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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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한 알인데[편집]

1[편집]

영심은 이층 자기방으로 올라와서 전등을 켰다. 드넓은 방에 책상 하나가 당그라니 놓였을 뿐, 여자다운 장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몸과 마음이 다 극도로 피로하여 영심은 책상앞에 털썩 주저앉아 허 정욱의 편지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전략)……얼마 안 있어서 영심씨의 운명이 최후적으로 결정되려는 이때, 내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다소 점잖지 못한데가 없지는 않으나 자기 자신의 감정을 속여서까지 유민호군과 결혼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 합니다. 오선생님 일가에 대한 유 군의 적지 않은 경제적 원조를 내가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낱 보은(報恩)의 방도로서 결혼을 승낙한다는 것은 이미 낡은 도덕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오선생님의 결백한 인격으로서 생각할 때 유군과의 결혼을 영심씨에게 강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니 이는 오로지 영심씨 자신이 택한 불행한 인생의 길일 수밖에 없읍니다. 진정으로 영심씨가 유군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결혼을 승낙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최후적이나마 허정욱이가 이런 부질없는 글월조차 쓸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불행을 뻔히 예측하면서 그 불행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는 영심씨의 심정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읍니다.

나는 영심씨의 결혼 생활이 반드시 불행해질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잘못하면 사심(私心)에서 나온 말이라고 오해를 받을는지 모르나 허식(虛飾)을 모르는 한 사람의 군인정신을 가지고 나는 지금 솔직하게 그것을 단언해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지닌 성실과 순정의 가치를 소중히 할 줄 아는 영심씨가 유군의 호화로운 사회적 지위에 유혹을 받았다고도 생각할 수 없는 나이이기에 이 결혼은 반드시 불행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내가 존경하는 오선생님 일가의 경사인 만큼 만사를 제지하고 결혼식에는 참석을 하겠읍니다만 최후로 한 가지 영심씨의 낡은 기완을 새롭히게 하고 싶습니다.

「통바리바위 위의 한알의 사과」는 오늘의 오영심의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후략)…

영심은 편지를 집어 다시 봉투에 쓰러넣으면서 허정욱의 무게를 가진 정열을 생각했다.

그렇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영심 자신이 초래한 불행이기에 그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불행 가운데서 영심은 도리어 한 줄기 행복 같은 것을 느끼려 했고 또한 그것을 때때로 느끼기도 하였다.

『어느 별 밑에 그는 지금 살고 있을까?』

약혼자 유민호의 호화로운 자가용 속에서 아까 캄캄한 창경원 문앞을 지났을 때, 후딱 느꼈던 그 조그만 행복감을 인생의 귀중한 무슨 보물인양 마음 속 한 구석에 모시면서 현실의 불행을 초극(超克)해 나가려는 영심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영심이었기 때문에 유민호보다는 좀더 인간적인 애정 같은 것을 느낌 수 있는 허정욱의 열렬한 구혼을 물리치고 단지 형식상의 결혼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길을 영심은 일부터 택했다.

그것은 일견 모순된 사고방법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영심은 진정으로 그것을 원했다.

허정욱과의 성실한 결혼 생활에서 창경원 연못가를 때때로 회상한다는 것은 남편된 사람의 애정이 성실하면 성실할수록 도리어 그 성실을 모독하는 죄인이 영심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라리 성실면에서 그 부담이 훨씬 적어도 무방한 유민호와의 결혼 생활을 영심은 원한 것 뿐이었다.

『퉁바리바위 위의 한 알의 사과!』

그것은 유민호와 허정욱의 인간을 저울질하는 하나의 지극이 낡은 기억이었다.

2[편집]

오진국씨가 봉직하고 있던 중학교 바로 뒷 산 밑에 바위가 한 개 박혀 있었다. 산을 깎아내어 운동장을 만들다가 남겨 놓은 바위였다. 뒷쪽은 아직 언덕에 파묻혀 있었으나 그 모양이 흡사 퉁바리(주발)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퉁바리바위라고 불렀다. 둥그런 밑통이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가 늘어지다가 맨꼭대기에서 주발 밑창처럼 좁다란 면적을 가지고 평평해진 바위였다.

점심 시간이나 방과후 같은 때, 학생들이 곧잘 이 바위에 기어 올라가 본다. 그러나 손 하나 붙잡을 수 없는 미끄러운 바위라, 절반 길이도 못 올라가서는 모두 다 툭툭 미끄러져 내렸다.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는데 성공하는 학생은 열이면 한 둘밖에 없었다.체조 시간 같은 때, 일본인 배속장교는 군사 훈련에 마참한 바위라고 하여 학생들은 뒷뜰로 몰고 와서는 기어코 올라가 보라고 했다. 그러나 오 십 명한 반에 잘해야 열 명 이상 했고 유민호 소년은 열 번이면 한 두 번 밖에 못 올라갔다.

