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4. 조선의 문화
교수요지
[편집]본과에서는 조선 초기의 약 백 수십 년 동안 특히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의 치세(治世) 동안에 제도와 문물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중기(中期) 이후는 오히려 발전하지 못하고 점차 쇠퇴하는 경향이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강의요령
[편집]중앙정부 및 지방의 제도
[편집]태조(太祖)와 정종(定宗) 때는 창업의 시기로서, 정부의 조직 등 대부분은 모두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사용하였지만, 태종(太宗)과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 새로운 제도가 대략 갖추어졌다. 【제2과 「태종(太宗) 및 세종(世宗)」 참조.】 지금 그 주요한 것들에 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태종 원년에 먼저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관제란 정부의 조직을 말한다. 이것에 따르면 중앙에 있는 최고의 행정(行政) 관청을 의정부(議政府)라고 불렀다. 그 직제(職制)는 백관(百官)을 통솔하며, 모든 정치를 총괄하고, 국가의 정치를 행하는 데 있었다. 의정부의 장관을 영의정(領議政)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총리대신(總理大臣)과 같다. 그 밑에 좌·우의정(左·右議政)이 있었다. 세간에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총칭하여 3공(三公)이라고 불렀다. 의정부의 다음에 육조(六曹)가 있었다. 육조는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로서, 각각 정무를 나누어 맡았다. 각 조의 장(長)을 판서(判書)라고 불렀다. 지금의 각 성(省)의 대신(大臣)들과 같았다. 행정상 지방의 구역은 태종 13년에 처음으로 전국을 8도(道)로 나누고, 도 밑에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두었다. 각 도의 장관을 관찰사(觀察使)라고 불렀는데, 도내(道內)의 행정과 사법(司法)을 관장하며, 또한 군사(軍事)도 겸하였으므로, 지금의 도지사(道知事)보다도 그 직무의 권한이 훨씬 컸다. 감찰사를 보통 감사(監司)라고 불렀다. 그리고 부사(府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현령(縣令)은 모두 감사에게 소속되었다.
교육
[편집]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모방하여, 태학(太學)을 수도에 설립하고 성균관(成均館) 【성균(成均)이란 교육이라는 뜻】 이라고 칭하였으며, 그 안에 묘(廟)를 설치하고 공자(孔子)의 제사를 지냈는데, 그것을 문묘(文廟)라고 하며, 학문을 익히는 곳을 명륜당(明倫堂)이라고 불렀다. 【7년】 또 명령을 내려 지방의 군·현에 향교(鄕校)를 설치하게 하였다. 그 제도는 성균관과 같았다. 정종 때 다시 경성 안에 5부(部) 즉 동부(東部), 서부(西部), 중부(中部), 남부(南部), 북부(北部)에 학교(學校)를 설치하고, 그것을 오부학당(五部學堂)이라고 불렀다. 【세종 때 북부학당을 폐지시켜 사부학당(四部學堂)이 되었다. 보통 그것을 사학(四學)이라고 불렀다.】 이때 교육의 제도가 갖추어졌다. 이상의 것들 외에 각지에 무수히 많은 서방(書房) 【또는 서당(書堂)】 이 있었다. 이들 학교와 서방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 주자학(朱子學)이었으므로, 이 학문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특히 성종(成宗) 【제9대】 은 주자학을 크게 장려하였으므로, 성종 때에 이르러 주자학은 더욱 왕성해졌다. 그로 인해 명유(名儒)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그중에서 조광조(趙光祖), 【호는 정암(靜庵)】 이황(李滉), 【호는 퇴계(退溪)】 이이(李珥), 【호는 율곡(栗谷)】 는 중종(中宗) 【제11대】 무렵부터 선조(宣祖) 【제14대】 에 이르는 기간에 배출된 유명한 학자들이다.
서원
[편집]다음으로 서원(書院)이라고 불리는 것이 중종 무렵부터 각지에서 일어났다. 서원이란 원래 지방의 유생(儒生)들이 서로 모여 명유(名儒)나 현신(賢臣) 등의 넋을 제사 지내고, 또 학문을 익히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그 목적은 매우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유생들이 방종해지고 학문 익히는 것을 게을리 하고 정치를 비난하였으며, 또 서원이 마구 설립되는 폐해가 생겨 왕은 명령을 내려 개인적으로 서원을 설립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또는 그것을 폐지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경국대전
[편집]태조가 즉위한 이래 제도는 점차 정비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법전(法典)이 없었으므로, 세조는 자손만대를 위해 법전을 만들기 위하여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그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최항 등은 종래의 제도와 교령(敎令) 등에 의거하여 법전을 편찬하는 데 종사하였는데, 그것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세조가 세상을 떠났으며, 다음 왕인 예종(睿宗) 원년에 이르러 겨우 완성하였다. 완성된 법전을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대전(大典)은 여러 차례 개정된 적은 있었지만, 근세까지 국정을 수행하는 기초가 되었다.
활자
[편집]활자는 일찍부터 중국에서 사용되었는데, 조선에서는 고려 중기 이후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려 말기에는 활자의 사용이 점점 활발해졌다. 그런데 태종은 국내에 서적이 적은 것을 염려하여,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새로 활자를 주조하였으며, 【3년】 이것으로 각종 서적들을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당시의 활자판(活字版)은 현재와 같이 신속하게 인쇄할 수는 없었지만, 목판(木版)과 함께 사용되어, 서적의 보급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서양에서 활자가 발명된 것은 세종 무렵 【서기 1400년대】 에 해당하므로, 태종이 주자소를 설치한 것은 그보다도 수십 년 이전이며, 고려에서 활자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것은 오히려 그보다도 150〜160년 전이다.
언문
[편집]옛날 신라의 설총(薛聰)은 이두(吏道)를 만들어 방언(方言) 【조선어를 말한다.】 을 써서 표현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한자(漢字)를 빌려 그 음훈(音訓)을 이용한 것이므로 매우 불편하였다. 이 때문에 세종은 언문(諺文)을 친히 만들고, 정인지(鄭麟趾) 등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그것의 해설을 만들어, 그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이름 붙여 나라 안에서 사용하였다. 【28년】 언문은 28자로 되어 있으며, 그것을 교묘하게 합쳐서 조선 고유의 언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는 대단히 편리한 것이다. 그것이 사회에 편익을 제공한 것은 대단히 컸다.
천문·건축·공예
[편집]이상 서술한 바와 같이, 조선 시대 초기에 학문은 이미 크게 발전해 있었지만, 천문(天文)에 관한 기술과 건축, 공예 등도 역시 매우 볼 만한 것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유물들에 비추어 보면 그 기술도 중세 이후에 이르러 차츰 쇠퇴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
[편집]고려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에 이르렀던 불교는 조선 시대 초기에도 여전히 쇠퇴하지 않았고, 태조 같이 독실하게 그것을 믿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역대(歷代)에 유학을 장려하여 유학이 융성해지면서 불교는 갖가지 압박을 당하였으며, 그 결과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유학이 활발히 번성한 성종 무렵부터 이후로는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여, 일반인들 가운데 불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승려는 보통 사람보다도 천한 계급의 사람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비고
[편집]중앙관제
[편집]태조 때 중앙 정부의 조직은 완전히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즉 문하부(門下府)는 백규 서무(百揆庶務) 【내무 행정】 를 관장하였고, 삼사(三司) 【처음에는 사평부(司平府)라고 불렀다.】 는 전곡(錢穀)을 관장하였으며, 밀직사(密直司) 【후에 중추원(中樞院)으로 고쳤다.】 는 출납(出納), 【왕명의 출납】 숙위(宿衛), 군기(軍機)를 관장하였다. 이 밖에 고려 시대부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있었다. 이는 합의체의 관부(官府)로서, 그 직원은 위의 1부 2사 직원들이 겸직하였으며, 나라에 대사가 있으면 서로 만나 협의하였지만, 특별히 독립된 관아를 가지지는 않았다. 이조(李朝) 때에 이르러 도평의사사의 지위는 더욱 중요해져, 태조 때는 따로 관아를 두었다. 이상 여러 관청들 밑에는 육조(六曹)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가 있어 모든 정무를 나누어 관장하였다. 다음 왕인 정종 2년에, 관제를 개편하였으며, 【제1과 비고 13 「정종(定宗)의 치적」 참조】 그로부터 비로소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아래에 그 대요(大要)를 기술하고자 한다.
의정부
[편집]정종 2년에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두었다. 이것이 의정부의 시작이다. 이어서 태종 원년에 문하부를 폐지하여 의정부에 합병함으로써 의정부는 명실공히 최고의 중앙 관부가 되었으며, 그 직권(職權)은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모든 정치를 조율하며, 음양(陰陽)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 우두머리를 영부사(領府事)라고 불렀지만 이어서 영의정(領議政)으로 고쳤으며, 그 밑에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 각 한 명씩을 두어 세 명이 회의하였다. 보통 그들을 삼공(三公)이라고 불렀다. 삼공 밑에는 좌·우찬정(左·右贊政) 및 좌·우참찬(左·右參贊)을 합쳐 네 명이 있었다. 사인(舍人) 이하 여러 직원들이 다시 그 밑에 예속되었다. 의정부는 최고의 행정 관청으로서 오랫동안 존속하였지만, 명종(明宗) 【제13대】 10년에 처음으로 비변사(備邊司)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 불렀다.】 가 설치되자, 그 직원들은 의정(議政)을 비롯하여 문무 중신(重臣)을 겸직하였으며, 국가의 정무는 크고 작은 것을 불문하고 여기에서 결정되었으므로, 의정부는 완전히 그 실권을 상실하였으며, 비변사는 사실상 중앙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되었다. 【아래 제9과 비고 3 「인재의 등용」 참조】
육조
[편집]이조(吏曹), 호조(戶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는 모두 고려 말기 공양왕 때 붙인 명칭으로, 이조 태조도 역시 그 제도를 답습하여 그것을 설치하였다. 각 조(曹)는 의정부의 밑에 있으면서 각각 정무를 나누어 관장하였다. 『경국대전』에 언급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조 문선(文選), 【문관의 임면(任免) 등】 훈봉(勳封), 【재상(宰相)·공신(功臣)의 시호(諡號) 등】 고과(考課) 【문관의 공과(功過) 등을 조사】 의 정무를 담당한다.
