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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성 (현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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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雁)의 성(聲)

해동초인(海東樵人)

무정한 낙일이 너울너울 넘어가더니 울연히 붉은 저녁놀이 삼개 앞 너른 물을 물들여 위아래 하늘빛이 연지 세계를 이룬 속으로 옹옹히 울고 가는 기러기 소리가 삼개 동네 막바지 그중 오뚝한 오두막집 서창 앞에 시름없이 앉아 있는 부인의 귀뿌리를 거스른다.

그 부인은 나이 열칠팔 세쯤 되고 히사시가미에 연옥색 치마저고리를 경쾌하게 입었는데, 그 미묘한 용모와 정숙한 태도가 흡사한 추수부용이라. 어디로 보든지 가히 신사의 부인이라 하겠는데, 무슨 근심이 그리 첩첩한지 오른손으로 턱을 고이고 강천에 가득한 놀빛을 바라보며 얼굴에 무한한 수색을 띠고 정신없이 혼자 앉았다가 기러기 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한탄을 하고 하는 말이,

"에그, 벌써 기러기 가는데 한 달만 가 있으면 좋은 도리가 있다더니, 두 달이 넘어 지나가고 기러기가 날도록 왜 아무 소식이 없나? 에그, 옛적에는 기러기가 편지 전하는 일이 있었다더니, 저 기러기는 왜 저리 무정하여 우리 서방님 편지 하나 아니 전하여 주나!"

하며 수건을 들어 눈물을 씻는 그 부인은 청년 법학가 김상현(金商鉉) 부인 박정애(朴貞愛)라. 그 부인의 남편 되는 김상현은 저 시대 정치에 유명하던 김판서의 아들로서 일찍이 그 부친을 여의고 누이동생 영자(榮子)와 더불어 그 과거한 모당을 모시고 일가정을 어거하여 가는데, 원래 문벌이 혁혁하고 가산이 유여하여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터이라.

그러한 처지에 있어 만일 그 심지가 천박하여 지금 세상에 경박한 소년배 같으면 아무 사상 없이 화조월석에 주색에나 침혹하여 가무관현으로 한세상 보내는 것을 낙으로 알 뿐이언마는, 김상현의 가상한 뜻은 보통 사람의 보통 지식과 달라 비록 청년의 어린 마음으로도 전시대의 전광으로 알아 지금까지 연긍하는 폐습이 소위 양반이니 문벌이니 하는 고질을 타파하고 평등주의를 주장하여 세상에 인류 된 자는 천부인권이 다 같은 터이라, 특별히 양반·상놈의 구별이 없는 것인즉 전일에 조상의 뼈 우려먹던 악습은 믿을 것이 아니라 하는 사상이 없을 뿐더러, 지금 고명한 풍조가 날로 증진하는 이 시대에는 비록 문벌 좋고 재산이 요부할지라도 지식이 없으면 능히 생활치 못할 줄을 깨달아 어려서부터 공부에 유의한 결과로 매동 소학교와 관립 소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그 후에는 법률전문을 공부코자 하여 열여섯 살 먹던 해 춘기에 관립 법학교에 입학을 하였는데, 집은 자하골 청풍 교계라. 자하골서 황토마루 법학교에 통행을 하자면 자연 광화문 앞을 지나는 터이라. 학교에 가고 오는 길에 광화문 앞 석난간 모퉁이를 지나자면 번번이 어떤 여학생 하나가 책보를 끼고 지나가는데 그 어여쁜 외화와 아리따운 자태가 실로 희귀한 인물일 뿐 아니요, 그 정숙한 행검이 외모에 나타나는지라 항상 속마음으로 흠앙하기를,

'저 학도는 뉘 집 영랑인지 모르거니와, 인물도 미묘할뿐더러 여자의 품행을 잘도 가르쳤다. 우리 집 누이동생 영자도 여학교에 통학을 하지마는 저렇게 덕망이 있어 보이지 못하는데, 이 걱정이야.'

하는 자각이 그 학도 만날 적마다 있어, 집에 돌아가면 그 누이 영자를 다시 보는 일도 있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과 방학 기간을 제한 외에는 갈 적 올 적 아니 만나는 날이 없어 삼 년을 두고 만나 보매, 그 여학생은 자기를 어찌 보았는지 모르나, 자기는 자연히 눈에 익고 마음에 흠모하여 비록 말은 서로 아니하되 은근히 깊은 정이 들다시피 하여 남모르는 속마음으로 아무 때든지 저 여학생의 성명이 무엇이고, 집이 어디며, 어떤 사람의 딸인지 좀 알아보리라 하는 생각을 두었더라.

경종(警鐘) 소리가 땡땡땡 나더니, 애오개 마루턱으로 석양을 안고 넘어가는 마포행 전차(麻浦行電車) 위에는 승객이 다만 두 사람뿐인데, 그 한 사람은 사방모자에 법(法)자 표 붙인 청년 학생이요, 또 한 사람은 히사시가미에 분홍 리본을 꽂은 여학생이라. 그 두 학생은 화려한 용모도 거진 같고 준수한 태도도 조금 다를 것이 없어 천생 내외라 하였으면 좋을 듯하니, 만일 그 두 사람이 각각 책보만 아니 가졌을 것 같으면, 누가 보든지 내외끼리 산보 나온 사람이라 지목하겠는데, 그 두 사람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외면을 하고 앉았으니, 그 청년 남학생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곧 자하골 김상현이라. 그 김상현이가 광화문 앞 석난간 모퉁이에서 날마다 만나는 여학생을 뼈에 사무치게 흠모를 하던 중, 하루는 법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졸업 예식에 참례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한 그 여학생을 전에 만나던 곳에서 만나매, 그 여학생도 역시 오른손에는 우산을 들고 왼손에는 졸업증서 한 장을 둘둘 말아 책보에 꽂아 들고 오는지라. 이때 김상현의 마음에, '아마 저 학도도 이번에 졸업을 하였나 보다. 나도 오늘 졸업식을 거행하고, 저 학도도 역시 졸업장을 가지고 가니, 내든지 저 학도든지 이제는 학교에 다닐 길이 없을 터이요, 설혹 전학을 할 지라도 서로 전과 같이 이 길로 작로가 되지 못할 터인즉, 이제 다시는 저 학도와 만나볼 길이 없으니, 이같이 섭섭할 데가 없고…….' 하는 감상이 나서 한참 생각을 하다가,

'에라, 내 오늘 저 학도를 좀 따라가 보리라. 내가 지금 이십 세기 청년으로 앞길이 창창한 터에, 일개 여학생의 뒤를 쫓아가는 것은 실로 온당한 행위라 할 수는 없다마는, 내가 저 학도를 삼 년을 두고 흠모하던 터에 저 학도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헤어질 것 같으면 평생에 궁금한 마음을 풀지 못할 것이니, 오늘날 마지막 만나는 길에 저 학도의 집이나 좀 알아보리라.'

하고 그 여학생의 가는 곳을 따라가는데, 그 여학생이 황토마루에 다다라서는 어디를 가는지 전차를 타고 가는 곳까지 동행을 하는 것이라. 빠르고 빠른 전차는 살 닫듯 애고개를 넘어 공덕리를 지나고 순식간에 마포 종점에 이르러 정거를 하매, 그 여학생은 김상현이가 뒤따르는 줄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천연한 태도로 차에 내려서 마포 동리로 들어서더니, 이 골목 저 골목 휘휘 돌아가다가 그중 막바지 수간두옥 다 쓰러진 사립짝 문설주에 박춘식(朴春植)이라 문패 붙인 집으로 쑥 들어가는데, 이때 촌락은 요요적적하고, 다만 분분한 낙화가 어지러이 날릴 뿐이라.

김상현은 바람결에 솔솔 불어오는 낙화 향기를 임하여 그 학도 들어간 집을 지점하며 누가 곁에 있어도 잘 알아듣지 못할 만치 중얼중얼하는 말이,

'옳지, 그 학도의 집이 여기로구먼. 이렇게 먼 데서 풍우를 물론하고 학교에를 어찌 그렇게 성실히 다녔던가! 글로 미루어 볼 지면, 그 학도의 공부에 열심하는 것을 가지이지. 그러나 박춘식이는 그 학도와 어찌 되는 사람인고? 집을 보아서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요, 그 여학생의 행검 가르친 걸로 보아서는 소위 행세 자리나 하는 사람이야. 그러나 내가 오늘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 학도의 이름이나 알고 가야 할 터인데, 학생 신분으로 남의 집 처녀 이름을 뉘게 물어볼 수 없으니 차라리 오늘날 그 학도를 여기까지 따라오지 아니하니만 같지 못하구나.'

하며 결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 아니하여 한참 배회를 할 즈음에 그 여학생이 그 집으로 들어가 책보를 두고 다시 나오더니 엉성한 사립짝 문에 의지하여 얼굴만 내어놓고 무료히 배회하는 김상현을 기웃이 한 번 보고 들어가는데 그 후에는 그림자도 다시 구경할 수 없고 다만 저녁연기 섞인 울에 저문 빛이 창창할 뿐이라. 이때 김상현은 옛적 양소유가 진어사 별장에서 채봉을 만나 양류사를 읊을 때에 채봉은 주렴을 드리우고 다시 소식이 묘연한 고로, 연연한 회포를 이기지 못하고 공연히 마음을 상하던 것과 다름없이, 자연 섭섭한 회포를 금치 못하고 무연히 집으로 돌아가 그 모친께 뵈니, 그 모친은 그 아들을 애지중지하는 자손인 고로 상현이가 만일 어디를 가서 돌아올 기한에 오지 아니하면 심히 근심을 하여, 문에 의지하여 기다리는 터인데, 그날도 그 아들이 학교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매 대단히 염려를 하며 고대고대하던 중이라, 그 아들을 보더니,

"이애, 너 어디 갔더냐? 오늘이 너희 학교 졸업식이라더니, 졸업식이 늦어서 이때까지 있었느냐? 나는 웬일인지 몰라서 매우 염려를 하였다."

하며 늦게 돌아온 이유를 묻는데, 상현은 차마 실사를 말할 수는 없는지라, 부모를 속이는 것이 온당치 아니한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라, 하릴없이 핑계하기를,

"아니올시다. 예식은 벌써 마쳤는데, 예식 끝에 이번 졸업생끼리 서강 근처로 산보를 나갔다가 조금 늦었습니다."

하며 책보를 끄르고 졸업증서를 내어 보이니, 그 모친은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오냐, 우리 집에 이만치 영화로운 일이 없다. 내가 네 아버지도 아니 계신 너를 기를 때에 바쁜 마음이 하루가 민망하여 항상 너를 대하면 언제나 길러 재미를 볼까 하였더니, 세월이 쉽고 쉬워, 네가 벌써 성년이 되고, 오늘날 전문과 졸업까지 하였으니, 이제는 내가 한 시름을 잊겠다."

하며 얼굴에 웃는 빛을 띠고 이 말 저 말 하던 끝에 하는 말이,

"이애 상현아, 네가 이제는 현숙한 배필을 얻어 늙은 어미를 공궤 하여야 아니하겠느냐? 나는 벌써부터 그 생각이 있어 네가 졸업만 한 후에는 곧 성례를 시키려고 유념하여 둔 곳이 있으니, 네 마음에는 어떠하겠느냐? 그 신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옆집 정봉자(鄭鳳子) 말이다."

상현은 그 말을 듣고 대답하는 말이라.

"그 일은 아직 늦지 않습니다."

그 노부인은 상현의 성년 되기를 기다리기도 무던히 기다렸거니와 또는 잠시가 바빠서 그 말을 한 것인데, 상현의 대답이 그렇게 나가매, 상현의 마음속은 자세히 알지 못하고 섭섭하기가 이를 것이 없어,

"이애야, 아직 늦지 않다는 말이 웬 말이냐? 네 나이 열아홉이 되었은즉 내가 너를 조혼시키는 것이 아니어든 네가 늙은 어미의 바라는 마음을 위반하여서야 쓰겠느냐?"

하며 간곡히 말을 하는지라, 상현이는 그 말에 대답이,

"아니올시다. 어머니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올시다. 제가 나이 어려서 늦지 않다는 것이 아니요, 또한 아내를 얻어 어머님 봉양할 마음이 없어 그리하는 것도 아니올시다."

(노부인) "그러면 늦지 않다는 말이 웬 말이냐?"

(상현) "그런 것이 아니라, 남녀를 물론하고 혼인이란 것은 소홀히 할 것이 아니올시다. 혼인은 평생 관계가 달린 것인즉, 만일 사나이가 장가를 한 번 잘못 든다든지, 계집이 시집을 한 번 잘못 갈 것 같으면 구만리 같은 전정을 일거에 그릇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 "아무렴 그렇지, 그렇다마다. 사람의 평생고락이 거기 달렸지."

(상) "그런즉 저도 아무쪼록 현량한 아내를 얻어 어머님께 효도를 하고 일 가정을 평화하게 어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노) "옳다, 네 말이 옳은 말이다. 그러기에 나도 몇 해를 두고 현숙한 신부를 듣보았다마는, 내 눈에 제일 가합하기는 정봉자 만한 처녀가 썩 드물더라. 너도 날마다 보거니와 인물인들 좀 자상하더냐? 네가 그런 신부를 좌지 할 것이 없다."

(상) "글쎄요, 어머니께서는 봉자를 어찌 보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봉자와 결혼하기 싫습니다."

그 정봉자라 하는 처녀는 김상현의 이웃에 있는 여학생이라. 그 여자는 본래 정승지의 무남독녀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또한 근원의 친척도 별로 없어 그 신세가 지극히 가련하게 되었으나, 원래 그 부모의 유산이 넉넉한 고로 비록 처녀의 혼자 몸이나 자기 집 누대 부리던 노파에게 의지하여 능히 살림을 지탱하는데, 그 여자는 성정이 원시 패려하고 겸하여 샘이 발라서 차차 자라매 공부에는 뜻이 별로 없으나 남들 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러워 마침내 자하골 여학교에 통학을 하나 학생의 신분은 조금도 지키지 않고 저간에 불미한 행동이 있어 얼굴이 반반한 소년만 보면 마음에 애모하는 사상을 두는 터인 고로 김상현의 얼굴이 묘함을 항상 흠모하야 은근한 속마음으로 나는 어떻게 하든지 저 김상현과 결혼을 하리라 하는 생각을 두니 그는 자기 일신의 장래를 생각하고 아무쪼록 좋은 남편을 얻으리라 하는 것이 아니오, 단지 그 인물을 탐하여 그러한 사상을 두는 것인데 그 김상현은 보통 소년과 달라 심지가 정확하므로 감히 다른 사나이와 눈 맞추듯 할 수는 없어 직접으로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고 그 김상현의 누이 영자와는 비록 한 학교에는 다니지 아니하나 동시 여학도요 또한 집이 이웃인 고로 날마다 상종을 하며 친근히 사귀어 노니, 자연 저희끼리 정의 상통이 되어 못할 말 없이 다 하는 터이라. 그런고로 자기 마음에 먹은 일을 그 영자로 하여금 상현의 모친에게 소개한 일까지 있었고 또한 상현의 집에 조석왕래를 하는 고로 그 부인을 보면 간사한 태도로 비상히 정답게 굴며 어디까지 환의를 사고자 하매 그 아무것도 모르는 옛 늙은이는 봉자의 교언영사에 빠져 봉자같이 영민한 여자는 세상에 없는 줄로 홀려서 외면에 발표는 아니 하나 속마음으로는 우리 상현이는 저 봉자와 결혼을 하리라 하고 상현이 졸업하기를 고대하다가 상현이가 졸업장을 가지고 오매 기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상현을 대하여 봉자의 혼인 말까지 한 것인데, 상현은 봉자의 행위를 대강 짐작할 뿐 아니라, 마음속에 딴생각이 있어 그 모친의 말을 이같이 거절한 것이라. 그 노부인은 상현이가 무슨 뜻으로 그리하는지 까닭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

"이애 상현아, 네가 무슨 이유로 그리하는지 알 수는 없다마는 내 마음은 정봉자 만한 혼처가 다시없을 줄로 생각한다. 정봉자가 양반이 남만 못 하냐, 가세가 남만 못하냐, 또한 인물이 일색인데 너는 무엇이 부족하여 그렇게 말을 하느냐?"

(상) "아니올시다. 혼인이란 것은 양반이나 인물이나 가세로 취할 것이 아니요, 그 사람의 덕행과 학문을 볼 것이올시다."

(노) "그러면 정봉자가 덕행에 무엇이 불미하며, 학문이 어떻게 부족해서 그리하느냐? 나 보기에 봉자가 마음이 자상하고, 처신이 온아하며, 또한 학문이 너무 얌전하더구나."

(상)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터에 어디까지 해혹을 하여 드렸으면 좋겠으나, 저도 청년의 신분으로 꽃봉오리 같은 처녀를 말할 것이 없어 자세한 말씀은 아니합니다마는, '결혼' 이자에 대하여서는 단념하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며 절대적 반대를 하니, 그 노부인은 상현이가 그 신부의 무슨 흠점을 알고 그리하는 것을 억지로 우길 것이 없어,

"오냐, 그러면 좋도록 하자. 혼인이란 것은 백년해로하는 일인즉, 부모가 압제로 할 것이 못 되니, 어디까지 네 마음에 가합한 신부를 구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상현의 말을 순청하였더라. 상현은 그 모친과 이같이 이야기를 하고 사랑으로 나와 적적히 누웠으니, 구름을 깨트리고 쑥― 솟아오는 달빛에 꽃 그림자는 동창에 비치어 습습한 춘풍이 불어오는 대로 흔들흔들하는데, 마포 여학생의 용모가 눈 속에 어리어 흡사히 꿈을 꾸는 듯한지라. 이때 정신을 가다듬고 돌려 생각하기를,

'에라, 내가 이 시대 청년으로 장차 좋은 사업을 경영하는 터에 일개 여자에게 정신을 팔리어 마음을 어지러이 할 것 같으면 도저히 남자의 본질을 잃는 것이니, 이 같은 공상을 두는 것이 불가하도다.'

하고 글을 읽으려고 일어 앉아 불을 켜고 책상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뚝 떠들어 보니 첫머리에 보이는 글이 다른 것이 아니요, 곧 '관 관저구재하지주로다, 요조숙녀는 군자호구로다' 하는 글이라. 그 글을 보고 다시 감상이 일어나서,

'이것은 옛적 성인의 글이라, 남자가 되어 좋은 배필을 구하는 것이 어찌 떳떳한 일이 아니리오. 지금 내 사세로 말하면 늙은 어머니께서 하루가 바빠하시는 일이요, 또한 자식의 도리로 일찍이 현처를 얻어 노모를 봉양하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 그러나 내가 구혼을 할진대 어찌하면 아무 여학생 같은 사람을 구할꼬.'

하고 여러 가지로 생각한 결과로, 그 이튿날 한강 선유를 차리되 자기 혼자 일엽편주에 술 한 병 싣고 마포 동리 동장으로 있는 성운경(成雲卿)을 청하였더라.

김상현은 싱긋 웃으며,

"여보 영감, 그 여학생에게 혼인 소개 좀 하여 주시오구려."

하여 실없는 말로 시작을 한다.

(성) "천만의 말씀도 하오. 그 신부로 말하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 어렵지마는 아직까지도 조선에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관습이 있는데, 댁에서 어찌 그런 사람의 누이와 결혼할 수가 있소? 그는 다 웃음의 말이지마는, 대저 그 여자의 인격은 참 도저합니다. 상놈의 계집 되기 아깝지요."

(김) "그게 다 무슨 말씀이오? 양반·상놈은 다 무엇이오? 그것은 전일 야매 시대에 하던 말이지, 지금 이십 세기 문명 시대에야 그런 말이 있을 리가 있소? 그전에 양반은 양반끼리, 상놈은 상놈끼리 하던 대신에 지금은 우매한 자는 우매한 자끼리, 지식 있는 자는 지식 있는 자끼리 결혼할 것 같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성) "아, 참 좋은 말씀이오. 그랬으면 좋다마다요. 그러나 개명한 양반의 말은 다 저렇지마는 보통 사람이야 어디 아직 그렇게 알아야지요."

(김) "아니올시다. 그렇지 않습니다. 남이야 알든 모르든 나는 나 할 일만 하면 고만이지, 이같이 관습상 폐해 되는 일은 누구든지 먼저 타시하는 이가 없으면 언제든지 개량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 말이 실없는 말이 아니라 진정의 말이니 영감께서는 공연히 장난의 말로 듣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내 사정으로 말하면, 늙으신 어머님께서 나의 성취 시키기를 날로 근심하실 뿐더러 나도 남의 자식이 되어 일찍이 장가를 들어 노모를 봉양해야 하겠는데, 신부로 말하면 규중에 갇혀 있어 아무 지식 없는 신부는 싫고 그래도 여학생 출신을 구하는 것이 좋겠으나, 근일에 소위 여학생이란 것들은 정작 학문은 아무것도 없고 지례 시어서 남녀동등이니 천부인권이니 하는 말을 주장하여 말괄량이가 되지 아니하면 무뢰 소년과 연극장 출입이나 하는 것을 능사로 아는 것들뿐인즉, 그런 것은 아무짝에 쓸 곳이 없는 고로 혼처를 구하기가 극난이오. 마포 박춘식의 집에 여옥기인한 처녀가 있는 줄 알고 결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으나, 소개할 만한 이가 없어 극히 뇌심 중이오니 영감께서는 그런 완고의 말씀일랑 작작하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중매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성) "아, 대단히 소통하시외다. 나는 당신이 모지자모지손이시기 마음속에 구대 사상이 있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통명한 지략이 계시기는 의외요 구려. 당신이 만일 습관의 폐해를 타파하고 평등주의를 주창하여 전일에 상놈 상놈하고 마루 위에도 못 올라오게 하던 상놈과 결혼할 뜻이 계실 것 같으면 어디까지든지 찬성하여 되도록 주선을 하여 보리다. 조선에서는 그런 신부를 구하기 어려울 터이니 상놈을 혐의하여 어찌 그런 혼처를 버리리까? 자― 기닿게 할 것 없이 그 박춘식이를 지금 불러다가 이 자리에서 확정을 합시다."

(김) "아니올시다. 나도 모친 계신 터에 내 임의로는 결정할 수 없으나 내 이 말씀을 어머님께 여쭈면 거절하실 리는 만무하니, 정혼은 어머니께 여쭙고 작정할 양으로 우선 그 사람을 청하여다가 문의나 좀 하여 보십시다."

성운경이가 사공을 시켜 마포 안마을 박춘식을 불렀더라. 그 박춘식은 본래 상놈이 아니요, 대대 남행으로 유명하던 박종성의 아들이더니, 어려서 그 부모가 구몰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세 살 먹은 누이 정애를 업고 사면팔방 다니며 전전걸식을 하다가 차차 나이 장성하매 혹 노동도 하고, 혹 장사도 하여 돈백이나 모아 가지고 마포에 집칸 명색을 의지한 후 날마다 생선 장사를 한다, 뱃사공질을 한다, 근근자자하여 돈 모으기로 열심을 하며 항상 그 누이 정애의 장래를 근심하여 자나 깨나 마음속에 생각하는 바는, '내가 본래 반반한 집 자식으로 오늘날 이 모양이 된 것은 한갓 재산이 없어 이러한 것이라. 나는 재산만 모아 가지면 다시 우리 조부모의 지위를 회복하기 쉽거니와, 저 정애로 말하면 신분이 여자이라, 저것을 만일 이 마포 구석에서 아무 문견 없이 무무하게 기를 것 같으면 도저히 행세하는 사람에게는 시집보낼 가망이 없고, 제 팔자가 좋아서 한껏 잘 간대야 나와 같은 생선 장수에 지나지 못할 것이니, 여자는 남자와 달라 시집을 한번 잘못 갈 것 같으면 그 평생에 가련할 팔자를 다시 변통할 수 없는 것이라. 그러므로 저 정애는 아무쪼록 공부나 시켜서 만 리 같은 전정에 희망이 있도록 하리라.' 하고 마침내 여학교에 통학을 시켜 고등과까지 졸업을 하였는데, 그래도 조선 풍속 상으로 남가여혼함에 제일 관계되는 것은 반상이라, 박정애가 인물도 일색이요, 품행도 단정하고 공부도 역시 우월하되 단지 흠절 되는 바는 생선 장수 오라범이라. 정애의 나이가 차 혼기가 되어 가매 그 인물을 욕심내고 혼인 소개하는 자가 날마다 답지를 하나, 소위 행세하는 사람에게 소개하는 자는 웃놀아 구경할 수도 없고, 어린아이 젖 보채듯 하는 곳은 모두 자기의 동류 되는 노동자뿐이라 은근히 심려가 되어 정애 졸업하던 그 이튿날은 정애를 불러 앞에 앉히고 답답한 사정을 말하는 것이라.

"이애 정애야, 우리 남매의 현상은 지극히 불쌍한 인물들이 아니냐? 우리가 그렇지 아니한 집 자손으로 오늘날 이 지경이 된 것은 누구에게 원망할 곳이 없구나. 그러나 나는 남자라 나의 장래 신세는 내가 잘하고 못 하기에 달렸으니, 만일 내가 잘할 것 같으면 가히 영웅의 반열에도 참례 하려니와, 너는 여자의 몸인즉 여자는 평생 신세가 남편을 잘 얻고 잘못 얻는 데 달린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네 일을 항상 근심하고 내 등에는 통지게를 져가며 네 공부를 시킨 것인데, 너는 내 마음을 본받아 공부에 열심한 결과로 오늘날 졸업까지 하였다마는, 내 마음에 먹은 바는 모두 허사가 되고 너와 통혼 하는 곳은 모두 나와 같은 하류밖에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정애는 얼굴을 숙이고 두 손으로 치마 끝을 부비며 아무 말 없이 앉았을 뿐이더라.

"이애 정애야, 너는 여자 마음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 그리하나 보다마는, 네 생각에 혹 좋은 의견이 있거든 말 좀 하려무나."

(정애) "………."

"나는 답답하여 못 견디겠다. 남매의 우애가 우리같이 좋은 터에 나는 너를 보면 가슴이 딱 막히고 눈썹이 저절로 찡그려지니, 이래서는 도저히 못 될 일인즉 별수 없다. 오늘은 너하고 나하고 한 가지 결정하자. 무슨 결정인고 하니, 지금 지체 좋고 학문 있는 사람이야 생선 장수의 누이 너와 결혼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런즉 통혼하는 사람 중에서 좀 나은 곳을 골라 정혼을 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나와 의절을 하고 너는 너대로 가 서너 마음껏 좋은 남편을 구하든지 두 가지 중에 아주 결정을 하여 우리 두 사람의 근심을 잊어버리자.

내가 부모 돌아가신 뒤에 걷지도 못하는 너를 업고 다니며 네 나이 열입곱 살이 되도록 기른 생각을 하면, 내가 너를 잠시도 못 보아도 못 견딜 듯하다 마는, 지금 사세가 소위 유유상종이라고, 너는 비록 비범한 인물이지마는 나는 생선 장수의 교제밖에 없으니 좋은 학문가와 통혼을 하여 볼 길이 있느냐? 그런즉 네가 잘 생각해서 두 가지 중에 확정을 하면 내가 적이 시름을 잊겠다."

정애가 마지 못하여 하는 말이,

"오라버니께서 아직 성례를 못한 터에 제 일이 그리 늦을 것 있습니까? 제가 만일 출가를 하면 오라버니는 누구와 살림을 하시려오? 그런즉 아직 늦지 아니한 일이올시다."

"이애, 그러면 나 살림해 줄 사람 없다고 너는 시집 아니 가고 나와 이 오막살이에서 세월을 보낼 터이냐?"

이같이 이야기를 하는 때에 마침 사공이 와서 동장염감이 부른다 하는 고로, 가옥세 독촉이나 하려고 부르는가 하고 즉시 나가 성운경을 보고 하는 말이,

"저는 영감께 할 말씀이 없습니다. 가옥세를 이때까지 못 내고 부르시게 하니 이런 황송할 데가 있습니까? 그러나 오늘도 역시 돈이 없어서 못 드리겠사오니 며칠만 더 관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며 자상히 말을 한다.

(성) "여보게, 내가 자네를 가옥세 달라고 부른 것이 아닐세. 그런 말 고만두고 이리 좀 올라오게. 그 사람이 나는 가옥세 받는 사람으로만 아네. 어서 이리 좀 올라와."

박춘식이가 뱃머리에 올라서며,

"아니올시다. 영감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부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는 가옥세 못 드리는 것 좌죄가 되어 한 말씀이올시다."

하며 뱃전을 붙들고 공손히 섰더라.

(성) "내가 오늘 자네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문안서 손님이 나오셔서 잠깐 놀러 가실 터인데 사람이 단둘이라 너무 무료하기에 자네와 같이 술잔이나 먹고 이야기나 좀 하려고 부른 것일세. 어서 이리로 올라오게."

(박) "에그 천만에, 황송한 말씀도 하십니다. 양반님네 노시는 좌석에 저 같은 놈이 어찌 참례를 하겠습니까? 그런 조롱의 말씀하시지 마시고 이를 일이 계시거든 어서 말씀하십시오."

(성) "그게 무슨 말인가? 늙은 사람이 자네를 데리고 조롱할 리가 있나? 어서 이리 올라오게."

이때 성운경과 마주 앉았던 김상현은 조금 옮겨 앉으며 하는 말이,

"여보시오, 우리 인사합시다. 당신이 박춘식 씨인지는 기왕 이 영감께 듣자왔소마는, 나는 김상현이란 사람이오. 그렇게 사양할 것이 없으니 어서 올라오시오구려."

박춘식은 어찌한 이유를 모르고 마지못하여 올라와서 한구석에 꿇어앉으며,

"아, 저 같은 놈을 대하여서 여러분이 이토록 하시니 올라앉기는 합니다마는, 원 어찌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성) "우리가 술이나 먹고 하루 잘― 놀아보자는데 별 이유가 있을 것 무엇 있나. 우선 한 잔 자시게."

하며 친히 술잔을 들어 권한다.

(박) "주시는 것이니까 먹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대단히 황송합니다."

하며 어찌 되었든 그 술을 먹었더라.

(성) "여보 상현 씨, 조선은 양반·상놈의 구별이 판이합니다. 저 박춘식으로 말하면 비록 저 모양으로 천한 영업은 하되 본래 양반의 자손이라 품행이 단정하고, 또 저 사람의 매씨는 천생 재상의 집 부인이지요. 그런 고로 나는 저 사람의 남매를 보면 매우 부러운 생각이 있어요."

(김) "녜, 보아하니 그러하겠습니다."

(박)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이같이 천업을 하는 놈이 품행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너무 과도한 말씀이올시다."

(성) "여보게 춘식이, 그러나 자네 매씨는 그와 같이 인물 좋고 덕망 있는 혼처를 구하여 작배를 해야 내외에 합하게 해로하지 않겠나?"

(박) "글쎄올시다. 저도 항상 그것으로 걱정이올시다마는, 생선 장수의 누이 년이 어찌 그런 남편을 맞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이 이야기를 하여 한 잔 두 잔 먹는 술이 얼마나 먹었던지 세 사람이 얼근하게 취하였더라.

(성) "여보게 춘식이, 자― 기닿게 할 것 없이 내가 중매 한 곳 할 터이니 자네 생각에 어떠한가?"

(박) "아, 작히 좋겠습니까. 좋은 곳으로만 보내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성) "혼인 중매 잘못하면 뺨이 세 번이라는데, 자네에게 뺨이나 아니 맞을는지 모르네, 허허허허."

(박) "하하하, 술 석 잔을 잡수시도록 하시지요. 왜 잘못할 생각을 하십니까?"

김상현은 옆에 앉았다가 "허허허." 웃었더라.

(성) "그것은 다 웃음의 말이오. 그 일에 대하여 으밀아밀 할 것 없이 자네 이 양반 좀 다시 보게. 자네 매씨를 이 양반과 결혼하면 어떻겠나?"

이때 박춘식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앉는다. 성운경은 계속하여 하는 말이,

"이 양반의 처지 자네가 알아보아도 알겠지만는, 김판서의 자제님이오. 나이는 올해 열아홉 살이시고, 공부는 법학전문을 수업하셨고, 또는 혼인에 낭자 하나만 보면 고만이지 재산이야 말할 것 있나마는, 유전하는 재산이 천여석 추수를 하는데, 댁은 자하골 청풍계일세. 이 신랑의 인물이 헌앙하여 학문이 유여해, 지체 좋아, 재산 있어, 그만하면 더 고를 수 있나? 자네 매씨에게 꼭 합당하지."

(박)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저는 생선 장수가 아니오니까? 생선 장수의 누이를 양반의 댁과 혼인이란 말씀이 당한 말씀이오니까?"

(성) "허― 이 사람, 별말을 다 하는군! 자네나 가세가 구차한 탓으로 생선 장수이지 자네 부모나 자네 매씨도 생선 장수야? 세상에 신성한 것은 노동인데, 구차해서 오라비가 생선 장수 좀 하였기로니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박) "풍속 상으로 상인에 당해서야 어디 그렇습니까? 제가 본래는 어떠한 사람이든지 현재에 생선 장수 하는 상놈이니까 그것이 하자가 되지 않습니까?"

(성) "어― 두 말 말게. 자네 만일 신랑이 부족하여 못하겠다면 나도 권할 수가 없지마는, 생선 장수를 구관하여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어디까지 권고하겠네."

(박) "아니올시다. 절대적 못 될 일이올시다. 상놈의 누이가 양반의 집으로 출가를 하면 제 신세에 관계가 되는 데야 어찌하겠습니까? 무슨 저 나리 댁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란 것은 일마다 다 잘하는 법이 없어 혹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저년은 상놈의 누이니까 아니 그럴 수가 있나.' 하는 구박을 종종 받을 것이요, 저도 상놈의 누이로서 양반의 집에 시집을 가면 얼굴을 들고 하인을 대할 수 있습니까? 또는 내외의 정의도 친근치 못할 것이외다."

이때 김상현은 가까이 다가앉으며 하는 말이,

"두 분이 그처럼 말씀하시는데 저는 아무 할 말씀이 없습니다마는 잠깐 듣사온즉 박춘식 씨 말씀은 전혀 오해올시다. 지금같이 문명한 시대에 양반·상놈이라는 구별이 있을 것 있으며, 또는 신랑의 집에서 관계하지 않는 이상에 스스로 혐의할 것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관념하실 것은 결코 아니올시다."

