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소학일본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권2/6. 임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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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요지[편집]

본과에서는 앞 과에서 서술하였듯이 사화(士禍)와 붕당(朋黨)이 계속 이어지고, 그로 인해 국력이 차츰 쇠퇴해갈 즈음에 주변국들과 난리를 겪어 국력은 크게 피폐해졌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국가 형편을 밝혀 주며, 이른바 임진란(壬辰亂)에 관해 설명해야 한다.

강의요령[편집]

일본의 국가 형편[편집]

태조가 즉위할 무렵 일본에서는 아시카가(足利) 씨는 대대로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하여 그 세력이 여전히 왕성하였다. 그 후 조선의 국운이 점차 융성한 약 백 년 동안에 【전 과 참조】 아시카가 씨는 점차 세력을 잃었으며, 세조(世祖) 【제7대】 말년에 해당하는 무렵에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때부터 군웅(群雄)들이 할거(割據)하여 쇼군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고, 이른바 전국(戰國)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선조(宣祖) 【제14대】 중기 무렵에 해당하는 시기까지 이 전국 시대는 약 120여 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국내를 평정하려고 하였는데 도중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뜻을 이어 국난을 진정시키자, 국내는 비로소 태평을 되찾았다. 이때가 바로 선조 23년 【일본 텐쇼(天正) 13년】 에 해당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적[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시카가 바쿠후(幕府) 무렵부터 국위(國威)가 해외에 떨치지 못함을 탄식하여, 명나라와 조선 등으로 하여금 조공(朝貢)을 하게 하려 하였으며, 우선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들이 복종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우리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히데요시는 이에 조선에게 길을 빌려 그들을 정벌하려고 하였으며, 조선으로 하여금 길을 안내하도록 하였지만,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복속하였으므로, 명나라의 위력을 두려워하여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마침내 마음을 정하고 명나라를 정벌하기로 하였는데, 국내가 평정되자 그 세력에 편승하여 군대를 출동시켰다.

임진 전역[편집]

분로쿠(文祿) 원년 【선조 25년 임진년】 에 히데요시는 명나라 원정의 목적을 이루려고 약 15만 명의 대군을 출발시켰는데, 그들을 9군(軍)으로 나누고 별도로 수군(水軍)을 갖추어, 우선 조선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군대는 이를 막아 통과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동(東)·서(西)·중(中)의 세 갈래로 진격하면서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며 마침내 수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앞서 국왕은 도성을 나와 의주(義州)로 도망갔으며, 사신을 급히 명나라에 파견하여 원조를 요구하였다. 일본군 선봉인 장수(將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다시 진격하여 평양(平壤)을 점령하였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북쪽으로 진격하여 함경도에 들어가 회령(會寧)에 이르렀다. 일본의 수군은 경상도 연안에서 여러 차례 조선 수군의 장수인 이순신(李舜臣)에게 패배하였으며, 따라서 육군도 평양 이북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런데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약 4만 명의 군대를 보내 조선을 도왔으며,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마침내 평양을 회복하였고, 조선의 지사(志士)들도 역시 곳곳에서 군대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후퇴하여 경성으로 집결하였으므로 이여송은 승리에 편승하여 나아가 그들을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도리어 크게 패배하여 자신도 하마터면 위태롭게 되었다. 이 때문에 후퇴하여 한때 평양에 머물렀다.

휴전[편집]

이여송은 급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심유경(沈惟敬)을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에 파견하여 화의(和議)를 요구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를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으므로, 이에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락하여 화의의 조건을 논의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소환하여 휴식을 취하게 하였으며, 일부는 남쪽에 머물면서 명령을 기다리도록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약 3년을 소비하였다.

정유 후역[편집]

게이죠(慶長) 원년 【선조 29년 정유년(丁酉年)】 에 명나라 사신 심유경 등은 확실히 화의를 강구하려고 일본으로 가서 히데요시를 알현하였지만, 화의의 조건이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국서(國書)에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문장이 있었으므로, 히데요시는 크게 노하여 명나라 사신을 쫓아내고 이어서 다시 정벌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으며, 조선 남부 지방에서 주로 명나라 군대와 싸워 각지에서 그들을 격퇴하였지만, 때마침 히데요시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날 때에 유명(遺命)으로 여러 장수들을 소환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줄지어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다. 【게이죠 3년, 선조 31년】 이 전란(戰亂)은 전후(前後) 합쳐 7년이 걸렸지만, 그 첫 해가 임진년(壬辰年)에 해당하므로 조선에서는 보통 그것을 임진란(壬辰亂)이라고 부른다. 이 때 조총(鳥銃)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조선에 전해졌다.

화친의 회복[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렸으므로 여러 장수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천하의 실권은 히데요시의 부하로서 가장 세력이 있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돌아갔다. 이에야스는 이어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었으므로, 바쿠후(幕府)를 에도(江戶) 【지금의 동경】 에 열고 국정을 실시하였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어 신속히 조선과의 화친을 회복하려고 쓰시마 도주인 소 요시모리(宗義盛)에게 화친을 도모하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소씨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크게 힘을 썼으므로 선조는 사절을 바쿠후에 보내 국서(國書)를 보내 우호를 수립하였다. 실로 히데요시 사후 9년으로 【게이죠 12년, 선조 40년】 이때부터 조선과 이에야스 씨의 교류는 친밀해져, 쇼군(將軍)이 바뀌면 매번 그것을 조선에 알렸고, 조선은 반드시 사절을 보내 그것을 축하하는 것이 오랜 관례가 되었다.

비고[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텐분(天文) 5년 【기원 2196년】 에 오와리국(尾張國) 나카무라(中村) 【오와리군(尾張郡) 나카무라】 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히요시마루(日吉丸)라고 불렀다. 후에 스스로 키노시타토키치로 불렀으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섬겼지만, 노부나가의 부장(部將)인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의 용맹에 가려 성을 하시바(羽柴)로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타고난 성격이 명민하고 기지(機智)가 풍부하여 일찍이 큰 뜻을 품었다. 애초에 부모는 승려가 되라고 하였지만 듣지 않고, 16세 때 도도미(遠江)로 가서, 구노(久能) 【슈치군(周智郡) 구도니시무라(久努西村) 구노】 의 성주(城主)인 마츠시다 유키츠나(松下之綱)를 섬겼다. 후에 그곳을 떠나 오와리의 기요스(淸洲)로 건너가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었다. 그의 재간이 점차 노부나가에게 인정을 받게 되어 차차 승진하여 마침내 그의 부장(部將)의 대열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웠다. 텐쇼(天正) 원년 【기원 2233년】 에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淺井長政)를 멸망시키자, 그의 채읍(采邑)을 히데요시에게 주었다. 이듬해 히데요시는 이마하마(今濱)에 성을 쌓고 나가하마(長濱) 【오미국(近江國) 사카다군(阪田郡) 나가하마정(長濱町)】 로 고쳐 22만 석(石)을 받았으며, 노부나가가 나라의 중부[中國]를 지배하려고 하여, 텐쇼 5년 【기원 2237년】 에 히데요시를 하리마(播磨)에 봉하고 그에게 군대를 맡겼다. 히데요시는 점차 군대를 보내 하리마와 이나바(因幡)를 평정하고, 10년에 빗츄(備中)를 침입하여 모리(毛利) 씨의 속성(屬城)인 다카마츠성(高松城)을 포위하고, 긴 제방을 쌓아 강물을 끌어들여, 유명한 수공(水攻)의 계략을 썼다. 이때가 바로 5월로 장마가 그치지 않아 성 안은 크게 고통스러웠다.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淸水宗治)는 마침내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자살하고, 사졸(士卒)들이 명령을 대신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도 역시 화의를 요청하였다. 때마침 6월 2일에 오다 노부나가가 그의 신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교토(京都) 혼노지(本能寺)에서 피습을 당하자, 마침내 불을 질러 자살하였다는 비보가 히데요시의 진영에 도달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비밀로 하고, 6월 4일에 무네하루(宗治) 등으로 하여금 배 안에 자살하게 하고, 모리 씨와 화약(和約)을 체결하였으며, 이튿날 급히 군대를 돌렸다. 11일에 히데요시는 이미 세츠(攝津)의 아마가사키(尼崎)에 도착하였으며, 13일에 미츠히데를 야마사키(山崎)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미츠히데는 오미의 사카모토성(阪本城)에 가서 의지하려 하였지만, 도중에 토착민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의 명성은 크게 높아지자, 조정은 히데요시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종오위하(從五位下)의 작위를 수여하고, 샤콘에쇼쇼(左近衛少將)에 임명하였다.

텐쇼(天正) 11년에 히데요시는 자신을 반대하는 시바타 카츠이에를 에치젠(越前)의 기타야마(北莊)에서 공격하여 그를 멸망시킴으로써 북국(北國)을 평정하였다. 텐쇼 13년에 장수를 파견하여 시고쿠(四國)의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를 친히 공격하여 그를 항복시켰으며, 14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들어가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를 사츠마(薩摩)에서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이리하여 본토의 대부분 및 시고쿠·큐슈가 모두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지만, 동국(東國)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으므로, 텐쇼 18년에 히데요시가 스스로 대군의 장수로서 호조 우지나오(北條氏直)를 사가미(相模)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에서 포위하였다. 호조 씨는 이즈(伊豆), 사가미, 무사시(武藏), 우에노(上野) 등지를 거느리며 동국에서 위력을 떨치고 있었지만, 마침내 히데요시에게 굴복하였으므로, 히데요시는 호조 씨를 멸망시키고, 그의 옛 영토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동국의 제후들은 다투어 진심을 전해왔으므로, 전국적으로 다시는 히데요시에게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원래 비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국내를 평정하고, 위로는 조정을 존중하고 아래로는 만민을 안정시켜, 텐쇼 13년 7월에 조정으로부터 간파쿠(關白) 직위를 받았다. 간파쿠는 대대로 후지와라(藤原) 씨에게 임명되는 직책으로서 천자(天子)를 보좌하고 받드는 영광스러운 직책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듬해에 다시 다이쇼다이진(太政大臣)으로 진급하고, 도요토미(豐臣)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 승진이 빨라 예나 지금이나 그에 미치는 사람은 없었다.

텐쇼 11년에 히데요시는 제후들에게 오사카성(大阪城)을 수축하도록 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13년에 시고쿠(四國)를 평정하자, 그곳을 교토(京都)에 버금가게 새로 지었는데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쥬라쿠(聚樂)라고 지었다. 텐쇼 16년 4월에 고요제이(後陽成) 천황 【제106대】 은 히데요시의 주청(奏請)을 받아들여, 쥬라쿠 저택에 행차하였다. 히데요시는 문무백관을 이끌고 호종하여 받들었다. 당시 전란의 뒤를 이어 이러한 성대한 의식이 오랫동안 끊어졌으므로, 신분이 높고 낮은 사람, 나이가 많고 적은 사람들이 멀리서 가까이서 몰려들어, 참배하며 구경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노인들은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전혀 뜻밖에 오늘 다시 태평한 모습을 보게 되다니.”라고 하였다. 이때 히데요시는 궁궐 금리어료(禁裏御料)로서 돈과 곡식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오다 노부카츠(織田信雄) 【노부나가의 아들】 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하의 제후들 20여 명으로 하여금 천황을 존숭하고 간파쿠(關白)의 명령에 위배하지 말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와카(和歌)의 모임, 춤과 음악 관람 등의 일들이 있었으며, 천황은 어가에서 5일을 머문 뒤 돌아왔다.

다음으로 텐쇼 18년에, 조선에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 등이 국서(國書)를 가져와 쥬라쿠 저택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였다. 이때의 모습은 유명한 유성룡(柳成龍)의 저서인 『징비록(懲毖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명을 완수하고 이듬해 19년 봄에 귀국하여, 황윤길은 반드시 병란(兵亂)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는데,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황윤길 무리가 인심을 동요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논의에 참가한 자들은 각자 그가 선호하는 바를 위주로 하면서, 선택에 매우 갈팡질팡하는 모양이었다. 또 히데요시가 조선 국왕에게 보낸 답서에서 “명나라가 우리와 우호를 체결하지 않으면, 대군을 급히 동원하여 그들을 공격할 것이다. 왕은 그 선봉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중신(重臣)들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명나라 조정에 이를 보고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명나라가 조선이 몰래 일본과 교류한 책임을 물을 것이므로 오히려 이를 보고하지 않는 쪽이 옳다고 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결국 답서의 내용을 보고하기로 결정하고 김응남(金應南) 등을 명나라에 파견하였다.

이보다 먼저, 히데요시는 류큐(琉球)의 사신이 왔을 때, 명나라를 정벌할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당시 류큐는 명나라의 속국이었으므로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명나라에 통보하였다. 또 명나라의 상인들로서 일본국에 있던 사람들도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이때 명나라 국내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되어 명나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조선의 사절인 김응남이 와서 일본의 정벌 의사를 보고하자, 명나라 조정의 의혹은 마침내 해소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히데요시의 명나라 정벌의 목적과 분로쿠(文祿)·게이죠(慶長)의 전후(前後) 두 차례의 전쟁의 경과는 다른 항목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므로 생략한다. 분로쿠 3년 6월에 히데요시는 병을 얻어 8월 18일에 63세를 일기로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세상을 떠남으로써 마침내 최종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히데요시는 죽으면서 유명(遺命)을 내려 해외의 군대를 돌아오도록 하였다.

