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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10. 강화도 사건과 임오 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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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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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대원군(大院君)이 은퇴한 후, 인척(姻戚)인 민씨(閔氏)가 전횡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고, 그 사이에 일본 및 여러 외국에 대한 외교 방침은 완전히 바뀌었지만, 안으로는 대원군과 민씨 일족의 다툼이 격렬해졌으며, 밖으로는 청나라의 억압을 심하게 받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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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척 민씨의 전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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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은퇴한 후에는 국왕이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지만, 정치의 실권은 왕비 민씨(閔氏)의 일족에게 돌아갔으며, 대원군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고 대원군이 정한 제도를 고쳤다. 그리고 이 기간은 20여 년간 계속되었다. 이 20여 년 동안에 일어난 중요한 내외 정치적 사건들은 매우 많다. 아래에서 그것을 개략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강화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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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조선의 관계는 앞 과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아무런 결실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明治) 8년에 우연히 일본 군함인 운요호(雲揚號)는 청나라로 가던 도중에 조선 근해를 통과하다가 식수(食水)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고 식수를 얻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다. 그러나 그 부근에 있는 포대(砲臺)의 수비병들이 갑자기 포를 발사하여 배를 공격하였다. 일본 군함은 이에 응전하여 영종도(永宗島) 포대를 함락시켰다. 【9월】 이리하여 일본 정부는 곧바로 사절을 파견하여 이 사건에 관해 조선 정부에게 담판하도록 하였다. 일본 사절이 온 것은 이듬해인 메이지 9년 1월이었다. 이때 대원군의 세력이 이미 쇠약해졌으므로 조선 정부는 결국 일본과 수교하기로 결정하고, 일본에 대해 그 죄를 사과하였으며, 위원을 선정하여 일본 사절과 강화부(江華府)에서 회합하여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이를 강화조약(江華條約)이라고 한다. 【메이지 9년 2월, 이 태왕 13년】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정부는 경성에 공사관(公使館)을 설치하고,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공사(公使)로 주차(駐箚)하게 하였다. 【메이지 13년 4월, 이 태왕 17년】

강화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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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조약은 실로 조선이 근세에 이르러 여러 외국들과 체결한 조약들 중 최초의 것으로서, 메이지 초년 이래 일본과의 수호(修好) 문제는 이에 이르러 비로소 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은 종래 일본과의 교류와 무역을 허락하고,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항하는 것을 승낙하였다. 【후에 이에 따라 원산, 인천 두 항구를 개항하였다.】 그 후에는 구미(歐美) 여러 나라들도 역시 일본의 전례를 모방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하고 모두 통상 무역을 하게 되었다.

왕비 민씨와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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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민씨는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일족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과 왕비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대원군이 은퇴한 후에는 민씨 일족이 정권을 좌우하여, 종래 대원군이 취하던 쇄국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어 여러 외국들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따라서 정부가 이처럼 개국(開國)의 방침을 취하고, 또한 대원군이 정한 제도를 고치는 것을 보고 대원군은 매우 불쾌해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때마침 국왕의 폐위를 기도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사건이 밝혀져 관련된 사람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왕의 서형(庶兄)인 이재선(李載先)도 역시 그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확실히 이러한 일들은 이재선을 받들어 반역을 꾀하려고 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메이지 14년, 이 태왕 18년】 이재선은 대원군의 서자로서, 대원군은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므로, 이재선의 죽음으로 대원군은 우울해하고 마음에 더욱 불평을 품게 되었다.

임오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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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조선 정부는 종래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구식(舊式) 군대 외에 따로 신식(新式)의 한 부대를 설립하고, 일본에서 무관(武官)을 초빙하여 그 훈련을 위촉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15년에 이르러 국고(國庫)가 크게 부족해지자 구식 군대에게 봉료(俸料) 【봉급으로 주는 쌀】 를 지급하지 못한 지 십수 개월이 지났다. 이리하여 구식 군대의 소란이 그치지 않았는데, 겨우 1개월 치 봉료를 지급하게 되자, 창리(倉吏)가 부정을 저질러 썩은 쌀을 지급하였으며, 또 그 액수도 매우 불공평하였다. 병사들은 분노하여 창리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정부는 이에 그 주모자를 체포하여 그를 법으로 처벌하자, 여러 군영(軍營)의 병사들은 갑자기 격앙되어 무기를 들고 왕궁(王宮)에 난입하여 폭동을 일으키며, 또한 민씨 일족의 저택을 파손하였다. 이때 왕비의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간신히 황궁을 빠져나와 몰래 충주(忠州)의 산속으로 숨었다. 대원군은 왕의 부름에 따라 급히 궁궐로 갔으며 다시 정치의 임무를 맡았다. 일본과 조선은 예전에 조약을 맺어 국교(國交)가 점차 개선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정변(政變)에 편승한 폭도의 한 부대는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므로, 공사(公使)인 하나부사 요시모토 이하는 포위를 뚫고 가까스로 위기를 피해, 곧바로 인천으로 가서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국 정부는 이에 하나부사 공사를 다시 조선에 보내 국왕을 알현하고 요구를 제시하게 하였다. 이때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교섭은 매우 곤란해지자, 하나부사 공사 등은 일단 제물포(濟物浦) 【지금의 인천】 로 철수하여, 국교는 곧 파괴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청나라 군함에 연행되어 가자, 조선 정부의 논의는 갑자기 완전히 바뀌어, 제물포에서 담판을 열고 (1) 흉도를 체포하여 그들을 처벌할 것 (2) 피해자를 후하게 장례 치를 것 (3) 손해를 배상할 것 (4) 사절을 파견하여 일본에 사죄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메이지 15년 8월, 이 태왕 19년】 위의 정변을 임오정변(壬午政變)이라고 하며, 위의 조약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라고 한다.