(박) "그러면 나리께서 제 누이와 결혼을 하실 것 같으면 일후에 상놈의 누이라고 구박하는 일이라든지 이혼하는 폐단이 결코 없겠습니까?"

(김) "그는 깊이 염려하실 일이 아니오. 당신이 만일 영매 씨를 이 사람에게 허락하시는 날이면 설령 이 한강이 변하여 남산이 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내 마음은 변할 리가 없으니 그쯤 생각하시오구려."

박춘식이가 빙그레 웃으며 성운경을 바라보고,

"그러할진댄 저 나리 같은 혼처를 어디 가서 구하오리까. 그러나 비록 남매간일지라도 제 말 한 번 아니 들어보고 경솔히 허락할 수가 없은즉 저는 돌아가 누이와 의논하여 결정하겠습니다."

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날은 해가 저물어 각각 헤어져 갔더라.

박춘식이가 그날 의외로 술도 평생에 처음 많이 먹고 놀기도 평생에 처음 잘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반갑고 반가운 말을 들어서 얼굴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고, 가슴에는 기쁜 마음이 가득하여 그날은 세상인 듯싶고 만사가 무심하여 반나마를 부르며 비틀걸음을 치고 황혼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니, 이때 그 누이 정애는 저녁을 지어놓고 그 오라버니 오기를 고대하던 터이라.

(정애) "왜 오라버니 그렇게 늦으셨소? 시장하시겠소구려. 어서 진지 잡수시오."

(춘식) "에구, 배가 어찌 부른지 저녁 먹을 수 없다."

(정) "어디서 무엇을 그리 많이 잡수셨소?"

(춘) "동장 영감이 선유 차리고 나를 청하였더구나, 놀기도 잘 놀았는걸. 그러나 네 혼사로 인하여 아까까지 근심을 하였거니와 이제는 아무 걱정 없이 되었다. 동장 영감께서 중매를 하시는데, 문안 청풍계 김판서 댁 자제 되는 이요, 공부는 법학교 졸업생이라더라. 그 낭자를 오늘 내 눈으로 보기까지 하였는데, 인물도 엄전하고 풍채도 헌앙하여 가히 호걸 남자라 하겠더라. 아― 그만하면 지체가 양반이야, 신랑이 얌전해, 우리 처지에 더 고를 수 있느냐? 내 생각에는 매우 합하다마는 네 마음에는 어떠한지?"

(정) "……."

(춘) "별수 없다. 그리로 결정하자. 생선 장수의 누이가 그만하면 고만이지, 더― 바랄 수 있느냐?"

(정) "……."

(춘) "이애 정애야, 너 왜 아무 말도 아니하느냐? 너는 부끄러워서 말을 아니 하나 보다마는, 우리는 팔자가 기박하여 부모도 아니 계시고 단지 남매가 의지하여 있는 터에 누구하고 의논을 하느냐? 그런고로 내가 너에게 의논을 하는 것인데 너는 부끄럽다고 말대답을 아니하여서야 쓰겠느냐? 오라비 앞에서야 못할 말이 뭐 있단 말이냐?"

(정) "아직 늦을 것 없습니다."

(춘) "늦지 않단 말이 웬 말이냐? 바로 혼처가 부족하여 싫다면 가하거니와 늦지 않단 말이 되는 말이냐? 그런 혼처를 넘겨버리고 어디 가서 다시 구하느냐? 그 혼처는 아무것도 흠잡을 것이 없고 다만 조그마치 흠잡을 것은 신랑의 오른 귀에 사마귀 하나 박힌 것밖에 없더라. 네 오라비 생선 장수 생각을 좀 하여라."

정애가 그 말을 듣더니 정신을 버쩍 차리며 그 오라버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다시 머리를 숙이며 하는 말이,

"오라버니께서 아직 성취를 못하셨으니까……."

한마디를 하는데 홀연히 두 뺨에 홍조가 올연하더라. 그 여학생 정애와 김상현이가 광화문 앞 석난간 모퉁이에서 만날 적에 오직 김상현이만 그 여학생을 유심히 보았을 뿐 아니라, 그 여학생 정애도 역시 사방모자 쓴 법학생을 만날 때마다 그 비범한 기상을 매우 흠모하여 항상 속마음으로,

'그 학생은 뉘 집 자손인지 모르거니와 매우 엄전도 하다. 근일 청년에도 저러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있으되, 여자의 신분이라 그런 이야기를 뉘게 말도 못하고 지내는 터이라. 그 학생의 오른 귀에 사마귀 있는 것까지 기억을 하는 터이라, 그 오라비가 다녀와서 혼인 말을 하는데, 신랑의 집이 청풍교라, 사범 학교 졸업을 하였다, 오른 귀에 사마귀가 있다는 말을 들으매 별안간 광화문 앞에서 날마다 만나던 학생의 생각이 나서 깜짝 놀란 것인데, 이때 은근한 마음속에,

'옳지, 그러면 통혼하는 신랑이 곧 그 학생이로구먼. 어제 그 학생이 우리 집까지 와 보았것다, 아까는 오라버니께서 좋은 혼처가 있다기에 어떤 사람인가 하고 아직 늦지 않다고 대답을 하였거니와 만일 그 학생 같을진대…….'

하는 생각이 있어 그 오라버니 얼굴을 정신 잃고 바라보던 끝에 '오라버니께서 아직 성취 전이시니까.' 하는 말뜻은, '내가 출가를 하면 홀로 있는 오라버니 사정을 어찌하오?' 하는 말이라. 이때 박춘식은 "허허 허허 허허." 웃으며,

"옳다, 그럴듯한 말이다. 오라버니께서 아직 성취를 못 하셨으니까…… 그럴듯한 말이냐…… 그러나 너 그런 걱정할 것은 없다. 나는 내 마음에 굳이 결정한 바가 있으니까 너 그런 생각하지 말고 사기 되는 대로 오라비 마음을 편하게 하여다오. 나는 종차 재산을 많이 모아 가지고 귀족의 집으로 장가가기로 작정이니까. 네야 어찌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느냐? 내가 지금 너 하는 말을 모두 알아 들었은즉 너 내 생각은 하지 마라."

이같이 이야기하는 동시에 자하골 청풍교 김상현의 집에서도 상현의 모자가 서로 앉아 역시 이와 같은 수작을 한다.

(상현) "저는 오늘 강에 나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성운경이 만나 보았습니다."

(모당) "너 요새 강에는 왜 그리 자주 나가느냐? 그래서 성운경의 집안이 다 태평하다더냐?"

(상) "네, 평안하옵디다. 그런데 저를 보고 대단히 반가워하던 걸요."

(모) "오래간만에 만나니까 물론 반갑겠지. 그래, 다른 말은 없더냐?"

(상) "하는 말이 있어요."

(모) "응, 무슨 말?"

(상) "……."

(모) "베 다 팔았다더냐?"

(상) "아니올시다."

(모) "그러면 돈 취해 달라더냐?"

(상) "아니요."

(모) "그러면 무슨 말을 하더냐?"

(상) "……."

(모) "들은 말을 왜 못하느냐?"

상현이는 빙긋 웃으며,

"좋은 혼처가 있다구요."

(모) "응, 혼처가 어디 있다더냐?"

(상) "자기 집 동리래요."

(모) "그러면 행세도 변변히 못하는 집이로구나. 대관절 뉘라더냐?"

(상) "박종성 집이라고, 신부의 어른이 종성 군수까지 지내고 돌아갔다던지요."

(모) "아마 신부의 어른 이름이 종성인 게다. 마포 구석에 웬 양반이 살겠니?"

(상) "아니올시다. 성운경이가 거짓말할 리가 있습니까?"

(모) "암만 정직한 사람도 혼인 중매하려면 거짓말 반은 하느니라. 그래, 신부의 나이는 몇 살이고 인물과 지식은 어떻다더냐?"

(상) "나이는 열일곱 살인데, 인물은 어찌 동탕한지 서시가 박색이 될 만하고, 공부는 여학교 고등과까지 졸업을 했대요."

(모) "그리야? 그러면 너 그리로 장가가고 싶으냐? 네가 마음에 아마 그리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있나 보구나. 어미가 말한 봉자는 싫다고 보지도 못한 문밖 신부에게 향의를 해?"

상현이는 빙긋빙긋 웃더라.

(모) "그러나저러나 신부가 네 말과 같을진대 네 소원을 좇아서 그리로 할 터인데 대관절 내 눈으로 그 신부를 한번 보아야 하겠다."

(상) "어머니께서 그 신부를 어떻게 보십니까?"

(모) "그야 어떻게 못 보겠니? 내가 마포를 나가서 집 찾는 것처럼 하고 그 신부의 집을 좀 가보지."

(상) "천만의 말씀도 다 하십니다. 어머니께서 어디를 가신단 말씀이오니까?"

(모) "딱한 말도 한다. 그러면 남의 말만 듣고 어찌한단 말이냐?"

(상) "아니올시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신부를 부득이 보시고야 약혼을 하실 터이면 성운경이를 소개해 남산공원으로 좀 오라 하고, 어머니께서는 공원에서 산보를 하시다가 만나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모) "옳지,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면 성운경이를 불러서 그렇게 약속을 하여라. 그리고 너도 그날 나하고 같이 가자. 정봉자 같은 인물을 타박하는 사람이 여간해서 눈에 들겠느냐."

상현이가 그 이튿날 성운경을 찾아보고 단단히 약속하기를,

"박정애와 통혼함에 대하여 우리 어머니께서 친히 보신 후에 약혼하시겠다 하시는데, 만일 어머니께서 정애의 집을 가 보시고 박춘식의 본색이 탄로될 것 같으면 신부가 암만 가합할지라도 성사치 못하겠는 고로, 내가 여차여차히 말씀을 여쭈었으니 당신께서도 박춘식의 신분을 감추어주시기 바라며, 정애를 남산공원으로 산보 오게 하기를 주선하여 주시오."

하고 부탁한 결과로 성운경은 박춘식을 찾아보고 정애를 며칟날 몇 시에 남산공원으로 산보를 보내게 하였더라.

하룻밤 동풍에 무정한 낙화를 불어 다하고, 새로 트는 나뭇잎이 초록 장을 드리운 듯 남산공원의 신선한 경색이 사람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데, 분수 탑 한편 사모정 속에 댕갈댕갈 나는 이야기 소리는 김상현의 모친이 그 아들과 영랑을 데리고 산보를 온 것이요, 그 노부인 앞에 마주 앉아,

"네, 그 신부는 보시나마나 더할 나위 없지요마는 아마 오래지 아니하여 오겠습니다."

하며 말하는 사람은 마포동장 성운경이라. 그 성운경은 김상현의 부탁을 듣고 즉시 박춘식을 찾아가서,

"여보게 춘식이, 내가 일전에 자네 매씨와 통혼하는 곳에서 신랑의 모친이 친히 자네 집을 나와서 신부를 한번 본 후에 정혼을 한다 하는데, 만일 노부인이 나오실 것 같으면 신부야 물론 눈에 들겠지마는, 자네 집 꼴을 보든지 자네의 본색이 탄로된다든지 하면 신부가 암만 합의할지라도 혼인은 필연 아니 되고 말겠기에 내가 말하기를, '부인이 신부의 집을 가시는 것은 만만불가한 일이오니 제가 어찌 주선을 하든지 신부를 모레 저녁때 남산공원으로 산보를 보내게 할 터이오니 그리로 만나보시는 것이 적당하외다'고 하였은즉, 자네가 잊지 말고 모레는 자네 매씨를 부디 남산공원으로 데리고 오게."

하며 재삼 부탁한 후, 기약한 날 김상현의 집으로 가서 상현의 모친에게 신부의 칭찬을 가슴이 시원하게 하며, "그 신부를 보시고자 하시거든 오늘 남산공원에 산보를 가십시다"고 말하매, 그 노부인은 십분 기뻐하며 그 아들과 영랑을 데리고 성운경을 따라 공원을 온 것이라. 신부 오기를 기다리며 서로 이야기를 하는데,

(노부인) "그런데 그 신부가 부모나 있소?"

(성) "부모는 아니 계시지요."

(노) "그러면 남녀 간 형제는 몇이나 되오?"

(성) "손위 오라범 하나 있는데, 팔난봉이 되어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노) "그러면 가까운 친척이나 있나요?"

(성) "친척도 없습니다."

(노) "그러면 처녀 혼자 살림은 어찌하였으며 학교에는 어떻게 다녔나요?"

(성) "이 사람이 살림 뒤를 많이 보아줍니다."

(노) "네네, 그러신가요?"

이같이 수작을 할 즈음에 그 아래 기념비 모퉁이로 일탁 부용이 우뚝이 맑은 물결에 솟은 듯, 일수벽도가 외로이 빈 담에 의지한 듯, 가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은 연여색 반양복에 기려한 조화를 머리에 꽂고 오른손에는 우산을 들어 태양을 가리우고 춘광을 자랑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완완히 올라오는 박정애라.

그 뒤에 운동 모자를 푹 숙여 쓰고 따라오는 사람은 곧 정애의 남형 박춘식이니, 그 박춘식이는 성운경의 말을 듣고 그럴듯하게 여겨 공원으로 기약한 날 정애더러 말하기를,

"이애 정애야, 오늘은 일기가 대단히 화창하구나. 나도 생애에 골몰 하여 한 봄이 다 가도록 꽃구경 한 번 못하였고, 너도 학교에 다니느라고 소창 한 번 못하여 네나 내가 울적한 생각이 있을 것인즉, 우리 오늘은 한양공원에 가서 신선한 공기나 쏘이고 옴이 어떠하냐?"

하며 정애도 역시 온 봄내 학교에 가면 공부하기에 열심할 뿐이요, 집에 돌아오면 살림하기에 골몰하여, 꽃이 피는지 봄이 가는지 아무런 줄 모르고 지내던 터이라. 공원으로 놀러 가자는 말을 들으매 어찌 반갑던지 쾌히 응낙을 하는 고로 날마다 쪽지게나 지고 의관이라고는 명색을 모르던 박춘식이가 그날은 운동모자에 모사주의에 제법 내용으로 정애를 사랑하는 듯, 외면으로는 정애의 하인 비스름 수대를 들고 뒤를 쫓아오며 경색을 사랑하여 서로 이야기를 하고 올라오는 길이라. 이같이 화성대 기념비 앞으로 올라오는데 춘식이가 먼저 성운경과 김상현을 보았던지 가만가만히 정애를 부르며,

"이애, 정애야 정애야. 저기 우리 동리 동장 영감이 왔구나."

(정애) "어디요?"

(춘) "저기 분수탑 옆 사모정 속에 앉았다."

하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며,

"에그! 그 앞에 김상현도 앉았네. 저 늙은 부인과 여학도 하나는 모르겠는데……. 저 김상현 씨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성운경씨가 너와 통혼한다는 사람이다. 너도 백년해로할 남편을 네 눈으로 한번 만나보고 정혼하는 것이 우연히 잘된 일이로구나."

하는 말에 정애가 머리를 돌려 한번 바라보니 김상현이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곧 광화문 앞 석난간 모퉁이에서 삼 년을 두고 날마다 보던 법학생이라. 이때 정애의 심중에 부끄러운 생각이 생겼던지, 얼굴에 홍조가 오르며 고개를 숙이고 외면을 하더라.

(춘) "그렇지, 여자의 마음으로 부끄러운 생각이 없을 수 있니? 이애, 그렇지만 외면할 것 무엇 있느냐? 서양 사람들은 친히 정하는 일이 있다더라. 허허허허."

이때 정애가 아무 말도 아니 하는 속마음에는,

'일전에 성운경 씨가 혼인 소개한다는 말을 대강 듣고, 광화문 앞에서 만나던 학생인 줄 대강 짐작하였지만는, 그 가부를 확실히 몰라 오라버니께 쾌락을 아니 하였더니, 만일 통혼한다는 그 사람이 저 학생 같을진댄 전일에 내 마음속에 먹었던 작정이나……….'

하는 생각이 있어 얼마쯤 기쁜 뜻을 이기지 못하나, 외면에는 여자 신분이라 전보다 일층이나 더 아리따운 태도를 부리며 살짝 돌아서서 북악을 바라고,

"오라버니, 저 산은 남산보다 높더니 여기서 보기에는 얕아 보이는데요."

하며 딴말을 꺼내는데, 성운경은 김상현의 모친을 대하여, 신부의 오라범은 팔난봉이 되어 간 곳을 모르다니, 신부의 살림을 자기가 보아 주나니 하며 거짓말을 하다가 정애의 올라오는 양을 보고 하는 말이,

"옳지, 저기 옵니다. 저기 오는 저 여자가 제가 말씀하던 박정애올시다."

(부인) "응, 그리야? 응―."

하며 한참 바라보더니,

"참, 인물은 도저하구먼. 그러나 너무 하이칼라인걸."

하고 그 옆에 앉았는 상현을 돌아보며,

"네 눈에는 꼭 들겠다. 하하."

상현이는 그 말을 듣더니 빙긋 웃고 외면을 하더라.

공원이라는 곳은 오는 사람을 제한한 바가 없어 누구든지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라. 이때 마침 김상현의 옆집에 있는 정봉자가 공원으로 놀러 왔다가 공교히 김상현의 매제 영자를 만났다.

(영자) "아, 너 웬일이냐?"

(봉자) "소창하러 왔다. 너는 왜 왔니?"

(영) "나는 우리 어머니 모시고 색시 선보러 왔지."

(봉) "하하하, 네가 색시 선은 보아 무엇 하니?"

(영) "우리 오라버니 장가들지."

봉자가 별안간 깜짝 놀라며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평일의 자기 행위가 불결한 것은 생각지 않고 상현과 결혼할 마음이 굴뚝같아서 꼭 믿고 있는 터인데, 졸지에 영자의 말을 들으매 낙심이 되어 그 모양으로 서 있는 것이라. 한참 만에 하는 말이,

"이애야, 내가 네게 부탁한 말이 없느냐? 그런데 이것이 별안간 어찌한 딴 문제이냐? 네가 아마 거짓말을 하나 보구나."

(영) "거짓말이 무엇이냐. 네 일은 다 상했다. 일전에 우리 어머니께서 네 일로 우리 오라버니를 권하다 못하고 오늘날 이 지경이 된단다."

(봉) "그러면 새로 말하는 색시는 어떤 사람이냐?"

(영) "네 그 색시 꼴 좀 구경하련?"

(봉) "아, 그 색시가 여기 왔니?"

(영) "아, 선보러 왔단 말 듣지도 못하니?"

(봉) "아, 그런데 색시 선을 공원으로 보러 오니?"

(영) "나도 모르겠다. 이리 좀 오너라."

하며 봉자의 손목을 끌고 가만가만 가다가 나무 수풀에 숨어 서서 정애를 가리키더라.

(봉) "아, 저 애 말이냐? 누가 혼인 소개를 하니? 어떤 놈이 혼인 소개 몹시 한다!"

(영) "그게 웬 말이냐?"

(봉) "흥! 너는 저년을 모르리라마는, 저년이 나하고 한 학교에 다니던 박정애다. 저년이 어떤 년인데 그러니?"

(영) "왜 그러니? 너는 저 색시의 일을 자세히 아는 말이로구나. 무슨 흠절이 있거든 내게 말 좀 하려무나."

(봉) "이애, 고만두어라. 남의 좋은 일에 공연히 방해할 것 무엇 있니? 기러기 들이고 초례한 후 말하마."

그날은 그 여러 사람이 공원에 모여서 이러한 광경을 지내고 다 각기 헤어졌더라. 영자는 봉자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서 그 모친에게 은근히 하는 말이,

"나는 오라버니 말을 듣고 어디 아황·여영이나 있는 줄 알았더니, 그 계집애를 가지고 그렇게 야단을 했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성운경이도 성정이 아주 괴악한 놈이로군."

그 모친은 정애의 태도를 보고 마음에 십분 환희하는 중, 사랑하는 딸 영자의 말을 들으매 대단히 의심스러워 물어보는 말이라.

"그게 웬 말이냐? 너 그 애를 이왕부터 알았느냐?"

(영) "알지는 못해도 대강 짐작은 하는데 그년의 행실이 어찌 부정 한지 벌써 서방이 여남은 된다는 걸요."

(모) "에 이년, 너도 계집애 년이 무슨 말을 그렇게 난잡히 하느냐? 그 말 뉘게 들었니?"

(영) "그년 그런 줄을 누가 몰라서요? 여학생 계에서는 다 아는데요."

(모) "그게 무슨 말이냐? 그래도 뉘게 들은 데가 있겠지?"

(영) "아,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정봉자가 그년의 속을 다 아는데요."

(모) "그러면 그 말을 봉자에게 들었구나. 언제 그러더냐?"

(영) "그전에도 하고 오늘 공원에서도 하고 날마다 그 말을 하는데요."

(모) "그래, 봉자가 박정애를 너의 오라범에게 통혼하는 줄 알더냐?"

(영) "알고말고요. 그런 년을 혼인이 다 무엇이냐고 하던데요."

(모) "그러면 그것이 봉자의 거짓말이다. 봉자는 지금 너의 오라범과 영영한 마음이 있는 고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정말 그럴 것 같으면 성운경이가 우리 집에 통혼을 할 리가 있느냐?"

하며 영자의 말을 압박하고 즉시 사주를 써서 성운경 편에 보낸 결과로, 현숙한 신부 박정애는 그와 같은 신랑 김상현과 백년가약을 맺어 신혼식을 거행하고 우귀까지 하였더라. 예로부터 전해오던 말에, 세상 사람이 누구든지 살아서 호사 한 번, 죽어서 호사 한 번, 일평생에 두 번 호사는 한단 말이 있으니, 살아서 호사라 하는 것은 곧 혼인하는 날이라. 남녀를 물론하고 혼인하는 날은 재상의 동품 우대를 받을 뿐 아니라, 그날은 장차 생남생녀하고 백년해로할 천생배필을 맞는 날인즉, 그날이 오죽 좋은 날이뇨? 그러므로 혼인하는 날은 신랑·신부를 물론하고 좋은 마음은 사람마다 있을 것이지마는, 정애의 우귀하던 날은 어찌하여 좋은 마음이 없던지 남매 서로 붙들고 우는 빛뿐이라.

(춘식) "이애 정애야, 오늘은 네가 백년 배필을 만나 장래의 무궁한 복록 받을 좋은 날인데 내가 조금이나 어찌 슬픈 마음을 두겠느냐마는, 오늘을 당하여 단지 내 마음에 섭섭한 바는 다름이 아니라, 우리 남매가 어려서 부모를 이별하고 외로이 서로 의지하여 심한 고생을 오늘까지 하다가 오늘은 각각 헤어지니 그것이 하나 섭섭한 일이나, 남가여혼이 천리에 정한 바라 어찌할 수 없거니와, 내 마음에 가장 서운한 것은 내가 오늘날 너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만나볼 기약이 묘연하니, 어찌하여 그리하냐 하면 나는 오늘 너를 의절하는 날이니 내 마음이 변하여 의절하는 것이 아니요, 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종을 끊겠다 하는 말이니, 너는 오늘 다행히 좋은 배필을 만나 조상의 문벌을 회복하거니와 나는 아직 천한 영업을 면치 못하여 통지게 질빵 틈에 목을 넣고 생활할 터인즉, 내가 만일 너를 찾아가든지 네가 만일 나를 찾아와 볼 것 같으면 아직 반상의 관습이 타파되지 못한 이 시대에 너의 시댁은 무슨 모양이며, 네 얼굴은 무엇이 되고, 낸들 어찌 부끄럽지 않겠느냐? 그런고로 나는 결코 너를 찾아보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니 너도 내 생각 말고 내 집에 오지도 말 것이요, 정히 궁금하거든 우편으로 편지나 하여주기 바라며, 또한 너의 댁 문밖으로 생선 장수가 지나가거든 내가 몸 성히 잘 있어 저같이 장사를 잘하거니 짐작하여 궁금한 마음을 위로하여라. 여필종부라니, 너는 부디 내 생각 말고 아무쪼록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공경하여 일가의 화기를 지켜서 무궁한 행복 받기를 바란다."

하고 느껴가며 우니, 정애도 역시 남매 서로 의지하여 고생하던 생각을 하고 섭섭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그 오라비 춘식을 붙들고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차마 떠나지 못할 듯하나, 원래 여자라 하는 것은 어렸을 때에는 비록 그 친모와 친형제를 의뢰하거니와 급기야 일신의 백년을 한번 남에게 허락한 이상에는 그 사랑하고 우애하던 친부모와 친형제를 이별하고 시집에 가서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는 것이 정한 이치라. 정애가 어찌 그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는 남매가 헤어지기 어려워 시집을 가지 못하리오. 초창한 마음을 억제하고 친정을 이별하여 시가로 온 후에 삼 일에 입주하여 그 시어머니께 지성으로 효도하며 그 남편에게 지극히 공경하니, 그 남편의 정의는 이루 말할 것 없거니와 그 시모 노부인도 역시 며느리를 극진히 사랑하나, 다만 정애의 마음에 미안한 바는 그 시누이 영자가 정애의 공경하고 사랑함을 받지 않는 것이라. 정애는 영자에게 대하여 아무쪼록 눈에 들고자 지극히 우애하고 지극히 공경하나, 영자는 무슨 심장으로 그리하는지 정애가 시집온 지 한 달이 채 못 가서 정애를 구수 같이 미워하며, 그 모친에게 여러 가지로 모함을 한다. 자래로 고부간에 이간을 붙이고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는 자는 간사한 시누이 까닭이지마는, 아무리 그래도 자기에게 극진히 하는 사람을 무슨 까닭으로 모함을 하는지, 영자가 정애에게 대하여 심히 하는 구박은 특별히 보통사람보다 더욱 심하여, 정애의 일생 신세를 일조에 비참하게 만들고자 하여 그 모친을 대할 적마다,

"어머니, 어머니 마음에는 정애가 얌전하고 유순한 줄로 아시지요? 아직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같아서는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운 듯, 오라버니께 극진히 공손한 듯 아주 얌전을 빼지마는 그러한 속에서 딴 일이 있단 말이야요. 지금은 그러한 간악에 빠져서 어머니도 다시 없이 사랑하시고, 오라버니는 죽자사자 하지마는 조금만 더 지내고 할 말씀이야요. 그년이 제 친정 근처에 약속한 서방이 있어, 동생동사를 맹세하였으나 단지 재산이 없음을 한하여 한 계교 속으로 돈 모으러 우리 집으로 온 것이야요. 제 말을 아니 들으시고 기어이 혼인을 하시더니 장차 좋은 꼴 보실 걸요."

하며 백방으로 모함을 하는 것은, 영자가 결코 제 마음으로 그리 하는 것이 아니요, 그것이 어떤 사람의 교사이냐 하면, 당초에 정봉자가 자기의 여자 직분은 지키지 않고 좋은 남편은 얻고자 하는 생각으로 항상 김상현을 유의하고 영자에게 소개까지 하였다가, 필경은 낭패에 돌아간 고로 영자의 마음속에 칼날 같은 함혐을 먹고 '어느 때든지 정애가 눈물로 세월 보내는 것을 내 눈으로 보리라' 하고, 영자로 자기의 조아를 삼아 우선 모함함에 착수를 한 것이라. 그러나 영자의 모친은 원래 정직한 부인인 고로 영자의 말을 믿지 않고 듣는 대로 영자를 나무라며, 남의 귀에 그런 말이 들릴까 염려하여 그 아들 상현에게까지 발설치 아니하니, 정애가 그럴 줄이야 알 수 있으리오마는, 영자의 구박하는 일에 대하여 지극히 근심이 되나 스스로 위로하기를,

'오냐, 영자의 구박은 일시적 액운에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니 부모가 사랑하고 남편이 귀애하는 이상에 영자쯤이 암만 하면 무엇하리. 그 영자는 평생 이 집에 있을 사람이 아니요, 장차 출가를 할 터인즉, 출가한 후에야 아무리 나를 미워한들 될 수 있으리오.'

이와 같이 너그럽게 생각을 하나 어찌 전혀 관념이 아니 된다 할 수 있으리오. 글로 심려가 되어 얼굴에 화색이 없고, 항상 근심 빛을 띠고 있는 것은 혹여 시모의 눈 밖에 날까, 남편의 사랑을 잃을까 하는 것이요, 결코 그 시누이를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더라. 하루는 아무 죄 없이 그 시누이에게 무안히 나무람을 듣고 마음이 산란하여 자기의 처소에 홀로 앉았는데, 마침 그 남편이 들어오다가 정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하는 말이,

"여보 정애, 오늘은 어디가 편치 않소?"

하는 소리에 정애는 깜짝 놀라며 웃는 얼굴로,

"아― 니오."

(남) "그러면 무슨 불평한 마음이 있소?"

(정) "천만에, 불평할 일이 있을 것 있나요."

(남) "그러면 왜 근심하는 사람같이 앉았소? 몸이 아프거든 몸이 아프다고 하고, 근심이 있거든 근심이 있다고 말을 하오. 내외간에 못할 말이 어디 있겠소? 어려워 말고 말을 하오."

(정) "아니야요. 종용한 곳에 한가히 있으매 어찌 무료한지 화초 구경 하느라고 가만히 앉았었지요."

(남) "그리야? 그렇게 심심하거든 재미있는 소설이나 보지."

(정) "소설도 많이 보았는데, 책을 보면 졸음이 와요."

(남) "그렇지, 우리 둘이 만나야만 심심치 아니해."

정애는 그 말을 듣고 생긋 웃었더라.

(남) "여보 정애, 정애는 내게 대하여 아무 근심 없다 말하지마는 나는 정애의 근심되는 바를 짐작하오. 영자로 말하면 나이 아직 어리고 지각이 없어 그러하지, 속에 암심은 없는 사람이니 그것을 인연하여 과히 심려를 할 것 없은즉, 정애는 아무쪼록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근심할 것이 없소."

상현도 역시 영자의 행동을 알고 정애를 이같이 위로하는 것인데, 이때 마침 노부인이 영자를 데리고 정원으로 산보를 하다가 상현이 내외가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말소리를 들었더라.

여자가 한번 원을 품으면 오월에 서리가 내리는 법이라. 봉자가 칼날 같은 혐의를 한번 품은 이후로 밤이나 낮이나 골똘히 생각하는 바는, 어찌 하면 정애의 이혼하는 꼴을 보리라 하는 악심이라. 그러한 결과로 영자를 어찌 꼬였던지 이 어림없는 영자는 봉자의 모함할 기회를 얻고자 보고자 하는 터인데, 정애 내외의 수작하는 말을 듣고 그 모친에게 하는 말이,

"어머니, 저것 좀 보시오. 정애가 무엇이 그려서 실심을 합니까? 옷밥이 남부러울 것 없어, 아무 하는 일 없이 몸 편히 있어, 어머니께서 사랑을 하셔, 오라버니가 귀히 여겨, 무엇이 부족하여 얼굴에 수색이 가득합니까? 저것은 다름이 아니라 남모르는 속마음에 깊이 생각하는 놈이 있어 저 모양이지요. 지금 오라버니에게 들켜서 할 말이 없으니까,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인데, 오라버니는 맥도 모르고 애매한 남을 끌어넣어서 말을 합니다그려. 제가 조금이나 정애에게 잘못한 일이 있습니까? 참 별말도 다 듣겠지. 내외 정분이 좋으면 남매간 우애도 잊어버리는 것이야."

(모) "지각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니는 제 말을 종내 못 믿어 하시지마는, 이다음에 후회하실 때가 있을 터이니 두고 보십시오."

하며 무한히 험담을 하니, 옛말에 이른바 십벌지목이 없다고 처음 한두 번 들을 때에는 영자가 지각없이 공연히 올케를 미워한다 생각을 하겠지마는, 세 번 듣고 네 번째 들으면 아무라도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라.

(모) "너 어찌 알고 그런 말을 하느냐? 알거든 자세한 말을 하여라. 공연히 남을 미워하지 말고."

하는 동시에 마침내 대문 밖에서 "편지 들여가시오." 하는 소리가 나매, 그 집에 하인도 많이 있건마는 영자가 쪼르르 나가서 우체 편지 한 장을 받아 가지고 들어오더니,

"어머니, 이 편지 좀 보시오. 이 편지가 아마 정애의 못 잊어 하는 사람의 편지인 듯해요."

하는 고로 그 편지 피봉을 보니 전면에는 '경성 청풍계 김상현 방 박정애 전' 이라 하고, 후면에는 사연 보면 알 만한 사람은 마포에서 하였고, 우표에는 마포 우편국 일부인이 맞았는지라, 노부인 역시 의심이 나서,

"마포서 정애에게 편지 올 데가 없는데 그게 웬 편지란 말인가?"

(영) "이게 그 편지야요. 좀 뜯어볼까요?"

(모) "아서라, 어떤 편지인지 알지도 못하고 남의 편지를 함부로 뜯어 본단 말이냐? 그런 흉한 말 하지 말고 어서 정애 갖다 주어라."

하며 엄숙히 하는 말에 영자는 마지못하여 그 편지를 정애에게 갖다 주며 생긋생긋 웃으며,

"반가운 편지 왔어. 아무도 몰래 비밀히 보아."

이때 김상현은 정애를 위로한 후 사랑으로 나가고 정애 혼자 앉았다가 영자가 전하는 편지를 받아보매, 자기에게는 마포서 편지 올 데가 없는데 난데없는 우편 편지가 온 고로 마음에 심히 괴상히 여기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자기 오라버니가 와서 보지는 못하고 우편으로 편지를 하였는가 하고 그 편지를 뜯어보니, 그 편지 사연이 하도 괴상망측하고 도시 알 수 없는 말인 고로 반쯤 보다가 다시 봉투에 넣어 책상 밑으로 던졌더라.

영자가 그 편지를 정애에게 전한 후에 그 모친에게 무슨 말을 하였던지 그 어질고 착한 노부인은 몽롱한 의운이 흉중에 가득하여 즉시 정애를 부른다. 정애는 천만뜻밖에 희한하고 괴상한 편지를 받고 어찌 된 곡절을 몰라 더럽고 분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는 중 삵이 같은 영자가 별안간 오더니,

"언니, 어머니께서 부르시오. 어서 가보, 어서."

하며 재촉을 하는지라, 정애는 어쩐 영문을 모르고 즉시 가서 그 시어머니를 뵈니 정애 시집온 후로 항상 웃는 낯으로 정애를 보던 어머니가 그날은 얼굴에 불평한 기색을 띠고 묻는 말이,

"지금 네게 우편으로 편지 왔지?"

