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무지개 뜨는 언덕/13장
13. 꿈에 그리던 교정
이튿날, 초등학교를 마친 소년 소녀들이 새로운 희망과 아름다운 꿈을 한아름씩 안고 꿈에 그리던 중학교 교문을 처음으로 들어서는 3월 초, 오전 10시의 일이었다.
방송국 마루턱을 한 고개 넘어서면 동신여자중학교 교정의 푸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파랗게 이끼가 낀 벽돌 담벼락에는 푸른 담쟁이덩굴이 고개를 내저으며 기운차게 뻗어 있다. 신입생들에게는 꿈에 그리던 교정, 희망의 나라였다.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만 입학할 수 있는 이 학교에 들어오기 위해, 신입생들은 지난 1년 동안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고 잠도 마음껏 못 자면서 시험공부를 해 왔다. 바로 오늘의 이 커다란 기쁨을 갖기 위해서였다. 모든 기쁨은 오로지 노력에서만 오는 것이다. 노력 없는 기쁨과 행복은 참된 기쁨일 수 없으며, 가치 있는 기쁨일 수가 없다.
신입생들은 지금 그러한 자기들의 노력에 대한 분명한 결실을 눈앞에 보면서, 앞으로도 끊임없는 노력을 하리라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하고 있었다.
“오늘부터 나는 이 학교 학생이 된 거야.”
자기들을 바라보는 상급생들의 부드러운 눈동자가 처음에는 약간 무섭기도 하고 수줍기도 하여, 신입생들은 얼굴을 바로 들지 못했다. 어미 닭 가운데 병아리가 섞인 것처럼 어색하고 쑥스럽고 부끄럽기만 했다.
은철이가 서무실로 들어가서 입학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에 은주는 잔디밭 한 모퉁이에 외로이 서서 오빠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에게 끌려 하는 수 없이 따라왔지만, 앓아누우신 불쌍한 어머니를 컴컴한 방 안에 혼자 남겨 두고 자기만 이렇게 화사한 운동장에 서있는 것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학교가 다 뭐야! 먹고살기도 힘든데...... 오빠는 괜히 허영에 들떠서 그러지.”
은주는 입속말로 가만히 종알거려 보았다. 짝 잃은 병아리처럼 외로이 서서 종알거려 보는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자기처럼 남루한 옷을 입은 학생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들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새로 산 구두나 운동화를 신었다. 은주는 문득 두꺼비 등처럼 더덕더덕 꿰맨 자기의 운동화를 들여다보았다.
“이 꼴로 학교에 다녀서 뭐해?”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으나, 아직 어린 은주가 왜 학교에 다니고 싶지 않겠는가. 더구나 남달리 음악에 소질이 있는 은주로서는 그 방면으로 나아가 타고난 재주를 한번 힘껏 길러 보고 싶은 욕망이 불길처럼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은주로서는 먼 허공에 뜬, 한낱 무지개와도 같은 아름다운 꿈일 뿐이었다.
“너, 은주 아니니?”
그 때, 반갑게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은주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으응, 난 또 누구라고.”
그 애는 은주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영순이였다. 약간 주책없긴 하지만 마음은 착한 애였다.
“난 네가 학교 그만둔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몰라. 너처럼 음악에 재주가 있는 애가 학교를 그만두면 어떡하니, 얘?”
영순이는 수선을 떨면서 은주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은주는 대답 없이 입가에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 버리는 영순의 성품을 은주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 오늘 같은 날 운동화나 새것으로 하나 사 달라고 하지, 그게 뭐냐?”
영순이는 주책없는 말을 또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주는 화를 낼 줄 모른다. 남이야 아무렇게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보통 애들 같으면 발칵 화를 낼 것을, 은주는 빙그레 쓴웃음만 지어 보일 뿐이다.
운동화가 다 뭐냐고, 앓아누우신 어머니를 위해 약 한 첩도 못 지어드리는 형편인데, 하고 생각하니 은주는 자기를 이런 곳에 억지로 끌고 온 오빠가 자꾸 원망스러워졌다.