히데요시가 필리핀과 대만에 입공을 촉구하다[편집]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일을 일으키려고 하면서, 또한 필리핀 군도 【당시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여송(呂宋)이라고 불렀다.】 를 불러들여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하였다. 필리핀 군도는 우리가 전국(戰國) 무렵 【기원 2189년, 고나라(後奈良) 천황 2년】 에, 스페인 사람이 태평양을 항해하다 이른 곳이며, 에이로쿠(永祿) 8년(기원 2225년)에 식민지로 삼았다. 겐키(元龜) 2년 【기원 2231년】 에 비로소 마닐라에 정청(政廳)을 세우고, 오오모리(大守)를 두어 그곳을 통치하게 하였지만, 토착민들의 반항이 그치지 않았고 그 방비도 역시 견고하지 못하였다. 하라다 마고시치로(原田孫七朗)라는 사람이 여러 차례 그곳을 왕래하여 그곳 사정에 밝았으므로, 텐쇼 19년 【기원 2251년】 9월에 히데요시는 마고시치로를 통해 오오모리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입공(入貢)을 촉진하고, 만약 지연되면 이어서 군대를 보내겠다는 사실을 전달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우리나라는 백여 년간 작은 나라들이 패권을 다투느라 천하가 통일되지 못하였지만, 내가 태어날 즈음에 천하가 통일될 기이한 조짐이 있었다. 그리하여 장년이 된 나는 나라를 다스린 지 10년도 안되어 아주 작은 지역까지도 남김없이 모두 통일하였다. 그러자 삼한(三韓)·유구(琉球)부터 먼 나라 이역에서조차 우리나라 변방에 와서 조공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명나라를 정복하려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나라 사람들은 아직까지 조공의 예를 갖추지 않으므로 먼저 군졸을 이끌고 토벌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상선(商船)편으로 그 나라를 수시로 왕래하는 하라다 마고시치로라는 자가 근신(近臣)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며 말하기를, “아무개가 서둘러 그 나라에 가서 우리나라가 배를 띄우는 취지를 미리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공 바치는 것에 대해 해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군막(軍幕)을 나서지 않고도 천리 밖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옛 사람의 지극한 말이다. 따라서 천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잠시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내년 봄까지 큐슈와 히젠에 진영을 설치하고 옮기지 않을 것이니, 날짜에 맞춰 항복 깃발을 들고 와서 항복하라. 만약 무릎걸음하며 엎어지며 자빠지느라 지연할 경우라도 기필코 신속히 정벌할 것이다. 후회하지 말라. 이만 줄인다.

 텐쇼 19년 9월 19일

오오모리(大守)는 히데요시의 편지를 보고 크게 놀라, 사신을 보내 히데요시를 히젠(肥前)의 나고야(名古屋)에서 알현하고, 그 진의(眞意)를 살폈다. 그러나 당시 히데요시는 조선을 정벌하는 데 힘을 썼으므로, 마닐라에 전념할 수 없어 서신을 주고받는 데 세월을 보냈으며,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히데요시는 또한 분로쿠 2년 【기원 2253년】 11월에 하라다 마고시치로로 하여금 대만(臺灣)에 편지를 보내서, 그들이 입공(入貢)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태양은 두루 비추어 주어 바다와 산과 내와 풀과 나무와 짐승과 벌레까지 태양의 은광을 입지 않음이 없다. 내가 인자하신 어머니의 태반에 잉태되려 할 때 어머니께서 상서로운 꿈을 꾸었는데, 그날 밤 햇빛이 온 방안에 가득하여 마치 대낮과 같아지자, 사람들은 놀라 두려움에 떨었다. 점쟁이들이 모여 점을 치고 말하기를, “장년이 되면 덕이 온 세상에 빛나 만방에 위광을 발할 기이한 일이로다.” 하였다. 나는 출세한 지 10년이 채 안되어 불의를 다스리고 공을 세웠으며 국내를 평정하였다. 그러자 다른 나라의 아주 외진 곳에서조차 나의 풍모를 흠모하여 홀연 자기 나라를 떠나 먼 바다에 배를 띄워-오고가는 사신들이 끊이지 않아 길에는 수레가 뒤엉키는데도-앞을 다투어 항복하였다. 그런데 조선국은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동맹의 맹세를 하였음에도 오래 전에 그 약속을 배신한데다 또 내가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할 때 배반할 계략을 꾸몄다. 이 때문에 장수들에게 명하여 조선을 정벌하자, 국왕은 도망치고 수도 한양은 불바다가 되었다. 사태가 급박해짐을 들은 명나라가 수십만 명의 구원군을 보내 전투를 하였지만 끝내 전세가 유리해지지 못하자, 명나라는 칙사를 우리나라 히젠에 보내 항복을 구걸하였다. 조선에 수십 개의 성에 진영을 쌓고 조선의 영내에 있는 경상도에서 병사를 거두어 여러 번이나 진위를 확정하였다. 남만(南蠻)의 유구(琉球) 같은 경우에는 해마다 지역 특산물을 바다와 육지를 통해 배와 수레로 보내와 나의 덕광을 숭앙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아직까지 막부에 들어오지도 조공을 하지도 않았으니, 죄가 하늘에 가득하다. 비록 그렇더라도, 사방에서 조공 바치는 것을 몰랐다면, 그 지역이 외지다는 이유로 너희 나라의 뜻까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하라다씨에게 사명을 받들어 배를 띄우게 하였으니, 만약 이렇게 하였는데도 와서 조공하지 않는다면 장수들에게 너희 나라의 정벌을 명할 것이다. 만물을 생장시키는 것도 태양이고, 만물을 말려 죽이는 것도 태양임을 생각하라. 이만 줄인다.

 분킨(文禁) 2년 호시아츠(星集) 계사(癸巳)년 11월 5일

 일본국 전 관백(關白) 인(印)

 다카이야마국(高山國)

다카이야마국이란 곧 다카사고 【고사(高砂)】로서, 우리나라[일본] 사람들이 대만(臺灣) 섬을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당시 대만은 토번(土蕃)의 소굴로, 통일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히데요시의 편지에 대해 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어서 세상을 떠나고 후대 사람이 그의 웅대한 시도를 계승할 수 없게 되자, 대만은 잠시 네덜란드인에게 점령되었으며, 후에 정성공(鄭成功)이 차지하였으며, 그가 죽자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적[편집]

일본과 명나라 및 조선의 교류는 이미 아시카가(足利) 바쿠후(幕府) 무렵부터 오랫동안 이루어졌지만, 바쿠후가 쇠퇴함에 따라 서로의 왕래가 차츰 끊기게 되었으므로, 히데요시는 다시 명나라나 조선과 옛 교류를 맺고 다시 통상무역(通商貿易)의 길을 열려고 하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일찍부터 일본의 국위를 해외에 발양하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으므로, 단지 아시카가 씨가 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들에게 요청하여 【즉 우리가 입공(入貢)하는 형식으로】 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조공하게 하려 하였다. 그 나라에 대한 조공의 형식으로 통상을 허락하고 무역을 하는 것은, 지금 원나라 및 명나라가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의 소란이 점차 평정되어 위엄 있는 명령이 국내에 널리 미치게 되자, 히데요시도 역시 원나라나 명나라가 하였던 바를 하려고 조선에 중개를 주선하는 노력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 히데요시는 대만, 필리핀 등에 조공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건국 초기부터 명나라에 복속되어 사대(事大)의 예를 지켜온 조선은 조금도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으며, 명나라도 역시 히데요시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도저히 평화적 수단으로는 그의 바람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군대를 일으키기로 마음을 정하고,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히데요시의 해외 원정의 목적이 애초부터 조선에 있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정복전쟁으로 헛되이 명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굳이 그 나라를 유린하는 데에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은 텐쇼(天正) 13년에 오사카에서 알현한 포르쿠갈인 선교사 가스펠 케로에게 히데요시가 말한 다음의 내용으로부터 알 수 있다.

“나는 단지 평화를 이루려는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그에 의해 모든 분쟁과 내홍(內訌)을 근절하려는 데 뜻이 있으며, 나는 또한 계획한 바가 있어 국내를 평정하고 스스로 중국에 건너가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목적이 그 나라를 소탕하여 유린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제국(帝國)의 정치적 교화를 그들에게 미쳐 굳건히 하려는 것이다.” 【크랏세, 『일본교령사(日本敎令史)』】

임진·정유란[분로쿠·게이죠 역]의 경과[편집]

이 전란(戰亂)은 선조 25년 임진년(壬辰年) 【분로쿠(文祿) 원년】 부터 선조 31년 【게이죠(慶長) 3년】 에 이르기까지 전후(前後) 7년 동안 지속되었다. 지금 그것을 전후 두 전쟁으로 나누어 경과의 개요를 서술하고자 한다.

임진란[분로쿠 전후]의 경과[편집]

【본문의 월일(月日)은 일본력(日本曆)에 따른다. 명나라 역법을 받들던 조선과는 달[月]에서 날[日]을 취하여 서로 다르며, 그 주요한 것만 대조하여 병기(倂記)한다.】

부서(部署)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정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명나라를 원정할 군대를 출동시키도록 하였다. 이에 먼저 해군, 육군 등 제군(諸軍)의 여러 부서를 정하고, 또한 명령을 내려 군의 폭력적 약탈을 금지하고, 결코 조선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 전쟁에 동원된 병력의 수는 다음과 같다.

 갑 나고야(名護屋) 주둔군

   히데요시(秀吉) 휘하 약 3만 명

   주둔 제군(諸軍) 【46명의 장수】 약 7만 명

   합계 약 10만 명.

 을 도선군(渡鮮軍)

   선발군(先發軍) 9군 【29명의 장수】 약 15만 명

   증견군(增遣軍) 【37명의 장수】 약 4만 명

   수군(水軍) 【11명의 장수】 약 1만 명

   합계 약 20만 명

   총계 약 30만 명

 이때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건너가는 여러 군대[渡鮮諸軍]에게 발포한 금지령은 다음과 같다.

   금제(禁制)     고려국(高麗國)

 1. 군대 갑(甲)과 을(乙)의 사람들은 산만하게 여기저기 흩어져 혼란을 일으키는 것.

 1. 방화.

 1. 지하에 있는 사람이나 백성들에게 법도에 어긋나는 예의를 보이는 일.

 위의 조항들은 분명히 중지할 것을 명하며, 만약 이를 위반하는 무리들이 있을 경우에는 신속히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텐쇼(天正) 20년 정월 일 【히데요시 주인(秀吉朱印) 『적번벌열록(荻藩閥閱錄)』·『가토 기요마사가 장서(加藤淸正家藏書)』·『부카지키(武家事記)』·『텐쇼키(天正記)』】

육군(陸軍)의 경과(經過)

제1군의 장수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소 요시토시(宗義智),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 등과 군사 1만 8천여 명을 이끌고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 14일】 에 부산에 상륙하여, 당일 부산성(釜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어서 동래(東萊)를 함락시키고 양산(梁山)을 빼앗았으며 밀양(密陽)을 항복시켰는데, 진군하면서 방(榜)을 세워 군사들의 폭력과 약탈을 금지함으로써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18일에 제2군의 장수 가토 기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賴房) 등은 부산에 상륙하여 양산에 당도하였으나, 유키나가가 밀양에서 상주(尙州)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진로를 바꾸어 언양(彦陽)을 공략하였으며, 20일에 경주(慶州)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제3군의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도 역시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와 안골포(安骨浦)에 접근하여, 김해성(金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8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밀양으로부터 진격하여 상주에 이르러,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과 싸워 그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이어서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빼앗고,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들어섰으며,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과 탄금대(彈琴臺)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다. 신립은 패주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 【27일】 가토 기요마사도 역시 경주로부터 영천(永川)과 신령(新寧)을 거쳐 풍진(豐津)을 건너 유키나가와 충주에서 만났는데, 【28일】 두 장수는 다시 진로를 나누어 유키나가는 여주(驪州)로부터 한강을 건너 용진(龍津)의 경로로 나아갔고, 【5월 1일】 기요마사는 죽산(竹山)과 용인(龍仁)을 거쳐 경성(京城)으로 향하였다. 【2일】 이보다 앞서 히데요시는 도선군(渡鮮軍)에게 명하여 확실하게 병사들의 약탈을 금지하였지만, 이때에 이르러 선봉의 여러 장수들에게 다시 명령을 내려, 힘써서 조선의 백성들을 안심시키도록 하였다. 【4월 26일】 이때에 국왕은 일이 위급해지는 것을 보고, 갑자기 도성을 나가 평양으로 피하고, 【4월 29일, 조선력으로는 4월 30일】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 등으로 하여금 남아서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 5월 2일에 기요마사의 군대가 공격하여 한강에 이르자, 이양원과 김원명은 모두 성을 지키는 것을 포기하고 달아났으므로, 기요마사는 마침내 강을 건넜다. 이날 유키나가의 군대도 역시 양근(楊根)에서 용진을 건너 진격하여 경성의 동쪽으로 나아갔고, 유키나가는 이날 밤 곧바로 동대문에서 성 안으로 들어갔으며, 기요마사는 다음날 남대문으로 들어갔는데, 두 장수는 상의하여 진(陣)을 성 밖으로 옮겼으며 방(榜)을 세워 백성들을 안심시키려 하였다. 【5월 5일】 이에 앞서 구로다 나가마사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제4군의 주장(主將)】 와 병력을 합쳐 서쪽 노선으로부터 진격하였는데, 지나가는 곳의 성루(城壘)를 수리하고 수비를 두었으며, 5월 8일에 이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제8군의 주장】 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제6군의 주장】 등의 장수들과 서로 이어서 도성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이 서로 만나 8도(八道)의 통치와 공략에 대한 분담을 논의하여, 유키나가는 평안도를, 기요마사는 함경도를, 나가마사는 황해도를, 요시나리는 강원도를 맡았으며, 히데이에는 남아서 경성을 지키기로 하였다. 15일에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두 군대는 진격하여 임진강에 도달하였으며, 조선의 장수 김명원과 강을 사이에 두고 서도 마주하였는데, 유키나가는 소 요시토시의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로 하여금 몰래 편지를 조선군에게 던져 화의를 요구하였다. 18일에 조선군은 일본군이 수비를 게을리하는 것을 엿보아 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조선의 장수 신길(申硈)과 유극량(劉克良)은 전사하였다. 27일에 조선군의 수비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강을 건너 북쪽으로 추격하여 개성(開城)을 함락시켰다.

