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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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제삼]의 運命[운명][편집]

오랫동안 지운은 소탁자 앞에서 석란과 마주앉아 있었다. 울렁거리는 감정을 억압하기 위하여 담배만 푹푹 피우고 있다가,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주기 바라오.』

석란은 시선을 들며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석란은 박 준모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지운은 얼굴빛을 빤히 바라보며 석란은 가만히 돌이돌이를 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의 불행을 더 조장시키는 결과를 맺을 것이요.』

『저는 솔직했어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행동을 취할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일종의 장난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런 감정도 다소는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저편에서 그것을 강요했을 때 저는 처음에는 그것을 강력히 거절했어요.』

석란은 거기서 말을 뚝 끊었다. 그리고는 자기의 솔직한 생각을 골라 보려는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 순간, 얼른 생각키운 것이 한가지 있었어요. 이 기회에 나는 내 자유를 확보해 두고 싶었어요.』

『음,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지운은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참으로 어린애 같은 소리다!』

조금 아까 어머니를 찾으면서 엉엉 울던 생각이 불현 듯 났다. 철이 없다면 철이 없는 셈이 되는 것이고 똑똑하다면 아버지 임 교수의 말대로 지나치게 똑똑한 계산이 되는 것이다.

『이거 봐요, 석란!』

지운은 다소 부드러운 어조가 되며,

『사람에게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요. 석란은 결국 그 운명을 모르던가,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운명이 뭐예요.』

석란은 지운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것을 물었다.

『인간을 간단히 나눌 때 우리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가 있소. 하나는 남성이고 하나는 여성이요.』

『그렇겠죠.』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남성이 되고 싶어서 남성이 된 것도 아니요. 그것은 분명히 우리 인간의 자유 의사로는 어떻걸 수 없는 하나의 숙명을 말하는 것이요. 알아 들어요?』

『알아 듣겠어요.』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제 이의 운명인 민족적 운명이라는 것이 있지요.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지요. 이 인류의 운명은 개인이 그것을 아무리 싫다고 해봤댔자 우리의 일생을 속박하는 완강한 운명의 손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버이가 자식에게 설교나 하듯이 지운은 성실한 열의를 가지고 타이르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부르짖고 옹호하는 것도 결국에 있어서는 이러한 기정(旣定) 운명을 전제로 삼고 하는 말이요. 남성이 싫다고 해서 여성으로 변할 수도 없는 것이고 여성이 싫다고 해서 남성이 될 수도 없고 자기 민족이 싫다고 해서 다른 민족이 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체(運命體)로서의 자유와 인권을 말하는 것이요. 이리하여 이 석란은 그러한 운명체로서의 자유. 다시 말하면 한국 민족의 한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갈망했을 따름이요.』

『그래요. 저는 한국 여성의 자유가 필요 했어요.』

『그러나 이 석란의 운명은 이미 여성이 아닌 것이요.』

『무슨 뜻이예요?』『여성인 동시에 한 사람의 아내요. 이 제 삼의 운명을 설정한 것은 조물주가 아니고 이석란 자신의 의사였소. 좋건 싫건 석란은 자기 손으로 설정해 놓은 운명체로서의 행동밖에는 할 수 없게 된 것이요. 석란은 지금 여성의 자유와 아내의 자유를 혼돈하고 있는 것이요. 그러나 그 두 개의 자유 가운데는 제 삼의 운명의 담벼락이 가로 놓여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요.』

지운의 이야기를 석란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조물주가 설정한 운명에는 불평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자기 손으로 만들어 놓은 제삼의 운명에는 불평을 말할 여지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의사가 존중되기 때문이요. 결혼이란 일종의 약속이다. 자유 의사에서 출발한 이 약속이 무시 당하고 위반될 때에는 참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적인 인격의 파산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석란의 결혼은 석란으로 하여금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한국 여성으로서의 자유의 일부분을 포기하고 그보다, 범위가 좁은 한 사람의 한국의 아내로서의 자유속에서 만족하겠다는 약속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그러한 약속을 위반했다는 거죠?』

『그렇소. 오늘의 결혼 형태는 모노 거미즘(一夫一妻主義[일부일처주의])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요. 그것이 다년간에 걸친 인류의 역사에 비추어 보아서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럴까요?』

일부일처 주의에 대해서 다소의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에 석란은 물었다.

