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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네/미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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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머리 속에 의(義)에 대한 개념이 들어갔느냐? 만약 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갔으면, 아버지는 둘째 이야기로 너에게 동정(同情)이라는 것을 보여 주겠다.

의가 표면에 나타날 때에는 반드시 의협심이나 동정심이라는 형식을 밟는 것이다. 충성, 애국심, 용맹, 희생심─이 모든 것이 의의 변태물임에 틀림이 없으나 그 모든 아름다운 감정은 반드시 의협심이라는 길을 밟은 뒤에야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한 동화(童話)로써 너에게 의협심과 동정심을 보여 주려 한다.

너는 시골길을 다닐 때에 미륵이라는 것을 본 일이 있느냐? 커다랗게 돌로 깎아서 세운 사람의 모양을 한 물건이다.

K라는 동리에서 N이라는 동리에 가는 길에 커다란 미륵이 하나 서 있다. 기도를 하면 근심을 없게 하여 주는 미륵, 아이를 낳게 하여 주는 미륵, 병을 고쳐 주는 미륵, 농사를 잘 되게 하여 주는 미륵─ 이렇게 많고 많은 가운데 이 미륵은 특별한 권능을 가졌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한평생 가운데 아무런 소원이든 한 가지에 한하여 응해 주는 것이었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니, 돈이다, 먹을 것이다, 호강이다, 그 많고 많은 소원 중에, 그 한 가지만은 이 미륵에게 정성을 드리면 성취를 하는 것이다.

이 미륵을 두고 한 가지의 아름다운 동정심의 발로가 있었으니, 내가 이제 네게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N이라는 촌은 미륵이 있는 곳에서 이 리쯤 떨어져 있는 곳이다.

N촌은 바닷가였다. 그 바다는 N촌 앞에서부터 미륵 있는 앞에까지 일직선으로 가서, 미륵 앞에서부터는 남쪽으로 기역자로 꺾어져서 거기서부터는 까맣게 직선으로 해안선이 뻗어 나갔다.

미륵은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없다. 동리 노인들의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적어도 오륙백 년 전부터 서 있는 모양이다. 모진 비와 몹쓸 바람이며 찬 눈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오륙백 년간을 그곳에 서 있으면서 자기에게 정성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일평생의 한 가지 소원만은 꼭 이루어 주었다 한다.

혹은 그 미륵에게 기도를 올려서 자식을 본 사람도 있겠지, 혹은 미륵의 덕택으로 병을 고친 사람도 있겠지, 또는 잃을 뻔한 재산을 다시 거둔 사람도 있겠지, 재물을 모은 사람도 있겠지, 오륙백 년간의 많고 많은 사람의 소원에는 별의별 것이 다 있었을 것이다. 모든 귀찮은 소원을 미륵은 한 마디의 불평이며, 꾸중도 없이 다 들어 준 것이었다.

이러한 영한 미륵이 서 있는 곳에서 한 이 리쯤 떨어져 있는 N촌에 일수라는 노인과 삼덕이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일수는 마음이 약한 노인이고, 삼덕이는 마음이 강한 데다가 욕심이 꽤 많은 노인이었다.

이 두 노인과 미륵과의 사이에 얽힌 재미있는 한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이제 여기 쓰려는 이야기는 즉 그것이다.

일수라는 노인은 자작농이었다. 삼덕이라는 노인은 소작농이었다.

일수는 어려서는 머슴살이에서 시작하여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자작농으로─ 말하자면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삼덕이는 늙은 지금까지 머슴으로 지내다가 겨우 소작농으로 된 사람이었다. 더구나 삼덕이의 부치는 밭은 거의가 일수의 것이었다.

