 방으로 나갔다. 남 쪽과 동쪽이 다 유리 문이어서 무척 밝은 방이었다. 유리 문 밖으로 정원이 내려다 보이고 처마 끝에 매여 달린 조롱 속에는 목과 배가 셋노란 밀화부 리 한 쌍이 졸고 있었다.
『아가씨, 점심 자셔야지?』
벌써 한 시가 되었다. 덕순이가 상을 봐 가지고 들어왔다.
『아니, 나 먹고 싶지 않아. 나 인제 또 나가야겠어.』
『어딜 또 나가세요?』
『중신을 들러 나가는 거야.』
『중신을요? 어머나!』
덕순이는 일부러 더 놀라 보인다.
『왜 나는 중신 들면 안 돼?』
『아가씨, 제 일이나 좀 빨랑빨랑 해결하세요. 남의 일은 참견 마시고 ……』
『그런 게 아니야. 덕불고(德不孤)라고, 덕을 베풀어 놔야만 후일 나도 덕 을 보는 거야.』
『그런데 어느 분의 중신을 드시는 거예요?』
『안 돼. 그건 안 가르쳐 줘.』
『앗, 알았어요. 제가 제 중신을 드시는 거 아냐요?』
『어쩌면 덕순 언니는……』
그 순간, 이상하게도 영림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것은 실로 영림 자신 도 거기까지는 의식하지 못했던 한 줄기 부끄럼이었다.
한 사람의 성실한 독자로서 작가 강석운에 대한 호기심은 벌써부터 있었 다. 그리고 그것은 주로 인생관의 일치에서 오는 호기심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을 지금 덕순이는 여성 대 남성의 관계로서의 극히 세속적인 해석을 하 여 버린 것이다.
『아가씨, 제 말이 맞았어?』
『아냐. 정말 아냐! 어디까지나 나는 제 삼자로서 중신의 역할만 하고 있 는 거야.』
영림은 열심히 변명을 했다.
『암만해도 좀 이상하세요. 어쨌든 양복이나 새 것으로 갈아 입고 나가세 요. 그리고 화장도 좀 하시고……』
『그럴까?』
영림은 옷장을 열었다. 가지각색의 블라우스와 스커트, 그리고 산뜻한 그 린 색과 선명한 회색 스으츠가 장 안에 걸려 있었다.
『그 파아란 양복, 좀 근사해요?』
『싫어, 그만 둘 테야.』
영림은 탁 장문을 닫았다.
『아이고, 성미도 참…… 그럼 화장이나 좀 하세요.』
『화장?』
영림은 벽에 걸린 둥그런 거울을 불현 듯 들여다 보다가
『있을 건 다 있구먼.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그랬음 됐어!』
그리고는 휙 돌아서 벗어 놓았던 칙칙한 저고리를 다시 입었다. 그리고는 다 낡아 빠진 껌정 핸드백을 들고 방을 나섰다.
『아가씨도 참, 종시 그냥 나가시는군.』
침모가 영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기에 말이예요. 핸드백도 흰 나이롱으로 만든 아주 근사한 것이 있 답니다.』
덕순이가 상을 들고 일어서면서 하는 말이다.
『후훗!』
하고 영림은 웃으며
『나 삼청동 좀 다녀 올 테야.』
『정말 아가씨처럼 올케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야.』
영림의 등 뒤에서 덕순은 감심을 하는 것이다.
택시로 십 오분, 올케 한혜련(韓惠蓮)의 친정은 삼청동 막바지에 있었다.
열 다섯간의 한옥이 삼청동 공원 옆에 조촐하게 들어 앉아 있었다. 아버지 는 없고 어머니 혼자 뿐이다. 해방 이후 아버지는 쭈욱 신병으로 누워 있다 가 삼년만에 돌아가셨다.
일제시대에는 어떤 사립중학의 교원이었다.
영림이가 들어섰을 때, 쉰 넘은 어머니가 울타리 밑 꽃밭 옆에서 딸의 탕 약을 달이고 있었다. 일찌감치 파종을 한 꽃밭에는 봉선화를 비롯하여 채송 화, 백일홍, 금송화, 분꽃 등의 재래종이 새파랗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 중 에서도 봉선화가 제일 많았다. 봉선화는 올케 혜련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었다.
『얘, 혜련아, 아현동 아가씨가 오셨구나.』
부채질을 하던 손을 멈추며 늙은이가 일어섰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언니 좀 어떤가요?』
『그저 그 모양이지.』
영림은 성큼 성큼 대청으로 해서 안방으로 들어서며
『괜찮아, 괜찮아! 어서 누워 있어요.』
아랫목 이부자리 속에서 일어나려는 올케를 영림은 도로 뉘었다.
『그냥 각혈해요?』
『오늘은 아직……』
『얼굴이 무척 창백해요.』
『피가 줄어드니까 그렇겠지.』
지분 한 점 없는 파리한 병인의 얼굴이었으나 어딘가 서양 사람처럼 투명 하고 야리야리한 피부를 가진 대단한 미인형의 여인이었다. 전형적인 포류 형(蒲柳型)이다.
금년 들어 서른 둘, 혜련의 미모를 탐내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든 영 림의 오빠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피를 다분히 물려 받은 오빠로서는 한 사 람의 미모를 붙들고 일생을 조용히 살다 죽을 위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예쁜 꽃도 서 번만 보면 흥취가 없다.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지 않 은 곳에 아름다움의 생명은 짧다. 영림의 오빠는 이미 혜련의 육체에서 신 비로움을 모조리 박탈해 버린 사나이였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응, 곗군들과 오늘은 들놀이를 갔어.』
『아가씬 왜 놀러 안 가세요?』
『언니가 앓아 누웠는데 나만 놀러 감 좋겠어?』
『흐흥……』
혜련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영림의 손길을 가만히 잡았다.
『케익을 사 왔어요.』
사 갖고 온 과자 상자를 영림은 끌렀다.
『올 적마다 사 갖고 옴 어떡하세요?』
『내버려 둠 오빠와 아버지가 다 써 버릴 돈인데, 뭘 그래요?』
『아가씨도……』
『언니, 이것 좋지. 슈우크림…』
『아가씨, 고마워요.』
『아이고, 언니는 인삿성이 너무 밝아서 싫어.』
그러면서 영림은 약병들과 함께 머리맡에 놓인 접시에다 과자 몇 낱을 담 아 들고 약을 달이는 어머니한테로 나갔다.
『이거라도 좀 잡수시면서 약은 천천히 다려도 무방하세요. 언니의 병은 한 달 이내에는 꼭 낫기로 마련이 돼 있으니까요.』
『아이유, 황송도 해라! 한 달은 고사하고라도 일 년 앞으로만 나아 주어 도……』
『아냐요. 인제 정말 두고 보심 아실 거예요.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명의 (名醫)를 초청해 오기로 했어요. 지금 그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뵙고 오는 길 이예요.』
무슨 영문인지를 어머니는 모르고 그저 히쭉히쭉 웃고만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 누워 있는 혜련은 그 순간, 영림의 이야기에서 일종 형언 할 수 없는 전률을 전신에 느끼며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아, 아가씨가 종시……』
종잇장처럼 해말쑥하던 혜련의 얼굴이 처녀인 양 빨갛게 물들기 시작하였 다.
스물 한살 먹은 해 봄에 약혼을 하고 그 해 가을로 영림의 오빠 고영해(高 英海)는 부랴부랴 혜련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혜련은 K대학 가사과 졸업 반이었으나 결혼을 하고는 그대로 가정에 들어앉고 말았다.
학생 시절부터 몸이 무척 약해서 결혼 생활이 어떨까고, 집안에서도 걱정 을 하고 의사도 염려를 했으나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처음 이 삼년 동안 은 별반 몸에 지장이 없었다.
세살잡이 사내 아이가 있었으나 육이오 통해 건사를 잘못해서 이질로 죽었 다. 어린애를 잃어버린 심뇌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한지 반 년도 되기 전에 남편이 딴 여자에게 손을 댄 사실이 좀 더 극심한 타격을 혜련이에게 주었다. 그 때부터의 혜련의 심뇌였다. 그렇다고 남편이 아내를 소홀히 취 급하는 것도 아니기에 혜련은 그저 태양을 못 보는 그늘의 꽃처럼 집안을 지켜왔다.
눈에 띄게 혜련의 건강이 쇠약해진 것은 육이오와 일사 후퇴로 말미암은 고된 몸 움직임과 섭생을 돌보지 않은 악식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 동안 약재도 많이 썼고 마산 요양원에도 몇 달 가 있었다. 그러나 혜련의 병세는 일진 일퇴 격으로 가뜬하게 나아 주지를 않았다.
소위 긴 병이라고 해서 시가에서도 인제는 겨워했다. 남편은 또 남편대로 회사일이 바쁘다고, 밤낮 집을 비우고 나다녔다. 늘 자리에 누워만 있는 아 내에게 남편은 곧잘 역정도 냈다. 혜련은 그저 모든 것을 단념하고 죽는 날 을 고요히 기다림으로써 온갖 저항을 고스란히 포기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누이 영림만이 혜련의 눈물을 거두어 주는 단 하나의 소중 한 인물이었지마는 영림은 또 영림이대로 학교에 나가 버리면 혜련은 정말 고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혜련은 석달 전부터 친정 어머니의 신 세를 지고 있는 몸이 되고 만 것이다.
『언니, 나 오늘 선생님 만나 뵈었어요.』
혜련의 자리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영림은 다소 흥분한 어조로
『인제 네시에 다방에서 또 만나기로 했어요.』
『어마, 아가씨도……』
커다랗게 뜬 혜련의 두 눈이 무슨 기적이나 바라보는 것처럼 영림의 얼굴 을 빠안히 쳐다보았다. 두 볼을 물들인 한 오라기 홍조가 좀처럼 가시지를 않는다.
강석운을 만나 보고 왔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병상에 누워 있는 이 여인 에게는 비길 데 없이 커다란 충격을 준 듯 싶었다.
『아가씨, 정말이유?』
『내 언제 거짓말 했어요?』
『어쩌면 아가씨도……』
『언니 문제를 갖고 아침에 정능엘 갔었어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둘이서 영화 구경갈 타령만 하고 있지 않겠어요. 화가 나서 한 바탕 해대고 왔어요.』
『글쎄 인제 그 문제는 내버려 두라니까요.』
『언니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싫어. 저 때문에 사는 세상이지, 남 때문에 사는 세상인가?』
『저 때문에 사는 세상도 인제 얼마 남지 않았는 걸…… 무얼 구태여 그럴 필요 없어요.』
『아이구, 요 못난 페시미스트(悲觀論者[비관논자])야!』
홍조를 띈 혜련의 볼 하나를 가만히 꼬집어 주며
『끝까지 싸우다 쓰러지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인 걸 모르슈?』
『흐흥……』
하고 혜련은 쓸쓸히 웃으며
『나는 암만 해도 현대인이 아닌가봐요.』
했다.
고영림은 올해 영문과 졸업반이지마는 올케인 한혜련의 결혼 생활을 비난 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였다.
처음에는 오빠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비난쯤으로 행실이 바로잡아 질 오빠는 아니었다. 거기 대한 좋은 선철(先轍)을 영림은 지긋지긋하게 아 버지에게서 보아 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림은 오빠를 단념하고 올케를 나무 라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시대가 달라서 하는 수 없다고 쳐도 무방하지만 언니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오빠의 시중을 들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럼 어떡하라는 말이세요?』
『언니는 무엇 하러 학교에 다녔우? 일생 동안 우리 오빠의 종 노릇이나 하려고 다녔우?』
『아가씨도 참……』
『뭐가 아가씨도 참이에요? 애정의 독점없는 결혼은 결혼이 아니라고, 이 건 강석운 선생의 지론인데, 강선생의 열렬한 애독자인 언니가 그걸 모를리 는 없을거 아냐요?』
『글쎄 누가 모른데요?』
『알기만 함 뭘 해요. 실행을 해야지.』
『실행이 그처럼 쉬운 일인 줄 아세요?』
『뭐가 어려워요?』
『참 해방 후에 학생들은 생각이 단순해서 좋겠어요. 실천력이 강하고 ……』
이런 종류의 대화가 교환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사오년 전의 일이었다.
엄격히 따져 보면 한혜련이가 일제 시대의 사년제 여학교를 마친 것이 열 여덟살 되는 봄이었다. 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시기라, 물 자 부족으로 일반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 갔고 징병이니 지원병이니 보국대 니 근로봉사니 젊은이들은 자연 결혼의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아버지는 중학교에 봉직하고 있는 몸이었기 때문에 몸도 허 약한 딸의 결혼을 단념하고 M전문 학교에 넣어 두었다. 혜련이가 사학년 때, 해방이 되었으니까 스물 한 살 먹은 여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고영림이가 순전히 전후파(戰後派)에 속하는 사고 방법으로 자기 의 일생을 대담하게 처리해 나가는데 반하여 한혜련은 완전히 전전파(戰前 派)적인 세태(世態)속에서 그의 청춘의 생태(生態)가 영위되어 온 계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고영림과 한혜련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현저한 차이가 있다 고 보는 것도 하나의 객관적이 견해 일런지 모르지만 성격의 차이도 또한 등한히 할 수는 없었다.
『언니는 결국에 있어서 결혼을 잘 못한 사람이예요. 우리 오빠에 대한 애 정의 자세의 중량을 엄밀히 재 보지도 않고 그저 오빠가 잡아당기는 데로 끌려 들어갔을 뿐이니까요.』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그 때는 오빠보담 더 난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하는 수 없었어요. 오빠가 그처럼 방탕한 사람인 줄을 누가 알았어요?』
『언니는 내 말을 못 알아 듣는군요. 오빠가 났다든가 오빠보담 난 사람이 없었든가 하는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문제는 오빠에 대한 언니의 애 정의 자세라니까요. 영롱(玲瓏)하지 못한 애정을 가지고 결혼하는 건 위험 하다는 말이예요.』
『영롱한 애정! 영롱한 애정!』
영림은 남들이 쓰지 않는 말을 곧잘 창작해서 섰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 다 혜련은 일종의 존경의 염을 가지고 영림의 어딘가 모르게 천재적인 센스 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참 좋은 말이예요. 확실히 오빠에 대한 나의 애정은 영롱하지를 못했어 요.』
『그것이 도대체 잘못이었어요. 영롱할 수 있는 애정의 대상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영원히 나타나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 살아야죠. 고독하지만……』
이런 대화를 바꾼 것은 영림이가 대학 이학년 때의 일이었다.
칸나의 意慾[의욕]
[편집]고영림과 한혜련의 이년 전의 대화는 좀 더 계속이 되었다.
그렇지만 명민한 눈을 가지고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면서 기다리노라면
『언젠가 한 번은 영롱할 수 있는 애정의 대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나는 믿어요.』
『그렇지만 아가씨, 그런 대상이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할 꺼예요?』
『신이 아닌 이상, 그걸 어떻게 안담?』
『나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어요.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롱하지 못한 애정을 가지고 오빠와 결혼을 한 것이예요. 그러니까 오빠만 방탕하지 않았 던들 나는 나 대로의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았을런지 몰라요.』
『가만 있어요!』
영림은 그 순간, 그 무엇을 언뜻 생각하며
『언니, 결혼 전에 실연했우?』
『아니요.』
『그럼?』
『말하자면 일종의 불가항력이었어.』
『무슨 말인데?』
『아가씬 그런 거 알 필요가 없어요.』
『비밀주의! 언니는 나빠!』
『개방주의에도 미는 있지만 비밀주의에도 아름다음은 있는 거라우.』
『그런 아름다움은 인제 낡아 빠졌어요. 있는 건 있고 없는 건 없고……
흉금을 탁 터 놓는데 현대적 미는 깃들어 있는 거예요.』
『눈부신 햇빛 속에서 새빨갛게 피어난 칸나꽃의 불타는 의욕도 이쁘지만, 그늘진 응달에서 아쉽게 시들어 버리는 봉선화의 애수도 이쁘지 않아요?』
『아이구, 또 봉선화 예찬이야?』
『아가씨가 칸나 예찬자니까……』
『맙소사. 사센티멘틀! 곰팡이 냄새! 춘향전이나 심청전이야?』
『새로운 것만이 가치가 있다면 학교에서 고전(古典)은 뭣하러 배우시 우?』
『좋아요. 비밀주의! 남의 속은 다 털어 놓게 하구선 자기 속은 꽁꽁 묶어 만 두구……』
『묶어 두는 게 아니예요. 묶어 둘만한 이야기 거리조차 못 되는 건데 요.』
『아이, 안타까워! 정말로 언니는 그늘진 응달에서 아쉽게 시들어 버리는 봉숭아가 되고 싶은가봐.』
『좀 이뻐요? 애수가 있구…… 꿈이 있구…… 신비가 있구……』
『아이구, 그 폐병환자 같은 넋두리는 좀 집어 치워요.』
『폐병 환자가 폐병 환자 같잖으면 어울리지가 않아서 걱정일 거예요.』
『철저한 페시미즘(悲觀論[비관론])이다!』
그것이 이년 전 이야기였다.
그러던 것이 지금으로부터 석달 전, 혜련이가 친정으로 옮아 온지 한 주일 만에 영림은 비로소 혜련의 비밀을 알고 무척 놀랐다.
영림은 퍽 오래 전부터 강석운의 소설을 탐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서 작가가 보는 인생의 눈과 영림이가 보는 그것이 태반은 일치해 왔었 다. 그러한 일치점을 발견할 적마다 영림이가 받는 감정은 말할 수 없이 컸 다.
그것은 주로 사고 방법의 투명성과 감정의 소박성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 은 고영림의 생리와 윤리의 한계가 작가 강석운의 그것과 일치하는 데서부 터 기인하는 감정이입(感情移入)의 극치를 의미하고 있었다. 예술을 향수 (享受)하는데 있어서 작가와 독자의 기질적 조건이 이렇듯 일치한다는 것은 독자나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이상적인 상태라고 아니볼 수 없는 것 이다.
영림은 차츰 차츰 작품과는 떠나서 작가 강석운 그 사람을 환영에 그려보 기 시작하였다.
영림이가 하나의 인격체(人格體)로서의 강석운을 마음속에 그려보기 시작 한 것은 벌써 오래 전,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일이었다.
『속속들이 이야기 해보고 싶은 사람!』
온갖 세속적인 탈을 대담하게 벗어 버리고 이야기해 보고 싶은 사람, 흉금 을 탁 터 놓고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를 끝장까지 해 보 고 싶은 사람, 그 이야기로 말미암아 설령 자기의 일신을 망치는 한이 있다 손 치더라도 뉘우침이 없을 사람, 무한이 높은 창궁(蒼穹)처럼, 무수히 많 은 별의 종족들처럼 일생 동안을 이야기해도 이야기의 끝마무리가 없을 것 같은 사람 ── 그것이 강석운만 같았다.
『강석운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투명한 논리와 소박한 감정이 불똥을 튕기면서 부딪칠 때, 그 일순간이야 말로 인간 최고의 보람이요, 진리요, 가치요, 행복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격과 인격의 대화였고 육체와 육체의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기 때문에 영림이가 나이 차서 이성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강석운 그 사람을 생각하는 대신에 강석운을 표본으로 한 딴 남성을 환영에 그리고 있었다.
영림의 나이 올해 스물 넷, 그 동안 보이 프랜드도 여럿 사귀어 보았고 나 이가 지긋한 사회인과도 교제를 맺어 보았다. 그러나 영림은 종시 강석운의 소박한 감정과 순수한 논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세계로 부터 도피해 나왔다.
지난 겨울, 영림은 정중한 편지와 함께 거의 이백장이나 되는 감상문을 강 석운에게 보냈다. 그것은 영림 자신의 거짓없는 생활 체험의 기록이었다.
제목은「칸나의 의욕(意慾)」 ── 「칸나의 의욕」은 과거 고영림이가 사 귀어 본 남성들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여 영림 자신의 솔직 대담한 생태 묘 사(生態描寫)로써 일관되어 있었다. 그 적나나한 묘사 가운데는 섹슈얼 미 스테리(性的神秘[성적신비])에 대한 과학적인 규명과 아울러 철학적인 당위 성(當爲性)에 까지 언급되어 있었다.
《누가 먼저 나를 칸나(canna)라고 불러 주었는지, 기억은 아득하다. 중학 시절부터 나는 칸나를 무턱대고 좋아 했다. 그래서 불리워진 별명이긴 했으 나 그 때까지도 나는 칸나가 어떤 꽂인지를 모르고 좋아했다. 어떤 서구(西 歐) 작가의 작품에서 나는 이 꽃 이름을 알았다. 정열에 불타는 빨간 꽃이 라고도 했고 다년생(多年生)이어서 생명력도 강인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보다 칸나라는 엑소틱(異國風[이국풍])한 어감이 좀 더 구미에 당겼었는지 도 몰랐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식물 도감(植物圖鑑)을 찾아 보았다.
칸나는 담화과(曇華科)에 속하는 다년생 꽃으로서 난초(蘭蕉) 혹은 미인초 (美人蕉)라고도 불렀다. 미인이 못 되는 나이기에「미인초」라는 이름에다 꿈만을 얹어 보았다. 키는 삼사척에서 오륙척, 잎사귀는 파초와 비슷했고 여름부터 가을에 걸처 노랑색 혹은 빨간 꽃을 피운다고 했다. 마레에와 인 도지나가 원산이나 아메리카와 화란에서 많이 난다고 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나는 꽃 집으로 가서 칸나를 사자고 했다. 주인은 홍초(紅蕉)한 분을 내놓으면서 그것이 칸나라고 했다. 나는 놀랐다. 홍초는 우리 집 뜰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푸대접도 하지 않았지만 별로 소중히도 여기지 않던 홍초가 그 순간 부터 나에게는 화중(花中)의 여왕이 되어 버렀다……》 이상은「칸나의 의욕」의 맨 첫 대목이었다.
《칸나의 주위에는 남자 동무가 많았다. 젊은이들도 있었고 사회인도 있었 다. 그들은 모두가 다 칸나를 우대해 주었다. 칸나의 분부가 떨어지기가 바 쁘게 그들은 시종들처럼 칸나에게 영합(迎合)하였다.
그렇건만 칸나는 슬펐다. 불행히도 칸나에게는 요기(妖氣)가 부족했는지 모른다. 보이프랜드들의 젊음은 좋았으나 그것은 태반이 다 풋 병아리의 비 린내를 지닌 치졸(稚拙)의 영역에서 멋 없이 우쭐댔고 지긋한 사회인들의 분별(分別)은 좋았으나 그것은 언제나 세속의 누룩(麯子[국자])으로 말미암 아 발효(醱酵)해 버린 술찌꺼기처럼 텁텁했다. 독도 되지 않고 약도 되지 않는 이미 알맹이를 상실한 분별이었다. 영롱한 애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칸 나는 그들의 세계에서 뛰쳐 나왔다……》
「칸나의 의욕」의 한 구절이었다. 또 다음과 같은 대목도 있었다.
《우주는 신의 게당케(思想[사상])라고 독일의 시인 〈쉘러〉는 말했다.
이 말에는 칸나도 수긍을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의 실천으로서 생물(生物)에 웅자(雄雌)의 구별을 두어 섹스(性[성])의 매력을 부여하였다. 이 섹스의 매력이야말로 인류의 행복한 번영과 아울러 온갖 문명의 원동력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위대한 신의 창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칸나는 슬펐다. 그것은 동시에 또 하나 인류의 불행을 마련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온갖 연애의 비극은 신의 무사려(無思慮)하게 부여한 성의 인력에 있었다. 한 사나이에게 두 여자, 한 여자에게 두 사나이의 비극……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대 간음하지 마라는 치졸한 미봉책을 십계명(十 戒命) 속에 집어 넣지 않으면 아니 된 신의 무분별을 칸나는 슬퍼했다.
칸나는 어떤 청년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았다. 칸나도 그 청년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청년은 칸나의 영혼보다도 더 열심히 칸나의 육체를 요구했 다.
그러나 칸나는 정신적으로 청년을 존경할 수가 없었다. 여성(특히 칸나)에 게 있어서 존경은 애정의 발아(發芽)를 의미하는 동시에 애정의 극치이기도 하다. 존경의 염이 없는 애정은 다만 육체의 발화(發火)일 뿐이다. 시간이 라는 물만 끼얹으면 불은 꺼진다고, 칸나는 앞질러 생각했다.
그러나 조물주가 부여한 섹스에의 신비로운 매력은 칸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의 요구에 응할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애정 행위는 십계명의 간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칸나는 생각했다. 칸나는 청년의 요구를 거절했다. 청년은 자살을 하려고 독약을 먹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에게 발견되어 청년은 목숨을 건졌다.
칸나는 가끔 생각한다. 청년이 가엾어서 이왕 조물주가 주신 양성의 일력 이고 보면 청년의 요구를 들어 주어도 무방한 것 같은 생각을 가끔 해 보다 가도 칸나는 결국 머리를 흔들었다.
칸나는 하나지만은 그 한 사람의 칸나 가운데 육체적인 칸나와 정신적인 칸나의 두 사람이 들어 앉아 있는 사실을 생각했다. 정신적인 칸나가 그 어 떤 이상적 남성을 동경하면서 육체적인 칸나가 청년과 결합한다는 것은 확 실히 일종의 간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정신의 분열…… 칸나의 비애는 그 곳에 있었다……》
「칸나의 의욕」에 대한 강석운의 독후감이 며칠 후에 왔다. 그것을 요약 하면 다음과 같았다.
강석운의 독후감은 무척 간략하고 침착한 글이었으나 적지 않은 흥분이 일 면에 배이 있었다.
《칸나가 지닌 정신 연령(精神年齡)의 높이를 가상(嘉尙)합니다. 또한 칸 나의 투명한 순수한 감정은 칸나로 하여금 오늘의 성실을 지니게 한 동시에 그것은 이미 칸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모랄(도덕률(道德律[도덕률])을 형성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칸나는 모랄의 탐구라고 생각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랄은 이미 형 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칸나를 통솔하는데 성공했읍니다.
단지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과 육체의 분열에 대한 칸나의 비애입니다. 모랄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맛본 칸나의 심각한 번민입니다. 그 것을 칸나는 신의 탓으로 돌렸읍니다. 그러나 결국은 신의 섭리(攝理)에 맞 도록 칸나 자신을 이끌어 가는데 칸나는 성공했읍니다.
그러나 자기 분열의 비애를 칸나가 남달리 절실히 맛본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나는 봅니다. 그것을 신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칸나의 육체 연령보다도 칸나의 정신 연령이 훨씬 높았다는 데 원인은 있을 것입니다.
칸나의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지마는 칸나의 육체 연령을 부쩍 끌어 올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칸나의 정신 연령을 끌어 내리든가 하기 전 에는 그러한 비애를 모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읍니다. 따라 서 그것은 칸나에게 있어서 영원한 비극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물도 보기 전에 칸나 꽃이 좋아진 칸나…… 인간 고영림의 아름다운 꿈 은 그 곳에 깃들어 있었읍니다. 칸나 꽃에 대한 지식을 완전히 마스트한 후 에야 비로소 실물을 사러간 칸나…… 인간 고영림의 현실은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칸나, 칸나! 참으로 어여쁜 이름입니다. 칸나의 아름다운 의욕이 영원히 살찌고 여위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어 마지 않습니다.
추신(追伸) ── 혹시 이 글을 발표하고 싶다면 알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 으려 합니다.
그러나 영림은, 선생님의 고평을 얻은 것만이 뼈저리게 황송할 뿐, 발표의 욕망은 추호도 없노라고 하고 후일 몸소 원고를 찾으러 가겠노라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간단한 회장을 띄웠다.
그것이 벌써 지나간 겨울 철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오늘까지 강석운을 찾 아보지 못했던 영림이었다.
어느 날, 영림은 강석운의 독후감을 올케인 혜련이에게 보이었다. 그것은 영림과 혜련이가 강석운의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작중 인물의 운명, 성격, 인생관 등에 관하여 밤을 새워 가면서 토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석운의 답장을 보는 순간, 혜련은 깜짝 놀라며 글자 그대로 얼굴 의 핏기가 해말쑥하니 가시기 시작하였다. 영림은 혜련의 놀라움이 하도 크 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았으나,
『아이, 아가씨는 정말로 행동성이 발랄해서 좋아요!』
했다.
그것은 일견, 아가씨가 무슨 편지를 했기에 이처럼 감동에 찬 회답을 강선 생에게서 받았느냐는 놀람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외 에 무슨 놀람의 원인이 있는 것 같아서 이리 저리 찔러 보았으나 혜련은 좀 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이럭저럭 해는 바뀌어 신정이 왔다. 영림이가 올케의 비밀을 안 것은 정월 보름을 지나 혜련이가 친정으로 옮아간지 한 주일만의 일이었다.
해방 후 약이 좋아서 혜련의 병세가 급속도로 악화하지 않은 것만은 불행 중에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하고 온갖 심뇌를 잊어 버려야만 하는 혜련의 몸인 만큼 시집살이는 역시 병인의 심신을 적지 않게 피로하게 하였다. 더 구나 남편의 알뜰한 애정까지 잊어 버린 몸이고 보면 차라리 친정 어머니의 다사로운 간호 밑에서 사는 날까지 살다 죽기를 혜련도 원했고 영림도 권했 다. 그래서 친정으로 옮아간 혜련이었다. 그리고 혜련 모녀의 생활비와 치 료비는 시집에서 부담해 준다고 했다.
사흘이 멀답시고 영림은 올케의 문병을 갔다. 그리고 그것은 정월 하순, 어떤 눈 내리는 날 오후의 일이었다.
영림이는 들어가다 닷새에 한 번씩 왕진을 오는 주치의(主治醫) 김박사가 가방을 들고 안방에서 나오는 것과 마주쳤다.
『아, 김선생님 오셨어요?』
아현동에 있을 적부터 왕진을 오는 김박사를 영림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나 오빠와도 잘 아는 오십객이었다.
『언니 좀 어때요?』
『주위에 신경을 덜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현동 시절보다는 경과가 좋아 요. 열은 삼십팔도를 오르내리는데, 절대 안정이 필요하오.』
『선생님, 정말 좀 고쳐 주세요. 저는 선생님만 믿고 있어요.』
대문 밖까지 따라 나가면서 영림은 애원하 듯 말했다.
『그런데 날 좀 보오.』
김박사는 대문 밖에 세워 놓은 택시 앞으로 걸어 가며 눈짓으로 영림을 오 라고 했다.
『눈이 오는데 우리 차 안에서 이야길 좀 하지』
『네.』
영림은 김박사를 따라 차에 올랐다.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육체 뿐이 아니요. 정신적인 안정도 동 시에 필요하다는 건데……』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언니의 기분을 명랑하게 해 주느라고 애를 쓰고 있어요.』
『좋은 말이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암만해도 무슨 지나친 심뇌가 있는 것만 같은데… 오빠가 그렇고 보면 심뇐들 없겠오마는……』
『그러나 오빠에게 관해서는 벌써부터 단념하고 있으니까, 별반 마음의 짐 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럼 그 밖에 무슨 마음 고생 같은 것은 없오.』
『그런 건 저도 알 수 없어요. 원체가 명랑한 편이 못돼서 옆에서 보면 늘 상 우울해 뵈죠. 그래서 제가〈프라우조르게〉(憂愁夫人[우수부인])라고 불 러 주죠.』
『음,〈프라우 조르게〉!무슨 소설에 그런 이름이 있던 것 같은데……』
『독일 작가〈주우데르만〉에게 그런 작품이 있어요.』
『어쨌든 그 우수부인에게서 우수를 쫓아 내는 것이 이 병에는 약 이상의 효력이 있을 것 같소. 그 점을 주의해서 마음을 늘 즐겁게 갖도록 해 드리 시요. 그럼 나는 가겠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영림은 내리고 차는 떠났다.
『아가씨, 무슨 이야기를 그처럼 오래 하셨우?』
방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해련은 누운 채 물었다.
『아냐, 아무런 것도 아냐.』
『흐흥.』
혜련은 가볍게 받아 넘기며
『나도 다 알고 있어요.』
『알긴 언니가 뭘 안다는 거유?』
『인제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니, 그리 알라는 거지요.』
『어마?』
영림은 놀라며 병인의 그 절망적인 신경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냐요. 아현동에 있을 적보다 경과가 무척 좋다고 하면서〈프라우 조르 게〉우수(憂愁)만 떼 버리면 문제없이 났는다고요.』
그리고 나서 영림은 김박사와 바꾼 이야기를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그걸 떼 버리지 못하면 암만 약을 써도 소용 없다는 건가요?』
혜련은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약이 소용 없다는 게 아니고, 우울을 없애 버리고 명랑한 기분을 늘상 갖게 됨 병은 훨씬 속히 날 거라구요.』
『…………』
그러나 혜련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한참 동안 영림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 다가
『아가씨!』
하고, 어조에 다소 힘을 주어 불렀다.
『응?』
『영원히 나는 우수부인으로서 죽을 거예요. 영원한 프라우 조르게!』
그 말에 영림의 표정이 긴장을 하며
『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요?』
혜련은 가만히 도리도리를 하며
『아냐요. 괜히 그저 그래 본 거예요.』
했다.
『아냐, 뭐가 있어요. 언니의 우울에는 기필코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아 요. 무슨 말 못할 이유가……』
『흐흥, 말 못할 이유!』
그리고는 또 한참 있다가
『정말 인제는 말 못할 이유가 되고 말었어요.』
『내게도? 아니, 내게도 말을 못 해요?』
적지 않게 서운하다는 표정을 영림은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아가씨, 미안해요. 그렇지만 서운히 생각지는 마세요.』
『왜 서운하지 않을까? 언니는 나를 아무 것도 아닌 거로 여기고 있는 증 거예요.』
핑하고 눈물이 감도는 시선으로 영림은 혜련을 흘겨 주었다.
혜련은 백납처럼 하얀 손을 뻗혀 영림의 손길을 더듬어 잡으며
『내가 죽기 전에 적어도 아가씨에게 만은 이야기하고 죽고 싶었어요. 그 렇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생각이었고…… 이제는 정말 아가씨에게도 이 야기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용서해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걸 왜 인제는 못 한단 말이야? 아냐, 나는 듣고 말 테야. 해요. 어서 해 요!』
영림은 혜련의 여윈 손길을 자꾸만 흔들어 댔다.
『나는 듣고 싶음 들어야만 하지, 참지는 못 해요. 나는 칸나야! 칸나의 의욕이 강하다는 걸 몰라? 남의 호기심만 건드려 놓고 뭐에요? 해요. 어서 빨리 해요!』
혜련은 그러나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언니는 나빠! 나를 그처럼 믿지 못하우?』
『아냐요, 믿지 못하는 건 아냐요.』
그리고 또 한참 있다가 눈을 감은 채
『아가씨, 조금도 숨기지 말고 대답할 테에요?』
하고 조용히 물었다.
『무언데?』
『무어든……』
『네버 마인! 책임지고 솔직할 테야!』
『그럼 묻겠어요.』
『뭐든지 물어요.』
『저어……』
적이 혜련은 망서리다가
『저 강석운 선생님 말이예요.』
『응? 강석운 선생님?』
『그 후 강선생님에게 또 편지 냈었우?』
『아아니!』
영림은 그 순간, 강석운선생의 회답을 보고 새파랗게 안색이 변해지던 얼 마 전의 올케를 불현 듯 연상했다.
『아니, 그건 왜 물어요? 언니의 이야기라는 게 무슨 강선생님과 관계가 있는……』
영림의 신경이 날쌔게 귀를 기울이었다.
『아냐요. 난 또 그 후에도 쭈욱 편지 왕래가 있는가 하고……』
창백한 혜련의 얼굴에 한 줄기 발기우리한 핏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냐, 원고를 보내 달라기도 미안한 일이고 해서 한 번 찾으러 가겠다는 간단한 답서를 냈을 뿐인데…… 그것과 무슨 관련 있는 이야기유?』
그랬더니 혜련은 영림의 안색을 살펴 가며
『아가씨, 강선생님을 무척…… 무척 좋아하시지?』
『거야 뭐…… 나쁘다고 생각해야 할 하등의 재료도 없으니까……』
『사랑하시는 건 아니예요?』
『어머나? 어쩌면 언니두……』
이 뜻하지 않은 올케의 물음에 영림은 실로 여러 가지 의미에서 놀라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아가씨, 정말 진심을 말해 주세요.』
『언니는 그처럼 사람을 홀가분히 사랑할 수가 있을 것 같으세요?』
『아니, 내 얘기가 아니고 아가씨 말이예요.』
『글쎄 그 아가씨가 고영림이야. 고영림이가 사람을 그리도 간단하게 사랑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정말?』
『나는 거짓말 안해! 무엇 때문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살아요? 진심만 이야 기 할래도 못다 하구 죽을 몸인데……』
『아가씨가 정말 그렇담……』
『슈어(정말)! 네버 네버!』
영림은 새끼 손가락을 내밀고 올케의 새끼 손가락을 깍지를 끼워 주며
『언니, 인제 마음 놓고 이야기해요. 프라우 조르게의 우수의 원인이 강석 운선생에게 있다는 걸 인제는 알았으니까 말이야.』
『정말 아가씨, 괜찮겠우?』
『아이, 답답해! 괜찮지 않더래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 뭐예요? 사실은 사 실대로 알아야만 하니까요.』
순간, 강석운에 대하여 지니고 오던 영림의 존경의 염은 차차 희박해져 갔 다. 올케처럼 착하고 고운 마음씨를 가진 한 여성을 이렇게까지 마음의 고 생을 시켜온 강석운이란 사나이의 이중 인격이 점점 무서워졌다.
존경은 여성에게 있어서, 특히 영림 자신에게 있어서 애정의 극치인 동시 에 애정의 싹이기도 하다고, 칸나는 말했다. 그리고 칸나는 작가 강석운을 존경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고영림은 강석운에게 대하여 일종의 애정의 발아(發芽)를 고백한 셈이 결론적으로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강석운의 이중 인격을 발견한 이 순간, 존경의 염도 애정의 싹도 고영림에게 있어서는 깨끗이 가시기 시작했다.
『자아, 언니 어서 이야기해요!』
어떠한 일이 있을지라도 올케는 이처럼 불행하게 만든 강석운의 행동에 역 사를 영림은 알아야만 했다.
『그렇담 이야기하겠어요. 아가씨는 작품을 통해서 그 분을 아셨지만……
나는 벌써, 벌써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벌써부터…… 그게 언젠데?』
『여학교 일학년이었으니까 열 네 살 때에요. 그때, 그 이는 동경 W대학 재학중이었어요. 헬렌과 돌구름의 이야기……』
『무슨 뜻이예요?』
『내 이름을 서양식으로 부르면 헬렌(Holen)이 되구요, 그이의 이름을 새 겨서 부르면 돌구름(石雲)이 되지요.』
『어쩌면……』
영림의 호기심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鳳仙花[봉선화]의 哀愁[애수]
[편집]천 구백 삼십 팔년, 그러니까 그것은 혜련이가 열 네살 적 여름 방학의 일 이었다.
그때, 혜련은 아버지가 봉직하고 있는 서울 어떤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 일 학년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선병질(腺病質)의 허약한 몸을 가진 혜련의 건 강을 부모네는 매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의사의 권고도 있고 해서 여름 방 학 한 철을 이용하여 원산으로 해수욕을 갔다.
그때만 해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라, 송도원(松濤園) 해수욕장은 대단히 다채로왔다. 가지 각색의 비취 파라솔과 수영복이 눈부시게 화려했 다.
혜련 모녀는 송도원 뒤로 인접해 있는 개말이라는 마을에서 민가 한 방을 빌려 가지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혜련 모녀 뿐 아니라, 피서객의 태반은 다 그러하였다. 여관들이 해변 솔밭 사이에 있었으나 대부분은 다 민가로 몰려들었다. 반농 반어(半農半漁)의 이 마을은 여름 한 철 피서객에게 방을 빌려 줌으로써 다소의 부수입을 집집마다 노리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피서 객으로 득실거렸다.
혜련은 매일처럼 어머니를 따라 해변으로 나가서 미역도 감고 일광욕도 했 다. 어머니도 가끔 물에 들어갔으나 모녀가 다 헤엄을 못 치는지라, 어머니 는 태반 비취 파라솔 밑에서 혜련의 물장난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깜자주 수영복의 혜련의 모습이 조금만 보이지 않아도 어머니는 덜컥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러다가 죽 끓듯 하는 욕객 속에서 깜자주 수영복을 발견하고 야 마음을 놓곤 하였다.
어머니는 무서워서 이튿날부터는 사람이 적은 데를 찾아서 해수욕장 맨 끝 으로 혜련을 데리고 갔다. 거기서는 혜련을 잃어버릴 염려가 통 없었기 때 문이다.
깜장 수영복을 어머니는 입었으나 물에는 별반 들어갈 생각을 않고 태반은 파라솔 밑에서 허벅다리를 내놓고 일광욕만 했다. 그때 어머니는 서른 다섯 이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혜련도 무척 좋아했으나 날이 갈수록 점점 쓸쓸해졌다.
본시부터가 고독한 혜련이기도 했다. 헤엄이라도 칠 줄 안다면 또 모르지만 허구한 날을 무연한 바다만 바라보는 것이 혜련은 싫어졌다.
그러나 한 달만이라도 해수욕을 하면 건강에 무척 좋은 것이라는 의사의 권고가 귀에 남아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고집을 세웠다.
그러던 어떤 날이었다. 혜련 모녀가 바다로 나가 보니 매일처럼 자기네가 자리를 잡고 있던 맨 끝의 장소에서 어떤 청년 하나가 수영을 하고 있었다.
혜련 모녀도 그 옆에다 비취 파라솔을 세워 놓고 물에 들어갔다.
『어머나, 이 조개 좀 봐!』
주먹만큼씩 한 숭굴숭굴한 조개가 한 무더기 모래 웅덩이 속에 가득 차 있 었다. 조그만 가막 조개는 혜련이 모녀도 잡아 보았지만 이처럼 큰 조개는 물 속 깊이 들어 가야만 잡혔다.
『엄마, 우리도 이런 것 좀 잡았으면……』
혜련은 쪼그리고 앉아서 조개를 어루만져 보았다.
『우리가 어떻게 잡니? 저것 좀 봐라. 저렇게 한참 동안이나 물 속에 들어 가서야 잡는데……』
바라다보니, 청년은 한참씩 숨박꼭질을 했다. 그러다가는 푸푸 하면서 조 개를 잡이 ( )나오곤 했다.
『인제 저이가 나오면 우리 몇 개 돈 주고 사자.』
『응, 그래요! 꼭 사요!』
혜련은 조개를 들여다보며 청년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런는데 청년이 조개 세 개를 움켜 쥐고 물에서 나왔다. 그래서 어머니는 물었다.
『이거 보세요. 우리 애가 조개를 무척 갖고 싶어 하는데 몇 개 파실 수 없겠어요?』
그 말에 청년은 단발을 한 혜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주 귀여운 소녀군요. 그 처럼 귀여운 소녀가 팔라는데 왜 안 팔겠읍니 까?』
혜련은 얼굴을 붉히며
『한 개에 얼마씩이예요?』
『한 개에 일원씩만 내려므나.』
『어머나?』
쌀 한 말에 일원 오륙십 전 하던 세월이었다.
그 날, 혜련은 하루 종일 기뻤다. 꽃 조개, 호랑 조개를 비롯한 가지 각색 의 조개를 청년에게 선물 받았다. 헤엄을 못 치면 어떡하느냐고, 청년은 혜 련에게 헤엄도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물결이 드나들어 곱게 젖은 해안선에서 뜀박질도 했다. 삼십 미터 가량 접 어 주고 하는 뜀박질이었다.
청년은 오후 세 시쯤 해서 혜련 모녀와 헤어져 들어갔다.
『좀 더 놀다 가세요.』
혜련은 갑자기 쓸쓸해졌다. 혜련으로서는 이 해수욕장에 온 이래로 실로 처음 맞이한 즐거운 날이었기 때문이다.
『시내에 들어가서 누구 잠깐 만나 보고 올 사람이 있어서……』
『내일 또 나오세요?』
내일 또 나오기를 고대하면서 묻는 혜련이었다.
『나오고 말고. 해수욕을 하러 온 사람이 안 나오면 어떡하니?』
『언제 오셨어요?』
이번에는 어머니가 물었다.
『한 십여일 됐읍니다.』
『서울서 오셨어요?』
『네.』
『저희도 서울서 왔지만 얘가 몸이 너무 허약해서 해수욕을 하면 좋겠다기 에 데리고 왔는데, 너무 고적하다고 자꾸만 집으로 가자는 거예요. 될 수 만 있으시다면 내일도 나오셔서 수영도 좀 가르쳐 주시고, 좀 같이 놀아 주셨으면……』
『그렇다면 마침 잘 됐읍니다. 저도 혼잡니다. 저기 보이는 저 송학관(松 鶴舘)에 묵고 있으니까 매일처럼 나올 수 있지요.』
『그러시면 서로 잘 되셨군요. 저희들은 마을에서 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있답니다. 이애의 식성이 별라서 아무거나 고분고분 먹어 줘야지 말이죠.
꼭 내 손으로 찬 걱정을 해줘야 한답니다.』
『편식은 몸에 좋지 않읍니다.』
『편식도 이만 저만한 편식이 아니랍니다.』
청년은 혜련의 어끼를 툭툭 치며
『안돼요. 편식을 하면 신체 발육에 균형이 잡히지 않아요.』
인삿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실감을 가지고 걱정하는 말이었다.
『오늘 저녁 찬은 그 조개를 끓여 먹어요. 아주 몸에 좋으니까……』
『조개는 입에도 대지 않는 애랍니다 글쎄.』
『안되겠는 걸!』
청년은 혜련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기웃거렸다.
『저도 어렸을 때는 편식이 심했어요. 그렇지만 나이 자라니까 차차 나아 가더군요.』
『그것 좀 봐요, 어머니! 어머니는 괜한 걱정만……』
혜련은 자기 편 하나를 얻은 것 같아서 청년이 차차 더 좋아졌다.
『그럼 내일 또 수영 배워요.』
청년은 케에프로 어깨를 가린 채 송학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혜련은 바라보며, 자기는 이 처럼 오랫동안 눈 전송을 하는데 끝끝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송학 관 울타리 안으로 사라져 들어간 청년을 가볍게 나무랬다.
마음이 허전했으나 발부리 앞에 쌓인 한 무더기 조개를 바라보니, 허전하 던 마음 한 구석이 어쩐지 메꾸어지는 것도 같았다.
그 날 저녁, 혜련은 조갯국을 먹었다. 눈을 딱 감고 약 먹듯이 혜련은 먹 었다.
『어쩌면 혜련이가……』
어머니는 놀랐다.
이튿날도 청년은 와서 혜련과 함께 놀아 주었다. 고무 뜨개에 태워서 밀어 도 주고 수영도 가르쳐 주고 물 속 깊이 들어가서 조개도 잡아 주었다. 공 치기도 하고 뜀박질도 했다. 어머니는 파라솔 밑에서 잡지 책을 읽으며 둘 이의 노는 양을 미소와 함께 바라보곤 했다.
『이름이 뭐지?』
파도가 넘나드는 기슭에 나란히 앉아서 청년은 물었다. 혜련은 장난이 하 고 싶어 물이 젖은 모래 위에다 잠자코 손가락으로 썼다.
── Helen Han ──
『헬렌한?』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청년은 표정을 크게 썼다.
『정말은 한혜련이지만 우리 학교 미스 부라운이 서양 이름과 발음이 비슷 하다고 해서 늘 그렇게 불러 줬어요.』
『미스 부라운은 영어 선생이냐?』
『네, 회화 선생이예요.』
『음, 그러고 보니, 헬렌의 살결이 너무 맑아서 서양 아이들과 비슷도 해.』
『훨 이스 유어 네임(이름이 뭣이예요)?』
혜련은 갓 배운 영어가 자꾸만 쓰고 싶었다.
그랬더니 청년도 혜련의 본을 따서 모래 위에 썼다.
── 돌구름 ──
『돌구름이 뭐예요.』
『강석운(姜石雲)이란 이름을 우리 말로 부르면 돌구름이 되는 거야.』
『아이, 재미 있어요. 그럼 이제부터 돌구름이라고 불러도 괜찮으세요?』
『괜찮구 말구.』
『돌구름, 돌구름! 아이, 우스워!』
가냘픈 허리를 꼬며 혜련은 캬득 캬득 웃어대다가
『아이 저 갈매기 좀 봐.』
멀리 갈마반도(葛麻半島)에서 갈매기 떼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나부끼고 있 었다.
『한 마리 잡았으면……』
혜련에게는 곧잘 불가능에 가까운 욕망을 불태우는 버릇이 어렸을 적부터 있었다.
『조개는 잡을 수 있어도 갈매기는 좀 어려운 걸.』
『어려운 걸 극복하는데 가치가 있대요. 우리 아버지가 그랬어요.』
『아버지는 뭘 하시니?』
『우리 학교 역사 선생이예요.』
『음, 그래?』
그러나 그 날은 좀 더 일찌감치 청년이 시내로 들어갔다.
혜련은 또 갑자기 쓸쓸해졌다. 모래 위에 씌어진 〈헬렌 한〉과 〈돌구 름〉을 혜련은 발길로 힘껏 문질러 버렸다. 청년이 일껏 잡아 준 여남은 개 의 조개를 무슨 투정이나 하듯이 하나하나씩 바닷물 깊숙이 던져 넣었다.
어머니는 놀라 물었으나 혜련은 종시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후, 전깃불이 휘황한 송도원 유원지를 거닐고 있는데 시내에서 나오는 청년과 혜련 모녀는 만났다. 검은 학생복에 뾰족뾰족한 사각모를 청 년은 쓰고 있었다.
『어마? 아버지와 같은 학교가 아냐?』
학생 시대의 아버지의 사진을 혜련은 보아 왔었기에 그 독특한 사각모만 보고도 W대학인 줄 모녀는 알았다.
셋이서 그날 밤은 아이스크림 먹고 송학관에도 들렸다. 헤어질 무렵, 청년 은 혜련 모녀를 마을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문 밖에 채마 밭이 우거진 초 가였다. 산보를 나은 피서객들이 좁은 길에 흩어져 있었다.
달 밝은 밤이었다. 주인 노친이 뜰 한가운데서 모깃불을 피워 주었다. 그 모기 쑥 냄새를 맡으면서 혜련과 청년은 토방 마루에 걸터앉아서 「달아 달 아 밝은 달아」를 밤 깊은 줄도 모르고 불렀다.
밤이 으슥해서 청년은 돌아갔다. 혜련은 자리에 들어서 아까 낮에 청년이 잡아 준 조개를 모조리 바닷물 속에 던져 넣은 것을 무척 뉘우치면서 잠이 들었다.
『인제 안 그럴께 또 잡아 주세요.』
혜련은 꿈 속에서 청년에게 빌었다.
이튿날, 하루 종일 청년은 바다에 나오지 않았다. 혜련은 송학관으로 가서 물었더니, 아침 녘에 시내로 들어가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혜련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옆에 쓸쓸히 앉아서 갈마반도에 낙엽처럼 나 부끼는 갈메기떼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갈매기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청년을 바닷가에 붙들어 둘 힘이 없는 것을 혜련은 슬퍼했다.
『오늘은 조개를 하나도 못 잡았네!』
『잡아 주면 뭘 하니? 도로 물 속에 집어 넣는 걸.』
아, 그래서 돌구름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혜련은 절망에 가까 운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어젯밤 꿈에서 잘못했다고 빌었는데…… 그래서 혜련은 한 줄기 희망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후, 돌구름은 크림 초코렡를 한 봉지를 사 들고 와서 해변으로 놀러 나가자고 했다. 혜련은 기뻤다. 어젯밤 꿈에 잘못했다 고 빈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 찾아 왔을 때, 어머니는 일광욕을 지나치게 해서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 있었다. 혜련은 토방 마루에 외로이 걸터앉아서 동리 처녀 아이들에게 서 백반(白礬)에 절인 봉선화를 얻어다가 새끼 손가락에 들이고 있었다.
『아, 봉사를 들이는군.』
『한 손으론 맬 수가 없어요.』
『어디, 내가 매 주지.』
달이 밝아서 불은 안 켜도 좋았다.
나릇나릇한 조그만 흰 손이었다. 청년은 보드러운 어저귀(水麻) 잎사귀로 척척히 절은 봉선화 꽃을 혜련의 새끼 손가락 손톱 위에 올려 놓고 곱게 싸 맨 후에 실로 동여 주었다.
『이편 손톱도……』
혜련은 또 다른 손을 내밀었다.
『왜 새끼 손가락만 들이니?』
『다 들이면 미워요.』
이윽고 청년과 혜련은 해변으로 나갔다. 청년은 혜련의 손길을 잡고 달 밝 은 모래 밭을 걸었다. 혜련은 만족했다.
『혜련은 무슨 꽃이 제일 좋은고?』
『연꽃……』
『옳지, 연꽃!』
『어머니가 꿈에 연꽃 핀 걸 보고 저를 낳았대요.』
『옳지, 그래서 좋아했군. 그래서 혜련이구……』
『돌구름은 무슨 빛을 좋아하세요.』
『음, 돌구름은…… 돌구름은 무슨 꽃을 좋아하나?』
『제가 좋아하는 것도 모르세요?』
『나는 구름꽃을 제일 좋아한다.』
『구름꽃이 뭐예요?』
『타오르는 노을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구름꽃 말이다. 좀 예쁘 냐?』
『아이, 정말! 구름꽃! 구름꽃!』
혜련은 청년의 이야기가 신통하게 재미 있는 것이다.
『참, 혜련에게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 줄까?』
『무슨 얘긴데요?』
『봉선화 꽃 이야기다. 봉선화를 지방에 따( )서 봉사라고도 하고 봉숭아 라고도 하지만…… 이 꽃에는 무척 재미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단다.』
『빨리 해 주세요. 무슨 얘긴데요?』
『저기 저 나무 다리로 나가서 해 주마.』
삼십 미터 가량 되는 잔교(棧橋)가 바다로 쑤욱 기어 나가 있었다.
혜련과 청년은 그리로 걸어 나가서 맨 끝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나란히 걸 터앉았다.
해풍이 무섭게 거칠다. 둘이의 머리는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다. 출렁출 렁, 다리 밑에서 들리는 파도소리가 혜련에게는 무서웠으나 눈물겨운 봉선 화 이야기에 혜련은 참아야만 했다.
청년의 입에서 흘러 나온 봉선화의, 주옥처럼 아름답고 기라(綺羅)처럼 어 여쁜 한 토막의 서글픈 전설은 이리하여 시작되었다.
『옛날, 옛날…… 그것이 백제 시대인지 고구려 시대인지는 분명치 않지 만……』
돌구름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어떤 고을에 주씨(朱氏) 내외가 살고 있었는데, 이 주씨로 말하면 당대 일류로 가는 금장(琴匠)이었다.』
『금장이 뭐예요?』
혜련은 물었다.
『금장이란 거문고를 만드는 사람이다. 가야금이라는가 비파 같은 것을 만 드는 사람인데 사십이 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쓸쓸히 지내던 중, 어 느 날 밤, 주씨 부인은 흰 옷을 입은 어여쁜 선녀가 봉황새 한 마리를 안 아다 주고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단다. 그리고 그 날부터 태기 가 있어서 낳은 것이 무남독녀 외딸인 봉선(鳳仙)이었다. 선녀가 봉황새를 안아다 준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해서 이름을 봉선이라고 지었다는거야.』
『정말 꿈이 맞나봐요. 우리 어머니도 연꽃을 보고 저를 낳았다는데……』
혜련은 소녀다운 호기심을 가지고 꿈의 세계를 신통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참 혜련이도 그랬었지!』
『그래 어떻게 됐어요.』
『봉선이는 인물도 예뻤을 뿐 아니라, 어렸을 적부터 거문고를 무척 잘 탔 대요.』
『어쩌면!』
『그런데 그 때의 젊은 임금님이 음율(音律)을 몹시 좋아했다는 거야. 요 새 말로 하면 음악이지. 봉선이가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자기의 거문고 소리를 임금님께 한 번 들려 드릴까 하고 머나 먼 길을 걸어 궁궐을 찾아 갔어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높다란 궁궐 담장 밑에서 앉아서 열심히 거 문고를 탔대요. 봉선이의 나이가 그때 열 여섯, 음율을 좋아하는 젊은 임 금님을 단 일순간이라도 위로해 드리고 싶은 일념이 봉선이의 가슴 속에 꽈악 차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거기에 뜻하지 않은 적수가 한 사람 나타 나서 봉선이를 무척 슬프게 했대요.』
『뜻하지 않은 적수가 누구에요?』
『당시 전국에서도 제일 피리를 잘 부는 학녀(鶴女)라는 열 아홉살 먹은 처녀가 역시 궁궐 담장 밑에서 열심히 피리를 불고 있었대요. 그러니 불행 히도 거문고 소리는 피리 소리보다 낮아서 손톱에서 피가 흐르도록 타도 임금님의 귀에는 좀처럼 들리지가 않았대요.』
『가엾어라!』
거기서부터 혜련은 봉선이를 무척 동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떤 날, 매일처럼 들려 오는 처량한 피리 소리에 젊은 임금님은 마음이 움직여 사람을 시켜서 학녀를 궁궐 안으로 불러 들여다가 왕후를 삼으려고 약속을 했대요.』
『어머나!』
혜련은 가슴이 뜨끔 했다.
『봉선이는 기가 막혀서 거문고 소리가 작은 것을 한탄했으나 어쩌는 도리 가 없었어요.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자기의 거문고 소리가 임금님의 귀에 들어갈 것을 기약없이 기다리기를 또 일년, 그러나 임금님은 종시 봉선이 를 불러 들이지는 않았대요. 그러다가 마침내 봉선이는 몸에 병을 얻고 하 는 수 없이 그 머나먼 길을 걸어서 자기 집으로 돌아오자 그만 병석에 눕 는 몸이 되었대요.』
『아이, 가엾은 봉선이!』
혜련은 꺼질 것 같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기를 또 일년, 임금님은 학녀와 결혼을 해 가지고 어떤 날, 봉선이 가 살고 있는 마을 앞으로 행차를 하시게 되었는데, 그 소문을 듣자 봉선 이는 앓는 몸을 간신이 일으켜 가지고 한길 가로 나가서 거문고를 타기 시 작했대요.』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글쎄 이제 좀 이야기를 들어 봐요. 정말로 측은한 이야기야.』
해풍은 그냥 거세기만 했다. 물 소리도 그냥 요란했다. 창백한 달빛이 해 면에서 자꾸만 부서지고 있었다.
『그때, 봉선이는 열 여덟살, 임금님이 행차하시는 길 옆에서 단정히 꿇어 앉아 그것이야말로 일편 단심의 지극한 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거문고를 뜯 고 있었대요. 그랬더니 임금님은 행차를 멈추시고 오랫동안 봉선이의 거문 고 뜯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대요. 임금님이 타고 계신 가마 바로 뒤에는 왕후가 된 학녀가 가마를 타고 있었지요.』
『어쩌면……』
『거기서 학녀가 임금님께 아뢰기를, 저 여자는 자기와 함께 비가 오나 눈 이 오나 궁궐 성벽 밑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던 사람이라고요. 그 말에 임 금님은 대단히 감동을 하여 신하를 시켜 봉선이더러 고개를 한 번 들어보 라고 명령했어요. 고개를 숙이고 정신 없이 거문고를 타고 있던 봉선은 임 금님의 분부를 듣자 조용히 고개를 들었어요. 그랬더니만 임금님의 얼굴과 함께 봉선이의 시선에 뛰어 들어온 것은 잊히지지도 않는 피리의 주인공 학녀의 모습이었지요. 그 순간, 봉선은 거문고 위에 탁 쓰러지면서 죽어 버리고 말았지요.』
『어마?』
혜련의 감동은 무척 컸다. 돌구름에게 잡힌 손아귀 속에서 혜련은 조그만 손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임금님이 놀라서 가마에서 내려와 보니, 거문고 위에 쓰러진 봉선의 열 손가락이 모조리 볏겨져 나가고 새빨간 피가 거문고를 적시었대요.』
『아이, 봉선이가 불쌍해요.』
소녀 혜련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어 있었다.
『임금님은 사람을 시켜 백반을 빨리 가져오라고 했어요. 옛날부터 백반은 일종의 지혈제(止血劑)로서 손이 비어져서 피가 나올 때는 백반 가루를 발 랐대요.』
『…………』
혜련은 이미 대답을 못할 지경으로 슬픔이 커 있었다.
『임금님은 손수 봉선이를 일으켜 안고 피가 흐르는 열 손가락에 백반 가 루를 바르고 길옆에 돋아난 어저귀 잎사귀로 동여매 주었으나 한 번 끊어 진 봉선이의 목숨은 다시 살아 날 수는 없었어요. 임금님은 봉선이의 죽음 을 무척 슬피 생각하여 훌륭한 장례를 치러준 후에 그 피묻은 거문고를 죽 는 날까지 자기 옆에서 떼 놓지를 않았대요.』
『…………』
혜련은 이미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혜련아, 그런데 말이야. 여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어요.』
『…………』
『봉선이가 죽은 바로 그 자리에서 이듬해 봄이 되자 아주 예쁜 꽃 나무가 하나 돋아났대요. 그 꽃이 꼭 봉황새와 같더란다. 새빨간 꽃이 줄기와 가 지 사이에 피어났는데 말이야. 그 꽃의 형상이 꼭 봉황새의 머리, 날개, 꼬리, 발과 같이 생겼더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꽃을 봉선화라고 불렀대 요.』
『오오, 그래서 봉선화로군요.』
그제야 혜련은 입을 열었으나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그런데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어쩌다 손을 베이면 백반에다 봉선화 꽃 을 섞어서 임금님의 본을 따라 어저귀 잎사귀로 동여매곤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손톱이 새빨갛게 변하곤 하더란다. 그런데 일단 새빨개진 손 톱은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없어지지 않더라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 은 그것을 봉선이의 단심(丹心)이 피가 된 것이라고들 생각했어.』
『봉선이의 혼이지 뭐!』
혜련은 흑흑 흐느끼며 가만히 대답 했다.
『음, 그 때부터 처녀 색시들이 봉사를 들이기 시작했다는데, 봉사를 들이 면 봉선이처럼 일편 단심의 열녀가 된다고 해서 저마다 들이게 된 거래.
그후 이 풍습이 널리 퍼져서 멀리 중국으로 건너 가고 또 일본으로도 갔대 요.』
봉선화의 애달픈 전설은 거기서 끝났다.
달빛 속의 갈마반도가 무슨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짐승처럼 해상에 길다라 니 엎디어 있었다.
혜련은 바람 속에 가물거리는 등대 불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언지 모르게 운명에 대한 막연한 서글픔을 전신에 느꼈다. 그러나 청년이 이야기하는 봉 선화의 전설 가운데는 혜련의 열 네 살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할 대목이 있 었다. 그래서 물었다.
『임금님을 바라보는 순간, 봉선이가 죽었다지만…… 왜 죽었어요?』
『학녀가 임금님 옆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제 혜련이가 좀 더 크면 다 알게 될거야.』
왜 그런지, 돌구름은 그 이상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혜련은 그것이 학녀의 피리 소리가 봉선의 거문고 소리보다 높았다는데 대 한 단순한 질투심 뿐만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 하는, 그리고 영화나 소설 책에 곧잘 나오는 「사모」나 「사랑」의 탓일런 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혜련의 열 네 살과 소녀다운 수줍음은 봉선이가 임금님을 사모하고 있었느냐는 물음을 도저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청년의 이 야기에는 사모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귀절은 한 대목도 없었기 때문에 자기의 그러한 해석이 전연 잘못인지도 모른다고, 자기의 엉뚱한 생각을 마 음 속으로 문질러 버렸다.
그날 밤, 혜련과 청년은 「봉선화」의 노래를 부르면서 밤 늦게 까지 해변 을 걸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 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 때 어여쁘신 아가씨를 너를 반겨 놀았도다.
바다 바람이 몸이 거칠어 둘이는 집으로 돌아갔다.
『내일 또 이야기해 주세요.』
『그래, 내일 또 해 줄께.』
혜련은 나불나불 손을 내저으며 호박 덩굴이 얽힌 수수 밭 옆에서 청년과 헤어졌다.
어머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청년이 봉선화를 들여 준 양쪽 새끼 손가락 을 애처롭게 만져보며 가엾은 봉선이의 혼이 자기 몸에 차차 배어드는 것같 이 느끼면서 혜련은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 속에서 혜련은 완전히 봉선이가 되어 있었다. 임금님은 돌구 름이었고 학녀는 자기 반에서 제일 키가 크고 선생님에게 귀염을 받는 김순 희였다. 거문고 위에 엎드려 져서 혜련은 죽어 있었으나 피는 열 손가락에 서 다 나지를 않고 봉선화를 들인 새끼 손가락 두개에서만 났다. 그래서 그 런지 임금님인 돌구름은 안아 주지도 않고 손가락을 동여매 주지도 않았다.
돌구름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피가 아니고 자기가 들여 준 봉선화 물이 라고 하면서 학녀인 김순희와 함께 창황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더 슬프고 원통해서 혜련은 그만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그러다가 자기 울 음 소리에 놀라서 혜련은 꿈에서 깨어났다.
벌써 아침이었다. 어머니는 뜰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혜련은 무언지 모르 게 일종의 불안을 희미하게 느꼈다.
조반을 먹고 혜련은 송학관으로 돌구름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청년은 아침 일찌감치 시내로 들어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혜련 모녀는 한나절 해변에서 쓸쓸히 지냈다. 그래도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 돌구름이 왜 안 올까?』
『글쎄, 무슨 일이 생겼나 보지.』
혜련은 청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봉선화의 전설도 이야기했고 어젯밤 꾼 꿈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는데 청년이 학생복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청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전문학교 학생인 듯 싶은 스물 안팎의 여자를 동반하고 왔다. 흰 적삼에 파 란 치마, 백색 하이힐에 파라솔을 쓰고 있었다. 어디를 앓았는지, 여자의 갸름한 얼굴이 약간 파리하다.
혜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처럼 기다리던 돌구름보다도 여자의 얼굴을 더 열심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말문이 막힌 오똑이 모양 말끄러미 바라보 고 서 있었다.
청년은 서로 인사를 시키고 나서
『얘가 바로 그 귀여운 소녀 미스 헬렌이랍니다.』
하고, 저희들끼리는 이미 혜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온 모양으로 동반한 여자를 돌아다 보았다.
『아이, 어쩌면 정말 불란서 인형처럼 귀여워요!』
김옥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자는 물에 젖은 혜련의 단발머리를 쓸어보 며
『미스 헬렌!』
하고 웃는 낯으로 혜련의 얼굴을 갸웃하고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혜련은 대답도 않고 웃지도 않고 수줍어하지도 않은 표정 없는 얼 굴로 건드리지 않은 오똑이 그대로의 자세로 말똥말똥 서 있었다.
『이 아저씨한테서 혜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일학년이라지?』
『…………』
혜련은 그래도 대답이 없다.
『애두 참,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봐? 묻는 말에 대답도 못하구……』
옆에 있던 어머니가 무안해서 혜련을 바라다 보았다.
『…………』
그러나 혜련의 침묵은 그만한 말로서는 좀처럼 깨뜨려지지가 않았다. 쥐고 있던 조그만 까막 조개 한 알을 이빨로 빠득득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깨물 어 대며 보살처럼 그 자리에 꼬박 서 있었다.
옥영은 하는 수 없이 혜련의 어머니를 향하여
『제가 급성 관절염으로 어저께까지 입원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며 칠 동안 이 이가 한 번씩 찾아와서는 혜련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불란 서 인형처럼 귀엽다고요.』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몸도 약하구. 그거 하나 뿐이라고, 집에서들 오 냐 오냐 하니까 제멋대로 자라서…… 참 애두 왜 갑자기 벙어리가 됐어!』
『어젯밤엔 또 봉선이의 이야기를 했다면서?』
옥영은 그러며 또 한 번 혜련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나 혜련은 여전히 조개만 무섭게 깨물고 있었다.
『음, 혜련이가 오늘은 대단히 기분을 상했구나! 어머니한테 무슨 꾸중을 들었나본데…』
청년은 그러다가 생각이 난 듯이
『참 오늘 저녁에 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준다고 혜련이와 약속을 했었 지만, 갑자기 볼 일이 생겨서 이따 세시 차로 떠나게 돼서 안됐다.』
그 말에 혜련은 힐끔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말은 여전히 없다.
『서울로 돌아가세요?』
어머니가 물었다.
『네, 서울로 갔다가 저는 곧 동경으로 갑니다. 졸업반이기 때문에 학교 일이 좀 밀려서요.』
『두 분이 같이 가세요?』
『아냐요. 저는 서울까지만 같이 가요. 학교가 서울이예요.』
하고 옥영이가 말을 받았다.
『그럼 댁도 서울이세요?』
『아냐요. 집은 원산이예요?』
『약혼을 하셨어요?』
어머니는 웃으면서 물었다. 옥영은 대답을 못하고 석운을 쳐다보았다.
『아직은 안했지만………』
석운은 열없은 표정을 지으며
『아마 장차는 그렇게 될상 싶습니다. 하하하……』
『좋은 시절입니다. 일생에 한 번 밖에 없는 시절인데. 호호호……』
『하하하…… 그럼 혜련이, 잘 있어요. 깊은 데 들어가지말고…… 몸을 튼 튼하게 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해요.』
『그럼 안녕히들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작별의 인사를 하고 석운과 옥영은 즐거운 듯이 송학관을 향하여 나란히 걸어갔다.
그 순간, 혜련의 입에서 빠짝 하고 소리가 났다. 잘긴 잘긴 깨물어 대던 조개 알이 이빨의 압력을 받아 마침내 터져 나가고 말았다. 혀를 다쳐 피가 흘렸다.
조개가 터지는 바람에 혀 끝을 다쳐 입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 내렸다. 눈 물도 포옥 쏟아져 나왔다.
그것을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하여 혜련은 홱 돌아서자 물 속으로 뛰 어 들어갔다. 머리를 한 번 물에다 푹 들여밀었다 나니 눈물도 피도 흔적을 감추어 버렸다. 수면에 얼굴만 내놓고 혜련은 송학관 쪽을 불현 듯 딱 바라 보았다.
『꿈이 맞는다!』
김순희와 함께 호화로운 가마를 타고 창황히 사라져 가던 돌구름을 혜련은 생각했다.
『어젯밤 꿈이 맞는다!』
옥영의 파라솔이 청년의 뒷덜미까지 감주어 주고 있었다. 그처럼 둘이는 바싹 붙어 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무슨 짓궂은 욕심장이와도 같이 옥영의 파라솔은 혜련의 시야로부터 돌구름의 사각모를 일부러 막아 주는 것만 같 았다.』
『욕심쟁이! 욕심꾸러기!』
혜련의 입술이 삐죽삐죽 이그러지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소금 물에 혀 끝이 쓰라리다. 혀 끝에 손등을 대 보니 피가 번지어 있었다.
『아, 없어졌다.』
울창한 수목 사이에 있는 송학관 안으로 둘이의 뒷모습은 마침내 허황한 꿈에서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어머니는 비취 파라솔 밑에서 물 속에 우두커니 앉아 송학관 쪽만 내다보 고 있는 혜련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시선이 무서워 혜 련은 얼른 물 속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홱 돌아앉아 하늘과 바다 가 입맞추는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자꾸만 울고 있었다. 소리없는 울음 을 혜련은 언제까지나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끼 손가락 둘을 혜련은 문득 들여다보았다. 어제 저녁, 돌구름 이 들여 준 봉선화 물이 새빨갛게 손톱에 배어 있었다.
『봉선이의 혼이다! 가엾은 봉선이의 혼이다!』
혜련은 새끼 손가락 둘을 입에다 홀랑 집어 넣고 가만히 빨아 보았다. 좀 더 세게도 빨아 보았다. 그렇게 해서 빨간 손톱을 빨 적마다 봉선이의 혼이 자꾸만 자꾸만 자기의 몸에 배어드는 것 같아서 혜련의 슬픔은 더 한층 컸 다.
혜련이가 못 살게 졸라대는 바람에 이튿날 아침 차로 모녀는 서울로 돌아 왔다.
날이 가고 해가 갔다. 연꽃이 제일 좋다면 혜련이가 봉선화를 가장 좋아했 다. 해마다 봉선화를 일찌감치 파종한 것도 혜련이었고 늦가을까지 봉선화 를 가꾸는 것도 혜련이었다.
동삼 석달만 내놓고는 언제나 봉선화를 들여 빨개 있는 혜련의 새끼 손가 락이었다.
「돌구름」이라는 뜻을 가진 강석운의 이름을 지상에서 발견한 것은 그로 부터 삼년 후, 혜련이가 여학교 졸업반 때의 일이었다. 혜련은 놀랐고 어머 니는 반가와했다. 그 때부터 혜련은 강석운의 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샅 샅이 뒤져 읽었다. 그리고 어떤 수필에서 강석운의 가정이 단란하다는 것과 부인이 그 때의 그 김옥영이라는 것과 첫 딸을 낳았다는 사실까지 혜련은 알았다.
M전문에 혜련은 들어갔다. 거기서 일제 말기의 수라장을 치르고 해방하던 해 영림의 오빠 고영해와 결혼을 했다.
중매 결혼이었다. 몸도 허약했고 혜련의 심경도 맑지 못해서 혼담을 누차 주저도 하고 거절도 해 보았으나 원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중매를 보내 오 는 판에 혜련은 마침내졌다.
삼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부터 남편 고영해는 본격적으로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혜련의 심뇌는 심해졌고 평범한 결혼생 활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혜련은 마침내 그것마저 놓쳐 버리는 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폐침윤(肺浸潤)으로 누워 있는데 육이오가 터졌다. 그 통에 세 살짜리 사 내를 잃어버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건강은 점점 더 나빠졌다. 마산 요 양원에도 가 있었다. 그러나 병세는 일진일퇴하여 환도와 함께 혜련은 서울 로 올라갔다.
이상이 지금으로부터 석달 전, 눈 내리는 날 오후에 들은 우수부인 한혜련 의 서글픈 이야기였다.
올케의 이야기에서 영림은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고영림이가 여태 까지 강석운 방문을 연기하고 원고를 찾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충 격을 대한 처리방법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한 달 전, 모 잡지에 발표한 강석운의 봄의 수필 「봉선화의 전설」을 읽고 나서 영림은 잡지를 가지고 올케를 방문하여 읽어 보라고 했 다.
줄거리는 십 구년 전, 혜련이가 원산 송도원에서 돌구름에게 들은 그대로 였으나 내용은 봉선이의 서글프고도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였다. 음율을 즐 기는 젊은 임금님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피리의 학녀와 거문고의 봉선이가 절절한 사모의 염을 품고 사랑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 이 사랑의 고백인 거문고의 음향이 불행히도 피리 소리보다 낮았기 때문에 사랑의 승리가 학녀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거기서 봉선이는 만침내 사랑병 에 걸려 누워 있다가 임금님의 행차 때, 최후의 기회를 붙잡은 몸이 되어 기를 쓰고 거문고를 탐으로써 임금이 자기의 그 애절한 사모의 일념을 받아 주기를 원했으나 불행히도 임금님 옆에 학녀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그만 기가 막히고 간장이 뒤집혀져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강석운은 그리고 이 봉선화의 전설을 중학시절 어떤 늙은이한테 들었다고 말한 후에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이 애처로운 봉선화의 이야기를 해 준 것이 수십 차례나 된다고 부언하였다.
『언니, 이 글을 읽고 무어 생각키우는 것 없어요?』
『있어요. 그때, 내가 어렴풋이 생각하다가 만 것……』
『사랑이라든가 사모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죠?』
『그랬어요. 그이는 단지 음율의 경쟁 의식만으로 나의 주의력을 돌렸을 뿐, 남녀 관계로서의 이야기는 통 없었어요. 그래서 봉선이가 왜 죽었는지 를 물었지만, 그이는 그저 크면 안다고만 대답했어요. 인제 와서 생각하니 대학 졸업반이 열 네살 짜리 여학생과는 남녀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무척 거북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응?』
『너무 얕잡아 본 것이 분해요! 열 넷이면 관념적으로는 다 알고 있는 이 야기가 아냐요?』
『그렇지만 그러한 관념적인 것을 어린 언니에게서 구체적으로 끄집어내 주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만은 강석생님의 좋은 점이지 뭐예요?』
강석운의 이중 인격을 의심했던 그만큼 영림은 강석운의 편이 되어 있었 다.
『아가씨야 강선생님의 숭배자니까 좋도록만 생각할 거예요. 호호호……』
『아이, 언니두 어쩌면……』
그 순간부터였다. 실로 그 순간부터 고영림은 자기의 온갖 감정과 의욕과 이성을 죽이고 올케 혜련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을 하리 라고 굳게 결심을 했다.
어쨌든 올케가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옛날의 돌구름과 옛날의 헬렌 을 한 자리에 모아 보리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올케의 병 이 회복될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혜련은 영림의 그러한 생각에 펄펄 뛰면서 한사코 반대를 했다.
『솔직히 말해서 죽기 전에 한 번만 꼭 만나보고는 싶어요. 그렇지만 어쨌 든 나는 남의 아내요, 며느리가 아냐요? 그 뿐인가요? 그이는 단란한 가정 의 책임성 있는 남편의 몸인데…… 죽으면 그저 조용히 죽는 것이지. 그런 짓은 절대로 못해요!』
『가만 있어요. 나한테 다 맡겨요.』
영림은 영림이대로 생각이 있었다. 우선 한혜련을 고씨 집 호적에서 빼내 버림으로써 아내와 며느리의 신분을 말살해 버릴 것과 어떠한 수단으로서든 지 강석운의 마음을 움직여 놓을 것 ── 그 두 가지 방법을 취하기로 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인간 고영림이가 처음으로 부딪치는 자기 반역(自己反逆)을 의미하 고 있었다. 운명적인 것에 어디까지나 순종하려는 한혜련의 무기력하고도 가련한 동경(憧暻) ── (그것은 곧 생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을 채워 주기 위한 자기 희생에의 태아적(太我的)인 의욕의 발로였다.
그러나 오빠와 아버지는 이혼 수속에는 절대로 반대를 했다. 일단 고씨 집 문턱 안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고씨 집 귀신이 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희들은 방탕할 대로 방탕하면서 그런 말같잖은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고, 영림은 근 한달 동안이나 맹렬한 투쟁을 개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리도 반대하지는 않았다. 송장을 치르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일찌감치 영림이가 정능으로 찾아 나간 것도 최후적인 담판을 해볼 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둘이서 영화 구경을 갈 차비만 하고 있었다.
『그래 화가 나서 강선생님을 찾아가던 길에 정류장에서 만났어요.』
『그래 이제 네시에 그이를 만나선 도대체 어떡할 셈이세요?』
『강선생님만 마음이 움직여 준담, 며느리의 자격임 어떻고 아내의 신분임 이 어때요?…… 언니는 이미 고영해의 아내도 아니고 고종국씨의 며느리도 아냐요. 그 따위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그 따위 아내가 어디 있어요?』
『흥, 아가씨는 아직 세상을 모르세요. 세상이 무섭다는 걸 모르고 있지 요.』
『그까짓 술 찌꺼기 같은 세상이 무서워요? 내 도리에 맞음 되는 거지 뭐 예요?』
고영해와 이혼을 할 생각은 혜련도 벌써부터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편이 바람을 피기 시작할 무렵부터의 일이었으나 남편과 시부모는 좀처럼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이혼을 한다고 해서 재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몸도 허약할 뿐 아니 라,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처럼 고이고이 길러 주신 자기 한 몸이 시집살이 라는 무서운 숙명때문에 이처럼 천대를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혜련에게는 뼈가 저렸다. 추우면 추울새라 더우면 더울새라, 살얼음장을 집늣이 애지중 지 키워 주신 부모님의 지성이 혜련은 측은했을 뿐이다. 사위에게 인간 대 우를 못 받는 딸자식의 가엾은 처지를 생각할 때, 세상의 어버이들은 그 얼 마나 눈물겨워 할 것인가!
혜련은 그것이 슬펐을 따름이었다.
영림은 쌍벌죄로 오빠를 고소하자는 말까지 해 보았으나 그러한 노릇을 감 히 할 수 있는 혜련은 못 되었기에 어차피 멀지 않아서 죽을 몸이니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왕 강선생님과 만나자는 약속을 했으니까 안 갈 수는 없지만, 제발 내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 줘요. 십 수년 전에 있는 단 사흘 동안의 이야긴 데…… 무슨 구체적인 사건이 있은 것도 아니고…… 그 이는 벌써 다 잊어 버리고 있을 이야긴데……』
『어쨌든 나한테 다 맡겨 둬요.』
『아냐요. 아가씬 아직 어려요.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제발 문학 이야기나 하다가 돌아가세요.』
『그래, 그럼 그러죠.』
『정말이예요!』
『그래 정말이야!』
『괜히 아가씨한테 그런 부질없는 말을 했나 봐요.』
『염려 말아요.』
『그이에게는 명예가 있어요. 평화로운 가정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글쎄 언니의 얘기는 정말 안한다니까!』
『만일 한다면 나는 혀를 깨물든가 독약을 먹고 죽을 테에요!』
그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창백한 혜련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 있 기 때문이다.
『그래, 안 해요. 안해, 나는 나 자신의 연애 공작을 위해서 갈 테에요!』
『어머나? 부인이 있는데도?』
영림은 일어서서 아무런 대답도 없이 총총히 방을 나섰다.
人生問答[인생문답]
[편집]『아내를 소중히 하자!』
다동 골목으로 접어들어 가면서 강석운은 누차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 사나이를 그렇게도 끈기있게 소중히 여겨 주는 것이 세상의 아내들이었 다. 그러한 아내를 일시나마 의심 하고 온갖 망상을 다했다는 것에 대한 미 안한 생각이 좀처럼 가시지가 않는다.
선뜻은 하지마는 현실적인 발판이 깊숙히 뿌리 박혀있지 못하기 때문에 애 인들의 애정에는 끈기가 없다. 분위기나 감정이 조금만 비뚤어지면 순간적 으로 남남이 되고 만다. 시간적인 역사와 현실적인 뿌리가 희박하여 소위 미운 정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내란 소중한 존재야!』
오늘의 이러한 성실한 감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강석운은 야쓰데화분을 갖 고 돌아서서 아내에게 선물을 하리라고 생각하며 여학생과 약속한 다방 으 로 들어갔다.
『선생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하고 정중한 인사를 했다.
『괜찮소.』
석운은 여학생과 마주 앉았다.
『선생님, 시장하실 텐데 위로 올라가셔서 무얼 좀 잡수셔야지요.』
『그럴까요?』
사실 석운은 시장했다. 북경루에서는 맥주 반 잔으로 얼버무려 버린 석운 이었다.
둘이는 이층 그릴로 올라가서 들창 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선생님, 치킨 좋아하세요?』
『좋아하지요.』
학생은 보이에게 치킨이 섞인 정식과 맥주를 가져오라고 하고
『오이스터 프라이 한 접시만 더 가져오세요.』
했다. 그리고 나서 석운을 바라보며 방그레 웃었다.
『허어, 학생은 오이스터 프라이(굴 프라이)를 좋아하는군.』
『아냐요. 선생님이 좋아하신다기에 청했어요.』
어떤 짤막한 글에서 안주에는 오이스터 프라이가 제일이라는 말을 석운은 쓴 적이 있다.
『별 것을 다 기억하고 있군.』
『그것 뿐이 아냐요.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는 전부 알고 있는 걸요.』
『허어, 그래요?』
『선생님이 모르고 계시는 이야기까지……』
『조심해야겠는 걸. 학생으로만 알았더니 흥신소 여사무원인지도 몰라.』
『후훗……』
『학생은 쿡쿡 웃었다. 그 웃음에서 석운은 또 옥영의 모습 한 조각을 불 현 듯 주웠다.』
석운은 웃으며
『인제 그만 했으면 신분이나 좀 밝혀 보겠지. 흥신소 사원과는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가 없으니까……』
『참 세상에는 그런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었군요.』
학생은 거기서 정색을 하고 속 주머니에서 학생증을 꺼내 놓으며
『저 이런 사람이예요. 인사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음, 이번에는 학생 편에서 나를 경찰관으로 취급을 하는 모양인데……』
『아냐요. 가짜 학생도 있을 법하구요, 또 이제부터 선생님의 솔직한 말씀 을 듣기 위해서도 필요한 에티케트이에요』
『다소 불유쾌하지만 보라니까 볼 수 밖에……』
웃는 얼굴을 지으며 석운은 학생증을 들여다보았다.
『M대학 영문과 사년생 고영림…… 흥신소 사원은 아니로군!』
석운은 유쾌한 표정으로 도로 학생증을 돌려 주다가
『고영림…… 고영림…… 아, 저 칸나?』
『생각나셔요?』
방글방글 웃으며 영림은 빤히 석운을 바라보았다.
『생각납니다. 좋은 글이었오.』
『되지도 않은 글을 보아 주십사구……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는데 식사가 왔다.
그것이「칸나의 의욕」의 필자 고영림이라고 생각하면 아까 아침 혜화동 로타리에서 견지동까지 같이 타고 오는 동안에 바꾼 대화의 특이성이 가히 이해가 되었다.
『벌써 한 번 찾아가 뵙는다면서도…… 선생님, 예를 갖추지 못했어요, 용 서하세요.』
시장하던 참이라 석운의 식욕은 대단히 왕성했다. 영림도 똑 같이 왕성했 다.
『오이스터 프라이, 많이 잡수세요. 모자라면 또 가져 오겠어요.』
『학생은 나를 황소로 아는군.』
그래서 두 사람은 유쾌히 웃었다.
『음, 차장의 뺨을 갈긴 것이 칸나였었군. 하하…… 유쾌하던데!』
『여자답지 못하다고, 선생님 속으로는 무척 흉보실 거예요.』
『나도 이제부터는 가끔 완력을 써야겠는 걸.』
『왜요?』
『옳게만 사용하면 완력에는 미가 있으니까……』
그러면 영림은 두 손으로 맥주 병을 공손히 들고 한 잔을 따라 주며
『술을 제 손으로 따라 마시면 맛이 안 난다죠?』
『학생이 그런 건 다 어디서 배웠오?』
『대학에서요.』
『응?』
『사회 대학에서 말이예요.』
석운은 문득「칸나의 의욕」의 한 구절을 생각했다.「사회인들의 분별은 좋았으나 그것은 모두가 세속의 누룩으로 말미암아 발효해 버린 술찌꺼기 같은 그것이었다.」
『참 요즈음 학생들은 맥주 쯤은 마실 줄 안다면서?』
혼자 마시기도 거북하고 해서 그런 말로 석운은 권해보았다.
『다른 학생들은 어쩐지 모르지만 저는 먹음 먹어요. 한 두 병 쯤은 문제 없어요.』
『허어?』
석운은 약간 놀랐다.
『선생님의 그 「허어」에는 불량 학생이라는 의미가 팔십 퍼센트 쯤은 내 포되어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먹어도 별반 괴롭지 않고 기분이 유쾌해진다 는 체질적인 조건을 저는 지금 설명해 드리고 있는 것 뿐이예요.』
『허어?……』
석운은 마침내 포크를 멈추었다.
『그러니까 이번「허어」에서는 선생님의 퍼센테이지를 좀 달리해 주셨음 좋겠어요.』
마주 보면서 영림은 곱게 웃었다.
『다소 달라졌오. 성실성이 팔십 퍼센트, 불량성이 이십 퍼센트…… 이것 은「칸나의 의욕」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불량이요.』
『선생님, 무척 기뻐요! 저를 그처럼 알아 주시니 말이예요. 아무리 저 자 신을 호의적으로 생각해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은 확실히 있는 것만 같아 요.』
『그만 하면 대단히 우수한 성적이요.』
『그럴까요?』
『그렇다고 나는 보지요. 오십 퍼센트의 성실성과 오십 퍼센트의 불량 성…… 이것이 대다수라고 나는 보아요.』
『그렇담 이런 결론이 되겠군요. 작가 강석운 선생이 제 아무리 성실하다 고 해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은 확실히 갖고 있다고 단정을 하고, 인제부 터 칸나는 선생님을 모시기로 하겠어요. 무방하시죠? 항의 같은 건 없으시 죠?』
시종 여일하게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고영림은 이론의 전개를 꾀하고 있었 다.
『곤란한 학생인 걸!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그 선생님을 시험해 보려는 학생, 언지를 잡아서 뒷날의 증거로 삼으려는 학생임이 분명한데……』
『선생님은 지금 대답을 회피하고 계시지만 구태여 대답을 듣지 않아도 결 론은 이미 나왔으니까, 그렇게 믿고 제가 이야기를 좀 하겠어요.』
『대체 무슨 이야긴데……?』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이면 충분한 이야기예요.』
『응?』
석운은 덤덤히 영림을 바라보았다.
강석운은 고영림의 솔직 무구(無垢)하면서도 무척 재미있는 논리 전개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차 심금이 건드려지기 시작하였다. 영림의 논리는 항 상 미소의 부드러움으로 감싸져 있었기 때문에 조금도 똑딱하지가 않아 보 였다.
영림의 이러한 미소 전술은 순전히 올케를 위해서였다. 만일 올케의 문제 가 없이 강석운 대 고영림의 경우라면 필요 이상의 미소 전술은 쓰지 않았 을 것이다.
아뭏든 사람이 백 퍼센트로 성실하기가 어렵다는 인간성의 약점을 강석운 이 자기가 입으로 직접 인정하였다는 사실은 우선 고영림에게 있어서 성공 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써는 노력하는 강석운의 행동을 좌우하기는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서 좀 더 책임있는 말을 강석운의 입을 통하여 직접 들어 야만 하였다.
그런 것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지만 천천히 듣기로 하고 우선 권해도 좋다면 한 잔 권하겠오.』
석운의 입장에서 보면 먹을 줄 안다는데 안 권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영림은 치킨을 뜯던 손을 멈추고 석운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여전 히 미소 뛴 표정으로 말하였다.
『선생님, 그건 서양식 예의예요.』
『뭐가?』
『선생님이 권하고 싶으심 권하는 것이지, 제 의향을 물으실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해요.』
석운은 웃었다.
『일일이 상대편의 의향을 물어보고 행동하는 것이 문화 민족의 예의런지 는 모르지만 저는 별로 좋다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언제나 그렇지만 석운은 말을 듣는 편이고 말을 하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칸나의 의욕」의 필자이고 보면 더 많은 말을 듣기 위해서도 자기 의 의견을 먼저 내세워서는 아니 되었다.
『거기에는 이해성은 있지만 지극한 정성은 없어요. 식욕이 없는데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자꾸만 권하지요. 얼핏 생각하면 야만인 같아서 경멸하고 싶 지만 그 지극한 정성에는 눈물겨운 데가 있다고 보아요.』
『학생이야 말로 이해성이 풍부하군요.』
『선생님도 제 말에 동감이시죠?』
『동감입니다.』
석운은 유쾌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선생님이 동감해 주신다니 정말 기뻐요! 그럼 됐어요!』
『되다니…… 뭐가 됐다는 말이요?』
『인간의 지극한 정성을 알아 주실 수 있는 선생님이란 것을 발견하고 저 는 무척 기뻐요.』
『무슨 영문인지, 도시 모르겠는 걸. 학생의 태도는 나를 일일이 테스트 (試驗[시험])하는 것만 같아.』
『후훗……』
포크를 든 손으로 영림은 입을 가리웠다.
『자아, 이왕 먹을 줄 아는 술이라니까 한 잔 들어요.』
『먹을 줄 몰라도 권하고 싶음 권하는 거예요. 선생님은 암만 해도 지나치 게 점잖으세요. 신사이기는 하지만요.』
『이거 말마다 탓하고 보니 큰일인 걸』
『호호호…… 그렇지만 오늘은 사람의 눈도 있고 해서 그만 두겠어요. 다 음 날, 선생님을 또 뵙게 되는 자리에서 먹겠어요. 제 의향과 능력을 묻지 마시고…… 선생님이 진심으로 한 잔 권하고 싶으실 때…… 그 때는 독약이 라도 마실런지 모르죠.』
이야기는 무섭게 비약을 했다. 석운은 대꾸를 잃은 채 물끄러미 학생의 얼 굴을 바라보며 들었던 맥주병을 자기 잔에 따랐다.
아까 견지동 출판사 앞에서 내릴 때 느낀 동요보다 좀 더 강렬한 정신적 흔들림이 석운에게 왔다. 편지를 받았을 때까지 합치면 세 번째의 흔들림이 었다.
『선생님, 오늘 제가 선생님을 뵙고자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용건만 이야기하겠어요. 어떤 젊은 여자의 생명에 관한 중대한 인생 문답이예요.』
『아, 무슨 그런 케이스가 생겼오?』
『인제 선생님이 동감에 주신 두 가지 문제와 관련된 이야기예요.』
『두 가지 문제?』
『선생님, 벌써 잊어먹음 어떡하세요? 식욕이 없더라도 지극한 정성을 가 진 상대편의 권이람 한 두 숟갈 뜨는 것이 한국 사람의 인정이라는 이야기 와 또 아무리 성실한 사람이라도 이십 퍼센트의 불량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 야기와…… 이 두가지 이야기에 선생님이 동감해 주시지 않으셨어요?』
『아, 그래서?』
『어쨌든 동감하셨죠?』
『그래 동감은 했오.』
『그럼 됐어요! 이제 이야기 하겠어요.』
영림은 적이 안심을 하는 표정이 되며
『이런 경우에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친구인 어떤 여자가 어렸을 때 어떤 청년 한 사람을 사모했어요. 그때 여자는 열 네 다섯의 소 녀였고 남자는 스물 네 다섯의 청년이었지요. 청년은 여자를 나이 어린 소 녀로만 믿고 어린애 취급을 했는데 여자는 소녀다운 심정으로 청년을 몹시 그리워 했었지요. 나이 어린 소녀의 몸이라 마음 속을 이야기 할 수는 도저 히 없고 그러다가 두 사람은 영영 헤어져 버리고 말았어요. 그 소녀야말로 먹음 죽을 줄 아는 독약이라도 그 청년이 먹으람 눈을 딱 감고 먹었을는지 몰라요.』
석운은 불현 듯 영림을 쳐다보았다. 독약이라도 마실런지 모른다는 이야기 는 아까 영림 자신이 입에 담은 한 마디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영림은 강석운에 대한 한혜련의 사모의 정을 추상적으로 쭉 이야기 를 하고 그때의 그 청년이 지금은 세상이 다 아는 이름 있는 국회의원이라 고 했다.
『선생님의 의견을 들어 가지고 저는 그 국회의원을 찾아갈 결심이예요.』
『찾아가서는?』
『죽기 전에 한 번만 만나 주라고요.』
『책임 문제는 아니니까……』
『그건 저도 알고 그 여자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 동무인 그 여자도 국회의원을 찾아가 보겠다는 저를 굳이 만류하면서, 정말 제가 찾아간다면 혀를 깨물던가 독약을 먹고 죽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음.』
강석운은 그 비연의 여주인공에 대하여 동정의 염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참 미인이예요. 뭐라고 할까? 요즈음 유행하는 저희들의 말을 빌면 생김 생김 이라든가 몸 매무새가 그거야 말로 날씬하지요. 보슬비에 젖은 해당화 도 좋고 배꽃도 좋지만 그런 따위는 비교도 안 되리만큼 예뻐요. 동성인 저 까지도 꼭 안아 주고 싶도록……』
석운은 웃었다.
『정말이예요. 선생님! 안으면 꺼질 것같이 보드랍고도 가련한 여인! 조금 만 건드리면 톡 하고 떨어져 버리는 양귀비 꽃, 조그만 누르면 터져 버리는 슈우크림의 말랑말랑한 체질을 지닌 포류의 여인이에요.』
『굉장한 찬미인걸! S언니가 아닌가?』
『한 번만 만나 주면 병이 날런지도 몰라요. 자비스런 의사가 된 셈치고 한 번만 만나 달람 안 만나 줄까요?』
『그건 사람 나름에 달렸겠지만……』
『선생님 같으심 어떡하시겠어요? 물론 선생님은 예술가니까 만나 주시겠 지만요. 감격성과 이해성이 다 함께 풍부하실 테고 또 예술가적 로맨티시즘 을 살리기 위해서도 만난 주시겠지만 저 편은 소위 예술을 모르는 정치가고 또 어딘가 도학자적인 데가 있는 사람이니까 어려울 것 같기도 해요.』
『곤란한 문젠 걸!』
식사는 디저트 코스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곤란한 인생 문답을 나에게 제시한 건 학생이 처음이요.』
과일을 깍으면서 석운은 말했다.
『그래요?』
『학생은 내가 예술가니까 쉽사리 만나 줄 것으로 믿는 모양이지만 예술가 에 대한 학생의 인식이 너무 낡아요. 오늘의 예술가는 십 구세기적인 서정 (抒情) 제일 주의로서는 도저히 감당해 나가지 못하리만큼 지성의 요청을 받고 있어요. 인텔리전스(知性[지성])란 지적인 존재 이유의 구명을 말하는 것이니까 동정이라든가 하는 감정이 행동화 되려면 반드시 인텔리전스와의 민주주의적 타협이 성립되어야만 하지요. 감정의 미가 때로는 이성의 추로 변하는 것은 그러한 타협이 성립되어야만 하지요. 감정의 미가 때로는 이성 의 추로 변하는 것은 그러한 타협이 없이 감정이 독선적(獨善的)으로 발동 하기 때문이요.』
영림이가 결코 그것을 모르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강석운으로 하 여금 십 구세기적 예술가로 밀어 버림으로써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 뿐이다. 그래서 동감한다는 말을 억제하고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온갖 독재주의가 그러하듯이 감정의 독재주의도 결국에 가서는 행동의 파탄을 일으키고야 말지요. 나도 그 여인의 가련한 운명에는 만감의 동정을 가집니다. 될 수만 있으면 어떻게 손을 뻗쳐 주고 싶어요. 그러나 손을 뻗 칠 수 없는 것이 그 국회의원의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국회의원이 나와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면 우선 국회의원의 부인을 방문하여 납득시 켜야 할 것이예요. 그길 이외에 사건을 처리할 방도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 해요.』
영림은 물끄러미 석운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기의 생각과 틀림이 없다. 한 사람의 남편 으로서의 성실성이 영림의 가슴에 뭉클하고 왔다. 그 리고 그것은 동시에 인간 강석운의 성실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림은 이전처럼 그러한 강석운을 찬양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성실성을 자기의 것으로서 차지할 수 없는 일종의 질투와 초조감을 영림 은 불현 듯 느꼈다.
『선생님은 대단히 냉정하셔요.』
했다.
『결론을 너무 빨리 지우니까 일편 냉정하게 보이는 것이지요. 그 슈우크 림과도 같은 말랑말랑한 여인을 동정하는 대목에서 내가 오랫동안 어물어물 답보만 하다가 한 서너 시간후에 이상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면 학생은 아마 나를 무척 다사로운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거요.』
그 말에 영림은 손뼉을 치고 표정을 크게 쓰면서 외쳤다.
『으와! 선생님, 굉장한 심리학자시네요!』
석운도 놀랐지마는 주위에 앉았던 손님들이 모두 이편을 힐끔힐끔 바라보 았다.
학생은 그런 대목에서 이처럼 감격할 줄을 안다는 것은 실로 좋은 소질의 소유자라고 석운은 반대로 감심을 하며
『남의 이야기에 대한 동정심은 그리 오래 가지를 못하는 거요. 학생은 그 것을 내가 냉정한 탓으로 돌리지만 그건 내가 제 삼자이기 때문에 생기는 냉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거요.』
『알아 듣겠어요. 선생님 말씀 참 재미 있어요. 지성적이예요.』
『암, 재미 있지요.』
석운은 웃었다.
『그럼 선생님이 만일 그 국회의원의 입장에 서셨담 좀 더 오랫동안 동정 을 하실 거 아냐요. 따라서 결론도 그 처럼 냉정하지가 않으실 거구요.』
『아마 그렇겠지요.』
『선생님 바쁘시지 않으심 거리를 좀 걸으실까요.』
『이야기는 이제 끝났오?』
『아직 조금 더 있어요. 여기는 답답해서 걸으면서 이야기하겠어요.』
석운이가 계산을 치르려는 것을 영림은 궂이 막으며
『학생이라고 얕잡아 보심 싫어요.』
『학생이 웬 돈이 있을까?』
『양공주 노릇은 안하니까 선생님 과히 걱정 마세요.』
층계를 내려오면서 석운은 이 학생의 인품을 마음 속으로 채점(採點)하여 보았다. 판정(判定)은 단연 A급이었다.
저녁 무렵, 을지로 네거리는 어지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빌딩 유리창에 놀 이 탄다.
『선생님과 이렇게 같이 한 번 걸어 보았음 하는 생각, 어렸을 적부터 가 끔 해 봤어요.』
둘이는 거리로 나서서 남대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렸을 적이라고, 언제부터?』
『제가 칸나를 좋아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러니까 여학교 시절부터 죠.』
『…………』
대답을 하면 싱거운 소리 밖에 튀어 나올 것 같지가 않아서 석운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냐고 하기도 김빠진 소리요 고맙다는 대꾸는 더구나 싱겁다.
그저 이처럼 젊은 여성과 나란히 서서 걷는 것 그 자체가 유쾌할 뿐이었 다. 상실했던 청춘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오늘만이 아니다. 이전에도 그러했었다.
『참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닌데……』
영림은 후딱 그것을 생각하고 말머리를 다시 돌렸다.
『제 이야기는 후일 다시 뵈일 때 하기로 하고…… 선생님 봉선화 좋아하 세요?』
『봉선화?…… 좋아하지요.』
『봉선화의 전설두 좋아하시구……』
『그럼요.』
『미스 헬렌도 좋아하셨죠?』
『미스 헬렌? 누군데요?』
『한혜련, 생각 안 나세요?』
『한혜련…… 모르겠는 걸.』
『지금으로부터 십 구년 전…… 선생님이 사모님과 달콤해 계실 때…… W 대학의 사각모를 쓰고…… 원산 송도원 해수욕장에서…… 그래도 모르셔 요?』
『모르겠는데…… 그런 일이 있기는 있었지만……』
『큰일 났네요!』
『뭐가 큰일이야?』
『백사장에 아로새긴 헬렌 한과 돌구름의 이야기……』
『아, 아 그 때의 그 조그만 소녀?』
석운의 기억은 비로소 희미하게 소생하기 시작했다.
『소녀야 다 조그맣지만…… 그렇지만 마음은 조그맣지가 않았답니다.』
『참 그 소녀에게 봉선화의 전설을 이야기해 준 생각이 나오. 얼굴이 희고 귀엽다고 생각했던 소녀가 분명히 있었오.』
『새끼 손가락 둘에 봉선화 물을 들여 주셨지요. 그 소녀가 지금은 서른 둘, 돌구름 강석운의 환영을 십 구년 동안 안고 살다가 지금은 오늘 내일 하는 목숨이지요.』
『아아……』
석운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선생님 걸으면서 이야기해요.』
둘이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한혜련이가 바로 제 올케예요.』
『올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선생님의 애독자지요. 겨울철 석달을 남겨 놓고 는 십 구년 동안은 새끼 손가락에 봉선화물을 들여 온 여인…… 모습처럼 고운 마음씨의 여인…… 반생을 두고 돌구름만을 생각하다가 병에 쓰러진 여인……』
『아아, 무슨 말인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소!』
석운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저는 선생님의 인간성을 굳게 믿고 왔어요. 미스 헬렌의 이러한 비극을 선생님은 못 본체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미스 헬렌…… 그 소녀는 이름을 영어로 모래 밭에 썼었오!』
『선생님이 그때 이야기 해 주신 봉선화의 전설처럼…… 거문고를 타던 봉 선화의 운명처럼.』
『불행히도 거문고는 피리 소리보다 높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비극…… 학 녀를 임금님 옆에 바라보는 순간 봉선이는 죽었지요!』
『…………』
『그렇지만 한혜련은 아직 살아 있어요. 죽은 후에 꽃다발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 보다는 죽기 전에 돌구름의 모습 한 번 보여 주신담 좋은 약이 될 거예요. 생명수가 될 거예요.』
『…………』
진고개 입구로 해서 퇴계로 넓은 길로 둘이는 접어 들어갔다.
영림은 올케와 오빠의 관계를 비롯하여 우수부인 한혜련의 불행한 과거를 상세히 이야기 하였다.
그 동안 석운은 쭈욱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강석운이가 부딪친 인생 문답 중에서 곤란한 문제를 이번에는 몸소 실천해야만 하는 딱한 단계 를 이르러 버린 것이다.
『학생이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한다면 왜 이런 딱한 문제를 가지고 오는 거요?』
얼마만에 석운은 무겁에 입을 뗐다.
『선생님이 무척 곤란해 하실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언니의 삶이 하두 딱해서.』
『학생!』
『네?』
『솔직하게 대답하겠오. 내 솔직한 대답을 학생이 지닌 총명으로 잘 처리 해 주시오.』
『알아 듣겠어요. 결국 국회의원의 부인을 찾아가서 승낙을 얻으라는 것이 죠?』
『그처럼 너무 빨리 결론을 내려 버리면 아까처럼 냉정하다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서 얼맛동안 여기서 답보를 하겠오.』
두 사람은 마주 쳐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 심경으로는 무턱대고 그 여인을 만나 보고 싶소. 그처 럼 오랜 시일을 두고 나를 생각해 준 데 대한 감사의 념도 있고, 또 그 서 양 애들처럼 귀엽던 소녀가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나 변했는지, 거기 대한 호기심도 지극히 왕성하오.』
『그러나 내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오!. 다음 말씀은 그거죠?』
석운은 웃을 수 밖에 없었다.
『학생, 결론이 너무 빠르오.』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자기를 사모해 주었다는 한혜련에게 보다는 석운은 이 학생에게 좀 더 호기심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한다든가 안한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 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내와 남편의 사회적 지위라는 말이요.』
『무슨 말씀이신데요?』
『내가 그 여인을 만나러 간다면 내 아내가 좋아할 것 같소, 싫어할 것 같 소?』
『선생님이 무슨 딴 생각이 있어서 가시는 것도 아니고…… 그거야 말로 한 사람의 의사로서 잠깐 다녀오는 것이 무어가 그처럼 싫을까요?』
『학생은 아직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무언지 모르오.』
『경험이 없으니까 모르지만…… 아마도 사모님이 바가지를 무척 긁으시나 봐!』
그리고 허리를 꾸부러뜨리며
『아, 하하핫…… 아이, 우스워!』
영림은 자즈러들게 웃었다.
『그런 게 아니요. 바가지를 긁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고…… 만일 어떤 남 자가 자기 아내를 오랫동안 사모하다고 죽게 되었을 때, 남편 되는 사람이 자기 아내에게 문병 가기를 즐겨 허락할까요?』
『그렇지만 여자와 남자는 세계가 다르지 않아요?』
『뭐가 달라요?』
『…………』
영림은 대답을 못했다.
『학생의 총명으로써 여자의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격하(格下)한다는 건 서글픈 일인 걸.』
그제서야 영림은 실토를 했다.
『실은 저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빠와도 무척 싸웠지만……』
『그걸 잘 알면서도 학생이 모르는 척 한다는 건 확실히 좋지 않은 태도 야.』
『언니의 마음이 너무나 가엾어서…… 선생님, 미안합니다!』
영림은 고개를 숙이며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강석운은 그대로 임을 다시금 발견하고 마음이 풍족했다.
『그렇지만 저는 선생님의 마음에 비밀을 알고 있어요.』
『응?』
석운이가 머리를 돌리는데
『저리 올라가서 다리 쉬임을 하고 가요.』
영림은 남산 쪽을 가리켰다.
소나무가 서 있는 풀밭하나가 남산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초입에 있었다.
『내 마음의 비밀이라고…… 내가 무슨 비밀을 갖고 있기에 학생이 안다는 건가?』
풀밭에 나란히 앉아서 석운은 담배에 라이터를 그어댔다.
『선생님, 요즈음 와서 마음의 공허를 때때로 느끼시죠?』
『무슨 말이야?』
『시치미를 떼셔도 다 아는 걸요.』
『음, 학생이야말로 심리학자 모양인데……』
『알아 맞쳤죠? K신문에 나는「유혹의 강」을 읽음 다 알아요.』
『그건 소설이고…… 그건 작품 세계야.』
『흥, 선생님이 저를 정말로 얕잡아 보시네요. 아주 소학생 취급을 하실 모양이야.』
석운은 대답을 피하고 담배만 푹푹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의 불량성을 이십 퍼센트로 계산한 건 오산일 것 같아요. 적어도 사 오십 퍼센트는 될 거예요.』
『시세 폭락인 걸.』
『선생님의 시세가 폭락해서 슬퍼할 사람은 사모님 뿐일거예요.』
석운은 후딱 학생을 돌아다 보았다. 영림의 그 무척 도발적인 한 마디가 하마터면 석운의 조심성을 깨뜨려 버릴뻔 하였다.
영림의 시선은 멀리 시가 한 구석에서 못박힌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무척 자극적이었으나 표정은 대단히 무심하다. 그러한 세 련된 포즈를 이 학생은 어디선가 습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흐르는 침묵 속에서 영림은 강석운의 반응의 정도를 계산하고 있었고 강석운은 영림의 정열의 중량을 저울질하고 있었 다.
그러나 석운의 계산에는 자꾸만 갈래가 생겼다. 오늘의 이 회견이 한혜련 을 위한 것인지 영림 자신을 위한 것인지, 좀처럼 석운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구심은 고영림 자신에게도 있었다. 말로는 올케를 위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감정으로는 제 일을 처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둘이 다 감정의 통일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영림은 독심을 먹고 자기를 눌렀다.
『선생님의 시세가 폭락해서 제일 기뻐할 사람은 한혜련일 거예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선생님 잠깐만 다녀 와요. 선생님의 불량성도 좋고 자 비심도 좋아요. 한 시간동안만 빌려 주세요.』
석운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잠자코 있다가
『불량성이건 자비심이건 내 일은 내가 처리하지요. 그러나 그 여인은 남 편이 있는 몸이요. 오빠는 나의 방문을 하나의 불륜으로서 간주할 것이 요.』
『오빠의 일은 제가 처리할 테에요. 오빠는 선생님의 방문을 알 턱이 없으 니까요. 본질적으로 이 일이 불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이상 오빠만 모르 면 그만이 아냐요?』
『학생은 어리오. 내가 그 여인을 사모한대도 가기가 어렵지요. 또한 그 여인이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준다면 그러한 곤란한 처지에 나를 세우려 하 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요. 올케는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혀라도 깨물고 죽는다고 했어 요.』
『맞았오. 그 여인의 생각이 옳소!』
식욕이 없는데도 권에 못이기어 한 술 뜨는 자비심과 이십 퍼센트의 불량 성을 이용하려던 고영림의 계획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
危險地帶[위험지대]
[편집]의욕이 강한 반면에 고영림은 무척 담백한 일면도 있었다. 헬렌과 돌구름 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영림은 절실히 깨 달았다. 인간 사회에 그러한 완강한 장벽이 가로 막혀 있다는 것을 영림은 통탄하였으나 어쩌는 도리가 없었다. 또한 강선생을 모시고 가는 날에는 시 댁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올케가 정말로 독약을 마실런지도 몰랐다. 그만큼 나약한 올케이기도 하기에 영림은 간단히 단념해 버리고 말았다.
단념을 하고 나니 감정의 통일이 생겨서 영림의 이야기는 아까처럼 조심성 을 유지하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따라서 고영림의 독특하고 발랄한 대화가 자유롭게 튀어 나와도 좋았다.
『선생님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사실은 올케도 강 선생님을 그처럼 깊히 생각하고 있는 건 아냐요. 옛날 해수욕장에서 만났던 그 청년 이 작가가 되었다니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선생님 이야기를 가끔 한다는 것 뿐이예요. 그걸 제가 무척 과장해서 말한 거예요. 소설적으로 꾸며 대 서……』
한혜련에게 집중되어 있는 신경을 풀어 주지 않는 한, 강선생은 무슨 인생 의 숙명적인 부담 같은 것을 느끼고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괴로워 할 것만 같았다. 이왕 희망없는 이야길진대 강선생으로 하여금 한혜련의 이야기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하여 드리는 것이 영림으로서의 도리 같기도 해서 앞 말 을 취소해 버렸다.
『응? 꾸며댄 이야기라고?』
『네, 선생님을 한 번 테스트해본 것 뿐이예요.』
『나를 테스트해 봤다? 나를 한 번 떠 봤다는 말인가?』
『네.』
『나의 무엇을 떠 보았다는 말인가?』
『선생님의 지조라고 할까? 말하자면 불량성과 성실성의 퍼센테이지를 말 이예요. 호호호홋……』
영림이가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대고 있는데 날카로운 한 마디가 총알처럼 석운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웃음을 그첫!』
지극히 불쾌한 표정이 홱 석운의 얼굴을 덮어 왔다.
『어마?』
순간, 영림의 웃음은 꼬리를 잘리운 금붕어처럼 팔딱팔딱 뛰다가 그만 꽉 얼어 붙고 말았다.
『나쁜 사람! 전형적인 아푸레 학생이다!』
강석운은 풀밭에서 휙 몸을 일으켰다.
『앗, 선생님……』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던 영림은 그렇게 외치며 한 걸음 다가섰다.
『손윗 사람이라고 대접을 받겠다는 건 아니야. 한 사람의 인간 대 인간의 문제다! 그대를 인간적으로 대해 왔던 내가 우선 불찰이었어!』
사태가 이처럼 돌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석운에게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한 자기의 행동이 이처럼 결과를 맺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 던 고영림이었다.