청나라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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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기술한 폭동이 일어나자 국왕은 청나라 정부에 급보(急報)를 보내 급히 원조를 요구하였다. 청나라 정부는 신속히 함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많은 병사들을 경성으로 수송하였으며, 또한 대원군을 꾀어내어 강제로 군함에 태워 천진(天津)으로 보내고 그를 그 나라 【보정부(保定府)】 에 억류하였다. 이때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여겨졌던 왕비는 그 후 무사히 충주에서 궁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의 출병으로 쉽게 질서를 회복하고 뒷수습을 잘 할 수 있었지만,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이때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청나라 군대는 경성에 주둔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인 원세개(袁世凱)는 사사건건 국사에 간섭하였는데, 청나라 정부가 추천한 독일인 【멜렌드로프】 을 조선 정부에서 외교 고문으로 채용하게 하였으며, 영국인 【하트】 에게 세관(稅關)의 업무를 감독하게 하고, 군대는 모두 청나라식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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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일족이 권세를 쥐고 있던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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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민씨(閔氏)는 즉 명성황후(明成皇后)로서, 이왕(李王)의 생모(生母)이다. 왕비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민치록(閔致祿)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이 태왕 3년 3월에 왕비에 책봉되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인 운현궁(雲峴宮)에서 가례(嘉禮)를 치렀다. 이때 나이 16세였다. 같은 왕 10년에 대원군이 나이가 들어 물러났을 때 국왕은 22세였고 왕비는 23세였으며, 이때부터 국왕은 중요한 정무를 친히 처리하였지만 그 정사(政事)는 왕비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또 민치록의 양아들인 민승호(閔升鎬) 【왕비의 사촌형제】 와 그의 아우인 민겸호(閔謙鎬) 등을 비롯하여, 민씨 일족은 높고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여 그 세력이 강하였으며, 대원군이 해 놓은 대부분이 일들을 변경하였으며, 대원군의 일파를 모두 배척하였다. 그 때문에 대원군은 의기소침하여 기분이 좋지 않은 양상이 되었다. 따라서 두 파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민씨 일파는 개화주의(開化主義)의 정치를 행하였으며, 특히 외교관계는 옛날의 면모를 고쳐 일본 및 여러 외국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서로 교류하였으므로, 국가의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민씨 일파가 권세를 떨친 것은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부터 같은 왕 32년 【메이지 28년】 에 왕비 민씨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년간으로, 이 기간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항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 태왕 11년 갑술년(甲戌年) 【메이지 7년, 서기 1874년】 2월 원자(元子) 【곧 이척(李拓) 전하이다.】 가 탄생하였다.

12년 을해년(乙亥年) 【메이지 8년, 서기 1875년】 3월 예전에 일본에 대해 강경한 외교를 담당하였던 전(前) 부산훈도(釜山訓導) 안동준(安東晙)이 효수(梟首)되었다.

  8월 【양력 9월】 일본 군함이 강화도 부근의 포대(砲臺)에서 포격을 받았다.

13년 병자년(丙子年) 【메이지 9년, 서기 1876년】 2월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 의 저택에 방화한 사람이 있었는데, 전(前) 병사(兵使) 신철균(申哲均)은 예전의 민승호(閔升鎬) 폭사(爆死) 사건과 함께 그 주모자라고 하여 주살되었다.

  2월 【양력 2월】 일한수호조규(日韓修好條規) 【이른바 강화도조약】 가 체결되었다.

  4월 【양력 6월】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하여, 일본에 보빙(報聘)하게 하였다.

17년 경진년(庚辰年) 【메이지 13년, 서기 1880년】 2월 수신사 김굉집(金宏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3월 【양력 4월】 일본 변리공사(辨理公使)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와서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에 주재하였다.

  같은 달 【양력 5월】 원산진(元山津)을 개항하였다. 【강화도조약의 결과】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영의정 이최응을 통리대신(統理大臣)으로 삼았다.