그런지라, 같은 노인이라 하나, 일수는 그 동리에서 상당히 존경을 받고 있는 데 반하여 삼덕이는 그다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때 이 동리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삼덕이가 자기의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과일과 떡을 준비하여 가지고 미륵에게 기도를 드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기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일수 노인의 재산 전부를 자기에게 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삼덕이의 심술로는 할 만한 노릇이었다. 일수는 별로 이 삼덕이에게 혹독히 군 사실은 없지만, 삼덕이는 늘 일수를 미워하고 있었다. 미워하는 까닭은 단지 자기에게는 돈이 없는데 일수에게는 있으며, 자기에게는 땅이 없는데 일수에게는 있으며, 자기나 일수 나 다 같은 사람인데 자기는 일수의 아랫사람이라는 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런 소문이 일수에게 들어올 때에, 일수는 그것을 곧이듣지 않았다. 삼덕이의 마음이 불량한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구태여 남의 재산이 자기의 손에 들어오게 해 달라고 미륵님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일수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미륵의 영험은 나타났다.

사람의 한평생 한 가지의 소원은 꼭 들어주는 미륵의 영험은, 삼덕이의 불량한 소원이라고 그 예를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 해 몹시 흉년이 들었다. 일수의 소출은 전멸이 되었다. 내년 추수 때까지의 양식은커녕 그 해 가을의 세납도 뽑을 것이 없었다.

거기 반하여 삼덕이는 횡재를 하였다. 물론 일수의 밭을 부치는 소작인인지라 역시 소출은 없었지만, 그의 소가 우연히 병든 것을 잡으니까 그 소에는 우황이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삼덕이는 뜻밖에 적지 않은 돈을 잡게 되었다.

일수의 밭 일부분은 세납 때문에 공매에 붙이게 되었다. 그 밭을 산 사람은 삼덕이었다.

그 뒤부터는 일수의 운은 나날이 피어 갔다. 그 반대로 삼덕이의 운은 나날이 높아 갔다. 가운이 피어져서 한 필 한 필씩 땅을 팔 때마다 그 땅을 사는 사람은 삼덕이었다.

마음이 비교적 착한 일수 노인도, 차차 삼덕이에게 대하여 노염이 가기 시작하였다. 평생 한 가지의 소원은 들어주는 미륵, 그럴진대 다만 자기의 운이 좋게 되기를 빌었으면 넉넉하겠거늘, 하필 남은 망하고 자기가 잘 되도록 빌다니? 마음 착한 일수 노인으로는 처음에는 믿지도 않던 그 일이 차차 실현될 때에, 일수 노인의 마음에는 삼덕이의 비열한 심술에 대한 노염이 점점 높아갔다.

「그저 이놈!」

죽어도 일수 노인은 삼덕이에게는 땅을 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팔지 않을 수 없도록 꾀인 가운데, 또한 그 작은 N에서는 삼덕이 밖에는 땅을 살 사람이 없었다.

일수 노인은 몇 번을 영험 있는 미륵 앞에 가서 머리를 숙이고 섰다.

「내 가운을 다시 회복하도록 해 줍소서.」

이런 기원이 그의 입에서 나오려고 하였다.

「삼덕이를 망하게 하여 줍소서.」

이런 기원도 나오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한 가지의 땅을 팔 때마다, 이 땅은 팔지 않게 해 줍시사고 영험 있는 미륵께 빌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매번을,

「평생에 단 한 번」

이라는 점을 생각하고는 단념하고는 하였다.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밖에는 들어주지 않는 미륵에게 덜컥 이런 변변치 못한 일을 빌었다가, 이후에 더 중대한 사건이 생기면 어찌할까─ 이런 생각 때문에 일수 노인은 마침내 기도를 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K 동리에서 제일 크고 화려함을 자랑하던 일수 노인의 집까지도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만은 내놓지 않으리라, 일수 노인은 끝끝내 버티어 보았다. 그러나 꾀어 가는 가운─ 노인의 버팀도 쓸 데가 없었다.

내놓게 된 이상에는 결코 삼덕이에게만은 팔지를 않으리라,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이 집을 삼덕이에게는 안 내어 주리라, 이렇게 결심도 하여 보았다. 그러나 이 동리에서 이런 큰 집을 살 만한 사람은 차차 흥하여가는 삼덕이밖에는 없었다.

이리하여 이전에는 삼덕이가 소작짐을 지고 드나들던 커다란 일수 노인의 집도 삼덕이의 집이 되어버렸다.

일수 노인의 삼덕이에게 대한 원한은 더욱 커 갔다.


일수 노인이 삼덕이에게 집을 내어주는 날이 이르렀다. 그 날이 집 새 주인의 짐은 연하여 들어왔다.