호조 호구(戶口), 공부(貢賦), 【조세】 전량(田粮), 【농지·식량 비축·세입·세출에 대한 통계】 식화(食貨) 【산업의 권장】 의 정무를 담당한다.
예조 예악(禮樂), 제사(祭祀), 연향(宴享), 조빙(朝聘), 학교(學校), 과거(科擧) 【관리의 등용 시험】 의 정무를 담당한다.
병조 무선(武選), 【무관의 임면 등】 군무(軍務), 의위(儀衛), 우역(郵驛), 【교통과 운수】 병갑 기장(兵甲器仗), 【병마(兵馬), 무기(武器), 성보(城堡), 봉수(烽燧) 등】 문호 관약(門戶管鑰)의 정무를 담당한다.
형조 법률, 평언(評讞) 【죽을 죄를 지은 죄수의 취조 등】, 사송(詞訟), 【민사 소송】 노예의 정무를 담당한다.
공조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야(陶冶) 【야금(冶金), 도와(陶瓦) 등】 의 정무를 담당한다.
각 조의 우두머리를 판서(判書)라고 불렀고, 그 밑에 참판(參判), 참의(參議)가 각각 한 명씩 있었으며, 정랑(正郞) 이하의 관리들이 다시 그 밑에 예속되었다.
중추원·승정원·오위도총부
[편집]고려 성종(成宗) 때 처음으로 중추원을 설치하고 출납(出納), 【왕명의 출납】 숙위(宿衛)와 함께 군기(軍機)의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후에 밀직사(密直司)라고 고쳤다.
조선 태조도 역시 고려의 제도에 따라 그와 같은 기관을 설치하고 중추원이라고 불렀다. 정종 2년에 삼군부(三軍府)라고 고쳤으며, 9년에 그것을 폐지하고 다시 중추원을 설치하였으며, 진무소(鎭撫所)를 설치하여 궁궐의 숙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조 때 관제(官制)를 고쳐 중추원의 권한을 분산시켰는데, 별도로 승정원을 두어 왕명의 출납을 전임(專任)하게 하였으며, 중추원은 중추부(中樞府)로 명칭을 고치고 그 업무를 정하지 않아 문무(文武) 당상관(堂上官)들 중 임무가 없는 사람을 우대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정종 때 설치한 진무소를 오위도총부로 고쳤으며, 그 권한을 확대하여 병조에 예속시키지 않고 전문으로 군무(軍務)를 담당하게 하였는데, 마치 지금의 참모본부(參謀本部)와 같은 것으로 하여, 군정(軍政)을 크게 쇄신하려고 시도하였다.
사헌부
[편집]이조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사헌부를 두고 시정(時政)을 논의하였으며, 백관(百官)들을 감찰하고,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풍속을 바르게 하고, 억울한 누명을 풀어 주었으며, 함부로 속이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 우두머리를 대사헌(大司憲)이라고 불렀다.
사간원
[편집]이조 태조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문하부의 관리들로 하여금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지만, 태종 2년에 별도로 사간원을 설치하고, 후에 그 우두머리를 대사간(大司諫)이라고 불렀으며, 사간(司諫), 헌납(獻納), 정언(正言) 등의 관직을 두었다.
의금부
[편집]건국 초기에 이전 왕조의 제도를 계승하여 사평순위부(司平巡衛府)를 설치하였지만, 태종 14년에 이를 고쳐 의금부라고 불렀으며, 교지를 받들어 추국(推鞫)의 일을 담당하였다. 판사(判事) 이하의 관직을 두어 왕족의 범죄, 국사범(國事犯), 기타 중대 범죄에 대해 국왕이 몸소 죄인을 심판하거나 위임받은 관리로 하여금 심판하게 하였다.
이상이 중앙 정부의 주요한 것들이다. 이 밖에 경성에 있는 관리들을 총괄하여 경관(京官)이라 불렀고, 그에 대해 지방관(地方官)을 외관(外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관리들 중 문관(文官)을 동반(東班), 무관(武官)을 서반(西班) 【또는 호반(虎班】 이라고 불렀다. 동반과 서반을 아울러 이른바 양반(兩班)이라고 불렀다.
지방제도
[편집]태종 13년에 전국을 8도(道)로 나누었다. 이때 8도의 명칭은 아래와 같다.
경기도(京畿道) 【태조 4년에 고려 말의 제도를 답습하여, 경기(京畿)를 좌우로 나누어 두 도(道)로 정하였다. 태종 13년에 하나로 합쳐 경기도라고 불렀다.】
충청도(忠淸道)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에 충청도라고 불렀다. 이조(李朝)는 이에 따랐다.】
경상도(慶尙道) 【고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경상도라고 불렀다. 이조는 이에 따랐다.】
전라도(全羅道)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전라도라고 불렀다. 이조는 이에 따랐다. 후에 인조(仁祖) 때 전남도(全南道)라고 고쳤으며, 다시 전라도라고 하였고, 후에 또 광남도(光南道)라고 하였으며, 이어서 옛 호칭을 되찾았다. 영조(英祖) 4년에 전광도(全光道)라고 개칭하였으며, 14년에 다시 전라도라고 불렀다.】
강원도(江原道) 【고려의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이다. 이조 태조 4년에 고쳐 강원도라고 불렀다. 효종(孝宗) 때 원양도(原襄道)라고 고쳤으며, 이어서 옛 호칭을 되찾았다. 숙종(肅宗) 때 강양도(江襄道)라고 고쳤으며, 이어서 다시 옛 호칭을 되찾았다.】
풍해도(豐海道) 【고려의 서해도(西海道)이다. 이조 태조 4년에 고쳐 풍해도라고 하였으며, 태종(太宗) 17년에 다시 고쳐 황해도(黃海道)라고 하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황연도(黃延道)로 고쳐 불렀으며, 이어서 옛 호칭을 되찾았다.】
영길도(永吉道) 【고려의 동북면(東北面) 및 삭방도(朔方道)이다. 이조 태종 13년에 고쳐 영길도라고 불렀으며, 16년에 함길도(咸吉道)로 고쳤다. 성종(成宗) 원년에 영안도(永安道)라고 고쳐 불렀으며, 중종(中宗) 4년에 다시 고쳐 함경도(咸鏡道)라고 하였다.】
평안도(平安道) 【고려 때 서북면(西北面)이라고 불렀다. 이조 태종 13년에 고쳐 평안도라고 불렀다.】
【위의 8도의 명칭에 대한 연혁은 『태종실록(太宗實錄)』·『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증보문헌비고·여지고(增補文獻備考·輿地考)』에 따랐다.】
다시 8도를 구분하여 유도부(留都府) 1, 부(府) 6, 대도호부(大都護府) 5, 목(牧) 20, 도호부(都護府) 74, 군(郡) 73, 현(縣) 154개를 설치하였다. 즉 다음과 같다.
유도부(留都府) 1 : 개성(開城) 【후에 강화(江華), 수원(水原), 광주(廣州), 춘천(春川)을 더해 5도(五都)가 되었다.】
부(府) 6 : 광주(廣州), 경주(慶州), 전주(全州), 함흥(咸興), 평양(平壤), 의주(義州)
대도호부(大都護府) 5 : 안동(安東), 창원(昌原), 강릉(江陵), 영흥(永興), 영변(寧邊)
목(牧) 20 : 여주(驪州), 파주(坡州), 양주(楊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상주(尙州), 진주(晉州), 성주(星州),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능주(綾州), 황주(黃州), 해주(海州), 원주(原州), 길주(吉州), 안주(安州), 정주(定州)
【도호부 이하는 생략한다.】
위의 유도부 이하의 숫자는 때로 증감되기도 하였지만, 이 제도는 최근 이 태왕(李太王) 32년 【메이지(明治) 28년】 까지 존속하였다.
지방관으로 도(道)에 관찰사(觀察使)를, 유도부(留都府)에 유수(留守)를, 부(府)에 부윤(府尹)을, 대도호부(大都護府) 및 도호부(都護府)에 부사(府使)를, 목(牧)에 목사(牧使)를, 군(郡)에 군수(郡守)를, 현(縣)에 현령(縣令) 또는 현감(縣監)을 두었다. 유수는 관찰사와 동등한 자격의 관직이었지만, 부윤 이하는 모두 관찰사에게 예속되어 그의 감독을 받았다. 관찰사는 다른 말로 감사(監司)라고도 불렀으며, 부윤, 목사, 군수, 현령 및 현감을 총칭하여 수령(守令)이라고 불렀다.