  같은 달 대원군이 설치하였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였다.

18년 신사년(辛巳年) 【메이지 14년, 서기 1881년】 4월 신사(紳士) 조준영(趙準永), 박정양(朴定陽), 민종묵(閔種黙),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시찰하게 하였다.

  6월 군제(軍制)를 개혁하여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새로 장어영(壯禦營), 무위영(武衛營)의 2영을 설치하였으며, 또한 따로 백여 명의 병력으로 신식(新式) 부대 하나를 설치하고, 일본에서 육군 중위(中尉) 호리모토 레이죠(堀本禮造)를 초빙하여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10월 안기영(安驥泳), 임정호(任鼎鎬) 등이 반역을 꾀하여, 왕의 서형(庶兄) 이재선(李載先)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을 추대하려고 하였다. 사건이 드러나자 안기영, 임정호 등은 형벌에 복종하여 죽임을 당하고 이재선은 사약을 받았다.

19년 임오년(壬午年) 【메이지 15년, 서기 1882년】 4월 【양력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6월 【양력 7월】 훈국(訓局)이 병란(兵亂)을 일으켜 일본 공사관도 역시 난민들에게 습격당하였다.

  같은 달 【양력 7월】 대원군은 조정에 다시 들어와 국정을 돌보았으며, 예전에 설치된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영(營) 및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7월 【양력 8월】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8월 【양력 8월】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와 부사(副使) 김만식(金晩植)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이 수행원이었다.

  같은 달 【양력 9월】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었다. 청나라는 이것으로 조선과 종속(宗屬) 관계를 분명히 하려고 하였다.

  12월 통리군국기무아문(統理軍國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청나라 사람 왕석창(王錫鬯)을 참의(參議)로 삼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설치하고, 독일인 멜렌도르프를 협판(協辦)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조선의 내치(內治)와 외교(外交) 모두 청나라의 통제를 받았다.

20년 계미년(癸未年) 【메이지 16년, 서기 1883년】 2월 전환국(典圜局)을 설치하였다.

  5월 【양력 6월】 인천(仁川)을 개항하였다.

  10월 【양력 11월】 영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달 독일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1년 갑신년(甲申年) 【메이지 17년, 서기 1884년】 2월 멜렌도르프를 전환국 총판(總辨)으로 삼고 당오전(當五錢)을 주조하였다.

  3월 우정국(郵征局)을 설립하고 홍영식(洪英植)을 총판으로 삼았다.

  윤5월 【양력 6월】 이탈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달 【양력 7월】 러시아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0월 【양력 12월】 김옥균 등이 개혁을 기도하였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1월 【양력 이듬해 1월】 일본과 한성조약(漢城條約)을 체결하였다.

22년 을유년(乙酉年) 【메이지 18년, 서기 1885년】 2월 【양력 4월】 영국 함대가 갑자기 거문도(巨文島)를 점령하였다.

  3월 【양력 4월】 일본과 청나라 양국 간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이 이루어졌다.

  7월 이중하(李重夏)를 토문감계사(土們勘界使)로 삼아, 청나라가 파견한 관원들과 백두산의 경계를 상의하게 하였다.

  8월 대원군이 청나라 보정부(保定府)에서 돌아왔다.

23년 병술년(丙戌年) 【메이지 19년, 서기 1886년】 3월 미국인 데니(Denny)를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삼고, 외무장교사(外務掌交司)를 겸직하게 하여 멜렌도르프를 대신하게 하였다.

  4월 【양력 6월】 회령부(會寧府)를 개항장(開港場)으로 삼았다.

  5월 【양력 6월】 프랑스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24년 정해년(丁亥年) 【메이지 20년, 서기 1887년】 2월 【양력 2월】 영국 함대가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25년 무자년(戊子年) 【메이지 21년, 서기 1888년】 7월 영국 기사(技士) 할리팍스가 전선(電線)을 가설하였다.

26년 을축년(乙丑年) 【메이지 22년, 서기 1889년】 11월 함경감사(咸鏡監司) 조병식(趙秉式)이 명을 발령하여 곡물의 수출을 금지하였다.

27년 경인년(庚寅年) 【메이지 23년, 서기 1890년】 1월 함경감사는 3등(等) 월봉(越俸)의 처벌을 받았다. 이어서 충청도 감사로 전근되었다.

  윤2월 내무협판 데니는 임기가 만료되었지만 여전히 계속 고용되었다.

29년 임진년(壬辰年) 【메이지 25년, 서기 1892년】 3월 함경감사 이원일(李源逸)의 지나친 폭압에 견디지 못하여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5월 【양력 6월】 오스트리아와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1월 회령부(會寧府)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30년 계사년(癸巳年) 【메이지 26년, 서기 1893년】 3월 양호(兩湖)에 동학당(東學黨)이 창궐하였다. 이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았다.