「흥! 이 집도 이젠 내 집, 이 곳간에 전에는 나락섬을 지고 드나들더니, 이제부터는 내가 주인이다.」

마치 일수 노인에게 들으라는 듯이, 삼덕이는 곳간 문을 열어젖히고, 그 앞에 서서 장한 듯이 이런 말을 하였다.

이러한 보기 싫은 꼴을 보면서 일수 노인은 초연히 이전에는 자기의 집이던 이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 집을 나서는 순간, 일수 노인의 마음에는 삼덕이에게 대한 맹렬한 복수심이 일어났다. 재산을 빼앗기고, 지위를 빼앗기고, 또한 집까지 빼앗긴 데 대한 노염은, 맹렬한 복수심으로 일수 노인의 마음에 일어난 것이었다.

노인은 달음박질하였다. 달려가는 도중에 주머니를 털어서 능금 몇 알을 샀다.

복수심에 불붙는 노인의 성난 모양은 미륵의 앞에 나타났다. 도중에서 산 능금은 미륵의 앞에 바치어졌다.

「영하신 미륵님 저─ 저─ 삼......」

그러나 기원을 올리던 일수 노인은 여기서 뚝 끊었다.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

아무리 밉고 또 미운 삼덕이라 하나, 평생에 한 번밖에는 올릴 수가 없는 기원을 이런 일에 써버리기가 아까왔다.

한참을 멍하니 미륵 앞에 서 있던 일수 노인은 다시 능금을 주워서 호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참아라! 더 긴한 때가 있겠지.」

입 밖에까지 나오려는 삼덕이에게 대한 저주의 기원을 일수 노인은 이를 갈면서 도로 삼켰다. 그리고 초연히 돌아섰다.

봄이 이르렀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겟불은 안 쬔다.」

일수 노인은 죽을지라도 삼덕이의 소작인은 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배고픈 데 들어서는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날 일수 노인은, 종내 이전에는 자기 집이던 삼덕이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전에 자기의 소작인이던 삼덕이에게 허리를 굽히고 밭 한 필을 얻어 부치기로 하였다.

「여보, 일수!」

이전에는 반드시 나리라고 부르던 삼덕이었다. 지금 벌써 이렇게 부르는 것을 보면 며칠 뒤에는 하게를 할 것은 분명하였다.

이전에는 때때로 그 곡식의 잘 되고 못 됨을 돌아보러 다니던 자기의 땅에서, 일수 노인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오히려 삼덕이가 긴 대를 물고 간간 밭을 돌아보러 나왔다.

「농사가 왜 이 꼴이야? 사람 덜 난 것에게 밭을 주었더니! 음, 버렸군!」

이것은 눈에서 불이 나는 말이었다.

그러나 배고픈 데 들어서는 일수 노인도 할 수가 없었다.

「비가 안 오셔서 이 꼴이외다.」

갈리는 이를 악물고 이렇게 대답을 하곤 하였으나, 그럴 때마다 일수의 늙은 눈에서는 비분의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다. 평생 한 번의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미륵의 모양이 무시로 노인의 머리에 어릿거렸다. 그러나 이 뒤에 언제인지 모르지만 더 중대한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일수 노인은 참고 또 참았다.

「인지위덕이라」

일수 노인이 억지로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말이 이것이었다.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일수 노인은 너무도 더움에 견디지 못하여, 미역이라도 한 번 감을 양으로 바다로 나왔다. 그리고 급히 옷을 벗으려던 노인은 저편에서 나는 괴상한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단말마의 무서운 부르짖음이었다. 눈앞에 죽음을 본 사람이 아니면 내지 못할 날카로운 부르짖음이었다.

일수 노인은 황급히 눈을 휘둘렀다. 두르는 동안에 그의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그 바다에는 용소(龍沼)라는 곳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평평한 바다 밑 가운데 갑자기 측량할 수 없이 깊은 곳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는 늘 물이 술렁술렁 끓었다. 만약 사람이 그릇 용소에 걸려들기만 하면 다시는 세상에 살아올 가망이 없는 무서운 곳이었다.