지방청(地方廳)의 조직은 감사(監司)의 정청(政廳)을 다른 말로 감영(監營)이라고 불렀으며, 감사 밑에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방(房)을 두었고, 도사(都事)·판관(判官)·막비(幕裨) 등의 보조기관을 두었으며, 부·목·군·현은 부사·목사·군수·현령·현감 밑에 이·호·예·병·형·공의 6방(房)을 두고, 좌수(座首)·별감(別監) 등의 보조기관을 두었다. 그리고 지방관의 직권(職權)은 각각 그 관내의 재정·군정·교육·농상공(農商工)·경찰(警察) 등 제반 행정 및 사법의 사무를 담당하는 것이므로, 수령의 정무는 감사의 정무들 중 작은 것들이었고, 감사의 정무는 중앙 정무의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 제도는 중앙 제도의 축소판으로서 오직 그 소관(所管) 사무에 크고 작음과 넓고 좁음의 차이만이 있었다.
감사는 직권상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겸직하였으며, 수령도 역시 대다수는 한 지방의 무관을 겸직하였다.
교육제도
[편집]반도의 교육 제도는 신라 시대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였고, 고려 중엽에 이르러 대략 갖추어졌으며, 조선 시대는 대체로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이후 더욱 발전시켜 완성하였다. 즉 조선 시대는 최근 갑오(甲午) 혁신 【메이지 27년】 에 이르기까지 중앙에 성균관(成均館)이 있었고, 그 밑에 사학(四學) 【최초에는 오부 학생(五部學生)】 이 있었으며, 지방에 향교(鄕校)가 있었는데, 성균관과 사학은 예조 직속으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관립(官立) 학교였다. 향교는 주·부·군·현이 경영하는 것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공립(公立) 학교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밑에 무수히 많은 서당(書堂)들이 각지에 있었다. 이리하여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들은 7~9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한문(漢文)의 읽기를 배우고, 15~16세 무렵에 향교 또는 사학에 들어가 수년 동안 공부한 후 과거에 응시하였으며, 그 합격자는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균관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문과(文科)에 응시하여, 거기에 급제(及第)하면 비로소 고급 관직을 받았다. 그것이 보통의 순서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교육 제도는 완전히 과거를 위해 설립되었던 것으로, 취지가 오늘날의 학제(學制)와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태학, 사학, 향교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한다.
태학
[편집]태학은 신라 시대에도 설치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때 태학을 설치하고 국자감(國子監)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성균관(成均館)이라고 불렀다. 【충렬왕(忠烈王) 34년】 조선 태조는 즉위한 후 6년에 수도 한성(漢城)의 동북쪽 모퉁이 숭교방(崇敎坊)에 상(相)을 보아 태학의 터를 잡아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해에 완성하였다. 고려 시대의 호칭을 이어받아 성균관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을 문묘(文廟) 즉 대성전(大成殿)이라고 불렀고, 학문을 익히는 곳을 명륜당(明倫堂)이라고 불렀으며, 유생들이 기거하는 곳을 재(齋)라고 불렀다. 태조는 여기에 학전(學田) 및 노비를 주었는데, 이후의 여러 왕들도 역시 전결(田結)을 지급한 것이 적지 않았다. 또 전라남도 연해의 여러 섬들의 어장(漁場)을 성균관에 주어, 거기에서 나오는 세금으로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을 충당하였다. 성균관에 지사(知事) 【1명】 동지사(同知事) 【2명】 대사성(大司成) 【1명】 좨주(祭酒) 【2명, 후에 사성(司成)으로 고쳤다.】 사예(司藝) 【3명】 사업(司業) 【2명, 나중에 설치하였다.】 직강(直講) 【4명】 전적(典籍) 【13명】 등의 관직을 두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2백 명으로, 모두 진사나 생원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자격을 가진 자의 정원이 부족할 때는 사학의 생도로 보충하였으며, 또 후대에 이르러 일정 부분 무자격자도 정원에 추가되었다.
사학
[편집]정종(定宗) 2년에 처음으로 경성 안에 동·서·중·남·북의 5부(部)에 각각 학교를 설립하고 오부학당(五部學堂)이라고 불렀다. 세종(世宗) 27년경에 북부학당을 폐지하고 동·서·중·남의 넷만을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사부학당(四部學堂)이라고 불렀으며, 보통 사학(四學)이라고 불렀다. 사학에는 명륜당과 재(齋)를 설치하였지만 문묘는 설치하지 않았다. 이것이 향교와 다른 점이다. 역대 여러 왕들은 여러 차례 학전(學田)과 노비를 지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라남도 연안의 여러 섬들의 어장을 주어, 그 세금으로 선비를 양성하는 자금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학은 각 학교마다 교수(敎授) 2명 및 훈도(訓導) 2명을 배치하였는데, 모두 성균관의 직원들이 겸직하였다. 사학 유생의 정원은 각 학교마다 백 명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기 이후에 사학의 역할이 활발하지 못한 것 같다. 인조(仁祖) 【제16대】 가 정묘 후란(丁卯後亂) 후 【제7과 「병자(丙子)의 난」 참조】 에 사학의 유생 정원을 5명 이하로 줄인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어서 현종(顯宗) 【제18대】 때 북학(北學)을 다시 설치하기도 하였지만, 일시적인 데 불과하였던 것 같다.
향교
[편집]고려 인종(仁宗) 5년에 각 주(州)들에 명령하여,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이것이 지방에 학교를 설립한 시초이다. 조선 태조는 즉위하자, 문교(文敎)를 크게 발전시켰는데, 원년에 각 도(道)에 명령하여 학교의 흥폐(興廢)를 수령(守令)들의 고과(考課) 기준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같은 해에 이미 제주(濟州)에서 학교를 세웠으며, 이후 공주(孔州), 【경흥(慶興)】 갑산(甲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를 건립하고 경서(經書)를 가르치게 되었다. 향교로는 부·목·군·현에 각각 학교 하나씩을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모두 대성전, 명륜당과 함께 두 개의 재(齋)를 갖춘 것은 성균관과 다르지 않았다. 단지 그 규모가 작았을 뿐이다. 그곳에서 가르치는 유생의 정원은 지방의 자금력에 따라 정하였다. 즉 유도부(留都府)는 50명, 목(牧)·도호부(都護府)는 40명, 군(郡)은 30명, 현(縣)은 15명으로 하였다. 향교는 수령이 지방의 공적 자금으로 설립한 것이었으므로, 즉 현재의 공립(公立) 학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관찰사의 감독을 받았다. 관(官)에서는 관찰사에게 학전(學田) 및 노비를 지급하도록 규정하였지만, 그 밖에 관찰사나 수령, 유림(儒林)의 독지가(篤志家) 등이 재력에 따라, 향교의 설립과 유지 및 선비 양성 자금으로 제공하기 위해, 토지나 돈이나 곡식을 기부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또는 도진(渡津), 어장(漁場), 산림(山林) 등에 관한 권리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재산들은 향교에서 재(齋)를 담당하는 직원이 있어 그것을 관리하였지만, 후대에 이르러 향교의 쇠퇴와 함께 재산의 관리도 극도로 문란해졌다. 때문에 융희(隆熙) 4년 【메이지 43년】 에 처음으로 향교재산관리규정을 설치하여, 관찰사의 감독 아래에 부윤, 군수로 하여금 그것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향교에서는 처음에 교수관(敎授官), 교도(敎導), 학장(學長)이 있어서 교육을 맡았으며, 도호부 이상은 모두 교수관이 맡았다. 군, 현은 혹시 교수관이 없거나 교도가 없는 경우도 있었으며, 민호(民戶)가 5백 호가 안 되는 작은 읍(邑)에는 학장만을 두기도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러서 교직은 교수(敎授), 훈도(訓導)의 둘로 나뉘었는데, 큰 군(郡)들에는 교수와 훈도가 각각 한 명씩, 작은 군들에서는 훈도만을 두었지만, 그 지위는 매우 낮았으므로 유생들은 이 교직(敎職)을 맡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따라서 교사(敎師)를 구할 수 없게 되어 향교는 명종(明宗) 때에 이미 크게 쇠퇴하였다. 같은 왕 때 저 유명한 이퇴계(李退溪)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만약 대저 군·현의 학교 【향교】 는 곧 헛되이 문구(文具)를 설립하고, 교육은 바야흐로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선비들은 거꾸로 향교에서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이율곡(李栗谷)도 선조(宣祖) 2년에 글을 올려 향교 진흥의 대책을 논하였다. 따라서 같은 왕 19년에 각 도에 제독관(提督官)을 배치하여 학사(學事)를 독려하게 되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여러 차례의 병란(兵亂)을 겪었으므로 향교는 극도로 황폐화되었으므로, 유생 무리들이 개인의 재력을 출원하여 그것을 경영하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이때 상을 주어 그것이 부흥하는 데 힘썼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서원(書院)이 발흥하였으며, 향교는 그것에 압도되어, 겨우 유생들의 모임 장소로 전락하였다. 이렇게 사학과 향교는 조선 시대 중기에 교육기관으로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지만 그 알맹이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문묘(文廟)의 제사인 석전(釋奠)은 활발히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등을 시행함으로써, 예양(禮讓)의 기풍을 북돋우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과거
[편집]개설
[편집]과거란 관리의 등용을 위한 시험이다. 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에 처음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개설하였지만, 그 제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고려 광종(光宗) 9년에 후주(後周) 사람인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시부송(詩賦頌) 및 시무책(時務策)으로 시험을 쳐서 인재를 뽑았으므로 그로부터 과거는 보통의 인재 등용 방법이 되었다. 조선 태조는 즉위 원년에 내린 교서(敎書)에서 문무(文武) 양 과의 한쪽만을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기술(記述)하는 과거의 법을 정하고, 이듬해 2년에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3년에 한 번 시험을 치르기로 하여, 자(子)·오(午)·묘(卯)·유(酉)에 해당하는 해에 과거를 시행하기로 하였으며, 같은 해 【계유년(癸酉年)】 부터 실시하였다. 그리고 무과는 태종 8년 【무자년(戊子年)】 부터 실시하였다.