『마치 시정의 사깃군보다도 더한…… 그대야 말로 교양의 발판을 상실한 현대적 총명의 심볼이라는 걸 알아야해.』
영림의 고개가 차츰차츰 수그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앞 말을 또 다시 취소하여 강선생에게 마음을 부담을 주기 도 안됐고 그것은 또한 강선생의 정열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키는데 있어서 커다란 방해물을 될 것도 같았다. 이럴 줄을 알았던들 올케의 이야기를 애 당초 꺼내지 않았던 것만 못하다고 영림은 마음 속으로 뉘우쳐 보았으나 이 미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바쁘니까 나는 먼저 가겠오.』
석운은 모자를 집어 쓰고 성큼성큼 풀밭을 걸어 나왔다.
『앗 선생님!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 주세요!』
영림은 뛰어 가자 석운의 앞에 탁 막아 섰다.
『선생님, 조그만 진정하세요. 저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는 선생님을 이대 로 돌려 보낼 수는 정말 없어요!』
영림은 두 손길로 석운의 양복 앞 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듯이 말했다.
『비끼시오!』
석운은 다소 침착한 음성이 되며
『학생의 변명을 들어야만 할 필요도 없고 의무도 없오.』
『그것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 편에서 들려 드리고 싶어요!』
『나는 학생을 교육시키는 선생님도 아니고 또한 보호자도 아니요.』
음성은 다소 부드러워지고 있었으나 석운의 감정은 차차 더 뿌리 깊게 비 뚤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제 잘못을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취한 행동이라면 더욱 괘씸한 학생이 아닌가!』
『아냐요. 처음에는 몰랐지만 선생님의 꾸중을 듣는 순간, 제 잘못을 너무 도 잘 알았어요.』
『잘못을 알건 말건 내게는 하등의 상관이 없오. 나는 다만 교양없는 한 사람의 학생의 방문을 받은 것, 다방에서 만나 주면 좋겠다기에 만나 준 것, 그리고는 마침내 학생에게서 조롱을 받은 것…… 그것 뿐이요.』
『아, 선생님, 결코 조롱이 아니었어요.』
『처음 만난 사람을 그처럼 농락하고도 조롱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네, 결국은 그렇게 돼 버렸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말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로는 존경한다면서 행동으로는 농 락을 했오. 나는 정말 시간이 바쁜 사람이요. 학생이 비끼지 않으면 내가 비껴 가지요.』
양복 앞 자락을 잡은 고영림의 팔을 조용히 떠밀고 석운은 풀밭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조용히 떠미는 석운의 손길이 예상 밖으로 완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손길의 완강한 힘과 정비례하는 분량의 악화된 감정을 영림은 불현 듯 느끼 고
『아아, 종시 선생님을 놓쳤다!』
여학생 시절부터 마음으로 줄곧 모셔 오던 선생님이 아니었더냐고, 경솔했 던 자기의 실수를 절실히 뉘우치며 핑하고 뜨거워 오는 눈시울을 영림은 어 린애처럼 손등으로 눌렀다.
풀밭을 나서서 비탈길을 석운은 성큼성큼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비뚤어진 그의 감정을 그대로 실은 것처럼 강석운의 두 어깨가 무척 날카로와 보였 다.
한 번 쯤은 뒤를 돌아다 볼 것도 같아서 뜨거워 오는 눈시울에서 손등을 떼고 말끄러미 영림은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감실감실 작아져 가는 석운 의 뒷모습은 그냥 딱 앞만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감정이 차츰 격해지며
『선생님!』
손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영림은 소리 높이 불러 보았다. 안 들릴리는 만 무한 거리였으나 대답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는다.
『선생님!』
『…………』
『선……생……니……임!……』
『…………』
『어머나?』
종시 돌아보지 않은 채 석운의 모습은 완전히 비탈길 밑으로 사라지고 말 았다.
영림의 입술이 삐죽삐죽 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이그러진 입술 위로 눈 물이 한 줄기 주루루 흘러 내렸다.
오늘 처음으로 만난 본 강선생님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오랜 시일을 두고 사 귀어 오던 애인에게서 배반을 당한 것 같은 절실한 감정을 영림은 느꼈다.
석운은 비탈길을 총총히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자기를 부르는 영림의 목 소리가 두 세 번 들렸으나 대답할 감정은 통 움직이지가 않았다.
『저런 학생이야 말로 잘못하면 어마어마한 노릇을 대담하게 해 치울 우려 가 다분히 있어.』
석운은 진정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암소한테 물린 격이라고, 석운의 분노는 점점 더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확대되어 가고 있었다.
『참으로 맹랑한 노릇이다!』
칸나에 대하여 갖고 있던 호의의 가지 가지가 일순간에 운무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침 잘 됐어!』
칸나의 언어 행동에서 정신적인 동요 같은 것을 불현듯 느끼곤 하던 자기 자신을 얼른 돌이켜 보며 그러한 흔들림이 더 커지기 전에 위험지대에서 안 전지대로 간단히 빠져 나올 수 있게끔 되어 버린 오늘의 석운은 마음으로 축복하였다.
『저런 학생과 교제를 하다가는 큰 코를 다치지!』
학생이 총명하기 때문에 다치는 코도 어마어마하게 클 것이라고 강석운은 앞질러 생각하며 어서 빨리 꽃집으로 가서 야쓰데 화분을 찾아다가 아내에 게 선물하는 즐거움을 맛보리라 생각하였다.
비탈 길을 다 데려가서 퇴계로 넓은 길로 들어서는데 발걸음 하나가 또박 또박 따라오고 있는 것을 석운은 문득 깨달았다.
『그 학생인가?』
그 학생인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다 볼 감정은 조금도 없다. 변명을 듣고 싶은 생각도 또한 없다. 그만한 학생이면 변명 쯤 얼마든지 꾸며 댈 수가 있을 것이 아니냐고, 재치있는 학생의 대화에 감심을 했던 것만큼 석운은 일종의 증오까지 느끼고 있었다.
발걸음은 그냥 따라오고 있었다. 석운의 걸음걸이가 빠르면 빠른 대로, 늦 으면 늦은 대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또박또박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걸었을까?…… 발걸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다가 이윽 고 석운의 오른편 쪽으로 검은 어깨와 함께 자색 구두 코가 나타났다. 아까 부터 보아 오던 칸나의 평화였다.
다소 부자연스럽게 치기를 느끼기는 했으나 석운은 그냥 황혼이 깃들기 시 작한 서편쪽 하늘을 곧잘 바라보면서 걸었다.
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청보랏빛 하늘이 점점 어두워 가고 있었다.
울툭불툭 고르지 못한 거창한 톱날인 양 즐비한 회색 빌딩의 이 지붕 저 지 붕이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청보랏빛 하늘에 물들여져 있었다.
영림도 말이 없다. 말이 없이 어디까지나 나란히 서서 걸어오고 있었다.
말다툼을 한 애인들처럼 묵묵히 두 사람은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이상한 학생인 걸!』
석운의 편에서 먼저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치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이 어른답지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실 거예요. 이처럼 넓은 길인데 하필 왜 바싹 붙어서 걷느냐는 말 씀이죠?』
영림의 목소리는 이미 서글퍼 있지는 않았다. 이전처럼 또릿또릿한 어조였 다.
『그것도 있지만, 그 뿐만이 아니야.』
『그러실 거예요. 어떻게 보면 착실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시정의 사깃군 같기도 하고……』
『남성을 다루는 편이 상당히 능숙한 걸.』
『다소의 경험을 쌓았으니까 그렇겠지만…… 선생님이 상상하시는 것 보다 는 아직 순진할거예요.』
『제 자랑을 제가 하면 객관적인 박력이 없어져.』
『오해하시면 슬퍼요. 저는 지금 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거니까요.』
『말을 삼가요! 학생과 같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다는 건 신에 대한 모독이야!』
석운의 언성은 또 갑자기 높아졌다.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말을 듣고 영림은 지극히 슬펐다. 영림은 정말로 신 과 대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올케 한혜련에 관한 이야기를 취소한 것을 석운은 인간의 불신(不信)으로 서 계산하고 있지마는 영림의 입장으로서는 강석운의 심기를 덜어 주기 위 한 하나의 정의를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오해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풀어 드릴 수 없는 것을 슬퍼할 뿐이예요. 그렇지만 언젠가는 풀어 드릴 수 있는 문제이기에 선생님의 오해 를 산 채 저는 제 이야기를 계속하겠어요.』
『역시 신과의 대화인가?』
『그래요. 거짓없는 이야기라면 신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마음대로 해 봐요.』
『칸나는 오늘 선생님과의 회견에 있어서 출발을 잘못 했었어요. 칸나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의욕을 존중했어야만 했어요. 쓸데없는 영웅주의, 쓸데없는 자기 희생…… 그런 종류의 자기답지 않은 감상주의가 도대체 잘 못이었어요.』
『무슨 말인지, 도시 못 알아 듣겠는 걸.』
『못 알아 들으실 거예요. 못 알아 들으신 채 이 대목은 그대로 보내 주세 요』
『그래서……』
『오늘 제가 선생님을 만나 뵌 시간이 아까 아침 녘에 한 삼십 분, 그리고 네시서부터 지금까지가 두시간 반, 그러니까 도합 세시간 밖에는 되지 않아 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제 선생님이 화가 나서 내려오실 때, 칸나는 울었 어요.』
그제서야 비로소 석운은 영림의 옆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영림의 얼굴은 그냥 앞을 향하고만 있었다.
『아냐요. 제가 말을 또 잘못 했어요. 칸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으니까요.
칸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으니까요. 칸나가 운것이 아니고 칸나의 눈에서 육 체의 배설물인 말간 물 방울이 솟아나왔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거 예요. 운다는 건 설명이고, 눈물이 솟아 나왔다는 건 묘사니까요. 설명보다 는 묘사가 정확성을 띄고 있을 테니까요.』
비뚤어졌던 감정과 별개의 의미에서 석운은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거기서 칸나는 생각했어요. 단지 세 시간 밖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 때문 에 눈물이 솟구쳐 나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눈물이 솟아 나오고 있었으니까요.』
석운은 또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아무리 돌아다 보셔도 화장을 한 얼굴이 아니니까 눈물 자욱은 보이지 않을 거예요. 사깃군같은 거짓말을 잘 하는 전형적인 아푸레 학생의 말이니 까 선생님이 곧이 돌으실 리는 만무하겠지만 저는 지금 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요, 용서하세요. 선생님이 옆에 계시는데 딴 분과 이야기 를 해서 미안해요.』
영림은 비로소 얼굴을 돌리고 석운을 쳐다보며 방그레 웃었다.
칸나의 뾰족하면서도 한편 무척 소박한 성격이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직접 석운의 심장에 왔다.
『인제부터 나하고만 이야기해요. 딴 사람과는 이야기 말고……』
석운도 미소를 지었다.
『솔직하게 들어 주심 이야기 하겠어요.』
『아까처럼 떠보지만 않는, 솔직한 이야기라면 솔직하게 듣지요.』
『그럼 됐어요. 이제부턴 절대로 솔직할 테에요.』
『그럼 됐어. 나도 이제부터는 절대로 솔직하게 들을 테니까……』
『이 순간에 있어서의 저의 솔직한 욕망은 선생님을 한 번 유혹해 보고 싶 다는 거예요.』
『…………』
『나를 유혹한다?』
석운은 적지 않은 놀람을 가지고 물었다.
동화 백화점을 지나 명동 쪽으로 둘이는 걸어가고 있었다. 날은 이미 저물 어 전등이 켜져 있었다.
『유혹이라는 것보다도…… 결국은 그것이 유혹이겠지만…… 제가 이렇게 도 선생님을 좋아하고…… 오래 오래 선생님을 제 옆에 모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뿐이예요. 이런 생각이 다 선생님을 유혹하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요?』
『그렇지만 나를 유혹해서 학생에게 이로운 점이 별반 있을 것 같지가 않 은데……』
『이해 득실을 저는 문제로 삼고 있는 건 아냐요. 제 감정이 그렇게 돌아 가고 있다는 것뿐이예요.』
『나를 그처럼 호의적으로 생각해 주는 건 감사하지만…… 학생 자신의 앞 날을 위해서도 그런 감정은 죽여 버려야만 해.』
『어른다운 그리고 선생님다운 말씀이예요. 그렇지만 그런 말씀을 제 앞날 을 위해서 하시는 건지, 혹은 선생님의 평화로운 가정을 위해서 하시는 건 지?』
『돌을 다 위해서 하는 거야. 여자의 행복은 일생에 한번 밖에는 없어. 그 처럼 소중한 행복의 대상은 따로 있을 거니까……』
『제가 예측하고 있던 그대로예요.』
『그대로여서 다행이지요.』
『선생님의 안전을 위해서는 다행일 거예요.』
『동시에 학생의 안전을 위해서도 다행이지요.』
『선생님, 이제 그 학생이라는 말을 좀 집어 치워 주시면 좋겠어요. 고영 림이라는 떳떳한 이름이 제게는 있어요. 칸나라는 별명도 있구요. 그런데 하필 왜 학생, 학생 하면서 사제지간의 윤리로서 자꾸만 견고한 삼팔선을 그어 놓으려는 거예요?』
『허어, 참 학생은……』
『또 학생이예요? 선생님한테 학생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어쩐지 어린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아주 질색이예요. 선생님은 어른이라는 안전지대에 버티고 앉아서 허어허어 하고 어린애 취급을 해두시는 것이 위험하지 않아 서 편하시겠지만…… 저는 그런 종류의 핸디캡은 싫어요.』
『그럼 어쩌면 좋은가?』
『일대 일로 가는 거예요. 선생님도 아까 그런 말씀하셨죠. 인간 대 인간 의 문제라고요. 나이 스물 넷임 어린 애 취급은 면해야지 않아요?』
『그럼 좋아. 영림 양은……』
『영림 양…… 영림 양…… 아.,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갓을 쓴 것 같아서 감각에 맞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미스 김이라든가 미스 고라든가 하는 말은 구역질이 나서 못해.』
『그건 저도 동감이예요.』
석운은 조금 생각하고 나서
『영림씨는 어때요?』
『아이구 서먹서먹이야! 그저 영림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 편이 융통성이 있어서 좋아요.』
『융통성이 있어?』
『남이 볼 때는 사제지간 같아서 무난하고, 단 둘이 있을 때는…… 후 훗……』
『응?』
『애인 같잖아요?』
번화한 명동 입구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석운은 대꾸를 잃은 채 후딱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영림의 얼굴은 곧장 전 면을 향하고 있었다.
석운은 지금 자기가 위험 지대에 놓여 있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할 만큼 마 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었다.
영림이가 내뱉은 한 마디가 이미 청춘의 상실을 자각하고 있는 강석운의 영혼을 앞질러 가면서 꼭꼭 자극해 왔다. 마치 배설기(排雪機)와도 같이 앞 길을 열어 주면서 고영림을 떠밀어가며 걸어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석운은 자극에서 받는 마음의 동요를 배제하고 억압하기 위하여 일부러 물 었다.
『영림은 내가 쉽사리 유혹을 당할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말에 영림은 핼끔 석운의 표정을 살피고 나서
『웬만해서는 당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건 표면에 나타난 문제이고 마음으로는 가끔 유혹을 받고 있을 거예요. 그걸 선생님은 교양이라든가 하 는 따위의 노력으로써 극복해 나가고 있을 뿐이죠. 그렇지만……』
『응?』
『선생님의 그러한 노력이 일단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날에는 성실도 없고 체면도 없을 거예요. 가정도 없고 사모님도 없어요.』
『허어? 그런 걸 영림은 어떻게 다 알고 있어?』
『다 알아요. 선생님이 갖고 계시는 아름다운 꿈과 본질주의가 합작을 하 는 날에는 세속적인 온갖 것이 무가치 하게 되고 말 거니까요.』
하낱 독자로서 이렇듯 신랄하게 작가 강석운의 본질을 찔러 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것은 비단 독자로써 뿐만 아니었다. 친구들 중에서도 강석운을 이만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 쉽사리 내 노력이 허물어질 것 같은가?』
『선생님의 노력이라고는 별다른 것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선생 님의 노력을 허물어뜨릴 만한 상대자가 아직까지 선생님의 눈앞에 나타나지 가 않았을 뿐일 거예요.』
『그래 영림은 허물어뜨릴 것 같은가?』
영림은 한참 동안 대답을 주저하다가
『저도 노력해 봐야죠. 선생님의 노력을 허물어뜨릴 때까지……』
『위험 인물이구나!』
『반가운 인물이 될 때가 올런지 누가 알아요?』
『상당히 자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자신이 아니구요, 역시 끈기 있는 제 노력일 거예요.』
『무엇 때문에 그런 힘든 노력을 해야만 하느냐 말이요.』
『선생님이 그저 좋으니까.』
『모를 일인 걸! 여러 모로 보아서 나는 적임자가 아닐 텐데……』
『이것 보세요.』
『응?』
『선생님의 성격으로나 인생관으로나 따져 볼 때 선생님이 그중 좋아할 수 있는 타입의 여성이 즉 칸나 고영림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아주 지나친 경 솔한 말 같지만요. 저는 오랫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경솔했으면 용서하세요. 용서하시고 맞았음 맞았다고 안맞았음 안맞았다고 솔직히 한 마디만 대답해 주시면 좋겠어요.』
『맞았어! 솔직히 대답해서 나는 아직껏 영림과 같은 여성을 대해 본적이 없었오!』
신음하듯이 석운은 실토를 하였다.
『선생님, 기뻐요! 굉장히 기뻐요! 그럼 됐어요.』
『되다니……』
『제 노력의 절반이 줄어들 테니까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안 되겠는 걸. 정신 무장을 단단히 해야겠어!』
농담조지만 사실도 그랬다.
영림은 말없이 웃었다.
을지로 로타리를 건너 석운은 아까 야스데를 맞겨둔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들러서 화분을 하나 찾아 갖고 가야겠오.』
칸나 고영림이가 풍기는 강렬한 분위기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던 아내의 모습이 갑자기 확대되어 왔다.
『선생님, 야스데를 무척 좋아하시나 보요. 이런 먼데서까지 사 가지는 걸 봄……』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잘못 건드려서 그만 화분을 깨뜨렸지 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가시는 거군요.』
석운은 그저 웃기만 했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화초는 뭐예요? 이담 원고 찾으러 갈 때 사갖고 가 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지만…… 석류 같은 걸 좋아하지.』
『알았어요.』
주인더러 택시를 부르래서 화분을 실었다.
『제가 댁까지 선생님 모셔다 드려도 무방하시죠?』
『무방하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오. 이야기가 있으면 다시 만나지.
내 집으로 찾아와도 좋고……』
야스데 화분을 바라보면서 영림과 더불어 달콤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어 쩐지 석운에게는 마음에 걸렸다. 영림과의 드라이브를 즐기려거든 차라리 야쓰데 화분을 한길가에 내동댕이 치던가 그렇지 않으면 야쓰데 화분 옆에 서 한시 바삐 영림을 멀리하고 싶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감정의 불안정이 석운은 생리적으로 괴로왔다. 그것도 걸 프랜드와의 경쾌한 사교라든가 일시적인 매소부 등속과의 드라이브라면 모르거니와 칸나 고영림의 의욕은 뿌리가 깊다. 칸나가 야쓰데를 모욕하느 냐? 야쓰데가 칸나를 경멸하느냐? 두 사람 중의 하나는 결국에 있어서 자존 심에 상처를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그럼 선생님 후일 다시……』
『놀러 와요. 대개는 집에 있으니까……』
『언제 놀러 갈는지 모르니까…… 영영 안 갈런지 모르니까…… 떠나가시 기 전에 한 말씀만 더 드려 두겠어요.』
『아, 좋아요.』
『칸나의 의욕이 다소 강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불량 취급을 받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 아버지나 제 오빠에게 인간적으로나 애정적으로나 버 림을 받고 있는 제 어머니나 올케의 입장을 옹호할 줄도 아는 칸나라는 사 실을 동시에 알아두고 가시는 것이 좋으실 거예요. 그것 뿐이예요. 선생님, 편히 주무세요.』
『편히 돌아가요.』
『악수를 하고 싶지만 아껴 두기로 하겠어요.』
그리고는 홱 돌아서서 명동 쪽으로 또박또박 영림은 걸어갔다.
차는 떠났다. 달리는 백글라스로 석운의 시선은 얼마동안 영림의 뒷모습을 붙든 채 놓아 줄 줄을 모르고 있었다.
『상당한 학생이다.』
거짓없는 감탄의 한 마디를 석운을 토했다.
오늘 강석운이가 고영림에게서 받은 온갖 자극과 감동은 순전히 정신적인 그것이었다. 고영림이가 지닌 육체의 냄새를 맡을 수 있기에는 영림의 개성 이 너무도 강렬하였다.
개성이나 교양이 뚜렷하지 못한 여성일수록 육체의 냄새가 풍기는 법이다.
아니, 그러한 여성일수록 남성들에게는 육체 밖에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 다.
『상당한 여성이야!』
석운은 다시 한 번 되풀이 하다가 후딱 정신을 차리며
『위험 인물! 위험 인물!』
하고 중얼거렸다.
진실한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성일수록 강석운에게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건드려 보다가 그만 둘 수 있는 연애가 아니다. 칸나는 무섭다. 무섭고도 귀엽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석운은 야쓰데 화분을 무심 중 어루만지며 입 속으로 외쳤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도, 야쓰데 화분을 무심 중 어루만지면서도 석운의 의식 속에는 이 몇 시간 동안에 걸쳐 고영림이가 남 겨 놓고 간 강렬한 환영만이 자꾸만 확대되어 갔다.
얼굴 모습이나 몸 매무새보다도 고영림의 말이 더 좋았다. 대화의 형식도 현대적 센스를 담뿍 담뿍 지니고 있었지만 대화의 내용이 더욱 좋았다. 쓸 데없는 대화는 한 마디도 없었다.
후추 알처럼 매우면서도 소박하고 선량하기 때문에 부드러움이 있었고 지 성적이기 때문에 논리에 모순이 없어서 듣기에 지극히 상쾌하다.
지나칠 듯 지나칠 듯 하면서도 컨트롤이 있어서 탈선을 하지 않는 대목에 서 고영림은 동시에 겸양의 미까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형식은 아쁘레 같아 보이지만은 내용은 아쁘레가 아니었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 여성들처럼 천박한 자존심에서 톡툭 튀어 나오는 독선적인 감정의 노출이었기 때문에 유치해 보이지도 않았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따 라서 대화는 중단됨이 없이 일정한 논리의 궤도를 타고 어디까지나 계속 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저는 사모님의 입장도 잘 이해하고 있어요.』
헤어질 직전에 고영림은 방탕한 남편을 가진 어머니와 올케에 비유해서 그 런 의미의 한마디를 종시 첩부해 놓았다. 악수도 후일로 아끼어 두었다. 여 유있는 행동이라고, 고영림에 대한 채점율을 에이 플러스(A·+)라고 석운은 고쳤다.
『고영림! 고영림!』
자기 인생에 이런 종류의 여성이 뛰어들 줄은 몰랐다.
중년의 남성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그 태반이 여성들의 육체에서였다. 청 춘의 상실을 탄식하고 서글퍼하는 그 대상은 대개가 다 육체의 젊음이었고 영혼의 젊음은 아니었다. 그렇건만 고영림은 육체보다도 영혼의 젊음을 가 지고 석운에게 육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어두운 거리가 창 밖에 흐르고 있었다. 창경원 앞을 차는 지나는 모양이었 다. 담배를 꺼내려던 손길이 언뜻 뻗으면서 야쓰데 잎사귀를 어루만졌다.
『아내란 도대체 무엇일까?』
십 팔년 동안에 걸쳐 애정과 신뢰를 지니고 있는 아내 김옥영의 존재와 단 세 시간 동안에 걸쳐 그것을 느끼게 된 고영림의 존재를 석운은 무심 중에 비교하고 있었다.
인간을 신뢰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 고영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애정에 있어서는……』
그러다가 석운은 단번에 앞 말을 취소하였다.
『영림에게서 느낀 것은 애정이 아니다. 단순한 감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종류의 감동은 멀지 않은 장래에 있어서 애정으로 변할 가 능성이 지극히 많달 뿐이다. 고영림이가 자꾸만 보고 싶고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지는 순간, 자기의 감동은 비로소 하나의 애정으로 변모를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여튼 오늘 밤 나는 고영림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까지 사 실대로 아내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는 말해야만 할 것인가?』
석운 자신은 말하자면 끝까지 수동적 태도를 취해 왔을 뿐 아니라, 영림의 의욕에 대해서는 어른다운 충고도 했다. 그렇고 보면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 도 무방할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했다.
(내외간에 비밀을 가진다는 것…… 가정의 파괴는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법이다.)
安全地帶[안전지대]
[편집]혜화동 로타리에서 차는 멈추고 아이들을 위해서 과자 한 상자를 샀다. 그 리고는 곧장 혜화동 골목으로 접어 들어갔다.
정문 앞에서 차 멋는 소리를 듣고 맏딸 경숙이가 사내 동생 둘을 거느리고 뛰쳐 나왔다.
『아버지, 뭐 사 왔어요?』
열 살 짜리 도선(道善)이가 차에서 내리는 석운을 우선 붙잡았다.
『도선아, 그러지 마! 어떻게 매번 사 오시니?』
열 다섯의 도현(道賢)이가 언니다운 수작을 했다. 그러면서도 의례 사왔으 려니 하는 짐작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아, 이건 너희들 것!』
『그것 봐! 안 사 갖고 올 아버지야?』
도선은 과자 상자를 들고 다람쥐처럼 쪼르르 뛰어갔다.
『너희들은 이 화분 좀 맞들고 들어가거라.』
『어마, 화초 분 또 사오셨네요.』
『응, 이건 너의 어머니 거다.』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만……』
요즈음에 와서 경숙은 그런 말을 곧잘 했다. 아버지를 찬양하는 말이었으 나 몇 퍼센트 쯤 질투도 있을 것이라고 석운의 짐작은 거기까지 가고 있었 다. 아이들이 크면 말 한마디 허수로이 못하겠다고, 옥영은 조심을 하고 있 는 터이다.
협소는 했으나 아담한 정원이었다. 콩크리트로 만든 조그만 못 가에 화분 이 주루루 놓여 있었다. 야쓰데도 화분 속에 있었으나 나무가 적다. 겨울 한 철을 책상 위에서 난 야쓰데였다.
『어머니, 빨리 나오세요. 굉장한 푸레센트예요!』
경숙이가 또 안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래? 아버지가 엄마한테 푸레센튼가?』
『글쎄 빨리 좀 나와 보세요! 아버지가 지금 엄마한테 인삿말 받으려고 기 다리고 계신데요.』
『요것이!』
석운은 금새 권투 선수가 되면서 스트레이트를 넣는 시늉을 했다.
『엄마!』
경숙이가 목을 움츠러뜨리며 소리를 치는데
『아버지, 맞서 봐요?』
도현이가 아퍼 칼의 태세를 취하면서 달려 들었다.
『옳지. 인제야 호적수다. 계집애는 상대가 안돼!』
그러면서 석운이가 몸가짐을 바로 잡는데
『뻐억……』
하고 석운의 옆 엉덩이에 편취가 하나 들어 닿았다.
『야아, 손 들었다! 손 들었어!』
석운이가 두 손을 번쩍 드는데 정신이 갑자기 환해지며
『아이구, 커다란 어린애. 한 분 또 나타나셨군!』
부엌 전등을 복도에 내 걸며 옥영은 뜰로 내려섰다.
『글쎄 어머니, 이 야쓰데 좀 보세요. 어떻게나 큰지. 어머니를 위해서 정 성 들여 사오신 거래요.』
『어쩌면…… 크기도 하네요.』
『어머니, 인제 인사하세요.』
『감사합니다.』
소학생처럼 옥영은 절을 했다.
『으와, 한 커트 찍어 두고 싶은 씬이야!』
경숙은 손뼉을 치며 호들갑스럽게 웃어 대고 나서
『엄마와 아버지는 그마니스트라니까!』
했다.
『참, 요즈음 애들은 못하는 말이 없어.』
옥영은 다소 민망했고 석운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도현은 못 물을 퍼서 야쓰데 화분에 부어 주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일찌감치 들어올 것 같다고 해서 모두들 저녁을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 참이라고 했다.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어서들 저녁을 먹어요.』
석운은 푸푸 세수를 하며, 자기가 고영림에게 황홀해 있는 동안 집안 식구 들은 시장기를 참고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적지 않게 미안해졌다.
『저녁 잡수셔야죠?』
석운의 모자와 옷을 들고 옥영은 물었다.
『나는 이른 저녁을 먹었는데……』
『오늘 밤 원고 쓰세요?』
『어디가…… 오늘은 파이야. 머리가 뒤숭숭해서……』
『그럼 술이나 조금 데워요?』
『아, 그러는 게 좋겠오. 그런데 혜숙(惠液)은 어디 있오?』
비누질을 하며 석운은 물었다.
『벌써 자는 걸요.』
금년 일곱 살 먹은 막내 딸이다.
옥영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술 상을 차리기 시작했고 식모는 저녁 상을 보 아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세수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문지르면서 석운은 그처럼 강렬하게 떠오 르던 고영림의 환영이 조금씩 희박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됐어!』
마음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하는 자기 자신을 좀 더 힘차게 붙들기 위하여 석운은 일부러 손을 뻗쳐 물방울이 달랑달랑 맺혀져 있는 야쓰데 잎사귀를 한번 건드려 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나는 먹었다. 어서들 먹어라.』
『네에.』
둥그런 상에 둘러 앉아서 아이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조금 후에 옥영이가 술상을 보아 가지고 들어왔다.
『애들하고 같이 먹겠오.』
아버지와 한상에서 먹는 것은 아이들은 좋아했다.
『부산한데 따로 잡수세요.』
『아니야, 같이 먹어.』
옥영은 술 주전자와 안주를 아이들 옆에 옮겨 놓으며
『아버지가 오늘은 늦어져서 너희들한테 미안하신 모양이시다.』
머리에 빗질을 하고 나서 석운은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았다.
『잔이 작은 걸, 비루 술잔 갖다 줘요.』
『어머나? 일주는 작아야 술 맛이 나신다더니…… 아주머니, 술잔 하나 가 져와요.』
『네에.』
오십 고개의 식모가 술잔을 가져왔다. 옥영은 술을 따르며
『아이, 한 주전자가 다 들어가네요.』
어쩐지 석운은 목이 자꾸만 갈하다. 반 술잔를 단숨에 석운은 들이켰다.
『맥주인줄 아시나봐?』
옥영은 놀란다.
『목이 갈해서……』
『그럼 오늘은 원고도 안 쓰실 텐데 한잔 드시고 일찍 주무세요.』
『응, 그래야겠오.』
늦은 저녁이라, 아이들은 열심히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열심 히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즐거운 노릇이었다. 석운의 가슴속에 화락(和樂)이 깃들기 시작했다. 들떴던 감정이 또 조금 가라 앉는 것을 느끼자
『고영림이가 다 뭐야!』
석운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렇게 외치고 나니 또 조금 마음이 평온해졌다.
『참, 출판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숟가락을 멈추며 기대에 찬 옥영의 얼굴이 반짝 들렸다.
『아, 잘 됐오. 인세는 절반식 나눠서 두 번에 받기로 했오.』
『얘, 경숙아, 이번에는 정말로 아버지가 네 피아노를 사 주신단다!』
『으와……』
경숙이 숟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벌떡 일어나서 어린애처럼 발을 동동 구르 며 빙글빙글 맴돌다가
『아이구, 아버지!』
하고, 희열에 넘치는 외침과 함께 등 뒤로부터 석운의 목을 껴안았다.
『애두 참, 좋으면 저러는가?』
옥영도 만족했고
『아이구, 목이야! 숨이 막혀!』
석운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영림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했다.
이윽고 아이들을 하나 둘 흩어져 갔다. 도현이와 도선은 저희들 방으로 과 자 몇 낱씩을 배급 받아가지고 갔다. 경숙은 오쭐오쭐 춤을 추면서 명륜동 으로 피아노 연습을 갔다.
『그래서 말이요, 한편으로는 당신을 믿으면서 눈앞에 전개되는 광경은 딱 딱 들어 맞거든 다방에서 요릿집 뽀이를 만난다던가…… 그 뽀이의 인도를 받아 호화판인 자가용 차를 몰아 댄다던가…… 목적지는 틀림없이 호텔이 아니면 요정이라고 생각을 했지.』
『어쩌면 당신은……』
『아니나 다를까, 당신은 마침내 북경루로 자취를 감추었거든. 나미아미타 불! 될 대로 다된 일이라고, 나는 마음 속으로 이미 손을 들고 있었오.』
오늘 석운이가 겪은 이야기를 상세히 하고 나서
『어쨌든 나로서는 실로 좋은 경험을 한 셈이요. 실제로는 여편네를 떼움 이 없이 떼운 경험을 샅샅이 했으니까 말이요.』
술 기운이 휘잉 돌아 석운의 이야기가 다소 조잡해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도 작가적인 하나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시름없이 상 귀에 앉아 있던 옥영의 눈에서 눈물이 스루루 흘러내리고 있 었다.
『아냐요.』
옥영은 넋을 잃고 도리도리를 조용히 하여 보이며
『잘못 생각하시면 정말 슬퍼요. 작가적인 성장보다도 저는…… 저는 당신 의 인간적인 성장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아, 글쎄 그런 줄은 알지만……』
『작가로서 성공해 주는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착실해 주시는 편을 저는 택 해요.』
『아, 그건 글쎄 잘 안다니까……』
『당신이 후세 만대에 걸친 위대한 작가가 되어 주는 것 보다도…… 이 조 그만 가정 속에서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고 좋은 남편이 되어 주는 편이 나 는 훨씬 행복해요.』
『아, 글쎄…… 나 참……』
『이런 말을 나는 비로소 하지만……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나를 무척 속 된 인간이라고 당신이 경멸할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문학이라든가 예술이라 든가 하는 세계를 전연 모르는 인간이 아니예요. 그렇지만…… 예술로써 인 간을 그르칠 바에는 예술을 버리고 인간을 구하고 싶어요.』
『알 수 있는 말이요. 눈물을 닦고…… 울긴 왜……』
『내가 언제 당신에게 눈물을 흘가분히 보였어요. 나는 좀처럼 울지를 않 아요. 그렇지만 오늘 일만은 눈물이 나와서 못 견디겠어요.』
『그처럼 충격이 강했던가?』
『저희들의 결혼 생활은 이미 십 팔년이나 됐어요. 그런대도 당신은 아직 나라는 인간을 모르고 있는 것이 슬퍼요.』
『당신을 의심해서…… 잘못됐어요!』
『남자들은 자기네가 불순하니까 여자들도 모두 그럴 것처럼 착각을 하는 모양이지만…… 윤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태반의 여자는 그렇지 않을 거 예요. 모르기는 하지만 말이예요.』
『잘 알았오. 미안하오!』
『아이, 그렇게 말하면 도리어……』
옥영이가 눈물을 씻는데
『자아, 악수…… 악수를 해요!』
석운의 손길이 밥상 위로 뻗어 갔다.
『나 참……』
옥영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고 남편의 손길을 잡다가
『아야앗! 좀 가만히……』
『아파?』
『아프지만…… 아픈 만큼 기억에 남아서 좋아요!』
이런 것을 가리켜 부부의 애정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눈물 어린 옥영의 미소 하나가 십 팔년 동안, 고락을 나누어 온 공존(共存)의 역사를 아주 간 단히 석운으로 하여금 회상케 하고 있었다. 웃음 속에 눈물이 있었고 눈물 속에도 웃음이 있었던 과거야 말로 이인삼각(二人三脚)의 거룩한 상부 상조 의 역사였다.
『이제부턴 정말 야쓰데 화분을 소중히 해야겠어요.』
스스로를 꾸짖고 반성하기 위하여 한낱 좌우명(座右名)으로서 야쓰데 화분 을 사갖고 온 남편의 성의가 눈물겹도록 옥영에게는 고마웠다.
『아, 소중히 해 줘요.』
부드럽게 웃으며 석운은 잔을 들었다.
『당신의 마음이 거칠어 졌을 때, 나는 열심히 야쓰데 화분을 가꾸겠어 요.』
『좋은 말이요!』
그 순간, 석운은 불현 듯 고영림을 생각했다.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술잔 속에서 고영림의 의욕에 불타는 얼굴이 석운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석운은 한 두 번 머리를 휙휙 흔들었다.
『술에 무슨 티가 있어요?』
옥영은 식탁 너머로 술 잔를 바라보았다.
『아니……』
석운은 훌쩍 잔을 기울여 술을 마셔 버리며
『아, 아까 그 학생 말이요. 다방에서 만나자던……』
『참, 그 학생을 만났었어요?』
『만났는데…… 거 언젠가, 글을 써 보낸 독자가 있지 않았오?』
『글을 써 보낸 독자라고…… 어느 사람?』
『독자로부터 편지를 많이 받기 때문에 옥영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았다.
더구나 남편에게 온 편지에는 간섭을 하지 않는 옥영이었다.
『작년 가을인가? 왜 내가 읽어 보래서 읽어본 원고가 있지 않소? 「칸나 의 의욕」이라는……』
『아, 그 여자예요?』
옥영도 생각이 났다.
그때, 옥영은 「칸나의 의욕」을 읽고 나서 참으로 좋은 소질을 가진 여자 라고 칭찬을 한 적이 있었다. 이처럼 올바르게 인생을 괴로워할 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크스리챤 출신인 옥영은 결국에 있어서 신의 섭리를 따른 칸나를 극구 찬양하고 나서
『우리들과는 제네레에순이 달라서 세대적인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나와 비슷한 데가 있어요.』
『나도 그런 생각을 했오. 당신과 같은 데가 있다고…… 그러나 당신은 칸 나보다는 무척 조용한 편이요.』
『세대가 달라서 그럴 거예요.』
『아니요. 세대도 세대지만…… 결국 성격 문제야. 인생관은 시대의 영향 을 받기가 쉽지만 성격은 시대를 추월한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
『동감이예요. 얼핏 보면 같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구먼요.』
『사물을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점은 같은데…… 가만 히 따져 보면 다른 점도 많아.』
『칸나는 나보다 의욕이 강하고 또 표현주의예요.』
『그렇소. 그래서 당신은 조용해 보이고 칸나는 떠들썩해 보이는 거요.』
『칸나는 나보다 더 뜨거워요.』
『맞았오. 당신은 칸나보다 차겁지.』
『뜨거우면 이내 식어요.』
『차가우면 이내 더워지지가 않구……』
『그대신 더워만 지면 날래 식지도 않을 거예요.』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두 사람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래 그 학생이 무슨 용건으로 만나자는 건가요?』
지난 이야기를 회상하며 옥영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내외간에 비밀을 가져서는 아니된다고, 아까 택시에서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옥영에게 이야기할 생각을 석운은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고영림의 의욕과 정열을 그대로 고 스란히 아내앞에 털어 놓는 것은 도리어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좋을 것 같 지가 않았다. 석운 자신으로는 별반 탓할만한 행동도 없었는데 공연히 아내 의 신경만 건드려 놓는 결과만 될 것 같았다.
진실이 도리어 인간 생활을 좀먹는 경우가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고영림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히 조절해서 들려 줄 생각을 순간 적으로 했다.
『문학 이야기겠죠?』
옥영은 이미 앞질러 생각하고 있었다.
『응, 자기의 원고를 보아 주었다는데 대한 인사를 겸해서 저녁을 샀는 데……』
『글을 읽어 보면 그 만한 예의는 알 법한 학생이예요.』
대답이 담백하다. 옥영은 추호도 남편의 말을 의심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말이요. 미스 헨렌이라고……』
석운은 거기서 결혼 직전, 원산 송도원에서 만났던 한 혜련의 이야기를 상 세히 하여 간신히 옥영의 기억을 새롭힌 후에 그 한혜련이가 지금은 고영림 의 올케라는 말을 하고
『가끔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거요.』
『그래요? 참 그런 애가 그때 있었던 것도 같애요.』
그런 정도의 호기심 밖에 옥영은 더 보이지 않았다. 평범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고영림이란 그 학생은 당신과 이야기가 어울릴 거예요. 여러 가지 점으로 봐서 당신과 일맥 통할 데가 있음직 한 학생 같던데……』
역시 옥영은 그런 점에 더 흥미를 가지는 모양이었다.
『응, 그만하면 인간은 돼 먹은 학생이야.』
『저번에 원고와 함께 보내 온 편지를 보면 당신을 극진히 존경한다고 했 던데…… 얼마나 존경합디까?』
화락한 미소와 함께 옥영의 말이 넌지시 날아 왔다.
『흥, 그건 분명히 나를 살금 살금 떠 보는 질문인데……』
『떠 보긴…… 내 언제 당신을 그처럼 못 미더워 했어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지나치게 믿는 건 다소 문제야.』
석운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석운의 마음은 아내의 그러한 믿음 앞에 고 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찍힐 땐 찍혀도 찍힐 때 까지는 믿고 살 테에요. 믿는 자를 배반하는 것 처럼 큰 죄악은 없다고, 이건 당신의 지론이었으니까.』
『좋은 말이요.』
아내의 믿음이 크면 클수록 유혹에 대한 자기의 저항도 따라서 클 것이라 고, 십 팔년 동안의 아내와 세 시간 동안의 고영림을 비교해 보던 자기 자 신을 석운은 마음 속으로 부끄러워 했다.
『그 학생이 이제 원고를 가지러 온다니까 한번 만나 봐요. 당신과도 이야 기가 맞을 거야.』
『만나 볼 테에요.』
『좋은 상대가 될 거야.』
『그래요?』
옥영의 호기심은 차차 커가고 있었다.
『아이, 졸려!』
『주무세요.』
식모더러 술상을 치우게 하고 옥영은 남편의 자리를 보아 놓았다.
『경숙이가 오늘 밤엔 잠을 못 잘 거예요.』
『응, 응……』
옥영은 밖으로 나가고 석운은 자리에 들었다.
술의 양이 다소 지나쳐서 석운은 자꾸만 눈이 감겨졌다. 잠이 들을락말락한 몽롱한 의식 세계에 타오르는 당홍색 칸나꽃이 한 떨기 눈부시게 내려쪼이 는 햇볕 속에서 찬연히 꽃피어 있었다.
비밀을 가지는 남편이, 강석운은 마침내 되어 버렸다.
戀愛散賣業[연애산매업]
[편집]《미스터 송 오늘 뜻하지 않은 돌발사가 생겨서 오늘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촬영대회는 혼자 다녀 오세요. 모델이 예쁘니까 신이 나실 거예요. 그렇지만 그 모델에게는 집의 오빠가 매니저로 항상 따라 다니니까 웬만큼 마력을 내기 전에는 함락이 잘 안될 거예요. 어쨌든 성공을 빌어요. 미안해요.
즉일 한시 쟈스트. 고영림 송준오씨 앞》 호수 다방 전언관에서 송준오(宗準五)는 고영림의 편지를 집어 들고 읽고 있었다.
오늘 두시부터 한강 백사장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촬영대회의 모델은 한성 양조의 여사무원인 이애리(李愛梨), 대학 이학년까지 다니다가 가정 사정으로 중퇴을 한, 고영림과는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다.
촬영대회라야 고영림과 이애리를 중심으로 한 몇몇 젊은이들의 사교파티의 전주곡을 의미하고 있을 뿐, 사진 예술에 대단한 열광자들은 아니었다.
결국 고영림과 이애리가 발산 하는 젊음의 향기를 페부 깊이 호흡해 보려는 남성들이 몇 사람 모인달 뿐이다.
송준오는 작년 가을, 고영림의 사랑을 잃고 독약을 마셨던 바로 그 청년이다. 작년 봄 대학 법과를 마치고 도미(渡美)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고영림이가 못 미더워 유학을 연기하고 있던 중에 음독 사건을 일으켰다.
그 후 송준오는 한 해 겨울 쭉 집에만 처박혀 있다가 이른 봄부터 거리를 나다니는 몸이 되어 영림의 사교 그룹에도 얼굴을 나타냈다.
송준오의 아버지는 모 퇴직 고관으로서 목하 K은행의 상무이사였다.
한성양조의 고종국사장과는 상거래도 있고 아들의 그러한 심정에 눈물겨워 하며 고종국 사장에게 누차 정식 혼담을 청해 보았으나 고사장도 딸의 의사를 좌우할 힘이 없었다. 고사장과 아들 고영해(高英海)의 입장으로서는 송준오와 인척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한성양조의 재정적 배경이 견고해지기 때문에 될 수만 있으면 그렇게 되기를 절실히 바랬으나 그럴적 마다 영림은 혼담의 동기를 불순하다고 매양 거절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영림이가 송준오를 싫어하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음독까지를 한데 대해서는 동정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동정심이 영림의 정열를 전폭적으로 불사르지는 못하고 있었다. 송준오의 어딘가 여성적인 나약한 성격과 몸 매무새가 영림에게는 싫었다.
영림의 편지를 읽으면서 송준오의 해사한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곤색 양복에 모자는 쓰지 않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은 채 레지에게서 종이 한 장을 빌려 신경질적인 조그만 글씨로 송준오는 다음과 같이 써서 전언판에 끼워 놓고 다방을 나섰다.
《미쓰 이애리 돌발 사건이 생겨서 촬영대회에는 참석을 못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송준오》 송준오는 이윽고 다방을 뚜벅뚜벅 나왔다.
그러나 송준오가 열어 젖힌 다방 문을 헵번 머리가 하나 홀가분히 들어섰다. 보오얀 회색 투피스의 이애리였다.
『왜 나오세요?』
『아, 잠깐……』
송준오는 주저하다가
『돌발사건이 생겨서요.』
『돌발 사건? 무슨 일이 생겼는데요?』
『글쎄 무슨 일인지…… 나도 잘……』
『응?』
애리는 송준오를 떠밀다시피 하며 다방 안으로 들어서면서 낯익은 레지를 향하여 물었다.
『아직들 안 왔어요?』
『아까 고영림씨가 와서 편지를 써 놓고 갔어요.』
『편지?』
그러다가 애리는 준오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펴보며 종알거렸다.
『알았어! 돌발 사건의 의미를……』
준오는 비로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준오씬 종시 안 갈 테야?』
『글쎄 돌발 사건이 생겨서……』
『영림이가 없음 사진도 못 찍어?』
그러다가 애리는 전언판에서 자기 이름을 발견하고 쪽지를 뺐다. 읽고 나자 애리는 쭉쭉 찢어 버리며
『참, 세기적 싱검둥이라니까!』
매서운 눈으로 애리는 핼끔 준오를 흘기고 나서
『미안하지만 나 종이 하나 주세요.』
레지는 웃으며 종이를 내주었다.
《고전무님 오늘 갑자기 피치못할 돌발 사건이 생겨서 촬영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어요. 황송하리 만큼 미안해요. 그 대신 내일은 세 번만 더 웃어 드리겠어요. 바이바이!
애리가 정성껏 씀》 겉에다 고영해 이름을 쓰고 전언판에 꽃아 놓았다.
애리를 바라보며 준오는 소리없이 웃고 있었다.
『자아, 이제 나가요. 나도 돌발사건이 생겼어!』
애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준오의 등을 떠밀었다.
『모델이 가지 않으면 돼?』
『모델에게는 돌발사건이 생김 안된대?』
『나 참……』
애리는 레지를 향하여
『고전무가 오셔도 암말 말아야 해요.』
『네 네, 염려 마세요.』
레지는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눈 전송을 했다.
『내일은 세 번만 더 웃어 드린다고 쓰던 데…… 거 무슨 말이요?』
다동 골목을 거리로 빠져 나가면서 준오는 물었다.
『아, 그거 말이요? 호호호……』
애리는 카들카들 웃고 나서
『들어봄 아주 간단한 이야기야. 고전무가 말이예요. 최소한 하루에 다섯 번만 웃어 달라는 거야.』
『자기보구?』
『응, 그래. 오늘은 미안도 하구 해서 내일부터는 세번만 더 웃어 줄테야.』
『세 번을 더 웃어 주면 그만큼 봉급도 올라가겠군.』
『다른 사원들과의 비율도 있으니까 봉급은 못 올라가지만 보이지 않는 보너스가 가끔 나온대요.』
『그것야 말로 웃음을 파는 거로군.』
『웃음 쯤 팔아서 보너스가 두둑히 나옴 오죽 땡이야.』
『여자란 참 좋은 밑천을 갖고 있어!』
『그러니까 남자 본위인 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거지 뭐야? 주먹 다짐을 못하는 대신에 웃음으로 해 보도록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거 아냐?』
『흥!』
준오는 코웃음을 쳤다.
『따지고 봄 그렇지 뭐야? 준오씨는 팔자가 좋으니까 코 구멍에서 흥 소리가 튀어 나오지만…… 삼만환 남짓한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한달 동안을 살아 나가겠어?』
『…………』
『웃음 쯤으로 여섯 식구가 살아 가고 동생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준오씨와 같은 순정파로선 상상도 못할 거야.』
준오는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애리를 이해는 하면서도 그러한 애리에 동감을 하기에 송준오의 사회적인 시달림이 너무나 박약했다.
『여성들의 웃음이 팔린다는 사실을 나는 조물주에게 감사히 생각해요.
그렇지 않았음 우리 여섯 식구는 벌써 거덜이 났게?』
『웃음을 파는 여자!』
그런 생각으로 애리를 바라보니, 이해는 가면서도 먼저 경멸의 정이 앞장을 섰다.
웃음을 팔기에는 마침한 몸매였다. 짧막이 커트를 한 헵번 헤어에 얄싸하고 갸름한 얼굴이 요사스럽도록 야실야실했고 하이힐 위에 얹혀진 날씬한 아랫도리를 몬로 타이트가 팽팽하게 감싸고 있었다.
애리가 송준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준오가 음독 사건을 일으킨 후 부터의 일이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실연 자살을 한담?』
먹고 살기에도 바쁜 이 시대에 한가스레 독약을 마시고 꿈틀거리던 송준오를 상상하고 애리는 코웃음을 쳤다.
『아, 그래? 싫음 그만 두려므나. 여자가 너 하나 뿐이더냐? 한 남자 앞에 세 추럭 반이야, 세 추럭 반!』
그랬음 되지 않느냐고, 애리는 위로 절반 경멸 절반의 감정을 가지고 준오에게 타이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 동키호테와도 같이 시대 착오적인 송준오의 순정이 주옥같이 소중하기도 해서 송준오를 끈기있게 애리는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어딜 가는 거요?』
을지로 입구에서 송준오는 걸음을 멈주었다.
『돌발사건이 생겼담서? 영림이한테 전화 걸어 줘?』
웃지도 않는 새침한 얼굴이다.
『참 애리씨도 돌발사건이 생겼다면서?』
준오는 웃으면서 말했다.
『생겼어, 중대한 돌발사건! 연애보다도 더 중대한 사건이야.』
『그게 뭔데?』
『인간 생사에 관한 문제야. 그대 화폐는 가졌겠지?』
『화폐?』
『돈 말이야, 돈! 돈이란 말은 이미 속될 대로 속돼 먹어서 입에 담기도 싫어. 그런 쾨쾨 묵은 봉건적 관념에 비함 얼마나 신선해요! 가졌지, 화폐?』
『아, 약간은……』
『그럼 청춘 사업 좀 해 봐요.』
『무엇을 해요?』
『아이구, 일일이 번역을 해 바쳐야만 하니, 이건 스틱 걸이 아니고 모름지기 콘사이쓰 대용품인 걸』
애리를 대하면 말문이 자꾸만 막힌다. 얼른 이해되지 않는 말을 애리는 곧잘 썼다.
『어서 좀 번역을 해봐요.』
『애리가 만일 고사리나 올드 미스처럼 새들새들 말라 빠졌담 일종의 사회 사업이 되겠지만 말이야. 오월 하늘 밑에 청청히 푸른 신록(新綠)처럼 애리는 단 물이 뚝뚝 흘러! 물 한 방울이라도 얻어 먹고 싶음 어서 어서 청춘 사업을 많이 해 둬야지! 아이, 시장해! 빨리 점심 사요.』
애리는 배를 움켜 쥐며 요사스레 웃었다.
『참 애리씨는 못하는 말이 없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그러한 애리가 귀엽기도 했다.
『글쎄 생사에 관한 일이라니까! 전무님만 모시고 왔음 중국 요리는 문제가 없었는데……』
준오는 웃으면서 다시금 명동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는데
『아, 마침 저기 보이는구먼! 아서원 간판이……』
애리는 앞장을 서서 이미 그리로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었다.
『팔자가 늘어진 실연 자살 미수자의 눈에는 거렁뱅이의 창자를 십여 개 빌려 갖고 온 줄로 알 거예요! 호호호……』
호들갑스럽게 웃어 대며 홱 애리는 돌아 섰다. 돌아서서 눈 한 쪽을 살며시 감아 보이며
『어때? 이만함 몬로나 헵프번이 왔다가 울고 가겠지?』
준오는 웃으면서
『웃고 갈는지 누가 알아?』
『흥, 비트는 말이겠지만…… 이 편에서 그대를 비틀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대의 순정이 지나치게 지극해!』
『뭘 잡수셔요?』
아서원 이층 걸상 방에 둘이가 마주 앉는데 차 두 잔을 따라 놓으며 보이는 물었다.
『냉채 하나, 나조기 하나, 양잠피 잡채 하나, 그리고는 맥주!』
애리는 외듯이 단숨에 음식을 청했다.
『네네.』
보이는 물러가고 애리는 준오를 향하여 방긋 웃어 보였다.
『이제 그만 웃어요. 웃음 값을 청구해 오는 날에는 화폐 부족이야.』
송준오도 차차 유쾌해졌다.
『염려 말아요. 그건 준오씨가 베풀어 주는 청춘 사업에 대한 댓가로서 지불되고 있는 거니까요.』
『점심 한 끼에 웃음이 몇 번인고?』
『점심 나름에 달렸어. 설렁탕 한 그릇도 점심은 점심이니까……』
『차 한 잔 살 때는 어떻게 해요?』
『가만히 앉아서 마셔만 줌 되지.』
『그런 때는 주지 않는가요?』
『웃음 미찌게?』
그래서 두 사람은 또 한바탕 웃어 댔다.
『애리씨, 이제 정말 그만 웃어요. 웃음이 과불(過拂)되는 날에는 수지 계산이 안 맞을 테니까.』
『아냐. 이건 나 자신의 생리적 요구에 의해서 웃는 거니까 화폐 가치로의 웃음과는 별도 계산을 해야만 되는 거야.』
『셈이 아주 밝군요!』
『현대 여성 치고 셈 어두운 사람 봤어? 겉으로는 얌전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모두들 호박씨를 까고 있는 거야. 탁 터놓은 만큼 나는 승부가 정정 당당하지만…… 흥, 그저 보기만 해서는 얼굴이 보살처럼 얌전해 보이지! 마리아처럼 순결해 보이구……』
『참 애리씨는 유쾌해!』
준오는 감심을 했다.
『유쾌하지! 영림의 생각 같은 건 아득해졌지?』
사실 준오는 영림을 완전히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빙그레 웃었다.
『웃지만 말고 그럼 그렇다고 솔직히 말해 봐요. 도대체 영림의 어디가 좋다는 말이야? 아이구, 그 지긋지긋한 심각파!』
그러면서도 애리는 그 야실야실한 얼굴을 갸웃하고 조금 수그리며 눈꼬리웃음을 곱게 웃어 왔다.
준오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여성으로서의 요염한 매혹은 영림보다 애리가 월등하게 짙었다. 준오는 그러한 생리적인 가슴의 흔들거림을 억제하면서
『애리씨 그 웃음은 뭐요? 계산에 드는 거요?』
『암 들지! 상품용이니까, 계산에 넣지 않음 수지가 안맞아.』
『상담한 상품인 걸!』
『그만 함 화폐 가치 있어 봬?』
『우등품이야!』
『마음에 들었음 됐어!』
『응?』
『점심 값 지불은 그걸로써 청산이 됐다는 말이예요. 호호홋……』
그러는데 요리가 들어왔다.
『참 고마운 일이지 뭐야. 웃음 하나로써 이런 산해 진미가 수월히 입 속으로 들어온다는 건 참으로 신령하신 조물주의 거룩한 혜택일 수 밖에…… 』
그리고는 맥주를 준오의 잔에다 따라 주며
『자아,, 변변치 않은 음식이지만 많이 들어요. 웃음을 팔아서 한 턱 하는 점심이예요.』
『헤에?』
『사양할 것 없어. 얻어 먹기가 미안하면 다음엔 준오씨가 저녁을 사면 되잖아?』
맥주도 몇 잔 수월히 마셨지마는 애리는 참으로 맛있게 식사를 했다.
『고전무님 지금 쯤은 푸푸하면서 또 어느 접대부를 끼고 낮 술을 마시노.』
『고전무한테 빚을 많이 지고 있는 모양이군요.』
맥주 몇 잔에 준오도 얼근해졌다.
『아냐, 나는 나대로 빚을 죄 청산했는데 고전무가 아마도 계산을 잘못하고 있는가봐. 워낙 사업가란 욕심이 많아서 이자에다 또 이자를 붙이는 복리 계산법을 사용하는 모양이야.』
『웃음만 가지고는 청산이 잘 안되는 모양이지.』
『손목 몇 번 잡히어 주었어.』
준오는 웃으며
『순목은 웃음보다 비쌀 거 아니요?』
『그러기에 말이야. 게다가 덤꺼정 주었는데……』
『덤이라니……』
『손등에 입술을 갖다 대기에 내버려 두었어.』
『아, 하하핫……』
그러한 애리를 마음 속으로서는 경멸을 하면서도 송준오는 술 기운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한 마디 한 마디에 도발과 유혹을 당하고 있었다.
『그 따위 덤 쯤으로는 고전무의 계산이 맞지가 않는 모양 아니요?』
『그러기에 말이야. 양복 한 벌 쯤 입혀 놓고 으시대는 걸 봄 가관이라니까!』
『양복?』
『이거 말야, 이거!』
애리는 자기가 입고 있는 회색 양복을 턱으로 가리켰다.
『아, 그것도 웃음의 댓간가?』
『손못의 댓가라니까……』
『거 괜찮은 장산 걸! 손등에다 입 한 번 갖다 대게 하면 말쑥한 양복이 한 벌!』
『그래서 하는 말이야. 생각함 신통하기 짝이 없다니까 글쎄. 사내 자식들은 도대체 어떻게 돼 먹어 준 동물인지 알 수가 없어.』
『참 알 수 없는 동물이야!』
준오는 동감을 했다.
『요즈음 그럴 듯하니 차리고 나다니는 여자들을 가만히 봄 태반이 다비슷 비슷한 연애의 산매업자(散賣業者)들이야.』
『연애의 산매?』
『독약만 마실 줄 알았지, 세상 물정에는 깜깜이로구먼!』
『깜깜이니까 독약을 마셨겠지.』
『정신 좀 똑똑히 차리고 독약 살 돈으로 이제부턴 점심이나 가끔 사요.
점잖음 점잖은 대로, 야하면 야한 대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기의 애정을 가장 비싸게 팔아 보려고 이손님 저손님을 살금살금 건드려 보는 거지, 뭐야? 건드려 보는 데서 구두도 생기고 핸드 빽도 생기고 차 한 잔 점심 한 그릇, 영화관이나 음악회, 심지어는 십 오환 짜리 전차표까지 공짜로 생기게 되니, 여자들이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기야.』
『그러고 보면 남자로 태어난 게 불행인 걸.』
『말해서 뭘 해! 괜히 척하고 싶은 여성들은 남성들의 횡포니 뭐니 하고들 떠들어 대고 있지만 생각함 남자들이야 말로 불쌍한 동물들이야. 잘난 놈 못난 놈 할 것 없이 모두들 여자 앞에서는 히쭉히쭉 까불까불이지.
부처님도 여자 앞에선 웃는다면서?』
『하하하핫……』
그러나 준오는 다음 순간, 웃음을 갑자기 거두고 나조기를 집으러 오는 애리의 손가락 둘을 무심 중 잡았다.
나릇나릇한 손 두가락이었다.
애리의 고개가 후딱 들리며 준오의 순정을 삼켜 버리려는 듯이 눈꼬리 웃음이 달려왔다.
『별안간 이게 뭐야?』
손가락 둘을 잡힌 채 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빨간 매니큐어가 준오의 손아귀 속에서 알린알린 꽃피어 있었다. 독사의 대강이 처럼 세모난 손톱이 애리의 일면을 상징하는 것 같아서 다소 꺼림찍도 했지만 그만큼 스릴도 있었다.
『애리, 나는 완전히 영림을 잊어먹고 있어!』
준오의 스물 다섯 살이 혈관 속에서 꿈틀꿈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영림이와 애리가 무슨 관련성이 있다는 거야?』
준오가 마침내 들떠 왔다. 애리는 적지 않게 그것을 기뻐했지마는 일단은 젖혀 봐야만 애정의 댓가는 오르는 것이다.
『영림이 때문에 애리가 빛을 냈다는 거야?』
『아니야! 애리를 좀 더 먼저 사귀지 못한 것을 탓할 뿐이야.』
『어쨌든 이 손가락 놓고 말해요. 이럼 수지 계산이 들어맞지가 않아.
점심 값은 아까 다 청산을 하지 않았어?』
『애리!』
준호는 손가락을 잡은 채 훌쩍 일어났다.
『이건 분명히 과불이야. 이러다간 장사 밑천 들어 먹을라!』
준호는 애리의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애리의 손등에 입술을 비볐다.
『아냐, 아냐! 이건 분명히 양복 한 벌 값인데……』
애리는 걸상에서 일어서며 손을 빼려 했으나 힘으로 대항 하기에는 애리의 손길이 지나치게 나릇나릇했다.
『애리, 인제부턴 나를 사랑해 줘요!』
손등에다 입을 대며 준오는 우울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사랑이라고……… 어떡허는 게 사랑이지?』
『애리는 일종의 요부다! 요부지만 나는 좋아졌어!』
『아이구, 대접에 치어서 숨도 못 쉬겠네요.』
『애리!』
순진한 사람일수록 격하기가 쉽다. 준오는 와락 달려들어 애리의 두 어깨를 안아 오며
『나만을…… 나만을 사랑해 줘요!』
『그런 소릴 하니까 레코드가 팔리는 거야. 요즈음 잘 팔리는 왈츠가 있잖아?「나 하나의 사랑」……』
『나는 애리의 웃음을 살 테야! 애리의 전부를 살 테야!』
무섭게 육박해 오는 준오의 얼굴을 애리는 들고 있던 나무 젓가락 두 개로 살짝 방패를 삼으며 상반신을 뒤로 반뜻 젖혔다. 침침한 어조로
『안돼!』
『어째 안되는 거야?』
『입술은 비매품(非賣品)이야!』
『누구한테도 비매품이야?』
『그건 상업상 비밀이니까 말할 수 없어.』
준오는 입 언저리가 쭝긋쭝긋 경련을 했다. 타오르는 눈초리로 애리를 쏘아보며
『고전무한테는 팔았겠지?』
순간, 애리의 눈꼬리가 발끈 치켜지며
『팔았음 어때?……』
토라진 한 마디가 총알처럼 튕겨 나왔다.
『나한텐 왜 못 파는 거야?』
『그대한텐 안 팔아! 절대 안 팔아!』
『고전무보다 값비싼 댓가를 지불하면 되지 않아?』
『어쨌다구?』
애리는 외치자 들었던 두 개의 젓가락으로 준오의 뺨따귀를 호되게 내갈겼다. 한번…… 두 번…… 세 번……
준오는 탁 애리의 몸뚱이를 놓았다.
젓가락 두 개가 준오의 면상을 향하여 날아갔다. 애리는 핸드백을 들었다.
『아, 애리! 애리씨!』
그러나 애리는 이미 한 쪽 어깨로 날카롭게 문을 떠밀어 젖히고 돌팔매하듯이 복도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장사아치에게도 순정은 있는 것이라고, 자기의 순정을 남과 같이 돈으로 사러 드는 준오가 그지없이 원망스러워 애리의 입술이 마침내 비쭉비쭉 일그러졌다. 눈물이 글썽거려 층계가 희뿌옇게 뭉그러져 있었다. 계단 하나를 헛짚어 하이힐이 퉁그러지면서 몬로 타이트의 솔기가 두 치나 터져 나갔다.
肉體派群像[육체파군상]
[편집]한성 양조는 노량진에 있었다. 넓은 대지에 양조 공장이 기다라니 서 있었 고 커다란 창고 안에는 청주「백부용」(白芙蓉)을 비롯하여 사오종의 렛텔 을 달리하는 술궤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백부용」은 해방 직후부터 질이 좋다는 평판을 받고 있는 술로서 고종국 씨가 이 양조소를 떠맡게 된 것은 일사 후퇴로 부산에 피난을 갔던 무렵이 었다.
사변으로 말미암아 공장 시설을 하나도 옮기지 못하고 적치하에 남겨 두고 온 전 경영자가 전국 여하에 불안을 느끼고 내버리다시피 한 싸디 싼 가격 으로 고종국씨에게 넘겨 버린 것은 서울 재수복 직전의 일이었다.
재수복이 되기가 바쁘게 고종국씨는 아들 고영해와 함께 노량진 공장을 시 찰하고 시설이 거지반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을 알았다. 포탄으로 말미암아 공장 한 구석이 파괴되었을 뿐 양조용 기재가 전쟁에는 불필요했던 사실을 은근히 축복하였다.
그 동안 고종국씨 부자는 파괴된 부분과 기재를 충분히 마련해 놓고 있다 가 칠이칠 휴전 협정이 되기가 바쁘게 대지급으로 양조를 시작하였다.「백 부용」은 날개가 돋힌 듯이 팔렸다. 한때는 미처 뒤를 대지 못하여 채 익지 도 않은 신주를 내서 신용을 떨어뜨린 적도 있었지마는 그때는 또 그때대로 렛텔을 달리 하여 다른 이름으로 내서 팔았다. 그러는 동안에「백부용」은 다시 신용을 회복하게 되어 무서운 기세로 방방곡곡으로 파고 들어갔다.
〈여자는 양귀비, 술은 백부용!〉 이런 광고가 매일처럼 신문지 몇 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광고문은 고사 장 자신이 창안한 것으로서 양귀비의 무릎을 베고 백부용을 마시는 것이 인 간 최대의 행복이라는, 고사장 자신의 인생 철학을 광고문에다 삽입하였다.
이 광고문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고, 고사장의 술 친구들은 극구 찬양을 하였다.
『뭐니 뭐니 해도 별 것 없어! 그게 제일이지, 제일이야! 자고로 하는 말 이 팔 고비를 베고 물한 표주박 마셔도 낙이라고 했지만, 돼먹지 않은 소리 야. 그런 쓸데없는 허세 때문에 인간은 참된 행복을 놓쳐 버리고 말거든.
그대 성현 군자들 말좀해 보라니까. 글쎄 양귀비의 보드러운 무릎이 그래 뼈대가 딱딱 맞치는 팔 고비보다 못해? 백부용의 방염한 향기가 맹물보다 못해?』
친구들 중에서도 양심이니 교양이니 도덕이니 문화니 하는 따위의 위인들 을 일부러 청해놓고는 백부용을 먹여 가면서 그런 말을 고사장은 일쑤 잘했 다.
그러한 고사장이 지금 이층 사장실 팔걸이 교의에 반석같이 파묻혀 인접한 사무실로 통하는 여닫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이즈음 고사장은 이 여닫이 문을 곧잘 열어 놓는다. 이유는 사무원들의 집 무 태도를 보살핀다는데 있었지마는 고사장의 팔걸이 교의와 이애리의 사무 탁이 문을 통과하는 일직선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만지지는 못해도 보는 것 쯤이야 어떨라구?』
눈요기만으로도 고사장은 어지간히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만큼 고사 장은 늙음에의 자각이 뼈에 사무쳐 왔다.
책꽃이에서 장부를 뽑아 쥐던 애리가 이편을 무심 중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그머니 숙이며 해쭉 꽃웃음을 보내 왔다.
고사장의 시선이 당황을 하다가 허쭉 맞웃음을 웃었다.
『분명히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인데……』
공장은 내놓고 사무원만 이십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여사무원이 애리까지 넷, 애리는 선전부 책임자라는 명목을 갖고 있었으나 고전무의 비서역으로 서 더 많이 자질구레한 일을 보아 주고 있었다.
고사장이 여닫이 문을 가끔 열어 놓기 시작한 것은 저번 벚꽃이 한창이던 무렵, 수도극장 앞 북경루에서 강교수 부자를 만난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수도극장 앞에서 소설가 강석운에게 색시 집에를 가자고 했을 때, 강석운 은 여학생과 만날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그때의 강석운의 한 마 디가 고사장의 가슴에 뭉클하고 왔다. 황산옥이나 술집 아가씨들만 주물고 있던 고사장의 격을 건드리는 것만 같아서 여학생에게 대한 식욕이 부쩍 났 다.
외도에도 일종의 권위가 있는 것이라고, 접대부들만 건드리고 돌아간 자기 의 이력서가 갑자기 빈약하게 여겨졌다. 용모가 좋고 교양이 있고 나이가 젊은 상대일수록 정복의 가치가 있고 권위가 서는 것이라고, 더 늙어서 허 리를 못 펴기 전에 어서어서 이력서의 한 대목을 훌륭하게 빛내고 싶었다.
그 중에서도 연령의 차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권위가 설 것 같았다. 육십의 늙음을 가지고 이십대의 젊음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은 소박한 인간 욕망의 최대의 것인 동시에 생명력의 순수한 환희를 의미하고 있었다. 그것은 되살 아 온 청춘을 보증하는 동시에 시들어가는 생명을 위한 보혈제이기도 하였 다.
『나는 아직 늙지 않았다!』
이렇게 호통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늙음의 추격(追擊)을 받고 있 다는 서글픈 발버둥이기는 하지마는 그 발버둥질, 그 몸부림이야 말로 단두 대 위에 올라선 사형수의 그것과도 같이 처참하고도 진지한 생명력의 절규 를 의미하고 있다.
애리는 여학생이 아니지마는 이년 전까지도 자기 딸 영림이와 동창이던 사 실을 생각하면 여학생이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생글생글 웃기도 잘하고 차분차분 달라 붙기도 잘하고 애리를 생각할 때, 고사장은 자기의 공상이 전연 불가능한 일만 같지는 않았다.
시선이 또 마주쳤다. 이번에는 고사장이 먼저 싱긋이 웃어보였다. 애리도 또 생긋이 웃어 왔다.
『아이구, 고년 사람 잡겠다!』
애리의 그 야들야들한 웃음이 총알처럼 심장에 왔다. 젊었을 시절에 느끼 던 몇 갑절의 성능(性能)을 지니고 심장을 흔들어 왔다. 심장의 흔들림은 다음 순간, 격렬한 진저리로 변하며 고사장의 심신의 감미롭게 쳐 왔다.
『이게 암만해도 내가 불량해서 그런지 모를 일이야.』
고사장은 불현 듯 옆 집에 사는 강학선 교수를 생각했다.
강교수는 수양을 많이 쌓은 위인이니까 자기처럼 이렇듯 감미로운 진저리 는 느끼지 않을런지 모른다고, 언제 한 번 기회가 있는 대로 강교수의 솔직 한 술회가 듣고 싶어졌다.
『고 야들야들한 웃음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다소의 명예와 체면과 그리고 생명과 전 재산을 포기해도 아깝지가 않을성 싶었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라고, 옛날 사람들은 좋은 말만 골라서 했거 든!』
고사장은 진심으로 감심을 하며
『인생의 황혼이다! 아주 어둡기 전에…… 채 밤이 오기 전에……』
죽어서 한 줌 황토가 되면 그만이 아니냐고, 인생 최후의 도박을 고사장은 꿈꾸기 시작하였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애리는 끈기있게 고사장을 위하여 꽃다운 웃음을 보 내 주었다.
그러나 애리는 고사장을 위해서만 웃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무를 위해서도 같은 종류의 상품을 발송하고 있었다.
고전무는 애리와 같은 사무실 안에 있었다. 사장실로 통하는 여닫이 문과 남쪽 한길에 면한 들창 사이에 커다란 사무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나이는 삼십 오륙세, 안경을 끼고 코 밑에 챠푸린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이 수염은 아버지 고 사장이 기르래서 기른 수염이다.
『나이 어려 보이면 한 수 깍이고 들어가는 거야. 장사아치의 눈은 매 눈 보다도 밝다는 걸 알아야 해.』
사실 수염을 길러 놓고 보니 누구나가 다 사십대의 듬직한 신사로 보아 주 고 있었다. 유들유들한 얼굴이었다.
담배를 붙여 든 엄지 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을 건드려 보면서 계산서에다 주문 전표와 출고(出庫)전표를 끼워 가지고 온 젊은 사원을 앞에 세워 놓고 도장을 찍어 결재를 했다.
젊은 사원이 물러가기가 바쁘게 고전무는 엄지손가락으로 연방 수염을 건 드리면서 맞은편 쪽에 앉아 있는 애리를 바라보며 싱긋이 눈 하나를 감아 보였다.
애리도 똑같이 눈 하나를 야실야실 감아 보였다.
저번 촬영대횟날 돌발사건으로 말미암아 고전무를 따버리고 송준오와 행동 을 같이 한 이후부터 웃음 세 번을 더 웃어 줌으로써 애리는 책임을 면제가 되겠거니 생각하고 있었으나 고전무의 노여움이 워낙 컷었기 때문에 눈하나 를 감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에 와서는 선전부 책임자로서의 임무보다 도 더 사무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고전무의 노여움이 클 밖에 없었던 것도 또한 무리는 아니었다. 그날, 아 서원 골목으로 접어 들어가고 있는 애리와 송준오의 뒷모습을 회사용 지프 차 안에서 고전무는 보았다. 부를까 하였으나 점심 요기를 하고 곧 올 것만 같았기에 곧장 다방으로 달려가 보았더니만 애리의 편지가 돌발사건을 고하 고 있었다.
이튿날, 고전무는 통 애리의 웃음에 호응해 오지를 않았다. 웃음을 웃어 주어도 본체 만체, 엄지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만 못살게 건드리며 푸푸 담 배 연기만 호기있게 내뿜고 있었다.
그 이튿날도 그랬고, 또 그 다음 날도 그랬다.
그러한 고전무가 애리에게는 다소 걱정이 되고 있었다. 웃음이 도시 팔리 지가 않는다. 웃음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단골 손 님을 놓친다는 것은 풋나기 장삿군이 하는 짓이다.
그런 줄을 뻔히 알고는 있으면서도 팔리지 않는 웃음을 어쩌는 도리가 없 었다. 하는 수 없이 좀 더 실속 있는 상품을 만들어 보려고 애리는 전에 비 하여 갑절이나 짙은 웃음을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고전무는 표정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애리는 하는 수 없이 고객의 범위를 확장하여 고사장에게 웃음을 발송하는 한 편 고전무에게는 딴 상품을 팔아 보기로 했다.
눈 하나를 감아 보이는 상품이 마침내 팔렸다. 그날 저녁, 고전무는 똑같 은 아서원에서 저녁을 샀다.
『순진한 송군을 유혹하면 안돼. 송군은 결국 영림의 사람이야.』
상품의 독점욕이 드디어 질투로서 노골화했던 것이다.
애리의 왼편 쪽으로 비스듬히 장부계의 유현자(兪賢子)가 앉아 있었다. 도 틈도틈한 얼굴에 까무죽죽하고도 발가우리한 철색 피부를 가진, 애리와 동 년배의 여사무원이었다.
퍼머의 웨이브가 요즈음에 와서 갑자기 희한해졌고 거무죽죽하던 철 늦은 투피스가 어느덧 안개가 보오얗게 돋은 크림 색 후레야 양복으로 변해 있었 다.
『현자도 웃음을 판 게로군.』
새 양복을 입고 나온 날 애리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팔았을까?』
그런 눈치로 며칠을 지내보니 손님은 틀림없는 고전무님이었다. 고전무의 이상 야릇한 눈짓이 연방 뻗어 갔고 그럴 적마다 유현자는 얼굴을 붉히며 장부로 병풍을 치곤했다.
『모두들 장사를 펴 놓았군. 무슨 상품을 팔았을까?』
모르긴 모르지만 얼굴을 붉히며 장부 병풍을 치는 폼이 암만해도 웃음만 판 것 같지는 분명코 않다. 잘못하면 밑천까지 들어먹었는지도 모를 일이라 고, 스타크(在庫[재고])없는 상인의 말로를 애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그 유현자가 장부에다 전표 나부랑이를 끼워 가지고 고전무 앞으로 하느적 하느적 걸어갔다. 공손히 아주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결재를 받기 위하여 장부를 고전무 앞에 내놓았다.
일상은 여자의 얼굴만 보면 히쭉거리던 고전무가 예외없는 일로 쳐다도 보 지 않고 무뚝뚝 했다.
어쩌나 보자고 애리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열심히 선전문을 연구하는 체 하면서 찢어지도록 시선을 치켜 이마를 짚은 손가락 사이로 고양이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장부와 전표에 결재 도장을 말 없이 찍다가 고전무는 후딱 손을 멈추며 전 표 한 장을 들여다 보며 얼른 구겨서 주머니에 쑥 쓸어 넣었다. 그리고는 힐끔 애리 편을 바라보고 나서 장부와 전표를 도로 집으려는 유현자의 손등 에다 들고 있던 도장을 톡 하고 한 번 찍어 주었다.
애리는 쿡하고 웃었으나 소리를 낼 수가 도시 없다. 이윽고 머리를 드니 고전무는 엄지 손가락으로 수염을 건드리며 점잖게 시치미를 뗐고 제자리에 되돌아온 유현자는 전표를 정리하면서 얌전하게 시치미를 뗐다.
상업술도 진보를 하는 것이라고,「백부용」판매에만 소용되는 줄로 알았더 니 연애 판매에도 전표가 필요했다. 거기 대한 결제 도장은 손등에 찍어야 만 한다는 것도 오늘이야 애리는 납득이 되었다.
단골 손님을 빼앗기면 파리나 날리고 있는 신세가 되겠기에 어떡하나 보자 고, 한참 후에 애리도 일어섰다.
이래서 월급장이 노릇을 하면 사람을 버린다고 좋건 싫건 자질구레한 데까 지 동료들과 비교가 되어지고 있는 자기 자신의 화폐 가치가 애리의 자존심 을 극도로 서글프게 하였으나 이런 종류의 경영주나 상사들 앞에서 인간의 가치를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노릇이기에 애리는 서슴치 않고 자리를 일어서서 고전무 앞으로 토라지게 걸어갔다.
애리의 손에는 결재 용지와 함께 선전 도안(圖案)이 잡혀져 있었다.
『이번 초하(初夏)의 선전은 이렇게 한 번 해봤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러면서 도안을 내놓았으나 고전무는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애리의 얼굴 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거 양복 멋진 걸! 몬로 스타일!』
고전무 자신의 화폐로 만들어진 애리의 양복을 고전무는 지금 찬양하고 있 는 것이다.
『어서 결재해 주세요. 좋지 않으시담 다시 만들어 가지고 오겠어요.』
그러나 전무 고영해는 그냥 딴 소리만 했다.
『암만 봐도 멋진 양복이야. 몬로 스카아트에는 곡선미가 풍부해서 멋지다 니까!』
동료들이 하하 웃었다.
웃음 쯤 문제가 아니지만 애리는 다소 귀찮아져서
『멋지지 않음 수지가 맞겠어요?』
『응?』
『손등이 닳도록 힘늘여 번 화폐로 만들었는데……』
순간, 고전무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바닥이 닳도록이겠지! 말이란 너무 빨리 하면 실수가 많아』
『아냐요. 분명히 손등이었어요!』
했다. 어지간한 고전무도 적지 않게 겸연쩍은 얼굴로
『손등으로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 있잖아요?』
『으음, 손등이건 손바닥이건 어쨌든 양복만은 멋져!』
그렇게 얼버무리며 애리의 손등에서 모닥불이 일도록 비벼대던 자기의 입 술을 뻐억 고전무는 쓰러내렸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를 동료들은 알 까닭이 없다. 그것을 고영해는 다행 으로 여기며 비로소 선전 도안을 펴놓고 시선을 던졌다.
던지다가 고영해는 문득 만년필을 꺼내 들며
『이건 이렇게 고치는 게 좋지 않아?』
하고 커다란 소리로 중얼거리며 탁상 일기 한 장을 뜯어 내 가지고 다음과 같이 썼다.
《애리, 정말 그러기야? 두고 봐!》 애리는 웃었다. 웃으면서 만년필을 뺏어 들고 썼다.
《두고 봐야 또 손등에다 모닥불을 피시겠지.》 고영해가 또 썼다.
《이번에는 손등만 가지고는 잘 안될 걸.》 애리가 또 썼다.
《상품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격은 균일하지 않읍니다.》 고영해는 히쭉히 웃으며 지극히 음탕한 시선을 들어 애리를 쳐다보았다.
애리는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전무님 이번 도안은 그럴 듯 하죠?』
『응 잘했어.』
아직 들여다보지도 않고 고영해는 잘 됐다고 소리내어 칭찬하면서 비로소 도안에 시선을 던졌다.
『응?』
광고문보다 먼저 도안이 눈에 띄었다.
벌거벗은 마리린 몬로가 실크해트를 쓰고 다리 하나를 번쩍 쳐들은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영화 잡지에서 도려낸 것이었다. 배경은 캬바레, 바아텐이 뒤 에서 소반에다 술 병을 올려놓고 서 있었다. 그 술병의 렛텔을 애리는「백 부용」으로 고쳐 놓고 있었다.
한쪽 손으로 허리를 끼고 다리 하나를 공중으로 쳐들은 몬로의 다른 한쪽 손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그 뻗어 있는 몬로의 손에다 술이 철철 쏟아 져 나오는 「백부용」병을 애리는 그려 넣었다. 그 밑에서 술잔을 하나씩 들고 쏟아지는 술병을 받으려는 청년, 장년, 노년의 신사를 여남은명 그려 놓았다. 미술과를 다니다 중퇴한 애리로서는 그만 쯤의 회화는 문제가 없었 다. 선전부에 취직이 된 것도 그만한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어!』
고영해는 감심을 하며
『…여자는 몬로, 술은 백부용……』
그러한 간단한 광고문이 도안 맨 위에 가로 씌어져 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였다.
양귀비가 몬로로 변한 대담한 선전 도안이었다.
『어때요? 그만함 선전 효과는 백 퍼센트죠?』
고전무는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애리는 물었다.
『음 확실히 독창적이야!』
벌거벗은 육체파 여우 몬로의 요염한 사지가 발산하는 꿈틀거림을 안주로 하여「백부용」의 방순(芳醇)한 향취에 도연히 취해 보고 싶다는 것은 확실 히 애주가들의 구미를 자극하는 최대의 꿈인 것이라고, 고영해는 생리를 달 리하는 한낱 여성인 애리가 그것을 명확히 지적해 온 그 센스를 높이 평가 하고 있었다.
『애리의 감각은 확실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영해는 동시에 몬로 타이트로 팽팽하게 감싸진 애리 의 꿈틀거리는 육체의 도발을 받고 있었다.
『포스타 용이로군.』
『신문이나 잡지에도 무방하죠.』
『아주 기발한 광고 도안이지만 양귀비를 몬로로 고친다는 대목은 사장의 결재가 필요한걸. 양귀비는 사장의 영원한 애인이야.』
『육체파 여성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육체파 신사라는 말은 금시 초문인 걸.』
『호호호홋……』
애리는 웃고 나서
『육체파 신사를 모르세요?』
『모르겠어, 어떤 종류의 신산가?』
『전무님 같으신 분!』
『나?』
고영해는 히쭉 웃으며
『내가 그처럼 육체미가 풍부한가?』
『오해하셨군요.』
『응?』
『잠든 시간만 빼놓고는 진종일 돈벌이 생각과 여자의 육체만 상상하는 신 사를 두고 하는 말이예요.』
『응, 잠든 시간만 빼놓군.』
웬간한 고전무도 얼굴이 붉는다.
『우등생인 육체파 신사는 잠든 시간도 빼놓지 않는다면서요?』
『무슨 말이야?』
『그런 종류의 꿈만 꾼다면서요?』
어지간한 애리도 음성을 낮추었기 때문에 동료들의 고막은 흔들리지 않았 다.
『요것이?』
고영해는 기안(起案) 용지에 도장을 탁 눌러 결재를 하고 나자 저도 모르 게 손길이 그냥 뻗어가며 애리의 손등에다 톡 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건 무슨 결재죠?』
유현자에게도 그랬었기 때문에 애리는 도장의 의미를 알아야만 했다.
『애리에 대한 독점권을 의미하는 거야, 그 도장 임자의 승인 없이는 함부 로 상품을 팔면 안돼.』
『소위 매점(買占)이로군요.』
『오늘은 밤 일이 있으니까 가지 말고 기다려요.』
『야근 수당은 톡톡히 나오겠죠?』
『암, 나오지.』
『손등 일이예요? 손바닥 일이예요?』
『요것이 정말……』
고영해는 히쭉 웃고 나서
『빨리 사장한테 가서 결재를 맡아요.』
『네.』
애리는 그 걸음으로 결재 서류를 들고 또박또박 사장실로 들어갔다.
고영해는 애리가 사라지기가 바쁘게 아까 주머니에 구겨 넣은 전표를 끄집 어냈다. 유현자의 편지였다.
《오늘 밤 아홉시에 예의 장소에서 기다리겠어요. 전무님, 꼭 와 주세요.
현자올림》
『야근이 겹쳐 놓고 보니 대단히 바쁜 걸!』
고전무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힐끔 유현자를 바라봤다.
평온한 얼굴로 유현자는 장부 기입에 열중하고 있었다.
여기 또 하나의, 좀 더 심각한 육체파 신사가 있다.
고영해는 지금 한창 청춘의 긍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애욕 수렵(狩獵)에 있어서도 마음에 여유가 있었지만 나이 육순이 되고 보면 그러한 여유는 좀 처럼 젊고 눈부신 여성 앞에서는 저절로 마음이 수그러지는 일종의 비굴감 을 고사장은 감출 수가 없었다.
『원통한 노릇이다!』
고사장은 자기의 비굴감을 그렇게 외치며 마음 속으로 통분하게 여겼으나 중년 바람이 불면서부터 천군 만마사이를 오락가락한 그 방면의 효장(驍將) 도 머리에 서리를 이고 보면 열등감부터가 먼저 머리를 들어왔다.
『양귀비가 몬로로 변한다는 말이지요?』
늙은 사장으로서의 권위도 세워야 하겠기에 속과는 정반대의 점잖은 말을 우선 고사장은 뱉아야만 하였다.
『그럼요. 시대의 첨단을 걸어야만 될「백부용」인데 양귀비가 뭐예요? 시 대적 감각이 예민해야만 광고는 효과가 있는 거니까요.』
여닫이 문은 애리가 들어올 임시에 이미 제 손으로 닫았기 때문에 사무실 과는 별천지가 된 사장실이었다.
『그럴까? 몬로가 그처럼 일반 대중에게 인기가 있는가?』
『그럼요. 사장님, 못 보셨어요?「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는 영화……』
『봤지, 봤어!』
젊은 축들이 지닌 취미에 영합(迎合)이나 하려는 듯이 고사장은 호기 있게 대답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자기의 늙음을 캄플라즈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세요? 어쩌면……』
애리는 몬로의 표정 그대로를 따라 감동 섞인 놀람을 요사하게 나타내 보 이며
『사장님, 역시 무척 젊으세요.』
고사장의 얼굴이 헤짝해지며
『어허헛, 그러다 보니 애리는 나를 팔십 노인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로 군.』
육십은 팔십보다 확실히 이십 년은 젊다. 그 이십년의 젊음을 수학적으로 애리의 마음속에 인박아 주고 싶어서 팔십의 노령을 고사장은 일부러 인용 을 한 것이었다.
『아냐요. 실은 사장님께서 육순이라는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그래? 그럼 몇 살 쯤으로 보았노?』
십 년 쯤은 젊게 보아 주기를 기대하는 심정이 고사장의 표정에 알알이 떠 올랐기에 애리는 시치미를 똑 떼고
『육십이 뭐예요? 오십으로도 많이 본 거죠.』
『그래?』
고사장은 알숭달숭한 꽃무늬가 박힌 헹커취를 꺼내어 입언저리를 문지르며 지극히 만족해 하였다.
『머리나 갓 깎으시고, 샤스나 갓갈아 입으신 날 같은 때는 오십이 뭐예 요? 사십 칠 팔로 밖에는 정말 안 보이시는 걸.』
『어허헛, 갑자기 십년이나 젊어 졌으니, 이거 정말 한턱 해야겠는 걸!』
그것이 비록 애리의 인삿말이라고 가정해도 그것이 결코 고사장은 싫지가 않았다. 인사로라도 그런 말을 받을 수 있는 젊음같은 것이 아직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고사장은 솔직하게 기뻐했다.
『정말 한턱 하세요?』
『정말이구 말구!』
『아이, 기뻐!』
애리는 하이힐로 발치 방아를 어린애처럼 찧으며 귀여운 포즈로 손뼉을 쳤 다. 참으로 귀엽다. 그 귀여움을 차지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 생을 포기해도 뉘우침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고사장은 황홀한 심정으로 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주옥과도 같은 귀 여움을 혓바닥위에 올려 놓고 대굴대굴 굴려 보았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절실히 희구할 때, 인간은 자기가 지닌 최고 최후의 가치와 교환할 것을 가끔 생각한다. 그것은 명예와 재산, 한 걸음 더 나가 서는 생명의 포기를 의미하고 있었다.
고사장은 거리를 거릴 때, 때때로 그런 것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안개가 보오얗게 떠도는 싱싱한 과일을 연상시키는 새파란 젊은 여자들을 볼 적마 다 고사장은 항상 육순의 연령을 생각했고 흰 머리에 손길이 저절로 갔다.
급기야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생각하고 한숨을 후유 내쉬었다.
그러다가도 미련은 그대로 남아서 전 재산과 바꾸어 볼 생각도 하여 보고 생명의 포기도 가끔 상상해 보았다. 육순이 지닌 생명의 나머지에 그 무슨 가치가 있으련만 그렇게 하여 인생의 마지막 한 토막을 화려한 정열로 불태 워 보고도 싶었다.
그러한 종류의 대상이 하나 지금 고사장 앞에서 귀여운 재롱을 부리고 있 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 황송해서……』
『뭐가 황송해?』
『저 같은 애숭이 사원이 어떻게 사장님의 한 턱을 얻어 먹겠어요?』
기실 황송한 것은 자기 편이라고, 고사장은 만족한 얼굴로
『괜찮아, 민주주의에는 남녀 노소의 구별은 없어. 이따 아홉시 쯤 해서 시간이 있을까? 십년이나 젊어졌으니까 저녁 한턱 쯤은 해야만 옳을 거 야.』
다소 시간이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마는 사원들의 눈도 있고 해도 길고 해 서 거리가 캄캄해질 무렵을 고사장은 일부러 택한 것이다.
『글쎄 전무님만 무슨 일이 없으시담 모르지만……』
애리가 고전무의 비서를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명목이 전 무지, 실상은 아들 고영해가 회사 일 전 반에 대한 실권을 쥐고 있기 때문 에 비서가 필요할 만큼 바빴다. 고사장은 그저 뒤에서 큰 기침만 하고 앉아 있으면 되기 때문에 비서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오늘 밤에는 연회도 없으니까 시간은 있을 텐데……』
관계자들과의 연회가 있을 때마다 애리는 고전무와 동반을 하지 않으면 아 니 되었다.
『종로에〈코롬방〉이란 양과자점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면 돼. 내가 그 리로 갈게.』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봐서 가겠어요.』
아까 고전무도 손등에 도장을 찍어 주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밤 일이 한꺼 번에 밀려서 약간 불안스럽기도 했지마는 어떡하든 될 것이라고, 애리는 장 사에 신을 내기로 하였다.
『그것은 하여튼 전무도 이 광고 도안에 결재를 했다는 말이지?』
『그럼요, 사장님도 이제부터는 애인을 바꾸셔야겠어요.』
『허어, 애인을 바꾼다? 내가 무슨 애인을……』
애인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고사장에게는 청춘의 감미로운 노스탈쟈(鄕秋 [향추])를 가져 오고 있거늘 하물며 애리처럼 귀여운 여성의 입으로부터 그 한마디가 서슴지 않고 흘러 나오는 것을 볼 때, 고사장은 그 순간, 자기의 늙음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사장님의 애인이 양귀비인 줄도 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쾨쾨 묵은 양 귀비 보다야 몬로가 훨씬 현대적 관능이 풍부하죠.』
『현대적 관능……』
고사장은 황홀한 중얼거림과 함께 그 현대적 관능을 몬로에게서 찾아 보기 전에 먼저 눈앞에 날씬히 서 있는 애리의 몸 매무새에서 더듬고 있었다.
『어디 한 번 애리의 말을 신용해 보지!』
고사장은 도장을 탁 찍으며 시선을 떨어뜨린다. 떨어뜨린 시선 아래 실크 해트를 쓴 몬로의 나체가 다리 하나를 쳐들고 있었다.
愛慾[애욕]과 金慾[금욕]
[편집]퇴근 시간이 넘어도 고전무가 자리를 뜨지 않으면 좀처럼 사원들은 퇴근할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규칙상으로는 여덟시 반 출근에 다섯시 퇴근으로 되어 있지마는 이 규칙이 제대로 실행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윗사람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일을 하는 체 해야만 되었고 그러다가 여섯시 일곱시가 되어도 고전무의 승낙이 없이 는 엉덩이를 들지 못한다.
그것은 비단 한성양조 뿐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네 다섯 명의 사원을 가진 조그만 기업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풍습이 만연되고 있었다. 그만큼 오 늘의 중역 계급은 직권 이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애리는 이 회사에 취직해 온 그날부터 규칙대로 퇴근 시간만 되면 또박 또박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러한 애리를 사원들 은 일종의 신화처럼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고사장 따님의 동무니까 그만큼 관대히 보아 주는 것이라고 사원들은 생각하고 있었으나 애리의 생각은 그 것이 아니었다.
집단 생활이니만큼 다른 사원들과 보조를 맞추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보다 못해 고전무는 어느 날 충고를 했다. 거기 대해서 애리는 말했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 퇴근하지 않는 사원을 본 받으라는 건 대학에서도 배우지 않았어요.』
『여기는 학교가 아니고 사회요.』
『사회가 학교의 논리를 무시하기 때문에 오늘의 부패와 혼란이 온 것이라 고 나는 생각해요. 전무님도 대학을 나오신 분이기에 사칙(社則)쯤은 읽을 줄 아신다고 보았는데요.』
고영해는 모욕을 느끼고 권력 행사를 단번에 해 버리고 싶었으나 영림의 동창이기도 하고 그 보다도 좀 더 딴 생각이 강해서
『그런 말을 하면 출세를 못하오. 교단과 다르니까 대세의 물결이 흐르는 대로 어물어물 흘러가야 하는 거요.』
『술 장수 선전이나 해 주고 출세할 생각은 꿈에도 안하니까 전무님의 충 고는 별로 고맙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뭘 하려고 이런 회사에 취직을 원했오?』
『목구멍이 원수가 돼서요.』
『허어? 그렇다면 주위와 좀 보조를 맞추어요.』
『악이 선에게 보조를 맞춰야지, 선이 악에게 보조를 맞출 수는 없는 일 아냐요?』
『허어, 그게 그처럼 선악으로서 논평될 문젠가요?』
『살인 강도만이 악은 아냐요. 온갖 약속 위반은 모두 다 악을 의미하는 거니까요. 여덟시간 반씩 일해 주고 한달만에 이만 칠천환의 보수를 받기로 하고 입사했으니까요.』
그러는 애리를 그대로 방임해 두었다가는 회사의 분위기가 깨질 것도 같아 서 전무의 비서라는 명목으로 비서 수당 팔천환을 붙여서 애리의 발목을 밤 늦게 까지 동여매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전무가 오늘은 어떻게 된 셈인지, 퇴근 시간 정각에,
『오늘은 일찌감치들 나가지.』
했다. 그래서 사원들은 웬 떡이냐고 모두들 퇴근을 했다.
가만히 보니, 유현자가 나갈 때, 고전무에게 인사를 하는데 허리만 굽히는 것이 아니라 눈인사가 이상하게도 짙었다. 그것을 고영해는 엄지손가락으로 챠푸린 수염을 건드리면서 가볍게 받아 넘기고 있었다.
『흐응, 사고는 사고야!』
텅 비인 사무실에서 책상을 치우며 애리의 날쌘 후각이 사냥개처럼 발동을 하고 있는데
『미스 리!』
하고, 고전무의 목소리가 날아 오길래 얼굴을 들었더니, 눈 한쪽은 이미 싱 긋이 감겨져 있었고 수염 언 저리가 쭝긋쭝긋 움직이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 그대로 내버려 두려다가 얼른 유현자와의 경쟁 의식이 머리 를 들어 눈 하나를 가만히 감아 주었더니만
『잠깐 기다려!』
하고 고전무는 훌쩍 일어나서 사장실로 총총히 사라져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 안에서 애리는 책상을 치우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숙직 사원이 한 두 번 들어왔다가 나갔다.
『어떡할까?』
사장도 만나자고 했고 전무도 기다리라고 한다.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적 당히 처리를 해야겠는데 시간 관계가 어떻게 될런지 고전무의 시간표가 아 직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짐작조차 가지가 않는다. 사장과의 동석은 오늘 이 처음이기 때문에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되는 경우라면 사장과의 약속 을 지키리라고 애리는 생각을 했다.
따르릉… 따르릉… 고전무 책상의 전화 종이 운다.
애리는 콤팩트를 백에 집어 넣고 홀가분히 걸어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네, 한성양조입니다.』
『고전무 계세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기는 아현동인데요. 고전무 잠깐 대 주세요.』
『어마, 영림이 아냐? 나야, 나!』
『아, 애리였었군! 오랜만이야. 어때, 바뻐?』
『여전하지만 바쁠 땐 또 바뻐.』
『선전 일이 뭐가 많아서 그리 바쁠까?』
『선전도 선전이지만……』
『전무님의 비서역이 바쁘지?』
『영림아, 너 비꼬는 거니?』
『비꼬긴…… 사실인 걸!』
『말 말아 얘. 미스터 송이 독약을 다시는 마시지 않아도 괜찮게 됐다면 서?』
이것은 애리가 한 번 떠보는 말이다.
『뭐? 무슨 말인데』
이것 역시 역효과를 바라는 애리의 교묘한 심리 작전이다.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동정을 하기 전에 반항을 하기 쉬운 영림의 성격을 이용하는 것 뿐 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그따윗 말을 하지?』
『출처를 밝힘 말 싸움을 하러 다녀야 될 테니 귀찮아서 취소할 테야.』
『흥, 전무님의 말씀이겠지.』
사실 오빠는 송준오를 매부로 삼고 싶어 하는 말을 여러번 했었기 때문이 다.
『추측은 맘대로지만 나는 책임 안 져.』
『무슨 그 따위 일로 책임 문제까지……』
『축복합니다.』
『뭘 말이야?』
『미스터 송과의 경사스런 약혼 말이지 뭐야?』
애리는 또 한 번 되집어 따져 놓았다. 따지면 따질수록 영림과 송준오의 거리는 멀어지고 반대로 자기와 송준오의 거리가 짧아지는 것이다.
『나 참 애리도……』
고영림의 센스와 언변도 상당 하지마는 밑바닥에 가시가 돋지 않았기 때문 에 결국에 있어서는 애리의 언변에 일보를 양보하는 셈이 항상 되고 있었 다.
『한 번 만나, 좀 놀러 오라니까 글쎄.』
『영림이처럼 한가스런 신세가 못 돼서 미안해.』
『그럼 슬퍼! 내 마음 몰라?』
『응, 알긴 알지만…… 잘 알아. 너는 나보다 확실히 선량해.』
『또 신세 타령인가?』
『그것도 다소 있지만 말이야. 어쨌든 너는 정신파(精神派)고 나는 육체파 라니까……』
『오늘 밤 좀 놀러 오려므나.』
『어디가…… 오늘도 야근이야.』
『응, 연회두 한 곳이면 좋게? 늙은 축 넓은 축, 애리의 몸뚱이가 한 두 서넛 쯤 있었음 수지가 맞겠어.』
『그처럼 바쁨 봉급을 인상해 달라려므나.』
『어디가…… 지독한 깍쟁이들인데……』
『내가 말 좀 해볼까?』
『천만에! 사람은 제 실력으로 살아야지, 남의 힘만 빌림 잠자리가 나 빠.』
『오빠 좀 대 주겠어?』
『대 줘! 하고 왜 명령을 하지 못하고……』
『애리야, 그럼 정말 눈물이 나!』
『인제 안 그럴께! 미안, 미안! 잠깐만 기다려.』
애리는 수화기를 대고 사장실 문을 열었다.
『전무님, 전화 받으세요.』
사장실 문을 애리가 여는데 모자를 쓰고 퇴사하는 사장을 모시고 고영해가 뒤로 따라 나오고 있었다.
고영해는 책장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고 사장은 애리의 전송을 받으며 복도 로 나갔다. 나가면서 고사장은 애리의 인사를 턱으로 받으며 눈으로는 아홉 시 약속을 애리의 시선에다 다지고 있었다. 애리도 알아 듣겠다는 듯이 눈 인사를 또 한 번 했다.
『그래서 말예요, 언니 문제에 관해서 오빠와 한 번만 더 의논해 보고 싶 어요. 최후적으로……』
『최후적으로? 뭐가 그리 급해서 너는 자꾸만 서둘러 대는 거냐?』
고영해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애리가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영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애리의 귀에 도 들려오고 있었다.
『남은 앓아서 누워 있는데 오빠는 뭐예요? 병 문안 한 번 안 가보구 ……』
『내가 병 문안을 가서 날 병 같으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가겠다만…… 하 루 아침에 더친 병이라더냐?』
『어쨌든 이야기가 있어요. 오늘 밤은 빨리 돌아오세요.』
『안되겠는 걸. 오늘 밤은 조금 바쁘다. 회사 일로 연회가 있어. 이야기가 있거든 내일 아침에 하려므나.』
『아침엔 학교엘 가야지, 늦잠만 자는 오빠를 어떻게 기다리라는 거예 요.』
『어쨌든 알았다. 오늘 내일로 어떻게 될 병이 아니니까 너무 서둘러 대지 좀 말아라.』
『악덕한!』
『뭣이?』
『채칵.』
전화는 끊기었다. 고영해는 하는 수 없이 불쾌한 얼굴로 수화기를 놓고 애 리를 바라보았다.
『영림이죠?』
『계집애가 나잇살이나 먹었다고 건방지게……』
『어느 계집애 말예요? 여기도 그만한 나잇살을 먹은 계집애가 하나 서 있 는데……』
불쾌한 표정이 갑자기 펴지며
『애리는 귀여워!』
『영림이보다도?』
『물론이지. 그 놈의 계집애 돼 먹지 않게스리…… 나가.』
고영해는 모자를 쓰고 애리와 함께 사무실로 나섰다.
지프차 운전수가 병으로 결근을 하여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았다.
한강 일대에 보트가 떴다. 철 이른 벌거숭이 떼도 모래사장 위에 오구구 했다. 한강 인도교를 택시는 건너고 있었다.
『오늘 밤도 연회가 있어요?』
『응, 애리와 단 둘이의 연회가 있어.』
『무서워!』
『뭐가 무서워?』
『손등에 또 모닥불이 필까봐서……』
『손등에만 피면 다행이지.』
고영해는 애리의 손길을 자기 무릎 위로 끌어다 놓고 손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왜 자꾸만 만나지 못해서 그러는지 몰라?』
애리는 정말로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의문으로 되어 있었다.
『좋으니까 그러는 거야.』
『좋음 그러나?』
『남녀의 애정은 접촉에의 욕구에서 생기는 거야.』
『그건 남자들의 경우일지 몰라도 여자는 좀 달라요.』
『어떻게 다른고?』
『피부적인 접촉보다도 먼저 정신적인 접촉을 희구하고 있는 거예요. 결국 은 피부적인 데까지 가지긴 하지만 말이예요.』
『애리도 차차 영림을 닮아 가는군.』
『닮아 가는 게 아니라 실정이 그렇다는 말이지.』
『그렇지만 애리는 육체파가 아니야?』
『노오!』
애리는 토라지게 그것을 부인하며
『내가 육체파이기를 남성들이 요구했을 뿐이야. 거기에 응하고 있는 것 뿐이라니까……』
애리는 갑자기 송준오가 그리워졌다.
성남극장을 지나고 서울역 앞을 지났다.
고영해에게 손 하나를 잡힌 채 애리는 천연스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 영해도 애리의 얼굴을 때때로 바라볼 뿐,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남성들이 육체파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거기 응하는 것 뿐이라는 애리의 한 마디가 고영해에게는 무척 서운했지마는, 그리고 손 하나를 내 주고도 마음으로는 끄떡도 않는 애리가 항간의 창기를 연상시키고 있었지마는 그렇 건만 고영해는 애리의 그 허수아비와도 같은 육신의 일부분을 놓아 주기가 싫었다.
마음으로는 자기를 얕잡아 보고 있는 애리를 뻔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애리의 손길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기도 하 였다.
『도대체 사내 자식들은 어떻게 돼 먹은 동물인지 알 수가 없어!』
이것은 지난 날, 애리가 뱉은 한 마디지마는 그것을 고영해는 지금 자기 자신이 마음 속으로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정신적인 흔들림은 티끌만큼도 섞이지 않은 애리의 다섯 손가락이 어쩌면 이처럼 자기의 전신을 불사르게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도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비웃어 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좀 더 정직하고 진지한 자기가 고영해에게 는 도사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자기 역시 애리를 정신적으로 알뜰 살뜰히 사랑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애정의 사깃군, 사랑의 장사아치 같은 애리의 불손한 언어 행동에 접할 때마다 이제는 이미 김이 빠지고 단 물이 찌여서 다시는 돌보 기도 싫어진 아내 혜련이가 인간적으로는 훨씬 존경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을 고영해는 가끔 느껴 왔다.
그렇건만 지금 고영해는 애리의 한낱 껍질에 지나지 못하는 다섯 손가락을 한혜련의 전부라도 바꾸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뭉클뭉클 느끼고 있었다.
나긋나긋한 손가락 다섯을 오작 오작 뜯어 먹고 싶은 이 왕성한 식욕! 이 것이 사랑이 아닐진대 뭣을 가리켜 사랑이라고 정의(定義)를 지을 것이 냐?…… 인격에나 정신에는 침을 뱉아 가면서도 손가락은 뜯어 먹고 싶도록 식욕을 건드려 왔다.
아내 혜련을 처음으로 탐낼 적에도 그러하였다. 아니, 온순한 혜련에게는 정신적으로 우러러 볼만한 아름다움도 또한 못지 않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 던 것이 오랜 시일에 걸친 부부생활의 권태와 병마로 말미암은 육체적 매력 의 상실이 왔다.
한낱 껍데기에서 더 지나지 못하는 육체적 매력의 상실이 이렇듯 한혜련이 지닌 내면적인 아름다움까지를 거부할 줄은 몰랐다. 애리의 다섯 손가락과 바꾸어질 만큼 한혜련의 가치가 폭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신주의자들 잠꼬대 같은 수작을 고영해로서도 일소에 붙일 수 밖에 없었 다.
『육체가 있으니까 영혼이 있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에게 섹스의 매력을 부여한 조물주의 창의(創意)는 단순히 그 구조를 달리하는 육체적 조건에 있었다.』
그것을 내면생활에 까지 연장시켜 영혼의 가치를 육체의 가치 이상으로 끌 어 올리려고 온갖 인위적인 노력을 힘써 온 형이상학자(形而上學者)들이야 말로 인류를 현혹시킨 위대한 사기사였고 조물주의 의도한 바를 모독한 사 탄의 무리들이라고 말한 강석운의「유혹의 강」의 주인공 박목사의 한 마디 를 고영해는 생각하며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애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창 밖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던 애리가 얼굴을 돌리며, 흥 하는 표정으로
『어떡하는 게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가요?』
『애리의 손길을 잡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남대문을 지나 차는 진고개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애리의 손길을 놓아 주고 싶지 않은 이 절실한 심정! 이것이 인간의 진 실! 이것이 인간의 진실일진대 이 진실을 우리는 소중히 해야만 될 거야.』
『운전수 양반이 웃어요.』
『운전수 양반으로 웃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 모두 다 도학자의 족속들, 인 류의 사기꾼들이야. 남녀가 사랑한다는 것은 웃을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 니니까…… 아, 스톱!』
진고개 입구, 어떤 고급 그릴 앞에서 차는 멎었다.
넓은 홀을 지나 둘이는 특별실로 돌아갔다. 보이에게 식사를 주문하고 나 서 저고리를 활활 벗어 걸었다. 그리고는
『애리 아가씨도 벗으시지요.』
등 뒤로 돌아 가서 애리의 저고리를 벗기며
『이쯤 되고 보면 비서 수당은 내가 받아야겠는 걸.』
애리는 잠차코 있었다. 물 수건으로 손가락을 닦고 있는데 목덜미에 입술 이 왔다.
『뭐예요?』
『비서 수당으로 받는 거야.』
그러나 애리는 별반 떠들지도 않고 쥐었던 물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내며
『상살(相殺)를 해 버릴 모양이지만 그건 안돼요.』
『흥, 계산이 분명한 걸.』
고영해는 애리와 마주 앉았다.
『분명한 게 좋지 뭐예요? 결국은 상품을 팔고 사는 거니까 전무님도 사랑 이니 애정이니, 죽겠다 살겠다 하는 따위 군더더기를 붙일 필요는 없어 요.』
『좋아, 흥정이 명백해서 좋아.』
『상인들이 걸핏하면 인간적이니 양심적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써 상대방의 계산 의식을 약화시키는 것과 매일 반이지 뭐예요.』
『허어?』
고영해는 가슴이 다소 따끔 했다.
『그러니까 전무님도 결국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따위의 탈을 쓰고 제 계 산 의식을 마비시켜 보자는 거지만……』
『잘 안되겠어?』
『잘 안될 거예요.』
『음, 이러다가는 사나이의 밑천 들어 먹겠는 걸.』
『사나이의 밑천이란 주먹과 돈 밖에 더 있어요?』
『주먹과 돈?』
『놀라실 것 없어요. 전무님이 마음을 턱 놓고 저를 데리고 다니는 것도 결국 그 두 가지 권력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죠. 주먹이 세니까 저한테 얻어 맞을 걱정은 없을 것이고 금력이 있으니까 온갖 애로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죠.』
고영해는 아연히 애리를 바라볼 뿐, 마침내 대꾸를 잃었다.
『그렇지만 저는 주먹이 약하니까 잘못하면 얻어 맞을런지도 모른다는 불 안감을 항상 느끼죠. 또 생활이 빈곤하니까 물욕의 유혹을 늘상 받고 있어 요. 주먹에 대한 위협을 무마하고 물욕에 대한 다소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제가 갖고 있는 오로지 하나의 생활 능력이 있다면……』
애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상대편의 표정을 한 번 살피고 나서
『연애…… 아니, 연애의 냄새를 파는 길 밖에 없어요. 잘못하면 밑천까지 들어 먹게 될런지도 모르지만요, 들어 먹은 사람들도 수두룩 하지만 말예 요.』
『틀렸어! 이야기가 심각해서 틀렸어!』
고영해는 돌연 커다란 소리를 내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그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니까 심각히 들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말 은 하지 않아도 그러한 심정은 적든 많든 태반이 다 갖고 있다고 저는 생각 해요.』
식사가 왔다.
『자아, 술을 들어요. 심각하면 우울해. 가볍게 명랑하게 어물어물 살아 나가는 거야.』
『어물어물해서 이득을 보는 건 남성들이지만 어물어물하다가 코를 다치는 건 여성들이라니까 글쎄.』
술을 들고 식사를 하는 동안 고영해는 쭉 애리라는 한 여성의 구김살 없는 성품과 음영(陰影) 없는 벌거숭이 생태(生態)를 생각하고 있었다.
『애리!』
『응?』
몇 잔 권한 위스키를 사양치 않고 받아 마신 애리의 피부는 윤이 반지르르 돌고 있었다.
『아귀처럼 닭고기를 뜯어 먹는 애리가 오늘 따라 무척 예쁜 걸.』
그러한 애리에게서 과거에는 빈민 계급의 무 교양과 더러움을 느끼고 경멸 해 오던 고영해였었다.
『이브가 닭고기를 뜯어 먹을 때와 마찬가질 거예요. 그렇지만 전무님은 얌전을 빼고 호물호물 녹여 삼키는 숙녀들을 더 이쁘게 보실 텐데……』
『아니야, 생각이 갑자기 달라졌어!』
『어떻게 달라졌어요?』
『애리를 보는 눈이 오늘 밤 갑자기 달라졌어. 솔직히 말하면……』
『솔직히 말해 봐요. 나는 다 털어 놨는데……』
고영해는 물끄러미 애리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밤, 애리에게서 인간의 본질 같은 것을 발견했어. 말하자면 애리는 도회지 야생녀(野生女), 현대의 이브다!』
윤기띈 시선을 애리는 들었다. 두 손으로 닭의 다리를 뜯어 먹는 그대로의 자세로
『칭찬이야? 핀잔이야?』
『좀 전까지는 핀잔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 애리의 좋은 점을 나는 여태껏 발견 못하고 있었다. 에리의 육체만을 나는 탐내 왔다. 솔직히 말해서 애리야말로 얼마간의 화폐로 환산해 버리면 그만인 그런가치 밖에 없는 여성이라고 생각해 왔었고 또한 그런 생각 밑에서 애리를 희롱해 왔 다.』
『좋지 뭐야? 전무님이 화폐로써 나를 희롱할 생각을 하니까 나는 또 나대 로 전무님을 희롱해 보는 거니까……』
『좋아! 계산이 분명해서 좋아. 과거 나는 여러 층의 여성들을 사귀어 보 았지만 모두가 다 하나처럼 사랑의 탈을 쓰고 왔다가는 화폐의 탈을 쓰고 물러가 버렸어. 우리들 상인이 인간적이니 양심적이니 하는 탈을 쓰고 대하 는 거와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지금 내눈 앞에서 아귀처럼 닭의 다리를 뜯고 있는 애리는 아무런 탈도 베일도 쓰지 않았다. 정신적인 글자 그대로 정신적인 벌거숭이다.』
『흥!』
애리의「흥」은 상대편의 말을 비웃을 때도 쓰지마는 그와 정반대로 상대 편의 말을 전적으로 수긍할 때도 가끔 쓴다.