6월 1일에 일본군의 여러 장수들이 개성을 출발하여, 안성역(安城驛) 【황해도】 에 도달하였으며, 기요마사는 나가마사와 유키나가의 여러 장수들과 길을 나누어 북쪽의 함경도로 갔다. 이때 히데요시는 조선을 다스릴 방책을 정하려고 몸소 막 바다를 건너오려다가 갑자기 멈추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마츠다 나가모리(增田長盛), 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隆)를 파견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나라로 진입하도록 지시하였다. 또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힘써 조선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조세를 징수하며, 동시에 진영(陣營)을 지어, 이듬해의 친정(親征)을 대비하도록 하였다. 【6월 3일】 11일에 왕은 일본군이 점차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거처를 평양에서 의주로 옮겼지만, 이때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등은 진격하여 대동강에 이르러 조선군과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이때 유키나가는 요시토시와 모의하여 승려 겐소(玄蘇)·야나가와 노리노부를 보내 대사헌(大司憲) 이덕형(李德馨)과 강물 위의 작은 배 안에서 만나, 길을 빌려줄 것을 말하고 화의를 요구하였지만 합의하지 못하였다. 14일 이른 새벽에 조선군은 몰래 강을 건너 요시토시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구로다 나가마사가 와서 도와 요시토시와 힘을 합쳐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승리에 편승하여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6월 15일】 이보다 먼저 조선의 국왕은 임진강에서의 패배 후 곧바로 명나라의 요동도사(遼東都司)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이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도움을 구하였는데, 평양이 함락되자 다시 사신을 요동에 보내 출병(出兵)을 촉구하고, 또한 명나라의 속국이 될 것을 청하고, 6월 23일에 의주(義州)의 용만관(龍灣館)에 도착하여 머물렀다. 명나라는 옛날에 류큐(琉球)와 조선 등이 보낸 보고를 받고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벌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본군이 마침내 바다를 건너 조선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접하자, 곧바로 요동 및 산동(山東)에 명하여 요지(要地)의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하였다. 또한 요동진무(遼東鎭撫)에게 명하여 정예부대 2개 부대를 조선의 국경으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6월 7일에 유격(遊擊) 사유(史儒)와 참장(參將) 대조변(戴朝弁) 등은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요동을 출발하여, 15일에 강을 건너 의주에 머물렀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이 일본군을 안내하지 않는가 의심하여 구원에 대한 조정 신하들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만이 구원을 주장하였지만, 그 후 조선으로부터 청원하는 사절이 여러 차례 오자, 마침내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병력 5천 명을 이끌고 사유 등을 독려하여 조선에 들여보냈다. 조승훈 등은 이에 진격하여 평양에 다다랐지만 유키나가 등에게 격파되어, 사유는 전사하고 조승훈은 달아나 요동으로 돌아갔다. 【7월 15일】 이보다 앞서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 등은 함경도를 평정하고, 6월 24일에 영흥(永興)에 이르렀는데,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珒), 순화군(順和君) 보()】 가 도망쳐 북경(北境)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요마사는 나오시게를 영흥에 남겨두고 요리후사와 병력을 데리고 그들을 쫓았다. 북도병사(北道兵使) 한극성(韓克誠)은 6진(鎭)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그에 맞서 해정창(海汀倉)에서 싸워 대패하였다. 【7월 18, 19일 무렵】 기요마사는 멀리 추격하여 회령(會寧)에 이르자, 아전인 국경인(鞠景仁) 등은 두 왕자 및 종신(從臣)들을 모아 항복하였으므로, 기요마사는 성 안으로 들어가 왕자와 신하들을 만나서 그 포박을 풀어 주고 환대하였으며, 그들을 경성(鏡城) 【함경북도】 으로 옮기고 병사들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7월 23일, 조선력으로는 7월 24일】 여러 책들에서 기요마사가 두 왕자와 종신들을 환대한 기사가 보이지만, 그중 『선조실록(宣祖實錄)』의 한 구절을 아래에 기재하고자 한다.

국경인(鞠景仁)은 문서로 기요마사에게 보고하였다. 기요마사는 회령부에 이르러 진(陣)을 성 밖에 치고, 홀로 수레에 타고 성으로 들어가서 왕자와 신하들을 만났다. 국경인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이들은 너의 국왕의 친자식 및 조정의 재신(宰臣)들이다. 심한 모욕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다. 왕자와 신하들의 포박을 풀고 군중(軍中)에 두었으며 식사와 물품의 제공이 매우 후하였다.

이때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영흥에 있으면서 부근의 여러 읍들을 항복시키고, 나아가 함흥(咸興)으로 들어갔으며, 【7월 21일】 8월 13일에 정평(定平)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마침내 장수들을 여러 부서로 나누어 홍원(洪原), 영흥 등의 성을 지키게 하였으며, 조세를 징수하고 법률로써 금지사항을 정하여 영구히 주둔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앞서 모리 요시나리는 강원도를 평정하고 삼척(三陟)에 있었다. 구로다 나가마사도 역시 황해도를 공략하고 해주(海州)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前) 해주관찰사(海州觀察使) 조인득(趙仁得) 등이 군대를 일으켜 봉기하였으므로, 나가마사가 격렬히 싸워 그들을 격파하였다. 【8월】

가토 기요마사는 회령으로부터 진격하여 북쪽의 우량하(兀良哈) 【지금의 간도(間島) 국자가(局子街) 부근】 로 들어가, 여러 성들을 함락시켰으며, 이어서 군대를 돌려 다시 회령에 도착하여, 두만강 연안의 여러 읍들을 평정하고 경원(慶源)에 이르렀으며, 북도병사 한극성을 사로잡아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여러 부서(部署)로 나누어 길주(吉州), 단천(端川) 등의 여러 성들을 지키게 하고, 마침내 두 왕자를 안변(安邊)으로 데려갔다. 10월에 홍원, 함흥, 영흥 등의 주민들이 봉기하여 그 세력이 창궐하여 극에 달하였다.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나아가 싸워 그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며, 11월에 거처인 함흥으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길주에서도 역시 북도평사(北道評事) 정문부(鄭文孚) 등이 군대를 일으키자, 기요마사는 사자(使者)를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나오시게는 즉시 군대를 나누어 그를 지원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는 군대를 일으켜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삼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대장으로 삼아 조선을 도왔는데, 송응창은 요동에 머물렀고 이여송은 세 진영의 병력 4만여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의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과 화의를 체결하기로 하였으므로, 명나라 군대에서 사신이 도착하자, 가신(家臣) 다케우치 기치베(竹內吉兵衛) 이하 20여 명을 파견하여 그들을 순안(順安)에서 맞이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속이고 술을 마시게 하고는 갑자기 일어나 그중 10여 명을 살해하고 여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분로쿠(文祿) 2년 정월 4일, 조선 선조 26년 정월 5일】 정월 7일 새벽에 이여송은 군대를 독려하여 유키나가를 평양에서 포위하고 조선의 군대도 역시 그를 따랐다. 유키나가는 소 요시토시,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의 장수들과 힘을 합쳐 싸워 저녁 무렵에 이르렀지만, 적들보다 힘이 부쳐 한밤중에 결국 병영을 불사르고 퇴각하여, 9일에 백천(白川) 【황해도】 에 이르렀으므로,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을 돕고, 유키나가로 하여금 먼저 가게 하였으며, 자신이 후발대로 싸우면서 개성에 도달하였다.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는 개성에 있었는데 평양의 패전 소식이 경성(京城)에 도달하자, 이시다 미츠나리, 마츠다 나가모리 등은 사자(使者)를 보내 다카카게와 나가마사를 불렀다. 두 장수는 처음에는 패전 소식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후에 오타니 요시츠구가 친히 와서 설명을 하자, 마침내 퇴각하여 경성으로 집결하여, 나가마사는 동대문을 지키고 다카카게는 남대문에 진을 쳤다. 이여송은 이 기세에 편승하여 일거에 경성을 함락시키려고, 26일에 경성에서 고작 5리(里) 거리에 있는 벽제역(碧蹄驛) 남쪽의 여석령(礪石嶺) 아래에 이르렀다. 다카카게는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과 이여송의 군대에 맞서 싸워 그들을 크게 무찔렀으며 거의 이여송을 찔러 죽일 뻔하였다. 이여송은 간신히 몸을 피하였는데, 다음날 동파(東坡)로 후퇴하였으며, 결국 개성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 2월에 일본군은 행주성(幸州城) 【경기도】 을 공격하였지만, 수비하는 장수 권율(權慄)은 잘 지켜냈으며, 일본군은 승산이 없자 후퇴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사가라 요리후사는 예전에 함경도에 있었는데, 수도에 있던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경성(京城)에 대한 걱정이 많다고 하자, 상의하여 사자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병사들을 모아 와서 모이도록 하였다. 때마침 길주에서 북도평사 정문부, 유생(儒生) 이붕수(李鵬壽) 등이 군대를 일으키자 수비하는 일본군은 형세가 매우 위급해졌다. 기요마사는 이에 두 왕자 이하 여러 신하들을 나오시게에게 맡겨 함흥에 남겨두고, 자신은 길주로 가서 그들 토병(土兵)들을 격파하여, 일본군을 구하고 다시 함흥으로 출발하였으며, 29일에 마침내 나오시게, 요리후사 등과 경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일본과 명나라의 양쪽 군대 사이에서는 강화(講和)의 논의가 다시 시작되자, 일본군은 4월 18일부터 점차 경성을 출발하여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이여송은 이 소식을 듣고 군대를 진격하여 개성에 이르렀으며, 이어서 경성으로 들어갔지만 조선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이여송에게 일본군을 추격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원래부터 그들을 추격할 의사가 없었다. 때마침 송응창(宋應昌)의 격문을 보고 점차 경성을 출발하였지만 고작 문경에 이르자 돌아갔다.

일본군은 이미 경성을 떠났지만 경상도의 남쪽 해변에 머물면서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울산(蔚山)과 서생포(西生浦)에서부터 동래, 웅천(熊川), 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기대어 18개의 진지를 건설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서 조선 인민들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오래 머물 계획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다시 여러 장수들에게 군대를 진격하여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먼저 일본군의 한 부대는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3월 3일】 히데요시는 우리 군대의 치욕이라고 여겼으며, 또한 진주성의 군대가 강하여 그 존재는 일본군의 연락을 적지 않게 위협하였으므로, 마침내 진주성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여러 부대는 진격하여 진주성을 압박하였고, 【6월 20일】 진주성을 포위한 지 7일이 되자 가토 기요마사는 구로다 나가마사와 계책을 세웠는데, 구갑차(龜甲車)를 만들어 거기에 사졸(士卒)들을 태워 성벽의 돌들을 제거하였으므로, 성벽이 무너져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병사(兵使) 최응회(崔應會) 이하 군민(軍民)들 중 죽은 자가 6만여 명에 이르렀다. 【6월 29일】 히데요시는 이에 명을 내려,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연해(沿海)에 진지를 만들어 병사들을 쉬게 하였지만, 게이죠(慶長) 원년 【조선 선조 29년】 6월에 명나라 사신이 바다를 건너오자 기요마사, 나오시게 등은 앞뒤로 군대를 철수하여 돌아갔지만, 여전히 일부 장병들은 남아서 더욱 수비를 엄중히 하였다. 【『서정일기(西征日記)』·『한진문서(韓陣文書)』·『고바야카와가 문서(小早川什書)』·『요시카와가 문서(吉川家什書)』·『구로다 나가마사기(黑田長政記)』·『기요마사 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보문집(普聞集)』·『정한위략(征韓偉略)』·『고니시 일행기(小西一行記)』·『요시노 각서(吉野覺書)』·『황명실록(皇明實錄)』·『전절병제고(全浙兵制考)』·『선조실록(宣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징비록(懲毖錄)』·『한음문고(漢陰文稿)』·『동년보(同年譜)』·『백사집(白沙集)』·『임진일록(壬辰日錄)』·『농포집(農圃集)』】

해군의 경과

분로쿠(文祿) 원년 4월 10일에 일본 해군의 장수인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등은 수군을 이끌고 나고야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 요시타카 등으로 하여금 다시 키이(紀伊), 히젠(備前)의 전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4월 19일】 이리하여 일본 해군은 전함을 부산 웅천의 해안에 정렬해 놓고 적의 전함에 대비하였지만, 5월 7일에 토도 타카토라는 조선의 수군 【주장(主將)은 원균(元均)과 이순신(李舜臣)】 과 옥포(玉浦) 【거제도 연안에 있다.】 앞바다에서 싸워 패하고, 이어서 같은 달 29일에 노량(露梁) 【경상남도 곤양(昆陽)의 남쪽에 있다.】 앞바다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이때 일본 해군의 지휘관 이름은 분명치 않다.】 이순신은 거북선을 풀어 돌진하였으므로 일본군은 대적하지 못하고 다시 패배하였다. 거북선은 보통 이순신이 발명하였다고 일컬어지지만 그 이름은 이미 멀리 태종(太宗) 때부터 보인다. 태종 13년 2월에 왕은 친히 임진강에 가서 거북선과 왜선(倭船)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살펴보았다는 사실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 기재되어 있다. 단지 그 제작 기법이 이순신의 거북선과 같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일본군에서는 그것을 눈먼 배[めくら船]라고 부르며 무서워하였다.