과거의 종류
[편집]과거는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에 대해 문과(文科), 무과(武科)의 구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과의 예비(豫備)인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가 있었다. 또 통역관(通譯官) 및 기술관(技術官)에 대하여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 등이 있었다. 역과 이하를 총칭하여 잡과(雜科)라고 불렀다. 이들 여러 과들은 3년에 한 번 시험을 치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즉 자(子)·오(午)·묘(卯)·유(酉)에 해당하는 해에 과거를 시행한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이를 일컬어 식년(式年)이라고 하였다.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경우 또는 몇 번의 경사를 합쳐서, 식년 이외에 특별히 문과, 무과, 생원과진사과 및 잡과의 과거를 시행한 경우도 있었다. 이를 일컬어 증광(增廣)이라고 하였으며, 그 경사의 중요성이 가장 큰 것을 대증광(大增廣)이라고 하여, 합격 정원을 약간 증가시켰다. 이 밖에 문과와 무과에 한해서는, 아래에 열거한 것과 같이 갖가지 명목 하에 특별시험을 치렀으니, 결국 한 해에 여러 차례 과거가 행해졌으며, 중세 이후에는 더욱 많아졌다.
(1) 별시(別試) 나라에 경사가 있는 경우에 문과와 무과를 함께 시행한 것. 아래에 기술한 중시(重試)가 있을 때는 반드시 함께 실시하였다.
(2) 정시(庭試) 임시로 문과 수험자(受驗者)들을 궁전 마당에 불러다 치르는 것으로, 별시를 변경하여 정시로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 시험은 특히 당일에 급제 결과를 발표하였다.
(3) 알성과(謁聖科) 국왕이 성균관 문묘(文廟)의 제사에 친히 참여하였을 때 문과와 무과를 함께 시행한 것. 정시와 마찬가지로 당일에 급제를 발표하였다.
(4) 춘당대시(春塘臺試) 국왕이 창덕궁(昌德宮) 내에 있는 춘당대(春塘臺)에 친히 와서, 무술 솜씨[武技]를 관람하고, 또한 무과 시험을 치를 때 문과도 역시 함께 치르는 것.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일에 급제를 발표하였다.
(5) 외방별과(外方別科) 평안도(平安道)·함경도(咸鏡道)의 두 도 【도과(道科)라고 한다.】 나 혹은 전주(全州), 송도(松都), 함흥(咸興), 강화(江華), 교동(喬桐), 제주(濟州), 온양(溫陽)과 같이 특별한 유서(由緖)가 있는 지방에 시험관을 파견하여 문무 양 과를 시행하는 것.
위의 시험들 외에 이미 문과 또는 무과에 급제하였거나, 또는 이미 문무 관직에 있는 자에 대해 다시 시험을 치러 승진의 기회를 주는 것도 있었다. 즉 다음의 두 가지이다.
(6) 중시(重試) 10년마다 한 차례씩 병년(丙年)에 시행하였다. 이 시험에는 이미 문과 또는 무과에 급제한 자가 응시하였으며, 또는 당하관(堂下官) 【정3품 이하】 인 자가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7) 문신정시(文臣庭試) 국왕이 무술 재능을 관람하는 데 친히 나서서 무관(武官)의 과거를 시행할 때 특별히 명령을 내리면 시행하는 것으로, 문관 당상(堂上) 정3품 이하인 자들이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특히 성균관(成均館) 【다른 말로 반궁(泮宮)이라고도 불렀다.】 유생들에 대해 시행하는 문과 시험을 반제(泮製)라고 불렀으며, 그것에는 곧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8) 절일제(節日製) 정월 7일, 【인일제(人日製)】 3월 3일, 【삼일제(三日製)】 7월 7일, 【칠석제(七夕製)】 9월 9일 【구일제(九日製)】 의 절일(節日)에 시행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 대책(對策), 표(表), 전(箋) 등을 작성하도록 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를 급제시켰다. 【절일제는 때때로 성균관 학생[泮儒] 이외의 자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9) 황감제(黃柑製) 매년 제주(濟州)에서 밀감(蜜柑)을 공물로 바칠 때, 특별히 그것을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절일제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치렀다.
(10) 도기과(到記科) 매년 봄과 가을에 임금의 특지(特旨)에 따라 시행한 것으로, 춘추도기(春秋到記)라고도 불렀다. 시문(詩文)의 작성과 강경(講經)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이상에서 기술한 각종 과거들 외에, 등준시(登俊試), 탁영시(擢英試), 【중엽 이후에는 시행하지 않았다.】 현량과(賢良科), 【중종 때 개설하여 시행하였다.】 충량과(忠良科) 【영조 때 개설하여 시행하였다.】 등의 과목이 있었다. 모두 일정한 시기에 행해졌던 것들이다.
시험 방법 및 정원
[편집]과거의 시험 방법은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회로 나누어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때로 그중 하나나 둘을 생략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초시는 식년(式年) 전 해 【인(寅)·신(申)·사(巳)·해(亥)의 해】 가을에 성균관, 한성부(漢城府)와 각 도(道)에서 시행하였으며, 【관시(館試)와 한성시(漢城試)는 함께 향시(鄕試)라고 불렀다.】 복시와 전시는 식년의 봄에 초시 합격자들을 경성에 모아 시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식년과 증광(增廣)에 치르는 각 시험들에 대한 합격자 정원이 있었다. 그 외에는 임시로 정하는 것으로 하였다. 지금 『경국대전』에서 보이는 식년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과명(科名) | 식년(式年) | |||
---|---|---|---|---|
초시(初試) | 복시(覆試) | 전시(殿試) | ||
문과(文科) | 240 | 33 | 33 | 갑과 3 을과 7 병과 23 |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 | 생원 700 진사 700 |
100 100 |
― ― | |
무과(武科) | 230 | 28 | 28 | 갑과 3 을과 3 병과 20 |
역과(譯科) | 35 | 19 | ― | |
의과(醫科) | 18 | 9 | ― | |
음양과(陰陽科) | 18 | 9 | ― | |
율과(律科) | 18 | 9 | ― |
생원·진사
[편집]생원과 진사란 생원진사과(生員進士科) 【줄여서 생진과(生進科)라고 한다.】 에 급제한 유생을 말한다. 그들 중 오경사서(五經四書)의 문제에 합격한 사람을 생원이라 불렀고, 시부(詩賦)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라고 불렀다. 생원, 진사는 하급 관직 【참봉(參奉), 도사(都事) 등】 에 한해 취직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또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문과는 생원이나 진사가 아닌 사람도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생원이나 진사가 시험을 치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생원과 진사의 자격은 유생(儒生)들이 매우 명예롭게 여겼으므로 생원이나 진사로 평생을 마치는 사람도 많았다. 유생으로서 생원이나 진사의 자격을 얻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유학(幼學)이라고 불렀다. 유학은 사후(死後)에 그를 학생(學生)이라고 불렀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지 않은 사람은 한량(閑良)이라고 불렀다.】 생원진사과의 시험은 초시와 복시의 2회로 나누어 시행하였으며, 초시 합격자의 정원은 앞의 표와 같이 대단히 많았고, 식년의 전 해 가을에 한성부와 각 도에서 시험을 치르는 것을 통례로 하였다. 이 한성시험과 향시의 초시에 합격한 자는, 식년의 봄에 각지에서 경성으로 모여 복시에 응시하였다. 복시는 성균관과 예조(禮曹)에서 시행하였다. 성균관은 원래 국자감(國子監)이라고 불렀으므로, 이 복시를 다른 말로 감시회시(監試會試)라고도 불렀다.
성균관 유생이 문관에 대해 특전(特典)을 가졌듯이, 사학(四學)과 향교(鄕校)의 유생들은 생원진사과에 대해 일종의 특전을 가졌다. 즉 (1) 승보(陞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사학 유생들에 대해 매년 10회 혹은 십수 회 시행하는 시부(詩賦) 시험】 (2) 사학합제(四學合製) 【사학의 각 학교에서 매년 시부와 강서(講書)에 관해 따로 시험을 치르고, 그 합격자에 대해 성균관 대사성이 다시 선발하는 시험】 (3) 공도회(公都會) 【유수(留守) 및 각도 관찰사가 관내(管內) 향교의 유생들에 대해 매년 시부(詩賦)와 강서(講書)에 관해 따로 치르는 시험】 에 합격한 자는 누구나 정규(定規) 초시를 거쳐, 곧바로 생원진사과의 복시를 치를 수 있었다.
증광(增廣)의 정원은 식년과 동일하여, 증광이 있는 해는 각 과의 합격자가 식년의 두 배였으며, 대증광(大增廣)의 경우는 다시 약간 증가시켰다. 이 밖에 문과와 무과는 위에서 기술한 각종 특별 시험에 의해 매년 급제자가 배출되는 것도 역시 적지 않았다.