  8월 이 달 이후로 재령(載寧), 중화(中和), 개성(開城) 등의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켰다.

31년 갑오년(甲午年) 【메이지 27년, 서기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古阜)의 백성들이 학정(虐政)을 견디지 못하여 소요를 일으켰으며, 동학당의 우두머리 전봉준(全琫準)이 이에 가담하여 난을 일으켰다.

  같은 달 자객(刺客) 홍종우(洪鍾宇)는 김옥균을 상해(上海)로 유인하여 암살하였다.

  4월 김해부(金海府)의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

  5월 【양력 6월】 청나라는 군대를 아산(牙山)에 보냈으며 천진조약(天津條約)에 따라 이 사실을 일본에 통지하였다. 일본은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위해 출병하였으며 일본 군대는 인천에서 경성(京城)으로 들어갔다.

  6월 【양력 7월】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는 개혁 5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국왕은 위원(委員)을 두어 그것을 조사하게 하였다.

  같은 달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는 군대를 이끌고 왕성(王城)을 호위하였다. 대원군은 궁중에 들어가 국정을 살폈다. 한국 조정은 일본군에게 아산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도록 요청하였다.

  같은 달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였다.

  7월 【양력 8월】 일본과 청나라는 선전(宣戰)을 포고하였다.

  10월 법무협판(法務協辨) 김학우(金鶴羽)가 암살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은 궁중을 떠나 공덕리(孔德里)로 물러났다.

32년 을미년(乙未年) 【메이지 28년, 서기 1895년】 3월 【양력 4월】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이 체결되었다.

  같은 달 대원군이 사랑한 손자 이준용(李埈鎔)이 교동도(喬桐島)에 유배되었다. 예전에 김학우 암살에 관계하였기 때문이다.

  8월 【양력 10월】 대원군은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들어갔다. 이 변란으로 왕후 민씨(閔氏)가 목숨을 잃었다. 왕후에게 명성(明成)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광무(光武) 원년 【메이지 30년】 에 황후(皇后)로 추책(追冊)하였다.

강화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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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을 물리치고 일본의 국서(國書)를 거절함으로써 여전히 쇄국의 방침을 고수하였는데, 이 태왕 10년 【메이지 6년】 말에 대원군이 정계를 은퇴함에 따라 민씨 일파는 대원군과 반대의 방침을 취하였으며, 국외 사정에 밝은 박규수(朴珪壽), 민규호(閔奎鎬) 등이 중용되자 정부의 방침은 점차 개국(開國)으로 나아갔다. 때마침 강화도 사건을 기회로 메이지 9년에 일본과 수호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이에 조선의 쇄국 방침은 완전히 파괴되기었다. 지금 그 전말(顚末)을 간략히 기술하고자 한다.

메이지(明治) 8년 【이 태왕 12년】 9월 12일에, 운요함(雲揚艦)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는 만선(滿鮮) 연해(沿海) 조사의 명을 받고 나가사키(長崎)를 출발하여 10일에 경기도 연안(沿岸)에 왔다. 20일에 강화도 동남쪽의 한 작은 섬인 난지도(蘭芝島)의 앞바다에 정박하였는데, 땔감과 식수를 구하기 위해 함장 이하 십 수 명이 국기를 내걸고 단정(端艇)에 올라타고 한강의 수로(水路)를 거슬러 올라갔는데, 강화도의 남단인 초지진(草芝鎭) 부근에 있는 섬의 포대(砲臺)에서 갑자기 그들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우리 병사들은 그에 응하여 분전하였지만 때마침 비가 내렸고 또 수로를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함선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21일에 함장은 전날 당한 폭거를 되갚아 주려고 초지진 포대를 포격하고 22일에 영종도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운요함은 22일에 나가사키로 돌아왔으며 그 취지를 자세히 보고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의 불씨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는데, 이 보고를 받고 국론(國論)이 다시 들끓었다. 11월에 일본은 우선 청나라 주재 공사인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로 하여금 조선의 불법을 꾸짖고 조선과 수호(修好)를 논의하자는 취지를 청나라 정부에 알리게 하였다. 이어서 구로다 키요다카(黑田淸隆)를 특명전권변리대신(特命全權辨理大臣)에,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를 특명전권변리부대신에 임명하여, 조선으로 가서 수년 이래 우리의 국서를 거절하는 이유와 이번의 운요함 포격의 사유를 조선 정부에게 따져 묻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육군 8백 명 및 군함 2척, 운송선(運送船) 3척을 이끌고, 9년 1월 하순에 경기도 연안에 도달하였으므로, 한국의 조정은 급히 바다의 방비를 엄격히 하였으며, 또한 신헌(申櫶)을 접견대관(接見大官)에, 윤자승(尹滋承)을 접견부관(接見副官)에 임명하였다.【병자년 정월 5일, 양력 1월 11일】