정애는 죄 없이 가슴이 우둔우둔하여 어찌할 줄 모르다가 마지 못하여 대답을 하였더라.

"네, 그러나 그 편지는 제게 오는 편지가 아니야요."

(모) "편지 피봉에 무엇이라고 썼더냐? '청풍계 김상현 방 박정애 전'이라고 하였지?"

(정) "네."

(모) "그러면 그 편지가 네게 오는 편지가 아니고 뉘게 오는 것인 듯 싶으냐? 대저 그 편지 누가 한 편지더냐?"

(정) "저도 모르겠어요. 하도 이상해서 연구하는 중이올시다."

(모) "그게 무슨 소리야? 네게 온 편지를 네가 모른단 말이냐? 그 편지 이리 가져오너라. 네가 모르면 내가 보고 알지. 네게 온 편지를 내가 보자는 것은 일이 아니지마는 내가 잠깐 상고할 일이 있으니 어서 가져오너라."

정애는 그같이 맹랑한 편지를 가져오잔 말도 못하겠고 아니 가져오잔 말도 못 하겠어서 주저주저하는데 노부인은 처음 큰 소리를 지르며,

"시어머니가 편지 좀 보자는데 너 망설일 것 무엇 있느냐? 어서 냉큼 가져와!"

정애의 마음에는 '내가 아무 죄 없는 이상에 은휘할 것이 무엇 있으 리오.' 하고 즉시 그 편지를 갖다가 어머니께 드리며,

"이것은 어떤 장난꾼이 저를 욕하려고 이런 짓을 한 듯합니다."

하고 한 번 웃었더라. 노부인이 그 편지 사연을 보니,

'정애를 잠시 잊지 못하는 이 사람은 정애를 한번 이별한 후로 정애의 꽃다운 용모와 낭랑한 목소리는 공연히 눈과 귀를 어지러이 하여 화조월석에 마음을 수고로이 하는도다. 잠이 들면 정애의 꿈, 잠이 깨면 정애의 생각, 어느 날 어느 때에 정애의 생각을 괴로이 하는 줄을 정애는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생각하기를, 정애도 내가 정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하는 줄로 아노라. 그같이 생각하던 끝에 정애에게 편지나 한 장 부처 가슴에 가득한 정회를 말하리라 하고 지필을 임하니, 도리어 가슴이 막혀서 한마디 할 말 없고, 평일에 정애를 만나면 평생을 두고 말하여도 못다 할 듯하던 말까지 잊어버렸도다. 어찌하면 정애를 속히 만나 이런 말을 정답게 하여 볼꼬! 편지로만 장황히 말할 것 없어 이만 통정하노니, 정애는 부디 우리가 이별할 때에 약조한 바를 잊지 말고 어서 다시 만나 옛말하듯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자. 즉 정애 생각하는 사람.'

조행이 백옥 같은 정애에게 그러한 편지할 사람이 어디 있으리오. 그 편지는 다른 사람의 소위가 아니요, 곧 정봉자가 정애를 모함코자 하는 흉계로 이와 같은 악희를 시작하는 것이라. 그러나 노부인이야 어찌 그러한 줄을 알 수 있으리오. 그 편지 사연을 보고 하도 어이가 없어 하는 말이라.

"이런 편지 받는 사람이 언변이 오죽 능하겠느냐마는 이것을 장난꾼의 짓으로 돌리느냐?"

정애는 그 시어머니 말이 그렇게 나가매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어 다만 우두커니 섰을 뿐인데, 그 옆에 섰는 영자는 한입에 잡아 먹을 듯이 눈을 흘기고 정애를 보며,

"구변은 좋아. 장난꾼이가 욕하려고 편지를 하였것다. 둔사에 지기소궁이라, 둔사로만 암만 둘러댄들 누가 옳은 말로 알아야지?"

하며 살을 에고 소금 치는 소리를 한다. 그 모친은,

"너는 무슨 참견이냐? 가만히 있어……."

하며 영자의 말을 가로막고,

"이애 정애야, 네 말이 도시 아니 되는 말이다. 바로 사건이 여사 여사하게 된 일인즉, '다시 그런 짓을 아니 할 터이니 용서하오.' 하는 것은 가커니와, 번연히 보는 일에 생작이로 잡아떼어서야 '눈 가리고 아옹하기'지, 그런다고 속는 사람이 누구란 말이냐? 기닿게 할 것 없이 대관절 그 장난꾼이 어떤 놈이냐? 편지 사연과 같이 너는 알 만한 장난꾼이지?"

(정) "이런 원통한 일이 어디 있사오리까? 천만뜻밖에 이런 일을 당하오매 어머니께 무엇이라고 여쭐 말씀은 없사오나, 저는 아시로부터 남의 남자와는 말을 한 일이 없는데 오늘날 이런 변이 있는 것은 저도 생각지 못하는 바올시다."

이때 영자는 배쓱 돌아서며,

"그것 다 무슨 소리야? 말로는 그런 일이 없지마는 사실까지 그런 일이 없어?"

하는데 그 모친은 별안간 얼굴에 노기를 띠고 고성을 질러 하는 말이,

"여보아라, 네가 족히 그런 편지 받겠다, 내 눈으로 당장 보는 일을 그렇게 방색을 할 제야 못 보는 터에 무슨 짓을 못하겠느냐? 대저 여자라 하는 것은 품행을 한번 잘못 가지면 다시 씻지 못할 허물이어늘, 네가 행실이 그러하고 어찌 남의 귀한 며느리가 되겠느냐? 부정한 행위가 이왕 현로한 이상에 네가 발명을 해도 쓸데없고, 내가 잔말을 해도 소용없으니, 우리 아무 말 말고 고만두자."

정애는 몽매같이 그런 원통한 일을 당하여 평생에 처음 누추한 말을 듣고 통한한 생각과 분한 마음에 어찌할 줄을 모르겠으나, 도저히 발명할 수는 없어 답답한 가슴이 죽어도 시원치 아니할 듯싶어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섰는 두 눈에 다만 구슬 같은 눈물이 비 오듯 할 뿐이라. 누가 정애의 가슴속에 모닥불 묻은 줄 알리오. 노부인은 한숨을 쉬고,

"집안이 망하려니까 별일이 다 있다."

하더니 영자를 시켜 상현이를 부르는데 이때 마침 김상현이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정애의 우는 양을 보고 깜짝 놀라며 한참 섰다가 그 모친에게 묻는 말이,

"정애가 무엇을 잘못하고 걱정을 드렸습니까?"

(모) "정애더러 물어보아라. 나는 모르겠다."

(상) "아, 정애가 무엇을 대단히 잘못했습니까?"

(모) "정애더러 물어보라니까 왜 이리 여러 말을 하니? 어미의 말 아니 듣고 네 마음대로 골라 장가들더니 참 장가 잘― 들었다."

상현이가 그 모친의 말을 들으매 정애가 무슨 큰 허물이 있는 듯한 고로 정애를 향하여 묻는 말이라.

"여보 정애, 왜 그러오?"

(정) "……."

(상) "무슨 잘못한 일이 있소? 왜 말을 아니 하오?"

(정) "……."

(상) "여보 정애, 어머니께서는 정애더러 들으라 하시고 정애는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하니, 정애의 우는 꼴 보는 이놈의 가슴은 좀 생각지 않소?"

이때 영자는 입을 비쭉하며,

"미상불 오라버니 가슴이 타게는 되었소. 부끄러워서 말 못 하는 언니더러 말을 하라면 말할 리가 있나요?"

상현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영자에게 하는 말이,

"무에 그렇게 부끄럽단 말이냐? 어머니께서도 말씀 아니하시고, 정 애도 말을 아니 하니 그러면 네가 이야기 좀 하여라."

(영) "다른 일이 아니라오. 지금 언니에게 우편 편지 한 장이 왔는데요, 그 편지가 대단히 이상한 편지야요."

(상) "편지가 무슨 편지란 말이냐?"

(영) "편지가 아주 재미스러. 저기 있으니 좀 보오."

상현이가 그 말을 듣고 편지를 집어보더니 "허허허허" 웃으며,

"어머니, 이 편지를 보시고 정애를 의심하십니까? 어머니께서 이 편지를 보시고 정애를 의심하시면 대단히 오해를 하시는 일이올시다. 형산 백옥은 비록 티가 있을지언정 정애는 결코 허물이 없을지니, 어머니께서는 다시 생각하시고 정애를 용서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모) "이놈아, 너도 사람의 창자를 가진 놈이냐? 사람의 창자가 있고 보면 그런 말을 못 하겠다. 날더러 무슨 용서를 하란 말이냐? 며느리가 간부의 편지를 받아도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상) "아니올시다. 이게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이 편지는 결코 정애의 행위가 불미하여 이런 편지가 온 것이 아니요, 정녕 악소년배의 장난인 듯합니다. 근일에 타락 학생들은 공부에는 조금도 뜻이 없고 날마다 일삼는 바는 여학생의 뒤나 쫓아다니며 공연한 욕심을 내다가 혹 부정한 여자가 있어 그렇지 못하면 그 여자를 욕도 하고 혹 그 여자 다니는 길에 흉악한 말로 방을 붙이기도 하며, 혹 이러한 편지를 부쳐 욕하기도 하는 일이 종종 합니다. 아무 증거 없는 편지 한 장으로 무죄한 사람의 애매한 의심을 해서야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이 편지를 경찰서에 계출하여 이런 장난한 놈은 어디까지든지 수색을 할 터이오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노부인이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옳다, 네 말이 그럴듯하다. 이애 정애야, 내가 너무 경솔히 말을 했다. 네 처소로 나가거라."

하며 두어 마디 위로를 하는 지라, 이때 상현이가 정애를 데리고 나와 무한히 위로를 하였더라.

그 노부인도 그 아들의 말에 의심을 적이 풀었으나 기연가 미연가 반신반의를 하는 중이요, 정애도 역시 그같이 미안한 일을 한번 당한 후로는 항상 마음에 부끄러운 생각이 떠나지 아니하여 더욱 염려하며 더욱 조심하여 그 시모와 시누이를 극진히 공경하나, 영자는 묘한 계교를 마침내 실패하고 분한 생각이 공연히 탱중할 뿐더러, 요괴한 봉자는 영자를 만날 적마다 간사한 말로 꼬이매 그러한 꼬임을 들을 적마다 정애를 어디까지든지 모함할 일 있어 정애의 허물을 얻고자 하는 터이라, 날마다 정애의 일동일정을 여겨 보고 살펴보는 중인데, 하루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세수를 하노라니 중문간으로 어떤 광주리장수 하나가 들어오며,

"소주 삽시오, 조개젓도 있습니다."

하고 광주리를 내려놓더니 한참 주저주저하다가 부엌으로 쏜살같이 들어가서 아침 하는 정애와 무슨 이야기를 수군수군하는데, 그 행색이 심히 수상한 고로 가만히 엿본즉 무슨 수작을 한참 하다가 광주리장수가 치마 허리에서 무슨 편지 한 장을 내어주는데 정애는 가만히 받아서 품에 감추는지라, 영자가 그것을 보고 마음에 여득천금하여 즉시 노모의 앞으로 나아가 은근히 하는 말이,

"언니에게 무슨 편지가 또 왔어요. 오라버니는 그런 것을 모르고 정애라면 사족을 못 쓰니 어쩌잔 말이야요? 그렇게 오장 없는 이는 처음 보겠소."

(모) "무슨 편지가 또 왔단 말이냐? 똑똑히 알고 말을 해라."

(영) "어머니도 못 믿어 하는 말씀이올시다그려. 범연히 보고 그런 말을 할까요? 지금 어떤 광주리장수가 와서 언니와 수군수군하더니 허리춤에서 편지 한 장을 내어 주니까 언니는 그 편지를 받아서 얼른 감추던데요."

노부인이 그 말을 듣고 우두커니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한참 하다가,

"허― 그것 참! 우리 집안 일이 말 아니다. 장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더니 다시 하는 말이,

"네가 잘못 보았지, 그럴 리가 있느냐?"

이때 영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며,

"어머니께서도 제 말을 못 믿으시니까 조금 있다가 그 편지를 갖다 드릴 터 오니 친히 보시면 아시겠지요."

하고 나가서 가만히 정애의 동정만 살피더라.

정애 남매는 그 우애와 정의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남매와 달라서, 정애가 김씨 문중에 출가를 한 후로 정애는 그 오라버니 생각하기를 살이 마르도록 하며, 춘식이는 정애 생각하기를 역시 그와 같이 하여 서로 침식이 달지 않게 지내는데, 세월은 쉽고 쉬워 정애가 출가한 지가 어언간 이삼삭이 지나매 "나는 너를 보러 갈 필요가 없으니 너도 날 보고 싶은 생각은 단념하여라." 단언하던 박춘식이가 정애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고 간절하여 꿈에라도 한 번 만나 보면 좋을 듯하나, 끄레발을 하고 차마 행세하는 새 사돈집을 갈 수도 없고, 예로부터 거짓말 제일 잘하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혼인 중매 아비라 할 것이니,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혼인 중매를 하자면 자연히 거짓말을 아니 하고는 못 되는 것이라. 그러므로 성운경이도 정애의 혼인 소개를 할 때에 박춘식의 생선 장수를 엄적하느라고 김상현의 모친에게 신부의 오라범은 팔난봉이 되어 부지거처라고 속인 고로, 상현의 모친은 정애의 오라비는 간 곳을 모르는 줄로 아는 터이요, 박춘식은 유래 조선의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습관에 거리끼어 정애 시집 보낼 때에 남매간 연신을 끊기로 결심하였으나, 박춘식과 정애의 새 사돈집에서 정애 친정 족속은 아무도 없는 줄 아는 터에 정애를 불러 내올 수도 없어 다만 울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할 뿐인데, 하루는 신문 잡보에 파고다 공원 개방이라 하고, 요사이는 사동 파고다 공원을 밤낮 열어놓아 일반의 관람을 허한다더라 하였는 고로 그 신문을 보고 생각하기를,

'옳다, 그러면 정애를 그곳으로 만나 보리라.'

하고 편지를 써서 광주리장수 편에 비밀히 보낸 것이라. 정애가 오래간만에 그 오라버니 필적을 보매 반갑기가 이루 측량할 수 없으나, 일전에 허무한 편지 까닭으로 시모께 죄 없이 미안을 당한 터이라, 그 편지를 몰래 몰래 보느라고 영자 눈에 띄지 않는 틈을 타서 가만히 보고 얼른 감춘다는 것이 필경은 영자의 보는 눈동자 속으로 들어갔더라. 정애야 어찌 영자의 지극스레 살피는 줄을 알았으리오. 오래간만에 보고 싶고 생각하던 우리 오라버니 편지를 잘 보고 잘 두었거니 하고 무심히 서적을 보다가 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요괴한 영자는 정애가 편지 보는 양과 편지 두는 곳까지 자세히 엿보아 두었다가 정애의 잠든 사이를 이용하여 민첩한 수단으로 그 편지를 감쪽같이 집어다가 쏘―온 살 같이 그 모친에게 바치니 노부인은 그 편지를 급히 열어본다.

'내가 너를 작별할 때에 나는 너를 찾지 말고 너는 내 집에 오지 말라고 박절히 말을 하였지만, 내가 너를 보낸 뒤에 아무리 생각을 말자 하여도 자연히 오장에서 솟아나오는 정리를 금치 못하여 때때로 너 보고 싶은 생각이 문뜩문뜩 나면 만사가 무심하고 심기가 민울하여 실로 결연한 회포를 이루 이기지 못할 적이 많다. 너도 필연 내가 너 생각하듯 나를 생각할 줄 짐작하나, 네나 내나 만나볼 기약이 없는 것은 사실상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다만 내가 재산이 없어 신분이 이 지경에 있는 것만 한탄이라.'

노부인이 편지를 보다가 이러한 말에 이르러는, "이것 참, 우리 집안이 결딴났구나! 이럴 줄을 누가 알았단 말이냐?" 하고 한탄을 하며 보던 편지를 마저 본다.

'그러나 이 사이 신문을 보니 탑동 파고다 공원을 개방을 하고 일반에게 관람을 시킨다 하니, 오늘 밤 여덟 시에 탑동공원으로 오면 잠깐 만나보겠다. 나는 먼저 가서 기다릴 터이니 잊지 말고 부디 그리로 오너라. 미진한 설화는 만나 보고 말하겠기로 이만 적는다.'

하였고 편지한 사람의 성명도 없더라. 노부인이 그 편지를 다 보더니 귀하고 귀한 아들 상현이를 생각하고 그리하는지 아무 말 없이 느껴가며 우는데 영자가 하는 말이,

"어머니 우실 것 무엇 있습니까? 이왕 잘못된 일을 후회하고 우시면 쓸데 있습니까? 그러기에 제가 당초에 무엇이라고 했어요? 오빠는 정신없이 정애의 간사에 빠져서 정애의 말이라면 어디까지 두호를 하고 지난번 편지도 장난꾼의 악희로 돌리더니 이 편지도 장난꾼의 짓이라고 할는지. 어머니 어머니, 울지 마십시오. 이제 울면 소용 있습니까? 잘 조처하실 도리를 생각을 하셔야지요. 어머니, 좋을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이 편지 보신 체 마시구요, 이따가 정애의 하는 거동을 살펴보시고 오빠를 불러 조용히 조처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나가 두었던 곳에 그 모양대로 다시 넣고 저녁 여덟 시 되기를 기다리더라.

정애는 영자가 그 편지를 훔쳐다가 시모의 눈에 보였는지 어쨌는지 아무런 줄 모르고 그 오라버니를 주야로 보고 싶던 끝에 편지를 받아 보고 '어서 이 해가 갔으면 우리 오라버니를 만나보겠다.' 하는 생각이 있으나, 다만 한 가지 거리끼는 것은 다름이 아니요, 시집온 지 몇 달 못 된 젊은 여자 혼자 밤 출입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뜩이나 허무맹랑한 편지 사건으로 시모에게 의심을 받고 미안한 마음이 풀리기 전에 일없이 문밖을 날 수 없는 사정이라. 시집에서는 자기 오라버니가 부지거처로 아는 터에 오라버니 보러 간다고 할 수도 없고, 학교에 다니는 동무의 집을 간다고 핑계할 수도 없어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다가 한 가지 의견이 나서,

'옳다. 우리 남편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오라버니가 있는 줄 모르시지마는, 우리 남편은 오라버니를 아는 터이니 우리 남편과 같이 갈 것 같으면 시어머니가 아신대도 무슨 관계가 있으리.'

하고 해지기를 기다려 그 남편더러 하는 말이,

"여보시오, 오늘은 일기도 심히 청랑하고 여러 날 장마 끝에 달구경도 처음 하였으니 우리 어디 가서 산보나 좀 하고 옵시다."

김상현은 그 부인의 말이라면 일분부 시행을 하는 터이라, 그 부인이 산보 가자는 말이 귀엽게도 들릴 뿐더러 자기도 역시 변호사 시험을 치르려고 법률 공부를 하기에 뇌가 심히 아파서 한번 신선한 공기를 쏘이고자 하던 터이라,

"아, 그 말 좋소. 어디로 산보 가려오?"

하며 머무르지 않고 승낙을 한다.

"요사이 탑동공원을 열어놓고 구경을 시키는데 그 청유한 야경이 심히 좋더랍디다."

(상) "아, 그러면 그리로 가지."

이때 정애는 남편과 같이 산보 가는 이상에 조금이라도 은휘할 것이 없어,

"여보― 그러나 우리가 잠시를 어디 가더라도 어머니께 여쭙고 가는 길이 옳지요."

(상) "아무렴, 여쭈어야지."

하고 얼른 대답을 하다가 속마음에 우리 어머니는 완고 시대 어른이라 혼인한 지 몇 달 못 된 내외가 장안 대도 상에 건달이 갈보 데리고 가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니는 것을 대기로 아시고 필연 말리시려니 하는 생각이 났던지 다시 말하기를,

"여보, 잠깐 다녀올 것을 어머니께 여쭈어 무엇 하겠소. 슬그머니 갑시다."

(정) "그게 무슨 말씀이오? 옛말에 출필곡하고 반필면이라니 잠깐 일지라도 부모 몰래 어디를 가서야 될 말이오?"

(상)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니야. 어머니는 주무실 터이니 그 사이에 잠깐 갔다 오면 고만이지. 가려거든 어서 갑시다."

하며 재촉하는지라, 정애는 그 남편이 그리하는 이상에 억지로 우길 것 없이 그 남편과 한가지 탑동공원을 향하였는데, 영자는 정애의 동정을 살차게 살피다가 정애가 문밖으로 나가는 양을 보고 즉시 그 모친에게 일러 바치니, 그 모친은 귀하고 귀한 외아들 생각을 하고 아무 말 없이 울기만 할 뿐이라. 영자는 노모를 위하는 체 간사를 부리며 하는 말이라.

"어머니, 울지 마십시오. 가만히 정애를 쫓아가서 그 증거를 잡아 가지고 응용히 조처하신 뒤에 오라버니 장가를 다시 들이면 고만이지, 우실 것 있습니까?"

그 노부인이 그 말을 듣고 그럴 듯이 여겨 곧 영자를 데리고 탑동공원으로 정애를 좇아갔더라.

상현이가 자기 부인과 동반하여 파고다 공원을 가는데, 그날은 천기가 가을밤같이 청명하고 가로에 달빛이 심히 아름다워 산보 나온 사람의 심회가 적이 쾌창한지라, 내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월색을 따라 공원 문 앞에를 당도하였는데, 그 옆 북부경찰서에서 군도 소리가 데걱데걱 나더니 별안간,

"자네, 어디 가나?"

하는 말에 돌아보니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곧 자기와 한 학교에 다니다가 같이 졸업한 후에 즉시 경부로 서임되어 북부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친구 현국진(玄國鎭)이라.

"어, 여기까지 왔네. 자네 요사이 공부에 바쁘지나 아니한가?"

(현) "나는 별로 바쁜 것 없네마는 자네는 요사이 무엇 하나?"

(상) "별로 하는 것 없네. 이왕 공부하던 것 복습을 좀 하는 체 하는데, 어디 공부되던가?"

(현) "옳지, 자네는 경부 하기 싫다고 변호사 고시에 청원했단 말 들었네. 아무쪼록 공부 잘해서 목적을 달하게. 그러나 오늘 마침 자네를 잘 만났네."

(상) "응, 무슨 좋은 일 있나?"

(현) "좋은 일이야 있을 것 있나마는 지금 나하고 같이 남대문 정거장으로 손광준(孫光準)이 전별하러 가세."

(상) "왜, 그 사람 어디 가나?"

(현) "아따, 자네 알듯이 그 사람이 역시 경부로 서임한 후에 나와 한 서에 출근하다가 이번에 경주경찰서장으로 영전을 하여 오늘 떠나는데 낮에는 덥다고 밤차로 내려간다네. 한 반에서 공부하던 사람 중에 우리 세 사람이 그 중 정의 상합하게 지내는데, 우리가 그 사람의 전별을 아니 해서야 될 수 있나? 시간이 거진 되겠네. 어서 나가세."

김상현은 그 말을 들으매 정든 친구 전별을 아니 할 수도 없고, 부인을 데리고 산보를 왔다가 떼쳐버리고 갈 수도 없이, 좌우가 망단한 고로 한참 주저주저하여 생각다 못하여 그 부인에게 말하기를,

"지금 급히 볼일이 있어 잠깐 어디를 갔다 올 터이니 여기서 한시 동안만 기다리오."

하고 그 친구 현국진과 같이 전차를 타고 남문역에를 나갔는데, 정애는 그 남편이 친구 전별을 하러 가며 잠깐 기다리라 하매 하릴없이 자기 혼자 공원 문을 들어서니, 조요하던 등빛은 울밀한 나무 수풀에 비취어 맑은 광휘와 그윽한 그늘은 청량한 가을 뜻이 나는 듯, 기이한 꽃과 아름다운 풀은 땅에 가득히 난만하여 일폭 공원의 영롱 찬란한 경개가 실로 사람의 심신이 상쾌할 만한데, 그곳에 소창하러 온 사람들은 사나이·여편네·늙은이·젊은이·섰는 사람·앉았는 사람, 오락가락 인성만성한 지라, 그중에 자기 오라버니가 왔는가 하고 면면상고를 하며 옥탑 근처로 돌아가는데 한편 나무 수풀에서 헙수룩한 사람이 툭 튀어나오며, "정애!" 하고 부르는 자는 곧 박춘식이라. 남매 오래간만에 만나매 어찌 반갑던지 우두커니 마주 서서 서로 물끄러미 보기만 할 뿐이라. 남인들 몇백 리 밖으로 출가를 하며 몇 해씩 남매 서로 못 보고 견디리오마는, 정애의 남매는 그 우애와 정리가 남에서 특별히 다를 뿐 아니라,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매 손목을 마주잡고 다니며 전전걸식을 할 때에 그 정의가 과연 어떻다 하리오. 지금은 비록 춘식이도 자유 생활을 하는 터이요, 정애도 시집을 가서 잘사는 터인즉, 만일 서로 보지 아니하여도 관계없으련마는, 어려서 고생하던 생각을 하면 잠시간 못 보아도 궁금한 마음이 간절하여 그리하는 것이라. 그와 같이 한참 마주 서 보다가,

"오라버니,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오?"

"오냐, 나는 전이나 오늘이나 한 모양이다마는 너는 시댁 살림하기가 너무 괴롭지나 아니 하냐?"

"관계치 않아요."

"오냐, 다행이다. 이제는 내가 밥 시름을 잊어서 너를 평생 아니 보아도 관계치 않다마는, 남매 정리를 이기지 못하고 어찌 보고 싶던지 오늘 너를 이곳으로 잠깐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네가 너의 남편에게 물론 귀염받는 줄을 안다마는, 시어머니께서도 사랑하시고 시누이와도 합의하게 지내느냐?"

"네, 다 관계치 않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매우 온후하신 어른이시라, 친어머니가 계셔도 그에 더할 수가 없고, 시누이가 좀 이상한 성미를 가졌으나 그리 관념할 것이 없는데, 그간에 좀 미안한 것을 당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니요, 어떤 놈의 소위인지 흉악한 헛편지를 제게로 보내서 글로 하여 잠깐 미안히 지냈으나, 무사히 타첩되고 다시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춘) "그것이 웬일이란 말이냐? 그러면 너의 시댁에서는 너를 얼마쯤 수상히 여기시겠구나?"

(정) "아니오, 사실 없는 일에 수상히 여길 것이야 있습니까마는, 제 마음에 대단히 부끄러워요."

(춘) "그렇지, 너의 시댁에선들 너 같은 사람을 몰라보실 리야 있겠느냐마는 그런 일이 없느니만 할 수가 있느냐? 그것은 어떤 악소년이 너를 흠모하여 보고 그런 짓을 하였나 보다. 참 세상에 괴악한 일도 많지."

이같이 이야기를 할 때에 뒤에서 별안간 여자의 기침 소리가 나며,

"언니, 어머니가 저기서 부르시오."

하는 말에 무심히 돌아본즉, 그 말하는 사람은 곧 자기 시누이 영자이라. 정애가 깜짝 놀라서 황망히 하는 말이,

"에그! 아가씨 웬일이오? 어머니께서 여기를 어떻게 오셨소?"

하며 그 오라버니께 인사도 못하고 돌아서서 오는데,

(영) "왜 여기는 언니만 오고, 어머니는 못 오시는 데요? 어서 갑시다."

하며 재촉을 하는지라. 이때 정애의 간담이 한 움큼은 되어 죄없이 벌벌 떨며 그 시모 앞에 나아가,

"어머니, 여기를 어떻게 오셨습니까?"

"너는 여기를 왜 왔니? 옳지, 남 재미있게 이야기하는데 왜 왔느냐 말이냐?"

(정) "그게 웬 말씀이오니까?"

(모) "말은 잘 한다. 웬 말씀이십니까? 지금 서로 수작하던 놈이 누구냐?"

시모는 분노함을 이기지 못하나, 목소리는 나직나직 남이 들을까 조심하여 감히 소리를 크게 못 지르고 나직나직한 말소리라.

(정) "아니올시다. 그런 일 없습니다."

(모) "그런 일 없습니다? 나 혼자 본 것 아니요 영자까지 네 눈에 당장 본 것을, 없다는 것만 상책이냐? 네가 안찬 것이 족히 그런 행위를 하겠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왁자하고 보면 남이 부끄러우니 아무 잔말 말고 집으로 가자."

(정) "어머니 말씀을 어찌 거스르겠습니까마는 제 사내가 저더러 잠깐 기다리라고 어디를 갔으니까 올 때까지 기다려서 같이 가야 하겠습니다."

(모) "사내? 아까 너하고 이야기하던 놈 말이냐? 네 사내는 너 같은 년 데리고 이런 곳에 올 사람이 결코 아니다."

(정) "어머니, 어머니께서 왜 그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어머니께 거짓말할 리가 있습니까?"

(모) "허― 잔말 말고 어서 가! 남이 들으면 부끄러워."

하며 노기가 등등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모양이라. 한마디만 더 방색을 할 것 같으면 그 사람 많은 곳에서 불호광경이 일어날 지경이라. 하릴없이 그 시모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데, 정애의 오라범 춘식이는 정애의 시모가 온 줄 알고 그곳에 있을 수가 없어 슬며시 빠져 달아났더라.

노부인은 정애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얼굴에 노기가 가득하여 정애를 불러 세우고, 정애의 얼굴이 뚫어지도록 노려보며 천기가 나서 말을 하려다가 못하고 또다시 무슨 말을 하려다가 못하기를 한참 동안 하더니 별안간 소리를 버럭 지르며,

"이 년아, 네가 와서 내 집을 망한단 말이냐?"

하더니 다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섰다 앉았다,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쿵 때렸다 한숨을 휘― 내쉬었다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오냐, 고만두어라. 네까짓 개 같은 년에게 말하는 내가 틀리다. 이 지경 된 판에 말은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더니 담뱃대를 집어 마루에다 탁탁 털어 담배를 담아 들고 성냥을 그어서 불을 막― 붙이는 터이요, 정애는 그 시모가 그리하는 자리에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어 마루 상기둥을 잡고 묵묵히 섰는 가운데, 다만 두 눈에서 눈물이 가랑가랑한데 이때 문소리가 덜컥 나며 정애의 남편 상현이가 들어온다. 상현이는 남문 정거장에 나가서 친구를 전별하고 일초가 바쁘게 공원으로 돌아와서 사면 다니며 정애를 찾으나 정애는 어디로 갔는지 형영도 없는지라. 기다리라고 부탁을 한 터에 그새를 못 참아 혼자 집으로 돌아갈 리는 만무하고, 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였으면 다른 곳에는 갈 데가 없는 터이라, 어찌 된 곡절을 몰라서 인력거를 타고 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터이라. 들어오며 본즉 정애는 벌써 자기 집으로 왔으나, 자기 어머니든지 정애의 모양이 심히 수상한 고로, 그 모친의 얼굴 한 번 보고 정애의 얼굴 한 번 보고, 또 영자의 얼굴 한 번 보고 삥삥 돌아가며 얼굴 한 번씩 치어다 보다가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막― 벗어 거는데 그 모친이, "상현아!" 부르는지라 즉시 대답을 하고 마루로 나오니 그 모친은 노기가 등등하여,

"너 어디 갔더냐?"

상현이는 그 모친이 무슨 일로 그리하는지 몰라 주저주저하다가,

"오늘 저와 한 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경주경찰서장을 하여 떠나는 고로 남문 밖 정거장에 가서 전별을 하고 오는 길이올시다."

"정녕 그럴까?"

"아, 어머니께 거짓말을 할 리가 있습니까?"

"그러면 왜 어미에게 말을 아니 하고 갔어?"

"아니올시다. 집에서부터 정거장에를 갈 줄 알았더면 어머니께 여쭙고 가겠지만는, 중로에서 어떤 친구를 만나서 그 말을 듣고 바로 정거장을 다녀왔으니 어머니께 말씀할 사이가 있습니까?"

"그러면 너 정애와 어디 같이 간 일은 없지?"

"아니올시다. 오늘 밤은 달이 하도 밝고 천기가 매우 청량하기에 정애와 같이 산보를 나갔다가 어떤 친구를 만나서 경주경찰서장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잠깐 정거장을 나갔다 왔습니다."

"여러 말 할 것 없다. 손자를 못 보는 한이 있더라도 정애 같은 며느리는 눈으로 보지 아니할 터이니 너 지금으로 정애와 이혼해라."

"졸연히 웬 말씀이니까?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이혼을 하다니요?"

"아무 죄 없으면 이혼을 하랄까? 이혼할 만한 효상을 내 눈으로 목도를 하였으니까 이혼을 하라는 것이지."

"무엇을 보셨단 말씀이오니까?"

"네가 생각해 보아라. 여자의 이혼할 죄가 무엇이겠느냐? 우리 집안이 그렇지 않은 터에 며느리 명색이 그 같은 추행이 있을 줄 누가 알았단 말이냐? 나는 입이 더러울까 보아 말 못 하겠으니 너는 그쯤 알고 당장에 이혼해라."

"저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정애가 어찌어찌하였으니 행위가 불결하다고 말씀을 하셔야지요."

노부인은 화증이 나서,

"어미가 여간 알고 그런 말을 할까? 행실이 부정하다면 다 짐작할 것이지 묻고 또 묻고 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하며 음성이 차차 높아지는데 영자가 그 모친의 말을 가로채서 하는 말이,

"오라버니, 내가 자세히 말씀하리다. 아까 어머니께서 언니가 어디를 갔는데, 집에 있는 줄 아시고 저를 데리고 탑동공원으로 구경을 가셨는데, 공교히 언니가 그곳에 와서 어떤 사람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시고 즉시 불러 데리고 오셨어요. 그만하면 아시겠지요? 기외에 자세한 말은 언니더러 물어보시면 아시리다."

이때 김상현은 자기 누이 영자가 아직 계집아이 년으로 건방지게 어른의 말 참관하는 것이 괘씸하여,

"이 년, 계집아이 년이 어른의 말참례가 무엇이냐? 남의 행실을 말하지 말고 네 처신이나 잘 가질 도리를 해!"

하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고 다시 정애더러 묻기를,

"여보, 이게 웬일이오? 말하오. 나는 정애를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터에 가끔 가끔 이러한 풍파가 나니, 이게 웬일이오? 조금도 온휘할 것 없이 말하오."