6월 2일에 일본 해군은 이순신 등이 이끄는 수군과 미륵도(彌勒島) 【경상남도 통영의 남쪽】 의 당포(唐浦)에서 싸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부장(副將) 이몽구(李夢龜)는 일본의 장선(將船)을 수색하여 금색의 둥글부채 한 자루를 획득하였는데, 그 부채면에는 “귀정유구수전(龜井流求守殿)”이라고 씌어 있었다고 한다. ‘귀정유구수(龜井流求守)’는 아마도 ‘가메이 고레노리(龜井武藏守玆矩)’일 것이다. 이어서 5일에 당항포(唐項浦) 【『동국여지승람』에는 ‘당항포(當項浦)’라고 씌어 있으며, 고성(固城)의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은 다시 패하였다. 이때 쿠키 요시타카, 카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경성에 있었는데, 조선 수군이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해로 달려갔지만, 7월 7일 【조선력으로는 8일】 에 야스하루는 전함 60여 척을 이끌고 웅천(熊川)을 출발하여 견내량(見乃梁) 【거제도의 서쪽】 에 도착하여 조선의 수군과 마주하였다. 이순신은 속임수로 후퇴하여 그들을 한산도(閑山島) 앞바다로 유인해 내고 화포를 쏘아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야스하루는 전함 39척을 잃고 쾌속정을 투입하여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요시타카와 요시아키는 부산에 있었는데 야스하루가 출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배를 출발시켰으며, 9월에 안골포(安骨浦)에 이르러 이순신 등의 군대와 마주쳤는데 역시 거북선과 화포에 격파되어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해군의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거제에 수채(水砦)를 쌓고, 선책(船柵)을 설치하고 함부로 나가서 싸우지 말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2년 2월에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쿠키 요시타카 등은 웅천에 있었는데, 조선의 수군이 여러 차례 항구 안으로 들어와 일본의 수채를 침범하였으므로, 2월 1일에 여러 장수들과 상의하여 몰래 쾌속정을 보내 습격하여 그들의 배 여러 척을 탈취하였다. 【『다카이야마공실록(高山公實錄)』·『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칸세이중수보(寬政重修譜)』·『고려선재기(高麗船戰記)』·『와키자카가기(脇坂家記)』·『정한위략(征韓偉略)』·『선조대왕실록(宣祖大王實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조선의 의병(義兵)

조선의 주(州)와 군(郡)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군을 수비하는 데 실패하자, 여러 도(道)에서 강개한 선비들이 일어나 이를 회복하려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현풍(玄風) 【경상북도】 의 유생 곽재우(郭再祐)는 먼저 의령(宜寧)에서 일어났고, 전 제독(提督) 조헌(趙憲)도 역시 옥천(沃川) 【충청북도】 에서 군대를 일으켰으며, 【선조 25년 4월】 장흥(長興) 【전라남도】 의 고경명(高敬命), 광주(光州) 【전라남도】 의 김천일(金千鎰), 합천(陜川) 【경상남도】 의 정인홍(鄭仁弘), 고령(高靈) 【경상북도】 의 김면(金沔), 수원(水原)의 홍언수(洪彦秀) 및 그의 아들 홍계남(洪季男) 등이 이어서 군대를 일으켰지만, 고경명과 조헌은 일본군과 금산(錦山) 【전라북도)】 에서 싸워 패하여 사망하였으며, 【고경명의 전사는 7월이고, 조헌은 8월이다. 】 홍언수도 역시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후에 진주성(晉州城)에 진입하였는데, 이듬해 6월에 이 성이 함락될 무렵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묘향산(妙香山) 【평안북도】 의 노승(老僧)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 호는 청허(淸虛)】 도 역시 신도 수천 명을 모아 병사를 일으켰다. 이때 국왕은 수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있었으므로, 곧 그곳으로 가서 왕을 알현하고, 제자인 의엄(義嚴)을 총섭(摠攝)으로 삼아 그 무리들을 이끌고 순안(順安)의 법흥사(法興寺)에 진을 쳤다. 【선조 25년 7월】 이때 그의 뛰어난 제자였던 처영(處英) 【호는 묵뇌(黙雷】 은 전라도에서 일어나 도도절도사(道都節度使) 권율(權慄)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 호는 사명(泗溟)】 은 강원도에서 일어나 평양으로 갔다. 유정은 송운이라고 불렸으며, 금강산에 있었지만 왕의 교서(敎書) 및 휴정의 격문이 도착하자 곧바로 일어나 산속의 승려들을 규합하고, 또한 글을 사방에 보내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9월에 함경북도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도 역시 군대를 일으켜 경성(鏡城)을 수복하고, 【9월 16일】 10월에 회령에 들어가 국경인(鞠景仁)을 주살하였다. 【10월 14일】 그 외에 각 도에서 이른바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으며 도처의 일본군들에게 항거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으며 절도가 없었고 훈련도 역시 매우 부족하여 오합지졸들이었으므로, 한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자 잇따라 패배하였음은 물론이고, 주둔이 길어지자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 거의 도둑떼와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있게 되었다. 【『일월록(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농포집(農圃集)』·『연려실술기(燃黎室述記)』】

강화(講和)와 그 파기

처음에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이 평양에서 패하자, 명나라는 비로소 일본군을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즉시 먼저 설득하여 화의(和議)함으로써 그들의 군대를 완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가흥(嘉興) 사람인 심유경(沈惟敬)을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삼아 일본군 쪽에 보내서 일본군을 설득하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원년 【조선 선조 25년】 8월 29일에 심유경은 평양으로 와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만나 우호(友好)의 이로움을 말하였다. 유키나가는 처음부터 강화(講和)의 뜻이 있었으므로 일찍이 조선군과 임진(臨津)에서 서로 마주하자 몰래 편지를 보내 강화를 논의하였으며, 【5월 15일】 이어서 대동강 연안에서 서로 마주하였을 때에도 소 요시토시(宗義智) 씨의 가신(家臣)인 야나가와 노리노부(柳川調信), 승려 현소(玄蘇) 등을 보내 대사헌(大司憲) 이덕형(李德馨)과 강 위에서 강화를 논한 적이 있었다.(6월 3일) 이 때문에 심유경과 만나자 곧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 심유경으로 하여금 다시 돌아가 보고하게 하고, 50일을 한도로 하여 나무 팻말[木標]을 평양의 서북쪽에 세우고 일본인도 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조선인도 역시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다.

11월 14일에 심유경이 또 왔다. 유키나가는 내년 봄에 함께 나고야(名護屋)에 가서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며칠 동안 군영 안에 심유경을 묵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제독 이여송(李如松)으로 하여금 통솔하여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는데, 이여송은 원래부터 화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분로쿠 2년 정월 7일에 이여송은 군대를 진격시켜 평양을 공격하고 마침내 유키나가는 패주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벽제(碧蹄)에서 패하자 크게 두려워하여,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상의하여 다시 심유경을 유키나가에게 보내 화의를 회복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심유경은 경성으로 들어가 유키나가의 군영에 이르러 화의를 도모하였으며, 유키나가는 이를 허락하여 자신이 조정하는 데 힘을 썼다. 이때 일본군도 역시 식량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질병이 유행하여 군대의 사기가 갑자기 저하되었으므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곧바로 심유경의 말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자, 히데요시도 역시 식량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고 화의를 허락할 뜻이 있었다. 이에 우선 경성 및 각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명하여 급히 군대를 철수하여 경상도의 남해안으로 퇴각하도록 하였다.

4월 18일에 일본군은 경성을 출발하였다. 이날 명나라의 사신인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 두 사람은 일본 군영에 왔으므로,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두 사신과 함께 나고야에 갔다. 【5월 15일】 히데요시는 그들을 불러 【23일】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보내 그들을 후하게 대접는데, 마침내 화약(和約)의 조항을 정하여 그들에게 주었다. 또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명하여 조선의 두 왕자 및 그 수행원들을 보내도록 하였고,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딸려서 그들을 돌려보냈다. 히데요시가 명나라의 사신들에게 준 화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 명나라 임금의 딸을 일본의 후비(后妃)로 삼을 것

 (2) 감합인(勘合印)을 복구할 것

 (3) 양국의 대신들은 각서를 교환할 것

 (4) 조선의 네 도(道)를 돌려줄 것

 (5)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보내 인질로 삼을 것

 (6)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낼 것

 (7) 조선의 대신(大臣)은 영원히 우리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각서를 바칠 것

경성이 수복되자 왕은 10월에 수도로 돌아왔으며, 명나라는 계요총독(薊遼總督) 고양겸(顧養謙)으로 하여금 조선의 사태를 처리하도록 하고, 송응창과 이여송을 소환하였다. 【12월】 이때 왕은 강화를 달가워하지 않아 이듬해 【일본 분로쿠 3년, 조선 선조 27년】 2월에 진주사(陳奏使) 허욱(許頊)을 명나라에 보내 강화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므로, 명나라는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파견하여 다시 그것이 이롭다는 것을 일깨워 주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화의의 교섭은 점점 진척되어 게이죠(慶長) 원년 【조선 선조 29년】 4월에 명나라는 도독첨사(都督僉事) 이종성(李宗城), 도지휘(都指揮) 양방형(楊方亨)을 정·부사(正·副使)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종성은 부산에서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다시 양방형을 정사(正使)로 삼고 심유경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조선도 역시 돈녕도정(敦寧都正) 황신(黃愼)을 정사로 삼고, 대구부사(大丘府使) 박홍장(朴弘長)을 부사로 삼아 명나라의 사신들을 수행하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은 6월 16일에 부산을 출발하였고, 조선의 사신 황신은 윤7월 【조선력으로는 8월】 4일에 출발하였다. 【부사 심유경은 이보다 먼저 이미 배를 타고 일본에 가 있었다.】

8월 【조선력으로는 윤8월】 29일에 명나라 사절과 함께 조선 사절은 후시미(伏見)에 도착하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두 왕자를 돌려보냈지만, 왕자가 친히 와서 감사를 표시하지 않고 천한 관리를 보낸 것에 화를 내며 조선 사절의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일 【조선력으로는 3일】 명나라 사절을 오사카(大阪) 성에서 맞이하고, 다음날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지만, 화약의 조항에 서로 차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의 국서(國書)에 “그대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라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사신을 추방하였으며, 마침내 화의를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요시노각서(吉野覺書)』·『대곡기(大曲記)』·『이우소유물어(梨羽紹幽物語)』·『적번벌열록(荻藩閥閱錄)』·『고바야카와가 문서(小早川什書)』·『남선사구기(南禪寺舊記)』·『조선어진실기(朝鮮御陣實記)』·『정한위략(征韓偉略)』·『징비록(懲毖錄)』·『서애집(西涯集)』·『일월록(日月錄)』·『선조실록(宣祖實錄)』】

정유란[게이죠 후역]의 경과[편집]

정유재란과 부서(部署)

게이죠 원년 9월에 강화의 논의를 파기하자 히데요시는 곧바로 다시 정벌에 나서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듬해 2월 21일에 도선군(渡鮮軍)의 부서를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1. 선진(先陣)·2진(二陣)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7명의 장수로 하고, 가토와 고니시는 격일(隔日)로 교대하여 근무한다.

 1. 3진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8명의 장수.

 1. 4진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重) 【나오시게의 아들】

 1. 5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 6진 쵸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7명의 장수.

 1. 7진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이코마카 주마사(生駒一正),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 8진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 부산성(釜山城), 【수장(守將)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 가덕성(加德城), 【수장 다카하시 나오츠구(高橋直次)】 죽도성(竹島城), 【수장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서생포성(西生浦城) 【수장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전체 군대 약 14만 1500명

 1. 토도 타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가 수군(水軍)을 감독하고, 필요에 따라 사국(四國)의 병력이 그를 지원할 것.

 1. 우선 전라도를 평정하고 그로부터 충청, 경기 등으로 나아갈 것.

 1. 만약 명나라가 대군을 일으켜 조선의 수도에 접근하는 데 5, 6일 정도의 거리에 도착하면, 신속히 그것을 보고할 것. 【『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정벌기(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

육군(陸軍)의 경과

다시 조선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가토 기요마사는 다른 군(軍)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갔으며, 【게이죠 2년 정월 14일, 조선 선조 30년 정월 15일】 죽도(竹島) 【경상남도】 의 옛 보루를 복구하고 부산의 수병(戌兵)을 합쳐 기장(機張)에 진을 쳤다. 이어서 양산(梁山)을 함락시키고 서생포(西生浦) 부근에 방(榜)을 걸어 백성들에게 타일러 쓸데없이 소요를 일으키지 말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별도로 부산 밖 바다에서 진격하여 두모포(豆毛浦)로 들어갔으며, 【정월 15일】 2월 초하루에 부산에 있는 원래의 진영을 수리하여 오랫 동안 머물 계획을 세웠지만, 3월 중순에 이르러 제3군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잇따라 바다를 건너오자, 다섯 갈래로 나누어 조선에 들어가 동래, 기장, 울산 등을 점거하고 웅천, 김해, 진주, 사천, 곤양 등의 사이를 왕래하였다. 그렇지만 결코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폭행을 하지는 않았으며 힘써 인민의 안심을 도모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조선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상서(兵部尙書) 형개(邢玠)를 총독(總督)으로 삼고, 첨도어사(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삼고, 전 도독동지(都督同知) 마귀(麻貴)를 총병관(總兵官)으로 삼아, 군대를 출발시켜 조선을 구하러 갔다. 이리하여 양호와 마귀는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는데 양호는 평양에 주둔하였고 마귀는 경성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역할을 분담하였다.

7월에 일본군은 지난번 전쟁[임진란]을 거울삼아 육군과 힘을 합쳐, 우선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고 한산도(閑山島)를 점령하였다. 이에 앞서 히데요시는 조선에 있는 장수들에게 편지를 보내 공격을 재촉하였으므로 이때 일본군은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한 부대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시마즈 요시히로,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5만여 명은 경상도의 남쪽 해안을 따라 운봉(雲峰) 【전라북도】 을 접수하고 남원(南原)으로 향하였다. 다른 한 부대는 모리 히데모토를 대장으로 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여 구로다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등 약 5만 명은 경주(慶州)를 출발하여 대구를 거쳐 전주(全州)로 향하였다. 나머지 한 부대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장수 야마구치 마사히로(山口正弘) 등 8천여 명을 이끌고 밀양과 현풍을 거쳐 충청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8월에 우키타 씨의 군대가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하였다. 【12일】 남원에는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 요동(遼東)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 등과 지키고 있었지만, 마침내 15일 【조선력으로는 16일】에 성은 함락되어 이복남 등은 전사하고 양원은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명나라의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은 전주를 지키고 있었는데, 남원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우키타 씨의 군대는 곧바로 전주를 함락시켰고, 【19일, 조선 20일】 모리 히데모토의 군대도 역시 황석산성(黃石山城) 【경상남도】 을 함락시키고, 안음(安陰) 【경상남도, 지금의 안의(安義)】 을 접수하고 와서 만났다. 이리하여 일본군은 진격하여 충청도를 평정하고, 히데모토는 전주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전의(全義) 【충청남도】 에 도착하였으며, 【9월 7일】 다른 부대인 가토 기요마사는 진천(鎭川) 【충청북도】 에, 구로다 나가마사는 직산(稷山) 【충청남도】 에 도달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군대는 후퇴하여 왕성(王城)을 지켰으며 한강의 험준함에 의거하였는데, 경리 양호는 평양(平壤)에서 와서 부총병 해생(解生)으로 하여금 직산을 지키게 하고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소사평(素沙坪)에서 싸웠다. 이때 히데요시는 군대를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또한 날씨도 점차 추워졌으므로, 10월에 일본군은 후퇴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집결하였다. 기요마사는 울산(蔚山)에, 나가마사는 양산(梁山)에, 유키나가는 순천(順川)에,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는데, 시작과 끝이 7, 8십 리가 되는, 모두 16개의 진영이 해안을 따라 꾸려졌다.

