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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네/신무대왕과 궁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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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환아!

위에서 아버지는 고지식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그러나 고지식한 것은 잘못하다가는 또한 미련한 것과 혼동이 되기가 쉬운 것이다. 고지식한 것은 오직 마음이 곧고 단순함을 가리킴이요, 미련한 것은 아무 사려가 없이 둔하고 심술궂고 밸만 센 것을 가리킴이다.

고지식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성공은 못한다 할지라도 그 행동은 아름답고, 설혹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미소로써 용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거기 반하여 미련한 사람의 행동은 남을 역하게 하는데 지나지 못하며, 때로는 그 행동 때문에 자기와 및 남까지 해를 보게 하는 것이다.

일환아!

너는 미련한 애가 되지 말아라. 네가 고지식하고 직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버지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네게서는 미련한 언행이 나온다. 어린애라고 그냥 버려두지 못할 미련한 언행이 때때로 보일 때에,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느냐? 아예 미련한 애는 되지 말아라.

네가 약고 간사한 애가 되는 것은 아버지가 바라지 않는 바다. 그러나 결코 미련한 애는 되지 말아라. 너는 슬기로와라. 의를 알아라. 도리를 알아라. 순서를 알아라. 사람의 길을 알아라. 결코 미련하고 둔한 사람은 되지 말아라.

구약 성경에 이런 말이 있지 않으냐?

아브라함이 나이가 늙었다. 그에게는 에서와 야곱의 두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 에서는 좀 미련한 편이었다. 작은아들 야곱은 약은 편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에서를 사랑하였다. 미련은 하나 미련하니 충직하였다. 아버지는 그것을 사랑하였다. 야곱의 약은 것은 그다지 좋게 못 보았다.

에서는 늘 산에서 사냥을 하고 하였다. 그의 몸은 모두 털투성이고 건장하였다. 야곱은 약은 만치 생김생김도 빤빤하였다.

어떤 날 에서는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돌아왔다. 배가 지독히도 고팠다. 눈이 잘 보이지 않을만치 배가 고팠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집으로 돌아오매, 동생 야곱은 그 때 팥죽을 쑤고 있었다. 그 구수한 냄새는 주린 에서의 코를 찔렀다. 에서는 동생에게 갔다.

「동생, 팥죽 한 그릇 주게.」

야곱은 형을 쳐다보았다. 주리고 주린 그 꼴은 지금 팥죽 한 그릇을 위해서는 천하라도 희생할이만치 급한 것이 분명하였다. 야곱은 약았다. 형의 그 약점을 본 야곱은, 늘 부럽던 일을 이 기회에 청구하기로 하였다.

「형님, 팥죽 한 그릇 드릴께 맏아들의 자리를 내게 주겠소?」

「동생,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게야 말이 되나? 다른 청구면 아무것이든 줄게, 어서 팥 죽 좀 주게.」

야곱은 대답하였다.

「형님이 그게 싫다면 그만두려 나는 팥죽을 못 드리겠소.」

「아, 그러지 말고......」

「싫어요.」

여기서 한두 번 더 승강을 해본 뒤에, 공복 때문에 견딜 수가 없던 에서는 하릴없이 야곱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팥죽 한 그릇에 에서는 아브라함의 맏아들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맏종손(宗孫)인 그 귀중한 자리를 동생 야곱에게 물려 주기로 약속한 것이었다.

땡잡은 것은 야곱이다. 팥죽 한 그릇으로 그는 귀한 자리의 귀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히 야곱의 약음과 에서의 미련함에서 나온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임종이 이르렀다. 두 아들은 임종의 아버지 앞에 불리었다. 야곱은 미리 준비를 다하였다. 에서는 손발에 털이 많은데, 야곱은 손발이 희고 고운지라, 야곱은 그 것을 속이기 위하여 양의 가죽을 쓰고 들어갔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이젠 눈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임종의 아버지는 먼저 맏아들을 불렀다.

「야, 에서!」

「네!」

대답한 것은 에서가 아니요 야곱이었다.