『흥, 탈을 안 씀 베일이라도 써야 할 텐데 나처럼 홀랑 벗어 버리니까, 어떤 순정파가 말하기를 나를 가리켜 요부라는 거야. 요부지만 좋다는 거 요. 요부면 나뻐야 할텐데 왜 좋다는 걸까요? 전무님은 오늘 밤, 나를 요부 로부터 이브로 승격을 시켜 주셨지만요.』
『애리는 지금 Κ신문에 연재되는「유혹의 강」을 읽는가?』
『요즈음 얼마 동안은 못 읽었지만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어 요.』
『그 소설 속에서 작자는 주인공 박목사의 입을 통하여 이런 말을 했어.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쪽 벌거벗을 때, 여성은 이브가 되는 동 시에 요부가 되는 것이며 남성은 아담이 되는 동시에 악마가 되는 것이라 고……』
애리는 놀라며 닭의 다리를 접시에 도로 놓았다. 무언지 절실히 느끼면서 도 해명하지 못하고 있던 수수게끼 하나가 드디어 풀리어 나는 것 같았다.
『참 좋은 소설이야. 애리도 꼭 계속 읽어요. 특히 애리나 나 같은 사람은 공명하는 바가 많을 테니까……』
『읽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강석운 선생님 일찌기 한 번 뵌 적도 있어 요.』
『그래?』
『학생 시절, 어떤 자리에서 한 번 봤어요.』
이야기는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
『그렇지만 나는 여태껏 내가 이브일런지는 몰라도 요부라고는 한 번도 생 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거야. 거기 대해서 작가 강석운씨는 이렇게 말했어. ……영육(靈 肉)으로 완전히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였다. 이브는 요부가 아니었지만 아담 에게는 확실히 요부였다. 이브의 요사스런 매력이 아담의 눈을 황홀하게 만 들고 있었다. 아담은 생각하기를 이브는 무슨 요사스런 술책으로 자기를 유 혹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브가 아담을 유혹한 것이 아니고 아담이 이브에게 유혹을 느꼈을 뿐이라고……』
『전무님도 그 말에 동감을 하세요?』
『동감 하지!』
고영해는 과거에 지닌 수 많은 남녀 관계 그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기뻐요!』
애리는 물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홍차를 들었다. 드는 찻잔에 위스키를 따 라 주며 고영해는
『웃음을 팔아서 생활을 한다고, 애리는 거리낌 없이 그것을 탁 터 놓았지 만…… 그리고 그러한 애리를 세상 사람들은 흰 눈으로 바라보며 요부 같다 고들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을 나는 애정의 합리화라고 생각하지. 모르긴 하지만 인간의 애정에 는 두 가지 속성(屬性)이 있다고 봐. 하나는 애정의 순수성이고 다른 하나 는 애정의 합리성(合理性)이다.』
『술 장수 작은 오야붕이 어려운 말을 너무 많이 해요.』
『얕보면 안돼. 이래 봐도 대학은 우수한 성적으로 나왔어. 전공은 사회과 학이지만 취미는 생물학이야. 학교 교편도 사오년 잡아 봤어.』
『금시 초문이 돼서 미안합니다.』
애리는 까딱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나 영림의 동무인 애리가 그것을 모 를 리는 물론 없었다.
『술장수가 학력이라든가 지식을 내세우면 술이 잘 안 팔려.』
『알았어요. 인제 이야길 어서 계속해요.』
『애정이 비교적 순수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처럼 생존경쟁이 극심하지 않 던 과거의 일이야. 지나간 시대에는 애정의 합리성을 불순하다고 보아 왔지 만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보아지고 있는 거야. 애정은 속속 합 리화되고 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의 마음 속에는 삼부의 순수성과 칠부의 합리성으로 형성된 애정의 자세가 도사리고 있다고 나는 보는 거야. 그리고 그 삼부의 순수성 마저 예술가들의 회고적(懷古的) 취미의 대상 밖에 안될 뿐, 그들의 현실적인 애정의 자세는 세속적인 합리성에 있었어. 애리, 내 말 알아 듣겠어?……』
『얕잡아 보지 말아요. 지금은 비록 술장수네 집에서 화초(花草) 노릇을 하고 있지만 이래뵈도 얼마 전까지는 미술 대학생이었어. 더구나 기생 출신 인 우리 어머니가 다섯 차례나 남편을 바꾸지 않으면 아니된 뜨내기 가정 속에서 눈치 밥을 얻어 먹고 요만큼 자란 애리야. 그만한 말귀도 못 알아들 음 벌써 나가 떨어졌게?……』
『음, 금시 초문인 걸!』
정말로 고영해는 처음 듣는 소리다. 애리의 가정 내막을 영림이도 그처럼 은 몰랐기 때문이다.
『알아 듣는다면 지극히 좋아. 그런데 여기서 나는 여성들의 합리화를 한 낱 허영이나 불순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아.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 회적으로나 여성은 약자이기 때문에 완력이라든가 금력이라든가 또는 명예 나 권력 같은 강한 것에 대하여 여성들이 본능적으로 동경하는 욕망의 자 세…… 그것의 실천이 곧 애정의 합리화라고 보고 싶어.』
『전적으로 동감이예요.』
애리는 흥분한 어조로
『전무님 상당하세요! 술장수 오야붕으론 좀 아까워!』
애리와 고영해의 생활철학은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인간 본위의 애정의 순수성은 이제 이 거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하나의 신화로 변했어.』
『그래요. 애정과 생활의 합리화가 있을 뿐이예요. 인간 자체에도 정열을 느끼지만 그 보다 못지 않게 물질과 권위에 대해서도 정열을 느끼고 있어 요. 나만이 불순하고 불량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요.』
애리의 이러한 생활철학은 애리를 노리고 있는 고영해에게 있어서는 지극 히 유리했다.
『아니야,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애리는 다만 솔직하게 쏟아 놓고 있는 것 뿐이다. 나는 그러한 애리를 존경해.』
애리를 바라보는 고영해의 눈이 한층 더 정열에 익어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나도 전무님을 존경해요.』
존경한다는 말을 어떠한 의미로 쓰는지는 모르지마는 어쨌든 똑 같은 한마 디가 두 사람의 거리를 형식적으로 접근시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결국에 있어서 생활 능력을 의미하는 남성의 경제권과 여성의 육체권(肉 體權)…… 서로 대립되는 이 두 가지 권위에 대한 각기의 욕망이 남성에게 있어서는 애욕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고 여성에게서 있어서는 물욕으로서 나 타나는 것이야. 이 두 가지 욕망에 대한 조절과 타협이 애정이라는 아름다 운 탈을 쓰고 남녀의 결합을 형성한다고 보아. 이것은 남의 취미인 생물학 과 나의 전공인 사회학의 교훈이야. 애리는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있지만 단념했어요?』
『왜?』
『애정과 생활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에요.』
『송준오군을 사랑하고 있지?』
『사랑하지만 저 편에서 싫다는 거예요.』
『왜?』
『영림과의 관계도 있고…… 또 내 사상이 나쁘다는 거예요.』
『사상이 나쁘다? 음, 그건 애리가 너무 솔직한 탓이야. 솔직하면 손해니 까 다른 사람들처럼 탈을 쓰고 마음의 풍경을 말하지 않아야 돼.』
『손핸 줄은 알면서도 탈을 쓰기가 싫어요.』
『참 딱한 성격인 걸!』
고영해는 갑자기 침울해졌다. 애리처럼 적나라하게 자기의 알심을 꺼내 보 이는 여성을 아직껏 본 적이 없다.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가면이라도 쓰 고 오면 속은 채 하고 건드려 보아도 무방이지마는 생활을 위하여 갓난애 처럼 쪽 벌거벗은 애리의 허위 없는 삶의 자세를 눈 앞에 볼 때 가긍하고 측은한 생각이 한 조각 남은 고영해의 양심을 쳤다. 몇 장의 화폐를 위하여 홀랑 벌거벗고 나선 창기처럼 서글픈 데가 있었다. 펄펄 타 오르던 정열이 불꽃이 탁 시들어지며
『인제 가요.』
고영해는 훌쩍 일어서서 저고리를 입었다.
『벌써?』
의외라는 듯이 애리도 일어났다. 좀 더 치근치근 달려 붙지 않는 것이 이 상도 했지마는 다행이기도 했다. 고영해가 저고리를 입혀 주었으나 아까처 럼 목덜미에 입술은 와 닿지 않았다.
그릴을 나서서 어두운 거리를 두 사람은 묵묵히 걸었다. 전무님이 왜 갑자 기 침울해졌는지를 애리는 통히 모른다.
『전무님, 무슨 기분 상하신 일이라도 계셔요?』
『아니……』
『그럼 왜……』
『갑자기 서글퍼졌어. 서글프도록 애리가 귀여워졌어.』
『무슨 말씀이예요?』
『나도 잘은 모르지만…… 나는 이 순간, 애리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고 있어.』
『…………』
애리는 잠자코 있었다.
진고개 입구를 빠져 나와 둘이는 명동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애리, 돈벌이하고 싶지?』
고영해는 갑자기 물었다.
『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요. 기껏 해야 연애의 냄새를 파는 것 뿐이 지. 남처럼 대담하지 못하니까 돈 있는 양반의 이호나 삼호는 될 수 없 고……』
『왜 남들은 곧잘 되던데……』
『흥, 이래 뵈도…… 보기에는 양공주 같이 보여도 아직 나는 버어진(處女 [처녀])이야. 이호 삼호의 생활은 우리 어머니의 과거로써 충분해. 진저리 가 나도록 보아 왔으니까 되풀이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마침 한 사업체가 하나 났는데 해볼 생각 없어?』
『돈벌이 되는 거야요?』
『벌리지, 잘하면 유망해.』
『뭔데……?』
『하나는 땐스 홀이고 하나는 빠아…… 우리 회사와 관련이 있는 덴데 목 하 영업 중이지만 얼마 전에 내놨어.』
애리는 잠자코 있었다.
『그런 방면에서 성공할 소질이 애리에게는 확실히 있어.』
『불량성이 풍부하다는 말이죠?』
『뭣보다도 계산이 밝아서 좋아. 연애의 냄새만을 팔 수 있는, 그런 비상 한 재주를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거든.』
『내 재주 가지고 될까?』
『충분해. 건달 놈팽이와 난봉만 안 나면 충분해.』
『그런데는 자신이 있어요. 돈 없는 사나이는 날개 없는 새니까, 애당초부 터 흥미가 없어요. 그런 염려는 없지만 내 나이가 좀 어리지 않아요?』
『괜찮아. 내가 뒤에 있으니까……』
『빠아보다는 땐스 홀이 좋아요. 자본이 많이 들겠지만……』
『정말 생각이 있어?』
『왜 생각이 없겠어요? 잘함 우리 여섯 식구가 살아날 판인데…… 내 힘이 모자람 어머니 더러 좀 나와 달랄 수도 있어요.』
『아, 어머니…… 몇 살이신데?』
『마흔 다섯이지만 차리고 나서면 그럴 듯하죠. 그런 방면에는 손도 익으 시니까.』
『좋아! 그럼 적극적으로 추진시켜 보기로 할 테야.』
애리에게 비로소 희망이 생겼다. 그런 사업체만 손에 들어온다면 사나이들 에게 연애의 냄새를 팔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지금까지 애리를 너무 조급하게 사랑해 보려던 내가 불찰이었어. 조급하 게 사랑하고 조급하게 내버리기에는 아깝다는 것을 오늘밤 절실히 느꼈 어.』
헤어질 무렵, 을지로 네거리에서 고영해는 말했다.,
『애리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고 내가 정말로 애리를 좋아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해요. 이건 넣어 둬.』
칠만환짜리 수표 한 장을 애리에게 쥐어 주었다.
『어마?』
애리는 놀랐다.
『아무런 댓가도 요구 하지 않을 테니 아쉬운 대로 가용에 보태 써요.』
실은 오늘 밤, 이 수표 한 장으로 애리를 유혹해 볼 요량을 하고 왔던 고 영해였다.
그 고영해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끈을 탁 늦추었다. 조급하게 가 까워지면 조급하게 멀어진다. 결국에 있어서는 경제권과 육체권의 교환이기 는 하지마는 서로의 목적이 너무 뚜렷해서 싱겁기 비길 데 없을 뿐 아니라, 연애의 냄새만 팔려는 애리가 손쉽게 건드려 질 것 같지도 또한 않았다.
『사람은 역시 옷을 입고 마음의 탈을 쓰는 것이 신비로운 여음이 있어서 좋아. 애리가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랑의 탈을 쓰고 올 때를 기다릴테야, 잘 가요. 내일 또 봐요.』
택시를 잡아타고 시청 쪽으로 사라지는 고영해를 애리는 모퉁이에서 말끄 러미 바라보다가
『아, 사장님과의 약속이 있었지!』
그러나 애리의 손목 시계는 이미 아홉시 이십 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잘 됐어!』
수표가 생기고 또 굉장한 사업체가 굴러오게 된 애리에게 있어서 사장은 이미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다.
『희망이 왔다!』
자기에게도 인제부터는 물욕에 굴하지 않아도 좋을 만한 생활이 올런지 모 른다고, 커다란 희망을 한 아름 품고 청진동 자기 집을 향하여 활기 있게 걸어갔다.
칸나의 抵抗[저항]
[편집]『악덕한!』
그보다 세 시간 전, 고영림은 침을 뱉 듯이 오빠와의 전화통 속에다 그 한 마디를 내던지고 찰칵 수화기를 놓았다.
전화는 대청 마루에 있었다. 영림은 자기 방을 거쳐 동쪽 정원에 면해 있 는 응접실을 겸한 양실로 나가자 테이블 앞에 되는대로 몸을 던지며 유리창 밖을 분연히 내다보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서둘러야 하나?』
오빠와 올케 한혜련과의 이혼 문제를 본인들보다 한층 더 서둘러 대는 자 기 자신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오빠에게 냉대를 받고 있는 올케에 대하여 동정하는 마음도 물론 있었고, 전 여성의 약하디 약한 사회적 수난(受難)을 옹호하고 분개하는 대국적인 심사도 또한 있었다.
그러나 하루 바삐 올케가 고씨 문중에서 이적(離籍)이 되어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원하는 심사에는 좀 더 까다로운 영림의 심리적인 갈등이 있는 것이 다. 그것은 영림의 자기 저항(自己抵抗)을 의미하고 있었다.
미스 헬렌과 돌구름의 이야기를 했을 때, 강선생은 말하기를, 무턱 대고 한혜련을 만나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강선생은 그것을 감히 하지 않았 다. 거기에는 강선생 자신의 가정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마는 호적상의 남편 이 한혜련에게는 있었기 때문이다.
올케에 대한 강선생의 인간적인 흥미와 작가적인 호기심은 마침내 꺽이어 졌다. 꺽이어진 그 틈바구니를 타서 자기는 강선생을 유혹했다. 강선생은 사십 대의 지성을 가지고 그것을 점잖게 물리치기는 했으나 내심으로는 확 실한 유혹을 받고 있었다. 영림은 그날 저녁 강선생의 태도에서 그것을 명 확히 느꼈다.
『이것은 결코 공평한 승부가 아니다.』
자기와 똑같은 자유로운 신분으로서 올케 한혜련이 강선생의 눈 앞에 나타 나기를 영림은 차차 더 절실히 원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올케의 입장을 일부러 불리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영 림은 죄진 사람처럼 마음이 자꾸만 구겨지고 어두워진다.
이러한 마음의 구김살과 어둠을 제거해 버리지 않고서는 올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영림에게는 없다. 한달 전, 강선생을 만나고 돌아온 영 림은 올케의 신신 당부대로 미스 헬렌의 이야기도 통 꺼내지 않았노라고 보 고를 했었지마는 어쩐지 올케의 애인을 가로챈 것처럼 마음이 꺼림직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 바삐 올케를 이적시켜, 미스 헬렌이 지닌 봉선화의 서글픈 애수와 영 림이가 지닌 칸나의 불타는 의욕을 동시에 강선생 앞에 제시함으로써만 강 선생의 참다운 애정의 자세를 엿볼 수가 있는 것이라고 영림은 생각했다.
이 한 달 동안, 영림은 「칸나의 저항」이라는 제목으로써 강선생과의 회 견기를 집필하면서 그것을 골똘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영림은 만년필을 들고 다시금 원고지와 마주 앉았다. 집필된 「칸나의 저 항」은 이미 백장을 넘고 있었다.
「칸나의 저항」은 「칸나의 의욕」의 속편의 형식으로서 집필되고 있었 다. 「칸나의 의욕」에서는 영림이가 여학생 시절부터 불살라 온 아름다운 욕망을 표현해 보았지마는 「칸나의 저항」에서는 그 신화인 양 아름답던 동경이 마침내 행동화되어 강석운을 만나 본 이후에 있어서의 영림의 심정 이 적나라하게 기록되고 있었다.
강선생을 만난 것은 이미 한 달 전, 벚꽃이 한창이던 무렵이었다. 벚꽃은 하염없이 지고 눈부신 신록의 오월이 왔다. 신록은 짙어 검푸른 녹음의 유 월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나 영림은 다시 강석운을 찾지 않았다.
그것은 강선생에게로 기울어지는 마음의 경사(傾斜)가 너무도 급하고 가파 로왔기 때문이었다. 만나 본 것은 단 몇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마는 이미 여 학생 시절부터 기울어져 오던 마음의 경사이기에 이제 다시 한 번 만나는 날에는 남달리 의욕이 강한 영림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걷잡을 수가 도저히 없을 것만 같았다.
『원고가 아직 강선생님의 손에 묵고 있으니까……』
찾아갈만한 구실은 충분했다. 영림은 그러나 악물고 찾아가지 않았다.
『강선생을 다시 한 번 만나 뵈어 인생을 말하고 문학을 말하고 우주를 말 하고 영원을 말하고 사랑을 말해 보았음 한이 없을 텐데……』
뜰안 돌산 틈바구니에서 기승을 부리며 싱싱히 피어나는 칸나의 줄기찬 성 장을 바라보며 영림은 한숨을 짓다가 탁 책상 위에 엎디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영림은 그러한 강렬한 의욕을 누르는 데까지 눌러 보고 있는데 조 용한 희열을 또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희열을 행복의 높이 에 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자신이 영림에게는 있었다.
만나면 질식할 것 같은 기쁨이 있을 것 같았으나 그 기쁨을 아껴 두는데 좀 더 깊이 있는 기쁨을 영림은 느끼는 것이었다.
『강선생님과 헤어질 때, 악수를 아껴 둔 것처럼……』
그렇듯 줄기찬 기대를 가슴 깊이 품고 이렇듯 조용할 수 있는 자기 만족 속에서 영림은 정원의 검푸른 나무 잎사귀를 바라보며, 「칸나의 저항」을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강선생은 점잖케 칸나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것은 그러나 도리어 역효과 를 냈을 뿐이다. 좀 더 많은 분량의 불량성을 발휘했었던들 칸나는 제물에 물러났을런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칸나의 의욕이 분별없이 날뛰지는 못했다. 사모님의 입장을 생각한다는 말이 간사스럽기도 하고 새 삼스럽기도 해서, 불신한 남편을 가진 어머니와 올케를 동정도 할 수 있는 칸나라고, 일부러 깨우쳐 드리기도 했다. 원고는 언제 찾으러 갈런지 모른 다고도 했고 영원히 안 갈런지도 모른다고 했다. 찾으러 가지 않고는 견디 어 배기지 못할 때까지…… 돌부처처럼 움직이지 않을 결심을 칸나는 그 순 간 했다. 의욕이 정열에까지 연소(燃燒)되기 전에 함부로 움직인다는 것은 양쪽을 다 함께 욕되게 하고 스포일(그르침)할 우려가 다분히 있기에 칸나 는 별 꽃이 오순도순 돋아난 밤 하늘을 우러러보며 가만히 외쳤다.
《칸나여, 조용하자! 조용히, 조용히 의욕을 연소시키자!》 이것은 「칸나의 저항」속에서 강석운과 헤어진 직후의 감상이었다.
영림은 조용히 의욕을 연소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월여가 지난 요즈음에 와서는 영림은 비로소 한 시도 안절부절을 못하고 삥삥 돌아만 다니는 자신 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사 오월의 신록이 육 칠월의 녹음으로 변모를 하듯이 벌렁거리던 의욕의 불길은 마침내 타서 쇠붙이를 녹여 버릴 수 있는 새파란 정열의 불꽃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날, 송준오에게서 때때로 느꼈던 피부적인 것이 아니 고 송준오에게서 늘상 그 결핍을 느끼던, 좀 더 넓고 깊이를 지닌 인간적인 신뢰와 애정에서 오는 정열 같았다. 자기의 참된 가치를 알아 주고 또한 자 기가 그것을 상대편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 대 인간의 동지애(同志愛)가 남녀라는 이성 위에서 형성되고 육성되어 마침내 정열에까지 연소된 것이라 고 생각하였다.
《칸나는 요즈음, 분명히 자기의 연장(延長)을 강선생에게서 느꼈다. 칸나 는 강석운이라는 옥토(沃土) 깊이 뿌리를 박고 거기서 양분을 섭취하여 줄 기를 뻗고 잎을 기르고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폭위(暴威)가 그 옥토를 뒤흔들어 버릴 때, 칸나는 뿌리째 송두리째 나자빠질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한낱 연약한 칸나가 강선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은 착각이다. 다만 칸나는 강석운이라는 옥토 위에서 육체가 성숙하고 인격이 완성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따름이다.》
「칸나의 저항」에서 영림은 마침내 그렇게 기록하게끔 되어 있었다.
영림은 안타깝게 강석운의 옆이 그리워졌다. 고요한 영혼의 대화로써만 흡 족할 수가 영림에게 없게끔 되었다. 영림의 시각은 강석운의 무뚝뚝한 모습 을 그리워했고 영림의 청각은 강석운의 부드러운 음성을 탐냈다.
그러나 영림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견디어 배겼다. 그것은 오로지 강석 운이 기혼자 이기 때문이었다. 「칸나의 저항」에서 영림은 다음과 같이 기 록하였다.
《칸나는 한층 더 스스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결심했다. 강선생이 기혼자 라는 세속적인 도덕률의 압력을 느껴서가 아니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 다. 문제도 또한 될 수 없다. 좀 더 참되고 깊은 의미에 있어서의 인간 대 인간의 모랄은 강석운 대 칸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모님 대 칸나에게 있 다. 칸나는 사모님을 모른다. 사모님이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소유자인가를 측량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나 봐야만 하겠다. 만나 보고 나서 만일 사모님이 지닌 인간 가치의 총결산(總決算)이 칸나보다 떨어진다는 결 론을 얻었을 때, 칸나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강선생을 전취(戰取)하기 위하 여 줄기차게 움직여도 무방할 것이며 신도 그러한 칸나의 행동을 꾸짖지는 못할 것이다.》 그 때까지는 아무리 강선생이 그리워도 스스로의 의사로써 강선생을 찾아 가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영림은 운명까지를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영림은 그러한 불가피한 운명이 두 사람 사이에 있어지기를 골똘히 바랬다. 여기서 영림이 가 생각하는 운명이란 길거리 같은 데서 우연히 강석운을 만나게 되는 일이 다. 영림의 의사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그러한 종류의 우연은 곧 신의 의욕 이며 사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거리를 싸돌아 다녀도 외출이 별반 잦지 않은 강석운을 우 연히 만나기는 좀처럼 힘이 들었다. 아니, 강선생을 만나려고 일부러 돌아 다니는 행동 자체가 이미 우연이 아니기에 최근에는 외출조차 별로 하지 않 았다.
그러한 영림이가 어제 우연히도 전화를 통하여 애리의 입으로 부터 송준오 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송준오를 한 번 만나 보아도 무방할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만년필을 던지고 영림은 다시 마루에 나가서 송준오의 집에다 전화를 걸었 다. 송준오는 마침 집에 있었다.
송준오를 만나기 위하여 영림은 서대문 네거리에서 종로 쪽으로 가는 전차 를 탔다.
송준오는 신당동에서 산다. 종각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오랫만에 저녁이 나 같이 먹자는 것이 영림의 의향이었다.
아까 애리로 부터 전화로, 송준오와 약혼을 한다지 않느냐는 말을 듣는 순 간, 영림은 불현 듯 송준오를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던 것이 다.
어쨌든 송준오는 영림을 위해서 음독까지 한 사나이였다. 한 사나이가 한 여자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희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 최고의 지순(至 純)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같은 값이면 자기의 정열이 강선생에게 서 타는 것 보다는 송준오에게서 타 주었으면 모든 것이 편하다. 사모님이 라는 한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아내의 지위와 인격을 욕되게 함이없이 자기 의 의욕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편하고 좋은 일이냐고, 어쩌다가 강선생을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기 전에 한 번 더 송준오에게 접해 봄으로써 자기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영림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것은 올케 한혜련을 하루 바삐 고씨 문중에서 이적시켜 자유로운 신분으 로 만들기 위해서 영림 자신이 한층 더 서둘러대는 것과 마찬가지 성질의 저항이었다.
『가망은 없지만 어쨌든 신중을 기하는 의미에서 한 번만 더 만나보자.』
그런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영림은 종로에서 내렸다. 이 저항의 정신은 그 의 강렬한 의욕과 더불어 하나의 가치체(價値體)로서의 인간 고영림이 존재 의 의의(意義)와 생명력의 소재(所在)를 규정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즈음, 택시에 몸을 싣고 송준오는 종로를 향하여 달려 오고 있었다.
영림이가 일부러 전화를 걸어 준데 대한 고마운 마음에 어린애처럼 송준오 는 젖어 있었다. 자존(自尊)의 자세를 갖출 수 없도록 기진맥진한 자기 자 신에게 세속적인 혐오의 염을 순간적으로 준오는 느꼈으나 그것을 끝끝내 내세우기에는 고영림에게 향하는 연연한 감정이 다급하게 앞장을 섰다.
『아아, 고영림!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느끼는 고영림!』
그 서둘러 대는 감정 속에서 자기 멸각(自己滅却)을 준오는 또 다시 생각 하고 있었다.
준오는 울고 있었다.
『죽음의 초대다!』
죽음의 초청장과도 같은 영림의 전화를 받는 순간, 준오는 서슴치 않고 그 의 초청에 응할 것을 결심했었다.
준오는 알고 있는 것이다. 영림이가 오랫동안 흠모하던 강석운 선생이 마 침내 영림의 앞에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준오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달 전, 한강 백사장에서 애리를 모델로 하여 촬영대회를 열자던 날, 영 림은 돌발사건을 빙자하여 종이 조각 하나를 다방 전언판에 꽂아 놓고 사라 져 버렸다. 하는 수 없이 준오는 애리가 발산하는 강렬한 육체의 냄새를 코 가 저리도록 맡으며 아서원에서 점심을 먹었다.
뾰르통해서 애리는 사라져 갔으나 준오는 갈 데가 없다. 지향없는 마음을 발걸음이 이끌어 갔다. 남산에 올라 푸른 하늘을 속절없이 쳐다보며 한 두 시간을 준오는 구름과 놀았다.
구름에 지쳐서 내려오는 길에 준오는 영림의 돌발사건을 목격하고 절망을 느꼈다. 숲 새로 몸을 숨기고 준오는 보았다. 경사진 비탈을 강석운은 총총 히 걸어 내려갔고 소나무 곁에서 영림은 울고 있었다.
이윽고 영림은 강석운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 내려갔고 영림이가 울고 섰던 바로 그 소나무 밑에서 준오도 울었다.
그것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준오는 영림을 깨끗이 단념하고 애리를 사랑해 보려고 무진 노력을 꾀하여 보았으나 오로지 그것은 순간적인 신념일 뿐, 포말처럼 노력 은 허무했다.
『그러한 영림이가 오늘 나를 불렀다. 왜?』
동정으로써 움직일 고영림이가 아니기에 일부의 희망같은 것을 품어도 보 았으나 결국에 있어서 영림의 의식 세계에는 강석운과 송준오와의 비중 문 제가 도사리고 있겠기에 젊음만으로서는 대결하기 힘든 압력을 숨 가쁘게 느끼며 독배를 마시러 나가는 소크라테스처럼 자기 멸각의 의식이 준오에게 는 비장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송준오의 이 최후의 보이팅(投票[투표])이 무엇을 결과 하든 그는 이미 두려운 것이 없었다. 운명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는 지금 죽음을 예측하는 최후의 향연에 참석하고자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차가 멎었을 때, 종각 앞에서 영림은 손을 내젓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읍니까?』
『아뇨, 지금 왔어요.』
『오랫만입니다. 그 동안……』
준오는 말꼬리를 잇지 못하고 얼굴부터 붉혔다.
『준오씨도 그 동안……』
『네, 그저……』
영림의 모습을 정답게 핥고 있던 준오의 시선이 후딱 발부리로 떨어져 내 려갔다. 음독 사건이 있은 후부터 준오는 시선을 잘 들지 못했다. 영림의 시선과 마주치는 것을 준오는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한 준오가 영림의 마음을 쥐어짜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준오씨가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가요.』
『그렇지만 영림씨는 양식을……』
좋아하지 않느냐고, 떨어뜨렸던 시선을 준오는 들어보였다.
『흐흥……』
영림은 서글프게 웃어 보이며
『오늘은 초밥 먹기로 해요. 나도 먹고 싶어요.』
『그럼 저리로 가지요.』
둘이는 나란히 서서 을지로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었다. 거리는 소란했으나 둘이의 심경은 호수처럼 조용했다.
호수처럼 깊이도 했다.
『왜 수염도 좀 깍으시고, 그러시지죠?』
존댓말을 쓰지 않을 수 없으리만큼 준오의 얼굴이 홀쭉해 있었고 수염이 파아랗게 돋아 있었다.
『아, 수염……』
준오는 쓸쓸히 웃으며 입 언저리에 손을 갖다 댔다.
『미국은 언제 쯤 떠나세요?』
할 말이 없어서 영림은 물었다.
『아, 미국…‧… 여권이 아직 안 나왔읍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임을 영림은 알면서도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여기 저기 걸리는 데가 많아서…… 아주 귀찮답니다.』
『준오씨가 서두르지 않으니까 그런 거 아냐요?』
준오는 잠자코 있었다.
영림도 잠자코 있었다.
화제가 없다. 화제가 없으면 영림은 괴롭다. 죄진 사람처럼 침묵이 무섭 다.
『요즈음 사진 많이 찍으세요?』
『별로……』
『참, 저번에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미안합니다.』
차차 더 영림은 송구만 해진다.
『아니요, 미안은……』
돌발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준오는 도리어 탓할 수가 없다. 탓을 하다 가는 추한 질투심만 튀어 나올 것 같았고 이만 저만한 질투심도 또한 아니 기에 일단 입 밖에 냈다가는 수습할 방도가 전연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 문이었다.
『애리, 여전하죠?』
침묵이 싫어서 영림은 또 물었다.
『여전하더군요.』
『애리, 요즈음에 점점 더 예뻐지던데……』
준오의 마음 자세를 영림은 떠 보고 있는 것이다.
준오는 또 잠자코 있었다.
『집의 오빠가 눈이 벌개서 쫓아다니지만…… 애리의 마음은 딴 곳에 있어 요.』
『…………』
『그걸 나는 잘 알고 있죠.』
『애리씨의 마음은 화폐에 있다고 하더군요.』
『화폐?』
『돈이란 말이 봉건적이 라서 안 쓴다고 하더군요.』
『애리다운 감각이예요. 그렇지만 애리를 얕잡아 봄 안돼요. 애리의 언행 에는 애리다운 철학이 있어서 좋아요.』
『매소부의 철학 말입니까?』
어조가 비웃고 있었다.
『그처럼 한 마디로 제껴 넘길 수 없는 무엇이 애리에게는 있다고 보아요.
가정이 다소 불우해서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니까 준오씨도 이 해를 좀 하셔야만 될 거예요.』
『웃음을 팔아 먹는다고 내놓고 장담하는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입 니까?』
『그건 아직도 애리를 모르는 말이예요. 여자들의 태반이 갖고 있는 깜찍 한 데가 애리에게는 없어요. 탁 터놓는 개방된 성격에다가 자기의 논리에 도취하는 버릇이 있어서 실지로 마음 먹고 있는 것보다 훨씬 과장된 말을 해요. 그래서 잘못함 오해를 받지만…… 실지의 행동은 옆에서 생각하는 것 처럼 대담하지는 못하죠.』
『영림씨가 왜 갑자기 애리씨의 열렬한 옹호자가 됐읍니까?』
『사실이 그러니까 그러는 거죠.』
『그만해 두시오.』
뱉 듯이 준오는 말했다. 영림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가
『애리는 고독한 애예요. 거기에는 명랑하고 이야기가 무척 딱딱하게 돌아 가고 있지만…』
『딱딱한 사람이 육체의 냄새를 그처럼 피워요?』
『그게 다 고독하기 때문이죠. 애리의 그처럼 솔직한 성격은 이해하지 못 하고 모두들 불량하다고만 보아 주고…… 애리를 참답게 사랑해 주는 남성 이 없기 때문에 애리는 애리대로 더 한층 기승을 부려 가면서 반항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몸을 팔아 가면서까지 반항을 할 수가 있을까요?』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애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 을 거예요.』
『어머니가 기생 퇴물레기라지요?』
『문제는 거기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모르긴 하지만 어머니를 지지리 학 대해 온 남성들에게 대한 반발심 같은 무슨 그런 것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요.』
『무서운 여자로군요.』
『모르는 일이예요. 조금도 무섭지 않은 애예요. 진심으로, 그리고 인격으 로만 대해 준다면 아주 폭삭 녹아 버릴 애죠. 고독한 사람일수록 인정에는 약해요. 눈물이 많구요.』
『애리씨에게 눈물이 있어요?』
『모르긴 하지만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곳에서는 많이 울 거예요. 낮에는 싸우고 밤에는 울고…… 도리어 나 같은 인간이 눈물이 없는 편이죠.』
『…………』
준오는 문득 영림을 쳐다보았다. 단념하라는 선전 포고와도 같아서 준오는 가슴 속이 뜨끔했다.
준오의 시선을 피할 셈으로 영림은 문득 외면을 하다가
『아, 강선생님이……』
외면을 한 영림의 시야에 강석운의 얼굴이 오벌래프의 스크린처럼 휘익 뛰 어 들어왔다.
을지로 네거리에서의 일이었다.
「강선생님」이라는 영림의 불의의 외침은 지나간 한 달 동안, 그것과 강 파르게 저항해 오던 칸나의 압축된 영혼의 몸부림이었고 고뇌에 찬 오랜 진 통 끝에 신의 축복을 받으면서 분만(分娩)하는 또 하나의 생명이 자기의 존 재 이유를 소박하고 와일드하게 주장하는 고고(呱呱)의 소리와도 같았다.
그것은 칸나가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생명의 연장 같기도 하였고 그것의 신생(新生) 같기도 하였다.
고영림은 자기 속에 두 개의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며 강석운 선생이 타고 있는 전차 안을 말똥히 바라보는 그대로의 자 세로 불현 듯 걸음을 멈추었다.
명동 쪽으로 대가리를 두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전차가 파도치는 자동차 의 행렬을 따라 을지로 로타리를 굼벵이처럼 꿈틀꿈틀 건너가고 있었다.
배꼭이 들어선 비좁은 전차 꼬리께서 강선생은 혁대에 매달려 창 밖을 내 다보고 서 있었다. 그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라서, 점점 멀어져 가기는 했지 마는 강선생의 표정의 움직임을 희미하게나마 영림은 붙잡을 수가 있었다.
강선생은 영림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의의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 으로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이며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그러나 순간적인 표정에 그쳤을 뿐, 웃음을 후딱 거두어 버린 강선 생의 얼굴에는 무관심의 평온이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의식 적인 평온이며 무관심임을 영임은 이윽고 깨달았다.
왜냐 하면, 손 하나를 들어 보이고 한 두 번 흔들어 보이기도 한 영림에게 강선생은 아무런 반응도 움직임도 보여 주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지며 강선생의 모습이 차차 작아져 갔다. 그러나 손도 흔들어 주지 않았고 작별의 고개도 숙여 주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멀어지고 시각 (視角)이 좁아짐을 따라 강선생의 얼굴이 조금씩 위치를 변해 가며 이편 쪽 을 열심히 바라보고 섰을 뿐, 다른 아무런 동작도 강선생에게는 없었다.
『강석운 선생이지요?』
이윽고 저만큼 전차가 사라져 갔을 때, 송준오는 무뚝뚝하게 물어 왔다.
『네, 강선생 아세요?』
『사람은 모르지만 얼굴만을 알지요. 언젠가 학교에 과외(課外) 강의를 하 러 왔었으니까요.』
둘이는 묵묵히 로타리를 건넜다.
로타리를 건너 서서도 둘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꺼낼만한 화제도 없었거니와 새삼스런 화제가 간사스럽기만 했고 온갖 화제가 감정의 파도 속에서 무의미한 포말처럼 껌뻑껌뻑 꺼지기만 했다.
명동 한 복판, 초밥을 잘한다는 어떤 〈가뽀야〉 이층에 마주 앉아서도 둘 이는 아무런 화제도 끄집어내지 앉았다. 그래도 화제의 궁핍을 느끼지 않을 만큼 감정의 물결은 둘이에게 있어서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아니, 화제가 하나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화제로 끄집어 내기에는 둘이가 다 같이 무섭다. 상극되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두 젊은이는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강석운의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
『준오씨, 많이 드세요.』
초밥 접시가 들어오고 스끼야끼도 끓었다. 싫다는 준오를 억지로 달래며 영림은 술도 권했다.
『영림씨는 왜 들지 않소……?』
몇 개 집어 먹다가 가만히 앉아서 자기를 말끄러미 쳐다만 보는 영림에게 준오는 물었다.
『먹는 것보다 이렇게 앉아서 보는 것이 더 좋아서……』
영림은 쓸쓸히 웃었다.
준오도 똑 같이 쓸쓸히 웃었다.
안 먹는다는 술을 영림은 억지로 권했고 그럼 같이 들자는 술을 영림은 쾌 히 마셨다.
억지로 권하고 싶고 쾌히 들고 싶은 감정이 영림에게는 끓었다. 술맛을 알 아서가 아니건만 먹으면 먹을 수 있는 술이기도 했고 준오가 따라 주는 술 이 어쩐지 인간 하나의 생명처럼 존귀함을 후딱 후딱 느끼기 때문이다.
『영림씨가 술을 든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먹으면 먹는다면서도 좀처럼 들지 않던 영림의 술이기에 준오는 기뻤다.
『준오씨 앞날에 행복이 있기를 빌고 싶어서요.』
얼굴에 별반 오르지 않는 영림의 술인가보다. 영림이 보다 준오가 더 빨리 빨개졌다.
『행복이라고요?』
준오는 얼른 시선을 떨어뜨리고 제 손으로 술을 따라 훌쩍 들이키며
『내 행복을 갖다 줄 사람은 영림씬 줄로만 알았는데…… 그 영림씨가 내 게 행복이 있기를 비는군요.』
얘기하고 있던 것처럼 준오에게 있어서는 마침내 죽음의 초대연이 되어지 고 있었다.
『준오씨.』
영림은 쓸쓸히 웃으며
『나는 노력했어요. 오늘도 노력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력하고 있어 요.』
영림은 괴로와 준오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오늘 저녁의 영림씨의 호의가…… 결국에 있어서 영림씨의 과거를 영원 히 묻어 버리려는 장송연(葬送宴)을 의미한다는 거지요?』
뚫어지듯 노려보는 준오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거리기 시작했다.
영림은 불현 듯 고개를 들며
『아냐요. 그런 의미에서 만나잔 건 결코 아니예요.』
『그렇다면 일부러 나를 불러 내서…… 나를 이처럼 울려 놓을 심사는 어 디서 나왔읍니까?』
『아냐요, 일부러 그런 건 아냐요. 그 것만은 믿어 주세요.』
괴롭다. 정말로 괴롭다. 그렇지만 헤어질 때 까지는 아직도 한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 그 순간까지 영림은 칸나의 일생을 이 순진한 청년에게 맡길 수 있으며 거기서 또한 칸나의 강렬한 의욕과 정열을 충족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칸나의 생명을 완전히 불태울 수가 있을런지 모른다는 판정이 내리 어지기를 절실히 원했다.
『동정의 눈물을 뿌리면서 장송연을 베풀어 보는데 최후의 흥취가 있다는 건가요?』
영림은 두 눈을 가만히 감으며
『나는 그렇게까지 잔인하지는 못해요. 잔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를 만든 거예요.』
영림도 울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비스듬히 꿇어 앉은 자세 그대로 조용 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정의 눈물이 얼마나 값싼 것인지도 잘 알고 있고…… 잔인을 향락하리 만큼 마음이 표독스럽지도 못하고……』
『영림씨는 그럼 뭣 때문에 지금 눈물을 흘립니까? 나로서는…… 값싼 동 정의 눈물일지라도…… 그 처럼 울어주는 것이 황송하리만치 기쁘기는 하지 만요.』
『하기 싫은 대답이지만…… 물어 주시니 대답을 하겠어요.』
영림은 조용히 눈물을 찍어 내며
『영림은 지금 영림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거예요. 그 싸움이 너무도 강열해 서 우는 거예요.』
『…………』
『최후의 일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 보는 것 뿐이예요.』
『강석운 선생을 사모하고 있읍니까?』
순간, 흠칫 몸서리를 쳤으나 이윽고 영림은 조용히 눈을 떴다.
꺼내서는 아니 될 화제를 송준오는 끝끝내 꺼내고야 말았다.
영림은 오랫동안 준오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묻고 싶지도 않은 말을 물었읍니다.』
준오는 제 손으로 또 술을 따라 마셨다. 취기가 감정에 불을 붙이고 있었 다.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영림씨의 분명한 심경을 알아야만 하겠기에……』
『준오씨, 술 같이 들어요.』
영림은 잔을 들었다. 그러나 준오는 잔을 들 생각은 통히 않고,
『영림씨!』
준오의 목소리는 격정에 떨고 있었다.
『알고 싶어서 묻기는 했지만…… 대답을 그만 둬 주시오. 기다림의 행복 을 남겨 두기 위하여 갑자기 듣기가 싫어졌읍니다.』
준오는 흑흑 흐느껴 울었다.
『준오씨, 굳세 주세요. 준오씨의 앞길은 그거야 말로 대해처럼 양양해 요.』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 같은 감정이 항상 영림에게는 앞장을 선다. 준오를 대할 적마다 영림은 누나가 되고 있었다. 일찌기 두 사람 사이에 포옹이 있 었을 때, 영림은 자기가 준오에게 포옹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도 자기편에서 준오를 포옹해 준다는 느낌이 한층 더 강했다. 처음에는 무심 중 지나쳐 버 리곤 했으나 그러한 느낌이 차차 커져 가면서 불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러한 불만이 오늘도 또 왔다. 잘하면 메꾸어 질런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 각하고 왔던 불만이었다.
『준오씨, 인제 가요. 눈물을 씻고……』
영림이가 일어서서 준오의 저고리를 벗겨다 입혀 주는데 준오의 얼굴이 눈 물과 함께 다가왔다.
영림은 눈을 감고 시주나 하는 것처럼 준오의 격렬한 포옹과 입술을 조용 히 받았다.
『영림! 죽어도 나는 영림을 잊을 수는 없어! 죽어도 못 놓겠어!』
『…………』
『영림은 너무도 무정해! 냉혈 동물이야!』
『…………』
『사람의 목숨 하나가 그처럼 초라했던가요? 이 절망…… 이 암흑……』
『…………』
영림도 울고 있었다.
『강석운이…… 강석운이 영림의 애정을 가로채 간다면…… 나는 그를 죽 여 버려도 좋아!』
『모르는 말이예요. 그 선생님에게는 아무런 불찰도 없어요. 자아, 인제 가요!』
『무어가 선생님이야? 그 따위가 선생이야? 부인도 있고 자식이 있는, 지 성이 있다는 문화인이 제자를 꼬여내?』
『준오씨는 술이 좀 취했어요. 자아……』
영림은 가까스로 준오의 완강한 포옹에서 빠져 나오며
『인제 나가요. 술이 지나치면 어머님이 또 걱정을 하실 텐데…… 정말 좋 은 어머님이세요.』
『지나치게 총명한 것이 영림은 탈이야. 어머니 걱정까지 해 주지 않아도 좋아요.』
비틀거리는 준오를 부축하고 영림은 거리로 나섰다. 어두운 거리였다.
큰길로 나가 택시를 불러 세우고 준오를 영림은 태웠다.
『신사동까지 모셔다 드려요.』
『네네.』
영림은 택시 값을 치르고 나서
『자아, 악수!』
그러나 준오는 쭈그리고 앉아서 두손으로 덮어 버린 얼굴을 무릎 위에 파 묻 듯이 한채 아무런 대답도 없다. 우정을 나서면서부터 준오는 술이 깬 듯 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어서 악수!』
준오는 홱 얼굴을 들며 두 손으로 영림의 손목을 꽉 부여잡고 눈물 어린 자기 볼에다 격렬히 비벼댔다.
『영림, 행복해요!』
진심으로 준오는 영림의 행복을 바라며 말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 처럼……
『고마워요!』
준오가 아까운 듯이 놓아 준 손길로 영림은 한 번 더 수염이 깔깔한 준오 의 턱과 볼을 만져 보았다.
이윽고 차는 떠나고 영림은 오랫동안 그 자리에 꼬딱 서 있었다.
명동 입구 십자가 한 모퉁이에서 송준오가 타고 간 택시의 빨간 테일 라이 트가 을지로 어귀로 감실감실 감돌아 들 무렵까지 영림은 꼬딱이 서서 말똥 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며 영림은 울고 있는 것이다.
어둠이 빛깔을 몽땅 삼켜 버린지 그리도 오래지 않은 초저녁, 현실과 피로 만을 한짐 짊어지고 넋 없이 늦은 귀로를 재촉하는 생활인의 비장하리만큼 무표정한 얼굴의 행렬이 십자가에는 있었다.
저렇 듯 남들은 모두가 다 생활에 지쳐 있는데……
『나는 왜 이렇 듯 울고 섰어야만 하나.』
의식주에 시달림이 없는 한 인간의 눈물이 아무리 생각하여도 지금 영림 자신이 느끼는 것처럼 존귀해 보이지는 정녕 않았다.
『결국은 교단의 눈물이요, 상아탑의 눈물이다.』
스스로 자기의 눈물을 다루어 보고 자질해 볼 수 있는 가능(可能)이 솟구 치는 눈물 밑바닥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불행이다!』
그런 것이 다 칸나 고영림의 불행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슬픔이면, 슬 픔, 기쁨이면 기쁨, 그 자체 속으로 파고 들고 그 자체 속에 침몰하지 못하 는 자기의 까다로움을 영림은 어둠 속에서 말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림은 다음 순간, 그 세속적인 불행 속에서 이내 빠져나올 수 있 는 발받이 하나를 붙잡고 외쳤다.
『그렇다. 그네들만이 생활인이 아니고 고영림이도 하나의 생활인이다.』
의식주를 위한 생활만이 생활은 아니다. 자기도 일년 후면 의식주를 위하 여 걱정을 하겠지마는 오늘의 고영림이도 한 사람의 진지한 생활인임을 자 각하였다.
먹고 사는 것만은 생활은 아니다. 생활이란 각기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려고 몸부림치는 노력을 노력하고 있는 인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목하 영림에게는 의식주를 위한 임무는 아직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올바르게 배우는 것과 올바르게 청춘을 밭 가는(耕[경]) 것 뿐이다.』
이리하여 고영림은 자기의 눈물이 지닌 존귀한 뜻을 다시금 찾을 것만 같 았다.
『그럼 나는 무엇 때문에 지금 이렇 듯 울어야만 하나……?』
냉혈 동물이라는 원망스런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진 송준오의 영혼의 흐느 낌과 암흑 같은 절망이 눈물겨워서 우는지도 몰랐다. 강석운 선생이 그리워 서 자기는 울고 있는지도 또한 몰랐다.
그러나 영림은 이윽고 마음으로 도리도리를 했다.
『아니다, 아니다.』
그 어느 것도 영림에게는 진정한 눈물이 아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건 만 영림의 설움은 자꾸 복받쳐 오르기만 했다. 자기 눈물의 참된 뜻을 구명 하기 전에는 이 어둑컴컴한 십자로 한 모퉁이에서 한 발자국도 뜰 수가 없 다.
이 어두운 밤 거리 십자로에 꼬딱이 서서 그 네 갈래로 뻗어진 어느 길이 자기의 길인지를 영림은 택해야만 했다.
『나는 왜 이처럼 고달피 울까?』
순간, 영림은 후딱 하늘을 쳐다보며
『그렇다. 이 설움은 서글픈 설움이 아니고 고달픈 설움이다.』
무심중 뱉은 한 마디가 영감인 양 영림에게 왔다.
『그렇다. 고달픈 설움! 고달픈 설움!』
영림은 그냥 밤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들이 하늘에 고달피 조는 밤 고달픈 영혼의 행렬은 대지에 흘렀다.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 어이 혼자 안일하려뇨.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서러워 하는 귀여운 칸나여.
그대마저 생활에 지쳤느뇨 냉혈 동물에 눈물이 흘렀다.
그윽한 동경 위에 청춘을 밭 갈자.
영혼은 타서 재가 되라 사랑의 바다에 쪽배를 띄우자 노는 없어도 서럽지 않다.
구원을 잡으러 바람을 타자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여.
십자로의 영림은 그냥 울고만 섰다.
──〈失樂園[실락원]의 별 上卷[상권] 끝〉──
下券[하권]
[편집]靑春[청춘]의 終着驛[종착역]
[편집]이날 밤, 아홉시를 전후하여 을지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한 몇 군데 지점에 는 직접으로나 간접으로나 앞날의 운명을 서로 서로가 좌우할런지도 모르는 인과율의 다소의 소재(素材)가 될 수 있는 인간들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 다.
우선 명동 입구 십자로 한 모퉁이에서 밤 하늘을 우러러보며 자기의 청춘 을 참되게 올바르게 밭갈아 보려고 고달픈 눈물에 젖어 있는 어여쁜 개척자 고영림이가 차지한 시간적 위치는 여덟시 오십분이었다.
아홉시 이십 분에 을지로 네거리에서 작별한 고영해와 이애리는 이 시각에 는 진고개 입구 어떤 고급 그릴 특별실에서 금권과 육체권의 흥정에 지칠대 로 지쳐 강석운의 작품 「유혹의 강」의 한 대목을 인용하여 영육적으로 벌 거벗은 인간의 천진성과 악마성을 토론하면서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 다.
그즈음, 고종국 사장은 아홉시에 애리를 종로 <코롬방>에서 만나기 위하여 관철동 어떤 은근짜 집 안방에서 베게로 삼았던 윤마담의 무릎을 떠밀고 부 시시 몸을 일오켰다.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를 본 것도 실은 이 윤마 담과의 일이었다.
똑같은 아홉시에 유현자는 예의 장소에서 고전무와 만나기 위하여 광화문 과 종로 사이에서 무교동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강석운은 그 무렵, 한국은행 뒷골목 어느 조그만 중국집 이층에서 젊은 시 인 한 사람과 술을 마시며 을지로 네거리에서 본 칸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여섯 사람 아니, 금방 택시를 타고 신당동으로 떠난 송준오까지 합하면 일곱의 계산이 된다. 택시가 곧장 신당동으로반 달리라는 법은 없다. 송준 오의 조그만 의욕 하나로서 차는 되돌아 설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시간과 공간의 이치를 어슷비슷이 차지하고 있는 이들 한 무더기의 인간상 아니, 영혼상(靈魂像)이 어느 순간, 어느 방향으로 자기의 육신을 운반하느냐 하는, 각기의 의욕 하나에 따라서 이합(離合)의 우유성(偶有性) 은 형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이라는 화가가 확정한 한 폭의 캔버스 위에 끼적거려진 인 생의 뎃상과도 같았다. 각기 그들이 제 아무리 제멋대로의 의욕 밑에서 좌 지우왕과 정착 이별의 움직임을 꾀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결국 무궤도의 궤도를 달리는 인생의 우발차(偶發車)일 수 밖에 없다.
그 무궤도의 궤도를 부설하는 것이 그 거창한 화가의 부러쉬였다. 화가의 붓 끝은 점과 선으로써 윤곽을 장만하고 빛깔의 명암과 색채의 농담으로써 인생의 회화를 완성시켜 왔다.
이리하여 그려진 한 폭의 회화 속에서 오랜 시일을 두고 울어 왔다 웃어 왔다 괴로와 했고 고달파 했던 것이다.
오늘 밤, 시공적(時空的)으로 한 조각 같은 갠버스 위에 점과 선으로써 뎃 상의 윤곽을 마련하고 있는 이상의 일곱명이 과연 어떠한 명암과 색채로써 이합이 우유성을 구현하여 한폭의 인생 회화를 우리에게 제시할 것인지를 알고 있는 것은 오르지 저 외경(畏敬)의 권화인양 드높이 솟은 창조의 화백 인 황천(皇天) 그 어른일 뿐이다.
명동 입구 십자로의 고영림, 진고개 입구 그릴 특별실의 이애리와 고영해, 한국은행 뒷골목 중국집 이층의 강석운, 무교동을 거닐고 있는 유현자, 을 지로 이가 쯤을 달리고 있을 송준오, 관철동 은근짜 집 윤마담의 무릎에서 부시시 일어서는 고종국 사장……
십자로의 영림은 칼칼히 메마른 목을 축이기 위하여 바로 등살머리께에 아 가리를 벌리고 있는 이층 다방으로 올라가서 소다수를 들이키고 내려온 것 이 아홉시 오분이었다.
그러나 갈 데가 없다. 아현동으로 곧장 돌아가기에는 오늘 밤의 설움을 좀 더 고달파하고 싶었고 되씹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길로 접어들까를 생각하며 다방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출판기념회에서 몇 잔 들이킨 국산 위스키에다 중국집 배갈을 얹어 넘긴 강석운이가 거나하게 취해서 요정을 나선 것이 아홉시 쟈스트였다.
삼각지에 산다는 젊은 시인과 한국은행 앞에서 강석운은 헤어졌다. 취하면 꼭 택시에 태워 달라고 출판 기념회를 중도에서 빠져 나올 무렵부터 당부를 하던 강석운을 위하여 젊은 시인은 택시를 멈주었으나 시간도 이르고 기분 도 나고 운동 부족도 이런 때 보충을 해야만 한다고, 강석운은 쓰다는 운전 수의 표정 쯤 무시해 버릴 수 있을 만큼 신경이 마비되어 있었다.
휘청휘청, 종로 사가까지는 기어이 걸을 작정을 그 순간 하며 동화백화점 앞으로 거닐기 시작하였다.
애리와 고영해가 만일 조금만 더디 그릴을 나섰던들 진고개 입구에서 애리 와 강석운은 얼마만의 해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애리와 고영해는 그 즈음, 땐스홀 경영을 의논하면서 도깨비 소굴 같은 우체국 청사를 지나 중국대사관 골목을 건너서고 있었다.
그 시각에 유현자는 무교동 어떤 중국 요정 밑층에서 고전무를 기다리고 있었고 고사장은 종로 <코롬방>에서 철 이른 아이스크림을 점잖게 핥으며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애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역시 그 즈음, 을지로 이가를 송준오는 택시로 달리며 영림과 바꾼 포옹의 절실감을 애무도 했고 강석운을 변호하는 영림이가 고맙기도 했고 변호를 받은 강석운의 존재를 저주도 했고 애리가 갑자기 그리워지기도 했다.
애리에 대한 가능이 영림에 대한 불가능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허술한 생활 철학이 준오에게 왔다. 고독의 영혼은 구슬피 울어도 올 것은 기어이 오지 않고야 말았다. 오오, 체념의 인생이여, 현실의 증언(證言)은 그 곳에 없었던고……
『아아, 애리가 보고 싶다! 애리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이 한 밤을 울어 새우자! 이 기막힌 생명의 오열을 애리여, 그대 나와 더불어 눈물을 뿌려 다오! 요부라도 좋다. 매소부라도 나는 좋다. 운전수 양반, 차를 돌려요.
청진동으로 차를 돌려요!』
그 청진동에 애리의 집은 있었다.
그때 영림은 비로소 걸음을 옮겨 놓았다.
전찻길을 미도파 쪽으로 빗비슴히 건너가자 남대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 였다. 별을 쳐다보며 서울역까지만 걸어 가자. 거기서 전차를 타도 무방했 고 택시를 잡으면 가격이 그만큼 비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소공동 지대 그릴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나 오고 있었다. 길도 어둡고 마음에 들기에 무심중 발길을 돌려 그리로 걸어 들어가 보았더니 모 시인의 출판 기념회가 있는 모양으로 길다란 쪽지가 문 깐에 붙어 있었다. 순간……
『아, 강선생님이 혹시나……』
아까 전차에서 영림은 강선생을 보았기에 열이면 아홉까지는 자기의 육감 이 맞을 것만 같았다.
한길 가 어둠 속에 서서 나오는 인사들을 하나 하나 영림은 살펴 보았다.
『혹시나 저 강석운 선생님이 여기 오시지 않았어요?』
맨 처음으로 나온 몇 사람을 의식 없이 지나쳐 버렸기에 그 속에 끼었다면 따라가 볼 요량으로 영림은 젊은이 하나에게 물었다.
『아까 오셨는데 중도에서 나가 버렸읍니다.』
『아, 그…… 그러셔요?』
그때, 강석운은 그 길 맞은 편 중국대사관 골목을 건너서고 있었고 애리와 고영해는 명동 입구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저녁 무렵, 강석운은 을지로 로타리 전차 속에서 고영림을 한길 가에 서 발견한 순간 놀라움에 가까운 반가움을 전신에 느꼈다.
원고가 아직 자기 손에서 묵고 있기에 멀지 않아 영림이가 찾아 오리라고 믿고 있던 강석운의 불안한 기대는 한 달이 지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불안한 기대였다. 고영림이가 나타나 주기를 원하는 마음과 나타나 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반씩 뒤섞인 지나간 한 달이었다.
활짝 열어 젖힌 이층 서재에서 원고지와 마주 앉으면 작중 인물의 대화보 다 먼저 영림이가 남겨 놓고 간 그 구슬처럼 영롱하고 사향(麝香)처럼 그윽 한 유혹의 말들이 먼저 머리에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연 붓 끝은 무디고 마음은 달렸다.
(아직도 내게는 청춘이 있었던가?) 상실을 자각했던 청춘이었다. 그 청춘이 아직도 자기 주변에서 서성대고 있는 것을 깨닫자 강석운은 새삼스럽게 소년처럼 가슴이 설렜다. 가능의 청 춘이 아니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그것이었기에 가슴의 설레임은 한층 더 컸 고 좀 더 값비쌌다.
『반복의 가능이 없는 청춘의 종착역(終着驛)!』
그 가슴 설레는 플랫홈에 지금 작가 강석운은 무연(憮然)히 서 있는 것이 다.
붓을 던지고 거울을 든다. 머리를 헤치고 흰 머리카락 하나를 골라 뽑는 다. 희다. 반짝 반짝 희다. 그 반들거리는 윤의 반사를 물끄러미 들여다보 다가 돌연 강석운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휙 내동댕이를 쳤다.
그러나 무게없는 터럭은 다시금 사쁜 원고지 위에 내려 앉았다. 또 물끄러 미 강석운은 들여다보며 그 터럭처럼 자기의 인생은 이미 무게를 상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에 칸나 고영림이가 있다!』
자기 인생에 다시금 무게를 갖다 주려는 고영림의 존재를 생각하고 강석운 은 생명의 충실감을 숨가쁘게 전신에 느꼈다. 책상 머리에서 불현 듯 몸을 일으키며 강석운은 외쳤다.
『무게를 다오! 무게를 다오! 내 생명에 무게를 다오!』
영혼의 충족과 삶의 활기가 조수처럼 밀려 왔다. 아우성을 치면서 밀려왔 다.
『청춘은 아직도 가지 않았다! 내 주변에서 서성대는 청춘을 붙들자! 놓치 면 천추의 한이다!』
종착역 역두에서 강석운은 외쳤다. 청춘의 막바지에서 강석운은 울부짖었 다.
「유혹의 강」의 주인공 박목사는 사회의 온갖 인위적인 질서를 페리처럼 저버리고 스스로 유혹의 강물에 빠져 들어갔다. 정진결제(精進潔齊), 인생 은 노력함으로써 인간의 평온과 행복을 차지해 보려면 퓨리턴 박목사는 외 쳤다.
『오십 평생 나는 속아 왔다. 어떠한 위대한 교훈도 이미 나를 유혹하고 나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인간의 최대 행복은 나를 위한 것이야만 했거 늘 뭇 성현들의 요사스런 교훈은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하라고, 온갖 감언이 설로 인류를 유혹하였다. 이는 실로 인간 실존(實存)의 순수유(純粹有)를 무시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괴변론자의 간사한 말들이었다.』
강석운은 서재 안을 삥삥 돌며 자기 원고의 한 대목을 소리 내서 외우다가 는 후딱 생각이 난 듯이
『원고를 찾으러 왜 안 올까?』
영림이가 오기를 골똘히 강석운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단 한 번 밖에 만나보지 못한 영림이기는 했으나 「칸나의 의욕」에서 부 터 이미 강렬한 정신적 흔들림을 받고 있던 강석운이기에 벌써 오랜 교재를 맺어온 사이처럼 후딱 후딱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림을 생각하고 영림이가 그리워질 때는 반드시 박목사를 끄집어 내어 자기의 변호자로 삼았다. 박목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허허 벌판 한 구석에 가련히 피어난 한 떨기 들국화의 의욕을 소중히 여 길 줄 아는 인간이라면 인간은 모름지기 인간 자신의 꿈틀거리는 생명의 의 욕을 존중할 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인간이여, 간사한 쏘피즘(詭辯論[궤변 론])에 현혹됨이 없이 그대 입을 열어 소박하게 말하라. 과연 그대는 그 누 구를 위해서 살아 왔으며 또한 그 누구를 위해서 살아갈 것인지를 말하라!
그대의 혀 끝이 거짓을 말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그대의 마음 속 한 구석 에서 꿈틀꿈틀 보채는 욕망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대들의 쏘피즘이 나를 쓰러뜨릴지언정 나를 정복하지는 못한다. 최후의 일순까지 나는 나의 인간 을 붙들고 살으련다. 내가 사람이다. 나만이 진짜 사람이다!』
이 문장을 쓰는 날, 강석운은 완전히 작중의 박목사가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쓰고 나서 석운은 만년필을 던지고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팔꿈 치 두 개를 겹쳐 베고
『쏘피스트! 위선자!』
천장을 멍청히 쳐다보며 강석운은 중얼거렸다.
『너의 혀 끝은 고영림의 유혹을 점잖게 물리쳤다. 공자님처럼 타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너의 마음 속 한 구석에서 꿈틀거리며 보채는 욕망의 정 체를 보고 있다. 위선자! 쏘피스트!』
자조의 웃음과 함께 고영림의 또렷또렷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시금 들려 왔다.
『선생님을 한 번 유혹해 보고 싶어요. 이것이 현재에 있어서 솔직한 마음 의 소리예요.』
『그렇다, 나도 영림을 한 번 유혹해 보고 싶다. 이것이 현재에 있어서의 내 솔직한 마음의 소리다.』
그런 대답을 하여 보며 담배를 피워 물고 두어 모금 들이키는데
『여보오!』
아내의 코에 걸린 목소리가 뜰에서 동그랗게 날아올라 왔다.
『응?』
석운은 벌떡 일어나자 책상 앞에 앉아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왜 그러우?』
『암만 올려다 봐두 당신이 보이지 않기에…… 난 또 누가 홀랑 떼간 줄만 알았어요.』
『나 같은 나이에 누가……』
『말씀 마세요. 요즈음 여성들은 당신만한 나이가 똑 마침 하다던데……
어리지도 않고 늙어 빠지지도 않고……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게다가 쓴맛 단맛 다 알아서 사랑이 극진하고……』
『참 내 모르는 것도 없어!』
『당신이 거기 앉아서 늘상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야쓰데 분을 이리로 옮겨 놨어요.』
이층에서 내려다 보이는 못 한 구석에 치자 분을 올려 놓았던 사각 돌이 있다. 그 돌 위에 야쓰데 분이 어느 틈에 올라앉아 있었다.
『아, 참…… 참 그러는 게 좋겠군!』
속과 겉이 딴판인, 어색한 웃음 하나가 강석운의 입술을 새어 나왔다.
그것이 지금으로 부터 보름 전의 일이었다. 머리만 조금 돌리면 이내 시야 에 뛰어드는 한 떨기의 야쓰데 분! 그 야쓰데 분이 지나간 보름 동안에 강 석운에게 힘 입힌 심리적 영향은 다음과 같았다.
이 보름 동안 강석운은 정원의 야쓰데 분을 내려다보며 청춘의 종착역에서 몸부림치는 생명의 약동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인생의 무슨 단 하나 밖에 없는 보물처럼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어 가며 야쓰데 분을 가꾸는 아내의 뒷모습이 눈에 뜨일 때마다 지나간 십 팔년 동 안에 뿌리를 박은 부부 생활의 깊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웬만한 비바람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아람드리 고목처럼, 외모는 비록 고 색이 창연하지마는 땅 속 깊숙히 뻗고 뻗은 줄기찬 뿌리는 질길 대로 질겼 고 굵을 대고 굵었다.
외모는 비록 줄기차고 젊고 신선하고 청청히 발랄하지마는 고영림이라는 연륜 어린 나무에게는 뿌리가 약했다. 바람만 조금 거세게 불면 금방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고영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록의 나무!
고운 때가 묻은 입성처럼 옥영에게는 비록 눈부신 색채는 없었지마는 안식 과 평화의 여신(女神)이 조용히 깃들어 있었다. 연륜의 때를 좀 더 소중히 하는 낡은 청자기(靑磁器)의 가치와 보배로움이 옥영에게 있었다.
『조용하자! 설레이는 마음을 조용히, 조용히 무마하자! 그리하여 유종의 미를 내 인생으로 하여금 거두기로 하자!』
청춘의 종착역에서 강석운은 인생의 종착역을 바라보면서 설레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여보! 좀 올라와요.』
어떤 날 석운은 뜰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 아내를 황급히 불렀다.
『왜요?』
『글쎄 빨리 좀 올라와요!』
『한 회 또 쓰셨어요?』
앞 치마에 물 묻은 손을 씻으며 옥영은 창황이 올라왔다. 한 회 분의 원고 가 끝나면 옥영은 그 원고를 소리내어 낭독을 해야만 했고 석운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다.
『아니요, 원고는 아직 안됐어. 어쩐지 잘 써지지가 않아서 걱정이요.』
『어째 그럴까?』
옥영이 근심스런 표정을 짓는데
『여보!』
석운은 벌떡 일어나서 아내의 물기 있는 촉촉한 손길을 획 잡아당겼다.
『아이, 깜짝이야!』
옥영의 말 소리는 석운의 품 안에서 났다. 남편의 격렬한 포옹을 받으며
『왜 그러세요? 갑자기……』
『당신이 예뻐서……』
『아이, 황송해라!』
『아내가 남편의 포옹을 받는데 뭐가 그처럼 황송할까?』
『아냐요, 여자들은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때, 언제나 그런 종류의 감정을 가지는 거예요.』
『그건 봉건적이야. 일대 일인데 뭐가 황송해?』
『그걸 봉건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피상적이에요. 아내들의 애정 속에는 그 런 감정이 근본적으로 있는 것 같아요.』
『그럴까?』
석운은 포옹을 풀고 두 손을 어깨에 올려 놓으며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들 여다 보았다.
『왜 갑자기 그러세요?』
『당신이 소중해서…… 고운 때가 묻은 입성처럼…… 이조시대의 청자기처 럼……』
『골동품은 낡을수록 가치가 있죠.』
옥영은 웃었다. 석운은 그러나 웃지도 않는 얼굴로 아내를 물끄러미 들여 다보며
『당신의 눈 언저리에 잡힌 잔주름이 갑자기 소중해졌오.』
『당신의 흰 머리털이 제게는 소중한 것처럼……』
『아, 흰 머리털!』
석운은 또 갑자기 영림을 생각했다.
『이제 내려가 봐요.』
석운은 다시 책상과 마주 앉았다.
옥영은 내려가면서 마음 속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뭐가 확실히 있기는 있어!』
남편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정체 모를 감정의 파도를 옥영은 민감하게 느 끼고 있었다.
『사십대의 위기!』
청춘의 막바지에서 느끼는 한낱 인생의 위기로써 강석운은 마침내 자기의 마음의 동요를 처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위기를 잘 처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비극이 오느냐 평온이 보 존되느냐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자기의 동요는 고영림이 라는 하나의 특정한 대상에서 온 것이 아니고 고영림과 만나기 이전부터 그 러한 동요를 받아 들일만한 마음의 틈사리가 이미 장만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장만되어 있던 틈서리 앞에 우연히 나타난 것이 고영림일 뿐, 구태여 고영림이가 아니라도 무방했을 것만 같았다.
『결국은 젊음에의 노스탈쟈다!』
그러기 때문에 고영림이가 아닌 다른 그 어떤 젊은 여성이라도 족할런지 몰랐다. 청년기에 달한 젊은이들이 특정한 대상 없이 연애를 연애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막연한 갈망처럼 자기도 역시 젊음을 연애하려는 한 사람이었는 지도 모른다고, 석운은 자기의 그러한 인생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발버둥치 기 시작하였다.
『영림은 안된다!』
고영림은 무섭다. 고영림의 의욕에는 피를 보고야 말 고도의 정열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인제 새삼스럽게 뿌리 깊은 가정을 파괴하면서 까지 연애 를 하려는 생각은 석운에게 없었다. 동경은 있지만 의욕은 없다.
『젊음의 냄새! 연애의 냄새!』
자기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만 그런 것들의 냄새일 뿐이라고, 이 즈음 에 와서는 고영림이가 찾아와 주지 않기를 바라는 강석운의 심정이었다.
그러한 심정으로 강석운은 오늘 저녁 전차에서 한길가의 고영림을 발견했 던 것이며 놀라움에 가까운 반가움 끝에 평온과 무관심의 표정을 의식적으 로 지어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석운의 노력과는 정반대로 출판기념회에서나 젊은 시인과의 술추렴 의 자리에서나 그는 쭉 고영림을 생각하고 있었고 영림과의 동반자인 젊은 청년의 위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취기가 거나해지면서 부터 고영림에게 향하는 그리움이 차차 구 체적인 촛점을 잃고 막연한 청춘에의 향수로 번지어 갔다.
『젊음의 냄새를 다오! 연애의 냄새를 다오!』
고영림이가 소공동 출판기념회장 앞에서 강석운의 참석 여부를 젊은이에게 묻고 있을 무렵, 석운은 맞은 편 중국대사관 골목을 건느면서 그렇게 중얼 거리고 있었다.
영림이가 만일 전차 길로 되돌아 나왔던들 강석운의 휘청거리는 모습을 혹 시 붙잡았을런지 몰랐다. 그러나 영림은 고독이 쥐어 짜버린 허전한 마음으 로 고달픈 별을 쳐다보며 어두운 길을 시청 쪽으로 걸어갔다. 강선생을 만 나게 하여 주지 않는 운명을 도리어 감사히 생각하면서 걸었다. 나무라면서 도 걸었다.
명동 입구를 지날 무렵, 석운은 저만큼 앞서서 걸어가는 남녀 한 쌍의 뒷 모습을 취안으로 바라보며 소설적인 공상을 감미롭게 하여 보다가
『혹시 영림일런지도 몰라……』
아까 본 영림이도 남자와 동반이었다. 취중이기에 무섭기는 커녕 반가움이 앞장을 섰다.
을지로 입구에서 남자가 택시를 타고 시청 쪽으로 사라질 무렵, 석운은 이 미 혼자 남은 젊은 여자의 등 뒤까지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야! 딴 여자다.』
헵번 머리였다. 여자의 뒤로 횡단 도로를 건너서는데 헵번 머리가 힐끔 뒤 를 돌아다 보다가,
『어마, 강선생님이 아니세요?』
여자는 멈칫 섰다. 반가와 하는 얼굴이었다. 젊은 얼굴이었다. 야실야실 예쁜 얼굴이기도 했다.
『아, 난 또 누구라고? 애리양이 아닌가!』
밤의 浪漫[낭만]
[편집]『선생님, 정말 오랫만이예요!』
애리는 바싹 석운의 앞으로 다가섰다.
『아, 참 오랫만이군!』
젊음에의 향수에 그윽히 젖어 있던 강석운의 이끼낀 감정 앞에 이슬 맺힌 신록처럼 젊은 얼굴이 반가운 웃음 한 송이를 야드르르 꽃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악수!』
애리는 서슴치 않고 손을 내밀었다. 석운도 서슴치 않고 애리의 손을 잡았 다. 나릇나릇한 애리의 네 손가락이 석운의 손바닥 속에서 힘을 주어 왔다.
『두 번째의 악수예요.』
표정과 꼭 같이 감회 깊은 애리의 말이었다.
『참, 그렇군! 지금 몇 학년인가? 졸업반?』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은 후 곧 학교를 그만 뒀어요.』
『그래? 그럼 지금은?』
석운은 애리의 유달리 눈에 뜨이는 모습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변했죠?』
『아, 약간……』
『천천히 말씀드리겠어요. 선생님 바쁘시지 않음 어디 잠깐……』
『아, 그럴까?』
『선생님, 약주 하셨네요.』
『아, 위스키와 배갈…… 독종들만 골라 가면서 마셨지. 목이 칼칼한 걸.』
『그럼 제가 맥주 사 드리겠어요.』
『애리가 술을 해?』
『저도 지금 그 독종을 먹고 오는 길이예요.』
『허어, 애리가……』
『종로로 가요. 제가 잘 아는 집이 있어요.』
그래서 따라 나서는데
『선생님, 좀 취하셨나봐요.』
휘청거리고 강석운의 팔 하나를 애리는 꼈다.
『취하긴……』
자기를 소중히 여겨 주는 애리가 고마와 팔을 낀 채 어둑컴컴한 보도를 석 운은 걸었다.
거리도 어둡고 취기도 있고 해서 통행인들의 시선이 과히 면구스럽지도 않 았다. 자기를 버려두고 저만큼 도망을 치려는 청춘을 붙잡아 온 것 같은 느 낌이 갑자기 왔다. 팔굼치 언저리에 젊음에의 향수와 연애의 냄새 같은 것 이 암향(暗香)인 양 그윽했다.
『저는 그 동안 쭉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를 믿고 살아 왔어요. 무서운 번 민이 마음을 쑤실 때, 저는 늘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음……』
연인들처럼 두 사람은 팔을 끼고 걸었고 연인들처럼 주고 받는 대화에 감 정이 사무쳤다.
연애의 냄새를 파는 여인과 연애의 냄새를 그리워하는 사나이에게 침묵이 흘렀다. 보도를 아로새기는 둘의 구두 소리가 제법 그 어느 불란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슬프다고 느껴야만 했다.
고독을 안고 남몰래 울던 애리에게 연애의 환각이 왔다. 청춘의 막바지에 서 젊음을 향수하던 작가 강석운은 감정의 표백을 하고 있었다.
어두운 거리다. 침묵은 말처럼 추억을 불렀다.
『애리, 아직 결혼 안 했어?』
『아뇨.』
『왜?』
『사상이 불온해서 모두들 싫대요.』
『사상이 불온하다? 무슨 소린데?』
『불량하다고…… 아프레걸이라고…… 연애의 냄새를 팔아 먹고 산다 고……』
『연애의 냄새를 판다?』
『선생님, 사실 테에요?』
『응?』
석운은 놀라며 애리를 힐끔 돌아다보았다.
애리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모나리자의 후예처럼 알지 못할 미소였다.
『연애의 냄새를 나더러 사라고……』
언뜻 돌린 시선 앞에 모나리자는 그냥 조용히 웃고 있었다.
『선생님에게는 특별히 무료로 제공해도 좋아요.』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는 걸. 모나리자의 미소와 같이 신비로운 말이 야』
『선생님은 제 비밀을 알고 계시는 분이니까……』
『아, 비밀…… 역시 마음을 쓰고 있는 모양이로군.』
『가로등은 추억인가! 그날 밤도 어두운 거리에 가로등이 졸고 있었죠.』
애리답지 않는 시심(詩心)이 애리에게 왔다.
『보슬비 내리던 어두운 밤 거리…… 선생님은 제 손을 힘차게 쥐어 주시 며…… 굳세게 살라고 말씀해 주셨죠.』
이년 전 어떤 봄 밤에 있었던 추억이었다. 많은 추억은 아니었으나 깊이를 지닌 추억이었다.
어느 날 밤, 강석운은 종로 삼가 뒷골목에 있는 K산부인과 원장을 방문하 였다. 원장은 강석운의 중학 동창이었다. 강석운이 진찰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학생인 듯 싶은 젊은 여자 하나가 원장과 마주 앉아서 조용히 울고 있 었다.
『아, 강군, 마침 잘 나타났네. 이런 문제는 암만해도 자네의 분야같은 데……』
원장은 그러면서 울고 있는 학생에게 강석운을 소개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니 좋은 의견을 듣기로 하자고 했다. 학생도 강석운의 이름을 잘 알고 있는 독자였기 때문에 일종의 신뢰감과 친근감을 가지고 인사를 했다.
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학생은 모대학 미술과 이학년, 집은 청진동인 데 어머니는 기생 출신, 다섯 번째의 계부와 동거를 하는 중 사흘 전 계부 는 가족들이 없는 틈을 타서 사이다에 수면제를 적당히 섞어 가지고 학생에 게 먹였다고 했다.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는 학생이 사이다 한 병을 거진 다 먹고 깊이 잠들 어 있는 사이에 겁탈을 당했다고 했다. 놀라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온전한 몸이 아니었다. 학생은 계부의 얼굴에다 재떨이를 뒤집어 엎고 미친 듯이 집을 뛰쳐 나왔다.
어두운 골목, 어두운 거리, 어두운 사바, 어두운 영혼…… 절망과 암흑의 오열은 밤거리를 뒤흔들었고…… 동대문 밖 동무의 집으로 가서 이틀 밤을 자고 난 애리에게 생각도 하지 못했던 공포 하나가 회오리바람처럼 왔다.
『임신을 하면 어떡하나?』
그래서 K산부인과를 찾은 애리였다.
『강군, 이건 분명히 자네의 영역이네. 나로서는 이 학생을 위로할 도리가 없네. 학생의 정조는 분명히 겁탈을 당했으니까……』
강석운은 오랜 침묵 끝에 열성을 가지고 애리에게 말했다.
『학생, 실컨 우시요. 그러나 울음만 가지고는 학생의 불행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요. 이윽고 울음이 그치는 순간, 학생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 직 하나 학생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거요.』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비교적 눈물이 적은 사람이예요.』
구세주나 만난 것처럼 애리는 석운을 쳐다보며 좀 더 명확한 말을 듣고자 했다.
『눈물이 적다는 것은 학생에게 있어서는 불행 중 다행이요.』
『선생님, 저는 독심을 먹으면 어느 정도 제 자신을 지배할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이제 그 누구에게도 떳떳이 바칠 수 있는 정조는 없어지고 말았어요.』
『아니요! 학생에게는 아직도 떳떳한 정조가 있오!』
『옛?』
『지나간 시대에는 육체적 처녀성을 가지고 곧 정조라고 보아 왔지요. 그 렇지만 오늘 이 시대에서는 그렇지 않소. 정신적인 협력이 없는…… 영혼의 가담이 없는 불가항력이 학생에게서 빼앗아 간 것은 학생의 정조가 아니고 다만 한낱 과학적인 처녀성일 따름이요. 정조와 육체의 처녀성을 혼동하지 않는 사고 방법만이 이 불행으로 부터 학생을 구할 것이요.』
애리는 영리한 사냥개처럼 한참 동안 귀를 가만히 기울이고 있다가 이윽고 명확한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밤이 이슥해서 강석운은 병원을 나섰다. 애리도 따라 나섰다.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밤이었다. 돈화문 앞 넓은 길을 전찻길로 걸어 나 가면서 석운은 여러 가지로 애리를 격려하고 타일렀다. 여기서 마음이 꺾이 면 앞날을 그르치기가 쉽다고 제 일처럼 석운은 걱정해 주었다.
보슬비 속에서 가로등이 가다가 하나씩 졸고 있었다. 달무리처럼 번져진 가로등 주변에 빗방울이 은실같이 나부끼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애인같이 둘이는 걸었다. 둘이가 다 코트의 깃을 세우고 조용히 걸었다. 애리는 고개를 수그리고 걸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전찻길로 나서서 작별의 인사를 애리는 정중히 했다.
『애리양, 굳세게 살아야 해요. 슬픔에 젖는다는 것은 자위는 될런지 몰라 도 전진(前進)은 아니오.』
『아, 처음 뵙는 선생님인데 이처럼 저를……』
애리는 또 울었다. 네 번이나 계부를 바꾸어 온 뜨내기 가정에서는 보지 못한 다사로운 인간애를 느끼고 애리는 우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꼭 믿고…… 이제 집에 돌아가서는 죽어도 울지 않겠읍 니다.』
『좋은 말이야! 애리양은 총명해서 좋아! 자아, 굳세게 살기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져요.』
『네.』
악수가 끝난 후, 애리는 종로 사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강석운의 뒷 모습을 오랫동안 십자로 한 모퉁이에서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오늘 밤 처음 보는 애리였다. 그러나 이년 전의 그 순진하던 애 리는 이미 아니었다. 헵번 머리에 몬로 타이트, 술도 먹을 줄 알고 연애의 냄새도 팔 줄 안다는 애리로 변모를 한 것이다. 변모의 이유가 석운에게는 궁금했다.
『그 때와는 무척 달라졌죠?』
『응, 대단히 달라졌는 걸!』
『그렇지만 그건 제 탓이 아니에요. 사나이들이 원하니까 연애 장수를 차 려 놓은 것 뿐인데요.』
『사나이들이 원한다?』
『선생님, 시치미를 떼셔도 소용 없어요. 이년 동안 공부를 한 걸요.』
『허어!』
그러는데 애리의 팔꿈치가 콕 하고 석운의 옆구리를 찔러 왔다.
『선생님도 저와 이렇게 팔을 끼고 걷는 것, 나쁘지 않으시죠?』
『…………』
석운은 마음이 뜨끔해지며 팔을 빼려고 했다. 애리는 놓아 주지 않으며
『아니에요. 팔을 놓자는 게 아니고…… 나쁘냐 좋으냐? 솔직히 대답해 보 시라는 말이예요.』
『그런 건 왜 갑자기 묻는 거야?』
석운은 대답을 회피하고 뚱딴지 같은 말을 했다.
『진정으로 알고 싶어서 그래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싫다는 남자 가 있는지 그게 알고 싶어요. 선생님도 지금 기분 나쁘지 않으시죠?』
『그래 나쁘지 않아.』
『좋죠?』
『좋아.』
『인제 알았어요. 이년 전에는 계부가 저를 왜 그렇게 했을까하고, 무척 의문이었어요. 근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사나이들이란 모두가 다 짐승 같은 계부와 어슷비슷 하다는 말이에요.』
『음……』
석운은 깊은 신음을 했다. 술이 갑자기 깨는 것 같았다.
『사나이들이 모두 다 그렇담 저는 또 저대로 살아 나갈 수 밖에 없죠. 사 내들이 저를 잡아 먹으려는데 가만히 앉아서 그들의 밥이 될 수는 없는 일 아녜요?』
『애리가 변모한 이유를 알 것 같애.』
『아, 저리로 들어가시죠.』
네거리를 건너 종로 뒷골목으로 둘이는 접어 들어갔다.
어머니의 친구가 경영한다는 비어 홀 한 구석에서 애리는 자기도 마시고 석운에게도 쪽기를 권했다. 전작이 있는 터라, 취기는 그냥 돌기만 했다.
『그 동안 선생님을 한 번 찾아 뵙고 싶었지만 생활의 틀이 잡히지 않아서 그만……』
추억과 현실이 얼버무려진 표정으로
『그 때는 정말, 선생님의 친절이 눈물겨웠어요.』
『나도 가끔 애리양이 그후 어떻게 됐을까 하고 궁금했었지. 그래 지금 은?』
『직업여성 이예요.』
『무슨 직업인데?』
『근사하죠. 술장사네 집 선전부장이예요.』
『술장사?』
『왜 신문에 늘 광고 나잖아요? 「여자는 양귀비, 술은 백부용」이라 고…… 그 회사에 있어요.』
『허어, 계부에 대한 복수심에서, 남자들을 모조리 술과 연애의 냄새로 때 려 눕힐 셈이로군!』
『호호호……』
『하하하……』
둘이는 차차 더 취기가 돌아만 갔다.
『실은 그래서 선생님에게 술을 자꾸만 권하는 거예요. 선생님 정신을 똑 똑히 차리셔야지.』
『음, 사실 취했어!』
『술이 취해야만 남자들은 연애 냄새를 잘 사 주니까……』
그러면서 애리는 야들야들하게 웃었다.
『참 변했는 걸! 이년 동안에 그 처럼 변할 수가 있을까?』
『사람이란 변하려면 하루 아침에도 변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헌데 선생 님!』
애리는 갑자기 조금 엄숙해지며
『선생님 말씀대로 저는 저 자신을 정신적인 정조의 소유자라고 믿고 살아 왔어요. 그래서 남에게 뿐만 아니라, 제 자신도 저를 정신적인 처녀로 치부 를 하고 있어요.』
『그래야지. 그렇지 않으면 비뚜루 가!』
『그런데 선생님, 요즈음에 와서는 그러한 신념이 자꾸만 허물어져 가요.
나는 처녀가 아니다. 나는 이미 정조를 잃어 버렸다. …… 그렇게만 생각이 들어서 자신이 차차 없어져가요. 결혼할 생각도 가끔 해 보지만 자꾸만 무 서워요. 그러다가는 괴로움에 지쳐서 혼자서 울지요. 낮에는 처녀로서 뻗대 지만요.』
『그래선 안되겠는 걸!』
그러나 이 한 마디는 단순한 인삿말임을 석운은 순간 느꼈다.
아까 애리를 만난 순간부터 석운은 처녀가 아닌 애리로서 저도 모르는 사 이에 치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기도 취기지마는 팔을 끼는 애리를 석운의 감각은 확실히 허술하게 대하고 있었다. 나는 너의 비밀을 안다고, 고의적은 아니지마는 강석운의 피부는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선생님, 바른 말씀 좀 해주세요. 선생님도 저를 처녀와 꼭 같은 감정으 로 대할 수는 없으시죠? 어딘가 허전한 여자로 보이시죠?』
『…………』
석운은 자신의 감각을 속이기가 싫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 안하셔도 이제 알았어요. 역시 제 생각과 마찬가지예요. 역시 저는 불행할 수 밖에 없어요. 저는 이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작정이예요.
결혼은 해도 무방하지만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처녀로서의 사랑 말이예요. 이제부터는 이 애리가 미망인의 렛델을 붙이 고 다닐 테예요.』
그러면서 애리는 딱 식탁에 엎디어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울고 있는 애리의 어깨 위에 파도가 인다. 석운의 취안이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불행한 여자라고, 동정을 하고 있었다.
처녀성의 상실이 이처럼 한 여성의 영혼을 외롭게 하고 비굴하게 만드는 것인가 하고, 그것의 존귀함을 새삼스럽게 석운은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석운은 애리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며
『자아, 인제 그만 울고…… 취하면 감정이 부풀어 오르니까, 이제 돌아가 요.』
『선생님, 감사해요. 그렇지만……』
애리는 얼굴을 들고 눈물을 닦아 내며
『아무리 독심을 먹어도 감정이 자꾸만 비굴해지는 걸요. 그래서 기승을 부려가며 뻗대 보지만……』
애리는 일어서서 제 손으로 계산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 계부는 지금도 같이 있나?』
『어디가요.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머니한테 쫓겨났지요.』
『나쁜 놈이야!』
『사내들은 다 나빠요. 그렇지만 선생님만은 안 그러실 거예요.』
애리는 그러면서 석운의 팔을 끼고 캄캄한 골목을 걸어 나왔다.
『글쎄, 나도 나쁜 놈인지 모르지!』
자조하듯이 석운은 말했다.
『요즈음 며칠은 못 읽었지만, 선생님의 「유혹의 강」을 읽어 봄 그런 생 각이 더 한층 절실해져요. 선생님, 왜 그런 소설을 쓰세요? 이전 작품들은 안 그랬었는데……』
석운은 대답을 하지 않고
『자아, 이제 헤어지지. 청진동이랬지?』
한길로 나서면서 석운은 애리의 팔을 놓으려 했다.
『아냐요. 삼가까지만 모셔다 드리겠어요. 이년 전 선생님과 헤어진 지점 까지……』
그래서 팔을 낀 채 둘이는 또 걸었다. 묵묵히 걸었다.
『누가 보면 연인들 같겠죠?』
얼마만에 애리의 쓸쓸한 한 마디가 보도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애리는 고독하구만! 애리의 고독을 메꾸어 줄 사람이 빨리 나타나야겠는 데……』
『없어요. 모두가 다 연인들같이 보여 주기만 했을 뿐이었어요. 무대에 올 라선 배우들처럼 연애의 흉내만 냈을 뿐이예요.』
『연애의 흉내! 일종의 연애 유희였군!』
『유희도 제게는 아니었어요. 유희는 유희로서의 가치가 있을 테니까요.
말하자면 일종의 모의연애(模擬戀愛)……』
『모의연애!』
『마음은 고독하고 행동은 화려했지요. 제 모양, 오죽 화려해요? 제 행동 좀 명랑해요? 이렇게 남자들과 팔을 턱 끼고 걸어가면 누가 저를 초라한 마 음의 소유자로 알겠어요?』
『음.』
어둑 어둑한 밤 거리가 애리의 한숨과 함께 감상에 젖어 있었다. 낭만을 찾기에는 방랑하는 애리의 영혼의 독백이 지나치게 구슬프다.
『선생님, 여기서 헤어졌지요?』
삼가 한 모퉁이에서 애리는 말했다.
『자아, 오늘도 또 여기서 헤어지지.』
『병원 앞까지만 더 걸어 주세요. 시주를 하시는 셈 치시고……』
『그러지.』
돈화문을 향하여 둘이는 또 걸어 들어갔다.
애리의 소원이 지나치게 처량하다. 이처럼 화려한 모습의 애리가 그처럼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일 줄은 정말 몰랐다.
『돈화문 앞까지만 모셔다 드리겠어요.』
병원 앞을 그대로 지나치며 애리는 또 말했다.
『그럼 그러지.』
『누가 보면 연인들 같겠죠?』
아까 한 말을 애리는 또 되풀이했다. 취기와 고독이 애리의 기억을 몽롱하 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연인들처럼 걷는 것, 선생님 싫으세요?』
『싫긴……』
『이것도 일종의 모의연애죠.』
『음, 모의연애.』
『선생님의 영혼을 제가 차지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될 수 밖에 ……』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석운은 애리가 뿌리는 일종의 서글픈 분위기 속으로 한 발 한 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애리의 감상이 석운에게는 한 줄기 낭만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작중의 인물처럼, 스크린의 주인공처럼 로맨틱한 심정이 취기와 함께 자꾸만 확대 되어 가고 있었다.
정신적인 끄나불이나 동요는 희박했지만, 그리고 한 낱 값싼 인연으로 맺 어진 오늘 밤의 해후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우연한 해후가 인간의 운명을 좌 우하는 경우가 결코 적지 않음을 석운은 생각하고 있었다.
『선생님, 댁이 혜화동 몇 번지죠?』
애리는 생각난 듯이 물었다. 번지를 가르쳐 주었더니 애리는
『어떻게 됨 빠아나 땐스 홀을 차려 놓을런지 몰라요. 개점식 날 선생님을 모시겠어요. 꼭 와 주시죠?』
『빠아를?』
『아마 땐스 홀이 될 거예요. 초대장 보낼 테니 꼭 오셔야 해요.』
『애리양이 한다면 가겠지만…… 허어, 땐스 홀을 ……』
석운은 적지 않게 놀랐다.
『술 회사에서 선전이나 해 주는 것 보다야 얼마나 좋아요?』
『자본이 많이 들 텐데……』
『그 점은 걱정 없어요. 우리 회사 전무님이 뒷받침을 해 준다니까요.』
『무슨 회사지?』
『한성양조라고, 노량진에 있어요.』
『아, 한성양조? 그럼 저 고종국씨가 사장인?』
『어마, 고사장을 아세요?』
『알지, 정능 바로 내 가친과 옆 집에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고전무는 바로 그 고사장의 아드님인 걸요. 나를 못 쓰게 넘 어뜨린 계부와 어슷비슷한 인간이죠.』
『음, 그렇다면 뒷받침을 해 주는데는 그만한 요구 조건이 있을 게 아닌 가?』
『요구 조건이라야 뻔하죠.』
『그래 그런 점을 다 인정하고 들어가는 건가?』
『인정하는 척하면 되잖아요?』
『위험한 걸!』
『위험이라야 별 것 있겠어요? 먹고 살아야 할 판인데……』
『그렇지만 그 쯤 되면 연애의 냄새만 가지고는 잘 안될 걸.』
『그 점은 염려 없어요!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사이다만 조심해서 먹음 돼 요. 호호호……』
애리는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삼키며
『참, 선생님 그럼 영림이도 아시겠네요.』
『응? 영림이?』
저도 모르게 충격을 지닌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어마, 어쩌면 영림이도 아시네요. 영림인 제 중학 동창인데요.』
『아니, 고영림이가 바로 그 고종국씨의 따님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그럼 어떻게 영림이를 아세요?』
『아, 그저…… 어떻게 알게 됐어.』
『선생님, 수상해요. 약간……』
애리의 육감은 지독히 빠르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문학을 좋아하는 학생인데……』
『여학생 시절부터 선생님 숭배자였어요. 옳아! 알았어요. 인제 대강 윤곽 은 알았어요.』
애리는 제멋대로 생각을 하고 제멋대로 수긍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 그 영림이와 늘 만나는가?』
『궁금하신 모양이니 알으켜 드리겠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글쎄 가만 계셔요. 오늘 저녁 무렵에도 전화로 만나 봤지요. 미스터 송 과 결혼을 한다더군요.』
영림이와 강선생이 어떠한 사이인지는 자세히 몰라도 앞질러 가면서 애리 는 침을 놓았다.
자기가 강선생을 사모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마는 공연히 그저 그 한 마디 를 해 놓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질투라기보다도 차라리 고독의 발악인지 도 모른다.
『미스터 송? 누군데?』
『송준오라고, 왜 영림이 때문에 독약을 마셨던 싱검둥이 있잖아요?』
『아, 바로 그 청년과……』
「칸나의 의욕」속에 그런 대목이 씌어 있던 생각을 석운은 했다. 동시에 아까 을지로 네거리에서 본 영림의 동반자를 생각했다. 그래서 영림이가 자 기를 찾아 주지 않았는지 모른다고 석운은 무슨 자기의 애인이라도 빼앗긴 사람처럼 서운한 생각이 불쑥 들어
『아, 결혼을 하는군!』
조심성 없는 한 마디가 감정을 머금고 흘러 나왔다.
『선생님, 어지간히 낙망을 하시는 모양인데……』
애리는 애리대로 또 갑자기 쓸쓸해졌다.
『낙망은 누가……』
『그만함 다 알아요.』
송준오도 그렇고 강선생도 그렇고, 고전무나 고사장, 그 밖의 모든 남자들 이 자기에게서 바라는 것은 오직 육체의 냄새일 뿐, 영혼의 향기는 아닌 듯 싶어 애리는 다시금 어둡고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찾아드는 것 같은 서글픔이 자꾸만 복받쳐 오르고 있었다.
애리는 이제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가로등이 번진다. 눈물이 되살아 나오는 시야 속에서 어릿어릿 가로등이 자꾸만 번지어갔다.
『애리, 왜 갑자기 말이 없어?』
돌아다보니 애리는 조용히 울고 있었다.
『애리는 술이 좀 취했어. 자아, 이제 여기서 헤어져요. 집으로 가서 한잠 푹 자고 나면 설움도 거뜬히 가실 거야.』
『원남동까지 모시겠어요.』
눈물을 닦아 내며 애리는 가만히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집이 자꾸만 멀어지지 않아?』
『선생님, 저와 같이 걷는 것이 싫으세요?』
애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양공주 같아서 싫으심 전 돌아가겠어요.』
『아니야. 무슨 그런 말을 애리는…… 자아, 그럼 원남동까지 같이 가 요.』
애리의 감정을 건드린 것 같아서 석운은 풀어져 가는 애리의 팔을 잡아당 겨 좀더 탐탁히 꼈다.
별들이 옹기종기 돋아난 훤한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시꺼먼 굴다리가 머리 위에 가로 놓여 있었다.
『선생님까지 저를 탐탁하게 알아 주시지 않는군요. 허술한 인생! 허술한 정조!』
그러다가 애리는 불현 듯 걸음을 멈추며 석운의 품 속에 얼굴을 묻고 격렬 히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왜 그런 말을 애리는 하나? 누가 애리를 허술히 생각했다는 거야?』
『선생님만은 제 초라한 마음을 알아 주실 줄로 믿고 있었지만……』
『아니야, 애리는 너무 자학(自虐)이 지나쳐. 낡은 정조관을 버려요. 애리 에게는 아직 깨끗한 영혼의 정조가 깃들어 있는 걸!』
석운은 애리가 가엾어 흐느끼는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나서 애리를 부축하 듯이 하며 다시금 긴 돌담 밑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건 거짓말이예요. 거짓말이지만 감사히는 생각해요.』
그러다가 애리는 석운을 쳐다보며
『선생님, 제 비밀, 영림이에게 이야기하심 안돼요! 전 죽어 버릴 테예 요!』
『그런 말을 뭣하러 할까?』
원남동에서 석운은 택시 두 대를 잡았다.
『이 후에라도 제 힘에 겨우는 일이 있을 때…… 못 견디게 쓸쓸하고 허전 할 때는 선생님을 찾아 뵙고 힘을 빌리겠어요.』
『좋아요, 언제든지 찾아 오면 같이 생각하고 같이 울어 줄 테야, 잘 가 요.』
『선생님 안녕히……』
악수를 하고 차는 떠났다. 하나는 창경원 쪽으로 하나는 돈화문 쪽으로 캄 캄한 길 위에 각기 두 줄기 헷트라이트가 뻗어 가고 있었다.
모두가 다 자기다운 따뜻한 보금자리로 찾아 들어가는데……
『애리에게만 그것이 없다!』
쿠션에 우두커니 앉아서 아귀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을 애리는 또 찾아 들어 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송준오가 찾아왔더라는 말을 어머니는 했다.
『그가 왜 찾아왔을까……』
일루의 희망 같은 것이 갑자기 애리에게 왔다.
不幸[불행]한 밤
[편집]그보다 얼마 전, 무교동 중국 요정 이층에서 고영해와 유현자는 마주 앉아 있었다.
음식에는 손 하나 대지 않는 유현자 앞에서 고영해는 제 손으로 맥주를 따 라 마시며 의외라는 듯이 유현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저는 전무님이 정말로 저를 사랑해 주시는 줄로만 믿고 있었어요. 그렇 지만 여러 가지 모로 따져 보아서 제게 대한 전무님의 호의가 암만해도 일 시적인 장난 같이만 생각키워요.』
『그게 무슨 말이야, 현자? 내가 현자를 어떻게나 소중히 하고 귀애하는 지, 그걸 현자는 통 모르고 하는 말이야.』
고영해는 펄쩍 뛰어 보이며 의외라는 표정을 크게 지었다.
『말씀만은 감사히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곰곰히 생각해 봤어요. 전무 님에게는 사모님이 계시고…… 또 애리도 있지요.』
『애리라고? 그건 오해야! 애리는 비서니까 하는 수 없이 데리고 다니는 것 아닌가!』
유현자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가
『저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요. 그래서 처음에는 전무님의 호의를 정말로 참된 애정으로만 생각하고 기뻤어요. 그렇지만 저번 날 밤, 여기서 전무님 을 뵈었을 때, 전무님이 제게서 요구하는 것이 제 애정이 아니고……』
유현자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부끄럼이 앞장을 서서 견딜 수 없다. 하마터면 남성들의 야욕과 애정을 혼동할 뻔 했던 저번 날 밤을 생각하며 무사히 봉변을 면할 수 있었던 자기 자신을 유현자는 천행으로 생 각하는 것이었다.
『그럼 현자는 그런 것이 사랑이 아니면 뭘 가지고 사랑이라고 보는가 말 이야. 남녀의 사랑이란 결국 다 그런 거야.』
철색 피부에 도톰도톰한 유현자의 모습이 새하얀 얼굴의 애리보다도 한층 더 고영해의 애욕을 도발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지, 애리의 개방적인 애욕 의 도발보다도 유현자의 부끄럼을 타는 발가우리한 철색 피부에 고영해는 좀 더 격렬한 끌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좀 더 깊고 좀 더 긴 애정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유현자는 핸드백을 열고 흰 사각 봉투 하나를 꺼내 고영해 앞으 로 가만히 밀어 놓았다.
『응? 이게 뭐야?』
술잔을 탁 내려놓고 고영해는 봉투 속을 들여다 보았다.
저번 날 밤, 유현자의 조용한 항거로 말미암아 실패한 직후, 고영해가 몰 래 유현자의 백속에다 넣어 준 바로 그 봉투였다. 봉투 속에는 십만환 짜리 수표 한 장과 조그만 종이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현자! 그걸로 멋진 양복 한벌 해 입고 날마다 내 눈을 화려하게 해 주어요.》 종이 조각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미리 써 가지고 온 봉투를 실패 직후 에 넣어 준데는 고영해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고영해는 수표와 유현자의 멋진 크림색 후레아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아니, 어떻게 된 노릇이야? 그 양복은?』
푸루죽죽하던 유현자의 원피이스가 지금 입고 있는 크림색 후레아로 변하 고 구두와 퍼머머리가 갑자기 환해진 것이 바로 그런 일이 있은지 며칠 후 의 일이었기에 고영해는 내심 회심의 웃음을 지으면서 유현자가 감사의 뜻 을 표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현자, 어찌 된 셈이야?』
그러면서 고영해는 수표를 한 번 더 들여다 보았다. 분명히 고영해 자신의 수표가 아닌가.
『현자, 왜 이 수표를 쓰지 않았어?』
어리벙벙한 얼굴로 고영해는 다급하게 물어 왔다.
현자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고영해의 얼굴을 쓸쓸히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가서야 이 봉투를 발견했어요. 그리고는 하루 밤새껏 울었어 요.』
『왜 울어?』
『직업 여성들의 모습이 가엾고 처량해서 울었어요.』
『무슨 소린지, 난 정말 통 모르겠는걸!』
고영해는 순간, 유현자의 다음 말을 재빨리 눈치를 채고 얼버무렸다.
『자아, 쓸데없는 말 그만 하고 맥주나 한잔 들어요.』
하고 권해 오는 고영해의 술 잔을 가만히 밀어 놓으며
『제가 언제 술을 먹었나요?』
유현자는 얼굴을 붉히며
『전무님은…… 제가 얼마동안이라도 호의를 가졌던 전무님이기에 솔직하 게 말씀 드리기로 하겠어요.』
『아, 그건 관계 없지만……』
『저는 하룻밤 울며 새우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어요. 회사를 계속해서 다니려면 그 철 늦은 퍼러무리한 양복을 벗어 버려야만 하겠다고 생각했어 요. 그건 절대로 허영에서가 아니예요. 젊은 여자니까 허영도 다소는 있겠 지만 그것보다도 옷이 남루하면 그만큼 유혹의 기회를 남성들에게 주는 것 같아요.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자라는 인상을 남자들이 가질 것만 같아요.
전무님도 제 옷이 그처럼 초라하지만 않았던들 적어도 옷감 한 벌을 가지고 저의 일생에 관한 문제를 그처럼 손쉽게 처리해 보려는 생각은 못 가졌을 거예요.』
『원 그게…… 그게 무슨 당치 않은……』
붉으락 푸르락, 고영해의 표정은 칠면조처럼 변화가 풍부했다.
『그래서 이튿날, 집에 있는 돈을 털고 모자라는 건 친척을 동원시켜서 부 랴부랴 지어 입은 것이 이거예요. 머리도 손질하고 구두도 갈아 신고……
오늘 날, 직업 여성을 비롯하여 거리에 나다니는 여자들이 대개는 화려하지 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애리 같은 여자만은 아닐 거예요. 먹을 것을 못 먹고도 입고 나서야만 하는 현실을 전무님도 조금은 알아 주셔야 하실 거예 요.』
고영해는 이상 더 자기를 변호하려 들지 않았다. 그만한 학식의 발판이 있 었기에 흑백을 가릴 줄도 또한 알고는 있는 것이다.
『옷차림으로써 사람을 다루어 보는 이 현실을 저는 그 때까지 모르고 있 었어요. 그래서 저는 나이는 애리와 같지만 생각은 무척 어렸어요. 웃음을 팔고 사랑을 팔고, 그래서 차림새가 화려한 사람들도 물론 있을 거예요. 그 렇지만 그런 사람은 눈에 잘 뜨일 뿐, 수는 극히 적을 거예요. 대부분은 생 활을 위해서, 생존 경쟁을 위해서 옷차림을 하는 거예요. 허영도 있겠지만 요.』
『현자, 미안해. 그런 걸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럼 이건 내가 도로 넣어 둘테야.』
『제발 넣어 두세요. 그리고 저 내일부터 회사를 그만 두겠어요.』
『응? 그건 안돼!』
고영해는 진심으로 유현자를 막았다.
『아냐요, 전무님의 장난이 너무 심해요. 제 손등에 도장을 찍고…… 사원 들이 그걸 보았으면 저를 뭐로 생각하겠어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회사 에 나갈 수가 없어요.』
『음, 그것도 역시 내가 실수했어.』
고영해는 자기의 과오를 명백히 인정하고 들어갔다.
『애리에게는 애리로서의 생활 태도가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까지 해 서 생활을 위하고 싶지는 않아요.』
『현자는 참으로 좋은 말을 했어! 그렇지만 회사를 그만두는 것만은 단념 해 줘. 나도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까……』
『그럼 저는 먼저 실례하겠어요.』
할 이야기는 인제 다 했다. 이상 더 고전무와 마주 앉아 있다가는 또 무슨 봉변을 당할 것만 같아서 유현자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현자는 나를 무서워 하는 모양이로군.』
고전무도 빙그레 웃으며 홀가분히 따라 일어섰다. 유현자가 이미 자기를 경계하고 있는 이상 뭐라고 지저분하게 늘어놓는 것은 도리어 싱거운 일임 을 고영해는 안다.
『오늘은 고영해의 인격이 폭락인 걸! 그러나 내가 현자를 진심으로 사랑 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야.』
밤 거리를 광화문 쪽으로 걸어 가면서 고영해는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현자에게 대해서 양심의 부끄럼 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 다 만 수표를 현자에게 준 것이 잘못이었어. 그러나……』
소그듬히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유현자의 옆 얼굴을 힐끔 바라보고 나서
『그러나 나는 현자와 헤어지기 전에 꼭 한 마디만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
『말씀하세요.』
『나는 이제 요정에서 현자의 꾸지람을 솔직하게 받아 들였어.』
『아이, 꾸지람이라고……』
유현자는 다소 송구해졌다.
『그래서 일단은 현자에게 내 잘못을 빌었어. 그러나 이대로 헤어져 버리 면 현자는 영원히 이 고영해라는 인간을 한 사람의 악인으로서 치부를 할 거야. 그것이 두려워서 한 마디만 이야기해 두겠어.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악인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테니까……』
유현자 하나 쯤 다루는 것은 고영해의 연륜과 학식으로서는 문제도 아니었 다.
사실 유현자는 고전무의 이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자기가 약간 지나친 것 같은 생각도 들었고, 한 걸음 더 나가서는 고전무의 참된 사랑을 자기가 공 연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도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두 가지 점에서 현자한테 오해를 사고 있어. 하나는 현자에 대한 나의 사랑의 표현이 약간 다급했다는 것, 또 하나는 돈을 주었다는 것, 이 두 가지야.』
『…………』
『그러나 그거야 말로 현자의 얼토당토 않은 오해야. 애정이 깊으면 깊을 수록 당연히 오는 인간의 욕망을 현자는 아주 낡은 시대의 도덕관을 가지고 죄악시하는 거야. 그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고 애정의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 는 애정의 꽃이야. 온갖 애정의 봉오리는 결국에 가서는 꽃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현자가 나라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언 밖에는 안되니까…… 그렇다 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
『또 하나는 돈 문제…… 인간의 모든 애정은 결국 돈으로 환산될 수 밖에 없다는, 말하자면 현대의 생리를 알아야 할 거야.』
『무슨 말씀이예요? 돈과 정조를 바꾼다는 뜻인가요?』
현자는 시선을 가만히 들며 물었다.
『그런 게 아니고…… 오늘날 돈이란 인간이 지불하는 귀중한 노력에 대한 댓가거든. 우리가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번 돈을 정 없는 데는 한 푼도 쓸 수가 없어. 사람이 죽었을 때의 부의금, 경사가 있을 때의 축의금, 사회의 기부금, 빈민에게의 동정금, 기타 인간의 온갖 정의를 표현하는 하나의 수 단으로서 우리는 돈을 사용하는 거야. 우리가 흘린 피와 땀을 나눠 주는 거 야. 말하자면 정을 나눠 주는 거야. 오늘의 돈은 물건을 사고 파는 수단으 로서도 사용되고 있지만 인간의 순결한 애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도 사용 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자는 알아야 해요. 현자의 정조를 사려는 돈이 아니 고, 현자에 향하는 이 안타까운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돈이었어!』
고영해는 현자의 어깨를 한 번 어루만져 주며
『오해하면 슬퍼요. 내 말 알아 듣겠어?』
고전무의 말을 들어 보니 그럴 성도 싶었다. 돈이 인정의 표현 수단이라는 말에는 유현자도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물건의 가치 뿐 아니라, 온갖 정신적 가치가 돈으로써 표시된다는 것이 현대의 생리거든. 돈이라고 하면 덮어 놓고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위인들 도 있는 것 같지만 천만에 피와 땀의 결정이 돈이니까 돈처럼 고귀한 것은 없다는 말이야. 사랑은 주는 것이야. 애인에게 주는 돈의 금액이 많으면 많 을수록 그만큼 사랑이 깊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거니까…… 현자, 오해하지 말아요!』
그러면서 현자의 어깨를 옆으로 한 번 꼭 꼈다가 놓아 주며
『자아, 이제 여기서 헤어져요.』
광화문 네거리였다. 현자는 효자동에서 산다.
『현자에게 오해를 산 돈이니까 오늘은 내가 도로 넣어두지만…… 그럼 어 떡하나? 빚을 내서까지 사 입은 양복인데……』
『전무님의 말씀 잘 알아 듣겠어요. 그렇지만 갖고 가세요.』
『음, 역시 오해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로군! 하여튼 이제부터는 절대로 사 원들 앞에서 무안을 주지 않을 테니 회사는 꼭 계속해 다녀야 해요.』
『정말이시죠?』
『정말이래도 그래!』
고영해는 걸음을 멈추고 유현자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기념비 옆 컴컴한 골목 어귀였다.
『현자, 내가 현자를 깊이 사랑한다면 현자는 어떡할 셈인가?』
『애리가 있는데…… 전무님은 애리 좋으시죠?』
『그런 양공주 같은 걸 누가……』
『그래도…… 암만 해두 전무님은 저를 희롱하는 것만 같애요.』
『또 그런 말을……』
고영해는 휙 유현자를 끌어 안았다.
『정말 그러지 마세요. 사모님이…… 사모님이 알고 계시는데……』
유현자는 몸을 비비적거리며 고영해의 품 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힘을 썼 다.
『별거생활을 하고 있는지가 오랬어! 내일이라도 이혼해 버리면 그만 아니 야?』
『그런…… 그런 말씀 하시면 안돼요! 아……』
고영해의 입술이 마침내 왔다. 볼을 무섭게 비벼 대던 입술이었다.
『정말 그러심 고함을 치겠어요!』
그 말에 고영해는 유현자를 탁 놓아 주며
『현자! 실례가 됐다면 용서해요! 그렇지만 오늘 밤 집으로 돌아가서 곰곰 히 생각해 보면 알 거야. 오늘 밤부터 현자는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할 테니 까…… 죽을 때까지 현자는 내 입술을 잊지는 못해!』
수수께끼와도 같이 신비로운 한 마디를 남겨 놓고 한길로 도로 나와 택시 한 대를 고영해는 세워 놓고,
『자아, 현자, 타고 가요.』
『전무님이나 타고 가세요. 저는 전차를 탈 테예요.』
『또 쓸데 없는 말만……』
억지로 등을 밀어 차에 태우고 대금을 지불하면서 현자의 귀에다 입을 갖 다 대고 속삭이었다.