12월에 명나라 장수 양호와 마귀는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였고,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권율 등은 이들을 따라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서 포위하였다. 당시 기요마사는 서생포에 있었는데, 변고를 듣고 일어나 쾌속정을 타고 밤에 성 안으로 들어갔다. 도산(島山)은 포위된 지 12일이 되자, 【게이죠(慶長) 2년 12월 22일부터 이듬해 정월 4일까지】 양식이 부족하여 매우 곤란하였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모리 히데모토 이하 일본군의 여러 장수들은 도산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명나라 군대는 패하였으며 마침내 포위를 풀고 경주로 도주하였다.

7월 【게이죠 3년, 조선 선조 31년】 에, 양호는 파직되고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경리(經理)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명나라 군대는 삼협(三協)의 병력을 네 방면으로 나누어, 마귀(麻貴)는 동로(東路)를 담당하고, 동일원(董一元)은 중로(中路)를 담당하며, 유정(劉綎)은 양로(兩路)를 담당하고, 진린(陳璘)은 수로(水路)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8월에 유정은 순천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먼저 거짓으로 유키나가와 화의를 약속하고, 그를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9월 19일에 순천을 포위하고, 진린은 해상(海上)으로부터 와서 힘을 합쳤지만 결국 당해 내지 못하였다. 23일에 마귀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울산을 공격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중로(中路)의 장수 동일원은 유격 모국기(茅國器)와 사천을 공격하고, 【9월 7일】 이어서 망진(望津), 영춘(永春), 곤양(昆陽) 등의 진지를 함락시켰지만, 사천읍 이외의 새로운 진지에 이르러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크게 패하여, 【10월 1일】 진주로 돌아갔다. 【『기요마사 고려진각서(淸正高麗陣覺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아사노가 문서(淺野家文書)』·『구로다가기(黑田家記)』·『조선물어(朝鮮物語)』·『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사쓰마번구기(薩藩舊記)』】

해군(海軍)의 경과

게이죠(慶長) 2년 2월 21일에 히데요시는 도선군(渡鮮軍)의 역할 분담을 정하자, 토도 타카토라(藤堂高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에게 명하여 해군을 통솔하게 하고, 사국(四國)의 병력으로 하여금 형편대로 그를 돕도록 하였다. 4월에 야스하루, 요시아키 등이 조선에 진입하자 적의 해군은 그들을 중도에 요격하려 하였지만, 때마침 태풍이 불고 파도가 심해, 조선의 수군은 거제로 물러나자, 야스하루 등은 다행히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통제사(統制使) 이순신은 물러나고 전라수사(全羅水使) 원균(元均)이 그를 대신하였다. 【2월】 원균은 한산도에 도착하여 이순신의 약속을 모두 바꾸고 형벌이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떠나고 군대의 사정은 동요하였다. 7월 15일 원균이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여 절영도(絶影島) 부근에 도달한 때는 이미 해질 무렵이었는데 군사들은 한산도를 출발하면서부터 하루 종일 노를 저어, 모두 피로에 지쳐 일본 군함이 바다에 출몰하는 것을 보면서도 운항할 수 없었다. 또 풍랑이 갑자기 일어 전함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원균은 남은 함선들을 수습하여 가덕도(加德島)로 후퇴하였다. 그날 밤, 일본 해군의 장수인 토도 타카토라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카토 요시아키 등은 진격하여 조선 함선의 정박지를 습격하였다. 조선군은 16일 새벽에 또 일본 군대의 습격을 받아 패배하자,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는 물에 빠져 죽고 원균도 역시 죽임을 당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다시 등용되어 통제사(統制使)가 되었고, 9월에 일본 해군과 진도(珍島) 【전라남도】 의 벽파정(碧波亭)에서 싸워 일본 해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전함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듬해 6월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은 남하하여 해군을 통솔하였는데, 8월에 이순신은 일본 해군과 고금도(古今島) 【전라남도의 남해에 있는 완도(莞島)의 동쪽에 있다.】 부근에서 싸워 역시 그들을 격파하고, 적군의 머리 백여 개를 획득하였지만, 진린은 그것의 대부분을 빼앗아 자기의 공으로 돌렸다.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와키사카가기(脇阪家記)』·『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정한위략(征韓偉略)』·『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선조실록(宣祖實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징비록(懲毖錄)』·『조야첨재(朝野僉載)』】

히데요시(秀吉)의 사망과 일본군의 철수

게이죠(慶長) 3년 【조선 선조 31년】 8월 18일에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다. 유명(遺命)에 따라 죽음을 비밀로 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는 유명을 받들어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치쿠젠(筑前)의 하카다(博多)에 보내 군대를 귀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고, 토쿠나가 나가마사(德永壽昌), 미야기 토요모리(宮木豊盛) 두 사람을 조선에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전하게 하였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는 사천에서 대패한 후에는 일본군을 크게 두려워하여, 10월 13일에 모국기(茅國器)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허락을 받아 사신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고, 그의 동생인 모국과(茅國科)를 보내 인질로 삼게 하였다. 유정(劉綎)도 역시 유키나가(行長)와 화의를 논의하였으며, 유천작(劉天爵)을 인질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서로 약속하고 11월 10일을 군대 철수의 시한으로 삼았는데, 15일 【11월】 에 요시히로는 사천을 떠났으며, 17일에 기요마사는 울산을 떠났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아사노 요시나가(淺野幸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 등 여러 장수들도 역시 같은 날 군영을 철수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히데요시가 이미 세상을 떠나 일본군이 곧 조선을 떠나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총병(總兵) 등자룡(鄧子龍) 및 조선 통제사 이순신을 보내 수군 천여 명을 통솔하여 그들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요시히로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으므로, 17일에 요시히로는 배를 순천 연안에 정박시켰는데, 18일 새벽에 적의 선박과 노량(露梁) 【경상남도】 에서 싸워 많은 병사들을 잃고, 점차 군대를 철수하여 거제(巨濟)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명나라 총병 등자룡과 함께 여러 차례 일본의 해군을 괴롭힌 조선 통제사 이순신도 역시 유탄에 맞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요시히로는 12월 10일에 하카다에 나타났으며 유키나가도 역시 돌아왔는데, 요시히로는 예전에 사천 대첩에서 명나라 사람들을 항복시켰고, 이 전투에서도 역시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 수군과 격렬히 싸워, 일본 군대가 온전히 돌아오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이에야스는 토시이에(利家)와 상의하여 그 공을 높이 평가하고 보도(寶刀) 및 봉읍(封邑) 4만 석(石)을 요시히로에게 추가로 하사하였다. 【『히데요시보(秀吉譜)』·『기요마사기(淸正記)』·『나베시마 나오시게보(鍋島直茂譜)』·『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사쯔마번구기(薩藩舊記)』·『정한위략(征韓偉略)』·『명사(明史)』·『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징비록(懲毖錄)』·『이충무공전서부록(李忠武公全書附錄)』】

명나라 군대의 철수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곧바로 군대를 철수하였으므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리고 명나라 군대도 역시 곧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선조 32년 【일본 게이죠(慶長) 4년, 명나라 만력(萬曆) 27년】 정월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 진린(陳璘), 마귀(麻貴), 동일원(董一元) 등은 모두 군영을 철거하고 경성을 향하였으며, 형개(邢玠)는 네 노선[路]의 병력을 통솔하여 서쪽으로 돌아갔다. 만세덕(萬世德), 이승훈(李承勳), 【都督同知】 두잠(杜潛) 【산동안찰부사(山東按擦副使)】 등은 아직 경성에 남아 뒷수습을 잘 하려고 하였지만 이듬해 9월에 역시 돌아갔다. 이리하여 명나라 군대는 모두 조선에서 철수를 완료하였다.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조야첨재(朝野僉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출병 목적[편집]

히데요시가 출병한 목적은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있었지, 조선을 정벌하는 데 있지 않았으며, 조선이 우리 군대를 저지함으로써 우리에게 항거하는 경우에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으므로, 조선의 병사들은 우리 군대에 죽임을 당하거나 사로잡히는 수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인민을 살육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행위는 본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맨 처음 출병할 때 장수들에게 명하여 확실히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였다. 다만 도기공(陶器工) 같은 경우는 일본으로 데려와 그 업(業)에 종사하게 한 결과, 일본 도기업의 발달에 기여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조선으로 건너간 장수들의 대부분은 히데요시의 뜻을 명심하여 무익한 살육을 금지하고 사졸(士卒)들의 난폭함을 경계하였다. 지금 그중 눈에 띄는 예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분로쿠(文祿) 원년 정월에 일본군이 바다를 건널 때 히데요시는 3항목의 금지령을 내려 이를 각 군(軍)에 배포하였다.

 ① 군의 기강을 난폭하게 어지럽히는 일.

 ② 방화하는 일.

 ③ 인민에 대해 불법을 저지르는 일.

(2) 같은 해 4월 20일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대구를 함락시켰는데, 시내에 인민들이 없는 것을 보고, 곧바로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팻말을 세우고, 인민을 소집하여 힘껏 그들의 사정을 살피고 위로하였다.

(3) 같은 해 4월 26일에 히데요시는 다시 선봉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려 힘껏 인민을 위로하고 확실히 사병들의 난폭한 행위를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4) 같은 해 5월 5일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경성에 입성하자 서로 이어서 성 밖으로 진을 옮기고, 사방의 성문에 방(榜)을 세워 인민을 안도(安堵)하게 하였다.

(5) 같은 해 5월 16일에 경성을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나고야(名護屋)에 도달하자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① 국왕의 안도를 꾀하고, ② 국내의 정치 방식을 신중히 하고, ③ 도피한 주민들의 귀환을 꾀하도록 하였다.

(6) 같은 해 6월 3일에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훈시하여, 인민을 안도시키고 조세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7)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황해도를 평정하였는데, 6월 5일에 방을 세워, 일본은 천하와 함께 태평(太平)을 향유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조세를 가볍게 하여 인민의 안도를 꾀할 것이라는 취지를 널리 알렸다. 당시 화산(花山)에 체류하고 있던 이정암(李廷馣)은 그 일기에 쓰기를, “일본군은 한 사람도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집도 역시 불태우지 않았으며, 사람을 보면 농업에 힘쓸 것을 권고하였다.” 【『사류재집(四留齋集)』】 라고 하였다.

(8)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西生浦)에 있었는데 게이죠(慶長) 2년 정월 20일에 편지를 보내 여러 방면에 공문을 게시하여 경상좌도(慶尙左道) 인민의 안도를 꾀하였다.

(9) 같은 해 9월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경상과 전라의 각 도에 방문(榜文)을 게시하여, 도피한 사민(士民)은 신속히 돌아와 농사에 힘쓰라고 공시하였다.

(10) 같은 해 11월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공원(恭原) 【칠원(漆原)인 듯】 , 함안(咸安), 창원(昌原), 의령(宜寧)의 네 군(郡) 안에 방문을 게시하여, ① 군내(郡內)의 주민들은 안심하고 살면서 오로지 농사에 힘쓰게 할 것, ② 만약 그 처자들이 일본군에게 잡혀간 사람이 있으면, 신고에 응하여 곧바로 석방하여 돌려보낼 것, ③ 설령 관인(官人)이라 할지라도 일본에 따르는 사람은 각 향읍(鄕邑)으로 돌려보내 안도하게 할 것 등의 사항들을 공시하였다.

고야산의 조혼비[편집]

또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조선에서 돌아오자, 게이죠 4년 6월에 그의 아들 타다츠네(忠恒)와 적군과 아군의 전몰자들을 위해 코야산(高野山)에 비(碑)를 세우고 진실로 추천하여 장려할 만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려 하였다. 그 비석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명나라 군대의 약탈[편집]

이것은 일본군이 조선 인민에 대해 안무한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경우에 일본군은 난폭하게 어지럽히는 행위는 적었고, 거꾸로 구원을 하러 온 명나라 군대가 탈취와 약탈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여러 저서들에 적지 않다. 『선조실록(宣祖實錄)』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의 기사에서도 역시 그 대략적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조도사(調度使) 홍세공(洪世恭)은 황급히 아뢰기를,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은 군대 1319명, 말 1529필을 거느리고 어제 잇따라 도착하였습니다. 기율이 엄격하지 않습니다. 또 군마(軍馬)가 민가에 난입하게 하였습니다. 인민들은 놀라 흩어지고 성 안은 텅텅 비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문서(加藤淸正家書)』·『나베시마 나오시게보고보(鍋島直茂譜考補)』·『고니시 일행기(小西一行記)』·『서정일기(西征日記)』·『한진문서(韓陣文書)』·『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시마즈가 조선진조령비(島津家朝鮮陣弔靈碑)』·『선조실록(宣祖實錄)』·『사류재집(四留齋集)』】

이순신[편집]

이순신의 자(字)는 여해(汝諧)로, 인조(仁祖) 원년 【우리나라[일본] 텐분(天文) 14년, 명나라 가정(嘉靖) 24년】 에 한성(漢城)의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의 본관은 경기도 덕수(德水)로서, 집안 대대로 유학(儒學)으로 출세하였다. 그도 역시 어릴 때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의 두 형들을 따라 교육을 받아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렇지만 서책(書冊)에 묻혀 삶을 보내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았다. 22세가 되어 처음으로 무예를 배웠다. 32세 때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蕫仇非堡權管)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가 무관으로서 세상에 나온 시작이다. 그 자리에 있은 지 3년이 되어 수도로 돌아가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가 되었다. 여러 차례 지방에 나가 진(鎭)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는데, 43세 때 조산(造山)의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되었고, 이듬해에 녹둔도(鹿屯島) 【함경북도 조산만(造山灣)】 의 둔전관(屯田官)을 겸하였다. 이 섬은 북쪽 변방의 외딴 지역에 있어 여러 차례 만족(蠻族)의 침입을 받아 수비가 어려웠다.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적을 잘 정복하고, 그들의 포로가 된 민간 60여 호(戶)를 탈환하여 원근(遠近)에 용맹을 떨쳤다. 재직한 지 1년여 만에 무고를 당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얼마 안 되어 다시 등용되어 무관(武官) 겸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후에 전라도 정읍 현감(縣監)을 거쳐 진도(珍島) 【전라남도】 군수가 되었다. 이는 그가 48세 때이다. 이듬해 일본군은 대거 원정을 벌였는데, 바다와 육지의 방어가 무너져 변방에서 매일 위급함을 알려오자, 이순신은 발탁되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거북선[편집]

