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네/소년 부장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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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집]

일환아!

너는 옛말이며 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하지? 그러면 아버지는 너를 위하여 여기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겠다.

그것은 지금부터 일천 이백 육십여 년 전 말하자면 오랜 옛날 이야기다.

그때 우리 조선에는 신라와 백제와 고구려라는 세 나라가 있었다. 신라에는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임금이 계셨고, 백제에는 의자왕(義慈王)이라는 임금이 계셨다.

그런데 그때 백제는, 나라의 강토를 넓히기 위하여 끊임없이 신라의 국경을 침노하려고 하였다. 비록 신라는 큰 나라이라 하나, 부러 남의 나라를 침노하려고 오니만치, 자신이 있는 백제의 군사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신라의 군사는 쫓겨 가고, 신라의 군사가 쫓겨 갈 때마다 신라의 땅은 조금씩 조금씩 백제에게 먹히어 들어갔다.

「백제의 군사는 강하다.」

전쟁 때마다 쫓긴 경험만 있는 신라의 군사들 사이에는 어느덧 이런 생각이 들어박혀 버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라, 더욱 신라의 군사는 백제 군사의 그림자만 보아도 도망할이만치 겁을 먹게 되었다.

신라의 임금은 자기 나라가 너무도 약함을 탄식하시고, 늘 장군들을 모아가지고 어떻게든 백제에게 지지 않을 계획을 강구하곤 하였다. 그러나 수차의 전쟁에 이기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승하게 된 백제의 군사를 피곤한 신라의 군사로써는 도저히 대적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이렇게 저렇게 의논이 백출하던 끝에 드디어 한 가지의 방책을 안출하였다. 그것은 당나라의 구원병을 청하여 당나라의 군사와 신라의 군사가 힘을 합하여 백제를 치자 하는 것이었다. 급사(急使)는 당나라로 달려갔다. 당나라서는 신라를 위하여 소정방(蘇 定方)이라는 장군의 인솔하에 십만 대군을 신라에 빌려주게 되었다.

당나라의 많은 구원병을 얻은 신라는 기운이 나서 이번에는 백제에 원수를 갚으려고 자기 나라의 군사를 죄 출동시켜서 당군과 합하여 황산이라는 데 진을 치고 싸움을 돋우었다.

그러나 급히 전쟁을 시작하고 보니, 역시 백제의 군사는 강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남의 나라를 위하여서 목숨을 내어놓기까지의 의기가 없는지라, 백제 군사들이 쫓아 들어오면 산산이 도망하였다. 구원군이 이 꼴인지라, 신라 군사도 당나라 군사가 도망을 하면 같이 따라서 도망하곤 하였다. 이리하여 한 번 두 번으로 세 번 네 번까지 전쟁을 하였지만, 신라의 군사는 연하여 패할 뿐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싸우면 패하고 싸우면 패하고 한 신라의 진에서는, 임금을 중심하고 어전회의가 열렸다. 그것은 죽음의 방 안과 같이 조용하였다. 왕 이하 뭇 장군들은 모두 머리를 푹 가슴에 묻고, 한마디의 말도 못하였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말석 가까이 앉아 있는 소년 부장 관창(官昌)은 때때로 눈을 들어서 살피어 보았다. 그러나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는 것뿐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머리를 가슴에 묻고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드디어 왕께서 먼저 머리를 조금 드시었다.

「좋은…… 방책은?」

위엄있는 왕자의 음성이라기보다. 오히려 탄원하는 사람의 비통한 소리에 가까왔다. 왕의 제일 가까이 앉았던 대장군 김유신이 머리를 숙인 채 혼잣말같이 말하였다.

「죽기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스런 사람은 없을까?」

왕은 머리를 천천히 유신에게로 돌렸다.

「누구든 죽기는 무서워하니깐......」

왕의 이 말씀을 탄식으로 들을까, 혹은 비웃음으로 들을까, 말석에 앉아서 왕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관창의 눈은 차차 광채가 더하였다. 나라를 위해서는 죽음을 아끼지 않는 한 소년이 여기 있는 것을 잊으셨읍니까? 저에게 죽음을 명하소서. 어떤 일을 명하시든 이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행하겠읍니다.

김유신 장군의 음성이 다시 조용한 방에 울리었다.

「피폐한 군심을 돋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감한 죽음이 필요하옵니다.

유신에게 붓고 있던 왕의 눈은 이편으로 돌아와서 만좌를 둘러보았다.