『지금은 내 행동에 다소 무리가 있는 것같이 생각키울 거야. 그렇지만 며 칠을 두고 곰곰히 생각하면 내 다사로운 애정에 현자는 감동할 거야.』
그러나 유현자는 아무 말도 없이 원망과 감사가 얼버무려진 눈동자로 고영 해를 한 번 바라보고 나서 이윽고 효자동 쪽으로 사라져 갔다.
『참으로 순진한 여성이다!』
다른 택시를 불러 타고 서대문을 향하여 달리면서 고영해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다소간 느끼고 있었다. 애리에게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가책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유현자와 아내 한혜련을 바꾸어 볼 생각을 불현 듯 해 보며 그 거추장스런 양심의 가책을 무마하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오늘은 재수 없는 밤이 되고 말았다.』
아까는 애리의 그 창부처럼 서글픈 모습에서 양심의 흔들림을 느꼈고 이제 와서는 또 다시 유현자의 입술 한 번 빼앗은 행동에서 그것을 다시금 느꼈 다.
『이 양심의 소리들을 철저히 때려 눕히지 않는 이상 나에게는 완전 무결 한 행복은 오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불유쾌한, 재수 없는 밤이다!』
이처럼 유쾌치 못한 밤을 고영해는 때때로 맞이하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에 통일이 있어야만 인간은 만족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소위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거추장스런 것이 가끔 머리를 들고 반항을 하는 데는 정말 질색이다. 생각은 분열되고 행동은 둔해진다. 다리 를 잘리운 도마뱀처럼 행복한 의옥은 팔딱거리기만 했지 전진이 없다.
참으로 불쾌한 노릇이다. 양심이란 완강한 적을 철저하게 무찔러 버리기 전에는 불쾌한 일생을 살아 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과거 자기에게 양 심의 소재를 깨우쳐 준 온갖 교양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한 불쾌한 감정을 한 아름 품은 채 고영해가 아현동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는 안방에서 이미 자리에 들어 있었다. 영림을 만나 보기 위해서 건 넌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영림은 보이지 않았다. 미닫이를 열고 다음 방인 양실로 들어가 보 았으나 테이블 위에 무슨 원고가 한 뭉치 놓여 있을 뿐 영림은 없다.
『색시, 영림은 어디 갔오?』
부엌에서 덜거럭거리는 식모 덕순이를 향하여 소리를 쳤다.
『삼청동 댁에 가신다고 아까 전화가 왔읍니다. 거기서 주무시고 오신대나 봐요. 내일은 일요일이라고……』
『이야기가 있다기에 만나 볼까 했더니만……』
그러면서 고영해는 무심 중 테이블 위로 손을 뻗쳐 원고를 뒤적거리다가
『뭐야? 「칸나의 저항」?』
원고를 쓴답시고 밤을 새우곤 하는 영림을 생각하며 고영해는 피곤한 몸을 털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계집애가 건방져 가는 건 모두가 이 문학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이야.
뭐 강석운 선생을 만났다구?』
고영해는 뭔지 모르게 일종 불길한 예감을 불현 듯 느끼며 이번에는 좀 더 자세히 원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하였다.
『뭐, 한혜련?』
아내의 이름이 무심 중 눈에 띄었다. 그 대목을 고영해는 읽어본다.
《강선생님을 뵈러 가는 동기부터가 칸나는 불순했는지 모른다. 올케 한혜련의 이십 년에 걸친 숨은 연정이 눈물 겨워서였던가? 칸나여, 솔직 하자. 자기 답지 않은 영웅심은 결국 칸나의 귀중한 인간성을 그르칠 따 름이다.》
『이십 년에 걸친 숨은 연정?』
영림을 상대로 했던 불길한 예감이 회오리바람처럼 휙하고 아내에게로 번 지어 갔다.
여기서 고영해는 맨 처음부터 다시금 원고를 찬찬히 읽어볼 수 밖에 없는 그 어떤 다급한 심정의 노예가 되어 백매를 훨씬 넘어선 「칸나의 저항」을 끝까지 읽고 났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무렵이었다.
원고를 읽어 나가는 동안 고영해는 때때로 이상 야릇한 신음 소리를 냈다.
돌구름 강석운에게 대한 미스 헬렌의 숨은 연정이 순서 있게 기록되어 있 지는 않았지마는 그날 고영림이가 혜련과 헤어져서 강석운을 만나러 간 심 리적 경위에서부터 강석운으로 하여금 미스 헬렌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이야기한 십 구년 전의 원산 해수욕장 봉선화의 서글픈 전설, 죽은 후에 꽃다발을 들고 무덤을 찾아가는 것 보다는 죽기 전에 한 번 만나 보아 달라는 이야기 등 등……강석운에 대한 고영림의 불타는 정열과 아울러 아 내 혜련의 기라처럼 아름답고도 서글픈 연모의 정을 고영해는 숨가쁘게 읽 어 내려갔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사리를 가려서 따져 볼 여유도 없이 폭풍처럼 전신을 뒤흔들어 오는 것은 불륜한 아내에 대한 증오에 찬 가책과 더럽혀진 남편의 체면과 열광적이 아 닌 질투의 정염이었다.
우연히도 아내의 비밀을 알고 난 고영해는 한 동안 형언할 수 없는 격정의 시달림 속에서 아연히 자기를 잃고 앉아 있다가 이윽고 원고를 다시 테이블 위에 가려 놓은 후에 사랑채인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의걸이, 장롱, 경대, 책상, 머릿장 등 등 십여년 동안이나 아내의 손 때가 묻은 방 세간들이 허수아비 같았던 남편이라고, 일제히 아우성을 치면서 달 려오는 것 같았다.
이 방 세간들처럼 자기가 옮기고 싶으면 옮기고 그대로 놓아 두고 싶으면 놓아 둘 수가 있는 아내인 줄로만 고영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아내가 십 여년 동안이나 딴 사나이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말이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라고, 적어도 한 가정의 왕자로서 남편의 존 엄성이 허수아비처럼 무시를 당하고 있던 과거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 볼 때, 그 앙큼한 아내의 가슴패기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싶은 충동이 무서운 기세로 머리를 들어왔다.
파경(破鏡)의 가정이기는 했다. 그러나 아내의 불륜으로 말미암아 이혼을 한다는 것은 남편의 수치일 수 밖에 없다.
『음, 강석운! 아내와 누이를 모조리 건드려 놓을 셈인가!』
이상한 방향으로 감정이 폭발되어 갔다.
『어떡하면 좋은가?』
고영해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내에게 무시를 당한 남편의 체 면을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들어 가는 가을의 화초처럼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아내 한혜련이가 그런 종류의 마음의 비밀을 품고 있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써 갑자기 싱싱한 매력을 가지고 되살아 왔다. 그리고 그것은 고 영해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이상 야릇한 매력이었다.
『아내가 딴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의 발견이 이처럼 갑자기 아내의 존재를 소중히 느끼게 할 줄은 몰랐다. 따라서 처음에는 뜻뜻 미지근하게 느끼고 있던 질투의 정염이 차아 열광적인 자세를 취해 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고영해에게는 이미 삼십 오세 가 지닌 현실적 계산 방법이 오고 있었다. 이 불쾌한 질투심 속에서 오랜 동안을 시달린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극히 불건강한 노릇 이라고, 사업가다운 사무 처리를 결심하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어머니에게 사연을 쭉 이야기하였을 때,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영림이가 그런 사나이를……』
어머니가 펄쩍 뛰면서 걱정하는 것은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었다.
『아니, 영림이가 미치지 않은 이상, 여편네가 있고 자식 새끼들이 수두룩 한 그런 녀석한테 걸리다니…… 얘야 빨리 서둘러야겠다.』
한 자리에 앉아 배기지를 못하고 어머니는 연방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머니, 염려 마세요. 일은 간단합니다. 한 년은 놓아 주고 한 년은 붙 들어야겠읍니다.』
『무슨 말이냐. 똑똑히 말 좀 해 봐라.』
『한 년은 원하는 대로 이혼장에 도장만 찍으면 되고요. 영림이 년은 송준 오와 곧 결혼을 시켜 버리는 수 밖에 없어요. 우물쭈물 하다가는 집안 망신 톡톡히 하게 됐읍니다. 며느리 떼우고 딸 망쳐요.』
『글쎄 영림이가 어디 말을 들어 먹어 줘야지. 저 때문에 독약까지 먹은 사람인데 끄떡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어머니가 오냐오냐 받아 주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뭏든 영림일 잘 감시해야겠다. 그 녀석과 만나지 못하도록…… 그 녀 석이 영림이를 자꾸 꾀어 내면 어떡하느냐?』
『그런 정도는 아직 아닌 것 같아요. 영림의 편에서 열을 올리고 있는 모 양인데…… 보아서 사태가 정말 악화되면 제가 강석운을 한 번 만나 봐도 좋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들어줄만한 인간이기도 하니까요.』
『글쎄 어떨는지…… 그만큼 이름 있는 사람인데 남의 소중한 딸을 망쳐 놓기야 할라구?』
『어쨌든 삼청동엘 좀 다녀 와야겠읍니다.』
고영해는 긴장한 모습으로 훌쩍 어머니 옆에서 일어섰다.
남자[男子]라는 이름의 動物[동물]
[편집]『언니, 피곤할 텐데 이제 돌아가요.』
『그래요, 그렇지만 오랫만에 걸어 보니까 어찌나 기분이 상쾌한지 모르겠 어요.』
이른 아침을 마친 후, 혜련은 자꾸만 걷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이왕이면 화장이라도 하고 나서자고, 영림은 제 손으로 올케의 화장을 정성들여 해 주었다.
삼청공원 일대에 아침의 정기(靜氣)가 고요히 깃들어 있었다. 한복을 입은 올케의 팔을 끼고 소나무가 우거진 산 밑으로 우불꾸불 뻗은 산보로를 영림 은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언니가 그처럼 화장을 하고 나서니까 정말 천사 같은 걸요.』
『참 아가씨도, 놀리면 싫어요.』
『강선생님에게 한 번 보여 드리고 싶은 걸!』
그러면서 영림은 갸웃하고 혜련의 얼굴을 익살맞게 들여다 보았다.
『아이, 참……』
꺾어 쥔 솔가지 하나로 들여다보는 영림의 얼굴을 때리는 시늉을 내며
『곰팡이가 파아랗게 쓰른 머나 먼 옛날의 기억인데…… 아가씨는 괜히 그 걸 자꾸만 과장을 해서 생각하면 싫어요. 오빠만 그렇지 않았으면 벌써 기 억조차 희미해졌을 건데……』
『그러니까 결국 언니에게는 오빠가 은인이 된 셈이야. 오빠가 바람을 피 웠기 때문에 돌구름의 기억이 되살아 나왔으니까, 그렇잖아요?』
『뭐가 되살아 나와요? 아가씨가 옆에서 자꾸만 강선생 예찬을 하니까 그 런 거죠.』
『흥, 숨김 누가 모를 줄 알고? 거문고 소리가 불행히도 피리 소리보다 높 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봉선이의 불행……』
그러다가 불현 듯 혜련의 빨간 새끼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물 잘 들었죠?』
『누가 들려 준 봉산데 그래요?』
어젯밤, 영림은 아직 피지 않은 봉선화 봉오리와 잎사귀를 뜯어다가 혜련 을 위해서 들여준 봉선화였다.
『돌구름이 들여 주었음 좀 더 잘 들었을 걸!』
『아 에이, 내 참……』
혜련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한 두 번 쿡쿡 기침을 했다. 썩어가는 혜련 의 가슴에는 아침 공기가 지나치게 냉냉했는지 모른다. 호흡을 할 적마다 싸아하도록 폐부에 젖어 드는 자극 있는 공기였다.
『언니의 일생 소원이 뭐죠.』
『소원이라고…… 난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똑똑히 좀 말해 봐요.』
그러면서 영림은 팔꿈치로 콕 하고 혜련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이, 간지러!』
혜련은 허리를 꼬았다.
『언니도 간지러운 걸 다 아네요.』
『아이, 아가씨도 참…… 누굴 등신으로 아나봐요.』
『난 또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감각도 없는 등신이나 무골충 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혜련은 조용히 웃으며
『몸이 약하면 마음도 약해지나봐요. 아무런 욕망도, 의욕도 없어요. 저녁 에 고스란히 잠이 들었다가 아침엔 제발 좀 깨나지 않아 주었으면…… 그게 소원이에요.』
『또 남의 눈시울만 데우는 소리……』
『오싹 오싹 추워요.』
『그럼 이제 들어가요.』
그러는데 저만큼 골목 어귀에서 택시 하나가 멎더니 중절모를 쓴 신사가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오빠 아냐?』
『그렇군요.』
고영해는 성큼성큼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고 택시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 었다.
『어제 저녁에 전화로 한 번 닦아 세웠더니만…… 제법 뛰어 왔군 그래.』
『내버려 두지 않고 아가씨는 괜히……』
『택시가 기다리고 있는 걸 봄 인삿말 몇 마디 집어던지고 곧 돌아갈 판인 데……』
『아가씨, 암말 말고 내버려 두셔야 해요.』
『글쎄 나한테 맡겨 둬요.』
둘이는 택시 옆을 비끼어 골목으로 접어 들어갔다.
올케를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섰을 때, 영림은 장모와 간단히 인사를 마치 고 난 오빠의 표정에서 일종 형언할 수 없는 긴장미를 문득 발견하고 그것 이 단순한 문병이 아님을 재빨리 눈치챘다.
『언니, 어서 누워요. 오한이 나는데……』
아랫목에 깔아 놓은 이부자리에 손질을 하며 영림은 혜련을 뉘려 했다.
『괜찮아요, 아가씨.』
그러면서 혜련은 반대로 자리를 거두려 하였다.
『하도 누워 있으니까 진절미가 나는지, 자꾸만 바깥을 걸어 보고 싶다 구……』
장모가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사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영림의 옆에 쪼그리고 앉은 아내 의 파리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누워요.』
감정이 극도로 억압된 한 마디를 고영해는 토했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조금 들다 말며 혜련은 조용한 대답을 하였다.
『홍차가 아직 좀 남았는지 모르겠다.』
이 사위를 대하기가 이 장모는 자꾸만 어렵고 송구스러워서 오래 마주 앉 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몸을 일으키는데
『어머님도 좀 앉아 계십시요. 제 이야기를 어머님도 같이 들어 주셔야 겠 으니까요.』
『그래도 차나 한 잔……』
『괜찮습니다, 앉으세요.』
장모는 도로 가만히 앉았다. 고영해의 무거운 어조가 방 안의 공기를 갑자 기 숨막히게 하였다.
『당신도 누워요. 누워서도 내 말은 알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이야긴지는 모르지만…… 어서 말씀하세요.』
소그듬이 고개를 숙인 채 혜련은 한 두 번 기침을 하면서 대답하였다.
오빠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긴장을 했는지, 영림은 도시 짐작도 가지 않는 다. 증오의 빛이 후딱후딱 떠오르는 오빠의 표정을 영림은 날쌘 사냥개처럼 골똘히 살피기만 하였다.
혜련의 얼굴을 핥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오빠의 표정이 그때 후딱 방 바닥 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영림은 보았다. 오빠의 그 날카로운 시선 앞에 방바닥을 짚고 있는 혜련의 다섯 손가락이 있었다. 어제 저녁에 봉사를 들 여 준 새끼 손가락도 있었다.
다음 순간, 오빠는 다시 시선을 들어 뜰 담장 밑을 문득 내다보았다. 아침 햇발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신록의 화단이 그 곳에 있었다.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국화, 맨드라미, 백일홍, 채송아, 금중화, 나팔꽃 등 등……
그러나 화단의 절반을 차지한 것은 줄기차게 자라고 있는 봉선화의 청청한 무더기였다.
시선을 돌리며 오빠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오. 내가 오늘 당신을 찾은 것은…… 과거 십 여년 동 안에 걸친 결혼 생활에 있어서 나는 단 하루도 당신의 남편이 되어 보지 못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오.』
『옛?』
혜련은 놀라 해말쑥한 얼굴을 불현 듯 들었다.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는 없을 거요. 우수부인 한혜련의 우수의 원인을 지금에 와서야 알았기 때문이요.』
『아………』
가느다란 입속 외침이 혜련의 핏기 없는 입술을 새어 나왔다.
영림도 놀랐다. 동시에 어제 저녁, 허술히 건사했던 테이블 위에 원고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돌구름과 미스 헬렌의 이야기도 알았고 당신이 늘상 봉선화를 열심히 가 꾸던 정성도 이미 알았소. 시누와 올케가 한 사나이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있 는 심리적 투쟁도 알고 있오.』
거기서 고영해는 원고에서 얻은 지식을 샅샅이 들어가며 혜련의 정숙하지 못한 마음의 자세를 맹렬히 공박하기 시작하였다.
사정을 모르는 장모는 그저 어리벙벙해서 한 마디의 변명도 없는 딸과 시 누의 표정만 살피며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림에게는 이따 집에 가서 할 말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터취 하지 않겠 다.』
『좋아요. 집엘 가든지 아무 델 가든지, 행동에는 제가 책임을 질 테니까 상관 없지만… 언니를 그처럼 불륜한 아내로 몰아치는 오빠의 분노를 나는 문제 삼고 싶어요.』
『무엇이 어때?』
고영해는 맞받아 가며 소리를 쳤다.
『오빠, 오빠의 목소리가 왜 그 처럼 높아야만 하는 거요? 오빠의 분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거요?』
『마음으로는 딴 사나이를 생각하면서 남편에게 안기던 아내다! 그러한 앙 큼하고도 괘씸한 아내임을 알고도 분노를 참아야 한다는 말이냐?』
『아아, 그건…… 그건……』
영림의 대답이 튀어 나오기 전에 숨가쁜 신음 소리와 함께 혜련은 비틀비 틀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영림과 어머니가 혜련을 부축하여 자리에 뉘고 이불을 덮어 주는데
『아가씨!』
혜련은 반드시 누워 눈을 감고 영림의 손 하나를 더듬어 잡으며
『아무 말 마시고…… 오빠가 좋을 대로 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러는데 어머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얘야, 혜련아. 이게 도시 어떻게 된 노릇이냐?』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좋으세요.』
『그래도 어디 그러느냐?』
그때, 영림은 오빠를 향하여
『오빠는 언제부터 유신론자가 됐우? 사람을 공박할 때는 정신주의의 칼을 휘두르고 자기를 변호할 때는 유물론의 방패를 들고…… 물체가 있은 후에 야 영혼이 있다는 오빠의 지론은 어디로 뺑소니를 쳤우? 자기는 별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면서 뭐 언니의 마음의 자세를 문제로 한다고요. 어디서 그런 뻔뻔한 소리가 나오는 거유?』
『이 건방진 년이 누굴 보고 뻔뻔하다고?』
고영해는 눈알을 부라리며
『너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들고 나서서 서두르는 거냐, 응?』
『오빠나 아버지가 모두 돼 먹지 못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예요.
저희들은 미친 개처럼 싸돌아 다니며 방탕할 대로 방탕하면서도 아내의 마 음속까지를 문제로 삼겠다고 날뛰어요? 뭐, 불륜한 아내? 남자들의 어디를 누르면 그따위 뻔뻔한 인생관이 튀어 나오는 거요?』
『입을 못 닫치니?』
꿰엑 하고 고영해는 소리를 치며
『인생관이 아니다!』
『그럼 뭐예요?』
『그것이 남자의 소리다! 그것이 사나이의 거짓 없는 아우성이다! 아무 데 를 눌러도 튀어 나오는 진실의 발언이다!』
『악덕한!』
영림이도 맞받아 나가 고함을 치며
『욕심장이! 악마! 짐승의 무리들아! 사내들이 멸망할 때도 머지 않아 올 것이다.』
영림은 정에 격해 제 고함 소리에 그만 핑 하고 눈물이 돌았다.
『이년이 주둥이만 살아 가지고……』
고영해는 불끈 주먹을 쥐었다.
그것을 보자 영림은 비웃는 듯이 조용한 어조로
『남자들의 주먹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거예요.』
『음, 네가 지금 나를 교육시키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따위 간사한 말 로써 유혹을 당할 네 오빠는 이미 아니야. 주먹 위에 하늘이 없는 것이 현 실이다. 제 힘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은 일시적인 동정이요, 감상일 뿐, 결국은 제 힘에 알맞는 욕망 위에서 몸부림치다가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요, 현실의 궤도다.』
『오빠도 대학을 나온 사람임 그런 무지 몽매한 언사를 어떻게 감히 입에 담는 거요?』
『대학을 나온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야.』
『힘 없는 여성들은 그럼 모두가 다 죽어야 하겠네요. 언제까지나 남자들 의 동정을 비럭질해야만 한다는 말이예요?』
『죽든 살든, 빌어먹건 줏어먹건 그건 그대들 여성들의 일이지, 내 일은 아니야. 나는 남성으로서의 내 한 몸을 제대로 가누기에도 지쳤어. 남의 일 에 참견할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다는 말이야.』
『이기주의의 권화 같은 말만 오빠는 해요.』
『이기주의가 얼마나 인간다운, 거짓 없는 주의라는 걸 네가 터득하기에는 아직 인생이 어려. 여성들이 이기주의가 아니어서 얌전히들 엎디어 있는 줄 로 알아? 들썩거리고 나서 봤댔자 별반 신통한 일이 없으니까 얌전하다는 말이라도 들어볼까하고들…… 이기주의적 계산 방법에 있어서는 여성들이 한 걸음 더 뜨는 거야.』
『남권주의(男權主義)의 횡포지 뭐예요?』
『그 횡포스런 남권주의를 무찔러 버리는 임무와 사명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대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남성들이 양보해 주기만 바라지 말 고 그대들의 힘으로 전취(戰取)하라는 말이야.』
『그래서 남편들은 외도를 해도 좋고 아내들은 생념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는 말이죠?』
『맞았어, 그런 거야.』
『인류의 이상은 다 어디로 갔어요?』
『이상이란 밤 하늘의 별 무더기와 같은 거야. 멀리서 반짝거리는 걸 바라 만 볼 수 있는 거지 붙잡을 수는 없어. 별나라에서 사는 화성인(火星人)들 은 이 지구를 멀리 바라보면서 이상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인간의 양심은 다 어디로 갔어요?』
『양심을 앞세우기에는 내 욕망이 좀 더 바쁘다! 실은 여기 올 때, 그대들 의 소원대로 이혼장에 도장을 찍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 찍으세요.』
『안 찍겠다.』
『왜 안 찍어요?』
『생각이 갑자기 달라졌다.』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예요?』
『솔직히 말하마. 도장을 찍음으로써 네 올케가 마음 놓고 그 작자와 만날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힌다.』
『흥, 저 먹긴 싫어도 남 주긴 싫다는 말이죠?』
『맞는 말이야!』
『어쩌면 욕심도……』
『그 말도 맞는 말이야. 이처럼 욕심이 갑자기 생길 줄은 나 자신 생각도 못한 일이니까…… 이처럼 갑자기 네 올케에게 새로운 애착을 느낄 줄은 정 말 몰랐어!』
그러면서 고영해는 오늘따라 화장을 하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 라보았다. 냄새가 나던 아내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서 무언지 모르게 보 오얗게 떠오르는 한 줄기 그윽한 향기 같은 것을 고영해는 불현 듯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오빠는 악마 같은 말만 골라서 하는 거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영림은 정말로 벌렸던 입이 좀처럼 닫혀지지가 않았다.
『그것이 악마 같은 말인지, 천사같은 말인지를 나 자신도 모른다. 다만 나는 솔직한 마음의 풍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 뿐이다.』
『아가씨, 내버려 두시래도…… 마음대로 하시람 되잖아요. 이혼을 했다고 내가 기쁠리가 없을 테고 안 했다고 슬프지도 않으니까요.』
감은 두 눈꼬리에서 말간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긴지, 나는 아무런 것도 모르지만……재는 오늘 이때까지 사내사람이라고는 자네 하나 밖에는 모르는 아이라네.』
치맛귀로 어머니는 눈물을 씻으며
『어렸을 적부터 마음이 꼬옹해서 남처럼 헐레벌떡 돌아다닐 줄도 모르고, 몸이 허약한 탓도 있고 해서 방 구석에 들어 배겨서 책이나 볼 줄 알았 지…… 재가 봉선화 꽃을 좋아한 건 어린 시절부턴데 여자 사람치고 봉선화 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노?』
『그것이 보통 봉선화가 아니랍니다.』
고영해는 씁쓰레한 웃음을 띄면서 대답하였다.
『자네도 너무하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런 일도 있었던상 싶지만 열 셋 이나 넷이면 그거야 정말 어린애가 아닌가! 그것도 내가 알기엔 단 이틀인 가 사흘인가? 그리고는 영영 헤어져 살아서 모르는 사람인데…… 사내 사람 이라고는 통 모르는 애인만치 그 때의 청년이 후일 유일한 소설가가 됐다니 까 희미하던 기억이 새로워지는 건 인정이 아닌가. 그걸 가지고 무슨 마음 의 비밀이니 불륜이니 한다는 건 너무하는 이야기네. 모르기는 하지만도 내 딸만큼 얌전한 아이는 벼랑 없을 거네, 노여우네.』
『제가 어머니 말씀을 좀 더 보태서 설명하겠어요.』
하고 영림이가 이내 말을 받으려는데
『아가씨, 정말 그냥 내버려 두시래도.』
혜련은 영림의 손길을 또 잡아당겼다.
『언니, 가만 있어요. 오빠가 이 사실을 안 건 분명히 지금 내가 쓰고 있 는 원고를 본 때문인데……』
『그렇다, 어제 저녁에 그걸 보았다. 그대들은 한 사나이를 가지고 경쟁을 하고 있다지.』
『아무런 말을 해도 나는 괜찮아요. 그렇지만 언니를 위해서 나는 분명히 해야겠어요. 언니의 생각은 지금 제 어머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기억이 되살아 나왔을 뿐이지 무슨 남녀 관계로서의 연정이 되살아 나왔다는 건 결 코 아니었어요. 그러나 설혹 그것이 연정이라고 가정해도 좋아요. 오빠가 좀 더 가정 생활에 충실했던들 기억은 되살아 나왔을런지 몰라도 그것이 연 정으로 변모하지는 않았을 것이예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음 언니가 일생 동 안 다소나마 호의를 갖고 대한 사나이는 오빠와 그 돌구름이라는 청년 두사 람 밖에는 없어요. 그런 위치에 있는 오빠가 가정을 비우고 나돌아 다니니 까 아무런 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언니의 마음이 그 희미하고 짧은 기억이 나마 더듬어 보았다는 것이 뭐가 그처럼 불륜하다는 말이예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나는 네 원고를 읽었다. 그 원고에는 강석운이 분 명히 내 아내의 애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원고에는 그랬어요. 그러나 거기 대해서 이제부터 설명하려는 거예요.』
『그 이상의 설명은 괴변이다.』
『아냐요, 강선생님에 대한 내 심리적 갈등의 경로를 이 자리에서 밝히겠 어요.』
『귀찮다, 그만 둬라.』
『이거 보세요. 제가 왜 강선생님을 만나러 가는데 언니를 걸머지고 들어 갔는지를 꼭 설명해야겠어요. 나는 확실히 강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었어 요.』
『집안 꼴 잘 돼 간다! 강석운의 이호 노릇을 하겠다는 건가?』
『이호건 삼호건 거기 대해선 이따 집에 가서 이야기할 테예요. 다만 내가 강선생님을 만나러 가는데 언니를 끌고 들어간 것은 말하자면 나 자신에 대 한 하나의 레지스땅스(抵抗[저항])를 의미하고 있었을 뿐이예요.』
『무슨 괴변이야? 똑똑히 말해라!』
『괴변이라고 생각해도 할 수 없어요. 아까 오빠가 말한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풍경을 솔직히 이야기할 자유가 있다는 것 뿐이예요. 평온한 가정을 갖고 있는 강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나의 동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불순한 것 같았어요. 어딘가 하늘이 무서워요.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의 그러한 불순과 무서움을 속이고 무마하기 위한 한낱 핑계로서 언니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확대시켰어요. 마치 언니가 근 이십 년 동안이나 줄곧 강선생님을 사모하고 있던 것과 같은 환각을 언니에게도 주려 했고 나 자신도 가지려고 했었어 요. 나는 언니 때문에 강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 나 자신의 불순한 동기 때문이 아니라고, 누구에게도…… 인간 뿐이 아니라 신에게도 떳떳이 변명할 수 있는 뚜렷한 동기를 만드느라고 일부러 문제를 확대시킨 것 뿐이 예요.』
『관념적으로는 그럴 상도 싶다는, 결국은 되는 대로 꾸며 대는 이야기 야.』
영림의 성품으로서는 어쩐지 그럴 성도 싶었다. 그러나 결국 고영해는 반 신반의의 심정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좋아요. 다만 일이 이렇듯 되고 보니 언니에게 미 안할 뿐이예요. 오늘 아침만 해도 공원을 걸으면서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강선생님에 대한 언니의 연정에 불을 지르고 있었어요.』
『그건 또 왜?』
『요 수일 내로 강선생님을 한 번 더 만나보기 위해서요. 만나러 가는 구 실을 신에게도 보여 드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만들어 놓을 셈으로요.』
『네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시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인제는 다 틀렸어요. 이처럼 제 마음 속 깊이 파묻혀 있던 미 묘한 움직임을 탁 털어 놓고 보니 인제부터는 나 자신도 속일 수가 없고 또 한 신에게도 뭐라고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됐어요. 언니, 미안해요.』
혜련의 손길을 영림은 꼭 쥐어 주었다.
『아가씨도…… 그렇지만 아가씨가 그처럼 조심성 있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그저 칸나의 불타는 의욕과 정열 뿐인 줄만 알고 있었어요.
아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인제부터는 언니도 건드리지 않고…… 저 갈 길을 곧장 칸나는 갈 수 밖 에 없게 됐어요. 그 누구도 속이지 않고…… 나 자신도 속이지 않고……』
『아가씨의 생각이 정말 그렇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만 잘 생각해서 하셔야지 집안 어른들의 말씀도 조금은 귀담아 들어야 할 거예 요.』
『어쨌든 영림아, 너는 나하고 집으로 가자. 지금 쯤은 아버지도 오셨을 테니까……』
고영해는 그리고 나서 혜련을 향하여
『당신이 진정으로 나와 헤어지기를 원한다면 나도 그렇게 할 용의는 이미 갖고 있오. 그렇지만 당신이 나 이외의 그 누구를 생각하고 그러한 연정 때 문에 갈라지기를 안타깝게 바란다면 나는 죽어도 도장을 찍지 않을 테요.
당신이 나를 걸어 쌍벌죄로 고소를 할 때까지는 안 찍을 테니까……』
『염려 마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법을 끌어 내고 싶을만큼 생에 대한 욕망 은 이미 강하지가 못하니까요. 제일에 대해서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 시면 될 거예요. 아까 당신이 한 말을 들으면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다 그렇다니까 결국은 당신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거예요. 저는 뭐 당신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들을 못마땅히 생각하는 것도 아니예요. 저는 다만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목숨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예요.』
그러면서 혜련은 젖어 있는 눈을 가만히 뜨고 천정의 꽃 무늬를 말똥히 바 라보고 있었다.
『좋소. 결국 당신은 당신대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밖에……』
『오빠, 돼 먹지 않은 소리는 인제 그만하고 빨랑빨랑 돌아가세요.』
『너도 같이 가자.』
『그래 가요!』
영림은 홀가분히 몸을 일으켜 오빠를 따라 방을 나섰다.
『흥, 거 봉선화 꽃 많이 심었는 걸! 아예 화단 전부를 봉선화로 채워 버 리지!』
남편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대문간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자동차 구는 소리 가 멀어지며
『얘, 혜련아, 네 남편이 무진 오해를 하고 있는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글썽거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면 되지요.』
『그래도 오해가 있다면 풀어 줘야지.』
『풀어 줄만한 오해 거리도 없지만…… 기력도 없어요.』
『남자들이란 오해 삼기가 쉽단다.』
『아버지도 그러셨우?』
『아버지야 원체가 얌전하신 분이었으니까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렇지 만 어쨌든 남자들이란 자기 아내의 정조 관념에 대해서는 무척 까다롭단 다.』
『저희들은 멋대가리 없이 굴면서도……』
『거야 남자들이니까 하는 수 없지만…… 그래서 옛날부터 여자들은 길을 걸어도 소그듬히 땅만 보고 걸어야지, 고개만 조금 쳐들어도 의심을 받았단 다.』
『…………』
아무런 대답도 없이 혜련은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人間[인간]의 探求[탐구]
[편집]이날 아침, 고종국씨는 황산옥의 품안에서 애리를 생각하면서 늦장을 부리 고 있었다.
동과 남을 향한 언덕 밑 침실에 놓인 더블 베드가 육십과 사십의 체중을 넌지시 실은 채 연륜에서 오는 그들의 생리의 찻수(差數)가 돈이라는 매끄 러운 기름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지장도 없이 메꾸어지고 있는 진기로운 인 생 풍경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그 육중한 더블 베드가 발언의 능력을 갖고 있다면 다 음과 같은 명확한 한 마디를 중얼거렸을 것이다.
『화폐는 현대인이 지닌 생리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화폐를 참답게 사랑할 줄 아는 황산옥의 생리는 인간을 사랑하는 다른 여 성들의 그것과는 조금도 다름 없는 기능과 정열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사랑의 대상이 인간이래야만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꽃이라도 좋 고 새라도 좋고 고양이나 강아지라도 무방하다. 자연을 사랑한 시인 묵개도 있었고 골동품을 사랑한 회고 취미자도 있었거늘 하물며 현대인이 돈을 사 랑하고 돈과 정사(情死)를 한대서 무엇이 나쁠 것이냐고, 황산옥은 더블 베 드의 무기력한 침묵을 대신하여 소리 높이 외쳐도 무방하였다.
『영감, 무엇을 멍청히 생각하고 계슈?』
『아, 무엇이라고…… 산, 산옥을 생각하고 있었지.』
애리와 산옥을 고사장의 혀 끝은 얼른 바꾸어 놓았다.
『산옥은 이처럼 영감 옆에 있는데 생각할 게 뭐가 있어요?』
『아, 참 그랬었군! 난 또 산옥이가 어디로 홀랑 달아난 줄로만 생각했었 지.』
『아이, 영감도 참 슬쩍 넘겨 버리는 데는 선수라니까……』
애리가 어젯밤 약속을 왜 지키지 않았을까? 적어도 사장과의 약속인데……
고년의 야들야들한 눈웃음…… 고년이 인제 사내 간장을 여남은개 빼 먹고 야 떨어질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고사장은 자기의 간장이 다소 녹슬은 사실을 깨닫자 씁 쓸한 웃음 하나를 넌지시 천장에다 던지며 불로초를 캐오고 불사약을 구해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면서 몸부림하던 진시왕의 심정을 가만히 어루만 지고 있는데
『참 영감!』
『응?』
『영감 말대로 강교수를 한 번 슬쩍 유혹해 봤어요.』
『아, 그래? 언제?』
공상에서 깨어나며 고사장은 불끈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다.
『어저께…… 그리고 저번에도 한 번……』
『그래 어떻게 유혹해 봤어?』
『심심해서 놀러 가는 척 했어요. 저번엔 서재에서 무슨 글을 쓰고 있었고 어저껜 닭장 안에 들어가서 모이도 주고 화초도 가꾸고 그랬어요. 그래 이 런 이야기 저런 이야길 하면서 슬쩍 추파를 한 번 던졌지요. 호호호……』
산옥은 베개에 볼을 비비며 자지러들게 웃었다.
『그래 어떻게 됐어? 걸리던가?』
고사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고사장은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일생 동안을 그처럼 근엄하 게 살아 온 강교수의 생리와 일생 동안을 벌렁거리는 불꽃처럼 욕정에 달떠 서 살아 온 자기의 그것과를 고사장은 진심으로 비교해 보고 싶었던 것이 다.
그래서 언젠가의 잠자리 속에서 지나가는 말처럼 그런 이야기를 슬쩍 비쳤 더니만, 바탕이 화류계 출신인 산옥은 깔깔깔깔 한 바탕 웃어 댄 후에 정히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보자는 것이었다.
고사장은 그러나 시험해 보라는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만 두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것이 정말로 시험을 해 봤다는 산옥의 말에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추파를 던지니까 걸리던가?』
냄새가 나기 시작한 산옥이기는 했으나 정말로 그것을 실행해 보았다는 말 에는 어딘가 한 구석 마음이 언짢은 데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왕 시험 해 본 일이고 보면 결과나 들어 보자고, 진실을 탐구하는 과학도처럼 마음 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영감이 무척 걱정이신 모양이야. 강교수가 정말로 걸려들까봐서…… 호 호호 ……』
『걱정은……』
『아니, 그럼 걱정이 안된다는 말예요?』
산옥이가 발딱 일어나 앉으며 따져 왔다.
『그래 내가 그 고리타분한 영감쟁이와 그래도 무방하다는 말이야?』
산옥은 고사장의 잠옷 멱살을 긁어 쥐고 흔들어 댔다.
『아니, 이 양반이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흥, 내가 인제 다 영감의 생각을 알아 채렸어! 인제 냄새가 나니까 그렇 게 해서 나를 슬쩍 다른 대로 떠맡겨 버릴 배짱 아냐?』
『아니, 어둔 밤중에 홍두께 모양으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 알았어! 그렇지만 잘 안될 걸! 흥, 그 누구들처럼 몇 푼 쥐어 준다 고, 그걸 가지고 꾸벅꾸벅 쫓겨 나갈 황산옥은 아니야! 나는 죽어도 영감 옆에선 못 떨어져!』
『글쎄 산옥이더러 누가 떨어지라는 건가?』
『그럼 왜 걱정이 없다는 거야? 영감이 자꾸만 강교수의 마음을 떠 보고 싶다니까, 그래서 해본 일인데……』
『글쎄 말이 헛 나가서 한 말을 가지고서…… 왜 걱정이 없겠노? 이처럼 산옥이가 귀여운데……』
고사장은 넌지시 산옥의 턱을 쓸어 올렸다.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고 말고!』
그제서야 산옥은 멱살을 놓으며
『하루에 죽 세끼를 먹고도 젠척 하는 강교수 같은 영감쟁이가 수백 명 달 라붙어도 이 황산옥은 끄덕도 없어요.』
『아, 글쎄 누가 그걸 모를라고…… 그래 강교수가 뭐라고 하던가?』
고사장은 싸이드 테이블에서 담배를 집어다가 하나는 자기 입에, 또 하나 는 산옥의 입에다 물려 주며 라이타를 켰다.
『맨 처음 번엔 강교수가 글을 쓰고 있었는데 밖에서 내가 간드러지게 한 번 웃어 줬지.』
『응, 그래서……』
『그랬더니 강교수는 내 웃음에 따라서 싱긋이 웃으려다가 얼른 외면을 하 지 않겠어요?』
『음………』
『그리고 어제는 꽃밭에서 화초를 가꾸고 있길래, 아이 선생님 취미는 참 고상하네요. 저희 집 영감님은 술만드는 취미 밖에는 통 모르는 걸요. 저는 이처럼 선생님 옆에서 일생동안 꽃이나 가꾸다가 죽었음 한이 없겠어요. 그 러면서 이번에는 눈을 하나 살그머니 감아 보였지.』
『그래, 그래 저편에서 뭐라고 해?』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사장은 목마른 물음을 말했다.
『그랬더니 말이야. 호호홋…… 나를 한 번 힐끔 바라보고 나서…… 그 바 라보는 눈초리가 보통이 아닌걸! 윤이 반짝 하고 도는 걸 보았으니까……』
『음, 역시 목석은 아닌 모양이로군!』
『바라보고 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꽃을 가꾸면 배가 고프다고요. 그래 서 내가 또 한마디 했지.』
『뭐라고?』
『사랑만 있으면 배고픈 것이 뭐가 무서울까요? 그랬지.』
『허허허헛, 막 연애를 했구려!』
『글쎄 잠자코 내 말 좀 들어 봐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걸작이야. 시장끼 를 참는 것도 어렸을 적부터 단련을 해야지, 부인처럼 사십 줄에 접어 들고 보면 창자가 건방져서 말을 들어 줘야지요?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서 서재로 꽁무니를 뻣어요. 호호호……』
『허허허헛……』
그러나 고사장의 웃음은 오래 가지 못하고 금새 중단되고 말았다.
『음, 역시 나와는 어딘가 좀 다른 데가 있기는 있어!』
『오늘은 일요일인데 어디 강교수나 한 번 방문해 볼까?』
아침을 먹은 후, 고사장은 정원을 거닐면서 창포를 삶아 낸 물에 머리를 감고 있는 산옥을 향하여 그런 말을 했다.
『영감 앞에서 한 번 강교수를 유혹해 볼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요정에서 손님 다루던 솜씨를 써 볼 셈인가?』
『호호호홋…… 재미 있지 않아요?』
그러는데 회사 지프차가 들어 닿았다.
『아현동 마님께서 회사로 전화를 걸으셨읍니다. 집안에 무슨 중대한 일이 생겼다고 곧 사장님을 모시고 오라고요.』
운전수의 보고였다.
『중대한 일? 무슨 일인데?』
『내용은 자세히 말씀을 안하시고 그저 빨리 가서 모셔 오라고요.』
『곧 간다고 가서 그래.』
지프차는 다시 달려 가고 차고로 부터 자가용 닷지가 이윽고 굴러 나왔다.
옷을 갈아 입고 나오는 고사장에게
『흥, 마님의 세도가 상당하시군! 영감은 암만해도 엄처시하셔! 호호 홋……』
산옥이가 농담 절반 진담 절반으로 빈정거리는 말이다.
『쓸데없는 말 말아요. 이런 때나 충성을 다 해 둬야지.』
이윽고 닷지는 강교수 댁 대문 앞으로 해서 일로 시내를 향하여 내닫기 시 작하였다.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풀을 뜯고 있는 강교수 내외의 자태 가 얼깃설깃한 울타리 사이로 들여다 보였다.
반 시간 후, 고사장이 아현동에 도착하였을 때, 한달 동안이나 얼굴을 보 지 않아도 조금도 섭섭지 않은 마누라가 아랫목에 보료를 깔아 놓고 기다리 고 있었다.
『무슨 일이요?』
일부러 더 허겁지겁 스프링 코트와 모자를 벗어 버려야만 자세가 선다. 한 사나이가 두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데는 역시 그러한 제스추어가 필요할 만 큼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남편의 그러한 태도가 메스껍기는 하지마는 싫지도 또한 않다. 그러한 형 식적인 굴복이라도 있기에 이 마누라는 이 위치에서 오늘날까지 과도의 정 신적인 상처를 입음이 없이 지탱해 올 수가 있는 것이다. 아내는 아내로서 의 법적 위치가 침범당하지 않는 이상 태반의 경우는 남편의 방탕을 묵인하 는 습성을 갖고 있다.
<보오보와르>는 말했다.
《방탕한 남편을 지닌 아내는 한 사람의 아내로서는 피해를 입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영림의 어머니도 결국은 그것이었다. 존경과 동정의 자각은 때로 인간 생 활의 샘물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마저 없었다면 과거 오랜 역 사에 있어서 고규(孤閨)를 지켜온 뭇 아내들은 글자 그대로 남성의 노예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고규의 아내들은 자기네들이 남성의 노예라는 자각은 극히 희 박했다. 아니, 노예를 자각하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존귀한 사명 을 자각하고 남편의 방탕과 투쟁하여 온 것이다. 아내로서의 소규모의 인생 이 아니었다. 좀 더 커다란 인생, 인간으로서의 여성, 인간으로서 모성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대규모의 인생이었던 것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이러한 대아적인 감정의 발로로써 이루어진 그들 고규의 아내들의 인생이야 말로 남편의 애정권, 경제권, 폭력권 등, 온갖 소아적인 이해 관계를 초월한 성스러운 인생인 동시에 노예라는 한 마 디로써 집어 치우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숨가뿐 영혼의 높이가 영봉(靈峰)처 럼 영롱하게 솟아 있었던 것이다.
『영림이가 큰일 났읍니다.』
남편의 애정을 상실하고 망각한지 이미 오랜 마누라의 모든 관심이 가문의 지조를 지키고 딸의 정조를 수호하려는, 한 사람의 주부로서의 위치와 어머 니로서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강교수의 아들이?』
마누라에게서 자세한 사연을 듣고 난 고종국씨가 우선 커다란 놀람을 가지 고 외치듯이 한 한 마디는 작가 강석운이 아니었고 성실한 학자요 인격자라 는 말을 듣는 강학선 교수의 아들이었다. 바로 어저께 산옥이가 그의 인격 을 시험해 보았다는 강교수의 아들이었다.
『강석운은 바로 정능 옆집에 사는 강교수의 아들인데……』
『어쩌면? 그럼 그 강교수를 잘 아시겠구려?』
『아다마다! 음, 아비는 인격자일런지 몰라도 아들 놈은 개판이었군!』
『글쎄 말이예요. 그 녀석이 어쩌자고 남의 집 딸 며느리를 모조리 집어 먹을 셈인지……』
『생각하면 알 법한 일이기도 하오. 그 녀석이 요즈음에 쓰는 소설을 보면 도무지 돼 먹지가 않았거든. 사회 악을 장려하는 글만 쓰는 녀석인데……』
그때, 대문 밖에 차가 닿으며 영해와 영림이가 또 같이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너 거기 좀 앉거라.』
이런 때나 위엄을 보이자는 듯이 턱으로 고종국씨는 자리를 가리켰다.
영림은 오빠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았다. 고씨 일가의 가족 회의는 이리하 여 긴급 소집을 보게 된 것이다.
『글쎄 얘야 네가 어쩌면……』
어머니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딸의 모습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이십 사 년 동안, 그처럼 알뜰살뜰한 모성애가 오순도순 깃들여 있는 구석 구석을 우선 파내 보고 있었다.
『네가 글쎄 어쩌자고 그런 녀석과……』
바라보면 볼수록 이 모퉁이도 알뜰했고 저 모퉁이도 살뜰하다.
『네 아버지는 계집에나 미쳐서 싸돌아 다녔지만…… 내야 무엇 때문에 살 아 왔노? 금지옥엽, 너 하나 남부럽지 않게 길러 보려고 살아 왔는데……』
사실 그렇다고 영림이도 생각한다.
남편의 사랑이라고는 꿈에 떡맛 보듯이 하며 살아 온 어머니가 오직 하나 삶의 희망을 붙인 것은 남편의 노예라는 열등 의식보다도 먼저 내 혈육과 내 책임에 대한 좀 더 숭고한 우월감에서였다. 남편에게 아내로서의 학대는 받고 있지마는 적어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남편보다 자기가 우월하다는 자각 하나를 발받이로 하여 살아온 어머니임을 영림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어머니를 영림은 지금 극도로 슬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 나도 잘 알아요.』
영림은 조용한 대답을 했다.
『그런 줄을 네가 안다면 나를 좀 기쁘게 해 주려므나.』
『어떻게 함 어머니가 기쁘겠어요?』
일부러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영림은 물었다.
『송준오와 결혼하면 오죽 좋겠니?』
영림은 그냥 미소를 띄운 채,
『그 이가 그처럼 어머니 눈에 들었어요?』
『아, 얌전하고…… 또 너를 그처럼 아껴주고…… 여자란 그저 저를 아껴 주는 남편이 제일이란다. 네 아버지처럼 밤낮……』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고종국씨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씁쓰레 웃었다.
『그렇지만 어머니, 어머니는 아껴 주지 않는 남편도 아껴 주면서 한 당대 살았지만…… 나는 아껴 주는 남편이라도 내가 아끼고 싶지 않음 못 살아 요.』
그때, 오빠가 불쑥 말을 받으며
『그래 송군의 어디가 나빠서 못 아낀다는 말이냐? 서울 장안을 뒤져 봐 라. 그만큼 순진한 청년이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영림은 핼끔 오빠를 쳐다보며,
『오빠가 아끼는 만큼 나도 준오씨를 아껴 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니까 쓸모 없는 충고는 그만 두세요. 공연히 혓바닥이나 닳을 뿐이예요.』
『뭐가 어째서? 어머니나 아버지나 내나가 다 네 앞 길을 진심으로 걱정하 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니?』
『진심으로 생각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영림은 고개를 깐뜩 숙여 보였다.
『어쨌든 간에……』
그때, 아버지는 비로소 참견을 하며 위엄 있는 한 마디를 입에 담았다.
『강석운은 안된다. 절대로 안된다!』
『저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영림은 부드러운 대답을 했다.
『잘 안다면 그런 생각은 단념해라!』
『저도 노력하고 있어요.』
『나는 강석운이라는 사나이를 잘 안다. 전번 날, 강교수 내외와 같은 자 리에서 식사도 한 적이 있다만……』
『그러세요?』
영림은 다소 의외였다.
『말하자면 이중 인격자야. 표면으로는 점잖은 체 하지만 바람잡이거든.
그건 그녀석이 요즈음 쓰는 소설만 보더라도 알 법하지 않느냐? 뭐랬지?
아, 「유혹의 강」인지 뭔지 하는 그 따위 패륜의 글을 쓰는 작자니만큼 뱃 속은 극히 음흉해. 그런 작자의 손에 한 번 걸려 들기만 해 보아라. 너 같 은 애숭이는 국물도 없다.』
『아버지의 충고도 감사합니다.』
영림은 또 고개를 깐뜩 숙였다.
『뭐야? 너는 아버지한테도 그런 태도를 취할 셈이냐?』
오빠가 옆에서 꿰엑 소리를 쳤다.
영림은 조소의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오빠가 효자인 줄은 벌써부터 알고 있으니까요.』
『어쨌어?』
오빠의 얼굴 빛이 험악해졌다.
『효자라는 말이예요. 효자가 난 집안에 효녀가 나지 못해서 서운하다는 말이예요.』
『아니, 이년이……』
『얘들아, 쌈할 때가 아닌데 왜들 그래야만 하느냐?』
어머니가 만류 하였다.
『아마 취미가 어슷비슷하니까 존경의 마음도 생길 거예요.』
순간, 아버지의 안색이 홱 변하는데 오빠의 손길이 철썩 하고 영림의 얼굴 로 갔다.
『얘야, 이게 무슨 짓이냐?』
어머니가 아들의 주먹 쥔 팔을 꽉 부여잡았다.
『이년아 아까부터 못하는 수작이 없이…… 부모를 모욕해도 분수가 있 지.』
그러나 영림은 아무런 반항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얻어 맞은 볼을 두 손으 로 움켜 쥔 채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러고 앉아 있었다.
『영림아!』
하고 그때, 아버지가 지극히 불쾌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불렀다.
『말씀하세요.』
눈을 뜨지 않고 손도 떼지 않은 채 영림은 대답하였다.
『네가 지금 나를 핀잔하고 있는 줄 잘 안다. 또한 너한테 핀잔을 들을만 했었는지도 모른다.』
담배를 붙여 무는 고종국씨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이것과는 문제가 다른 줄을 알아야만 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말씀해 주세요.』
『좋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들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뿐이야.
그처럼 사랑하는 딸이나 누이 동생을 자식 새끼가 수두룩한, 가정을 가진 사나이의 첩으로서는 정말 눈물이 나서 못 보내겠다는 것 뿐이다!』
『그러기에 말이예요. 영림아, 너도 철이 났으면 생각 좀 해 보려므나 글 쎄.』
어머니였다.
『이게 다 문학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이랍니다. 인간이 어찌어찌 닦아놓 은 길을 파괴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니까요.』
오빠였다.
『그럼 아버지께 제가 한 마디 말씀 드리겠어요.』
영림은 비로소 손을 떼고 눈을 가만이 떴다. 손가락 자리가 시뻘겋게 왼편 볼에 물들어 있었다.
『집안에서 모두들 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줄은 저도 잘 알고 있 어요. 그렇지만 저를 참되게 사랑해 주신다면 저를 그대로 내버려 두세 요.』
영림은 진심으로 그것을 원했다.
『내버려 두면 어떡한다는 말이냐? 심경이 그 처럼 위험한 길로 기울어지 고 있는 것을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라는 말이냐, 응?』
고종국씨는 딸을 달래기 시작하였다.
『내버려 두면 저는 저대로 잘 생각해서 행동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옆에 서 그렇게 초상 난 집처럼 자꾸만 떠들어 대면……』
강선생님은 더 자꾸만 뵙고 싶어져요, 하는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 다.
『어쨌든 송준오가 싫다면 싫어도 무방하지만 강석운은 안된다. 딸 하나 낳았다가 그런 법이 어디 있다는 말이냐? 더구나 이 아버지나 오빠를 탓하 면서도 너 자신은 그런 상스럽지 못한 생각을 해도 좋을 수는 없지 않느 냐?』
『그러게 말입니다. 아버지, 얘는 아까도 나를 가리켜 짐승이니 악덕한이 니 하는 말로 호되게 공격해 왔지만……』
그러면서 오빠는 영림을 향하여
『그래 너는 남자들의 방탕을 그 처럼 증오하면서 도대체 어째서 너 자신 은 강석운이라는 한 가정의 남편과 그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느냐는 말이 다. 네 이론이나 인생관이 도대체 돼 먹지가 않았어. 어디 거기 대한 네 이 론을 한 번 들어 보자.』
『강석운이가 너와 그런 관계를 맺는다면 그 작자도 악덕할이요, 짐승인 것이 분명한데…… 그래 너는 강석운의 악덕에는 눈을 감고 네 오빠만을 공 격할 자격이 있느냐?』
『있어요.』
영림은 토라진 대답을 명확하게 하였다.
『있어? 그런 논리가 성립이 돼?』
『성립이 되죠.』
『어떻게 된다는 말이냐?』
오빠의 언성은 또 높아졌다.
『신을 무시하는 인간에게는 짐승 밖에 남을 것이 없다는 말이예요.』
『무엇이?』
『그러나 신이 되기에는 인간은 너무 약해요. 짐승이 되어 버리기에는 인 간은 너무 강해요. 신으로 승격할 수도 없고 짐승으로 추락할 수도 없는 것 이 인간이라고 나는 믿어요.』
『흥, 네가 신을 끄집어낸다는 말이지?』
『주먹 위에 하늘이 없다고 생각하는 오빠에게는 신이라는 존재가 가장 귀 찮을 거예요. 그렇지만 신으로 승격할 수는 없지만 그 귀찮고 까다로운 신 의 존재를 믿는데서 인간은 짐승의 영역으로 부터 구출을 받고 있는 거예 요. 나는 신도 되고 싶지 않고 짐승도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다만 참다운 인간을 찾고 있을 뿐이예요.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래 그것이 강석운과의 케이스에 있어서 무슨 관련성이 있다는 말인가?
그 작자는 너와 그런 관계를 맺어도 짐승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래요, 오빠는 짐승이 되지만 강선생님은 인간이예요.』
『얘이, 입 좀 닥쳐라! 아전인수냐? 사랑은 맹목이라더니 그런 당치 않은 논리가 어디서 부터 튀어 나오니?』
오빠는 홱 얼굴을 들며 외쳤다.
『천만예요!』
영림은 자신 있는 어조로
『나에 대한 강선생님의 생각은 아직 모르지만…… 그러나 강선생님과 나 의 관계가 앞날에 있어서 좀 더 깊어 진다면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생기 는 연애 관계예요. 그렇지만 오빠는 그게 아냐요.』
『그럼 나는 뭐냐?』
『짐승의 본능 뿐일 거예요. 좀 더 달리 말함 여성들을 속여 먹는 악마구 요.』
『요 계집애가……』
눈알을 부라리고 들리는 팔을 어머니는 또 꽉 눌렀다.
『신의 존재를 무서워하는 인간만이 참다운 연애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가 졌다는 말이예요. 오빠의 경우는 점잖게 말해서 단순한 애욕, 치정…… 좀 더 정확한 과학적인 술어가 있지만 입이 더러워질까봐서 감히 담을 수가 없 어요.』
영림은 휙 몸을 일으켰다.
『이 계집애가…… 좀 앉아!』
오빠는 영림의 팔을 낚아챘다.
영림은 비틀비틀 엉덩방아를 찧었다.
『얘야, 왜 이리 우락부락스리……』
어머니는 엉덩방아를 찧는 딸을 가누며 아들을 만류했다.
『어머니, 좀 가만 계세요. 이 계집애가 제법 이론 투쟁을 하자는 모양인 데…… 그래 연애와 애욕이 뭐가 다르다는 말이냐, 응? 어디 너 한테서 교 훈을 좀 받아 보자!』
오빠는 지극히 불쾌한 모욕감을 느끼며 영림을 억지로 주저앉혔다.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 두겠어요. 나는 시간이 없어요.』
영림은 또 일어섰다.
『앉아!』
또 팔을 잡으러 오는 오빠의 따귀를 이번에는 영림의 편에서 보기 좋게 내 갈겼다.
『아, 이 계집애가 사람을 친다?』
오빠도 훌쩍 일어났다.
『건방진 소리 말아요. 나는 사람을 친게 아니고 개 돼지를 쳤다고 생각하 고 있는 거예요.』
『뭐야, 이년아! 개 돼지야?』
오빠의 손길이 또 철썩 날아갔다.
『뭐야, 이 개 돼지가……』
영림은 죽어라 하고 오빠에게 달려 붙으며 마구 갈기고 할퀴어 주었다.
『얘들아, 글쎄 왜들 이 모양이냐?』
어머니가 아들의 몸뚱이를 꽉 부여잡는데 휙 하고 휘두르는 오빠의 손길에 걸려 영림의 뒤통수가 따악 하고 소리를 내며 옷장 밑에 머리를 구겨 박고 쓰러졌다.
『아이고, 엄마아!』
영림은 무섭게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아이고, 얘 영림아!』
어머니는 오빠를 놓고 영림에게로 달려가자 머리를 열심히 비비기 시작하 였다.
고종국씨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만 있었고 오빠는 붉으락 푸르락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고 계집애가 주둥아리만 까 가지고 인제 집안 망신 톡톡이 시킬 거야!
에이, 집안이 망하려니까 별 놈의 계집애가 하나 나와 가지고……』
『얘, 글쎄 너 좀 가만 못 있겠니?』
어머니는 아들을 꾸짖다가
『아이고, 얘 머리에서 피가 나는구나!』
어머니가 허겁지겁 경대 위에 놓인 마큐롬 병을 집어 솜에 적셔서 발라 주 고 있는 데 영림이 조용히 눈물 어린 얼굴을 들며
『오빠, 참 재미 있는 말만 골라서 하는구려. 부자가 경쟁을 하듯이 난봉 을 피우는 건 집안 망신이 안되는 세상이라죠?』
『영림아!』
그때서야 비로소 고종국씨는 무서운 호령을 하였다.
『너는 오늘 이 아비를 개 돼지로 취급을 했어! 그러나 너도 흥분했고 나 도 약간 흥분했기 때문에 오늘은 아무런 말도 않기로 하겠다. 어서 네 방으 로 건너가 보아라.』
영림은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았다가
『아버지, 제 실언을 용서하세요.』
영림은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사과를 했다.
『어서 건너 가거라.』
『네, 건너가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한 오해를 풀어 드리겠어요.』
『그래 말해 봐라.』
『저는 뭐 강선생님의 첩 노릇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정식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말이예요. 또 무슨 이렇다는 뚜렷한 연애 행동도 있 는 것이 아니예요. 그저 그런 것을 저 혼자서 생각해 보고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해 보았을 따름이예요.』
『음, 알아 듣겠다.』
『오빠의 말이나 아버지 어머니의 말씀이나 다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 로서도 될 수만 있으면 준오씨와 결혼을 하려고 노력도 해 보았고 또 이제 부터도 그 노력을 계속해 보겠어요, 그것 뿐이예요.』
『좋아! 좋은 말을 영림은 했어! 그렇게 되기를 온 집안이 원하고 있으니 까!』
『그래야지, 그럼 그렇고 말고!』
어머니도 적이 안도의 가슴을 쓸어 내린다.
『그리고 삼청동 언니의 문제는 도시 문제도 되지 않는 거니까, 괜히 오빠 의 과장된 말을 곧이 듣지 마세요.』
그리고는 피 묻은 손을 머리에 그냥 대고 영림은 자기 방으로 총총히 건너 왔다.
칸나의 解放[해방]
[편집]영림은 방으로 건너왔다. 방 안을 둘러본다. 책상, 양복장, 책장 등 방 안 은 어제처럼 쓸쓸하다.
미닫이를 열고 양실로 나갔다. 테이블 위에 원고가 어제 저녁과 같은 자리 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오빠의 그 추잡한 눈초리와 상념이 스치고 지나간 원고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비장(秘藏)의 보물이 더럽혀진 것 같아서 마음이 언짢아 견딜 수가 없다.
아버지와 오빠는 강석운의 첩이 될 셈이냐고, 그런 말로 영림에게 따져 왔 었지마는 그러한 추잡한 관념 밖에는 가질 수 없는 그들의 세계가 저주스럽 기 한이 없다. 그러한 세속적인 오예(汚穢)의 관념으로 부터 초월하기 위한 칸나의 노력이었다.
영혼의 연소가 없는 육체적인 결합만이 그들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 고 그것을 가리켜 애정이라고 그들은 불렀다. 짐승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에 짐승이라고 영림은 깨우쳐 주었을 따름이다.
그렇건만 오빠는 주먹을 들어 왔다. 그들도 짐승이란 한 마디에는 격분을 느낄 만큼 짐승의 세계를 멸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남성의 거짓 없는 아우성이며 주먹 위에 하늘이 없다는 장담을 한 그들의 마음에도 신은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신의 너그러운 침묵을 기 화로 삼고 짐승이 되어 가고 있을 따름이라고, 영림은 그들의 분노의 원인 을 밑바닥까지 꼬치 꼬치 캐어 보고 나서야 비로소 뒤통수의 아픔을 느꼈 다.
밤알만한 혹이 돋아 있었다. 옷장 서랍 손잡이에 닿아서 피가 조금 배었을 뿐, 영림은 원고를 가려 가지고 내려와서 책상 서랍에 넣고 쇠를 잠근 후에 벽에 걸린 둥그런 거울을 들여다보며 콜드크림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머리 에 간단히 손질을 하고 나서 백을 들고 홀가분히 방을 나섰다.
안방에서 두런 두런 올케에 대한 이야기도 들리고 자기의 이름도 들려 나 오고 있었다. 무슨 신통한 전후책을 강구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구두를 신 고 댓돌을 내려서는데 방문이 탁 열리며 어머니가
『너 어딜 가느냐?』
목소리와 표정이 똑 같이 어둡고 걱정스럽다.
『잠깐 나갔다 오겠어요.』
『어디를 나가는지 가는 데나 말하고 가려므나.』
『거리에 나가요.』
『무턱대고 거리면 어디냐?』
『한강에 빠져 죽으러 나가는 게 아니니까, 염려마세요.』
『애도 어쩌면……』
대문을 나서서 아현동 비탈길을 전찻길로 내려올 무렵까지 영림의 걸음걸 이는 자못 기가 차 있었다. 무슨 긴급한 용무라도 있는 사람처럼 영림의 감 정은 긴장할 대로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서대문 로타리까지 걸어 나온 영림의 발길은 목적 없는 타성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갈 데가 없다. 갈 데가 많은 것 같아서 뛰쳐 나온 영림이었다. 그러나 가 만히 생각해 보니 갈 데가 있어서 뛰쳐 나온 것이 아니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취한 행동임을 영림은 깨닫고
『그래도 어디든지 가야지!』
기가 차서 토라지게 뛰쳐 나온 자기의 자세를 집안 식구들에게 세우기 위 해서도 어디든지 영림은 가야만 했다.
『아, 강선생님을 방문할까?』
무심 중 중얼거린 한 마디에 영림은 저도 모르게 가벼운 흥분을 전신에 느 꼈다.
『지금이 몇 신가?』
영림은 불현듯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 한시 십분 전…… 오늘은 일요일인데 선생님이 집에 계실런지?』
로타리 한 모퉁이에서 영림은 망서리었다.
우연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수일 내로 강선생을 한 번 찾아 볼 생각은 하 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에는 칸나의 자 기 저항이 상당히 굳셌다. 최후의 일순간까지 자기의 벌렁거리는 의욕을 누 르고 있는데서 칸나 고영림은 한 사람의 연애인(戀愛人)으로서의 고뇌보다 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좀 더 폭 넓은 희열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건만 오늘 ── 영림은 서슴치 않고 동대문행 전차에 홀가분히 올라타고 혁대에 매어달리 며 마음 속으로 외쳤다.
『그렇건만 오늘부터 칸나에게는 이미 자기 저항의 노력이 필요치 않은 것 이다.』
이러한 결론이 온갖 세속적인 기반과 속박으로부터 영림을 완전히 해방시 켜 주고 있었다.
아까 집에서 영림은 싸울 때 왜들 초상 난 집처럼 떠들어 대느냐고 가만히 내버려 두면 결국 영림은 자기대로의 분별을 가지고 일을 무사히 처리할 수 도 있는 노릇인데 옆에서 그처럼 떠들어대고 보면 자기 저항의 노력은 보람 이 없어지고 낡은 인습의 압력만을 거세게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칸나의 생명은 칸나 자신만이 이것을 주재(主宰)해야만 하고 또한 주재 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주재권을 부모에게 빼앗긴 셈이 되어 버린 오늘의 싸움이며 압력이 었다.
오늘의 압력이 없었던들 칸나는 자기 생명의 몸부림을 자기 손으로 적당히 주재하여 무사히 무마했을 런지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홀가분히 강선생을 만나기 위하여 전차에 올라타지 않았을 런지 모른다.
이리하여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던 칸나의 내면적인 저항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인 주변을 향하여 그 자세를 돌연 바꾸어 버리고 말았다.
영림은 이미 자기 자신에게서 쉽사리 해방되어 나올 수가 있었다.
『아아, 명랑한 날씨다!』
심신이 갑자기 명랑해지고 가벼워 지는 것 같았다. 마음의 부담은 이미 없 다. 있는 것은 오직 외부의 압력 뿐이다. 마음의 부담에 비하면 외부의 압 력 쯤은 영림에게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윽고 종로 사가에서 영림은 전차를 바꾸어 탔다. 원남동을 지나고 창경 원을 지날 무렵 봄을 즐기려는 유흥객이 창경원 앞에 물결치고 있었다.
『혹시 선생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창경원에나 오지 않았을까?』
들창 넘어로 영림은 흐느적거리는 인파를 내다보았다. 젊은 여성들이 모두 가 다 말쑥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음 양복이나 갈아 입고 올 걸 그랬지.』
영림은 자기의 그 철 늦은 꺼무틱틱한 곤색 양복을 새삼스럽게 훑어보다가
『괜찮아, 괜찮아! 옷차림으로서 사람을 저울질 할 강선생님은 적어도 아 니니까.』
혜화동에서 전차를 내린 영림은 넓은 길로 한참 걸어 들어가다가 이윽고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접어들면서 세번째 이층 양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석운」이라는 나무 문패가 흰 팽키 칠을 한 정문에 붙어 있 었다.
강선생의 문패를 바라보는 순간, 영림은 공연히 가슴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강선생님을 만나서 어떡하겠다는 말이야?……』
마음의 구속으로 부터 풀려 나왔다는 오직 그 한 가지 명랑한 해방감이 영 림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 뿐이었다.
얼깃설깃한 정문 사이로 들여다보니 아담한 정원에 화단이 있고 그 둘레로 사철나무와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돌산으로 둘러 쌓인 조그만 못 같은 것 도 있는 성싶었다.
그제서야 영림은 이렇듯 빈 손으로 달려 온 자신을 후회하였다. 저번 날 밤, 을지로 입구에서 헤어질 때는 화분을 하나 사 갖고 간다는 약속을 했었 는데…… 여남은 살 되어 보이는 사내와 칠팔세쯤 된 계집애가 화단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공기를 하고 있는 것이 들여다보였다.
영림은 얼른 돌아서서 혜화동 로타리로 되돌아 나와 케이크 한 상자를 사 들고 들어갔다.
『아버지 계시냐?』
정문을 들어서서 현관 앞을 지나 안마당으로 걸어가면서 영림은 물었다.
『네, 계세요.』
사내 아이가 일어서며 영림을 말똥히 바라본다.
『네가 도선이지?』
영림은 다가가며 사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네.』
『그리고 너는 혜숙이고?』
『네.』
혜숙이도 대답을 했다. 영림은 벌써 오래 전부터 이집 식구의 이름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이다.
『어디 나하고 공기 좀 해 볼까?』
도선이는 히쭉 웃었고 혜숙이는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어머니도 계시냐?』
『네.』
도선이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어머니, 손님 오셨어요.』
하고 안방을 향하여 고함을 쳤다.
『그래?』
안방 문이 스르르 열리며 재봉틀 위에 앉아 있던 옥영이가 복도로 나왔다.
유리 문을 드르릉 열며
『어디서 오셨어요?』
그러는데 영림에게 손 하나를 잡힌 채 혜숙이가 다가오며
『엄마, 아줌마가 나하고 공기하재요.』
그 말에 옥영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 혜숙인 누구하고도 금방 친해진답니다.』
옥영은 신발을 신고 뜰로 내려서며 혜숙이와 손을 잡고 걸어오는 영림이를 맞이하였다.
『애기들이 무척 귀여워요.』
그러면서 영림은 옥영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자기 소개를 했다.
『사모님은 혹시 저를 모르실런지 모르지만…… 고영림이라고, 작년 가을 에 「칸나의 의욕」이라는 원고를 좀 보아 주시면 하고 선생님께……』
『아, 「칸나의 의욕」 왜 몰라요? 참 좋은 글이라고, 선생님이 하도 칭찬 하시길래 나도 읽었답니다.』
『어쩌면 사모님도…… 부끄러운 글을 뭣하러 읽으셨어요?』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칸나의 생각에는 공명하는 데가 많았답니다.』
『아이, 어떡함 좋아요? 사모님까지 그러심……』
『자아, 어서 좀 올라오세요. 선생님도 이제 곧 일이 끝나실 거예요. 오늘 은 일요일이라서 오후는 쉬신다니까요.』
『그럼 잠깐만……』
『자아, 어서 올라 오세요.』
옥영은 영림의 등을 밀다시피 하여 안방으로 이끌어 들였다.
『일감을 벌여놔서 어수선 하지만…… 어서 여기 좀 앉으세요.』
재봉틀에 늘어진 일감을 걷어 올리며 옥영은 영림에게 아랫목 자리를 권했 다.
『아니, 사모님, 여기 앉겠어요.』
『글쎄 이리 좀 내려와 앉으세요.』
영림의 글을 읽은 후부터는 적지 않은 호감을 갖고 있는 옥영으로서는 영 림이가 처음 보는 사람 같지가 않으리만큼 어딘가 친근감을 느끼며 그렇게 권했다.
『아이, 정말 사모님……』
영림은 황송하여 도저히 옥영의 권을 받을 수가 없어 머릿장 앞에 조용히 꿇어 앉았다.
『그럼 이 방석을 까세요. 온돌 방은 딱딱해서 양장한 분들에게는 정말 고 통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럼 깔겠어요.』
영림은 권하는 대로 방석을 깔며 옥영이라는 한 여성이 지닌, 어딘가 귀족 적인 고상한 인품과 아울러 그 친밀한 신경이 가져오는 다사로움을 불현 듯 느꼈다.
『혜숙아, 이건 네 것이다.』
영림은 과자 상자를 혜숙의 앞에 내밀었다.
『뭘 다 그런 걸 갖고 오세요? 접때도 선생님이 저녁 대접을 받았다는데 요.』
『변변치도 않은…… 바쁘신 선생님에게 봐 주십사고만 해 놓고는……』
『혜숙이, 아줌마한테 고맙습니다, 안해?』
『아줌마, 고맙습니다.』
혜숙은 깐뜩 고개를 숙였다.
『아이, 귀여워요.』
그것은 단순한 인삿말이라기보다도 영림의 감각이었다. 이처럼 감각을 가 지고 아이들을 귀엽다고 해 본 적이 영림에게는 통히 없었다.
『그럼 잠깐 앉아 계세요. 내 선생님한테 올라가 보고 오겠어요.』
『선생님 바쁘실 텐데 괜히 와서 방해만 됨 어떡하나?』
『영림씨가 오셨다면 선생님도 반가워 하실 거예요.』
옥영은 과자 상자를 머릿장 위에 올려 놓고 총총히 방을 나섰다.
그제서야 영림은 마음을 놓고 방안을 한 번 휘이 둘러보았다. 사모님의 애 정의 때가 구석구석을 탐탁하게 메꾸고 있는 것 같은 알뜰한 방이었다.
『후우……』
하고 영림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지었다. 금만가들의 가정처럼 호화롭지 는 못하나마 조촐한 가구들이 빈틈 없이 째어 있는 이 아담한 방 안 풍경이 영림을 갑자기 서글프게 하였다.
혜숙이가 우두커니 앉아서 영림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글픈 감정 이 이상한 방향으로 머리를 들어 영림은 갑자기 혜숙을 한 번 안아 보고 싶 어졌다. 좀처럼 아이들을 안아 본 적이 없는 영림이가 돌연 손을 뻗쳐 혜숙 을 무릎 위로 끌어다 안았다.
『혜숙이가 아주 얌전하군.』
혜숙의 토실토실한 조그만 몸뚱아리를 발작처럼 영림은 꼭 껴안으며 혜숙 의 볼에다 자기 볼을 격렬히 비볐다.
왜 그런지, 싸늘한 혜숙의 볼이건만 영림에게는 차츰 차츰 다사로워졌다.
강선생의 온기가 그 싸늘한 볼 밑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영림은 분명히 감 각하였다.
『아줌마, 아파요.』
오그라지는 조그만 몸뚱이를 영림이가 탁 풀어 놓는데 층층대를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잠간만 기다리세요. 선생님, 조금만 있으면 일이 끝나신다니까요.』
영림은 순간, 호다닥 놀라며 혜숙을 얼른 무릎 위에서 내려 앉혔다. 죄지 은 사람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영림은 대답을 했다.
『네, 괜, 괜찮아요.』
사모님의 발자국 소리는 그러나 방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부엌으로 사라져 나갔다.
석운은 일을 끝내고도 이내 아래 층으로 내려가지를 못하고 서재 안을 삥 삥 돌기만 했다.
『칸나가 마침내 왔다.』
조수처럼 밀려드는 불안한 기쁨과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가 않는다. 그러한 들뜬 마음을 가지고 내려갔다가는 반드시 실수를 저지를 것이라고, 조용하 면서도 지극히 예민하고 날카로운 옥영의 신경과 눈초리를 석운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뭣 때문에 왔을까? 멀지 않아서 미스터 송과 결혼을 한다지.』
어젯밤에 들은 애리의 말을 생각하며
『결혼보고? 원고 반환?』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던 칸나가 왔다. 칸나의 그러한 행동에는 반드시 그 무슨 뚜렷한 동기가 있을 것이라고 그것이 만일 유혹일진대 유혹 이라도 좋았다.
청춘의 종착역에서 아직도 서성대고 있는 나머지 한조각 청춘을 그처럼 아 껴 줄 수 있는 칸나 고영림의 출현이야말로 작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강석 운의 가치가 다시 한 번 인정받은 것 같은 행복감이 전신을 휩쓸어왔다.
『그렇지만 강석운이가 그처럼 쉽사리 유혹에 빠질 수가 있을까?』
그러한 자신도 또한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기에 인생의 한낱 시련(試 鍊)으로서의 행동을 칸나와 더불어 가져 보아도 무방한 것이라고 자기의 움 직임에 대한 결정적인 단안을 내리고 있는데 층층대를 올라오는 발자국 소 리가 들리며
『여보, 아직도 멀었어요?』
옥영의 목소리였다.
『아, 내려갈께!』
『저희가 올라 갈테예요. 영림씨가 선생님 서재를 한 번 보신다고요.』
『그래? 그럼 올라오지.』
석운이가 열어 젖힌 문을 옥영이가 차 소반을 들고 들어왔고 그 뒤로 영림 이가 따라 올라왔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영림은 들어서며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다.
『오오, 영림양이 이거 웬일이오?』
『선생님께 잠깐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요.』
무의식 중에 뛰어 나간 한 마디였다. 무슨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방문했다는 것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고 있던 참이라, 사모님에게 번명이나 하듯이 입을 연 것이 그런 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자아, 어서 앉으세요.』
책상 앞 남편 옆에 앉아서 소반에 담긴 과일과 케이크와 차를 내려 놓으며 옥영은 앉기를 영림에게 권했다. 내놓은 방석 위에 영림은 앉으며
『선생님 바쁘시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강선생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괜찮소. 오늘은 인제 끝났으니까요.』
강석운도 그러면서 영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며 둘이는 가만히 웃었다. 시선부터 마주쳤다는 것은 눈동자 속에 감추어진 마음의 움직임을 서로가 다 재빨리 포착한 셈이었다.
영림의 눈동자가 말을 했다.
석운의 눈동자가 말을 받는다.
그런 줄도 모르는 옥영은 차 석 잔을 각기 나누어 놓노라고 여념이 없이
『이 케익, 영림씨가 사 갖고 온 거예요.』
『아, 그런 걸 뭘 다 ……』
그제서야 석운은 시선을 떨어뜨리고 찻종지를 들었다.
『어서 영림씨도 드세요.』
그제서야 영림도 석운의 눈동자로 부터 옥영의 눈동자로 시선을 얼른 옮기 며
『사모님도 같이……』
말꼬리를 잇지 못할 만큼 영림의 시선은 당황을 하며 억지로 눈웃음 하나 를 옥영에게 지어 보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영림은 서재 안을 두루 두루 살펴 보았다.
호화로운 서재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검소하기가 비길데 없다. 들창 옆에 낮은 책상, 그 옆에 곰보 유리 문이 달린 커다란 책상, 그 옆에 전축, 저편 모퉁이에 놓인 코너 테이블 위에 아스파라가스의 분이 하나 한들한들 놓여 있었다.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석류를 한 분 사 갖고 오려다가 그만 시간이 없어 서, 다음으로 밀어야겠어요.』
『뭘 그런 것까지……』
『약속만 해 놓고…… 약속은 개인의 법률인데, 그만 마음이 촉박해서 범 법(犯法)을 했어요.』
영림은 저도 모르게 뒤통수로 손이 갔다. 밤알만 하던 혹이 호두 알만큼 커져 있었다. 영림은 차차 비장한 심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원고 속의 칸나와 똑 같죠? 이야기나 인상이』
옥영은 남편 옆에서 케이크 한 조각을 집으며 영림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 었다.
석운은 웃으며
『당신과 비슷한 데가 있는 학생인데……』
『호호, 그러세요?』
옥영은 남편과 마주 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 선생님도……』
영림도 따라 웃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강선생을 쳐다보면서 눈꼬리 웃음을 웃고 있는 사모님에게 일종 형언할 수 없는 질투를 불현듯 느꼈다.
남편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다는 반석 같은 신념이 사모님으로 하여금 자기의 존재를 극히 가볍게 치부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에게 매를 맞아 가면서 달려온 자기가 아니었던가.
『저 선생님, 오늘 갑자기 제가 찾아 온 것은……』
다급한 감정의 풍경을 설명하고 싶어서 시간 전에 생긴 싸움의 경과가 저 절로 튀어 나오려는 것을 영림은 후딱 정신을 차리고 다음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아, 무슨 일인데?』
석운은 정색을 했다.
『저어……』
할 말이 없다. 되는 대로 주워 댄 것이
『저희들 문학을 좋아하는 몇 동무가 있는데요. 선생님을 한 번 모시( )…… 저어…… 식사나 하면서 선생님 말씀이나 들을까 하고요.』
『언제?』
『오늘…… 지금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요.』
엉터리 없는 거짓말이다.
『오늘?』
석운은 의외라는 듯이 웃었다.
『실은 어저께 찾아 뵈려 했었는데…… 집안에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그만 제가 오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동무들이 모인 장소엘 다녀 오는 길이예요. 선생님한테 연락을 못했으니 후일로 밀자고요.』
이야기에 차츰 줄거리가 선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어지간히 자신 있는 어 조로
『그랬더니 동무들이 어디 들어 줘야죠. 어쨌든 저더러 가 보고 오라는 거 예요. 선생님이 정말 바쁘심 후일에 모시기로 하겠다고요.』
『음, 요즈음 젊은이들은 어쨌든 제멋대로야. 상대편의 사정은 들으나 마 나 제 요구만 내대면 그만이라지?』
그러는 남편을 옥영은 만류하며
『그러니까 영림씨가 사정을 이야기하는 것 아냐요?…… 일도 끝났는데 바 람도 쏘일 겸 나가 보세요.』
『그래도 무방하지만, 어쨌든 버릇을 모르는 것이 한국적 민주주의의 한 특징이라니까 하하핫……』
『후훗……』
하고 영림은 웃으며
『선생님 미안합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였다.
열 두시 반이 가까와 오는 책상 위의 시계를 바라보며 석운은
『장소가 어딘데?』
『명동이예요.』
『명동? 모인 학생은 몇 명이나 되는고?』
『대여섯 명 돼요.』
『남학생들도 있고?』
『여학생들 뿐이예요.』
『음……』
그러는데 옥영이가 옆에서
『여인 천국이군요, 수염이나 좀 깎고 가세요.』
『수염은…… 누가 선을 뵈러 가는 건가?』
『그런 게 아냐요. 젊었을 때는 수염도 일종의 화장이 되지만 늙을수록 몸 단장을 해야만 한다는 데도……』
『늙다니, 누구가 늙었다는 말이오?』
『암, 새파랗게 젊으셨지요. 영림씨, 선생님은 인제 겨우 갓 서른 밖에 안 되셨답니다. 후훗……』
『후훗……』
그래서 두 여인이 쿡쿡 웃는데
『아, 그 웃음 말이요.』
하고 석운은 갑자기 소리를 쳤다.
『네?』
『당신과 영림양의 웃음이 어쩌면 그렇게 꼭 같소? 후훗…… 하고 끝으머 리를 꿀꺽 삼켜버리는 웃음, 감정의 꼬리를 이성의 칼로 잘라버리는 웃음, 여음이 있어서 예술적 향기가 그윽한 웃음, 조심성이 있어서 겸양의 덕을 보이는 웃음인데 도대체 그런 웃음 법을 어디서들 수입해 왔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웃음이
『하하하……』
『호호호……』
하고 한바탕 벌어졌지만 석운은 이 두 여성이 가끔 가다가 똑 같은 종류의 웃음 「후훗」을 발하는데서 어딘가 성격의 일치점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 다.
앞에서 말한 것은 그 웃음이 지닌 장점 뿐이지만 그 장점의 이면을 뒤집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결점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송두리째 자기네들의 감정을 개방할 수 없고 개방하기 싫고 개방하 면 안된다는 조심성이 있는 비밀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다. 좀 더 나쁘게 표현하면 앙큼한 것이 무엇하나 심중에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여인 천국으로 태연하게 남편을 내보내는 옥영이나 떳떳한 구실로써 옥영 의 남편을 밖으로 끌어내는 영림이나 똑 같이 그 「태연」과 그 「떳떳」
이외의 그 무엇이 그들의 감정의 모퉁이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면 서도 석운은 그 웃음이 지닌 내용의 일면만을 입에 담아 해석을 했을 뿐, 다른 일면은 결국 마음 속에 새겨두고 말았다.
강석운의 이러한 행동은 이미 강석운의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충분한 증언 일 수 밖에 없었다.
어쨌든 극히 조심성 있는 두 여인임에는 틀림이 없었고 동시에 한낱 기분 주의로 타락하기에는 다소 억울한 교양의 발판이 두 여인에게는 있었던 것 이다.
『그럼 수염이나 좀 깎고 갈까?』
일어서려는 강석운을 영림은 막으며
『아이, 선생님 괜찮아요. 저희들이 선생님을 모시는 건 강선생님의 모습 이나 보자는 게 아니니까요. 얼굴만을 내세우고 으시대는 핸섬 보이는, 명 동 거리에 얼마든지 있잖아요?』
『하하핫, 그럼 그만 두지. 어쩌면 내 마음에 꼭 맞는 말만 영림양은 골라 가면서 할까?』
그 말이 다소 옥영의 정성을 슬프게 했으나
『참 영림씨는 좋은 데가 있어요. 요샛 사람들과는 다른 데가……』
악의 없는 옥영이었다.
손님인 영림의 말을 존중하고 남편의 의향을 소중히 하여 자기를 양보하는 사모님의 겸양 앞에 영림은 마음 속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참 몰랐더니 한성양조의 고사장이 바로 영림양의 아버님이시라고?』
옷을 갈아 입으려고 몸을 일으키다 말고 석운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참 집의 아버지를 아신다고요?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던데요.』
『얼마 전에 같이 식사를 하셨답니다. 정능 할아버지와 함께……』
거기서 옥영은 대신 설명을 했다.
『그러세요?』
영림은 의외였다. 정릉엔 별반 가 본 적이 없는 영림으로서는 바로 옆집에 사는 이가 강선생의 부친이신 강교수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바로 영림양과 만나던 날인데……』
『어머나?』
『그렇지만 그때는 고사장님의 따님인 줄은 몰랐었지.』
『그럼 언제 아셨어요?』
『어젯밤, 거리에서 우연히 애리양을 만났더니만……』
『아, 애리를 아세요?』
영림은 뜻 밖이라는 듯이 또 외쳤다.
『벌써부터 알고 있지.』
『어쩌면…… 그래서 아셨군요.』
『학교에 다니는 줄로 알고 있었더니 한성양조에 취직을 했다지 않아? 영 림양과는 중학 동창이라고…… 덕택에 영림양이 쉬 결혼한다는 사실도 알 았고』
『결혼? 누구와 한다는 거예요?』
석운과 옥영은 마주 쳐다보면서 말 없이 웃었다. 남편한테 들어 옥영도 알 고 있다는 것이다.
『아, 알았어요. 송준오씨라죠?』
석운은 웃으며
『미스터 송이라고 왜 원고에 등장하는 인물 있지 않아? 영림양을 위하여 독을 마신 바로 그 청년이라더군.』
애리다운 이야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애리의 그러한 중상에는 강선생에 대한 애리에 애정 문제 같은 것이 밑바닥에 감추어져 있는 것 같은 직감이 영림에게 왔다.
그러나 영림은 구태여 그것을 부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렇게 될런지도 모르죠.』
했다.
그 순간, 옥영은 무언지 모르게 막연히 안도감 같은 것을 문득 느끼며 역 시 자기는 영림의 출현을 저도 모르는 사이에 경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 생각하였다.
옥영 자신 자각도 못했던 그런 종류의 본능적인 경계심이 뭇 아내에게는 있는지 모른다. 그처럼 굳건한 남편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런 경계심을 품 는다는 것이 옥영 자신의 비열한 인격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하였다.
어쨌든 이 순간에 있어서 옥영이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달팽이 뿔과도 같은 것이 모든 아내에게 구비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온갖 여성의 유혹으로 부터 남편을 수호하려는 일종의 예민한 촉수(觸手)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날처럼 허무 맹랑한 세상에 그만한 각오와 정성을 가지고 한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 희귀한 일이니까 영림양도 지나친 자존심만 갖고 빨 랑빨랑 결혼을 해야만 해요.』
말만은 발라야 한다는 격의 말 밖에는 안되는 말을 씨부리고 있는 것이라 고, 영림의 결혼을 소리 높이 반대하고 싶은 충동을 석운은 느끼며 갑자기 마음 속이 공허해졌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영림이도 바른 말을 했지마는 바른 감정일 수는 물론 없다.
『그저 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도 좋게 보이는 법이라고.』
십 팔년 간의 결혼 체험을 옥영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강석운이가 옷을 갈아 입으려고 아래로 내려간 사이에 두 여인은 잠깐 동 안 멍청히 앉아 있었다.
『선생님의 작품 행동에는 사모님의 내조의 공이 많으시다죠?』
어느 정도의 내조인지를 영림은 알고 싶어서 그것을 물었다.
『아이, 영림씨도…… 제가 무얼 안다고요?』
옥영은 얼굴을 붉혔다.
『아냐요,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용서하세요, 사 모님.』
영림은 긴장한 표정으로
『저 과히 사람 잘못 보지 않아요. 사모님 상당하세요. 오늘 보니까요.』
『어마나, 영림씨도…… 잠깐 보고 어떻게 알아요?』
『사모님, 왜 자꾸만 겸손하세요?』
『제가 무얼 겸손해요? 또 그런데가 조금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 람이면 겸손할 수 밖에 없잖아요?』
『아냐요, 상당하신 사모님이세요.』
영림은 진정으로 그 한 마디를 솔직하게 토했다.
『그런 말을 하는 영림씨야 말로 보통이 결코 아닌 것 같아요.』
이 한 마디도 김옥영의 진심이었다.
『사모님, 건방진 말 같지만요, 한 마디로 사모님을 평해 보면…… 용서하 세요. 저희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걸핏함 사람을 다루어 보기 좋아 해서는 큰 일이예요.』
『서당 개 삼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그런 의미에서는 영림씨의 말을 충분 히 이해하고 있지요. 그리고 그런 정도라면 저도 영림씨를 한마디로 평해 볼 수도 있어요. 호호호……』
이 마지막에 흘러 나온 「호호호」야 말로 똑 같은 내용의 말이지마는 고 영림에게 있어서 결핍되어 있는 김옥영의 관록이었다.
고영림은 웃지 못했는데 김옥영은 웃는 것이다. 강석운 쟁탈전에 있어서의 김옥영의 위치가 그만큼 견고하다는데서 오는 안도감이라기 보다도 차라리 한 사람의 여성 대 여성의 대결에 있어서 인간적인 무게였던 것이다.
패기가 만만한 영림으로서는 이미 사십대에 가까운 사모님의, 곰팡내가 나 기 시작했을 사고 방법을 얕잡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완숙에 가까운 인생기에 도달한 김옥영으로서는 영림의 패기를 일종의 치기(稚氣)로서 처 분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떻든 간에 이 두 여인이 솔직하게 상대방이 지닌 인격의 가치를 인정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동시에 그러한 솔직한 확인(確認)은 서로 서로가 다 함 께 하나의 호적수(好敵手)를 발견하였을 때에 느끼는 가벼운 흥분과 더불어 일종의 투쟁 의식의 발동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호호호」하고 웃어 넘 기는 사모님에게 영림은 순간, 일종의 가벼운 압박감을 느끼며, 그래서 일 부러 미소 하나를 덤으로 띄며
『어디 그럼 사모님부터 평해 보세요. 그 담에 제가 말할께요, 네.』
애교의 의미로 「네」를 하나 더 영림은 부록으로 붙였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해 볼까요?』
옥영도 웃는 얼굴로 대답하였다.
보통 같았으면 사람의 평을 그것도 이런 경우에 있어서 제가 먼저 입에 담 는 몰상식한 옥영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옥영이 편에서 재빨 리 기선(機先)을 제압해야만 했다. 잘못해서 똑 같은 평이 두 사람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 나중 발언한 사람은 추종이 아니면 모방으로 오 인을 받기 쉬워 옥영의 창조적인 고유한 평이 빛을 잃기 때문이었다.
『실례가 되면 용서하셔야 해요.』
『염려 마세요, 사모님도……』
『한 마디로 말해서 영림씨는 이야기하면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봤어 요.』
『어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사모님이 먼저 하심 어떡하세요?』
『호호호, 호호홋……』
옥영은 명랑하게 웃어 젖혔고
『…………』
영림은 좀 더 깊은 압박감에서 덤덤히 옥영을 바라보았다.
영림이가 느끼는 압박감은 그러나 절대로 불쾌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기 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하나의 행복감으로 이내 변모를 하고 있었다.
『참 저처럼 선생님한테 원고를 가지고 오는 사람이 많죠?』
『많지만…… 어디 그걸 다 일일이 읽어 볼 시간이 있어야죠, 영림씨는 특 별이예요.』
『아이 고마워라.』
『사실은 고마운 게 아니고 글이 좋았던 탓이지요. 처음 몇 장만 읽어 보 면 아신다니까요. 열 장만 무난히 읽어 넘길 수 있는 글이면 된다고요. 그 런데 영림씨 글은 말이예요. 원고 집필을 모두 집어 치우고 단숨에 읽으셨 으니까요. 그쯤 되면 문제 없다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고마운 게 아니고 원고가 고마웠죠.』
『아이, 사모님도…… 편지도 많이 오죠? 독자들에게서……』
『네, 많이 와요.』
『여성 독자와 남성 독자와 어느 편이 더 많아요?』
강선생님에 관한 일은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샅샅이 영림은 알고 싶은 것 이다.
『그저 반반씩 되나봐요. 근데 참, 이상한 독자가 한분 있답니다.』
생각이 난듯이 옥영은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인데요?』
『어쩌면 글쎄 한 번도 잊지 않고 선생님의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꽃 봉 투를 꼭꼭 보내오는 여성 독자가 있답니다.』
『꼭꼭이라고…… 생일과 크리스마스는 일년에 한 번씩인데……』
『그러기에 말이예요. 벌써 육이오 전부터니까 칠 팔년은 넉넉히 될 거예 요. 보통 때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생일과 크리스마스만 되면 분홍 꽃 봉투가 날아 오는 걸요.』
『어마, 상당히 열광적인 애독잔가 봐요. 그래 선생님도 회답을 내시고?』
꽃 봉투만은 보내지 않았지마는 자기에게도 그만한 정성은 확실히 있는 것 이라고, 영림은 그 꽃 봉투의 주인공과 무슨 경쟁이라도 하고 있는 심정이 불쑥 되어 가고 있었다.
『어디가요, 주소가 통 씌어 있지 않으니까 어디 회답을 낼 수가 있어야 죠?』
『왜 그럴까요?』
『글쎄 말이예요. 선생님도 그 지극한 정성이 눈물겨웁다고 감사의 답장을 내고 싶어 하지만…… 주소를 모르고 보니 도리가 있어야죠.』
『팔년 동안을 내내?』
강선생님의 생신은 영림도 벌써 부터 알고 있었다. 단행본이나 잡지 같은 데 실린 강선생님의 경력은 여학생 시절부터 많이 보아 왔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씌어 있어요?』
『네, 금심(琴心)이라고, 저어 거문고 금자와 마음 심잔데……』
『금심…… 내용은 뭔데요?』
연거푸 물어 오는 영림의 그 집요한 태도에 옥영은 마음의 고개를 갸웃 했 다. 금심이란 혹시 영림의 별명인지 모른다고……
『내용도 언제든지 똑 같아요. 아주 간단한……』
『뭐라고 씌어 있어요?』
확실히 수상한 데가 있기는 있다고, 날카로운 신경은 눈동자로만 모아 놓 고 표정은 아주 태평한 춘풍처럼 허수러이 가지며
『역시 봉투와 똑 같은 분홍 편지지 한복판에 붓글씨로 이렇게 씌어 있어 요.』
《祝生辰[축생신](또는 祝聖誕[축성탄])
先生[선생]님은 항상 제 琴心[금심]에 살아 계시오. 이렇게 一年[일년]에 두 차례씩 聖誕[성탄]과 꼭 같은 意味[의미]를 지닌 先生[선생]님의 生辰 [생신] (또는 先生[선생]님의 生辰[생신]과 꼭 같은 意味[의미]를 지닌 聖 誕[성탄]) 祝賀[축하]하는 글월을 올릴 수 있는 幸福[행복]만이 제 삶의 보 람인가 하옵니다.
生辰前夜[생신전야](또는 크리스머스 이브) 琴心[금심]은 조용히 올림》
『판에 박은 듯이 언제든지 꼭 같은 내용이예요.』
『어쩌면?……』
사모님이 자기를 의심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영림은
『금심이란 어딘가 기생 이름 같지 않아요?』
『나도 그래서 선생님께 물어 보았어요. 그러나 요정에서 만났던 기생들은 많아도 금심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통 없었다니까요.』
『참 모를 일도 다 있군요.』
그러나 사모님은 대답 대신 영림의 표정만 골똘히 살피고 있었다.
『그럼 올해도 선생님의 생신에는 또 꽃 봉투가 올 거 아냐요?』
『모르긴 하지만 아마 올 거예요.』
그러나 금심이가 한혜련의 익명인 줄을 아는 이는 하늘 아래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다. 불쌍한 계집애 朱鳳仙(주봉선)이의 거문고 소리는 어이하여 그처럼도 조그맣고 이처럼 낮기만 했던고! 그 이름과도 같이 빨간 봉선이의 단심(丹心)이여, 연연(娟娟)한 거문고줄에 연연(戀戀)한 마음을 가득히 싣 고 남 몰래 구슬피 울던 탄야월(彈夜月)의 영혼인양 일년에 두 차례씩 꽃봉 투를 띄움으로써 삶의 보람을 찾으려는 미스 헬렌의 금심은 언제까지 살으 려나?
『자아, 영림양, 이제 나가 볼까?』
아랫층에서 석운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네에.』
두 여인은 똑 같이 대답을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회색 양복에 회색 중절모, 석운은 이미 구두를 신고 뜰로 내려서며
『큰 애들은 다 어디 갔오?』
『정능 할아버지한테 갔어요. 아버지께 달걀 얻어다 드린다고요.』
『맨손으로 보냈오?』
『쇠고기 몇 근 사 보냈어요.』
『음, 잘 했오. 자아 영림양!』
『사모님, 안녕히 계세요.』
『또 놀러 오세요.』
『혜숙이, 안녕.』
『아줌마, 안녕.』
도선이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남편과 나란히 서서 정문을 나서는 영림의 뒷모습을 옥영은 말똥히 바라보 고 섰다가 찻종지를 치우려고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면서 마음의 고개를 또 갸웃거렸다.
저녁을 대접한다고 젊은 여성들이 찾아 와서 남편을 데리고 나가는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건만 어쩐지 오늘의 내방객인 고영림에게는 무언가 지적할 수 없는 불안감이 후딱 머리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감이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은 꽃봉투의 주인공인 금심의 이야기가 났을 무렵 부터의 일 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찻종지를 소반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방을 쓸어 내리려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젖뜨리는데 골목 어귀를 빠져나가고 있는 두 사 람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앞집 지붕 위로 넘겨다 보이는 골목 어귀에서의 일이었다.
나란히 걸어가던 영림이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남편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섰다. 영림의 그러한 갑작스런 동작에 따라 남편도 우뚝 멎으며 영림의 얼 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다소 떨어진 거리여서 똑똑하지는 않지마는 입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단 한 마디의 대화도 거리에는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있다면 그것은 눈동 자의 대화일 따름이라고 옥영은 눈 앞이 아찔해졌다.
옥영은 열었던 창문을 본능적으로 홱 닫았다. 닫힌 문을 이번에는 조금만 열고 시선만 총알처럼 내 뽑았다.
오뚜기처럼 서서 아무 말도 없이 남편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고 있던 영 림이가 그때 홱 고개를 숙이며 골목 밖으로 뛰쳐 나갔다.
순간, 멍멍히 섰던 남편이 영림의 뒤를 약간 당황한 걸음걸이로 따라 나갔 다.
넓은 한길을 왼편으로 몇 발자국 꼬부라지다가 이윽고 둘이의 그림자는 옥 영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대화를 상실한 이 한 토막의 묵극(黙劇)이 십 팔년에 걸친 김옥영의 반석 같은 아내로서의 자리를 뒤흔드는 일대 비극의 푸롤로그(序幕)가 아니기를 옥영은 이윽고 경건한 마음으로 하늘에 조용히 빌었다.
誘惑[유혹]의 江[강]
[편집]혜화동 로타리에서 두 사람을 집어 실은 택시가 명륜동을 거쳐 창경원을 지날 무렵에도 영림은 아무 말도 없이 프론트글라스 너머로 닥쳐오는 거리 의 풍경만 골똘히 쏘아보고 있었다.
골목 어귀를 나설 무렵에 취한 영림의 행동에서 강석운은, 이미 칸나의 침 묵의 이유 같은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강석운도 똑 같은 침 묵 속에서 고영림의 옆 얼굴을 때때로 살펴보며 이 드라이브 코스가 지닌 그 무슨 운명 같은 것을 멍청히 생각하고 있었다.
영림은 한 번도 석운의 얼굴을 돌아다보지 않았다. 그것이 다소 신경에 걸 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어떻게 된 셈이야?』
『…………』
『모인 학생이 몇 명이랬지?』
『…………』
『모르겠는 걸. 꼭 화난 사람 모양으로……』
『아, 돈화문 쪽으로 돌아가요. 안국동으로 해서 가요.』
대답은 없고 원남동에서 영림은 그렇게 외쳤다.
『네네.』
『화날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화난 사람 같은 감정이 하나 가뜩 가슴에 차 있어요.』
『…………』
이번에는 석운의 편에서 벙어리가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
『선생님이 아심 그런 심리 상태를 작가적인 입장에서 좀 해부해 주세 요.』
『그래도 무언가 조금은 있겠지, 화날 이유가……』
『조금도 없어요.』
『영림은 이상한 사람인 걸!』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그걸 모르심 누가 알아요? 제 감정의 한 오리 한 오리를 선생님은 지금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아주 모른 척 하고 어물어물 넘겨 보내실 작정이시지만……』
『내가 뭘 안다고 그래? 천 길 바다 속은 알아도 한 길 가슴 속은 모른다 는데.』
『후훗……』
그때서야 비로소 영림은 석운을 돌아다보고 미소 하나를 비웃듯이 지어 보 였다. 석운도 따라서 빙그레 웃어보였다.
두 사람은 그 이상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화날 이유는 없으나 화난 사람 같은 감정을 둘이는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화날 이유라고는 단 한 가지, 사모님이 저를 너무도 잘 대해 주신 것 뿐 이예요. 정말 좋은 사모님이세요.』
『잘못 대해 줬더라면 큰일 날 뻔 했었군.』
『그랬음 얼마나 좋겠어요! 이처럼 우울하지는 분명코 않았을 테니까요.』
『영림은 예쁜 말을 잘 해서 좋아.』
『제 말 예쁘세요?』
『예뻐. 영림의 입에서는 주옥 같은 말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걸.』
영림은 만족한 듯이 석운을 말갛게 바라보며
『목에 가시가 든 사람처럼 선생님도 어물어물 삼켜 버리지만 마시고……
주옥 같은 말을 좀 마음 놓고 쏟아놔 주세요.』
석운은 그말이 또 주옥처럼 예뻐서
『쏟아 놓았다간 줏어 담지를 못해.』
『삼켜 버림 소화 불량에 걸려요.』
『그 편이 오히려 난 걸.』
『암만 해도 목에 걸린 가시를 빼 드려야 할까 봐요.』
『또 주옥 같은 말을……』
『이 길 두 번째예요. 달포 전에…… 아, 저 출판사 앞에서 내리셨지요.』
견지동을 지나 차는 일로 명동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삼켜 버리면 소화 불량이 된다고, 목에 걸린 가시를 빼 드려야겠다는 영림 과 쏟아 버렸다가는 주워 담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석운 사이에 대화는 또 뚝 끊어진 채 차만 달렸다.
종로를 지나고 또 을지로를 건널 때,
『어제 같이 걷던 사람이 미스터 송이요?』
영림은 앞을 바라보던 그대로의 자세로 고개만 끄떡끄떡 했다. 한참만에 영림은
『처음엔 반가워 하던 선생님이 나중에는 왜 그처럼 쌀쌀하셨어요?』
『…………』
얼마 있다가 석운은
『목에 가시가 걸려서……』
『그러신 줄 알았어요.』
『아, 여기가 명동인데요.』
『장소가 어딘데?』
명동 입구를 지나 차는 곧장 달려가고 있었다.
『명동 어디 쯤입니까?』
운전수가 물었다.
『그냥 가요.』
진고개 입구를 지나 차는 남대문 쪽으로 달렸다.
석운은 빨리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오뇌의 빛이 한 줄기 영림의 프로필을 뒤덮고 있었다.
어디서 차를 멈춰야 할런지, 정처없는 차 바퀴의 운전만이 신경에 왔다.
곧장 가면 한강이 될 테지, 한강 건너 편에 한성양조가 있다. 무서운 것은 하나도 없었으나 회사 사원들의 눈이 귀찮아
『시청 쪽으로 꺾어 줘요.』
남대문 앞에서 차는 돌았다.
이상 더 석운은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영림의 얼굴에 푸뜩푸뜩 떠 오르는 오뇌의 빛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장 갑니까?』
시청 앞에서 운전수는 또 물었다.
『아무데나 가 줘요.』
『네?』
『어서 곧장 가요.』
영림은 눈을 감고 상반신을 되는 대로 탁 젖히다가
『아얏!』
쿠션에 뒤통수가 부딪혀 혹이 뜨끔 했다. 뒤통수의 얼얼한 아픔을 영림은 애정의 댓가라고 생각했다.
『어디 다쳤어?』
『아니요.』
눈을 감은 채 영림은 가만히 대답했다.
『그럼?』
『사모님 좋으신 분이예요.』
뚱딴지 소리를 영림은 중얼거렸다.
『영림양은 나쁜 사람인가?』
『노오! 나도 좋은 사람이죠.』
『어디로 갈깝쇼?』
중앙청 앞까지 와서 운전수는 또 물었다.
『가고 싶은 데로 가요.』
『가고 싶은 데라고요. 곧장 가면 효장동인데요.』
『그럼 그리로 가요.』
차는 또 달렸다.
차가 어디로 가든, 석운도 이미 내던지듯이 영림과 같이 눈을 감으며 마음 을 가라앉히기 시작하였다.
『그냥 곧장 갈깝쇼? 자하문 밖으로요.』
효자동 종점에서 운전수는 말했다.
『마음대로 하시요.』
눈을 감은 채 이번에는 석운의 편에서 대답을 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빠져 나가는 차는 이윽고 탄탄한 비탈 길을 날쎄게 달 리기 시작했다. 일요일이라 오고 가는 차량이 눈에 띄이게 많았다.
자하문 고개를 넘어 세검정(洗劍亭)에 다달았을 무렵까지 석운과 영림은 단 한 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가느다란 한숨만이 가다가 두 사람의 입술을 새었을 따름이었다.
『어떡할까요? 더 올라갑니까?』
『그냥 올라가요.』
개울을 끼고 차는 울퉁불퉁한 길을 어디까지나 자꾸만 기어 올라갔다.
유흥객들이 술추렴을 하며 개울가 여기 저기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개울 건너 편 숲 사이에서도 그랬다. 조용한 아베크도 있었다.
『선생님, 능금 밭이 굉장히 많아요.』
『아, 능금 밭이……』
영림의 시선을 따라 석운은 창 밖을 내다보았다. 가도가도 즐비한 능금 밭 의 행렬이다.
『이제 그만 내릴까요?』
『아, 그러지.』
차는 멎고 둘이는 내렸다. 상당히 깊숙히 차는 들어오고 있었다.
차삯을 치르고 나서 둘이는 그냥 위로 걸어 올라갔다. 사람의 그림자가 차 차 드물어졌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만이 여기 한쌍 저기 한쌍 옹 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럴 줄 알았음 뭘 좀 사 갖고 올 걸 그랬어요.』
석운을 쳐다보며 영림은 웃었다.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이 준비를 톡톡히 해 놨을 텐데……』
『후훗……』
웃다가 돌부리를 헛 짚어 발 하나가 퉁그러져 나가며
『어, 엄마……?』
허위적거리는 손길과 함께 휘청하고 쏠려 오는 대단한 무게…… 그러한 무 게가 어디에 깃들어 있었더냐고, 보기와는 딴판인 육중감을 두 팔에 느끼며
『하마터면 개울로 기어 들어가는 걸.』
『용서하세요, 선생님!』
완전히 담겨졌던 상체가 석운의 품 안으로 부터 비비적거리며 영림은 조금 얼굴을 붉혔다.
『거짓말을 하니까 돌부리가 벌을 준 거야.』
통그러질 때 빠져나간 핸드백을 석운은 집어 주며
『어째 그리도 무거워?』
보기에는 날쌘 암사슴처럼 탄력성이 있고 홀가분할 것만 같아 보이던 영림 의 무게였다.
『후훗.』
영림의 빨간 얼굴이 웃음을 삼키며
『무거워서 짐이 되시나봐요.』
『응?』
『제가 제 힘으로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했으니까 선생님에게는 무거운 짐 이 될 수 밖에……』
말 뒤에 또 하나의 말이 숨겨져 있는 것이라고 영림의 그 번개처럼 흐르는 상념을 석운의 지성이 간지럼을 타도록 귀여워했다.
석운은 오뇌에 짙어 있는 얼굴에 웃음 하나를 싱긋이 띄며
『짐이 되기를 무서워 하는 세속적인 조심성을 비웃는 말이겠지만…… 문 제는 그 이전에 있어야만 할 거야.』
『알겠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인간적 성실의 문제죠.』
『돌부리는 이 세검정 골짜기에만 있는 게 아니고 인생의 비탈길에도 있는 거야.』
『그걸 아마도 제가 요즈음 헛집고 있나 봐요. 그래서 제 한 몸을…… 제 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선생님께로 쏠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지 만……』
『돌부리도 지금처럼 헛집지 않고 정신을 차려서 잘 집고만 넘어가면 넘어 갈 수도 있는 건데……』
『선생님에게 짐이 되는 제 무게를 드리지 않아도 좋았을 테고……』
『결코 짐이 되는 무게는 아니었어. 그렇지만 어쨌든 그 무게와 함께 하마 트면 개천가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질 가능성도 확실히 있었으니까……』
『정말이세요?』
『응?』
『제 무게가 짐이 되지 않으셨다는 말씀……』
석운은 영림의 눈동자에서 생명의 몸부림과도 흡사한 진지한 움직임을 뚫 어지게 응시하다가 이윽고 침착한 어조로 대답을 했다.
『달가운 무게? 그저 달가운 무게였어.』
영림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달가운 무게! 그저 달갑게만 생각키우는 무게를 강선생님은 자기에게 느끼 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위치의 무게를 강선생님에게서 차지할 수 있는 칸 나 고영림은 송구하리만큼 행복했다.
『선생님!』
숨가쁜 외마디 외침이 시발차(始發車)의 기적인 양 영림은 냅다 격정의 레 일을 달리고 있었다.
『아아, 선생님!』
망그러진 인형 모양 고개가 뚝 부러지며 툭툭툭, 칸나의 격정은 마침내 맑 은 물이 되어 발부리를 뿌리기 시작했다.
영림은 운다, 자꾸만 운다.
어린애들처럼 두 손등으로 연방 눈물을 씻어 내며 무섭게 흐느껴 울었다.
꼬박 서서 울었다.
강선생님이 자기를 그렇게 까지 생각해 주실 줄은 정녕 몰랐다. 무표정하 리만큼 태연하던 모습, 쌀쌀하리만큼 무표정하던 어른다운 표정의 배후에서 영혼의 대화를 자기와 더불어 수 없이 바꾸고 있던 강선생님을 영림은 발견 한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
영림은 솟구치는 눈물을 씻으며 얼른 얼굴을 들고 천천히 석운을 추켜 보 는 자세로
『그렇지만 선생님, 과히 염려하시지 마세요. 제 무게가 선생님에게 짐이 되실 때, 오뚜기는 쓰러졌다가는 또 바로 서니까요. 이처럼…… 이처럼 말 예요.』
기척을 하고 영림은 석운의 앞에 오뚝 섰다. 그냥 눈물은 흐르기만 했다.
여학교 시절부터, 실로 오랜 시일에 걸쳐 한 방울 두 방울 모아 두었던 눈 물이기에 참아도 참아도 연방 솟구쳐 나오기만 했다.
『이만함 됐죠? 아까는 모르고 쓰러졌지만요.』
『…………』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석운은 돌부처 모양 서 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척 을 하고 서 있는 영림의 자태가 사랑에 불타는 마리아처럼 성스럽게 석운에 게는 비쳤다.
『됐어! 그만 하면 훌륭해.』
그대로 내버려 두면 와락 쓰러안고 똑 같은 흐느낌 속에서 숨가빠 할 수 밖에 없을 자기 자신의 허물어져 가는 자세를 최후적으로 석운은 간신히 지 탱하며 조용히 말했다. 명령하듯이 말했다.
『오뚜기, 눈물을 씻어요.』
영림은 열심히 씻으며
『씻어도 그냥 나와요.』
석운도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왔다.
그러나 자기마저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이십 년이나 나이가 어린 영림의 격정에 불을 사를 수는 도저히 없다.
석운은 얼른 손을 뻗혀 빤히 추켜보고 섰는 영림의 두 어깨를 잡고
『오뚜기, 이제 돌아서서 가요.』
영림의 방향을 가만히 돌려 놓았다.
그대로의 자세로 그냥 마주 서 있기에는 석운의 모랄이 이미 약화되어 있 었다. 저항의 발받이가 한 조각 남아 있어 말갛게 쳐다보며 우는 영림을 돌 려 세우기는 했으나 아주 선 채 쓰러져 올 것만 같은 고영림의, 결코 짐이 아닌 달가운 무게를 거부해 버릴 자신은 이미 없었다. 젊었을 때는 도리어 그러한 용기가 석운에게는 있었건만……
『오뚜기, 망가지기 전에 어서 앞으로 걸어 가요. 오뚜기도 망가지면 바로 서지를 못하는 법이야.』
그때 석운은 마침내 눈물이 되어 볼을 적시고 있었다.
석운은 얼른 눈물을 닦아 내며 시름 없이 걸어가는 영림의 뒤를 서서히 따 랐다.
일부러 목소리만을 명랑하게 높이어
『칸나의 오뚜기는 아직도 망가지지는 않았는 걸! 제법 잘 걷는구만!』
그러나 그런 말 따위에 영림이는 호응해 오지 않았다. 않을 만큼 영림의 감정에는 엄숙한 경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고, 사십 대의 완숙한 지성이 이십대의 미숙한 감정 풍경 앞에 눈물을 흘렸다는, 그 우스꽝스런 사실을 작가 강석운은 지금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길을 비낀 송림 사이 오르막 길 막바지에 풀밭 하나가 있었다. 아이들 둘을 거느린 중년 부부가 그 풀밭에서 일어나 개천 가로 맞 받아 내려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내려 오는데…… 그리로 가서 앉아요.』
흐느낌이 가시지 않아 대신 영림은 고개만 끄떡거려 보였다.