정애가 눈물을 씻고 꿇어앉으며 공손한 말로,

"그런 게 아니올시다. 어머니께 바른대로 말씀을 여쭈었으련마는 아무 말씀도 못한 것은 곧이들으실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기도 괴이치 아니하게쯤 된 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문 앞에서 당신은 정거장으로 나가시고 저는 공원으로 들어가서 한편 구석에 앉았더니, 마침 오라버니가 구경을 왔어요. 그래서 서로 안부를 묻고 그간 지내던 이야기를 할 때에 어머니께서 작은 아씨를 데리시고 오시다가 보시고, 혹시 제가 외인 교제나 하는가 아시고 대단히 걱정을 하시니, 제야 그 사람이 저의 오라버니라 하면 어머니께서 곧이들으시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이때까지 당신 들어오시기만 기다리는 터이올시다."

(상현) "자― 어머니, 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자세히 알지 못하시고 그렇게 과도히 말씀도 하십니까?"

(모)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어리석지. 내가 모르고서 말을 해? 정애의 오라범은 부지거처라는 사람이 어디서 마침 그렇게 왔으며, 그뿐 아니라 내가 평생에 구경이라고는 아니 다니는 사람이 공원에는 왜 갔겠느냐마는, 벌써 정애가 그런 놈을 맞추고 공원으로 갈 줄 알고 뒤를 밟아 갔더니라. 너희가 뉘 앞에서 그런 간사한 말을 하느냐? 상현이 너는 계집에 허기가 져도 분수가 있지, 저렇게 똥물에 튀한 놈이 어디 있단 말이냐?"

(상) "어머니께서 정애가 그런 놈 맞춘 줄을 어찌 아셨단 말씀이오?"

(모) "응, 증거를 분명히 알려느냐? 오늘 아침에 어떤 년이 와서 정애에게 전하던 편지 보았어. 그 편지에는 공원으로 만나자고 하였어. 그 편지가 어떤 놈이 하였는지 너는 생각하겠느냐?"

(정) "아니올시다. 그 편지도 역시 오라범의 편지올시다."

(모) "웬 오라범이 그리 많으냐? 편지한 놈도 네 오라범, 공원에서 이야기 하던 놈도 네 오라범, 부지거처로 난봉부리는 놈도 네 오라범. 나 모르는네 오라범이 어찌 그리 많으냐?"

(상) "아니올시다. 그런 것이 아니올시다. 정애의 오라범은 박춘식이라 하는 사람이온데, 난봉이 되어 돌아다니다가 일전에 왔단 말을 저도 확실히 들었습니다. 어머니 조금도 의심치 마십시오. 정애가 만일 행위가 불결할 것 같으면 제가 밤뼈 자란 놈이 아닌 전에야 조금인들 두호할 리가 있으며, 사정 둘 리가 있겠습니까?"

(모) "응, 너는 어찌 생각이 들어 그리하는 줄을 모르겠다마는, 너의 말들이 하나도 참된 말이 아니다. 설령 난봉부리던 오라범이 왔을 것 같으면 어엿하고 광명정대하게 제 누이를 와 보든지 데려다 보든지 할 것이지, 편지를 몰래 한다, 공원으로 불러본다, 그렇게 수상한 짓을 할 리가 있느냐? 나도 네 주의를 짐작한다. 네 주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왁자히 떠들고 보면 남이 부끄러울 터이니까, 이러나저러나 덮어두었다가 옹용히 처사를 하려는 의사인즉, 오냐, 네 잘 생각했다. 이것은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조처하여라. 보기 싫어, 저리들 가!"

하더니 영자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장지를 벼락같이 닫더라.

"어머니께서 이처럼 하시기도 괴이치 아니하오나, 잠깐 돌려 생각하실 것은 정애가 비록 그러한 행실이 있을지라도 분명히 알기 전에 경솔히 처사하지 못할 일이어든, 확실히 알지 못하고 어찌 남에게 적악을 하오리까? 여자라 하는 것은 남자와 달라 한 번 이혼을 당하면 다시 거두를 못할 지니, 만일 이혼당한 계집이 확실히 외인을 간통하는 자 같으면 죄를 받는 것이라 관계할 것이 없거니와, 만일 잘못 알고 애매한 사람으로 일평생 비경을 면치 못할 것 같으면 그 무형적 죄악을 어찌하잔 말이오니까? 그런즉 제가 어머니 말씀을 복종치 아니하겠다는 것이 아니오라, 아직 좀 더 두고 보아서 정애가 만일 확실한 죄가 있을진댄 이혼 아니라 법사에 고발이라도 하겠사오니 어머니께서는 분하심을 참으시기 바라나이다."

하며 간곡히 말하여 그 모친을 위로하니, 이는 아직 모친의 노함을 풀고 장차 정애의 특이한 정절을 보아 전일 의심을 풀어 드리고자 좌우로 얼렁거려 가는 수작이라. 그러나 정애는 그 남편이 그와 같이 애호를 하니 무슨 걱정이 있으리오마는, 여자의 편성이라 그 일로 근심이 되어 어찌하면 시어머니 의심을 풀고 가정이 원만하게 지내볼꼬 하는 마음이 가슴에 맺히고 맺혀 있는 결과로 자연 얼굴에 화색이 없고 차차 구미가 달지 아니하더니 며칠 아니 되어 우연히 병이 나는데, 그 병은 다른 병이 아니요 곧 심경 병이라. 사지가 날연무기하고 공연히 정신이 희미하며 때때로 오한이 발하여 동양 의학에 소위 뇌점이란 병과 흡사히 되더니 점점 신체가 파리하며 병이 깊어가는지라, 이때 정봉자는 정애의 병든 것을 기화로 알고 영자와 궁흉극악한 공론을 하였더라. 하루는 영자가 그 모친에게 하는 말이,

"어머니, 요사이 정애의 모양을 보십니까? 그년이 우리 오라버니의 인후한 덕택으로 이혼을 아니 당한 생각은 못하고 간부를 보지 못하여 상사병이 났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요사이 흔히 유행하는 매독이나 임독 같은 전염병이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대저 오라버니 일이 딱하지 않습니까?"

영자가 제반 요악한 말을 모두 하니 그 노모는 가뜩이나 그 며느리 미워하는 마음에 그 말이 그럴 듯이 들려서 즉시 상현을 불러 하는 말이,

"여보아라, 요사이 정애의 병기가 대단히 심한 모양이니, 이혼할 때 하더라도 치료를 해주어야 아니하겠느냐? 그런데 누구든지 시집에서는 거처도 불편하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어 병을 속히 치료하지 못하는 고로 친정으로 가서 조리하는 사람 많더라. 그러니 정애도 친정으로 보내서 병을 치료하게 하자. 마포는 강변이라 공기도 신선하고 서울서 과히 멀지 아니하여 약 쓰기도 편리하니, 하루바삐 일전에 공원에서 보던 제 소위 오라범 집으로 보내라."

이같이 정성스럽게 말하는 것은 실로 정애를 위로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니요, 정애를 핑계 삼아 친정으로 보낸 후에 눌러 이혼을 하여버리고 정봉자를 집으로 데려다가 상현이와 정이 들게 하고자 함이라, 상현이가 어찌 그 모친의 어훈을 몰라 들으리오. 공손하게 하는 말이,

"지금 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제 마음에 대단히 기쁩니다. 어머니께서 정애를 이처럼 사랑하시면 제 집에 보내지 아니하여도 병이 스스로 낫습니다. 저도 미상불 정애 병이 점점 깊어 가기에 공기 좋은 강변으로 피접이나 보낼 생각이 있사오나, 어머니께서 허락을 하실는지 몰라 그런 말씀을 내지도 못 하였삽더니, 어머니께서 먼저 말씀을 하시니 곧 그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소위 정애의 친정이라고는 수간두옥에 편히 거처할 곳도 없을 뿐더러, 일전에 말씀한 바와 같이 제 오라범은 난봉 되어 제 집에 있는 날 며칠 되지 못 하는 모양이오니 그리로 보내고 보면 집에 있느니보다 바이 못하여, 하루에 나을 병을 일 년에도 고치지 못할 것이오니, 하필 제 집으로 보낼 것이 있습니까? 제가 두호강정(斗湖江亭)으로 데리고 가서 며칠 치료하겠습니다."

하고 그날로 행장을 간단히 차려 두호강정으로 나가니, 그 모친은 자기 마음과 얼마쯤 상위가 되어 아들이 그리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내외를 강정으로 내어 보내더라.

두호강정은 김상현의 별장이라. 옹옹울울한 녹림 속에 일개 소정이 익연히 일대 청강을 임하여 남악과 관악 등의 명산을 멀리 연한 중에 바라니, 그 아름다운 안계와 그윽한 풍경은 누구든지 가히 사랑할 만한 곳이라. 그런고로 그 강정을 귀중히 보관하며 자기 집 공원으로 알아, 방춘화시에 화류 구경을 가도 그곳, 삼복증염에 피서를 하여도 그곳, 가을에 단풍 구경을 하든지 겨울에 설경을 보더라도 그 정자를 내어놓고는 가히 소창할 곳이 없는 양으로 여기는 곳이라. 이때 사랑하고 사랑하는 부인 정애를 데리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강정에를 당도하매, 맑고 그윽한 경색이 일층이나 더욱 생광스러울 뿐더러, 때는 칠월 초순이라 괴롭고 괴롭던 장마는 새로 개이고, 원 근 산색은 쪽빛같은 푸른데 울울총총한 수림 속에서 헤헤한 매미 소리는 태평성대의 한가한 뜻을 보하고, 유리같이 맑은 수면에 쌍으로 나는 백구는 홍진 세계의 공연히 바쁜 사람 조롱하는 듯, 가히 형상할 수 없는 취미가 실로 사람의 병을 가히 소복할 만한지라, 상현은 그 부인을 대하여 포도주를 권하며,

"이것은 자양품의 대왕이라고 하는 것이라. 그대도 아는 바어니와 동양의학에는 기허한 사람에게 삼용으로 보기허를 하지마는, 서양에서는 병중에 수척한 사람에게는 포도주로 흥분제를 삼나니, 우리가 지금 이같이 풍경 좋은 곳에 와서 술 한잔 아니 먹을 수 없고, 유독한 술은 부인의 병에 적당치 못할 것인즉, 우리는 병기를 소복하고 운치에 정당한 포도주나 먹어 봅시다."

정애는 그 술잔을 받아 들고 만단 사정을 그 남편에게 하소연한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제가 잘못한 것이 없으면 죄를 받는 법이 없나니, 내가 오늘 이러한 누명을 쓴 것은 모두 내가 잘못한 연고로 그러하거니와, 당신이 내게 대하여 이처럼 애호하시는 것은 비록 내외간일지라도 감사함을 칭량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병이 깊어 죽을지 살지 모르거니와, 나는 살아도 당신의 아내요, 죽어도 당신의 아내라. 남의 남편이 되어 아내를 애호함이 괴이한 일은 아니나, 내가 남의 아내가 되어 남편의 심지를 이열케는 못할지언정 남편으로 하여 근심이 되게 하는 것이 지극히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에게 대하여 극진히 애호하시는 것을 감사 감사히 여깁니다."

상현이가 그 말을 듣고,

"여보 정애, 정애는 아무쪼록 나를 보아 마음을 평화하게 먹고, 병기가 속히 소복되게 하고요, 옥같은 정애를 천 사람이 비방하고 만 사람이 모함할지라도, 나 한 사람만 정애의 정절을 짐작하면 관계될 것이 조금도 없을뿐더러, 정애가 스스로 생각할지라도 천지신명에 부끄러울 것이 없을 터인즉, 무엇이 근심할 바가 있으리까? 그뿐 아니라 부모로 말하면 하늘과 같으니, 하늘의 이기는 지공무사한지라. 어머니께서 지금은 비록 오해를 하시나, 만일 정애의 애매한 줄을 깨달으시는 날은 정애를 전보다 더욱 사랑하심이 인천우로가 만물을 윤자케 함과 다름이 없으리니, 정애가 편협한 마음을 먹고 성병할 정도로 근심할 것이 무엇이 있소?"

이같이 정담을 하며 술을 서로 권하는데, 문안 청풍계 자기 집에서 영자와 봉자가 구수 상의하는 것은 일단 정애를 모해코자 흉계를 꾸미는 의논이라. 영자는 그날 밤 아홉 시쯤 되어 후원으로부터 급히 안방으로 들어오며,

"어머니 어머니, 저는 지금 별별 꼬락서니를 다 보았습니다. 에고 망측해! 그런 변이 어디 있어요?"

하고 간사를 부리는데 그 모친은 아무 영문도 모르고,

"왜 그러느냐? 무엇이 망측하단 말이냐?"

하며 물으니 영자는 정애를 모해하려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시작한다.

"에고, 처음 보았어요. 그런 망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애야, 무엇을 처음 보았단 말이냐? 너는 조그마한 일을 보아도 너무 수선을 떨더라."

"수선이 무엇이오니까? 그런 꼴 처음 보았어요."

"갑갑하다, 어서 말해라."

"저― 건넌방머리 담 너머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오니까? 그 담 밖에는 진개통이 놓였지요?"

"그래서, 왜 그러니?"

"지금 제가 저녁을 먹고 후원을 돌아가서 운동을 하고 건넌방 머리로 돌아오자니까, 건넌방머리 담 너머로 어떤 놈이 기웃이 넘어다보며, '여보, 정애 정애!' 하며 가만가만히 부르는데 컴컴하여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고 하릴없이 도적놈 같습디다."

"그래, 그게 웬 놈이란 말이냐?"

"그게 다른 놈이겠습니까? 일전 탑동공원에서 보던 정애의 간부 놈이지요."

"그래서 어찌하였단 말이냐?"

"처음에는 그것을 보니까 어찌 무서운지 몸에 소름이 끼치고 어찌할 줄을 모르겠어요. 그래, 정신 차리고 차차 들으니까, '정애 정애' 하고 부르기에 벌써 눈치를 채고 그놈의 하는 양을 보려고 '아그, 벌써 왔습더니까?' 하며 앞으로 가까이 가니까 저는 아마 나를 정애로 보았던 게야요. 망측하고 괴악한 말을 기닿게 하는데, 저는 '응응응.' 대답만 하였습니다. 제가 아주 욕을 잔상히 보았어요."

"그래, 그놈의 말이 무엇이라더냐?"

"다른 말은 할 것 없고요, 공원에서 그 지경 당한 후에 얼마나 곤란을 받았느냐 하고 다음에 하는 말은, 그때 준 것은 잘 보관해 두고 정애가 보고 싶으면 정애를 보는 듯이 가끔가끔 내어 본다고 하기에, 제 생각에 정애가 그 놈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몰라 궁금하기에 제가 웃으며 하는 말이, '나는 그때 무엇을 드렸는지 생각이 아니 나는데요?' 하였더니 그놈의 말이, '왜 그렇게 말을 해. 금지환 말이야.' 그럽디다."

"에그, 그러면 그년이 아마 혼인할 때에 예물로 준 금가락지를 정표로 준 게로구나. 그 뒤는 어찌하였니?"

"그 말만 듣고 그놈하고 더 말하기가 싫어서 이 모양으로 잠시간 수작을 할 수 없으니 내일 또 만나자고 좋게 말해서 보냈습니다.

(모) "정녕 그랬단 말이냐?"

(영) "아니 그 참, 어머니도 그게 웬 말씀이오니까? 제가 거짓말을 왜 해요? 미친년 전에야."

(모) "아니, 너더러 거짓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도 기가 막혀 하는 말이라. 그년이 아마 금지환을 준 게로구나."

(영) "아마가 아마가 아니라 정녕 그런가 보아요."

(모) "원, 그런 죽일 년이 있나! 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영) "도시 오라버니 잘못이야요. 알고 그리하는지, 모르고 그리하는지 너무 무럼 생선 노릇을 해요."

(모) "글쎄 말이다. 그런 자식은 처음 보았다."

하고 무슨 생각을 한참 하더니,

(모) "오냐 걱정 말아라. 내가 결심하였다."

하고 그날밤을 지낸 후 아침 일찌기 하인을 두호강정으로 내여 보내 상현이를 급히 부르더라.

상현이는 한유한 강정에서 정애를 데리고 맑은 야색과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여 밤이 깊도록 정담을 하다가 술이 취하여 흥미 있게 그 밤을 지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집에서 하인이 나와 모친의 명령으로 급히 부르는 고로 무슨 일인지 몰라 즉시 집으로 들어오니 분밖에는 구루마꾼이 두엇이 서서 '마포 가는데 모두 일원만 줍시오 팔십전 적습니다.' 하며 왁자지껄하고 안마당에는 정애의 세간을 낱낱이 내여놓고 분주히 짐을 매는지라

상현이는 마음에 깜짝 놀라서

"어머니 이게 웬일이오니까"

하고 물어본다. 그 모친은 상현이를 보더니 얼굴에 노기가 등천하여

"웬일인지 좀 알려느냐? 이러 오너라 내 말하마. 너 지금으로 정애를 보내야지 그렇지 아니 하면 내가 죽을 터이다. 네가 사람의 자식 같으면 음흉한 계집을 사랑하여 어미 죽는 것을 보지 아니할 터이니 네가 자량하여라."

(상) "이게 웬 말씀이십니까? 그 동안에 또 무슨 이간을 들으셨습니까. 어머니께서 사람의 선악을 모르시고 이리 하시는 것은 대단히 망령된 일이올시다."

(모) "내가 사람의 선악을 몰라? 네가 사람의 속을 모른다. 기닿게 할 것 없어. 네가 지금 이혼을 한다면 내 자식이어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나는 오늘 세상을 하직하기로 결심하였다. 네가 그년에게 미혹하여 정신을 잃다가는 당장에 가문이 깎이고, 남부끄러운 것은 고사하고 장래에 무슨 화색이 있을는지 모를 터이니 내가 차라리 죽어서 그 꼴을 보지 아니하여야지, 사람의 어미가 되어 자식이 참혹한 지경 당한 것을 차마 볼 수 있느냐?"

(상) "어머니, 제가 어머니 말씀을 한 번이나 언제 거역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지금 말씀은 복종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만일 정애가 조그마한 죄라도 있을 것 같으면 어머니께서 두 번 말씀하시기를 어찌 기다리겠습니까마는, 정애는 백옥 같은 지조를 가진 사람이어늘 어머니께서 무슨 죄로 정애를 버리라 하십니까? 어머니께서 그처럼 과도히 하시는 자리에는 감히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제가 만일 정애를 버리면 정애는 곧 이 세상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니 이는 어머니께서 공연히 생명 하나를 참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오니까? 어머니께서 잘못하시고 그리하시는 것인즉, 다시 생각하시고 노함을 푸셨다가, 만일 분명한 증거가 있거든 정애를 보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상현이는 이 같은 말로 그 모친을 간하나 그 모친은 듣지 않고,

"잔말이 무슨 잔말이냐? 증거는 어떠한 증거를 분명하다 하느냐. 내가 무슨 심정으로 불분명한 일에 전정이 만 리 같은 자식더러 이혼을 하라 할 리가 있느냐? 월전에 우편 편지라든지, 일전 파고다 공원 사실이라든지 그것은 분명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며, 또한 어젯밤에 영자가 목도한 일도 있거니와 남의 눈으로 본 것은 다 고만두고 우물고누 첫수로 정애의 부정한 행실을 알려거든 지금이라도 정애에게 나아가서 저 시집올 때에 내가 예물로 준 금지환 가졌나 좀 알아보아라. 그 가락지는 보통 가락지와 달라서 너의 내외 이름을 한 짝에 하나씩 새겼으니 그 가락지 좀 당장 찾아다가 내 눈앞에 보여 다고. 두호를 하는 모양이야? 허, 그것 참 기가 막혀 말 못하겠구! 어미는 죽는대도 예사로 듣고 정애가 만일 이혼을 당하면 이 세상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게 다 사람의 자식의 말이냐! 기닿게 할 것 없다. 이혼을 할 터이냐 아니할 터이냐, 말 한마디만 하여라. 내가 결심한 바 있다."

(상) "저는 어머니 말씀을 알 수 없습니다. 영자가 어젯밤에 무엇을 보았단 말씀이오니까……. 이애 영자야, 너는 무엇을 보고 어머니께 무슨 말씀을 하였느냐?"

영자가 그 옆에 섰다가 내달아 하는 말이,

"오라버니, 어젯밤 사실을 자세히 아시려오? 어젯밤 여덟 시쯤 되어 내가 건넌방 머리 담 옆에 섰으니까 어떤 놈이 담 너머 진개통에 올라서서 넘겨다보며, 나를 언니인 줄 알았던지 가만가만히, '정애 정애.' 부릅디다그려. 그래서 나는 어찌 무서운지 어찌할 줄 모르고 우두커니 섰더니, 그놈의 말이, '일전 공원에서 그 지경 당한 후에 얼마나 곤란을 당했느냐.'고 하고, 그때 준 지환은 정애가 보고 싶을 적마다 정애를 보는 듯 내어 본다고 하옵디다."

상현이가 그 말을 들으매 그 모친이 그리 하는 것이 모두 영자의 소위인 줄을 비로소 짐작하겠는지라,

(상) "이애 영자야, 아서라 아서라. 그런 일이 없느니라. 네 지금 처녀의 신분이 아니냐? 자고로 시누이가 올케 미워하는 것은 네가 아직 꽃봉오리 같은 여자로 그런 짓도 하느냐? 덕의 상으로 하더라도 못하는 일이요, 제 신분을 생각하더라도 못하는 일이어늘, 네가 어찌 이런 짓을 차마 하느냐? 네가 지금 아무것도 모르시는 어머님은 속여도 내야 감히 속인단 말이냐? 아서라, 네 심장이 어찌 되어 이렇게 변하였느냐? 내 마음에 아무리 미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을 모해하여 비참한 지두에 떨어지는 날은 후회가 되느니라. 아서라, 그리 말아라. 정애가 비록 흠절이 있을지라도 내가 조용히 정애에게 대하여 그리하지 않도록 권고하여 어디까지 보호하는 일이 옳으냐, 이처럼 모해를 하여 그 사람의 일평생을 그릇하는 것이 옳으냐? 황차 정애는 그런 일이 결코 없는 줄을 내가 알거든, 네가 이렇게 심히 할 수가 있느냐? 아서라, 네가 만일 시집을 가서 너와 같은 시누가 있으면 네 마음에 어떠하겠느냐? 네가 지금 장래가 창창한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느냐? 내가 지금 너에게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마는 남매간에 잘못하는 일을 서로 경고 아니 할 수 있느냐? 내가 지금 너에게 하는 말은 결코 정애를 위하여 역성하는 것이 아니요, 너를 사랑하여 충고하는 것이니, 너는 다시 생각하여 어머니께 잘못한 사죄를 하여라."

하며 아무쪼록 영자의 마음을 돌려 그 모친의 의심을 풀고 무사히 되도록 하고자 하나, 영자같이 염통이 비뚜루 앉은 인물이 그 말에 어찌 회심할 리가 있으리오. 이때 영자는 독살이 정수리까지 치뻗쳐서 불구슬 같은 눈 방울을 뒤통수까지 돌아가도록 흘겨보며 뾰족이 내민 입술로 물 퍼붓듯 하는 말이,

"오라버니, 그게 어디 당한 말씀이오? 오라버니 말씀은 도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이오구려. 그러니까 정애는 아무 흠절 없는 사람인데 내가 못된 년이 되어서 정애를 모함을 한단 말이오? 어머니께 사죄를 하라 하니 정애의 죄를 내가 대신하여 사죄하란 말인가요? 나는 오라버니를 위하여 본 대로 말한 것인데, 오라버니가 그처럼 말을 하니 나는 다시 아무 말 아니하리다. 내가 어떠한 일을 보든지 말만 아니 하면 고만이지 잘못한 일 없이 사죄할 것은 없어요."

하며 돌아서서 훌쩍훌쩍 운다.

(모) "상현아, 네가 그게 사람의 말이냐? 그러면 영자가 그런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아니하여야 옳단 말이냐? 영자의 마음이 변한 것 아니라, 네 마음이 변했다. 어찌하자고 정애같이 못된 년을 두둔하여 영자를 천하에 악한 년을 만드느냐? 네가 악한 계집을 버리지 않고 도리어 순량한 동기에게 흉한 허물을 돌려보내고자 하니, 이는 인륜이 멸절하는 일이니 네가 별안간 이럴 수가 있느냐? 기닿게 할 것 없다. 네가 지금 정애와 이혼할 터이냐 아니 할 터이냐? 말 한마디만 하여라."

하며 더욱 분노함을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라. 상현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저주저하는 데 그 모친은,

"어미가 묻는 말을 왜 대답 아니하느냐? 말 한마디 하기가 그리도 어려우냐?"

하며 목소리를 벽력같이 지른다. 상현은 어찌할 수 없어,

"어머니, 그렇게 조급하실 게 있습니까? 잠깐 참으시고 차차 좋도록 조처를 하십시다."

이것은 상현이가 우선 그 모친의 화증이나 풀고 차차 좋은 말로 정애의 발명을 하여 볼까 한 것인데, 그 모친이 그 말을 듣더니 더욱 화증을 벌컥 내며,

"이놈아, 너도 사람의 자식이냐? 그에나 어미의 뜻을 거역하고 네 몸에 독해를 받자 하는구나. 네가 심장이 바뀌어서 동기를 몰라 볼 때에 어미는 알겠느냐? 나는 너 같은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세상에 살 수 없으니 너는 네 마음대로 하여라. 그 꼴 보고 살아 있을 틀린 인사 없다."

하더니 방으로 들어가며 칼을 잡아 들고 새파란 칼날로 자기 목을 향하여 겨누는지라, 상현이는 소족이 황망하여 망지소조하고 급히 쫓아 들어가 그 모친의 칼 잡은 손을 붙들며,

"어머니, 이게 웬일이십니까? 이혼하겠습니다. 이혼해요. 이렇게 아니하시면 제가 어머니 말씀을 거역할 줄 아십니까? 어머니께서 이렇게 하시면 이는 어머니께서 이놈 하나를 불효를 만들고자 하심이 아니오니까? 제가 이 길로 나가서 정애를 보낼 터이오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십시오."

하며 흉격이 막혀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흐르는 줄 모르게 옷깃을 적시는데, 그 모친은 정신을 차리고 한숨을 늘어지게 쉬더니,

"그러면 네가 이 길로 나가서 이혼을 한단 말이냐?"

(상) "녜,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모) "그러면 어서 나가서 그길로 바로 보내라."

상현이 하릴없이 그 모친에게 이와 같이 승낙을 하고 곧 두호강정으로 나아가니, 이때 정애는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 자기 남편을 불렀는지 모르고 궁금한 마음이 지극히 간절하여 자기 남편 다녀오기를 일 년같이 고대하던 터이라, 그 남편이 다녀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마주 나오며,

"이제 다녀오십니까?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별고는 없습더니까? 저는 집에 무슨 일이 있어 그리 급히 부르셨는지 몰라 들어가신 뒤에 어찌 궁금한지 다녀오시기를 대단히 기다렸습니다."

그 말을 듣는 상현이는 정애의 얼굴이 다시 보여서 그 말대답은 못하고 정애의 얼굴만 흘금흘금 치어다볼 뿐이라.

(정) "집에 아무 연고 없어요? 왜 아무 말씀도 아니하십니까?"

상현이가 집에서 두호로 향하여 나올 때에는, '오냐, 내가 어찌 정애 한 사람을 위하여 부모에게 불효를 하겠느냐? 인정상에 아무리 박절 할지라도 나가는 길로 정애에게 사세 이야기를 하고 곧 집으로 보내리라.' 결심을 하였으나, 급기야 정애를 대면하매 가슴으로 우러나오는 연연한 정은 고사하고 정애가 그런 말을 들으면 간담이 떨어져서 기절을 할 모양이라,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아니하여 거짓말로 좋도록 대답하기를,

"집에 아무 별고는 없고, 시골서 손이 와서 나를 부르셨어."

하며 아무리 생각하여도 조처하기가 대단히 난처하여 답답한 흉격을 이루 형상할 수 없는데, 정애는 상현의 마음이 이같이 산란한 줄은 모르고 빙긋빙긋 웃으며,

"그런 것을 저는 공연히 애를 썼습니다그려. 나는 집에 무슨 큰 일이 있는 줄 알았어요. 아마 시장하시지요?"

하더니 일변 밀크 통을 뜯으며, 일변 모당을 내어놓고 가피차를 농하게 타서 그 남편의 앞에 놓으며,

"위선 이것을 먼저 잡수시오. 곧 진지 차려 오리다."

하고 권하니 이때 상현이는 그 차를 집어 한 번 마시며 하는 말이,

"밥은 먹은 지 오래지 아니하니 다 고만두고 술이나 있거든 있는 대로 모다 가져 오오. 오늘은 내가 심회도 산란하고 정애도 매우 갑갑한 터이니 배나 타고 술이나 먹읍시다. 일기는 바람 한 점 없고, 강상에는 파도가 일지 아니 하니 배 타고 가을 풍경 구경하기가 아주 훌륭하오."

정애가 그 말을 이상히 들었던지 별안간 기색이 좋지 아니하여 묻는 말이,

"녜, 술은 무궁무진합니다. 가져오라시는 대로 얼마든지 가져오지요. 그러나 심회가 산란하다 하시니 무슨 불평하신 일이 있습니까?"

(상) "아니, 불평한 일은 없어."

(정) "그러면 무슨 까닭으로 심회가 산란하셔요?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아마 제가 보기 싫어서 심기가 불평하시지요?"

하며 바짝 달겨 묻는다.

(상) "아니오, 무심히 나오는 말이 그렇게 되었소구려. 그것을 그리 심히 물을 것 무엇 있소? 우리 술병 가지고 강에 가서 선유나 합시다."

이때 상현이가 그 부인 정애를 데리고 일엽편주를 가벼운 바람에 맡기어 일곡창랑 맑은 물결에 가는 대로 떠다니며 구곡간장에 쌓여 있는 정회를 서로 이야기하는 때에, 아랫 여울·윗 여울에 고기 잡는 노래는 한가히 화답하여 사람의 근심을 돋우고, 서산에 걸려 있는 햇빛은 유리 같은 수면에 비끼어 비늘 같은 물결이 낱낱이 반짝반짝 상현의 귀와 상현의 눈에는 모두 강개한 소리, 초창한 빛뿐인데, 육칠월 긴긴 해가 간이 녹는 이야기 속에 벌써 휘끈 넘어가고, 붉은 놀 푸른 연기가 맑은 물결에 비취어 오색이 영롱한 별유천지가 되더니, 어언간 먼 산 밑 외로운 촌과 강나무 그윽한 수풀은 늦은 매미가 뚝 그치는 소리 속에 어두컴컴히 저문 빛이 잠기며, 어디로 오는 퉁소 소리인지 요요한 음향이 바람결에 태여 무한 정한을 하소연하는 듯 빈 물가 검은빛이 초창한 기색을 띤 중에 한 조각 가을 달이 검은 구름 너머로 완전히 돋아 오니, 맑고 맑은 광선에 물결은 아름아름, 풀끝 나뭇잎에 백옥 같은 찬 이슬은 낱낱이 반짝반짝, 이때 만일 심기가 평화한 사람이 그런 경색을 구경할 것 같으면 심신이 쾌창하여 만사가 무심하겠지마는, 상현이는 귀 뿌리에 부딪치는 소리, 눈동자에 들어오는 빛이 모두 신경을 흔들어서 마음을 요란케 하는지라, 철석같은 간장이 굽이굽이 스러져 스스로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고 방울방울 떨어져 옷깃을 적신다. 정애가 보기에 하도 이상하던지,

"여보시오, 왜 그러십니까? 당신이 이와 같이 상하실 것 같으면 보는 이 년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전에 말씀한 바와 같이 부모는 하늘이라, 하늘이 무고한 백성은 죄 주는 법이 없고, 부모가 옳은 자식은 미워하는 일이 없나니, 나는 무엇을 잘못하였든지 부모께서 잠시 오해하심인즉, 그 부모께서 마음을 돌리시는 날은 운권천청과 같을 것이어늘 이같이 하실 것 있습니까? 돌려 생각하시고 참으십시오."

상현이는 정애의 손목을 잡고 하는 말이,

"여보 정애, 내가 내 입을 가지고는 차마 못할 말이오마는, 내가 정애에게 간청할 말 한 가지가 있으니 정애가 내 말을 들어줄 터이오? 만일 정애가 못 듣겠다 하면 나는 오늘 이 강물에 빠져 죽는 날이오."

(정) "에그, 왜 그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죽으라고 하셔도 죽을 사람이어든, 무슨 말씀을 아니 들으리라고 그렇게 과도한 말씀을 하십니까?"

(상)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니오. 정애는 이 말을 어찌 들을는지 모르겠지마는, 정애가 한 달만 친정에 가서 있을 것 같으면 그사이 좋은 일이 있을 터이니, 그대가 그 말을 들어주겠소?"

정애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며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정) "에그! 웬 말씀이십니까, 친정으로 가다니요?"

(상) "아니야, 한 달만 가 있어."

(정) "글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친정은 왜 가라고 하십니까? 무슨 이유가 저간에 있어요?"

(상)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아침에 집에를 들어갔더니 어머니께서, '네가 정애와 이혼을 아니 하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극단의 말씀을 하시며 심지어 불호한 광경까지 있어서 내가 어찌할 수 없이, '그러면 이혼을 하겠습니다.'고 허락을 하였으니, 내가 사정에 거리껴 어머니 명령을 위반하는 날은 이 한 몸이 불효의 대죄를 면치 못할 것인즉, 그대는 잠깐 친정으로 갈 수밖에 없소."

(정) "아, 그러면 이혼을 한단 말씀이오니까?"

(상) "딱히 그런 것이 아니야. 아직 친정에 가서 있으면, 그사이 어머니 마음을 아무쪼록 회심하시게 주선하잔 말이야."

(정) "사정이 그러하신 게야 제가 어찌 고집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마는 차후에 잊어버리시지 아니하실는지…… 요."

머리를 숙이고 느껴가며 우니 상현이도 역시 비창함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우는데 이미 흘러가던 배는 어언간 마포 배나들이 언덕에 닿더라.