그 용소에 웬 사람이 빠졌다. 일수 노인이 그곳으로 눈을 향하는 순간, 걸핏 사람의 머리가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다시 보려 할 때는 그 그림자는 벌써 없어졌다.

일수 노인은 벗으려던 옷을 다시 움켜쥐고 그곳을 향하여 달려갔다. 달려간댔자 별 수는 없으련만, 자기의 눈앞에서 사람이 바야흐로 죽게 되는 것을 볼 때에 노인은 그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다.

노인이 그 앞에까지 달려갔을 때에 물속에 잠겼던 사람은 다시 떠올랐다.

노인은 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삼덕이었다. 골수에 박히고 또 박힌 원수 삼덕이었다.

술렁거리는 물은 다시 삼덕이를 삼켰다. 그리고 잠시 뒤에 삼덕이는 없어진 자리에서 좀 거리가 있는 물 면에 쑥 솟아올랐다.


(하느님이 원수를 갚아 주신다.)

그것이 삼덕인 줄 아는 순간 일수의 마음에 생긴 첫 생각은 이것이었다. 그 가운데는 통쾌하다는 생각이 꽤 많이 섞이어 있었다.

물 면에 떠오른 삼덕이의 눈은 언덕에 서 있는 일수 노인에게로 달려왔다. 무서운 부르짖음이 또 들렸다. 이미 죽음을 정면으로 본 삼덕이의 얼굴에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공포와 괴로움이 역연히 나타나 있었다.

삼덕이의 얼굴에 나타난 공포를 일수 노인은 보았다. 이때였다. 일수 노인은 자기로도 무엇을 하려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달음박질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일수 노인의 모양은 어느덧 영험 있는 미륵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두 손은 힘있게 합장되었다.

「사람이 죽습니다. 미륵님, 구원해 주소서. 사람이 죽습니다.」

자기로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일수 노인은 경건한 마음으로 미륵님께 기원을 드렸다.

이 기원─ 그것은 그가 땅을 한 한 필씩 팔아넘길 때도 아까와서 차마 하지 못한 기원이었다. 뼈에 사무친 원수를 갚고자도 하지 못한 기원이었다. 일생의 안락을 위하여서도 하지 못한 기원이었다. 그리고 언제든 자기의 몸에 더 긴한 일이 생긴 뒤에 하려 아끼고 또 아끼던 기원이었다. 평생에 한 번밖에는 올릴 수 없는 기원─ 한 번 올린 뒤에는, 이후에는 효력이 없어지는 기원─ 이 최초요 또한 최후의 기원을, 일수 노인은 자기가 철천지한을 품고 있는 원수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한 것이었다.

일생에 한 번의 소원에만은 꼭 영험이 있는 미륵이라, 일수 노인의 정성을 다한 기원은 성취되었다. 용소의 술렁거리는 물속에 잠겼던 삼덕이가 다시 물 면에 떠오를 때는, 그는 벌써 소에서 벗어났다.

한참을 미륵 앞에서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리던 일수 노인은 펄떡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는 소에서 벗어난 삼덕이가 피곤한 몸을 기다시피 하여 언덕을 향하여 올라오는 때였다.

일수 노인의 기원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성취를 보면서 일수 노인은 맥없이 덜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아─!」

기다란 탄식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것은 절망의 탄식이었다. 동시에 또한 비분의 탄식에 다름 없었다.

아끼고 아끼던 그 기원을 뚱딴지 원수의 생명을 위하여 드린 것이었다. 이제는 자기에게 아무리 중대한 일이 생길지라도 구원을 받을 가조차 잃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일수 노인은 삼덕이를 살렸기 때문에 생계까지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덕이는 용소에서 다시 살아난 이튿날 곧 일수 노인을 불렀다. 그리고 봄내 여름내 힘들여 농사지은 그 농토를 당장에 떼어서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다. 자기가 용소에 빠졌을 때에 보고도 구해 주지 않고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 농토를 떼는 이유였다.

일수 노인은 변명하지 않았다. 변명하여야 곧이들을 삼덕이도 아님을 잘 알므로─ 이리하여 일수 노인은 삼덕이를 구원했기 때문에 단 한 번인 기원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그 위에 생활의 근거까지 잃어버렸다.