오르막 길 중턱에서 중년 부부의 일행과 마주쳤다. 가족 일동이 두 사람을 힐끔힐끔 돌아다보면서 내려갔다.
『엄마, 저 사람 도선이 아버지야.』
『그래 그래, 잠자코 있어!』
들릴락 말락한 이야기였지마는 뒤에 떨어져 올라가던 석운은 들었다.
무심 중 뒤를 돌아다본 석운의 시야 속에서 중년 부부는 모르는 체하고 앞 장 서서 내려가고 있었고, 사내 아이들은 여전히 힐끗힐끗 이편을 돌아다보 곤 했다.
『들켰다.』
석운은 마음이 시무룩했다. 남편의 얼굴에는 낯이 없었으나 인제 생각하니 부인과 애 한 놈의 얼굴은 확실히 낯이 익다. 이름은 모르나 도선의 아버지 를 알아보는 그놈은 확실히 도선이의 동무였다. 부인도 인사는 없었으나 아 내 옥영이와는 마을 동무 쯤은 확실히 되어 있을 것이라고, 외나무 다리에 서 원수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십 팔년만에 처음 부닥친 오늘의 염사(艶事)가 이처럼 신속한 보도망을 거 쳐 아내의 귀에 들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들은 오랜 시일 을 두고 바람을 피우면서도 아내의 눈만은 교묘히 속여 오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셈이냐고, 하늘은 짓궂은 앙심을 품고 자기만을 중뿔나게 내려다보 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상식으로 판단할 때, 자기 남편과 함께 인기척 드문 숲 사이를 걸으면서 흐느끼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을 아내 옥영의 감정이 어느 정도의 심증(心證) 을 가질것인가 그건 이미 뻔한 이야기였다.
『할 수 없는 일이야!』
석운은 이내 단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단념 속에는 그 무슨 막연한 각오 같은 것이 불쑥 뒤섞여져 왔다. 달가운 짐에 대한 희미한 각오 가 운명론적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이러한 목격자가 없었던들 그러한 각오 가 운명론적으로 처리될 수 있는 강석운은 적어도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의 자세가 삽시간에 외부로 방향을 돌이켰다. 아내 의 비탄과 분노와 저주에 대한 저항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그것은 마치 칸 나의 자기 해방과 비슷한 의미와 위치를 지니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예요?』
눈물을 거두며 영림은 시름없이 물었다.
『아니, 알긴……』
둘이는 나란히 다리를 뻗고 풀밭에 앉았다. 멀리 송림 사이로 계곡이 흐르 고 있었다. 맞은 편 산 너머로 초하의 사양이 눈부시게 뿌려진 계곡의 일원 (一圓)이었다.
영림은 핸드백을 열고 껌 두 개를 꺼내 석운의 뻗힌 한쪽 다리 위에 가만 히 올려 놓았다. 가벼운 한숨 하나가 영림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올려 놓고 되돌아 가는 갸름갸름한 손길을 따라 석운의 시선이 움직이는 데, 언덕 밑 개천가 길로 중학생들의 노래소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사랑하는 죄이라서 말 못하는 내 가슴은 이 밤도 울어야 하나 둘이는 후딱 시선이 마주치며 조용히 웃었다. 이윽고 영림은 가만히 물었 다.
『선생님, 사랑이 뭔가요?』
『몰라, 저 중학생에게 물어보면 잘 알으켜 줄 거야.』
『선생님이 그걸 모르심 소설은 어떻게 쓰세요?……』
『산 속에 들어간 사람은 산을 모른다니까……』
사랑의 산 속으로 선생님이 들어가셨단다. 그래서 사랑이 무언지를 선생님 은 모르신단다. 영림은 갑자기 소녀화보의 여학생들처럼 감상이 감미로워졌 다.
『사랑이 무언지를 선생님은 아실 텐데……』
『혼자 있어도 즐겁고 둘이 같이 있으면 더욱 더 즐거운 것! 그게 사랑이 지.』
영림의 감정이 손뼉을 쳤다.
『내가 아는 건 그것 뿐이야. 그리고는 아무 것도 몰라.』
석운은 소년들처럼 이름 모를 풀대 하나를 꺾어 입에 물었고 영림은 눈 앞 에 돋은 앉은뱅이 솔잎을 한줌 훑었다. 훑어 쥔 솔잎을 스커트 위에 쭈욱 펼쳐 놓으며
『열 일곱 살 때부터 선생님과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보기를 꿈꾸고 있었 어요.』
『꿈은 아름다웠으나 현실은 추했지?』
『아아뇨.』
영림은 도리도리를 해 보이며
『꿈보다 현실이 제게는 더욱 더 좋았어요.』
『그렇지는 못할 텐데……』
『혼자 있어도 즐겁고 둘이 같이 있음 더욱 더 즐거운 것! 어쩌면 선생님 은 한 마디로 열 마디 값을 하세요?』
『독일에 릿타 하우스라는 시인이 있었어. 그의 시에 이런 것이 있었지.』
사랑이 무엇이냐고 태양에 물었더니 태양은 아무 말도 없이 황금색 햇빛 을 던져 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꽃에 물었더니 꽃은 그윽한 향기를 뿌린 채 잠자코 있었다.
사람이 무엇입니까, 깨끗한 엄숙입니까, 달콤한 도취입니까 고 신에게 물었더니 신은 한 사람의 정숙하고 귀여운 여자를 내려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사랑이 뭐냐고 다시는 묻지 않았다.
『낡은 시대의 사랑이예요. 좋게 말하면 한 번 보고 좋아진 성춘향과 이몽 룡 같은…… 나쁘게 말하면 집의 아버지나 오빠와 같은…… 동물적 순수성 이 있을 뿐이예요. 그런 백치 같은 인간의 잠꼬대는 그만 외우시고 선생님 의 사랑이 듣고 싶어요.』
석운은 싱긋이 웃으며
『모르는 말이야. 연애에서 동물적인 것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영혼의 공 허 뿐이야.』
『어쩌면 선생님은 「유혹의 강」을 집필하면서 부터 인생관이 달라지신 것 같아요.』
『달라진 게 아니고 바로 잡고 있는 한 과정이라고도 볼 수는 있지.』
『어어? 그럼 선생님은 박목사의 행동을 정당시하고 계세요?』
『박목사의 행동 전부를 정당시하는 건 물론 아니야. 다만 그러한 생활의 존재 의의를 극도로 확대시켜 보는 것 뿐이니까. 말하자면 과거의 나의 작 품 행동에 대한 일종의 반등이라고나 할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의 말씀……』
『모를 것 없어. 감각으로서 영혼을 배반하지 말고 영혼으로서 감각을 배 반하지 않는 연애 그것이 남녀의 참다운 사랑이라고, 이것은 불란서의 규 수 작가요 연애 대장인 〈죠르쥬 쌍드의〉 경험적 연애 철학이야.』
『관념적으로는 알 것도 같지만요.』
『관념적이 아니고 칸나는 이미 체험을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
『제가요?』
『칸나가 송준오라는 청년에게서 느낀 영혼의 공백을 오늘 와서는 나한테 서 충족시키려는 갈망, 불행히도 칸나의 정신적 연령이 높았기 때문에 그 것을 한 사람에게서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야.』
『확실히 그건 그랬어요.』
『영림은 아까 돌려 세워 놓지 않았으면 내 품 안으로 쓰러져 왔을런지 몰 랐을 것이고 나 역시 영림을 끌어 안았을런지 몰랐어. 왜…… 영혼의 양식 만으로는 사람의 배(服)는 부르지 않기 때문이야.』
석운은 좀더 계속했다.
『칸나는 나를 존경한다고 했어. 동시에 칸나는 존경 속에서 애정이 발아 한다고도 했었지.』
『네, 제 감정은 확실히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칸나의 그러한 애정이 순전히 영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 라면 칸나는 멀지 않아 이 강석운에게서 실망을 느낄 거야. 나와 이렇게 같이 앉아 있어도 조금도 즐겁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올 테니까 말이야.』
『안 와요.』
영림은 확고한 대답을 했다.
『어째 안 올까?』
『선생님이 지금 착각하고 계시는 것처럼 선생님을 사모한 제 애정은 육체 와 영혼을 뭐 그처럼 이론의 칼로 베이 듯이 양단해 놓은 게 아니니까요.
제가 말하는 것은 다만 미스터 송이 너무나 조급히 제 육체를 갈망한 것과 는 정 반대로 여성은 좀 더 조급히 남성들의 정신적인 세계를 갈망한다는 것 뿐이었어요. 정신적인 충족감이 없이는 여성의 육체는 좀처럼 감각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는 말이었어요. 그걸 선생님은 오해하셨나봐요.』
『아, 이제 잘 알았어.』
석운은 금새 얼굴이 어두워지며
『어쨌든 연애의 결말은 애욕을 가져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칸나가 나 를 따른다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돌부리를 헛집은 셈이 됐어.』
『어째서요?』
『나에게는 가정이 있으니까……』
『선생님과 결혼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제게는 없어요.』
『그렇다면 더 큰 비극이다!』
『누구에게 있어서 비극이라는 말씀이에요? 선생님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리적 윤리는 남자의 과거는 씻어 주어도 여자의 과거는 씻어 주지를 않는 거야.』
『과거는 자기의 역사를 의미하는 거예요. 자기의 역사를 씻기우기를 칸나 는 바라지 않아요. 겨우겨우 공들여 아로새긴 자기의 역사를 칸나는 무엇 보다도 소중히 하며 살아 갈 수 있는 인간이니까요.』
『불행한 생각이다!』
석운은 성난 사람처럼 물었던 풀대를 내동댕이치며 훌쩍 몸을 일으켰다.
『행복한 생각이지, 어째서 불행한 생각이라는 말씀이예요?』
영림도 스커트에 펼쳤던 솔잎을 털며 홀가분히 따라 일어섰다.
『가요! 내려가요!』
영림은 막아서며
『왜 이내 가세요? 공들여 온 길인데……』
『장소가 나쁘다. 지나치게 고요해. 사람들 있는 데로 내려가요.』
『선생님, 무서워서 그러세요?』
『무섭긴,』
석운은 말꼬리를 잇지 못하고 무서운 눈동자로 물끄러미 영림의 정열을 핥 았다.
『가정이 무서우세요?』
『…………』
『그렇지 않음 제가 무서우세요?』
석운의 입 언저리가 연방 쭝끗거리기만 했다.
『제 역사는 제가 만들 테니까 선생님의 역사는 선생님이 만드셔야지.』
순간, 석운의 손길이 쭉 뻗었다. 영림이 두 팔을 힘차게 잡아 낚으며 비틀 비틀 쏟아져 들어오는 어깨를 벅차게 끌어 안고
『영림!』
사십대의 지성이 지닌 최후의 저항은 드디어 허물어 졌다.
억압되어 있던 격정은 돌팔매하듯이 분류했고 숨 가쁜 포옹 속에서 영혼의 격류는 아우성과 소용돌이를 쳤다.
『칸나여, 내 역사는 내 손으로 만든다.』
『아아, 선생님!』
열풍(熱風)속에서 접순(接唇)은 작렬했다. 나긋나긋한 칸나의 입술이 왔 다. 꺾어지는 모가지, 눈을 감고 칸나는 창궁(蒼穹)을 우러렀다.
『칸나! 칸나는 내 것이다.』
『선생님도…… 선생님도 저의 ……』
자리를 못 잡고 허위적거리던 접순은 이윽고 말과 동작을 포기해야만 했 다.
침묵과 정지, 이 두 가지 관념 속에서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숨막힐 듯 고 즈넉했다.
지구는 지축을 잃어도 좋았고 천체는 허물어져도 관심이 없다.
영육의 접순에서 인간의 꽃은 피었다. 예술도 피었다. 철학도 피었다.
『아아……』
하늘하늘, 칸나의 목소리는 폭 넓은 석운의 품 안에서 가냘피 떨고 있었 다. 고요히 흐느끼고 있었다.
감격이 눈물로 유형화(有形化)했다. 이 단순한 생리학적 현상 과정에서 인 간은 곧잘 영혼과의 대화를 교환하는 것이다.
영림은 강선생님의 벅찬 포옹 속에서 영혼의 불멸을 푸뜩푸뜩 느꼈다. 영 혼의 불멸, 그것은 생명의 영원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실재는 감각으로써 인식(認識)되었다. 강석운이라는 참의 인격체를 감각으 로써 인식하는 데서 영림은 주체적인 진실의 종합체로서 연애의 진리를 파 악한 것 같았다.
강석운 선생에 대한 과거 오랜 시일에 걸쳤던 사모의 정에는 감각의 환영은 있었으되 그 실체는 없었다. 강선생님의 환영을 안고 잠자리 에든 적도 한두 번이 아니건만 그 사유(思惟)된 감각은 결국에 있어서는 개 념적인 환각(幻覺)인데 불과하였다. 과부족(過不足)인 개념에서 연애의 실 체는 진리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었다.
오늘에 있어서는 칸나 고영림의 불타는 의욕은 강선생님의 아내가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칸나는 다만 영육의 일치에서만 올 수 있는 참다운 연 애 감정의 실체를 강석운이라는 하나의 인격체에서 과학자처럼 정밀히 실럼 해보고 싶었을 따름이다.
둘이는 풀밭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석운의 가슴에 영림은 빗비슴히 머리 를 기대고 있었다. 기대인 영림의 어깨 한 쪽을 석운은 가만히 끌어 안고 있었다. 석운의 모자는 발부리 앞에 나동그라져 있었고 계곡을 건너 맞은 편 송림 사이에는 술 취한 젊은이들이 「사랑을 위하여 왕실도 버리고」를 여념 없이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남들은 왕실도 버리고 사랑을 했는데 칸나의 과거가 씻기지 않는 것 쯤 뭐가 그리 두려울까요?』
대답 대신 석운의 손길이 영림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
『응?』
『칸나는 행복해요!』
저도 모르게 배알는 「한창」이라는 애드버어브(副詞[부사])가 웃으워 한 두 번 영림은 쿡쿡 웃었다. 웃음과 함께 포동한 사지가 발산하는 가냘픈 율 동이 석운의 품 안으로 퍼져 들었다.
『애정의 실감!』
퍼져드는 율동을 석운은 그렇게 표현했다.
『선생님, 뭐가 실감이예요?』
영림은 눈자위를 추켰다.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어서 한창 행복해요!』
『후훗……』
영림은 웃음을 깨물며
『선생님, 수염을 안 깎고 오시길 잘 했어요.』
『왜?』
『깔깔해서…… 따끔따끔…… 영원히 기억에 남을 것만 같아요.』
석운은 말 없이 웃다가 영림의 머리를 두 손으로 힘차게 깜싸 안았다.
『아앗!』
품 속에서 억압된 소리가 났다.
『거기 아파요.』
『아, 혹이…… 어찌 된 혹이야?』
『후홋!』
『아프다면서 웃긴 왜 웃어?』
『선생님을 사모한 댓가인가 봐요.』
『무슨 소리야?』
머리칼을 들추고 석운은 들여다보았다.
『아, 피가…… 피가 말라 붙었어. 조금……』
석운의 허벅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정신적으로만 선생님을 열심히 생각했기 때문인가 봐요.』
『그러면 혹이 생기나?』
『그럼요! 감정과 감각과 육체의 주소가 가슴이람, 정신과 영혼과 환상의 주소는 머리니까요. 가슴엔 하아트(心臟[심장])가 살고 있지만 머리엔 부 레인(腦髓[뇌수])이 깃들어 있죠. 심장은 가만히 놔 두고 뇌수만 자꾸 부 려먹으니까 그것이 마침내 불평을 품고 통그라져 나온 거예요.』
『아아, 칸나! 귀여운 칸나!』
『그렇지만 인제부터는 주로 심장을 부려 먹을 테니까 내일 쯤은 아마 쑥 들어갈 거예요.』
『아아, 칸나!』
석운은 혹 위에 가만히 입술을 비볐다.
소년 하나가 자질구레한 물건이 담긴 목판을 메고 와서 사라고 했다.
『아이, 정말 배가 고파요.』
그제서야 두 사람은 시장기를 갑자기 느꼈다. 국산 위스키와 비스키트와 오징어와 카스테라를 영림은 샀다.
사랑만으로써는 배가 부르지 않는지, 뇌수의 불평을 간신히 무마해 놓으니 까 이번에는 영림의 밥주머니가 발버둥을 쳤다.
영림은 비스키트를 연방 주워 먹었고, 석운은 위스키 병으로 나팔을 불었 다.
드높은 녹음 사이로 사양이 비껴 든다. 바람이 이나보다. 얼룩진 햇볕이 무릎 위에서 하늘하늘 떨고 있었다.
『한 모금 마실래?』
『싫어요.』
『먹을 줄 안다면서?』
『선생님의 그림자는 밝아도 안 된담서요?…… 담배도 선생님 앞에서는 못 핀담서요?
『선생님이 이젠 아니야. 제자를 포옹하는 선생님이 세상에 어디 있어?』
『제 앞에 계시잖아요?』
『선생님은 인제 집어 치워요. 일대 일이요. 남자요 여자의 문제야.』
석운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공복에 술기운이 찌르르 돈다. 가정과 아내와 아이들과 그리고 십 팔년 동 안에 걸친 성실과 파국이 머리에 왔다. 표정에도 왔다. 그 조각 조각 깨어 져 나간 성실의 파편 같은 것이 술기운과 함께 빙글빙글 전신을 돌고 있었 다.
『선생이 선생 구실을 해야만 선생의 대접을 받는 법이야! 고영림 대 강석 운의 문제다.』
혼자말처럼 석운은 되씹었다.
말끄러미 석운을 바라보며, 예기는 하고 있었지마는 내성(內省)이 시기가 너무나 빨리 온 것이라고, 영림은 강선생의 인간적 자세를 다시 한 번 확인 을 하며
『선생님은……』
『선생님은 제발 좀 그만 두라니까! 제자를 끌어 안고 입을 맞추는 선생님 이 어디있어?』
정체 모를 가벼운 분노의 한 마디를 석운은 불쑥 뱉았다.
술기운도 있었지마는 마음보다 먼저 말이 노기를 띄어 왔다. 습성으로 말 의 뒤를 따라가면서 석운의 감정도 차츰 분노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 다.
『선생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
대답을 않고 석운은 꿀꺽꿀꺽 위스키만 들이켰다. 내팽개칠 곳이 없는 노 기를 강석운은 술 안주로 삼고 있었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지금 후회를 하고 계시는 거죠?』
오징어 발 하나를 씹다 말고 영림은 물었다.
『아니야!』
말과 함께 노기를 뱉아 버리려 했으나 튀어 나간 것은 말 뿐이고 정체 모 를 노기는 그냥 감정 속에서 뒹굴기만 했다.
『그럼 왜 그러세요? 갑자기?』
석운은 부드러운 어조가 되며
『칸나가 인제부터 선생님이란 말만 안하면 돼! 이따위 강석운을 선생이라 고 존경할 놈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건 선생님이 모르시는 말씀이예요.』
『또 선생님이야? 그만 둬요. 부끄러워.』
그러다가 석운은 또 영림을 홱 끌어 안으며 무섭게 몸부림을 쳤다.
『잃은 것은 존경이고 얻은 것은 사랑이다.』
『아이,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영원한 애제자예요.』
『선생이 아니라도 좋고 제자가 아니라도 좋다!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자격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면 그만이야! 그것이 인간의 정체일런지도 몰라.
인간 위에 지저분한 관사(冠詞)를 붙일 필요가 어디 있다는 말이야?』
『선생님!』
『있는 것은 관사가 아니고 그대와 나다!』
「선생님」과 「남편」의 자격을 잃은 댓가로 작가 강석운은 「인간」을 찾았다.
분노는 이윽고 해소되고 사랑의 법열만이 그곳에는 있었다..
『선생님은 지금 인간을 찾으셨지만 인간이란 무얼 두고 하는 말인가요?』
풀밭에 누워서 석운은 드높은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빗비슴히 영림은 꿇어앉아서 조용히 물었다.
『나도 몰라. 영림이가 인간이고 또 내가 인간이라는 것 밖에 나는 아무 것도 몰라.』
포옹의 흥분은 차차 가시고 사색의 즐거움이 둘이에게 왔다. 포옹의 흥분 을 사색적으로 정리를 하려는 것처럼 영림은
『인간답다는 말은 사람이 동물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고 신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거 아닌가?』
『그럼 결국 인간이란 무언가요?』
『영림이 같은 것, 강석운 같은 것, 아마 그런 걸 테지.』
『아이, 선생님도 참 꼭 같은 말만……』
『영림이가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나를 아내 옆에서 끌어낸 것 같은 행동, 내가 한 사람의 남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영림과 뽀뽀를 한 것 같은 행 동…… 그런 것들이 다 인간의 행동이야.』
순간, 영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야기를 하면 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까지 격찬을 해 주신 사모님이 아니었더냐고, 자기 저항이 박약했던 것을 불현 듯 느끼며
『선생님, 제가 확실히 나빴죠? 선생님을 유혹해서……』
『아니야, 영림이가 유혹한 것이 아니고 내가 유혹을 느낀 때문이야.』
『확실히 나쁘긴 했었지만…… 그렇지만 그 이상 더 자기를 누를 힘이 제 게는 없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 이상 자기를 누른다는 건 제 생명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어요. 사 모님보다는 역시 제 자신이 더 소중했으니까요.』
『세상에는 필요악(必要惡)이라는 것이 있는 거야.』
『필요악이라고요?』
『공자님 같은 분은 부부의 성생활까지를 필요악이라고 규정을 했어. 섹스 는 인간에게 필요는 하지만 그건 선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런 입장에 서 본다면 내가 아내를 속이고 영림이가 사모님의 눈을 속인 것도 일종의 필요악일런지 몰라.』
『저는 다만 제 생명의 가치를 그 누구의 것보다도 귀여워 했을 뿐이예요.
그러기 위해서 제게는 선생님이 필요했어요. 그러니까 사모님에게 대해서 어딘가 안됐다고 생각키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싱거운 센치예요. 문제는 선생님에게 있는 거지 사모님에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정확한 생각이야. 자기 확장(自己擴張)을 위해서 영림에게는 내가 필요 했다는 말이지?』
『그래요, 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연애에 있어서 섹스 문제 같 은 건 제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보다도 영혼의 양식이 필요했어 요. 그 양식을 선생님만이 제게 주실 것 같았어요. 선생님의 작품을 여러 가지 읽어 보면 기질적으로나 사고 방식으로나 또는 취미 같은 것까지 어 쩌면 그처럼 통할 수가 있을까요?』
『값 비싼 말이야. 작품 세계에서나 인간 세계에서나 자기를 알아 주고 자 기와 같아져 주는 사람만이 참다운 독자인 동시에 참다운 지기(知己)일 수 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저는 만나서 한 두 번만 이야기해 보면 선생님이 저를 꼭 좋아하 실 줄로 믿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처럼 좋아하지 않았어?』
『황송해요, 선생님!』
『선생님이란 말 이제 정말 그만 둬요.』
『그렇지만 이름은 못 부르겠어요. 도저히 입에 담기지가 않는 걸요.』
『그럼 그때까지 기다릴 테야.』
『여자의 애정은 역시 존경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 가장 깊이 있는 사랑 의 과정인 것 같아요.』
영림은 석운의 손 하나를 집어서 자기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양은 좀 더 나지막이 비껴져 왔다. 새라도 울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유흥 객의 발자취조차 멀어진 이 오솔길 끝에 자리 잡은 조그만 풀밭은 아늑만 했고 정적만이 깃들어 있었다.
생명의 고동이 들려오는구나! 하늘을 쳐다보며 반듯이 누워 있는 폭 넓은 가슴 위에 청진 모양 기대인 영림의 한쪽 귀바퀴에서 툭, 툭, 툭…… 생명 의 증언(證言)인양 영혼의 맥박은 신화처럼 신비로운데……
『신화처럼 신비로운 것만이 영양(營養)이 될 수 있는 순간이 인생에는 있 는가 봐요.』
『그래서 유신론자가 생기는 거야. 인간의 영혼이 가장 깨끗해질 순간, 인 간은 신비를 찾아야만 했지. 신앙은 신을 발견했고……』
『신은 흙으로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빗대로 이브를 만들었다죠?』
『아니야. 나의 창세기(創世記)는 조금 달라.』
『어떻게 달라요?』
석운은 혹 돈은 머리 위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아담과 이브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고……』
『네?』
『옛날 옛날 아주 먼나먼 옛날 얘기지.』
『어마, 선생님이 옛 말을 해 주시네요.』
행복하다. 여학생 시절부터 꿈꾸어 오던 그대로의 행복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인지, 지명은 분명치 않지만 하여튼 세계 최고의 문학의 발상지 인 바빌로니아의 벌판 쯤으로 생각해 두어요. 중앙 아세아, 지금의 이란, 이란 근처야.』
『석유가 만이 나다는데?』
『옳지 옳지. 신문도 제법 읽는군 그래.』
『아이, 선생님도 참! 석유 때문에 옥신각신 하잖았어요?』
『난 또 내 유혹의 강만 읽고는 다른 건 집어 치우는 줄 알았는데……』
『어서 이야기를 하세요. 참.』
『그 바빌로니아 벌판에 유혹의 강은 흐르고 있었어.』
『유혹의 강?』
『응, 그것이 티그리스 강인지, 유우프라데스 강인지는 분명치 않겠지 만…… 어쨌든 유혹의 강은 천지 개벽 때부터 유유히 흐르고 있었어. 그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쪽 숲 사이에는 악마들이 살고 있었고 저쪽 벌판 에는 천사들이 살고 있었대요.』
『정말 옛말이로군요.』
『신비는 영양소로 섭취하려는 칸나를 위해서 하는 이야긴데 옛말 치고는 구약의 창세기보다야 확실히 과학적이지.』
『흙으로 남자를 만들고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지는 않았나요?』
『글쎄 그런 흐리멍텅한 이야기는 아니라니까! 강석운은 창세기에는 과학 이 흐르고 있어.』
『어디, 어서 좀 빨리 이야길 하세요.』
『이편 숲 새에서 살고 있는 악마의 무리가 바라다보니 강 건너 허허 벌판 에서 천사들이 나비처럼 춤을 추고 있지 않겠어? 악마들은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정신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지.』
『재미 있어?』
『암 재미 있지. 천사들은 제 흥에 겨워서 춤을 추고 있는데 악마의 눈에 는 저희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춤을 추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악마 들은 천사들을 가리켜 님프(妖精[요정])라고 부르며 욕을 하면서도 마음으 로는 모두가 다 녹초가 됐어. 현대인이 여자를 요부라고 욕지거리를 하면 서도 그 요부의 품 안에서 생명을 소모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렇지만 강물이 원체 거세고 넓어서 건너갈 수가 있어야지?…… 똑같이 생긴 악마들끼리만 사는데 이미 질식할 것 같은 단조로움과 권태를 느끼고 있는 그들로서는 강 건너로 바라다보이는 색다른 모습이 신비롭고 아름다 워 견딜 수가 없었어. 무한한 동경과 뜯어 먹고 싶은 충동을 폭풍처럼 느 꼈지만 강물은 여전히 거세기만 했지.』
석운은 말을 멈추고 뜯어 먹고 싶은 충동을 악마처럼 느끼며 머리의 혹을 꼭 눌렀다.
『아앗!』
『아파?』
『아픔도 애정인가!』
『정열은 병이 아닐 텐데……』
『그래서 어찌 됐어요?』
『악마 한 놈이 결심을 했지.』
『무얼?』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강을 건너 보리라고……』
『열성 분자네요.』
『나처럼.』
쳐다보고 내려다보고 네개의 눈동자는 조용히 웃었다.
『한 놈이 헤엄을 쳐서 건너가다가 절반도 못 가서 물에 빠져 죽었어. 다 음 놈이 또 나섰지만 그놈도 마찬가지야.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워낙 님프에서 미쳐버린 악마들은 하나 하나씩 모조리 물귀신이 되고 말았지.
무서운 강이야.』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모조리 죽고 세 놈이 남았지. 유혹의 강은 어제 모양 오늘도 흘렀어. 불 나비처럼 또 한 놈이 뛰쳐 들어갔지. 그놈은 마침내 강을 건너갔어.』
『막깔깔대고 카들거리며 도망을 치는 천사를 붙들어 옆구리에 끼고 강을 도로 건너오다가 기진 맥진해서 천사와 함께 또 물귀신이 됐지.』
『가엾어라』
『두 놈이 났았는데 또 한 놈이 뛰어들었어.』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도…… 지독한, 지독한 열성이야.』
『악마처럼 지독하다는 말은 아마도 거기서부터 나온 걸 거야.』
부든러운 눈웃음을 웃으며 석운은
『그런데 그놈은 마침내 성공을 했어.』
『어마나!』
『열성이 있는 곳에 안되는 일 없다고, 그것도 아마 그때부터 생긴 걸 거 야.』
『그래 천사를 붙들어다가 어쨌어요?』
『말할 것 뭐 있어…… 좋아서 날뛰었을 테지. 안고 돌아가면서 춤도 추고 아까처럼 뽀뽀도 하고……』
『싫어요.』
『오늘의 사교 춤은 그때서부터 시작이 됐다니까 글쎄.』
『거짓말.』
『그런데 사고가 하나 생겼어.』
『뭔데?……』
『나머지 한 놈이 질투를 했어.』
『저두 건너가서 하나 붙들어 옴 될 거 아냐요.』
『그러기에 말이래두, 헤엄칠 실력이 모자라서 남아 있던 놈이니까 건너가 다가는 십상팔구 물귀신이 될 것은 뻔했지. 그래서 천사를 꾀임수로 자기 것을 만들려고 했어.』
『어떻게?』
『저 자식은 헤엄은 잘 치지만 춤은 자기가 잘 춘다고 그러면서 천사를 껴 안고 한바탕 춤을 추었어.』
『근데?』
『아마 멋들어지게 추었던 모양이지? 천사는 그만 그놈에게 홀딱 반해 가 지고……』
『미친 년 같으니. 저 때문에 그 위험한 강을 건넌는데……』
『미쳤는지 순진했는지, 아마 둘 중에 하날 거야. 원체 여자라는 게 맥힌 데가 좀 있지 않아? 그런 게 다 그 때부터 시작된 일이래두.』
『그래서요?』
『가만 있어. 목 좀 축이고.』
더듬는 석운의 손길 앞에서 영림은 냉큼 자기가 병을 들었다.
『아아, 하세요.』
『어린애는 아닌데……』
『그저 그래 보는 거예요.』
부어 주는 위스키를 석운은 멋적게 입을 내밑고 받아 마셨다.
술의 향기인가 칸나의 향기인가?…… 유혹의 강 기슭의 악마들 모양 강석 운은 완전히 향기 속에 도연했다.
『그쯤 되고 보니 처음 놈이 화가 날 수 밖에, 농사는 자기가 지었는데 열 매는 딴 놈이 딴다? 둘째 놈이 새치기가 하도 미워 덤벼들 수 밖에…… 그 리하여 유혹의 강기슭에서 백주의 결투는 벌어졌어.』
『어느 편이 이겼어요?』
매마른 소리를 영림은 냈다.
『처음 놈이 물론 이겼겠지?』
『그랬으면야 오늘 이 사회의 새치기는 하나도 없었을 테지만…… 허위와 가면과 중상 모략이 이처럼 활개치는 것만 보아도 둘째 놈이 이겼을 것은 귀납적으로 뻔하지 않나.』
『어쩌면……』
『헤엄만에는 자신이 없지만 춤도 잘 추고 주먹도 세던 모양이야. 처음 놈 은 나가떨어져 죽고 둘째 놈이 천사를 소유했어. 그제서야 천사는 나가떨 어진 시체를 보고 통곡을 했었지만 참회의 눈물은 이미 늦었지.』
『…………』
『그래도 참회의 눈물이라도 뿌려 보는 게 기특하고 신통한 편이지. 요즈 음 여자들도 그런 종류의 기특과 신통쯤은 갖고 있는 것 같드구먼.』
『그래 그 다음은?』
『뻔한 일이지, 뭐야. 악마와 천사는 결혼을 했을 수 밖에…… 그런데 열 달 만삭에 아이들 낳고 보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깜짝 놀랐 어.』
『왜요?』
『왜가 뭐야. 병신 놈을 하나 낳아 놓았다니까!』
『병신이라고요?』
『흉물에 가까운 불구자야, 요즈음 같아서는 써어커스로 데리고 다니면 돈 벌이가 될만한 흉물인데……』
돌연히 취기가 돈 석운의 언변이 어느덧 유머를 섞어가며 유창해져 있었 다.
『어떻게 생긴 아이기에?』
『천사인 어머니 어깨에 날개가 없고 악마인 아버지 이마에 뿔도 없다니까 글쎄.』
『사내? 계집애?』
『사내야. 이름은 아담이라고 지었어.』
그제서야 영림은 웃으며
『아버지도 어머니도 닮지 않은 우리 같은 사람이 나왔군요.』
『꼭 같지가 않을 뿐, 닮기야 닮았지. 뿔과 날개가 없을 따름이니까.』
『그래서요?』
『또 얼마만에 아이를 낳았대.』
『이번엔 나 같은 거죠?』
『음.』
『이름은 이브구요.』
『옳지, 맞았어. 이러다 보니 강석운 창세기에 칸나의 공도 적지가 않구 먼.』
『그 둘이가 결혼을 했죠?』
『원체 사람의 종자라고는 둘 밖에 없고 보면 근친 결혼이라고 막을 수도 없어서 부모들은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고, 우주가 신의 사상이고 보면 생물의 종족 보존(種族保存)은 그의 사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플랜이기 때 문에 인종이 많아지면 자연히 원친 결혼이 될 것이라는 원대한 포부를 품 으시고 눈 몇 번 감아 두면 되는 일이 아니냐고 양미를 찌푸리면서 눈을 감았을 거야.』
『아이 재미 있어. 어쩌면 선생님은……』
애정의 감흥은 썬물처럼 멀어지고 경이에 가까운 존경의 염이 밑물처럼 새 삼스럽게 밀려왔다.
『인간! 그러니까 인간의 어머니는 천사고 인간의 아버지는 악마죠?』
『암, 강석운의 창세기가 그것을 보장했어. 어머니를 따르려면 아버지가 말썽이고 아버지를 따르려면 어머니가 뽀르퉁이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비가 오실는지 알 수 없는 이른 아침, 그러니까 효자는 아버지의 말씀대 로 오른 발에는 짚세기를 신어야 했고, 어머니의 말씀대로 왼 발에는 나막 신을 신을 수 밖에……』
『아이, 선생님!』
존경의 염이 다시금 애정으로 환원하며 영림은 석운의 머리를 두 팔로 감 싸 안았다.
『그러나 짚세기와 나막신은 층하가 져서, 걸을 때마다 이리 퉁그라지고 저리 쏠리고…… 그게 인간이라니까, 그게 사람이라니까.』
머리를 감싸 안고 볼을을 비벼 오는 영림의 매마른 입술이 석운의 코 위에 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아, 창세기 구술도 끝났으니 인제 좀 걸어 볼까?』
『네.』
영림은 모자를 집어 석운의 머리에 씌어 주려다가 익살맞게 자기 머리에다 올려놓았다.
『어때요, 선생님?』
길 없는 길을 아무렇게나 마구 걸으며 영림은 물었다.
『서부 활극에 나오는 아리쓰 같군.』
『아리쓰가 누구에요?』
『중학생 시절 평양 제일관에 도둑 구경을 많이 갔었지. 들키면 무기 정학 이지만 아리쓰가 이뻐서 그래도 다녔지.』
『글쎄 아리쓰가 누구냐니까요?』
『배우 이름은 모르고, 연속 서부 활극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야, 한 주일마다 갈아대어 여남은 주일에 끝나는 연속극인데 영화는 미국의 유니 버살 꺼야. 금발 미인인데 테 큰 모자를 쓰고 장화를 신고 가는 허리에 쌍 권총이지.』
석운은 나무때기 둘을 거두워 쥐고 영림에게 쌍권총을 소년처럼 착 겨누고 변사의 목청 그대로를 본따서
『야잇, 아리쓰! 손을 들어라! 아메리카 인디안의 혼백은 살아 있다!』
깔깔깔깔 영림은 웃다가 두 손을 들었다.
석운은 다가가서 영림의 허리에서 쌍권총을 뽑는 흉내를 내며
『계집애에게는 위험한 장난감, 록키 산맥에 황금이 쏟아진다. 아리쓰, 황 금에 눈이 무져 여기까지 왔느냐? 눈 앞에는 권총, 등 뛰에는 폭포수! 아 아, 진퇴 양단의 가련한 아리쓰여! 아리쓰의 운명은 과연 여하히 될는지, 내주일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라! 하하하하……』
『호호호…… 아이, 선생님 못하는 것이 없네요.』
영림은 허리를 꼬고 손벽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어 댔다.
『못하는 걸 내놓곤 다 하지.』
『어린애 같은 데가 있어요, 선생님은』
『아직 멀었어. 좀 더 사귀어 보면 갓난애도 될 수가 있지, 영림이 보고 엄마 소리를 할는지도 몰라.』
『아이, 우스워.』
『워낙 여성의 애정에는 모성애적인 데가 있는 법이야. 아까 내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줬지? 그런게 다 그거야.』
『선생님은 정말 연애 박사, 아니 애정 박사예요.』
『아는 척하는 거지. 그래야만 영림이가 좋아할 테니까 말이야.』
『감사합니다.』
영림은 모자를 벗어 들고 곡마단의 마술사처럼 두 손을 벌리고 한쪽 발을 뒤로 조금 내뽑으며 멋진 인사를 했다.
『선생님.』
영림은 모자를 석운의 머리에 가만히 씌워 주며
『선생님에게 그처럼 유쾌한 데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요.』
석운은 씨익 웃었다.
영림은 석운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면서
『좀 칙칙해요. 좀 화려한 것이라야 어울리겠어요. 나이와 넥타이는 정 반 대라야 한다는데……』
『영림은 왜 그 칙칙한 곤색 양복만 입는 거야? 화장도 안 하고……』
『옷 차림이나 화장으로써 칸나의 가치를 인정 받아야만 한다는 건 슬픈 일이예요.』
『흐응……』
석운은 귀여워 영림과 어깨동무를 하며 걸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그러람 이다음부터 그러겠어요. 연지도 찍고 향수도 뿌리고……』
『어디 한 번 그래 봐요. 예술이란 결국 인공적 미의 창조야. 그런 의미에 선 화장도 일종의 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이, 멋들어진 말씀! 어쩌면 선생님은……』
석운의 손등을 충동적으로 잡아당겨 앞 이빨로 영림을 꼬옥 한 번 깨물어 보았다.
정녕 영림은 영혼의 영양소를 강선생에게서 섭취하고 있었다.
犯罪意識[범죄의식]
[편집]남편과 영림을 떠나보내고 나서 옥영 여사는 찻종지도 치우지 못한 채 남 편의 책상 머리에 넋 잃은 사지를 가만히 주저 앉혔다.
앞집 지붕 위로 얼른 바라다본 남편과 영림의 묵극 한 토막이 자기의 착각 위기를 옥영은 진심으로 빌었다.
오랜 결혼 생활 동안 여자 관계로 아내의 행복감을 위축시키고 평화로운 가정에 파문 같은 것을 던져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남편이기에 또한 가정 낙원설을 소리높이 제창하여 일부 주의의 결혼 형태의 문화성을 말로나 글 로나 부르짖어 온 남편이기에 정녕 그 한 토막의 묵극이 옥영에게는 착각인 것만 같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명 착각은 아니었다.』
요즈음에 있어서 남편의 태도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일종의 초조가 엿보 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창작 생활에서 오는 초조는 분명 아니었다. 남 편의 창작욕은 과거 어떤 시절에 비해서도 가장 왕성하게 불붙고 있었고 또 한 고도로 연소되고 있음을 옥영은 잘 안다.
그러던 것이 「유혹의 강」을 집필하면서부터 남편의 초조감은 눈에 뜨일 만큼 현저해졌다. 그것을 옥영은 총명하게도 작품 행동과 현실 행동의 틈에 서 오는 윤리적 감정의 부조화라고 생각하였다.
『여보, 흰 머리카락 또 하나 생겼오.』
거울을 들여다보며 빗질을 하다가 남편은 무슨 투정이나 하듯이 머리카락 한 오리를 처리하기에 너무나 많은 힘을 가지고 그것을 뽑아버리는 것을 옥 영은 여러번 보았다.
『이것은 분명히 죽음의 초대장인데……』
뽑아 쥔 흰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남편을 향하여
『죽는 게 그리도 무서우세요?』
『아니야.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흥, 죽는 건 무섭지 않아도 청춘은 부재래(靑春不在來)라는 말이죠? 박 목사처럼 한 번 발 벗고 나서 보시구려.』
『당신이 엉엉 울까봐 못하겠소.』
『저 좋아서 하는 일을 내가 왜 울어요.』
이러한 대화에서 옥영은 남편이 지닌 초조감의 정체 같은 것을 어렴풋이나 마 붙잡을 수가 있었던 어제 오늘이었다.
거기에 고영림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옥영의 눈에는 고영림은 남편을 좋아 할 타잎 중에서 가장 선발된 여성으로 확실히 비쳤다. 사색적인 깊이가 있 고 그러한 깊이가 벌렁거리는 정열로써 감싸져 있는 것이다.
『아, 참……』
옥영은 냉큼 일어서서 남편의 책상 서랍에서 영림의 「칸나의 의욕」을 꺼 냈다. 또 다른 서랍 하나에서 생긴 일과 크리스머스 때면 꼭꼭 날아오는 분 홍 봉투를 끄집어 내어 두 사람의 필적을 대조해 보다가
『아닌데, 필적이 확실히 다른데……』
원고와 봉투를 제 자리에 뒤집어 놓고 차종지를 들고 내려오면서
『아주머니, 이층 좀 쓸어내요.』
손수 방을 쓸어낼 기력이 어쩐지 없다.
『그래도 그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을 꺼야.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
젊은 시절에 남편은 삼방 약수로 가서 한 동안 원고를 쓴 적이 있다. 어떤 친구와 어울려서 술추렴을 하다가 기생 한 사람씩을 배당 받아 가지고 제각 기 딴 방에서 잤다고 했다. 밤 새도록 자지를 못하고 뒤채기만 하는 남편의 꼬락서니를 보고 무안도 하고 화도 나서 동도 트기전에 기생은 뺑소니를 쳤 다고, 그래서 공연한 화대만 물었노라고, 이것은 후일 그 친구들의 입에서 몇 다리를 건너 들어온 소식이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도 그랬는데……」라는 옥영 여사의 오덕독스(正說[정 설])속에 「젊었으니까 그랬다」는 하나의 파라독스(逆說[역설])가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지식은 옥영에게 없었다.
시부 강학선 교수의 성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정도로 옥영은 남편의 성 실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옥영 자신의 성실을 믿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성실의 믿음이었다.
그러한 믿음이 허물어져야만 할 이유를 옥영은 발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에게 대한 애정이 없어졌다면 모르지마는 그렇지 않은 이상 남편이 지 닌 성실과 애정의 결합은 이 가정을 금성탕지(金城湯池)와도 같이 수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경숙이와 도현이가 계란 한 보따리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
『이 편지 할아버지가 주세요. 어머니 갔다 드리라고요.』
『무슨 편진데……』
옥영은 시아버지가 써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두서도 없는 글이었다.
경숙 어미 보아라.
요즈음 네 남편이 쓰는 「유혹의 강」은 좀 지나치는 데가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파고 들면 그럴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까지 파고 들고 싶어하는 네 남편의 마음의 자세를 우리는 문제 삼아야만 할 것이다.
중년기의 위기는 청년기의 그것보다 폭이 넓고 뿌리가 깊다. 이런 점을 경 숙 어미는 잘 이해하여 네 남편의 마음의 자세를 바로 잡도록 세심 주의하 여 가정의 공기를 항상 신선하게 만들고 남편의 관심이 외부로 뻗어 나가지 않도록 갑절의 힘을 써야만 할 것이다.
나와는 다소 달라서 특히 네 남편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감정의 파도가 범인 보다는 예민하고 섬세하고 또한 폭이 넓다는 사실을 알안야 할 것이며, 흔 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약하고 나긋나긋한 일면도 다분히 갖고 있 기에 하는 말이다.
이러한 일면은 오르지 네 시모에게서 물려 받은 혈통 같지마는, 그래서 예 술 부문에 종사하고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네 남편에게는 이십 년 가까 운 가정 생활에 있어서 일시적인 암영(暗影)도 가져옴이 없는 의지적인 일 면도 나를 닮았는지, 또한 있다고 보는 것이니까 너의 내조만 적당히 얻을 수 있다면 이러한 위기를 잘 넘겨 보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총명한 경숙 어미이기에 감히 하지 않아도 무방한 말을 한것 같으나 늙은 이의 노파심으로 알아 주면 고마울 뿐이다. 이런 이야기는 네 입으로 네 남 편에게 할 필요는 없고 네 마음에만 간직해 두고 있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 각하는 바이다.
『아버님도 역시……』
자기와 꼭 같은 그 무엇을 느끼고 계시는 것이라고 옥영은 시부 강교수가 지니고 있는 인격적인 존엄성과 함께 그 다사로운 배념이 눈물겹도록 고마 왔다.
『정신을 바싹 차려야겠다.』
편지를 다시금 봉투에 쓸어 넣은 옥영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어머니, 오케 피아노 상회에 백이십 만환짜리가 한대 나왔어요.』
저녁을 먹으면서 경숙이는 불쑥 그런 말을 했다.
『어떤 건데?』
『야마하 이호래요. 며칠 전에 나왔다고 살려면 그걸 사라고 김선생님이 그러셔요. 소리가 참 좋대요.』
『글쎄 샀으면 좋겠지만…… 아버지가 돈을 마저 만들어 주셔야지 않겠 니?』
『아이, 참 속상해! 또 놓치겠네.』
보름 전에 아버지는 백 여만환의 인세 중 오십 만환을 갖다 주었다.
밤 여덟시 반, 강석운과 고영림은 명동 입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해질 무렵에 세검정에서 돌아와 명동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젯밤 이 무렵 저는 이 십자로에서 울고 있었어요.』
『울긴…… 미스터 송과 같이 다니지 않았어?』
『같이 다니다가 저녁 먹고 여기서 헤어졌어요. 영원히 영원히 헤어졌지 요.』
『결혼한다면서?』
『그저 그래 본 거죠. 제 온 넋이 선생님 품에 안겨 있는데 어떻게 딴 사 람과 결혼을 하겠어요.』
영림의 정열과 의욕이 결정적으로 파동쳐 왔다. 벅차서 석운은 대꾸를 잃 고 영림의 탄식의 그윽한 향기를 시인처럼 향수(享受)만 했다.
밀려드는 인파를 거추장스럽게 헤엄쳐 나가며 독백인양 석운은
『천금처럼 값 비싼 봄 밤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렇듯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의 물결인가?』
다소의 취기도 보탬이 되어 있었으나 어젯밤처럼 석운은 마음 놓고 취하지 는 못했다. 영림과의 동행이 강석운에게 조심성을 강요해 왔었기 때문이다.
『제가 딴 사람과 결혼을 한담 선생님은 확실히 화내 주시죠?』
그러나 석운은 못 들은 채 멍청한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시라도 읊듯이
『까다로운 지성의 무마와……』
『네?』
『희뿌옇게 둔탁한 감정의 표백을 위하여……』
『…………』
『불나비의 의욕을 지니고 갸륵하게도 몰려드는 이 수많은 생명의 기체(基 體)들…… 한숨과 하품과 걸레조각 같은 인정의 쓰레기 통, 그대 명동의 밤 거리……』
번잡한 입구를 빠져 나오면서 영림은 석운의 팔 하나를 가만히 잡아 끼었 다. 을지로 쪽으로 둘이는 꺾어지며
『명동의 생리 속에서 그러나 생명은 순간의 가치를 모색했다. 쥐어 짜도 마냥 고독은 흐르기만 했고 고독의 낙루(落淚)가 범람한 페이브 위에서 거 리의 서정시인은 삶의 황홀을 찾았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영림은 솔깃이 귀를 기울이고 걸었다.
『술과 지분과 꿈과 아방쥬르와 스캰달에 굶주린 보헤미앙의 정열이 방탕 하는 거리, 〈트로이 메라이〉(夢想[몽상])의 선율에서 도리어 현실을 발견 하고 독을 마신 시인도 그곳에는 있었다. 소모된 정열과 생명을 섭취하며 명동은 살쪘다. 불나비 같은 인생을 마셔 버리는 명동의 밤 거리……』
『불나비 같은 인생!』
영림은 석운의 긴 감상 속에서 그 한 마디만을 붙들면 되었다. 그것이 자 기의 물음에 대한 대답인 것만 같았다.
『어젯밤 여기서 애리를 만났지.』
을지로를 건너면서 석운은 말했다.
『어젯밤도 이렇게 애리와 팔을 끼고 갔어.』
『그래 기분 좋으셨어요?』
『오늘보다는 마음이 평온했어. 불안한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영림은 기뻤다. 강선생님은 불나비의 인생을 확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아, 여기서 헤어져요.』
종로에서 석운은 팔을 풀고 손길만 잡아 쥐었다.
『저만큼 모셔다 드리고 싶지만…… 그냥 여기서 헤어지겠어요.』
『아, 그러기로 해요.』
『선생님, 언제 한 번 더 만나 주시겠어요?』
그러나 석운은 이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영림의 얼굴만 빤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만나 주시지 않음 인제 아예 저는 선생님 안 찾아 뵙겠어요.』
『왜?』
영림은 석운의 손을 놓고 고개를 한 번 숙였다가 다시 들며
『선생님이 사모님과 나란히 앉아 계시는 걸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요.』
『…………』
『그렇지만 그건 사모님이 못마땅해서 하는 말은 아니니까 선생님 과히 서 운히 생각하실 건 없어요. 사모님이 제게 대해서 잘 해 주시면 주실수록 도 리어 화가 나요.』
『하여튼 오늘은 여기서 그냥 헤어져요. 다시 만날 약속은 말고…… 또 만 나게 될 때까지 헤어져 있기로 해요.』
영림은 원망스러운 듯이 말끄러미 석운을 쳐다보다가
『선생님 마음 편하실 대로 하세요. 그래야만 편하실 테니까요. 그렇지만 저도 안 찾아가고 선생님도 안 찾아 주시면 영 만나지 못할 수 밖에 없군 요.』
『영림!』
석운은 어두운 얼굴에 오뇌의 빛을 후딱 띠며
『서울은 좁아.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순간까지 서로 참아 보기로 해요. 영림의 주소도 나는 알고 전화 번호도 찾아보면 알 수가 있으니까 말 이야.』
『본국 二三二三[이삼이삼]번이예요. 합함 열이 되죠. 그렇지만 저는 이미 참지 못해서 오늘 선생님을 뵈러……』
『스톱!』
석운은 갑자기 소리를 쳤다. 영림은 놀라서 입을 호닥닥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영림의 말을 중지시키는 호령이 아니고 둘이의 옆을 스름스 름 지나가고 있는 박카아드를 멈추는 소리였다.
『오늘은 이 이상 아무 말도 없이 벙어리처럼 헤어지기로 해요. 자아 영 림, 먼저 타고 가요.』
『선생님이 먼저……』
『쉬이, 말을 하면 안돼! 우리는 지금 벙어리가 됐으니까.』
영림은 쳐다보며 조용히 웃었다. 석운도 웃었다.
여자 벙어리는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남자 벙어리가 그 손을 꼭 잡고 남 은 한 손으로 여자 벙어리의 손등을 귀여운 듯이 덮었다.
작별의 악수가 애석히 끝났다. 남자 벙어리는 여자 벙어리의 등을 떠밀 듯 이 하며 차에 태우고 택시 값을 운전수에게 지불하며
『아현동까지!』
차가 떠나는데 여자 벙어리도 입을 열었다.
『생각하는 불나비.』
소학생처럼 공손히 숙이는 영림의 고개와 함께 박카아드는 네거리 로타리 를 삥 휘돌아 갔다.
『귀한 물건이 사라져 갔다.』
구슬처럼 귀하고 휘황한 물건이 석운의 가슴 속 한 복판에서 총탄의 관통 상(貫通傷) 하나를 감각적으로 남겨 놓은 채 쏘옥 빠져나간 것 같은 허전한 느낌이 돌연히 왔다.
박카아드의 보데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석운은 발꿈치를 돌렸다.
『일은 마침내 저질러졌다.』
실로 오랜 동안 푸뜩푸뜩 느껴오던 인생의 위기는 마침내 왔다.
종로 사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석운은 후딱 하늘을 우러렀다. 즐비한 빌딩 너머로 헤화동 일대에 별빛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어느 별 밑에 아내는 앉아 있으리라. 자고 있으리라. 남편이 돌아오기 를 기다리면서 건득건득 졸고 있을는지도 몰른다.
『아아, 또 하나의 귀한 물건이…… 아니, 진정으로 귀한 물건이……』
범죄자의 심리(心理)가 석운에게 왔다.
『취기가 모자란다. 술을 먹어야지.』
의식을 무마하기 위하여 석운은 한길 가 꼬치 안주 집으로 쏜살 같이 들어 갔다.
영림과 헤어지는 즉시로 석운의 머리에는 가정이 오고 아내가 왔다. 해로 동락의 성실한 애정을 꿈꾸고 있는 옥영에의 배반과 한 사람의 남편이라는 세속적인 위치에서 오는 일종의 범죄 의식이 점점 명백히 확대되어 왔다.
야릇한 감미로움을 그대로 남겨 놓고 호화로운 박카아드와 함께 사라진 칸 나의 휘황한 구슬은 석운의 심장 속에서 마냥 눈부시기만 했건만 그 어느 별 밑에 쪼그리고 앉아서 남편을 기다리는 옥영의 구슬은 비록 휘황 찬란한 눈부심은 없었으나 석운의 머릿속에 오붓히 살아 있었다.
『박목사는 가정의 질곡(桎梏)을 박차고 나옴으로써 인간을 찾았다고 했 다.』
아까 세검정 산 속에서 영림과 애정을 교환하는 순간에는 강석운도 그렇게 느꼈다.
그 느낌에 거짓이 없다면 자기는 이와 같은 범죄 의식을 갖지 않아야만 할 것이 아니냐고, 박목사의 철저한 생명제일주의(生命第一主義)가 갑자기 부 러워졌다.
『나는 약하다.』
『가슴 속에 눈부신 휘황한 구슬과 머리 속에 살아 있는 오붓한 구슬』
이 두 개의 구슬을 다 함께 차지할 수가 없다. 인간의 세속적인 위치가 차 차 취기를 돋구어 오는 석운을 극도로 슬프게 하고 있었다.
꼬치 안주 집 바텐 앞에서 컾 술을 마지막으로 들이키는 석운은 밖으로 나 와 택시를 집어 탔다.
『어쨌든 일은 저질렀는데……』
거나하니 석운은 취해 있었다.
『남들도 다 하는 노릇인데, 나만 유독히 얌전할 필요는 또 어디 있어?』
속된 생각이 취기와 함께 자꾸만 머리를 들어왔다.
박목사 모양 철저하지 못한 석운으로서는 자기의 행동을 철학적으로 구명 하기 전에 사회현상학적인 양식(樣式) 속에서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있었 다.
『이게 다 왕자 의식에서 나오는 소리거든.』
지난 날, 석운은 옥영의 뒤를 밟아 수도극장 앞 골목 북경루까지 따라갔을 때, 석운은 결국 아내의 불륜을 왕자 의식으로써 처리하고 말았다. 남들이 다 하고 있는 바로 그 양식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불현 듯 돌이켜 보며 석운은 씁쓰레 고소를 지었다.
『아내의 불륜은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의 그것은 눈감아 주기를 원하는 이 모순된 심정! 이러한 괘씸한 심정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차는 창경원 앞을 몰아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아내에게도 이런 종류의 모순된 심정이 깃들어 있는 것일 까? 그런 심정이 애당초부터 없어서 그처럼들 얌전한 것일까? 있으면서도 인간이 성실해서 얌전한 것일까? 사회적 지위가 약해서 하는 수 없이들 얌 전한 것일까?』
이윽고 차를 헤화동에서 멈추고 석운은 카스테라 한 상자를 샀다. 다시 차 에 오르면서
『오늘 일을 아내에게 죄 털어 놓고 말까? 아직도 늦지는 않으니까.』
그렇다, 아직도 늦지는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 더 커다랗게 부딪혀 올 인생의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는 것이며 아내의 비탄과 분노로써 자기의 자 유로운 욕망과 행동을 구속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은 괴롭고 거추장스런 범죄 의식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줄곧 들 떠 있어야만 할 감정의 파도를 가라앉히어 실락원의 비극을 최소 한도에서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라고 석운은 문득 생각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혹한 자기 항쟁(抗爭)이 필요하였다.
신부 앞에서 참회를 하는 교인들의 심정이 철학적인 사고의 결과로서가 아 니고 예술가적인 하나의 직감으로서 석운에게 왔다.
차는 멎고 석운은 정문을 들어섰다.
『아버지!』
옥영의 앞장을 서서 경숙이가 뛰쳐 나오며 과자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응, 너 아직 자지 않았니?』
『아버지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옥영은 양복을 받아 걸며
『늦으셨군요.』
『아, 좀……』
그럴 성싶어서 그런지 오늘 따라 아내의 눈초리가 유심히 빛나고 있는 것 같아서 석운은 마음이 뜨끔 뜨끔 했다.
아내의 태도는 일상과 추호도 다른 점이 없었으나 시선이 잠시도 쉴 새 없 이 이편의 표정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까맣게 잊어먹고 있던 도 선의 동무 녀석의 얼굴이 후딱 머리에 왔다. 그 녀석의 어머니의 얼굴도 왔 다. 고자질?
『그래 재미 있어요? 학생들과의 좌담회……』
잠옷으로 갈아 입고 안방을 들어서는데 옥영은 물어 왔다.
『작은 애들은 다 자오?』
어떻게 대답해야만 될까고 시간의 여유를 얻기 위하여 딴 말을 석운은 물 었다. 고백 여하의 문제가 아직 결정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벌써들 자는데요.』
경숙이가 카스테라 상자를 풀면서 대답을 했다. 건넌방에서 애들은 잔다.
『아이, 카스테라야 엄마! 아버지가 오늘은 특별이세요.』
『어쩌면……』
옥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명랑했고 침착했다.
무심하다. 천사처럼 무심한 얼굴이라고, 그처럼 평온한 아내의 이십 년 가 까운 행복이 자기의 고백 한 마디로써 산산이 깨어져 나갈 것을 생각하니 감히 입을 벌려 사실을 고백할 용기가 석운에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 진실의 고백은 죄악을 의미했다. 빈혈증이 있는 아내 는 까무러칠지도 몰른다, 애정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세상을 모르는 온실의 꽃과도 같은 아내이기에 옥영의 그 비탄과 절망에서 오는 가슴 아픔이 석운 자신의 아픔처럼 느껴야만 할 것이 석운은 무서웠다.
『그래 학생들과 재미 있게 놀았어요?』
카스테라 한 조각을 집으면서 옥영은 천연스럽게 물었다.
『그저 그렇지.』
『여태껏?』
『세검정엘 갔었지. 복잡한 시내보다도 임간 좌담(林間座談)이 좋겠다고들 해서 그 길로 곧 택시를 타고……』
『그러세요. 그것 참 잘 하셨군요. 일요일이니까 사람들도 많았을 거예 요.』
『많이들 나왔더구먼.』
『그래 점심이랑 저녁은 어떻게 하셨어요?』
『점심은 학생들이 초밥이랑 과자랑 사 갖고 갔었고 저녁은 시내로 들어와 서 먹었지.』
이처럼 미리 복선을 펴 두면 보고가 들어오더라도 발뺌이 자연스럽게 성립 이 된다.
이윽고 경숙이도 건너가고 석운은 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석운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못 주무세요?』
한밤중에 아랫목에서 자고 있던 옥영이가 물었다. 이 남편은 불면증으로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응.』
이리 뒤채고 저리 뒤채기만 하는 남편과 똑같이 옥영도 뒤채고 있었다.
『당신은 왜 못 자오?』
『나도 갑자기 불면증이 생겼나봐요.』
시부의 편지가 또렷하게 되살아 오기만 했다. 묵극 한토막도 망막에 인박 힌 채 사라지지가 않는다.
석운은 손을 뻗쳐 아랫목에 누운 아내의 손길을 말없이 더듬어 잡았다. 아 내의 조그만 손길이 거기에 응하며 꼭 쥐여 왔다.
오래오래 같이 살다가 같이 죽자는 서글픈 호소처럼 자기의 손을 두 손길 로 꼬옥 옥영은 감싸 쥐고 있었다.
『이 손길에는 역사가 있다.』
고난의 역사가 있고 환희의 역사가 거기에는 있었다. 옥영의 손길에서 느 끼는 이 오붓하고 탐탁한 애정 속에서 석운은 고영림의 눈부신 정열이 한낱 백일몽(白日夢)처럼 허황함을 문득 느꼈다.
『고영림이가 도대체 뭐야!』
석운은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정열은 병이 아닐 것이라고 어제 석운은 애정을 교환하면서 말했다.
그러던 것이 오늘 아침, 애들이 학교엘 가느라고 새벽부터 떠들어대는 이 부산한 현실을 눈 앞에 볼 때 정열은 역시 일종의 병이라는 느낌이 절실히 왔다.
들뜬 정열만으로써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생활의 톱니바퀴가 현실의 음 향(音響)을 소리 높이 내면서 간단 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톱니바퀴의 이러 한 회전 속에서는 그처럼 절실히 느껴지던 영림에의 감각이 하룻밤 사이에 차차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참 철 없는 것이지.』
나잇살이나 먹은 것이 영림이 같은 어린애 하나를 적당히 처리 못해서 질 질 끌려 들어갔다는 생각을 하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지 않은 것만은 참으로 잘 했어.』
흰 머리카락을 뽑아 버리면서 하던 투정이 꼭 어린애들의 밥 투정만 같아 서 싱겁기 한이 없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왔다.
현실의 압박감과 아울러 영림을 잊어버리고자 하는 노력이 석운의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러나 부부 생활에 이미 오점(汚點) 하나가 찍혀졌다는 이 역사적 사실이 석운을 항상 범죄자로서 취급하고 있었다. 아내가 모르고 있는 비밀 하나를 갖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머리로 들어왔다. 그래서 아내의 눈치와 표정을 늘 살피게 되었고 태연하던 애정 생활에 인공적인 장식이 자연 필요해졌다.
그러나 그것 역시 타성이 되고 보니 비밀을 가졌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석 운의 마음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유혹의 강」의 집필은 차차 진행되어 저번 날 영림에게 미리 이야기해 준 강석운의 창세기를 기록하는 대목에서 석운은 여러 번 붓을 내던지고 영 림을 감각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악마와 천사의 이야기를 하면서 영림과 바꾼 정열의 한 매듭 한 매듭이 어 제 일처럼 선명하게 피부에 왔다.
『이래서야 어디 글을 쓰겠나.』
하루에 한 회도 쓰지 못하고 석운은 책상 앞에 벌렁 나자빠져서 소설 생각 보다도 영림의 생각을 좀 더 골똘히 하고 있는데 정신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럴 적마다 옥영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이층으로 올라와서 책상머리에 마 주 앉으며
『그렇게 안 써져서 어떡하세요?』
『슬럼프야, 슬럼프.』
작가 생활에 때때로 습격해 오는 슬럼프(不振狀態[부진상태])를 옥영도 잘 안다.
『기분 전환으로 어디 여행이나 하고 오셨음……』
『외국 작가들은 그렇게들 하지만, 여기서야 어디 쥐꼬리만한 원고료를 가 지고는 여비도 안 나와.』
『참 우리 나라 작가들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어요. 생활비도 안 대 주고 좋은 원고만 쓰라니까요.』
『차 한 잔도 먹지 말고 된장에 김치 깍두기만 먹고서 훌륭한 작품을 연방 써 내라는데야 말할 것 뭐 있어? 에크, 된장 트림이 막 겨 올라오는구나.』
옥영은 웃으며
『참 커피 한 잔 끓여 올까요?』
『그만 둬요. 수지 계산이 맞지가 않아. 맹자 가라사대 항산(恒産)이 없으 면 항심(恒心)도 없다고, 커피 한 잔 훌쩍 들이키고 된장도 떨어져서 소금 밥 먹기는 싫어.』
커피를 끓이기 위하여 옥영이가 일어서는데 석운도 벌떡 일어나 앉으며
『여보!』
『네?』
『당신 뭐 할려고 살우?』
『당신하고 같이 죽을려고.』
『아주 막 생색을 내는군.』
『정말인 걸 어떻게 해요.』
『한 번 안아 줘.』
옥영은 얼굴을 붉히고 다시 꿇어 앉으며 다가드는 남편을 가만히 품에 안 았다.
『이런 아내를 나는 지금 속이고 있지.』
금방이라도 머리 위에 벼락이 쳐 내려올 것만 같았다.
유월 중순 경, K신문의 「유혹의 강」은 하루 이틀씩 빠지게 되어 독자들 을 실망하게 하였다. 전화로나 편지로나 하루도 거르지 말고 실어달라는 독 자들의 재촉을 받고 담당 기자는 그 뜻을 작자에게 누차 전달했으나 슬럼프 에 빠져서 큰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런 상태로 유월 하순까지 갔다. 나중에는 관절염이라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리만큼 석운의 창작욕은 마비되어 갔다.
그동안 석운은 하루에도 여러 번씩 영림에게 전화를 걸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석운은 끝끝내 전화를 걸지 않고 견디어 배겼다.
어떤 날 같은 때는 헤화동 로타리로 나가서 약방 전화로 본국 二三二三[이 삼이삼]번의 다이얼을 돌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탁 수화기를 던지기도 했 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뒹굴며 영림의 환영과 씨름을 하는 것이 었다.
일부러 정원으로 뛰쳐 내려가서 옥영이가 열심히 가꾸는 야쓰데 분에 물도 주어 보고 걸레로 분을 반들반들 닦아 주기도 했다.
『야쓰데는 다년생이다. 칸나는 일년생이 아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놓인 칸나 분을 바라본다. 무서운 의욕을 지니고 줄기차게 자라나는 칸나였다.
『그렇지만 칸나는 일년생이지. 칸나의 의욕과 정열이 제아무리 왕성하게 불타 올라도 서리를 맞을 무렵이면 시들어 버릴 걸 그래.』
시들어 버릴 고영림의 의욕이며 정열임을 칸나 분은 암시해 주는 것 같았 다.
『그렇지만 다년생인 야쓰데는 수명이 길거든.』
칸나와 야쓰데, 범죄 의식과 왕자 의식 속에서 작가 강석운의 기력은 차차 피로해 가기만 했다.
영림은 다시는 찾아 주지 않았다. 편지도 띄워 오지 않았다.
그동안 옥영은 어떻게 된 셈인지, 이전보다도 더 명랑했고 나긋나긋 했으 나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우수 같은 것이 한 줄기 떠돌고 있는 것도 같았 다.
집필이 여의치 않음을 걱정하면서
『그렇게 고생스럽게야 어떻게 쓰시겠어요? 신문사에 말해서 아주 중단해 버리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해서 좋을 거예요.』
『아니야, 나는 아직까지 소설을 중단해 본 적이 없어. 죽어도 끝까지 쓰 고야 말 테니까.』
『그래도 몸을 돌봐야지 않아요? 요즈음 얼굴이 몹시 상했어요.』
『인제 추서겠지, 문제 없어.』
그러면서 석운은 주먹으로 허공을 쳤다. 그러한 남편의 태도에서 옥영은 언제나 매일반으로 그 어떤 불길을 전신으로 느끼곤 했다.
이리하여 영림과 헤어진지 만 한 달이 된 유월 하순에 애리에게서 땐스 홀 개점 축하 파티의 초댓장이 날아 왔다.
홀 이름은 「애리자」(愛梨子)였고 장소는 을지로 이가였다.
《인생과 사업과를 바꿀는지도 모르는 애리의 첫 출발을 축하하여 주시기 바라는 의미에서 맨 처음의 초댓장에다 선생님의 성함을 쓰고 있읍니다. 웃 음을 팔아 먹고 사는 애리가 올림》 초댓장 한 모퉁이에 애리는 써 왔다.
『마침 잘 됐군. 요즈음 울적하신데 꼭 가 보세요.』
『언젠가?』
『내일 아냐요.』
『당신도 같이 갈까?』
『아아뇨, 갈 데가 따로 있지 내가 홀엘 어떻게……』
祝賀[축하] 파티
[편집]땐스 홀 「애리자」의 개점 축하연은 오후 다섯시부터였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나서 옥영은 한참 동안 뜰에서 서성대고 있다가 연못 물을 퍼서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어머니, 창길이가 아버지 봤대요. 접대 세검정에 갔을 때 아버지 봤대 요.』
돌아다보니 이웃집에 사는 창길이와 함께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 이었다.
『그래, 창길이 너도 그때 갔었니?』
화분에 물을 계속해서 주며 옥영은 물었다.
『네, 우리 아버지랑 엄마랑 다들 갔었어요.』
그러면서 창길이는 고무총으로 나뭇가지에 앉은 참새를 겨누었다.
『엄마, 우리도 능금 사 먹으러 가요. 아버지는 여학생하고만 가고.』
『도선이는 알지도 못하고…… 그날은 무슨 일이 계셔서 가셨단다.』
『창길이가 그러는데 여학생이 울면서 올라가더래요. 아버지는 뒤로 따라 가고, 창길이 엄마랑도 다 봤다는데?』
『울면서 올라가?』
옥영은 화분에서 허리를 폈다.
『학생들이 많았지?』
창길이는 고무총을 탁 쏘며
『아니요, 혼자예요.』
『그래 둘이서 어디로 가던?』
『우리가 않았던 자리로 올라갔어요.』
『둘이서?』
『네.』
『그래, 그 학생이 왜 울던?』
『몰라요. 우리 엄마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하지말라고 그랬어요.』
창길이의 이 마지막 한 마디가 옥영의 눈 앞을 캄캄하게 하였다.
더 물어볼 필요가 이제는 없다. 창길이에게 함구령을 내린 것만 보아도 남편과 영림의 그 날의 행동은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었다.
『엄마, 우리도 아버지랑 세검정에 가요.』
『그래 이제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물어보고 다음 공일에 가자.』
『아이 좋아! 창길아, 우리도 간대요.』
이윽고 두 아이는 뒷뜰로 뛰어갔고 옥영은 야쓰데분 앞에 덤덤히 서 있었 다.
창길이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좀 더 똑똑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마 는 옥영에게는 어쩐지 그 똑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서워 일부러 흐리멍 덩한 추측 속에서 일루의 희망같은 것을 붙잡고 늘어지는 편을 옥영은 취했 다.
그러는데 뭉클 하고 오늘 저녁 축하 파티가 가슴에 왔다.
남편의 말을 들으면 애리라는 여자는 한성 양초의 고전무의 후원으로 땐 스 홀을 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 고전무가 영림의 오빠이고 보면 그리고 또 애리와 영림이가 중학 동창생이고 보면
『그이는 오늘 저녁 영림이가 파티에 참석할 것을 예기하고 간 것이 아닐 까?』
창길이의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할 때 옥영의 이러한 상상은 십중 팔구 정 확성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거미줄!』
자기 혼자만이 모르고 있는 무슨 불길한 실마리 같은 것이 자기의 둘레를 거미줄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옥영은 불현듯 느끼며 부루루 진 저리를 치며
『그래도 그이가 설마 그럴 수가 있을라구?』
옥영은 입 속 말로 경건히 종알거렸다.
「애리자」개점을 계기로 한 오늘의 연회는 개업을 의미하는 파티인 동시 에 고영해가 애리를 위하여 열어 주는 이중의 뜻을 가진 성대한 파티였다.
그러나 고영해 부자에게 있어서는 그 밖에 또 하나 중대한 복안이 이 파 티에는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저번 날, 영림은 오빠와 싸움을 하고 안방을 나설 때 부모나 오빠의 마음 을 자기도 잘 안다고 하면서
『……그래서 저로서도 될 수만 있으면 준오씨와 결혼을 하려고 노력도 해 보았고 또 이제부터 노력을 계속해 보겠어요, 그것 뿐이예요.』
했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영림의 이 어른다운 한 마디에 최후의 희망을 걸 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날로 영림이가 강석운을 방문한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희망은 아직도 끊기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고영해는 아버지와 의논을 한 결과 오늘 저녁의 축하연을 이용하 여 영림과 송준오와의 접근을 계획적으로 꾀하여 줌으로써 영림의 망서리는 마음에 결정적인 못 하나를 박아 주어야만 하였다.
『송군, 군은 영림의 눈치만 보는 것 같은데 그처럼 약하게 나가면 여자 는 휘어 잡지를 못하는 법이야. 여자의 눈치야 어떻든 간에 이편의 욕망을 남자답게 솔직히 행동화해요. 눈물 대신에 완력을 가지고, 그까짓 조그만 계집애 하나를 못 휘어 잡아서야 될 말인가. 오늘 밤은 기회가 좋아. 계집 애 하나 못 꼬여서야 어디 남자로서 출세를 하겠나? 속임수도 좋아, 속아 넘어간 담에는 꼼짝 못하는 게 여자야.』
한 잔 축하주에 적이 흥분되어 있는 송준오의 귓속에 고영해는 그런 말을 했다. 심각한 표정으로 송준오는 듣고만 있었다.
『송군은 사냥을 못해 보았나? 매가 꿩을 덮치는 식으로 하면 되는 거야.
여자란 뭐니뭐니 해도 남자들이 지닌 그런 종류의 힘의 세계를 도리어 동경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거야.』
고영해의 이러한 귓속말에는 고영해대로의 타산이 또 하나 숨어 있었다.
송준오가 영림에게 열중해 있는 광경을 애리는 볼 것이다. 따라서 애리로 서는 송준오를 증오하지 않으면 단념해야만 할 마음의 자세를 취할 것이 뻔 하다. 자연 애리는 고영해의 품 안에서 돈과 사랑을 교환할 마지막 결심을 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애리의 심리를 계산해 놓고 고영해는 고영해 대로 오늘 밤에는 유현자를 손아귀에 넣을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밤에는 유현자와만 춤을 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왜 그러 냐 하면 애리는 땐스 홀 개점으로서 이미 경제적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했다. 고영해가 애리에게 많은 관심 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유현자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애리의 존재를 무 시하는 태도로 유현자만을 상대로 해야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유현자는 고 전무의 애정을 전적으로 믿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상이 오늘 밤 고영해가 파티에 연출할 연애극의 각본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영해의 각본은 애리 혼자만이 알고 있는 강석운의 등 장을 전혀 계산에 넣지 않은 그것이었다.
오늘 저녁 이 「애리자」축하연 무대의 등장 인물은 고종국 사장과 애첩 황산옥, 송준오와 그의 부친인 은행가, 주인공인 애리와 전신이 기생 출신 인 그의 어머니, 유현자를 비롯한 한성 양조의 사원들, 고영해와 고영림, 그리고는 오십 여명의 남녀 내빈이었다.
홀 안은 축하 화환과 오색의 등불로 휘황찬란했다. 밴드가 있는 스테이지 후면에는 츠렁츠렁 늘어진 검정 비로드 장막을 배경으로 하여
「꿈의 전당 애리자」
라는 일루미네션이 작렬된 정열처럼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더 넓은 무도장을 중심으로 한 좌우 객석에는 한성 양조의 특급주 「백부 용」을 위시하여 양주와 맥주가 홍수처럼 범람했고 흰 가운을 입은 보이들 이 음식 쟁반을 들고 분주하게 오락가락 했다.
고영해의 인사말과 내빈의 간단한 축사가 끝났을 때 강석운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마, 선생님이?』
애리와 송준오를 상대로 하여 식사를 하고 있던 영림이가 입 속으로 그렇 게 외쳤을 때는 이미 애리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켜 보이에게 인도를 받아 들어오는 강석운을 맞이하였다.
『선생님,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애리양 축하합니다.』
『선생님, 어서 여기 앉으세요.』
애리는 애인처럼 반겨 맞으며 석운을 자기 옆 자리에 정중히 모셨다.
석운의 앞자리가 영림이었고 애리의 앞자리가 송준오였다.
『아……』
착석을 하고 시선을 들다가 석운은 가느다랗게 외쳤다.
영림은 말 없이 고개를 가만히 숙여 인사를 했다.
『참 영림이 너 선생님을 안댔지? 그런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소개를 할 뻔했다. 얘.』
영림은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애리가 흰 나일론 드레스에 핌프스를 신고 있는데 비하 면 여전히 그 칙칙한 곤색 양복이 화장도 없는 영림의 모습이 어딘가 이러 한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초라하게 보였다.
『참 미스터 송, 선생님에게 인사하세요. 강석운 선생님이예요.』
애리는 그리고 석운을 향하여
『저 송준오라고, 영림을 위해서는 목숨 하나쯤 언제든지……』
순간, 영림과 송준오의 시선이 똑같이 애리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 보았 다.
『강석운입니다.』
『송준옵니다.』
보이가 석운의 요리를 날라왔다.
『자아, 선생님 무슨 술을 드실까? 아, 참 선생님은 맥주당이시지.』
방글방글, 애리는 연방 웃음 진 얼굴로 석운에게 맥주를 따라 주며
『선생님, 저번 날 밤은 늦으셨지요? 어쩌면 선생님 그처럼 뵈올 수가 없 어요? 저는 정말 이년 동안 선생님을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는데.』
석운은 웃는 얼굴로 맥주를 들며
『애리양이 오늘은 대단히 명랑하군.』
『저번엔 선생님 앞에서 실컨 울었었지요.』
석운은 불현듯 영림을 바라보았다. 영림은 못 들은 체 식사만 하고 있었 고 송준오는 경멸의 눈초리로 애리와 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애욕의 각본이 고영해에게 있듯이 오늘 밤의 애리에게도 그런 종류의 풀 랜 하나가 가슴 속 깊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애리는 송준오와 몇 차례를 만났다. 그러나 송준오가 결국 애리에 게서 요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애욕일 뿐 애리의 고달픈 영혼을 다사롭게 무 마해 주지는 않았다. 웃음을 파는 여인으로서 밖에는 더 대해 주지를 않았 다.
애리는 서글퍼 강석운을 초대했다. 그것은 뭐 강석운을 사모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송준오에 대한 대항 의식에서 나온 일종의 시위 운동을 의미하고 있었다.
거기에 고영해가 다가왔다.
『전무님, 강석운 선생님이 오셨어요.』
애리는 냉큼 일어나서 둘이를 소개하였다.
『응, 강석운 선생?』
고영해는 뜻 밖이라는 듯이 그러나 만면에 웃음을 띄며 애리를 바라보았 다.
『제가 모시었어요. 전부터 잘 아는 선생님이예요.』
『아, 그렇습니까 고영해올씨다.』
강석운도 인사를 했다.
『선생 같으신 분을 모시게 되어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허어, 애리양이 강선생을……』
고영해는 그러면서 마주 앉은 영림을 힐끔 바라보았다. 눈치를 채고 애리 는
『아이, 전무님은 영림이만 강선생님을 아는 줄 아시나봐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허어, 강석운 선생이…… 』
오늘 밤 뜻밖에도 강석운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데는 필경 영림의 숨은 뜻 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정을 하며 증오의 염과 아울러 일종의 적개심 이 왔다. 그러나 입으로는
『자아, 강선생, 제 술 한 잔 드십시오. 정말 잘 오셨읍니다. 애리를 후 원하는 의미에서 이제부터 자주 좀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애리양을 위해서 많은 힘을 써 주신다고 들었읍니다.』
『원 천만의 말씀을…… 자아, 그럼 나는 좀 저리로 가봐야겠읍니다. 애 리는 오늘 밤 강선생을 잘 모셔야 해요.』
영림을 강석운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강석운을 애리에게 맡겨 둘 필요를 문득 느끼며 그렇게 말했다.
『염려마세요. 선생님을 누구가 모셔 왔기에요.』
『참 그렇구먼.』
애리는 이미 자기의 것이라는 생각에서 영림이보다는 허술하게 취급을 했 다. 그리고 그것이 애리가 아니고 유현자였던들 고영해는 동생을 호보하기 위해서 유현자를 강석운에게 맡겨 두지는 않았을 는지 몰랐다.
어쨌든 뜻하지 않았던 강석운의 등장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긴급 조치를 고영해는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고영해는 걸어 가다가 송준오의 귀에다 입을 갖다 대고 가만히 속삭이었 다.
『강석운은 군의 강적이다. 영림을 잠시도 놓아 주지 말라!』
송준오는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편 쪽에서 고종국씨가 송준오의 부친 송달(宋達榮)씨와 환담을 바꾸고 있는 옆에서 황산옥이가 양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댁의 아드님은 지나치게 얌전해요. 그까짓 영림이 하나 쯤 못 휘어 잡고 호호호……』
황산옥의 말에 송달영씨는 웃는 얼굴로
『허허헛, 내 아들이 얌전한 게 아니고 댁의 따님이 지나치게 고집이 세 서……』
『허허허……』
하고 고종국씨도 웃으며
『송선생이 원체 얌전하시니까 그 핏줄기가 딴 곳으로 갔을라구요? 허허 헛……』
그러는데 고영해가 다가왔다.
『아버지, 강석운이가 저기 와 있읍니다.』
『응? 강석운이가?……』
고종국씨와 똑 같이 황산옥도 놀랐다.
『영림이가 초대했다더냐?』
『자세히 알 수 없읍니다. 초대는 애리가 했다지만……』
『음.』
고종국씨는 어두운 표정을 하며
『영림이와 무슨 이야기를 하든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음, 필경에 무슨 곡절이 있어서 왔을 거야. 어디 내가 좀 가보고 오 지.』
고종국씨의 뒤로 황산옥도 총총히 따라갔다.
그러는데 밴드가 울리며 춤이 시작됐다.
음악은 블루스.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손님들은 짝을 지어 중앙으로 몰려 나왔다.
고종국씨와 황산옥은 강석운의 식탁으로 걸어갔다.
『오오, 이거 강군이 아니요?』
고종국씨는 명랑한 소리로 강석운의 어깨를 쳤다.
『아, 고사장 축하합니다.』
강석운도 일어나며 인사를 하였다.
『난 또 누구라고요 근엄하신 강교수님의 아드님께서 이런 델 올 줄은 정 말 몰랐어요 호호호……』
황산옥이가 슬그머니 하는 소리였다. 강교수의 근엄함을 몸소 실험해 본 적이 있는 황산옥으로서는 그 한 마디에 실감을 느끼며 토했다.
석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부인의 말을 묵살해 버리고 있는데 고사장은
『강교수의 아드님이 「유혹의 강」과 같은 훌륭한 소설을 쓸 줄을 몰랐 다니까. 참으로 좋은 소설이거든. 매일처럼 읽고 있는데 아마도 그게 다 강 군의 경험에서 생겨난 이야길 거야.』
석운은 여전히 미소만 띄고 있었다.
아버지의 비꼬는 말이 귀에 거슬려 영림은 냉큼 일어서서 송준오와 함께 무도장으로 걸어 나가서 스테프를 밟기 시작했다.
고영해도 유현자를 안고 돌아가고 있었다.
『자아, 선생님 좀 춰요.』
애리가 석운을 붙들고 나가는 등뒤에서 황산옥은 말했다.
『이따 나에게도 강선생을 좀 빌려 줘야 해요.』
『네네.』
애리는 가볍게 받아 넘기며 석운과 함께 인파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황산옥은 이윽고 송달영씨와 마주 잡았고 고종국씨는 애리의 어머니와 서 투른 스테프를 밟고 있었다.
완만한 블루스가 오색 등 밑으로 감미로운 멜로디를 가지고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선생님, 제법 잘 추세요. 언제 다 춤을 배우셨소요?』
『소설을 쓸려면 이것 저것 다 알아 둬야지.』
『영림이가 우리를 연방 바라보고 있어요.』
그 말에 석운도 시선을 돌려 영림을 먼 발로 찾아 보았다. 송준오의 어깨 옆으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영림이가 이쪽을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애리는 송준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일부러 더 석운의 가슴에 바싹 얼굴을 기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잘못하면 사업과 인생을 바꾸게 될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야? 초댓장에도 그런 말이 씌어 있던데 고전무 말인가?』
『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의 절반을 제게 준대요.』
『음, 흔히 있는 케이스야.』
『선생님, 어떻게 험 좋아요?』
『음, 그렇지만 애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지?』
『있지만, 그이는 나를 허수롭게만 생각하고 있는 걸요.』
『누군데?』
『지금 영림이와 춤을 추는……』
『아, 미스터 송?』
석운은 약간 놀라며
『영림이와 결혼을 한다면서?』
『영림이가 말을 안 들어요.』
그러다가 석운을 빤히 쳐다보며
『송의 말을 들음 선생님 때문에 영림이가 말을 안 듣는다는데…… 선생 님, 그게 정말이예요?』
석운은 대답을 못하고 시선으로 영림을 찾았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선생님 정말인가 봐요.』
『…………』
『영림이가 나빠요. 싫음 싫다고 딱 잡아 떼지도 않고, 그러니까 송이 질 질 끌려 들어가는 거예요.』
『음, 잘 알았어.』
『송과 결혼하게만 된담 이런 사업도 집어 치우겠어요. 빨리 집어 치워야 죠. 그렇지 않음 결국 고전무의 세컨드가 될 수 밖에요.』
연거퍼 세 차례나 애리는 석운과 춤을 추었다.
영림은 차차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동안 한 번쯤은 자기더러 춤 추기를 청해 올 것 같았으나 석운은 어쩐지 그러지를 않았다.
한 달 동안을 꼬바기 기다렸으나 전화 한 번 걸어 주지 않은 강선생이었 다. 그것에 야속하기도 했지마는 오늘 이 자리에 강선생님이 나타날 줄은 정말 뜻 밖의 일이었다.
이년 동안이나 교제해 왔다는 애리와의 관계가 영림의 신경을 긁어 쥐고 있었다. 저번날 밤, 애리는 강선생님 앞에서 실컨 울었다고도 했다.
『왜 울었을까?』
여성이 남성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애정의 애달픈 고백 밖에는 없 을 것이 아니냐고, 사모님의 존재만을 꺼림칙하게 생각하고 있던 영림의 눈 앞에 뜻도 하지 못했던 애리의 존재가 갑자기 확대되어 왔다.
『그렇다면 세검정에서의 선생님의 애정이 모두 다 허위의 것이었던가?
그럴 수 있는 강선생님은 분명히 아닐 것만 같은데,』
송준오와 춤을 추면서 영림은 문득 자기의 차림차림을 훑어 보았다.
야들야들한 예쁨을 가진 애리의 얼굴도 얼굴이지마는 흰 나일론 드레스가 눈부시게 화려하다.
『이럴 줄 알았담 옷이라도 갈아 입고 왔을 걸 그랬지.』
자기의 칙칙한 곤색 양복이 갑자기 불안을 가져왔다. 유현자도 그렇고 다 른 여자들도 그렇고 모두가 다 유월의 계절과 홀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경쾌 한 색채를 지닌 옷차림이 일종의 압력을 가지고 일제히 습격해 왔다.
『영림, 공을 들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데, 영림은 너무도 무정해.』
술기운이 퍼지면서 송준오는 불같은 정열을 태우고 있었다.
『영림이가 강선생을 생각한다는 건 일종의 꿈이야. 꿈도 무서운 꿈이야.
가정을 가진 이들은 결국에 있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는 건데……』
『나도 다 알아요.』
『알면서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거야?』
『누가 머 어쨌어요. 이처럼 미스터 송과 춤을 추고 있는데.』
『고마워, 오늘 밤은 나와 같이 밤샘을 해요.』
『그래요.』
『저거 봐요, 강선생은 애리하고만 추지 않어? 중년 남자들은 일정한 대 상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거야. 누구든지 젊고 곱살한 여자면 다 좋아하는 거야.』
『…………』
『젊은 사람처럼 결혼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일시적인 흥분 제로서 여자를 상대로 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생각하면 위험 천만한 일이야.』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들에게는 애리도 좋고 영림이도 좋고 현자도 좋고…… 아니, 여기 있 는 모든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 취미를 갖고 있거든. 영림의 오빠를 봐요.
영림의 아버지를 봐요.』
『그것도 알아요.』
춤이 끝났다.
영림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길로 달려가서 사무실 전화로 아현동 집을 불러냈다.
『덕순 언니야? 운전수 지금 집에 가 있지? 박씨 말이야. 응, 그럼 이제 내가 부를 테니 대지급으로 옷 좀 보내 줘요. 옷장에 있는 그린 색 후레야 양복과 팔 소매 없는 로오 넥크 블라우스와 레에쓰가 달린 슬리프…… 그리 구 서랍에서 비취 이어링, 귀걸이 말이야. 그리고 넥크레스도, 목걸이 몰 라? 양말도 새것으로 한 켤레, 펌프스는 구두장에 있고, 아이, 속상해! 춤 출때 신는 흰 구두 있잖아. 아냐, 또 있어. 콜드 크림과 분은 갖고 있으니 까 그만 두고…… 도오랑과 입 연지, 눈썹 먹, 아이샤도우 약…… 아이 참 밥통이야! 눈 언저리를 꺼멓게 하는 것 있잖아?…… 그리고 로오숀, 로오숀 도 두 가지 다 보내요. 화장용과 헤어 로오숀…… 머리에 바르는 것 말이 야. 향수도 잊지 말고…… 메니큐어 약도…… 손톱에 바르는 것…… 분홍은 싫어. 흰 것으로 …… 대지급이라는 걸 알아야 해요. 박씨더러 그렇게 일러 요. 바이바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홀 안은 점점 문란해졌다. 주흥에 겨워 성급한 젊은 축들은 지르바를 추었다. 밴드를 향하여 맘보를 청하기도 했다.
악대도 흥이 났다. 거나하게 한 잔들 걸친 판이라, 컨덕터는 춤을 추는 것 같은 흥겨운 액션을 마구 연발했다.
나이 지긋한 축들은 젊은이들의 경쾌한 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있었 다.
황산옥은 얼근해서 젊은이들과 마구 돌아갔다. 강석운과 송준오도 한 번 씩 붙들리었다.
고영해는 이미 유현자를 함락시키는 최후의 단계까지 이르고 있었다.
『현자도 보면 알거야. 현자는 애리와 나 사이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 만 사실 나는 애리에게는 그리 흥미가 없어. 춤 한 번 출 생각도 않는다니 까 글쎄.』
『그럼 뭣 때문에 애리에게 홀을 내 주셨어요?』
『아, 그건 애리의 상업술을 산 것 뿐이야. 이제 봐요. 모두가 다 애리에 게 미쳐서 덤벼들 테니 말이야. 그런 방면에 있어서는 천재적 소질을 애리 는 가지고 있다니까.』
강석운이가 송준오와 마주 앉아서 술을 들고 있는 동안 애리는 젊은 축들 과 신이 나서 맘보를 추고 지르바로 핑글핑글 돌고 있었다.
당장에 애리는 젊은이들이 인기를 한 몸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룸바를 추 면서도 젊은이들과 어깨를 대고 요염한 웃음을 방글방글 웃으며 홀을 하 바 퀴 삥 돈 적도 있었다.
애리의 장기는 스케이팅 월쓰였다. 그러나 파트너들은 절반도 못 가서 춤 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케이팅 월쓰에는 애리를 무난히 리드할 작 자가 오늘 밤에는 없었다.
『애리! 애리!』
술 취한 젊은 축들은 애리를 자기네의 애인들처럼 불러대며 박수 갈채로 환영을 했다.
어지간히 취한 애리는 신이 났다.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애리는 술잔 을 들고 소리 높이 외쳤다.
『웃음을 사 가요! 웃음을 사 가요! 애리는 오늘 밤부터 홀 「애리자」에 서 웃음 장사를 시작했어요 맥주 한 잔에 웃음 한 번, 칵텔 한 잔에 웃음 두 번.』
『으하하하하핫……』
청년들이 애리의 어깨를 좌우에서 잡고 웃으며 떠들며 고함치며 마셨다.
석운은 바라보며 후딱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리의 그 자포자기하는 심 정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석운 혼자 뿐이었다.
송준오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애리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강선생, 우리도 술을 듭시다.』
하고 맥주를 권해 왔다.
『네, 듭시다.』
석운은 송준오와 글라스를 맞대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송준오는 취해 있었고 석운도 어느덧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애리는 저런 버릇이 나빠요. 웃음을 파는 여자라고 저처럼 제 입으로 선전하지 않아도 무방할 텐데……』
송준오는 그런 말을 석운에게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슨 고달픈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는데 애리가 청년들의 틈바구니를 빠져 나와 맥주 한 잔을 손에 들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다.
걸어오다가 애리는 후딱 걸음을 멈추고 반대편 쪽에서 조용히 걸어 들어 오는 영림을 발견하고 취안을 크게 떴다.
어디를 갔었는지 한 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영림이가 색다른 차림새와 색 다른 표정을 지니고 역시 두 사람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 영림……』
송준오가 꿈결처럼 돌아보며 부르짖듯 불렀다.
그 돌변한 영림의 모습에 석운도 놀랐다.
화이트 그린의 후레야 스커트, 어깨에서 부터 미끈한 팔이 몽땅 드러난 로오 넥크 블라우스, 로키트가 달린 순금 넥크레스, 백색의 무도용 펌프스, 짙은 도오랑 화장의 엷은 아이샤도, 화판인 양 곱게 그려진 타오르는 입술, 파아란 비취 이어링이 양쪽 귀바퀴에서 한들거리고 있었다.
애리는 연방 눈을 깜박거렸고, 영화 화보에서 쏘옥 빠져나온 성싶은 영림 의 화려한 얼굴은 바닷속처럼 조용했다. 무기미하게 조용했다.
불나비 영림이가 그처럼 호화로운 몸차림으로 나타난 것을 먼발로 바라보자 고영 해 부자도 적지않게 놀라고 있었다. 몸치장에는 통 관심이 없던 영림이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이 되었다. 바이얼린 독주가 흘러나왔다. 〈오리엔털〉에 뒤이 어 〈G선 위의 아리아〉, 마지막이〈트로이메라이〉.
송준오 옆에 영림은 앉아서 준오가 따라 주는 각테일을 석 잔이나 연거퍼 마시고 있었다. 그러한 영림을 보고 송준오도 놀랐고 애리와 석운도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된 셈이야? 갑자기 화장을 하고 술도 마시고.』
석운의 팔 한 쪽을 끼고 애리는 몽롱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영림은 무심히 웃어 보이며
『미스터 송을 보기가 딱해서, 내 초라한 모습이 신경에 걸리는지, 준오 씨의 시선이 자꾸만 애리에게로 뻗길레……』
『흥, 의미가 지극히 심장하구나! 나 같은 둔감으로는 알아 듣기가 힘든 데…… 자아, 이왕 입에 댄 술이니 내 술 한 잔 받아요. 그리고 그 술 일랑 선생님에게 드려봐요.』
애리가 따라주는 위스키를 영림은 말 없이 들이키고 나서
『자아, 애리도 한 잔……』
『선생님한테 드리라는데.』
『드리고 싶음 네 손으로 드려요. 남의 손을 거치지 않음 못 드릴 사이도 아닌 상싶은데.』
『아이고, 아파라! 이건 분명 영림의 화살인데…… 자아, 선생님!』
석운은 심각한 표정으로 잔을 받으며 어두운 시선으로 영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림은 한 번도 제대로 석운의 시선을 붙들어 주지를 않는다. 자연스런 외면으로서 준오의 시선만 연방 붙들고 있었다.
『영림이 너 그러고 나서니까 오늘 밤의 히로인같구나.』
『감사하지만 사퇴할 테야.』
두 여인의 심리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비뚤어져 가기만 했다.
이윽고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춤이 시작되었을 때 제각기 두 쌍은 서로가 다 본의 아닌 상대자를 붙들고 열심히 스테프를 밟아야만 하였다.
멋도 모르고 기뻐한 것은 송준오 뿐이 아니었다. 고영해 부자를 비롯하여 송달영씨와 황산옥도 기뻐했다.
영림의 감정이 아까부터 뚫어져 가고 있는 것을 석운은 잘 알고 있었지마 는 이상하게도 고사장 부자의 눈초리가 유달리 자기에게만 쏠리고 있는 사 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석운은 가급적 영림을 멀리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다.
그러던 것이 취기가 차차 돌면서 부터 석운은 안타깝게 영림을 붙들고 싶 었다. 할 이야기도 많았다. 갑자기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 입고 나선 영림 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아서
『영림양, 한 번 출까요?』
월쓰가 끝나고 탱고가 새로히 시작되었을 때였다. 송준오를 비롯한 많은 감시의 눈초리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석운은 송준오 옆에서 영림을 끌어냈 다.
영림은 잠자코 따라 일어섰다.
순간, 송준오의 시선이 험악하게 빛나고 있었으나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애리를 붙들고 준오도 나섰다.
『선생님, 뵙고 싶었어요.』
안기기가 바쁘게 영림은 한 달 동안 밀렸던 감정의 무더기를 어린애처럼 쏟아놓는다.
『영림, 나도……』
가벼운 포옹을 〈록크〉로써 둘이는 했다.
곡은 〈라 콤파르시타〉 기쁘다기 보다도 그저 흐느껴 울고만 싶은 오열의 감정이 둘이의 가슴에 는 꽉 차 있었다.
『전화 종시 안 걸어 주셨지요.』
「프롬나아드」로 걸어 가며 영림은 혼자말처럼 종알거렸다.
『나무라면 못써.』
『제가 싫어지신 건 아니죠?』
오뇌의 시선으로 영림의 화장 짙은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너무 급속도로 좋아져서, 그래서 전화를 못 걸었어.』
『그러리라곤 생각했었지만…… 사랑처럼 의심이 많은 건 없나 봐요.』
『왜 갑자기 화장을 하고 나왔어?』
『화장도 예술이라고 선생님이 그러셨기에요.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 서요.』
석운은 말 없이 영림의 손을 꼬옥 쥐어 보았다.
『애리하고만 이야기하시고, 애리하고만 춤을 추시고……』
『어린애 같은 소리야. 송군이 영림이 옆에 딱 붙어 있고, 아버지랑 오빠 랑 어쩐지 날 보고 야유하는 소리를 했어. 눈치를 챈 모양 같아서……』
『챘음 어때요?』
『저거 봐요. 오빠가 저기서 우리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지 않아.』
『선생님!』
『응?』
『오빠의 제안으로 오늘 밤은 여기서 밤을 세운대요. 딴 손님들은 보내고 말이예요. 이 빌딩 이층부터가 호텔인데, 미스터 송이 나와 함께 밤을 새우 자는 거예요.』
『음, 그래서?……』
『아까 오빠가 송한테 하는 귓속말을 제가 들었어요. 오늘 밤은 저를 놓 침 안 된다고요. 처음에는 모르고 왔었는데, 알고 보니 무슨 그런 상스럽지 못한 계획이 확실히 있어요.』
『알았어. 내가 그들의 계획을 중지시키지.』
힘찬 한 마디를 석운은 토했다. 흥분한 감정이 영림을 빼앗겨서는 안 된 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현대에는 있을 수 없는 말이야. 정략 결혼은 이미 낡았어!』
그 힘차게 튀어 나오는 항거의 말들이 영림에게는 눈물겨워 견딜 수가 없 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어떻게 중지시켜요?』
『누구한테도 영림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아아, 선생님!』
스테프가 어지러워져서 턴이 제대로 돌아가 주지를 않았다.
『나도 같이 밤을 새우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파티가 끝나기 직전에 선생님 먼저 나가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어떡하든 빠져 나갈 테예요.』
『어디서 기다려?』
『명동쯤에서 기다리세요. 미도파 앞에 다방이 하나 있죠?』
『아, 있지.』
『거기서 기다림 제가 어떡하든 빠져 나갈 테예요.』
『빠져 못 나오면 어떻게 해?』
그것이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저희들이 아무렴 완력을 쓸라구요?』
『쓸는지도 모른다. 나와 약속이 있어서 빠져 나가는 줄을 뻔히 알고 있 을 테니까, 좀처럼 내보내지를 않을 거야. 어때? 나와의 관계를 저들이 알 고 있는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오빠한테 매까지 얻어 맞았어요. 저번의 그 혹……』
『아, 그 머리의 혹이』
『그렇지만 저희들이 세검정에서 만났던 일은 아직 모르고 있죠.』
『아, 그 혹!』
멋도 모르고 꼬옥 눌러 주던 그 피 묻은 혹을 애처로이 생각하며 영림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지 않고는 견디어 배길 수 없는 다급한 감정에 석운은 완전히 사로잡히고 있었다.
『선생님, 춤이 통 추어지지가 않아요. 선생님 발등만 밟고……』
『괜찮아. 후일 다시 추지.』
『머언 데…… 어디 머언 데로 가서 선생님과 단 둘이만 진종일 춰요. 아 담과 이브처럼… 에덴 동산에서』
『음.』
취흥도 도와 주었지마는 구김살 없이 부풀어 오른 강정 속에서 애욕의 도 피행(逃避行)을 소설처럼 석운은 상상했다.
한 편 애리는 애리대로 송준오와의 애정 투쟁을 전개시키고 있었다.
『무얼 그처럼 멍청하니 바라만 보는 거야?』
영림과 석운의 모습만 멍하니 쏘아보고 있는 준오의 손가락을 애리는 꼬 집었다.
『흥, 이 양반 잘못함 독약 한 번 더 마셔야겠어요.』
그러나 송준오는 통 애리와의 춤에서 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애리!』
『응,』
『애리는 무엇 때문에 나를 그처럼 좋아하는 건가?』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거야요.』
『이유가 없이 좋아할 애리는 아닌 상싶은데……』
『웃음 장사라고요?』
『암!』
『웃음 장사에게도 순정은 있어요.』
『흥, 애리에게는 순정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야.』
『무슨 말이야요?』
『고전무에게도 순정을 팔고……』
『뭐라구요?』
『강석운에게 순정을 팔고……』
『………?』
『아까 보니까 수 많은 청년들에게도 돌아가면서 공평하게 순정을 팔더 군.』
애리의 눈초리가 험악하게 빛나며 준오의 손을 탁 놓고 우뚝 마주 섰다.
준오는 여전히 조소하는 어조로
『그런 의미의 순정이라면 오늘 밤이라도 나와 결혼을 해요.』
순각, 애리의 손길이 날쎄게 들리며
『찰싹, 찰싹……』
하고 준오의 뺨을 호되게 갈겼다.
『아, 애리!』
준오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애리를 불렀다.
그러나 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한 얼굴을 하고 가까운 식탁으 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가까운 식탁에서 고종국씨는 송달영씨를 비롯하여 황산옥과 애리의 어머니를 상대로 주흥에 겨워 있었다.
『너 왜 그러냐?』
어머니가 양미를 찌푸리며 애리를 바라보았다. 사십 오세의 애리의 어머 니지만 이처럼 차리고 나서니까 애리의 얻니처럼 젊고 예뻤다. 「애리자」
경영에서 뒷시중을 해 주기로 되어 있는 어머니였다.
『아냐요, 아무 것도……』
애리는 태연한 얼굴로 웃음까지 띠어 보였다.
아들의 뺨을 갈기고 온 애리를 송달영씨는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찌 된 셈이야?』
황산옥이가 말을 건네는데
『사장님, 춤 한 번 추어 주세요.』
하고 애리는 방그레 웃었다.
『어허허, 잘못하면 애리양의 구두 코만 찌그러뜨릴 걸 그래.』
『괜찮아요. 새것 또 사 주실 테니까요.』
『어허허, 이거 갑자기 젊어진 판이로군.』
고사장의 손길을 모셔 잡고 애리는 트룻트를 밟아 주었다.
『영감 어젯밤 꿈을 잘 꾸셨오.』
황산옥이가 등 뒤에서 유쾌한 소리를 냈다.
『이거 어디 젊은 사람들과는 황송해서 출 수가 없는 걸.』
아무리 보아도 자기 아들과 친해 지내는 것 같은 눈치를 벌써부터 채고 움직이는 마음을 억제하고 있던 판이라서 마음 놓고 행동할 수가 고사장에 게는 없었다.
『황송해 하실 것 뭐 있으세요? 아앗, 정말 구두 코를 밝으셨어요.』
『어허허…… 미안한 걸.』
『구두 한 켤레는 벌써 벌어 놨어요. 호호호……』
『암 사 주고 말고. 그런데 저번에는 왜 약속을 안 지켰나?』
『무슨 약속요?』
『아, 종로 코롬방 에서 만나자는 약속 말이지.』
『어마? 사장님, 그게 정말이었어요?』
얼버무려 버려도 항의도 못할만한 연륜의 차이를 애리는 이런 형식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음, 그럼 애리양은 농담인 줄로만 알았었군.』
『그럼요, 사장님이 저 같은 애송이 사원과……』
『음.』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의 비애가 절실히 고종국씨에게 왔다.
송준오의 뺨을 갈기고 나서부터 애리는 막 술을 퍼먹기 시작했다. 애리의 상대로 석운도 지나치게 마시고 있었다. 애리는 석운을 붙잡고 놓아 주지를 않았다.
『선생님만이 제 마음을 알아 줄 수가 있어요.』
춤을 추면서 애리는 울었다. 애리의 심정에 석운도 자꾸만 서글퍼졌다.
파티가 끝나기 직전에 석운은 애리의 어머니와 고사장 부자에게 인사를 하고 홀을 나섰다.
그로부터 반 시간 후에 파티는 끝나고 손님들은 몰려 나갔다.
영림은 화장실로 돌아가서 아이샤도만을 간단히 지우고 이어링을 떼서 핸 드백에 집어 넣었다.
『영림아, 어디 가니?』
손님들 틈에 끼어서 갈아 입은 옷보따리를 들고 나가려는데 오빠가 재빠 르게 불러 세웠다.
『피곤해서 나 집에 가서 잘래요.』
『차가 와 있는데 갈려거든 같이들 가야지.』
『밤샘을 한다면서요?』
『글쎄 잔말말고 같이 가!』
오빠가 궤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빠도, 무슨 상관이예요?』
『얘 영림아, 아버지하고 같이 집으로 가자.』
『아버지는 정릉으로 가셔야지 않아요?』
『가는 길에 집까지 데려다 주마.』
『아이, 누굴 어린앤 줄 아시나봐요.』
『영림씨』
하고 그 때 송준오가 다가와서 조용히 불렀다.
『강선생님과 만나러 가는 줄을 오빠는 알고 있답니다. 어쨌든 안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영림의 일생에 관한 문젠데 집안에선들 왜 걱정을 안 하겠 오.』
『흥, 미스터 송은 언제부터 우리 집안을 걱정했어요?』
그러는데 오빠가 와락 달려들어 영림의 등을 홀 안으로 밀어 넣으며
『너는 오늘 밤은 강금이다.』
비틀비틀 밀려 들어가다가
『사람을 왜 마구 떠미는 거예요?』
영림은 발악을 했다.
손님들이 밀려 나가면서 힐끗힐끗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이리 와!』
오빠는 영림의 팔을 잡아당기며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기를 기다릴 셈으 로 식탁으고 끌고 가서 억지로 주저 앉혔다.
『강석운과 만날 약속을 했었지?』
『아아뇨.』
『바른 대로 말을 해.』
『하지도 않은 말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예요?』
『음, 강석운 그 자식을……』
『자식이 뭐예요? 강선생님이 뭐 어쨌게 자식이라는 거예요?』
『요년, 입을 못 닫치겠니?』
『제 주제나 좀 돌아다보고 남을 욕해요. 돼 먹지 않게 스리……』
『닥쳐!』
고영해의 커다란 손길이 철썩 하고 갔다.
『아이!』
영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었다.
『아이, 전무님, 그만 하세요.』
술 취한 애리가 달려오면서 오빠를 붙들고 저리로 끌고 갔다.
영림은 이윽고 조용한 얼굴을 가만히 쳐들었다. 울지는 않고 있었다. 생 각하고 있는 것이다.
감금을 당하면 선생님은 밤새껏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냐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영림은 빠져 나가야만 했다.
영림은 불현듯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시 오분 전, 영림의 초조한 시선 이 들창으로 뻗어 갔다. 울긋불긋 색칠을 한 들창 하나가 열려져 있었다.
이 층이 아닌 것만이 다행이라고 중학 시절 들창을 넘어 잔디밭으로 뛰어내 리던 광경 하나가 번개처럼 머리에 왔다.
『앗, 저 계집얘가……』
저편 밴드 옆 의자에 애리와 함께 앉아 있던 고영해가 벌떡 일어서면서 외쳤다.
걸상과 식탁을 사다리 삼아 어둠 속으로 영림은 창문을 뛰어내리고 있었 다.
『아버지, 저 계집얘가 들창으로……』
손님들의 마지막 꼬리가 밀려 나가고 있는 홀 입구로 고영해는 허둥지둥 뛰쳐 나갔다.
『옛날 시골 색시들의 도망군 같군.』
택시를 타고 옷보따리에다 빽을 같이 싸 꾸리며 영림은 한 두 번 쿡쿡 웃 었으나 얼굴은 사뭇 불그스레 상기되어 있었다.
미도파 앞에서 택시를 버리고 다방으로 올라 갔을 때 석운은 밤 늦은 다 방 한 구석에서 취기로 말미암아 몽롱한 시선을 번쩍 들며
『아, 영림!』
옷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가오는 영림을 반가이 맞이했다.
『용히 빠져 나왔군.』
『약속을 지켜야죠. 그래야만 선생님에게 신임을 받지요.』
『뭘 한 잔 들어야지?』
『아이, 목이 타요. 영화 그대로의 심야의 탈출이었어요. 들창을 넘어 서……』
소다수를 단숨에 빨어 넘기며 영림은 간단한 보고를 했다.
『음……』
깊은 신음 소리가 석운의 입으로 흘러 나왔다.
『접때도 이 다방에서 소오다수로 목을 축였어요. 선생님은 골똘히 생각 하면서요.』
『접때라고?』
『선생님이 출판 기념회에 나오셨던 날 밤에』
『아, 애리를 만나던 날 밤이로군.』
『그때, 선생님이 저와 만나지를 못하고 애리와 만난 것이 지금 생각하니 까 도리어 잘 됐어요.』
『무슨 말인데?』
『애리는 우연히도 만나셨기 때문에 오늘 밤 선생님이 파티에 오신 거 아 냐요. 전정말 선생님이 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그대로 영영 만나 뵙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애리는 우리들의 마스코트가 된 셈이로군.』
『정말이예요.』
그날 밤 애리의 등장은 확실히 한낱 우연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러한 우연성엔 창조주의 거대한 캔버스 위에서는 이미 마련된 소재로서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좀 더 중대하게 가질는지도 모를 일 이다.
그때, 열시 반의 사이렌이 뚜우 하고 났다.
『이제 나가요.』
석운은 담배 갑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어디로 나가요?』
옷보따리를 무릎 위에 올려 놓은 채 우두커니 앉아서 영림은 물었다.
『집으로 돌아가야지. 시간이 없는데.』
영림은 말끄러미 바라보며 쓸쓸히 웃을 뿐 얼맛동안 잠자코 앉았다가
『저는 갈 데가 없어요. 죽어도 집에는 들어가기 싫어요.』
들창을 넘어서까지 허겁지겁 달려온 영림의 정성을 석운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마는……
『그래도 들어가야 해요.』
『안 들어갈 테예요.』
『안 들어가면 어떡하나?』
『여기서 밤을 세우죠. 오빠랑 아버지랑은 인제 얼굴도 보기 싫어졌어 요.』
『그럼 못써!』
석운은 딱했다. 집어 넣었던 담배를 다시 한 꼬지 꺼내 피우다가 다시금 재떨이에 비벼 버리며
『자아, 일어서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석운은 일어서서 돈을 치렀다.
다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쨌든 나가요.』
영림도 하는 수 없이 부시시 따라 일어섰다.
영림의 팔을 끌다시피 하며 석운은 다방을 나섰다.
어두운 밤 거리에 인적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 직전의 택 시들이 헤들라이트를 기다랗게 뽐으며 질풍처럼 냅다 달리고 있었다.
『스톱!』
석운은 적이 당황하며 지나가는 차마다 손을 들었으나 멎어주는 차는 하 나도 없다.
『야단 났는 걸!』
술기운이 갑자기 깨는 것 같았다.
『스톱! 스톱!』
석운은 손을 들고 뛰어나가 차를 막아 보았다. 그러나 차는 기적을 드높 이 울리며 곧장 맞받아 들어오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석운은 피했다.
전부가 다 손님을 싣고 있었다. 귀로가 바쁜지 가끔 하나씩 지나가는 빈 차도 멎지를 않는다.
『영림이 어떻게 하지?』
『선생님만 어서 하나 붙들어 타고 가세요.』
『무슨 소리를…… 앗, 스톱!』
낡아 빠진 시보레 하나가 급정거를 했다. 석운이가 앞을 탁 막아 섰기 때 문이다.
『여보, 당신 죽어 보려고 그러오?』
운전수가 짜증을 냈다.
『미안합니다. 길이 늦어서…… 대금을 넉넉히 드릴 테니 태워 주시요.』
『시간이 없오!』
『그러니까 사정하는 거 아니요? 자아, 영림이 타요.』
영림의 등을 밀어 넣고 석운은 어쨌든 올라 탈 수 밖에 없었다.