「없느냐? 누구든 나설 이 없느냐?」

만약 왕이나 유신 장군의 눈이 잠시라도 관창 소년에게로 왔더면,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제가 죽겠읍니다고 일어설 것이었다. 엄숙한 이 좌석의 공기를 흩어놓기가 어려워서 소년은 누구의 눈이 자기에게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긴장된 마음으로 사면을 살피고 있었다.

「없느냐? 없느냐?」

왕은 마음이 조급한 듯이 다시 부르짖으시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유신 장군이 고즈넉이 그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소신이 가겠읍니다.」

이 뜻밖의 말에 왕 이하 뭇 장군들은 멍하니 유신 장군을 쳐다볼 뿐이었다.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없었다.

유신 장군은 천천히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때에 왕께서 황급히 일어서면서 장군의 소매를 잡았다.

「장군이 죽음의 길을 밟으면, 장차 이 신라의 대군을 누가 거느리겠소?」

왕은 유신의 소매를 잡으시고 이렇게 근심하셨다. 유신은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러나 남에게 권하지 못할 일을 소신밖에 갈 이 누구오니까? 아무라도 바쳐야 할 제사─ 소신이 마지막 충성을 다하겠읍니다.」

왕의 눈에는 눈물이 보였다.

「그러면 장군이……」

「네.」

그러나 이때였다. 유신 장군의 곁에 앉아 있던 흠춘(欽春) 장군이 벌떡 일어섰다.

「야, 반굴(盤屈)아! 반굴은 어디 있느냐?」

반굴은 흠춘 장군의 아들이었다.

「네, 여기 있읍니다.」

반굴은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여 황망히 일어서서 아버지의 가까이로 갔다.

「너 가거라!」

「네!」

「곧 준비해 가지고 시재로 가거라.」

유신 장군의 소매를 붙들고 계시던 왕은 얼굴을 반굴 소년에게로 돌리시었다. 유신 장군의 충성 때문에 괴었던 눈물은 소년의 충성에 마침내 땅에 떨어졌다.

「네가 가겠느냐?」

「네!」

「가면 죽는다!」

「네!」

「죽어도 좋으냐?」

「네!」

아무런 물음에도, 「네」의 한 마디 대답뿐이었다. 왕은 마침내 유신의 소매를 놓고 소년의 두 손을 힘있게 잡으시었다.

「가거라. 가서 죽어라! 결코 살아서 돌아와서는 안 된다. 신라의 대군이 보는 앞에서 용감히 싸워서 적의 칼을 받고 죽어라!」

이리하여 아직 싹도 트지 않은 어린 용감한 혼은 말 위에 몸을 싣고 창을 비끼고, 백제의 날카로운 군사의 진을 향하여 채찍질을 하였다.

왕이며 뭇 장군이며, 신라의 대군과 당나라의 원병들은 모두 무슨 큰 구경이나 하는 듯 이 백제의 진을 향하여 달려가는 나이 어린 부장의 용감한 뒷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을 사지(死地)로 보낸 흠춘 장군도 다른 장군들과 함께 밖에 서서 자기 아들의 용감스런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서 만나지 못할 이를 보내는 장군의 눈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눈물이 보였다.


2[편집]

반굴 소년의 말을 달리는 모양이 차차 멀어졌다. 마침내는 백제의 진중에까지 들어갔다.

「갔구나!」

유신의 입에서 이런 혼잣말이 나왔다.

멀리 보이는 백제의 진중에서는 분탕이 났다. 이 뜻하지 않은 기마장군을 향하여 사면에서 백제의 군사들이 개미같이 달려들었다. 마술(馬術)에 숙달한 반굴은 백제 군사들을 말발로 밟으면서 좌충우돌하였다. 때때로는 번쩍이는 창의 반사광이 신라진에까지 보이는 때도 있었다. 말잔등에 높이 앉은 반굴 소년의 모양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백제의 군사들을 무찌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한 개의 소년이 수천 명의 백제 군사를 당할 수가 없었다. 난군 가운데를 이리저리 무찌르며 다니던 반굴 소년과 그가 탔던 말의 모양이 한순간 없어졌다.

「아!」

신라의 장군들이 놀라서 반굴의 용자를 찾으려 할 때에, 반굴이 탔던 말이 벌떡 일어서는 모양이 보였다. 그러나, 순간 전까지 말등에 앉아서 창을 휘두르던 반굴 소년은 이미 말 등에 없었다. 말이 거꾸러졌던 자리 근처에 백제 군사들이 삥 둘러섰다.

「와아!」

거리가 멀므로 소리가 크게는 안 들렸지만, 많은 사람의 함성이 신라의 진중에까지 들렸다.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유신 장군은 천천히 머리를 돌려서, 반굴 소년의 아버지요 유신 장군 자기의 동생 되는 흠춘 장군을 보았다. 흠춘 장군은 머리를 푹 수그린 채 백제의 진은 바라보지도 않고 있었다.