「응, 에서냐? 가까이 온! 내가 임종이 임종에 이르러 축복을 해야겠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 될 에서야, 가까이 와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라.」

「가까이 왔읍니다.」

축복을 하려던 아버지는 문득 손을 움쳤다.

「너, 야곱이로구나?」

야곱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런 때에 임하여 본색을 나타낼 야곱이 아니었다. 야곱은 시치미를 떼었다.

「아니올시다. 에서올시다.」

「그럼, 네 목소리가 왜 다르냐?」

「다를 리가 없읍니다.」

「어디 에서는 손에 털이 많이 났는데 만져 보자. 손을 가져오너라.」

이것은 야곱이 미리 다 준비했던 바였다. 야곱은 양의 가죽 씌운 손을 아버지의 앞으로 내밀었다.

아버지는 손을 더듬어서 쓸어 보았다. 그런 뒤에야 머리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이 맏아들을 위하여 축복하였다. 그래서 맏아들 에서는 뒤서게 되고 작은아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아, 마침내 이스라엘 십이지파의 조상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라는 명예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


일환아!

여기도 또한 약은 사람의 성공이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네게도 가증하지 않으냐? 그렇다고 에서의 미련도 또한 배워서는 못쓸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할지라도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맏아들의 자리를 판다 하는 것은 얼마나 미련한 짓이냐? 시재의 급한 주림만 생각하고 장래 영구의 주림을 생각지 않는 에서는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냐?

지금에 앉아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가련한 사람이었나니, 그의 맏아들은 팥죽 한 그릇을 위하여 맏아들의 자리를 내어던진 만치 미련한 사람이었고 그의 작은아들은 또한 남의 약점을 잡고 그것을 이용하여 맏아들의 자리를 속여서 빼앗은 간사하고 약은 사람이다. 그가 가진 두 아들은 다 결점이 있는 사람이다.

일환아!

전에도 말하였거니와, 너는 결코 약은 사람이 되지 말아라. 야곱이 되는 것을 아버지는 절대로 반대하는 바다.

그렇다고 또한 에서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되지 말아라. 오직 곧고 고지식한 사람은 될지언정 결코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되지 말아라.

여기에 에서와 야곱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취하라 하면 약은 야곱보다는 오히려 어리석은 에서가 나을지 모르나, 에서도 또한 본받을 만한 사람은 결코 못된다. 약지 말아라! 그렇다고 또한 미련하지 말아라! 이 가운데를 취하기는 힘들지만 가운데를 넉넉히 취한 사람은 인생의 보석이라 할 만치 아름다운 사람이다.

일환아!

여기서 아버지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주마. 어리석고 미련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은 가련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여 주마.


신라 제 사십 오 대의 왕이신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아직 잠저(潛邸)해 계실 때였다.

그 이에게 궁파(弓巴)라 하는 협사(俠士)가 있었다. 그 인물됨이 지혜 없고 미련하기는 하나, 용맹과 힘은 능히 백 사람을 당할 만하였다. 주먹으로 바위를 치면 바위가 부서질 만치 힘이 세었고, 그 용기 또한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래에 큰 뜻을 품고 있는 신무대왕은 이 궁파를 잘 이용하고 계셨다.

어떤 때, 그 이는 조용히 파를 부르셨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가 날 끝까지 돕겠나?」

「돕다뿐이오리까?」

「만약 끝까지 도와서 이후 내가 성공하여 보위에 오르는 날에는, 큰 상을 줄 테니 끝까지 힘써 주게.」

『돕기야 돕다뿐이오리까. 그렇지만 성공을 하시면 어떤 상을 주시겠읍니까? 그것을 한 번......」

「다른 것보다도 먼저 자네게 애랑(愛娘)이 하나 있지 않나? 내가 위에 오르기만 하면 그 사람을 맞아서 비(妃)를 삼지.」

이리하여 궁파와의 한 가지의 약속은 성립되었다.

그 뒤 일은 순조로이 되어 나갔다. 비록 지혜는 없다 하지만 용맹과 힘은 남보다 몇 곱 되는 궁파를 이용하여, 신무대왕은 군사를 일으켜서 싸움을 돋우어, 드디어 왕위에까지 올라가시게 되었다.