“은주야, 학교가 참 좋아. 칡넝쿨이 있고, 잔디밭이 있고...... 잔디밭에 누워서 흰 구름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좋겠니. 그렇지?”
“응, 좋은 학교야.”
은주가 하는 수 없이 대답했을 때, 은철이가 현관에서 뛰어나왔다.
“은주야, 됐다! 모든 수속은 끝났으니, 이제 마음 놓고 학교에 다닐 수 가 있어, 은주야, 기쁘지?”
은철이는 은주의 손목을 잡고 동생의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은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은철이는 그 순간 은주의 눈에서 이슬같이 희고 고운 눈물이 툭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울긴 왜 울어? 응, 은주야?”
“기뻐서 오빠가,...... 오빠가 너무 고마워서.”
은주는 울다가 이내 눈물을 씻어 버렸다.
“기쁘면 웃어야지, 울긴 왜 우니?”
“너무 기뻐서......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나온다잖아.”
그러면서 은주는 눈물 젖은 얼굴로 일부러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나 정말로 고맙기 그지없는 것은 은철이였다.
“그렇지, 그렇게 웃어야 내 마음이 편하지. 자아, 그럼 오빠는 일이 좀 바빠서 그만 가 봐야겠어. 입학식 끝내고 선생님 말씀 귀담아 듣고 와.”
“오빠, 어디로 가?”
“여기저기 갈 곳이 많아.”
“다른 덴 나중에 가고, 우선 집에 들러서 어머니 점심 끓여 드리고 가야 되지 않아?”
어제까지는 은주가 매일 물을 데워 어머니의 점심을 챙겨 드리곤 했던 것이다.
“아참, 하마터면 깜빡 잊어버릴 뻔했구나!”
“그리고, 어머니 베개 밑에 70원을 넣어 두고 왔는데 그걸로 달걀 하나 사다가 미음에 풀어 드려. 어머니 혓바닥이 해져서 너무 짜면 못 잡수시니까, 약간 싱겁게 해야 해.”
은주는 어쩌면 이렇게 생각이 깊기도 할까! 어머니에 대한 은주의 그 지극한 효성에 비하면 자기 같은 건 열 명이 합해도 은주 하나를 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번엔 은철이 편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너 하라는 대로 꼭 할게. 소금은 싱겁게 약간만 칠게. 나는 어머니가 혓바닥이 해진 줄도 몰랐어. 난, 나쁜 오빠야! 용서해라!”
은철이는 은주의 손목을 다정하게 꼭 쥐어 준 후, 은주의 어깨를 귀여운 듯이 툭툭 쳤다.
“그야 오빠가 돈벌이 하느라고 밤낮 밖에만 나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일부러 몰랐나 뭐?”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은철이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은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휙 돌아섰다. 그리고 서너 걸음 걸어가고 있는데, 그 때까지 옆에 서서 두 오누이의 이야기를 재미있다는 듯이 듣고 있던 영순이가 주책없이 한마디 툭 내쏘았다.
“말로만 귀엽다고 그러지 말고, 운동화나 새것 하나 사 줘요!”
아, 영순이의 그 말이야말로 은철의 가슴에 비수처럼 와 닿는 한마디였다.
‘그래! 그렇게도 귀엽다고 하면서 동생의 운동화 한 켤레도 사 주지 못하는 바보 같은 오빠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나는 바보다! 바보!’
은철이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머리를 푹 수그린 채 교문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 순간 달려가는 은철이의 등 뒤에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한 은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너더러 누가 운동화 걱정을 해 달래?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
그것은 은주 같은 온순한 아이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오리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날카로운 한마디였다.
“흥, 듣기 싫으면 그만 두렴! 제 생각 해주느라고 그러는데...... 흥!”
영순이는 빈정거리는 말을 남겨 놓고 저 쪽으로 뛰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