(상) "여보, 벌써 마포를 왔소구려. 그대는 집으로 들어가오. 내가 집까지 같이 갔으면 좋겠으나 춘식이를 볼 낯이 없어 차마 못가겠으니, 자― 집으로 가서 한 달만 내 생각 하지 말고 아무쪼록 귀중한 몸을 보전하여 쉽사리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

(정) "그러면 저는 집으로 갈 터이나 내두지사는 다만 당신만 믿습니다."

하며 서로 붙들고 울다가 정애는 배에 내려 자기 친정으로 들어가고, 상현이는 뱃머리를 돌려 두호로 갔더라.

상현이가 정애를 이별하고 창연한 마음을 비에 가득히 실어 두 호 강정으로 돌아가니 이때 겸가는 창창하고 백로는 횡강한데, 적적한 강촌에 다만 월색만 교결할 뿐이라. 상현이가 그 배를 타고 내려갈 때에는 차마 잠시를 떠나지 못하던 정애와 두 사람이더니, 돌아올 때에는 단지 자기 한 사람의 외로운 그림자뿐이로다. 천지조화옹이 어찌 사람의 이별을 마련하였는고? 상현이 돌아오는 길로 정애와 정다운 이야기 하던 곳에 혼자 누웠으니 정애의 아름다운 용모는 눈방울에 비취어 시신경에 사진을 박아 두었던지 웃고 말하던 자태가 당장 그 앞에 앉은 듯한지라, 결연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어찌 하면 어머니의 의심을 해혹하여 가정이 원만하게 평화를 회복할꼬?' 하고 여러 방면으로 연구하는 동시에 이슬에 젖은 버러지 소리가 근심 많은 사람의 동정을 표하더라.

상현이가 정애를 이별한 후에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 그 모친께 이혼한 사유를 고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마는, 이는 실로 이혼이 아니요 잠시 수단적에 지나지 못할 일뿐더러, 그 모양을 하고 집으로 들어가면 신산한 마음이 더욱 비할 데 없을 듯싶어 강정으로 도로 간 것이라. 상현의 마음에는 며칠간 그 정자에서 거처하다가 차차 집으로 갈 작정인데, 그 모친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으로 상현이를 보내고 그 뒤로 하인을 내어 보내 상현의 행동을 살피다가, 정애를 친정으로 보냈다는 소문을 듣고 만심환희하여 즉시 영자를 불러 하는 말이,

"이야, 영자야, 너는 오라비가 정애를 보냈다는구나. 그것은 참 시원하게 되었다마는, 이제 정애 대신이 있어야 아니하겠느냐? 이러나저러나 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영) "그것은 오라버니가 진작 그렇게 하실 일이지요. 오히려 늦었어요. 그러나 정애 대신에 과히 근심하실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항상 유의하시던 좋은 재목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십니까? 그렇지만 오라버니가 어머니 말씀을 못 이기어 정애를 보내기는 하였으나 필연 내용은 이혼한 것이 아닐 터이니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대관절 이혼신고를 경찰서에 제출한 연후에야 그 후임자를 구하는 것이 적당한데, 오라버니는 이혼신고를 결단코 아니 할 터이니 그것을 어찌합니까?"

(모) "그것 참 옳은 말이다. 네가 말 아니하였더면 나는 무심히 있을 뻔하였구나. 그런즉 네 오라비는 이혼신고에 도장을 치지 아니할 터이니 네 생각에는 그것을 어찌하면 좋겠느냐? 좀 연구하여 보아라."

이때 영자가 눈썹을 내리깔고 무슨 생각을 한참 하더니 어떠니 어떠니 한 계교를 생각하였던지, 그 모친의 귀에 대고 속살속살 한참 수작을 하더라.

상현이는 두호강정에 한가히 누워 그 모친을 해혹시킬 연구를 하다가 그럭저럭 수삼 일이 지난 지라, 그날은 집으로 들어가 모친께 정애 보낸 말도 하고, 그 뒤에는 어디까지든지 모친의 의혹을 풀도록 하여 정애를 다시 데려와 보리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 모친은 어디 출입을 하였는지 아니 계시고 또한 영자도 볼 수 없는데, 안마루에는 정봉자가 앉아 책을 보고 앉았다. 그 봉자는 비록 처녀이나 이웃집에서 같이 자라날 뿐더러 학교 출신으로 내외 아니하고 만나면 서로 인사하는 터이라, 상현이를 보더니 공손히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데,

"요사이 문밖에 나가셨다더니 이제 들어오십니까? 저는 실례의 일이 많습니다. 아무도 아니 계신 빈집에 와 있어서."

(상) "천만의 말씀을 하십니다. 어서 앉아 공부하십시오. 그러나 우리 어머니께서 어디 가신지 아십니까?"

(봉) "글쎄요, 어디 출입을 하셨는지요? 잠깐 다녀오시마고 가신 지 얼마 아니 됩니다."

(상) "네― 그러면 영자도 없습니까?"

(봉) "아마 영자도 어머니 모시고 갔나 보이다."

상현이는 옷도 벗지 않고 마루 한구석에 앉아 담배 한 개를 내어 붙여 물고 빈 뜰에 한가히 날아다니는 잠자리만 유연히 바라보는데, 봉자는 치맛자락 휩싸고 날아가는 듯이 앉아서 가장 아리따운 태도를 빼며 첩첩이구로 수작을 꺼낸다.

"그러나 제가 대강 말씀은 들었습니다마는 오죽 섭섭하시겠습니까?"

(상) "무엇이 섭섭하단 말이오? 나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요?"

(봉) "정애 말씀이올시다."

(상) "밑도 끝도 없이 말씀을 하시기에 무엇을 섭섭하다고 하시는지 몰랐더니 정애 말씀이야요? 그것을 섭섭하다면 섭섭하겠구요, 시원하다면 시원할 만하지요."

(봉) "에그, 미상불 잘된 일이올시다. 정애는 흠절이 있든지 없든지 고부간 윤기가 끊어지면 자연 가정이 불화할 것인즉, 당신 같으신 효자로 어찌 어머니 근심을 끼치시겠습니까? 저는 당신께서 용단하시는 것을 어디까지 치하하겠습니다."

(상) "치하를 하셔요? 고맙습니다. 나를 위해서 치하를 하신단 말씀 이시지요?"

(봉) "아, 그게 치하할 일이 아니오니까? 부모의 뜻을 받아 그렇게 할 양반이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상) "네― 부모의 뜻을 받았으니 가히 치하할 일이외다. 그저 그 말씀 대단히 고마워요."

(봉) "그러나 제가 당신을 조용히 뵈면 할 말씀이 무궁무진합니다."

(상)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조용하니 말씀하십시오."

봉자는 생긋 한 번 웃으며 얼굴을 숙이고 말을 아니 한다.

(상) "왜, 무슨 말씀 아니하십니까? 어서 말씀하셔요."

(봉) "당신께서 제 말씀을 들으실는지요?"

(상) "무슨 말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한번 말하셔서 듣고 아니 듣는 것은 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니까?"

(봉) "글쎄, 제가 말씀을 하면 무슨 말이든지 들으시겠습니까?"

(상) "그야, 내가 귀먹지 아니한 이상에 하시는 말씀 아니 들을 리야 있겠습니까?"

(봉) "아니오, 제가 청구하는 말을 들으시겠느냐 하는 말씀이올시다."

(상) "나는 그런 말씀 다 못 알아들어요. 다른 이야기 하십시오."

(봉) "그래도 못 알아들으십니다그려. 당신께서 정애를 보내셨으니 시하 정지에 불가불 구혼을 하실 터인즉, 제가 비록 미거하오나 정애의 후임자가 되고자 하는 말이오니, 당신의 의향에 어떠하십니까?"

상현이가 그 말을 듣고 발연히 변색하며 준절히 책망을 한다.

"여보, 봉자! 그게 무슨 말씀이오? 봉자의 신분을 말하면 그렇지 않은 집 여자로 학교에서 공부한 처녀거늘, 어찌 여자의 조행을 지켜 정직한 여자가 될 생각을 못하고 어찌 남의 집 남자를 대하여 그게 다 무슨 망측한 소리요? 그런 말은 조금도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어서 빨리 돌아가 고쳐 생각하오."

하며 박절히 괄각을 하니, 봉자는 별안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아무 말 못하고 앉았다가 무연히 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마침 그 모친이 영자를 데리고 어디를 갔다 오다가 다시 반가운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며,

"너, 왜 이제야 들어왔느냐? 나는 너를 기다리기에 못 견딜 뻔하였다. 네가 네 처 이혼을 하였을 것 같으면 진작 어미를 와서 보는 것이 옳겠지, 이제야 온단 말이냐? 오냐, 그러나 잘 들어왔다. 그러지 아니하여도 내가 지금 너를 보러 나가자 하였더니 마침 잘 들어왔다."

상현이는 그 모친께 절을 하며,

"그날 즉시 들어왔으련마는 몸이 불편해서 공기 좋은 곳에서 며칠간 한양이나 하고 신기가 건강하기를 기다려서 오느라고 이삼일 지체가 되었습니다."

(모) "몸이 불편해? 몸이 불편할수록 집으로 올 일이 아니냐? 그래, 지금은 쾌히 나았느냐?"

(상) "네, 조금 낫습니다."

(모) "오, 낫다니 다행하다. 거기도 집이나 다름없지마는 문밖이 서울만 할 수 있느냐? 몸 아픈 때는 집만 한 데가 없느니라."

(상) "……."

(모) "그래, 이혼은 확실히 했지?"

(상) "네, 아직 제 집으로 보냈습니다."

(모) "그러면 이제 이혼신고를 해야지."

(상) "신고는 하나 아니하나 관계 없습니다."

(모) "그게 무슨 말이냐? 이왕 이혼을 하였으면 경찰서에 신고해서 민적을 삭제해야지, 그대로 두면 그게 이혼한 것이냐?"

(상) "신고 아니해도 차차 민적에 뺄 수 있습니다. 그리 바쁠 것 있습니까?"

(모) "내 그저 네 마음이 그러할 줄 알았다. 네 어미의 말을 곧이듣고 이혼하는 것 같으면 신고하기를 방색할 것이 있느냐? 그래도 네 중심에는 그런 못된 년을 차마 못 버리는 생각이 있어서 그리한 것이지? 아서라, 너도 사람이거든 어미의 말을 들어서 무슨 일이든지 용단을 하여라. 설마 네게 대해서 불길한 일이야 시킬 리가 있느냐? 네 일신의 장래를 생각하든지 어미의 권고를 듣더라도 이혼은 아니치 못한 일, 이혼을 한 이상에는 불가불 백성이 되어 백성의 의무를 행해야 아니하느냐? 왜 이혼신고 하기를 주저하느냐?"

상현이는 집에 돌아올 때에 아무쪼록 모친의 의혹을 해결하리라 하여 비상히 좋은 말을 많이 준비하였던 것인데, 별안간 이혼신고 문제가 도로 기하는지라, 감히 한 말도 못하고 꾸어놓은 보릿자루같이 우두커니 앉았다.

(모) "내 그저 네가 그리할 줄 알았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너희들의 이혼신고서를 경찰서에 제출하였다. 나도 이것이 범법하는 일인 줄까지 알지마는 내 마음을 미리 검장하고 이런 짓을 하였어. 너는 어찌 생긴 사람인지 그 괴악한 년을 차마 못 잊어서 '이혼은 하고도 신고는 못하겠다.' 하는 뜻이 무슨 뜻이야? 오냐, 여러 말 할 것 없다. 내가 너는 이혼신고서에 도장 아니 칠 줄 알고 네 도장 새기고 정애 도장 새겨서 신고하였으니까, 나는 법률에 범촉한 년이다. 내가 법률을 범한 것도 너를 위한 일이야. 그렇지만 이년은 도장 위조·무고 관청 두 가지 죄지은 년이니 네가 어서 고소하려거든 해라. 아니 고소할 것 없어. 경찰서에서 너희 둘을 불러 물어보거든 우리는 이혼한 일이 없고 우리 어머니가 도장을 위조하여 거짓 신고를 했다고 하려무나."

하며 노기가 등천한 상현의 모친은 영자의 말을 듣고 상현이 내외의 도장을 새겨서 이혼신고서를 수정하여 하인을 시켜 보내고 그래도 못 믿어서 자기가 친히 영자를 데리고 경찰서 문밖까지 갔다가 오는 길로 그 아들을 만나 미리 여기지름을 하는 것이라.

상현이는 그 말을 들으매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져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중 여러 가지 생각이 난다.

'도시 세상이 귀찮아 정애니 무엇이니 생각지 말고 한시름 잊었으면 좋겠으나, 그 노모를 보아서 그리할 수도 없고, 도무지 이 꼴 저 꼴 보기 싫어 하늘 끝 닿은 데로 달아났으면 좋겠으나 그리도 못할 것이, 이혼신고를 경찰서에 제정하였은즉 필연 당사자 두 사람을 불러 물을 것이니, 내가 없고 보면 정애 혼자 들어갔다가 어찌 된 까닭을 모르고, 나는 이혼한 일도 없고 도장 찍어 신고한 바도 없노라 하면, 지금같이 맑은 경찰 하에 정밀히 조사하는 날에는 제가 죄지은 곳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를 어찌하나. 만일 내가 경찰서에 출두를 하는 마당에 어머니 허물을 벗기려고 이혼을 확실히 하였다고 하면 장래의 희망이 끊어질 뿐 아니라 정애는 곧 그 자리에서 자처를 할 사람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고?' 하는 근심이 가슴에 가득하여지며 화증이 정수리까지 일어나나 어찌할 수 없어서 마음을 눅이고 생각, 생각하다가 한 생각을 문득 하고 모친을 꼬인다.

"어머니, 이번 일은 잘 처사하셨습니다. 저는 생각이 소삽하여 이 때까지 유예를 하였더니 어머니께서 그렇게 하신 이상에야 다시 주저할 것 있습니까? 정애의 신세는 어찌 되었든지 내 일은 잘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장차 우리 둘을 불러서 조사를 하여 볼 때에 필연 도장 조사를 하는 터이니, 그때는 저의 몸에 도장을 가졌어야 아니하겠습니까? 그런즉 정애의 도장은 제게로 내어 보내고, 저의 도장은 제가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 도장 두 개를 다 줍시오." 하며 한참 엉얼을 부리니, 상현의 모친은 그 말을 매우 반갑게 듣고 아무 내심 없이 상현에게 내어 주었더라. 상현은 그 도장을 받아 가지고 사랑으로 나가서 이혼신청서에 대한 취하 청원을 써서 그 도장을 나란히 찍어 양복 주머니에 넣고 즉시 북부경찰서에 제출한 후, 자기 친구 손경부를 찾아보고 그렇지 아니한 사실을 대강 이야기하였는데, 당시 서장은 김상현의 이혼신고를 접수하자 즉시 취하 청원이 들어오매 어찌 된 사유를 알지 못하여 당사자의 말을 듣지 않고 능히 처판할 수 없어 김상현을 불러 사실을 조사하는 것이라.

(경관) "네가 김상현이냐?"

(김) "네."

(경) "네 부인은 성명이 누구냐?"

(김) "박정애올시다."

(경) "그러면 너의 내외가 연명해서 이혼신청서를 제출한 일이 있지?"

(김) "네."

(경) "그것이 경관을 희롱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 어찌된지 이 일로 이혼신고할 제는 언제요, 또 취하해 달라는 것은 웬일이냐?"

(김) "다름이 아니올시다. 일전에 변변치 아니한 일로 내외가 다툰 일이 있는데, 그 다툰 것은 다름 아니요, 수일 전에 제 처 정애가 사동 공원 구경을 갔다가 저의 오라비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을 제가 마침 그것을 잘못 보고 정애의 행위가 그러한가 의심하여 급기야 쟁힐한 결과로 이혼신고를 제출함에까지 이르렀는데, 차차 알아본즉 정애는 백배 애매하므로 제가 후회막급하여 즉시 취하 청원을 제출한 것이니 먼저 제출한 이혼신고서는 각하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경) "사실이 정녕 그뿐일까?"

(김) "네, 별로 다른 일은 없습니다."

(경) "그러나 이 일이 김상현 하나의 일이 아니요, 박정애를 불러 조사 해본 후에 처판할 터이니 나가 있어."

(김) "그것은 어디까지든지 조사해 보십시오마는, 사실은 그에서 지날 것이 없고 또는 이 신고할 때에도 정애와 연명을 하였고 취하 청원에도 연명날장을 하였는데 다시 조사하실 것이 없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이때까지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라, 아무쪼록 백성끼리 평화하고 범사에 일이 없기를 희망하는 고로 이때 서장이 김상현의 말이 그럴 듯이 여기고 두말없이 이혼신고를 각하하여, 다시는 이런 행동하지 말라고 엄중히 설유하는지라, 상현이가 경관의 설유를 듣고 즉시 집으로 돌아오니, 그 모친은 이혼신고를 취하한 줄은 모르고,

"너 어디 갔다 왔냐?"

묻는지라, 상현이가 바로 대답할 수 없어, 부모를 속이는 것은 대 불가한 일인 줄 알지마는 사세부득이 거짓말을 한다.

"교동 좀 갔다 왔습니다."

(모) "교동은 왜?"

(상) "오래간만에 여러 친구 좀 찾아보았습니다."

(모) "이야, 친구 찾아보고 혼처 구하려고 그러니?"

(상) "혼처는 구해 무엇하게요?"

(모) "너 장가 들지."

(상) "천만의 말씀도 하십니다. 저는 다시 장가 안 들어요."

(모) "네 이게 무슨 소리냐? 네가 그년 괴악한 줄은 모르고 어미에게 배채는 말이로구나?"

(상) "아니올시다. 어머니께 그리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처복이 없는 놈이라 백번 장가를 들어도 또 그 모양일 터이니까, 당초에 고만두는 것이 좋을 듯하여 하는 말씀이올시다."

(모) "그도 그러하다. 네 속이 오죽 상하여야 그런 말을 하겠느냐?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네가 남의 독자로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늙은 어미 슬하에 있으니, 네가 네 신세는 고사하고, 어미를 보더라도 홀아비로 있어서야 될 수 있느냐? 그런즉 별수 없다. 네가 이 늙은 어미의 말을 들어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내 자식이 아니다. 지금 사세는 며느리를 속히 보아야 하겠고, 며느리를 구하자 한즉 미상불 정애 같은 것이 또 들어올까 보아 불무염려인즉, 이제는 특별히 주의해서 구혼을 해야 할 터인데, 나는 아무리 보아도 앞집 정봉자 만한 처녀가 없더라. 그 인물야와 조행야와 학문야와 언어야와 그렇게 얌전한 사람은 다시없을 듯하더라. 그저 암만해도 양반의 자식이 다르니라. 그리로 혼인할 수밖에 없다."

(상) "제 말씀 잠깐 들어봅시오. 저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올시다. 늙어 가시는 어머니 생각을 하든지 장래가 창창한 제 생각을 하든지, 살림을 주장하고 정상접하할 사람이 없지 못할 처지올시다마는 저는 결심코 다시는 장가 안 들기로 작정이올시다. 제 마음이 그렇게 들어간즉 정봉자 말고 천상처녀가 있대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 "그러면 네 어미 공궤는 누가 하며, 네 장래는 어찌할 작정이냐? 좋으나 언짢으나 계획이 있겠구나."

(상) "제가 지금 어머니께 진정으로 간할 말씀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고만 오해를 푸십시오. 정애를 어떻게 아시고 남의 신세를 그 지경을 만드십니까? 저간에 어떠한 공교한 일이 있어 어머니 눈에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정애는 결코 호리만 한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천인갱참에 몰아넣고 어찌 내외 복록을 바라겠습니까? 어머니께서는 정봉자 정봉자 하시지마는 정봉자의 행색이 어떠한 것을 어머니께서 아십니까? 남의 흠절을 드러낼 것이 없어 봉자의 행위는 말하지 않거니와, 정애를 버리고 봉자를 데려오고자 함은, 비유컨대 주옥을 버리고 와륵을 취하는 이나 다름없는 것이니, 어찌 깊이 생각지 못하십니까? 어머니께서 다시 생각하시고 오해를 푸셔서 정애로 하여금 다시 좋은 사람을 만드시면 우리 집에 무궁한 영화가 있을 줄로 아오니, 어머니께서는 천만번 다시 생각하시기를 바라나이다."

노부인이 그 말을 듣고 노기가 등등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이애 상현아, 말 들어라. 네 마음이 저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단 말이냐? 네가 아무리 천하 간특한 정애 년이 네 집 재산을 모두 빨아 가지고 저와 눈 준 놈과 마음이 있게 아직 알짱알짱하는 바람에 빠져서 정신을 잃었나 보다마는, 네 마음이 역시 저렇게 변하였단 말이냐? 나더러 오해한다지 말고 네가 오해하지 마라. 정애같이 더러운 년을 못 잊어 하고 남의 집 옥같은 처녀 봉자를 험담하는 것이 참 환장을 하였구나. 그러고 저러고 너는 어미의 말이라면 기어코 거역하자는 뜻이로구나. 당초에 어미의 말을 아니 듣고 그런 옥화를 당하고 끝끝내 어미의 말이라면 한사 거절을 하느냐?"

하더니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비절비절 울며,

"내가 네 아버지 없는 너 하나를 귀히 길러서 만년에나 재미를 볼까 하였더니, 오늘이 웬일이냐? 이것은 내가 너 나무랄 것 없이 도시 내 눈 멀어서 이 지경이로구나. 아서라, 너도 늙은 어미 생각 좀 해라."

눈물을 뎅겅뎅겅 흘리는지라, 상현이가 그 모양을 보매 마음이 적 승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으나, 그 부모가 그리하는 것을 거스를 수 없어,

"어머니, 이놈이 불효올시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마음을 상하실 것은 없습니다. 정애는 밉든 얌전하든 이왕 버렸으니 그만이요, 장차 다시 장가 들 일은 아직 늦지 아니할 뿐더러, 이제는 고르고 골라서 아무쪼록 얌전한 사람을 골라서 함이 좋으니 어머니께서는 안심하시고 봉자는 단념하십시오."

하며 만단 위로하고 사랑으로 나갔더라.

상현이가 사랑으로 나와 적적한 방에 한가히 과거사와 장래를 생각하니 실로 한심하고 처량하다. 정애와 내외 인연을 맺을 때에는 백 년을 아름다이 태평하게 누리기를 기약하였더니, 오늘 즉 이 모양 이르기도 천만뜻밖이요, 또한 현재의 형편을 살펴보건대, 그 모친의 고집불통하는 마음은 실로 일만 소가 돌리기 어려워, 정애와 미진한 인연을 계속코자 함은 공연히 부질없는 봉상을 부운유수에 돌려보낼 뿐이라. 그런즉 자기의 장래와 애정의 신세는 가련한 지두에 떨어져 내두에 아무 영화를 희망키 묘연하고, 또는 자기가 정애를 보낼 때에 정녕히 약속한 말이 있어, 정애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하루가 삼추같이 기다리는 터인데, 일이 뜻과 같지 못하여 자연히 실신함에 돌아간즉, 당당한 장부의 구설로 일개 한 여자를 속인 모양이 될 것이요, 정애가 기다리다 못하여 속은 줄로 짐작하는 날에는 정애의 꽃다운 혼백이 가련한 길로 돌아갈 터이라. 그런즉 일후 지하에 갔을지라도 정애의 방혼을 대할 낯이 없을지니, 이렇게 통한한 일이 어디 있으리오 하는 생각이 뼈끝에 맺혀서 간잎이 저리며, 연연한 정한이 가슴에 가득하여 자기 일신이 이 세상에 나왔던고 하는 탄식이 스스로 발하는 끝에 세상만사가 귀찮은 생각이 팔미도 바다에 조수 밀어 오듯 하나, 노모를 두고 세상을 버리는 것은 불효막심이라. 그리도 할 수 없어, '에라. 내가 세상에 났다가 사람 노릇을 못하는데, 이 한 몸이 이 세상에 없는 셈치고 세계 주유나 하여 천하 각지의 인물·풍경이나 구경하고, 울적한 암회나 소창하며 창창한 전도를 소견법으로 보내리라.'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그 시로 금전을 준비하고 행장을 단속한 후, 그 이튿날 그 모친에게 좋은 말로 구라파 견학 여행을 하겠다고 간절히 말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남대문 정거장에서 서관차를 타고 전지구 일주유 먼 길을 떠나는데, 그 노모의 영자는 전별을 하는지라.

속마음에, '내가 화증김에 이 길 떠나기는 한다마는, 노모와 어린 누이를 두고 이 길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한 일이다.' 하는 생각이 부지중 발하여 가슴이 답답하나, 이는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라 하고 마음을 억제하며 차에 오르니, 기적 일성에 기차가 떠나 만 리의 멀고 먼 길을 시작하여 용산 철교를 지나간다. 이때에 가슴속에 용문산 안개 두르듯한 첩첩한 생각은, '내가 이 길을 떠날 때에 못 잊고 못 잊고 못 잊는 정애를 찾아보고 사정말이나 통지한 후 겸하여 작별이라도 할 것이지마는, 박춘식을 볼 낯이 없어 그 집 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고 편지를 부치자 하오나 일은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이렇게 처창한 길을 떠나는 터에, 편지만 할 것 같으면 사맥을 알지 못할 뿐더러 장래의 희망 없는 신신치 못한 말로 편지할 것 없어 인정사정 뚝 끊어버리고 이 길을 떠나니, 내가 한 번 간 후에 정애가 부질없이 고대할 일이 참 애석하도다.' 하는 생각이라. 기차에서 창을 열고 마포 강상을 시름없이 바라보는데, 그 눈 정신이 가는 곳은 박정애의 집에서 정애는 그런 줄 저런 줄 모르고 오늘이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 내일이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하며 공연히 반가운 소식을 기다린다. 정애가 그 남편을 작별하고 자기 친정으로 갈 때에 한걸음에 두 번씩 돌아보며 멀리 가는 배를 향하고 속마음으로 축수하기를, '광명정대한 천지신명은 우리 내외의 극진한 사정을 살피어 다시 속히 서로 만나게 하여 줍시사.' 하며, 그 배가 가고 아니 보이도록 강두에 서서 축원한 일도 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자기 친정 문 앞에 다다르니, 차마 그 오라버니 얼굴을 대하기 부끄러운 생각이 나서 주저주저할 즈음에, 그 오라버니 박춘식이가 이웃집에 가서 밤이 깊도록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고 사랑하는 누이 정애가 초초 행색으로 밤중에 온 것을 보고 대경실색을 하며 하는 말이라.

"아, 너 누구냐? 네가 이 밤중에 어찌 여기 와 섰느냐? 이것 변이 난 게로구나? 무슨 일로 이렇게 왔느냐?"

하며 급히 묻는지라, 정애가 그래도 그 시집의 흉허물을 들어 말하기 어려워서 이리 저리 엄호를 하여 대답한다.

"아니올시다. 놀라시지 마시옵시오. 동생이 오라버니 집에 오기가 변이오니까?"

그 말이 채 그치기 전에 춘식이는,

"네가 내 집에 오는 것이 변될 것이 있느냐마는, 여자의 행색이 저 모양을 하고 이 아닌 밤중에 서울서 여기를 걸어 나오다니, 저것이 될 말이냐? 오라비 속이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여라. 무슨 일이 있어서 왔느냐?"

(정) "아무 일도 없습니다. 오라버니는 별말씀도 다 하시오구려. 그런 것이 아니라, 요새 하도 울적하여 제 남편과 두호정자에 나가 며칠간 한양을 하다가, 오늘은 오라버니 생각이 간절하기에 제 남편과 배를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춘) "그러면 네 남편은 어디 계시냐?"

(정) "여기까지 오셨다가 오라버니가 아니 계시니까, 그 배 타고 도로 가셨어요."

(춘) "배를 타고 도로 가다니? 너를 이 문간에 세워놓고?"

(정) "제 남편은 요사이 변호사 시험을 보려고 공부를 하는 중이니까, 잠시도 한가한 틈이 없어 그렇게 급히 갔어요."

(춘)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지, 왜 밖에 섰단 말이냐? 이 집이 너하고 나하고 고생하던 집인데, 집이 서툴러서 못 들어온단 말이냐? 오라비 집에 왔으면 내가 없더라도 안으로 들어갈 것이지, 밖에 우두커니 섰어? 어서 들어오너라."

정애가 그때에야 그 오라버니 뒤를 따라 들어가니 쓰러진 벽과 깨어진 창문은 옛때 형용을 의지하여 전일에 지내던 감구지회가 자연히 나는데, 그동안이 몇 달 되지 못하였으나 천지와 만물은 다달이 변하여, 그해 봄 그 집을 떠나 시집으로 갈 때에는 봄비에 배부른 장미화가 벽촌 촌리에 황금같이 피었더니, 그사이 벌써 성긴 울타리 반쯤 의지한 곳에 희고 흰 박꽃 위로 편편히 나는 박쥐는 이리로 휙― 저리로 휙― 임의로 왕래하고 나뭇가지에 걸린 거미줄에는 맑고 맑은 찬이슬이 내려 달빛이 비취는 곳마다 반짝반짝 백옥주렴을 드리운 듯, 무한한 정한이 새로 그윽이 생겨서 초창한 심회를 금하기 어려운데, 그 오라버니 춘식은 정애의 가슴속에 그러한 한이 있는 줄 모르고 그사이 서로 그리던 말이며, 시집이 과히 어렵지나 않으냐고 묻는 말을 귀둥대둥 대답을 꾸며대는 즈음에, 밖에서 별안간 두런두런하는 인적이 나며 박서방을 찾는 고로, 춘식이가 나가 보니 어떤 놈 등자 사오명이 무슨 세간을 구루마에 싣고 지게를 지고 와서, "이 집이 박춘식의 집이냐?"고 하는지라, 춘식이가 대단히 괴이하여 "우리 집에 무슨 세간 짐이 왔노?" 하고 대답하기를,

"내가 박춘식이오. 왜 찾으시오?"

한즉 그중 한 놈이 나서더니,

"녜, 우리는 문안 청풍교 김서방님 댁에서 왔는데, 정애 아씨 세간을 가져왔소."

박춘식이가 그 말을 듣고 정애가 밤중에 온 것을 생각하매 비상히 괴상한 일이라 깜짝 놀라며,

"정애 아씨 세간을 가지고 오다니? 정애 아씨 세간을 왜 가지고 왔어?"

(짐꾼) "나는 모르오. 그 댁 노마님께서 갖다 두라니까 가져왔지요."

춘식이가 그 말을 듣더니 분기가 창천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이애, 정애야! 네가 나를 왜 속이느냐? 금시에 알 것을 속인단 말이냐? 밖에 네 세간 짐이 왔다. 이게 대관절 웬일이냐?"

정애가 역시 그 말을 듣더니 웬일인지 몰라서 실혼 낙담하며,

"세간이 오다니요, 그게 웬일이오? 좀 자세히 물어보시오."

(춘) "물어보긴 무엇을 물어보아!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어서 바른대로 말해라."

정애는 가슴이 터지고 기가 막혀서 두 눈에 눈물이 핑그르 돌며 하는 말이,

"나는 진정 이럴 줄은 몰랐어요."

(춘) "응, 그러면 네가 오늘 이 밤중에 내 집에 오기를 왜 왔어?"

(정) "이제 말씀이지, 시어머니께서 오해를 하시고 그러신답니다."

(춘) "너의 시어머니가 오해를 하고 너를 보내더란 말이냐?"

(정) "사실이 이상하여 말할 수 없어요."

(춘) "오해는 무슨 오해란 말이냐? 네가 행실이 부정하다고 이혼을 했단 말이냐?"

(정) "그렇다면 그렇지만 확실히 그런 것도 아니야요."

(춘) "그런 것 아니기 웬 말이냐? 그러면 네가 오자 세간이 뒤받쳐 온단 말이냐? 그래, 너의 남편도 너더러 가라고 하더냐?"

(정) "아니, 제 남편의 마음이 변치 아니한 줄은 제가 믿는 바이야요. 오늘도 어머니 하시는 일을 지극히 민망히 여기시고 저더러 한 달만 집에 가 있으면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만단 사정을 말하여 여기까지 데려다주고 갔어요. 지금 세간까지 보낸 것은 어머니가 그리하시는 것이지 이혼한 것이 아니야요. 그렇지만 이를 어찌하면 좋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춘) "그게 다 무슨 소리냐, 한 달만 기다리란 말이? 한 달 후에는 그 늙은 마누라의 악심이 어디로 간단 말이냐? 너 속았다, 속았어! 이런 죽일 연놈들이 있나!"

이 모양으로 수작이 분운한 중 삯꾼은 어느 틈에 세간을 들여다가 마당 한가운데 여기저기 벌여 놓고 어디로 달아났더라. 춘식이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길길이 뛰다가 팔을 부르걷고 내달으며

"내가 가서 이 연놈들하고 담판을 하겠다. 네가 무슨 죄가 있어 신세를 맞쳐 준다더냐? 요 중매쟁이 놈, 성운경이 이놈부터 행실을 내고, 김상현 이놈의 집에 가서 고 늙은 년과 상현이를 한주먹에 때려죽이고 오겠다. 고놈이 혼인할 때 나를 속이기를, 한강이 변하여 남산이 된대도 내외 화합하게 지낸다고? 요런 죽일 놈 보아! 그 말하던 놈이 혼인한 지 석 달이 못 되어서 남의 집 계집아이 신세를 저 지경을 만들어?"

하고 문밖으로 뛰어나가는지라, 정애는 송아지 날치듯 하는 그 오라비를 붙들고 만류를 한다.

"오라버니, 이리할 것이 아니올시다. 어머니께서 망령이 나셔서 잠시 그리하시는 것이지, 남편이야 무엇이라고 합니까? 단지 누명 듣는 것만 분하지, 다른 것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춘) "누명이 무슨 누명이란 말이냐? 옳지, 그 연놈들이 애매한 사람이야 쫓겠느냐? 흉한 누명을 뒤집어씌워야지, 에라, 이런 놈들 그냥 둘 수 없다. 붙들지 말고 놓아라."

(정) "그러실 게 아니야요. 늙은 시어머니께서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고생이라도 후일에는 회복하는 수가 있지요."

(춘) "늙으신 어머니? 그까짓 년이 어머니가 다 무슨 어머니냐! 에라, 놓아라! 그 늙은 년부터 죽이고 오겠다."