문과 및 무과의 급제자
[편집]문과 및 무과의 급제자는 앞의 표에서 보듯이, 그것을 갑과(甲科), 을과(乙科), 병과(丙科)의 3급(級)으로 구별하였는데, 갑과의 제1등 급제자는 장원(壯元)이라고 불러 특별히 명예롭게 하였다. 문과의 갑과 제1등에게는 종6품, 그 나머지는 정7품, 을과에게는 정8품, 병과에게는 정9품의 관직을 수여하도록 규정하였으며, 무과 급제자도 역시 이와 같았다. 문과 또는 무과의 과거를 거쳐 관리에 등용되는 것은 정당하고 순탄한 경로로, 이른바 동서(東西) 양반(兩班)의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 밖에 문과 또는 무과의 과거를 거치지 않고, 특별히 임용되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를 총칭하여 남행(南行) 【남ᄒᆡᆼ】 또는 음직(蔭職) 【음직】이라고 불렀다. 남행에는 생원·진사로서 임용되는 자, 공신(功臣)·청백리(淸白吏)·유현(儒賢) 등의 자손 중 유학(幼學)으로서 특별히 천거된 자 등이 있었다.
유학의 장려
[편집]태조는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지만, 태학을 건립하고 향교를 설립함으로써 유학(儒學) 진흥의 방침을 정하였으며, 또 한편에서 과거를 시행하여, 경학(經學)·시부(詩賦)의 시험으로 인재를 등용하기로 하였으므로, 유학은 조선 시대 초부터 융성하는 기운으로 나아갔다. 태종은 영민하고 비범함을 자질로 삼아 송경(松京) 【개성(開城)】 에서 즉위하자, 곧바로 알성(謁聖)의 예(禮) 【문묘에 참배하는 것】 를 행하였으며, 또한 맏아들[冑子]에게 명하여 학문에 들어서도록 하였고, 세종도 역시 즉위한 초기에 예의를 활발히 하여 학교에 거둥하고 알성하였으며, 3년에 세자의 나이 8세에 이르자, 성균관에 입학하는 예를 행하였다. 당시 불교를 숭상하는 풍조가 상하를 불문하고 여전히 멈추지 않자, 국왕은 솔선하여 유교를 높이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였다. 이후 알성과 입학(入學)은 일상적인 관례가 되었으며, 학문을 일으키는 데 열심이었던 여러 왕들은 재위 중에 행학과 알성을 하는 것이 참으로 몇 번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여 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2년에 집현전(集賢殿)을 궁궐 안에 다시 설치하고, 【정종 원년에 설치하였다가, 이어서 보문각(寶文閣)으로 고쳤다.】 고금의 경적(經籍)들을 모으고, 재덕(才德)과 문학(文學)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전고(典故)를 토론하며 연구하게 하였으며, 같은 해에 또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개최하고, 왕이 유신(儒臣)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였다. 이리하여 유학의 연구는 더욱 활발해졌으며, 세종과 문종이 통치한 수십 년 동안에 집현전은 학자들의 집합소로서 유학의 중심이 되었다. 세조 원년에 뜻밖에도 집현전 학사(學士)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이른바 육신(六臣)이 된 사람들이 앞장서서 상왕(上王)의 복위(復位)를 기도하는 일대 사건이 발생하였으므로, 【제3과 비고 1 「세종(世宗)의 왕자들」 참조】 왕은 명을 내려 이들 여러 신하들을 주살하였으며, 또한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이리하여 한때 유학의 기세가 급격히 꺾였지만, 세조는 군비(軍備)의 확장과 함께 문교(文敎)의 장려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어서 성종(成宗)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학문을 크게 좋아하여, 치국(治國)은 교화(敎化)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고, 교화는 학교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유학을 크게 보호하고, 성균관에 존경각(尊經閣) 【장서각(藏書閣】 을 설치하였으며, 【6년】 또한 성균관과 향교에 전답(田畓)을 주었다. 【15년】 이 밖에 여러 도(道)의 향교들에 대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포하였다. 【20년】 그뿐 아니라 성종은 옛 집현전을 모방하여, 시로 홍문관(弘文館)을 설립하고 학사(學士)들을 배치하였으며, 교대로 매일 숙직하며 경사(經史)를 시강(侍講)하도록 하였고, 또 세종이 집현전 학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저술을 하도록 한 예를 본받아, 유신(儒臣)들에게 휴가를 주었으며, 용산(龍山)의 폐사(廢寺)에 독서당(讀書堂)을 지어 전심전력하여 독서와 문장(文章)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성종은 학사(學事)에 뜻을 기울였으므로, 유학은 대단히 발전하였다. 당시 가장 뛰어난 유학자는 김종직(金宗直)이었다. 그의 문하에도 역시 유명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조광조(趙光祖), 【정암(靜庵)】 이황(李滉), 【퇴계(退溪)】 이이(李珥) 【율곡(栗谷)】 등과 같은 명유(名儒)들이 배출되기에 이르렀다.
유학의 흥성과 더불어, 불교에 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에서 설명한다. 불법(佛法)을 배척하는 기운이 강해져, 그야말로 고려 시대에 대단히 융성하였던 불교도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극도로 쇠퇴하였으며, 일반의 풍속과 습관도 역시 유교화(儒敎化)되었다. 성종 5년에는 『국조예의(國朝禮儀)』를 널리 펴서 시행하였으며, 또한 동성(同姓)의 결혼은 엄격히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성(異姓)이라고 할지라도 재종형제(再從兄弟)들 간까지는 허락하지 않기로 하였으며【성종 2년】 부녀자의 재가(再嫁)를 금지하였고 【성종 8년】 재가한 사람의 자손은 벼슬을 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은 것 등은, 모두 유교의 주의(主義)에서 유래된 것들이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
[편집]김종직
[편집]김종직은 경상북도 선산(善山) 사람이다. 자(字)를 계온(季昷)이라고 불렀으며, 호(號)는 점필재(佔畢齋)이다. 신체가 왜소하고,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으며, 아직 약관(弱冠)의 나이도 안 되어서 글 솜씨로 크게 이름이 알려졌다. 어세겸(魚世謙)이 일찍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쥐고 마부를 하더라도 결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종은 문학(文學)을 하는 선비 십 수 명을 선발하여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개최하였다. 김종직은 그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서, 학문과 문장으로는 실로 한 시대의 유학의 종사(宗師)라고 추앙받았다. 그의 문 앞에 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유명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이종준(李宗準), 남효온(南孝溫) 등은 문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외에 관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친 사람들도 대단히 많았다. 성종 23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점필재집(佔畢齋集)』, 『이존론(彛尊錄)』, 『동문수(東文粹)』 등의 저작이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연산군 4년 무오년】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일손, 김굉필 등은 유배되어 참수되었고, 당시의 명사(名士)들이 거의 다 죽임을 당하였다. 죄가 김종직에게 미쳐, 유골을 파내어 참수하였으며, 문집(文集)을 불태웠다. 【「사화」 항목 참조.】
조광조
[편집]조광조의 자(字)는 효직(孝直)이고, 한양 사람이다. 호는 정암(靜庵)이다. 어릴 때 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어천(魚川) 【평안북도】 에 가서 성장하였다. 때마침 김굉필이 유배되어 희천(熙川)에 오자, 그에게 배웠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뛰어난 제자였으므로, 조광조는 곧 김종직의 학파를 계승한 사람이었다. 조광조는 지조가 굳었으며 경술(經術)에 밝았다. 항상 세상의 도덕과 인심이 황폐해지는 것을 개탄하면서, 그것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중종(中宗)은 조광조를 부제학(副提學)에서 대사헌(大司憲)에 발탁하여 국정을 자문하기에 이르렀는데, 현량(賢良)을 등용하여 치적을 이루었으며, 풍속을 바르게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오로지 도학(道學)을 기준으로 삼는 완고한 사상과 급격한 개혁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으며, 마침내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무고로 체포되었다. 이때 여러 유생들이 그를 위해 억울한 죄를 호소하였는데 광화문 밖에 모인 사람들이 천여 명에 이르러 대단히 소란스러웠다. 그는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간언으로 사형에서 한 등급을 감형 받아 능주(綾州) 【전라남도】 로 유배되었지만, 고작 2개월이 지나 정광필이 실각하게 되어 마침내 사약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38세였다. 유저(遺著)로 『정암집(靜庵集)』 15권이 있다.
이황
[편집]이황의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이다. 연산군(燕山君) 7년에 경상도 예안(禮安)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숙부인 송재(松齋)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중종 29년에 문과(文科)에 등제(等第)하였으며, 선발되어 호당(湖堂) 【문학에 뛰어난 사람에게 휴가를 주어, 전심하여 학문에 종사하도록 하는 직책】 에 들어가 여러 해 동안 학업에 매진하였고, 후에 사인(舍人)이 되어 의정부에 직책을 받았으며, 또한 외직(外職)에 임명되었다. 명종(明宗) 4년에 병에 걸려 관직을 사직하고, 경상도 예안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워, 독서와 자제들의 교양에 매진하였다. 후에 여러 차례 조저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나가서 관직을 맡았지만, 오래지 않아 예안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이황은 66세 때 홍문관(弘文館) 및 예문관(藝文館)의 대제학(大提學)에 임명되어, 한 나라의 학문에서의 큰 권위를 가졌으므로, 조야(朝野)에서는 그의 학식과 덕망을 우러러 받들었으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다. 선조(宣祖) 3년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영의정을 추증(追贈)받았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라고 하였다. 선조가 조정에 배향(配享)하고, 문묘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이황은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한 세대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며, 반도 유교의 종사(宗師)로 추앙받았다. 『계몽전의(啓蒙傳疑)』, 『성학십도(聖學十圖)』,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疑)』, 『퇴계집(退溪集)』 등의 저서들이 있다.