사람은 굶어 죽게는 나지 않는 법이다. 이 근방의 큰 지주이던 일수 노인은 소작 자리까지 잃은 뒤에는, 하릴없이 이전의 자기 소작인이던 사람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는 벌써 일수 노인은 온갖 일을 다 단념한 때였다. 평생에 한 번밖에 이루어지지 않는 미륵님께의 기원도, 벌써 뚱딴지 사람을 위하여 써먹었다. 자기의 장래에 가장 중대한 일이 생길 때에 써먹으려고 아끼고 아끼던 그 기원도 이제는 더 바랄 바가 아니다. 사람이 차마 굶어 죽지는 못하겠으니, 이제는 늙어 죽기까지 남의 머슴살이나 하여 제 입이나 굶기지 않는 것─ 이것이 일수 노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아, 고단한 세상을 걸어왔다!」

자연 탄식이 무시로 그의 입에서 나왔다.

삼덕이를 미워하는 생각도 이제는 없어졌다. 하물며 부러워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꿈에도 안 났다. 권토중래의 희망과 용기를 이미 잃어버린 이 노인은 다만 죽는 날까지 자기의 입이나 굶기지 않으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는 때때로 미륵의 앞을 지날 때마다, 원망스러운 듯이 미륵을 쳐다보곤 하였다.

「미륵님, 나는 이제는 당신과는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이외다. 내가 무슨 기원을 드린대도 이제는 성취될 가망도 없는 사람이외다. 당신은 당신, 나는 나, 다시 희망 붙일 곳도 없는 사람이외다.」

오륙백 년간을 눈비를 맞으면서 위연히 서 있는 미륵을 적적한 눈으로 쳐다볼 때는, 그의 늙은 눈에서는 때때로 뜻없이 눈물까지 나왔다. 이러한 가운데서 날이 가고 달이 갔다.


그것은 일수 노인이 삼덕이를 구하고자 미륵님께 기도를 올린 지 삼 년째 되는 여름이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더위에 못 견딘 일수 노인은, 미역을 감으러 바다로 갔다.

바닷물에 몸을 잠근 노인은 자기의 마르고 여윈 몸을 어루만지면서, 이리저리 헤엄을 치고 있었다.

노인은 펄떡 놀랐다. 몸이 쑥 물속으로 빨리어 들어갔다. 만뢰(萬雷)와 같은 우렁찬 소리가 귀에 들리었다.

「앗!」

노인은 어느덧 용소까지 와서 용소에 빠진 것이었다.

왁 왁, 몸은 물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갔다. 몇십 길 몇백 길을 빨려 들어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몸은 벌컥 뒤집혔다. 쑥 놀라운 물의 힘에 밀려서 몸은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물 면에 떠오를 때에 노인은 저편 정면으로, 언덕 위에 우연히 서 있는 미륵을 걸핏 보았다.

오륙백 년을 그 자리에 그 모양대로 서 있는 미륵은, 역시 움직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앞에서 실행되는 참극을 고즈너기 보고 있었다.

「미륵님!」

노인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 힘에 빨려서 쑥쑥 물속으로 들어갔다.

좀 뒤에 노인은 다시 휙 하니 물 면에 떠올랐다. 맞은편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미륵의 모양이 또 눈에 띄었다.

「살려 줍쇼!」

무슨 뜻으로 부르짖었는지 노인은 몰랐다. 왜 부르짖었는지도 몰랐다. 삶을 욕구하는 사람의 본능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부르짖게 한 것이었다.

한 마디의 부르짖음을 발한 뿐, 노인은 다시 물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때였다.

오륙백 년간을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임이 없던 미륵이 천천히 발을 떼었다. 몹쓸 비, 찬 바람, 휘날리는 눈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미륵이 노인의 부르짖음에 마침내 발을 뗀 것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서 바다로 내려와서 몸에 쓴 이끼가 젖는 것도 생각지 않고 물로 절벅절벅 들어왔다.

몇백 길 물속에 잠겼던 노인이 다시 면에 떠오를 때에, 미륵은 그의 팔을 펴서 떠오른 노인의 옷을 움켜쥐어서 높이 쳐들었다.