일한수호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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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초순에 일본 사신(使臣)은 강화도에서 접견대관을 만나 조선에 온 뜻을 알렸다. 이때 대원군은 비록 정계를 은퇴하였지만 배외론(排外論)을 앞장서 주창하였으며 조정에 있는 여러 관리들도 역시 그에 따랐으므로, 우호의 논의는 곧 중단되게 되었다. 그러나 우의정 박규수(朴珪壽)와 중국어 통역관 오경석(吳慶錫)은 충분히 해외의 형세를 감안하여 배외가 오히려 재앙의 단초를 열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등을 설득하였으며, 또한 때마침 청나라 사절이 조선에 도착한 것이 일본과의 수교에 유리하다는 것을 설명하였으므로, 양국의 전권(全權)은 2월 26일에 마침내 강화부(江華府)에서 수교조규(修交條規)를 체결하였다. 보통 이것을 강화조약(江華條約)이라고 한다. 이 수교조규는 실로 조선이 근세(近世)에 여러 외국들과 체결한 조약의 선구(先驅)가 된 것이다. 이 조규(條規)는 모두 12조항으로 이루어졌으며, 20개월 후를 기한으로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항하여, 무역장(貿易場)으로 삼기로 약속하였다. 구로다 변리대신은 3월에 돌아와 보고하였으며, 6월에 조선은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修信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에 일본에서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를 이사관(理事官)으로 삼아 조선에 보내, 경성에서 다시 수교조규 부록(附錄) 및 통상장정(通商章程)을 협의하여 결정하였다. 이 강화조약의 결과 메이지 13년에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대리공사(代理公使)로서 국서(國書)를 가져와서, 비로소 경성에 주차(駐箚)하였다. 이리하여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 말엽 이래 두절되었던 조선과의 국교는 가까스로 회복되었다. 【『일성록(日省錄)』·『외부존고(外部存稿)』·『일본외전사(日本外戰史)』·그리피스(Griffis) 저, 『조선(朝鮮)』】

이재선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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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이 은퇴한 후 그 일파 중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권의 회복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8월에 대원군의 근신(近臣)들인 안기영(安驥泳), 임정호(任鼎鎬), 이철구(李哲九) 등이 일본을 친다는 명분으로 몰래 군대를 모집하였다. 프랑스군 방어에 용맹을 떨쳤던 한성근(韓聖根)도 역시 이 일에 참여하였다. 막 일을 거행하려고 할 때, 광주중군(廣州中軍) 이풍래(李豊來)라는 사람이 모반을 고해 바쳐 사건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안기영 등의 주모자들을 비롯하여 그 무리들은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국왕의 서형(庶兄)인 이재선(李載先) 【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은 역신(逆臣)들의 추대를 받으려 하였다고 하여 사약을 받았다.

일본 공사관 이동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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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은 설치된 이래 20여 년 동안에 여러 가지로 변천을 거듭하였는데, 따라서 그 위치도 바뀌었다. 지금 아래에 그것을 나타냈다. 【『경성발달사(京城發達史)』에 의거하였다.】

임오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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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은퇴 후, 민씨 일파의 정부가 취하는 방침을 좋아하지 않았다. 쌍방의 질시는 점점 격화되어 조만간 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형세였다.