급히 전비(戰備)를 정비하고 철쇄(鐵鎖)를 명양도(鳴洋島) 【전라남도 진도와 우수영(右水營) 사이에 있는 해협】 에 가로질러 일본 전함의 통과를 막았으며, 또한 거북선이라는 일종의 전함을 만들어 일본군을 크게 괴롭혔다.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배의 구조는 선상(船上)을 큰 판으로 덮어 그 모양이 마치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고, 판 위에는 十자형의 좁은 통로가 있어 통행할 수 있으며, 나머지 부분에는 모두 끝이 뾰족한 칼을 꽂아 놓아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앞대가리와 후미(後尾) 및 양쪽 가장자리에는 총구(銃口)를 뚫어 놓아, 병사들이 배 안에 숨어서 일제히 사격을 하는 데 편리하였다. 조종이 자유자재이고 속도가 빨라 날아가는 듯하였다고 한다. 분로쿠(文祿) 원년 4월 13일 【조선력으로 14일】 에 육군의 장졸들이 부산에 상륙함에 따라, 일본 해군은 함선을 부산 웅천(熊川)의 해구(海口)에 배열해 놓고 적함에 대비하였는데, 경상도 우수군절도사(右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은 여러 성들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 노량(露梁)으로 후퇴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곧 전함 20여 척을 이끌고 와서, 5월 7일에 일본 함대 수십 척을 거제도 【경상남도】 동쪽 해안의 옥포(玉浦)에서 요격하여 그들의 함선 20여 척을 불태웠다. 이때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하여 사기가 완전히 저하되어 있었는데, 승전보가 처음으로 도착하자 상하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서 이순신은 같은 달 29일에 일본 함대를 노량 【경상남도 하동군】 에서 발견하여 크게 싸웠다. 수십 척이 합쳐져 싸웠는데 갑자기 날아온 탄환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였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는 데 크게 힘써,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당포(唐浦), 【경상남도 통영(統營)의 서쪽】 당항포(唐項浦) 등에서 일본 해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경성에 주둔하고 있던 쿠키 요시타카(九鬼嘉隆), 카토 요시아키(加藤嘉明),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등은 조선 해군이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남해(南海)로 돌아왔으며, 7월 7일 【조선력으로는 8일】 에 야스하루는 이순신과 견내량(見乃梁) 【경상남도 고성군】 에서 싸웠지만 이기지 못하고, 요시타카·요시아키는 전함 39척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와서 구하였으며, 9일에 이순신과 안골포(安骨浦)에서 싸웠는데 역시 패하여 물러났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근거지를 한산도(閑山島) 【경상남도 통영군】 에 두고 근해를 순찰하며 경계하였으며 또한 한 부대를 장문(長門)에 파견하여 일본 해군을 견제할 것을 꾀하였다. 공훈에 따라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원균은 이순신의 명성이 나날이 더해가고 또한 직위도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보고 못마땅히 여겨 몰래 사람을 보내 모함하였으므로, 이순신은 강등되고 원균이 대신 통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정유년(丁酉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원균은 일본 해군과 싸워 대패하고, 마침내 서천도(黍川島) 【경상남도 거제도에 딸린 섬】 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논의하여 다시 이순신을 기용하기로 하였다. 게이죠 2년 9월 16일에 이순신은 일본 해군 3백여 척을 진도 【전라남도】 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에서 요격하여 그 전함 30여 척을 파괴하였다. 이듬해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세상을 떠났는데 유명(遺命)으로 조선에 있는 장병들을 소환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은 이 사실을 정탐하여 알아내고 이순신 및 부장(部將) 등자룡(鄧子龍)으로 하여금 일본군의 귀로(歸路)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노량 【경상남도】 에서 일본 해군과 전투를 벌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이순신은 자신이 북을 치며 부하들을 지휘하였지만 갑자기 날아온 총알이 가슴을 관통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때가 바로 선조 31년 11월 19일 【게이죠 3년, 만력(萬曆) 26년】 이다. 이순신은 천성이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또한 평소에 해저(海底)의 깊이와 조류(潮流)의 속도 등을 숙지하여 일본 함대과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는 많은 공을 세울 수 없었다. 후에 영의정을 추증(追贈)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봉하였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총[편집]

임진란(壬辰亂)에서 일본 병사들이 전투에 숙달되었고 또한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가 예리하였다는 것은 조선에서도 인정하는데, 유성룡(柳成龍)은 그가 지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전투에 익숙하고 기계는 정교하고 예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중 조선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조총(鳥銃)으로, 유성룡은 또한 기록하기를 “옛날에는 조총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으며, 그것이 멀리 날아가는 힘과 명중하는 교묘함은 화살의 다섯 배에 달한다. 우리가 만약 평평하고 넓은 들판에서 서로 마주쳐 양 진영이 맞서는 방법으로 교전을 하면, 그들을 당해내기가 매우 어렵다. 생각건대 화살의 능력은 백 보(步)를 넘지 못하지만 조총은 능히 수백 보에 미치며, 날아오는 것도 바람이나 번개와 같아 그것을 당해낼 수 없음이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당시 명나라 군중(軍中)에도 조총이 없었음은 물론인데, 이여송은 평양 전투에서 대포(大砲)를 과시하면서, “왜(倭)는 단지 조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포를 사용한다. 모두 5, 6리(里)를 날아간다. 적들이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포와 조총은 각기 그 장점이 다르므로 명나라 군대에서도 그 후 조선에 의뢰하여 조총을 구하였다는 것은, 조선 국왕이 이순신에게 내린 다음의 유서(諭書)에서도 볼 수 있다.

“서울 장안에 남아 있는 조총통(鳥銃筒)은 단지 그 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장수도 역시 그것을 구한다. 경(卿)이 획득하는 조총 중 정교하고 좋은 것을 골라 그것을 올려 보내라.”

조총이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오다[편집]

조총이 처음 조선에 건너온 것은 선조 23년 【일본 텐쇼(天正) 18년】 3월로, 쓰시마의 타이슈(太守) 소 요시토시(宗義智)가 증여한 것이다. 임진란 초기에 조선의 병사들이 그 사용법을 몰랐다는 것은 앞에 게재한 유성룡의 기록에서 대략 살펴보았지만, 후에는 조선에서도 그 사용에 대한 훈련을 병사들에게 실시하였는데 이것도 또한 왕이 이순신에게 내린 다음의 유서(諭書)에서 알 수 있다.

“조총은 군기시(軍器寺)와 도감(都監)에 있는 것들을 합쳐 260여 자루인데 파괴된 것을 수리하여 다음 훈련 때 군대에 나누어 준다. 그런데 군사(軍士)의 응모자가 나날이 증가하여 골고루 지급하기가 어렵다. 듣자 하니 본(本) 도(道)는 작년에 수군의 전투에서 적의 총을 탈취한 수가 대단히 많아 왕왕 용머리[龍頭] 나무거치대[木架]가 파괴된 것을 쓸데없이 버리고 모아두지 않는다고 한다. 대단히 애석한 일이로다. 경은 그것을 수습하여 올려 보내도록 하라.”

이 전쟁 동안 조선군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 무기를 이용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후에 효종(孝宗) 5년 【선조의 임진년으로부터 62년이 지남】 에 청나라가 러시아와 사이가 멀어지자, 조선 병사들이 조총을 잘 쏜다는 말을 듣고, 그 병사들 백 명을 소집하여 흑룡강(黑龍江) 방면으로 오게 한 적이 있다. 따라서 조선 군대가 점차 훈련을 거쳐 그 기술을 익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징비록(懲毖錄)』·『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통문관지(通文館志)』 등.】

이여송[편집]

이여송(李如松)은 임진란 때 명나라 군대의 장수로서 조선을 구원하여 알려졌다. 자(字)는 자무(子茂)이고, 요동(遼東) 철령위(鐵嶺衛) 사람이며,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장자(長子)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성량의 조상은 조선 사람으로, 이산군(理山郡) 【평안북도 초산(楚山)】 사람이었지만, 5대조 때부터 중국에 들어가 복속되어, 대대로 철령위의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으며, 마침내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성량은 융경(隆慶) 【명나라 목종(穆宗)의 연호】 이래 각지를 다니며 전투를 벌여 공을 세웠으며, 당시의 명장(名將)이었던 척계광(戚繼光)과 그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고 한다. 이여송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병기(兵機)를 능숙하게 외울 수 있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1년에 승진하여 산서총병관(山西總兵管)이 되었고 20년에 제독섬서토역군무총병관(提督陝西討逆軍務總兵管)이 되어 영하(寧夏)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무신(武臣)이 제독이 된 것은 실로 이여송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때마침 조선은 사신을 급히 보내 요청하기를, “일본 군대가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다. 청컨대 원병(援兵)을 보내달라.”라고 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즉시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조승훈(祖承訓) 등을 보냈지만 한 번 싸워 크게 패하고 간신히 몸을 피해 돌아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상하 모두 크게 실망하였다. 이리하여 명나라는 다시 이여송으로 하여금 요동, 계주(薊州), 보정(保定) 【내성(內省) 직속】 및 산동(山東)의 정예 병력 4만여 기병의 장수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건너가도록 하였다. 그 군대는 10만 명으로 분로쿠(文祿) 원년 【명나라 만력 20년, 조선 선조 25년】 연말에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이듬해 정월 3일 【조선력으로는 4일】 에 진격하여 숙령관(肅寧館) 【평안남도 숙천(肅川)】 에 머물렀으며, 우선 첩자를 풀어 평양에 머물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동태를 살폈다. 이에 앞서 유키나가는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를 믿고 방비를 약간 완화하였으며, 또한 수비 병력도 5천 명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정월 6일 【조선력으로는 7일】 에 이여송은 서·남·북쪽의 세 방향에서 곧장 성을 압박하였다. 유키나가는 힘을 다해 막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마침내 어둠을 틈타 얼음을 밟고 대동강을 건너 경성으로 후퇴하였다. 이여송은 곧바로 이여백(李如柏)을 파견하여 개성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경성(京城) 서쪽에 있던 우리 장병들은 모두 경성으로 귀환하여 전비(戰備)를 가다듬고 명나라 군대를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이여송은 승세를 타고 일거에 수도를 회복하려고 압박해 왔다.

벽제관 전투[편집]

1월 26일 【조선력으로는 27일】 에 타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먼저 여석령(礪石嶺)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벽제면 벽제관(碧蹄館)의 남쪽】 에서 명나라 군대와 충돌하여 승패를 주고받았다. 같은 날 오후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등 여러 장수들이 와서 구원하였으며, 타카카게는 자신이 한 부대를 이끌고 여석령 아래에 진을 쳤으며, 무네시게,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 모리 히데카네(毛利秀包) 등을 고개 위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별도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은 예비 부대로서 고개 뒤에 있었는데, 이여송은 진격하여 타카카게의 진지를 압박해 왔다. 전투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고개 위에 있던 군대가 갑자기 아래 있는 명나라 군대의 중심을 공격하였다. 예비 부대도 역시 기회를 보아 돌진하여 우리 군대는 세 방면에서 적병을 포위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여송은 허둥대다가 말에서 떨어져 타카카게의 부장(部將)인 이노우에 고로(井上五郞) 병위(兵衛)에게 자상을 입었지만, 아군의 구호를 받아 간신히 몸을 피할 수 있었으며, 명나라 군대는 마침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사상자가 모두 만여 명에 달한 이 전투를 벽제관 전투라고 이른다. 이여송은 파주(坡州) 【경기도】 로 달아나 패잔병들을 수습하였는데 사기가 저하되어 다시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의 북쪽에서 군대를 돌려 평양을 습격하려 한다.”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 때문에 이여송은 평양으로 퇴각하여 대동강을 차지하고 방어하였다. 4월 18일부터 일본군은 경성에서 철수를 개시하여 부산으로 향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이여송은 20일에 경성으로 들어왔다. 조선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은 명나라 군대를 설득하여 대대적으로 일본군을 추격하기로 하였다. 이여송은 우리 군대가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히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에 명나라 조정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 등의 말을 받아들여 병력의 철수를 감행하고 단지 유정(劉綎)만을 남겨 두어 뒷일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이여송 등은 이해 12월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으며 공을 세움에 따라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고 세록(歲祿) 백 석이 증가되었다. 만력(萬曆) 26년 4월에 토만(土蠻)이 요동(遼東)을 침범하였다. 이여송은 명을 받고 적군의 토벌에 나섰지만, 경기병(輕騎兵)들을 거느리고 적진에 깊이 들어갔다가 매복에 걸려 분전하다 사망하였다. 신종(神宗)은 매우 슬퍼하여 소보영원백(少保寧遠伯)을 추증하였으며, 또한 사당을 짓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심유경[편집]