위에 올라가신 신무대왕은, 궁파와의 옛날 약속을 잊지 않고, 궁파의 딸을 맞아들여서 비로 삼으셨다. 이번 왕위를 얻은 데는 과연 궁파의 힘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급기 비로 모셔 들여오고 보니깐 많은 결점이 보였다. 민간의 상집에서 길러난 비는 궁중의 예의를 몰랐다. 맨발로 뜰에까지 나서기가 일쑤였다. 상에 바치어 온 만반진찬을 모두 내려놓고 움켜쥐어 먹기가 예사였다. 때때로는 왕께서 정사를 보시는 곳에도 뛰어나왔다. 궁녀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머리채를 휘어잡고, 몸소 물고 뜯고 때리기가 예상사였다. 몸을 부정히 가지고 옷고름도 단정히 매지 않고 하는 일, 하는 말이 모두 천태로서 요컨대 거리 상집안에서 하던 행동이며 말을 궁중에 들어와서도 그냥 하는 것이었다. 한 때는 왕께서도 보고도 못본 체 하시고 듣고도 못 들은 하시어, 이제 차차 고쳐지려니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개 꼬리 삼 년 지나도 황모 못 된다는 말과 같이, 비의 천스러운 언행은 아무리 기다려도 고치지를 못하였다. 이것이 너무 딱하여 때때로 왕께서 타이르시면, 그때는 울며불며 행악까지 하는 것이었다. 심한 때는 왕의 옷을 휘어잡고 왕께 펄펄 달려드는 일까지 있었다.

여기서 왕은 비 때문에 매우 괴로와하셨다. 일찌기 궁파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 딸을 맞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비의 너무도 심한 무식 때문에 왕은 고통을 받으셨다.

비의 이 심한 모양은 신하들도 잠자코 있지 못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궁중의 일이라 감히 말을 내지를 못하였지만, 비는 나날이 더 추태가 심해 매, 신하들은 드디어 왕께 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궁파는 본시 비천한 사람─ 그 사람의 딸을 비로 맞으신다 하는 것은 당치않은 말씀이옵니다. 즉시로 도로 내어보내시는 것이 좋을 줄 생각하옵니다.」

신하들은 마침내 왕께 이렇게 말씀드리었다. 비에게 진저리가 나셨던 왕은 이 기회를 좋다 하시고,

「그럼, 경들의 마음대로 하오.」

하시어서, 신하들에게 이 사건의 처리를 내어맡기셨다.


왕에게서 왕비 처치에 관한 권리를 받은 신하들은, 내전으로 들어가서 불문곡직하고 왕비를 궁에서 내몰았다. 신하들에게 이 욕을 본 왕비는 왕께 그 하소연을 하러 가려 하였지만 그것도 못하게 하고, 궁 밖으로 마치 짐승이라도 내어쫓듯 쉬쉬 하여 내몰았다. 왕비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소리를 높여 통곡하면서 궁에서 나갔다. 궁에서 나간 왕비는 즉시로 자기 아버지 되는 궁파에게로 갔다.

궁파는 그때 청해진(淸海鎭)에 대사로 있을 때였다.

궁파의 딸은 길을 내내 어이어이 쳐울며 청해진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곧 아버지를 찾아들어갔다. 지금은 왕비로서 궁중에서 온갖 호화로움을 다 누리고 있을 제 딸이 머리를 헤뜨리고 어이어이 울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보고, 궁파는 놀라서 뛰어나가 맞았다.

「너 웬일이냐?」

무식한 파에게는 왕비도 없었다. 여기 어이어이 울면서 오는 여인은 자기의 딸에 지나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웬일이냐고 묻는 말에도 대답을 못하고 딸은 그냥 울기만 하였다. 성미가 조급한 궁파는 벌컥 성을 내었다.