『그렇지요. 애정이나 애욕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무제한 허용하는 결혼 형태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가져올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것을 봉건적 사회에 있어서는 일부일처 주의의 윤리로서 억압을 했었고 오늘과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윤리 이외에 한가지 더 당사자들이 바꾼 약속의 존엄성으로서 억압을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오늘의 일부일처 주의의 결혼은 애정과 율리와 약속의 세가지 유대(紐帶)로서 형성되고 또한 지속되고 있는 것이요. 오늘날 애정 애정하고 애정 문제가 봉건적 결혼 형태에 의 반동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기는 하지만 기실 오늘의 대다수의 결혼 생활이 별반의 파탄없이 지속되고 있는 중요한 유대가 변모하기 쉬운 애정보다도 윤리와 약속의 존엄성에 있다고 나는 보아요. 순수한 애정만으로써 오십 년의 결혼 생활을 지속해 나가기는 대단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선생님 말씀 잘 알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제게는 공감이 가지 않아서 걱정이예요. 지금 구체적으로 문제돼 있는 것은 오늘의 제 행동이지요. 거기 대한 제 심정은 아까 솔직히 설명해 드렸어요.』

『어떤 대목에 동감이 가지 않는다는 거요?』

지운은 극도의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 대답하기 전에 제가 먼저 선생님께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요.

솔직하게 대답해주세요.』

『대답하지요.』

『제가 이 자리에서 제 행동에 대하여 사과를 한다면 선생님은 저를 용서해 주시겠어요.』

그러면서 석란은 지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운은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석란의 물음은 중대성을 띄고 있는 때문이다. 지운 자신의 생각은 이미 결정적이지만 한 번 더 자기의 감정의 밀도를 잔잔히 계산해 본 후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석란의 행동을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지요. 그렇지만 내 감정이 그것을 용서 하지 않소.』

거기서 석란은 이미 최후를 각오하면서 다시금 물었다.

『그것은 제게 대한 애정 때문에 생긴 감정이예요?』

그것은 석란에게 있어서나 지운에게 있어서나 지극히 중요한 물음이었다.

거기 대한 답변 여하에 달려서 석란의 행동을 비판하는 지운의 가치 기준이 확립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답해 주셔야만 하겠어요.』

『솔직히 대답을 하지요. 석란에 대한 애정도 물론 있소. 석란을 한대 갈겨준 정도의 애정이지만요. 그리고 약속 위반에 대한 감정도 있고…… 그러나 지금 석란을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감정의 태반은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의 위신과 체면 문제에서 생긴 것 같소.』

『잘 알았어요. 그러면 아까 물은 선생님의 질문에 제가 대답해 드리겠어요.』

이미 최후를 각오하고 난 석란에게는 아무것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석란은 명확한 어조로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저는 지금 선생님의 제 삼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자유의 한계가 뭐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어요. 동시에 과연 제가 실수를 했다고 분명히 느꼈어요. 그리고 제 실수의 원인을 지금 가만히 돌이켜 보았어요. 첫째로는 제가 철이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다소의 불량성이 있었다는 것이예요.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불량성이라고 지적해 주 신 것은 임 학준 교수였고 저는 여때까지 그것을 제 성격에서 우러나온 명랑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어서 이야기 하시요.』

『세째로는 저의 온갖 의욕을 억누르고 선생님만을 위해야만 할 정도의 애정을 갖지 못한 것이었고 네째로는 선생님 손으로부터 제 자유를 확보해 두고 싶은 생각에서였어요.』

『솔직히 말해 주어서 고맙소.』

『그러한 이유로서 제 실수가 생겼다고 보아요. 어쨌든 제 과오에 대해서는 한 사람의 아내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겠어요.』

석란의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나서,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받을 생각이었지만, 선생님의 감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지요. 결국 선생님에게 최후의 심판을 받은 저니까, 이것으로서 선생님의 아내라는 자리에서 저는 이미 물러앉은 셈이 되지요.』

이런 경우에는 좀더 울고불고 해 보았으면 좋겠지만 석란은 감히 그것을 하지 않았다. 상대편의 동정을 구해서 일시적인 용서를 받아 보았댔자 지운의 감정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결국에 있어서는 용서를 받은 것이 못되기 때문이었다.