이이
[편집]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 【혹은 석담(石潭】 이다. 경기도 덕수(德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글을 매우 좋아하였다.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상(喪)을 치르고 있었지만, 우연히 불서(佛書)를 읽고, 생사(生死)의 설(說)에서 깊이 느낀 바가 있었으며, 마침내 뜻을 정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이때가 19세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모든 것은 결국 한 곳으로 돌아가거늘, 그 한 곳이 어디인가?" 【萬法歸一, 一歸何處】 라는 구절에 의심을 품고, 다시 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일찍이 이퇴계를 만나, 이기(理氣)의 학문을 논변(論辯)하여 크게 깨우친 바가 있었다. 퇴계도 역시 그의 학설에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명종 20년에 사마(司馬) 【진사생원과】 와 문과에 모두 다 수석으로 합격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이 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교리(校理) 【홍문관의 직원】 에 올랐다. 선조 초기에 관직을 사임하고, 해주(海州) 석담(石潭) 【황해도】 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모집하여 정주(程朱)의 학문을 강의하였다. 고향을 위해 그의 학덕(學德)을 다 쏟아 부었다. 그 후 여러 차례 경연(經筵)에 참여하여 치국(治國)의 중요한 도리를 강의하고, 혹은 지방에 나아가 관직을 맡기도 하였지만, 모두 병 때문에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뜻은 항상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있었으므로, 여러 차례 봉서(封書)를 올려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군비(軍備)를 갖추는 급선무를 논하였으며, 혹은 모든 말을 다 동원하여 붕당(朋黨)을 조화시킬 것을 논하였다. 선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를 발탁하여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이이는 크게 감격하여 국사에 몸과 마음을 다하였지만, 많은 경륜(經綸)을 펼치지 못하고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고, 문묘에 종향(從享)되었다.
그리고 그의 업적으로 저명한 것은, 종계변무(宗系辨誣) 사건 및 서원(西原) 【충청도 청주】 ·해주(海州) 【황해도】 에 향약(鄕約)을 만든 것이다. 이씨 개국 초기에,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신하인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명나라에 전해졌다. 그 후 효종(孝宗) 【명나라 제9대】 때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게재하였으며, 또한 “왕씨의 네 왕을 죽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조선의 상하 관료들은 크게 놀라, 이미 태조 시대부터 사실을 바로잡아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하여 사신을 보낸 것이 수십 번에 이르렀지만, 명나라는 쉽게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이는 이것을 크게 염려하여, 죽음을 각오한 선비로서 명나라에 글을 보내 탄원하였다. 이에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새로 고쳐 펴낼 때 이것을 바로잡았다. 이에 거의 2백 년간에 걸친 종계변무 사건은 비로소 매듭 지어졌다. 다음은 향약과 관련된 업적이다. 송나라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의 네 항목인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참작하여 수십 조목의 규약(規約)을 작성하고, 격월(隔月)로 그것을 서원(書院)에서 강의하여 마을에서 가르쳤으므로, 지방의 미풍양속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저작으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대학언해(大學諺解)』, 『중용언해(中庸諺解)』,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집(栗谷集)』 등이 있는데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서원
[편집]서원(書院)의 기원(起源)은, 보통 중종(中宗) 36년 풍기(豐基) 【지금의 경상북도에 있다.】 군수(郡守) 주세붕(周世鵬)이 관내에 있는 순흥(順興)이 고려의 명신(名臣)인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곳이라고 하여, 그 옛터에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이름 붙인 것에서 시작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원이라고 일컫는 것이 그 이전에도 두세 개 없지 않았지만, 명종(明宗) 때 이황(退溪) 【퇴계(退溪)】 이 임금에게 올린 말에 기초하여,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렸고, 또 서책(書冊), 노비, 전결(田結)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서원이 크게 일어났으므로, 이 서원은 특히 유명해졌으며, 서원의 효시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때 이황이 상언(上言)하기를,
“신(臣) 황(滉)이 은밀히 지금의 국학(國學) 【성균관】 을 살펴보니, 원래부터 현명한 선비들이 관계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현(郡縣)의 학(學) 【향교】 들이 생도들에게 문구(文具)를 마련해 주어, 가르침이 거꾸로 크게 파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도리어 향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피폐함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道)로써 이를 구하지 않는 것은 한심하다 할 것입니다. 오로지 서원의 교육이 왕성하게 오늘날 일어난다면, 그때는 바라옵건대 학정(學政)의 결함을 구제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향교는 이미 선조(宣祖) 이전에 교육의 실질을 상실하였으며, 그것을 대신할 만한 것으로 서원이 건전하게 발달하여, 그 문교(文敎)를 보완하여 채워 주는 부분이 컸다. 그러나 아래에 기록한 바와 같이 서원의 성적은 매우 불량하였다.
처음에 서원은 명유(名儒), 현신(賢臣)들의 영혼을 제사 지내고, 젊은 자제(子弟)들이 모여 덕(德)을 연마하고 학문을 익히는, 이른바 사자(士子) 【유생】 들이 수양하는 장(場)으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설립된 취지는 매우 옳은 것이었지만, 이미 선조 때에는 유생들의 행위가 방종해져 조금도 수양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으므로, 이이는 상소를 올려 사표(師表)를 세우고 교육의 효과를 완전하게 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이후 서원과 사당의 건설은 점점 왕성해짐에 따라, 또한 그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사적으로 사원을 건설하였는데, 그 유서(由緖)가 분명한 것에는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예에 따라 국왕이 편액을 하사하고 노비와 전결을 주어 서원의 설립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후에 점차 서원이 마구 설립되는 폐단이 발생하여 인조(仁祖) 22년에는 신설하는 서원이나 사당은 반드시 도(道)에서 예조(禮曹)에 통보하여, 중앙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비로소 창건(創建)에 착수하도록 정하였다. 그렇지만 그 후 첩설(疊設) 【동일한 사람이 2개 이상의 서원을 설립하는 것】 과 사적으로 건립하는 풍조가 끊이지 않아, 서원과 사당의 수는 터무니없이 증가되어 폐해가 대단히 커졌다. 그리하여 효종 6년에 명을 내려 첩설하는 서원과 사당에 대한 편액의 하사를 중단하였으며, 효종 8년에 서원과 향현사(鄕賢祠)의 사적인 건립을 금지하고, 그것을 주동한 유생을 처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원과 사당을 사적으로 건립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는 읍(邑)마다 그것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한 읍에서 여러 곳의 서원과 사당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도(道)에 8~10개를 헤아릴 정도였고, 서원과 사당 외에도 영당(影堂), 생사(生祠) 【생사는 지방관 등의 공덕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를 마구 설립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또한 첩설한 서원과 사당에 대한 편액의 하사를 청원하는 경우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숙종 때에는 더욱 서원과 사당의 사적인 건립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으며, 관찰사로 하여금 첩설을 일절 방지하도록 하였고, 40년에는 마침내 명을 내려 위의 금지령이 있은 이후에 사적으로 건립한 서원과 사당들을 철폐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더욱 단속을 엄격히 함에 따라 한편으로는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이 교묘해져, 영조(英祖) 무렵에는 단순히 사당이라고 칭하면서 창건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등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조 17년에 다시 명을 내려 숙종 40년 이후에 사적으로 건립한 서원과 사당을 철폐하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3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다음 왕인 정조(正祖) 때에 서원과 사당[院祠] 및 영당을 합쳐 약 650개가 있었다고 한다.
서원의 폐해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책들이 기록하고 있는 바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원이 점차 번성하여 오히려 향교를 능가하자, 향교의 유생들도 모두 서원으로 돌아갔다. 또한 유생들 가운데에는 학문을 하지 않고 난잡한 무리들이 많아졌는데, 그들은 전혀 학문을 연마하고 도를 닦는 데 힘을 쏟지 않고 놀고먹으면서 쓸데없는 논의나 일삼는 무리가 되었다.
(2) 선조 때부터 중앙 정계(政界)에서 붕당(朋黨)이 분열을 일으키자, 지방 서원의 유생들도 역시 그와 한통속이 되어 왕성하게 조정을 비난하였다.
(3) 서원이 일어나자 양민(良民)들은 군역(軍役)을 피하기 위해 서원의 노예로 모집되어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수령(守令)은 이를 금지시킬 수 없게 되자 효종(孝宗) 때 서원과 사당의 노비 숫자를 제한하였지만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서원 수의 증가에 따라 이 폐해는 더욱 커졌다.