정부는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여 여러 외국과 교류하여 새로운 문화의 유입을 도모하였으므로, 메이지 14년 【이 태왕 18년】 6월에 군사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일본의 육군 중위(中尉) 호리모토 레이죠(堀本禮造)를 초빙하여, 새로 백여 명의 별기군(別技軍)을 편성하였으며, 그들에게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장어영(壯禦營), 무위영(武衛營)의 2영으로 바꾸었다. 이리하여 구식 병사가 파면되는 일이 계속 이어졌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매우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혔을 뿐만 아니라 그 급여도 충분하지 않아 심한 불평을 품게 되었다. 이에 더해 이듬해 15년 임오년(壬午年) 【이 태왕 19년】 은 가뭄으로 일반적인 인심조차 평온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국고(國庫)는 나날이 부족해지고 구식 군졸(軍卒)들의 봉료(俸料)는 13개월이나 지급되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병사들의 소란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도봉소(都俸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1개월 치 봉료를 지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분배하는 쪽에서는 매우 공평성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훈련도감(訓練都監) 【훈국(訓局)】 은 군사들의 봉료를 지급하면서 그 봉미(俸米)에 모래와 자갈을 섞었으며 썩은 봉미도 있었다. 군사들의 격앙은 극에 달하여 훈국의 병사들이 먼저 일어나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고 고리(庫吏)를 구타하였으며 또한 창청(倉廳)에 난입하였다. 피해자인 고리(庫吏)는 선혜당상(宣惠堂上) 【선혜청(宣惠廳)의 제조(提調)를 일컫는다. 선혜청은 대동미(大同米), 대동포(大同布), 대동전(大同錢)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민겸호(閔謙鎬)의 가인(家人)이었기 때문에 민겸호는 범인을 수색하여 처벌하려고 하였다. 이에 여러 영(營)의 병사들은 일시에 들고일어나, 먼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기를 가지고 나아가 동별영(東別營) 【지금의 인의동(仁義洞)의 한편에 있었다.】 에 모였다. 이때가 메이지 15년 7월 23일 【이 태왕 19년 임오년 6월 9일】 로, 바로 국왕은 큰 가뭄 때문에 인정전(仁政殿)에서 가서, 기우제를 집행하던 때였다. 국왕은 가까운 신하를 보내 선유(宣諭)하여 해산시키려고 하였지만 병사들은 따르지 않았다. 왕은 어쩔 수 없이 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하였으며, 사태를 진정시킬 계책을 논의하였다. 대원군은 이에 훈련대장(訓練大將) 이경하(李景夏)를 동별영으로 보내 알아듣게 타이르도록 하였지만 병사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 병사들 중에는 평소 시국에 불평을 가진 사람들이나 부랑자도 가담하였으므로 이들은 폭도로 변하였는데 그중 한 대오는 먼저 민겸호 및 김보현(金輔鉉) 【이조판서】 등 여러 사람들의 집을 습격하였으며, 다른 대오는 감옥을 열고 포도청을 파괴하여 죄수들을 풀어 돌려보내고, 경성 부근의 여러 사찰들을 불태웠다. 저녁이 되자 또 그중 한 대오는 신식(新式) 병영(兵營)이 있는 하도감(下都監) 【지금의 훈련원 동쪽】 으로 향하여 일본 교관인 호리모토 중위를 참살하였으며, 또 다른 한 대오는 서대문 밖 청수관(淸水館)인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을 질렀으므로, 하나부사 공사는 관원(館員)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나가 남대문에서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과 생사를 함께하려고 하였지만, 성문이 굳게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경로를 바꿔 인천으로 피난하였다.

10일 새벽녘에 많은 군인들이 운현궁(雲峴宮)에 들어가 대원군에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창덕궁(昌德宮) 돈화문(敦化門)으로 돌입하였으며, 다시 내전(內殿)을 침범하였는데, 이때 왕비는 신변이 위태로웠지만, 변장을 하여 간신히 궁궐을 빠져나갔으며, 졸지에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에 숨었다. 그와 동시에 한 지대(枝隊)는 비를 무릅쓰고 【그날 새벽부터 비가 종일 그치지 않았다.】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이조참판 민창식(閔昌植)의 저택을 습격하였다. 이 난으로 민겸호, 김보현, 민창식 등 세 사람은 살해되고 이최응은 부상을 당한 다음 세상을 떠났다. 이때 민씨 일족의 저택은 거칠게 유린당하고 대소 관리(官吏)들은 살해되거나 혹은 가산을 파괴당한 경우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궁중 및 성 안은 완전히 무질서와 무경찰(無警察)의 거리가 되었다.

대원군은 궁중에 있으면서 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2영을 폐지하고 옛 5영(營)을 복구하였으며, 【10일】 왕비가 행방불명되었으므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고 국장(國葬)을 발포하고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부상(負商)의 무리 【떠돌이 장수들로, 강고한 단체를 이루었다.】 들이 12일 밤에 속속 입성하여 민씨를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공언하였으므로, 온 도시가 솥에서 물이 끓는 듯하였다.

이때 어윤중(魚允中)과 김윤식(金允植) 등은 천진(天津)에 있었다.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이 사변을 맞이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미리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을 우려하던 때였으므로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곧장 청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수군과 육군 약 5천 명을 거느리고 즉시 조선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 등이 장수에 포함되었다. 그들이 조선에 도착한 것은 29일 【양력 8월 12일】 이었다. 그리고 경성 안팎에 있던 조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에게 격파되어 왕도(王都)는 질서를 점차 회복하였다.

예전에 일단 인천으로 피난하였던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다행히 근해(近海)를 측량하던 영국 포함(砲艦) ‘플라잉 피쉬’호에 타고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여, 사건을 우리 정부에 급히 보고하였다. 정부는 이노우에(井上) 외무경(外務卿)을 시모노세키(馬關)에 파견하여, 다시 하나부사 공사를 귀임(歸任)하게 하고, 한국 조정과 교섭하도록 하였다. 공사가 군함 4척과 육군 약 1개 대대를 이끌고 인천에 도착한 것은 같은 달 29일 【양력 8월 12일】 이다. 약 1주일 후 공사는 경성으로 들어가서 국왕을 알현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요구하고, 3일 이내로 회답하도록 하였다. 【7월 7일】 그러나 대원군 등은 궁궐 안에 있으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결정을 하지 않았다. 기한은 헛되이 지나가 버렸다. 공사는 즉시 경성에서 결연히 철수하여 다시 인천으로 돌아갔다. 【11일】 이때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즉 대원군은 실로 이번 난동의 우두머리라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과 한국이 일을 질질 끈 것은 청나라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장경은 대원군이 남대문 밖의 청나라 병영(兵營)을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곧장 대원군을 호위하여 남양만(南陽灣)에 정박해 있던 군함에 태워서 천진(天津)으로 가게 하였다. 【7월 13일】 이날 오장경의 명의로 종로에 방(榜)을 붙여, 일반 인민들에게 국태공(國太公) 【대원군】 의 전횡을 꾸짖고 황실을 튼튼하게 하는데 힘쓴다는 뜻을 알렸다.