『이상으로서 선생님과 저와의 구체적인 문제는 깨끗이 해결을 본 셈이니까, 내일 아침 둘이 동과 서로 갈라지면 되지만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선생님과 환담을 하면서 밤을 새워보고 싶어요.』

지독히 새침한 표정이며 어조였다. 이해 관계가 서로 달라지면 부부란 결국에 있어서 이처럼도 차거운 이별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지운만이 아니라 석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환담은 갑자기 무슨 환담이요?』

지운은 서글퍼졌다. 석란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자꾸만 서글퍼지는 것도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성실한 남편과 성실하지 못한 아내 —— 이것이 오늘 선생님과 저 사이에 규정지어진 문제로서 거기 대한 심판은 이미 끝났어요. 제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 선생님은 벌을 주셨고 저는 저대로 벌을 받고 이혼을 당한 셈이 되지요. 소위 제삼의 운명을 감수하지 못한 한 사람의 아내로서의 최후의 길을 밟은 셈이지요.』

석란은 좀더 자기가 침착해 지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그러나 선생님과 저와 같은 예는 대단히 드물지요. 오늘날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그와 반대의 경우 —— 성실한 남편과 성실한 아내의 경우예요. 이 경우에 있어서 세상의 아내들은 모두가 다 선생님처럼 아니 남편처럼 자기의 감정을 소중히 하여 불량한 남편들에게 이혼의 심판은 내리지 못하고 있지요. 성실한 점에서는 그들의 아내들은 적어도 오늘의 선생님보다 더 성실하면 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감정을 소중히 하는 점에서도 결코 남편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지요. 그래도 감히 최후의 수단인 이혼 만은 하지 못하고 있지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좋은 실례를 하나 갖고 있어요. 』

석란의 이야기는 이미 개체적인 문제에서 떠나고 있었다. 석란은 그것을 지금 환담의 형식으로서 꺼내고 있는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요리집 자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러한 장면을 많이 보고 자랐어요. 아무리 성실한 남편이라도 그들의 아내처럼 얌전하지는 못 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예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는 그처럼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양반들이 말로나 글로는 그처럼 도덕의 수호신 같은 양반들이 어쩌면 여자들 앞에서는 그리도 쉽사리 헤실 퍼지는지 통 알 수 없어요. 저 양반도 가정에서는 아내가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을 정도로 행동들을 천연스럽게 해 넘기지요. 물론 개중에는 선생님 같은 분도 계시겠지만요. 그러니까 저는 지금 선생님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냐요. 얌전한 아내와 얌전치 못한 남편의 경우를 말하는 거니까요.』

『잘 알고 있소. 어서 계속하시요.』

『그래 어머니더러 물어보니까 하는 말이 다소의 차이는 있을런지 모르지만 사내들이란 다 그런거라고요. 임 교수가 제아무리 성실한 대도 임 교수 부인처럼 깨끗하지는 못했을거라고.』

지운은 지금 자기가 상대하고 있는 것이 스물 셋의 석란이가 아니고 사십대의 마담로우즈의 인생관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석란은 다만 그것을 지금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저는 선생님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 형태로서 내세운 오늘의 일부일처주의가 한낱 허울좋은 형식에서 지나지 못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인간이 지닌 제삼의 운명이라고 볼수 있는 일부일처주의의 미덕을 충실히 지켜나가는 것은 세상의 아내들 뿐이고 세상의 남편들은 아니지요. 아내에게 자유의 한계가 있듯이 남편에게도 그것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어요?』

『물론 있어야지요. 그래서 나는 성실한 남편이 되기를 절실히 각오했지요.』 『글쎄 선생님 이야기가 아니라니까요. 선생님과 제 문제는 이미 결말을 보았으니까요.』

석란은 다소 쓸쓸한 표정이 되며,

『돌아가신 제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여자 관계로 우리 어머니를 울린 사람이지요. 우리 어머니 같은 상당히 뾰족한 성미의 소유자로서도 결국에 있어서는 울면서 참아나가는 도리밖에 없었지요. 나는 어머니를 울리는 아버지를 무척 미워했지요. 철이 들면서부터는 그런 아버지와는 깨끗이 헤어져 버리자고 저는 주장했지만 결국에 있어서는 경제적인 자주력이 없는 것과 다소의 인간미와 그리고 갈라져서 더 불행해 지는 것은 반드시 여자 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에게 참을성 있는 울음 끝에 온 것이 무관심이었지요. 지금은 어머니가 다소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을 무렵에는 반항적으로도 그러고 싶어도 못 그랬어요. 사회적인 비판 앞에 나서기가 무서웠으니까요. 왜 무서웠나? 사회적인 비판을 마련하고 형성하는 주체가 여성이 아니고 남성들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의 모든 문화의 추진력이 되고 도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남성이기 때문이예요. 남성 본위이기 때문이예요.』

『알 수 있는 이야기요.』

『남성들도 자기네들의 무절제한 행동을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옳지 못하다고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의 중대한 사회 문제로나 인권 유린 문제로서는 주지는 않았지요. 그럴 수도 있는 문제라고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웃어 버릴 정도의 화제거리밖에는 더 되지 않았지요. 모르긴 하지만 그것을 하나의 중대한 사회문제로서 취급해 주기가 남성들에게는 어쩐지 자꾸만 싫은 모양이죠?』

지운은 대답을 못했다.