심유경(沈惟敬)은 중국 가흥(嘉興) 【절강성(浙江省) 가흥부(嘉興府】 사람이다. 밤이나 낮이나 주막에서 지내는 무뢰한이었는데, 방랑하다가 수도인 북경(北京)으로 와서 오현(吳縣)의 기생인 진담여(陳澹如)과 결혼을 하였다. 진담여의 하인인 정사(鄭四)라는 사람은 일찍이 해구(海寇)에게 체포되어 일본을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상당히 우리나라 사정에 밝았다. 심유경은 항상 정사의 이야기를 들어 대략적으로 일본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이때 분로쿠(文祿)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조선이 패하였다는 소식이 연달아 북경에 전달되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설객(說客)을 풀어 우리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키려고 꾀하였다. 마침 어떤 사람이 심유경을 추천하였으므로 석성은 심유경을 불렀다. 심유경은 교묘하게 석성을 설득하여 조선으로 가서, 우리 장병들과 상의하여 화의(和議)를 체결하는 중임을 위임받았다. 심유경은 북경을 떠날 때 천금(千金)을 들여 망의(蟒衣), 옥대(玉帶), 화폐(貨幣) 등을 구입하여, 우리 군대에게 줄 뇌물로 삼았다. 분로쿠 원년 【명나라 만력 20년】 9월에, 심유경은 의주를 거쳐 순안(順安) 【평안남도】 에 도착하여, 먼저 평양에 웅거하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 사서(使書)를 보내고, 진귀한 보물과 화폐를 주면서 만나 줄 것을 요구하였다. 유키나가는 이를 승낙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유키나가의 진영에 와서 백방으로 화의(和議)의 이로움을 설득하였으며, 유키나가는 군대가 원정을 온 지 오래되어 점차 권태를 느낄 때가 되었으므로, 심유경의 말을 받아들여 화의 7조항 【이 조약은 비밀에 부쳐졌으므로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후에 체결된 나고야조약(名護屋條約)과 대동소이하지 않겠는가.】 을 요청하였다. 심유경은 회답하기를 “사안이 중대하여 일단 나라에 돌아가 품신하여 재가를 받겠다. 왕복하는 기간으로 50일이 필요하다. 때문에 휴전을 요구한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평양의 서북쪽 곡산원(谷山院)에 팻말을 세워 양쪽 군대의 경계로 삼고, 각자 이곳을 넘지 않기로 하였다.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사이에 명나라 조정에서의 논의는 일변하여 주전론(主戰論)이 승리를 거두고,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제독(提督) 이여송 등은 속속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왔다. 이여송은 유키나가를 평양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개성을 수복하였으며 파죽지세로 경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지만,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사기가 갑자기 꺾였다. 심유경은 이 기회에 편승하여 다시 화의를 제창하면서 교묘한 말로 명나라의 상하 관료들을 속였으며, 또한 외국 원정에 피로를 느끼고 있는 우리 장병들을 권유하며 설득하였으므로, 담판은 쉽게 진척되었다. 유키나가 등은 사자(使者)를 나고야 【히젠(肥前)에 있을 당시 히데요시가 이곳에 거처하였다.】 에 보내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였으며, 또한 명나라 사신을 접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히데요시는 그것을 허락하고 경성에 있는 일본군에게 명령을 내려 조선의 남쪽으로 후퇴하도록 하였다. 분로쿠(文祿) 2년 5월 23일에 히데요시는 명나라 사신 사용재(謝用梓), 서일관(徐一貫) 등을 불러 7개 조항의 약관(約款)을 제시하고, 명나라가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면, 곧바로 조선에서 아군을 철수하고 영구히 우호를 보장하겠다고 통고하였다. 이리하여 화의가 성립되려는 희망이 생겼으므로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일부 남아서 지키는 군대 외에는 모두 병력을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도록 하였다. 또한 예전에 가토 기요마사가 잡아온 두 왕자 및 대신들 이하를 모두 돌려보내고,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고니시 히다노카미조안(小西飛驒守如安)을 사절로 명나라에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화의는 처음부터 심유경이 양국의 중간에서 몰래 간계를 부린 것으로, 히데요시가 명나라 사절에게 교부한 강화 조건 같은 것도 자세히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단지 히데요시가 바라는 것은 작위[封]와 공물[貢]에 있을 뿐이라고 보고하였다. 그렇게 심유경이 대충 보고를 마무리함에 따라 일단 화의는 성립될 것 같았지만 만약 실정이 폭로되면 파기될 것은 명백하였다.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후 3년이 지나 명나라 사신 양방향(楊方享)과 심유경이 오자, 게이죠 원년 9월 2일에 히데요시는 그들을 오사카(大阪)로 불러 만났지만 화의는 결국 성립되지 않았다. 때문에 심유경은 양방향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거짓으로 보고하기를, 히데요시는 작위를 받고 은혜에 감사하였으며 또한 위조한 표문(表文)을 바치고, 우리나라에서 구입한 진기한 보물들을 명나라 조정에 바치면서 히데요시가 준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다시 원정군을 조선에 상륙시키자 그들의 죄상은 곧바로 폭로되었지만, 심유경은 도리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것은 일본이 조선의 무례함을 응징하는 군대로서, 명나라에 대해 아무런 다른 뜻이 있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양방향은 사태가 잘못된 것을 알고 사실을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여 심유경도 처벌을 받게 되었지만 석성(石星)의 비호로 간신히 죄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심유경은 다시 조선으로 들어가 오로지 미봉(彌縫)으로 죄를 면하려고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궁색한 나머지 도망쳐 일본군에게 투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령(宜寧)에 이르러 명나라 총독(總督) 형개(邢玠)의 부장(部將)인 양원(楊元)에게 붙잡혔으며 이어서 기시(棄市)되었다. 이때가 만력(萬曆) 25년 【우리[일본]의 게이죠 3년】 12월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집]

도쿠가와(德川) 씨는 원래 마츠다이라(松平) 씨라고 불렀다. 대대로 미카와(三河) 【아이치현(愛知縣)】 에 살았다. 그의 먼 조상은 미나모토 요시이에(源義家)의 증손인 닛타 요시스에(新田義季)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에야스는 텐분(天文) 11년 12월에 미타와국(三河國) 오카자키성(岡崎城)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이쇼다이진(太政大臣)에 추증된 마츠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로, 어릴 때 이름은 타케치요(竹千代)라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戰國)이 난립한 시대였다. 도쿠가와 씨가 거느리던 미카와의 동쪽에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今川) 씨가 있었고 서쪽에는 오와리(尾張)의 오다(織田) 씨가 있었는데, 서로 기회를 보아 공격하였으므로, 타케치요는 6세 때 고국을 떠나 오다 씨에게 인질이 되었으며, 이어서 또한 이마가와 씨에게도 인질이 되었다. 19세 때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죽자, 비로소 오카자키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아버지 히로타다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에야스가 이어서 국정을 담당하였다.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와 단절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화친을 맺어 주변 국가인 토토미(遠江) 및 스루가를 공략하여 점차 영토를 넓혀갔다. 때문에 오부나가도 역시 뒷일을 걱정하지 않고 경기(京畿) 지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부나가가 그의 부하인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에게 시해되었으며, 오부나가의 신하인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라고 불렀다.】 는 즉시 미츠히데를 토벌하여 그를 주살하자, 히데요시의 명성은 갑자기 높아졌으며 여러 장수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부나가의 아들인 노부오(信雄)는 히데요시의 명성이 자기보다 높아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히데요시도 역시 노부오를 싫어하게 되었다. 텐쇼(天正) 12년 3월에 노부오는 마침내 히데요시와 관계를 끊고 이에야스에게 의지하였다. 이에야스는 그를 도와 출병하여 코마키산(小牧山) 【오와리(尾張)】 에 진을 치고, 히데요시의 군대와 싸워 그를 격파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가 영리하고 용감하므로 그와 다투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아, 말을 겸손하게 하면서 화의를 요구하고 또한 자기의 누이를 이에야스에게 시집보냈다. 이에야스도 역시 그의 아들인 히데야스(秀康)를 보내 히데요시의 양자로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비로소 오사카에 가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이때가 텐쇼 14년 10월이다. 이때부터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크게 중시하게 되었다.

텐쇼 18년 4월에 히데요시는 고다모토(小田元) 【사가미(相模)】 의 호조(北條) 씨를 정벌하려고 출정하자 이에야스는 여기에 종군하였는데, 호조 씨가 패하여 멸망하자, 히데요시는 그들의 옛 영토인 이즈(伊豆), 사가미, 무사시(武藏), 우에노(上野)에다 가즈사(上總), 시모사(下總)를 더하여 약 210만 석의 땅을 이에야스에게 주었다. 이에 이에야스는 오카자키를 떠나 무사시의 에도성(江戶城), 즉 지금의 도쿄(東京)에서 살았다. 이때가 텐쇼 18년 8월 초하루이다. 이로부터 후에 이에야스는 오로지 영토의 경영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분로쿠(文祿) 원년에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원정하기 위해 군대를 조선으로 출발시켰으며, 본영(本營)을 히젠(肥前)의 나고야(名護屋)에 두었다. 이에야스는 또한 히데요시를 가까이에서 섬기면서 항상 중요한 업무를 받들었다. 그러던 중 게이죠(慶長) 3년 8월에 히데요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히데요시는 병이 악화되자 특별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의 두 사람에게 뒷일을 부탁하였으므로, 이에야스는 유명(遺命)에 따라 후시미(伏見)에 있으면서 정치 전반을 살폈고, 토시이에는 오사카에 있으면서 히데요시의 첫째 아들인 히데요리(秀賴)를 보좌하였다. 당시 천하의 영웅호걸들은 갑자기 우두머리를 잃고 거취를 정하지 못하고 의구심을 품었지만, 이에야스의 명망이 홀로 강하여 천하의 패권은 저절로 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도요토미(豐臣) 씨의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은 도요토미 씨 때문에 이에야스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당(黨)을 결성하여 그를 제거할 계책을 세웠는데, 먼저 아이즈(會津)의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로 하여금 군대를 일으키게 하고, 이에야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동쪽 지방으로 내려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동서에서 서로 호응하여 그를 공격하고 격문을 뿌려 활발하게 장사(將士)들을 모았다. 이리하여 천하의 형세는 마치 양분되는 것처럼 보였다. 게이죠 5년 9월 15일에 동서의 양쪽 군대는 미노국(美濃國)의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크게 싸웠지만, 이에야스의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 이시다 등의 군대는 패하여 흩어졌으므로, 전투 후에 이에야스는 상벌을 크게 내려 여러 장수들의 봉지(封地)를 변경한 바가 있다. 이리하여 여러 장수들은 이에야스에게 복종하여 모두 그의 지휘에 따랐다. 게이죠 8년 2월에 고요제이(後陽成) 천황은 이에야스를 불러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하고 우다이진(右大臣)으로 승진시켰다. 도쿠가와(德川) 바쿠후(幕府)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실로 이에야스가 62세 때이다. 【조선 선조 36년, 명나라 만력 31년】

게이죠 10년 4월에 이에야스는 쇼군(將軍)직을 그의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주고 슨푸(駿府) 【스루하(駿河)】 에 은거한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대사를 결정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이에야스를 오고쇼(大御所)라고 불렀다. 이때 히데요리(秀賴)는 오사카성에서 통치를 하였는데, 셋츠(攝津), 카와우치(河內), 이즈미(和泉)의 땅 65만 석을 차지하는 데 불과하였지만, 타이코(太閤) 【히데요시(秀吉)】 에게 은혜를 입은 여러 장수들 중 마음을 의지해 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히데요리의 생모인 요도기미(淀君)는 몰래 타이코의 옛 위업을 회복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도요토미 씨의 부흥은 곧 도쿠가와 씨의 실권(失權)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에야스는 스스로 안심이 안 되었다. 그는 오사카 지방의 재력을 고갈시키기 위해 활발하게 토목사업을 일으키게 하였다. 때마침 히데요리가 재건하는 교토(京都) 동산(東山)의 호코지(方廣寺)의 종명(鐘銘)에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에야스는 이것이 자기를 저주하는 것이라고 하여 엄중하게 따졌으며 마침내 쌍방의 화의는 깨졌다. 게이죠 19년 10월에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와 함께 제후들을 이끌고 오사카성을 포위하자 오사카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성을 지키던 사람들은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이래 패잔병들이 약 9만 명을 헤아렸지만, 제후들 중에는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사카 지방은 격파되어 화의를 강구하였다. 이것을 오사카후유진(大阪冬陣)이라고 한다. 그런데 강화(講和)의 조건 가운데 오사카성(大阪城)의 해자(垓字)를 매립하는 사항으로 의견 차이가 생겼으며, 히데요리는 또한 낭사(浪士)들을 모집하여 다시 일어날 것을 계획하였다. 모집한 병사들은 모두 15만이라고 전한다. 겐나(元和) 원년 4월에 이에야스 부자(父子)는 다시 대군의 장수로서 오사카로 향하였다. 서군(西軍)의 장병들은 방어전에 매우 힘썼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5월 8일에 성은 마침내 함락되고 히데요리 모자(母子)는 자살하여 도요토미 씨는 망하였다. 이것을 이전의 전투에 대하여 오사카나츠진(大阪夏陣)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이에야스는 명실공히 국내를 통일하였으므로, 오닌(應仁)의 난 이래 무릇 150년간 전란이 계속되어 인민들은 편안히 생활할 수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태평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때를 일컬어 겐나엔부(元和偃武)라고 부른다. 이듬해 겐나 2년 3월에 이에야스는 다이쇼다이진(太政大臣)으로 승진하였으며 4월 17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75세 때이다. 유명(遺命)에 따라 스루하(駿河)의 구노산(久能山)에 매장되었다. 이듬해 3년 2월에 토쇼다이곤겐(東照大權現)이라는 칙호(勅號)를 하사받았으며, 3월에 쇼이치이(正一位)로 추증되었다. 이해에 시모노(下野)의 닛코산(日光山)으로 이장하고 사당을 세웠는데 유명한 닛코뵤(日光廟)가 바로 그것이다.

