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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 아동용/권2/9. 대원군의 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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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왕의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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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왕(李太王) 【제26대】 이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이하응(李昰應)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왕은 나이가 겨우 12세에 불과했으므로 정치의 실권(實權)은 모두 대원군이 손에 쥐었다.

대원군의 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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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먼저 전대(前代)의 외척들을 물리쳤으며, 당파에 얽매이지 않고 인재를 채용하고, 쓸모없는 서원(書院)을 철폐하는 등 단호하게 기존의 폐해들을 고쳐나갔다. 또한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군비(軍備)를 갖추었다. 그러나 백성의 고충을 생각지 않고 경복궁(景福宮)을 재건하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관작(官爵)을 팔았으며, 또한 여러 외국들에 대해 쇄국양이(鎖國攘夷)라는 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에, 인심(人心)을 잃었으며 국운(國運)의 발전을 가로막은 면이 적지 않았다.

천주교의 금지와 쇄국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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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지독히 천주교를 싫어하여 프랑스 선교사를 붙잡아 죽였으며, 또한 많은 신도들을 사형에 처했다.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는 이를 알고는 곧바로 와서 강화도를 포격했으며, 마침내 그 읍성(邑城)을 점령했지만 곧 퇴각했다. 【게이오(慶應) 2년, 이태왕(李太王) 3년】 때문에 대원군은 점점 양이(攘夷)의 뜻을 굳히고 군대의 방비를 엄격하게 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미국의 군함도 역시 강화도에 와서, 일찍이 미국인이 조선에서 살해된 사건에 관해 교섭을 요구하면서, 수비병에게 포격을 가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메이지(明治) 4년, 이태왕 8년】

일본의 권고에 응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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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이 즉위한 초기에 조선과 국교(國交)를 맺었는데, 도쿠카와(德川) 막부 말엽부터 단절되었던 국교를 회복시키기 위해, 특별히 사신을 조선에 보내 크게 정치를 새롭게 할 것을 고하고 수교를 권고하셨다. 그러나 대원군은 쇄국주의를 고수하여 완고하게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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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최익현(崔益鉉) 등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실정(失政)을 논했을 뿐만 아니라 왕도 이미 장성했으므로 대원군은 국정에서 물러나기로 뜻을 정했다. 【메이지 6년, 이태왕 10년】 그가 국정을 맡아본 지 10년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