「계집애도 무슨 철없는 일이란 말이냐? 어이어이, 이게 무슨 철 없는 일이란 말이냐? 어이어이 쳐울며...... 갑자기 오기는 어떻게 오며 울기는 왜 우느냐 말이다.」

「......」

「대답을 해라! 왕비라는 게 이게 무슨 꼴이냐?」

「아버지, 난 왕비가 아니야─」

「무얼?」

「난 쫓겨났소.」

「그게 무슨 말이냐?」

「난 그놈들한테 매맞고 쫓겨났소.」

「그게 무슨 말이야? 좌우간 들어가서 자세히 말을 해라.」

궁파는 딸을 데리고 들어갔다.

거기서 딸은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서 제 아비에게 호소하였다. 그 사연을 다 듣고 궁파는 성을 머리끝까지 내었다.

「왕은─ 왕도 가만 있더냐?」

「그 사람한테 가려도 가지도 못하게 해요. 그래서 알리지도 못하고 거기서 그대로......」

「에익! 요망한 계집애 같으니! 너 같은 어리석은 게 왕비가 다 뭐냐? 그걸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비록 자기의 딸을 꾸짖기는 하였지만, 궁파의 마음에는 왕과 대신들에게 대한 노염이 맹렬히 일어났다. 그 용맹과 힘으로는 남에게 몇 곱이 된다 하지만, 사리를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궁파는, 그 쫓겨나온 연고를 알아보기 전에 먼저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앞섰다.

왕은 순전히 자기의 덕으로 (궁파는 그렇게 믿었다) 지금 보위에 올라가셨다.

이 은혜를 왕은 저버렸다.

왕은 보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자기 딸을 왕비로 삼아 주마고 단단히 약속을 하였다. 그렇거늘, 왕은 오늘 그 약속까지 어기었다.

왕은 은혜를 잊었다. 그리고 또한 약속을 어겼다.

이런 무신하고 무의한 왕에게 대해서 내가 가만 있을 것인가? 내 도움이 없었더면 지금의 보위에 못 올라갔을 왕을 이제 도로 그 위에서 끌어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리 하여 왕에게 첫째로는 약속을 저버리는 일의 무서움을 알게 하고, 둘째로는 이 궁파의 힘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하여야겠다.

자기의 딸이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알아볼 만한 마음의 너그러움을 못 가진 궁파는, 이렇게 왕에게 반심을 품고, 왕과 이 나라에 대하여 모반하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즉시로 반군을 일으켰다. 그리고 서울을 치러 가려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궁파가 반심을 품고 반란군을 일으키련다는 소식은 곧 서울에까지 왔다. 그리고 그 말은 조정에도 곧 들어왔다.

그때 신무대왕께서는 신하들을 모으시고 나라 일을 의논하고 계시던 때였다.

이 소식은 왕과 뭇 신하들을 여지없이 놀라게 하였다.

왕은 그 소식을 들으신 뒤에 눈살을 찌푸리셨다. 그런 뒤에 한참을 생각하셨다. 이윽고 왕은 머리를 드셨다.

「누구든 가서 궁파를 벨 사람은 없겠소?」

왕의 이 말씀에 대신 갑(甲)은 을(乙)을 보았다. 을은 병(丙)을 보았다. 병은 정(丁)을 보았다. 이리하여 서로 얼굴만 차례로 보았다. 가겠읍니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궁파는 지혜 없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 힘은 남의 몇 곱이 되었다. 그런 궁파에게 달려갈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왕은 한참을 좌중을 바라보시다가 다시 말씀하셨다.

「누구 갈 사람이 없겠소?」

거기 대하여 갑은 을을 보고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을공, 가 보시구료.」

그러나 을은 머리를 저었다.

「글쎄, 가면 궁파 같은 놈이야 즉시로 베겠지만, 내일 모레가 제사날이구료! 병장군 어떻소?」

「참 신기하오. 나도 내일이 제사날인데─ 정장군이 가 보시지?」

「나는 이즈음 설사가 심해서......」

이리하여 서로 차례로 밀기만 하였다.

이렇게 서로 밀기만 해서 아무리 해야 갈 사람이 없을 때에, 그들은 다른 계획을 왕께 드렸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궁파의 딸을 도로 왕비로 모셔오면 이번의 분요는 저절로 삭아지리라 하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 그렇듯 용감스러이 왕비를 몰아낸 그들이었지만, 위태로운 일을 만나서는 서로 또한 다시 왕비를 모셔 오기를 종용하였다.