『어디까지 갑니까?』
타협조로 운전수는 나왔다.
『아현동까지요.』
『아이구, 거긴 정말 못 갑니다. 팔분 밖에 안 남았어요.』
『아, 참 영림, 어딘가 올케네 집이 있다고 했지? 그리로 가서 자요.』
『삼청동이지만……』
영림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럼 됐어, 삼청동으로 갑시다.』
『삼청동도 팔분 동안에 갔다 올 수는 없읍니다.』
『어쨌든 가 봐요. 대금은 청하는 대로 드릴 테니까 말이요.』
『나 참……』
휙 하고 차는 달려갔다.
석운은 후유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어쨌든 영림만 데려다 주고 나면 자 기는 파출소에 들어가서 밤을 새워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영림은 눈을 지긋히 감은 채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올케 옆에서 잘 수는 없지.』
강선생님의 품에서 애무를 받은 적이 있는 자기가 그런 사실을 숨기고 미 스 헬렌 옆에서 하룻밤을 모른 체 하고 지낼 수는 도저히 없다.
『뻔뻔스럽다.』
세검정에서 돌아온 이후로는 한 번도 올케를 방문한 적이 없는 영림이기 에
『이거 보세요, 이 근처에 어디 여관 없어요?』
을지로 네거리를 건너서면서였다.
『있읍니다.』
『나 여관으로 데려다 주세요.』
그리고 석운을 향하여
『선생님은 이 차로 헤화동까지 가시고요.』
『왜 올케네 집은 안 돼?』
『거기도 못 가요.』
『왜?』
『이유가 있어요.』
그때 운전수는 초조한 듯이 속력을 늦추며
『어떡하시겠읍니까? 명수장 호텔이 다동에 있는 뎁쇼.』
『어쨌든 그리로라도 갑시다.』
차는 커브를 돌며 다동 골목으로 휘익 돌아 들어갔다.
석운은 마침내 단념을 하고 오늘 하룻밤의 운명을 재빠르게 예측했다.
석운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영림의 정열을 이 이상 더 물리칠 기력이 자기에는 있을 성싶지가 정녕 않다.
『선생님, 미안해요. 저 때문에,』
『무슨 그런 쓸 데 없는 말을……』
명수장 호텔 이층 방에서 석운과 영림은 소파에 걸터 앉아 씁쓰레한 웃음 을 짓고 있었다.
호텔은 만원이었다. 손님이 예약한 방 하나가 있다기에 가까스로 떠밀고 들어온 두 사람이었다. 손님이 오면 내주기로 하고 들었다.
아무리 졸라도 택시는 혜화동까지 가 주지 않았다.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돈 먹은 호텔이었다. 암록색 소파 셋트가 한 편에 놓여 있고 탁자 위에 빨간 카네이션 화분이 놓여 있었다.
동쪽 들창 밑에 더블 베드, 머리맏 소탁자 위에는 교환대로 통하는 전화 가 설비되어 있었다. 아로하 무늬의 커튼, 밑레의 「만종」이 붙어 있는 벽 밑에 아담한 화장대가 있었다.
『우리도 밤셈을 해요. 이렇게 앉아서요.』
『밤을 새우려면 야식이 필요할 텐데……』
『선생님 앞에서 술을 한 번 많이 마셔 봤음……』
『먹을 줄도 모르는 술을…… 그만 둬요.』
『저번 날 미스터 송과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술을 먹었어요. 먹을 줄 모 르는 술을요. 송의 정성이 공연히 서글퍼서요.』
『그럼 오늘은 무엇 때문에 술을 먹겠다는 건가?』
『선생님의 정열이 고맙고 탐탁해서요.』
기뻐해야만 할 영림의 한 마디건만 어쩐지 석운의 마음은 연방 구겨지고 어두워지기만 했다.
생각과는 달라서 이러한 장소에서 이처럼 막상 단 둘이서 마주 않고 보 니, 소설적인 화려하고 감미롭고 사치한 온갖 감정과 정서는 운무처럼 사라 지고 그저 연 덩어리처럼 무거운 압박감과 초조한 침울만이 전신을 휘덮어 왔다.
위기는 정말로 눈 앞에 닥쳐온 것이라고, 청춘의 마지막 고비에서 이러한 위기를 가끔 인생의 아름다운 향기로 간주하고 동경까지도 하여 주던 그 순 간의 공상과는 얼토당토 않게 동떨어진 엄숙이 숨가쁘게 몰아쳐 왔다.
『선생님, 왜 갑자기 침울해지셨어요?』
『아니야, 아무 것도 아니야.』
박목사에게는 이런 종류의 엄숙이 전혀 없었기에 그렇듯 생명의 환희만을 추궁했다. 결국 박목사는 석운 자신의 사상에서 탄생한 작품 세계적 인물이 아니었던가?
영림에게 앞날이 있듯이 자기에게는 가정이 있지 않으냐고 삼척동자도 가 히 셈을 따질 수 있는 이 엄숙한 현실 앞에 또 하나의 엄숙한 현실이 석운 의 눈 앞에는 찬연히 꽃피고 있는 것이다.
오늘 따라 화장을 하고 나선 영림의 모습이 활짝 피어난 꽃송이처럼 몽롱 한 석운의 눈에는 비쳤다. 아무한테도 내주고 싶지 않은 꽃송이 하나가, 훌쩍 석운은 일어나서 보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단한 야식으로는 위스 키와 샌드위치밖에 없다고 했다.
이윽고 보이가 그것을 쟁반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다.
『각텔은 달아서 좋지만……』
영림은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위스키를 억지로 들이키고 있었다. 석운은 성난 사람처럼 술을 들며 공교롭게 맺어진 오늘 하룻밤의 우연을 어떡하면 재치 있게 넘겨 보냈 수 있을까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의 얼굴이 술잔에 오랫동안 떠올라 있었다. 아내의 얼굴에 석운은 훌 쩍 돌이키며
『영림!』
『네?』
『내일은 집에 들어가지?』
영림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응? 안 들어가? 안 들어가면 어떡허나?』
『그럼 좋아요. 제가 선생님께 하나 묻겠어요. 칸나의 정조를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처리해 버리려는 그 무서운 이리 떼의 소굴로 저를 돌려 보내고 싶으세요? 대답해 주세요.』
석운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저를 버리기 전에는……』
『나는 영림은 버렸어.』
『말로만요.』
『마음으로도.』
『선생님의 눈동자가 저를 버리지 않았는데요.』
석운은 얼른 외면을 하고 벌떡 몸을 일으키며 커튼을 젖혔다.
어두운 하늘에 별은 쏟아지고 있었다.
『제가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책임지실 필요는 없어요.』
영림도 몸을 일으켜 왔다. 석운의 팔을 한 손으로 더듬어 잡으면서 탄식 처럼, 추억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말똥히 내다보았다.
『영림은 이미 어린 소녀가 아니예요.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나 제가 지는 거예요.』
『영림은 역시 어려.』
『선생님은 제 나이에는 자기가 어리다는 생각은 안 하셨을 텐데요.』
『누구나가 다 자기는 어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성장해 가고 있는 거 야. 나중에 생각하면 모두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후회를 하면서도.』
『저는 후회 안 해요. 선생님과 하룻밤을 행복하게 지낸 제 귀중한 역산 데요.』
『고달픈 행복이야.』
영림은 석운의 옆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선생님이 저를 정말로 사랑하신담 고달퍼 하실 까닭이 없을 텐데요. 선 생님은 제 앞날의 불행 같은 것을 생각해 주시는 것 같지만…… 행 불행은 주관적인 문제니까 제 걱정 마시고 선생님이 좋으실 대로 사랑해 주심 돼 요.』
석운은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오뇌에 찬 어두운 어조로
『이 하룻밤이 너무도 빨리 닥쳐온 것 같아.』
『제게는 너무 늦게 닥쳐온 것 같아요.』
『영림!』
석운은 획 영림을 돌아다보며
『정말로 오래 전부터 나를 사랑해 줬어?……』
『그럼요. 여학생 시절에는 여학생처럼 어리게 생각했었고…… 대학생 시 절에는 대학생처럼 어리게 생각했었죠. 그래서 저는 철이 들면서 이성을 생 각할 적마다 어느 때나 그 사람을 선생님과 비교하고 있었어요.』
석운은 영림이가 낀 팔을 풀고 영림의 손을 꼬옥 한 번 쥐어 보았다. 맞 받아 꼬옥 쥐어 오며
『그러나 모두가 다 선생님보다 못한 것 같고, 어린 것 같고, 선생님만이 제 인생을 이해하여 주실 것만 같아서…… 저번 날 밤, 명동 입구 십자로에 서 미스터 송과 서글피 작별하고 나서 하늘의 별을 우러러보며, 이렇게 저 는 울면서 마음으로 외쳐 봤어요.』
『뭐라구?』
『짤막짤막하게 끊어서 읽음 시 같죠. …별들이 하늘에 고달피 조는 밤, 고달픈 영혼의 행렬은 대지에 흘렀다.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 어이 혼 자 안일 하려노.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오히려 모자람을 서러워 하는 귀여운 칸나여, 그대마져 생활에 지쳤느뇨. 냉혈동물에 눈물이 흘렀다. 그윽한 동 경 위에 청춘을 밭 갈자. 영혼은 타서 재나 되라. 사랑의 바다에 쪽배를 띄 우자. 노는 없어도 서럽지 않다. 구원을 잡으러 바람을 타자. 오오 고달픈 우주여, 칸나여!』
고달픈 감격과 고달픈 영혼과 고달픈 정열이 네개의 시선을 타고 물끄러 미, 말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랫동안 둘이는 그러고 마주 서 있었다.
『선생님도 고달프시지만 저 역시, 송은 절더러 냉혈 동물이라고 불러 줬 죠. 그렇지만 저는 제 인생을, 제 생명을 제 손으로 밭갈고 싶었어요. 선생 님이란 그윽한 동경 위에서……』
석운을 빤히 쳐다보며 영림은 제 설움에 입술을 한 두번 삐쭉거렸다. 애 달픈 눈동자에 말간 물이 조금씨 고이며, 넋을 잃은 영림의 상체가 조용히 쏠려 들어왔다.
다치면 꺼질세라, 석운은 쏠려 들어온 영림의 어깨를 가만히 품에 넣었 다. 볼을 비비며
『잘 알았어! 영림의 생각을……』
『처음에는 먼 데 떨어져 있어도 사모만 하고 있음 될 줄로 알았어요. 그 렇지만 수양이 모자라서 그런지 그렇게 안 되는 걸요.』
『잘 알았다니까.』
석운도 영림의 어깨 위에서 눈을 감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왜 자꾸만 가까이 오고 싶을 까요.』
『그래서 들창을 넘어 왔었지.』
『지붕이라도 수월히 뛰어 내릴 것만 같았어요.』
귀엽다. 그저 귀엽기만 했다. 취기와 함께 그 귀여움 속에서 석운은 차차 과거의 기억이 희미해 갔다. 가정도 희미해 갔다. 옥영도 희미해 갔다.
홀에서 부터 애리의 술을 연방 받아 마신 석운은 적지 않게 취해 있었다.
영림도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졸리면 저리로 가서 자요.』
『아아뇨.』
밤이 깊도록 둘이가 소파에 나란히 걸터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벙어리처럼 앉아 있기만 했다. 침묵의 피로와 석운은 담배만 연방 피워 물 었고 영림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맞은 편에 놓인 더불 베드가 어쩐지 무서워 석운은 한 번도 그 쪽으로는 발길을 하지 않았다. 영림도 그리로는 가지 않았다. 그러한 의식적인 행동 이 둘이에게는 더 긴 침묵만 가져오게 하고 있었다. 침묵 끝에 한숨이 왔 다.
송준오의 조급성을 영림은 생각하며 선생님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지 모를 일이라고 애욕의 경험이 없는 영림의 지식이 관념적인 서글픔을 빨 리빨리 가져오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충분히 만족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사랑의 정체가 이것 뿐이 아닐 것이라고 상식적인 관념에 영림은 봉착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겁쟁이야요 무얼 그처럼 심각하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시는 거예요?』
석운의 손길을 자기 무릎 위에서 영림은 만지고 있었다.
『겁쟁이! 음, 그 겁쟁이가 지금 저 하루살이를, 저 불나비를 보고 있 지.』
반만큼 열려진 창문으로 밤벌레가 날아들고 있었다.
유백색 갓으로 둘러 싼 전등을 제각기 떠받고 있었다.
『유아등(誘我燈)이라고 시골에 가면 있어. 논두렁에 등불을 켜 놓으면 둘레에 있던 잔벌레가 모두들 모여 들어와서는 불에 타 죽는 거야. 하루살 이도 불나비도 모두 다 죽어.』
『불나비의 이야기, 저번에도 하셨지요 명동에서』
석운의 손을 끌어당겨 영림은 자기 볼에 가만히 비벼보며
『뭐랬더라?…… 깡까로운 지성의 무마와 희뿌옇게 둔탁한 감정의 표현을 지니고 갸륵하게도 몰려드는 수 많은 기체들…… 그리고 뭐랬죠?』
『몰라, 다 잊어 먹었어.』
무뚝뚝한 대답과 함께 석운은 어깨를 잡아당겨 꼈다.
『아, 참…… 명동의 생리 속에서 생명은 순간의 가치를 모색했다. 고독 의 낙루가 범람하는 페이브 위에서 거리의 서정 시인은 삶의 황홀을 찾았 다. 그리고는 뭐죠?』
『몰라, 기억은 뜨물처럼 희뿌옇게 흐려졌어.』
영림은 석운의 품 속에 고스란히 안기우며
『아, 참…… 술과 지분과 꿈과 아방취와 스켄달에 굶주린 보헤미안의 정 열이 방랑하는 거리……』
석운은 안타까이 영림을 포옹하며
『나에게는 아무런 기억도 이젠 필요 없어. 있는 것은 다만 감각의 기능 뿐이야. 나의 시각은 칸나의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족했고, 나의 청각 은칸나의 영롱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되는 거야. 소모된 정열과 생명 을 섭취하며 명동은 살쪘지. 불나비 같은 인생을 마셔 버리는 명동의 생리 야.』
『아아, 선생님.』
『불나비는 자기의 생명을 태워 버리는 것이 삶의 의욕이요 목적이었 지.』
『칸나는 벌써부터 그 불나비가 되어 있는데…… 선생님은 그렇게만 생각 하는 불나비시지?……』
『막걸리 같이 혼탁한 기억 속으로 생각은 이미 사라졌어. 불나비의 정열 뿐이야. 칸나의 불을 느낄 수 있는 내 촉각이 있으면 그만이야…… 그윽한 이 지분 냄새, 머리칼 냄새! 그대의 이 흑칠(黑溪) 같은 머리칼 속에 내 얼 굴을 흐뭇하게 담그고 아아, 이 기나긴 하룻밤을 새워 보고 싶은 욕망 ……』
격렬한 포옹에서 이윽고 접순으로……
세속적인 온갖 것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두 줄기의 교차된 정열 속에서 한 쌍의 불나비는 이미 침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金玉影[김옥영] 女史[여사]
[편집]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고 머릿장 위에 놓여 있는 파란 유리 시계가 열 두시 를 가리켰을때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던 옥영은 일체 단념 할 수 밖에 없었다.
파자마로 갈아 입고 자리에 들었으나 잠이 올 리는 만무한 일이었고, 그대 로 골목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릴적마다 옥영은 솔깃이 귀를 기울이곤 했 다.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남편이 절대로 아니었기에 무슨 교통사고나 생긴 것 이 아닌가도 생각해 보았으나 아까 낮에 창길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 옥영으 로서는 교통 사고보다도 좀 더 커다란 인생의 사고를 앞질러 생각하고 부르 르 몸서리를 쳤다.
한 시가 되었다. 잠이 오지가 않아 옥영은 다시 자리 위에 일어나 앉았다.
영림을 생각하며
『그래도 그이는 그렇지 않을 거야. 유혹은 느낄는지 모르나 결국은 자기 를 지킬 사람이지.』
과거에도 남편은 그래 왔었다. 웬만한 유혹쯤은 수월히 피해온 남편이었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적 신뢰를 상실하지 않았는데 좀 더 가치 있는 희열을 느끼면서 살아온 남편임을 옥영은 잘 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의 취미나 성품으로 보아서 그렇게 홀가분히 좋아질 여성 도 드물 것이며 남편의 정열을 전적으로 불태울만한 대상이 그리 쉽사리 나 타날 것 같지도 또한 않았다 자기를 지키는데 무척 결백하고 뾰족한 일면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기에 그러한 점도 옥영에게는 안심의 한 조각 요소가 되 어 있었다.
『그런데 고영림은……』
생각하면 남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뭇 젊은 여성이 아니고 단 한 사람의 고영림이었다.
남편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가끔 느끼는 젊음에의 그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남편임을 옥영은 안다.
『그러나 고영림은 문제가 좀 다르다.』
지금까지 옥영이가 보아온 뭇 여성 가운데서 고영림처럼 남편의 정열을 전 적으로 흔들어 놓을 여성은 극히 드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이가 가장 좋아할 타입의 고영림!』
옥영은 그것이 차차 더 무서워졌다.
그러면서도 교통 사고 때문에 남편이 못 돌아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끝끝내 옥영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한 사고 때문에 남편은 지금 어느 병원 에 실려져 갔을 지도 모를 일이었고, 팔 하나 다리 하나가 잘라져 나갔을 지도 몰랐다. 아니 잘못하면 죽었을는지도 모른다.
『아아, 그럴 바에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고영림에게라도……』
고영림의 옆에서 살아 있는 남편을 옥영은 도리어 원했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어서 날이 밝아서 남편의 생사를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차차 더 다급 해졌다.
전전긍긍, 뜬 눈으로 새운 하룻밤은 마침내 밝았다.
『엄마, 아버지 안 들어오셨어요?』
아이들도 똑같이 교통 사고를 생각하면서 어두운 표정들을 하고 물었다.
『이제 돌아오실 테지.』
옥영은 태연한 대답을 했다.
『엄마, 아버지가 어떻게 되셨을까?』
『어떻게 되긴, 어제밤 좀 늦어서 못 돌아오신 거지. 어서들 학교에나 빨 리 가거라.』
아이들은 하나 둘씩 어머니의 창백한 표정만 살살 살피면서 학교에 갔다.
부산하던 한 때가 지나고 혜숙이만이 남은 집안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잠 을 못 잔 자기의 뒤숭숭한 모습이 보기 싫어 옥영이가 화장대 앞에서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주인을 찾는 듯 싶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분이 선생님을 찾아 오셨어요.』
식모가 명함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정말 무슨 사고가 난 것이 아니냐고 옥영은 가슴이 덜컹 내리앉으며
『어떤 사람인데?』
명함에는 「한성 양조 전무 취체역 고영해」라고 씌어 있었다.
『한성 양조의 고영해?』
옥영은 화장대 앞에서 냉큼 몸을 일으키며 불길한 예감이 고영해의 환영과 함께 갑자기 확대되어 왔다.
명함을 쥔 채 옥영은 현관으로 나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랬더니 코 밑에 수염이 나고 안경을 낀 신사는 모자를 벗어 들며
『강선생님 좀 뵈러 왔읍니다.』
평온한 음성이었으나 표정은 무척 굳어져 있었다.
『지금 안 계십니다.』
『아, 벌써 외출하셨는가요?』
『아니요. 어제밤 볼 일이 있어서 외출하셨다가 아직……』
『아, 역시 안 돌아오셨군요.』
고영해는 잠간 동안 옥영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부인이시지요?』
『네. 어떻게 찾으시나요?』
『혹시 부인께서 고영림이라는 학생을 아시는지요?』
올 것이 마침내 온 것이라고 옥영은 마음이 후둘거려 견딜 수 없었으나 태 연한 어조로
『네, 알고 있어요. 달포 전에 한 번 찾아 온 적이 있읍니다.』
『아, 달포 전에요?』
고영해가 무엇인가 혼자서 수긍을 하다가
『고영림은 제 동생입니다.』
『그러세요.』
『영림이가 무엇 때문에 찾아 왔었읍니까?』
『문학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좌담회를 연다고 그래서 같이 나가 셨어요. 세검정으로 갔었다든가요.』
『세검정이라고요?』
『왜 그러세요?』
고영해는 또 잠시 주저하는 모양이더니 이윽고 결심을 한 듯이
『부인께서는 그 말을 곧이 들으셨읍니까?』
『네, 곧이 들었어요.』
『알겠읍니다. 그럼 어제밤 강선생이 축하 파티에 나가신 것도 아시는가 요?』
『네, 알고 있어요.』
고영해는 또 잠시 망서리다가
『부인께서는 강선생을 전적으로 믿고 겠시겠지요?』
하룻밤 사이에 믿음은 이미 완전히 흔들려지고 있었으나 옥영은 순간 모욕 감을 홱 느끼며
『그런 말씀까지 저한데 물으실 필요는 없지 않으세요?』
『아, 실언을 용서하세요, 실은……』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인 후에
『실은 이런 말을 하여 부인에게 실망을 드리려고 찾아 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동생을 걱정하고 있는 것 뿐이니까 요.』
『무슨 말씀인지 좀 더 자세히……』
마음의 자세는 이미 쓰러지고 있었으나 옥영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엄연했 다.
거기서 고영해는 어제밤 영림이가 들창을 넘어 나간 데까지를 간단히 설명 하고 나서
『영림이도 아직껏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다만 제 욕망은 한시 바삐 강선 생을 만나 뵙고 제 동생의 처소를 알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찾아오신 뜻은 잘 알았어요. 선생님도 동생을 염려하고 계시겠지만 저 역시……』
옥영은 어디까지나 태연 자약한 태도로 말을 이어
『돌아오시는대로 선생님이 찾아 오셨던 뜻을 전하겠어요.』
『부인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다시 찾아 뵙겠읍니다.』
『언제든지 찾아 주세요.』
이윽고 정문 밖에서 차 떠나는 엔진 소리가 들릴 무렵까지 옥영은 현관에 그대로 선 채 한걸음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얼어 붙은 석고상처럼 얼굴만 이 해말쑥하게 핏기를 잃고 있었다.
이윽고 비틀비틀 쓰러지려는 몸을 가누기 위하여 옥영은 응접실 문 손잡이 를 붙들며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보! 아무 일 없이, 아무리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와 주세요. 지금도 이 순간에도 나는 당신을 믿고 싶어요.』
실은 오랫만에 아현동 본댁에서 하룻밤을 세우다시피하면서 지난 고종국씨 는 큰 마누라 옆에서 아들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강석운이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는지 몰라서 홀에 있는 청년 하나를 근처 에 파수시켜 놓았읍니다. 강석운이가 돌아오는 대로 전화로 연락해 달라고 요.』
『응, 잘 했다.』
기가 찬 표정으로 고종국씨는
『그래 그 청년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느냐?』
어머니였다.
『안 할 수가 없어서 대강 했지만,』
『음, 비밑로 해야 할 텐데.』
하고 고종국씨는 어두운 표정을 하며
『이런 소문이 송달영씨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에는 모두가 허사다.』
어머니는 말을 가로채며
『어쨌든 영림이만 무사했으면 좋겠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글쎄 종시 내 딸을 유혹해냈구나. 여편네가 있는 녀석들이 왜 그 모양들인지 하늘이 무심 하지.』
그 말에 아버지와 아들은 힐끔 서로 바라보다가 쓰다는 표정으로 잠자코 외면을 했다.
『너희 부자가 모두들 그 모양이고 보니…… 가슴 좀 아파 보라고 하늘이 벌을 주는 건 줄로만 알아라.』
『또 쓸 데 없는 소릴.』
고종국씨는 입맛만 쩝쩝 다시다가
『음, 강교수의 아들녀석이겠다.』
마누라의 핀잔에는 변명할 길이 없다는 듯이 고종국의 울분은 이상한 코스 를 거쳐 강교수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 한 번 맞서 볼 날이 있겠지. 내 딸만 망쳐 놔봐라, 이놈들.』
고사장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분한 심정은 고영해도 마찬가지였 다. 자기네들은 그처럼 태연히 해 젖히는 일이건만 입장이 바뀌고 보니 이 처럼도 흥분할 일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거기에 비하면 마누라의 통분은 그들처럼 절실하지는 않았다. 다만 딸 자 식의 그 불행한 상태가 좀 더 비참하게 확대되었을 뿐이다. 이 남편과 이 아들의 체험 세계가 한 여성을 속여 넘기는데 있어서 얼마나 음흉하고 잔인 하고 거짓말 투성이로 도배질이 되어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처럼 분하 다는 생각에는 실감이 가지 않았다.
열 두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에 파수를 시켜 놓았던 박으로 부터 전화가 걸 려 왔다.
『강석운이가 이제 방금 돌아왔읍니다.』
『그래? 혼자서?』
『네, 혼자서요. 그런데 알고 보니 가끔 보던 사람이군요. 언젠가도 뻐스 정류장에서 본 적이 있읍니다.』
『그럼 됐어. 그가 만일 내가 가기 전에 어딜 또 나가거든 뒤를 밟아요.
연락은 역시 이리로 하구.』
『알았읍니다.』
고영해는 전화를 끊었다.
『영림이도 돌아올는지 모르지 않아?』
어머니였다.
『돌아야 오겠지만, 어쨌든 나는 강석운을 한 번 만나 봐야겠읍니다.』
『거기 좀 앉아라.』
기가 차서 나가려는 아들을 고사장이 부르며
『저편 쪽을 잘 다루어야 해. 이런 일이란 소문이 나게 되면 결국 여자 편 에서 손해를 보는 거니까 말이다.』
『그런 줄도 알지만요, 이번 일에는 강석운에게는 약점이 많습니다. 사회 적으로 매장을 시켜 버릴 테니까요.』
집에는 이제 죽어도 안 들어간다는 영림을 호텔에 남겨 두고 석운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자기 집 정문 밖에서 서성대고 있던 안경쓴 청년 하나가 석운과 엇바뀌어 골목을 빠져 나오며 힐끔힐끔 석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한 번 본 것 같은 인상이 뚜렸했으나 누군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정문을 들어서면서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골목 어귀에 우두커니 서서 청년도 이편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 하고 어깨가 벌어진 곤색 더 불을 입은 청년이었다.
『엄마! 아빠 오셨어. 아빠!』
뜰에서 놀고 있던 혜숙이가 고함을 치며 바르르 뛰어왔다.
『오오, 혜숙이냐.』 매어달리는 혜숙을 얼싸 안고 석운은 카라멜 꾸러미 를 쥐어 주었다.
『아빠, 어디서 잤나?』
『친구 집에서 잤다.』
『왜 잤나?』
『시간이 늦어서 잤다.』
현관 앞을 지나 안 뜰로 돌아갔다.
『아까 엄마가 울었어.』
『엄마가 왜 울어?』
『몰라, 경대 앞에서 울었는데.』
덜컹 하고, 발각 직전의 범죄자의 심리가 왔다.
혜숙의 고함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얼굴조차 내놓지 않는 옥영의 울음은 단지 밤을 새우고 들어온 데 대한 단순한 슬픔에서가 이미 아닌 성 싶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셨답니다.』
주방에서 나오며 안방을 향하여 식모가 말했다. 그래도 옥영의 얼굴은 나 타나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뛰쳐 나올 옥영이었는 데……
혜숙을 뜰에 내려놓고 석운은 복도로 올라갔다. 성큼 성큼 걸어가서 안방 문을 열었으나 옥영은 없다.
『여보오!』
다시 방을 나서며 석운은 커다란 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텅 비인 집안에서 석운의 목소리만이 으르렁 으르렁 울리고 있었다.
『어딜 나가셨나?』
식모도 어리둥절 해 있었다.
『여보! 어디 있오?』
석운은 모자를 벗어 던지고 건너방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도 없다.
석운은 부리나케 층층대로 뛰어 올라가며
『여보!』
그러나 서재에도 옥영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소설적인 공상 하나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집을 나갔는지도 모른다.』
무슨 유서 같은 것이라도 있을 성싶어 석운은 뛰어가서 책상 위를 두루두 루 살펴 보았다. 서랍도 열어 보았다. 그러나 옥영의 글씨는 아무 데도 보 이지 않았다.
『아주머니, 집에 무슨 일이 생겼오?』
층층대를 뛰어 내려오며 식모에게 물었다.
『아니요.』
그러다가 식모는 생각이 난 듯이
『참, 아까 아침에 손님이 한 분 오셨읍니다. 자동차로요.』
『손님이라고, 누군데?』
『모르는 분인데, 아씨를 만나 보고 가셨읍니다.』
『사십은 채 못 됐겠고, 안경을 쓰고 코 밑에 수염이 난 사람이예요.』
『자동차…… 자동차는 깜자주 빛이고?』
『네, 그래요. 깜자주 빛이예요.』
『고영해다.』
너무나 빠르다. 이처럼도 신속히 비밀이 탄로난 줄을 몰랐다.
『그런데 옥영은. 옥영은 어딜 갔나?』
『얼마 전까지도 방에 계셨는데요. 한 시간이나 됐을까요. 방에서 주무시 는 줄로만 알았어요.』
『혜숙아!』
뜰에서 놀고 있던 혜숙을 석운은 불렀다. 카라멜을 씹으며 혜숙은 왔다.
『엄마가 어디 나가는 걸 너 못 봤니?』
『못봤어.』
석운은 모자를 다시 집어 쓰고 허겁지겁 뜰로 내려서서 구두를 신었다.
『내 엄마 어디 갔는지 가서 찾아 올게.』
석운은 혜숙의 얼굴에다 자기 볼을 한 번 비비고 나서 정문을 향하여 뛰어 나갔다.
뛰어 나가다가 석운은 문득 현관 옆에 달린 응접실 쪽을 바라보았다. 항상 늘어져 있던 풀빛 커튼 한 쪽이 오늘 따라 방씻하니 젖혀져 있지 않은가.
발길을 돌려 응접실 밖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서 유리 창으로 들여다보다가
『아, 여보!』
석운은 기뻐서 유리창을 두드리며
『여보! 나요, 나!』
그러나 옥영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소파에 걸터앉은 채 옥영은 소탁자 위에 쓰러지듯이 조용히 엎디어 있었 다.
석운은 현관으로 뛰어 들었갔다. 신발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응접실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은 안으로 부터 완강히 잠겨져 있었다.
『여보, 열어요. 문을 열어 줘요!』
안으로 부터는 그러나 하등의 대답이 없다.
석운은 문을 두드리며
『여보, 옥영이! 나요, 문을 좀 열어 줘요!』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독을 마셨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언듯 석운에게 왔다.
『여보! 빨리 문 열어요!』
고함을 치며 석운은 두 주먹으로 무섭게 문을 두드려 댔다.
『아씨, 선생님이 돌아오셨는데 이제 문을 여세요.』
식모도 허둥지둥 혜숙을 안으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혜숙은 종시 엉엉 울어 댔다.
그러는데 안으로부터 옥영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나왔다.
『아주머니!』
『네, 저 여기 있읍니다.』
『아주머니는 혜숙일 데리고 저리로 가 있어요.』
『네, 네……』
식모는 얼른 돌아서서 혜숙을 안고 안방으로 사라져 갔다.
『여보, 어쨌든 문을 열어요.』
석운은 손잡이를 자꾸만 비틀어 댔다.
『문을, 문을 열기가 무서워요.』
흐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울고 있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문을 열고 나를…… 만나 줘야지 않겠오?』
『당신을 보기가, 당신을 만나기가 제게는 무서워요. 입때껏 당신을 기다 리고 있다가…… 무서워서 그만 문을 걸었어요.』
『여보, 어쨌든 문을 열고 말을 해요.』
『아냐요. 당신 입에서, 당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는지 그것이 무서워 서 못 열어드리겠어요. 제발 아무 말도 마시고 저를, 저를 이대로 가만히 좀 내버려 둬 주세요.』
『아, 옥영! 나는 정말.』
『아무 말도 마시고, 입을 열지 마시고 저리로 가 게세요. 안다는 건 모른 다는 것보다 나쁠 때가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이대로 물러가 있겠오?』
『염려 마세요. 나 절대로 경솔한 사람이 아니예요.』
『아아, 옥영!』
석운은 뭉클 하고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아아……』
석운은 괴로와 응접실 문짝에 머리를 기대었다.
『당신이 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나는 이대로 기다리겠오.』
안으로부터는 그러나 아무 말도 이미 들리지 않았다.
소탁자가 덜그럭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옥영이가 탁 쓰러지는 소리 같았 다.
영림의 옆에 있을 때는 옥영의 기억이 희미했고, 옥영의 옆에 있을 때는 영림의 생각이 흐려졌다. 그 어느 것이나 다 같이 인간 강석운에게는 추호 도 거짓 없는 진실하고도 절실한 애정의 자세였다.
남편의 최후의 한 마디가 무서워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옥영의 심정과 죽 어도 집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온갖 세속적인 인연을 손수 끊어버리고 석운 이가 돌아오기를 호텔 일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림의 심정과 …… 석운은 이 두 갈레로 분산된 애정의 농담(濃淡)을 자기의 분별로써 저울질하고 그 것을 재치 있게 처리해 나갈 기력을 이미 상실하고있었다.
부닥쳐 오는 물결을 석운은 그저 수동적으로 덮어 쓸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문이 안으로부터 조용히 열리며 비애와 공포가 얼버무려진 표정을 지닌 채 한 두 걸음 옥영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 여보!』
석운은 달려 들어가며 뒷걸음질을 치는 옥영을 와락 부여안았다.
『무, 무서워요.』
남편의 격렬한 포옹을 숨가쁘게 받으며 옥영은 더듬거리는 어조로 말했다.
『여보!』
석운은 무섭게 볼을 비볐다.
『그래도, 그래도 돌아와 주셨군요.』
『아, 여보!』
할 말이 없다. 석운은 운다. 울음 소리가 갑자기 흐느낌으로 변했다.
격정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똑같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쁜. 나쁜 남편이 나는 마침내 됐오.』
『아아……』
기적은 이미 갔다. 최후의 기대는 이미 끊어졌다.
옥영은 해말쑥하니 핏기를 잃으며 드디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품 안에서 차차 무거워지고 있는 옥영의 몸 무게와 함께 석운은 소파에 펄썩 주저 앉 았다.
『옥영, 용서해요.』
『………』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옥영을 끌어안는 대로 남편의 품에 머리를 파 묻고 있었다.
이 남편과 이 아내는 그저 자꾸 흐느껴 울기만 했다. 울음 이외의 아무 것 도 거기에는 있을 수가 없다.
오랫동안 둘이는 부여안고 울고 있었다. 이윽고 석운은 입을 열었다.
『나쁜 놈이 결국 되고 말았오.』
『…………』
『나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그만, 그만 어떡할 수가 없었오.』
『당신만은 세상 사람이 다 나빠도 당신만은 믿었어요.』
흐느낌은 이제 점점 가시고 품 속에서 억압된 한 마디와 함께 옥영은 비로 소 얼굴을 들면서 두 손으로 가만히 남편의 가슴을 밀어 놓았다.
그리고 눈물을 씻으며 남편의 얼굴을 오랫동안 빠안히 들여다보았다. 그러 나 옥영의 두 눈에는 금시 눈물이 가뜩 가뜩 고이고 있었다.
대롱대롱 눈물이 매달린 눈동자로 남편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며, 저 볼 과 저 입술과 저 손등은 이미 어제의 그것들이 아님을 생각하는 순간 옥영 은 부르르 전신에 경련을 느꼈다.
『당신은 영림을 또 만나시겠어요?』
『응?』
석운은 얼른 옥영을 바라보며
『아니, 안만나겠오.』
그러나 이것은 자신 없는 대답임을 석운은 자각하고 있었다.
『그럼 영림과의 관계는 일시적이었나요? 그렇지 않으면 진정으로……?』
『아, 옥영이!』
석운은 괴로와 옥영의 두 손을 꽉 부여잡으며
『괴롭소. 괴로워 견딜 수가 없오.』
진심으로 괴로와 하는 남편의 그 한 마디를 들은 순간 옥영의 눈에서는 차 차 눈물이 가시기 시작하였다.
옥영은 남편의 손아귀에서 두 손길을 가만히 빼며
『알았어요! 이제 다 알았어요. 그렇지만, 하늘이 무너질 것을 걱정 안하 고 사람들이 살듯이…… 당신을 하늘처럼 믿고 살아 온 제 슬픔이 너무도 크달 뿐이예요. 세상을 몰랐어요. 온실의 꽃처럼 세상을 모르고 살아 온 제 평온했던 삶의 댓간가 봐요.』
『여보, 나도, 나도 무척 노력을 했었오.』
『잘 알고 있어요. 결국 당신이 지닌 성실성이 저로 하여금 이날 이때까지 온실의 꽃으로 만들어 준 줄을 지금에 와서야 알겠어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세상의 남편이라는 것을, 좀 더 허수로이 여기면서 살아 왔었던들 오늘날 이처럼도 제 허무는 크지 않았을 거예요.』
『옥영이, 나는 마침내 나쁜 놈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무척 노력을 했었 오. 영림을 만난후부터. 그것이 벌써 몇달 전 이야기지만, 어떡할 수 없이 마음의 동요를 자꾸만 느끼고, 그후 몇 차례 만나본 이후로 야쓰데 화분을 손수 사 갖고 와서 나 자신과 싸워왔었오. 그러나 나의 온갖 노력은 이미 모두가 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오.』
석운은 또 서글퍼졌다.
『그런 줄도 잘 알아요. 당신의 선량한 인품을 내가 잘 알아요.』
『어젯밤, 통행금지 시간까지도 어떻게 해서 시간에 대올려고 애를 써 봤 지만…… 모두가 다 틀려 먹고 말았오. 아니, 변명은 이미 필요가 없지.』
『잘 알았어요. 일시적인 방탕보다도 차라리 진실한 연애를 하는 편을 당 신의 인격을 위하고 또 제 인격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농담삼아 그런 말을 한 적도 과거에는 있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관념적 이야기였어요. 당 신을 하늘처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 꿈같은 소리였어요.』
『아아, 옥영이 내가 이처럼 당신을 소중히 하고 있으면서도 왜 딴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가를 나 자신도 대체 알 수가 없구려.』
『영림을 잊어버릴 수는 정말로 없겠어요?』
일시적인 외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옥영은 물었다.
『옥영이, 조금도 거짓 없이 솔직히 말하겠오. 나는 지금 옥영을 위해서라 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을 쾌히 바치겠지만, 그렇지만 그것은 할 수 있지 만 내 목숨이 붙어 있는 지금에 있어서 영림을 잊어릴 수는……』
『…………』
옥영은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옥영은 이미 아무런 발언도 대답도 할 필요가 없었고 기력도 없다.
『옥영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영림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마음은 전 혀 없오. 아, 아……』
석운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 쥐며
『이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허용될 수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신 의 노여움을 살말이지만 옥영과 영림을 나는 다 함께 갖고 싶을 뿐이요.』
모욕감을 느끼고 옥영은 가만히 몸을 일으켜 응접실을 나와서 안방으로 총 총히 걸어 들어갔다.
人間[인간] 姜石雲[강석운]
[편집]석운은 머리를 움켜 쥐고 오랫동안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일은 마침내 저질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나 사랑해 온 아내였더냐고, 나 하나만을 태 양처럼 믿고 살아 온 아내의 그 자그만 가슴 속에 내 스스로의 손으로 절망 과 비분의 씨를 뿌려 주고야만 자기 자신이 극악 무도한 악당처럼 저주스러 웠다.
『나는 확실히 악인이다.』
지나간 날 아내의 정조를 의심하고 북경루까지 쫓아가던 순간의 자기의 그 절박했던 심정을 불현듯 생각했다.
『그것과 꼭 같이 절박한 심정이 지금 아내의 그 자그만 가슴 속에서 부글 부글 끓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건만 아내는 지나간 날의 자기모양으로 격분의 정을 화산처럼 폭발시 키지는 않았다. 조용히 울고만 있는 아내!
그 조용한 원망과 눈물 속에서 한 사람의 여성인 김옥영은 기나긴 인류의 역사가 지녀온 뭇 아내의 운명을 지금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하였다.
약자로서의 그러한 비참한 운명을 아내 김옥영으로 하여금 되풀이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정 낙원설을 소리 높이 외치며 유혹의 물결이 굽이치는 이 거리를 조심성 있게 석운은 걸어 왔다.
그렇건만 석운에게는 마침내 고영림의 정열을 물리칠 기력이 없었다. 그것 이 인간 강석운이가 지니고 있는 성실의 한계였다.
고영림이가 조금만 더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여성이었던들 강석운의 과거가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한 젊음에의 동경만으로서는 오늘의 결과를 저질러 놓 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걸레 조각처럼 떨쳐 버리고 나선 고영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개 벌거벗은 생명의 벌렁거림 앞에서 강석운의 성실의 한계는 무너 지고 만 것이다.
어쨌든 석운은 지금 한 사람의 범죄자로서 아내 옥영이 앞에 임해 있는 것 이다. 과거의 인류의 역사가 남편들의 이러한 범죄를 어떻게 취급하여 왔는 가에 대한 소위 도덕적인 면에 있어서의 범죄 의식도 있었지마는 이른바 부 부라는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서 김옥영 대 강석운이라는 인격과 인격 앞에 서 느끼는 범죄의식이 좀 더 강하게 왔다.
남편이 아내를 모욕했다는 것이 아니고 강석운이가 김옥영을 모욕했다는 데서 출발한 양심의 가책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내 김옥영의 사고 방법이기도 하였다. 떠들지도 않고 발악도 않고 조용한 눈물 속에서 원망의 시선만을 보내온 옥영의 심정을 석운은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이다.
옥영은 지금 남편에게 침범을 당한 아내의 위치보다도 더 절실히 강석운이 라는 인간에게서 훼손당한 자기의 인격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을 강석운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석운과 옥영의 부부생활은 언 제든지 내외라는 사회적 위치로서 형식적으로 영위되어 오기보다도 먼저 애 정을 기초로 한 인격의 존중으로써 영위되어 왔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한 사람의 인격을 모욕해도 좋을 만한 자격이 내게는 있을 수 없 다! 그렇다. 이제라도 늦지는 않다. 아내의 인격을 구하기 위하여 이제라도 나는 영림을 잊어야만 한다.』
석운은 훌쩍 소파에서 일어나자 응접실 안을 미친 듯이 빙빙 돌았다.
『나는 이미 사람들에게 인간의 성실을 말할 자격을 상실한 인물이다. 누 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누가 내 글을 읽어 주랴. 내 자식들도 이미 이 아버지의 말을 비웃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나 작가적으로나 이미 모든 사람에게 밀려 나간 자기 자신의 비 참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영림을 잊고 옥영을 구하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영림에 비하여 옥영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엽 고 가치 있는가를 절실하게 느껴져 왔다.
석운이가 응접실을 나서서 옥영을 보고자 안방으로 들어가는데 현관 문이 열리면서 고영해가 들어섰다.
『아까 오셨던 분이 또 오셨읍니다. 고영해라고 하시는 분이……』
식모가 안방으로 들어가서 내객을 통했을 때 석운은 아랫목에 이불을 쓰고 누워 있는 옥영의 앞에 우뚝 서 있다가 시선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식모의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무엇을 결심한 듯 싶은 침착한 어조 로 말했다.
『응접실로 인도해요.』
석운은 일어선 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안방을 나서 서 응접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고영해는 모자를 벗어 걸고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키며 인 사를 했다.
『강선생, 실례하겠읍니다.』
석운도 마주 걸어가서 악수를 하며,
『어젯밤 파티는 대단한 성황이어서 거듭 축하합니다. 앉으시지요.』
『고맙습니다.』
탁자를 끼고 둘이는 마주 앉았다.
『바쁘신데 누차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침에도 오셨더라는 말은 이미 듣고 있읍니다. 제가 없어 서 도리어 실례가 되었읍니다.』
서로가 주고 받은 이 예의적인 엄격한 대화에서 두 신사는 제각기 상대편 에서 그 어떤 적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읍니다.』
『무슨 말이든지 귀담아 듣겠읍니다.』
학식으로 보나 인생의 경력으로 보나 제각기 자기다운 깊이와 무게를 두 신사는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이 혹시 강선생의 인격을 훼손할는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어디 까지나 이 고영해의 한낱 추측이라는 점을 밝혀 두고 싶읍니다.』
『어서 말씀하시요.』
『영림은 어젯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읍니다. 제 추측으로서는 강선생이 혹 시 영림의 처소를 알고 계시지나 않는가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고영해는 석운의 얼굴을 쏘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석운은 물끄러미 마주 바라보면서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영해는 다시금 물어 왔다.
『십중 팔구 제 추측이 맞을 것만 같이 생각하고 왔읍니다.』
『잘 오셨읍니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고전무의 추측이 들어 맞았읍니다.』
강석운은 명백한 어조로 고영해의 추측을 인정하였다.
『아, 역시.』
고영해는 그 너무나 명백한 수긍에 가벼운 압력을 느끼며,
『한시 바삐 영림을 집으로 데리고 가야겠읍니다. 영림이가 지금 어디 있 는지 처소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한시 바삐 영림양을 데리고 가고 싶어하는 고전무의 심정은 잘 알겠읍니 다. 그러나,』
『………?』
『영림양은 죽어도 집에는 안 들어가겠다고 말했읍니다.』
『안 들어오겠다고요?』
고영해는 안색이 홱 변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선생은 영림이가 안 돌아오겠다는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는데요.』
『알고 있읍니다.』
『강선생 때문입니까?』
『그것은 잘 모르겠읍니다. 다만 내가 명확히 알고 있는 이유로서는 영림 양은 이렇게 말했읍니다. ── 칸나 고영림의 인생을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요리하고 마음대로 처리하려는 그러한 이리 떼 속으로는 죽어도 안 들어가 겠다고 말했읍니다.』
『이리 떼라고요?』
고영해의 입 언저리가 쫑긋쫑긋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리 떼라는 말에 고영해는 모욕감을 전신에 느꼈으나 영림의 말을 이처럼 자신 있는 태도로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강석운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고영 해는 또 한 번 거세인 압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석운도 녹녹지 않지마는 그러나 고영해도 결코 녹녹한 인물은 아니었다.
『좋습니다. 이리 떼라도 좋고 호랑이 떼라도 무방하지요. 철 없는 아이들 은 일쑤 잘 부모님의 사랑의 말들을 쓰다고만 하니까요.』
『모르기는 하겠읍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영림양은 철 없는 아이가 아니었 을 따름입니다.』
『그럴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그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다만 강선생은 우리들에게 영림의 처소를 알려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내게는 그런 의무가 없읍니다.』
『없다고요?』
『없읍니다. 영림양의 의사를 나는 존중해야만 하니까요.』
『음………』
고영해는 분노와 절망을 한꺼번에 느끼면서,
『나이 찬 양반이 어린애를 유혹해 내고도 하등의 양심적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요?』
석운은 순간 모욕감을 느꼈으나,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일단 그런 종류의 가책도 느껴야만 하겠지요. 그리 고 느끼고도 있읍니다.』
『그렇다면 영림의 처소를 빨리 알려 주시요.』
『단지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이 찬 양반이 어린애를 유혹했다는 한 마디입니다. 고전무의 경우에서는 그러한 경험이 하나의 상식적 진실로 서 통용될는지는 모르지만 이 강석운의 진실은 그러한 상식지대(常識地帶) 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말이요.』
『무슨 뜻이요? 똑똑히 말을 하시요.』
마침내 고영해는 언성을 높였다.
『나이 찬 사람도 어린 사람에게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어린 사람도 나이 찬 사람에게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요.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고 전무의 인생 철학으로서는 곧 남자들의 유혹을 연상하는 것 같지만, 그리고 그런 종류의 유혹으로써 맺어지는 남녀 관계에 참다운 애정은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유혹을 하고 유혹을 받고 정복을 하고 정복을 당하고 하는 그런 종 류의 남녀 관계는 비록 고전무의 영역일는지는 몰라도 강석운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소.』
『뭐라고요? 당신이 도리어 나를 힐난하는 거요?』
고영해는 분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힐난하는 것이 아니요. 남녀의 참다운 애정이란 유혹없이 맺어질 수 있 는 생명과 생명의 불가항력적 상태를 말하는 거요. 행동이 아니요. 행동 이 전이기 때문에 유혹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요.』
『그러면 영림과 당신의 관계도 그렇다는 말이요?』
『그렇소.』
석운은 단호한 대답을 했다.
『당신의 처자는 어떡할 테요?』
『알 수 없오. 나는 다만 현재에 있어서 나의 심정을 피력했을 뿐이요.』
『당신은 한 사람의 지성인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할 셈이요?』
『뭘 가리켜 지성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이미 나는 알 수 없게 되었오.』
『당신에게는 사회적인 명예가 있오.』
『걸레조각 같은 명예일 것이요.』
이상하게도 대결 의식이 자꾸만 머리를 들었다.
『나는 당신을 사회에서 매장할 테요.』
『걸레 조각이 없어진다면 도리어 시원하겠지요.』
『나 어린 처녀를 유괴해 내다가 강금한 부덕한을 관헌에 고발할 테요.』
『나는 지금 나 스스로의 의사로서는 촌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요. 누가 와서 건드려 주면 오히려 다행한 일이지요.』
『에이, 이 썩어빠진 자식!』
고영해는 벌떡 일어서며 맞은 편에 앉은 석운의 멱살을 잡고 귀퉁이를 내 갈겼다.
응접실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식모는 아닐테고 옥영임에 틀림 없다.
석운은 가만히 앉은 그대로의 자세로 고영해의 매를 얻어 맞았다.
그러나 다시금 들리는 고영해의 손길을 석운은 막으며 같이 우뚝 섰다.
『그만 하고 돌아가시요. 그만 했으면 고전무의 정의감과 울분심은 무마가 됐을 거요.』
그러면서 석운은 멱살을 잡힌 고영해의 손목을 힘있게 잡아 쥐며,
『일 대 일이라면 고전무의 젊음쯤은 쾌히 감당할 거요. 그러나 이 자리가 내 가정이요.』
『에이, 밸 빠진 사람이!』
고영해는 탁 멱살을 놓으며,
『오입을 하려거든 좀 재미 있게 못하고, 비린내 나는 계집애 하나 때문에 명예를 버려? 가정을 버려?』
고영해의 인생 철학으로 보면 실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충고는 감사하오. 그러나 재치 있는 오입을 나는 당초부터 원하지 않았 오.』
『그럼 당초부터 손을 대지 말 것이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구.』
『불가항력이었오.』
『당신 같은 인간이 글을 쓰니까 사회는 파괴가 되는 거요.』
『그럴까요?』
『나이 어린 여성들을 마구 유혹해 내다가는 몸을 망쳐 주고 일생을 불행 하게 만들어 주는 당신 같은 인간이 글을 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가 없오.』
『잘 알았오. 그 점에 대해서는 나 역시 생각하는 바가 있기에 이제부터는 고전무의 충고를 존중하겠오.』
『그런 의미에서 이제라도 결코 늦지 않으니까 영림을 돌려보내 주시오.
당신과의 관계는 절대 비밀히 하고 말이요.』
『이제 만나거든 그렇게 충고하지요. 그러나 돌아가고 안 돌아가는 것은 영림양의 자유겠지요.』
『음, 어디까지나……』
고영해는 훌쩍 모자를 집어 쓰며,
『알겠오. 당신이 어디까지나 그러한 태도로 나온다면 나는 나대로 비상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어.』
증오의 눈초리가 석운을 무섭게 감았다.
『고전무, 잘 알았오. 비상수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주위에서 지나치게 덤비면 사태는 더욱 나빠질 가능성 밖에 없오. 영림양의 성품도 그렇고 나 역시도 그렇소.』
『음……』
『한 마디 더 말해 둘 것은 이 사건을 해결 짓는 단 하나의 방도는 오직 시간의 흐름 밖에 없다는 것이요.』
그리고는 고영해의 손을 잡아 쥐며,
『시간의 여유를 주시요. 내 나이 이미 사십을 넘었으니 시간은 나에게 무 슨 분별을 가져다 줄 것이요.』
고영해는 그 말에 갑자기 언성을 부드럽게 가지며,
『강선생, 이제 그 말을 선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렵니다.
강선생의 분별만 믿고 가겠읍니다.』
고영해는 이제 어쩌는 수 없이 강석운의 그 한마디를 붙잡고 늘어질 수 밖 에 없었다.
『나 역시 나에게 분별이 있어지기를 고전무와 똑 같은 심정에서 원하고 있읍니다.』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석운이가 고영해를 전송하고자 응접실을 걸어 나오고 있을 때 옥영은 이미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총총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편과 고영해의 언쟁에서 옥영은 이미 영림에 대한 남편의 마음의 풍경을 알기에 이상 더 알아야만 할 아무런 것도 이제는 없었다.
안방으로 들어와서 옥영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버렸다. 혜숙은 식모가 데리고 나가고 없었다. 이윽고 발자국 소리가 들리며 남편이 들어왔다.
『여보.』
석운은 걸어가서 옥영의 머리맡에 조용히 꿇어 앉았다.
옥영은 대답을 않고 아랫목 벽을 향하여 가만히 돌아 누우며 이불 깃으로 얼굴 절반을 가렸다.
『옥영이 용서해 줘요.』
석운의 머리가 저절로 숙어졌다.
『내가 당신을 이처럼 슬프게 할 줄은 정말 나 자신도 몰랐던 일인데 ……』
옷장, 머릿장, 경대, 시계, 꽃병 등 등, 어제의 평온이 깃들여 있던 그것 들은 이미 아니었다. 그 여러 가지 가구들이 이방인(異邦人)처럼 서먹서먹 한 시선으로 일제히 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울어진 태양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안에 어둠은 밤처럼 충만해 있었고 불 행한 감정은 해무(海霧)인양 자욱했다.
『아무 말 마시고 어서 올라가세요. 이 순간의 내 감정을 폭발시키면 추태 밖에 발악 밖에 더 나올 것이 없으니까요. 그런 추태를 당신에게 보이고 싶 지 않아요. 그보다도 나 자신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아요. 그저 아무런 말도 마시고 어서 올라가세요.』
한참만에 옥영은 조용한 대답을 그렇게 했다.
석운은 또 오랫동안 잠자코 있었다. 옥영도 잠자코 있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 속에서 사발시계의 초침만이 생물처럼 똑똑똑 움직이고 있었다.
옥영은 아무 말도 하기 싫었고 할 필요도 또한 없었다. 그래서 어서 어서 남편이 이 숨막히는 방 안에서 나가 주기를 골똘히 바랐다. 그러나 남편은 좀처럼 머리맡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 시간 동안이나 그러고 있는 동안에 석운은 불현듯 영림을 생각했다. 잠 깐 다녀 온다고 호텔 일실에 혼자 남겨두고 온 영림이었다.
석운은 차차 초조해졌다. 그러한 심정으로 또 얼맛동안의 시간을 흘려보내 고 있었다.
네 시가 되었을 때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앞 뜰에서 났다.
여느 때 같으면 안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어머니에게 과자를 타 먹던 도선이 가 슬며시 건넌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혜숙을 데리고 나간 식모가 도선이를 안방으로 들여보낼 리가 없었다.
『여보, 내 잠깐만 나갔다 올께.』
영림을 만나야만 했다. 영림을 호텔에다 언제까지나 처박아 둘 수는 없었 다. 고영해가 찾아 왔던 이야기를 하고 어쨌든 영림을 집으로 돌려 보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래도 옥영은 대답이 없다.
『잠깐만 나갔다 올께.』
『기어코 나가셔야겠어요?』
『영림을 집으로 돌려 보내고 오리다.』
『그럼 아까 당신이 영림의 오빠한테 이야기 한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과 연 영림을 돌려 보내고 올 수가 있을 것 같으세요?』
『…………』
석운은 대답을 못하고 한숨을 짓다가,
『옥영이, 어쨌든 내 돌려 보내고 올 테니까.』
힘 없는 대답이었다.
옥영은 다시 한 번 절망을 느꼈다.
그래도 옥영은 밤을 새우고 들어온 남편이 오늘로 되돌아 서서 영림의 곁 으로 달려갈 줄은 몰랐다.
『헤설픈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만한 사람이…… 내 이 허무한 감정을 너무 도 잘 알 사람이 그래도 기어코 나가야만 하겠다는데 지금 내가 억지로 붙 잡아 보았댔자 가치 없는 행동이니까 좋으실 대로 어서 나가세요.』
그러나 말과는 정 반대의 감정이 옥영을 무섭게 습격해 왔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있어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면 영림을 만나러 나가려는 당신의 뒷덜미를 두 손으로 긁어 잡고 내동댕이질을 하고도 싶지 만, 그렇지만 그러한 내 꼬락서니가 가엾어서 못하겠어요.』
옥영은 부르르 격렬한 몸서림을 느끼며,
『다만 나는 지금 당신을 미워할 수 있는 감정이 어서 어서 커져서 내 마 음의 키를 돌릴 수 있을 때가 오기를 바랄 뿐이예요. 그러면 다소의 평온이 라도 얻을 수가 있을 것 같애요.』
『옥영이!』
석운은 후딱 손을 뻗쳐 옥영의 얼굴에서 이불을 반만큼 잡아 젖히며 손길 을 더듬어 잡았다.
그러나 옥영은 잡힌 손길로 남편의 손을 살그머니 밀어 놓으며,
『어서 나가세요.』
차가운 한 마디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이불을 뒤집어 썼다.
석운은 일어서며,
『내 꼭 영림을 보내고 올께!』
아까와는 달리 힘찬 한 마디가 석운의 입을 튀어 나왔다.
아까 고영해에게도 말한 것처럼 사십대의 자기의 분별이 이 순간에 임하여 절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석운은 방을 나서자 모자를 내려쓰고 앞 뜰로 내려서는데 건넌방 문이 홱 열리며,
『아버지, 어디 가세요?』
도선이의 기가 찬 목소리가 뒷덜미에서 났다. 열 한살의 어린 신경이지마 는 이미 무엇인가 재미 없게 되어가고 있는 불안한 가정의 분위기를 눈치 채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 도선이냐?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오마.』
『엄마는 어디 아프세요?』
『응, 어서 들어가서 엄마한테 과자를 달래 먹으렴.』
『아니예요, 안 먹어도 괜찮아요.』
안 먹어도 괜찮다는 도선의 어른다운 표정에서 석운은 성질을 달리하는 또 하나의 범죄 의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거리로 나가서 빵 사 줄까?』
『아니요.』
도선은 그러면서 아버지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 것이다.
『도선이가 갑자기 어른이 됐는 걸.』
『오늘 밤도 안 들어오세요?』
『왜 안 들어와? 이제 곧 들어올께.』
석운은 성큼 성큼 정문을 향하여 걸어 나갔다.
도선은 얼른 신을 신고 아버지의 뒤를 살금 살금 따라 나섰다. 골목 어귀 를 빠져 나가 혜화동 로타리까지 도선은 따라가 보았으나 택시를 잡아 타는 아버지를 그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택시를 타고 무심히 석운은 창 밖을 내다보다가,
『아, 도선이가 아닌가!』
뻐스 정류장 전선대 옆에서 도선은 이편을 말끔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뭉클하고 마음이 아팠다. 이미 아이들에게도 신임을 못 받는 아버지가 석 운은 마침내 되고 만 것이다.
『어떡하든 영림을 돌려 보내야지.』
그러나 집을 빠져 나오는 골목 어귀에서 부터 안경을 쓴 작달만한 청년이 뒤를 밟다가 역시 택시를 잡아 타고 자기의 차를 따르고 있는 사실을 석운 은 전연 모르고 있었다.
창 밖에 거리가 흘렀다. 허황한 꿈결처럼 울긋불긋 간판이 흘렀다.
전선대 뒤에 우두커니 선 도선이의 얼굴, 이불을 쓰고 조용한 분노에 몸부 림치는 옥영의 모습, 오늘 하주 원고를 못 썼기 때문에 모레부터는 중단될 수 밖에 없는 「유혹의 강」……
이러한 뭇 극적인 장면과 극적인 심경을 석운은 지금까지 소설 속에서만 취급해 왔고 책상 앞에서만 공상해 왔었다.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어떠한 참 담한 심경에도 작가 강석운은 한 사람의 방관자로서의 착각적 흥분과 희열 을 맛보아 왔다.
그러한 강석운이가 마침내 현실적인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석운은 작가적인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가져지기도 했다. 그러나 톱니바퀴처럼 연달아 부닥쳐 오는 현실의 물결 앞에 그러한 관조적(觀照的)인 마음의 여유는 물거품처럼 명멸하여 밀려 나가기만 했다.
『내가 마침내 주인공이 되다니?』
「미이라」잡이가 「미이라」가 된 셈이라고, 지나간 날 이층 서재에서 이 런 종류의 극적 심경을 묘사하여 아내와 더불어 창작적 흥분을 나누던 그러 한 평온은 이미 갔다.
석운의 상념은 이윽고 깨어지고 눈 앞에 현실이 무자비하게 왔다. 영림이 가 우두커니 기다리고 있는 명수장 호텔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차에서 내리는데 영림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초조하게 날아 내려왔다.
이층 창 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림이가 상반신을 내밀며 손을 흔들고 있 었다.
석운도 손 하나를 흔들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층계를 당황히 뛰어 올 라갔다. 방으로 들어서기가 바쁘게,
『선생님!』
영림은 달려와 안기며 석운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기다렸어?』
영림은 고개만 끄떡끄떡 하다가,
『다섯 시간 하고 사십 이분 동안……』
『그렇게 오래 됐나?』
『그러엄.』
『이것 저것 일을 좀 치르고 오느라고……』
어젯밤, 홀에서 입었던 소매 없는 브라우스와 후레아스커트를 영림은 입고 있었다.
『그동안 뭘 하고 있었어?』
『선생님 생각만요.』
석운은 볼을 비비며 힘찬 포옹을 했다. 입술도 오고 갔다.
『기달려지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확실히 행복한 일인가 봐요.』
『…………』
『기다린다는 건 괴로운 즐거움이죠.』
『즐거운 괴로움일는지 모르지.』
영림은 불현듯 시선을 들며,
『선생님, 괴로우세요?』
『아니』
석운은 명랑한 웃음을 웃어 보이며,
『영림, 점심은 먹었어?』
『아뇨』
『왜 청해 먹지.』
『혼자 먹기가 아까웠어요.』
석운은 물끄러미 영림을 들여다보며 자기는 지금 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 고 있는 악마와도 같이 생각되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다고 자기에게 향하는 영림의 정이 더 짙어지고 더 커지기 전에 이 정도로서 막을 수만 있다면 막 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오빠가 집으로 찾아 왔었어.』
『오빠가요?』
『집에서는 영림이의 걱정을 굉장히들 하고 있는데,』
『그래 오빠가 뭐라는 거예요?』
『영림이 때문에 집안에서는 초상난 집처럼 밤을 꼬박 새우고, 날더러 영 림이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는거야.』
『그래 알려 주셨어요?』
『알려 줄 수 밖에……』
『옛?』
영림의 표정이 홱 긴장을 하며 석운의 얼굴을 무섭게 쏘아 보다가,
『알겠어요. 선생님 마음 이제 다 알았어요.』
영림은 시계를 언뜻 들여다보며 침대로 뛰어가서 양복 저고리를 재빨리 입 었다. 경대 위에 널려져 있는 화장 도구와 함께 핸드백을 옷 보따리에 싸 들고,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면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선생님은 편하실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집엔 안 들어가요.』
그리고 나자 영림은 총총히 문을 향하여 뛰어 나갔다.
『아, 영림이!』
석운은 달려가서 영림을 막았다.
『어딜 가는 거야?』
『어물어물하다가 오빠한테 붙들려 가기는 싫어요. 완력으로 끌어 갈테니 누가 봄 얌생이꾼 같잖겠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석운은 영림을 끌고 가서 침대에 억지로 앉히었다. 영림은 다시 벌떡 일어 서며,
『선생님도 오빠 편이군요. 저를 오빠의 손에 인계할 약속을 하고 오셨죠?
분명히 그러시죠?』
영림은 적이 흥분한 얼굴로 따져왔다.
『그런 게 아니야. 하여튼 좀 진정해요.』
『싫어요. 선생님의 그 어른다운 행동, 저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놓세 요.』
석운의 손을 홱 뿌리치고 영림은 다람쥐처럼 뛰어 나갔다.
『영림, 아니야. 거짓말을 했어. 영림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리 지 않았으니까.』
『속지 않아요. 그런 말로 저를 붙들어 두었다가 오빠가 오면 넘겨 줄 심 산이지만요. 나쁜 사람! 나쁜 선생님!』
영림은 석운을 탁 밀쳐 버리고 들창 가로 뛰어갔다.
『앗, 영림이!』
그러나 어젯밤처럼 들창을 넘어 나갈 수는 없었다. 이층의 높이를 영림은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다가,
『아, 저이는?』
석운의 뒤를 따라 온 안경 쓴 청년이 맞은 편 골목 어귀에서 이층을 열심 히 올려다보다가 홱 외면을 했다.
『저이는 홀 문지기,』
어젯밤 영림은 홀을 들어서면서 그 청년을 보았던 것이다.
『흥, 선생님도 상당하시군요. 오빠의 앞재비를 달고 오셨단는 말이죠?』
『아니야, 절대로 그런 건 아니지만……』
아까 석운이가 집으로 들어갈 때, 정문 앞에서 서성대던 바로 그 청년이었 다. 청년이 자기의 뒤를 따라온 것이 분명했고 호텔에 도착한 지가 벌써 이 십 분이나 되었으니 고영해에게 전화 연락을 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석운 도 청년을 어젯밤 홀에서 본 생각이 그제서야 불쑥났다.
『어쨌든 나는 나가요. 비겁한 선생님!』
『영림, 같이 가요.』
『싫어요. 저를 따라 와서 어디까지나 오빠에게 넘겨 줄 생각 아냐요?』
『아니다. 빨리 뒷문으로 빠져 나가자! 우물쭈물 하다가는 오빠가 달려올 테니……』
석운은 모자를 집어 쓰고 영림을 재촉하며 복도로 뛰쳐 나갔다. 층계를 허 겁지겁 내려가서 계산을 한 후에,
『이 호텔에 뒷문은 없나?』
『있읍니다.』
『빨리 그리로 좀 인도해 줘요.』
『이리 오십시요.』
보이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 옆으로 해서 우중충한 좁은 골목으로 두 사람은 나섰다.
『이리 와요.』
석운은 앞장을 서서 청년이 지키고 있는 앞길과는 반대로 뒷길로 빠져 나 갔다.
어쨌든 일단 호텔로 또 가야만 하였다. 차는 광화문 앞으로 해서 남대문 쪽으로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운전수의 인도로 둘이는 남대문 밖 태양호텔 로 갔다.
어쩐지 사람의 눈을 피하고 싶어 구석진 방 하나를 얻어 들었다. 명수장호 텔과 어슷비슷한 장치를 한 방이었다. 식당에는 나가기 싫어 저녁 식사는 방에서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태반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밤이 되었다. 석운은 혼자서 위스키만 연방 들이키고 있었고 영림은 창 가 에 기대고 서서 어두운 밤 하늘만 내다보고 있었다.
가까운 정거장에서 기적소리가 가끔 들려왔다. 어쩐지 처량만 했다. 그 처 량한 기적소리를 들을 때마다 영림은 먼 이국 땅을 후딱후딱 생각했다. 인 간의 윤리와 사회의 질서에서 영림은 어서 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석운의 설명으로 자기의 처소를 오빠에게 알리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고 오 빠가 홀 청년을 선생님의 집 근처에 파수시켜 놓은 사실도 이제는 명백했 다.
『선생님.』
창 밖을 내다보며 영림은 불렀다.
『응?』
의자에 걸터앉아서 잔을 들던 석운은 시선을 들었다.
『술을 안 잡수심 괴로워서 못 견디시죠?』
『누가 그런 말을 했어?』
석운은 표정을 크게 썼다.
『저도 한 잔 먹을 테예요.』
영림은 걸어와 마주 앉았다.
『영림도 술을 안 먹으면 괴로운가 본데.』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똑 같은 제스추어로 영림도 표정이 컸다. 영림은 얼굴을 찡그리며 한 잔을 들이키고 나서,
『이렇게 쓴 걸 뭣 때문에 잡수세요?』
『영림은 뭣 때문에 들었나?』
『혼자서 선생님이 쓸쓸하실까 봐서……』
석운은 웃었다.
『선생님의 가정을 생각함 저도 안됐지만…… 그렇게도 선생님은 저를 돌 려 보내고 싶으세요?』
『아니, 그렇지만……』
잠깐만 다녀온다던 석운은 벌써 아홉시가 넘었건만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 했다. 옥영과 도선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겹쳐지면서 어른거렸다.
『초상난 집처럼 떠들어 댈 제 집이나 초상난 집처럼 조용할 선생님 댁이 나 다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 거예요.』
위치는 같을런지 몰라도 비극의 성질은 다를 것이라고 석운은 생각한다.
『그런 걸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선생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마찬가지 이야기야. 내가 영림의 옆을 떠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 고…… 어쨌든 내 잠깐만 다녀 올께.』
『어딜요……?』
『집에 말이야.』
영림은 의외라는 듯이 석운을 말끔히 바라보다가,
『다녀 오세요. 어서 다녀 오세요!』
영림은 냉큼 몸을 일으켰다. 석운의 모자를 손주 집어 주며,
『다녀 오실 필요는 없으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
영림의 입가에 조소의 빛이 가볍게 떠돌고 있었다.
『돌아가실렴 돌아가셔도 좋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드려 둘 것이 있어 요.』
영림은 모자를 매만지며,
『선생님을 사모하는 제 마음이 어제와 오늘 하룻밤 사이에 어쩐지 변해진 것 같아요. 어제까지도 저는 허심탄회에 가깝도록 선생님을 돌려 보낼 수가 있었는데…… 오늘은,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는 선생님을 댁으로 돌려 보내 기가 이처럼 애달프고 이처럼 알뜰 살뜰히 싫어질 줄은 몰랐어요.』
갑자기 영림은 울먹울먹 하며,
『그렇지만 기어코 돌아가신다면 하는 수 없죠.…… 그러나 영영 다시는 저를 찾지 마실 생각으로 돌아가세요!』
『영림은 무슨 말을……?』
석운은 일어서서 영림의 옆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을 유혹한 제가 나쁜 줄 다 알지만…… 그러나 저로서는 그 길 밖 에 없었어요.』
『내가 유혹을 느낀 것이지, 영림이가 유혹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 아.』
『그건 선생님의 겸손이 아니면 자존심을 붙들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지 만…… 선생님 앞에 제가 나타나지만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괴로움을 선생 님에게 드리지 않아도 됐을텐데……』
영림은 혜련 올케를 생각했다. 끝끝내 돌구름 앞에 나타나지 않는 한혜련 과 자기를 비교해서 생각하였다. 어떤 것이 참된 사랑의 자세인지를 골똘히 알고 싶었으나 거기 대한 정확한 대답을 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인간 위에 신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오빠한테서 들어 왔어요. 그러한 제가 이 순간에 와서는 신을 의심하게 되었어요. 신의 섭리로 돌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제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영림의 어깨 위에 손 하나를 얹고 석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는 좀 더 많이 정신적으로 선생님을 모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제 옆을 떠나고 싶어 하실 때는 언제든지 수월하게 돌려 보내 드릴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것이……』
영림은 들고 있는 모자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며 석운의 품 속에 가만히 머리를묻 었다.
『그게 아니었어요. 돌려 보내기가 이처럼 싫어질 줄은 통 몰랐어요. 신의 섭리를 따르기에는 너무도 다급한 심정…… 결국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평범한 애정, 속된 사랑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영림, 알겠어! 잘 알았어!』
영림의 어깨를 석운은 힘차게 포옹했다.
『영림의 타락일런지 모르지만…… 그 타락한 애정 속에서 영림의 한 목숨 이 연기처럼 없어져 주었음 좋겠어요!』
『영림, 이제 안 갈께 집에 안 가도 괜찮아!』
『하룻밤 사이에 제 심정이 이처럼 돌변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머나먼 별이라도 바라보는 것처럼 인간의 애정을 소꼽장난이나 하듯이 관념적으로 가지고 놀았지요. 인간의 애정이 이렇게도 속되고 다급한 것인 줄을 알았었 더라면……』
뚜우, 뚜우, 뚜우……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소꼽장난처럼 마음대로 돼 주지 않는 애정의 정체를 기적 소리에 싣고……
『머언 데로…… 머언 데로 가 버리고 싶어요.』
『음, 머언 데로……』
『서울은 이제 싫어졌어요. 숨막힐 것 같은 이 서울의 공기…… 인간의 질 서가 따라오지 못할 심산 유곡이 그리워졌어요!』
뚜우, 뚜우, 뚜우……
금방이라도 뛰어가서 무작정 영림은 기차에 오르고 싶다.
失樂園[실락원]
[편집]하룻밤이 또 새었다.
영림을 돌려 보내고 곧 돌아 온다던 남편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정녕 않았 기에 분노와 굴욕을 가까스로 참으며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 었던 옥영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종시 돌아오지를 않았다. 어머니 옆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어두운 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며 옥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아버지!』
이튿날 아침 소녀다운 의분심을 가지고 맏딸 경숙은 아버지를 나무랐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있던 경숙이기에 아버지를 나무라는 감정이 그만큼 더 절실했고 컸다.
『자동차 사고가 났는지도 모르지 않니?』
도선은 아직도 어리벙벙했다.
『그래, 어저께 아버지는 택시를 타고 나갔어. 내가 따라가서 봤다!』
도선이도 도현이와 마찬가지로 교통 사고를 걱정하고 있었다.
『모름 가만히나 있어!』
경숙이가 빽 소리를 치는데,
『빨리들 학교에나 가거라.』
옥영이의 조용한 한 마디가 떨어지자 세 아이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면서 학교에 갔다. 밀물이 찐 듯이 집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혜숙은 옥영이 옆 에서,
『엄마, 아빠는 왜 자꾸만 안 오나?』
『아빠는 무슨 일이 생겼단다. 오늘은 돌아오실 테지.』
그러나 옥영은 이미 남편이 돌아온댔자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죽어도 싫 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어디론가 휙 없어져 버리고만 싶다.
어젯밤까지는 그래도 남편에 대한 애정의 끄나불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 었다. 그러나 오늘은 이미 그러한 끄나불은 완전히 끊기어 버린 것이라고, 인제는 다만 자기의 이 상처받은 감정을 처리할 방도만이 남아 있음을 옥영 은 명백히 깨달았다.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는 것만이 자기의 감정을 신속 히 처리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이었다.
『혜숙은 아빠가 제일 좋지?』
『엄마도 좋아.』
『아빠는 과자를 늘상 사 주지 않아?』
『응, 그래 아빠가 좋아.』
『정능 할머니도 좋지?』
『응, 좋지.』
『아빠하고 할머니만 있으면 엄마는 없어도 좋지……?』
『싫어이!』
『아니, 오래 오래 말고, 며칠 동안만 말이야.』
『몇 밤만……?』
『응, 세 밤…… 아니, 다섯 밤만……』
『다섯 밤……? 그럼 난 할머니하고 같이 잘 테야.』
『아빠는 맛있는 과자를 사다 주시고, 할머니하고 같이 자고…… 혜숙인 참 좋겠네요!』
『아이, 좋아!』
조개비 같은 손으로 혜숙은 손뼉을 쳤다.
그러는데 신문사 사람이 찾아왔다고 식모가 들어왔다.
『응접실로 모셔요.』
이윽고 옥영은 흐트러진 머리를 간단히 매만지고 응접실로 나왔다. K신문 사 문화부 기자 송찬(宋燦)이었다. 어제 저녁 무렵, 남편이 나간 후에도 송 찬은 「유혹의 강」의 원고를 가지러 왔었던 것이다.
『식모 아주머니에게서 들었는데 선생님이 어젯밤도 안 돌아오셨다고요?』
걱정스런 표정을 송찬은 지었다.
『안 돌아오셨어요.』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일은 통 없으신 선생님인데……』
옥영은 잠자코 있었다.
『오늘도 원고가 못 나가면 내일은 끊기는데요.』
그때 또 현관 문이 열리며 남편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영해의 목소리 였다. 모르는체하고 내버려 두었더니 식모가 들어와서,
『어저께 오셨던 분이 또 오셨읍니다.』
『이리로 들어오십사고 해요.』
『사모님, 그럼 저는……』
송기자가 자리를 사양하려고 하는데,
『괜찮아요. 송선생님만은 어차피 아셔야 하실 테니까요.』
송찬은 그만큼 강석운 내외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다.
고영해는 혼자가 아니었다. 고영해의 뒤로 영림의 어머니와 안경을 쓴 우 락부락한 박청년이 따라 들어왔다.
박청년은 소파로 가서 송찬의 옆에 앉았고 고영해 모자는 옥영이와 탁자를 끼고 마주 앉았다.
『제 어머닙니다.』
고영해는 옥영에게 어머니를 소개하였다.
『네, 수고로이 오셨읍니다.』
옥영은 어수선한 머리에 손질을 하고 나서,
『찾아오신 용건은 말씀 안하셔도 알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안 들 어오셨읍니다.』
기선을 제하는 의미에서 옥영은 제가 먼저 발언을 하였다.
『실은 어제 이 박군을 이 근처에 파수시켜 놨더랬읍니다. 그래서 강선생 의 뒤를 밟아 다동에 있는 명수장호텔까지 무사히 따라가서 저한테 전화 연 락을 해 놓고 호텔 앞에서 기다렸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를 채고 제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두 사람은 호텔 뒷문으로 빠져 나가고 없었읍니다.』
옥영은 조금도 떠들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조용한 대답을 했다.
『소식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도 걱정이 되시겠지만 저희들로서는 어쩌는 도리가 없어서 강선생이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작정으로 왔읍니다.』
『좋도록 하세요.』
옥영은 여전히 태연한 대답을 했다.
『어쩌면 이처럼도 얌전하고 똑똑한 부인을 두고…… 참 세상이란 알 수가 없구려!』
영림의 어머니는 자기와 입장이 비슷한 데서 오는 동정의 염을 문득 느끼 며,
『올 때는 무슨 투정이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했는데…… 생각하면 애 기 어머니야 뭐가 나쁠라구……?』
옥영은 잠자코 있었다.
『애기 아범도 아범이지, 이처럼 예쁘고 똑똑한 사람을 두고 글쎄…… 영 림이 같은 어린애가 글쎄 뭐가 좋길래 이 지경이유?』
어머니는 가만히 옥영의 손등을 쓸어보며,
『딸 하나 못 쓰게 한 생각을 하면 그저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지 만…… 애기 어멈더러 이런 말을 하면 무엇하리, 애기는 몇이나 되우?』
옥영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옥영은 지금 그 누구에게도 동정을 받고 싶지 가 않았다. 동정은 모욕을 의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덧 되시오?』
옥영은 귀찮아서 고개를 끄덕거려 보였더니,
『원 저런 변이…… 어쩌자구들 그러는지 글쎄 알 수가 있어야지. 남자들 은 모두들 바람을 피우고 보니 이런 딱한 노릇이 어디 있노……? 마음 상하 는 일이 웬만하겠오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 든든히 먹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라도…… 이제 애기 아범도 쉬 돌아올 거라우. 오늘도 안 돌아오면 부득이 경찰에 수색원을 낼 테니까……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옥영은 이상 더 이 늙은이의 넋두리를 듣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냉큼 몸을 일으키며,
『나는 안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간단한 한 마디를 남겨 놓고 그 질식할 것 같은 응접실을 총총히 나섰다.
『사모님!』
송찬이 따라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도 모르겠어요, 그 쯤 알고 돌아가세요. 그렇지만 송선생, 선생님을 위해서 사건은 당분간 비밀히 해 주세요. 시일이 경과되면 어차피 세상이 알 일이지만……』
『사모님, 그 점은 염려 마시고…… 저도 선생님의 처소를 가급적 빨리 알 아 보겠읍니다.』
송찬이가 골목을 빠져 나와 혜화동 로타리로 걸어나가는데,
『아, 송군!』
달려오던 택시가 삐꺽 하고 멎으며 석운이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 선생님! 어찌 된 일입니까?』
『집에 들렸었나?』
『네, 지금 막……』
『집에 무슨 일은 없던가……?』
『사모님이 무진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 뿐인가요. 웬 사람 셋이 찾아 와서 선생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셋이라고……? 코 밑에 수염이 난 사람이겠지?』
『네, 그이와 그의 어머니와 또 안경을 쓴 청년과…… 안경 쓴 청년이 어 저께 선생님을 호텔에서 놓쳤다고……』
『집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럼요. 수염 난 작자가 사모님께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음, 알았어!』
『경찰에 수색원을 내겠다고요. 선생님, 어쨌든 들어가셔서 사모님을 안심 시켜 드려야하지 않겠읍니까?』
『음, 그러려고 달려오기는 했지만……』
석운의 표정이 칠면조처럼 연방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도 오늘 못 넘기면 내일은 끊어집니다.』
『알아, 알고 있어.』
석운의 표정이 갈피를 못 잡고 흐렸다 개었다 했다.
『어쨌든 송군, 올라 타게.』
『선생님, 그럼 댁에는 안 들르십니까?』
『들를 수가 없게 됐어.』
『그이들 때문에?』
『응, 운전수, 차를 돌려요.』
『네.』
골목으로 빽을 했다가 차는 다시 되돌아 섰다.
『송군이 안 타겠다면 그대로 갈 테야.』
『탑니다, 타겠읍니다.』
송찬은 하는 수 없이 올라 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주시요.』
『네, 네.』
차는 냅다 달렸다. 둘이는 부처님처럼 말이 없었다. 창경원과 원남동이 침 묵 속에서 날아갔다.
『선생님.』
『…………』
『집엘 안 들어가시면 어떡하십니까?』
『들어가면 그 사람들한테 붙들려.』
『그렇지만 서로 부닥쳐서 해결을 하셔야지, 언제까지나 숨어만 다니겠어 요?』
『그만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해결의 방도가 내게는 없다!』
『선생님, 어쩌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셨읍니까?』
강석운이라는 인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송찬으로서 도 옥영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나도 알 수 없어.』
『선생님, 약해지시면 안 되셔요. 사모님이 가엾으시지 않으세요. 선생님 이 그처럼 좋아하시고 존경까지 하신다던 사모님이신데……』
『고마워! 허지만 나는 지금 내 의사로써 나 자신을 통솔할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이야.』
『도선이랑 혜숙이랑도 생각하셔야지.』
『송군의 충고, 무진 고마우네. 아이들 생각도 하기는 하지만…… 생각 뿐 이야. 행동이 따르지 않는 걸.』
『실례지만 후에라도 무슨 도움이 될까 하고 묻습니다만…… 영림이란 어 떤 여잡니까?』
『학생인데……』
『아직 어리다면서요?』
『어리다면 어리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기도 하지.』
『지금 숙소는 어디시죠?』
『유도 신문에 걸릴 내가 아니야. 자아, 송군은 여기서 내려요. 스톱!』
돈화문 앞에서 차는 멎었다.
『그렇지만 선생님! 저한테 까지 숨기실 필요가 없지 않읍니까?』
『미안하다고 생각해. 소설은 당분간 중지네. 사로 돌아가서 적당히 전달 해 주게.』
『그렇게 되면 소설이 큰일 났읍니다.』
『소설보다 작가가 좀 더 큰일 났네 자아, 악수!』
차에서 내려서는 송찬의 손을 잡았다가 놓으며,
『운전수, 종로 삼가로 나가 줘요.』
『네 네.』
강석운의 택시가 저만큼 사라졌을 때, 송찬도 택시를 잡아 타고 석운의 차 를 따라갔다.
남대문 밖 태양호텔로 되돌아 온 석운으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듣고 난 영 림은 정말로 서울 거리가 시끄럽고 귀찮아졌다.
『어머니까지 출동했어요?』
『응.』
『그게 부모의 애정인지 모르지만…… 아이 지긋지긋해!』
영림은 침대 위에 번듯 나가 누우며,
『선생님.』
『응……?』
『머언 데로 가요.』
『머언 데로……』
석운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담배만 푹푹 피우고 있었다.
『선생님, 용기 없으시지……?』
머리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 영림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용기라고……?』
『머언 데로 갈 용기 말예요.』
『누가 없다고 그랬어……?』
『없을 것 같아서……』
『흥, 요것이 사람을 마구 놀려 먹는 걸!』
석운은 손을 뻗쳐 영림의 볼 하나를 꼬집어 주었다.
『용기 없으심 댁으로 아주 돌아가시든지……』
『내가 돌아가기를 영림은 원하고 있어?』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예요.』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석운은 담배를 휙 재떨이에 던져 넣고 영림의 얼굴을 자기 얼굴로 덮어 버 렸다.
포개어진 두개의 얼굴은 말을 잃고 비비적거리기만 했다.
이윽고 숨가쁜 포옹이 끝나며,
『내 언제 거짓말 했나……?』
『선생님은 정말 좋아!』
안기어 오는 영림의 머리를 석운은 쓰다듬으며, 소녀<에데>를 사랑한 늙으 막의 <몬테크리스트>를 생각했고, 십 칠세의 소녀를 사랑한 칠십 삼세의<괴 테>를 생각했고, 돌아올 줄 모르는 애인의 딸에 지극한 애착을 느끼는 <장 끄리스또프>의 늙은 심경을 생각했다.
가련한 것에 대한 무한한 애착, 헌신적인 애정의 경사(傾斜)를 걷잡을 수 없이 석운은 느끼며,
『영림, 우리 먼 데로 갈까……?』
『가요, 가! 이제라도 기차를 차요.』
『여비가 필요할 텐데……』
『제 목걸이를 팔아요. 이어링도 팔아요. 가다가 찻삯이 모자라면 아무 데 나 내려요.』
『가만 있어!』
석운은 휙 일어서서 수화기를 들고 견지동 S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저번에 반액을 받고 아직도 기일은 차지 않았으나 오륙 십만환의 인세가 남아 있는 것이다. 경숙의 피아노 대금으로 예산을 세우고 있던 돈이었다.
S출판사 사장이 전화를 받았으나 예산에 넣지 않았던 돈이므로 오늘 당장 에 오륙십만환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후에,
『강선생이 그처럼 급하시다면 이십만환 쯤은 돌려 드릴 수도 있지만요.』
『이십만환…… 그럼 그것이라도……』
『지금 어디 계신지, 그리로 보내 드리지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고 내가 그리로 가겠읍니다. 미안합니다.』
석운은 전화를 끊고 모자를 썼다.
『기다려요. 내 잠깐 견지동까지 다녀 올께.』
『선생님!』
걸어 나가는 석운을 영림은 불렀다.
『응……?』
『벌써 잊으셨어!』
『아, 참……』
석운은 다가와 작별의 포옹과 접순을 했다. 외출할 때는 반드시 그러기로 약속이 암암리에 되어 있었다.
『돌아 오실 때, 보스톤 빽을 하나 사 갖고 오세요.』
『오 케!』
호텔을 나서서 석운은 택시를 잡았다.
맞은 편 대중 식당에서 점심 요기를 하며 밖을 내다보고 있던 송찬이도 뛰 어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석운의 차를 따라갔다.
십분 후, 석운은 견지동 S출판사 앞에서 차를 버리고 안으로 총총히 들어 가 버렸다. 송기자도 차를 버리고 맞은 편 골목 어귀로 숨어 들어갔다.
얼마만에 석운은 출판사를 나와 광교 다리 근처에 있는 은행으로 들어갔 다. 은행에서 다시금 거리로 나온 석운은 신문지에다 싼 돈 뭉치를 옆구리 에 끼고 있었다.
석운은 보스톤 백을 살 셈으로 을지로 쪽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낯 익 은 청년의 얼굴 하나가 마주 걸어오다가 석운의 앞에서 우뚝 멎었다.
『아, 송준오군이 아니요!』
그러나 송준오는 묵묵히 석운의 얼굴만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감정의 상 극이 라이블(戀敵[연적]) 의식과 함께 석운에게 왔다. 석운이가 휙 자세를 돌려 지나쳐 버리는데,
『강선생!』
송준오가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시오?』
석운은 다시금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영림을 만나거든 이렇게 전해 주시오…… 영림에 대한 과거의 내 순정이 너무도 아까웠다고 전해 주시요.』
차가운 한 마디였다.
『…………』
석운은 묵묵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처럼 황홀하게 받아 들였던 영림의 입술이 너무도 값싼 것인 줄 은 몰랐었다고 이 말도 겸해서 전해 주시오.』
그리고는 휙 돌아서 갔다.
송준오의 날카로운 두 어깨를 석운은 덤덤히 바라보다가 보스톤 백을 후딱 생각하고 다시금 을지로로 총총히 걸어갔다. 송준오의 날카로운 어깨가 망 막에 남아 석운은 또 한 번 돌아다보다가,
『아, 군은……』
송찬은 종시 들키고야 말았다. 히쭉히쭉 웃으면서 다가오는 송찬을 향하 여,
『과연 민완기잔 걸! 태양호텔 앞에서는 어지간히 지루했을 텐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점심 요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감사하오!』
석운은 송찬의 손을 부여잡으며,
『송군의 호의는 영 잊지 않을 테야. 하지만 당분간 나를 놓아 주게.』
『선생님, 정말 어떻게 마음을 돌리실 수는 없읍니까?』
석운은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마운 말이지만…… 아무 말 말고 돌아가 주게. 스톱!』
석운은 차 한대를 멈추며,
『어서 신문사로 돌아가요. 군의 호의도 잘 알고…… 그러니까 이상 더 내 뒤를 밟을 필요는 없고…… 태양호텔도 곧 뜰 테니까……』
『이 삼일 사이에 그럼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 뵈올까요?』
『아, 그래 그래!』
송찬은 하는 수 없이 단념을 하고 차를 타고 떠나 갔다.
차가 저 만큼서 커브를 틀며 사라지는 것을 보고야 석운은 비로소 백을 사 러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즈음 아현동 영림의 집에서는 혜화동서 돌아온 마누라와 아들의 보고를 고종국씨는 듣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도 없고 해서 박군을 파수시키고 돌아왔읍니다.』
『음, 잘 알았다. 그럼 내가 강석운의 아버지를 만나 봐야지.』
고사장은 냉큼 일어서서 방을 나섰다. 대문 밖에 차는 기다리고 있었다.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오입할 상대가 따로 있지, 남의 귀중한 딸을 후 려내?』
달리는 차 안에서 고사장은 분노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사십분 후, 차가 정릉에 다달랐을 때, 고사장은 자기 집에는 들르지 않고 곧장 강교수의 집 앞에서 차를 멈추었다.
넓은 대지를 둘러싼 성깃성깃한 울타리 한 쪽에 대문이랍시고 목문 하나가 서 있었다. 닭장, 채소 밭, 화단이 울타리 안으로 삥 둘러 있었다.
화단에는 가지 각색의 꽃이 만발해 있었고 닭장에는 백색의 레그홍, 얼룩 얼룩한 푸주마스록크가 모이를 줍고 있었다.
열 대여섯 간 되어 보이는 중고옥이 대지 한 가운데 잠방하니 앉아 있었 다.
심산 유곡의 농가처럼 허스름한 정적과 초라한 평화가 고요히 깃들어 있는 마당 한 가운데서 고종국씨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금욕과 애욕의 도가니 속에서 기름지고 살찐 고종국씨의 들뜰 대로 들떠 있는 오관이 주위 의 이 고즈넉한 분위기에 당황을 했다. 위축도 했다.
자기의 호화로운 생활이 강교수의 이 검소한 생활 앞에 위축을 받아야만 할 무슨 이유가 있느냐고, 고종국씨는 일부러 위엄 있는 목소리로,
『에헴!』
하고 기침을 했다.
낯 설은 기침 소리에 젊은 식모가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었고 사랑방에서 한복의 강교수가 문을 열었다.
『아, 이거 고사장이 아니시요.』
강교수는 몸소 일어나서 고종국씨를 반가이 맞이하였다.
『강선생이 바쁘실 줄은 알지만 잠깐……』
『어서 좀 올라 오시지요. 저번에는 실례가 많았읍니다.』
사랑 문 좌우 담벼락에 낡아 빠진 초라한 액자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有山有水處[유산유수처]
無榮無辱身[무영무욕신]
(산 있고 물 있는 곳에서 영화도 없고 욕됨도 없는 몸이로다.)
詩有聲之畵[시유성지화]
畵無聲之詩[화무성지시]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없는 시로다.)
오랜 비바람에 글씨는 퇴색을 했고 여기 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고종국씨는 무언의 압력을 또 한 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기름 진 삶의 방도가 조소를 받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아랫 배에 힘을 주며 권하는 대로 서재에 들어가 마주 앉았다.
책장에 넣다 남은 책이 주위에 산적해 있었다. 집필 중이던 모양으로 낡아 빠진 책상 위에 원고지와 펜이 놓여 있었다. 원래 넓지 못한 방이라서 세 사람만 들어 앉아도 비좁을 만한 여유 밖에 없었다.
강교수 부인은 돈암동 시장에 저자를 보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식모더러 차를 끊여 오라고 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읍니다.』
하고 고종국씨는 주인의 호의를 차갑게 막았다.
석운과 영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동안 고사장은 시종 여일하게 차가운 모 습을 견지하고 있었고, 강교수는 무척 놀라면서도 마음의 침착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불미로운 사건을 강교수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처리할 작정입니까……?』
차는 다 식어 빠지도록 고사장 앞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적어도 강교수의 자제라기에 웬만한 자각은 가졌을 줄로 알았는데……
끝끝내 영림의 처소를 알리켜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의 불찰을 깨 닫지 못하는 미실이 아닐진대 하나의 악덕한, 패륜의 자식이라고 볼 수 밖 에는 없오.』
이렇게 막 욕설을 퍼붓고 보니 어쩐지 고사장은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 았다.
『내 아들 놈의 미련한 탓이라기보다도 모두가 다 이 아비의 미급한 탓입 니다. 고사장 일가의 심로에 대해서는 충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 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 오던 강교수는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의 뜻을 표하였다.
『사과로서 될 일이 아니요, 한시 바삐 사건을 처리해 주시요.』
『나도 그것을 지금 골똘히 생각은 하고 있읍니다만 처리 방도가 서지를 않읍니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글 줄이나 쓰는 놈이라기에 그렇지 않게 보아 왔더 니…… 남의 만금 같은 딸을 꼬여 내다가 감금을 시켜 놔……? 윤리학 교수 의 아들 놈이 아니었더라면 그 녀석은 남의 유부녀라도 꼬여 낼 망국지종이 되었을 거요.』
강교수는 송구스레 숙였던 머리를 불현 듯 들고 고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 다가 침착한 어로 입을 열었다.
『고사장의 말씀이 다소 지나치십니다.』
『뭐라구요? 내 말이 도리어 지나친다구요?』
의외라는 표정이 크게 왔다.
『그렇읍니다. 일단은 사과를 드렸읍니다만 지나친 험구는 듣고 싶지 않다 는 말입니다.』
『흥, 알겠오! 그러다 보니 강교수도 아들 놈과 동혈 동족이니만큼 아들 놈의 행실을 옳다고 여긴다는 말이지요?』
강교수는 또 묵묵히 상대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사장, 분명히 대답해 두겠읍니다만 나는 지금 내 자식의 행실을 옳다 고도 말할 수 없고 그르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것 뿐입니다.』
『허어, 이게 또 무슨 소리요……?』
고사장의 눈이 그 어떤 패기로 말미암아 희번덕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만 내 아들 강석운이라는 한 사람의 인간을 믿고 있다는 것 뿐입 니다. 내 아들 석운이가 만일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나는 내 아 들을 믿읍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아니 될 무슨 깊은 뜻을 품고 한 일 이겠기에 내 아들을 함부로 책망할 수는 없읍니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서,
『실례지만 나는 좀 볼 일이 있어서 나가 봐야겠읍니다.』
『음, 아들 가진 재세를 하는 거요?』
고사장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섰다.
『그러한 상식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다만 내 아들을 만나서 그의 숨 김 없는 심경을 들어보고 싶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좋은 수습책이 발견된다 면 가급적 속히 손을 쓰겠읍니다. 실례하겠읍니다.』
강교수는 옷을 갈아 입으려고 안방으로 총총히 들어갔고
『잘난 놈들도 별 것 없구먼! 제 자식 믿고 싶어하는 마음은 술장수 오야 봉에게도 있어!』
고사장은 괘씸한 시선으로 강교수의 뒷모습을 쏘아 보았다.
아내의 抗議[항의]
[편집]시장에서 돌아온 부인과 함께 강교수가 혜화동 아들네 집을 찾은 것은 이 럭저럭 한 시간후가 되었다.
오후 네 시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경숙이는 동생 셋을 데 리고 건넌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안방에 있는 어머니의 동정만 조용히 살피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경숙의 말을 곧잘 들었다.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 고 놀음에 팔려 떠들어 대다가도 경숙이가 시선만 조금 추켜도 금방 조용히 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허수로이 취급하기 시작한 이 가정의 보호와 옹립 을 위한 책임과 사명을 열 일곱 살인 경숙이가 무언 중에 짊어진 형식이 되 어 있었다.
그때, 옥영은 안방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볼 수 있도 록 현재에 있어서의 자기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그리고 그것 이 끝나면 경숙이와 정릉 시부에게도 간단한 편지를 써 놓고 남편이 돌아오 기 전에 집을 나갈 작정을 하고 있는데 시부모가 들어선 것이다.
옥영은 얼른 편지를 서랍 속에 집어 넣고 시부모를 맞이하였다. 기가 차서 들어서는 시부모의 기색에서 옥영은 이미 남편의 사건 때문에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시부모는 얼떨김에 순서 없이 남편의 이야기를 단도직입으로 물어오는 데 대해서 옥영은 극히 침착한 태도와 어조로 지나간 일을 조리 있게 쭉 설명 하였다.
『원 이런 변이 어디 있노? 다른 사람이면 모르지만 네 남편이 설마 이럴 줄이야 꿈엔들 생각했겠니……?』
시부모는 이야기를 들어가는 도중에도 이 말을 수 없이 되풀이했다. 적어 도 자기 남편 강학선 교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남편을 믿듯이 아들의 굳건 한 인간성을 믿고 있던 시모인만큼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린 것처럼 늙은 이는 당황하고 있었다.
『음, 네 고생스런 마음이나 또 네 거북스런 처지를 잘 알았다.』
오랜 침묵 후에 강교수는 신음하듯이 말하며,
『너를 대할 낯이 내게는 이제 없다. 적어도 내 아들만은, 인간의 성실만 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고, 내가 그처럼 고창하면서 길러낸 내 아들만은 믿 었었는데…… 뭐라고 너를 위로할 말이 없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
침통한 표정이 늙은 강교수의 주름진 얼굴을 무겁게 덮어 왔다.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시모가 위로를 하며,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충신이 나는 것처럼 집안이 평안치 못할 때 열 녀가 나는 법란다. 애 아범이 과히 미련하지 않은 위인이니 이제 모든 것을 청산해 버리고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 정을 지켜야지.』
『어머니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잘 알고 있어요.』
옥영은 고개를 소그듬히 숙이고 조용히 대답했다.
『암, 그렇고 말고! 네가 엔간한 사람이라고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련만 도……』
『그렇지만 어머니.』
옥영은 시선을 들어 시모를 바라보고 나서,
『미련하고 못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아무리 기를 써도 마음을 단단히 먹을 수가 없어요. 저로 하여금 마음을 단단히 가지도록 한 원인이 남편의 애정에 있었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오늘, 무엇을 가지고 마음의 기둥을 삼 으라는 말씀이신지…… 원인 없는 행동을 저는 취할 수가 없어요. 그런 의 미에서 저는 열녀도 되고 싶지 않고 현모 양처도 되고 싶지 않아요.』
강교수 내외는 적이 놀라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너……』
시모는 마음의 놀람을 억제하며,
『널더러 열녀가 되라는 건 아니지만 너는 네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네 아 이의 어머니가 아니냐……?』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어쩌니? 아버지의 사랑과 보호를 이전처 럼 못 받게 된 자식들을 위해서 이런 때 일수록 아버지의 몫까지 어머니가 도맡아야만 할 텐데…』
『도맡을 기력을 저는 잃어버리고 있어요.』
『안될 말이다. 마음을 굳세게 먹어야지. 집안이 이처럼 어지러워진 경우 에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일을 처리해 왔는지, 너도 잘 알 것이 아니냐? 모 두가 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가정을 지켜 왔단다. 그것이 소위 모성애라는 건데……』
『어머니의 말씀 잘 알아 모시고 있지만, 그리고 부모님 앞에서 너무도 당 돌한 말 같지만 그리고 또 제게도 그만한 모성애는 있지만, 그렇지만 세상 의 아내들이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저도 따라 할 수는 없어요.』
『무슨 말인지, 도시 알 수가 없구나. 너처럼 얌전하고 똑똑한 사람의 입 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옥영은 고개를 숙이고,
『제가 그이와 결혼한 것은 단지 밥이나 벌어다 주는 경제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 한 것도 아니고, 또 자식을 낳아서 모성애를 발휘하고 그 모성애 속 에서 행복을 구하고자 한 것도 아니었어요. 오직 한 가지 영원히 변함이 없 는 남편의 애정이 소중해서 결혼을 한 것이었어요.』
『그야 그렇겠지만……』
논리의 궁핍을 느끼고 시모는 시부의 표정을 언뜻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 교수는 시종 여일하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가정을 지킨다든가 자식들을 보호하고 양육한다든가 하는 것은 다른 이 들은 몰라도 적어도 제 결혼 목적이나 결혼 의식 속에는 없었어요. 있다면 그것은 다만 남편의 애정을 차지하기 위한 하나의 부수적인 결과로서 밖에 는 없었어요. 이런 말은 아이들이 들으면 저를 냉혈동물이라고 원망할런지 모르지만…… 그것도 하는 수 없는 일이예요. 저는 지금 한 여자로서의 숨 김 없는 결혼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 뿐이예요. 진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 예요.』
사실 건넌방에서는 경숙이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네 생각을 잘 알겠다.』
오랜 침묵 끝에 강교수가 비로소 말을 받아 왔다.
『네 생각을 잘 알지만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싶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들었다.
『인간에게는 인류의사(人類意思)라는 것이 있다. 자기의 연장을 바라는 종족보지(種族保持)의 의사가 그 하나요, 인간의 번영을 바라는 문화보지 (文化保持)의 의사가 그 둘이다. 그것은 인류의사인 동시에 우주의 의사요, 신의 의사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결혼은 목적이 아니 고 인류의 수단인 셈이 되는 것이다. 마음의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지금의 너에게 이러한 우원한 이야기가 보탬이 되기는 어렵겠지만 생각의 키 를 조금이라도 돌려야만 할 너에게 다소라도 도움이 되면 하고 말이 다.』
『저 역시 제 마음의 키를 돌릴 수만 있다면 돌려 보고 싶읍니다.』
『그렇다면 좋아. 역시 너는 너 자신을 다룰 줄 아는 총명을 가진 사람이 다.』
이 며느리의 똑똑함과 얌전함을 강교수 내외는 다시 한 번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수단일진대, 오늘의 네 남편의 불미로운 행실에서 받는 네 마음의 타격을 다소라도 무마할 수 있을까 해서 하는 말 인데…… 그러한 인류의사를 존중하여 너의 연장을 의미하는 아이들의 양육 을 위하여 삶의 힘을 얻어야 하겠고 가정을 지킨다는 문화적 사명을 느껴야 만 한다는 말이다.』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뜻을 알아 들을 것 같읍니다.』
『고마운 말이야. 옛날부터 방탕한 남편을 지닌 뭇 아내들이 곧잘 고규를 지켜 왔지만, 그리고 요새 사람들은 그것을 오로지 봉건 사랑의 희생물처럼 여기고 아내들의 굴욕적인 노예생활로서 간주하고 있지만…… 아니, 그것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는 바에 의하면 그렇게만 단정해 버리기 에는 좀더 숭고한 정신이 그들에게 깃들어 있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좀 더 커다란 인류의식, 좀더 엄숙한 인간애의 사도(使徒)로서의 사명을 절실 히 느끼고 자식과 가정을 지키는 데 엄숙한 긍지를 갖고 살아 왔다고 믿고 싶다. 남편의 애정을 잃었다는 데서 오는 허무와 비굴의 감정보다도 가정을 지키고 어떤 생명들을 보호 양육하는 문화사적(文化史的)인 사명과 숭고한 모성애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극히 높이 평가하면서 살아 왔다고 생 각하고 싶다는 말이다. 결국 그들은 인류의사의 실천자들이었다. 인생의 수 단인 소아적인 결혼 의식을 지양(止揚)하고 그의 목적인 좀 더 커다란 대아 적인 사명을 다해 온 것이다.』
거기서 강교수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현재의 네 다급한 감정으로서는 이런 말이 잘 들리지 않을런지 모르지만 네 마음의 키를 조금이라도 돌리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일 뿐이다.』
『아버님 말씀 감사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지는 않아 요.』
옥영은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빡빡 문지르면서,
『그렇지만 제가 그런 심경에 도달하기에는 많은 노력과 오랜 시일이 필요 할 것 같아요. 또한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될런지도 의문이예요. 제 남편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안되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영림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저 역시 아버님의 말씀이 지당하신 줄을 알면서도 결국은 그렇게 하지 못하 는데 인간의 약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이예요.』
『물론 노력을 해야지. 당장 되는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까지 노력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버님은 인류의사니 신의 의사니 하는 말씀을 하셨지만 따지고 보면 저는 신을 생각하기 전에 인간을 생각하고 싶고 인류를 생각하기 전에 김옥영이라는 개인을 생각하고 싶을 따름이예요. 신이 있고 인류가 있었기 때문에 김옥영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김옥영이가 있었기 때문에 신이 있고 인류가 있는 거니까요.』
『어서 말을 해 봐라.』
강교수는 점점 난처함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총명한 여성이라고는 생각하 고 있었지마는 그 총명이 이러한 종류의 논거(論據)를 지니고 있는 줄은 전 혀 모르고 있었던 강교수 내외였기 때문이다.
『당돌하다고 꾸지람하실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아버님께 하나 만 여쭙겠읍니다.』
『좋아.』
『아버님께서는 어머님과 결혼하실 때, 인류의사의 실천이라는 생각을 가 지고 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읍니다.』
『음………』
강교수는 불현 듯 옆에 앉은 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을 사랑하시면서 결혼을 하셨다고 들었읍니다. 그러 한 결혼에 있어서 아버님은 과연 어머님을 귀애하신 애정이 한낱 수단이었 고 종족보지와 문화사적인 사명을 목적으로 의식하셨는지, 그것이 알고 싶 읍니다. 이 말은 또한 어머니에게도 하는 물음이예요.』
『글쎄 나야 뭐 아느냐만…… 결혼을 하여 애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가지 겠다고 생각하는 건 인정이 아니겠느냐?』
시모의 대답이었다.
『아냐요, 제가 드리는 말씀은 처음부터 애정 없는 결혼을 말하는 것이 아 냐요. 어머님과 아버님의 경우나 또는 저희들의 경우처럼 애정을 토대로 하 고 이루어진 결혼에서 말이예요. 이러한 애정 결혼에서 과연 자식을 낳고 가정을 이룩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생각하시고 애정을 다만 그 수단으로서 의식하셨는지, 그 말이예요. 제 솔직한 경험을 말씀 드리면 저는 남편의 애 정 그 자체가 목적이었어요. 그 애정의 결과로서 오는 결혼이라든가 출산이 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결코 목적이 아니었으니까요. 다만 그러 한 결과로서 오는 결혼, 출산, 가정이라는 것이 남편의 애정을 독점하는 좋 은 유대(有待)가 되고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 그것을 구태여 거부하 지 않고 허용했을 뿐이었어요.』
『음, 알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기의 대를 이어 나가고 싶 어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인데……』
『그러니까 그것은 모든 생물에게 부여된 하나의 잠재의식일 뿐, 인간 의 식 위에는 그것이 주목적으로 나타나 주지를 않는다는 말씀이예요. 제 생각 이나 성품으로서는 더우기나 그래요.』
강교수는 마침내 대답을 잃고 말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아버님과 어머님도 저희들과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다만 아버님께서는 어른되신 입장에서나 전공하신 학문적 입장에서 가정의 평화와 인류의 친화를 위해서 인간의 감각을 신의 심리에 맞추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실까요……?』
강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나는 네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강교수는 놀라는 시선을 며느리에게 조용히 던지며,
『오늘날 사십대의 주부들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어 머니의 사십대와는 확실히 달라졌다.』
『그러기에 말이요. 내가 네 나이에는 생각도 못하던 소리다. 세상에는 도 덕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서운 하늘도 있고……』
시모가 적지 않게 나무라는 소리였다.
『아냐요, 어머니. 저희들에게도 도덕은 있어요. 남만 못지 않은 모성애도 있구요. 다만 저희들은 그 도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알고 싶을 따름이 예요. 옛날 사람들은 모성애만으로서 가정을 지켜 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 도 그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말(本末)이 전도된 삶이 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이예요. 남편의 애정을 잃 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모성애라도 붙들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내들의 참된 삶의 자태라든가 숭고한 인간애의 발로이기 때문에 자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면 요즈음 애들은?』
시모의 나무람은 점점 더 커갔다.
『어머님께 실망만 드려서 죄송하지만 저는 지금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제 생각을 솔직히 말씀 드려 아버님의 충고와 고견을 듣고 싶을 따름이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좋다, 솔직히 말해 다오. 내가 듣겠다.』
오늘 밤으로 집을 나가야만 한다는 옥영의 결심은 조금도 풀릴 줄을 몰랐 다. 옥영이가 지금 시부인, 강교수에게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심경을 솔직 하게 말하고 있는 데는 숨은 이유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슬픈 감정에서 나오는 넋두리가 아니고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을만한 무슨 신통한 교훈의 말이라든가 또는 자기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논리의 모순 같은 것을 지적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구태여 집을 나가지 않아도 좋았다. 문제는 집을 나가지 않고도 이 굴욕적 인 감정과 상처 받은 인격이 무마되고 보상된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옥영은 다시 말했다.
『모성애는 위대할런지 모르지만 뭇 아내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부부 애라고 제게는 생각되어요. 부부애를 상실한 아내들이 모성애의 위대하고 숭고함을 떠메고 나오는 것은 일종의 허세일 거예요. 그렇게라도 해야만 자 세가 서니까요. 뿐만 아니라, 남성들이 소리를 높여 가면서 여성들의 모성 애를 극구 찬미하고들 있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아내들을 일종의 보모로 서 가정에 동여매 두고 싶은 생각에서 억지로 떠맡긴 대의명분에서 지나지 못하지요. 아내들은 또 아내들로서 그러한 대의명분이라도 떠메고 나서야만 체면이나 자세도 설 뿐더러 고규를 지킴으로써 경제적 무능으로 말미암은 생활난을 모면할 수가 있기 때문이예요. 경제적 자립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치고 남편의 방탕을 눈감아가며 위대하다는 모성애만으로써 가정을 지키는 데 만족해 할 아내가 있을 것 같지는 정녕 않아요.』
시모는 또 새침한 표정으로 며느리를 바라보았고, 시부는 덤덤히 앉아서 며느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들에게는 가정 생활 이외에 사업이라는 게 있다지만 여자들에게는 가정 생활 그것이 인생의 전부예요. 제 남편은 여자들의 그러한 입장을 잘 이해하고 가정이 곧 낙원이라고 까지 말하며 충실한 결혼 생활을 쭉 계속해 온 사람이지요.』
『그렇고 말고. 그 애가 어쩌다가 이번에 한 번 걸려 들었지, 내 아들이라 고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죽 신통했느냐! 그러니까 애 어미도 좀 너그 럽게 생각해야하지 않겠니? 남자들이란 모두 그렇다는데……』
시모의 말이 이번에는 애원조로 나왔다.
『참, 아버님. 한 가지 진심으로 여쭈워 볼 말씀이 있읍니다.』
옥영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냐, 어서 말을 하렴.』
시부는 고개를 들면서 대답 했다.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신 것처럼 제 남편이 본시부터 헤실픈 사람이었다 면 모르지만 그만큼 자각이 있고 굳건하고 이해심이 풍부한 사람이 이번 일 을 저지른 데는 무슨…… 저희들 여성이 엿볼 수 없는 무슨 뿌리 깊은 이유 같은 것이 꼭 있을 것만 같아요. 이제 어머님도 말씀하셨지만 남자란 모두 가 다 그런가요……?』
옥영은 빤히 고개를 들었다.
『모두라고?』
강교수는 얼른 외면을 했다. 며느리의 시선을 근엄한 강교수로서는 정면으 로 받아 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저희들은 연애결혼이었읍니다. 그이는 저를 아내로서 귀여워 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대해 주었고 참답게 자기를 알아 주는 지기 로서 대하여 주었읍니다. 어느 모로 따져 보나 빈 틈이 없는 가정이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이는 마침내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저로서 는 도저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예요. 그것이 제게 대한 애정의 결핍에서 오는 것인지, 또는 그 밖의 무슨 다른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 어머님의 말 씀대로 남자란 다 그렇다는 데서 오는 것인지……? 아버님, 제게 진실을 알 리켜 주세요.』
강교수는 힘이 들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며느리에 게서 이런 종류의 질문을 받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 일이기에 과거 대학 총장까지를 거쳐 온 윤리학 대가인 이 늙은 교육자는 다만 며느 리의 입으로 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시대의 변천만을 뼈아프게 느끼고 있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추종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니, 인간의 이 성이다. 이성은 오로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보배로운 재산이다. 인간이 이 보배로운 재산을 포기할 때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초극하고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노력하며 걸어나가는 데 인간의 이상은 있는 것이다.』
명확한 대답을 피하고 강교수는 그렇게 말하여 완곡한 답변을 꾀하고 있었 다.