유신 장군은 머리를 좀 더 돌려서 왕을 보았다. 왕께서는 비통한 안색으로 묵묵히 백제의 진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잠시 왕과 흠춘 장군의 안색을 살피고 있던 유신 장군은 다시 뒤로 향하여 돌아섰다. 보매 신라의 진중에는 어떤 동요가 있었다. 용감한 소년이 단신 백제의 진중에 뛰쳐 들어가서, 좌충우돌로 백제군을 무찌르다가 힘이 부족하여 죽고만 이 영웅적 행동은 크게 신라군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모양이었다. 군인들의 눈에는 모두 핏대가 섰다. 백제 군인들 보기만 하면 달아나던 신라의 군인이라고는 볼 수가 없을이만치, 군사들 사이에는 어디인지 모르게 힘과 용기의 기운이 보였다.

잠시 군심을 바라보던 장군은 무거운 기침을 한 번 한 뒤에, 목소리를 가다듬어서 고함쳤다.

「누구─ 한 사람만 더 백제의 진중에 단신으로 갈 사람은 없느냐?」

유신 장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뜻 안 한 곳에서 계집애의 소리와 같은 가냘프나 힘있는 대답이 유신 공의 곧 뒤에서 났다. 그것은 아까 반굴이 백제 진을 향하여 떠날 때부터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관창이었다.

유신 장군은 관창을 내려다보았다. 관창은 명랑한 눈으로 아무 거침이 없이 장군을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가겠느냐?」

「예!」

「가면 죽는다!」

「예!」

「죽는 것이 무섭지 않으냐?」

역시 「예」하고 대답하려던 관창은 나오려는 말을 도로 삼켜버렸다. 지금 이렇듯 쾌활하고 명랑한 생명이 일각 뒤에는 없어져 버린다 하는 것이 관창에게는 무서웠다. 아까 용감스러이 말을 달려서 가던 반굴도 지금은 벌써 죽어서 다시 만날 길도 없지 않은가. 반굴이 말 엉덩이에 채찍질하던 그 소리조차 아직 귀에 남아 있거늘, 반굴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어떠냐, 죽는 것이 무서우냐?」

장군은 다시 재촉하여 보았다.

「예!」

「그럼 그만두련?」

「네, 죽는 것이 무섭기는 하지만, 의(義)는 죽음보다도 더 중하옵니다.」

용감한 대답이었다. 이 용감한 대답에 칭찬의 한마디라도 하려던 유신 장군은, 목이 메어서 말을 하지를 못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관창에게 가까이 가서, 두 손을 들어서 관창의 두 어깨를 붙들 뿐이었다. 잠시 뒤에 장군은 겨우,

「장하다!」

이렇게 한 마디를 입 밖에 내었다.

왕도 감격하신 모양이었다. 잠시 관창의 얼굴을 들여다보시던 왕은

「네가 품일(品日) 장군의 아들이냐?」

하고 물으셨다. 관창이 대답하였다.

「예!」

「몇 살이냐?」

「열 여섯이올시다.」

「음, 그 아비에 그 아들─ 가라! 가서 죽어라!」

아직껏 왕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관창의 아버지 품일 장군이 자기의 아들에게 향하였다.

「자 어서 가라! 가서 싸우고 싸워서 죽어라! 결코 살아서 다시 내 앞에 돌아왔다가는 안 된다. 살아서 돌아왔다가는─ 돌아왔다가는, 이 아비가 결단코 그냥 안 두겠다.」

관창은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의 아들은 목숨을 그냥 보전하려고 적진에 가는 바가 아니니 걱정을 마십시오. 이것이 영결이올시다.」


3[편집]

관창은 이편으로 돌아와서 사랑하는 말의 안장을 다시 검분하고, 갑옷과 투구의 끈을 다시 단단히 맨 뒤에 손익은 창을 길게 비껴든 뒤에, 용감스러이 적진으로 향하였다. 방금 신라의 한 무장을 죽인 백제 군사들은 아직 두런거림이 끊어지지 않은 때였다. 그들은 신라의 진에서 또 이리로 달려오는 한 무장을 보았다.