한참을 대신 장군들의 의논을 듣고 계시던 왕은 주먹으로 땅을 두드리셨다.

「무슨 말들이오? 먼젓날 비를 겨우 내보내고 마음을 조금 놓고 있는데, 다시 그 사람을 궁으로 데려 들여온단 웬 말이오? 그렇게 가기가 무서우면 그만 둘 일이지, 비를 다시 궁으로 들인단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이오? 아! 내 아래는 용맹과 충성을 아울러 가진 신하는 하나도 없느냐?」

신하들의 비겁한 꼴에 왕은 탄식하시기를 마지 않으셨다.

그때 문득 왕의 머리에 떠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오늘 불행히 입시는 안하였지만 왕께서 시키기만 하면 아무런 일이라도 감행할 만치 충성되고 용기 있고, 그 위에 또한 지혜도 상당한 염장(閻長)장군이 왕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왕은 즉시로 장군을 부르셨다. 왕명에 의지하여 달려온 장군에게, 왕께서는 궁파가 반역을 하련다는 말씀을 알려 주시고, 즉시로 달려가서 궁파의 목을 베어 오기를 명하셨다. 장군은 왕명을 듣고 절하여 명령대로 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소장이 비록 약하오나 돌보아 주신 은공을 갚기 위하여 반드시 궁파의 목을 잘라다가 상감께 바치겠읍니다. 이틀 뒤에는 상감의 앞에 역적 궁파의 목이 놓일 줄 기다려 주시옵소서.」

이렇게 복수를 한 뒤에 어전을 물러나왔다. 어전을 물러나온 장군은 잠시 집에 들러서 조상 적부터 물려 내려오는 장검을 꺼내어 한 뒤에 역적 궁파를 베고자 청해진으로 향하여 말을 달려 떠났다.


청해진까지 가서 장군은 즉시로 궁파를 찾았다.

부르는 소리에 응하여 나온 청지기를 향하여 장군은,

「염장장군이 영감께 뵈러 왔다고 곧 여쭈어라」

고 하였다.

청지기는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만나시지 못하시겠답니다.」

청지기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장군은 다시 청지기를 달랬다.

「왜 못 만나시겠다는지도 짐작이 간다. 다시 한 번 들어가서 염장장군도 왕께 죄를 짓고, 몸을 피해서 여기까지 도망해 온 것이라 여쭈어라. 지금 사해는 모두 왕의 아래 왕의 명령을 복종해서 다른 데 피할 곳이 없어서 영감께나 몸을 의탁하러 왔다고 다시 잘 여쭈어 보아라.」

청지기는 다시 들어갔다. 조금 뒤에 안에서는 벽력 같은 고함 소리가 났다. 그것은 분명히 궁파의 소리였다.

「염치없는 자식이지, 별별 잡트리를 다해서 내 딸을 궁에서 몰아내고 무슨 염치로 여기를 온단 말이냐? 썩 돌아가라고 그래.」

청지기는 또 나왔다. 궁파는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못 만나겠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꼭 궁파를 만나서 왕께 받은 사명을 다 하여야 할 장군은, 다시 한 번 청지기를 사이에 두고 궁파를 달랬다.

「노염도 짐작이 못 가는 바는 아니지만, 따님을 내보낼 때는 나는 병 앓아서 집에 있어서 알지도 못한 일─ 알기만 했다면 한사코 말려서 그런 불상사는 안 생기도록 했을 것이다. 나도 지금 왕께 죄를 입고 할 수 없이 왕께 배반하려는 사람, 영감과 서로 합력을 해서 함께 원수를 갚으면 오죽 좋겠나? 다시 한 번 들어가서 잘 여쭤 봐라.」

이렇게 세 번 네─번을 청지기는 장군과 궁파의 사이를 왕복하였다.

마지막에 청지기는 나와서 장군에게 궁파의 말로서,

「사실로 반기를 들러 왔느냐?」

고 물었다.