『반대로 세상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절반 만한 행동이라도 취했다고 해 봐요. 실로 중대한 사회문제로서 남성들은 절대로 묵과해 주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 거듭 말씀 드리지만 이건 결코 제 행동이 훌륭했었다고 변명하는 것이 아냐요. 똑 같은 나쁜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처리 문제를 말하고 있는 거니까요.』

『동감이요.』

『선생님이 동감이어서 저는 기뻐요.』

자기 이야기에 동감을 한 지운을 말로는 고맙다고는 하면서도 그 순간 석란의 입술에는 가느다란 비웃음 한 줄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오늘날 모든 문화의 실권이 남성들의 손에 있지 않고 여성들의 손에 쥐어졌다고 가정한다면 오늘의 도덕률은 거꾸로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남성 본위의 도덕률은 여지없이 허무러질 것이고 따라서 세상의 아내들은 참을성 있는 울음만 울고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말에도 동감이요.』

『고마워요.』

동감을 한다는 지운의 한 마디를 석란은 내심 무척 기뻐했다.

지운이가 뱉은 이 한 마디의 언질(言質)은 석란 자신이 논리를 전개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란은 그것을 지운이가 지닌 하나의 맹점(盲點)이라고 내심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어머니께서 빌린 지식이지만요. 사내들이란 대개가 그렇다고 하면서, 바람을 피다가 아내에게 발각이 되지 않는 한 시치미를 뗀다지만요. 그런 경우에 남자들은 대개 그것을 하나의 과실로 돌리던가, 그렇지 않으면 애정도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우와끼』니까 용서를 하란다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늘상 그랬었다니까요. 선생님은 물론 얌전하신 분이니까, 그런 실수는 일평생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 어머니의 말로는 두고 봐야 안다지만요. 어쨌든 십년 후에고 그런 종류의 과실을 선생님이 범했다고 가정하고 말이예요. 선생님 그런 경우에 제가 용서해 드리기를 바라지 않겠어요?』

석란의 이야기는 결국 올 데까지 온 것이라고 지운은 보았다.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한 긴 이야기였던 것이다.

『제 경우와 똑같죠. 저도 실수였고 선생님도 실수인 똑같은 경우니까요.

다만 하나 다른 점은 그 불행한 과오가 아내의 편에 먼저 왔다는 것 뿐이지요. 그 불행이 남편들보다 먼저 아내에게 왔다는 점이 남성인 선생님을 더욱 분개하게 만들고 있는 줄도 저는 알아요. 그렇지만 아까 제 말에 동감을 표시해 주신 선생님이니까요. 어느 편에 먼저 오건 이미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말하자면 그건 하나의 우연한 챤스 문제일 뿐, 요는 제 삼의 운명인 결혼의 약속을 위반한 당사자와 거기에 대처하는 상대방의 태도가 문제일 거예요. 선생님, 제발 좀 공평하게 대답해 주세요.』

석란은 의기 양양하게 기세를 올려왔다.

논리의 막다른 골목까지 지운을 몰아 넣은 석란이었다.

그러나 지운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논리의 궁핍을 뼈 아프게 느끼면서도 지운은 침착하였다.

『실제로 당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까 석란이가 용서를 빈 것처럼나도 용서를 빌겠지요.』

『제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어떻할 테야요.』

『하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아내들은 그들은 대개가 다 용서를 하면서 살아 와요. 저도 울고 불고 하면서 바가지를 긁다가도 결국에는 우리 어머니처럼 용서를 할 것만 같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저를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있어요.