그것은 어느 초가을 일요일이었다. 한문 교사 오진국씨가 아홉살 먹은 영 심의 손목을 잡고 학교 뒷뜰을 거닐고 있었다. 바위밑 양지 쪽에 한 무더기 소년들이 놀고있다가 오진국씨에게 절들을 했다. 그 소년들 틈에 허정욱과 유민호도 섞여 있었다.

『영심아, 너 뭘 먹니?』

유민호 소년이 알면서도 물었다.

『사과 ──』

『너만 먹니? 나도 하나 주렴.』

『하나밖에 없는데……』

먹던 것은 줄 수가 없고 아버지에게 잡힌 손에 사과는 한 알 밖에 없다.

그러는데 다른 소년들도 영심이가 귀여워서 나도 나도, 하고 손을 벌렸다.

『아이구 아버지 어떻거나?……』

영심은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음, 영심이가 야단났군!』

그러다가 오진국씨는 문득 생각이 난듯이 미소를 지으며,

『옳지, 좋은 수가 하나 있다!』

그리고는 영심이더러,

『너 그 사과를 가지고 뒤로 돌아가서 저 바위 꼭대기에 놔두고 오너라.

누구가 먼저 내려다 먹나 보자.』

그랬더니 소년들은 좋다고 손벽을 치며 떠들어 댔다.

영심이도 재미가 나서 언덕으로 바르르 뛰어 올라갔다. 한 쪽이 높은 언덕에 파묻힌 바위다. 영심은 쉽사리 바위 위에다 빨갛게 익은 사과 한 알을 당그라니 놓아두고 내려왔다.

소년은 신이나서 영심이가 채 내려오기도 전에 퉁바리바위를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먼저 올라가면 안된다. 다들 이리와서 일렬로 쭉 서라. 인제 영심이 가 하나, 둘, 셋 ── 하고 신호를 할테니, 누가 먼저 사과를 내려다 먹나 보자. 손가락 끝이 사과 알에 먼저 가 닿는 사람이 먹기다. 물론 뒤로 올라가서는 안되구……알겠나?』

『예 ──』『예 ──』

소년들은 제가끔 신나는 대답을 했다.

3[편집]

여남은 명은 실히 되는 소년들이 오진국 선생앞에 일렬로 나란히 섰다. 그중에는 영심이 또래의 조무래기도 한둘 섞여 있었다.

『하나……둘……셋!』

영심의 귀여운 목소리가 신호를 했다.

『와 ──』

하고 소년들은 바위 밑으로 뛰어갔다.

오선생은 대단히 유쾌하였다.

십 여 명의 소년들이 퉁바리바위를 열심히 기어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소학생 두 놈을 내놓고는 모두가 십 오륙 세의 소년들이었다.

뭐라고들 제가끔 소리 소리를 치면서, 손바닥에 침을 퉤퉤 바르는 놈도 있고 거치장스런 신발짝을 벗어 던지는 놈도 있다.

영심은 기가 막히게 재미가 난다. 발을 둥둥 구르며,

『민호가 이긴다! 정욱이가 이긴다!』

그밖에도 자기가 아는 이름을 죄다 영심은 불렀다. 집이 바로 학교 근처라, 아는 얼굴이 영심에게는 많다.

그러나 영심은 그중에서 민호가 이기기를 바랬다. 민호는 상냥스럽기도 하지만 자기 반에서도 수재라는 말을 듣는 최우등생이다. 집이 가난하다는 조건도 영심의 동정을 사는 원인이 되어 있었다.

정욱이도 공부는 못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무뚝뚝해서 민호만은 못했다. 그대신 정욱이가 축구 선수로 뽑혀나가서 뽈을 찰 때는 정욱이 편이민호보다 좋아지는 어린 영심이었다.

그때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하던 영심이가 오뚝 동작을 멈추었다. 정욱이가 맨 선봉을 서서 절반 이상이나 올라갔는데 민호가 쭈욱 미끄러져 떨어졌다.

벌써 세 번이나 미끄러진 민호였다. 그럴 적마다 떨어지지 않을려고 옆의 아이의 어깨도 짚어보고 다리도 잡아 보았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민호는 다시는 기어 올라갈 생각을 않고, 우두커니 서서 바위 꼭대기의 사과 알만 골돌히 쳐다보고 섰지 않는가.