거기 대하여 장군은 자기의 찬 보검을 청지기에게 보이며, 반기를 들 예산이 아니면 왜 조상 전래의 칼까지 가지고 왔겠느냐고 하였다. 청지기는 그 말을 가지고 또 궁파에게 들어갔다. 들어갔던 청지기는 다시 나왔다.

「그러면 잠깐 들어오시랍니다.」

청지기는 이렇게 말하였다.

장군은 마음으로 미소를 하였다. 그리고 청지기를 따라서 들어갔다.

청지기가 장군을 이끌어 들인 방은 넓다란 방이었다. 거기 궁파는 자기의 위력을 보이기 위하여 문 앞 문 뒤에 창을 든 파수를 세우고, 뜰 아래로 활이며, 창으로 무장한 파수들을 세워 두었다. 그 틈으로 청지기를 따라 들어가며 장군은 눈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고요한 발걸음과 고요한 태도와 고요한 안색으로 따랐다.

넓다란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청지기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 앉았지만, 방 안에는 장군 한 사람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워 둔 파수들은 마치 깎아 세운 듯이 움직임 없이 서 있었다.

(하하! 기껏 나한테 위엄성을 보이려는구나!)

장군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미소하였다. 이렇게 위엄성을 보이려는 이상에는, 좀 뒤에 궁파가 들어올 때는 더 위엄성을 보일 것이며, 혹은 처음부터 자기를 내리누를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하고 장군은 속으로 코웃음쳤다.

(궁파야, 어서 와서 내 칼을 받아라! 왕명으로 너를 베러 여기까지 온 내다. 네가 아무리 위엄성을 보이려 해도, 염장의 마음은 그맛 일은 우스울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장군은 고요히 허리를 젓고 있었다.


드디어 저편에서 발소리가 났다. 제걱제걱 하는 소리도 났다.

문이 열렸다. 여러 장졸에게 호위되어 궁파가 위풍 당당히 들어왔다.

궁파는 장군의 앞을 지나서 아래쪽으로 내려가서 덜석 주저앉았다. 그의 좌우에는 두 소년 부장이 칼을 뽑아 든 채로 시위해 섰다.

「장군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소?」

궁파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장군은 먼저 궁파의 얼굴을 눈이 부신 듯이 쳐다보았다. 그런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까 청지기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장군도 들었을 줄 아오.」

「그럼, 장군도 정의의 반군을 들겠단 말이오?」

「그렇소.」

「장군, 내가 잘못했단 말이오? 장군에게나 말이지 누가 잘못했소? 어디 말씀해 보시오.」

여기서 궁파를 칭찬할 필요를 느낀 장군은, 재간을 다하여 궁파를 칭찬하고 이 왕과 뭇 신하들의 행동을 그르다 하였다. 그리고 거기 덧붙이어 왕께 대한 나무렴을 많이 썼다. 무신하고 무의한 왕으로서 궁파에게도 그만치 무신 무의하였거니와 염장장군 자기에게 대하여도 많은 과실이 있었으며, 이번에 더구나 장군이 왕께 죄를 지었다 하는 것도 무슨 큰 실수가 아니라 왕께 진상한 과일 가운데 그 한 알에 벌레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 하고, 그런 사소한 일로 공 많은 장수를 죽이려는 왕은 포악 무도한 군주라고까지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할 수가 없었다. 장군이 세 치 혀끝을 놀려서 한참 왕을 나무라고 궁파를 칭찬할 동안 파는 차차 장군에게 속았다.

마지막에 장군이 궁파에게 향하여,

「자,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해서 신라를 치면, 그맛 신라 따위야 한 달을 못 가서 성문을 열게 아니오? 그러면 그때는 장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시고 나는 재상이나 되어서 나라를 도와가면 무서운 나라가 될 터이오. 그런데 장군─ 만약 그렇게 되면, 따님이나 내게 주시오 이 전에는 왕비니깐 감히 마음을 못 냈지만 그렇게 되기만 하면 그 따님을 꼭 내게 주시오.」

이런 말까지 할 때에는 궁파의 입도 꽤 벌어졌다.