조선과의 국교 회복의 시말[편집]

게이죠(慶長) 3년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세상을 떠나고 첫째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그 뒤를 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등은 히데요시의 유명에 따라 조선에 있는 병력을 소환하였다. 당시 히데요리는 나이가 겨우 6세였으므로 아직 제후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사이에 이에야스의 위세가 점차 여러 제후들을 압도하여 천하의 실권은 자연히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정책을 달리하여 오로지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꾀하였다. 분명히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한 까닭은 전적으로 명나라를 정벌하는 길을 빌리기 위한 것이었다. 불행히도 조선과 싸움을 하게 된 것은 그 본래의 뜻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다. 또 고작 좁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예로부터 관계가 깊었던 조선과 국교가 단절되는 것은 국가를 위한 책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는 게이죠 4년부터 6년까지 3년간 쓰시마 도주(島主) 소 요시토시(宗義智)로 하여금 네 번 조선에 사신을 보내, “히데요시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우리 국정(國政)은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양국의 수교를 원한다.”라는 뜻을 알리게 하였다. 처음에 조선 정부는 이에야스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쉽게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또 종주국인 명나라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망설이고 결정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우리나라의 실정을 알게 되자 게이죠 9년 【선조 37년 갑진년】 에 손문혹(孫文或)을 정사(正使)로 삼고 승려 유정(惟政) 【송운대사(松雲大師)】 을 쓰시마에 함께 보내서 먼저 임진난 때의 포로들을 돌려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의 국정을 탐색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요시토시는 곧 사자를 급히 보내 그 취지를 에도(江戶)에 보고하였다. 따라서 이에야스는 요시토시에게 명하여 조선의 사신이 동쪽 길을 통해 교토(京都)로 오도록 하였다. 이듬해 10년 2월 11일에 이에야스는 사신 일행을 후시미(伏見)로 안내하여 그의 아들 히데타다(秀忠)가 천하의 제후들을 수행하여 에도에서 교토로 올라가는 행장(行裝)을 실제로 보도록 하였다. 이것은 지금 제후들이 모두 도요토미 씨를 떠나 도쿠가와 씨에게 신하가 되어 섬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시간이 흘러 3월 5일에, 이에야스는 혼다 마사노부(本多正信) 및 승려 죠타이(承兌)를 접대 역으로 삼아, 후시미성에서 사신 일행을 만나면서 조선의 토산품을 받았다. 이어서 이에야스는 사신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포로 3천 명을 데리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사신 일행은 귀국하여 왜(倭)의 상세한 사정을 보고하자, 조선의 상하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나라의 평화로운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이죠 11년 【선조 39년 병오년】 7월에 조선은 쓰시마에 서찰을 보내 이르기를, “① 우선 이에야스가 국서(國書)를 조선에 보낼 것. ② 임진란 때 선왕(先王)의 능묘를 발굴한 자를 체포하여 보내는 두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면 전쟁 전과 같이 화친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국서를 보내는 것은 곧 우리나라가 화친을 요청한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에야스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반대로 당시의 쓰시마의 상황을 보면 그 땅은 척박하여 섬에서 생산되는 물산(物産)으로 섬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하였다. 그 섬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조선에 왕래하면서 교역을 하여 생계를 꾸렸는데 분로쿠(文祿) 전쟁과 게이죠(慶長) 전쟁 이후 교역이 갑자기 중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무역의 이익을 잃어 상하 모두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리하여 쓰시마는 하루라도 일찍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여 그들과 통상무역을 다시 일으킬 것을 열망한 나머지, 그의 가노(家老)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등은 마침내 섬 내의 죄인을 능묘를 파헤친 자라고 칭하여 조선으로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조선의 왕인 선조는 중신(重臣)들을 불러 화친에 대해 가부를 논의하였다.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은 화친에 반대하였지만, 왕은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만약 일본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혹시 후에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따라, 선왕의 능묘를 발굴한 죄인 두 명을 거리에서 참수하였으며, 자세한 내용을 명나라 황제에게 알리고 화의를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차 사절[편집]

게이죠 12년 【선조 40년 정미년】 말에 이르러 조선은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이하 약 270명을 수교를 위해 파견하였다. 일행은 이듬해인 13년 정월에 관례에 따라 먼저 쓰시마에 와서 의식(儀式)에 관해 협의를 마친 후, 소(宗) 씨의 안내에 따라 오사카(大阪), 교토(京都)를 거쳐 에도(江戶)에 도착하였다. 당시 이에야스는 이미 쇼군(將軍)직을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슨푸(駿府)에 물러나 은거하고 있었으므로, 여우길 등은 히데타다를 알현하고 국서(國書)와 특산물을 바쳤다. 조선의 사신은 알현의 의식을 마치고 히데타다의 답서(答書)를 받아 에도를 출발하였으며, 중도에 이에야스를 방문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이에 따라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었고, 쇼군은 새로 그 직위를 물려받을 때에는 우리가 그 사실을 조선에 알렸으며, 조선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축하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정례(定例)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조선통신사[편집]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에 대해 화친과 수교에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은 전 항에서 상술한 바와 같다. 그리하여 조선과 우리의 국교가 옛날로 돌아갔으므로, 새로운 쇼군이 직위를 물려받는 【나라가 창성하고 태평함을 축하하거나 혹은 세자가 출생한 것을 경축하는 등 한두 가지 예외가 있었다.】 때에는 쓰시마에서 그 사실을 조선에 통지하고, 조선에서는 반드시 사절을 파견하여 경하(敬賀)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쇼군 직위를 계승하는 데 따른 하나의 성대한 의식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게이죠(慶長) 12년 이후 조정에 온 통신사는 다음과 같다.

 (1) 게이죠 12년 【선조 40년 정미(丁未)】

   목적 수교

     에도성(江戶城)에서 쇼군 히데타다(秀忠)를, 슨푸(駿府)에서 이에야스(家康)을 알현하였다.

   정사(正使) 여우길(呂祐吉), 부사(副使) 경섬(慶暹), 종사관(從事官) 정호관(丁好寬).

 (2) 겐나(元和) 3년 【광해군 9년 정사(丁巳)】

   목적 도요토미(豐臣) 씨를 멸망시키고 국내를 통일한 것을 경하하였다.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쇼군 히데타다를 알현하였다.

   정사 오윤겸(吳允謙), 부사 박재(朴榟), 종사관 이경직(李景稷).

 (3) 간에이(寬永) 원년 【인조 2년 갑자(甲子)】

   목적 3대 쇼군 이에미츠(家光)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다.

   정사 정립(鄭岦), 부사 강홍중(姜弘重), 종사관 신계영(辛啓榮).

 (4) 간에이 13년 【인조 14년 병자(丙子)】

   목적 나라가 창성하고 태평함을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닛코뵤(日光廟)에 참배하였다. 그 이후 관례가 되었다.

   정사 임광(任絖), 부사 김세렴(金世濂), 종사관 황호(黃㦿).

 (5) 간에이 20년 【인조 21년 계미(癸未)】

   목적 쇼군 이에미츠의 세자(世子) 이에츠나(家綱)의 탄생을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이에미츠를 알현하였으며, 마지막에 닛코뵤를 참배하였다.

   정사 윤순지(尹順之), 부사 조경(趙絅), 종사관 신유(申濡).

 (6) 메이레키(明曆) 원년 【효종 6년 을미(乙未)】

   목적 4대 쇼군 이에츠나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고, 마지막에 닛코뵤를 참배하였다. 【닛코뵤 참배는 이후로는 중지하였다.】

   정사 조형(趙珩), 부사 유창(兪瑒), 종사관 남용익(南龍翼).

 (7) 텐호(天和) 2년 【숙종 8년 임술(壬戌)】

   목적 5대 쇼군 츠나요시(綱吉)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윤지완(尹趾完), 부사 이언강(李彦綱), 종사관 박경준(朴慶俊).

 (8) 쇼토쿠(正德) 원년 【숙종 37년 신묘(辛卯)】

   목적 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건의에 따라 그들의 대우를 고쳤다.】

   정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9) 쿄호(享保) 4년 【숙종 45년 을해(乙亥)】

   목적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홍치중(洪致中), 부사 황준(黃璿), 종사관 이명언(李明彦).

 (10) 칸엔(寬延) 원년 【영조 24년 무진(戊辰)】

   목적 9대 쇼군 이에시게(家重)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홍계희(洪啓禧), 부사 남태기(南泰耆), 종사관 조명채(曹命采).

 (11) 호레키(寶曆) 13년 【영조 39년 계미(癸未)】

   목적 10대 쇼군 이에하루(家治)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에도성에서 쇼군을 알현하였다.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12) 분카(文化) 8년 【순조 11년 신미(辛未)】

   목적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의 직위 승계를 경하하였다.

     쓰시마(對馬)에서 응접하였다. 대개 종래의 조선 사절 일행에 대한 접대에는 매우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이에나리 쇼군의 취임 초기에 텐메이(天明) 연도의 대기근 등으로 인해 장소를 바꾸어 교섭한 결과이다.

   정사 김이교(金履喬), 부사 이면구(李勉求) 【종사관은 없음】

즉 조선에서 사절을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에 파견한 것은 모두 12번이었는데 각 대(代)를 통틀어 방문의 의식과 가고 오는 경로는 거의 동일하였다. 여기서는 그 대략적으로 기록하고자 한다. 정사(正使)가 사신 일행을 인솔하고, 부사(副使)와 종사관(從事官) 등은 보좌역이었다. 일행의 인원수는 많을 때는 5백 명, 적을 때도 2백 7, 8십 명을 내려가지는 않았다. 정사는 파견의 명을 받으면 부하들을 독려하여 밤낮없이 준비를 갖춘 다음, 국왕으로부터 국서(國書)와 특산품을 받고 경성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여 여기에서부터 배를 타고 날씨가 맑은 날 먼저 쓰시마로 건너갔다. 쓰시마의 영주(領主)인 소(宗) 씨는 일행을 맞이하고 선도하며 일행은 이끼(壹岐)를 거쳐 큐슈의 북쪽 해안을 지나 세토(瀨戶)의 안쪽 바다로 들어가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오사카(大阪)에 상륙하여 순서대로 에도(江戶)로 향한다. 이에 앞서, 바쿠후는 조선에서 통신사가 왔다는 보고를 접하면, 특별히 연도의 여러 번(藩)에 명하여 역로(驛路)를 수리하고 숙소를 설치하는 등의 일들을 하게 하였고, 녹봉을 많이 받는 사람은 말을 징발하고 품삯을 부담하게 하였다. 또 조선의 사절 일행이 통과할 때에는 맞이하거나 전송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단속을 엄중히 하여 무례를 가하지 않도록 하였다. 에도에서는 큰 번(藩)의 제후나 로쥬(老中)를 접대봉행(接待奉行)에 임명하고, 시바(芝)의 혼세이지(本誓寺) 【쇼토쿠(正德) 이후에는 아사쿠사(淺草)의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별원(別院)으로 바꾸었다.】 를 숙소로 제공하여, 제반 준비가 완료되기를 기다렸다가 날짜를 정하여 쇼군을 알현하는 식을 거행하였다.

식은 가장 엄숙한 가운데 진행하였다. 이날 쇼군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다이묘(大名)와 중신(重臣)들을 따라 혼마루(本丸)의 대연회장 【大廣間】 으로 나온다. 조선의 삼사(三使) 【정사·부사·종사관】 는 안내역에게 인도되어 쇼군을 알현하고 국서를 바친 후 일단 다음 칸으로 물러나 앉는다. 쇼군은 다시 별실에 진열되어 있는, 조선에서 헌상한 특산품들을 둘러보고 이어서 대연회장에서 다시 삼사를 알현하고 식을 마친다. 곧 사절은 쇼군이 보낸 사람에게 먼 길을 와서 큰 의식을 치른 뜻을 전달받으며, 술과 음식을 대접 받고서 성을 물러나온다. 일행은 에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여러 차례 로쥬나 여러 다이묘들로부터 정중한 대접을 받는다. 노가쿠(能樂), 사루가쿠(猿樂) 등을 관람하면서 여정(旅情)을 달래는 것이 보통이다. 또는 여가를 이용하여 각 곳들을 관람하기도 한다. 또는 우리 학자들과 아회(雅會)를 열어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일행은 또다시 기회를 얻어 시모노국(下野國)의 닛코뵤(日光廟)를 참배한다. 【닛코의 참배는 간에이(寬永) 13년에 시작되어 텐호(天和) 2년 이후에는 하지 않았다.】 현재 닛코에는 아직도 조선에서 헌상한 국왕 친필의 편액(扁額), 금등롱(金燈籠), 화병(花甁)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리하여 통신사는 쇼군의 답서와 하사품을 받고, 로쥬 이하 여러 사람들과 작별의 예를 마치고 에도를 떠나 귀로에 오른다. 쓰시마에 도착할 때까지 소(宗) 씨가 사절을 수행하는 것은 갈 때와 다름이 없다. 무사히 경성에 도착한 뒤 국왕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임무를 마친다.

조선 통신사가 조정에 오는 것은 조선과 우리나라[일본] 사이의 친밀한 교의를 표명하는 것이므로, 도쿠가와 시대에 가장 성대한 행사의 하나였다. 그런데 바쿠후 초창기에는 조선에서 답신이나 사신 방문에 관한 의식 등도 충분히 강구되어 있지 않았지만 태평이 유지되었고, 모든 일들이 순서에 따라 점차 완벽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통신사 일행은 수백 명이 넘고 행렬도 쓸데없이 요란스러운 데다 바다와 육지를 수백 리나 왕복하며 날짜도 약 반 년이나 걸렸으므로, 우리나라[일본]는 설비의 촉박함과 접대의 번거로움에 날짜도 부족하였고 쓸데없는 노력과 경비를 지나치게 소모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일찍부터 이에 착안하여 바쿠후 정치가 시작되는 국면에 처하자 마침내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그는 쇼토쿠(正德) 연간인 쇼군 이에노부(家宣) 때 우선 의식(儀式)을 요견(遙見), 사향(賜享), 사견(辭見)의 세 가지로 나누어, 종전에 비해 통신사의 예우(禮遇)를 점차 낮추었다. 게다가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행을 쓰시마에서 영접하고, 우리나라[일본]에서는 코케(高家) 두 사람을 특별히 파견하여 국서 및 특산품을 교환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때마침 이에노부 쇼군이 세상을 떠나고 요시무네(吉宗)가 뒤를 이었다. 새로운 쇼군은 성실히 옛 관습과 옛 관례에 따르려고 하였으므로 하쿠세키의 개혁안은 실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70년이 지나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가 직위를 승계하였을 때는 조선에 교섭하여 그 사절을 쓰시마의 경계에서 맞이하는 것으로써 빙례(聘禮)의 의의를 다하였다. 실로 분카(文化) 8년 7월의 일이었다. 12대 이에요시(家慶) 이후에는 바쿠후도 말기에 가까워져 국내가 점차 복잡다단해졌으므로 쓰시마에서의 빙례도 중지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사절을 파견한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