『그러면 아버님, 있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를 목표 삼아 걸어 나가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 읍니까? 현재를 모르고 장래를 무턱대고 꿈꾸기는 싫읍니다. 남편을 모시고 일생, 이생, 삼생을 살아도 겨웁지 않을 제 욕망인데 남편은 겨우 십 팔년 간을 한도로 이 가정을 버렸읍니다. 왜 그렇까요? 역시 제게 대해서 싫증을 느낀 탓이 아닐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다. 네 남편은 너를 가리켜 일생에 단 하나 뿐인 여성이요. 친구요 동지라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저를 버리고 딴 여자에게로 갔을까요?』
『사랑이란 가다가 마음이 비이는 순간이 있는데 그러한 순간이 나쁜 환경 과 우연히 겹쳐질 때, 자칫하면 후회를 가져올 행동을 저지를 수도 없지 않 아 있는 건데…… 모르긴 하지만 아마도 그런 종류의 탈선이 아닌가 생각한 다.』
『당돌한 말씀이지만 아버님도 과거에 그러한 순간을 느낀 적이 계신가 요?』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강교수는 다소 무안한 듯이 마누라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그러나 그러한 순간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옥영은 머리를 숙이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제 친구의 남편 한 분이 어떤 연회 석상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인 그 아 내는 적지 않게 불안한 마음으로 그 연회 석상에 와 있던 젊은 기생들을 걱 정하는 말을 했었다고요.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은 무슨 그런 걱정을 하느냐고, 자기의 눈에는 그 기생들이 마치 요릿상에 놓인 술 도꾸 리와도 같은 하나의 무생물로 밖에는 비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내의 신경 과민을 일소에 붙이더라는 말을 저에게 한 적이 있어요. 이런 말을 저희들 아내는 어떻게 들어야만 하는가요……?』
『남의 일은 내가 알 수 없고……』
『남의 일이 아니예요. 인간인 남성들의 일입니다.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그 인간을 연구하시는 철학자이신데……』
강교수는 정말 딱했다. 며느리와 한 자리에서 남성들의 쎅스를 토론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이 거북스런 입장이 숨막힐 것 같이 괴로왔다.
『나의 전공은 실천철학인 윤리학이다. 마음의 풍경보다도 행동에 치중하 고 있는 건데… 다시 말하면 마음의 소재(所在)를 인류 의사에 맞도록 초극 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내 학문에 주목적인 것이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 다면 오늘의 모든 문화는 지리멸렬, 있는 것은 다만 질서와 균형을 상실한 양육강식의 정글 시대일 것이요, 본능적인 에고(自我)만이 중뿔나게 날뛰는 암흑시대로 변했을 것이다.』
『아버님 말씀 잘 알겠어요. 그렇지만 현제의 제 관심은 인간의 행동이 아 니고 마음의 풍경이예요. 인류의 문화가 지리멸렬이 되건 약육강식의 암흑 시대가 오건, 저는 지금 제 남편의 마음의 움직임을 알고 싶었을 따름이예 요. 그리고 인제 그것을 알았어요. 젊은 기생들을 도꾸리 병 쯤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제 친구 남편의 말이 진실과는 얼마나 동떨어진 말인지도 알았고 동시에 아내의 마음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한 지극한 사랑의 말인 줄도 알았어요. 그렇지만……』
옥영의 표정이 일순간 허탈한 사람처럼 몽롱해졌다.
고영림이라는 한 젊은 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겼다는 데서 오는 허무보다도 좀 더 뿌리 깊은 인류적이요, 우주적인 커다란 허무감 앞에 한 사람의 성실 한 아내 김옥영 여사는 우뚝 서 있었다.
강석운 대 김옥영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 대 아내의 문제요, 남성 대 여 성의 문제였다.
결혼 생활의 허무, 따라서 뭇 여성들의 불행한 운명을 옥영은 생각했다.
한 사람의 남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여성들의 애정의 자세와 한 사람의 아내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는데 노력을 필요로 하는 남성들의 애정 의 자세를 옥영은 생각했다.
남녀의 이 운명적인 영원한 비극 앞에 김옥영 여사는 삶의 희망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아버님,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편이 도리어 행복했었읍니다. 안다 는 건 불행한 일이지요. 세상의 모든 아내는 부처님이라고 부처님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사는데 아내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는, 어떤 외국 작 품을 읽은 적이 있지만 그때도 저는 제 남편만을 믿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 에서 저는 아버님을 새삼스레 존경하고 싶읍니다.』
『어쨌든 네 남편을 빨리 만나야겠는데……』
『만나셨댓자 소용이 없을 거예요. 또 만나지도 못하실 거구요. 아까 신문 사 송기자가 와서 하는 말이, 남대문 밖 태양호텔에 있었다는데 송기자에게 들킨 줄을 알고는 호텔을 곧 뜬다니까요.』
『남대문 밖 태양호텔?』
강교수는 훌쩍 일어서며,
『여보, 당신도 같이 갑시다.』
『호텔이 어딘지……』
『남대문 밖에 가서 찾으면 알 수 있오. 신문사로 가서 송기자를 데리고 가도 좋고……』
강교수 내외는 창황한 걸음으로 방을 나서며 옥영을 향하여,
『내 어떡하든 데리고 올 테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침착해야 한다.』
옥영은 따라 나가서 현관까지 늙은 시부모를 전송했다.
그리고는 곧 되돌아 와서 아까 쓰던 편지를 다시금 끄집어내서 펜을 들었 다.
식모는 부엌에서 저녁 불을 때고 있었고 아이들은 건넌방에서 짹 소리도 없었다.
아들을 찾아 남대문 밖을 한 시간이나 헤메다가 태양호텔을 발견한 것은 아홉시가 넘었을 때였다.
그러나 석운과 영림은 아까 낯에 벌써 호텔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떴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강교수 내외가 혜화동으로 피 곤한 몸을 택시에 싣고 돌아온 것은 열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저녁 후 외출했다는 며느리 옥영은 그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말을 들으면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잠깐 저자를 보아 가지 고 온다던 아머니였다고 하면서 모두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박두해 옴을 따라 강교수 내외도 차차 불안해졌다. 강교 수는 무슨 생각이 불쑥 들어 이층 서재로 올라갔다. 책상 위에는 없었다.
서랍을 열었다.
『아, 역시……』
낯 익은 며느리의 글씨로 봉투 둘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남편에게, 하나 는 강교수와 경숙에게 한 편지였다. 강교수는 부리나케 봉투 둘을 한꺼번에 찢었다.
《남편이였던 당신에게.
당신을 만나기가 무섭고 싫어서 나는 당분간 마음의 키를 돌릴 수 있을 때 까지 당신의 옆을 떠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마음의 자세를 잡아야만 이 가정에 물러 있을 수가 있을 것 같고 또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책임을 질 수도 있을 것 같기에 이런 행동을 마침내 취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 때가 뜻 밖으로 속히 올런지, 또는 영원히 오지 않을런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읍니다.
현재에 있어서 나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면, 남편에게 버림을 받는 한 사람 의 아내로서의 비애와 허무의 감정을 견디어 낼 기력이 없는 동시에 그보다 못지 않은 정도로 허무의 열매 밖에 가져올 수 없는 전체 여성들의 서글픈 숙명적 애정의 자세 앞에서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읍니다.
내가 지금 눈물을 거두고 이만큼이라도 조용한 심경을 가질 수 있게끔 된 것을 자기 스스로 감사히 생각합니다.
당신의 아내였던 여인》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
불효 소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부의 심경은 새삼 다시 말씀드리지 않 아도 헤아리실 줄 아오며 경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행동을 감히 취 함에 있어서 다만 아버님과 어머님을 믿사옵니다.
네 아이의 어머니보다 한 사람의 남편을 좀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온 소부 이오나 앞으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서만도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이 루어지기를 노력해 보겠읍니다.
오십만환의 예금 통장의 소재는 경숙이가 알고 있읍니다.
불효 소부 상서》
《경숙이 보아라.
이런 경우에 있어서 너희들이 원할 수 있는 어머니가 끝끝내 되어 주지 못 하고 완전히 힘을 잃어버리고만 이 미련한 어머니를 나무라 달라는 한 마디 밖에 더 남길 말이 없는 것을 슬퍼한다. 동생들과 함께 할아버님과 할머님 의 말씀 잘 순종하기 바란다.
미련한 어머니》
편지를 움켜 쥔 강교수의 손길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즈음 어두운 광야를 남쪽으로 달리는 경부선 열차 이등 객실 속에서 강 석운과 고영림의 애욕의 도피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久遠[구원]의 幸福[행복]
[편집]칠월 상순, 검푸른 녹음이 삼청공원 일대를 구름처럼 뭉개며 뒤덮고 있었 다. 대낮에는 이글이글 끓고 있던 햇볕도 아침 저녁으로는 살풋이 누구러지 곤 했다.
어떻게 된 셈인지, 한혜련의 병세가 요즈음에 와서는 한결 차도가 있어 보 였다. 잔 기침도 덜 나고 각혈의 돗수도 훨씬 줄어졌다. 알린알린, 유리처 럼 샛말갛게 들여다 보이던 창백한 얼굴에는 보오얀 화기까지 발기스레 감 돌고 있었다.
약은 김박사가 권하는 대로 꾸준히 썼다. 정제로는 파스 나이드라짓드를 복용했고 주사로는 스트랩터마이신을 맞았다. 주사는 어머니도 놀 줄 알아 서 편했으나 가벼운 운동을 겸하는 의미에서 안국동에 있는 김냇과까지 몸 소 가서 진찰을 받아 가면서 맞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번번히 김박사 를 차로 모셔 오는 비용을 절약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달포 전, 남편이 찾아와서 혜련의 마음의 불륜을 분개하여 지랄발광을 하 며 영림을 데리고 간지 얼마 안되어 혜련 모녀는 생각 끝에 금후 시집의 경 제적 원조를 일체 거절하겠다는 편지를 남편에게 띄웠던 것이다. 그리고 거 기 대한 간단한 회답이 날아왔다.
- 《딴 사나이에게 음란한 마음을 품은 아내가 남편의 원조를 받기 힘들어
- 하는 심정을 가히 이해하겠기에 요청하는 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남편이오.》
이것이 그 회답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혜련의 어머니는 부랴부랴 쟁봉틀에 올라 앉아서 삯바느질을 시작 했다. 그리고 딸의 조용한 정양을 위하여 지난 정월부터 비워 두었던 뜰아 랫방에 다시금 사람을 넣기로 결정을 하고 아이들이나 과히 많지 않은 단촐 한 식구를 물색하기 위하여 여기 저기 부탁을 해 놓고 있었다.
오늘도 어머니는 일찌감치 조반을 치르고 아는 사람을 통하여 여기 저기서 맡았던 일감이 다 되어 그 여름 옷가지들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나눠 주러 나갔다. 김박사 부인의 옷가지도 있었다.
혜련은 요즈음 마음이 가볍고 편했다. 그것은 남편의 회답을 받은 그 순간 부터의 일이었다. 무슨 커다란 짐을 하나 어깨에서 내려 놓은 것처럼 혜련 은 심신이 다 같이 날 것만 같았다.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지.』
어머니에게는 한 없이 미안한 말이지만 시집의 원조를 거부하는데 있어서 이 이해성 깊은 어머니는 딸에 못지 않게 서둘러 댔다. 본시부터 바느질 솜 씨도 고왔던 어머니였다.
딸의 얼굴에 화기가 돌고 병세가 도리어 누구러진 것도 그러한 마음의 부 담이 없어진 때문일 것이라고, 어머니는 도리어 이번 기회가 좋은 약재가 된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었다.
사실도 그러했다. 혜련은 이제 정말 아무런 데도 마음을 쓰지 않아도 좋았 다. 병세가 악화되면 조용히 죽는 날을 기다리면 그만이었다. 죽움을 기다 리는데 혜련은 일종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영림도 오지 않았다. 와 주지 않는 시누이를 처음에는 적지 않게 서운히 여기고 있었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와 주지 않은 편이 도리어 좋았다. 영 림을 만나면 시집 식구들 이 자연히 연상될 테고 이야기 끝에라도 알 필요 가 전혀 없는 강석운 선생님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이 혜련에게는 도리어 감정의 짐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짐 저런 짐을 죄 벗어 버린 한혜련의 오늘의 심경은 검푸른 호수처럼 깊고도 조용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깊고 조용한 심정으로 혜련은 지금 화단 앞에 꾸부정하고 서서 줄 기차게 피어나는 봉선화 잎사귀에서 누에 같은 봉선화 벌레를 잡아 주고 있 는 것이다.
『아이, 여기 또 한 마리……』
매일 처럼 잡아 주는 벌레지마는 어디서 생기는지, 혜련은 벌써 다섯 놈이 나 잡아서 땅에 묻었다. 회색 바탕에 검은 반점이 얼룩진 놈, 싯멀뚝하도록 새파란 놈들이 잎사귀를 색색 갉아 먹고 있는 양을 볼 때마다 혜련은 마치 자기의 살이라도 갉히우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소름이 쭉 끼친 때도 있 었다.
『그런데 소설은 왜 안날까……?』
K신문에 연재되던 「유혹의 강」은 벌써 한 주일 동안이나 「금일휴재」를 계속하고 있었다. 거기 대한 무슨 사고(社告)같은 것도 없었다.
『몸이 편찮아서 쉬시는지도 모르지.』
현재의 한혜련이가 마음을 쓰는 곳이란 그저 그런 정도의 것 밖에는 없었 다.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란 참 우스꽝스런 거야.』
연꽃을 좋아하던 한 여성이 일생을 두고 봉선화 꽃을 좋아하면서 죽어야만 하는, 그 숙명적인 감정의 경사를 혜련은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고유의 의욕과 취미를 송두리째 버리고 자기 아닌 그 어떤 다른 사람 을 위한 의욕과 취미 속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감정을 혜 련은 하나의 수수께끼, 하나의 신비로서 돌리고 있었다.
『하나의 생명이 자기 고유의 희로애락 속에서만은 절대로 살아 나갈 수 없는 고독을 느끼는 것이 인간일런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혼자 살다가 죽어가지는 않았다. 누구나가 다 자기 아 닌 그 어떤 다른 이들을 위하다가 죽어 갔다. 부모는 자식을 위했고 자식은 부모를 위하다가 죽었다. 남편은 아내를 위했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다가 죽 었다. 형제를 위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친구를 위해 죽은 사람도 있다.
나라와 사회와 인류를 위하다가 죽어간 충신과 성현들도 있었다. 애인을 위 하다가 죽은 이도 있었다.
『모두가 다 자기 혼자를 위하다가 죽은 사람은 없다. 나는 그럼 누구를 위하다가 죽어가는 몸인고……?』
어머니 밖에는 없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다. 굴곡 없는 삶이었기에 그 삶 속에서 일순간 이나마 감정의 파동을 아름답게 일으켜 준 오직 한 사람의 인간이 십 구년 전의 돌구름 일 따름이었다.
주마등같이 어수선하고 다채로운 일생이었던들 단 며칠 동안에 걸쳐서 움 터진 돌구름의 기억은 이끼 끼고 녹슬은 아득한 망각의 피안에서 까물거렸 을 것이었다.
인생의 극히 조그만 물결에 지나지 않은 돌구름이 강석운이라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매일처럼 잡지나 신문 지상에 나타나면서 부터 그에 대한 기억은 점점 확대되어 갔다.
불행한 결혼 생활과 기복 없는 단조로운 감정에 돌구름의 기억을 애인처럼 소중히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이라도 붙잡고 죽어야만 죽어가는 혜련의 영혼은 최소한도의 안정을 얻을 것 같았다. 모두가 다 그 누구를 위해서 살 다가 죽는다면 자기는 돌구름을 위하다가 죽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죽고 싶었고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저녁 무렵에 어머니는 새 일감들을 주워 모아 가지고 돌아갔다. 점심은 김 박사 댁에서 먹었노라고 하면서,
『때 마침 한 사람이 오게 됐단다.』
『마침한 사람이라뇨?』
『뜯 아랫방에 들 사람 말이지.』
『어마, 어떤 사람인데요? 식구는 몇인데요?』
살림의 보탬이 여간 될 것 같지가 않아서 혜련도 기뻤다.
『식구는 없고, 여자 혼잔데…… 한 주일 전부터 김박사 댁에 와서 묵고 있는 사람인데… 그저께 갔을 때도 그런 말이 통 없더니 갑자기 어디 조용 한 방을 얻어 가지고 나와야 하겠다구 의논하고 있는데 마침 내가 들어가지 않았겠니?』
『늙은이예요?』
『어디가…… 서른 여섯이라고 하지만 서른 두세 밖에 보이지 않더라. 김 박사 부인의 동창이라는데 얌전한 사람이야.』
『혼자몸이래요?』
『아니야. 집은 돈암동에 있는데 신병으로 앓다가 어디 조용한 데로 나와 서 당분간 수양을 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부인은 너처럼 폐를 앓는 모양이 더라. 김박사 병원에 입원을 하려고 왔던 모양인데 조용하지가 않아서 나오 는 거겠지.』
『말동무가 되어서 좋겠어요. 언제 와요?』
『이따 저녁 먹고 온단다, 김박사 부인과 함께……』
한 주일 전 그날 밤, 옥영은 편지를 써 놓고 아침거리를 사러 나간다는 말 을 남겨 놓은 후에 집을 나왔다. 시부모가 혹시나 남편을 데리고 돌아오기 전에 나가야 한다고 부랴부랴 뛰쳐 나오기는 했으나 친척 하나 없는 이 서 울 바닥에서 옥영이에게는 갈 곳이 없었다.
갈 곳도 없지마는 갈 곳이 있어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죽고만 싶었다.
저자 바구니 속에 핸드백이 들어 있었으나 몇 천환의 돈이었다. 어두운 밤 길을 무턱대고 걷노라니까 창경원 앞이 되었다. 창경원 돌담을 끼고 또 자 꾸만 걷노라니까 원남동이 되고 돈화문 굴다리 밑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 자 기 자신을 발견하였다.
걷다가 문득 애들 생각이 나면 갑자기 애처롭고 처량한 마음이 들어,
『통행금지 시간 전에는 들어갈 테니 걱정들 말아.』
그렇게 마음으로 속삭이었고 그러다가도 남편 생각이 불쑥 나면,
『아이, 보기 싫어!』
그러기도 했고
『아이, 무서워』
그러기도 했다.
걸으면서 옥영은 지난날,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 이런 경우에 처해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하나 둘 골라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다 자기보다는 나 이 어린 연대의 여성들이었다.
『내 나이가 벌써 사십을 바라보는데……』
그러니까 좀 더 세속적으로 자기의 감정을 처리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그 렇게 처리해야만 하지 않겠느냐고 이십대의 여성들과 똑 같이 돌아가고 있 는 자기의 감정의 어림을 뒤채 보기도 옥영은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 지나 머리로 짜낸 생각일 뿐, 옥영의 어린 감정이 따라가 주지를 않았다.
『나이는 사십을 바라보지만……』
이십년 가까운 행복된 결혼생활이 자기의 감정을 이처럼 어리게 만들고 젊 게 만든 것이라고, 온실처럼 감정의 풍파를 모르고 지낸 이십년의 세속적 공백(空白)이 도리어 오늘에 와서는 원망스럽기도 했다.
『처음부터 좀 더 해실픈 남편이었던들……』
오늘의 허무가 이렇듯 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돈화문에서 원남동까지를 옥영은 세 번이나 오락가락 했다. 그러다가 마침 내 옥영의 발길은 그냥 안국동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내 남편만이 유독 나쁜 남편이었던들……』
옥영은 허무가 이처럼 크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내 남편만을 나쁜 남편이 라고 나무라면 되었기 때문이었고 인간 생활 전체에 대한 암흑과 절망과 공 허를 느끼지 않아도 무방했을 것이다.
이건 우주적이요 전 인류전인 고독과 허탈 속에서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어떤 약방 하나를 시야 속에 발견하고 꿈결처럼 옥영은 걸어 들어갔다. 그 것은 재동 어귀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약방 주인은 옥영이가 요구하는 수량 대로의 〈세로나알〉은 팔지 않고 두 알만 주었다. 극약인 수면제 판매에는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통행금지 시간까지는 사십 분이나 남아 있었는데 옥영은 종시 되돌아 갈 줄을 모르고 안국동 김내과로 찾아 들어가고 말았다.
김내과 원장 김박사 부인은 옥영보다 삼년 위인 여학교 동창이다. 친언니 처럼 따르던 사이였다.
내일은 정말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아이들 생각이 간절해지면 옥영은 금세 어머니가 되지마는 그러나 동시에 남편을 대할 생각을 하면 죽어도 들어가 고 싶지 않고 아내의 감정으로 돌변하곤 했다. 아내의 자리와 어머니의 위 치를 저울질하며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한주일을 옥영은 지냈다.
옥영이가 집을 나온 이틀날 어머니가 혹시 그리로 가지 않았느냐고 경숙에 게서 전화가 왔었는데 옥영의 지시대로 김박사 부인 오신정(吳信貞) 여사는 오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다.
『아이구 옥영이도 참 딱하지. 여지껏 팔자가 늘어진 탓인 줄이나 알아요.
남편이 바람쯤 핀대서 아내가 죽어야 한다면 서울 장안의 아내들은 모두가 다 미아리 공동 묘지나 녹번리 화장터로 송장 떼가 돼 나가겠다 얘.』
오신정 여사는 옥영의 심로를 일소에 붙이면서,
『날 좀 봐요, 날! 남편이 하루 이틀쯤 나가 잔다고 죽어야 한다면, 내 참 목숨이 열개가 있어도 못 당하겠다 얘.』
오신정 여사의 남편 김박사는 오십 고개의 위인이지마는 젊어서 부터 많은 바람을 피워 온 사람이었다. 두 집 살림을 차려 놓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 었으나 요즘에는 약간 정신이 들었는지 노상 착실한 남편 노릇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 김박사가 어제 저녁, 내실과 병원을 연결하는 어둠컴컴한 복도에서 지 나치는 옥영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쳐 버린 것이다. 부끄럼과 모욕을 한꺼번 에 느끼면서 옥영은 밤새껏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허물어지고 남편이라는 기둥을 잃어버린 한 사람의 아내의 비애가 너무도 빨리 옥영에게 왔다. 남편이 가정 안에 건재하여 있 을 무렵에는 좀처럼 거들떠 보지도 못하던 김박사가 아니었더냐고, 남편의 애정만을 문제로 삼아 씨름해 오던 옥영이에게 남편의 위치가 갑자기 중대 성을 띠어 왔다.
『남편만 저 모양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이러한 모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남편의 애정을 잃어버 린 뭇 아내들이 참을성 있게 가정을 지켜 온 또 하나의 원인 같은 것을 옥 영은 발견했다. 비무장으로 적탄 앞에 나선 병사처럼 옥영은 갑자기 마음이 허전했고 세상이 무서워졌다. 우물쭉물 하다가는 어느 맹수에게 잡혀 먹히 는지 모르는 한 마리의 들토끼를 옥영은 상상했다.
이튼날, 그러니까 그것은 오늘 아침의 일이었다. 굳이 만류하는 오신정 여 사의 말을 완곡히 사양하고 조용한 방 하나를 얻어 가지고 나가겠다고 했 다. 하루 이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까 언제까지나 덧붙여 살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고 이부자리나 한 벌 빌려 주면 방을 얻어 가지고 나가겠다고 했다.
『정히 그렇다면 마침 참한 방이 있기는 하지만……』
오신정 여사는 옥영을 위하여 삼청동 환자의 방 하나를 생각했다. 바느질 감을 맡아 가는 환자의 어머니는 얼마 전부터 단출한 식구를 물색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혜련의 어머니가 여름 옷가지를 지어 가지고 들 어섰던 것이다.
속앓이 병을 가진 환자라고 소개를 하고 혼자 니니 딴 솥을 걸 필요도 없 지 않느냐고 옥영의 식사까지를 오신정 여사는 부탁해 주었고, 혜련의 어머 니도 다년간 신세를 지고 있는 김박사 부인인만큼 그러한 조건을 쾌히 승락 해 주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부자리와 함께 자질구레한 간단한 도구를 택시에 실고 오신정 여사를 따라서 옥영은 병원을 나왔다.
이 이삼일 이래 한혜련의 호수처럼 맑고도 조용한 심경에 파동 하나가 일 고 있었다. 그것은 뜰 아래 방에 이사 온 여인에 대한 관심이었다. 수수께 끼이기도 했다.
돈암동에 집이 있다는 이 여인, 김박사 부인의 여학교 동창이며 속앓이 병 을 앓는다는 이 여인, 식사를 부탁해 놓았다면서도 아침 저녁으로 어머니의 손도움을 부지런히 해 주는 이 여인의 모습이 어쩌면 꼭 잡지 같은 데서 많 이 보아오던 강석운 선생의 부인만 같았다.
희미하고 아득했었지만 십 구년 전, 원산 해수욕장에서의 기억도 더듬어 보았고 스크랩 부크에 정성들여 따붙여 둔 강선생님의 가족 사진도 여러 차 례 꺼내 보았다.
『틀림 없어.』
강선생의 사모님에 틀림이 없건만 그 사모님이 오늘날 어찌 된 연고로 가 정을 떠나야만 했는지를 알 도리가 혜련에게는 없었다.
더우기나 의심적은 것은 강선생님의 「유혹의 강」이 중단된 것이 벌써 열 흘, 그와 비슷한 무렵에 사모님은 집을 나와 김박사 댁에 묵은 계산이 된다 는 것이었다.
『속앓이 병이라고, 폐가 나쁘세요?』
조반이 끝나기가 바쁘게 어머니는 재봉틀 앞에 올라 앉았고 혜련은 옥영과 함께 꽃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네, 그저 좀……』
옥영은 말꼬리가 여전히 흐렸다.
『무슨 약을 쓰세요?』
『무슨 약이라고…… 환약을 좀 써 봤어요.』
『병은 오래 됐어요?』
『한 일년 됐어요.』
『그럼 초기로군요. 나는 사기랍니다.』
옥영은 물끄러미 혜련을 바라보며,
『김박사는 뭐래요?』
『요즈음은 무척 좋아졌대요.』
『시댁이 서울이라죠?』
『네.』
꽃밭에 물을 다 주고 나서,
『제 방에 좀 놀러 오세요.』
『고맙습니다.』
『자아, 어서 좀 들어오세요. 아무 것도 없지만……』
혜련은 옥영의 손을 잡아 끌었다.
『좀 들어가서 노시우. 말동무가 생겼다고, 재가 어떻게나 좋아하는지 모 른다오.』
건너방 재봉틀 앞에서 어머니도 권했다.
혜련은 부엌으로 들어가서 손수 도마도를 썰어 접시에 담아 가지고 들어왔 다.
『한 쪽 드세요.』
『네.』
혜련과 옥영은 조용한 안방에 마주 앉아서 도마도를 들었다.
『잡지도 있고 신문도 있으니까 심심하시면 얼마든지 갖다 보세요.』
『고맙습니다.』
책상 위에 잡지와 소설 책이 여러 권 꽃혀 있었다. 남편의 소설도 몇 권 끼어 있었다.
옥영은 가슴이 아팠다. 그 작품들이 씌어진 무렵의 평온과 행복이 아득한 꿈결만 같았다.
『소설 좋아하세요?』
혜련은 물었다.
『네, 그저……』
『강석운 선생님의 작품을 읽으셨어요?』
혜련이가 조심성을 지닌 어조로 재차 물어 왔을 때 옥영의 표정에는 다소 서글픈 미소만이 한 줄기 가볍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서글픈 미소에서 혜련은 강선생님의 가정에 움터 있는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것을 금새 느겼다. 무슨 깊은 사정이 있기는 확실히 있는 것이라고, 그동안 쭉 얼굴 한 번 나타내지 않는 시누이 고영림을 불현듯 생각였다. 칸 나의 그 강인한 의욕과 불타는 정열을 생각했다.
『그런데 K신문에 나던 강선생의 「유혹의 강」이 왜 갑자기 중단됐는지 모르겠어요.』
『아, 글…… 글쎄요.』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복잡 미묘한 이그러진 표정이 옥영의 모습을 극도로 어지럽히고 있었다.
혜련은 순간, 사모님의 불행의 원인이 칸나의 정열에 있다는 것을 직감적 으로 느끼며 솔직하게 물었다.
『사모님! 사모님이 바로…… 바로 강선생님의 사모님이시죠?』
『어머나?』
옥영은 나자빠질 듯이 놀랐다.
『사모님, 저는 벌써부터 강선생님의 사모님이신 줄을 알아 보았어요.』
『아니, 어떻게 그런 줄을……』
『잡지 같은 데서 늘 보아 왔었으니까요.』
『어쩌면?』
옥영의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생각하면 그럴 성도 싶었다.
『저는 이 이삼 일 동안 사모님이 왜 집을 나오셨을까 하고 무척 생각해 보았어요.』
『강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셨나요?』
마음을 약간 가라앉히며 옥영은 조용히 물었다.
『네, 무척……』
그러다가 혜련은 문득 마음의 비밀이 탄로날 것만 같아서,
『그렇지만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게 어디 저 뿐인가요? 모두들 좋아 하는 데요 뭐.』
그러나 이렇게 막상 덧붙여 말을 하고 나서 보니 도리어 마음 속을 감추려 는 변명같이 들릴까도 두려워 혜련은 오히려 안한 것만 같지 못했다고 뉘우 쳤졌다.
그래서 앞날의 인상을 얼른 뭉개버릴 셈으로,
『근데 「유혹의 강」은 왜 끊어졌어요? 선생님이 요즘 편찮으신가요?』
『네 요즈음 얼마동안 신경통으로 누워 계세요.』
『네에, 그러시군요.』
그러나 병상에 누운 남편을 내버려 두고까지 가정을 떠나지 않으면 아니 되는 사모님의 심정이 혜련에게는 안타깝도록 알고 싶어서,
『선생님이 그처럼 병환이 계신데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얼마나 불편하실까 요?』
『…………』
옥영은 시선 둘 곳이 없어 언뜻 외면을 하며 잠자코 화단을 내다보았다.
대답을 못하는 사모님의 심정이 서글퍼 혜련도 얼른 입을 다물고 꽃밭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화를 잃은 두 여인 앞에 봉선화의 무더기가 검푸른 녹음 속에서 활짝 꽃 구름을 피우고 있었다.
오랫동안 두 여인은 그렇게 고즈넉히 앉아 있었다. 흰 나비가 한 쌍 꽃밭 위에서 까불어대고 있었다. 뒷산에서 희미하게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은 옥영이보다 혜련의 입에서 먼저 흘러 나왔다.
『처음 보는 저에게 사모님이 마음을 털어 놓을 수는 없으시겠지만……』
혜련은 꽃밭을 말끔히 내다보는 그대로의 자세로,
『제 이야기를 제가 하는 것 같지만 저 과히 헤실픈 사람 아냐요. 사모님 의 말동무가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어요.』
『고마운 이야기예요. 그렇지만 할 이야기가 뭐 있어야지요?』
꽃밭 위에서 까불어 대던 나비 한 쌍이 나불나불 사쁜 사쁜 고독한 두 여 인의 시야로 부터 사라져 갔다.
『선생님이 착실하신 분이어서 듣기에는 사모님이 무척 행복하신 줄 알았 어요.』
옥영은 조용히 웃으며,
『불행해 보여요?』
『사모님의 얼굴이 지나치게 어두워요.』
『건강이 늘 나쁘니까 그렇겠지요.』
『건강보다도 마음이…… 마음 고생이 계시는 것 같아요. 혹시 선생님이 요즈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시지나 않으세요?』
옥영은 얼른 혜련을 돌아다보며,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생각되세요?』
혜련은 빤히 옥영을 바라보며,
『생각키우는 것이 한 가지 있어서 그래요.』
『무언데요?』
가벼운 긴장이 옥영의 시선 속에서 머리를 들었다.
『이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제 추측이지만요.』
『무언데요?』
『혹시 문학 공부를 한다는 여대생이 선생님을 방문한 적이, 고영림이라 는……』
『어마……?』
『있죠?』
『………?』
역시 자기의 추측이 정확했다고, 총소리에 놀란 참새 모양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모님의 눈동자를 혜련은 서글피 바라보며,
『그 학생이 선생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어 드리고 있는 거죠?』
『………?』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다. 오들오들 떨고 있던 사모님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으려고 달려붙어 왔다.
『요 며칠 동안 그렇지나 않는가 하고 무척 걱정했어요.』
『아니, 그 고영림이라는 학생을 어떻게 아세요?』
가쁜 숨결을 몰아 쉬며 옥영은 우선 다급한 것부터 물어 왔다.
『제 시누이예요.』
『어머나?』
소스라치게 놀라는 옥영을 혜련은 미소를 지으며 잠시 바라보다가,
『그렇지만 사모님, 과히 걱정은 마세요. 사정이 있어서 시댁과는 통 왕래 가 없으니까요.』
거기서 혜련은 별거 생활을 하게 된 전후 사연을 쭉 이야기하여 사모님의 편이 되면 되었지, 결코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어 상대편을 안심시켰다.
『아, 그러시었군요.』
그렇다면 혜련의 위치로 보나 호의로 보나 자기를 해할 것 같지가 않아 옥 영은 적이 마음을 늦추며,
『고선생이 어머님과 함께 저의 집을 찾아오신 적이 있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혜련의 편에서 놀랐다.
『무엇 때문에 갔었어요? 언제 갔었어요?』
짐작은 이미 가고 있었으나 확실한 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 영림이라는 학생 때문에…… 벌써 열흘 전 이야기예요.』
『아이, 역시 아가씨가……』
혜련의 추측은 한 오라기도 어긋남이 없이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사모님,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저는 사모님의 편이 될 수 가 있는 사람이에요. 아가씨에 대해서는 다소나마 알고 있는 대목도 있고 요.』
『고마워요, 그렇지만……』
『사모님, 저를 믿어 주세요. 저는 정말 한 사람의 애독자로서 선생님과 사모님을 존경해 왔고, 선생님의 단란한 가정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제 힘이 자라는 데까지는 이건 정말 헤실픈 소리가 아냐요. 신명에 맹세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예요.』
혜련은 진심으로 사모님의 불행이 곧 자기의 불행처럼 느겼지고 있었다.
돌구름을 위하고 돌구름의 가정을 위해서라면 없는 힘이나마 짜낼 수 있는 신비롭고도 숭고한 감정이 혜련이 썩어가는 가슴 속을 파동치며 돌았다.
『어찌 된 인연인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고마운 분을 여기서 만날 줄은 정 말……아, 참…』
옥영은 문득 생각이 나는 바가 있어,
『알았어요. 이제 생각나요. 한혜련씨, 그러시죠? 그리고 옛날, 저 원산 해수욕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 미스 헬렌……』
『어머, 어떻게 그런 걸 아세요?』
죄 지은 사람처럼 혜련은 가슴이 뜨끔 했다.
『영림에게서 들었노라고 강선생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에 관한 이야기는 통 꺼내지 않았노라던 시누이의 말을 생각하며 혜련 은 호닥닥호닥닥 놀라고 있었으나 태도만은 태연해야겠다고 기를 쓰고 표정 을 가다듬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차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에 대한 사모님의 지식은 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소녀 시절에 잠시 만난 적이 있는 돌구름이 후일 작가가 되었기 에 그의 작품을 호기심에서 애독한다는 정도의 것 밖에는 없었다.
더구나 영림과 강선생의 관계를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사모님의 태도나 표 정으로 보아서 자기의 마음 속 비밀 같은 것에는 추호도 신경을 쓰지 않는 사모님을 혜련은 알고 적이 안심을 하며,
『알았어요, 그래서 아가씨가 그동안 한 번도 얼굴을 나타내지 않었군 요.』
혜련의 고즈넉하던 감정이 영림의 그 불미로운 행동을 무섭게 가책하고 있 었다.
『영림은 나빠요. 불량 학생야요.』
헤련의 입으로 부터 돌팔매 같은 가책의 말이 무심 중에 튀어 나왔다.
그것은 사모님을 위해서 하는 분노이기 전에 미스 헬렌의 감정의 폭발이었 다. 미스 헬렌이 그처럼도 소중히 모셔 온 돌구름의 평화로운 가정을 칸나 는 끝끝내 파괴하고야 말았다.
혜련은 매서운 얼굴이 되며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십 구 년 전, 원산 송도원 이래 처음 보는 다급한 감정의 발언이었다. 조개알을 바스러지도록 깨물다가 입술을 다쳐 피를 흘리던 순간의 감정이 그대로 되 살아 나오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지금도 망막에 삼삼하다. 파라솔을 나눠 쓰고 돌구름과 함께 멀리 송학관쪽으로 사라져 가던 김옥영이라는 이름의 여인! 그 여인에게 향 하던 것과 꼭 같은 종류의 감정의 발악이 이십년을 껑충 넘어선 오늘 이 순 간에 있어서 강선생님을 뺏앗아 간 고영림에게 대해서도 고스란히 그대로 폭발하리라고는 혜련 자신도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어떡하면 영림의 손으로부터 강선생님을 도로 찾아다가 사모님에게 모셔다 드릴 수가 있을 까를 혜련은 골돌히 생각하며,
『사모님, 실은 강선생님을 찾아 뵙겠다는 아가씨를 제가 여러 번 말렸어 요.』
『아, 그런 말을 항상 혜련씨에게 했었나요?』
『네, 아주 개방적인 성격이에요. 숨기는 것은 티끌만큼도 없고 모든 것이 적극적이고, 그야말로 칸나처럼 자기 의욕에 충실하려는 학생이예요.』
『그건 나도 짐작은 했었어요.』
『그렇지만 사모님, 자기 의욕에만 충실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요?
모두가 다 자기 의욕만 중쁠나게 내세우면 삼십억의 인류가 죄다 좌충우돌 을 면치 못할 거예요.』
『정말이예요. 혜련씨야 말로 정말 얌전한 분이예요.』
『아이, 사모님도……』
그러나 얌전하다는 찬사 위에 안주해 있기에는 혜련의 감정이 너무도 서둘 러 댔다.
그 순간 말을 이룰 수 없는 혜련의 감정이 젖부둥 밑에서 또 한번 발악을 했다.
『나쁜 돌구름! 돌구름은 나빠, 나빠!』
일년에 두 차례씩, 꽃 봉투를 띄움으로써 구원의 행복을 소녀들처럼 희구 했던 혜련의 아름다운 꿈은 조각조각 흩어져 버리고 남은 것은 오직 폐허처 럼 삭막한 감정의 오열 뿐이다 무명의 꽃봉투조차 이미 보낼 곳을 잃어버린 혜련의 허무와 현실적으로 남편을 잃어버린 옥영의 허무가 조용히 마주 앉 아 있었다.
그러다가 무심 중 혜련은 고개를 들며,
『그렇지만 사모님,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저는 아직 사모님보다 나이 어려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지금 얼른 생 각한 일이지만 인간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을 것 같아 요.』
『영원한 행복이라고요?』
『네, 영원한 행복! 그 누구도 파괴할 수 없는 행복의 길이 있어요. 인간 악도 사회악도 그리고 자연악까지도 그 행복을 무너뜨릴 수는 없을 거예 요.』
『그게 뭔데요?』
혜련은 쓸쓸히 웃으며,
『사모님은 사랑하는 행복을 느껴보신 적이 계신가요?』
『사랑하는 행복이라고요?』
『네, 사랑을 받는 행복이 아니고 사랑하는 행복! 인간이 차지할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은 거기서 밖에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돌구름이 영림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데서 느낀 허무의 감정을 혜련은 그 렇게 해서 도로 메꾸고 있는 것이다.
『혜련씨의 말을 잘 알겠어요.』
한혜련이라는 한 여성의 심정이 그러한 깊이에 까지 파들어 가고 있었던가 하고 옥영은 비로소 혜련이가 지닌 삶의 방도와 애정의 자세를 발견한 것 같았다.
『주제 넘은 말이라고 책망하시겠지만 사모님이 지금 지니고 있는 허무감 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행복의 길 밖에는 없지 않을 까요?』
『말 뜻만은 알 수가 있겠어요.』
『그렇게 느끼시진 못 하실까요?』
옥영은 그것을 느껴 보려는 듯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자기의 감정의 물결을 정밀공(精密工)의 감각을 가지고 자진정해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느낄 수 있다면 사모님의 불행은 구제를 받을 수가 있을 거예 요.』
거기서 옥영은 눈을 뜨며,
『이번에 내가 묻겠어요. 혜련씨는 그것을 느낄 수가 있는가요?』
『네, 느낄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아니, 현재도 그것을 느끼고 있으니까 요.』
『실례의 말 같지만 실연의 경험이 있는가보군요.』
『네, 그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용하십니다.』
『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라고요? 그럴까요?』
혜련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초인간적인 영원한 것을 바라는 마음이 아마도 혜련씨에게 그러한 심경 을 복돋아 주었겠지요. 사랑이 신앙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뿐만 아니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요.』
혜련은 답변을 잃고 덤덤히 옥영을 바라만 보았다.
『실연은 과정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혜련씨가 사랑을 신앙에 까지 끌어 올리고 있는 데는 허약한 건강에서 오는 체념 때문일 거예요. 신 앙은 체념의 철학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사모님의 말이 우선 논리적으로 가슴에 왔다. 그러나 그 썩어 가는 가슴으 로서는 그러한 논리를 받아 들이기에는 숨이 가빴다. 그 모자라는 호흡이 한혜련으로 하여금 체념의 철학이나마 붙들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열 네살의 소녀의 호흡으로서는 지나치게 숨가빠 조개알을 깨물어 터 지면 체념과 같은 계통의 철학이었다.
『사랑하는 행복 속에서 영원을 찾기 전에 사랑받는 행복 속에서 순간을 찾고 싶은 것이 현재의 나의 기원이에요. 머리의 사랑보다도 가슴의 사랑, 생각하는 애정보다도 느끼는 애정이 내게는 필요해요.』
『사모님,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사모님의 오늘의 허무감을 무엇으로 구제 합니까?』
『고마워요, 혜련씨. 그렇지만 구제 받을 수 없는 것을 구제 받으려고 애 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따름이예요.』
『안돼요, 사모님. 그렇게만 생각하시면 절망 밖에는 없을 거예요. 선생님 이 기다리고 계실는지도 모를 테니까 어서 댁으로 돌아가셔야겠어요. 그 뿐 인가요 어린 애기들을 생각해서라도 돌아가셔야 해요.』
혜련은 무심 중 손을 뻗쳐 사모님의 손을 잡아 쥐었다. 정에 격하여 한 두 번 꼭 쥐어 보았다.
사모님도 같이 쥐어 왔으나 자기보다 힘은 덜 들어 있었다. 덜 들어 있는 그만큼 사모님의 정신적 허탄은 자기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은 것 같았다.
『사모님, 제가 아가씨를 꼭 만나 볼 테니 사모님은 어서 댁으로 돌아가세 요.』
『고마운 말이지만 아예 만날 생각은 마세요. 외부의 압력으로써 돌아올 남편이 아닐 거예요.』
사모님의 조그만 손을 만지작거리며 혜련은 얼른 생각했다.
『아이, 이 손은 돌구름이 애무하던 손! 그리고 사모님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은 돌구름이 봉사를 들여 준 손이고……』
혜련은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아서 얼른 외면을 했다.
愛慾[애욕]의 行路[행로]
[편집]하루 저녁에 폐허처럼 황량해진 혜화동 집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튿날 아버지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 들어왔다.
《옥영이 보시오.
나는 이미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요. 이 세상을 제 일 즐겁게 해 주던 내가 당신을 이처럼 슬프게 해 줄 줄은 꿈에도 몰랐오.
정녕 당신에게 있어서는 제일 나쁜 인간이 되고만 강석운이요. 무한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오.
나는 당분간 서울 땅을 떠나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싫어서가 아니고 당 신이 무서운 때문이오. 혜화동 일대가 무섭고 아이들이 무섭소. 당신의 비 애와 허무가 무섭고 아이의 저주가 무섭소.
언제 돌아올 수가 있을 는지 나는 모르오. 모르지마는 다만 한 가지 예감 은 내가 만일 죽을 때가 와서 죽는다면 오로지 옥영의 옆에서만 눈을 감을 수가 있을 것 같다는 것이요.
옥영이, 그러면 안녕히…… 내 입으로 어찌 당신의 안녕을 빌 수 있겠오 만, 모든 염치를 무릅쓰고라도 그것을 빌고 싶은 마음에 허위는 없오.
아이들에게는 따로이 쓰지 않겠오. 아버지와 어머님에게도 따로이 쓰지 않 겠오. 쓸 것도 없지마는 쓸 수가 없오.
하늘을 무서워 하면서도 하늘에 순종하지 못하는 비겁하고도 약한 사나이 로 부터》
아이들은 어리둥절 했고 강교수는 깊은 신음을 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강교수 내외는 차차 끈을 늦추고 시간의 흐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 가고 있었고, 혜숙과 도선이는 점점 더 풀기 를 잃어가고 있었다. 경숙과 도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차츰 더 나무라고 있었다.
『뭐예요? 이게 아버지예요? 이게 어머니예요?』
경숙의 열 일곱살과 도현이의 열 다섯살이 부모의 애정을 규탄하기 시작하 였다.
『부성애는 다 어디 가고 모성애는 다 어디 갔어요?』
경숙은 눈자위가 새빨갛게 충혈을 하도록 울고 난 눈으로 할아버지와 할머 니를 쏘아보았다.
『오냐, 인제 다 돌아오느니라.』
강교수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돌아와도 난 싫어요! 이제 다 알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경숙은 옥영이가 쓰던 안방 책상에 와락 엎디면서 무섭게 흐느껴 운다.
네 아이가 빙 둘러 앉은 한 가운데서 강교수는 푹푹 담배만 피웠고, 할머 니는 혜숙이와 도선이에게 사과를 깎아 주고 있었다.
『싫으면 어떡하느냐? 싫어도 부모고 좋아도 부모란다.』
할머니가 그러면서 경숙의 분노를 조용히 꾸짖고 있었다.
『그건 할머니, 말이 안 돼요. 싫어도 부모라면 싫어도 자식이 아니겠어 요? 자식이 싫어지면 저희들은 마음대로 아이들을 팽개지고 나가 버리는데 우리들은 뭣 때문에 싫어도 부모를 섬겨야 한다는 말이예요?』
흐느끼는 얼굴을 홱 들면서 경숙은 대들 듯이 말했다.
『아버지는 나빠! 어머니도 나빠!』
도현이도 경숙의 편이 벌써부터 되어 있었다.
그러는데 열 한살짜리 도선이가 냉큼 나서며,
『그래도 누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으면 어떻게 사니?』
『왜 못 살아!』
경숙이가 밴하니 소리를 쳤다.
『돈은 누가 벌고 일은 누가 하니?』
『그럼, 그렇고 말고.』
혜숙에게 사과를 깎아 쥐어 주며 할머니가 도선을 응원했다.
『싫어요! 난 그런 아버지가 벌어다 주는 돈 안써도 좋아요. 그런 어머니 가 일 안해 줘도 좋아요.』
『흥, 그럼 누나는 학교 어떻게 다닐테야?』
『학교 안 다녀도 좋아! 아이, 창피해! 남 부끄러워서 어떻게 학교를 다 녀?』
자기 아버지만은 그렇지 않은 아버지라고, 그런 종류의 불량한 아버지를 가진 동무들 앞에서 언제나 떴떴했고 마음 든든했던 경숙이기에 그의 서글 픈 상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경숙은 눈물을 씻으며 새침한 표정으로 불렀다.
『오냐.』
『나 아버지와 어머니한테 편지를 쓸 테예요.』
『편지? 어디 있는지 알아야 편지를 쓰지 않느냐?』
『편지를 써서 신문에다 낼 테예요. K신문 문화부에 있는 송선생에게 부탁 하면 내 줄 거예요.』
『뭐라고 쓰느냐?』
『할 말이 있어요. 안 돌아와도 좋다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 돌아 온대 도 우리 네 식구는 죽지 않는다고, 기어코 살아 볼 테라고, 막 해댈 테예 요.』
경숙의 입술이 정에 격하여 다시금 비쭉비쭉 이그러지고 있었다.
『음, 그것도 무방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이 죄 알게 될 텐데……
네 동무들도 알게 되고……』
『알아도 좋아요. 이제 학교는 안 다닐 테예요. 피아노도 안 살 테예요.
살 돈도 없어요. 신문사 송선생의 말을 들으면 아버지는 S출판사에서 피아 노 살 돈으로 남겨 둔 인세를 이십만환인가 삼십만환인가를 찾아 가지고 갔 다니까요. 나보다도 아버지는 그 여자가 좋은 거예요.』
경숙은 또 다시 무섭게 흐느끼며,
『예금 통장에 있는 오십만환까지 가지고 가지 않았어요? 이 집까지 왜 안 팔아 갔어요?』
부모를 나무라는 경숙의 이 다급한 감정 앞에 강교수는 언뜻 외면을 하며 뭉클 하고 뜨거워지는 눈꼬리를 손으로 씻었고, 도현이와 도선이는 훌쩍훌 쩍 콧물을 들여 마셨다. 할머니도 목메인 소리로,
『그래도 부모는 부모지, 그러면 못 쓴단다.』
『우리에게는 부모가 없어요. 우리는 고아예요. 고아지만 죽지는 않아요.
기어코 살아 보일 테에요.』
『누나가 학교에 그만 두면 나도 안 갈 테야.』
도현이가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말했다.
『나는 신문장수 할 테야.』
도선이도 한몫 들어왔다.
『누가 너희들 보고 학교 그만두랬어!』
경숙이가 홱 얼굴을 돌리며 뺑하니 소리를 쳤다. 부모가 집을 나간 이후 경숙은 완전히 이 가정의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있고 내가 있는데 너희들이 무슨 걱정이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내 죽는다.』
도선이가 아는 체하고 경고를 했다.
『할머니, 죽음 싫어이!』
혜숙이가 할머니의 목을 껴안으며 무릎 위로 올라왔다.
『죽긴 내가 왜 죽느냐.』
할머니가 혜숙을 끌어안는다.
『오냐, 그만들 하고 이제 자거라. 너희들의 생각도 잘 알았다. 기특한 생 각들이지만 내가 있는데 무슨 쓸 데 없는 걱정들이냐.』
강교수의 한 마디가 무연히 흘러 나오는데 도선이가,
『할머니, 인제 달걀 먹지 말고 모았다 팔아요.』
『오냐 오냐, 참 애들도……』
강교수 부인은 눈시울을 손가락으로 조용히 눌렀다.
고영해는 그 동안 수차 혜화동을 찾았으나 서울 땅을 떠났다는 강석운의 소식을 강교수에게서 얻어 듣고는 될대로 될 수 밖에 없다는 단념을 하고, 사업욕과 애욕에 이끌려서 밤낮으로 바쁘기만 했다.
고사장 내외도 이제는 하는 수 없이 먼 하늘을 우러러 보며 과실히 제물에 익어 떨어지듯이 제발로 영림이가 걸어 들어올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 다.
그래도 고사장 부인만은 딸의 걱정을 끈기 있게 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끈 기가 고사장에게는 없었다. 관철동 윤마담과 황산옥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애리에 대한 욕망을 가끔 확대시켜 보는데서 황혼의 인생을 서글피 체념하 는 것이었다.
아들 고영해의 손에 이미 떨어졌을 는지도 알 수 없는 애리였기에 그런 종 류의 부도덕은 피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자기의 그러한 마음의 자세를 고사 장은 노상 어른다운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땐스홀 「애리자」는 언제든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마담인 애리 자신이 직접 홀에 나섰다. 마담의 일은 애리 어머니가 도맡고 있었다.
단골 손님이 나날이 늘어갔다. 애리의 개방적인 명랑성과 적당한 불량성이 꿀물이 되어 있었고 그러한 꿈결에 손님들은 머리를 싸매고들 들러붙었다.
그래서 애리는 매일처럼 예약이 있었고 삼 사일씩 기다려야만 차례가 돌아 왔다.
『사나이는 움직이는 금고야.』
『무슨 소린데?』
『금고란 본시 무거워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 특징 아냐?』
『그래서?』
『금고의 용도란 돈을 넣어 두고 굳게 자물쇠를 잠가 두는 데 있지 않 어?』
『그래서?』
『그렇지만 열쇠만 적당함 언제든지 열어서 돈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는 말이야.』
『그 적당한 열쇠를 쥐고 있는게 애리라는 말이지?』
『물어서 뭘해요.』
『음, 움직이는 금고라.』
『고전무도 말하잠 움직이는 금고예요. 금고치고는 대형(大型)이고.』
『음, 대형 금고라.』
『그 금고 속에서 이 커다란 홀이 나왔으니까요. 그만함 대형이죠?』
녹음기에 테이프 레코드에서 감미로운 불루스가 완만히 흘러 나오는 대낮 의 홀이다. 그 텅 빈 드넓은 홀 한가운데서 고영해는 애리를 품안에 깊숙히 넣고 봄바다의 물결처럼 흐느적 흐느적 움직이고 있었다.
볼과 볼은 벌써부터 겹쳐져 있었다. 걸어만 다녔다. 〈록크〉만 대고 했 다. 다른 거추장스런 〈휘거어〉는 하나도 없다. 〈휘거어〉가 찾으면 볼과 볼이, 가슴과 가슴이 떨어져야만 했기에……
『애리, 그렇지만 걱정이야.』
『뭐가요?』
『특대형 금고가 나타나면 큰일인 걸.』
『네버 마인! 애리는 이미 당신 것인데 뭘.』
『변심하지 말아요.』
『당신이나 말아요.』
『특대형 열쇠를 갖고 있어도 그것만은 사용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저희들이 그러니까 여자들도 온통 그러는 줄 아나베?』
『애리가 연애 장사니까 하는 말이지.』
『이제 그 장사는 집어 쳤어.』
『송준오도?』
『메시꼬운 말 그만 해요. 애리의 순정에는 한도가 있어. 거지 발싸개 같 은 것이 노상 중쁠만 나 가지구……』
애리의 육체권과 고영해의 금권이 마침내 교환된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 다.
애리는 볼을 바싹 비벼 오며,
『내 걱정은 작작 하고 당신 걱정이나 똑똑히 해요. 유현자를 낚고 있지 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고영해의 가슴 속은 따끔도 않다.
『다 아는 걸 가지고 숨길 필요는 없잖어?』
『알긴 애리가 뭘 알아?』
『이 눈치 저 눈치를 다 채고 있어. 적어도 연애 장산데……』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센스가 다소 오버한 것 아니야.』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시계처럼 펑츄얼(正確[정확])한 정밀생리(精密 生理)를 나는 갖고 있죠.』
『시계도 태엽을 안 틀면 늘어지는 법이고 잘 못 맞추면 빨라도 지지.』
『증거가 있어.』
『무슨 증거?』
『고전무의 결재 도장!』
『무슨 소린데?』
『손등에 찍는 도장은 무엇을 결재하는 거죠?』
『아, 그걸 보았나?』
『보지 않고서 어떻게 알아요?』
『그건 장난이고……』
『능치지 않아도 괜찮아, 문제는 낚었는지 못 낚었는지 그것만 알면 된다 니까 글쎄.』
『그런 시골뜨기는 낚어 볼 생각조차 없어.』
『잘 낚어지지가 않는 모양인가?』
『요것이!』
애리의 보조개에서 쭉 소리가 났다.
『거 무슨 소리야?』
『애리의 보조개가 웃는 소리지.』
『아, 하하하……』
애리는 유쾌해졌다.
『술장사나 해 먹긴 아까운 유모어야.』
『연애장사나 해 먹긴 아까운 보조개처럼.』
『부인 병환 좀 어때요?』
『송장 치르기 전에 집어쳐야겠어.』
『아이, 불쌍해. 당신은 잔인해요.』
『잔인한 게 현대적 성격이야. 주위를 돌아다 봐요. 모두가 다 잔인한 에 고이스트들이야. 그 누가 남을 위해서 겸손하느냐 말이야. 송준오는 자기를 위해서 애리를 박찼고 영림은 자기를 위해서 송준오를 박찼다. 강석운은 자 기를 위해서 부인을 버렸고 부인은 자기를 위해서 아이들을 버렸다. 고사장 은 자기를 위해서 내 어머니를 버렸고 황산옥은 자기를 위해서 본 남편을 버렸다. 애리는 자기를 위해서 고영해를 안았고 고영해는 자기를 위해서 송 장을 치르기 전에 애리를 이처럼 안는 것이다.』
춤은 이미 아니었다. 고영해와 이애리는 지금 각기 자기들을 위해서 정열 에 불타고 있는 것이다. 보조개의 지분이 얼룩이 갔고 루쥬가 차차 희뿌옇 게 퇴색해 갔다.
춤을 상실한 테이프 레코드가 탱고를 부르고 있었다.
『모두가 다 자기에게 충실해 있는 거야. 송장 같은 몸으로도 내 아내는 역시 자기에게 충실하고 있어.』
『문슨 뜻이예요?』
『딴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야.』
『어마?』
『아내는 나의 물질적 원조를 거부했다. 마음 놓고 철저히 자기에게 충실 하기 위해서…』
포옹이 끝났다.
『아이, 시장해.』
『정열이 가면 시장기가 온다. 시장기가 가시면 정열이 또 오지.』
『먹고야 사랑인가?』
『사랑만 있으면 먹지 않겠다는 작가들도 있지.』
『그게 누군데?』
『안개를 먹고 사는 사람들!』
『뭐요?』
『꿈만 먹고 산다는 맥의 종족들!』
『알았어, 한숨을 마시고 산다는 예술가 나부랭이들 말이지?』
『대포만 쾅쾅 놓는 성현 군자들도 마찬가지지.』
『그렇지만 그들도 결국 창자가 차야만 대포도 놓고 꿈도 꿀 것이 아냐?』
『그러기에 말이래도, 밥을 먹으면서도 안개를 먹고 산다는 잠꼬대 같은 수작만 늘어놓는 작자들!』
『아이, 정말 시장해요.』
『자아, 요릿상으로 가서 뭐든지 좀 집어 넣고 와요.』
둘이는 홀을 나와 총총히 주방으로 사라져 갔다.
뜨기가 바쁘게 응석을 부리던 칠월 중순의 태양은 오전 열 시를 맞이한 대 구 역전 드넓은 광장 위에서 벌써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오르고 내리고 승객들의 무더기가 여기 저기서 물결치고 있었다. 수십대의 울긋불긋한 택시가 역사 맞은편 주차장에 도사리고 있다가 손님들을 잡아 싣고는 손살 같이 시내로 흩어져 들어가곤 하였다.
새하얀 파나마 모자에 보스톤 백을 든 강석운과 그린빛 후레야 스커트에 저고리를 벗어 한쪽 팔에 걸친 고영림은 한길을 건너 역전 광장을 들어섰 다.
『선생님, 저기 멋진 차가 한 데 있어요.』
영림은 주차장 쪽을 가리키며 깜자주 빛이 반짝반짝 윤을 내고 있는 고급 택시 하나를 골라 잡았다.
『아, 그건 닷지야, 고급이지.』
깜자주 빛 고급차에는 기억이 있다. 지난 날, 을지로 입구에 있는 다방
「기다림」에서 옥영을 붙들어 간 차가 바로 깜자주 닷지였었다.
『닷지, 맞았어요. 선생님, 차에 대한 지식도 상당하시네요.』
『암, 상당하지. 하성 양조 고사장의 자가용도 바로 저것이었지.』
『어마,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소설가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되겠어?』
『어쩌면……』
『귀신 같지.』
『참 모를 일이예요.』
『칸나가 나를 이모 저모로 연구한 것처럼 돌구름도 칸나의 이 구석 저 구 석을 연구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버지의 자가용까지 연구하셨군요.』
『그 뿐인가. 고사장의 소실 황산옥 여사의 왼손 약지에는 비취 가락지, 장지에는 카랏트 반쯤 되는 다이야 반지, 기름진 손목에는 백금 시계……』
『아, 그만 그만! 이제 알았어요. 언젠가 수도극장 앞에서 식사를 같이 하 시던 때…… 그렇죠?』
『그렇죠!』
『아이, 남의 흉내만……』
칸나의 팔꿈치가 홱하고 돌구름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불국사까지 몇 시간임 가요?』
깜자주 차 앞으로 걸어가며 영림은 물었다.
『빠르면 두 시간임 갑니다.』
대답보다 먼저 조수는 차 문을 열고 있었다.
『요금은?』
『왕복에 삼만환입니다. 가기만 하는 데가 이만환이구요.』
『아이, 비싸! 우리 돈 다 떨어졌으니 좀 싸게 했요.』
영림은 벌써 올라 타고 있었다.
『아가씨는 돈이 떨어졌는지 몰라도 선생님의 보스톤 백에는 만환 몽치가 하나 가득……』
『말 말게. 이 속에는 헌 옷가지 밖에 들은 게 없네.』
『선생님, 겸손일랑 마셔도 괜찮읍니다. 보기에는 우락부락 소도독놈 같아 서 경계를 하시는 모양이지만 마음은 천사처럼 이쁘장하답니다.』
『호호홋…… 이쁘장한 마음씨! 선생님, 아주 독창적인 표현이죠?』
『음, 확실히 대 문호의 소질이 풍부한 걸! 뜻하지 않은 동호자를 얻었으 니 자아, 빨리 랫스 꼬오.』
『오 케! 기분 나이쓰!』
차는 휘익 광장을 감돌아 일로 금호강(金潮江) 다리를 향하여 질주하기 시 작하였다.
십 여일 동안 둘이는 대구에서 묵었다. 부산행 차표를 사 가지고 무작정 올라 탄 야간열차가 대구역에서 멋없을 순간, 둘이는 또 무작정하고 내려 버렸다.
부산이 한국의 끝이기에 무작정 갈래야 갈 수가 없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시베리아 벌판을 생각하고, 사하라 사막을 그리워 하 며 여정(旅程)을 아끼고 한국 땅에 절약하는 의미에서 둘이는 부랴부랴 내 렸다. 둘이가 다같이 대구가 낯선 도시였던 것도 매력적이었다.
역 앞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매일처럼 둘이는 고독과 권태와 무료를 모르 는 행락(行樂)의 과정을 하나 하나씩 밟아 갔다. 낯선 얼굴과 낯선 사투리 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한 것이 둘에게는 더우기 좋았다. 서울에서처럼 숨 막히지 않고 서둘러 대지 않는 대구의 공기가 둘이의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 히고 있었다.
남이 하는 행락을 둘이는 빼놓지 않고 모조리 했다. 다방 출입도 했고 교 회에도 나갔다. 음악회도 가고 극장에도 갔다. 빠아에도 가고 땐스홀에도 갔다.
그러는 사이에 둘이는 행락의 피로를 가끔 느끼고 호텔 일실에 고슴도치처 럼 들어 앉아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웃기도 했다.
트럼프로 한나절을 보낸 적도 있다.
달랑달랑 돈도 떨어져 갔다. 물쓰듯이 혜프기도 했다. 더구나 아는 얼굴을 두셋 만난 것이 석운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볼 일이 있어서 잠간 내려 왔다는 서울 젊은이들었다. 글 쓰는 사람도 있었고 신문사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놀란 표정을 하고 영림을 힐끔힐끔 바라보면서 「유혹의 강」이 중단된 이유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중 한 젊은이는 대구에 온지 이 틀만에 거리에서 만났다.
연배가 비슷하든가 또는 가까운 사이라면 적당히 발뺌을 해 두고도 싶었으 나 그런 친분이 못 되기에 양쪽에서 다 같이 어물어물 했다. 호기심과 경제 심이 서로 대결을 하다가 헤어지고 말았다.
『세상은 좁아.』
『좁아서 무서우시지.』
『무섭긴……』
『좀 더 아는 얼굴이 없는 데로 가요. 불국사 같은 데로……』
『괜찮아.』
『가요.』
그래서 불국사행을 결행하게 된 두 사람이었다.
차는 금호강 다리를 건너서고 있었다.
『아이, 저 사람들……』
영림은 차창에 기대어 오른편쪽 동촌(東村) 유원지 일대에 흩어져 있는 유 흥객과 피서객들을 내다보았다. 강에는 보트 떼가 죽끊듯 했다. 모터 보트 가 물결을 가르기도 했다.
닷지 치고는 어쩐지 차체가 무거워 동요가 적다. 그래서 석운은 물었다.
『이 차 닷지지요?』
『아닙니다. 올스 모빌입니다.』
『아, 올스 모빌! 제네랄 모터스에서 나오는……』
『그렇습니다. 시보레 회사지요.』
『어쩐지 보데가 좁 육중한 것 같더니만.』
『원거리 용으로는 마춤입니다. 닷지는 가볍지요. 시내용으론 무방하지만 요. 올스 모빌은 대구에 이것 하나 밖에 없읍니다. 폰데약이나 캐다락 모두 다 같은 시보레 회삽니다.』
『알아, 포오드 회사 치로서는 링컨이 역시 제일 고급이지!』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 차 많이 가지고 굴리셨군요?』
『음, 과거에는 자동차 밀수입으로 한 밑천 잡았는데 요즈음 와서는 바람 을 피울래기에 졸딱 망했어. 패가망신 격이네.』
『후후……』
하고 영림은 웃다가 말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얼른 석운의 옆모습을 쳐다보 았다.
작가로서, 성실한 남편으로서 한 밑천 잡았던 것을 칸나 때문에 졸딱 망했 다는 풍자처럼 영림은 들었기 때문이다.
시내 버스가 다니는 반야월(半夜月)까지는 포장된 도로에서 드라이브가 사 뭇 흥겨웠다.
하양(河陽)까지는 육십리 길이요 구십리 길인 영천(永川)에는 한 시간 남 짓에서 들어 닿았다.
차체가 무거운 올스 모빌은 아무리 속력을 내도 까불 줄을 모른다.
라디오는 배가본드를 방송했다. 〈스폐인의 귀부인〉이 흘렀다. 〈센트 루 이스 블우스〉도 흘렀다. 그 격정적인 고조된 메로디가 피로했던 두 사람의 감각을 모닝 커피처럼 은근히 자근했다.
『춤추고 싶어.』
『호텔에 가서 추지.』
영림은 살그머니 머리를 안겨 왔다. 석운은 영림의 어깨를 가만히 끌어 안 았다. 머리를 안기고 석운의 남은 손을 무릎 위에서 영림은 더듬어 잡으며,
『선생님 품 안에서 칸나는 지금 청춘을 밭갈고 있어요.』
석운은 대답 대신 영림의 어깨에 힘을 주었다.
『유행가처럼…… 사랑해선 안될 사랑이지만…… 유행가처럼 눈물의 부산 정거장이 될는지 모르지만…… 가는 데까지 이 땅이 끄치는 데까지은 가 보 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가는 거 아니야?』
『내일을 생각하지 말기로 해요.』
『…………』
『과거를 생각하시는건 가급적 절약해 주세요.』
『누가 과거를 생각한댔어?』
『흐응……』
영림은 눈을 가만히 감으며,
『세상이 좋아서 싫어서지?』
『또 쓸 데 없는 말만……』
『한 밑천 잡았었는데 그만 쫄딱 망하셨지.』
『응?』
석운은 얼른 영림을 들여다보았다. 영림은 눈을 반짝 뜨고 석운을 추켜 보 며 해쭉 웃었다.
『무슨 말이야?』
『아냐, 아냐! 자동차 밀수입으로 한 밑천 잡았던 거 말이야.』
석운은 웃으며,
『난 또 무슨 말이라고……』
『패가망신두 하시고……』
『응?』
『다 알아요. 그렇지만 괜찮어, 괜찮어요』
다시금 눈을 감고 석운의 품 안에 얼굴을 묻어 왔다.
건천(乾川) 거리에는 우시장(牛市場)이 열려져 있었다. 수십 마리의 황소 암소가 넓은 마당에 웅기종기 모여 있었다. 조수가 라디오를 껐다. 왁자지 껄 우시장은 벌 등지를 터뜨린 것처럼 웅성대고 있었다.
『아, 능이 보여! 저것 좀 봐요.』
건천 시가를 빠져 나오면서 부터 거대한 왕릉이 드문드문 한길가에 흩어져 있었다.
『빨리 저것 좀 보래도!』
『안 봐도 좋아요. 보고 싶지 않아요.』
얼굴을 묻은 채 영림은 종시 우시장도 보지 않았고 능도 보지 않았다.
이윽고 경주시가를 통과할 무렵에야 영림은 얼굴을 들고 창 밖을 내다보았 다.
『쓸쓸한 거리예요.』
『쓸쓸한 것이 고도(古都)의 정취지.』
『칸나의 영혼처럼 쓸쓸하군요.』
『칸나가 왜 쓸쓸할까?』
『아마도 선생님의 본을 따는가 봐요.』
『내가…… 내가 언제 쓸쓸해 했어?』
영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운은 가정을 생각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마음이 갑자기 어두워 졌다. 그 어두운 마음을 영림은 재빨리 계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유행가처럼 사랑했다고 느끼는 데 칸나의 의욕과 정열은 이미 감상과 애수의 모체(母體)로서 변모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저 돌무더기, 기와장 무더기…… 아, 저 능 좀 봐요. 우뚝 우뚝……
하나, 둘, 셋 넷……』
경주 시가를 차는 빠져 나오고 있었다.
『아까 보라니까 안 보고……』
『지금도 늦지 않아요. 여학생 때 한 번 왔었으니까요. 아 저것이 첨성대 (瞻星臺)죠?』
쓰러질 것처럼 한 쪽으로 기울어진 첨성대가 창 밖으로 휘 날아 갔다.
『저기 보이는 저 구름이 계림(鷄林)이구.』
『조그만 더 가면 안압지(雁鴨池)라는 못이 있죠.』
『기억력이 그만인 걸.』
이윽고 왼쪽으로 안압지가 바라다보였다. 집 한 채가 물 가에 둥실 떠 있 었다.
사십리 길인 불국사에는 반 시간도 못 돼서 들어 닿았다. 석운도 영림도 두 번째 보는 불국사였다.
울창한 수목이 대웅전 앞마당에 솟아 있었다. 사람들이 희뜩희뜩 나무 사 이를 꿰다니고 있었다.
신라호텔은 양실이 없다고 해서 철도호텔에 둘이는 들었다.
뒷뜰에 면한 단층 방이다. 소파가 있고 침대가 있었다. 뒷뜰이 곧 남향이 다. 높고 낮은 산줄기와 구름이 멀리 가까이 묵화처럼 아련했다.
『조용해서 좋아.』
푸른 그늘이 방안에 범람해 있었다.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해요. 영림이 먼저 들어갔다 나와.』
『레디 훠스트니까.』
『여자란 떠받쳐 주면 좋아한다니까.』
『흥.』
영림은 불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었다. 양말도 벗어 던져다. 대구에서 산 파 자마를 슬리퍼 위에 덧입으며,
『연애 시절에는 레디 훠스트지만 결혼만 하고 나면 젠틀맨 훠스트라죠?』
『나만은 달라.』
『그렇지만 나 선생님과 결혼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타월과 비누를 들고 방을 나서려는 영림을 향하여,
『잊은 것 뭐 없어?』
『뭐?』
핸들을 쥐고 영림은 돌아섰다.
『정열의 퇴각이다. 레디 훠스트가 젠틀맨 훠스트로 변모를 하는 것과 마 찬가지의 의미에서……』
『아, 선생님, 용서, 용서…… 그만 깜짝……』
영림은 달려와서 입술을 주었다.
『에스큐스 미! 그렇지만 선생님, 사람에게는 망각의 기능이 있다는 걸 이 해하셔야지.』
『망각의 기능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정열도 휴식이 필요했던가.』
『어마?』
영림은 민감하게 눈썹을 추키면,
『그건 일종의 세타이어(諷刺)가 분명한데……』
『정열의 퇴각은 망각의 기능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시간이 흘러간 뭇 애 인들은 어수선한 머리에 손질할 것을 망각했고 흐트러진 앞자락을 여밀 줄 을 몰랐다. 여자의 저고리 동정과 남자의 넥타이에 때가 꾀죄죄 해도 이미 관심은 없다. 여자는 레디 훠스트를 요청했고 남자는 젠틀맨 훠스트를 강요 했다. 오오, 간만(于滿)의 조수와도 같은 정열의 역사여!』
『그건 너무해요. 슬퍼요.』
『아냐 아냐. 내가 작가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 묘사해 본 것 뿐이야.』
『풍자는 애정의 순수성을 모독하는 거예요. 제게 잘못이 있음 왜 솔직하 게 말씀해 주시지 않고.』
『알았어. 인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자아, 빨리 들어갔다 나와 서 식사를 해요 아주 전망이 좋은 식당이야.』
석운은 그러면서 영림을 다시 한 번 안아 주었다.
둘이는 목욕을 하고 식당으로 나갔다. 앞이 탁 터진 전망실이기도 했다.
손님이 두셋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석운과 영림은 다 같이 식욕을 잃고 있었 다. 일품 요리도 영림에게는 겨워 절반이나 남겼다. 한참 동안 휴식을 즐긴 둘이는 호텔을 나와 불국사 경내로 들어갔다.
울창한 수목 사이로 백운교(白雲橋)와 청운교(靑雲橋)가 구름다리처럼 빗 비슴히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선생님과 이런 데를 이렇게 돼서 올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도 몰랐지.』
『가끔 공상은 해 봤지만요.』
『무슨 공상을?』
『선생님과 어떻게 알게 되어서 여기 저기로 여행을 하는 공상,』
『공상으로 그쳤으면 더욱 아름다웠지. 현실은 추하니까.』
『추할는지 모르지만, 추한 것이 인간이지만 현실의 뿌리 없는 아름다움은 부평초처럼 서글퍼요.』
그러한 서글픔을 영림은 올케 한혜련에게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토함산(吐含山)의 영기(靈氣)와 신라의 슬기로운 넋이 둘이의 폐부 깊이 숨어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석운의 손길을 어린애처럼 부여잡고 올라가며 백운교의 계단을 영림은 셈 하고 있었다.
『열 일곱이예요.』
다음에는 또 청운교의 계단을 세었다.
『열 다섯, 둘이 적어요.』
『커다란 어린애 같애. 어린애들은 층계를 곧잘 세어 보지.』
『아냐요, 선생님의 기억을 위해서 일부러 세어 드린 거예요.』
『내 기억을 위해서라고?』
『그럼요, 이 다음에 소설을 쓰실 때나 또 저와 함께 불국사 여행을 온 기 행문을 쓰실 때는 꼭 필요하실 테니까요. 열 일곱과 열 다섯! 잊으심 안 돼 요.』
『음, 열 일곱과 열 다섯!』
『그때는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석운은 얼른 영림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말처럼 영림의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영림은 왜 그런 말을 할까?』
『결과가 뻔하니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송준오씨의 말이 모두가 다 어리지만 한 마디만은 어리지 않았죠.』
『무슨 말인데?』
『저번 날 축하 파티 때, 미스터 송이 저에게 한 말이 있어요. 선생님과 교제를 하지 말라고, 가정을 가진 사람은 결국에 있어서는 가정으로 돌아간 다고요.』
『음………』
『그렇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가정으로 돌아가실 때 까지는 선생님을 붙들고 있고 싶었으니까요. 선생님이 성실한 분이면 분일 수록 가정으로 돌아가시는 시일이 빠를 줄도 알아요.』
『…………』
『이 며칠 동안 선생님은 저 몰래 가정을 많이 생각하고 계시는 줄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이제 가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몸이야. 죽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
둘이는 자하문(紫霞門)을 들어섰다. 대웅전 앞 뜰에 사양이 눈부시다. 시 골 아낙네들이 한 무더기 참배를 하고 있었다.
『저게 다보탑(多寶塔)이야.』
석운은 오른쪽을 가리켰다.
『선생님, 죽는다는 것 생각해 보신 적이 계세요?』
『저게 무영탑(無影塔)이고……』
석운은 왼쪽을 또 가리켰다.
『…………』
영림은 잠자코 있었다.
무영탑 앞으로 둘이는 걸어갔다. 잠자코 걸어갔다.
서울을 등진지 십 여일, 처음에는 침묵이라는 것을 둘이는 모르고 지냈다.
그런던 것이 얼마 전부터 침묵이라는 방문객이 정열의 틈서리를 헤치며 파 고 들어왔다.
『선생님, 무얼 생각하세요?』
『영림, 무슨 생각을 하나?』
이런 대화를 가끔 바꾸게 되었다. 침묵은 정열의 휴계소이기도 했지마는 정열의 계산기이기도 했다.
『이게 아사녀(阿斯女)의 비극을 만들어 낸 탑이야.』
무영탑을 쳐다보며 석운은 말했다.
『아사녀?』
영림은 무영탑의 전설을 모르고 있었다.
『이 탑을 세울 때, 당(唐)나라에서 유명한 석공(石工)을 초청해 왔었는데 그 석공의 아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길래 멀리 이 신라 땅까지 남편을 찾아 왔었대.』
『어마, 당나라에서요?』
영림은 비로소 침묵을 깨뜨렸다.
『응, 수년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보려고 공사장인 여기까지 찾아왔으나 여자는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이 불국사 경내 에는 통 들어서지를 못하게 했대요.』
『그래서요?』
영림의 호기심이 차차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편단심 사모하는 남편을 보려고 수천리 길을 찾아온 아사녀를 가상히 여긴 일군들이 아사녀를 불쌍히 여기고 하는 말이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절 대로 못 만날테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못 하나가 있다고 하면서, 탑이 준공되면 그 탑 그림자가 그 못에 비칠 거라고, 그러니까 그리로 가서 그림 자가 비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대.』
『옛날 같은 전설이예요.』
『전설 같은 옛말이지.』
『그래서 물론 기다렸겠죠?』
『암, 워낙이 열녀 같은 현모양처니까 못 가로 가서 기다렸지. 그러나 원 체 심혈을 기울여서 세우는 탑인지라 좀처럼 탑 그림자는 비치지를 않고 아 사녀는 그만 너무도 기가 막혀서 못에 빠져 죽었어.』
『…………』
영림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석운의 이야기가 어느덧 열을 띠어 왔기 때문 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서울에 두고온 부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 다.
『탑이 다 준공되었을 때야 비로소 석공은 일군들의 입으로 부터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가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어. 그러나 석공이 허둥지둥 못으로 달 려가 보았을 때는 이미 아사녀는 물귀신이 된지 오래였고고 아사녀가 신고 있던 신 한 짝이 못가에 남아 있었지. 아아, 아사녀, 아사녀…… 하고 미친 듯이 부르짖기를 얼맛동안 하다가 석공도 마침내 아내의 뒤를 따라 물에 빠 져 죽었다고…… 그래서 그 못을 영지(影池)라고 불렀고 이 석가탑을 무영 탑이라고 불러 왔다는 거야. 어때 재미 있지?』
『재미 있군요.』
대답이 신통치 않아 석운은 영림을 불현듯 돌아다보았다.
그랬더니 영림은 방그레 웃으며,
『그 석공은 자기의 예술을 위하여 아내를 잃었지만 선생님은……』
『영림을 위해서 아내와 예술을 깡그리 버렸어.』
『가요, 저리로 해서 이제 내려가요.』
범종각(梵鍾閣)을 거쳐 극락전(極樂殿)으로 내려갔다. 마당의 석탑들을 보 는 둥 마는 둥 둘이는 총총히 호텔로 돌아왔다.
영림은 확실히 우울해 있었고 무영탑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석운은 금방금 방 아사녀의 정성을 지닌 아내 옥영의 절망적이 심정을 헤아려 보며 한 사 람의 인간이 과연 한 사람의 인간을 그처럼 학대해도 무방할 자격과 권리가 있을 까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호텔 손님들은 석굴암(石窟庵)에 올라간다 고 새벽 네시쯤부터 일어나서 서둘러댔다. 동해 바다에서 해 뜨는 것을 봐 야만 석굴암을 올라갔던 보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운과 영림은 석굴암에 올라갈 생각은 통 안 하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씩 올라갔던 것을 둘이가 다 구실로 삼고 있었으나 기실은 십리가 되 는 가파른 오르막 길이 체격으로나 둘이에게는 고통이 되리만큼 지쳐 있었 던 것이다.
『숙소를 옮겨야겠어. 좀 더 값싼 여관으로.』
나흘째 잡히는 날 입에 담기 싫던 한 마디를 석운은 마침내 담고야 말았 다.
그때 영림은 침대에 누워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영림도 돈이 떨어 져 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싫어요. 그런 어둑컴컴한 여관 방은.』
『싫으면 어떡하나?』
석운은 소파에 길다랗게 누워서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 잡쳐요. 처음부터 여관에 들었음 모르지만 누가봄 호텔에서 쫓겨나 가는 줄로 알텐데……』
『그래도 하는 수 없지 않아?』
『제 이어링과 넥크레스 팔아요. 이 시계도……』
『시계는 내게도 있어.』
『그걸 다 팔면 며칠 더 묵을 수 있잖아요.』
『여기서는 팔 수 없고, 경주엘 나가야겠는데……』
『…………』
『경주 구경도 할겸 같이 나가 볼까?』
『선생님, 혼자 나갔다 오세요. 전 고단해서 좀 누워 있겠어요.』
『그래?』
석운은 담배를 푹푹 피우며 여자의 귀걸이와 목걸이를 들고 금방을 드나드 는 자기의 모습을 쓴 웃음과 함께 상상했다.
이런 경우가 만일 옥영이었더라면 여자의 소지품을 들고 금방엘 드나드는 남편의 꼬락서니를 생각해서라도 침대에 누워 있을 사람과 경주로 나가는 사람의 위치는 바뀌어졌을 것이다.
『그럼 혼자 나갔다 오지.』
석운은 훌쩍 소파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는데,
『선생님 오래 있지 말고 곧 돌아오세요.』
『응.』
『혼자서 쓸쓸해요.』
『무얼 잠시 동안……』
『선생님은 그래 저와 떨어져 있어도 쓸쓸하지 않으세요?』
『커다란 어린애! 칸나의 지성은 다 어디로 갔나?』
『선생님이 홀딱 다 마셔 버렸지.』
『요것이 사람을 막 녹여!』
석운은 휙 하고 침대로 달려오자 영림의 얼굴을 마구 덮었다.
『어마, 선생님 샤쓰 깃에 입술 자욱이……』
거칠은 포옹이 저지른 실수…… 석운의 샤쓰 깃 앞 자락에 화판처럼 빨간 입술 꽃이 피어 있었다.
『이 일을 어쩌나? 새것은 이것 밖에 없는데.』
『다른 걸 줘요.』
『다른 것은 없어요. 두개 다 입다가 벗어 놓은 건데요.』
영림은 침대에서 내려와 보스톤 백을 열었다. 꼬기꼬기 뭉쳐서 틀어 박아 둔 샤쓰 두개가 나왔다. 옥영이었더라면 오늘날로 세탁소에 내 주었을 것이 요, 지금쯤은 빳빳이 다려져 있었을 것이다.
『다른 걸 하나 사 입고 오세요.』
『여자의 귀걸이까지 팔아 먹는 신센데 무슨 돈이 있어서.』
『아이, 너무 돈 돈 하지 마세요. 사람이 돈을 써야지, 돈이 사람을 쓰게 됨 어떻게 해요?』
『흥, 좋은 말이긴 좋은 말인데……』
석운은 입었던 샤쓰를 벗고 꼬기꼬기 더럽혀진 것으로 갈아 입었다.
『시계는 내것을 팔 테니까, 하나는 있어야지.』
귀걸이와 목걸이만을 주머니에 넣고 영림의 조그만 시계는 도로 내주었다.
『그럼 다녀 올께.』
석운은 총총히 호텔을 나섰다.
女性[여성]의 宿命[숙명]
[편집]그 무렵 중앙 문단에서는 유혹의 강을 이유 없이 중단하고 갑자기 자취를 감추어버린 작가 강석운에 관한 스캔들이 날개가 돋힌 듯이 퍼져 나가고 있 었다.
강석운이가 어떤 젊은 여자와 대구시가를 방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 람이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그 젊은 여성은 학생이라는 이도 있었고, 모 유부녀라는 이도 있었고, 땐서라는 사람도 있었다.
부인 김옥영 여사도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정 낙원설의 제창자 강석운은 이리하여 드디어 실락원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강석운을 중상하려는 패들은 이와같은 사실에다 가지 가지의 추잡한 스캔 들을 그럴 듯하니 덧붙여서 퍼뜨려 놓았고 강석운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모 주간지에서는 유혹의 강」의 중단과 작가 강석운의 애욕행각을 까십 풍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럭 적럭 하여 강석운의 애욕의 도피행은 문단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행인지 불행인지 안국동 김박사 부인 오신 정 여사도 모환자에게서 이런 사실을 얻어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신정 여사는 옥영의 남편 강석운이가 집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을 뿐, 서울을 떠나 멀리 대구 시가를 방황하고 있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옥영도 마찬가지였다.
오신정 여사는 사실을 옥영에게 알리기 전에 우선 혜화동을 방문하여 소문 의 진위를 알아볼 필요를 느꼈다.
오여사가 부랴부랴 혜화동 옥영의 집을 방문한 것은 오후 한 시가 넘었을 때였다. 강교수는 정릉 집이 비어서 그리로 나가 있었고, 강교수 부인이 혜 숙이를 데리고 외로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큰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서 돌 아오지 않았다.
강교수 부인의 입에서 오여사는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옥영이가 집을 나간 이튼날 강석운은 편지 한 장을 띄워 놓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과 강석운이가 대구 시가를 방황한다는 소문도 신문사 송기자에게서 얻 어 듣고 집안에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경숙이가 참다 못해서 마침내 돌아올 줄 모르는 아버 지와 어머니에게 대한 편지를 써 가지고 K신문사 송기자를 찾아갔다는 것이 었다.
『그게 언젭니까?』
『이 삼일 전이랍니다. 이왕 세상이 죄 아는 일이니 숨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그 애도 제 어미 성미를 닮아서 무척 뾰족한 데가 있지요.』
강교수 부인은 혜숙을 무릎 위에 안아 올리며 조용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래 경숙의 편지가 언제쯤 신문에 난답니까?』
『글쎄, 그런 건 잘 모르지만……』
『할머니, 이 편지는 제가 잠깐 빌려 갖고 가겠어요. 곧 가져 올 테니까 요.』
옥영한테 보낸 강석운의 편지였다.
『그러시오. 그런데 애 어미가 정말 어디 있는지 모르시오?』
『할머니, 걱정 마세요. 옥영이가 있는 데를 제가 잘 알아요.』
『그러셔요.』
강교수 부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얼굴을 했다.
『혜숙아, 이제 엄마를 데려다 줄게. 참 혜숙인 얌전도하지.』
『엄마 죽지 않았나?』
『애도, 죽긴 왜 죽어? 혜숙이가 이처럼 이쁜데……』
혜숙의 머리를 한 번 쓸어 보고 오여사는 황황히 몸을 일으키었다.
『혜숙이 하나만이라도 데리고 나올 걸.』
날이 갈수록 옥영은 아이들 생각이 골똘히 사무쳐 왔다. 혜숙은 막내 아이 라서 남편이 제일 귀여워 했다. 아버지만 있으면 혜숙은 어머니가 없어도 과히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할머니도 따르는 혜숙이었기에 홀몸으 로 나온 옥영이었지만……
『이래서 남편을 잃은 아낙네들이 가정을 지키게 되는지도 몰라.』
남편에 대한 체념이 차차 생기면서 부터 옥영의 모성애가 점점 강렬하게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을 위해서 남 몰래 흘리던 눈물이 날 이 갈수록 아이들을 위해서 옥영은 흘리게 되었다.
아이들만을 위해서도 살아 갈 수 있는 체념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는 옥영 이었다. 조석으로 남편의 얼굴을 대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서 오늘 내일 하면 서 옥영은 그냥 삼청동에 주저 앉아 있었다.
모성애로서 아내들을 가정에 동여매 두도록 만들어 준 조물주의 사상이 그 지 없이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 무한히 고맙기도 했다. 이 모성애마저 아내 들에게 없었던들 무엇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갈 것이냐고, 뭇 아내들이 그렇 게 하듯이 옥영도 결국은 한 사람의 평범한 여성으로서 아이들을 기르는데 삶의 이유 같은 것을 발견하고 있었고 또한 발견하려고 노력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의 숙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성들의 숙명일 뿐 여성들의 기원은 아닐 것 이라고 그 떠맡겨진 대의명분 속에서 자기의 참다운 삶의 자세는 여전히 발 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영림! 나의 행복을 송두리째 뽑아 버린 고영림!』
처음에는 고영림보다도 남편을 탓했던 옥영이가 오늘에 와서는 남편보다 고영림을 좀 더 탓하는 심정이 되어가고 있었다.
옥영은 석양 볕에 내려 쪼이는 화단을 멍하니 내다보며 지난 날 남편을 찾 아 와서 방글거리던 영림의 얼굴과 그래도 가 봐야겠고, 종시 나가 버리던 남편의 최후의 얼굴 모습이 축 늘어진 봉선화 무더기 위에서 주마등처럼 빙 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이윽고 화단이 차차 번져지고 주마등이 갑자기 뭉그러졌다. 눈물이 주루루 옥영의 볼을 스쳤다. 옥영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비쭉비쭉 어린애들처럼 보기 흉하게 이그러지려던 입술이었다.
울어서는 안 된다고 울었댔자 별 수 있느냐고 자기 불행의 증언(證言)과도 같은 눈물이기에 아무도 보지 않는 잠자리에서 까지 기를 쓰고 막아 온 눈 물이었다.
자기의 불행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동정 받고 싶지 않았기에 불행의 목격자요 불행의 동정자인 눈물은 옥영에게 있어서 위안이 되기 전에 자학(自虐)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래서 피가 나도록 꼭 깨물어 댄 입술이었으나 옥영의 눈물은 마침내 옥 영의 입술을 적시고야 말았다.
『변함 없이 영영 같이 살다가 죽자던 당신이……』
아무리 깨물어도 입술은 마침내 불쭉비쭉 이그러져 갔다. 조수처럼 흐느낌 이 밀려 나왔다.
옥영이가 방문을 닫는데
『사모님, 좀 건너 오세요. 쓸쓸해서 못 견디겠어요.』
안방에서 혜련의 목소리가 응석을 하듯이 흘러 나왔다.
며칠 전부터 또 다시 자리에 누워버린 혜련의 병세였다. 이번에는 정말 죽 을 것만 같다고, 혜련은 옥영을 언니처럼 모시기도 했고 언니처럼 어리광도 부렸다.
『그래요, 이제 건너갈 게요.』
옥영의 대답은 젖어 있었다.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간단히 고치고 옥영은 안방으로 건너 갔다. 혜련의 어머니는 건너방에서 재봉을 하고 있었다. 더운 날이었다.
『덥죠, 사모님?』
혜련은 누운 채로 머리맡에서 부채를 집어 옥영에게 권했다.
『그래도 어제보담 좀 난 것 같아요.』
옥영은 권하는 대로 부채를 들며
『각혈을 해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해요.』
『항상 그런 걸요.』
『걱정이예요.』
『걱정…… 저 정말 아무런 걱정도 없어요. 이렇게 사모님과 조용히 이야 기하다가 덜컥 숨이 끊어져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정말 한이 없을 것 같 아요.』
혜련은 그러면서 빙그레 웃었다.
『아이 혜련씨도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죽긴 왜 죽어요?』
옥영은 헤련이가 측은하여 견딜 수 없었다.
『어머니, 뭐 없어요? 사모님이 건너오셨어요.』
혜련은 건너방에서 재봉을 하는 어머니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아이 그만 두세요, 내 걱정은……』
그러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래 내 화채를 만들어 줄게.』
재봉틀 소리가 멎으며 어머니가 방을 나섰다.
『밤낮 얻어만 먹고 아이 부끄러워요.』
『원 무슨, 뭘 대접한 것이 있어야죠. 사모님만 옆에 있으면 그 애는 항상 마음이 편하답니다.』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어머니의 말이다.
『아이 참, 제가 말동무나 했지, 뭐 해 드린게 있나요?』
『그 애는 어렸을 적부터 강선생님의 소설이라면 죽을 둥 살 둥이었답니 다. 돌구름 돌구름하면서 원산해수욕장에서 한 번 보 선생님인데 글쎄 어쩌 면 그렇게 따르는지……』
『아이, 어머니도! 따르긴 누가 따른댔어요?』
어머니의 말을 욱박지르는 혜련의 창백한 두 볼에 핏기가 홱 떠올랐다.
『어머니는 참 주책도 없으셔.』
『그럼 어떠세요.』
옥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독자가 한 둘 뿐이냐고 남편의 수 많은 여성 독자들을 불현듯 머리에 그려 보며 무심 중 그대로 넘겨 보내려다가 후딱 기억을 새롭힌 것이 꽃봉투였다.
(혹시 그 꽃봉투의 발신인이 이 한혜련이가 아닐까?) 고영림의 필적은 분명히 아니었다.
《선생님은 항상 제 금심(琴心)에 살아 계시오며, 이렇게 일년에 두 차례씩……글월을 올릴 수 있는 행복만이 제 삶의 보람인가 하옵니다. 금심(琴心)은 조용히 올림》
옥영은 언제나 판에 박은 듯이 꼭 같은 꽃봉투의 글월을 생각했다. 혜련의 별명이 혹시 금심(琴心)이 아닐까?
(금심이란 거문고의 마음이라는 뜻인데……) 그러다가 옥영은 돌연 (가만 있어! 그이는 그때 혜련에게 봉선화의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다지 않 아? 피리를 부는 학녀와 거문고를 타는 봉선이의 이야기…… 그러니까 거문 고의 마음은 곧 봉선이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봉선이의 서글픈 심정을 한혜련은 남편에게 대해서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후딱 바라본 옥영이었으며, 그래서 또 후딱 눈을 감고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혜련인지도 몰랐다.
옥영은 갑자기 혜련의 필적이 보고 싶어졌다.
사과와 도마도를 썰어 넣고 어머니가 화채를 만들어 왔다. 어머니는 도로 건너가서 재봉틀에 올라 앉았고 혜련은 일어나 앉아서 옥영과 같이 화채를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혜련의 필적을 볼 도리가 없고 심심 풀이인 것처럼 옥영 은 책상에 꽃힌 잡지나 소설책 같은 것을 여러 권 뽑아 가지고 뒤적거리고 보았으나 혜련의 필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모님!』
한참 동안 잠자코 앉았던 혜련이가 잡지를 뒤적거리는 옥영을 조용히 불렀 다.
『네?』
옥영은 시선을 들었다.
『이 다음…… 그게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은 일이 지만요 제가 죽을 때, 사모님을 보고 싶다면 사모님, 와 주시겠어요?』
쓸쓸한 미소와 함께 혜련은 옥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말만 자꾸 하세요?』
옥영은 잡지를 가만히 접어 놓았다.
『왜 그런지, 사모님의 손을 꼭 쥐고 죽고 싶어요.』
『언제든지…… 그야 언제든지 뛰어 오겠지만……』
『정말이세요?』
『내가 왜 혜련씨에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나 같은 걸 다 언니처럼 믿고 따라 주는 혜련씬데.』
『사모님, 정말 꼭 와 주셔야 해요.』
『글쎄 꼭 온대도 그러셔.』
옥영은 한 걸음 다가앉으며 혜련의 손길을 끌어다 잡았다.
『사모님, 약속!』
혜련은 옥영의 새끼 손가락에다 자기의 핏기 없는 새하얀 새끼 손가락으로 깍지를 꼈다 옥영도 힘껏 손가락에 힘을 주며
『봉선화가 어쩍면 이렇게 곱게 들었을까?』
깍지를 낀 혜련의 새끼 손가락을 옥영은 들여다보며
『봉선화꽃 좋아하세요?』
혜련은 웃는 낯으로 어린애처럼 끄덕끄덕 했다.
『오오, 그래서 봉선화를 저렇게 많이 심으셨군.』
『사모님은 봉선화 좋아 안 하세요?』
『왜 안 좋아해요.』
『봉선화의 전설을 제가 들은 건 선생님한테서예요.』
『아, 옛날…… 원산 송도원에서요』
『네,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아이, 봉선이가 가엾어서 죽을 뻔했어요.
슬퍼서 자꾸만 울었지요.』
『참 서글픈 전설이예요. 거문고 소리가 나지만 않았으면.』
옥영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그러기에 말이예요. 사람의 운명이란 정말 모를 일이라구, 그때는 어린 마음에 먼저 와서 피리를 불던 학녀가 어찌나 미운지.』
『그랬었어요?』
『그럼요, 피리나 거문고나 마찬가지 악긴데 하나는 소리가 높고 하나는 소리가 낮았을 뿐이지, 두 처녀의 정성이야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피리를 부는 마음이나 거문고를 타는 마음이나 똑 같을 텐데……』
옥영은 언뜻 생각이 나서
『그럼요. 학녀의 적심(笛心)이나 봉선이의 금심(琴心)이나 마찬가지죠.』
금심이라는 말을 옥영은 일부러 썼다.
순간, 깍지를 낀 혜련의 손길이 잘게 경련을 일으켰다. 혜련의 시선이 옥 영의 표정을 후딱 살펴보다가 오들오들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혜련은 깍지 를 풀고 화단을 내다보았다. 옥영은 이제 모든 것을 안 것 같았다.
여기에도 또 자기의 남편을 극진히 생각하는 여인이 있었더냐고, 꽃봉투의 주인공인 금심을 한혜련이라고 단정하는 순간, 늘상 그러하던 것처럼 그 어 떤 불안 같은 것을 희미하게 느끼면서도 옥영은 한혜련의 그 지극한 정성에 눈물겨운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자기의 손길을 아니 자기의 손길이나마 꼭 붙잡고 죽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혜련의 서글픈 심정을 가만히 생각해 보며
『혜련씨의 말마따나 모든 것이다. 숙명인가 봐요. 학녀의 행복도 봉선이 의 불행도……』
『그런가 봐요. 그렇지만 봉선이의 불행이 없었던들 그처럼 아름다운 봉선 화의 전설은 생기지 않았을 거 아냐요?』
『봉선화의 전설을 무척 좋아하시나봐요.』
『정말 좋아요. 손톱이 벗겨져서 피가 나도록 거문고를 탓지요. 그리고는 죽었지요. 아무 말도 없이 봉선이는 죽었지요.』
아무 말도 없이 혜련도 죽을 것이라고 고영림의 의욕과는 딴판인 한혜련의 기라처럼 예쁘고 호수처럼 조용한 애정의 자세를 옥영은 그지없이 다사롭게 여기고 있었다.
『옥영이 어디 갔어?』
말을 잃고 두 여인이 조용히 앉아 있는데 오 신정 여사의 목소리가 대문을 들어서며 뜰 아랫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언니, 나 여기 있어요.』
『사모님 좀 들어오세요.』
옥영과 혜련이가 오신정 여사를 맞아 들이는데 혜련 어머니가 건너방 재봉 틀에서 일어서며,
『아니, 이 더위에…… 그렇지 않아도 저녁 무렵쯤 치마가 다 될 것 같아 서 갓구 갈려던 참인데…… 어서 좀 올라 오셔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오신정 여사는 안방으로 들어서며
『일어나 앉았구먼, 좀 어떤가?』
『괜찮아요. 어서 사모님 좀 앉으세요.』
혜련은 자리를 권했다. 오여사는 털썩 주저앉으며
『환자 둘이 마주 앉아 있는 풍경이 그럴 듯하구먼. 아이 더워!』
옥영은 부채를 쥐어 주며
『이 더위에 어떻게 왔어요?』
『글쎄 병쟁이 노릇을 잘 하는지 알아 보러 왔다니까.』
옥영과 헤련은 조용히 웃었다. 웃으면서 옥영은
『병쟁이 노릇 인제 안 해도 무방하게 됐어요. 혜련씨가 날 알아보는 걸.』
『그래? 탄로났구먼.』
어머니가 또 화채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아이, 고맙구먼요. 목이 말라.』
오여사는 그릇째 들고 벌컥 벌컥 마셔 댔다.
『천천히 앉아 노세요.』
어머니는 이내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좋은 어머님이야.』
그러다가 오여사는 옥영을 향하여
『야, 너 빨랑빨랑 집에 들어가야겠드라. 집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네 남 편인데 인제 가 보니까 꿩 구어 먹은 자리야.』
『…………』
『네가 집을 나온 그날 밤부터 여태껏 안 들어왔다는 거야. 소문을 들으니 영림인가 뭔가를 데리고 팔도 강산 유람을 떠났대나. 대구에서 본 사람이 있대. 모 주간지에 까십까지 나리만큼 모두들 알고 있는데 너 혼자 맨꽁무 니로 이렇게 앉아 있어도 되겠느냐 말이야』
『대구엘 갔더래요?』
『잘 되지 않았어? 보기 싫은 사람이 없어졌으니 빨랑빨랑 집으로 들어가 거라. 혜숙인 엄마가 죽은 줄로 알고 있더라.』
『할머니, 안 와 있어요?』
『왜 안 와 있겠니? 아들 며느리가 하루 저녁에 없어졌는데.』
옥영이가 발딱 일어섰다.
『왜 이리 질겁이냐?』
『언니나 집에 가겠어!』
울먹울먹 하고 섰는 옥영의 손목을 끌어 앉히며
『이야기나 듣고 가야지. 이것 좀 읽어 보구……』
석운의 편지를 오여사는 내놨다.
남편의 편지를 읽고 난 옥영에게 오여사는 그의 독특한 변설로 추켰다 하 면서 한참 수선을 떨다가 핸드백에서 신문 한 장을 끄집어냈다.
『이것 좀 읽어 봐라.』
그것은 가도 판매의 K신문이었다. 사회면 사단 제목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게 호소하는 경숙이의 편지였다. 경숙이의 사진도 났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오시라── 작가 강석운씨의 장녀 경숙양의 절절한 호소문──》
이러한 제목의 글이었다.
『흥, 아버지 어머니가 유달리들 똑똑하더니만 부모의 가르침을 본받았는 지 경숙이도 무섭게 똑똑하더라 얘.』
오신정 여사는 여전히 빙글거리고 있었다.
옥영은 신문을 펴 들었다.
기사는 매우 온건하였다. 소설 게재 관계도 있고 하여 강석운의 인신 공격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 작가 강석운의 오늘의 행동을 진지한 태도로써 취 급하고 있었다. 「유혹의 강의 작가로서 작품과 작가의 행동성과의 관련 문 제로 한 보도 기사였다. 강석운의 행동에 대한 진지한 세평을 요망한다는 간단한 앞말과 함께 경숙이의 호소문을 좀 더 중대히 취급하고 있었다.
《사실 경숙양의 호소문 가운데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새로이 움트고 있는 현대적인 윤리 관계가 다분히 암시 되어 있었다. 자식의 눈에 비쳐진 부모 의 행동이 신랄하게 비판되고 있는데 오늘의 새로운 윤리관이 형성되고 있 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모랄은 이미 그들 틴에이저(十代)의 소녀들의 생리 화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아닐까 한다.》
이것이 기사 앞 말의 한 대목이었으며 경숙의 호소문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그립습니다. 밀물이 갑자기 찌듯이 하루 저녁에 저희들 눈앞에서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 허황한 꿈결처럼 사라져 간 아버지와 어머니, 집안은 일 순간에 폐허처럼 쓸쓸하고 어둡고, 무더운 날씨이거만 찬바람만 불고 있는 가정으로 돌변했읍니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는 아버지와 어머 니를 찾았고 그러다가는 시무룩해서 벽을 향하여 슬며시 돌아 누워서는 소 리없이 웁니다. 처음에는 소리를 내서 훌쩍훌쩍 울었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절대로 울음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제가 울지 못하게 했읍니다. 울기만 하 면 무작정 제가 욕을 했읍니다. 커다란 자식이 뭐냐고, 도현이가 울 때는 쥐어 박기도 했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인 아이들을 제가 함부로 욕지거리를 하고 쥐어 박 을 권리가 제게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 니는 이미 아이들을 버렸기 때문에 저희들은 응당 부모를 잃은 고아일 수 밖에 없읍니다. 따라서 부모가 팽개치고 간 권리와 의무가 제게로 돌아온 것 같아서 욕도하고 쥐어 박기도 했읍니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 각했기 때문에 절대로 울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서 울어 주지 않는 것을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울 필요가 없다고 저는 생각했 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 봐도 그 젊은 여자 하나의 사랑 만 못해서 가정을 버리고 나갔읍니다. 어머니는 저희들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 봐도 아버지 하나의 사랑만 못해서 집을 나갔읍니다. 이러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서 저희들이 울어야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죽어도 울 지를 않으렵니다. 어느 누구든지 우는 자식을 보기만 하면 경숙은 마구 갈 겨 줄텝니다. 울기 전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먹고 살아야 합니다. 고아 라도 모두가 다 죽지는 않습니다. 경숙은 반드시 살아 보일 테예요. 아버지 와 어머니가 없어도 동생들을 훌륭하게 키워 보일 테예요.》
옥영은 더 읽어 나갈 기력을 잃고 와락 신문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세계가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니의 세계가 있듯이 저희들은 또 저희들의 세계가 있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읍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저의 생각이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순간, 저는 그지 없이 허무했고 쓸펏읍니다.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모두가 다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저는 보았읍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 해야 한다는 학교 교단에서 들은 말이 얼마나 공소한 교훈인지도 이제는 절 실히 알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 아버지와 제 어머니 만은 그렇지 않을 줄 로 믿고 있던 저희들의 긍지는 무너졌읍니다.
나쁜 아버지와 무정한 어머니! 어머니의 슬픔과 절망은 저도 잘 알 것 같 아요. 그래서 저는 나이는 어리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무척 동정은 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들까지 내버리고 집을 나간다는 것은 너 무 해요. 아버지는 원체 나쁜 아버지니까 말할 나위도 없지만 어머니까지 저희들을 버리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머니, 어서 돌아오세요. 아버지 없는 가정이지만 우리 사남매는 열심히 어머니를 모시겠읍니다. 그리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그처럼 소중히 여기시 던 이 가정을 영영 버리시겠읍니까? 그렇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정 돌아 오기가 싫으시다면 안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우리 사남매는 기어이 살아 가 겠읍니다.》
옥영은 신문을 접어 쥐며 홱 일어섰다.
『신정 언니, 나 집에 가겠어!』
옥영은 울고 있었다.
『잘 생각했어. 필시 그럴 것 같아서 택시를 돌려 보내지 않고 골목 밖에 세워 두었지.』
『혜련씨, 다시 찾아 뵙겠어요.』
『사모님, 어서 돌아가 보셔야겠어요.』
옥영은 건너방으로 들어가서
『어머니, 신세 많이 졌어요.』
『어머나, 어떻게 그처럼 갑자기?』
혜련 어머니는 재봉틀에서 훌쩍 일어섰다.
『옥영이의 속앓이 병이 다 낫나봐요.』
오신정 여사가 그런 말을 하면서 뜰아랫방으로 들어가서 옥영이가 쓰던 자 실구레한 도구와 이부자리를 꾸려가지고 나왔다.
혜련과 어머니는 골목 밖까지 따라 나와서 친절한 전송을 했다.
『혜련씨, 어서 들어가서 누워 있어요.』
오여사와 함께 옥영은 차에 올랐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가 없구만. 그래도 그처럼 부랴부랴 떠날 줄은 모르고.』
헤련의 어머니는 여전히 어리벙벙해 있었다.
『노인네는 모르시는 편이 좋아요.』
오여사는 유쾌히 웃었다.
『그렇지만 혜련이가 오죽이나 서운해 할라고.』
『혜련씨, 몸 조리 잘 하세요.』
옥영은 눈물을 씻으면서 말했다.
『사모님도……』
혜련은 말끄러미 옥영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사모님, 종종 들러 주세요.』
옥영은 혜련의 손길을 한 번 잡아보며
『들리고 말고요. 너무 마음 약하게 가지지 말고 희망을 품어야 해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차가 저만큼 서 커브를 하여 보이지 않을 무렵까지 혜련 모녀는 골목 어귀 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안국동 병원에 들러 이부자리를 내려 놓고 오신정 여사와 옥영이가 혜화동 에 도착했을때는 도현이와 도선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있었다.
『아, 어머니가?』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도현이가 허리를 펴며 주춤하고 서서 정문을 들어서는 옥영을 낯선 사람처럼 멀거니 바라보는데
『엄마, 엄마아!』
짱아채를 들고 잠자리를 쫓아가면 도선이가 짱아채를 냉동댕이 치고 다람 쥐처럼 기를 쓰고 달려 왔다.
『도선아!』
『엄마!』
달려드는 도선을 옥영은 꽉 부여안았다. 옥영의 배꼽노리에서 도선의 까만 대강이가 무섭게 비비적거렸다. 옥영은 무릎 하나를 마당에 꿇고 앉아서 자 기의 키를 줄이며
『도선아, 엄마가 왔다! 엄마 보고 싶었지?』
도선은 말을 않고 끄덕거리기만 했다. 글썽글썽 눈물이 어린 도선의 눈이 어머니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땅만 들여다보았다.
포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옥영의 시야를 희뿌옇게 뭉그러뜨리고 있었다.
눈물을 씻으며 송글송글 땀이 배인 도선이 이마에 옥영은 입을 맞추었다.
안으로 들었갔던 오여사가 혜숙의 손목을 끌고 나왔다. 오여사의 뒤로 식 모가 뒤쳐 나왔고, 할머니는 복도에 서서 웃는 낯으로 멀리 옥영을 바라보 고 있었다.
『엄마!』
오여사의 손을 뿌리치며 혜숙은 바르르 달려왔고
『혜숙아!』
옥영은 도선을 놓고 맞받아 달려갔다. 얼싼안은 옥영의 목을 혜숙은 두 팔 로 꼭 껴안으며,
『엄마, 죽지 않았어?』
『죽긴…… 혜숙을 두고 엄마가 왜 죽어.』
『엄마 죽은 줄 알았어. 작은 오빠가 죽었을 거라고 그랬어.』
일단 멎었던 눈물이 되짚어 솟구쳐 나왔다. 이 조그만 넋들이 자기를 하늘 처럼 믿고 있지 않았더냐고, 저번 날밤, 재동약국으로 수면제를 사러 들어 섰던 이기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던가를 뼈 아프 게 옥영은 느꼈다.
『엄마, 이제 또 가나?』
도선이가 감히 쳐다보지 못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혜숙은 말똥히 들여다보 면선 물었다. 옥영은 혜숙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안 간다. 혜숙이하고 꼭 같이 살께. 언제까지나.』
『아이, 좋아! 오빠, 엄마 이제 안 간대. 아무 데도 말이야.』
비를 든 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섰는 도현이를 향하여 혜숙은 재빨리 보고 를 하였다.
『도현이 너는 기쁘지 않니 어머니가 돌아왔는데.』
오여사가 멍하니 섰는 도현을 향하여 그런 말을 했다. 그랬더니 도현은 거 북스런 웃음을 한 번 희쭉 웃었다.
그리고 나서 도현은 다시금 마당을 쓸기 시작하였다.
『도현이가 마당을 다 쓸 줄 알구……』
옥영은 물끄러미 도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도현의 변 모가 다시금 옥영의 가슴을 쳤다.
남편의 애정 같은 것이 뭐가 그리 신통한 것이냐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얼 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옥영은 분명히 세우는 것이었다.
『어머니, 늦게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혜숙은 손목을 붙들고 안으로 걸어가서 복도에 서 있는 시모에게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오냐, 어서 올라오너라. 아버님도 무척 기뻐하실 거다.』
죽음과 같이 고즈넉하던 이 가정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아이 들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할머니와 식모도 물을 얻은 고기처럼 꼬리를 치며 돌았다.
할머니는 손수 저자에 나가서 며느리를 위한 저녁거리로 쉬고기와 생선을 사들였고 도현의 통지로 강교수도 정릉에서 부랴부랴 달려 왔다.
『아버님, 제 생각이 옹졸했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오냐, 멀지 않아 네가 돌아올 줄을 나는 믿고 있었다. 네 마음 고생이 오죽했겠냐만 결국 너는 돌아와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아버님의 말씀을 진작부터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렇게 한 번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도 제게는 소중한 경험이 되는 것 같습 니다.』
『좋은 말이야. 좋은 경험이 됐을 거야.』
경숙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머니!』
가방을 내던지고 옥영의 무릎에 와락 얼굴을 묻으며 울었다. 아무 말도 없 이 자꾸만 울었다.
『경숙아, 엄마가 할 말이 없다.』
옥영도 같이 부여잡고 조용히 울었다 일동은 오랫만에 평화로운 저녁 식사를 끝냈다.
『이제 저희들 걱정은 마시고 돌아가세요.』
어두워질 무렵에 옥영은 시부모에게 말했다.
『오냐, 오늘 밤은 애들과 편히 쉬어라.』
시부모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어두운 길을 나섰다.
『이만했으면 우선 자리가 잡혔으니 나도 가 봐야겠다.』
오신정 여사도 자리를 일어섰다.