하고 날치는 것을 정애가 모만사하고 만류하여 서로 붙들고 방으로 들어갔더라. 그날 밤에는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세 사람이라. 장래 근심이 무궁무진한 정애는 고사하고 춘식이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정애를 이별하고 초창한 회포를 이기지 못하는 김상현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그날 밤에 잠 못 잔 사람은 이 세 사람인데, 그중에 누구의 걱정이 제일이냐 하면,

'어찌하여 이년의 신세가 종래 이 모양인가! 팔자에 부모의 복을 이렇게 못 탔나? 친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시어머니 한 분은 나를 공연히 미워하니 이런 팔자가 어디 있나? 남편은 비록 인자하고 다정하여 나를 차마 못 잊어 하나, 부모가 그리하는 자리에 자기 임의로 할 수가 있나. 이 고생을 장차 어찌하며, 이 팔자를 장차 어찌하나?'

하는 근심이 구곡간장에 첩첩이 쌓인 정애가 제일이라. 그 밤을 그 모양으로 새우고 그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니 하릴없이 시집가기 전 모양이나 조금 다를 것이 없더라. 그날로부터 울울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 남편 상현의 말을 믿어 좋은 소식 오기를 공연히 기다리는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나 내일이 다를 것 없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좋은 소식은 오지 않고, 무정한 세월이 자동차 바퀴 돌아가듯 오고 또 와서 어언간 그 가을이 다 갔던지, 낙목한천에 기러기 떼가 일대 장강 소슬한 물가 겸가는 창창하고 저문 연기는 흩어진 곳으로 와각와각 울고 가는 소리에 귓속이 따끈따끈하여 울울한 회포를 이루 어찌할 수 없어 스스로 신세를 탄식하며 시름없이 앉았는 것이라. 그 곡진한 사정과 무한한 회포를 이야기로 들을 것 같으면 그리 애달을 것 없으되, 그때 그 지경이 되어 앉은 정애의 가슴은 가히 혀로 말할 수 없고, 붓으로 기록할 수 없는 정애이라. 이때 춘식이가 들어오며 하는 말이,

"이애 정애야, 너 왜 그러고 앉았느냐? 네 근심이 아무리 태산 같을지라도 근심하는 빛을 내 눈앞에 보이지 말아다오. 내가 너 근심하는 양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여 못 견디겠다. 이제는 너하고 나하고 평생을 이 모양으로 지내게 되었으니, 근심을 하면 쓸 데 있으며, 기다린들 쓸 데 있느냐? 사람이 일평생을 속아서 산다는 짝으로 너는 지금까지라도 혹시 좋은 일이 있을까 하고 기다리고 기다리지마는, 그 기다리는 것이 다 쓸데없이 되었다. 이제는 아무 생각하지 말고 남매 서로 의지하여 그럭저럭 지내자꾸나. 첫째는 내가 잘못한 까닭이요, 둘째는 네 팔자가 기박한 한탄이나 하지 별수 있느냐? 부디 너 그렇게 근심하지 마라."

정애가 그 말을 들으매 대단히 이상하여 정신을 차리고 물어본다.

"그게 웬 말씀이오니까? 무슨 말씀을 들으셨거든 자세히 말씀 좀 하십시오."

(춘) "말은 자세히 하나 마나 사기가 그렇지 아니하냐? 너는 어림없이 상현이 놈을 눈이 빠지도록 고대하지마는 천하에 인정 없고 천하에 깍쟁이 놈 같은 상현이는 네 생각 조금 아니하고 벌써 외국으로 달아난 지가 두 달이나 된단다. 너는 그래도 그런 놈을 그렇게 기다렸지."

(정) "그 말씀 뉘게 들으셨어요?"

(춘) "성운경이가 그러더라. 성운경이를 두 달 만에 오늘 처음 만나 보았다. 성운경이가 그 일로 내게 사과를 왔더구나. 내가 그 말을 들으매 분함을 견딜 수 없어 위선 성운경부터 해내고 싶으나, 항자는 불살이라고, 자기는 딱하고 민망하여 무색한 빛이 외면에 나타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을뿐더러, 실상 생각한즉 성운경이야 무슨 죄 있느냐? 그래서 참고 참았다마는 대저 이런 일도 있느냐? 말 들으니까 상현이도 그 늙은 년 때문에 달아날 수밖에 없겠더라."

정애가 그 말을 듣더니 두 눈에 눈물이 갈상갈상하며 한숨을 가만히 쉬고 정신 잃은 사람같이 앉았다가 하는 말이,

"오라버니, 제 남편은 욕하지 마시오. 결코 그이는 나를 잊을 리가 없어요. 그러나 외국을 갔다니 언제나 돌아올는지 올 기약이 묘연하니 한이 되는 게야요."

하며 한마디를 겨우 한 후에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더라.

춘식이는 정애의 신세 생각으로 저녁 먹을 마음도 없어 토봉당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애매한 담배만 떨고 담고 떨고 담고 하며, 이 생각 저 생각 하느라고 밤이 늦는 줄도 모르더니, 소슬한 강풍이 살살 불어오며 서리 찬 밤기운이 사람의 살을 갈기는 듯한지라. 춘식이가 방으로 들어가서

"벌써 천기가 이렇게 냉랭하구나. 세월이 잘도 간다. 아무 배운 것 없이 한 나이라도 더 먹는 것도 한심하거니와 과동할 준비도 못하고 벌써 겨울이 되니 어찌 하잔 말이냐. 이애 정애야. 너는 춥지 아니 하냐?"

정애는 아무 대답이 없는 고로 춘식이 생각에 근심이 태산 같은 정애가 벌써 잘 리는 만무하고 자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내가 말하는데 대답 아니할 리가 없는데 아무 기척 없으니 웬일인고 하고 심히 괴상히 여기여

"정애, 벌써 자니?"

하며 문 열고 방을 둘러보니 불빛은 침침하여 자세히 뵈이지도 아니하는 속에 돌아앉아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천지신명은 이 불쌍한 정애를 굽어 살피사 우리 남편 김상현으로 하여금 육해 원로에 귀한 몸을 보중하게 하여 주시옵고 속히 고원에 돌아와 이 사람으로 하여금 미진한 인연을 계속 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며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는지라. 춘식이가 그것을 보내 마음에 깜짝 놀라 속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이게 웬일인가 정애가 학교에를 다니며 학교를 공부한 사람이라 미신적 행위는 극구 반대를 하던 터인데 이게 별안간 웬일인가 이거 큰일 났군 하고 정애 어깨를 흔들며,

"너도 이러한 우치한 짓을 하느냐? 평일에 기도라면 극반대 하던 사람이 별안간 이게 웬일이냐?"

하여도 정애는 들은 체 만 체 여전히 중얼중얼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생각이 과도히 하든지 별안간 혹독히 놀라든지, 희로애락 등 층절이 극단에 이르도록 신경을 감촉하면 마침내 정신병이 생기는 법이라. 정애가 상현을 이별하고 친가로 돌아온 후에 일단 생각하는 바는, 그 남편 상현의 생각이요, 주야로 기다리는 바는 그 시어머니가 해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자 함이라. 이같이 생각하고 기다리기를 자나 깨나 잠시를 노심초사 아니할 때가 없이 지내던 차에, 별안간 그 남편 상현이가 외국으로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실혼낙담이 되어 마침내 신경병을 얻은 것이라. 평일에는 기도니 발원이니 하는 미신적 행동은 결코 절증지하던 사람이 한구석에 돌아앉아서 천병만마 가운데도 꼼짝 아니하고 밤새도록 쉬지 않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만 시어머니 회개하게 하여 줍시사 하는 말뿐이라. 춘식이는 놀랍고 놀라운 중에도 가련하고 가련한 정애가 시집을 잘못 간 탓으로 마침내 저 지경이 되어 이제는 영히 신세를 버린 생각을 하매,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이 가슴을 쏠아, 어찌할 줄 모르고 정애를 붙들고 앉아 눈물을 흘리며,

"정애야 정애야, 네가 이게 웬일이냐?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이것이 웬일이란 말이냐? 여자의 성정은 아무리 편협하다 할지라도 이 지경이 되도록 편협한 마음을 먹는단 말이냐? 이제는 네가 정신을 못 가지고 평생을 가련하게 마치겠구나. 이게 웬일이냐 정신 좀 차리고 오라비나 좀 보아라. 너 그 시어멈과 남편 생각하지 말고, 내가 내 정신 가지고 오라비 나와 서로 의지하여 살자. 정애야 정애야!"

하고 만단으로 위로하는 말을 하나, 정애는 그 말을 듣는지 마는지 도시 상관 아니하고 줄곧 하는 소리가, '시어머니 회개해 줍시사, 남편 속히 돌아오게 하여 줍시사.' 하고 또 하고 천번 만번 하여 그 밤을 지내는데, 춘식이는 정애를 위로하다 못하여 한편으로 물러앉아서, 정애의 불쌍한 생각을 하고 '오죽해야 저 지경이 되었으리! 제가 정신이 없는 이상에는 살았어도 죽으나 다름이 없구나. 저 꼴을 눈으로 어찌 본단 말인고.' 싶어서 울며 그 밤을 지냈더라.

그렇게 영리하고 자상하던 정애가 그날부터 실진한 사람이 되어 아무 정신 모르고 짐승을 보아도 절을 하며 축원하고, 초목을 대하여도 절을 하며 축원을 하여, 그 행동이 대단히 이상한지라. 춘식이는 그러한 누이를 두고 집을 떠날 수 없어 장사하는 사람이 장사도 못하고 날마다 정애를 보호하기에 아무 볼일을 못 보니, 구차한 살림에 호구할 계책이 망연한지라, 민망하고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아무 정신 모르는 정애를 향하고 한탄을 하는 말이,

"이애 정애야, 내가 너를 보면 구곡간장이 녹는 듯하구나. 네가 아직 꽃 방울 같은 연기에 저 지경이 되었으니 백 년을 살면 무엇하고 천 년을 살면 무엇하느냐? 너 같은 인물과 너 같은 학문으로 평생에 영광을 모르고 한세상 헛났구나. 에구, 나는 너 불쌍해 못 살겠다. 그러나저러나 나는 본래 가난한 사람이라, 하루를 못 벌면 하루 먹을 것이 없는 처지니, 너를 붙들고 앉았자 하면 호구지책을 난계하겠고, 볼일을 보고자 나간즉 네가 밖에를 나아가 남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그를 어찌하잔 말이냐? 일변 애석하고 일변 답답하여 못 견디겠구나."

하며 만단 사정을 말하나, 정애는 평일에 그 남매가 무슨 일이든지 서로 의논하며 우애가 자별하게 지내던 마음이 어디로 갔는지 그런 말을 듣더라도 못 들은 듯이 다만 축원하는 소리만 입을 끊이지 아니할 뿐이요, 혹시 그 오라비 눈에 아니 띄는 때면 가만히 밖으로 나아가 신당이나 성황당에 가서 엎디어 지성으로 기도를 하는데, 정애가 그 모양으로 제정신을 모르지마는, 밖에 나갈 때에는 풀어 산발하였던 머리도 다시 단장을 하고 의복도 정제하게 입어 남 보기에 실성한 사람 같지 아니하게 보인다.

어디든지 한곳에 앉아 기도를 시작하면 이틀 사흘 일어나지 아니하여 그 오라비가 가서 데려오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올 줄 모르는 고로, 춘식이는 더욱 집에 먹을 것이 없어도 집을 잠시도 떠나지 못하여 돈 한 푼 벌지 못하니, 가난한 사람이 하루 이틀이지 장구한 세월을 어찌 정애만 붙들고 있으리오. 혹 정애가 그리하다가도 잠이 곤히 들면 종일 자는 날이 있는 고로 그리 할 때를 틈타서 춘식이는 밖에 나가 노동을 하고 돈푼을 벌어다가 남매 연명을 하여가는데, 그럭저럭 그 해가 다 가고 그 이듬해가 되어, 해는 점점 길어지고 생활 정도는 차차 곤란하여 그 남매의 신세가 하릴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에 다다랐는데, 춘식이가 하루는 정애가 잠든 틈을 타서 봄에 나가 젓갈을 외상으로 받아 지고 문안으로 들어가 팔러 다니는데, 이때 사정이 (*) 그것을 다 팔아서 본전을 갚고 돈푼이나 남아야만 물건 임자에게 졸리지 않고 그 강날 호구를 간신히 할 터인데, 그날은 일수가 사나워 그렇던지 목통이 터지도록 종일 외고 다녀도 사는 사람은 별로 없고, 해는 너울너울 넘어가서 서산에 반쯤 걸쳤는지라, 춘식의 마음은 조민하기 이를 것 없어,

'이런 제기! 이 노릇을 어찌하나? 물건은 겨우 삼십 전밖에 못 사고 해는 벌써 넘어가니, 물건값을 이것만 갖다 주자 한즉 밥 해먹을 것이 없고, 이것으로 밥을 해 먹자 한즉 이다음에는 물건을 또 받을 수 없을 터인즉,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그도 그렇거니와 나 나온 사이에 정애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은즉 이렇게 답답한 데가 어디가 있나. 어서 나아가 보아야 하겠다.'

하며 무한히 한탄을 하고 바삐 집으로 나아가 보니, 정애가 그 사이 간 곳이 없다. 춘식이가 깜짝 놀라,

"에그! 이것이 또 어디로 갔구나. 이것이 나가서 남우세나 하면 어찌 하나? 제정신 못 가진 것이 마음에 항상 원통한 생각은 품었은즉 세상 귀찮은 마음으로 생명을 버렸으면 어찌하나? 제 신세로 말하면, 그 모양 하고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어 남의 눈에 부정한 꼴 보이지 않는 것이 낫지마는, 제 오라비 이놈으로 말하면 그것이 참혹하고 불쌍하여 어찌 산단 말인가."

하고 지극히 근심을 하며 사면으로 찾아다닌다. 동리 사람에게 물어도 종적을 알 수 없고, 심지어 순사 파출소에 가서 물어도 도시 간 곳을 알 수 없는지라. 그날 밤새도록 찾아다니고 그 이튿날 종일 찾아다니되 마침내 행위가 불명한 고로 춘식이는 정애의 불쌍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에그, 이것이 필경 어디 가서 죽은 것이로구나. 제가 제정신이 있을 것 같으면 나를 보지 않고 죽을 리가 만무하지마는, 실성을 한 것이라. 남매 정의를 생각지 못하고 어디 가서 죽은 것이니, 이것이 불쌍하여 내가 어찌 사나! 송장이라도 찾아 죽은 얼굴이나마 다시 한 번 보고 장사나 잘 지내어주어야지."

하고 혹시 강물에나 빠져 죽었는가 하고 강변에 나가 아래위 여울을 낱낱이 수색하되 도시 형적이 없고, 혹시 문안이나 들어갔는가 하고 서울로 들어가서 방방곡곡에 돌아다니며 파출소마다 가서 물으나 한 곳도 아는 데가 없는 고로 찾아다니다 못 하여,

"에라, 동기일신이라는데 내 누이가 그 지경이 되어 간 곳을 모르는 처지에 내가 어찌 집에서 편안히 살 수 있느냐! 의리로 말하더라도 찾을 수 없다고 무심히 고만두는 것도 일이 아니요, 정리로 말하더라도 그 동생을 다시 못 보고는 가슴에 피가 맺힐 터이니, 내가 십삼도 강산을 다 돌아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정애를 찾아 나갈 수밖에 없다. 만일 찾아다니다가 요행 만나 보면 하나님 덕택이요, 설령 못 만나 보더라도 하릴없고, 정애가 어디 가서 죽었을지라도 죽은 얼굴이나마 한번 만나 보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니, 화증나는 김에 명산 구경삼아 사면팔방 유산객 노릇이나 하여 보리라."

하고 그날로 괴나리봇짐에 짚신 들메를 하고 발길 돌아가는 대로 정처 없이 떠나가는데, 먼저 개성을 향하여 출발을 하였더라.

상현의 모친은 상현이 떠난 후에 영자를 데리고 세월을 보내는데, 상현이가 정애 이혼한 것은 천만 다행하나, 상현이가 봉자와 결혼함을 거절하고 멀리 여행한 것이 마음에 항상 미흡한 생각도 있고, 또한 상현이는 애지중지하는 아들이라 슬하를 떠나 멀리 갔으매, 그 아들이 풍토가 다른 곳에 가서 몸 성히 있는가 하는 염려도 간절하여 그 아들 생각날 적마다,

"세상에 얼뜬 놈도 있다. 그놈이 이번에 여행한 것은 문견을 넓히기 위하여 하는 여행도 아니요, 실상 나를 미워서 하는 여행도 아니라. 봉자와 결혼하기 싫어함은 봉자가 인격이 부족하다든지 행실이 부정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니요, 그 괴악한 정애를 못 잊어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것이니, 그런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나. 그러나 제가 우물 안 고기로 자란 것이 해외에 가서 고생이나 아니하는지 궁금도 하거니와, 제일 손자가 늦어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저도 과히 지각없는 사람은 아니라, 어찌하여 이번 길을 떠났든지 몇 달만 지나면 필연 내 생각을 하고 속히 돌아올 것이요, 돌아오는 날에는 아마 정애 생각도 그처럼 아니할 터이지."

하며 하루 이틀 지내는 터이요, 봉자는 상현이와 결혼을 하려고 영자와 부동하여 궁흉극악한 계교를 내다가 겨우 애매한 정애의 신세만 참혹하게 만들었을 뿐이요, 정작 목적은 달치 못하여 제반 경영이 모두 허사가 된 지라, 봉자가 만일 여간만 악한 사람이 아니면 이왕 잘못한 것을 후회도 할 터이요, 또한 자기의 행실을 고쳐 장래의 다른 혼처나 좋은 곳을 구할 터인데, 봉자는 어찌 된 인물인지 백옥 같은 정애로 하여금 그 지경을 만들었으되, 마음에 조금도 가엾은 생각이 있지 아니할뿐더러, 자기가 상현에게 괄각하는 거조를 당하였으나 웃노라고 부끄러운 마음도 손톱 반머리만치 없고, 단지 분한 마음만 품고 있으나, 사기는 벌써 천리만리 어기어지고 자기의 분한 마음은 쓸데없는 곳에 돌아갈 뿐이라. 제 꼴에는 장래가 실망이 되어 타락심을 먹고, 상말로 화증김에 서방질한다고 음란한 행실만 점점 늘어서 영자와 짝패가 되어 시쳇말로 하이칼라 단장만 하고 밤마다 연극장이 아니면 밀매음 뚜쟁이 집으로 돌아다니며 경박 소년·패가 자제 등 불량배와 눈을 맞추어 비밀히 추축을 하며, 요리나 먹고 풍류나 듣고, 산사 강정에 놀이나 다니는 것을 가장 행락으로 알아, 속마음으로 '어찌하면 평생을 이와 같이 지낼꼬.' 하여 그것을 무궁한 행복으로 생각하고 그칠 줄을 모르는 고로, 남의 손가락질도 많이 당하고, 혹시 경관에게 발각이 되어 설유도 여러 번 만났으되, 속담에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날마다 그 버릇을 놓지 못하고 화조월석에 무한한 재미를 붙이니 저간의 부랑패류 쳐놓고 정봉자 모르는 사람이 없고, 조선 십삼도에 망신패가한 자는 정봉자에게 다만 돈푼이라도 아니 빼앗긴 사람이 없더라.

때는 춘삼월 호시절이라. 일기는 온화하고, 백화는 만발하여 곳곳이 금수강산을 이루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놀아나는 때인데, 하루는 봉자가 어떤 건달을 따라 문밖에 나가서 종일 질탕히 놀고 들어오는 길에 연극장에 가서 열두 시가 되도록 구경하고, 그 끝에 요리를 차려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여 가며 밤새도록 행락을 하다가 늦게 잠이 들어 그 이튿날 오정까지 자고 일어나니 어떠한 엽서 편지 한 장이 왔는데, 그 엽서를 보니 전면에는

'경성 청풍계 정봉자 전.'이라 하고 후면에는 '심사할 사건이 있으니 래 십오일 오전 구 시에 당서로 출두할사. 연월일. 경주경찰서.'라 하였고, 그 밑에 큼직한 인을 쳤는지라, 마음에 대단히 이상하여, '이게 웬일인고? 경주경찰서에서 무슨 일로 나를 부르노? 내가 경주경찰서로 불려 갈 일이 무엇인고?' 하여 아무리 생각하여도 도시 지방경찰서에서 부를 일은 없는데, 한 가지 미심한 것은 한 달 전에 경주 사는 어떤 부자의 자식 하나를 후려서 사기 취재한 돈을 많이 빨아먹은 일이 있는 고로, 아마 그 일이 탄로되어 재산 허비한 곳을 조사하는 것인가 보다 하고, 그 호출장을 들고 급히 영자를 찾아가서 은근히 내어 보이며 하는 말이,

"이애 영자야, 나는 이상한 일을 당했다. 경주경찰서에서 호출장이 왔구나."

하니 영자가 깜짝 놀라며,

"이게 웬일이냐? 내게도 호출장이 왔다!"

하고 엽서 한 장을 내어놓는데, 그 엽서 역시 자기에게 온 엽서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전면에 성명만 영자라 하였는지라. 봉자는 더욱 이상하여 영자와 분운히 의논만 한다.

(봉) "영자야, 이것이 아마 월전에 경주 놈 하나 놀려 먹은 사건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영) "글쎄, 내 생각에도 그런 듯하다마는 알 수가 있느냐?"

(봉) "그것이 그것이냐? 그놈이 제 집 논문서를 위조해서 잡혀 가지고 돈을 그렇게 잘 썼다더라. 아마 그 일이 발각되어 돈 쓴 이유를 조사하나 보다."

(영) "글쎄……."

(봉) "그 일이 아니면 경주경찰서에서 우리를 부를 까닭이 있느냐?"

(영) "아마 그런가 보다. 그 일 같으면 우리가 염려할 것 없다. 사기 취재를 해도 그놈이 했지 우리가 했느냐? 우리 가서 그런 일 없다고 시치미를 떼자꾸나."

(봉) "아무렴, 그렇지. 생파리 같이 떼야지. 조금만 어름어름하다가 봉변이야. 그러나저러나 아니 갈 수는 없지?"

(영) "아무렴, 그렇지. 가야지, 그러나 어머니가 아시면 어찌하니?"

(봉) "이왕 그렇게 된 일을 아시면 어떠하냐? 별말을 다 하는구나."

(영) "자― 그러면 어머니께 핑계를 대고 갔다 오자."

두 사람이 이같이 의논을 하고 출두할 일자를 기다려 경주를 내려가는데, 영자는 그 모친께 아무 말 없이 갈 수가 없어 호출당한 말을 대강 고하니, 그 모친은 어찌 된 이유를 몰라서 대단히 겁을 내며,

"네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먼 데 있는 지방 경찰서에서 호출을 하느냐? 범죄한 일이 있거든 말이나 바른대로 하고 가거라."

재삼 물으나 영자는 자기도 모르는 일에 무엇이라고 대답할 말이 없는 고로,

"저도 웬일인지 알지 못하나 부르는 것을 아니 갈 수 없으니 잠깐 다녀오겠으니, 어머니께서는 과도히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죄 없는 이상에야 무엇이 무서우리까."

하며 담대한 말을 하고 봉자와 동행하여 경주를 내려가며 속마음에 대답할 예비를 생각하되, 만일 경주 부자의 돈 먹은 말이 나거든 쾌쾌히 말하리라 잔뜩 벼르고 경찰서에 당도하여 호출을 내어놓은즉, 경찰서 처수소에서 그 호출장을 받고 한 사람씩 차례로 불러들여 신문을 하는데, 신문하는 곳은 곧 사법계라. 봉자를 먼저 불러들여서 무슨 말 물었는지 두 번째 영자를 불러 들이는데, 영자는 이때까지라도 '나는 아무 죄 없거니, 아무 죄 없는 이상에야 무엇이 겁나리오.' 하고 마음을 굳세게 먹고 들어간즉 경관이 묻는 말이,

"네가 김영자냐?"

영자가 대답을 하매 경관은 계속해 묻기를, 나이 얼마냐, 네 집은 어디며 직업이 무엇이냐, 너의 부모는 무엇을 하며, 네 오라비는 어디를 갔느냐, 네 오라비의 처는 네 집에 한가지 있느냐, 별별 말을 다 묻는지라, 영자는 묻는 대로 대답을 하는데, 나중에는 경관이 눈을 크게 뜨며 하는 말이,

"네가 정봉자와 부동하여 네 오라비의 처를 이혼시킨 일이 있지?"

영자의 의외의 그 말을 들으매 생각하던 바와 딴판일 뿐더러, 그 일을 어찌 알고 말하는지 귀신같이 아는 듯한지라, 놀랍고 겁나는 마음은 이루 칭량할 수 없으나, 자백하기는 죽어도 싫어서 앙탈을 한다.

"그런 일 없습니다."

(경관) "너 그러면 네 오라비 처의 금지환은 도적질한 일이 있지?"

영자가 그 말을 들으매 더욱 기가 막혀서 아무 말 못하고 오도카니 섰는 속마음에, '대저 이게 웬일인가? 이 일을 봉자나 알고,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지, 경주경찰서에서 어찌 알았는가?' 하여 주저주저하는데, 경관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어서 바른대로 말해!"

하는 소리에 경찰서 관사가 드르렁 울리는지라, 영자가 깜짝 놀라며 겁결에 하는 말이,

"죽을 때라 잘못하였습니다. 경관의 덕택으로 살려 줍시오."

하며 애걸을 한다.

(경관) "그런즉 그 가락지를 정녕 네 손으로 집어냈지?"

(영) "녜, 그리하였습니다."

(경) "그러면 네가 그 가락지를 집어낸 이유가 무엇인고? 그 가락지가 욕심이 나서 집어냈다든지, 돈 쓸 일이 있어 집어냈다든지, 한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니 바로 말을 하렷다. 바로 말을 하면 무사히 보낼 것이요, 만일 둔사로 말을 하면 감옥서로 갈 터이야."

영자는 감옥서로 간다는 말을 들으매 정신이 아득아득하며 전에 잘못한 일이 모두 후회가 나나, 이왕 하여놓은 일을 무를 수도 없고 감옥서 말고 지옥을 간대도 경관이 알고 묻는 마당에 거짓말할 수 없어 하릴없이 자백을 한다.

(영) "그런 게 아니올시다. 그것이 탐이 나서 남의 것을 집어낸 것도 아니요, 돈이 없어 훔쳐내어 팔아먹으려고 훔쳐낸 것도 아니요, 제 동무 정봉자라 하는 처녀가 있는데, 그 처녀는 제 오라비 상현과 결혼하기를 원하나, 제 오라비는 이왕 박정애와 혼인을 한고로 봉자는 주야로 생각하기를, '어찌 하면 정애로 하여금 이혼을 시키고 기어코 내 목적을 달해 볼꼬.' 하는 마음으로 정애를 모함하기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시켜 그 가락지를 훔쳐내게 하고, 정애로 하여금 그 가락지를 정든 간부를 주었다고 모함을 하였습니다. 그런즉 저는 봉자의 말을 듣고 그런 짓을 한 것이요, 제 마음으로는 그리한 것이나, 일인즉 매우 잘못한 일이오니 용서하여 주십시오."

(경) "그러면 그 가락지로 하여금 박정애가 이혼이 되었느냐?"

(영) "네, 이혼을 하였습니다."

(경) "그래, 이혼이 되었으면 봉자가 네 오라비와 결혼을 하였느냐?"

(영) "아니올시다. 결혼이 못 되었습니다."

(경) "어째서?"

(영) "제 오라비가 항상 정애를 못 잊어서 정봉자는 결혼하기 싫다고 거절을 하고 구미 각국으로 여행을 갔답니다."

(경) "그래서 그 가락지는 집어다가 어찌하였나?"

(영) "그 가락지를 집어내어 놓고 생각하온즉 가지자니 이목이 번 다하여 할 수 없고, 내어버리자니 아깝고, 어찌할 수 없어서 봉자와 같이 의논하고 전당국에 잡혀 먹고 표는 찢어버렸습니다."

(경) "전당국은 어느 전당국이냐?"

(영) "야주개 전당국이올시다."

(경) "그러면 그 전당 주인을 아느냐?"

(영) "안다면 알 만하고, 모른다면 모르지요."

(경) "똑똑히 말해. 그게 무슨 당국치 못한 말이냐!"

(영) "대강 짐작은 합니다."

(경) "응, 그러면 이게 그 가락지냐?"

하며 순금지환을 한 개 내어놓는데, 영자가 자세히 본즉 그 가락지가 정녕 한가지라 대단히 이상하여, '저 가락지가 어찌 되어 여기까지 왔노.' 하며,

"네 그 가락지올시다."

경관은 다시 아무 말 아니하고 순사 불러, 영자를 유치장으로 내려다 가두라 하는지라, 영자는 할 수 없이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서 눈물을 흘리며 후회막급하더라.

영자가 그 금지환을 가만히 집어내어 정애를 모해한 후에 그 지환을 처치할 방편도 난처하고 또한 재정도 군색하나, 그것을 임의로 방매할 수도 없는 고로 봉자와 의논하고 전당국에 잡히어 그럭저럭 써버리매 아무 흔적 없는지라, 영자와 봉자는 마음을 놓고 조금도 염려하지 아니한 것인데, 세상 이치가 막현어은이라, 그런 일이 발각되자면 지극히 용이하게 되는 법인 고로, 영자가 그 지환을 잡혀 먹고 전당표까지 찢어 버렸은즉 아무 후환이 없을 듯하지마는, 그것은 영자나 봉자의 짐작에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라. 그 전당국 주인은 그 지환을 전집한 후에 십여 삭이 넘도록 찾아가지 아니하매, 전당 영업 규칙에 의하여 그 금지환을 방매하니, 이는 유질 기약이 과한된 것이라 법률에 아무 저촉될 것이 없으나, 그 지환이 대단히 귀중한 지환이라. 김상현이와 박정애의 결혼식할 때에 그 시모가 며느리 예물을 준 것인데, 그 금지환에 가히 기념품이 될 만한 조각을 놓았으니 한 짝에는 김상현 삼 자를 새기고 또 한 짝에는 박정애를 새긴 것이라. 그것은 누가 보든지 김상현과 박정애의 소유물인 줄 분명히 알 것이라. 전당국에서 그 지환을 팔 때에 경주 사는 어떤 사람이 사 갔는데, 그 경주 사람은 본래 부랑한 사람인 고로 그 지환을 사서 끼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로 경찰 규칙 위반죄로 잡혀서 취조를 당하는 마당에 그 금지환의 조각한 것이 탄로 되었는데, 이때 경찰서장은 김상현의 친구 현국진이라. 현국진이가 경주경찰서장이 되어 내려간 후에 김상현의 소식은 돈연히 모르고 지내던 터이라. 부랑 소년 하나를 취조하는 당석에 김상현과 박정애의 성명 조각한 지환을 발견하고 하도 이상하여 그 금지환 사 가진 원인을 조사한즉, 소년의 말이 그 물건을 서울 전당국에서 샀다 하는 고로 즉시 그 전당국 주인을 불러 내려다가 조사하니, 그 전당국 주인이야 전당 잡혀 먹고 아니 찾아간 사람을 어찌 알고 말하리오마는, 정봉자와 김영자는 여학생 밀매음으로 유명한 자라, 그 두 여자가 길에 나서면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손가락질 아니하는 이 없어 여학생계를 물들이기는 첫손가락을 꼽는 인물인 고로, 전당국 주인도 그 지환 전당 잡을 때에 대강 짐작을 하였던 터이라. 그러나 영업하는 사람이 남의 행위 부정한 것이야 교계할 것 있으리오. 무론 어떤 사람이 무슨 물건을 전질하든지 돈 주고 잡은 것이요, 한이 지나도록 아니 찾아가니까 아무 사람에게나 팔아버린 것이라. 한 지난 유질물 팔아먹은 것이야 무슨 관계 있으리오. 그런고로 경관이 묻는 마당에 조금도 은휘할 것이 없을 듯하여, 자초에 전당 잡던 말이며, 한이 지나 팔아버린 일이며, 잡힌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낱낱이 대답한지라. 현국진이 처음에는 김상현의 집에서 도난을 당하였는가 하였더니 급기야 조사하는 결과는 소장지변에 지나지 못하는 고로 그럭저럭 타첩을 하고, 김상현을 불러 지환이나 내어줄까 하다가, 경찰관리가 되어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면 불가한 줄로 생각하고 마침내 전당국 주인의 말을 의지하여 봉자와 영자를 부른 것인데, 그 두 여자를 불러다 조사한 결과는 원인이 점점 깊어, 박정애 모함한 전적과 무죄한 사람 이혼시킨 사실까지 드러나는 고로, 현국진은 그 두 여자를 범죄자로 인정하여 우선 유치장에 구류하고 김상현의 모자와 박정애의 남매에게 급히 호출장을 놓았더라.

영자가 평생에 처음 구류 간 맛을 보매 무섭고 겁나는 품이 죽는 이나 다름없어 일변 한심하기도 칭량 없고, 일변 후회하는 마음도 이를 데가 없는 중, 경관이 어찌 알고 그리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지극히 궁금한지라,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고 있는 차에, 봉자는 비록 그 옆 간에 유치하였으나, 다만 벽 하나 사이라, 음성이 서로 들릴 만한 고로 순사 없는 사이를 틈타 서로 사정 이야기를 한다.

(영) "이애 봉자야, 대관절 이게 웬일이냐? 우리가 생각한 바와는 딴판이로구나. 경찰이 너더러는 무엇이라 묻더냐?"

(봉) "글쎄다, 웬 셈을 모르겠다. 처음에 나를 먼저 불러들이더니 무 두 무미히 하는 말이, '너 박정애의 금지환을 절취하여 영자와 같이 아무 전당국에 전질한 일 없느냐?'고 하니, 그 지경이 된 것을 아니라면 될 말이냐? 어떻게 발각이 되었던지 단사가 드러나서 전당국 주인의 입에서 말난 것이 분명한데 떼를 쓰면 되겠더냐? 그래서 그런 일이 있다고 자백을 한즉, '그러면 네가 절도가 아니냐?'고 하니 그 대답을 무엇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구나. 그래서 바른대로 박정애의 사건을 자세히 말해 버렸다. 너도 과히 겁내지 마라. 이왕 죄지은 것을 무를 수가 있느냐? 심려를 하면 당할 것을 아니 당할 터이냐? 나는 아모 걱정 없다."