『민호야, 빨리 올라가!』

그러는데 민호가 후딱 허리를 굽히며 발뿌리 앞에서 돌을 두 개 집어 들자 사과를 겨누고 힘껏 내던졌다. 그러나 사과는 맞지 않았다.『아, 그건 못써!』

오선생이 소리를 쳤으나 민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또 한 개를 던졌다.

이번에는 사과 보다 한 자나 위를 날았다. 민호는 돌 던지기를 단념하고 옆에 선 소학생의 손에서 고무총을 휙 빼앗아 들고 조약돌 두 개를 또 집었다.

『그건 안된다!』

그러나 둘째 번는 조약돌이 마침내 사과에 명중을 했다. 사과는 대구르르 굴러서 저편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민호는 뛰어가 사과를 집어서 흙도 문질 사이가 없이 덮썩 한 입에 깨물면서,

『만세. 만세!』

하고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때는 이미 정욱 소년은 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건 위법이다!』

꼭대기에서 정욱이가 소리를 쳤다.

『무어가 위법이야?』

아래서 민호도 소리쳤다.

『고무총으로 쏘는 법이 어디 있어?』

『쏘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어?』

『기어올라 와서 내려다 먹으랬지 쏘아 먹으랬어?』

『언제 그런 말 했어? 누구든지 먼저 내려다 먹으면 된다구……뒤로만 올라가지 않으면 된다구……손가락 끝이 먼저 가 닿는 사람이 먹기라구……』

『음 ──』

오진국 선생은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4[편집]

오진국 선생은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기어올라가서」먹어야만 한다는 말은 하지도 못했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통념(通念)으로서 성실한 인간 사회에서는 누구나가 다 인정하는 대전제(大前提)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무시된다면 오늘의 법관들은 법의 미비(未備)로 말미암아 도저히 흑백을 가리지 못할 것이다.

『정욱이가 이긴 거지 뭐야?』

영심은 갑자기 민호가 얄미워졌다. 얄밉다는 마음은 영심이 뿐만 아니라소년들의 전부를 대표하는 감정이었다.

『아니다. 콜럼브스가 달걀을 세운 것과 마찬가진데, 뭘 그래?』

민호의 이 한 마디에는 오 선생도 대답을 못했다. 민호 소년의 불성실을 저으기 탓하면서도 논리의 궁핍을 어쩌는 도리가 없다.

벌써부터 오선생은 달걀을 깨뜨려서 세운 콜럼브스의 이야기는 비록 창의(創意)를 존중하는 예로서는 적당할는지 모르나 민주 교육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성실한 인간사회의 통념을 파괴하는 악영향을 청소년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콜럼브스의 이야기는 영심이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민호의 입에서 튀어나왔을때 영심의 생각은 또 한 번 바뀌어지며 민호를 봉이 김선달 같은 제간둥이라고 우러러 보는 대신에 정욱을 무척 미련한 인간이라고 얕보기 시작하였다.

『어쨌든 사과는 민호가 먹었지만 이긴 것은 정욱이다.』

그 한 마디를 남겨 놓고 오진국 선생은 영심의 손목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영심은 열심히 바위를 기어올라간 정욱이가 사과를 먹지 못한 것이 어쩐지 자꾸만 마음에 걸리던 낡은 생각을 영심은 지금 허정욱 중령의 편지를 앞에 놓고 하는 것이다.

『퉁바리바위 위의 한 알의 사과!』

그것을 허중령은 오늘에 있어서의 영심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오늘의 오영심은 아니다. 자못 창경원 연못가에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꿈이 금후 오랜 시일에 걸쳐서 허정욱의 성실한 가정애(家庭愛)를 모독할 것이 무섭고 죄스러웠을 따름이다.

어서어서 꿈이 사라져 주었으면 좋았다. 그러나 꿈은 좀처럼 영심의 노력으로서 만은 사라져 주지를 않는다.

영심의 나이가 벌써 스물 다섯, 결혼이라는 인생의 절차를 밟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난다면 또 모르거니와 어차피 그렇지 못할 바에야 허중령의 성실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는 마음의 부담이 훨씬 덜한 유민호를 영심은 택할 것이다.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 보다는 자기 자신이 희생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적인 사고방법에서 출발한 인생 관조(觀照)의 태도였다.

영심은 불을 끄고 자리에 들었다. 잠은 좀처럼 올 것 같지가 않다. 몸은 저으기 피곤을 느꼈으나 사념이 착잡하다. 달은 있으나 창가에는 비쳐 주지를 않는다.

『그이도 나처럼 결혼을 해서, 지금 쯤은 어린애 한둘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불쑥 감정이 들뜨면,

『한 번만 더 만나 봤던들 어디서 사는 누구인지나 알았을 건데……』

그때의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영심은 안타까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