『언니, 미안해요. 삼천동에는 후일 다시 찾아가서 인사를 하겠어.』
『괜찮아, 내가 할 테야.』
현관을 나서면서 오여사는
『아내들이 한 번씩 치르는 홍역인 줄로만 알면 되는 거야. 홍역이 너무 늦어서 다소 고될 뿐이지 나는 결혼한지 삼년만에 치른 홍역을 옥영은 이십 년만에 치렀으니 꽃이 빨리 필 턱이 있겠어? 열이 빨리 내솟구어야 할텐데 속으로만 파고 드니…… 속히 포도주를 마시고 열을 뽑아 버려야겠다. 얘 사내들이란 다 그런 거야.』
옥영은 쓸쓸히 웃으며 홍역은 일는지 모르지마는 홍역의 종류가 다른 것이 라고 포도주잔이나 마셔 가지고 열 꽃을 활짝 피워 버릴 수 있기에는 홍역 의 뿌리가 지나치게 깊은 것 같았다. 그날 밤, 옥영은 잠든 도선이와 혜숙 을 방에 남겨 두고 경숙이와 도현을 응접실로 데리고 나가서 도란도란 이야 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는 그만 두기로 하고 하는 말이다. 너희들이 엄마를 나무 랄 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어쩌는 도리가 없었단다. 이만큼이라도 안정된 마음으로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은 결국 그렇게 해서 집을 한 번 나가 본 덕 택인지도 모르지, 너희들이 있기 때문에 이처럼 무사히 돌아올 수도 있는 거니까.』
『어머니의 마음 잘 알 것 같아요. 서운해서 어머니를 나무라도 보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가엾어요. 그처럼 사이가 좋던 어머니와 아버 지였는데…… 어쩌면 우리 아버지까지 그래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나 쁜 아버지가 결코 아니었는데……』
경숙의 말을 도현이가 불쑥 받으며
『나쁜 아버지가 뭐야? 그래도 괜찮아. 엄마, 아버지가 없어도 우리 잘 살 수 있어. 엄마만 또 나가지 않으면 문제 없어. 누나하구 다 짰는데……』
옥영은 쓸쓸히 웃으며
『엄마는 이제 절대로 안 나간다. 너희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없으면 어떠 니?』
『엄마, 누나와 약속을 했어. 이 집 팔아 가지고 혜화동 로오타리에다 조 그만 책 가계를 내자고 약속을 했어.』
『책 가게라고?』
『아버지가 잘 아는 책 가게 있잖어? 그 책가게를 판대.』
『그래?』
옥영은 귀가 저절로 솔깃해졌다.
愛情[애정]의 姿勢[자세]
[편집]이 산간의 호텔은 늘상 조용하였다. 토요일 오후에서 부터 일요일 오전까 지. 일박(一泊) 손님들이 들끓지만 일요일 오후부터는 밀물이 찐 듯이 갑자 기 조용해지곤 했다.
석운과 영림은 이 호텔 전부를 차지한 것처럼 자유를 향락하고 있었다. 일 과처럼 둘이는 대웅전 앞마당을 산보했고, 베비 골프도 했고, 산에 올라 깊 은 숲 새에서 낮잠도 늘어지게 잤다. 밤에는 조그만 홀로 나가서 레코드를 틀어 놓고 춤도 추었다. 달빛을 안고 밤 산보도 누차 했다.
온갓 행락을 둘이는 샅샅이 뒤져 가면서 했다.
그러나 행락의 꼬리를 권태가 가끔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선생님, 재미 있는 플랜 같은 거 뭐 또 없어요?』
어느 날 열시가 가까운 무렵까지 늘어지게 자고 난 영림이가 기지게를 펴 면서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글쎄 뭐가 또 있을까? 재미 있는 플랜은 죄 실천을 했는데.』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석운은 빗질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소설가 아니세요? 그러니까 굉장한 플랜을 하나 창작해 내세 요.』
『귀걸이나 목걸이를 판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또 선생님은 돈 타령만…… 제가 선생님을 존경한 건 선생님이 물질을 초월한 데 있었는데 시정인과 꼭 같은 말만 하심 어떻게 되세요?』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사는 점에서는 다소 초월할 수도 있지만 전연 먹지 않고 사는 재주는 내게 없는 걸.』
『죽음 되잖아요? 죽음은 삶의 연장이니까요.』
『흥, 영림이가 언제부터 철저한 불교 사상을 가지게 됐는고?』
『불국사엘 왔으니까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봐요.』
『칸나의 불타는 의욕이 입도(入道)의 경지를 그리워한다는 건 확실히 정 신적인 타락을 의미하는 건데……』
『체념이 타락인 것처럼……』
영림의 목소리가 갑자기 쓸쓸해졌다.
석운이더러 돈 타령만 한다고 입으로는 커다란 소리를 해 보이는 영림이었 지만 내심으로는 언제까지나 이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니냐고, 실은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어서 불국사를 떠나야만 하겠다고는 영림도 생각하 고 있는 것이다.
석운이 경주로 나가서 목걸이랑을 팔아 온지도 벌써 한 주일이 되었다. 영 림의 비취 귀걸이와 순금 목걸이가 사만 여환, 석운의〈롤렉스〉 금시계가 팔만환, 합쳐서 십여만환의 돈이었다.
『자아, 빨리 세수를 해요. 재미있는 플랜을 생각했어.』
『뭔데?』
『저 밖에서 조반을 먹어요. 나무 아래서,』
먼 산이 바라보이는 앞마당 한가운데 포플라 나무가 몇 그루 솟아 있었고 열시가 지난 태양이 나무 그늘을 그리워하게 하고 있었다.
『아이 멋져!』
영림이가 세수를 하러 나간 동안에 석운은 보이를 불러 나무 밑 그늘진 데 다가 식탁을 마련하고 그리고 조반 식사를 운반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식탁과 식사가 마련되어 석운은 영림이가 오기를 기다리며 걸상에 앉아 있었다. 아사녀가 죽었다는 영지(影地)가 벌판과 산줄기가 합쳐진 언 저리에서 희끄무레 바라다 보았다.
『옥영과 아이들은 지금 뭘하고 있을까?』
이맘 때쯤 석운은 이층 서재 책상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집필을 시작하던 지나간 날의 평온을 무심 중 생각했다. 호수처럼 잔잔한 삶이었다.
고영림의 정열과 김옥영의 평온을 때때로 저울질 해 보는 석운이가 되어가 고 있었다.
돈이 떨어지면 불국사를 떠야 할 것이고 불국사를 뜨는 날에는 서울로 밖 에 돌아갈 곳이 없다. 영림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기를 쓰고 돈타령 을 하지 않으려 했다.
『아이, 정말 밥맛이 나요. 여기서 먹으니까.』
푸른 그늘에 푸른 바람이 인다. 들도 푸르고 산도 푸르다.
『선생님, 참 재미 있는 플랜이예요. 또 다른 것 뭐 없어요?』
수픈을 뜨면서 영림은 웃었다.
『이따 점심 식사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해요. 타아잔 부부처럼.』
『아이, 멋져! 선생님, 정말 그렇게 해요. 네?』
『못할 것 뭐 있어? 그렇지만 말이야. 아무리 재미있고 신통한 것도 두 번 만 해보면 평범해지는 거야. 그래서 모두가 다 평범 속에서 살다가 죽는 거 야.』
『평범의 인생철학은 싫어요. 항상 새롭고 비빗드하고 후렛쉬하고…… 그 런 것이 좋아요 못물은 썩어도 강물은 썩지 않는 것처럼……』
『좋은 말이야. 그런 의미에 있어서 인제 불국사를 떠나요. 이대로 그냥 주저앉아 있다가는 못물이 썩는 것처럼 우리들도 썩을 테니까.』
『그래도 무방해요. 돈이 모자라서 떠나는 것이 아니고 불국사가 인제 평 범해졌으니까 떠나는 거니까요.』
영림은 웃었다. 석운도 싱긋이 웃으며
『돈타령은 그만 해요. 대라 장수 여편네처럼 밤낮 돈 돈 돈 돈……』
『후훗……』
영림은 쿡 하고 입을 막았다.
『자아, 불국사를 떠나서는 어디로 갈까? 금강산이나 묘향산에는 원한의 삼팔선이 가로 막혔고 기껏해야 백운대나 송도 해수욕장인가?』
『아이, 너절해요.』
『제주도는 어때?』
『제주도까지 갈 돈 있어요?』
『또 돈 타령만? 걸어가면 되지 않아?』
『바다두 걸어서 건너요?』
『용궁에서 거북을 한 쌍 초청해다가 타고 건느면 돼.』
둘이는 마주 바라보며 웃었다.
『선생님은 정말 재미 있는 분이예요.』
『암 재미 있지.』
『먼 데는 그만 두고 울릉도로 가요.』
『울릉도…… 오징어만 먹고 살 작정이야?』
『울릉도에 가서…… 오징어가 먹기 싫어짐…… 선생님, 저와 같이 죽어 요.』
웃던 표정이 후딱 어두워졌다. 어두워졌던 표정이 다시금 밝아지며
『일본의 어떤 중년 작가가 정사를 했다죠? 아들 딸 수두룩하니 두고 ……』
『음, 아리시마(有島武郎[유도무랑])…… 화족 출신의 크리스챤이었지. 어 떤 잡지의 여기자와 정사를 했어.』
『정사라는 건 둘이가 정이 꼭 들어서 죽는 거죠?』
『글자의 뜻은 그렇지만 실제에 있어서의 정사의 원인을 통계적으로 살펴 보면 정이 꼭 들어서 죽는다는 것보다도 현실적인 주위 환경이 어쩔 수 없 어서 모두들 죽는 거야. 아리시마의 유서에도 그런 말이 씌어져 있었거든.
그러나 어쨌든 정사라는 건 확실히 낡은 시대의 유물이야. 현대적 성격을 이미 상실하고 있지.』
『동감이예요. 현대인은 좀처럼 죽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을 가끔하는 거야?』
『쓸데 없는 생각이 아니고 쓸데 없는 표현일 거예요. 표현의 유희를 즐기 고 있다는 것 뿐이예요. 무대에 올라선 배우들처럼……』
『음, 표현의 유희!』
심리 풍경과는 얼토당토 않은 표현의 재능에서의 영림은 지금 자기가 당면 하고 있는 오늘의 난국을 재치 있게 돌파하려는 노력 같은 것인 지도 모른 다고 생각하였다.
강석운이 지니고 있는 굳건한 사십대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경쾌하게 주고 받는 뭇대화를 교양의 뿌리가 없는 한낱 부평초와도 같은 난센스라고 경멸 의 염과 함께 등한히 취급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얼핏 보아 한낱 난센스와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기는 하였 다. 그러나 지금 영림이가 말하는 표현의 유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난센스의 밑바닥에는 오늘의 지성이 그래도 간파 할 수 없는 시대적인 고민 과 신음소리를 밑받침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실토를 하겠어요.』
『갑자기 실토는 또 무슨……』
『칸나의 의욕에는 불가능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칸나의 행동에는 그것이 있나봐요. 행동의 가능을 상실한 현대인의 유일한 유희…… 그것이 곧 표현 의 장난인 것만 같아요. 그것이 곧 예술이구요.』
커피 잔을 놓고 석운은 담배를 붙였다. 그리고는 어두운 표정을 하고 영림 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영림의 눈이 갑자기 쌍까풀이 졌어. 고단한 모양인가?』
『선생님의 눈이 촛점을 잃고 때때로 먼산만 멍하니 바라보지요. 선생님도 아마 뭔지 좀 고단하신가봐요.』
멋진 대답을 영림은 했다. 고단한 마음은 양편이 다 똑같이 지니고 있었 다.
『아이러니(反語[반어])가 신랄한데…… 쌔타이어(諷刺[풍자])는 애정의 소박성을 모독한다고 충고를 한것은 분명히 영림이었는데……』
『후훗……』
하고 영림은 웃으며
『아이러니나 쌔타이어나 패라덕스(逆說[역설])는 고단한 마음을 감추는 현대인의 좋은 무기이죠. 예술이 곧 표현의 장난인 것처럼…… 좋은 예술이 란 언제든지 가능의 실제성보다도 불가능의 진실성을 표현해 주는 작품일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 제 아니러니나 패라덕스를 사랑해 주세 요.』
『칸나는 확실히 마음이 고단해 있어.』
『연인인 강석운 선생의 마음이 고단해 있는 것처럼.』
서로 서로의 고단한 마음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이 두 사람은 그 것을 구체적으로 끄집어 내기를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
『응?』
『제가 죽음을 말하고 정사를 입에 담는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소망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세요.』
『알고 있어. 그러한 표현의 장난으로써 자신을 납득시키고 자신을 소화시 기고 있는 것 뿐이야. 체하기 전에 소화제를 복용하는 것처럼.』
『눈물이 슬픔을 무마하는 것처럼.』
『한숨이 체념을 북돋는 것처럼.』
『선생님.』
영림은 홀가분히 걸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 한 시간 동안만 혼자서 걷고 오겠어요.』
『왜 같이 걷지.』
『아냐요, 저번 날 선생님이 경주로 목걸이를 팔러 갔을 때 몇 시간 동안 혼자 있어 보니까 무척 좋아요.』
『내가 옆에 있는 것이 거치장스러운가?』
『아냐요. 제 옆에 선생님이 안 계시는 시간을 한 번 더 가져보고 싶어 요.』
『음, 그래도 무방하지만…… 그럼 다녀 와요. 너무 멀리는 가지 말고.』
『선생님도 선생님 옆에 제가 없는 시간을 한 번 더 가져 보세요.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그 한 시간 동안에 제 존재가 선생님에게 있어서 얼마만 한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를 잘 저울질 해 보세요.』
석운은 영림의 이 돌연한 제안을 흥미롭게 생각하며 한 시간 동안의 작별 악수를 했다.
영림은 식당 옆으로 해서 불국사 경내로 나불나불 사라져 갔고 석운은 그 대로 멍하니 걸상에 앉아 있었다.
영림이가 사라진 포플라 나무 밑 걸상에 빗비슴히 기대고 앉아서 석운은 담배를 피우며 높고 낮은 구름이 파도처럼 겹겹이 싸인 먼 하늘가를 하염없 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이러한 제안을 한 영림을 총명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서울에 두고 온 가정을 생각하고 옥영의 비탄을 생각하고 소설을 중단 하고 온 자기의 행동을 좀더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기에는 영림의 일거 일동 이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서 석운의 사색의 줄거리를 방해 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이렇게 해서 영림이라는 하나의 젊은 육체와 정열이 가져 오는 감각의 세 계에서 벗어나와 자기와 몇 가지의 주변을 한 번 보살펴 볼 수 있는 위치와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고영림을 알게 된 것이 석달 남짓, 고영림과 같이 서울을 떠난 것이 이십 여일의 시간이 흘렀다. 서울을 등진 이십여 일동안 석운은 줄곧 영림의 옆 에서 영림의 체취를 맡으면서 살았다 머나먼 별빛처럼 옥영의 체취가 희미 해 있는 동안 여림의 체취는 태양처럼 뜨거웠다. 영림의 감각은 옥영에의 기억을 무자비하게 말살해 버리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저번날 경주를 다녀 오는 동안 석운은 쭈욱 영에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 금 또 다시 별빛처럼 또 희미한 옥영에의 기억을 되씹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영림을 사랑하고 있다.』
석운은 소리를 내서 중얼거렸다.
『그럼 옥영은? 나는 과연 지금 옥영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조금도 거짓 없는 자기의 답변을 듣기 위하여 석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옥 영의 기억과 감각을 정밀하게 계산해 보았다.
『나는 확실히 옥영을 사랑하고 있다.』
석운은 또 한 번 소리를 내서 힘차게 중얼거렸다. 한 사람의 사나이가 두 사람의 여성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에 있어서의 강석운의 상식 이었고 애정의 법칙이었다. 얼마동안 멍하니 걸상에 앉은 채로 담배를 피우 며 영림이라는 젊은 육체로 가는 애정과 옥영의 뿌리 깊은 애정과를 저울질 해 보는 석운의 곁으로 식당 보이가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두 여인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며 석운은 식탁 위에 커피 시트를 뎅그런히 놓고 돌아서는 보이를 불렀다.
『나, 신문 좀 갖다 줘요.』
고영림과 같이 서울을 떠나온 후의 이십 여일을 석운은 줄곧 세상 소식을 모르고 살아온 셈이었다.
고영림이라는 젊은 여인으로써 가득 차던 정열의 틈바구니로 떠나온 서울 소식이 궁금해지고 자기와 고영림 외의 세계에 한 가닥 미련이 오고 있는 자기를 발견하며 석운은 피로한 눈으로 날짜가 벌써 지난 신문장들을 넘기 고 있었다.
신문철은 K신문이었다. 아직도 누구의 소설을 싣지 못하고 있는 문화면을 일회 분치를 메꿈으로써 느낄 수 있었던 지나간 날 하나의 성실한 작가로서 의 행복이, 거주권을 박탈당한 이주민의 비애처럼 그대로 가슴에 부딪혀 왔 다. 그것이 괴로워 석운은 삼면 기사들만 대충대충 읽어갔다.
『………?』
그러는 석운의 눈이 기사 하나를 잡고 놓아줄 줄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 돌아오시라. ── 작가 강석운씨의 장녀 경숙양의……》
석운은 후들후들 떨려오는 두 눈으로 경숙의 호소문을 읽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그립습니다. 밀물이 갑자기 찌듯이 하룻 저녁에 저희들 눈 앞에서 사라진 아버지와 어머니 허황한 꿈결처럼……》
무거운 머리를 팔 하나로 받쳐든 그에게 후딱 지나가는 상념 하나가 있었다.
『죽음.』
옥영이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코 죽음의 길을 택하였 을 것이다. 순간 어느 안개낀 뒷거리 약방에서 다량의 수면제를 사들고 가 는 아내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르다간 점점 더 선연히 확대되어 갔다.
『아, 옥영이!』
뜨거운 눈물이 주루룩 흐르며 심장이 터져 갈 듯한 아픔이 왔다.
눈앞에 놓인 한 개의 영롱한 구슬을 위하여 가슴 속에 깊이 깊이 뿌리 박 아 놓아 보석을 잃어버린 슬픔!
《아버지는 어머니와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봐도 그 젊은 여자 하나의 사 랑만 못해서 가정을 버리고 나갔읍니다. 어머니는 저희들 네 아이의 사랑을 합쳐봐도 아버지 하나의 사랑만 못해서 집을 나갔읍니다……》
지금이라도 큰 딸 경숙이가 저 숲새 어느 나무 그늘에서라도 불쑥 나타나 이 패덕한 아버지에게, 아니 그 보다도 네 아이들이 저마다 그의 가슴 속에 들어 앉아 「아버지! 아버지 하고 부르짖는 것만 같은 호흡의 격동속에 석 운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쁜 놈! 나쁜 놈!』
강석운이라는, 사십년 동안이나 자기가 거느리고 온 하나의 인간이 이처럼 나쁜놈이었단 말이냐구……
『무서운 일이다!』
수습할 수 없는 착잡한 심경으로 온 몸이 우수수 떨려오는 석운은 무서운 환상이라도 쫓아버리듯 고개를 번쩍 추켜 들었다.
거기엔 한 시간 동안의 작별 악수를 나누며 나불나불 영림이가 사라져 간 숲새 길이 있었지만 지금 석운은 그 하얀 길목도 짙푸른 수목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석운은 가슴이 타오르는 듯한 심한 갈증을 느끼며 소리쳐 식당 밖으로 나 온 보이를 불렀다.
보이는 오늘 아침 안정을 잃어 가는 석운의 창백한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 보며 걸어왔다
『무슨 말씀입죠?』
『아, 나 맥주 한 병…… 아니 그보다도 위스키가 좋겠어.』
그러자 보이는 숲 속으로 나불나불 사라져 간 영림의 일이 몹시 궁금하다 는 듯이
『참 아씨는 어딜 가셨어요?』
『여보, 잔말 말고 위스키나 빨랑 가져오우, 냉수도 잊지 말고.』
총총히 돌아서 가는 보이 뒤에서 석운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져가 고 있었다.
『영림에게 향하는 나의 애정의 자세란 무엇인가?』
새삼스럽게 한 사람의 사나이가 두 사람의 여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조금 전의 애정의 법칙에 흔들림이 왔다.
일체의 허세를 떨쳐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쪽 뻗은 하나의 순수한 생명의 벌렁거림 앞에서, 그러한 영림의 의욕 앞에서 정신적 흔들림을 느낀 것도 진실이나, 그러나 강석운 대 고영림의 관계에서 석운 자신은 그보다도 칸나 의 생동하는 젊음에의 체취에 끌려 갔다는 생각이 비중이 점점 무거워 가고 있었다.
『아, 젊음에의 노스탈쟈…… 나는 마침내 청춘의 종착역에서 영림의 안내 로 돌아가선 안 될 고국으로 역려(逆旅)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위험한 불장난을 치르고 있는 듯싶었다.
그러나 영림과의 그것이 조마조마한 불장난이라면 옥영의 경우는 절대로 그 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보이가 따라 놓는 위스키 한 컵을 석운은 주욱 들이켰다.
『옥영의 그것은 가슴 속에 너무나 뿌리 깊이 박아 놓은 애정이다.』
석운은 연거푸 또 한 컵을 마시며 훈훈해 오는 체내 구석구석에서 지난 날 옥영의 따스한 체온들을 되살려 본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라도 옥영을 위하여서는 목숨 하나를 버릴 수는 있 어도 영림을 위하여는 목숨을 버리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러나 영림을 잃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고영림……고영림.』
나직이 영림의 이름을 불러보는 석운의 몽롱한 시야속으로 엉뚱한 얼굴 하 나가 떠올랐다.
『아아……』
줄곧 영림이라는 하나의 젊은 육체와 정열이 가져오는 감각의 세계에서 먼 하늘의 별빛처럼 점점 빛을 잃고 있던 옥영의 기억이었다.
『아, 하늘이여 나를…… 나를 벌하소서.』
석운은 냉수 한 컵을 훌쩍 들이마시며 위스키를 또 따랐다. 온몸에 배어오 는 술기운과 더불어 고즈넉한 평온 속에서 지내던 지나간 날의 행복이 꿈 속처럼 흘러오고 있었다.
『아 옥영이 옥영이!』
이 순간 석운은 누구 앞에서고 부끄럽지 않은 진실로 떳떳한 자기 모습을 찾고 있었다.
『옥영이여, 무사하여 주시오.』
얼마나 소중이 여기던 아내며 얼마나 사랑하는 남매였던가. 십 팔년 아니 사십 여년이라는 오랜 시간과 정력으로 이룩한「가정낙원」을 제 손으로 깨 쳐버린 어리석고 무서운 생각이 왔다.
『어리석은 사나이!』
자기 울 안에 있는 보물은 모르고 집까지 팔아 보물을 캐러 다니던 불쌍한 우화(寓話)속의 인물이 자기는 마침내 되었다.
『아, 그러나 나는 울 안의 보물을 너무나 빤히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서러워 석운의 볼엔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어쩌면 나무 잎새들은 이렇게 싱싱하기만 하담.』
쭉쭉 뻗어 올라간 수목 사이를 거닐며 영림은 싱싱히 푸르러간 이름 모를 나무 잎사귀를 부드럽게 바라보는 것이었다. 바라보는 넓직넓직한 나무 잎 사귀를 위로 조는 듯한 칠월의 태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 언제나 고독한 칸나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하늘……』
영림은 어느 노송(老松) 그늘에 살풋이 앉아 본다.
석운과 떨어져 온 이 한 시간 동안을 영림은 잡목이 울창한 사이 녹색지대 를 거닐며 싱싱한 수목들이 배앗는 푸른 숨결을 마시고 있으면서도 어쩐지 자기는 고단해져 있다고 지금 그렇게 칸나를 피곤케 한 원인을 골똘히 생각 해 보는 것이었다.
수목 사이 사이로 멍하니 올려보는 머리 위론 새파이어로 감칠한 하늘이 있었다. 지나간 초여름 석운과의 초회(初會)의 숨가쁜 접순 속에서 고요히 흐느끼며 우러러보던 하늘도 꼭 저랬었다고 칸나의 사이 기억은 그 행복하 던 날들을 가만 더듬고 있었다.
『내가 벌써 지쳐버렸나?』
석운과의 이 행복한 시간에 자꾸만 감상에 빠져가는 자기를 영림은 물끄러 미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칸나를 이렇게 지치게 한 원인이 무엇일까?』
조금 전에 떠나온 식탁에서 석운이가 하던 말이 되살아 왔다.
『아무리 재미 있고 신통한 것도 두 번만 해보면 평범해지는 거야.』
좀처럼 영림을 잡고 놓아 주질 않던 이 말 속에 어제 오늘 유난히 피로해 보이는 석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영림은 조용히 눈을 감아 본다.
『확실히 선생님은 점점 정열이 식어가고 있는가봐.』
그런 석운의 눈동자를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영림의 온몸을 흔들 어왔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을 생각하며 괴로워 하는 선생님.』
선생님이 아니라도 좋고 제자가 아니라도 좋다고 그저 한 남자와 한 여자 의 자격으로서 사랑을 누리면 그만이라고, 가정도 세상도 버리고 나의 시각 은 칸나의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족하고 나의 청각은 칸나의 영롱한 목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되는 거라고 뛰쳐 나온 선생님이 이제는 그 칸나의 감각 세계에서 틈서리를 느끼며 아늑하던 지나간 날이 그립고 세상 소식이 궁금하여진 것이라고 영림은 차근차근 따져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칸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세상 소식이 궁금해진 석운의 일이 아니었다.
『칸나는 언제나 칸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거야.』
문제는 석운보다는 자기에게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영림은 송림 그늘에서 발딱 일어서 천천히 걷기로 했다. 걸으며 자기를 좀 더 정리해보고 칸나를 이처럼 좀 먹어 들어가는 요소들을 뽑아 버리자.
『들창을 넘어서까지 선생님의 곁으로 달려오든 정열이…… 지금은?』
지금은 석운의 곁에서 한 번 떨어져서 혼자서 산보라도 해보고 싶을 만큼 정열에 틈서리가 생긴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석운의 호흡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숨가쁘게 살아 날 수 있었던 영림의 영혼이 이렇게 수목과 하늘을 찾으며 울먹울먹하는 것이 아 닌가.
『선생님 곁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순간 또 하나의 영림이 맹렬히 항의해 오는 것이었다. 영림은 우뚝 서 버렸다.
『노우! 노우! 칸나의 애정엔 계산이 필요 없다. 선생님보다는 좀 더 내가 중요하다. 칸나여! 너의 불타는 의욕을 태우라!』
영림은 오뚝 멈췄던 자세를 의욕의 길로 돌려 세웠다.
『나는 결국 옥영에게로, 저 아늑한 별빛 속으로 돌아가야 된다.』
석운은 경숙이의 호소문이 실린 신문 한 장을 뜯어서 주머니에 넣으며 병 에 남은 마지막 술을 훌쩍 들이 마셨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지금이라도 훌쩍 여기를 떠나 버릴 수 있다는 말인 가?』
저 밤하늘에 까마득히 떠서 반짝이는 별을 따 버릴 수는 없는 것처럼, 영 림이라는 젊은 의욕의 세계에서 그렇게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자기를 석운 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 아늑한 별과 칸나……』
그러나 석운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결국 나는 돌아서 갈 사람이 아닌가? 아늑한 별빛 속이야말로 언제고 한 번은 내가 가야만 될 나의 위치가 아닌가?』
『그러나 가긴 가도 지금이 돌아서 갈 시간은 아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대로 석운은 아늑한 별이 떠서 있을 하늘만 쳐다본다.
그러는데 왼편 숲 새에서 명랑한 목소리 하나가 떨어져 왔다.
『선생님!』
『어?』
엉거주춤하니 서 있는 석운 옆으로 다가와서 영림은 석운의 얼굴을 빠안히 들여다본다.
『선생님 괴로우세요?』
둘은 또 전과 같이 걸상에 마주 앉아 버렸다.
『선생님 괴로우시죠?』
『응? 아니.』
『괴로우셔서 술까지 잡수시구.』
텅 빈 위스키 병이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던 영림은 거기 놓인 신문철을 보 고 선생님의 고뇌에 어쩌면 저 신문철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 는 것이었다.
『선생님 그만 들어가세요 네,』
우울을 밟아버리듯 자기 앞에서 또박또박 걸어가는 영림의 뒤를 석운도 무 거운 발로 따라갔다.
자기들 방으로 돌아온 영림은 소파에 반듯하게 누워버렷다.
『나 좀 머리가 아파서』
석운도 저고리와 넥타이를 푸르곤 침대에 누어 버렸다. 네 개의 눈동자가 한 쌍은 또렷 또렷하게 또 한 쌍은 덤덤히 천장을 바라볼 뿐 둘에겐 말이 없었다.
얼마 뒤 무거운 공기에 싫증이 난 영림은 소파에 누운 채 석운을 불렀다.
『선생님!』
그러나 석운은
『영림, 우리 어디로 떠날까?』
『어쩌면 선생님은 꼭 제 말만 하셔.』
『음! 그렇다면 떠나요, 영림이가 끄는 대로 어디로든지.』
『아이 싫어! 난 선생님이 끄는 대로 따라갈 테야요.』
『하여튼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떠나요.』
거기에서 대화는 또 끊어지고 공백 속엔 또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영림은 소파에 누운 채 영화잡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선생님! 내일……』
『…………』
그제야 영림은 석운 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기운에 피곤한지 석운은 벽쪽으로 누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어마 이대로……』
와이샤쓰라도 벗겨 주려던 영림의 손이 쓰봉 주머니에 삐죽이 내민 신문을 뽑아 들었다
『……? 사모님이 집을 나갔다?』
경숙의 호소문을 모조리 읽어버린 영림은 신문을 접어 도로 집어 넣고는 소파에 푹 파묻히고 말았다.
『사모님은 나가고 아이들은 부모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칸나의 의욕으로 눈 감아 버리려고 발버둥치던 괴로움이 마침내 꼬리를 들 고왔다.
『칸나여, 시련(試鍊)의 위기다!』
칠월의 아침 햇살이 불국사 경내에 조용히 내려 앉고 있었다.
『선생님,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석운과 나란히 식당문을 나서며 영림은 눈이 부시 듯 한 손을 이마에 대었 다.
『음, 날씨가?』
그제야 석운도 내려 쬐는 햇살을 한 손으로 막으며 호텔 지붕 너머를 바라 보았다. 둘은 아늑한 뒷뜰을 걷고 있었다.
『영림 피곤하지?』
『선생님도 무척……』
둘은 하룻밤 새에 핼쓱해진 서로의 얼굴들을 마주 보았다.
돌아가야만 될 옥영에의 애정의 자세와 돌아갈 수 없는 영림에의 애정의 위치에서 한 잠을 못 자고 뒤척이는 석운 곁에서 영림은 영림대로 마침내 다가온 자기 애정의 시련 앞에서 한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샌 것이었다.
이러한 서로를 둘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를 위로해 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둘은 방으로 들어와 나란히 소파에 기대 앉았다.
『생선님 제가 원망스러우시죠?…… 선생님과 사모님의 낙원을 깨뜨려버린 제가 무척 원망스러우시죠?』
어느새 영림의 영롱한 두 눈에서 눈물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아 영림이……』
석운의 두 손이 흐늑 흐늑 떨고 있는 영림의 두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 다.
『영림이,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을 얘기할 때가 아니야, 영림이가 나빴던 내가 나빴던 좋고 나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야. 영림이는 영림이대 로 나는 나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는 갈 수 밖에 없어.』
『그렇지만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십자가가 되는 건 싫어요.』
그 순간 발딱 젖혀진 영림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아니……아니 나의 십자가는 별이다, 가정이다, 옥영이다.』
『아아, 선생님?』
둘은 와락 끌어안았다.
『칸나! 칸나의 적은 칸나다!』
『선생님도 선생님과 힘껏 싸우셔야……』
이윽고 숨가쁜 작렬의 시간이 지나갔다.
화장대 앞에서 얼굴을 매만지며 영림은 들창 밖을 내다보는 석운을 불렀 다.
『선생님 이제 말씀하신 것……』
『글쎄, 오늘이라도 불국사를 떠야겠는데……』
담배를 피워 물며 석운은 영림이 옆으로 돌아섰다.
『선생님 고도로 가요.』
이윽고 얼굴에 지워진 화장을 고친 영림이가 석운 앞으로 다가왔다.
『고도? 어디가 좋을까?』
『제주도도 좋겠고요.』
『그러나 거긴 너무 멀어.』
『참 선생님 울릉도도 간대구선…… 울릉도.』
『허어 오징어가 산떼미 같이 쌓였다는 울릉도 말이지?』
『아이 선생님, 이러고만 계심 어떡해요. 빨랑빨랑 짐이라도 꾸리시고.』
『그래요, 영림 이제 우리는 어느 때보다 힘차야 돼요.』
그때 이 고요한 산간을 흔들어오는 메아리 소리가 있었다.
『어마? 하나님이 우릴 위해서 차까지 보내 주는가 봐요.』
영림과 석운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지금 막 구불구불난 숲새 길을 빠 져 들어온 회색빛 빅크를 쳐다보았다.
차에선 어느 젊은 남녀가 내려오고 보이가 빽을 들고 뒤를 따랐다.
『자, 우리 저 차로 포항까지 나가요.』
석운은 호텔 경리실로 나가고 영림은 총총히 짐을 꾸렸다.
불국사를 떠난 사아몬 그레이의 빅크는 두시가 좀 지나서 포항 시가에 들 어왔다.
들어오는 길로 선박회사에 들러 울릉도 선편을 물었으나 일 주일에 한 번 씩 왕래선은 오늘 아침에 떠났다는 것이었다.
『어마! 뭐가 그래요. 선생님 일 주일을 여기서 어떻게 기다려요.』
저 멀리 구룡반도(九龍半島)가 바라뵈는 해변을 석운과 영림은 걷고 있었 다.
『어제쯤 왔으면 탔을 걸.』
못내 서운은 하면서도 그것이 영림이의 불평과는 성질이 틀릴지도 모른다 고 석운은 얼른 앞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꿈꾸듯이 조용히 흔들리는 바다 위엔 조개잡이 배들이 떠 있었다. 해변은 아직 방학 때가 아니라서 그런지 캠프가 몇 개 늘어서고 손님을 기다리는 보트며 신장한 베비 콜프장을 이 한산한 해수욕장의 초하 풍경을 이루고 있 었다.
둘이는 아무런 말도 없이 해변가에 비둘기장처럼 파아란 칠을 하고 있는 맥주 홀로 나란히 들어섰다.
방금 물 속에서 나온 듯한 젊은이들이 맥주를 병째 마시면서 이쪽을 흘끔 대며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수군대는 것을 보자 석운은 청년들 중에 누구라 도 자기를 알것만 같아 이마가 찌푸려졌다.
맥주와 코카콜라를 청해 놓고 영림은 석운을 빤히 들여다보며 이 한산한 해변처럼 지금 선생님의 감정은 초라해 있다고 불국사를 떠나오며 그들의 정열이 더 흔들리기 전에 세상과 동 떨어진 울릉도 외따른 섬 속에서 칸나 의 청춘을 밭갈고 추수하리라던 자기의 정열도 저렇게 파리를 날리는 구멍 가게들처럼 쓸쓸해져 있다고 며칠 더 불국사에 눌러 박혔던 편이 차라리 좋 았을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홀가분히 떠나온 일을 하나 둘 계산해 보는 것이 었다.
(그렇게 옹색한 여관 방에서 고슴도치처럼 일 주일씩이나 눌러 박혀 배를 기다릴 수가 있을까? 조개국이나 먹으며 밤마다 물것에 뜯기노라면 선생님 이든 나든 지루한 생활에 환멸을 느끼지나 않을까? 아니 벌써부터 그런 종 류의 환멸은 둘이의 가슴 속에서 발악하며 성해 간 것은 아닌가?) 그때 맥주 컵을 놓던 석운의 눈이 테이블에 떨어진 영림의 시선을 물끄러 미 들여다보며
『영림,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어 응? 요즈음 확실히 칸나의 의욕과 정열이 변모를 했어.』
『의욕과 정열이 차지했던 자리를 칸나답지 않은 감상과 애수가 점점 폭을 넓혀 가는가봐요.』
말 끝에 후훗 하고 웃어 버릴 것을 계산에 넣은 대화가 마음 같이 되지 못 한 영림이었다. 그러한 영림의 표정이 괴로와 석운은 손바닥만하게 뚫린 창 밖을 내다본다.
『영림이 우리 밖에 나가서 보트나 타요. 그래서 바닷바람도 쐬고…… 영 림의 우울에도 위안을 줘요.』
『선생님! 현대의 애인들은 자기 마음의 풍경을 곧잘 사랑하는 사람의 가 슴 속에서 진단해 버리는 위트를 가졌는가 봐요.』
이번에도 끝내 웃지를 못하고 석운의 뒤를 따라 보트가 있는 사장으로 나 왔다.
보트는 피곤한 두 개의 무게를 싣고 가볍게 백사장을 미끄러져 나갔다.
『선생님 피곤하신데 제가 저어요.』
『아직까진 레이디 훠스트야 허어.』
조개잡이 배 사이를 빠져 그들이 탄 배가 사장에서 꽤멀었을 땐 영림의 손 에 노가 있었다.
『아, 등대가 보여, 선생님 저쪽 좀 보아요.』
이전처럼 생동하는 영림의 목소린 아니라고 이재 그런 것을 느끼며 석운은 영림이가 가리킨 등대가 있는 해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석운과 영림은 포플라 그늘을 지나 고단한 발걸음으로 여관에 돌아왔다 포항 여관은 역전 부근에 있는 눅거리 여관이었다. 전등 하나가 두간방을 비치고 있는 침침한 방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영림은 아 무래도 이렇게 일 주일은 견뎌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재켜 놓은 이부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 담배를 피워 문 석운도 어서 어서 여비가 떨어지기 전에 아무데로든 떠나가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둑컴컴한 방 안엔 석운의 담배 연기만 푹푹 뿌려질 뿐 벽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영림이나 석운에겐 무거운 침묵만이 덮여오고 있었다.
『영림이!』
그 무거운 공기를 석운의 나직한 대화가 흔들었다.
『…………?』
『고도에 가서 오징어나 먹고 사는 생활에 환멸이 오지 않을까?』
『……………』
영림은 부채만 만지작거릴 뿐 말이 없다.
『그렇게 일 이년 살아 가노라면……』
『선생님 가정이 그리우시고 사모님이 그리우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심 되 잖아요.』
『……………』
이번엔 석운 편에서 말을 잃어버렸다.
『영림이 가는 데까지 가봅시다.』
이윽고 둘이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자리에 들어서도 말이 없었다.
불국사를 떠나오면서 하루 종일 시달린 심신이었다.
돈이 떨어지기 전에 이것 저것 생각해 볼 것 없는 낯설은 고도(孤島)라도 찾아가서 점점 식어가는 자기들의 정열을 구제해 보려던 희망이 이렇게 허 전하게 무너져 지금 둘이는 서로의 괴로운 마음 속을 어떻게 위로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왜인지 지금 칸나는 울어봤음 좋을 것 같아요.』
『영림이, 자 어서 자요, 마음이 고단해지면 감정이 센치해져. 한잠 푹 자 고 내일 문제는 내일 해결해 나가기로 해요.』
석운의 한 팔이 흑흑 흐느끼는 영림의 어깨를 가만 가만 달래 주었다.
얼마 뒤 영림의 흐느낌도 멎고 둘이는 고단한 꿈 속에 빠져버린 뒤 삼십촉 희미한 전등불엔 어디로 들어왔는지 부나비 몇 쌍이 나불나불 춤을 추고 있 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시간의 휴식 뿐 영림은 고단한 꿈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 다.
옆에는 며칠 사이에 훨씬 더 이마에 주름살이 잡힌 석운이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영림은 잠든 석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움푹 들어간 눈자위…… 지나간 날 로맨스 그레이라고 사랑스런 꿈이 깃들 었던 흰 머리칼이 유난히 눈에 띄어왔다.
『이렇게 고달픈 선생님 곁에서 나는 끝까지 정열을 불사를 수 있다는 말 인가? 선생님은 심신이 지쳤고, 칸나가 구제 받으려던 고독은 오히려 두 사 람의 영혼을 그 그늘 깊숙히 끌어 넣을 것이다. 환멸은 당장 밝아오는 아침 에라도 올 수 있는 준비가 갖춰졌다.』
칸나는 자리에서 가만히 빠져나오며 괴로운 환멸의 때가 오기 전에 칸나는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가리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서울까지 여비만 남기고 나머지 돈은 석운의 머리맡에 놔두었다. 새벽이었 다. 영림은 옷을 입고 난 뒤 가만히 석운 옆에 꿇어 앉았다.
『선생님 안녕!』
잠든 석운의 볼에, 입술에 눈물 젖은 입술 자국을 남기며 방문을 나서는 영림의 귀에 해안을 끼고 오는 새벽 열차 소리가 울려오고 있었다.
칸나의 불타오르던 정열에 환멸이 오기 전에 자기는 떠나가야겠다고 잠든 석운의 얼굴에 입술 자국을 남기며 영림이가 총총히 떠나간 포항 일실에서 석운도 고단한 아침 잠을 깨고 있었다.
『아 ──』
기지개를 켜며 반듯하게 누운 자세대로 석운은 머리맡의 담배 갑을 더듬어 본다.
『…………?』
담배갑 대신 쥐어오는 하얀 카드와 돈.
『영림이!』
자리에서 후딱 일어난 석운은 벌써 늦어진 시간임을 알면서도 영림을 불러 본다.
《선생님! 이 이상 더 정열이 식기 전에, 서로가 환멸을 느끼기 전에, 아 름다운 기억을 품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에 제가 먼저 떠나는 것 뿐입니 다.》
하얀 카드 위엔 올망졸망한 영림의 예쁜 글씨들이 이렇게만 써놓고 가 버 렸다.
『아아……』
석운은 벽에 벌렁 기대버렸다.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 버렸다. 언제고 한 번 이렇게 허탈한 심정에 빠질 것을 계산해 넣은 사십대의 지성이었지만 그것이 이처럼 가슴에 부딪치는 감정일 줄은 몰랐다.
『그럴 수 있는가 영림이……』
그러나 지금 석운의 가슴 속에서 조수처럼 밀려 나가고 있는 허탈한 감정 의 틈서리에 한가닥 아늑한 평온 같은 것도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언제고 한 번 벗어 놓아야 될 짐.』
그 무거운 짐이 저 혼자 달려 왔다가 저 혼자 지쳐서 나가 떨어졌다고 무 거운 짐을 벗어버린 가벼운 느낌이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만 되는가?』
석운은 담배 한 대를 붙여 불며 천천히 지나간 부나비와도 같던 날들을 더 듬어 보며 자기 위치를 설명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림이, 영림이!』
언제고 필연성을 띤 이런 종류의 불행이 자기들 앞에 내리어지리라고 석운 의 타다 남은 지성은 그것을 말해 주었지만.
『불나비! 불나비와도 같이 영혼을 연소시켜 보자고 그것만이 젊은 칸나가 갖는 삶의 의욕이요 목적이라고 그렇게도 싱싱하게 덤벼오더니…… 영림 이!』
십 팔년 동안이나 정들인 아늑한 별을 잃어버리고 이제는 단 하나의 영롱 하던 구슬마져 사라져 갔다고 석운의 기억은 자꾸만 울고 있었다.
『구슬을 잃고 별을 잡았는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진정한 자기를 찾았는데……』
이렇게 자유를 얻었어도 허탈하기만 한 자기가 석운은 갑자기 서글퍼졌다.
『너무나 빨리 나는 어여쁜 칸나를 잃어버렸다.』
지나간 이십 여년 동안이나 쌓아온 세속적인 온갖 노력을 하루 아침에 무 너뜨릴 수 있었던 것도 칸나의 눈부신 정열 속에서 하나 하나 생명을 불태 워 갈 수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러한 감정의 지주(支柱)를 상실한 지금 석운 은 자기 자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영림의 후렛쉬한 의욕과 정열 앞에서 나머지 타다 남은 목숨을 불나비 같이 몽땅 태워 버리는 편이 행복 했을 것을 ……』
차라리 일체의 것을 망각했던 편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옥영이, 저 아득한 별빛 속의 옥영이!』
허탈한 육체 속에 조수의 간만과도 같이 우루루 몰려 왔단 떠나가는 감정 들……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아니 나는 모든 것을 한꺼번 에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석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孤獨[고독]의 位置[위치]
[편집]열어 놓은 창 밖으로 무자비한 태양이 내리쬐는 거리가 보였다.
칠월의 오후 세시.
여름 옷으로 성장한 남녀들의 어지러운 발걸음들만이 권태로운 페이브 위 로 흩어져 가고 있었다.
영림은 칼피스 한 모금을 빨고는 이내 또 어지러운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 다.
부산스럽게 부채질들을 하며 웅성대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수한 표정을 마 주 대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영림에게 없었다. 그래서 밖을 내다보는 영림의 눈엔 울긋불긋한 파라솔이며 축 늘어진 파나마 그늘 사이로 지나가는 뻐스, 전차, 고급 택시들……
『권태로운 행렬이다.』
그러나 저렇게 권태롭기는 하여도 남들에겐 모두 다 바쁘게 갈 곳들이 있 다고 조금 전에 하던 생각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어디로 갈까?』
햇볕과 먼지 속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던 영림은 갑자기 갈 곳이 없었다. 을 지로 입구에서였다. 영림은 어느 꽃가게 앞에서 잠시 멈추었던 걸음으로 이 내 다방 문을 열며 역에서 부터 여기까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남들 틈에 밀 려 온 자기가 쑥스러워졌다.
『집으로?』
이 하늘 밑에서 남들처럼 집이 있어도 유리창을 뛰어 넘어서까지 거역하고 나온 아버지와 오빠가 있는 그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영림은 잠자코 고개만 젓는다.
『죽어버릴까보다.』
그러한 영림에게 애수가 왔다. 그러나 오늘 아침 포항을 떠나오며 차창에 기대 앉은 영림에게 금방 금방 그런 생각들이 물거품처럼 일어났지만 이내 하얀 미소로써 지워버리곤 하던 낡은 센티멘탈들이었다.
『이렇게 살기 위해 버둥대는 인생의 대열에서 누구보다도 생에 집착하는 칸나 혼자 쓸쓸히 죽어갈 이유가 무엇이냐?』
누구보다도 싱싱한 의욕 속에 누구보다도 숨가쁜 저항 속에 살아온 자기를 기억하는 현대인 고영림의 의욕에찬 미소 하나가 감상에 빠진 듯한 자기를 비웃는 것이었다.
『칸나는 언제나 칸나를 위해서 살아 왔다.』
때문에 칸나의 정열을 불사르고 떠나온 지금도 자기가 불행하다고는 생각 해 볼 수 없는 영림이었다.
『강선생님과는 떨어져 왔지만 강석운이라는 인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 던 칸나의 인생은 소중한 푸러쓰다.』
강석운이라는 한 사람의 사나이에게서 불살라버린 정열을 강석운이로 하여 구제될 수 있었던 자기의 고독이라고, 때문에 그런 정열이 식기 전에 떠나 온 자기는 행복하다도 생각해 보는 영림이었다.
그렇게 있는 영림에게 후딱 로맨스 그레이의 표정 하나가 날아 왔다.
『지금쯤 강선생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
심각한 고뇌 속에서 안정을 잃고 있는 석운의 표정 하나를 다음 순간 영림 은 도리도리하며 힘껏 지워버리고 있었다.
『강선생님은 강선생님대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고…… 칸나에게는 계산 이 없다. 지난 날의 낡은 감상보다는 항상 새롭고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칸나의 고독은 칸나의 행동만이 구제할 수 있었다.
칸나는 항상 새롭고 움직임이 있어야 된다고 영림은 탁자 위의 핸드백을 집어 둘고는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카운터 위에 차값을 치르고 영림은 「기다림」다방 문을 총총히 나섰다.
「기다림」다방을 나선 영림은 파라솔을 갖지 못했기에 쏟아지는 햇볕을 피하며 비좁은 꽃가게 앞에 잠깐 섰다.
지나간 봄 벚꽃이 한창이던 무렵 어느 날 아내의 부정한 환상에 쫓기며 십 팔년 동안이나 고즈넉히 지켜온 가정 낙원의 절박한 위기 의식에 사로 잡힌 강석운이 가야쓰데 분을 깨치며 뛰쳐 나온 그 꽃가게엔 지금 히야신스, 글 라디오라스, 장미가 빼곡히 들어서고 알맞은 화분에 야쓰데도 한 그루, 바 로 옆엔 크림즌 레이크로 불타오르는 칸나마저 줄기찬 잎사귀와 더불어 피 어 있었지만 한산하게 꽃구경을 하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영림은 이내 종로 쪽으로 또박또박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며칠 동안 동무네 집에 가 있으면서……』
그러면서 칸나의 배(舟)를 저어가자고 영림은 그렇게 생각하며 걷는 것이 었다.
『그렇지만 너줄하게……』
그러나 그것보다도 막상 딱 누구라 생각해 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보이 프렌드들의 젊음 속에는 풋병아리 같은 치졸을 느끼며 고독했고, 지 긋한 사회인들에게선 세속의 때로하여 발효해 버린 술찌꺼기를 연상하며, 영롱한 애정을 발견하지 못하던 영림은 상아탑 속에서도 순박한 우정을 찾 아낼 수 없었다.
투명한 이성과 소박한 감정으로 발랄한 영림의 대화에 그들은 언제나 불연 속을 이루었고 마침내 대화를 잃어버린 영림의 곁에서 동무들은 하나 둘 떨 어져 갔다.
모두 다 칸나의 까다로운 생리 때문이라고 동무네가 있는 청진동까지 가려 던 영림은 신신 앞에서 서 버리고 말았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아! 혜련언니……』
그제야 영림은 이제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올케 한 혜련을 생각하며 칸 나는 너무나 처절한 에고이스코트였다고 자신을 가볍게 나무라 보는 것이었 다.
영림은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빈 택시 하나를 잡았다.
『삼청동까지 가줘요.』
이윽고 시그날이 떨어지고 차는 스름스름 안국동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뒷 쿠션에 앉은 좌상 그대로 영림은 눈을 감아본다.
감은 눈 위로 석고상처럼 표정 없는 올케의 푸로필 하나가 떠올랐다. 그 올케가 가슴을 싸안고 아침 저녁 정성껏 가꿔 놓은 울타리 밑의 봉선화는 지금쯤 무더기가 지게 피어 있으리라……
『봉선이처럼 불쌍한 혜련 언니!』
가슴이 상해가도록 마음 속의 거문고만 타면서 봄, 여름, 가을…… 물들여 도 애만 터지는 새끼 손톱만 빤히들여다 보다 죽을 혜련언니를 자기는 마침 내 학녀보다도 얄궂게 배신하고 말았다고 그런 생각이 영림에게 왔으나 영 림은 프론티 글라스로 고개를 돌리며 마음속으로 도리질을 하는 것이었다.
『프라우 조르게(憂愁夫人[우수부인]) 할렌의 한낱 애달픈 사랑의 전설을 위해서 내가 서글퍼질 이유는 없어.』
중앙청 앞에서 차는 커브를 했고 영림은 좌상의 위치로 돌아와 눈을 감고 있었다.
이번엔 그 감은 눈 위로 무수한 군상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강석운……사모님……한혜련.
사장 아버지……오빠……송준오. 그 환영 속에서 마지막까지 지워지지 않 는 창백한 얼굴 하나가 있었다.
『준오, 준오……』
이미 김옥영이라는 여인이 차지하고 있는 강석운이라는 사십대의 남성과 송준오의 순수한 정열.
『순수성을 상실한 정열과 독약까지 마시며 덤벼드는 순수한 정열.』
지난 날 송준오의 그 순수성을 풋병아리 같다고 등을 쳐주며 돌려 보내던 생각에 흔들림이 왔다.
차는 삼청공원을 바라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기다림의 행복을 남겨 두기 위하여 다음 말이 갑자기 듣기가 싫어졌 읍니다.』
이 말은 지난 봄 강석운과 한 번 만나고 헤어진 뒤 뜰안 돌산 틈바구니로 칸나가 기승을 부리며 성장하던 오월. 「저항하는 칸나」의 계절 그 어느 날 김옥영이라는 한 여인이 차지하고 있는 강석운에게서 보다 칸나를 위하 여 자기의 목숨하나를 희생할 수도 있었던 송준오에게 칸나의 일생을 맡길 수 있으며, 거기서 칸나의 일생을 맡길 수 있으며, 거기서 칸나의 강렬한 의욕을 불태울 수 있을까 하는 최후의 기대를 가지고 준오와 마주 앉았던 명동 어느 〈가뽀야〉 이층에서, 부디 영림은 행복하라고 그러나 자기는 떠 나간 영림을 고이고이 기다리는 불행한 행복을 어루만지겠다고 흐느껴 울면 서 송준오가 하던 말이었다.
지금 영림은 흔들리는 차 속에서 눈을 딱 감은 채 그러한 준오의 기억을 살려보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서 그러한 준오의 순수성 속에서 칸나의 정열을 새롭게 불태 워버릴까?』
막연한 기대하나가 왔다. 그러나 그 〈가뽀야〉의 밤 울면서 울면서 자기 와 저항하며 날뛰던 기대보다는 좀 더 뿌리 깊은 현실적 발판을 가지고 있 는 기대라고 영림의 고독이 소근거리고 있었다.
『수염이 까칠 까칠한 하오의 순정 속에서.』
칸나의 정열을 파랗게 불사를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칸나의 기대는 성장하여 갔다.
차는 평탄한 삼청동 오르막길을 다 오고 있었다. 그래서 운전수는 눈을 딱 감고 잠자코 앉아 있는 영림의 좌상을 빽미러로 들여다보며
『공원으로 올라갈깝쇼?』
히죽이 웃으며 물었다.
『아! 다 왔어요, 저 골목 앞에서 세워 줘요.』
이윽고 차는 혜련네 골목 앞에서 서고 영림은 탕약 냄새가 풍기는 뜰 안으 로 들어갔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대문 소리가 나자 건넌방 재봉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던 혜련 어머니가 반색을 하여 마루로 나왔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어머니의 놀란 소리에 혜련이도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봤다.
『아……!』
『아!……』
그처럼 소중히 아끼던 돌구름을 아름다운 꿈의 동산에서 빼앗아 간 여인과 빼앗긴 여인은 말을 잃었다.
저 눈, 코, 입을…… 입술을 꼭 깨문 채 영림의 얼굴을 말똥히 내다보는 혜련의 창백한 표정과 그러한 혜련 앞에서 얼마쯤 당황해지는 자신을 느끼 면서도 영림은 태연히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언니!』
마침내 혜련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나, 언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러나 혜련은 영림의 말보다도 돌구름의 소식이 다급해서 물었다.
『강선생은?』
『…………』
『강선생님께서는 어디 계셔?』
『아마 포항 계실 거야.』
『뭐? 포항.』
『울릉도 가서 오징어나 먹고 살려다 포항에서 나 먼저 와 버리고 말었 어.』
『아……』
학녀다. 나쁜 영림이. 저렇게 귀여운 영림이가 하필이면 학녀가 되었더냐 고 조개 알을 바드득 깨물던 할렌처럼 혜련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언니! 나 지금 언니 맘 너무나 잘 알 것 같아요. 허지만 강선생님은 전 설 속의 임금보다는 좀 더 인간이었댔으니까…… 나 조금도 언니께 부끄런 맘 없어요……』
거기서 영림은 어머니가 썰어 온 도마도 즙을 먹으며 잠자코 듣고 있는 혜 련 모녀에게 강선생과 헤어져 온 얘기를 쭈욱 들려 주었다.
영림의 얘기를 다 듣고 혜련 어머니는 안국동으로 부랴부랴 김박사 부인 오신정 여사를 찾아갔다.
『어쩐 일로 이렇게?』
외출을 하려던 오신정 여사를 현관에서 만났다.
『마침 잘 되었구먼요. 우리 아이 시누 아씨가 돌아왔어요.』
『아 그래서요? 강선생도 돌아오셨대요?』
『어쩐 걸요. 그분은 포항에 남으시구 아가씨 혼자서 왔다는군요.』
『쯧쯧! 그 양반 큰일 나셨군. 늦바람이라더니…… 하여튼 아주머님 잘 오 셨군요. 오랫만에 옥영이한테 한 번 들릴려던 참이였는데……』
오신정 여사와 혜련 어머니는 로터리까지 나와 택시 하나를 세웠다.
혜련 어머니를 먼저 모시고, 자기도 푹신한 뒷 큐션에 파묻히며 오신정 여 사는 영림이라는 깜찍한 학생에게 흥미가 가고 있었다.
『그래, 영림이라는 학생은 왜 혼자 헤어져 왔대요?』
『글쎄, 우린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지질 않더군요. 그 분에게서 자기의 정열에 환멸을 느끼기 전에 자기 먼저 떠나왔다고 아가씨는 힘 하나 안 들 이고 또박또박 말하더군요.』
『어쩌면! 요즈음 젊은 애들은 그래서 탈이지 뭐예요. 남녀가 한 번 만나 고 한 번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다 큰 처녀 애들이 제 몸 생 각도 못하고 그저 덤벙거리니……』
『글쎄 부인! 몸 생각이 뭡니까, 우린 도무지 모를 소리가 가정을 가지신 분하구 팔도를 싸돌다 돌아온 새파란 처녀 입에서 자기 인생에 푸러쓰가 되 었다고 후회하는 빛은 조금치도 없거든요.』
차는 푸라타나스 그늘을 지나며 혜화동에 들이닿았다.
『도현 엄마아.』
현관문을 열며 오신정 여사가 호들갑스럽게 불렀으나 집안은 텅 빈듯 고즈 넉했다.
『아! 사모님 오셨군요.』
부엌에서 푸성귀를 씻던 식모가 손을 닦으며 나왔다.
『다들 어디 갔우?』
『오늘 아침이 할머님 생신이시라 그래 모두 정릉 갔어요.』
『그래? 그럼 어쩌노…… 저 식모, 집은 우리가 봐줄 테니 곧장 정릉 다녀 와야겠오. 도현 아버지 계신 데를 알고 또 같이 나간 학생도 돌아왔으니 정 릉 가서 도현 엄마랑 할아버님을 모셔와요.』
『아! 우리 선생님이…… 그럼 내 곧 다녀 올께요. 이리 들어오셔요.』
오신정 여사와 혜련 어머니는 응접실로 들어가고 식모는 옷을 바꿔 입고 정릉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로부터 얼마 뒤 문 밖에 차 멎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나며 강학선 교수와 혜숙을 데리고 옥영이가 들어왔다.
『이렇게 무더운 데 저의 집 일로 수고를 끼칩니다.』
『별스런 말씀……』
인사들을 나눈 뒤 탁자를 끼고 네 사람은 마주 앉았다.
『도현 아버지 일 때문에 아주머님이 제게 오셨잖아요. 그래 제가 모시고 왔답니다.』
옥영이가 마주 앉은 혜련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말씀을 드려야 되겠기에……』
그러며 혜련 어머니는 영림에게서 들은 얘기를 빠짐없이 들려 주었다.
『아가씨 얘기가 강선생님은 며칠은 더 포항 여관에 계실거라구요.』
『전해 주시는 말씀 감사히 들었읍니다.』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하여 강학선 교수는 자리에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어미야 이렇게 하자! 아무래도 내가 밤차로 내려가서 석운일 만 나 보겠다.』
강학선 교수는 전보를 치겠다고 밖으로 나오고 굳이 만류하는 옥영의 청에 못 이겨 오신정 여사와 혜련 어머니가 저녁을 마치고 옥영네 집을 나온 때 는 여름 밤이 괘 깊은 뒤였다.
『아가씨 집에선 어머니랑 까아맣게 기다리고 계실 터인데……』
오늘이라도 돌아가봐야 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혜련 어머니는 하고 있었 다.
그러나 영림은 봉선화가 무더기 무더기로 햇볕을 받고 있는 꽃밭을 내다보 며 잠자코 아침 화장만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가씨를 낳아 주신 부모님이 계신 곳이라야 안식처가 되어 주 지, 아가씨 혼자 있음 마음이 외로워요.』
그제야 파후를 치던 손을 멈추며 영림은
『어머님, 너무 염려 마셔요. 저도 조금은 제 일 해 나갈 줄 알아요.』
『글쎄, 난 영림 아씨가 너무 총명해서 그게 늘 걱정이라오.』
『후훗! 총명이 지나처서 위태하시단 말씀이죠.』
『아이, 재롱의 말두…… 호호.』
『어쩌면 어머니도, 불국사까지 나녀온 미쎄즈인데 그렇게 아기같이 놀리 기만 하셔요 후훗……』
『쯧! 그런 말 쓰면 안돼요.』
목소리를 죽이며 조용조용히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는 혜련 어머니 쪽으로 어젯밤을 꼴딱 새운 혜련이가 까부라져 잠이 들어 있었다.
별빛 속에 잠든 삼청공원 일대를 은은하게 울려오는 자정 종소리를 들으며 영림이도 잠을 못 이루었지만, 영림이의 나타남으로 하여 되살아오는 충격 속에 혜련은 뜬 눈으로 지내다 오늘 새벽엔 각혈까지 한 것이었다.
『…난 이제 아무런 것도 생각하기 싫어요. 아가씨는 날 페씨미스트라구 그러셨지만 난 내가 갈 앞 길을 너무나 빠안히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인 걸 요 조용히 나 혼자서 죽어 가면 될 사람이예요.』
사랑을 받는 감각적인 행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행복 속 에서 영원한 행복을 모색하던 프라우 조르게의 체념은 영림이의 불타는 의 욕 앞에서 콜칵 콜칵 피를 토하고 까부라져 누워 버렸다.
『내가 얻니한테 괜히 왔어.』
핏기라곤 한 점도 없이 새하얗게 잠든 혜련을 들여다 보며 영림은 지금 자 기는 그 올케를 위해서 못할 일을 시켜 주었다고 후회 비슷한 감정 하나가 획 날아왔다.
그러는데 요란하게 대문 소리가 나며 눈물 섞인 목소리가 뜰 아래에서 왔 다.
『아이구, 영림아!』
오늘 아침 혜련 어머니의 부탁으로 건 오신정 여사의 전화를 받고 허둥지 둥 달려온 어머니였다.
『나는 네가 꼭 죽어서 돌아오는 꿈을 열 번이나 꾸었단다. 우리 영림인 착 하지, 얘 영림아!』
딸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우는 어머니 앞에서 이런 어머니를 두고 자기는 외따른 섬 속으로 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의 손 하나를 잡은 채 영 림도 조용히 울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그만 우셔요.』
기운 없는 소리였다.
『아…… 더위를 타느라고 고생이 더한 모양이로구나.』
그제야 자리에서 가까스로 일어나려는 혜련을 말리어 영림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새벽엔 또 각혈을 했답니다.』
이 어머니와 딸 앞에서 영림 어머니는 무어라고 떳떳한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네 남편 하나 없는 셈 치고 집에 와서 있으려므나.』
이 불쌍한 며느리 앞에서 시어머니는 자꾸만 가슴이 조인다. 어색한 표정 이 두 어머니에게 흘렀다.
『얘, 영림아! 빨리 가보자. 네 아버지도 걱정이 태산 같으시단다.』
치료비에 보태라고 봉투에 넣은 수표 한 장을 억지로 남기고 영림네 모녀 는 골목 밖에 세워 놓은 차에 올랐다.
아현동 집 문 밖에서 차를 멈추고 영림과 어머니는 총총히 안으로 들어갔 다.
『어머나! 아가씨가……』
대청 마루에서 다듬이질을 하고 있던 식모 덕순이가 영림을 보고 반색을 하며 뛰어 나왔다.
어린 아이들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어쩔 줄을 모르는 덕순이의 손목 하나를 영림은 잡아주면서
『덕순 언니, 잘 있었어?』
『아유, 아가씬 여전하시네.』
『할머니도 안녕하셨어요?』
돋보기 넘어로 웃음을 죽이며 영림을 보고 있던 침모 할멈도 그제야
『아가씨 도망갔음 한 일년쯤 있다 오시지 벌써 오시우.』
『가다가 여비가 떨어졌어요 후훗!』
『호호호……』
웃어 젖히는 덕순의 뒤에서 어머니는
『얘, 영림아 그 가슴이 절렁거릴 소린 그만 두어라 아이휴!』
『저어 아가씨……』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덕순이가 어머니 눈치를 힐끔거리며 영림의 귀에 대 고 소근거렸다.
『꼭 소박 맞고 쫓겨온 시골뜨기 같아요, 아가씨 몸 차림이 훗후……』
『요것이 누굴 놀리려고.』
그러나 영림도 그런 종류의 감정 하나가 꼬리를 늘이고 있었다.
『얘, 어서 네 방으루 건너 가서 그 먼지 앉은 옷을 벗어 놔라.』
어머니는 잃었던 딸이 아니더냐고 어린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를 열심히 생각하며 손수 주방으로 나가 얼음에 채웠던 쥬스며 청과들을 벗겨왔다.
『너를 낳은 어미지만 네 심경은 아예 묻지 않기로 하겠다. 그저 이렇게 네가 이 어미에게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이 그지 없이 고맙구나!』
어머니는 쥬스를 훌쩍 훌쩍 마시는 딸을 보자 또 눈물이 솟았다. 생각하면 이가 갈리도록 원통한 일이요, 가슴을 풀어 헤쳐도 분한 마음을 다할 수는 없겠지만, 지나간 두 달 동안 행방을 모르던 귀여운 딸 자식을 기다리는 하 루하루에서 그런 마음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가고 이렇게 살아서 보게 된 까 다로운 성미의 딸이 그지 없이 고맙기도 했다.
『어머니, 죄송스럽게 됐어요. 그렇지만 이 말은 제 자신이 부끄러워 하는 소리는 아니예요. 저는 지금도 강선생님을 안 일을 조금치도 후회하고 있지 는 않으니까요. 지나간 얼마동안은 칸나의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시기였 으니까요.』
『아이구, 얘야 뭐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네가 장하구 착하 게만 뵈는구나.』
영림은 일어서면서
『아버지 오빠 여전하시죠?』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물음이었다.
『여전이 뭐냐? 요즘은 극성이란다. 무슨 복을 타구났는지. 네 아버진 그 황산옥 인가 뭔가를 내보내고 젊은 여사원을 들여 앉히겠다고 야단이고, 네 오래비는 그 애리 때문에 회사 일보다는 땐스 홀 일이 큰일이니…… 네 어 미 혼자 사면초가구나 얘야.』
영림은 자기 방으로 건너왔다.
그동안 쓰지는 않았지만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위엔 어느 사진첩에서 떼었는지 M대학 정원 고목에 기대서서 찍은 영 림의 사진이 화려하게 웃고 있었다.
자기가 없는 동안 이렇게 자기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사랑이 우루루 왔다.
어머니는 어느새 「밀화부리」 조롱도 양실 처마 밑에서 영림의 책상 위에 옮겨 놓고 있었다.
『영림아, 목욕 물 넣어 놨다.』
『네에.』
영림은 옷장으로 가서 가운으로 바꿔 입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그때 이 으리으리한 고종국 사장집 문 앞에 멎는 감색 시보래 한 대가 있 었다.
지금 막 아현동 중턱까지 올라온 택시에서는 옅은 회색으로 말쑥하게 차린 청년 하나가 내려 이내 아담하게 꾸민 영림네 정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앞뜰 돌산 사이로 기승을 부리며 성연(盛宴)을 베풀고 있는 칸나의 싱싱한 잎사귀들 사이로 우드커니 드러난 삼층탑을 바라보며 순간 청년의 늠름한 얼굴엔 잠시 한 가닥 우수가 스처갔으나 이내 청년은 평온한 표정을 회복하 며 안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이구, 도련님이 어떻게…… 어서 들어오우!』
건너 방에서 나오던 어머니가 청년의 손을 잡을 듯 반가와 하였다.
『너무 어랫동안 뵙지 못했읍니다.』
청년은 모자를 벗으며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래, 더위에 댁에서들 모두 편안하시고?』
『네! 염려해 주셔서……』
어머니와 청년은 양실 마루에 선풍기를 내놓고 마주 앉았다.
『그 동안 어쩌면 그렇게 오지 않었어요? 무척 바빴나봐.』
어머니는 무겁게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는 청년의 얼굴을 건너다보았다.
『네…… 실은 그 동안 여권수속도 좀 남았고, 또 저는 저대로 마음의 안 정을 잡느라고 문 밖 출입을 별로 안 했읍니다.』
『아 참! 도련님이 미국 간됐지? 그래 어떻게 됐노?』
『저, 내일 아침 서북향공편으로 떠나게 되었읍니다.』
『내일?』
그동안 복잡하던 수속과 감정을 정리하고, 내일 도미여정(渡美旅程)에 오 르겠다는 준오의 늠름한 얼굴을 어머니는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앞으로 종종 못 뵈웁게 되었읍니다. 떠난 뒤 소식이나 자주 전해 드릴까 하고 오늘 이렇게 어머니를 뵈러 왔읍니다.』
덕순이가 오렌지 쥬스 두 컵을 들여왔다. 그 쥬스를 저으며
『그래 얼마나 가 있으려우?』
다급해지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물었다.
『글쎄요. 한 사년 생각하지만 그건 가서 봐야 알겠읍니다.』
준오와 어머니는 컵을 놓고 창가로 시선을 던진 채 얼마동안 잠자코 있었 다.
『저 그러면 가봐야 되겠읍니다. 사장님과 고형껜 인사 드렸읍니다.』
『아니 우리 영림이도 있는데 점심이나 먹고 가요.』
『아…… 영림이가!』
탁상 위에 모자를 집어든 채 준오는 얼맛동안을 망서리고 있었다.
『이제 곧 들어올 테니, 자 더 앉아서 얘기나 좀 하다 가요.』
『아니 어머니, 저는 어머니를 뵈러 왔지 영림씨를 보러 온 것은 아니니까 요. 영림씨를 꼭 만날 필요는 없읍니다.』
『…………?』
준오는 조용히 문 앞으로 다가섰다.
『떠나면서 준오는 영림씨의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더라고 그렇게만 전 해 주시면 감사 하겠읍니다. 그러면……』
『아니 그래두 영림일 잠깐 보고 가야지 내일 미국으로 간다는 사람이.』
준오는 말없이 문을 열었다. 이미 결정지어진 자기의 인생 코스에 이제 와 서 새삼스럽게 고영림을 만남으로해서 변화가 오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 았지만, 지나간 괴로운 기억을 소생시켜 본다는 것은 역시 불 유쾌한 일이 라고 영림을 보지 않고 가버리고 싶었다.
『아……!』
『준오씨!』
그러나 준오가 열어 놓은 문 밖엔 고영림의 화려한 눈동자가 오똑이처럼 마주 서서 돌부처같이 표정을 잃은 준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오씨!』
말이 없다. 말이 없는 대신 준오는 영림의 눈동자를 자꾸만 들여다본다.
『말이 없음 저 싫어요. 내일 떠나신다죠?』
『…………』
준오는 창가로 가버렸다.
『축하합니다.』
영림도 창가로 나란히 갔다.
『자 난 나가서 상 볼 테니 그렇게 멍청하니 섰지들만 말고 이쪽으로 앉아 서 얘기들이나 해라 응?』
어머니는 열린 또어를 닫으며 나갔다.
『내일 몇 시에 떠나세요?』
『…………』
한 사람의 젊은 순정을 병아리의 유희라고 코웃음쳐버리던 영림을 준오는 그의 눈 동자만 무섭게 쏘아본다.
『그렇게 보시면 전 울 것 같아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자꾸만 마음이 울먹울먹해지는 것을 영림은 기를 쓰 고 참아갔다.
『저 무척 나빴죠?』
영림은 비뚤어진 웃음 하나를 지어 보였다.
『영림!』
마침내 준오의 침착한 목소리 하나가 그러한 영림의 감정 위로 왔다.
『…………』
『내가 이 순간에 영림에게 분명히 할 수 있는 얘기는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렇소! 나는 지금 쓰라린 과거도 순정도 깨끗이 망각해 버릴 수 있는 기능을 인간에게 부여해 준 조물주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 소.』
『아……』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사실조차 쑥스러운 일이지만 지난 날의 나의 순정이 영림씨에겐 너무나 아까웠읍니다. 이제는 칸나를 기다리는 행 복 속에 살아 가겠다던 준오의 순정은 가고, 자기 부활(自己復活)속에 살아 가는 희망과 의욕만이 제게는 남았읍니다.』
『아 준오씨! 준오씨, 그만 그만 둬 주세요.』
영림은 마침내 소파 등에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어여쁘신 숙녀 앞에서 같이 울어 드리는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만 불행히 도 제겐 눈물이 말라버렸읍니다. 자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요.』
『준오씨!』
밖으로 나가려던 송준오를 울음을 그친 영림의 목소리가 막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준오씨! 언젠가처럼 오해하시면 안 돼요. 눈물이 불행의 증거만은 아닌 것처럼 저, 지금 준오씨가 생각하고 계시는 것보다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예 요. 지금 흘린 제 눈물로 준오씨는 순정의 복수를 하셨다고 기뻐하시겠지 만, 저는 저대로 달갑지 않았던 눈물의 부채를 갚아버린 셈이예요. 준오씨 에겐 어느새 망각의 생활철학이 생기셨다니 앞으론 행복하실 거예요. 자 그 러면……』
서로의 이별을 위해서 악수 하나를 남기자는 영림의 손을 준오는 끝끝내 잡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영림은 고마운 사람이요. 나에게 청춘을 배워 주고 이제는 눈물의 기교까지 배워 주니…… 그러나 내가 마지막으로 영림에게 남길 말은 역시 영림은 고독해야 될 사람이란 말입니다.』
어머니의 만류도 듣지 않고 송준오는 정원 돌산 옆으로 뚜벅뚜벅 사라져 갔다.
『아 ── 준오도 가버렸다.』
강(석운)도 가버렸다. 칸나의 저항도 의욕도 가버렸다. 지금 이 순간엔
「칸나의 고독」만이 세간 넓이의 이 방안에 우두커니 남아 있을 뿐이다.
『칸나여! 내일 일은 신의 의지에 맡기고 오늘은 조용히 칸나의 고독을 향 수하자.』
失樂園[실락원]의 별
[편집]종일을 두고 이글이글 작렬하던 팔월의 태양이 잿빛놀 속으로 사라진 뒤 서울역전 광장에는 깊기 쉬운 여름 밤이 스름스름 날려앉고 있었다.
그 어둠 속으로 오늘 밤 서울을 떠나가는 무수한 군상들의 피곤한 모습들 이 모여들고 있었다. 헬멧을 쓴 점찮은 노신사, 대천으로 캠프를 떠나는 중 학생들, 석간신문 장수며 담배 파는 아이들, 행상하는 여인들의 억센 사투 리도 들려오고……
주차장엔 얼마 뒤에 도착될 경부선 급행열차를 맞기 위해 택시며 지프차들 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지금 그 주차장으로 합승택시 하나가 들어왔고 이내 하기강습을 받으러 온 듯한 지방 교사들이 세명 내린 다음 아로하 노타이를 입은 청년하나가 내려 다음에 내리는 여인의 보스톤빽을 받아 들었다.
『시간이 거의 됐을 겁니다.』
젊은 청년과 흰 모시적삼에 곤색 나이론 치마를 입은 대학을 갓 나온 듯한 여인은 늘어선 군중들 틈을 헤치며 나란히 이등 대합실로 들어섰다.
가벼운 피로감이 집산되어 가는 대합실 안 역등(驛燈)들이 무기력한 표정 들을 비춰 주고 있는 구석쪽으로 그들 두 젊은 남녀는 걸어갔다.
청년의 시선이 자기 이마 위에서 타고 있는 것을 여인은 느끼며 고개를 숙 였다.
『수련씨! 다시 만날 줄거운 기약 속에 수련씨를 떠나 보냅니다.』
청년은 여인앞으로 다가섰고, 수련(秀蓮)이라 불리운 여인의 볼은 장미 빛 으로 물이 들어 있었다.
『내려가서 곧 편지 주십시요.』
『네에.』
여인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제 곧 개찰을 할 모양이군요 자아 수련씨!』
청년은 패스포드에서 약혼녀의 승차권을 내 놓았다.
『아이! 찬씨도…… 그런 걸 다……』
그러는 그들 옆으로 웬 보이 하나가 대합실 안을 두리번 거리며 다가오더 니 이내 맞은편 쪽으로 달려갔다.
『아 여기 계셨군요.』
탄력 있는 살이 그대로 들여다 보이는 하늘빛 블라우수와 팽팽한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있던 아가씨가 시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가 보이의 인사를 받 았다.
『그래 전무님 왜 안 오신대니?』
아가씨는 보이가 내미는 쪽지를 펼쳐 본다.
《애리!
무섭도록 잘 팔리는 애리의 냄새를 며칠 동안 나 혼자서 마음껏 독점하려 고 오늘 밤 안양엘 가자던 약속을 내일로 미루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어.
영림이가 오늘 돌아왔기 때문이야. 자세한 얘기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 은 미안해요.
고영해》
『피이! 이건 뭐 제 맘대로야!』
애리는 고영해의 쪽지를 꼬깃꼬깃해서 대합실 구석에 집어 던졌다.
『매담 모실려고 차가 밖에서 기다립니다.』
이윽고 개찰이 시작되었고, 고전무와 유원지로 휴양을 떠나려던 이애리는 보이의 뒤를 따라 대합실을 나오고 있었다.
『어마?』
『왜 그러세요?』
『아니야, 미스터 권은 여기서 기다려요, 나 잠깐 저분 보고 올 테니.』
애리는 그러며 지금 막 대합실 문 밖으로 빠져 나가는 아로하 노타이의 청 년 곁으로 깡충 깡충 뛰어갔다.
『저…… K신문의 송기자님 이시죠?』
『…………?』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방글방글 웃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송찬 기자는 의아 한 눈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이렇게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송찬 기자의 기억엔 없었다. 그래서 송찬은 여인을 약간 경계하며 물었다.
『네! 제가 송찬입니다만,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그러자 애리는 쿠욱 웃으며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날 밤 늦게 술이 취하셔서 친구분들이 모시고 제 집에 오셨댔으니까요.』
『네에?』
통 모를 소리였다.
『호호호…… 무얼 그리 놀라셔! 강석운 선생님이 쓰시던 「유혹의 강」이 중단되고 그분 따님의 호소문이 실린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고 세상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가정 낙원 설의 제창자요, 자기 결혼의 상담역이셨던 강석운 선생의 불행이 서러워서 자기는 지금 이렇게 울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 자기는 모든 인간을 불신임해 버린 고독 속에서 술을 마셨다고 서글피 우시 던 날 밤의 기억…… 혹시 송기자님 기억나세요?』
『아…… 그랬읍니까.』
비로서 그날 밤의 기억이 희미하게 살아 오고 있는 송찬 기자였다.
그날 밤, 자기도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강석운 선생님을 존경하고 은혜를 입었던 여자라던 장미 무도복의 땐서…… 혹시 지금 자기 옆에서 방글거리 고 섰는 이 여자가 그날 밤의 그 땐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송기자는 고개 를 조금 숙이며
『그날 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요. 저 을지로 이가 애리자였죠?』
『호오! 쩌날리스트시라 기억도 좋으셔. 그럼요 땐스홀 애리자였고 제가 그 강석운 선생님을 둘도 없이 존경한다고 한 백 번은 발등을 밟히던 이애 리예요.』
『아, 그러시다면 더우기나 실례가 되었군요.』
『아이 별말씀! 허지만 송기자님 때문에 저는 우리 금고한테 단단히 욕을 먹었죠. 아직도 애리한텐 쎈치가 있다구 밤을 홀딱 새우며 아주 혼났어요.
호호홋.』
송찬 기자는 이런 여자와 더 마주 서서 이야기할 흥미가 없어졌다. 뉴스를 잡기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여자다 이런 여자 앞에서 약혼녀를 떠나 보내고 돌아 오는 첫시간을 맞다니 기분이 잡쳐 왔다. 그러는데 여인이 바싹 다가 서며
『송기자님 바쁘시지 않으시면 제게 가서 맥주나 드시다 가시죠.』
『아니! 좋습니다. 저 지금 취재 중이니까요.』
『호오…… 밤에도 취재활동을 하신다? 그래 역사근처(驛舍近處)에서 스쿠 프(特種)라도 하나 잡으셨어? 호호.』
『자 그러면 실례합니다.』
그러자 전찻길을 넘으려는 송찬 기자를 애리는 막았다.
『그러시담 이 애리가 K신문 일단 기사거리 하나 드리죠.』
『네에? 기사요?』
애리는 잠자코 웃는다.
『작가 강석운씨 귀가(?) 오늘 정부 고영림은 고독의 방에 안착! 호호 어 때요?』
『거 정말입니까? 고영림이라는 학생이 돌아왔어요. 강선생님도요?』
『강선생님은 모르죠만 영림인 분명히 돌아왔어요. 신빙할만한 소식통이 전해 왔으니까요.』
『애리양! 감사합니다. 뉴스 쏘스는 밝히지 않겠읍니다만 사례는 강선생님 을 만난 뒤 베풀겠읍니다.』
송찬 기자는 애리의 손목 하나를 가볍게 흔들고 전찻길을 뛰어 넘었다.
아! 그러나 바로 그때 그들이 서 있는 바로 뒤까지 다가왔던 중년신사 하 나가 파나마 모자를 깊게 눌러 쓰며 허둥지둥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애리가 조금만 일찍 돌아섰어도 보았을 것이었다.
『이제는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벌이다!
죄악이다.』
조금 전에 도착한 야간열차에서 내린 여객들이 분산되는 역전 광장 전찻길 앞에서 마주 서 있는 이 애리와 송찬을 본 순간 알지 못할 무거운 죄의식 (罪意識)에 사로잡힌 석운은 무질서하게 흩어지는 택시들 사이로 얼른 몸을 감추고 말았다.
지나간 날 하나의 성실한 작가로서 또는 인생의 선행자(先行者)로서 애리 의 불우한 운명을, 송찬의 젊음을 진실하게 상담할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하 면 김옥영이라는 여인 하나의 애정과 강석운의 애정이 결합된 발판 위에서 성립될 수 있었던 대인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
한 여자가 주는 아늑한 애정의 행복 속에서 남편은 네 아이의 좋은 아버지 가 될 수 있었고 선량한 시민이 될 수 있었고 성실한 작가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애정의 발판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 지금에 와서 아는 얼굴을 만 난다는 것은 더구나 애리나 송찬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아내 옥영의 조그마한 분신이라도 어쩌다 우연히 마닥드린 것만 같아 무섭다.
그래서 석운은 문을 열고 기다리는 빛 낡은 시보레 한 대에 올라탔다.
『합승입니다.』
조금 전 이차로 송찬이가 왔고 바로 지금 자기가 앉았던 쿠션이 그 자리라 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앉은 석운에게 운전수가 말했다.
『여보! 돈 치루겠오. 종로 사가……』
손님을 기다리던 조수를 태우고 차는 전찻길로 슬금슬금 나섰고, 이미 자 기에겐 피서 여행의 고달픔 속에서도 즐겁게 꿈꿀 수 있는 귀로(歸路)의 행 복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득히 사라져 버렸다고 눈을 감아 버렸다.
슬금슬금 군중을 헤치며 나가던 차가 남대문 쪽으로 머리를 둔 채 빠져 들 어갈 사이가 없이 분주했다. 그러고 있는 낡은 시보레 옆으로 엷은 감색의 박카아드 한 대가 미끈한 차체를 나란히 하여 왔다.
만일 지금 완만한 블루스가 새어 나오고 있는 신형 박카아드 속의 애리가 싸이드 글라스로 고개를 돌렸거나 강석운 역시 좀 더 감정에 여유가 있었더 라면 지금 막 여름 밤이 무겁게 내려앉은 페이브 위로 두 줄기 헤들라이트 를 눈부시게 뿜으며 앞서버린 박카아드는 서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석운이 고개를 돌려 거리를 본 것은 박카아드가 이미 앞서버린 뒤 였다.
『괴로운 일이다!』
자신의 초기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꿈 꾸고 사랑하고 안타깝게 인생을 체 험하다 돌아간 남대문통을 자기 위치를 상실한 작가 자신이 쓸쓸히 내다본 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아아!』
그때였다. 박카아드의 속력이 주는 십여 메터의 거리 사이로 지금 들어서 려는 승합 뻐스. 그 뻐스가 남긴 몇 명의 피곤한 그림자들 중에서 설백처럼 흰 머리털을 한 노교수의 여윈 얼굴 하나가 휙 스쳐간 순간 석운은 고개를 푹 수구리고 말았다.
『아 아버님께서 어떻게 이렇게 밤 늦게…… 아니? 아아……』
그렇다. 자기가 포항 여관에 있다는 소식을 영림의 연락으로 아시고 어젯 밤 차로 내려오셨다 기운없이 돌아 오시는 강학선 교수라고.
『그렇게 근엄하신 아버님께서.』
석운이 애써서 묵살하려던 윤리가 가슴을 쾅쾅 처왔다.
영림이가 행복한 기억 속에 떠난다고 떠나버린 새벽에 석운도 영림이도 없 는 포항 여관에 더 있기가 싫어서 그날 아침 뻐스로 대구에 나왔고, 어젯밤 을 고뇌 속에서 밝힌 석운은 오늘 대구를 떠나온 길이었다.
박카아드는 어디쯤에선가 놓쳐 버리고 낡은 시보레는 종로로 들어서고 있 었다.
화신을 좀 지나서 석운을 남긴 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걸으면서……』
걷기라도 해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석운의 감정은 다급해져 있 었다.
어두운 대기 속을 석운은 휘청휘청 걸어간다. 파고다공원 앞이였다.
그러는 그의 앞으로 지금 공원에서 저녁 산보라도 하고 나오는 듯한 중년 부부의 도란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왔다. 정감도 왔다.
『괴로운 기억…… 행복했기에, 너무나 행복했기에 괴로운 기억이다.』
연애를 연애하는 젊은 애인들처럼 팔 한짝씩을 나란히 끼고 걸어가는 어느 행복해 보이는 중년 부부 뒤에서 석운의 너무나 생생한 그런 종류의 과거가 또렷또렷이 살아오고 있었다.
『여보오! 이런 밤엘랑 차 타지 않아도 되죠?』
자주 나오지 못하는 문 밖 출입이니, 오늘 저녁엔 혜화동 집까지 사뭇 걸 으며 같이 얘기나 하자는 옥영의 말이었다. 이런 종류의 말은 명동엘 나가 는 날 밤엔 진고개에서 났고 광화문에서도 났고 동대문에서도 났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젊은 애인들처럼 그들 부부에겐 화제의 빈곤이 없었 다.
얘기하며 걷다가 배가 고프면 밤이 늦은 양식집이고 화식집이고 때로는 눅 거리로라도 배를 채우면 되었다.
『여보! 남들은 살기 위해 먹는다는데 난 당신과 얘기하려고 이렇게 먹으 니 그럼 난 얘기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인가 봐! 후훗.』
어두운 밤하늘 사방에서 꼬리를 잘린 은어처럼 옥영의 「후훗」 거리는 웃 음 소리가 뿌려져 오는 것만 같았다.
『아…… 옥영이!』
사가까지 걸어온 석운은 대학가로 곧장 걸어가고 있었다.
『옥영이! 결국 나는 나쁜 사람이 돼 버리고 말았지만 당신만은 제발 아이 들 곁으로 와 주시오!』
자기는 제 손으로 가정낙원을 부수고 나왔지만 아내 옥영이만은 부서진 낙 원을 매만지며 ( )어 주었으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본능적인 한 가닥이 솔직히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도 옥영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집으로 달려가 볼까?』
막상 헤화동 로터리까지 왔지만 옥영이 앞으로 간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석운이었다.
『너무나 소중한 당신을……』
영림이 같은 구슬에 비기며 잊어버렸더냐고 석운의 애욕 행로엔 절실한 후 회의 감정이 결실되어 있었다.
『아, 술이라도 좀 마셔보자.』
석운은 로터리에서 조금 들어간 한길 가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꼬치 안줏 집으로 들어갔다.
정종 한 컵을 마시며 생각해 보니 지나간 초하(初夏) 세검정 숲 속에서 영 림과 첫 포옹을 나누며 돌아오던 날 밤 아내에의 범죄 의식과 자신의 인생 에 위기를 후딱후딱 느끼며 까다로운 지성을 무마하기 위하여 술을 듬뿍 취 하도록 마신 집이 이 집이었다.
『안 됐읍니다! 술 그만 두겠오.』
눈이 둥그래진 주인 앞에 정종 반되 값을 집어 주고 석운은 곧장 나오고 말았다.
『비록 옥영은 만날 수 없더라도 야쓰데를 가꾸며 낙원을 잃지 말자던 그 집이나 보고 돌아서자.』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아서 도선이 동무 창길이네 집.
『아……』
마침내 석운은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이층을 바라보며 우뚝 섰다.
우뚝 멈춘 돌부처의 자세로 담 너머 이층을 바라보고 섰는 석운에게 지나 간 날의 고즈넉한 행복들이 다급한 감정의 기억으로 밀물쳐 왔다.
『옥영의 평온한 숨결이 묻혀 있던 팔조방……』
그 방엔 지금쯤 자기가 그렇게 뿜어내던 자옥한 담배 연기도 너저분하게 흐트러져 있던 원고 뭉치며, 잉크병, 재떨이, 담배 갑, 라이터, 위스키 병, 잡지 나부랑들의 어수선한 기억도 옥영의 투명한 감정 속에서 가물가물 쫓 겨 났을 것이라고 석운은 안타깝게 문 앞으로 다가섰다.
대문엔 언제나처럼 엷은 펭끼 칠을 한 창살이 있었다.
『옥영이가 있을 집이다. 경숙이, 도선이, 도현이 일곱 살 짜리 혜숙이가 있을 집이다. 아?』
야쓰데를 가꾸며 아침 저녁 맏딸 경숙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아 내의 쿡쿡대는 웃음 속에 몇 년이고 살아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이냐고 석운은 문살 틈으로 그 집안을 들여다본다.
푸른 숲 속에 잠들은 정원엔 달빛이 내려 쏟고 있었다.
등나무 그늘옆에 자그마한 돌산…… 그 돌산엔 삼방약수(三防藥水)터며 석 왕사(釋王寺)로 싸돌아 다니던 옥영과의 줄거운 약흔시절 이곳 저곳에서 주 워모은 기념석(紀念石)들도 있을 것이라고,
『요, 깜정 돌은 아마 명사십리(明沙十里)의 훈장일 거야.』
주먹만한 곰보 돌 하나가 애정의 훈장(勳章)이라고 어느 일요일 아침 연못 에 물을 뿜으며 우쭐대던 옥영의 행복이 잠들은 그 돌산 곁엔 조그만 연못 도 있었다.
『아! 별빛 속에 잠든 연못……』
옥영의 시심(詩心)이 곧잘 쫑알대던 그 연못엔 오늘 밤 혜화동의 하늘 위 로 총총한 별빛들이 고요히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쯤 옥영의 별도 저 연못 속에 잠들어 있을 테지……』
멍하니 무수한 별들이 잠긴 열 여섯 평의 연못 속을 들여다보며 석운은 울 고 있는 것이다.
『저 오리온 성좌 넘어 그중 초록으로 빛나는 별은 당신 별이야!』
석운이가 일러 주었던 옥영의 그 초록별도 연못 속엔 있었다.
『옥영은 초록별……』
밤하늘의 무수한 별무더기처럼 수 많은 여인 중에서 단 하나 초록별인 아 내 옥영!
『아! 나는 다시는 그 별빛을 내 가슴에 못 맞을 것인가.』
가슴이 아파왔다.
선악과(善惡果) 한 알이 없는 에덴동산을 천사장 미가엘은 그릅 천사들을 두어 아담과 이브를 추방시켰지만 석원의 낙원은 애정의 반신을 잃은 채 고 요히 잠들어 있는 것이다.
『옥영이! 날 한 번만 용서해 줄 수는 없오?』
지금이라도 이 이층 가옥 어느 방 안에 옥영의 조그만 몸뚱이가 곤히 잠들 어 있을 것만 같아 석운의 손이 하마터면 초인종 보단을 누를 뻔하였다.
『이대로라도 와락 달려가 레코드를 망가뜨렸던 도현이처럼 옥영의 품안에 안기워 앞으로는 정말 당신만을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싶은 이 절실한 마음을……』
옥영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일시적인 바람보다는 진실한 연애를 하라고…… 그러나 그때는 이미 강 석운과 김옥영은 남남이라고 말하던 옥영이!』
석운은 문 앞을 떠나며 어두운 담장 밑을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해서 자기 집 앞에 멎는 발소리를 들으며 석운은 허둥지둥 창길이 네 문앞으로 숨어 버렸다.
자기 집 문 앞에서 멈추는 발소리에 석운이가 허둥지둥 이웃집 문 앞으로 숨은 뛰 이제까지 석운이가 서서 별빛 속에 잠든 정원 연못을 바라보던 자 리엔 하얀 하복(夏服)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식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 었다.
『경숙이가 아닌가.』
자신들만의 애정이 중요해서 네 아이들을 팽개처버린 채 아버지와 어머니 는 뿔뿔이 사라져 갔지만 굳세계 살아서 부모가 없는 동생들을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키워보겠다던 맏딸 경숙이……
지금이라도 등 뒤로 달려가 경숙아! 아빠가 왔다고, 이제부턴 너희들 하고 만 살 아빠가 왔다고, 고 조그만 몸뚱이를 붙잡고 힘껏 안아 주고도 싶었지 만 석운의 너무나 강렬한 죄의식이 후들후들 떨고 있는 그를 놓아 주지 않 았다.
그때 현관 문 소리가 나며 아이들의 떠들썩 한 인사 소리가 담 너머 석운 에게 왔다.
뜰에 밟히는 신발 소리도 났다.
『몹시 피곤하실 터인데 아버님! 돌아가실 때 택시라도 하나 잡으세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 옥영이가 돌아와 있었구나!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옥영이가.』
석운은 창길네 집 대문에 기대선 채 조용히 눈을 갑았다.
『옥영이! 당신의 의지가 너무나 고맙소!』
담 너머로 또 목소리가 왔다 이번엔 강교수의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러니 너무 상심 말고 조용히 기다려 보자. 그렇게 며칠 기다리노라면 하늘의 의지가 어떡하든 귀결지어 주시겠지…… 자 그럼 혜숙 어민 들어가 보아라.』
쪽문이 열리며 강학선 교수가 나오고 옥영이도 따라 나왔다.
『할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경숙이가 강교수의 손 하나를 잡았다.
『오냐 경숙이었구나. 오늘 밤 차로 닿았다.』
『그래 포항서 아버지 만나 보셨어요?』
강학선 교수를 오똑이처럼 바라볼 경숙이의 눈동자가 석운의 가슴에 그대 로 날아왔다.
『이번 포항은 헛행이 됐나보다. 나도 돌아가고 정릉 할머니도 목이 빠져 라 네 아비를 기다릴 텐데……』
강학선 교수의 뒤를 옥영이가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따르고 경숙이는 강 교수 옆에서 무어라 종알대며 골목 밖까지 전송을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로터리에서 차 멎는 소리가 나고 크락숀도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아들의 기별을 전하기를 꼬박 기다리실 어머니 ……』
우욱 하고 멎었단 뗑뗑……뗑하며 우루루 종점으로 달려가는 밤전차 소리 가 그대로 석운의 가슴 복판으로 울려왔다.
그때 옥영의 나직한 소리가 밤 공기를 타고 왔다.
『퍽 늦었구나…… 밤길에 조심해야겠다.』
『오늘은 피아노를 좀 더 오래 치느라고 이렇게 늦었어요.』
발 소리가 멎고 쪽문 닫는 소리가 나더니 다음 말은 뜰 안에서 났다.
『내일부턴 좀 덜 치구라도 너무 늦질랑 말아라.』
『네! 그렇지만 괜찮아요. 근데 엄마! 우리 아빠가 어쩌면 그럴까…… 난 우리 아빠가 너무나 밉지만, 엄마 그래도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요. 엄 만 안 그래?』
말 소리들은 사라져 갔다.
창길네 문 앞에서 석운도 나왔다.
『아! 나쁜 아버지!』
나쁜 사람보다는 나쁜 아버지의 감정이 휘익 가슴을 쳤다.
석운은 고개를 푹 파묻고 집 앞의 가등(街燈) 밑을 지나 지금 막 종전차 (終電車)가 오고 있는 로터리로 나왔다.
피곤한 하루의 생활을 마지막 싣고 가는 전차였다.
이내 차는 종로 쪽으로 대학가로를 우루루 몰려 갔고 석운은 적적한 야경 (夜景)속으로 무거운 고개를 돌렸다.
거기, 일과(日課)를 마친 거리 너머론 혜화동 일대의 등불들이 여름 밤의 창 밖으로 껌벅껌벅 명멸(明滅)하고 있었다.
『아…… 젊음에의 노스탈자가 벗어 던진 잔해(殘骸)!』
누구의 외로운 임종이라도 증언하는 듯 껌뻑대는 창 밖의 불빛들을 보며 석운의 고독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에겐 재치가 없었다. 누구나 격어야 되는 사십대의 위기 하나를……』
어쩌다 이렇게 서투르게 처리했기에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등지면서까지 이 밤중에 어디로든 쫓겨가야 되느냐고 차가 종로 사가에 멈추자 석운은 내 려서고 말았다.
『결국 자신에게 너무나 솔직하게 충실했기에……』
그러나 그것은 이런 종류의 불행만 남겨놓았다고 석운의 지성은 좀 더 계 산이 있었어야 되었다고 한 가닥 후회가 준렬히 항의해 왔다.
『대체 세상의 남편들은 이런 경우의 불행을 어떻게 해결하여 왔는가.』
아니, 그것은 꼭 불행이어야만 하느냐고.
『한 사람의 인간이, 더우기 나 한 사람의 작가가 언젠가 한 번은 격어내 야 할 하나의 시련(試鍊)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그렇다면 자기 인생의 성장을 의미하는 이런 종류의 체험은 반드시 불행이라고 규정할 수만은 없 지 않은가?』
순간 기억 속의 옥영이 목소리 하나가 날아왔다.
『당신이 한 사람의 위대한 작가가 되어 주는 것보다는 이 조그만 가정 속 에서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 되어 주는 편을 난 택하겠어요.』
어느 컴컴한 골목으로 들어서며 석운은 힘차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다! 작가의 성장? 잔인한 궤변이다! 악마의 자위다! 그렇다면 나를 이 불행의 구렁이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김옥영!」── 자신보다도 그것은 옥영일지도 모른다, 고 석운은 생각해 본다.
『그것은 정확한 감정이다.』
고영림과의 애정의 자세를 이제 정밀하게 분석해 본다면 거기엔 실로 몇 개의 우발성을 띠울 수 밖엔 없는 것이었다.
『거울을 여들다보며 한 가닥 두 가닥 변색하는 머리카락에서 잠간 잠간 느끼던 내 인생에서 슬픔과 그로해 움터 온 젊음에의 강렬한 향수 때문에 거기엔 고영림이라는 영롱한 구술이 아니였더라면 좀 더 다른 형태의 여유 가 있었을 것이다. 강석운의 인생에 고영림의 감각이 오지 않았더라도 되 었지만 젊은 육체를 가진 영림의 투명한 지성과 줄곧 같이 있는 동안에는 실은 언젠가 영림과는 헤어짐이 있으리라는 잠재의식을 보증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좀 더 중대한 사실은 젊음에의 향수 고영림 이와의 관계고 모두가 김옥영이라는 여인의 십 팔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줄 기차게 뻗어온 애정을 상실할 것을 계산에 넣은 행동은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자학을 의미할지라도 모성애 만을 가지고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옥영이면 자기의 잘못을 용서 받을 수 있을지도.
『그렇다! 나의 불행은 옥영에게서 해결을 볼는지도 모른다.』
두 시간 전 어두운 거리를 걸어가며 느끼던 불안한 감정은 옥영에의 기대 로 점점 순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때 싸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왔고 내일에의 기대로 가슴이 벅찬 석운 은 그 골목 막바지 「신생」(新生)이라는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요란스러운 펌푸 소리와 더불어 여관집의 아침은 밝았다.
석운은 자리에 누운 채 담배 연기를 푸우푸 내뿜고 있었다.
『나는 한 여인의 뿌리 깊은 애정을 배반하고 십 팔년 동안이나 지켜 온 가정을 파괴해버린 죄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속죄의 가능을 상실한 그런 불행한 죄인은 아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가서 속죄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위치 에 지금 자기는 놓여졌다고.
『그렇다! 잃어버린 낙원을 찾자. 비록 멍들고 깨어진 낙원일망정 사랑하 는 아내,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 그곳에만 이 강석운의 행복은 잠들어 있을 것이다.』
돌아가서 그 멍들고 깨어진 상처를 매만지며 이전보다 더 열심히 가꿈으로 써 「가정낙원」을 재축하느라면 옥영에의 속죄의 길도 되어 줄 수 있을 것 이라고 석운은 타월을 목에 걸고 세수터로 나갔다.
우물 곁엔 칸나가 한 포기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받으며 화려한 화판을 사 랑하고 있었지만 석운의 감정은 평온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돌아가선 좀 더 열심히 정원을 매만지고 야쓰데를 가꾸자.』
온 몸에 새로운 행복이 우수수하니 오는 듯했다.
『옥영이! 지나간 날의 과오는 참회로 씻을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옥 영이 나빴던 나를 한 번만 용서함으로써 내 손으로 놓쳐버린 행복을 내 손 으로 잡을 수 있게 해 주오.』
석운은 조반상을 그대로 물리고 부랴부랴 신생 여관을 나왔다.
『어젯밤에 연못에 떴던 초록별 하나를 오늘 나는 놓쳐서는 안 된다.』
옥영을 만나는 순간 석운의 새로운 운명이 결정지어질 것이라고.
『하늘이여!』
별을 잡을 수 있는 쪽의 운명을 석운은 절실히 기원하는 자세로 걸어가고 있었다.
골목을 빠져 나온 석운은 무수한 생활인들이 흩어져 가고 있는 포도(鋪道) 위를 걸으며 일찌기 맛보지 못한 하나의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행복한 가정 을 금새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있는 그의 곁으로 달려오던 택시 한 대가 삐꺽 하고 멎었다.
『강선생님!』
『?…………』
얼른 돌린 시야로 문을 열고 뛰어 내리는 청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 송찬군!』
『선생님!』
『…………』
정에 격하여 송찬은 석운의 손목 하나를 와락 잡았다.
『…………』
『그러잖아도 지금 미아리 나가는 길에 선생님댁에도 들리려던 참이었어 요. 하여튼 선생님 가시면서 말씀하시죠.』
『…………』
석운은 잠자코 큐션에 송찬과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이 돌아오셨을지도 모른다는 말 어젯밤 이애리한테 들었어요.』
그것을 알고 있는 석운은 말이 없다.
『그런데 밤 열시쯤 사모님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선생님은 그렇게 속히 돌 아오실 분이 아니라고요.』
차는 이화동을 지나고 있었다.
『송군! 여러 가지로 고맙소. 그러나 우리 얘기는 내일 합시다. 난 오늘 누구와 한가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요.』
혜화동 로터리에 다 오도록 둘은 곧장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운전수 양반, 여기서 멈춰 주시오. 그리고 송군은 미안하지만 여기 서 내리지 말고 이대로 돌아가 내일이라도 또 들려 주게!』
『알았읍니다. 저는 이 순간의 벅찬 기쁨을 무엇이라고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읍니다. 그러면 다시 뵙겠읍니다.』
석운은 정문 앞에서 내리고 송찬을 태운 차는 가까스로 빠크를 하여 로타 리로 나갔다.
『아! 낙원을 찾아야 한다! 별을 잡아야 한다!』
석운은 가슴 깊숙히 심호흡을 하며 정문을 들어섰다.
마당이며 꽃밭은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손질되었고 연못 가의 야쓰데 화분 도 눈에 띄었다.
『아, 선생님!』
현관 문이 열리며 늙은 식모의 놀라는 목소리가 났으나 마당 한 가운데 우 뚝 멈춘 돌부처의 자세로 석운은 잠자코 이층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나 반쯤 열린 이층 창안에도 오뚝이처럼 반듯하게 선 옥영의 상반신이 오둘오둘 떨리는 눈동자로 마당 복판의 석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조금 전 택시의 크락숀 소리에 휙 하고 온몸을 스처가는 육감하 나를 느끼 며 옥영이가 창너머를 본 순간.
『그이가 오셨다!』
마침내 옥영은 벙어리처럼 오뚝이가 되어 있었다.
「도선 어머니!」를 부르는 식모의 소리를 분명히 들으면서도……
『옥영이가, 옥영이가 나를 보고도……』
그러나 자신도 대화를 잃은 채 옥영이가 서 있는 창 속만 석운은 올려다 본다.
『어쩌다 우리들이……』
이렇게 안타까운 해후(邂逅)를 갖지 않으면 안 되었더냐고 마침내 이층 위 오뚝이의 고개가 툭 하고 꺽어지고 말았다.
『아! 옥영이!……』
창가에 섰던 옥영의 상반신은 획 뵈지 않고 석운은 눈물을 주룩주룩 뿌리 며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옥영이 내가 왔오.』
석운은 잃어버린 별을 잡아야 한다는 다급한 심정으로 층계 위를 성큼성큼 뛰어 올랐다.
『옥영이!』
지난 날의 석운의 서재…… 아직도 원고지들이 쌓여 있는 책상 위에 고개 를 파묻고 옥영은 울고 있었다.
『나는 죄인이 되었오! 옥영이 내가 왔오. 당신이 너무나 너무나 보고 싶 어서 왔오! 옥영의 흐느적 거리는 두 어깨를 석운은 잡았다.』
『아아…… 여보!』
마침내 눈물 젖은 얼굴로 옥영은 석운의 가슴을 무섭게 파고 들었다.
『옥영이, 용서…… 한 번만 용서해 주오!』
석운도 옥영의 머리 위에서 서글피 울고 있었다.
『조금도 거짓 없는 진실이 있다면 옥영이, 당신만이 내 사랑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오. 옥영! 고영림이라는 젊은 이성에게 끌리워 간 것은 애정 의 발판보다는 한낱 젊음에의 향수였오. 어느 것이 진실이고 무엇이 두려 운 일인지도 모르고 그렇게도 뿌리 깊이 간직한 당신의 사랑을 잃었었오.
그것은 곧 내 인생의 파멸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을 순간은 아!……옥영이 나는 불행히도 감각의 노예인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오! 결국 나는 나쁜 인 간이요, 나쁜 남편이요, 나쁜 아버지요!』
그때야 무섭게 울어 대던 옥영의 울음 소리가 점점 꼬리를 잘려가며 석운 의 가슴을 조용히 밀어왔다.
『언젠가 당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참회로 메꾸어질 수는 없 을 것 같아요.』
석운의 가슴을 조용히 떠밀은 옥영은 창가로 일어 섰다.
『아…… 옥영이 너무나 너무나 잘 알고 있오! 인간의 역사는 참회로 메꿀 수는 없는 일이오…… 그러나, 그러나……』
언어를 잃었다. 무슨 말이든 이렇게 용서를 바라고 싶은 절실한 감정을 표 백하여야겠다고 가슴은 소리쳐 오지만 석운의 논리가 질서를 잃으며 꿇어앉 은 자세로 옥영의 손목 하나를 와락 잡았다.
『옥영이! 내가 감히 옥영에게 용서를 바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만…… 아 지금 이 순간에 용서를 바라는 내 마음은 진실이요!』
옥영의 야들야들한 손목 하나가 석운의 눈물 젖은 볼 위에서 무섭게 비벼 지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당신을 용서해 드리고 안 해 드리고 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옥영은 창 너머 하늘로 시선 하나를 던질 수 있는 마음을 애써서 회복하며 분명한 대답을 했다.
『아니, 그것은 무서운 말이오! 지금 내게 있어선 그것만이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앞으로의 내 인생 태도를 결정지워 줄 것이오.』
『그런 말씀 저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저는 지금 당신의 행동의 결과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어쩌면 당신 같으신 분으로도 그런 행 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가…… 하는 행동의 본질부터 생각하고 싶어요.
본래부터 헤실펏던 사람이라면 비극의 종류가 틀리지만 당신의 애정 당신 의 성실을 가지고도 결국 나쁜 남편이 되지 않으면 아니되었다는 사실 ─ ─ 그런 비극적인 사실을 생각하면서 결혼 생활의 허무, 뭇 아내들의 불행 한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거예요.』
『아……옥영이!』
옥영은 지금 강석운 대 김옥영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좀 더 깊이 남 편 대 아내의 문제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내의 불행한 논리가 석운의 가슴에 파동쳐왔다.
『세상에 남편들이야 어쨌든 당신 하나의 성실한 애정만을 믿고 왔던 저로 서는 당신의 일로하여 하나의 인간이 성실과 노력하려는 의미를 가지고도 처리할 수 없었던 인간적 운명의 비애를 느끼기에 먼저 허무의 열매 밖에 가져올 수 없는 아내들의 서글픈 애정이 좀더 가슴에 왔고 여인이라는 이 름의 운명이 좀더 괴롭게 가슴에 왔어요. 때문에 저는 지금 당신의 지나간 행동을 큰 죄악처럼 용서해 드리고 싶은 마음도 용서 못해 드리겠다는 마 음은 별로 없이 이만큼이라도 조용할 수 있는지 몰라요.』
『아니요 옥영이!』
석운도 창가에 옥영이와 마주 서며
『내가 나쁜 놈이 되어서 그런 거지, 인생 그 자체에 대해서 절망을 가질 필요는 없는 거요.』
『아냐요! 그것도 당신의 겸손인 것 같아요. 나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인 생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시는 말인 줄로 알아요.
저도 지나간 날, 온실 속에서 지나던 때 와는 달라요. 절망과 허무 애정의 댓가는 결국……결국……』
그것 뿐인가봐요! 라는 말을 옥영은 종내하지 못하고 커튼에 고개를 파묻 은 채 흐느끼고 말았다.
『아……그러한 허무감을 당신에게 주지 않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던 나 였는데……』
이렇게 울리고야 말았다고 사십대의 인생이 후딱후딱 느끼는 젊음에의 강 렬한 노스탈지어 ── 그 인생의 위기 하나를 극복하지 못한 사나이의 손이 밤 하늘의 수 많은 별들 중에서 단 하나 영혼의 별일 수 있는 여인의 등을 힘있게 눌러 왔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인간인 고로, 그보다도 사나이인 당신에게 절대적인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죄악일는지 몰라요.』
파란 커튼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끼던 옥영이가 석운의 뜨거운 손을 뒤로 느끼며, 결국 강석운의 노력도 성실도 그가 인간이라는 이름의 아들인 이상 절대적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또 ( )것을 바라는 것은 여인이라는 운명의 공통된 에고(利己)일 뿐이라고, 한 마디 한 마디 분명한 자기증언(自己證 言)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며 꼬치꼬치 해부해 놓고야 만족하는 옥영에 게서 언제나 한가닥 존경과 깊은 애정을 느껴오던 젊은 날의 석운이었고, 그러한 옥영의 이성이 성숙하는 연륜과 더불어 보다 더 깊은 인생의 수련을 겪으며 하나의 또렷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였고 이 순간에 그러한 옥영을 석 운은 숨가쁘게 감사하는 것이었다.
『옥영! 당신의 이해 깊은 한 마디 한 마디에 머리를 숙일 따름이요. 진정 으로 진정으로 옥영! 나는 당신 옆에 일생을 푹 파묻고 싶은 감정만이 지 금의 내심경이요. ……앞으로도 이 마음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데 조금의 거짓이 없오!』
『이전에도 당신은 변함이 없겠다고 저에게 여러 변 여러 번 맹세하시군 요.』
옥영은 그것이 서러워 커튼 자락 사이로 무섭게 고개를 파고 들고 말았다.
『아 옥영! 그러나 그 때는 나도 모르는 불평이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리고 있었오. 그것이 비록 막연한 하나의 동경 같은 종류였지만 그러나 그 한가 닥 동경은 마침내 성장하고 죄악을 결실하고 말았오. 그러나 지금은 진정 이오. 조그마한 잡념이 없는…… 내 진실한 증언이오!』
『이 순간에 저도 당신의 심경을 너무나 잘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인 간을 몰랐던 탓인가봐요.』
『옥영!』
석운은 커튼 속에 파묻힌 옥영의 고개를 힘껏 끌어 안으며 도리도리를 해 버렸다.
『옥영이가 인간을 몰랐던 때문보다도, 좀 더 내가 인간을 그릇 안 때문일 거야.』
『아 여보, 제 마음 한 구석에서 당신을 허용 못하겠다고 기를 쓰기도 합 니다만, 또한 당신의 옆이 얼마나 다사롭고 그리운 것도 진정이에요!』
『아 옥영! 옥영!』
석운은 포옹하는 옥영의 체열 속에서 강석운의 가정 낙원이 재생될 수도 있다는 우루루 떨려오는 행복 하나를 후딱후딱 느끼는 것이었다.
『옥영! 고맙소.』
『그러나 여보! 이와 같은 당신과 나의 감정과 대화만으로써 우리들의 가 정낙원이 재생 될 수 있는 희망 위에 서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아무래도 그것이 곧 가정낙원의 원상을 회복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이제부터 당신과 나는 깨진 그릇이나마 마주 붙여서 힘껏 붙들고 나가야해요.』
옥영의 말끔히 눈물을 거둔 얼굴 하나가 석운의 턱 믿에서 하나의 불타오 는 의지의 표정으로 오뚝 서 있었다.
『옥영! 그래요. 부지런히 가정낙원을 가꾸기로 우리 서로 노력합시다! 그 동안 당신의 별빛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나는 좀 더 당신의 별빛을 아득히 바라보면서 나는 좀더 당신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배울 수 있었고, 지나 간 십 팔년 동안의 우리 고즈넉한 행복속에 잠들었던 생활이 얼마나 귀중 하게 보배로웠나를 너무나 너무나 값비싸게 배우고 온 나요. 옥영의 정원 을 들어 설 때 아침 이슬을 받고 짙푸르게 뻗어 간 야쓰데를 보며 이제는 정말 열심히 당신이 그 동안 매만지던 야쓰데를 가꾸겠다고 맹세했오.』
『당신의 그 말씀 제게도 커다란 힘이 되어 줄 것 같아요. 이제 당신도 나 도 더 열심히 노력하며 일할 수 있을 거에요.』
『옥영이! 정말 그럴 것 같소.』
그때 성당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대문 소리가 들려오고 둘이서 내다보는 정원 뜰엔 야쓰데가 짙푸르게 자라나 있었다.
──〈失樂園[실락원]의 별 下卷[하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