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6. 임진란
일본의 나라 형편
[편집]세조 【제7대】 말년부터 이후 백 수십 년간은 바로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해당했지만, 선조(宣祖) 【제14대】 때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등장했는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뜻을 계승하여 일본 국내의 전란을 진압하여 평정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표
[편집]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찍이 국위(國威)를 해외에 떨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조선 등이 일본에 조공(朝貢)토록 했는데, 먼저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이러한 취지를 알렸으며, 또한 유구(琉球), 타이완(臺灣), 필리핀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이 복종할 것을 촉구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의 속국이었으므로 이에 응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이에 뜻을 정하고, 국내가 평정되자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임진 전역
[편집]분로쿠(文祿) 원년 【선조 25년 임진년】 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군을 이끌고 먼저 조선에 도착했다. 조선의 군대는 이를 막아 내지 못하고 통과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세 갈래로 나아갔으며, 가는 곳마다 모든 성(城)들을 함락시켜,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국왕은 의주(義州)로 달아났으며, 명나라에 원조를 요구했다. 일본군의 선봉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나아가 평양을 탈환했으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함경도에 진입하여 회령(會寧)에 도달했다. 이때 반역한 신하인 국경인(鞠景仁)은 두 왕자를 붙잡아 와서 기요마사 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의 수군(水軍)은 이순신(李舜臣)에게 격파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선을 도왔는데,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은 마침내 평양을 수복했으며, 조선의 군대도 또한 곳곳에서 일어났다. 일본군은 퇴각하여 경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여송은 나아가 이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했다.
휴전
[편집]이렇게 되자 명나라 군대는 화의(和議)를 요구했으므로, 히데요시는 이를 허락하고 여러 장수들을 소환하여, 일부는 남쪽에 남아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정유 후역
[편집]게이초(慶長) 원년에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 등이 일본에 가서 히데요시를 알현했지만 화의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 사실이 있었으며, 또한 명나라의 외교 문서에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라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이듬해 【정유년】 에 다시 출병했다. 그러나 그 후 머지않아 히데요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여러 장수들은 모두 히데요시가 남긴 명령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갔다. 이 전쟁은 전후(前後)를 합쳐 7년에 이른다. 그 첫 해가 임진(壬辰)년이므로 이를 임진란(壬辰亂)이라고 일컫는다. 또 이때 조총(鳥銃)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전래되었다.
화친 회복
[편집]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취임하여 국정을 장악했으며, 다시 조선과의 화친을 회복했다. 따라서 선조는 사신을 에도(江戶) 막부(幕府)에 보냈다. 그 후 장군이 바뀔 때마다 조선에서는 반드시 사절을 보내 경축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