「또 온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신라의 한 무장 같은 것은 우스웠다. 커다란 신라의 군대라도 백제군을 보기만 하면 늘 달아나고 했으니까─

관창은 서슴지 않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백제의 군사들 사이로 말을 달려서 들어갔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그에게는 무서움이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눈앞에 수없이 덤비는 백제의 군사들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의 귀에는, 백제의 군사들이 지르는 함성이 들리지 않았다. 말을 달려서 이리로 저리로 달려 다니며 창에 닥치는 모든 물건을 함부로 찔렀다. 이미 각오한 죽음이매, 죽음의 공포며 하는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아무 의식도 없이 함부로 이리저리 창을 두르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부로 달리면서 창에 닥치는 물건을 마구 찌르고 있던 관창은 문득 이상한 충동을 깨달았다. 몸이 웬일인지 공중에 떴다. 그 떴던 몸이 내려질 때는 그의 몸은 말 등에 있지 않고 커다랗게 땅에 떨어졌다.

「사로잡아라!」

「잡았다!」

이런 백제 군사들의 부르짖음을 어렴풋이 들으면서 아직도 손에 잡고 있던 창을 휘두르려 할 때는, 그의 몸은 억센 백제의 군사 몇 사람의 팔에 힘있게 안기었다.

이 소년 포로는, 백제 명장 계백(階白)의 앞에 끌려갔다. 계백이 군인들을 시켜서 포로의 갑주를 끄르니까 뜻밖에도 그 속에서는 계집애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소년이 나왔다. 계백은 의외인 듯이 잠시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관창.」

「나이는?」

「열여섯.」

당돌하고 맹랑한 대답이었다. 계백은 이 당돌한 태도에 탄복하였는지, 잠시 더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좌우를 돌아보았다.

「신라에는 좋은 군사가 있기도 하다.」

그리고는 다시 아까운 듯이 관창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떠냐, 백제에 항복을 하면?」

「나는 신라 사람이오.」

「약한 신라보다 강한 백제가 좋지 않으냐?」

관창은 계백의 눈을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지는가 경쟁을 하자는 듯이 계책과 관창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마침내 관창이 입을 열었다.

「장군이 신라에 항복을 해서 신라를 강하게 하여 주시오. 약한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남아의 쾌사가 아니오?」

소년의 이 말에는 계백도 고소(苦笑)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소년의 위기를 사랑하여 도로 신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군사들에게 관창의 말과 창을 도로 내어주기를 명하였다.

죽으러 떠났던 관창은 죽지를 못 하였다. 다시 무사히 말에 올라서 신라의 진으로 향할 때는 관창은 스스로 부끄러워서 감히 머리를 들지를 못하였다. 죽기를 결심하고 죽으러 떠났던 몸이 적장의 동정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오니 무슨 면목으로 왕과 뭇 장군들을 뵈올까!

신라의 진 가까이로 오매, 무심한 신라 군인들은 관창이 살아서 돌아옴을 보고 환호의 소리를 높이 하였다. 그것을 귓결로 들으면서 관창은 초연히 말께 내려서 아버지의 곁으로 갔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살아서 돌아오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 주기는커녕, 휙 머리를 돌려서 외면을 하여 버렸다. 곁에 있던 다른 장군들도 의리의 미소는 얼굴에 떠나 반가와하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여기서 발을 더 내놓을 기운을 잃은 관창은 잠시 주저한 뒤에 돌아서서 진 뒤 조용한 곳으로 찾아갔다. 천 가지 만 가지의 생각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하였다. 자기가 부러 죽음을 피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는 죽음을 바랐건만 저편에서 자기를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것이었다. 그렇거늘 우리 진중에서는 왜 이다지도 자기에게 찬 대접을 할까?

그렇다! 신라의 퇴폐한 군심을 격동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이 필요하다. 자기는 아무리 천지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일이 있는 자기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군심을 격동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죽지 않으면 안 될 자기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이게 될 일이냐? 다시 가자. 이번에도 못 죽으면 또다시 가자. 몇 번이든 언제까지 자기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진중으로 가자.

관창은 다시 맹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창을 비껴들고 다시 말 위에 올랐다. 관창이 장군들의 곁을 말로써 지날 때에 곁눈으로 보매, 아까 불쾌한 듯이 외면을 하였던 아버지가 다시 아까운 듯이 아들의 용감스러운 태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관창은 백제진에서 또 몇 사람의 군사를 죽인 뒤에 사로잡혔다.

먼젓번에는 그냥 놓아 보낸 계백이었지만, 두 번째 다시 온 것을 보고는 용서를 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부러 죽음의 길을 취하려는 관창은 마음껏 계백을 욕하였다. 이리하여 관창은 아까운 열여섯 살이라는 나이를 최후로 칼날의 이슬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의 의기를 역시 버릴 수가 없는 계백은 관창의 머리를 관창의 말 안장에 달아서 신라진으로 말을 돌려보냈다.