제물포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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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한국 조정의 의향(意向)은 일변(一變)하여 이의(異議) 없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7월 10일 【양력 8월 30일】 에 쌍방 전권(全權)이 조인을 마쳤다. 그것을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이라고 한다. 이 조약은 6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 흉도(兇徒)들을 포획하여 엄벌에 처할 것 (2) 피해를 당한 일본 관리들을 예우하여 매장하고, 또한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해 조위금(弔慰金)을 지불할 것 (3) 일본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할 것 (4) 공사관 보호를 위해 경성에 일본 군대를 주둔하게 할 것 (5) 일본에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할 것 등을 요건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국왕은 스스로 처벌한다는 교지를 내리고, 박영효(朴泳孝)를 수신대사(修信大使)로 삼아 일본에 파견하였으며, 또한 청나라 군대를 충주(忠州)에 보내 왕비를 맞아 궁궐로 돌아오게 하였으므로, 【8월 1일】 사태는 비로소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대원군은 천진(天津)에서 보정부(保定府)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4년 동안 억류되었다. 또 오장경은 경성에 체류하였으며, 그가 떠난 후에 군사마(軍司馬) 원세개(袁世凱)가 그 뒤를 이어 주차(駐箚)하였다.

박영효가 일본[內地]에 사신으로 가자, 김만식(金晩植)은 부사(副使)가 되었으며, 서광범(徐光範), 민영익(閔泳翊), 김옥균(金玉均) 등은 거기에 수행하였다. 이들은 내지에 가서 그 문화가 발달한 것을 보고 일본을 본받아 국정을 개혁하고 문명을 수입하려고 하였으므로, 이 무렵부터 조선의 정치가들 중에 신구(新舊)의 두 파가 생겨났다.

제도의 개폐와 청나라의 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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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 일파에는 수구파(守舊派)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민씨 일파에는 개화파(開化派)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 세력의 성쇠에 따라 제도의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통리기무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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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대원군은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켰으며 삼군부(三軍府)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민씨가 세력을 잡는 시대가 되자 예전의 비변사에 상당하는 중요한 정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그 안에 7사(司)를 두었으며, 영의정 이최응(李最應)을 통리대신(統理大臣)으로 삼고, 그 밖에 정부의 중요 관리들을 그 직원으로 하여, 많은 개화파 사람들을 채용하였다. 【이 태왕 17년, 메이지 13년】 또 같은 해에 대원군이 설치한 삼군부를 폐지하고, 이듬해에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종래의 5영(營)을 폐지하고 2영으로 고쳤으며, 따로 신식(新式)의 한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 태왕 18년, 메이지 14년】 이것들은 참으로 지혜롭고 용기 있는 조치였지만, 수구파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였으며 일반 인민들의 분노가 결국 폭발하여 임오정변(壬午政變)이 일어났다. 그 정변 과정에서 대원군은 중요 정무에 관여하였는데, 반대파가 설치한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영과 삼군부를 부활시켰다. 【이 태왕 19년 6월, 메이지 15년】 그러나 청나라가 이 정변을 잘 마무리하려는 대책에 관여하면서, 한국 조정을 위해 알선(斡旋)할 기회를 잡고 새로운 태도로 조선을 대하였으며, 조선의 정치에 간섭을 시작하자, 조선은 다시 제도를 크게 바꾸었다. 같은 해 말에 청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처음에는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이라고 불렀다.】 을 설치하고, 처음에 문무관(文武官)을 주로 영의정으로 삼던 것을 총리(總理), 판리협판(辦理協辨) 등의 관직에 임명하여, 청나라 정부가 추천한 청나라 사람 왕석창(王錫鬯)을 그 아문의 참의(參議)로 삼았으며, 【이듬해】 그와 동시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처음에는 통리아문(統理衙門)이라고 불렀다.】 을 설치하고, 마찬가지로 이홍장(李鴻章)이 추천한 독일인 멜렌도르프를 이 아문의 협판(協辨)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오장경(吳長慶), 다음에는 원세개(袁世凱)가 경성에 주차하여 국사를 감독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선은 내치와 외교에서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통리군국사무아문에 합쳤으며, 【이 태왕 19년 12월】 5영(營)을 폐지하고 따로 좌·우·전·후의 4영으로 편제(編制)하여 청나라 군대에게 훈련을 받았다. 그에 더하여 세관(稅關)에 관한 사무도 역시 이홍장의 부하인 로버트 하트 【Sir Robert Hart】 의 감독을 받아 처리하게 되었다.