(영) "에그, 너는 뱃심도 좋구나. 어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모지냐? 나는 후회가 되고 겁이 나서 죽을 지경이다. 그러니까 정애 이혼하였다는 말은 네 입에 먼저 나왔구나. 경관이 정애 이혼한 줄까지 알고 묻기에 어찌 알았는지 몰라서 궁금하더니, 이제 아니까 그 말은 네가 했구나. 그러면 그 말은 네가 했거니와 당초에 가락지 사건은 어찌 발각이 되었단 말이냐? 전당국으로부터 발각이 되었다 한들, 전당국에서는 우리를 어찌 알고 말했단 말이냐? 그러나저러나 큰일이 났구나."

(봉) "에그, 못생긴 년! 작은 일이었더냐? 징역밖에 더 하겠니? 죽지는 않는다."

(영) "이년아, 그게 말 따위냐? 죽지 않는 것만 다행하냐? 징역을 하게 되면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무엇 있니?"

이같이 이야기하는 판에 순사가 오는고로 하던 말을 중지하여 버렸는데, 그러한 이야기도 모두 쓸데없는 말이요, 다만 백방이 되나 징역을 하나 속히 처결되기만 기다리며 밤낮 마음을 졸이는데, 그 두 사람의 신세 참 가석하게 되었더라. 현국진은 경주경찰서장으로 내려올 때에 남대문 정거장에서 김상현과 손광준을 이별한 후 서울 소식은 묘연하나, 그사이 김상현의 내외가 이혼이 될 줄은 천만뜻밖이더니, 이혼된 사건을 알고 보매 저간에 요악한 계집들의 모함한 바가 되어 율리상의 큰 관계가 될 만한 일이 생겼는지라. 그런고로 경찰권을 가지고 직무를 지킬 뿐 아니라, 친절 친구 김상현의 일을 바로잡아 주리라 하여 김상현의 모자와 박정애의 남매를 호출할 때에 먼저 경성 북부경찰서에 근무하는 자기 친구 손광준에게 사찰을 보내고 김상현 이혼 사건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보내라고 부탁을 하였더라.

손광준은 김상현 이혼 사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모르나 대강 짐작하는 고로 현국진의 편지를 보고, 김상현의 이혼신고는 김상현이가 취하한 일이며, 박정애는 친구의 집에 가서 있다는 말로 답장을 하였는데, 김상현은 멀리 여행한 사람이요, 박정애는 실성이 되어 간 곳을 모르는 터이며, 박춘식도 역시 죽장망혜로 정애의 종적을 찾아 정처 없이 나간 사람이라, 호출장 접수할 형편이 못 되어 출두하지 못하고, 상현의 모친은 정애를 이혼시키고 정애를 친정으로 보낸다, 이혼신고를 민적계에 제출한다 한 후에, 상현이는 해외로 멀리 가고 집안은 쓸쓸하여 주야로 그 아들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천만의외로 영자가 경주경찰서 호출을 당하여 내려가니 무슨 일인지 몰라 '아직 시집도 아니 간 처녀년이 무슨 죄가 있어 경찰서 호출을 당하였노?' 하고, 일변 남도 부끄럽고 일변 겁도 나서 마음을 이루 진정할 수 없이 근심이 될 뿐 아니라, 크고 드높은 집 속에 사람이라고는 단지 자기 하나뿐이라, 소슬한 바람이 집 안에 핑그르 돌아 난리 난 집도 같고, 파산한 집도 같아서 잠시를 견딜 수 없는 중, 하루는 체전부가 와서 "편지 들여가오!" 하는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자, 행랑 하인이 엽서 두 장을 받아 들여오는데, 그 엽서는 보통 편지가 아니요, 경주경찰서 호출장이라. 하나는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요, 하나는 자기 아들에게로 오는 것인 고로, 마음에 심히 이상하여 속생각으로, '이게 웬일인고? 영자를 부르자 우리 모자를 부르니 이것 분명 가정상 사항에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라. 우리 가정에 정애 이혼한 사건밖에 없으니, 그 일로 경주서 부를 리는 만무하니, 괴상도 하다. 이게 웬일인고?' 하며 무한 의심을 하다가 일한이 차차 되어 오매, 호출장을 가지고 경주를 향하여 떠났더라.

박춘식과 정애는 동리 사람도 종적을 모르는 터이라, 경찰서 엽서는 전할 곳이 없이 되어 '영수인이 무함'이라는 쪽지가 붙어서 반환이 되고, 다만 김상현 모친만 김상현의 호출장까지 함께 가지고 출두를 하였는데, 서장 현국진은 그 사이 손광준의 답장을 받아 보고 김상현의 이혼 사건을 대강 알자 김상현의 모친이 출두한지라, 즉시 불러들여 자세히 조사하여 본 즉, 그 노인은 전연히 영자와 봉자의 간악한 계교에 속은 것이 분명하고, 정애는 원통히 이혼을 당하였으며, 상현은 화증 김에 여행을 한 것이 명약관화한지라, 경관 현국진은 김상현의 모친을 위하여 영자와 봉자의 죄상을 말하고 정애의 백백히 애매함을 설명한 후, 빨리 돌아가 정애에게 사과하고 아들을 불러 재혼케 하여, 차후에는 아무쪼록 가정이 화목하게 지내라고 자상히 설유하여 내보내고, 영자와 봉자는 유죄로 인정하여 즉시 경주 지방재판소로 압송을 하였는데, 재판소에서는 봉자와 영자의 죄안을 사실한즉 과연 남의 물건을 절취하고, 애매한 사람을 모함한 죄를 범하였는고로 즉시 조문을 참작하여 각각 징역 이개년이 선고하니, 대개 죄지은 사람의 형벌 받는 것은 떳떳한 이치라 그리 불쌍한 것은 없으나, 영자나 봉자는 꽃봉오리 같은 미가전 처녀라. 마음 한번 잘못 먹고 장래가 창창한 신세를 지극히 가련하게 만들었더라. 상현의 모친은 경찰서에서 설유를 듣고 나와, 그 딸 영자의 소식을 좀 알고 가려고 그곳에 사관을 정하고 소식을 탐지하니, 벌써 재판소로 넘어가 각각 이개년 징역이 되었다 하는지라. 그 말을 들으매 모녀의 정리에 간담이 서늘하나 자기 딸 영자는 봉자의 꾀임을 들어 남못할 노릇하고, 제 신세까지 마친 것이 가엾은 마음은 조금도 없고 도리어 미운 생각이 발하며, 백옥 같은 정애에게 누명을 씌워 그 지경을 한 것이 가엾기도 이를 것이 없고, 어질고 착한 아들로 하여금 마음이 변하여 멀리 가게 한 것이 후회막급하여 스스로 근심하며 스스로 한탄을 하다가 감옥소에 면회 청원을 제정하여 영자를 만나 보고, '네 죄를 생각하면 오히려 이년 징역이 가볍다.'고 일장 질책하고 집으로 올라와 정애에게 사과를 할 양으로 마포를 나가니, 어느 집이 정애 집인지 몰라 사면 찾아다니다가 간신히 물어서 찾아간즉, 게딱지같은 수간두옥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쓰러진 울타리와 깨어진 벽에 소슬한 바람이 사람의 눈을 처량하게 하는지라, 부인이 어찌 된 까닭을 모르고 동리 사람에게 물은즉 동리 사람 말이,

"우리도 어찌 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정애 부인은 이혼을 당하고 항상 근심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실성을 하여 어디로 갔는지 종적을 모르고, 그 오라비 춘식이라 하는 사람은 남매간 우애가 가히 모범할 만한 사람인데, 그 사랑하는 누이가 그 지경된 것을 불쌍히 여겨 사면으로 찾아다니더니, 요사이는 어디로 갔는지 간다 온다 말없이 나가서 아니 들어온 지가 월여가 되매,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그 두 사람 종적을 알 수가 없나이다."

하는지라, 그 말을 들으매 자기 미거한 것이 더욱 후회가 나고, 정애의 참혹한 것이 더욱 불쌍하여 홀로 먼 산을 바라보고 낙루를 하다가 돌연히 생각하기를,

'에라! 나 한 사람이 잘못한 까닭으로 여러 사람의 신세가 가련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가 죽어 고혼이 된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정애를 보리오! 정애가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하나, 만일 죽지 아니하였을 것 같으면 한번 만나 보고 무수히 사과나 하고, 비록 정신병은 고치지 못할지라도 내 집 사람의 명목을 다시 지어 죽더라도 원한이 없게 할 터이니, 내가 이 길로 정애를 찾아 나가리라.'

하고 그 부인마저 머리에 수건을 들어 얹고 지팡이를 질질 끌며 정처 없는 길을 떠나,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경찰서마다 통지를 하여 정애의 종적을 탐지하더라.

김상현이 한번 결심하고 돌연히 집을 떠난 것은 그 노모에게 향하여 감정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요, 다만 울울한 심회를 금치 못하여 세상 구경이나 시원히 할 목적이라. 집을 떠난 후로 먼저 개성으로 내려가 명승고적을 구경하는데, 고려 왕궁의 만월대 기지와 선죽교 상의 포은 선생 혈흔이며, 채하동 수석과 박연의 폭포를 낱낱이 구경하고, 그 길로 평양으로 내려가 대동강 모란봉의 명미한 산수와 연광정, 부벽루의 기려한 풍경이며, 기린궁, 영명사 등의 금수강산을 유람하고 즉시 신의주 시가의 새로 번창함을 본 후, 곧 압록강 철교를 건너 동청철도를 타고 안동현 봉황성을 지나, 봉천부에 다다라 시가의 번성함과 물화의 교통하는 상태를 관찰하고, 계문연수를 지나 북경에 들어가니, 가옥의 굉걸함과 물산의 풍부함이 평일에 듣던 바에서 지나므로 경탄함을 마지 아니하고, 그길로 남청철도를 좇아 상해에 다다라서 동서양 인물의 폭주병진하는 성화를 구경한 후 남경 오송의 문물을 사랑하고, 한가한 자취로 동정군산과 소상춘수에 놀아 이백 간 뒤에 오래 한가하던 강남 풍월을 위로하니 벌써 떠난 지가 오륙 개월이라.

어언간 삽삽한 서풍이 가을을 재촉하고, 즉즉한 충성은 불평함을 읊조리니, 이때 비록 심기가 평화한 사람이라도 여관 한등에 객회가 없지 못할지어늘, 황차 정애의 인연을 끊고 노모의 슬하를 떠난 상현의 회포야 과연 어떠하리오. 깊고 깊은 마음속에 항상 나를 사랑하시는 우리 어머님, 나를 못 잊어 하는 우리 정애, 하는 회포는 묘묘히 생각 아니 나는 때가 없이 지내나, 장부의 한번 결심한 마음을 중도에 정지하는 것은 불가한 줄 아는 상현이라, 다시 태서에 두류코자 상해로부터 비로소 윤선에 올라 태평양 너른 물결을 깨트리고 인도양을 횡단하여 영령 인도에 들어가 열대지의 동식물이며 새로 발달되는 공업품을 낱낱이 시찰하고, 다시 지중해를 통하여 처음 구라파에 도착하니, 집 떠날 때의 노자는 얼마나 가지고 나섰든지 저 간에 모두 소모가 되고, 다만 적수공권이라, 하릴없이 유명한 정치가 재산가 등을 찾아다니며 자기의 세계 주유의 취지를 설명하매, 간 곳마다 지극히 환영하며 영준한 재화를 창양하여 다수한 기부금을 보조하는지라. 이때는 자기가 집에서 가지고 나온 여비보다 오히려 풍족히 쓰게 되니, 흡사한 쾌소년의 무전여행(快少年無錢旅行)이 되었더라.

그길로 파리 백림 피득보 등의 장걸한 시가를 열력하고, 서서의 세계 명승지라 칭하는 빙하공원의 기관이며, 기타의 화란 정말 서반아 이태리 등의 풍물을 곳곳이 구경하고, 영국 수부 론돈의 장관을 유람한 후 또한 아불리가로 항행하여 사하라 사막(沙漠) 희망봉 산맥을 바라보고, 연초 산지 애급과 열강의 점령지 제 부락을 낱낱이 구경하고, 태평양 너른 바다에 용맹한 돛을 다시 달아 적도선을 통과하고, 영대 지방으로 유명한 호주에 들어가서 세계에 제일 화려하다는 시가와 세계에 제일 풍부하다는 물산 등의 모든 상황을 목도하고, 그길로 남양 제도 야만 인종의 기괴한 풍속을 재미있게 구경하니, 무정한 세월은 어언간 두 돌이 되었는지라.

이때 다시 남북 아메리카로 가서 서반구 일폭을 편답코자 하다가, 그 모친의 생각이 심히 간절하여 잠시를 견딜 수 없는 고로 어시호 마음을 돌려 다시 생각하기를,

'에라! 아서라. 내가 고만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나를 생각하시고 주야 근심으로 지내실 터이니 내가 남의 귀한 자식이 되어 어찌 노모의 심회를 상케 하리오. 사람의 처라 하는 것은 사정에 지나지 못하고 사람의 부모라 하는 것은 천리의 떳떳한 대의라. 내 어찌 사정으로써 대의를 저버리리오. 일찍이 집으로 돌아가 늙으신 모친을 봉양하니만 같지 못하도다.'

하고 즉시 회정하여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지에 다다라 동경의 모든 풍물과 경도 대판 마관 등지의 화려한 물색과 선미한 풍속을 관광하고, 연락선으로부터 부산에 도착하였더라.

김상현이가 삼 년 만에 고국 산하를 구경하니 반가운 마음도 이를 것이 없고, 또한 자기가 나고 자기가 거주하는 조선 명승도 마저 다 구경하고 싶어, 서울 가는 역로에 경주 진주 대구 공주 등의 도회를 구경코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나, 그에서 더 급한 생각은, 일단 오래 그리던 자기 모친도 어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일시가 바쁘고, 또는 서로 잊지 못하는 정애는 그간에 어찌 되었는고, 하는 생각이 태평양 바다에 조수 밀어 들어오듯 하여 급급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바로 급행차를 타고 경성에 도착하니, 시가는 도로 확장이 되어 별건곤을 이루었고, 가옥 제도도 많이 개량이 되어 어디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 없을 만치 되었는데, 자기 집을 찾아가 본 즉 기가 막히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이게 웬일인고? 내가 무슨 마음으로 바람을 잡았던가!' 하는 후회가 나서, 아무 말 못하고 마당 한가운데 서서 한탄만 나가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오래간만에 집에 올라올 때에 '어서 가서 우리 어머니를 뵈리라.' 하고 급히 온 터에, 자기 모친은 어디로 갔는지, 자기 누이는 어디로 갔는지, 빈집에 소슬한 찬바람이 도는 것이라. 어찌 된 까닭을 모르고 사면을 둘러보더니 다행히 전에 부리던 행랑 하인은 남아 있어 반갑게 인사를 하는 고로, 우선 그 모친의 연고를 물으니 하인이 울며 대답하는 말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릅니다."

하는지라, 상현이는 궁금한 마음 끝에 화증이 나서,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마님 가신 곳을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이냐? 마님께서 언제 어디를 가셨으며, 작은 아씨는 어디로 가셨단 말이냐? 어서 바로 말해라."

하며 소리를 지르니 하인이 다시 말하기를,

"작은 아씨는 서방님 가시던 해 봄에 경주경찰서에서 불러가더니 무슨 죄인지 징역을 하신다 하고, 마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출입을 하시더니 삼 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겠으니, 소인네는 어찌 된 까닭을 도시 알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상현이가 그 말을 들으니, 간담이 서늘하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고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한참 섰다 생각하기를, '우리 친구 손광준은 경관이라, 대강 그런 일을 알 듯하다.' 하고 손경부를 찾아가니, 손씨는 대단히 환영하며 오래간만 만나는 회포를 서로 말한 후, 상현이가 자기 집 사정을 물으니, 손씨는 상현의 집에 풍파가 났단 말을 듣고 자세히 조사까지 하여본 일이 있는 고로, 영자와 봉자의 징역하는 사실과 정애의 실성 된 말이며, 노부인은 무슨 이유인지 종적이 불명하다는 이야기를 낱낱이 하는지라. 상현이가 그 말을 들으매 마음에서 화산이 터지고 눈방울에서 번개를 하여 잠시를 견디지 못하다가, '에라! 나도 어디를 가서든지 우리 어머니를 찾아보리라.' 하고 손씨를 작별하고 즉시 향방 없는 길을 발하더라.

상현이가 다시 집을 떠나매, 이때는 심지가 비상히 타락하여 아무리 기려한 풍경을 구경하여도 아무 흥미를 모르겠고, 아무리 연구할 글 한 자를 보아도 심상히 보일 뿐 아니라, 모두 비관적 심회가 가슴에 가득하여 아무 경황 없이 다니는데, 삼남의 인후지라는 수원으로부터 보은 속리산, 부여 백마강 등의 미려한 강산을 열력하고, 그길로 삼남에 제일 도회되는 대구의 즐비한 시가를 구경한 후, 차차 향방 없이 간다는 것이 경상남도 진주 부중에 다다랐는지라. 이때 생각에 '이곳 명승지는 촉석루가 제일 장관이라 하니 잠깐 구경하리라.' 하고, 걸음걸음 촉석루에 도박한즉, 누는 참암한 석벽에 의지하여 거울 같은 강물에 임하였는데, 때에 석양은 서천에 기울어지고, 연기 물결은 십 리에 평포한 곳에 한가한 백구는 뜻 없이 날아 상현의 비창한 마음을 더욱 돋우는지라. 이때 상현이는 만사가 무심하고 다만 세상이 귀찮은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곧 강상을 굽어보며 나는 듯이 뛰어내려 세상을 잊고자 하는 생각을 하느라고 정신을 잃고 섰는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하도 괴상하여 귀를 기울이고 들은즉 새소리도 아니요, 짐승의 소리도 아니요, 사람의 소리도 같고, 귀신의 소리도 같고, 도저히 알 수가 없는지라, 방금 그 석벽에 떨어져 만경창파에 장사를 지내고자 하던 상현이가 그 소리를 들으매, 결심하였던 마음은 어디로 도망질하고, 그 소리 나는 곳을 수색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눈을 들어 사면을 둘러보니, 인적은 조금도 없고, 다만 습습히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만 흔들릴 뿐인데, 그 소리는 분명한 사람의 말소리이나 누구하고 이야기하는 소리도 아니요, 그 어훈이 대단히 이상한 고로 정신을 가다듬고 자세히 들은 즉, 그 말소리는,

"지공무사하신 하나님께 비나이다. 착한 사람은 복을 주시고, 악한 사람은 재앙을 주시는 것이 정한 이치라. 소녀도 물론 죄악이 있어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남편에게 이혼을 당하여 마침내 이 지경이 된 것이어니와, 소녀가 오늘날 하나님께 비옵는 바는, 소녀가 죄악이 있거든 당장 죽여 풍도 지옥으로 보내시고, 만일 그렇지 않거든 여간 죄를 사하시와 우리 시어머니가 마음을 돌리시고 남편이 무사히 돌아와 소녀의 남은 인연을 이어, 가정이 원만하고 부부 화락하는 복을 주시와, 소녀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람의 노릇을 하고 돌아가게 하여 줍시사."

하고 축원하는 소리인지라. 상현이가 그 말을 들으매, 그 말이 남의 일 같지 아니 들리고 자기 아내 정애의 생각이 불현듯이 나서 혼자 한탄하기를,

"에그! 이상도 하다. 어떤 사람이 저러한 원한을 품고 이같이 축원을 하노? 천하에 사람의 일은 이루 추측할 수 없는 것이야. 어찌 그리 우리 가정과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그 목소리든지 말하는 어의가 남자는 아니요 여자인데, 그 소리가 어디서 나노?"

하고 사방을 돌아보는데, 그 말끝을 계속하여 나는 소리가,

"비나이다, 하나님께 비나이다. 지극히 참혹하고 지극히 가련한 박정애는 하나님께 비나이다."

하는지라, 그 말소리에 상현이는 정신이 아득하고 가슴이 털컥 내려앉으며,

"이게 별일이다! 박정애라는 말이 웬 말인고? 내가 꿈을 꾸나? 내가 미치나? 이 소리가 웬 소리인고?"

하고 강물로 떨어지려고 칼날 같은 바윗돌 위에 오뚝이 올라서서 그 못 보는 어머니를 향하여 이별하는 인사를 고하고자 하던 상현이가 별안간 성큼 내려서며 걸음을 옮겨 이리저리 찾아보니, 한편 층계 밑에 어떤 여자가 거지꼴을 하고 엎디어 그와 같이 축원을 하는지라. 무엇이라고 물어볼 수 없고, 마음에 궁금은 하여 우두커니 서서 관망을 하니, 그 여자가 그같이 축원을 하다가 말을 마치고 공손히 일어나 촉석루 누상으로 서서히 올라가는데, 옷은 비록 더러웠으나 태도는 얌전하고, 얼굴에 비록 때는 올랐으나 전형이 대단히 미묘한데, 그 여자의 얼굴 전형이든지 흡사히 자기 가슴에 맺혀 있는 정애와 같은지라.

가만히 그 동정을 살펴보니 그 여자는 자기를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본체만체하고 조용히 누상으로 올라가 정신없이 섰는 모양이 얼빠진 사람도 같고 실성한 사람도 같고 대단히 이상하게 보이는 고로, 자기도 역시 누상으로 올라가 그 여자의 얼굴 좀 자세히 보려고 옆으로 가까이 간즉, 그 여자는 대면을 아니 하려고 비슬비슬 돌아서는데 그 얼굴이 영락없는 정애인지라. 마음에 놀랍고 반갑고 불쌍하고 궁금한 생각이 가슴에서 죽 끓듯 하나, 곧 진가를 자세히 알 수 없어 시험적으로 한번 물어본다.

"여보시오, 부인은 누구신지? 보아 한즉 무슨 근심이 있는 모양이니, 무슨 걱정이 있어 그리하십니까? 남자가 부인에게 묻기는 황송하나 보기에 정녕히 딱하여 잠깐 묻사오니 말씀하시기를 바라나이다."

그 여자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아무 대답도 아니 하니 상현이는 더욱 궁금하여 다시 물어본다.

"아까 잠깐 듣사오니 부인은 박정애라 하오니 부인의 남편은 김상현이오니까?"

그 여자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는 듯하고 다시 아무 말 없이 돌아섰을 뿐이라.

(상) "여보시오, 부인이 김상현의 부인 박정애시거든 나를 잠깐 보시오."

그 여자는 소불동념이라.

(상) "이런 제 알 수가 있나……. 여보 부인, 내가 김상현이오. 그 대가 박정애거든 나를 좀 돌아보시오."

그 말을 듣더니 머리를 돌려 한번 돌아보다가 아무 말 없이 눈물이 비 오듯 한다. 상현이가 자세히 본즉 의심 없는 정애라. 정애가 그 모양 된 것을 보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여 달려들어 정애의 목을 잡으며,

"여보, 그대가 정녕한 정애로구려. 정애가 이 모양이 웬일이오? 여보, 나 좀 자세히 보. 그대가 나를 모르겠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항상 정애를 못 잊어 하는 김상현이오. 그대가 나를 왜 몰라 보? 나는 부득한 사정으로 그대를 이삼 년 그리었거니와, 그대는 이 모양 된 것이 웬일이오? 나는 결코 그대를 잊어버리지 아니할 줄은 그대도 아는 바인데 이게 웬일이오?"

하며 우는데 그 여자가 음성을 듣고 다시 한 번 물끄러미 보더니 반갑게 달려들어 상현의 옷깃을 잡고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정신을 진정하느라고 머리를 상현의 몸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 여자는 곧 상현의 생각이 일구월심에 맺혀 있는 정애라. 정애가 그 시모에게 쫓겨 친정으로 가서 어느 날이나 좋은 소식이 있을까 하여 날로 기다리고 달로 기다리던 차, 상현이가 멀리 갔다는 말을 듣고 실혼낙담을 하여 실성이 된 후로 아무 정신을 모르나, 항상 입에 그치지 않고 축원하는 바는 김상현이가 무사히 돌아와 남은 인연을 계속하게 해줍소사고 하는 것이니, 이는 김상현이가 가슴에 맺히고 맺혀 있어 잠시를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라. 그 오라비 춘식이 몰래 집을 나온 이후로 얼굴에 때칠을 하여 거지꼴을 하고 사면팔방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 먹고 정신없이 향방 없이 다니는 중에는 어디를 가든지 신당이나 절이나 경치 좋은 누각 같은 것에 다다르면 그와 같이 축원을 하는 고로 그 모양으로 발멈 발멈 간다는 것이 삼 년 만에 진주 촉석루 앞에 이르러 그같이 축원을 하다가, 마침내 오매불망하던 남편을 만난 것인데, 그같이 실성한 사람이 어찌 남편을 알아보리오마는, 당초에 정애가 실성한 원인이 그 남편 상현으로 하여금 그 지경이 된 것인 고로 그 남편의 음성을 듣고 그 남편의 용모를 보매 신경의 감각기가 즉시 회복되어 반가운 생각이 이를 데가 없고 완전한 정신이 차차 돌리는데, 이때는 천지가 번복하는 듯 심신이 혼미하여 운무중에 싸인 듯 어떠한 곡절을 알지 못하고 그 남편의 몸에 의지하여 정신을 진정하는데, 그 사이 그리고 고생하던 설움이 부지중에 눈물이 화하여 자연히 흐르는 것이라. 두 사람이 서로 붙들고 그 모양으로 섰으며, 가슴은 터지는 듯하고 눈물은 앞을 가리어서 아무 정신없이 누가 오는지 가는지 모르는 즈음에, 촉석루 앞 층층계로 천천히 올라오는 사람은 어떤 늙은 부인이라. 그 부인이 누상으로 올라오다가 그 두 사람이 서로 붙들고 우는 양을 보고 한참 여겨보더니 별안간 허둥지둥 달려들며,

"에그, 네가 상현이로구나! 너 그사이 어디를 갔더냐? 고생인들 오죽하였겠느냐? 그러나 이 사람은 누구인데 서로 붙들고 우느냐?"

하고 머리를 안고 울며 목이 매어서 다시는 아무 말도 못하는데, 상현이가 그 부인을 보니 자기 모친인 고로,

"어머니! 어머니께서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소자는 불효막심하여 어머니로 하여금 근심을 시키고 이곳까지 오시게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오며 어머님 앞에서 다시 여쭐 말씀이 없사오나, 이 사람은 정애올시다. 그 못된 년들 까닭으로 우리 가정이 이 모양이 되고 천하에 백백 애매한 정애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되었사오니 어찌 가련치 아니하오니까? 그러나 하늘이 도우사 우리 모자와 부처 서로 만나 보오니, 이는 모두 어머니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은택이올시다."

(부인) "응, 이 사람이 정애냐? 에그, 참혹해라. 정애가 이게 웬일이냐? 이애 정애야, 나는 미련하고 용렬한 너의 시어미 몸이다. 나는 눈뜬 소경이 되어서 지극히 요악한 영자와 봉자의 말을 곧이 듣고 현숙한 며느리 너를 몰라 보았으니 어찌 사람이라 하겠으며, 어찌 이 죄를 받지 않겠느냐? 이 년이 비단 너에게만 죄를 졌을 뿐 아니라 천지신명도 필연 나를 미워할 터이니 내가 어찌 인류라 하겠느냐? 그러나 오늘날 너희 내외를 이곳에서 만나 보는 것은 우리 어진 며느리 정애 너의 음덕으로 안다. 너는 아무쪼록 미거한 시어미의 잘못한 일을 용서하고 어서 네 정신을 차려 네 남편의 마음을 위로하여라."

하며 만단설화를 한다. 그 부인 역시 영자·봉자의 간계가 탄로된 후로 자기의 잘못한 일을 생각하고 그 아들 내외에게 대하여 뉘우친 마음이 이를 것 없어, 미쳐 나간 정애를 찾아 나서서 방향 없이 다니며 정애의 종적을 찾으니, 정애는 실성한 사람이라 큰길이나 도회처로 다니는 일은 별로 없고, 산곡이나 수풀 밑에서 며칠씩 지내는 일이 한 달이면 이십구일은 되니, 그러한 사람을 어디 가서 만나리오. 삼 년 동안에 십삼도 강산을 무른 메주 밟듯 돌아다니다가 천우신조하여 촉석루에서 그 아들과 정애를 일시에 만나매 반갑고 부끄럽고 뉘우친 생각이 이를 것 없어 정애를 붙들고 그와 같이 사과를 하는 것인데, 정애 원래 그 시어머니 눈에서 서로 잊지 못하는 남편과 리언을 하고 심지어 실성이 된 사람이 그 남편을 만나 원정신이 참 돌리자, 또한 그 시어머니를 의외로 만나 사과하는 말을 들으니 자기가 실성이 되어 아무 정신을 모르는 중에도 가슴에 맺히고 맺힌 마음으로 입에 끊이지 않고 축원하던 바가 일시에 여의하게 되었는지라. 이때 정애는 새 정신이 버쩍 나며 그전 정애가 다시 되어 달려들어 그 시모의 치맛자락을 잡고,

"어머님, 소녀는 불효막심하여 어머님과 남편으로 하여금 이 모양이 되도록 하였으니 황송함을 깨닫지 못하겠사오며, 죄가 많은 소녀를 사랑하시와 이같이 위로하시니 소녀는 몸 둘 곳을 알지 못하나이다. 소녀도 차후로는 어머님을 효도로 봉양하옵고 남편을 공경하여 섬기겠사오니, 어머님과 남편께서는 소녀를 불쌍히 여기어 더욱더욱 애호하시와 가정에 화기가 원만하게 되기를 바라나이다."

하며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니 노부인 역시 눈물을 금치 못하는지라. 이때 상현이는 그 노모를 위로하고 병들었던 정애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고자 하여 공손한 말로,

"어머님, 마음을 과히 상하지 마십시오. 일시적 비운으로 이러한 액회를 당하였으나 다시 원만한 가정이 되면 전보다 더 재미있게 지낼 터이올시다……. 여보 정애, 정애 마음이야 어떻다 하겠소마는 그 같은 곤란을 지내고 이제 우리가 서로 만난 이상에야 그리 비창한 생각을 둘 것이 없고, 또한 어머니께서 그같이 말씀을 하시니 아무쪼록 마음을 위로하여 비창한 생각을 먹지 마오."

정애가 그 말에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씻으며,

"감사한 말씀은 이루 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을 이토록 사랑하시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이 어느 곳이며 우리가 어찌하여 이렇게 만났습니까? 저는 정신이 없어 제 몸이 어찌 되어 이곳에를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나는 바는, 제가 친정으로 가서 좋은 소식 오기를 고대하던 차에 남편이 여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정신 잃은 생각밖에 아니 나는데, 어머님은 어떻게 이곳에 오시고 당신은 어떻게 오셨으며, 저는 또 이것이 어디라고 와 있습니까? 제가 아마 그동안 정신병이 들린 듯하외다. 그러나 그 사이가 몇 해나 되고 작은 아씨는 잘 있습니까? 그간에 출가나 하였습니까?"

(노부인) "영자 말이냐? 그년 잘 있지. 경주 감옥서로 시집을 가서 잘― 있지. 너는 그 괴악한 년 생각을 하는구나? 그년이 감옥서에 썩고 내 눈앞에 다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집의 태평한 가정이 이 모양 되고 불쌍한 네가 저렇게 된 생각을 하면 눈에 불이 난다. 그까짓 년이 세상에 살아 무엇 하겠느냐? 그러나 실정 생각하면 이게 모두 내 잘못이다. 수원수구를 하겠느냐마는, 그년은 천지신명에 죄를 지은 년이니까 죄를 받아야 하느니라."

정애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어머니 이게 웬 말씀이오니까?"

하며 당황히 묻는데,

(상현) "아따, 차차 알지, 그리 급할 것 있나. 영자의 잘못한 것은 그대도 짐작하는 바인데 이상할 것도 없고, 죄진 사람은 죄받는 것이 정당한 일인즉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 아니오? 어서 내려가서 요기도 좀 하고 다리도 좀 쉬어서 속히 집으로 돌아갈 도리를 합시다."

이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세 사람이 서로 붙들고 진주 성중으로 내려와 우선 사관을 정하고, 상현의 주머니에 여간 여비 냥 남은 것을 내어 노부인과 정애의 의복을 일신히 준비하여 입히고 서울로 향하여 올라갔더라.

오래간만에 서로 만난 모자와 부처 일행이 경부선 열차로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하니, 그 세 사람의 마음에는 의구한 강산이 자기 일행을 환영하는 듯, 눈앞에 우뚝이 푸른 남산이 반갑고 기쁜 생각을 새로운 듯이 돋우더라. 즉시 인력거를 몰아 청풍계 자기 집으로 돌아오매 비록 주인이라고는 아무도 없고 집은 엉덩하게 비었으나 쓰던 세간은 모두 행랑 하인이 보관하여 잘― 맡아 가지고 있는 터이라. 세 사람이 대문을 들어서 안으로 들어가는데 행랑방으로 급히 뛰어나오며,

"에그! 마님, 그 사이 웬 일이십니까? 에그, 서방님과 아씨도 오시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절 한 번씩 굽실굽실하는 끝에 반가운 마음을 못 이기어 눈물이 뎅겅뎅겅 떨어지며 훌쩍훌쩍 우는 사람은 전일에 친절하게 부리고, 그사이 집을 보관하고 있는 하인 내외라. 노부인과 상현이 내외도 역시 반가워서,

"오냐, 너희들 잘 있더냐? 그 사이 벌이나 잘 하여 걱정 없이 지내느냐?"

하며 물으니 하인 내외는 울며 하는 말이,

"소인네는 집에서 편히 잘 있었습니다마는 마님께서나 서방님 아씨는 그 사이 어디 가셔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러나 소인네는 어찌 된 곡절을 알 수 없사오나, 여러분이 다 각각 집을 떠나신 후에 어찌 되어 이렇게 동행이 되셨습니까? 소인네 좋은 마음은 춤이라도 추겠습니다."