선생님뿐만 아니라 세상의 남편들은 대개 다 용서를 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아까 제 이야기에 동감을 해 주신 선생님으로서는 대답한 모순이 아냐요?』

『모순이 아니지요. 남성 본위의 도덕이 행세를 하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럼 선생님은 그걸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여성의 약한 사회적 지위를 어디까지나 학대해 보겠다는 말씀이세요?』

『아니요. 나쁜 줄을 알고 동정은 하지만 오늘날 어째서 여성 본위의 도덕이 수립되지 못했는 가를 생각할 뿐이요.』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橫暴)에 원인이 있을 거예요.』

『남성들의 횡포가 아니라, 나는 그것을 남성들의 실력이라고 보지요. 과거 오랜 역사에 있어서 여성들이 여성 본위의 도덕률을 세우지 못한 것은 모든 부문에 있어서 여성들이 실권을 잡지 못한, 여성들 자신의 실력 문제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석란은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남성들이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고 침해한 것이지. 왜 실력이 없다는 말이예요?』

『나는 모르오, 다만 나는 과거의 역사가 그랬었고 현재도 그렇다는 것 뿐이요. 그러나 나는 미래는 알 수 없소. 여성들의 실력이 참되게 발휘되는 날이 오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요. 석란은 지금 여권 확장의 대변자가 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여성의 참다운 권리와 자유는 남성에게서 물려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고, 여성들 자신의 실력으로써 획득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그러한 노력이 없이 물려 받은 권리나 자유는 언제든지 철회(撤回)를 당할 수 있는 일종의 동정의 선물이니까요.

그것은 한 민족의 독립과 자유의 문제와도 상통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하지요.』

『선생님은 결국 남자니까, 어디까지나 남성의 편을 드는 폭언이예요.』

그러나 석란의 기세는 아까처럼 세지는 못했다.『여성의 약한 입장은 조금도 몰라 주고 제 입장만 편하면 된다는 거죠?』

『그런 말은 나에게 하지 말고 연단에나 가두로 나가서 횡포한 남성들과 절제 없는 남편들에게나 설교하시요. 다행히 석란은 정치외교를 전공하는 사람이니까, 가정으로 들어올 생각은 아예 말고, 밖으로 밖으로 자꾸만 나가시요. 더 나가시요. 아마도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석란을 아내로 맞아드릴 만큼 훌륭한 여권 옹호자(擁護者)는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소.』

『흥, 비꼬아 보는 거요? 결혼을 하라고 백일기도를 드려 줘도 다시는 하지 않아요!』

『다행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 민족의 이혼률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까요.』

『뭐예요? 저희들은 밖에 나가서 이 바람 저 바람 다 피면서 아내들이 조금만 잘못 하면 도덕이 어떻다 윤리가 어떻다 하고 떠들어 대고……』

『그래서 그 점에는 아까 동감을 했기 때문에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하나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아내의 약한 입장에 동정하여 나 자신이 자숙할 것을 각오 했었소. 그러나 남성인 나 자신이 자숙하기를 결심 했는데도 불구하고 부인께서는 여권 확장 사상(擴張思想)때문에 오늘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사과를 했지, 뭣 때문에 사과를 해요?』

『아내의 자유를 위해서는 사과할 필요조차 없을 줄 압니다.』

『그렇다면 때리긴 왜 때렸어요?』

『그렇소. 그 것 만이 부인에게 대한 내 애정이었소!』

지운은 훌쩍 일어서서 석란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아팠겠소. 용서해 주시요. 철이 든 후, 내가 사람을 친 것은 오늘 밤이 처음이었소. 일생을 두고 그만한 애정의 책임감을 나는 항상 느낄 것이요.』

그 말에 갈구라졌던 석란의 감정이 칵 약해지며 탁자 위에 업드려져서 또 엉엉 울었다. 이론을 말할 때는 비수 같던 석란이도 결국에 있어서는 어린애 같은 감정의 소유자였다.

『이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런지 모르오. 그러나 석란보다 내가 다소 나이를 더 먹었기 때문에 하오. 박 준모는 악인이요. 석란이가 그 이상의 실수를 하는 날에는 한 사람의 유능한 여권 운동자가 매장을 당할 거요. 박준모를 당해 내기에는 석란의 인생이 너무 어리오. 미이라를 잡으러 갔다가 미이라가 되는 격일 것이요.』

그날밤, 지운은 꼬박 앉아 세웠으나 침대에 누워서 한참 동안 흐느껴 울던석란이가 마침내 어린애처럼 쌔액쌔액 잠들어 버린 것은 열 두 시가 좀 넘었을 무렵이었다.

이튿날 아침, 지운과 석란은 부산역으로 들어와 서울행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다.