(4) 서원은 대부분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서도 어떤 조세도 내지 않았다. 쓸데없이 게으르고 무위도식하는 유생과 한가한 장정들을 양성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5) 지방의 사족(士族)들은 서원을 근거로 서민들을 괴롭혔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춘관통고(春官通考)』, 『선조실록(宣祖實錄)』 등.】
경국대전과 그 후의 법전
[편집]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약간의 법전(法典)과 갖가지 교령(敎令)이 있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세조(世祖)는 이를 보완하여 만대(萬代)의 법으로 만들기 위해,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는 데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6권으로 이루어졌으며,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전(典)으로 나뉘었다. 그중 호전(戶典)과 병전(兵典)은 세조의 재위 중에 완성되었고, 이어서 예종(睿宗) 【제8대】 원평(元平)에 이르러 다른 4전(典)도 완성되었다. 이름을 붙이기를 『경국대전(經國大典)』이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제9대】 때 처음으로 이를 시행하였으며 또한 개정하였다. 이 때문에 성종 왕 23년에 이극증(李克增)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 이후의 교령(敎令)들로서 항구적인 법으로 삼아야 할 것들을 취하여 그것을 집성(輯成)하도록 하였다. 『대전속록(大典續錄)』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중종(中宗) 【제11대】 과 숙종(肅宗) 【제19대】 때에도 『대전속록』의 뒤를 이어 차례차례 법전의 편찬을 시도하였는데, 영조(英祖) 【제21대】 20년에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명하여 이것들을 대규모로 완성하도록 하였다. 이를 『속대전(續大典)』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정조(正祖) 【제22대】 때 『경국대전』 및 『속대전』을 합치고, 다시 당시의 법령을 더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을 만들었다. 【정조 8년】 이 태왕(李太王) 2년에 조두순(趙斗淳) 등에게 명하여 『대전통편』을 바탕으로, 『대전통편』 이후 90년 동안의 교령과 정식(定式)을 보충해 넣어 편성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대전회통(大典會通)』이다. 이어서 대원군(大院君)의 개혁으로 제도가 변경되어 다시 『육전조례(六典條例)』를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이 태왕 4년】 이상은 조선 시대 법전 편찬의 대요로서, 『경국대전』의 정신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활자
[편집]활자(活字)의 기원은 중국에 있다. 그 기원은 송나라 사람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처음 보인다. 송나라 경력(慶曆) 연간에 필승(畢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교니(膠泥)를 이용하여 활판(活版)을 만들었다고 기록한 것이 효시이다. 경력(慶曆)은 서기 11세기 중엽 【1041-1048년】 으로, 바로 일본의 헤이안(平安) 시대, 고려 정종(靖宗) 【제10대】 때에 해당한다. 중국으로부터 조선 반도에 활자가 전래된 연도는 아직 명백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사용한 것이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 것은 고려 고종(高宗) 【제23대】 때 【서기 13세기】 이다.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제11의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에 이 기사가 있다.】 이때의 활자는 금속제(金屬製)였던 것 같다. 서양에서 활판의 기원은 서기 15세기로, 필승이 발명한 후 약 4백 년, 고려 고종 때로부터 보아도 역시 약 2백 년 후이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 활판의 사용은 점점 더 활발해져, 공양왕 때에는 활자의 제작 및 서적의 인쇄 간행을 위한 서적점(書籍店)이라는 관아가 설치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그러나 그에 관해 다시 하나의 새로운 획을 그은 것은 조선 태종 3년에 주자소(鑄字所)의 창설이다. 당시 아직 조선에는 서적이 적어 유생들은 폭넓게 읽고 견식을 넓힐 수 없었다. 때문에 왕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이직(李稷) 등을 주자소 제조(提調)로 삼아, 내부(內府)의 구리를 내주고, 활자를 활발히 제조하여 서적을 인쇄하여 발행하도록 하였다. 활자의 주조와 서적의 인쇄 발행은 세종에 이르러 더욱 활발해졌으며 이후 계속되었지만, 선조(宣祖) 【제14대】 때 임진(壬辰) 병란(兵亂)으로 폭민(暴民)들이 불을 질러, 전해오던 활자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이리하여 목활자(木活字)를 제작하여 그것을 보충하였지만, 이때 한번 단절되고 그 후 170~180년간, 영조 때에 이르기까지 크게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영조 때에 이르러 활자 주조 사업을 부흥(復興)시켰으며, 다음 왕인 정조(正祖) 【제22대】 때 활자 주조가 다시 활발해졌다. 현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소장되어 있는 옛날의 활자 수는 88만 4천여 개다. 이 밖에 민간에서 사적으로 제작한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이 많다. 또 그 활자의 종류는 동활자(銅活字) 【동(銅)·황동(黃銅)·청동(靑銅】 를 주로 하고, 목활자·철활자(鐵活字) 및 도활자(陶活字)가 있었다. 단지 도활자는 그 종류가 지극히 적다.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씨와 오다 미키지로(小田幹治郞)씨의 조사에 따름.】
언문
[편집]언문(諺文)은 세종 28년에 반포되었다. 이보다 먼저 세종은 여러 나라들은 각자 문자를 만들어 그 나라의 말을 기록하는데 오로지 조선에 고유한 문자가 없음은 매우 유감이라고 하여, 친히 언문을 만들고, 언문과 관련된 부서를 궁궐 안에 개설하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등에게 명하여 언문과 관련된 것을 토의하게 하였다. 또 예의(例義)를 덧붙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하여 나라 안에 공포하였다. 이때 성삼문 등은 음운(音韻)이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기 위해, 당시 귀양에 처해져 요동(遼東)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황찬(黃瓚)의 허락을 받으러 왕래한 것이 실로 13번이나 되었다고 한다. 언문은 정확히는 그것을 정음(正音)이라고 하고, 그 예의(例義) 즉 해설을 훈민정음이라고 한다는 것은, 정인지가 지은 「훈민정음 서문」의 “우리의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한 예와 뜻으로 그것을 보이시고, 그것을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之曰訓民正音】 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언문이라는 것은 한자(漢字)에 대해 통속문자(通俗文字)라는 뜻으로, 바로 중국의 언어에 대해 조선어를 조선인 스스로가 방언 이어(方言俚語)로 칭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의 언문은 자모(子母) 28자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중 3자는 사라져 오늘날에는 25자만 사용되고 있다.
언문 제정(製定)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것으로 크게 편리함을 느끼게 되었지만, 반포 당시에는 그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언문이 반포되기 2년 전에, 당시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언문은 신기한 하나의 재주에 불과하여 학문에 손해이고 다스리는 데에 이로움이 없다.”라고 하여, 극력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 때문에 왕의 견책을 받은 것 같지만, 그것의 확실한 사례는 없다.
언문의 기원에 관해서는 종래에는 옛날 전서(篆書)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 외에 범자(梵字) 기원설이나 몽고자(蒙古字) 기원설 【특히 파스파(巴思八) 문자】 및 발음기관들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상형(象形) 기원설 등이 옛날부터 있는데 아직 결정을 보지는 못하였다.
천문
[편집]세종 임금은 천문(天文)에 밝았는데, 14년에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 정인지(鄭麟趾)에게 명하기를, “우리는 동쪽 먼 곳의 해외에 있다. 무릇 시행하는 바가 오로지 화제(華制) 【중국의 제도】 를 준수한다. 다만 하늘을 관측하는 기계는 빠져 있다. 경(卿)은 대제학 정초(鄭招)와 고전(古典)을 조사하고 연구하여 의표(儀表)를 창조함으로써, 조사하고 측량하는 데 대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원(元)나라의 제도를 연구하고, 이천(李蕆)과 장영실(蔣英實) 두 사람은 장인들을 감독하였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장영실이 가장 착상이 뛰어나, 7년이 걸려 북극측정기(北極測定器)와 여러 종류의 일구(日晷), 【해의 위치로 시각을 알 수 있는 기계】 누각(漏刻) 【물시계】 등을 제작하였다. 특히 경복궁 안에 설치된 흠경각(欽敬閣)이 유명한데, 이 건물의 중앙에는 종이를 풀칠하여 높이 7척(尺)의 산(山)을 만들고, 그 안쪽에 수력윤전기(水力輪轉機)를 갖춘 옥루(玉漏) 【물시계】 한 개를 설치해 놓았다. 또 금으로 만든 해가 있어 하루 밤낮 사이에 이 산을 한 바퀴 돌고, 그것이 운행하는 모양은 그것을 태양에 합쳐 놓았으며, 주위에는 방위(方位)를 나타내는 신상(神像)들을 배치해 놓았고, 각종 인형들이 자동적으로 시각을 알려 주었다. 그 밖에 종이로 만든 산의 사방 주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경치를 모형으로 나타냈는데, 백성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그 구조가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한다.
세종 15년에는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로운 천문도를 그려 그것을 돌에 새기게 하였다. 같은 해에 또한 정인지, 정초, 정흠지(鄭欽之) 등에게 명하여, 원나라의 역법(曆法)을 기준으로 삼고, 명나라의 역법을 참작하여 칠정력(七政曆)을 편찬하게 하여, 이를 나라 안에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에게 명하여 회회력(回回曆)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다. 이순지와 김담은 모두 당시 천문에 통달하여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세종 24년에 명을 내려 동(銅)으로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었다. 길이는 1척(尺) 5촌(寸)이고 직경은 7촌 【주(周)나라 척도를 이용하였다.】 이었다. 돌로 대(臺)를 만들어 그 위에 설치하였다. 한 기는 서운관(書雲觀) 【천문, 지리, 역서(曆書), 측후(測候) 등을 담당하였다.】 에 설치하여, 비가 올 때마다 그 깊이를 측량하게 하였다. 각 도(道)에는 동으로 주조한 측우기를 한 개씩 보냈고, 다시 그것을 표준으로 하여 자기(磁器) 또는 와기(瓦器)로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그것을 객사(客舍)의 마당 안에 설치하고, 장부를 비치하여 비의 양을 기입하도록 하였다.