이같이 반가워하며 서방은 일변 바구니를 들고 가게를 나간다, 계집은 일변 장국을 끓인다, 펄펄 뛰고 좋아하는데, 그 두 사람은 진실한 품이 조금도 시속 사람이 아니라. 근일의 완미한 하등 인물 같으면 빈집에 주인들은 어디로 간 줄 모르고 집안에 있는 재산이 전만어치나 좋이 있으니 그것이 모두 제 재물이라 소리치고 모두 팔아먹어도 누가 말 한마디 할 사람 없어, 두 질빵 틈에 목을 넣지 않고도 한 이태 잘 지냈을 것인데,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집에 비록 주인은 없을지라도 주인이 살림할 때보다 더 조심을 하여 티끌 하나 개개지 않고 제 물건보다 더 잘 보호하여 둔 고로, 노부인이 들어가 보니 안방·건넌방·마루·부엌에 놓인 세간이 삼 년 전에 자기가 집 떠날 때나 조금도 다른 것이 없이 모두 놓였던 자리에 놓여 있고, 문갑 속 반닫이 안의 은행 절수와 토지 문권이 두었던 곳에 그대로 있고, 심지어 부정 등속과 부지깽이 하나일지라도 없어진 것이 없는지라, 노부인과 상현 내외가 이 내외는 심히 기특히 여길 뿐 아니라 비상히 정직한 사람인 줄 알아 대단히 고맙게 대접을 하며 무수히 칭찬을 하더라.

상현의 모친은 우선 은행에 저치한 돈을 찾아 살림을 정돈한 후 정애의 애매한 누명도 벗길 겸, 여러 친척 고우를 청하여 크게 경연을 설행코자 하여, 하루는 그 아들과 며느리를 앞에 앉히고 의논하는 말이라.

"우리 가정이 그와 같은 액회를 경과하고 백옥 같은 정애가 그러한 누명을 썼을 뿐 아니라, 저간에 위험한 경위를 지낸 것은 모두 이 늙은 것의 잘못이라. 내 죄를 생각하면 오늘날 이만치 된 것은 오히려 의외 행복인즉, 이는 나의 복이 아니라 모두 너희의 덕이어니와, 내 생각에 이러한 경사는 다시 없으니, 정애의 누명을 벗기고 정렬을 표창할 겸, 또한 우리 가정의 새로운 경사를 축하할 겸 지구간 여러 사람을 청하여 연회를 할 터이니, 너희 마음에는 어떠하냐?"

이때 두 사람의 생각에도 물론 경연을 설행하고 저간에 괴상한 변괴로 가정에 비상한 풍파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여 여러 사람에 해혹을 시키어 옥 같은 정애로 하여금 새 사람을 만들고 싶으나, 그 내외의 심중에 각각 한가지씩 화락치 못한 생각이 항상 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상현은 그 누이 영자가 비록 잘못하기는 하였으나 남매간 사정으로 인하여 가슴속에 불쾌한 마음이 있어 그같이 기쁜 일을 당하여도 좋은 줄 모르는 터이요, 정애는 정신을 한번 잃은 후로 그 오라비를 몰라보고 집을 나와 삼 년을 돌아다니다가, 급기야 자기 소원대로 그 시모 마음이 회개되고 명심불망하던 남편을 만나 고향을 돌아와 보니, 그 서로 우애하던 오라비가 자기로 인하여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갔는지 종적이 묘연한즉, 정애 마음에는 오라비가 그 사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가슴속에 못이 박혀 있는 터이라. 그 두 내외의 마음에는 경연을 배설하고 여러 사람을 초대할 경황이 없어 정애가 먼저 그 시모에게 대답하는 말이,

"어머님 말씀이 대단히 지당하외다. 저희가 오늘날 어머님을 모시고 저 모양으로 의지함은 모두 어머님의 인자하신 덕택이라 어찌 경사로운 연회를 아니하겠습니까마는, 미거한 제 생각에는 아직 연회할 경황이 없습니다. 무엇인고 하면, 잘잘못은 고사하고 작은 아씨가 지금 저 지경으로 있으니, 그것은 이년의 죄로 창창한 전정을 버렸다 하더라도 가하거늘, 오늘날 저만 잘 되었다고 연회를 하는 것이 인정이 아니요, 또는 이년의 애매한 사실을 벗기자고 그 지경에 있는 사람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사람이 차마 할 일이오리까? 그도 그렇거니와 또 한 가지는 어머니께서 이제야 제 오라비가 있는 줄을 아시지마는, 사람이 되어 누가 남매간 우애가 없을 것은 아니나, 저희 남매로 말하면 잠시를 서로 잊지 못하는 남매온데, 그 오라비가 오늘날 이 못된 누이 년으로 말미암아 사생을 알지 못하오니, 비록 출가외인이라 여자가 시집을 가서 시부모와 남편을 섬기는 자리에는 친정 가족은 관계가 없다 하겠으나 제야 어찌 그 오라비 종적을 모르는 터에 경연을 배설할 경황이 있사오리까? 그러하온즉 어머님 인자하신 덕택으로 작은 아씨든지 제 오라비까지라도 머지 아니하여 모두 만날 듯하오니 잠깐 기다려 가정이 원만한 후에 연회를 개설함이 좋을 듯합니다."

(상현) "그 말이 그럴듯한 말이올시다. 저나 정애나 동기간 의리에 경사로운 연회를 하겠습니까? 제 생각에도 정애의 말과 같이 영자나 나오고 춘식이나 들어오거든 여러 친척을 초대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노부인이 상현이 내외의 말을 듣더니 그럴 듯이 여기고,

"오냐, 그도 그렇겠다. 그러면 너의 말대로 하자."

하며 연회를 중지하고 다음날을 기다리는데, 그 소문이 어찌 났던지 각 신문에 정애의 정렬을 극히 찬송하여 세계 안목에 광포하였더라. 그 신문 잡보 본 사람은 정애의 정렬을 아니 칭찬하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진주 재판소에는 임자를 찾아주려고 잘 보관하여 두었던 금지환을 경성 북부경찰서로 보내어 정애에게 내어주게 하고, 경주경찰서장 현국진은 편지로 치하를 하여 기타 친척 고우도 원근 없이 모두 찾아와서 무한히 치하하는데, 상현의 가장 친절한 친구 손경부도 와서 저간에 서로 소식을 모르고 궁금히 지내던 정회를 말하며 가족이 다시 단합된 치하를 하는지라, 상현은 손경부를 만나 그간에 자기 일로 주선하여 준 혜택을 치하한 후, 자기 처남 박춘식의 소식을 각 경찰서로 탐지하여 달라고 부탁을 간절히 하고 일변 각 신문사에 광고를 위탁하니, 그 이튿날 신문 삼면에 대자특서한 광고에 하였으되,

'누구시든지 경성부 마포에 거주하던 박춘식(二八)의 있는 곳을 아시는 이가 계시거든 경성 북부 청풍계 김상현의 집으로 통지하여 주시면 후사하오리다.

박춘식의 매부 김상현, 누이 박정애 고백'이라 하였더라.

사람이 세상에 사는 목적이 비단 밥 먹고 옷 입고 편안히 일평생을 보내는 것으로만 영광이라 할 수 없는 것이라, 어디까지든지 육체와 정신을 활동하여 상당히 사람의 하는 사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사람이 세상에 나온 목적을 달하였다 할지니, 사람의 사업이 무엇이냐 하면, 무론 어떤 사람이든지 아는 바와 같이 벼슬할 사람은 벼슬하고, 공업할 사람은 공업하고, 농사할 사람은 농사하여 자기의 생활방침을 영위하는 동시에, 사람의 직분에는 '인의예지 효제충신' 여덟 자를 잘― 지키는 것이 곧 사람의 영광이라. 김상현이가 당초에 법률을 졸업하고 장차 사업에 활동하려고 변호사 시험 준비를 하다가 가정의 풍파를 인하여 뜻과 같지 못하고 중도폐지하였으나, 원래 재분이 과인한 사람이라 학력은 비상히 우월하여 경성에 유명한 법학가의 명칭을 듣는 터인데, 저간에 이삼 년 동안을 해외로 다니며 제반 풍상을 겪고 돌아와 천행으로 가정이 단합하였으나, 도저히 할 만한 사업이 없어 그 해 일 년을 무료히 지내며 내외 동반하여 공원으로 놀러 다니기에 세월을 보내더니 어진 공장은 촌만한 재목을 버리는 일이 없고, 착한 정부는 좋은 인재를 아니 수용하는 일이 없는 법이라, 총독부 일판이여출일구로 김상현은 가히 법관의 재목이라는 공론이 빙그르 돌며, 하루 관보에는, '임 대구지방재판소 판사서 주임 관사 등 김상현'이라 게재된 지라, 상현은 즉시 수첩하고 장차 대구지방재판소로 도임할 터인데, 봉급도 몇 푼 되지도 못하고 또한 머나먼 지방에 가족을 대동하고 갈 처지는 못 되나 상현의 사정은 차마 정애를 두고 갈 수도 없고, 정애를 데리고 가자니 그 노모 한 분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가산을 모두 하인을 맡기고 행장을 간단히 차려 그 모친과 정애를 데리고 직소에 내려갔더라.

상현이는 본시 인자하고 공정한 사람이라 공무를 집행함에 법률을 공평히 하며 백성을 사랑하매, 영남 일경에 김상현 칭찬하는 송덕이 자자하여 사람 사람 입으로 비를 세우는데, 하루는 어떤 계집이 소장을 제출하고 이혼하여 달라 하는지라. 그 계집을 불러들여 조사하여 보니, 얼굴은 절묘하고 나이는 열아홉인데, 똑똑한 품이 지각도 대강 났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심지가 요양미정하여 남의 꾀임을 잘 들을 만하고, 그 신분은 본래 대구 기생으로 그곳 어떤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어 이삼 년 동거하던 터이며, 이혼하여 달라는 이유는 별로 중대한 관계가 없고 다만 사내가 술을 먹고 주정을 잘 하니 살 수 없다는 이유에 지나지 못하는지라. 그 사내 되는 사람을 불러 물어본즉 계집의 말과 같지 아니하여 자기는 술 먹을 줄도 모를 뿐더러 동거 삼 년에 정의가 비상히 친밀하고 싸움 한 번 하여 본 일이 없는데 졸지에 이혼소송을 제출함은 실로 뜻밖이라 하여, 자기는 죽어도 그 계집을 보내고는 일시를 못 살겠다 하는데, 계집은 한사코 이혼하여 달라 억지를 쓰는지라. 그 두 사람의 동정을 가만히 본즉 계집은 어떤 놈의 꾀임을 듣고 그리 하는 것이 분명하고, 사나이는 그 계집과 정이 들어 계집은 비록 배반하는 뜻을 두나 차마 버리고는 못 견딜 모양이라. 상현이가 생각하여 보니 이런 것을 오결하여 계집의 뜻대로 이혼을 시킬 것 같으면 이같이 문란한 풍기가 점점 심하여 나중에는 그 폐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알지 못할 것이라. 그 계집을 대하여 설유하기를, 남녀가 한번 내외 된 이상에 큰 허물이 있기 전에는 경솔히 이혼하지 못하는 말과, 내외의 의리가 중한 설명을 알아듣도록 간명히 한 후에, 다시 엄중한 언사로 '네가 만일 무단히 이혼코자 할진대 배부하는 형벌을 당할 터이니 네가 징역하고라도 서방을 버릴 터이냐?'고 대단히 을러서 내어 보낸 일이 있었더라.

세월이 어찌 쉬운지 시계 초침이 째깍째깍하는 그 째깍 소리가 무궁무진히 쉬지 않고 나는 동시에, 일 분 이 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달아나는 하루 이틀이 희끗희끗 지나가서 한 달 두 달이 말 달리듯 하더니, 상현이가 서울서 떠날 때에 울긋불긋하던 단풍 잎새는 소슬한 가을바람에 날아가고, 너푼너푼하는 백설은 강산을 장식하여 흡사 한 은세계를 만들더니, 하룻밤 동풍에 언 나뭇가지가 풀리고 온화한 일기가 점점 화창하여 이곳저곳 새소리는 새봄을 맞아 노래하고 푸른 풀, 붉은 꽃은 금수강산을 이루었는지라, 상현이 내외는 춘회를 못 이기어 일요일을 기다리다가 하루는 내외 동반하여 야외로 산보를 나갔는데, 동문 군산 모퉁이를 지나가니 어떤 젊은 여자 두 사람의 거지꼴을 보고 심중에 자상한 마음이 감발하여 그 남편에게 말하기를,

"에그, 참혹도 하오. 사람 되기는 일반이어늘 저 여자들은 어찌하여 저 모양을 하고 밖에를 나왔을까요? 모양을 보니 남 보기가 대단히 부끄러워서 외면을 하는구려. 그 외면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여 그리하겠소!"

(상현) "글쎄, 대단히 참혹하구려. 그러나 사람이란 것은 빈궁현달이 모두 제게 달렸습니다. 혹시 비색한 운수를 당하여 횡액에 곤란을 겪는 일이 있지마는 대개 하늘 이치는 사람이 악한 일을 행하면 곤궁을 면치 못하는 법이외다. 저 사람들은 어찌하여 저러한 비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으나 대략은 제가 잘못하여 빈궁을 면치 못합니다."

(정애) "그렇기는 그렇지요마는, 저 사람들을 보니까 불쌍한 마음이 나는구려. 우리 저 사람들을 불러서 구조를 좀 하여 줍시다."

(상현) "아니, 그럴 것 없어.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구조를 하여 준단 말이오?"

이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종일토록 잘 놀고 돌아왔는데 그 거지꼴을 하고 지나가던 여자 두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요, 정애를 모함하던 상현의 누이 영자와 봉자라, 그 두 여자가 경주 감옥소에서 삼 개년 복역을 마치고 옥문 밖을 나와서 서울로 향하여 가는 길에 수중에 노비는 한 푼 없고 의복은 남루하여 하릴없이 거지꼴을 면치 못할 뿐 아니라, 천 리나 되는 길에 빌어 먹으며 오는 것이 달장간 만에 대구에 도착한 것이라. 그 두 사람은 상현이 내외를 알아보고 심중에 부끄러운 생각이 났던지 그와 같이 외면을 하고 가는 것이더라.

영자와 봉자가 감옥에 있을 때는 보리밥이라도 주는 대로 얻어 먹고 지냈지마는, 급기야 해방이 되는 날부터 전전걸식을 하노라니 그 곤란이 이루 말할 수 없어 서울까지 갈 일이 망연할뿐더러, 면목을 들고 서울 천지에 발을 들여놓을 수 과연 없는지라,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무한히 공론을 하던 끝에, 봉자가 서울서 학교에 다닐 적에 대구 여자로 서울 와서 유학하던 동창 학생 서숙자의 집이 대구 시중에 있는 생각이 문득 나서 영자와 의논하고 서숙자의 집을 찾아가니, 그 서숙자는 봉자와 한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날 졸업을 하고 서로 헤어진 후로 경향이 낙락하여 서로 소식을 몰라 봉자가 징역을 하였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전연 부지하는 터이라, 봉자가 그 꼴을 하고 별안간 찾아가매 어찌 된 까닭을 모르고 깜짝 놀라 어쩐 연고를 물은대, 봉자는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구호하여 주기를 간청하니, 서숙자는 보기에 심히 측은할 뿐 아니라, 전일에 한 학교에서 공부하던 정리를 생각하고 우선 두 사람의 의복을 일신히 새로 하여 입히고 거처 음식을 융숭하게 관대를 하는지라, 그 집에서 며칠간 유숙하는데 두 사람의 생각에, 남의 집에서 일없이 여러 날 유식하기 무료하고 어디로 갈 데 없어 지극히 민망하던 차, 하루는 두 사람이 동행하여 서중에 산보를 하다가 한곳 이층집 문 앞에 광고판이 걸렸는데, '간호부 견습생 이인 신모집'이라 쓰고, 그 옆에 주의서를 열서하였는데, '본원에서 간호부 견습생을 모집하오니 지원자는 금일 십오 일 이내로 본원에 지원서를 제출하시오. 단 이십오 세 미만의 여자에 한하고 고등학교 졸업생 정도로 입용하겠음.'

하였는데, 그 집 간판을 살펴보니 '동아의원'이라 하였는지라, 봉자는 영자를 돌아보며,

"이애, 여기가 병원이로구나."

(영) "아마 그런가 보다."

(봉) "그런데 저 광고판 좀 보아라."

(영) "나도 보았다. 너 견습할 의향이 있어 그리하니?"

(봉) "이애,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서울을 가겠느냐? 모진 목숨이 죽을 수는 없고, 남의 신세를 장구히 지잔 말도 못하고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인즉, 우리 자격이 이것을 능히 당할 터이니, 이거나 공부하여 가지고 몇 해든지 세상에 있을 동안 남에게 자선이나 하여 이왕 죄악을 벗어보자."

(영) "그도 좋은 말이다마는 우리 학력은 겁날 것 없으나 신분이 불미한 일이 있으니 될 수 있느냐?"

(봉) "그것이야 우리 변명하고 신분을 속이면 고만이지."

이같이 서로 의논을 하고 기류하는 집으로 돌아가 주인 숙자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두 사람의 이름을 고치되 영자는 영희로, 봉자는 봉희로 개명하여 청원서를 쓰고 신분을 속여 이력서를 써서 첨부하여 동아의원에 제출하였더니, 그 의원 주인 이은생이라는 의사가 사무실로 불러들여 학문도 시험하여 보고 이력도 자세히 물어본 후, 매우 가합하게 여기고 곧 수용하는지라, 두 사람은 대단히 다행하게 생각하고 그날부터 병원에 들어가 기숙까지 하며 간호부 견습을 하는데, 심기가 그같이 불량하던 사람들이 그 사이 세상이 어떠한지 대강 알고 죄지으면 법률에 저촉되는 줄도 알았으며, 사람이란 것은 어디까지든지 천품지성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로 깨달아 훌륭한 어진 사람이 되어 실로 전일의 영자와 봉자가 아니요, 지금은 어질고 착한 영희 봉희가 되어 그 주인도 대단히 신임을 하고 무슨 일이든지 서로 의논하여 어디까지 친밀하게 되었더라.

때는 한밤중 열시 이십 분쯤 되어 순사의 군도 소리가 제걱제걱, 사람의 자취는 후당퉁탕 대구 성중이 별안간 물 끓듯 하더니 동아병원에 웬 병인 하나가 입원하는데, 그 병인은 별 병이 아니라 남에게 불의의 해를 당하여 중상을 피한 병인이라. 순사가 호위하고 와서 의사를 청하여 응급수술로 신속히 치료하라 부탁하는지라, 의사는 급히 병실로 인도하고 우선 진찰을 하여 보니 왼편 어깨에 칼 맞은 흔적이 있으니 생명은 아무 관계 없고, 혈관이 상하여 혈액이 많이 나왔으므로 정신이 혼미하여 인사를 알지 못하는 것인데, 의사는 무슨 까닭인지 기가 막히게 수선을 떨며 암만 하여도 생명이 위태하다고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간호부 견습하는 영희와 봉희를 밀실로 부르더니 수군수군 무슨 수작을 하는데, 영자 봉자는 구호하러 들어간 모양으로 그 병자 수용한 처소에 들어가더니, 그 두 사람의 얼굴빛이 흙빛이 되어 나오며 남이 들을까 알까 쏘살쏘살 하는 말이,

(영) "이애, 이게 웬일이냐? 우리 오라버니가 어찌하여 이곳에서 저 지경을 당하였느냐? 저를 어찌하면 좋을지 도리가 없구나."

(봉) "이애, 우리가 대구에 처음 올 때 동문 밖에서 너의 오라버니 같은 이를 만나보고 외면하던 일이 없느냐? 내 생각에는 그이가 이 지방으로 잠시 볼일 보러 온 줄 알았더니, 이때까지 이곳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러나 의사는 무슨 까닭으로 그런 주의를 먹는지 모르겠구나. 네야 동기간이니 더할 말 없거니와, 나도 정애에 대하여 그같이 못할 일을 하고 너까지 그 지경을 만들었다마는, 오늘날은 후회막급하여 내가 왜 그런 마음을 먹었던고 하는 터인데, 지금 의사의 말을 복종해서야 어찌 사람이라 하겠느냐? 그런즉 우리 이렇게 하자."

하더니 무슨 공론을 한동안 하더라.

김상현이가 불의에 그 지경을 당한 것은 동아의원 주인 의사의 소위라.

원래 의사 자격은 비단 의학만 한숙할 뿐 아니요, 심지어 지극히 인자하여 태도가 지극히 침묵하여 도학 있는 군자지경에 가까워야 가히 의사라 하겠거늘, 그 의사는 명색만 의사이지 의술도 변변치 못할뿐더러, 심지가 패악하고 행동이 불량하며 사치를 능란히 하고 색계만 유의하는 자이라. 그런고로 간호부를 두어도 자기와 같은 하이칼라만 선택하여 쓰는 터인 고로 영희와 봉희가 입용된 것이라. 그런데 그 의사가 대구 성내에 있는 젊은 여자는 모두 주름을 잡는 터이라, 기생들은 물론이요 기외에 여염집 유부녀라도 눈에 들기만 하면 무슨 수단을 부리든지 자기의 사랑하는 물건을 만들고 마는데, 그중 한 여자와 서로 깊은 정이 들어서, 한 사람이 죽으면 따라 죽을 만치 되었으나, 다만 거리끼는 바는 그 여자의 서방이 눈이 둥그렇게 살아 있어 마음대로 재미있게 행할 수 없는 것이라. 그러므로 그 여자를 꾀어 재판소에 이혼 청원을 하였더니, 정직하고 강명한 판사 김상현이가 엄중히 설유하며 축출한 후 다시는 어찌할 도리 없어 영구히 절망이 되었으므로 김상현에게 혐의를 품고 어찌하면 저놈을 요정 낼꼬 하는 악심을 품었다가, 하루는 심복을 보내어 김상현을 암야에 자살코자 한 것이라. 마침내 수의치 못 하고 그와 같이 중상을 한 것이라. 경찰서에서는 상현의 집 경보를 듣고 급히 출장하여 범인을 수색하나 종적이 없으므로 체포치 못하고 그 내용이 동아 의원의 소위인 줄은 알지 못하여 급히 가까운 병원으로 치료하러 보낸다는 것이 그 의원으로 보낸 것인데, 그 의사는 상현이가 입원하는 것을 보고 겁이 어찌 나던지 전신이 떨리며 아무 정신없는 중에도 악한 마음은 사라지지 아니하여, 생명이 위태하지 않은 상현이를 순사에게 대하여는 대단히 위험하여 능히 구하기 어렵다고 말하고, 일변 영희 봉희를 내용하여 극제를 쓰게 하였는데, 영희와 봉희는 그 중상자가 김상현인 줄 알고 무수히 공론한 후 병실로 다시 들어가 방금 먹이려고 하던 극제를 쏟아버리고 의사 몰래 우선 흥분제 주사를 한다, 상처에 창상약을 바르고 붕대로 동인다, 응급 수술을 의사보다 낫게 하니 상현이가 얼마 만에 정신을 차리는지라. 이때 영자는 병실을 수직하고, 봉자는 급히 경찰서로 가서 의사가 중상을 피한 김상현에게 무슨 이유인지 극제를 복용하라고 하던 말을 고발하니, 범인을 포박코자 고심 중이던 경찰서에서는 그 말 듣기가 무섭게 포박령을 놓아 당장에 의사를 잡아다가 취조하매 의사는 관청에서 기정할 수가 없어 어떤 여자와 정이 깊어 이혼 청원을 제출하던 말로, 판사에게 감정이 나서 자객 보낸 말을 자백하고, 행흉하던 놈은 나의 심복 김돌이라고 제공한지라. 경관은 즉시 각처로 비상선을 늘이고 김돌이를 포박하기에 전력하더라.

그렁성 하노라니 그날 밤은 거진 다 밝았는데 이때 상현의 모친과 정애는 졸지에 불의지변을 당하여 어찌 걱정을 하였던지, 고부가 정신을 잃고 혼도하였다가 어느 때나 되었던지 정신을 차려 본즉 상현이는 동아의원으로 입원하였는지라, 고부가 교군을 타고 급히 동아의원으로 간즉, 꿈에도 생각지 못한 영자와 봉자가 내달아서 영자는 자기 모친을 붙들고 울고, 봉자는 정애의 손목을 잡고 울며 이왕에 잘못한 일을 무수히 사과하고, 저희가 이제는 사람이 되어 이곳에서 간호부 노릇을 하노라고 하며, 가정이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것과 상현이가 어찌하여 그 지경 당한 것을 묻는지라. 부인과 정애는 상현이가 판사에 관직되고 대구에 온 말과, 이유 없이 불의에 봉변한 일을 대강 말한 후 우선 상현의 소식을 물으니, 영자와 봉자가 고부를 병실로 인도하여 상현의 무사함을 보이고, 그곳에서 서로 축하를 하며 차후로 이왕 지낸 일은 모두 잊어버리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서약하였더라.

그 이튿날 경찰서에서 상현을 집에 돌아가 치료하게 하고 순사를 파송하여 호위하게 하였는데, 정애는 영자와 봉자를 데리고 가서 전일의 혐의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정의가 친밀하게 하는 것은, 정애의 천성이 원래 인자하여 그것을 혐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남편이 영자와 봉자의 손에 재생지인이 된 것을 감사히 여김이라.

하루는 경찰서에 혐의자 하나가 잡혔는데 그 혐의자는 한 걸객이라. 경찰서에서는 각처에 비상선을 늘이고 범인을 포박코자 하는 판에, 어떤 보행 객주 집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모여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김상현의 이야기가 나서 지방재판소 판사 김상현이는 모야무지간에 칼을 맞았다는 둥, 그 노모와 부인 정애는 봉변할 당시에 기절을 하였다는 둥, 그 범인은 동아 의원 의사인데 그 의원에 간호부로 있는 영희와 봉희는 김상현의 은인인 고로 범인이 주인 의사인 줄 발각하여 곧 경찰서에 고발하였다는 둥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좌석에 있는 여러 사람 중에 지나가는 객 하나가 그 말을 여겨 듣고 이 말 저 말 물으며 행색이 심히 수상한지라. 이때 평복한 형사 순사들이 각 객주와 여객으로 돌아다니며 수상한 사람을 탐지하는 차에 그런 이상한 눈치를 알았으니 어찌 한번 취조 아니할 리 있으리오. 이중에 섞여 앉았던 평복 순사가 그 사람을 불러내어 조사하여 본즉 그 사람은 점점 수상한 말로 김상현이가 우리 매부가 되는데 그 판사가 우리 매부가 아닌지 모르겠다는 둥, 간호부는 범인이 의사인지 어찌 알았는지 모르겠다는 둥 하는 말을 하는 고로, 순사는 의심이 버썩 나서 마침내 경찰서에까지 데리고 갔더라.

경찰서 사법계에서 그 혐의자 취조를 하는데,

(경관) "네 성이 이가이지?"

(그 사람) "아니올시다. 박가올시다."

(경) "그러면 이름은 무엇이냐?"

(박) "춘식이올시다."

(경) "집은 어디이고?"

(박) "제 집은 서울 삼개올시다."

(경) "네 이곳에 온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

(박) "이곳에 온 지 사흘 되었습니다."

경관이 눈을 딱 걷어붙이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이놈! 네 말이 모두 거짓말이야! 바른대로 말해!"

(박) "제가 무슨 죄가 있어 경관이 불러 물어보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는, 경관께 기망을 할 까닭이 있습니까?"

(경) "너 이놈, 기망을 아니한다니 네 성명은 이돌이요, 이곳에 와 있은지 오랬는데, 횡설수설 딴소리를 하면서 기망을 아니한다고 해?"

(박)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성명은 박춘식이오. 제가 이곳에 오기를 그저께 밤에 와서 보행 객주에 이틀 밤을 잤습니다."

(경) "너 어디로 해서 그저께 밤에 대구에 왔느냐?"

(박) "제가 대구에 도착하던 전전날은 청도 읍내 김이방 집에서 자고, 그 이튿날은 무인지경에서 해가 저물어 산속에서 노숙을 하고, 그저께 대구에도 착하였습니다."

(경) "네 집에서 떠난 지는 며칠이나 되었느냐?"

(박) "삼 년이올시다."

(경) "너 대구에 오기를 무슨 일로 왔느냐?"

(박) "일은 아무 일 없고 구경차로 돌아다니는 길이올시다."

(경) "구경차라니? 유산객이란 말이냐? 너― 직업은 무엇이니?"

(박) "이렇게 다니는 놈이 직업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경) "전에는 무슨 영업을 했어?"

(박) "생선 장수 했습니다."

(경) "대구에 오던 날 밤에 동아의원 주인과 이야기한 일 있지?"

(박) "그런 일 없습니다. 동아의원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경) "너― 그러면 김상현이 아느냐?"

(박) "어떤 김상현이 말씀이오니까?"

(경) "대구지방재판소 판사 말이야."

(박) "글쎄, 판사에 김상현이는 누구인지? 제 매부에 김상현이가 있는데, 그이가 제 매부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경) "네 매부 김상현이는 어디 사는 사람이냐?"

(박) "본시는 서울 청풍계 살았지요마는 지금은 어디 사는지요?"

(경) "네 누이 이름은 무엇인데?"

(박) "정애야요."

(경) "그러면 네 매부가 판사를 하는지 어디 사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박) "삼 년을 이같이 돌아다녔으니, 그간 어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경) "삼 년 동안을 무슨 일로 어디 어디 다녔어?"

(박) "아까 말씀과 같이 일은 아무 일 없이 돌아다녔사온데, 제가 당초에 집을 떠난 사실은 다름 아니라……."

하더니 김상현이가 매부 되던 말로부터 정애는 이혼당하고 상현이는 외국으로 여행을 하였는데, 정애가 그 남편을 생각하고 실성을 하여 종적 없이 나간 고로 동기간 정의에 아니 찾을 길 없어 정애를 찾아 나온 길인데, 종시 정애는 만나 보지 못하고 정처 없이 다니다가 이곳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소소히 이야기하니, 경관은 그 말이 대단히 이상하여 그 진가를 알고자 하여 순사를 김상현의 관사로 보내어 정애에게 물어보라 하였는데, 순사는 정애를 찾아보고 '부인의 오라버니가 있으며, 성명은 무엇이고 집은 어디냐?'고 자세히 물어보는 말에, 정애는 무슨 일로 그같이 묻는지 몰라서 순사에게 이유를 물으매, 순사는 혐의자로 체포된 말과 그 혐의자는 성명이 박춘식이라 하며, 정애 부인의 남형이라 하기로 그 진위를 알고자 조사한다고 대답한지라.

정애는 그 오라버니를 보지 못하여 일구월심에 무한한 한을 품고 있는 터이라, 순사의 말을 들으매 정신이 버썩 나서 그 사람과 대면을 시켜주면 그 진위를 알겠노라 하니, 순사는 그럴 듯 여기고 정애를 대동하여 경찰서에 가서 경관에게 정애가 그 혐의자와 면회를 청구하는 사유를 고하매, 경관은 정애를 불러들여 그 혐의자와 대면을 시키고,

"부인이 저 사람을 아시오?"

물어보는데, 정애와 그 혐의자는 서로 물끄러미 보더니 정애는, "에그, 오라버니!" 그 혐의자는, "네가 정애로구나!" 하며 와락 달려들어 서로 붙들고 낙루를 한다. 그 혐의자로 잡혀 온 사람은 정녕한 정애의 오라버니 박춘식이라. 그 박춘식이가 정애를 찾아 나서서 사면팔방 돌아다니나 정애는 꿈에도 보지 못하고, 항상 눈물을 흘리며 방향 없이 발길 가는 대로 다니다가 우연히 대구에 와서 보행 객주 집에서 유숙하는데, 동리 사람들이 모여 앉아 김상현의 조난한 이야기를 듣고 귀가 번쩍 띄어서 이 말 저 말 묻다가 마침내 형사에게 혐의자로 체포된 것이라. 아무 죄 없이 잡혀가서 취조를 당할 때에는 마음이 대단히 원통하고 허무하여 이런 횡액이 있나 싶더니, 전화위복이라고 천만의외에 가슴이 아프던 정애를 만나매, 반가운 마음이 극도에 달하여 아무 할 말이 없어 붙들고 울기만 하는 것인데, 경관이 그제야 박춘식은 정애의 남형인 줄 확실히 알고 울음을 만류하고 남매가 신기히 만난 것을 무한 치하하여 곧 내어 보내는지라, 정애는 희불자승하여 그 오라버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더라.

정애는 그 오라버니를 만나 그간 경과한 정회를 서로 이야기하며 관사로 돌아가 그 남편과 시모에게 사유를 고하니, 이때 김상현의 상처가 완전히 치료되어 기력이 전과 같고 동작에 불편한 것이 없이 완인이 된 지라, 요행히 박춘식을 만나매 반가운 마음은 더할 데 없으나 일변 부끄러운 생각이 있어 얼굴에 홍조를 띠고 그간 지낸 역사를 자기도 말하고 묻기도 하다가 내당으로 불러들여 모친과 영자에게 통내외를 시키니, 그 노부인과 영자는 저간에 잘못된 일을 무수히 사과하고 차후로는 가정이 원만하게 지내겠다는 서약을 하다시피 하니, 춘식이도 왕사는 어찌 되었든지 풍비박산하였던 가정이 천행으로 원만히 다시 만나 전일 형편을 새로 이룬 것을 대단히 다행하게 여겨 사람에게 행복을 축하하고, 그 후부터는 친자질 친형제 같이 지내는데, 오래지 아니하여 김상현은 관직이 승차 되어 경성복심법원 판사로 천전되매 즉시 가족을 대동하고 서울 본제로 왔더니, 김상현의 지구와 친척은 김상현이가 비운에 빠졌던 가정이 원만하게 되고 위험한 액운을 무사히 지낸 것과, 또한 관직이 승차되어 서울로 천전한 축하를 하기 위하여 남산공원에 축하연을 배설하고 김상현의 가정 일동을 청한지라. 상현의 가정은 연회에 참례하여 감사한 뜻을 답례하고 서로 술을 권하며 정다운 회포를 진술하여 융융한 화기가 공원에 가득한 즈음에, 경관의 복장으로 엄연히 연회석에 들어오는 두 사람은 경주경찰서장으로 있던 현경시와 북부경찰서에 근무하는 손경부라. 현경시는 이때 마침 경시로 승임이 되어 서울로 올라왔더니, 어떤 친구에게 김상현이 축하회 한단 말을 듣고 자기도 축하하기 위하여 손경부를 작반하여 온 것이라. 좌중이 서로 마주 인사를 마치고 식당에 인도하여 무한히 오락하는 끝에 좌중의 여러 사람은 권고로 봉자를 김상현의 부실로 정하고, 또한 소개로 영자는 현경시의 부실로 매탁하여 당석에서 상우례까지 거행하였다더라.


안의 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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