「네 기원 들어 주마.」

낭랑한 미륵의 음성이었다.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던 노인은 이 낭랑한 음성에 펄떡 정신을 차렸다.

「자기를 위해서도 아끼던 기원을 남을 위해서 드린 네 기특한 행동을 귀엽게 봐서 이번의 한 가지와 이 뒤에 한 가지의 네 기원을 들어 주마.」

낭랑한 미륵의 음성은 이렇게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미륵과는 이미 인연이 끊어진 줄만 믿고 있던 노인은 여기서 뜻밖에도 미륵에게 구원을 받을뿐더러, 이 뒤 한 가지의 소원을 더 들어주겠다는 승낙까지 얻었다. 미륵의 영험은 놀랄 만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다시 행복을 못 보리라고 단념하였던 일수 노인에게도 다시 봄이 이르렀다.

수, 부, 귀, 다남자라는 세상의 온갖 복락이 다시 이 노인에게 이르렀다. 이리하여 꿈과 같은 행복스런 일생을 보내었다.


일환아!

미륵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어떠냐? 재미있었느냐?

그러나 아버지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는 재미만에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한길에서 간간 커다란 아이들이 어린아이에게 못되게 구는 것을 볼 때에, 네 마음에 칵 일어나는 불길─ 어린아이의 편을 도와주겠다는─을 맛본 일이 있느냐? 그것이 동정심이로다. 짐승을 학대하는 사람을 볼 때에, 학대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과 함께 학대받는 짐승을 그 사람의 손에서 구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느냐? 그것이 동정심이로다. 비록 네 원수일지라도 괴로운 경우에 빠진 것을 목격할 때에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느냐? 그것이 의협심이로다. 불쌍한 사람을 볼 때 학대받는 사람을 볼 때, 천대받는 사람을 볼 때, 수모받는 사람을 볼 때, 욕보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을 그 불쌍한 경우에서 혹은 그 학대에서, 혹은 그 천대에서, 혹은 그 수모에서 혹은 그 욕에서 구원하여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느냐? 그것이 의협심이로다. 그리고 사람의 양심과 사람의 감정과 사람의 정서를 가진 사람은, 그 강하고 약함의 구별은 있을망정, 반드시 얼마의 의협심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인비인(人非人)이라 하여 경멸할 만한 인종이다.

그러면 일환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일환아!

너는 얼마의 동정심과 의협심을 가졌느냐? 전에 너에게 〈의〉라는 것을 가르친 아버지는 이번에는 너에게 또한 〈의협심〉을 많이 가진 아이가 되기를 종용한다. 아니, 종용하기보다 오히려 엄명을 한다.


일수 노인은 삼덕이의 심술 때문에 파산을 하였다. 늙은 여망 없는 몸이 외로이 이 쓴 세상을 헤엄쳐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삼덕이는 일수 노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원수다. 일수 노인은 지극히 삼덕이를 미워하고 저주하였다.

삼덕이는 우연히 죽을 지경에 빠졌다. 이것은 일수 노인에게는 바라고 또 바라던 바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수라 할지라도 자기의 눈앞에서 괴로와하는 모양을 볼 때에 일수 노인은 황망히 미륵 앞에 뛰어가서 자기의 원수를 구하여 주기를 빈 것이다. 아끼고 아끼던 자기의 장래의 희망까지 버리고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행동이냐!

이런 아름다운 행동이 있었기에, 미륵은 일수에게 특별히 다른 사람에게 한하여서는 단 한 번밖에는 안 들어 주던) 기원을 세 번을 들어 주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냐?

혹은 비록 자기의 기원을 희생하고 삼덕이를 구하여 낸 것을 일수 노인은 후회를 하였을 것이나, 이것은 제 이단으로 생각할 문제요, 첫째 문제는 모든 것을 잊고 미륵에게로 달려간 일수 노인의 아름다운 행동을 생각할 것이다.

일환아!

너는 의에 두터운 사람이 되며, 또한 의의 발로인 동정심,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라. 너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여 가면서라도 남을 위하여 힘쓰는 귀한 일이 되어라.

일환아!

다시 부탁하노니, 너는 의와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 되어라! 결코 비열한 사람이 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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