간도 국경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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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초기에는 그 국경이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에 이르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하였다. 청나라가 건국되자 장백산(長白山) 【조선의 백두산】 이북의 땅은 그들의 발상지였으므로 그곳을 금주지(禁住地)로 삼았으며, 조선도 역시 매우 마음을 쓰지 않았다. 청나라 성조(聖祖) 강희(康熙) 51년 【조선 숙종 38년, 서기 1712년】 에, 청나라 관리(官吏)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청나라 조상이 발상한 영지(靈地)를 실제로 답사하라는 명을 받고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백두산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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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진(惠山鎭)부터 육지를 거쳐 백두산에 올라 산 정상 가까이에 비석 하나를 세웠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고 여기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물이 나뉘는 산마루 위의 돌에 새겨 기록하노라.[鳥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강희(康熙) 51년 5월 15일

실제로 살펴본 자가 기록한 바에 따라, 이 비석은 백두산의 맨 꼭대기 호수가 있는 곳에서 동남쪽 기슭 1리(里) 남짓 떨어져 있으며, 압록강과 토문강(土門江) 【두만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송화강(松花江) 상류이다.】 두 강의 원류(源流) 사이에 끼여 있으며, 동남쪽으로 경사진 평탄한 안부(鞍部)에 있는데, 비면(碑面)은 남쪽을 향해 있으며 서쪽에서 북쪽으로 30도 방향을 이루고 있다. 비석이 있는 곳에서 서쪽 압록강의 수원(水源)까지는 약 3정 (町), 토문강의 수원까지는 약 5, 6정 정도이다. 토문강의 상류 1리 반 정도는 물의 흐름을 볼 수 없어 땅이 갈라진 형상을 하고 있고, 비석을 세운 지점부터 그를 따라 하류로 수 리(里) 사이에 높이 5, 6척의 돌무지[石堆] 및 흙더미[土堆]들이 있어 점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토문강은 발원하는 곳으로부터 동동북쪽을 향해 흐르고, 우여곡절을 거친 후 그 방향을 바꾸어 마침내 송화강(松花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두만강(豆滿江) 【청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도문강(圖們江)】 의 원류는 그 비석과 가장 가까운 홍토수(紅土水)인 것 같지만, 여전히 하나의 구릉(丘陵)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길이로 70리 떨어진 곳에서 발원한다고 한다. 이 비석이 바로 흔히 이르는 정계비(定界碑)이다.

이후 백 수십 년 동안, 이 금주지(禁住地)에 언제부터인가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민간인들과 조선 북쪽의 인민들이 떠돌다가 이주하여, 터를 잡고 개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광서(光緖) 초년에, 국경을 넘어 땅을 개간하여 농사짓는 백성들의 조치에 관해 청나라는 조선과 교섭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는 바로 이 태왕 치세(治世)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원래 이 방면의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은 명확하지 않았으므로, 계속적인 국경 문제가 되었다. 제1회 감계담판(勘界談判)이 열린 것은 이 태왕 22년 【청나라 광서 11년, 일본 메이지 18년】 으로, 목극등(穆克登)이 비석을 세운 해로부터 173년 후이다. 같은 해 7월에 조선국은 안변부사(安邊府使) 이중하(李重夏)를 감계사(勘界使)에, 조창식(趙昌植)을 종사관(從事官)에 임명하여, 청나라 위원인 덕옥가(德玉賈), 원계영(元桂瑛) 등과 회령(會寧)에서 만나 일을 논의하게 하였다. 조선의 감계사는 목극등의 비문에서 말하는 토문(土門)은 두만강이 아니라 송화강 상류를 가리키므로, 이 강 이동(以東)과 두만강 이북(以北)의 땅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청나라 사신은 토문(土門)과 도문(圖們)의 중국 발음이 같으므로, 비문(碑文)에서 말하는 토문은 바로 두만강으로 이 강 이북의 땅은 청나라 영토라고 단정하였다. 양국은 서로 승복하지 않았으며 양측 위원들은 함께 현지를 답사하였지만 결국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교섭을 거듭하였는데 여전히 결정하지 못하고 21년이 지나 한국의 외교권이 이미 일본에 위임된 뒤인 메이지 42년 9월 8일에 ‘간도(間島)에 관한 협약(協約)’에 따라 정계비(定界碑) 【목극등의 비석】 를 기점(起點)으로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삼기로 결정하자, 오랜 기간에 걸친 현안은 비로소 해결되었다. 【『통감부임시간도파출소기요(統監府臨時間島派出所紀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