또 세종 때, 강화도(江華島)의 마니산(摩尼山), 갑산부(甲山府)의 백두산(白頭山), 제주도(濟州道)의 한라산(漢拏山)에 따로 역관(曆官)을 파견하여, 그 지역의 북극(北極) 고도를 측정한 적이 있었지만, 그 도수(度數)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상은 세종 때, 천문(天文)과 역수(曆數)에 관해 시행하고 설치하였던 사항들의 대요(大要)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당시 천문 지식이 발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건축·공예·미술
[편집]조선 시대의 예술은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前期)는 건국 초기부터 선조(宣祖) 【제14대】 에 이르는 약 2백 년간이다. 문화가 융성함에 따라 예술도 역시 매우 발전하였던 것처럼,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감화(感化)를 받음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한 발전을 크게 이루었다. 후기(後期)는 선조 이후 약 3백 년간이다. 국운(國運)이 쇠퇴하고 백성들이 피폐해짐에 따라 예술도 역시 땅에 떨어졌다. 신라와 고려의 예술은 주로 불교의 융성에 따라 발전하였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풍조가 극심해졌기 때문에 그러한 풍조는 예술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또 선조 이후 재앙과 난리가 계속되어, 파괴된 공예품과 미술품이 참으로 적지 않았다. 더구나 근세에 이르러서는 국정이 문란해진 결과, 공예품 미술은 전혀 보호를 받을 수 없었으며, 민력(民力)도 피폐해져 또한 이것을 돌볼 여지가 없게 되어, 결국 크게 쇠퇴하거나 기술은 완전히 잊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모든 예술 작품을 배척할 수는 없다. 특히 건축에서는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웅대하고 장엄한 것들도 있다. 회화(繪畵)는 아마도 각 시대들 가운데 최고를 차지할 것이며, 조각, 칠기(漆器)와 같은 것들도 역시 대단히 볼 만한 것들이 있다. 【세키노(關野) 박사·이왕직박물관(李王職博物館) 등의 조사에 따름.】
불교와 도교
[편집]불교는 고려 시대에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그 말기에는 온갖 폐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때에 즈음하여 주자학(朱子學)이 중국에서 전해져 지식계급들 사이에서 유행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 초기에는 오히려 전(前) 조대(朝代)의 영향을 받아 매우 융성하였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독실하게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 무학(無學)을 왕사(王師)로 삼고 석왕사(釋王寺) 【함경남도 안변군(安邊郡)】 를 건립하였다. 태조 때에 벼슬을 하여 유명한 이지란(李之蘭) 같은 사람은 남정북벌(南征北伐)하면서 대단히 많은 살육을 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등지고 승려가 되었다. 이리하여 불교가 상하(上下)간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원(寺院)은 광대한 사원의 영지(領地)와 수많은 노비를 점유하였으며, 승려는 계율을 지키지 않고 욕심이 많으며 인색한 사람이 많았으므로, 태조는 여러 차례 명을 내려 승려들이 청렴해지고 욕심을 버릴 것을 권유하였다. 태종과 세종에 이르러서는 유학을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한다는 방침을 취하자, 종파(宗派)와 사원의 영지 등을 정리하는 것은 행정상 당면한 문제가 되었다.
태종과 세종의 개혁
[편집]태종 2년에, 서울 이외의 70개 절 이외의 절들의 전조(田租)는 영구히 군자(軍資)에 제공하고, 노비는 여러 관청에 나누어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이어서 왕은 전국적으로 존치(存置)할 사찰(寺刹)로 모두 242개를 선정하였으며, 또한 당시 존재하던 11개의 불교 종파를 조계(曹溪), 【임제(臨濟)를 포함한다.】 화엄(華嚴), 자은(慈恩), 중신(中神), 총남(摠南), 시흥(始興), 천대(天臺) 등 일곱 종파로 폐합하였다. 세종이 후사(後嗣)로 정해지자, 다시 이 일곱 종파 중 조계, 천대, 총남의 세 종파를 합쳐 선종(禪宗)이라 하고, 화엄, 자은, 중신, 시흥의 네 종파를 합쳐 교종(敎宗)이라고 하였으며, 유서 깊은 사찰 36곳을 선정하여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각 절들에 거주하는 승려들의 수를 참작하여 토지를 나누어주었다. 이때부터 조선의 불교는 단지 선종과 교종의 두 파가 되었다. 이것이 세종 6년 4월의 일이다. 그러나 제7대 세조는 불교를 좋아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경론(經論)을 간행하였는가 하면, 사찰을 중건(重建)하기도 하였다. 저 원각사(圓覺社)와 같은 것은 바로 세조 때 지은 것이다. 【제3과 비고 「원각사(圓覺寺)」 참조】 또 세조 때 편찬한 『경국대전(經國大典)』 중에는 분명히 도승(度僧) 제도를 인정하였으며, 문무과(文武科)를 본떠 새로 승과(승과)를 설치하고, 3년마다 한 번씩 승려를 시험으로 선발하였다. 예종(睿宗) 【제8대】 이후로는 사원의 새로운 창립을 금지하였지만, 옛터에 고쳐 짓는 것이 여전히 적지 않았다. 다음 왕인 성종(成宗)은 승려를 매우 싫어하여 승려에게 도첩을 발행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승려와 비구니를 환속시켰다.
연산군(燕山君) 【제10대】 때에는 도성 안의 사찰을 모두 폐지하여 공공기관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중종(中宗) 【제11대】 7년에는 마침내 원각사를 헐고 그 자재들을 부근의 민가(民家)들에게 주었다. 그러므로 승과(僧科) 같은 것도 중종 때부터 자연히 중단되어 폐지되었다.
보우
[편집]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명종(明宗) 【제12대】 이 즉위하였다. 왕은 아직 나이가 어렸으므로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 가 섭정하였다. 왕후는 독실하게 불교를 믿어 널리 명승(名僧)들을 구하였다. 강원도 감사(監司) 정만종(鄭萬鍾)이 인제군(麟蹄郡) 백담사(百潭寺)의 승려 보우(普雨)를 천거하였다. 보우는 모후의 신임을 크게 받아 승과(僧科)와 도승(度僧) 제도를 부활시켰으며, 무차대회(無遮大會)를 크게 여는 등 매우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렇지만 불교는 유학이 융성하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다. 대간(臺諫) 및 유생들은 간사한 승려 보우를 주살해야 한다고 규탄하였고, 석학(碩學) 이이(李珥) 【율곡(栗谷)】 와 같은 사람도 그의 죄를 거론하며 그의 육신을 찢어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같은 왕 20년에 모후가 승하하고, 보우는 제주로 귀양가 죽었으므로, 불교는 부활의 조짐만을 보였을 뿐이고 다시 일어설 수는 없게 되었다.
승병이 일어나다
[편집]임진난(壬辰亂)을 맞이하여 승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평안남도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의 승려】 은 승군(僧軍)을 모집하였으며, 또한 제자들에게 격문을 돌려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 처영(處英) 【뇌묵대사(雷黙大師)】 등을 각각 한 방면의 장수로 삼아 공훈을 세웠으므로, 선조(宣祖) 【제14대】 는 휴정을 팔도십육종(八道十六宗) 【조선은 8도인데다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가 있었으므로 이렇게 불렀다.】 의 도총섭(都摠攝)에 임명하여 승려를 통솔하도록 하였다.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이 불교는 유교에 압도되었지만 전혀 쓸모없이 여겨지던 승려들도 국난의 시기에 이르러 크게 쓸 데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인조(仁祖) 【제16대】 는 승려가 함부로 풍수를 말하여 인심을 현혹시키고 혹은 권세 있는 집안에 드나들며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걱정하여, 승려와 비구니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에 승려들을 모집하여 노역을 돕게 하였으며, 또한 성 안에 사원을 짓고 그곳을 승려들의 진영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들을 모집하여 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후에 북한산성(北漢山城)에도 똑같이 승려들의 진영을 설치하였으며, 【숙종 때】 또 성을 쌓는 등의 경우에 승병들을 동원하여 노역에 종사하게 한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이리하여 승려는 완전히 그 본래의 사명을 잃었고, 불교는 점차 타락할 뿐이었다. 현종(顯宗) 【제18대】 때 양민이 삭발하고 승려나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지시키는 명을 내린 것을 보아도 얼마나 승려가 천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상은 조선 시대에 불교의 변천을 개략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대는 이전 시대의 불교의 폐해에 염증을 느껴 숭유배불(崇儒排佛)을 정교(政敎)의 커다란 방침으로 삼았고 그 결과 승려의 지위는 저하되어 승려는 보통 사회에서 일반 백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되었고, 불교는 겨우 종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불과하였다. 일한병합(日韓倂合) 후에 조선의 불교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포교(布敎)가 허용되었고, 승려의 신분도 일반 인민과 전혀 다르지 않게 되어 면모가 완전히 새로워졌다.
도교
[편집]조선 시대의 불교를 간략히 서술한 김에 도교(道敎)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도교는 노장(老莊) 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그 뜻을 펼치고, 그것에 신선술(神仙術)과 불교(佛敎) 등을 가미한 일종의 종교로서, 이미 옛날부터 반도에 전래되었던 것 같다. 고려 시대에는 도교의 교의(敎義)와 의식(儀式) 등은 불교 속에 혼합되거나 혹은 독립하여 상하(上下) 계층들에 만연하였다. 조선 시대에도 역시 고려 시대의 제도를 본받아, 도교의 관아인 소격서(昭格署)를 두고, 삼청전(三淸殿)을 설립하여 성신(星辰)에게 초제(醮祭)를 올리는 일을 맡겼지만, 도교는 불교와 함께 심하게 유교의 박해를 받았다. 중종 11년에 그것을 폐지하였다가 중종 20년에 부흥시켰다. 그러나 임진병란(壬辰兵亂) 이후에 그 일은 마침내 폐지되었다. 현재 경성(京城) 북부에 있는 총독부(總督府) 학무과(學務課) 분실(分室) 【옛 규장각】 은 소격전(昭格殿)의 옛터로, 근방의 지명이 소격동(昭格洞), 삼청동(三淸洞)인 것은 그 이름의 잔재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