신라의 진에서는 어렴풋이나마 관창이 잡힌 것을 보고, 그 뒤에 관창의 말이 혼자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마주 나가서 말을 잡았다. 말 안장에는 관창의 원한을 머금은 듯한 머리가 달려 있었다.

관창의 머리는 창의 아버지에게 곧 전하였다. 그것을 받아 쥔 품일 장군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물끄러미 그 머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꼭 죽어라!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이런 명령으로 내보냈던 아들이었지만, 비명에 죽은 아들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고 들여다보매,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열여섯 살이라 하면 아직도 장난이나 하면서 놀 나이다. 나라를 위하여는 반드시 죽어야 할 목숨이었지만, 어버이 된 정리로서는 또한 무심히 아들의 머리를 볼 수가 없었다. 이름 높은 장군의 눈에도 아들의 애처로운 일생을 조상하는 눈물이 맺혔다.

누가 장군의 어깨를 가만히 잡아당겼다. 돌아다보니 왕이었다.

「장군, 얼마나 애통하오?」

장군은 허리를 굽혔다.

「나라를 위해서 죽었으니……」

「장군의 처지로는 아깝고 심통하겠지만,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위로받으시오.」

「황공하옵니다.」

이때였다. 저 뒤 신라 진중에서 마치 무너지는 듯한 무서운 함성이 들렸다.

「복수다!」

「원수를 갚자!」

「헛죽음을 만들지 말자!」

두 소년의 죽음에 격동한 신라 군사들은 마침내 함성을 지르면서 복수의 싸움을 하려고 덤비기 시작하였다.

장군들은 황망히 부장들을 시켜서 각 진중으로 가서 격동된 군심을 좀 진중시켜서 구체적 싸움을 돋우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격동된 군심은 장군의 명령에도 복종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복수심과 용기에 격동된 신라의 군사들은 아직껏 무서워하던 백제의 진을 향하여 복수전을 하러 용감히 달려나갔다.

두 소년은 죽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죽음이 아니었다. 어전회의 때에 예측한 바와 같이 두 소년의 죽음은, 피폐하고 겁 많던 신라의 군심으로 하여금 용기와 힘으로 찬 강한 군사가 되게 한 귀중한 제물이 되었다.

전쟁에 있어서 사람이 둘쯤 죽는다는 것은 아주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반굴과 관창 두 소년의 죽음은 신라의 군심을 격동시켰다. 죽음을 귀신보다도 더 무섭게 보던 신라 군사들은 두 소년의 죽음에 감동되어 마침내 아직껏 먹고 있던 겁을 모두 씻어버리고 용감히 백제의 군사와 싸우러 백제진을 향하여 달려갔다.


4[편집]

백제의 군사가 비록 강하다 하나, 그 강하다는 것은 마음이 강한 것이었다.

지금 백제의 군사를 치러 달려가는 신라의 군사들도 전과 달라져서 마음이 강하게 된 군사들이었다. 더구나 신라 군사와 당나라 구원군과 합한 수효는, 백제의 군사의 수십 배가 되었다.

백제의 군사가 비록 강하다 하나, 수효에 수십 배가 되는, 역시 지금은 강한 신라의 군사를 대적할 수가 없었다. 성낸 물결과 같이 달려오는 신라의 군사에게 백제의 군사는 거의 전멸을 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 명장 계백도 이 전쟁에서 그만 목숨을 잃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황산에서 크게 이긴 신라의 군사들은 그 승리에만 만족치를 않았다. 아직껏 몇 해를 두고 백제에게 수모를 받던 그 원한이 한꺼번에 폭발된 신라의 군사들은, 황산에서 백제 군사를 전멸시킨 뒤에, 그 뒤를 따라서 완전히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백제의 서울로 몰려 들어갔다. 이전에는 백제의 군사를 만나기만 하면 달아나던 신라 군사건만, 두 소년의 죽음으로 마음이 강하게 된 지금은 백제 군사를 보기만 하면 따라가 싸우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

이리하여 갑자기 강하게 된 신라의 군사는 마침내 백제의 서울까지 함락시키고, 백제를 신라에 합병하게까지 이르렀다.

귀여운 두 소년의 죽음이었다. 두 소년이 용감히 자기의 목숨을 나라에 바쳤기에 신라는 오랫동안 수모받아 오던 백제를 격퇴한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전에 그렇게 무서워 하던 백제를 자기 나라에 합병하게 되도록 강하게 되었다. 신라가 백제를 통일한 그 원동력은 두 소년의 죽음에 있다. 얼마나 힘 있는 죽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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