「그때 내 딸을 또 며칠만 데리고 살다가 버렸다가는 한 칼에 죽을 줄 아오. 그래도 내 딸을 달라겠소?」

이런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다.

이렇게 서로 마음이 풀린 뒤에는 궁파는 염장장군을 위하여 주연을 열었다. 반역을 도모하는 두 장수는 장래 영구히 서로 배반치 말자고 술잔을 서로 바꾸었다.

술은 차차 돌았다.

마음에 다른 배포를 하고 있는 염장장군은 술을 먹는처럼만 하고 그냥 쏟아버리고 하였지만, 술을 즐기는 궁파는 연하여 먹었다. 더구나 한 사람의 장수를 동지로 얻었기 때문에 마음이 기뻐진 궁파는 술잔이 늦다 하고 채근하여 먹고 먹었다.

이리하여 궁파가 술이 취하는 기수만 보고 있던 장군은 궁파가 취하여 거의 정신을 잃게 된 뒤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덧 조상 때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 온 보검이 높이 들리었다.

「궁파, 왕명이다. 반역의 죄 알아봐라!」

한 마디의 고함과 동시에 번득이는 칼 아래 궁파의 목은 방바닥에 떨어졌다.

장군은 피가 흐르는 칼을 높이 들고 사면을 돌아보았다.

「주인에게 가담하려는 놈들은 다 나오너라. 정의의 칼이로다. 받고 싶은 놈들은 다 오너라」

벽력 같은 장군의 소리가 울리었다.


궁파에게는 많은 부하가 있었다. 창을 비끼고 있던 파수며 칼을 들고 있던 부장이며, 이런 호위하는 부하들이 많았다. 그러나 염장장군의 기세에 눌리어 움찔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오는 놈 없느냐? 주인에게 충성된 놈 없냐?」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뿐더러, 들고 있던 창이며 칼을 모두 슬며시 땅에 놓아 버린다. 눈을 부릅뜨고 칼을 비끼고 호령하며 있던 장군은, 아무리 기다려야 나오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큰 소리로 한 번 웃은 뒤에 궁파의 옷을 찢어서 궁파의 머리를 쌌다. 그리고 유유히 나와서 말에 올랐다.

이튿날 염장장군은 궁파의 머리를 왕 앞에 바치었다.

「가져왔읍니다.」

이렇게 말하며 옷소매에 싼 것을 내어놓을 때에, 왕은 그 소매를 펴고 물끄러미 들여다 보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그렇듯 용맹하고 그렇듯 힘세던 궁파가 지혜없기 때문에 오늘날 이 모양이 된 것은 왕에게도 가련히 보였다. 한 때는 왕과 힘을 같이 하여, 빼앗겼던 이 사직을 도로 찾는 데 큰 힘이 된 궁파도,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이다. 한참을 그 머리를 들여다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왕은, 머리를 들어서 염장장군에게 사례하셨다.

「장군의 노력 감사하오.」

간단한 이 한 마디에는 왕의 진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환아!

위에 기록한 것이 아버지가 하려던 이야기다. 네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가련한 말로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일환아!

너는 궁파의 이야기를 다 보았지. 네가 아무리 잘 보려 하여도 궁파의 행동을 지혜있는 행동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려(思慮)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슨 일을 만날 때에 그 일의 원인을 생각해 보며 자기의 취할 방책을 세울 줄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궁파의 딸이 쫓겨왔다. 그는 왜 쫓겨왔나? 궁파는 이것을 생각해 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제 딸을 쫓은 왕과 신하들을 원망하였다. 원망이 가해져서 그는 원수를 갚으려 하였다. 원수를 거꾸러뜨리고 나라를 빼앗으려 하였다.

물론 용기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용기의 뒤에 있어서 그 용기를 빛나게 할 만한 〈사려〉라는 것이 없은 것이다.

일환아!

너는 〈사려〉라 하는 것을 알아라. 약은 사람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아버지는 너를 사려 많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어리석지 말아라. 미련하지 말아라. 네게서 때때로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볼 때,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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